13장. 로판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소설? 미연시?
로판이라고 해도 다 같은 게 아닌데, 대체 뭔지 모르겠다.
진짜 더럽게 불친절한 알림도 그게 끝이었다. 그 이상으로는 어떤 힌트도 주지 않겠다는 듯, 아무리 말을 걸어도 불통이었다.
덕분에 들려오라는 소리는 안 들려오고,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게 무슨 일이냐며, 우리 화신 너무 예쁘다 극찬합니다.]
필요 없어!
아, 이제 연결된 건가. 어째 내용은 반갑지 않았지만.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외면하며 삐딱선을 타고 있는데, 제발 들려오지 말라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벨로아 아가씨. 벨로아 아가씨!!”
“……아. 진짜.”
그놈의 벨로아가 누군데.
그러나 휘황찬란 비싼 벨벳 꼬까옷을 입은 내 모습이 그리도 좋으셨는지, 처음 만난 이후로 이렇게 하이텐션인 적 없던 성위님이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사실적시를 해 주셨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누가 봐도 고가의 중세드레스로 풀 세팅한 너지 누구겠냐며 폭소합니다.]
“…….”
진짜 짜증 지대로였다. 성위님의 말이 틀린 게 하나도 없어서 더 짜증이 났다.
조금 전, 시스템 알림음을 보고 현실 도피를 하며 허우적거리는데, 나보다 키도 작고 죽음의 다이어트라도 거친 듯 비쩍 마른 팔다리의 소유자가 나타나 대체 어디서 나온 힘인지 모를 우악스러운 힘으로 나를 끌었다. 그리고 시간이 없다며 다짜고짜 어디론가 데려가더니 현재의 이 풀 세팅한 꼴로 만든 것이다.
진짜 무슨 영화나 로맨스 판타지 웹툰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몰골이었지만……. 일단 머리카락 색이 현란하다 보니 위화감은 없었다. 오히려 이렇게 각 잡고 꾸미자 진짜 제대로라는 느낌.
그러나 25살이나 먹은 닳고 닳은 영혼은 순수하게 재미있어할 수 없었다.
‘X발. 누가 보면 개 수치사인데…….’
아무리 위화감이 없다 한들, 얼굴이 그대로니 결국 그냥 코스프레지 않은가!
새삼 내 스킬이 얼굴부터 몸까지 싹 다 바꿔 준다는 사실에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누가 봐도 그건 내가 아니니, 헐크로 변신해도 아무렇지 않아 할 자신이 있었다.
아니, 자신을 넘어 완전히 이입해선 재밌다고 다 때려 부숴 볼 것 같다.
[워워. 아니 그건 너무 갔다고. 헐크는 평화를 사랑하는 히어로라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자신의 헐크에 대한 애정을 피력합니다.]
그건 또 언제 봤어?!
대체 시스템은 뭘 다 보여 주고 있는 건지, 어느샌가부터 넷플…… 아니 인류의 문화에 중독되어가는 성위님을 보며 황당함을 금치 못하는데, 아주 잠깐도 마음 놓을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연이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이제 출발하셔야 해요!”
“…….”
어딜?
눈 뜨고 나서 알게 된 건 내가 로판 속에 빠졌고, 부잣집 귀족 아가씨고, 이름이 ‘벨로아 루체’라는 것뿐이었다.
아. 하나 더 있다. 아까부터 나를 겁나게 부르고 있는 메이드 이름이 ‘미아’라는 거. 그것도 내게 말을 걸던 대사 속에서 잡아낸 정보였지만.
설정조차 알려주지 않는 불친절함에 지치지도 않고 스팀이 올랐다. 요즘 로판은 설정 다 까고 시작하던데, 여긴 무슨 알려주는 게 X도 없다. 성위님은 새로운 이벤트에 매우 신나다 못해 날아다니는 것 같지만.
“……미아.”
“네. 아가씨! 마부 불렀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오늘 내가 어딜 가야 했지?”
최대한 ‘내가 그런 하찮은 일을 알아야 하는진 모르겠지만 물어는 봐 준다.’라고 보이도록 귀족처럼 도도하게 말하려 노력하며 이 스토리의 진행 방향을 묻자, 다행히 의심을 사진 않은 듯 미아가 답했다.
“오늘 아가씨의 약혼자인 베어 경을 보기로 하셨잖아요?”
“……아?”
뭐야. 뭐 이리 급 전개야. 요즘 로판 다 이래?!
* * *
덜컹덜컹― 달그락―
푸르릉―
마차가 덜컹거려 엉덩이가 두 쪽으로 쪼개질 것 같은 충격에도 돌아오지 않는 멘탈을 다잡으려 노력하고 있는데, 지금 이 미친 스피드 전개가 매우 만족스러운 듯 성위님은 아주 좋아 죽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역시 전개는 초절정 폭풍 사이다 플러스 미친 스피드라며 쾌재를 부릅니다.]
‘……진짜 패고 싶다.’
성위님 때리는 건 딱히 도의에 어긋나지 않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와. 진짜 빙의하자마자 얼마 되지도 않아서 약혼자라는 인물을 만나러 가는 화신 멘탈은 걱정 안 하고 재미있겠다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니. 맨날 내가 제일 소중하다, 사랑한다 뭐 이랬던 건 다 개뻥이었다. 결국 다 지 재미만…….
[어이어이, 아무리 내가 조금 재밌어했기로서니 거기까지 가기 있냐고. 나 섭섭하다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말합니다.]
[솔직히 너도 당사자가 아니었으면 재미있어했지 않았겠냐고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합니다.]
……솔직히 그건 그렇지.
부정하려 했지만, 나 역시 나를 너무나 잘 알기에 인정할 건 깔끔히 인정했다. 멀리 갈 것 없이 당장 윤지우가 그랬다면 진짜 세상이 떠나가라 박장대소하고도 모자라, 웃음을 못 참고 굴러다녔을 거다.
“진짜 돌아 버리겠네…….”
그럼 뭐 하는가. 당사자가 나인데. 거기다 지금 약혼자나 만나러 가고 있고.
진짜 어떤 소설에서도 빙의하자마자 제 약혼자 만나러 가는 여주는 못 봐서 왕년 로판 독자로서 매우 당황스러웠다. 이게 요즘 트렌드인 건가? 아무리 내가 잠시 판소로 외도를 했다 한들……. 그전에 읽었던 로판이 얼마인데.
소설 속에서 또 소설에 빙의된 것은 둘째치고, 전개가 적응이 안 돼 두 배로 더 멘탈 유지가 안 됐다.
“……미하일 베어.”
간신히 기억해 둔 약혼자의 이름을 읊으며 지금까지 알아낸 사실을 곱씹었다.
현재 내 이름은 벨로아 루체. 루체 백작가의 무남독녀. 약혼자 이름은 미하일 베어. 베어 후작가의 삼남이라고 했다. 이름도 왜 이따위로 지은 건지. 글자수 딱딱 맞춘 게 작가가 더럽게 대충 지은 거 같았다.
그리고 눈뜨자마자 울렸던 알림음들.
【‘로판’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추가 정보가 공개됩니다.】
【희극 ‘헤르세르크의 반려’의 세계 속에 입장하셨습니다.】
【이야기를 클리어하십시오.】
참 여전히 더럽게 불친절한 알림이었다. 오죽하면 이야기를 클리어하라고 알려준 것이 어디냐고 생각할 정도로. 그런 기본적인 사실조차 안 알려 줄 법한 불친절함의 극치가 바로 이 시스템 놈들이었으니.
하지만…….
“아니,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데?! 어떻게 클리어해! 엔딩이 뭔지도, 애초에 주인공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엔딩을 봐!”
확 죽으면 새드엔딩인데, 그것도 엔딩으로 쳐 주나?!
극단적으로 치솟는 생각에, 아까까지 신나게 쪼개던 성위가 서둘러 나를 만류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워워. 거기까진 너무 갔다며, 희극에 새드엔딩이 웬 말이냐고. 그리고 죽으면 그냥 클리어 실패로 너까지 그대로 죽을지 누가 아냐고 일단 진정하라 합니다.]
아. 그건 그러네.
소설에 빙의했을 때 로판의 경우 보통 죽으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거나 하겠지만, 여긴 그냥 표현이 빙의지 사실은 게이트였다. 죽으면 그대로 현실에도 죽어서 나가는.
즉, 죽으면 어떻게 될지 더더욱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여느 로판 소설 속 여주랑 똑같은 처지에 놓여지자, 진짜 헐크로 변신하고 싶어졌다. 다 때려 부수게.
“X발. 그만 좀 덜컹거려라.”
이 와중에 겉은 고급스럽게 생긴 주제에 더럽게 덜컹거리는 마차 때문에 엉덩이가 아팠다. 이게 무슨 놀이공원 디스코팡팡도 아니고, 앉은 채로 붕붕 떴다 내리치는데 꼬리뼈가 나갈 거 같았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원래 중세시대 마차가 겉만 그럴듯하고 실상 안정감은 쓰레기인 게 학계의 정설이라고, 자동차라 생각 안 하면 괜찮을 거라고 나름대로 위로를 건넵니다.]
……이게 지가 안 탄다고.
하지만 틀린 말은 하나 없었고, 아예 그냥 포기하고 시험도 해 볼 겸 마력으로 엉덩이를 감싸 에어쿠션을 만드니 좀 괜찮아졌다.
처음 여기 들어올 때는 아무것도 안 되더니, 이제 다시 확인하니 전부 다 이상 없이 쓸 수 있었다.
성위님이 내 곁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예상한 일이기는 했지만, 마력을 다뤄 보려고 하자 내 손짓에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을 보며 그래도 좀 안도했다. 아무 힘도 없다는 것과 있는 것은 아주 큰 차이였으니까. 지금과 같은 상황에는 그 어떤 것보다.
“그럼 이제부터 뭘 어쩐다…….”
일단 벨로아 루체로서 좀 살아 봐야 하나. 처음 소설 속의 세계에 들어왔던 그때처럼.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울 것이라 여겼다. 벌써부터 조금 마음이 진정되기도 했고.
여차하면 다 깨부수면 되니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자, 그럼 일단 약혼자님 얼굴이나 구경할까.”
마음의 정리가 끝나자, 마치 내 정리를 기다려 주기라도 한 듯 마차가 딱 완벽한 타이밍에 멈추었다.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아. 그래.”
으리으리한 궁전 같은 후작가의 저택에 도착해, 중세영화 한 편 보듯 쭉 즐겁게 구경하며 나는 결심했다. 그냥 적당히 구경이나 하다가 때 봐서 토껴야겠다고.
“벨로아 루체 아가씨 도착하셨습니다. 도련님.”
“……아.”
내 약혼자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미하일, 베어 경?”
“……벨로아…… 루체 양?”
깜빡깜빡―
진짜 보고도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두 눈을 깜빡였다. 상대도 마찬가지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손으로 눈을 비벼댔다.
