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장.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의 태양은 뜬다. (4/30)

3장. 무슨 일이 있어도 내일의 태양은 뜬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내일의 태양은 뜬다.

그 말은 대체 왜 있는 걸까. 왜 있어서 나를 이리도 괴롭게 하는가. 자괴감에 찌든 얼굴로 눈을 손으로 짓눌렀다.

“……아오.”

침대 위에서 뒹굴며 현실 도피를 하다 포기하고 다시 현실을 직면해 보니―

따끈따끈한 빅 뉴스에 모두의 관심이 폭발한 듯, 인터넷부터 시작해 TV까지 새로운 랭킹 1위의 등장으로 아주 도배가 되어 있었다.

무슨 예능 채널마저도 하라는 예능은 안 하고 새로운 랭커 얘기를 하고 있냐. 정말 인생에 도움이 하나도 안된다.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계속 그러고 있으면 또 어머님께 등짝 스매시를 맞는다며 이제 그만 일어나라고 종용합니다.]

“닥쳐. 똥별.”

[그건 무슨 신박한 별명이냐고 ‘이매망량’ 님이 묻습니다.]

“지금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말도 통하지 않는 성위놈과 무슨 말을 하겠는가. 포기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 …아악!”

안 그래도 죽을 맛인 몸을 일으키니 전신 근육통이 온 것처럼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무심코 확 일어났다가 밀려오는 어마무시한 통증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자, 망할 놈의 성위가 끌끌 혀를 찼다.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각성도 다 끝나서 이전 몸보다 백배 튼튼한 몸일 텐데 뭔 놈의 근육통이냐고 혀를 끌끌 찹니다.]

[그거 다 네가 움직이기 싫어서 마음으로 느끼는 거라고, 헛소리 하지 말고 퍼뜩 일어나라며 충고합니다.]

이놈의 별은 뭐 사색에 빠지게도 못하게 팩트폭격 하나는 오지게 잘한다. 몸을 일으켜 어기적어기적 화장실로 들어가 치약을 짠 칫솔을 물었다.

그때, 인생에 노크 따윈 없는 동생 놈이 화장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누나!”

“……왜.”

이 누님 지금 매우 심기 불편하시다. 별거 아닌 내용이면 가만두지 않을 테다.

불편한 심기를 가득 담아 동생 놈을 노려보자, 동생 놈이 답지 않게 다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누나! 지금 랭킹 봤어?!”

아이 씨.

반사적으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봐야 돼?”

시치미를 뚝 떼고 평소와 같이 답하려 노력했다. 다행히 잠에 아직 덜 깬 상태고 워낙 텐션이 낮은 상태라, 평소였으면 귀신같이 거짓말을 눈치챘을 녀석이 별말 없이 넘어갔다.

“랭킹이, 랭킹이 바뀌었어!! 우리나라 랭킹 1위가!!”

“안 궁금. 랭킹 같은 거, 원래 유동적인 거야.”

“그, 그건 그렇지만, 1위는 쉽게 안 바뀌거든?!”

“쉽지 않게 바뀌었나 보지. 그럼.”

물론, 울트라 슈퍼 킹왕짱 별님 덕에 미친 듯이 쉽게 땄지만.

랭킹 1위. 그거 별거 아니더라.

“누나랑 무슨 얘기를…… 암튼! 덕분에 내 얘기는 쏙 들어갔어!”

“오. 그건 희소식이구만.”

눈물 나게 반가운 소식이었다.

졸지에 빼앗아 버린 랭킹 1위가 그래도 아주 쓸모없지는 않았다는 게 아주 위안이 되었다.

“그래서 이 틈에 센터 가 보래. 엄마가.”

“좋은 방법이네. 기자들 안 따라붙고.”

아무리 1위 찾는 데 혈안이라도 신성 루키를 홀대할 일은 없다.

잘 다녀오라고 손을 두어 번 흔들어 주고 입을 헹구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인 폭격이 날아왔다.

“누나랑 같이.”

“……난 왜?”

아, 왜, 세상은 망하지 않는 걸까.

* * *

“1위에서 물러난 현재 심정은 어떠십니까?”

“유지한 헌터! 말씀해 주십시오! 자신보다 위가 나타났는데, 성위께서는 아무 말이 없으셨습니까?”

“유지한 헌터! 유지한 헌터!”

“혹시 현 신성과 관계가 있으십니까?!”

“정부에서는 현재 1위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데 그에 대한 심정은 어떠신지!!”

날파리보다 못한 놈들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내뱉으며 미친 듯이 길막을 해댔다. 약이라도 한 것인지 미친 소마냥 들이닥치는 게 보기만 해도 겁나는 수준이었다.

미친 소들 사이에 아주 파묻혀 버린 (구) 랭킹 1위를 구출하면서 유라와 민현이 치를 떨었다.

“와, 저것들 혹시 우리 모르는 사이에 단체로 무슨 병 같은 거 감염된 거 아니야? 끈질기기가 거머리 이상이야…….”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요. 퇴치해 버리게.”

진심이 그득그득 담긴 말에 유라가 진심으로 선언했다.

“우리 길드 법카로 살충제 잔뜩 사 놓자. 뿌려 버리게.”

“기사 나오고 싶으세요?”

“저 거머리질을 계속 당하는 것보단 낫지. 그보다 이놈은 왜 이렇게 정줄 놨어? 진짜 1위 놓쳤다고 이러는 거야?”

네놈이 그럴 놈이 아닌데?

유라의 날카로운 팩폭에 민현이 유라를 만류했다.

“선배. 말이 너무…….”

“괜찮아. 이런 걸로 상처받는 놈이었으면 좋겠다. 진짜로. 속 터져서 진짜.”

그동안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호구 짓을 되새김질하며 유라가 부들부들 떨었다. 적나라한 말투에 민현이 그래도 굳이 그렇게까지 할 거 있냐고 머리를 긁적였다.

후배가 이렇게 실드를 쳐 주고 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구) 랭 1위는 여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그 모습에 슬슬 유라도 진심으로 지한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야. 진짜 충격받은 거야? 언제 랭킹 신경 썼다고…….”

“선배, 그만. 그래도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올라 달성한 1위에요. 아무리 지한 선배라도 충격일 만하겠죠.”

동료들이 열심히 그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도 지한은 여전히 딴 세상이었다. 아주 넋을 놓아도 제대로 놓아 버린 모습에 보다 못한 성위가 말을 걸었다.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첫사랑인 건 알지만 안 그래도 호구인 주제에 더 못 봐줄 호구가 된 걸 만약 그 여자가 보게 된다면 여지없이 100% 차일 테니 얼른 정신 줄 붙들라 일갈합니다.]

“아, 아니야!!”

날아가던 정신이 단박에 돌아오는 소리에 지한이 새된 비명을 질러댔다.

그 소리에 싸우던 두 사람의 시선이 지한에게로 쏠렸지만, 지한은 난데없이 내리꽂힌 팩폭에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렇다.

지한이 지금 이렇게 제대로 얼빠진 꼴을 못 면하고 있는 이유는, 단연 랭킹 때문이 아니었다.

【랭킹이 변동되었습니다.】

【현재 ‘정의의 수호자’ 유지한 님의 국내 랭킹은 2위입니다.】

처음 알림창을 봤을 때는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들었다.

1위를 달성하기 위해서 달려온 인생은 아니다. 그러니 떨어진다 한들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랭킹 1위가 아니게 되어도 자신은 여전히 유지한이었으니까.

그런데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처음에는 랭킹이 떨어져서 그런가 싶었다. 하지만 그러다 이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버렸다.

그것도 아주 단순하게.

‘얘는 또 뭐 이리 쓸데없이 잘생겼어…….’

불현듯 생각난 한마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다 지한은 한 가지 사실에 직면했다.

잘생겼다는 건, 얼굴을 말하는 것도 있지만, 보통 그 사람의 능력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예를 들자면, 얼굴은 잘생겼는데 돈도 없고 능력도 없는 남자와, 얼굴도 잘생기고 돈도 많고 능력도 많은 남자의 잘생김은 누가 생각해도 다르지 않은가!

물론 그녀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게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랭킹 역시 제가 가진 매력 요소 중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게 되니 절로 평소처럼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했다. 아주 혼자 제대로 뻘짓하는 모습을 매우 한심스럽게 바라보며 성위가 말했다.

[되도 않는 소리는 그쯤하고 원래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도 불쌍해서 알려 준다고 하며 얼른 집 나간 정신 도로 찾으라고 ‘승리를 걷는 자’ 님이 재촉합니다.]

“뭐. 뭘?”

지한이 진심으로 당황해 버둥거렸다.

그 모습을 보는 두 사람은 지한이 성위와 대화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매우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한은 그동안 성위와 대화를 해도 그걸 숨겼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성위와 대화하는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자신들도 성위가 있기에 막상 해 보면 별거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제 생각을 전부 읽혀 버린 지한은 부끄럼에 몸부림치느라 그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집 나간 정신 빨리 도로 넣고 평생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그 새집 같은 머리 다시 세팅하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라 충고합니다.]

“……머, 머리?”

무슨 소리인지 당최 하나도 이해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머리를 매만졌다.

빛의 속도로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돈하여 말끔해지는 지한의 모습을 보며 유라와 민현은 황당함을 가득 담아 바쁘게 시선을 교환했다.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집에서 막 나온 새집 미남이 그냥 꽃미남이 되어 가는 광경을 무척이나 어이없게 지켜보는 이들은 안중에도 없는지, 꽃미남은 집 나간 정신으로 정돈을 끝내고 주변을 살폈다.

“누나. 안 내릴 거야?”

“내려. 내려. 대체 일반인인 나는 대체 왜 끌고…… 귀찮아 죽겠네.”

“몰라. 나도 그 얘기 했는데 그냥 혼자 가지 말래.”

“역시 엄마는 만인의 귀감이시다.”

그리고 지한은, 한심하단 듯 혀를 내두르고 있는 성위와 별개로, 앞으로 성위의 말을 신봉하기로 하였다.

* * *

뒷문으로 들어온 지한 일행 덕분에 아주 편하게 정문을 통과하는 이들을 보며 유라와 민현이 입을 열었다.

“어? 저거 루키지?”

“저번에 본 그분들이네요. 누나까지 대동한 모양인데요?”

“타이밍 딱 좋게 왔네. 기자들도 없이.”

“평소였으면 벌써 먼지가 되어 날아갔을 텐데.”

“파묻히는 쪽이 아니라?”

“둘 다 정답 아닐까요? 근데 누님 표정이 별로네요.”

“그 대쪽같은 성품 때문에 끌려 나온 것 같지?”

“하하. 인상적이긴 했죠. 그쵸, 지한 선배……?”

습관적으로 지한에게 말을 걸다 민현은 신세계를 경험했다.

처, 천하의 유지한이 뺨을 붉히며 어쩔 줄 모르며 제 잘생긴 얼굴을 신경 쓰고 있는 것이다!

유라는 아직 저걸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민현은 저걸 유라에게도 알려 줘야 하는지, 아니면 자기 혼자 보고 말아야 하는지 고민에 휩싸였다.

민현이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지한은 마력으로 구겨진 옷을 피고, 피부에 광을 내고 있었다.

처음 보는 마력 컨트롤의 수준에 놀라야 할지, 그 수준 높은 마력 컨트롤을 고작 저딴 것에 쓴다는 것에 놀라야 할지 민현은 혼란스러웠다.

