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홀로 이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건
“아, 지호 씨는……!”
넋이 나간 지한이 퍼뜩 원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는 번개처럼 벌떡 몸을 일으켜 다급하게 물었다.
머릿속을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잊어버릴 게 따로 있지, 어떻게 잊어도 이걸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잠시라도 그녀의 안위를 뒤로 미뤘다는 것을 스스로 이해도, 용납도 할 수 없었다.
당장 나가 죽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았지만, 일단 지금은 그런 것보다 먼저인 게 있었기에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지호를 찾았다. 그러자 그런 지한을 보며 유라가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아, 저기 그게…… 게이트는 ‘그분’께서 잘 닫아 주셨는데…… 사망자도, 생존자도 다 나왔고…….”
유라 성격에 자연스럽게 존칭을 쓰는 것도 충분히 신경 쓰이는 부분이었지만, 더 중요한 게 있었기 때문에 서둘러 유라를 독촉했다.
“왜. 뭔데? 뜸 들이지 말고!”
“아…… 그게…….”
지한의 독촉에도 유라는 계속 망설였다.
아주 나쁜 소식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게 좋은 소식이 맞는지도 헷갈려서.
유라가 계속 머뭇거리자, 점점 지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니 급기야 유라를 잡고 있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지한의 머릿속에서 점점 나쁜 생각이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마냥 좋은 소식이면 유라가 이렇게 꾸물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럼 뭐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인데.
지한은 지호에 한해서는 그 어떤 ‘문제’도 조용히 넘길 수 없는 남자였다.
“……제발 말해 줘.”
잠시의 시간도 초조함에 버틸 수 없는 지한이 빌 듯 애원했다.
거의 죽어 가는 듯 애절한 지한이 이상해 보일 법도 한데, 유라는 그런 쪽으로는 조금도 의문을 품지 않고, 그저 초조해하는 지한이 안쓰러워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알았어. 그게, 다들 나왔는데…….”
“…….”
“지호 씨가 없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지한이 얼빠진 얼굴을 보였다.
“……뭐?”
“아니, 그게… 게이트는 완전히 닫혀서 더 나올 사람이 없는데, 지호 씨는 없어서……. 아마 애초에 안 들어갔다거나 아니면…….”
게이트가 발생했을 때 벌어질 최악의 일.
말이 씨가 된다고, 거의 금기시되는 말을 꺼내자니 입이 안 떨어지는 유라를 대신해 하얗게 질린 얼굴의 지한이 말을 이었다.
“……게이트 안에 갇혔거나.”
절망과도 같이 토해지는 말에 지한은 땅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게이트 안에 갇힌다는 건 죽음의 선고와도 같았다.
그 어떤 위대한 헌터라도 벗어날 수 없는, 죽어서도 육체는 나갈 수 없는 감옥.
물론 매우 매우 희귀하고, 게이트가 생기고 지금까지 발생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헌터는 언제고 최악의 최악을 가정해야 하는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럴 리가 없어.”
그럴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 내가 ‘어떻게’ 곁에 둔 너인데.
‘……?’
어떻게?
“유지한!”
짝―!
정신을 화들짝 일깨우는 박수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방금 뭐였지.
알 수 없는 생각이 머릿속을 휙 스쳐 지나간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마치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그런 지한을 보며 어떻게 생각한 건지 유라가 황급히 그를 달래며 이리저리 말을 쏟아 내었다.
“저기, 일단 지우 군이 열심히 연락하고 있고, 신원 확인도 계속 진행 중이야. 그런 일은 진짜 로또 맞기보다 더 어려우니까……. 그냥 안 들어갔을 확률이 몇 배나 더 높은걸! 그러니까 걱정 마.”
유라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누군가 게이트에 갇힐 확률은 로또 확률보다 희박했고, 처음부터 출입하지 않았을 확률이 몇 배 수준이 아니라, 몇십 배가 높았다.
무엇보다, 그보다 그녀를 더 오래 봐 왔고 아마 더 아낄, 그녀의 피붙이가 열심히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다 하니 지한이 걱정할 건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어디 생각대로 되는 것이었던가.
심장이 버석거리며 몸에 힘이 쭉 빠지고 있었다.
너무 몸을 혹사한 데다 그 상태에 극도로 무리가 가는 스킬까지 썼으니, 그에 대한 리바운드인지, 아니면 그녀를 잃을 수도 있다는 극단적인 생각에 너무 무서워 공포에 질려 이러는 것인지 확실치 않았지만 지한에게는 둘 다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후자 쪽이 훨씬 겁이 났다.
만약 저 생각이 실제가 된다면…….
“더는 살고 싶지 않아질 테니까.”
네가 없는 이 세상이 무슨 가치가 있겠어.
“뭐?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이미 너와 함께하는 세상을 알아 버렸는데, 네가 없던 세상으로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돌아갈 바에는 기꺼이 죽음을 택하리라.
지한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조금의 위화감도 없이.
초점이 어긋난 생각이라 스스로도 의아함을 느낄 법함에도 지한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자연스러운 수순인 것처럼.
“유지한 너…….”
그제야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한 유라가, 지한을 유심히 바라보았지만, 당연히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지한은 그저 텅 빈 눈으로 근처에서 벌어지는 쌍욕의 현장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아니 윤지호 이 기집애는 휴대폰 두고 국 끓여 먹었나! 전화는 왜 안 받아! 분신처럼 달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냐고! 어디서 싸돌아다니길래 망할! 누가 이기나 해 보자고!”
매몰차게 연락 한번 닿지 않는 누군가에게 제대로 돌아 버린 윤지우가 휴대폰을 부여잡고 저주를 하듯 쌍욕을 퍼붓자, 주변인들이 조심히 슬금슬금 지우의 곁을 피했다.
자고로 돌아 버린 놈 근처에는 가지 않아야 하는 법이다. 불똥이 튈 수 있으니까.
그런 지우를 보며 지한은 멀어져 가려는 정신을 다잡았다.
눈앞이 금방이라도 하얗게 점멸될 것 같았다. 몸 상태 때문도 있었지만 지옥이 현실이 될 것 같은 공포감에.
그때. 갑자기 향기가 느껴졌다.
“……!”
절대 지한이 잊을 수 없는 향기가.
퍼뜩 고개를 들자, 멀리서 희미하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실루엣만 보여도 세상을 찬란하게 바꾸는 거 같은 그녀가.
“……뭐야. 이거 다 무슨 난리야?”
“실장님!”
“지호 씨!”
“윤지호―!!”
“환영 인사 왜 이리 격해? 뭔 큰일이라도 났었어?”
격환 환영 인사에 당황한 지호가 태연스럽게 묻자, 그 태연스러움에 열불이 뻗친 윤지우가 소리쳤다.
“너, 어디서 뭐 하고 왔어?!!”
느닷없는 고함에 지호가 반사적으로 귀를 막으며 짜증을 냈다.
