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취직과 던전은 언제나 갑작스럽게
“똥별님. 똥별아. 아니, 이 똥별 쉑. 나와. 당장 튀어나오라고!!”
이쯤에서 해명하건대,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다. 요즘 믿지 못할 일들을 연달아 겪어서 그런 것인지, 유독 감정 조절이 잘 안 되는 것뿐.
나름 멀쩡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멘탈은 이미 터져 버린 후였던 건가.
새삼 현타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며!!”
내 평생 내 입으로 꺼낼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말을 토해 내며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누가 보면 신파극의 여주인공이었다.
연애할 때도 이렇게 처절하게 신파극을 찍어 본 적이 없건만. 그걸 사람도 아닌 성위한테 하고 있는 꼴이라니. 진짜 어쩌다 내 신세가 이렇게 되었는지.
“……흑. 진짜 짜증 나.”
구질구질한 자신의 신세에 진심으로 눈물이 찔끔 나왔다.
진짜로 눈물이 나와서 짜증을 가득 담아 있는 대로 눈가를 짓이겼다.
그렇게 소리를 질러도 묵묵부답이던 성위 놈이 눈물에 당황이라도 했는지 그제야 제 존재를 알려왔다.
[‘이매망량’ 님이 울 정도로 놀랐냐고, 미안하다 합니다.]
[잠시 한눈판 사이에 이렇게 될 줄은 자신도 몰랐다고, 안절부절못합니다.]
기계음으로 전달되는 말이지만, 그래도 진심이 느껴지는 것 같아 눈물이 좀 잦아들었다.
“……그래서, 뭐가 어떻게 된 건데?”
나 혼자 떨어진 건 알겠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냐 묻자, 그래도 묵묵부답이던 사이 알아보기라도 한 듯, 성위가 막힘 없이 대답을 해 주었다.
[아무래도 근처에 쪼개져 있던 대로 각각 다른 곳으로 떨어진 것 같다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답합니다.]
……엥?
쪼개졌다고?
달갑지 않은 소식이었다.
“그럼 어떻게 쪼개진 건데?”
[‘이매망량’ 님이 너와 유지한만 각각 따로 떨어지고 그리고 서유라, 최민현, 네 동생 윤지우가 셋이 뭉쳐 있다고 전합니다.]
“후우…….”
떨어졌던 심장이 도로 제자리를 찾아왔다.
던전에 떨어지고 나서 가장 먼저 걱정한 건 사실 윤지우였다. 같이 안 떨어졌으면 참 좋았겠지만, 내 바로 근처에 있던 윤지우가 떨어지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나야 상관없지만 그 녀석이 홀로 던전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로또와 같았다. 그랬기에 혹시 녀석도 혼자 떨어졌을까, 심장이 철렁였다.
천만다행이었다.
베테랑 헌터가 둘이나 있으면 적어도 생각했던 불행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유지한이야, 주인공이고 워낙 대단하신 분이니 걱정할 필요도 없고.
분명히 그럴 터인데…….
‘윤지호―!’
이상하게 지금은 윤지우보다 그가 더 걱정이 되었다.
그 얼굴 때문이었을까.
정말,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인데.
그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니까.
다 알고 있으면서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격하게 끓어오르던 분노와 짜증이 잦아드니 이제는 다른 감정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이런 나를 보며 성위가 매우 떨떠름하게 말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너 자신은 걱정되지 않냐. 띠껍게 묻습니다.]
[내 입장이 아니라도 내가 너였으면 당장 힘 한번 써보지 않은 자신을 걱정했을 것이라며 쓸데없는 생각은 그쯤하고 너 자신부터 걱정하라 합니다.]
“……아.”
성위의 말대로 나는 나를 가장 먼저 걱정해야 하는 게 맞았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하지만 여전히 나 자신은 대체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인지 조금도 걱정되지 않았다.
우스울 만큼.
그야…….
“네가 있잖아.”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건 또 뭔 소리냐 묻습니다.]
“행복하게 해 주시겠다며. 성위가 제 입으로 한 말을 지키지 않을 리도 없고. 또, 네가 만들어 준 랭킹 1위잖아. 나. 여기서 회까닥할 정도였으면 애초에 그 타이틀이 안 달렸겠지. 시스템이 바보도 아니고.”
뒷말은 뒤늦게 떠올린 것이지만, 그래도 전부 진심이었다.
너만 믿고 있다고 자신만만하게 웃자, 시스템이 알려 주지도 않았건만 성위가 환하게 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 느낌에 입가에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나는 기지개를 한번 쭉 켰다.
“음. 그럼 여기 계속 있는 것도 그렇고 기왕 온 거 구경 한번 해야지.”
[‘이매망량’ 님이 이 던전 클리어라도 할 생각이냐 묻습니다.]
“미쳤어? 무슨 구설수에 오르려고. 그냥 내 힘도 확인할 겸, 우리 주인공님 힘이 어느 정도인지 구경 가자.”
어느 쪽으로 가면 돼?
대수롭지 않게 묻자, 성위가 굉장히 떨떠름해하면서도 길을 알려 주었다. 그런 성위를 모른 척하며 무심히 걸음을 옮겨, 세이프 가드를 넘어섰다.
사실 성위에게 되도 않는 구라를 쳤다.
그냥 내가 미친 거 같았다.
어떻게 생각해도 이점은 하나도 없는데 왜 그를 향해 걸음을 옮기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잘 모르겠다.
아아. 이게 다 그 표정 때문이었다.
대체 왜 기껏해야 얼굴 몇 번 본 내게 그런 얼굴을 하는 건지…….
“여긴 뭐 어떤 것들 나와?”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건 룰상 알려 줄 수 없고 어차피 너한테는 다 X밥이니 그냥 직접 보라 합니다.]
“……거참 대답 한번 성의 있네. 뭐, 안심은 된다.”
심드렁하게 성위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문득 또다시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윤지호―!’
……그러고 보니, 내가 그에게 내 이름을 알려 주었던가?
* * *
한편, 느긋하게 던전 탐험을 하고 있는 당사자와 다르게 뒤이어 던전에 진입한, 한 남자는 그렇게 느긋해질 수가 없었다.
쏴아아―
지호에 이어서 빛에 감싸져 던전에 입장한 지한은 익숙하게 바닥에 착지를 하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는 고요한 세이프가드. 기감을 넓혀 살펴봐도 자신 외의 사람은 없었다.
지한은 곧바로 지호를 찾을 준비에 착수하며 울렁이는 심장을 억눌렀다.
‘윤지호―!’
지호가 빛과 함께 사라지는 순간 쿵― 주저앉은 심장이 여전히 주체가 안 됐다.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되새겼다. 걱정할 필요 없다. 이곳은 던전이다.
이미, 수십 수백 번, 수없이 다양한 난이도를 클리어해 온 던전.
제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지한은 각성하고 지금껏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남자였다. 이번에도 분명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명한(?) 그녀는 분명히 움직이지 않고, 누군가 던전을 클리어할 때까지 안전한 곳에서 구조를 기다릴 테니까.
그렇게 계속 되뇌니 조금씩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평정은 익숙하게 울리는 시스템과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에스칼리도의 미궁’에 입장하셨습니다.】
【‘에스칼리도의 미궁’의 난이도는 A급입니다.】
“……!”
잘못 들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 귀를 의심했다. 느껴지는 익숙한 위압감이 틀림없는 진실임을 분명히 말해 오고 있음에도, 지한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자신이 빠진 건 괜찮았다. 유라나, 민현이 빠진 것도, 하다못해 지우가 빠진 것도 괜찮았다.
그도 각성한 헌터였고, 혼자 떨어졌다 한들 A급으로 각성한 헌터가 쉽사리 잘못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나.
‘……아, 네. 저야말로! 그날은 죄송했습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일반인이었다. 아무런 힘도 없는.
A급 던전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없다시피 한 평범한 사람.
“윤지호.”
심장이 내려앉았다.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만약 잘못된다면…….
“흡―”
가정만 했을 뿐인데도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무게가, 그를 내리누르는 고통의 무게가 달랐다.
아마, 그녀가 일반인이 아니라 헌터였어도, 하다못해 자신보다 강하다 해도 제 행동은 같았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위기에 빠진 일반인들을 수없이 구하면서도, 한 번도 이런 감정이 든 적이 없었으니까.
민간인이 던전 브레이크에 휘말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얼른 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을 뿐, 이렇게 절망적인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이렇게 처절하게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감각 따위, 손톱만큼도 느끼지 못했다.
“……허억, 헉―!”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든 진정시키기 위해 마음을 다독이는데, 성위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며 말을 걸어왔다.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께서 네 멘탈이 유리 조각인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아직 확인되지도 않은 일에 삽질할 시간이 지금 남아도냐 지적합니다.]
[그럴 시간에 클리어나 해서 있는 멋 없는 멋 다 긁어모아 허세나 부리라고 심드렁히 충고를 곁들입니다.]
은근히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이었지만 지한은 오히려 그 말에 그제서야 조금 진정이 되었다.
그래.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1분 1초가 귀중했다.
그 1분 1초가, 그녀를 살리는 시간이 될 수 있었으니까.
성위의 말대로였다. 그는 노닥거릴 시간이 없었다.
자신을 기억할 생각 따위 눈곱만큼도 없는 눈에, 자신을 새겨 넣으려면, 이러고 있을 시간에 몇 배, 몇천 배로 노력해야 했다.
그 망막에 내가 새겨지려면, 그는 한없이 그녀에게 잘 보여야 하고, 멋있어 보여야 했으며, 그녀의 생생한 눈이 필요했으니까.
“가장 빠르게 이 던전을 클리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제야 정신을 차렸냐며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눈을 빛냅니다.]
“당연하죠.”
어떻게 ‘만들어 낸’ 기회인데.
무슨 짓을 해 가며 얻은 기회인데.
고작 이따위 것으로 잃을 수는 없었다.
“……?”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간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오싹한 이질감이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지만, 지한은 그 의문을 접어 넣었다.
지금은 그 이질감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여기서 주저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클리어합니다.”
……자신을 위해서.
* * *
“오. 저거 신기하다!”
나는 어느덧 느긋하게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쓸데없이 만연체라고 욕만 먹을 게 뻔해, 소설에서는 던전이 어떻다고는 제대로 묘사된 적이 없다 보니 사방에 신기한 것 천지였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누가 보면 평생 감방에 갇혀 있다 이제 탈옥한 줄 알겠다며 고마 해라 합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언감생심, 미쳤다고 이런 곳을 와 볼 생각을 하겠는가.
올 일 자체가 없을 것이다. 이런 세계에 빠지지만 않았으면.
“금빛으로 빛나는 이끼라니……. 진짜 이런 걸 볼 날이 이렇게 올 줄이야.”
역시 인생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정말 순수하게 신기하게 하고 있는데, 오히려 그 순수한 감탄에서 양심이 찔린 듯 성위가 급 친절해졌다.
[‘이매망량’ 님이 그건 금빛 이끼라고 해서 포션이랑 야광탄 만들 때 쓰여서 꽤 돈 좀 나갈 거라고 첨언해 줍니다.]
……뭐?
“야, 그런 건 미리 말해 줬어야지!”
순수하게 만지작거리고 있던 손이 망설임 없이 흙을 파고들어 갔다.
단번에 쑥― 흙 안으로 들어간 손가락에 힘을 주자, 그대로 쭉 이끼가 들어올려졌다.
새삼 진짜로 내가 헌터가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앞으로 힘 조절 좀 하고 살아야겠어.
예전 힘을 생각하고 빡쳐서 무심코 뭐라도 내리쳤다 기물 파손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물어내는 건 양심 있는(?) 나일 텐데.
빛과 같은 속도로 금빛 이끼 동산을 만들며 덤덤하게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표본 같은 모습에 대체 무슨 생각이 든 것인지 그렇게 다짐하는 나를 보며 성위가 기막히다며 혀를 찼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양심리스 자본주의의 표본 같은 고백은 제발 안 해 주면 안 되냐고, 순수한 내 동심이 박살 나는 것 같다고 그쯤 해달라 청원합니다.]
“내가 그렇게 과하지는 않거든?”
나 정도면 평범하지!
억울한 표정을 짓자, 성위가 기가 찬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이 느껴져 진심으로 억울해졌다.
아 왜! 세상에 나보다 엄청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전 모 기업의 모 사장이라든가.
자본주의에 미쳐 직원들 피를 빨아먹으며 기생하던 전 사장을 예로 들며 억울함을 토로했다.
내가 정당하게 한 야근조차 제대로 수당 안 쳐주고 인센티브도 어떻게든 안 주려고 기를 썼던 개새끼.
결국 나올 때 동생 빽으로 시원하게 복수하긴 했지만, 새삼 다시 생각하니 속이 안 풀렸다.
헌터도 된 김에 가서 함 뚜까패?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보스급 목 딸 스킬로 송사리 잡을 일 있냐고 기겁을 합니다.]
진정성이 넘치는 호들갑에 순식간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수많은 스킬들이 머릿속에 나열됐다.
그래. 그 갖기 힘들다는 S급 스킬로 F급도 안되는 폐급 쓰레기를 잡을 수는 없지.
맞아. 나는 불굴의 지성인. 지성인인 내가 참자.
저 멀리서 망할 성위가 혀를 차는 것만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조용히 무시했다.
“……아. 그러고 보니 나 아직 인벤토리 못 쓰지. 아저씨. 뭐 담을 거 없어?”
인벤토리는 대체 왜인지 모르지만, 첫 던전을 클리어해야만 주어졌다. 물론 인벤토리 크기는 각성자가 가진 힘과 특성에 비례했다.
다 캐 놓고 이걸 그냥 두고 가자니 너무 아까워, 금빛 이끼 동산을 보며 해사하게 묻자, 성위가 노발대발로 화답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내가 무슨 도깨비방망이로 보이냐며 노발대발합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생각한 건 아닌데.
“그렇게 화낼 일이야?”
물어볼 사람이 없어 물어본 것뿐이었는데 저리 노발대발하는 답이 돌아오자 괜히 기분이 가라앉았다.
내가 그렇게까지 개념이 없는 인간은 아니거든?
생각할수록 점점 더 빡치는 거 같아 씩씩거리자, 민망한 마음이 들기라도 한 듯 성위가 헛기침을 하며 해결책을 제시해 주었다.
[‘이매망량’ 님이 크흠. 어차피 팔 거니까 블랙마켓 창고에 넣어 두면 되지 않느냐고, 시스템은 폼이 아니라 말합니다.]
“……아.”
그게 있었지.
헌터 감각 제로의 인간이었기에 그쪽으로는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재빨리 블랙마켓을 펼치자 아공간이 나타났다.
얼마에 팔릴까. 책에서 보면 막 억 단위가 오가던데.
시스템에 쌓일 금액에 금세 기분이 업돼 콧노래까지 부르며 금빛 이끼를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보며 성위가 굳이 안 해도 될 첨언을 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너 정말 이럴 때 보면 똑똑한 건지, 바보인지 매우 헷갈리니 제발 하나만 해 달라 첨언합니다.]
이 성위님이 별님이라 그런지 돈님의 위대함을 잘 모르신다. 이 세상에선 신님보다 위대한 것이 돈님이건만.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당신의 계약…….]
[‘이매망량’ 님께서…….]
“으. 시끄러.”
굳이 들을 필요도 없는데 들어 놓고 참 떽떽거렸다.
뭐, 그래도 개의치 않고 금빛 이끼를 마저 다 넣었다.
“아예. 그래서 어디로 가면 돼?”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대로 쭉 가기나 하라며 소리칩니다.]
떽떽거리면서도 또 묻는 건 착실히 대답해 주는 성위를 보며 나는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안 그런 척하지만 이 성위는 자신에게 매우 약했다.
음. 내가 윤지우를 대할 때도 저러려나…….
태평히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던전 안에서 걸어다니는 사람답지 않게 그 발걸음은 매우 여유롭고 가볍기 그지없었다. 자신을 아끼는 성위가 함께니, 이곳이 위협적이라는 A급 던전이라는 사실도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나는 문득 다시 우리의 주인공님이 떠올랐다.
당신은 지금 어쩌고 있을까.
“근데 괴수는 안 나와?”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웬만한 X밥들은 네 기운 느끼면 다 도망가서 엔간한 애 나타나려면 좀 걸릴 것이라 예고합니다.]
혹시 나를…….
“에…….”
……걱정하고 있을까?
* * *
한편 그런 누군가를 모르는, 또 다른 쪽에서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원치 않던 회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일단 여긴…….”
“던전이죠. 동생 군 누나가 가장 먼저 빠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스템이 확인사살을 해 주었다.
【‘에스칼리도의 미궁’에 입장하셨습니다.】
【‘에스칼리도의 미궁’의 난이도는 A급입니다.】
“아오…….”
“……후.”
두 헌터가 너 나 할 것 없이 동시에 탄식을 터뜨렸다.
던전이 진짜 위험한 까닭은 굳이 던전이 폭주해 괴수를 배출해내지 않아도 정말 재수가 없으면 그 자리에 있는 일반인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던전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에 있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 것인지 등급이 높은 던전일수록 일반인을 끌어들이는 확률이 매우 적어졌다.
분명 그럴 터였는데.
“무슨 이런 미친 던전이.”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A급 던전이 일반인을 끌어들이는 경우는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 A급 던전쯤 되면 입맛도 까다로워서 막 각성한 초보자도 웬만해서는 안 들이는 경우도 있을 정도인데…….