마침내 둘만 있으라고 시종들이 자리를 피하는 순간, 우리 둘은 터져 버렸다.
“윤지우! 니가 왜 여기 있어?!”
“누나야말로! 왜 여기 있는데?!”
피가 증명하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반응하며 똑같이 난리를 치는 남매의 모습이었다.
윤지우가 내 약혼자라니. 이 무슨 패륜…… 아니, 근친이냐.
“진짜 내 약혼자가 너야?”
“그건 내가 물을 소리야. 진짜 누나야?”
정말 바라지 않았던 확답에,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이를 갈았다.
……나와, 이 시스템 새끼야.
* * *
살다 살다 드디어 친동생이 약혼자가 되는 경험까지 해 보았다. 너무 짜릿해서 돌아가실 것 같았다.
“널 죽여서 일단 이 근친혼을 해결하는 게 첫 과제는 아니겠지……?”
하도 어이가 없어 생각이 거침없이 튀었다. 이 쓰레기 같은 시스템 새끼라면 그럴 수도 있어. 점점 미쳐가는 날 보며 이미 머리가 과부하 상태가 된 윤지우가 질린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넣어 둬, 누나 이 미친년아. 아니 일단 좀 그냥 앉자. 제발. 머리가 터질 거 같아.”
“……콜.”
그렇게 극적인 화합을 이룬 우리 남매는 일단 약혼 관계인 남녀의 담소를 위해 마련된 테이블에 마주 앉아, 홍차를 무슨 소주라도 되는 듯 들이켰다.
그러다 더는 안 되겠어서 케이크를 미친 듯이 흡입해, 급격히 솟아오른 당으로 행복감을 강제로 끌어올리며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너 먼저 알아낸 거 말해 봐.”
“……그게 지금 입에 들어가?”
“이거라도 입에 안 들어가면 제대로 말도 못 할 지경이야. 빡쳐서. 너도 먹어.”
당분으로 뇌라도 속여야지.
합리적인 내 말에 동의한 윤지우가 디저트 트레이의 과자들을 흡입했다.
이윽고 트레이의 반을 비운 녀석이 그제야 조금 살 것 같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일단 내가 이 집의 막내라는 거. 형이라는 놈 둘 봤는데 완전 얼굴도 싹 다른 서양인이야. 근데 내가 동생인 걸 너무나 당연스럽게 여기는 게 아마 게이트에 진입할 때 설정된 효과인가 봐.”
“그래? 아는 사람들은 아직 못 만났어?”
“눈 뜬 지 얼마나 됐다고. 누나는?”
“난 더하지. 일어나자마자 너 만나야 한다고 치장하느라 강제 욕실행 3시간이었거든.”
진짜 이제껏 만난 인간은 부모도 친구도 아니고 메이드들밖에 없다. 뭘 어쩌란 건지.
암울한 사실을 다시 깨닫자 스팀이 오를 것 같았는데, 그걸 기가 막히게 알아본 윤지우가 내 입에 쏙― 마카롱을 넣어 줬다.
“그럼 서로 아는 게 없다는 거네.”
“어. 졸라 X같다.”
“욕은 거기까지.”
“욕 안 나오게 생겼냐.”
이 정도 욕으로 끝난 걸 다행으로 알라고 시니컬하게 말하며 마카롱 하나를 더 입에 넣자, 저도 거지 같긴 한지 윤지우도 휘낭시에 하나를 입에 넣기만 했다.
한창 디저트 먹방을 펼치던 우리 남매는 트레이의 디저트가 전부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아. 주인공.”
“주인공?”
아차. 반사적으로 유지한을 주인공이라고 말해 버리고 말았다. 맨날 속으로 주인공님, 주인공님, 하더니 습관적으로 튀어나온 게 분명하다.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일단 마침 이 세계가 세계이니만큼 그럴듯하게 꾸며서 말을 이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말이야. 일단 여기 소설 속 같은데. 딱 봐도.”
“누나가 징그럽게 보던 로판.”
“어. 그럼 주인공이 있다는 건데, 누굴 거 같아?”
일단 여주는 누군지 모르겠지만, 남주는 누굴지 감이 딱 왔다. 게이트 속 세계라 해도 결국 이 세계의 주인공은 한사람이었으니까.
“……길드장님?”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대체안이 일단 없지 않아?”
주인공 할 만한 인간이 그 외에 더 있기는 해?
이로운도 있고, 뭐 다른 훌륭한 랭커들도 있는데 전부 아웃 오브 안중을 실행하는 동생 놈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나는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럼 일단 길드장님 비롯해서 아는 사람부터 찾자. 후작가고 남자니까 여기선 네가 더 활동하긴 편할 거 같은데, 나도 최대한 찾아볼게. 약혼은 일단…… 유지해 놓자. 그래야 연락하는 데 의심 안 살 테니까.”
이쪽 세계관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중세라면 아무래도 약혼 관계가 아니고서야 남자와 여자가 자주 만나거나 연락을 하는 것도 힘들 수 있었다. 워낙 보수적인 편이니까.
그러니 거지 같다 하더라도 일단 이 관계는 유지하는 편이 이득이었다.
제가 말하고도 미친 것 같아 이를 빠득 갈며 이야기하자, 해탈한 것 같은 윤지우 놈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네. 알았어.”
“조심하고. 1순위는 니 안전임을 잊지 마.”
“…….”
“여기는 게이트야. 얼마든지 위험해질 수 있어. 긴장의 끈을 놓으면 안 돼.”
단단히 당부하자, 일반인이 각성한 헌터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웃긴 것인지, 제가 헌터가 됐음에도 여전한 누나의 모습이 어이없는 것인지 윤지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누구한테 이야기하는 거야.”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에 미소를 돌려주면서도 나는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정 주지 마. 네 가족은 나야. 알지?”
“……당연한 소리하지 마.”
“옳지.”
너는 나와 다르게 모질지 못하니까, 걱정이 될 수밖에.
* * *
덜걱― 덜걱―
윤지우에게 괜찮은 척하며 마차에 오르긴 했지만, 마차에 올라 윤지우가 보이지 않게 되어서야 나는 자신만만한 얼굴을 거뒀다.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임시로 만든 것 같지도 않고, 매우 짜임새 있고 치밀하기까지 한 세계관. 아무래도 단순한 희극 정도가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더군다나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는 지극히도 적었다. 이 세계를 나가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클리어하라.’라는 단 하나만 알려 줄 뿐. 그 어떤 정보도 주지 않았다. 이런 백지 상태라면 생각보다 더 오래 이곳에 머무를 수도 있었다.
그건 매우 좋지 않았다.
자신이 들어올 때 모였던 인원을 보면 대한민국 대표 전력들이 모두 이곳에 끌려왔을 확률이 높았다. 그들이 몽땅 빠진 대한민국이라니. 그보다 좋은 먹이가 어디 있겠는가.
물론 망할 헬조선 따위 어찌 되든 상관없지만, 그래도 주인공님은 신경 쓸 테고, 나 역시 부모님과 친구들이 있으니까 완전히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
“그냥 미연시처럼 퀘스트를 줘…….”
빨리 끝내 버리게.
진짜 어떤 고난도 퀘스트라도 클리어할 자신이 있었다. 그 기회도 안 줘서 문제지.
“진짜 소설이면 진짜 노답인데……. 어후.”
나오는 건 결국 한숨뿐. 이 와중에 덜컥거림은 그대로라 진짜 더 돌아 버릴 것 같았다.
“멈춰!”
타닥. 푸르릉!
“아가씨, 왜 그러세요?”
“멀미가 날 것 같으니 좀 걷고 싶구나.”
다년간 로판을 읽고, ‘망자의 귀부인’으로서도 경험했던 덕에 로판풍 어투는 쉽사리 나왔다.
“하지만 아가씨…….”
“두 번 말하게 할 셈이니?”
뭐, 위압적으로 말하는 건 애초에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었기에, 가뿐하게 미아의 의견을 물리치고 마차에서 내렸다.
내 뒤로 곧장 호위 기사 하나와 미아가 붙었지만, 그래도 단단한 지면과 발을 맞닥뜨리고 숨을 쉬니 좀 살 것 같았다.
“후우…….”
시원한 바람이 소름 돋을 만큼 좋았다. 너무 상쾌한데. 리얼함이 지나친 거 아니야?
바람을 신나게 쐬고 나니 이제야 주변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빵 사세요! 맛있는 빵이 가득합니다!”
“오늘만 맛볼 수 있는 버터 비어! 진한 감칠맛과 시원함이 아주 일품입니다!”
“어머. 그거 진짜야?! 말도 안 돼!”
“진짜라니까. 엄청나지?”
이 모든 게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사람 사는 냄새와 소리가 짙게 피어오르자 기분이 오묘해졌다.
너무나 다 진짜 같다.
사실감이 넘쳐서 반대로 실감이 안 났다. 혼자만 이곳에서 붕 떠 있는 것만 같아서. 보니까 나 홀로 귀족인 거 같으니 그래서일 수도 있지만.
“아가씨. 양산 쓰셔야죠.”
“아. 그래.”
정처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 상쾌했던 기분은 사라지고, 점차 허망함이 들었다. 분명 이곳을 걷고 있는데, 투명 인간이 된 것 같다. 나만 이곳에 홀로 이방인인 느낌.
발밑이 점점 물에 잠겨가는 듯 무거웠다. 앞으로 걷기조차 싫어질 정도였다. 이 세계에 발을 딛는 것조차 현실감이 안 드는데, 걸어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런 감각을 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
‘……괜찮으십니까?’
그때는 유지한이라는 존재가 이 세계를 존립시켜 주었고, 그가 손을 내밀며 나를 이 세계에 발 디딜 수 있게 해 주었었다.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다.
“……유지한.”
당신이 보고 싶었다.
당신이 필요했다.
이번에도 역시 내게 손을 내밀어,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길. 이 세계에 있어도 된다고, 그렇게 확립시켜 주길.
당신이 내겐 이 세계를 살아갈 수 있는 지표였으니까.
“……아가씨?”
지금 당신이 내 앞에 나타났으면 좋겠다. 나타나서, 늘 그랬듯, 나를 부르며 달려와 주었으면.
“……그럴 리가 없겠지.”
당신이 어떻게, 내가 어디에 있는 줄 알고.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은 계속 생각할수록 내게 손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한시라도 빨리 그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애썼다.
“미아. 우리 저거 사 먹을까.”
“네? 드실 수 있으세요?”
“……?”
못 먹을 거 파는 거니?
되게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나서 별생각 없이 먹자 한 건데, 돌아오는 대답에 갑자기 불안함이 몽실몽실 피어났다. 생긴 건 그냥 크레페 같았는데?!
내 얼굴을 본 미아가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 제 입맛에는 분명 맛있는데, 아가씨는 늘 고급 음식을 드시니까……. 입맛에 안 맞으실 수도 있을 거 같아서…….”
