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5장. 어떤 직장도 꿀일 수는 없다.
6장. 내가 바로 진정한 이 구역 미친년
7장. 모든 일은 예고가 없다.
5장. 어떤 직장도 꿀일 수는 없다.
죽어도 찾아도 안 나오던 국내 랭킹 1위가 갑자기 S급 던전을 클리어함과 동시에 월랭 1위를 찍어 대한민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속보] 실시간 월드랭킹 top 100/국내랭킹 top 10』
― 펄럭~
└ 퍼얼럭~
― 동해물과 백두산이~
└ 마르고 닳도록~
└ 하느님이 보우하사~
└ 대한민국 만세!!
└ ㅋㅋㅋㅋㅋ마지막 뭐임
└ ㅤㅇㅏㅋㅋㅋㅋㅋㅋㅋ
└ 우리나라 만세 어디갔어ㅋㅋㅋ
― 키야~ 국뽕 지리고요
― 세계랭킹 1위에 태극기 실화냐… 사랑합니다. 무명님. 평생 발닦개를 다짐함
└ 저도요. 같이 가시죠
└ 22
└ 333
― ㅋㅋㅋㅋ국내랭킹은 하나도 안 바뀌었는데 절대 바뀔리 없던 월랭 상위 클라스만 바뀜…. 졸라 멋있네
― 부동의 1위 밀리언님 잠수중 ㅋㅋㅋㅋ아 소감 좀 듣고픈데
└ 그러지마셈. 밀리언팬 불편함
└ 어쩌라고~
└ 네 다음 불편충~
└ 실컷 불편해 하시고요~
― 아. 나는 밀리언 필요없고 우리 1위님! 1위님을 보고 싶다고!!!
― 대체 어디서 귀문불출 하시는 거냐고. 정부 일 좀 해라. 제발.
└ 제발좀. 원래도 일 안하지만 진짜 이번에는 일좀 했으면
└ 개궁금함. 나같음 1위찍으면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닐텐데
└ 그건 너니까
└ ㅈ밥의 심리와 일찐의 심리는 다르다는 거죠. 클라스의 차이..
└ 클라스고 나발이고 사진이라도 좋으니까 얼굴한번 영접해 봤으면... 파파라치님들 일좀 해 주세요....ㅠㅠ
└ 투자할 용의 있습니다. 열심히 직업정신좀 발휘해 주세요. 제발!!!!
└ 내 통장을 바칠게여. 제발...
모두가 한마음으로 1위를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궁금해하는 1위 님께서는…….
“……후우.”
현재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이직할 뻔한 취직처 앞에 있었다. 정말, 죽어도 여기 올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래서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하나 보다.
모두가 찬양하는 랭킹 1위가 회한에 잠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하고는 벌써 1주일째 냉전 중이었다. 솔직히 그냥 넘어가려 해도 그런 엄마의 태도를 겪고도 평소랑 똑같이 엄마를 살갑게 대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성녀급의 착한 호구딸이면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그런 딸이 아니었다.
엄마는 이번에는 확실히 선을 넘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친구든 가족이든, 아니 가족이기에 더 서로를 존중하고 선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엄마는 기본적으로 말을 세게 하고, 극단적인 스타일이긴 하지만 정말로 내 선을 침범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에게는 제대로 화내 본 적이 없었다. 어찌 보면 무르게 굴었던 내 실책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이번엔 엄마가 정말 도를 넘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취직이고, 인생을 결정한다고 해도 될 만큼의 중한 문제였다. 상대가 엄마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라 한들 그걸 강요할 자격은 없었다.
‘아…… 저희가 아무래도 실수한 거 같네요. 다음에 정식으로 다시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어쩌다 보니 상황이 이렇게 됐지만 저희는 진심입니다. 편하실 때 연락 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다행히 상식적인 두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는 다음에 제대로 다시 이야기하자며 결정을 보류해 주었기에 그나마 두 사람에게는 미소로 대할 수 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건 물론 예의가 아니긴 했지만 두 사람에 대한 호감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띠링―
두 사람이 떠나자마자 나는 바로 입가에서 미소를 지웠다.
‘……장난해?’
시리도록 차가워진 내 얼굴에 윤지우가 뒤로 주춤했다.
타인이 있는 자리에서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해서 내가 그냥 넘어갈 리 없음을 윤지우는 충분히 예상한 듯 재깍 발을 뺐다.
그런 윤지우와 달리 엄마는 처음 보는 내 모습에 당황한 듯했다.
하지만 지금은 엄마의 당황 따윈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니, 당황하지 않았다면 그것대로 화가 났을 것이다.
‘눈뜨자마자 거실로 나왔더니 내 손님이 있는 것도 모자라, 조건도 뭣도 아무것도 안 보고 이름만 아는 회사에 나더러 취직을 하라고? 취직이 장난이야? 로또 뽑기냐고.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아줌마.’
‘넌 엄마한테 아줌마가 뭐니?’
‘지금 내 입에서 얌전히 엄마 소리 나오면 내가 미친년이지. 내가 그렇게 호구로 보여?’
서슬 퍼런 눈으로 엄마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미친 듯이 화가 나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때문에 끝까지 화를 내지는 못했는데 각성한 탓인지, 보다 냉정하게 정을 끊어 내고 화를 낼 수 있었다.
처음으로 각성 부작용에 감사를 느꼈다.
‘누나 일단 진정…….’
‘넌 네 손님이기도 한데 내가 자고 있으면 미리 알리든가, 약속을 다시 잡든가 할 생각은 안 했냐? 아무리 생각해도 저 두 사람이 막무가내로 우리 집을 알아내 쳐들어올 리는 없고, 분명 너한테라도 연락이 갔을 텐데 말이야.’
막 깼을 때는 당황해서 생각하지 못했지만 냉정해지니 그것조차 이상했다.
원티드의 그 두 사람은, 원래의 성격도 성격이지만 어디든 쫓아오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질릴 대로 질린 이들이다. 그런 이들이 남에게 똑같은 짓을 할 리가 없다.
‘아. 그게 연락이 왔는데 누나랑도 같이 보고 싶다고 해서 누나한테 물어본다고 하려 했는데…… 엄마가 그때 마침 같이 있어서…….’
결국 엄마에게도 알려진 던전 소식에 엄마가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초대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윤지우의 변명에 나는 실소를 흘렸다.
‘결국은 엄마가 문제라는 거네?’
어처구니가 없어 손으로 머리를 쓸어올리는데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면서 인정하기는 싫었던 엄마가 먼저 큰소리 냈다.
‘왜! 내가 인사하려고 부른 건데. 내 집에 내가 불렀는데 뭐가 문제야! 그리고, 집에 계속 있으면 뭐 할 건데! 알찬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지!’
‘……엄마. 그건 좀……. 제발, 일단 둘 다 진정 좀 하고…….’
‘야. 뭘 진정해. 이미 진정 상태야.’
그래서 더 확실히 깨달았다.
‘너, 어딜 들어가?’
‘의미 없는 대화를 계속하는 속 좋은 취미 없어.’
더 이상의 대화는 가치가 없다는 걸.
그렇게 대화는 종료되었고, 냉전은 당연한 결과였다.
엄마에게 굽히고 들어갈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지만, 엄마를 무시하는 게 좋을 만큼 나쁜 딸도 아니어서 마음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장점은 있었다.
엄마 요리를 먹지 않아도 된다는 거.
‘……나도 엄마랑 싸울까?’
‘뭐라니.’
그게 얼마나 큰 장점이냐 하면, 내가 안 먹어서 혼자 독박을 쓰게 된 윤지우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
지은 죄는 아는지 엄마는 내가 그렇게 차갑게 구는데도 꾸준히 말을 걸었다.
물론 열심히 무시해 주었지만.
그러다 대화를 한 게 바로 어제저녁이었다. 아마 엄마의 저녁을 안 먹고 우아하게 한우를 구워 먹어 윤지우의 멘탈을 털리게 한 것이 시발점이었던 것 같다.
* * *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윤지우가 처절하게 소리쳤다.
세상에 그렇게 억울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그 처절한 목소리에 온 가족의 시선이 집중됐다.
‘……뭐야.’
그리고 당사자인 나는 어이가 털렸다.
아니, 내 돈 내고 사 먹는데 넌 대체 뭐가 문제야.
한우를 제 돈으로 먹은 것도 아니고, 내 돈으로 사 먹는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처절하게 소리치는 윤지우는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정말 몰라서 묻냐고 제 화신에게 진심으로 묻습니다.]
성위가 비꼬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꼬우면 지도 사 먹으면 되지 뭐가 억울하다고 저러는지 몰라 어이없는 눈으로 동생 놈을 바라보았다. 그런 우리 둘을 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쉰 엄마는 힘 빠진 목소리로 항복을 선언했다.
‘이제 그만하자. 잘못한 거 아니까.’
‘아줌마. 누구신데요?’
‘아. 요놈의 기지배가! 그때 내가 너무 앞뒤 설명 없이 막 나간 거 아니까 그만해. 네가 그런 얼굴을 할 줄은 몰라서…… 좀 놀랐던 거야.’
‘그게 벌인 일에 대한 설명은 되지 않는 거 같은데.’
우아하게 한우를 입에 넣으며 대꾸했다.
‘내가 그렇게 안 하면…… 너 또 겁먹고 도망칠 거였잖아.’
멈칫.
우아하게 입으로 한우를 가져가던 젓가락이 멈칫했다.
‘……내가?’
아니, 그 상황에 도망이 어디 있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엄마는 단호했다.
‘너 수락하고 싶어 하면서도 망설였잖니. 이유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원티드면 절대 이상한 대우를 할 길드도 아니고, 얼굴 보니 더더욱 그러기도 힘들 면상들이더만. 어차피 내가 강요해서 네가 한다고 해도 제대로 답을 다시 들을 사람들인 것 같았고.’
‘……아니었으면?’
‘다시 깽판 치면 되지. 계약서를 쓴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니.’
마치 제 맘을 꿰뚫어 본 것 같은 말과 함께 생각보다 합리적이었던 판단이 들려오자, 나는 얼빠진 얼굴을 수습하며 반박했다.
‘그렇다고 해서 엄마가 한 행동이 정당한 건 아니거든?’
‘네 등을 밀어줄 필요는 있다 생각했어. 하다 보니 과열돼서 내가 실수한 건 맞아. 미안. 처음에는 나도 그냥 얼굴만 보고 감사 인사나 하려고 한 거였어. 진짜야.’
진심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전해지지 않을 것 같은 간단하고 영혼 없는 사과에 눈살을 찌푸리자, 그런 본인을 잘 알고 있는 엄마가 재빨리 다시 사과를 해 왔다.
‘미안해. 진심이야. 엄마가 이렇게밖에 사과하지 못하는 거 알잖니.’
알지. 미안해도 미안하다고는 죽어도 말 못 하는 그 성미.
새삼 나는 내가 누굴 닮았는지 깨닫고 있었다.
‘……얼굴 찬양도 진심이잖아?’
‘당연하지.’
칼같이 돌아오는 대답에 실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완벽히 끝을 낸 건 아니지만 냉전은 그날로 조금 완화가 되었다.
‘겁먹지 말고 한번 제대로 조건 들어보고 생각해 봐. 너도 이제 회사 생활해 봐서 잘 알겠지만, 같이 일해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 건 정말 하늘의 별 따기란다. 왔을 때 잡아야 돼. 다시 올 거라는 생각하지 마. 안 오니까.’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 한다.
평생을 깨달아도 어쩌지 못하는 진리를 상기시킨 엄마 덕에 그날 밤, 나는 망설이다 핸드폰을 붙잡았다.
하여, 지금 이곳에 서 있게 된 것이었다.
어쨌든 결국 마주하게 된 곳은…….
“……오. 돈지랄은 역시 이렇게 해야지.”
훌륭한 돈지랄의 성지였다. 센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지난 던전 덕에 예쁘게 박살나서 이제는 형태도 없긴 했지만.
사라지기 전의 센터가 겉모습만 삐까뻔쩍한 속 빈 강정 같은 돈지랄이었다면 이쪽은 진짜 실속있는 돈지랄이었다.
내 생각과 별반 다르지 않은 듯 성위 역시 감탄을 토해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역시 있는 놈이 쓰는 것도 잘한다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인정.
역시 있는 놈은 쓰는 것도 정말 남다르게 쓴다.
소설에서 하도 찬란한 어휘로 써 놔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는데, 결코 그 표현이 과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탄복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볼수록 감탄이 샘솟았다. 사람이 지키지 않아도 웬만한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는 마력금속 장벽을 통과해 빌딩 안으로 들어가자, 보이는 푸른 녹원이란. 정말 소설 속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공원에 가도 쉽사리 볼 수 없을 것 같은 녹음을 훌륭하게 건물 안에 재현한 것에 진심으로 감탄사가 뿜어져 나왔다.
대체 돈을 얼마나 들였을까. 천문학적인 금액이 깨졌을 것이라는 데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런 로망 산산조각 내는 소리 말고 그냥 이 아름다운 경치를 좀 즐기면 안 되냐고 타박합니다.]
아니, 이건 그냥 본능…….
하고 싶은 말은 넘쳐났지만 틀린 말도 아니어서, 이번만큼은 그냥 성위의 말을 좀 실천해 보기로 했다.
“예쁘네.”
진심이었다. 돈만 있으면 될 정도의 풍경이 아니었다. 수천억이 있어도 이러한 광경을 만들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아무리 감정이 없는 이라도 보면 시선을 뺏기지 않을 수 없는 공간이었다.
하염없이 감상에 빠져드는데, 등 뒤에서 절대 못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네요.”
“……아. 유지한 씨.”
뒤를 돌자마자 보이는 이 세상 모든 여자들의 취향을 압살해 버리는 스윗한 미소에 나는 급히 혼미해지는 정신을 다잡았다.
