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 주인공이 옆집에 사는 것에 관하여.
이런 망할.
아까부터 수십 번째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 이 말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같은 말 뿐이기만 할까. 수십 번씩 감정이 오락가락했다. 분노가 훅하고 치밀어올랐다가, 그래도 어떻게 화낼 수 없어 가라앉히는 것의 반복이었다. 급격한 감정변화 아래서 서류는 점점 찌그러지기만 했다.
그걸 보며 마지막 마무리를 하러 온 차지혁이 또 지랄병 도졌냐는 얼굴로 물었다.
“……괜찮냐?”
“괜찮아 보여?”
매우 안 그래 보였으면 좋겠는데. 살벌한 얼굴에 차지혁이 바로 꼬리를 말았다.
정말 세상사 제 뜻대로 되는 일이 없긴 했지만 이런 뭣 같은 경우가. 다시 생각해도 뭘 어쩌지 못해 결국 아무것도 못 했던 어제를 회상하며 나는 다시 스팀이 올랐다.
‘……옆집이세요?’
‘네.’
뭐가 문제인 건지도 모르는 듯한 천진난만한 얼굴에 순간 뭐가 ‘네.’긴 네냐며 멱살을 잡고팠다.
진짜 잡을 뻔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일단 진정. 진정하라며, 일코. 일코 갖다 버릴 거냐며 황급히 만류합니다.]
저 조금의 문제점도 느끼지 못하는 천진난만한 얼굴과 성위님의 만류가 아니었다면.
진정하려고 보니 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나는 옆집이 빈집인 줄 알았다. 누가 들어올까 싶을 정도로 워낙 비싼 오피스텔이기도 했고, 옆집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인기척도 없었으니까.
……그야 당연했다. 제가 병원에 처넣었으니까.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왜 옆집이에요…?’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런 말뿐이었다. 다른 집도 많았을 텐데, 왜 굳이 옆집이냐고.
그 질문에 지한이 얼빠진 얼굴로 답했다.
‘당장 줄 수 있는 집이 이곳이어서……. 말 안 했던가요?’
당연하지―! 말했으면 내가 여기 들어왔겠냐?!
절로 혈압을 올리는 대답에 뒷목을 잡을 뻔했다. 하지만 하도 파란만장한 일이 많아 말할 기회 따위 없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결국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짜증 나―!!”
그게 너무 속 터져 돌아가실 것 같았다.
내가 발광하는 것을 보고 ‘저건 잘됐는데도 왜 지랄이냐.’ 하는 썩은 얼굴로 차지혁이 나를 보았다.
“자자. 응. 너 짜증 나는 건 다른 문제인 거 같으니까 확인해 보고 싸인해.”
차지혁이 사인하라는 건 원티드에게 반환될 반환금 내역서였다. 한두 푼도 아니라 신중하게 볼 법하지만 나는 되려 시큰둥했다.
“차지혁. 솔직히 말해도 돼?”
“뭐.”
“니들이 등쳐먹은 게 하도 많아서, 이 정도 액수를 보니 1원까지 딸딸 따지기엔 너무 귀찮아.”
“……젠장.”
내 솔직한 말에 차지혁이 욕을 곱씹었다. 이유는 서로 잘 알고 있었다. 본인도 같은 심정이거든.
결국 차지혁은 이미지 관리를 포기하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진짜 이 정도로 털어먹었을 줄 알았냐고. 어느 정도여야 정확한지 따지지.”
“8,000억대가 되어 가는데 아무 말 안 한 우리 길드장을 존경해라.”
머지않아 사리 나올 거야.
그 정도면 부처로 승격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신랄한 비꼼에 옆에 있던 요한과 유라, 민현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많이 뜯겼을 거라 상상은 했지만, 진짜 이 정도였는지는 몰랐나 보다.
사실 나도 놀랍긴 했다. 몬스터로 벌어들이는 수익은 소설에서도 천문학적이긴 했지만, 소설로 보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달랐으니까. 너무 액수가 커서 그런지 실감도 나지 않았다.
“여기 직인. 너도 찍어.”
해탈한 두 사람이 마무리를 지으며 드디어 오랜 기간 이어진 악연이 하나 뽑혀 나갔다.
나름 열심히 고군분투했던 차지혁인지라 그래도 결과물을 보니 뿌듯하긴 한 듯했다. 그 모습에 고마움이라도 느꼈는지 다른 사람들이 한두 마디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차지혁 팀장님.”
“아닙니다. 결국 한 건 다 저녀석인걸요.”
“그래도 팀장님의 노고를 부정할 수는 없죠. ……계속 센터에 계실 건가요?”
은근슬쩍 욕심이 난 듯 유라가 떠봤지만, 그 말을 그리 깊이 있게 받아들이지 않은 차지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철밥통이 갈 데가 어디 있나요.”
센터는 공공의 적과도 같다 보니 센터를 나온다고 해도 갈 곳이 딱히 없었다. 그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해도 센터에 있었다는 것 자체가 앙금으로 남아 다른 길드에 잘 섞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보니 센터를 그만두고 나온 헌터들은 보통 수준 낮은 용병 길드나 대기업에서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기동대 같은 곳에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차지혁은 그에 대해선 아예 생각조차 못 한 듯했다.
하지만 나는 대화를 들으며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새삼 자신의 멍청함에 탄식을 흘리며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망설임 없이 폭탄을 내던졌다.
“차지혁. 우리한테 올래?”
“……뭐?”
이게 뭐라는 거야. 라는 얼굴이 눈에 훤히 보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는 벌떡 일어나 서랍 이곳저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센터 월급 쥐꼬리잖아. 그거보다 많이 줄게. 표준계약서가 어디 있더라…….”
“야. 잊고 있는 거 같은데 나 원래 부자거든?”
쥐꼬리라는 말에 상처받기라도 했는지 발끈하며 차지혁이 대꾸했다.
물론 난 코웃음만 쳤다.
“니가 원래 갖고 있는 돈이랑 버는 돈이랑 같냐?”
비교할 걸 해야지.
버는 돈은 그냥 돈이 아니다. 그 인재의 가치지. 기본 중 기본도 모르는 거냐고 힐난하는 눈빛을 쏘아 보내자 차지혁이 입을 쏙 다물었다.
하여간, 이기지도 못하면서 덤비는 건 참 잘했다.
“자. 여기 계약서. 센터에서 지랄하면 내가 난장판 한번 피워서 싹 정리해 줄게. 걱정 말고 사인해.”
“나 간다고 안 했거든?!”
누구 마음대로 결정하냐고 차지혁이 한번 튕겼다. 그 말에 저 또한 너무 강압적이라고 생각했는지 유라 역시 살살 나를 말려왔다.
“그래요. 지호 씨. 너무 강요하는 건 좀……. 팀장님도 생각할 시간을 드려야죠.”
정말 스카우터만큼은 하면 안 될 인재였다. 세상 어떤 스카우터가 생각할 시간 따윌 진짜 스카웃 상대를 위해서 주는가. 백날 그래 봐라. 잡히는 건 호구뿐일 거다.
물론 저건 호구였지만 시간이 아까웠다.
원래대로라면 저 외골수 차지혁을 회유하는 건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아. 그래? 그래. 알았어. 난 나름대로 생각해서 욕먹을 거 각오하고 네게 제안한 거였는데 싫다니 뭐…….”
기껏 기회를 줘도 못 받아먹으니 네 인생 네가 알아서 하란 투로 계약서를 물리려 하자, 내 말에서 어떤 뉘앙스를 정확히 캐치해 낸 차지혁이 황급히 내 손을 붙잡았다.
“…욕먹을 거 각오하다니?”
약간의 불안이 담긴 다급한 어조에 나는 보란 듯이 운을 깔았다.
“며칠 전에…… 정하나가 나 찾아왔는데…….”
“……그런데?”
“나한테 자리 하나 뜯어갔거든.”
차지혁은 물론 다른 이들도 처음 듣는 소리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넹?!”
“……정 박사님이요?”
“어쩐지 채소아가 신나서 연구실에 박혀 있더라니…….”
아주 알맞은 추임새에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판이 완벽하게 짜여졌다.
물론 차지혁은 굳이 판이 짜여지지 않더라도 정하나 하나에 완벽하게 돌아버릴 수 있는 남자였지만, 그래도 이 완벽한 분위기에 제대로 낚인 불쌍한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어조로 물었다.
“……정하나가 여기 있다고?”
센터는 어쩌고?
타당한 의문에 나는 우수에 찬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때려쳤대. 누구 씨랑 좀 떨어질 필요를 이제야 느끼는 것 같다면서……?”
그런 말 하는데 어떻게 안 내주니.
완벽한 한 방에 차지혁이 비명을 내질렀다.
“야―!!!”
“아, 왜 소리를 질러.”
이게 뭘 잘했다고. 그럴 거였으면 진작 잡기라도 하든가. 용기가 없어서 잡지도 못하고 질질 끌기만 하는 남자의 억울함과 분노 따위는 받아줄 생각이 1도 없다.
내가 진심으로 짜증을 담아 노려보자, 와중에도 내 얼굴에서 그것을 읽었는지 차지혁이 상처받은 남자의 얼굴을 했다.
그래도 조금도 불쌍하지 않았다. 모든 건 제가 자초한 것이니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차지혁의 친구기도 했지만, 정하나가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
“나름대로 인내심 박박 긁어모아 기회를 줘도 지랄이야, 이건. 됐어. 이제 진짜 꺼지면 되겠다.”
정하나 인생에서.
망설임 없이 차지혁의 팔을 뿌리치며 계약서를 거둬가자, 내 마지막 말에 심장이 내려앉은 표정이 된 남자가 죽기 살기의 본능으로 내 팔을 붙잡으며 매달렸다.
“어. 어디 사인하면 된다고?! 아니 직인이야? 나 지금 없어. 사인 안 돼?”
……역시 사랑에 빠진 남자만큼 쉬운 것은 없었다.
“사인 돼. 앞으로 잘 부탁해. 차지혁.”
아, 물론 그 당사자는 내가 아닐 때.
“…마녀.”
“이제 알았나.”
뭐. 새삼.
* * *
“아. 오늘도 알찬 하루를 보냈군.”
차지혁에게서 뜯어낸 계약서를 고이 보관하며 알찬 성과를 이룬 나 자신에게 보람찬 찬사를 보내자, 모두가 굉장히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
“왜요?”
그걸 보며 나는 억울해졌다.
아니, 왜?! 이런 굉장하고 보람찬 성과를 이뤄냈는데, 다들 좋아하기는커녕 억지로 쇠고랑 채운 것 같은 얼굴이나 하고 있는데?
이해할 수 없어 어리둥절해 하는데, 그런 나를 보며 성위님이 마지못해 답을 해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웬만하면 편을 들어주고 싶지만 매우 솔직한 사람으로서 솔직히 그런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하다며 떨떠름하게 답합니다.]
안 하느니만 못했다.
아니 이것들이?! 이다지도 사람 마음을 몰라주다니! 너무 억울해서 말도 다 안 나왔다.
물론 나름 낚시질을 해서 내 이득을 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내 이득만도 아닐뿐더러, 애초에 이 판을 깔아놓은 당사자는 따로 있었다.
[‘이매망량’ 님이 그건 또 무슨 소리냐며 호기심을 담아 묻습니다.]
그야, 물론 결정하고 행동한 건 나긴 하지만, 소스를 만들어 놓은 어떤 년이….
애초에 이걸 바라서 판을 다 짜놓고 내게 선택권을 내어 줬으니까. 내가 결코 이 상황을 놓칠 리가 없다는 걸 잘 알고서.
쾅―!
“요. 한 건 해 준 윤지호. 감사?”
아니나 다를까, 양반은 못 된다고.
첩자라도 심어둔 건지, 아니면 소머즈 귀라도 달고 다니는지, 차지혁이 사인하고 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득달같이 사무실로 쳐들어온 정하나를 보며 나는 가차 없이 혀를 내둘렀다. 저런 년에게 걸린 놈이 새삼 조금 불쌍해지기도 했다.
“오냐. 네 큰 그림에 잘 이용당해 주셨다. 만족스러움?”
“물론.”
더없이 만족스러운 배부른 미소에, 정작 가장 이득 본 건 나였어도 배알이 좀 꼴리려 했다.
“애초에 네가 차지혁에게서 멀어져 보겠다니, 믿지도 않았지만……. 그럼 그렇지.”
뭔가 의뭉스럽긴 했지만 내게는 손해가 아니라 생각 없이 넘겼는데, 역시 정하나는 얕볼 수 없는 년이었다.
혀를 차며 가차 없이 힐난을 던지자 정하나가 머쓱해 하며 나름대로 변명을 덧붙였다.
“왜에. 나도 반신반의했는데 뭘.”
세상이 어디 생각대로 흘러가냐고, 그 남자가 어떻게 나올지 내가 확신을 어떻게 하냐고,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나름 그럴싸한 변명을 내뱉었지만,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내게는 그야말로 희대의 개소리였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누가? 차지혁이?”
처음 만난 날부터 정하나밖에 몰라 허우적거리는 그 맹목적인 남자가 고작 직장 하나를 망설일 거 같은가. 되도 않는 헛소리였다.
지나가던 개도 비웃을 소리였지만, 그 덕에 나도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이 녀석도…….
“이제는 그렇지 않으면 어떡하니.”
“…….”
똑같이 사랑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여자라는 것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 녀석에게 헤어나오지 못하는 누구 씨만큼.
“여기까지 해 줬으니 이제 하나만 좀 해라.”
솔직히 거진 5년인데 이젠 질릴 때도 되지 않았나. 불타는 사랑도 3년이면 식는다는데, 이루지도 못한 사랑이 뭐 그리 오래도 가는지.
그런 사랑을 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냥 결여되어 있는 건지, 이렇게 이 녀석들처럼 제대로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내 마음을 읽은 듯 정하나가 나름 새초롬하게 투덜거렸다.
“모두가 너처럼 깔끔하게 끝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뭐.”
부정하진 않았다. 개 같더라도 고작 연애. 술 한번 거하게 마시고, 개새끼라 욕 한번 하고 털어내면 끝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나쁜 연애를 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나빴나? 간만에 생각하려니 제대로 떠오르지도 않았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 정도면 전남친이 조금 불쌍할 정도라며, 그래도 너무 매정한 거 아니냐 조심스럽게 의견을 피력합니다.]
그런가……?
하지만 정말인 걸 어쩌겠는가. 고작 연애에 저 정도로 허우적거리는 것도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저렇게까지 말하니 살짝 미안한 감이 들 뻔도 했지만, 그래도 서로 좋아서 만난 건데 그런 마음이 생길 건 또 뭔가 싶었다.
그러게 누가 이런 여자 만나래?
“그래. 이래야 윤지호지. 뭐, 이로운은 그런 취급 받을 만하니 인정.”
“……응?”
“……이로운?”
뭔가 낯익은 이름에 순간 모두의 의뭉스러운 시선이 두 사람을 향했지만, 그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두 사람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옛날 일인데 기억하고 있는 니가 더 신기하다. 너나 잘해. 제발.”
“미래의 너에게 꼭 전달해 주마. 너 다음 연애할 때 보자.”
“헐. 언제 할 줄 알고요.”
나도 모르는 내 연애계획을 네가 알고 있냐고 놀람을 담아 묻자, 정하나가 의미심장하게 예언을 던졌다.
“조만간? 감이야.”
어쩌면 그 예언을 귀담아들었어야 했는지도 몰랐다. 감 하나는 귀신 같은 정하나였으니까.
“……아옙.”
그때의 나는 개무시했지만.
* * *
한편. 원티드를 제외한 모든 곳은 일견 조용한 듯 보이면서도 한창 시끄러워지고 있었다.
원티드의 변화는 곧 헌터 업계의 변화를 의미했으니까.
“오호. 드디어 유지한이 쓸 만해지겠어요.”
“일단 1급 부산물 의뢰 넣을게요.”
“더불어 신입 마법사들 던전도 얼른 선점 뽑아요. 너도나도 개처럼 달려들기 전에.”
마법사 길드로 톱을 달리고 있는 ‘유예’는 약삭빠른 족속들답게 변화를 캐치하자마자 발 빠르게 움직였고, ‘사계절’과 다른 여타 길드들 역시 던전과 게이트를 잡기 위해 열심히 활력 있게 돌아다녔다.
“몇백 개……. 아니 몇천 개가 풀리는 거예요?”
“이걸 그 멤버로 해냈다고? 과로사하는 거 아냐?”
“인간이 아닌 것들이 모여 있긴 했네요. 진짜로…….”
원티드가 빠지니 정부가 무리하게 원티드에게 몰아주었던 양이 훤히 보여 모두는 동정을 금치 않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뻐 마지않았다. 그동안 눈을 씻고도 보이지 않던 성장의 기회가 지천에 널린 판이 되었으니까.
오죽했으면, 이렇게 헌터가 많은 나라인데 헌터들 등급이 낮았던 까닭이 다 정부가 해 먹으려고 해서 그런 것 같다는 소리가 돌 정도였다. 그 정도로 풀린 양은 어마어마했다.
처음에는 당혹스러워하던 헌터 업계는 곧 원티드의 결정에 환호했다.
원티드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던 세상은 너무나 활기차고 빠르게 돌아갔다. 그 변화의 시기에 잠깐 자리를 비웠던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야. 고작 2주일 게이트에 들어가 있었는데…….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유해한이 드물게 진심으로 감탄하며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누가 보면 눈으로 휴대폰을 뚫어버릴 것 같은 강렬한 눈빛이었다.
그걸 보던 카카오가 결국 한소리 던졌다.
“부길마님, 휴대폰 뚫리겠어요. 대통령이라도 바뀌었어요?”
뭐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가 있기에 그러냐고, 귀를 후비며 묻는 시큰둥한 소리에 유해한은 발끈조차 하지 않고 멍하니 답했다.
“차라리 대통령이 바뀌었다면 놀라지 않겠다. 이거 유지한 맞아?”
아무리 봐도 믿을 수가 없다며 계속 같은 화면만 반복해 보고 있는 유해한의 모습은 사뭇 광기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 모습에 다들 호기심이 들어 저마다 인벤토리 어딘가 처박아 두었던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은 자신들이 던전에 파묻혀 있는 사이 달라진 세상에 기함했다.
“헐. 원티드가? 대박!!”
200년을 산다고 해도 보지 못할 것 같았던 일이 일어나자 다들 열심히 두 눈을 비벼댔다. 각성자의 힘으로 아주 빡빡 문질러대 눈이 토끼처럼 붉어지는데도 멈출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정부가 가져간 돈을 돌려주다니. 너무 현실성이 없어 소설로도 안 쓸 일이 벌어지니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러다 결국 한 사람이 그럴듯한 가설을 제시했다.
“확실히 다 돌려받았어? 주는 척한 거 아니야?”
주는 척 빠지기가 특기니 그럴듯하지 않냐는 말에 모두의 귀가 쫑긋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 자리의 누구든 그 말에 설득될 법했다.
다만, 이 현실이 사실이라는 것을 뒷받침해준 근거이자 증거가 없었다면.
“야. 1위가 이따구로 나왔는데 쫄아서라도 주지. 유지한은 비비지도 못할 급이네. 대박이야.”
그 증거로 쓰레기 말만 내뱉던 국회의원 뭐시기의 엔딩 영상이 재생되자, 아까부터 현재진행형으로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었던 누구처럼 다들 화면 안으로 들어갈 듯이 영상에 시선을 집중했다.
요약본이라 재생 시간은 짧았지만, 엑기스만 담았기 때문에 왕의 위엄을 알기에 부족함은 없었다.
“……와.”
영상이 끝났음에도 후유증에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한 랭킹 38위, 녹음의 메인 팀원 중 하나인 ‘방어술사’ 주우리가 황홀한 얼굴로 선언했다.
“졸라 멋있어. 오늘부터 내 롤모델.”
그 모습을 보며 왜 우리 길드에는 정상인이 없냐고 씹어먹을 듯 짧게 욕을 한 씹선비가 단호하게 개소리를 차단했다.
“응. 이미 널렸다. 댓글 봐라.”
씹선비의 말대로 댓글은 온갖 찬양과 존경. 그리고 공포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언밸런스 그 자체였지만, 씹선비는 잘 알고 있었다. 공포는 사람을 매료시킨다는 것을. 애석하게도 맛이 간 우리 길드장조차 아는 것을 전 랭킹 1위께서는 모르셨던 것 같지마는.
성향으로 따지면 녹음보다 원티드가 더 잘 맞을 것 같은 씹선비가 원티드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 역시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 호감은 있지만, 세상보다 자신이 더 소중한지라 희생 따위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문득 씹선비는 조금 궁금해졌다.
이 반응들을 보며 그는 이제야, 조금이라도 그 사실을 깨달았을까?
씹선비가 이런 심오하고 진중한 생각을 하는지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주우리는 열심히 휴대폰에 열중했다.
“아, 당연하려나. 팬클럽도 생겼겠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퍽이나 안 그러겠다.”
“당장 가입 간다.”
헛소리 아닌 헛소리를 하며 모두가 이 신박한 소식을 즐기고 있는데, 국내 랭킹 6위인 장하리 역시 그 사이에 끼어 의문을 제시했다.
