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2장. 길드장을 위하여
13장. 로판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14장. 장래희망은 당신의 신부
12장. 길드장을 위하여
“……아니야. 이것도 아니고.”
모니터와 맞짱을 뜨듯 심각하게 대치하며 중얼거리는 음성에는 온갖 짜증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사무를 볼만한 직원이 없어서 강제로 끌려와 업무를 보고 있던 차지혁이 그 목소리를 듣고 징그럽다는 얼굴로 지호를 비난했다.
“야. 몇백 통은 되는 의뢰 메일이 보기 싫은 건 알겠는데, 대체 뭘 고르길래 그렇게 짜증을 내는 거야.”
정말 더럽게 많긴 하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닐 테고. 아무거나 골라잡아도 다 천문학적인 금액의 의뢰들일 텐데 대체 뭘 바라는 건지.
역시 윤지호가 생각하는 건 클래스가 다른 것인가. 차지혁은 배때기가 부르다 못해 터져버릴 것 같은 그 오만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 지혁의 모습에 나는 오히려 이게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지혁을 올려다보았다.
“이건 진짜 언제쯤 간이 커질까.”
“……네 간이 빌어먹게 큰 거거든?!”
아니. 솔직히 말해. 넌 없지?
아예 간이 없지 않은 이상 이렇게나 엄청난 거금을 뻥뻥 차 버릴 수는 없다. 정말로 간을 떼다 어디 맡겨둔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지혁은 자신이 정상임을 열심히 피력했지만, 지호는 오히려 콧방귀를 꼈다.
“야. 뭔가 착각하고 있는데.”
“뭘?”
“원티드가 언제부터 돈이 없었냐?”
“……!”
나는 진심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 차지혁더러 간이 작다고 말하는 거다.
일전에 돈 때문에 난리를 치기도 했으니 웬만한 이들은 우리가 돈에 움직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평범한 인간의 기준에도 그게 자연스럽고.
하지만 원티드는 애초부터 돈이 없는 집단이 아니었다. 활동하며 적자를 그렇게 냈는데도 길드 건물이며 높은 생활 수준을 누리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가.
돈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정당한 보수를 받기 위해 따지는 거지 그게 무조건적인 1순위는 아니었다.
“이제 좀 머리에 새겨 넣어, 차지혁. 넌 이제 돈에 절절매고 목숨 거는 센터가 아니라 원티드 소속이야.”
“……!”
“바람의 이름을 딴, 바람같이 자유롭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선하고 정의로운 집단.”
몇 주째 출근하고 있으면서 정작 아직까지도 그가 자각하지 못한 사실을 짚어주자, 지혁은 그제서야 그것을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고작 돈과 라인. 단순하고도 직선적인 목표가 우선시되었던 되었던 센터와 달리, 원티드가 된 이상 그는 좀 더 폭넓은 시각을 가져야만 했다.
지금 원티드에게 필요한 것은 돈도 분명 있겠지만, 그보다 더욱 절실한 건 인맥과 권력을 뒷받침해 줄 핑계였다. 사실상 권력을 만들지도, 탐하지도 않을 것이지만 짓밟히지 않기 위해선 그것을 쥐고는 있어야 한다.
토대는 쌓았다.
그러니 이제 다음으로 해야 할 것은 홀로 고고히 서는 외로운 절대자가 되지 않기 위한 밑작업. 표면적으로라도 원티드를 지지한다는 어필을 함으로써, 여론을 완벽히 이쪽 편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숨은 동업자를 둘 차례였다.
그 뜻을 정확히 알아들은 지혁이 물었다.
“그래서, 어떤 뒷배를 선정할 건데?”
“지금 보고 있잖아.”
아무나 막 고를 수는 없기에 최고의, 최선의 패를 집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열심히 보고 있지 않느냐고 내가 부러 짜증을 부리자, 그런 나를 간파한 차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구라 즐.”
“…….”
“지금 바라는 거 있어서 그거 찾고 있잖아. 너.”
“……하여간 이럴 때만 눈치는 더럽게 빨라.”
지 연애할 때나 그럴 것이지.
차지혁의 말대로였다. 나는 이미 원하는 1순위가 있었다. 가장 강력하고, 든든하나…… 아마 길드장은 바라지 않을 패.
“그래서, 그게 어떤 패인데.”
“……우리 유리멘탈 유지한 님의 멘탈을 흔들 패……?”
그래서 원하면서도 살짝 고민되었다. 모두 당신을 위해 하는 짓인데, 정작 당신이 바라지 않을 것 같아서.
아마 무슨 손해를 보더라도 싫다고 하지 않을까?
당신이 싫어하는 것은 아무것도 주고 싶지 않다는, 조금 바보 같은 충동이 들어 버리는 바람에 결국 멍청한 고민이 되었다. 사실은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데.
그리고 이런 내 멍청한 고민을 알아차린 차지혁은 뜻밖에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야 나보다 백배는 선량하고 마음이 여린 놈이니 그 역시 같은 고민이 들었을 테니까.
“……그게 최고이자 최선이긴 한데, 고민할 만하네.”
“그치?”
“유지한이잖냐.”
전국민에게 사랑을 받아 마땅할 인간.
장난스럽지만 진심이 듬뿍 담긴 대답에 나는 실없이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선택권은 일단 이쪽에 있었으면 하는데…….”
일단 우리 앞마당으로 와야 고민을 하든 말든 하지.
그러나 결국 온 메일을 전부 확인했는데도 바라던 것이 없자 나는 그대로 책상에 엎어져 땅이 꺼져라 탄식했다.
“아.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아직도 간 보나. 조X일보를 움직여 준 것으로 충분히 기대할 만하다 여겼는데, 착각이었던 건가.
시작 자체가 힘들지, 시작하기만 하면 끝장을 보는 그의 성격을 알기에 기대했는데 기우였나 보다. 이 정도 도움은 도움 축에도 들지 않는 건가.
누군가에게 미적미적 매달리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번만은 쉽사리 포기하기 어려웠다. 소설을 읽은 나는 그 패가 다른 것과는 비교 불가한 최선의 패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좀 궁금하기도 했다.
누구보다 성공한 인생이라 할 수 있지만, 결국 아무것도 쥐지 못하고 망가진 남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고민하는 내가 조금 불쌍하기라도 했는지 차지혁이 어설프게 위로를 해왔다.
“그냥 포기하고 차선책이나 먼저 마련하는 게 어때?”
“그러긴 할 건데……. 아아……. 진짜로 슬슬 올 때가 됐는데…….”
“뭐가요?”
“엄마야!!!”
“……!!”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펄쩍 뛰어올랐다. 지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두 사람의 반응이 너무 격하자 그는 제가 큰 실수라도 한 것처럼 조심스러워졌다.
“제가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났나요……?”
당연했다. 방금 둘이 나눴던 이야기는 갑작스럽게 등장한 이놈만큼은 절대 들어서는 안 됐으니까.
그건 이 남자의 지뢰와도 같은 부분이라, 하려면 몰래 뒤로 모든 걸 다 마쳐놓고 통보해야 간신히 될까 말까 할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럴 계획이 만만이었고.
재빨리 차지혁과 시선을 교환했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것을 목표로 하는 덕에 재빠르게 눈으로 합의를 마친 우리 둘은 간만에 합심했다.
“네. 노크라는 우리나라의 훌륭한 예절을 모르시는지?”
노크(knock)가 어느 나라 예절인지는 사실 알 바 아니지만, 일단 우리나라에도 있으니 이렇게 우겼다.
질세라 차지혁도 합세했다.
“맞아요. 우리가 이렇게 딸랑 둘이 빡세게 일하는데, 적어도 심신이 심약해질 수 있는 등장은 좀 삼가 주시죠. 길드장님.”
“……아. 미안합니다.”
그의 얼굴은 ‘두 사람이 고작 이 정도로 심신이 심약해질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하려면야 저 표정을 걸고넘어져 개처럼 물어뜯으며 정신을 빼놓을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양심상 그 짓은 안 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방귀 뀐 놈이 성내는 거냐고. 그 유명한 속담의 정석을 방금 자신이 본 것 같다고 놀람을 감추지 못합니다.]
……닥쵸.
뻔뻔 컨셉으로 나가려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서 초를 치는 성위님 때문에 순간 표정 관리에 실패해 하마터면 위험할 뻔했다.
혼자서 표정에 갑자기 급변화가 있으면 이 세상은 보통 ‘성위랑 대화하나?’로 연관 지으니까.
‘망할 성위님아. 들키면 어쩔 뻔했어―!’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내 화신은 그렇게 약하지 않다며, 그런 걱정은 사치일 뿐. 이라고 말하며 코를 후빕니다.]
화를 돋우기 충분한 깐족거림에 나는 불굴의 한국인답게, 참지 않았다.
‘아. 드러.’
빼애애액―!
‘악 씹―!!!’
1초의 간격도 없이 곧바로 튀어나오는 괴성에 머리가 울리며 절로 쌍욕이 튀어나왔다. 하마터면 입 밖으로도 튀어나올 뻔했지만 필사의 의지로 참아내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어떻…….]
‘안 보인다, 안 보인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
[내가 뭐가……]
[‘이매망량’ 님께서 너 이렇게 사람 말 씹을 거냐고…….]
[빨리 대답하지 못하냐고 필사적으로……]
한번 모른 척하자 그 뒤로 폭발적인 메시지가 연속적으로 쏟아져 하나를 미처 다 읽기도 힘들었다.
어차피 읽기 힘든 거, 읽기도 힘들게 만든 인간 탓으로 돌리며 사뿐하게 쌩깠다.
‘아. 행복해라.’
너무 고소한 나머지 갑자기 기분이 급 해피해졌다. 이래서 사람 마음은 갈대라나 보다.
“그래서 어쩐 일이에요?”
있는 대로 짹짹거리는 성위님을 뒤로 넘기고 돌아와 지한에게 용건을 묻자, 그제야 용건이 생각난 듯한 주인공님이 얼빠진 얼굴로 끔뻑거리다 미적미적 답했다.
“아. 우리 임무 언제 나가나 해서요. 슬슬 다들 좀이 쑤시는 모양이고…….”
“……그럴 리가요?”
의심을 넘어 그럴 리가 없다는 확신 어린 내 말에 이번에 놀란 쪽은 지한과 지혁이었다. 그럴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 단호하게 이야기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들이 더 이해가 안 됐다.
“뭘 좀이 쑤셔요. 얼마나 쉬었다고. 휴가 내자마자 유지한 씨 그 꼴 나서 놀러 나간 사람 일정 다 취소하고 돌아왔지, 그 생난리를 치고 또 길드 한 번 난리 나는 바람에 이제 마무리돼서 뭐 제대로 하루는 쉬었나?”
뭘 당연한 얘기를 하고 있어.
저 말로 그치지 않고 이게 무슨 휴가냐, 다들 일만 했는데 뭘 좀이 쑤시냐, 오히려 휴식이 필요하지. 라고 덧붙이며 이번 일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이를 올려다보자…….
“…….”
그분께서는 머쓱한 얼굴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셨다. 더불어 차지혁도.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새삼 조금 반성이라는 것을 했다. 너무 정신없이 휘몰아치긴 했나 보다. 둘 다 바빴다는 자각도 못 한 걸 보니.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줄 건 확실하게 주는 실장이니까 쐐기를 박아 주었다.
“그리고 어제 예기치 못한 일로 떠났다 일도 못 마치고 유턴한 레쓰비 님이 ‘나의 보물을 찾아 떠나니 누가 찾으면 나는 속세로 떠난다고 전해달라.’라며 쪽지를 남겼고, 회사원님이 이참에 입사하고 한 번도 제대로 가 보지 못한 해외여행을 다녀오겠다며 짐 바리바리 싸 들고 떠나셨어요. 다른 분들 얘기도 더 있는데……. 들려줄까?”
“……아니. 안 들어도 알 것 같아.”
원티드 정예 멤버들이 뭐 얼마나 된다고.
굳이 정예 멤버들이 아니더라도 훤히 보이는 원티드의 속사정에 차지혁은 조심스럽게 지한을 외면했다. ‘제가 꺼낸 말이니 알아서 하겠지.’ 이런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그에 지한이 이렇게 자신을 버리기 있냐며 그에게 울망울망한 눈빛을 보냈지만, 차지혁은 윤지호에 의해 다년간 다져진 외면 스킬로 지한을 이겨냈다.
결국 이렇게 지혁에게 버림받은 지한이 절망적인 얼굴을 하며 고개를 풀썩 숙이는 것으로 게임이 끝났다. 절로 동정이 가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에 직격타를 먹은 나는 결국 이번에도 지한에게 져 줄 수밖에 없었다.
“우리 길드장님이 요즘 병원에만 계시기도 했고, 바쁘다가 급 한가해져서 적응이 안 되시나 봐요.”
“아니 그건 아니……. 네.”
유지한은 처음에는 부정하려고 노력하는 듯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을 보고는 솔직하게 심경을 고백했다.
“늘 언제나 할 게 너무나 많았는데……. 지호 씨가 전부 다 해 주셔서……. 할 게 아무것도 없네요. 이제껏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신나게 한번 늘어져 자 보면요?”
“……그래 본 적이 없어서…….”
해가 뜨면 자동으로 눈이 떠져 버린다고. 습관이 되어 버렸나 보다 말하며 애처롭게 웃는 남자는 모두의 심금을 울리기 충분했다.
차지혁이 안쓰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지한에게 제안했다.
“길드장님. 일단 그럼 평소에 가 보고 싶었던 곳은 없습니까?”
“어……. 글쎄요? 어딜까요?”
아니, 그걸 왜 우리한테 물어봐.
자기가 하고 싶은 것도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남자의 행태에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좋아. 우리 어른이 길드장님께 숙제를 내 줄게요.”
“……숙제요?”
“열심히 인터넷 서칭해서 가고 싶은 곳 세 군데 찾아오기.”
“……예?!”
“맛집이든, 장소든 어디든 좋아요. 세 개만 찾아와요. 각각 세 개씩 찾아와도 되고, 더 찾아와도 돼요. 일전에 곱창집 골랐을 때처럼요. 알죠?”
“그건 그런데……. 세 개씩이나…….”
아무래도 일전의 맛집은 정말 우연과 오랜 고민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던 듯, 주인공님이 너무 과한 숙제를 받아든 양 난감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게 꼭 낑낑거리는 강아지 같아 또 절로 머리로 손이 갔다.
사라락―
“열심히 찾아와 봐요. 보다 보면 설렐 거에요. 찾으면 같이 가 줄 테니까.”
“……!”
같이 가 준다는 말에 주인공님은 번쩍 고개를 들며 격하게 반응을 하셨다. 기대가 어린 눈이 반짝이며 제가 들은 걸 확인받고파 했다.
“……정말요?”
그 어린애 같은 모습이 너무나 귀여워서 순간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럼요. 혼자 가면 그게 무슨 재미예요.”
아무리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그런 곳까지 혼자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고, 우리 몸만 큰 주인공님에게 훌륭한 핑곗거리를 만들어 주자 주인공님이 웃었다.
수줍고, 행복하게.
“네. 열심히 찾아볼게요.”
“좋아요. 착한 어른이.”
칭찬을 가득 담아 열심히 지한을 쓰다듬어 주고 있는데, 길드의 경비를 맡은 경비원이 갑작스럽게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쾅―!
“실장님-!”
“엄마야. 오늘은 사람 놀라게 하는 날인가.”
“그러게.”
문짝 남아나겠냐.
차지혁이 이제는 체념한 얼굴로 문의 상태를 걱정하는 걸 보면서 나 역시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용건은 들어야 할 것 같아 경비원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가요?”
“저, 손님이 오셨는데……. 예약되셨냐 물으니 이미 알고 있을 거라 하면서 무작정 밀고 들어오셔서요. 곧 있으면 올라올 겁니다!”
전달을 받고 바로 달려 들어온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전해 준 정보에 차지혁이 물었다.
“오늘 손님이 올 예정은?”
“없어.”
“그럼 저 당당한 불청객은…… 뭐지? 또 어느 길드에서 쳐들어온 건가?”
“…….”
방금 전까지 신나게 이야기를 나눴으면서 이 인간은 멍청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며칠째 이 생각만 하고 있던 나는 이야기가 달랐다.
반응이 없어서 서운해하고 있었는데, 설마 이렇게 직접 행차하실 줄이야. 내 생각보다 더 좋은 징조였다.
조금 안도하기도 했다. 그래도 아무 애정조차 받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막지 말고 정중하게 모셔요. 중요한 손님이니까.”
“……예?”
“……중요한 손님?”
아놔. 이 인간은 이렇게 말했는데도 감이 안 잡히나 보다. 주인공님은 몰라도 넌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아침부터 계속 기다리던 손님인데 당연하지.”
“……아!”
“알았으면 여기 주인…… 아니, 길드장님 데리고 나가 줄래?”
아직은 그래도 얼굴 마주치게 하는 건 좀 아닐 것 같지 않냐는 눈빛은 또 기차게 알아들은 지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한의 앞을 가로막았다.
“길드장님은 저랑 커피나 한잔하실까요? 마침 좀 듣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네? 아니…….”
“이쪽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 없네.”
“……!!!”
먼저 빼내려고 했는데, 실패해 버렸다. 빼내기도 전에 손님이 먼저 당도해서 초를 쳤으니까.