“뭔 일이 이렇게 꼬이냐.”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파지는 상황에 서유라가 머리를 쥐어뜯으며 있는 대로 앓는 소리를 해댔다.
민현도 마찬가지인지 멍한 얼굴로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A급 던전에 들어온 일반인이 무사할 확률이 얼마인지는 베테랑인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 동생 군……!”
“맞다…!”
해서 두 헌터는 이 자리에 있는 가장 위험한 천방지축을 뒤늦게 신경 쓰고야 말았다.
무려 그 일반인의 친족이자, 이제 막 각성하고 던전에 첫 입성한 풋내기. 이성을 잃기 딱 좋은 포지션이 완벽하게 갖춰지지 않았는가. 급 위험성을 깨닫고 황급히 뒤를 돌아보는데…….
“……동생 군?”
“아. 네.”
데면데면한 사이라도 누군가 눈앞에서 위험에 빠진 이런 상황이라면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는 게 정상이다.
하물며 윤지우는 이제 막 힘을 각성한 헌터고, 남매는 매우 우애가 좋아 보였다. 진작 튀어나가고도 남았으리라는 것이다.
“괜찮아요?”
“……예.”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가만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윤지우의 모습에 둘은 순간 우리가 무엇을 잘못 보았나 생각했다.
물론 금방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의젓하게 서 있는 것 같았지만 눈의 초점은 하염없이 흔들리고 있었으며, 피가 날 정도로 힘을 준 주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너무 괜찮지 않아서, 오히려 괜찮은 것처럼 보인 것이라는 것을.
한순간이라도 그런 의심을 한 것이 죄스러울 정도였다.
“……동생 군. 싸울 수 있겠어요?”
“무기는 없지만, 싸울 수 있습니다. 그래야죠.”
“무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안쓰러움에 민현이 부드럽게 위로를 건넸다.
그 위로에, 윤지우의 눈에 이채가 생기며 얼굴에도 굳은 결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무리는 이미 하고 있어요. 아마…… 누나도 그럴 거고요. 그래 봬도 엄청 쫄보예요. 우리 누나.”
“음, 동생 군 누님이요?”
“하하. 얼굴은 그렇게 생겼는데 하는 행동 보면 안 그렇죠? 근데 진짜예요.”
그 조그맣고 귀엽기만 한 외모와 정반대로 행동은 심드렁하고 무심하기 그지없어 쫄보와는 영 매칭하기 어려운 상이다.
한때 윤지우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윤지호는 기본적으로 겁이 정말 많았다.
상처받기 싫어하고, 손해 보기 싫어하고, 자신이 불러일으킬, 혹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안 좋은 결과에 앞서 겁을 낸다.
그럼에도 누나가 겉으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 건, 망설이면서도 결국은 행동으로 옮기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선행동 후쫄보랄까.
다 일 저질러 놓고 나중에 후회하고 바짝 쪼는 게 윤지호라는 인간이다. 정말 특이한 인간이라 피붙이인데도 그걸 알아차리는 게 매우 늦었다.
‘아악―!!!’
‘그렇게 좋은 말로 할 때 좀 듣지 그랬냐. 동생아. 그럼 내가 이렇게 힘 뺄 일도 없었잖아.’
‘야 이 미X년아!!’
‘오. 그 근성 하나는 인정. 그래. 뭐라도 하나 있어야 희망이라도 가지지. 아주 좋다. 쭉 유지해.’
‘악―! 아, 아! 아프다고 윤지호!!’
‘그럼 아프라고 때리지, 치료해 주려고 때리냐.’
윤지우가 그 사실을 알게 된 날이, 자신이 죽도록 얻어터졌던 날이니까.
있는 대로 다 행동하고, 내 다리까지 다 박살 직전까지 만들어 놓고 뒤를 돌아서야 마침내 떨리는 손이, 흔들리는 눈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X발. 저 XX.’
미친 반항기 시기, 고작 윤지호가 죽도록 팼다고 정신을 차릴 리 없었다. 그랬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다. 그때 윤지우는 복수심으로 이글이글 차오르고 있었다.
어렸을 때도 서로 머리끄댕이 한번 안 쥐어 잡았다. 폭력은 질색인 윤지호 덕택이었다.
해서 그때의 윤지우에게 윤지호는 그야말로 X밥이었다.
검도를 같이 다니긴 했지만 그뿐. 윤지우에게 윤지호는 윤지호였다.
한데, 그 당연하다고 여겼던 진리가 한방에 부서지고, 심지어 자신이 졌다는 것 역시 인정할 수 없었다.
뚜드려 맞으면서 듣는 언어폭력들은 더 굴욕적이었다. 욕 하나 안 하고 조곤조곤 말을 어찌나 잘하던지. 그 말을 도무지 이길 수도 없었고, 욕보다 더 신랄한 말에 자존심은 있는 대로 아작났다.
복수할 거야.
복수를 다짐하며 윤지호의 뒷모습을 똑똑히 새기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윤지호를 노려보는데, 뒤늦게 볼 수 있었다.
망설임 없이 패는 것 같았던 그 무자비한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사실은 패는 내내 계속 그랬다는 것을.
손을 넘어서 이제는 몸으로 옮겨 간 떨림이 윤지호의 후회를 처절하게 보여 주는 것 같았다.
무거운 발걸음 역시.
멍청한 동생은 그 순간 깨달았다. 평생 제 손을 들어 본 적도 없는 누나가 자신에게 손을 대기 얼마나 망설이고 또, 두려워했는지를…….
생각해 보면 항상 누나는 그랬다.
투덜대면서도 항상 져 주고, 제가 울면 달래는 데 능력은 없었지만 노력은 했으며, 결국은 제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는 걸.
해서, 자신이 마음껏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는 걸.
그 순간, 윤지우는 다짐했다.
저 겁 많은 누나가 나서게 하지 않겠다고.
결국 언제나 윤지호가 자신보다 강했기에 그 다짐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잊지는 않았다.
“누나는, 괜찮을 거예요.”
“동생 군.”
“패닉 상태에 빠져도 오히려 몸은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누나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러니까, 누나 찾으러 가겠다고 혼자 뛰쳐나갈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마치 두 사람의 속내를 읽은 것 같은 대답에 두 사람이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찾으러 가고 싶지 않아요?”
“당연히 그러고 싶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혼자 뛰쳐나가지는 않을 거예요.”
“왜요?”
“누나가…… 싫어할 거거든요. 끔찍하게.”
제 누나, 윤지호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마 그러면…… 무지하게 혼날 거예요.”
그뿐이랴.
다신 나 같은 거 안 본다고 말하고는, 그 말을 몸소 실천할 것이다. 망설이면서도 결국 행동은 옮기는 인간이니까.
“그러니까, 가요. 이 던전을 클리어하면 모두 다 빠져나갈 수 있는 거죠?”
윤지우가 물었다.
기본 상식이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괜찮은 척했지만 확인받고 싶어하는 게 유라의 눈에 보였다. 그 눈을 보며 유라는 시원하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렇죠. 그럼 우리 길드장님 찾아 합류하는 게 제일 빠르겠네요. 가다 누나분 만나면 금상첨화고요.”
“그럼 얼른 움직이죠.”
답을 듣자, 더는 망설이지 않고 신중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윤지우의 뒷모습을 보며 두 사람은 나지막이 감탄했다.
“누나가 동생을 정말 잘 키웠다.”
“정말이요. 저도 제 동생을 저렇게 키웠어야 했는데…….”
“난 유지한을, 아, 저렇게 키웠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어떻게 안 되나?”
“그분께는 무슨 횡액입니까. 얼른 가기나 하죠.”
“쳇.”
한탄 같은 한숨을 내쉰 채로 두 사람이 지우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제발, 그 누나가 무사했으면 좋겠다고 바라며.
그러나 그건 간절한 두 사람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동생 군. 같이 가야지. 그렇게 빨리만 걸으면 안 돼.”
“어디에 힌트가 숨겨져 있을지 모르니 주변을 잘 살피며 가야 합니다.”
정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 * *
“이쪽 맞아?”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원래 가르쳐 주면 안 되는데도 고생해서 알아보고 알려 주고 있는데 무슨 망발이냐고 불쾌해합니다.]
물론 그건 무척이나 고마웠다.
수많은 소설에서 그렇듯 룰도 룰이지만 본인의 재미도 있기 때문에 가야 할 곳을 친히 알려 주는 성위는 없었다.
주인공님도 꿈도 못 꿀 치트키를 쓰고 있는 것이었지만…….
그렇지만…….
“그건 고마운데……. 왜 점점 길이 더 으스스해지냐고.”
아. 나 이런 거 진짜 싫어한단 말이야.
공포 영화는 물론이고 귀신의 집도 들어가지 않는 새나라의 윤지호(25)가 치를 떨었다.
성위가 호들갑 좀 그만 떨라고 말해 왔지만 굴하지 않았다.
진짜 싫은 걸 어쩌라고.
“……벌레 나올 거 같아.”
박쥐라거나. 기어 다니는 무언가라든가.
나오는 순간, 성위를 저주할 테다.
굳은 다짐을 하며 다시 걸음을 재촉하는데, 성위가 떨떠름하게 태클을 걸어 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럴 때는 보통 귀신이 나올 것 같지 않냐고 하지 않냐고 딴지를 겁니다.]
“다 싫거든? 우선순위 따질 게 아니야.”
뭐가 더 낫지 않냐느니. 꼭 그런 거 물어보는 이상한 것들이 있더라.
아니. 그런 걸 왜 물어봐. 당연한 거 아니야?
그것들한테 순위가 어딨어.
똑같이 다 극혐이지.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그래, 우리 이쁘고 잘난 계약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라며 휘파람을 붑니다.]
“…….”
왠지 비꼬는 것 같았지만, 착한 내가 넓은 마음으로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나저나.
“진짜로 더 어두워지는 것 같다……?”
던전은 정말 신기하게, 불이 있는 것도 아닌데 통로가 참으로 밝았다. 사실 엄청 밝다 할 정도는 아니고, 적어도 불을 켤 필요 없을 정도는 되었다. 입장을 막 했을 때만 해도 말이다.
그러나 갈수록 점점 으스스한 느낌이 들더니 느낌뿐 아니라 진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서서히 빛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빛이 뚝― 하고 사라졌다.
“……어? 어? 뭐야? 이제 뭐 등장하는 거야?”
이건 딱 뭐가 등장하기 좋은 씬 아닌가.
가장 하찮은 거로 시작하면, 박쥐라든가…….
“헐. 박쥐 개싫어. 아니 쥐도 싫어!!”
햄스터 아니면 다 꺼져!!
이 상황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나올 순한 것들만 생각해도 속이 울렁거렸다.
던전이니까 그냥 지네도 대왕 지네 님쯤 되겠지.
장담컨대, 보는 순간 기절할 거다.
정말 쓸데없는 장담에 성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찼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너한테 X밥도 안될 것들한테 뭐 이리 쪼냐고. 세상 다 찜 쪄먹게 해 줬으니 쪼다같이 굴지 말라 첨언합니다.]
“시끄러워. 생리적 현상이야.”
내 시력은 소중해.
간절함을 담아 내 시력보호를 강경하게 주장하자, 납득한 듯 성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건 별이라도 당연히 인정해 주어야 하는 권리다. 세상에 이쁜 게 얼마나 많은데 굳이 그딴 걸 봐야 하냔 말이다.
“아. 깜깜하니까 더 불안해. 나 불같은 거 못 만드나?”
그 순간이었다.
화륵―
“와 씨. 뭐야?!”
말하기가 무섭게 내 앞에 파란 불이 생성되어 공중에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갑자기 뿅― 하고 튀어나온 불에 진짜 식겁할 뻔했다.
아니. 예고 좀 해 주면 좀 덧나냐고.
헛소리를 주절거리며 마음을 진정시키자 슬슬 의구심이 들었다.
이거 갑자기 어디서 생긴 거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성위가 한심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말을 걸어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지가 만들어 놓고 뭐냐고 하는 헌터는 너밖에 없을 것이라며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그니까 지금 이게…….
“내가 만든 거라고?”
[그럼 누가 만든 거냐고.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스킬을 보고 드는 생각이 그딴 것뿐이냐며 ‘이매망량’ 님이 한탄을 토해 냅니다.]
당연히 스킬은 멋있지. 내가 이해가 안 가는 건 대체 이게 어떤 식으로 발동이 된 거냐고.
갑자기 튀어나온 스킬의 행태에 이해가 안 가는 건 나뿐이야? 진짜로?
난 진짜 나 불같은 거 못 만드냐고 한 것뿐…….
“설마.”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아니면 뭐일 것 같냐고, 그러기에 내가 진작 조금씩 한번 써 보라고 하지 않았느냐 잔뜩 비꼽니다.]
“아니. 난 이렇게 쉬운 줄 몰랐지.”
스킬 발동이라는 게 이렇게 쉬운 거였어?
게임도 이거보단 어렵겠다.
상상도 못했던 [Easy] 난이도에 감탄을 금치 못하는데 쉽게 만들어 줘도 지랄이냐는 성위의 품위 없는 투정이 들려왔다.
물론 그걸 상대할 정신 줄은 없었다.
성위의 투덜거림을 브금 삼아 스킬 창을 열었다.
[도깨비불(S)]
숙련도: 0.1%
흔히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매망량의 이미지에 맞는 불이다.
구전으로는 요괴들이 사용한다는 푸른 불이라 전해지며, 산 자는 손을 댈 수 없다.
주로 죽은 영혼을 태우는 망자의 불이며, 세상의 존재하는 것은 물론 존재하지 않는 것조차 태울 수 있다.
그럼 정확히 무엇무엇을 태울 수 있다는 거야?
정말 설명 한번 자세했다.
“사용하면서 알아보면 되겠지. 계속 보니 예쁘네.”
붉은 불과 다르게 투명한 푸른 빛을 띠는 불은 불길하다는 선입견이 있어서 그렇지 막상 보니 예쁘긴 했다.
“앞도 잘 보이겠다. 슬슬 다시 가 볼까?”
왠지 모르게 이거 하나만 있어도 이곳은 문제없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샘솟아, 편한 마음으로 기지개를 켰다.
바 선생님의 최대의 적, 불. 그게 있는데 무엇이 무서우랴. 지네 님이든 바 선생님이든 나오자마자 눈으로 보기도 전에 다 불살라야지.
예전부터의 원대한 꿈이었지만 현실적인 조건(불에 그을릴 바닥이라든가, 날아갈 수 있는 집이라든가)에 부딪혀 실천해 보지 못했는데 나이 다 먹어서 이룰 모양이었다.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아 업된 마음으로 콧노래까지 시전하는데, 갑자기 뒤에서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렸다.
스사삭―
……꿈에 들릴까도 무서븐 끔찍한 소리에 자동적으로 몸이 정지했다.
이길 수 있다는 걸 알아도 쪼는 건 그냥 본능이다.
잘못 들은 것이어라…….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언제나 기도는 묵살 당한다. 변치 않는 진실을 증명하듯 뒤에서 붉은 두 눈이 번쩍했다.
그 눈이 빛남과 동시에 내 평정도 휘발됐다.
“꺄악―! 개 싫어!! 진짜 개싫어어어―!!”
팔다리를 맘껏 활용하며 있는 대로 발광을 했다.
【스킬: 도깨비불(S)을 발동합니다.】
물론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스킬을 발동하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화르륵―!
키에엑―!
보이진 않았지만 등 뒤에서 지옥이 펼쳐진 것 같다. 어마무시한 불이 켜지는 소리가 무섭게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으니까.
“와. 더럽게 처절한 비명이다.”
돌아보기 싫게.
정말 등 돌리기 싫었지만, 그래도 왠지 아주 안 볼 수는 없을 것 같은 강박관념에 결국 두 눈을 꾹 감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슬며시 눈을 뜨자…….
“……이건 무슨 지옥이야?”
내 평생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광경에 잔뜩 쫄았던 것도 잊고 눈을 번쩍 뜬 채 벙쪘다.
내 키보다 더 큰 지네가 푸른 불에 휩싸여 키다리 풍선 춤을 추고 있었다.
어찌나 열정적으로 추는지, 가게 오픈할 때 밤낮 가리지 않고 신나게 펄럭거리는 풍선 아저씨들 저리가라였다. 진짜 돈 주고도 못 볼 풍경이었다.
아. X바. 내 눈.
현자 타임이 와 두 눈을 손으로 가린 채 좌절하고 있자 성위가 그런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러다 바퀴벌레라도 나오면 진짜 어쩔 거냐고 혀를 끌끌 찹니다.]
……이 망할 성위님이 끔찍한 소리를 하신다.
가정도 하고 싶지 않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던전 통째로 불사른다. 진심.”
만약 그런 날이 오면 진짜 그럴 거다.
그런 건 이 세상에 있으면 안 된다.
왠지 성위가 혀를 내두르는 것 같았지만 곱게 무시했다.
쉬리릭―
슬슬 통구이가 끝났는지, 불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통구이가 된 지네의 시체만 남겨 두고.
이왕 잡은 거 아이템(돈)이 궁금해졌다.
“음. 분명 이렇게 했던 거 같은데. 아닌가…….”
워낙 발로 봐서.