“나는 원티드가 탈출했다는 것보다 다국적기업으로 바꾼 게 더 안 믿기는데. 그 유지한이?”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일 텐데?
장하리의 냉정한 평가에 유해한은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뇌에 필터는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의 막말과 비난의 대가였지만, 저래 봬도 장하리는 사람을 매우 잘 파악했다.
뭐, 유지한이라면 굳이 장하리가 아니더라도 파악하기 쉬운 인물이긴 하지만, 자신조차도 유지한이 이런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할 정도였다.
물론 다른 이들이 의견을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원티드는 결국 무한 유지한 처돌이 호구들만 모인 만큼 강경하게 나가지 못했던 곳이었다. 만약 그랬다면 원티드가 그 꼴이진 않았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들이 아닌 다른 이가 원티드를 휘어잡았다는 건데…….
“……아―!”
생각을 이어나가던 그는 뒤늦게 벼락처럼 깨달았다. 원티드가 새로 영입했다던 인물을!
그 정보를 듣고 자세히 알아보기도 전에 A+급 던전 의뢰가 들어와 바로 이쪽에 날아왔다 보니 아예 잊고 있었다.
그래도 고작 2주일인데……. 2주 만에 무슨 짓을 저지른 거지?
물론 하루 만에도 세상은 변할 수 있긴 했지만, 이런 극적인 변화는 기적과도 가까운 일이었다.
“길드장님, 아무래도 저번에 영입했다던 새로운 그 분……, 이로운?”
그래도 제 보스인지라 의견을 들어보려 고개를 돌리는데, 무슨 몬스터를 맞닥뜨렸을 때보다 더 무서운 포스의 보스가 휴대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딱히 살기도 느껴지지 않는데 대체 왜 무서운 건지. 함께한 세월이 꽤나 흘렀음에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유해한은 애써 본능을 억누르며 이로운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이로운이 입을 열었다.
“……공주인.”
그게 누군데?
반사적으로 생각했던 유해한은 바로 알아차렸다.
공주인. 법인 명운의 대표. 그 미친 또라이를 모르면 헌터 업계 사람이 아니었다. 다만 공주인이라는 이름보다 명운=공주인이다 보니 다들 명운이라 불러서 바로 연결을 시키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 명운이 연관되어 있다는 게 왜?
“명운은 원래 원티드 좋아죽는 쪽이잖아. 이런 일에 불나방처럼 뛰어들고도 남을 스타일이고.”
그렇다 보니 조금의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딱히 대단하게 여기지도 않았고. 유해한은 그리 생각했지만, 그의 보스는 다른 것 같았다.
“그래. 물론 그렇지.”
모두가 그리 생각할 것이고, 그게 맞긴 했다. 하지만 그를 잘 알고 있는 이로운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한들, 천하의 공주인이, 이렇게 빠르게, 이런 큰판에 합류할 리가 없다는 것을.
“원티드로 간다.”
“……뭐? 지금?!”
“잠깐 보스. 우리 지금 엄청 꾀죄죄…….”
“아니. 우리를 떠나서 보스 당신 지금 피범벅이거든?”
막 던전을 클리어한 직후여서 꼴이 다들 말이 아니었다. 이 상태로 다른 길드를, 아니 누구를 만나더라도 씹민폐였다.
거기다 특히 이로운은 막타를 처리하느라 몬스터의 피를 그대로 뒤집어쓴 상태였다. 머리도 하얀색, 옷도 흰색. 언제나 온통 흰색을 트레이드 마크로 삼는 그가 지금 선명한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호러 영화에나 나올 그런 꼴로 간다고? 진짜로?!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모두가 뜯어말렸지만, 이로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의 상태가 더 나았다. 상대를 짓밟기에 딱 좋은 베스트 드레스 코드 아닌가.
어차피 꽃단장을 하고 갈 상대도 아니었다.
“따라오기 싫으면 오지 마.”
“야. 보스! 인간아―! 같이 가!!”
“저 인간 진짜 혼자 가려고 해!”
“망할!”
척척 걸음을 옮기던 이로운은 문득 생각했다. 꽃단장, 하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자신이 열심히 꽃단장을 하고 싶게 만들었던 상대가.
언제 만날지 몰라, 각성하자마자 가장 먼저 익힌 스킬이 꽃단장과 관련된 스킬이었다. 정말 하등 쓸모없다는 걸 알면서도.
유해한이 ‘미친놈은 사고부터 다른 건가.’라는 눈으로 쳐다봤음에도 열심히 익혔다. 조금의 흐트러짐으로, 너의 시선 한 줌 버릴 수 없다는 일념하에.
‘……뭐야. 왜 이리 예쁘게 하고 왔어?’
이미 예전에 잃어버렸음에도.
* * *
“선배?”
카페에서 커피를 사 들고 나온 민현과 유라는 길드 앞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 앞을 서성거리던 지한은 그들의 시선에도 멋쩍은 미소만 보낼 뿐이었다. 그런 지한을 보며 유라는 저거 또 시작인가. 하는 얼굴로 물었다.
“뭐야. 너 왜 그러고 있어?”
“아. 그냥. 좀. 들어가기가…….”
“여기 네 길드거든?”
이게 뭐라는 거야. 자신의 길드, 그것도 지가 대표로 있는 곳을 들어가기 그렇다니. 유라는 이게 무슨 희대의 개소리인가 싶었다. 이곳이 전부 다 자기 거고, 법적으로도 ‘소유주: 유지한’ 딱 찍혀 있구만. 뜬금없이 내외하나.
“아니…….”
세상 별 해괴한 걸 다 보겠다는 얼굴이 된 두 사람을 보며 지한은 조금 억울해졌다. 이해는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는데 대놓고 저런 반응이라니.
그러던 중, 무언가 캐치해 낸 것 같은 민현이 혹시나 하는 얼굴로 이 대치에 돌을 던졌다.
“혹시 윤 실장님이랑 무슨 일 있으셨어요?”
움찔―!
소심하게도 아니고 아주 대놓고 움찔거리는 누구 씨의 모습은 정말 모른 척 눈감아 주기도 힘든 모습이었다.
“뭐야. 그새 뭔 사고 쳤어?”
이번의 일로 완전히 윤지호 신봉자가 된 유라는 제 보스를 향해 ‘또 분명 이게 쓸데없는 짓을 했겠네.’라는 의심의 눈길을 아낌없이 보냈다.
그 힐난의 눈빛에 지한이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 아니야!!”
열심히 필사적으로 부정했지만 별로 신뢰는 가지 않았다. 신뢰라는 걸 하기에 그들의 보스는 너무나 사람 혈압을 오르게 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인간이었다.
혈압만 올릴까. 복장을 터지게 하는 데도 어디 가서 절대 뒤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n년차 제 상사이자 친구보다, 만난 지 3달도 채 안 된 그녀를 편들기로 했다.
“야. 솔직히 불어. 무슨 짓 했어?”
그리하여 유라는 허심탄회하게 너의 죄를 털어놓으라고 협박을 했고.
“또 얼토당토않은 소리 해 가며 혈압 올리신 거 아니죠?”
민현은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그럴싸한 가설을 제시하며 답을 종용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지한은 새삼 제 인생이 참 부질없었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친구고 뭐고…….
원망에 찬 지한의 눈을 실시간으로 마주하면서도 꿀릴 거 하나 없는 이들은 당당히 그 눈빛을 마주했다. 오히려 그들이 집중하는 건, 억울하다는 티는 팍팍 내면서도 계속해서 미적미적거리는 유지한의 행동이었다.
“아, 말해! 뭐냐고!!”
인내심이 바람보다 짧은 유라가 참다못해 결국 멱살을 틀어쥐었다. 그 덕에 겨우 정신이 안드로메다에서 조금 돌아온 지한이 더듬더듬 해명했다.
“……별거 아닌데.”
“어. 그만하고 말하라고. 별거 아닌 거면 말하는 데도 문제없네.”
말로 하는 건 이게 마지막이라고, 다음에는 말이 아닌 주먹이 나갈 거라고 예고하듯 유라가 주먹을 들어 보이자, 지한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냥 얘기 안 한 것뿐이야!”
“뭘!!”
주어를 말해 짜식아―!
아까부터 깔짝깔짝 뭐 하는 거냐고 윽박을 지르자, 아무래도 거기까진 너무 막 나간 것 같다고 생각한 민현이 나섰다. 그가 일단 진정하라고 유라를 말리려던 때, 드디어 지한의 입이 열렸다.
“……내가 옆집이라는 거.”
“……뭐?”
“……네?!”
뭐 이 새끼야?
순간 유라는 친구고 나발이고 절로 쌍욕이 튀어 나갈 뻔했다. 아니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지? 순간 사고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건 옆에 있던 민현도 마찬가지인 듯, 그는 얼빠진 얼굴로 황급히 지한에게 되물었다.
“옆집이요? 그럼 윤 실장님이 달라고 했던 집을…… 선배 옆집으로 준 거예요?!”
“……당장 바로 줄 수 있는 곳이잖아.”
X랄―!
바른생활을 모토로 삼는 민현조차 저 성의 없고 얼빠진 대답에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그걸 지금 핑계라고 대냐!
넋 나간 정신이 그대로 안드로메다로 향할 소리였다.
지한의 오피스텔은 국내 최고의 보안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한 층에 단 두 세대밖에 살지 않았고, 출입구부터 엘리베이터까지 몇 겹이나 되는 보안 시스템이 24시간 내내 철저히 감시하는 곳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곳에 사는 사람은 지한 급의 네임드 헌터, 혹은 굴지의 톱스타 등, 평범한 곳에서 살 수 없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애초에 주민조차 골라 받아서 방위 요새라는 별명이 붙은 오피스텔이었다.
심지어 그 오피스텔에서조차 보안이 가장 필요한 으뜸 인사는 바로 저 유지한 님이시라, 그는 아예 한 층을 전부 매입한 상태였다. 옆 주민이 어떤 사태가 발생해 지한에게 달려들지 알 수 없는 일이니.
평소에는 좋은 사람이라도 본인 혹은 주변의 누군가가 죽거나 신변의 위협에 처했을 때 평소의 태도를 유지하기란 죽기보다도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그런 이유로 그는 천문학적인 금액을 지불하면서까지 한 층을 전부 구매한 것이었다. 불시의 사태 자체를 만들지 않기 위하여.
그런데 그걸 지호에게 줬다고 말하는 거다. 지금 저 남자는.
“……그걸 설명도 안 하고. 다 주고 나서 마주친 거예요?”
“응.”
……대체 왜.
원티드에서 그나마 제일 현실적이고 정상적이어서, 윤지호에 대한 지한의 마음을 가장 빨리 알아차렸던 민현은 손으로 두 눈을 가렸다.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자세히 알지 말자고 외면하기도 했던 일이 이렇게 부메랑이 되어 날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다른 집을 구해 줄 수도 있었잖아. 그런데 굳이 직장 상사 옆집을 줬다고? 돈을 떠나서 그걸 좋다고 하겠냐?! 이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옳다구나―!!
유라의 꾸짖음에 지한이 광명이라도 찾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릿속에 아주 종이 치는 것 같았다.
사실, 길드 문턱 앞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면서도 지한은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다. 분명히 그녀의 기분이 나쁜 것 같긴 한데, 그 이유를 모르겠어서 선뜻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자신을 피하면 피하는 대로 상처일 것 같기도 했지만, 다짜고짜 잘못했다고 할 수도 없고, 그럼에도 잘못했다는 말밖에는 할 게 없어서.
물론 머릿속으로 몇 가지 가설을 생각해 내기는 했다.
옆집에 내가 있는 게 싫은 건가? 아니, 그래도 모르는 사람보다는 아는(?) 사람이 좋잖아. 내가 지켜 줄 수도 있으니 안심도 되고.
내가 옆집이라고 말 안 해 줘서 그런가? 그런데 집 주면서 내 옆집이라고 어필하는 것도 좀…….
하나같이 헛소리뿐이어서 듣다 못한 성위가 다 집어치우라고 일갈했던 가설들이었다.
그래서 그냥 사뿐히 즈려밟고 얼굴이라도 보고 얘기해야겠다 싶어 왔지만, 차마 용기가 없어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런 해답을 안겨 주다니! 역시 넌 환상적인 내 친구―!
……라는 얼굴을 하고 있는 지한을 보며 두 사람은 진심으로 깊은 회한에 빠졌다. 새삼 눈앞에 보이는 이 인간이 사회생활이라고는 단 한 순간도 할 필요 없었던 나름대로 승리자 인생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호구여서 당하고 살아서 그렇지, 진짜 곱게 자랐구나. 유지한.
대체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암담해진 유라는 이제 반쯤 체념한 목소리로 한탄했다.
“아니……. 세상 어떤 직장인이 제 상사가 옆에 있는 걸 좋아하냐.”
그것도 퇴근하고서도!
누가 생각해도 기겁할 법한 소리인데, 아무리 사회생활, 아니 직장생활을 하지 않았어도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는 거지?
비록 민현도 유라도 미성년일 때 각성해 제대로 된 사회생활을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그 기분은 대충 이해가 갔다. 사회생활을 하진 않았어도 들은 것이 있고, 학교를 다니는 것도 일종의 사회생활의 축소판이었으니.
그렇게 생각하니 이 양반도 학교는 다녔을 텐데……. 하고 문득 드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지한을 본 그들은 깨달았다.
“……?”
“…….”
……다닌다고 해도 다 똑같은 걸 깨닫는 건 아니지. 암.
얼굴부터가 귀공자인 저 인간이 학교에서도 그냥 학생이었을 리가 없었다. 물론 그들도 마찬가지이긴 했지만, 어나더 레벨인 그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든 지한이 이해하긴 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 생각을 못 했어……. 그렇구나. 고마워.”
덕분에 해결이 되었어.
드디어 해답을 찾아 기쁘고 해맑은 얼굴에 두 사람은 뭐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이제 화내기도 지쳤다. 그저 지호에게 이런 짐을 떠넘겨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기도했다.
‘……제발 불똥 튀지 않게 해 주세요.’
이런 두 사람의 마음은 알지도 못하는 모지리께서는 너무나 해맑게 웃고 계셨다. 해결책을 찾은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렇게 보면 참 웃겼다. 어차피 본인이 이사 갈 것도, 다른 집을 구해줄 생각도 하나 없으면서.
“어쩌게?”
“대화를 해 봐야지.”
“……그걸로 되겠냐.”
“괜찮아.”
어쩌면 지한은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호가 어쩔 수 없이 자신에게 져 줄 것이라는 걸.
자신에게는 약한 윤지호를 알아서.
‘……괜찮아.’
그걸 위해 철저히 여린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까. 조금이라도 호감을 붙들어 놓도록.
……자신을 놓을 수 없도록.
“유지한?”
“……응?”
“덥냐? 왜 땀을 흘려?”
“아니. 그냥.”
사실 다 쌩 허풍이었지만.
그때그때 상대의 감정에 따라 심장을 졸여야 하는 남자에게 그런 자신감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있다면 그건 그냥 머저리였다.
다행히 머저리는 아닌 지한이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괜찮다고 말한 건 그냥 허세였다. 허세라도 부리지 않으면, 앞에 서지도 못할 것 같았으니까.
네 앞에서 난 한없이 작아지기만 해. 네가 내 본심을 알아 버릴지도 모르니까.
“……이 새끼 안 괜찮은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정상이면 전 진작 도망갔습니다.”
이런 지한의 생각을 알 리 없음에도, 지한이 이상한 건 또 기가 막히게 눈치챈 두 사람이 속닥였다.
뭐, 말이 속삭임이지 실상 지한의 귀에도 다 들리는 소리였지만, 지호의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머릿속에서 수많은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는 지한은 능숙하게 둘을 개무시했다.
그리고 지한이 무시하든 말든 저들끼리의 세상에 빠져 있는 둘 역시 그걸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저건 진짜……. 어, 지금 뭐―!!”
“…마력이에요!”
다들 각자의 세상에 빠져 아주 재미나게 놀고 있는데 갑자기 로비에서 마력 반응이 느껴졌다. 심지어 그것은 길드에 출입 가능한 마력이 아니었다. 그들이 잘 아는 마력이긴 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원티드 길드원 외의 마력은 길드 건물 내부로의 출입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으니까.
그게 원티드 연구원들이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기술력을 갖추었다고 여겨지는 이유이자, 그렇게 게이트 쪽에서 적자가 나는데도 원티드가 유지되는 이유기도 했다. 탁월한 마력 차단 기술 덕분에 어지간한 게이트는 이 건물 근처에 열리지도 못했다. 원티드의 자랑이자, 믿어 의심치 않는 진실이었다.
하지만 힘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에야 방법이 없을 터. 그런 상황이었다. 유라가 벼락같이 소리쳤다.
“유지한―!!”
“뛰어―!!”
말보다 먼저 지한의 몸이 움직였다. 뒤이어 두 사람 역시 최고 속도로 지한을 따라붙으며 길드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마스터.―
원래는 입구에서부터 거지 같다고 맨날 욕하지만 바뀌지 않는 여러 보안 절차를 거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길드장이 함께였기 때문에 과감하게 생략되었다.
우리도 그렇게 해 달라는 길드원들의 원성에 프로그램이 복잡해진다고 1차로 까고, 그럼 길드장도 똑같이 하라는 요구에 그런 귀찮은 짓을 할 것 같냐며 2차로 깠던 연구원들에게 새삼 감사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이 거의 30초도 걸리지 않은 속도로 로비에 도착하자…….
―긴급경보를 발동합니다.―
―길드 내에 부정 마력이 발생했습니다.―
―규정 외 외부인이 침입했습니다.―
―연구원 및 비각성자분들께서는 대피소로 이동해 움직이지 말고 대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
“꺄악―!! 피! 피이!!”
“와. 저거 진짜 미친놈들 아니야?!”
로비는 완전 아수라장이었다. 시스템이 경보음을 미친 듯이 울리며 위험경계체제로 돌입하자, 사태를 파악한 이들이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며 건물 내부가 혼비백산이었다.
그러나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우왕좌왕하면서도 직원들은 그 와중에 너무나 황당한 침입자의 작태에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길드의 주축이 되는 나무 앞에 뻔뻔하게 텔레포트한 것도 어이가 없는데, 심지어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전신에 피 칠갑을 한 채라니.
멀리서도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를 보니 몬스터의 피였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 꼴을 하고 돌아다니는 용자들이 있었다고?”
“녹음이잖아. 나름 우리나라 대표 길드 중 하나인데 저래도 되는 거야?”
원티드에 불법 침입을 했다는 것보다도 그 사실이 더 놀랍고 믿을 수 없다는 듯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저마다 너도나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조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소리였다.
녹음은 원티드와 함께 대한민국의 3대 길드 중 하나였다. 유명세로는 확실히 원티드를 따라올 수 없지만, 게이트로 버는 수입 면에서는 국내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실력자들이었다.
심지어 익숙한 면면들을 보니, 녹음에서도 최상위권으로 꼽히는 최정예들이었다.
그런…… 이들인데…….
“아니, 그 전에 저 정도면 저 꼴 자체가 시비야!”
그 사이에서 그나마 이성을 가지고 있는 다른 이가 현실을 꼬집어 주었다. 그제야 모든 이들이 퍼뜩 집 나간 정신을 주워 담으며 심각하게 얼굴을 굳혔다.
그 말이 맞았다. 모든 상황에는 그에 걸맞는 절차와 예의가 있는 것이다. 이미 텔레포트로 불법 침입한 것부터가 그런 건 밥 말아 먹은 거지만, 적어도 대화를 할 요량이었다면 저런 꼴로 이곳에 와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진짜 전쟁 치르자고 온 거야?”
“저 얌새들이? 대놓고 전면전을 한다고?”
녹음은 냉혈한 길드장을 앞에 내세워 정면으로 맞서는 것 같으면서도 뒤에서 몰래 수작을 잘 부리는 것으로 유명한 길드였다.
뒷수작이란 원래 마법사의 전유물과도 같은 것. 하지만 전 길드원이 마법사로 이루어진 ‘유예’도 한 수 접고 배우러 가야 할 정도로 녹음의 뒷수작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굴지의 1위였다.
그런 녹음이 꿈에서도 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바로 멍청하게 진짜로 전면전을 치르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쳐들어온 게 ‘그’ 녹음이라고?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그들의 행색과 완전무장한 모습을.
그리고 이윽고 하나둘씩 모인 원티드의 전투원들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눈을 빛냈다.
“던전 클리어하자마자 바로 튀어온 거 같은데, 투기를 폴폴 날리는 꼬라지 보니 아마도?”
“이야. 녹음, 이 야비한 새끼들. 드디어 한번 조질 수 있겠다.”
“빨리 전화 돌려. 이런 빅 이벤트가 터졌는데 하나라도 빼먹으면 나중에 졸라 귀찮아진다.”
“이미 톡으로 다 쐈다. 저기, 벌써 칼같이 튀어왔네.”
이런 건 진짜 기가 막히게 빨라요…….
혀를 차는 그들의 시선에는 프로그램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텔레포트를 했는지 허공에서 내려오는 레쓰비와 사춘기 고딩이 있었다.
유유히 하강하던 사춘기 고딩이 발아래에 펼쳐진 대치에 휘파람을 불며 온몸으로 제 기쁨을 표출했다.