저건 못 먹는 감이다. 홀리지 말자. 제발.
“일찍 도착하셨네요. 마중 나가려고 했는데.”
“아니에요. 마중은 무슨. 바쁘실 텐데.”
홀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지 몇 초나 지났다고 쉴 새 없이 이어지는 하트어택에 또다시 정신이 혼미해짐을 느끼며 격하게 손사래를 쳤다.
나도 학교에서 깨나 알아주는 돌심장이었는데, 애석하게도 그게 주인공님까지는 해당되지 못했나 보다.
“그렇게 바쁘진 않은데…….”
소시민이 견디기에는 매우 부담스러운 하트어택들에게서 살아남느라, 주인공님이 소심하게 어물쩍거리며 하는 중얼거림을 듣지 못했다.
“네?”
“아무것도요. 올라가죠. 유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 네!”
뒤늦게 무슨 말을 했냐 물었지만, 산뜻한 미소로 안내를 하는 주인공님을 홀리듯 따라가느라 주인공님의 중얼거림은 금방 잊고 말았다.
얼굴이 최고의 복지라는 엄마의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벌써 이 회사 나쁘지 않은데, 라는 생각이 퐁퐁 피어나고 있었다.
애석한 현실을 깨달으며 나는 내가 새삼 엄마의 딸임을 실감했다.
“……길드장?”
참으로 애석한 내 모습에 한탄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다.
“음. 얼굴은 맞는 거 같은데.”
“아. 눈에 이상이 생겼나 봐. 헛것이 보여.”
“나도. 드디어 시력이 너무 좋다 못해 미쳤나 봄.”
이라며 눈을 비비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을.
* * *
“아. 그러고 보니 윤지우 녀석은요?”
투명한 엘리베이터를 올라가며 푸른 나무의 모습에 열중하다 뒤늦게 윤지우의 생각이 났다.
이 누님께서 열심히 엄마의 횡포와 맞서 싸울 때, 애초부터 원티드가 워너비였던 동생 놈은 재깍 다음 날부터 출근을 했다.
아주 헤벌쭉한 얼굴이 매우 꼴 보기 싫어 어땠는지 묻지도 않았었다.
이런 속 깊은 사정을 모르는 주인공님은 친절하게 답변을 내주려 했다.
띵―
“아. 지우 군이라면 요즘 훈련에 열심입니다. 성과가 꽤 좋은 편이라고…….”
콰과과광―!!
엘리베이터에 내리자마자 울리는 어마어마한 굉음이 아니었다면.
사실 굉음만이었으면 그냥 야멸차게 무시했을 수도 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닌데 알 바인가.
하지만 날아다니는 솜 덩어리들과 반짝반짝 빛나는 불빛들의 향연은 도무지 무시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며, 나는 불신이 가득 담긴 눈으로 주인공님을 향해 물었다.
“……진짜요?”
“아마도.”
추궁의 눈빛을 견디지 못한 주인공님이 어물쩍 답하며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다른 사람이면 진작 멱살을 잡고 남았겠지만, 금이야 옥이야 대해 줘야 할 주인공님이라 참았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정말 이유가 그것뿐이냐며 의뭉스러운 눈으로 추궁합니다.]
아놔. 요 깜찍한 별님 같으니.
태클이라고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성위의 태클에 그럼 뭐가 더 있겠냐고 속으로 윽박을 질러 화답했다.
그 순간, 굉음의 원흉 중 하나인, 유라가 드래곤 브레스 급 분노를 포효했다.
“아놔. 이 빌어먹을 사춘기 고딩 자식이!!”
“으악. 선배! 진정! 진정하시고……!”
“메롱. 메롱입니다. 아무리 한번 연애 못 해 본 모태솔로라지만 아줌마 바가지는 메롱스러우니 자제 부탁.”
서유라의 매서운 분노에도 겁나지 않는 것인지, 교복을 입은 매우 곱상하게 미소년이 정신 나간 어그로를 시전했다.
반쯤 집 나간 정신 상태에서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그로 수준이 아주 예술이었다. 맨정신도 가출할 것 같은 어그로와 상큼한 얄미움의 시너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걸려들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으리라.
예상처럼 그 어그로에 확실하게 걸린 유라가 크게 숨을 들이 내쉬며 팔을 걷어붙였다.
“후. 저건 내가 오늘 족치지 않으면 내가 서유라가 아니다. 너 이 새끼. 이리 와!!”
“휘유~ 아줌마 정신 놓으신 듯. 그런 얼굴로 이리 오라고 하면 오는 바보가 어딨음?”
“아오. 저걸……!”
“선배! 본 실력 발휘는 안 돼요! 길드 다 무너져요! ……으악―!”
두 실력자가 손짓만 해도 어마어마한 괴력들이 형태를 드러내며 번쩍번쩍 눈을 부시게 했다.
거기에 새우등이 터지는 건 단연, 아무 죄 없는 불쌍한 비품들과 벽이었다.
빛의 속도로 새것과도 같은 것들이 폐기물이 되는 광경을 지켜보며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돈 많이 들겠다…….
족히 몇백은 깨질 것 같은 황폐화 현장을 멍하니 지켜보는데, 갑자기 주인공님이 날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잠깐.”
“……?”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서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주인공님의 행동을 납득하게 된 건 수 초 뒤 우리 주인공님이 막아낸 돌덩이들이 바닥에 떨어지고 난 후였다.
아. 나도 새우등 중 하나였구나.
물론 진짜로 저 불쌍한 비품들처럼 새우등이 터질 일은 없었을 테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 사이로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이제 그만 좀 하십시오!”
“맞아요!”
짜증이 가득 담긴 처절한 외침에 비로소 정신이 좀 돌아왔다.
그래도 정상인이 있긴 있었군.
이미 이상한 나라지만, 더욱 이상한 나라에 빠진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는데, 뒤늦게 만난 정상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헛된 희망일 뿐이었지만.
희망이 싹틈과 동시에 귀여운 외모의 여성분과 인텔리한 외모의 남성분이 짜증을 가득 담아 윽박을 질렀다.
“복구하기 힘들단 말이에요!”
“돈 든단 말입니다!!”
“…….”
“……죄송합니다.”
주인공님이 애절한 목소리로 사죄를 해 왔지만, 들리지 않았다.
나도 한 자본주의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앞에서는 게임조차 되지 않는 것 같았다.
훌륭한 자본주의의 화신들을 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데, 성위가 맞장구를 쳐 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넌 대체 어딜 온 거냐 묻습니다.]
그러게.
난 분명 이직할 회사에 면접 보러 온 거 같은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진심으로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돌아갈까. 순간 진심으로 고민했다.
“금방 끝날 겁니다. 유라가 그래도 정말로 싸우지는…….”
그런 나를 눈치챈 것인지 주인공님이 어설프게 포장을 시전했다. 안심시켜 주려는 마음은 가상했지만, 매우 미안하게도 그 말은, 신빙성이 없었다.
“……저게요?”
백 마디의 말보다 한 번의 행동이 더 확실하다지 않는가.
오랜 선조의 격언을 본받아, 불신 어린 얼굴로 이 아비규환을 가리켰다.
“너 이 X. 잡히기만 해 봐라!”
파사삭―!
끼이잉―
“헹. 이 몸이 이 정도에 잡혀 주실 줄 아셨음? 쯧쯧. 우리 부길마님이 나를 너무 봉으로 보심.”
“아오! 이게―!”
“으악, 선배 스킬 쓰지 마세요!!”
느릿하게 내 손가락을 따라 아비규환을 감상한 주인공님이 참으로 믿음 안 가는 얼굴로 어물쩍 변명을 내놓았다.
“……유라는 그래도 화가 빠르게 식는 편입니다.”
“아. 그래요.”
퍽이나.
나름 시니컬하게 폼을 잡으며 대놓고 비소를 흘렸다.
그래 봤자 주인공님에게 반쯤 대롱대롱 매달려 있어서 그렇게 위엄이 있진 않았지만.
그때, 이 난장판에도 용케 무사했던 엘리베이터가 추가 피해자를 모셔왔다.
띵―
“그래서…….”
“……!”
“우리 신입 군은 궁금한 게 참 많아요. 거참 좋은 자세…… 아. 닫아요. 얼른.”
사고 치는 놈들 따로, 말리는 놈 따로, 걱정하는 놈들 따로인 아수라를 무심히 쭉 둘러본 추가 피해자들은 재빨리 버튼으로 손을 가져갔다.
“어째 하루를 그냥 넘어가지 않아. 우리 길드는.”
“우리 고딩님이 오신다고 했는데, 이정도야 당연하죠. 참 사이좋고, 다정하죠?”
“그만 좀 화목했으면 좋겠는데.”
대화를 나누면서도 닫힘 버튼을 누르는 손은 아주 신속했다. 그걸 보며 나는 이 광경이 이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광경임을 알 수 있었다.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었던 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을 멍하니 지켜보며, 나는 ‘이 회사를 다니면 안 되는 타당한 10가지 사유’에 당당히 이 일을 랭크시켰다.
스르륵―
그렇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가 싶었는데, 갑자기 문틈으로 불쑥 손이 튀어나오며 누군가 놀란 얼굴로 엘리베이터에서 몸을 빼냈다.
“잠깐만요―!”
“신입 군?!”
“이번 신입이 패기가 좋군…….”
“패기 하나는 인정하지만, 이건 패기가 아니라 객기에요. 새우 등 터질 확률 200%거든요. 그러니 봉변당하기 전에 얼른 도로 타세요.”
필터링을 한 건지 의심스러운 말을 뒤로하고 꿋꿋하게 몸을 뺀 놈은 바로 내 동생 놈이었다.
“아. 그건 알고요. 누나!! 왜 여기 있어?!”
황당함이 가득 담긴 동생 놈의 물음에 나도 궁금해졌다.
그러게. 난 여기 왜 있을까?
“……누나?!”
“누님분?!”
마땅히 할 답이 없어 어색한 웃음으로 무마하는데, 동생 놈에게 누나가 있다는 것에 놀란 건지, 이곳에 누나가 있다는 것에 놀란 건지 경악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에 참 맞지 않은 생뚱맞은 소리였지만, 결과적으로 그 비명은 매우 효과적이었다.
“……?”
“……누나?”
유라가 뚝― 행동을 멈추고 이쪽을 돌아보자, 말리던 사람들의 노력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지호 씨?!!”
“윤지호 씨. 오셨었군요. 하하. 그니까 이건…….”
유라가 급하게 제 무기를 인벤토리에 넣었고, 그런 유라를 가리며 민현이 어떻게든 변명을 지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이들은 순식간에 난장판을 정리하게 된 나를 정체가 뭐지 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공님조차 차마 더 이 광경을 보지 못하겠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 난장판 사이로 나는 어색하게 손을 들어 보였다.
“……하이요.”
* * *
“하하. 스X벅스 좋아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날아가서 사 가지고 왔는데…… 다른 게 더 좋으셨을까요?”
이X야? X썸? X앤X스? 커피X?
말만 꺼내는 순간 바로 뛰쳐나갈 민현의 기세에 집 나간 정신으로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아. 하하. 아니에요. 좋아해요.”
이 상황에서 커피가 넘어갈지가 문제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커피는 쪼로록, 쪼로록 잘도 넘어갔다. 주인공님 얼굴부터 시작해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것들을 여럿 봤더니 목이 탔었나 보다.
카페인이 들어가니 서서히 집 나간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거른다. 무조건 거른다. 이건 진짜 무조건 걸러야 하는 곳이었다.
그래도 약간은 망설여졌던 마음이 확고해졌다.
딱 봐도 가족같이, 편하고 위계질서도 없이 움직이는 집단이었다. 분명 다들 사이좋고 편하게 지낼 것이다. 장점이긴 했다.
하지만 회사생활 3년 차.
장점과 함께 단박에 깨달을 수 있었다. 가족 같은 게, 가X같이 되는 것은 한순간일 것이라는 걸.
그 증거가, 이 황폐해진 사무실이었다.
무슨 마법을 쓰는 건지 원래의 상태로 전부 복원이 되어가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뇌리에 박힌 광경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아, 그게…… 못 볼 꼴을 보여드렸네요. 송구합니다.”
유라가 머쓱한 얼굴로 사과를 해 왔다.
나름 순수해 보이는 히로인의 모습에 어색하게나마 아니라고 답하려고 하는데 어그로 고딩이 현란하게 입을 털었다.
“그니까. 아줌마는 성깔부터 좀 죽일 필요가 있어요. 내가 아무리 잘났다지만, 연애 한 번 못 해 본 게 내가 잘난 탓은 아니…… 악! 왜 때림!”
현란한 입놀림에 듣다 못한 다른 헌터가 위대한 고딩님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목덜미를 잡았다.
“시끄러워. 누가 이 사춘기 고딩 입에 테이프 좀 붙이자.”
“여기 테이프.”
“오. 역시 준비성 좋아. 채소아.”
“기본이지.”
아주 죽이 척척 잘 맞았다. 괜히 이들이 같은 길드가 아니었다. 그 와중에, 뒷목이 잡혀 퇴로도 없는데도 고딩님의 입은 위대했다.
“사춘기라니! 나는 훌륭한 예술…… 읍읍!”
“아. 이제 조용하네.”
“저거 얼른 치워요. 더 못 볼 꼴을 보여 주면 무슨 낯입니까.”
“보여 줄 건 이미 얼추 다 보여 주지 않았나?”
“그렇다고 정말 다 보여 줄 필요는 없으니까 얼른 치우자고요.”
“뭐. 그건 그렇지. 그럼 최민현, 네가 다리 잡아.”
“네. 신속하게 갖다 버리자고요.”
“아주 행복한 소리네요. 얼른 움직여요.”
“…….”
위대한 고딩님께서 퇴장마저 위대하게 하고 계시는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는데, 마찬가지로 같은 것을 보고 있었던 유라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왔다.