민현을 패닉에 빠트려 놓고, 그 짧은 순간에 그냥 꽃미남에서 빛이 나는 꽃미남으로 진화한 지한의 신경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 예. 누구…….”

“누나! 서유라 헌터님이잖아! 국내 랭킹 7위! ‘빙속의 검사’!”

“아. 죄송해요. 제가 사람을 잘 기억 못 해서…….”

“맞아요. 원래 누나가 그런 편이라 이해해 주세요. 윽―!”

“하하. 동생아. 좋은 말로 할 때 다물렴? 착하지?”

“…….”

유라와의 대화를 마치고 그녀의 시선이 비로소 지한을 향했다.

처음으로, 온전히 그 시선이 저에게 향했을 때, 지한은 진심으로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녀가 제게 걸어온다.

제게 걸어오는 그 발걸음 소리만큼 심장이 거세게 요동쳤다. 날뛰는 심장을 모른 척하며 지한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감 어린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부디, 당신에게 좋아 보였으면 좋으련만.

“……반가워요.”

보고 싶었어요.

* * *

가고 싶지 않다 뻐겼지만, 당연히. 우리 마나님을 이길 수는 없었다.

“누나. 안 내릴 거야?”

“내려. 내려. 대체 일반인인 나는 대체 왜 끌고…… 귀찮아 죽겠네.”

그렇게 도착한 센터 앞. 우리나라의 최첨단 과학의 집합체인 그곳을 처음으로 본 소감은…….

“역시. 대한민국. 겉으로만 보이는 이 돈지랄. 속 빈 강정의 제대로 된 표본이야.”

“누나. 옆에 다른 사람 있어.”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크흠―!”

옆에 버젓이 센터 사람이 헛기침을 하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뭐, 보나 마나 뻔하지.

세상에 구멍 없는 집단은 없다. 아마 사회 생활을 해 본 이 중에서 이 말에 동조하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이 무례한 말에도 센터 직원이 헛기침밖에 하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고.

그나저나 참, 이 양반도 거짓말 참 못 하는구만.

실없는 생각을 하며 성큼성큼 계단을 올라섰다.

각성과 관계없을 때는 올라가도 그러려니 하고 말았겠지만, 본의 아니게 각성하고 이 계단을 오르니, 내가 저당 잡히러 온 것만 같은 아주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영 틀린 건 아니지 않냐 반론합니다.]

닥쳐.

지체 없이 가라앉는 기분에 짜증을 곱씹는데 뒤에서 대체 뭐가 그렇게 어색한 건지 쭈뼛거리는 동생 놈이 눈에 들어왔다.

헌터는 이놈이고, 자신은 이곳과 하등 관계없는 일반인(?)이었는데 정작 헌터인 놈이 더 머뭇거리는 꼬락서니를 보니 앞으로가 심히 염려스러워졌다.

왕년에 양아치질은 대체 어떻게 했나 몰라.

한심함을 가득 담아 한숨을 내쉬며 센터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마자 비싸 보이는 건물 내부가 삐까번쩍하게 광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광보다 더 빛이 나는 사람들이 있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돈지랄도 사람의 후광 앞에서는 다 의미 없나 보다.

이런 별 의미 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늘씬하고 매우 쿨해 보이는 미인이 내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

와우. 미인.

연예인보다 더 예쁜 것 같았다. 그뿐 아니라 보였다. 감추려 해도 드러나는 그녀의 기운이.

그걸 보고 나서야 그제야 내가 각성자라는 게 실감이 좀 났다.

[‘이매망량’ 님이 고작 그런 거 가지고 그러냐며 코웃음을 칩니다.]

망할 성위놈이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유난이라며 매우 빈정 상해했지만.

어쨌든 보이는 기운이나, 외모나, 그 자신감이나 매우 유명인일 것이라는 데 전 재산을 걸 수 있었다.

문제는 정작 내가 모른다는 것뿐.

“아. 예. 누구…….”

결국 소심하게 누구냐고 여쭤보려 하는데, 망할 동생 놈이 초를 쳤다.

“누나! 서유라 헌터님이잖아! 국내 랭킹 7위! ‘빙속의 검사’!”

어떻게 이분을 모를 수 있냐는 경악에 절로 얼굴이 붉어졌다. 동생이 아니라 진짜 웬수였다.

“아. 죄송해요. 제가 사람을 잘 기억 못 해서…….”

그래도 나름 초면이고, 예쁘신 분에게는 좀 잘 보이고 싶어 이미지 관리에 나서는데…….

“맞아요. 원래 누나가 그런 편이라 이해해 주세요. 윽―!”

“하하. 동생아. 좋은 말로 할 때 다물렴? 착하지?”

“…….”

동생 놈의 멱살을 잡고 사뿐히 포기했다.

그래. 네가 있는데 내가 뭘 하겠냐.

깔끔하게 포기하니 오히려 산뜻한 얼굴로 그녀를 마주 볼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서유라 헌터님. 이 녀석 누나되는 사람입니다. 요 며칠 전부터 백수고요.”

“어머. 백수. 정말 부럽네요. 저도 백수가 꿈인데.”

“통하는 데가 있네요. 백수만큼 짜릿한 게 없죠.”

이 언니. 나랑 잘 맞는데?

역시 어느 세계든 백수는 황홀한 단어였다.

일 안 하는 자, 먹지도 말라.

그런 말도 안 되는 노예 명언은 뿌리째 사라져야 한다. 암.

“앞으로 자주 봐요. 한동안은 센터 올 예정이거든요.”

“하하. 그럼 좋겠지만. 저는 헌터가 아니라서요. 오늘만 특별 출입이죠. 밖에서 만나게 되면 꼭 인사할게요.”

이 언니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신다. 각성을 안 했으면 모를까, 각성해서 졸지에 주인공님의 랭킹 1위까지 빼앗은 판국에 센터에 계속 온다니.

다시 이곳에 발을 들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계속 오면 진짜 귀신 붙을 거 같아. 물귀신.

“밖에서 만나면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저 헌터인 거 아시죠? 비싼 거 사 드릴 테니까 사양 말고 말 걸어 주세요.”

“그럼 염치 불고하고 잘 얻어먹겠습니다.”

“정말 마음에 드네요.”

어머. 언니. 나도요.

물론 마주친다고 해도 그 많은 인파 사이를 뚫고 아는 척할 생각은 요만큼도 없지만, 사회 생활이란 원래 그런 거다.

만약 사람이 없고, 평범한 상황이라면 아는 척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거참 여기까지 와서도 사회 생활 열심히 하신다고, 입에 침이나 바르고 말하라며 혀를 내두릅니다.]

닥쳐. 똥별.

[‘이매망량’ 님이 여린 성좌 가슴에 못을 박지 말라 각설하며 가슴을 부여잡으며 울먹입니다.]

받든지 말든지 혼자 생쇼를 하는 성위를 뒤로하고 매끄럽게 대화를 마무리하고 고개를 드니, 라스트 보스가 딱 눈에 띄었다.

아니, 주인공님.

그렇게 후광을 비춰 주시지 않아도 댁이 주인공인 거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 그렇게 존재감 내뿜지 않으셔도 돼요. 제발요.

속으로 있는 대로 절규하면서도 겉으로는 애써 미소를 그렸다. 그 순간, 언젠가 이 남자 앞에서 보였던 추태가 떠올랐다.

‘얘는 또 뭐 이리 쓸데없이 잘생겼어…….’

제발 사라져라. 내 흑역사야.

진짜 울고 싶었다. 대체 난 왜 대놓고 면전에다 대고 그딴 소리를 한 것인가…….

제정신이 아니긴 했지만 그날의 자신을 마주한다면 그딴 소리를 하지 않게 입부터 먼저 꿰매리라. 그리 다짐하며 우리의 위대하신 주인공님의 용안을 마주하는데…….

위대하신 주인공님이 매우 주인공다운 미모를 뽐내며 환하게 미소를 지어 주셨다.

“반가워요.”

그 순간 나는, 왜 과거의 자신이 그런 소리를 했는지 조금은, 아니, 매우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엮이면 피 보는 주인공만 아니었다면, 1초 만에 사랑 고백을 할 것만 같은 찬란한 미소였다.

심장이 철렁였다. 역시 나 같은 소시민에게 주인공의 미소는 너무나 타격이 컸다.

“……아, 네. 저야말로! 그날은 죄송했습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기억하고 계셨군요.”

“그 얼굴을 기억 못 할…… 아니, 저를 구해 주셨는데 당연하죠!”

아니, 근데 왜 당신은 그리 기쁜 얼굴이신가요.

열심히 변명을 쥐어 짜내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날은 제 인생에도 흑역사였지만 당신에게도 인생 최대의 황당함을 안겨 드리지 않았나요.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이 나오지 않아, 그냥 사뿐히 포기하기로 했다.

“……나만 기억하는 줄 알았는데.”

“네?”

“아니에요. 유지한입니다.”

“물론 알고 있죠. 아무리 저라도 랭킹 1위님을 몰라뵐 리가…….”

“아, 지금은 1위가 아닌데…….”

네. (구) 랭킹 1위한테 (현) 랭킹 1위가 현재 랭킹을 확인 사살시켜 버렸습니다.

젠장.

얼결에 얻은 거라, 잊고 싶다는 본능이 만들어 낸 실책이었다. 알림이 뜨지도 않았는데 성위 놈이 폭소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나타나지도 않는 게 무슨 랭킹 1위인가요! 유지한 씨가 당연 1위죠! 금방 다시 가져오실 수 있을 거예요!!”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자괴감이 차고 넘치게 생겨나는 중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셀프 디스를 하며 유지한을 띄워 주었다.

어떻게든 이 주인공님의 기를 펴 주는 것이 중요했다.

얼른 살아나서 랭킹 1위 좀 탈환해 주세요. 제발요.

“그렇게 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노력해야겠네요.”

순수한 미소에 양심이 쿡쿡 찔렸다.

큭…… 넌 또 왜 이렇게 예쁘고 착하고 난리니.

이 누나 가슴이 찢어지잖아…….

사실은 유지한이 나보다 두 살이 많았지만, 착하고 이쁜 것 앞에서 무조건 나는 누나였다.

그러니 얼른 내 랭킹도 가져가 주렴. 이 누나는 다 줄 수 있어요.

속으로 뻘소리를 지껄이고 있는데, 센터 직원이 타이밍 좋게 대화를 끊어 주었다.

“저, 이제 헌터 등록을 하셔야 하는데…….”

“아. 맞네. 윤지우. 가자.”

“아. 응!”

대충 인사도 끝냈겠다, 이때다 싶어 윤지우를 데리고 이 자리를 뜨려 했다.

여기 더 있으면 무슨 흑역사를 더 쓸지 몰라.

필사적으로 어서 이 자리를 회피하려 몸을 움직이는데 유라가 급제동을 걸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저희도 같이 동행하죠. 새 루키 실력도 궁금하고. 유지한. 너도 그렇지?”

“그래.”

아. 언니. 저한테 왜 이러세요. 우리 아까까지만 해도 좋지 않았나요. 근데 왜 저한테 이런 빅엿을…….

이런 속마음을 말할 수는 없기에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헌터 등록일 뿐이었는데, 졸지에 급 S급들이 우르르 함께하게 된 초특급 빅 이벤트가 되었다. 센터 직원의 경직된 등이 몹시 안쓰러웠으나, 제 코가 석 자였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도착한 곳에는, 아무것도 없고 책상 위에 달랑 큼직한 구슬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생소한 현장에 조금 호기심이 들었다. 저기에 손을 올릴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궁금하긴 했다.