“아, 왜 소리를 질러. 빵 사 가지고 집 가려고 했는데 왜.”
“……빵?”
“어. 먹고 싶어서 간만에 사러 갔다 왔다. 뭐가 문제야?”
스륵―
그제야 모두의 눈에 지호가 들고 있는 빵 봉지가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격전의 시간을 보냈던 그들에겐, 그 빵 봉지가 너무나 평화로움의 상징과도 같아 보여 오히려 모두 멍해졌다.
지우는 반사적으로 이미 뒷목을 잡았다.
그래도 참 다행스러운 일이라 그것에 위안 삼으며, 지우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맛있겠네…….”
온갖 회한이 다 담긴 것 같은 말에, 지호가 이건 도대체 왜 이러냐는 얼굴로 지우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기에 나오는, 태평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며 지한은 진심으로 안도했다.
아무 일도 없었구나. 정말 아무것도 겪지 않았구나.
다행이다.
마음을 푹 놓자, 그제야 미뤄 왔던 반동들이 한 번에 그를 덮쳐 왔다.
쿨럭―
“너!”
“유지한 헌터―!!”
“선배!!”
그의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쏟아져 나오는 피를 보면서 지한은 그제야 조금 반성이란 걸 했다. 이렇게 몸 상태가 안 좋았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결국 자신보다 그녀가 더 자신의 몸 상태를 잘 알았다니. 조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이 와중에도 그게 묘하게 기쁜 자신이 우습기도 하고.
‘……아.’
눈앞이 정말로 흐려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남들처럼 기절이란 걸 해 보는 듯했다.
그렇게 무심히 생각하는데,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나를 보고, 그녀는 걱정해 줄까……?
흐릿해진 시야를 최대한 집중해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제 눈에 비친 것은…….
“유지한―!!”
아. 이런 상황에 좀 미친 것 같지만. 조금 행복한 것 같았다.
* * *
와우. 갈수록 늘어가는 나의 연기력에 치얼스!
거짓말이 거의 습관이 되어 가다 보니 발연기에 발연기를 자랑하던 연기력도 일취월장한 것 같았다.
역시 빠르게 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빵집부터 달려가 빵을 사 온 게 신의 한 수였던 것 같다. 이 난리통에서도 정상 영업 하시던 빵집 사장님이 다했다고 볼 수 있다.
뭐니 뭐니해도 구라에는 적당히 현실성이 있어야 더 구라칠 맛이 짱짱하…….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어. 그거 아니야. 얼른 돌아오렴이라며 서둘러 재촉합니다.]
쳇. 기분 좀 내려 했더니 곧바로 초를 치는 성위님 덕택에 망했다. 죽어도 늘지 않던 연기력이 늘었다는데 기분 좀 내면 덧나나.
속으로 있는 힘껏 성위한테 투덜거렸다. 정작 상대는 콧방귀나 뀌어댔지만.
“그래. 맛있겠네…….”
뭐, 그래도 나에 대해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호적 메이트에게 통과를 받았으니 그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걸리면 귀찮아질 일이…… 어우 생각하기도 싫었다.
“넌 안 먹을 거였어?”
“……먹을 거야!”
파란만장한 하루였지만, 어떻게든 잘 넘겼으니 됐다고 나름 만족스러워했다.
결국은 다 잘됐으니까.
아. 멋대로 병원을 빠져나와 위험천만한 곳에 들어와 있는 힘껏 몸을 혹사시킨 누군가 빼고.
이제 저거 족칠 일이 남아 있었지? 1일 1포션형에 처해야지.
굳은 결심을 했지만 그래도 그뿐, 가벼운 마음이었다.
정말로, 단 한 번도 이런 일은 가정조차 하지 않았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떻게 감히 해 봤겠는가.
“유지한―!!”
너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 같은 걸.
* * *
재빠르게 달려가 지한을 받아 냈지만, 이미 반쯤 쓰러진 지한을 완벽히 받치는 것은 무리였다.
거의 같이 쓰러지는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머리는 부딪치지 않게 받았으니 다행이라는 생각만 했다.
“유지한 헌터!”
“누가 구급차, 아니 그… 그니까, 병원에 연락 좀 해 주세요!”
다른 사람도 아닌, 나라를 지탱하는 기둥이나 다름없는 인물이 쓰러지자, 모두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단 한 번도, 그가 쓰러질 거라는 가정 자체를 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그는, 대한민국의 모든 이들에게 영원히 쓰러지지 않는, 고고한 구원자와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게이트가 닫히고 나면 정해진 수순처럼 많은 헌터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장면이었음에도 버퍼링이 걸린 듯 누구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저 목석처럼 그를 껴안고만 있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놀란 건 알겠는데, 일단 정신 차리고 거기 고거 얼른 옮겨서 치료든 뭐든 해야 하지 않겠냐며 조심스럽게 달래 옵니다.]
보다 못한 성위의 만류에 그제서야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그래. 그래야지. 이대로 둬서는 안 되지.
불규칙하지만 숨은 착실히 쉬고 있었다.
그래. 여기서 이렇게 죽을 리가 없지. 주인공이잖아.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리가.
“윤지호. 괜찮아?”
“……어.”
꽈악―
그렇게 생각함에도 손이 떨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윤지우. 연락 좀 해. 병원에. 주치의 당장 대기시키고, 차보다 마법사가 빠르니까 백지 수표를 뿌려서라도 당장 이리로 오라고 해 줘.”
“어. 어. 어!”
“마. 마법사…… 그렇지! 여기 힐러 없나요?!”
“힐. 힐러. 그래. 잠시만요!!”
그래서 기계적으로 명령을 내리고, 사람들이 제 말에 따라 황급히 움직여, 마법사가 그와 자신을 병원으로 옮길 때까지, 나는 계속 지한을 꽉 붙들어 끌어안고만 있었다.
“이런 젠장! 혈액부터 달아. 그리고 센터에 연락해서 독촉하고, 마력 안정제부터 놓자. 서둘러!!”
“네. 선생님!”
“실장님, 이제 저희가 맡겠습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어디에도, 절대 보내 줄 수 없다는 듯이.
* * *
지한이 수술실로 향하고, 지호가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한참을 멍하니 수술실 앞에 앉아 있을 무렵.
세상은 뒤집어졌다.
『유지한 중태! 전선에서 물러나나……』
『현재 의식 불명. 원티드의 파업은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 벌인 것인가.』
『안전 적색경보. 유지한 헌터 건강 악화.』
『과도한 임무를 강요하고 대가도 치르지 않았던 정부에게 맹비난이 쏟아져……』
『유지한은 의식불명.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1위의 행보는……』
『대한민국은 이대로 무너지나. 도를 넘은 정부의 행태에 ‘무명’이 밝힌 자신의 행보는… 절망적.』
* * *
― 지관종이 드디어 해냈다.
― 언젠가 지관종이 해낼 줄 알았어.
― 지관종과 더불어 드디어 울나라가 해냄. 망한 헬조선.
