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탈렘 (21/22)

탈렘

붉은 장밋빛의 사암 절벽. 그 사이로 천혜의 요새가 펼쳐졌다. ‘이국적이다’라는 말은 탈타르노에서 사용하기엔 이른 감상이었던 것 같다. 나니아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종류의 도시 경관에 빠져들어서 두리번거리기를 멈추지 못했다.

“너무 커요…. 크고 넓어요.”

“뭐가?”

“그냥 다요. 전부다.”

압도적인 크기의 탑문을 지나 시가로 진입했다. 도시 한가운데에는 언젠가 그들이 말했던 것처럼 나선형 지구라트가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주변의 다른 건물들을 모두 난쟁이로 만들어 버릴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군데군데 부서진 흔적조차 영험해 보였다. 나니아가 저것의 용도를 묻자, 예전에는 제단으로 쓰였으나 지금은 아니라고 했다. 선대 염황 때에 개축해서 현재는 다른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고.

나니아는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먼 곳을 향하느라 보지 못했던 주변을 뒤늦게 살펴보았다. 어딜 가나 왁자지껄한 탈렘은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였다. 민가와 저자의 구분이 모호했다. 회반죽으로 적당히 마무리된 벽면. 그 옆으로 솜씨 좋게 쌓아 올린 벽돌집이 보였다. 벽돌을 너덧 개씩 묶어 수평 또는 수직으로 반복 배열한 벽면은 공들여 지은 티가 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건물은 색색의 채유 타일로 장식해 반짝이는 질감으로 완성되었다.

“햇빛이 이리도 강한데 눈까지 부시군요.”

님프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마에 손을 붙여 그늘을 만들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타일이 반사하는 햇빛이 때때로 두 눈에 꽂혀 들었다.

“정오라서 그래요.”

건물 외벽 곳곳에 햇빛을 가리는 장막이 드리워 있었다. 연달아 이어지는 차양 아래에서 그나마 숨통이 좀 트였다.

“나랑은 정말 맞지 않는 곳이야.”

눈송이처럼 뽀얀 피부의 님프가 투덜거렸다. 남자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사람도 식물처럼 기후와 식생에 따라 서식지를 정한다면, 이곳은 확실히 시뻘건 도마뱀들의 본향다웠다.

리자드 세 마리가 인파를 뚫고 길을 열어 주기 위해 앞서가고 있었다.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반듯한 어깨, 넓은 등. 삼각 꼴의 날개뼈가 걸음걸음마다 선명하게 도드라지고 걷어붙인 소매 밑으로는 팔뚝이 드러났다.

남자는 신이 정성들여 빚어 놓은 정물처럼 반짝반짝하게 빛이 났다. 크고 화려한 예술품 같았다.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색마저도 이곳과 잘 어울렸다. 태양을 닮은 사내였다.

그때 나니아는 깨달았다. 여기 이 땅에서, 남자는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것은 이제 자신의 역할이었다.

“아이, 씹…. 뭐야!”

누군가 나니아와 어깨를 부딪쳤다. 그리고 대뜸 욕지거리부터 해 댔다. 너무 놀라서 미안하다든가 실수였다든가 하는 말도 나오질 않았다. 소녀는 둔탁한 통증이 감도는 어깨를 웅크렸다.

인상 나빠 보이는 리자드 한 마리가 그녀를 깔아 보다가 멈칫했다. 웅크린 어깨 위로 익숙한 앞발이 와 닿았다. 그것은 나니아 자신의 손보다도 더 조속하게 그곳을 어루만졌다. 라히무스가 뒤를 돌아 그녀 곁으로 걸어온 것이었다.

본연의 사나운 눈빛이 그를 향했다. 어떠한 말 따위가 오간 것은 아니었다. 으르렁거릴 필요도 없었다.

“뭐, 뭐….”

단지 그것만으로도 낯선 이는 스리슬쩍 꼬리를 내리곤 제 갈 길을 가 버렸다.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적을 포기한 것이었다.

수컷들 사이에 주고받는 상호 작용이란 게 다 그랬다. 다분히 직감적이고도 본능적이었다. 그의 무의식이 먼저 말해 주었을 것이다. 이런 놈과 붙어 봤자 승산이 없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어서, 딱히 굴욕이랄 것도 없었다.

나니아는 고개를 들어 라히무스를 올려다보았다. 소름 끼치게 서늘한 얼굴. 단단한 목선에서 이어지는 날카로운 턱선이 매서운 인상을 돋우었다. 큼직해서 믿음직스러우면서도 그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이곳에서마저 그의 덩치가 제법 튀는 편임을 깨달았다. 좋게 말해서 우월한 체격이었다.

사내가 나니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군. 여자랑 다녀 본 적이 없어서.”

인산인해 속에서 자그마한 인간 애인을 보호하려면 앞서 걸을 게 아니라 나란히 걸었어야 했다. 덩달아 멈추어 선 파키케팔로가 뙤약볕에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으아, 라히무스 안 더워?”

아닌 게 아니라 이곳에서 긴 소매 옷을 입은 남자가 그뿐이었다. 나니아는 그의 목에 맺혀 있는 촉촉한 땀방울을 두드려 닦았다.

“더워요?”

“…조금.”

“갈아입을 옷부터 좀 살까요?”

나니아가 묻자 사내는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맨살 보이는 게 싫다고 했잖아.”

“그, 그랬긴 한데….”

그 시답잖은 지시를 이렇게나 진지하게 따라 줄 줄이야. 나니아는 미안하고 무안해졌다. 애인을 단속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나 학대할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사내의 신체에 작은 자유를 주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러한 결심도 곧 장사꾼들이 파는 물건을 보고 무너져 내렸으니, 이런 불볕더위 속에서 수컷 리자드들이 입는 옷이란 게 하나같이 천 쪼가리에 지나지 않아서였다. 적어도 나니아가 보기엔 그랬다.

“너무 짧아요!”

“이건?”

“목이 너무 파였어요.”

“이건?”

“입는 의미가 없지 않나요?”

“아, 이건 내가 입고 싶은데. 내게 어울릴 것 같지 않나요?”

가판대에 쌓인 옷들을 이것저것 들춰 보던 벨로즈가 마음에 드는 옷 한 벌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앞뒤로 돌려 보았다.

“그건….”

나니아는 불신 가득한 눈으로 벨로즈가 찾은 옷을 쳐다보았다. 펄렁이는 흰색 천은 착의 형태를 가늠하기 힘든 모양새로 주름이 잡혀 있었다. 언뜻 보아하니 한쪽 어깨에만 간신히 걸쳐 놓아질 모양새였다. 옷깃 사이를 가로지른 은도금 체인이 목걸이처럼 보이는 효과를 누렸다.

“아이고, 손님! 안목이 있으십니다. 제가 꼭 팔고 싶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손님께 저엉말 잘 어울려요. 어떠십니까? 기왕 탈렘까지 오신 김에 이런 옷도 한 번 입어 보셔야죠.”

님프에게선 외지에서 온 티가 풀풀 났다. 틀림없이 최소 한 벌은 사 입을 사람들이다! 돈 냄새를 맡은 장사꾼이 판촉을 시도했다.

“잘 아실까 모르겠습니다. 보통 요 바지랑 함께 입으시는데, 보시다시피 옆선이 탁 트여서 시원하죠. 예. 한번 보세요.”

본인 옷을 고르는 데에는 별 흥미가 없던 챠링고가 벨로즈를 돌아보았다.

“아, 확실히…. 빈말이 아니네요.”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님프가 고른 옷을 그의 몸에 가져다 대보았다. 나니아의 상식으로 그것은 도저히 남성 의복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우아해 보였다. 수컷이 입기엔 지나치게 하늘하늘 성스러운 그 옷은, 과연 벨로즈 님 정도는 되어야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런 나풀나풀한 옷이… 남성용이라구요?”

“별로예요?”

“별로라든가, 그런 문제가 아니라….”

기함하는 그녀의 옆에서 파키케팔로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 톨라는 원래 좀 예쁘장한 수컷한테 어울리는 전통 옷이야. 라히무스는 입고 싶어도 못 입을 테니까, 걱정 말라니깐.”

“…모, 못 입을 건 또 뭐예요?”

말도 안 되는 옷이라고 생각했으면서 막상 자신의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을 거란 말을 들으니 오기가 생겼다.

“라히무스는요, 체구는 좀 커도 체형이 잘 빠져서 뭐든 다 잘 어울려요. 뼈대가 예쁘단 말이에요.”

“아니, 애초에 라히무스한테 맞는 크기의 옷이 없을 거라니깐?”

소녀가 언젠가 티에트의 배에서 리자드 아가씨들에게 배운 말들을 구사하자 챠링고가 재미있어했다.

“냅둬. 식 올릴 때 한 벌 맞춰 줄 건가 보지.”

예식용 톨라를 차려입은 모습이 아주 볼만하겠다며 킥킥 웃었다.

논쟁의 중심에 정작 주인공은 없었다. 라히무스는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제게 맞는 옷을 찾고 있었다. 저를 두고 무슨 얘기가 오가는 줄은 몰랐다. 나니아는 그 옆으로 쪼르르 다가가 참견하기 시작했다.

“저거 입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요.”

“어떤 거.”

“팔만 가리고 가슴은 다 내놓는 저거요!”

“이건?”

“망사도 안 돼요.”

“그물 옷이 시원하긴 해.”

“아무튼, 속이 비치는 건 안 돼요.”

라히무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로서는 적당히 몸을 욱여넣을 옷 정도면 충분했다.

“도대체가, 남사스러워서 입힐 게 없네…!”

나니아가 혼잣말했다.

“이거! 이게 좋겠어요.”

연인의 까탈스러운 감찰 아래 사내는 정숙하다 못해 촌스러울 정도로 얌전한 옷을 강요받았다. 상박 노출을 포기하는 대신 목덜미를 꼼꼼히 가리는 민소매였다. 하지만 새 옷으로 갈아입은 라히무스를 보고 나니아는 허탈해졌다. 뒤늦은 깨달음이 그녀를 비웃었다.

바람 샐 틈 없이 바듯하게 죄여 입은 옷은, 빗장뼈를 비롯한 턱 아래를 모두 가림으로써 외려 몸의 굴곡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단단한 복부와 터질 듯한 가슴 근육이 몹시 외설적이었다. 나니아는 여러모로 아찔해져서 심란한 기분으로 이마를 짚었다. 옷이 문제가 아니라, 옷걸이가 너무 야했다.

남자가 자꾸만 허리 위로 말려 올라가려는 옷을 아래로 잡아당기며 물었다.

“괜찮아?”

의견을 묻는 목소리가 예사로웠다. 그의 입장에선 특별할 것 없는 일상복이었다. 이상한 데 없느냐는 확인 질문에 가까웠다.

“으응….”

나니아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사실 별로 마음에 안 들었지만, 솔직하게 말할 수가 없었다.

“어이, 나나! 네 것도 한 벌 사야지?”

“저요? 저는 지금 가지고 있는 옷으로 충분한데….”

“저기 가 보자, 저기.”

“아, 네….”

챠링고가 나니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가져다 대는 옷이란 게, 전부 가슴 가리개에 지나지 않아 보여서 나니아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당사자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라히무스가 먼저 성을 내며 반응했다.

“미쳤어?”

“왜? 리자드랑 살기로 마음먹었으면, 리자드 전통의상 한번 입어 봐야지.”

“얘한텐 속옷 수준이야, 그거.”

동대륙에서 자란 소녀의 상식을 고려해 주는 척하는 점이 가소로워서, 챠링고는 혀를 찼다.

“막상 입어 주면 헤벌쭉할 새끼가.”

사내는 부정하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다가 벌게진 얼굴로 버럭 화를 냈다.

“나 말고 다른 새끼들도 침 흘릴 거 아냐…!”

일단 지가 봤을 땐 침이 질질 흐를 옷이란 사실은 인정한 셈이었다.

라히무스는 얼굴이 붉어져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아무튼 안 돼.”

결국 나니아에게는 펑퍼짐한 카프탄드레스가 입혀졌다. 민속적인 패턴이 화려하고 어깨부터 무릎까지 일자로 떨어져서 몸매가 잘 드러나지 않는 옷이었다. 얇은 재질에 소매가 넓고 바람이 잘 통해서 시원했다.

익숙한 옷도 그녀가 입으니 새롭고 생경하기만 했다. 라히무스는 그 옆에서 손바닥을 죔죔 쥐었다. 귀여워 해 주고 싶어서 안달 난 게 보였다.

챠링고가 파키케팔로와 벨로즈의 어깨에 냅다 팔을 걸치며 말했다.

“더 눈꼴 시리기 전에 갈라지자.”

둘 사이를 훼방 놓고 싶은 님프가 저항하였으나 강인한 리자드의 어깨동무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었다. 여자가 라히무스를 보고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야이, 미련 둔탱아. 줬다 뺐다 해야 된다고. 알았지?”

