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8장. 강자의 신념
9장. 홀로 이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건
10장. 내가 있는 세계에서
11장. 주인공이 옆집에 사는 것에 관하여
8장. 강자의 신념
쏴아아아아―
“……!”
단 일격에 가고일의 목이 날아갔다.
그것도, 스킬로 보이는 그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단순한 일격에.
“……뭐야.”
모두가 그 모습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하나 그 시선들은 보이지도 않는 듯 우아하게 양산을 펴 쏟아지는 피의 비를 막은 여자는 아주 어여쁘게 미소를 지었다.
“이쪽은 그래도 상황이 좋네요.”
지한은 전율했다. 저번에 봤던 모습과는 달랐지만, 저 분위기, 저 마력은 분명.
“……무명.”
정말, 예고조차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이름과 매우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쏴아아아―
“뭐야. 저 괴물은…….”
누군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자칫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무례할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납득했기 때문도 있었지만, 아예 입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건지 그녀는 너무나 기품 있게 아름다운 입을 열었다.
“이쪽은 그래도 상황이 좋네요.”
그리 말하며 초토화된 주변과는 대조적으로 평화롭고 우아하게 걸어오는 모습에 모두가 시선을 빼앗겼다.
사람 같지가 않았다.
괴물이라는 것은 방금의 일격만으로도 증명했지만, 단순히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마력이라고는 조금도 뿜어내지 않는데, 숨조차 쉬지 못할 것 같은 압박감이라니. 마치 신이라도 조우한 것 같았다.
털썩―
“……허, 허억.”
등급이 낮은 이들은 버티지 못하고 호흡 곤란 증세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 이들은 안중에도 없이 유유히 지한의 앞에 걸어온 그녀를 보며 지한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생김새, 체형, 뿜어내는 기운. 그 모든 것이 다름에도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를.
“또 만나네요.”
그 말에 그녀의 눈이 놀랍다는 듯 크게 떠졌다.
“단박에 알아보네요?”
본인도 본인의 모습이 그때와는 매우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말에 지한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차원이 다른 힘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은 당신밖에 없으니까.”
“…….”
“그 모습은 본인의 특성입니까. ‘이매망량의 주인.’”
지한의 폭탄선언에 돌처럼 굳었던 현장이, 파사삭― 깨어났다.
“……뭐?”
“……!!”
뭐요? 누구요?? 뭐라구요?!?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음에도 여태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여기서, 지금 이렇게 등장할 줄은 아무도 몰랐던 탓에 어마어마한 파장이 그들을 휩쓸었다.
붙잡아야 하나? 말이라도 걸어 봐야 하나?
누구도 생각지 못한 타이밍에 등장한 1위 때문에 모두가 패닉 상태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양산을 접고 어느새 지한의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오. 바보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건 바로 알아보는군요.”
부드러운 미소와 다르게 말은 그다지 상냥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상냥한 원 펀치에 제대로 한 방 먹은 지한이, 그만 평소 성격대로 작게 투덜거리고 말았다.
“……바보는 아닙니다.”
“설마.”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날아오는 즉답에 바로 KO 당했지만.
지체 없는 빠꾸에 자신감을 잃은 지한이 시무룩해지자 그녀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누가 봐도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광경이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기고 끼어들 수 없을 만큼.
“그래서, 그…… 어느 쪽이 진짜입니까?”
차마 ‘성별’이라고는 물을 수는 없어, 조심스럽게 지한이 물었다. 차별 발언이라고 여길 수도 있었으니까.
다행히 그녀는 그렇게 느끼지 않았는지, 웃어 주었다. 대신 놀리고 싶은 마음이 다분해 보였지만.
“글쎄. 어느 쪽일까요~?”
“…….”
“푸핫―!”
기껏 어렵게 한 질문에 대답다운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지한의 얼굴이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뾰로통해졌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그녀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즐겁게 웃는 그녀를 향해 왜 웃냐고 쳐다보는 지한까지, 정해진 한 쌍처럼 완벽했다.
그뿐이 아니다.
특별했던 그들이, 한순간에 평범하게 보였다.
아니, 이질적인 건 여전했지만 그런 그들이 함께 있으니, 그저 보통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다만 그들 자신과는 다른, 동족.
뭐라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이 헌터들의 머릿속을 헤엄쳤지만, 느끼는 바는 거의 비슷했다. 누구도 아무 말 하지 못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사이, 웃음을 멈춘 그녀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지한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상처투성이네요.”
“딱히 그렇진…….”
“그렇게 생각하며 사는 것도 정말 재주고.”
너덜너덜한 걸 자각도 못 하는 건 정말 존경스럽네요.
너무나 당당하고 단호하게 말하니 도리어 할 말을 잃어버린 지한을 뒤로하고,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얄밉기도 하고 얕보였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지한이 살짝 발끈해 입을 열었다.
“당신도, 이래야 하지 않습니까?”
현재 이 나라의 1위는, 당신이니 당신 역시 내가 그랬던 것처럼 희생해야 하지 않냐고 전 1위가 현 1위에게 묻는 장면은 숨이 막히게 매서웠다. 오죽하면 서유라까지 흡―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유지한 저게 진짜 돌았나 봐.”
“……크흠.”
상대는 특급 다이아몬드 별수저를 물고 혜성처럼 등장해서 1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인물이다. 한마디로 안하무인 독재주의를 실천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이란 말이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별이 허락했으니까.
피눈물이 나도록 부러운 로또였지만, 누구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권력을 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머릿속 한구석이 맛이 가 버린 어떤 놈은 다 가져 놓고도 구질구질하게 살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저 같을 거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적어도 세상에 저런 인간이 둘이 있다가는 성좌가 속 터져 뒷목 잡고 돌아가실 거라 자신하는 서유라가 전 1위의 만행에 솔직하게 기함했다.
그냥 대충 봐도 현 1위와 2위의 격차는 엄청났다.
포스를 제대로 드러내는 것 같지도 않은데, 여유롭게 압살하고 있는 1위님과 거기에 맥을 못 추는 2위, 유지한이 몸소 보여 주고 계시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듣기만 해도 화병 나는 소리라니.
진짜 한 대 얻어맞고 날아가는 건 아닌가 조마조마하기까지 했다.
“하하하. 하하하.”
아니나 다를까, 현 1위께서 모자란 현 2위의 발언에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리셨다.
“저 화장실…….”
“그런 게 여기 어디 있어.”
“……그냥 도망가고 싶어요.”
“괜히 새우 등 터지기 싫으면 가만히 있자.”
꿈에 나올까 무서운 미소였다.
* * *
“하하하. 하하하.”
죽일까.
현 1위 님께서 진심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 속마음을 고대로 보고 있는 성위가 황급히 현 1위 님을 달래 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그래도 일단 네 돈줄. 지금 치워 버리면 일코가 어려우니 진정하라며 살살 달랩니다.]
성위가 간만에 맞는 말을 했다. 지금 열 내 버리면 일코까지 해제될 위기였으니까. 일단 진정을 해야 했는데 화신 스킬이 깨질 정도로 진정이 되지 않았다.
우아한 귀부인의 가면을 쓰고 있어서 이 마음이 전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게 천만다행이었다. 안 그랬음 100퍼 빡쳐서 막 나가다 내가 윤지호라는 것까지 뽀록 날 게 뻔했으니까.
그러나 가면의 힘이라는 것도 아슬아슬하긴 했다.
‘……아 놔. 진짜.’
진심으로 눈앞에 있는 이놈에게 살심이 끓어올랐다.
애초에 병원에 곱게 처박혀 있어야 할 놈이 여기 있다는 것도 개빡쳐서 돌아 버리겠는데, 꺼내는 말마다 아주 불 난 집에 기름을 부어댔다. 내가 누구 때문에 무슨 짓까지 하고 있는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저건 원래 저렇게 속 터지는 노답호구였는데 뭘 새삼스레 빡쳐 하냐고, 일이라면 아직 다 망친 건 아니지 않냐고 묻습니다.]
‘아니. 사실 그것 때문에 빡친 거 아니야.’
저 자식이 여길 와서 기껏 벌인 일에 지장이 가게 됐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물론 원티드의 파업이고 뭐고 다 날아갔으니 처음부터 수습하고 진행하려면 매우 성가시고 짜증 나게도 힘든 길을 돌아가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다시 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몸은 다른 문제 아닌가.
대체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너덜거리는 몸으로 여길 기어들어 와 있는 건지, 그것만으로도 속 터져 돌아가시겠는데, 그렇게 설명했음에도 저렇게 한 치의 변화도 없다는 게 매우 속이 터졌다.
그를 위해 벌여 놓은 일들이, 제가 하고 있던 모든 게, 사실은 다 무의미한 일이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이러다 들통나기 딱 좋았다.
스킬 만세를 외치고 있긴 했지만, 언제 뽀록 날지 누가 아는가. 일단 이 불난 속을 좀 가라앉혀야…….
“강한 자는 강한 만큼 약한 이들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는 개뿔.
“누가 그러던가요?”
“…….”
당장 내 눈앞에 데려오면 1초 안에 그 존재를 세상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내 각오를 본 건지 우리의 주인공님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셨다.
그래도 뭐 크게 상관없었다.
“커헉― 가. 감히! 날 이렇게 홀대하다니.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다!!”
알아서 제 명줄을 깎아 먹는 쓰레기가 대신 답을 해 줬으니까.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이제야 나타나는 저 쓰레기가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는 말이며 꼬락서니며, 상황 설명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것 같았으니까. 만만한 원티드 길드장에게 어떻게 대했을지.
어쨌든 대답을 해 줬으니 그에 대한 보답을 해 줘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틀었다.
“……어머. 여기 해충이.”
스킬이 있다는 것에 지금은 정말로 감사했다.
스킬의 영향으로 ‘망자의 귀부인’의 성향과 감정까지 동화된 덕에……
스윽―
저런 쓰레기쯤,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었으니까.
저 정도를 죽이는 데 크게 힘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 한눈에 스쳐도 계산이 다 되었다.
챙―!!
끼이익―
“……?!”
