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 젠장. 차라리 겜판이나 읽을걸. (2/30)

1장. 젠장. 차라리 겜판이나 읽을걸.

나, 윤지호는 25살 먹도록 부모에게 빌붙고 있는, 빌어먹을 회사에도 제발 종신 계약해 달라 빌어야 하는 신세의, 쩌리 중에서도 하급 쩌리였다.

왜, 이 나이 먹도록 부모에게 빌붙어 살고 있냐 하면,

첫째로, 사람이 살 가격이 아닌 서울 집세 때문이옵고.

두 번째로, 매우 감사하고 다행스럽게도 본가가 서울이었기 때문이옵고.

마지막 세 번째로, 내 월급은 언제나 그냥 통장을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사회 초년생의 암울한 현실이었다.

“네가 미친 게으름뱅이에 청소 더럽게 못 하는 건 왜 빼먹어. 이 노답 식충아.”

“닥쳐. 윤지우! 진짜 식충이가 누군데! 난 엄연히 돈을 버는 사회인!!”

“응. 난 아직 빌붙어도 되는 자랑스러운 이 나라의 군필자 대학생.”

“……젠장.”

나름 산뜻하게 하려던 PR이 쌈박하게 무너졌다.

아씨. 쟤처럼 그냥 4년제로 갈걸.

그럼 더 당당하게 빌붙어 놀고먹었을 텐데.

대체 무슨 효도를 하겠다고 일찍 돈 벌겠다 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매일 까이는 게 주 업무인 것 같은 회사원이었고, 가족과 함께 살고 있으며, 나보다 한 살 어린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여기서 포인트는, 바로 이 남동생이었다.

이놈은 다른 집 일반적인 남동생들처럼 온갖 게임, 만화부터 시작해 무협과 판소를 수집해 보는 녀석이었고, 게임은 좀 해 봐도 취미가 없어 그만뒀지만 그래도 동생 덕에 소설은 같이 봤다.

작가님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얘가 이미 사 본 걸 굳이 내 돈 주고 다시 사 보기에 나는 가난한 사회인이었다.

“노답 누나야.”

“왜. 이 누님에 대한 공경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패륜아야.”

“미친. 공경할 게 있어야 하지. 아! 발 냄새 나! 발 좀 씻고 와!”

“안 나거든?!”

“나거든?!”

“안 난다고!!”

사실 쪼금 나는 것 같기도 했지만 이 정도는 사회인으로서는 당연한 거지!

뻔뻔함으로 밀고 나가자, 망할 동생 놈이 대체 그 뻔뻔함은 날이 갈수록 능력치가 쭉쭉 올라가기만 하냐는 얼굴로 헛웃음을 쳤다.

“와. 윤지호. 드디어 후각 마비됨? 미친 거 아니야!”

“진짜 안 난다고!”

“이것들이, 시끄러워! 동네 떠나가겠다!! 이것들은 잘 멕여 놨더니 왜 그 기력들을 목청에만 쓰고 지랄이야!!”

“…….”

어머님. 실례지만 어머님이 제일…… 아 옙. 그냥 그렇다고요.

어느 집에나 그렇듯, 우리 집안 최고 서열 1위는 바로 살상능력 85%를 자랑하는 무기를 몸에 지니신, 삼X화재 관악지점 영광스러운 4위의 빛나는 보험판매원. 채미화 여사님이셨다.

“처맞고 싶지 않으면 조용히 가서 잠이나 자!!”

“옙. 어머님.”

“그럼요. 맘스터…… 가 아니라 은혜로우신 어머님.”

굽신거리다 순간 필터가 제 기능을 살짝 못했다.

곧바로 필터를 ON하는 덴 성공했지만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옆에서 따사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미친 누나야.’

‘쏘리염. 순간 필터링이…….’

‘같이 죽잔 소리 하면 진짜 죽일 거야.’

함께 많은 시련을 거쳐 온 남매만이 이룩할 수 있는 경지인 신속하고 정확한 눈 대화를 마친 후, 다시 재빨리 머리를 조아렸다.

다행히 마나님께선 눈치채지 못하신 것 같았다.

무사히 폭풍이 지나가자,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바로 엎어졌다.

눕자마자 망할 동생 놈의 날카로운 질책이 잊지 않고 날아들었다.

“망할 누나야. 맨날 노답노답 하니까 진짜 핵노답이라도 된 거냐? 어떻게 거기서……. 심장 쫄려 뒈질 뻔했네.”

“진짜 쏘리. 아. 심장 쫄려. 요즘 팀장 빌런께서 손수 내 필터링을 깨부수고 계시는 중이라.”

“그 새끼는 아직도 그래?”

“세상에 그런 새끼가 사라지는 날이 오기나 할까? 포기하고 그냥 삶.”

“네 인생도 참.”

“기구하지. 아니까 그쯤하고 이제 내놔.”

얼른 내게 이 현실로부터 도피할 것을 내놓으렴.

단호하게 손짓하자, 윤지우가 불쌍하단 얼굴로 손에 아X패드를 쥐여 주었다.

“불금에 소설이나 보겠다는 너도 참.”

“쯧쯔. 이래서 물정 모르는 대학생이란. 자고로 불금이란 원래 회사에서 5일을 불사르고 타다 남은 재처럼 침대에 쪼그라져 힐링 받으면서 보내는 게 최고야.”

“그냥 네가 저질 체력인 거지.”

“불금이라고 클럽에 가 젊음을 불사르는 건 대학생 때처럼 여유 넘칠 때 하는 거고. 사회인은 그럴 체력도 여력도 없다.”

사회인의 비애를 토로하면서도 눈과 손으로는 열심히 이번 주말을 책임져 줄 귀한 아이들을 선별해 나갔다.

그런 누님이 나름 안쓰러워 보였던 건지 망할 동생 놈이 굳이 안 해도 될 소리까지 내뱉었다.

“차라리 애인이라도 좀 사귀어서 그 애인이랑 힐링을 하는 게 우리 집 마나님을 행복하게…….”

“애인? 그게 뭔데? 먹는 거냐?”

“……됐다. 소설이나 골라라.”

짜식, 그럴 거면서.

“새로운 거 추천 좀.”

“어떤 쪽으로.”

“헌터물.”

단호하게 지금 가장 끌리는 걸 피력하자, 동생 놈이 웬일이냐는 얼굴로 나님을 돌아보셨다.

“언제는 들입다 겜판만 파더니?”

“볼 만한 건 얼추 다 봤어. 이제 보다 만 거 완결 나기나 기다리려고. 깨작깨작 보는 건 역시 취미가 아님.”

“<황금의 대장장이> 완결 나려면 몇 년 걸릴 거 같던데?”

“나중에 한꺼번에 몰아 봐야지. 쨌든, 추천!”

“아오! 알았다고! 하여간 이건, 성격 한번 드러워서……. 누가 데려가려나 몰라.”

“너 데려갈 사람이나 얼른 물색해. 내가 볼 때 너도 나만큼 가망 없거든? 현실 직시 좀.”

“욕하지 마.”

솔직하게 말해 줘도 지랄이야.

뭐, 콩깍지라고는 1도 없는 현실 남매 대화의 묘미란 바로 이런 것 아니겠는가.

언제나 그렇듯 이 정도는 가뿐하게 무시하고, 동생 놈에게 요즘 잘나가는 헌터물을 내놓으라 재촉했다.

녀석이 알았다고 성질을 부리면서도 언제나 그렇듯 순순히 내 입맛에 맞을 만한 걸로 추천해 주었다.

“요즘 헌터물은 이거지. <이 세계의 주인공입니다> 나, <랭킹 1위에 관한 고찰>.”

“뭐가 달라?”

“헌터물은 보통 각성인데, 이것들은 신인가 뭔가랑 계약해서 헌터 되는 성좌물.”

“오. 새로운 소재. 시간을 투자할 만하군.”

“필력도 괜찮대. 둘 중 골라 봐.”

“이번 주말 다 쏟으면 되겠네. 땡큐.”

아주 자리 잡고 눕자, 쫄보인 나보다 이럴 때 보면 더 쫄보인 동생 놈이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

“다 쏟지는 말고. 제발. 나까지 불똥 튀니까.”

“이 짓 한두 번 하냐. 완급조절 만렙. 오키?”

“오키.”

이 짓만 몇 년째인데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할 것 같냐는 말에 녀석이 비로소 믿음이 생겼는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녀석을 안심시키고 둘 중 뭘 먼저 볼까, 라는 중요 난관에 발을 들였다.

아차, 잊을 뻔했다.

“이제야 회사에서 탈출한 애처로운 누님을 위해서 뽕따 좀.”

“아. 직접 갖다 먹어. 귀찮아.”

“네 친구 피X츄 시켜.”

“노답아. 그거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야.”