그녀가 무어라 충고하는 말을 나니아는 알아듣지 못했다. 조언 대상인 라히무스는 떫은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따가 봐!”

파코가 품 안에 있던 코우의 손을 잡고 흔드는 시늉을 했다. 이미 머물 장소를 정해 놓은 일행은 명확한 재회 약속 없이 두 그룹으로 갈라졌다. 애인과 단둘이 남겨진 사내는 두근거리는 기분으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암컷과 밀고 당기기를 하라니. 라히무스에게는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그는 우회하는 방법 따위 알지 못했다.

두 남녀는 아주 잠시간 멀뚱멀뚱 서 있었다. 생명을 위협하는 적도 없고, 지켜야 할 의뢰인도 없고, 성가신 동료들도 없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견제해야 할 수컷도 없었다. 이를테면 연인의 옛 남자라거나, 첫사랑이라든가, 그녀의 냄새에 침을 질질 흘려 대는 그런 것들 말이다.

사내는 이토록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좋아하는 여자애랑 어떻게 시간을 보내면 좋을지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

‘젠장, 이럴 땐 보통 뭘 해야 하는 거지…?’

남자가 입술을 달싹이며 나니아를 내려다보자, 천연한 눈길이 그를 향했다. 직사광선을 그대로 내리쬐는 피부가 가엾도록 창백했다. 라히무스는 그녀의 얼굴 위로 커다란 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나니아가 활짝 웃었다.

정말, 활짝 웃었다.

나니아의 만개한 웃음에 익숙지 않은 사내는 머리가 아찔해졌다.

‘나한테 웃어 줬어….’

이렇다 할 말은 없었지만 여러 가지 감정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작지만 다정한 배려에 대한 감동, 챙겨 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 단둘이 남게 된 것에 대한 설렘, 기대, 그 사소한 기쁨들이 그녀를 웃게 했다. 어두컴컴한 그늘 밑에서도 소녀의 미소는 눈부시게 빛났다. 라히무스에게 그것은 하늘에 뜬 태양보다 찬란한 일이었다.

‘젠장, 예쁘잖아….’

팔랑이는 속눈썹 아래로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녀에게 사 주고픈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래, 무엇이든 사 주고 싶었다. 온 세상 금은보화를 그녀 발밑에 대령하고 싶었다. 남자가 목이 멘 음성으로 물었다. 일전의 설욕을 만회할 기회라는 생각에 안달이 나는 중이었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갖고 싶은 거?”

“그래, 뭐든.”

소녀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갑자기 그런 걸 물어봐도 곧바로 생각해 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장은 떠오르는 게 없어서 멀뚱히 눈을 깜빡였다. 그 무구한 눈빛이 사내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아까 그 옷, 혹시 입어 보고 싶었어? 뭐 가끔은 그런 옷도 나쁘지 않겠지. 내 앞에서만 입어 준다면…. 몇 벌 사는 것도 괜찮아. 아니, 아예 원단을 골라서 맞출까? 그래. 너는 너무 쪼그매서 그래야 할 거야. 어울리는 장신구도 좀 사고. 목걸이라든가 발찌라든가…. 나냐 네가 꼬리가 있었더라면 좋았을걸. 보통 꼬리 장식을 세트로 맞추는 게 가장 비싸니까 사치 부리기엔 그만한 게 없거든. 시장에선 남이 쓰던 주얼리를 더 높게 쳐주지만, 나는 아무래도 남이 쓰던 건 좀 찜찜하다고 생각하는데 너는 어때? 아무래도 새로 세공을 맡기는 편이 좋겠지.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여차하면 링고파코만 보내고 너랑 나랑은 여기 남아서, 나냐 너만을 위한 걸로….”

그때, 리자드의 거창한 소비 계획 사이로 커다란 웃음소리가 끼어들었다.

“아하하하!”

나니아가 참을 수 없다는 듯 끅끅대다가 웃음을 터뜨리고만 것이었다.

“…….”

사내는 싹둑 썰린 노끈처럼 말을 멈추고 나니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잦아든 웃음소리가 손바닥 안에서 키득거리는 소리로 남았다.

“…왜 웃어?”

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묻자, 웃음기 가득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니,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를 것 같아서. 이렇게 말 많은 거 처음 봐요, 라히무스. 당신, 말이 빨라질 때면 꼬리도 엄청 씰룩거리는 거 알아요?”

“…내가?”

사내는 머쓱해져서 관자놀이를 긁었다. 겸연쩍어하는 그를 보고 또 웃음이 났다. 한 번 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올 줄을 몰랐다.

“바보 같아.”

바보라는 말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게 보여서 재빨리 뒷말을 덧붙였다.

“귀엽다는 뜻이에요.”

“귀엽….”

리자드는 넉넉하고 탄탄한 남성미를 뽐내고 싶었기 때문에 그 말이 평소처럼 탐탁지 않았다. 챠링고에게 들은 바가 은근히 신경 쓰이던 참이기도 했다.

‘내가 봤을 때 나나 걔는 귀여운 남자 별로 안 좋아해. 어른스럽고 믿음직한 수컷한테 끌린단 말이야, 걔처럼 약한 애들은.’

남자가 무엇을 못마땅해하는 줄은 모르고 나니아는 사양하기만 했다.

“그리고 내가 그런 게 왜 필요해. 예쁘게 꾸미고 갈 곳이 어디 있다구. 짐밖에 더 되겠어요?”

‘그럴 돈이 있으면 닭이나 몇 마리 더 키우지. 매일 아침 따끈한 달걀을 낳아 줄 암탉들로 말이야.’

여자는 망상 병자인 듯 현실적인 편이었다.

‘물론 수탉 한 마리 들여서 병아리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야. …그러다 닭장이 너무 좁아지면 어떡하지? 미안하지만 수탉은 다 크면 잡아먹어야겠어.’

그녀가 신혼집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는 사이, 재물을 뽐낼 기회를 박탈당한 리자드는 시무룩해졌다.

“물론, 자기는 그런 거 없어도 예쁘긴 하지만….”

남자가 무어라 중얼거리는데 주변이 워낙 시끄러워서 잘 들리지 않았다. 주눅 든 그를 향해 나니아가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라히무스, 닭 잡을 줄 알죠?”

“…뭐?”

듣는 라히무스로서는 생뚱맞은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도 죽이는 마당에 그까짓 닭이 문제겠는가.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도 남자가 산새의 모가지를 비트는 것을 본 적 있었다. 나니아는 소리 없이 빙긋 웃었다.

‘내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고 내가 못하는 일을 도와줄 반쪽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구나!’

두 남녀가 서로 다른 공상에 빠져 있는 사이, 거리가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저마다 다른 용건들로 떠들썩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 방향으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길을 비켜라!”

우렁찬 목소리가 주변을 외어서게 했다. 저 멀리 거대한 마차 한 대가 광장의 인파를 뚫고 지나가려 하는 중이었다. 마차 주위를 에워싼 근위병들이 천근만근 같은 판금의 구둣발을 움직이며 행진하고 있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기계와 같이 규칙적이었다. 다급할 것 없는 듯 여유로우면서도 절도가 넘쳤다. 나니아는 저 멀리 펼쳐지는 행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우와, 군인들인가 봐요.”

감탄하는 나니아의 옆에서 라히무스가 떨떠름하게 팔짱을 꼈다.

“글쎄…. 저런 옷 입곤 못 싸워.”

요즈음 대륙은 동방향의 새로운 문화를 향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병사들의 정복에도 그러한 첨단 유행의 영향이 반영되어 있었다. 이쪽 기후에는 걸맞잖은 소재와 모양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모르긴 몰라도 입고 있는 쪽은 상당히 고통스러울 터였다.

“그래요? 그치만 정말 멋지네요!”

멋지단 말에 사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병사들이 입은 옷은 실용적이기보단 장식적이었는데, 적으로부터 몸을 보호한다는 당연한 목적보다도 그들이 호위하는 대상의 권위와 명예를 드높이는 일이 훨씬 중요해 보였다. 누가 보아도 혹할 만큼 웅건했다.

특정 기준을 넘는 신장의 수컷들로만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주인이 얼마나 허영심이 넘치고 과시적인 성미인지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훤칠한 사내들에게 입혀진 화려한 군복엔 그토록 탐미적인 메시지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단연 시선을 끄는 남자가 있었으니, 행렬의 가운데에서 누구보다 좋은 옷을 걸치고 누구보다 근사한 말을 타고서 고풍스러운 미감을 뽐내는 사내였다. 얼굴에 베일을 덮고 있어서 이목구비를 뜯어볼 틈은 없었으나, 탄탄한 체격과 반듯한 몸가짐으로 보아 틀림없이 월등한 매력을 지닌 수컷일 게 분명해 보였다. 나니아는 멋진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멋진 그를 보고 순수하게 감탄하였다.

“우와, 왕자님 같아.”

그 말은 산골 소녀가 잘 차려입은 남성에게 건넬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라히무스의 열등감을 긁어 부스럼을 일으키는 말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저 멋진 리자드가 호위 중인 이들은 또 얼마나 고귀한 분들이실까. 양식화된 추상무늬를 새겨 놓은 마차는 근위병들의 차림새만큼이나 화려했지만, 탑승자의 지위와 신분을 밝히는 표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차에 탄 사람은 누굴까요? 분명 높은 사람들이겠죠?”

나니아는 처음 보는 진기한 광경에 마음이 들떴다. 신기해하며 재잘거리는 그녀와 다르게 라히무스는 부쩍 말수가 적어졌다. 그러다가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하였다.

“…순례 중인 귀족인가 보지.”

신전의 영묘엔 역사적 지도자들과 현인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었다.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이유로 방문하는 귀족들이 많으니, 그런 이들 중 하나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그냥 개축된 별장에 놀러 온 한가한 한량들이거나. 어느 쪽이든 남자가 싫어하는 부류의 집단임은 분명해 보였다.

* * *

황량한 절벽 너머로 해가 저물고 어둠이 찾아온 시간. 파키케팔로와 챠링고는 출출한 배를 부여잡고 대상 숙소로 돌아왔다. 통행 중인 상인, 신전을 찾은 순례자 등 탈렘으로 드나드는 사람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이곳은 그 모든 여행객을 수용하는 크기의 복합 여관이었다.

“새 옷이 그렇게 좋으십니까?”

챠링고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녀 옆에는 누구보다 쇼핑을 즐긴 듯한 벨로즈가 두 손 가득 전리품을 들고 있었다.

“그동안 내 수준에 맞지 않는 거적때기만 걸치고 다녔으니까요. 좋을 수밖에요.”

님프는 새침하게 대꾸하면서도 입꼬리에는 은은한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배고파! 빨리 뭐라도 먹자.”

“으아아, 탈렘은 음식이 형편없는데 말이지….”

허기져서 방방 뛰는 파키케팔로의 옆에서 챠링고는 기대되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저녁은 라히무스한테 빌붙자!”

청년이 씩씩한 목소리로 기생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들은 나니아와 라히무스를 찾아 위층으로 올라갔다. 어쩌면 아직 돌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먼저 도착해 있었다.

짝짓기에 성공한 남녀 둘이서 마음껏 데이트 좀 하고 오라고 자리까지 비켜 줬건만, 이토록 빨리 돌아올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때 이른 귀환보다도 더 놀라운 사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두 남녀가 각방을 쓰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둘이 따로 잔다고? 왜?”

깜짝 놀란 것은 챠링고뿐만이 아니었다. 벨로즈도 의외로워하면서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능청스럽게 물었다.

“그럼 나랑 잘까요, 나니아?”

“뭐야! 그럼 오늘 저녁은 라히무스한테 못 얻어먹어?”

님프의 농담과 진담을 구분할 수 있게 된 소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테이블 앞에 앉았다. 멍청한 수컷들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넘기며 두 여성이 대화를 이어 나갔다.

“잘 모르겠어요. 어째서인지 아까부터 삐져서…. 본인은 아니라는데요, 분명 어느 순간부터 확 가라앉아선 평소보다 훨씬 무뚝뚝해졌거든요.”

“뭐 때문인지 너는 전혀 모르고?”

“말을 해 줘야 알죠. 그렇지 않아요?”

나니아는 그때의 답답한 심정이 떠올랐는지 왈칵 짜증을 냈다. 옆에선 파키케팔로가 저녁 식사를 주문하고 있었다.

“정찬 4인분이요. 라히무스도 오나? 5인분이요. 벨로즈 님은 안 먹어? 아, 그럼 4인분이요.”

“자기 기분 나쁜 걸 알아주길 바라는 건지 어쩐지도 잘 모르겠어요! 손을 잡아도 그냥 잡혀 있기만 하고, 제대로 말도 안 하구, 눈도 안 마주치는데요, 막연하게 달래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그러니까 저도 못 참겠더라구요.”

“언제부터였는데 그래.”

“챠링고랑 헤어지고 나서 얼마 안 돼서…. 뭐 사 주고 싶다는 거 다 필요 없다고 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그런 걸까요?”