“죄송합니다. 정말. 이런 못 볼 꼴을 보여 드려서…….”
“아. 아니에요.”
별로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꼴이긴 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래도 나름 재밌는 꼴 아니었냐고 낄낄거립니다.]
우리 성위님이 아직 많이 어려서 뭘 잘 모른다.
이런 건 한 번이기에 재밌는 거라고.
“그래서, 이분은 어쩌다 이런 악의 소굴에 오…… 커억―!”
“입에 필터링 안 까냐.”
누가 봐도 엘리트로 보이는, 인텔리한 미남이 옆구리에 엘보우 블로우를 맞고 장렬히 전사했다.
그걸 보면서도 이제 나는 놀라지 않았다. 놀라기에는 더 강렬한 걸 너무 많이 봤다. 금방 살아나기도 했고.
“손 먼저 나가는 버릇은 좀 고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분명 제대로 들어갔던 거 같은데, 저리 금방 살아나는 거 보면 역시 각성자는 각성자였다.
나도 저런가?
살짝 의문이 고개를 내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맞는 자학적인 취미는 없어서 재깍 의문을 털어 내었다.
어쨌든 인텔리 미남이 매우 합리적이게 팩폭을 던지며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웬만한 사람은 찍소리도 못할 정도로 좌중을 휘어잡는 목소리와 어휘력이었다.
“너도 인간적으로 그 입 좀 어떻게 해 주라. 제발.”
하지만, 인텔리 미남에게는 애석하게도 서유라는 웬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분은 왜 모신 겁니까? 각성자도 아니신 거 같은데.”
쪼로록. 쪼로록.
말없이 커피를 쪼로록 마시면서 대놓고 나를 비꼬는 것 같은 인텔리 미남을 바라보았다.
딱히 기분이 나쁘거나 하진 않았다. 말을 저렇게 해서 그렇지, 오히려 눈은 왜 죄 없는 사람을 이런 지옥 굴에 끌고 왔냐는 듯한 유라를 향한 원색적인 비난만 가득했다.
그래서 그냥 재밌게 상황을 관전했다.
“누나……?”
“……괜찮습니까?”
“아? 응. 뭐.”
조용히 내 옆에 앉아 계시던 주인공님과 동생 놈이 내가 기분 나빠 했을까 안절부절못하는 것도 즐거운 관전 포인트 중 하나였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거참 성격 한번 비비 꼬였다며 낄낄거립니다.]
당연하지. 그 성위에 그 화신 아니겠어?
성위와 화신이 한마음으로 낄낄거렸다.
그 사이, 그 말에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유라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인텔리 미남의 말을 맞받아쳤다.
“이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뇌가 근육으로 만들어진 헌터들은 못 하는 일을 해 주실 분이셔.”
“알아듣게 좀 얘기해 주시죠. 그런 일이 한두 개입니까.”
“아. 인정.”
오오. 전 방위 폭풍 디스 지리고요.
공간 안에 있는 모든 헌터들의 아니꼬운 시선이 쏠렸지만, 두 사람은 그들만의 리그를 이어 갔다.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 그니까…… 네가 맨날 욕하던 일, 해 주실 전문가분?”
“……!”
“……?”
아, 내가?
대답 같지도 않은 대답을 단박에 알아들은 인텔리 미남이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럽게 시선이 몰리자 당황한 나는 손을 들어 나를 가리키며 멍하니 인텔리 미남을 바라보았다.
아니, 여기서 내가 왜 나옴.
이 의문의 답은 위대하신 내 별님이 내려 주셨다.
[‘이매망량’ 님께서 진귀한 광경에 정신 빠진 건 알지만 네가 거길 간 태초의 이유 정도는 기억하라 말합니다.]
아. 여기 내 면접장이었지.
면접과는 거리가 백만 광년 떨어진 광경을 너무 봐서 완전히 잊고 있었다.
새삼 원래의 목적을 떠올려 얼떨떨해 하고 있는 내게 인텔리 미남이 드디어 면접스러운 질문을 건넸다.
“경력이십니까?”
“……그렇죠?”
대체 어떤 경력을 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잡다한 일을 다 해서 웬만한 사무직 일은 다 경력이긴 할 거다.
아. 다시 생각해도 욕 나오네. 내가 잡캐라니.
물론 잡캐가 아니면 살아남기 어려운 세상이었지만, 그래도 하나만 우직하게 파고들어 대성하는 전문직이 되고 싶었던 나는 소리 없이 좌절했다.
질문은 저가 해 놓고, 상대방의 반응은 딱히 관심이 없는 것 같은 인텔리 미남은 여실히 제가 하고 싶은 질문을 해나갔다.
“하면, 전에는 어디서 근무하셨습니까?”
“그, 대기업이 아니라 아실지 모르겠는데…….”
“괜찮으니 말씀해 보십시오.”
이어지는 질문을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어차피 안 다니겠다고 하면 되는 문제인데, 나는 왜 이 질문들을 받고 있지?
타당한 의문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지만, 사회생활 3년 차.
갑을관계에 찌들어 산 소시민은 명백히 자신이 갑이라고 말하는 듯한 위압감에 쫄아 본능적으로 입을 열고 있었다.
“그, 서정 인터내셔날이라고…… 인재총무팀에서 근무했었습니다.”
본능적으로 뱉어 놓고도 멈칫했다.
아오. 이 쫄보. 말할 필요 없는데 그걸 왜 다 말하고 있어…….
3년간 짓눌려온 을의 습관이란 무서웠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저놈이 뭐라고 쪼냐고, 무려 랭킹 1위 님께서!! 라며 혀를 끌끌 찹니다.]
힘숨찐 코스프레 해제할 거 아니면 어쩔 수 없지!
코스프레 안 해도 본능적으로 이랬을 것 같긴 하지만 뻔뻔하게 주장했다. 그사이, 인텔리 미남이 곰곰이 생각에 잠기신 듯하며 꿍얼거렸다. 아마 내 회사 정보를 머릿속에서 뒤지는 것 같았다.
열심히 뒤지는 것 같은 노력은 가상했지만, 별로 기대가 되진 않았다. 대한민국에 수백 개는 될 중소기업의 정보를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자신 있게 말하건대, 그 인간은 변태다. 어디 할 짓이 없어서 그런 짓을.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코웃음을 치는데, 갑자기 머릿속에 광명이라도 울린 듯 인텔리 미남이 감격에 젖은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
“……정요한?”
갑작스러운 행동에 모두가 놀란 얼굴로 인텔리 미남, 정요한을 바라보았다.
하나, 정작 당사자가 놀랄 새도 없이 내 손을 꽉 부여잡은 인텔리 미남은 그런 시선들에 조금도 개의치 않은 체 인텔리한 외모답지 않게 매우 저렴하게 소리쳤다.
“겁나게 환영합니다!!”
“…….”
……맞네. 같은 길드.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역시 인간들은 다 끼리끼리 모여있는 법이라고 계약자의 생각에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떨떠름한 내 얼굴을 보이지도 않는지, 인텔리 미남님께서는 잔뜩 격양된 어조로 서유라를 다그치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귀한 인재를 두고 당신은 뭘 한 겁니까?! 진작 모셔오지 않은 것도 모자라 오자마자 그딴 거나 보여 드리고 있었다니!!”
“……그 문제는 일단 나도 반성하고 있으니까 일단 자리에 앉아 줄래?”
아까의 못 볼 꼴을 떠올린 유라가 얼굴을 붉히며 일단 진정 좀 하라 권유했다.
“언제 그런 거 신경 썼다고.”
“조용히 해.”
유감스럽게도 인텔리 미남께서는 그 간곡한 권유를 코로 들으셨다.
“엎드려 빌어도 모자랄 판에 저런 거나 보여 드리다니……. 스카우트의 기초도 모르십니까. 진짜.”
“읍, 읍읍―!!!”
가리켜진 ‘저런 거’가 테이프에 꽁꽁 묶인 상태에서도 활기차게 날뛰었다. 갓 잡아 올린 활어도 저 활기참에는 이기지 못할 것 같은 팔딱거림이었다.
그나저나, 쟨 언제 저렇게 전신이 테이프 미라가 된 거지?
살짝 궁금증이 일었지만, 해소해서는 안 될 궁금증인 것 같아 조용히 그를 외면했다.
“이제부터 제대로 할 거야.”
인텔리 미남의 팩폭에 발끈한 유라가 선언했다.
그러고는 퍽이나 그러겠다는 얼굴의 인텔리 미남을 뒤로 밀어 버리고 내게 미소를 지어 왔다.
“지호 씨. 진짜 저희는 업계 최고의 대우를 해 드릴 수 있어요! 원하시는 조건을 말씀만 하시면 다 들어드릴게요!!”
부길마가 길드장 허락도 없이 백지 수표를 날려왔다.
상세한 조건도 아니고 저렇게 백지 수표를 날려대니 없던 현실감이 더 없어져 감이 오지 않았다. 게다가 길드장 허가도 없이 저렇게 막 던져도 되나?
내 옆에 병풍처럼 앉아 있는 길드장님을 돌아보았다. 내가 시선을 던지자, 주인공님께서는 어느새 새 커피를 받아 ‘더 드릴까요?’ 같은 얼굴이나 하고 있었다.
응. 너는 그냥 아무 생각이 없구나.
이 길드의 진짜 실세가 누구인지 여실히 알 수 있었다. 저도 모르게 유라에게 동정의 시선을 던졌다. 저 자유무리 집단을, 이 순수 무해한 길드장을 두고 관리하는 건, 그냥 인간승리였다.
내 시선의 의미를 눈치챈 유라가 체념한 얼굴로 애원을 해왔다.
“……저, 좀 살려주세요.”
“…….”
튀어나온 진심에 동정심이 물씬 스며들어 손을 잡아 줄 뻔한 마음을 급히 다잡았다.
이럼 안 된다. 까닥 잘못하면 이 악의 굴에 끌려 들어갈 것이다. 불쌍했지만, 여기서 약해지면 안 된다.
“쯧. 그것도 스카우트라고.”
내가 그렇게 마음을 다잡는데, 인텔리 미남께서 유라의 애절한 스카우트를 냉정하게 총평했다.
냉정하기 짝이 없는 총평에 발끈한 유라가 대꾸했다.
“그럼 너는 얼마나 잘하는데?”
“이런 건 원래 정확하게 조건을 제시해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두루뭉술하게 얘기하면 현실감이 들겠습니까. 오히려 허무맹랑해서 고민 선상에서조차 제외됩니다.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그럼 네가 해. 못하기만 해 봐라.”
냉정하긴 하지만 모두 맞는 말만 하는 인텔리 미남의 말에 유라가 자신의 역할을 떠넘겼다.
못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르렁거리며.
분명 호랑이의 으르렁이라 겁먹을 만도 한데, 고양이의 투정급으로 들은 것 같은 인텔리 미남이 각을 잡으며 제대로 된 스카우트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일단 연봉은 5억 정도로 시작하죠. 거기에 위험한 일은 없겠지만, 혹시 모를 출장이나 위험 피해가 생기면 그에 따른 인센티브와 보상은 당연히 추가로 지급될 겁니다.”
“……어, 얼마요?”
귀를 의심했다.
뭐? 얼마?
미친 듯이 야근하고, 집에 못 들어가며 일해, 그나마 또래보다는 높은 연봉을 받긴 했지만, 기본제시를 그 10배부터 시작하니 입이 떡 벌어졌다.
무엇보다 경력이라고 해 봤자 고작 스물다섯짜리의 경력이 뭐 얼마나 되는지 뻔히 알면서도 관리 총괄을 맡기겠다니. 황당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헌터였다. 소설 속 세계에서 억 단위는 한 번에 버는, 일반인과는 차원이 다른 수익을 거두어들이는 헌터. 그러니 나름 시세에 빠삭한 거 같은 이조차 소시민의 경제 관념에는 감각이 무뎌진 것이었다. 그도 헌터인 만큼 헌터들만의 세계에서 살아왔을 테니까.
여기에 유일하게 끼어있는 소시민만이 그 문제를 깨닫고 박탈감에 속이 터졌다.
나도, 나도 각성자인데!!
전혀 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렇게 경제 관념이 다른 걸 보니 새삼 살짝 시샘이 났다. 왜 일반인들이 헌터들을 그렇게 낮잡으며 돈에만 시샘하는지도 살짝 이해가 갔다.
“저, 아무리 스카우트라도 그 금액이라니…… 오히려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요.”
그나마, 여기서 아직까지 일반인에 가까운 동생 놈이 구세주처럼 변호를 해 주었다.
짜란다. 짜란다. 내 동생!
금액을 직접 들어 보니 더 무서워졌다. 경제 관념이 없는 건 그렇다 쳐도, 저렇게 제시를 한다는 건 그만큼 간절하단 소리였다.
그리고 그건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사회인의 촉이 발동했다.
저렇게 소시민이 혹할 조건을 가지고 지금까지 아무도 구하지 못했다는 거는 분명 크나큰 헬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대체 뭘 시키려고.
그런 내 모습을 본 인텔리 미남이 급히 변명을 해 왔다.
“우리는 결코 윤지호 씨께 정당하지 않은 일을 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높은 금액을 제시하는 건, 애초에 이곳에 들일 수 있을 만한 분이 얼마 없기 때문이에요.”
“네?”
변명은 변명이긴 한데, 순 외계어였다.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내게 인텔리 미남을 대신해서 커피 셔틀을 하고 있던 민현이 조곤조곤 말을 풀어 주었다.
“저희는 ‘원티드’입니다. 소수정예 길드인 만큼 하나하나가 전부 헌터로서 네임드이기도 하고, 자율성이 굉장히 강합니다. 그만큼 적도 많고, 경계도 강하지요. 그래서 아무나 길드에 들일 수가 없어요. 무엇보다 다들 헌터다 보니 이질감도 있고 길드 안에서는 마력조절을 안 하다 보니 주변 마력의 농도 달라 일반인은 온다고 해도 얼마 버티지 못합니다.”