“평생. 부모님이 준 위대한 이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살아.”

“꺼져.”

할 수 없군. 이렇게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필살기를 써야겠어.

“지우야. 서둘러. 어서 포X몬 마스터가 되어야지! 반드시 포X몬 마스터가 된다며!”

“아우 씨!”

더 듣기도 싫은지 동생 놈이 욕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흠. 역시 자주 쓰면 위험하지만, 가끔 사용하면 개꿀인 스킬이다. 이래서 이걸 포기할 수 없다니까.

애증의 동생 놈이 가져온 뽕따를 입에 물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고민을 마쳤다.

“음, 역시 <주인공>은 내용이 흔할 거 같으니, 간만에 클리셰 말고 딴 걸 도전을…….”

사실 도긴개긴이었지만, 그래도 눈 가리고 아웅이라도 한 점에 더 점수를 쳐 주며 <랭킹 1위에 관한 고찰>부터 탐독에 들어갔다.

내용은 꽤나 재밌었고, 당연히 시간은 순삭이었다.

주인공이 너무나 매력 있어 정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사실, 내가 정말 선호하지 않는 진부한 스타일이었다. 착하고, 정의롭고, 자신이 희생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는 히어로.

착하기만 한 히어로는 고구마 백만 개는 먹은 것 같다고 내게 욕을 먹었다. 시원스러운 빌런 주인공들이 판을 치는 요즘 시대에 대체 언제 적 유행인지. 작가가 시류를 못 타는 건가 싶었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바보 같을 정도로 맹목적이지만 끝까지 제 신념을 관철해 나가는 주인공은, 인정하긴 싫지만 정말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결국 날밤 꼴딱 새워 중간까지 읽고, 아침 해를 보다 잠들었다.

새벽에, ‘대체 저건 언제 철이 들지?’ 하는 동생의 닭 같은 소리를 듣긴 했지만, 언제나 그렇듯 가뿐히 무시했다.

그리고, 만족스러울 만큼의 분량을 보고 감았던 눈을 뜨자마자 창문 너머 하늘은…….

“엄마 나 배고…, 응?”

붉디붉은 하늘이었다.

* * *

깜빡 깜빡 깜빡―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였지만, 보이는 풍경은 영 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무 오래 잤나? 그렇다고 해도 갑자기 푸른 하늘이 붉게 될 리 없었다.

언젠가 해가 지는 걸 보겠답시고 동생 놈을 셔틀로 끌고 간 서해조차 저렇게 붉진 않았다.

그럼 대체 뭐지?

설상가상으로 웬일로 휴일인데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인지 집 안은 아주 고요했다. 늘 엄마 아니면 동생 놈 하나는 있어야 하는데.

가뜩이나 심란한데, 아파트 방음을 뚫고 온갖 소란스러운 소리들이 난무했다.

비명 소리와 함께, 다급한 발소리와 조금도 듣고 싶지 않은 구타음까지. 아주 가관이었다.

괜히 불안해져 대충 슬리퍼를 주워 신고 사람들을 따라 밖으로 나가 보았다. 사회인의 필수템인 휴대폰은 잊지 않고.

그래도 그때까지의 난 꽤나 안이했다.

나가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비해서는.

“까아아악―!”

“밟지 마요! 밀치지 말라고요!!”

“같이 삽시다, 좀! 규칙 잊었어요?!”

“애, 저희 애 밀지 마세요! 넘어지면 어쩌려고!!”

개판이었다.

아니, 아비규환과도 같았다.

갑자기 세상이 멸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온갖 비명과 구타음이 소용돌이쳤다. 어떻게 해야 할지 우매한 내 머리로는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자기 혼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는 없어서 사람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끼이이익―!

콰아아아악―!

위이이잉― 위이이잉―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신속하게! 서두르지 말고 어서 대피소로 향하시기 바랍니다!”

“침착하게!! 모두 규칙을 잊지 마시고!!”

순간 멍하니 생각했다.

영화 찍나……?

무슨 블록버스터 하나 찍는 거 같았다. 어떻게 생각해도 납득은커녕 현실 직시조차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생존본능이란 대체 무엇인지, 내 발걸음은 천천히라도 피난하는 사람들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계속 뒤를 돌아보며.

봐도 봐도 믿을 수가 없었다. 난 그냥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이게 대체 뭐지? 그 와중에도 따라 걸어간 게 용했다.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린 건 더 용했고.

그렇다. 내가 비로소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었던 건 사람들의 그 말 같지도 않은 말 때문이었다.

“아. 헌터는 왜 아직도 도착을 안 했어?!”

“그러니까! 이것들이 돈만 드럽게 받아먹고!!”

“말은 바로 해라. 그 돈 네가 주냐.”

“어쨌든!!”

“랭커들 언제 와! 이 난리인데?!”

“랭킹 1위도 오나? 이참에 랭 1위나 보고…….”

“그전에 뒈지고 싶냐?! 빨리 안 뛰어?!!”

바로 이 닭도 안될 것 같은, 뻘소리. 저 소리를 듣자마자 든 생각은 매우 평범했다.

‘헐, 쪽팔리지도 않나. 오글거리게 무슨 랭커에 헌터… 무슨 현판소 같은 발언을…….’

“……!!”

거짓말처럼 걸음이 정지했다. 걸음만 멈췄을까. 사고도 같이 정지했다.

내가 방금 뭐라 했지?

제가 생각해 놓고 격하게 바로 현실을 부정했다.

에이. 설마 그런 일이 정말로 벌어지려고, 그거야말로 진짜 소설이지.

그리고 이때, 참 소설 같은 타이밍에 들리는 목소리.

“아. 유지한 언제 오는데?!”

“랭킹 1위가 오겠냐!? 이거 B급 게이트라는데!!”

바라지도 않았건만 이름 하나가 선명히 귓가에 꽂혔다.

유지한.

그래. 그 이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기억 못 할 리가. 몇 시간 전까지 봤던 이름인데. 아무리 멍청해도 이쯤 되니 최악의 가정을 의심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하지만 곧바로 부정했다. 유지한이라는 이름. 흔하지 않은가.

‘랭 1위’라는 말만 들어도 각이 나왔지만, 살면서 유지한이라는 이름의 남자를 한 번도 본 적 없는 스물다섯의 윤지호는 열심히 현실을 부정하려 했다.

끝까지 그러고 싶었다.

정말. 정말로.

“……이거 실화냐.”

신님. 누구나 이런 세계에서 한번 살아 보고 싶다고 생각은 하겠지만 그렇다고 다 정말 거기 넣어 주진 않으시잖아요. 대체 저한테 왜 이러세요. 제가 그렇게 세상을 잘못 살았나요. 저는 진짜 열심히 살기만 했는데…….

온갖 헛소리가 머릿속에 난무했다.

끼이이이악―!

그 와중에 현실도피도 못 하게 괴수의 울음소리가 참 실감 나게 들렸다.

정말 싫다. 진짜.

그래서 나는…….

“왜 나야, 이 빌어먹을 신 새끼야!!!”

“저 사람 봐. 괴수 봐서 그런가. 미쳤나 봐.”

“이 상황에서 제정신인 게 더 이상하지.”

이미지 관리를 포기했다.

* * *

“아이고. 이건 나이만 헛먹고. 진짜.”

“누나야. 드디어 돌음? 그런 거야?”

“넌 이 상황에서 그딴 말이 나오니? 아우. 속 터져 진짜. 이런 것들을 자식이라고 길러 놓다니.”

이미지 관리를 포기한 덕에 좋은 점은 있었다.

엄마가 나를 빨리 찾았다는 거.

게이트가 터지면 당연히 차는 이용할 수 없기 때문에 차를 버리고 나를 찾으러 오셨단다.

눈물겨운 가족애에 감동은 받았지만, 그보다 더 큰 감정이 이미 한계까지 치솟은 상태였기에 그 감동은 애석하게도 금세 묻혔다.

“꺄아―! 헌터가 왔어, 우린 이제 살았다!!”

“헌터님! 저것들 다 죽여 주세요!”

“다 발라 버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심정이었다.

“유지한이다! 진짜 유지한이야!!”

“와, 진짜 존잘.”

“지한 님 밑으로 다 쩌리라고! 그걸 이제 알았어?!”

대체 왜 B급 게이트에 랭킹 1위가 와서 현타를 날릴까. 진짜 눈물이 앞을 가렸다.

“누나. 진짜 미친 거야? 왜 이래?”

“크흡… 다으윽치어어 이 새윽기야아…….”

“뭐라는 거야. 욕하는 건 알겠는데.”

그것만 알면 됐지, 뭘 더 바라!!

안 그래도 서러워 미치겠는데 망할 호적 메이트가 설상가상으로 불난 집에 친절히 기름까지 부어 주었다.

