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점화 (22/22)

점화

하루하루 시간은 바쁘게 흘러가 어느새 문제의 그 날이 코앞으로 성큼 도래해 있었다. 성대한 연회를 앞두고 신전은 일찍이 붐비기 시작하였다. 각지에서 찾아든 다종족의 귀족들은 얼마 뒤에 있을 공주의 탄생연을 위해 바리바리 선물을 싸 들고 와선 저마다 방 한 칸씩을 차지했고, 그것이 마땅찮은 사람들은 사원 밖에서라도 투숙할 공간을 찾았다.

연회 장소로 쓰일 공간을 포함하여 신전에서 제공하는 모든 것들은 전부 염황 부부의 어마어마한 후원을 대가로 얻어지는 것들이었다. 신전을 찾은 이들이 개인적으로 바치는 헌금의 양도 상당했으니, 그것이 귀족 행사에 문을 활짝 열어 주는 까닭이었다.

그러던 중에 나니아는 뜻밖의 반가운 손님들을 만났다. 정원을 누비는 한 무리의 리자드 암컷들이 그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티에트 님!”

그들이 누군지 알아보자마자, 나니아는 활짝 웃으며 총총총 달려갔다. 예상치 못한 재회가 놀랍기는 리자드도 마찬가지였다.

“…또 이렇게 만나는군.”

그녀의 날카로운 눈이 아주 잠깐 굳었다가 이내 차가운 인상을 무너뜨리고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터라 반가운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빙해룡의 차녀 곁에는 그녀의 위장 처녀 파티에 동행중이던 리자드 귀족 영애들도 가득했다. 개중에는 초청장을 받지 않았지만, 초대 손님의 지인 자격으로 알음알음 따라온 이들도 많았다. 마침 탈렘을 지나던 중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잖아도 놀기를 좋아하던 여자들이니, 이런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몇몇 사람들이 못 보던 수컷 리자드를 옆구리에 끼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알고 보니 그들은 아내의 호출에 몇 날 며칠을 쉬지 않고 달려온 남편들이었다.

“정조대 풀어 준다고 했더니 한걸음에 달려왔잖아.”

누군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속닥거렸다. 상당히 경박한 사연이었다.

홀몸인 암컷들에게도 사연은 있었다. 우리 남편은 시일을 맞출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불평하는 여자도 있었고, 그러게 자기처럼 아예 부르지 말았어야 했다고 말하는 여자도 있었다. 또는 아예 결혼하지 않은 처녀도 있었으니, 파트너가 없는 미혼의 리자드는 대체로 이런 마음가짐이었다.

“오랜만에 비싼 남자 먹어 볼 생각에 설렌다, 얘.”

그녀들은 괜찮은 수컷이 하나 낚이면 슬쩍 빠져나갈 생각부터 했다. 기혼자들은, 특히 남편을 대동한 암컷들은 뒤늦게 부러운 기색을 드러냈다.

“러브 체어 같은 건 준비된 거야?”

누군가 장난스럽게 묻자, 그녀의 남편이 말리듯이 말했다.

“아직 나이가 한 자릿수인 황녀의 생일입니다. 더군다나 신전에 그런 걸 어떻게 가져다 놓습니까?”

남자는 그런 식의 방탕한 파티일 리 없지 않느냐며 기막혀했다.

“뭐야, 그럼 내가 자기 정조대를 풀어 준 보람이 없잖아!”

아내가 불평하자 남편의 얼굴이 빨개졌다. 주변에서는 까르륵 웃어 댔다. 그녀들의 음담패설은 나니아가 온전히 이해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왁자지껄한 그들의 모습을 지나가던 다른 남성들이 흘긋대며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방탕하기로 유명한 여자들이었다. 순진한 총각들 사이에서는 잘못 걸렸다가 험한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역시도 나니아는 잘 모르지만, 그들 사이에 어떤 안면이 있다는 것쯤은 느낄 수 있었다. 선망의 시선과 혐오의 시선이 함께 맴돌았다.

그들의 우두머리격인 여자는 정작 이성 문제엔 관심이 없으니 참으로 모순적인 일이라 할 만했다. 혼자 있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고독이란 낱말이 잘 어울리는 여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다.

“티에트 님께서도 파트너를 정하셨어요?”

샬롯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 것이었다. 이런 질문이 실례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저희 벨로즈 님께서는요, 누구 손을 잡으실지 말이 많았거든요. 결국엔 황녀님을 품에 안고 입장하기로 하셨는데, 그런 게 여기선 제법 중요한 문제처럼 다뤄지길래….”

과묵한 사람 앞에선 어쩐지 자꾸만 부자연스럽게 떠벌리게 되어서 부끄러웠다. 정작 티에트는 별생각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무감하게 대꾸하였다.

“약혼자가 오기로 했는데, 글쎄….”

오든지 말든지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는 투였다.

티에트의 말을 듣고 나니아는 아차 싶었다. 떳떳할 수 없는 그들의 관계는 이런 사건으로 삐걱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샬롯은 지금 여기, 사원 안쪽으로 들어올 수조차 없었다. 유멘타가 낄 수 있는 자리일 리가 만무했다. 적이 많다던 염황은 반대로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추종자들 역시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신전은 초대장 없이 기웃거리러 온 귀족들의 참석을 수용하기만도 벅찼다.

공식적인 반려와 비공식적인 연인이 별개인 삶은 앞으로 얼마나 더 다양한 불편함과 비참한 갈등을 만들어 낼까. 나니아는 감히 그들을 걱정하고 동정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녀 자신이 특별 대우를 받고 있음을 새삼 실감하였다. 높은 사람, 즉 벨로즈를 등에 업고 쥐어진 특권이었다.

“세상에, 네가 탈타르노에서 찾는다던 그 사람이 불로수의 후계였단 말이야?”

“유멘타를 찾는다지 않았어?”

나니아와 벨로즈 사이의 관계와 친분을 전해 들은 여자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배에서 들은 사정에 대해 어렴풋한 기억을 꺼내 들고 저마다 분분하게 말을 걸어왔다.

“나 여기서 일하는 애한테 들었어. 그렇게 예쁘다며?”

“요정 그 자체라네요, 글쎄.”

“님프들이 다 그렇지 뭐.”

“아니, 참말로 급이 다르대.”

어디서 어떻게 새어 나간 정보인지 벨로즈에 대한 소문이 일찌감치 파다하였다. 하마터면 태어난 줄도 모르고 방기될 뻔했던 불로수의 아들. 그 기구한 사연이 갖는 타이틀도 대단하지마는, 굉장한 미남이라더라는 평가가 사람들의 호기심에 불을 지폈다. 염황 외에는 아무도 만나 주지 않는 그의 태도가 손님들을 더욱 자극하기도 했다.

한 번만 만나 보게 해 달라는 도마뱀들의 간곡한 부탁이 나니아의 등을 떠밀었다. 실제로 그녀는 벨로즈에게 가서 그 청을 어렵사리 꺼내 보았다.

하지만 님프는 예의 그 거만한 얼굴로, 오직 나니아나 파코쯤에게나 허락해 주는 싱그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안 돼요.”

라고 말할 뿐이었다. 세상에 그보다 도도한 사내는 없을 것 같았다. 제 몸값을 높이는 방법을 아는 남자였다. 나니아는 모호한 미소를 띤 얼굴로 하하, 웃었다. 머릿속으로는 가서 뭐라고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파코라도 데려가야 하나….’

사람들의 입방아 속에서 벨로즈는 나라를 흔들 정도의 어마어마한 경국지색으로 부상 중이었는데,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님프는 태연하기만 했다. 관중들 앞에서 자신을 선보여야 하는 부담되는 상황에서 어떤 압박감이나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라는 몰라도 영지 하나는 확실히 망쳐 놓았지.”

챠링고가 파비올라를 떠올리며 비소를 흘렸다. 파키케팔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막상 자기 실물을 보고 실망해서 씹어 댈까 봐 걱정되지도 않아요, 벨로즈 님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 것은 벨로즈도 마찬가지였다.

“내 얼굴 어디에 실망할 여지가 있죠?”

고운 손등에 괴어 놓은 얼굴의 반쪽이 찌푸려졌다. 대칭이 무너진 이목구비 역시도 완벽하게 아름답기만 했다.

* * *

리자드의 커다란 몸은 뜨겁고 우람하여 무더운 날에 어울리기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니아는 기회가 생길 때면 언제나 그의 목에 매달려 입맞춤을 나누는 일에 열중하였다.

“음….”

이불을 덮지 않은 팔다리가 부목을 감고 올라가는 넝쿨처럼 엉겨들었다. 질척한 입술과 뜨거운 숨결이 몸을 달구었지만, 거기까지였다. 내일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벨로즈의 시중도 들고 나니아 본인도 치장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이쯤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그녀가 라히무스의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라히무스 요즘 좀…. 매끈매끈해진 것 같지 않아요?”

소녀의 손가락이 뺨에서 턱으로 흘러내려 군데군데 자상이 아문 흔적과 흉터를 더듬었다.

“아닌가….”

애정과 의심이 담긴 손길이 가슴으로 내려와 잘 잡히지 않는 살덩이를 만지작거렸다.

“살이 좀 빠진 것 같기도 하고.”

“어….”

남자가 그 말에 긍정하였다.

“요새 많이 못 먹어서….”

나니아는 안쓰러운 듯이 그의 몸을 쓰다듬었다.

‘밥도 잘 안 넘어갈 정도로 고되구나. 날씨도 덥고…. 가엾어라.’

나니아는 피곤한 그에게 말을 시키는 대신 자신이 두 배로 쫑알대기 시작하였다. 힘들었을 그의 하루를 환기해 주고 싶었다.

“있지, 나 오늘 선물 받은 드레스 미리 입어 봤거든요? 예전에 파비푸스에서 입어 본 옷, 그거 기억나요? 그때 그 옷보다 더 예쁘다?”

“…그래?”

“응.”

“여기서 더 예뻐지면 어떡하지….”

남자가 나른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나니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반쯤 감긴 눈으로 부드럽게 호를 그리며 웃었다. 나니아는 가슴이 뭉실뭉실해진 기분을 느꼈지만 못 들은 척 딴소리를 했다.

“그게, 음…. 오히려 파코 옷이 훨씬 치렁치렁해서요. 엄청 부끄러워해서, 하루 종일 놀렸어.”

“네가?”

“아니, 벨로즈 님이.”

남자가 또다시 피식 웃었다. 그러다 이내 낮게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새끼들 얘기는 궁금하지 않은데…. 네 얘기나 더 해 줘, 나냐.”

그 말에 나니아는 무슨 말을 해 주면 좋을지 고민하며 작게 끙끙거렸다. 이내 늘어놓는 말들은 두서없이 난장이었다.

“오늘도 마지막까지 춤 연습을 했는데, 드디어 처음부터 끝까지 안 틀리고 해냈어. …나 말고, 벨로즈 님이. 나는, 음, 사실 아직 발을 조금 절 때가 있는데, 그래도, 그치만 파코보단 훨씬 잘해.”

남자는 이젠 아예 눈을 감고 가볍게 응응거렸다.

“그리고 어제는 커다란 마차가 들어오는 걸 봤다고, 챠링고가 그랬는데, 거기에 연회용이 틀림없는 식재료들이 잔뜩 있었다는 거예요. 그동안 탈렘 음식은 너무 맛이 없다고 불평 많았거든요. 그런데 어제부터 아주 들떠서, 내일은 뭐가 맛있는지 알려 줄 테니까 자기만 믿고 따라오래요. 그치만 파티 시작 시간은 밥 때도 아닌데…. 아마 못해도 두 시간은 더 있어야 저녁 식사가 준비될걸요? 내가 하녀 일을 해 봐서 잘 알잖아요. 손님들께 따뜻한 음식을 제공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이란 말이에요. …라히무스 내 얘기 듣고 있어요?”

나니아는 언제나처럼 일찍 곯아떨어질 기미가 보이는 도마뱀의 볼을 붙잡아 늘렸다. 사내는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서 그마저도 계속 졸린 듯이 끔뻑거렸다.

별로 재미있는 얘기가 아니란 건 알지만, 그래도 이야기를 시켜 놓고 잠드는 건 나빴다.