“여기에 손을 올리시면 됩니다.”

막상 등록을 하려니 겁이라도 나는 것인지 구슬 앞에서 윤지우가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무도 윤지우를 재촉하지 않았다.

윤지우가 머뭇거리다 나를 직시했다. 망설임과 고민이 가득한 그 눈을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네가 무엇을 선택해도 상관없다는 듯.

그런 내 모습에 녀석은 오히려 결심을 굳힌 듯, 구슬에 손을 올려놓았다. 구슬에 손을 올려놓자, 구슬의 특성으로 윤지우가 공개 설정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볼 수 있게 상태 창이 떴다.

[상태 창]

[이름: 윤지우

이명: 미정.

소속: 대한민국

타이틀: 없음.

성향: 용맹하고 우직한 조력자.

계약성: 없음.

등급: A

국내 랭킹 59위.

월드 랭킹 권외.

특성: 믿음의 방패(A), 불굴의 용기(S), 망설임 없는 검(B), 지키기 위한 신념(S)……]

오. 역시 관리자의 눈이라 불리는 아이템. 시스템이 특정할 수 있는 기본적인 정보들이 여과 없이 떴다.

근데 저것도 엄연한 프라이버시 침해 아닌가.

어차피 저 관리자의 눈에만 기록되고 그 어디에도 기록으로 남을 수는 없어 스킬 유출 같은 일은 없다지만.

새삼 왜 그렇게 높은 등급으로 각성한 이들이 헌터 등록을 끔찍이 싫어하는지 이해가 갔다. 아무리 유출은 되지 않는다지만, 저렇게 낱낱이 다 읽히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그런 생각을 하며 심드렁하게 상태 창을 보고 있는데, 다른 이들은 아니었나 보다.

“이 정도면…….”

“던전 몇 개 돌면 바로 S급 뜨겠는데?”

“진짜 다크호스인데요? 스킬이…… 와우…….”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우리 쪼렙 센터 직원님은 쫄아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걸 보며 나는 도리어 당황했다.

아니, S급 스킬이 있긴 하지만 A도, B도 골고루 있다. 나열하자면 S보다 A, B급이 더 많은데 왜 이런 반응이지? S급 헌터면 S급 스킬은 수두룩하게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이 반응은 정말 예상 밖이었다.

“……저, 많이 대단한 건가요?”

해서,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내 질문에 그나마 정신을 차린 이들이 답을 해 주었다.

“네. 아무리 S급 헌터라 해도 S급 스킬을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보통은 던전을 돌며 스킬을 단련해 종합적인 능력평가로 S급을 받는 거죠.”

“후에 스킬을 새로 얻을 수도 있구요. 처음부터 S급 스킬은 얼마 뜨지 않아요. 이 정도면 거의 로또 수준입니다.”

“아아…….”

뜨뜻미지근하게 호응하자 열변을 토한 이들이 그게 다가 아닌데 제대로 실감을 시켜 줄 수 없어 아쉽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할 수 있는 호응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머릿속이 카오스였다.

S급 헌터라도 S급 스킬이 많지 않다고?

그럼 난 뭐지?

나는 S등급 외의 스킬은,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단 한 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상태 창을 열어 보았다.

[상태 창]

[이름: 윤지호.

이명: 미정.

소속: 대한민국

타이틀: 진 화신(化身) ‘이매망량의 주인’

성향: 권태로운 성향의 방관자

계약성: ‘이매망량’

등급: S

국내 랭킹 1위.

월드 랭킹 3위.

특성: 수백 개의 가면(S), 얼음의 심장(S), 꺼지지 않는 불꽃(S), 냉철한 신념(S)……]

뭐야. 왜 진짜 하나도 없어…….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이제야 자신의 위대함을 알았느냐며 우쭐해합니다.]

너무 위대해서 눈물이 다 나오네요. 진짜.

“유지한 씨는 그래도 많지 않아요……?”

희망을 담아 지한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주인공인데, 얼마나 많이 쥐여 줬겠어. 계약성도 심지어 ‘승리를 걷는 자’잖아. 분명 승리할 수밖에 없는 것들을 쥐여 줬을 거야!

기대 어린 눈으로 주인공님을 바라보자, 주인공님께서 매우 머쓱한 얼굴로 답했다.

“저도 다 S급만 있는 건 아니고…… 다른 분들보다 조금 더 있는 정도입니다.”

청천벽력이었다.

헐. 망할 계약성아. ‘승리를 걷는 자’라는 이명이 아깝지도 않냐!

주인공의 성위가 들었으면 네 성위가 미친놈일 뿐이라며 열변을 토하다 못해 울부짖을 소리였다.

그런 성위들의 사정은 눈곱만치도 모르는 나는 속으로 울부짖으며 다짐했다.

숨기자, 무조건.

“제 동생이…… 정말 귀한 놈이었네여……. 하하.”

평생 힘은커녕, 밑바닥에서 이리저리 치이기만 한 인생이었는데, 이젠 하다하다 힘숨찐 놀이까지 하게 되다니.

망할 인생…… 흐어어.

* * *

“여기, 헌터증입니다.”

“와. 엄청 빠르네요.”

“바로 해드려야죠. 이건 단말기입니다. 위치 정보 역시 등록되어 있기 때문에 게이트가 발생되면 위치와 문자가 갈 겁니다. 헌터님의 위치 역시 공개되긴 하지만, 그건 센터에만 공개되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와 당당하게 위치추적기를…….

헌터 없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던 자로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행태였지만, 모두가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어, 새삼 나는 이 세계 사람이 아닌 게 실감이 났다.

그리고 깊게 다짐했다.

절대로, 들키지 않겠다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다 드러난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루키 님. 이명 결정 안 했네. 얼른 해. 해야 채널에 들어가지.”

“채널이요?”

“랭커 채널. 우리 애증하는 시스템님이 만들어 주신 거지. 이명, 그니까 닉네임을 결정하면 헌터들이 이용하는 블랙마켓에 들어갈 수 있음과 동시에 랭커들이 소통하는 채널에도 입장이 가능하거든.”

“아. 그럼 얼른…! 근데 뭐로 하죠……?”

“그건 직접 정해야지.”

동생 놈이 뭘로 정해야 할지 몰라 머리를 쥐어 싸맸다. 백날 고민해도 못 정할 기세였다.

한심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다, 나도 문득 이명을 안 정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근데 나는 마켓을 이용할 것도 아니고, 채널은 더더욱 이용할 생각 없으니 안 정해도 상관없지 않나?

그 생각을 알기라도 하듯 유라가 지우에게 충고했다.

“처음에 정신없어서 정하는 걸 다들 까먹기 쉬우니 봐주긴 하는데 너무 오래 시간 끌지 않는 게 좋아. 오래 안 정하면 언제부턴가 시스템이 압박 오지게 주거든.”

“압박이요?”

“어. 그거 때문에 거의 미치다시피 해서 아무거나 막 이명 정하는 바람에 미친 듯이 후회하는 사람들 엄청 많아.”

“대표적인 예로 ‘씹선비’와, ‘배운변태’가 있지.”

“……랭킹 8위와 11위 아닌가요?”

그냥 랭킹으로 봤을 때는 게임 랭킹 순위랑 별다를 바 없어서, 줄곧 위화감이 없었는데 윤지우가 저걸 저렇게 입 밖으로 꺼내니,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가 오글거림을 참지 못하고 손을 오그라트리자, 그런 나를 보며 주인공님께서 걱정 어린 말을 건네셨다.

“……벌써부터 이러면 안 돼요.”

“…….”

무시무시한 소리였다.

황급히 못 들은 척하며 시선을 돌리는데, 유라가 아련한 얼굴을 하며 썰을 풀었다.

“내가 랭커가 막 되고 이명을 정할 때 본인한테 직접 들은 이야기지. 보통 사람이 기한이 있다 보면 생각하다 잊고 그냥 살잖아.”

“그렇죠?”

“그래서 완전히 까먹고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알림창이 뜨기 시작하더래. 이명 정하라고.”

“……평범한데요?”

“그게, 10초에 한 번씩. 잘 때도 오고. 꿈속까지 찾아와 독촉하는데?”

“……네?”

그냥 알림창만 뜨는 거면 누가 그걸 무게감 있게 여길까. 그 사실을 숙지하고 있기라도 한 듯 시스템은 집요하게 꿈속까지 찾아와 사람을 괴롭혔다.

고민할 틈조차 주지 않고 쉴 새 없이 눈앞을 가리는 알림창 덕에 결국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아무거나 막 불러댔다.

그 아무거나 막 질러댄 이름들은, 본인이 한때 게임을 할 때나 썼던 인터넷 닉네임들인 경우가 허다했고, 그 닉네임들은 하나같이…….

“무슨 님? 하면 손발이 찌그러드는 것들이라는 게 문제지.”

“……허걱.”

“씹선비 님은 정중하게 사람 괴롭히는 알림창을 보고 빡쳐서 ‘아오, 망할 씹선비 같은 새끼!’라 했다가 유일한 명사인 ‘씹선비’가 채택되신 거고, 배운변태 님은 알림창 보고 질려서 ‘와…… 진짜 배운변태다…….’ 하고 중얼거리다 배운변태가 되셨지.”

“…….”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진짜 불쌍해. 완전 불쌍해.

모든 사람들이 숙연한 얼굴로 두 사람을 위로했다.

“두 분은 그 뒤로 절대, 인터넷 용어는 안 쓸 거라고 혈서까지 쓰셨다던데.”

“……어? 그런 것치고 두 분 다 채팅창에서 엄청…….”

“평생을 그리 살아왔는데 고치는 게 쉽겠냐. 계속 고치는 중이시란다. 어쨌든 나는 그 말 듣고 바로 이명 지었지.”

민현이 유라의 이명을 떠올리며, 유라에게 물었다.

“스텔라는 그럼 무슨 뜻이에요?”

“그냥 내 영어 이름.”

“아…….”

이명을 정하라는 말에 습관적으로 늘 쓰는 닉네임 이름을 댔던 신속의 검, ‘담별’ 최민현이 눈물을 흩뿌렸다.

유라가 무심히 민현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했다.

“너 같은 사람이 대부분이야. 울지 말렴.”

“……미워요. 선배. 나한테도 좀 알려 주지.”

“넌 다 정하고 들어왔잖아.”

“흑…….”

민현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나도 위기감을 느끼며 상태 창을 켰다.

【이명을 정해 주십시오.】

【이명은 블랙마켓에 등록되며, 모든 채널에 표기됩니다.】

상태 창을 열자마자, 득달같이 알림창이 떴다. 말로만 들은 시스템의 집요함의 한 면을 엿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근데 막상 정하려니 뭘로 정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진짜 잊어주세요. 이름 없음. 이런 거 안 되나…….

꼴랑 이명 하나 정하는데 엄청난 고뇌에 휩싸였다.

그때, 망할 계약성이 사고를 쳤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너 그러다가 분명 평생 가도 못 정한다며 이름 없음을 원한다면 그냥 ‘무명’으로 하라 합니다.]

……뭐?

뭔 소린지 제대로 알아듣기도 전에 알림창이 떴다.

【이명이 정해졌습니다.】

【랭킹에 이명이 등록됩니다.】

【블랙마켓에 이명이 등록되었습니다. 바로 이용 가능하십니다.】

>― 랭커 1번 채널에 입장합니다.

