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모든 일은 예고가 없다.
“까아~ 넘 짜릿해. 이 맛에 널 사랑한다니까.”
“……이제 갔어.”
고마 해. 변태야.
이제 어느 정도 익숙해졌긴 했지만, 그것도 말 그대로 어느 정도라 한계치를 넘으니 몸에서 닭살이 올라올 것 같았다.
해서 가감 없이 소견을 표하자 닭살을 긁는 나를 보며 녀석이 매우 아쉬워하는 얼굴로 플러팅을 그만두었다.
“이번 달 특종 보너스를 내가 안 받으면 비리부터 의심해 봐야 해.”
플러팅을 그만두니 이번에는 자화자찬으로 갔다.
뭐. 확실히 저 정도를 물어다 줬는데, 보너스가 없으면 진짜 회사가 미친 거긴 했다. 주기 싫어도 줘야 할 만한 폭탄이었으니까.
그 정보의 가치를 너무나 잘 아는 녀석이 잇몸 만개 미소를 꽃피우며 말했다.
“자기야.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이 언늬가 보너스 기념으로 한턱낼게.”
“어, 음…… 아X백?”
막상 물으니 생각 나는 게 없어, 억지로 쥐어짜 유명 패밀리 레스토랑의 이름을 댔다.
그랬더니 돌아오는 반응은 아주 처절했다.
“야. 너 몇 살이야.”
“…….”
아. 그래. 나이 엿 바꿔 먹어서 미안하네. 기껏 생각해 줬더니―!!
딱히 엄청 가고 싶었던 곳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무난한 곳을 말했더니 저 지랄이다. 아니, 내가 더럽게 비싼 곳을 고르면 또 어쩌려고?
아마 그때는 그때 일이겠지만, 내가 패기가 없는 게 그냥 매우 마음에 안 든 듯했다.
아. 그냥 호텔 스카이라운지나 부를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드는 가운데, 인간 세상의 물정이라곤 모르는 성위님께서 천진난만하게 기름을 부어 주셨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아X백이 얼마나 싸구려길래 쟤가 저렇게 발광하는 거냐 천진난만하게 묻습니다.]
선량한 소시민은 매우 억울해졌다. 대체 저 계집애 때문에 무슨 소리를 듣나 싶었다. 한 번 가면 10만 원은 써야 하는 곳이 이렇게 싸구려 취급을 당하다닛……! 갈 때마다 큰맘 먹고 가는 소시민으로서 괜히 현타가 왔다.
……나만 그러나?
“기껏 적게 뜯어도 지랄이에요. 그럼 네가 정해.”
“거래 성립.”
“…….”
바라던 게 이거였냐?
즉각적으로 튀어나오는 칼답에 어이가 털린 심정을 고대로 표출하는데도, 불굴의 철판. 여울림 기자 자기님께서는 유유자적 앞으로 나아가셨다.
“난 이대로 기사 작성하러 회사 들어간다!”
“어. 최대한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지?”
“내 모토 읊을 필요 없고. 너 어디 가? 가는 길에 내려 줘?”
여울림이 나가려는 걸 보며 나도 주섬주섬 짐을 챙기자, 여울림이 물었다.
그 물음에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됐어. 지하철 있어.”
아직 월급이 통장에 찍히지 않은, 무늬뿐인 고액 연봉자는 지하철이 맘 편했다.
* * *
지옥철을 겪지만 않는다면, 지하철은 나름의 묘미가 있다.
“세일입니다~!!”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고,
“잠깐 들어왔다 가 보세요. 볼 거 많아요!”
간 김에 다른 곳에 들렀다 갈 수도 있고…….
“아. 그리고 여기 맛있는 빵집이……!”
사실 다 개소리고 그냥 딴 길로 새는 게 좋은 거다.
집에 가도 이건 없는걸!!
분명 내일이면 평생 다이어트 중인 아가리어터가 땅을 치고 후회하겠지만, 적어도 오늘의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고대하면서 그 빵집 앞에 도착했는데……!
<재정 악화로 영업을 중단합니다. 그동안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이런 젠장. 지금까지 걸어왔던 모든 걸음이 아까워지는 순간이었다.
아까 그냥 여울림이 태워다 준달 때 탈걸…….
이 빵집을 오기 위해 공짜 카풀도 버리고 왔건만, 보이는 거라고는 휑하니 보이는 건물뿐이니 마음이 허탈해졌다.
“에라이.”
터덜터덜, 바람에 날아갈 것 같은 힘없는 걸음을 옮기자, 내 꼬라지를 보다 못했는지 성위가 답지 않게 위로를 해 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그럼 다른 빵집을 가면 되지 않겠냐 다정한 목소리로 제 화신을 달랩니다.]
“……오늘은 저기 빵이 먹고 싶었다고.”
저기에 맥주 한잔하면서 오늘 올라올 기사 반응 보고 쪼개면 딱이었는데!! 매우 쪼잔하고 사악한 계획이 단박에 무너져 버렸다.
“에이 씨.”
허망한 마음으로 강남역으로 내려가 지하철 줄을 서며 익숙하게 스마트폰을 손에 쥐었다.
―지금, 역삼. 역삼역 방향으로 가는 외선순환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산뜻한 지하철 언니의 알림을 브금 삼아, 평소와 같이 네X버 어플로 들어가 검색 차트를 살펴보는데…….
“와. 역시 여울림 미친…….”
빛보다 빠른 스피드에 절로 찰진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나온 지 이제 30분쯤 됐으니까 지금에야 회사에 도착했을 터였는데, 벌써부터 실검을 도배시켰다.
1위. 원티드 비리.
2위. 윈티드 투자
3위. 원티드 투자 내역
4위. 원티드
5위. 정부 투자 목록
화려하게 실검을 장악한 장황한 이름들에 깊이 감탄했다.
이야…….
“……조X일보 올해 롤 모델이 디X패치인가.”
이것들이 이렇게 빠른 집단이 아닌데?
극보수로 유명한 조X일보가 무슨 바람으로 디X패치처럼 빛의 속도로 빵빵이지?
여울림의 추진력은 인정해도, 극보수 꼰대 꼴통 대표주자 신문사는 믿지 못하는 불신러의 의심이 활화산처럼 피어올랐다.
뭐지? 뭔가 얘기가 오간 게 있나? 내가 그쪽으로 압력을 넣진 않았는데…….
이쪽이 헌터계에서 끗발을 날리긴 해도 정통 보수가 그런 거에 순순히 굽혀 줄 리도 없고, 어쨌든 윗선의 허락은 받았다는 건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렇게 중요한 거냐고 묻습니다.]
한창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궁금증을 참다못한 성위님 덕에 생각이 뚝 끊겼다.
아니. 뭐 그런 당연한 걸 물어보는 거야.
[‘이매망량’ 님이 그냥 어쩌다 한 번은 이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차디찬 눈빛에 항의합니다.]
나름 일리 있어 보이는 항의였지만 나는 자신할 수 있었다.
세상에 그런 집단은 없다. 사람이 많고 오래된 대집단일수록 ‘어쩌다’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변덕을 부린 게 사장이라면 예외겠…… 사장?
“……아하.”
이제야 퍼즐이 맞춰졌다.
설마 여기서 이렇게 움직여 줄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만족스러운 사실에 미소를 짓자, 내 돌변한 모습을 보다 못한 성위가 재촉을 해 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뭔데? 뭐냐고! 혼자만 알고 웃지 말고 재밌는 건 같이 좀 알자, 며 채근을 해 옵니다.]
‘왜. 쉽자나.’
[그건 너한테만 쉬운 거라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포효합니다.]
아니. 진짜 쉬운데.
굳이 소설을 모르더라도 일반론으로도 쉽게 맞출 수 있는 정답이다.
유지한이 이끄는 원티드.
리더 유지한의 주변에 있는 사람 중 극보수 꼰대파 수장의 의견을 단박에 바꿀 수 있는 능력자는, 이리 보고 저리 보고 거꾸로 봐도 딱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음…… 그 사람이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나서 주는 거 보면 쓸 만은 하겠는데?”
그 사람을 잘 활용한다면 쉽게 풀릴 일들이 아주 많았다.
어떻게 잘 써먹을 수 있을까 머리를 굴리며 시커먼 미소를 짓자 왠지 뒤로 슬금슬금 발을 빼는 성위가 보이는 것 같았다.
쟨 이상한 데서 쫄보더라. 그 화신의 그 성위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고 가볍게 무시하며, 시커먼 생각을 이어가는데…….
―지금, 교대. 교대역 방향으로 가는…직―
지직. 지지직.
갑자기 안내음이 끊기면서 들어오던 열차가 그대로 직진해 사라져 버렸다.
“……??”
파직―
그와 동시에, 전기 끊기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며, 마침내.
챙―!
불이 나갔다. 눈앞이 암전됨과 동시에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정적 끝에 이어진 것은 당연히…….
“꺄아아악―!”
“뭐. 뭐야!”
“어. 얼른 나가야 돼!!”
“비켜요! 비키라고―!!”
이 모든 현상의 원인을 직감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아비규환이었다.
찢어질 듯한 고함과 함께 온갖 타격 소리가 난무했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나가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우에에에엥―!!”
그 와중에 애가 넘어져 서럽게 울어댔지만 아무도 시선조차 던지지 않았다.
“우에에엥―! 어어엉마아아아!!”
“비켜요―! 비켜! 비키라고!!”
“너나 비켜!! 손 치우라고요!”
“내가 먼저 나갈 거야!!”
그 난장판 사이에서 멍하니 서 있는 나는, 그 불편하고 잔인한 소리와 함께 더 짜증 나는 시스템 소리를 함께 서라운드로 듣고 있었다.
【돌발성 게이트가 발생했습니다.】
【게이트의 규모에 따라 게이트 내의 공간이 특색에 맞춰 변화합니다.】
【게이트 안에 진입해 계신 각성자분들께서는 전투 태세를 갖추어 주십시오.】
【게이트의 등급을 측정하고 있습니다.】
【측정 완료.】
【현재 진입하신 게이트의 등급은 B+등급입니다.】
아주 친절하고도 재수 없는 목소리에 나는 짧게 화답했다.
“……X발.”
제발 깜빡이 좀.
* * *
사각사각―
탁―
“이야. 우리 누나 일 열심히 하네.”
제 누나의 화끈함에 당한 누군가가 너무나 안쓰러웠던 윤지우는 조신하게 앉아 사과를 깎다가, 다시 한번 실검을 뒤덮는 누나의 위엄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이제는 놀랍지도 않다는 것 같은 질린 말투로 감탄하는 지우의 모습에, 지한의 옆에서 지우가 깎아 놓은 사과를 뺏어 먹던 두 사람의 시선이 지우에게로 쏠렸다.
“왜 우리 위대한 실장님이 또 한 건 했어??”
매우 평범한 간을 가지고 있는 소시민 셋과 다르게 매우 대범한 간을 가지고 있는 서유라가 눈을 빛내며 물어왔다.
소시민은 감당하지 못할 패기에 소심한 세 남자들은 속 편히 외면을 택했다.
그중 답변을 해 주어야 하는 윤지우는 썩은 동태 눈깔 같은, 영혼 없는 눈으로 무심히 답변을 건넸다.
“네. 작정했나 봐요.”
“오. 이번엔 뭐야? 어디 어디…….”
신이 나서 스마트폰을 켜는 서유라와, 마찬가지로 불안한 마음으로 쫄리는 간을 부여잡은 채 스마트폰을 켜는 다른 이들을 보며 윤지우는 다시 한 번 제 누나의 위대함을 몸소 실감했다.
“……와우.”
“이번에도 화끈하신데?!”
“……하아아.”
영향력 진짜 끝내준다. 윤지호. 여러모로…….
단언컨대, 윤지우는 같은 배를 빌어 태어나긴 했지만 죽었다 깨어나도 윤지호처럼은 못 살 거 같았다.
맨날 자긴 쫄보니 뭐니 하지만, 인생에서 그 인간만큼 핀트가 어긋나면 막 나가는 인간은 보지를 못했다.
‘누나…누나……. 야, 이 개싸가지야―!!’
‘……하암. 얜 왜 갑자기 지랄 발광이야?’
그래서 맨날 저 혼자 안절부절못하게 만들어서 사람을 굉장히 서럽게 만드는 인간이었다. 본인은 정말 눈곱만큼도 모른다는 게 더 짜증 났지만.
문득 윤지우는 제가 가드를 쳐 내쫓았던, 주제도 모르던 개자식들을 떠올렸다.
대체 왜, 다들 어딜 보고, 이 여자가 그렇게 좋다는 건지. 다들 눈들이 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후우. 또…….”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기 폰을 보고 세상이 떠나가라 한숨을 내쉬는 길드장님을 보자니 자연스레 그들이 떠올랐다.
상황은 많이 달랐지만, 분명 그 개자식들도 개썅 마이웨이에 저는 쳐다도 안 보는 윤지호를 보면서 딱 저렇게 한숨을 쉬었…….
‘헐.’
내가 드디어 미쳤나 보다.
그 개자식들이랑 하늘 같은 길드장님을 비교하다니―!
애초에, 길드장님에게 왜 윤지호를 갖다 붙이는가! 수준이 하늘과 땅 차이인데―!!
―라고, 본능적으로 눈치를 깠음에도 현실 도피하는 시스콤이 생각했다.
* * *
“후우우―”
한편, 시스콤의 본능이 정확히 가리키고 있는, 윤지호에 눈먼 남자는 그런 시선은 꿈에도 모른 채 한 손으로 머리를 쥐어 싸며 땅을 파고 있었다.
‘또. 또―!!’
걱정이 되어 미칠 것 같았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하필 자신이 없을 때 이런 위험한 일들만 연달아 저지르고……!
사실, 지한은 딱히 비도덕적이라거나, 강압적인 방식이라서, 혹은 자신의 신념 때문에 지호의 일을 반대하고, 말리려고 했던 건 아니었다.
누구보다 바른 척을 해 올 수 있었던 건 그만큼 바르지 않은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쭉 보아 온 것이 그런 것들이었는데 새삼 환멸이 들 일은 없었다. 더구나 상대가 당신이니까. 당신이 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틀렸다’, ‘하면 안 된다’라고 말할 생각 없었다.
설사 당신이 살인을 저지른다고 해도 아마 나는 흔적을 다 지우고 그 피를 내 손에 다시 묻힐 것이다.
다만, 말리고 걱정했던 까닭은, 당신이 다칠까 봐. 내 걱정을 한답시고 나를 이런 곳에 넣어 놓고 혼자 이렇게 일을 벌이다, 상처 입을까 봐.