― 진심 유지한 없으면 이제 우리 어케 삼?
― 그러게 망할 빈대ㅅㄲ들이 유지한이 구해줘도 내 집, 내 돈 어쩔거냐고 맨날 신나게 소리지르는 거나 다 틀어막지.. 정부가 못하니 이제는 새 1위. 왕님께서 하신다네? 이야. 끝내준다.
― ㅅㅂ 저 슈렉 팔 자르는 거 나만 안보임? 어떻게 자른건지 모르겠음. 양산 휘두른 것만 알겠네.
└ 삐빅― 정상임.
└ ㅇㅇ.
└ 더불어 저ㅅㄲ 좆됨.
└ 인생 폭망 ㅃ2
― 언니 사랑해요. 다 죽이자. 일단 저기 국회의사당에 있는 인간들부터 시작할까?
└ ㄴㄴ. 센터부터 시작해야함. 원래 고름은 끝에서부터 짜는거임.
― 팬클럽 만들러 간다.
└ 같이 가.
└ 22
― 필요하면 다 죽이겠다는 인간 보면서도 팬클럽 만들러 간다는 인성보소. 당장 가입간다.
└ 국룰이지.
└ 모든 건 여신님의 뜻대로.
└ 우리 왕님의 뜻대로지. ㅅㅂ 지리겠누.
― 그래서 우리 이제 어떻게 돼?
└ 1위님 마음대로지.
└ 그녀가 꼴리는대로.
└ 기도합시다. 모두 하나님을 믿으시면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고 천국과 함께하시며 모든 고난과 역경을...
└ 누가 저 기독교인지 사이비인지 모를 종교충 퇴치좀여.
모든 실검을 장악한 것도 모자라, 온 나라가 패닉이었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안전 불감증이라고 할 정도로 안전에는 무지하고 태평했다. 많은 헌터들이 그들의 안전을 위해 짐을 지고 있기도 했고, 무엇보다 기둥이자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자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던전이나 몬스터로 피해를 입어도 사망률은 세계에서 최하위. 건물 등 재산 피해는 어쩔 수 없지만,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꼽혔다.
그렇기에 국민들은 태평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터지면 헌터들이, 유지한이 해결해 줄 테니까. 이렇게 막연한 믿음을, 짐을 한 사람에게 지워 두고.
편하기 그지없었다. 피해를 입으면 그냥 지한을 욕하기만 하면 되었고, 그 호구 같은 유지한은 겸허히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만 했으니까.
덕분에 대한민국 정부는 더욱더 편하게 활개 치고 다니며 선동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이득을 취하며 국정을 운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막을 내리려 했다. 혜성처럼 등장한 한 사람에 의해.
“올 것이 왔구나 싶지만, 막상 이리되니 정말로 골치가 아프군.”
왜 하필 내 대에서 말이지…….
말년이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터진 대형 사고에 센터장, 장현무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자 그의 밑에 앉아 있던 이들이 몸을 움츠렸다. 지금은 저렇게 온화한 태도를 취하고 있지만, 저들의 보스는 매우 아수라 같은 남자라는 것을 몸소 깨우쳤으니까.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 회의장에서, 있는 대로 한숨을 내쉰 센터장이 적막을 깼다.
“영상 띄워 보지.”
“네.”
삑―
스크린에 화면이 띄워졌다.
지금 현재 대한민국을 뒤엎고 있는,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누군가의 모습이.
“헌터 스트리머 지현민이 생중계한 영상입니다. 워낙 인기 있던 스트리머고 생중계로 진행했기 때문에, 영상 차단은 불가했고, 현재도 일파만파로 퍼져 나가는 중입니다.”
“저 예쁜 얼굴로 폭탄을 던진 거군. 반응은.”
“일단 외모가 외모다 보니 불호보다는 호가 많습니다. 국민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인물이었고, 보다시피 외모도 훌륭하니까요. 모든 시너지가 더해져 그녀의 사상에 대해서도 분노와 불안감보다는 납득하는 분위기가 태반입니다.”
“……쯧.”
“아무래도 현재 월드 랭킹 1위의 심기를 건드려 봤자 좋을 것 없다는 심리도 그 밑에 깔려 있을 것이고, 덕분에 그녀가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정부에 대한 불신이 커져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더불어 하필 유지한 헌터 역시 중태에 빠져, 더 이상 자신들을 지켜 줄 방패막이 없다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는지 정부를 압박하는 여론이 거셉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그동안 유지한 헌터 한 사람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이미지 메이킹을 하다 보니 다른 S급이 있음에도 국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필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1위의 등장과 그가 보여 준 극단적인 행동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그간 헌터의 상징과도 같았던 2위가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지다니. 입이 열 개라도, 머리가 열 개라도 해결책 따위 나올 수가 없었다.
그동안 유지한 하나를 몰아세워 막대한 책임을 지운 만큼, 영웅의 부재는 너무나 타격이 컸다.
새로이 영웅이 되어 줘야 할 이는……당당하게 정부와 국민, 모두를 부정했고.
그러니 그간 선동당했던 국민들의 억울함은 당연히 정부를 향할 수밖에 없었다.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네.”
체념과도 같이 뱉어진 말에, 무거운 공기 사이로 누군가 입을 열었다.
“……어떤 연락입니까?”
“언제나 그랬듯 멍청한 소리지. 당장 유지한을 복귀시키라더군.”
“……의식 불명에 빠져 있는 헌터를, 말입니까?”
“헛소리지. 하지만 언제 그치들이 저들 맘에 안 드는 말에 듣는 시늉이라도 했던가.”
“…….”
최악의 소식이었다.
물론 유지한의 복귀가 현재는 최선의 수지만, 망가진 몸 상태로 현재 의식조차 찾지 못한 이를 무슨 수로 복귀시키는가. 의식을 차린다 해도 그가 다시 전과 같이 일선에 복귀해 줄까. 아무리 그가 호구라고 해도 그 지경까지 됐는데 전처럼 활동할까.
그의 호구 근성에 정부와 마찬가지로 덕을 실컷 본 그들이었지만, 입이 찢어진다 한들 아무도 자신 있게 답을 할 수 없었다.
그 생각을 훤히 읽은 센터장이 청심환을 입에 털어 넣고는 암울한 어조로 물었다.
“현재 원티드는 어떤 상태지?”
“파업으로 인해 휴가를 갔던 헌터들이 속속들이 귀국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들의 분노 역시도…….”
“알 만하군. 아주 미치겠어.”
그동안 곯아있던 고름이 한꺼번에 터지는 것 같았다.
그동안 대한민국이 곯을 대로 곯아 있었다는 것 정도는 장현무 역시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한때, 젊었을 때는 그것을 바꿔 보려 노력도 해 보았으나, 결국 깨달았다.
무언가를 바꾸는 건 새로운 분란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으며, 그럴 때마다 큰 소란과 분쟁이 벌어진다는 것을.