∥5∥레쓰비: 헐. 눈이 잘못된 거 같아.

∥11∥배운변태: 지금 1위 입장 ㅅㅎ?

∥9∥카카오: 와와와와와와아!!! 1위다! 1위님!!!

∥3∥지식인: 카카오 호들갑떨지말고. 도망가실라.

∥6∥도로시: 안 떠는게 이상하지. 며칠동안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드신 분이잖아. 님 여자에요? 남자에요?

∥10∥회사원: 몇 살이세요?

∥11∥배운변태: 와 우리 꼰대님 또 라떼 is 홀스를 시전하시려고 이렇게 밑밥을……

∥8∥씹선비: 넣어놔. 넣어놔. 아저씨. 조빱이면서.

∥10∥회사원: 이것들이 간만에 총맞고 싶나. 나올래?

∥11∥배운변태: ㅎㄷㄷ… 엄마. 이 아저씨 무서워요…

∥8∥씹선비: 엄마… 나이많은 아저씨가 협박해요…

∥10∥회사원: 나와 이 X새들아.

뭐야. 이게…….

보기만 해도 정신이 혼란스러워지는 채팅창에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망할 성위놈이 급히 변명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자신도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어차피 이명이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니 진정하라며 황급히 변명합니다.]

같잖은 개소리에 평소라면 바로 욕이 튀어나갔겠지만,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모르는 정신머리 때문에 욕할 정신도 없었다.

성위놈의 같잖은 변명을 뒤로하고, 황급히 정신을 챙기며 현실을 돌아보는데…….

“어? 방금 1위 채널에 떴어…… 유지한!!”

“보고 있어. 진짜네.”

“진짜요?!”

“랭킹에 표시됐습니다. 이명 정했네요.”

“와! 어떤 사람이에요? 네? 선배! 빨리 좀 말해 줘요!”

“저희에게도 꼭 좀 부탁드립니다!”

“……댁들 같은 사람들이 득실거려서 아무 말도 안 하는 거 같은데요.”

“…….”

그 채팅창 급으로 막장이 된 현장을 보며, 나는 그냥 정신을 놓고 싶었다.

야 이 망할 똥별 새끼야. 당장 나와.

“와, 벌써 실검 떴어요.”

“이명 하나 정한 거 가지고 아주 난리 블루스…….”

“랭킹 1위잖아요.”

랭킹 1위.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마법의 단어였다.

아, 정말 바라지 않는데, 안 그래 주시면 안 될까요.

(구) 소시민이자 (현) 랭킹 1위가 하루아침에 벌어진 괴리감에 몸부림쳤다.

“이명은 무명이네, 그 무명(無名)인가? 이름 없음? 뭐 이렇게 지었대.”

“1위니 이름 따위 필요 없다! 이런 거 아닐까요?”

“아, 그런 설정충이다?”

“기본적으로 상위 랭커들은 거의 다 멀쩡한 사람이 없…….”

“뭐라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아무도 날 아는 척 안 했음 싶었던 마음이었다고!

속에서 아우성을 쳤지만, 절대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내뱉는 순간, 미친년 or 랭킹 1위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으니까. 여기서 이렇게 커밍아웃하고 싶진 않았다.

결국 내가 이 순간 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뭐. 그래도 배운변태보단 평범한데요?”

“그건 그렇죠.”

좋아. 자연스러웠어.

마음 같아서는 주먹을 쥐고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옆에서 계속 쳐다보시는 것 같은 주인공님 땜에 패스했다.

근데 진짜 자꾸 왜 쳐다보지? 평범한 소시민 가슴 떨리게시리.

시선만으로도 부담 백 배에 더 찍힐까 두려움이 앞서긴 했지만, 그래도 저렇게 잘생긴 남자가 쳐다보는데 설레지 않을 리 만무했다.

‘아. 진짜.’

이름도 모르는 작가가 원망스러워지는 순간이다.

대체 왜 이렇게 잘생기게 설정하신 건가요. 작가님.

피눈물을 흘리며,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미남의 시선을 모른 척했다. 주인공만 아니었다면, 철면피 한번 깔고 무작정 대시라도 했을 텐데. 잘생긴 얼굴이 너무 아까워 미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이제 다 끝난 건가요?”

“아, 등록은 끝났습니다만…….”

“뭐가 더 남았나요?”

“누나, 집 가고 싶구나.”

“응.”

백 년 치 스트레스를 한 번에 몰아 받아 이미 체력은 바닥이었다.

침대가 너무나 그리웠다.

망할 성위 놈도.

그 잘난 얼굴에 죽빵 한 번만 날리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진작 도망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보자.’

한때, 우리 엄마도 울고 갔던 극한의 쪼잔함을 보여 주리라 다짐하며 센터 직원에게 빨리 더 할 거 없다고 말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우리 불굴의 회사원. 힘은 없지만 용기는 넘치는 우리의 센터 직원이 나의 눈빛에도 아랑곳없이 우렁차게 답했다.

“드, 등록은 끝이지만 게이트에 들어가시려면 먼저 테스트를 받으셔야 합니다.”

“……테스트?”

“예! 현재 실력을 알아야 저희도 윤지우 님께 맞는 게이트를 찾아드리니까요.”

왜 이 말이 어느 정도 수준의 게이트까지 들어갈 수 있는지 시험하겠다는 소리로 들릴까.

이미 심사가 배배 꼬여서 그런지 그렇게밖에 들리지 않아 인상을 구기자, 센터 직원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안절부절못했다. 내 험악한 얼굴을 본 주인공님께서도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걸 보며 나는 다시금 되새겼다. 정말이지 거지 같은 현실이었다.

“그 테스트 어차피 저놈이 받는 거고, 난 이제 집에 가면 안 되나.”

어차피 헌터 되라고 이미 허락한 마당에 여기서 말리는 것도 그렇고, 이왕 허락해 준 거 너 마음대로 하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그 말에 센터 직원이 아닌 척하면서도 대단히 기뻐하는 게 눈에 똑똑히 보였다.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매우 억울했지만 간다는 말을 뱉은 후로 왠지 시무룩해진 것 같은 주인공님에 괜스레 심장이 덜컹해서, 그냥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었다.

하지만 그 간절한 마음을, 내 평생의 원수가 단 한 마디로 짓밟았다.

“엄마를 감당할 수 있으면.”

“……아이 씨.”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대체 난 이제 어른이고, 나이도 먹을 만치 먹었는데 왜 아직도 엄마에게 제대로 한번 개길 수 없는 것인가.

“……그래. 가자. 가.”

기력이 쭉 빠진 모습으로 항복 선언을 하자, 그래도 낯선 곳에 혈육이라도 있길 바란 건지 윤지우 놈은 신바람이 났다.

어휴. 저 화상을 진짜.

“누나! 빨리 와!”

“간다 가.”

한숨을 내쉬며 내키지 않는 걸음을 질질 끌었다.

가지 않는다는 내 말에 시무룩했던 누가 화사하게 살아난 것만 같은, 불길하고도 달큼한 느낌을 애써 무시하며.

“구경, 구경. 역시 신입의 패기 넘치는 모습은 봐두는 게 예의지.”

“암요. 암요.”

“죽이 아주 잘 맞네.”

그리고 그렇게 내키지 않게 간 곳에서…….

“……뭐야. 저 X신은.”

색다른 X신을 목격했다.

* * *

“여, 여깁니다.”

센터 직원은 안내를 끝내자마자 쏜살같이 줄행랑을 쳤다.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순간 불안해졌다.

혹시 나도 모르는, 랭킹 1위의 위엄(?)이라도 새어 나오는 건가. 각성한 후로 힘을 다뤄 본 적도 없으니 자신도 모르게 제어가 안 되는 건가.

고민하기 무섭게 이럴 때만 득달같이 나타나는 별님이 여지없이 태클을 걸어 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자신이 그렇게 허술할 것 같냐며, 랭킹 1위가 제 마력을 제어 못 한다니. 이게 무슨 개구리도 비웃을 소리냐며 코웃음을 칩니다.]

하긴, 마력이 새어 나온다면 여기 있는 랭커들이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럼 대체 뭐지.

굉장히 고심하며 얼굴을 살피다가 문득 다른 이유가 생각나 주변을 돌아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에요.”

그리고 바로 납득했다.

현재 여기 모여 있는 인원들은 민간인인 자신 빼고 전원, 랭커들이었다.

아마 아무리 등급이 낮아도, 기감이 발달한 헌터라면 그들과 정면에서 오래 마주하기 힘들 것이다.

적어도 나 때문은 아니라는 만족스러운 해답에,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훈련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X벤져스가 생각나지?”

왜 유X브 같은 데서 메이킹 필름 같은 식으로 현장이 나오지 않는가.

이 방은 딱 그거 같았다. CG 씌우기 전, 영화 촬영장.

사각이 흰 벽으로 돼 있으면서 벽 중간중간에 마력석 같은 게 붙어 있었다. 그리고 훈련을 지켜볼 수 있는 유리창으로 된 감독실.

신기하면서도, 꺼림칙했다.

유리장 안에 쥐가 된 것 같은 느낌이랄까.

불쾌한 느낌에 손으로 양 팔뚝을 쓰다듬자, 뒤에서 주인공님이 내 양팔을 강하게 붙잡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괜찮습니다. 일반인은 들어가지 않으니까.”

“…….”

그렇지 않더라도 그렇게 해 줄게요.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따지자면 적어도 지금은 그보다 강한 사람이 나일 텐데. 그런 나를 지켜 준다고 하는 것만 같은 그 말은, 별 사심이 담기지 않았다는 걸 아는데도 괜스레 마음을 술렁이게 했다.

얼굴에 자꾸만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어 필사적으로 안면 근육에 힘을 주었다. 남자에게 면역력이 없어, 거의 조건 반사식으로 반응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스스로 타협했다.

이 다정한 남자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는 남자였으니까.

“아! 멋대로 손대, 미안합니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늦게 본인이 내 팔을 잡았다는 것을 깨달은 그가 새빨개진 얼굴로 사과를 해 왔다.

정말 미워할 수 있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주인공이겠지.

괜히 그런 주인공님의 안절부절못하는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지만 꿋꿋이 참아 내었다.

충동을 잠재우면서, 이제 이 상황을 어떻게 매끄럽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고민에 빠지려는데, 구세주처럼 문이 열렸다.

“제가 좀 늦었네요. 잠시 분석할 게 생겨서.”

와우. 굿 타이밍.

기가 막힌 타이밍에, 방금 등장한 상대가 어떤 놈이라도 환하게 웃어 줄 호의가 마구마구 샘솟았다.

고개를 돌려 그 ‘어떤 놈’을 보자마자 싹 사라졌지만.

“……정하나?”

아주 예쁜 미인이었다.

자신이 아주, 잘 아는.

문제는 이 기지배는 여기 있을 애가 아니라는 거다.

일단, 현재의 내가 알기론.

설마설마하는 마음으로 이름을 부르자, 언제나 그랬듯 내 마음은 눈곱만치도 알 생각이 없는 또라이가 상큼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오, 하이루. 오랜만.”

“오랜만이긴 한데, 너 왜 여기 있냐.”

“그야, 여기 직원이니까?”

귀에 이상이 생긴 것 같다.

……뭐라고?

* * *

“그니까…… 네가 비전투계 B급 헌터고, 센터 소속 분석가라고?”

“잘 이해했네. 철밥통 부럽지?”