내가 기다리던 손님을 보고, 주인공님은 역시나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버지?”
다신 볼 생각이 없었던 것일까. 눈앞에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에 부자간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었다.
이 골을 더 깊게 만들 수는 없어, 나는 재빨리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자네가 브레인이군.”
내 얼굴을 보자마자 단박에 알아차리는 모습에 새삼 자식과 부모는 그렇게 닮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다.
“알아봐 주셔서 영광입니다.”
“저 녀석이 웬일로 괜찮은 짓을 했어.”
“회장님의 아드님은 언제나 괜찮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 어떤 의미로는 그렇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지만, 나는 오히려 그 모습에 안심했다.
그래도 생각보다 그는 자신의 아들을 잘 아는 듯했다. 저 짜증의 진짜 이유가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더없이 기쁜 얼굴로 진심을 담아 이 말을 할 수 있었다.
“원티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유재환 회장님.”
* * *
“원하시는 거 있으신가요?”
“아무거나 괜찮네.”
“그럼 알아서 드리겠습니다.”
‘아무거나’라는 말은 어차피 제 입맛에 맞는 게 없을 테니 내오기만 하라는 뜻 같았지만, 아마 그의 예측과는 다르게 뭘 고르든 입맛에 맞을 터였다.
그렇게 착취당했음에도 뼈 빠지게 일해 벌어놓기도 했고, 일단 기본적으로 돈이 썩어나는 인간들이(대표적으로 지금은 차지혁에게 끌려나가고 없는 지한이나 유라 등등…….) 사무실에 이것저것 온갖 값나가는 커피든 차든 과자든 산처럼 쌓아 놨으니까.
다 최고급이다 못해 더러는 ‘이걸 사 왔다고?’ 싶은 귀한 것들도 많이 섞여 있어 이 중에 뭘 대접해야 할지…… 모를 리가.
내가 소설을 읽으면서, 어떻게 보면 주인공보다 더 이해가 안 가던 인물이 바로 눈앞의 이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그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처음부터 정독하며 의미를 파 보기도 하고, 중간에 이런저런 관련 정보를 검색도 하다가 다시 돌아와 읽기도 했다.
그런 내가 고작 이 남자의 차 취향 하나를 모를까.
까다롭거나 맞추기 어렵지도 않았다. 이 남자가 마시는 차는 딱 하나였으니까.
“백목단입니다. 제가 차를 잘 우리는 재주는 없어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물론 개뻥이었다. 부족한 다도 실력을 커버하기 위해 성수로 우렸으니까 맛이 없을 리가 없었다.
찻잎 자체는 그리 어마무시한 고급은 아니었지만, 성수로 우린 것이니만큼 최상급보다 더 맑고 조화로운 맛을 낼 것이다. 값어치는 두말할 것 없고.
무엇보다 확신이 있었다. 이 백목단은 그의 연인이 그에게 남긴 잔재였으니까. 아무리 이쪽에서 뭘 내놓든 거들떠보지 않기로 결심했더라도, 그는 절대 이 차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나로서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
내가 내온 차를 받은 그는 말없이 침묵한 채 고요히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너무 반응이 없어 긴장된 얼굴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그가 꺼낸 말은 내 예상과 사뭇 달랐다.
“역시……. 말한 대로군.”
“……예?”
뭘요?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는 말에 대놓고 의아한 티를 내었음에도 그는 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특유의 오만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차를 들 뿐.
어차피 딱히 그 진의가 궁금했던 건 아니었기에, 나는 가차 없이 용건에 들어갔다.
“손수 찾아 주셨다는 건, 제가 바란 답을 기대해도 된다는 뜻입니까?”
“글쎄. 자네는 영특하나, 자네에게 권한이 있지는 않을 것 같은데.”
결국 이 길드는 유지한의 것. 결정 역시 유지한이 해야 한다는 것을 정확히 짚으며 그는 되려 내게 제가 원하는 답을 요구해 왔다.
너는 유지한을 설득할 수 있겠느냐는.
만만치 않은 아저씨였다. 괜히 굴지의 대기업 오너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하지만 이쪽도 만만하게 보일 생각은 없다.
“아드님이 그렇게 고집이 세진 않으셔서요. 그리고…….”
“…….”
“아드님도 이제 알 때가 되지 않았나요.”
세상은 모두 제 뜻대로 되지 않고, 자신의 신념만을 관철해서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걸.
특히 무리의 리더인 이상, 그는 제 고집대로 버티기보단 실리를 취해야 했고, 현실과 정의 사이에서 타협을 해야만 했다.
지금까진 그걸 하나도 못 해 빵점이다 못해 마이너스점인 리더였지만, 이제부터는 달라질 것이다.
“설득은 제가 할 겁니다. 그게 제 일이니까요.”
“…….”
“그러니 회장님께서는 답변만 들려주시면 됩니다.”
유지한이 내키지 않아 한다는 걸 알지만, 향후 원티드와, 그리고 유지한 본인을 위해서도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꼭 필요했다. 이 남자가 원티드에, 유지한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어쩌면 그래서 그녀는 이 남자를 선택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무려 ‘예언’의 무녀니까.
그리고 단호한 내 말에 찻잔을 무심히 내려놓은 그가 답을 주었다.
“내 답변은 처음부터 같았다. 그저 원하지 않아 하는 것이 보였기에 원하는 대로 해 줬을 뿐. 싫다는데 억지로 쥐여 줄 이유도 또 없으니.”
“…….”
“내가 내 아들마저 저버릴 정도로 냉혈한은 아니네.”
풉― 그 말에 절로 비소가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아내었다.
진짜 희대의 개소리였다. 자식이 유지한 말고도 셋이나 더 있으면서도 그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그에게 버림받은 자식들이 듣는다면 심장을 쥐어뜯으며 울분을 토할 쓰레기 같은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게 그렇게까지 놀랍지 않았다.
“좋은 답변 감사드립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
어쨌든 이쪽은 만족스러운 답을 얻었으므로 만족스러운 미소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런데 용건이 끝나자마자 바로 자리를 뜰 인간이 뜻밖에 가지는 않고 가만히 앉아 나를 바라보기만 하는 게 아닌가.
“……회장님?”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빤히 쳐다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어 별 얼빠진 생각까지 해 가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그런 나를 한참은 더 보고 나서야 그가 마지못해 입을 떼었다.
“……그러도록.”
“……아. 예.”
뭔가 매우 미심쩍었지만, 괜히 파고들었다가 꼬투리 잡히기는 싫어서 조용히 배웅이나 하자 싶었다.
“……엄마야.”
문을 열자마자 나이는 어디로 바꿔먹었는지 의심스러운 주인공님이 튀어나오지 않았다면.
“여기서 뭐 해요?!”
“아니…….”
“엿들었어요? 어차피 말해 줄 건데?”
“……안 해 줄 거잖아요.”
……이런 들킴? 꼭 왜 이럴 때만 눈치가 좋은 것인가. 정말 희대의 미스터리…….
크흠. 장난은 여기까지 하고, 이번에는 진짜 말해 줄 생각이었다. 설득을 해야 했으니까.
유지한의 뒤를 보자, 어설프게 붙어 선 차지혁이 결국 그를 끝까지 잡아 놓지 못해 죄책감이라도 느끼는지 기도 중이었다.
……내가 널 죽이냐?!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왕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커밍아웃하는 게 어떠냐며, 솔직히 말해. 너 깡패였지. 라고 진지하게 묻습니다.]
‘…….’
……응. 일단 너부터 죽여야겠다.
진짜 힘을 써서 저걸 볼 수 있었다면, 일코고 나발이고 당장 커밍아웃하고 저거 족치러 갔다.
“후. 왜요. 물어보면 다 말해 줄 거예요. 내가 언제 유지한 씨가 말하는 거 안 들어 준 적…….”
“…….”
아. 많지 않나?
내가 나를 믿을 수 없어, 중간에 제 발이 저린 나머지 지레 먼저 발을 뺐다.
“크흠. 이번에는 들어줄 거니까, 시무룩한 얼굴 원상 복귀.”
“……원상 복귀.”
“좋아. 착한 어른이.”
쓱쓱―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유지한 달래기 완료를 한 후, 그제야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인간의 존재를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썅.’
아니나 다를까, 뚫어지게 바라보고 계셨다.
뭐라 핑계를 찾기도 그렇고 생각도 안 나서 그냥 외면할까…… 온갖 생각이 들었다 사라졌다.
그러나 그런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심지어 아까의 무감하고 오만한 얼굴은 어디 갔는지 그는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까지 띠며 지한을 향해 말했다.
“네가 지금까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인 거 같구나.”
“…….”
“인재는 놓치지 않아야 진정한 가치를 가지는 법이지.”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고는, 그대로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홀연히 자리를 떴다.
왠지 모르게 포스 있는 그 뒷모습에 멍하니 그가 사라지는 걸 바라보는데, 지한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이리저리 내 몸 상태를 살폈다.
“……뭐 해요?”
“뭐 이상한 이야기 들은 거 아니죠? 아버…… 회장님은 말씀하시는 게 좀 그래서…….”
……네 아버지가 사탄이냐.
대체 주인공님에게 아버지는 무엇인지 진지하게 궁금해졌다.
“아니, 당신 아버지인데요.”
“……그래서요.”
자신이 상처를 많이 받았기 때문일까, 상처받을 만한 이야기를 듣지 않았나 걱정하는 게 훤히 보여 절로 한숨이 터져 나오려 했다.
아들한테 이런 이미지인 아버지라니.
“괜찮아요. 어차피 그 사람은 저한테 무슨 위해를 가할 필요도 없고, 유지한 씨 생각해서라도 그렇게 못하니까.”
“……그건 아무 상관없어요. 그 사람은…….”
자신과 연관된 이라 해서 신경을 써 줄 정도의 연민이 있는 사람이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온갖 감정이 담겨 복잡해진 얼굴에, 아까부터 설마설마했지만 그가 진짜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나는 진심으로 놀라서 지한에게 물었다.
“……설마 진짜 모르는 거예요?”
“……?”
와. 진짜인가 봐. 이건 놀랐다.
물론 행동 자체는 빵점이다 못해 마이너스 따따블이 붙을 아버지인 건 잘 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마음까지 하나도 모를 줄은…….
“저 사람에게 자식이라고는 유지한. 당신뿐이에요.”
다른 본처의 자식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그가 자식이라 생각하는 건 오로지 사생아인 유지한 하나뿐인데. 나를 비롯해 은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걸 정작 그가 몰랐다.
“……지호 씨가 어떻게 알아요?”
“모를 수가 없잖아요.”
원작을 읽은 나는 더더욱, 그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으니까.
* * *
한편, 미련 없이 홀가분한 얼굴로 방을 나온 유재환은 어느 순간 그림자처럼 제 뒤에 따라붙은 비서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그리고 제 평생의 유일한 친구이자 비서이기도 한 장 비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장 비서. 내 오랜 친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본다고 하던가?”
미세하지만 장난기 어린 물음에 장 비서가 큭― 웃음을 참으며 비서로서가 아닌 오랜 친구로서 답을 했다.
“어떻게 보긴요. 회장님 젊었을 때와 아주 똑같다 하지요.”
“……그렇지?”
“쩔쩔매는 것까지 아주 갖다 박았네.”
어쩜 사랑에 빠진 모습마저 제 아비를 닮았는지. 역시 피는 숨길 수 없는 모양이라고 장 비서는 생각했다.
비록 지금은 이런 꼴이 되어 있었지만, 원래의 그는 정말 지한과 똑같은 사람이었다. 쓸데없이 정의로운 사상만 뺀다면.
뭐, 그렇다고 해서 마냥 호구 같진 않았다. 잘 웃기도 하고 삐지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조금의 손해를 감수할지언정 필요하다면, 제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남을 위해서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밝고, 맑은 남자였다.
겉으로는 조금 무뚝뚝해 보여도 속은 그런 사람이었기에 모두가 그를 좋아했고, 동경했으며, 그의 눈에 들기를 소망했다.
지금의 유지한처럼.
‘여기서 뭐 해요?!’
‘……아니…….’
거기에 한 여자에게 허우적거리며 절절매는 모습까지. 아주 데자뷰가 보일 정도였다.
“하하. 내가 그 정도였나?”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은데?”
“……장성규. 월급 깎이고 싶구나.”
“뭐야. 정해진 답 물어본 거였어?”
그럴 거면 애초에 뭐하러 물었냐며 장 비서가 불평불만을 토해냈다. 그런 장 비서, 장성규를 뒤로하고 재환은 아까 전 자신이 보았던 장면을 떠올렸다.
‘……뭐 해요?’
‘뭐 이상한 이야기 들은 거 아니죠? 아버…… 회장님은 말씀하시는 게 좀 그래서…….’
그 말을 듣자마자 절로 조소를 할 뻔했다. 어쩜 그리 우습던지.
아니. 조금 울고 싶었던 것 같기도 했다.
‘화연아. 아버지한테 이상한 이야기 들은 거 아니지?’
‘……회장님이야 뻔하시죠. 돌아가 주시겠어요?’
분명 저도 그의 자식과 같았던 날이 있었지만…….
‘……아니, 당신 아버지인데요.’
그는 이런 답을 받지 못했다.
자신을 거부하지 않는 말을, 자신을 달래는 저 애정 어린 화답을…… 받지 못했다.
그 누구보다 바랐고, 세상 어떤 것보다 원했던 것인데도.
물론 그는 다른 의미로 답례를 받았지만, 사실은 그저 그것을 바랐을 뿐이었는데. 아마 지금도 여전히.
“내 아들은 앞으로 걱정 없겠어.”
“왜. 너처럼 될지 누가 알아.”
다른 이가 했으면 그대로 끝이었겠지만, 장 비서이기 때문에 용납받았다. 장성규는 그런 말을 해도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모든 걸 다 지켜보고, 함께 애써주고 망가져 주며, 전부 다 버리면서까지 곁에 있어 준 유일한 친구만이.
“아니. 그럴 일 없어.”
“……어떻게 확신해?”
“이화연이 그리 말했으니까.”
“아.”
제가 사랑하는 이여서가 아니라 ‘이화연’이라서. 이화연을 알고 있는 자에게는 그녀의 말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공신력이 있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유재환은 그녀가 하는 모든 말들을 믿고 따랐다. 사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곁에 두어주기만 한다면 뭐든 할 수 있었다. 하늘의 별을 따달라고 해도 기꺼이 따다 줄 만큼.
그러나 그는 그것을 허락받지 못했다.
아마 평생 허락받지 못할 것임을 안다.
젊었을 적에는 그것이 너무나 원통했고, 원망스러웠고 억울했지만, 이제는 안다. 그것이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그래도 조금 원망이 남은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나를 위해서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나는 네 곁에 있고 싶었어. 너무나 바뀌어버린 지금도 여전히.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러 가야겠어.”
“일주일에 한 번은 꼬박꼬박 가시잖습니까. 설마, 아직도 얼굴조차 안 보여줍니까?”
아니, 그래도 같이 애까지 만든 사이인데?!
둘의 사이를 어느 정도 알긴 알지만, 그래도 믿을 수가 없어 장성규가 기겁을 했다.
올해 유지한이 27이다. 지한을 낳기 전까지의 시간까지 모두 합하면 도합 40년에 가까운 세월이었다. 거의 반평생을 함께한 거나 다름없으면서 어떻게 이리 꾸준하게 매정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
종종 재환을 보고 너는 가면 갈수록 인간 같지 않아진다고 툴툴거린 성규였지만, 이제야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저 냉혈한 유재환을 훌쩍 뛰어넘는 이가 바로 이화연이라는 걸.
아주 여러 의미로.
드라마틱하게 변화하는 성규의 표정을 보면서도 재환은 덤덤했다. 그저 자그마한 기대감을 품으며 말할 뿐이었다.
“이번엔 보여주겠지. 제 아들은 그래도 꽤나 신경 쓰니까.”
“……아니, 그건 당연한 거고…….”
더 이상 말해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 태클을 걸기도 지친 나머지 성규는 알아서 하라고 손을 내저었다.
삐뚤어진 애정도 애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다 개소리였다. 저런 걸 무슨 애정이라고.
새삼 지한이 왜 제 부모라면 머리카락도 안 보려고 하는지 절절히 이해가 갔다. 저 같아도 털끝 하나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추후 일정 모두 취소하겠습니다.”
그래도 성규는 재환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비록 제 아들을 그저 님의 얼굴 한 번 보기 위한 용건으로 이용하는, 아버지로서 실격이다 못해 쓰레기인 남자긴 하지만, 그래도 평생을 함께한 친구였으니까.
“다녀오지.”
세월이 그렇게 흘렀음에도 여전히 설레는 티를 숨기지 않으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저 불쌍한 남자를 말릴 재간도 없었고.
“……다녀오십시오.”
* * *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가. 센터장.”
“어쩌겠습니까. 현실이 그런 것을요.”
이젠 받아들이셔야죠.
심드렁하기 짝이 없는 센터장의 대답에 참다못한 대통령이 그대로 그의 얼굴에 서류를 집어 던졌다.
어차피 피하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일부러 맞고 있자니 기분이 참 뭐 같다. 라고 생각하면서, 센터장은 바닥에 우수수 떨어진 서류들을 밟고 당당하게 서서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했다.