그래서 그는 시대에 순응했다. 때로는 필요악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그렇게 순응하며 살아와 이른 말년에, 이 모든 악을 그저 고름일 뿐이라 말하며 당연하다는 듯 도려내려는 이가 등장한 것이었다.
“젊은 데다 큰 힘을 얻은 김에 들떠 내지른 패기인가. 아니면…….”
진짜 왕의 대관식인가.
젊었을 적, 바랐지만 제힘이 부족해 포기했던 것이, 지금에서야 벌어지려는 것인지…….
어쨌든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결국은 시대가, 세상이 보여 줄 테니까.
“지금까지 원티드에게 미지급한 정산이 얼마지?”
“……계산 불가입니다.”
“진짜 다 죽어나는 꼴 보기 싫으면 그 정산금 가져다 쓴 인간들한테 좋게 말할 때 다 뱉어 내라 해. 지금은 제 몫 뺏길까 전전긍긍할 때가 아니야. 상대는 정말로 마음만 먹으면 국가고 뭐고 다 치우고 새롭게 세울 수 있는 자니까.”
“…….”
“그 정산 먼저 지급해 원티드를 달래고 더불어 일단 여론 과열부터 막도록 하지. 자네들도 먹은 게 있으면 다 뱉도록 해.”
“…….”
성의 표시는 우리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장현무의 말에 모두가 침울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저걸 보고서도 제 아집을 버리지 못하는 작태를 보며 장현무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일침을 놓았다.
“상대는 유지한 헌터의 말에 따르면, 모습도 바꿀 수 있고 본명뿐 아니라 능력치 불명, 모든 게 불명인데도 이 세계의 최강자라는 칭호를 단 자야. 목숨보다 돈이 소중하진 않겠지?”
“……알겠습니다.”
우리는 현재 그녀에게 어떻게 해서든 잘 보여야 하는 입장임을 자각하고. 우리가 언제 어떻게 슥삭― 당할지 알아. 저기 어떤 머저리처럼.
영상 속 팔이 잘린 머저리를 턱짓하며 일침을 박자, 마지못해 대답하던 자들의 얼굴에 공포가 스며들었다.
그제야 와닿기 시작한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설명해야 알아듣다니. 이런 골 빈 돼지들을 데리고 뭐 하는 건지……. 새삼 현타가 밀려 왔지만 꼭꼭 숨기고 인자한 얼굴로 당근을 던져 주는 척하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후……. 고생들 좀 하게. 정말로 이 나라의 끝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제 평생 이런 말을 뱉어 볼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한 적 없던 장현무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뱉어 냈다.
“정말이지…….”
새로운 별은 어떤 의미로든 언제나 폭풍을 불러온다.
* * *
“……윤지호.”
“…….”
윤지우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지호를 불렀다.
1인 특실이 아무리 넓다 한들, 의식 불명인 환자 한 명 빼고 단둘뿐인데 듣지 못할 터가 없음에도 지호는 답을 하지 않았다.
매정하게도 쳐다보지조차 않았다.
그렇다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한을 보살피는 것도, 연인처럼 손이라도 꼭 붙잡으면서 세상 온갖 걱정을 다 끌어안은 티를 내는 것도 아니었다.
지호는 그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가만히 지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사실 그냥 가만히 있는 것뿐임에도 윤지우는 그 고요한 모습이 두려웠다.
저런 윤지호는 윤지호답지 않아서.
시니컬하지만 아닌 척 늘 활동적인 제 누나는 정말 고요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렇게 가만히 있는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안 그러던 사람이 그러니 더 좌불안석이고, 한번 엇나가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윤지호를 알기에 윤지우가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찡찡거렸다.
“……누나야.”
“왜.”
그래도 제 동생의 우는소리는 무시할 수 없었는지 지호가 드디어 답을 해 줬다.
매우 퉁명하고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평소였으면 섭섭하다고 샤우팅을 빽― 내질렀겠지만, 지금은 그것도 감지덕지하게 느껴진 지우가 겨우 숨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계속 그러고 있으니까 무섭잖아. 이만 들어가. 너 잠도 안 자고 뭐 먹지도 않았어.”
뭐라도 일단 먹으러 가자. 아니면 사다 줄 테니까 말이라도 좀 해.
혈육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지우가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안달복달했다.
그런 혈육의 정을 생각해, 정말, 매우 귀찮았지만 지호는 나름 인심을 써 입을 열었다.
“지금은 건드리지 마. 생각 중이니까.”
“……무슨 생각?”
대체 뭘 생각하길래, 빵순이 윤지호가 저가 직접 골라 온 빵도 내팽개쳐 버릴 정도의 일이냐고, 윤지우의 순수한 물음에 지호가 더없이 음산한 아우라를 뽐냈다.
“누가 누가 있을까? 라는 생각.”
“누가 누가?”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 사람.”
윤지우가 조용히 지호를 따라 시선을 내렸다.
“……아.”
단박에 무슨 얘기인지 정확히 알아들은 윤지우가 단말마를 내뱉었다.
윤지호는 역시 윤지호였다. 걱정이 쑥 내려갔다. 전투를 준비하는 거라면 말릴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윤지호스럽게 잘 헤쳐 나갈 테니까.
이때는 오히려 걱정이랍시고 옆에서 귀찮게 하는 게 더 민폐였다. 평소라면 오히려 얼마나 큰일을 벌일지 조마조마했겠지만, 요즘 벌인 일이며 지한의 고구마를 다 경험한 상황에선 오히려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윤지우가 홀가분한 얼굴로 뒤를 돌아 걸음을 옮겼다. 걱정 하나 없는 얼굴로.
“어. 신입! 지호 씨는?”
“아. 멀쩡합니다. 방해하면 오히려 죽빵 날아올 수 있어요. 얼른 튀죠.”
오히려 눈치 보다 뒤늦게 병실로 들어온 유라와 민현을 도로 밀어내 내쫓기까지 했다.
방금 전까지는 그들보다 더 안절부절못했으면서, 잠시 자리를 비운 새 180도 바뀐 지우의 태도에 적응이 되지 않는 두 사람이 당황스러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며 다급하게 되물었다.
“뭐? 아니 무슨 소리…….”
“알아듣게 설명 좀 해 주시겠어요?”
그 말에 콧노래까지 부를 정도로 태평한 얼굴로 두 사람의 어깨를 잡고 함께 병실을 나서며 지우가 재치있게 답변했다.
“데스노트 작성 중이래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데스노트?”
이건 또 뭔 소리야?
도통 뭔 소리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두 사람이지만, 피는 속일 수 없는지 그런 그들의 의문을 해결해 줄 마음이 전혀 없는 윤지우는 서둘러 둘을 재촉했다.
“살생부 적을 때의 윤지호는 건드리는 거 아니에요.”
그 명부에 같이 작성되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거든요.
참고로 죽어도 그 명부에 들어가기는 싫은 지우가 남몰래 몸서리를 쳤다.