내 인생 진짜 왜 이래.

“크흡…… 큭…… 흐으읍.”

“엄마. 얘 진짜 돌았나 봐?”

“지금 이걸 겪었는데 이 쫄보가 제정신인 게 더 이상하지. 그냥 냅둬.”

“아. 맞다.”

노빠꾸 팩폭. 엄마가 젤 나빠.

하지만 맞는 말이다. 나는 진짜 미친 쫄보였다. 그러니 그 개 같은 팀장 새끼한테 한번 개겨 보지도 못했지.

그 대리만족으로 현판을 봤던 거고.

근데 그게 직접 눈으로 보고 직접 겪고 싶단 얘기는 아니었어요. 듣고 있어요? 신님?

“어? 이쪽으로 온다!”

그 와중에 지금 이 순간, 정서적으로 정말 도움이 안 되는 랭킹 1위가 내 쪽으로 왔다. 왜인가 하면은, 현실도피 하느라 내가 제일 얼마 못 도망쳤거든.

대피 행렬의 가장 끝에 있는 내게 다가온 유지한은 상냥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많이 놀라셨나 보네요. 괜찮으세요? 이제 안전하니까 안심하세요.”

네가 다 쪼개는 거 봐서 알아요.

주인공님께서 참 주인공다운 대사를 시전했다.

마치 환상처럼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였다. 이런 목소리가 현실에 있었으면 하는 내 바람이 만들어 낸 건 아닐까 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로.

그래도 끝까지 현실 부정을 하고 싶어 배배 꼬인 마음으로 슬쩍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았다.

내 눈이 썩 좋은 눈빛도 아닐 텐데, 그는 당황스러워하지 않고 상냥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다 끝났어요.”

누가 봐도 나 주인공이요. 하는 후광이 아주 등 뒤로 번쩍번쩍 빛이 났다.

잘생기기는 현판소 주인공답게 겁나 잘생겼고.

작가의 상상이라지만, 대개 성장물 현판소는 보통 주인공을 잘생기게 설정 안 하지 않나?

“얘는 또 뭐 이리 쓸데없이 잘생겼어…….”

주인공 패시브인가.

쫄보는 절망했다.

젠장. 차라리 겜판이나 읽을걸.

* * *

균열이 일어난 게이트 앞.

“네! 게이트 정상적으로 닫혔습니다!”

“사망자는 총 24명. 부상자는 총 178명입니다!”

“빨리빨리 움직여!!”

언제나, 어느 급의 게이트가 열리든 늘 어수선하고 급박한 현장.

S급 헌터 서유라는 신속하게 지휘를 내리면서도, 잊지 않고 관리국 공무원에게 지옥의 레이저를 쏘았다.

S급 헌터의 살기 어린 눈빛은 일반인에게는 진짜 죽을 것 같은 위협을 동반할 터인데도 제법 베테랑인 듯한 공무원은 침착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게이트를 빠져나온 여섯 마리의 B+급 괴수들은 모두 처리되었습니다. 사체와 마석의 수입은 유지한 님께 배분될 겁니다.”

“이번에도 또 중간에서 배분 슬쩍하면 가만 안 둔다고 전하시죠, 똑바로! 애가 순하고 맹하다고 이게 한두 번인가! 걔는 가만히 있어도 나는 가만히 안 있어요. 이번엔 정말 똑바로 전해요.”

“무, 물론입니다!”

아무리 침착하게 굴었어도 S급 헌터의 살기를 받고 정말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는지 대답하는 목소리가 떨렸다.

똑바로 대답 안 하냐고 일갈이 날아올 법도 하건만, 유라는 흡족해하며 가 보라며 눈짓했다. 행여 마음이 바뀔세라 공무원은 곧바로 자리를 내뺐다.

그 모습을 매우 한심하게 바라보는 유라에게 한 헌터가 다가왔다.

“유라 선배. 적당히 하시지. 저건 일반인이라고요.”

“내가 뭐 때리기를 했냐, 뭐를 했냐? 그리고 그래서 더 질 나쁜 새끼들이야. 그거 믿고 대놓고 양아치 짓 하잖아.”

“뭐. 그건 그렇죠.”

하나둘씩 떠오르는 ‘양아치 짓’에 예의 그 헌터가 학을 뗐다.

개고생할 때는 어디 기어들어 가 있는지 보이지도 않다가 다 끝나고 나서야 뻔뻔하게 낯짝 들이미는 꼴에 뒷목을 잡기 일쑤였으니까.

헌터라면 누구나 공감할 이야기였다.

“야. 최민현.”

“왜요. 선배.”

무언가를 유심히 살펴보던 서유라가 대뜸 민현에게 물었다.

“저거 총 얼마 나올 거 같냐?”

“음. 사이클롭스 가죽은 가공이 여러 가지로 되니까, 마석까지 하고 이것저것 하면 정산료만 한 50억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

“좋아. 50억 이하로 부르면 다 뒤집어 엎으면 되겠군.”

“그 얘기였어요?!”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냐며 민현이 기함하자, 뭘 그러냐는 듯 유라가 코웃음을 쳤다.

“야. 한두 번 당하냐? 진짜 이번에도 아무 대응 안 하면 적어도 향후 5년은 헌터 업계 전체가 계속 후려쳐질걸? 슬슬 한번 엎어 줘야 다른 급 낮은 헌터들에게도 좋아.”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 그 격언을 몸소 실천하겠다는 선배님의 발언에 민현이 소리 없이 박수를 쳤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힘이 있어도 하지 않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능력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고.

새삼 저런 무데뽀가 민현은 조금 멋있고, 부럽기도 했다.

“잠깐, 근데 어차피 입금은 지한 선배한테 가서 유라 선배가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지 않아요?”

“보는 거야 쉽지. 유지한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얼마 받는지 신경도 안 써.”

“그거 불법이에요. 선배…….”

“걔가 신고 안 할 거니까 괜찮아.”

아니. 안 괜찮은데요…….

태클 걸고 싶은 마음이 만만이었지만, 날아올 일갈이 무서워 민현은 조용히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힘센 놈이 다지. 암.

그런 후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관심도 없는 듯한 매정한 선배가 슬슬 이 일의 원흉을 찾아 헤맸다.

“그나저나, 유지한 이 새끼는 또 어디 갔어?”

“지한 선배라면 아까 일 끝나자마자 민간인 살피러 갔어요. 맨 끝에 있던 일반인이었는데 많이 놀란 것 같아 보인다고.”

“또야? 가 봤자 ‘팬이에요’ 소리밖에 더 들어? 대체 왜 맨날 그러는지. 즐기는 것도 아니면서…….”

“워낙 착하시잖아요.”

“그건 병이야. 그냥. 병.”

그건 선배 생각이고요.

민현이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민현이 그러거나 말거나, 유지한 레이더를 가지고 있는 유라가 그새 근처에 있는 지한을 발견하고 재빨리 다가갔다.

“유지한! 또 시달렸어?”

또 이 와중에 팬이라고 방방 뜨는 인간 일일이 다 받아주고 사인해 주고 사진 찍어 주고 그랬냐고, 평소와 같이 캐물으며 유라는 지한을 살폈다.

사실 살피면서도 별로 기대는 안 했다. 또 어벙벙하게 헤실헤실 웃기만 하겠지.

“……유지한?”

하지만 이상하게도 오늘 놈의 태도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영혼이 가출하기라도 했는지 멍하니 다른 곳만을 바라보고 있는 녀석. 딴 세상에라도 가 있는 것 같은 태도에 유라가 지한을 툭툭 쳤다.

“야. 정신 차려.”

그 덕에 현실 세계로 돌아온 지한이 매우 어색한 얼굴로 ‘어, 어?’를 연발했다.

평소와는 매우 다른 반응에 유라가 놀란 얼굴로 지한을 닦달했다.

“왜. 무슨 일이 있었는데? 어? 누가 너한테 욕이라도 하든?”

만약 그랬다면 그게 누구든 당장 잡아 족칠 것 같은 험악한 얼굴로 유라가 존버를 탔다. 그런 유라를 보고 지한이 서둘러 변명했다.

“아,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그냥 뭐?”

“그냥 좀…… 아, 이걸 뭐라고…….”

수줍은 듯 붉어진 얼굴로 뭐라 설명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웅얼거리는 모습에, 이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유라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복잡한 것과 길게 고민하는 것을 세상에서 제일 귀찮아하는 서유라는, 나쁜 일을 당한 건 아닌 것 같으니 결국 그냥 넘기기로 했지만 말이다.

“별일 아니면 됐어. 그만 철수하자.”

“어, 어. 응.”

황급히 유라의 뒤를 따르며 지한은 남몰래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유라가 더 캐묻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 역시 그 평생 이런 일은 또 처음이었으니까.