“……아.”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갔다.
저 돈을 보고 혹하지 않을 일반인이 있을 리가. 하지만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적응하지 못하면 버티지 못하는 게 사람이다. 아무리 능숙하게 조절해도 헌터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일반인이 매일 견디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를 것이다. 괜히 랭커들이 따로 혼자 나와 사는 것이 아니었다.
제게 매달리는 이유가 순식간에 이해가 되었다. 문제는 그들이 모르는 크나큰 오류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걸 모르는 민현이 필사적으로 변명을 이어 갔다.
“윤지호 씨는 일단 동생분이 헌터시다 보니 윤지호 씨는 모르시는 것 같지만 마력에 꽤나 익숙하신 것 같으시고.”
아니, 그건 내가 힘숨찐이라 그런 거 같은데…….
“저희를 봐도 그렇게 랭커들이라 다르게 여기시는 거 같지도 않고.”
그것도 내가 힘숨찐이라…….
“헌터인 동생분도 잘 다루시고!!”
음. 그건 걍 얘는 내 밥이라…….
태클을 너무나 걸고 싶었지만, 걸어 봤자 좋을 게 없는 태클이라 그냥 조용히 있었다.
내가 세계 최고인 것도 현실감이 안 드는데, 너희들이 센 거에 현실감이 들겠니.
티를 안 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무표정을 가장하며 속으로 탄식했다.
아, 힘숨찐이라는 게 이렇게 힘든 거였나요…….
“저희에겐 지호 씨만 한 적임이 없어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유라가 발작처럼 외치며 애원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5억은 역시 좀 적고, 10억 정도는 되어야 좀 혹하시려나?”
그 와중에 인텔리 미남이 무서운 소리를 하셨다. 5억도 충분히 넘치는데 10억이라니…….
무시무시한 소리에 순간 멈칫하자, 그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지 유라가 물었다.
“그거면 되나요?”
……이 언니가 더 무서워.
‘그거면 되나요’가 ‘고작 그걸로 될까요?’로 들리는 매직에 이어서 나올 뒷말이 무서워 그 말은 못 들은 셈 쳤다.
“아니, 그래도 이건…… 저는 좀…….”
쏟아지는 어택에 핑핑 도는 머리로 어떻게든 거절의 문구를 꺼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데, 그런 날 보며 작전을 바꾼 듯 인텔리 미남이 서류 하나를 내 앞에 들이밀었다.
“이것 좀 한번 봐 주시죠.”
“……?”
왜 주는지 모르지만, 일단 주니 받았다. 대체 이게 뭔데,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서류를 보는데…….
“뭐죠. 이 눈 뜨고 봐 주기 힘든 장부는?”
신종 엿 먹이기인가.
이 세계로 온 후, 정말 못 볼 걸 많이 보게 된 거 같다는 회한과 함께 어떻게든 진정해 보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이런 상도덕 따윈 개나 줘 버린 장부라니!!”
내 일 아니라도 빡쳐.
진심 스팀이 올랐다.
혹시 내가 시세를 잘못 알고 있나, 해서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후다닥 블랙마켓을 열어 대충 시세를 확인했다.
써 있는 이름값에서 느끼긴 했지만, 역시 제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사이클롭스의 발톱이 고작 60만 원? 아니, 도매가라 그렇다 쳐. 거기서 유통비다 뭐다 빼는 거 아는 것도 그렇다 치지만 미친! 중간에서 대체 얼마를 떼어먹는 거야!! 잘못 작성한 거 아니야?!!”
떼먹히는 숫자에 붙은 0 개수가 달랐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100억 단위를 떼먹나. 한 번 먹고 날 것도 아니고.
고딩이 발로 작성해도 이렇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은 장부를 보자, 지난 3년 동안 지긋지긋한 장부만 봐 왔던 사회인의 한이 폭발했다.
광분하는 내 모습에 동생 놈이 뭐냐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미주알고주알 설명을 해 줄 정신은 없었다.
“제대로 작성된 장부입니다. 개개인으로서가 아니라 국가의 호출로 던전에 들어가는 경우엔, 저희가 사냥한 괴수의 부산물도 기본적으로 국가에서 처리를 해 주고 있습니다. 저희는 따로 그쪽을 관리해 주는 분이 없으시고, 괴수를 처리하기도 바쁜 저희가 정산까지 신경 쓰는 건 아무래도 무리니까요.”
“……그래서, 지금 이 횡포가 벌어졌다?”
“네. 저희가 알아차릴 때쯤이면 이미 전부 처리가 끝난 후라…….”
아놔. 이 공무원 XX들…….
이래서 공무원과는 상종을 하면 안 된다.
어떻게든 등쳐 먹기 위해 수많은 절차를 만들어 놓고는, 한번 그걸 수정하기 위해서는 무지막지한 절차를 또 거쳐야 하다 보니 가만히 있어도 철밥통인 그들은 당연히 일이 늘어나길 바라지 않는다.
어차피 애초에 뭘 개선할 생각보단 등쳐 먹을 생각밖에 없기 때문에 안 된다는 소리만 꾀꼬리처럼 짹짹거릴 테고.
물론 그렇지 않은, 불쌍한 공무원들은 더 많다.
이 경우는 앉아서 엉덩이살이나 늘리며 거드름 피우는 뭣 같은 고위 공무원들의 이야기다. 원티드 정도 되는 길드를 고작 조무래기가 상대할 리 없으니까.
“누나, 많이 심각한 거야?”
“……그 정도입니까?”
혈압이 올라 뒷목을 잡는 날 보며, 동생 놈과 주인공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걸 보며 나는 기분이 뒤숭숭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 놈의, 나라에 등쳐 먹힐 미래가 참으로 암울해 어떻게 설명을 하기도 어려웠다. 게다가 아무리 사생아지만 대기업에서 나고 자랐으니 이 상황을 아예 몰랐을 리 없는데, 그런데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당신은…….
두 눈을 찔끔― 감았다. 죽어도 안 하겠다는 다짐이 흔들렸다.
“……아오.”
내 편안한 생활을 위해서는 뭐가 어떻게 굴러가든 무시하고 돌아서야 하는데, 뭐든지 괜찮다 말하는 주인공님의 얼굴과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 놈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에 인텔리 미남이 쐐기를 박았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원하시는 조건은 뭐든 들어드릴 테니까……!”
인텔리 미남이 고개를 숙였다.
곧 죽어도 고개는 못 숙일 자존심 센 인간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안 그럴 것 같은 인간이 그러니까 더 이상했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봐 봤자 더 흔들리기만 했으니까.
그때, 제 옷자락을 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자, 주인공님이 애처로운 얼굴로 내 옷자락을 살짝 붙들고 있었다.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억지로 하실 필요 없어요.”
마치 어린아이가 매달리는 것 같은 손길.
차마 팔을 잡아 오지도 못하고 옷 끝만 잡은 손이 그렇게 애처로워 보일 수가 없었다. 말과 얼굴은 정반대인 것도 웃겼고.
제가 빠져나갈 구멍을 손수 만들어 주었는데도 이상하게 반대로 결심이 섰다. 정말, 수렁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인데도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지호…… 씨?”
아아. 나는 정말 이 주인공님에게 왜 이렇게 약한지 모르겠다. 강아지 같아서 그런가.
스윽. 스윽.
“그런 말을 할 거면 얼굴도 언행일치를 시켜야죠.”
“……?”
나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어 버렸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놀랐으면서도 그래도 싫지 않은지 가만히 머리를 대고는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내 말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지만.
어찌나 예쁘던지.
얼굴이 복지라는 엄마의 말을 다시 한번 통감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정말 있던 짜증도 날아갈 것이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냐 묻습니다.]
성위가 핵심을 찔러 왔다. 그 말에 나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었다.
아니, 그딴 게 어디 있어.
아마 집에 가자마자 후회할 것이다. 하지만, 아마, 거절하고 가서도 후회할 것이다. 주인공이라서 겪는 시련 중 하나라도, 착한 당신이 이런 부조리를 더 견뎌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여기, 숙소 제공도 해 주나요?”
“……네?”
갑작스러운 내 물음에 모두가 당황해했다. 윤지우 녀석마저도.
집 뻔히 있는데 숙소 제공을 운운하니 당연했다.
그 사이에서 유일하게 내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답한 것인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주인공님이 말까지 더듬으며 답했다.
“네. 네! 됩니다!! 당장이라도 가능해요!!”
여전히 내 손바닥에 머리를 둔 채 대답하는 얼굴이 어찌나 활기찬지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아아. 정말, 내 팔자를 내가 꼬다니.
아마 지금쯤 성위가 세상이 떠나가라 비웃고 있을 것이 눈에 선했다.
* * *
역시 이렇게 되는군.
제 화신을 비추는 수경을 보며 ‘이매망량’은 즐거운 얼굴로 턱을 쓸었다.
뭐든 제공되지만, 그 무엇 하나 없는 허무의 공간에서 그가 즐기는 유일한 오락은 제 화신이었다. 그녀는 최근 그의 애정을 한몸에 받고 있었다.
주변 성위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역시 귀엽다니까.”
그렇게 넘치도록 주었건만 여전히 처음과 같은 모습으로 땡깡을 부리고, 후회하고, 일희일비하는, 생동감 넘치는 화신은 그를 한시도 지루하게 하지 않았다.
‘이것’을 얻기 위해 분에 넘치는 대가를 치렀지만,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다.
그 깊은 고독 속에서도 유일하게 맛볼 수 있었던 ‘너’.
무엇을 내준다고 해도 기꺼이 내어줄 수 있었다.
‘그’와 같이.
‘그럼 나와 거래를 하자. 신의 경지를 넘보는 자야.’
‘이매망량’은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나는 꼭 이루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강해지고 싶어요. 죽고 싶지 않아요.]
깊은 잠에 빠지기 전에도, 그녀를 제 화신으로 삼은 후에도 그는 다른 성위들의 계약자들도 수도 없이 지켜봐 왔었다.
[이렇게 강해졌는데 어째서?]
[이제 와 이게 뭐냐고!]
[당신은 날 도와줘야 맞는 거잖아!]
하지만 그 어떤 인간이라도 힘을 가지게 되면 변하게 되기 마련이었다. 살아가는 환경부터 바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었다.
제 화신 역시 힘을 숨기고는 있다지만 각성을 한 이상, 주변 환경이 빠르게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힘 있는 자는 다른 힘 있는 자를 끌어모으기 마련이었으니까.
[아오. 망할 내 인생…….]
그럼에도 언제나 같은 모습으로 발을 동동 구르는 제 화신은 절로 입가의 미소를 그리게 했다.
아마 바로 제 곁에 있었으면 확 끌어안아 버렸으리라.
“미친 팔불출 같으니…….”
수경을 보며 실실 웃고 있는 ‘이매망량’의 곁에 다가온 한 성위가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있는 대로 인상을 구겼다.
저 꼰대가 얼굴을 구기다니.
꼰대 같은 그의 꼿꼿함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이매망량’은 그와 반대로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는 저도 제 화신 이뻐하면서 나한테만 그러면 쓰나.”
“나는 너처럼 그러진 않는다.”
“그러시겠지. 세계를 위하시는 분이시니.”
‘이매망량’이 비꼬듯 툴툴거리자, 그가 짜증 어린 눈으로 ‘이매망량’을 바라보며 충고했다.
“너야말로 재미는 적당히 찾아라. 그 아이에게 개연성이 어긋날 정도로 넘쳐나는 힘을 주다니. 아무리 재미를 찾는다고 해도 정도가 있다.”
“아니. 그건 그냥 얘가 귀여워서 준 건데. 이 정도 개연성이야. 나한테 크게 문제될 것도 아니고. 천년만년 살아서 뭐 그리 좋은 것도 아니고.”
우리 애가 이쁜데 그럼 어떡함.
뻔뻔하게 제 화신 자랑을 하며 수경에서 눈을 떼지 않는 ‘이매망량’을 보며 그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그러면서 애한테 ‘이매망량’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름이나 알려 준 거냐?”
“아주 틀린 건 아니잖아?”
“제 화신한테 사기나 치고. 쯧쯧. 세월이 지나도 자네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군.”
“성위 이름 반 사기인 거 모르는 화신이 몇이나 돼. 당신도 구라잖아.”
“너 정도의 사기는 아니다. 다들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말장난 치면서 상도덕은 지켜.”
망할.
‘이매망량’ 님이 수경에서 눈을 떼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성위가 계약한 화신에게 알려주는 이름은 당연히 성위의 진명은 아니다. 진명인 이도 있지만 극히 극소수였다. 하지만 그래도 보통은 제 진명을 연상할 수 있을 만한 이름으로 알려 주기는 했다.
여기, 이 ‘승리를 걷는 자’처럼.
애석하게도 ‘이매망량’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제 화신에게 사기를 친 어리석은 성위를 향한 원색적인 비난에, ‘이매망량’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그렇게 안 했으면 내 화신은 날 상대도 안 했을 거란 말이야.”
땅에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시무룩해지는 게 참 안쓰러워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어차피 사기 계약해 놓고 무슨.”
‘승리를 걷는 자’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에 ‘이매망량’이 제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아들처럼 투덜거렸다.
“아. 할아버지. 그냥 나는 내 인생 살 거니까 그냥 좀 내버려 두시죠.”
“자네가 나보다 백만 배는 오래 살았을 텐데.”
지금 뭐 하는 시추에이션이냐는 나지막한 으르렁에 ‘이매망량’이 자신 있게 답했다.
“머릿속은 네가 더 꼰대잖아요.”
이걸 그냥 확―!
