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내가 바로 진정한 이 구역 미친년
“와우.”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새로 온 실장이 오자마자 한 폭탄선언에 모두가 곧바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정신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 일단 없는 정신으로도 새 실장을 데리고 튄 길드장님께서 사라지자 그제야 하나둘 집 나간 정신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와. 성격 진짜…….”
“화끈하다. 정요한이 바로 넙죽 엎드리며 찬양할 만한데.”
“정요한이?!”
누가? 누구? 내가 아는 그 정요한? 원티드 자타공인 똑똑한 또라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 한국 자체를 잠시 떠나 있어 소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듣지 못했던 레쓰비가 기함했다.
“몰랐냐? 오늘이 오기만을 벼르고 있다가 급 주식 물살 타서 못 온다고 온갖 욕을 다했잖아.”
“그럴 만했죠. 정요한이 빌면서 스카우트했으니까요.”
스카우트 아닌 스카우트 날 현장에 있던 연금술사가 나지막이 첨언했다.
“확실하다. 길드장님 이제 완전 잡혀 살겠네…….”
누군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말에 다들 아까 없는 정신으로 황급히 실장을 끌고 가면서도 혹시 불쾌해할까 안절부절못하던 길드장과, 그런 길드장에게 무심히 끌려 가던 새 실장을 떠올렸다.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의 우열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한순간의 판단으로 목숨이 오가는 헌터들은 기지를 유감없이 발휘하며 빠르게 판단을 마쳤다.
“앗싸―!”
“야! 빨리 짐 싸!!”
“이미 다 싸 짊어지고 있어.”
“연락 받기 전까진 절대 안 온다.”
환호성을 내지르며, 빛의 속도로 제 물건을 챙겨댔다. 이사라도 가는 것처럼 모든 짐을 바리바리 싸는 손길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그나마 침착한 디올이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우리 싹 다 없어야 해! 우리가 다 없어야 길드장이 뭘 못하지! 남겠다는 놈은 족쳐서라도 끌고 가!”
“그런 놈 없어. 드디어 이놈의 호구가 호구 잡히지 않을 날이 왔는데 그럴 리가. 남는 놈은 우리 스파이니까 빨리 족쳐!!”
“옳소―!!”
“간신배는 죽음으로!!”
지한이 보았으면, 분명 대성통곡을 했을 광경이었다.
* * *
지한은 답지 않게 열성적인 태도로 지호를 끌고 나오긴 했지만, 사실 그다지 제정신은 아니었다. 다른 여자도 아니고, 윤지호의 팔을 잡은 것인데 제정신일 리 없었다. 머릿속은 이미 패닉이었다.
“……우왕.”
그런 지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에서 나지막이 감탄사가 들려왔다. 지한이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돌아보았다.
고개를 돌리자, 끌려오는 것임에도 제 발로 걷는 듯이 너무나 유유자적한 지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조차도 너무나 예뻐 지한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기합니까?”
지호가 감탄사를 터뜨린 곳은, 바로 지한의 공간이자, 이 길드의 최상부. 길드장실이었다.
본인의 공간이긴 하지만, 지한의 손길은 딱히 들어가지 않았다. 이 공간은 자신의 의견은 무시하고, 인테리어 디자이너와 길드원들이 열과 성을 다해 만든 합작품이었다.
평소였다면 솔직하게 바른대로 이야기했겠지만, 그래도 그 바른말이 없는 점수도 더 깎아 먹으리라는 것 정도는 알았기에 지한은 조용히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그런 지한을 보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얼굴로 지호가 눈을 데구루루 굴리다 솔직하게 입을 털었다.
“네. 유지한 씨는 뭐든 남한테 다 퍼주고 정작 자기한테는 무관심해서 분명 본인 방도 그럴 거 같았거든요.”
의외네요.
난데없이 날아든 돌직구 팩폭에 지한이 심장을 움켜쥐었다.
마, 맞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그녀의 입으로 제대로 들으니 뼈아팠다.
“저, 저도 욕심은 있습니다.”
차마 물욕이 있다고는 말하지 못해, 지한이 어설프게 해명했다. 그 말에, 지호가 지한의 책상에 엉덩이를 걸치며 의미심장하게 대꾸했다.
“고집과 욕심을 착각하면 안 돼요.”
그게 뭔지나 알고 말하는 거냐는 돌직구에 지한은 진심으로 억울했다.
그도 사람이었다. 욕심은 당연히 있었다. 이르자면…….
“……착각 안 해요.”
차마 여기서 솔직한 마음을 토로할 수 없어, 지한이 붉어진 얼굴로 부루퉁하게 대답했다.
갑자기 붉어진 지한의 얼굴에 지호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지한은 시선을 회피했다.
“음. 그렇다 치고, 그럼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시시콜콜한 워밍업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냐 묻자, 그제야 이곳에 지호를 데리고 온 목적을 떠올린 지한은 순간 아연해졌다.
아무리 정신이 없었다지만 본래의 목적도 잊다니. 스스로의 멍청함에 탄식하며 지한이 축 처진 얼굴로 본론을 꺼냈다.
“어째서 그러신 겁니까?”
“전권은 저한테 다 위임하기로 하지 않았나요?”
이제 와 딴소리냐고, 섭섭하다고 지호가 장난스럽게 툴툴거렸다. 너무나 가볍게 이 상황을 입에 올리는 모습에, 상대가 지호라는 걸 신경 쓰면서도 지한은 조금 답답한 얼굴로 말을 꺼냈다.
“파업은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원티드가 활동을 멈추는 순간 시민들에게 이루어지는 피해가…….”
“있겠죠. 원티드가 그동안 제 살, 정확히는 유지한 씨 살을 깎아 가면서 열심히 다른 사람들 뒤를 닦아 주고 다녔으니까.”
“…….”
‘오늘 저녁밥은 뭐 먹을까?’ 하듯이 단조로운 태도로 물 흐르듯이 뱉었으나, 결코 가볍게 들릴 수 없는 말들이었다. 지한이 하려 했던 말들을 전부 무로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입이 막혀 버린 지한을 향해 지호는 날카롭게 시선을 던지며 유유자적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럴 건데요? 유지한 씨가 어느 날 사라진다면, 만약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는 이 원티드의 길드원들이 그 뒤를 계속 닦아 줘야 하나요? 당신의 뒤를 이어서?”
“그럴 일은……!”
“없을 거라 어떻게 확신하나요. 당장 한 치의 앞도 알 수 없는 게 사람 일인데.”
하물며, 헌터 일을 하고 있으면서.
지호가 있는 힘껏 조소했다.
냉기가 가득한 비웃음에 지한이 자신보다 훨씬 큰 산을 마주하는 느낌을 받으며 위축되어 갔다. 그럼에도 지호는 멈추지 않았다.
“어린애예요. 유지한 씨는.”
* * *
기껏 군말 없이 끌려와 주었더니. 예상과 정말 한 치도 다르지 않은 소리에 진심으로 질려 버렸다.
“어린애예요. 유지한 씨는.”
“……!”
내 태도에 눈앞에 있는 남자가 명백히 당황해하는 게 눈에 보였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어릴 때는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죠. 뭐든지 할 수 있고, 그렇게 될 거라고. 어른들이 그렇게 주입시킨 결과기도 하죠. 자신이 바라는 이상을 만들기 위해.”
착한 어른이 되고. 훌륭한 사람이 되고. 큰 사람이 돼라.
말은 참 좋다.
하지만, 막상 어른이 되면 모두가 알게 된다. 훌륭한 사람은, 결국 남들 위에 서는 사람이고, 남들 위에 서는 사람은 결국 누군가에게는 이유 없는 질투를 사고 열등감을 안긴다.
그럼 누군가에게 박탈감을 주는 사람은 휼륭한 사람인가?
만약 지식X에 이런 질문을 올린다면 온갖 욕설과 악플들이 100개 이상 달릴 것을 자신할 수 있다.
세상은 그런 것이었다. 모두가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는 없다. 좀 더 편하고, 조금 더 좋은 걸 바라는 사람의 욕심이 있는 한.
결국 ‘착한 어른’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는 말일 뿐이고. ‘훌륭한 사람’은 자신에게 이득을 가져다주는 사람이 되란 말이며. ‘큰 사람’은 죽어서도 대대손손 이름을 남겨 가문의 콧대를 세워달라는 말일 뿐이다.
“성인이 된 후에도 그 말을 강요당하며 살아온 당신이 가진 그 신념은, 분명 정의롭고 존경받아 마땅한 것이죠.”
“……그런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대단한 게 아니면 왜 그렇게 억지로 끌어안고 살아요? 뭐가 좋다고? 정작 중요한 제 사람은 지키지 못하는 그 빌어먹을 신념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데?”
나는 그런 게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결국 실컷 이용해 먹고, 그 무엇도 해 주지 않고, 그저 씌워 주는 이름뿐인 감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물론 그런 것에 만족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 신념은 말처럼 모든 걸 이뤄 주지 않고, 뜻하는 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아요.”
“…….”
“지금도 봐요. 당신의 그 신념에 이득을 보는 건 당신은 알지도 못하는, 면식도 없는, 호의도 무엇도 없는 수백만 사람들이고, 손해를 보고 있는 건 당신이 마음을 나눈 사람들과…….”
“…….”
“바로 당신이죠.”
그래.
장래희망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도 이렇게는 살지 못할 것 같은 삶을, 순응하며 살아가는 머저리 같은 너.
“이제는 좀 깨달아야 할 나이예요. 적어도 당신이 아끼는, 당신을 아끼는 이들에게는 보답을 해 줘야죠. 당신을 위해서 빈말뿐 아니라 진짜로 목숨을 거는 사람들인데.”
“…….”
목숨 걸고.
말은 참 쉽다.
많이 인용되는 말이었지만, 실제로 목숨을 거는 사람들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인간은 결국 살아가면서 쌓아 놓은 것들이 있는 만큼, 그 모든 걸 쉽게 놓아 버릴 수 없으니까. 저 말은 그저 각오를 보여 주기 위한 인용구일 뿐이다.
“언제까지 그들이 대가 없이 목숨을 걸 수는 없잖아요.”
“……전 그럴 생각은…….”
“알아요. 하지만 당신이 그럴 생각 없어도, 당신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하나, 그 어려운 말을 실제로 이루는 이들에게 당신은 과연 무엇을 해 주었는가.
당신이 그럴 생각이 없었다 해도, 결국 침묵으로 용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당신도 잘못이 없다 말할 수 없었다.
당신은 이제 알아야만 했다.
“우선순위를 착각하지 말아요.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 물론 원칙상으로는, 숫자놀음으로는 맞는 말이죠.”
“…….”
“근데, 당신의 안에서 더 가치 있는 쪽이 다수인지 소수인지, 분명히 해요.”
말하면서도 제발, 다수를 위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는 말하지 않길 간절히 소망했다. 그로 인해 버려질 길드원들의 인생뿐 아니라, 그의 결말 또한 불 보듯 뻔했으니까.
“당신은 신이 아니고, 신도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요.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 따위, 꿈꿀 나이 아니에요.”
세상에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없다.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질 때, 양쪽을 다 선택할 수 없는 것처럼.
어른이 되어 가며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진리다. 슬프지만, 당신 역시 피할 수 없다.
“이젠 어른이 되어 줘요. 아예 당신의 신념을 꺾으라는 게 아니에요. 그저, 조금만 타협을 해 줘요. 당신과 길드원들의 권리는 내가 찾아 올 거니까.”
설마. 당신에게 평생을 살아온 방식을 바꾸라고 할까. 아무리 일할 때는 무자비한 나라도 그런 걸 시킬 용기는 없다. 어차피 시켜 봤자 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된다고 해도 그건 그거대로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못하는 일은 더 잘하는 내가 할 거야. 그게 내가 이 자리에 앉은 이유니까.
“……나는.”
주인공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흔들리는 그를 보며 못된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고지가, 머지 않았다.
약간 마음이 약해지긴 했지만 때를 놓치지 않고 밀어붙였다.
“당신은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돼요. 리더답게. 원래 리더는 위에서 고고하게 앉아만 있는 게 학계 정설이에요.”