“커다란 우우룡 분수가 있는 곳이요. 그 앞에 커다란 문에서부터 입장을 시작한다고 했어요. 그거 알아요? 파코는 저번에 티에트 님 배에서 만난 어떤 분이요, 파코를 파트너로 점찍으셨거든요. 그래서 내일 걔는 우리랑 있지 않을 것 같아요. 나랑 챠링고는 벨로즈 님 잘 계신지 보다가, 홀로 가서 식사할 거예요. 있죠, 라히무스는 어디에서 경비를 서요? 측랑 위쪽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거예요?”

그 말에 남자가 다시 감았던 눈을 뜨고서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경비?”

“응.”

“…경비?”

“응.”

남자는 고장 난 물건처럼 똑같은 말을 두어 번 반복하더니 이내 미간을 확 찌푸렸다.

“어디 서 있을 거야?”

“…….”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내가?”

라히무스는 잠이 달아난 눈으로 소녀를 쳐다보았다.

“…아니야?”

그제야 나니아는 이 대화의 어느 지점이 어긋나 있음을 깨달았다.

“염황, 염후 폐하의 경호를…. 맡고 있는 거 아녔어?”

“내가 그 노인네들을?”

라히무스는 당치도 않다는 듯이 말했다.

“근위병들은 뒀다 뭐 하고. 내가 왜?”

“그야….”

나니아는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라히무스는 전부터 당연하다는 듯 벨로즈의 연회 준비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파코처럼 춤 연습을 하기는커녕 따로 옷을 맞추지도 않았고, 챠링고처럼 그날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친 적도 없었다. 그는 그저 연회가 끝나고 빨리 염황의 손아귀 밖으로 떠날 생각밖에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였다. 남자가 이 연회에 어떠한 관심도 관계도 없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던 까닭은.

“염후께서 시키신 일이 있다고 했잖아.”

“어.”

“그게 뭔데, 그럼?”

나니아가 추궁하듯 묻자 남자가 떠름하게 대꾸했다.

“그건 말하기가 좀…. 복잡한데.”

“뭐가 어떻게 복잡한데?”

어디부터 말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사내는 목 뒤를 벅벅 긁으며 졸린 눈을 깜빡였다. 피곤한 듯이 콧대를 붙잡거나 눈을 비비기도 했다.

“내일 연회장에서 뭘 좀 돕기로 했어.”

“…뭐를?”

“어?”

“뭘 도울 수 있는데, 라히무스가?”

“…그게 무슨 뜻이야?”

“아니, 내 말은. 그렇잖아요. 당신이 뭘 할 수 있어서 뭘 돕는다는 거야.”

남자는 요리를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악기를 연주할 줄 아는 것도 아니었다. 식장의 컨디션을 조절하고 꾸미는 것도 그가 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역시 귀족들 경호하는 일 말고는 없잖아.”

“…….”

네가 몸으로 때우는 일 말고 할 줄 아는 일이 무엇이 있느냐는 말처럼 들렸다. 라히무스는 어두워진 낯빛으로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이래서 말하기 싫었어.”

“…뭐?”

날이 선 태도에 나니아는 일순 당황했다. 재차 따져 물으려다가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말하기 싫다는 사람을 붙잡고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문제의 그 날이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지 않은가. 어찌 됐든 중요한 것은 그가 소외당하는 일 없이 연회에 참석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 하나였다.

“그, 그래…. 그럼 옷 같은 건 준비됐어요?”

“…어.”

“다행이네. 염후께서 마련해 주셨어요? 어떤 옷이에요? 나는 연보랏빛 드레스인데. 살짝 푸르스름해서, 예뻐요. 기왕이면 우리 둘이 나란히 섰을 때 어울리는 색이라면 좋겠는데.”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하려 나니아는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그의 가슴팍에 올려놓은 손가락으로 건반을 두드리듯 톡톡톡 움직였다.

“라히무스, 혹시 춤출 줄 알아요? 나, ‘구름 위 오두막’에 맞추어서 연습했는데. 그 노래만큼은 자신 있어요.”

소녀는 이 음악을 아느냐며 익숙한 후렴구를 흥얼거렸다. 애써 즐거운 척하는 그녀와 다르게 라히무스는 심란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구름 위의 오두막….”

남자가 탐탁잖게 중얼거리는 것을 보고 나니아는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음, 아냐. 괜찮아요. 춤 같은 거 출 줄 몰라도. 어차피 파코 말고는 상대도 없을걸. 게다가 걔는 내일 종일 다른 여자 옆에 붙어 있어야 하니까.”

그 사교계는 나니아와는 관계없는 세상이었다. 그녀가 낄 만한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춤을 배워도, 쓸 일은 없을 거라고. 혼자 있어도 괜찮다고. 파트너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래도 참 다행이다. 라히무스가 있다니까. 혼자서 그런 델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면 좀 부담스러웠는데…. 나 사실, 그냥 가지 말고 여기 남아 있을까 싶기도 했거든요.”

소녀가 사내의 손을 붙잡고 살랑살랑 흔들었다.

“나랑 같이 있어 줄 거죠? 내일 이렇게 손 꼭 붙잡고 들어가. 응?”

남자가 그리해 줄 것이라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는 얼굴로, 나니아가 활짝 웃었다. 그러다 깍지를 낀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라히무스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어…. 저기, 나냐.”

망설이며 주저하길 여러 차례.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사내의 입술이 바짝 말라 보였다.

“미안한데, 나 내일 에스코트하기로 한 사람이 따로 있어서.”

“…….”

“그래서…. 계속 곁에 있을 수는 없을 것 같은데.”

“뭐…?”

나니아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그녀의 얼굴이 번개에 얻어맞은 듯이 싸늘해졌다. 라히무스도 그제야 무언가 놓친 부분이 있었음을 깨닫고 침대 밖으로 한숨을 뱉었다.

한 번은 참았는데, 두 번은 참기 싫었다. 나니아는 뜻밖에 미운 말만 해 대는 라히무스의 주둥이를 손바닥으로 한 번 찰싹 때리더니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서 그를 추궁했다.

“해야 한다는 일이 그거였어? 높으신 분 시중드는 일?”

“어…. 그런 셈이지….”

소녀의 얼굴이 얼룩덜룩한 감정으로 물들어 갔다.

“네가 왜?”

“…내가 왜?”

반문하던 라히무스도 누워 있던 몸을 슬금슬금 일으켜 침대맡에 기대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나니아를 쳐다보았다.

“네가 왜 그런 걸 하는데!”

“…….”

사내는 갑작스러운 고함에 놀라 침대 옆을 더듬으며 램프를 찾았다. 불을 밝혔을 땐, 영문을 알 수 없이 언성을 높이는 나니아의 선명한 분노가 보였다.

“당신이 어디 귀족 가문 영식이야? 고관대작 아들이야? 너 같은 남잘 그런 데서 일하게 하는 의도가 뭔데? 그냥 암컷들 눈요기시켜 주겠단 거밖에 더 돼?!”

“…나 같은 남자?”

그게 무슨 의미냐는 듯 남자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지만, 나니아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희롱당하는 라히무스에 대한 상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티에트의 배 위에서 파키케팔로가 그리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 처음부터 느낌이 안 좋았어. 내가 그럴 줄 알았다고! 뭐? 그런 짓을 안 해? 아, 그래. 여자들한테 술 따르는 짓은 안 한다고 했지. 같이 팔짱 끼고 따라 놓은 술 마신다고는 안 했으니까. 그렇지?”

나니아가 빈정거리자, 라히무스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아주 예민한 여자를 대하듯 성가시다는 투로 말하는 것이었다.

“별거 아냐, 그냥 입장할 때 손잡고 조금 걸어 주다가, 다가오는 여자들이랑 춤 몇 번 춰 주고 끝날 일이야. 아무도 없으면 마는 거고.”

나니아는 라히무스가 그렇게 엄청난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것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그럼 라히무스…. 그동안 자꾸 사라졌던 게….”

신전에 들어온 후로 부쩍 소홀해진 라히무스 때문에 내심 얼마나 서운했던가. 하지만 그가 무언가 아주 고된 일을 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외로운 걸 참고 내색하지 않으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이런 배려를 베푸는 동안 그는 말 못 할 고행에 시달리고 있던 게 아니라.

“다른 여자 손 잡고 빙글빙글 돌려 주면서 춤을 출 준비나 하고 있었단 거지?”

라히무스는 덥수룩한 앞머리를 멋쩍게 쓸어 올릴 뿐, 부정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니아가 또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쩐지 그 할망구가 널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했어!”

그에 라히무스는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낮추라는 신호를 보냈다. 어디서든 듣는 귀를 조심하라며 근심스럽게 당부하였다.

“…여기 홍염 땅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시다. 말씀 높여.”

그녀를 감싸는 말에 울컥한 나니아는 아예 침대 밖에 일어서서 손에 잡히는 쿠션을 그에게로 집어 던졌다.

“너 진짜 짜증 나.”

“…너, 너 하지 말랬어.”

남자가 엄한 표정을 지으며 나무라자, 짜증은 더욱 복받쳤다.

“몰라! 네 마음대로 해!”

소녀는 옆방에 있는 사람이 깰 정도의 소리를 꽥 내질렀다. 그러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쿠션을 다시 그의 얼굴에 휘두르고는 그대로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 * *

그날 밤, 나니아는 챠링고의 침대에서 잠이 든 뒤 그녀와 함께 아침을 맞이했다. 쫓아와서 문을 두드려 대던 라히무스는 챠링고가 버럭 화를 내서 쫓아내 주었다. 뭔진 몰라도 다 네 잘못이 틀림없다며 일갈하고는 자세한 사정을 묻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졸음이 완전히 가신 얼굴로 나니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었다.

“라히무스가 다른 여자 에스코트를?”

챠링고는 믿기 힘들다는 듯 놀라워하더니 이내 생각을 바꾸어 수긍하였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럴 수도 있다구요?”

그녀가 나니아의 어깨를 토닥이며 너그러운 대인의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네가 이해해. 걔한텐 나름 좋은 기회잖아.”

‘좋은 기회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파키케팔로는 짝이 없으니까 그런 기회를 반겨야 할지도 모르겠지만, 라히무스에겐 나니아 자신이 있지 않은가.

나니아는 챠링고에게도 삐져서 불퉁해졌다. 불룩해진 입술에 붉은 연지가 와 닿았다. 창백한 피부에 화색을 돋우는 염료였다. 염황이 내린 시종들은 벨로즈의 치장을 마치고 나서 곁다리로 나니아의 머리와 옷맵시까지 만져 주었다.

소녀는 화창한 봄날에 만개한 꽃처럼 차려입고서, 그 얼굴만은 마치 비 내린 골목길에서 흙탕물을 뒤집어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옆에선 장신구를 두를 일만 남은 벨로즈가 물 대신 염소젖을 홀짝이며 참견하는 목소리를 냈다.

“얘는 머리 올리지 않는 편이 예뻐요. 어깨를 덮게 내려놓는 게 좋아. 응, 그래. 그 정도가 좋겠다.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카락, 오히려 여기선 드물잖아요?”

옆에는 벨로즈 다음으로 치장을 마친 파키케팔로가 멋쩍은 표정으로 벨트를 추켜올렸다. 이전에 브로슈어에서 골라 둔 것과 똑 닮은 옷을 입고서 꼬리엔 그와 어울리는 은장품을 가득 끼워 놓은 채였다.

이 모든 난관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챠링고가 녀석에게 갈채를 보냈다. 여느 때처럼 놀림 가득한, 그러나 애정 어린 찬사가 쏟아졌다.

“이야, 파코! 인물 훤하잖냐! 새신랑이 따로 없네.”

시큰둥한 표정의 나니아도 옆에서 손가락 끝을 얕게 부딪혀 박수치는 시늉을 했다.

“오늘 그 아가씨랑 잘해 봐야지.”

“아, 웬 또 헛소리야!”

녀석이 부끄러워하며 괜히 소리를 빽 내질렀다.

벨로즈는 마치 처음 발견한 생물을 보듯 눈을 댕그랗게 뜨고 파키케팔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사시사철 아름다운 님프보다는, 과연 개털 같던 머리를 말끔하게 빗어 넘긴 청년의 행색이 더 색다르게 느껴졌다.

“으…. 허벅지가 꽉 껴!”

청년은 벨트를 두른 허리 아래로 슬림하게 달라붙는 정장 바지에 두 다리를 꿰어 넣은 채였다.