얘야. 무슨 소리니. MSG로 무장한 배달 음식을 N년 째 먹고 산 한국인한테.
진짜 이렇게 말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이 아이에게 나는 윤지호가 아니라 벨로아 루체였기에 그 말을 꾹꾹 삼켜 넘겨 버렸다. 일단은 벨로아 루체의 설정을 따라야 할 것 같았으니까. 정보가 무지한 상태에서 엇나가는 행동을 하는 건 대단히 위험했다.
“한 번도 안 먹어봐서 더 호기심이 생기는걸. 한번 도전해 볼래.”
해서, 윤지우가 보면 가증스럽다며 당장 헛구역질을 할 내숭을 시전하며 나는 자연스럽게 미아에게 눈짓했다.
“네. 그러시다면야. 못 드실 거 같으면 바로 저 주셔야 해요. 억지로 드시지 마세요.”
“물론이지.”
내가 맛없는 걸 꾸역꾸역 입에 넣을 것 같니.
메이드가 이런 걱정을 하는 귀족 아가씨라니. 벨로아 루체는 어떤 귀족 영애였는지 알 것 같아 새삼 무서워졌다. 일단 나랑 정반대일 것 같아. 본능적으로 호구력이 느껴져! 세상에서 호구 취급 받는 것이 제일 끔찍한 싸가지가 몸부림쳤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딱 사이즈 보아하니 곧 머지않아 탄로 날 것 같은데, 차라리 적응되게 미리 조금씩 까는 게 어떠냐고 진지하게 의견을 묻습니다.]
‘……차라리 진짜 그게 낫겠는데?’
간만에 매우 쓸만한 생각이라 동조하는데, 마침 눈앞에 크레페가 도착했다.
“음. 맛있어 보이는데?”
“생각하셨던 맛은 아니실 거예요.”
아니. 완전 생각한 그대로의 맛일 것 같은데.
얇은 크레페 반죽에 누X라 같은 초콜릿이 발려져 있고, 생크림에 딸기와 바나나까지 가득 들어 있다. 게다가 진동하는 설탕 냄새까지 백퍼 내가 알고 있는 크레페였지만, 굳이 이걸 말로 꺼내진 않았다.
바작―
별 의심 없이 크레페 끝 쪽을 베어 물었다.
“음. 맛있네!”
역시나 생각했던 맛이라 기분 좋은 미소가 숨겨지지 않았다. 덕분에 약간의 진심을 더해 내숭을 떠는 게 가능했다.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이에요.”
“다른 것도 맛있는 거 아니? 소개해 주렴. 네 것도 사 줄게.”
“어. 그럼 여기 유명한 케이크 집이 있어요!”
언니가 다 사 줄게! 라며 플렉스를 시전하자, 환해진 얼굴로 기다렸다는 듯 안내하는 미아의 모습은 꽤나 기분 전환이 될 만큼 귀여웠다.
현실에는 못 데려가겠지? 메이드 하나 있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이렇게 귀여우면 금상첨화고.
퇴근 후 방전 상태가 되는 직장인이라 널브러진 집의 몰골이 떠오르자 자동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안 될 걸 알지만, 생각만 하는 건 나쁜 게 아니니까.
그렇게 미아 덕에 조금 사랑스러운 기분이 되어 그녀를 따라 걷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확 잡아끌었다.
“―!!”
너무나 갑작스러웠던 탓에, 반항할 새도 없이 그대로 끌려가 어떤 이의 품에 안착했다. 넓고 단단한 체격이 전신을 꽉 끌어안았다.
폭― 안기자마자 나는 당황스러움에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끌어 당겨져 웬 남자의 품에 안겼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보다는 그 품이 너무 익숙했기 때문에.
바라지 않았던, 바라자마자 바로 꺾어 버렸던 기대가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나를 놀라게 하는 사람이니, 또 이렇게 나를 놀라게 해주는 것은 아닐까.
‘……저, 지호 씨…….’
내 손끝 하나 대는 것도 겁먹어 망설이는 남자지만,
‘윤지호―!!’
어떨 때는 믿기지 못할 박력을 보여 주는 사람이니까. 이번에도 분명 바람처럼 나타나 내가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지 않을까.
헛꿈 꾸지 말자고 그렇게 노력했음에도, 어쩔 수 없는 기대와 함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내가 바라는 사람에게 보낼 미소가.
“……윤지호?”
“…….”
그리고 이윽고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그 미소는 산산이 깨어졌다. 스스로가 놀랄 정도로.
눈앞에 보이는 이는 내가 찾아야 할 이 중 한 명이 분명했지만, 이 순간 내가 바라던 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고작 그 사실 하나에 이렇게 절망적인 기분이 들 줄은 나 자신도 몰랐다.
“윤지호? 너 맞지? 그런 거지?”
“……이로운.”
“다행이다……. 무사해서……. 미칠 것 같았어.”
그런 내 마음은 보이지 않는 건지, 제 감정을 있는 대로 쏟아내며 나를 끌어안고 떠는 남자의 앞에서 나는 일말의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조금은 불쌍하게 여길 법도 한데.
하다못해 짜증이라도 날 법한데, 느껴지는 건 심장이 내려앉은 듯 서늘한 감각뿐이다.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충격도.
내가 그 사람을 이렇게까지 바라고 있었을 줄은 스스로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일까. 고작 상대가 유지한이 아니라는 것에 이렇게 심장이 주저앉은 느낌이 들다니.
누구에게 한 번도 제대로 의지한 적이 없었기에 더욱 이런 마음이 적응되지 않았다.
인정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 누구보다, 당신에게 이래서는 안 되니까. 손끝이 떨려왔다.
“이로운. 일단 떨어져.”
무거워.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이로운이 흠칫― 몸을 움찔했다. 이윽고 천천히 그의 몸이 떨어져 나가자, 나는 그제야 이로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녹음의 수장, 사계절 이로운의 트레이드 마크인 백발과 붉은 눈은 어디로 가고, 검은 눈에 검은 머리로 바뀌어 있었다. 기존보다 매우 평범해지긴 했지만, 저건 어느 날 내가 무척이나 좋아했던 이로운의 모습이었다.
“머리. 옛날이랑 똑같아졌네.”
“……응. 이게 원래 색이니까.”
내게 고백하고, 열심히 내 곁을 함께했던 그 이로운의 모습이었다.
과거가 생생히 떠오르는데도 별다른 감상은 들지 않았다. 남은 것은 고작 ‘아. 그랬었지.’라는 감정뿐이라니. 새삼 그 모든 시간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어쩌면 누군가 때문에 더 그러는 걸지도 모른다.
3년을 만난 너에 대한 추억보다, 고작 만난 지 세 달 남짓인 남자를 더 기대한 나를 보니 알겠다. 못하니까, 걱정이 될 수밖에.
“너도 이곳으로 넘어왔구나.”
이로운에게 건넨 말은 그 정도였다. 그저 다른 이들도 다 이쪽으로 넘어왔다는 사실만을 확인했다. 시간대가 다르다거나, 멀리, 아니면 다른 곳에 떨어졌을지도 모른다는 가설도 세워 뒀었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만났어?”
“어. 유해한은 금방 만나서 나랑 있어. 장하리랑.”
“……유지한은?”
궁금한 건 이것이었다. 유해한이나 다른 사람은 궁금하지 않았다. 오직 유지한만 이 순간 가장 궁금했다.
티를 내고 싶지 않아 자연스럽게 묻는 척했지만, 표정은 숨길 수 없었던 듯했다. 빌어먹게도 내 표정 하나는 기가 막히게 읽는 남자기도 했고.
“……궁금한 건 그거구나.”
“…….”
정곡을 찔려서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답지 않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알았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이렇게 되니 내 감정을 보다 확실하게 마주할 수 있었다.
“그래.”
“……윤지호.”
“내가 보고 싶은 건 그 사람이야.”
나는 지금 이 순간 어느 누구보다 보고픈 사람이 있다. 필요한 사람이 있다.
“네가 아니라.”
올곧게 나를 바라보는 그 사람이.
* * *
“……이로운?”
허망한 얼굴로 서 있던 이로운을 흔든 건 그를 찾아 나섰던 유해한이었다.
‘모르면 더 이상 볼 일 없어.’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지호의 뒷모습만이 생생해 이로운은 그대로 한참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라지더니 넋 나간 사람처럼 변한 제 보스의 모습은 왜 안 오나 하고 찾으러 왔던 유해한 입장에선 황당함 그 자체였다.
정신 차리라고. 이유를 알 수 없어 대체 너 왜 그러냐고 열심히 이로운을 흔드는데, 그 덕에 정신을 차린 건지, 아니면 아직도 영혼은 다른 곳을 부유 중인 건지, 흔드는 대로 흔들리던 이로운이 간신히 입을 열었다.
“조금은……. 아니, 사실은 꽤 기대했어.”
고작 ‘꽤’ 정도뿐일까. 솔직히 이로운은 무척이나 기대했었다. 옛날의 자신 그 자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았을 때.
각성으로 일어난 변화는 단순히 머리 색과 눈 색뿐이 아니었다. 얼굴도 분위기도 그때와는 확연히 달라졌다. 윤지호와 함께했을 때의 자신과.
이미 끝난 사이였지만, 조금이라도 지호의 흔적을 지우고 싶지 않은 로운에게는 그런 자신의 몰골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원래대로 되돌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마력 탓인지 염색 자체가 되지 않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마치 그때처럼 전부 되돌아간 제 모습이라니.
솔직히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예전과 같은 이 모습이라면 지호의 눈에 조금이라도 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래도 함께한 시간이 있으니, 이 모습에는 지호도 그 시간들을 떠올려 주지 않을까. 그래서 실낱같은 기회라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꿈에 부풀었었다.
‘……윤지호?’
하지만 직접 마주한 순간, 그 기대는 산산이 깨어졌다.
기대한 이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모를 수 없게끔, 제 얼굴을 보자마자 싸늘하게 식어버리는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이로운은 깨달았다. 그녀가 기다리던 이는, 그녀가 마주하고 싶었던 이는 자신이 아니란 걸.
‘……유지한은?’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입 안을 짓씹지 않게 노력해야 했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기다렸던 이가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었으니까.
역시, 유지한이다. 또.
이래서 이로운은 유지한이 싫었다.
사실 이로운은 지호가 헌터와 엮이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음에 대단히 안도했다. 헌터와 연관되기 시작하면 언제고 유지한을 한번은 마주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로운은 지호가 유지한을 마주하지 않길 바랐다. 그 빌어먹을 놈은 분명 제가 죽도록 노력해서 얻은 걸 너무나 손쉽게 가져가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으니까.
모를 수가 없었다. 제가 저런 남자가 되고 싶었으니까. 저런 남자가 되어, 지호의 것이 되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저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렇게 될 수 없었기에 그는 유지한이 끔찍이도 싫었다.