사실 지한은 처음에 지호에게 다가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어떤 게이트가 터지든, 괴수를 없애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 사람들은 생기기 마련이고, 그들이 당황해하고 놀라는 건 당연했으니까.

처음에는 신경이 쓰여서 다가갔다 유라의 말처럼 당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게 되면서 지한도 이제는 그들에게 다가가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오늘 지호에게 다가갔던 건 그 눈 때문이었다.

자신을 보고 있으나 자신을 보지 않는 것 같은 눈. 마치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구분하기 싫은 것 같은 눈이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시선이 가고, 발이 움직였다.

왜, 자신을 보면서 그러고 있는지 알지 못해서.

그것이 끝끝내 신경이 쓰여서.

‘많이 놀라셨나 보네요. 괜찮으세요?’

막상 가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꺼낸 말은, 자신이 항상 하던 말이었다.

‘……!’

그래도 무난한 말이었는데, 어째서일까.

제가 말을 꺼내자마자 그녀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순간 정말 당황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볼품없는 말이어서 그렇지 그렇게 이상한 말도 아니었고, 아예 말이 안 되는 소리도 아니었는데 대체 왜 이런 얼굴을 보여 주는 것인지, 제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했다. 다른 데서는 몰라도 지금 이 상황에서, 그걸 티 내면 안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얘는 또 뭐 이리 쓸데없이 잘생겼어…….’

그 한마디에 모든 게 다 끝장났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머릿속에 알림이 떴다.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간만에 벌어진 이벤트에 박수갈채를 보내며 흡족해합니다.]

하등 도움 안 되는 계약성의 환호 소리였다.

안 그래도 혼란스러워 제정신을 유지하기 힘들건만 더 성가시게 만드는 소리에 이를 악물었다.

그때, 얼결에 저와 함께 그 소리를 들은 그녀의 어머니가 딸의 등을 시원하게 내리쳤다.

‘이년이 미쳤나! 죄송합니다, 헌터님. 뭐 해! 이 진상 얼른 치워!’

‘옙. 마나님!’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너무나 신속하게 벌어진 일이라 지한은 허망하게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잡을 틈도 없었다.

잡아 봤자 뭘 할 것도 아니었으면서.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께서 네놈은 원래 본투비 호구였다며 귀를 후비적거립니다.]

[이런 데서도 본투비 등신이라 그런 거 아니겠냐고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의견을 피력합니다.]

‘제발 조용히 해 주시길 요청드립니다.’

계약성의 심드렁한 비꼼에 지한은 계약을 해지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어차피 턱도 없는 소리란 거 스스로도 잘 알지만 그래도 생각이라도 해야 속이 좀 후련했다.

[그래서 네가 찌질 호구라며 당신의 계약성 ‘승리를 걷는 자’ 님이 화투를 치며 건성으로 답합니다.]

계약성의 2차 비꼼을 사뿐히 흘려들으며 지한은 생각을 전환했다.

정신을 차리니 조금 미련이 남았다.

“잘생긴 얼굴은 별로인 건가……?”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 분명했기에 더욱더.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지한은 제 계약성의 말처럼 한심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엄마의 손에 이끌려 주인공의 시야에서 벗어난 나는,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피난민들을 바라보았다.

정작 나도 그 피난민 중 한 명이었지만.

“넌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나오고 뭐 했어.”

어깨 위에 담요가 둘러졌다.

엄마가 잠옷 바람으로 튀어나온 내 차림새를 보고는 구호 대원에게서 얻어 온 것이었다.

말만 툴툴거리지, 엄마의 애틋한 모정을 느끼며 맏딸이 투정을 부렸다.

“엄마. 나 코코아.”

“……넌, 지금 그게 당기니.”

“돌아 버린 멘탈에는 당분.”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당당하게 피력하자, 엄마는 순순히 윤지우와 함께 코코아를 구하러 떠났다.

두 사람이 완벽히 눈에 보이지 않자,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손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어필은 오히려 다른 이들에게 이상하게 보이지 않을 말이었다.

이 소설 같은 상황에 유일하게 ‘제정신’인 나는 모로 보나 이질적인 티가 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정신 차려야 해. 윤지호.”

스스로에게 세뇌하듯 되새겼다.

차라리 미치는 게 편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계속 그럴 수는 없었으니까.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켰다. 일단 내가 살던 현실과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인해야 했다.

대체 누가, 무슨 목적으로, 어째서 나를 이 책 속으로 끌어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알아 봤자, 납득할 수 있을 리 없었으니까.

나는 진심으로, 그 진실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진실보다는 어떻게든 감당해야 하는 현재에 집중하며 나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자기야. 주말인데 불금 진짜 안 보낼 거임?」

「살려 줘……. 망할 채지연이 우릴 죽이려고 해…….」

「저 술독이랑 술을 왜 마시러 나와서……. 같이 죽자. 친구야.」

쭉쭉 이어지는 채팅창은 어제 제가 봤던 것과 모두 똑같았다. 한순간에 세상이 뒤집혔는데도,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생활은 크게 변함이 없었다.

아까 본 엄마와 윤지우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알던 그들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미쳤다. 진짜.”

아니, 그래야만 했다.

다르다고 생각조차 해서는 안 된다.

평범했던 세상에서 괴수가 나타나는 세상으로 바뀌어 버렸는데 제가 알고 있는 가족마저 달리 변해 연기처럼 사라진다면, 버틸 수 없을 테니까.

거짓이어도, 외면이어도, 제 가족은 그대로라고, 그리 믿어야 했다.

내가, 일단 이 세계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그리고 얄팍하고, 나약한 나를 위해서라도.

“아. 왜 이제 온 거야. 집 어쩔 거냐고. 집값 다 떨어지겠네.”

진정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이 세계가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보다 또렷하게 들려 왔다.

“목숨 건졌으면 됐지, 그게 문제냐.”

“그건 헌터면 당연히 해 줘야 하는 거고. 아 내 돈!”

“하긴…… 부은 돈이 얼마인데. 어떡하냐.”

“조금 더 일찍 오지.”

“다 부수고 나서야 오냐. 진짜.”

조소가 튀어나올 것만 같은 한심한 세계였다.

소설이라고 극대화를 시키긴 했겠지만, 어떻게 저렇게 이기적일 수 있을까. 저게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본성 중 하나라 더 구역질이 치밀었다.

“유지한 헌터!”

“이번 게이트 사태를 조금도 예견하지 못했습니까!”

“왜 출동이 늦었는지 해명해 주십시오!”

“게이트가 열린 지 40분 동안 대체 무얼 하셨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유지한은 축지법도, 텔레포트도 쓰지 못한다. 보통 인간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 한들 그뿐, 거리가 있다면 보통 사람들처럼 이동을 해야 한다.

그런데 대체 무엇을 바라는 건지 모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들이 유지한에게로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따지면 유지한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었을 이 구역 담당 헌터들은 대체 무엇이고,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따져야 한다면 그들에게 따져야 하지 않는가.

“……피해를 보신 분들께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이 화수분처럼 튀어나왔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익숙하게 그것들을 받아넘기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부조리가 넘치는 세계였다.

내가 읽던 <랭킹 1위에 관한 고찰> 속 유지한은 본투비 호구라 정부한테 등쳐 먹히긴 해도 항상 우월했고, 시련을 겪은 후에도 결국 성공하는 게 당연한 주인공이었다.

심지어 그가 어떻게 시민들을 구하는지 직접 본 뒤였다. 그런데 저런 말도 안 되는 대사가 아무 거리낌 없이 내뱉어지는 걸 듣고 있으려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게 정말 사람들이 그리도 열광하는 판타지 소설의 세계인지.

이 순간, 판타지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이 세계는 정말 당신들이 생각하는 판타지 세계인가. 재밌고 즐거운 것만 가득했던, 마냥 태평하게 부러워만 하던 그 세계가 맞는가.

적어도 저 꼴을 본 지금, 나는 모르겠다.

뚜르르. 뚝―

그래서 나는, 딱 한 번만. 나답지 않은 일을 해 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윤지호가 웬일이래?”」

“아저씨. 아직도 공무원이야?”

빚지는 건 싫으니까.

―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너보다 두 살 많다. 이 자식아. 그럼 철밥통이 아직도 철밥통이지. 뭘 하겠냐. 지금은 개고생하는 센터 공무원이지만.”」

“센터…… 아, 헌터 협회?”

「“지금도 개고생 중이다.”」

기억 속에 이 녀석은 분명 행정부 쪽이었던 것 같은데, 이런 건 현실과 달랐다.

역시 소설 속이니 현실과의 괴리는 있었다. 그래도 바뀌는 건 직업뿐인 거 같았다. 대화는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진행할 수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몹시 위안이 되었다.

“그럼 개고생하는 중에 하나만 더 하자.”