“계속 그렇게 걸을 거예요?”

“그치만, 너무 불편하다니깐. 찢어지면 어떡해!”

“안 찢어져요.”

님프가 그의 어기적거리는 걸음을 지적하자 녀석은 울상이 되었다. 한편 나니아는 귀 뒤에 생화를 흉내 낸 꽃 장식을 꽂고서 머리단장을 마쳤다. 챠링고의 관심이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왔다.

“나나도 오랜만에 제비꽃같이 귀여운데.”

그녀가 나니아의 허리에서 너울대는 옷 주름을 매만지며 휘파람을 불었다. 소녀는 그녀 말대로 그럴싸하게 꾸며 입고서 공주님 기분을 내기도 모자란 참에 하나도 즐겁지가 않고 시무룩하기만 했다. 정작 예쁘게 보이고 싶은 상대는 곁에 없어서였다. 라히무스를 생각하면 울적하다가도 부아가 치밀었다.

벨로즈는 오늘의 주인공이기 때문에 염황 부부가 있는 자리로 따로 불려 갔다. 파키케팔로는 일전에 녀석을 찜해 둔 숙녀를 모시러 허둥지둥 사라졌다. 나니아는 챠링고에게 의지하여 연회 장소로 향하였다. 아직 본격적인 행사가 있기 전 여유가 넘치는 시간이었다.

정원에선 평소와 다른 바람이 불었다. 긴 옷을 입어도 덥지 않을 거라던 시종들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만한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연회에는 몇 명의 다룸이 동원되었을까. 나니아는 궁금해졌다.

이곳에서는 환경을 거스를 수 있는 모든 방법이 사치요, 과시였다. 응당 사막에는 주어지지 않은 푸른 화훼로 가득한 정원에서 손님들을 반긴다는 것부터 이미 그 의도가 선명했다.

분수처럼 뻗어 나가는 음각 곡선이 붉은 사암 벽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그 위로 더듬더듬 기어오르고 늘어져 내린 나무 덩굴이 삭막한 암벽에 신선한 생명을 부여하였다. 무채색 타일이 번들번들하게 짜 맞춰진 바닥과 분수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익히 아는 사이인 듯 해후를 나누며 친목을 도모하는 그들 사이에서 나니아는 라히무스를 찾았다. 하지만 남자는 어디에도 보이질 않았다.

“아…. 역시 나는 파티 같은 거 불편하다니까.”

챠링고는 자신 같은 빈 둥지 출신에게 이런 귀족적인 분위기는 익숙지 않다며, 목덜미를 조인 타이를 잡아당기면서 어색해했다.

두 사람은 음악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2층을 받치는 교각이 연속적으로 아치를 만드는 공간. 그 길쭉한 아케이드 옆으로 곧장 실내가 연결되었다.

진정한 의미의 연회가 시작될 곳은 바로 그곳이었다. 밖으로는 정원이 내다보이고, 반대쪽으론 절벽이 펼쳐졌다. 그 아슬아슬한 건축물은 겪는 이로 하여금 경이로운 신앙을 이끌었다.

본래는 경배를 올려야 할 회중석이 사교의 장으로 둔갑하였고 설교가 펼쳐져야 할 단장 위에는 세속적인 음악이 울려 퍼졌다. 일전에 챠링고와 술집에서 보았던 그 악기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구성이었다. 산뜻하고 잔잔한 가락이 이제 곧 막을 올리려 하는 연회의 공백을 메우고 있었다. 저 악기들이 저렇게 밝고 건전한 악곡을 연주할 수도 있는 거구나 싶어서 나니아는 기분이 묘했다. 챠링고와 단둘뿐이라 더 감회가 새로운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은 정원이 내다보이는 측랑 기둥에 붙어 서서 삼삼오오 화담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곳에도 나니아가 찾는 남자는 없었다.

그녀의 신경은 분수대 너머 사암 벽의 대문 쪽으로 곤두서 있었다. 대관절 어떤 여자와 어떻게 달라붙어 있을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었다. 그것이 설령 뒷덜미 잡고 쓰러질 만한 광경일지라도. 소녀의 매서운 눈길이 한 점을 노려보았다. 챠링고가 그런 나니아의 어깨를 콕콕 두드리며 말을 걸었다.

“오, 나나. 나는 저어 쪽에서 술이나 한잔할까 싶은데.”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 제단 앞 좌우 양평으로 넓게 이어진 공간에 음료와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직 본격적인 식사를 차려 놓기엔 이른 시간. 하나씩 집어 먹기 좋은 핑거 푸드와 찰랑거리는 술잔이 객들을 유혹했다.

챠링고가 함께 가겠느냐고 물었지만, 나니아는 사양하였다. 그녀는 정원 입구를 통과하여 장내로 들어오는 이들을 탐색하는 중이었다. 연단 앞 익랑에서는 볼 수 없는 위치였다.

일전에 지은 죄가 있는 챠링고는 소녀를 혼자 두어도 괜찮을지 염려하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하며 단념하였다.

“그래, 그럼.”

이곳은 발정 난 도마뱀들이 근본 없이 들러붙는 그런 곳이 아닐뿐더러, 정 뭣하면 당장 자기가 쓰던 방으로 돌아가는 길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걱정할 것은 없어 보였다.

그렇게 챠링고는 붉은 빛깔이 탐스러운 용딸기 음료를 향하여 멀어져 갔다. 그녀는 이런 귀족 놀음에 관여할 이유도 없고 흥미도 없어서 어쩌면 일찍 돌아가서 쉴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남겼다.

챠링고가 떠나간 후, 나니아는 기둥 하나를 골라잡고서 그 옆에 바짝 붙어 섰다. 꼬리가 없는 것을 감추듯이 몸을 웅크렸다. 연회에는 인간도 있고, 땅쟁이도 있고, 이런저런 낯선 생김의 생물들이 종종 보였는데, 역시나 리자드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상한 시비가 걸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러잖아도 소극적인 몸가짐이 더욱 움츠러들었다.

저마다 오랜만에 만나는 지인들과 정답게 해후하는 자리에서 나니아는 홀로 외떨어져 있었다. 배신자를 목 빠지게 기다리면서 그 외로움은 점점 비참한 크기로 자라났다.

‘다른 여자랑 팔짱이라도 끼고 있으면, 내가 정말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하지만 용서해 줄지 말지를 가늠하고 있던 것이 무색하게도 라히무스는 끝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입장 마감 시간이 다 되어 갈 때까지도 나타나질 않았다.

자신도 모르게 한눈을 파는 사이 놓치기라도 한 것일까.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처럼 거대하고 잘생긴 리자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파수들이 지키는 저 대문 외에 따로 반대편 입구가 마련되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공중에서 떨어질 게 아니고서야 공식적인 출입문은 오직 저곳뿐이었다.

그때, 내리닫이 쇠창살 문이 사암 벽의 천정에서 내려와 입구를 가로막았다. 이제 연회장을 나고 들기 위해서는 병사들의 허락을 받아야 할 판이었다.

‘누구랑 어디에 있는 거야, 라히무스….’

나니아는 쓸쓸하다 못해 막막해졌다. 아침 일찍 혼자서 사라진 것만으로도 속이 끓었는데, 여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그렇게 화를 내면서 나와 버릴 게 아니라,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봤어야 했나 싶어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회환과 분노가 한데 뒤섞여 즐거워야 할 파티를 망칠 즈음에 실내를 밝히는 조명들에 하나둘씩 불이 들어왔다. 눈이 번쩍 뜨이는 현란한 조도에 소녀는 천장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아직 별이 돋기엔 이른 시간. 은하수를 빼앗아 매달아 놓은 듯한 샹들리에가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독특한 것은 유리구슬 한 알 한 알이 반사하는 불빛이 저마다 다른 색채로 빛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엄숙해야 할 사원에 가져다 놓은 세속적 광채. 연회를 위해 설치된 이전에 없던 물건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측랑 상층의 복도, 연회장의 중심이 내려다보이는 그곳 난간에 우량의 피륙이 펄럭이며 내걸렸다. 동시다발적인 그 너붓거림이 사람들 사이에 오가던 잡담을 털어 내는 듯했다.

정원 분수에서는 솟아 나오던 물이 끊기고, 악단은 연주를 중단하였다. 시계는 어느새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무언가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응당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흐르던 가락이 사라진 자리에 침묵이 밀려들었다. 그 고요한 정적이 좌중의 이목을 중앙 연단으로 잡아끌었다. 이 넓은 홀에서 가장 거대하게 빛나는 조명 무리의 아래였다.

-두두두둥, 두둥. 두두두둥, 두둥.

모두가 집중한 그때, 다시금 화통한 북소리가 들려왔다. 연회의 손님들은 마치 누가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멈추어 선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잘고 빠른 드럼의 발길질이 멎어들 때쯤. 누군가 비상한 톤으로 목청 높여 제왕의 하림을 알렸다.

“현룡께옵서 나리시오!”

지상에 강림한 현세의 용. 그것은 리자드가 군주를 드높이는 최고의 수식어였다. 남자는 이 연회의 호스트, 그 이상의 지배자인 것이었다.

잔잔한 퍼커션의 공명 위로 새로운 음률이 춤추기 시작하였다. 빠르지만 웅장한, 쾌락하되 엄숙한, 붉은빛의 행진곡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한 쌍의 나선 계단이 본당의 연단에서 상층 갤러리로 뻗어 올라갔다. 계단은 홀의 중심을 축으로 완벽히 대칭을 이루었다. 그 끝에 그야말로 현신하였다는 말 외에는 합당한 표현을 찾을 길 없는 익숙한 존안이 보였다. 우측 계단 위에는 염후가, 좌측 계단 위에는 염황이. 두 귀인은 각각 듬직한 인상의 홍염룡 하나씩을 옆에 두고 걸음을 떼었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은 깃털처럼 우아하되 중후한 무게를 싣고 내려왔다.

장갑으로 주름과 오지를 가린 샤르쿠스의 손이 발타롭스의 앞발 위에 포개어져 있었다. 그 건조한 접촉은 마치 계단 난간에 손을 얹는 행위만큼이나 당연해 보였다. 사실 염후는 이제 빈말로라도 아름답다는 말을 듣기엔 무리가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공들여 지은 성채처럼 든든하고 매력적인 막내아들이 그녀의 위신을 바로 세웠다.

사 황자 발타롭스는 비교적 한량스러운 인상의, 그러나 로열패밀리 특유의 권위적이고 거만한 미소가 천부적인 사내였다. 젊은 아들은 그녀의 남편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어머니를 장식하였다. 청년을 액세서리처럼 끼고 선 염후에게선 아들 넷을 내리 훌륭하게 길러 낸 노부인이 가져도 좋을 품위가 느껴졌다. 지혜롭고 현명한 어머니와 그 밑에서 잘 자라 준 아들. 두 모자의 그림 같은 모습은 지켜보던 군중들로 하여금 탄복을 자아냈다.

“벌써 저리 장성하셨던가요?”

“암요. 성인식을 지나 보낸 지도 꽤 되셨지요.”

초대된 손님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홍염 땅의 황실에 대하여 수군거렸다. 귀엣말은 연주 소리에 묻혀 서로의 귓가에만 오갔다.

“샤르쿠스의 똑똑한 바탕은 첫째, 둘째가 다 뽑아 간 후라던데….”

“어머, 호호호. 머리에 든 게 없다는 말씀을 어찌 그런 식으로.”

“배경 좋고, 인물 좋으니, 그거면 됐지요. 수컷이 가진 가장 큰 자산이 얼굴 아니겠습니까?”

“그래요. 더군다나 넷째이니…. 그저 나라에 도움이 되는 집안으로 장가만 잘 들면 될 일이지요.”

사람들은 발타롭스에 대해 논하기를 즐기는 듯했다. 어쩌면 그것은 염후가 바라는 바인지도 몰랐다. 부부가 서로의 손을 잡지 않고 자식에게 손을 맡겼다는 것은, 오늘 보여 주고 싶은 자랑거리가 그 혹은 그녀임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자신이 낳은 소생임을 현현하고 가족애를 과시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염황께서 가장 하찮게 여기는 자식이라더니…. 훤칠하기만 합니다, 그려.”

“딸이 갖고 싶었던 사내의 용렬한 심술이지요.”