걱정되고, 한시라도 곁에 있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서럽고 애끓는 마음이 곱게 마블링 돼 심장을 갉아먹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 걱정하는 만큼의 몇 배는 더, 내가 당신을 걱정한다는 걸…… 왜 몰라. 다리 병신이 된다 해도, 쓰지 못하는 다리를 억지로 질질 끌어서라도 곁에 있고 싶은 나를 왜 몰라…….
나와서는 안 될 온갖 마음이 흘러넘쳤다.
그 미친 속내를 보다 못한 계약성이 결국 한소리를 했다.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어디 가서 그 여자가 쉽게 당할 여자 같냐고, 딱 보니 지금 너 하는 꼬라지보다 백배는 강한 여자인데, 쪽팔리니 제발 땅 좀 그만 파라 첨언합니다.]
[그리고 정말 들켜서 곁은커녕, 근방 100m에도 발도 붙이지 못하게 되기 전에 그 미친 지 오래돼 회까닥 돈 것 같은 머리통 얼른 수습해 폐기 처분하라 충고합니다.]
‘……아.’
마지막 충고에 조금 정신이 돌아왔다. 만약 들킨다면 정말 그대로 끝장이었다. 얼른 주워 담아야 했다.
윤지호는, 제가 마음에 둔 그녀는 분명…….
나를 싫어하지 않지만, 아니 오히려 호에 가깝겠지만, 저와 깊은 인연을 만드는 것을 조금도 바라지 않는 그녀는 저를 버리는 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을 테니까.
버림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 발밑에서 기어야 하는 비참한 자의 입장에서 이 감정은 분명 오만이었다.
[왜 쓸데없이 이럴 땐 주제 파악을 잘하냐며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매우 찝찝하고 안쓰럽다는 듯 혀를 찹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니까.’
버림받지 않기 위해선 그래야 하니까.
본능적으로 지한은 뼛속까지 깨닫고 있었다. 윤지호가 정한, 내가 넘을 수 있는 선의 높이를. 그녀가 나를 봐줄 수 있는 선의 정도를.
내게 유하지만, 결국 그만큼 나를 버리는 데 있어서 다른 이보다 더욱더 가차 없을 그녀의 시리도록 다정한 그 선을, 모를 수가 있을까.
그렇게 잔인할 수 없었다. 다른 이에게보다 훨씬 넓은 선을 그려 주었음에도 그뿐, 그 선을 넘는 순간, 단 한 번의 기회도 없이 가차 없이 나를 잘라 버릴 그녀가.
야속하고, 볼 때마다 심장이 버석거렸지만, 그래도 그는 괜찮았다. 버틸 수 있었다.
버림받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는, 정말, 뭐든 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그때, 모두의 폰에 듣기 싫은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아. 경보 떴네요.”
“이따위로 우리한테 굴어 놓고, 실검도 이렇게 터졌는데 우리한테 그게 왜 날아와?”
염치는 국 끓여 먹은 지 오래라지만, 철판이 도대체 몇 개래?
시끄러운 경보음에 귀를 막으며 유라가 있는 대로 짜증을 내질렀다. 마찬가지로 같이 귀를 막은 민현이 드물게 유라의 말에 동조했다.
“없어질 만하면 자체 생산 무지하게 잘하잖아요. 근데 이건 아마 등록된 헌터들한테 일괄적으로 다 뿌리는 걸걸요.”
“……아. 짜증 지대로네. 이번엔 어디야?”
“어디 보자. 뭐 별… 강남역인데요?”
“뭐?”
아무리 악감정이 있는 상태라지만, 그래도 악감정은 정부에게 있는 것이었지 시민에게까지 있는 게 아니었기에 그들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아무리 일 안 한다 뻗대며 권리를 되찾는 중이었지만, 그들은 뼛속까지 헌터였다. 사람들을 구하는.
“……가 봐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헌터들이 출동했을 거야. 물어봐. 아는 사람 없어?”
“잠깐만요. 녹음이 출동한다네요. 유예도 차출 나간다는데요?”
“그럼 골고루 대규모로 밀어붙인다는 거네. 됐어. 그럼 우리가 안 나서도 넘칠 만큼 충분… 아.”
서유라는 문득 말하면서 깨달았다.
자신들이 아니어도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헌터는 이렇게나 많았다.
원티드가 파업해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분명 이렇게 될 것이라 말은 했지만, 정말로 그 말대로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었다. 우리가 처리해 오던 것이 너무 익숙했으니까.
당연히 이번에도 우리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깔려 있었나 보다.
“왜 그래요. 선배?”
“아니. 정말 지호 씨 말대로여서.”
하지만 이번에도 그 사람이 옳았다. 너무나 당연하게 우리가 아니어도 된다고 말하던 그 사람의 말처럼, 세상은 정말 그렇게 돌아갔다.
“근데 강남이면 우리 길드 근처 아닌가? 우리 사람 휘말린 건 아니겠지?”
“우리 쪽 사람들 지하철 안 탈걸요?”
일단 퇴근을 안…….
신입 앞에서 꺼낼 소리는 아니어서 민현은 황급히 뒷말을 삼켰다.
길드원들을 제외하고 길드를 지키는 경호원과 관리인, 특히 연구원들은… 제발 길드원들이 퇴근 좀 하라고 해도 연구에 미쳐 퇴근을 하지 않았다.
경호원들과 관리인들은 길드 건물 내에서 아예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연고가 없는 이들로만 채용했으니까.
한마디로 거기서 출퇴근을 하는 일반인은 딱 한 사람뿐이었다.
“지호 씨야 뭐 택시 타셨겠지.”
연봉도 어느 정도 받고 있고, 시간을 얼마나 금처럼 아끼며 생활하는지 며칠간 보아 온 유라가 여상하게 말했다.
물론 틀린 건 아니다. 일할 때 지호는 시간을 가장 귀하게 생각하니까.
다만…….
피붙이 윤지우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에 새파래진 얼굴로 고백했다.
“윤지호… 아직 지하철 타는데…….”
“……!”
온몸에 피가 다 빠져나가도, 이렇게 끔찍하진 않으리라.
유지한은 생각했다.
* * *
“아…… 놔…….”
멧돼지가 돌진해도 그것보다는 덜 무서울 것 같은 미친 사람 떼가 난리 통을 만들며 순식간에 사라지자,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혼자 남게 된 나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이런 뷁 같은…….”
그래 봤자 욕밖에 안 나왔지만.
고인물의 욕까지 동원하자, 내 깊은 빡침을 느낀 성위님께서 살살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진정하고 위험하니까 일단 움직이자고 다독입니다.]
[이렇게 무방비 상태로 계속 여기 있는 건 아무리 그래도 좀 그렇다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안달복달 못합니다.]
조곤조곤하게 나를 달래는 상태 창에 빡침이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늘 나와 함께하는 이 성위의 애정에는,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지.”
천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변의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만, CCTV가 있어서 바로 스킬을 쓰는 건 위험할 것 같았다. 제대로 작동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서 정체를 들킬 생각은 1할도 없기 때문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흠.”
천천히 움직이면서, 누구에게도 안 들킬 만한 곳이 어디일까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화장실도 입구까지는 CCTV가 있으니 들키기 쉬울 것 같고, 그렇다고 그냥 다 깔린 이곳에서 능력을 쓰기도 그랬다.
지하철 CCTV 사각지대가 어디더라?
머리를 가열차게 굴려 봤지만, 꼭 필요할 때는 안 떠오른다고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놔. 분명 어디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정작 필요할 때는 쓸모없는 머리통이었다.
머리를 쥐어 싸매고 있자, 나름 달래 준답시고 성위가 말해 왔다.
[‘이매망량’ 님께서 그냥 화장실이 낫지 않냐 합니다. 어차피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나올 텐데 크게 들키진 않지 않겠냐고 묻습니다.]
“뭔 소리야. 요즘 사람들 무서워.”
사람은 들어갔는데 다른 사람이 나오고, 정작 그 들어간 사람은 코빼기도 안 보여 봐라. 단박에 의심한다.
멍청한 나라는 몰라도 무시무시한 네티즌 수사대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머리를 미친 듯이 굴려대다, 문득 생각이 났다.
지하철 곳곳에 있는 용도 모를 철문들! 어두워서 CCTV가 있어도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그 공간이라면……! 밑져야 본전이란 생각에 황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앗싸!”
다행히 찾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런 철문은 지하철에 쌔고 쌨으니까. 그 안에 대체 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알 바 아니었다.
저기 들어가서 다칠 가능성은 제가 얼빵하게 자빠지지 않는 이상 제로에 가까울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괜히 열었다 갑자기 폭발하거나 해서 울 예쁜 너님 다치면 어떡하냐고 걱정을 홍수처럼 쏟아 냅니다.]
“……솔직히 말해. 어제 무슨 영화 봤어.”
대체 무슨 영화를 어떻게 본 것인지, 정작 내 믿음의 원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아니, 무슨 성위가 웬 영화를 그렇게 봤어?!
[‘이매망량’ 님께서 성위도 오락을 즐길 권리가 있다며, 당연히 넷X릭스 정도는 패치가 되어 있다 항의합니다!]
또 제 욕하는 건 절대 참지 않는 성위가 보란 듯 태클을 걸었다.
난 진심으로 어이가 털렸다.
“아니, 뭐 그딴 걸 패치해 주고 있어!?”
화신이 한국인이라고 성위도 한국인 패치해 주는 거야?! 대체 이놈의 시스템이란 뭔지.
일단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저 망할 성위에게서 넷X은 좀 압수했음 좋겠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그런 유익한 오락을 압수하라 하다니!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며 실연에 빠진 남자처럼 처연하게 소리칩니다.]
“……넷X 버려라. 진짜.”
세상의 모든 한심함을 담아 한숨으로 표현하자, 성위가 어떻게 그런 모진 말을 할 수가 있냐고 처절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더 얘기해 봤자 말꼬리만 늘어질 거 같아, 사뿐히 무시하고,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끼익―
녹슨 묵직한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매우 소름 끼치게 들렸다. 기분 나쁘긴 했지만, 개의치 않고 문을 홱 열었다.
덜컹―!
“……헐.”
너무나 간단히 열려 버린 문에, 잠깐 긴장했던 게 허무해졌다.
아니, 항상 잠겨 있었잖아! 근데 오늘은 왜 이리 잘 열려 있어?!
여차하면 티 안 나게 힘써서 열 생각이었던 나름의 계획들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이젠 하다 하다 쉽게 열려도 난리냐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아까 넷X의 원한으로 꽁한 채 투덜거립니다.]
‘아놔. 이 밴댕이 소갈딱…….’
[누가 밴댕이 소갈딱지야―!!]
“아놔. 이 씨X!! 이딴 걸로 진언 보내지 마, 미친놈아!!”
선량한 소시민 놀라서 살 수가 있나―!
진언의 위력 정도는 숱한 소설을 통한 내공으로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글로 아는 거랑 실제로 겪는 건 역시 천지 차이였다.
반사적으로 샤우팅을 해댔음에도 심장이 벌렁거려 진정이 되지 않았다. 단순히 귀가 떨어질 것 같은 게 아니었다. 귀보다는, 머리와 심장에 꽂히는 직격타.
몸이 아니라 영혼 자체를 흔드는 것 같은 이 소름 끼치는 느낌은 평범한 사람으로 살면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다.
누가 나를 흔드는 걸 끔찍이 싫어하는 나로서는, 정말 두 번 다시 느끼기 싫은 감각이었다.
“다시 한번 진언 보내면 진짜 죽여 버릴 거야…….”
뭐 이런 걸로 진언까지 하고 난리야. 할 말이 있으면, 내 앞에서 와서 직접 해. 간신히 헐떡이는 숨을 고르며 몸을 쭉 폈다.
【라이브러리를 발동시킵니다.】
【대상자의 상황 및 현재 상태를 체크합니다.】
성위에게 답은 없었다.
【성위 ‘이매망량’의 라이브러리 북이 갱신됩니다.】
【라이브러리가 대상과 융화됩니다.】
【진 ‘화신’ 스킬: 수백 개의 가면(S)이 전개됩니다.】
【성위 고유 스킬이므로 제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 속마음까지 싹 다 읽을 수 있는 놈이, 꼭 이럴 때만 내뺐다.
【‘망자의 귀부인’이 선정됩니다.】
【‘망자의 귀부인’이 라이브러리에 저장됩니다.】
【‘망자의 귀부인’의 가면을 씁니다.】
쏴아아―
[‘수많은 세월이 흐른다 한들……. 당신에게 나는 영원히 숭배해야 할 귀부인일지니.’]
하지만 변신과 함께 희미하게 들려오는 가면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널 숭배하듯…….’]
왠지 나는 답을 들은 것 같았다.
“좋아. 가 볼까.”
* * *
【돌발성 게이트가 발생했습니다.】
【게이트의 규모에 따라 게이트 내의 공간이 특색에 맞춰 변화합니다.】
【게이트 안에 진입해 계신 각성자분들께서는 전투 태세를 갖추어 주십시오.】
【게이트의 등급을 측정하고 있습니다.】
【측정 완료.】
【현재 진입하신 게이트의 등급은 ‘B+’급입니다.】
한편, 정부의 문자를 보고 뒤늦게 게이트에 출입한 헌터들은.
“꺄아아아악―!”
“살려 줘요! 살려 달라고!!”
“헌터! 헌터들은 대체 언제 오는 건데!!”
익숙한 시스템의 알림과 함께 들려오는 이기적인 비명에 인상을 찌푸렸다. 하루 이틀 듣는 소리가 아니었지만 들을 때마다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모두, 침착하세요! 자리를 이탈하시면 위험하십니다!”
“제발. 모두 침묵해 주세요! 소리가 커질수록 몬스터가 출몰할 위험이 높아집니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헌터였기에, 싫은 티 하나 내지 못하고 사람들을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시민들부터 진정시켜. 그리고 어느 쪽에서 더 오고 있다고 했지?”
일사불란하게 진열을 가다듬으면서도, 왜 자기가 이 황금 같은 휴일에 강남에 나와서 개고생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센터 소속 B급 헌터. 헌터 제4팀 부팀장 김시열이 짜증스럽게 제 부하에게 물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B+급 게이트에 길드들이 눈독을 들이지 않을 리 없으니까.
B+급 게이트를 처리할 여력이 안 되는 센터에게도 군침이 도는 먹잇감인데 하이에나 떼인 그들이 안 꼬일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부하가 기다렸다는 듯 답해 왔다.
“현재 9번 출구 쪽은 녹음이. 5번 출구 쪽은 유예가 진입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쪽이 12번 출구 쪽이니 아주 딱 좋은 포메이션이긴 했다.