「“내 개고생을 왜 네가 더 추가해.”」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어쩌면 빚지고 싶지 않다는 건 핑계고, 그냥 이 거지 같은 상황에 거하게 엿을 먹이고 싶었을 뿐인지도 몰랐다.

저 거지 같은 소리에 분명 상처받았을 주인공에 대한 안쓰러움과 함께.

“지금 일어난 B급 게이트. 원티드가 처리했지만 분명 제값 안 치르지?”

「“……귀신이냐.”」

“제값을 치르면 우리나라 정부가 아니지. 이번에는 제값 치러 줘. 가끔은 이렇게 가끔 약을 주긴 해야 하잖아. 어차피.”

「“슬슬 약 칠 때라는 건 어떻게 안 거냐. 진짜.”」

“어느 정도 해 처먹었을 테고 그럼 분명 슬슬 말이 나왔을 테니까.”

진심이기도 했지만, 사실 소설에 나와 있는 것이었다.

정부는 S급인데도 가만히 당하기만 하는 호구 유지한을 보고 신나서 오지게 등쳐 먹기만 했다.

그러니 이렇게 찔러 주면 양심이 조금 찔리긴 할 터였다. 정확히는 위기감을 느끼는 거겠지만.

“안 그러면 내가 다 증거 뒤져서 언론에 흘린다. 나 한다면 해. 막는다고 해도 이번에는 줄 수밖에 없게 만들어 줄 수도 있어.”

그 정도 근성은 돼. 나. 알지?

「“야. 그래도 그건…….”」

소소하게 협박이 들어가도 명백히 망설이는 태도에 나는 큰마음 먹고 히든카드를 꺼내었다.

“……정하나한테 찌른다? 우리 정하나 차는 건 정말 칼 같아요. 잘 알죠?”

「“야. 이 X……! 네가, 이럴…….”」

“이야. 어휘 능력 보니 공무원 짬밥이 어디 가지 않네.”

히든카드를 꺼내자마자 곧바로 들려오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비속어의 향연에 유연하게 빈정거리자, 결국 항복선언이 들려왔다.

「“……다음에는 이딴 부탁하지 마라.”」

“그럼. 당연하지. 이번만이야. 나 구해 줬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 할 거 같아서.”

「“뭐? 아, 이번 게이트 너희 집 근처였지.”」

“그런고로. 잘 부탁해. 나중에 밥 살게. 엄마 온다. 끊는다.”

「“오냐. 거하게 쏠 준비해라.”」

뚝―

서둘러 폰을 내리자마자, 엄마가 내게 코코아를 내밀었다.

“자. 코코아.”

“오. 역시. 울 엄마. 능력자라니까.”

따뜻한 코코아가 위를 적시니 몸에 힘이 쭉 풀렸다. 역시 당분은 만능이었다.

“하여간. 나이가 몇인데.”

“네 손에 들린 코코아는 버리고 얘기해 줄래?”

“난 동생.”

“응. 그래 봤자 한 살 차이 동생.”

“……엄마!”

언제나와 같은 대화에 조금 많이, 안심이 되었다. 얼마나 달라졌든, 이 세계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다는 확인을 받은 것만 같아서.

* * *

집에 들어오자마자 잊고 있던 흑역사가 떠오르신 듯 어머니가 속 시원히 속내를 털어놓으셨다.

“내가 저년 때문에 쪽팔려서 어디 살겠나!”

“어머니. 일단 진정하시고…….”

“진정하게 생겼어?! 잘생겼으면 땡큐지! 뭐 그딴 소릴 하고 있어, 이 기지배는!!”

“……그 문제였던 거야?”

어머니의 얼굴 신봉 선언에 동생의 눈이 짜게 식어가는 와중에도 나는 그런 동생을 구출해 주지 못했다. 그럴 여력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실 이 비현실적인 현실을 인정한다고 해도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답이 있는 게 더 이상했다.

걸고 넘어지고 싶은 게 너무너무 많았다.

소설 속에 들어온 것도 황당한데, 또 우리 집도 그대로고 우리 가족도 그대로야. 저렇게 둘이 말하는 거 보면 알맹이도 똑같아. 근데 지식만 달라.

평행 세계냐고.

“……아오.”

이 와중에 깨알 같은 소설 지식 자랑하는 내가 싫다…….

이런 상태이니 동생 실드는 물론, 엄마를 케어할 수 있을 턱이 없다.

동생에게는 매우 미안하지만, 엄마는 동생에게 쿨하게 넘기고 터벅터벅 방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당연하지! 잘난 얼굴이 뭐가 아쉬워서―!”

“엄마. 아빠도 그걸로 고른 거 아니지?”

“그걸로 안 골라서 한이다! 왜!”

“아니…….”

탁―

어머니의 충격 고백에 멘탈이 터진 남동생을 뒤로하고 문을 닫으니 소음이 한풀 꺾였다.

드디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나는 것도 없어 더 정리가 안 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일단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책상 구석에서 종이를 찾아 펼치고 펜을 들었다.

<1. 여기는 헌터물처럼 괴수가 나타나 사람을 잡아먹는다.

2. 여기는 내가 어제 보고 잠들었던 <랭킹 1위에 관한 고찰> 속이다.

(근거 1: 남자 주인공, 유지한이 있다.)

(근거 2: 헌터가 있고 랭킹이 매겨진다.)

3.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소설 속에 들어와 있다.

4. 배경이 서울이라 그런지 우리 가족 역시 그대로 있다. 친구나 인간관계도 그대로이다.

5. 나만 이상하다.

6. 돌아갈 방법은 모르니 일단 살아가야 한다.

결론: 답이 없다.>

절망적이었다.

결국 뭐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평생 오늘처럼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이곳이 소설 속이란 것만 알고 있는 채로.

“……진짜 노답이다.”

가능만 하다면 누군가에게 내 머리를 내리쳐 달라고 부탁해서라도 그 사실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싶었다.

아. 나더러 대체 어떻게 살라고.

눈앞이 깜깜했다.

정말 울고 싶었지만, 너무나 충격적인 걸 연이어 겪었더니 이제 눈물도 안 나왔다.

한참을 베개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 문득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회의감이 들었다.

어차피 며칠 뒤 상사 놈 보며 머리 빠지는 건 아마 똑같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일상은 원래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며칠 뒤의 자신이 보면 미쳤다 할 생각이었지만, 그렇게 합리화를 하니 기운이 솟아났다.

해서, 정확히 몇 시간 뒤면 박살 날 계획을 야심차게 세웠다. 알차다고 생각하며 야무지게.

<1. 남주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마주치지 않는다.

마주치는 것이 더 힘든 국보급 먼치킨 남주지만 만약의 우연이 생긴다 한들 없는 존재감을 더 없게 만들어 존재감을 피력하지 않는다.

2. 민간인으로 살면 안전 구역에 있어서 괴수 마주칠 일도 매우 드무니 안전 구역에서 절대 나가지 않는다.

약간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3. 헌터 자체와 엮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위험할 일도 없고, 위험한 일에 엮일 일도 없다.>

좋아. 완벽해.

정말 완벽한 계획이었다. 뭐 하나 힘든 것이 없다는 점이 가장 만족스러웠다.

자고로 계획이란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내용이어야 완벽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정말 만점이었다. 2번만 빼면 다 내가 하려고 용을 써도 하기 힘든 일들이었으니 난이도 최하였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계획을 짠 자신을 찬양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침대에 몸을 누였다.

자신의 일상은 평소와 조금도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믿으며.

“……뭐라고요?”

다시 생각해 보면, 그냥 자기 위로였던 것 같다.

* * *

당연히 몰랐는데, 외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더라도 게이트 반경 500m 근방에 있었다면 법적으로는 일주일 동안 강제 자가격리를 실시해야만 했다.

외적인 부상이 없더라도 어떤 정신적인 피해를 입었을지 모르기 때문에 정해진 법이라 한다.

처음 들었을 땐 좀 놀랐지만, 새삼 법이 아예 쓸모없진 않구나. 라는 걸 느꼈다.

“아아. 최고야.”

이런 꿀맛 같은 휴식이라니.

관계되지도 않은 거, 이런 휴식을 취할 수 있다면 이 세계도 나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행복하게 늘어지는 나를 엄마가 매우 한심하단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격리라는 휴식을 받는 대신 매일매일 병원 가서 오늘은 뭐 했고, 무슨 징조가 없었느니, 이런 짜증 나는 일들을 해야 하긴 했다. 그래서인지 평소 같으면 벌써 엄마의 성화가 날아들었을 텐데 이번에는 한숨을 내쉬면서도 눈감아주셨다.

덕분에 우리 남매는 간만에 제대로 늘어지는 나날을 보냈다.

문제는 빌어먹을 놈의 후유증. 이변이었다.