그러나 결국 둘은 운명이라도 되는 듯 마주했고, 윤지호는 역시나 유지한을 선택했다.
아아. 그렇겠지. 네가 가장 약한 타입 중에서도 최고인 게 바로 그놈이니까. 너는 그런 놈을 두고 보지 못하니까.
“이로운. 미쳤어? 왜 그래.”
그런데……. 나는?
“나도 너인데…….”
나 역시 너를 너무나 필요로 하는 남자인데. 네가 너무 간절한 남자인데……. 왜, 나는 안돼? 있는 그대로의 나는…… 어째서 너에게 선택받지 못해?
아무리 노력해도 왜 나는 너를 온전히 가져볼 수 없어?
“야. 야. 이로운.”
“……죽여버리고 싶어.”
추악한 질투와 미련이 온몸을 휘감았다.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그녀의 눈에 들지 않도록.
인생에서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추잡한 마음을 곱씹으며 이로운은 스스로를 향해 조소를 흘렸다. 이런 자신을 대단하다 말하는 이들이 우스울 정도였다. 이다지도 보잘것없는데.
“이로운. 유지한 만나러 가야 하는데, 그럴 수 있겠어?”
아아. 그 와중에 네놈은 어쩜 그리도 주인공 자리를 잘 꿰차는지. 질투로 머리가 돌아버릴 것 같았다.
“만나러 가야지.”
유지한이 어디 있는지 알면서 말하지 않은 건 내 비겁한 이기심이 맞아. 그래서 나는 절대, 너에게 유지한이 어디 있는지 말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나를 만나러 와서, 화라도 내.
난 그것마저도 기꺼워할 테니.
* * *
“아가씨, 아가씨!”
“아, 미아.”
이로운 때문에 본의 아니게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알게 돼 빡쳐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그 바람에 미아도 잊고 성큼성큼 걸어가던 중, 뒤에서 애타게 쫓아오며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나는 간신히 정신이 번쩍 들어 뒤돌아 미아를 챙겼다.
“미안. 내가 정신이 없어서 널 잊었네.”
그래도 그렇지 내 뒤를 열심히 따라오는 아이를 눈치채지도 못하다니.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몰랐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빌어먹을 신분 차 덕에 미아는 그런 내 행동을 대수롭지 않아 했고, 오히려 다른 일에 눈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불태웠다.
“아니에요. 그러실 수 있죠. 화나셨던 거 같은데……. 아가씨치고는 드문 일이네요!”
“…….”
대체 이 벨로아 루체는 어떤 성인이었던 거지? 점점 알아갈수록 답이 안 나오는 벨로아 루체의 무서움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나를 내버려 두고, 미아가 매우 열성적인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이바노프 공작님과 아는 사이셨어요?”
“……뭐?”
이건 또 뭔 소리야. 누구?
대체 그 개떡 같은 이름이 누굴 말하는지 몰라 인상을 구기는데, 이 와중에 성위님은 또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혀를 끌끌 차며 말하셨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루체, 베어, 이바노프. 뭐 이런 짬뽕 언어가 다 있냐고. 작가가 그냥 아무거나 막 갖다 쓴 것 같다고, 이곳이 로판이라는 설을 더 지지합니다.]
‘아니. 그거는 근거가 안 되지. 근데 로판 확정 아니었어?’
일단 지금 내가 놓여 있는 스토리는 분명 ‘로판’이 맞았다. 시스템이 그렇게 결정지어 줬으니까.
다시 상황으로 돌아와 나는 미아에게 나름대로 최대한의 상냥함을 담아 물었다.
“이바노프 공작님이라니……. 누가?”
“……네?!”
내가 묻자, 오히려 무슨 소리냐는 듯 미아가 반문했다. 그 모습에 나는 살짝 억울해졌다. 아니. 진짜 모른단다. 얘야. 그 오글거리는 이름의 주인이 대체 누군데?
“방금까지 아가씨랑 같이 계셨던 분이요!”
“……응?”
뭐? 누구?
당황할 새도 없이 미아가 속사포랩을 시전하듯 말을 쏟아내었다.
“아가씨가 화내셨던 분이 이번 대 이바노프 공작이신 에이버 이바노프 공작님이시잖아요! 최연소 공작! 제국 최고 신랑감!”
……맨 마지막 말은 빼도 될 거 같은데.
어쨌든 그 덕분에 나는 미아가 아주 찬양을 하는 고매하신 이바노프 공작님의 정체를 유추해낼 수 있었다.
“……이로운?”
그게 공작이라고?
아. 진짜 인생 뭣 같네.
* * *
“싱그러운 아침입니다. 베어 경.”
주춤―
내가 귀족 영애의 정석처럼 화사하고 우아하게 인사를 건네자, 매우 솔직하기 짝이 없는 혈육 메이트가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며 ‘이게 미쳤나.’라는 얼굴을 해 왔다.
그 모자란 얼굴을 보며 나는 싱긋 미소를 지우지 않고 열심히 따뜻한 시선을 던졌다.
‘표정 관리 안 하냐.’
누군 좋아서 이따위 걸 하고 있는 줄 아나.
너만 역겨운 거 아니니 얼른 그 멍청한 표정 치우고 연기하라고 눈으로 다그치자, 비로소 정신을 차린 윤지우가 고상하게 인사를 해 왔다.
“……그대 덕에 더욱 싱그러운 아침이 되었습니다. 루체 영애.”
우욱, 미안. 나 방금 토할 뻔했어.
감정을 떠나 약혼 관계인 사이에서는 자연스러운 인사임을 알고 있음에도, 이걸 제 친동생의 입으로 들으니까 진짜 거짓말 안 하고 속이 울렁거렸다. 천부적인 연기력이 없었더라면 진짜 헛구역질을 했을 것이다.
그건 윤지우도 별반 다르지 않은 듯, 헛구역질을 참으려고 하다 보니 얼굴이 보랏빛으로 변했다. 선천적으로 애교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는 남매였기에 다른 이들보다 두세 배 타격이 더 컸다.
그런 우리를 눈곱만치도 모르는 집사와 시종들은 흐뭇한 얼굴을 하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우웩―!”
“우욱―!”
그들이 자리를 뜨자마자 우리는 연기를 집어치우고 가감 없이 헛구역질을 시전하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살다 살다 이런 짓까지 해야 하다니.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내가 할 말이야. 이런 걸 누나로 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벌 받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또 이렇게 세트로……. 라는 소리가 들렸지만 사뿐히 무시했다. 나도 할 말이 있거든.
“차라리 포X몬 세계에 빠졌어야 했는데. 그럼 윤지우는 주인공 당첨이었을 거고. 지우가 포X몬 마스터가 되도록 나는 지원이나 쌔빠지게 한번…….”
“야―!!”
내 입장에서는 그냥 하는 실없는 뻘소리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놀림을 당해 온 윤지우는 아니었는지 반사적으로 샤우팅이 튀어나왔다. 나는 자동으로 귀를 틀어막으며 반박했다.
“아 왜. 여기서 근친물 찍는 것보단 낫잖아!”
근친물이냐. 포X몬이냐.
비교할 가치가 있냐고 콧방귀를 뀌며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윤지우가 할 말을 잃은 듯 넋이 나갔다. 포X몬은 트라우마라 끔찍하게 싫고, 근친물은 말할 것도 없으니 선택 자체가 불가능해져 그런 듯했다.
더 이상 몰아치는 건 의미 없을 듯해서 이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누구 찾은 사람 있어?”
소득 보고나 하라고 묻자,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윤지우가 답했다.
“아직 제대로 찾은 건 폭검뿐이야.”
“……폭검?”
“응. 황실기사단 기사로 들어가 있던데?”
기사로 빙의한 건지, 빙의 후 기사단에 들어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기사단에 있는 것은 확실하단다. 어쩐지 나는 지금쯤 폭검이 어떤 행각을 벌이고 있을지 눈에 선히 보였다.
“거기서 신나게 날아다니고 있겠네.”
“……응. 겁나 유명하더라.”
기사단 단장보다 유명한 것 같다고. 윤지우가 별로 궁금하지 않은 정보를 덧붙였다. 그건 알 바 아니라 사뿐히 넘기고, 나는 곧바로 묻고 싶은 것을 물었다.
“유지한은?”
“아직. 우리가 쉽게 알아볼 수 없는 인물로 빙의한 것 같아. 후작가쯤 되면 그래도 꽤 정보력이 있는 편인데 파도 나오는 게 없어. 그나마 의심 가는 건 황궁?”
“……황궁?”
“워낙 철통같은 곳이라 보안을 뚫기가 어려워. 특정 인물 찾기는 사막에서 눈 가리고 바늘 찾기 수준이고. 일단 남은 곳 중 최고로 가능성 있는 데는 거기야.”
“일리 있네.”
주인공으로 낙점되었다면 평범한 스펙은 아닐 것이고, 로판 남주의 전형적인 특성은 보통 황자나 혹은 황궁에 관련된 고위직이니……. 윤지우의 말대로 가능성이 있었다.
“누나는 뭐 알아낸 거 있어?”
“아. 나도 있긴 하지. 너 안 좋아할 거.”
“뭐? 뭔데.”
이로운이라면 개지랄을 떠는 녀석이라 자칫 소란을 피울까 살짝 걱정이 들었지만, 이미 기운은 아까 어느 정도 빼 놔서 괜찮겠다 싶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녀석도 알아야 할 정보기도 했고.
“이로운 만났거든. 무려 공작님이시더라.”
그것도 최연소. 인생 참 불공평해. 그치? 나도 공작이나 되었으면 지금 이렇게 오글거리는 거 안 하고 있을 텐데…….
내가 부러움과 회한을 담아 읊조리자, 윤지우는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얼굴을 구겼다.
“아. 그 씨발 폐차 새끼. 그럼 녹음 쪽은 거의 공작가로 모였겠네?”
“유해한이랑 장하리는 있다고 했는데, 다른 이들은 모르지?”
“그 둘 붙으면 거의 다 붙은 거지. 아, 녹음은 그런데 우리는 뭐냐.”
하여튼 소수 정예 아니랄까 봐, 진짜 성격대로 자유롭게 다 떨어져 있는 거 뭐냐고. 윤지우가 투덜거렸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조금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도 다들 열심히 찾고 있을 거야.”
“그러려나.”
“당연하지.”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흘러서 강을 이룰 정도인 내 단언에 의문을 품은 윤지우가 입을 열었다.
“뭐가 당연…….”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멍청한 소리였다. 저놈은 툭하면 맨날 잊어먹는다. 그래서 새삼스레 다시 일깨워 주었다.
“내가 있잖니?”
현 원티드의 주축 중 하나이자, 원티드가 1순위로 보호해야 하는 민간인이 여기 있다는 걸.
“아……. 대단하셔.”