“다들 제대로 한탕하겠다고 줄지어 왔구만.”
하필 하나같이 먹이 싸움을 할수록 덩치만 더 커질 양반들이라 그렇지.
제 맘 하나 편하자고 공무원을 택한 김시열은 머리가 지끈거리는 걸 느끼며 습관적으로 신경 안정제를 찾아 가슴께를 더듬었다.
“아. 퇴사 마렵다.”
“퍽이나. 하실 수 있겠습니까?”
“X발. 아니까 더 X같다고.”
아무래도 자신은 취직을 잘못해도 단단히 잘못한 것 같았다. 이제 와 퇴사한다고 해도 쉽게 퇴사시켜 줄 것 같지 않아 그게 제일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저, 저기!”
“꺄아아악―!”
턱― 터벅― 콰아앙―!
“……!”
설상가상으로 사건까지 터졌다. 그렇게 소란스럽게 질러댔는데 손수 안 찾아와 줄 리가. 친절히 찾아와 주신 몬스터님께서 침까지 줄줄 흘리며 친히 위압감을 뽐내셨다.
몬스터의 외양으로 정체를 알아차린 부하가 소리쳤다.
“부팀장님! 변종 트롤입니다!”
글고 이미 보자마자 정체를 알아차린 김시열이 오열했다.
콰과가강―!
“미친… B등급이라며 망할 시스템아―!!”
망할 시스템님께서는 귓등으로도 안 들을 소리였지만.
“모두 전투 태세!”
“시민들의 안전이 최우선이다!”
“서포터들은 시민들을 보호하면서 뒤로 빠져!”
김시열은 빠르게 전황을 살폈다.
이쪽은 B급 나부랭이인 자신 하나와 C급 둘. 그리고 D급 넷. 그리고 저건 B급 중에서도 상대하기 까다롭다는 변종 트롤이었다.
머릿수로 밀어붙인다 해도 역부족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도 없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김시열이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외쳤다.
“전원!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전투 준비! 목표는 목표물의 사살이다!”
외치면서도 심장이 벌렁거렸다. 과연 자신을 따라 줄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지금, 제가 내린 명령은……
다 같이 죽어 달라는 말이었으니까.
하지만―
“예! 부팀장님!”
“다들 무기 꺼내!!”
아무도 그 명에 불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전투 태세를 갖추는 그들을 보며 김시열은 이를 악물었다.
“…….”
무기를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이내 고쳐 쥐고, 선두로 뛰어나갔다.
“모두, 엄호해!”
“옛―!!”
죽음을 각오한 만큼 모두의 자세는 비장하기 그지없었다. 김시열을 제외한, 여섯 명의 헌터들이 육각형 형태로 산개해 스킬을 펼쳤다.
【스킬을 발동합니다.】
【스킬: 단칼 베기(D)를 전개합니다.】
한 명이 오른쪽 다리를 베어 들며 파고들자,
【스킬: 옭아매기(C)를 발동합니다.】
다른 한 사람이 똑같은 타이밍에 맞춰 왼쪽 팔을 옭아맨 다음.
【스킬: 파이어볼(D)를 발동합니다.】
가운데에서 직격타를 날렸다. 물론 눈곱만큼의 타격도 없었지만, 그래도 시야를 가리고, 시선을 이끌기엔 충분했다.
그들을 방패 삼아 의지하며, 김시열은 자신 있게 목숨을 던지고 트롤이 보이는 틈을 파고 들어갔다.
우어어어―!
콰과가강―!
“아악―!”
“붙잡아!”
“아니, 이쪽 먼저!”
“모두, 기회는 한 번뿐이다!”
날뛰는 트롤의 행각에 건물들이 속수무책으로 부서졌다. 모두가 재빠르게 트롤로 인한 피해를 막아 보려 했지만,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그 틈을 타 트롤의 팔에 맞아, 왼쪽 팔을 옭아매고 있던 헌터가 순식간에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그와 동시에 오른발을 공격했던 헌터 역시 트롤의 발버둥에 정통으로 맞고 말았다.
“크억―!”
“……!!”
“아악―!!”
온갖 괴음과, 비명에 김시열은 눈을 찔끔 감아 버리고 싶었다. 한두 번 겪는 것도 아니고, 거의 매시간 매 순간 겪는 것이지만―
“젠장―! 모두 부상자는 신경 쓰지 말고 눈앞의 전투에 집중하도록!!”
목숨을 깎아 내는 듯한 목소리로 달리며 김시열이 명령했다.
“예!!”
“모두! 부팀장님 엄호를 늦추지 마라!”
“알겠습니다!”
우어어어어―!!
모두의 목숨을 건 목소리를 들으며 이리저리 휘두르는 트롤의 팔 위로 올라타 그대로 돌진했다.
슥―
트롤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함께 날아드는 잔해들이 얼굴을 비롯해 온갖 곳을 할퀴고 지나갔지만, 달리는 발은 조금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망설임은커녕, 멈칫거림조차 없었다.
그럴 수 있을 턱이 없었다. 그의 등 뒤로, 그를 위해서 생사를 오가는 이가 몇이나 되는데, 그럴 수 있을 리가. 그는 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염치가 없는 사람이 못되었다.
【스킬을 발동합니다.】
잡은 검을 절대 놓치지 않도록 꽉 쥐고 더욱 속력을 내었다.
【스킬: 가성비 최고치의 한방(B)이 발동됩니다.】
【시전자는 혹시 모를 반동에 대비하십시오.】
반동 따위 알까 보냐.
이 스킬이 주는 무시무시한 반동은 시스템보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몸소 겪은 후로 한시도 잊을 수 없었다. 그 극한의 고통을 알아서, 평소에는 상사가 저를 죽인다고 난리를 쳐도 쓰지 않았던 스킬이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 더 막아!”
“봉쇄해!”
“부팀장님이 한 타를 날릴 때까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가떨어지지 마!”
“있는 모든 스킬 다 쏟아부어!”
스킬들이 자아내는 휘황찬란한 빛이 번쩍였다. 저렇게 자신을 믿고 목숨을 내거는 이들이 있는데 안 쓸 수 있을 리가.
맨날 그렇게 부정하고 욕을 했지만, 자신도 결국 헌터였다. 타인의 생명이 걸린 이상, 마음대로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는.
“먹고 확 죽어 버려―!!”
힘차게 트롤의 어깨를 딛고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 붉은빛으로 빛나는 검이 트롤의 목에 정확히 꽂혔다.
스걱―!
투둑―
퉁―!!!!
둔탁하게 트롤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지며 육중한 소리를 내었다.
탁―
“허억. 허억…….”
그 목보다 간발의 차로 늦게 착지한 김시열은 착지하자마자 그대로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검을 땅에 꽂고 간신히 지탱하고 있지만, 금방이라도 힘이 빠져 그대로 바닥에 뻗어 버릴 것 같았다. 덜덜 떨리는 손이 증명하고 있었다. 이제껏 겪은 중 제일 엄청난 반동이 올 것이라고.
각오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목이 떨어졌으니 그래도 해치운 게 아닐까……?
“……허억. 헉.”
그러나 숨을 몰아쉬던 김시열은 뒤늦게 깨달았다. 분명 목은 땅에 떨어졌음에도, 시스템의 알림이 들려오지 않았다.
‘트롤을 처치했다’라는 알림이.
“……!”
숨을 쉬던 것도 있고 황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 김시열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
잘린 목 위로 새살이 돋는 것 같이 이어 붙는 살점들을.
그와 동시에 제가 떨어뜨린 트롤의 목이 서서히 먼지가 되듯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마치 잘린 머리가 그대로 이동하는 것처럼 새롭게 머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게임이냐.”
게임이면 밸런스 무슨 일이냐고 당장 패치 제대로 안 하냐고 미친 듯이 본사에 컴플레인을 때렸겠지만, 애석하게도 이건 인류 최고의 X망겜. 현생이었다.
망연자실한 김시열이 두 눈을 감으며 속으로 간절히 외쳤다.
시스템 개X끼야. 밸런스 패치 좀. 제발.
언제나 그렇듯 그 기도는 들어주지조차 않은 것 같았지만.
우어어어어어―!!!!
“……하. 하하.”
어느새 머리를 되찾은 트롤이 그가 목숨을 담아 날린 데미지가 다시 제로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기똥차게 괴성을 질러댔다.
우렁찬 괴성에 화답하듯 튀어나오는 건 망연자실한 헛웃음뿐이었다.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는 듯, 멍하니 트롤을 바라보기만 했다. 모든 전투 의욕을 상실한 모습에 호통을 칠 힘도 없었다.
아. 저들은 살아야 하건만…….
그나마 다행인 건 그새 일반인들은 모두 대피시켰고, 우리밖에 없다는 거다. 그럼 이들만 어떻게 보내면 되는데, 애석하게도 검을 쥘 힘도 없었다. 조금만 움직이려고 해도 온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몸이 이 지경인데 가성비는 무슨 가성비. 새삼 스킬 명이 자신을 놀리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죽음을 기다리는데…….
“……?”
가만히 김시열을 바라보던 트롤이 그대로 몸을 틀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상대할 가치도 없을 정도로 약해져 흥미가 식은 건가?
몬스터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상식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자신들 따위가 아닌, 진짜배기들이 오고 있었다. 시간만 벌 수 있어도 충분했다.
자존심 따위. 다른 이들의 목숨만 건질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내다 던질 수 있었다.
“으억―!”
“저 미친―!! 컥―!!!”
“……!!”
그러나, 그런 기적이 일어날 리 없었다. 저 빌어먹을 트롤은 그가 지금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는 것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저놈이 선택한 건 그를 먼저 죽이는 것이 아닌,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죽이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 가장 마지막은 자신일 것이다.
제 목을 자른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고 비참하게 죽이려 이러는 것이겠지. 몬스터 주제에 더럽게 머리가 좋았다.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피. 피하십시오. 부팀장님, 악―!”
“제, 젠장할―!!”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몸으로 주저앉아 듣는 제 동료의 비명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소리였다. 트롤을 공격할 수 없다면 진작 제 귀를 제가 망가뜨려서라도 듣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참으로 잔인했다. 그럴 수조차 없게 하다니.
“……아직.”
“커헉―!!”
“우웩―!”
이어지는 스킬 반동에 결국 굴복하고 바닥과 찐하게 키스를 했다.
그나마 저 잔인한 장면들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두 눈으로 그 장면을 눈에 담으려 했다.
자신은 책임을 져야 했으니까. 눈을 감고 보지 않는 건 이기적인 도피임을 알았다.
“……망…….”
간신히 고개를 돌렸지만, 뿌옇게 된 시야 때문에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아마 이번 반동은 시야 점멸도 포함인가 보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건데 좀 선명하기라도 할 것이지.
뭐 하나 제대로 해 주는 게 없다고 생각하며 김시열은 허탈한 마음에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신 따윈 없다, 무슨 신을 찾고 지랄이었냐. 신에게 간절히 애원하던 자신을 비웃다, 또 찾을 게 신밖에 없어 간절히 빌었다.
제발……. 구원자가…….
제가 아니어도 좋으니 저들이라도 구해 줄 구원자를 내게 달라고.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제발 그래 달라고.
하지만 신이 답을 준다 해도 이젠 귀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천천히 죽어 간다는 것은 아마 이런 느낌이리라. 이게 죽음인가……
욕하다 빌다 온갖 생쇼를 다하고 나니 이제는 체념이 되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진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아. 인생 정말 X같다…….
그리 생각하며 서서히 눈을 감는 순간이었다.
서걱―
끄어어어어―!!!
멀어 가는 귀에도 선명히 들릴 정도로 깔끔하고 정갈한 검 휘두르는 소리와 함께 망할 트롤의 끔찍한 비명이 들려온 것은.
“……!!”
반동으로 까딱할 수 없는 몸도 잊고 눈을 부릅떴다. 억지로 움직였더니 몸이 미친 듯이 지랄 발광을 했지만, 그래도 그 대가로 볼 수 있었다.
제 팀원들을 유린하던 망할 트롤이 정확히 세로로 잘려 두 동강이 나는 것을.
그리고 둘로 나뉘는 트롤의 몸통 앞에 서 있는… 신비로운 여성을.
그녀는 무기인 것이 분명한 양산 같은 것을 탈탈 털더니 무심하게 펼쳐 썼다.
존재만큼 신비로운 은발이 나부꼈다.
쏴아아아―
“…….”
갈라진 트롤에게서 나오는 피의 빗속에서 양산을 쓴 채, 중세풍의 풍성한 검은 드레스를 입고 고고히 서 있는 은발의 아름다운 여성.
마치 명화를 보는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김시열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제 평생을 다 바친다 해도, 저런 광경을 보지는 못할 것 같았다.
멍하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제 앞에, 중세 귀부인처럼 더없이 우아한 걸음걸이로 그 여자가 걸어왔다.
“어머. 살아있네.”
부드럽고 우아한 미소로 잔인한 말을 내뱉으며.
살아있어서 아쉬우십니까. 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애석하게도 말은커녕 입을 달싹일 수도 없었다.
아마, 말을 할 수 있었다고 해도 결국 그 말은 꺼내지도 못했을 터이지만.
“…….”
제 월급을 챙겨 주는 이에게조차 튀어 나가는 미친 반골 기질이 고개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그녀는 신비로웠으며, 아름다웠고, 기품이 넘치고, 우아했다.
“음. 스킬 리바운드 같고, 목숨에는 그다지 지장이 없어 보이네. 불행인지 행운인지.”
그러게나 말입니다…….
하지 못할 대답을 삼켰다. 하지만 마치 답을 들은 것 같은 그녀는 아름답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
“살아남은 걸 축하해요.”
그 미소를, 김시열은 필사적으로 머릿속에 새겼다.
마치 구원을 내리는 것 같은 그 미소를.
“앞으로의 당신의 인생이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 나날이기를.”
그 말을 남기고, 그녀는 등장처럼 우아한 걸음걸이로 제 곁을 떠나갔다.
찰박찰박―
피가 낭자한 시체들 사이를 마치 레드 카펫처럼 우아하게 걸어가는 그녀를 보며 김시열은 점멸되는 시야 사이에서 생각했다.
“……아.”
죽음을 형상화한다면, 분명 그녀 같을 것이라고.
* * *
제 평생 이렇게 우아하게 걸은 적이 없다 자신할 정도로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치밀하게 주변을 살폈다.
시스템인지 아니면 스킬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왜 가면이 내 주변 상황을 스캔한 뒤 ‘망자의 귀부인’으로 정했는지 걸을수록 뼈저리게 알 수 있었다.