약 올리는 듯 이죽거리는 특유의 말투에 진심으로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정하나와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낸 소꿉친구 사이였다. 같은 동네 살아서인지 집끼리도 친했고, 초중고를 나란히 같이 다녔다.

초중고를 나란히 다닌 내가 녀석에 대한 평을 내리자면, 이 녀석은 그냥 또라이였다.

상또라이.

오로지 제 흥미만을 찾아 떠나는 이 하이에나는 주변은 조금도 개의치 않고 정말 저 하고 싶은 대로 살았다. 그 성격은 성적에서조차 고스란히 반영돼, 항상 부모의 뒷목을 잡게 했다.

저 관심 있는 항목에는 두말할 것도 없는 만점. 아니, 만점조차 모자라서 대학 과정까지 파고드는 반면, 제가 관심 없는 과목에는 연필 굴리기로 찍는 무지막지한 센스를 보여 주셨다.

분명 할 수 있다는 게 여지없이 보이는데 본인 흥미 위주로 하다 보니 극과 극을 찍는 성적표.

선생님들은 성적표만 보면 울화통이 치민다고 가슴을 치셨고, 정하나의 부모님은 글러 먹은 딸의 성적표 앞에 마주 앉아 한숨을 내쉬며 소주를 까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항상 생각했다.

저 녀석처럼 해서 천재가 될 수 있다면, 천재 따위 안 하고 만다고.

“후. 그래. 너니까 놀랍지도 않다. 보나 마나 안 물어봤으니까 말 안 한 거겠지.”

“어머. 역시 넌 날 너무 잘 알아.”

어쩐지 나는 저 얄미운 목소리만 들으면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참자. 참을 인 자를 세 번만 삼키면 사람도 살릴 수 있댔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차분히 잠재웠다. 다행히 한두 번이 아니라, 가라앉히는 게 아주 어렵진 않았다.

“비전투계면 넌 전투는 못 해?”

소설에서는 전투계 헌터 기준으로 이야기가 진행됐기에 비전투계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다.

인터넷에 검색해 봐도 전투계 헌터에 대한 정보는 주르륵 나오면서, 비전투계에 대한 정보는 개미 오줌만큼도 나오지 않았다.

“상거지지. 안 설치는 게 더 도움 되는 수준?”

“완벽한 설명이다. 개꿀이네.”

“아이. 역시 넌 내 맘을 잘 알아. 육체 노동 따위. 몸만 상하고 뭐가 좋니.”

“동감이야.”

그래서 헌터 따위, 돈이 없어 굶어 죽어도 안 할 생각이다. 나는 내 한 몸이 제일 중요한 인간이니까.

“참. 들었어. 우리 직원들이 너 싫어하는 짓만 아주 골라 했더만.”

“알면 미리 좀 알려 주지 그랬냐.”

그동안 시달려 왔던 행태가 절로 떠올라 있는 대로 미간을 구기며 따지자, 정하나가 진정하라는 듯 손짓했다.

“그럼 차지혁한테 말하지 그랬어.”

“그 아저씨는 이미 최근에 써먹어서.”

그 말에 갑자기 주인공님의 시선이 제게 훅 꽂힌 거 같지만, 착각이려니 했다.

주인공님이 고놈을 알 리가 없었으니까.

그사이, 정하나가 나름대로 변명을 했다.

“윤지우가 각성한 거 나 어젯밤에 들었거든? 그전까지 연구실에서 못 나왔고. 너에 대한 얘기는 오늘 아침에 듣고 바로 뻗었지.”

“못 나온 게 아니라 안 나왔겠지.”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 어쨌든, 같이 올 줄은 알았지만 진짜 같이 왔네.”

사소한 게 아닐 텐데.

가자미눈을 하고 정하나를 흘겨보다 한숨과 같이 답했다.

“어마마마의 지엄하신 명이셨다.”

“아아. 너희 어머니 대단하시지. 뭐, 넌 그거 아니라도 네 동생 일이라면 분명 왔을 테지만.”

이건 또 무슨 신소리냐.

어이가 가출한 얼굴에도 정하나는 정말 아니냐며 오히려 제가 더 이상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아니야?”

“귀찮게 뭐 하러.”

우리는 평소, 그렇게 살가운 남매 사이는 아니었기에 이런 정하나의 추측을, 무척이나 이해할 수 없었다.

“윤지우가 조르면 짜증 부리면서도 다 들어주잖아. 너.”

이게 뭐라는 거야.

윤지우 역시 정하나를 어이없게 바라보는데, 정하나는 꿋꿋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진심으로 인생에 회의가 들었다.

난 왜 저런 거랑 친구를 먹었을까.

현타 온 남매를 뒤로하고, 궁금증을 참지 못한 유라가 정하나에게 물었다.

“정말요? 동생 군이 조르면 다 들어줘요?”

기대하던 반응이 등장하자, 정하나는 떫은 표정의 우리를 사뿐히 무시하고 신나게 입을 털기 시작했다.

“순 억지 부리는 거 아니면요? 기본적으로 화를 잘 내는 편도 아니라서 어지간한 건 다 들어줘요. 윤지우가 뭐 하고 싶다고 하면 말리다가도 그래도 하고 싶다 하면 지지해 주고. 헌터쯤이 예외죠.”

“시끄러워.”

“진짜 의외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윤지우가 헌터 되게 놔둘 리가 없는데. 반대했다고는 들었지만 이렇게 같이 온 거 보면 결국 져 준 거잖아? 이번에는 안 져 줄 줄 알았어.”

“…….”

제가 키운 동생이 목숨 걸고 일을 하겠다는 걸 환영할 윤지호가 아니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정하나가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걸 보며 나는 저 얄미운 혀를 콱 잡아 뽑아 버렸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딱히 틀린 말이 아니라, 그냥 입을 다무는 걸 선택하는데, 그런 나 대신 윤지우가 입을 열었다.

“누나가 왜. 어차피 내 인생이거든, 하나 누나?”

“네 인생이라도 널 키운 건 97%가 네 누나잖아. 네가 담배 피우며 양아치 짓 할 때도 윤지호가 단박에 고쳤고.”

그때의 악몽이 떠오른 듯 윤지우가 몸서리를 쳤다.

“얘기하지 마. 으. 생각도 하기 싫어.”

“아니, 얼마나 혼났기에?”

기본적으로 남매들은, 체격 차가 있기 때문에 누나가 혼을 낸다고 해도 그렇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누나가 헌터가 되어, 체격 차를 압도할 정도가 되면 모를까.

심지어 지금은 누나가 일반인, 남동생은 헌터로 각성해, 그 체격 차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만큼 벌어진 상태다.

그런데도 저런 반응이라니.

미래를 위한 순수한(?) 호기심을 담아 유라가 눈을 빛냈다.

정작 당사자는 그런 눈빛은 안중에도 없는 듯, 새삼 스멀스멀 떠오르는 그때의 악몽에 몸서리쳤다.

“그때 다짐했죠. 빡친 누나한테는 절대 개기면 안 된다.”

내가 화났을 때 절로 움츠러드는 건 그 다짐의 방증이었나 보다.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당사자 입으로 직접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정말 별로 안 팼는데…….

정하나가 내 생각을 눈치챈 듯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그리고 동시에 사람들의 의구심 어린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니에요.”

“아. 예.”

“아니라고.”

순식간에 폭력 누나가 된 누나는 진심으로 억울했다.

왜. 나 진짜 얼마 안 때렸어!

동생이라서 진심으로 막 팰 수는 없어 몇 대 때리지도 못했다. 그런 나를 윤지우가 흰 눈으로 나를 매도했다.

“와. 누나. 진짜 양심 없다.”

“닥쳐. 넌 얼른 테스트인지 나발인지나 빨리 해. 집에 가서 자고 싶으니까.”

더 이상 이야기를 끌었다가는 어떻게 해도 내가 불리해질 거 같아 황급히 말을 돌렸다. 이럴 때는 대화 주제를 바꾸는 게 최고였다.

우우.

대놓고 화제를 돌리자 다들 매우 아쉬워하는 티를 냈지만, 원래 본론은 이쪽이었기에 순순히 따라 주었다.

“……에, 윤지우는 여기로 내려가고.”

“야, 너 너무 의욕 없지 않냐?”

그래도 나름(?) 귀중한 자료 만드는 건데 너무 의욕 없는 거 아니냐고 타박하자, 정하나가 하품을 하며 손을 휘휘 저었다.

“착각이야. 착각. 얼른 들어가.”

“……무슨 이상한 거 아니지?”

너무나 의욕 없는 태도에 눈치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없는 윤지우마저 불안한 느낌이 들었는지 연신 가라는 데는 안 가고 쭈뼛거렸다.

결국 정말 괜찮다는 주변의 눈빛에 마지못해 들어가긴 했지만.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새삼 뿌듯해졌다.

그래. 아주 눈치를 밥 말아 먹지는 않았구나.

저 정도면 눈치 없이 나가 뒈지지는 않을 거 같아 안심했다. 물론 아주 잠깐이었다.

아주 잠깐.

“테스트는 저기서 하는 거야?”

“맞으면서도 아니랄까?”

“뭔 소리야.”

“보면 알아.”

윤지우가 무기를 고르고, 공간 한가운데 섰다. 무기를 고르는 저장고는 가장자리에 있다 보니 윤지우가 어떤 걸 골랐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렇게 기대도 안 했으니까.

“좋아. 됐네. 이제 시작할게. 고른 무기는 바스타드 소드고. 변경 안 할 거지?”

「“어.”」

단호박처럼 답하며, 지가 고른 것이 매우 마음에 들었는지 위험한 무기를 잡고 붕붕 흔드는 게 진지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아무리 실전이 아니라지만, 저 꼬라지를 보니 대체 언제 철이 드나 생각하는데, 어째 무기 꼴이 이상했다.

저게 뭐야.

저놈의 철없음에 넋이 팔려 정하나의 말을 한발 늦게 알아들었다.

“뭐? 바스타드 소드를 골랐어?”

“응.”

“와 나. 저 미친놈이…….”

바스타드 소드.

게임 같은 데서 흔히 볼 수 있는 그 무기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어마어마하게 큰 대도를 말하는 것이다.

흔히 뽀대 난다고 남자들이 많이 착용하고 다니는 무구.

대체 저 무식하게 생긴 것이 어디가 뽀대 나는 것인지 나는 1도 모르겠지만, 헌터물에서 보면 뭣도 모르는 것들이 헌터가 됐다고 자만심에 빠져 흔히 선택하고 X되는 무구기도 했다.

살상력이 높은 건 맞지만, 무게도 워낙 무겁게 만들어졌고, 부피도 부피다 보니 움직임이 둔했다.

한마디로 초보자가 고를 만한 건 아니라는 거다.

절로 머리가 아파 왔다. 소설 속은 내가 살고 있는데 저놈이 더 현실성 없이 살고 있는 것 같다.

“크흠. 그래도 탱커니까 체력이라면 문제없을 거야. 일단 해 보면…….”

눈앞이 캄캄해 해결책이 안 보여 머리를 싸매고 있는 내가 매우 불쌍했는지 정하나가 답지 않게 위로를 해 왔다. 문제는 그 위로가 먹히기에는 내 머리가 빌어먹을 정도로 현실적이게 쌩쌩 잘 돌아갔다는 것이었다.

“X되겠지. 저게 평생 칼이나 한번 들어 봤나.”

“……뭐, 처음이잖아.”

“후…….”