그 자리에 있던 나니아가 모르는 일을 챠링고가 알 턱이 없었다. 잘은 몰라도 틀림없이 아주 하찮은 이유일 게 뻔했다.

‘어쩌면 그건가? 내가 시키는 대로 줄다리기를 시작했다든가.’

챠링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칼로 물 베듯 흔적 없이 사라질 갈등일 게 분명했다.

그때, 라히무스가 한발 늦게 그들을 뒤따라 내려왔다. 동료들이 돌아와서 그녀를 데리고 나간 것을 이미 알고 있던 눈치였다.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던 맹수와 소녀의 눈이 마주쳤다. 마침 그에 대한 악감정을 토로하고 있던 나니아의 눈의 뾰족해졌다. 리자드의 표정 없는 냉랭한 얼굴에선 그녀와 같은 공격성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과연 나니아의 말대로 어딘지 단단히 못마땅한 구석이 있음은 분명해 보였다.

“라히무스! 역시 내려올 줄 알았다니깐. 내가 라히무스 몫까지 시켜 놨어.”

파키케팔로가 활짝 웃으며 남자의 넉넉한 지갑을 반겼다. 나니아는 그를 노려보던 것을 멈추고 테이블 위에 대령된 식사로 시선을 돌렸다. 밀가루 반죽을 납작하게 펼쳐 구운 음식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끌었다. 라히무스는 나니아의 옆자리를 골라 앉았다. 냉전은 그녀 혼자만의 문제이기라도 한 것처럼 사내의 접근은 무심하고 뻔뻔했다. 그래서 나니아는 일부러 그쪽에 등을 돌려 앉으며 반대편의 파키케팔로를 향해 물었다.

“이건 어떻게 먹는 거예요?”

나니아의 물음에 녀석이 손바닥을 싹싹 비볐다. 익숙한 식기 대신 깨끗한 앞발로 시범을 보였다.

“여기 잘 구운 난을 펼쳐 놓고, 그 위에 좋아하는 것들은 얹어. 돌돌 말아서 여기다 찍어 먹거나, 입에 묻히고 싶지 않으면 미리 발라 놓는 것도 좋겠지. 나는 개인적으로 이 치킨 소스를 추천할게!”

나니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구석에 앉아 있던 벨로즈가 턱을 괴고 참견했다.

“척박한 땅이라 그런가, 역시 신선한 재료는 별로 없네요. 여긴 정말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건가요? 사막이라는 건 생각보다 훨씬 답답하군요.”

이런 메마른 환경에서 오랜 시간을 버텨 보기는 처음이라, 님프는 자신도 몰랐던 생리적 결함을 경험하는 중이었다. 수목이 자라지 않는 땅에서 나무의 요정은 기운을 잃었다.

“오아시스 근처에 대추야자가 자라긴 해!”

“가까운가요?”

“흠, 걸어갈 만한 거리는 아니야.”

그렇다면 쓸모없는 정보였다. 님프가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잠깐 숨 돌릴 만한 곳이 있었으면 좋겠는데요.”

챠링고가 대답했다.

“신전 안쪽에 원소술로 유지 중인 정원이 있습니다만, 작물을 기르는 곳은 아니고 말 그대로 정원입니다.”

님프가 찾는 딱 그런 장소였다. 그가 관심을 보이자 챠링고가 날짜를 물었다.

“오늘이 몇 번째 달이지?”

신전 자체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지만, 성소는 아니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깊은 내실까지 출입할 수 있는 달은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아쉽게도 현재는 그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어렵겠는데요. 많이 힘드십니까?”

“그냥 좀… 갈수록 호흡이 힘들어지는 느낌입니다.”

“이러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희 불찰입니다.”

“죽을 정도는 아니에요.”

벨로즈의 흰 손이 자신의 목을 죄듯이 쥐었다. 괜찮다고 말을 하면서도 피로해 보였다. 챠링고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지만 사실 뾰족한 수는 없었다. 귀한 핏줄을 사랑하시는 성인들 앞에서 신앙심 부족한 용병들은 천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님프가 당장 신분을 밝힐 수 있는 능력이나 여건도 못되었다. 그냥 하루빨리 탈렘을 떠나는 것이 최선인 듯싶었다.

나니아는 파키케팔로가 보여 주었던 대로 납작한 밀가루 빵을 접시에 올렸다. 섬세한 손길이 동그란 난을 네 갈래로 찢었다. 그중 한 조각에 추천받은 소스를 발랐다. 그녀는 옆에 앉은 사내를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남자는 긴 다리를 꼬고 앉아선 미동도 없이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 식사를 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를 향해 나니아가 물었다.

“뭐 좋아해요.”

그건 꼭 ‘그럴 거면 왜 내려왔어?’라고 물을 법한 차가운 음성의 질문이었다.

단단히 침묵하던 사내의 얼굴에 둥근 물음표가 떠올랐다. 나니아는 살짝 신경질적인 손끝으로 이런저런 내용물을 넣어서 빵 조각을 둘둘 감았다.

“또 그렇게 대답 안 할 거면, 주는 대로 먹든가.”

그러고는 한입 크기보다 조금 커다랗게 말아진 브리또를 남자의 입에 쑤셔 넣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하녀는 식사를 자기 입에 넣는 것보다 남의 입에 넣는 게 더 우선인 것 같았다. 그녀가 준 먹이에 리자드의 주둥이가 저항 없이 틀어 막혔다. 불룩해진 볼 안쪽으로 열심히 씹고 있는 게 보였다. 얄미운 와중에도 귀여워서 짜증이 났다.

“그래서 왜 난데없이 심술이었냐구.”

자기 때문에 더욱 말을 할 수가 없어졌는데도, 소녀는 뾰족한 투로 물었다. 남자는 입 안에 든 음식물을 반쯤 씹어 넘기고 나서야 겨우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심술부린 적 없어.”

“부렸어.”

“아니야.”

“화냈잖아!”

“내가 언제.”

“표정 싹 바꾸고서 건성건성 대꾸했잖아. 그렇게 티 냈으면서 뭐가 아니라는 거야?”

“얘들아, 밥상 앞에서는 그냥 좀 처먹으면 안 돼?”

챠링고가 입맛 떨어진다는 듯이 핀잔을 주었다. 나니아는 빵 한 조각을 더 말아서 라히무스의 입에 쑤셔 박았다. 기습과도 같은 행동에 인상을 찌푸린 채로도 사내는 열심히 저작 운동을 했다.

싸우자는 건지 말자는 건지. 그들 앞에는 눈꼴 사나워하는 중인 벨로즈가 앉아 있었다. 본래 나니아의 보살핌은 그의 것이었더랬다. 물만 먹어도 연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들키기 전이었더라면 저 다정함이 자신의 몫이었으리란 생각에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건지 사실대로 말하기 전까지, 라히무스랑 화해할 생각 없어요.”

나니아는 냉엄한 척하는 투로 말했다.

“소스는 이걸로 괜찮아요?”

간간이 그의 기호를 살폈다.

“…난 하얀 게 좋아. 아니, 화해하고 말 것도 없잖아. 내가 뭘 어쨌다는 거야?”

날 선 말들이 휘몰아치는 전쟁 통에서 간간이 사사로운 말들이 오갔다. 호불호를 이야기한 사내는 이제 아예 고개를 숙이고 입을 벌리기까지 했다. 나니아는 얄밉다는 듯이 그를 노려보면서도 손으로는 착실히 다음 난을 접시로 가져왔다.

“내가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해서 그래요? 당신 성의를 무시한 것 같아서?”

“…그런 거 아니야.”

“그것도 아니면 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답답해하자, 리자드는 우물쭈물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그냥, 좀…. 갑자기 생각할 게 많아졌을 뿐이야.”

“무슨 생각?”

“…너는 몰라도 돼.”

꺼내 말하기엔 여러 가지로 복잡한 사연이고 쪽팔린 열등감이었다. 자세한 내막을 알 길 없는 나니아에게는 세상에 그토록 기분 나쁜 말이 또 없었다.

“뭐? 몰라도 돼?”

나니아는 손에 든 스푼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테이블에 튀긴 요거트 소스 자국에서 신경질적인 심상이 드러났다.

“꼭 그런 식으로 말해야 돼?”

파키케팔로는 불안한 눈초리로 테이블 위의 코우를 들어다 제 무릎에 앉혀 놓았다. 챠링고와 벨로즈도 말없이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남녀 문제는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일임을 새삼 깨달았다.

‘뭐 저딴 걸로 싸우고 그래….’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옥신각신하던 두 사람 중에 먼저 자리를 피한 쪽은 라히무스였다. 그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무책임한 회피는 소녀의 화를 돋우었다. 쉽게 풀릴 문제를 복잡하게 꼬아 놓는 사내였다. 나니아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남자가 돈 때문에 저러는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옷이니 장신구니 뭐니, 나는 다 필요 없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저런다니까요!”

“그럼 그냥 받지 그랬어.”

챠링고는 그녀의 말을 듣고 더욱 아리송해졌으나 무의미한 싸움이란 추측에는 확신이 더해졌다. 더는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적당히 대답하고 말았다.

“그치만, 한 푼 두 푼 모아서 살림에 보태야 할 거 아녜요. 저는 그냥 꽃 한 송이 꺾어다 주는 걸로도 만족할 수 있는데요. 왜 저렇게 자존심 상한다는 얼굴인지 모르겠어요.”

검소한 여자를 처로 맞이하게 된 것에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저리 억지를 부린다며 나니아는 평소 같지 않게 땍땍거렸다.

“라히무스한테도 그렇게 말했어? 꽃 한 송이로 충분하다고?”

“네, 그랬죠.”

언젠가 그가 그녀에게 꺾어다 주었던 제비꽃이 떠올라서였다. 나니아는 그때만큼 남자에게 무언가를 받고 기뻤던 적이 없었다.

“사막에선 꽃 한 송이만큼 구하기 어려운 게 없지! 돈을 주고 살래도 없다니깐.”

대화를 반만 듣고 반만 이해한 파키케팔로가 빵을 씹다 말고 끼어들었다.

“설마 그걸 찾으러 갔으려고. 그냥 담배 한 대 태우러 갔겠지.”

챠링고가 나니아의 어깨를 두드리며 선심을 쓰듯 말했다.

“오늘은 내 방에서 자자, 나나.”

나니아는 답답해하면서 맨 빵을 씹었다.

* * *

늦게까지 잠을 설칠 줄 알았던 나니아는 생각보다 빠르고 순탄하게 정신을 잃었다. 잘만 자고 일어나서 눈을 떴을 때 옆자리엔 곯아떨어진 챠링고가 누워 있었다. 나니아는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손빗으로 정돈하면서 입술을 삐죽거렸다.

‘라히무스 없으니까 푹 잘 수 있어서 좋다, 뭐.’

일찍 잠자리에 든 만큼 일찌감치 깨어나 버린 소녀는 방 밖으로 나와서 벨로즈를 만났다. 게으른 듯 부지런하고, 부지런한 듯 게으른 그는 때때로 아침잠이 없는 노인 같을 때가 있었다.

“이렇게 일찍 어딜 가시려구요?”

외출복 차림의 벨을 보고 나니아가 물었다. 아침이라 부르기에도 다소 이른 시간이었다. 사막의 태양은 아직 푸르스름한 여명의 끝자락을 잡고 있었다. 남자는 입술에 오른손 검지를 가져다 붙인 채로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얇고 붉은 입술이 싱그러운 호를 그렸다.

“신전에 가 보려고요.”

“네? 벨로즈 님 혼자서요?”

“쉬이-.”

벨로즈는 목소리를 낮추라는 듯이 펼쳐 든 손가락에 대고 입술을 내밀었다. 아무래도 공주님께서는 은밀한 모험을 즐기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님프는 근래 들어 부쩍 담이 커졌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건너온 지금, 뚜렷한 납치 위협과 살해 위협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하지만 나니아가 보기에 벨로즈는 언제 어느 때고 불의의 사고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예기치 못한 위험들은 항시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고, 무엇보다 그는 너무 아름답고 연약했다.

“아무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시는 건 위험해요.”

“그럼 나니아도 함께 가요.”

“저… 저랑요?”

자신의 존재가 님프의 안위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을 알고 나니아는 당황했다. 달걀 두 개가 모여 봤자 달걀이었다. 공주님을 지키기 위해선 돌멩이가 필요했다.

“그러지 말고 파코나 링고가 일어나면 같이 가요. 아니면 라히무스라도….”

라히무스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끈끈한 망설임을 느꼈다. 모종의 다툼으로 냉전 중이기는 하였으나 그는 객관적으로 가장 듬직한 호위였다. 어지간한 도마뱀들 모두 그의 위협적인 덩치와 눈빛에 설설 기었으니, 그것은 파키케팔로나 챠링고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벨로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니아의 제안을 물리친 그는 도리어 그녀를 설득할 만한 이야기를 꺼냈다.