‘귀부인’은 전혀 티를 내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매우 꼼꼼하게 주변을 살피고, 자신을 가다듬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 특성을 보여 주듯, 지금 내 눈에는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널브러져 있는 사람들의 상태까지도.
‘저쪽은 중상이긴 하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고, 이쪽은…….’
사망이네.
반갑지 않은 사실을 마주하는 건 정말 뭐 같은 일이었지만―
【스킬, 얼음의 심장(S)이 시전자의 안위를 위해 자동적으로 발동합니다.】
【스킬의 반작용으로 감정 조절이 미숙해질 수 있습니다.】
독인지 약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른 스킬이 상쇄해 주었기 때문에 크게 거슬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저런 지지는 보지 말고 얼른 다른 거, 재미난 거나 보러 가자고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재촉합니다.]
정작 이런 스킬을 준 건 자기면서, 나보다 더 호들갑을 떠는 성위 때문에 조금 웃음이 나올지언정.
아니, 이럴 거면 주질 말든가. 성위란 것들은 다 저런 건지, 어째 인간보다 더 걱정이 태산이었다. 어디 소설의 어떤 성위들은 아주 제 화신들 잡아먹으려고 난리던데…….
안 그래서 다행이긴 하지만 참 대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찰박찰박― 탁.
“……응?”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되도록 피가 드레스에 튀지 않게 걷고 있는데, 갑자기 구두코에 무언가 걸렸다.
무심히 아래를 내려다보니, 웬 남자의 손이 내 구두코 위에 얹어져 있었다.
“……?”
갑자기 웬 손이지?
무심히 손을 따라 시선을 굴리자, 시체인지 구분이 안 가는 누더기 남자가 바르르 떨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 죽…… 포, 포션……. 살…….”
“…….”
뭐라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대충 찍어 보면 살려달라는 말 같았다.
어떻게 할까 잠깐 고민하다, 그래도 살아서, 나를 알아보고 여기까지 기어 온 집념이 가상해 특별히 서비스해 주기로 했다. 첫 개시를 이런 식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무렴 어떤가.
【블랙마켓을 오픈합니다.】
【환영합니다. 각성자님.】
【첫 방문을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국내 랭킹 1위의 혜택으로 모든 수수료가 면제됩니다.】
【세계의 최강자를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세계 랭킹 1위의, 행성의 대표께서는 블랙마켓에 있는 모든 물품을 무료로 습득하실 수 있습니다.】
아니, 이런 개꿀이……?!
이런 빅 뉴스를 진작 알고 있었다면, 재깍 다 쓸어서 어디 암시장에 팔아 떼돈을 벌었을 텐데―!
나는 기꺼이, 이런 중요한 걸 알려 주지 않은 누구에게 불손한 눈초리를 쏘아 보냈다. 그러자 그 눈초리에 가차 없이 케이오를 당한 누구 씨께서 비겁한 변명을 쏟아 내셨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러면 질서를 어지럽힌다며 더럽게 욕먹는다고, 내가 너를 생각해서 그런 걸 어찌 몰라 주냐고 서럽게 웁니다.]
응. 다음 허접한 변명.
매정하게 변명을 일축하자, 귓가에 아우성이 들리는 것 같았지만 매몰차게 씹었다.
나에 대한 사랑이 겨우 그 정도란 말이지.
[‘이매망량’ 님께서 울 애긔는 왜 이리 자신의 사랑을 몰라 주냐고, 울 애긔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러기냐고 훌쩍입니다.]
새삼 깨닫는 성위의 사랑의 척도에 상처받은 마음을 고스란히 내보이자, 성위가 아주 죽어 가려 했다.
물론 저 정도의 넘어갈 내가 아니기에, 가뿐하게 씹고, 제일 비싼 회복 포션을 구입했다.
뭐 비쌀수록 좋은 거겠지. 돈이 드는 것도 아니니 마음 편하게 질렀다.
이게 바로 진정한 플렉스……!
위험한 세계에 눈을 뜰 것 같아,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포션을 꺼내었다. 아무 데나 손을 쑥 뻗자, 아공간이 생성돼 자동으로 포션이 손에 집히는 맛은, 아주 꿀맛이었다.
……졸잼인데??
왠지 조만간 지름신이 강림할 것 같음을 느끼며 나는 포션을 그대로 남자를 향해 쏟아부었다. 무심히 쏟은 포션이 흘러내리며 닿은 몸에서 미세하게 빛이 나기 시작했다.
오, 역시 비싼 건 값을 하는구나.
빛과 함께 순식간에 지워져 나가는 외상들을 보며 속으로 감탄했다.
귀부인의 특성인지, 자동으로 놀란 표정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컥. 커헉!”
외상이 사라지자, 비로소 숨이 제대로 쉬어지는 듯 남자가 힘겹게 숨을 뱉어 내며 숨을 골랐다. 그러고는 무슨 애니메이션에서 장화 신고 나오던 고양이같이 눈을 땡그랗게 뜨고 날 올려다보는데…….
‘……귀엽네?’
솔직한 감상에 성위가 날뛰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내 화신 눈이 이상한 거 같다고 포션을 마셔 보길 권합니다.]
[어떻게 저게 귀여워 보일 수 있냐며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블랙마켓을 엽니다.]
‘응. 내 눈 정상이니까 그거 도로 닫아.’
아니 좀 귀여워 보일 수도 있지 뭘.
억울했다. 아무 생각 없이 오로지 저만 보며 땡그랗게 떠진 눈이 귀여워 보이는 건 국룰이라고!
열심히 항의했지만, 이미 질투로 눈이 돌아간 성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저 삐진 성위를 어떻게 할까 정말 귀찮은 고민에 빠지려 하는데, 발밑의 귀요미가 입을 열었다.
“……천사님?”
“…….”
어머나.
[아니 고작 저딴 말에 현혹되지 말라고, 그렇게 쉬운 여자냐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필사적으로 항의합니다.]
응. 샷업.
발악하는 할아방 아저씨를 입 다물게 하고 인자하게 미소를 흩뿌렸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지만 다짜고짜 천사님이라니. 남자는 보통 얼빠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혜자롭게 미소를 뿌려 주자, 입까지 벌리며 두 볼이 불그스름해지는 게 아주 예술이었다.
그걸 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역시, 미모는 최고야! 바로 이거지!!
인생을 남 놀리는 재미로 사는 여자가 내적 비명을 마음껏 내지르며, 순진남을 놀리는 데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변태 같으니까 그만해. 아줌마, 라고 말하며 매우 짠 눈으로 힐난합니다.]
어쩌라고.
이런 게 변태라면 기꺼이 변태가 될 의향이 넘치는 스물다섯이 떳떳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망할 성위가 고개를 절레 젓는 것이 느껴졌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친절하게 고개를 숙여 귀요미와 눈을 맞추고는 조금 미안한 현실을 들려주었다.
“미안한데. 천사가 아니라서.”
그 반대면 몰라도 ‘천사’라는 호칭은 매우 양심이 찔리는 망자의 귀부인이 이실직고했음에도, 여전히 내 정체를 파악 못 한 귀요미는 멍하니 내 얼굴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아. 한번 꼬집어 보고 싶다.’
왠지 이성보다 본능이 이길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허벅지를 꼬집고 싶었지만, 귀부인의 자존심상 꾹 참았다.
그때 귀요미가 말했다.
“……저한테는 천사님으로 보여요.”
헐. 대박.
본래의 나였으면 함박웃음 짓고 바로 뽀뽀 각이다.
미친 대사 퀄리티에 내적 비명을 지르며, 지금 내가 가면을 썼다는 것에 매우 감사했다. 하마터면 순진한 어린애한테 못할 짓을 할 뻔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대체 뭔 짓을 하려 했냐며 짜게 식은 눈으로 고개를 내젓습니다.]
‘……궁금해?’
원한다면 기꺼이 알려 줄 용의가 넘치는 닳아빠진 25세의 화신이 친절히 묻자, 성위가 잘못했다며 넙죽 엎드렸다.
[아니, 그것만은 제발 참아달라며 잘못했으니 봐달라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말합니다.]
앗. 아까워라.
놀릴 소스가 사라진 것에 아쉬워하며, 나는 다시 귀요미에게 집중했다.
“어려서 그런가, 보는 눈이 없네요. 그래도 나를 그렇게 봐주니 고마워요. 좋은 추억이 될 것 같네요.”
“……그런.”
그런 게 아니라 진심이라고,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 듯 허둥대는 그 속이 훤히 보여 작게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저 기분 좋은 호의에 대한 보답으로 조그마한 충고를 해 주기로 했다.
“하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할 것. 나는 그대가 만나서 좋을 것 없는 사람이니까.”
어디 만날 사람이 없어 죽음에 가까운 사람을 만나나.
그건 굳이 내가 아니라도 앞으로도 그가 살아가면서 꼭, 새겨야 할 충고였다.
안 그러면 그 사람처럼 될 것이 훤했으니까.
귀엽긴 해도 처음 본 사람에게 왜 자꾸 호의를 보이고 싶을까 했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순진한 표정을 보니 비로소 깨달았다.
저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얼굴은 그 사람을 닮았다.
여기저기에 늘 빼앗기기만 하면서, 조금도 개의치 않고 도리어 더 주려고 하는, 내가 지켜 줄 수밖에 없는 망할 주인공님과.
애석할 따름이었다. 인생에 하등 도움 안 되는 것들만 잔뜩 가지고 있는 그 주인공님 닮아서 좋을 거 하나 없는데.
“죽음의 앞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길 바랄게요.”
진심 어린 충고에도 별로 이해하지 못한 것 같은 그 얼굴이 너무나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해서 뒷맛이 씁쓸했다.
왜 귀요미를 보면서 자꾸 그 사람 생각만 드는 걸까.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눈앞에 사람 두고 다른 사람 생각만 하고 있는 것도 실례인 거 같아 애써 생각을 끊고 귀요미에게서 등을 돌리는데…….
‘……아.’
문득 깨달았다.
아. 지금 난 그 사람이 보고 싶은 건가.
어쩌면 정말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괜히 저 귀요미가 그 사람을 생각나게 해서.
그 생각을 읽은 성위가 물어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지금 당장 만나고 싶은 거냐고 묻습니다.]
그 소리에 육성으로 진저리를 쳤다.
“무슨 미친 소리야.”
이 망할 성위는 지금 여기가 어디인지 까맣게 잊은 모양이었다. 병원에 한 반년을 처박아 둬도 시원치 않을 사람을 어디에다 데려다 놓으려는 건지. 꿈에 나올까 무서운 소리였다.
“만에 하나라도 여기서 보게 되면 진심으로 멱살부터 잡을 거야.”
[‘이매망량’ 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결연히 선언하자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진짜로 그럴 거라고 굳게 다짐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성위랑 투닥거리는 데 정신이 팔려, 깨닫지 못했다.
“……절대로, 가만두나 봐라.”
뒤에서 나를 따라오는 한 사람의 기척을.
* * *
지현민은 관종 스트리머였다.
본인이 X밥이라는 건 눈치라는 게 생기기 시작한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있었으나, 넘치는 관종기를 주체하지 못해 몸뚱어리가 고생을 사서 하는, 매우 불쌍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 미친 듯이 발버둥 쳐도 관종 소시민 1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며 살아가던 관종스트리머에게 신은 적선이라도 하듯 기적을 내려 주셨다.
‘각성’이라는 기적을.
‘앗싸―!!’
뭐. 기껏해야 C급이라는, 매우 무난하고 찌끄러기나 다름없는, 널리디 널린 애매한 등급이긴 했다.
그래도 ‘일반 사회 ― 소시민 1’에서 ‘헌터 사회 ― 엑스트라 헌터 1’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스템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지현민은 더욱더 업그레이드된 관종이 되기로 결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대로 마음먹은 관종의 집착은 무시무시했다.
‘이거 진짜 돈 거 아니야? 안 된다니까―’
‘짐꾼으로라도 좋아요! 들어가게 해 주세요!!’
‘카메라 들고 들어가는 미친 짐꾼이 어디 있어!’
‘이건 제 무기…… 제 아이덴티티예요!’
C급은 턱도 없다는 B급 이상의 레이드에 무작정 얼굴부터 들이밀며 짐꾼으로 들어가 촬영하는 패기!
자기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는 몬스터 앞에도 카메라를 들이미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저 미친 새끼가!’
‘누가 이딴 X신 들여보냈어?’
이런 쓰레기 관종도 구제해 줘야 하는 의무를 가진 위대한 헌터님들께 늘 쌍욕을 먹고 살지만, 전혀 개의치 않으며 도리어 바싹 엎드려 절하는 게 바로 지현민이었다!
‘감사합니다, 형님들! 평생 존경하겠습니다!!’
‘필요 없고, 다신 보지 말자. 제발!’
‘사랑합니다. 형님들!!’
‘꺼져―!’
자존심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다음에 또 신세 질 테니까.
사람들을 그런 그를 이 시대의 진정한 관종. ‘지관종’이라고 불렀다.
뭐 어쨌든 그는 흔남이긴 해도 화면발은 꽤나 잘 받는 귀염상이었던 덕에 나름대로 매우 인기 있는 헌터 스트리머였다. (라이징 스타인 훈남 배우 짝퉁으로 어그로 끌다가 그 팬들이 안티로 돌아서기도 했다.)
제대로 미친놈은 어쨌든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그 미친놈은 이번에도 신의 계시를 받은 건지, 간만에 인싸력을 뽐내려 강남에 왔다가 기적처럼 터진 던전에 그대로 휘말리고 말았다.
“꺄아아아악!!”
“나, 나가야 해―”
“비켜요! 비키라고―!!”
온갖 비명으로 점철된 틈에서 멍하니 시스템 알림을 읽고는 넋을 놓고 있던 그는 생각했다.
‘……이런 잭팟이―!’
역시 신은 아직 날 사랑하시는 거였어!!
안 그래도 이제는 얼굴과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져서 ‘때려죽여도 이 새끼는 출입 금지’라고 다 찍힌 마당이었다. 덕분에 높은 등급은 출입도 못 해 방송 소스가 부족했건만, 이런 기회를 내려 주시다니!
그는 재빨리 경건한 마음으로 늘 착용하는 장비를 인벤토리에서 꺼내었다. 몬스터의 피에도 피해가 없는 신발과 갑옷. 일반적인 헌터의 복장이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옷에 주렁주렁 달린 액세서리들과, 손에는 무기가 아닌 카메라가 들렸다는 것!
육안으로 확인하기 힘든 헌터의 움직임도 무리 없이 담을 수 있으며, 몬스터의 피나 공격에도 끄떡없는, 말 그대로 그의 전 재산을 쏟아부은 방탄 카메라였다.