이해는 하긴 했지만 인정하긴 싫은지 매우 떨떠름한 얼굴로 윤지우가 동조했다. 그런 놈의 뒤통수를 가볍게 한 대 후려주고, 나는 다시 이야기를 본론으로 돌렸다.
“그럼 황궁에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지? 쓸 만한 방법이…….”
열심히 머리를 굴리려는데, 그 전에 윤지우가 무슨 고민을 하냐며 한심하다는 얼굴로 내게 말했다.
“바로 있잖아?”
“뭐?”
영문을 몰라 묻자, 진짜로 모르냐며 윤지우가 전세 역전해 의기양양하게 나를 바라봤다.
왜. 진짜 몰라. 어쩌라고. 라는 눈으로 응수하자 윤지우가 ‘지금 이걸 믿고 함께하다니.’라는 얼굴로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곧 있으면 2황자 탄신축하연 열리잖아.”
“……아!”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 * *
아, 잊고 있었다.
“뭐 해! 빨리 움직여!”
“시간이 없다고!”
“하녀장님! 이쪽 준비 끝났습니다!”
“좋아! 다들 시간 체크 확실히 해!”
“넵!”
귀족 영애의 무도회는 하녀들의 빅 이벤트였다는걸. 잊고 있을 만했다. 겪은 적이 없는데, 뭐 와닿는 게 있어야지.
“아가씨! 이쪽으로!”
어느 로판이든 항상 혼비백산하며 여주를 진 빼놨던 이벤트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현실은 무엇이든 그 상상 이상이었다.
“나오시면 안 돼요. 향이 푹 배어야 합니다. 몸에서 장미 향기를 풍기실 수 있도록.”
아니, 그러면 내가 장미지. 사람이냐!
어처구니가 없어 정신이 가출할 것 같았지만, 가출할 새도 없이 계속 사람을 들들 볶아가며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짜증도 못 냈다.
사람이 미친 듯이 프로페셔널하게 일을 하고 있으면 왠지 건들기 힘든 분위기가 있는 것이다. 적어도 방해는 하지 말아야지, 하는.
결국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온몸에서 진동하는 장미 냄새를 맡으며 소파에 앉혀지자, 이번에는 옷이 줄줄이 내 앞으로 도착했다.
“이건 어떠십니까, 아가씨. 이번 시즌 마담 퐁파레가 자랑하는 자색…….”
“여긴 신인 디자이너의 작품입니다. 햇살을 수놓은 것 같은 자수가 매력적인…….”
“아가씨, 저번에 아가씨께서 눈여겨보셨던 파스텔 블루의…….”
영혼이 탈곡돼 앉아 있는 사람에게 무슨 전문가마냥 열성적으로 드레스를 피력하는 이들을 보며 나는 이제 완전히 질려 버렸다.
보통 무도회 드레스는 하나만 특별하게 제작해서, 굳이 내가 고를 필요도 없이 그걸 입는 걸로 정해져 있지 않나? 이번에는 다른 것인지, 아니면 이 집이 미친 듯 부자라 이런 것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무도회 드레스라고 하면서 저세상 화려함으로 무장한 드레스가 이후로도 줄줄이 더 이어 들어오려 했다. 대체 이 뒤로도 얼마만큼 이어지는지 상상조차 하기 싫어 그냥 나는 눈앞의 파스텔 블루인지 뭔지 하는 드레스를 찍었다.
“이걸로 할게.”
“네. 그럼 장신구를 맞추겠습니다.”
“알아서 해 줘.”
이것까지 나에게 선택을 요구하지 마라. 더럽게 피곤하니까. 하는 귀찮은 티를 팍팍 내자, 다행히 하녀장은 거기까지 요구하진 않았다.
“메이. 다 꺼내 오너라.”
“알겠습니다.”
뭐, 보석은 많지도 않을 테니까 적당히 아무거나……. 라고 생각했지만, 메이가 가져오는 건 그냥 작은 보석 한두 개가 아니었다. 메이의 품에 가득 차고도 남는 커다란 보석함의 등장에 나는 진심으로 이 집의 재정 상태가 궁금해졌다.
졸부인가?
흔히 로판에서 등장하는 백작가는 딸에게 이 정도의 보석을 안겨줄 재력이 되지 않는다. 이 집안 뭘까…….
생각해 보면 뭐 별거 없는 백작가 집안이 후작가와 사돈을 맺기도 어려운 일이다. 뭐, 삼남이라면 있을 법하겠지만, 윤지우가 빙의돼 있는 미하일 베어는 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검술 신예였다. 검기를 다루어 20살의 나이로 소드 엑스퍼트에 오른.
지금의 윤지우가 그걸 쓸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런 앞날이 창창한 윤지우와 약혼이라는 것은 이 집안에 무언가 꽤나 대단한 것이 있다는 의미였다.
머리를 힘차게 굴려봤지만, 짚이는 게 없었다. 심지어 내가 직접 본 백작 부부는 진짜 인자하고 화목한 부부 그 자체였다. 뭐라 의심하기도 힘든, 성격 좋은 사람들이었다.
“아가씨, 다 되었습니다.”
“아.”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치장이 끝났음을 알리는 하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눈앞의 거울을 보는데…….
“이게 뭐야.”
맙소사.
기겁한 내 목소리에 불안함을 느낀 하녀들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혹여 어디 마음에 들지 않으신 부분이라도…….”
문제? 아주 많이 있지.
“이 실력으로 왜 하녀를 하고 있니? 다들?”
대체 왜 이런 미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작 하녀로 지내고 있는 거야?
좀 과장해서 말하면 호박을 진짜 수박으로 만들었다.
그냥 평범한 흔녀를 물의 요정급으로 만든 그들의 실력에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는데, 내 말에 혹여나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불안해하던 하녀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에 드셔서 다행입니다.”
“아가씨. 베어 경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응. 내려갈게.”
몸을 일으키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모습을 그 남자가 보았으면 좋았을걸. 이라고. 안 그런 척하지만 내가 예쁘게 꾸미는 걸 무척이나 좋아하는 남자였으니까.
나도 사람인지라 아무리 그래도 매일은 무리였고, 어쩌다 한번 빡세게 꾸미는 날이면 그의 얼굴은 정말 가관이었다. 감정을 숨길 생각도 못 하는 그 멍한 얼굴을, 솔직히 얘기해서 사랑했다.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아마 지금 이 모습을 보았다면 그가 보여줄 얼굴이 눈에 선했다. 눈이 먼 듯 얼빠진 얼굴을 하겠지, 분명. 생각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비록 이렇게 꾸민 모습을 보고, 내 손을 잡을 놈은 애석하게도 윤지우였지만, 그래도 다른 인간보다는 나으니 괜찮았다. 요 녀석도 분명 기대할 만한 반응을 보여줄 테니까.
“뭐야. 기어나……!”
“큭―”
봐 봐. 볼만하다니까.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경악 어린 얼굴에 순간 웃음을 못 참고 터뜨릴 뻔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저 반응을 보고 있으니 새삼 내 귀여운 화신이 왜 동생을 귀여워하는지 알 거 같다고 윤지우에게 호감을 드러냅니다.]
그치? 놀리는 걸 멈출 수가 없어.
윤지우가 질색하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습관이 되어 버려서 나도 모르게 주인공님조차 놀리게 되곤 하는 것이다. 고쳐야 한다고도 생각했지만 고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재밌는걸.
“자자. 정신 차리세요. 베어 경. 약혼녀가 아무리 예뻐도 혼을 빼놓으시면 안 되죠. 네?”
우리는 할 일이 있잖아요?
약혼녀가 약혼자에게 장난을 치듯, 평소 윤지우에게 하던 남매 버전이 아니라 우리 주인공님께 하던 아슬아슬한 수위의 장난을 치자, 그 모습을 봐 왔던 윤지우가 내 의도를 정확히 알아차렸는지 시뻘게진 얼굴로 분한 듯 씩씩거렸다.
“너어는…… 진짜…….”
무슨 말을 해 봤자 이기지 못할 걸 뻔히 알아 씨근대기만 하는 모습에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몸은 컸지만, 여전히 내 앞에서는 어린아이가 되는 이 여린 동생이 귀여워서.
“자. 얼른 가자 윤지우.”
우리는 오늘 할 일이 많아.
* * *
“제론.”
“네. 황자 저하.”
‘……후우.’
곧바로 튀어나오는,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호칭에 지한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진짜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눈을 떠보니 낯선 천장이 보이고, 생전 처음 보는 옷을 차려입고, 금빛으로 변해 버린 머리와 눈까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하기 버겁건만, 처음 보는 외국인이 저를 뒤따르며 깍듯하게 대우하는 건 제 성정으로 정말 상대하기 어려웠다.
“내가 알아봐 달라던 건?”
그래도 나름 빙의된 인물의 위치에 맞춰 주위에 민폐 끼치지 않기 위한 마음으로 하대를 하다 보니 나름대로 자연스러워졌다.
지금의 이 모습이 그녀가 그토록 그에게 바라던 모습이었던 것 같지만, 지한은 아무래도 자신은 이런 걸 계속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특히 그녀에게라면 더더욱 무리였다. 평생 자신이 받들어도 모자랄 판국에.
이런 걸 보면 천생 리더라는 것은 바로 그녀 같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 같았다. 자신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제론이 난감한 얼굴로 질문에 답했다.
“정보가 너무 부족합니다. 하다못해 인상착의라도 정확하면 좋겠는데, 그것마저 특정할 수 없다 하시니.”
“…….”
충분히 이해가 되는 말이라 뭐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말로 더 알려줄 것이 없었다. 자신이 금발에 금안이 된 만큼 그녀도 달라졌을 수 있으니 머리색조차 특정할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어떤 인물을 찾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세계관이 세계관이니만큼 귀족인지 평민인지조차 알 수 없었고.
결국 자신이 말할 수 있었던 건, 근래 행동이나 성격이 변했다거나 한 이들 중 제 설명과 최대한 비슷한 이목구비를 가진 여성이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것뿐이었다.
그나마도 별처럼 예쁜 눈에 오똑한 코, 미소가 눈부신 사람이라니. 세상 이렇게 어려운 조건이 어디 있을까. 그래도 시종은 나름대로 충실히 알아보려고 했지만, 역시 그걸로는 무리였던 것 같았다.
“고생했어. 제론.”
결국 방법은 직접 찾는 것뿐인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이제껏 제가 찾은 사람은 정말 도움이 안 되는 폭검과 이로운, 유해한뿐이었다. 황궁에 자주 출몰하는 유명인들이라 금세 만났지만, 우리 쪽 이들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한 명도 마주하기 힘들었다.
이것도 시스템이 의도한 것인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적대 세력만 기가 막히게 금방 마주치고 제 사람들은 한 명도 만나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합리적인 의심에 빠져드는데 제론이 나름 괜찮은 제안을 해 왔다.
“저……. 만약 찾으시는 분이 귀족 여성이시라면 오늘 무도회에서 찾아보시면 어떠신가요?”