“자자. 얼른 갑시다.”
“어, 잠깐만?!”
“지우 군. 머리 괜찮은 거 맞죠?”
당연한 말씀을.
속으로 물음에 답변을 하다 문득 조금, 아주 조금, 의구심이 들었다.
길드장 같은 스타일에는 맥을 못 추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마음을 잘 주지 않는 윤지호였다. 그런데, 밥도 안 먹고 살생부를 짜며 하염없이 길드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너는, 무슨 마음으로…….
“밥 먹으러 가죠.”
“……에?”
아주 사소한 의문이었다.
* * *
“나가야겠어.”
윤지우가 나가고 나서도 한참을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발작을 일으키듯 몸을 일으키며 선언했다.
말없이 갑자기 뛰쳐나가자 내 급발진에 당황한 성위가 다급하게 말을 걸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갑자기 어딜 그렇게 튀어 가냐고, 드디어 배가 고픈 거냐고 밥 먹으러 가냐고. 아니 그런 거면 일단 잠부터 자야 하지 않냐며 횡설수설 말합니다.]
성위의 말은 틀린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다 맞는 말이었지만 답하지 않았다. 답은 나도 모르니까.
그냥 튀어 나가고 싶었다. 이곳을 뜨고 싶었다. 망할 사슬 같은 것이 날 옥죄는 것만 같아서, 발악하듯 뛰어나온 것이다. 잡혀 줄 생각은 추호도 없고, 잡혀서도 안 될 것 같았으니까.
미친 듯이 달렸다.
“하아. 하아.”
시원한 바람이 뺨을 때렸다. 머릿속도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대로 계속 달리고 싶었다.
헌터로 각성한 덕분인지 3분만 달려도 기브업이던 몸은 몇 분을 달려도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하기만 했다.
어디로 갈지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달리다 멈추고 보니, 산이었다.
“……하하. 완벽하게 돌았나 보네.”
높은 곳에 올라가고 싶었던 건가?
고소공포증이라 높은 건 싫어하지만 산 정상은 좋아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등산을 끔찍하게 싫어해 구경도 안 갔는데…… 어쩌다 여기 있는 것인지.
무슨 생각으로 달렸는지 모르겠는데, 그래도 막상 정상의 풍경을 보니 좋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맑은 밤하늘이 참 예뻤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이제 기분 좀 좋아졌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성위가 물었다. 나는 단호하게 답할 수 있었다.
‘아니.’
밤하늘은 참 예뻤다,
누구 씨가 그렇게 쓰러져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있는데, 여전히 원망스러우리만치 밤하늘은 너무나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그게 싫었다.
이곳은…… ‘네’ 세계인데. 어째서.
“……용납이 안 돼.”
다 부셔 버리고 싶을 만큼. 그 마음이 들리기라도 한 것일까.
[윤지호. 뒤!!]
이변이 일어났다.
“뭐……?!?”
갑작스러운 성위의 진언에 놀라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일은 터져 버렸다.
쉬이익―
바로 등 뒤에 나타난 블랙홀 같은 것이 나를 빨아들였다.
“아 놔.”
그리고 그 결과는 당연히…….
【히든 던전에 입성하셨습니다.】
【정식 랭크가 책정되지 않는 던전입니다.】
【어떤 용도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는 던전입니다.】
【행동에 각별히 유의하여 주십시오.】
“…….”
정말 성의 없는 알림에 이제는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해탈한 것 같았다.
던전에 용도가 있을 수 있다는 건 오늘 처음 안 거 같은데……. 참 좋은 거 이제야 알려 준다 싶었다.
쥐뿔 도움도 안 되는 망할 시스템 같으니라고.
【귀하의 언행에 주의해 주십시오. 언제나 귀하를 생각합니다.】
“얼씨구.”
그 와중에 저 욕하는 건 기가 막히게 잘 알아들은 시스템이 섭섭함을 토로했다. 정말 이게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그나마 나보다 진실에 가까이 있을 존재를 추궁하자, 억울하다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저거의 정체를 순진한 나님이 어떻게 아냐고, 화신은 내 순수함을 알아달라! 억울함을 가득 담아 항의합니다.]
[내가 너한테 숨길 게 무엇이 있겠느냐며, 사랑에 빠진 남자가 애원하듯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그리고, 성위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자는 생각했다.
‘……글쎄. 졸라게 많은 것 같은데.’
성위가 들으면 억울하다며 뒤집어질 소리였다. (물론 실제로 그러고 있었다.)
뭐, 그냥 매도하려는 소리는 아니었다.
감이 말해 주는 것도 분명 있었지만, 확실히 느끼고 있었으니까. 너무나 당연하게 내게 많은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면서도 중요한 것은 숨기는 것 같은 태도도, 전부.
이렇게 엄청난 힘을 내어 주는 것으로 봐서 일반적인 급의 성위는 아닐 것이 분명하건만, 자신의 격은 숨길 생각이 없으면서 그런 존재가 시스템에 대해 모를 리가 없는데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이라든가.
그래서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긴 했다. 시스템에 관한 것쯤은 예고 정도고 아마 더 큰 ‘무언가’를 숨기고 있을 거라는 걸.
그래서 조금씩, 시스템을 핑계로 성위를 추궁하면서, 기회를 엿보려는 거였다.
대놓고 물을 수도 있었지만 그 숨기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는 이상, 내가 무엇을 물어보든 분명 계속 그는 발뺌할 것이고, 그가 이렇게 감추려는 것을 보면. 혹시나…… 내가 감당하지 못할 진실일까 봐. 묻지 못했다.
감당하지 못할 진실은 모르니만 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구룩, 구룩, 구룩.
안 그래도 복잡한 마음인데 심란한 생각까지 더해져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밑바닥을 달리고 있건만, 그런 나를 위해서라는 듯 몬스터 떼가 우글우글 다가왔다.
푸우룩― 후우우―
소름 끼치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것.
일반인이 들었으면 그대로 숨이 꼴까닥 넘어가 기절할 것 같은 소리였다. 징그러운 것을 제일 극혐하는 나로서도 원래라면 질색을 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야 힘숨찐 일반인. 이 구역의 미친년답게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아. 잘됐다.”
기분 전환에 제격이겠어.
내게는 환영인 일이었고, 몬스터에게는 재앙인 일이었다. 뭐, 하지만 불쌍한 마음 따윈 요만큼도 들지 않았다.
【스킬: 사신의 낫(S)을 활성화합니다.】
【산 자부터 죽은 자, 영혼까지 베어 버릴 수 있는 무기입니다. 사용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킬: 얼음의 심장(S)이 활성화됩니다.】
【시전자의 안위를 지킴과 동시에 시전자의 향후 성정에도 영향이 갈 수 있으므로 과도한 스킬 사용에는 주의해 주십시오.】
사용한 스킬은 딱 두 개.
수백 개의 가면은 사용하지 않았다. 오늘은 가면을 쓰고, 다른 인물이 되어 써는 게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썰어 버리고 싶었으니까.