“어차피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 세계의 실질적인 지배자의 뜻을 우리 같은 개미들이 무슨 수로 저지합니까.”
언론에 철저히 은폐했기 때문에 다행스럽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한민국을 시작으로, 이매망량의 주인이 판결을 내렸던 망령들이 돌아다니며 한민국에게 동조해 그들을 죽인 이들에게 같은 벌을 내리고 있었다.
한민국 본인은 죽지도 못한 채 현재 병실에서 모든 이들에게 기피당하며 살아가고 있었고.
여러 곳에 자문을 구한 결과, 판결은 한민국에게 내려진 것이니 그 연루자에게 위해를 가할 수는 있지만, 사실 왕이 한 번만 제지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 했다.
한마디로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전부 왕의 묵인하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직접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 한들, 왕은 그들을 봐줄 생각도, 또 자비를 베풀 생각도 없었다.
이번 일에 연관된 자들 중 센터의 임원들도 몇 있었지만, 왕이 등장하자마자 납작 엎드리고 모든 걸 내어놓았던 덕분에 다행히 눈앞에 형벌을 마주하고도 형벌을 받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겠는 듯, 이 나라의 현 원수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서, 지금 센터만 빠져나갔다고 발뺌을 하겠다는 건가!”
“대통령 각하. 저희는 발뺌을 할 게 없습니다. 한다고 한들, 그게 용납이 될 것 같습니까?”
“이―!”
“시류를 파악하시지요. 지금은 모든 헌터들에게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이 세계의 왕이, 헌터들을 지지하고 있으니까. 마땅한 대안이 있으면 모를까, 지금은 더 이상 왕의 심기를 건드려선 안 되었다.
“만약 왕이 국외로 나가게 되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습니다. 각하.”
“……그래서 자네의 생각은 뭐지?”
설마 지금 너네만 살았다고 우리 엿 먹이기 위해서 온 건 아니겠지, 하며 어서 해결책을 내놓으라는 으름장에 센터장은 순간 고민에 휩싸였다. 그냥 엿 먹이러 왔다고 하고 갈까.
지금 하는 꼬라지를 보고 있으니 머지않아 왕의 손에 제거된 확률이 더 높아 보였다. 진지하게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매달려 빌어도 모자랄 판에, 아직도 제가 갑인 줄 알고 으름장을 놓는 모습이라니. 제일 먼저 치워지기 딱 좋은 모습 아닌가.
진짜 그냥 갈까 맹렬히 고민하다, 그래도 아직은 눈앞에 있는 저 남자가 이 나라의 수장이었기에 센터장은 불굴의 인내로 꾹 참아내었다.
“일단 보여주기 식으로라도 ‘우리는 헌터의 편이다.’라는 걸 피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
“누구라도 ‘이번 정부가 헌터들을 신경 쓰는구나.’라고 알 수 있게.”
우리의 왕께 잘 보이도록.
어쭙잖은 것들은 우리가 누군데 누구한테 아부를 하냐며 시끄럽게 개 짖는 소리를 한껏 왈왈댈 의견이었다.
그래도 그 아부와 눈치를 한껏 살려 이 자리까지 앉은 그인지라, 비록 기분은 좀 나빠 보였지만 대통령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이내 정확히 상황을 이해한 듯 침착한 얼굴로 센터장을 향해 되물었다.
“……구체적인 방법이 있는가?”
“곧 만찬회가 있지 않습니까?”
“아!”
만찬회.
보통은 국외 귀빈이 방문했을 때나 송년을 맞이하며 진행하던 것이었지만, 헌터 중심의 사회가 된 후 매년 최상위 헌터 10명과 그 외 각 주요 길드장들, 그리고 그의 산하 길드원들을 초대해 대접하는 자리로 바뀌었다.
저렇게 설명하면 초대인원이 굉장히 많아 보이지만, 실상 최상위 헌터 10명이 각 주요 길드장과 길드원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참석자는 보통 많아 봐야 20명 미만이었다.
늘상 그 멤버가 거의 그 멤버였고 새로운 인사는 없었지만, 이번에는 다를 예정이었다. 기둥이 바뀌었으니까.
하나…….
“그분이 오시겠는가?”
그분이란다.
그렇게 무시하려고 했으면서 반사적으로 극존칭을 쓰는 대통령의 모습에 센터장은 순간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역시 유지한이 그렇게나 열심히 나라를 지키려고 애썼던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렇게 발바닥에 불나게 뛰어다니면 뭐 하는가. 고작 한 번의 공포가 이리도 훨씬 더 강력한 것을.
새삼 선의의 부질없음을 깨달으며 잠시 한탄하던 센터장이 본론으로 돌아와 답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질문에 대한 답을.
“누군지는 알고 초청하시려고요?”
“…….”
“하물며 전국적으로 광고하면서 초청한다고 해도 오겠습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찾아댔지만 머리카락 한 올 드러내지 않은 사람입니다. 만에 하나 온다 한들…….”
뭐, 꼴 보기 싫은 인간들 멱 뽑기밖에 더 하겠나.
유치원생도 알 법한 이야기를 정작 이 나라의 수장은 모르는 이 병신같은 상황에 대해 눈빛으로 쌍욕을 건네자 대통령님께서 쭈그러드셨다.
일말의 동정심도 들지 않는 추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센터장은 대통령 예우 차원에서 겉으로는 안쓰러움을 담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초대하는 인원은 그동안과 같을 겁니다.”
“……준비하지.”
한바탕 이벤트가 벌어질 징조였다.
* * *
한편, 이런 움직임이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던 나는…….
“뭐.”
“아니. 센터에서 나왔다니까요…….”
“어쩌라고 이…… 읍!!”
“누나야, 고만.”
입이 막힌 대신 눈으로 빔을 쏘며 센터직원들과 대치 중이었다.
“므알꾸어라바?(뭘 꼬라봐?)”
“아, 이놈의 누나가. 진짜.”
시비를 서슴지 않는 내 모습에 윤지우가 아주 죽는 소리를 해 댔지만, 나는 당당했다.
뭐! 내 거 날치기하겠다고 찾아온 것들이 뭐가 이쁘다고! 아님 네가 책임질 거야? 그래?
분노의 화살을 돌리자 윤지우는 할 말이 없는 듯 시선을 피했다. 저건 진짜 X밥 주제에 왜 자꾸 끼어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워워, 그래도 네 혈육 메이트, 네 동생인데 바른 말 고운 말을 사용하자며 바른말 캠페인을 선동합니다.]
‘아니……. 저게 자꾸 사람이 말도 못 하게 입 막잖아!’
나름 소심하게 반항하긴 했지만, 성위님 말이 틀린 건 아니었기에 이번에는 곱게 따라 주기로 했다. 얌전히 있겠다고 팔을 툭툭 치자 윤지우가 눈치를 보며 입 막은 손을 떼 주었다.
“그래서, 용건. 짧고 간단히.”
자고로 공무원과 깊게 말을 섞어서 좋은 일이 없다는 말을 신봉하는 내가 신속히 끝내자고 재촉하자, 이미 앞선 기선제압으로 인해 제대로 기가 눌려버린 센터직원이 소심하게 제가 가져온 본론을 내뱉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안 하느니만 못한 소리였다.
“저희 센터에서는, 윤지호 씨가 직접 불러낸 것이 아닌, 자연에 있는 미등록 영물과 센터의 사전 허락도 없이 계약한 것을 유감스러워하며 계약해지와 함께 영물을 반환할 것을 고하는 바……!!!”
이 날강도들이.
다른 것도 아니고 내 것을 마치 지들의 것이라도 된다는 듯 말하며 날치기하려는 행태에 분노하지 않는다면 내가 사람이 아니었다.
센터 직원은 내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듯 말을 다 끝마치지 못하고 겁먹은 얼굴을 했지만, 이미 늦었다.
“……아. 이게 뚫린 입이라고 다 뱉으면 말인 줄 아나.”
굳이 마력을 쓰지 않고도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은 아주 많았다. 위압적인 기운을 내보낸다거나. 특히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저 내 존재감을 조금 드러내면 될 뿐이었으니까.
물론 마력을 실어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겠지만, 그 정도가 된다면 눈앞의 이들은 짓눌리다 못해 그대로 심장마비로 사망할지도 모른다. 딱 봐도 그냥 일반인 같으니.
“흡―!”
예상대로 내 기세가 무서운 것인지, 아니면 그냥 내 얼굴이 무서운 것인지 센터 직원이 겁을 잔뜩 집어먹은 얼굴로 덜덜 떨며 내 손을 잡아 왔다.
아, 왜 내 손을 잡아 오냐 하면은, 존재감을 드러내기 전에 내가 그의 멱살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냥보다는 확실히 멱살을 잡는 게 기운을 집중하기 쉬워서…… 는 당연히 아니고, 그냥 빡쳐서.
“잠, 잠깐…… 선생님…….”
계속 보다 보니 더 빡쳐서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녀석의 얼굴이 빨개졌다.
별로 보기 좋은 꼴은 아니어서 이걸 어쩔까, 하고 있는데……. 우리의 주인공님이 당황했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얼굴로 내 팔에 매달려 왔다.
“지호 씨. 일단 진정하고, 제가! 제가 할게요!”
“…….”
뭘 네가 해. 설마……. 이거 족치는 걸?
내가 생각하고도 믿을 수 없는 소리에 헛웃음을 치면서도, 그밖에 달리 유추해낼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설마 하는 얼굴로 주인공님을 돌아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성위님께서 코웃음을 치셨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설마 바랄 걸 바라라고. 저 호구가 그게 가능할 거 같냐고 코웃음을 금치 못합니다.]
‘역시 그렇지?’
천연 중의 천연, 순도 100% 호구가 누굴 족쳐.
깔끔하게 포기하면서도, 어쨌든 나는 주인공님 말에 귀 기울여주고 싶은 착한 독자니까 주인공님의 의견에 따라주기로 했다.
휙― 철푸덕―
“……허억! 쿨럭. 쿨럭―!”
그래도 좋은 인상을 준 놈은 아니라 그대로 집어 던지자, 바닥에 쓰러진 놈이 헐떡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누가 보면 쟤가 피해잔 줄 알겠다. 보는 이들이 억울해질 정도로 절박하고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덕분에 진짜 피해자는 짜증이 복받쳤다.
‘……한번 밟을까?’
진짜 밟기라도 하면 억울하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이 나도 몰래 몸으로 드러난 것인지 내 원수 같은 혈육 메이트가 말했다.
“누나야. 발. 다리 내려. 빨리.”
“……아.”
이럴 때만 참 친절한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모른 척했으면 그냥 밟았을 텐데. 쳇. 하여간 이놈은 도움이 안 된다.
나지막이 혀를 차는데, 그것마저 기차게 본 윤지우가 앓는 소리를 해 댔다.
“사람 내동댕이친 거로도 이미 내 간은 쪼그라들었거든? 제발. 누나야.”
“그건 니 간이 작은 거지.”
“니 간이 엄청난 거거든?!”
난 정상이라고!!
라고 윤지우가 열심히 피력했지만, 2N년간 윤지우를 봐온 내 귀에는 그리 신빙성 있게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믿을 사람에게 그런 소리를 해야지. 태어날 때부터 봐 온 소심함을 이제 와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법.
그리고 여기 간 작은 걸로는 어디 내놔도 지지 않을 인간이 또 한 명…….
“지호 씨. 손 괜찮아요?”
“……제 손이요?”
내 손이 왜? 이건 또 상상도 못 할 신박한 물음에 윤지우와 내 고개가 절로 갸웃거려졌다.
“멱살 같은 거 함부로 잡으면 오히려 잡은 쪽 손이 더 타격을 받을 수 있어요.”
숙련자가 아니시잖아요.
세상 천하 가장 쓸모없을 유지한의 걱정에 우리 남매는 침묵했다.
“…….”
물론 내 손이 굳은살 하나 없는 보송보송하고 말랑말랑한 손이긴 하지만, 이건 굳은살이 안 생기는 체질 때문이지 절대, 결단코, 내가 약골이어서는 아니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더불어 내가 얼마나 멱살을 전문적으로 잘 잡는지 아는 윤지우는 그야말로 질색을 하며 눈빛 대화를 보냈다.
‘저거 뭐라는 거야? 저분 앞에서 멱살 많이 잡지 않았음?’
‘저 논리를 아는 순간 네가 국민 호구.’
‘아. 인정.’
쿨한 남매간의 대화를 마치고 다시 본 상황으로 돌아온 나는 깔끔하게 내 상태에 대해 피력했다.
“손 말고 마음이 아파요. 길드장님.”
상처받은 비련의 여주인공을 목표로 메소드 연기를 펼치며 심정을 고백하자,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님이 화들짝 놀라며 반응했다.
“……예?! 왜 그러세요? 많이 아프세요?”
누가 들어도 개소리인데 거기 득달같이 반응하는 모습에 살짝 양심이 찔려 왔다. 윤지우는 옆에서 뭔 개소리를 하냐는, 뭐 씹은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양심이 너무나 찔렸지만, ‘양심이 뭐임? 그거 먹는 거임?’ 마인드를 굳게 장착하며 말을 이었다.
“하람이는 내 소중한 가족이자 내 건데, 저 쓰레기 같은 놈들이 말도 안 되는 도둑놈 마인드로 날치기를 해 가려 해서요.”
“…….”
얼른요. 혼내주세요.
기대감 어린 얼굴로 초롱초롱하게 주인공님을 올려다보자, 난감한 얼굴로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결국 참았던 웃음이 빵― 터져버렸다.
“아하하하! 땀 흘리는 것 봐. 하하하!!”
“…….”
빵 터진 나를 보고 우리 주인공님께서는 삐치신 듯 양 볼을 뚱하게 부풀리셨지만, 그래도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한참 그러고 있자, 이제는 주인공님이 불쌍해진 윤지우가 어색하게 나를 말렸다.
“……누나 너무 웃는다.”
그런 윤지우의 뒤에서 정요한과 장예슬이 혀를 찼다. 두 사람은 센터직원이 왔다는 소리를 듣고 후다닥 달려온 참이었다.
“웃을 만하죠. 저런 건 애초에 길드장이 나서서 내쫓아야 하는데.”
“그러니까요. 우리 심약한 길드장님은 진짜 잡상인도 못 내쫓으셔서…….”
평소에는 그래도 유라 선배가 나서 주시는데 오늘은 그 유라 선배도 없네요.
오늘 본가에 가느라 길드에 나오지 않은 유라를 떠올리며 예슬이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정요한도 마찬가지인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예슬과 달리 요한은 그리 크게 걱정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걸 해결할 사람은 길드장이 아닐 테니까.
언제나 그랬듯.
“거기 날치기. 그보다 이건 센터장의 의견인가?”
어느 정도 웃었겠다, 표정을 갈무리하며 아까부터 궁금했던 의문을 던지자, 열심히 숨 고르며 아직도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고 있던 놈이 움찔했다. 답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몸짓에 나는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럼 그렇지.”
어쩐지 뭔가 이상하다 했어.
어이없이 혀를 차자, 이유가 궁금한 주인공님께서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어왔다.
“……어째서입니까?”
“센터장은 저번 환급 때부터 우리에게 매우 우호적이었어요. 우리 때문인지, 새로운 1위님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생각보다 매우 빠르게 환급이 진행됐죠. 누가 봐도 우리의 심기를 건들지 않으려는 것처럼.”
아마 이 생각은 정답일 터였다. 우리가 이를 드러내서도 있지만, 새로운 1위가 그렇게나 화끈하게 신고식을 치렀는데 겁먹지 않을 정치인이 어디 있겠는가. 제가 그 꼴이 날 수도 있는데.
한민국 사건 이전에 그것을 예견한 센터장은 먼저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우리가 이를 드러내 더욱 일을 키울수록 그건 전부 자신들에게 화로 돌아올 것을 예견하고.
그 판단은 아주 정확했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1위가, 바로 여기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한마디로, 우리 하람이가 욕심난 병신들이, 센터장 허가도 없이 무단으로 이렇게 날치기를 하러 왔다. 이 말이죠.”
“…….”
깔끔하게 설명을 마치며 나는 다시 날강도에게 시선을 던졌다. 저걸 어떻게 요리할까, 라는 눈빛으로.
“……음. 나는 내 걸 넘보는 놈들을 한 번도 그냥 넘겨 본 역사가 없는데.”
어떻게 할지 고민하며 머리를 긁적이는데, 이런 내 이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윤지우가 옆에서 애원했다.
“살인은 안 돼. 알지?”
“…….”
‘아니. 이건 누굴 살인자로 아나.’
내가 그렇게 아무나 죽이진 않거든? 진심으로 억울해졌다.
물론 필요하다면 죽이는 걸 서슴지 않겠지만, 나도 정도라는 건 있는 사람이었다. 고작해야 강제로 떠밀려 윗선의 머저리 같은 소리를 전하러 온 따까리에게 그렇게까지 가혹하게 대할 생각은 없었다.
“……돌려보내. 그냥.”
“……윤지호?”
어디 아파? 윤지우가 못 들을 소리를 들은 것처럼 기겁을 했다. 얼굴까지 만져대며 이리저리 나를 살피고 있는 이 빌어먹을 혈육 메이트를 보고 있자니 다시 혈압이 오르려고 했다.