자신의 분신까지 완벽하게 장비한 그는 신이 나서 들뜬 걸음을 옮겼다.
“짠! 여러분! 제가 지금 어딨는지 아십니까! 바로 강남역 게이트입니다. 간만에 돈가스나 썰러 나왔다가 이런 행운을 맞닥뜨리다니! 무려 B+급이라고 시스템님께서 판명해 주신 게이트! 맨날 감추기 급급한 누구들보다 제가 먼저! 발 빠르게 생중계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다들, 구독과 좋아요, 아시져??”
유유히 방송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것도 따끈따끈한 생방송.
― 아. 형. 진짜또라이. 사랑해.
― 진짜 저기 들어가있는거라고? 찐?
└ 응. 저 형 진짜 레알 찐이심.
― 형. 내가 형을 사랑해서 하는 말인데, 형의 패기는 인정하지만 거긴 아니야. 얼른 나와.
└ 이야. 찐팬이신가보네. 하지만 난 존나 궁금한 ㅆㄹㄱ 팬이니 응원합니다, 형님.
오랜만에 올라오는 화끈한 반응들에 더욱 힘입어 힘차게 앞으로 나아갔다.
“보세요. 이 황폐해진 지하철역을. 아무리 강남역이 오래되고 이미 찌든 때 가득이긴 했지만 이렇게 노답이진 않았단 말이져. 이번 게이트 컨셉은 이런 건가 봐요. 호러 버전인가……. 뭐 이미 인생이 호러긴 하져?”
알뜰하게 방송 분량을 챙기면서 말이다.
― 이야. 이번 던전도 화려하네.
― 이 형은 대체 무슨 재주로 맨날 이런 데를 들어갈 수 있는 거지?
└ 목숨 걸어서 그럼.
└ ㄴㄴ 저건 목숨 걸어도 될 게 아님
└ ㅆㅇㅈ 헌터들이 욕은 지들이 먹으니까 얼마나 칼같이 막는데
― 아 졸라 그냥 아닥하고 처보자 다른 데서 이 급을 볼 수 있겠어?
― 아… 겁나 서글프다 우리나라만 안 해 랭커 스밍…….
└ 222 젠장… 그래서 이렇게 관종 방송이나 보고 있고…….
미친 관종답게 알뜰하게 방송 분량을 챙기면서도 이제 슬슬 전투 장면이 나와줘야 하는 타이밍이라 X줄이 타기 시작했다.
아, 물론 자신의 전투 장면 말고. 남의 전투 장면.
관종빈대거머리가 뻔뻔하게 생각할 무렵, 멀지 않은 곳에서 굉음이 터졌다. 진짜 신이 그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건지, 그의 바람대로, 완벽한 타이밍에.
“……와 씨. 대박.”
역시 신은 날 사랑하셔.
관종이 환호하며 날듯이 뛰어갔다. 카메라부터 치켜드는 건 습관과도 같은 일이었다.
오크 무리를 둘러싸고 전투가 벌어졌다. 자신의 발치에 이미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쓰러진 헌터들이 몇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발밑에 있는 그들이 내심 안쓰럽고 걱정되긴 했다. 하지만 그들을 도와주려면 카메라를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건 할 수 없었다.
― 형. 발밑에 사람 있어. 좀 봐봐.
└ ㄴㄴ. 저 형 지금 앵글 담고 있는거 안보임?
― 아니 밑에 다친 사람이 중요하지 촬영이 중요함?
└ 쌉중요함. 여기서 도덕찾을 거면 도덕쌤을 찾아가셈
― ㅇㅇ. 여기 그딴 거 있는 새끼들 없음.
그는 목숨보다 촬영이 소중한 쓰레기였다. 스스로도 자신이 그런 쓰레기인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신념을 가지고 촬영에 집중했다.
대신 그는 항상 인벤토리에 지니고 있던,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값비싼 것 베스트 3 안에 드는 아이템을 망설임 없이 꺼내었다.
헌터가 무궁무진하게 많아지고, 세상은 살 만해졌지만, 여전히 수요 대비 공급이 현저히 모자라 늘 금액이 고공 행진하는 상품.
바로, 포션이었다.
― 잠깐, 형. 진짜 번 돈 다 포션사는데 쓰는거 아니지?
― 저 형이 저렇게 욕먹으면서도 다들 이 방송 보는 이유 중 하나.
― 관종인데 끝까지 관종짓하면서 저러는 저 형은 진짜 ㄹㅈㄷ
촤락―
비싸디비싼 포션이 부상당한 헌터의 몸에 아낌없이 뿌려졌다. B급 회복 포션이긴 했지만, 그래도 가격이 어마어마한 분이셔서 그런지 포션이 흡수가 되자마자 빠르게 치료되는 게 눈에 보였다. 상처가 전부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 뒤로도 그는 한 손으로는 촬영을 하면서 부상자를 마주칠 때마다 포션을 뿌리고 다녔다.
그가 그렇게 욕을 먹으면서도 헌터들에게 진심으로 경멸과 미움을 받지 않는 이유기도 했다.
그는 욕먹을 짓은 해도 비겁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콰콰과과광―
굉음과 함께 오크 무리의 목을 한순간에 전부 베어 버리고 그 사이로 뛰어오른 남자의 모습에, 지현민은 남자를 알아보고 환호했다.
“오. 진짜배기의 등장입니다! 무려 녹음의 유X브 담당 ‘우유빛깔’이네요!”
― 그나마 우리에게 얼굴을 비춰주시는 그분!
― 샤방한 그 얼굴 나줘 형. 제발. 전재산 다 털게. 내얼굴이랑 바꾸자.
└ 응. 전재산 개털이라 무리
└ 응. 안바꿔~
└ 우유빛깔이 회까닥 돌고 인생포기할때나 가능~
└ 나쁜넘들앜ㅋㅋㅋㅋㅋㅋㅋㅋ
네임드의 등장에 채팅창도 뜨거워져 지현민은 신이 났다.
그러나 지현민이 신이 난 것과 반대로 상황은 최악이었다.
오크는 여기 모인 헌터들이 상대하기에 난이도가 있는 몬스터는 전혀 아니었지만, 떼거리로 몰려오니 뭐 하나 제대로 상대를 할 수 없어 속수무책이었다.
전선은 당연히 뚫려 버리고, 개판 5분 전이었다.
“야! 거기 제대로 안 막아?”
파사삭―
“우유빛깔 님, 여기 또 밀려옵니다!”
“아. 이것들이 단체로 약을 처먹었나. 왜 이러는 건데?! 길장님 없을 때 하필 이러냐고―”
“오크가 무리 지어 다니긴 하지만 이건 대체…….”
“X발!”
그러나 그런 상황과 전혀 관계가 없는 지현민은 늘 착하기만 했던 우유빛깔의 가면 해제에 쾌재를 불렀다.
저거 하나만으로도 오늘 영상은 다 딴 거나 다름없었다. 태생부터 착함을 뒤집어쓰고 나온 순백의 우유빛깔은 정말 어지간한 일로는 화를 내지 않았으니까.
― 헐. 우유빛깔이 욕한다.
― 드디어 우리 비까리도 욕이란 걸 배우는 것인가!
― 안돼. 우리 비까리는 계속 순수해야 한다고!
― 더럽혀진 건 우리만으로도 충분해! 빛깔아. 진정하자. 아빠가 보고 있어!
└ 나이 클라스 그정도냐고…….
시청자들도 웬만해서는 볼 수 없었던 레어 영상에 환호해 지현민은 싱글벙글 그 자체였다.
하지만 마냥 싱글벙글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우유빛깔이 우두머리인 걸 보면 녹음의 네임드 오브 네임드는 오지 않았다는 거고, 그럼 지금 투입된 헌터는 대부분 B급 정도라는 거다.
그래도 B+등급 게이트라는 메시지를 보고 꽤나 많은 인원을 투입한 듯 보였지만, 부상자가 벌써 과반수를 달할 판국이니 숫자는 의미가 없었다.
그 와중에 계속해서 몬스터들은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전투 중인 곳과 조금 거리를 두고 촬영을 하고 있는 그조차 슬슬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식은땀을 흘릴 정도였다.
‘……아, 어쩌지.’
이대로 있다간 제가 있는 곳도 안전하지 않을 것 같았다.
평소라면 아랑곳하지 않고 더 가까이 갈 테지만, 확실하게 이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을 만한 헌터가 없는 지금 시점에서까지 그럴 정도로 그는 몰상식한 쓰레기는 아니었다.
그가 그런 몰상식한 짓을 할 때에는 나름대로 안전한 뒷배가 있을 때였다.
자신만이면 상관없지만, 전투 중에서는 한 사람의 행동에도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발을 뺄 수도 없었다.
그의 등 뒤로는, 그가 구해 준 생명들이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자신이 자리를 피하면, 이들은 꼼짝없이 죽을 것이었다.
어디로 옮겨라도 주고 싶었지만, 이 상황에 안전한 곳도 없고, 이 인원을 다 옮길 자신도 없었다.
결국 그는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아. 정말 저답지 않은 짓인데 말이져…….”
― 지관종. 도망 안가?
― 비장의 수라도 있어?
― 있어도 지관종인데. 형 무리하지마. 제발.
― 형이 언제고 방송하다 죽을거 같긴 했는데 그게 오늘은 아닌 것 같아.
― ㅇㅇ. 형이 몬스터한테 찢기는거 안보고 싶어. 그 패기 얼른 넣어둬! 그거 아니야!!
비꼬는 건지 걱정인지 분간이 안 가는 내용들로 도배된 채팅창을 보며 지현민은 나지막이 미소를 지었다.
미친놈이라는 소릴 들으면서도 지관종은 정말 눈앞의 사람들을 버리고 저 혼자 도망칠 수가 없었다.
“미로의 반지. 발동.”
【계약자의 시동어에 반응합니다.】
“은신 결계를. 최대한 오래, 자연스럽게 발동할 수 있는 정도로.”
【명령을 인식합니다.】
사라라락―
【미로의 반지(B+)가 계약자의 명령에 따라 결계를 생성합니다.】
【안개의 은신 결계가 발동합니다.】
시스템의 알림음과 함께 중지에 끼워진 반지에서 나온 안개가 현민의 주변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미친 듯이 빨려 나가는 마력을 느끼며 현민은 이를 악물었다.
가진 마력이 너무 보잘것없는 탓인지, 코딱지만 한 마력이 단번에 빠져나가자 온몸에 힘이 쭉 빠져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간신히 다리에 힘을 주고 버티며 그는 부들거리는 손을 들어 귀걸이를 툭 건드렸다.
【시간의 귀걸이(A)가 계약자에게 반응합니다.】
【계약에 따라 시간을 돌려 초기 입력된 계약자의 생체 정보 상태를 유지합니다.】
【귀걸이에 누적된 마력이 소진되지 않는 한, 상태는 지속됩니다.】
【귀걸이의 마력에 각별히 주의해 주세요.】
‘……후.’
귀걸이를 발동시키자마자 바로 원래의 몸 상태로 돌아와 지현민은 편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게 바로 그의 장사 밑천이자, 지금 이때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진짜 이유였다.
곁에 있는 헌터들이 아무리 그를 구해 준다고 해도, 절체절명의 매 순간을 신경 쓰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럼에도 높은 등급을 거침없이 다녔던 것은 높은 등급일수록 고렙의 헌터들이 모인다는 사실을 믿은 것도 있었고 그가 미친 관종이라는 것도 있었지만, 바로 이 아이템들로 한 번 정도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몬스터를 해치우진 못했지만, 부상자들도 도울 수 있었고.
몰래 던전에 들어갔다가 들켜도 헌터들이 오지게 욕은 할지언정 그를 내보내지 않고 동행하게 해 주는 이유기도 했다.
“자. 그럼 다시 찍어 볼까.”
부상자들과 자신을 결계로 가린 지현민이 다시 여유로운 태도를 돌아와 카메라를 손에 쥐자, 그의 행각을 눈치챈 헌터들이 오크를 막아서면서 샤우팅을 내질렀다.
“아. 지현민 이 개자식아!”
“저 새끼 또야?! 미치겠네, 진짜.”
“와서 도와, 이 자식아―! 오크 정도는 너도 상대할 수 있잖아!”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부상자들과 함께 자취를 감추고 정작 전투에는 나서지 않을 만한 헌터는 그들이 알기로 딱 한 명밖에 없었기에 척하면 척이었다.
애초에 이 정도 급 되는 게이트에서 저런 짓을 할 수 있는 놈도 이놈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샤우팅을 한몸에 받은 지현민은 태평하게 대답했다.
“뭔 소리예요. 저걸 제가 어떻게 상대해요?”
무슨 그런 세상 무서운 소리를 하는 건지.
당연한 사실을 말했다는 듯 태연한 지현민과 달리, 그의 진심 어린 대답에 채팅창이 난리가 났다.
― 앜ㅋㅋㅋㅋㅋㅋㅋㅋ
― 형 너무 찐이자낰ㅋㅋㅋㅋㅋㅋㅋ
― 이 형 자기파악 넘 잘해 웃겨 ㅋㅋㅋㅋㅋㅋㅋㅋ
― ㅋㅋㅋㅋㅋㅋㅋㅋㅋ죄송해요 녹음분들 우리 형은 무리데쓰~
― 푸르른 녹음은 할수 있슴다! 화이팅-! 여기 형은 촬영 열심히 하면서 부상자나 케어할게요. 그게 어디에요~
― 마자요. 마자. 부상자 케어는 아무나 하나여. 저렇게 현질을 하는데 이해해 줍시다~
― 이분 전재산 털어서 포션 사들고 다니는 사람이에요. 봐줄 이유 충분~
신난 채팅창들을 보기라도 한 듯, 헌터들이 소리를 내질렀다.
“아놔― 저 새끼 내가 언젠가 팬다!”
“제 몫도 있어요.”
그런 길드원들의 샤우팅에 결국 참다못한 우유빛깔이 일갈했다.
“입 말고 손 놀려. 이것들아!”
“네, 팀장님.”
분노마저 느껴지는 우유빛깔의 목소리에, 헌터들이 재깍 전투에 몰두했다.
“부상자들은 지현민이 케어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모두 전투에 집중해!”
“저게 저래 봬도 잠시 시간 벌어 주는 건 잘하니까 그 틈에 얼른 해치워야 된다! 모두 전력을 다하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현민이 부상자를 맡아 주자, 걸림돌이 없어져서 그런지, 다들 움직임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스킬을 발동합니다.】
각자의 스킬 역시 마음껏 펼칠 수 있었고 말이다.