“라히무스는 지금 여기에 없어요. 그야말로 진작에 신전으로 떠났거든요.”

“네…?”

나니아는 그걸 당신이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눈빛으로 벨을 쳐다보았다. 님프는 천연덕스럽게 눈썹을 팔랑이며 한 번 더 동행을 권했다.

“궁금하죠? 같이 따라가 봐요.”

나니아는 아직 씻지도 못한 얼굴을 문지르며 머뭇거렸다. 하지만 라히무스를 팔아넘기는 벨로즈의 제안에, 이번에는 과연 응할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기별 없이 숙소를 나왔다. 탈렘의 새벽은 한적하되 다망했다. 하루를 시작하는 상인들이 덧문을 열고 갑판을 펼쳤다. 그들은 거리에 널린 이방인 따위에 관심을 보일 만큼 한가하지가 못했다. 나니아와 벨로즈는 그 사이를 생쥐처럼 누비며 지나쳐 갔다. 소녀의 발걸음은 님프보다도 더 성급하고 분주해 보였다. 라히무스는 이미 어느 길로 향했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이 멀어졌지만, 마치 그렇게 걸으면 따라잡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바쁘게 움직였다.

마침내 신전의 드높은 탑문 앞에 다다랐을 때, 벨로즈는 그 높이를 가늠해 보며 놀라워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쌓아 올린 벽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을 자연물을 깎아 만듦으로써 더욱 신성하고 당위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나니아가 탑문 꼭대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첫 번째 문이 열린다…. 문을 연다?”

“음?”

“그렇게 적혀 있어요.”

소녀는 저 높이 사람 크기로 새겨진 글자를 가리켰다. 님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벽이라고 생각했는데, 문이라…. 일종의 관문이로군요.”

손톱으로 긁으면 바스러질 듯한 사암 조각을 님프의 고운 손이 어루만졌다. 그는 마치 고대 유적지를 탐사 중인 모험가라도 되는 것처럼 흥미로워했다.

“그림이 그려져 있네요. 무슨 내용인지 알겠어요?”

붉은 돌을 깎아 만든 커다란 열주에 거대한 음각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늑대, 호랑이, 표범, 토끼, 사슴, 등등 다양한 육지 동물들의 형상을 원시적으로 그려 낸 암각화였다. 실제 모습과는 다소 괴리가 있었지만 세상의 온갖 짐승들을 나타내려는 의도만큼은 잘 드러났다. 동물들은 커다란 원으로 둘러앉아 일제히 한곳을 바라보았다. 화폭의 정가운데에 서 있는 그것은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진, 가장 익숙한 형태의 생물체였다.

“이건… 인간일까요?”

“리자드가 아닐까 싶은데.”

“하지만 꼬리가 없어요.”

“리자드 신전에 인간이 그려져야 할 까닭이 뭘까요.”

의문은 다음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문에 그려진 그림에서 차례로 해소되어 갔다. 처음에는 지나치게 거대한 나머지 한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세 번째 벽에 바짝 붙어 서서야 겨우 식별할 수 있을 만큼 암벽은 광활했다.

주저앉은 사람의 옆모습. 그리고 그런 그를 굽어보는 웅장한 생명체가 하늘을 날고 있었다. 모름지기 고대인들은 중요한 것일수록 커다랗게 그리기 마련이라, 너른 두 날개를 펼쳐 든 그것은 분명 이 그림의 주인공이자 숭배의 대상이었다.

“이건….”

실존하지 않는 신화적 생명체.

“드래곤? 아마도 그런 거겠죠.”

자신들을 용의 후예라고 부르는 자들이니 님프의 추측은 타당했다. 일련의 그림들은 아마도 리자드 자신들의 탄생 과정이라든가 태초의 순간을 묘사한 신화화일 가능성이 커 보였다.

“다른 동물들은 왜 그려 놓았을까요?”

“글쎄요….”

두 번째 그림에도 몇몇 맹수들이 등장하고 있었다.

“아마 그 모든 피조물을 꺾고 이 괴물이 인간을 차지했다는 내용으로 읽히는데.”

다른 동물들은 모두 구석진 곳에 작은 비중으로 그려져 있었다. 마치 창공을 나는 용이 하늘에서 굽어보느라 그렇게 작아 보이는 것처럼. 또는 다른 동물들이 그만큼 미약한 존재임을 드러내고자 하려는 의도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님프의 해석은 이번에도 그럴싸해 보였다.

세 번째 그림엔 두 존재가 결합하는 듯한 모습이 나타나 있었다. 인간이 용에게 납치를 당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둘이 함께 도망을 치는 것 같기도 한 형상이었다.

그리하여 네 번째 그림에선 드디어 리자드의 모습을 한 생명이 태어났으니, 이것이 그들의 탄생설화일 것이란 확신이 드는 순간이었다. 부서진 난각. 쭉 뻗은 팔다리. 그리고 강인한 꼬리. 유독 굵직하게 강조된 그 부위는 비늘 한 땀 한 땀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었다.

제 문화의 성화조차 제대로 마주해 본 적 없는 인간 소녀가 신비로운 이국의 유산에 매료되어 있는 사이, 님프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저기 봐요, 나니아.”

님프의 손가락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이목을 잡아끄는 방향을 따라 나니아의 시선이 움직였다. 그 끝엔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머리털 한 오라기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은 알 수 있었다.

“라히무스예요.”

벨로즈가 속삭였다.

“어딜 들렀다 온 모양인데….”

같은 방향에서 왔다면 마주쳤을 터인데 사내는 반대편에서 나타났다. 머리 위로는 새카만 잠행복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긴 옷자락이 꼬리를 가렸다. 벨로즈와 나니아는 마치 뒤가 구린 목적을 가지고 미행하기라도 한 것처럼 당당히 나서질 않고 몸을 숨었다. 남자가 자신을 막아선 문지기와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보였지만 대화 내용을 알아듣기엔 턱없이 먼 거리였다.

‘해치우려나.’

‘때려눕히려나.’

남자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출입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다. 일단 담을 넘지 않고 문을 두드린 것 자체가 그답지 않게 생경한 행동으로 느껴졌다. 신전의 출입구를 지키던 자들은 곧장 문을 열어 주지 않고 벽에 기대 놓은 창을 고쳐 잡았다. 경계하는 것이 느껴졌다.

‘손이 나가려나.’

‘기절시키려나.’

순탄치 않아 보이는 통행 과정을,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훔쳐보았다.

하지만 라히무스는 예상과 다르게 흥분하지도 폭력을 쓰지도 않았다. 다만 가슴팍에서 무언가를 꺼내 상대방에게 보여 주는 행동을 취했다. 그들은 거북이처럼 목을 뻗어서 그가 내민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자기들끼리 말을 나누었다.

“저게 뭘까요?”

“…양피지 같은데요. 청록색 양피지.”

나니아가 묻자 벨로즈가 대답했다. 어디서 난 물건인지, 무엇이 적혀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이 출입증의 역할을 해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문지기들이 찌를 것처럼 세워 두었던 창을 거두고 신전의 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어, 어….”

육중한 철문이 뾰족한 첨형 아치를 반으로 갈랐다. 라히무스는 열린 문틈 사이로 성큼 발을 들였다. 그 뒤로 남자는 알지 못하는 안타까운 신음이 뒤따랐다.

“따라 들어갔어야 했을까요?”

나니아의 초조한 질문에 벨로즈는 대답 없이 진중한 눈빛으로 턱을 매만졌다. 방해물을 제거해 줄 줄 알았더니만, 저렇게 정상적인 경로로 입장할 줄이야. 완전히 오판이었다. 님프는 신전 안으로 들어갈 방법을 궁리하다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미인계를 써 보죠.”

“…네?”

남자는 신전 입구를 향하여 위풍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미처 말릴 틈조차 주지 않고서. 잘 다듬어진 백은색 머리카락이 이마를 넘어 뺨 아래로 흘러내렸다. 우아한 손빗이 가르마를 흐트러뜨렸다.

“베, 벨로즈 님!”

엉뚱하다 못해 바보 같은 발상이고, 씨알도 안 먹힐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일 붙어 지내서 익숙해졌던 탓일까. 나니아는 새삼 그가 가진 미모의 위력을 잊고 지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벨로즈를 본 문지기들은 꼭 언젠가 파비올라에서 누가 그랬던 것처럼 넋이 나가서 말을 절었다.

“그게, 어유, 무슨 말씀이신지는 알겠는데….”

꽁꽁 감싸 입고 있는 옷이 체형을 가려 주어서 영락없이 여자라고 오해하는 듯하였으나 바로잡아 줄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사내들은 낯선 미인을 상냥하고 깍듯하게 대하였다. 문제는 상대가 호의적이라고 해서 부탁한 바가 꼭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사전 허가를 받지 않은 분들은 들여보내 드릴 수가 없습니다.”

“또 지금 신전에 아주 중요한 분이 와 계셔서 경비에 만전을 기하는 중이기 때문에….”

문전 박대하지는 않았으나 들여보내 주지도 않는 그들을 보고 벨로즈는 속이 탔다. 율법과 교리를 받드는 신의 병사들은 이제껏 만나 온 평범한 사병들과는 달랐다. 놈들은 독실한 만큼 됨됨이가 바르고 책임감이 강한 도마뱀들이었다.

“잠깐,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벨은 예쁜 얼굴에 대고 손부채질을 하며 애원했다.

“나처럼 연약한 숲 요정 하나가 그 안에서 대체 무슨 사고를 칠 수 있겠습니까?”

중성적인 음성을 한 톤 높여 억지를 부리는 기교가 갸륵했다.

“아까부터 숨이…. 아, 이젠 정말 도저히….”

님프가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붉은 입술은 창백한 피부 위에서 더욱 완염하게 도드라졌다.

“그게…. 아, 아무리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

벨로즈는 이젠 아예 부축을 받기에 이르렀다. 곁에 있던 나니아에게 몸을 기대서 간신히 제 몸을 지탱하였다. 열 오른 사람처럼 부채질하던 손이 가슴을 짚었다. 숨이 차서 헐떡이는 모습이 가엾기 그지없었다. 위태로운 그의 모습은 이제 막 더러운 현세에 발을 디딘 여신처럼 처연한 구석이 있었다.

“베, 벨로즈 님….”

이쯤 되니 진짜인지 연기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실려 오는 무게가 장난이 아니라 나니아는 슬슬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괜찮으세요? 많이 안 좋아 보이세요.”

“정말로, 안 괜찮아요…. 최악….”

남자가 나니아에게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젠 가성을 쥐어짤 정성도 바닥이 난 듯했다. 조바심이 난 나니아는 다급해졌다.

“사실 저희는 방금 이 문을 통과해서 지나간 리자드의 일행이에요. 들여보내 주는 것이 어렵다면 그 남자를 다시 불러 주실 수라도 없으시겠어요?”

그녀는 벨로즈를 대신하여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물었다. 위급해 보이는 벨의 상태가 그를 몰래 미행하려던 종전의 목적마저 잊게 했다. 라히무스라면 타개 방법을 찾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파수들은 난감해하며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라히무스를 호출하는 것조차도 여의치 않아 보이던 그때, 다 쓰러져 가는 벨을 돕기 위해 나서 준 리자드가 있었다. 짙은 사향 냄새를 풍기며 다가온 그는 뜻밖에 면식이 전혀 없는 낯선 사내였다.

“사막을 지나는 한 송이 요정에게 베풀지 못할 꽃은 없는 법이다. 부황께서도 님프의 숲에 은혜를 베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으실 테지.”

한만한 걸음으로 다가온 그가 느긋하게 명령을 내렸다.

“안위는 내가 보장할 테니 그를 들여보내 드려라.”

“바, 발타롭스 님….”

“아니, 내가 직접 정원까지 인도하면 될 일이구나.”

그를 알아본 파수들이 몸을 움직여 차렷 자세를 취했다. 남자의 출현이 뜻밖이었던 것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던 듯, 다급한 움직임에 경황이 없어 보였다. 그들은 왼손에 든 쇠촉창을 모래 위에 곧추세우고 각 잡힌 오른손을 복장뼈 아래에 붙였다. 저 딱딱한 제식 동작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다.

나니아가 기시감을 느끼는 사이, 남자는 빙긋 웃는 얼굴로 짜증을 냈다.

“인사는 됐고. 문을 열라고.”

신경질적인 지시에 허겁지겁 문이 열렸다. 남자는 그제야 빙긋 웃는 얼굴로 돌아와 허락받지 못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시지요?”

님프는 눈을 끔뻑였고 하녀는 감탄했다.

‘벨로즈 님 미모가 통했어!’

대상은 바뀌었지만, 성공적인 미인계였다.