‘승리를 걷는 자’는 정말 눈앞의 성위를 한 대만 쳤으면 소원이 없었지만, 자신의 체면과 자신보다 아득히 먼 성위를 감당할 자신은 없어 화를 억눌렀다.
그 와중에 ‘이매망량’은 제 화신에게 장난을 치며 실실거렸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니 인생 니가 꼰 거, 그냥 포기하고 닭다리나 뜯고, 나도 하나만 달라고 실실거립니다.]
[아. 이런 예쁜 쉑 별님 같으니라고…….]
“……큭큭.”
곧바로 이어지는 반응에 ‘이매망량’이 즐겁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래서 얠 놀리는 걸 그만둘 수가 없다.
저만의 세계에 빠진 ‘이매망량’을 보며 ‘승리를 걷는 자’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주 제대로 빠졌군. 그래도 너무 빠지지는 않는 게 좋아. 자네처럼 굴다가 끝이 날 땐 끝내 미쳐 버리는 성위들도 꽤 많아. 다른 성위면 몰라도 자네가 미치는 건 곤란해.”
그 말에 ‘이매망량’은 어느새 닮아간 제 화신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 그 말은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어.”
매우 의미심장한 어조였지만 ‘승리를 걷는 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아주 생쇼를 한다고 ‘승리를 걷는 자’가 혀를 차는 때, 공간에 시스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신께서 계약성에게 보내는 선물이 도착했습니다.】
[이거나 먹고 떨어지라고 BXQ 후라이드 치킨을 선물합니다.]
“오오!!”
“……화신이 성위에게 선물을 보낼 수 있다고?”
한 번도 본 적도, 하려고 시도해 보지도 않았던 일이 눈앞에 벌어지자 ‘승리를 걷는 자’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커졌다.
‘승리를 걷는 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매망량’은 제 화신이 보낸 선물을 즉각 열어 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바삭한 치킨의 향연에 감동한 ‘이매망량’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봤지, 영감!! 우리 애가 이렇다고!!”
우리 애는 우주 최강임!
신이 난 팔불출의 모습에 선물 한번 받아 본 적 없는 ‘승리를 걷는 자’는 배알이 꼴렸으나, 여기서 입을 열면 지는 것을 알기에 묵묵히 입을 다물었다.
반면 그에게는 눈곱만치도 관심이 없는 ‘이매망량’은 수경을 향해 시선을 두며 애처롭게 미소를 지었다.
“얼른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때가 되면 너는 나를…….
* * *
“아. 야. 윤지호! 누나! 진짜 미친 거야? 그런 거야?”
집으로 오는 내내 동생 놈이 더럽게 짹짹거렸다.
길드 나올 때까지는 무슨 영혼 가출한 사람처럼 넋을 빼놓고 있어 사람을 귀찮게 하더니, 간신히 정신을 차린 후로는 쉴 새 없이 그게 말이 되냐는 둥 옆에서 짹짹거려 사람을 참 귀찮게 했다.
아. 그냥 이거 정신 놨을 때 괜찮은 곳에 버려 놓을걸.
뒤늦게 후회를 했지만, 언제나 후회는 늦은 법이다.
“아. 쫌! 내 나이쯤 먹었으면 슬슬 독립할 때도 됐는데, 뭐가 문제야?”
오히려 스물다섯에 3년 차 되는 직장인이 독립 안 한 게 요즘 세상에는 더 이상한 거 아닌가. 라는 당연한 생각을 하며 인상을 팍 구겼다.
실제로 집 나오면 개고생인 건 알지만, 다들 성인이 되고 한 번쯤 자취에 대한 로망이 있지 않은가.
그동안 그 로망을 실현시키지 못한 것은, 그냥 솔직히 말해서 이 비싼 서울 집값을 감당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이 서울이니 취직하면서 굳이 집을 구해 나갈 이유도 없었고.
하지만 집 구해 주겠다는데 안 나갈 이유도 전혀 없었다.
원티드에 취직을 결심한 이상, 헌터로서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어떻게든 엮일 수밖에 없다. 또, 비상시에 이 빌어먹을 동생 놈을 챙기고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힘을 기를 필요도 있었다.
집에서 그냥 할 수도 있지 않나, 기존에는 그냥 대충 생각했지만, 이번 일로 확실히 마음을 굳혔다.
무슨 병크가 터질 줄 알고.
이런 깊은 누님의 뜻도 모르고, 철없는 동생이 엄마 핑계까지 대가며 찡찡댔다.
“엄마가 허락해 줄 거 같아?”
“엄마 허락이 왜 필요해. 동생아. 많이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이 누님 성인 된 지 5년이나 됐다?”
“숫자만 는 거잖아!!”
“이런 예쁜 쉑이…….”
이 간악한 호적 메이트를 어떻게 하지?
순간 일반인(?)이 헌터를 상해 입히면 죄목이 어떻게 되는지 고민했다.
아니, 다 큰 누나가 혼자 나가 산다는데, 다른 남동생들처럼 쌍수를 들고 반기진 못할망정 이건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야. 어차피 길드에서 매일 볼 건데 뭐가 문제야. 집에서 안 보니까 오히려 더 좋지 않아?”
타당한 의문에 나이는 엿 바꿔먹은 동생 놈이 빽― 소리쳤다.
“그, 바. 밥해 줄 사람이 없잖아!!”
“에라이.”
쉬잉. 퍽―
“아악―! 왜 때려!!”
동생 놈이 억울하다며 빽빽 소리쳤지만 깔쌈하게 무시했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가자, 뒤늦게 내가 저만치 가 있는 걸 보고 후다닥 달려온 윤지우가 내 팔을 잡으며 아까와는 달리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안 그런 척해도 엄마, 섭섭해할 거야. 자기 때문에 집 나간다고 생각도 할 거고.”
“알아. 근데 생각만 하겠지.”
자존심에 또 자기 때문에 나가냐고는 못하고 속으로 원망만 무진장 할 거다. 자책도 하고.
엄마는 그런 사람이니까.
뭐, 딱히 아주 틀린 말도 아니어서 부정은 안 할 거다. 불효녀인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단호박 같은 내 모습에 동생 놈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투정을 부렸다.
“그냥 안 나갈 생각은 없어?”
“없어.”
나 돈 벌 거야.
* * *
지호가 드넓은 마음으로 치킨을 쏘며 집안사람들을 달래고, 쏘는 김에 성위에게도 치킨을 쏴 주변인들을 화목하게 만들고 있을 무렵.
국경선 부근에 열린 A급 던전에서, 지호의 집을 방불케 하는 아주 화목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끼이이익―!
퍼엉―!
촤아악―
“앗싸―!”
강렬한 폭발음과 함께 몬스터의 피가 분수처럼 하늘로 솟구쳤다.
어마어마한 양의 피를 고스란히 맞은 남자는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지으며 즐거움을 뽐냈다.
“휘유~ 훌륭한 피의 카니발. 아주 좋구요. 역시 학살은 이래야 제맛이죠?”
“피 다 뒤집어쓰고 그렇게 웃지 마라. 제발. 소름 끼친다고.”
“아. 피만 보면 이러는 게 내 특성인데 어떡해요.”
“넌 폭검이지, 광전사가 아니거든?”
그 광전사는 따로 있으니 제발, 정체성은 지키라는 말에 국내 랭킹 9위. 길드 녹음 소속. 폭검의 카카오. 민지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그거 아니에요?”
“……아니야.”
카카오야. 제발.
국내 랭킹 8위 길드 녹음 소속. 씹선비 님께서 한탄하셨다.
자신보다 강자고, 나이도 많은 윗분의 한탄에도 위대한 카카오 님께서는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 똘망똘망하게 눈을 반짝였다.
자기는 어리다는 티를 팍팍 내는 것 같은 그 눈빛에 마치 자신이 꼰대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 씹선비 님은 저 똘망거리는 눈을 손가락으로 콕 찍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누가 뭐라든 나는 내 길을 간다’가 모토인 카카오는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무심히 검을 휘두르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정탐 애들이 그러던데. 그 일전의 루키. 원티드가 먹었다던데. 들으셨어요?”
“누군지 알겠다. 그 A급 말하는 거지?”
녹음의 유X브 담당 ‘우유빛깔’이 닉네임처럼 우유빛깔인 미모를 빛내며 카카오의 말을 받았다.
카카오가 덤덤하게 몬스터를 썰며 말했다.
“최근에 루키라고 하면 그 사람 한 사람밖에 더 있어요. 선계약 후각성 급의 등장이었잖아요. 쬐끔 어중간하긴 하지만. 만약 안 했으면 진짜 월척이죠.”
아. 우리한테 왔으면 당장 대련 쌉가능이었는데.
카카오가 ‘폭검’답게 폭검스러운 생각을 하며 안타까움에 머리를 감싸 안았다.
정말 카카오스러운 반응에 유유히 몬스터를 썰던 녹음의 제2인자 님이 뭘 모른다며 혀를 쯧쯧― 찼다.
“선계약 후각성의 진리는 지금 베일에 싸인 우리 1위 님이시지.”
혜성같이 각성과 동시에 랭 1위를 해 드시고! 어디서 뭐 하시나 했더니 갑자기 던클 한 번으로 단번에 월랭을 드시고! 인생은 그분처럼 살아야 해!!
녹음의 제2인자이자, 부길마. 국내 랭킹 12위에 빛나는 랭커. 빛의 그림자, 유해한이 열변을 토했다.
매우 꼴값인 제 길드 부길마의 모습을 익숙하게 받아넘긴 길드원들은 부길마는 제쳐 두고 유연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인정.”
“근데 우리라고 하긴 그렇지 않아? 우리 거 아니잖아.”
영업을 하고 싶어도 누군지도 몰라, 정부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1위 님을 ‘우리’라고 하는 건 괜히 위대하신 1위 님의 비위를 건드리는 거 아니냐는 한 길드원의 타당한 의문에 유해한이 유해하게 반론했다.
“대한민국 소속이잖아!”
“…….”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니까. 너도 나도 대한민국. 그러니 우리.
애국심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인간이 정부에서 징글맞게 써먹는 핑계를 대고 있으니 아주, 눈꼴이 시렸다. 정부 사람들 상대하다가 쟤도 물들었나.
수다에는 관심이 없어 길드장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괴수 모가지를 따고 있던 마녀가 뻔뻔한 외침에 헛웃음을 흘렸다.
“야. 괜히 1위 심기 건드리지 마라. 던전 클리어 한 번 떴는데 바로 월랭 1위를 먹으신 분이야. 너 같은 건 그냥 손짓 한 번에 끽―”
목을 긋는 시늉이 어찌나 리얼한지. 괜히 직함이 마녀가 아니었다.
“진심 소름 돋았어여. 이명도 도로시라고 짓더니 진짜 미친 마녀…… 읍읍.”
“카카오. 입조심. 아무리 우리라도 마녀를 막아 줄 수는 없단다.”
“길짱님이 네 실드를 쳐 주면 모를까. 근데, 길짱님이 쳐주실 거 같니?”
“닥칠게여…….”
소소한 만담을 나누며 마녀의 리얼한 표현에 주변에 있던 길드원들이 오소소 소름이 돋은 팔을 박박 긁었다.
지옥을 골백번을 오간 그들은 진짜 무서운 것이 뭔지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정부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아무리 혼자 힘이 강하다 한들, 집단을 이길 수는 없다. 대한민국처럼 집단 생활이 당연하고, 그것을 강요하는 환경이라면 더더욱.
그런데도 흔적도 보이지 않고, 너무나 태연하게 던전을 클리어까지 했는데 정부는 여전히 1위가 어떤 인물인지 감조차 잡지 못했다.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현 세계에서 가장 강한 자라고 시스템이 공인했으니 인간이라고 하기도 애매하지만. 조금이라도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되는 괴물이라는 건 확실했다.
수다를 떨다 어느새 조무래기들을 다 잡아갈 때.
끼이이엑―!!
“멱따는 소리 죽이네.”
소프라노 가수는 그냥 찜 쪄 먹을 음역대의 비명 소리에 도로시가 감탄했다.
그 감탄을 들으며, 카카오가 물었다.
“……그 소리 길마님이 들어도 돼. 누나?”
“이미 알 건 알겠지만, 말하면 알지?”
“……넵.”
카카오가 수그러듦과 동시에 시스템 창이 요란하게 울렸다.
【던전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메두사의 임시 동굴’의 최종등급은 ‘A’급입니다.】
【던전을 클리어에 가장 기여한 자는 ‘정령사’입니다.】
【최초 던전 클리어를 축하드립니다.】
“앗싸!”
“끝났다아!!”
“3일간의 악몽이 끝났어!”
“목욕! 당장 나가자마자 목욕부터 한다!”
3일간 던전에 질릴 대로 질린 이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런 길드원들의 환호성 사이에서 유일하게, 그들의 길드장은 감정이라고는 존재하지 않는 인간처럼 무감각한 얼굴로 제 손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싸움 뒤라 더욱더 날카로워진 길드장의 모습을 유해한은 저도 모르게 넋 놓고 바라보았다.
수십 번을 보아온 모습이었지만 언제나 적응이 되지 않았다. 표정이나 행동보다는 새하얀 백발에, 그와 대비되는 붉은 눈. 인간 같지 않은 미모가 더욱더 인간 같지 않은, 녹음의 길드장.
국내 랭킹 4위에 빛나는 ‘정령사’. 사계절의 이로운이 무심한 눈으로 유해한을 돌아보았다.
“레이드 중 수다는 적당히 하지.”
“레이드에 수다라도 없으면 이 삭막한 분위기를 어떻게 버티냐. 이런 약이라도 있어야지.”
목숨이 수백 번을 오가는 이곳에서 이 정도도 없으면 제정신으로 있을 수냐 있겠냐며 유해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헌터라면 모를 수가 없는 씁쓸한 현실에 로운은 무심히 말을 돌렸다.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놓쳤나 보군.”