【스킬: 사신의 낫(S)을 활성화합니다.】
자신은 없지만, 대충 무기 스킬을 사용해 무기를 꺼내곤 좀 징그럽지만 낫을 그대로 지네를 향해 내리꽂았다.
징그럽기는 해도 의외로 꽂는 게 그렇게 힘들거나 혐오스럽진 않았다. 생김새를 알아볼 수도 없이 통구이가 돼서 그런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스킬: 얼음의 심장(S)이 활성화됩니다.】
해서, 사신의 낫이 뜨기 전에 뜨는 이 스킬 창을 눈치채지 못했다.
무심한 얼굴로 꽂은 낫에 힘을 주고 불안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추출?”
그러자, 빛과 함께 내 손 위로 한 구체가 천천히 내려왔다. 본능적으로 구체를 손에 쥐자, 구체는 손에 놓임과 동시에 아이템으로 변했다. 처음 얻은 아이템에 얼떨떨해하면서도 잊지 않고 아이템을 확인했다.
[대왕지네의 발톱(A)]
독성이 깃든 발톱.
어지간한 내성으로는 이기지 못할 독이 스며들어 있다.
[대왕지네의 내단(A)]
지네의 내성을 모아 놓은 내단이다.
복용하면 특수한 독을 제외한 모든 것에 면역력을 가질 수 있다.
[마력석(A)]
마력이 담긴 보석.
보석에 담긴 마력을 꺼내 쓸 수 있다.
“오. 맞았어! 내가 일일이 저거 다 파헤치면 어쩌나 했는데―!”
아무리 통구이로 만들었다 한들, 지네를 손수 해체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천만다행이었다.
이 세계에서 괴수에게서 아이템을 받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저 괴수를 일일이 해체해서 부산물을 발굴하는 법. 그때, 몸에 박힌 마력석과 아이템도 당연히 나온다.
두 번째는 바로 내가 사용했던 추출 방법이다.
아무래도 일일이 해체하는 것보다는 드랍률이 적지만, 이런 급 높은 던전에서는 부산물을 얻자고 시간을 지체하는 건 낭비였다. 해체팀을 따로 준비하지 않는 이상.
돈이 그렇게 급하지 않은 랭커들이 주로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해 본 적이 없어서 정말 될까 반신반의했다.
가상 현실 게임을 하면 이런 느낌일까. 신기로움이 주는 재미가 아주 쏠쏠했다.
“그나저나 얘 A급이었네?”
A급이면 엄청 급이 높은 거 아닌가?
그런 것치고는 내가 쓴 스킬은 하나밖에 되지 않아서 정말로 이 등급이 맞나 싶었다.
시스템의 룰상, 괴수의 정보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알아서 예상하고 공략을 해야 하는 것이니까.
이럴 때는 이게 참 불편했다. 얘가 뭔지 내가 어떻게 알아…….
괜히 심술이 나 입이 댓 발 나오는데, 그런 나를 보며 성위가 어깨를 으쓱이며 팩트체크를 시전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S급 스킬을 썼는데 당연한 결과지, 아니면 S급의 이름이 뭐가 되냐고 이제 이 몸의 위대함을 알겠냐며 어깨를 으쓱입니다.]
“그것도 그러네. 인정.”
성위에 대한 감탄은 쏙 빼, 성위는 매우 불만스러운 것 같았지만 속으로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정말 다 준다고 했어도 제힘을 전부 줄 수는 없을 텐데.
이 정도 위력이라니.
제 성위는 제가 생각보다 더 대단한 급의 성위인 것 같았다.
물론 한없이 높아질 콧대가 얄미워 이런 걸 솔직하게 말해 줄 생각은 없지만.
쿠웅―!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갑자기 커다란 진동과 함께 새로운 알림창이 떴다.
【던전의 주인이 깨어납니다.】
【힘을 깨운 주인의 힘이 던전을 뒤흔듭니다.】
【던전의 등급이 상향 조정됩니다.】
【‘에스칼리도의 미궁’의 등급은 ‘S’급입니다.】
“……오, 이런 미친.”
아무래도 우리 주인공님이 대형 사고를 치신 모양이다.
* * *
꺄아아아악―!
메아리처럼 들려오는 것만 같은 음성에 윤지우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방금 윤지호의 비명 같은…….”
희미하지만 이상하게 누나의 목소리인 것 같은 요상한 확신이 들었다.
아닌 척하면서도 아름답지 않은 것을 세상에서 제일 혐오하는 윤지호가 바느님이라든가, 바느님에 범접하시는 분들이 나타나면 자주 들려 주었던 샤우팅이었으니까.
그렇긴 했지만 너무나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에 긴가민가 한 윤지우가 문득 다시 눈앞에 있는 괴수에게 시선을 두었다.
취리릭―!
쉬익― 날름날름.
끼리릭―
“……지네가 혓바닥도 있던가?”
“일단 그냥 지네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러겠죠.”
“그건 그렇지.”
“…….”
비명 지를 만했다.
윤지호가 저걸 봤으면 그냥 숨넘어갔을 거다. 저걸 눈에 담느니 그냥 죽고 만다고 할 위인이었으니까. 둔감한 윤지우의 눈에도 저건 좀 무리였다.
“진짜 누나 비명 소리 같은데…….”
아득바득 참고 있었지만, 당장이라도 발이 튀어나갈 것 같았다. 혼자 찾으러 가 봤자 개죽음밖에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
지우의 불안해하는 모습에 그제야 뒤늦게 지우가 한 말을 들은 두 사람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동생 군. 아무것도 안 들렸는데? 지금도 마찬가지고.”
“누르고 있지만 정신적으로 불안해서 그런 걸 겁니다. 집중하세요. 윤지우 군. 눈앞에 있는 것부터 처리해야 윤지우 군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 말에 지우가 검을 고쳐 잡았다.
민현이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던 검을 내어 준 것이었다.
여분이라고는 하지만 랭커의 것인 만큼 고가임이 틀림없는 물건이었다. 그런 것을 서슴없이 내어 준 것이다. 그만큼 보답을 해야 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유라가 시원하게 미소를 지었다.
“좋아. 그럼 최단 시간으로 가 보자고!”
유라가 검을 치켜들며 날아올랐다.
빙속의 검사라는 이명답게 유라의 검격에 냉기가 감돌았다.
단번에 몸통은 무리였는지 다리부터 베어 낸 유라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 녀석 A급이야. 다들 단단히 각오해!”
그 말에 민현이 기겁을 했다.
“이제 던전 중반인데 벌써 A급이 튀어나온다고요?! 여기 A급 던전입니다!!”
“내가 던전이냐?! 이것들이 이렇게 나오는 걸 나더러 어쩌라고! A급 중에서는 하급 같긴 하지만 A급은 A급이야. 긴장을 늦추지 마!”
유라의 말과 동시에 지우는 스킬을 발동시켰다.
【스킬: 불굴의 용기(S)가 발동됩니다.】
【스킬: 지키기 위한 신념(S)이 발동됩니다.】
서걱―
끼익―!
윤지우가 침착하게 지네의 다리를 베어 나갔다.
지네가 찢어지게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지르는 지네를 향해 윤지우가 망설임 없이 몸을 숙여 내달려 지네의 몸통에 다다라 마디 사이에 검을 꽂아 넣었다.
끼에에에엑―!!
아까와는 비교조차 안 되는 비명이 터졌다.
그사이, 지네가 내뱉은 독을 피하며 지우가 황급히 몸을 뺐다.
일련의 모습을 지켜보며 두 랭커가 잠시 상황도 잊고 얼빠진 얼굴로 윤지우를 바라보았다.
“뭐야. 던전 처음 맞아? 저게 가능해?”
“……인간에게 불가능은 없으니까요?”
“개소리하지 말고. 와. 저거 진짜 물건이다. 누나 때문에 목적이 확실하다 하지만 어떻게 처음 싸우는데 잔동작이 하나도 없지. 아까 모의 때 모습 다 어디 갔어?”
“자세히 보면 자잘한 낭비는 있습니다. 그래도 아까 모의 때 경험을 주축으로 빠르게 보완하는 거 같네요. 성장 속도 한번.”
“진짜 대형 루키가 떴네.”
나도 처음 던전에 들어왔을 때는 저렇게까지 못했던 거 같은데.
두 사람의 마음속에 괜스레 경쟁력이 들끓어 올랐다.
“가자고. 신입한테 면이 안 서잖아!”
“물론이죠!”
촤라락―!
키에에엑―!
꾸룩―
“……후우. A급 될락 말락 한 놈 같지?”
“그래도 위협적이네요. 여긴 A급 던전이니 A급은 보스나 되어야 할 텐데 아무리 봐도…….”
“잡몹 같지?”
“아니 선배.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A급이 잡몹입니까. 여긴 A급 던전이에요. 잡몹이 A급이면 지금까지의 A급 던전은 다 밑밥이었단 겁니다. S급 던전이면 몰라도……!”
그렇게 세 사람이 나름(?) 고전해 지네를 쓰러뜨리고 한숨을 내쉬는데.
심장을 철렁이게 하는 알림창이 그들을 반겼다.
【던전의 주인이 깨어납니다.】
【힘을 깨운 주인의 힘이 던전을 뒤흔듭니다.】
【던전의 등급이 상향 조정됩니다.】
【‘에스칼리도의 미궁’의 등급은 ‘S’급입니다.】
“…….”
“…….”
“…….”
잠시간 침묵 후, 자신들을 반기는 알림창을 본 그들은.
“아. 길드장 놈아.”
“후…… 지한 선배.”
머리를 싸맸다.
아무래도 우리의 위대하신 길드장님이 또 사고를 치신 모양이다.
* * *
키엑―!!!
“…….”
보스의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수문장이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졌다.
제 옆으로 스러져가는 거대한 괴물을 보는 그의 무감각한 얼굴은 평소의 유지한을 본 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날 선 헌터의 모습 그 자체였다.
더욱 무서운 것은, 수문장을 쓰러뜨리기까지 수많은 괴수를 단신으로 처리해 왔을 텐데도 지친 기색 하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괜히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듯.
무심히 제 뺨에 튄 수문장의 피를 닦아 털어 내는 그의 모습을 보며 그의 성위가 혀를 찼다.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마음이 급한 건 알겠지만, 네가 아무리 괴물이라도 앞에 있는 보스는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니 정신 똑바로 차리길 권고합니다.]
비꼼을 가장한 성위의 충고에 지한은 차디찬 조소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선한 가면을 쓰고 있지만, 누구보다 뒤틀린 자가 실은 자신이라는 것을.
선한 가면은 강박일 뿐이었다. 사랑받기 위한.
그 가면을 벗으면 자신은 괴물밖에 남지 않으니까.
평범하지 않다는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던전 밖이면 그나마 나았지만 괴수를 죽이면 죽일수록, 느껴지는 그 희열을, 점점 차가워지는 심장을,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헌터라면 누구나 그렇다 위로를 받는다 한들, 그건 그저 위로일 뿐이었다.
그래서 지한은 강박적으로 가면을 썼다.
그리고 이제는 더욱 치밀하게 써야 할 이유가 생겼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직, 계속할 수 있으니까.”
절대, 그녀에게 이런 자신을 들키지 않아야 했다. 한 줌의 시선도 간절한 그는 그녀가 더 멀어질 그 어떤 것도 드러낼 수 없었다.
세상 전부를 기만해도 상관없었다. 해서 그녀가 모른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승리를 걷는 자’ 님이 네 그 모자란 사랑을 응원은 하지만 슬슬 무서워질 것 같으니 그쯤에서 적당히 하는 게 좋겠지 않냐고, 조심히 의견을 내뱉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다. 솔직히 자신이 생각해도 이 감정은 도를 넘었다.
고작 세 번. 오늘까지 딱 세 번 본 사람이었다.
첫눈에 시선이 가고, 두 번째에는 마음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고작 그뿐인 것.
이 진득한 감정을 설명하지는 못했다.
왜 자신은 이리도 그녀에게 매달릴까. 그녀는 자신을 거의 처음 만난 것이나 다름없는, 저 혼자 스쳐 지나간, 아주 짧은 인연일 뿐인데.
첫눈에 반했다 해도 말이 안 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은 만남에 이 무게는 어떻게 갖다 붙인다 한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서걱―
이해할 수 없는 난제와, 그럼에도 여전히 가슴 한편을 무겁게 짓누르는 공포감이 머릿속을 더 혼란스럽게 했다.
마치, 그가 모르는 무언가가 그에게 압박을 주는 것만 같았다.
너는 절대 여기서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헉.”
갑자기 숨이 턱 막혀 왔다.
아직은 아니라는 경고와도 같은 고통에 눈앞이 아찔했다.
그 순간, 왜일까.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말이 떠올랐다.
‘얘는 또 뭐 이리 쓸데없이 잘생겼어…….’
“……풋.”
정말 처음에는 황당했는데, 이제는 그 말만 떠오르면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상황에서조차도.
모든 고민을 싹 다 날려 주는 마법과도 같은 말이었다.
그래. 고민은 의미 없었다.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이 세계의 그 어느 누구보다 그를 그냥 ‘사람’으로 보았던 그 순간부터. 그 눈이 내게 계속 향하길 바란다, 욕망했을 때부터.
이 감정을 버린다 해도 어차피 정상은 될 수 없다.
오히려 이 감정이 자신은 아직 사람이라는 걸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아무것도 시작한 게 없음에도 이렇게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건지도 모른다.
“순전히 나를 위해서 이러는 겁니다. 나는 원래 이런 놈인 걸 알지 않습니까.”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정말 지지리도 모자라고 말 안 듣는 놈이라며 혀를 찹니다.]
성위의 투덜거림에 지한은 나지막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투덜거림 속에 숨겨진 애정을 모를 리 없기에.
자신을 사랑하는 별님의 애정을 등에 진 채 지한은 당당하게 보스의 방으로 진입했다.
방으로 진입하자 지한은 예상치 못한 풍경에 눈을 크게 떴다.
그곳은 보스의 방이 아니라, 마치 신을 모시는 신전 같은 매우 웅장하고 위엄이 가득한…….
그래. 마치 성전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에스칼리도의 성전에 입장하셨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지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알림창이 떴다.
“……!”
알림창이 뜸과 동시에 지한은 저도 모르게 실소를 내뱉었다.
괴수에게 ‘성전’이라니.
하지만 그 조소는 아주 순간이었다.
알림창이 뜸과 거의 동시에 공간이 진동했다. 지한이 황급히 자세를 잡는데도, 진동이 한 수 위였다. 원하지 않게 바닥에 엎드리게 된 지한의 귀에 머리를 짓누르는 진언이 울려 퍼졌다.
주제넘게 내 안식의 공간에 발을 들인 자여.
이곳에 발 딛기 전에 그대가 지나온 미궁은 나의 배려였음을 어찌 알지 못하는가…….
탄식과도 같은 진언과 함께 대기가 그 탄식에 동조하듯 울부짖었다.
“크윽―!”
어리석다. 어리석도다……!
인간은 어찌 이리도 어리석은가…….
이제는 탄식이 머릿속에 울리는 것 같았다.
고작 진언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중력에 지한의 시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 돼…….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당장 여기서 벗어나라 소리칩니다.]
시야를 다잡으려 노력하며 지한이 천천히 팔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성위의 충고는 옳다. 저건, 아무리 S급에 국내 탑 랭커라는 지한이라 할지라도 그 혼자 상대해서는 안 될 상대였다.
작전상 후퇴를 선택했으리라.
이성적이었더라면.
“그럴 수…… 있을 리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 혼자였다면, 하다못해 구해야 할 대상이 그저 일반인이었다면, 그는 망설이긴 했어도 합리적으로 후퇴를 선택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녀가 있었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어.”
고작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그는 반드시, 그녀를 다시 만나야만 했다.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이런 때마저 그쪽으로 머리가 돌아가는 계약자의 사고에 감탄을 금치 못합니다.]
아. 정말.
스스로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었다. 고작, 하나의 존재로 이렇게까지 바뀔 수가 있다니.
“긍정적인 건 장점이라 하지 않습니까.”
[‘승리를 걷는 자’ 님이 그게 너한테도 해당되는 이야기인 거 같냐고 신랄하게 비꼽니다.]
입가에 잔잔히 미소가 번졌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그녀도 똑같은 말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압―!”
몸을 일으킨 지한이 힘찬 단말마와 함께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쩌걱―
그와 함께 바닥에 금이 가면서, 공간 전체에 금이 가며, 공간 자체가 조각이 되어 부서져 내렸다.
처음부터, 가짜였던 것처럼.
모든 것이 부서져 내리자, 아까의 숨이 막히도록 웅장하던 성전의 모습이 아닌, 이미 오래전에 버림받은 듯한 초라하디 초라한,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성전의 모습이 드러났다.
초라한 것을 넘어, 이곳과 같이 사라져 버리라는 것만 같은 악의까지 느껴지는 것 같은, 공간이었다.
버림받은 자의 말로.
괴수에게, 동정심이 생길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물론 그것뿐이었다.
아무리 지한이라지만, 죽여야 할 상대에게 동정심을 갖지는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그는 이 자리까지 올라오지도 못했다.
그가 굳은 마음으로 검을 다잡자, 이름 모를 존재의 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결국 이 모습을…….
환영한다. 이름 모를 그대여. 이 광경을 보는 건 그대가 처음이니.