과연 그럴 만도 하다며 청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홍염의 황실 내에서 사 황자의 위치란 그런 것이었다. 딸자식을 바라는 집안의 잇따른 막내아들은 천덕꾸러기가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시…. 본판은 따라갈 수가 없네요.”

그렇게 말하는 어느 리자드의 시선이 반대편 계단을 향했다. 그곳 왼쪽에서부터는 아버지 바포르가 오른편의 샤르쿠스 모자와 마찬가지로 연주되는 음악의 한 박자, 한 박자에 맞추어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아, 그랬다. 남자는 정말 아름다웠다. 태양의 한 귀퉁이를 떼어다 만든 피조물처럼 눈이 부셨다. 부인처럼 무표정하지도 아들처럼 활짝 웃어 보이지도 않는 절제된 미소에서는 낙낙한 여유와 기품이 느껴졌고, 날 때부터 하늘이었던 자의 걸음걸이는 오늘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그의 지랄맞은 성정을 아는 사람들조차, 이렇게 작정하고 젠체하는 바포르를 마주할 때면 그 황홀한 껍데기에 홀려들 수밖에 없었다.

뼈대가 튼튼하고 기골이 장대하기로 유명한 홍염룡들 사이에서 염황은 단연 돋보이는 부류의 사내였다. 혼기가 꽉 찬 네 아들 중 누구도 그보다 찬란하지는 못할 것이었다. 그의 나어린 얼굴을 보고 있자면 세상에 수컷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그 어떤 요소도, ‘젊은 나이’ 그것 하나 앞에서는 우스워진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데, 폐하께서는 지금 누구의 에스코트를 받고 계신 겁니까?”

나선 계단이 반대 방향으로 휠 때쯤, 사람들의 시선이 염황을 떠나 그를 모시고 있는 리자드에게로 향했다. 바포르의 손끝이 어느 우직한 사내의 손바닥 위에 가볍게 놓여 있었다. 시커먼 수컷 둘이서 연출하기엔 다소 꼴사나운 자세였으나 염황이 미려한 탓에 그조차도 이상한 구석 없이 자연스러웠다. 염황은 어지간한 암컷보다 가녀린 편이었고 그 옆에 있는 남자의 덩치는 보통 이상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나니아의 시선은 아까부터 그쪽에 꽂혀 있었다.

교제하는 여성이 있긴 한지 궁금한 사 황자라든가, 홀아비로 늙어 가는 아들들에게 연연하지 않는 그들의 어머니라든가, 자타공인 홍염 땅 최고의 가십거리인 염황조차 안중에도 없었다. 사람들의 관심은 곳곳으로 분산되었지만, 나니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사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객들에겐 누구보다 낯설고, 그녀에겐 누구보다 익숙한 홍염룡 한 마리를.

“라히무스….”

당신이 왜 거기에 있어.

그녀가 정원 입구에서 애타게 기다리던 그 리자드였다. 남자는 참석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저 무대 반대편에서 이토록 화려한 입장을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대체 왜? 그의 행방을 알고도 여전히 의문은 가득했다. 아니, 오히려 종전보다 더 어리둥절해졌다.

라히무스, 라히무스.

남자의 이름이 들썩이는 바람처럼 불어 번졌다.

“맙소사, 그 잡종이잖아요!”

“이제 마당을 넘어 집 안으로까지 들이겠다는 건가요?”

“그게 누군데요?”

“세상에나…. 저 괴물을 무슨 생각으로?”

“끔찍이 싫어하던 게 아니었습니까?”

“그 왜 있지 않소. 축수에게 겁간당해 낳았다는.”

무수한 뒷말 속에서 나니아는 혼란스러워졌다. 동시에 그러잖아도 외롭던 마음에 완벽하게 혼자가 된 기분이 더해졌다.

‘저게 대체 다 무슨 소리야?’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듣다 보니 이제는 계단 위의 저 사내가 나니아가 아는 그 남자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는 이야기와 모르는 이야기가 뒤섞여 머릿속이 엉망진창으로 범벅되어 가던 가운데, 누군가의 명쾌한 해답이 긴가민가한 귓가에 날아들었다.

“라히무스, 염황의 사생아 말입니다.”

그 말을 엿듣고 나니아는 황당한 기분에 입이 벌어졌다. 우두커니 멈추어 서서 사람들이 흘리는 말들을 주워 담는데, 누군가 그녀의 등을 톡톡 건드렸다.

“나니아.”

뒤를 돌아보니 여기도 아는 얼굴이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화려하게 차려입은 티에트였다. 그녀의 곁에는 흐릿한 인상의 남자가 서 있었다. 아마도 전에 말한 약혼자이지 싶었다. 하지만 지금 나니아에게는 그를 눈여겨볼 여유가 없었다.

“저 남자는….”

티에트는 소녀의 멍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녀 또한 기대감을 내려놓은 투로 말했다.

“…몰랐던 건 너 역시 마찬가지인 게로군.”

나니아의 마음속에는 혹시라도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는 일말의 의심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티에트에게 ‘너도 몰랐구나.’라는 말을 듣는 순간, 번뜩 정신이 들었다. 저게 라히무스로 보이는 건 그녀의 착각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저는, 아…!”

하녀는 인사를 해야겠다든가 무례하다든가 하는 그런 생각도 잊고 몸과 고개를 돌렸다. 챠링고가 떠나간 방향을 향해서였다. 하지만 그때쯤 사람들이 염후와 염황이 연단 바로 앞까지 내려와 있었고, 군중들은 홀의 중앙으로 모여들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자리에 나니아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 보였다. 앞으로 가지도 뒤로 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모든 광경을 지켜봐야만 했다. 어느새 계단을 반쯤 내려와 있던 라히무스를.

이 땅에서 제일 존귀하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남자는 조금 이질적이었다. 가뿐한 느낌과는 거리가 먼 발걸음이나 웃음기 없는 표정과 같은 것들은 조금 더 부차적인 문제였다.

턱 끝까지 채워 올린 목깃. 그 밑으로 떨어지는 더블 버튼. 벌어진 어깨 위엔 엄숙한 느낌의 견장이 올라 사내의 건장한 체격을 강조하고, 금사를 꼬아 놓은 견식줄은 두툼한 오른쪽 가슴을 가로질러 그 밑으로 결속되었다.

굵고 강인한 팔뚝을 내리긋는 크림슨 컬러의 원단 한 줄과 역삼각형의 허리선을 강조하는 검집용 벨트가 두껍지만 늘씬한 상반신을 완성하였다. 그 밑으로 미끈하게 뻗은 두 다리는 육식 동물의 그것처럼 길고 날렵해 보였는데, 정장 바지를 입고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듯했다.

우아한 걸음걸이는 대칭적이고 절제된 꼬리의 움직임으로 완성되었다. 꼬리 끝부터 끝까지 촘촘하게 채워져 있는 금장 장식은 그가 걸치고 있는 옷만큼이나 화려하고 묵직하였다. 아니 어쩌면 가장 힘을 준 부분인 것 같기도 했다.

일자로 뻗은 예복이 발목에서 잘록하게 끝나는 것을 보고 저게 그 살기등등한 허벅지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의심스러운 참이었다. 긴 계단을 모두 내려온 염황 부부가 아들의 앞발에서 손을 떼어 내고 나란히 연단 위를 걸었다.

발타롭스와 라히무스는 그들 뒤에 대각선으로 서서 뒤따라오다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뒷짐을 졌다. 두 리자드 모두 상당한 장신이라 앞에 계신 두 부모를 지탱하기 위해 버티고 선 기둥처럼 보였다.

걸음을 따라 짤랑이던 꼬리 끝이 일자로 다물어졌다. 두 다리는 어깨너비로 벌어져 바닥을 짚고, 뒷짐을 진 가슴은 자연스럽게 앞으로 내밀어졌다. 리자드식 경례에서 가슴에 짚던 손만 허리 뒤로 옮겨 놓았을 뿐인 자세였다. 단지 그뿐인데도 본연의 늠름함이 배가되었다.

목청 높여 염황의 등장을 알렸던 어느 리자드가 다시금 사람들의 귓전에 자기 목소리를 때려 넣었다.

“시립하시오!”

잦아든 악기들이 한 번 더 곡을 바꾸고 염황의 입에서는 귀빈들에 대한 감사 인사와 진정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소녀의 귓가에는 아무것도 들리질 않았다. 오로지 라히무스뿐이었다. 오직 그만이 그녀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어디 내놓기도 창피한 추남일 거라고….”

“듣던 것과 상당히 다른데요.”

“저것이 축수가 낳은….”

“하지만 왜 이제 와서?”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바포르의 옆자리를 꿰찬 라히무스를 보고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하였다.

“…상당한 미남인데요.”

“염황을 제법 닮지 않았습니까.”

“글쎄요, 괴물이라고 부르기엔….”

사내는 이마를 덮던 머리카락을 멀쑥하게 넘긴 채였다. 한 치의 요령도 용납되지 않는 반듯한 헤어라인 밑으로 차가운 눈매와 비율 좋은 콧대는 물론 평소 머리카락에 잘 가려서 보이지 않던 눈썹까지 훤히 드러내었다. 수컷 냄새가 물씬 풍기는, 서늘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어쩜, 근사한 남자였잖아!”

그 매력적인 용모는 질투 섞인 배척과 호감 어린 환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그래 봤자 괴물 아닙니까.”

“맞습니다. 반푼이 괴물.”

“더러운 잡종일 뿐이죠.”

“하지만 꽤나….”

그가 몸에 두른 옷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황자 전하 그 자체였다. 하지만 나니아는 알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다른 사람들도 느끼고 있을지 몰랐다. 그 인위적인 기품 속에 깃들어 있는 야만을. 얄팍한 옷 따위로 가려지지 않는 야성을.

라히무스의 뾰족한 인상은 유리 덮개 바깥에서 길러진 장미의 가시를 닮았다. 그는 다듬어지지 않은 가시처럼, 길들일 수 없는 야생 동물처럼, 위험한 매력을 풍겼다. 그 사나운 분위기가 이목구비 곳곳에서 느껴졌다. 시키는 대로 턱을 들고 예를 취하였지만, 내리깐 두 눈은 여전히 반항적이었다.

사람들은 숙덕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천박한 태생은 숨길 수가 없지. …염후께선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죠? …어디 아들 하나를 염가로 팔아넘겨야 할 일이라도 생겼답니까? 저 남자, 침대 위에서의 얼굴이 궁금해지는걸….

나니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거기다 무엇을 발랐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왜 나한테 말해 주지 않았지?’

아직까지도 그에 대해 모르는 것 투성이라는 생각에 나니아는 답답하다 못해 어이가 없었다.

‘왜 숨겼지?’

대체 언제까지 나한테 비밀로 할 생각이었지? 다른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나? 여기서 또 더 무엇을 숨기고 있을까? 나니아는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라히무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득해졌다.

한편으로는 미리 알았다고 해서 뭐가 달라졌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연단 위의 그 리자드는 이미 나니아가 아는 그 남자가 아니었다.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자리를 옮길 수 없었던 나니아의 뒤쪽에 아직 티에트가 서 있었다. 정략결혼의 희생자. 샬롯의 얼굴이 떠올랐다. 완전히 남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내 일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니아는 아찔해졌다.

‘다가오는 여자들이랑 춤 몇 번 춰 주고 끝날 일이야. 아무도 없으면 마는 거고.’

그제야 라히무스의 말이 이해가 갔다. 사내는 이 자리에서 염황의 아들로서 그에 필적한 여자와 어울려야 하는 것이었다. 자신 같이 근본 없는 인간 계집애 따위가 아니라, 황실에 어울리는 어느 걸맞은 가문의 아가씨를.

나니아의 불안감이 속절없이 비약하는 사이, 뒤이어 등장할 인물이 소개되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멎게 한 것은 오늘의 진짜 주인공들이었다. 다시금 극적인 연출을 위해 모든 조명이 꺼지고, 오로지 그들이 들어올 길에 한정해서만 차례에 맞추어 재점화되었다.

염황 부부와 그의 아들들이 들어오던 때에 비하면 덜 웅장하되 더 경쾌한 악곡이 흘렀다. 그 청명하게 밝은 가락과 함께 장내에 나타난 이들은 예상대로 황녀를 품에 안은 벨로즈였다. 님프는 이곳의 엄중한 격식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 그러나 타고나길 우아한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 내려왔다.