“루키? 좀 아깝긴 한데, 탱커 특성대로 되게 우직하다더라고. 우리 쪽을 선택하기에는 애초에 무리가 있었지. 사실 어느 정도 예상했었어. 그 우직한 성격을 꼬시는 데 가장 최적인 헌터이자 얼굴마담이 원티드에 있잖아?”
아주 대단하신 분이지.
유해한이 소리 없이 박수까지 쳤다.
하지만 말 뼛속까지 스며든 비꼼을 감추기엔 무리였다.
“아직도 그 모양인가 보지.”
“뭐 인간이 그렇게 쉽게 바뀌겠어?”
“……위선자 새끼.”
이로운이 짜증을 닮아 낮게 읊조렸다.
로운은 정말로 유지한이라는 인간이 싫었다. 길드장이라는 자리, 모두를 이끄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지키려고도 하지 않고, 그 무엇도 우선순위로 두지 않아 끝까지 저 혼자만 고결하고 깨끗하게 남아 있는 그 인간이.
사실 그 혐오는 자신이 되지 못한 부러움과도 같은 것이기도 했다.
물론 로운은 그런 성격은 질색이었다. 그렇게 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못 살아. 이로운. 우쭈쭈. 안아라도 줄까?’
‘나 어린애 아니야.’
‘그래도 안 안길 건 아니잖아?’
‘……윤지호. 나빠.’
‘아이. 예뻐. 왜 이렇게 예쁘지?’
……네가 좋아했으니까.
결국 그런 남자는 끝까지 되지 못했지만, 필사적으로 노력해서 흉내는 얼추 냈다.
그래서 더 그가 싫었다. 내가, 그런 남자가 되고 싶었으니까. 네 마음에만 들 수 있다면, 나는 여전히, 무엇이든 되고 싶었으니까.
“……길드장?”
“아.”
또 나도 모르게 웃고 있었나.
그녀를 생각만 하면,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그리는 자신을 알고 있는 로운이 황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아. 결국 시답지 않은 질투였다.
원래 그런 답답하고 깨끗한 놈들을 질색했지만, 유지한을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저 녀석이라면 분명 그 아이 마음에 들 수밖에 없는 남자겠다는 것이었으니까.
“듣고 있어? 그 루키가 원티드 들어간 건 정설인데, 누나도 같이 원티드에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어.”
“……누나?”
원티드가 아무리 자유분방하지만, 길드 형태는 유지하고 있고, 쉽게 타인을 들이지 않아 인맥으로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신인 루키가, 제 누나를 꽂아 넣을 수 있을 리가. 누나가 각성자여도 무리였다.
아니, 각성자면 더 말이 안 됐다. 각성자들이 얼마나 통제 안 되는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으니까. 원티드처럼 자유분방한 곳이면 더더욱.
이런 로운의 생각을 읽은 것인지 유해한이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아니. 누나는 일반인이래. 그 누나를 헌터도 아닌데 어떻게 누난 줄 알았냐니까 그 루키 각성할 때 찾아간 스카우터들의 인상에 워낙 인상이 강렬하게 박혀 있어 바로 알아봤다더라고. 누님이 좀 독특하신가 봐. 센터 쪽에서 알음알음 아는 사람 많더라.”
반대를 그렇게 야무지고 맹렬하게 하는 사람 처음 봤다나 뭐라나.
포스가 장난 아니시래. 하하.
유해한이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로운은 그 너스레에 속지 않았다.
“네가 경계할 정도의 브레인인가 보군.”
“고작 A급의 각성 문제로 센터를 제 발밑에 기게 만들었다는 인물이야. 만약 원티드에 그런 브레인이 들어갔다면…….”
“적어도 지금처럼 호구로는 안 있겠군.”
원티드는 지금까지 정부 공인 호구였다. 정부에게 미친 듯이 뜯기고도 아무 말 못 하던 호구. 그래서 정말 양심 없게 다 뜯겼다. 그 답답한 행태에 옆에서 보기에도 짜증이 일긴 했지만, 사실 다른 대형 길드 입장에서는 그 덕을 꽤나 보기도 했다.
만만하지 않은 그들에게 뜯어 갈 것까지 만만한 원티드에서 모두 뜯어 갔으니까.
만약 원티드에서 그런 브레인을 영입했다면, 더 이상 가만히 두고만 보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잠룡이 드디어 기지개를 켤까?”
“재밌어지겠군.”
그동안 원티드가 정부의 호구를 자처한 덕분에 비교적 평화로웠던 헌터계가 시끄러워질 것이다. 원티드가 홀로 감당하던 것을 이젠 모두가 느끼게 될 터였으니까.
하지만 로운이 더욱 흥미로워하는 건, 바로 ‘그’ 유지한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기업이란 남의 것을 빼앗고, 결국 덜 주고, 남을 밟고 올라서는 것이었다. 세상에 깨끗한 기업이란 없다. 남에게서 대가를 받아, 다른 이들을 밟고 올라서 흑자를 내는 기업이 자원봉사자와 같을 리가 없지 않은가.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기업은 세상에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깨끗한 유지한 님께서는 자신이 늘 빼앗기는 쪽을 선택하며 고결하게 계셨던 것이었다.
만약 제대로 자신의 권리를 찾고자 한다면 유지한은 필연적으로 그 빌어먹을 신념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유지한이 과연 자신과 같은 급으로 떨어질 것인지. 로운은 무척이나 궁금했다.
유해한도 같은 마음인지 로운과 함께 스산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루키 이름이 뭐라고?”
“윤지우라고 하던데.”
“…….”
익숙한 이름에 걸음을 옮기던 로운이 순간 멈칫했다.
그 모습에 유해한이 이상하단 얼굴로 로운을 보며 물었다.
“아는 이름이야?”
“아니.”
분명히 모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아마 평생을 기억할 이름이 떠올라 본능적으로 멈칫했다. 그런 제 모습이 스스로 생각해도 우스운지 로운이 헛웃음을 흘렸다.
몇 년이나 지났는데도, 비슷한 이름에도 이 모양이라니.
정말 하나도 변하지 못한 어리석은 제 모습에 웃음을 흘리며 로운은 출구로 몸을 움직였다.
누나라고 했지. 그럼 이름도 비슷할 테고…….
로운은 순간 제가 생각하는 이름이 떠올랐지만 금세 어리석은 생각을 떨쳐냈다. 그녀가 그럴 리가 없었으니까.
로운은 확신했다. 헌터에게 얽혀 있는 세계를 혐오하기에 헌터를 좋아하지 않는 그녀가, 헌터의 세계에 제 발을 들여놓을 리가 없었다.
수백 번도 더 만나러 가고 싶었지만, 얼굴을 내밀지 못했던 이유였으니까.
그러니까, 그럴 리가 없었다.
“모두. 귀환한다.”
“네! 길드장님!”
“얏호!! 집 간다!”
“야! 앞의 피! 밟지…… 악! 튀겼잖아!”
“누가 거기 서 있으래요? 서 있는 사람 잘못이죠.”
“내가 오늘 저 새끼 안 족치면 사람 아님. 저 새끼 족치고 상큼하게 퇴근한다.”
“힘내라. 모두의 소망이야.”
……그럴 리가.
* * *
간만에 하는 출근 땜에 아침부터 정신없이 움직였다.
첫날인 만큼 각을 잡아 줘야 했으니까.
전장에 무기를 안 챙겨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와, 진짜 아무리 봐도 적응 안 된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사랑스러운 호적 메이트가 아침부터 참 맞는 말을 해댔다.
처맞는 말.
“닥치고 방해하지 마.”
당장 벌떡 일어나서 저 예쁜 입을 꿰매 주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참았다.
동생 놈을 무시하고 묵묵히 마스카라를 마저 완성하는데, 그런 나를 보며 동생 놈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똑같이 출근하는데, 어느 날은 완전 다른 사람으로 출근하고, 어떤 날은 슬리퍼 신고 출근하고……. 대체 무슨 기준이야?”
회사 안 다녀 본 새싹 티가 푸릇푸릇하게 나는 물음이었다. 그 파릇파릇한 모습에 새삼 배알이 꼴렸다.
젠장. 나도 저렇게 파릇파릇할 수 있었는데.
뭐. 그건 그거고 저 세상 물정 모르는 놈에게 세상 물정을 조금 알려 줄 필요성도 느껴 순순히 답해 주었다.
“꾸미는 날은 족칠 거 있는 날.”
“누나. 한국어로 해 줘.”
기껏 제 수준으로 맞춰서 해 줬더니.
1할도 알아듣지 못한 놈이 못 알아들은 제 까막귀는 생각도 안 하고 남 탓을 해 왔다.
주먹이 울었지만, 아직 마르지도 않은 마스카라가 주먹 날리다 뭉칠까 꾹 참았다. 화장만 아니었으면 진작 쥐어팼을 텐데…….
이제는 절대 남 패서는 안 되는 (현) 랭킹 1위의 무자비한 한탄이었다.
“기선제압 하는 날이라고.”
“기선제압 하는데 그렇게 열심히 꾸미는 게 필요해?”
“당연하지. 생각해 봐. 소개팅에 슬리퍼 끌고 나갈래?”
“……아. 근데 이건 그 경우가 아니잖아.”
“그 경우랑 다를 거 없어. 결국은 누구에게 잘 보이는 만큼 그 상대를 회유하기 쉽다는 거거든.”
21세기의 열린 사고. 남녀평등시대.
어쩌고저쩌고 말은 예쁘게 포장되어 있지만 그뿐이었다. 여전히 아직 수뇌에 떡하고 자리잡은 이들은 제가 살아온 세월을 죽자고 포장하고 안주하는 꼰대였고, 그 꼰대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은.
‘나 때는 말이야’와, ‘젊은 애가’였다.
상대가 여자인 경우에는, ‘여자가’, ‘여자니까’가 추가로 붙고.
요즘은 시대가 시대다 보니 꼰대 소리 듣기 싫어서 대놓고는 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아오고 버텨 온 이들이 그 좋은 핑계와 뒷담을 포기할 리는 만무했다.
어딜 가도 결국 여자란 성별은 떨어지지 않는다. 사람을 상대하면 더더욱.
결국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선택한 건 차라리 필요할 땐 그걸 십분 활용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내가 여자인 걸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 꼰대 인식 바꾸겠다고 인생을 꼴아박고 싶지는 않았으니 별수 있나.
“좋아. 퍼펙트.”
“자기 얼굴 보면서 그러면 좋으신가요.”
“곤죽된 네 얼굴 보면서 한번 해 볼래?”
“아니. 느. 늦었다. 얼른 가자. 누나!”
“흐음. 아쉽네.”
아주 색다른 경험일 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자, 식겁한 동생 놈이 얼른 가자며 등을 떠밀었다. 저지한다면 얼마든 저지할 수 있지만, 애쓰는 자태가 사뭇 귀여워 이번엔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난 택시 탈 건데 넌 걸어갈 거야?”
“어? 왜 나만! 나도 태워 줘!!”
“매일 뛰어간다길래 체력 관리하는 줄 알았지.”
“오늘은 그런 거 없어! 나도 탈 거야!!”
빽빽거리는 게 어릴 때랑 정말 하나도 달라진 게 없었다. 이래서 얠 놀리는 걸 그만둘 수 없다니까.
“좋아. 전장에 뛰어들어 보자고.”
본인이 알면 길길이 날뛰겠지만.
* * *
“오. 웬일로 전체 소집이야?”
국내 랭킹 5위에 빛나는 보석술사 레쓰비가 웬일로 바글바글한 길드의 모습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자유주의와 개성이 넘쳐나는 집단이라 소집을 한다 한들 이런저런 사정으로 못 나오는 이들이 태반이었으니까.
레쓰비도 거의 몇 달 만에 길드에 온 것이었다.
주위를 휙휙 돌아보자, 아는 얼굴들이 전부 집합해 있었다. 웬일로 원티드 전원 참석이었다.
“뭐야. 해가 서쪽에서 떴어? 이럴 리가 없는데?”
옆에서 ‘부르면 잘 나오기나 하든가!!’라는 유라 님의 빡침 어린 외침이 들려왔지만, 멤버들은 익숙하게 흘려들었다.
무지한 레쓰비를 위해 친절한 소환술사가 해맑게 말했다.
“이번엔 특별하잖아. 무려 원티드 사상 첫 일반인!”
“아. 그게 뭐가 특…… 뭐? 일반인?!!”
“얘 진짜 소식 느리다.”
“또 어디 광산 가서 보석 캐고 있었냐.”
“그거 허락은 받았지?”
옆에서 걱정스럽게 떠들었지만 레쓰비의 귀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일반인…… 일반인이라니!!
다 헌터투성이라 제대로 길드를 관리해 줄 일반인이 필요했지만, 원티드 특성상 잘 적응할 수 있는 인간을 찾기도 힘들뿐더러, 길드장을 호구로 보는 인간들이 천지라 결국 아무도 못 뽑고 결국 공석으로 놔뒀던 그 자리의 주인공이 나타났다고?!
언빌리버블한 기적에 레쓰비가 기함을 토하며 황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딨어? 어딨는데! 당장 눈으로 봐야 믿을 거 같아!!”
“아직 안 왔어. 진정해라. 너 보고 도망갈라.”
“그래.”
길드원들의 만류를 충분히 이해는 했지만,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는 레쓰비를 보며 사춘기 고딩께서 첨언했다.
“되게 귀엽게 생기심! 우리 맨날 달달 볶는 노처녀 아줌마와는 천지차…….”
“아. 이 고딩님이. 내가 입 털 때는 생각을 하고 털랬지?”
“나님은 항상 깊은 생각을 하고 말을 함. 아줌마가 현실을 못 받아들이는 것뿐!”
“이게 진짜!!”