“……크흡―”
그렇게 나간 공격은, 간발의 차로 나를 막아선 주인공님으로 인해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왜 그러죠?”
윤지호로서인지, 아니면 망자의 귀부인으로서인지 알 수 없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어 그에게 물었다.
치워 버려야 할 해충을 치우지 못하게 막아서는 그에게.
‘……대체.’
어이없고 화도 나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자기더러 치우라는 것도 아니고, 손수 알아서 치워 주겠다는데도 왜 이러는 걸까.
당신이라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으나 예상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달랐다.
그런 나를 보며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왜, 그러냐니…… 당연한 걸 묻지 마시죠.”
부르르.
힘을 준 손이 힘에 부친다는 듯이 부르르 떨려 오는 것이 느껴졌다.
제대로 힘 하나 주지 않은 양산을 막아 내는 것도 벅차하면서, 이렇게 약해 빠졌으면서 대체 뭘 구하겠답시고 나서고 있는 건지.
짜증이 났다. 어쩌면 윤지호일 때보다 더.
“비켜요.”
“못 비킵니다. 눈앞에서 살인이 일어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요.”
“무슨 소리예요. 살인이라뇨.”
우리 주인공님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신다.
살인이라니. 사람을 뭘로 보고.
“에?”
예상치 못한 대답에 주인공님이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그럼 지금 이 행동은 뭐냐는 얼굴이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타당하게 해 줄 말이 있었다.
“내가 지금 사람을 죽이려는 걸로 보이나요?”
“그럼 대체 뭐…….”
“해충을 제거하는 거죠.”
“……!”
주인공님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졌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나는 진심이었다.
저건 해충이다. 나를, 당신을, 우리를 갉아먹는 주제에 뻔뻔하기까지 한 기생충.
“사람입니다.”
“아니요. 해충이에요. 기생충이죠. 그저 빌붙을 생각으로만 살아가고 싶어하는 기생충.”
실제로 그렇게 빨아 먹히며 살아온 당신이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지는 않는다. 아무리 착하다 해도 그들이 그렇게 도를 넘었으니, 당장 머릿속에 스치는 기억 하나쯤은 존재할 것이라 자신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눈빛에 살짝 무언가 스쳐 갔다.
“……그래도 그들은 우리보다 약합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고요?”
“…….”
“당신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약자라고 모두가 이러지 않아요.”
세상 모든 약자가 이렇게 기생충처럼 빌붙는 걸 당연하게 여길까.
단언컨대 절대 아니었다. 약해도 때로는 강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니까.
그런 인간을, 사회 곳곳에 박힌 저런 해충들이 흐리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이런 것들이 다른 이들까지 선동해서 나를, 우리를 압박하죠. 그리고 당신은 그걸 용인했고, 덕분에 현재 헌터들의 대우가 어떻죠?”
“……그건.”
유지한은 차마 답을 할 수 없었다.
당연했다.
내가 아무리 유지한을 편애한다 해도 이 문제에서 유지한은 절대적 죄인이었다.
“나까지 가만히 당해 준다면 사태는 더 심해지겠죠.”
“그렇다면 이런 이들을 전부 죽일 겁니까?”
오. 이번에는 좀 세게 나오셨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꽤나 센 한 방이었을 것이다. 그에겐 애석하게도 난 그런 보통 사람이 아니었지만.
“필요하다면.”
필요하다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그럴 힘이 없으면 모를까,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것만큼 쉬운 일인데 못할 것도 없었다.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주인공님이 굳은 얼굴로 선언했다.
“당신이 그러도록 놔둘 수 없습니다. 절대로.”
‘…….’
누가 보면 진짜 당장 다 죽이고 다니겠다고 한 줄 알겠다.
“그렇게까지 할 생각 없어요.”
귀찮기도 하고.
―라는 말은 주인공님을 위해 생략했다.
“하지만 당신이 지켜 주고 있는 저 해충을 본보기로 치우면 몸을 사리겠죠. 앞으로 그 누구에게든.”
이런 것들의 행동 패턴이야 손바닥 뒤집듯 훤히 보였다. 세상에서 제 잇속이 가장 중요한 것들이니 그 머릿속 들여다보는 일이 어려울 것도 없었다.
왕은 필요 이상으로 잔혹할 필요는 없어도 차갑고 매섭게, 군림해야 한다. 다정한 왕은 얕보일 뿐이다.
왕이 얕보이면 그 순간 왕이라 할 수 있을까. 그저 꼭두각시일 뿐이지. 눈앞에 있는 남자가 그 산증인이지 않은가.
“너무 잔혹합니다. 그건 공포심으로 찍어누르는 게 아닙니까.”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주인공님이 반문했다.
단언컨대,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질문이었다.
“그래서, 당신은 성공했나요?”
“…….”
“강한 자는 강한 만큼,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 하는 일이 있고, 1위라는 건 모든 사람들 중 최고의 자리에 군림한다는 뜻이죠. 그건 자의든 타의든 누구의 위를 밟고 올라섰다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1위는 필연적으로 누군가를 내리누르면서 살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수많은 반감으로 본인이 깔아뭉개질 테니까.
“올라선 자가 자비로울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러다 낮잡아 보이는 순간, 저런 파리가 우글우글 달려와 수없이 깎아내리고 업신여기며 인생을 좀먹겠지요.”
당신이 그렇게 살았듯.
누구도 해치지 못하고 원하는 대로 얼마든지 배려해 주는 왕만큼 다디단 꿀이 어디 있겠는가. 주제 파악 못 하는 돼지들이 들끓기 딱 좋은 소리였다.
“공포심이 없는 군림이란 그런 것이죠. 무섭지 않은데, 누가 자신보다 높게 보고 경외하며 따르죠? 도를 넘는 건 좋지 않지만, 군림에 있어서 공포는 필수예요.”
기껏 군주의 기본 이론을 설명충에 빙의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그래도 그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답답하긴 했지만 그럴 만도 했다. 한 번도 그렇게 살아온 적이 없었고, 평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강요받아 왔을 테니까.
영웅의 삶이란 그런 것이기도 했다.
영웅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영웅’일 뿐이지, 군림하는 ‘왕’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당신이 굽히고 살았다 해서 나까지 그래야 할 이유를 말해 봐. 나에게 당신이 살고 있는, 그 벌레보다 못한 것 같은 삶을 강요할 거라면 그에 따른 제대로 된 근거를 대.”
어찌 됐든 지금 이 나라의 최강자라는 위치에 올라온 이상, 더더욱.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지껄인다 한들, 내게 당신의 말은 그저 모기가 앵앵대는 것만도 못해.”
“그―!”
“신념이 없는 강자의 말은 그냥 먼지만도 못한 쓰레기일 뿐이야.”
“…….”
그러니까 내게 합당한 근거를 대지 못할 거면.
서걱―
“아아악―! 내 팔!!!”
“……!!”
너도 제발 그렇게 살지 마.
“이런 내 신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
만약 이런 나를 부정할 거라면.
“나를 넘어서.”
남에게 신념을 강요할 수 있는 건 강자만의 특권이니까.
* * *
또각, 또각.
할 말을 마친 그녀는 더 볼일 없다는 듯, 그대로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방금 너무나 당당하게 적을 만들고서는, 적으로도 여기지 않는다는 듯 너무나 쉽사리 등을 보였다.
여기 있는 그들 정도는 경계할 급도 되지 않는다는 듯.
하지만 아무도 반감이 들지 않았다.
“……대박.”
한없는 경외심이 솟아올랐다면 모를까.
단호하게 팔을 자른 그녀의 방식은 분명 잔혹했지만, 그 고고한 태도에는 빛이 났다.
우러러볼 수밖에 없을 만큼.
그들은, 뚜렷한 신념을 가진 자는 그 신념이 어떤 것이든 사람을 홀린다는 말을 처음으로 실감했다. 분명 윤리적으로는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을 했음에도, 만약 그녀를 따를 수 있다면 기꺼이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녀는 그럴 마음이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유지한―!”
“…….”
정의롭고 대단하지만 안타까움이 먼저 들었던 누구와는 다르게.
넋이 나간 것 같은 그를 보며 그들은 본능적으로 아까 그녀가 한 말을 떠올렸다.
‘올라선 자가 자비로울 수는 있겠죠. 하지만 그러다 낮잡아 보이는 순간, 저런 파리가 우글우글 달려와 수없이 깎아내리고 업신여기며 인생을 좀먹겠지요.’
“아악―! 내 팔!! 내 팔 어쩔 거야!! 내 팔 어쩔 거냐고!!”
너무나 당연하게 그에게 원망을 쏟아 내는 꼴을 보고 있자니 더더욱.
“X같이 굴다 팔 잘린 걸 누굴 탓해!? 머리가 달렸으면 생각이란 걸 좀 하든가 닥치고 짜져 있어!”
“뭣……!”
“유지한 괜찮아?!”
넋 나간 지한 대신 참다못한 유라가 성격대로 일갈한 후 황급히 지한의 몸을 스캔했다.
어쨌든 지한이 막아 섰음에도 등 뒤의 인간은 팔이 잘렸다. 지한이 공격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바로 코앞에 서 있던 만큼 타격이 아예 없기는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제대로 힘 하나 안 들인 거 같은데도 지한을 확실히 압도하는 강자였다.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유라가 요리조리 살펴봐도 지한은 외상은 물론, 조금의 내상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는 게 불가능할 터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꼼꼼히 다시 한번 살펴보는데, 그런 유라 덕에 조금 정신을 차린 지한이 힘없이 말했다.
“안 다쳤어.”
털끝도 다치지 않았다. 본인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힘이 자신을 지나가는 느낌조차 모든 것이 끝난 후 깨달았다.
그 정도의 격차인 것이다. 고작 랭킹 하나 차이인데도 수준 자체가 달랐다.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상대는 세계 1위를 거머쥔 괴물이고, 국내로 따지면 네가 바로 밑이긴 하지만, 세계로 따지면 클래스가 다른데 그 정도는 당연한 것이니 진정 좀 하라 합니다.]
‘세계…….’
성위의 말에 지한은 처음으로 신경조차 쓰지 않았던 단어를 되새겼다.