어떤 사장이, 대빵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신입 사원보다 더 굴러요?
제대로 된 기업의 사장이라면 궤를 달리하긴 하지만, 시치미를 뗐다. 세간의 인식이 그러니 딱히 틀린 것도 아니고. 눈짓까지 줘 가며 있는 대로 팍팍 밀어붙였다. 여기서는 인정사정 봐줘서는 안 된다.
“……네.”
됐다.
다 끝났다는 생각에 그제야 비로소 마음 편히 미소가 새어 나왔다.
“좋아요. 착한 어른이.”
스윽스윽―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이제는 거의 버릇처럼 주인공님의 머리를 쓰다듬자, 피하지는 않으면서 어린애 취급당하는 것 같은 느낌은 싫은 듯 그가 투덜댔다.
그 모습마저 너무나 귀여워 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칭찬하는 거예요. 노력한 걸 테니까.”
이 대답 자체가 애한테 할 법하긴 했지만, 그래도 당신이 애썼다는 걸 모르지 않으니까.
“……아니에요.”
기특함을 가득 담아 칭찬해 주자, 칭찬이 낯선 어린아이처럼 주인공님이 얼굴을 붉혀 왔다.
고작 이 정도 칭찬마저 못 받아 본 것 같아, 귀여우면서도 조금 안쓰러워졌다. 그래서, 분위기를 전환해 보자, 조금 장난을 쳤다.
“진짜로 어린애 취급했으면 안아도 줬지.”
“……!”
“윤지우가 되게 좋아했거든요.”
장난스럽게 얘기하긴 했지만, 진짜였다.
저랑 다르게 속으로든, 겉으로든 감정이 매우 풍부한 동생 놈은 울음을 꾹꾹 참다가도 안아만 주면 온갖 눈물, 콧물을 다 쏟았고, 칭찬받을 때면 온갖 츤데레 티를 내며 틱틱거리면서도 나를 꼭 안은 팔은 놓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칭찬도 위로도 그다지 잘하지 못하는 나는 안아 주는 기술만 늘었다.
“동…… 동생 군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동공이 카오스 자체였다. 그러다 두 눈까지 찔끔 감는 것이 아주 제대로였다.
뭘 생각한 건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그대로 돌하르방이 될 것 같아서 참았다. 대신 마저 하던 칭찬을 추가로 해 주기로 했다.
칭찬은 많이 받을수록 애들 정서에 좋다지 않는가.
“참 잘했어요.”
꾹―
도장 찍듯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 눌러 주는데, 주인공님이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늘의 주인공님은 정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그래도 예뻐 그냥 웃어 주었다.
* * *
나름 해사한 분위기였건만.
그 해사한 분위기를 만드는 두 사람과 별개로, 조금 떨어져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이들은 그 분위기를 마냥 해사하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호가 무기한 파업이라는 폭탄을 떨어뜨린 바람에 두 사람이 움직이는 걸 보면서도 정신이 멍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뒤따라 올라오면서도 사실 조금 걱정을 하긴 했다.
“……누나가 길드장님 패면 어떡하죠?”
걱정의 종류가 사뭇 다르긴 했지만.
“일단 지한이 놈이 지호 씨랑 싸우진 않을 거예요.”
맞으면 맞았지.
하지만 그게 더 사람을 빡치게 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유라는 뒷말을 삼켰다.
“아. 그게 더 문제라고요…….”
아직 지한을 잘 모르는 지우는 그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제 누나가 정말 폭행이라도 저지르진 않을까 안절부절못했다.
그런 지우를 보며 유라는 속으로 지호에게 유감을 표했다. 유지한이 얼마나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지 아니까.
물론 그래도 멱살은 안 잡았기를 기도했다. 앞으로 계속 볼 사이인데 시작부터 멱살 잡고 잡히는 건 좀 그럴 테니까.
그렇게 각자 상반된 마음으로 도착한 그들은 예상과 다르게 아주 멀쩡한 광경에 조금 당황했다.
“……후. 다행이다.”
누나. 그래도 아직 자제력이라는 게 남아 있긴 하구나.
걱정 많은 윤지우가 안도했고,
“……와, 어떻게 안 잡을 수 있지?”
안 잡기를 빌긴 했지만 진짜 안 잡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간신배 서유라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눈을 비볐다.
“그럼 멱살 잡기 전에 얼른 끼어…….”
애석하게도 그런 서유라를 보지 못한 윤지우가 눈치 없게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려 하는데.
“……잠깐. 동생 군.”
얼빠진 채 서 있던 유라가 지우를 막아섰다.
“……?”
자신을 막는 유라를 이해할 수 없어 지우가 그녀를 돌아보았다.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자신을 막아서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으니, 이해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답을 찾기 위해 지우는 유라의 시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때마침 들려오는 말이 답을 일러 주었다.
“당신은 신이 아니고, 신도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요.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 따위, 꿈꿀 나이 아니에요.”
“……!”
제 누나의 목소리에 윤지우의 눈이 커졌다.
아니,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착하고 좋은 사람한테 무슨 저런 막말을……!
당장이라도 누나를 말려야 할 성싶었다. 하지만 지우는 여전히 자신을 막고 있는 유라의 얼굴을 보고는 선뜻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이젠 어른이 되어 줘요. 아예 당신의 신념을 꺾으라는 게 아니에요. 그저, 조금만 타협을 해 줘요. 당신과 길드원들의 권리는 내가 찾아올 거니까.”
“……나는.”
“당신은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돼요. 리더답게. 원래 리더는 위에서 고고하게 앉아만 있는 게 학계 정설이에요.”
“…….”
실컷 진지한 이야기를 이어 가다 막판에는 장난스럽게 분위기를 풀어 주는 누나의 필살 스킬에 동생이 뒷목을 잡았다. 아무리 좋은 의도라지만 저 선량한 사람마저 낚다니……. 간사한 타협과 양심이 내적 갈등을 일으켰다.
자신이야 동생이라 그렇다 치지만, 낚인 당사자의 일행인 분은 심히 안 괜찮을 것이 분명해 조심스럽게 옆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돌아본 얼굴은, 지우 스스로가 생각해도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질문을 내뱉게 만들었다.
“……괜찮으세요?”
내뱉고도 지우는 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안 그래도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저 광경을 보고 나선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저 눈이 어딜 봐서 괜찮아 보인단 말인가.
지우가 열심히 삽질을 하는 동안, 그 와중에 지우의 물음은 알아들은 유라가 여전히 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입을 열었다.
“……괜찮아.”
아니요. 전혀 안 괜찮아 보이는데요.
칼같이 태클을 걸고 싶었지만 지우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지우의 속마음이 훤히 보였지만 유라는 진심이었다.
‘……윤지호.’
난생처음 보는 얼굴로 ‘윤지호’라는 이름을 부르는 녀석을 보았을 때부터 유라는 예감했다.
분명, 그 이름은, 무척이나 특별한 사람일 것이라고.
해서 답지 않게, 뒷조사까지 했다. 유지한에게 호의를 보여 주는 이는 많았지만 호의가 아닌, 정말로 대가를 치러 준 인간은 처음이었으니까. 알아 두어서 나쁠 건 없었다. 능력도 꽤 좋은 것 같고.
아니, 사실은 다 핑계였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다. 유지한을 저런 얼굴로 만든 이가.
그렇게 알아보고, 직접 그녀를 보고 나서, 유라는 이상하게 그녀를 반드시 아군으로 만들어야겠다는 강렬한 확신이 들었다.
원티드에게는 그녀가 필요하다고.
그래서 그렇게 답지 않게 열심히 스카우트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옳았다.
“……네.”
그럼에도 이렇게 벅차오르는 것은,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이유는 그 예감이 정확히 맞아떨어졌기 때문일까.
아니면…….
“좋아요. 착한 어른이.”
모두가 하고 싶었지만 결국 하지 못한 말이 드디어 전해졌기 때문일까.
“……하…… 하.”
유라가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유지한이 처음으로 자신의 신념을 굽혔다. 타의에 의해서 강제로 꺾인 것이 아닌, 자의로.
어렸을 때부터 지한과 함께해 온 유라는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착하고 또 너무나 착한 유지한은 버림받지 않기 위해, 미움받지 않기 위해 늘 타의로 자신을 굽히고 살았다.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서 그게 어느새 신념이 되어 버린 남자였다. 그에게 누군가는 고맙다고, 잘했다고 말해 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유라를 비롯한 그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 포장해도 상처 줄 것을 아니까. 자칫 잘못하면, 또 우리 때문에 자신을 굽힐 테니까.
그것이 두려워 투덜거리면서도 지한에게 말하지 못했다. 유지한을 아끼기 때문에 더 입을 떼지 못했다.
스윽스윽―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럼에도 말해 줬어야 하는 것이었다. 저렇게, 눈앞에 있는 사람처럼.
“칭찬하는 거예요. 노력한 걸 테니까.”
솔직하게 말하고 솔직하게 칭찬을 해 주었어야 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너는 약한 사람이 아니었고, 분명 그 길은…….
“……아니에요.”
너를 행복으로 이끌어 주었을 테니까. 보다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잘못되었다는 걸.
그 순간, 어릴 적 제게 예언처럼 가슴에 박힌 말이 떠올랐다.
‘유라야. 언젠가, 분명 지한이를 바꿀 사람이 나타나면. 지한이를 대신해서, 네가 놓지 말아 주렴.’
‘……제가요?’
‘멍청한 내 아들은 분명 또 망설이다 놓칠 게 뻔하잖니. 그 상대가 너였으면 싶기도 하지만, 만약 다른 사람이 나타난다면…….’
‘저도 그런 거 못 해요. 그냥 유지한 등을 찔러서…….’
‘아마, 그 사람은 너에게도 필요한 사람일 거야.’
“……저 정말 잘한 거 같아요. 아줌마.”
헌터의 시대가 되기 전부터 예언 능력으로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취급받았던 그녀의 말은 이번에도 옳았다.
언젠가 그녀가 했던 예언대로였다.
유지한을 바꾸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고, 그녀는 분명…….
“참 잘했어요.”
저를 포함한 이 원티드 전체를 바꿀 것이다.
* * *
“다 정해졌겠다. 이삿짐부터 싸야겠네.”
대충 큰일을 끝내고 홀가분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리자, 대체 언제 따라온 건지 모를 동생 놈이 칭얼거렸다.
“이삿짐이라니?! 진짜 이사 가게?”
“치킨으로 다 끝난 이야기를 또 하는 저의는 뭐지?”
그날 쏜 치킨 값이 얼마였건만, 이제 와 또 딴소리하는 동생 놈의 작태에 심기가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 그 모습에 윤지우가 나름대로 열심히 변명을 쥐어짜 냈다.
“이, 이렇게 빠르게 이사 갈 생각을 할 줄은 몰랐지!”
“원래 쇠뿔도 단김에 빼는 거야.”
미적거리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기적의 한국인 논리를 펼치자, 윤지우가 넋이 나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니거든?!”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지.
뭐 그런 걸 따지고 있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저 여린 동생 놈의 하트 브레이크를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조용히 생략했다.
“어차피 너도 종종 놀러 올 거 아니야? 근데 왜 이렇게 과민 반응이야?”
귀찮음을 가득 담아 말하자, 그 가능성은 전혀 생각지 못한 얼굴로 녀석이 물었다.
“……가도 돼?”
……얜 대체 왜 이럴까?
오지 말란다고 안 올 녀석도 아니면서 대체 왜 이러는 건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오기 싫으면 안 와도 되고.”
“야!!”
“아, 시끄러워. 일단 집 구경 가자.”
뭐니 뭐니 해도 새집 구경만큼 좋은 구경이 없지.
사랑스러운 주인공님께 빛의 속도로 넘겨받은 집 주소와 비밀번호가 적힌 종이를 팔랑거리자, 매우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종이를 바라보던 동생 놈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그래. 가자.”
남의 집 가는 건데 마치 제집 와도 된다고 허락하는 것만 같은 이 느낌은 뭐지?