두 사람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감사 인사와 함께 리자드의 뒤를 따랐다. 신전의 입구는 웅대하여서 지나는 데만도 한참이었다. 떠름한 시선이 리자드의 꼬리 끝을 좇았다. 붉은빛 꼬리가 화려한 장식들에 휘감겨 있었다. 도금인지 순금인지 야릇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물건들이었다. 가짜 금이라면 별 볼 일 없는 허영일 테고, 진짜 금이라면 상당한 고가품일 터였다. 그는 걸쳐 입은 옷도 시정의 남정네들과는 달랐다. 헐벗다시피 드러내고 다니는 여느 수컷들과 다르게, 얇은 모슬린 재질의 겉옷이긴 하지만 뭐라도 한 겹 더 둘러놓은 모습에서 단정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러니까 남자의 신분은 꼭 타인의 융숭한 존칭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다. 발타롭스라 불린 그 사내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귀인의 태가 났다.

말굽 모양의 아치가 겹겹이 펼쳐지는 복도. 그 현란한 아케이드에 발을 들이기 전, 남자가 뒤를 돌아 제대로 아는 척을 하였다.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님프가 머물 곳으로 적합하지 못하지요, 탈렘은. 멍청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남자는 자기소개를 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았다. 초면에 다짜고짜 멍청하니 어쩌니 악담을 늘어놓는 것치곤 시종일관 웃는 낯이라는 점이 이상했다. 접혀 올라간 눈꼬리가 능글맞은 구석이 있었다. 벨로즈는 처음 보는 이 낯선 리자드가 꺼림칙했다. 자신의 무엇을 보고 존대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 많은 것처럼 구는 태도도 마뜩잖았다.

“…나는 먼 곳에서 왔다는 얘길 한 적이 없습니다.”

님프가 예민하게 날을 세우자, 리자드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투로 대꾸했다.

“당연히 멀리서 오셨겠지요. 이런 사막을 찾는 님프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사내의 언변은 꼭 자기 자신처럼 매끄러웠다. 그래서 벨로즈는 스스로가 과민한 것인지 고민하였다. 그러나 탐탁잖은 기분을 완전히 떨쳐 낼 수는 없었다.

‘기분 나쁜 남자다.’

벨로즈는 그렇게 생각하고는 빈혈을 느끼는 사람처럼 관자놀이를 짚었다. 한쪽 팔은 여전히 나니아에게 기대어 놓은 채였다.

“…풀 냄새가 나잖아.”

남자가 눈을 감고서 잠이 덜 깬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 쇠약한 신음을 귀담아들은 발타롭스가 벨의 상태를 염려했다.

“회목 증상이 심각한 편이시군요.”

“회… 뭐라고 했습니까?”

“회목증. 나무를 그리워하는 병 말입니다.”

벨로즈는 발타롭스의 말을 듣고 그렇지 않아도 지끈거리던 머리에 거센 두통을 느꼈다. 자기 자신의 몸을 남보다 더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짜증스러웠다.

“그래서, 정원은 어딥니까?”

벨로즈의 독촉에 리자드는 싱긋 웃으며 길 안내를 이어 갔다.

“이쪽입니다.”

남자는 고풍스러우면서도 어딘지 한량 같은 구석이 있어서 유들유들한 미소가 의뭉스러운 기운을 자아냈다. 그가 왜 이렇게까지 대우를 해 주는지 알 수 없어서, 벨로즈를 부축하여 걷는 내내 나니아는 이곳에 어떤 함정이나 계략이 숨겨져 있지는 않은지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노파심도 이내 새롭고 낯선 공간이 주는 동요에 압도당했다.

신에게 닿고 싶은 염원을 담아 하늘 높이 쌓아 올린 지구라트. 멀리서 보았을 땐 그 우뚝 선 나선형의 제단만이 전부인 줄 알았으나 문간에 발을 들이고 나서야 이곳의 진짜 쓸모와 볼거리는 성탑의 둘레에 포진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전 안쪽은 경건하기보단 예술적이었다. 대지와 문명이 합심하여 세운 듯한 그 공간엔 타고난 환경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자 한 건축가의 노력이 드러났다. 자연이 세워 놓은 암석 사이사이 인류의 간섭이 침투해 있었다. 없어도 될 기둥을 깎아 줄을 세웠고, 주두와 주각을 깎아 놓은 솜씨도 훌륭했다. 무른 벽을 오목하게 파낸 벽감엔 용도를 알 수 없는 성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네모반듯하게 깎아 놓은 바닥과 계단은 아마 태초에 한 덩어리였을 바윗돌의 형태로 그 어떤 건축자재보다도 굳건하게 교도들을 지탱하였다.

“멋진 곳이네요….”

나니아가 조용히 님프의 귀에만 들릴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졸졸졸.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저 깊은 땅 밑에서부터 끌어 올려진 심층수가 다리 밑을 지나는 중이었다.

“물이 흐르는군요.”

탈렘에 온 뒤로 물은 언제나 귀했기에 이렇게 목적 없이 흐르는 모습을 보기는 오랜만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이곳은 탈렘의 사막화 이전 태초의 형태로 복원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돈을 쏟았습니다. 유지하는 데에도 매년 상당한 비용이 쓰이고 있지요.”

남자는 마치 그것이 제 덕인 것처럼 공치사했다. 정작 듣는 이들은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알아줄 의사가 없음에도. 벨로즈는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점점 서늘해지는 기온만큼은 정말 마법같이 신비로웠다. 나니아는 그것이 원소를 다루는 이들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리는 보도로 이어졌고, 오랜만에 모래가 아닌 흙을 보았다. 그 위로 잘 다듬어진 회양목과 꽃 덤불이 자라 있었다. 정원은 중정의 형태를 띠었다. 위층에서부터 폭포처럼 뻗어 내려온 나무줄기가 한 폭의 그림 같은 광경에 역동성을 더했다.

님프는 살 것 같다는 표정을 지으며 숨을 들이마셨다.

“훨씬 낫네요.”

한결 편안해하는 벨을 보고 나니아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신전 안쪽은 사택이라 이보다 더 깊이 접근하시면 안 됩니다.”

“신을 위한 공간이, 누군가의 사저로 쓰이고 있습니까?”

“절벽 반쪽은 중수하여 별장이 된 지 오래입니다. 잘 모르시겠군요.”

도통 무슨 경우인지 이해할 수 없어서 눈살을 찌푸리는데, 리자드가 느물느물하게 웃으며 벨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멋대로 자기 턱 끝까지 끌어다 손등에 입을 맞추는 것이었다.

“그대보다 아름다울 화초는 없을 테지만, 모쪼록 평안히 완상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누군가 가는 길을 가로막거든 그때는 저 발타롭스의 이름을 대어….”

남자가 무어라 당부를 하려던 찰나였다. 저 멀리 보이는 둥근 창문에서 갑작스레 불 나발이 치솟았다. 펑 하는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불꽃은 순간적으로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가 까만 연기를 남기며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 또 몇 번을 번쩍번쩍했다. 누군가 소리를 지르는 듯도 하였으나 내용을 알아듣기엔 먼 거리였다.

심상찮은 화광에 발타롭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오, 파티바….”

이번에는 남자가 이마를 짚었다. 침착함을 잃고 횡설수설하면서 하던 말도 채 마무리 짓지 못하였다.

“곧, 다시 오겠습니다. 다시 올 테니….”

손가락으로 정원을 가리키면서 눈은 불길이 치솟았던 위치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리자드는 굉장히 다급해져서 우아한 발걸음도 잃고 화염이 솟아오른 곳을 향해 뛰어갔다. 고고하게 흔들리던 꼬리 끝에서 이번에는 방정맞게 잘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빠르게 계단을 오르는 모습에 전과 같은 느긋함은 없어 보였다. 남자는 그렇게 점점 보이지 않을 곳까지 멀어져 갔다. 발타롭스가 떠난 후, 벨로즈는 몹시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털었다. 거의 반사적이었다.

“왜 도마뱀 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내 손등에 입을 맞추지 못해 안달인 거죠?”

그새 기력을 차린 남자가 몹시 짜증을 냈다. 벌레라도 앉았다 간 듯 혐오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여인이라 오해하셨던 것 같아요.”

“아뇨. 내가 남자라는 걸 아는 눈치였습니다.”

소녀는 님프의 편리한 미모에 감탄할 따름이었으나, 벨은 발타롭스의 빙글거리는 얼굴을 떠올리며 그러한 생각을 부정하였다.

“분명 알고 있었어.”

의심스러워하는 푸른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님프는 손을 씻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사람처럼 신경질적으로 손등을 비비며 말했다.

“여러모로 께름칙한 자이니, 다시 만나기 전에 도망치죠.”

“그, 그래도 될까요? 기다리라는 식으로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나니아가 머뭇거리자, 벨로즈는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본인은 다시 오겠다지만, 우리는 그러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그러고는 발걸음도 당당하게 정원 깊숙한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니아는 낯선 곳에서도 기가 죽거나 긴장하지 않는 님프의 성정이 대단히 부러웠다. 그에게 새로운 환경은 짜릿한 모험의 기회일 뿐인 듯했다. 간혹 지나쳐 가는 리자드들이 동족이 아닌 그들을 의아하게 바라보기도 하였으나 님프의 당당한 신모에 곧 의심의 눈길을 거두었다. 나니아는 그 곁에 흐릿하게 붙어 있었다.

적황색 암벽 사이사이로 덩굴이 흐르고 꽃밭이 둘러싼 인공 연못엔 깨끗한 물이 찰랑거렸다. 그 중심에 구릿빛으로 빛나는 청동 조각상들이 서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통통한 앞발을 들어 올리고서 입으로 물을 뿜는 우우룡 분수대였다.

만찬 같은 녹음엔 각양의 선인장은 물론이거니와 사막에선 자생하기 힘든 식물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 없는 흙을 퍼 날라 심어 놓은 초목들에게서 도리어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척박한 돌벽의 틈을 타고 자생한 담쟁이들이 특히 그랬다. 잘 꾸려진 정원에서 그리운 정취를 느끼던 벨로즈는 넝쿨이 타고 올라간 꼭대기를 쳐다보았다.

“저 위에도 뭔가 있는 것 같지요?”

나니아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매끈하게 다듬어 놓은 돌벽 너머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던 차에, 익숙한 남자를 발견한 눈이 휘둥그레졌다.

“…라히무스!”

벽 위로 아주 잠깐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라 서로를 알아볼 틈은 없었으나, 소녀는 확신했다.

“방금 라히무스 아니었나요?”

벨로즈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 없어 했으나, 이내 뒤따라가 보면 될 일이라고 말했다. 그가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호기심과 이곳에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은 두 사람 모두의 공통된 감정이었다.

“저 위로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벽 타기는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나니아의 옆에서 벨로즈는 주변을 골몰히 탐색하였다. 부식된 돌 틈 사이로 빈틈을 찾았다. 정원과 멀어지는 방향이되 라히무스가 사라져 간 쪽이었다. 그 사이로 빠져나간다면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위로 오를 길을 찾는 것은 나중 문제였다.

“일단 이쪽으로 가 보죠.”

두 사람은 암벽 사이를 비집고 한 발 한 발 걸어 나갔다. 덩굴에 붙은 나뭇잎이 다리를 간지럽혔다. 막다른 길이 나오면 그대로 뒤돌아 나와야 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후퇴를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암벽 사이는 점점 벌어졌고 따라서 길도 점점 넓어졌다. 사람이 다니라고 만들어 놓은 길은 아니었기 때문에, 먼지가 가득하고 어두컴컴했다. 심지어는 야생 전갈도 한 마리 지나쳐 갔다. 거대한 벌레라고 생각한 나니아가 화들짝 놀라 벨의 등에 매달렸다. 님프는 까르륵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라히무스처럼 번쩍 들어 올려 주진 못해서, 미안.”

웃음기 가득한 얼굴이 장난스러웠다. 나니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역시나 큰 위로가 되었다.

한참을 걷자, 또 사막 같지 않게 신비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나니아는 누가 듣기라도 할세라 목소리를 낮춘 채 님프의 어깨에 바짝 달라붙어서 긴장감을 토로했다.

“들어와선 안 될 곳에 온 것 같아요….”

그녀의 불안감엔 근거가 있었다. 이곳에선 사람의 손이 닿지 않도록 가꾸어 온 신성한 분위기가 풍겼다.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다듬어 놓은 정원이 아닌 듯했다. 동굴 안을 휘감은 장엄한 기운이 곧 침입자를 향한 경계의 칼바람으로 바뀌어 불어올 것만 같았다.

“벨로즈 님, 저희 그냥 돌아가요…. 네?”

나니아의 간청에도 벨로즈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왜 그래요? 난 여기가 마음에 들어요.”

빛을 받지 못해 어두운 바위 위로 이끼가 자라고, 지반이 낮은 곳엔 물까지 찰랑거려서 축축한 냄새가 났다. 동굴 천장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 사이로 빛이 쏟아졌다. 파란 천공이 동굴 안쪽에 숨을 불어넣는 듯하였다. 그 빛나는 호흡은 주술이 만들어 낸 것인지 자연이 만들어 낸 것인지 알 수 없이 서늘했다.