국내 사정만도 신경 쓰기 바빠,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다.
무엇을 확인해 보고 싶은 건지는 스스로도 모르겠지만, 지한이 간만에 자신의 상태 창을 열었다.
[상태 창]
[이름: 유지한
이명: 이든
소속: 대한민국
타이틀: 정의의 수호자, 세계의 주인공. 불세출의 천재. 천계의 검. 용사의 자격. 세계의 구원자.
성향: 비틀리고 곧은 길을 걷는 자.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등급: S
국내 랭킹 2위.
월드 랭킹 17위.
특성: 빛의 철퇴(S), 오러 블레이드(S), 하데스의 안개(A), 빛의 가호(S)……]
‘……17위.’
분명 매우 높은 숫자였다. 이 지구에서 열일곱 번째 강자라는 뜻이니까. 그것은 절대 가볍게 여길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손꼽아 말할 수 있는 강자라는 뜻이었음에도 그 숫자가 왜 이리도 초라해 보일까. 지한은 생각했다.
세계에서, 이 넓은 지구에서 고작 열여섯 단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임에도,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하늘과 땅 정도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정 그러면 정말 그자의 말대로 올라가면 되지 않느냐 말합니다.]
[못하는 것처럼 말하지 마라. 넌 틀림없는 ‘승리를 걷는 자’이니.]
흔치 않은 성위의 진언에, 영혼의 결속을 느끼며 지한이 눈을 감았다.
평소 진언은 월권이라고 생각하던 꽉 막힌 성위였다.
원래도 진언이란 자주 들으면 화신의 영혼에 무리가 가는 위험한 것이기도 해서 다른 성좌들도 자주 쓰지 않긴 했지만, 지한이 성위의 진언을 듣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자신의 신념을 살포시 접으면서까지 독려한 성위 덕에 조금 기운이 났다.
그래. 올라서면 될 것이다.
올라설 수 있다.
[너는 틀림없이, 승리를 걸을 수 있는 자구나.]
처음부터 지금까지, 제 성위가 믿어 의심치 않았듯이.
그리고 어째서인지 이해할 수 없지만…….
‘나를 넘어서.’
아마 당신 역시.
그냥 당신은 그런 사람인가 보다, 하고 넘어가면 될 것을. 첫 만남부터 줄곧, 당신은 이상하리만치 신경이 쓰였다.
‘부상자는 이쯤 했으면 충분하다. 바통을 이어받을 사람도 왔겠다. 조금 쉬어도 아무도 뭐라 할 이는 없어.’
너무나 가뿐하고 당연하게 나를 구해 주면서.
‘당신은 넘칠 만큼 충분히 했어.’
나를 독려하고.
‘당신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약자라고 모두가 이러지 않아요.’
나를 깨우치려 하면서.
‘신념이 없는 강자의 말은 그냥 먼지만도 못한 쓰레기일 뿐이야.’
나의 성장을 재촉했다.
‘어린애예요. 유지한 씨는.’
제 전부와도 같은…… 누구처럼.
“……!”
“……유지한?”
“아니, 아니야.”
순간 숨이 턱― 막히며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런 면이 있다는 걸 자신이 멋대로 연관시켰을 뿐이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 저게 뭐야.”
“잠깐, 저거 설마.”
“저 미친 새끼……?!”
지한이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진정시키는데, 다른 헌터들의 눈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그리고 그 존재를 너무나 잘 아는 헌터들은 두 눈을 의심하며 반사적으로 욕을 내뱉었다.
일단 발견하면 반사적으로 내뱉는 게 일상이 되긴 했지만, 지금 여기서 다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지현민?!”
“너 이 새끼! 살아 있었어?!”
온갖 기쁨과 환희가 담긴 욕설에도 지현민은 황급히 걸음을 옮기기 바빴다.
카메라를 손에 들고.
평소라면 그것을 바로 눈치채고, 정말 징한 놈이라며 가자미눈을 선사해 주었을 것이나, 기쁨에 눈이 먼 헌터들은 모두 달려들어 지현민을 끌어안기 바빴다.
“지현민 이 개새끼! 네 주제에 누굴 구한다고 그딴 어그로 희생을……!”
“도망이나 갈 것이지…….”
“너 인마!!”
목숨을 각오하고 모두를 피신시켰던 이의 등장에 환호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목숨 빚을 진 거나 마찬가지였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평소였다면 기쁘게 환호를 즐겼을 지현민이었지만 그는 여전히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어딘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감사합니다. 근데 나중에 인사 다시 해요. 지금 가야 해요!”
“뭐? 어딜…… 미친.”
그제야 환희에 젖어 미처 보지 못한 지현민의 카메라를 발견한 그들은 상황을 순식간에 이해했다.
“이게 진짜 죽고 싶어 환장했나!”
“너 아까부터 쭉 다 찍고 있었지!!”
“야. 저분은 진짜 안 봐줘! 까딱하면 죽는다고! 저기 머저리 팔 잘린 거 안 보여?!”
모두가 쌍수를 들고 지현민을 뜯어말렸다.
우리나라 헌터들은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 유한 성질을 지니고 있었고, 개중 냉철한 사람도 지현민이라는 사람 자체가 나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동안 누구도 그에게 목숨을 위협할 만한 경고를 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 1위는 달랐다.
그 여왕 같은 여자는 어떤 이유가 딱히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제거할 필요가 있으면 제거할 뿐. 분명한 예시까지 방금 경험하지 않았던가.
그녀에게 주어진 힘이, 곧 뭘 해도 좋다는 성좌의 허락이나 다름없었기에 더더욱 위험했다.
하지만 지현민은 단호박이라도 처먹은 것처럼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습니다.”
“……똥을 싸라. 똥을 싸.”
“누가 여기 이 새끼 좀 묶어!”
“아니, 기절시켜!! 그럼 못 움직이겠지!”
이번에는 소속 길드가 어디인지를 떠나,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필사적으로 지현민을 막아섰다.
어느 때보다 위험한 게 확실한 불구덩이에 뛰어들어 간다는데, 심지어 목숨 빚까지 졌는데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안 돼요! 전 천사님을 찍을 의무가 있다고요!!”
“천사?”
이건 또 뭔 무슨 개소리야?
―라고 생각했던 헌터는 순간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고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천사는 맞네. 널 죽음으로 이끌 천사.”
그러니까 얌전히 묶이자.
그 소리에 지현민이 필사적으로 미로까지 발동시키면서 그들을 피해 도망쳤다.
“싫어요. 안 돼요! 하지 마세요!!”
전 천사님한테 가야 한다구요!!
지현민이 필살기를 쓰며 질주해 바람처럼 날랐다.
“와. 저거 여기서 필살기를 쓰냐…….”
설마 여기서, 이 타이밍에 필살기를 쓸 줄은 몰랐던 이들이 당황해 그만 지현민을 놓치고 말았다. 지현민은 그간 도망치던 짬을 자랑이라도 하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쩌지, 저거?”
“저 상태의 지관종을 어떻게 말려.”
“그럼 따라가?”
“그래야 하려나? 어차피 그분 따라간 거 같으니 공략점으로 갔을 텐데.”
나름 진지한 토론이 이어지는데, 그 사이에서 지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가자.”
“……뭐? 따라가겠다고?”
그런 일이 있었는데?
유라가 걱정과 놀람을 담아 물었다.
지한을 해치지 않았던 것으로 보아 지한에게 적대적이진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아주 호의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던 사람을 따라가자니.
무엇도 장담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 길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그러나 그렇게 마음 가는 대로 해도 되는 사람이 걷는 곳이었으니까.
그 걱정을 손바닥 뒤집듯 들여다보면서도 지한은 말했다.
“가야지. 저분도 걱정되고, 우리의 목적도 있잖아.”
“……아.”
어차피 공략은 해야 하는 것.
그리고,
“가고 싶어. 유라야.”
제대로 보고 싶었다.
“……후. 그래.”
자신이 올라서야 할 자를.
―원티드 ‘공략대’ 합류.―
* * *
……아. 왜 따라오는 거야.
존재감 없는 누가 따라오는 거라면 모를까, 다른 놈도 아니고 이 세계에서 아마 나 다음으로 존재감이 제일 뿜뿜한 인간이 뒤에서 따라오니 모를 수가 없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드디어 울 애긔가 강아지 한 마리를 겟한 거냐며 초롱초롱한 눈으로 묻습니다.]
‘꺼져!!’
주인공 강아지는 사양하겠음.
꿈에 나와도 무서울 개소리에 진심으로 진저리를 쳤다.
물론 너무너무 예쁘고, 당장 키우고 싶을 만큼 사랑스럽긴 했다. 주인공이 아니라면.
이미 저 미모에 홀려 많은 걸 해 주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진짜로 저 인생에 휘말려 이야기의 중심에 서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이야기의 방관자이고 싶었으니까.
더군다나 듣기만 해도 혈압이 오르고 뒷목 잡고 뒤로 넘어가기 십상인 고단한 주인공의 삶 따윈, 절대 함께하고 싶지 않았다.
내 마지노선은, 저 화병 나는 인생의 조력자까지였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런 것치고는 이미 너무 많이 오지 않았냐 팩폭을 던집니다.]
샬업.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은 현실 도피 소시민이 날카롭게 외쳤다.
그걸 보고 망할 내 성위 놈이 삐딱하게 태클을 걸어 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자꾸 소시민, 소시민하는데 울애긔가 아직 잘 몰라서 그러나 본데 진짜 소시민은 저렇게 최상위 네임드 랭커를 네가 하는 것처럼 이리저리 휘두르진 못한다며 삐딱한 자세로 귀를 후비적거립니다.]
그리고 소시민은 진심으로 억울해졌다.
내가 휘두르긴 뭘 휘둘러!!!
지금까지의 그 어떤 일도 그렇게는 한 치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양심리스가 외치자 성위가 진심으로 황당해하며 물었다.
[‘이매망량’ 님이 진짜 그 말 진심으로 하는 거냐고, 내 계약자가 이렇게 양심리스인 줄 몰랐다며 몸을 부르르 떱니다.]
……시끄러워.