썰고 썰어, 이 거지 같은 기분까지 썰어 버리고 싶었다.
손수 얼음의 심장을 튼 것은 그 때문이었다. 원래의 성격 때문에, 망설일까 봐. 썰고도 두려움이 들어 제대로 썰지 못할까 봐.
“아. 최고야.”
스킬이 발동되니 잔혹한 고양감이 나를 덮쳤다.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슥삭― 촤아아악.
“쿠어어어어―!”
“푸륵―!!”
“구억?!!”
마력을 전면으로 개방해, 몸을 강화시켜 바람과도 같이 움직이며 오크의 다리를 썰고, 고블린 같이 생긴 것의 머리를 썰고, 박쥐의 날개를 찢어 내렸다.
온갖 종류의 몬스터의 비명이 끔찍하게 던전 안에 울려 퍼졌지만, 휘두르는 낫의 속도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하. 하하하하!!”
정말 신나게 썰고 썰었다.
숫자조차 세기 힘들 만큼, 거의 수백의 몬스터 사체가 사방에 쌓였다.
그렇게 미친 듯이 날뛰고 나니 미친 건지 뭔지는 헷갈렸지만, 어쨌든 기분은 좀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스트레스를 푸는 것은 좋지만, 괜찮으냐 걱정스레 묻습니다.]
이런 나를 보며 성위는 걱정을 했지만.
성위의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몬스터를 박멸할 기세로 잔혹하게 쓸어 버리며, 조금 그런 생각을 했다.
강한 사람이. 조금 더 강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런 생각. 멍청하고 한심한 내 별인 당신이,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도록.
아마, 당신은 내가 아무리 더 강해진다 하더라도 언제까지고 쓸데없이 걱정할 것 같긴 했지만.
“끼에에엑―!!”
마지막 몬스터를 썰어 내리자, 내 등 뒤로 몬스터들의 피로 이루어진 사체 바다가 펼쳐졌다.
아무리 스킬을 켰다고 하더라도 그런 징그러운 장면은 별로 눈에 담고 싶지 않아, 루팅도 때려치웠다. 돈이 아쉬운 것도, 아이템이 아쉬운 것도 아니었으니.
“하아.”
그래도 신나게 미친년처럼 날뛰고 나니, 좀 시원해졌다.
몸은.
마음도 시원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라는 것을 마지막 몬스터를 도륙낸 뒤 깨닫고 말았다.
“아. 짜증 나.”
결국 이렇게까지 해도 여전히 글러먹은 기분에 빡이 쳐 머리를 쓸어올리는데, 눈앞에 문이 나타났다.
‘이 던전의 이유’라고 말하는 것 같은.
터벅터벅―
나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이곳을 빠져나가려면 들어가야 하기도 했거니와, 무서울 것도, 무서워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았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들어가니 그곳은 마치, 음 에덴과도 같은 곳이었다. 신선한 동산 같은 느낌?
온통 새하얀 나무 한 그루와 잔디만 있는 공간이었다. 고요한 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나무가 너무나 특이해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나 꺾어 가면 안 되겠지?”
가지 하나 가지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왠지 그러면 저주받을 것 같았다.
왜, 소설에 자주 나오지 않는가. 세계수를 꺾으면 안 좋은 일이 벌어진다든가 뭐 그런.
온통 새하얘서 그런가, 진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세계수 같은 느낌이었다. 뭐,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손대서는 안 되는 신성한 나무인 건 별반 차이 없을 터였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나무 쪽으로 가까이 가는데…….
“……아이?”
웬 아이가 하나 쪼그려 앉아 있었다.
뭘 지키거나, 특별한 역할을 하는 아이는 아닌 것 같았다. 그냥 지독한 외로움에 절어 있는 것 같은 아이가 빼꼼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인간?”
“그렇지?”
아닌 것처럼 보이냐 쏘아붙일 뻔했지만, 그래도 너무 어려 보이는 아이라 어른의 마음으로 참았다.
그리고 고민하다, 이왕 미친 김에 온갖 선심을 끌어모아 아이에게 물었다.
“왜 여기 있니?”
“…….”
아이는 답하지 않았다.
답할 수 없는 이유가 있을 수도 있었기에, 괜히 더 물었다가 엮일 수도 있을 거 같아 더 묻지 않았다.
내 선심은 딱 거기까지였다.
“오. 열매다. 별님. 나 저거 먹어도 돼?”
[드디어 먹을 걸 찾냐고 기뻐하면서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못 먹는 거라도 먹을 수 있게 만들어 줄 테니까 얼른 먹기나 하라며 감격스러워합니다.]
……나 그렇게 안 먹었나?
사실 기억이 거의 휘발된 거나 다름없는 상태라 조금 얼떨떨했다. 어쨌든 성위의 말도 있으니 열매로 손을 올리는데,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거, 못 따.”
“왜?”
“……나는 못 땄으니까.”
시무룩한 걸 넘어, 아예 인생조차 놓아 버린 것 같은 무채색의 빛을 띠는 아이의 말에 순간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일단 이곳에 있다는 것부터 평범한 아이일 리 없었고, 내뿜는 분위기로 보아 인간인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런데도, 저 희망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얼굴은, 아무리 그 사실을 주지시키며 되뇌어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제 팔자 제가 꼬고 있었다.
‘별님. 나 저거 못 따?’
혹시 몰라, 먼저 별님에게 확인을 하자,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 내 사랑을 듬뿍 받는 자긔가 고작 저런 걸 못 딸 리가 없지 않냐고 자신만만하게 콧대를 높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답하는 성위의 답을 듣고, 한껏 비꼼을 가득 담아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향해 말했다.
“그래? 나는 딸 수 있는데?”
“…….”
“왜, 저게 가지고 싶니?”
가지고 싶다 말하면, 얼마든지 줄 수 있다는 투로 말하자, 아이 주제에 솔직하게 갖고 싶다 말하면 될 것을 그저 빤히 나를 올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이다운 구석은 하나도 없는 꼬맹이였다.
그래도 나는 마음 넓은 어른이니까 가만히 꼬마의 답을 기다려 주었다.
……는 사실 핑계고, 그냥 고집이었다.
바라는 게 뭐일지는 대충 감이 잡히는데 그렇다고 꼬마의 되지도 않는 고집에 져 주기도 싫어서.
“……?”
“응?”
얼마의 정적이 우리를 감싸 안았을까.
아이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자그마한 눈에, 처음으로 자그마한 희망이란 단어를 눈에 담으며.
“……가질 수 있어?”
“네가 바란다면.”
그게 무어 그리 어려운 것이라고.
자신 있게 손을 뻗어, 열매를 손에 쥐었다.
자기는 딸 수 없다던 절망 어린 말과는 전혀 다르게 열매는 내 손이 닿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내 손아귀로 떨어졌다. 처음부터 내 것이라는 것처럼.