“무도회?”
“오늘 2황자님의 탄신 축하연이 열리잖습니까.”
설마설마했지만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지한의 모습을 약간 질린 듯 바라본 제론이 답했다.
“황자 저하께서는 당연히 참가하실 생각이 없으셨겠지만, 귀족 여성을 찾으시려면 무도회만 한 것이 없습니다. 특히 이번 탄신 축하연은 귀족이라면 거의 모두가 참석할 테니까요.”
“아…….”
그런 게 있었다니.
로판의 국룰이라 불리는 만큼 무도회 이벤트가 반드시 준비되어 있으리라는 걸 모르는 지한은 제론의 지략에 감탄했다.
로판이란 걸 읽어보진 않았지만, 신데렐라 동화를 떠올리며 대강의 스토리나 내용을 따라가고 있는 그인지라 제론의 제안에 신뢰가 높아지기도 했다.
“좋아. 참석할게.”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준비를 해야겠네요.”
“……준비?”
무슨 준비?
나름 들키지 않기 위해 열심히 근엄한 황자 행세를 하던 것도 잊고 순간 어리숙하게 되묻고 말았다.
기껏해야 옷이나 좀 갈아입으면 되는 것 아닌가? 사실 지금 입은 옷도 이미 굉장히 화려해서 지한은 이대로 가도 괜찮지 않나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론의 생각은 매우 다른 듯했다.
“황자 저하가 평복 차림으로 무도회를 나가시다니요. 그건 저희 황자궁 시종 전체의 위상이 떨어지는 일입니다. 자, 얼른 욕실로 가시지요.”
“어어…….”
반문을 할 새도 없이 지한은 그렇게 무도회 준비를 위해 끌려갔다.
* * *
“야. 윤지호. 이제 보니 하녀가 아니라 무슨 프로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둔 듯. 현실에도 데리고 가지 그래?”
마차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기계라도 된 듯 삐걱삐걱 걸었던 윤지우는 둘이 되자마자 다시 살아난 듯 열심히 입을 털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건 내게 타격을 줄 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할 수 있음 진작 했다.”
뭘 그런 당연한 소릴.
옛날이면 모르겠지만, 이제 나도 돈 무지 잘 버는 사회인인데……. 언니 돈 잘 버는데……. 어떻게 안 되겠니? 안 되는 거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 만큼 그들은 완벽했다.
솔직히 이 작품이 완성되는데 3시간이 넘게 걸리긴 했지만, 이 정도 결과물이 나온다면 3시간도 아깝지 않았다.
“아. 진짜 어떻게 안 되나?”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역시 그렇지?”
덤덤히 받아치는 말들에 질린 윤지우는 제가 어떻게 해도 제 누나에게는 타격이 없다는 걸 깨닫고 의자에 축 늘어졌다. 그러더니 다음 순간 나름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아무도 못 찾으면 어떡하지?”
진짜 그러면 다음엔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지기에 불안과 공포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그런 걱정은 스스로도 하는 것이었지만, 그건 나만 해도 충분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태평한 목소리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 어떡해. 이로운을 족쳐 봐야지.”
“……엥?”
“대단한 공작님이시잖아?”
벌써 녹음 쪽 인간들도 잔뜩 찾았고.
설마 공작님 정보력에 우리 쪽 이들을 쉽게 못 찾겠냐며 악녀처럼 미소 짓자, 윤지우가 그런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역시 나쁜년으로는 1티어야. 누나.”
“칭찬 고마워.”
싱긋 웃어 보이자 완전히 안심했는지 윤지우는 깊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그래. 그런 차선책도 있었네. 그럴 일 없었음 하지만.”
여전히 이로운이라면 더럽게 싫어하는 윤지우 님께서 말씀하셨다. 참 한번 싫어하는 사람은 끝까지 싫어하는 일관성에 새삼 감탄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그럴 일 없음 좋지. 그러니까…….”
“도착하셨습니다.”
“그럴 일 없게 열심히 찾아보자고.”
남매가 우애 좋게 손을 맞잡았다. 비록 연극을 하는 중이라 연인이 잡는 것 같은 포즈가 되긴 했지만, 마음은 남매로서 했으니 문제는 없었다.
“미하일 베어 경과 벨로아 루체 백작 영애 드십니다!”
이제 열심히 일을 할 차례였다.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미하일 베어 경. 저 기억하십니까?”
“아……. 오랜만이군.”
“어머. 간만이에요. 루체 영애. 여전히 미모가 빛을 발하시네요.”
“요정 같아요. 역시 루체 영애는…….”
도착하자마자 우리 둘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생각 이상으로 우리들이 유명인사인 모양이었다. 덕분에 특히 루체 백작가가 평범한 백작가가 아니라는 추측에 확신을 굳혔다.
아니나 다를까, 제 곁에 모인 영애들이 이상한 이야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정말 안타까워요. 베어 경도 좋지만 황태자 전하와도…….”
“쉿. 영애. 그건 실례예요.”
“앗. 죄송해요.”
이게 다 무슨 소리라냐…….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기에 그냥 허허 웃으며 넘기기만 했다. 다행히 귀족으로서의 자연스러운 대처였는지, 모두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자연스럽게 시답지 않은 이야기로 화제를 전환했다.
“두 분 이렇게 보니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한 폭의 그림 같으세요.”
……어이. 그건 욕인데.
남매한테 이게 무슨 개소린가 싶었지만, ‘나는 우아하고 프로페셔널한 귀족 영애다.’라고 스스로에게 세뇌를 하며 넘겼다. 그러면서 열심히 주변을 스캔했다. 낯익은 인물이 있는지.
윤지우도 마찬가지인 듯, 탐색하다 시선을 마주쳤다.
‘찾았어?’
‘아니.’
……진짜 사람이 많긴 더럽게 많았다. 너무 많아서 제대로 얼굴을 살펴보기도 힘들었다.
“……안 되겠다. 각자 흩어져서 찾자.”
“그래. 조금 있다가…… 테라스?”
“콜.”
결국 흩어져서 찾기로 하고, 서로 떨어지자마자 영애들이 귀찮게 자꾸만 붙었다.
“루체 영애!”
“간만이에요. 루체 영애!”
아니. 왜 자꾸 붙어. 나 이렇게 인싸야? 진짜 귀찮아 돌아가시겠다. 그래도 벨로아 루체의 이미지를 위해 싱긋 웃으며 나름대로 열심히 상대해 주었다. 그러면서 보고 싶은 이의 얼굴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아무리 주변을 앵무새마냥 두리번거려도 원하는 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나는 점점 낙담했다.
아. 정말 못 찾으면 어쩌나…….
윤지우에게는 당당히 말했지만, 이로운이 유지한을 찾아 줄 것이란 기대는 추호도 하지 않았다. 이로운은 그런 놈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만약 당신을 찾지 못하면 어떡하나. 당신 없이 이 세계에 오래 머물러 있게 되면 어떡해야 하나…….
점점 겁이 났다.
“……영애?”
어느새 걸음도 멈췄다. 옆에서 자신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영애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발밑이 푹 꺼진 것 같았다. 이 답 없는 곳에 진짜 혼자 남겨지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
만약 진짜로 그렇게 된다면…… 어떡하면 좋지? 생전 나오지도 않은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물론 나오진 않았지만.
그래도 막막한 마음에 손으로 얼굴을 가리는데…….
“……!!”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날 훅 잡아당겼다.
갑작스런 손길에 힘없이 끌려가 나를 잡아당긴 이를 올려다보는데…….
“지호 씨?”
“유지한……?”
내가 정말 보고 싶어 했던 이의 얼굴이었다.
꿈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 이렇게 갈망해 본 적 있나 싶을 정도로 그리워한 남자라 그런가. 막상 두 눈으로 맞닥뜨리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건 나뿐만이 아닌지, 상대 역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두 눈을 꿈뻑였다.
“……지호 씨 맞죠?”
“…….”
다시금 확인하는 목소리에 대답 대신 천천히 손을 올렸다. 손에 닿는 뺨이…… 따뜻했다. 틀림없는 진짜였다.
그것만으로도 믿기지 않아서 살짝 볼을 꼬집어 보았다.
“……아얏!”
그대로 당하면서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왜 그러냐고 나를 바라보는 게, 틀림없는 유지한이었다. 내가 너무나 보고 싶었던 주인공님이셨다.
반사적으로 기쁨의 미소가 피어오르려 했다. 이 고양감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너무 기뻐 소리라도 지를 것 같았다.
하지만 퍼뜩 깨달았다. 지금 여기가 어딘지.
“……3황자님이시죠?”
“연회에는 잘 나오지 않으셔서 정말 오랜만에 보네요.”
“여전히 황실 최고의 미남이시네요…….”
소곤거리며 사방에서 쏟아지는 시선과 목소리. 무슨 말인지 잘 들리진 않지만 우리를 두고 말한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누나 이 미친아……!’
그리고 안 들리지만 무슨 말인지는 아주 잘 알겠는 윤지우의 소리 없는 아우성까지. 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상황을 깨닫지 못하는 쪽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어느새 다들 댄스도 멈추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이 연회의 중심은 우리였다.
여기서 제정신이었다면 슬슬 떨어지거나, 아니면 자연스럽게 넘어갈 수 있는 무언가 훌륭한 변명을 고안해 냈을 것이다. 지금도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가슴은 달랐나 보다. 우리를 보는 따가운 시선과 앞으로 당해낼 관심들. 정말 귀찮은 것투성이인데…….
……아아. 알 게 뭐람!
와락―!
“……!!”
“찾았잖아.”
보고 싶었어.
* * *
“……지호 씨?”
머리 색과 눈 색, 그리고 차림새도 확 바뀌었지만, 뒷모습만 보고도 지한은 지호를 알아차렸다. 못 알아차릴 리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믿을 수 없어, 물었다.
“……지호 씨 맞죠?”
그렇게 찾으려고 해도 찾아지지 않아 조급해했던 마음이 망설이게 만들어서.
하지만 답 대신 손이 뺨으로 올라왔다. 따뜻한 체온에 얼굴이 확 달아오를 것 같았다.
“……아얏!”
그리고 이어지는 아픔에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윤지호였다. 자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윤지호였다.
깨닫는 순간, 보고 싶었던 마음이 둑처럼 터져나갈 것 같았다. 너무, 너무 보고 싶어서 오히려 이젠 이 마음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을 만큼.
그리고 그런 머저리 같은 나보다 언제나 한발 빠른 그녀가 내 목을 꽉 껴안으며 내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
갑자기 훅 밀려드는 체온과 현실감.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감정들이 드디어 세밀하게 느껴지기 시작해,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런 내 숨을 트이게 해 준 건 이번에도 역시 당신이었다.
“찾았잖아.”
나에게만 들릴, 아주 희미하지만 날것 그대로의 감정이 담긴 목소리. 그게 너무나 기쁘고 가슴이 벅차, 숨이 트였다. 내 품에 안긴 그녀를 두 팔로 힘껏 끌어안았다.