그를 반긴다는 의미에서 객들은 동대륙 양식으로 입혀 놓고서, 님프 본인은 리자드 전통 의상인 톨라를 입었다. 남자가 이 파티의 진정한 주역임을 현창하는 동시에 이 땅의 일원이 되었음을 상징하는 의상이었다.

사람들의 관심이 순식간에 그 아름다운 님프에게로 옮겨졌다. 누군가 자신을 소개하는 그 말이 끝나 갈 때쯤에, 벨은 자기 손 대신 황녀의 손을 들어 관중들에게 흔들어 주었다.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입에서 탄식이 터졌다. 그 소꿉장난 같은 행동은 확실히 깜찍한 구석이 있었다. 낯선 상황과 소음에 깜짝 놀라 평소처럼 소리를 지를 법도 한데, 황녀는 다행히 벨의 품에 얌전히 안겨 있어 주었다.

뒤에서는 티에트가 남들처럼 박수를 치며 질문을 던졌다.

“벨로즈…. 하지만 그것이 불로수가 지어 준 이름은 아니겠지?”

여자는 저 남자가 바로 나니아가 찾던 그 님프라는 사실을 알고 알은체를 했다.

“듣던 대로 정말 아름다운 남자로군.”

수컷에겐 관심이 없는 여자가 보기에도 그런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니아의 이목은 여전히 라히무스에게 머물렀다. 남자는 연단에서 내려와 정물처럼 서 있었다. 그에게로 가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도저히 길을 만들어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눈부시게 하얗고 예쁜 님프가 어린 홍염룡을 끌어안고 방긋방긋 웃는 모습은 과연 인상적이었다. 둘의 조합이 어떤 메시지를 품고 있는지 사람들은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염황을 에스코트할 영광이 반축 따위에게 주어졌던 일은 이미 거의 잊힌 채였다.

몇몇 호기심 넘치는 사람들이 염후에게 다가가 자세한 내막을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며 웃을 뿐이었다.

이 모든 것이 연출된 쇼라는 느낌을 받았던 사람들의 생각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주연 배우들은 그다지 원하지 않았던, 염후 혼자서 기획하고 감독한 퍼포먼스가 맞았다.

* * *

염황이 그의 보물 파티바와 술래잡기를 할 적에, 염후는 라히무스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존의 앞에서는 뻗대던 리자드가 정작 그의 부인 앞에서는 제대로 된 예를 갖추었다. 송구한 눈빛부터가 달랐다.

남자의 넓은 어깨가 반듯한 수평을 이루고 두툼하게 벌어진 가슴 위로 다섯 손가락이 직각을 그렸다. 무표정한 시선이 저 어딘가의 허공을 향하고 날카롭게 각이 진 턱선은 단단하게 여물어 있었다.

꼿꼿하게 바로 선 몸뚱이에 눈길이 갔다. 청년은 못 본 새 완연한 수컷이 되어 있었다.

‘저러니 바포르가 예민하게 굴 만하지.’

샤르쿠스는 실소를 흘렸다. 그러곤 맞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좌정하라.”

윗사람의 말이 떨어지자 라히무스는 그제야 자세를 풀고 시선을 바로 두었다. 그녀가 앉으라고 말한 곳은 의자나 소파 따위가 아니라 양탄자 위였다. 죄인의 아들은 군말 없이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못 본 새 많이 컸구나. 범이 낳고 달이 빚은 아이야….”

축수가 암악 주술을 이용하여 낳은 괴물을 그녀는 썩 낭만적으로 일컬었다.

“그러나 점점 더 태양을 닮아 가는구나.”

울로피. 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계집애가 바포르의 반반한 낯짝에 반하였을 적의 일이다.

오래전 염황과 울로피는 함께 전장을 구르는 장수들이었다. 피 튀기는 형극 속에서도 연심은 싹트는 모양이었다. 축수는 바포르의 어디에 그렇게 홀려 버렸는지 무척이나 목을 매었다고 들었다. 그러다 리자드의 발정기를 틈타 멋대로 염황의 몸을 취하였고, 끝내는 알까지 품었다. 아이를 가지면 남자가 돌아봐 줄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그때 샤르쿠스는 이미 여유와 관록이 넘치는 중년의 여성이었으니, 완전히 이해 못 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겁탈당한 지아비를 어찌 괘씸하게 여기거나 내쫓으랴. 남자는 핏물 위에 피어난 한 떨기 꽃송이처럼 아름다웠을 테니, 어여쁜 수컷을 짝으로 둔 여자의 고충이자 대가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만 그 가소로운 축수는 이 땅에 발붙이고 살 수 없도록 쫓아내었다. 그것이 울로피에게 내린 단죄의 전부였다.

“그래, 항상 서신을 통해서만 간신히 연락이 닿았으니.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이 언제였던고….”

노부인은 입에 문 파이프 끝을 뻐끔거리며 회상하였다.

“가장 최근이라 봐야 용골 전쟁 때인가…. 이제와 치하하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그땐 정말 수고 많았다. 암, 수고 많았지.”

직접 얼굴을 보고 대화를 나눈 게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샤르쿠스는 진두지휘를 하고 사내는 최전선에 나서서 싸우기 바빴으니 그조차도 제대로 된 만남이라 보기는 힘들었다.

“볼 때마다 쑥쑥 자라 있구만 그래.”

사실 두 사람의 인연은 라히무스가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길었다. 다른 여자가 복중에 저주를 심으면서까지 낳은 남편의 아이. 염후는 그것이 궁금하여 오래전 아이를 찾은 적이 있었다. 위험한 싹이 보이면 자르고, 될성부른 떡잎이면 데려오자 싶었다.

결과적으로는 둘 다 아니었다. 아이는 가만 내버려 두면 그냥 그렇게 죽어 버릴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약한 개체는 도태되는 것이 당연했으므로, 구태여 적대할 가치도 도와줄 필요도 없을 거라 판단하고 돌아왔다. 매음굴에 남겨 두고 온 그때 그 반축 리자드가 이렇게 장성할 줄이야 꿈에나 알았을까.

라히무스는 말없이 앉아 있기만 했다. 대답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할 말이 없어서였다. 염후는 그에게 있어 염황보다도 더 어려운 존재였다. 특히 지금처럼 잘 알고 지낸 조카를 대하듯 말을 걸어올 때면 어쩔 줄을 모르겠는 기분이 들어서 더욱 데면데면해졌다.

“아차, 총각 앞에서 담배를 피우다니.”

염후는 문득 실수했다는 듯이 입술에서 파이프를 떼어 내고 보울을 뒤집었다.

“…괜찮습니다.”

상관 말고 마저 피우라는 의미에서 라히무스 자신도 흡연자임을 밝혔다. 그러자 샤르쿠스는 그래선 안 된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러면 못 쓴다. 씨가 망가지잖니.”

여자는 시종을 향해 손짓하며 파이프는 물론 연초 찌꺼기까지 가져다 치우라는 신호를 보냈다.

“우리 둘째도 그렇고, 참…. 수컷이 담배 따윌 피워서 장가는 어찌 가려고.”

염려스럽다는 듯 혀를 내두르던 여자가 심심한 입 속에 박하사탕을 하나 넣어 굴렸다.

“그래, 만나는 여자는 있고?”

“…….”

“있구만.”

쭈뼛대는 라히무스를 보고 염후는 즐거운 코웃음을 쳤다.

“그래, 그럴 나이지.”

그러다 갑자기 또 인상을 확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니지. 너도 좀 늦었지 않니.”

라히무스는 민망한 기분에 애먼 입술만 훑고 깨물다 일그러뜨렸다. 시킨 일을 제대로 완수해 내기도 전에 애인과 살림을 차릴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들켜 버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오갈 곳을 모르는 시선이 카펫 위를 굴러다녔다. 그러다 이어지는 염후의 뒷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국혼서를 써 주랴?”

박하사탕 하나 줄까. 딱 그 정도의 제안처럼 대수롭지 않게 들렸다.

“내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라히무스는 솔깃한 동시에 황당했다. 그의 둥지는 황궁 바깥에 있었다. 바꿔 말해 황실의 일원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왕의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는데, 자신의 혼인 서류에 염황의 도장이 찍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사내는 공식적으로 없는 존재였다. 없다 뿐인가. 염황이 걸핏하면 사라져라 없어져라 구박하는 짐덩이였다.

“…불가능한 말씀입니다.”

라히무스는 염후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대꾸하였다. 그녀는 자기 손가락에 끼워진 염황의 시그닛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답했다.

“내가 네 이름도 주었는데 그깟 혼인서 한 장이 대수겠느냐.”

매음굴에서 도망쳐 나와 생부를 찾아온 라히무스에게 이름자를 만들어 준 것은 염황도 아닌 염후였다. 남자가 노발대발하며 쫓아내려는 것을, 그녀가 품어 주었다.

라히무스를 이루는 피와 살의 절반이 남편의 것이었다. 그는 공허한 알에서 태어났으니, 울로피의 태를 빌렸을 뿐 바포르 혼자서 낳은 리자드나 다름없었다. 사랑하는 남자를 쏙 빼닮았던 아이를 미워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라히무스의 성장은 불로과로 멈춰 놓은 바포르의 미래를 상상하게 했다.

노부인은 자꾸만 무너져 내리려는 허리를 고쳐 앉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나도 거저 주겠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예뻐해 주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였더라면 진작에 그를 황궁에 들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번 연회에서, 라히무스 네가 폐하를 에스코트해 주려무나.”

염후의 말에 라히무스는 목이 말라 바닷물을 퍼마시겠다는 사람을 본 것처럼 눈썹을 찌푸렸다.

“이제 와 저를…. 남들 앞에서 친자로 인정하시기라도 하겠다는 말씀입니까.”

“누가 뭐라도 너는 바포르의 친자식이 맞지. 네 얼굴이 그걸 증명했잖니.”

“그런….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라히무스는 염후의 의중을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했다. 그에 샤르쿠스는 농담조로 말하던 것을 관두고 단호한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오해 마라. 우리는 우리 입으로 너와 우리의 관계를 공인할 생각이 없느니, 네가 할 일은 그저 폐하의 손을 잡고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치는 일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셔서 얻어지는 게 뭡니까.”

샤르쿠스는 얘기가 길어지겠다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며 다시 박하사탕 한 개를 입에 넣었다.

“아이야…. 너를 드러냄으로써 님프와의 화친을 도모하는 동시에 네 아비를 우습게 만들 수도 있다면, 이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니.”

라히무스가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끔뻑거리자, 염후는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로 물었다.

“너는 내가 살아 봤자 앞으로 몇 년이나 더 남았을 것 같으냐.”

“…오래도록 사셔야지요.”

염후가 이번에는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 내 황녀가 남편을 다섯 정도 거느릴 때까지는 정정해야겠지.”

그러곤 다시 수심 가득한 얼굴로 돌아와 힘 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라히무스야. 네 그것을 아느냐. 폐하께선 이제 와 태자의 자리에 막내를 앉히고 싶어 하신다.”

“…….”

“네 듣기에도 이 얼마나 미친 소리 같으냐.”

그것은 확실히 머리가 흐린 소리였다. 원자가 태자로 책봉된 지가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었으니.

“하루빨리 보위를 첫째에게 넘겨주어야지 싶다. 내가 죽기 전에 말이야. 너도 알다시피 염황께서 젊음에 대한 욕심이 강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자리를 물려줄 수 있을 것 같지 않더구나. 단지 파티바가 어리기 때문만은 아니야. 내 딸이지만 그 애는 영…. 너도 보면 알 거다.”

염후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하지만, 저를 공식 석상에 대동하시는 것도 비슷하게 미친 짓 아닙니까.”

샤르쿠스가 하하 웃었다.

“글쎄, 그게 그 정도인가…. 분명한 것은 너의 소식이 도성에 전해지면 문무백관들이 가만있지 않을 거란 사실이란다. 특히 바포르를 지지하는 세력이 말이다. 크게 실망할 테지…. 그들은 대체로 엄정한 차별주의자들이거든. 한 번은 참아도 두 번은 봐주지 않을 거고. 염황께서 태자를 파티바로 바꾸고 싶다 하실 때, 그땐 진정 망령이 들었나 보다 싶을 게다.”