“앗싸―! 이런 빅 재미라니!”
“고딩아, 일단 그래도 상황 파악…….”
그래도 바로 전투를 할 생각은 없었던 레쓰비가 나름대로 사춘기 고딩놈을 달래려 해 봤지만, 그걸 들으면 사춘기 고딩이 아니었다.
“이미 끝난 거죠! 저 먼저 갑니다!”
“저놈의 새끼―!!”
레쓰비의 외침과 함께 그대로 녹음 길드원 쪽으로 내려가며 제 무기를 소환한 사춘기 고딩이 곧장 스킬을 전개했다.
【스킬을 발동합니다.】
【타락한 음악가가 살인자의 선율(A)을 연주합니다.】
“……!!”
그가 바이올린에 현을 올리는 순간, 퍼지는 음이 만들어낸 파동이 날카로운 실이 되어 그대로 녹음 길드원들의 머리 위에서 현란하게 춤을 췄다.
저게 미친놈인 건 알았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짜고짜, 그것도 제 본진에서 이렇게 격렬하게 공격할 줄이야……. 아군도 적군도 당황스럽게 하는 전개였다.
특히나 침입자들은 당황해 반격할 생각도 못하며 그대로 당하나 싶었지만…….
“아, 요 쪼만한 애새끼가 어른을 이렇게 개무시하면 쓰나.”
그럴 리가 없었다.
고딩은 바닥에 착지하기도 전에 제게로 튀어 오른 한 남자의 검을 현으로 받아내며 재치있게 대답했다.
“……역시 썩어도 준치라고 이 정도에 당하진 않네? 안녕, 폭검 아저씨.”
“내가 그렇게 나이를 먹진 않았는데 말이지……!”
캉―! 끼이이잉―
검과 현이 떨어지자, 현이 자아내는 선율에 모두가 반사적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탁―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한 사춘기 고딩은 방금 전 보여 준 패기와 성급함에 맞지 않게 매우 차분한 눈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사춘기 고딩이 가장 무서운 건 바로 이런 점 때문이었다. 미친놈이지만, 냉철한 미친놈이라는 것.
“후. 살았다.”
“저게 진짜 그 유명했던 천재(天災)…….”
“확실히 괜히 천재 소리를 듣는 게 아니야. 다리가 후들거리네.”
앓는 소리를 하면서도 제 길드원들을 완벽히 지켜낸 방어술사를 보며 사춘기 고딩은 비소를 흘렸다.
‘지랄하네.’
역시 어중이떠중이는 아니라 이거지.
던전을 클리어하자마자 바로 온 저 배짱 하며, 이름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지만 낯익은 얼굴들을 보아 이들은 녹음의 최정예, 제1 공대가 분명했다.
폭검과의 대치로 인한 반동으로 떨리는 팔을 진정시키며 사춘기 고딩은 냉철하게 승률을 계산했다.
그런 고딩의 앞에 대치하고 선 폭검, 카카오가 즐거운 미소를 듬뿍 입가에 담으며 물었다.
“어이. 애송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살기를 있는 대로 흩뿌리면서 웃는 놈이라니. 진짜 꿈에서도 상종하기 싫은 인종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이걸 드러내면 틈을 내어주는 거나 다름없음을 알기에 사춘기 고딩은 똑같이 미소로 응수하며 장난스러운 어조로 저격했다.
“알맹이들은 다 어디 갔을까, 하는 생각?”
실제로 1공대의 주력 멤버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녹음의 길드장을 포함해서 최정예 중 네임드가. 여기 폭검과 방어술사를 제외하고는 없었다.
그 말을 정확하게 알아들은 폭검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아. 우리 길드장님은 여기 말고 위에 볼일이 있으셔서 먼저 올라가셨지. 부길마님이랑 몇몇 더 따라가고. 난…….”
“…….”
“여기가 더 재밌을 것 같았거든. 일대일보다는 역시 다수랑 싸우는 게 더 재밌지 않겠어?”
미친놈.
새삼 사춘기 고딩은 왜 저게 폭검이라 불리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다수’라는 건 보통 자신 쪽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다수가 자기한테 덤빈다는 건데, 그게 더 재밌지 않겠냐고 하다니. 광전사 계열의 딜러들은 다 저따위인가. 미와 예술을 추구하는 자신과는 조금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먼저 올라가, 보스! 아줌마랑 선배도!”
사람이 살다 보면 싫은 일이라도 해야 할 때가 오지 않는가. 나중에 거하게 뜯어낼 보상을 생각하며 고딩은 기꺼이 오늘 한 번 자신의 예술을 희생해 주기로 했다. 그것도 예술이라면 예술이니까.
“…김윤한, 저 사춘기 고딩 새끼가 웬일…….”
평소 늘 고딩과 대치하던 유라가 적응이 안 된다는 듯 떨떠름하게 대꾸하자, 그 말이 다 튀어나오기 전에 민현이 재빨리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이러다 저게 ‘나 안 해!’라고 나서면 안 됐다.
마찬가지로 같은 생각이었던 지한이 서둘러 마침표를 찍었다.
“고맙다. 윤한아. 가자.”
그들이 빠른 속도로 고딩을 스쳐 지나가자, 그 길목을 막듯 자연스럽게 고딩의 양옆을 차지한 레쓰비와 어느새 길드로 도착한 회사원이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들은 사춘기 고딩을 뒤로 물리고, 장비를 갖추며 폭검에게 물었다.
“카카오 놈이 웬일로 대어들을 그냥 보내줘?”
“그러니까 말이야. 해가 서쪽에서 떠도 그럴 리가 없는데. 의심스럽게.”
같은 최상위 랭커로서 폭검을 잘 아는 두 사람이 비아냥거렸지만, 오히려 인원이 늘어난 것에 기뻐하기만 하는 카카오가 방글방글 웃으며 말했다.
“나도 우리 보스는 무섭거든. 무엇보다…….”
“…….”
“메인은 메인끼리 노는 거잖아? 난 귀찮은 일보다… 이쪽이 더 좋거든.”
그 대답을 마지막으로 이성의 끈을 놓은 카카오가 달려들었다.
철컥―!
“저 미친놈은 변하는 게 없어.”
파앗―!
【보석술사가 스킬을 전개합니다.】
【대가로 사파이어를 지불합니다.】
“녹음에 있는데 당연하죠. 녹음은 저런 놈이라 쓸모가 있는 걸 테니까요.”
“짜증 나는 집단이야.”
“동감입니다.”
“뭘 둘이만 떠들어. 떠들지 말고 나랑 놀아야지!”
외침과 함께 이쪽을 향해 날아오는 폭발을 보며 두 사람은 귀찮은 얼굴로 폭검을 향해 답했다.
【일회성 스킬: 흔들리지 않는 대기(A)가 발동합니다.】
【마탄의 사수가 마탄을 장전합니다.】
“너랑 노는 건 사양이야.”
“미투입니다.”
이럴 때만 정말 환상의 콤비였다.
* * *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달리며 유라가 지한에게 소리쳤다.
“유지한! 저쪽이 온 지 얼마 안 됐다면 아직 올라가는 중일 거야. 엘리베이터를 타면 우리가 더 빨리 도착할 수도 있어!”
길드를 지을 때, 건축자의 사심이 가득 들어가다 보니 조금 과하게 지어진 감이 없잖아 있었다. ‘우리 몇몇 쓰는데 건물은 왜 60층짜리 건물을 짓냐고!’라며 한탄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이토록 보안에 충실한 설계일 줄은 몰랐다.
위험경보가 울리면 가장 먼저 중단되는 것이 엘리베이터고, 메인 시스템이 아니면 절대 재가동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그 망할 새끼들은 어떤 수를 써도 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못하니, 계단으로 올라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그들이 빠르게 올라간다 해도 60층이라는 높이 앞에선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중간중간 위험경계체제로 인한 진로 방해도 있을 터이니 더욱 지체될 거고.
그러나 이쪽은 아니었다.
“마리! 엘리베이터를 가동시켜 줘!”
―주인의 명에 반응합니다.―
―엘리베이터를 가동합니다. 목적지는 어디십니까?―
“60층! 최고속으로!”
아직 그 어떤 회사의 기술로도 만들어내지 못한 인공지능 시스템 ‘마리’가 있고, 그가 명을 따르는 주인이 바로 여기 있으니까.
―문이 열립니다.―
주인의 명을 받든 마리가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세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문이 닫히며 최고속력으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원래도 빨랐지만 중간에 멈추는 것 없이 논스톱으로 올라가니 그들은 몇 초만에 최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띵―!
지한은 문이 열리자마자 반사적으로 달렸다. 적이 침입한 상태니 조금은 주변을 살피고 나가야 할 텐데도, 그의 눈앞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지한―!”
제 보스가 저러니 어찌 생각할 겨를이 있을까. 모두 그의 뒤를 쫓기 바빴다.
그렇게 지호가 있을 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타이밍도 딱 기가 막히게 이제 막 계단을 올라온 침입자들과 딱 마주쳤다.
“오. 이게 누구신가. 서유라 여사님?”
“유해한 이 개새끼…!”
딱 마주치자마자 능글맞게 인사를 하는 유해한의 모습에 유라가 보란 듯 이를 갈았다.
원래도 이렇게 욕설이 오고 가는 사이였지만, 불법 침입을 한 건 이쪽이었으니 그래도 양심이 있긴 했던 유해한은 평소처럼 뻔뻔하게 받아치지 못했다.
물론 그의 양심은 딱 거기까지였는지 당당한 태도는 여전했지만.
대신 유해한을 비롯해 오늘의 모든 일을 말리지 못한 씹선비가 미안하고 쪽팔려서 유라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그나마 이들 중 말이 통하는 인간이긴 했다. 별 도움이 안 돼서 그렇지.
“에이. 나도 까라면 까야 하는 인생인데, 이해 좀 해 주시지요.”
“구라 작작 까. 이 씨벌롬아.”
니가 뭘 까라면 까. 뒤통수를 까겠다고? 녹음의 진정한 실세이자 흑막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희대의 개소리였다.
“에이. 우리 보스가 이리 막강한데, 저한테 무슨 힘이 있다고요. 오늘도 못 말리고 끌려온 건데요?”
그 말과 동시에 유해한의 등 뒤에서 저벅저벅―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제 부하들을 먼저 올려보내고 뒤늦게 유유히 올라온…….
‘……이로운.’
녹음의 수장이었다.
피 칠갑을 한 채였지만 누구라도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걷는 걸음걸이부터 티가 났다. 불법 침입자 주제에 무슨 왕이라도 된 것처럼 느긋하게 걸어오는 모양새하고는.
게다가 트레이드 마크인 백발이 붉게 물들었어도, 저 눈은 물들일 수 없었으니까.
붉은 안광을 빛낸 그는 흐르는 피가 거슬리는 듯 손을 털어 피를 흩뿌리며 지한을 향해 시선을 두었다.
“…손님 대접이 형편없군.”
기가 찬 말에 지한이 불쾌함을 숨기지 않은 채 응수했다.
“언제부터 불법 침입자도 손님이 되었지?”
답지 않은 강경한 응수에 민현은 ‘드디어 저게 사람이 되려나.’라는 얼굴로 지한을 바라보았고, 유라 역시 ‘이게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나.’ 하는 얼굴로 지한을 응시했다. 여전히 정중한 감은 있지만, 그래도 장족의 발전을 이룬 접객 태도에 일단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유지한이 이렇게까지 날 선 표현을 할 줄은 몰랐던 녹음 쪽 역시 헛걸 보았다는 얼굴로 지한을 바라보았다
얼굴에 태가 나지 않았지만 그건 이로운도 마찬가지였다.
“……변했군. 무슨 심경의 변화지?”
“우리가 그런 걸 시시콜콜 알려줄 만큼 친한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만. 언제부터 그렇게 저에 대해 궁금해하셨습니까?”
따박따박 맞는 말만 하며 적대감을 숨기지 않는 유지한의 모습에, 침묵하는 이로운을 대신해 유해한이 뒤에서 속닥였다.
“뭐야. 저거 유지한 맞아?”
“…다른 놈이 변신한 거 아닐까요?”
씹선비가 합당한 의심을 했다. 그 정도로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저렇게 미친 철벽을 치는 유지한은.
반면 유라는 눈물을 흘렸다.
‘윤지호 만세.’
광신도처럼 지호를 찬양하며.
저 망할 호구를 이 정도로 바꿔놓다니. 평생 섬기기로 다짐까지 할 지경이었다. 그동안 얼마나 유라가 개고생을 했는지 설명이 되고도 남는 모습이었다.
이런 많은 이들의 심경변화가 눈앞에 찬란하게 펼쳐졌지만, 지한에게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을 자신이 만든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지한에게 중요한 것은 모두, 문 너머에 있으니까. 그리고 유지한은 그걸 위해서라면 모든 걸 저버릴 수 있는 남자였다.
그런 이가, 제 소중한 것을 강탈하려는 무뢰한들 앞에서 고작 이 정도 철벽도 못 칠 리가 없었다.
그런 지한을 유심히 보며 이로운이 입을 열었다.
“이게 본성인가, 아니면 또 그 알량한 선의 때문인가?”
“…….”
선의, 라고 제 입으로 말해 놓고도 끔찍한 듯 이로운이 미간을 구겼다. 납득할 수도, 인정하기도 싫은 얼굴이었다.
그러다 그는 깨달음이라도 얻은 얼굴을 하며 비꼬듯 악의적인 미소를 지었다.
“아, 원래 넌 일반인에게 피해가 가는 건 조금도 용납할 수 없는 인간이었지. 지금 이 태도는 그 탓인가.”
“…….”
“아니면 문 너머 인간이 너에게 중요한 인간인가.”
이로운이 물었다.
악의가 가득 담겨 있는 그 얼굴을 보면서 유지한은 새삼, 왜 이로운이 항상 제게 적대적이었는지 그 이유를 조금은 깨닫게 되었다.
저건 혐오였다.
단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특별한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철부지 어린아이와도 같은 자신을 향한.
예전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구하는 게 중요할 뿐, 타인을 잘 보지 않아 몰랐던 사실이 이제야 조금 보였다.
지호가 알려 주었으니까.
그가 자신을 싫어하는 이유도 납득은 갔다. 제가 생각해도 예전의 제 태도는 그가 싫어할 만했다.
하지만 이제 와 그게 무어 그리 중요한가.
지한은 저 질문에 답을 할 생각 역시 없었다. 이미 그가 범한 무례는 저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으니까.
“그 질문에 제가 답을 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정령사.”
저만 있었으면 신경 쓰지 않았을 거다. 이리 적대시하지도 않았을 거다.
하지만 여긴 지호가 있는 곳이다. 그곳에 이렇게 침입을 하고, 저런 꼴을 하고 나타나다니.
그녀의 안전에 관해서는 한없이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사랑에 빠진 남자가 화가 날 이유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그런 지한을 보며 유해한이 이로운의 앞을 막아서듯 서서 감탄사를 던졌다.
“아, 이 너머의 인간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야. 천하의 유지한을 저렇게까지 깨우치게 하다니.”
200년을 투자해도 안 될 것 같았는데 말이지.
누가 와도, 신이, 신 할아버지가 와도 안 될 것 같은 일을 해내다니. 그 위인의 정체가 너무나 궁금하다고 그가 너스레를 떨었다.
“길마나 부길마나 똑같이…….”
그걸 보던 씹선비가 온 세상 한숨을 다 끌어온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길마나 부길마나 참 유지한을 더럽게 싫어했다.
자신과는 태생부터 다른 것 같은 인종을 좋아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지만, 천성이 착한 씹선비로서는 정말 제명에 못 살 것 같았다.
그래서 말리지 못했다.
“그분은 대체 어떤 인물이실까?”
능글맞게 입을 돌리면서 뒤로는 항상 묘수를 두는 유해한을 모두가 잠시 잊은 탓에 그만 틈을 내어주고 말았다.
파아앗―!
벌컥―!
“……!!!”
“유해한 저 씹새가―!”
“유해한―!!”
유해한이 너스레를 떠는 척하다 손을 뻗어 마력을 방출해 그대로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 듯, 부드러운 바람이 사무실 안을 스쳐 지나가며 서류들이 허공에 살랑거렸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소파에서, 서류를 한 손에 안은 지호가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바깥의 아수라장이, 피 칠갑을 한 누구들의 행색이, 그리고 방금 전까지 적대적이던 상황에 맞지 않게 참 평온하고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사르르 풀릴 것 같은.
따스한 햇살을 맞으며 잠들어 있는 사랑스러운 외모의 여자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호오. 저게…….”
지호를 보며 유해한이 감탄했다.
눈을 감고 있는 지호는 객관적으로 봐도 매우 부드러운 인상의 미인이었으며, 그 주변을 휘어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만 봐도, 방금 전까지 싸움 나기 직전이었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지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지한을 바꿀 정도의 힘은 없어 보이는데…….
더군다나 그들이 던전에 들어간 새 원티드가 벌였던 일들은 매우 파격적이고 공격적이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여성은 절대 그런 일을 주도적으로 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생긴 거와 다르게 성격은 강한 건가.
골똘히 생각하던 유해한이 제 보스는 어떻게 생각하나 싶어 고개를 돌리다 멈칫했다.
웬만한 일로는 절대로 놀라지 않는 이로운이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로 망부석처럼 서 있었다.
“……이로운?”
“……내가 지금 꿈을 꾸나?”
대체 무슨 일이냐고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도 이로운은 대답하지 않고, 도리어 뭐에 홀린 듯 물었다.
난생처음 보는 보스의 모습에 모두가 적응하지 못해 당황한 채로 이로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이들은 보이지도 않는 듯, 이로운의 시선은 여전히 한곳을 향해 있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유해한은 일단 친절하게 답을 건네주었다.
“아니, 현실이야. 뭐야, 아는 사람이야?”
그렇다고 해도 이 반응은 대체 뭔데? 유해한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유해한의 답을 들은 이로운은 그의 질문을 무시하고 있는 대로 얼굴을 구겼다.
“…이런 씨발.”
나지막이 욕을 짓씹으며 자기는 완전히 망했다는 듯한 태도에, 상황 파악이 안 된 이들은 도대체 뭐냐는 얼굴이 되었다.
모든 이의 시선이 이로운에게 쏠렸지만, 당연히 그들은 안중에도 없는 이로운은 허둥지둥 제 몸 상태를 확인하며 스킬을 시전했다.
“…이로운?”
【클린(D)을 발동합니다.】
【찰랑찰랑 윤기가 나는 머릿결(F)을 시전합니다.】
【언제나 부드럽고 보송한 아기피부(C)를 시전합니다.】
【화사하고 부드러운 미성(E)을 발동합니다.】
【365일 청량한 풀내음(F)을 발동합니다.】
쏴아아―
“……뭐야.”
피 칠갑이 되었던 몸이 순식간에 깨끗해지고, 머리카락에 윤기가 돌며, 피가 묻어서 호러로밖에 보이지 않던 손이 뽀샤시하고 복숭아처럼 부드럽게 변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진풍경이었다. 공포 영화 속 귀신 1이 금세 아이돌처럼 변신했으니까. 원래 아이돌 외모이긴 했지만……. 아니, 근데 갑자기 왜?!
급격한 변화를 따라올 수 없어 도태된 이들의 멘탈은 이제 가출할 지경이었다. 그중 최고는 유해한이었다.
하지만 그런 유해한은 보이지도 않는지 스킬을 덕지덕지 시전하며 꽃단장을 마친 이로운은, 그래도 무엇이 그리 불안한 건지 연신 제 옷의 냄새를 맡으며 그에게 확인까지 했다.
“어때? 유해한? 냄새 안 나?”
“무슨 냄새…….”
설명이나 해 주고 물어볼래?
이 상황을 따라갈 수 없는 유해한이 기계처럼 답했음에도 개의치 않고 이로운은 다급하게 물었다.
“피 냄새. 안 나?!”
“……저기, 넌 원래 피로 범벅이 돼도 피 냄새 같은 건 조금도 나지 않는 진귀한 정령사거든?”
유해한이 평소 제일 빡쳐 하던 부분이었다.
4대 정령과 계약해 정령사라는 메인 타이틀을 따낸 그는 메인 타이틀의 영향인 건지, 정령친화력 덕분인 건지 몬스터의 피로 목욕을 해도 피 냄새는커녕 항상 청량한 향기를 풍겼다.
하다못해 땀 냄새조차 나지 않았다. 누구는 땀 냄새와 지독한 몬스터 피의 악취로 사시사철 절어 있는데, 매우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행이다.”
그런 불만은 남 일이고, 그저 대답만 챙겨 들은 이로운은 정말 다행이라는 듯 안도한 표정을 가감 없이 내보였다.
그걸 보며 유해한과 씹선비는 진심으로 기함했다.
넌 누구냐?!
제가 아는 이로운은 절대 이런 표정을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었다.
“뭐야. 대체 뭐야. 뭔데.”
“무, 무서워…!”
둘은 그야말로 패닉에 빠졌고, 그건 원티드 쪽도 마찬가지였다.
“의심은 이쪽을 해 봐야 될 것 같은데…?”
“우리 보스가 아니라 저기에 다른 사람이 들어앉은 듯?”
“저게 어딜 봐서 이로운이에요?”
“그니까.”