나는 그걸 그대로 아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주는 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뭐 그리 대단한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고, 그렇다고 배가 그렇게 고픈 것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저 빌어먹게도 처연한 표정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자꾸 누구를 생각나게 하는 것 같아서.
“네 거야.”
“……내 것.”
손에 쥐여 준 열매를 꼭 쥐며 아이는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뱉어 냈다.
난생처음 제 것이 생겼다는 듯,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새기려는 것처럼.
그것이 왜인지 모르게 가슴을 아려 오게 해, 답지 않게 물었다.
“여기 계속 있었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니?”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응?”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에 솔직하게 심정을 그대로 표하자, 아이가 열매를 바라보면서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난, 버려졌으니까.”
“……뭐?”
“이 열매는…… 가질 수 있었다면 뭔가 달라질까 싶었던 것뿐. 근데 못 가졌어. 그뿐이야.”
당연하게.
뒷말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아 뒷목을 잡을 뻔했다. 누구 못지않게 답답해 가지곤 사람을 빡치게 하는 데 도가 튼 애였다.
그래도 그게 버려졌다는 이 아이의 잘못은 아니어서,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아이에게 물었다.
“그래서, 계속 여기 있을 거니?”
“…….”
아이는 답하지 않았다. 그 결정권은 자기에게 없다는 것처럼. 정말 누구처럼 스팀을 올리는 재주가 있는 녀석이었다.
어차피 답도 하지 않겠다. 세차게 등을 돌렸다.
저 아이를 온전히 책임져 줄 게 아닌 이상 어설프게 손을 뻗는 것은 오히려 죄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어떤 한 생명을 책임지기에, 나는 이미 지켜 주기로 한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그러니까 여기에 무엇이든 더 얹을 여유가 없…….
터벅터벅―
“후. 아이야. 내가 미친 김에, 그냥 미친 짓 한 번 더 해 보려 해. 단 한 번만 물어볼 거야.”
“……?”
“갈 곳이 없으면, 나와 가겠니?”
“……!!”
내 말에 믿을 수 없다는 듯 아이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와 동시에 성위님도 똑같이 날뛰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아니 미쳐도 이렇게 급발진하기 있냐고, 저거 진짜 주워 갈 거냐고. 뭔 줄 알고 주워 가냐고 벌떡 일어나 소리칩니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미쳤다 싶었다.
성위님 말대로 이 녀석이 뭔줄 알고 주워 간다고 하는 걸까. 제 코가 석 자인데.
그러니까 미친 짓이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에서 버려진 것 같이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이 아이가 너무나 신경 쓰여, 도무지 그냥 두고 갈 수 없었다.
“…….”
물론 두 번 물어볼 정도로 내 양심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아이는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못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여기 계속 있을 거냐는 말에도 뭔가 걸리는 듯 자기 뜻대로 답 하나 못했던 아이니까.
그런 아이가 가엽기는 했지만, 내 친절은 딱 거기까지였다. 이미 미친 짓이라 할 정도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넘는 친절을 그 아이에게 주었다.
“……그래.”
답하지 않는 것도 이 아이의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존중해 주어야지. 덕분에 홀가분하게 이곳을 나갈 수도 있었다.
열매를 따는 것이 조건이었는지 출구가 열렸다. 그곳으로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려는데.
덥석―
“……?”
무언가 발에 걸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여전히 입을 열지 않고 있는 아이가 내 다리를 꼭 부여잡고 있었다.
……이게 아이 나름대로의 표현인 것 같았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
묵직하게 내 다리를 잡고 있는 아이의 무게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아이가 이렇게 용기를 내었는데, 어떻게 그 용기를 저버릴 수 있을까. 네가 무엇이든 내게는 큰 의미가 없을 터이니 네 존재는 개의치 않았다.
쏴아아―
그런 생각을 알아차린 듯 아이의 외형이 변했다.
“……이건.”
어린 흰 표범? 줄무늬 고양이?
너무 어려 판별은 어렵지만 고양이과 같은 느낌이었다. 어린 개체답게 치명적인 귀여움으로 무장한 채 네 발로 내 다리를 꼭 안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온갖 사랑스러움이 몰려왔다.
미친 짓이긴 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허리를 숙여, 어린 고양이를 품에 안았다.
“마침 키우고 싶었는데 잘됐네.”
살살 등을 어루만져 주며 안심시켜 주듯 말하자, 어린 고양이가 내 품 안에 얼굴을 묻은 채 두 발로 내 옷을 꼭 껴안았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내 품에 파고들 듯.
마치 우는 것 같은 그 아이의 등을, 토닥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참. 이름이 뭐니?”
“……없어.”
제 이름도 담담하게 없다는 아이를 보고, 대체 이 아이 부모는 어떤 새끼인가 면상이 조금 궁금해졌지만, 아이를 생각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럼 하람으로 하자.”
하람(昰㛦).
이름처럼 옳고 예쁜 삶을 살아가길.
내 품에 있는 동안은, 그리 살아가 주길. 너만이라도.
‘……아.’
그제야 나는 이 아이를 왜 저버리지 못하는 이유를 깨달았다.
이 아이는 망할 바보를 닮았다. 아마 내가 보지 못했을 그 망할 바보의 유년 시절은, 분명 이랬을 테니까.
아아. 결국 돌고 돌아 다시 그 바보였다.
“……후우.”
질릴 정도로, 구제 불능이었다.
* * *
“꺄앙.”
“하람아. 쉿. 피곤하면 자도 돼.”
이제 막 세상으로 나와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피곤한지, 몇 번 꼼지락거리다 결국 잠이 든 하람이를 품에 안은 채.
결국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온 나는 하염없이 주인공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단지 바라만 보고만 있을 뿐.
스스로 생각해도 진짜 좀 미친 것 같다.
먹을 거라고는 환장하던 인간인데, 물 한 모금도 생각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렇게 신나게 움직이기까지 했는데 배는 고프지 않았고, 졸리지도 않았다.
사람이라면 그러고 싶지 않아도 들 수밖에 없는 기본적인 욕구가 전혀 들지 않다니. 이것도 각성의 영향인가.
아니, 그런 것치고는 나는 각성하고서도 여전히 미친 듯 잘 먹었는데…….
잠깐 딴생각을 하다가도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다.
대체 이 남자는 왜 이딴 꼴을 하면서까지…….
‘……후.’
또다시 백만 번째쯤 되는 생각을 하자, 보다 못한 성위가 말을 걸어 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아 진짜 지겹지도 않냐고. 생각해 봤자 답도 안 나오고 이해도 못 하니 너답게 그냥 포기하고 제발 퍼질러 자라고 샤우팅을 내지릅니다.]
[각성한 후라 어느 정도 식욕과 수면욕을 조절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계속 그렇게 있으면 몸 상한다고 안절부절못하며 타박을 줍니다.]
아. 그래. 네가 있었지.