매우 꺼림칙했지만 이런 걸로 괜히 실랑이를 하기는 싫어 그냥 패스했다.
“오. 신입. 지금 나가나?”
“실장님도 같이 계시네? 우리 지금 나가요!”
“저는 얘랑 같이 여행이나 가려고요! 부길마한테도 말 전해 놨어요!”
남매끼리 오붓하게 걷고 있는데, 부리나케 한가득 짐을 싸 들고 나서는 길드원들과 마주쳤다. 어찌나 신나서 말을 하는지, 강제 휴가를 내려 준 것이 새삼 뿌듯해졌다.
“넉넉하게 줄 테니까 신나게 놀다 오세요. 느긋하게 잠도 실컷 자고.”
하루아침에 끝날 문제가 아니라, 아주 몇 달 푹 쉬고 오란 뜻으로 방긋 웃으며 이야기하자, 호구 길드장 밑에서 몇 년을 버텨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게 된 이들이 제 속뜻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활기차게 대답했다.
“네! 저희는 실장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방방곡곡 여행하러 다니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고 싶은 대로 막 다 하시고! 필요하실 때 부르십시오!”
“언제든지 달려오겠습니다!”
아싸. 노예 셋 획득.
시커먼 속내를 숨기고 말갛게 미소 지었다. 옆에서 사랑스러운 호적메이트가 매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지만 사뿐히 무시했다.
“여러분들이 마지막인가요?”
“아. 아마 부길마 일행 쪽을 제외하면 저희가 마지막일 겁니다.”
“그쪽은 휴가를 줘도 안 쓸 인간들이라 갈 만한 사람들은 그냥 다 갔다고 보면 돼요.”
인생에서 일하는 게 쉬는 것인, 공과 사가 사라진 불쌍한 중생들이라는 덧붙임에 나와 내 피붙이가 두 귀를 의심했다.
진짜 그런 인간이 있다고?
“……설마요.”
“내일이면 직접 겪게 되실걸요. 어쨌든 호위 겸 도와드릴 사람은 필요할 테니 쓸 만할 겁니다.”
“맞아요. 없으면 위험해요. 알아서 따라다닐 테니 떼어 놓지 마세요.”
“그럼 저흰 진짜 가 봅니다!”
“파이팅입니다!”
무시무시한 말을 남기고 그들은 홀연히 여행길을 떠났다.
“…….”
너무나 무시무시한 충고에 넋이 나가 우리 남매는 시원스럽게 웃으며 떠나가는 그들을 붙잡지 못했다.
“……누나야.”
“응. 동생아.”
“저거 무슨 뜻일…….”
“씁. 궁금해하지 마. 말도 꺼내지 마.”
뭐든 씨가 될 수 있어. 그러니 생각도 하지 마.
겁먹은 동생의 입을 나름 침착하게 막았지만, 쫄보인 내 다리가 제 맘대로 후들거렸다.
아. 그딴 무시무시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지 말라고. 그게 더 무서워.
“그런데 뭐 어떻게 하려고? 일 크게 벌이려고 해도 정부에서 막을 거라 쉽지 않을 텐데.”
불길한 예감에 오스스 돋은 소름을 긁어내리는데 동생 놈이 질문을 던졌다.
그 말에 나는 불길한 예감을 말끔히 벗어 던지고 거리낌 없이 음산한 미소를 마음껏 내보였다.
“……누나, 설마.”
설마 하는 동생 놈에게 나는 기꺼이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안녕. 자기야.”
“……!!”
사근사근한 내 목소리와 호칭에 상대가 누구인지 곧바로 알아차린 동생 놈이 경악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유유자적하게 입을 열었다.
“자기야. 내가 너에게 특종 하나 거하게 선물해 주려고 하는데, 어때?”
「“……그걸 왜 지금 말해―!!!”」
“응. 역시 자기는 그럴 줄 알았어.”
역시 이런 일에는 파리들이 제격이지.
* * *
목적대로 지한을 탈탈 턴 지호가 유유히 방을 나가고도 지한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제가 뭐라 했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못 하는 얼굴이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지한을 보며 드디어 이제 저 녀석도 사람이 되겠구나, 하며 씁쓸하면서도 뿌듯한 마음으로 유라는 조심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하아아.”
완전히 혼자가 된 지한은 그제야 한숨과 함께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스르르 주저앉았다. 그런 지한을 보며 그의 성위가 한심함을 가득 담아 칭찬 아닌 칭찬을 던졌다.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용케 표정 관리는 잘했다며 제 화신의 대견함을 떨떠름하게 칭찬합니다.]
정말 고맙지 않은 칭찬에 지한이 손으로 세수를 했다.
인정하긴 싫지만 성위의 말대로였다. 정말 표정 관리를 한 게 용했다. 대충 아무 말이나 해도 심장에 무리가 가는데 어쩜 그리도 정곡을 후벼 파는 말만 하는지. 도무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
‘당신은 신이 아니고, 신도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요.’
“…….”
알고 있었다.
제 맘대로 이뤄지는 것이 하나도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모른 척하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끝까지 외면하고 그 말을 믿는 척 세상을 살고 싶었다.
그 마음을 꿰뚫어 본 듯 정확히 폐부를 찌르는 말에 심장이 아려 왔다.
꺼내는 말 족족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한 이유는 바로 그 탓이었다. 모른 척하고 있었을 뿐,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아는 진실이었기에.
주제넘는 참견이라고, 그래도 그게 나라고 반박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상대가 그녀인 것도 있지만 그 날카로운 말 사이에 선명히 보이는 애정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었다.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는 발언에도 화조차 나지 않았다. 마치 꿈을 꾸는 듯,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애정이 눈앞에 있었기에.
그 마음이 심장을 움켜쥐어서.
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볼품없는 한 글자뿐이었다.
‘……네.’
영혼이 탈탈 털리고 있는 와중에도 제 볼품없는 대답에 입술을 깨물었다. 금세 상관없게 되어 버렸지만.
‘좋아요. 착한 어른이.’
놀리는 말이 분명하건만, 대체 왜인지 구원이라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칭찬하는 거예요. 노력한 걸 테니까.’
지금까지의 삶을 송두리째 부정해 놓고, 그래도 잘했다며 칭찬해 주는 모순적인 말임에도. 모순조차 구원인 그녀의 위대함에 지한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예감했다.
이렇게 눈이 부시게 빛나는 그녀를, 아마 저는 한 번도 이겨 보지 못할 것이라고. 그야…….
‘참 잘했어요.’
“무엇이든, 이루어 주고 싶으니까.”
당신이 바란다면 설령 이 세상을 멸망시킨다 하더라도, 분명,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지고 싶은 세상은 여기가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한 번 선택하면 돌이킬 수 없다.]
‘내 전부를 가져간다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눈앞에만 있다면.
* * *
어떤 식상한 이유로든 언제라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굴 수 있는 원티드의 대형 속보는 채 하루도 되지 않아 대한민국을 뒤집어 놓았다.
『숨죽였던 원티드가 드디어 기지개를 켜다!』
『헌터계에서 유명했던 원티드에 대한 정부의 갑질?』
『‘무기한 파업’을 선언한 원티드. 원티드의 파업으로 인한 국가 손실은? 가히 천문학적일 것으로 예상돼…….』
『정부는 대체 무엇을 위해 원티드를 핍박하고 폭리를 취했나.』
『도를 넘는 정부의 행태가 촉발한 원티드의 파업으로 여론이 들끓어 올라.』
『원티드의 부재로 서울시 부동산 가격 폭락!』
『원티드 소속 헌터들의 이민 얘기도 속속들이…….』
『원티드 전체 이민 시 국가에 미칠 피해는…….』
『청와대 긴급 기자 회견 ‘아직 그 무엇도 확실시된 바 없어. 도를 넘는 유언비어는 자제 부탁.’』
정부가 황급히 여론 진압에 나섰지만, 당연히 속수무책이었다.
그동안 정부가 원티드를 착취해 오고 이용해 온 만큼 국민들은 원티드에게 너무나 많이 의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수십 년간 믿음 한 번 제대로 준 적 없는 정부가 진압에 나선다고 무슨 큰 도움이 되겠는가.
정부는 원티드를 대신할, 자신들의 훌륭한 방패를 소유하고 있지 못했다.
결과는 당연지사.
“흥. 그래도 받은 게 있는데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지.”
대한민국을 뒤집어 놓은 원흉이 사악한 얼굴로 매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걸 보며 팔불출 계약성이 박수를 쳤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역시 내 화신이 움직이면 이 정도쯤은 돼야 하지 않냐고 잘한다 잘한다 뿌듯한 박수를 칩니다.]
‘훗. 감사.’
비꼬는 것 같았지만 시원하게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지금 기분은 최상이었다. 살면서 대한민국을 이렇게 뜨겁게 달궈 놓는 일을 저지를 날이 얼마나 될까.
뭐 딱히 좋은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짜릿한 건 짜릿한 것이었다.
1위 원티드
2위 무기한 파업
3위 원티드 파업
4위 원티드 휴가
5위 원티드 착취
6위 유지한
7위 정부 비리
8위 헌터 협회 비리
9위 원티드 착취
10위 원티드 이민
“키야~”
제 이름 하나 없이 온갖 실검이 제가 한 짓으로 도배됐을 때의 짜릿함은 겪어 보지 않고서야 모른다.
이게 바로 흑막의 맛……!
“윤지호. 아저씨 같아. 고마 해.”
안 해도 너 변태인 거 다 알아.
“……아놔.”
흑막의 뽕에 취해 있는데 옆에서 그런 나를 보고 있던 호적메이트가 산통을 깼다.
역시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
“야. 이게 쉬운 일인 줄 알아? 이런 때 아니면 또 언제 느껴 보겠어?”
그러니 너도 이 두 번 다시 없을 기쁨을 누리라 첨언했지만, 괜히 호적메이트가 아닌 만큼 녀석은 핵심을 정확히 찔러 왔다.
“뭐래. 넌 이 짓 하는 게 일상의 낙이잖아.”
아놔. 이 쉑. 어떻게 알았지?
매우 찔렸지만, 이미 털 난 양심. 내다 버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야. 내가 무슨 능력자라고 실검을 이렇게 만드냐?”
“지금 만들었잖아.”
“이건 내가 아니라 닭대가리들의 위력이고.”
“닭대…….”
내 거침없는 어휘에 호적메이트가 얼이 빠진 것 같았지만 난 떳떳했다.
솔직히 이건 자승자박이었다. 만약 그들이 그동안 아무런 비리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내가 어떤 지랄발광을 떤다 해도 이렇게까지 일을 키울 수는 없었다.
조용히, 우리한테만 했다면 모를까.
유지한의 목줄이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고 착각해 온갖 곳에 똥을 그렇게 뿌리고 다녔으니 일은 더 쉬웠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고작 ‘허락’을 받는 것뿐이었다. 이제 좌시하지 않을 터이니 마음대로 이 진실을 퍼뜨려도 된다는, ‘유지한’의 권능 아래 떨어진 허락.
모든 이들이 그렇게 바라고 원해도 내려지지 않았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그동안 쌓였던 것이 폭발하듯 온갖 진실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왔다.
그걸 보며 나는 역시 세상에 비밀은 없구나. 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우쳤다. 모른 척 눈을 돌리거나 인내하고 살 뿐, 아무도 모르는 비밀 따위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러니까 진작 좀 잘하지 그랬냐.
“동생아. 저기를 좀 보렴.”
“어딜…… 아.”
그 증거로 보라.
“크하하하학―! 여기 보세요. 선배. ‘정부 빻았다 빻았다 했지만 이번에는 레알 빻았네.’, ‘그냥 지들이 가루나 되지 왜 우리를 가루로 만들고 ㅈㄹ이야.’래요!”
“야 이게 더 대박이야. ‘이 와중에 언론에 얼굴 열심히 올리네. 대선을 목표로~ 는 개뿔 그전에 다음 대선도 없게 생겼거든요…… 제발 니들 밥줄을 위해서라도 일 좀 하자. 제발!!’ 이래. 최고야―!!”