물론 그 역시 느끼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이들의 시선, 앞으로 이어질 관심, 그리고…….
“헉, 길드장님?”
“실장님이다!”
또 자신이 찾아야 했던 이들의 시선까지도.
하지만 그것은 다 아무 의미 없었다. 그에게는 그 모든 것들보다 제 품 안에 있는 이가 가장 중요했다. 태초부터 그랬던 것처럼.
“계속…… 찾았어요.”
보고 싶었어요.
* * *
“무슨 생각인 거야!!”
윤지우가 화를 내다 못해 분을 참을 수 없는지 아주 휴게실을 방방 뛰어다녔다.
함께 사고 친 주인공님께서는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반성 모드로 돌입하셨지만, 미안한 마음은 있어도 반성 모드라는 옵션은 없는 나는 뻔뻔하게 응수했다.
“와. 내 약혼자님이 내가 바람피워서 화가 많이 나셨네.”
어이구, 어린 내 약혼자님. 삐지셨어요? 우쭈쭈~
상큼한 내 장난에 윤지우가 샤우팅으로 화답했다.
“야―!!”
“아우!”
각오는 했지만 예상보다 더 시끄러워서 귀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내 고막 터지면 니가 책임질 거야?”
“이, 이걸 누나라고 진짜…….”
그래도 나름 걱정해 주는 건데, 신경질과 타박이 돌아오자 상처받은 나머지 윤지우가 녹다운되었다. 그러자 결국 보다 못한 민현이 말했다.
“……이번에는 실장님이 잘못하셨어요.”
“마자요.”
“이견 없음.”
대체 언제 찾아낸 건지. 무도회가 진짜 만능인 듯, 민현을 비롯해 회사원과 레쓰비도 만날 수 있었다.
우리 쪽에서 이제 못 찾은 사람은 유라뿐이었다.
“유라 씨는요?”
설마 이들도 못 찾은 건가. 이제부터 다 같이 ‘유라 찾아 삼만리’를 찍어야 하는가. 라는 불안감에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묻자, 그들은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누님은 드레스 입기 싫다고 안 오셨어요.”
“……네?”
“서유라 성격 어떻게 알았는지, 북부 기사단 기사로 빙의했거든요. 그래서 평소랑 똑같이 입고 다녔는데, 무도회 가자고 풀세팅 하다가 못 해 먹겠다고 집어던졌어요.”
“아아.”
순간 머릿속으로 제가 아침부터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유라라면 못 버틸 만했다.
어쨌든 그럼 우리 쪽 인원은 전원 찾아낸 것이다. 드디어 한 챕터를 클리어했다는 생각에 조금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데, 옆에서 누가 내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
그 손길에 옆을 돌아보자, 우리 주인공님께서 주인 잃은 고양이처럼 애처로운 얼굴로 물어 오셨다.
“……약, 약혼자라니요……?”
“…….”
“…….”
나와 윤지우가 나란히 침묵했다. 굳이 꼭 그걸 물어보냐……. 매우 꺼내기 싫은 주제여서 선뜻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앞서 우리끼리 온갖 쌍욕을 다 하긴 했지만 그건 우리끼리고, 우리가 남매인 걸 아는 이들의 앞에서 밝히기는 매우 힘든 말이었다.
그래도 현 상태를 알리긴 해야 했고, 샤이보이 윤지우는 죽어도 입을 못 뗄 거 같아 그냥 내가 고백했다.
“얘요.”
“네. 지우 군이요.”
“……?”
일부러 이러는 건가.
왠지 모르게 현실도피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지만, 고개를 갸웃거리다 확실하게 확인사살을 해 주었다.
“윤지우가 지금 내 약혼자라고요.”
“……네?”
“……찐?”
“진짜요?!”
예상대로 모두가 아주 기겁을 했다. 하다 하다 남매가 약혼을 하게 되다니. 유교의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네. 찐.”
그런데 뭐 어쩌겠는가. 여기가 대한민국이 아니라 이런 일이 벌어진걸.
“대…… 대박…… 악―!”
“대박 소리 할 때냐. 그럼, 파혼을…… 아니 이걸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 여기가 어떤 이야기 속인지도 전혀 모르므로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회사원이 패닉 상태가 되어 물었다.
그에 윤지우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저희도 파혼 먼저 생각했는데, 변수가 너무 많아서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어요. 여기가 이런 곳이라, 서로 연락이 힘들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요. 처음엔 우리 둘밖에 없었고.”
“아. 그렇군요.”
한창 잘 설명해 주던 윤지우가 갑자기 씹어먹을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았다.
“……뭐, 그 약혼도 방금 박살 난 것 같지만.”
“…….”
할 말 없는 인간은 모르쇠를 시전했다. 그런 나를 윤지우가 아주 사람 뚫어질 듯 노려봤지만 끝까지 무시했다. 제가 생각해도 할 말이 없었으니까.
제정신으로 돌아오니 그때 정말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아니. 그걸 다 떠나서 그냥, 다시 생각하니 수치스러움에 온몸이 배배 꼬였다. 내가 그런 오글거리는 짓을……! 다시 하라고 하면 진짜 수치사할 자신이 있다.
그런데 더 우스운 건, 그 정도로 인생의 흑역사 하나를 새겼는데도 별로 후회는 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헤헤.”
쭈욱―
“웃지 마요.”
“……에에?”
내가 뺨을 꼬집고 있는데도 멍청하게 웃고만 있는 이 남자 때문일까. 별 하릴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제 어느 정도 분이 풀린 건지 제정신으로 돌아온 윤지우가 내게 물었다.
“누나. 이제 어쩔 거야?”
“뭘?”
뭘 말하는지 바로 알아들었지만, 일단 시치미를 뗐다. 사실 아무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나를 정확히 눈치챈 윤지우가 장난하지 말라며 보다 진지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내빼지 말고. 방금 누나가 사고 친 거로 우리 약혼은 거의 파기라고 봐야 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자와의 스캔들이야.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니라고.”
“……황자?”
누가 황자인데?
내가 윤지우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사건의 당사자였기에 들리지 않았던 정보도 있었다.
해서 감을 못 잡고 있는데, 윤지우가 짜게 식은 눈으로 답했다.
“지금 댁 옆에 계신, 댁이랑 스캔들 내신 분이요.”
“……뭐?”
고개를 천천히 돌려 지한을 돌아보았다. 우리의 주인공님답게 곱게 차려입으시니 아주 빛이 났다. 옷도 고급스럽고 저 단추 하나하나에 달린 보석은 전부 다이아 같았다. 이 정도 재력을 가지고 있으려면 확실히 황실이나 최소 세력이 강한 후작가 정도는 되어야 하겠지.
“……이름.”
“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유지한이요?”
아니, 그거 말고.
순간 이걸 때릴 뻔했다. 누가 그걸 모르냐!
다른 이들도 나와 생각이 같은 듯 저마다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저런 걸 보스로 모시고 있으니 그럴 만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한번 참고 애정을 긁어모아 친절하게 다시 물었다.
“본명 말고, 이 세계의 이름이요.”
“아.”
그 말에 비로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주인공님께서 대답하셨다.
“헤이든 몬트리버 헤르세르크입니다.”
“…….”
너무나도 주인공스러운 이름에 나를 비롯한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설마설마하긴 했지만, 진짜 여기서도 주인공이냐…. 안 질리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빌어먹을 알림창이 등장하셨다.
【축하드립니다. ‘헤르세르크의 반려’의 주연, 헤이든 몬트리버 헤르세르크를 마주하셨습니다.】
【이야기 엔딩까지 분발해 주세요. 파이팅!】
……나가 죽어.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알림을 받았을 것이다. ‘이런 거를 붙들어 엔딩을 봐야 한다니.’라며 절망에 빠진 이들을 보고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은 나는, 일단 해산을 외치고 추후에 내 저택에서 모이기로 했다.
어차피 장소도 황궁 휴게실이었고, 여기선 깊은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다. 휴게실에서 나누는 말들은 거의 70% 이상이 새어나갈 게 분명하니까.
황궁 시종들이 그림자처럼 말을 주워듣고 다닌다는 걸 잘 아는지라 여기서 더 자세한 계획을 세울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아가씨. 연회는 어떠셨어요?”
“파란만장했어.”
“네?”
“나 너무 피곤해. 미아.”
“아, 준비해 드릴게요.”
그렇게 자리를 파하고 다 털린 듯 빈 영혼으로 돌아온 나는, 일단 넋 나간 듯 자고 다음 날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열심히 나와 내 집안에 대해 알아보는 동안, 나는 깜빡 실수를 했다.
바로 소문에 대해 1도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
“들으셨어요? 3황자님과 루체 영애가…….”
“어머. 루체 영애는 베어 경과 약혼하지 않았나요?”
“그러니까요! 게다가 그것도 다들 모인 2황자님 탄신연회에서!”
“어머어머!!”
덕분에 소문은 나도 모르는 사이 일파만파 퍼져나가는 중이었다.
“그럼 베어 후작가와 루체 백작가의 결합은 어떻게 되는 거지?”
“애초에 그것도 수상했지. 황태자가 루체 영애에게 마음이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아닌가. 그럼에도 루체 백작가는 황태자가 아닌 베어 후작가를 선택했어. 정치적으로는 완전히 말이 안 돼.”
“하긴. 황실과 사돈이 되는 건데, 어느 귀족이 마다하겠나.”
“백작가를 지키고 싶었던 거라면? 루체 영애는 독녀고 베어 경은 3남이니, 베어 경이 백작가로 들어온다면 루체의 명맥은 이어지니까.”
“……음. 의중을 모르겠군.”
이 모든 소문들을 전달하며 이제는 다 해탈한 것 같은 회사원이 말했다.
“그래서 현재 온 귀족들은 물론, 서민들에게까지 이야기가 새어나가 온 나라가 이 스캔들 얘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씨…….”
뒤늦게 이 사실을 들었을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정보를 모으는데 정신이 팔려 그쪽은 관심도 없었다.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건지도 모른다. 저건 안다고 해서 막거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인생 흑역사를 하나 쓴 기분이라, 소파에 털썩 드러누워 허공에다 발차기를 하며 짜증을 해소했다. 진심으로 퍽퍽 찬 거라 위험을 감지한 윤지우가 반사적으로 내게 멀어졌고, 다른 이들에게도 저거 비스듬히 맞아도 최소 사망이니 얼른 떨어지라고 충고해 주었다.
참 더럽게 고맙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화신의 철판에 감탄합니다. 혼자 있을 때 해도 쪽팔릴 판에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저 뻔뻔함! 본받아야겠다며 감탄합니다.]
‘꺼져―!!’
이젠 성위님까지 속을 긁는다. 내 속이 긁히는 줄은 추호도 모르는 이들은 그냥 다시 스팀이 오른 줄 알았지만.