양심리스는 결국 회피를 택했다.
자연스럽게 대답을 회피하며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는데―
키야악!
서걱―
촤아아악―!
“……!”
등 뒤에 어떤 님께서 움찔움찔거리시는 게 다 느껴졌다.
‘……아. 정말.’
아까와 다르게 양산을 휘두르지도 않았는데 고블린 같은 건 그냥 잘려 나가니 놀란 것 같았다.
대한민국 최상위 네임드 랭커이자, 이 세계의 주인공님의 매우 어리숙한, 초보자 같은 반응에 절로 한숨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 본인도 1위였으면서, 이 정도는 익숙한 거 아니냐고. 별것도 아닌데 왜 놀라.
물론 이건, ‘망자의 귀부인’의 사고에 가까웠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권속을 수족처럼 다루는 귀부인은 손을 직접 쓰지 않고 상황을 처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으니까.
그 증거로,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겠지만, 지금 주변에는 귀부인을 지키는 기사들이 그녀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위협을 처리해 나가는 중이었다.
망자인 기사들이.
뭐, 쉽게 말하면 귀신이다.
공포 영화는 물론, 귀신이라고 하면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쌍욕을 시전할 수 있는 윤지호에게는 죽었다 깨어나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지만, 망자의 귀부인에게는 일상이었다.
생각보다 기사들이 귀신같아 보이지 않아서도 있었지만. 그래도 가끔 이 상황의 아이러니에 멘탈이 살짝 가출하려 할 때마다―
【스킬, 얼음의 심장(S)이 시전자의 안위를 위해 자동적으로 발동합니다.】
요런 나름 핵꿀 스킬이 잘 막아 주었다. 계속 보다 보니 이젠 익숙해지기도 했고 말이다.
어쨌든, 내 눈에는 다 보여서 신기할 것 하나 없었지만, 당연히 보일 리 없는 인간은 내가 손짓하지 않아도 알아서 몬스터들이 썰려 나가니 놀라 눈을 부릅뜨는 것이 당연하긴 했다.
그래도 명색이 주인공이 저런 얼빠진 행동을 하니 매우 걱정되긴 했다. 의도와는 다르게 어쩐지 제가 착실하게 말아먹고 있는 것 같지만, 소설은 진행형이었다. 그리고 뒤늦게 생각났다.
이 게이트는 소설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직전쯤에 나왔던 게이트였다.
‘B+’라고 책정됐지만, 통보도 안 하고 갑자기 미친 난이도 조정을 한 시스템이 새로운 기준으로 측정해 버린 것이라 절대 믿으면 안 되는 등급이었다. 예전 등급 난이도로 따지면 무려 A+급 던전이라 이 말씀이다.
그것을 떠올리면서 나는 새삼 이 소설의 막장력과 설정 붕괴에 감탄했다.
무슨 설정을 이렇게 막 바꿔.
대체 이게 왜 인기작이었나, 직접 들어와 보니 이젠 슬슬 의문이 들 지경이다.
“잠시만요. 무명.”
“……?”
잠시 딴생각에 빠진 사이에 어느새 바로 뒤까지 다가온 지한이 나를 돌아 세웠다. 멍한 얼굴로 지한을 돌아보자, 제가 돌아 세웠음에도 되레 당황한 얼굴이 두 눈에 비친다. 그 얼굴을 보며 게이트에 대한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그랬다. 오늘 이 게이트는, 그 막장 기준으로 책정된 등급 때문에 많은 사상자가 나왔고,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계속 이렇게 좌표 없이 안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합니다. 뭐라도 계획을 세우고…….”
돌이킬 수 없는 부상을 입고 만다.
마나 회로의 손상이라는, 아주 치명적인 부상을.
물론 그건 주인공 버프로 나중에 회복한다. 오히려 그 고생이 수련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그동안 제대로 돌지 못했던 많은 마력들이 더 응축된 형태로 마나 회로를 이뤄 더욱 힘을 키울 수 있는 포인트가 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전까지 많이 괴로워하고 힘들어했던 그를 잘 알고 있었다.
“내가 고작 이 정도 게이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언제든, 상대가 어떻든 방심은 금물입니다. 방심하면 그게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어요.”
그러니, 천천히 침착하게 들어가자고, 자신과 같이. 그래도 도움이 될 테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뒷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을 알았기에 더욱 냉담하게 칼을 내뱉을 수 있었다.
“본인 이야기인가요?”
“…….”
말은 언제든지, 사람을 구원할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될 수 있다. 누구보다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더 단호하게 입에 칼을 물었다.
필요하면 그쯤이야, 얼마든지.
“착각하지 말아요.”
“…….”
“그런 충고는 자신과 같은 급, 혹은 아래 급에게나 하는 거예요.”
“……무명.”
“지금, 당신의 눈에 보이는 내가. 당신과 같은 급으로 보이나요?”
당신을 위험에서 빼낼 수만 있다면.
지금 자기가 가는 곳이 불구덩인지도 모른 채, 아니 알면서도 뛰어드는 이 남자를 막을 수만 있다면.
“유지한 씨. 당신이 입버릇처럼 하는 생각이 있죠.”
“예?”
“약자는 보호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게 갑자기 왜 나옵니까?”
뜬금없는 이야기에, 지한이 물었다. 물론 내 귀에는 그의 질문이 더 어처구니없는 우문이었다.
“당신이 나보다 약하니까.”
“……!!”
“그러니까 당신의 논리대로 돌려주려고요.”
정말 바라지 않지만, 지금 이 순간은 참 다행스럽게도.
지금 눈앞에 보이는, 제 실력의 반도 제대로 내지 못할 몸 상태를 가진 남자는 내 상대는커녕 신경조차 쓸 가치가 없는 급이었다.
“그러니 얌전히 내 보호나 받아요.”
제발. 부탁이니까.
이제는 당신보다 훨씬 강한 내가 있으니, 자신이 세상 제일 강자인 것처럼 다 짊어지고 싸우려 들지 말라고.
“…….”
그 간절한 마음이 보이기라도 한 건지, 지한은 고개를 숙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착실하게 대답을 해 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내 말에 숙여 준 것이 기특해 귀부인의 가면을 쓴 채인데도 불구하고 습관처럼 손이 올라갔다.
“잘했어요.”
그거면 충분해요.
유지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건네는 게, 윤지호였는지, 망자의 귀부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뭐, 크게 상관하지 않긴 했다. 결국 그게 누구든 내가 하고 싶었으니까.
“자 그러니 이제…….”
슬슬 이제 여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돌아가라고 말할 타이밍이었다.
“호오. 꽤나 괜찮은 인간들만 모여 있군.”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등장한 쌍놈(?)만 아니었다면.
‘아놔. 이…….’
본능적으로 쌍욕이 튀어 나갈 뻔했으나, 우아한 귀부인께서 막아 주셨다.
왜 등장해도 이런 타이밍이냐고! 무슨 소설이냐!!
소설 속 세계임을 망각하는 마음의 소리가 짜증을 담아 외쳐대고 있었다. 정말 짜증 나 돌아가실 것 같았다.
“……넌 뭐지?”
방금 그렇게 힘내서 입에 칼까지 물고 촌철살인을 해 주었건만, 반사적으로 나를 등 뒤에 숨기고 앞으로 나서는 빌어먹을 주인공님 때문에.
아. 진짜 이 새끼를 어쩌면 좋지?
살심이 솟구쳤다. 다행히 티가 나진 않는지, 뒤늦게 달려온 유라와 민현, 그리고 망할 내 피붙이까지 모든 시선은 갑자기 나타나 모든 걸 망친 쌍놈에게 가 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를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그 쌍놈을 살폈다.
화려한 제복 차림이지만, 휘장이나 장식은 모두 떼어지거나 부서져 있었고, 살은 리치처럼 까맣게 말라붙어있었다. 얼굴도 마찬가지였고.
저게 그럼 리치인가?
그런 것치고는 허리에 검을 차고 있었다. 머리카락도 있었고.
그리고 등 뒤에 있는 한쪽만 존재하는 날개.
그마저도 온전치 않은 것 같은 날개를 보며 나는 어렴풋이 저 존재가 무엇인지 예측할 수 있었다.
“……악마인가?”
“이 꼴인데도 그렇게 봐주다니 영광이군.”
악마가 담백하게 화답했다.
그 말에, 모두가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작위 박탈자.”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내용 아닌가.
약육강식의 세계인 마계는, 힘이 전부다. 만약 싸움에서 패배하면, 모든 걸 빼앗긴다. 작위도, 힘도, 존재조차도.
“‘제4 마계 나태왕에게 패배한 자’가 총칭이지.”
너무나 담백하게 패배를 읊조리는 말에, 다들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어 입을 달싹이기만 하는데, 망할 놈의 그 불치병이 또 발병하신 주인공님께서 상황 파악도 못하고 덕담을 던지셨다.
“……뒤집어 말하면 왕에게 도전할 정도로 강한 자란 거겠지요.”
아니, 지가 싸워야 할 상대한테 뭐 하냐 쟨.
너무 황당해서, 말조차 안 나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넌 어쩌다 저런 호구랑 엮였냐고. 굿이라도 한번 하는 게 어떻겠냐고 의견을 제시합니다.]
그건 성위도 마찬가지였는지, 헛소리까지 해댔다. 하도 황당해서 굿이라는 말에 조금 솔깃할 정도였다.
쨌든, 그렇게 황당해하는 날 뒤로 하고 그 덕담을 들은 당사자가 흉한 얼굴로도 알 수 있을 만큼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아. 그렇게 칭해 주니 정말 고맙군.”
“…….”
“결국 죽여야 할 상대라는 게 아까울 지경이야.”
‘…….’
거봐. 진짜 너 뭐 했냐.
저 말끔한 뒤통수를 한 대 후릴까 말까 진심으로 고민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래도 후리는 건 너무하다 말립니다.]
‘역시 그런가?’
[어차피 백번은 더 저럴 텐데 벌써부터 후리면 더 후릴 곳이 남아나겠냐며 인내심을 가지고 참으라 ‘이매망량’ 님이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넵니다.]