염후는 신하들로 하여금 줄타기를 시키는 것이 특기인 여자였다.

“노망이 난 게 틀림없다는 소리라도 들었으면 좋겠구나. 그래서 차라리 태자 쪽으로 등을 돌려준다면…. 그래, 그게 제일이겠지. 나의 목적은 다름 아니라 거기에 있단다.”

염후는 남편의 자리를 빼앗아 아들에게 주려 했다. 남편도 아들도, 결국은 그녀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물론 첫째는 황실의 은혜를 벨로즈에게, 나아가 불로수에게 입히는 일이다.”

노부인은 자글자글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웃었다.

“님프가 여자였다면, 내 너와 염문이라도 만들어서 뿌렸을지 모르겠구나.”

그 말에 라히무스가 진정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염후는 채신없이 웃어 대다가 농담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곤 다시 엄정한 목소리로 칙명을 내렸다.

“라히무스야. 너는 홍염의 이름으로 님프의 숲에 가서 사명을 전할 것이다. 그 전에 먼저, 네가 우리와 연이 있음을 해백하게 보여 주어야겠지.”

* * *

정말 같잖은 짓거리였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서 귀족 흉내를 내는 스스로가 창피하다 못해 역겨웠다.

이 로열 로드를 걷는 일을 몇 번이나 연습했던가. 황족의 프라이드에 걸맞은 고상한 걸음걸이라든가, 염황이 완벽한 각도로 팔을 올릴 수 있는 높이에 앞발을 가져다 바치는 방법이라든가, 저 반대편의 발타롭스와 거울처럼 걷고 돌고 움직이는 방법 따위를 연습하면서 남자는 매일 아침 차라리 전장으로 나가고 싶은 갈망을 느꼈다. 그는 파키케팔로보다 심하면 심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훈련을 받았다. 사내가 이제껏 해 본 중에 가장 쓸모없는 훈련이었다.

아무튼 그는 해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이었다. 이 어쭙잖은 귀족들의 놀이터에서 맞이하게 된 일회성의 사교 데뷔가 오늘 그가 맡은 최종 방점이었다. 염후가 시키는 대로, 접근해 오는 여자가 있다면 그녀와 바보같이 빙글빙글 돌아야 했다.

벨로즈까지 소개를 마치고서, 대부분의 관심이 그에게로 쏠렸다. 개중엔 라히무스를 눈여겨본 여자들도 있어서 몇몇은 그에게로 다가왔다. 두 남자는 확실히 수요가 다른 얼굴이었다.

다만 벨로즈에게 접근하는 여자들과 라히무스에게로 접근하는 여자들의 마음가짐은 완전히 달랐다. 전자가 ‘나랑 한 번만 어울려 주세요.’라면 후자는 ‘내가 한 번은 어울려 줄게.’였다. 수컷 리자드와 남성 님프에게 배분되는 관심의 차이라고 할 수 있었다.

누군가 그에게 말을 붙였다.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라히무스 경?”

남자는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아야 했다. 정말 꼴사나운 호칭이었다. 물론 염후의 태생이 아니니 황자라고 불릴 수 없는 라히무스에게 그보다 더 적절한 경칭은 없었다.

사내는 제게 밀려드는 암컷들을 하나둘씩 훑어보면서 상대를 골랐다. 최소한의 의무를 마치고 나면, 나니아를 찾으러 나서겠다 다짐하였다.

‘다섯 명…. 딱 다섯 명까지만 참는다.’

그것이 라히무스가 정한 상한선이었다. 염후가 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남자가 조금 더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했다. 염황 부부의 곁에 머물되 다가오는 여자들을 물리치며 뻗댈 수도 없었다. 그러라고 춤 연습까지 확실하게 시켜 놓은 것이니까. 무엇이 됐든 염황을 만지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었다.

남편을 여럿 둔 여자는 사양이었다. 시비라도 걸렸다간 귀찮음이 배가 될 수 있으니까. 사내는 개중에 가장 뒤탈 없어 보이는, 그러니까 제일 어려 보이는 여자의 손을 골라잡았다.

“…가시죠.”

남자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춤을 추는 공간으로 이동했다. 사내는 자신의 첫 춤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저 몇 번이고 귀에 때려 박은 음악에 맞추어 몸이 기억하는 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애인의 마음이 문드러지고 있는 줄은 몰랐다.

악곡의 중간쯤에서부터 시작했던 춤을 끝내고, 여자를 돌려보내기 위해 마지막 예를 다한 인사를 건네는데, 공교롭게도 그 방향에서 챠링고가 보였다.

“라히무스 경, 그다음은….”

누군가 아래에서 말을 걸어왔지만, 사내의 시선은 챠링고에게 멈추어 있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다급한 손동작에. 여자는 어딘가를 가리키며 입 모양으로 뻥긋뻥긋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라히무스가 해석을 맞게 했다면, 그것은….

‘미쳤냐?’

그리고 손가락은 라히무스의 등 뒤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뜸 욕을 먹은 그는 한쪽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천천히 뒤를 돌았다. 리자드의 커다란 꼬리가 부채꼴을 그리며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뒤돌아본 그곳엔,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의 나니아가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시리게 얼어붙은 얼굴이 쨍그랑 깨져 버렸다.

“…나냐.”

남자는 아차 싶었다.

설마 처음부터 끝까지 저렇게 보고 있었나? 저토록 면밀하게?

지난밤 제대로 대화를 끝내지 못한 채 헤어졌고, 아침 일찍부터 이 우스꽝스러운 짓거리를 준비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너무 바빠서 그 무엇도 설명할 겨를이 없었다.

서둘러 그녀에게 돌아갈 작정이었다. 금방 끝낼 수 있을 거라고. 여차하면 챠링고나 파키케팔로가 옆에서 대신 변명을 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씹….”

라히무스는 나니아가 뒤를 돌아 도망치듯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잇새로 욕을 뱉었다. 그 욕지거리를 들은 아가씨 두엇이 몰상식하다는 듯 입술을 가리며 멀어졌다.

왜 자신은 그녀가 저를 찾지 않을 줄 알았을까. 왜 군말 없이 자신을 기다려 줄 거라고 믿었을까.

사내는 길을 비집고 나니아를 향해 뛸 듯이 걸어갔다. 하지만 사람들이 많아 속도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너무 작고 귀여워서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곳곳에서 피워 올리는 옅은 페로몬 때문에 그녀를 맡을 수도 없었다.

결국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층계를 뛰어 올라갔다.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찾기 위함이었다. 이미 나가 버렸으면 어떡하나 싶어 속을 끓이던 것도 잠시. 사내는 빠른 동체 시력으로 몇 계단 오르지 않고도 그녀를 찾았다. 그러나 곧 좌시할 수 없는 광경이 닥쳐왔다. 그럴 목적이 빤해 보이는 어느 한량 새끼가 나니아를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게 보였다.

“씨발.”

남자는 눈이 뒤집혀서 곧바로 성큼성큼 뛰어 내려갔다. 이번엔 목표물이 움직이지 않고 있어서 쫓아가기가 한결 쉬웠다. 아니나 다를까 낯선 남자는 나니아에게 춤을 청하고 있었다. 짝을 맞출 암컷의 수가 적으니 혼자 있는 여자는 쉽게 표적이 되었다. 퇴로가 막힌 나니아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머뭇거렸다.

“파트너가 따로 없으시면, 저랑….”

반질반질하게 생긴 리자드였다. 라히무스는 그가 잡으려던 나니아의 손을 거칠게 가로챘다. 그러고는 염후가 챙겨 주었던 교양이고 품위고 뭐고 다 벗어던진 얼굴로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꺼져.”

“…에?”

“얘는 내 꺼니까 딴 데 가서 알아보라고!”

사내는 평소처럼 와락 성질을 부렸다. 이로써 고상한 왕자님 흉내 내기 미션은 실패했지만, 직접 욕을 하지 않은 것만도 대견한 일이었다. 말을 마친 그는 살벌한 낯빛으로 나니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단둘이 있을 만한 곳으로 데려가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같은 기분으로는 가만히 따라 줄 나니아가 아니었다.

“이거 놔요!”

그녀가 손을 뿌리치려 하였지만, 라히무스는 빼앗기지 않았다. 몹시 불합리하다는 투로 나니아는 울분을 토했다.

“왜, 왜, 너는, 다른 여자랑 어울려 놓고! 나는 안 된다는 건데?”

억울하다는 듯 화를 내는 목소리에서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그에 라히무스는 멈칫하며 손을 놓아주었다.

“나는 일이고, 너는….”

남자는 변명하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순 자기 멋대로야!”

소녀는 참아 왔던 눈물을 터뜨리며 분개하였다.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통에 사람들의 이목이 끌렸다. 라히무스는 아슬아슬한 기분으로 꼬리를 동동 휘둘렀다.

애인은 화났고, 임무는 그르쳤다. 그의 난처한 시선이 저 멀리 염후를 향했다. 이쪽을 보고 있을까? 알 수 없었다. 일단은 가장 소중한 것부터 어르고 달래 주는 일이 급선무로 보였다.

“…가자. 일단 가서 얘기해.”

“가긴 어딜 가!”

나니아는 평정을 잃은 목소리와 표정으로 제자리에서 버텼다. 여기서 팔목을 잡아당겨 봤자 소녀를 아프게 할 뿐임을 깨달은 라히무스는 기어코 그녀의 몸을 일자로 들어 올렸다.

“이거 놔, 놔!”

‘어째 매번 이런 식이야.’

남자는 초조한 기분으로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저를 알아본, 상황을 궁금해하는 호사가들의 시선을 감내하면서 입속말을 중얼거렸다.

“네, 네. 애인입니다, 애인이에요…. 애인이 삐졌어요. 그러니까 길 좀 비켜 봐, 씨발….”

남자는 바둥거리는 나니아를 들쳐 안고 최대한 빠른 길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으슥한 뒷계단을 올라 2층 구석으로 향하는 내내 나니아는 못 알아들을 소리를 늘어놓으며 울먹거렸다. 홀의 조명이 닿을락 말락 한 자리. 남자가 염황의 손을 앞발에 올려놓고 입장을 준비하던 그 자리에 나니아를 내려놓았다. 여자는 가만히 있지 않고 회랑 위쪽을 향해 달려갔다. 절벽이 내려다보이는 그 난간이었다. 남자는 나니아를 쫓아가며 말했다.

“자기야, 오해야.”

“오해는 무슨 오해!”

소녀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거리를 두다가 이내 막다른 길에 다다라 발길을 멈추었다. 원소의 힘이 닿지 않는 곳. 진정한 사막의 바람이 뺨을 할퀴는 야외 테라스에서 남자는 드디어 나니아를 궁지로 몰아넣고 호소하였다.

“다섯 명, 딱 다섯 명까지만 상대하려고 했어.”

그 말을 듣고 기가 찬 나니아는 리자드에게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제일 예쁘고 어린애랑 췄잖아!”

라히무스는 그 모든 폭력을 맞아 주면서 몸을 굳혔다. 설마하니 그런 것까지 간파하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아, 그것도 오핸데….”

남자의 머뭇거림을 어떻게 느꼈는지 나니아는 또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다른, 다른 여자랑, 너도, 너도…!”

그러다가 곧 주먹질도 지쳐선 그의 가슴을 내리친 자세로 멈추어서 울먹거렸다.

“이제 나랑은, 그냥, 애, 애인, 관계로만, 남겠다고, 그, 그럴 거야? 라, 라히무스도, 티에트 님처럼….”

라히무스는 나니아의 작은 주먹을 큰 손안에 감싸 쥐고 분이 번지기 시작한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게 또 대체 뭔 소리냐며 어르고 달래는데, 들어 보니 얼토당토않은 소리라 헛웃음조차 나오질 않았다.

“이것 봐. 네가 뭔가 크게 오해하고 있다고 했잖아. 나 같은 반축은 그런 정략결혼의 수단으로도 못 써, 나냐.”

남자의 조소에 나니아는 코를 훌쩍였다.

“…아니야?”

“그래. 아냐.”

그러나 눈물이 멎는다고 해서 곧바로 진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 나 같은…. 부모도 없는 인간 여자애랑, 마, 만나지 말라고, 반대하면…. 그러면, 그러면 어떡, 해, 흑….”