이로운을 알게 된 뒤로 생전 처음 보는 부드러운 얼굴에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저게 방금 전과 같은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지한 역시 눈을 크게 뜨고 아무런 행동도 보이질 못하겠는가.
그렇게 자신으로 인해 패닉 상태가 된 이들을 가감 없이 내버린 채, 이로운은 언젠가 자신이 늘 썼던 가면을, 자신이 그토록이나 다시 쓰고 싶어 했던 가면을 썼다.
부드럽고, 누구 하나 해칠 줄 모를 것 같은, 해사하고 순수한 ‘이로운’의 가면을.
저벅저벅.
“……우움.”
잠꼬대 같은 사랑스러운 소리를 들으며 이로운은 나지막이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너무나 잔인하게 날 버렸음에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너는……
여전히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천천히 다가가 곁에 앉자, 그녀의 눈이 파스스 떨리며 조금씩 잠에서 깨어났다.
깜박이던 눈꺼풀이 올라가고, 몽롱한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본다. 그걸 보며 이로운은 멈출 수 없는 기대감에 눈을 반짝였다.
당연했다.
“……음? 뭐야. 운이잖아. 난 또……. 엉―?!”
언제나 저 눈에 내가 들 날을 소망했으니까.
“……이로운?”
분명 저를 반기는 얼굴이 아님에도, 이로운은 제가 꿈꾸었던 대로 최고의 미소를 입가에 담으며 인사했다.
“응. 오랜만이야. 지호야.”
‘네가, 네가 좋아. 윤지호.’
제가 그녀에게 처음 고백했던 그 날처럼.
* * *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렸던 것 같은데, 잠들기 시작하면 누가 업어가도 모르는 사람이다 보니 대강 무시하고 신나게 잤다.
뭐, 이렇게 태평하게 잘 수 있는 건 어떤 상황에서든 빠져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었지만.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유는 알겠는데, 그래도 좀 경각심을 가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며 혀를 찹니다.]
성위님이 뭐라 하는 것도 졸려서 제대로 듣진 않았다. 그러자 툴툴거리면서도 더 이어가지는 않는 것이, 일단 충고를 던지긴 했지만 여차하면 자기가 지켜 주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실상 성위님이 지켜 주고 나발이고,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가장 먼저 제 안의 마력이 나서줄 것을 알기에 걱정 않고 뻗은 것이었지만.
어차피 오래 잘 생각은 없었다. 소파 같은 데서 진짜로 푹 잘 수 있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선잠이 든 정도라 반쯤은 다 듣고 있으니까.
무시해서 그렇지.
계속 무시하려다 결국 눈을 뜬 이유는, 상상 이상으로 소란스러움이 점점 더 커져 가는 바람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움.”
그렇게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굉장히 낯익은 얼굴이었다. 몇 년을 익숙히 눈을 뜨며 봐 왔던 장면이어서 잠결에 반사적으로 반응이 나왔다.
“……음? 뭐야. 운이잖아. 난 또……. 엉―?!”
옛날처럼 익숙하게 반응하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잠이 확 달아났다. 내 입이 미쳤나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꺼낼 말이 있지. 누구?
번개같이 번쩍 눈을 뜨자, 제가 꿈을 꾼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확실하게 존재감을 뿜뿜하는 얼굴이 앞에 있었다.
몇 년을 봤어도 여전히 빛나는, 재수 없는 얼굴이었다.
“……이로운?”
머리카락이나 눈동자는 기억하는 것과 확연히 차이가 있었지만, 이 얼굴은 분명 내가 아는 이로운이었다.
그리고 저 변하지 않은 느낌도.
다만 확신하지 못했던 것은 색이 달라진 머리카락이나 눈동자가 낯선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뭐, 하필 여기서 지금 이놈을 만날 줄을 생각지도 못해 믿기 어려웠던 가장 컸지만.
그런 내 혼란을 알아차린 것인지, 이로운이 언젠가 늘 그랬던 것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응. 오랜만이야. 지호야.”
그 확인사살을 듣자마자 내 머릿속에 처음 든 생각은 바로 이거였다.
시발. 이 새끼가 왜 여기 있어.
* * *
뭐, 그래도 이런 마음을 그대로 다 내보일 생각은 없어 나름대로의 배려로 꼭꼭 감춰두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하얀 머리카락 안에 손을 넣어 진짜 머리카락인지 확인하며 궁금증을 해결했다.
“뭐야. 근데 머리가 이게 뭐야?”
모근까지 확인해 보니 진짜였다. 더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못 본 지가 얼마나 됐다고 머리가 다 하얗게 셌어?!
믿을 수 없어서 계속 이리저리 손을 꼼지락거리며 머리카락을 확인하는데, 내 관심을 받아서인지 손길이 나쁘지 않은 건지 이로운이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하네. 너는.”
그 미소가 정말 여전히 바보 같아 보여 조금 마음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해서 장난스러운 미소로 대꾸했다.
“사람이 그렇게 쉽게 변하나. 그나저나, 이건 또 뭐고?”
반대쪽 손으로 눈을 콕 찌르며 대체 뭐냐고 묻자, 여전히 머리가 잡혀 있으면서 뭐가 그렇게도 좋은 것인지 이로운이 헤실거리며 답했다.
“각성 후유증? 그니까……. 음……. 각성하고 나서 생긴 변화랄까?”
“……그런 것도 있어?”
적어도 나는 1할도 겪지 않아, 각성 시 무슨 변화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내게는 1할도 이해가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 내 의문에 제일 먼저 답해준 건 역시 이럴 때만 튀어나오는 성위님이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내 특성이거나, 아니면 어떻게 각성하냐에 따라 각성 변화를 겪을 수 있다 설명해 주며 ‘어때, 내가 짱이지?’라고 묻습니다.]
[아. 참고로 그래서 성격이 더럽게 나빠지거나, 살이 갑자기 훅 찌거나 빠지거나 머리카락이 바뀌거나 이런 경우가 꽤 흔하다 설명을 덧붙입니다.]
응. 짱인 건 모르겠고. 설명 감사. 영혼 없는 내 짤막한 감사에 성위님이 득달같이 따졌다.
[아, 왜! 설명 잘 해줬잖아! 라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항의합니다.]
그야, 대놓고 그렇게 나오면 또 말해 주기 싫은 게 사람 맘이거든.
그 말에 성위님이 더럽게 빽빽이는 소리가 BGM으로 들려왔지만 언제나 그랬듯 사뿐히 무시했다.
그러고 있는데, 유라가 천천히 내 곁으로 다가오며 설명했다.
“각성자마다 각성할 때 변화가 있을 수 있어요. 지호 씨. 그러니까 일단 그 손 좀…….”
“아…….”
계속 그렇게 잡고 있을 거냐는 물음에 화들짝 손을 뗐다. 그리고 머리채를 잡은 사과도 할 겸,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 따뜻한 격언을 던져 주었다.
“뭐. 그래도 예쁘네.”
토끼 같고.
뭘 해도 사실 찰떡같이 소화할 얼굴의 소유자였지만, 그래도 예쁜 건 예쁜 것이니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 감상평에 이로운은 기대하지 못한 칭찬이라도 받은 듯 볼을 발갛게 붉히며 사랑스럽게 웃어 보였다.
“고마워.”
짜증 나긴 하지만, 빌어먹게 예쁜 얼굴이었다. 계속 보고 있으면 별로 유쾌하지 않았던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아 망설임 없이 그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그러자 그제야 주변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 유지한 씨…… 어억?”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손을 놓자마자 득달같이 달려들어 번쩍 안아 올리며 이로운과 떨어트리는 주인공님이셨다.
순식간에 시야가 높아지며 방 전체가 한눈에 보였다. 모여든 사람들도.
근데……. 익숙한 낯 외에도…… 뭐가 좀 많다?
“모르는 분들이 많네요?”
멍 때리면서도 나름 상황 파악을 하려 묻자, 그런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건지 당황스러운 건지 다들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변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랄까?
그래도 내가 꿋꿋이 답을 기다리자, 회피를 포기한 민현이 어물쩍 대답했다.
“……그, 손님입니다.”
아마도.
아주 땅굴을 기어들어 가는 것 같은 작은 마지막 덧붙임 때문에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한가득이었다.
아마도? 아니 뭐 이런 간단한 정의에 아마도가 왜 나와? 이런 생각들을 하다 문득 생각이 났다.
“오늘 손님이 온다는 말이 있었던가요?”
내 기억에는 없었는데?
원티드는 방문을 하려면 기본적으로 사전에 약속을 해야 했고, 고지를 했다 한들 보안상 통과해야 할 절차가 있었기에 입구에서 반드시 연락이 오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기로는 잠들기 전까지 그런 연락 자체가 없었다.
분명 그랬는데, 놓친 것이 있었나?
어떻게든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하는데, 그런 내 노력을 보고는 유라가 한숨을 내쉬며 실토했다.
“불법 침입자들이에요. 지호 씨.”
“……네?”
“대담하게 건물 내부로 불법 텔레포트를 강행한 범죄자들.”
저기 저것들 몽땅.
이로운부터 시작해, 두 사람을 쭉 가리킨 후 마지막으로 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며 더불어 밑에도 아주 수두룩 빽빽하다는 말에 나는 그제야 상황 파악을 마쳤다.
“……뭐야. 그런데 왜 이러고 있어요?”
안 내쫓고?
당장 해야 할 기본적인 일도 안 하고 뭐 하고 있었냐고 질문을 던지자, 분명 타당한 질문이었음에도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저기 모르는 인간들을 포함해 모두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딱 한 명. 이로운 빼고.
뭐 당연한 거라 별로 신경 쓰진 않았다.
이런 나를 보며 우리 주인공님께서는 화등잔만 하게 커다래진 눈을 치켜뜨며 내게 물었다.
“……아는 사이, 아닙니까?”
“그런데요?”
그게 왜?
아는 사이인 거와 내쫓는 게 대체 무슨 상관인 거냐는 물음에 주인공님은 뭐라 말을 하려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런 머저리 같은 행동을 하는 주인공님의 뒤로 오히려 처음 본 인간들이 먼저 상황 파악을 끝내고 감탄사를 흘렸다.
“이런. 어마어마한 성격이시군요.”
“칭찬으로 들을게요.”
“이로운을 저렇게 단번에 병풍 만들 수 있는 인물이 있을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왜?’
그게 뭐가 어렵다고? 순간 생각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이로운이 많이 대단한 사람이긴 하죠.”
뭐, 실제로 옛날부터 그러긴 했다. 언제나 시선의 한가운데 있는, 무리에 있으면 본인이 그 중심이 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서 나까지 그를 중심으로 살아가진 않았다. 지독히 엮일 때나, 그렇지 않을 때나.
아마 이로운에게는 가장 끔찍한 사실일 것이다. 지금도 변하지 않은, 저 화를 돋우는 멍청한 눈만 봐도 뻔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딱 봐도 능글맞음의 극치로 보이는 인간이 박수까지 쳐 가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 보스를 그렇게 표현하다니. 오늘부터 존경하겠습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녹음의 유해한입니다.”
그리고 뒤늦은 자기소개를 들은 나는 흠칫했다.
“……유해한?”
녹음의 유해한? 그 뒷공작 1인자?
처음 들었을 때 이건 무슨 불량식품 같은 이름이지, 했던 그 유해한?
그 주요 인사를 여기서 볼 줄은 몰라 진심으로 당황했다. 그런 나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는 싱글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름이 좀 독특하긴 하죠. 발암이라고 놀림받기도 했습니다. 어렸을 때는요. 애들은 정말 너무해요. 그쵸?”
그 말에 이건 무슨 개소리냐는 듯 진심으로 놀란 얼굴을 한 유라가 대꾸했다.
“응. 아니. 정상인데?”
“고작 그렇게밖에 안 했어요? 발암새끼가 아니고요?”
“아니. 이 착한 분들이…….”
연이어 터진 민현의 솔직한 발언에 차마 내가 있어서 욕을 못하겠는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런 스타일인 건지 유해한이 신박한 반어법을 구사하며 웃는 얼굴로 이를 갈았다.
그런 그들의 삼파전을 멍하니 지켜보던 나는 그제야 아까 그의 말에 스쳐 지나갔던 어마어마한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건 그의 존재보다 100배는 더 충격적이었다.
“잠깐 그전에, 누가 보스라고요……?”
믿을 수 없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유해한은 내가 대체 왜 이리 심각한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태평하게 답했다.
“저기, 당신한테 대차게 무시당한 우리 보스. 이로운인데, 문제 있나요?”
그가 보스인 게 하등 문제 되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결국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저게요?”
내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만했다. 내가 아는 이로운은 누군가의 위에 서는 건 밥 먹는 것보다 쉬워도 누군가를 통솔할 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이런 내 말이 어떻게 들렸는지 모르겠지만, 이로운이 불쌍해지기라도 했는 듯 유라가 나름 변호를 해주었다.
“국내 랭킹 4위. 정령사 이로운이에요. 지호 씨.”
그러니 나름 자격은 충분하다는 소리였지만, 내게는 새로운 컬쳐쇼크였다.
저게 국내 랭킹 4위이자, 정령사 원탑이라고?
국내 톱3 길드 길드장?
“……헐.”
쇼킹한 소리였다. 세상에, 전남친이 이런 스펙을 가지고 다시 나타날 줄 누가 알았을까.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놀랄 일입니까?”
한창 정신이 집을 나가고 있는데, 우리의 주인공님이 날 현실로 워프시켜 주었다. 덕분에 바짝 정신이 들어서 일단 차근차근 머릿속을 정리했다.
더불어 연이은 충격적인 사건들 때문에 잠시 뒤로 밀렸던 일을 입 밖으로 꺼냈다.
“매치가 안 돼서요. 그보다 유지한 씨.”
“네?”
“슬슬 쏠리는 거 같으니까 이제 좀 내려 주실래요?”
언제까지 날 쌀포대처럼 안고 있을 거냐고 묻자, 50kg이 넘는 인간을 한 손으로 번쩍 들고 있었으면서 무게도 느껴지지 않았는 듯 그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이제야 그 사실을 알아챈 사람처럼 당황하며 서둘러 나를 바닥에 내려주었다.
발이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뻐근한 어깨와 허리를 펴면서 나는 그냥 속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뭐, 어차피 이제 나랑 관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 인생에서 이로운이 빠진 지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 버렸다. 다시 넣을 생각도 없고, 이미 유지한만으로도 충분히 벅찼다.
“그래서, 용건은 뭔가요? 불법 침입까지 했으니 뭔가 중요한 사안이 있겠죠?”
없으면 이 난장판에 대한 대가는 톡톡히 치를 줄 알아라. 라는 의도를 가감 없이 밀어넣어 질문을 던지자, 유해한의 얼굴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이 되었다.
그래도 차분하게 그를 기다려 준 끝에 그가 결국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글쎄, 그건 저희 보스에게 여쭤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저희도 일단 갑자기 간다고 하니 헐레벌떡 따라온 것뿐이거든요.
유해한의 덧붙임에 이건 뭐 화장실 함께 다니는 여자애들도 아니고 왜 몰려오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사람마다 타입이 다른 거니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일일이 따지기도 귀찮았던 게 가장 크긴 했지만.
결국 어쩔 수 없이 별로 보고 싶지 않은 인간에게로 시선을 던지자, 처음부터 계속, 고요히 나를 바라보기만 했던 눈동자와 맞닿았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은 저 미저리 뭐냐고. 혹시 내 귀엽고 예쁜 화신은 이별할 때 확실히 못 끊는 타입이냐며 안쓰러움과 짜증을 담아 묻습니다.]
마음의 안 든다는 듯한 성위님의 질문에 나는 순간 정말로 빵 터질 뻔했다. 여기서 웃음이 터지면 망하는 건데도 말이다.
이놈의 성위님이 나를 그렇게 보고도 아직도 나를 잘 모르신다. 우스우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살다살다 이로운을 제대로 차지 않았냐는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너무 잔인하게 차서 친구들에게조차 좀 너무한 거 같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는데.
한창 웃음을 참고 있는데 이로운이 아까의 질문에 답을 해 주었다.
“유지한이 변한 것 같아서 한번 보려고 왔을 뿐이야. 이러나저러나 유지한의 변화는 여러모로 변수를 만드니까. 그런데 널 보게 될 줄은 몰랐네.”
헌터들 일. 별로 안 좋아했으면서.
그 작은 덧붙임이 이세계의 윤지호의 설정인 것인지, 아니면 진짜 나를 이야기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인생사가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어서.”
어쩌다 저런 인간에게 코가 꿰일 줄 알았나.
지금 생각해도, 아니 언제나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라 헛웃음을 흘리자 무슨 위기감을 느꼈는지 등 뒤에서 주인공님이 옷자락을 잡아 왔다.
“……?”
대체 뭐가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절부절못하는 그 얼굴을 보니 그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결국 오늘도 주인공님께 항복하고 실없는 미소와 함께 손을 들어 잔뜩 머리를 헝클어 주었다. 그러자 뭐가 그리도 좋은지 안심된 듯 웃어 보인다.
그걸 보며 오늘도 또 져 주고 마는 얼빠가 마음속 깊이 한탄하는 줄도 모르고.
“그럼 이제 용건은 끝난 거지? 진동 보니까 밑에서 열심히 부숴 먹고 있는 것 같은데, 이 피해 보상은 녹음에 청구할게.”
“알았어.”
“아니, 이로운. 잠깐―!”
거의 반사적이다시피 튀어나오는 대답에 유해한이 끼어들어 서둘러 그 말을 취소시키려 했지만, 그걸 두고 볼 내가 아니었다.
“그럼 다음에는 좀 더 평화롭게 뵙도록 해요.”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자 낭패라는 표정을 짓는 유해한을 보며, 나는 그를 유해 인물 리스트에 등재해 놓았다.
얕볼 수 없는 여우였다. 이쪽에서 무엇을, 얼마를 청구할지 모른다는 핵심을 단박에 짚어내고 막으려 하다니. 이거 방심했다가는 이쪽이 눈 뜨고 코 베일 수도 있을 거 같았다.
어차피 결정권은 이로운에게 있으니 이번은 자신의 승리였지만.
“그럼, 나 배고픈데 우리 뭐나 좀 먹으러 갈까요?”
나가는 길에 개싸움도 좀 말리고요.
아직까지도 울려 오는 진동을 보니 싸움이 한창인 것 같아 덧붙이자, 주인공님을 포함해 유라와 민현이 맹목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먹을까요?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지호 씨가 먹고 싶은 거요.”
“그거 말고 유지한이 먹고 싶은 거.”
“어…….”
어물쩍거리는 귀여운 모습을 보며 기분 좋은 얼굴로 걸음을 옮기려 하는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지호.”
“……?”
별로 내키진 않지만, 그래도 녹음의 수장이라니 이것저것 엮일 일이나 앞으로의 관계를 생각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뭔가 불안한 표정의 이로운이 내게 물었다.
“……나, 반가워?”
정말 쌩뚱맞고, 오글거리고, 낯 뜨거운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질문의 저의가 궁금했다. 대체 상처받을 게 뻔한데 이런 걸 왜 물어보는 것일까.
“묻지 않는 게 좋은 질문인데……. 답해 줘?”
“응. 듣고 싶어.”
정말 남자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말해 달라니 말해 주지 못할 건 또 없어서, 마지막 선량함을 있는 대로 끌어모아 해사한 미소로 답을 건네 주었다.
“머리에 총 맞았어?”
어디 반가워할 게 없어서 전남친 따위를 반가워할 리가.
* * *
“……와우.”
처음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지만, 머리에 총 맞았냐는 대사를 던지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돌아 제 일행들을 끌고 사라져 버린 그녀의 행동에 유해한은 진심으로 감탄사를 터뜨렸다.
단연컨대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이 본 것 중 최고로 충격적이고 완벽한 마무리였다.
자신할 수 있었다. 그 증거로 보란 듯이 저기 넋 나간 채로 한방에 KO패 당한 제 보스가 있었으니까.
그 모습을 보며 유해한은 이제 존경심까지 싹트려 했다. 살다 살다 이렇게 거침없이 이로운을 나가떨어지게 하는 여성을 보게 될 줄이야!
지금까지 이로운에게 목매다 미쳐서 나가떨어지는 여성들은 수두룩하다 못해 질리도록 봐 왔지만, 그 반대는 처음이었다. 심지어 대한민국 최고의 마녀, 랭킹 5위의 장하리조차 그러지 못했는데, 그녀의 정체가 뭔지 궁금해졌다.
이로운은 기본적으로 여자 남자를 떠나서 사람들의 호감을 살 수밖에 없는 외모와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로운이 싫다 한들, 이로운의 존재감마저 무시하는 이는 없었다.
그 정도로 영향력이 있기에 유해한이 이로운을 선택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 이로운을 능가하는 인간이 있다니. 이건 뭐, 능가하다 못해 제 발치 아래로 두고도 남을 게 분명했다.
유해한은 조용히 지호를 자신의 요주의 리스트 상단에 올렸다.
처음부터 이로운을 동요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요주의 대상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이로운을 무너지게 만든다면 요주의가 아니라 각별히 감시를 해야 할 수준이었다.
그녀가 바꾸는 이로운은 분명, 녹음에는 득이 되지 못할 테니까.