이건 진짜 맞을 때가 됐나. 살짝 고민이 들었지만, 여기서 패는 건 아닌 것 같아 지금은 곱게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족치는 건 저게 아니라 저 윗선일 거니까 그냥 보내. 이미 질질 짜잖아.”
존재감은 감춘 지 오래인데, 내 얼굴을 힐긋힐긋 보면서 겁에 질린 얼굴로 울먹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비위가 상하려 했다. 저건 대체 몇 살이야.
얼른 그냥 내 앞에서 꺼져 줬음 싶어서 저거나 치우라고 윤지우한테 턱짓하는데…….
“……!!!”
“하람아!”
갑자기 내 어깨 뒤로 공간이 생기더니 거기서 하람이가 튀어나왔다.
반사적으로 하람이를 끌어안자, 하람이가 내 품에 얼굴을 꼭 파묻으며 껌딱지처럼 딱 들러붙었다. 명백히 이상한 모습이라 신경이 절로 날카로워졌다.
“하람아, 왜 그래. 응?”
하람이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한동안 집에 두고 출근했던 건데, 그게 실수였나 보다.
오피스텔에 자동으로 설치된 결계가 있는 것도 확인했었다. 그런데 설마 문제가 생길 줄이야.
대체 무슨 일이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설을 떠올리며 머리를 굴리는데, 답은 의외로 금세 나를 찾아왔다.
“역시, 반사적으로 제 계약자를 찾아가는군.”
“……!!”
문 근처에서 갑자기 나타난 긴 백발의 미남자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차갑고 냉혹해 보이는 남자의 말에 그가 하람이를 위협한 놈이라는 것은 바로 깨달았지만, 살기가 없어 무슨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누구?”
일단 하람이를 안은 채 정체를 묻자, 황급히 내 앞을 막아선 예슬이 답을 대신했다.
“백호! 이게 무슨 짓입니까!!”
“……뭐?”
사방신의 하나이자, 장예슬의 계약 신수인 백호가 나를 향해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만나서 반갑군. 어린 아해의 계약자.”
“…….”
그 인사에 나는 망연히 생각했다. 너 같으면 반갑겠냐.
정말 달갑지 않은 만남이었다.
* * *
달칵― 조용…….
찻잔 부딪치는 소리마저 천둥처럼 울려 당사자를 화들짝 놀라게 만드는 숨 막히는 침묵이 방 안에 가득했다.
이 어색한 고요를 참다못한 윤지우가 눈치를 살피며 옆에 있던 정요한을 향해 소곤거렸다.
“……나만 숨 막혀요?”
“쉿, 동생 군. 기 싸움 중에는 쓸데없는 사운드 넣는 거 아니에요.”
불똥이 튀거든요.
마음 같아선 머리카락 한 올도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정요한이 말도 걸지 말라며 대화를 원천 차단했다.
“…….”
그리고 저 미남자의 계약자인 장예슬은 현재 죄인이 되어, 사고를 제대로 친 제 짐승과 다르게 아주 땅굴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뭐, 본인은 전부 다 제 잘못인 것처럼 굴고 있었지만, 백호 정도의 최상위 신수쯤 되면 계약자라 한들 100% 통제할 수 없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기에 아무도 예슬을 탓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등을 토닥이며 위로를 해 주고 있었다.
“저 백호님은 진짜 평소에 가만히 있다가 왜 이럴 때만…….”
오히려 그런 행동들 때문에 착한 장예슬이 더욱 미안해져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았지만, 옆에서 우리 길드장님이 이쪽에 한눈을 열심히 팔면서도 잘 케어하고 계셨으니 그리 걱정할 만한 것은 아니긴 했다.
어쨌든 이런 제 계약자의 애처로운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세상 자유분방하신 백호님께서는 당당한 자세로 앉아 유유히 입을 여셨다.
“계약자를 잘 따르는군. 어린 아해들에게는 흔히 보이는 행동이지만, 유달리 맹목적이야.”
“…….”
“뭐. 계약자를 보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러면서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백호이건만, 백호 체면에 뭐 하는 짓이냐.’ 하는 가차 없는 힐난의 눈빛이 쏘아지자 하람이가 움츠러들었다. 정말 나이는 허투루 먹은 것은 아닌지, 눈빛과 위압감이 아주 제대로였다.
물론 다른 이들이 그랬으면 하람이는 쳐다도 보지 않았을 터이지만, 백호들에게 트라우마가 있는지라 도저히 저 눈빛을 견디지 못했다.
그 가여운 모습에 정말 저 눈앞에 있는 걸 족치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쳤지만, 일단 하람이를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기에 나는 하람이에게 집중했다.
“하람아, 요기.”
“뀨우…….”
“에이, 하람이. 나 봐야지. 난 여기 있는데?”
트라우마에 눌려 자꾸만 숨으려 드는 하람이의 얼굴을 잡고 눈을 맞추며 말랑한 배를 문질렀다.
그러자 눈앞에 내 얼굴이 있고 동시에 간지럽기도 해 긴장이 풀린 듯, 하람이가 금세 웃음을 흘리며 바르작거렸다.
“예쁜 우리 하람이.”
원래대로 돌아온 하람이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며 칭찬을 서슴지 않았다. 원래 아이는 예쁜 말로 키우는 거니까.(아,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유지한은 아이가 아니니까.)
그리고 긴장이 어느 정도 풀린 하람이를 품에 쏙 안아 저 재수 없는 짐승을 못 보게 하며 말했다.
“하람아. 낮잠 좀만 자자. 아까 힘써서 지치기도 했잖아.”
“……꾸우.”
절레절레.
트라우마로 정신없으면서도 내 앞에 현 백호의 수장을 두고 잠들 수는 없다는 듯 하람이가 거부 의사를 표했다. 그것마저도 너무 예뻤지만, 내가 고작 저딴 거한테 당할 위인인가.
“하람아. 우리 하람이는 나 알잖아. 그치?”
“……뀽.”
“내가 수명이 다할 때까지는 언제나 곁에 있어 준다고 했잖아.”
“…….”
“우리 하람이. 나 못 믿어?”
자신감 넘치는 내 말에 하람이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 눈을 흔들림 없이 마주해 주자, 이내 내 품 안에 파고들어 코알라처럼 고개를 파묻으며 앙증맞은 발로 내 옷을 꾹 잡아 왔다.
귀엽기 짝이 없는 그 모습에 결국 웃음을 터뜨리며 하람이를 꼬옥 안아주자, 하람이는 안심하며 그대로 스르르 잠이 들었다.
완전히 푹 잠들 때까지 잠시 부드럽게 어르던 나는, 이윽고 하람이가 깨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때 드디어 거리낌 없이 본색을 발휘했다.
“흠. 얘가 누군지도 알지 못하던 수장 주제에, 무슨 관심이 갑자기 그리 생기셔서 이 난리이실까?”
그쪽에서 버렸으면서 뻔뻔스럽기도 하지.
비꼼을 가득 담아 미소를 던지자, 그래도 양심이 찔리기는 했는지 우리 백호의 우두머리님께선 느닷없이 변명을 시작하셨다.
“백호의 아해는 태어난 직후 차기 백호의 씨앗이 있는지 없는지부터 판가름한다. 씨앗이 있다고 판단한 아해들은 원로원에서 거둬 차기 백호로서 키우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가 현(伭) 백호라 한들 개입할 수도, 신경을 쓸 수도 없다.”
“…….”
“하지만 그대의 품에 안긴 아해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차기 백호 아해 중 가장 뛰어난 자질과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원로원의 뜻이나 백호의 규칙을 납득하지 못할 정도로 정이 많고 상냥했지.”
“……그래서 너흰 이 아이를 추방했다. 그건 더 이상 이 아이에게 어떤 상관도 하지 않겠다는 뜻 아닌가?”
그동안 신경조차 쓰지 않은 주제에, 이제 와 나타나 간섭하려는 이유가 대체 뭐냐고.
불쾌한 티를 역력히 드러내자, 그건 아니라는 듯 백호가 고개를 저었다.
“원로원은 이 사태를 모른다. 관심도 없지. 저들이 버리고 잊어버렸을 테니까.”
“……쓰레기 새끼들.”
어린애가 뭘 안다고, 어린애한테 그딴 짓을.
산 채로 불태워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아 있는 대로 인상을 구기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백호가 지난날을 회상하는 듯 아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나는 잊히지 않더군. 사실 내가 그 아해를 봤던 건 추방당할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었는데……. 그때 그 아이가 내게 던졌던 질문 때문인지.”
“……뭐라 물었는데요?”
“그 자리는 정말 모두가 동경할 만한 자리냐고 물었지.”
“…….”
“일말의 동경도 없이, 순수한 궁금증만이 담긴 물음이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굳이 하람이에게 묻지 않아도 하람이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 수 있었으니까. 백호와 같은 냉철하고 무미한 짐승으로 살기에 이 아이는 너무나 여렸다. 여리고 너무나 예뻤다.
“내가 늘 나에게 하던 질문을 직접 들으니 너무나 신선하더군. 원로원이 괘씸하다 소리치며 곧바로 추방시켜 버려서 나는 그 답을 하지 못했지만.”
“…….”
“내가 그 아이를 찾아온 건 어떤 이유 때문은 아니야. 그렇게 내게도 각별한 기억을 남겼던 아이니만큼 궁금했던 것뿐이다.”
백호는 진심인 듯했다. 소식을 들은 참에 그때 그 아이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보고 싶었을 뿐인 것 같았다.
그렇게 확신한 것은 이어진 백호의 말 때문이었다.
“……설마 이렇게 지상을 떠돌 줄은 몰랐지.”
“…….”
아니, 감금이었는데.
너무 태평하게 추억을 더듬는 듯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심술이 돋아 사실대로 말해줄까 했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주워왔다고 설명해 버려서 곤란했다.
이제 와 사실을 밝히기도 뭐하고, 그래도 나름 하람이를 신경 써 주는 준 놈에게 초를 치는 것도 아닌 것 같아 그냥 마음 좋게 먹기로 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X도 모르는 게 혼자 저 잘난 듯 저러고 있는 꼬라지가 꼴 보기 싫다고, 죽빵 한 대 날리고 싶은데 나만 그러냐며 동조를 구합니다.]
‘……샷업.’
내 속마음 하나는 기가 막히게 아는 성위님께서 초를 치려 했지만 불굴의 의지로 넘어갔다.
“그래도 계약자가 그대 같은 사람이라 안심하기도 했어.”
“……한 성격 해서요?”
어디 가서 쉽게 하람이를 넘기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묻자, 백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 그것도 있지. 그래도 어차피 이름을 준 이상 그 사이를 누구도 떨어뜨릴 수 없겠지만. 백호의 수장인 나는 백호가 이름이니 예외라 쳐도, 다른 백호들은 이름을 준 이에게 종속되지. 그 강제성은 계약과 비교할 수준이 아니야. 이름이란 영혼을 명명하는 것. 고작 신수 계약 따위에 비교될 리가. 그대는 그 무게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나?”
“…….”
뭐, 곧바로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었다. 하람이에게 이름을 준 건 그야말로 충동적인 결정이었으니까.
이름이 없다기에 이름 없는 짐승으로는 둘 수 없어 준 것뿐이었다. 받은 이름에 하람이가 유달리 기뻐해서 만족스러웠고.
고작 그 정도의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나 역시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이름을 준다는 것의 무게는 잘 모르고 관심도 없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히 대답할 수 있어.”
“…….”
“난 절대 내 것을, 내가 책임지겠다 한 것을 버리지 않아. 무슨 일이 있어도.”
“……!”
“그게 내가 이 아이를 키우기로 결정하며 짊어진 각오야.”
아마 윤지우는 알 것이다. 나는 진심이고, 진심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걸.
그야, 윤지우도 이렇게 키웠으니까.
아무리 혈육이라고 해도 나는 피붙이라는 이유만으로 윤지우를 키우겠다 생각하진 않는다. 우리 남매가 남들이 보기에 특별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우리도 태어나자마자 특별하거나 하진 않았다. 그런 건 소설에나 있지, 현실에 그런 기적 같은 남매가 있을 리가.
우리가 지금의 관계가 된 건, 윤지우에게 받은 다짐과 약속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람이 또한 마찬가지였다.
흔들림 없는 내 눈을 본 백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람이라 했나. 부럽기도 하군. 사랑받으라는 듯이 지은 이름부터, 소중하게 대해 주는 계약자까지. 아마 그 아해는 역대 그 어떤 백호보다 사랑받는 백호일 것이다.”
“당연하지.”
자신할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하람이를 키울 수 있다고.
자신감 넘치는 내 모습에 흐뭇함을 숨기지 않은 백호가 갑자기 근엄한 얼굴로 선언했다.
“내가 걱정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건 무슨 뜻이지?”
“네 곁에 있으면 사랑만 받으며 클 뿐, 그 아해는 결코 성장하지 않을 테니까. 성장할 필요가 무어 있겠나. 그렇지 않아도, 아니, 그럴수록 더 사랑해주는 그대가 있는데.”
“…….”
일리 있는 말이었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지만, 하람이가 나 때문에 자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니까. 인생은 이후 뭐가 일어날지 그 무엇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그 가설을 단호하게 부정할 수 없었다.
“해서, 나는 그 후가 걱정된다. 그대가 살아봤자 인간의 수명은 고작 100년 남짓. 언젠가 그대는 이승을 떠나게 될 것이고, 성장하지 않고 남겨진 아해는 어떻게 되겠나.”
“…….”
“나 역시 마음이 쓰이는지라 하나 제안하고 싶은데. 어떤가? 내가 직접, 이 아해의 보호자이자 대부가 되겠다. 그러면 어떤 백호도 이 아해가 추방되었다며 내쫓지 못할 것이다. 백호의 세계에서 살 수 있게 되는 거지.”
“…….”
“아해를 아끼는 그대에게도 나쁘지 않은 이야기라 본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매우 좋은 제안이었고, 현실적으로 백호로서 더 이상 해줄 수 없는 최고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황송한 제안을 들었음에도 시큰둥하기만 했다. 아니, 오히려 차분해졌다.
“저기. 백호.”
“뭔가.”
“네가 큰 착각을 하나 하고 있는데…….”
“……?”
“나는 내 살아생전 이 아이가 자라지 않는다고 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백호가 득달같이 분노했다.
“그럼 그대는 이 아이가 그대로 도태돼도 좋단 말인가―!!!”
“아우, 시끄러.”
호랑이라 그런가. 목청도 더럽게 좋네. 하람이 깨겠다.
이럴 생각은 없었지만, 정말 하람이가 깰까 봐 염려되어 다들 눈치채지 못하게 스킬을 아주 약하게 써서 하람이를 완벽히 잠재웠다. 그러고 나서야 나는 결국 끝까지 제 생각이 옳다 믿는 꼰대 백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야. 네가 방금 말했잖아. 내가 살아 봤자 100년밖에 더 되겠냐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백호의 수만 년의 시간 중 고작 100년일 뿐인데, 이 아이가 왜 어린아이인 채면 안 돼?”
“……!”
아마 이 백호는 백호들 중에서 제일 하람이를 신경 써 줄 이임은 분명했다. 나름대로 걱정되고 염려되어 그런 거겠지.
그러나 내가 근본적으로 그를 탐탁지 않아 하는 이유가 이거였다. 평생 백호로 살아오고 백호가 되어 앞으로 생을 마감할 그는 결국 백호로서밖에 생각하지 못하니까.
“고작 100년, 그 짧은 시간 동안 이 아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어리광도 실컷 부리면서 사랑받으면 왜 안 되는데?”
하지만 이 아이는 백호가 아니라 하람이다. 훗날 백호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준 이름이 남아 있는 한, 이 아이가 이 아이라는 것은 변치 않는다.
그 사실을 조금도 깨우칠 생각을 하지 못하는 저 백호가 나는 진심으로 짜증이 났다.
“세상에서 제 생각이 제일 옳다 믿는 백호님. 그거 알아? 어른은 언젠가 돼. 되기 싫어도 말이야. 스스로의 다리로 혼자 딛고 일어설 때가 되면 자연적으로 깨닫게 되는 게 세상의 이치지.”
“…….”
“어차피 알게 될 세상의 이치, 상처 잔뜩 받은 아이가 조금 더 모르고 살면 뭐 어때서?”
“……그래서, 그대는 그 아이를 그리 키우겠다는 건가?”
내 말들이 저에 대한 비난으로 느껴졌던 듯 놀람과 불쾌감, 당황스러움이 모두 섞인 얼굴로 백호가 내게 물었다.
나는 당당했다.
“어. 나는 내 살아생전 하람이가 해 보고 싶은 것들, 보지 못한 것들, 보고 싶은 것들. 좋아하는 것들, 싫어하는 것들 모두 알려줄 거고, 보여줄 거야. 어리광도 실컷 부리게 하고 잔뜩 사랑만 주면서 키울 거야. 나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넘치는 사람이고.”
“…….”
“그래도 된다고 이 아이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니까.”
“……!”
“제일 큰 착각이 그건데. 어차피 결정은 이 아이가 하는 거야. 우리가 아니라. 이 아이의 인생이야. 당신이나 나나 이래라저래라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자신하건대, 나는 한 번도 내 맘대로 이 아이의 인생을 마음대로 정하지 않았다. 모든 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도록 했고, 그렇게 키우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하람이는 이런 나를 선택했다. 한 번도 제게 무엇을 물어본 적도 없이 자신을 버린 그들을 뒤로하고.