답이 없다. 저건.

이건 실제인데, 저놈이 게임이라도 하듯 너무 낙천적이라 덜컥― 불안감이 샘솟았다.

소설이건, 영화건, 실제건 저런 놈이 제일 먼저 퇴장하기 마련인데.

그 불안을 읽은 듯 우리의 주인공님께서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습게도, 가장 현실성 없는 인간이 어떻게든 달래 주려는 듯 저러고 있으니 의외로 웃음이 나왔다.

여기서 가장 걱정 없고 현실과 동떨어진 사람이 누구보다 가까이서 나를 이해해 주기 때문일까. 정말 나아진 건 아무것도 없는데도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이게 주인공 효과인가.

새삼 남주인공의 매력에 감탄하는 사이 정하나가 내게 종이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냥 보면 심심하니까, 너도 할래?”

“이게 뭔데?”

달랑 한 장밖에 되지 않는 종이에는 정말 별거 써 있지도 않았다.

이게 뭐야. 몇 글자 써 있지도 않고.

지능, 민첩, 순발력…… 엥?

“야, 이거.”

“능력치 평가표. 심심하니까 너도 하나 해 봐. 나름 안 지루하고 좋아. A―F등급으로 매기면 돼.”

센터에서 공식으로 시행하는 능력치 평가를 재미로 하라는 너도 진짜 대단하다.

매번 새삼 깨닫는 정하나의 대단함에 잠시 얼이 빠져 있다, 이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밌겠네. 너도 쓰는 거지?”

“당연하지. 내가 평가 분석 담당잔데. 너는 그냥 재미로 써. 나중에 참고해 줄게.”

아니. 그건 필요 없고.

진심이었지만 듣지도 않을 것을 알기에 굳이 말로 꺼내진 않았다.

“윤지우. 준비됐지?”

정하나가 마이크에 대고 말하자 윤지우가 우렁차게 답했다.

「“물론!”」

저쪽에도 말을 전달해 주는 마이크가 있는 듯 이쪽으로도 아주 잘 들렸다.

더럽게 멍청한 목소리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희망을 담아 마이크에 가까이 입을 가져다 댔다.

“윤지우. 그냥 한번 묻는 건데, 그 무기를 선택한 이유는?”

그리고, 신은 잔인했다.

「“뽀대 나니까!!”」

“……응. 그래.”

정말 예상과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대답에 나는 가지고 있던 미련을 완전히 내려놨다.

그래. 너한테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미련을 내려놓으니 오히려 덤덤하게 평가를 내릴 수 있었다.

<지성: D>

“……크흡!”

덤덤히 써 내려간 평가지를 보고 정하나가 폭소를 터뜨리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그 모습에 나는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나는 진짜 객관적으로 평가를 내린 건데?

“크흡……!”

“풉―!”

하지만 다른 사람들 생각은 아니었는지 내가 쓴 평가지를 보고 정하나랑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뭐야. 대체 뭐가 문젠데.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역시 너는 예뻐할 수밖에 없다고 엄지를 치켜들며 폭소합니다.]

이때다 싶어 끼어드는 성위는 원래 이런 놈이니 괜찮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리의 주인공님까지 웃음을 꾹― 참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배신감이 느껴졌다.

“흠흠, 그럼. 테스트를 진행하겠습니다. 테스트가 진행되면 괴수가 나타납니다. 그럼 가지고 있는 능력을 전부 발휘해서 괴수를 쓰러트려 주시면 됩니다. 그 공간은 S급 능력자가 힘을 사용해도 부서지지 않게 마력석으로 제작되어 있으니 걱정 마시고 있는 힘껏 임해 주시면 됩니다.”

「“네!”」

우우웅―

공간 벽에서 빛이 나기 시작함과 주변 풍경이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늘어지던 몸을 바로잡았다. 이윽고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완전 새로운 공간에 윤지우가 서 있었다.

어느새 제 앞에 나타난 괴수와 함께.

“오…….”

실제든, 실제가 아니든 괴수라 불리는 괴수를 본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 본 건 이 세계에 도착하자마자 멘탈이 나갔을 때라 아주 자세히 보지는 못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저렇게라도 다시 보니 퍽 신기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강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저건 어떤 괴수임?”

원래 헌터 쪽에는 그렇게 관심도 없다는 설정이 있는 덕인지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D급 트롤.”

“이거 만든 거야? 소환한 거야?”

아무리 봐도 실제인 거 같아 묻자, 정하나가 호기롭게 대답했다.

“당연히 진짜지! 저 공간은 우리가 만든 아공간으로 텔레포트 되는 공간이야. 그 안에서 괴수를 소환하는 거지.”

어때? 굉장하지?

정하나가 눈을 빛내며 반응을 요구했다.

“응. 대단하네.”

나름 맞장구를 쳐 줬는데도 내 심드렁한 태도가 만족스럽지 못했는지 정하나가 툴툴거렸다.

“……와, 반응 진짜.”

뭐가 나와도 설정이 그렇다고 납득해서 별로 궁금하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정하나는 그래도 센터 신기술의 집합체인데 그런 반응이면 섭섭하다고 난리였다.

아. 어쩌라고.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잡소리는 이쯤하고, 시작을 알리자마자 트롤이 곧바로 윤지우를 덮쳐 왔다. 예상보다 더 빠르게 움직이는 트롤의 모습에 당황한 듯 윤지우가 자세를 흩트렸다.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잡을 새도 없이 트롤이 바로 윤지우 앞에 당도해 윤지우를 향해 메이스를 휘둘렀다. 윤지우가 다급하게 몸을 옆으로 틀어 아슬하게 트롤의 공격을 피했다.

“그래도 반사신경은 좀 되네.”

처음 마주하는 괴수와의 싸움에 버벅거리는 게 눈에 보였지만 그래도 한방에 K.O 당하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하며 내 신경은 다른 쪽으로 옮겨 갔다.

“뭐 그래도 꽤 잘 만들었네. 아공간은 직접 만든 거?”

“아니. 아무래도 아공간을 과학으로만 만드는 건 무리야. 저건 마력석 수백 개랑 법사 계열 헌터들을 쥐어 짜서 만든 작품.”

매우 아쉽다는 듯 정하나가 툴툴거렸다.

“하긴. 현대 과학으로 될 리가 없지.”

100년이 지나 봐라. 될지.

가상 현실 소재가 100년 전부터 나왔는데 이제 가상 현실 끝자락에 발 담글까 말까 한 상황이다. 그러니 실제 아공간을 만드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과학자이긴 하지만, 나름 현실은 직시할 줄 아는 정하나도 이 점은 쿨하게 인정했다.

“뭐. 과학자의 욕심이지.”

“그나저나…….”

과학자의 욕심은 뒤로하고, 뒤늦게 보이는 한 광경에 처음에는 조금 참아 보려 하다 이내 와그작 인상을 구기며 한탄했다.

“저놈은 왜 저렇게 못해? 쟤 진짜 A급 맞아? 잘못 나온 거 아니야?”

정말 더도 말고, 더럽게 못했다.

D급과 A급의 대결.

숙련된 D급과 생초보 A급이라 어느 정도 밸런스는 맞췄다 치지만 정말 ‘어느 정도’였다.

“백날 하라는 공부는 처 안 하고 그렇게 쌈박질을 하고 다녔으면서 왜 이리 X밥이야?! 제대로 안 할래―!!”

“……!”

참다 참다 결국 폭발했다.

갑작스레 쌍욕을 내뱉자, 주변인들이 매우 당황해하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저런 미련한 싸움이라니. 아니, 저것도 지금 싸움이라고 칭할 수 있는가. 놀던 가락이 대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한심한 모습에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정하나가 불난 집에 부채질을 시전했다.

“……와우. 성격 안 죽었네. 취직하면서 하도 조용히 살길래 죽은 줄.”

저놈의 조동아리를 콱―!

불난 집에 기름을 부어도 아주 제대로 붓는 행각에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저걸 한 대만 치면 소원이 없겠다 하며 그래도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천천히 심호흡을 하는데…….

「“이게 그거랑 같냐!!”」

“아닐 건 뭐야! 왕년에 일진 짓도 했잖아―! 또 운동도 많이 했고! 그런데 싸움의 기본도 모르냐!!”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인생의 절반이 쌈박질이었을 녀석의 뇌 텅텅 인증 선언에 뒷목이 뻐근했다.

“저, 일단 진정하시고…….”

남들이 보기에는 살벌한 남매 싸움이었는지 서유라의 후배라던 랭커가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그 모습이 너무나 불쌍해 보여, 되려 조금 냉정해졌다.

“후우.”

그래. 애초에 기대도 안 하지 않았는가.

간신히 속을 진정시킨 후, 최대한 나긋하게 말을 하려 노력하며 마이크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윤지우. 내 말대로 움직일 수는 있어?”

「“응? 뭘?”」

“자. 알기 쉽게 게임식으로 설명할게. 게임은 HP, MP 다 나와서 그거 맞춰서 스킬 쓰고 물약 먹고 하지만 진짜 게임처럼 친절하게 시스템이 그런 걸 알려 주진 않을 테고.”

“당연하죠.”

“알려 주면 진짜 치트키죠.”

“그렇대. 그러니까 생초보는 자기 마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부터 해야 해. 그러니까 스킬 써서 마력량부터 감 잡아.”

기껏 맘 잡고 친절하게 설명해 줬더니 윤지우가 멍하게 감탄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아. 나 스킬 있었지.”」

예상은 했지만, 정말 뒷골이 당기는 소리였다.

“워워. 진정해.”

“그래요. 아직 어리잖아요.”

그래도 나름대로는 티 내지 않으려고 뒷목은 안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잡은 건지 정하나와 서유라가 살살 나를 달래왔다.

덕분에 하도 어이가 없어 홀라당 날아갈 뻔했던 멘탈이 좀 돌아왔다.

“그럼, 일단 거기 고 덩치 큰 녀석한테 네가 쓸 수 있는 최대치의 공격성 스킬 한번 써 볼래?”

말에서 살기가 느껴지기라도 했는지 평소라면 앙탈 몇 번 부리고도 남았을 녀석이 곧장 말을 들었다.

「“좋아. 간다―!!”」

유치한 기합을 내뱉으면서, 윤지우가 자세를 잡고 달렸다. 그러자, 윤지우가 쥐고 있는 검에서 푸른 빛이 새어 나오더니 갑자기 검의 색깔이 변했다.

그대로 윤지우가 트롤을 내려치자, 트롤이 단번에 반 조각이 되었다.

“오. 그래도 스킬 명 같은 건 말 안 해도 되나 보네.”

만화처럼 진짜 스킬 명을 읊으며, 스킬을 써야 하나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정말 다행이었다.

어찌 됐든 나도 때가 되면 능력을 써야 할 텐데 그때마다 스킬 명을 읊어야 되면…… 진짜 슬플 것 같았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그 자리에 있는 헌터들이 내 말을 듣고 진저리를 쳤다.

특히, 서유라는 아주 치를 떨었다.

“그러면 쪽팔려서 진짜 헌터 짓 못 하죠.”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나부터 죽고 싶을 거야.

랭킹 1위를 차지한 만큼 수많은 스킬을 가지고 있는 나는, 스킬 명도 쉽사리 부르기 힘겨운 것들이 천지였다.

항마력이 딸려서.

“그래도 이제야 좀 A급 같은데?”

“쟤 A급이야…….”

아닌 줄.

하도 허접이라.