이런 마음은 물론 깔끔하게 숨긴 채, 유해한은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로 너스레를 떨었다. 일단은 이로운에게서 그녀의 영향력을 조금이라도 지워야 했다.
“오. 대단하신 분이시네. 존경심이 싹 틀…… 꿰엑―!”
너스레를 가장한 언어폭력을 씹선비가 재빨리 차단했다.
“분위기 파악 좀.”
“아니 그렇다고 목을 치면 어떡합니까!”
나 그래도 부길마거든?!
어떻게 부길마 목을 그렇게 가차 없이 칠 수 있냐고 유해한이 난리를 피웠지만, 깔끔히 무시한 씹선비는 이로운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쟤는 무시하고. 괜찮아?”
저를 걱정하는 솔직한 목소리에 이로운이 그제야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 정도는 각오했어.”
윤지호가 이런 반응을 보일 거란 걸 예상하지 못했다면 정말로 남자친구였다는 타이틀을 떼야 했다.
하지만 알았고, 각오했다고 해서 괜찮은 것은 아니었다. 그 증거로, 각오했다고 말하는 그의 눈은 감출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듯 하염없이 떨리고 있었다. 목소리마저도 떨림을 숨길 수는 없었다.
아직까지 여전히 마음이 남아 있다는 티를 적나라하게 내는 모습에, 사랑에 빠진 이로운을 다뤄본 적 없는 두 사람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헉. 헉. 아. 힘들어. 전속력으로 달려왔는데…. 이미 끝났나 보네.”
그런 두 사람을 대신해, 타이밍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숨을 헉헉거리며 뒤늦게 이곳에 당도한 이가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는 이로운의 얼굴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안타까움을 가득 담아 혀를 끌끌 찼다.
“후. 분명 저럴 줄 알았지. 하여간 무슨 배짱이 있어선.”
지호 못지않은 화려한 등장이었다.
침입자가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자마자, 차지혁은 도통 말이 통하지 않는 센터의 귀먹은 머저리를 내던지고 전속력으로 달렸다. 이제껏 상대하던 이가 뒤에서 계속 꽥꽥대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언제고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 원티드 내부를 침입할 정도로 호전적인 적은 그가 알기로 단 한 곳뿐이었으니까.
그래서 정말 열심히 달렸다. 원티드를 위해서가 아니라 침입한 불쌍한 적을 위해서. 어차피 그들은 누구보다 손쉽게 윤지호에 의해 개박살 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뒤늦게 도착해, 이미 모든 게 벌어진 후의 풍경을 보고… 그는 역시나 하며 혀를 찼다.
나이 먹고 유해지긴 개뿔. 윤지호가 어딜 가나.
그리고 어쩌면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을 사람이 왜 굳이 그녀를 만나려 했는지, 차지혁으로서는 도무지 이로운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한숨 섞인 그의 목소리에 이로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차지혁?”
“응. 나고. 내가 누누이 말했지. 만나 봐야 너만 손해라고. 하여간 선배 말은 지지리도 안 들어요.”
대학교 선배라 쓰고 꼰대라 읽는 차지혁이 꼰대답게 충고를 하며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넋 나간 이로운의 얼굴을 보니 안쓰럽기도 했다.
이렇게 될 걸 뻔히 알았기에 다들 이로운의 귀에 윤지호의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게 조심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익숙하게 다들 입을 열지 않고 생각조차 하지 않을 때쯤 뒤늦게 이로운을 알게 된 유해한은 그 사실을 몰랐을 테지만.
만약 알았다면 저 지독한 이로운 빠인 유해한이 이곳에 이로운이 오는 걸 쉽게 허락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아예 정보까지 차단해 버렸겠지.
“일어나기나 해. 언제까지 앉아 있을 거야. 남의 집에서 그러고 있음 민폐야. 그러게 왜 와서는…….”
어른들 말은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하지 않냐며, 차지혁은 한심하단 기색을 감추지 않고 이로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로운은 멍한 얼굴로 자신을 일으키는 손길을 그대로 받아들여 일어서며 차지혁에게 물었다.
“……알고 있었어?”
“나 말고도 많이 알고 있어.”
너니까 몰랐던 것뿐이지.
좀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진짜 잔인한 인간이 곧이어 올라올 것을 알기에 차지혁은 기꺼이 악역이 되기로 했다.
태생이 착한 남자답게 그는 이로운이 진짜 빌런을 맞닥뜨리기 전에 얼른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잔악한 여자보다는 자기가 나을 테니까. 그래서 눈으로 열심히 유해한을 재촉하는데…….
“어머나. 반가운 얼굴들이 모여 있네?”
역시 빌런은 항상 타이밍 역시 기가 막히다는 지론을 몸소 체감시켜 주셨다.
“……저기, 하나야.”
“아, 이분은 모르는 분이시고. 누구세요?”
“…….”
……나쁜 년.
반사적으로 원망하는 소리가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사실 원망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차지혁은 도저히 입을 열 수 없었다.
물론 정하나는 그 생각을 훤히 꿰뚫어 보며 병신같은 놈이라고 속으로 욕을 했지만.
그러나 그걸 알아볼 정도로 눈치 있는 남자였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눈치채 봤자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게 뻔해 그녀를 더 화나게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본인을 놓지 말라고 애원하기에 더 질이 나쁜 남자였다. 차지혁은.
어쨌든 오늘 타깃은 그가 아니었기에 정하나는 철저히 무시했다. 그리고 오늘의 타깃에게 매혹적인 미소를 보내며 그를 털어 버릴 준비를 시작했다.
“우와. 우리 럭키가이님을 이렇게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네.”
다시 보게 될 일이 애초에 없을 줄 알았지만.
똑바로 이로운을 보며 던진 말에 차지혁이 의문을 제기했다.
“……왜 럭키가이야?”
참 멍청하게 들리는 의문에 정하나가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진짜 기적과도 가깝게 운이 좋아서 윤지호랑 사귄 남자라.”
이로운이 어떻게 윤지호와 사귀게 됐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정하나기에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아아…….”
반면 정확한 과정은 모르지만 이로운이 어마어마하게 운이 좋았다는 건 알고 있는 차지혁이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며 유해한은 ‘세상에 이런 일이’를 보는 것 같은 얼굴로 이로운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아는 이로운과 이들이 취급하는 이로운과의 엄청난 괴리감에 정신이 혼미했다.
대체 자신을 만나기 전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유해한은 문득 새삼 궁금하지도 않던 이로운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어차피 이제 럭키가이는 아니지만. 그 칭호 새로운 사람이 가져간 거 같거든.”
거기다 이번에는 찐 같고.
그리 말하며 정하나가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에는 명백한 기대가 서려 있었다. 눈앞에 있는, 기회를 차려 줘도 못 잡은 머저리랑 다르게 이번에는 제대로 기회를 붙잡을 놈이 나타났다는 확신 어린 기대감.
그때와 같은 가짜가 아닌, 이번에는 진짜일 것 같다는 예감.
정하나의 이런 예감은 틀린 적이 거의 없었기에 그 확언은 가히 위협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미 그 ‘진짜’를 대하는 윤지호의 태도에서 정하나의 저 예언이 들어맞을 것임을 느낀 차지혁은 조심히 이로운의 눈치를 살폈다.
기회를 놓쳐 버린 머저리끼리의 동질감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로운이 지금은 저렇게 온순하게 있어도 얼마든지 미친놈으로 변모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차지혁과 달리 이로운이 미친놈으로 변모하든 말든 조금도 관심 없는 정하나는 지금이 기회라는 듯 신나게 입을 털었다.
“몇 년 만인지. 간만에 윤지호 구경할 생각에 신나 죽겠어. 요 럭키가이님 연애 때는 재미가 없었단 말이쥐~ 역시 진짜가 아니라서 그랬나. 그래도 헤어지고 윤지호가 욕하는 건 좀 재밌었는데, 윤지호답게 하루 만에 리셋해 버리고 말이야.”
놀리는 맛이 없어요.
입을 열자마자 빵빵 터지는 폭탄 세례에 아연실색한 차지혁이 결국 황급히 달려와 정하나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와 동시에 유해한도 튀어나와 이로운 앞을 가로막고 횡설수설 아무 말이나 막 꺼내기 시작했다.
“정 박사님이 오늘따라 유머가 좀 과하시네. 원래 나 못지않은 블랙조크의 권위자시잖아. 이 정도 얘기 나눴으면 된 거 같아. 우리도 나가서 뭐 좀 먹을까? 레이드 뛰고 바로 나와서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맛있는 거 좀 먹자.”
그리고 일단 폭주 금지.
지금은 깽판을 놓는 게 아니라 퇴장할 타이밍이었다.
유해한 역시 평소 원티드를 굉장히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그래도 예의는 아는 사람이었다.
비록 평소 본인이 원할 때 살며시 내려놓는 예의긴 했지만 나름대로 어느 정도의 선은 있었고, 오늘은 이미 그 선을 아득히 넘었다.
더 이상은 그의 양심에도,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지탄을 피하지 못할 위치까지 왔다.
남의 집에 쳐들어가서 제 사정만으로 깽판 치는 건 어떻게 실드를 쳐도 커버가 안 됐다.
단순히 정찰 겸 선전포고를 하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왔고, 그에 비해 얻은 것이 너무나 없었다.
그러니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길드 망신은 충분하니 이만 돌아가자고, 유해한이 거의 애원하다시피 했다.
그런 유해한의 마음이 느껴졌던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정하나의 팩트 폭력을 견디지 못했던 것일까. 이로운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여기서 그걸 알아보지 못할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자, 때아니게 실례했습니다.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피해 보상은…….”
이미 완벽하게 밀려 버렸으니 먹튀는 불가능했고, 순순히 청구를 요청하자니 새삼 억울함이 살짝 고개를 내밀었다.
살다 살다 이런 굴욕적인 피해 보상까지 하게 되다니. 그것도 원티드한테!
다 이기고 뿌셔 놓고 ‘치료비 보내.’ 했으면 매우 고소하고 기분이 째졌겠지만, 그 반대가 되었으니 기분이 참으로 엿 같다고, 자칭 원티드의 영원한 적대자인 녹음의 2인자가 생각했다.
그런 유해한을 보며 차지혁이 덤덤한 대답으로 비수를 찔렀다.
“윤지호가 알아서 청구할 겁니다.”
얼마가 청구될지는 일단 심장 부여잡고 보시고요.
유지한이라면 모르겠지만, ‘그’ 윤지호가 정직하게 소소한 청구서를 보낼 리 만무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차지혁이 동정의 시선과 함께 충고를 보내자, 유해한이 속으로 욕을 삼켰다.
반면 이런 속사정은 알아도 관심이 없는 정하나는 아쉬운 얼굴로 차지혁의 손을 떼 내며 중얼거렸다.
“뭐야. 벌써 끝이야? 시시하게시리…….”
아직 할 거 많았는데….
너무나도 아쉬운 목소리에, 저 악마는 대체 뭐냐고 경악한 씹선비와 유해한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다 차지혁에게 항의의 눈빛을 던졌다.
그리고 저 악마 같은 성격의 소유자에게 반한 남자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두 시선을 필사적으로 외면했다.
그사이, 그런 정하나를 향해 이로운이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정하나. 넌 내가 안 불쌍해?”
그 소리에 정하나가 희대의 개소리를 듣는다는 얼굴로 이로운을 바라보았다.
“……와. 대박.”
“…….”
“지금 나보고 네가 불쌍하냐고 물어본 거야? 그런 거야? 이로운?”
마치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냐는 듯한 물음에도 이로운은 침묵하며 조용히 정하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모습에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터뜨린 정하나가 이로운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넘치는 기회를 받고 3년을 함께 연애했으면서, 고작 군대 핑계로 그 시간을 한 번에 물거품으로 만든 너를, 지금 불쌍하냐고 물어본 거야? 정말? 이로운?”
진심으로?
이렇게까지 직접적으로 이유를 들은 것은 처음이라 이로운이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아니. 난…….”
“와. 진짜 몰랐나 보네. 헤어질 때 니가 쌍욕조차 못 먹고 윤지호한테 지워진 이유가 그럼 뭐라고 생각했던 거야?”
윤지호가 그렇게까지 매정한 여자일 거라고 생각한 건가.
어느 쪽이든 윤지호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는 말은 같았기에, 정하나는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는 눈으로 이로운을 내던졌다.
“재미없어졌어. 그냥 평생 그렇게 살아. 어차피 이제 다 끝나서 네 차례도 지나간 거, 그냥 쭉 그랬듯 찌질하게 짜져나 있어.”
방해나 하지 말고.
여지조차 주지 않는 촌철살인에 이로운은 비틀대다 허물어지듯 무너졌다. 그런 이로운을 황급히 받아내며 유해한이 나름대로 이로운을 옹호했다.
“정 박사님. 좀 너무한 거 아닌가요?”
이어서 차지혁도 나름대로 이로운을 두둔해 주었다.
“맞아. 그렇게까지 말할 것까지는…….”
“왜, 동질감이라도 느껴?”
씨알도 안 먹혔지만.
정확하게 핵심을 찌르는 말에 차지혁은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렇게 차지혁을 처치하고, 정하나는 똑바로 유해한을 바라보았다.
“뭐. 그쪽은 그럴 만하죠. 이로운 편은 있어야 하니 인정. 그래도 아마 본인은 내 말을 이해할 거예요.”
“……?”
“자기가 어떤 실수를 했는지 눈치챈 얼굴이니까.”
그 말을 던지고 정하나는 시원하게 등을 돌렸다. 조금의 미련도 없다는 듯이.
정하나가 엘리베이터를 타자 차지혁 역시 황급히 정하나를 따라나서며, 곧 그 자리에는 이로운과 유해한, 씹선비만 남게 되었다.
“……괜찮아?”
자기들밖에 남지 않자 씹선비가 조심스럽게 넋 나간 것 같은 제 보스를 살폈다.
씹선비의 물음에도 이로운은 답 대신 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더 이상 누구도 이로운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의 손 사이로 흐르는 것 같은 눈물은 착각이 아니었으니까.
* * *
이로운은 이미 머릿속에서 싹 지워 버린 내가 밥 먹을 생각에 신나 로비로 내려오자, 이쪽도 이미 게임은 끝나 있었다.
“어. 실장님!”
“……두 분, 밑에 뭘 깔고 계세요?”
레쓰비와 회사원님 발밑에 웬 넝마 하나가 널브러진 채 밟혀 있었다.
누가 봐도 사람이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서 새삼스레 묻자,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두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미친 날파리요.”
……두 사람이 저렇게 친했던가?
순간 의문이 들긴 했지만, 괜히 입 밖으로 꺼내봤자 사달만 날 것 같아 조용히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아. 그래요. 보니까 아직 좀 꿈틀하는 거 같은데, 더 놀아도 돼요. 어차피 피해 보상은 청구할 거니까.”
마음껏 놀아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놀 곳도 지정해 주었다. 여기 디자인 마음에 안 드는 곳이랑, 저쪽 시설이 오래된 곳. 아, 저쪽도.
그들이 열심히 놀면 놀수록 이쪽은 이득이었다. 다짐하건대, 반드시 본전의 2배는 뽑을 것이다.
말로는 개싸움을 말린다고 했지만, 말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말려 봤자 이쪽 좋을 게 뭐가 있다고 말리는가. 게다가 사람은 이렇게 가끔씩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줘야 했다.
내 다짐을 느끼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이 활기차게 ‘네!’라고 답했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서 다른 침입자들을 제대로 놀려먹고 있던 사춘기 고딩 역시 그 확답에 응하듯 더 현란하게 선을 연주했다.
아주 날아다니는 녀석 덕에 다급해진 녹음 쪽 이들이 소리쳤다.
“잠깐! 너희 보스 내려왔으면 상황 끝난 거 아니야? 이제 안 싸워도 된다고!”
그러니 여기서 평화롭게 멈추자는 중재안에, 우리의 사춘기 고딩님께서는 질풍노도의 시기답게 코웃음을 치셨다.
“뭐래. 올 땐 맘대로여도 나갈 때는 아니시거든요. 손님들.”
그쪽만 평화적인 거 이쪽은 관심이 없어요~
【타락한 음악가가 ‘마리오네트의 저주’를 연주합니다.】
“악! 저 사춘기 고딩 새끼!!”
악쓰는 소리가 아주 제대로구만. 활기찬 사운드를 들으며 사뿐하게 걸음을 옮기자, 옆에서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래도 되나요?”
우리 건물 다 부서지기 전에 그래도 말려야 하는 거 아니냐는 1차원적이고 철없는 물음에 나는 꺄르르 웃음을 흘렸다.
“무슨 소리예요.”
“네?”
“저 정도 부순 걸로 얼마나 받는다고.”
뜯으려면 확실히.
내 인생 철칙 중 하나를 확실히 전수해 주자, 주인공님께서는 이 심오한 진리에 감화되신 듯 입을 다무셨다.
뭐, 이렇게 완벽한 가르침에 태클 걸게 어딨나 싶지만.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화신의 뻔뻔함에 탄성을 금치 못합니다.]
거기 성위님은 되도 않는 데까지 끼지 좀 말고.
성위님 입을 조용히 만들 즈음, 어느새 편안히 지나가시라며 내 앞길을 훤히 터놓아주신 길드원님들 덕분에 사뿐사뿐 가벼운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자. 그럼 우린 밥 먹으러 갑시다!”
* * *
“……하나야. 정하나!”
“왜.”
정하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답했다. 그러면서도 걸음은 멈추지 않는 것이 참 누군가를 생각나게 했다.
매정할 정도로 앞만 보고 가는 모습에 상처받는 것도 잠시, 거의 전부를 제 잘못으로 여기는 남자는 제 상처를 아랑곳 않고 그녀를 열심히 따라잡아 간신히 붙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면서도.
“……!”
자신을 붙잡는 손길에 이번에도 어김없이 붙잡혀 준 여자는 이를 악물었다. 전부 다 알면서도 늘 잡혀 주고 마는 자신이 너무나 싫어서.
“……헉. 허억. 정하나.”
“왜 불러.”
왜 자꾸 불러.
왜 자꾸 심장을 울려.
언제나 내뱉지 못하는 원망을 정하나는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이런 여자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못난 남자는 이번에도 역시나, 할 말을 찾지 못해 멍청한 소리나 해댔다.
“괜찮아?”
“…하.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는데?
대체 무슨 저의로 하는지 모르겠는 질문에 온갖 악의를 담아 답했다. 마치 자신이 괜찮지 않길 바란다는 소리처럼 들리지 않는가.
정하나는 한 번도 괜찮지 않은 적이 없었다. 고작 너 하나가 내 전부를 좌지우지하는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을 리 없지 않은가.
……스스로에게 이렇게 거짓말을 하지만, 제 친구가 알고 있듯 자신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정하나는 단 한 번도 괜찮은 적이 없었다. 이 남자를 강제적으로 선택하지 못하게 된 후부터.
그걸 눈앞에 있는 이 멍청한 놈만 몰랐다. 그게 너무나 화가 났다.
“할 말 없음 놔.”
그녀를 놓고 싶지 않은 차지혁은 필사적으로 할 말을 찾았다.
“……그, 윤지호가 화내지 않을까 해서. 그래도 본인 일인데 네가 이렇게 나서서…….”
“누굴 걱정하는 거야?”
윤지호가? 나한테?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는 건가. 이젠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로운에게는 매우 불쌍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로운과 저는 윤지호의 안에서 우선순위 자체가 달랐다.
만약 저가 이로운의 뺨을 한 대 쳤어도 윤지호는 폭소나 터트릴 것이다. 반면 반대라면, 이로운을 죽이러 갔을 거다.
자신이었더라도 그랬을 것이다. 그게 어릴 때부터 이어온 우리들의 유대라는 것이었다.
진짜 돌았냐는 눈빛을 서슴없이 보내자, 차지혁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지긋지긋해.’
또 이런 식이었다. 모든 말은 핑계에 불과하고, 사실 이 남자는 그저 나를 붙잡고 싶었던 것일 뿐이었다.
구질구질하더라도.
“너나 잘해. 제발. 네 인생이나 챙겨.”
남의 인생 그만 좀 챙기고.
그러니까 내가 내 인생을 던져 가며 너를 챙기게 되잖아. 내 인생 정도를 던져야 겨우 움직이는 머저리니까.
더 이상 할 말도, 더 상대할 이유도 느끼지 못해 정하나는 그대로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더없이 냉정하고 차가운 표정으로.
하지만, 만약 지금 현실적이고 냉정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저를 저버리진 못하는 사랑스러운 친구가 보았다면 알아차렸을 것이다.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망할 새끼.”
눈물이란 건 옛적에 다 쏟아내 말라 버렸는 줄 알았는데. 오늘 알았다. 그건 그저, 밖으로 흐르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을.
* * *
‘유지한이 먹고 싶은 거.’라는 메뉴를 고른 결과 도착하게 된 가게의 간판을 지호는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뭐, 굉장히 특이한 거나 그런 건 아니었다. 의외여서 그렇지.
“……먹고 싶은 게…….”
진짜 이거냐는 물음에, 대체 뭐가 부끄러운 건지 볼까지 붉히며 주인공님이 수줍게 말씀하셨다.
“……한 번도 안 먹어 봐서요.”
그리고 답을 들은 나는 생각했다.