식물들도 그곳이 유일하게 양지바른 곳임을 알고 편협한 햇살 아래 모여 자랐다. 그러나 태양이 비추고 싶은 주인공은 따로 있어 보였다. 자잘한 관목 사이에 세워진 커다란 비석과 제단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을 예닐곱 쌓아 올려도 그보다 더 높을 수가 없는 돌덩이였다. 빼곡하게 쓰여 있는 글자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잘 보이지도 않는 먼 거리였지만, 나니아는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벨은 도리어 호기심을 느끼며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했다.

“평범한 돌이 아닌 것 같죠?”

무엇이 적혀 있는 것 같으냐고 나니아에게 물었지만, 그녀는 도무지 궁금하지가 않았다. 다른 누군가를 만나 추궁당하기 전에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을 뿐이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겠다는 뜻으로 벨의 손을 뿌리치려던 그때였다.

“하아…. 여보, 너무 좋았소….”

“즐거우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려.”

어디선가 간질간질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수풀 너머 미지의 공간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였다.

“한 번만 더요, 응?”

“두 번은 힘들다 말씀드리지 않았소이까.”

“그치만….”

한 사람은 청년이었고, 한 사람은 고령의 여성이었다. 덤덤한 목소리에선 피로한 연륜이 느껴졌다.

여자가 혀를 끌끌 찼다. 청년은 귀여운 척 볼을 부풀리며 떼를 썼다.

“돌아가면 또 후와 붙어먹을 기회가 없을 텐데, 그러면 짐은 외로워서 죽소!”

“듣는 귀가 없어도 경박한 말씀은 자중하시지요. 버릇이 무섭습니다.”

꾸짖는 목소리가 엄했다.

“히잉, 샤샤….”

청년은 애교를 부리며 노부인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러게 파티바는 두고 오자고 말씀드렸거늘.”

“그럼 위로할 손만이라도 빌려주시오….”

안달복달하는 그와 다르게 그녀는 지쳐 보였다. 리자드가 어떤 상태인지는 꼬리만 봐도 대충 알 수 있었다. 기세 좋게 덜렁이는 청년과 다르게, 노부인의 꼬리는 그녀의 주름진 피부처럼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딱 한 번 만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하는 목소리에 체념 섞인 애정이 느껴졌다. 그녀는 바람대로 청년의 아랫도리를 만져 주려는 듯했다.

“아…. 으응….”

노쇠한 손아귀가 양물을 쥐고 흔들자, 젊은 남자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좋아…. 너무 좋아요, 여보….”

“이런 노인네 손이 뭐가 그리 좋다고.”

여인은 한심스럽다는 듯이 혀를 끌끌 찼다. 기계적인 손짓은 다소 의무적인 느낌마저 들었으나 수컷은 이보다 더한 쾌락은 없다는 듯이 황홀경에 빠져들었다.

“아, 아, 조, 조아….”

청년은 여인이 만져 주는 것으로도 모자란 듯이 하반신을 저어 댔다. 그러더니 이젠 아예 허리를 젖혀 놓고 빈약한 가슴을 흔들었다.

“가, 가슴도 만져 주세요, 부인….”

노부인의 거친 손이 청년의 흉부로 가 닿았다. 그녀의 엄지손가락이 청년의 가슴 돌기를 살살 굴렸다. 여자는 부탁을 들어주면서도 그에 대한 규탄을 아끼지 않았다.

“아응, 조, 좋아….”

“버릇이 영 나빠지셨소. 못쓰겠습니다, 아주.”

“아, 으응, 그치만….”

“이제 그만 칭얼거리고 속히 파정하시구려.”

수컷이 숨을 헐떡이며 노부인의 입술을 할짝거렸다. 여인은 청년을 꾸중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귀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뭐가 됐든 수컷은 노부인의 예쁨을 받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고,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다.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던 까닭은 어쩌면 그 때문이리라.

나니아는 벨로즈의 입을 틀어막은 채로 숨죽여 앉아 있었다. 기이한 광경에 심장이 벌렁거렸다. 수풀에 가려서 온전히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소리만 듣고도 그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였다. 다만 두 리자드가 정말 부부지간인지 아니면 불륜 관계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이 차이가 너무도 현격했던 탓에 정상적인 연인 사이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정말은 어떤 사이든 간에, 들어오면 안 될 곳에 들어와서 보아선 안 될 장면을 보았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했다. 나니아는 초조해졌다. 그들이 주고받은 말들이란 게 당장은 유치한 밀어에 불과하였으나, 말본새와 차림새가 예사롭지가 않은 것을 보아 상류층일 게 분명했다. 특히 여자 쪽은 대단히 수완이 좋은 귀족 어르신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토록 젊은 남자를 끼고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서 모든 것을 엿듣고 엿보았다는 사실을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초조해진 나니아는 벨로즈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아직 나니아가 가로막은 손에 의해 함구된 상태였다. 건조한 손바닥 아래 규칙적인 호흡과 뜨듯한 숨결이 느껴졌다. 위기감은 그녀 혼자만의 문제인지 벨로즈는 태평해 보였다. 도무지 무서운 게 없어 보이는 두 눈이 귀엽게 깜빡였다. 이내 곧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웃음을 치는데, 도톰한 애굣살이 예뻤다. 웃을 때면 정말이지 악동 같아지는 남자였다.

그런 감상이 들 때쯤 나니아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윽…!”

남자가 나니아의 손바닥에 대고 혀를 날름거린 것이었다. 저리 치우라는 뜻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장난이 치고 싶었을 뿐인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가 당한 짓만큼이나 괴상한 신음이 튀어나왔다는 사실이었다.

“누구냐!”

허겁지겁 감추어 보려던 놀란 마음이 파란을 일으켰다. 저 멀리 연로한 애인을 졸라 대던 청년이 침입자들의 기척을 알아차리곤, 바닥에 팽개쳐 두었던 부채를 들었다. 그는 원체 헐벗은 것이나 다름없던 차림새여서 따로 추슬러 입을 옷이 없었다.

나니아는 벨로즈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서 줄행랑을 치려 했다. 아무렴 저자가 여기까지 달려오는 것보단 더 빠르게 되돌아갈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그의 공격이 멀리서도 빗발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어딜 감히!”

남자가 접선을 펼쳐 휘두르자, 날카로운 열풍이 일었다. 풀숲에 닿은 바람은 웃자란 잡초의 머리채를 태우고, 바윗돌에 닿은 바람은 그을음을 남겼다. 그것은 마치 맹금류의 앞발처럼 매섭게 날아가 불에 달군 발톱처럼 표적을 할퀴었다. 네 번의 비행은 모두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남자가 부채를 다섯 번쯤 휘둘렀을 때, 그제야 칼바람이 진정 목표했던 방향으로 나아갔다.

등 뒤로 다가온 후끈한 열기에 몸에서는 도리어 차가운 땀이 흘렀다. 겁에 질린 나니아가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는 사이, 도둑고양이처럼 새카만 망토가 머리 위로 펄럭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덜덜 떠느라 제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지는 줄도 몰랐다.

―챙!

열풍은 마치 방패에 부닥친 단검처럼 튕겨 나갔다. 일부는 반사되었고 일부는 무력화되었다. 빠르고 신속한 대응이 그들을 지켰다. 누군가 우리에서 탈출한 맹수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든 것이었다. 몸이 멀쩡한 것을 깨달은 소녀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다.

이글거리는 불바람을 막아 낸 무기. 손목에서 꺼내 든 리스트 블레이드. 암살자가 쓸 법한 그 비밀스러운 검의 주인공은, 한 마리 표범처럼 달려든 라히무스였다.

익숙한 냄새와 익숙한 뒷모습이 바람에 나부꼈다.

“라, 라히무스….”

단지 그가 나타나 준 것만으로 크게 안심해 버린 나니아에게서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아직 그럴 때가 아니었지만 벨로즈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목숨을 추리고 나서 보니 얼굴 한쪽이 시큰거렸다. 남자가 채 수습하지 못한 열풍의 끄트머리가 뺨을 스친 것이었다. 쓰라린 통증 이상으로 화끈거리는 걸 보아 고온으로 인한 상처인 듯했다. 하지만 그가 입은 상처는 라히무스가 받은 타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일렁이는 열화를 뚫고 몸을 날린 대가는 칼등이 막아 주지 못한 두 팔이 톡톡히 치렀다. 미처 막지 못한 화력이 옷자락을 찢고 생살을 태웠다. 정통으로 맞았더라면 필시 회복 불능한 화상으로 번졌을 공격이었지만, 그마저도 라히무스 같은 군병에겐 자주 있는 일이니 크게 신경 쓸 만한 부상도 아니었다.

문제는 되돌아간 바람이었다. 라히무스의 칼날이 튕겨 낸 열풍의 일부가 깨진 유리 조각처럼 시전자에게로 돌아가 그의 뺨에도 벨로즈와 같은 생채기를 남겼다.

청년은 멍한 얼굴로 제 뺨의 통증을 더듬더듬 확인했다. 그의 다섯 손가락엔 화려한 반지들이 빼곡하게 끼워져 있었는데, 그중 한 손가락이 미끈한 뺨 위에서 미세하게 다른 감촉을 감지해 냈다. 일순 망연하던 얼굴에 노여움이 가득해졌다.

“네 이놈, 라히무스-!”

분기탱천한 리자드의 꼬리가 바닥을 힘껏 내리쳤다. 가녀린 몸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제 꼬리에 둘러 놓은 장신구 몇 개를 부서트릴 정도였다.

“감히, 감히…!”

안타깝게도, 남자는 누구보다 자신의 얼굴을 목숨처럼 여기는 리자드였다.

“짐의 용안을 덧들여?!”

우렁찬 포효와 바닥을 울리는 패기가 바람 한 점 없던 수풀에 돌풍을 일으켰다. 거대한 기백이 원형으로 퍼져 나가 주변의 풀들을 눕혔다. 그는 어째 침입자의 존재 같은 것은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모든 분노를 라히무스에게 쏟아붓기 시작했다.

“잠깐….”

남자는 당황한 라히무스를 향해 전광석화와 같이 달려들었다. 펼쳐 들었던 부채를 휘둘러 상대의 옆구리를 후렸다. 아가리를 다문 접선 끝이 뾰족한 철침처럼 수차례 빈틈을 노렸다. 라히무스는 어째선지 좀처럼 전력을 다하지 못하고 그의 공격을 막아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젠장, 말 좀…!”

끊임없이 허를 찔러 대는 통에 숨을 고를 틈조차 없었다. 손목에 붙은 칼날과 부채의 깃대가 몇 번이고 깡깡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청년의 쥘부채는 라히무스의 촌철을 능가하는 듯했다. 무기를 쥔 본인도 보기보다 기세가 좋았다. 완력 면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속도만 놓고 보자면 라히무스를 앞서는 듯했다. 그가 덩치에 비해 굼뜨지 않은 편인데도 그랬다. 마른 몸은 커다란 육신보다 어쩔 수 없이 더 날렵했다.

“어딜 쥐새끼처럼 숨어들어! 이 괘씸한, 괘씸한…!”

반격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라히무스를, 청년은 사력을 다해서 상대했다. 그의 얼굴은 커다란 창피를 당한 사람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는데, 씨근벌떡한 반응이 얼굴에 난 생채기 하나를 유일한 원인으로 꼽기엔 다소 과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바바.”

뒤에 있던 노부인이 더는 못 봐주겠다는 듯 끼어든 것이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쇄도하던 타격이 멈추고, 청년은 얌전해졌다. 마치 찬물이 끼얹어지기라도 한 듯 모든 소란이 삽시간에 그치었다.

“지금 걱정하실 얼굴이, 그 얼굴이 아닙니다.”

노부인이 말했다. 팔이 뚝 떨어지고 부채 끝이 바닥을 향했다. 청년은 천천히 뒤를 돌아 그녀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하다는 투로 말을 이었다.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귀한 얼굴에 직접 열상을 입히셨지 않습니까, 폐하.”

그녀가 턱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엔 라히무스의 커다란 몸 뒤로, 나무 뒤로, 바위 뒤로, 차례로 몸을 옮기기 바빴던 벨로즈가 나니아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무서워하는 기색은 없는데 경계하는 얼굴이긴 했다. 한 마리 백록처럼 곱단한 님프를 보고 노부인은 가볍게 코웃음 쳤고, 청년은 손에 든 부채를 뚝 떨어뜨렸다.

“다그칠 것이 아니라 개가를 불러 주어야지요.”

노부인은 자그마한 혼잣말과 함께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휘저었다. 그녀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금빛 오라를 뽐내며 자를 그렸다. 지휘와도 같아 보이는 그 움직임은 지금 이곳에 없는 누군가를 부르기 위한 신호였다.