그게 내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막말로, 거기서 좋은 기억 하나 없는 하람이가 백호계에 살 수 있게 됐다고 해서 좋아할 거라고 누가 그래?”
“그건…….”
착각이 넘 내핵을 뚫는 거 아니야? 자기를 매도하기만 하고 결국 버렸던 세상을 이 아이가 가고 싶어 할 리가. 물어보기라도 했나? 왜 당연히 백호의 세계에서 살고 싶어 한다고 여기는지 모르겠네.
그게 가장 짜증 난 부분이었다. 묻지도 않고 혼자 착각하고, 혼자 판단하고. 그거야말로 내가 제일 극혐하는 꼰대 마인드였다.
그래도 훗날 하람이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패였기에 놓치기 아깝긴 했다.
“정말 무슨 자신감인지. ……하지만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긴 해.”
적어도 하람이에 대한 호의는 진심인 것 같으니까.
“……미안하군. 할 말이 없네. 다 그대 말이 맞아. 내 생각에 빠져, 아이의 생각은 생각지 못했어.”
내 판단에 확신을 불어넣듯 백호가 순순히 사과를 건네왔다. 그래도 제 말이 맞다고 꾸역꾸역 우기는 쓰레기까지는 아니었나 보다.
“……헐, 저 벽창호가 사과를 하다니……!”
“장예슬……?”
“아윽―!”
“야!!”
“…….”
물론 저기 계약자의 반응을 보니 평소에도 그러는 것 같진 않았지만.
뭐, 저건 잠시 제쳐두고, 그래도 반성을 하신 백호님께 이번엔 내 쪽에서 거래를 제안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이 되네. 나랑 거래를 하자, 백호.”
“……? 무엇을…….”
“그쪽께서는 내가 없을 때 이 아이가 걱정된다고 했고, 나도 그건 마찬가지거든.”
“…….”
“그러니까 만약 내가 죽는다면 그 후엔 당신이 이 아이를 데려가 대부로서 키워 줘. 아, 물론 하람이가 원한다는 전제하에.”
마지막 말이 제일 중요한 거 알지?
라고 말하듯 빙그레 웃어주자, 그런 나를 보며 백호가 정말 못 당하겠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는 정말, 이길 재간이 없군. 왜 그 아이가 그대를 선택했는지 충분히 깨달을 지경이야.”
“……뭐.”
“아마 이 아이 인생에서 최고의 선택이 될 터지…….”
진심으로 부러워지는군. 작게 읊조린 백호가 선언했다.
“좋아. 거래에 응하지. 나로서는 더할 나위 없는 제안이니.”
“거래 성립.”
백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깔끔하게 마침표를 찍자, 순간 내 오른손 약지에 빨간 실이 휘감겨 매듭을 지은 후 사라졌다.
약속의 증표였다.
“백호의 계약은 내가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절대 끊어지지 않는다. 만에 하나 나의 생사가 위험하다거나 이 세계로의 교류 자체가 끊긴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는 한 그대의 삶 마지막까지 실이 끊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거참 확실하면서 슬픈 소리네. 명심할게.”
가장 좋은 건, 내 마지막까지 이게 끊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것 알고 있지?
웃으며 협박 아닌 협박을 건네자 백호 또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해. 차기 보호자 후보님.”
백호를 돌려보낸 나는 드디어 한 건 끝냈다고 생각하면서 자세를 편하게 고쳤다.
센터 쪽은 어차피 이 일이 센터장 귀에 들어가면 알아서 더 찾아오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어떤 엿을 줘야 할까 궁리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띠링―!
갑자기 주인공님을 비롯해 이곳에 있던 모든 이들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헌터들에게 오는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자마자 심지어 내 폰까지 울리는 바람에 ‘설마 들켰나?’ 하고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러다 간신히 마음을 추스르고 심호흡을 하며 폰을 확인하는데…….
“아니, 어째 우리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죠?”
문자를 확인한 내가 평했다. 그리고 그 말을 부정할 수 없는 다른 이들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화답했다.
“그러니까요.”
“이제 좀 쉬나 했더니.”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헌터분들과 주요 귀빈들을 정중히 초대합니다.
앞으로도 이 나라를 이끌어가실 여러분들과 친목 겸 새로운 미래를 그리기 위하여 소소한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 중략 ―
꼭 참석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랍니다.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문재호.」
빌어먹을 만찬회를 알리는 초대장이었다.
* * *
아. 짜증 나.
놀 생각은 없었지만 좀 느긋하게 가려고 하면 뭐가 이렇게 하나씩 빵빵 터지는지. 이젠 신이 날 놀리는 거 아닌가 싶은 정도였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러게나 말이라며 누가 울 화신 이렇게 괴롭히냐고! 원망을 던집니다.]
‘……그래놓고 알고 보니 이놈 아니야?’
왕년에 소설깨나 읽은 웹소 애독자로서 의심각을 잡자, 성위님이 기겁을 하셨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무슨 그런 서글픈 소리를 하냐며, 이 오빠는 결백하니 믿어달라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무죄를 주장합니다.]
……썩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심증뿐이었기에 그냥 믿어주기로 했다. 미우나 고우나 내 성위님이시니.
“윤지호, 다 모였어.”
잡생각은 이쯤하고, 만찬회 소식에 강제 긴급소집된 멤버들을 쭉 훑어본 나는 차지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차지혁. 만찬회 규모랑 상황 설명 좀.”
그간 서류들을 보고 정세를 파악하면서 만찬회의 존재는 알고 있었다. 정부가 매년 한 번씩 최상위 헌터들과 각 길드 주요 인사를 부르는 자리를 만든단 것.
그밖에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했지만, 정황상 대충 기선 제압하려 부르는 것 같다는 직감은 받았어서 정확한 확인이 필요했다. 하여 차지혁에게 설명을 요구하자, 안 그래도 소식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온 차지혁이 입을 열었다.
“아마 참석 인원은 연례대로일 거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아냐?”
짜증스럽게 대꾸하자, 차지혁이 이제 시작이니 좀 조용히 하라고 타박했다.
“가만히 좀 들어 봐. 랭킹이란 게 위로 갈수록 쉽게 바뀌지 않거든. 1위가 바뀌긴 했지만 당연히 부재일 테니 결국 인원은 거기서 거기일 거야. 그러다 보니 화제가 되는 건 새로 초대받은 루키란 말이야. 일단 우리 쪽 초대자 명단은 길드장님부터 시작해서 서유라, 레쓰비, 회사원, 그리고…….”
“…….”
“새롭게 너님이 계시네?”
“……씨발.”
“솔직히 말하면 이번 만찬회의 최대 변수는 바로 너 아닐까. 아마 시선이란 시선은 다 받을 거야. 참석 안 하실 1위님 몫까지 주목받는다 생각해. 축하한다.”
차지혁이 그래도 분위기 전환을 해 본답시고 농담을 건네왔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그 1위가 나니까.
왜 이렇게 됐지. 아, 내가 1위여서구나.
‘아오. 그러니까 1위는 왜 해 가지고―!!’
간만에 다시 시작된 1위에 대한 번뇌에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지자, 성위님이 불똥이 제게 튈까 황급히 변명을 해 오셨다.
[아니 다른 놈들이 그렇게 제 화신에게 힘을 안 풀었을지는 나도 몰랐지. 생각 이상으로 성위들이 제 화신에게 애착이 없었다며 결코 제 잘못이 아님을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열심히 피력합니다.]
‘아니. 그냥 니가 미친 팔불출인 거 아닐까?’
왠지 이쪽이 정답일 것 같았지만, 그냥 묻지 않았다. 자세히 알아도 좋을 게 없을 거 같아서.
이런 나를 알아챈 성위님께서 열심히 떽떽거리셨어도 그저 조용히 씹었다. 어차피 진실은 알 수 없고, 사실 뭐가 맞는지 파헤치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으니까.
분명 너는 평생 말해주지 않을 것이니.
딱 봐도 죄지은 게 있는 것 같아 묻지도 못했다. 질문의 답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 뻔해 보여서.
때로는 진실에 눈을 감는 것도 선택이다. 나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성위님은 다시 저리 던져놓고, 본론으로 돌아와 일말의 희망을 담아서 차지혁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 말고 새 인사는?”
“……너 같은 인간이 또 있다고?”
그런 재앙이? 진심이 철철 넘치는 얼굴에 나는 생각했다.
이게 나랑 싸우자는 건가.
명백한 시비에 나는 해사하게 웃었다. 나 방년 25세. 윤지호. 걸어 온 싸움은 절대 피하지 않지.
부웅―
“누나, 스탑!”
문답무용! 그대로 탁자를 딛고 날아올라 발차기를 시도하려 하자, 내 도약 자세를 정확히 알아본 윤지우가 재빨리 움직였다. 헌터 각성은 그래도 헛으로 한 게 아닌지,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민첩함을 보이며 내 몸을 잡아채 번쩍 들었다.
탱커의 힘을 아무런 마력도 발동 안 한 상태에서 이길 리는 만무했고, 그 결과 나는 허무하게 윤지우에 의해 달랑 올려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발차기를 날려대자, 활동은 안 했어도 실력은 확실한 A급 헌터가 당황하면서도 열심히 발차기를 다 피하며 소리쳤다.
“야. 윤지호! 니 발차기면 사망이야!”
“너 헌터잖아. 이 정도 처맞는다고 죽으면 그게 더 망신이야. 걱정 없어.”
A급 헌터가 일반인, 그것도 평범한 성인 여성의 발차기에 날아가 사망하면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대서특필 각이었다. 한마디로 그럴 일은 기적이 일어나도 없다는 거다.
더군다나 차지혁은 딜러임과 동시에 탱질도 하는 놈이었다. 고작 발차기 몇 대쯤이야 솜방망이 맞는 것만도 못 될 것이다.
아. 물론 내 발차기는 아니고. 발로 까서 아프게 하는 것 정도야, 마력이 없어도 하이힐만 있으면 껌이지. 괜히 내가 이 고문 기구나 다름없는 걸 자주 신고 다니는 게 아니었다. 언제 어떻게 필요할지 모르니까. 바로 오늘처럼.
부웅―! 휙―!
“니가 걱정 없는 건 아무 상관없거든?!”
이건 내 목숨이야!!
내 하이힐 발차기에 얼마나 많은 쓰레기들이 쓰러졌는지 알고 있는 차지혁이 필사적으로 발차기를 피하며 소리쳤다. 참 의미 없는 발악이었다. 그냥 한 대만 맞으면 깔끔하게 끝날 텐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미 한번 맞아봐서 더 죽자고 피하는 거 아니냐고 의심의 시선을 던집니다.]
‘내가 깡패냐! 그렇게 사람 두드려 패고 다니진 않거든!’
자신 있게 말했지만,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차지혁을 팬 적이 있는지 없는지 열심히 찾아 뒤졌다.
물론 친구를 진심으로 팬다거나 하지는 절대 않지만, 차지혁은 사람을 꼭지 돌게 하는 특수 스킬을 가지고 있어서(특히 정하나의 일로) 나도 나를 믿지 못했다.
“아우. 힘들어. 공중에서 하려니 두 배로 힘드네.”
그렇게 머릿속을 뒤지면서 쉴새 없이 공격을 퍼붓다 보니 결국 애석하게도 체력이 먼저 명을 달리했다. 내가 헉헉거리고 있자, 내 밑에서 나를 번쩍 들고 있는 윤지우가 같이 힘이 빠진 듯 헉헉거리며 투덜댔다.
“내가 두 배로 힘들어.”
윤지호. 너 살쪘지!
마구 움직이는 걸 누르느라 힘들었을 것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여자의 최대 금기어를 내뱉는 동생의 만행에 나는 주저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으악! 마녀야! 동생 죽일 일 있어!?”
주먹을 맞기 전에 윤지우가 황급히 손을 떼고 몸을 뺐다.
그냥 둬도 안전히 착지할 수 있는데, 후다닥 달려와 나를 받아든 주인공님 덕에 그 품에 안긴 채로 나는 내 동생에게 레이저를 쏘았다.
그 모습을 보며 다들 대세에 편승했다.
“지우 군. 방금 그 말은 진짜 아니었어요.”
“할 말이 있고 안 할 말이 따로 있지. 그건 맞아도 쌌어.”
“혹시 여친 생기면 절대 입 밖으로, 초성도 꺼내지 마요. 알았죠?”
각자의 사견과 경험에서 우러난 충고까지 아주 가지각색으로 듣게 된 윤지우는 억울한 듯 잔뜩 양 볼을 부풀렸지만, 뭐라 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더 입을 털어봤자 자기만 손해인 것 정도는 깨달은 눈치였다.
거기에 한마디 나도 얹을까 했지만, 타박은 이미 충분히 들을 만큼 들은 것 같아 이쯤 해서 끝내기로 했다. 주인공님의 품에서 쏙 나와 심술이 가득 돋은 동생 놈의 머리통을 몇 번 토닥여주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잠시 멈췄던 의논이 이어졌다.
“녹음은 이로운과 유해한일 테고, 거기 랭커가…….”
“폭검과 마녀.”
“씹선비도 있긴 한데, 씹선비는 정신 건강에 해롭다고 불참을 많이 했습니다.”
제 길드장을 비롯한 길드원들의 행태를 보고 있으면 심장마비 올 것 같다고…….
“…….”
그 행태가 뭔지 맛보기로 경험한 자로서 가슴 절절히 이해되지 않을 수 없는 변명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었지만, 차지혁이 굳이 몰라도 될 서글픈 진실을 하나 첨언했다.
“반면 이런 일에는 티끌도 관심 없는 폭검은 매년 참가야.”
“……진짜?”
“응. 싸울 상대 퀄리티 점검하러 오거든.”
……정말 굳이 알 필요 없는 진실이었다.
“그 밖의 길드가 유예, 사계절, 또 누가 있지?”
“딱 그 정도야. 우리나라에서 어느 정도 힘이 있는 길드는 몇 없으니까. 나머지는 그냥 오합지졸 모임이고. 굳이 초대할 필요가 없지. 그리고 아웃사이더들은 안 건드리는 게 서로 이득이니까.”
“……왜, 우리는 아웃사이더가 아니냐.”
길드원 성향으로 따지면 우리도 아웃사이더 축에 들고도 남지 않나. 그랬으면 이런 귀찮은 일도 없었을 텐데.
라고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탄하자, 차지혁은 대답 대신 내 어깨를 토닥이며 주변을 턱짓했다. 저들을 한번 보고 다시 말하라는 눈빛이다.
“……알아. 안다고.”
소수지만 이 정도의 랭커들을 데리고 아웃사이더로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알지만, 그래도 조금은 희망을 가지고 싶었다.
“아. 결국 견제란 견제는 다 받겠네.”
“그동안은 유라 선배가 길드장님더러 그냥 닥치고 사무적인 단답만 내뱉으라고 세뇌시켜서 그냥저냥 넘어가긴…….”
“욕하는 거 그냥 들어먹고 왔다는 시답지 않은 이야기는 넣어둬요.”
“정확하시네요.”
보지도 않으셨으면서.
예슬의 중얼거림에 나는 뭐 그런 뻔한 걸 말하냐며 손사래를 쳤다. 정치인들과 헌터들. 밀고 당기는 힘의 대립이 버젓이 보이는데, 그 권력과 경쟁의 중심에서 저 호구의 역할이야 뻔하지.
알지만 자세히 들으면 혈압이 오를 것 같아 생각을 스킵했다. 당장 내가 해야 할 게 분명해졌다.
“좋아. 그럼 이번 만찬회 때는 여러분들께 미션을 주겠어요.”
“……미션이요?”
해서 나는 이 혈압을 한 번에 날려버릴 시원스런 이벤트를 기획하기로 했다.
“네. 아주 신나는 미션일 거예요.”
“뭔데요?”
늘 기상천외한 선언을 한 덕에 내 선언 자체에 트라우마라도 생겼는지 다들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거기다 대고 나는 뭐가 그리 걱정이냐는 듯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선언했다.
“이번 만찬회에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 하는 인간들 귀에 마음 내키는 대로 쌍욕 뱉기.”
“……!!”
“어때요. 아주 재밌겠죠?”
빙긋 웃는 미소와 함께 터진 환호성은 당연한 것이었다.
* * *
한편, 만찬회의 소식이 여러 귀에 들어가고.
“앗싸, 신난다.”
“왜요, 길드장?”
“이번에 참석할 뉴비가 넘나 기대돼.”
“……인터넷 용어 언제 끊어요?”
“시끄러.”
유예를 비롯하여…….
“저번에 신세 졌으니 그거 인사랑……. 또 새로운 분께 잘 보이려면 뭐가 좋을까?”
“…그런 걸 좋아하실까요?”
“세상에 아부랑 선물을 싫어할 사람이 어딨어?”
“그럼 일단…… 저번에 유예한테 뜯었던 아이템을 챙기죠.”
“……! 넌 천재야.”
“별말씀을.”
신세를 진 데다 원래부터 호감도 MAX였던 사계절을 비롯하여 참가 인원들 모두 여느 때와 다르게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1위가 바뀐 후 처음 모이는 자리지 않은가!