전혀 놀랍지 않은데요. 매우 당연하지. 사생아라고 해도 재벌가 사생아가 곱창 따위 먹어 봤을 리가. 소설 속 국룰 아닌가?
그래도 두고두고 벼르고 있었는지 유지한이 데려온 곱창집은 한창 방송에서 떠들던 유명한 맛집이었다. 그게 또 나름 귀여워 놀려 주고 싶은 심술이 조금 샘솟았지만, 그러면 당장 장소를 옮겨 버려서 제대로 맛도 못 볼 거 같아 관대하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뭐. 난 좋아하니까, 다들 괜찮죠?”
“네. 좋아합니다.”
“전 가리는 거 없어요.”
다들 같은 마음인지, 아니면 그다지 관심이 없고 배만 고픈 것인지 별생각 없는 얼굴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몇 분이시죠?”
“4명이요.”
“저쪽 창가 자리 앉으실게요!”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뭘 모르는 주인공님을 대신해서 신나게 시켰다. 비싼 걸로, 많이.
어차피 내 돈이 아니라는 게 포인트니까.
“소곱창 3인분. 막창 2인분. 대창 3인분. 염통은 서비스로 나오나요?”
“네. 서비스로 나옵니다.”
“그럼 그거에, 다들 소주 괜찮죠?”
시선은 직원에게 두고 예의상 던진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재빨리 주문을 마치자, 모두가 홀린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 인간들을 보며 나는 새삼 신기해졌다.
……이 인간들, 밥은 제대로 사 먹고 다니는 거지?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저것들 진짜 주문도 제대로 못 해서 저렇게 쳐다보는 거냐고 일행들의 사회성을 의심합니다.]
‘쉿. 조용. 모른 척해 주자.’
거기까지 알면 진짜 엄마가 돼야 할 것 같아 사양이라고 단호하게 철벽을 치자, 내 마음을 십분 이해한 성위님께서 내 화신은 역시 똑똑하다며 엄지 척을 해주셨다.
어쩌다 이런 걸로 엄지 척을 받는 처지가 되었는진 모르겠지만.
탁―
인기 있는 집이라 주문이 몰릴 만한데, 빨리 시켜서 그런지 음식이 금방금방 나왔다. 순식간에 테이블 위가 채워지고 소주잔이 돌려졌다.
휘리릭. 드르륵―
“역시 곱창에는 소주죠. 다들 드실 거죠? 후레시 안 좋아하시면 다른 거 시키셔도 돼요.”
이미 시켜놓고, 흔들고 뚜껑까지 딴 후 물었다. 왜 그랬냐면, 다들 안 먹어도 난 먹을 거였으니까. 싫으면 다른 거 시키자고 덧붙여까지 주었으니 분명 할 도리는 다했다 여겼다.
단언컨대 나는 조금의 강요도 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성위님께서는 생각이 조금 다르셨나 보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완벽한 선처리 후보고에 역시 내 화신이라고 박수를 보냅니다.]
……욕이지? 이거?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내보이는데도 내 성위님께선 귀나 후비적거릴 뿐, 자신이 한 말을 정정할 생각이 없어 보이셨다.
망할. 아니 진짜 그렇게 들려?
나름 억울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자, 내 얼굴에서 뭘 읽은 건지 그들이 황급히 술잔을 들었다.
“곱창에 소주라니 완전 배우셨네. 없어서 못 먹잖아요, 저희.”
유라의 너스레에 민현이 ‘맞는 말이긴 한데…….’ 라며 사족을 덧붙였다.
“저희야 없어서 못 먹는 게 맞는데……. 지한 선배는 술 마신 적이 있긴 해요?”
아. 그 생각을 못 했네.
곱창은 몰라도 소주는 설마, 싶긴 하지만, 매우 의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기에 나 역시 흥미로운 얼굴로 유라의 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차마 할 말이 없는 듯 유라가 자신 없는 태도를 취하며 쥐구멍으로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를 짜내 답했다.
“마셔는 봤지…….”
아마. 한 모금? 길드 창설 때?
“…….”
안 마셨다는 답보다도 못한 대답에 나와 민현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했다. 경조사 때 축배로 한 모금 입만 적신 걸 누가 술을 마셨다 하는가. 세상 그 어떤 금주가도 술에 혀를 담갔다 뺀 걸 ‘마셨다.’라고 하지는 않을 거다.
이런 비난 어린 시선을 고스란히 느낀 유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자기도 동의하는 바라 할 말은 없는 듯했다.
그럴 만하긴 했다. 유라는 소설 속에서도 그랬지만, 짧은 시간 내가 몇 번 본 것만 해도 엄청난, 술을 사랑하는 주당이었으니까.
그래도 뭐 굳이 안 마시겠다는데 들이미는 사람은 여기 아무도 없었기에 주인공님은 그냥 음료수나 시켜줄까, 하다 급 나쁜 생각이 솟아났다.
“그럼, 내가 첫 술 가르쳐주는 건가?”
“……네?”
아니. 주인공의 일상 에피소드 하나를 만들어 주는 요런 소소한 이벤트를 빼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주인공을 사랑했던 독자라면 당연한 생각이었다. 암.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하며 저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주인공님이 살짝 얼굴을 붉히면서도 어쩐지 불안한 얼굴로 연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어린애 같은 그를 향해, 나는 악당처럼 짓궂게 미소 지었다.
“어때요? 한번 마셔 볼래요?”
……꿀꺽.
그의 목울대가 크게 울렸다.
그리고 그 유혹의 결과는…….
“……저거 괜찮아요?”
“……에이. 헌터가, 그것도 S급 헌터가 고작 소주 세 잔에 취할 리가 없잖아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헌터는 각성과 동시에 힘에 따라 독에 대한 내성과 회복력이 생긴다.
S급 헌터쯤 되면 드럼통 정도로는 마셔야 술에 취할 것이다. 그것도 다음 날이면 말끔하게 숙취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특히 신체능력 계열 각성자라면 더더욱.
이건 업계 상식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뿐 아니라 가게 안에 있는 모든 일반인조차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기에 연신 안 보는 척하며 이쪽 테이블을 힐끔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도 사고를 친 당사자라 나름 자기합리화를 열심히 해 보려고 합리화를 시도했지만…….
“그건 매우 맞는 말인데…….”
“…….”
“지금 그, 소주 세 잔에 취한 S급 헌터가 제 앞에 있는 것 같아요.”
“…….”
아이 같은 미소를 입가에 주렁주렁 단 채 고개를 꾸벅거리고 있는 주인공님을 보며 나는 자기합리화에 장렬히 실패했다.
아. 망했당.
* * *
“……선배 괜찮아요?”
“응? 왜?”
배시시― 헤실헤실. 꿈뻑꿈뻑.
“……아니에요.”
쉴 새 없이 이어지는 아찔한 미소 공격에 민현은 주저 없이 항복을 선언했다. 유지한의 ‘저건’ 그 정도로 치명적이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민현이 항복을 선언하자, 앞서 두 손 들고 뒤로 빠졌던 유라가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채곤 민현과 시선을 교환하다 진짜로 슬쩍 발을 빼려 했다.
귀신같이 그걸 캐치한 나는 얼른 유라에게 매달렸다.
“……이렇게 절 버리시기예요?”
죄는 내가 짓긴 했지만, 이 죄를 혼자 감당하긴 너무나 버거웠다. 우리는 한 팀이니 같이 나누자며 물귀신 작전을 사용하자, 난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유라가 아예 내 눈을 피했다.
“……미안.”
완곡히 ‘나는 저걸 어쩌지 못하겠소.’라며 포기를 선언하는 얼굴에 나는 절망에 빠졌다.
안 그래도 절망에 허우적거리는데,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 성위님까지 가세해 나를 늪으로 밀어 넣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제 무덤 제가 판 거지 뭐. 별수 있냐며 얼른 업어나 가라 합니다.]
[각성하고 제대로 체력적으로 힘써본 적은 없지 않냐고. 이참에 한번 써 보라고 빈정거리며 코를 후빕니다.]
넘쳐흐르는 욕 아닌 욕에 이제는 억울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소주 세 잔에 저렇게 되기 있냐고!!
솔직히 술을 처음 마신다고는 했지만, 헌터기도 하고 유지한이라서 웬만큼 마셔도 끄떡 안 할 줄 알았다.
이제껏 먹은 포션이 얼마고, 피지컬도 국내 최상위권 헌터인데 설마 소주 한 병에 취하겠는가. 상식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그는 법사계열도 아니고 검사계열이 아닌가. 그들이 갖는 육체적 강화라는 특징에는 웬만한 독에 내성이 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다 이게 무슨 술이라고. 진짜 소주 정도는 그냥 물이었다.
그런데…….
“……기분이 좋은 거 같아. 술은 좋은 거였구나.”
“…….”
저기 검사계열 최강자가 고작 소주 세 잔에 녹다운해 버리셨다.
미쳐 버리겠다. 이거 주인공 패시브인가? 그런 건가?! 아니 뭐 이런 걸 패시브로…!!
……그래. 여주인공 심쿵 포인트로 쓰겠구나. 있을 만하네. 그럼.
지금 다른 의미로 심쿵해서 돌아가실 것 같지만, 그래도 주인공 패시브다 보니 귀엽기는 해서 이 심정을 입 밖으로 토로하진 못했다.
한편, 내 이 심경의 변화들을 파노라마처럼 주르륵 지켜보던 두 사람은 대체 무슨 대화를 그렇게 열심히 하시는지, 눈빛 교환을 치열하게 하다 갑자기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저흰 가 볼게요. 지호 씨!”
“저희 길드장 잘 부탁드려요!”
아, 우리 길드장이요!
그 와중에 말 고치는 것까지 재빠르게 마치고 가는 모습이 아주 완벽했다.
계산까지 후다닥 마치고 쏜살같이 사라진 일련의 행동이 너무 깔끔해서 미처 잡지도 못했다.
“…….”
결국, 주인공님과 나 둘만 남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색하게 둘만 남겨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딱딱하게 굳은 채 주인공님을 돌아보자…….
“지호 씨.”
유지한이 웃어 보였다. 사르르, 꽃이 날리는 게 뭐라 화도 못 내게 만드는 미소였다.
“왜요. 휴. 이렇게 취해선.”
몸은 가눌 수 있나? 이러다 누가 톡 치면 휙 쓰러지는 거 아니야? 이러고 무슨 배짱으로 맨날 누굴 지켜 준다고 그렇게 나서는 건지. 새삼 신기하고 이해할 수 없었다.
“……지켜 줄 수 있어요.”
“…….”
“지호 씨만은…. 반드시…….”
그런 내 마음을 엿보기라도 한 것일까. 졸린 듯 꾸벅거리면서도 유지한이 말했다.
나는, 반드시 지켜 줄 것이라고.
“…….”
기분이 이상했다.
정말 같잖은 말 한마디일 뿐이었는데.
게다가 누가 누굴 지켜 줘, 진짜. 어이가 터지는 말뿐이었는데.
‘……체했나.’
이상하게 심장이 울렁였다. 반사적으로 세뇌하듯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만큼.
“……고마워요.”
“헤헤.”
…주인공 패시브일 뿐이다.
“유지한 씨.”
그래야만 했다.
“네. 지호 씨.”
당신은 내 것이 될 수 없었고,
“……유지한.”
“……응.”
설령 된다고 한들, 내가 안 되었다. 만약 돌아갈 날이 온다면…
“우리, 그만 집에 가요.”
나는 분명 당신에게 붙들릴 테니까.
* * *
“허억, 헉……. 이런 ㅆ…….”
숨이 턱턱 차오르다 못해 이대로 넘어가시게 생겼다.
내가 이 꼴이 된 건 그래도 어찌어찌 잘 가게를 나오나 싶다가, 중간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신 주인공님 때문이었다.
집도 어딘지 알고, 가는 길도 같은데 길거리에 그대로 놔두기도 뭐 했고. 설마 이럴 줄 알고 일부러 옆집을 내준 건 아니겠지?
어쨌든 과장 좀 섞어서 내 몸무게의 1.5배쯤 되는 주인공님을 업자니 무게는 고사하고 키부터 무리여서, 결국 그대로 등 뒤에 붙여놓고 질질 끄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럼에도 정말 더럽게 힘들었고, 질질 끌리는 다리가 불편할 법도 한데 깨지 않는 주인공님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내가 진짜, 헉, 유지하아아안……!”
모든 게 제 죄니 자연스레 나오는 건 욕뿐이었다.
솔직히 마력을 쓰면 가뿐하다 못해 한 손가락이었겠지만, 이렇게 처자고 있어도 마력에는 기민하게 반응하는 헌터다 보니 벌떡 일어날까 무서워 그러지도 못했다.
그러나 땀이 송골송골 흐르자 이젠 짜증이 치솟다 못해 그냥 버리고 갈까, 하는 나쁜 생각까지 스며들었다.
사실 친구들이 술 취하면 뒤도 안 돌아보고 빤스런 하는 인간이라, 보고 배운 게 그 꼴인 만큼 못할 것도 없었다. 아, 솔깃한다. 좀 위험한데.
그런 나를 훤히 아는 망할 똥별님이 때에 맞게 유혹적인 속삭임을 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일단 욕은 좀 넣어두고 그거 그냥 버리고 가면 어떻겠냐 추천합니다.]
[그래도 이 나라 최고의 딜탱 중 하나이니 네가 버리고 가도 아무 일 없을 거고 여차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주워 갈 거라고 속삭입니다.]
‘꺼져. 이 악마야.’
매우 솔깃하다 못해 사악할 정도의 감미로운 제안이었지만, 힘겹게 악마의 속삭임을 물리쳤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화신의 팩트폭력에 충격을 먹고 슬퍼합니다.]
[나는 너를 생각해서 말해 준 건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배신당한 남자처럼 처절하게 오열합니다.]
성위님의 억울하다는 토로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아. 하람이 밥 챙겨 줘야 하는데…….’
한창 몰입하고 있을 성위님이 들으면 대성통곡할 소리였다. 하지만 진짜로 하람이가 너무 보고 싶고 걱정됐다.
물론 먹을 건 잔뜩 사다 놨으니 배고프면 알아서 잘 찾아 먹겠지만…. 왠지 그러지 않고 내가 오길 계속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아침에 따라 나오려는 걸 무슨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오늘은 집에 있으라고 간신히 떼어놨는데, 걱정이 몰려왔다.
고로, 나는 빨리 집에 가야 하겠다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결심이 서서, 나는 내 등에 붙은 주인공님을 내려놓았다.
“아오. 내 허리.”
아직 얼마 쓰지도 못했는데!! 아작나면 이걸 어떻게 청구하지?
실없는 생각 한번 하고, 마지막으로 주인공님의 앞에 앉아 주인공님을 깨웠다.
“유지한 씨. 일어나요.”
“…….”
새액. 새액. 숨소리만 참 잘 들렸다. 반쯤 내동댕이쳤는데도 미동조차 안 하는 것 또한 이젠 의심이 들었다.
이거 사실 안 자는데 자는 척하는 거 아니야?
합리적 의심에 가자미눈을 하고 노려보는데, 눈빛이 따가울 텐데도 여전히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해서 나는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안 일어나면……. 버리고 갈 거예요.”
“…….”
“내 말이 진짜인지 시험해 봐도 상관없고요.”
진짜 버리고 갈 거거든.
할 만큼은 했고, 왠지 버리고 가면 그를 아끼는 성위가 강제로라도 그를 깨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알아서 집에 가겠지.
“그럼 전 이만.”
마지막 인사로 머리 한번 토닥이고 몸을 일으키는데…….
“……우음.”
“…….”
이건 전생에 강아지였나.
버리고 간다는 말이 포인트였는지, 아니면 토닥이는 손길이 포인트였는지 모르겠지만, 등을 돌리려는 내 셔츠 자락을 꾹 잡은 손에 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솔직히 이건 좀 화내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어린애처럼 한 손으로는 내 옷자락을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눈을 부비는 모습을 보니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아직은 귀찮음과 어이없음보다는 유지한이라는 인간에 대한 호감과 귀여움이 더 커서.
“유지한 씨.”
“……아. 우리 왜 여기에…….”
“그야 술 드시고 잠들어 버리셔서 제가 여기까지 어떻게든 옮겨 왔으니까요?”
택시도 안 잡혀서 못 탔다. 늦은 밤, 강남 골목길에서 잡힐 리가 없지만. 대로변으로 나가서 잡는 방법밖에 없는데……. 그쪽으로 가려면 아직 한참 더 남았다.
유지한은 지금 상황을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석고대죄 정도의 사과로 부탁드려요.”
그 정도는 해야 방금 전까지의 개고생이 조금은 보상받을 것 같았다.
물론 이건 농담이었다. 진심이 좀 섞이긴 했지만. 세상에 누가 진짜로 석고대죄를 받겠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다만, 이번에도 전국민이 다 아는 이 농담을 우리 주인공님만 모르시는 것 같다.
“……죄송ㅎ……?”
“그만!”
누가 진짜로 하래!! 황급히 바닥을 찧으려는 그의 이마 사이로 손을 넣었다. 아슬아슬하게 세이프였다.
진짜로 식겁했다. 내가 말하긴 했지만, 설마 그렇다고 진짜로 석고대죄를 하려는 인간을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등골이 오싹하다 못해 소름이 끼쳤다.
“누가 진짜로 하래요!!”
“……?”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는데도 내가 왜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그 순진무구한 얼굴에 나는 절망했다.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하지? 순간 몇 년을 유지한과 함께했음에도 조금도 학습을 시켜놓지 않은 유라가 원망스러워졌다.
최소한 기본 상식 정도는 교육을 시켰어야지!
애꿎은 사람에게 원망을 퍼붓다, 금세 현타가 왔다. 그래, 내 입이 방정이지.
“내가 잘못했습니다.”
순순히 잘못을 시인했다.
하긴. 오로지 직구밖에 모르고, 변화구고 커브고 아예 머릿속에 있지도 않은 인간한테 돌려 말하기를 시도한 내 잘못이지, 누굴 탓하겠나.
그런 내 모습에 지한이 강아지 같은 울망울망한 눈을 하고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괜찮아?”
“…….”
그걸 보며 나는 확신했다.
이거, 아직 술 안 깼구나. 설상가상이었다.
“다시는 유지한에게 술을 먹이지 않겠습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흥미 본위로 이런 짓을 하지 않겠노라 욕을 씹어먹듯 다짐하는데, 주인공님이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는 새로운 경험이어서 좋은데요……?”
“…….”
그래요? 나는 안 좋은데.
진심으로 쏘아 주고 싶었지만, 술에 취해 자신의 즐거움에 빠져 있는 주인공님에게 초를 치고 싶지는 않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랬더니 이 인간, 1절로 그치지 않는다.
“지호 씨 때문에 새로 겪는 게 참 많아요. 나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인데 지호 씨는 마법을 부리듯 쉽게 이뤄내니까……. 너무 신기하고…… 새로워요. 가끔은 따라가기 벅차기도……. 아니, 수시로 그러나…….”
“……그래서, 싫어요?”
삐딱선을 탄 내 귀에는 비꼬는 것 같이 들려서 태클을 거는데, 그런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그는 웃었다.
행복하기 그지없게.
“아니요. 좋아요.”
“……”
“정말로, 말로 표현 못 할 만큼…… 좋아요.”
당신이.
라는 말이 들리는 것 같아 순간 목이 턱 메어 왔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제가 생각해도 미친 것 같은 생각이라 어이가 없지만, 자꾸만 착각이 들었다. 아마 대사가 너무나 로맨스 소설의 그것 같아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고작 그뿐이라면 그냥 웃으면서 넘겼을 것을, 부끄러워하면서도 나를 올곧게 쳐다보는 저 눈 때문에 진심으로 착각하게 될 것만 같았다.
황급히 심장을 억눌렀다. 착각해서는 안 되니까.
설사 착각이 아니라 하더라도 착각이라고 부정해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나에게 당신은.
“그러니까, 마음대로 계속해요. 무엇이든, 무슨 짓을 해도 좋아요…….”
“…….”
그런데 왜…….
“계속 보여 줘요……. 앞으로도…….”
왜 다 아는 것처럼, 당신은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 * *
챙그랑―! 파사삭! 퍽―! 파앙―!
현란한 소리로 피날레를 장식하며 와장창창 온갖 물건들이 작살났다.
길드에 도착하자마자 사람 무섭게 소파에 가만히 앉아만 있던 이로운이 발작하듯 사무실의 물건들을 집어 던지며 난동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야―!!!”
물건들이 차례로 생을 마감하는 화려한 소리를 듣고 벼락같이 달려온 유해한은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연해졌다.
큰 소리가 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순식간에 녹음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길드장 사무실이 원래의 형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되어버린 것이다. 몬스터 작살내는 것도 탑티어더니, 사무실을 작살내는 것도 탑티어였다.
게다가 옆에서 소리를 치든 말든 아랑곳 않고 계속해서 집기를 던지는 모습을 보니 완전히 눈이 돈 게 분명했다.
자신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유해한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눈앞에서 날아가는 돈들을 바라보며 피해 금액을 추산했다.
저럴 때 괜히 끼어들었다간 본전도 못 찾고 저만 처맞기 십상이었으니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기도 했다.
“……아. 이번 지출 너무 큰데.”