유라와 고딩님께서 천장을 날아다녔다.
“아. 또 시작이다.”
“어째 올 때마다 저거 안 보는 날이 없어.”
“저 고딩 녀석은 그렇게 맞았으면 슬슬 학습할 때도 되지 않았나?”
“그러면 고딩이 아니지.”
레쓰비에도 익숙한 광경에 얼굴이 짜게 식었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도 저리 똑같은지, 이젠 식상했다.
익숙하게 아무도 말리지 않는데, 하품까지 하던 누군가가 문득 의문을 제기했다.
“야.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말린다고 듣냐. 그냥 냅둬. 금방 끝나겠지.”
“아니아니. 저것들 걱정하는 게 아니라 우리 레어분.”
“……!”
“……아.”
잠시간의 침묵이 그들 사이에 맴돌았다.
물론, 침묵은 짧았다.
“야! 저거 말려! 빨리!”
“그냥 공간을 차단시켜서 저 둘 치워 버리자! 히키코모리 녀석 어디 갔어?!”
“히키! 히키야!! 야. 이 새끼 구석에 찌그러져서 힘줘도 안 일으켜져!”
“저 후드부터 끌어내려! 빨리! 그럼 알아서 튀어올라!”
“넌 그런 고급 스킬을 왜 이제 말해!!”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둘만 날뛸 때는 그래도 다른 이들은 느긋하게 말이 없어서 그래도 그렇게 큰 문제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전원이 혼비백산해 여기저기서 난리를 치니 완전 난장판이었다.
“……내 후드……, 벗기지 마…….”
“저 둘만 치워 주면 안 벗길게. 그러니까 빨리…!”
“…….”
하필 제일 안 좋은 타이밍에 도착한, 윤지호 한정으로 내숭이란 내숭은 몽땅 떨어도 모자란 남자가 현실을 부정하며 눈을 찔끔 감았다.
왜 이런 것만 보여 주게 되는 건지…….
한 남자의 좌절을 전혀 모르는 장본인들은 여전히 힘차게 남자의 위를 날아다녔다.
“지호 씨 오기 전에 반드시 네 입을 찢어 놓거나, 치워 놓거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한다. 내가!!”
“헹! 아줌마가 할 수 있으실 거 같음?”
“하늘 같은 네임드 랭커를 우습게 보지 마!”
“랭킹이 전부가 아닌 거 모르는 사람도 있음? 괜히 눈에 보이는 순위로 잘난 척 노노.”
이 와중에 사춘기 고딩님께서 참 맞는 말을 하셨다.
처맞는 말.
“내가 폼으로 너보다 랭킹이 높은 게 아니거든……!”
서유라가 회심의 딜 예고를 선포했고.
“이 몸의 음악 앞에서는 랭킹 따위 다 의미 엄슴!”
그에 맞서 고딩님이 바이올린을 소환해내었다. 그걸 보며 한 길드원이 득달같이 외쳤다.
“모두 귀 막아!”
“아놔, 저 미친놈이……!”
“여기서 그딴 걸 꺼내면 어떡하냐고……!!”
외침과 동시에 모두 꼼꼼하게 귀를 막으며 절찬리 욕을 쏟아내었다. 저 바이올린이 자아내는 음의 위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휘황찬란한 욕들의 향연에도, 고딩님께서 유유히 활을 현에 올려놓았다.
띵―
“……!!”
“안 돼……!”
그 순간,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하필, 엘리베이터 있는 쪽으로 도망가며 연주할 준비를 하던 고딩께서는…….
드르륵―
“타이밍 대…… 악―!”
“누나!”
“앗. 본능적으로 그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날아오는 존재에 놀라 본능적으로 옆으로 피한 후 들고 있던 클러치백으로 얼굴을 후려친 화끈하신 여성분의 손에 그대로 바닥과 찐한 키스를 나누었다.
“꾸엑―”
“……죽었나?”
“누나. 그러면 누나가 죽인 거거든?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인정. 괜찮으세요?”
태연하게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남매의 모습에, 기함을 한 모두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앞으로 걱정 없겠다.”
“……응.”
진짜 ‘찐’님이 등장하셨다고.
* * *
또각또각.
낭랑하게 울리는 구두 소리가 아주 짜릿했다.
역시 힐은 나의 최대의 무기.
낭랑하게 울리는 소리와 함께 집중되는 시선에서 한껏 고양돼 위풍당당 워킹을 시전했다.
내 워킹에 옆에서 나란히 걸으려 노력하던 쭈구리가 결국 포기를 선언하며 찌그러졌다.
“와. 진짜 이 모습도 적응 안 되지만 행동은 더 적응 안 된다. 시선들이 부담스럽지도 않아?”
“쭈글아. 이 시선이 바로 기선제압의 기초거든? 시선이 쏠린다는 건 그만큼 내가 카리스마 있단 뜻이란다.”
“장래희망이 사장님이세요?”
“아니. 주님.”
단호하게 답했다.
사장님보다는 주님이지.
그간의 경험으로 보아, 개고생 천지인 사장님보다는 그 위의 주님. 건물주님이 역시 최고였다.
내 원대한 꿈에 쭈굴이가 기가 차단 얼굴을 했다.
“미쳤네요.”
“원래 꿈은 커야 하는 법. 헛소리는 이쯤하고, 너도 얼른 얼빵한 얼굴 수정해. 사회생활의 가장 기초가 호구로 보이지 않는 거야. 빨리 바꿔.”
갑작스럽게 내려진 명령에 본능적으로 얼굴 표정을 가다듬던 윤지우가 한창 표정을 만지다 문득 생각난 의견을 피력했다.
“……누나가 말하는 얼빵한 얼굴 대표가 여기 대표인데?”
“그래서 호구 취급 당하잖아.”
“…….”
노빠꾸 단답에 윤지우가 할 말을 잃은 듯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사실인데 뭐.
이렇게 빡세게 꾸미고 온 이유도 그 탓이었다. 현 길드 상황을 미리 파악하고 싶다고 미리 길드 자료를 받아본 날, 그대로 혈압으로 돌아가실 뻔했으니까. 뒷목을 하도 잡아대서 아직도 뒷목이 뻐근했다.
나랏일한다는 인간들의 기본 중 기본이 ‘상도덕이란 개나 줘 버려’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노답으로 다 당하는 곳도 없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아니 뭐, 편법은커녕 찌끄레기도 안 지키는 법을 다 지켜 가면서 당하고 있어!!
빡침을 그대로 워킹으로 표현시켰더니 위풍당당했던 워킹이 토네이도급으로 격해졌다.
동생 놈이 토네이도급 워킹에 조용히 몸을 사렸다.
너무 열이 받아서 그런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띵―
드르륵.
“뭐 해. 안 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동생 놈이 멍하게 넋 놓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왜 저러나 싶어 말을 걸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녀석이 후다닥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얼빵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보며 나는 새삼 고민에 휩싸였다.
나는 분명 나름 잘 키운 거 같은데, 얜 대체 왜 이럴까.
동생을 열심히 키운 죄밖에 없는 장녀의 한탄을 눈치챈 건지 동생 놈이 발끈했다.
“뭐. 왜. 뭐!!”
빼애액―!
남는 건 자존심밖에 없는 쭈구리가 한껏 존심을 세웠다.
한마디만 하면 그대로 밟을 수 있는 존심이었지만, 그래도 어린애의 존심은 소중한 것이었기에 너그럽게 넘어가 주기로 했다.
“누나. 근데 왜 다 모이라고 한 거야?”
엘리베이터에 타니까 비로소 정신이 든 듯 동생 놈이 그럴듯한 질문을 했다.
“일단 첫 번째는 이 길드의 단합력을 보는 거고.”
“단합력?”
“원티드는 워낙 분위기가 자유분방한 걸로 유명하니까. 자유로운 건 물론 좋지만 정작 단체로 활동해야 할 때 안 모이면 그런 길드가 무슨 의미가 있어?”
“……아.”
“일단 길드도 엄연한 회사고, 돈을 버는 이익집단이야. 그런 만큼 기준은 확실해야 하고, 원하지 않더라도 단체행동을 해야 할 때가 있지. 그때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이곳이 이미 집단으로서의 의미를 잃었다 생각하면 돼.”
“만약 다 안 모였으면?”
당연하게 나올 말이지만, 그만큼 멍청한 반문도 없다 생각하며 내가 답했다.
“넌 내가 떠내려갈 배에 계속 타고 있을 머저리로 보이냐?”
“……못됐다.”
칼 같은 대답에 동생 놈이 평했다.
멍청한 소리였다.
“네가 사회인이 덜된 거지. 사회에 섞여 살며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정말 짜증 나지만 내게 필요한 건 얻기 위해 노력하고, 해가 될 건 가차 없이 버리는 거거든. 그걸 못하면 본인이 망하는 거고.”
기껏 도움 되는 말을 해 줬지만 별로 이해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럼 두 번째는?”
“두 번째는 길드원들 파악. 이건 뭐 당연한 거고, 마지막은…….”
가장 중요한 엑기스를 말하려 하는데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물론 그렇다 해서 할 말을 멈출 필요는 없었지만.
띵―
“……!!”
“안 돼…!”
드르륵―
결국 마지막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타이밍 대…… 악―!”
“누나!”
“앗. 본능적으로 그만.”
퍽―
갑작스럽게 날아오는 검은 인영에 본능적으로 클러치백으로 받아쳐 버렸다.
아. 몸만 피하면 되는데, 당하고는 못 사는 몸이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꾸엑―”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머리를 풀 가동 시키고 있는데, 제 존재감을 알리듯 인영이 바닥과 찐한 키스를 나누며 굉음을 내었다.
“……죽었나?”
짧은 단말마와 함께 정말 운명이라도 한 듯 쥐죽은 듯이 누워있으니 서서히 불안감이 엄습했다.
불안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불길한 소리를 입 밖에 내자, 엎어진 이를 살펴보던 동생 놈이 짜증을 가득 담아 소리쳤다.
“누나. 그러면 누나가 죽인 거거든?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인정. 괜찮으세요?”
서둘러 무릎을 굽혀 제가 살해(?)한 이를 살펴보았다.
“얼굴 상태부터 보자.”
“그래. 안면 폭격이었으니.”
“시끄러워.”
“끄윽…… 넘, 내 잘생긴…….”
바닥과 키스한 얼굴을 돌리자마자 들리는 헛소리에 우리는 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안 죽었네.”
“후우. 십년감수했네.”
“그래도 내가 진짜 사람을 죽일 정도로 때리진 않거든?”
지금은 랭 1위니까 잘못 때리면 정말 죽긴 하겠지만.
이번엔 그냥 클러치백을 갖다 댄 수준이기도 하고 어차피 나만 아는 것이니 뻔뻔하게 응수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역시 내 화신의 철판은 알아줘야 한다며 성의 없이 휘파람을 붑니다.]
시꺼.
성위의 입을 다물게 하며 천천히 얼굴을 살폈다.
어쩐지 낯이 익었다.
“어, 이 얼굴.”
망가지긴 했지만, 이 얼굴은…… 고딩님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첫만남부터 그렇게 강렬했던 인상을 남겼는데 잊었을 리가.
“……망했다.”
솔직한 감상이 입 밖으로 튀어나가자, 동생 놈이 세상이 무너지기라도 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첫 계획부터 화끈하게 어그러진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할 리 없는 내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누나. 어쩔 거야……?”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드니,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저를 향해 있었다.
그런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아무리 낯짝이 두껍다 해도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결국 멋쩍게 꺼낸 말은, 참 갑분싸 하기 좋은 말이었다.
“…음, 안녕하세요?”
“…….”
……이런 젠장.
* * *
“……그, 죄송합니다. 애가 좀…….”
“고등학생이면 한창 혈기 왕성할 때죠.”
혈기 왕성은 얼어 죽을. 하필 이런 개 같은 타이밍으로 나한테 빅엿을 주다니.
고딩의 그 넘치는 혈기가 눈앞에 보였다면 당장 싹 다 지르밟았을 누군가가 그런 속내는 쏙 감춘 채 해사하게 미소를 지었다.
“지호 씨. 이쪽으로.”
“아. 네!”
근처에서 동생 놈이 ‘이 인간은 누구지…….’라는 얼굴로 보고 있긴 했지만, 나름대로 교육을 잘 시켜 놔 입을 털지는 않았다.
역시 조기 교육은 아주 중요하다.
실없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 어느새 주인공님이 제 자리를 내게 양보해 주었다. 본인은 기꺼이 사회자 역할을 자처하며.
“앞으로 우리 길드의 전체적인 관리 총괄을 맡아 줄 윤지호 씨입니다.”
“첫인상이 중요한데, 좋게 보이진 않았을 거 같아 민망하네요. 윤지호입니다.”
아까의 실패가 있어 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능숙하게 인사를 하자,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날아들었다.
“하하. 아니에요!”
“저놈이 그동안 한 뻘짓이 얼만데! 맞아도 쌉니다!!”
“부길마도 못한 일을 하신 건데요!”
“앞으로 우리 대빵!!”
“야! 그런 건 속으로 말해야지!”
“……?”
중간에 이상한 소리도 껴 있긴 했지만.
어쨌든 다들 환영하는 분위기여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다 시큰둥하거나, 어쩌라고 같은 분위기였으면 이 자리에서 퇴사할 수도 있거든. 첫인사에서조차 반기지 않는 조직의 분위기는 후에도 바뀌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았으니까.
적어도 나는 내가 갈려야 할 일인 것도 짜증 나는데 협조적이지도 않으면 매우 빡쳐서 다 집어던질 위인이라 이 간단한 분위기가 매우 중요했다.
“신입이 오니 모이라고 한 것밖에 없었을 텐데 이렇게 원티드 전원이 모여 주신 것에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원티드 길드원들은 자유분방하기로 유명해서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그래도 모두 원티드를 아끼고 있는 것 같아서 매우 기분이 좋네요.”