그대의 불운을 안타깝게 여긴다.
아까처럼 위압감 넘치는 진언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심으로 안타까움이 가득한, 염려 어린 걱정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의 주인공과 지한의 생각은 평이하게 달랐다.
“나는 불운이라 생각하지 않아.”
그 어떤 것이든.
설령 후회한다 해도.
“나는 반드시 여길 함께 나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
반드시 마주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래서, 그의 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 눈을 보며, 무엇을 떠올린 것인지 괴수가 회한에 잠겼다.
그대는 용감하고, 또 정의롭구나.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건만.
해서 그대에게 호감이 생기면서도 그대를 원망한다. 그대가 증오스럽구나.
나는 정말 추해졌나…….
마치 인간과도 같은 말이었다.
나락으로 떨어진 인간이 앞으로 나아갈 자에게 내뱉는 부러움과 같았다.
그대는 날 마주할 자격이 충분하다.
설령 이것이 나의 마지막일지라도, 내 마지막으로 그대는 더없이 완벽하구나.
쿠구궁―
“……!”
초라한 성전의 중심에 낡은 관이 올라왔다.
이곳에 잠든 이를 비웃듯 금방이라도 썩어 문드러져 부서질 것 같은 초라한 나무 관이었다.
끼이익―
파스슥―
그 생각을 증명하듯, 초라한 나무판자에 불과한 관 뚜껑이 열리자마자, 파스스 부서져 내렸다. 지한이 검을 고쳐 잡으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관에서 쏟아져 나오는 마력에 본능이 맹렬히 경고하고 있었다. 저 관 속에서 일어날 존재는, 지금까지 자신이 마주했던 그 어떤 존재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어야만 할 상대였다.
상대의 대한 예의든, 그의 실력 때문이든.
“……나를 위한, 승리의 찬가를. [세이라].”
나지막이 읊조린, 자신을 위한 응원과도 같은 말과 함께 지한의 검신이 새하얗게 빛이 났다.
순식간에 검을 전부 뒤엎은 빛은 검의 전신 자체를 바꾸며 검에게로 전부 스며들었다.
【에고소드가 긴 잠에서 깨어납니다.】
능력자의 정의에 따라 빛을 발산하는, 검.
나의 가련한 계약자를 위해.
상처뿐이더라도 그대에게 승리를…….
【빛의 검, 세이라가 계약자를 위해 승리를 노래합니다.】
빛의 검. 세이라가 그의 손에서 아름다운 빛을 뽐내며 승리의 찬가를 노래했다.
세이라를 깨우면서도 지한을 이를 악물었다.
지한은 세이라가 싫었다.
아니, 그것보다는 애증에 가까웠다.
어찌 소중하지 않을까. 자신을 지켜 주고, 강해지게 해 주고, 기도를 해 주는 존재인데. 하지만 그럼에도 세이라를 깨우고 싶지 않은 건,
부디, 이 소망이, 그대의 소망을 위한 지판이 되기를.
보고 싶지 않아 덮어 놓았던 것을 다시 들춰 보게 하니까.
자신이 위기에 빠진 순간에서조차도, 지한은 어지간해선 세이라를 깨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고작 자신의 감정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한이 세이라를 다잡음과 동시에, 아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진동이 지한을 덮쳤다.
쿠구궁―! 콰앙―!
【던전의 주인이 깨어납니다.】
【힘을 깨운 주인의 힘이 던전을 뒤흔듭니다.】
“……!”
지한이 흔들리는 지면에서 자세를 바로잡으며 관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관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마치 리치의 손을 보는 것 같은, 말라비틀어진 것을 넘어 새까맣게 문드러진 손이었다.
지한이 긴장으로 몸을 웅크렸다.
본능이 결코 긴장을 놓지 말라고 경고를 해 왔다.
경고하기가 무섭게, 음습한 마력들이 손으로 모여들더니 빠르게 살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삽시간에 몸이 완성된 이 던전의 보스, ‘에스칼리도’가 완전히 눈을 떴다.
눈을 뜬, 보스는 그가 흔히 알고 있는 괴수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냥 사람이었다.
인간을 초월한, 그 같은 사람.
그래서 지한은 예감했다.
그동안 했던 그 어떤 싸움보다 힘든 싸움이 되리라. 예견과 동시에, 알림창이 잔인하게 확인사살을 해 왔다.
【던전의 등급이 상향 조정됩니다.】
【‘에스칼리도의 미궁’의 등급은 ‘S’급입니다.】
“이렇게 일어나는 건 근 300년 만인 거 같군. 그대에게는 감사 인사를 해야겠어.”
오랜 잠에서 깨어난 그가,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며, 미소를 지었다.
티끌 한 점 없는 순수한 미소였지만, 지한은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저 미소가 금방이라도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혐오감에 지한은 이를 악물었다. 이 혐오는, 동질감에 의한 혐오였다.
저리 미소 지으니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저와 그는 지독히도 닮아있다는 것을.
“우리가 싸우지 않는 일은…… 없겠지.”
“우스운 소리를 하는군.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대가 바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를 넘어서야 하네. 나를 이곳에 가둔, 원망스러운 누군가가 만든 규칙이지. 그대도 나도 그 손바닥 안에 놀아나야 하는 존재이니 그 규칙을 따를 수밖에.”
“……‘원망스러운 누군가’?”
“그 힘을 가졌음에도, 아직 만나지 못했나 보군. 자격이 아직 부족한 건가, 어찌 됐든, 그것 또한 행운이지. 마주한다 해서 좋을 것 없는 분이니.”
원망스럽다면서도 결국 끝까지 존대를 놓지 못하는 그 모습이 안타까웠다. 스스로를 ‘놀아나는 존재’라고 표현하면서도 결국 아직도 놓지 못했다는 뜻이니까.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무척이나 궁금했지만 지한은 묻지 않았다.
“내 마지막을 기쁘게 장식해 주었으면 좋겠군.”
에스칼리도가 검을 뽑아 들며 선언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없다는 그 선언에, 지한도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그 모든 것을 묻어둔 채 자세를 바로잡았다.
“영광으로 알겠다.”
처음으로 단신으로 마주해 보는 S급 보스.
그동안 한국에는 딱 세 번의 S급 던전이 발생되었고, 지한은 그중 두 개의 던전에 참여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는 그때 마주했던 괴수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진짜라고 말하는 것처럼.
해서, 지한은 처음부터 전력으로 덤볐다.
【스킬: 빛의 철퇴(S)를 발동합니다.】
【주변 50m 이내에 아군이 있는지 주의하여 주십시오.】
익숙한 알림창과 동시에 검을 부딪쳤다.
“……호오.”
빛의 철퇴는 상대에게 위해를 가하기도 하지만 상대의 무기를 망가뜨리는 데 더욱 효과적인 공격 스킬이었다.
지한은 가장 먼저 그의 무기를 없애 버릴 생각이었다.
인간형 몬스터인 그에게 무기의 유무는 아무래도 중요한 요소일 테니까.
“……!”
결론부터 말하자면 지한의 선택은 옳았다.
문제가 있다면, 상대를 얕보았다는 것.
정확히는 얕본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상대보다 강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강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한 번도 자신의 공격이 아예 통하지 않을 만한 강한 상대를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성위 계약을 하고 나서, 단 한 번도.
“꽤 괜찮은 공격이긴 하나, 그대는 경험이 좀 부족해 보이는군.”
티를 내서는 안 되지만 도무지 아무렇지 않은 듯 굴 수가 없었다.
당황하는 그에게 성위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당장 정신 차리라고 소리칩니다.]
[지금 네 눈앞에 있는 상대가 네가 한눈을 팔아도 될 상대로 보이냐고 일갈합니다.]
그 말에 섬광처럼 스킬을 전개했다.
【스킬: 오러 블레이드(S)를 발동시킵니다.】
【스킬: 하데스의 안개(A)을 전개합니다.】
오러 블레이드로 거리를 벌림과 동시에 시간을 끌기 위해 시야를 차단하는 스킬을 전개했다.
하데스의 안개는, 산 자든 죽은 자든 절대 피할 수 없는 안개이니 조금은 시간을 벌어 줄 것이다.
그렇게 예상하고 거리를 벌린 뒤 지한은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전법을 구상했다.
하지만, 지한의 예상은 모두 빗나갔다.
“커억―!”
거리를 벌리는 순간, 순식간에 다가온 에스칼리도가 지한을 집어던졌다.
지한은 손쓸 새도 없이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실드를 치지도 못해 내상을 입은 지한이 짧게 피를 뱉었다.
“컥. 커억…….”
내상으로 인해 잘 쉬어지지 않는 호흡을 빠르게 정상화시키고 있는데, 에스칼리도가 그에게 다가와 짧은 감상을 내뱉었다.
“음. 받은 힘은 나쁘지 않지만, 사용법이 애매하군. 나쁜 건 아니지만 좋지도 않아. 방금 전법은 보통 상황에서는 꽤 쓸 만한 전법이지만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도 상정해 두었어야 하지 않나.”
……뭐지. 이 괴물은.
난생처음으로 지한은 눈앞에 존재에게 벽을 느꼈다.
자신은 올라갈 수 없는 벽을.
처음으로 손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런 지한을 에스칼리도가 무심한 얼굴로 관찰했다.
“평소에는 이렇게 싸우는 편이 아닐 것 같은데. 아, 만나고 싶은 이가 있다 했나. 그래서 조급해졌었나 보군. 그대도 모르는 사이 말이야.”
“……그렇다 한들, 모두 내가 만든 결과지.”
아닌 척했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얼른 그녀에게 가고 싶어, 조급해했다.
눈앞에 상대는 그럴 상대가 아니라 마음을 다잡긴 했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이던가. 그래서 지금의 이 어이없는 패착을 만든 거다.
모두 자신의 실책이었다.
그녀는, 잘못이 없었다.
【스킬: 빛의 가호(S)를 발동합니다.】
몸 상태를 정리하며 세이라를 휘둘렀다.
“……! 아직 움직일 수 있는가.”
“이 정도로 무너질 거였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어.”
빛의 가호는 치유 스킬이 아니었다. 가호를 받는 동안 몸의 고통을 없애 줄 뿐이지.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자신이 여기서 무너지면, 그 누구도 눈앞에 있는 존재를 막을 수 없으니까.
순간, 지한의 머릿속에 자신을 누르고 1위가 된 자의 존재가 떠오르긴 했지만, 이내 잊어버렸다. 아무리 1위가 됐다 한들, 이제 막 각성한 헌터가 이 규격 외의 존재를 홀로 상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러니 자신이 해야 했다.
“계속, 가자고.”
“하하하! 아주 좋은 자세군. 더 날 즐겁게 해 주길 바라네.”
설령 자신이 잘못된다 하더라도.
그는 내달렸다.
어느 순간부턴가 그를 지켜보는, 그가 지워 버린 1위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
* * *
【던전의 등급이 상향 조정됩니다.】
【‘에스칼리도의 미궁’의 등급은 ‘S’급입니다.】
얼.
믿고 싶지 않은 현실만 정말 콕콕 짚어 주는 불친절한 알림창을 보며 나는 잠시 넋이 나갔다.
A급과 S급의 차이를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기에 이쯤 되니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 말고, 주인공님이.
기억을 맹렬하게 더듬었다.
유지한이 S급을 단신으로 클리어할 정도로 힘을 얻게 된 게 지금 시즌인가?
소설 <랭킹 1위에 관한 고찰>은 제목 그대로 주인공 유지한의 성장기였다. 거의 먼치킨으로 나오긴 했지만, 처음부터 모든 걸 다 쓸어 버리는 먼치킨은 아니었다.
분명 <랭킹 1위에 관한 고찰>의 랭크는 초반은 최대 S급이었다가 SSS급까지 상향되는 세계였다. 초반에는 S급이 최고인 줄 알았다가, 주인공이 새로운 힘을 얻게 될 즈음, SS급 던전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등급들이 생겨났지.
거기서 일단 설정 붕괴인 것 같지만, 성장물을 그리고 싶었던 작가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됐기에 그냥 넘겼었다. S든 SSS든 솔직히 그냥 세다는 거니까 크게 중요한 건 아니기도 했고.
어쨌든, 저번에 신나게 웹서핑을 했을 때 알아본 바로는, 조강지처(?) 서유라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성녀’가 아직 등장하지 않은 걸로 봐서는 현재 이야기는 극 초반을 달리고 있었다.
랭킹 1위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야기로 따지만 이제 막 S급을 적당히 유지하고 있는, 혼자 단신으로 S급 던전 클리어는 절대 못 하는……!
“……X됐다.”
아주 X같은 상황이란 말이렷다.
유지한이 S급 던전을 단신으로 클리어한 게 언제였지?
워낙 발로 본 데다 기억력도 그렇게 좋지 못해서, 어땠었는지 정확히 하나도 기억이 안 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제대로 볼걸…….
“아오. 진짜 뭐 이러냐.”
암울한 상황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인생 한번 살기 참 고달팠다.
“일단 빨리 가 봐야겠네. 근데 이대로 가면 백퍼 들킬 텐데. 커밍아웃을 할 수는 없고…….”
얼굴에 검댕이라도 묻힐까?
가긴 가 봐야겠고, 또 각성자인 건 들키기 싫어 고민하는데 그런 나를 보며 성위가 코웃음을 쳤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뭐 이건 줘도 쓰지 못하냐고. 그따위 쓸데없는 고민할 시간에 네 스킬들이나 좀 확인해 보라고 코웃음을 칩니다.]
“어? 나 뭐 변장 스킬 그런 거 있어?”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매망량’ 님께서…….]
“……아, 알았어.”
있는대로 성질을 내는 성위에게 더 물을 수도 없어 나는 조용히 스킬 창을 열어 보았다.
스킬 창을 열자 맨 첫 번째로 나오는 메인 스킬이 딱 눈에 띄었다.
[수백 개의 가면(S)]
숙련도: 0.0%
이매망량은 망자의 세계.
이매망량을 거느리는 자는 그 어떤 존재도 될 수 있고, 될 수 없다.
산 자가 될 수도 있고, 죽은 자가 될 수도 있으며,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있고, 존재할 수 없게도 할 수 있다.
발동 시, 시전자가 바라는 것에 가장 적합한 가면을 쓴다.
스킬을 쓰면 쓸수록 라이브러리에 숙련도와 가면의 형태가 저장된다.
그 웅장한 설명에 짤막하게 감상평을 남기자면.
“……뭔 소리야. 이게.”
하여간, 여기 설명들은 설명이라고 하기 아까울 정도로 참 불친절했다.
아니. 은유법 말고 좀 직설법으로 써 달라고.
만약 패치가 된다면 이 의견은 꼭 반영되길 바란다고 간절히 외치며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눌러 담았다.
어쨌든, 변장 스킬은 맞는 것 같다.
가면이라 하면 일단 떠오르는 게 변장이잖아?
이 가설을 증명하듯 성위가 자신만만하게 거드름을 피웠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설마 내가 네게 하찮은 걸 줬겠냐며,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될 터이니 그냥 한번 써 보라 권합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니.
네가 그런 소리를 해서 좋았던 기억이 별로 없는데…….
스킬 쓸 마음도 싹 사라지는 소리였다.
저 뻔뻔한 소리에 홀라당 계약 당해 쫑 당한 인생을 몸소 겪고 있으니 더 무서워졌다. 그렇다고 저걸 안 쓸 수도 없어 눈을 찔끔 감고 스킬을 발동했다.
【스킬: 수백 개의 가면(S)을 발동합니다.】
【라이브러리가 펼쳐집니다.】
【시전자가 바라는 힘에 걸맞은 가면이 선정됩니다.】
“이거 진짜 겁나는데…….”
그냥 발동합니다도 아니고, 줄줄이 펼쳐지는 안내창에 덜컥 겁이 났다.
새삼 S급 스킬의 위압감이 느껴졌다. S급도 다 같은 S급이 아닌 건가? 아니면 그냥 복불복이란 소린가.
명백히 후자일 것 같지만, 설마가 사람 잡을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그사이, 어느새 가면이 선정됐다.
【‘망자의 왕, 염라’가 선정됩니다.】
【‘염라’가 라이브러리에 저장됩니다.】
“염라? 그 어느 지옥에 떨어뜨릴지 얘기해 주는 그분?”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름에 눈을 댕그랗게 떴다.
예상치 못한 소리에 조금 놀랍긴 했지만, 어차피 바랐던 건 변장이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나저나. 변장 스킬이라며.
“잠깐, 이게 끝이야? 변장이라며?”
말이 씨가 된다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몸에서 빛이 났다.
“……어.”
【‘염라’의 가면을 씁니다.】
순식간에 빛이 내 몸을 감싸고, 흩어졌다.
【가면은 당신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싶을 때 해제됩니다.】
【성위 고유 스킬임이 확인되었습니다. 스킬 정보를 변경합니다.】
【진 ‘화신’ 스킬: 수백 개의 가면(S)이 전개됩니다.】
【성위 고유 스킬임으로 제한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1초조차 되지 않는 시간인 거 같았다.
그냥 빛이 내 몸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달까?
[‘아득한 망자의 왕이여. 그대가 걷는 모든 길은, 그대의 행진을 위한 걸음이며, 세상 그 어떤 영혼도 당신을 이길 자가 없을지어니, 부디, 모든 것은 왕의 뜻대로.’]