격리 때문에 다 커서 징그러운 남동생과 함께 잠을 자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났지만, 우리는 커서도 종종 투닥거리다 기절해서 같이 자는 날이 꽤 있었기에 투덜거리면서도 익숙하게 잠을 청했다.

그날도 그럴 예정이었다.

“으, 윽…….”

새벽에 화장실 가려고 반쯤 눈을 뜨고 동생을 밟고 지나가려는데, 동생 놈이 미친 듯이 끙끙 대지만 않았다면.

“……뭐야. 왜 그래?”

당황했다.

함께 자라며 수없이 밟았지만 그때마다 왜 밟냐고 난리를 쳤으면 쳤지,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진짜 어디가 아픈 건가? 설마 내가 밟아서 아픈 거야? 진짜, 레알로?

만약 진짜 내가 어디 잘못 밟아서 아픈 거면 나는 그냥 죽는 거다.

엄마의 거센 폭풍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기에 황급히 녀석을 살폈다.

“야. 윤지우. 뭐야. 진짜 아파?”

황급히 셔츠를 들쳐 내가 밟았던 곳부터 살폈다. 다행히 세게 밟지 않아서 아무런 자국도 없었다.

십년감수했…… 아니, 이게 아니고.

외상은 아닌 것 같고 그럼 얘가 왜 이러는 거지? 그동안 감기 한 번 걸려 본 적 없는 녀석이 이러니 꼴에 동생이라고 두려움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잘못될까 봐.

“야. 야! 너 왜 이래―! 일단 정신 좀 차려봐! 야!”

“……윽, 시끄…… 나, 아파…… 누…….”

“뭐? 윤지우. 윤지우! 야!”

정신이 든 것 같긴 한데 극심한 고통으로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엄습하는 두려움에 열심히 윤지우를 깨우는데, 갑자기 윤지우의 몸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

연한 초록색의 그 빛은 딱 봐도 ‘나 특별합니다.’를 외치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이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책에서도 봤으니까.

각성의 징조. 생과 사의 기로.

“엄마아―!!”

깨달음과 동시에 발작적으로 외쳤다.

우당탕탕―

밤부터는 목이 잠겨, 넘어져도 비명 한 번 안 지르는 딸의 외침에 부모님들이 놀라 벌떡 일어나 부리나케 달려오셨다.

“엄마―!! 아빠―!! 윤지우, 윤지우가―!!!”

“왜! 무슨……!”

“…차! 차 키! 윤지호, 시동 걸 동안 꼼짝 말고 동생 지키고 있어!”

“그런 소리하기 전에 얼른 시동부터 걸어요! 아니, 내가 할 테니까 당신 애 업고 내려와요! 빨리.”

집안이 난리 법석이었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애가 이런 상태인데 제정신일 리가.

달밤에 아파트에서 그 난리를 치자 주민들이 다 뛰쳐나오기까지 했다.

그래도 다 착한 분들이셔서 차도 대신 찾아주고, 가까운 병원에 전화까지 해 주셨다. 패닉 상태여서 전화까진 할 생각도 못 했었는데 정말 다행이었다.

“의사―! 여기요!!”

“연락하신 분이시죠? 이쪽이에요!!”

증상이 증상인지라 미리 전화를 받은 병원에선 모든 걸 준비해 놓고 있었다.

의료진들이 빠르게 진통제를 놓고 사지를 붕대로 압박했다.

왜 저렇게까지 하나 싶었는데, 곧이어 윤지우가 진통제를 맞았음에도 고통에 못 이겨 날뛰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악―!”

“보호자 분들은 나가 계세요! 간호사!”

“네!!”

덜컥 겁이 났다.

잘못되면 어쩌지.

그제야 정말로 다른 세계에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런 세계가 아니었으면 저놈이 저럴 일도 없었는데. 평생을 강골로 살아서 병원 문턱도 밟아 보기 힘든 놈으로, 그대로 살았을 텐데.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부모님과 다르게 독하게 무교를 외치며 평생 신이라고는 찾지도 않았는데, 처음으로 신을 찾으며 간절히 빌었다.

아직 하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 어린 녀석이라고.

살아야 하는 녀석이라고.

“헌터 협회입니다!”

“센터! 너무 늦었잖아요! 뭐 하는 겁니까?! 이런 기회를 날리겠단 거에요?!!”

“지금 그런 말 하고 있을 때입니까?! 그건 나중에 하고, 이쪽입니다!!”

무슨 힘 따위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고.

아무 일 없기만 하면 된다고.

“마력 진정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잠 귀신이 붙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무섭도록 잠이 많은 나였다.

한데, 그 수식어가 무색하게도 잠 따윈 하나도 오지 않았다.

보다 못한 엄마가 옆에서 나더러 조금이라도 자라고 했지만, 잠들지 못했다.

그럴 수가 없었다.

“하아…….”

날이 밝고 모두가 녹초가 되어 쓰러지자, 윤지우의 상태가 진정되었다.

녹초가 된 이들이, 혹시나 하는, 희망에 휩싸여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 상기된 얼굴로 윤지우를 바라보았다.

그 기대 어린 시선 속에서, 비로소 눈을 뜬 윤지우는…….

“어? 윤지호. 너 얼굴이 왜 그래?”

“……윤지우.”

“뭐야. 다들 왜…… 헐? 이게 다 뭐야!!”

헌터가 되어 있었다.

* * *

“……뭐라고?”

윤지우가 눈을 뜨자, 그제야 비로소 안정되기 시작했던 마음이 다시 널을 뛰었다.

그건 당사자도 마찬가지인 듯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제가 헌터요……?”

“네. 어제의 증상은 각성에 따른 후유증이셨습니다. 주변에 누님이 계셔서 천만다행이셨죠. 마력이 보통 수준을 넘어섰기에 도움이 없다면 위험할 뻔하셨습니다.”

“보통 수준을 넘어요? 그럼…….”

“예. 윤지우 군은 무려 A급으로 각성하셨습니다! 차후 성장하시면 S급도 충분히 노려 볼 만합니다. 대한민국에 또 이런 기적이 발생하다니. 윤지우 군은 장차 대한민국의 보배이자 엄청난 군력이 되실 겁니다!”

흥분한 나머지 필터링이 안 됐던 건지, 매우 거슬리는 말이 여럿 들려왔다. 하지만, 엄청난 소식에 다들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우리 아들이, 그러니까…… 헌터가 되었단 말입니까?”

“예! 그것도 무려 세계에서도 30% 안에 드는 최상위 각성자이십니다―!”

“지, 진짜요? 내가 헌터?! 와!!!”

윤지우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진심으로 기쁜 듯한 얼굴이었다.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는 어느 계열이에요?!”

“일단 탱커 계열로 측정이 되지만, 이건 수련에 따라 또 달라지기 때문에 센터에서 교육을 받으면 정확히 판명되실 겁니다.”

“와 대박!!”

얼마 만인지 모를 A급 각성에 윤지우를 돌봤던 의료진들도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가족들도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에 당황했지만 매우 큰 일이었기에 윤지우에게 축하한단 말을 건넸다.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나는 도저히, 그 사이에 낄 수가 없었다.

“이 능력, 못 없애나요?”

난데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찬물을 쏟자, 모두가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입니까. 귀한 각성입니다. 그런데 그걸…….”

“귀하고 나발이고, 그건 당신들한테나 귀한 거지. 이거 못 없애냐고. 하다못해 봉인을 시키거나. 그런 거 없냐고 묻잖아.”

말투는 짧아지고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항상 밝게 떽떽거리거나, 투덜거리는 모습만 보았던 가족들이 차가운 내 모습에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안중에도 없었지만.

“누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왜 그래.”

“그래. 지호야. 축하해도 모자랄 판에.”

“윤지호.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얘가 진짜…….”

오히려 가족들이 당황하는 게 더 어이없었다.

남들 입장에서는 축하해 주는 게 맞다.

‘남들’은.

“아니, 나만 이래? 물론 다른 사람들은 축하해 줄 수도 있겠지만 난 아니야! 이게 어떻게 축하를 할 일이야?”

“윤지호!!”

엄마가 호통을 쳤다. 하지만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이 차가워졌다.

저 사람은 정말…… 내가 아는, 우리 엄마가 맞는가.

머릿속에서 피어오르려는 의문을 재빨리 묻었다. 형태 없는 의문을 꺼내 드는 순간, 돌이킬 수 없어질 테니까.

평소와 확실히 다른 내 모습에 아빠가 서둘러 엄마를 진정시켰다. 그 사이에서 윤지우가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너스레를 떨어 왔다.

“뭐야. 누나. 안 기뻐? 나 이제 돈 많이 벌 거야. 다 호강시켜 줄 수 있다고.”