……역시 님은 내 성위임.
미친듯한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저 생각은 보류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 망할 덕담에 감명이라도 받은 듯한 쌍놈이 제 목적을 술술 다 불어 주었다. 다 죽일 생각이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만.
“내가 받은 명은 이곳을 점령하고, 향후 나태왕의 출입구로 만드는 것.”
“……!”
“미친……!!”
“패배의 대가로 그에게 종속된 난 죽는 한이 있어도 그 명을 따라야 한다. 이해해 주면 좋겠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쪽을 베는 게 싫은 것인지, 명을 따르는 게 싫은 것인지, 검을 뽑으려는 손이 망설이고 있었다.
아니, 싸우는 것 같았다.
제게 걸린 속박과.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갸륵하긴 하지만 마왕의 속박을 저렇게 다 잃은 채로 어떻게 이기냐고 악마의 가련함에 혀를 찹니다.]
뭐, 결과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젠장.”
스릉―
검이 뽑히자, 모두가 황급히 자신의 무기를 다잡고 자세를 취했다.
‘오. 저 검 꽤 예쁜데?’
[‘이매망량’ 님이 전리품으로 가지자 꼬십니다.]
[가지면 일단 나도 한번 만져 보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놀러 온 듯한 태도의 나는 빼고.
뭐, 저렇게 나서니 일단은 어떻게 하는지 봐 줄 생각이었다. 절대, 빡쳐서가 아니었다.
“……!!”
검이 뽑힘과 동시에 신형이 사라졌다. 네임드 랭커의 눈에도 포착되지 않은 움직임에 모두가 당황해서 자세를 흐트러뜨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럴 필요도 없긴 했다. 제대로 어딜 살피기도 전에 바로 유라의 등 뒤에 나타났으니까.
“뭐―”
챙―!
“호오?”
기척도 없이 등 뒤에서 나타나자 유라가 당황스러운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도 랭커답게 순발력을 발휘해 자신을 향해 들어오는 검을 받아 냈다.
“뭐야!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그 소리 할 시간에 도와!”
모두가 패닉인 상태에서도 네임드임을 증명하듯 다들 발 빠르게 눈앞의 상대에 집중하며 지원사격에 나섰다.
‘오우.’
오, 저 자식 쇼맨십 좀 되는데?
태평하게 감탄하는 나 빼고.
“확실히 실력자들이긴 하군. 괜찮은데?”
“얻다 대고 평가질이야!!”
적 주제에 발 빠른 대처에 칭찬까지 건네주었다.
저건 정체가 뭔가 싶었다. 적은 맞나.
똑같은 생각을 하는지 그 같잖은 칭찬에 빡친 서유라가 맞받아쳤다.
끼이잉― 타앙―!!
“빈틈―!”
그 틈을 타, 서유라가 검을 밀어내고는 뒤로 쭉 빠지고 그 사이를 민현과 지한이 채워 반격을 개시했다.
【스킬: 발도재의 첫걸음(A)를 발동합니다.】
【스킬: 유일무이의 타격(A)를 발동합니다.】
“……!”
완벽한 타이밍에 들어간 타격에, 쌍놈이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콰과가강―!
스킬이 발동하며, 굉음이 터진 걸로 보아 타격은 제대로 들어간 듯했다.
“됐어―!”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정확히 들어간 건 맞았다.
“후. 연계도 쓸 만한데. 아까워.”
“……!”
“이런 미……!”
아무런 타격이 없었을 뿐.
그걸 본 이들이 경악에 질렸다. 랭커들의 직격타인데도 조금의 타격도 없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상급 몬스터라도!
“……저거 도대체 뭐야?”
“알면 진작 해결했죠. 선배…….”
“모두, 침착해. 방심해선 절대 안 돼.”
‘…….’
모두가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데, 전선에서 빠져 소외된 나는 팝콘이 먹고 싶어졌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하나 줄까? 라고 이미 팝콘을 씹으며 물어봅니다.]
‘어. 솔깃한데?’
하지만 여기서 정말로 팝콘을 씹고 있으면 저 망할 호적 메이트에게 걸릴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눈치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놈이었지만, 피는 물보다 진해서인지 이런 쪽에는 촉이 귀신같은 새끼였다. 귀부인 체면에도 무리고.
챙―! 챙챙챙!
지한의 검과 쌍놈의 검이 몇 번이고 연속으로 부딪치며, 서로를 마주했다. 브로맨스의 탄생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찐한 무빙을 나누시는 중이었다.
앗. 여기 진정한 히로인이……!
“죽이기 정말 아깝단 말이야. 속박만 아니었으면 곱게 보내 줬을 텐데. 정말 아쉽군.”
“헛소리―!”
소외된 김에 아주 제대로 관람각을 잡았다.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건드려선 안 되는 걸 알아서 그런지 저 빌런도 이쪽은 완전히 신경조차 쓰지 않아서 맘 편히 관람할 수 있었다.
저러다 급격히 내게 공격을 한다 해도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고 말이다.
일단 빵빵하고 무서운 믿는 구석이 있어서도 있지만.
캉캉―! 촤아아악―!
휘잉― 콰과가가광!!
“우아아악―!!”
언뜻 보기엔 매우 여유롭게 헌터들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더 뭔가를 보여 줄 것 같지 않았다.
직감이 그랬다.
헌터로서의 기감을 펼친 상태에서 이런 감은 틀리질 않았다. 상대를 파악하는 건 헌터의 기본 역량이었으니까.
강제지만, 다이아몬드 별수저를 물고 헌터가 된 몸이 이 정도도 틀린다면 말이 안 되긴 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젠 내 위대함을 알겠느냐며 으쓱입니다.]
‘아. 옙. 그럼여. 물론이져. 님이 최고심.’
떨떠름하게 맞장구를 쳐 주자 성의가 없다며 쨍알쨍알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저런 거에 순수하게 고맙다고 감사를 표하기에는 나는 매우 배배 꼬인 좀생이었다.
배배 꼬인 좀생이가 자기 성위를 깔끔히 무시하며 딴 세상에 빠졌다. 뭐 대단한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음. 소외된 김에 팝콘까진 체면상 그래도, 다른 거라도 좀 요기할까?’
주전부리 찾는 정도?
계속 멀뚱멀뚱 서 있는 것도 좀 지루하고 소외감도 느껴서 짜증이 나려 했다. 그래서 좀 생각했을 뿐이다.
―예. 레이디. 준비하겠습니다.
생각하기 무섭게, 나보다 먼저 우르르 행동에 나서는 이들이 있었으니.
‘……웅??’
뭘 준비해?!
당황하기 무섭게, 갑자기 눈앞에 테이블이 생겼다.
“……!!”
테이블에 정신이 팔리기 무섭게 테이블 위에 쫙 펼쳐진 완벽한 티타임 풀세트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미친. 내 별님. 사랑해.’
무심코 성위에게 사랑 고백을 할 정도로.
내가 무슨 정신으로 사랑 고백을 하는지는 별로 관심 없는 것 같은 성위는 고백 자체에 깊은 감명을 받으신 듯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울 애긔한테 이 정도는 당연 기본 옵션으로 해 줘야 당연한 거 아니겠냐고 콧대를 높입니다.]
‘헐. 개설렘.’
소시민이 소시민답게 작은 거에 미친 듯이 설레했다.
―레이디. 이쪽으로.
아까까지만 해도 희미하게 내 등 뒤를 지키고 있던 기사가 어느새 선명한 모습으로 테이블 옆에 서 시중을 들 준비를 했다.
귀신인 것을 알기에 본능적으로 시선을 두지 않기도 했지만, 일단 귀부인의 특성 자체가 제 기사에게 그렇게 많은 관심을 두지 않아 몰랐다. 그러나 이렇게 보니 눈을 검은 천으로 가리고 있었지만 보이는 선 자체가 미남이라고 아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이매망량’ 님이 그 얼빠 컨셉 아직도 안 버렸냐고. 저놈이 나보다 더 잘생겼냐고 억울함을 가득 담아 질투에 눈이 먼 남자처럼 질척거립니다.]
그에 얼빠는 자신 있게 답했다.
‘응. 새로운 미남은 언제나 설렘.’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돌아온 대답에 삐진 듯 뒤에 더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삐졌나?
10초 정도 생각했으나, 별로 고민은 되지 않았다.
어차피 장난이기도 하고, 금세 다시 돌아올 것을 아니까. 아마 지금쯤 가슴 부여잡는 척하면서 신나게 쪼개고 있을 거다.
“……음. 향이 좋네.”
귀신이어도 살아생전 교양깨나 쌓은 기사였는지, 홍차 우려내는 게 아주 수준급이었다.
카페에서 대충 티백 넣고 주는 홍차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이쯤 되니, 이 눈앞에 있는 망자가 기사였는지 집사였는지 헷갈렸다.
둘 다였나??
콰가가가가―!
번쩍―!!
“왜 이렇게 강해요?!”
“한눈팔지 마세요!”
“야! 최민현! 날개! 날개 노리라고!”
쨌든, 이렇게 느긋하게 티타임을 가지고 있는 누구와 다르게 다른 쪽은 열심히 생사의 기로에 놓여 착실하게 버둥거리고 있었다.
“이미 거의 잘려 있잖아요!!”
“야, 만화 안 봤어?! 악마 새끼는 날개랑 꼬리가 약점인 게 클리셰잖아! 그니까 얼른 노려!”
“클리셰를 왜 여기서 찾아요?!”
만화 좀 그만 봐요!!
최민현이 짜증을 담아 타박하면서도 유라가 말한 대로 이미 반쯤 찢겨 있는 날개를 노렸다.
【스킬: 빛의 발자국(A)을 발동합니다.】
‘오!’
그래도 악마가 빛에 약하다는 클리셰 정도는 알고 있는지, 검에 환한 금색 빛을 두른 민현이 그대로 날개를 내리쳤다.
쉬시시식―
“……이런.”
“앗싸―!!”
서유라가 환호했다.
예상이 적중해 남아 있는 날개가 그대로 녹아 떨어져 내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호로록―
서유라는 환호했지만 나는 느긋이 홍차를 마시면서 놈을 유심히 살폈다.