다 같이 합세해서 부상자 염려 없이 마음껏 전투에 임하니, 힘겹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세를 몰아붙여 결국 오크를 쓰러뜨릴 수 있었다.
우어어어―
털썩―
“후. 죽겠다.”
온 정신을 전투에 쏟은 탓인지, 그래도 부상자 몇은 더 나왔지만, 상황은 거의 정리 된 듯해 보였다.
거의 막바지에 접어든 전투를 카메라에 담으며, 지현민은 아이러니하게도 불안감을 느꼈다. 분명히 상황은 안정되고 있었는데 느낌이 좋지 않았다.
평소의 패기라면 죽자고 헌터들이 던전을 클리어할 때까지, 그리고 게이트가 닫힐 때까지 죽치고 있었겠지만, 이쯤에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았다.
단순히 B+급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자신이 낄 만한 무대가 아닌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은 언제나 잘 맞았기에, 지현민은 보급용으로 지급 받은 단말기로 현재 위치를 알려 부상자들을 데려가도록 조치를 취했다. 진작 할 수도 있는 조처였지만, 끝의 끝까지 참은 것은 관종 스트리머로서의 자존심이었다.
이제 결계를 유지하면서 구조대를 기다리기만 하면…….
“……이런 X발.”
난데없이 눈에 보이는 그것에, 프로 스트리머로서 N년째 욕을 한 적이 없는 지현민이 욕설을 내뱉자, 그를 잘 아는 그의 시청자들이 당황했다.
― 형. 방금 욕한거야?
― 형 프로라 절대 욕 안하자너. 왜 그… 미친.
― 응? 뭔데 난 못봄 왜… 이런 ㅅㅂ
지현민을 따라 시선을 옮긴 카메라에 ‘그것’이 담겼다. 이를 본 시청자 역시 너 나 할 것 없이 망연자실해 욕을 쏟아 냈다.
그리고 곧이어, 급박하게 채팅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 저거 어떡함? 다 뒈지는거야?!
― ㅅㅂ 빨랑 도망쳐 형!
― 괜찮아, 저건 빤스런해도 돼! 아무도 욕 안한다고!
― 빤스도 안두고 가도 돼! 빨리 튀어! 튀라고!!
― 형. 이럴 땐 객기부리는거 아니야!
한몸에 받는 걱정은 물론 감사하고 기쁘긴 했지만, 그는 그들의 말처럼 도망칠 수가 없었다.
뒤에 있는 부상자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털끝만 한 양심은 있는 관종인 그는 차마 그들을 버리고 무작정 혼자 튈 수는 없었지만, 정확히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망쳐 봤자 소용없다는 걸.
턱― 턱―
“…….”
육중한 발소리가 들린다. 그 발이 지나간 자리가 움푹 파여 자국을 남겼다.
그 자국을 멍하니 지켜보며 지현민은 한 가닥 남은 양심으로 신을 찾았다.
제발, 이곳을 찾지 못하게 해 달라고.
지금까지 녹음의 사망자는 제로였다. 심한 부상을 입은 자는 있었지만, 죽음에 이를 정도의 부상자는 지현민이 포션으로 치료해서 사망에 이르진 않았다. 이대로 구조대가 온다면, 전부 무사하게 귀환할 수 있는 것이었다.
저 괴물이, 구조대가 오기 전까지 이곳을 찾지만 않는다면.
콰쾅―
파지직―
쨍그랑!!
“……!”
하지만 마치 전부 알고 있었다는 듯, 희망은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났다.
“발록, 발록이다!”
“미친. 저게 왜 여기서 나와!!”
‘내 말이!!’
지현민이 내적으로 절규했다.
입 밖으로 꺼내고 싶어도 이미 공포로 입은 막혀 버린 지 오래였으니까.
오크들을 마저 처리하던 헌터가 그런 지현민의 상태를 보고 다급하게 우유빛깔을 찾았다.
“팀장님―”
“봤어. 일단 저기부터 막아! 지현민으로는 한순간 막는 것도 무리야! 어서―!”
“네!”
명을 받은 헌터들이 오크들을 뿌리치고 서둘러 움직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젠장……!”
지현민이 카메라를 집어 던지고, 다급하게 미로의 반지를 가동시켰다.
우어어어―
“미로!”
【계약자의 부름에 응합니다.】
콰과가가강―!
지현민은 간발의 차로 발록이 휘두른 주먹을 급히 생성한 결계로 막았다.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고, 온몸이 부서질 것 같지만, 이를 악물고 버텨 냈다.
물러설 수 없었다.
등 뒤에는 부상자들이 있었다.
단 1분, 아니 30초라도 막을 수 있다면.
다른 헌터들이 뒤를 맡아 줄 테니까.
“왜 B급 게이트에 A급 몬스터가 나오냐고오오!!”
으아아아악―!!
결계가 깨지기 전, 발악하듯 원망을 내지른 지현민은 온 힘을 끌어모아 발록의 주먹을 밀어 튕겨 냈다.
파사삭―
발록의 주먹을 밀어내자마자 그 힘을 당하지 못한 결계가 부서져 나갔다. 결계의 파편이 시야를 가린 틈을 잽싸게 파고들어 발록의 눈이 닿지 않을 만한 거리로 피했다.
이래 봬도 게이트 경험 다수로 주제에 안 맞을 정도로 단련된 스피드였다. 한순간 정도는 방심한 발록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다.
우어어―
괴성과 함께 발록의 주먹이 휘둘러졌지만 이미 그 자리에 지현민은 없었다.
제 결정적 한 방은, 기껏해야 오크도 상대할까 말까이기에, 모험 축에도 안되는 패기 따위를 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관종인 만큼 주제 파악도 너무나 잘하는 그는, 본능적으로 가장 현실적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이쪽이다. 이 머저리 소 새끼야!”
“……저 또라이가―”
아이 엠 어그로.
관종이 가지는 최대 유일의 스킬이었다.
어디 가서 이 스킬로는 빠지지 않는다 자부하는 지현민이 낼 수 있는 최선의 수였다.
가장 현명했지만, 가장 어리석기도 한 수에 그를 향해 달려가던 헌터들이 쌍욕을 짓씹었다.
미친 관종은 관종 주제에 결국 끝까지 비겁해지지도 못하는 멍청한 자식이었다. 대놓고 물으면 본인은 끝내 아니라 하겠지만, 저 행동은 분명…… 부상자들을 구하기 위함일 것이 뻔했다.
자신보다도 약하디약한 쪼렙에게 이런 짐을 넘기다니. 나름 ‘이름 있는 헌터’라는 자존심에 제대로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그럼에도 지금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적어도 저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더욱 가속력을 높인 두 명의 헌터가 간신히 부상자들 앞에 다다르는데…….
“……!!”
“……안 돼!”
쾅―
마치 이런 모든 술수를 알고 있었다는 듯, 헛스윙을 날린 발록이 곧이어 한 행동은, 지현민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의식이 없는 부상자들을 짓밟는 일이었다.
빠직―
“…….”
사람이 짓밟히는 소리만큼 끔찍한 소리는 없으리라.
그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전투 상황인 것도 잊고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눌려 터진 시체가 발에 가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발 사이로 수도꼭지처럼 흐르는 검붉은 피의 홍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그들에게 안겨 주었다.
“그만…….”
“그만해. 이 개새끼야―!”
전선까지 이탈해 가며 헌터들이 발록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발록은 오히려 그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자신을 공격하는 헌터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발길질을 계속했다.
순식간에 바닥이 피로 절여져 걸음을 옮기기만 해도 질퍽한 피가 발을 얽매었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그만, 제발, 그만…….”
종종 헌터들이 죽는 장면은 보았지만, 이런 무자비한 대량 학살극은 처음 보는 지현민으로서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정신을 놓고 싶었다.
아. 정말로 그럴 수 있으면 좋으련만.
티끌만 한 자존심과 헌터로서의 정신력이 그러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럴 때는 아무리 쪼렙이어도 헌터는 헌터라는 게 참 뭐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현민!”
“……!!”
그렇게 정줄을 놓고 있었던 탓일까. 목적한 바를 이룬 듯한 발록이 지현민의 머리를 잡아챘다.
그르르르르―
마치 애초에 바라던 것이 이런 상황이었던 건지, 기괴한 웃음소리를 내며.
없던 화도 끓어오르게 만들 것 같은 그 웃음소리에 사기가 죽기는커녕 도리어 오기가 피어올랐다.
“……몬스터 지능이 이렇게 X같을 줄이야. 이걸 모두가 다 알아야 하는데 말이지.”
두루두루 알려야 네가 이렇게 씹노답이라는 걸 알고 피해 가지 않겠느냐며 지현민이 신명 나게 도발을 시전했다. 어차피 죽을 거, 죽기 전에 입이라도 신나게 털어야겠다는 심산이었다.
그리고, 되지도 않는 죽빵도.
빡―
“……아, 내 발!!”
“저 미친놈이…….”
온 마력을 박박 긁어모아 발차기를 날렸는데 눈 하나 꿈쩍하기는커녕 제 발만 더럽게 아파 머리가 잡힌 상태에서 지현민이 비명을 질렀다.
우유빛깔의 명으로 지현민 쪽으로 이동하던 헌터들은 갑자기 배는 불어나 공격해 오는 오크 무리에 발이 묶여 있었다. 그러다 다들 지현민의 그 비명을 듣고는 오크들을 처리하는 것도 뒤로하고, 몸을 뒤로 빼 황급히 지현민에게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다시 제 앞을 가로막는 다른 오크들에 의해 한 발짝 정도밖에 움직이지 못하고, 애타는 마음을 담아 소리쳤다.
“어그로 작작 끌어! 진짜 뒈지고 싶어?!”
“얌전히 있으라고― 어떻게든 해 줄 테니까.”
열렬한 호응에 지현민은 순수하게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어떻게든 해 주긴 개뿔.
여기서 이 정도 급의 몬스터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뭘 어떻게 해.
하지만 그 진정성 있는 마음은 너무너무 고마웠기에 지현민은 그걸로 충분하다 여겼다.
휙―
“앗, 으아……!”
콰과과강― 바스락―
“커억―!”
그렇게 웃는 현민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발록은 그대로 현민을 집어던졌다. 무지막지한 힘으로 벽에 박힌 현민이 내상으로 인해 피를 토했다. 제대로 가드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벽에 박혔으니 무사할 리 없었다.
꿈쩍조차 할 수 없었다. 정신도 흐려져 갔다.
“지현민, 정신 차려!”
“살아있는 거지?! 그렇다고 말해!!”
멀리서 그런 그를 일깨우듯 헌터들이 애타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답을 해 줄 수가 없었다.
“…….”
말조차 꺼낼 힘이 없었으니까.
아. 이대로 눈 감으면 진짜 그대로 세상 하직할 것 같았다.
“……됐어! 이 근처에 사계절이 진입 중이야. 그쪽으로 유인해서 사계절과 합류해 처리한다!”
“예!”
“모두 들었지!?”
그 순간, 그토록 바라던 구조대의 합류 소식이 현민의 귓가에 들려왔다.
기쁜 소식이었다. 구조대가 구할 부상자들은 이미 남아 있지 않았지만.
“지현민 너 꼭 살아있어.”
“안 살아있으면 지옥에서 만나서 죽도록 처맞을 줄 알아.”
아니, 지옥행은 확정인가요…….
지현민은 억울했다. 하지만 그 마음마저 좋았기에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남기고 다시 발을 들어 올리는 발록을 헌터들이 유인하기 시작했다.
“이쪽이다, 되다 만 소 새끼야!”
“어딜 보는 거야!”
‘……잘하네.’
발록을 유인하는 목소리와 전투 소리가 점점 거리가 멀어져 갔다. 성공적으로 유인을 한 것 같았다.
마침내 정적만이 그를 감쌌을 때, 그는 이대로 편히 눈을 감으려 했다.
― 형. 형 죽어?!
― 진짜 죽는 거야?!
― 가지마. 가지마 형. 잘못했어. 진짜야.
― 왜 병신짓하다 그렇게…. 사계절은 왜 느리게 오는 거냐고!
시스템이 알려 주는 채팅창이 아니었다면.
저 카메라를 사며 유X브 실시간 채팅을 헌터 시스템과 연계를 한 탓에 카메라가 무사한지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채팅창을 볼 수 있었다.
그 채팅들을 보며, 지현민은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와중에도 제 카메라가 망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역시 비싼 건 비싼 값을 하는구나.
세상의 진리를 되새겨 준 카메라가 모든 상황을 그대로 전송한 것이었다.
‘……큭.’
자신의 걱정으로 도배하는 말들에, 그대로 눈을 감아도 좋겠다고 생각하던 지현민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웃을 수 있는 몸 상태도 아닌데 말이다.
마음만은 박장대소를 하듯 웃으며, 지현민은 그제야 생각했다.
아. 살고 싶다.
찰박. 찰박―
“……!”
그때, 기적처럼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지도 몰랐다. 혹시 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현민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 상대에게 애원했다.
“나 죽…… 포, 포션……. 살…….”
지현민은 살고 싶었으니까.
촤락―
“……컥. 커헉!”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기적이 행해지자 뒤늦게 눈을 떠 처음 마주한 것은…….
“……천사님?”
죽음 한가운데서 환하게, 빛나는…… 빛이었다.
“미안한데. 천사가 아니라서.”
관종의 직감으로 그는 깨달았다.
이 사람이 걸어나가는 길은, 분명 누구보다 빛나는 길일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소망했다.
“죽음의 앞에서도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길 바랄게요.”
그 빛나는 길을 보고 싶노라고.
“…….”
덥석―
해서, 그는 갓 회복된 몸을 얼른 일으켜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주워들고 자신이 발견한 빛의 뒤를 쫓았다. 그 영상이 이 세상에 어떤 파장을 줄지 전혀 알지 못한 채.
* * *
“이런 빌어먹을……!”
우유빛깔이 평소 성격은 사뿐히 지르밟고 욕을 짓씹었다.
“거기! 그쪽!”
“막아― 막으라고!!”
“무슨 수를 써서든 붙잡아!”
수없이 많은 팀원들과, 약자의 희생까지 치렀건만, 기껏 50명이 넘는 대규모의 사계절과 합류했어도, 발록 하나 처리하기가 너무나 버거웠다.
A급 몬스터의 위력이 이 정도였던가?
“뚫립니다!”
“안 돼……!”
갑작스레 마주하긴 했지만, 늘 정예의 팀원들과 함께했기 때문에 이 정도로 힘들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보아하니 사계절에도 네임드 헌터는 없었다. 인원 수로 승부할 생각이었는지 B급도 몇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젠장, 이 정도 인원인데 어째서 안 되냐고-!!”