덤덤한 평가에 기다렸다는 듯 성위가 태클을 걸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건 네가 킹 오브 갓이어서 그렇게 보이는 거지 네 동생이 그렇게 허접은 아니라며 헛기침을 합니다.]

그럼 다행이고.

저놈이 멍 때리다가 쉽게 죽을 것 같은 놈이라는 건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지만.

“윤지우. 잔동작 너무 많아.”

「“으아앗―!”」

“거기서는 오른발 말고 왼발. 너 왼발잡이잖아!”

그래도 아까 스킬 한번 쓰고 깨달음을 얻은 듯, 이어서 나오는 괴수들은 주의만 줘도 요령 있게 처리해 나갔다.

체력은 그래도 꽤 좋아 보이고, 민첩성도 나쁘지 않네. 어디 가서 그래도 쉽게 맞고 다니지는 않겠어.

부지런히 체크를 해 나가는데, 날아다니는 윤지우를 보며 헌터들이 감탄을 했다.

“이야. 저런 깔끔한 방법이…….”

“좋은데요? 최고 스킬 한번 써 보면, 그 뒤로 감 잡기가 저렇게 좋을 줄.”

“최고로 한번 빡 쏘면 최대치를 안다는 거니까. 그것만 알면 어느 정도 조절은 어렵지 않지. 여러 가지로 응용도 가능하겠는데?”

최민현이 윤지우의 몸놀림을 보며 다시 한번 감탄을 했다. 랭커인 그는 이 교육이 어떤 방식으로 쓰일 수 있는지 바로 감이 잡히는 모양이었다.

“써먹을 데가 많겠어요. 누님께서 실력이 좋으신데요? 아까도 계속 본인은 일반인이라고 하긴 했는데…… 정말 헌터 아니시죠?”

“마력은 안 느껴져. 더 대단하시네. 스카우트하고 싶어진다.”

들리기는 하지만 적절히 빈말을 해 주는 것이라 여겨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데, 마찬가지로 나와 채점을 하고 있던 정하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그러고 보니 너 백수지?”

“어. 잘난 동생 둔 덕에 망할 회사 폐업시키고 퇴직금이랑 실업 급여 받으면서 꿀 빨고 있지.”

이게 바로 제대로 된 꿀 라이프.

단언컨대, 실업 급여는 정부가 실행한 것 중 가장 바람직한 정책이었다. 귀찮은 절차가 몇 가지 있긴 하지만 꽁돈에 비할 바는 아니다.

“햄 볶는 냄새 너무 난다. 질투 나게.”

“꼬우면 너도 퇴사해라?”

“그거 해고당해야 주는 거거든?”

아. 맞다.

어떻게든 제게 잘 보이려 한 센터 직원이 실업 급여까지 싹 다 처리해 줘서 엄청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진 않았다.

“잘라 달라고 하든가. 완벽하네.”

“아이 씨. 부러워.”

이곳이 소설이든 아니든, 일단 내가 사는 현실이고, 잘린 마당에 실업 급여까지 없다면 정말 인생이 암담했을 거다.

소설이고 나발이고 일단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머니’였다. 세금 낼 때는 그렇게 아까울 수가 없었는데, 이렇게 보답받는 날이 오다니.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해서, 이제는 넓은 마음으로 윤지우에게 지적까지 친절히 해 줄 수 있었다.

“야. 조절도 못 할 거면 일단 버려. 네가 할 수 있는 거부터 하고 나가. 힘 세다고 다 좋은 거 아니라고. 제힘도 주체 못 해서 칼 휘두르다 휘청이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팔에 힘 너무 쏟지 말고, 다리에 힘주고. 네가 팔에 힘 몽땅 안 쏟아부어도 너 힘 센 거 그 앞에 있는 괴수도 다 알아.”

제 키만 한 대검에 뭣도 모르고 넘치게 힘을 줘 붕붕 휘둘려 비틀거리는 꼴이 아주 예술이었다.

저거 분명 나랑 검도 같이 다녔는데…….

왜 나는 아직도 기억하는 기본을 저 녀석은 기억 못 할까.

물론 싸우는데 검도 할 때처럼 정적이고, 느긋하게 세월아 네월아 하길 바라는 건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배웠던 힘의 밸런스라든가, 신체 균형을 잡는 것부터가 엉망이었다.

그냥 개싸움이라면 모르겠지만 자신보다 월등히 큰 존재와 싸우려면 힘의 균형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었다.

저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앞길이 막막해 한숨을 내쉬는데, 다른 분들은 그런 나와는 생각이 매우 다른 듯했다.

“오. 처음인데도 저 정도면 바로 실전으로 뛰어도 될 거 같은데요?”

“진짜 감은 실물을 보고 잡는 게 최고긴 한데, 저 정도 이해도면 금방 적응할 거 같네요.”

“누나가 말하는 거 듣고 바로 감 잡고 할 정도면 짐은 안 될 거 같은데?”

“그래도 처음은 좀 낮은 던전에서 시작하는 게 좋겠어요.”

센터 직원이 잔뜩 고무된 얼굴로 전화기를 붙들며 즐겁게 말했다.

이쪽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라도 더 전력이 느는 걸 테니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랭커들 역시 조금 다른 관점이긴 해도 비슷한 감상을 내놓았다.

“누님이 해 주는 설명이 간단하면서도 바로 효력 있는 힌트여서 그런 것도 있는 거 같은데요? 실제로 그 점이 가장 돋보이고.”

“그건 그래. 일단 높은 단계로 각성하면 중요한 건 기본 컨트롤이니까.”

“간만에 대형 루키인데, 이름값 좀 하겠어요. 우리가 스카우트할까요?”

“그건 조오기. 우리 대장님한테 물어보렴.”

기대감에 고무된 감상들을 들으면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 멍청한 근육 덩어리가 이런 소리를 들을 정도라고?

소설로 봤다 한들, 소설은 소설일 뿐. 엑스트라 하나를 일일이 다뤄 주진 않기 때문에 당연히 일반 헌터의 수준은 모른다.

내가 너무 소설 주인공 기준으로 판단하는 건가.

한 번도 써 본 적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내가 스킬을 쓴다면 저따위로 안 움직일 거라는 본능적인 확신이 있었기에 더욱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양심. 내 계약자 양심 어디 갔냐고 묻습니다.]

[울트라 초특급 최강인 이 몸이 모든 걸 내어준 너를 어디 네 동생한테 비교하냐고. 잔인한 소리 하지 말라 혀를 내두릅니다.]

와. 진짜 싫다…….

얼결에 1위가 되기는 했지만 언제나, 누구나 후딱 제칠 수 있는 조팝 1위를 소망한 (현) 1위가 좌절했다.

그런 (현) 1위의 좌절을 아는지 모르는지 위대한 (전) 1위 님께서 밝은 얼굴로 축하 인사를 건네왔다.

“축하드립니다. 훌륭한 랭커가 되겠어요.”

아뇨. 정말 안 반가운데…….

얼결에 마나님 명령에 동생 지켜보러 왔다가 속속들이 알게 되는 알고 싶지 않은 진실에 조팝 최강 랭 1위가 속으로 눈물을 흩뿌렸다.

이 와중에 (전) 랭 1위 님이 너무나 뽀샤시하게 빛나 눈이 부셨다.

새삼 자신이 미인계에 약하다는 사실이 이렇게 슬플 수 없었다.

“……고맙습니다. 안심이 되네요.”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렇게 생겨 먹은걸.

포기할 건 빠르게 포기하고 체념하자 마음은 편했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께서 포기하고 체념할 걸 조금 정정해 보는 건 어떻겠냐고 넌지시 제안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걸 포기하는 건 내 계약자가 좀 불쌍한 것 같다고 ‘이매망량’ 님이 중얼거립니다.]

그 얼빠 짓에 제일 덕을 본 내 성위님이 제 얼굴에 침 뱉기를 시전했다.

당장이라도 쏘아붙여 주고 싶었지만, 이번만 조용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럼, 테스트 얼추 끝난 거야?”

“응. 그만하자. 데이터도 다 뽑았고, 네 평가도 어디…… 역시. 윤지호 실력 안 죽었어?”

“숫자랑 평가만 징글맞게 보던 블랙 기업 인재총무팀 3년차였다.”

이 정도도 안 하면 거기서 버틸 수 있었겠냐.

너무나 당연한 소리에 콧방귀를 뀌고, 얼른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을 가득 담아 의자에 늘어졌다. 여기 있으면 있기만 해도 체력이 쭉쭉 빠지는 게, 역시 센터와 자신은 공기부터가 맞지 않았다.

“좋아. 그럼 이제 집에 갈 수 있겠다.”

“윤지우. 다 끝났으니 나와. 하여간. 일하는 거 같으니 그렇게 싫어?”

테스트를 종료시키고, 윤지우에게 나오라 말을 전하며 정하나가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혀를 차며 물었다.

얜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릴.

“그것도 그렇고, 그냥 여기가 별로야. 공기부터 나랑 안 맞아.”

“헌터 자체를 싫어하는 건 아니면서 하여간. 남들은 오고 싶어서 안달하는 곳이거든?”

물론 그렇긴 하다.

이 소설 속 세계는 헌터가 최고의 선망 직업이며, 불변의 선호도 조사 1위 직업이었다. 그런 이 세계에서 나는 굉장한 이레귤러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떳떳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다 해도 나는 이게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기꺼이 양보하겠다 전해 주렴. 꼭.”

언제든, 얼마든지 양보하겠다, 해. 제발.

여길 안 올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 자부할 수 있다.

정말 두 번 다시 오고 싶지 않은 곳이었다.

“누나. 왜 죽어 있어?”

“있기 싫은 곳에 너무 오래 있어서. 이제 진짜 집에 가자. 침대. 침대가 간절해. 누워서 한 20시간은 안 일어나고 싶다.”

1분 1초라도 빨리 이곳을 뜨고 싶은 마음을 간절히 표현하자, 가는 건 상관없는데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듯 윤지우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누나……. 배가 등딱지에 붙을 거 같아.”

아니. 뭐했다ㄱ…… 하긴 했지, 그래.

그렇게 움직였는데 배가 안 고플 리 없었다. 시간을 확인하며, 나는 결단력 있게 오늘의 메뉴를 정했다.

“삼겹살을 사 가자. 엄마 요리를 며칠이나 더 먹을 수는 없어.”

“당연하지. 오늘까지 먹으면 위가 파업할걸.”

오늘까지 그걸 먹으면 위가 아니라 그냥 내가 파업할 거다.

단언컨대, 그건 요리가 아니다. 흑마술이지. 마술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그 요리실력을 25년째 보고 있으면서도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뭐 이상한 재료를 넣는 것도 아니고, 뭘 반대로 넣고 하는 것도 아닌데, 결과물이 흑마술이었다.

그렇기에 우리 남매는 몇 번의 갱생 프로그램을 시도하다, 그냥 속 편하게 알아서 요리를 하기로 했다.

문제는 우리 어무니께서, 정말 안타깝게도 요리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계시단 거다. 정확히는 요리해서 자식들에게 밥을 주는 어머니라는 환상이었다.

‘엄마가 맛있게 해 줄게!’

‘아니, 그냥 내가…….’

‘씁. 공부나 하렴. 음식은 엄마가 할 테니까.’

‘……내가 하게 해 줘. 제발.’

아아. 왜 자꾸 자기가 요리를 하려고 하는 건데……!

그냥 속 편하게 자식들이 해 주는 거 먹으면 안 돼?