“여기, ‘그냥 저것들 싹 다 단두대 올리자 그냥. 마음 풀려서 돌아올 수도 있잖아.’도 있습니다.”
“‘헬조선이 헬조선했습니다.’가 짧고 굵은 거 같은데요. 이건 어때요?”
“역시 드립의 민족이야. 근데…… 니들은 휴가 안 가냐?”
신나게 환호성을 지르다 뒤늦게 이 자리에 없어도 되는 인물들의 존재를 파악한 유라가 나름 그들을 위해 물었지만,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정작 그들은 배신감 가득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런 재미난 걸 두고 어딜 가요!!”
“맞습니다! 이런 빅 뉴스를 직접 볼 일이 흔할 것 같습니까!!”
자기들만 이 좋은 걸 보겠다고?!
세상에 그런 법은 없다는 두 사람의 박력에 완벽히 패배한 유라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어, 어. 그래. 뭐 니들 맘이지.”
신경 써 줘도 지랄이야.
―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아무도 태클을 걸지 않았다. 다들 금세 다시 인터넷으로 빠져들기 바빴으니까.
그걸 보며 나는 무심히 생각했다.
머지않아 모니터 뚫리겠네.
심드렁한 나와 다르게, 내 호적메이트는 멍하니 그 광경을 보다 삐걱삐걱 목을 돌리며 같잖은 반박을 던졌다.
“모. 모두가 이러진 않을걸…….”
“어쩌라고.”
그래서 그 사람들이 밥 먹여 주니?
경멸을 서슴지 않으며 머저리 같은 발언을 질타하자 금세 기가 죽어 쭈그러든 윤지우를 대신해 주인공님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정말 이래도 될까요?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는데.”
자신의 부재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는 사실에 몸에 밴 호구 근성이 반응한 듯 주인공님의 불안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말이었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나는 진지하게 고민에 휩싸였다.
저 호구 근성은 어떻게 해야 없애버릴 수 있지?
외모 보정인지 물론 그것마저 예쁘긴 했지만, 애석하게도 예쁘다고 짜증이 안 나는 건 아니었다.
“그동안 얼마나 안일했는지에 대한 증거죠. 뭐. 그리고 걱정할 거 없어요. 지금 저렇게 당장이라도 세상 망할 것처럼 여론을 만든 건 우리뿐 아니라 정부가 유도한 것이기도 하니까.”
“……네?”
해서, 조금은 현실을 일깨워 줄 겸 조그맣게 힌트를 던져 주었지만, 우리의 훌륭한 호구는 떠먹여 주는 힌트도 제대로 받아먹지 못했다.
그뿐일까.
“무슨 소리야. 윤지호.”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정부가 유도하다니요?”
그 호구의 밑에서 살아온 습성 때문인지, 여기저기서 질문들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쉼 없이 튀어나오는 궁금증의 향연 속에서 나는 아연해졌다.
내가 이것들을 데리고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한 건지……. 현타와 통렬한 수치심이 눈앞을 가렸다.
아니. 어떻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
뒷목이 당겨 왔다. 이젠 설명해 주기도 지쳤다.
화병 나 돌아가시기 직전인 나를 대신해, 그나마 이곳에서 가장 눈치가 좋고, 꿈속에 살지 않는 자낳괴, 정요한 님께서 친절하게 모지리들을 위해 입을 여셨다.
“정부가 그렇게 멍청하진 않습니다. 윗대가리가 멍청하다 해서 그 밑까지 다 멍청할 수는 없는 조직이니까요.”
“……그래서?”
“후. 초장엔 실패했더라도 아주 손 놓고 당할 위인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근데 지금 하는 게 없잖아?”
여기까지 말해도 아직까지 정확히 알아듣지 못한 유라의 질문에 한숨과 함께 내가 답했다.
“아니에요. 기사를 잘 보세요. 묘하게 논조가 이상한 게 있지 않아요?”
“……네?”
“보시면, 지금 올라오는 기사의 한 반쯤은 슬슬 몰아가기식 논조가 있을 거예요. 아무리 여태껏 받은 처우가 부당하다 해도 당장 사람들의 목숨이 위급한데 원티드는 방관만 하겠다는 거냐는 식의.”
“그런 건, 아…… 아!”
“여론 조작이 시작된 거죠. 완전히 자기 판으로 돌릴 수는 없으니 화살을 조금씩 돌려보는 거예요. 유치 뽕짝하고 저급한 이런 수작에 누가 걸리나 싶겠지만, 이것만큼 잘 먹히고 실패 없는 방법이 없죠.”
실체가 없는 여론은 거대하며, 그렇기에 휩쓸리기 쉽고 때때로 논점을 흐린다. 그 속에서, 결국은 사람은 당장 자신의 안위가 중요한 법. 잘못한 것이 정부라 한들 당장 그들의 목숨과 직결된 쪽은 정부가 아니라 원티드다. 제 안위를 불안해하는 이들을 선동하는 게 어려울 리가.
선동한다는 걸 안다 한들, 결국 필요한 건 원티드기에 여론은 분명 정부 쪽에 힘을 실어 줄 것이다. 제가 얻어야 하는 것이 있으니까.
원티드에게서.
“당장은 우리 옹호 댓글이 많지만, 여론은 시간이 지날수록 뒤집어질 겁니다. 정부가 다른 길드에 손을 뻗지 않고 모든 걸 원티드 책임으로 돌리면 그 시간은 더 짧아지겠지요.”
아마 한 방에 뒤집힐 것이다. 마땅한 해결책이 없다면, 결국 가장 만만하고 쥐어짤 만한 쪽을 비난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까.
하물며 정부는 ‘부정적 여론’이라는 뒤에 숨어 조작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실체가 없는 것보다는 실체가 있는 이들을 비난하는 것이 더 쉽지 않은가.
“그럼, 이거 위험한 거 아닙니까?”
드디어 사태를 이해한 주인공님이 자못 심각한 어조로 물었다.
사태 파악을 한 건 칭찬해 줄 만한 일이지만, 애석하게도 논점이 틀렸다.
“세상에 리스크 없는 일이 어디 있나요.”
세상 모든 일에는 위험 부담이 따른다. 유지한, 당신이 하는 호구 짓도.
하물며 이건 지금껏 없던, 새로운 변화를 유도하는 일이었다.
“우리는 철저하게 한번 악역이 될 겁니다. 원티드가 선하다는 이미지를 강제로 만들어 우리를 압박해 왔으니, 일단 그거부터 깨부숴야죠.”
착한 게 밥 먹여 주는 것도 아니고 목숨까지 걸고 안고 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무슨 자선 기업 단체나 식품 기업도 아니고.
애초에 헌터를 히어로라 칭송하며 띄워 주긴 하지만 헌터가 정말 아무런 대가 없이 목숨을 걸리라 생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그렇게 머리에 꽃을 달다 못해 나사가 백 개는 나가떨어진 사람은 세상에 없다.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거지.
그런데 어차피 못 구해 주면 욕먹을 거, 굳이 착한 이미지까지 가져가서 어디다 쓰겠는가. 국 끓여 먹지도 못할 거다.
하지만 우리의 호구 주인공님의 생각은 자못 다른 듯했다.
“……하지만, 그동안 사람들이 위험해질 겁니다.”
아. 그건 그들이 감내해야 할 일이고.
열렬히 태클을 걸고 싶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잘생김에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꾹 눌러 담았다.
“아니요. 세상은 유지한 씨 생각처럼 그렇게 녹록지 않아요.”
당신이 크게 착각하는 게 있다.
세상은 당신에게 의지를 많이 했을 뿐, 순식간에 망해 버릴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당신과 비견되는 강한 이들도 많았고, 약하다 한들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지 못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힘드니까. 의지하면 편하니까. 굳이 애쓰지 않아도 되니까 당신을 이용한 것뿐이었다.
사실 이렇게 말해도 당신은 분명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간악하게 양심을 좀 버렸다.
“따지고 보면 지금 국내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유지한 씨가 아니잖아요? 유지한 씨가 이 나라에서 제일 강한 것도 아닌데, 다 짊어질 필요 없어요.”
“……그건.”
여러분은 지금 현 1위가 전 1위를 신랄하게 깔아뭉개는 장면을 보고 계십니다.
예? 양심 어디다 뒀냐고요? 잠깐 망할 똥별님 옆에 던져 뒀어요.
말하기가 무섭게 성위가 득달같이 억울함을 토로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왜 원래 없던 양심을 내 옆에 던져 둔 척하냐고 항의합니다.]
[간악한 거짓말로 순수한 시청자를 우롱하지 말라며, 청정한 방송을 요구합니다.]
닥쳐.
나지막이 웃으며 성위에게 따끔한 충고를 던지고 그래도 없는 양심을 끌어모아 다시 말을 수습했다.
“그리고 어차피 게이트 클리어 최다 횟수 길드는 우리가 아니라 ‘녹음’이잖아요. 녹음은 우리보다 길드원도 몇 배나 많고, 저희가 빠진다고 해도 전혀 문제 되지 않아요.”
오히려 녹음이 가져가도 되는 걸 저들 돈 꿀꺽하겠다고 부득부득 우리한테 던졌던 것뿐이었다. 우리가 빠지면 녹음은 아마 풍악을 울리리라.
A급 이상 게이트가 동시다발적으로 나오면 얘기는 달라지겠지만, 그 정도 위급 상황에는 법적인 문제 때문에라도 자동 출두할 것이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자. 그럼 문제 해결이죠? 그러니 얼른 유지한 씨도 휴가 가요. 솔직히 그동안 휴가 써 본 적 있긴 해요?”
한 번도 없다는 데 내 전 재산을 걸 수 있다.
내역서만 봐도 훤히 다 들여다보이지만 모르는 척 답을 종용하자, 우리의 주인공님이 머뭇거리며 답을 내놓았다.
“쉬, 쉬긴 했습니다.”
“얼마나요?”
“……이틀?”
“…….”
그게 휴가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건지, 저와 똑같은 얼굴로 주인공님을 바라본 윤지우가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그 이틀이 병원에서 응급치료받고 하루 자고 일어나서 이틀은 아니죠?”
“…….”
제발 아니라고 말해 달라는 대답에 주인공님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셨다.
속이 터져 돌아가실 것 같았다.
그런 내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 조강지처 서유라가 해탈한 얼굴로 내 어깨를 다독였다. 부처도 저렇게 해탈을 하진 않았을 것 같은 얼굴이 그동안의 고행을 고스란히 말해 주고 있었다.
존경심이 무럭무럭 솟아났다. 저걸 어떻게 그냥 참아 주고 산 거지?
지금 자신도 그러고 있긴 하지만, 서유라처럼 오래 할 자신 없는 저는 그냥 서유라를 존경하기로 했다.
그러다 급,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다가 잊고 있었던 기발한 아이디어가 다시 떠올랐다.
“그런 우리 길드장님을 위해 제가 아주 호화로운 휴양을 준비해 뒀지요.”
정확히는 이제 준비할 거지만.
이미 벼르고 있던 일이라 준비하는 데는 전화 한 통이면 충분했다.
“……?”
“뭐야. 뭔데?”
내 말을 전혀 이해 못 한 주인공님이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 와중에 내 미소에서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인생에 도움 안 되는 호적메이트가 초를 치려 했지만 싹 무시하고 화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인생에서 그런 휴양도 한 번쯤은 필요하죠. 그렇죠?”
“아, 그…… 예.”
“웃지 마. 무서워. 윤지호.”
아. 왜.
내가 설마 이 사람 안 좋은 걸 시키려고.
* * *
“…….”
그리고 마주하게 된 휴양지를 보며 모두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황당한 곳이라 그런 게 아니라 순전히 대단해서.
“……이게.”
“호화로운 휴양……?”
“와. 진짜 대단하다. 윤지호.”
어떻게 이렇게 사기를 잘 칠 수 있는 거지?
윤지호의 신급 사기 스킬에 제대로 말도 못 꺼내는 이들을 대신해서 윤지우가 혀를 찼다.
피붙이인 만큼 누나가 사기(라 부르고 왜곡이라 읽는다.)를 잘 친다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해가 갈수록 업그레이드되어 가는 느낌이다.