대체 선배들은 어떻게 이런 걸 무슨 산책 나가듯이 그렇게 두드려 잡았던 거지?
새삼 자신과 같이 다녔던 이들이 넘사벽의 괴물들이라는 것을 실감하며, 우유빛깔은 다시 검을 다잡아 쥐었다.
“죽어. 죽으라고!!”
검은 얼마나 충격을 크게 받았는지, 벌써 이가 몇 군데 나가 있었다. 그런데도 결정적인 타격 하나 입히지 못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무너졌다.
‘……젠장.’
나름 상위 랭커로, 대접받는 삶을 살고 있는 헌터였건만 실상은 이런 비루한 꼴이라니.
이가 갈렸다.
적어도 이 나라에서만큼은 꽤 강하다고 자부해 왔건만, 지금 그는 마음속으로 처절하게 빌고 있었다.
제발,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누군가 구원해 주기를.
검을 십자가라도 되는 양 간절히 붙잡고 소망했다. 들어주지 않을 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너무나 나약하고 무력해서, 그런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젠장!”
누구를 향한 건지 모를 원망을 하며 검을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가는데…….
“……!!”
서걱―
쏴아아아―
“와……!”
난생처음, 신이 소망을 들어주었다.
단 한 번의 참격으로 쏟아지는 피의 비를 온몸에 맞은 우유빛깔은 미처 닦을 생각도 못한 채, 두 동강 난 발록이 쓰러지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많은 인원이 죽을힘을 쏟아도 쓰러뜨릴 수 없을 것 같은 상대가,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손쓸 틈도 없이 명을 달리했다.
더욱 믿을 수 없는 건, 그럼에도 발록을 물리친 그에게서는 조금의 힘든 기색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한 번의 참격이 필살기도 아닌, 그냥 평타라는 것처럼.
검에는 피 한 방울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경외를 넘어 두려울 지경이었다.
“…….”
‘……괴물.’
우유빛깔은 처음으로, 그가 자신들과 다른 인종임을 실감했다.
“괜찮으십니까?”
그는 평소 길드장만큼 괴물 같은 인간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그 인간같이 생기지 않은 길드장보다 눈앞에 이 남자가 더더욱 괴물 같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유지한 헌터.”
“마침 지나가던 길에 도움을 드린 것뿐입니다.”
“현재 원티드는 파업 중이지 않으셨나요?”
“……여전히 유효합니다. 전 여기 아는 사람이 휘말렸을 가능성이 있어서 개인적으로 왔을 뿐입니다.”
애초에 사람같이 생기지 않은 길드장과 다르게, 너무나 사람 같은 얼굴로…….
“그렇군요. 그래도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대한민국의 희망이시군요.”
“여러분의 이야기를 잘못하신 것 같군요. 전 별로 한 게 없습니다.”
“별로 한 게 없으시다니요.”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어려운 일이, 아니…….”
그가 아는 모든 것을 송두리째 부정하니까.
자신이 그동안 해 온 노력이며 걸려 있는 목숨들을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기분은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말갛고 청렴결백한 저 얼굴과 태도.
우유빛깔은 새삼 왜 길드장을 비롯한 길드의 주요 헌터들이 눈앞에 있는 이 남자를 그렇게도 끔찍이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마음이 착하고 깨끗하다는 평을 듣는 우유빛깔조차, 비틀린 마음이 싹틀 것 같았으니까.
저 남자는 너무나 잔인할 정도로 불합리하고, 깨끗했다. 그 모순에 기분이 뒤틀릴 정도로. 대체 원티드는 저런 저 남자를 어떻게 받아주나 싶었다.
그때, 양반은 못 된다고 유지한의 뒤를 따라 그의 동료들이 달려왔다.
“아, 유지한! 천천히 가자고! 너만 앞질러 가면 무슨 의미가 있어?!”
“아니, 아직 제대로 확인된 바도 없는데 대체 왜……. 좀 상황은 파악하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억. 다들 이렇게 달리면서 왜 이렇게, 말을, 잘하세요? 헉… 허억.”
그들이 도착함과 동시에 이곳이 게이트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순식간에 부드럽고 평화롭게 바뀌는 분위기를 느끼며, 우유빛깔은 진심으로 공략이고 뭐고 그냥 돌아가고 싶어졌다.
“너 이 새끼……!”
“……유라야. 아파.”
“아픈 건 아냐!!”
저런 불합리의 극치는, 정신 건강에 해로웠다.
* * *
“아픈 건 아냐!!”
지한이 유라에게 머리채를 쥐어뜯기는 광경을 마치 드라마 보듯 감상하며 윤지우는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푹―
‘……야. 잠깐만, 야―!!’
‘……헐. 피, 피!’
애타는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 건지, 아무 말 없이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처럼 링거 바늘을 뽑아낸 지한은, 범인인 지우가 보기에는 많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팔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음에도 그런 건 보이지도 않는 건지, 올곧게 정면만 보고 있는 그는, 정말 무서웠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무엇이든 저버릴 수 있는 사람 같아서. 그 무엇도 그에겐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야 이 새끼야! 네 손 보라고, 손!’
비명에 가까운 육두문자를 시전하고 나서야 그제야 지한이 피 칠갑이 된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누가 봐도 놀랄 상태였건만, 여전히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도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
무심히 제 손을 내려다보다 유라의 기겁하는 표정을 보고서야 비로소 느끼는 바가 있는 듯, 지한이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 제 팔에 들이부었다.
‘…이게 진짜!!’
너 내 손에 한번 죽어 볼래?!
유라가 미친 말처럼 날뛰는 걸 민현이 힘겹게 붙들었다.
일단 어쨌든 치료란 걸 하고 있기도 했고, 이미 들이부은 거 어쩌겠는가. 기껏 부은 포션이 허사가 되는 건 볼 수 없어 필사적으로 막고 있지만 민현도 황당하긴 매한가지였다.
‘미친.’
그리고 헌터의 기본 지식만 있는 초보 헌터는 자신이 알고 있던 상식에 현재 상황을 적용해 보고서야 기함을 했다.
회복 포션은 기본적으로 세포를 강제적으로 빠르게 재생시키는 포션이었다. 즉, 체력과 수명을 맞바꾸어 이루어내는 기적이란 것이다.
포션을 헌터들이 잘 쓰지 못하는 건 워낙 금처럼 귀하고 비싼 탓도 있었지만, 이런 이유도 컸다. 의사들이 포션을 만병통치약처럼 생각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이유기도 하고 말이다.
포션을 사용하는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포션을 사용한 후 부작용을 뒷받침할 재활이나 정식 치료를 병행하는 것이었다.
요 며칠 강제로 지한이 한 것처럼.
그런 포션을, 심지어 회복해야 하는 몸 상태에서 다른 보조 장치도 없이 저렇게 사용하다니.
기껏 되살려 놓은 컨디션을 말짱 도루묵으로 만드는 저 행태에 모두가 기함을 하는데, 정작 본인은 덤덤하기 그지없었다.
뭐, 본인이 했으니 그럴 수 있긴 하다. 하지만 그 무덤덤한 모습이 너무나 사람 같지 않아 보였다.
‘인벤 열지 마―! 넌 움직이면 안 되는 거 몰라?’
‘지호 씨가 위험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일단 확인하고 가자고! 기껏 여기까지 왔는데 전부 무너뜨릴 거야!?’
‘확인한 후에, 늦었으면?’
‘…….’
그런데 묘하게 익숙했다. 저 사람 같지 않은 무심함이.
‘……그건.’
‘나 혼자라도 가.’
대체 왜지? 뭐지?
그 이유에 몰두하느라 그가 저렇게 지호에게 맹목적인 이유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더불어 지호가 상처를 알아차리면 안 되니까 회복 포션으로 치유를 한 것이라는 것도.
뭐, 그래도 고민 끝에 깨달을 수 있긴 했다. 대체 왜 익숙했던 건지.
숱하게 보아 왔으니까.
‘윤지우. 조용히 해.’
제 다른 반쪽에게서.
‘……아 놔.’
윤지호. 네가 드디어 또 한 사람을 해먹었구나.
윤지우는 절규했다. 진짜 어쩜 저리도 똑같은지, 뭐 하나에 꽂혀 미친 듯 매정해질 때의 윤지호랑 빼다 박은 수준이었다. 직접 겪기라도 한 것처럼.
거기에 절망해서 정신 놓은 상태로 얼결에 게이트까지 따라오게 되었다.
윤지우 정식 첫 게이트 진입이자, 헌터 데뷔였다. 정식 데뷔는 아니었지만.
“이번 루키 맞으시죠? 벌써 게이트 진입할 정도가 되었습니까?”
“아니, 이번에는 의도치 않게 합류한 겁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죠.”
망할 피붙이가, 가만히를 못 있어서요.
윤지호. 만나기만 해 봐라.
그렇게 후려쳐서 연봉 협상을 했으면 곱게 택시나 타고 다닐 것이지, 대체 왜 평소에 지하철만 애용하고 다녀서 사람을 불안하게 하고 난리인지.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전화가 아예 안 되는 걸로 봐선 게이트에 휘말렸을 확률이 80%였다. 일반 스마트폰은 당연히 게이트 안에서는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나머지 20%의 확률은 까먹고 안 받는다거나, 꺼놓은 것이었지만. 윤지우는 제 누나의 스마트폰 중독을 믿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됩니까?”
무데뽀로 들어와 놓곤 뭐 하나 아는 게 없어, 이제 대체 어쩔 거냐고 민현이 지한에게 물었다.
당연히 나올 답은 없었다. 뻔히 그걸 알고 있기에 유라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차라리 게이트 공략하는 게 빠르겠다.”
그냥 한탄이었다. 누가 들어도 그랬다. 문제는 그 말을 그냥 한탄으로 받아들이지만은 않을 사람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러면 되겠네.”
“……뭐?”
모두가 두 귀를 의심했다.
너 방금 뭐라 그랬냐.
그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 것인지, 천하의 눈새가 태연하게 선언했다.
“게이트 공략 쪽으로 목표를 잡고 다니다 보면 만날 확률도 높고, 문제가 생기기 전에 공략을 끝내 버리면, 위험성도 없어지잖아.”
“…….”
너무나 태연하게, 적당한 해답을 찾았다는 듯 내뱉는 산뜻한 대답에 모두의 혼이 순간 가출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익숙하게 가출한 정신을 도로 잡은 서유라가 뒷목을 잡았다.
“네 머릿속엔 대체 뭐가 들은 거야-!!”
“아오. 골이야…….”
뒤이어 민현이 머리를 부여잡고 좌절하자, 아직 정신을 다 되찾지 못한 윤지우가 넋 나간 얼굴로 물었다.
“진짜…… 이분 맨날 이래요?”
“뭐, 안 그러면 섭섭할 정도지.”
“……저 아직 퇴사 늦지 않았죠?”
“응. 늦었어.”
그럴 줄 알고 제일 먼저 네 통장에 계약금부터 꽂아 놨어. 못 물러.
원티드가 지금까지 팀원들을 어떻게 유지해 올 수 있었는지 그 진실을 깨달은 윤지우가 절규했다.
“윤지호가 저거 보면 일단 개샤우팅에 손절각인데요. 저니까 이렇게 곱게 말하는 거라고요. 어떻게 지금 이 상황에 저런 말이 쉽게 나올 수 있어요!!”
나 이 정도면 진짜 착하지 않냐고, 윤지우가 애끓는 목소리로 민현을 짤짤 흔들었다.
안쓰럽기 그지없었지만, 민현은 말없이 그냥 받아주기만 했다. 자신도 거쳐 온 관문이었기에 이 시점만 지나면 그래도 적응도 되고 괜찮아질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그 대화에서 ‘윤지호’, ‘손절각’만 칼같이 알아들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심장이 철렁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워낙 말을 꺼낸 당사자가 생쇼를 하고 있는 시점이었기에, 주목을 받진 않았다.
덕분에 지한은 원래도 보지 않았던 주변 눈치를 보는 대신 마음 편히 삽질을 할 수 있었다.
‘손절각이라니…….’
어떻게 그렇게 심한 말을…… 진짜 그러면 안 되는데…….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께서 그럼 이따위 노답 멘붕 발언을 하는데, 그 호탕한 성격에 손절 안 할 거 같냐고, 알고도 이러는 거 아니었냐고 한심함에 혀를 끌끌 찹니다.]
그 소리에 사랑에 빠진 남자가 발끈해 황급히 변명하려 입을 뗀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유지한이 나타나 게이트를 클리어하겠다고 말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은 헌터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정말입니까?! 정말 감사합니다-!!”
“소식 들었습니다. 이번 수익은 저희가 확실히 계산해서 전달해드릴게요!”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그렇게 해 주겠다고, 그러니 제발 도와달라는 절박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곳에 각 길드의 메인 전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들이 결국 한숨을 내쉬며 체념했다.
“그래요. 그래. 어차피 혼나는 건 우리 길드장님이실 테니까.”
움찔―!
사시나무 튀듯 움찔거리는 길드장을 봐도 아무도 안쓰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들으란 듯 연이어 입을 열었다.
“윤지호의 샤우팅을 제대로 한번 들어 보실 필요는 있으실 거 같아요. 길드장님.”
윤지호가 그 지옥의 포션 주면서 하던 표정 아직 기억하시죠? 괜찮아여. 죽지는 않아여. 죽는 게 나을 거라 생각할 수는 있지만.
아주 유익한 시간이 되실 거라고, 익히 그 공포를 알고 있는 윤지우가 살벌하게 조언했다.
“아. 이번 신입 잘 들였어. 칭찬해. 나.”
“이번 신입은 정말 이쁨을 듬뿍 받겠어요.”
매우 마음에 드는 발언에 서유라와 민현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 편은 1도 없는 사이에서 울적해진 지한이 속으로 훌쩍였다.
‘진짜 많이 혼날까?’
매우 소심한 생각을 하며.
그때 눈치도 없이 존재 자체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가 끼어들었다. 익숙한 얼굴, 센터 놈이었다.
“하. 그럼 그렇지, 주제에 파업은 무슨.”
원티드 주제에 답지 않게 파업이니 뭐니 해서 사람 귀찮게 하더니. 그럼 그렇지. 고개까지 주억거리는 꼬라지가 아주 제대로였다. 누구씨가 보았으면 바로 앞뒤 생각 안 하고 충동적으로 슥삭― 해 버렸을 만큼.
그걸 정면으로 당한 서유라가 한두 번 당한 게 아니었음에도 빡침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아놔. 저 미친 새끼가.”