“저희가 개인적으로 행동하긴 하지만, 그래도 원티드로서 모이는 일에까지는 그러지 않아요…….”
유라가 조심스럽게 항의를 하자, 모든 길드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도에 나는 더더욱 이 사람들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주인공님이, 정말 저 같은 사람들만 모아 놓았다.
“우선 저는 앞으로 이 길드의 모든 관리 총괄을 맡게 됐습니다. 이 길드의 체계부터, 외부인사. 앞으로 영입할 인재들까지. 전체적으로 길드장님이 헌터 일을 하시는 동안 못하시는 모든 일을 맡게 될 겁니다. 그렇다 보니 제가 하는 일이 독선적이게 느껴지실 수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
“만약 그게 불편하신 분들은 지금 말씀해 주세요. 아직 근로계약서 쓰기 전이니까, 엎으려면 쓰기 전에 엎어야 하거든요.”
앞으로 내가 할 일은 이 원티드의 근간을 흔들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 하더라도 원티드 자체를 쥐고 흔드는 일이었기에 그 자체를 불편하게 느끼는 이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이번에 들어온 윤지우를 포함해 원티드에 소속된 헌터 총 13명을 제외한, 경호원이라든가 의료 직원들, 연구원들은 이런 말로 표현하긴 좀 그렇긴 하지만 얼마든지 갈아 치울 수 있었다.
보조 인력은 얼마든지 충당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대체 인력이 존재하지 않는 이 13명의 헌터 중 누구 하나라도 불편을 느끼고 원티드에서 겉돌기 시작하면 그건 큰 문제였다.
그랬기에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예고를 하는 것이었다.
“말씀하실 분, 없으신가요?”
아무리 좋게 얘기해도 협박과 그리 다르게 들리지 않을 내용이라 어느 정도의 반발은 각오했다.
오히려 그 반발을 위해 꺼낸 말이기도 했다.
처음에 반발한다면, 후에 갈등을 겪어도 더 해소하기 쉬우니까.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냉정한 생각으로 점철된 말이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렇게 청산유수로 입을 털었는데, 누가 여기서 나는 별로라고 발언을 하겠느냐며, 제 화신의 영특함에 매우 기특해합니다.]
별로 그렇게 반갑지 않은 영특함을 칭찬하는 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조용히 그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자. 화를 낼까. 넌 뭐냐고 소리를 지를까.
사실은 이대로 그냥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마음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무리 주인공님을 위해서라지만, 주인공님의 뜻을 꺾어야 하고 그건 결과적으로 그를 상처 입힐 테니까.
전자는 몰라도 후자는 정말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누군가 말려 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어진 반응은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뭐야. 아직 안 썼어―?!”
“아놔. 이놈의 길드는 뭐 이런 것도 제대로 못 해?!”
“부길마! 길드장이 못 챙기면 부길마라도 당장 챙겼어야지!”
“야! 이건 길드장이 해야 하는 일이거든?!”
“제 몫도 제대로 못 받아먹는 길드장이 이런 걸 할 수 있을 거 같아?!”
“아. 인정.”
“……다들?”
디스를 하는 건지, 칭찬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현장에서 나 홀로 침묵에 잠겼다.
……이, 이건 뭐지.
예상한 것과는 한 9만 광년 떨어진 느낌에 진심으로 당황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네가 한 말의 포인트가 매우 빗겨나간 거 같지 않냐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매우 정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 같으니 이제라도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떻냐 나지막이 충고를 건넵니다.]
……아저씨가 봐도 그렇지?
아무리 봐도 회사로서는 썩 정상적이라고 보기 매우 매우 힘들었다.
정석적으로 일을 하러 온 원칙적인 인간이었다면 뭘 해야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하다 도망쳤을 것이다.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자’가 모토인 나도 회사는 원칙대로 굴러가는 것을 선호했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다면 결말은 대개 같았으니까.
“야. 그만해. 길드장님 운다.”
“괜찮아, 이 정도로는 안 울어. 기껏해야 땅 정도 파겠지.”
“그 정도는 해도 돼. 우리가 백만 번 말해도 들어 처먹질 않잖아!”
“차라리 세계 최고 공대왕이 되는 걸 꿈꾸라고! 호구왕 말고!”
“아직 세계 최고 호구왕은 아니거든?!”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거의 목표치에 근접하잖아! 반대로 하자고 반대로!”
“그래. 그 말은 찬성! 격하게 찬성! 길드장―!!”
“아, 저…… 그게…….”
“어? 길드장 도망가려 한다. 잡아!”
“어디 가, 길짱?”
“……안 갔습니다.”
“애들도 못 속일 얼굴이야. 길드장.”
“풋―”
왜 이렇게 웃음이 새어 나오는지 모르겠다.
정말 회사로서는 좋지 않지만, 내 커리어에 득이 되지 않는다 해도 계속 있고만 싶어지는 곳이었다.
길드 자료를 보며 화병이 나면서도, 왜 길드원들이 이런 취급에도 이곳을 떠나지 않는 것인지, 주인공님이 왜 이곳을 유지하려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곳은 그들의 또 하나의 집이었다.
어쩌면 가족보다 더 자신을 이해해 주고, 존중해 주는…… 또 다른 가족과 함께하는 집.
망설이던 마음이 솜털처럼 가벼워졌다.
이들의 집을, 꼭 지켜 주고 싶었다. 유지한, 당신이 그렇게나 소망하던 가족을.
“어째 제 방침은, 길드장님만 이기면 될 거 같네요.”
“에? 길드장님은 이미 함락하신 거 아니었어요?”
“아까부터 계속 눈치 보던데?”
“……?”
이건 또 뭔 소리인가.
고개를 돌려 애정하는 주인공님을 바라보자, 토마토와 같은 얼굴을 시전하신 주인공님이 필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아닙니다! 아니에요―!!”
필사적으로 항변하는 게 매우 애처로웠지만, 애석하게도 그 탓에 오히려 더 그 변명이 썩 와닿지는 못했다.
“왜, 힐끔힐끔거리나 했는데 역시…….”
“쉿. 눈칫밥 먹고 자라신 분이야. 본능일 거란 말이야. 몇 번 보지도 않았을 텐데.”
다크를 개그로 발랄하게 승화시킨 말에 다른 이들이 놀리듯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탓에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더 달아오른 얼굴로 주인공님이 눈물을 글썽였다.
“아니, 다들…….”
나 역시 조금 놀리고 싶었던 마음이 애처롭게 차오른 눈물에 쏙 들어갔다.
서둘러 주인공님에게 다가가 주인공님의 얼굴을 잡고 살피며 그새 눈가에 고인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 냈다.
“알았어요. 알아요. 다들 조금 재밌게 하려던 것뿐이었어요. 그러니까 뚝―”
“……흑.”
“앞으로는 다들 안 그럴 거예요. 싫다고 해도 그렇게 만들어 줄게요. 그러니까 울지 마요. 응?”
미인의 눈물의 위력은 대단했다. 망울망울한 눈망울을 보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런 건 소설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는데.
역시 소설 속 주인공이라 그런지, 저 때문에 일어난 반응도 소설처럼 만들 줄 알았다.
“……안…… 웁니다.”
“응. 그럼요. 내 보스인데.”
철부지 동생을 어르고 달래던 솜씨를 발휘해 간신히 주인공님을 달랜 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 위험했어.
진심으로 안도했다. 하마터면 그대로 끌어안을 뻔했다. 미인의 눈물은 진심으로 죄악이었다.
아니, 왜 우는 것도 예쁘냐고.
새삼 주인공을 요즘 대세인 평범남이 아닌, 우리나라 최최상위급 미남으로 그려 놓은 작가 놈을 원망했다.
저기서 코가 조금이라도 낮았으면, 눈이 조금이라도 작았으면, 결코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라 섣부른 단언을 하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주접은 그만 떨고, 네 동생도 아니니 그 이상의 접촉은 매우 보기 불편하니 얼른 떨어지라고 젠틀하게 권고합니다.]
주접이라니!!
천인공노할 소리에 분노했지만, 덕분에 정신이 들기도 해 성위에게 따지는 건 미뤄 두고 먼저 주인공님에게 붙어 있던 손을 떼어 냈다.
“……아.”
손이 떨어져 나가자, 매우 아쉬워하는 것만 같았지만 기분 탓이려니 했다.
대신 왠지 어린아이 같은 시선이 마음에 걸려 나도 모르게 주인공님의 머리를 살포시 쓰다듬어 주고 다시 이야기를 돌렸다.
“그럼 아무도 불만 없으신 줄 알고 이야기를 진행하겠습니다.”
“처음부터 그러셔도 됐는데.”
“그래도 개개인의 의견은 존중해야죠.”
“길드장님이 오케이면 저희는 거의 다 오케이라고 보시면 돼요. 사람을 너무 좋게 보기는 하지만 길드장님이 마음에 들어하는 분을 저희가 싫어할 일은 없거든요.”
의외였다.
주인공님은 분명 좋은 사람이었지만, 같이 짐을 짊어져야 하는 길드원들의 입장으로서는 저 호구 근성 때문에 분명 많이 당하기도 했을 터인데, 저런 무한한 신뢰라니.
“……고마워요.”
자기가 뭐를 가지고 있는 줄도 모르고 퍼주는 이 바보 같은 남자를 사랑해 줘서.
아끼고 애정하는 주인공이었지만, 현실적으로는 자기편에게 버림받기 아주 쉬운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기에 더욱 그 마음이 값지게 보였다.
그런 내 감사 인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길드원들이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하. 아니에요. 굳이 길드장님 때문이 아니라도 저희는 지호 씨가 아주 마음에 쏙―! 듭니다.”
“동생을 저렇게 잘 키웠는데 처음부터 믿고 있었습니다. 하하!”
“누나가 날 키우진 않았거든요!?!”
“아니. 딱 봐도 넌 누나가 80% 이상 키웠어.”
“90% 아니야? 누나 집 나간다고 며칠 내내 입 댓 발 나와 있었잖아.”
“아. 선배!!”
뭐, 어떻게 생각해도 상관없었지만. 별로 중요하진 않은 이야기이니 나는 다시 원점으로 화제를 돌렸다.
“다들 어느 정도 길드의 현 상태는 알고 계시는 거 같네요.”
“뭐. 아무래도 오래 있었으니까요.”
“다행이에요.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너무 길었거든요.”
내게 그런 인내심 넘치는 착한 재주는 없었다. 장담컨대, 입 떼는 순간 빡칠 거다. 요약해도 한 사건당 한 장 정도라고 치면, 거진 백 장에 다다를 정도인데. 만약 정말 알고 싶으면, 나한테 묻지 말고 그냥 직접 봐 줬음 싶다.
제발.
“아시다시피. 현재 원티드의 상태는…… 매우 개판입니다.”
변명하자면, 매우 순화한 표현이다.
“큰 예로 꼽자면, 원티드의 레이드 부속물을 따로 계약을 한 것도 아닌데 관례라며 센터가 멋대로 회수해 가서는 시세의 반도 모자라 반의반 수준으로 후려치고 있고.”
“……네?”
“……응?”
아주 대형 중 가장 기본을 말했을 뿐인데, 아주 반응이 격렬했다.
물론 그들도 후려쳐진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반 정도 아니었어?!”
“반의반이면 우리한테 그 정도 배당이 떨어질 리가 없어!”
후려쳐진 강도가 그들이 피부로 느낀 것과 매우 차이가 컸을 뿐.
그럴 만했다. 그들이 둔해서가 아니라, 분명한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럼 그동안 우리가 받은 금액은……?!”
마침 한 분께서, 아주 좋은 질문을 해 주셨다.
“물론 여러분이 지급받으신 금액은 여기 아주, 아~주 훌륭하신 길드장님께서 손수 발로 뛰어서 메꾸신 금액들입니다.”
“…….”
모두의 시선이 존경해 마지않을 길드장님께로 쏟아졌다.
“그…… 그게…….”
우리의 주인공님이 당황해 식은땀까지 흘리며 변명을 쥐어짜 내려 노력했다.
참으로 애잔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속으로 이 알찬 사이다에 환호성을 내질렀다. 차마 대놓고 할 수는 없었지만 답 없는 고구마를 꾸역꾸역 먹고 사는 모습에 울화통이 터졌었으니까.
“자, 우리를 위해 손수 발 벗고 뛰어 주신 길드장님께 박수를!”
중간중간 주인공님이 제발 도와달라는 SOS를 쳤지만 가뿐하게 못 본 척하며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다.
“아오. 저걸 진짜.”
“길마님. 하실 말씀?”
“……전, 그게.”
“없겠지. 저 양반이. 후우…….”
착한 건 물론 좋은 거지만, 저건 좀 당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일 하나뿐이라면 좋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건을 포함해서 현재 원티드는…… 아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
“저는 그냥 이 길드 폐업 신청하고 다시 새로 길드 새워서 정비하는 게 빠르다고 판단할 정도로 노답입니다.”
“…….”
진심이었다.
이 길드는, 정말 회사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조차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걸 다시 살리는 건, 정말 인력과 돈을 갈아 넣어도 쉽지 않은 일이다. 진짜 차라리 다 무로 돌리고 새로 만드는 게 훨씬 쉬웠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동안 원티드를 방패막이로 신나게 이용해 온 정부는 절대로 원티드란 이름을, 이 길드원들보다 버리지 못할 것이 자명했으니까.
결국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였다.
“하여, 저는 길드를 재정비할 겸, 그동안 레이드를 하시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던 여러분께, 휴가를 주려 합니다.”
“……설마?”
주인공님이 설마 그럴 수는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기꺼이 그 기대를 배반할 준비가 만만이었다.
원래 설마가 사람 잡는 법이다.
“오늘부로 원티드는 무기한 파업을 선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