공격이 처음으로 확실히 들어간 것에 정신이 팔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으나, 놈의 태도는 분명 의아했다.
클리셰대로 약점이라면 분명 당황하거나, 낭패를 보았다는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게 조금도 없었다.
약점이 아니라도 어차피 신체의 일부긴 하니 고통이라도 있을 터인데, 그조차도 평온하기만 했다.
그럼 약점이 아닌가? 아니, 그렇다 해도 공격을 처음으로 허용한 것인데 기분이 상한 것 같지도 않고, 대체 뭐……
“……아.”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나는 저 빌어먹게 짜증 나는 모습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고맙네 ……■■■여.’
아주 후련한 얼굴로 날 이용해 먹고 떠난 어떤 놈에게서.
“……아 놔. 이 X발.”
가면의 의태를 뚫고 본래의 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진짜 열 받아 돌아가실 것 같았다.
작가가 대체 무슨 의도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왜 만나는 보스몹마다 저런 놈들만 튀어나오는지 영문을 모르겠다.
어쨌든 죽여야 하는 빌런에게 왜 자꾸 의미를 부여하고 미화를 하는가.
괜히 죽이는 사람만 찝찝하게!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신파 유행 지난 지 한참인 거 같은데 요즘 왜 이렇게 시스템이 신파를 사랑하냐고, 가서 항의하고 오겠다고 합니다.]
그 화신에 그 성위라고, 똑같은 생각의 성위가 삐친 것도 잊고 진짜 짜증 났는지 말을 걸어 왔다. 그에 간절히 대답했다.
‘어. 제발.’
스토리 패치 좀여. 질려 돌아가실 거 같아요.
요즘 드라마나 영화도 그렇고 왜 이렇게 바라지도 않는 신파를 많이 넣어대.
그것까지는 어떻게 간신히 버텨 보겠는데 현실 반영까지는 진심 선 넘었음.
이 건의문이 제발 신님께 전해지길 간절히 바라며, 다시 고개를 돌려 저 상놈과 더불어 늘 내 속을 들었다 놨다 하는 빌어먹을 인간도 같이 보았다.
“밀어붙여! 유지한!!”
“[세이라]―!!”
【에고소드가 긴 잠에서 깨어납니다.】
【빛의 검, 세이라가 계약자를 위해 승리를 노래합니다.】
챙―!
“……큭―!!”
세이라까지 깨워 신성의 검 그 자체로 덤비니 고위 악마쯤 돼 보여도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끼이이익―
검들끼리 맞닿아 내는 소리가 무척이나 불쾌했다.
“유지한! 더! 좀만 더!”
“길드장님! 곧이에요!!”
“엄호하겠습니다!”
불쾌한 소리의 뒤로, 그 소리를 듣고 환호하며 기대를 섞는 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로록―
―더 드릴까요?
달칵.
“음? 좋지.”
한편의 희극을 보는 것 같았다.
우스꽝스럽고, 그럼에도 너무나 열심이어서 빛이 나는, 그런 희극.
내 감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바보들의 대잔치긴 했다. 고작 저 정도로 왜 저렇게 쩔쩔매고, 멍청한 실수를 반복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크흑―!”
“아니. 거기서 밑으로 내리치면 어떡해?!”
“선배 얼른 막아요!! 말 그만하고!!”
심지어 저건 내 바로 아래 랭커면서 왜 이렇게 약한 거지?
주인공 체면이 다 어디로 꺼졌는지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이 세계 대빵일 텐데, 왜 싸움에서마저도 호구지?
성장형 먼치킨이라지만 그래도 먼치킨인데??
벌써 두 번째로 유지한의 전투를 보는 것이지만, 먼치킨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많이 있었다.
적어도 먼치킨의 진수란, 화끈하고 사이다스러운 전투가 아니겠는가.
탕―!
“윽……!”
“유지한!”
“선배 흐트러지면 안 돼요!!”
근데 눈앞에 있는 건, 웬걸.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래도 국내에서는 너 다음인데, 저게 X밥은 아닐 거고, 저 반대편이 생각보다 강할 거라며 조심스럽게 첨언합니다.]
첨언은 개뿔. 본인도 그렇게 믿고 싶은 거 같은 소리였다.
뭐,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긴 했다.
어찌 됐든 저놈의 1위를 뺏은 입장에선 저놈이 저토록 X밥이면 일만 더 쌓일 것이 자명했으니까.
훤히 열린 고생길에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었다.
겉으로는 드러내지도 못하고 속으로 있는 대로 머리를 쥐어뜯고 있자, 그런 나를 보고 성위가 혀를 쯧쯧 찼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러게 저걸 왜 저렇게 신경 쓰고 있냐고. 아직 늦지 않았으니 얼른 버리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간신배처럼 속삭입니다.]
이 틈을 타 저거 얼른 버리고 자기만 봐 달라는 어필까지 아주 완벽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챙. 탕―!!
“괜찮아!”
콰강―!
“괜찮기는 개뿔!”
“이 정도는 아직 충분히 해 볼 만해.”
틀린 말을 넘어 솔직히 매우 솔깃한 말이었지만…….
‘조용히 해.’
버릴 수 있었으면 진작 내다 버렸을 터였다.
정말로, 애저녁에.
“세이라!!”
【빛의 검 세이라가 시전자에게 반응합니다.】
【고유스킬 발동.】
【에고스킬: 승리를 위한 빛의 찬가(S)를 발동합니다.】
결국 세이라까지 제대로 발동했다. 기억하기로 저 스킬을 발동하면 반동이 장난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놔. 저게 진짜.’
지금 같은 몸 상태면 분명 말도 못할 터인데, 정말 오늘만 사는 인간인 듯하다.
다시 속에서 깊은 빡침이 올라올 때였다. 세이라가 빛을 냄과 동시에 지한의 머리 색과 눈동자가 금빛으로 물들어가며 찬란하게 빛이 났다.
세이라의 최종 형태였다.
‘오. 존잘 오브 존잘의 자태인가…….’
이 와중에 주인공 버프 쥑이네.
외모 버프까지 완벽한 스킬에 빡침도 잠깐 잊고 순수하게 감탄했다.
뒤에서 득달같이 빽빽거리는 성위의 외침이 들려오는 것 같았지만, 깔끔히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존잘이었다.
콰가가강―
“하압―!!”
유지한이 자세를 잡고 그대로 날아올라 상대를 향해 정확히 검을 내리쳤다.
이름도 빼앗긴 악마 주제에 그 공격을 정통으로 받아 냈다.
자신과 상극인 빛의 에너지의 최상급인데도, 두 발로 멀쩡히 서서 말이다.
“……뭐야 저건―!!”
유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삿대질을 했다.
확실히 말이 안 되긴 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게이트의 등급은 B+.
날개까지 잘리고 이름까지 빼앗긴 패배자가 강해 봤자, 유지한의 최고 스킬을 받아 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저거 말이 돼요?”
“당연히 안 되죠.”
하지만 저놈은 받아 냈다.
살아남았다. 살아남을 수 있을 리가 없는 공격에.
주륵.
“커헉―!”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것조차 아니었으면 주인공이 X밥이든, 게이트 등급이 막장이든 당장 밸런스 패치하라고 신이라도 찾아가 멱살을 잡을 용의가 다분했다.
쿨럭―!
제대로 내상을 입은 듯, 결국 무릎을 굽힌 채 피를 한움큼 쏟아 냈다.
누가 봐도 딱 죽기 직전의 부상자였다.
그 죽기 직전의 부상자가 입에 피를 잔뜩 머금은 채로 쌍욕을 시전했다.
“젠장. 이 빌어먹을 속박……. 이 정도 공격에도 안 깨지다니.”
‘와우…….’
사탄도 저 독한 놈 좀 보라고 울고 갈 패기에 진심으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니까 저걸 속박이 깨질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으로 정면에서 맞았단 말인가!
목숨이 일곱 개정도 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패기였다.
다른 이들은 그래도 설마하니 일부러 맞았을까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말이 진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강력하긴 해도 너무나 정직한 그 공격을, 피하지 못할 실력이 아니었으니까.
파시식―
아무리 제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해도 말이다.
“날개가…… 떨어졌어.”
“끝인 거죠.”
날개가 부식되듯 부서져 내렸다.
날개가 장식이라 한들, 몸의 일부가 그렇게 부식되듯 사라진다는 것은 그 존재의 끝을 의미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
모두가 숙연해진 분위기 속에서 그 끝을 재촉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렸다.
호로록― 달칵―
멍청함의 끝판왕을 달리는 행태들에 한심함이 절로 쏟아져 나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저것들 진짜 최상급 네임드 랭커들 맞냐 의문을 제기합니다.]
[무슨 생초짜도 느끼는 걸 던전이라면 제집처럼 드나들었을 것들이 느끼지 못하냐고, 도를 넘은 한심함에 혀를 차며, 그 와중에 무슨 뽕에 찬 건지 왜 저딴 걸 지켜보며 폼을 잡냐고 삿대질을 합니다.]
……그래도 우리나라 최고 공대인데.
필터 하나 거치지 않은 것 같은 팩폭이라, 팩폭의 달인도 살짝 주춤했지만 그 말을 부정하진 못했다.
뭐 하나 틀린 게 없었으니까.
‘아니 끝난 것도 아닌데 왜 여운을 즐기고 있냐고…….’
님들이 소설캐는 맞는데요. 진짜 소설처럼 여운 겸 숨 고르는 장면까지 챙기셔야 하나요. 개인적으로 현실과 백만 광년 동떨어진 데다 시간만 끄는 장면을 매우 극혐하는 독자가 진저리를 쳤다.
“쿨럭……. 빌어먹을.”
끝이 아니었는지, 심지어 소설의 클리셰가 등장했다. 일명 최후에 나오는 빌런의 후회 대사!
으. 하다 하다 여기까지 나오다니!
몸서리가 쳐졌다.
“내 마지막 꼴이 이렇게 하찮을 줄이야. 빌어먹을 새끼…….”
피를 한 동이 흘리면서도 투지를 잃지 않은 듯, 분노를 토해 냈다.