희미한 소망을 들으며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나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어 있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자. 내 작품을 보라며 거울을 선물합니다.]
우쭐해진 성위가 자신만만해하며 거울을 보여 주었다.
“헐. 미친.”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기대한 대로의 반응에 들떠하면서, 내 위대함을 이제는 알겠냐며 자신의 우월함을 토로합니다.]
성위의 말에 태클을 걸 정신도 없었다. 이 망할 성위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더니, 정말 상상 그 이상의 것을 보여 주었다.
“야, 이건 변장이 아니라 변신이잖아!!”
물론 어설픈 변장보다는 이게 더 좋기는 하지만, 황당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얼빠진 얼굴로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데, 알림창이 집 나간 정신을 되찾아 주었다.
【‘망자의 왕, 염라’와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염라’의 모든 스킬과 향상된 신체 능력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숙련도에 따라 능력을 100%까지 쓸 수 있습니다.】
변신한 모습은 여자보다 남자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남자라 보기에는 그렇고, 성별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망자.
영혼에 성별이 있을 리도 없으니, 이름 그대로의 모습이기는 했다.
그것보다 신기한 건,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모습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온통 흰색뿐인 옷에 새하얀 머리. 새하얀 눈에 지지 않는 새하얀 피부. 새하얀 여우 가면까지.
망자의 왕보다는 신선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망자의 왕’도 어떻게 보면 신이기도 하니 어찌 보면 틀린 것도 아닌가.
어쨌든, 누가 봐도 나를 윤지호라고 생각하지 못할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절대 입 밖으로 꺼내선 안 되는 말을 저도 모르게 입에 담았다.
“……마법 소녀?”
오우. 쉣.
제 입으로 말해 놓고 소름이 돋았다.
마, 마법 소녀라니! 내 나이가 몇인데……!
아무리 잘 봐 줘야 10대에나 꿀 꿈을 방년 25세에 이루게 된 윤지호가 몸서리쳤다. 닭살을 긁어내리며 다짐했다.
“……커밍아웃은 절대 안 돼.”
인생의 모든 흑역사를 새로 쓸 수는 없다.
소름이 끼쳐서 문제지, 사실 스킬은 너무나 완벽했다. 아무리 멍청해도 이 스킬을 썩혀 두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결국 선택지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것밖에 없었다.
들키면 자살 각이야. 이거.
굳게 각오를 다졌다. 그때, 뒤늦은 알림창이 떴다.
【‘염라’의 특성에 따라, 성향 역시 ‘염라’에 맞게 맞춰집니다.】
【평소 성격과 괴리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주의하여 주십시오.】
【스킬, 얼음의 심장(S)이 시전자의 안위를 위해 자동적으로 발동합니다.】
【스킬의 반작용으로 감정 조절이 미숙해질 수 있습니다.】
“아저씨. 해명해.”
소름 끼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제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목소리에 겁이라도 먹은 것인지, 성위가 머뭇거리며 답을 해 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건 나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해명합니다.]
[나도 아무 조건 없이 해 주고 싶었지만 규율상 어떻게 해 줄 수 없어, 저게 한계였다 합니다.]
[어차피 힘을 얻는 데에 정말 아무 조건이 없을 거라 생각했을 건 아니지 않냐며 ‘이매망량’ 님이 소심하게 항의합니다.]
물론 그럴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진리는 깨달을 정도로 나이를 먹긴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대가가 있을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힘의 대가가 감정이라니.
감정이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 하필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대가라는 것이 문제였다.
어떻게, 어떤 감정이 바뀌는 건가. 그건 결국 내가 달라진다는 게 아닌가.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 나는 그게 무서운 것이었다.
“하, 이게…….”
모든 헌터는 딜레마를 겪는다.
이질적인 취급을 받으면서 인성이 파탄 나는 경우도 있고, 힘을 쓰면 쓸수록 마력 때문에 성격이 난폭해지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점점 냉정해지는 경우도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보통의 인간보다 월등한 힘을 쓰는데 굳이 감정을 대가로 치르지 않아도, 예전과 같은 마음으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소설이면 몰라도 현실은 많이 달랐다. 당장에 다리 하나 못 쓰게 돼도 변하는 게 사람인데. 그렇게 따지면 오히려 이건 대가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는 것과 저도 모르게 변화하는 건 다르지 않은가.
【스킬, 얼음의 심장(S)이 시전자의 안위를 위해 자동적으로 발동합니다.】
알림창 하나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성위는 내가 이 사실을 알면 무서워할 걸 알고 이런 스킬을 내게 주었나 보다.
워낙 쫄보니까.
어쩐지 아까도 몬스터를 내리찍는데 아무렇지 않게 내리찍을 수 있더라. 다시 생각해 보면 이상한 것투성이였는데 이제야 깨닫는 나도 참 나였다.
“아. 몰라. 생각해 보면 나쁘지도 않은데?”
쫄아서 아무것도 못 하고, 해도 쫄아서 벌벌거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런 내가 싫기도 했는데 자동으로 고쳐진다는 소리인 것 같기도 하고.
오. 그런 거면 진짜 좀 괜찮은데……?
바꾸려고 해도 못 바꾼 걸 알아서 바꿔 준다니. 어떻게 보면 꿀인 듯?
“오. 진짜 괜찮은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좋게 생각해 줘서 좋긴 한데 그걸 그렇게 해석하는 것도 너밖에 없을 거라 혀를 내두릅니다.]
“뭐 어때. 어차피 돌이킬 수도 없는 거, 좋게 좋게 생각하는 게 낫지.”
아직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사서 걱정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게 어디 있는가. 다 벌어지고 후회해도, 후회는 늦지 않는다.
“자. 그럼 이제 주인공님 구경 가자. 얼른.”
무엇보다 그래도 최대한 나를 위해 준 너를 원망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쩌면 이것도 전부다 스킬의 영향인지도 모르지만.
[‘이매망량’ 님이 뭐든 좋은 게 최고지. 쌈 구경만큼 재밌는 것도 없으니 어서 구경 가자며 재촉합니다.]
“좋아. 가 보자고.”
감성에 젖은 건 그쯤하고, 슬슬 현실로 돌아와 신나는 쌈 구경을 구경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달리겠다, 생각하니까 거짓말 안 하고 한걸음에 몇십 미터를 지나쳤다.
“오―!”
제가 달리고 있음에도 신기해 제 발을 내려다봤다.
와, 나 원래 100m 25초 대인데.
소리 없이 감탄하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벌써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렇게 처음 마주하게 된 보스의 방은…….
“……별님. 여기 진짜 보스 방 맞아?”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일단 맞기는 맞다 합니다.]
“폐허 굴인데? 그래도 보스 방인데 좀 휘황찬란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아니, 비싼 게 떡칠해 있고 뭐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 포스가……!”
[‘이매망량’ 님이 결국 네가 쓰러뜨려야 할 몬스터인데 대체 뭘 바라는 거냐고 타박합니다.]
그건 그런데…….
기대한 게 있어서 그런지 실망도 매우 컸다. 진짜 거짓말 안 하고 무슨 보스 방이, 다 무너져 가기 직전인 폐가보다 못한 느낌이었다.
“여기 보스는 혹시 시스템님께 원한을 많이 지기라도 하셨나?”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냥 들어가기나 하라고 재촉합니다.]
[나는 얼른 싸움 구경이 보고 싶다 강력히 항의합니다.]
“아. 예. 들어갈게요. 네네. 아, 들어간다니까!”
성위의 등쌀에 짜게 식은 눈으로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투명화는 잊지 않았다.
자고로 구경이라 하면 몰래 하는 게 최고지.
안으로 들어서자, 이제 막 본격적으로 파이트를 뜨려고 하고 있었다.
“내 마지막을 기쁘게 장식해 주었으면 좋겠군.”
“영광으로 알겠다.”
앗싸!
기가 막힌 타이밍에 쾌재를 불렀다. 싸움 구경은 처음부터 봐야 진리지.
대충 잘 보이면서도 두 사람에게 방해될 일이 없는 사각지대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가 자리를 잡고 앉자, 성위가 팡파르를 울렸다.
[돈 주고도 못 볼 귀한 구경에 당신의 성위가 축배를 울리며 주전부리를 찾아 자리를 잡습니다.]
앗. 치사하게. 너만 먹냐!
주전부리란 말에 본능적으로 살짝 발끈하는데, 이어지는 성위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구경에 주전부리가 빠질 수 있냐며 내 귀여운 계약자에게 ‘이매망량’ 님이 선물을 내려 줍니다.]
【카라멜 치즈 반반 팝콘&콜라를 획득합니다.】
“어멋, 내 별님 센스……!”
역시 구경에는 팝콘이지.
* * *
챙―! 챙챙챙!
“……호오.”
와그작― 와그작―
콰과광―!
“……!”
쏘옥― 냠냠.
오. 이 집 팝콘 맛집이네.
야금야금 팝콘을 먹어 치우면서 흥미롭게 싸움을 관전했다. 빛이 번쩍번쩍하며 순식간에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주 흥미진진했다.
어X져스. 개나 주라 그래.
인간이 만든 CG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역시 뭐니뭐니 해도 실제가 최강이었다.
“꽤 괜찮은 공격이긴 하나, 그대는 경험이 좀 부족해 보이는군.”
캬아―! 대사까지. 아주 볼만했다.
만약 이 영상을 찍으면 순식간에 백만 유X버는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쓰읍― 아. 카메라 들고 올걸. 아니, 나 휴대폰 어디에다 뒀지.
아쉬운 마음에 주머니를 찾아 뒤적거렸지만 옷가지까지 싹 다 변신했으니 휴대폰이 나올 리 만무했다.
쳇.
뭐 어차피 찍으려고 해도 제대로 찍으려면 상당한 기술이 필요할 터였다. 염라의 능력이 있어 아무렇지 않게 온갖 동작을 다 보는 거지, 일반인이 보기에는 눈으로 좇기도 힘들 테니까.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라 입맛을 다시며 다시 팝콘을 입안에 쏙 집어넣는데, 회심의 일격이 터졌다.
콰과과광―!
엄청난 굉음과 함께 공격이 자신에게까지 오자, 실드로 공격을 넘겨 버리며 감탄을 했다.
“……와아. 역시 주인공. 그냥 발리진 않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래도 제가 너 제외하고 국내 최고인데 그런 평은 조금 너무하지 않냐 조심스럽게 그의 편을 들어줍니다.]
“음. 사실 생긴 건 정말 안 그렇게 생겼잖아.”
검을 들긴커녕, 구정물 하나 못 묻힐 거 같은 얼굴이라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사서 걱정하게 되는 것 같다.
요즘은 차도남이 대세 아닌가? 차갑게 잘생겼으면 이런 걱정도 안 하는데. 왜 저렇게 순해 빠지게 잘생겨가지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럼 쟤가 네 의사에 맞춰서 잘생겨 줘야 되냐고 어처구니없다는 듯 혀를 찹니다.]
[새삼 저놈이 불쌍해 보이기까지 하니 그쯤 하라 합니다.]
“아니. 진짜 얼굴이 없던 동정심까지 절로 생길 것처럼 생겼잖아. 나만 그래?”
진짜. 진짜로?
열심히 자신이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라고 피력했으나, 망할 아재갬성은 가차 없었다.
[‘이매망량’ 님이 응. 너만 그런다고 답하며 심드렁하게 귀를 후빕니다.]
아이 씨…….
속으로 있는 대로 구시렁거리다, 다시 싸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한이 쓴 안개 스킬 때문에 상황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연기가 걷히자마자 이어지는 굉음에는 진심으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커억―!”
“……!”
지한이 벽에 박혔을 때는 너무 놀라 반사적으로 튀어나갈 뻔했다.
“컥. 커억…….”
그 움직임을 막은 건, 곧바로 숨을 몰아쉬며 싸움을 이어 갈 준비를 하는 지한의 행동이었다.
싸움에도 지켜야 할 룰이 있었다.
물론 나는, 싸움에 그딴 게 어디 있냐, 다구리든 옆에서 기습을 하든 이기면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자신의 정의가 존재하는 지한은 다를 테니까.
뭐, 서로에게 집중하고 있는 둘 사이에 낄 구석이 없다는 것도 있었다.
“아. 팝콘…… 다행이다.”
너무 놀라 벌떡 일어난 와중에도 팝콘은 본능적으로 지킨 모양이었다.
역시 나.
본능적인 순발력을 칭찬하며 다시 팝콘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어쩐지 몸이 앞으로 나가게 될 것만 같았다.
그는 주인공이니 절대 잘못될 리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말 이상했다.
심란한 마음에 팝콘을 입에 넣는데 보스몹이 지한의 실력에 대한 평을 늘어놓았다.
“음. 받은 힘은 나쁘지 않지만, 사용법이 애매하군. 나쁜 건 아니지만 좋지도 않아. 방금 전법은 보통 상황에서는 꽤 쓸 만한 전법이지만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도 상정해 두었어야 하지 않나.”
매우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차는 모습이, 지금까지 벌인 게 싸움이 아닌 대련이었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
보스몹이 싸우는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 주인공인가. 보스몹도 홀리는 마성……!
내가 감탄을 하고 있을 때, 반박할 수 있는 말이 없었는지 지한은 침묵했고, 보스몹은 그런 지한을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있을 수 없는 일에 나는 잠시 고민에 휩싸였다.
“……저거 보스몹이 아니라 교육몹 아니야?”
무슨 보스몹이 인정사정없이 들이박는 게 아니라 교육을 시켜 주고 있지? 괴수에 대한 정체성이 의심될 정도다.
나와 함께 팝콘을 먹으며 관람을 하던 성위가 내 심정에 동의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팝콘을 먹으며, 나도 저런 건 처음 본다고, 별 이상한 놈도 다 보겠다며 혀를 끌끌 찹니다.]
[딱 봐도 기사였던 거 같은데 아직도 제가 기사인 줄 아는 거 같은 과거의 망령이 노망 난 거 같다 평합니다.]
“오. 그거 그럴듯한데?”
그럴듯한 가설에 10점 만점에 8점 드립니다.
짝짝짝.
소리 없이 박수를 치며 성위를 칭찬해 주는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어째서 만점이 아니냐 항의합니다. 정당한 판정을 요구합니다.]
그거야, 당빠…….
“확실한 건 아니잖아. 뭐든 사실에 기반한 내용이어야 점수가 플러스 되는 법.”
틀리면 싹 다 마이너스.
세상의 이치 같은 거지.
잔인한 현실을 일깨워 주자, 성위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버럭버럭 항의를 해 왔지만 깔끔히 무시하며 팝콘을 입에 넣었다.
음, 역시 팝콘은 카라멜&치즈지.
태평하게 팝콘 맛을 음미하는데, 보스몹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입을 열었다.
“평소에는 이렇게 싸우는 편이 아닐 것 같은데. 아, 만나고 싶은 이가 있다 했나. 그래서 조급해졌었나 보군. 그대도 모르는 사이 말이야.”
“……!”
성위와 시시덕거리던 와중에도 절대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팝콘에게 향하던 손이 뚝― 정지했다.
정말 오글거리는 소리지만, 왜인지 그 사람이 나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주인공의 특성상 지금 이 던전에서 그가 가장 신경 쓸 사람은 내가 맞았다.
정말 별거 아닌 상식적인 일일 뿐인데…….
저 말이 너무나 특별하게 들렸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특별한 이를 지칭하는 것처럼.
‘윤지호!’
다시 머릿속에서 울려 퍼지는 이 외침 때문일까.
“……망할.”
이놈의 스킬은 뭐 제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 얼음의 심장은 발동된 상태 그대로인데, 이게 무슨 얼음의 심장인가.
미친 듯이 동요하는 심장이 존재감을 열심히 피력하고 있었다. 제 평생 제 심장이 이렇게 존재감을 내는 일도 없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더 낯설어, 애꿎은 스킬만 욕했다.
“……그렇다 한들, 모두 내가 만든 결과지.”
그 와중에 지한이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만드는 대답을 내뱉었다.
울렁거리는 심장을 황급히 다잡았다.
차라리 말하지 말지. 괜히 사람 더 싱숭생숭하게.
팝콘에서 손을 뗐다. 도저히 더 넘어가질 않았다.
이 와중에 괜한 질문을 던져 관계없는 사람 속까지 헤집어 놓은 원흉은, 지한이 몸을 일으키자 기쁨이 가득한 얼굴로 환희했다.
“……! 아직 움직일 수 있는가.”
“이 정도로 무너질 거였다면,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어.”
아니. 금방이라도 죽을 거 같은데.
방금 벽에 처박힌 정도로 봐서는, 아무리 튼튼한 헌터의 몸이라도 백퍼 늑골 두세 개는 나갔을 텐데.
더럽게 아플 것이 분명한데 왜 다시 일어나는 것인가.
지한을 이해할 수 없었다.
수십, 수백 번을 본 주인공의 클리셰 중 클리셰일 뿐인데. 소설로 볼 때는 너무나 당연해 보였건만 현실로 보니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내 마음은 눈곱만치도 모를, 주인공님은 굳센 얼굴로 검을 다잡으셨다.
“계속, 가자고.”
“하하하! 아주 좋은 자세군. 더 날 즐겁게 해 주길 바라네.”
두 상대가 발돋움하며 검을 부딪쳤다.
“……괜히 심란하네. 진짜.”