한창 그러고 있는데, 뒤늦은 손님이 등장했다.
“나 왔어! 와씨, 겁나 느려! 그냥 뛰어오는 게 나았을……! 지호 씨 왜 그래?”
“아. 왔냐. 서유라.”
“납득 되는 이유임. 내버려 두셈.”
이미 체념한 듯한 그들의 말에 유라는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 대로 물었다.
“뭐야. 유지한이 사고 쳤어?”
“…….”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왠지 모르게 억울한 공범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쨌든 그의 지분도 아주 컸으니 말이다.
그런 머저리를 대신해 어느 정도 분이 풀린 내가 답했다.
“같이 쳤어요.”
“……네?”
유지한은 몰라도 내가 사고를 쳤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는지 서유라가 눈을 끔뻑였다. 하지만 거기서 흑역사를 다시 되새김질하고 싶지 않아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일단 거기 남주님, 그만 땅 파시고 제대로 앉아주시고요. 이제 슬슬 회의 시작합시다.”
“오. 드디어 정신 차렸네.”
“다들 소파에 얼른 앉아. 앉을 자리 없는 사람은…… 알아서 하고.”
이것이 바로 약육강식. 누가 못 앉는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겠다는 주최자의 불친절함에도 불구하고, 주최자의 현 멘탈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걸 아는 착한 손님들은 전부 너그러이 이해해 주었다.
“자. 그럼 다들 알아낸 정보 있어요?”
먼저 회사원이 입을 열었다.
“기본적으로 시스템이 알려주는 것들은 이미 동생분께 들으셨을 거 같고……. 새롭게 알게 된 건 여기 우리 길드장님이 이 소설의 남주라는 거. 그리고 이로운이 남조라는 겁니다.”
“……엥?”
“이로운?”
“진짜요?!”
생각지도 못한 정보에 다들 반응이 현란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남조요……?”
대체 어떤 남조를 이야기하냐. 설마 하는 마음으로 묻자, 회사원이 매우 난감한 어조로 답했다.
“그 왜, 로맨스 소설 보면 여주를 같이 좋아해서 갈등을 만드는…….”
“아, 네. 서브남. 더 말하지 않아도 알겠네요.”
진짜 지 같은 포지션 잘 맡았다. 다들 내심 그리 생각하는지 얼굴이 나랑 다 똑같았다. 그 사이에서 회사원이 그나마 사감을 뒤로하고 말을 이었다.
“이로운은 현재 이 나라의 세 명밖에 없는 공작이고, 최연소 공작으로서 입지가 탄탄합니다. 그리고 그 뒷배가 되는 게 제국 최고 상단의 주인인 유해한이고요.”
이어지는 화려한 스펙들에 질려버리다 못해 감흥이 없어진 내가 로봇처럼 감상평을 펼쳤다.
“우와. 여주만 낙점되면 바로 낚기 좋겠네. 선물 공세 열심히 하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급 연기만 펼치면.”
“불가능이에요.”
“후자가 일단 말이 안 됩니다. 실장님.”
그 이로운이 연기라니. 그걸 그렇게 잘했으면 진작 이 나라 최고의 인기남은 유지한이 아니라 이로운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고 고개를 내젓는데, 여기서 딱 한 명. 이로운의 메소드 연기를 겪어 본 여자가 무슨 소리냐는 듯 답했다.
“뭐래요. 잘해요, 이로운.”
당한 당사자가 난데. 속지는 않았지만.
“아…….”
그제야 이로운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았던 몇몇이 바로 알아들은 듯 탄성을 흘렸다.
“근데 이거, 엔딩을 어떻게 봐야 되는 소설인데? 일단 남주가 여기 있는데, 남주랑 여주랑 이어져야 하는 거 아니야?”
“어. 그것도 그런데……. 의외로 남주라고 초반에 내밀었다가 서브남이랑 잘되는 소설도 꽤 많으니까.”
“어느 쪽인데?”
“왜 나한테 지랄이야. 내가 작가냐?”
물론 매우 그랬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아 반박하자 윤지우가 닥쳤다.
“그러고 보니 여러분은 어떤 인물들이에요?”
정작 그건 듣지 못해 이제야 묻자, 다들 이미 본명으로 실컷 이야기한 참이라 막상 로판 이름을 꺼내려니 어색한 듯 서로 바라보며 웃었다.
“저는 이 세계에서 세이 모리스. 황실 서기관입니다.”
회사원이 먼저 입을 열었고, 이어서 민현이 입을 열었다.
“저는 로젠 아이리스고 황실 기사단 기사입니다.”
“……황실 기사단이요?”
그 말에 이미 알고 있는 게 있던 나와 윤지우가 기겁을 했다. 우리의 반응에 이유를 알아차린 듯 민현이 해탈한 얼굴로 허탈하게 웃었다.
“진짜 폭검…….”
묻기도 미안해서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하는데, 폭검의 ‘폭’ 자만 들어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한 민현이 서러움을 토해냈다.
“죽을 것 같습니다.”
왜 하필 그놈이랑 엮여서. 지지리도 말은 안 듣고.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이야기에 다들 말없이 민현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그에 민현이 울음을 터뜨릴 듯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런 이들을 뒤로하고, 유라와 레쓰비가 마저 자기소개를 마쳤다.
“아. 저는 아샤 메이든. 북부 하이든 기사단 기사예요.”
“저는 루이스 하일. 마탑 소속 마법사입니다.”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내가 말했다.
“그래도 다들 귀족이네요.”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그래도 평민 하나는 있을 줄 알았는데, 다들 꽤나 권력 있는 인사들로 빙의했다. 원래의 힘 자체가 강해서 그런 건가. 뭔가 찝찝했지만, 일단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지금은 넘기기로 했다.
“저는 벨로아 루체 백작 영애예요. 여기 윤지우 약혼녀죠.”
“미하일 베어 후작 영식입니다. 누나 약혼자죠. 일단.”
마지막으로 우리까지 자기소개를 마치자, 유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약혼자…… 약혼녀요……?”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네요.”
이미 포기한 문제라 대충 아무렇게나 말하자, 그런 나 대신 윤지우가 말했다.
“어차피 그 약혼 곧 깨질 거예요.”
“네?”
그건 또 무슨 소리냐고 유라가 놀란 얼굴로 윤지우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며 윤지우가 무도회에서의 일을 대충 설명했다. 그리고 심드렁한 얼굴로 덧붙였다.
“전 국민이 알 정도로 그렇게 화려하게 스캔들이 났는데, 약혼이 유지되는 게 이상하죠. 백작이 셈을 할 줄 안다면 당연히 후작가 삼남보단 황자일 테니.”
몇 계단이나 신분 상승할 수 있는 기회인데, 그걸 놓치는 병신이 있을 것 같냐는 합당한 대답에 모두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이야기였으니까. 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아니. 안 깨질걸.”
“……뭐?”
“어째서요?”
이해할 수 없다는 물음에 나는 트레이에 있는 과일을 집어 먹으며 말을 이었다.
“연회 이후로 벌써 4일이야. 그렇게나 소문이 빠르게 퍼졌는데, 백작 부부는 나에게 스캔들에 대해선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어. 그냥 뭐 필요한 게 있냐고만 묻던데.”
“뭐? 그게 무슨…….”
“그러고 보니 내 쪽도 별말이 없었네.”
윤지우가 이제야 깨달은 듯 증언했다.
“그리고 그때 연회장에서 다른 영애들이 그러더라고.”
“뭐라고?”
“내가 아깝다고. 황태자의 배필이 될 수도 있었는데 왜 고작 베어 후작가의 삼남을 선택했냐고.”
“……어.”
다들 깨달은 눈치였다. 애초에 백작이 셈을 할 줄 알았다면 거기서부터 말이 안 된다는 걸. 냄새가 잔뜩 났다.
“그래서 헛소문인가 싶어 조사 좀 했더니, 저 얘기가 진짜더라고.”
“……진짜?!”
“정말입니까?”
모두가 기겁했다. 화등잔만 하게 커진 눈을 구경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1황자, 현 황태자인 이시스 에우로페 헤르세르크는 벨로아 루체에게 마음이 있었어. 청혼까지 했지.”
“……!”
“하지만 벨로아 루체는 황태자를 거절하고 미하일 베어를 선택했어.”
“헐. 말이 돼?”
“당시 황태자비로 유력했던 건 재상의 딸이자 현 사교계의 꽃이었어. 어떻게 보면 합리적인 선택이야.”
그렇다고 해도 가문을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무리 딸을 사랑하는 부부라 해도 그들 또한 귀족. 이만큼 부를 쌓았다면, 그 절호의 기회를 거절할 리 없었다.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의문이 늘어 갔다.
“벨로아 루체는 파면 팔수록 미궁이야. 비밀투성이에, 숨겨진 것들의 스케일이 보통이 아닐 것 같단 말이지.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
“아마 이 벨로아 루체가 여주인공 후보거나, 그에 준하는 이야기의 중요 인물 같아.”
“……미친.”
“아마 양가에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는 것도 서로 합의한 것이 있고, 아직 얻을 것이 있기 때문에 그럴 거야.”
그것조차 비범하지?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자, 본인 이야기인데 어쩜 그리 태평하게 있을 수 있냐는 듯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이 질린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태연했다. 원래 이런 사람인 걸 어쩌겠는가. 확실히 여기 있는 소인배보다는 내가 간이 크긴 큰 것 같았다.
“그래서 말야. 계획을 바꿔서, 난 일단 이 약혼을 깨 보려고.”
내 선언에 윤지우가 감탄했다.
“역시 또라이야. 어떻게 깨게?”
“이미 판은 벌어졌는데, 뭐가 어려워?”
얘는 대체 언제까지 가르쳐야 좀 제 몫을 할까. 살짝 한탄하다, 이제는 습관처럼 내 밑에 앉아 계시는 우리의 남주님에게로 손을 뻗었다.
“요기 예쁜 먹잇감만 잡아먹으면 되는데. 뭘 걱정해?”
나름 분위기 전환을 위해 재치있게 말했다 생각했건만, 우리 순수한 체리보이께서 듣기에는 너무 하드하셨던지 얼굴이 토마토로 변신했다.
그걸 보며 윤지우가 끌끌 혀를 찼다.
“속까지 시꺼멓게 때 탄 너와 다르게 우리 길드장님은 순수하고 퓨어하시거든? 좀 지켜 줘.”
“콜.”
그런 건 당연히 지켜 줘야지. 세상 순수퓨어한 남자를 격하게 사랑하는 내가 칼답을 하며 곧바로 순한 맛으로 말을 수정했다.
“작전명, ‘장래 희망은 당신의 신부’예요. 어때요? 싫어요?”
우리 귀여운 퓨어보이를 향해 싱글싱글 웃으며 묻자, 얼굴이 복숭아처럼 붉어진 분께서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푸핫― 웃음이 터져나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신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