매우 오글거려 돌아가실 것 같았지만, 어차피 여기서 저놈을 죽여선 안 되기 때문에 인내심을 박박 끌어모아 말을 들어 주었다.
아무도 저놈을 죽이면 안 되는 것이 이 게이트의 클리어 조건이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다들 착해 빠져서 조용히 그 분노를 들어 주고 있었다.
다 지긋지긋한 부처들이었다.
“……정정당당하게 싸웠다면 내가 분명 우위였는데! 신성한 대결을 더럽히고 얻어 낸 승리 주제에 뭐 그리 가치가 있다고!!”
명예를 저버리고 뒤통수를 친 건 그 자식인데 왜 정직하게 결투에 임했던 내가 이 수모를!
모든 걸 빼앗긴 자가 정당하지 못한 싸움에 의한 패배에 울분을 토해 냈다.
그걸 들으며 나는 뭐, 저런 병신이 다 있나 싶었다.
세상에 악마가 페어플레이를 논하다니.
보아하니, 마지막 보스전에서 자기는 정정당당하게 홀로 온 힘을 다했는데, 나태왕 쪽에서는 비겁하게 다구리를 친 듯했다.
근데, 애초에 악마인데, 악마가 페어플레이 같은 걸 하나?
영혼에서부터 배신과 타락이 새겨진 종족이 바로 악마란 종족 아닌가.
그중 최고의 자리에 앉아 있는데, 정정당당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 같은데…….
평범한 인간도 하는 생각을 정작 악마가 못하고 저 꼴이라니. 세상이 망할 징조보다 더 멍청하고 어이 털리는 소리였다.
제 종족 아이덴티티는 생각도 안 하는 저 작태에 헛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저거 악마가 아니라 혹시 제가 아직도 천사인 줄 아는 타락한 천사 같은 설정 아니냐고, 오글거림에 두 눈을 짓누르며 묻습니다.]
오죽하면 제 성위마저 저건 뭐 하는 생물이냐며 두 눈을 가리기까지 했다.
저따위면 마계 대표 이단아이자 아싸 각 아닌가?
저게 아싸이든 말든 눈곱만큼도 관심 없었지만, 너무 황당한 소리에 절로 관심이 갔다.
멈칫―
“…….”
‘아놔.’
이 와중에 억울해하는 악마의 모습에 끝을 내려는 걸 멈칫하고 계신 망할 호구님을 보자 절로 뒷골이 당겼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 환장 파티는 대체 뭐냐고, 선을 씨게 넘는 호구 신파 막장 스토리에 짜증스러운 얼굴로 백기를 내듭니다.]
너무 강한 호구력에 성위는 백기를 던졌다.
나름 자칭 인내심 끝판왕이라고 자부하는 성위조차 저 꼴이니 슬슬 저 상황을 중재해야 할 듯했다.
달칵―
스윽―
자리에서 일어나자, 명령하기도 전에 테이블이 사라졌다.
“……!”
“……헐.”
내 존재를 이제야 눈치챈 건지, 적막 속에서 가늘게 터져 나온 소리 사이로 내 걸음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또각. 또각.
내 존재를 새기듯.
“……당신.”
내가 지척에 다가오자, 이건 진짜 여기가 어디인지에 대한 자각은 휘발시키기라도 한 것인지, 지한이 다잡고 있던 검도 내려놓고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저러다 죽기 딱 좋은 모습이었다.
저기 아직 헌터의 헌 자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내 호적 메이트는 그렇다 치고, 너는 대체 왜 그러는 거냐.
한심함에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고, 한숨 대신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왜 이리 여린지.”
나 없었을 때는 이 험난한 세상에서 대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모두가 당신한테 상냥하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은 어떻게 이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알아 봤자 뭐가 달라지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건만, 호기심이 일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순간 타이밍 좋게 내 원래의 용건이 끼어들어 주셨다.
“큭……. 끝까지 안 끼어들 줄 알았더니.”
말 한번 잘했다.
“그럴 생각이었지. 네가 죽어서는 안 될 이유가 있지 않았다면 말이야.”
그리고 그걸 아무도 모르고 있지만 않았다면 계속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기면서 게이트가 공략되길 기다렸을 것이다.
“……죽어서는 안 된다고?”
“어째서?”
“그런데, 저분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야? 나만 잊고 있었어……?”
넋 나간 것 같던 정신이 돌아오자, 전혀 예상도 안 한 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소리가 곳곳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듣기만 해도 한심의 쓰나미 같은 소리였다.
그 중간에서, 그나마 핵심을 파악한 최민현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믿을 수가 없어요. 그렇게 느긋하게 혼자 티타임을 갖고 있었는데 어떻게 시선 강탈이 되지 않았지?”
이 급박한 전투 현장에서, 시종까지 데리고 꽃밭에서 느긋하게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는데?
온 신경이 전투에 몰입되어 있었다지만, 그런 이질적인 광경에 한 번도 시선을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다는 목소리에 그제서야 모두가 큰 충격에 빠진 듯 나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들을 한 몸에 받아들이며 나는 어깨를 으쓱여 보일 뿐이었다.
아니, 지들이 눈치 못 챈 걸, 나더러 어쩌라고?
물론 망자의 귀부인 특성상, 기척을 죽이는 건 특기라 그들이 전투에 집중할 수 있게 기척을 없애고 있긴 했었지만, 그래도 모습을 사라지게 한 것도 아니고, 눈치 못 챈 것들이 바보였다.
“……크, 크큭. 다른 것들도 나처럼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하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군.”
아. 정말 대단해.
쿨럭―!
피를 토하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않는 게 정말 훌륭한 미친놈이었다.
“굳이 말 안 해도 되는데 말이지.”
소설 캐릭이어서 그런가 미주알고주알 참 말이 많았다.
설정에 충실한 건 참 대견하지만 너무 대견해서 닭살이 올라오려 했다.
심하게 오글거려서.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저거 그냥 죽이면 안 되냐며, 온몸에 난 닭살을 요란하게 긁어대며 선동합니다.]
아. 부채질하지 말라고!
매우 유혹적인 부채질에 몸서리치자, 성위가 그러니까 저거 얼른 끝내자며 함께 몸서리를 쳤다.
그 성위에 그 화신이었다.
“뭐 저치들이 멍청한 건 당신에게는 행운 아니었나요? 당신의 주인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을 텐데 말이죠.”
“……주인은 얼어 죽을.”
나름 귀부인답게 우아하게 말을 던지자 그에 화답하듯 화려한 언사가 돌아왔다.
“어머. 언사가 꽤나 하시는 분이시네.”
“강제 속박에 잡혀 사는 신세에 무슨 주인 소리가 곱게 나오겠어.”
아. 그건 인정.
씹어 먹을 듯 내뱉어지는 말이 너무나 와닿아서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 빼앗기고 기껏해야 먼지만큼 남은 찌끄레기만 한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게 대단하긴 하네요.”
“…….”
“얼른 죽으라고 힘 하나 쥐여 주지도 않고 사지에 던진 그 주인도 대단하고.”
“…….”
“게다가 이대로라면 묫자리로 그 속박 주인한테 좋은 일까지 하나 딱 해 주고 죽는 거네요.”
완벽한데요?
비웃듯 묻자, 놈은 빡침이 치솟는 듯 벌떡 일어나려다 그 반동으로 피를 토하고 다시 쓰러졌다.
“…….”
털썩―
그 한심한 꼬락서니를 가만히 지켜보자, 그 시선을 정면으로 맞닥뜨리면서 놈이 입술을 짓이겼다.
“아, X발……. 더럽게 억울해…….”
마계왕에게 한번 패배한 것뿐인데 이 꼴이 되어서 억울한 건지, 아니면 속박으로 휘두르는 권력을 자신이 누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억울한 건지 모를 소리였지만, 그래도 나름 신세 한탄을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 해 줬다.
“비겁하게 뒤통수쳐서 이긴 새끼한테, 죽어서까지 좋은 일 시켜 주다니. 진짜 뭣 같네.”
확 다 망해 버렸으면.
절절히 뱉어지는 꽤나 인간적인 저주에, 나는 지긋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
저주가 씹어먹을 듯 튀어나오고 나서야 사태 파악이 된 듯 얼빠진 얼굴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는 게 아주 압권이었다.
아니, 저 정도야 돼서야 알아차리는 거야? 진심??
소설에 아주 기본의 기본적인 클리셰였음에도 이 정도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랭커들에게 진심으로 어이가 터졌다.
저 당황해하는 뒤통수들을 다 한 번씩 시원하게 쌔려 주고 싶은 욕구가 차올랐지만, 슬슬 골든 타임을 넘어가고 있었기에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했다.
‘윤지호’일 때 패야지. 라고 다짐을 잊지 않으며.
“그래서, 이대로 죽을 건가요??”
“……뭐?”
죽는 건 이미 예정된 수순이라고 여겼던 건지, 얼빠진 소리가 되돌아왔다.
그 얼빠진 소리를 듣자니 기분이 좋아져 한껏 고조된 미소를 띠며 놈과 시선을 맞췄다.
“당신이 죽은 자리가 구심점이 돼서, 이 게이트가 통로로 안착되는 거겠죠? 지금 당신의 몸 자체가 나태왕의 속박과 마력으로 범벅되어 있으니까.”
“……마치 모든 걸 본 것처럼 말하는군.”
“뭐 그리 어려운 예측인가요.”
훤히 보이더만.
사실은 전부 감이었지만, 죽어도 설명은 못 하는 여자가 뻔뻔하게 시치미를 뗐다.
그리고 그 뻔뻔함은 예상치 못한 신비로움을 가져다준 듯, 놈의 눈에 경외가 살짝 어렸다.
‘오. 몬스터에게 이런 눈빛을 받으니 살짝 짜릿한데??’
신세계가 열린 기분이었다.
이래서 헌터들이 헌터를 그만두지 못하는 건가?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워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고, 그 증거로 저길 보라고 삿대질을 하며 위험한 강을 건너지 말라 만류합니다.]