그나마 자신은 면역력이 있었지만, 내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누군가는…….
“…….”
제대로 말 한마디 못 꺼내고 넋 나간 얼굴로 팔에 링거를 달고 있는 불쌍한 길드장님의 모습을 더는 보지 못하겠어 지우는 무참히 시선을 떨궜다. 진짜 대단한 누나 하나 둬서 이게 무슨 고생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정작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이런 이들은 안중에도 없는 듯…….
“선생님. 돈은 아끼지 않으셔도 돼요. 아시죠?”
“알다마다요. 저 속 터지는 자식이 그동안 있으라고, 있으라고 해도 들어 처먹지를 않았는데 아주 속이 시원합니다. 이 기회에 그동안 못했던 거 싹 다 해 버리겠습니다.”
“네. 뭐든, 쓸데없는 것들이라도 싹 다 해 주시고요. 여기 밥은 잘 나오나요?”
당사자의 의견은 사뿐히 지르밟고 앞으로의 방향을 잡고 있는 것을 넘어 밥까지 신경 쓰고 있었다.
그 행태에 윤지우는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니. 뭘 그런 것까지 따지고 있어. 그보다 저기 넋 나간 당사자나 좀 신경 써 줬음 싶었다.
그런데 주치의 입에서 나온 답이 더 가관이었다.
“원하신다면 제휴 호텔 주방장께 따로 부탁해 준비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서비스도 있나요?”
“헌터 중엔 식성이 좋은 분들이 많고, 또 아무래도 영양이 중요하니까 그런 연계 서비스도 저희는 잘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머. 완벽하네요.”
“그렇죠. 그럼에도 저놈이 응급 치료만 끝나면 바로 일하러 가야 한다고 말도 안 듣고 달려가고…….”
“그동안 고생하신 거, 한 맺히신 거 싹 다 이번에 푸세요. 전폭적으로 지원해드릴게요.”
“앞으로도 오래오래 계셔 주십시오. 실장님.”
시원스러운 얼굴의 주치의와 더없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병실을 살피는 제 누이를 보며 지우는 조심스럽게 지한의 어깨를 토닥였다.
“……?”
넋 나간 와중에도 자신을 토닥이는 손길에 왜 그러냐는 듯한 순진무구한 눈빛을 보내는 지한을 보자, 지우는 진심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아. 왜 고르고 골라 이런 분한테 이러냐고. 진짜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그런 동생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는지, 더없이 해사한 미소로 지호가 말했다.
“여기 진짜 좋네요. 그렇죠?”
“…….”
아니요.
차마 하지 못한 말이 입안에서 맴돌았지만 아무도 내색하지 못했다. 그 광경에 윤지우는 홀로 침음을 삼켰다.
어머니. 대체 왜. 무슨 생각으로, 딸을 저렇게 키우셨나요. 엄마 미니어처인 거 알면서!!
윤지우가 소리 없이 아우성을 치는데, 그사이를 못 참고 우리의 불쌍하신 길드장님께서 사고를 치셨다.
“그,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 괜찮…….”
“…….”
“핫.”
안 하느니만 못한 소리였다.
그 누구도 믿지 않는 헛소리에 서유라가 눈으로 빔을 쏘아댔고, 민현은 믿을 구석이라고는 1도 없는 구라에 혀를 찼다.
측근 두 사람의 반응을 보니 그냥 들어도 신빙성 없는 소리가 더욱 신빙성 없게 느껴진 윤지우는 지금 이 타이밍에 저런 구라를 치는 길드장의 모습에 고개를 내저었다. 윤지호 밥이 되기 딱 좋은 소리를 저렇게 기가 막힌 타이밍에 내놓는 것도 재주라면 정말 재주였다.
아니나 다를까, 헛소리에 헛웃음을 치는 주치의를 뒤로하고 윤지호가 흑막처럼 짙게 미소를 지었다. 너무나 해사한 미소였지만 윤지우의 눈에는 지옥에서 온 사자의 미소 같았다.
다행히 본능까지 엿 바꿔 먹진 않았는지, 지한이 말을 끝마치지 않고 조용히 수그러들었다.
뭐. 이미 늦었지만.
“음. 그래요? 본인은 저렇다는데 어떤가요, 선생님.”
“네. 뭐 간략하게 추려드리자면.”
주치의가 주저 없이 차트를 펼쳤다.
“저번에 나간 갈비뼈가 붙기는 했는데 아직 완벽하게 붙지 못한 상태고, 그전 토벌로 인한 팔 부상도 마찬가지로 신경에 이상이 살짝 있는 상태입니다. 아, 회복이 느린 이유는 S급 헌터에다 랭킹 최상위권 주제에 관리는 죽도록 안 하고 나을 만하면 혹사를 시키다 보니 체력이 바닥이라 그럽니다. 그리고…….”
“네. 충분해요.”
이미 꽤 많이 나왔건만, 이제 시작이라는 듯 말하는 주치의의 태도를 보고 지호가 서둘러 주치의의 말을 끊었다. 더 듣고 있다가는 하루가 넘어갈 것 같았으니까.
그 의견에는 모두가 동감했다.
“자. 이렇다는데, 괜찮다고?”
“……아. 아니…….”
“내 눈 보고 말해야지. 그렇지?”
부드럽고 나긋하게, 웃는 얼굴로 상대의 목을 죄어 오는 제 누나는 흡사 악마 같았다.
사시나무 떨듯 떨며 눈을 제대로 맞추지도 못하는 대한민국 최강자를 보라. 국내 최강자가 저렇게 벌벌 떨다니, 자신이면 몰라도 그가 이런다는 건 제 누나가 인간이 아니고서야 설명이 안 됐다.
윤지우는 제 누나가 헌터도 아닌 일반인이라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렇게 국내 최강자에게 자연스럽게 하대를 하며 압박하는데도 아무도 위화감을 가지지 않다니. 지한이 아무리 호구라도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윤지우는 절대, 같은 일을 당하고 싶지 않아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뭐. 빨리 나으면 빨리 나올 수 있어요.”
“그건……!”
그래도 안 아픈 인간을 여기 처박아둘 할 생각은 없다는 말에 지한의 눈에 희망이 몽글몽글 차올랐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어리석음에 윤지우는 재빨리 탈출로를 스캔했다. 발은 본능적으로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윤지호가 정말 아무 일 없이, 그것도 치료가 필요한 사람을 그냥 내보내 줄 리 없었으니까.
괜한 불똥이 튀기 전에 튀어야 했다.
“마침 정하나가 한 번만 써달라고 했던 게 있었는데, 잘됐네요.”
“……?”
“그게 뭔가요? 포션?”
멋모르고 튀어나오는 순진무구한 물음들을 뒤로하고, 윤지우는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최대한 빠른 속도로 문으로 향했다.
그냥도 무서운데, 정하나의 이름까지 나왔으면 이건 찐이다. 목숨 걸고 피해야 했다.
쥐도 새도 모르게 내빼려는 지우를 반사적으로 민현이 붙잡았다. 대체 뭐냐고 눈으로 열심히 묻자, 지우는 들킬세라 답을 해 주는 대신 민현의 손을 잡고 사이좋게 뒤로 빠졌다. 그래도 순진한 원티드 사람들 중 가장 눈치가 빠른 덕이었다.
그리고, 상황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자. 마셔요.”
“네, 네?”
“얼른 낫고 싶다면서요. 이게 효과가 그렇게 좋대요.”
여기에 부작용도 없다니 금상첨화죠?
무슨 정력제 영업 문구처럼 말하며 지호가 병을 지한의 앞에 들이밀었다. 묘한 박력에 지한이 꼼짝을 못하면서도 눈으로 빠르게 병을 스캔했다.
병 모양이나, 안에 있는 푸른색 액체를 보았을 때는 영락없는 체력회복 포션이었다. 헌터 일을 하면서 안 볼 수가 없는 물품으로 지한도 꽤나 애용하고 있는 상품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애용했음에도 제가 그동안 봐 온 체력회복 포션은 저런 불길한 딥블루 색이 아니었다. 체력회복 포션은 어떤 제약 회사든 은은한 에메랄드의 푸른빛을 띠었지, 저렇게 짙은 색을 띠지 않았다.
혹시 그동안 먹어 왔던 건 희석시켰던 건가? 저게 원액이고?
효과가 그렇게 좋다고 말하는 거 보니 일반 포션보다 더 효과가 좋다는 거니까…….
지한의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나돌았다. 물론, 지호는 그런 지한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자. 어서요.”
부드러운 재촉에 지한은 결국 눈을 찔끔 감고 포션을 받아 들어 그대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체력회복 포션은 효과가 즉시인 만큼 지독한 맛을 자랑했지만 지한은 자주 애용해서 그런지 그럭저럭 먹을 수 있었다. 지호가 제게 나쁜 걸 먹이지는 않을 거란 믿음도 있었고. 지한 나름대로 여러 계산을 하고 포션을 먹은 것이다.
당연히 그 계산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완벽히 맞지도 않았다. 불행히도 말이다.
털썩―
“……?”
“어. 어. 유지한―?”
지한이 픽 쓰러지자 당황한 유라가 지한을 불렀다. 반면 지한이 쓰러졌음에도 이상하게 지호와 주치의는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지우는 뭔진 몰라도 제 직감이 맞았음에 눈을 감으며 신께 감사 인사를 전했다.
감사합니다. 신님. 제가 안 당하게 해 주셔서.
길드장님께는 매우 죄송한 일이지만, 대신 희생양이 되어 주어서 진심으로 안도했다. 아니면 빼박 캔트 내가 당했을 테니까.
보나마나 몸에 좋다는 둥 반협박으로 먹였겠지. 그 정하나가 부탁했다 하니 길드장님이 아니어도 누군가는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윤지우의 곁에서 민현이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 역시 저기에 휘말리는 건 사양이었다.
때마침 유라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듯한 지한이 유언(?)을 남기듯 흐려진 목소리를 하곤 입을 열었다.
“마, 맛이…….”
“……맛?”
맛? 맛이 왜?
순간 뇌에 과부하가 왔던 유라는 뒤늦게 생각해 냈다. 체력회복 포션이 죽도록 맛없다는 걸. 너무 맛없어서 유라 본인은 포션을 먹지 않기 위해 컨디션 조절에 목숨을 걸 정도였다. 덕분에 한동안 안 먹어서 그 맛을 잊고 있었다.
“……너무 맛없어서 죽어 가는 거라고. 지금?”
지한과 함께 던전을 다니면서 체력회복 포션 먹는 걸 본 게 몇 번인데. 그때마다 남들은 질색하는 와중에 혼자 태연했었다. 이 포션은 유달리 색이 범상치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황당하기 그지없어 유라가 짜게 식은 얼굴로 지한을 내려다보았다.
그 얼굴을 보며 지한은 진심으로 억울해졌다.
네가 질색하는 맛의 상상 그 이상인데…….
이 진실을 어떻게 밝힐 방법도 없고, 직접 체감하지 않는 한 알 수도 없는 거라 너무나 억울했다. 지한이 억울해하거나 말거나 묵묵히 지한을 보고 있던 지호가 짧게 평했다.
“정하나한테 전달해 줘야겠네요. 지독히 맛없는 거 확실하다고. 우리 길드장님이 못 먹는 거면 일단 다른 인간들은 싹 다 못 먹을 테니까.”
뭐, 죽기 싫으면 먹긴 하겠지.
“…….”
방금까지 생글생글 웃으면서 포션을 들이밀 땐 언제고 금세 시니컬한 표정으로 매정한 평가를 내리자 모두가 얼빠진 얼굴로 지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존경심까지 무럭무럭 싹트는 듯한 눈이었다.
그 사이로 심하게 충격을 먹은 지한의 눈동자만이 거침없이 흔들렸다.
‘아. 알면서도 먹인 거라고?’
치명적인 미각 폭격에 몸을 뒤틀며, 지한은 근래 느껴 본 적 없던 서러움이란 것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눈물까지 그렁그렁 단 것 같은 눈망울에 조금 마음이 약해진 것인지 지호가 지한의 머리를 토닥이며 나름 변명을 했다.