당장이라도 손이 나가려는 유라를 민현이 단호하게 제지했다.
“선배 일단 참아요.”
왜 막냐고 민현을 밀쳐 내려는데 그가 싸늘하게 정색하고 이어 말했다.
“같은 급으로 보이잖아요.”
뭐, 그렇게 썩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오우. 너나 진정해라.”
선배들한테 치여 살아서 그런가 평소엔 잘 화도 안 내고, 못 내는 놈이었다. 그런 녀석이 한번 화낼 때는 다른 이들보다 배는 소름 끼쳐서, 유라는 올라온 닭살을 긁어내리며 빨리 표정 관리나 하라고 닦달했다.
원래 사람 말을 잘 듣지만, 유라 말은 특히 더 잘 듣는 민현이 재빨리 얼굴을 풀고 평소대로 돌아왔다.
이런 길드원들이 노력이 보이지도 않는 건지, 잠깐 멍해 있던 그들의 길드장은 정말 사람 속 터지게 헤실헤실 웃으며 인사하고 있었다.
“다시 보네요.”
왜 짜증 나게 다시 보고 지랄인가요. 라고 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저런 속 터지는 소리나 해대니, 혈압이 안 오를 수 없었다.
“아오…….”
유라와 민현이 너 나 할 것 없이 뒷목을 잡았다.
주변에 있는 다른 길드원들도 그들의 고충을 백번 이해하고 남았기에 조용히 모른 척해 주었다.
그 암묵적 격려의 한가운데서 윤지호가 키운 사이다 인생 2N년차 윤지우는 그냥 현실을 외면했다.
윤지호 기준으로는 나름 소소했었다지만 그런 사이다에 평생을 길들여진 지우에게 이 고구마는 너무나 하드했다.
‘망할 누나, 어디 있어. 지금 여기 안 있고 대체 어디서 뭐 해?’
오죽하면 해선 안 되는 생각까지 했다.
“아……!”
정말 여기 있다면 당장 우주까지 지랄 염병을 해야 할 판이었다. 어찌나 간절했으면 그걸 잊고 이런 생각을 하다니. 뒤늦게 깨달은 지우가 감탄했다.
그 정도의 클라스라니……!
새삼 느껴 본 적 없던 고구마의 클라스에 놀라며 고개를 미친 듯이 흔들고 있는데.
“하. 그래요. 당연히 다시 보겠죠.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요? 우리가 나오라면 나와야죠.”
유지한 씨 주제에.
“……오늘 약 처먹었나 봐. 저 새끼.”
“늘 저랬잖아요.”
“업그레이드가 넘 오지잖아.”
진짜 오늘만 사는 인간인지, 주제 파악이라는 뜻은 잘 모르는 것 같은 놈의 어휘에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착한 성격 때문에 만만한 이미지로 보이긴 했지만, 지한은 어디 가서 무시를 당하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성격이 좋다 한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자타공인 국내 최강자였다.
그런 반면에 목숨이 일곱 개라도 있는 것 같은 저놈은…….
유지한을 팔아서 잇속을 꽤나 챙긴, 현재 매우 잘나가는 의원 놈 하나 뒤를 겁나게 빨고 다니기로 유명한 센터 소속, 헌터 제3팀 팀장. 랭킹 60위권 정도의 놈이었다.
하도 사람을 짜증 나게 해서 아무도 저 인간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도 않았다. 얼굴만 떠올려도 빡칠 거 같은데 누가 저런 인간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나. 본인도 ‘센터분’, ‘헌터님 헌터님’만 해 주면 제 이름을 기억하든 안 하든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머저리였기에 문제될 건 없었다.
진짜 문제는 그 머저리의 말에 있었다.
“야. 저 새끼 뭐야?”
“저거 그냥 내버려 둬도 돼? 진짜 수틀려서 우리도 안 도와주고 앞으로 계속 칩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니지. 저게 그 수준의 문제냐. 이거 그냥 대한민국 망하는 이야기거든?!”
길드장 닮아서 다 호구 같지만 하나같이 네임드로만 이뤄진 원티드가 장기 파업에 돌입하기라도 하면, 그건 곧 국가의 가치가 하락한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이 국가에 완전히 등 돌렸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나라의 위상이 달라질 테니까.
헌터들의 시선이 바쁘게 오가는 건 보이지도 않는지, 아가리를 바쁘게 놀려댔다.
“국민의 영웅이, 강자가 약자를 돕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그럼 필요할 때 나타나 줘야죠. 자기 편하자고 드러눕는 게 말이 되나요?”
“…….”
아. 그럼 네가 노는 건 말이 되고?
순간 모든 이들의 머릿속에서 그 생각이 튀어 올랐지만, 눈새는 저 잘났다고 열심히 시키지도 않은 입을 털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움직여야죠. 랭킹 1위면.”
“……지금 그 랭킹 1위 다른 사람이다. 이 머저리 새끼야.”
결국 참다 못한 서유라가 호구 같은 길드장은 자기가 지킨다는 듯이 뒤로 당기며 태클을 걸었다.
정곡을 정확히 찌르는 지적이었건만, 상상 이상의 대꾸가 돌아왔다.
“그 1위 안 보이잖아요. 그럼 저어기 유지한 씨가 1위 몫까지 다 해야죠. 센터에서 원티드를 업무 태만으로 고소해도 할 말 없지 않아요?”
“……헐.”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헛소리에 모두가 넋이 나갔다. 심지어 뒤늦게 달려오던 부하 직원도 그 소리를 듣고는 현실 도피를 하듯 그대로 뒷걸음질을 시도했다.
그 사이에서 가장 빨리 정신을 차린 서유라가, 결국 체면을 포기했다.
“네가 해, 이 씨X새야!”
니 새끼는 손이 없어 발이 없어?! 니 새끼가 처해야 될 걸 누구한테 당당히 책임 전가하고 뻔뻔하게 개소리질이야―!!
“서, 선배! 마력! 마력 새요!”
너무 화가 나서 마력 컨트롤까지 되지 않는지 주변으로 유라의 마력이 파사삭 피어올랐다.
민현이 그걸 보고 황급히 말리는데도 들리지가 않는 건지 조절이 되지 않는 건지, 마력은 계속해서 존재감을 높여 나갔다.
그걸 본 다른 헌터들이 한두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헐. 냉기 튀어나왔다.”
“일단 피해.”
“저거 가까이 가면 최소 동상이야.”
“진짜 조절 안 되네.”
“되겠냐. 나 같아도 안 되겠다.”
빡칠 만하다며, 인생에서 저런 개소리는 난생처음 들었다고 한 헌터가 질색했다.
“저게 일상이면 난 진짜 다 때려치우고 토낀다. 사람이고 뭐고 다 꼴 보기 싫을 듯.”
그 소리에 순간 모두가 숙연해졌다.
어쩌면 그들이 당했을 일까지 일상처럼 전부 겪고 있는 희생자가 그들의 눈앞에 있었으니까.
“그래도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어차피 전부 말 맞출 거니까 진짜 죽일 거 같으면 말리러 나서자.”
암묵적인 합의까지 이루어진 판국이었다. 센터의 말도 안 되는 만행을 눈앞에서 지켜본 이상, 그들은 정말로 그렇게 해 줄 용의가 넘쳤다.
쿵―
콰가가가강―!!
터벅터벅―
“……!”
“미친―!”
기가 막힌 타이밍에 등장하는 어떤 놈들이 아니었다면.
* * *
“저게, 뭐…….”
“가, 가고일이다―!”
“미친 소리 하지 마. 아무리 플러스여도 B급에 무슨 가고일이야!”
“있을 수 없다고!”
한 마리면 그나마 이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연달아 네 마리의 가고일이라니…….
게이트의 중심부에 다다른 것 같지도 않은데, 이 정도 난이도는 B급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말이 되냐고!!”
플러스 하나 붙었다고 난이도가 이렇게 널을 뛸 순 없는 거다.
“밸런스 패치 당장 해. 이 망할 시스템아!”
“다 죽이려고 작정했냐, 염병할.”
“등급 낮은 놈들은 다 뒤로 빠져! 빨리―”
소란이 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결국 화를 잠시 억누른 유라도 무기를 꺼내며 합류했다.
“우리가 막고 있을 테니까 얼른 전선 정비해.”
“감사합니다!”
“들었지? 어서―”
【스킬: ‘얼음폭풍’(A)을 발동합니다.】
유라가 하늘로 날아올라, 얼음 소용돌이를 만들어 그대로 가고일 하나를 에워쌌다.
우어어어―!!
“아, 겁나 시끄럽네. 너―”
유라가 한 마리를 상대하는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민현도 행동에 나섰다.
“지우 군은 뒤로 물러서 있어요! 아직은 단신으로 이 정도 몬스터를 상대하기에는 경험이 없으니까.”
“하지만…….”
“괜찮아요. 우리가 고작 이 정도도 못 할 것 같아요?”
【천검의 기록 제7장 제1항.
‘천신의 발도.’
―그대가 천신에 다다르자 하노라 한다면, 그대의 발걸음 자체가 신이 되어야 한다.―】
“……와.”
발도 자세를 한 채 발검을 하자마자 믿을 수 없는 위압감과 존재감이 뿜어져 나왔다. 그럼에도 모든 움직임에 발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며 윤지우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정식으로 보는 건 두 번째이지만, 왜 맨날 선배들에게 당하기만 하는 것 같은 그가 네임드 헌터인지 알려 주는 것 같았으니까.
‘역시 신속의 검.’
메인 타이틀은 그것이었지만, 아는 사람은 알고 있었다. 그게 그의 진짜 타이틀이 아니라는 것을.
아직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해 메인 타이틀로 달지는 못했지만, 그의 진정한 타이틀은 바로 이것이었다.
‘저게 바로 [천신의 길을 걷는 자.]’
물론 아직 발끝도 못 갔다 본인은 이야기하고, 그게 현실이 맞겠지만 그래도 존경스러운 등이었다.
믿음이 갈 수밖에 없는, 틀림없는 영웅의 등을 바라보며 윤지우는 어린 소년처럼 생각했다. 자신도 저 등이 향하는 길을 따를 것이라고.
* * *
콰가가강―!!
털썩―
우어어어어―!
“…….”
그나마 여유로웠던 상황이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어가는 광경을 보며, 지한은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생생하긴 했지만 아무런 감각이 들지 않았다.
전투 상황에서 이런 기분이 들게 된 지는 꽤 오래됐지만, 그래도 평소엔 의무적으로 움직이기라도 했던 것에 비해 오늘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국민의 영웅이, 강자가 약자를 돕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그럼 필요할 때 나타나 줘야죠. 자기 편하자고 드러눕는 게 말이 되나요?’
이 말 때문일까?
아니, 늘 들어온 말이라 아무런 감흥도 없었으니 그 탓은 아니었다. 그렇게 전혀 고민 같은 걸 할 상황이 아닌 상황에서 고요히 고민하다 문득 깨달았다.
‘그 1위 안 보이잖아요. 그럼 저어기 유지한 씨가 1위 몫까지 다 해야죠. 센터에서 원티드를 업무 태만으로 고소해도 할 말 없지 않아요?’
자신을 흔든 것은 이 말, 정확히는 이 말을 들었다면 분명히 가만히 있지 않았을 사람 때문이었다는 것을.
“……하.”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그러는 것은 괜찮았다. 얼마든지 당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그렇게 말했던 남자는 정말 당당하게 원티드에 공식적으로 요구하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그리고 현재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지한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그걸 용납할 리가 없었다. 입에서 불을 뿜는 수준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저런 소리를 굳이, 그녀의 귀에 들어가게 할 필요가 있을까? 좋은 것만 해 줘도 모자랄 사람한테?
어차피 이곳은 게이트. 사고로 누가 죽어도 알지도 못하는 곳이었다.
“아아아악―!”
우어어―
“살려 줘. 살려 달라고!!”
마침 핑계도 적절히 생겼다. 그냥 이대로 내버려 두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날 살려! 살리라고! 당신은 날 살려야 하잖아!!”
마치 맡겨 놓은 것처럼, 죽을 수 있는 상황에서조차 저런 뻔뻔한 태도라니. 점점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 마음을 본 자신의 성위가 말리지는 않지만, 괜찮겠냐는 듯 물어왔다.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께서 드디어 내 말을 좀 알아들어 줘서 좋긴 하지만, 그 여자가 좋아하는 건 내가 맨날 흉보던 이전의 너 같은데 지금 이러는 걸 들켜도 괜찮냐고 물어옵니다.]
‘…….’
조금 고민에 빠졌다. 그녀가 제 곁에 있는 이유 역시 그런 모습 때문이라는 걸 스스로도 알았으니까.
만약 그런 면모가 사라지면, 이제 혼자서도 괜찮겠다고 하며…… 날 떠날까??
“허억……!”
갑자기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혀 왔다. 예상조차 거부하는 극단적 현상에, 황급히 숨을 정비하며, 지한은 생각했다.
아마 다른 누구보다 제게 부드럽고, 또 냉정한 그 여자는 마지막까지 너무나 부드럽고 상냥하게 날 떠날 것이다. 너무나 잔인하게도.
그런 일을 겪지 않기 위해서라면 제 심장도 떼어 줄 수 있는 남자는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지금이라도 구할까? 그러다 나중에 귀찮아지면 그때 처리하…….
‘……1위.’
그때 문득 그 사람이 생각났다. 나랑 180도 다른 당신이라면 과연 어떻게 할까? 생전 처음으로 만나 본, 나와는 급이 다른 강자인 당신은 강자로 살기 매우 고달픈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 할까?
자신감을 넘어 존재감 그 자체가 왕이던, 현재 이 세계의 왕인 당신은.
꼭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만날 수 있다면.
지한은 처음으로 그를 다시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저번에 모습을 보아하니 네 앞에 그렇게 쉽게 나타날 것 같지 않다고, 어차피 그쪽에서 널 만나러 와야 가능한 만남일 것이라 첨언합니다.]
“……그도 그렇네.”
그것도 맞는 말이었다. 그쪽은 전혀 이쪽에 아쉬울 것이 하나 없었으니까.
그래도 언젠가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불쾌한 소리가 들려왔다.
“거기서 가만히 뭐 하는 거냐고―!! 아악!!”
우지끈―
“…….”
팔이 뜯겨 나가는 와중에도 변하지 않는 모습이 좀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저걸 정말 구해야 할까, 답지 않게 불쾌함을 가득 담아 세이라를 만지작거렸다. 망설이다 결국 발도를 하려고 하는데.
서걱.
우어어어어어―!!!
투둑― 촤라락―
<랭킹 1위 탈환을 소망합니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