“그 호강을 네 목숨 팔아 하는 건데 내가 퍽이나 기뻐하겠다! 이 머저리야―!”

“……!”

놀람으로 가득 찬 시선이 쏟아졌다.

일단 진정하고 차분하게, 모두가 당황하지 않게 말을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감정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잘난 헌터 동생이 돈도 많이 벌고 명예도 쌓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고? 그딴 게 뭐가 중요해! 난 그런 거보다 너 안 죽는 게, 너 안 다치는 게 더 중요해!!”

“……!”

“평생 아파 본 적도 없는 놈이 허구한 날 다쳐서 병원에서 사는 걸 볼 바에야 집에서 빈둥거리는 널 보는 게 백배 나아!”

“……누나.”

“누가 너더러 목숨 팔아 돈 벌어 오래? 내가 언제 그런 걸 바랐어! 잘난 헌터 동생 필요 없어. 내가 바라는 건 그냥 평범하게 투덜대기도 하고 적당히 벌고 평범하게 오래 사는 동생이야! 그러니까, 이거 못 버리냐고! 난 얘 헌터 안 시킬 거라고―!!”

소설일 때는 참 편하고 재밌게 봤다.

내 일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이 다쳐도 아무렇지 않았고, 시련이 오면 성장의 새로운 발판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남 일이고, 실제가 아니기에 너무나 재밌게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현실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실이 소설처럼 편하고 즐거울 리 없었다.

소설에 이름도 없어 그냥 적당히 스러져 갈 엑스트라 헌터 따위.

필요 없었다.

어차피 같은 엑스트라라면 차라리 위험하지도 않고, 헌터가 아닌, 평범하게 나와 같이 투닥거리며 살아갈 엑스트라가 백배 천배 나았다.

“뭐든 어떻게 못 하냐고! 이거 못 버려?! 아직 계약성 없으니까 당장 등록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러니까 그전에 얼른, 뭐든 못 하냐고!”

나는 진심으로……

“누나.”

“지호야…….”

나보다 먼저 갈 동생 따위, 원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보배든, 잔뜩 이용해 먹을 군력에 내 동생은 없으니까 어떻게든 해 보라고―!!”

* * *

한편, 그날 밤. 유지한도 같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정확히는 늘 하는 검사와, 지나친 게이트 클리어로 인해 쌓인 피로 때문에 링거 맞고 누워 있는 것이었지만.

다른 헌터도 아니고 그 대단하다던 한국 랭킹 1위가 체력을 회복할 새도 없이 임무에 나가, 체력의 한계로 허구한 날 링거나 맞고 있다니.

“아오.”

믿고 싶지도 않은 현실에 서유라는 골이 울렸다.

자신의 앞에서 당당하게 뒷목을 잡는 유라의 모습에 지한은 양심에 찔리기는 하는지 유라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유라는 더 혈압이 오르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유라의 얼굴을 본 민현이 황급히 유라를 달랬다.

“선배. 그래도 이번에는 한동안 임무 배정 안 해 준대요.”

“그 ‘한동안’을 넌 아직도 믿니?”

“그래도 사정 봐준다는 게 어디에요. 애초에 이번엔 강제도 아니고, 지한 선배가 자처해서 나간 거잖아요.”

“이 자식 성격 알고 당당하게 명령조로 나오는데 그게 어떻게 강제가 아니야?!”

눈 가리고 아웅도 유분수지!

반박할 수 없는 말에 두 남자가 합죽이가 됐다.

그때, 강력한 마력 파동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오, 이건 꽤나 거물인데요?”

“각성 같은데? 간만에 물건 하나 건졌다고 센터에서 난리겠네.”

“A급 이상 같지?”

“이 정도면 아닌 게 더 이상하지. 지금 각성 중인 거 같은데, 걱정이네. 잘 버텨야 할 텐데.”

못 버티면 죽음뿐이다.

경험자로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이었기에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센터 사람들 지금 총출동했네요.”

“확정이네. 안 죽을 거 같으니 모인 걸 테니까.”

센터가 얼마나 이익에 눈이 먼 집단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 말에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보나 마나 눈도장 겸 빠르게 낚아채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온 걸 테다.

“저 정도면 각성은 아침때면 끝나겠네. 그때 간만에 루키 구경이나 좀 하러 가자고.”

“영입하시게요?”

“이 정도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뭐 본인 선택이지.”

길드장이 이런 놈인 데다, 이름 따라 간다고 이들이 속한 길드 ‘원티드’는 소수정예에 다들 개성이 넘쳐, 딱히 영입을 발로 뛰는 편이 아니었다.

덕분에 오고 싶다는 놈은 천지지만 원티드는 창립 멤버들이 아직도 길드원의 주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 길드 안 들어오더라도 어차피 자주 볼 얼굴인데 얼굴은 보고 가면 좋겠지. 갈 거지?”

“응.”

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한도 딱히 그를 영입하고자, 하는 그런 건 아니지만, 각성 중 이정도 마력을 내뿜는 이가 누구인지 순수하게 궁금하긴 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 병원의 분위기가 달라졌을 때, 모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성공했구나.

“일어나기도 했나 보네. 가 보자.”

축하 인사도 건넬 겸 그들은 가벼운 마음으로 루키를 환영하러 갔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과 다른 풍경에 매우 당황했다.

매우 화기애애하면서도 기분 나쁘게 기뻐할 센터 직원들과, 자기가 영입하겠노라 탐욕에 득실거리는 헤드헌터들의 풍경을 예상했다.

A급 헌터는 돈이 되고, 힘이 되니까.

예상대로 모일 만한 놈들은 다 모여 있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매우 묘했다.

“뭐야. 왜 이래?”

“그러게요. 평소랑 많이 다른데요……?”

“다들 쥐약이라도 처먹은 건 아닐 테고.”

뭐지?

S급들답게 고도로 발달된 동체 시력으로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정말 능력 낭비나 다름없었다.

그중 랭킹 1위가 가장 먼저 원인을 찾아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랭킹 1위는 원인을 찾자마자 두 눈을 의심했다.

요 며칠 동안 제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여자였다. 다시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해, 괜히 더 답지 않은 소망을 품게 했던 사람이었다.

대체, 왜 여기 있는 거지?

설마…… 이 사람이 각성한 건가?

혼란스러운 마음에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했다.

헌터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성차별을 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이 세계에서는 여러 특성상, 여성으로서는 특히나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각성자면 앞으로 마주칠 일이 많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러면 안 되는데도, 조금 가슴이 뛰었다. 이런 자신이 너무나 낯설었다.

제멋대로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다른 이들보다 먼저 원인을 찾아냈으면서 사태 파악이 한발 늦었다.

“헐. 대박.”

가뭄에 콩 나듯 드문 유라의 진심 어린 감탄에 그제야 지한이 정신을 차렸다.

곧바로, 아까와 다른 의미로 굳어 버리고 말았지만.

“그 호강을 네 목숨 팔아 하는 건데 내가 퍽이나 기뻐하겠다! 이 머저리야―!”

목소리가 어찌나 명확한지, 정확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귀에 꽂혔다.

장내의 모든 헌터들이 돌이 된 듯, 얼어붙었다.

당연했다.

“잘난 헌터 동생이 돈도 많이 벌고 명예도 쌓고, 남들이 다 부러워하고? 그딴 게 뭐가 중요해! 난 그런 거보다 너 안 죽는 게, 너 안 다치는 게 더 중요해!”

모든 헌터가, 듣고 싶어 했지만 들을 수 없던 말이 들렸으니까.

아무리 이 직업이 명예롭고, 많은 부를 벌 수 있다 해도, 목숨 걸고 하는 일이다. 목숨을 대가로 버는 일. 얼마나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한들 결코 많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많은 돈을 버는 건 사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

때문에 헌터들은 그들보다 더 우월한 스스로를 과시하며 오만하고 꼿꼿하게 생활하지만, 그 어떤 헌터라도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늘 바라 왔다.

저런 말을 들어 보기를.

헌터가 각광 받는 직업이 된 지금.

모든 어린아이의 장래 희망이 헌터가 된 시대에서, 정작 당사자들은 부모에게조차 듣지 못하는 말을.

해서, 예전에 포기하고, 아무도 감히, 바라지 못했던 말이었는데.

“이거 못 버리냐고! 난 얘 헌터 안 시킬 거라고―!!”

가슴속에서 무언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지한은 목 위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감정을 꾹― 삼켜 내었다.

그렇지 않으면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간만에 탄생한 A급에 눈도장이라도 찍으러 뛰쳐 왔던 다른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그들은 잇속 차리는 데 급급한, 탐욕에 찌든 헌터가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었을 뿐.

모두가 감정을 참아 내기 바쁜 와중에 유라가 조금 붉어진 눈을 하며 입을 열었다.

“……부럽네. 저 친구.”