“빨리 낫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럼 이게 최선이에요. 상태가 정말 안 좋긴 하네요. 일반 체력회복 포션의 10배에 달하는 효력을 지녔다는데 바로 완치가 안 되다니. 한 개로는 많이 부족한 모양이네요.”
아니. S급 헌터 회복력이면 이거 한 개면 부러진 갈비뼈도 단 한 방에 붙을 텐데, 도대체 뭘 얼마나 참은 거지?
지호의 얼굴에 순수한 의문이 피어올랐다.
그 얼굴을 보며 할 말이 없어진 지한은 푹― 고개를 숙였다.
“…….”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의 피로와 상처는 하루 이틀 쌓인 것이 아니었으니까. 안 그런 척했지만 당사자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일이었기에 딱히 놀랍지는 않았다.
대신 그가 놀라웠던 건.
“선생님. 얼른 나가고 싶다고 하면 한 병씩 주세요. 포션은 선생님께 전달해 드릴게요.”
“……!”
그럼 최소한 얼른 나가고 싶다는 말 따윈 못 할걸.
굳이 말하지도 않아도 머릿속에서 음성 지원되는 말에 지한이 눈을 크게 떴다.
이런 신박한 방법은 생각지도 못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중 유일하게 반색하는 사람, 주치의는 지호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희열에 가득 찬 눈으로 고개를 숙였다.
“아우.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 귀하고 아름다운 것을 가능한 빠르게 전달해 달라는 열렬한 눈빛에 지호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가 성사된 순간이었다.
정작 포션도 먹고 치료도 받는 환자는 쏙 빼놓고 이루어진 거래에, 아예 혼이 나간 것 같은 당사자까지. 윤지우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역시 윤지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본인은 자기를 찐따라 주장하지만, 윤지호가 찐따면 세상 모든 인간들은 다 히키코모리 아싸라 자신할 수 있었다.
“한동안 좀 바쁠 예정이라 매일매일은 못 오겠지만 그래도 자주자주 올게요. 그동안 몸조리 잘하고, 무조건 푹― 쉬는 거예요. 알았죠?”
“……네.”
“옳지. 착하다.”
그 ‘네’가 정말 수긍의 의미인 ‘네’가 아닐 텐데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만족스럽게 미소를 짓는 제 누나를 보며 윤지우는 다시 한번 다짐을 되새겼다.
절대, 저 악마한테 개기지 않겠노라고.
나름, 평화로운 어느 날의 일이었다.
* * *
좋아. 제일 골치 아픈 하나는 치웠고.
가뿐한 걸음으로 병실을 나서며, 골칫덩이를 처리한 기쁨을 순수히 만끽했다.
분명 좋은 사람이고, 제게 나쁠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지만, 계획한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선 귀찮은 존재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으니까.
이제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차곡차곡 머릿속에서 정리하고 있는데 또 내 머릿속을 읽은 망할 놈의 성위가 태클을 걸어 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정말 그놈을 동정하고 싶진 않지만 절로 동정심이 간다며, 그래도 골치 아픈 놈이라고 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냐며 헛기침을 합니다.]
“아니. 그건 어쩔 수 없는 팩트야.”
전 재산을 걸고 자신할 수 있었다.
이런 더러운 흙탕물을 그에게 묻히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긴 했지만, 아무리 내 부탁에 잠시 숙여 주고 있다 한들 이런 일에서 타협 따윈 해 본 적 없는 그는 빌런 그 자체다.
1초가 아까운 틈에서 하나하나 그를 설득시키는 걸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 자체가 대손해였다. 그 1초에 놓치는 것들이 다 얼마인데.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애초에 몰라도 되는 이야기이니 그냥 그 사람은 모르는 채로 그렇게 있어 줬음 싶다. 그냥, 그 사람은 그랬음 했다.
[‘이매망량’ 님이 거참 눈물겨운 사랑이라고 ‘심심한 신파 로맨스 반대’ 팻말을 내걸며 심드렁하게 감상평을 내놓습니다.]
‘남의 인생 멋대로 평가질 꺼지셈. 그리고 무슨 로맨스임. 키스도 안 했음.’
단호하게 로맨스의 시작선을 부정하자 성위님께서 눈이 댕그랗게 튀어나오셨다.
[?! 키스부터 해야 로맨스 시작이냐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수준 높은 하이 로맨스 설정설에 황당해합니다.]
‘첫눈에 반해서 다 퍼주고, 그런 시대 예전에 버스 떠남. 적어도 키스 한 번 박고 확신 줘야 사랑도 주기 시작하는 게 요즘 세대임.’
대체 댁은 몇 세대에 사는 거냐고 혀까지 쯧 차 주었다.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기분 탓으로 무시했다. 곧이어 별님의 항복이 들려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시무룩한 얼굴로 그럼 이제 뭐 할 거냐고 묻습니다.]
“인력 충원해야지. 우리 길드는 현재 브레인이 없으니까.”
내가 일일이 혼자 다 뛰어다닐 수는 없으니, 나와 함께해 줄 동료가 절실했다.
‘또 쓸데없이 생각만 많지.’
“……!!”
순간, 동료라는 말에 본능적으로 떠오른 어떤 인간의 모습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짜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런 미친.”
하다 하다 그 인간을 떠올리다니.
진짜 해야 할 게 산더미라 막막하긴 했나 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 인간이라니. 씹소름이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대체 그 인간이 누구길래 그렇게 소름 끼쳐 하냐고 묻습니다.]
누구냐고?
성위의 물음에, 나는 적당한 답을 찾기 위해 곰곰이 말을 골랐다. 맨날 더럽게 욕만 해서 그런지 막상 선뜻 정의를 내리기 어려웠다.
“……내 전 사수?”
약간의 고민 끝에 그나마 무난하고 납득하기 쉬운 답을 고르자, 인생의 모든 요소를 재미로 해석하시는 우리의 아름다운(?) 별님께서 득달같이 항의를 해 왔다.
[아니 그딴 시시한 대답 들으려고 기껏 물어본 줄 아냐고. 미적지근한 대답에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분노를 표출합니다.]
……어째 한 번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냐. 그 태클력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저렇게 살면 보통 피곤한 게 아닐 텐데 말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화신인 나에 관해서는 촉이 귀신같이 좋은 이 별님은, 본인의 감으로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은 문제는 정말 지구 끝까지 물고 늘어졌기에 별수 없이 입을 털었다.
“내 사수 맞아. 덕분에 미친 듯이 구르고, 맨날 개까이고……. 빠르게 일을 배우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도 스팀 오르네. 장담하는데 한 시간에 수명이 1년씩 줄었을 거야.”
아직도 떠올리기만 해도 이가 갈렸다.
신입한테 제대로 된 교육도 없이 일부터 던져 주면서 못하면 힐난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그 쓰레기를 보는 눈초리란.
오기가 생겨서 정말 죽도록 한 덕에 동기들의 세 배 이상의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지금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그럼 왜 진작 퇴사하지 않았냐고, 네 성격에 초반에 그랬으면 진작 때려치우고 남지 않았냐고 예리한 의문을 던집니다.]
시스템이 덧붙인 사족처럼 정말 쓸데없이 예리했다.
짜증에 쯧. 하고 혀를 차며 나는 친구들에게도 한 번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던 말을 처음으로 꺼내었다.
“그 새끼가 말이야. 그렇게 사람 굴릴 대로 다 굴려 놓고, 늘 후회하는 얼굴을 해. 정확히는 후회보다 눈치를 본달까? 그렇다고 잘해 주지도 않으면서, 항상 눈으로만 안절부절못해. 그러면서 내가 몰라서 놓치는 걸 딱딱 짚어 줘.”
전형적인 츤데레상이었다. 당시의 나는 그렇게 느꼈다. 나중에는 그게 저였기에 그랬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것까지 성위에게 말할 필요성은 못 느꼈다.
‘…….’
‘아무 말도 안 하니 제가 할게요. 잘 가요.’
‘……그래.’
결국 제 마음 하나 밝히지 못하고,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날 떠난 남자 따위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고 싶지도 않았고.
어쩌면 내 나름의 쪼잔한 복수인지도 몰랐다.
“자. 그럼 이 얘기 끝! 나 바빠. 여기서 이러고 있을 틈 없어.”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2% 부족하지만 너그러이 넘어가 주겠다고 인자하게 말하며, 그래서 뭘 할 거냐고 묻습니다.]
“일단 내가 봐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부터……!”
우웅― 우웅―
말하기 무섭게, 재킷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절로 휘파람이 나왔다.
와. 진짜 타이밍 무엇. 하여간 여전히 재수가 없는 놈이다.
“작전 변경이야. 별님. 오늘 재밌는 구경 좀 하겠어.”
[‘이매망량’ 님께서 그럼 오늘 윤지호 주연 스펙터클 스릴러 영화 한 편 보는 거냐며 기대감에 가득 찬 눈으로 팝콘을 주문하며 제 화신을 바라봅니다.]
“뭐. 얼추 비슷하긴 한데, 그렇게 기대 안 하는 게 좋을걸?”
[뭐든 짜릿할 거라며, 간만에 벌어지는 빅 이벤트에 들뜬 ‘이매망량’ 님이 뿌X클을 사 줄 것을 청합니다.]
당당하게 삥을 뜯는 태도에 빡칠 법도 했지만, 사실 성위 못지않게 나도 한 성격 하고, 한번 시작한 싸움에는 절대 뒤로 빼지 않는 여자라 조금 들뜬 상태여서 흔쾌히 질렀다.
“콜. 잘 풀리면 사 줄게.”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앗싸!!!를 외치며 팝콘과 맥주를 들고 자리를 잡습니다. ‘이매망량’ 님의 환호성에 근처의 다른 성위님들이 ‘이매망량’ 님에게 관심을 둡니다.]
[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매망량’ 님이 3D 안경까지 제대로 쓰고 얼른 가자고 당신의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거기 3D 안경도 있어?”
아무리 별게 다 있을 수는 있다지만 그런 쓸데없고 현대적인 아이템까지 있다고?
순수한 의문을 표하자 성위가 콧대를 잔뜩 높였다.
[큰맘 먹고 오늘 같은 날을 위해 질렀다며 ‘이매망량님’이 콧대를 높입니다. 콧대가 하늘을 찌를 지경입니다.]
……어, 어. 그래.
왠지 시작 전부터 현타가 오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서둘러 마음을 다잡았다.
상대가 상대인 만큼 이런 마음으로 방심해선 안 됐다.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길게 심호흡을 하자, 다시 기운이 나기 시작했다. 미소까지 완전 무장을 하고 자신 있게 워킹했다. 완벽한 전투 자세에 같이 들뜬 성위가 물어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영화 키워드가 뭐냐 묻습니다.]
“작전 명은 언제나 심플하지.”
[그럼 심플하게 ‘사이다’ 같은 거냐고 ‘이매망량’ 님께서 의문을 표합니다.]
에이. 고작 그런 시시한 걸 리가.
작명 센스가 그 정도밖에 안 되냐고 타박하려는데 미친 듯이 핸드폰 진동이 울려댔다.
우웅. 우웅. 우웅. 우웅.
“……?”
아주 쉴 새 없이 울려댔다. 전화를 안 받으니 카톡으로 작전을 바꾼 듯했다. 미친듯한 속도로 날아오는 메시지들이 언뜻 봐도 무더기였다.
진짜 이렇게 막 나갈 거냐는 둥, 미친년 미친년 했지만 진짜 미친 거냐는 둥 아주 가관이었다.
“……하.”
이 양반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 고작 이 정도 가지고 이 난리라니. 아직 제대로 된 미친년을 보지 못했나 보다.
즐거움을 가득 담으며 나는 성위에게 오늘의 작전명을 말해 주었다.
“이 구역의 진정한 미친년은 나라는 걸 확실히 보여 줘야지.”
[…….]
“우후후.”
생각만 해도 아주 짜릿한 작전명이었다.
* * *
“……대체 왜 오시는 겁니까?”