* * *

수많은 삼각형과 역삼각형의 모서리가 서로 잘 맞아떨어지게 짜인 기하학적 무늬의 창문. 창문 바깥으론 널따란 정원이 펼쳐지고 창문 안쪽으론 햇볕이 쏟아지니, 채광이 훌륭하고 경관이 빼어난 방이었다. 아마 이곳이 성스러운 신전의 별채에서 가장 거룩하고 보배로운 장소일 터였다.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에 딱 어울리는 그런 곳이었다.

방에는 창문으로 가까워질수록 높아지는 계단식 고저 차가 존재했는데, 벨로즈는 리자드 부부와 같은 높이 즉 대등한 위치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벨은 자신이 그들에게 있어 융숭히 환대할 만한, 그럴 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직감하였다.

벨로즈 카뮈안. 그는 비록 반쪽짜리 그림자 공주의 신분일지언정, 날 적부터 고귀한 지체를 타고난 자였다. 그래서 이토록 낯설고 위압적인 상황 속에서도 겁먹거나 기죽지 않고 맹랑할 수가 있었다.

“짐의 결례를 부디 용서하시게. 내 염후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던 중에, 심히 창졸하여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아볼 생각도 못 하였으니.”

청년이 부채를 펼쳐 제 얼굴에 바람을 쐬며 말했다. 헐벗을 몸을 가릴 제대로 된 옷을 갖추어 입고 나타난 후였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이곳이 어떤 곳인지 이해가 부족했습니다.”

“그 또한 괘념치 마시게나. 그대 이곳에 발길을 들임이 응당 운명이었거늘.”

리자드는 살기를 지우고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실수를 수습하고 상황을 모면하려는 너털웃음이었다. 벨은 그를 대함에 있어 건조하지만 정중한 태도를 지켰다.

“제가 서쪽에 발들인지 얼마 되지 않아 서툰 것이 많습니다.”

“내 이해하다마다. 그간 얼마나 곡절이 많았겠소만. 귀공에겐 변변찮을 환경이나 모쪼록 충분히 노독을 풀고, 그리운 모목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리다.”

“생면부지의 외인을 이리 대접하여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벨로즈는 감사를 말하는 동시에 떨떠름한 시선으로 상대방을 훑어보았다. 눈앞의 남자를 관찰하던 벨의 눈길이 옆에 앉은 노부인에게로 옮겨 갔다가 다시 그에게로 되돌아왔다.

‘그러니까 이쪽도 사실은 저 정도 연배란 말이지?’

님프가 청년에게 깍듯이 예를 갖추는 까닭은 잘 알지도 못하는 그의 사회적 지위 따위가 아니라 연로한 나이 때문이었다. 파코만큼 앳된 얼굴로 중늙은이 같은 말을 구사하는 그는, 사실 나이를 먹을 대로 먹어서 반백이 훌쩍 넘은 리자드라 했다.

여남은 살도 아니고 삼사십 살가량을 속여 먹는 얼굴이라니.

‘사기꾼.’

그것이 남자에 대한 벨로즈의 첫인상이었다. 팽팽한 얼굴에선 젊음에 대한 집착이 생생하게 느껴졌고, 그 거짓된 왕성함은 소름이 끼치다 못해 역한 기분마저 들게 했다. 그의 곁에 자신의 세월을 거부 없이 받아들인 노부인이 함께하고 있었기에 더욱 대조되어 보였다.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청년과 슬하에 그보다 더 나이 많은 아들을 두었을 법한 노부인. 가시적인 모습만 놓고 보자면 상당히 기괴한 한 쌍이었다. 아무리 좋게 봐 줘도 엄마와 아들, 또는 노부인과 그의 젊은 애인쯤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벨로즈는 그러한 생각을 일절 내색하지 않으며 말했다.

“동녘에선 아드님께 신세를 졌더랬지요. 두 부자분의 은혜가 한량없습니다.”

그 말에 리자드는 멈칫하며 당황하였다. 의자 팔걸이에 올라와 있던 두 앞발이 힘껏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나, 나는 그 짐승을 아들로 생각하지 아니외다.”

다감하던 목소리에 날이 섰다. 곁눈질로 부인의 눈치를 살피는 꼴이 심히 미심쩍었다. 벨은 아리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스스로를 염황의 이 황자라 소개했었습니다.”

그 말에 남자는 다시 또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에 민망한 착각을 하고 있었음이 드러났다.

그 옆에서 노부인이 웃음을 터뜨렸다. 검버섯이 피어나려는 주름진 손가락이 엉큼한 사기꾼의 볼을 툭 건드리고 떨어졌다. 보는 눈이 있는 곳에서 즐기기엔 지나치게 체통 없는 애정 행각이었으나 도저히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는 듯 자신의 남편을 귀여워했다.

“여보….”

리자드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커다란 눈망울은 금세라도 울먹일 것처럼 촉촉해졌다. 그가 가진 거짓된 청춘의 얼굴은 정말이지 다채롭기도 했다. 근엄한 척하는 어조에 부합하지 않는 목소리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의 음색은 이제 막 성년식을 마친 소년처럼 청초한 구석이 있었고, 그 때문인지 왠지 모를 어수룩함과 느슨함이 엿보였다.

‘포악한 도마뱀이라면서요.’

벨은 홍염 땅과 관련한 챠링고와의 대화가 헛꿈이었던가 하는 고민까지 했다.

이 채신머리없어 보이는 리자드의 이름은 바포르 이야라 마그라타. 제국을 발아래 둔 무소불위 지배자, 염황이라 불리는 사내였다.

극악무도한 폭군인지까지는 잘 모르겠으나 변변찮아 보이긴 하였다. 여러모로 생각과는 영 딴판인 인물이었다. 그에게선 군림하는 자에게서 느껴지기 마련인 원숙한 무게감, 위신, 체통 같은 것들을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발카모스. 그 애는 우리 둘째가 맞소이다.”

염황 대신 그의 부인이 대답하였다. 벨로즈는 ‘역시 그렇지요’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발카모스 바포르 마그라타. 어디서 많이 들어 봤다 했더니 게롤린에서 전세를 뒤집어 주었던 그때 그 헌병대 사령관의 이름이었다. 바포르 이야라 마그라타. 왕가를 비롯, 명망 높은 리자드 가문에서는 호주의 이름을 미들네임으로 삼는 관습이 있었다. 벨은 가물가물한 발카모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앞의 남자와 그 외견을 비교해 보았다. 아들보다 더 젊어 보이는 아비라니. 소름이 끼쳤다. 둘을 나란히 세워 놓으면 틀림없이 부자지간보다는 형제지간으로 보이리라.

“아들 녀석은 잘 지내고 있더이까. 둘째는 환향이 난망하여 보지 못한지가 꽤 되었소이다.”

“예, 뭐….”

몇 마디 섞어 보지도 않은 사내의 무사 안녕에 대해서 알 턱이 없었다. 님프는 적당히 말끝을 흐렸다. 행여나 아들이 그리운 마음에 꼬치꼬치 캐물어도 해 줄 말이 없어 벨로즈는 급히 화제를 돌렸다.

“한데, 염황께선 어찌 그리 저를 잘 아십니까? 궁금해하여도 되겠습니까?”

당신이 나의 무엇을 어떻게 알고 처음부터 그리 알은체를 할 수 있었느냐. 님프는 지금 그렇게 묻고 있었다. 벨은 자신이 그 정도로 유명 인사일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얼굴이 알려질 틈 따위가 없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불로수의 덕을 보는 이들 중, 그 후계가 행불된 일을 모르는 자는 없소.”

이번에도 대답은 염후의 몫이었다. 염황은 재빨리 입꼬리를 잡아당겨 금 간 얼굴을 감추고 그녀의 말이 맞다며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하지만 님프는 계속해서 풀리지 않는 의문을 제기했다.

“저를 맺어 주신 어머니조차 제 얼굴을 이리 빨리 분간해 보시진 못하실 듯하여 여쭙는 것입니다.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저를 알아보셨지요. 마치 기다리고 계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또다시 절절맬 기색을 보이는 염황의 손등에 염후가 앞발을 올렸다. 젊고 싱그러운 피부 위로 주름진 손등이 겹쳤다.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와 다르게 노부인은 시종일관 침착하고 여유로웠다.

“귀공의 누이를 아오. 그녀의 얼굴과 똑 닮은 것을 보고 알았소.”

계속해서 말문이 막히는 남편을 대신하여 그녀가 대답하였다.

벨은 누이 얘기에 동공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수긍하였다.

“…그렇군요.”

누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따위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벨로즈 자신이 비슷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다지 알고 싶지 않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무관심이 염황 부부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누이를 안다는 염후의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불로수의 후계가 공교롭게도 둘이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한 열매에서 태어난 두 씨앗이 똑 닮은 쌍둥이일 거란 추측은 따로 증명해 볼 필요도 없이 당연한 사실이었다.

“이곳에선 아무도 저를 알아보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벨이 아쉽다는 듯 말하자 염후가 웃었다.

“귀공 같은 미남은 혁혁잖기 어렵지요.”

“샤샤!”

그녀의 미남 운운에 염황이 발끈했다. 남자는 부인이 저를 두고 다른 남자의 미색을 칭찬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했다. 노부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남편의 투정을 일축했다.

“일일이 질투하지 마십시오, 폐하. 피곤합니다.”

그에 염황은 입술을 쭉 내밀곤 삐진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 저리도 가벼울 수가.’

벨로즈는 질색했다. 정말이지 어른으로서의 위엄이라곤 요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보다 보여드릴 게 있지 않습니까.”

여자는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상기시키듯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남편에게 양보했다. 그러자 염황이 손뼉을 치며 ‘옳지’ 하곤 말했다.

“예비 모목께 보여드릴 님프의 열매를 가져오라.”

명령을 내리는 그의 목소리에 우렁찬 힘이 실렸으나 여전히 어른 흉내를 내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그들의 수하가 작달막한 손수레를 끌고 돌아왔다. 수레에 담긴 것은 새빨간 과실 세 덩이였다. 푹신푹신한 솜을 쿠션 삼아 웅크리고 있는 그 열매들의 크기는 수박만큼 커다랬으되 청포도 껍질처럼 얇은 막에 둘러싸여 있었다. 탱글탱글해 보이는 과육은 속이 비칠 정도로 투명했다.

“이것은….”

처음 보는 물체에 놀라워하는 벨로즈를 보고 염황이 설명했다.

“밀수꾼들에게서 압류한 것들이네.”

경악스러운 것은 열매 그 자체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투명한 과육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의 형체였다. 염황은 다소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러나 안타까움을 느끼는 척 말했다.

“그대, 벨로즈. 님프들의 문제에 리자드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네. 하지만 도난당한 열매들이 유멘타처럼 팔려 가는 상황이 나라고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모른 척할 수 없어 밀수업자들로부터 빼앗아 짐이 보호 중이었다네.”

남자가 무어라고 떠벌리는 말들을 벨로즈는 제대로 듣지 못했다. 다만 열매 속에서 자라는 새 생명을 물끄러미 구경하고 있었다.

포유류의 태아처럼, 과실 속 씨앗처럼, 아기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아마 벨로즈 자신도 이와 같은 모습으로 태어났을 거라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런 것은 처음 봅니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말을 아꼈다. 님프가 님프의 탄생에 대해 리자드에게 묻는다는 게 다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홍염 땅에서 님프 열매 밀거래는 엄격히 금지하고 있네만 뜻처럼 되지 않아 골머리 썩고 있소. 좌우간 황실도 님프 유괴 방제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아주게나.”

벨은 그가 왜 연신 변명조로 말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이렇게 유괴당한 님프들이 어디로 가는지, 무슨 쓸모가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열매를 도둑맞는 일은 흔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소. 특히 그대 불로수의 후계 열매가 사라진 일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싶을 정도로 난제였으니.”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범인을 찾는 중이라 했다. 남매를 품은 열매가 흘러 흘러 훌레랑에 닿기까지 무수히 많은 손을 거쳤으리라 추정할 뿐이었다.

벨은 저와 비슷한 운명이 될 뻔한 님프의 씨앗들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껍질을 찢고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아 두려웠다.

“그래서, 이것들은 언제 태어나지요?”

“그것은 우리도 알지 못하네. 하여 귀공에게 보여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염황이 수레 위로 두 팔을 벌려 가져가라는 시늉을 했다.

“후계여, 그대 뜻대로 하세.”

“…….”

벨로즈는 별안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를 본 리자드도 당황하였다.

“제가 뭘 어찌해야 합니까?”

님프가 물었다. 언뜻 당돌하게 들리는 질문이었으나 진심으로 궁금하였다.

“어, 어떻게 하냐니. 당연히….”

염황은 우지끈 부러진 나뭇가지 같은 몸짓으로 더듬거렸다. 무언가 계획이 있었는데 시도조차 못 해 보고 어그러진 느낌이었다.

“바바.”

염후가 자신만이 부르는 애칭으로 나지막이 그를 읊었다. 얕은 한숨이 함께였다.

“잠시 이야기를.”