“그러게요. 엄청 질투 나네요. 대성하겠어요.”

“대성까지야.”

“저런 가족이 있는데 안 강해지면 이상한 거죠. 아시잖아요. 헌터들 특성.”

“그건 그렇지.”

각성한 이상, 헌터가 되는 건 기정사실이다. 몸 어디 하나가 불구가 되지 않는 이상, 국가는 절대로 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저 누나가 저리 날뛴다 한들 그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저 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강해지는 것뿐이다.

헌터는 목표가 있을수록 강해진다.

많이 투닥거리긴 해도 딱 봐도 우애가 좋아 보이는 남매다. 자기 누나가 저러는데, 누나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는 강해질 것이다.

반드시.

“우리 아빠도 좀 저렇게 해 줬으면 좋았으련만…….”

“저 누님이 독특한 거예요. 요즘 세상에. 헌터가 되면 다들 만세삼창 부르잖아요. 가문의 경사라고.”

“돼 보면, 뭐 좋은 거라고 그러나 싶은데 말이야.”

옆에서 열심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도 지한의 시선은 지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누군가 가슴을 세게 후려친 것 같았다.

아니, 가슴속에서 홍수처럼 무언가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한껏 울음을 쏟아 내고 싶을 정도로.

“……지한아?”

유지한은 사생아였다. 재벌가 사생아.

덕분에 돈은 부족해 본 적이 없었지만 애정 같은 건 모르고 자랐다.

부모는 남보다 못한 사람이었고, 형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안은 삭막해 가족이라 부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집안이 그렇다 보니, 친구도 제대로 사귀지 못했다.

해서, 누군가에게 받는 애정같은 건, 옛날에 포기했다. 받아 본 적 없었으니 포기하는 건 쉬웠다.

물론 바라 본 적은 있었다. 수도 없이 많았다. 그래서 더 타인에게 과하게 상냥하게 구는 건지도 몰랐다.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누군가는 자신에게 사랑을 주었으면 해서.

유라는 늘 호구라 뭐라고 하지만, 사실 그렇게 순수한 마음은 아니었다. 가끔은 자신도 스스로의 행동이 제 살 깎아 먹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멈출 수 없었다.

그냥 자신의 이기심이었을 뿐이다. 무슨 짓을 해서든 제 공허한 속을 애정으로 채워 보겠다는 이기심. 잘 포장된 가면에 불과했다.

그걸 오늘에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진정으로 갖고 싶었던 건…….

“대한민국의 보배든, 잔뜩 이용해 먹을 군력에 내 동생은 없으니까 어떻게든 해 보라고―!!”

바로 저런 애정이었다는 걸.

뼈에 사무칠 만큼, 제 모든 걸 바쳐도 좋을 만큼…… 너무나 원했다고.

뒤늦게야 지한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이들이 하나둘씩 시선을 던졌지만, 지한은 지호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한참을.

* * *

“……진정됐어?”

“넌 싸물어.”

“넵.”

간만에 보는 누님의 포스에 적응이 안 된 윤지우가 쪼그라들었다.

부모님도 본 적이 없어 모르지만, 윤지우는 알고 있었다.

자신의 물렁한 누나. 윤지호는 기본적으로 물렁하고 덜렁거리는 노답 둔탱이었지만, 한번 꼭지가 돌면 다른 사람으로 돌변했다.

그 빈도가 극도로 적어, 3년에 한 번 볼까 말까였기에 아는 사람이 거의 아무도 없었지만.

윤지호는 기본적으로 자기 일에 진짜로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짜증은 낼지언정.

윤지우는 지금까지 윤지호가 진심으로 화내는 걸 딱 세 번 봤다.

윤지호와 같이 다니던 친구가 뒤에서 윤지호를 욕하고 이간질하다 뻔뻔하게 자기가 뭘 잘못했냐고 응수했을 때.

자신이 뒷골목 양아치들하고 놀러 다니며 담배를 배우고 패싸움을 하다 걸렸을 때.

그리고 마지막은 바로 지금이었다.

그 정도로 보기 힘든 상황이니, 지우는 자동으로 몸을 움츠렸다. 이럴 때는 심기를 건드리지 않는 게 최고였다. 죽도록 얻어터지고 나서 얻은 교훈이었다.

“……X발.”

애처로운 동생은 보이지도 않는 것인지 지호가 나지막이 육두문자를 읊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노답의 끝을 달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이 세계에 끌려 온 것만으로도 평생 먹을 엿은 차고 넘치게 먹은 것 같은데, 연달아 이따위로 빅엿을 더 던져 주다니. 신이 나랑 원수라도 지지 않은 이상, 이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거였다.

평화롭게 살겠다 다짐했다.

소설 속으로 들어왔다 해도 가족들은 그대로고, 나 역시도 변한 것이 없어 당연할 것이라 여겼다.

안이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뭐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거면 그럴 만한 거리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남들은 답 없는 계획들이라 여길지 모르지만, 제가 어제 짠 계획만 해도 사실 아주 신빙성이 넘치는 것들뿐이었다.

혹시나 하는, 기적과도 같은 희한한 불운만 없다면 얼마든지, 자신이 갑자기 미쳐 그 짓을 하겠다고 지랄을 해도 이루기 힘든, 정말 지극히 평범한 것들뿐이었다.

심지어 그 계획을 짠 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다. 자신을 엿 먹이기 위해 누가 일부러 짜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후우. 야.”

“어, 어?!”

“내놔.”

“뭐. 뭘?”

“상태 창!”

이 상황에서 내가 너한테 내놓으라고 할 게 그거밖에 뭐가 더 있어!!

동생한테 화낼 일이 아니란 건 충분히 잘 알고 있었지만, 사태가 사태다 보니 그러지 않으려 해도 절로 호통이 나갔다.

동생 놈이 바짝 쫄아서 재빨리 설정을 비공개에서 공개로 변경하고 자신의 상태 창을 상납했다.

[상태 창]

[이름: 윤지우

이명: 미정.

소속: 대한민국

타이틀: 없음.

성향: 용맹하고 우직한 조력자.

계약성: 없음.

등급: A

국내 랭킹 56위.

월드 랭킹 권외.

특성: 믿음의 방패(A), 불굴의 용기(S), 망설임 없는 검(B), 지키기 위한 신념(S)……]

“가지가지 한다, 진짜.”

각성한 지 얼마나 됐다고, 얻은 스킬부터 참 저 같은 거만 모아 놨다.

이 스킬로 탱커를 안 하면 그냥 미친 거였다. 거기다 성향조차 조력자라니 아주 완벽했다. 주인공 도와주고 앞에서 몸빵하다 재수 없으면 뒈지는 포지션으로 아주 딱이었다.

박수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역시. 엿 같은 내 동생. 마지막까지 이렇게 나한테 빅엿을 아끼지 않는구나.

“아오……. 이걸 확―!”

“왜에! 나 지킬 수 있는 거 많고 좋기만 하구만!”

“이게 진짜! 왕년에 폐인처럼 게임하던 거 다 어디 갔어!? 그 많은 현판은 대체 왜 읽었냐?!”

안 그래도 위험하건만, 멍청한 동생이 혈압을 올렸다.

뒷목을 잡자, 철없는 동생 놈이 뚱한 얼굴로 볼을 부풀렸다.

그 한심한 꼴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 감이 안 잡혔다. 제대로 뭐 하나 공격할 거리 없고 방어 스킬만 줄줄이 있는데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다니.

물론 몸빵을 해도 계속 버틸 수 있을 만큼 짱짱한 방어력이 있으면 말도 안 꺼냈다. 하지만,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는가. 계속 그렇게 버틴다 해도 언젠가는 한계가 오기 마련이다.

인간은 욕심쟁이고, 또 자만에 빠지기 쉬우며, 한치의 앞을 잊어버리니까.

“……후우.”

차라리 지호는 이왕 각성했다면 지우가 보조 스킬을 터득했으면 했다.

그것도 아니면 테이밍이라든가.

본인이 앞으로 나서서 싸우지 않아도 되는, 다치지 않는, 그런 스킬을 바랐다.

실상은 정반대였지만.

“인생 왜 이러냐. 진짜.”

뭐 하나 쉬운 게 하나도 없어.

겜판의 소재가 거의 똑같다 보니, 스토리 과정도 비슷해, 그나마 소재의 다양성이 있던 헌터물로 갈아탄 과거의 자신을 진심으로 저주했다.

겜판이었으면 게임이나 해서 돈 벌고, 안 위험하고. 딱인데.

망할 신이시여. 기왕 넣어 줄 거면 현판이 아니라, 겜판에 넣어 주셨어야죠.

“……누나.”

“왜.”

“그, 일단 자는 게 어때? 누나 내일부터 다시 출근이잖아.”

“…….”

울고 싶다. 진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