“자네 혼자 공을 독차지할 셈인가? 그리고 처신을 똑바로 하게. 난 자네의 상사야.”
……내 피 빨아 먹는 기생충이 아니고?
차지혁은 본능적으로 튀어 나가려던 본심을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그럴 리가요. 다만 혹여 위험하실까 그런 겁니다.”
간신히 변명을 토해 내며 차지혁은 몰래 식은땀을 닦아 내었다.
아. 위험했다.
아무리 왈왈 짖는 소리를 한다고 해도 현재 저 인간은 본인의 말대로 자신의 상사였고, 괜히 찍히면 매우 귀찮아질 게 분명했다. 빌어먹을 센터를 좌지우지하는 협회장 라인이었으니까.
“자네가 있는데 무슨. 그리고 아무리 원티드라 해도 내게 그리 안하무인으로 나올 수는 없네.”
“…….”
이건 무슨 소리일까. 사태 파악이 아직도 안 되나?
개가 들어도 개소리라고 할 말이었다. 혹여나 윤지호 앞에서 이런 소리를 지껄이기라도 한다면―
말도 안 되는 저 헛소리가 상황을 얼마나 개판으로 만들지, 더불어 윤지호를 빡치게 해 될 일도 어떻게 망칠지가 너무나 훤히 보여 지혁은 두 눈을 찔끔 감았다.
이때쯤 되면 차지혁은 매우 후회가 되었다.
28살에, A급 전투계 헌터. 국내 랭킹 39위. 어딜 보아도 아쉽지 않은 스펙이다. 그런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센터에 들어온 것인지.
“얼른 가세. 별것도 아닌 걸로 너무 나라가 시끄러워졌어.”
“……적어도 당장은 원티드의 심기를 거스르셔서는 안 됩니다. 만약 원티드가 정말로 등을 돌리면 센터 역시 온전치 못할 겁니다.”
“하하. 자네는 걱정이 너무 많군. 원티드가 아무리 강하다 하지만 결국 우리 손아귀에 있는 사냥개 아닌가.”
“…….”
정말 철모를 반항이었다. 후회를 해도 끝이 없었다.
유지한처럼 대기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재벌 중에는 나름 알아주는 진수기업의 차남. 인생을 휘황찬란하게 살 정도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조건이었다.
가부장적인 데다 유교 사상에 찌든 집안이라 힘들긴 했어도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첫사랑에 빠졌을 때부터 모든 게 꼬였다.
‘안녕하세요.’
그 화사한 미소에 빠져든 순간부터 제 모든 인생이 바뀔 줄 누가 알았겠는가.
지혁이 소리 없이 실소를 흘렸다. 우습기 그지없었다.
원래 예정된 꽃길 인생과 비교도 되지 않는, 이런 시궁창을 걷고 있으면서 요만큼도 후회하지 않는 자신이.
하지만 차지혁은 자신할 수 있었다. 아마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는 기꺼이, 사랑에 빠질 것이다.
‘……아. 안녕.’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 * *
“절대로 거기서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정확히는 그 녀석 앞이지만.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사실 너무나 착한 원티드는 저런 말을 들어도 화를 낼지언정 직접적인 보복을 할 생각은 1할도 하지 않겠지만, 그 녀석은 달랐다.
당한 건 적어도 당한 만큼 갚아 주는 것이 인생의 진리라 여기는 그 녀석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간접 경험이 다수 있는 지혁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정말, 왜 자신이 이런 거지 같은 역할을 맡게 됐는지 모르겠다. 윤지호랑 아는 사이인 걸 들키진 않았을 텐데.
윤지호가 터뜨린 잭팟을 보고 미친 듯이 전화질과 카톡질을 하기는 했지만, 정말 일 하나는 더럽게 못하는 윗대가리들이 그런 고급 정보를 이렇게 빨리 알아낼 수 있을 턱이 없으니까.
“설마. 거기서 그럴 리가 있나. 걱정 말고 가세.”
“……네.”
이미 그른 것 같지만, 지혁은 오늘이 무사히 지나가길 간절히 빌었다.
“뭐죠?”
……원티드 앞에 당도하기 전까지는.
“어째서 앞길을 막는 건가.”
이 와중에 눈치는 밥 말아 먹은 하오체 성애자가 저승길을 재촉했다.
지혁은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아까 한 말은 콧구멍으로 들었는지, 권력밖에 모르는 등신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 권력 추종자님께 원티드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이 직업 정신을 한껏 발휘해 주었다.
“선약을 잡으신 겁니까? 저희 쪽에는 전달받은 것이 없는 상태입니다. 만약 약속을 잡지 않으셨다면 안으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출입하고 싶으시다면 먼저 선약을 해 주십시오. 그럼 이만.”
“이런 경우를 봤나! 어딜 가는 겐가! 내가 누군 줄 아는가!!”
관심도 없을걸.
안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지혁은 조심스럽게 뒷목을 그러쥐었다. 머릿속에서는 온갖 탄식이 쏟아지고 있었다.
역시 윤지호. 일 처리 하나는 끝내주는구나.
경호원 배치부터 멘트까지, 어떻게 하면 사람 속을 뒤집을 수 있는지 꿰뚫어 보는 게 아주 완벽했다. 박수가 절로 나왔다.
“센터 현장 1팀 부장이자 A급 헌터, 차지혁입니다. 원티드 관리실장, 윤지호 씨께 용무가 있어 왔습니다.”
“……선약이 되어 있으신 겁니까?”
그럴 리가.
만약 그랬으면 그렇게 죽어라 미저리 전 남친처럼 전화를 해대진 않았을 것이다. 카톡 폭탄 역시도.
하지만 차지혁은 자신할 수 있었다. 그 귀신 같은 윤지호는 분명 제가 찾아오리란 것을 예상하고 있었을 거라는 걸. 아마 그게 오늘인 것까지도.
“제가 왔다고 전해 주시기만 해 주셔도 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마 알고 있을 겁니다.”
“……일단 전달은 해드리겠습니다.”
자신감 있으면서도 정중한 지혁의 태도에 누그러진 경호원이 아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30분간의 대기 후, 기다리던 답이 떨어졌다.
“이쪽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7층으로 가시면 됩니다.”
담백하게 감사하는 말을 전하면서 지혁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제 1관문은 통과한 것이었으니까.
물론 대기가 30분이었지만 그쯤은 그의 입장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정도는 진짜 관문 앞에서는 새 발의 피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옆에 얼굴 터질 것 같이 씩씩거리는 오뚝이는 전혀 모르는 거 같았지만.
저걸 데리고 말도 안 되는 협상을 해야 한다니 다시 생각해도 정말 한숨밖에 안 나왔다.
들여보내는 줬어도 절대 쉽게 만나 줄 리가 없다는 생각에 각오를 굳혔건만, 의외로 만나기까지 더 이상의 장애물은 없었다.
“흥. 그래도 보안은 까탈스럽더니, 더는 귀찮게 하지 않는군.”
멋모르는 등신 같은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지혁은 안 그래도 풀가동 중인 머리를 팽팽 돌려댔다.
머릿속에 온갖 의문이 떠다님과 동시에 본능이 경고를 미친 듯이 보내 오고 있었다.
뭐지? 왜 이리 쉽지? 그럴 리가 없는데? 윤지호가? 드디어 미친 건가? 아니면 나이 먹고 좀 유해진 거…… 아냐. 그럴 리는 없고.
그럼 트집 잡힐 거리는 조금도 주지 않겠다는 건가?
나름 신빙성 있는 가설이었지만, 그렇다기엔 제가 아는 윤지호는 이런 뺑뺑이 정도는 충분히 애피타이저로 찜 쪄 먹을 수 있는 여자였다.
그래도 이번 일은 스케일이 크니까 조심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생각할수록 의문은 깊어졌고, 당연하게도 답은 안 나오고 머리만 깨질 것 같았다.
띵―
그렇게 고민만 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고 있는 지호를 본 지혁은 불현듯 깨닫고 말았다.
“어서 오세요.”
……아, X됐다.
* * *
아. 여전히 쓸데없이 감이 좋단 말야.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이 흙빛이 되더니 이내 모든 걸 포기한 것 같은 차지혁의 눈에 속으로 짧게 혀를 찼다. 재미없는 남자 같으니라고.
사감은 뒤로하고, 천천히 그들을 훑어봤다.
벌써 인생 말아먹은 것 같은 얼굴을 하는(사실 진작 말아드셨지만) 차지혁은 차치하고 차지혁과 같이 온 인물을 유심히 살폈다.
비쩍 마르고 비열하게 생긴 얼굴. 차지혁의 상사로 온 모양이지만 자세나 태도나 무엇 하나 나아 보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시각 폭력인 상판이었다.
얼빠긴 해도 사람 얼굴 평가는 안 하는 내가 단박에 왜 이리 평가하냐면…….
“원티드의 사람 대접이 형편없군요.”
“…….”
굳이 말을 섞지 않아도 어떤 인간인지 알겠으니까.
파악할 가치도 느낄 필요 없는 유형이었다. 딱 봐도 라인 하나 잘 타서 권력의 힘으로 지금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뿐, 자기 손으로 이룬 건 하나도 없는 놈이었다.
하여, 나름 기선 제압을 하려 한 건지, 거드름을 피우려고 한 건지. 어쨌든 안 하느니만 못한 같잖은 소리에 대해 답하는 대신 눈으로 차지혁에게 물었다.
뭐, 이딴 걸 데리고 왔냐고.
협상에서 제일 짜증 나는 게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눈치도 없는 족속들이 끼는 거다.
되지도 않는 잡소리에 제대로 협상이 이어지지도 않을 것이 뻔했기에, 어차피 을도 아니겠다 그냥 이대로 엎어 버릴까 순간 고민했다.
물론, 센터와 협상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지만.
그걸 눈치챈 건지, 차지혁이 눈으로 애원을 해 왔다.
‘……진짜 일 열심히 한다.’
거의 광신도급으로 절박하게 애원하는 그 눈이 불쌍해 한 번은 봐주기로 했다. 저 인간이 죄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는 따까리가 뭔 죄가 있나.
그런 암묵적 대화를 눈치챌 눈치도 밥 말아 먹은 것 같은 인간이, 허락도 안 했는데 제가 이 자리의 주도권을 쥔 것처럼 중앙에 철퍼덕 앉아 민폐 오브 민폐라는 쩍벌을 시도했다.
‘윽. 내 눈.’
끔찍한 시각 폭력에 본능적으로 눈을 감았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저런 시각 폭력은 용서하는 게 아니라고, 저런 해악인 놈은 깔끔하게 이 세상에서 치워 버리는 게 낫지 않겠냐고 실눈을 뜨며 의견을 제의합니다.]
똑같이 원치 않게 시각 폭력을 당한 별님이 분노하며 그냥 저거 죽이자며 살랑살랑 나를 부추겼다.
매우 유혹적인 제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무리였다.
‘노노. 저기 이 시대 선비 차지혁 있어서 안 됨.’
만약 저 혼자였으면 진작 슥삭― 했을 것이다. 무엇을 슥삭하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내 화신 애긔. 언제부터 그렇게 상냥해졌냐고. 그럴 거면 울 애긔한테 다 퍼 주는 나한테 좀 상냥해질 생각 없냐고 젠틀하게 묻습니다.]
…….
삐빅― 시스템이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
‘대체 뭘 보고 온 건지 모르겠지만 ‘울 애긔’ 거리면서 자기한테 잘해 주는 남자는 젠틀과는 백만 광년 거리가 멂.’
그 속삭임을 시스템도 들은 건지, 시스템의 답변이 들려왔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합니다. 죄송합니다, 화신님. 앞으로는 필터링에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겠습니다.]
헐.
진심이 절절 느껴지는 사과 문구에 얼이 빠졌다.
저거 진짜 사람 아니야?
의심이 슬쩍 피어올랐지만, 그다지 큰 관심사가 아니어서 대충 넘겼는데, 울 성위님은 아니었나보다.
[헐. 뭐야. 이렇게 하면 된다며! 라며 훈수를 두던 다른 성위의 멱살을 잡아댑니다.]