이전에는 언제나 늘 똑같은 인선으로, 왕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왕 노릇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해 버러지들이 날뛰게 하는 왕 덕에 언제나 되도 않는 개소리와, 그에 빡친 다른 네임드 수장들의 독침 어린 독설이 오가는 자리였다.
솔직히 말이 만찬회지, 갔다 오기만 해도 한 일주일 치 체력이 빠져 버리는… 진짜 끔찍하다 못해 진저리 나는 일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언론 때문에 참가를 안 할 수도 없고. 거짓말 안 하고 참석 랭커들이 가장 싫어하는 행사 1순위였다.
그나마 제일 상식인이라 불리는 씹선비는 길드 메인 멤버긴 하지만 주축을 담당하지 않고, 다른 참가 길드원이 많으니 본인은 필수참가가 아니라며 매회 불참하는데 그게 미친 듯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부럽다 못해, 나만 당할 수 없다는 일념하에 씹선비를 끌어들이려고 온갖 중상모략들이 그를 덮쳤지만, 그 심리를 다 파악했다는 듯 딱 저 기간 동안 잠수를 타는 현명함에 모두가 실패했다.
그런 행사였지만, 올해는 특히나 달랐다.
“혹시…… 그분도 오시려나?”
“……미치셨어요?”
“아니, 그냥 말만 해 본 거야. 말만.”
나도 기대는 안 해.
라고 말했지만 얼굴에 기대감이 너무나 넘쳐 구라치지 말라는 일갈을 들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혹시나 하는 기묘한 기대감과.
“원티드가 그렇게 바뀌었으니, 부재인 왕을 대신해 이번에는 진짜 그럴듯할 수도 있어.”
“그래도 유지한인데요?”
“유지한을 휘두를 인간이 나타났다며. 가능성 있어. 애초에 이 꼴이 된 건 원티드 인간들이 다 호구 같아서 유지한한테 제대로 뭐라고 못해서 그런 거잖아.”
“……하긴.”
왕의 부재가 기정사실이라 한들, 원티드의 변화로 여느 때와는 확실히 다른 자리가 될 것임을 확신하는 이들로 인해 이미 이번 만찬회는 벌써부터 평소와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 또 다른 변화를 예고하는 한 곳.
“유해한, 자세히 봐. 이쪽이 나아, 아님 이게 나아?”
“……도긴개긴인데?”
화악―
“아야! 나한테 이프리트 보내지 마! 왼쪽! 왼쪽이 더 괜찮네.”
“……그래?”
죽기 싫어 황급하게 대답한 건데도 그걸 진지하게 듣고 거울 앞에서 옷을 대 보며 골똘히 고민하는 이로운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유해한은 정말 미친 것 같지만 제 친구가 너무나 불쌍해 보였다. 세상에서 제일 안 불쌍한 놈 1순위인데 말이다.
대체 무슨 자그마한 희망에라도 기대고 싶은 건지.
해서 조심스럽게 나름대로 진지한 의견을 건네 보았다.
“……나는 그분 취향을 몰라서 제대로 된 답은 못 해 주겠는데……. 그래도 전남친이잖아. 이런 건 네가 잘 알지 않아?”
가라앉은 불씨를 들쑤시는 게 아닐까 싶어 조심스럽게 묻자, 그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한 건지 이로운은 화를 내기보단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잘 알지만……. 윤지호는…….”
“응?”
“취향이 특정되지만 특정되지 않아.”
“……이게 무슨 개소리, 아니 말이야?”
진심 나만 못 알아들어?
묘한 표정으로 이로운을 바라보자, 그가 이해는 하지만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는 듯 조금 난처한 얼굴로 볼을 긁으며 말했다.
“진짜야. 윤지호는 그냥 느낌이 좋으면 그걸로 땡이라, 어떤 스타일이 좋다 딱 특정되지 않아.”
아. 추리닝 스타일은 질색해.
그건 있다며 정말 답 없는 소리를 하는 모습에 유해한은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졌다.
“……야. 그럼 이젠 그냥 네가 어떤 차림을 하든 다 개별로인 거 아니야?”
너라는 인간 자체가 아웃인데 느낌이고 뭐고 좋을 리가 있냐고 진실을 냅다 던지자, 가차 없는 현실 적시에 직격타를 맞은 이로운이 타격이 큰 듯 휘청이며 모기만 한 목소리로 변명을 했다.
“아니야. 그래도 심미안은 완벽하니까…….”
“눈에 들기라도 하게……? 아. 그래. 그럼…… 이거 해.”
눈에 확 띄다 못해 시선 강탈일 테니까.
여자들 취향은 잘 모르지만, 재벌가 출신으로 안목만큼은 대단히 높은 유해한이 자신 있게 던져준 옷은 그야말로 정장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블랙 쓰리피스 슈트였다.
“평범하지 않아?”
“……이건 또 무슨 개소리래.”
어찌 보면 매우 흔하고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패션이었지만, 그럴수록 누가 입느냐에 따라 그 차이가 더 두드러진다. 이 새끼는 지가 너무 잘나서 오히려 더 모르나. 유해한은 매우 심기불편한 얼굴로 이로운을 노려보았다.
“그런 평범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인간이 몇이나 될 거라고 생각하냐.”
“…….”
그리고 그 몇 안 되는 인간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지금 사람 놀리냐고 유해한이 언짢음을 감추지 않자, 그 말을 이해한 이로운이 환해진 얼굴로 곧장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예고 없는 행동에 유해한이 아우성을 쳤다.
“어우야. 내 앞에서 홀랑홀랑 벗지 좀 말아 줄래.”
남자 몸 보고 설렐 일도 없지만 그러고 싶지도 않거든?!
유해한의 주접은 자연스럽게 넘기고 이로운은 서둘러 긴장한 마음으로 옷을 챙겨 입었다.
다 입은 다음엔 매무새를 다듬고, 하지도 않던 악세사리도 착용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울을 보며 머리를 쓱 넘겨 올리자…….
“헐. 대박……. 야, 오늘 베스트 드레서는 너일 듯.”
등 뒤에서 유해한의 감탄이 들려 왔다. 미적 기준이 제법 높아 웬만해선 감탄하지 않는 유해한인지라 믿음이 갔다.
만족스럽게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이로운은 작게나마 기대했다.
예전과 같이 격한 반응을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단 몇 초간이라도 네 시선을 집중해서 받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았다.
“가자.”
그리고 이런 각양각색의 마음을 전혀 알 리도 없고 관심도 없는, 모두를 여러 의미로 설레게 한 당사자는…….
“음. 이것도 괜찮을 것 같고……. 이것도 나쁘지 않은데, 뭘로 하지?”
“지호 씨가 원하는 걸로요.”
“본인이 입는 건데, 스스로 선택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요.”
‘물론 이상한 걸 고르면 바로 스루할 거지만.’
이른 아침부터 남의 집에 불쑥 난입해 남의 집 옷장을 털고 있었다.
정작 그 옷을 입어야 하는, 강제 코디를 당하는 당사자는 난처한 얼굴이긴 했지만, 속으로는 무척이나 행복한 기분을 만끽하는 중이었고.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너님 그러다 속 다 보인다고, 얼른 질질 흐르는 그 엔돌핀 넣으라고 심드렁하게 권고합니다.]
성위가 충고까지 해 왔지만, 그래도 지한은 폭포수처럼 넘쳐흐르는 기쁨과 올라가는 입꼬리를 자제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꼭…… 신혼부부나 연인 같잖아.’
아내가 남편의 옷을 골라주는 것, 못해도 여자친구가 남자친구의 옷을 골라주는 것 같았다. 물론 김칫국인 것을 알지만 그래도 설레는 마음을, 들뜨는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어려웠다.
실상은 이번에야말로 호구처럼 보이지 않겠다는 다짐 하에 옷차림부터 제대로 교육을 시켜 주려는 것이었지만.
뭐, 그래도 지한이 행복해하니 그거면 된 것 아닌가.
“진짜 멋있게 하고 가야 아무도 우리 유지한 씨 안 무시하지.”
화앗―
자신을 이렇게 신경 써 주는데 사랑에 빠진 남자가 설레지 않는 것도 무리긴 했다.
결국 지한이 달아오르는 얼굴을 주체할 수 없어 재빠르게 손으로 얼굴을 식히는데, 그런 그에게는 전혀 관심도 없는 듯 열심히 옷에 시선을 두던 지호가 마침내 코디를 완성했다.
“좋아! 이렇게 입어 보고 와요! 시간 없으니까 얼른!”
“네!”
지호의 호령에 지한은 옷을 받아들고 헐레벌떡 드레스룸 안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었다. 순발력 빠른 헌터답게 재빨리 착용을 마치고 수줍은 얼굴로 문을 열었다.
“……어때요?”
“환상이에요.”
눈앞에 드러난 존잘남의 모습에 지호가 코피라도 쏟을 듯 코와 입을 막으며 감탄했다. 물론 실제론 그러진 않았지만.
사실 패션도 패션이지만, 그 수줍은 모습이 더 크리티컬 히트였다는 건 비밀이다. 굳이 이런 취향을 말해줄 필요성을 못 느끼기도 했고, 그렇게 덧붙이지 않아도 제 완벽한 코디를 받은 지한은 완벽 그 자체였으니까.
“대박. 오늘 주인공은 유지한이다.”
“……아니, 지호 씨일 텐데.”
그리고 들뜬 지호와 다르게 지한은 의외로 매우 현실적이었다.
자신이 아무리 꾸미고 완벽하게 갖춰 입는다 한들, 오늘 모일 인사들은 외모보다는 그 알맹이에 중점을 두는 인간들이라 분명 자신이 앞에 있어도 지호에게 시선을 둘 테니까.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지한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자. 앉아 봐요. 이제 마무리 해야쥐~”
그것을 말하면 지금 저 즐거운 표정과 행복한 시간을 잃게 될까 봐.
지한이 거울 앞 의자에 앉자 지호가 왁스를 손에 바르고 그대로 지한의 한쪽 머리를 쓱 옆으로 올렸다. 왕년에 지우 머리로 장난 좀 쳤던 것인지 제법 능숙한 손길이었다.
그대로 스타일을 잡아 고정시키고 잔머리를 좀 정리하자…….
“헐. 나 대박.”
나 지금 뭐 한 거니. 지호는 자기가 해놓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짜 장난 아니다. 내 작품이지만 대박!”
지호가 너무 좋아하자 그게 좋은 지한이 수줍게 웃었다. 그 수줍은 미소에 또 한 번 치인 지호가 방방 뛰자, 지한은 행복한 웃음을 터뜨리며 이 시간을 마음껏 만끽했다.
“근데, 지호 씨는요?”
“응?”
“지호 씨는 안 꾸며요?”
“꾸민 건데요?”
뭔 소리를 하는 거냐고 지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나 당당한 발언에 지한은 오히려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야 지금 그녀의 차림은 검은색 H라인 치마에 흰 와이셔츠로, 그야말로 오피스룩의 정석이었다. 지호가 항상 하고 다니던 차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지한은 처음 길드에 인사하러 왔을 때의 화려한 차림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 모습이 꾸민 것이란 말에 동의할 수가 없었다.
그런 지한을 알아차린 듯 지호가 뭘 모른다는 얼굴로 말했다.
“에이. 꾸안꾸 몰라요? 꾸민 듯 안 꾸민 듯.”
“…….”
자신은 아주 꾸민듯 꾸미고 꾸며서 꾸꾸꾸를 만들어 놓고 본인은 그 반대를 추구하는 아이러니에 할 말을 찾지 못하자, 지호가 결국 참다못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아 표정 봐. 당연히 지한 씨랑 나는 다르죠.”
“……네?”
“나는 오늘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라 유지한이었음 좋겠는걸요.”
진심이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나보다, 계속 이곳에 있을 유지한이 더 주목을 받았으면 했다.
이런 지호의 마음을 알아차린 것인지 지한이 불안한 얼굴로 지호의 소맷자락을 잡아 왔다. 제대로 팔을, 손을 잡는 것도 아니고 옷자락을 잡는 게 소심한 유지한다워 다시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리고 소심한 유지한과 다르게 대범한 윤지호는 연신 불안한 얼굴로 눈을 맞춰오는 지한의 이마에 장난치듯 입을 맞췄다.
“……?!”
“아. 얼굴 빨개졌다.”
“……놀리지 마요.”
이마를 부여잡고 토마토같이 붉어진 지한의 모습에 환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지호는 그의 얼굴에서 불안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안도했다.
당신은 불안함 같은 건 전혀 없으면 싶다.
이런 나를 몰랐음 싶다.
내 속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굴지 않았으면 싶다.
나로 인해 일희일비하지 않았음 싶다. 그럴 때마다 굳게 다잡은 마음이 흔들리려 하니까.
이런 마음은 언제나 그렇듯 능숙하게 감춘 채 지호가 장난스러운 미소로 말했다.
“자. 그럼 가 볼까요. 전장으로.”
* * *
“……뭐야. 오늘 다들 왜 이래?”
진짜 죽어도 오기 싫었지만, 웬일로 평소엔 1할도 저를 신경 쓰지 않던 제 보스가 손수 끌고 온 덕에 만찬회에 참석하게 된 씹선비가 중얼거렸다.
멤버가 늘 똑같기도 했지만, 사실 평소에도 꽤나 자주 마주쳐 익숙하다 못해 징글징글한 얼굴들이 오늘따라 때깔이 곱다 못해 광칠까지 아주 제대로였다.
얼굴뿐일까, 옷차림도 무슨 소개팅이라도 나가는 듯 아주 휘황찬란하게 차려입었다. 단체로 정신이 나간 듯했다.
“여. 씹선비 랭커님.”
이것들이 미쳤나, 라는 얼굴로 속속 입장하는 이들을 바라보던 씹선비에게 한 남자가 말을 걸었다. 호칭만 간신히 랭커를 붙였지, 대하는 태도는 옆집 친구라도 부르듯 허물없는 태도였다.
그러나 씹선비는 그쪽을 제대로 쳐다도 보지 않은 채 익숙하게 툴툴댔다.
“본명으로 불러라, 제발. 넌 내 친구잖아.”
현 유예 길드 소속, 유예 길드장의 비서인 우민호가 익숙한 투덜거림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소속 길드가 갈려 서로 원수지간이 돼야 했지만, 고작 길드 하나로 깨질 우정은 아니었다. 다행히 둘 다 서로의 소속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편이라 그들은 지금도 우애 좋은 친구로 남아 있었다.
오히려 같은 편이 아니라서 서로 자기 길드 쌍욕을 신나게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고.
“그래, 하민환. 넌 목 좀 그만 앞으로 뻗을래? 좀 있으면 빠지겠어. 만찬회 안 와 본 것도 아닌데 왜 이래?”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다들 뭐야? 꼭 여기 처음 오는 것처럼 단체로 약 먹은 듯 이상하게 굴잖아.”
“아……. 뭐, 뉴비는 언제나 설레는 법이지.”
“아. 그거였어?”
그 뉴비를 이미 만나 본 씹선비는 단박에 납득했다. 납득은 했지만, 그래도 저렇게까지 들뜰 이유가 되나? 공감할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선물 꾸러미는 다 뭐야?”
“잘 보이고 싶으시대.”
“……헐.”
그야 물론 실제로 보면 매우 대단한 여자긴 했지만, 보지도 않고 그걸 본능으로 알아차려서 가지고 온 거라면 거의 육감이 짐승 수준 아닌가.
‘근데 분명 당사자는 개오바라 생각할 거 같은데.’
부담스러워할 게 훤히 보이는 광경을 상상하며 혀를 차는데, 우민호가 씹선비의 어깨를 말없이 툭툭 쳤다. 그러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차마 직접 손가락질할 용기는 없었는지 시선을 이쪽에 고정한 채 슬쩍 엄지로 뒤쪽을 가리켰다.
“왜, 뭔데?”
의도가 명확한 제스처에 씹선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따라 뒤로 넘어갔다.
시선의 끝에 보이는 것은…….
“……젠장.”
현재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자체 발광하고 있는 제 보스였다.
대체 누구를 꼬시려는 것인지(사실 알고 있지만) 아주 작정하고 꾸민 모습에 씹선비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이제 보니 자신이 누굴 뭐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중 우리 보스가 제일 끝판왕이라.
다들 그렇게 열심히 꾸미고 왔는데도 제 보스 앞에선 그의 옷차림 한 번 보고 제 차림 한 번 보고 ‘졌다……!’ 하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그러다가도 이내 홀린 듯 그를 계속 쳐다보고 있는데, 저런 광경을 보고 있자니 살짝 현타가 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원티드 갈걸. 원티드는 보스가 속 터져서 문제지, 이런 기상천외한 경우는 없지 않은가.
끙끙 앓다 못해 스트레스성 위경련이라도 올 것 같은 씹선비의 모습에 우민호가 나름 동정심이 생겨 어깨를 토닥여 주는데,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게 장내가 일순 고요해졌다. 그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야. 주인공 오셨다.”
“……아우. 저쪽도 오늘 작정했네.”
“유지한이 저러는 거 처음 봐.”
찬란한 빛을 뽐내며 맨 앞에 선 유지한의 모습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라,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정신없이 유지한을 바라보던 씹선비는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씹선비 님. 다시 보네요.”