여태 조용하다 활기차게 돌아온 성위님 덕에 정신이 조금 들었다. 계속 왜 이러고 있나. 라는 현타도 좀 밀려 오고.
사실 그건 아까부터 밀려 오고 있긴 했다.
‘……왜, 웃었어…?’
잊을 수 없던 그 미소가 너무나 강렬해, 금세 지워졌을 뿐.
계속 망부석처럼 이 자리를 떠나지 못하던 이유가 그것이었다. 어찌 보면 정말 별거 아닌 이유긴 했다.
‘쿨럭―’
‘유지한―!!!’
유지한이 쓰러지는 순간, 그가 정신을 잃기 전.
내 외침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타이밍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확히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는…… 웃었다. 너무나 행복한 얼굴로. 더 바랄 것이라고는 추호도 없다는 얼굴로.
그 미소가 눈에 박히는 순간,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분명히 그 자신도 이런 일로 죽지는 않을 것이란 걸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아직은 세상이, 그를 놔줄 턱이 없었으니까. 아직 그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봐야 할 그의 성위도 마찬가지였고.
더군다나, 그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었다.
이렇게 원래의 ‘예정’과 반대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리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와 가슴은 반대였나 보다. 너무나 잘 알지만, 그 미소를 보는 순간, 덜컥― 무서워졌으니까.
‘……지호 씨!’
‘그건 지호 씨가…….’
언제나, 마치 처음 부르는 것처럼 수줍게 내 이름을 부르던 당신이.
‘……반가워요.’
‘어서 와요.’
한참을 쭈뼛거리다, 설익은 풋사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를 하던 당신이…….
더는 없을까 봐.
“참 이상하지. 내가 진짜 돌아 버렸나 봐.”
보면 얼마나 봤다고. 만나면 얼마나 만났다고.
겁이 났다.
인생에서 그렇게 겁이 난 적이 없었다. 자신할 수 있었다. 적막과 함께 드디어 솔직하게도 때늦은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 무서웠어.”
……당신이 없을 이 세상이.
당신이 없고 나 혼자 남겨진 이 세계가.
그 순간 벼락처럼 깨달을 수 있었다. 소설 속에 들어와, 온갖 말도 안 되는 일을 보고 겪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현실보다 더 자유롭고 마음껏 행동할 수 있었던 이유를.
바로 ‘당신’이었다.
<랭킹 1위에 대한 고찰>.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주인공인 당신이 있기 때문에, 모든 걸 편하게 묻어 둘 수 있었다. 당신의 존재 덕에 마음 편히 이 세계에 발을 붙일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내 기둥이었다.
주인공인 당신이 없는 이 세계는, 더 이상 내가 아는 세계가 아니니까.
홀로 이 세계를 살아간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너무나, 너무나 무서웠다. 세상에 그것보다 무서운 건 없으리라.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것 하나 없이. 그저 절벽 끝 낭떠러지와 같을 뿐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살아. 유지한. 다치지도, 지치지도 말고. 그렇게…….”
당신이 필요해.
* * *
한편 지한은, 꿈을 꾸고 있었다.
아주 그립고도 행복하고, 아프고 좋은, 그런 꿈을.
그리고 지한은 당연하게도 꿈에서조차 지호를 보고 있었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지호를.
정확히는 자신을 모르는 윤지호를.
“아. 망할 동생 넘아!!”
“폭력 반대! 고질라야, 아프다고!”
평행 세계라도 되는 건가. 이 세계는 자신이 알던 세계와는 완전히 달랐다.
아니, 정확히는 같으면서도 달랐다.
서울도, 윤지호도, 가게도 전부 비슷했지만, 헌터들이 없었고, 몬스터들이 없었으며, 자신이 없었다.
평화로운 세계였다. 즉 이곳은, 헌터 유지한이 필요 없는 세계였다. 그리고 숨 쉬듯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에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지호는 이곳에 있었다.
“정하나?”
“윤지호. 나 배고파.”
“……꺼져!”
“아잉. 친구한테 이러기야?!”
여전히 자신이 필요 없는 윤지호.
“응. 이러기야.”
내가 없는 세계에서도 너무나 잘 살아서, 내가 낄 자리는 추호도 없는 윤지호가.
그게 심장이 찢겨나갈 정도로 아팠다. 그러다 문득 지한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장면을 언젠가 본 적이 있다는 것을.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언젠가, 자신이 죽을 고비를 넘겨서 간신히 얻어 낸 것들을 기꺼이 내바치고 아주 찰나의 시간 동안 이 장면을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는 것을.
[정말 그러겠느냐.]
‘망설일 거면 스스로 내걸지도 않았습니다.’
어떻게 얻어 낸 것들인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버리고, 오로지 이 광경에 끼어들 수 있기만을 소망하며, 이 찰나의 시간에 매여 있었다는 것을.
‘와. 잘생겼다…….’
고작 그 미소 하나에 반해서.
“……!!”
모르는 기억과 감정이 쏟아지고 있었다.
갑자기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감정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속절없이 무너지다, 지한은 불현듯 절망과 함께 깨달았다.
이건 바깥에서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에게서.
감당할 수도, 용납해서도 안 될 진실이었다.
‘……보고 싶어. 한 번만 더.’
‘아니야. 거짓말이야.’
‘……당신이 갖고 싶어.’
‘거래를 하고 싶습니다.’
[……오만하고 안타까운 자여.]
“안 돼―!!”
인간이 아닌 게 분명한 음성에, 벼락처럼 깨달았다.
지금 이 기억은 누구도 알아선 안 되는, 그 어떤 세계에서도 있어서는 안 되는 진실이었다.
작정하고 저지른, 돌이킬 수도, 돌이켜서도 안 되는 나의 죄. 죽는 한이 있어도 이것만큼은 들켜선 안 되는 것이었다. 자기 자신에게도.
쏟아지는 감정의 잔해에 몸부림치던 지한은, 다른 것보다 이 모든 것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그 순간부터 제가 망가지는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터져 나오는 기억과 감정을 미친 듯 끌어, 제 안에 눌러 담았다.
미친 듯이 꾹꾹 눌러 담고 눌러 담아, 지금 자신이 깨달은 이 진실 역시 모두 넣은 후, 단단히 자물쇠를 걸어잠갔다.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었다.
절대로.
‘모든 감당은 내가 할 겁니다.’
철컥―
꼭꼭 숨기자. 꼭꼭 숨기고 숨겨서.
‘어떤 것도 감수할 겁니다. 이 세계엔 ……것이 없으니까.’
철컥― 철컥―
감추고 또 감추고. 감춰서.
나 자신도 깨닫지 못한 채.
‘절대로. 알려선 안 돼.’
촤르르륵―
그렇게 그녀가 마음에 들어할 만한 모습으로,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유지하며.
달칵― 탕―!
내 세계를 손아귀에 쥐기 위해서.
그렇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비밀은 자기 자신에게서조차 지우고, 눈을 뜨자―
“……어서 와요.”
나의 세계가 나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