2차전이 시작된 걸 보면서도 그렇게 흥미진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조금만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겠지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돌이킬 수 없는 수렁에 빠질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내가 가장 소중한 인간이어서, 내가 상처받을 게 가장 중요한 소인배니까.
어차피 당신은 주인공이니까.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될 테니까…….
더 알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아무 기분도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에 대한 걱정보단 외면할 생각부터 드는 나는 정말, 구제불능이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안 어울리게 갑자기 웬 삽질이냐고 심드렁한 얼굴로 귀를 후빕니다.]
[이상한 데서 쫄보인 네가 다른 것도 아니고 감정에 인색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닌데 새삼 뭘 그런 걸로 그렇게 땅을 파고 있냐 말하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혀를 찹니다.]
“……풋.”
신랄한 성위의 태클에 화가 나기는커녕 도리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맞는 말투성이였다. 화낼 이유도 없었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고, 그렇게 스무 해를 넘게 살아 왔다. 새삼 놀랄 것도 스스로를 비난할 것도 아니었다.
“하앗―!”
“그렇지. 이래야 더 재미있지!!”
그럼에도 자꾸만 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분명…….
“커억―!”
“이런 힘 조절을 잘못했군.”
“……하아. 아직. 아직이야.”
보는 사람이 다 화병 날 정도로 올곧고, 스스로를 위할 줄 모르며.
“아직 충분히 더…… 할 수 있어……!”
그래서 너무나 바보 같고, 어리석어.
“명을 재촉하는군. 무리한 힘의 사용은 수명을 깎아 먹는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그래도 하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자꾸 신경 쓰이다 못해 짜증 나게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정말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탄식과 함께 실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원망 어린 변명들을 내쏟다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다.
아아. 그래. 화가 날 수밖에.
정말 내가 좋아하지 않는 짓만 골라 하는 너인데도…….
“어리석군.”
“아마…… 그녀한테도 같은 소리를 들을 거야.”
왜 이 세계의 주인공인지 말해 주는 것처럼, 눈이 부시니까. 무감한 내 눈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당신이 예쁘니까.
“그녀가 누군지 궁금해지긴 하는군. 본인 때문에 그대가 이 꼴이 돼서도 어떤 표정을 지을지도 궁금하고.”
“그건, 나도 궁금하네. 조금은…… 슬퍼해 줄까?”
“글쎄. 그대를 잘 아는 이라면 화부터 낼 거 같군.”
“그것도 좋은 거 같은데.”
“……그대. 어디 모자란 거 아닌가?”
“제정신이 아니긴 하지.”
나도, 어쩔 수 없는 최애 병인가 보다.
아무리 부정하고, 무시하려 했지만 나 역시 당신의 매력에 빠져 소설을 본 독자였으니까.
분명 성위는 코웃음을 치겠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이유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내가 어울리지 않게 당신을 저버리지 않는 이유는.
“주인공 앞에서 관종 티 내는 게 좀 그렇긴 하지만, 슬슬 끼어들어 볼까?”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드디어 우리 애기가 등장하는 거냐고 팝콘을 공중으로 튀기며 열광합니다.]
“아니. 그 귀한 팝콘은 내비 둬. 음식은 귀한 거야.”
[어차피 공중에 떴다 그대로 다시 곱게 제자리로 돌아왔다며 당연한 소리하지 말라고 ‘이매망량’ 님이 핀잔합니다.]
아님 말고.
툭툭―
변신 상태가 사람이 아니다 보니, 먼지 따위 묻을 리 없지만 기분상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팝콘을 곱게 창고에 넣었다.
인벤토리를 아직 못 쓰는 게 참 서러웠다. 줄 거면 그냥 주지, 왜 던전 하나를 클리어해야 열어 주는 거야.
참 효율적이지 않은 시스템에 혀를 차며, 투명화를 풀었다.
쏴아아―
투명화를 품과 동시에 내가 내뿜는 위압감이 순식간에 공기를 지배했다.
“……!!”
“……!”
서로에게 정신이 팔려 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던 인간들이 빛과 같은 속도로 내 쪽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아.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자. 잠깐. 당신은……!”
일단 주인공님부터 보스몹과 떼어 놓자는 마음에 둘 사이에 끼어들어 그를 번쩍 들어 장소를 이동하자, 주인공님이 발버둥쳤다.
그게 좀 큐티해서, 안 해 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쓸데없이 귀엽단 말이야.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코스프레. 일코 빨리 하라고 재촉합니다.]
알아. 안다고.
어차피 염라의 가면을 쓰고 있어, 겉은 진짜 이질적인 염라의 얼굴 그대로였다.
어느 정도 피해가 가지 않을 선에서 남주를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내 입에서 처음 듣는 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부상자는 이쯤 했으면 충분하다. 바통을 이어받을 사람도 왔겠다. 조금 쉬어도 아무도 뭐라 할 이는 없어.”
제가 말해 놓고 속으로 꽤 놀랐다. 정말 사람이 내는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말투도 그랬다.
다른 사람처럼 말했으면 좋겠다 생각은 했지만, 연기의 재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내게 그런 것이 가당키나 한가.
해서 애초에 말끔히 포기하고 평소처럼 말했다. 그런데 완전히 다른 말투와 분위기로 말이 나가는 것이다.
새삼 이 스킬의 위험성이 실감이 났다.
이래서 감정오염을 주의하라고 한 거였구나.
딴 세상에 잠시 빠져 있는데, 주인공님이 그런 내가 무척이나 마음에 안 든 듯했다. 조금 반항적인 눈으로 쏘아붙이려다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게 문제가…… 1위……?”
“음. 그게 가장 문제 안 되는 거 같은데. 노코멘트도 선택이겠지?”
힌트라고는 아무것도 없다시피 했는데 바로 알아채는 주인공님의 무서운 추리력에 살짝 흠칫― 했지만 염라의 가면 덕택에 태연하게 말을 돌릴 수 있었다.
수백 개의 가면 만세.
이런 내 마음은 눈곱만치도 알지 못하는 주인공님은 정말 놀란 듯 제대로 말조차 잇지 못했다.
“어떻게 여기에…….”
“어쩌다. 전 1위 님이 질문이 참 많군. 남은 질문들은 다음으로 미루지. 지금은 타이밍이 별로거든.”
아. 오글거려.
가오 잡는 말투가 정말 적응이 안 됐다.
그래도 지금 중요한 건 내 말투가 아니라 주인공이었기에 애써 사소한 걸로 치부하며, 손을 뻗어 지한의 눈을 가렸다.
“조금 자 두는 게 좋겠어.”
“아니, 하지만……!”
아직 해야 할 것이 있다는 그 애타는 목소리에 괜히 가슴 한편이 뻐근해졌다.
가까이서 보니 몸 상태는 더 가관이었다.
대체 이 상태로 누굴 구한다고. 뭘 한다고 이토록 필사적인지.
“당신은 넘칠 만큼 충분히 했어.”
“그…….”
“그러니 이제 좀 제발 자도록 해.”
여기서, 당신이 죽는 건 이야기를 떠나 그냥 싫거든.
잠들기 싫다고 발버둥 치는 주인공님을 강제로 재우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자, 조용히 내가 준비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준 보스몹이 보였다. 그걸 보며 나는 줄곧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내내 했던 의심에 확신을 굳혔다.
“기다려 줘서 참 고맙군. 이제부터는 내가 갈 건데 괜찮겠지?”
“내게 선택권이 있는 문제인가?”
“음. 그건 아니지만 상관없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하지만 계속 지켜보았던 싸움의 태도.
물론 주인공 버프로 일어난 일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저 모습은 어폐가 좀 있었다.
해서 보다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보스몹이었지만, 누구보다 사람 같아 더 소름 끼치는 이 괴수는.
“너는 즐길 만큼 즐겼고, 무엇보다…….”
“…….”
“너는 죽고 싶지 않나.”
진짜 사람이라는 걸.
정확히는, 살아생전에는 사람이었던 자. 죽었으나, 영혼이 묶여 죽지 못하고 이곳에 있는 것이었다.
그걸 확신할 수 있었던 건 염라의 눈으로 보이는 그의 영혼의 모습 때문이었다.
칭칭 묶여 있는 영혼의 형태. 영혼과 맞지 않는 육체.
그것이 무엇보다 큰 증거였다.
그런 자가 바라는 게 하나밖에 더 있겠는가.
안식.
“어차피 당신의 본래의 힘은 반의 반도 돌아오지 않았지. 봉인이 풀렸다고는 하지만 극히 일부고, 아마 본인이 풀 생각도 없겠지. 그래서 그렇게 저기 있는 녀석을 성장시키면서 신나게 즐기고 있었던 거고.”
“…….”
“본인을 죽일 수 있게.”
계속 의문이었다.
오죽하면 저거 보스몹이 아니라 교육몹 아니냐는 소리까지 했겠는가.
주인공이 호감을 샀다 한들, 해치우기보단 계속해서 성장을 재촉하는 느낌의 싸움. 무엇보다 S급이면서도 묘하게 S급으로 보기에는 모자란 것 같은 힘.
처음에는 유지한이 마음에 들어 봐주면서 싸우는 줄 알았다. 힘이 무력하다기에는 쓰는 것이 너무 능숙했으니까.
그러다 문득문득 보였다.
그냥 힘을 쓰면 되는 부분에도 굳이 기술로 커버하는 모습이.
S급 힘이면 그럴 필요가 없을 터인데도 보이는 그 모습에 줄곧 의문을 가지다 이내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간단한 이야기였다. 쓰질 못하니까.
“아마 여기서 죽는 게 당신에게 내린 마지막이겠지. 저기 자고 있는 녀석이 그래 줬으면 더할 나위 없긴 했겠지만, 나여도 딱히 상관없지 않나? 안식은 공평하다.”
그러니 굳이 아픈 애 데리고 떼쓰지 말자.
태연히 말을 마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말해 보라 턱짓하자, 보스몹 ‘에스칼리토’가 헛웃음을 흘렸다.
“마치 전부 꿰뚫어 본 것처럼 말하는군.”
“틀린가?”
“아니. 정답일세. 소름 끼치도록 정답이야. 그대의 말대로 나는 현재 생전 가지고 있던 힘의 반의 반도 쓰지 못하는 상태야. 이 삐걱거리는 몸이 내 힘을 감당하기에 한계가 왔다는 거지. 마침 마지막을 장식해 주기엔 적임자 같은, 아주 올곧고 순수한 자가 나를 찾아왔으니 이런 끝도 정말 나쁘지 않다 여겼네.”
“…….”
“저자는 그럴 가치가 있지 않나. 내 마지막에 저자를 키워 주는 것도 나쁘지 않고. 저런 이는 흔치 않네. 정말로. 아주 귀해.”
“알고 있어.”
저런 머저리가 세상에 둘이면, 인생 피곤해서 살겠나.
저건 하나이기 때문에 더 귀중한 거다.
“그래. 그대가 구하러 온 것이겠지.”
“……당신도 그 별종 중 하나야.”
내 눈에는 보였다. 그의 영혼이.
그의 영혼에 새겨진 정의가.
그래서 굳이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었다.
내 말을 어떻게 느꼈는지 에스칼리토가 쓴웃음을 흘렸다.
“그대가 날 어떻게 보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망령이네. 더 이상 살아있지 않은 자야. ‘현’ 망자의 왕인 자네가 그것을 모를 리 없을 터.”
“‘……그게 너의 선택인가?’”
아까와는 또 다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불현듯 깨달을 수 있었다.
이건 내게 자신의 얼굴을 빌려준, 진짜 ‘염라’의 진언이었다. 그것을 느낀 에스칼리토가 서글픈 얼굴로 예를 갖추어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부디 내게 안식을. 왕이시여. 이제는 정말로…… 당신의 품으로 가고 싶나이다.”
감정을 숨기지 못한 채, 온 마음으로 죽음을 바라는 자를 보며 괜스레 가슴이 묵직해졌다.
“내 곁에…… 있는 방법도 있어. ‘에스칼리토.’”
멋대로 나오는 진언에 처음은 당황했지만 진언이 전해지는 방식을 금방 깨달아, 곧바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날강도긴 했지만 폼으로 이매망량의 주인이 아니었다.
나는 ‘에스칼리토’를 거둘 힘이 있었다. 굳이 성위에게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힘이,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 말에, 에스칼리토는…….
웃어 주었다.
“그것도 매력적이지만, 이미 나는 이생에 뜻하는 바가 없어. 그러니 부디 내 뜻을 존중해 주게.”
아아. 정말 주인공님하고 똑같은 인간 같으니. 이런 괴수는 정말 두 번 다시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염라 고유의 스킬: ‘생의 종언’을 선언합니다.】
【모든 영혼은 염라의 앞에서, 염라의 뜻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망자의 낫을 현현합니다.】
망설임은 없었다.
결심을 굳힌 나는 원래 실행에 있어선, 망설임 따윈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나를 굳건히 해 줄 스킬도 있었고.
서걱―
해서, 나는 망설임 없이 낫으로 그의 목을 베어 버릴 수 있었다.
목이 갈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한순간 늦게 피가 튀기며 목이 분리됐다. 그사이. 아주 찰나의 에스칼리토가 내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고맙네 …… ■■■여.”
아주 후련한 얼굴로.
베는 사람 정말 기분 더럽게.
망할.
솨아악―
빛과 함께 형체도 없이 사라진 에스칼리토와 함께 시끄럽게 알림창이 울렸다.
【‘에스칼리토의 미궁’ 정보가 갱신됩니다.】
【‘봉인된 에스칼리토의 무덤’ 의 최종등급은 ‘S―’급입니다.】
【던전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던전을 클리어한 자는 ‘이매망량의 주인’입니다.】
【최초 던전 클리어를 축하드립니다.】
【첫 던전 클리어로 인벤토리가 개방되었습니다.】
【랭킹이 갱신되었습니다.】
【윤지호 님의 월드 랭킹이 변동되었습니다.】
【윤지호 님의 월드 랭킹은 1위입니다.】
얼.
보면 볼수록 말도 안 되는 개소리의 향연이었다. 그럼에도, 무수히 떠오르는 알림창은…… 놀랍게도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제는 포기해서 그런가.
그것보다는 오히려 내 손 위로 내려앉는 빛이 더 신경이 쓰였다.
【에스칼리토의 마력석(S급)을 획득하셨습니다.】
【운명의 여신의 세 가지 애정(S급)을 획득하셨습니다.】
볼 필요도 없는 마력석은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다른 아이템을 확인했다.
[운명의 여신의 세 가지 애정(S급)]
운명의 여신이 세상의 남긴 물건.
운명의 여신은 자신의 소중한 이를 도와달라 애원하는 신도에게 한 가지 선물을 내려 주었습니다.
귀걸이에 엮인 세 가지의 보석은 각각 하나씩 한 번의 소망을 담을 수 있습니다.
시전자가 소망을 담고, 원하는 보유자에게 선물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시전자가 소망하고 보유자가 사용할 수 있는 구조기에, 시전자는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선물용 아이템입니다.
“……남겨도 꼭 저답게 남기고 가네.”
어차피, 괜찮은 거면 어떻게라도 지한에게 선물할 참이었지만.
누가 교육몹에 가까운 보스 아니랄까 봐, 에스칼리토는 정말 괜찮은 걸 남겨 주었다. 이건 누구보다 지한에게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자신보다 남을 위하는 바보 같은 당신에게.
귀걸이를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첫 번째 소망은, 어떤 상처든 치유할 수 있는 힘을.”
【첫 번째 보석에 ‘치유’의 소망이 담깁니다.】
“두 번째로는…… 늘 최상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두 번째 보석에 최상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는 ‘리셋’의 소망이 담깁니다.】
“마지막으로는…….”
가장 필요한 현실적인 스킬들을 넣고 나니 마지막은 뭘로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뭐, 더 필요한 게 있던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공격 쪽은 주인공님의 성위님이 다 채워 줄 테고, 보조계도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조금, 꿈같은 소망을 빌어 보았다.
“부디, 당신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구하고, 또 구하고, 보람은 느끼지만 정작 본인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는 모르겠는 당신을 위해.
【세 번째 보석에 보유자의 소망을 이룰 수 있는 ‘소망’의 소망이 담깁니다.】
……잘하는 짓인지는 모르겠다.
귀한 아이템에 쓸데없는 걸 담은 게 아닌가.
그래도, 조금 소망했다.
주인공이니만큼 이런 도움 없이도 원하는 바를 충분히 이룰 수 있을 거 같으면서도, 설정값이 워낙 설정값이기에.
그렇게 설정된 소망이 정말 당신의 소망인지 헷갈리는 당신에게 이것이 부디 도움이 될 수 있길.
【수백 개의 가면이 해제됩니다.】
【‘염라’가 라이브러리에 저장됩니다.】
【수백 개의 가면의 숙련도가 상승합니다.】
쏴아아―
스킬을 해제하니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다.
역시 분수에 맞지 않게 몸을 움직이니 피로가 쌓이긴 하나 보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럼 안 그럴 줄 알았냐며 어처구니없어 합니다.]
“……그냥 희망 사항이었거든?”
[희망 사항 한번 참 양심 없다고 ‘이매망량’ 님이 질책합니다.]
예예. 제가 죄인입니다.
성위와 투덜거리는 사이, 던전의 출구가 열렸다.
【던전의 출구가 열립니다.】
눈앞에 펼쳐진 출구를 보며, 살짝 고민했다.