최근 원티드의 공백으로 풀려난 게이트 중 다수를 녹음이 차지해 수입이 늘어나긴 했지만, 모두가 환호하며 기뻐하던 그 수입이 이번 일로 몽땅 다 털리게 생겼다.
물론 사무실 하나쯤이야 큰 문제가 아니었다. 평소였다면.
유해한의 속을 쓰리게 하는 건 거기에 더해 곧 날아올 피해 보상 청구서였다. 이로운을 가볍게 녹다운시키면서 제 쪽을 향해 눈을 빛내던 그 여자가, 우리를 배려해서 피해 금액을 산정할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으니까.
상상하기도 싫은 천문학적인 금액에 유해한이 머리를 쥐어뜯는데, 어느새 초토화된 사무실 한가운데 선 이로운이 행동을 멈추었다.
“……허억. 헉…….”
잠잠해진 건 더 이상 박살 낼 물건이 없어서인지, 아직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겠는 듯 이로운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숨을 고르려고 해도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탓에 그는 결국 심장을 쥐어뜯으며 나지막이 욕설을 읊었다.
“……씨발.”
창문까지 화려하게 깨부순 덕에 시원하다 못해 거센 바람이 볼을 때리고 있음에도 몸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아무리 조절하려 해도 성난 감정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자꾸 정하나의 말이 맴돌아서.
‘넘치는 기회를 받고 3년을 함께 연애했으면서, 고작 군대 핑계로 그 시간을 한 번에 물거품으로 만든 너를, 지금 불쌍하냐고 물어본 거야? 정말? 이로운?’
그 말이 그렇게 충격적일 수 없었다.
아니, 사실 내용 자체는 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비난이 그렇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것은…….
“……그러려던 게 아니야.”
설마 내 그 하찮은 속내를 네가 다 눈치챘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네가 그때 내 예상보다도 더 차갑게 나를 쳐냈던 이유가, 나의 그 하찮은 욕심과, 불만과, 희망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나는 정말 몰랐다. 그때는 말하면서도 나 또한 내 마음을 깨닫지 못했으니까.
‘와. 진짜 몰랐나 보네. 헤어질 때 니가 쌍욕조차 못 먹고 윤지호한테 지워진 이유가 그럼 뭐라고 생각했던 거야?’
내가 그 하찮고 치졸한 마음을 알아챘던 건, 너에게 버림받고 매일을 술로 지새다 갈갈이 찢기는 마음으로 힘겹게 마침표를 찍었던 때였다.
‘아. 그래.’
‘……아. 어?’
나 스스로도 그 순간에야 깨달았던 것인데, 너는 바로 단박에 그것을 눈치챘던 것이다. 심지어 내가 깨달았던 사소한 것 이상으로, 너는 나보다 더 깊이 내 본질을 꿰뚫어 보았다.
그 사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슬프고, 죽도록 원망스러웠다.
네가 아닌, 내 자신이.
눈물이 멈추지 않고 주륵주륵 볼을 타고 내려왔다. 지나칠 정도로 잔뜩 쏟아져 내려 거추장스러웠지만 그 눈물을 닦지 않았다.
정하나의 말처럼,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이었으니까.
얌전해진다 싶더니 눈물을 줄줄 흘리는 이로운을 보고 유해한이 슬며시 다가왔다.
그는 뒤집어진 소파를 되돌려서는, 솜이 다 튀어나왔지만 그래도 앉을 수 있다는 걸 확인하고 자리에 앉으며 말을 붙였다.
“좀 진정됐나 보네. 다 부수니까 속은 시원하냐?”
부순 건 네 통장에서 깔 것이다.
장난스럽긴 했지만 진심이 가득 들어간 말이었다. 그러나 이로운은 미동도 없었다.
진짜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하고 유해한은 분위기 전환이고 뭐고, 돌려 말할 것 없이 그냥 속 시원하게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했다.
“진짜 뭐 했냐. 너. 무슨 개 같은 짓을 했기에 그렇게 욕을 먹는 거야?”
사실 그는 모두가 이로운보다는 윤지호 편이라 다소 편파적일 수 있다는 계산도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없던 일을 만들어 비난할 수는 없을 거라 추측했다.
따라서 이로운이 욕을 먹어도 ‘넌 그럴 만하다.’라고 판단하게 할 사건 자체는 진실일 테니 뭔가 사고를 치긴 했다는 소린데.
대체 무슨 짓을 했는데 너조차 이 꼴이 되냐고, 뭘 알아야 뒤처리를 해 주고 싶어도 할 수 있지 않겠냐고 유해한이 다소 협박을 섞어 구슬리자, 이윽고 천천히 이로운의 입이 열렸다.
어차피 그도 누군가에게는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 결국 꺼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아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나는 딱 한 번 실수를 했어.”
아주 치명적인 실수를.
그때는 정말 몰랐었다. 그게 인생을 바꿀 실수란 것을.
* * *
“아. 진짜 이걸 그냥…….”
“뀨우?”
“어떡할까. 하람아. 진짜로.”
술자리가 있었던 그날 이후, 완전히 입장이 뒤바뀌었다.
전에는 내가 줄기차게 피해 다녔었는데, 이제는 지은 죄가 있으신 주인공님께서 나를 정말 열심히 피해 다니고 계신다.
심란해야 할 것은 이쪽인데 왜 지가 이렇게 줄기차게 도망 다니는 건지. 누가 보면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판국이라 어처구니가 없었다.
오죽하면 유라와 민혁이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혹시 한 대 패셨냐고 물어봤을 정도다. 그럴 만도 한 게, 간신히 마주치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뒷걸음질 치다가 삼십육계 줄행랑을 놓는데 오죽하겠는가.
물론 그런 적은 네버, 전혀 없었다. 약간…… 힘에 부쳐 내동댕이치긴 했지만.
하지만 그건 이해해 줘야 한다. 일코해야 하는데 어쩔 수 없잖아―!
내 필사적인 모습이 재밌었는지 성위님이 낄낄거리며 말하셨다.
[그게 충격적이었나 보지. 나를 이렇게 내동댕이친 여자는 네가 처음이야―! 하면서. 이거이거, 그 녀석에게 전부 다 처음인 영광스러운 여자 아니냐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낄낄거립니다.]
……거기에 담배까지 꼬나물고 있으면 넌 오늘부로 아웃이다.
비흡연자이다 못해 담배 혐오자가 악의를 듬뿍 담아 음산하게 선언하자, 내가 그럴 리가 있냐며 허겁지겁 말하는 모습이 딱 그러고 있다 걸린 꼬라지였다.
그래도 직접적으로 보지도 않았고, 증거도 없는 데다 성위님 꼬랑지는 말리게 했으니 이번만은 관대하게 넘어가기로 했다.
처음은 얼어 죽을. 그런 처음은 전혀 영광스럽지도 않거든?! 진짜 영광일 만한 건 아직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풋풋한 체리를 따먹었을 때나……. 이런.
나이에 맞게 성숙한 대답이 튀어나올 뻔한 걸 급하게 틀어막았다. 다른 의미로 일코 해제를 할 뻔했다.
하지만 또 이런 건 기가 막히게 잡아채는 성위님이 질색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남자에 관한 화신의 견해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안 그런 척하더니 역시 네가 진정한 알파라며 혀를 내두릅니다.]
……아 씨. 하여간 듣지 말라는 건 기가 막히게 잘 듣는다. 들으라는 건 안 들으면서.
그래도 이 생각을 안 게 성위님이라 다행이었다. 고작 술김에 말실수 좀 한 걸로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는 순진한 주인공님이 알아 봐라. 죄책감으로 그날 즉시 수치사다.
어쨌든 지금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집에 와서 하람이를 껴안고 그래도 괘씸해하며 이걸 어떻게 할까 음산하게 고민하는 것뿐이었다.
속이 터지고 답답하긴 하지만, 일코 중인 상태로 국내 랭킹 2위의 영웅을 잡는 건 무리였으니까.
여러모로 억울해 죽을 것 같았다. 정리해야 할 것도 많고 심란한 것도 이쪽인데. 진짜.
그러다 갑자기 또 그 말이 생각이 났다.
“……술. 술이 필요해.”
떠올리자마자 가슴이 묵직해져 술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술로 이 심란하고 묵직한 마음이 쑥 내려갔으면 했다.
홀짝―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아무리 그래도 무슨 혼자 위스키를 까서 스트레이트로 먹냐며 태클을 겁니다.]
“남이사.”
물론 단칼에 개무시했다. 지금은 성위님보다 내가 더 중요했으니까.
안주도 없이 로얄 살루트 38년산을 내리 네 잔 정도 마시자, 단번에 취기가 올라오면서 조금 살 것 같았다.
양주는 돈 아까워서 살 생각도 안 했었는데, 선물 받은 것이 이렇게 감사할 수 없었다. 고급스러운 맛은 느끼지도 못하겠고. 독한 것이 취기가 바로 확 돌아 아주 만족스러웠다.
며칠 전 소주 먹을 때 느꼈지만, 전혀 취기가 없어 새삼 내가 각성자라는 것을 실감했었다. 원래라면 세 잔쯤 넘어가면 그래도 술을 마셨다는 느낌이라도 들긴 하는데, 대체 이 몸이 취하려면 얼마나 처마셔야 하나……. 그냥 안 먹고 말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며칠도 안 돼서 술을 까고 있다니. 진짜 인생 헛산 느낌이 팍 들었다.
‘아니요. 좋아요.’
“…….”
그렇게 조심한다고 노력했지만, 방심하고 있던 것처럼.
나도 쉽게, 곧잘 하는 소리인데, 그 소리에 심장이 내려앉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주인공을 향한 독자의 애정으로서 하는 소리였지만, 당신은….
‘정말로, 말로 표현 못 할 만큼…… 좋아요.’
“아. 미치겠다.”
나쁜 마음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갖고 싶어질 것만 같다. 아마 당신이 유지한이 아니었다면, 당신이 이 세계의 주인공만 아니었다면…….
[유지한이 유지한이 아니었다면 바로 고민 없이 잡아먹었을 거냐고 ‘이매망량’ 님이 묻습니다.]
“……음.”
좀 생각이 필요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고민할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반사적으로 답을 하고 있었으니까.
“곧바로 멱살 잡고 키스했다.”
유지한은 그럴 만한 남자였으니까. 만약 유지한이 주인공이 아니었다면, 정말 거리낌 없이 당신을 사랑했을 것 같다.
어떻게 너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마음대로 계속해요. 무엇이든, 무슨 짓을 해도 좋아요…….’
내가 무엇을 해도 좋으니,
‘계속 보여 줘요……. 앞으로도…….’
계속 곁에 있어 달라고 말하는 그 남자를.
세상 모든 사람들이 결국 포기하지만, 항상 바라는 것일 터인데.
하지만 그 남자만큼은 안 됐다. 결국 ‘유지한’이고, 이 세계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빌어먹게도 변치 않는 진실이었으니까.
정말 다행인 건, 나는 애초에 안 되는 건 시작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시작조차 하지 않기에 힘들게 포기할 필요도 없었다.
별로 좋지 않은 행동방식이었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마음을 다치지 않으니 감사할 줄은 알았다.
씁쓸한 마음에 마저 한잔을 더 따라 그대로 원샷하려는데…….
띵동―
갑작스럽게 초인종이 울렸다.
“응? 누구지?”
시간이 자정을 막 넘어가고 있었기에 누구 올 사람이 없었다. 그래도 일단 확인은 해 봐야 하니 일어나 현관문을 열었다.
달칵―
“……저, 지호 씨. 들어가도 될까요?”
양반은 못 된다고.
유지한이었다. 내 골칫거리의 주범. 그 원흉이 갑자기 찾아와서 안으로 들어가길 청하고 있었다.
나는 술김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너 잘 걸렸다.
“들어와요.”
“실례하겠습니다.”
그렇게, 지한은 모르는 지옥의 문이 닫혔다. 본인이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것이니 선처는 없었다.
* * *
“집이 좀 어질러져 있어요. 아직 청소가 다 끝난 게 아니라서.”
사실 그렇다기보단 이사하고 나서 청소를 계속 미루고 미루다 보니 그 위에 점점 얹혀진 거지만, 그게 그거라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다.
다행히 속옷 같은 건 한곳에 다 몰아넣어 놨기 때문에 진짜로 못 볼 꼴을 보여주는 것은 면했다.
그렇다 보니 급하게 치울 것도 딱히 없어, 나는 편안히 유지한을 방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내 뒤를 졸졸 따라오는 하람이를 안아 들어 침대에 눕혔다.
“하람아. 먼저 자.”
“우우.”
“착하지.”
“뀨우…….”
하람이가 자기 먼저 자기 싫다고 칭얼댔지만, 그래도 애를 밤늦게까지 안 재울 수는 없었다.
완고한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불만스러워하면서도 하람이는 수긍한 듯 눈을 감았다. 그리고 투정 부렸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금방 잠들었다.
그렇게 하람이를 재우고 뒤를 돌아보는데, 어느새 내 단출한 술상을 보아버린 주인공님이 한소리를 하셨다.
“……술을…….”
마시고 있었냐고요. 안주 없이. 네 맞습니다. 이미 똑같은 타박을 한차례 받은 참이라, 더 들을 것도 없어 곧바로 한밤의 알콜 드링킹 사유를 밝혔다.
“누가 요즘 속을 썩여서요.”
누구 씨가 자꾸 내 얼굴이 핵무기라도 되는 것처럼 보자마자 도망 다니기도 하고.
“윽…….”
가감 없는 팩트 폭력에 주인공님께서 앓는 소리를 내셨다.
흥. 지도 잘못한 건 알긴 아나 보지? 콧방귀를 뀌어대자 주인공님이 순순히 사과해 왔다.
“죄송합니다. 그게…….”
“…….”
“그……. 제가…….”
이대로 놔두면 아주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기어들어 갈 것 같아, 그 꼴을 더 보기 싫어 내가 먼저 선수를 쳤다.
“필름 안 끊겨서 그랬겠지요. 뭐.”
뻔하지. 안 봐도 훤했다.
저 남자에게 다음 날 일어나 ‘나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라는 희대의 뻔뻔한 연기가 가능할 리가.
이불 킥이라고는 있는 대로 하다가, 간신히 추스르고 길드에 나와서도 연기는커녕 표정 관리도 안 돼서 결국 튀어 버렸을 것이다.
알긴 알지만, 그게 한두 번이 아니라 짜증이 돋았을 뿐이다. 아, 생각하니 울컥하네.
다시 자리를 잡고 마시던 잔에 로얄 살루트를 따르자, 더 마실 거냐는 얼굴로 주인공님이 경악했다. 그 얼굴이 너무나 웃겨 순간 마시려던 술잔을 놓칠 뻔했다.
“왜요. 한 잔 줘…… 아니, 실언. 잊어요. 빨리.”
레드 썬. 롸잇 나우.
가볍게 말하다가, 며칠 전의 재앙이 떠오르며 다시는 유지한에게 술을 먹이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말을 맺기 전에 재깍 바꿨다.
“…….”
그런 내 모습에, 지금까지도 이불 킥하다 나왔을 것이 분명한 유지한은 묘한 얼굴이 되었다. 본인도 마실 생각은 절대 없었겠지만, 내가 단호박같이 잘라내며 말을 무르자 반발심이 드는 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듯했다.
여기서 윤지우였으면 그 기분에 편승해 나도 마실 거라고 빽빽 소리를 질러 댔겠지만, 다행히 이 사람은 윤지우가 아니라 유지한이라 그러지는 않았다.
“앉아요. 아. 과일 먹을래요?”
과일이라고 해 봤자 배송비 안 붙이려고 추가한 커팅 파인애플 컵뿐이었지만, 그래도 과일은 과일이니까. 말이라도 최대한 있어 보이는 척을 했다.
냉장고에서 파인애플을 꺼내오자 유지한은 멍한 얼굴로 그것을 건네받았다.
“아……. 감사…… 합니다.”
그리고 뭐에 홀린 듯 포장을 뜯는데, 술 마신 건 난데 취한 건 이쪽인가 슬슬 의심이 되었다. 소주에 비하면 위스키가 몇 배는 알콜 도수가 높으니 설마 냄새만으로도 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나 이거 치워야 돼?
순간 격한 내적 갈등에 휩싸였다. 딴 술은 그 자리에서 다 먹어 치워야 한다는 지론이 있다 보니.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세상에 그딴 지론이 어디 있냐며 기막혀합니다.]
‘있어. 여기.’
술은 딴 다음에 다시 잠가 놓으면 그사이 알콜이 날아가서 술맛이 떨어진단 말이야.
나만 느끼는 걸 수도 있지만, 내 기분으로는 그랬다.
[매우 한심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럼 눈앞에서 넋 놓고 있는 머저리 얼른 보내고 마저 마시라 합니다.]
……그 머저리 지금 파인애플 먹고 있는데.
기계적으로 집어먹고 있어 맛은 알고 먹는 건지, 설마 그거에도 취하는지 물어볼까 싶었지만 괜히 무서워 건들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쪽은 이미 따른 술이 아까우니 먹자는 주의로 잔에 따른 술을 원샷 때리는데, 파인애플을 다 씹은 주인공님이 갑작스레 질문을 던졌다.
“……원래 이렇게 집에 함부로 들여보내 줍니까?”
“예?”
이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순간 넘어가던 술을 그대로 역류시킬 뻔했다.
와. 죽을 뻔했네. 아무리 나라도 도수 40도에 달하는 술이 코로 넘어가면 견딜 수 있을 리 없었다.
“갑자기 뭔 소리예요. 아. 깜짝이야.”
“……외간 남자 함부로 집에 들이는 거 아닙니다.”
쌍팔년도식 대사를 읊는 이 남자. 이 시대의 진정한 씹선비였다. 지가 들어와 놓고 하는 말 하곤……. 너무 어이가 없어, 심술이 솟구쳤다.
“유지한인데?”
본인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유지한을 그런 식으로는 경계한 적 없었다.
물론 이 세계에서 내게 제일 위험한 남자기도 했지만, 동시에 가장 안전한 남자였으니까. 한 번도 그 사실을 의심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나를 지켜 주겠다고 말하는 남자였으니까.
“……그, 그! 저라도……!”
“에이. 유지한인데. 그리고 약속도 했잖아요.”
“……?”
“지켜 준다며?”
“……!!”
장난스럽게 그날 일을 상기시켜 주자, 유지한의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그 순진하고 바보 같은 모습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푸하하하―! 아하하하!!”
결국 참다못해 상까지 두들겨가며 폭소를 터뜨리자, 새빨개진 얼굴의 유지한이 내가 마시던 잔을 그대로 빼앗아 술을 따르더니 시원하게 원샷해 버렸다.
“잠깐……! 그거 도수 40도…….”
황급히 말리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이제는 부끄러워서인지, 술에 취해서인지 모를 새빨개진 얼굴로 유지한이 외쳤다.
“기회 안 주잖아요! 이로운은 줄 거면서!”
“……이로운?”
갑자기 그 이름이 왜 나오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당황해 얼이 빠졌다.
그런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유지한은 술에 취한 있는 대로 제 속마음을 내지르겠다는 듯 작정하고 쌓였던 말들을 죄다 쏟아냈다.
“이로운은 갑자기 다른 인간처럼 싹 변해서 붙어 있는데, 말리지도 않고, 떼 내지도 않고……!”
“…….”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다정하게 얘기하고…….”
세상 다정함이 다 얼어 죽었나 보다. 그게 다정하게 얘기하는 거라고? 입에 칼침을 그렇게 박았었는데, 이 양반은 뭘 어떻게 들은 것인가 싶었다.
“내가 안고 있는데도, 나는 없는 사람 취급하고 둘만 딴 세상에 빠져 있고.”
“…….”
어쭈구리. 그래, 질러라. 질러.
이제는 해탈한 마음으로 뭐라 더 말하는지 지켜보자, 감정이 극에 달한 듯 서러운 얼굴로 유지한이 설움을 토해냈다.
“내가 궁금해하는 거 뻔히 알면서, 아무 말도 안 해 주고…….”
“……아니.”
그걸 굳이 말해야 할 필요가 있나?
물어 봐도 대답해 줄 생각이 없거니와, 알아서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아야 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나름 인생의 흑역사 중 하나였고, 세세한 감정은 다 잊었지만 그때 받았던 충격과 분노만큼은 가슴 한편에 확실하게 남아 있었으니 말이다.
“그날 술 마셨던 것도 이로운 때문이잖아요.”
……아니, 그건 진짜로 곱창에는 소주라 그런 건데. 그걸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구나.
“지금도 술 마신 거 사실 나 때문이 아니라 이로운 때문이죠……?”
“…….”
“아직도……. 이로운이…….”
너무나 신기했다. 어떻게 이걸 그렇게까지 오해할 수가 있는 거지?
이해할 수도 없고 그 생각을 따라갈 수도 없어서, 그저 눈앞에 있는 희귀동물을 신기하게 바라보다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하……. 하하하하―!”
“……?!”
그때 유지한이 술 취해서 그런 생난리를 피우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사람을 심란하게 만들지 않았더라면 나는 분명 술 마시면서 한편으론 이로운을 생각했을 것이다.