이런 나를 본 성위 놈이 득달같이 달려와 원티드 인간들을 삿대질 하면서(특히 망할 유지한 님) 나를 만류했다.
되도 않는 뻘소리였지만, 유지한을 생각하자니, 정말 거짓말처럼 진짜 팍 식긴 했다.
“……꼭 방법이 있다는 것처럼 얘기하는군.”
“있죠.”
당연히. 그런 것도 없이 이렇게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을까.
그런 악취미는 없다 당당하게 말했지만, 억울하게도 그렇게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무슨?!”
“바. 방법이 있다고?!”
“무슨 소리지?”
뭐 그것도 그거지만 던진 이야기가 폭탄이라 그런지, 반응이 매우 알찼다.
“……정말인가?”
하지만 이쪽도 매우 알찬 반응을 보여 주니, 나도 모르게 조금 안쓰러운 마음이 생겼다.
“생각 잘해야 해요. 사실 난 별로 추천하지 않거든요.”
진심이었다.
가장 깔끔하고 편한 방법이긴 했지만, 어쩌면 여기, 당신에게는 분명 또 다른 족쇄. 그 이상 그 이하도 되지 않을 테니까.
사실 굳이 당신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냥 흔적도 없이 없애 버릴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왠지 저기 저…….
“……?”
……모자란 놈이 당신을 신경 쓰는 것 같으니까.
“선택권을 줄게요. 당신이 말하는 그 나태왕의 수족으로 죽을지. 아니면…….”
“아니면?”
“내 것이 될 건지.”
* * *
“……!”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다 폭탄이었지만, 상상을 뛰어넘는 마지막 말에 지한은 흡―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숨을 들이마셨을 뿐인데도,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쩜 다 저런 말만 할 수 있는지, 지한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경지였다. 물론 이해할 수 없었던 건 전투 초반부터였지만.
처음 발견했을 때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다들 미친 듯이 전투에 임하고 있는데, 혼자 소외된 것처럼 멀뚱하게 서 있더니 어느샌가 보니까 아예 판까지 다 깔아 놓고 느긋하게 티타임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다른 이들은 기감이 약해서 뒤늦게 눈치챘었지만, 그들보다는 더 기감이 높은 지한은 거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 말 안 했을 뿐이다.
말할 재간도 없었을뿐더러, 말한다 해서 뭐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보여 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쩐지, 자신을 명백한 약자로 보는 그 사람에게. 자신은 그렇게 약하지 않다고 증명하고 싶었다.
“……유지한?”
결국은 아무짝에도 소용없었다.
끝까지, 그녀의 눈에는 자신은 약자일 뿐이었다. 자신과는 상대조차 되지 않는.
그녀의 눈에 비치는 자신을 보며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동급’이라고는 추호도 생각지 않는다는 걸. 그럴 자격도 없다는 걸.
이가 악물렸다. 분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것이 되라고?”
“그래. 내 것.”
“……그게 무슨.”
“잘 선택해야 할 거예요. 나답지 않게 매우 많은 인심을 베풀고 있는 거거든.”
그리 말하며, 싱긋 미소를 짓는 귀부인은, 귀부인답게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지금 나태왕이 지배하고 있는 모든 속박은 해제될 테지만, 대신.”
“……!”
“영혼까지 내 것이 되는 거야. 내가 죽지 않는 한. 영원히. 네 영혼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네 영혼에는 내 이름이 새겨져 있을 테지.”
뼛속까지 새겨지는 것 같은 매혹적이고 위압적인 목소리에 절로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말을 듣는 당사자는 자신이 아닌데도 지한은 마치 자신에게 하는 소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 느껴진 것은 비단 자신뿐만은 아닌지, 다들 팔을 쓸어내리는 것이 눈에 비쳤다.
그게 묘하게 안심이 되면서도 저걸 듣는 당사자는 저 어마어마한 압박감과 매혹을 어떻게 견디는지 궁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거의 넋이 나가듯이 한 얼굴로 그가 물었다.
“그럼 내게 주어지는 건 뭐지?”
그 물음에, 무슨 그런 바보 같은 걸 묻느냐는 듯이 웃음을 흘리며 그녀가 답했다.
“지금 걸린 속박의 해제와 힘. 내가 가진 힘을 당신에게 줄게. 가서, 바라던 바를 마음껏 이루고 와.”
“……!”
“나는 포기하고 순응한 채 사는 개새끼는 필요 없어. 내가 원하는 건 투쟁하고, 제가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끼는…….”
“……그래. 지금 너 같은 눈을 한 개가 좋아.”
어때. 좋은 주인이지?
너무나 산뜻하게 말해서 더 와닿는 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심장이 고장 난 거 같았다. 저런 지독한 말에 어째서 심장이 멋대로 뛰는 건지.
저런 말을 진짜로 자신이 들었다면 어땠을지, 상상하기도 무서웠다.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
긴장감이 감도는 사이에서, 악마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는데 홀린 듯 그녀를 올려다보던 그가, 입술을 짓씹으며 눈빛을 달리했다.
독기가 어린 그 눈을 보며 지한은 확신했다. 저 입에서 어떤 답이 나올지.
“……쿨럭. 하, 하하……. 그래. 좋아. 뭐든 하지. 이 빌어먹을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
“개든 노예든, 얼마든지 네 발치에 키스하고 개처럼 기겠어.”
그건 다짐과도 같은 말이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필사의 각오.
지독한 그 다짐에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는데, 그녀는 웃었다. 더없이 사랑스럽게.
“좋아. 잘 기억해. 지금 이 순간부터, 너의 모든 건 내 것이야. 손톱, 머리카락 한 올, 네 영혼까지.”
그녀의 손이 닿는 순간 그의 모든 것이 변해 갔다. 미라같이 말라붙었던 피부가 곱디고운 하얀 피부가 되었고,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길게 자라나며 생기를 더했다.
“……대박.”
부서진 날개 역시 원래의 멋진 위엄을 뽐내었고. 전투로 망가진 옷까지 전부 복구가 되었다. 그리고 새롭게 바뀐 그의 모습은…….
“원래는 이런 모습이었구나. 예쁘네. 네 이름은?”
누가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압도적인 미형의 고위 악마였다. 그가 자신의 새로운 주인의 손에 입을 맞추며 무릎을 굽혔다.
“내 주인의 뜻대로.”
그 순종적인 모습을 보며, 그녀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머리로 손을 뻗었다.
“그럼, 데이모스로 하자.”
언제나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너를 위하여.
그리 말하며, 그녀가 부드럽게 그, 데이모스의 이마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애정을 담듯.
“바라는 바를 이루고 돌아오렴. 그렇지 않으면 못 돌아올 줄 알아라. 알았지?”
장난스러운 명령에, 데이모스는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나의 주인. 모든 것은 나의 주인의 뜻대로.”
“…….”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으며 다른 사람이 낄 여지 따윈 조금도 없는 광경이었다.
낄 생각도 없었지만, 왜인지 그 사실에 가슴이 조여 오는 것 같아 지한은 애꿎은 심장만 쥐었다 폈다 했다.
왠지 그냥 싫었다. 자신이 낄 자리는 조금도 없다는 듯한 저 광경이.
정말 이상했다. 저기 보이는 인간은 자신보다 강자인, 랭커일 뿐인데. ‘그녀’가 아님에도…… 왜 이런 감정이 드는 것인지.
“다녀오렴.”
짧은 선언과 동시에 그가 희미한 인영이 되며 사라졌다. 명을 따르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어엇.”
“선배 넘어지겠어요!”
그와 동시에 주변 환경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로를 챙기기가 무섭게, 시스템이 알려 왔다.
【게이트가 클리어되었습니다.】
【‘나태왕의 개척점’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향후 높은 난이도의 게이트의 발현 가능성이 낮아졌습니다.】
【게이트 난이도 집계 조정합니다.】
【게이트의 최종 난이도는 A+급입니다.】
【게이트를 클리어 한 자는 ‘무명.’ 이매망량의 주인입니다.】
【클리어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알림 무더기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이 와중에 환경이 제대로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원래의 환경으로 돌아가기 위해 말이다.
두 다리에 안간힘을 주며 간신히 버티고 서며 지한은 어지러운 시야로 그녀를 찾았다.
찾는 건 쉬웠다.
그녀는 같은 자리에서, 게이트가 어그러지는 충격도 그녀에게는 예외였는지, 너무나 평온하게 양산을 쓴 채 서 있었으니까.
“……잠깐!”
휘청이는 몸을 필사적으로 세우며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무너지는 게이트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한 일이니 당연했다. 그걸 알면서도 나아가려 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지한은 스스로도 왜 나아가려 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격차만큼 닿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반드시, 당신을 넘을 겁니다!!”
왜 그런 말을 한 건지 본인도 모르겠다.
그냥 본능적으로 튀어 나간 말이었다.
뱉고도 아차 싶었다.
하지만 그 외침에 그녀는 오늘 처음으로 놀란 얼굴로 자신을 돌아보았다.
그 얼굴에 지한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 자신을 보며, 그녀는 아까 그놈에게 준 미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미소를 보내 주었다.
“……그래. 꼭. 나를 넘어서.”
자신이 한 외침이 그 어떤 것보다 기쁘다는 듯, 그녀는 웃어 보였다. 그 미소에 숨이 막혀, 어떤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당신은 약하니까. 당신이 나를 넘어설 그날까지. 당신이 위험해진다면.”
“…….”
“당신을 구해 주러 올게.”
왜, 어째서. 라고 묻지 못했다.
살면서 누군가로부터 자신을 구해 주겠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답을 해야 할지도 몰랐고, 지금 드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조차 형용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지한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시선을 떼지 못했다.
“……유지한!”
“선배!”
“길드장님! 괜찮으세요?!”
게이트가 닫히는 순간까지.
“유지한. 왜 또 넋 놓고 있어?”
“괜찮으신 거예요?”
밖으로 나와, 겨우 정신을 차린 지한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뼛속까지 깨달아 버렸다. 강자의 신념. 강자만이 가지는 오만.
“원티드 전 인원 확인된 겁니까?”
“네.”
“그럼 마무리 절차를 위해…….”
그녀의 신념이 무엇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