어느새 무리에서 떨어져 이쪽으로 왔는지 미소 짓는 여자가 서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우리 보스 못지않게 빛을 내는 인간 옆을 걸으며 태연하다 못해 여유롭게 주변을 살피고 있던.
그 모습에 씹선비는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아! 네. 반갑습니다. 그……. 윤지호 씨?”
“어머, 기억해 주셨네요.”
‘……잊을 리가.’
오늘 최강은 분명 이 여자일 것이라고.
* * *
“유지한이 드디어 곰에서 사람이… 컥!”
원티드가 자리에 착석하자, 유예 길드장 노이람이 홀린 듯 유지한을 바라보며 필터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곧바로 같은 길드 소속인 배운변태의 손에 입이 틀어막혔다.
제 손바닥 아래서 요란하게 당황스러운 소리가 나는데도, 조금의 놀란 기색도 없이 평온한 얼굴을 한 배운변태가 한심한 제 길드장을 향해 권고했다.
“길드장. 그런 건 속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게. 노이람, 그런 건 속으로 생각해 줘. 불쌍한 우리 영웅님 상처받잖아.”
거기에 기다렸다는 듯이 옆 테이블에 앉았던 유해한이 끼어들었다. 그러나 편드는 척하면서 두 배로 디스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있는 대로 심기불편한 티를 풀풀 풍기며 배운변태가 쏘아붙였다.
“너님이 더 나쁩니다. 유해한.”
“나는 그래도 된다. 뭐.”
“너도 안 됩니다. 또라이야.”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고 배운변태가 일침하자, 이건 진짜 씹선비 버금가는 선비라고 혀를 내저으면서도 유해한은 순순히 항복의 제스처를 취했다.
그 행각에 재밌다는 듯 웃던 장하리 역시 신기하긴 하다는 듯 유지한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확실히. 오늘은 평소랑 많이 다르네. 평소에는 차림도 딱 호구스러웠는데, 오늘의 저 트렌디함은 뭐야? 완전 다른 사람 같네.”
역시 사람은 옷빨도 중요해.
그 말을 들으며 같은 듯 다른 생각을 하는 폭검 역시 덧붙였다.
“평소에는 빈틈 천지였는데 오늘은 빈틈도 없네요. 차림새도, 마력도.”
저건 폭검이 좋아하는 전투태세에 가까웠다. 물론 그래도 덤비진 않았다. 그럼에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손끝 하나 닿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으니까.
워낙 싸움 자체를 좋아해 질 것 같아도 일단 덤비고 보는 폭검이었지만, 그래도 한 합조차 되지 못하는 싸움은 시작하지 않았다. 그 정도 분별력은 있는 편이었다.
이렇게 여러 이들이 놀라워하는데, 그건 원티드 쪽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오늘 유지한 무슨 일이야? 진작 이러고 다니지!”
“맞아요! 이러면 아무도 호구처럼 안 볼……!”
“응. 그건 너무 갔어.”
그 난장판 속에서 지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내 작품이에요. 괜찮죠?”
“……아 역시.”
그 한마디에 모두가 대번에 납득했다. 그럼 그렇지. 이 인간이 이런 코디를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지.
그 납득을 읽어낸 지한은 자신이 그 정도냐며 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시무룩한 강아지 그 자체라 지호가 지한의 머리를 쓸며 다독여 주었다.
“하핫, 얼굴 봐. 에이, 다들 나쁜 뜻 아닌 거 알죠?”
그래봤자 그녀 또한 만면에 웃음기가 가득한 채라 그렇게 다정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쓰다듬는 손길이 좋은 지한은 그냥 얌전히 받고만 있었다.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이 익숙한 원티드 쪽은 그걸 아무렇지 않게 넘겼지만…….
“헐 대박…….”
“나 꿈꾸는 듯.”
“나 시력에 문제가 생긴 거 같아.”
“나도.”
“……끝나고 안과 가자.”
다른 쪽은 아니었다. 그중 특히 이것들을 뛰어넘는 반응을 보여주는 곳이 하나 있었으니.
“야! 이로운, 포크! 포크! 그거 우리 거 아니다?!”
“아니……. 왜 포크는 녹이고 의자는 얼리는데?”
“……길드장?”
누가 봐도 매우 매우 관계가 있고도 남는 질투 뿜뿜 모습에 장하리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이로운을 불렀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진짜 만찬회 시작도 전에 개판이 될 수도 있음을 직감한 씹선비가 빠르게 선수를 쳤다.
“길드장! 아무리 유지한이 싫어도 여기서 이러지 말자! 여기 ‘민간인’도 있어!”
최대한 의심 사지 않게, 그러면서도 이로운을 진정시킬 포인트까지 어렵게 넣어가며 말한 씹선비의 노력이 통했는지, 이로운이 정신 차린 듯 모든 힘을 상쇄시켰다.
“식기…… 바꿔 주시죠.”
“ㅇ, 예엣! 알겠습니다!”
서빙 직원도 아니면서 경호원이 식기를 바꿔주기 위해 허둥지둥 달려 나가자, 비로소 의심이 사라진 듯 장하리가 말했다.
“진짜 우리 길드장, 유지한 너무 싫어한다. 좋은 꼴도 봐주기 싫다니. 뭐, 상극스타일이긴 하지.”
“…….”
‘나이스!’
물론 그것도 있긴 했지만, 진짜로 빡친 주체는 들키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하며 씹선비는 자신의 노고에 셀프 칭찬을 했다. 그러면서 피눈물을 흘렸다. 이래서 안 오려고 했는데…….
그러나 이런 씹선비의 마음은 알 리 없고, 알 생각도 없는 이들은 가볍게 그를 무시하며 서로 저마다의 계산을 하기 바빴다. 저런 관계인 두 사람을 상대로 어떻게 행동해야 그들에게 이득일지.
머리 빠지게 고민하는 것이 훤히 보여 유해한이 조금 비웃음을 흘리는데…….
“다들 모이셨군요.”
마치 제가 주인공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은 병신이 등장하셨다.
* * *
“다들 모이셨군요.”
일부러인 게 분명했다. 허허 인자한 웃음을 흘리며 주인공처럼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는 모습이라니. 내가 헛웃음을 치기도 전에 비웃음을 입에 건 이들이 가차 없이 선제공격을 시작했다.
“대통령 임기가…… 올해로 마지막인가?”
“아니, 아직 1년 더 남았습니다.”
“아, 그래. 그럼 앞으로 한 번 더 볼 일이 남았군요. 그때까지 앞으로도 승승장구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대통령님.”
“아……. 하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저야 뭐 국민들의 뜻에 따라…….”
오오. 나이가 몇이신데, 치아 조심하셔야 되지 않나? 이를 아주 바득바득 가는 게 눈에 훤히 보인다.
그 정도만 해도 이미 속은 터져나가고도 남았을 것 같은데, 비꼼의 화신이 강림이라도 했는지 다들 고삐 풀린 마차처럼 멈추질 않고 말을 받았다.
“아, 국민들의 뜻. 좋은 말씀이네요.”
“오. 그럼 내년 대통령은 유지한이겠는데? 호감도 1순위. 출마만 하면 바로 당선이겠는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와. 쩐다.
진짜 순수하게 감탄했다. 비꼬는 게 진짜 랭커급이었다. 아니, 진짜 랭커라 이런 것도 랭커급인 걸까. 거기에 은근슬쩍 끼워 넣는 것처럼 하면서 본래의 표적에게 자연스럽게 화살을 돌리기까지 하다니. 가히 사탄도 울고 갈 실력이었다.
그리고 우리 본투비 호구께서는 또 사람 속 터지게 그 의도대로 고대로 당해 주려 하고 계셨다.
“아니……. 제가 무슨 그런…… 읍―!”
입을 열자마자 우리 쪽 인간들 얼굴이 시퍼레지며 손사래를 치는 게 보이지도 않는지, 저다운 대답을 하려는 지옥의 주둥아리를 황급히 손으로 틀어막고 대신 말을 받았다.
“어머.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저희 길드장님은 지금도 충분히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는데, 대놓고 화살받이까지 하라는 건 너무하시죠. 안 그래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개소리는 믿지 않지만, 웃는 얼굴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는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고운 말 하나하나에 독침을 박았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차마 대놓고 뭐라 할 수 없으니, 이걸 어떻게 받을지 살짝 기대가 되기도 했다.
뭐. 못 받으면 닥치고.
그런 내 상냥한(?) 생각까진 당연히 모르는 노이람이, 일면식도 없는 내가 나서서 당황스러운 건지 아니면 어색한 건지 어물쩍 말했다.
“……대통령이 화살받이라니. 한 나라를 대표하는 최고 높은 자린데요.”
……개소리 오지게 한다. 방금까지 한 나라의 대표자를 개 취급하던 인간이. 절로 태클을 걸 뻔했지만, 필사의 의지로 참고 입가에 환하게 미소를 띠었다.
“어머. 그럼 유예 길드장님이 다음 해에 출마하시나요?”
“아니 내가 아니라…….”
“왜요. 좋은 자리라면서요. 그럼 당연히 출마하셔야죠. 꼭 투표해 드릴게요.”
저도 투표권 가진 시민권자니까.
입으로는 응원한다는 식의 말을 하면서 얼굴에는 내 속마음을 그대로 담아 미소를 지었다.
진짜 출마해라. 반드시 투표한다. 네가 그 자리에 올라서 얼마나 좆같은 일을 당하게 될지 알고 싶거든 꼭 그렇게 해.
뭐하면 지금이라도 체험시켜 줄 수 있다는 각오를 하며 바라보자 노이람이 쭈그러들었다. 그러면서 옆의 제 부하에게 무어라 속삭였는데, 워낙 성능 좋은 귀라 그런지 다 들렸다.
“뭐야. 무서워……. 일반인 맞아?”
아니다. 이 자식아.
일반인이라 쓰고 (현) 랭킹 1위라고 읽는 현 세계관 최강자가 불편한 심기를 표출해 줄까 했지만, 최강자의 넓은 마음으로 참아 넘겼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뻥 치지 말라고, 네가 이렇게 간단하게 봐줄 리가 없으니 어서 꿍꿍이를 이실직고하라고 합니다.]
‘응. 사실 청와대 음식 먹어보고 싶었어.’
나름대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로망 아닌가. 청와대 만찬. 우리나라 최고 권력자들의 전속 요리사인 만큼 대한민국 최고…(아, 매 대통령 기준) 셰프의 요리.
대통령은 안 궁금해도 그 셰프의 실력은 매우 궁금했다.
어찌어찌 제1 라운드가 깔쌈하게 종료되자,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대통령이 크흠 하며 되도 않게 근엄한 척을 하더니 선언했다.
“어……. 그럼…… 식사를 내오도록 하죠.”
‘앗싸!’
이런 빠른 전개 매우 감사요.
보통 만찬회라면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소소한 담화를 나누고, 나오고 나서도 먹는 것보단 대화에 집중하는 게 정석이었지만 이 만찬회는 정반대였다.
드르륵―
선언과 동시에 잠시의 시간 낭비도 참을 수 없다는 듯 빠른 속도로 음식이 나왔고, 서빙을 하던 인간들은 무조건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은지 서빙을 마치자마자 빛의 속도로 사라졌다.
뭐, 음식이 워낙 훌륭한 자태였으므로 불만은 없었다.
“오. 맛있겠다. 그냥 먹으면 되나요?”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누가 먼저고 아님 기다리고 뭐 이딴 구시대 사고방식을 주장하려는 건 아니겠지?
고대했던 만찬회의 주목적을 마주하고 텐션 업된 기분으로 묻자, 유라와 레쓰비가 저들이 앞서 식기를 들며 말했다.
“그딴 거 없어요. 여기 위아래가 어디 있다고.”
있긴 있는데 어떤 양반이 다 뒤죽박죽 만들어서 의미 없어요. 지한을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으며 유라가 말했다. 그 말에 말 그대로 서열 개판을 만든 장본인이 조금 움찔했다.
그러자 조금 안쓰러워졌는지 레쓰비가 화제를 돌리듯 내게 말했다.
“근데, 아침 안 드셨어요?”
“당연히 못 먹었죠.”
먹을 시간이 어디 있어? 평소에는 그 시간에 잠을 한 톨이라도 자는 걸 선호해 그랬지만, 오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뭘 먹을 생각을 못 했다.
“예? 뭐 때문에요? 설마 긴장하셔서?”
이 말에는 모두가 호기심이 동했는지 내 쪽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나는 답 대신 먼저 내 옆에 있는 인간의 차림을 검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쓸어 주었다.
“내가 이 작품을 만드는 데 몇 시간이 걸렸을 거 같아요?”
“……아.”
단박에 튀어나오는 긍정에 유지한이 조금 억울한 듯, 답지 않게 부루퉁해져 대꾸했다.
“아니. 왜 다들 쉽게 긍정하는데…….”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야 너님은 혼자 코디하는 게 불가능하니까요.”
그 패션이라고 하기도 미안한 패션 센스로 어딜.
단 한 순간도 망설이지 않는 레쓰비의 반박에 그야말로 회장이 웃음바다가 됐다.
“아하하하하!! 와. 진짜 저 새끼 돌직구 여전하네?”
“아하하하!! 그래도 지 길드장인데 너무한다.”
넓은 회장을 들썩이게 할 정도로 큰 웃음소리에 유지한은 쪽팔린 나머지 그대로 쪼그라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나는 누가 쪼그라들든 말든 배고파 뒤지겠어서 먼저 우아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유지한 씨, 거기 빵 줘요.”
“……네.”
그 와중에도 재깍재깍 말은 잘 듣는 것을 보니 별로 걱정할 필요도 없다 싶었다.
곧 주변 사람들도 진정하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레쓰비 저건 인생의 보물을 찾으러 간다더니, 찾았어?”
“쟨 보석술사가 아니라 트레져헌터야. 너 솔직히 말해. 발굴 허가 안 받았지.”
“뭘 허가를 받아. 쟤 아님 어차피 보석들 다 찾지도 못할 텐데.”
“시끄러! 이번엔 못 찾았다고! 니가 거기 있다고 했잖아!”
“……뭐야, 진짜 없어? 거기가 제일 확률이 높았는데?”
“없어! 없다고! 잠 한 시간도 안 자고 일주일을 쏟아부었는데도 안 나왔다고!”
너무 짜증 나서 비행기고 뭐고 냅다 텔레포트로 한국 왔다!
입장할 때만 해도 그렇게 진중하고 견제가 넘치던 만찬회는 어느새 간만에 보는 이들의 인사와 안부, 그리고 잡담이 넘치는 자리로 변질되었다. 그 사이에서 대통령은 공기가 되었고.
“텔레포트 저거 불법 아닌가?”
“뭐 알아서 잘했겠지. 솔직히 어디로 어떻게 이동했는지 어떻게 알아. 국제법 체결된 것도 최근인데.”
“그러고 보니 장하리 이건 아직도 하나만 파? 그…….”
뒷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지만, 모두의 시선이 같은 테이블에 앉은 누구를 향하는 걸 보니 다들 아는 분위기였다.
“흥. 나 같은 순정녀가 당연하지.”
“아니, 그건 순정녀랑은…… 읍!”
“쉿. 조용히 해. 죽고 싶지 않으면.”
누가 봐도 만찬회가 아니라 그냥 소모임이었다. 아, 소모임이라기엔 좀 많나? 잠깐 잡생각을 하다 다시 음식에 집중했다.
근데…….
‘왜 음식이 전체적으로 다 삼삼해?’
좋게 말하자면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린 거고, 나쁘게 말하면 네 맛도 내 맛도 아니어서 내 얼굴이 절로 오묘해졌다.
그걸 가장 먼저 알아챈 것은 아까부터 얼굴 뚫릴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던 이로운…… 이 아닌, 정신이 우주로 날아간 것 같았던 유지한이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나요?”
걱정스러운 얼굴에 순간 기분이 오묘해졌다. 그 말랑말랑한 느낌을 뭘 어째야 할지 적응이 안 돼 그냥 솔직하게 막 나가기로 했다.
“네. 여기 별로예요.”
진짜 졸라 기대했는데 이게 뭐냐고.
내뱉고 나니 청와대가 음식점이 된 것 같은 기묘한 뉘앙스였지만, 망설임 없이 빛나는 별점 2점을 매기며 단호하게 별점 테러를 했다. 인테리어 분위기와 사장의 짜증남까지 포함된 점수였다. 그러면 사실 1점을 줘야 맞겠지만, 죄 없는 셰프님을 감안해 플러스 1점.
어린애처럼 뚱한 얼굴로 식기를 툭 내던지자 쨍, 하는 소리가 났다. 짜증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났는지 유지한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나를 달래 왔다.
“원래 여기 음식이 많이 심심해요. 나가서 또 먹죠. 우리.”
어차피 다들 배 하나도 안 차서 2차로 회식해야 할 거예요.
유지한의 말이 끝나자마자 대충 배라도 채우겠다는 속셈으로 깨작거리던 이들이 망설임 없이 손을 놓았다.
“아, 회식할 거야? 그럼 안 먹을래. 드럽게 맛없어.”
“MSG에 길들여진 한국인에겐 무리가 가는 맛이지.”
“응. 떡볶이 먹고 싶다.”
“난 치킨.”
“난 야채 곱창.”
“어 그럼 나도 족발! 족발 구이!”