염황의 살벌한 접선이 생각났다. 그녀의 남자를 마음껏 후리던 모습도.

“라히무스한테, 너, 너그러운 아버지는, 아, 아닌 거잖아….”

당신이 그렇게 얻어맞는 모습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아냐며 나니아가 염려하자, 리자드는 허세를 부렸다.

“노친네 때리는 거 이제 별로 아프지도 않아.”

전혀 걱정할 게 못 되는 걱정으로 스스로 속을 썩이는 나니아를 보고 라히무스는 허탈해졌다.

“내가 어디서 뭘 하든, 그 남잔 나한테 그렇게 관심 없어.”

나니아는 계속하여 믿지 못하겠다는 듯 훌쩍거렸다. 저와 같이 고아인 줄 알았던 애인에게서 자꾸만 부모가 튀어나오자, 불안해진 것이었다.

“나…. 집안에서 반대, 흑…. 아, 안 해?”

소녀의 빨개진 코가 귀여워서 실소가 다 나왔다. 남자는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핀잔을 주었다.

“자꾸 그렇게 골 때리는 소리 할래?”

그러잖아도 지금 이 우스꽝스러운 광대 행세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은가. 사내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코 밑을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사실은…. 님프 환영 쇼에 장단을 좀 맞춰 주면, 나랑 너랑 결혼하는 거….”

“…허락해 준댔어?”

“아니, 허락은, 뭐, 내가 그쪽 허락을 받을 이윤 없고….”

사내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곤 조금 부끄러운 듯이 말을 이었다.

“국혼서, 써 준대서….”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라히무스의 시선이 저 먼 사암 절벽을 향했다. 오히려 나니아 쪽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거 보통, 왕들 자식한테나 써 주는 건데….”

나니아도 그게 뭔지 알고 있었다.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서류 있으면, 너…. 나 말고 다른 새끼 데리고 못 살아. 벌받아. 아니, 너를 벌받게 하고 싶은 건 아닌데…. 아무튼 그게 있으면…. 널, 조금 더 내게…. 묶어 둘 수 있으니까…. 나는, 그게….”

너를 내게 종속시키고 싶어서, 내 것이 아닌 그 권력이 난생처음으로 탐이 났다고는 차마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었다. 머뭇거리던 그는 이내 눈을 질끈 감고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젠장, 이런 식으로 말하려던 게 아니었어!”

그러고는 가슴팍을 뒤져 초조하게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있는 줄도 몰랐던 그의 안감에서 나온 것은 아직 포장도 채 하지 못한 결혼반지였다.

“씨발, 미구앵 새끼…. 이걸 상자도 없이….”

남자는 좀스럽게 얼굴을 붉히며 구시렁거렸다. 그가 이번 연회에 맞추어 여러 가지 패물들을 납품하면서 함께 주고 간 것이었다.

“오늘, 이거, 주려고, 내가…!”

그의 길고 굵은 손가락에 비하면 너무나 작고 앙큼해 보이는 반지였다. 그것이 리자드의 앞발 위에서 발발 떨리고 있었다.

“젠장…. 이따 해가 지면, 폭죽, 터뜨린다고 했단 말이야….”

프러포즈 타이밍까지 재고 있던 그였다. 한데 모든 계획이 엉망진창으로 어그러진 듯하였다. 리자드는 단숨에 주눅이 들어선 시름시름 앓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나니아는 라히무스가 손에 쥔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느새 눈물은 쏙 들어가 있었다. 코를 훌쩍이면서도 제법 진정이 된 그녀의 목소리가, 이제는 쟁반 위의 콩처럼 통통 튀었다.

“나한테 청혼할 거야?”

그 청량한 질문에 리자드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부끄러운 기분을 감추려 애써 짧고 퉁명스럽게 대꾸하였다.

“…어.”

평소처럼 들어 올릴 게 없는 이마 위로 사내의 길고 투박한 손가락이 짚어졌다.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게 틀림없는 얼굴로 맨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당당하지 못한 얼굴을 나니아는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부리로 콕 찍듯이 말을 뱉었다.

“해.”

“…….”

“하라구, 청혼.”

사내는 입술 위에 손을 덮고서 몇 번이나 마르게 문질렀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그는 난간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눈앞에 펼쳐진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라히무스 자신의 심경과 비슷했다.

“뭐…. 뭐라고 해야 할지 다 까먹었어….”

남자가 천치 같은 얼굴로 웅얼거렸다. 나니아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 바보스러운 표정도 초조한 음성도 모두 그녀가 사랑하는 것들이었다. 사내는 난간을 짚은 양팔 사이에 여자를 가둬 두고서 정작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대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모를 시선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럼 가르쳐 줄게.”

나니아는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집어삼키며 새초롬하게 말했다. 눈물 따윈 진작에 휘발되어 버린 목소리가 또박또박 지시를 내렸다.

“좋아한다고 해.”

남자는 여전히 허공을 맴도는 시선으로 그 말을 따라 하였다.

“…좋아해.”

“아니, 아니다. 사랑한다고 해야지.”

“…사랑해.”

“나밖에 없다고 해.”

“…너밖에 없어, 난.”

띄엄띄엄 그녀가 바라는 말들을 들려주는 라히무스의 눈빛이 곧 끊어질 동아줄처럼 아슬아슬했다. 시키는 말 중에 거짓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패배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낮과 밤을 가르는 낙조가 라히무스의 얼굴을 물들였다. 그는 붉은빛이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이글거리던 태양처럼 작열하다가도, 이처럼 다 꺼져 가는 촛불 같은 얼굴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나니아는 그 불꽃을 소중히 어루만져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로 인한 화상쯤은 기꺼이 감수하고 싶을 정도로.

나니아는 손을 들어 제 양옆의 난간을 짚은 라히무스의 팔뚝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말을 시켰다.

“…데리고 살아 달라고 해.”

“…….”

머리를 말쑥하게 넘긴 사내는 자신의 긴장을 한 오라기도 감출 수가 없었다. 덕분에 나니아는 그의 잘생긴 얼굴을 구석구석을 뜯어볼 기회가 생겼다. 리자드는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심장을 토해 낼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데리고 살아 줘….”

허공을 맴돌던 라히무스의 시선이 아주 잠깐 나니아를 향했다. 그녀의 얼굴에 감추기 힘든 웃음이 스며들었다. 사내는 볼을 붉히며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시선 끝에 나니아의 손가락이 보였다. 아무것도 끼워져 있지 않은 그 하얀 손을 보고 라히무스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하게 자발적인, 그리고 너무나 멋대가리 없는 구애의 말을 꺼냈다.

“나랑 결혼해 줘, 나니아.”

그 말을 듣고 나니아는 활짝 웃었다. 정말, 활짝 웃었다. 그 모습을 본 라히무스의 온 세상이 눈부셔졌다. 저문 태양이 다시금 떠오른 것처럼.

자기 입맛대로 프러포즈를 코치해 놓고 정작 답을 해 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나니아가 환한 목소리로 대꾸하였다.

“좋아.”

라히무스는 난간을 짚은 두 손이 새하얘질 정도로 힘을 주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는 참아 왔던 숨을 터뜨리듯이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솔직히 거절당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꿈치로 뭐라도 찍어 버리면서 포효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소리를 지르는 대신, 나니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가는 손가락에, 이젠 감히 투박하다고 평가하기 힘든 요르문간드 반지를 끼워 넣었다. 남자는 단번에 쑥 끼워 넣지 못하고 손을 덜덜 떨었다. 뜨끈한 반지는 손가락 마디마다 서너 차례 부딪친 다음에야 비로소 안착하였다.

자신의 꼬리를 문 뱀. 그것은 불멸치 않는 영원한 사랑의 상징이요, 증표였다. 소녀를 향한 자신의 마음이 그러할 것이라 약속하는 행위였다.

“이렇게 귀한 건…. 매일 끼고 다닐 수가 없잖아.”

섬세한 보석 세공이 돋보이는 디자인이었다. 점점이 수놓인 보석은 화려하지만 천박하지 않게 드래곤의 비늘을 장식하였다.

남자는 떨지 않은 척 태연함을 가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까짓거 별로 비싼 것도 아닌데…. 그 전 것보단 확실히 낫네.”

흐뭇한 웃음이 번지려던 것도 잠시, 라히무스는 이내 엄하게 당부하였다.

“…빼면 안 돼.”

사내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관자놀이에 입을 쪽 맞추었다.

“잃어버리면 또 만들어 줄 테니까…. 응?”

그러곤 칭얼대며 속삭이는 것이었다.

나니아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당장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행복했지만, 사실 그에게 묻고 싶은 말들이 산더미처럼 남아 있었다.

“있잖아, 왜 말하지 않았어?”

나니아는 성난 기운이 쏙 빠진 목소리로 순수하게 궁금해했다.

“…뭐를?”

“라히무스 얘기. 아버지 얘기나, 불로수 얘기나…. 뭐 그런 것들.”

“…….”

“매일 사라져서 뭘 하고 오는지도 말 안 해 줬었고….”

나니아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것을 멈추고 눈길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다시금 여유가 사라진 라히무스의 얼굴이 보였다. 남자는 입술을 달싹이며 대꾸하기를 주저하였다. 어디서도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의 삶을, 양친 모두에게 버려진 자신을 삶을, 구태여 말하고 싶지 않았다. 천대받는 사생아라는 사실 따위도.

스스로 밝히기엔 입도 맘도 아픈 얘기였다.

“그냥…. 태생이 천한 걸 네 앞에서 또 증명하는 꼴이라…. 싫었어.”

남자의 대답을 듣고, 나니아는 마음이 아파졌다.

“나는 그런 거 하나도 상관없는데…. 그래도, 매일 뭘 하는지는 알려 줬어야지. 왜 오해하게 내버려 뒀어.”

남자가 숨겨 왔던 것들은 죄다 그런 얘기들이었다. 설령 그걸 알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아무렇지도 않았을, 전혀 개의치 않았을 그런 얘기들.

소녀는 원망스럽고 미안한 마음을 담아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아른아른한 불빛에 물든 뺨이 민망한 기색으로 일그러졌다.

“씨발, 내 입으로 그런 걸 어떻게 말해….”

피부 관리를 받고 있다든가, 식단 조절을 하고 있다든가, 워킹 연습을 하고 있다든가, 그딴 쪽팔린 일들로 매일매일 숨 가쁘게 살고 있다고 얘기할 수는 없었노라고. 그 꼴사나운 스케줄을 이제라도 밝힌 그는 뒤늦게 창피해하며 씨근거렸다.

그 말을 듣고 나니아는 더욱 애틋한 마음으로 리자드의 뺨을 쓰다듬었다.

“라히무스 살 뺐어?”

그 다감한 눈빛에 라히무스는 기댈 구석을 찾았다. 소녀가 저를 안타깝게 여기는 걸 알고 그녀의 손바닥에 적극적으로 뺨을 비볐다.

“…계속 굶었어.”

굶었다는 말에 나니아의 눈빛이 측은해졌다.

“맨날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구 그랬어?”

“응….”

소녀의 다감한 목소리가 리자드의 지친 마음을 녹였다. 그는 곧 난간에 붙인 팔을 접어 그녀에게로 몸을 더 가까이 밀착시켰다.

“어쩐지 말랐더라….”

소녀는 라히무스의 뺨뿐만 아니라 가슴, 팔뚝, 허리 등등 여러 곳을 어루만지며 가늠하였다. 단단한 살보다도 딱딱한 옷 장식이 만져졌다.

“자기가 뺄 살이 어디 있다고.”

곰살궂은 애칭에 리자드는 흐물흐물해졌다. 뺨을 주물러 주는 박자에 맞추어서 기분 좋게 고롱거리는 소리를 냈다. 두 눈이 마주친 순간, 야트막이 남아 있던 모든 부정적 감정들이 녹아내렸다. 남자는 황홀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입을 맞추었다.

“나냐, 예뻐….”

한참을 쪽쪽거리던 입술이 떨어지자, 나니아의 시선이 라히무스의 얼굴부터 다리 사이를 오갔다.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차려입은 그의 전신을 새삼스레 훑어보는 것이었다. 자신이 예쁘다고 말하는 그야말로 오늘 정말 최고로 멋졌다.