소설 속이어도 결국 내 가족이라, 이런 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이런 건 조금 변해도 되는데 말이다.

“오늘 너는 죽도록 힘쓴 거야. 알았지? 거의 죽어 가듯 연기해. 너무 연기 티 내면 안 되는 거 알지?”

해서 우리 남매는 살기 위해 연기력을 길렀다.

“이 짓 한두 번 해 보나. 내가 시선 끌 테니까 밥은 누나가 몰래 후딱 해.”

“콜. 협상 완료. 전투 준비하자.”

이건 단순히 투정이 아니었다.

목숨을 건 사투였다.

솔직히, 소설 속에 들어와 처음 봤던 무시무시한 티라노사우루스 같은 괴수보다 엄마 요리가 나는 더 무서웠다.

“대체 어느 정도길래…….”

“선배보다 더한 거 아닐까요?”

“뭐 인마?”

“서유라. 멱살은 좀…….”

“닥쳐!”

남매의 비장한 다짐에 다른 한쪽에서는 누군가가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것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 같았지만, 프라이버시를 생각해 조용히 모른 척해 주었다.

평생 지옥 같은 요리를 강제로 맛보게 된 자로서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그 요리를 먹게 될 주인공님께 심심한 위로를…….

책임져 주지는 못하니까 위로만 해 주었다.

어차피 내 남자도 아닌 거.

“아. 윤지호가 요리하는 거면 얻어먹으려 했는데.”

어느 쪽이든 대충 결판(?)이 나자, 정하나가 나를 보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엄마 상대하기에는 체력이 부족해. 그냥 맘 편히 삼겹살을 사서 편하게 먹고 뻗겠어.”

엄마 빌런은 무시무시한 딜량을 자랑했기에 어쭙잖은 체력으로는 상대가 불가능했다. 하물며 지금같이 HP가 있는 대로 딸린 상태로 상대가 되겠는가.

안 되는 건 빨리 포기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았다.

아마 아빠는 삼겹살을 보는 순간 대성통곡을 할 거다. 장담할 수 있었다.

엄마를 사랑해도 엄마의 요리까지는 사랑하지 못한 사랑꾼은 어제 엄마의 사랑이 담긴 요리에 큰 타격을 입으신 상태였기에 정상적인 음식이 매우 간절할 거다.

“좋아. 삼겹살 사러 가자.”

아빠. 딸내미 용돈은 나중에 채워 주리라 믿어.

오늘 고생할 카드를 비장하게 꺼내 들자, 윤지우가 열렬히 환호했다.

“맛있게 먹어라. 난 먼저 간다.”

“어. 잘 가.”

“나중에 전화할게.”

원래 바람은 잡는 거 아니라는 격언처럼 무심히 정하나를 떠나보내고, 이제 삼겹살을 향해 행진하려는데…….

“사이가 좋네요. 정말.”

눈부신 미모와 함께 스윗한 목소리까지 탑재하신 주인공이 빛을 발산했다.

아오. 깜빡이 좀.

갑작스러운 끼어들기라 심장이 쫄깃했다.

그냥 끼어들어도 놀랄 텐데, 끼어든 급이 너무 비인간적인 얼굴이라 백배로 부담스러웠다.

그래도 저렇게 대놓고 말을 하는데 무시할 수도 없어, 다니며 다년간 터득한 사회용 미소를 지으며 주인공님을 돌아보았다.

이래 봬도 가‘족’같은 기업을 폼으로 다니지는 않았다.

“이럴 때만 좋죠. 오늘 감사했습니다.”

눈 호강 감사.

어휘는 같지만, 진위는 다르게.

그래서 진심이 담긴 것처럼 보이게.

사회용 미소의 기본이었다.

이런 진실을 손톱만큼도 모르는 우리의 주인공님께서는 순백 같은 맑은 미소로 내 양심을 찔리게 했다.

“저희야말로. 불편하셨을 텐데…….”

뭐야. 잘 아시네요.

“하하. 아니에요.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분이신데, 영광이죠.”

하지만 속마음과 정반대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말하는 것이 바로 사회 생활.

백수의 짜릿함을 느끼다, 다시 사회 생활의 비애를 느끼고 있자니 기분이 참 팝콘스러웠지만, 그래도 상대가 잘생기고 호구 같은 주인공님이라 그럭저럭 괜찮았다.

시커먼 생각을 하며 하얀 미소로 화답을 하고 있는데, 내 본심을 홀라당 들여다보는 취미를 가진 변태성위가 태클을 걸어왔다.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넌 전생의 사기꾼이었냐고 진지하게 질문합니다.]

진중히 반론하겠습니다.

이건 그냥 꼰대들을 만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익히게 되는 스킬입니다. 저에겐 선택권이 없었어요.

[‘이매망량’ 님이 속 보이는 거짓부렁이라 화신을 매도합니다.]

[어쩔 수 없이 익혔다지만 너만큼 알차게 써먹고 있는 사람이 있냐며. 있다면 말해 보라 채근합니다.]

알 바? 닥쳐욧.

“다음에 마주치시면…… 음, 커피라도 대접할게요.”

인사치레로 보통 밥 한번 먹자 하긴 하지만, 밥 먹다가 체할 상대라 재빨리 커피로 말을 돌렸다.

예의상 당연히 미소는 곁들임으로.

혹시라도 속내가 드러날까 안면 근육에 힘을 꽉 주고 있는데 대체 그런 내게서 무엇을 본 건지 주인공님이 살짝 안심한 듯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주 잠시여서 정말 본 게 맞나 싶긴 하지만.

“유. 유지한 헌터님!”

“멋진 헌터가 될 겁니다. 윤지우 군. 금세 상위 랭커가 될 수도 있을 거 같네요.”

“아, 아니, 그럴 리가요!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감사드립니다……!”

갑자기 내 앞에 팬미팅 현장이 펼쳐졌다.

“진심이에요. 현재 대한민국에서 윤지우 군을 스카우트하지 않으려는 길드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겁니다.”

“아직 멀었죠. 이렇게 뵙게 되어서 정말 영광입니다!”

“…….”

한순간에 공간을 팬미팅 현장으로 만든 윤지우의 능력에 나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녀석은 헌터가 아니라 이쪽이 천직 같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프로 같은 모습이었다.

특히 덜덜 떨며 악수하는 손이.

“동생이……. 죄송합니다.”

“하하. 아니에요. 저 나이 때가 원래 다 저렇죠.”

왜 사과와 쪽팔림은 나의 몫인가.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어, 시선을 돌린 채 사과를 하는데도 서유라는 넉살 좋게 내 사과를 받아주었다. 역시 히로인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집에 가서 이불 차기 전에 저거 얼른 수거해서 가야겠네요.”

“하핫. 누나분. 동생이란 같이 우리 원티드 들어올 생각 없어요? 있으면 너무 든든하고 재밌을 거 같은데.”

에헤이. 이 언니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하신다.

“하하. 전 일반인인데요. 거기 가서 제가 뭘 하나요.”

안 돼요. 싫어요. 하지 마세요.

옆에서 늘 벌어지는 사건 사고에 휘말려 야단법석을 떨 자신이 머릿속에 훤히 그려진다.

장담컨대 심장 쫄려서 부정맥부터 올 거다.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뭐 일이야……. 아니에요. 그런 막노동을 시킬 수는 없지, 아무렴.”

다행히 이런 간절함이 통한 건지 서유라가 아쉬운 얼굴을 하면서도 더는 권유하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린 것 같기는 했지만.

‘……후.’

단번에 수명이 10년은 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주연들 근처는 얼씬도 해선 안 됐다.

[성격은 그 모양이면서 왜 맞지 않게 이상한 데서 쫄보냐고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끌끌거립니다.]

시끄러워. 타고난 성격을 어쩌라고.

생각하는 거와 답지 않게 이상한 데서 미친 쫄보인 건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고치려고 해서 고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진작 포기한 것이었지만.

안 되는 문제에 깔끔하게 미련을 털어 버리고 이제 슬슬 윤지우를 회수하려고 뒤를 돌아보는데,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윤지우 군. 이제 곧 스카우트 제의가 많이 들어올 거에요. 신중하게 선택하는 게 좋아요. 다른 곳만큼 조건이 좋지는 않지만 우리 원…….”

설마 그 ‘원’ 뒤에 나오는 게 원티드는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었다.

최상위 랭커들만의 소수정예 길드인 원티드에 넘쳐나는 것이 A급 이상인데, 이제 갓 A급은 원티드에게 아무런 매력도 없었다.

“잠……!”

알면서도 불안감을 지울 수 없어, 서둘러 뒷말을 자르려고 입을 여는데…….

쿠웅―!

“……!”

“뭐야?!”

갑자기 천장이랑 키스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몸은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는데 말이다.

순간, 저도 모르게 마력이 새어 나와 모두에게 각성자라는 것을 들킨 줄 알아 심장이 덜컹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건 아니었다.

그냥, 천장이 움직인 것이었다.

정확히는…….

“윤지우.”

“……왜, 누나.”

쫘악― 짜지직―

“지금 바닥이 반으로 쪼개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네가 보기에는 어떻니?”

“정상인 듯. 나도 그렇게 보이거든.”

건물이……!

젠장할.

“일단 여길 떠야 하는 거 아니야?”

머릿속에 테러 같은 온갖 불길한 생각들이 나돌았다.

그러면서도 일단 여기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말을 꺼내는데 서유라가 그런 나를 향해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세요!”

크게 울리는 목소리에 곧바로 멈춰 헌터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야말로, 이런 재난 상황의 프로였으니까.

그 증거로 그들의 얼굴은 한순간 당황이 어리긴 했지만, 곧바로 침착한 얼굴을 유지했다. 아까의 얼빠진 사람들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것도 결국 아주 잠시가 됐지만.

“일단 손을…… 어?”

주인공님이 내게 손을 내밀며 심각한 어조로 운을 떼다,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갑작스러운 변화를 이해할 수 없어 제게 내밀어진 손에 무심코 손을 뻗다 멈칫하는데.

“……응?”

내 발밑에 갑자기 빛이 퍼졌다. 그리고 그 빛은 순식간에 나를 집어삼켰다.

누구도 저지할 틈도 없이.

“윤지호―!”

빛으로 인해 점멸되는 시야 사이로 다급하게 나를 향해 손을 뻗는 주인공이 눈에 보였다.

세상의 모든 절망을 끌어안은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착하고 호구력 넘치는 주인공이라 그런가. 제대로는 오늘 처음 본 나를 상대로도 저런 얼굴이라니. 나라면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그러니 그가 주인공이지.

본능적으로 손이 나갈 것만 같았다.

저 간절한 손을, 잡아 주고 싶어졌다.

결국, 잡아 주지 못했지만.

쏴아악―

“뭐야. 여긴.”

대충 감은 잡았지만 나만 다른 곳으로 이동된 것 같았다.

그 정도는 예상했지만, 문제는 이동된 장소였다.

【던전에 입장하셨습니다.】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에스칼리도의 미궁’에 입장하셨습니다.】

【던전의 등급이 측정됩니다.】

【‘에스칼리도의 미궁’의 난이도는 A급입니다.】

“……?”

아무리 봐도 이게 뭔 소린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간단히…….

“아저씨. 해명해.”

[당신의 계약성 ‘이매망량’ 님이 그냥 네가 운이 없었던 거지 내 죄는 아니라며 시선을 피합니다.]

성위를 족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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