줄줄이 나오는 K-푸드(배달 전용)에 새삼 이들이 토종한국인이라는 것이 폐부로 느껴졌다.
“좋아요. 길드 가서 시켜 먹죠.”
지금 말한 거 다 시켜. 뷔페다!
평소 뜻은 있었지만, 결국 다 못 먹을 것을 뻔히 알기에 위장을 탓하며 포기했던 배달음식 뷔페의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가슴이 설레었다.
“이야. 먹을 줄 아시네?”
“대찬성이요!”
간절히 소망했던 로망 하나를 클리어해 보자는 일념으로 장난스럽게 말한 건데 모두가 환호하니 기분이 좋았다.
그런 우리의 모습이 꽤나 생소한 듯, 신나게 떠들던 이들이 어느새 우리만 다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하나였던 유해한이 부럽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장난을 치려는 건지 똘망똘망한 얼굴로 이로운을 올려다보며 애교 있게 물었다.
“우리는?”
‘우리도 회식하장~’ 말끝을 굴리며 윙크를 하자 이로운이 그야말로 썩은 얼굴로 답했다.
“닥쳐.”
“쳇.”
뭐 이들이 아니더라도, 다른 길드들 역시 저마다 회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 봤자 우리처럼 친구 모임 같은 회식 분위기는 나지 않겠지만.
원티드가 워낙 여기 모인 길드들에 비해 소규모여서 가능한 이야기였다. 대규모 길드는 어떻게 해도 지금 이런 자리의 연장선밖에 되지 않을 터였다. 많은 인원들 통솔하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뭐, 내 알 바 아니지만.
“이…… 이놈들이…….”
그때, 오합지졸인데도 한마음처럼 뭉쳐 주최자를 외면한 우리들 덕에 공기가 되어 있었던 대통령이 결국 폭발했다.
“이 빌어먹을 것들이! 조금 오냐오냐해 주려 하니까 아주 머리끝까지 기어올라……!”
“…….”
순식간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고요한 가운데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였다.
저게 돌았나. 정신승리 무슨 일.
“……돌았나?”
“아니, 초딩도 아니고 무시 좀 당했다고 뭐 저런…….”
“나이 엿 바꿔 먹었나……?”
다른 이들도 크게 다른 생각은 아니었는지 여기저기서 소곤대며 대화를 나누었다.
“다 들려―!! 이것들아!!”
다 들린다는 게 문제였지만.
“이것들이 어른을 우습게 보고 말이야―!!”
……질린다. K-꼰대 끝판왕.
나가 죽어도 시원치 않을 꼰대 발언에 순간 반사적으로 발이 날아갈 뻔했다.
나만 그런 충동을 느낀 것은 아닌지, 모든 이들에게서(아, 유지한을 제외한) 스멀스멀 살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모인 살기만으로도 충분히 사람 하나 작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들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어떤 의미로는 아주 대단한, 입이 아주 제대로 트이신 꼰대는 거침이 없었다.
“애초에 이 자리가 말이야! 너희들 웃고 떠들라고 만든 줄 알아?! 다, 국민들에게 너희가 얼마나 국가에 충성하는…… 컥―!”
뭐 나름대로 본인은 야심차게 입을 열었겠지만 제대로 시작도 못 했다. 벌컥― 열린 문과 함께 후다닥 뛰어 들어온 두 명의 인간 중 한 명이 급히 꼰대의 입을 틀어막았으니까.
자세히 보니 낯익은 얼굴이었다.
“……센터장?”
“죄송합니다. 잠시 길이 막혀 늦었는데 이런 사태가 벌어진 줄은 몰랐습니다.”
진짜 미친 듯이 달려온 듯 땀을 흘리며 숨까지 헐떡이면서도 말은 또 숨 한 번 막혀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진짜 신기한 기술이었다.
어쩌다 보니 처음 마주하는 모습이 이렇다는 게 매우 웃프기도 했고.
아직은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인지, 그는 일단 대통령 목숨줄을 붙잡고 저 미친 꼰대가 질러놓은 불을 끄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었다.
저도 고위인사면서 거침없이 90도로 허리를 꺾으며, 같이 달려온 총리로 보이는 인간의 옆구리를 찌르는 광경은 단언컨대 인생에서 한 번도 볼 거라 생각 못 했던 진풍경이었다.
더불어 옆구리를 찔리자마자 태엽 인형처럼 재깍 말을 꺼내는 총리도 진짜 대박이었다.
“대통령 각하께서 요즘 심신이 많이 불안정하십니다.”
“…….”
대통령 목을 날리며 그와 함께 이번 정부의 정치도 날릴 바에야 차라리 대통령을 심신미약자로 만들어 붙여두는 게 낫다는 듯, 하는 말이 거침없었다.
확실히 현명한 판단이긴 했다. 너무 현명한 판단이라 순간 모두 흩뿌리던 살기도 잊은 채 넋이 나갔지만. 뭐, 그것 역시 전략이었다면 대성공이었다.
“아. 그래서 그렇게 정신병자같이 되도 않는 개소―”
“리가 나오실 수 있으시죠. 요즘 임기 막바지라 레임덕이 와서 많이 힘들어하셨습니다.”
……와. 저 총리 말빨 무엇.
무슨 소리가 나와도 더없이 정중하게, 그러나 칼같이 차단하는 환상의 언변에 나는 진심으로 눈앞에 있는 저 노인, 아니, 신사분이 존경스러워졌다.
역시 저 정도 무기는(이 경우에는 무적 방패) 가지고 있어야 총리를 하나 보다. 총리는 진짜 아무나 하는 거 아니었다. 아, 대통령보다도 더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건 안 비밀.
“와. 여전히 철벽 방어 요새시네요.”
“우리나라의 방패들께서 무슨 말씀이십니까.”
분에 넘치는 과찬 하지 마시라고 자신을 낮추며 등 뒤에서는 센터장과 공모해 열심히 대통령을 뒤로 치우는 이중 스킬. 그게 티 나지 않고 자연스럽다는 것에서 세월의 노련함이 느껴졌다.
물론 우리의 K-꼰대는 영원한 빌런이기에 조용히 퇴장해 주지 않았다.
“야! 이 총리! 네가 뭔데 내가 정신병자라고…… 웁―!”
……저 새끼는 정체가 대체 뭘까? 제가 임명했을 텐데 총리가 보좌라고 진짜 시다바리인 줄 아는가 보다. 이 총리라니.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말해서 순간 이름이 진짜 ‘이총리’인 줄 알 뻔했다.
“길드장님, 저분 성함이 이 총리예요……?”
“……이남윤 총리님이세요.”
오죽하면 옆의 유지한에게 물어봤을까. 사실 정치판에 관심이 없어서 대통령 이름은 알아도 총리 이름까지는 몰랐다.
뭐, 그건 대충 넘어가고.
그보다 상황이 이 정도로 파국을 맞아서야 나는 간신히 한 가지 의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사실은 처음부터 궁금해했어야 했는데.
“그래서, 원래 만찬회의 목적이 뭐예요?”
“…….”
나는 진짜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것인데, 갑자기 무시무시한 침묵이 회장을 감쌌다. 아니, 이걸 또 다들 듣고 있었어?
근데 답은 왜 안 해?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나 같아도 할 말 없겠다고. 이렇게 답 없는 모임은 또 처음 본다고 귀를 후비적거립니다.]
……그냥 밥 먹고 수다 떨러 만난 것 같지? 성위님까지 이렇게 말하니 진짜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목적도 뭐도 전혀 모르겠지만, 이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이번 만찬회는 그냥 망했어.
“우리 여기서 해산할까요?”
쓸데없이 아까운 시간 때우지 말고 이만 끝내자고 산뜻하게 말하자, 그 말이 제대로 피날레를 장식한 듯 모두가 푹 늘어져 기지개를 켰다.
“아. 역시 이번 만찬회는 기대대로네. 판타스틱하다.”
몇몇은 자유롭게 테이블을 이동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내 앞에도 옆 테이블에 앉았던 분들이 다가오셨다. 아까와는 다르게 정중한 표정으로.
“워낙 개판이라 이제 인사드리네요. 노이람입니다. 유예를 맡고 있…….”
“다고 말하고 실질적으로는 다른 분이 다 관리합니다. 유예의 김은우입니다. 반갑습니다.”
“아. 네…….”
“‘배운변태’야. 그렇게 말하니 못 알아듣잖아.”
“아, 말하지 말라고!”
……아. 그 말에 그제야 이분이 누군지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이명 결정의 최대 피해자 동지!
안쓰러움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몰려오려 했다. 이쪽도 얼결에 망할 성위님께서 내뱉은 것으로 정해졌으니 동질감이 남달랐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나도 그럴 줄 알았냐며 억울함을 표합니다.]
‘응. 아닥. 할 말 없으심.’
되도 않는 소리를 하는 놈은 가차 없이 처단하고, 나는 연이어 밀려들어 오는 인사들을 받았다.
“저는 사계절의 길드장…… 아니 어쩌다 이로운 저놈이 저희 길드명과 똑같은 이명으로 활동해서 그렇지 저희가 더 먼저 창시됐습니다!”
“아, 네.”
“이건 저희 길드원들이 저번에 신세를 졌다 해서 약소하게나마…….”
“예? 신세라니요.”
무슨 신세?
그야 나한테 지긴 했지. 랭킹 1위인 나한테.
하지만 일코 중이니 그런 생색은 낼 수 없고, 내서도 안 되기 때문에 무슨 소리냐며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그런 거면 그건 저희 길드장님한테…….”
“아유, 아닙니다. 꼭 원티드 실장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굳이 보답이라며 사계절의 길드장은 선물꾸러미를 내게 들이밀었다. 계속 거부할 수도 없어서 결국 넘겨받고 멍하니 서 있는데, 지한이 받아도 된다고 웃어 주어 그냥 받기로 했다.
“오. 역시 인기 많네요.”
“유해한 씨.”
그때, 정말 이름값을 하듯 유해한 타이밍에 유해한이 끼어들었다.
그를 마주하자마자 바로 나를 뒤로 감추고 경계태세에 돌입하는 지한을 보며 유해한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 유지한 얼굴 봐라. 바로 구겨지네.”
“가까이 오지 마시죠.”
“내가 해충이냐?”
“그보다 위험하죠.”
이유는 당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냐는 눈길에 유해한이 의미심장하게 미소를 지었다.
“왜. 너나 나나 같은 핏줄인데? 그걸로 따지면 너도 똑같지, 뭐.”
어쨌든 같이 집안을 탈출한 자식이기도 하고.
물론, 유해한이 유지한을 싫어하는 것은 그런 핏줄 탓과는 전혀 무관했다.
그 말에 지한이 들키기 싫은 치부를 들킨 사람처럼 소리쳤다.
“유해한!”
“아, 이쪽은 몰랐나 봐?”
그 외침에 그제야 나를 보며 시치미를 떼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가증스러워 어이가 없었다. 비꼬는 게 아주 수준급이네.
가만히 있을까 하다 떨리는 주인공님의 뒤태를 보고 나는 결국 한숨을 쉬며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었는데요.”
“……네?”
“진짜요?”
“집 나간 재성 그룹 셋째 아들. 집안에선 내놓은 자식이지만 훌륭하게 자수성가한 케이스. 정확하죠?”
깔끔하게 유해한의 이력을 한 줄 요약하자, 유해한도 내가 알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듯 감탄 섞인 헛웃음을 흘렸다.
“아. 알고도 모른 척하신 거구나? 아버지도 끌어들이시고?”
오. 집 나간 자식이지만 그래도 아버지 일정 정도는 확인하나 보다. 새로운 사실을 체크하면서 나는 아까의 유해한처럼 유들유들 얄미운 미소로 답했다.
“뭐. 여기 길드장님은 모르시지만, 유해한 씨는 잘 아는 점을 활용했죠.”
“와……. 이분 제대로시네?”
그럼 내가 그럼 폼으로 유지한 곁에 있을까. 이 정도도 못 할 생각이었으면 진작 유지한과 50km 이상은 떨어져서 은거했다.
더 할 말도 없는 것 같아 여기서 대화를 끝내려다 잊고 있던 할 일 하나가 떠올랐다.
“아. 하나만 전달 좀 해 주시겠어요?”
“네?”
“이로운더러, 저 좀 그만 쳐다보라고요. 얼굴 뚫릴 거 같다고.”
‘이제 좀 그만 질척거려라.’를 나름대로 곱게 포장해서 말한 것 같은데 유해한의 표정을 보니 실패한 것 같다.
그래도 뭐, 딱히 틀린 것도 아니어서 그냥 생글생글 웃자, 유해한은 ‘이로운 이 불쌍한 놈.’이라고 중얼거리면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등을 돌리는데…….
콰과과광―
“……?!”
“억―!!”
“지호 씨!!”
갑작스러운 진동에 다리가 훅 꺾이자 내 옆에 있던 유지한이 다급하게 나를 붙들었다.
그런 우리를 비롯해 다른 이들도 갑작스럽게 울린 깊은 진동에 놀란 듯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며 혼란스러운 기색을 내비쳤다.
“뭐야. 지진 났어?!”
“청와대에?!”
“뭐야, 드디어 이거 박살 나는 거야?!”
불안인지 쾌재인지 모를 소리에는 나도 살짝 공감했다. 그러게. 그토록 박살 나라 할 때는 나지도 않더니.
실없이 생각하다 갑자기 떠오른 사실에 얼굴을 와자작 구겼다.
“……X발.”
“네? 왜요?”
“윤지우.”
“……네?”
“윤지우가 밖에 있어요.”
조급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실수했다. 이로운도 오는 건 기차게 알아 가지고, 그 새끼 어쩌고 하며 저도 따라오겠다고 하도 땍땍대서 참다 참다 그냥 데려왔는데. 착오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 안 데려왔다.
그래 봬도 A급 각성자이니 웬만해선 쉽게 죽진 않겠지만, 그래도 여전히 내 눈에는 약골 머저리 동생이라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내가 곁에 없으니까.
그런 내 얼굴을 본 유지한이 나를 안은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얼른 나가면 되죠.”
나보다 약골이 하는 말인데, 왜 그게 그렇게 위로가 되는지. 순간 상황도 잊은 채 잠시 유지한의 얼굴을 바라봤다. 왠지 이 얼굴을 봐야 할 것만 같아서.
그 순간이었다.
“……지호 씨!”
“유지한!”
“게이트다!!”
“모두 대비해!”
우리의 등 뒤로 게이트가 생성된 것은.
그리고 그 게이트가 가장 먼저 빨아들이는 것은…….
“……윤지호―!”
역시 나였다.
“……망할.”
황급히 나를 잡으려 아우성치는 주인공님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뒤바뀌었다.
게이트에 진입하게 되자 진심으로 간만에 쌍욕이 튀어나왔다.
랭킹 1위라고 이런 것도 1등이냐!
* * *
‘웁―!’
게이트에 진입하자마자 물 같은 것이 날 덮쳤다. 아니, 물에 빠진 것만 같았다. 당황해 허우적거리는데도 변화는 없었다.
‘뭐지?’
황급히 스킬을 전개하려 했지만 스킬도 발동이 되지 않았다. 이런 적은 난생처음이라 진심으로 당황했다.
‘성위님? 성위님! 야. 이 똥별 새끼야!’
조급한 마음에 성위를 불렀는데 답이 없었다. 이 상황에 내가 이렇게 다급히 부르는데도 튀어나오지 않을 성위님이 아니었기에 나는 비로소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했다.
‘이런 젠……!’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의식이 희미해졌다.
설마 여기서 이렇게 끝나는 건가.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밀려오는 짜증을 느끼며 의식을 놓는데…….
“……허억―!”
갑자기 생동감이 차오르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정신이 멀어졌다 급격히 현실로 돌아오는 경험은 진짜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보다 백배는 짜릿했다.
‘아씨. 무슨 게이트가 이따구야.’
짜증을 내며 있는 대로 머리를 흐트러뜨리는데, 옆에서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어?”
뭐? 누구? 분명 날 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아가씨라니.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소리에 얜 대체 뭘까, 하고 시선을 돌리자마자 나는 황급히 주의를 둘러보았다.
“……헐, 미친.”
무슨 중세영화에서나 볼 것 같은 인테리어. 메이드복을 입은 여자아이.
그리고…… 원래의 내 옷은 어디 가고 슈미즈 같은 잠옷 부스러기스러운 걸 입은 나.
벌떡 일어나 거울을 향해 달려갔다.
“아, 아가씨. 왜 그러세요?”
“……이게 뭐야.”
다행히 내 얼굴은 그대로였다. 머리카락과 눈이 파란색이 된 것만 빼면.
이 무슨 미친…….
옛날 한창 책에 빠져 살 때 읽었던 어떤 것의 시작이 이따위였던 것이 떠올라 더 혼란스러웠다.
그 순간, 눈앞에 알림창이 떴다.
【게이트에 입장하셨습니다.】
【스토리 전개식 게이트입니다.】
【등급 측정 불능. 읽히지 않는 비밀요소들이 존재합니다.】
【‘로판’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속속 뜨는 알림창에 난 진짜로 간만에 넋이 나갔다.
“벨로아 아가씨. 어디 아프세요?”
살다 살다 소설에 빙의됐는데, 그 소설 속에서 또 로판에 빙의가 되었다.
“이것들이 단체로 돌았나…….”
이건 대체 무슨 경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