대가리에 총 맞았냐고 솔직한 마음을 시원하게 때려 박긴 했지만, 그래도 내 인생에서 가장 오래 사귀었던 남자이니만큼 찝찝함은 남아 있었을 테니까.
아마 그대로 놔뒀다면 조금은 답지 않게 과거의 기억을 들춰내며 우수에 젖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 지금 유지한이 말하기 전까진 난 단 한 번도, 이로운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하하하. 아 배 아파. 너무 웃었나 봐.”
전부 당신뿐이었다.
당신만 생각하느라 바빴다.
그 사실이 너무나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다.
“설마 내 흑역사인 전남친을 그렇게 해석할 줄이야. 이럴 때만 상상력이 아주 풍부하죠?”
“……흑역사요?”
“우리 길드장님이 이렇게 땅을 파고 계시니, 어쩔 수 없이 오픈을 해야 하나. 뭐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사실 엄청난 흑역사라고 할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냥 인생의 어느 지점에 한 점을 찍었을 뿐인, 그런 사건 정도.
“이로운은 말이에요……. 스토커였어요.”
“……네?!”
“차여도 계속 내 곁을 맴돌며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스토커.”
그리고, 그러다 결국, 그 스토커가 눈에 밟혀버렸다는……. 뭐 그런 흔해 빠진 이야기였다.
* * *
아, 언제였더라…….
오랜만에 과거를 뒤져보다 보니 생각보다 꽤 더 한참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아. 분명 그날이었다.
고3 때 봄. 당시 사귀었던 남친인지 병신인지 의심스러운 놈과 마침표를 찍던 날.
그때가 시작이었다.
“아 씨발 윤지호!”
이게 누구한테 욕질이야.
입에 걸레라도 문 것 같은 저 아가리를 확 털어버릴까 싶었지만, 어차피 오늘로 끝이었기에 넓은 마음으로 넘어가 주었다.
어차피 내다 버릴 거. 저거한테는 수고를 들이는 것도 아까웠다.
분명 저게 마음에 들었던 시기도 있었다.
사실 마음에 든다기보다는, 고백했고 고백을 받았으니 사귄 것에 가까웠다.
고등학교 때의 자신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잘 모르면서도 막연히 동경했어서, 고백받고 썩 나쁘지 않으면 일단 사귀어 보고는 했다.
그때는 뭐 다들 그러지 않는가.
하지만 벌써 저 때가 3번째의 실패인가 그랬을 거다.
처음에는 분명 나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도 넘은 욕심을 정당화시키려 하고, 그래놓고는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욕을 퍼부었다.
그렇게 먼저 떠나간 놈도 있었고, 합의 하에 헤어진 적도 있었고, 이번에는…….
“그냥 곱게 꺼져. 말하고 있기도 귀찮으니까.”
내가 먼저 내다 버리는 쪽이었다.
“뭐?”
“헤어지자고 그러는 거 아니었어? 헤어지자고. 됐지?”
그러니까 얼른 서로 갈 길 가자.
집에 가서 얼른 자고픈 마음이라 적당히 여기서 끝내자고 일갈하자 이제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놈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
아니, 지금 보면 슬픔인가. 그때는 어려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었다. 하지만 새삼 그놈이 그다음에 한 대사를 떠올려 보면 후자가 맞을 성싶었다.
“……날 사랑하긴 했어?”
“…….”
제가 생각해도 못된 년이긴 했다. 저 우수 어린 물음에 ‘저게 미쳤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것을 보면.
그러는 너는 날 사랑해서 욕하고 멋대로 휘두르려 한 거라고?
그래도 헛으로 사귄 건 아니었는지, 내 표정에서 대답을 읽은 놈은 그대로 돌아섰다.
그때 다짐했다.
“아. 지긋지긋해.”
당분간 내 인생에 연애는 없다.
이번에 아주 학을 떼서 당분간은 연애고 뭐고 그냥 편하게 놀고 싶었다. 그래서 당당히 연애 중단 선언을 하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아쉽네.
“……?!”
아주 불쌍하고 안쓰러운, 동정심이 샘솟는 얼굴과 목소리로 등장한 그 녀석은 정말 간만에 나를 당황시켰다.
그게 이로운과의 첫 만남이었다.
* * *
“누구시죠?”
“……네게 고백하려는 남자?”
……이 새끼 드라마 너무 본 거 아니야?
첫 만남은 황당 그 자체였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대답은 안 하고, 무슨 로맨스 드라마의 연하남이 심쿵 포인트를 노리고 하는 대사 같은 걸 날리고 있다니. 이게 뭐 하자는 건가 싶었다.
만약 똑같은 대사를 방금 전 이별한 전남친 같은 놈이 했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튀었겠지만, 이쪽은 보기만 해도 무해해 보이는 얼굴과 머뭇거리는 머저리 같은 행동이 차마 그럴 수 없게 했다.
먼 훗날의 누구 씨처럼.
“……개그 끝났죠? 그럼 이만.”
더 이상 여기 있으면 휘말릴 것 같아서 얼른 빠져나오려고 황급히 등을 돌리는데, 이로운이 내 교복 자락을 붙잡아왔다.
“……?”
“아직. 고백도, 안 했어.”
“…….”
너님은 고백을 예고하고 하시나요. 생전 처음 보는 얼빠진 행태에 진심으로 얼이 빠졌다. 저 한심하다 못해 넋 나간 반반한 면상만 아니라도 진작 한마디 해 줬을 것이다.
하지만 너는 마치 내가 그런 것에 약하다는 걸 알고 있는 듯, 철저하게 타이밍을 계산해 내가 뭐라 하지 못할 가련한 얼굴을 만들어냈다.
그때는 그것을 몰랐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모집 중이 아닌데요.”
나름 맘이 약해져서 곱게 거절을 하는데, 이로운은 머뭇거리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럼 친구부터.”
와, 끈질기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왜일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름.”
“응?”
“이름이 뭐냐고요.”
“이, 이로운! 이로운이라고 해.”
“……이로운?”
이름 한번…… 지같네. 그래도 얼굴은 정말 누가 봐도 세상에 이로운 얼굴이었다.
인정.
“근데 몇 살이에요?”
“……스물하나?”
“……미성년자를 노리다니. 변태.”
“……?! 아니야!!”
그 뒤로, 이로운은 계속해서 내 주변을 맴돌았다. 한번 보이기 시작하니 계속 보였다.
그건 이로운이 스토커짓을 한 것도 있지만, 애초에 서로 가까운 동네에서 살아 오가는 길이 잘 겹치는 탓도 있었다.
그렇게 한 번, 두 번, 세 번. 우리는 약속조차 하지 않았음에도 계속 마주쳤고.
“……정하나 이 썅년이……!”
“아, 잘못했다니까?”
“너 거기 안…… 웁―!”
“앗!!”
어쩌다 정하나와 추격전을 하다 그대로 이로운의 품에 부딪힌 적도 있었다.
“미안해요! 야! 너 거기 안 서!!”
바쁘게 돌아서며 다시 정하나를 잡으러 갔지만, 제 품 안에 떨어진 나를 보고 새빨개진 얼굴이 시선 끝에 언뜻 스쳐 가는 건 알았다.
한참 멀어져 뒤를 돌아보니, 이미 떠나가 버렸는데도 내가 안겼던 감촉을 곱씹으며 행복하게 웃고 있는 그는 솔직히 너무나 예뻤고, 사랑스러웠다.
“뭐야. 왜 맨날 봐요.”
“운명인가 봐.”
“이야. 멘트도 많이 발전했고.”
그렇게 그는 가랑비처럼 내게 스며들었고.
“커피 마실래?”
“응.”
“쿠키는?”
“응.”
“나랑 사귈래?”
“응.”
그러다 사기당했다.
“……응?”
“무르기 없기야. 분명히 대답했어.”
새빨갛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얼굴로 하는 협박은 정말 눈곱만큼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저걸 누가 협박이라 하나.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지만, 그래도…… 예뻤다. 그 호구같이 얼빠진 얼굴이 예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 정도면, 우리가 연인이 될 이유는 충분하지 않을까?
남자를 향해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도 처음이기에, 그거면 넘치다 못해 충분하다 여겼다.
“누가 무른대?”
“……네가 정말 좋아.”
너는 행복하게 웃었고, 그런 네 모습이 좋았으니. 당분간 연애는 하지 않겠다고 기껏 한 다짐을 저버려도 괜찮았다.
“이로운―!”
“왔어?”
우리는 행복한 연인이었다. 서로가 함께하는 시간은 행복했고, 즐거웠다. 3년이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그 흔하디흔한 싸움 한 번 해 본 적 없었다.
있다면 이 정도?
“아, 나 이거 먹을래!!”
“나 이거 못 먹어. 지호야.”
“왜? 어째서? 먹어보면 안 돼? 나 진짜 먹어보고 싶단 말이야.”
“싫어. 혼자 먹으면 안 돼?”
“그건 싫어!”
……그냥 생떼지만.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내 남친을 조금 곤란하게 만들고 싶다는 조금의 심술이었다.
우리에게 싸움이라고 해 봤자 내가 일방적으로 생떼 부리다 살짝 삐치는 정도일 뿐이었다. 그것도 다 반쯤 연기였고.
우리는 그렇게 잘 사귀었다.
“사랑해.”
“하하. 매번 들어도 낯간지러운데 좋네.”
오글거리는 말을 워낙 못해서 사랑한다는 말을 되돌려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마음을 표현했다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크나큰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고.
* * *
“깨달은 건 그 새끼가 입영 통지서가 날아왔다고 통보한 날이었어요.”
“……아. 이로운은 군대에서 각성한 케이스였죠.”
“그건 모르고요.”
관심이 없어서. 헤어진 전남친에게 무슨 관심이 그리도 많아서 따로 검색을 해 보겠나. 그 정도로 미련을 두지 않았다.
“어쨌든, 그래서 군대 가야 한다고 말하더라구요.”
사실 딱 가야 할 시기이긴 했다. 24살. 더 이상 미루기도 애매한 나이가 아닌가.
‘……군대?’
‘……응.’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긴 했지만, 기분은 참 이상했다. 어차피 가야 하는 것인데, 그래도 늘 함께 있던 이가 사라진다는 허전함 때문이었을까.
괜히 더 깊게 파고들어봤자, 괜히 마음만 심란해질까 봐, 더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 심란한 마음에 고개를 드는 순간, 보고 말았다. 온전히 내 반응을 읽기 위해 집중한 그 눈을.
그런 주제를 꺼내는데 당연한 게 아니냐 물을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 안에 들어 있던 감정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딥빡이 차오르네. 그 눈 안에 담겼던 게 뭔지 알아요?”
“…….”
“기대였어요.”
그래. ‘기대.’
내가 어떤 반응을 할지를 지켜보는 시선.
기대와 희망, 불안, 초조가 뒤섞인 그 눈동자를 보고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눈앞의 이 남자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3년. 3년이란 시간을 함께했는데도 그 개새끼는 제 감정이 더 크고, 저가 여전히 매달리며 그 관계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리고 혼자 지치고 불안해져 갔고.
배신감이 들 정도로 어이없는 착각이었다.
나는 매달린다고 해서 순순히 붙잡혀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는 멋대로 입영 신청까지 하면서 군대를 핑계로 나를 떠본 것이다.
너도 나를 사랑하냐고. 나를 사랑하긴 하냐고.
차라리 말로 물어보는 것이 낫지. 이 문제에 대해 내가 불안해하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으면서, 이렇게 나온다는 건 협박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제게 매달려야만 사랑하는 거라니.
최악이었다. 내 지난 3년이 이토록 허무하고 덧없을 수가 없었다.
아. 그 3년 동안 너는 너 혼자 연애를 한다고 생각했구나. 내가 보였던 애정과 감정은 전부 아무것도 아니었고.
네 눈에 나는 그 정도로 쓰레기였나.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아마 단언컨대, 인생에서 그렇게 차갑게 분노한 날은 없었을 것이다.
‘아. 그래.’
‘……아. 어?’
너무 분노하고 화가 나면 도리어 뭐라 소리칠 마음도 들지 않는다. 말도 섞기 싫었다.
그래서 그 말을 끝으로 이로운을 등졌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것 정도는 기가 막히게 잘 아는 병신이 등 뒤에서 절망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절망한 건 너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이상, 윤지호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때요. 별거 없죠?
그다지 좋은 얘기는 아니었기에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유지한이 멍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면서도 대답은 빠릿빠릿하게 했다.
아니, 뭐에 홀린 듯 말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네. 그러네요.”
“……?”
바라던 대답이긴 하지만, 본투비 매너남인 유지한이 할 법한 것은 아니었기에 조금 당혹스러웠다. 분명 ‘……아. 아니요.’라든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머뭇거리다 회피할 것이라 예상했었으니까.
그래도 듣기 나쁜 대답은 아니었기에 당황은 웃음으로 무마했다.
“그렇죠?”
“…….”
“그래놓고 지가 반갑냐고 물어보다니.”
상병신이죠. 그쯤이면.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세상 모든 여자들한테 한번 물어봐라. 모종의 이유로(사별했다던가, 멀리 떠나게 되었다거나), 헤어진 것이 아니라면 세상 어떤 여자가 전남친을 반가워할까.
좋게 헤어졌어도 다시 만나면 겁나게 어색하고 뭐라 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나머지 ‘이 새끼는 왜 만난 거야.’라고 생각하게 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적어도 살아오면서 그런 상황밖에 보지 못했던 나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다시 생각해도 열 받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계약자의 히스토리를 듣고 넌 뭐 그딴 놈이랑 3년이나 사귀었냐며, 그 성격에 무슨 생각으로 3년을 참았는지 어이없음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아. 몰라. 연기는 졸라 잘했어.
보기만 해도 믿음이 가는 이로운 얼굴에, 항상 얼빵하고 순진한 태도여서 나는 그게 원래 진짜 성격인 줄 알았다.
처음에는.
내 앞에서는 항상 그런 모습을 보이는데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귀고 나서 시간이 지나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틈틈이 보였다. 여전히 순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면서도, 그는 나를 제외한 타인에게는 언제나 잔인하고 냉정했다.
늘 주목받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환경에서 살았을 터이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가끔 지나치다 싶을 때가 있었다. 제게 보이는 행동과 태도 쪽이 가식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걸 깨닫기 시작하면서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나를 대할 때의 이로운을 보고 저게 미친 거 같다고 속삭이는 그의 지인들. 나랑 있을 때 다른 사람이 와도 개무시를 하거나 관심도 없이 오로지 내게만 집중하는 태도.
분명 여자친구 입장에서는 좋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기뻐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딱히 문제가 있었다는 건 아니었다.
‘……야. 이로운 성격 알아?’
‘아는데?’
‘아는데도 괜찮다고?’
‘나한테는 좋은 남친은 맞잖아.’
어쨌든 나한테 그는 좋은 남자였고, 언제나 좋은 남자이고 싶어 하는 남자였으니까. 그 마음은 고마웠고 소중했고, 솔직히 조금 많이, 나를 기쁘게 만들기도 했다.
어쩌면 그게 3년을 함께한 이유였던 걸지도 모른다.
사랑 언저리에, 갈 것 같았다가 결국 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너는 내가 만났던 그 어떤 사람보다 내게 맹목적이었고, 나는 그런 맹목적인 너에게 약했고, 너를 뿌리치지 못했으니까.
너는 그렇게 스며들었고, 내게 있어 너무나 당연한 사람이 되었었다. 네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연기를 하는 건 상관하지 않을 만큼.
그런 나를 배신한 건 너였다.
“누가 보면 내가 썅년인 줄 알겠어요.”
그런데 왜 지가 피해자인 것처럼 구는지, 그게 제일 기분이 더러웠다.
아까의 더러운 기분이 되새김질 돼 저도 모르게 있는 대로 얼굴을 구기자, 그런 나를 향해 유지한이 팔을 뻗어 왔다.
“아니에요.”
“……!”
“지호 씨는…… 잘못한 거 없어요.”
뺨에 살포시 얹어지는 손. 명백히 선을 넘는 행동이었다.
아니, 선은 넘어도 한참 전에, 이곳을 침범하겠다고 내게 허락을 구할 때부터 넘었던 건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가 나질 않으니, 내가 술에 취한 건지 아닌 건지 제대로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 취한 건 맞긴 한 것 같다.
“맞아요.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그럼요.”
언제나 내가 옳다고 말해 주는 이 남자에게.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해 주는 예쁜 남자에게.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 벼락처럼 깨달았지만, 누구를 위해서인지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었던 진실 하나를 입에 담았다.
“……유지한.”
“……응.”
“이 집을 고른 거, 고의지?”
지금이라면 무엇이든 용서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 내 마음을 읽었기 때문일까. 맑은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맞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응.”
“어째서?”
아마 대충 예상했으면서 물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틀리지 않다고 확인해 주듯,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주인공님은 선명히 답해 주셨다.
“……가까이서, 내가 지켜줄 수 있으니까.”
“…….”
“늘 당신이 날 지켜 주었지, 난 한 번도 지켜 주지 못했으니까…….”
“…….”
“가까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더, 당신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조곤조곤 내뱉어지는 진심들에 그만 나는 그의 뺨으로 손을 뻗으며 진심으로 탄식했다.
아아.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정말 주인공이 맞았다. 부정할 수 없는 이 세계의 주인공.
“……아직은 내가 당신을 지킬 날이 더 많은데?”
“노력해야지.”
이리도 맑고, 깨끗해, 눈이 부셔서…….
“……그래요. 꼭. 그런 날이 올 거야.”
누구라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니까.
* * *
“우음.”
어느새 잠이 든 것인가. 지한은 바닥에서 눈을 떴다.
비척거리며 일어난 그는 제가 만취한 사람처럼 바닥에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는 걸 깨닫고 붉어진 얼굴로 연신 마른세수했다.
심지어 선명히 떠오르는 건 간밤의 취중 고백이다. 술을 그렇게 마신 것도 아닌데. 취기가 도는 느낌조차 없었던 게 확실한데.
‘이게 무슨 망신이야…….’
다신 흑역사를 만들지 않겠다 늘 다짐하면서 어째 매번 흑역사를 꾸역꾸역 적립하는 것 같다.
취했다 아니다를 오가며 한껏 자괴감에 허우적거리는데, 그를 보다 못한 성위가 지한을 비꼬았다.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왜. 취하긴 취하지 않았느냐고, 그게 술이 아니라 그렇지. 라고 평하며 심드렁하게 귀를 후비적거립니다.]
“……아.”
그 말에 지한의 얼굴은 벌겋게 익다 못해 그냥 터져 버렸다.
성위의 말이 모두 맞았다. 취하기는 만취할 만큼 취하긴 했다.
윤지호한테.
술에 취한 윤지호는 정말 그녀에게 취할 수밖에 없을 만큼 너무나 독하고 달콤했다.
그래서일까, 지호가 화내지 않을 거라 확신한 다음부터는 평소라면 물어봐도 절대 보이지 않을 진심을 아주 줄줄이 내뱉어버리고 만 것이다.
‘왜. 아주 너 좋다고 광고를 하지.’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는 행각이었다.
“……죽자. 유지한.”
지금 한강 물 온도는 어떻더라?
생전 궁금하지도 않던 생활 지식을 궁금해하다 그냥 접싯물에 코 박고 죽자는 생각까지 이르는데…….
바삭―
소리가 들렸다. 명백히 나는 여기 있다고 알리는 소리가.
아무리 작다 한들 자신이 절대 못 알아챌 리 없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소리가.
“우음…….”
방금 전까지 한강물에 접싯물까지 찾았으면서, 그런 것은 까맣게 잊었는지 반사적으로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몸이 움직였다.
새근― 새근―
“…….”
침대 위, 남의 속은 잔뜩 시끄럽게 만들어 놓고 정작 장본인은 세상 만족스러운 얼굴로 잠에 빠져 있었다.
그게 새삼 억울해지려고 했지만, 결국 그는 작고 작은 원망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 모습조차 예뻐서.
이런 너조차 사랑해서.
“……이곳을 준 게 너를 화나게 했다고 해도, 나는 역시 잘한 것 같아.”
이렇게 편안히 잠든 너를 볼 수 있으니까.
이 모습 하나만으로도 너를 억지로 이곳에 들인 보람이 있었다. 아마 이런 내 생각을 알면 그때는 네가 정말로 화를 낼지 모르겠지만.
지호가 깨어날 수도 있겠다 생각하면서도, 깊이 잠들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변명을 하며 지한은 욕심껏 잠든 지호의 손에 살포시 자신의 손을 포갰다.
“나는 멍청한 이로운이랑은 달라.”
분에 넘치는 기회를 얻었으면서, 그 기회가 기회인지 모르고 제 욕심에 그걸 송두리째 날리는 짓 따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다.
“……움.”
“……!”
제 다짐을 들은 것일까. 지호가 겹친 손을 꼭 잡아 왔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가 더 빠르게 뛰었다.
마치 그렇게 하라며 그녀가 허락해 주는 것 같다고, 그저 잠결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사소한 것조차도 의미를 새길 수밖에 없었으니까.
겹친 손을 뒤집어 살포시 입을 맞추며 지한이 미소를 지었다.
슬프면서도 기쁘게.
벅차게 행복하면서도 애처로운 미소였다.
“……좋아해.”
비참할 만큼, 네가 좋아.
<랭킹 1위 탈환을 소망합니다>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