주인공도 내가 데리고 나가야 하나?
상관은 없는데, 그러면 내가 의심받을 것 같다.
의심받을 상황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데 참 쓸데없는 걱정한다며 성위가 혀를 찼다.
[소멸성 던전이라 살아만 있다면 던전이 다 뱉어 줄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이매망량’ 님이 한심함을 담아 말합니다.]
오우. 그런 핵꿀이.
그럼에도 조금, 아니 조금 많이 눈에 밟히긴 했지만 모른 척 출구로 걸음을 옮겼다.
“……아. 진심 자고 싶다.”
정말 피곤한 하루였다.
* * *
“…한!”
“…배. 지한 선배―!”
“유지한 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지한이 힘겹게 눈을 떴다.
아무리 헌터의 몸이 회복이 빠르다고는 하지만, 너덜너덜해진 몸이 잠시 눈을 붙인 사이에 회복될 리는 만무했다.
아픈 몸을 내색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고 천천히 보이는 것들을 눈에 담았다.
“……!”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완전히 망가진 센터의 모습과 뒤늦게 던전으로 들어갔을 거라 추측했던 유라와 민현. 그리고 지우였다.
밖이 보이고, 세 사람이 보이는 걸 보니 던전이 클리어된 모양이었다.
“와. 진짜 그래도 랭킹 1위가 아주 놀지는 않으려나 봐요. 그렇게 한 번만 얼굴 보여 달라고 온 국민이 애걸복걸할 땐 죽어도 안 나오더니. 이렇게 휘황찬란하게 데뷔를 할 줄이야.”
“지금 태평하게 그런 소리가 나오냐. 그 사람 없었으면 모두 위험했어. 최종 ‘S-’급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만으로 그게 쉬웠을 거 같아?”
“그러니까 더 난리죠. 거의 솔플로 S-급을 클리어했는데. 저기 센터랑, 기자들 포함해서 지금 인터넷 완전 뒤집어졌어요.”
평등하게 뿌리는 정보 알림창은 전국에 있는 모든 헌터에게 뜬다. 이미 이번 던전이 클리어된 걸 모르는 헌터는 없을 거라는 소리였다.
설상가상으로 헌터들이 인터넷을 한번 뒤집어 놓으면서 일반인들도 난리가 났다. 한동안의 이슈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그분이 오셔서 살았죠. 정말. 길드장님 상태가 이 정도인데.”
“시끄러워지는 것도 이해는 가지. 구급차는 언제 온대?”
“도로가 부서져서 시간이 좀 걸리려나 봐요.”
사태를 수습하고 있는 일반인들까지 모두 홀연히 나타났다 던전을 클리어하고 다시 사라진 1위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그 이야기들을 들으며 지한은 난생처음 본 랭킹 1위의 힘에 이를 악물었다.
왜 그 사람이 자신을 제치고 랭킹 1위가 된 건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가진 마력의 양부터 비교가 되지 않았다. 나름 마력저항력도 꽤나 가지고 있다 자신했건만 그자의 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무엇보다 정말 사람이 아닌 것 같은 그 느낌은 자신이 그의 앞에서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속속들이 깨닫게 해 주었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무력감을 느끼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애초에 그건 고놈 성위가 미친 팔불출이라 그런 것도 있고, 성위 힘 자체가 우리랑은 일단 궤를 달리해서 그런 거라고 너무 상심하지 말라 심심찮게 위로합니다.]
“……그래도, 싫습니다.”
성위가 위로까지 해 주었지만, 무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차이가 너무 확연히 느껴져서. 아니, 그것도 맞지만 가장 가까운 정답은 질투였다.
내가 구해 주고 싶었다는, 추잡한 질투심.
내가 좀만 더 강했다면, 그녀를 구해 내는 건 나였을 텐데 하는 열등감.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열등감에 지한은 속으로 조소를 흩뿌렸다.
이렇게 한심한 남자가 어디 있을까. 자신의 무력함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지한 선배?”
하지만 지한은 울지 못했다. 뒤늦게 가장 중요한 누군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지호 씨는?”
그 물음에 민현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그걸 못 알아볼 리 없는 지한의 얼굴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다행히 지한의 손이 떨리는 것까지는 보지 못한 민현이 마찬가지로 급격히 어두워진 지우의 눈치를 보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 곧 나올 거예요. 저희 나온 지 1분도 안 됐거든요. 일반인이 가장 늦게 나오니까…….”
“그럼. 살아 있을 거야! 윤지호 씨가 누구 누나인데! 들어 보니 운동도 꽤나 잘했다던데?”
유라가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해맑게 말했지만 지한의 귀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민현의 말은 옳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던전이 클리어 되면, 가장 먼저 던전이 뱉어 내는 건 헌터들이었다. 일반인은 그다음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모두 나온 다음 지호가 나오는 것이 맞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에 몸이 떨렸다.
던전은 ‘산 자’만 뱉어 낸다.
시체를 얻으려면 직접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거다.
만약. 만약…….
“지한 선배…….”
“유지한. 일단 진정…….”
지한의 이상 상태를 눈치챈 이들이 걱정스럽게 지한을 바라보며 지한을 만류했다.
그 순간, 기적 같은 타이밍으로 허공에 출구가 생성됐다.
“으잇차.”
그 속에서 빛과 함께 지호가 사뿐하게 지면을 밟고 내려왔다. 마치 구세주가 강림한 것 같은 장면에 모두가 하던 것도 멈추고 멍하니 지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이 보이지도 않는 것인지,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지호가 아는 이들을 발견하고 반갑게 웃어 보였다.
“오. 다들 무사하네. 다행이다.”
해금과도 같은 미소에 그제야 마법이 풀린 듯이 모두가 지호를 향해 달려갔다.
“누나―!!”
“지호 씨!!”
“윤지호 씨!”
절박하게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이들의 모습에 지호가 머쓱하게 볼을 긁는데, 그런 그들보다 한발 먼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지한이 지호를 끌어안았다.
“……!”
“……유지한?”
사실 끌어안을 생각까진 없었다. 속으로 무척이나 당황했지만 막상 품에 안으니 놓고 싶지 않았다.
“……유, 지한 씨?”
그녀가 당황한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그럴 것이다. 갑자기 끌어안으니 놀라지 않을 리가.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밀어내지 않았다. 구명줄을 붙잡듯 그녀를 부여잡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듯.
그녀의 다정함에 불안이 눈 녹듯 가라앉았다. 그녀의 앞에서 자신은 정말, 무력하고,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곁에 있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행복했다.
“…무사해서, ……미안합니다.”
“……?”
자신이 들어도 맥락 없는 말에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자신을 보는 것이 느껴졌다.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이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전에 구해 주지 못해 너무나 미안했다.
“구해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내가 구해 줬어야 했는데. 당신도, 당연히 내가 당신을 구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그가 살아온 삶은 언제나 그런 식이었기에, 지한은 진심으로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모든 사람들을 구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그러한 인식과 취급이 당연해졌고, 익숙했기에 그녀가 원한다면 원망도 기꺼이 받아 줄 생각이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심 의기소침해졌다.
왜, 다른 사람은 다 구할 수 있었는데, 그녀는 그러지 못했을까. 처음으로, 진심을 다해 구해 주고 싶었는데.
스스로의 무력함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전혀 제 예상과는 달랐다.
“아니. 잠깐만.”
“……?”
그녀가 갑자기 자신을 밀어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조금 팔에 힘을 빼고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갑자기 두 손을 쭉 뻗어 제 얼굴을 잡고 저와 얼굴을 마주했다.
“……지호 씨?”
갑자기 얼굴이 가까워지자, 지한이 얼굴을 붉히며 어쩔 줄을 몰랐다.
그 한심한 작태를 보며 지한의 성위가 혀를 찼다.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이런 천하의 숙맥을 보았나. 제 계약자의 한심함에 몸부림칩니다.]
[어떻게 이런 찬스도 눈 뜨고 놓치고 있냐고 있는 대로 혀를 차며 그러게 진작 여자 좀 만나고 다니지 그랬냐고 질책합니다.]
그 소리에 지한은 억울해졌다.
랭커일 때는 말할 것도 없었고, 랭커가 아니었을 때도 다가오는 여자는 정말 많았다. 하지만 그런 여자들이 적극적으로 대시해 올 때도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상대가 그녀라서 이러는 것이었다.
그런 지한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호가 지한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말했다. 왠지 모르게 화가 난 것 같은 목소리였다.
“방금 그 말 다시 한번 해 봐요. 왜, 지한 씨가 미안해해요?”
“……그야, 구해 드리지 못했으니까요?”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답은 해야겠어서 어물쩍거리며 답하자, 그녀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아. 이 표정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정말 쓸데없는 것만 잘 읽어 낸다며 성위가 한탄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순간만은 지한도 살짝 공감했다. 모르는 게 나았을 텐데…….
이런 지한의 생각은 알 리 없는 그녀는 또다시 다시 한번 폭탄을 던졌다.
“왜, 지한 씨가 구한 게 아닌 게 돼요?”
“……예?”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지한이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그에 더 화가 난 듯 그녀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왜, 그게 지한 씨가 구한 게 아니게 되냐구요. 열심히 싸우지 않았어요?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요?”
“……아니요.”
“그런데 왜 지한 씨가 나를 구한 게 아니게 돼요.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클리어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지한 씨의 노력이 없던 것은 아니에요. 그렇게 따지면 레이드 공대들은 다 뭐가 되나요. 리더 빼고 다른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안 구한 게 되나요?”
“……그건.”
반박할 수 없는 말에 지한이 입을 다물었다.
다 맞는 말투성이였다.
자신이 늘 다른 헌터들에게 적용시키는 상식이었으니까. 그걸 자신에게만 적용시키지 않았을 뿐.
그제야 지한은 깨달았다. 왜, 그녀가 화를 냈는지.
깨달음을 얻은 지한이 조금 얼이 빠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지한을 보며, 그녀는 지한이 가장 바라던 미소를 내주었다.
“날 구해 줘서 고마워요. 유지한 씨. 자기 몸은 신경 쓰지 않고 나를 먼저 생각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평생 기억할게요.”
“…….”
수십, 수백 번을 들었던, 흔하디흔한 감사 인사였음에도 지한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동안의 모든 나날들이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마치 그녀를 만나기 위해, 그동안 그토록 노력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아. 정말 ‘너를’ 만나기 위해 포기했던 모든 것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분명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 자신할 수 있었다.
분명 금방 잊어버릴 테지만.
“아…….”
지금 이 순간, 지한은 지호를 미친 듯이 끌어안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자신에게 뻗어 준 손이 너무나 좋아, 차마 그러지 못했다.
대신 지한은 그새 그렁그렁해진 눈에서 눈물이 터져나오지 않게 참으며 제 두 뺨에 올려져 있는 지호의 손에 손을 겹쳤다.
이 순간만큼은 정말.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었다.
“아. 맞다―!”
그때,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지호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지한의 귀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
지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하면서도 얌전히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는데…….
스륵―
한쪽 귀에 무언가 걸렸다. 귀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지한이 손을 들어 올렸다. 만졌을 때 느껴지는 파장으로 봐서는 그냥 평범한 귀걸이가 아니라 아티팩트였다.
그것도 평범한 등급이 아닌…….
“이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아티팩트의 등급에 지한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런 지한의 의문을 읽은 듯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클리어하신 분이 주고 갔어요. 일반인이 들어왔는데 아무것도 안 가져가면 정말 재수 옴 붙은 거밖에 더 되겠냐고. 어차피 자기보다 저한테 더 유용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럼 왜 이걸 저한테…….”
본인이 직접 쓰지 않고…….
쓰지 못하는 아이템이라고 해도 이 정도 아티팩트라니, 팔면 엄청난 거금이 될 것이다. 그걸 아는 지한이 왜 이걸 자신에게 주냐 묻자, 지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내가 던전에 또 들어갈 것도 아니고 이게 왜 필요해요. 당신에게 더 필요할 것 같았어요.”
“…….”
말하고도 조금 쑥스러운 듯 볼을 핑크빛으로 물들이며, 그녀가 배배 몸을 꼬았다. 그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그런 그를 향해,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워지는 감정과 기억 속에서 아직은 ‘존재하는’ 유지한이 바라 마지않았던 단어를 황송하게 입에 담았다.
“어때요?”
“…예뻐요.”
숨이 멎을 만큼.
* * *
‘……오잉?’
안 그런 척하겠지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하는 남동생에게 헌신하는 마음으로 응석을 받아주고자 팔을 벌리려던 나는, 뭔가 안기긴 안겼는데 내가 생각했던 대형견과는 다른 대형견이 안기자 당황을 금치 못했다.
뭐지? 이 상황은?
안 그래도 당황스러워 미치겠는데 거기에 성위가 시끄럽게 기름을 부어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시츄에이션이냐 묻습니다.]
[평생 몇 번 못 볼 목석 같은 네 모습이 매우 볼만하다 낄낄거립니다.]
[근데 계속 보고 있을 만한 건 아니니 자신의 시력 보호를 위해 신속하게 떨어질 것을 권고합니다.]
……얜 또 뭐라는 거야.
혼자 아주 뻘소리를 다하고 있는 성위는 제쳐 두고, 눈알을 데구르르 굴렸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모두 넋이 나간 것이 보였다.
그걸 보며 살짝 안심했다. 적어도 다른 이상한 건 못 느낀 듯했다.
그나저나, 모두의 혼을 나가게 만든 장본인에게 왜 이러는 거냐고 물어보려면 일단 요걸(?) 떼어 놓아야 하는데, 내가 구명줄인 것처럼 절박하게 붙잡고 있으니 선뜻 떼어 놓을 수가 없었다.
분명 출구에 들어간 건 내가 먼저일 텐데 나보다 먼저 나와 깨어있는 걸 보니 나오는 것도 시간차가 있나 보다. 대체 나와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몸이 맞닿아 있는 나는 분명하게 느낄 수 있는, 그의 생생한 떨림이 나를 냉정해지지 못하게 했다.
나를 제외하면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왜 이렇게 사시나무처럼 떠는 것인지. 괴롭히는 사람도 없을…….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쟤가 저렇게 본투비 호구인데 그거 진심이냐고 묻습니다.]
……건 아니겠지만, 유라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있었으니 곧바로 그러진 않았을 텐데.
성위의 말에 큰 깨달음을 얻고 재빨리 말을 바꿨다.
소설을 읽었을 때는 큰 감흥이 없었지만, 막상 내가 피부로 느낀 이 소설의 핵발암이 떠올라 주인공을 괴롭히는 사람이 없다고는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대체 뭐지?’
설사 내가 못 본 사이 괴롭힘을 당했다 해도, 그런 거에 그다지 상처받는 편이 아닐 텐데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시무룩해진 대형견 같은 모습에 무심코 손이 나갈 것 같았다. 동생 놈도 이런 스타일이라 그런지, 이런 모습에는 너무 약했다.
이 예쁜 대형견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비로소 주인공님이 감사하게도 입을 열어 주었다.
“…무사해서, ……미안합니다.”
……매우 색다른 소리를 하긴 했지만.
무사해서, 미안합니다?
뭐야. 내가 무사해서 미안하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이지? 무사해서 싫다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인공님이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 와중에 성위가 또 다른 색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쟤 원래 포지션이 탱커냐 묻습니다.]
[어그로가 아주 끝내주는 게 최상위 탱커상이라고 감탄은 금치 못합니다.]
……얘 딜러일걸?
하지만 아주 개소리는 아닌 의견이라, 그 가능성에 조금 마음이 기울어졌다. 어그로라면 아주 예술적인 어그로긴 했다.
“구해 주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이건 또 뭔 개X소리야.
차라리 그냥 예술적인 어그로인 게 나았다. 아니 다른 의미로 어그로는 맞나? 사람 빡치게 하는 데 최적이니까.
뒷골이 당겼다. 누가 누굴 구해 줘. 참나.
구해 줬어야 한다는 말만으로도 충분히 어이 밥 말아 먹을 일이었지만, 망할 주인공님이 하는 말은 빌어먹게도 그 이상이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빡치는 건 알겠지만 마력. 마력 새어 나온다고 일단 진정하라 권고합니다.]
[설마 여기서 힘숨찐 관둘 거냐고 묻습니다.]
후우…….
방정맞은 성위의 호들갑에 가까스로 진정을 했다.
그래. 여기서 다 까발릴 수는 없지. 하지만 열 받는 소리인 건 어쩔 수 없다.
저 말만 떼어 놓고 보면 별거 아닌 소리일 수 있다. 하지만 윤지우가 헌터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이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피부로 느낀 나는 저 소리가 별거 아닌 소리로 들릴 수가 없었다.
‘윤지우 님. 당신은 이 나라의 훌륭한 군력이십니다.’
‘당신이 살릴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지 세기도 어렵게 될 정도입니다. 그 유익한 힘을 부디 국민에게…….’
듣기만 해도 딥빡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뻔할 뻔 자다.
살아남게 해 줘도 고작 생채기 났다고, 구해 줬어도 다리 부러졌다고 자신의 부러진 다리에 대한 보상을 내놓으라며 원망을 퍼붓는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아니. 잠깐만.”
있는 대로 쌍욕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참았다. 욕을 먹어야 할 상대는 당신이 아니었으니까.