한 치의 여유도 없이 꼭 맞는 예복은 그의 육감적인 몸뚱이가 가진 매력을 극대화하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맸는데도 벗긴 것보다 더 야해 보이는 건 왜일까. 언제나 그랬듯이 결국 옷걸이의 문제인 듯하였다.

“이거 입어야 해서, 살 뺀 거야?”

나니아가 남자의 옷에 붙어 있는 요모조모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너무 커 보이면 안 된대서….”

“왜?”

“기껏 품을 맞춰 입었는데, 단추가 벌어지면 흉할 거라고….”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예복엔 이미 버티기 힘들어 보이는 단추가 몇 개 있었다. 나니아는 그 단추 하나를 풀어서 생명을 구해 주었다. 벌어진 재킷 안쪽으로 검은 셔츠를 받쳐 입은 것이 보였다. 남자는 까만색이 참 잘 어울렸다. 그 안쪽으로 손을 쑤셔 넣어서 가슴을 주물럭거리고 싶은 것을 참고, 나니아가 물었다.

“있잖아, 리자드 암컷들은 예쁘고 가녀린 수컷을 좋아해? 라히무스처럼 커다란 남자 말구?”

구태여 살을 뺐다는 얘기를 들으니 호기심이 일었다. 라히무스보다 파키케팔로에게 더 관심을 보이던 암컷들이나 염황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싶어 하는 까닭에 대한 답이 듣고 싶었다. 나니아의 질문에 리자드가 눈썹 끝을 긁적이며 대답하였다.

“뭐, 작고 귀여운 애들이…. 인기가 좋은 편인가. 아무래도 그렇지….”

대답하는 목소리에 자신감이 부족했다. 나니아는 그의 옆구리를 타고 흐르는 봉제선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피부가 까무잡잡한 편이라 검은색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남자는 흰색도 잘 어울렸다.

“라히무스는 크고 귀여운데.”

소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곤 머리를 들어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귀엽다는 말에 망가진 남자가 보였다. 바람에 나부낀 머리카락 몇 가닥이 그의 이마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아, 그는 귀엽고 늠름하고 다부진 데다 섹시하기까지 했다.

나니아는 다시 고개를 내려 그의 재킷 끝을 매만지는 척했다. 이렇게 멋지게 차려입은 그는, 정말이지 모르는 남자 같았다. 숨이 멎을 정도로 근사했다.

소녀는 조금 침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히무스, 왕자님 같다.”

그 말에 라히무스는 다시 또 케이크를 크림부터 떨어뜨린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그 초연하지 못한 모습에서 다시 익숙한 리자드가 보였다.

남자가 이상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그걸 왜 그렇게…. 슬프게 말해.”

라히무스는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녀가 그 말을 입에 담는 걸 몇 번이고 본 적 있지만, 그게 자신을 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언제나 경탄의 빛을 띠었지 이토록 비통한 느낌도 아니었더랬다.

“그냥…. 당신이 내 남자라는 게, 실감이 안 나.”

소녀는 덤덤한 투로 말하면서도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라히무스도 그 집착적인 관심을 알아차렸다. 이 탐탁지 않은 옷이 그녀에게 어떤 반향을 일으켰다는 게 조금 두근두근해져서, 그는 감히 교만해졌다.

“마음에 들어?”

“…….”

무시하기 힘들 만큼 끈적한 목소리. 나니아는 더듬더듬 눈길을 들어 그의 야릇한 미소를 마주하였다. 소녀는 멍한 눈빛으로 퉁명스레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지어?”

“무슨 표정.”

“…본인이 잘생긴 거 아는 표정.”

그 말에 사내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크게 웃지 않고 여유로운 척하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되는 표정이었다.

“잘생겼어?”

“…….”

소녀가 대꾸 없이 시선을 피하자, 라히무스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그러곤 건물에 붙어 있는 짧은 난간 위에 올려놓았다. 나니아는 순식간에 눈높이가 확 높아져서 그의 어깨를 부여잡고 발을 동동 굴렀다.

“떠, 떨어져.”

“안 떨어뜨려.”

입술을 한참 빨아 주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싫어, 무서워!”

하지만 계획과 달리 나니아가 그의 머리를 꽉 끌어안는 바람에 라히무스는 제 입술을 그녀의 입술이 아니라 가슴에다 문지르는 꼴이 되었다. 하트라인 드레스에 맞춰서 끌어 올린 가슴 둔덕 사이에 사내의 높은 콧대가 파묻혔다.

‘아, 씹…. 좋아….’

흥분한 리자드의 꼬리 끝이 휘둘러졌다. 절그럭거리는 꼬리 장식의 무게 탓인지 평소처럼 방정맞지 못했다. 한편 공간에 여유가 없는 사타구니 사이가 빡빡해져서 버거운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보드라운 가슴에 짓눌린 입술을 움직여 웅얼거렸다.

“방금 그 말, 한 번만 더 해 주면 안 돼?”

“무슨 말? 무서워?”

“아니, 그거 말고….”

“…네가 내 남자라는 게 실감이 안 난다구?”

“아니, 그 말도 좋긴 한데. 좀 더 전에 거….”

나니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그가 원한 말을 다시 들려주었다.

“왕자님 같아?”

“…어, 그거.”

나니아가 평소 그 말을 어떤 의미로 쓰는지 알았기 때문에, 라히무스는 애가 달았다. 그녀가 멋진 남자의 가슴에 달아 주는 최고의 수식어였다.

“맞아. 왕자님 같아.”

소녀는 재차 그 말을 반복하였다. 더는 비통하지도, 경이롭지도 않은 말투였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도 저를 괴롭히던 나니아의 왕자님들에 대한 열등감이 치유되는 기분이었다.

“이 말이 왜 듣고 싶은데?”

나니아가 의아하다는 듯 묻자, 남자는 그녀의 말랑한 살갗에 입술을 비비며 웅얼거렸다.

“나…. 너한테 멋지다는 말, 별로 들어 본 적 없어서.”

그 말에 나니아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라히무스의 목에 팔을 감고 무게를 실었다.

“나 내려 줘.”

저를 향해 떨어지려는 나니아를 막으려면 막을 수 있었지만, 라히무스는 더 버티지 않았다. 그녀의 당돌한 포옹 선언 때문이었다.

“안아 주고 싶어.”

리자드가 그녀를 내려 주자마자, 소녀는 그의 품에 폭삭 안겨서 중얼거렸다.

“라히무스 오늘 정말 근사해. 멋있어.”

그 말에 사내는 부푼 폐를 가라앉히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러다 수줍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나도 이제 네 취향이야?”

“아니, 나는 이제 취향 같은 거 없는데.”

“…….”

그 뜻밖에 매몰찬 말에, 사내는 소녀를 품에서 떨어뜨려 놓고 내려다보았다. 뚱한 얼굴이 단단히 불만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나니아는 그를 달래 줄 생각 따윈 없어 보이는 목소리로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난 이제 네가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좋단 말이야. 이렇게 말끔하게 차려입은 라히무스도, 며칠 못 씻어서 꼬질꼬질해진 라히무스도, 나는 다 좋아. 전부 사랑스러워.”

나니아의 말에 리자드는 히죽거리려다 말고 툴툴거렸다.

“…꼬질꼬질했던 적 별로 없는데.”

“아냐, 있어.”

“…별로 없는데.”

소녀는 라히무스의 말을 무시하곤 다시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어느새 푸르스름한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사치스럽게 반짝이는 샹들리에 불빛이 그들 발치에까지 넘어와 은은한 빛으로 전율하였다. 드리운 것은 불빛만이 아니었다. 익숙한 선율이 홀을 채우고 기둥 너머 테라스에까지 와 닿았다. 나니아는 귀를 쫑긋 세웠다.

“나 이거 알아. ‘구름 위 오두막’이야.”

그녀가 몇 번이나 벨로즈의 손을 잡고 연습하던 그 춤곡이었다. 소녀는 허리에 두른 팔을 풀고 리자드의 앞발에 손을 올렸다.

“라히무스도 이거 배웠어?”

그러고는 대답을 들어 볼 생각도 없는지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다가 다음 마디부터 스텝을 디뎠다. 한 박자, 한 박자, 익숙한 방향으로 몸이 돌았다. 연습의 성과를 여기서 이렇게 선보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라히무스도 발을 움직였다. 그녀는 너무 조그마해서, 남자는 평소 연습하던 것보다 절반은 더 작게 움직여야 했다.

소녀의 연보랏빛 드레스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귀 뒤에 꽂아 놓은 꽃핀은 또 어찌나 깜찍한지.

‘젠장, 결혼해 줘….’

이렇게 귀여운 아내라니. 지금 당장 어디로든 데리고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구름 위 오두막 같은 곳이라면 좋겠다.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둥지에 꼭꼭 숨겨 놓고, 하루인지 이틀인지 모르게 종일토록 사랑을 나누고만 싶었다.

현을 긋고 건반을 두드리는 소리에 더욱 힘이 실렸다. 이다음은 남자가 파트너의 허리를 들어 올리는 지점이었다. 벨로즈는 언제나 대충하고 넘어갔던 그 파트. 나니아는 예상 못 한 동작이라 깜짝 놀랐는데, 사내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린 그 자세로 와락 끌어안고는 내려 주질 않았다. 그대로 소녀의 얼굴에 키스를 퍼부었다. 하지만 나니아는 그의 입술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고개를 모로 비틀고 칭얼거렸다.

“나 춤추잖아.”

핀잔을 주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는 계속 입을 맞추려 들었다. 소녀는 음악이 끝나 가는 것을 아쉬워하며 재차 징징거렸다.

“너랑 춤출 거라구.”

“…네가 너무 예뻐서 그렇잖아.”

내려 달라고 떼를 쓰면서 가슴을 치는데, 라히무스는 모든 게 그녀 탓이라고 했다.

결국 안무는 완성되지 못한 채 다음 곡이 시작되었다. 나니아는 아주 잠깐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못 이기겠다는 듯 그의 가슴 앞으로 무너졌다.

남자가 나니아의 등에 팔을 둘렀다. 나니아도 그의 허리에 팔을 둘러 꼬옥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이제 어떤 스텝을 밟아야 하는지 따위 잘 모르겠는 그 낯선 곡에 맞추어서 천천히 몸을 흔드는 것이었다. 좌우로 비틀비틀. 그저 사랑하는 연인 둘이 서로를 탐할 뿐인 몸짓이었다.

“나냐.”

“응.”

“…나냐.”

“응.”

남자의 그윽한 목소리가 저 깊은 절벽처럼 낮고 깊었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 음성이 무섭지가 않고 포근할 뿐이었다.

“사랑해.”

“…응.”

“…너도 그렇다고 해 줘야지.”

불평하는 목소리에 나니아는 키득거렸다. 그러곤 흥얼거리듯이 말하였다.

“나도 사랑해….”

깊은 골짜기, 그 위로 누군가 불꽃을 쏘아 올렸다. 언젠가 그녀가 빛이라는 글자를 태워 만든 그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색은 훨씬 다양하고 크기는 더욱 커다란 빛의 무리가, 그저 까마득한 밤하늘을 화려하게 물들여 갔다.

반짝이는 폭죽이 그녀의 눈동자 안에서도 펑펑 터지고 있었다. 멍하니 벌어진 입술이, 온 신경을 빼앗긴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라히무스는 조금 다급히, 불꽃 구경에 여념이 없는 그녀의 입술을 빼앗아 물었다. 신음할 틈도 없이 소녀는 모든 호흡을 빼앗겼다. 사랑하는 남자의 부푼 가슴과 헐떡이는 숨이 느껴져서 덩달아 목이 멨다.

다시없을 그 광경이, 언제고 나눌 수 있는 입맞춤보다 아쉽지는 않았다. 눈부신 섬광의 흔적은 곧 사라지겠지만 서로와 함께한 이 기억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을 테니까.

난만한 불꽃놀이가 끝난 밤하늘엔 그보다 덜 화려하지만 더 영원한 별빛이 남았다. 한순간 번쩍이고 사라지는 충동이 아니라 오래도록 열을 발하는 사랑이. 그것이 눈부시지 않다고 해서 찬란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서로의 새카만 마음을 폭죽처럼 뒤흔들던 그들은, 끝내 서로의 가슴에 별이 되어 박혔다. 영원토록 빛날 일만 남은 사랑이, 끝을 모르고 반짝거렸다.

[리자드 스토리 R]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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