[과도한 폭력은 교육 환경에 좋지 않으니 자제 바랍니다.]
대체 누구 멱살을 잡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딴 같잖은 멘트나 알려 주는 놈에게는 그다지 궁금증이 일지 않아 스킵하기로 했다.
스륵―
“……?”
무심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두 사람의 뭐냐는 시선이 쏟아졌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를 나서자, 그제야 사태 파악이 된 차지혁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하지만 이미 떠나간 버스였다. 그러게, 협상 테이블에 누가 이런 걸 데려오라 그랬니.
“어딜 가는 거지?!”
사태 파악이 된…… 아니, 전혀 안 된 거 같지만 그래도 지금 자기가 자신만만하게 이끌어야 할 자리가 파투 난 것은 알았는지 황급히 나를 붙잡았다.
그러면서도 아직도 제가 내 위라고 생각하는 꼬락서니가 정말 같잖았다.
“이야기를 하러 오신 것 같지 않아서요. 안 그래도 바쁜 처지다 보니, 한시가 아까워서 말이지요. 먼저 실례하죠.”
“저…… 저!!”
비쩍 곯은 간신배 같은 X끼가 어디다 대고 삿대질이야.
순간 저 개념 없는 손가락을 확 부러뜨릴까 고민했다. 대체 저걸 가르친 게 누구일까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아무리 라인을 잘 탔다 해도, 저렇게 눈치 밥 말아 먹은 멍청이를 이만한 협상 테이블에 앉힌 거지? 누군지 몰라도 희대의 멍청이가 분명했다.
아니면 나를 떠보려는 수작이거나.
어쨌든 센터를 대표할 만한 힘을 가진 이라면 아마 후자일 것이다.
가자미눈을 치켜떴다.
그렇다면 상대를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 나는 두 번의 기회를 주는 사람이 아니거든.
이대로 이 자리를 파한다 해도 하등 아쉬울 게 없는 나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윤지호 씨!! 이렇게 가시면 어떡합니까.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너무나 잘 아는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나를 붙잡았다.
“전 의미 없는 대화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아서요. 어차피 입만 아플 대화. 시간이 아깝네요.”
하지만 나는 인생이 단호박인 여자다. 결코 차지혁의 눈빛 공격 따위에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
“자. 잠깐만!!!”
쿨하게 지나치려는데 미저리가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바람에 모양 빠지게 자빠질 뻔했다.
“아. 넘어질 뻔했잖아―!”
모양 빠질 바에는 그냥 수치사 하겠다는 신조를 가진 내가 나름 하던 연기도 집어치우고 버럭 짜증을 내자, 기다렸단 듯 망할 놈이 뻔뻔하게 소리쳤다.
“네가 이런 걸로 넘어질 리 없잖아!!”
……아놔. 이런 이쁜 놈을 보았나.
“패대기쳐지고 싶다고? 그거라면 간만에 실력 발휘 좀 해 줄게.”
할아버지 때문에 강제 검도 다닐 때 배웠던 호신술을 지금 발휘해 보겠다고 비장하게 몸을 풀자, 이미 유사 경험이 있는 놈이 사색이 된 얼굴로 열변을 토했다.
“나더러 죽으라는 거냐?! 나 아직 고백도 못 했어―!!!”
“……뭐야. 인생 왜 살아?”
아직도 안 하고 뭐 했어?
상상치도 못한 대답에, 화내던 것도 잊고 진심으로 얼이 빠졌다.
아니 너희 둘이 서로 죽고 못 사는 거 알아 온 게 장장 몇 년인데.
물론 이어지지 않았다는 건 알고, 미친 듯 겉도는 년인 것도 알지만 그래도 감정이 그대로인 걸 뻔히 아는데… 아직도 안 했다고?
“……미친 거 아냐?!!”
육성으로 소리치자, 지도 못난 건 아는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녀석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일단 앉아. 이거 중요한 거야. 우리나라 망하자는 거야?”
“뭐래. 안 망해. 니들이 어리광 부리는 거지.”
갑작스럽게 바뀐 상황에 적응도 못 하고 파악도 못 해 눈만 굴리고 있는 머저리는 치우고, 연기도 끝났겠다 속 시원하게 자리에 앉아 속내를 들춰내었다.
“그간 원티드가 헌터계에서 높은 위상을 차지했던 건 기본적으로 그들의 실력도 있지만 전체에서 거의 6할에 가까운 일거리를 소수 인원만으로 처리했기 때문이지.”
“…….”
“그 6할의 절반 이상은 굳이 원티드 정도 되는 길드가 맡을 필요도 없는 수준 낮은 것들이 태반이었고 말이야. 원티드가 손을 뗀다 한들, A급 게이트가 터지면 알아서 자동으로 차출될 거고, 그 아래 게이트들은 드디어 제 사람 손에 들어가게 되겠지. 일거리 없어서 빌빌거리고 있는 D급 헌터들이 한둘도 아니고. 뭐가 문젠데?”
“…….”
“뭐가 문제냐고. 대체 어디가.”
문제는 많겠지.
높으신 양반들 지갑 사정이.
매우 알 바 없는 사정이어서 나는 싱글싱글 웃었지만, 마찬가지로 알 바 없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고 그렇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도 없는 불쌍한 인간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말만 더듬어댔다.
“…그, 그건…….”
“후. 내가 머저리도 아니고, 귀찮으니까 그냥 본론만 까자. 뭐 들고 왔어?”
진짜 시간 아까우니 거기까지 하고 그냥 가져온 협상 카드나 까라고 솔직하게 판을 깔아 주자, 더듬거리던 입이 빛의 속도로 닫혔다.
덜덜거리더라도 뭐라도 꺼내려던 입은 대체 어디로 갔는지. 아주 꿰매졌나 보다.
그래도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줬다.
협상 카드를 꺼내라 하긴 했지만 이쪽은 아쉬울 게 없는 입장인 반면에 그쪽은 아쉬울 게 너무나 많아 뭘 들고 왔다 해도 쉽사리 제 패를 까기 어려울 테니까.
“……뭐야.”
“…….”
하지만 둘이 세트로 입에 풀칠이라도 한 건지, 아무리 기다려도 원하는 말은커녕 그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에 혜성처럼 머릿속에 깨달음이 스쳤다.
썅.
“하하. 미쳤나 봐, 니들이. 아니면 이 나라가. 하긴.”
슬슬 망할 때가 되긴 했지. 지금까지 용케 안 망한 게 가상하긴 했다.
“야. 야. 이렇게 가면 안 되지!”
대화의 이유 자체가 소멸돼 망설임 없이 자리를 뜨자, 차지혁이 황급히 나를 붙잡았다. 그런 그를 향해 진심으로 물었다.
“왜, 어째서?”
“그, 그야……!”
아놔. 정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이젠 진짜 신물이 올라오려 했다.
대체 유지한은 이걸 어떻게 버티고 산 건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마 평생 이해할 수 없을 거 같았다.
“진짜 원티드가 만만하긴 했나 봐. 아니면 내가 만만해 보였든가. 어느 쪽이든 기분이 매우 더럽네?”
이 더러운 기분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나는 친절한 사람이니 정말 친절하게 물어 줬다. 내가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살려 줘.”
아니, 내가 대체 뭘 했다고 그러는 건지, 기껏 성격 다 누르고 웃으면서 나긋하게 물어 줬건만 차지혁이 살려 달라고 빌어 왔다.
매우 억울해지긴 했지만 확실히 감이 좋은 녀석이긴 했다.
“지금까지 센터가 원티드에게 제대로 지불하지 않은 체납 금액이 얼마지?”
“…….”
차지혁이 머리 굴리는 게 눈에 보였다. 머리 굴려 봤자 소용도 없을 텐데 뭐 하러 굴리는 건지 모르겠다.
한두 번 빼먹었어야지.
“일단 말도 안 되게 빼먹은 그 금액부터 원상 복구시킨 후 협상 테이블에 앉지. 원래 협상은 서로 동등한 상태로 시작해야 하지 않겠어?”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하지만 자고로 개소리란, 개소리인 게 분명한데도 말 되는 것처럼 설득력 있게 하는 것이 제맛인 법.
아주 맛깔나게 개소리를 하자, 할 말을 찾지 못한 차지혁 녀석이 감탄사를 뽐내었다.
“……미친.”
칭찬 감사.
최초의 목적도 달성했겠다. 미련 없이 등을 돌려 가볍게 발걸음을 놀리자, 등 뒤에서 나를 뛰어넘는 참신한 개소리가 들려왔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걸 어떻게 돌려주나? 애초에 우리는 정당하게 지급을 해 줬어―!!”
“……야. 쟤 뭐라니?”
너무나 참신한 개소리에 얼이 빠져 옆에 있던 차지혁에게 설명을 요구하자, 마찬가지로 이해하지 못한 차지혁이 대답을 회피했다.
“나도 모르니까 묻지 마…….”
“네가 데려온 쓰레기거든?”
그러니까 치우는 것도 네가 해야지?
상냥하게 웃어 보이자, 무슨 마녀의 미소라도 본 듯 차지혁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시선을 피했다.
저 망할 놈이.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는 게 도무지 저 인간을 제 선에서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공무원 따까리의 불쌍한 말로였다. 결국 하는 수 없이 내가 상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정당함의 근거를 보여. 적어도 우리는 우리가 부당 대우를 받았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으니 그에 따른 반박을 하려면 마찬가지로 증거를 내보여야지.”
“…….”
“응? 얼른 보여 봐.”
그 같잖은 입을 찢어 버리기 전에.
“그, 그 돈은…… 국익을 위해 훌륭히 쓰였네!”
“하. 국익.”
이게 진짜 미쳤나.
“그쪽 국가는 국익을 위해 소시민 삥도 뜯어 가나 봐. 국익이 참 대단해 그렇지?”
“모름지기 나라를 위해서 투자도 해야……!”
그 투자가 높으신 양반들 뒷주머니 채워 주는 꼼수를 말하는 거냐?
어디 할 투자가 없어서 그딴 걸 하냐.
“아. 투자. 좋은 단어네요. 좋아. 투자. 나쁘지 않지.”
“……윤지호?”
내가 절대 할 리 없는 소리에 의심을 가득 담은 목소리가 들려왔음에도 제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놈은 그런 목소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그. 그럼 물론이지! 다 나라를 위한 투자이니, 국민으로서 무척이나 가치 있고 보람 있는……!”
“네. 그럼 그 가치 있는 투자 내용이 뭔지 좀 알고 싶네요.”
“……뭐?”
“……!!”
차지혁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이제야 내 진짜 목적이 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세상에 제가 투자한 곳을 모르는 투자자가 어디 있나요. 저희가 투자자면 얼마든지 요청할 수 있는 사항이죠. 지금까지 저희의 투자금이 얼마나 이롭게 쓰였는지 너무나 궁금해서 말이지요. 그럼 그걸 보고 시작하도록 하죠.”
“……!!”
아. 짜릿하다.
저 영혼 가출한 얼굴이 그렇게 짜릿할 수 없었다. 제가 만만하게 뜯어먹던 이에게 이렇게 역공당한 건 어떤 기분일까.
크게 관심 없지만.
고소함을 가득 담아 미소를 지으며 망설임 없이 응접실 문을 열고 말했다.
“잘 들었지? 사실대로 예쁘게 써 줘.”
“……!!”
다른 사람이 이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한 두 사람의 기겁한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음에도 쉴 새 없이 녹음기를 돌리며 메모를 하고 있는 녀석이 덤덤하게 사랑 고백을 해 왔다.
“사랑해. 자기야. 역시 너밖에 없어.”
“응. 알아. 자기야.”
사랑 고백에 덤덤하게 화답하며 나는 새삼 생각했다.
역시 이년도 한 미친년이야.
그때, 등 뒤에서 우렁찬 비난 소리가 메아리쳤다. 저년이 누군지 알고, 내가 무슨 짓을 한지 잘 아는 목소리였다.
“야 이 미친년아―!!!”
그 소리를 가볍게 흘려들으며 나는 귀를 후볐다.
아. 나 미친년인 거 이제 알았나. 새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