“왜, 지한 씨가 구한 게 아닌 게 돼요?”
“……예?”
“왜, 그게 지한 씨가 구한 게 아니게 되냐구요.”
화를 내지 않게 열심히 숨을 골랐다.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클리어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라고 해서 지한 씨의 노력이 없던 것은 아니에요. 그렇게 따지면 레이드 나가는 헌터들은 다 뭐가 되나요?”
“……그건.”
아, 오글거려. 내 인생에 이렇게 곱게 오글거리는 말을 할 날이 올 줄이야.
닭살이 우수수 돋아날 것 같았지만, 차마 요 예쁜이에게 쌍욕을 할 수는 없어 최대한 곱게 곱게 말을 다듬었다.
“날 구해 줘서 고마워요. 유지한 씨. 자기 몸은 신경 쓰지 않고 나를 먼저 생각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평생 기억할게요.”
당황하다 이내 행복으로 물든 얼굴을 보니 그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오글거리는 짓을 해도, 그 오글거리는 짓을 보람있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역시 주인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그 행복한 얼굴을 계속 보고 있자니 어쩐지 다시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꼬일 것 같아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아. 맞다―!”
줄 생각이었지만 어떻게 줘야 하나 고민하던 참에 아주 잘 되었다.
“클리어하신 분이 주고 갔어요. 일반인이 들어왔는데 아무것도 안 가져가면 정말 재수 옴 붙은 거밖에 더 되겠냐고. 어차피 자기보다 저한테 더 유용할 거라고 하더라고요.”
사실 이유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고 준 거라, 진짜 아무 말이나 대충 막 내뱉었는데 의외로 앞뒤가 자연스럽게 딱딱 맞았다. 몰랐는데, 창작에 꽤 소질이 있었나 보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아주 훌륭한 임기응변에 박수를 칩니다.]
네. 감사.
성위의 찬사에 짧게 소감을 말하며, 지한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혼이 반쯤 나가 보이는 얼굴로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혹시 마음에 안 드나 하는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디자인은 내가 만든 게 아니라서 바꿀 수도 없는데…….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주인공님에게 물었다.
“어때요?”
그 말에, 주인공님이 서서히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예뻐요.”
다행스러운 대답이었다.
대답에 안심하고 주변을 돌아보자, 아주 패닉을 넘어서 이젠 현실도피에 빠진 것 같은, 남동생을 포함한 다른 이들이 눈에 밟혔다.
이제 어떡해야 하나…….
딱 봐도 귀찮을 것 같은 상황에 절로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너무나 행복해하는 얼굴로 예쁘게 웃고 있는 당신을 보니 아무렴 뭐 어떠냐는 생각이 들어 버렸다.
“윤지우. 집에 가자.”
“……어? 어!”
다른 이들이 현실로 돌아와 귀찮게 하기 전에 재빨리 탈출을 선택했다. 그 대가인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엄마의 벼락 같은 목소리가 꽂혔지만.
“이 기지배가! 지금 몇 시야!! 뭐 하다 이제 와!!”
“악―! 엄마! 아프거든? 고생하고 온 딸한테 이래도 돼?! 그리고 엄마가 가라며! 그리고 윤지우도 같이 있었거든?! 왜 나만 때려!”
“늦을 거면 전화라도 해야 할 거 아니야!!”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 아, 아파! 엄마!”
불같이 분노한 엄마를 피해 간신히 씻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침대가 아주 몸에 착 감겼다.
한계치까지 쌓인 피곤이 그대로 몸을 점령했다.
정말 파란만장한 하루였다.
인생에서 한번 겪을까 말까 한 일을 아주 무더기로 겪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예뻐요.’
그 어떤 보석보다 예뻤던 주인공님의 미소 때문일까.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진짜 그 얼빠 컨셉 언제까지 유지할 생각이냐고 물으며 귀를 후빕니다.]
“왜. 그 신성한 얼굴은 마땅히 감탄해 줄 가치가 있어.”
[그러다 진짜 그 신성한 얼굴에 엎어져 봐야 정신 차릴 거냐고 ‘이매망량’ 님이 건들거립니다.]
“뭐래. 자주 볼 수 있는 얼굴도 아니고, 자주 볼 얼굴도 아닌데. 앞으로 볼 일 없어.”
[인생사 한 치의 앞도 장담하면 안 되는 거라고 ‘이매망량’ 님이 권고합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 일이 한두 번도 아닌데 쓸데없이 확신하지 말라 투덜거립니다.]
아. 예예.
성위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확률적으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태평하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음 날.
“그래서…… 어머. 윤지호! 누가 자던 차림으로 나오래!”
“하아암. 아침부터 무슨 헛소리야, 엄마. 방에서 자다 거실로 나오는데 자던 차림으로 안 나오면 어떤 차림으로 나오라…… 응?”
“……하하. 안녕하세요. 지호 씨.”
“아, 예…….”
“일단, 그…… 저희 지호가 이런 거에 매우 취약해서요.”
“침 자국 봐라. 봐줄 만한 꼬라지로 만들어서 나오자. 누나.”
“아니, 그런 뜻이…….”
새빨간 토마토처럼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주인공님을 보며 두 눈을 의심했다.
뭐야. 쟤가 왜 여기 있어?
* * *
“……뭐라고요?”
일단, 먼저 말하자면 나는 원래 잘 때 바지는 안 입고 팬티에 대빵 큰 티셔츠를 입고 잤다.
편하거든.
남동생이 있는 가정이었고, 남동생님께서 옷 좀 제대로 입고 있으라 뭐라 한 적이 몇 번 있긴 하셨지만 꼬우면 너도 벗고 다니라고 하자 얌전히 쏙 들어갔다.
어쨌든 동생이 늘어진 원피스 티셔츠 잠옷 그만 보고 싶다고 해서 나름 딸을 이쁘게 꾸미고 싶었던 어머니가 이를 적극 수용해 예쁘장한 슬립을 몇 개 사 주셨다.
나름 그런 것에 로망이 있던 나도 추가로 몇 벌 더 구매해 집에선 슬립을 입고 살았다.
어쨌든, 그 차림에 새집 된 머리로 반쯤 눈뜬 채 집을 돌아다니는 건 전혀 부끄럽지 않았지만, 내 그 몰골을 보고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 주인공님을 보니 살짝 수치사 할 것 같았다.
순진한 주인공님한테 나는 뭘 보인 거지?
‘침 자국 봐라. 봐줄 만한 꼬라지로 만들어서 나오자. 누나.’
문제가 되는 부분이 너무 많아 탈인 윤지우의 뻘소리에도 고분고분 끌려가 차림새를 정리하고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상대가 주인공님이 아니었으면 나는 집에 찾아온 불청객을 위해 절대로 옷차림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너를 위해 입는 건 어떠냐고 여쭙습니다.]
성위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얌전히 테이블에 앉았다.
대충 스킵해도 괜찮을 안부 인사 단계를 넘기자마자 주인공님과 함께 방문한 서유라가 대뜸 폭탄선언을 던졌다.
탕―!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컵을 떨어뜨렸다.
“야!”
“윤지호!”
“……아.”
황급히 컵을 잡았지만 이미 물 님은 다 테이블에 쏟아진 후다. 다행히 하필 어머님이 제일 아끼시는 컵 님은 운명하지 않으셨다.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컵 님이 운명하셨으면 내 등짝이 남아나지 않았을 거다.
“……괜찮으십니까?”
아니요. 안 괜찮아요…….
대체 왜 온 거냐고 다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내가 흘린 물을 닦으면서 처량하게 나를 올려다보는 꼴이 너무 예뻐서 차마 그러지 못했다.
성위가 수도 없이 권고할 때도 무시했었는데, 처음으로 자신의 얼빠 기질이 원망스러웠다.
엄마. 이런 건 안 물려줬음 좋았잖아.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러기에 진작 이 성위님 말을 잘 들었으면 좀 좋았냐고 투덜댑니다.]
으알고오 이따고오…….
때를 가리지 않는 태클에 이를 악물었다.
이 와중에 패닉이 된 내가 보이지도 않는 건지 위대하신 서유라 님이 친절하게 아예 못을 박아 주셨다.
“갑작스러운 제안인 거 압니다. 하지만 저희 원티드는 꼭 지우 군과 함께 지호 씨를 영입하고 싶습니다.”
“아니, 저는 헌터가 아닌데요?”
(현) 월랭 1위가 뻔뻔하게 제가 헌터가 아님을 주장했다.
아. 왜. 뭐. 헌터는 아닌 거 맞잖아.
내 현재 직업은 훌륭한 백수였다. 제 화신의 뻔뻔함에 성위가 감탄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당신의 합리화와 뻔뻔함에 박수를 보냅니다.]
응. 성위님. 셧업.
성위의 찬사를 깔끔하게 무시하면서 나는 정당하다 열심히 주장했다.
“맞아요. 누나는 일반인인데 원티드에서 누나를 영입하려는 이유가 뭐죠?”
잘한다. 내 동생. 키운 보람이 있구나.
윤지우의 가세에 희망을 본 나는 열심히 내 쓸모없음을 증명하려 했지만, 서유라는 만만치 않았다.
“당연히 누님분이 헌터가 아니신 건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 원티드는 현재 길드를 관리해 줄 분이 한 분도 안 계셔서요. 워낙 소수 정예제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나 뽑을 수도 없고, 믿을 만한 분을 영입하는 건 매우 힘든 일이죠.”
“……설마.”
“네. 저희는 윤지호 씨가 저희 길드 관리실장이 되어 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대우는 업계 최고로 해드릴 거고요. 지우 군도 저희와 함께하면 아무래도 합도 더 잘……, 그렇지만 지우 군이 원티드로 오지 않으신다 해도 저는 윤지호 씨를 꼭 저희 쪽으로 영입하고 싶습니다.”
와, 이 언니 말 진짜 잘한다.
진짜 저도 모르게 오케이를 외칠 뻔했다.
실제로 제발 우리에게 와 달라고 비는 이런 스카우트 제의를 살면서 받아 볼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직원이란 회사의 부속품이다. 중요 인사가 빠져나가면 아쉬워하긴 해도 결국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한 것이 바로 직원이란 존재였다. 세상은 넓고, 일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널린 만큼 아무리 핵심 인재니 뭐니 해도 그만한 인간은 찾아보면 얼마든지 나오게 되어 있으니까.
드라마에서나 보고 꿈도 꾸지 않았던 환상의 스카우트에 갈대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안돼. 넘어가면 안 돼.
이미 충분히 엮이고 남았다. 여기서 더 엮이는 건 정말 내 무덤 내가 파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 거기서 넌 왜 그렇게 애절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거야.
몇 번이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주인공님의 고양이 같은 눈망울에 세차게 마음이 흔들렸다.
저 얼굴에다 대고 ‘응. 나 안 함. 꺼져.’라고 말할 수 있는 인간이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흔들리는 마음도 다잡아 가며 거절해야 하는 고난이도 코스에 눈앞이 아찔했다.
그 와중에 옆에서 도끼눈을 뜬 어머니의 무시무시한 포스가 느껴졌다.
젠장. 어떻게 해야 엄마를 납득시키고 젠틀하게 거절을 할 수 있을지 맹렬히 고민에 빠졌다. 그때, 정말 인생에 도움이 하나도 안되는 동생 놈이 선수를 쳤다.
“전…… 들어가겠습니다.”
“정말요? 환영합니다!”
지우의 말에 유라가 쌍수를 들고 환영했고, 주인공님의 얼굴에도 순간 꽃이 폈다.
엄마도 윤지우의 칼결정에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나라에서 제일 이름있고 대단한 길드에 아들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만족스러운 듯 근엄한 자세로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모두가 해피해피 비 해피인 공간에서 오로지 나만, 언 해피했다.
“……야.”
나지막이 동생을 불렀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낮게 깔린 내 목소리에 동생 놈이 지은 죄는 아는지 움찔했다.
“난 들어갈 거야. 원티드라면 랭커들도 못 들어가 안달인 곳이고. 이런 행운은 잡아야지. 내 인생이니까 내가 알아서 하라며.”
“…….”
머리 큰 동생의 말에 뒷목을 잡았다.
그 말을 이렇게 써먹을 줄 몰랐다.
윤지우의 말처럼 애가 헌터가 되는 걸 받아들인 이상, 헌터인 윤지우에게 원티드는 좋은 선택지이긴 했다.
이제 선택은 나만 남았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인싸와는 매우 거리가 멀었던 나는 그 시선이 매우 부담스러웠다.
그냥 차라리 전화로 하지. 한방에 거절할 수 있는데.
애꿎은 원망을 하며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는데도 정말 입이 떨어지지 않아 입술을 씹는데, 침묵을 견디다 못한 마나님께서 폭발하셨다.
“이 기지배가 빨리 계약 조건 뭐냐고 안 물어봐?!”
“아―!!!”
시원한 맘스터치가 등짝을 강타했다.
거짓말 하나 안 보태고 더럽게 아팠다.
물 밖으로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팔딱거리는 내 모습에 이런 생소한 광경을 처음 보는 이들이 당황한 게 느껴졌으나 아픔이 모든 걸 잊게 해 주었다.
“아. 왜 때려!!”
억울한 심정을 그대로 토로하자, 아예 내숭을 포기한 듯 마나님께서 필터링 없이 아주 곱게 입을 터셨다.
“아오. 속 터져! 뭘 고민해. 고민을! 너, 전 회사는 그렇게 고민해서 갔냐? 그냥 월급 제일 괜찮고 붙으니 면접 더 보는 거 귀찮다고 그냥 들어갔잖아! 근데 하물며 업계 최고로 대우해 준다는데 뭘 입에 풀칠한 것처럼 그러고 앉았어! 당장 한다고 안 해?!”
“아니. 이건 내 인생인데 왜 강요를 해! 난 선택권도 없어?! 나도 세금 내는 민주주의 대한민국 국민이거든?!”
선택지 없는 강요에 민주주의 대한민국 국민이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희대의 히틀러 채미화 여사님께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요 기지배가 입만 살아서. 그 입은 대답하랄 때는 안 써먹고 왜 말대답할 때나 써먹고 있어!! 야. 그 망할 쓰레기 같은 회사에서 뭣 같이 굴러도 욕하면서 쭉 다녔던 년이! 돈 많이 주면 땡큐라며! 돈 많이 준다잖아! 당장 해!!”
“이게 그 문제냐고!! 내가 일하지 엄마가 일 안 하거든?! 나라에서 돈도 나오겠다 몇 년 만에 쉬는 딸내미가 그렇게 아니꼬워?”
“그래! 속에서 천불이 인다!! 그러니까 빨랑 취직해! 한다고 하라고!!”
단호박 같은 강요에 어이가 실시간으로 터져 나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합리적으로 반항했다.
“아니 뭐 복지도 제대로 안 들어보고 단호박 명령인 건데?! 내가 그 망할 회사 다닐 때도 없는 복지 있는 복지 싹 다 확인은 하고 들어갔거든?!”
“결국 받지도 못할 거 확인해서 뭐 했니. 저 착한 얼굴로 복지를 안 챙겨 줄 거 같아? 걱정도 팔자다! 지우도 들어간다잖아! 누나가 되어 가지고!!”
역시 이게 이유였군.
단박에 알아차린 엄마의 속내에 어처구니가 없어 맹렬하게 항의했다.
“엄마는 결국 그 착한 얼굴 때문에 가라는 거잖아! 남자는 얼굴 뜯어먹고 사는 거 아니라매!!”
“내가 언제 그랬어! 남자는 얼굴 뜯어먹으면서 사는 거지!! 그게 아니면 뭘 뜯어먹고 살아!!”
“누가 보면 스카우트 받은 게 아니라 프러포즈라도 받은 줄 알겠네! 아줌마. 저 지금 취집이 아니라 취직을 제안받은 거거든요?!!”
“저 얼굴에 취직하라고! 저 촉촉한 눈망울이 안 보이냐고! 네 남자 안 해도 저 얼굴 자체가 복지잖아!”
“아놔. 이 아줌마가! 그건 인정하지만 그 문제가 아니라고!! 악―! 그만 때려!!”
개판인 광경에, 우리를 제외한 세 명이, 특히 이런 광경을 처음 보는 두 분이 우리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한 듯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나마 이 상황에 조금이나마 익숙한 윤지우는 두 사람보다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죄송해요. 저희 집이…… 좀 그래요. 그냥 잊어버리시면 됩니다.”
“……아. 아니, 이걸…….”
“금방 끝날 거예요. 아마.”
윤지우가 불안한 얼굴로 눈치를 살피며 대꾸했다.
윤지우의 선언대로 싸움은 싱겁게 끝났다. 세상에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우리 집에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아. 알았다고! 간다고! 그만 때려!!”
“진작 그럴 것이지.”
아. 사고 쳤다.
25년 평생을 길들여진 탓에 버릇처럼 소리쳐 버렸다. 서둘러 번복하려 했지만, 애석하게도 엄마는 그런 걸 용납할 정도로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내 화려한 백수 라이프가 눈앞에서 떠나가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제대로 즐기지도 못했는데…….
그런 나는 보이지도 않는지 다시 고급스러운 마나님 내숭으로 돌아간 엄마는 우아하게 다시 손님을 상대했다.
역시 엄마는 최고였다.
“……아오.”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내 취직이 결정되었다.
아. 내 인생.
<랭킹 1위 탈환을 소망합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