그녀가 자리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염황이 벌떡 일어나 그녀를 쫓았다. 부부는 잠시 벨로즈의 귀가 닿지 않는 곳으로 가 의논하였다. 벨로즈는 그들이 자기 몰래 무슨 대화를 나누려는지 궁금했지만, 체통과 자리를 보전했다.

장막 한 겹 너머의 테라스. 그곳에서 염황은 자신의 처에게 매달리며 혜안을 보챘다.

“어떡하면 좋소, 부인? 전혀 감격하지도 고마워하지도 않는 것 같구려!”

“그러게, 소용없을 거라지 않았습니까.”

조마조마한 그와 다르게 염후는 침착했다.

“먼 땅에서 깨고 자라 아무것도 모르는 애송이입니다. 불로수의 후계는커녕 평범한 님프보다도 동포 의식이 없소.”

그녀가 남편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워서 흡족했다. 그는 불로과 섭취를 멈춘 후로 하루하루가 다르게 늙어 가는 것 같다면서 생떼를 썼지만, 그녀가 보았을 때는 언제고 비슷하게 귀엽고 젊었다.

남자가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칭얼거렸다.

“그치만…. 바바는 좋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여보.”

그는 부인과 단둘이 있을 때면 꼭 갓난쟁이라도 된 듯이 굴었다. 염후는 그런 남편의 볼을 꼬집으며 질책했다.

“침대 밖에선 경망되게 행동치 마시오, 바포르.”

남자가 히잉, 하는 소리와 함께 아양을 떨었다.

“저 님프는 자신에게 어떤 권한이 있는지도,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도 몰라. 그러니 개인의 신세와 혜택에 의존해서는 안 될 노릇이지. 단지 불로수 한 알 얻어먹자는 것이 우리 목적이 아님을 간과하지 마셔야 하오, 염황.”

엄중한 목소리로 혼이 난 후, 남자는 주눅이 들어서 포옹을 풀었다. 노부인은 깜찍한 남편의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정말 도둑맞은 님프 몇 마릴 돌려주는 것으로 화친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겝니까? 순진하기도 하지….”

“…짐이 또 우둔하였소?”

“다소 그렇소.”

바포르는 또 요상한 소리를 내며 귀여운 척을 했다. 나잇살 처먹은 남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얼굴만 보자면 귀엽긴 했다.

“의외로 감상적인 구석이 있다니까.”

염황 부부는 금실이 좋기로 유명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처첩을 취할 수 있는 권력자들이 철저히 서로만을 바라보며 몇십 년을 부대껴 살았다. 샤르쿠스 주라라 보르레르. 그녀는 남편이 저질러 놓은 바보짓을 수습하고 그를 예뻐해 주는 게 일인 여자였다. 홍염 땅의 군주는 염황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 버티고 서 있는 염후가 실세라는 사실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 여자는 남편을 도와 국무를 돌보았고 때로는 아예 대신하기도 하였다. 염황은 사랑스러운 남편이었지만, 훌륭한 위정자는 아니었다. 하루빨리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 그가 다스리는 영토엔 더 도움이 되리란 생각이 들 정도로.

남자는 그녀가 부재중일 때면 꼭 사고를 쳤다. 특히 최근 몇 년은 님프의 숲을 태워 먹은 후로 황실에 대한 평판이 바닥을 치는 중이었다. 그녀는 잃어버린 민심을 되찾아 이반을 잠재울 방법을 찾고 있었다. 시야가 좁은 염황의 목표는 불로수 그 자체였지만 염후의 바람은 그 너머에 있었다.

“내가 생각한 방법대로 합시다.”

“그건…. 그건 싫다고 했잖소!”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눈치챈 남자가 펄쩍 뛰며 전에 없이 강렬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 무에 어려운 일이라고. 폐하께서 하교하신 일임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문제를 어찌 그런 식으로 타개할 수 있단 말이오?”

“불로수의 후계가 홍염의 은혜를 입었음을 공고히 할 좋은 기회요. 라히무스의 공을 황실의 덕으로 취하여 이참에 빚을 지우잔 말입니다. 함께 돌려보낼 님프 열매들은 쐐기로 삼읍시다. 아시겠소?”

정사를 논하는 염후의 태도는 극히 예사롭고 사무적이었다. 도리어 참을 수 없어 하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른 쪽이었다.

“제발…. 그 얘기는 제발 그만합시다, 여보. 어찌 그 괴물을 서자로 인정한단 말이오. 상상만으로 끔찍하오!”

염황은 매우 감정적으로 분노하고 애원하기를 반복했다.

“나에게 주는 벌이지요? 순결을 지키지 못한 일에 대한 벌을 이제야 내리시려는 거잖아요. 몇십 년이 지난 지금에야!”

“멍청한 소리. 몇 번을 이야기했지만 나는 정말 그 애를 싫어하지 않소, 바바. 당신 피가 반이 섞인 아이를 내 어찌 미워해.”

“그 녀석은 내 삶의 가장 큰 치부요! 놈을 내 마당 안에 들이느니, 차라리 님프들과의 화친을 포기하겠소!”

설득되지 않겠다는 듯 도리질 치는 그를 보고 염후는 노하였다.

“철없는 소리 마시오, 바포르. 이것은 얼어붙은 정세를 조처하고 파탄한 숲과의 관계를 돌이킬 마지막 기회요.”

염후는 태자에게 그 어떤 잡음 없이 안온한 권능만을 물려주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남편이 싸질러 놓은 변을 퇴비로 바꾸어 놓을 필요가 있었다.

“무조건 내 말대로 하는 겁니다.”

그녀는 단호한 지시와 함께 염황의 등을 떠밀었다.

* * *

잠시 후 벨로즈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돌아온 이는 샤르쿠스 한 사람뿐이었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좌정하여 곁에 있던 시종에게 턱짓하였다. 그사이 식어 버린 찻물을 다시 내오라는 뜻이었다. 시종이 고개를 조아리며 물러간 뒤에, 염후가 말했다.

“내 흉금을 터놓고 처음부터 다시 술회하리다.”

혼자 남은 그녀는 도리어 둘이었을 때보다 더 숭엄한 분위기로 벨로즈를 압도하였다. 숙련된 통치자 특유의 중후한 멋과 여유는 오히려 이쪽이 더 갖추고 있는 듯하다고, 벨로즈는 생각했다.

“말씀하시지요.”

“귀공은 동쪽에서 자라 아무런 반발감도 느끼지 못하겠소만, 황실과 독대하여 줄 모목의 후계란 기실 이 땅에 그대가 유일할게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는 님프를 위해 샤르쿠스는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처럼 차근차근 설명하였다. 몇 년 전 실패로 돌아간 그들의 침략 전쟁에 대해서였다.

“염황께서는 지난날 홍염의 몸뚱이를 부풀리는 일에 안맹하여 불로수를 비롯한 님프의 숲에 적잖이 미움을 사셨소.”

그녀가 노산의 몸을 조리하고 늦둥이 막내딸을 품기 위해 수도를 멀리 떠나 있던 때였다. 염후가 자리를 비운 틈에 무사안일해진 염황은 적적함을 이기지 못하고 젊은 시절처럼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는 본디 과시적이고 호전적인 성품으로 몸소 출정하기를 즐기는 군주였는데, 어느 때고 앞뒤 분간 않고 달려들기를 잘했다. 처음엔 두려울 것 없는 맹렬한 남진으로 세력을 넓혀 나갔다. 남쪽으로 남쪽으로 홍염의 영토가 끝없이 확장되어 가는 듯했다. 그러다가 마지막 칼끝이 님프들을 향했다.

“건드려선 안 될 벌집을 건드렸던 게지.”

샤르쿠스는 당시를 회상하며 딱하다는 듯 말했다. 님프의 숲은 대륙의 산실이자 질서였다. 염황의 군사들은 그곳을 중립 지대로 보전하기 위한 결집 세력과 충돌하였고, 특히 용골에서의 전쟁은 바포르의 계획대로 흘러가 주지 않았다.

“수습에 나선 황자들이 가까스로 군대의 괴멸을 막고 태자는 종전 의사를 천명하였소. 무가치한 희생을 반대하는 입장에 참전 세력 모두가 동의하였지. 하나 이미 염황의 군대가 숲 하나를 송두리째 불태워 버린 후였소.”

그리하여 제국과 님프가 반목하고 지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이야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맺히는 과실이 적어 갈수록 지난해지던 불로과의 유통도 그 일을 계기로 완전히 단절되었으니, 님프의 숲 침공 사건은 우매한 전쟁광의 다시없을 실책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묻소. 귀공은 불로과에 대해 알고 있소?”

“효험에 대해서라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폐하의 존안을 보자마자 대중했을게요.”

염후는 영민한 님프가 그를 향한 호의의 저변에 어떤 기대감이 깔려 있는지를 눈치챘을 것이라 짐작하였다. 실제로 벨로즈는 염황이 자신의 존재를 반기는 까닭을 대략적으로나마 가늠하고 있었다. 도무지 자기 나이로는 보이지 않는 그의 인공적인 젊음 때문이었다. 불로수의 후계라는 자신에게서 필시 무언가를 얻어 가려는 게 틀림없다고, 그렇다면 혹시 모를 비합리적인 거래에 휩쓸리지 않도록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겠다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노부인은 조금 지쳐 보이는 몸을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기대어 앉으며 말했다.

“귀공. 믿어 줄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단한 것을 축원치 않소. 심지어는 불로과조차 안중에 없소. 불로수의 후계 자리를 이어받는 것이 귀공일지 귀공의 누이일지조차도, 나는 전혀 관심에 없소.”

과연 믿기 힘든 말이었다. 염황이 노화에 집착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염황께서는 염후를 위해 그리 젊게 살고 계신 것이 아닙니까?”

님프의 물음에 노부인은 코웃음 쳤다. 정말로 불로과의 존재 따위는 중요치 않아 보였다.

“그리 보이나? 말로는 내 마음이 떠나갈까 두렵다 하지만, 나는 그러라고 한 적이 없소. 그저 어린 수컷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그만의 아집이지.”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는 듯, 여자는 한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러고는 희미한 웃음과 함께 말했다.

“그대, 벨로즈. 내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요.”

담론을 마치려는 염후의 눈빛이 정중하고 진지한 빛을 띠었다.

“언젠가 모목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내 의붓아들의 노고와 홍염의 은공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소.”

님프 사회에 어떤 식으로든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게 될 그가, 화친을 바라는 황실의 진심을 전하고 사사하는 말 한마디만 거들어 줄 수 있다면.

“…단지 그뿐이라오.”

고인 물을 흐르게 하면 어떻게든 넘나들게 되기 마련이었다. 교섭은 태자의 몫이 될 테지만, 어미는 그렇게 작은 물꼬라도 트여 놓고 싶었다.

* * *

벨로즈가 염황 부부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나니아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이 벨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언제 마주하게 될지 모르는 염황을 당면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지 마, 나나.”

챠링고가 곁으로 다가온 나니아를 향해 말했다. 챠링고 그녀는 아까 전부터 벌을 받는 사람처럼 정자세로 꼿꼿이 서 있었다. 벨로즈나 나니아와 다르게 그들은 손님일 수 없었다. 홍염의 알에서 태어난 그들은 언제 어디서나 염황의 충직한 종이 될 준비를 해야 했다. 얼굴 한 번 뵙지 못한 주군이라도 그를 향한 충성은 마땅히 요구되었다.

“그치만, 혼자 앉아 있으려니 마음이 너무 불편해요….”

“너는 처음부터 벨로즈 님을 따라온 하녀인 척, 그냥 그렇게 조용히 있어.”

낯선 환경에서 안절부절못하는 나니아를 두고 챠링고가 충고했다. 지키고 서 있던 자들이 어디론가 물러갔기 때문일까. 소녀는 좀처럼 말을 듣지 않고 계속 그녀 주변을 알짱거렸다.

“파코랑 라히무스는 왜 입마개를 해야 하는 거예요?”

차마 본인들에겐 직접 물어보지 못하고 비교적 운신이 자유로운 그녀에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빈 둥지 출신의 수컷들이니까.”

“그게 왜요?”

“위험하다는 거지.”

그녀들에게서 한 발 떨어져 있는 파키케팔로와 라히무스의 주둥이에는 아닌 게 아니라 맹견에게나 쓸 법한 입마개가 씌워져 있었다. 턱 끝에서부터 콧잔등으로 이어지는 가죽끈은 다시 또 목줄과 이어져서 등 뒤로 떨어졌다.

사람이 짐승도 아니고 그깟 입질을 좀 막는다고 해서 보안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팔다리의 운신이 자유로운 이상 그들은 원하는 만큼 깽판을 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같은 단속에 실제적 효용성이 기대되는 건 아니었다. 입마개와 목줄이 가지는 상징성이 더 중요했다. 그것은 기득 계층이 천한 수컷들을 대하는 방법이자, 일종의 낙인이었다.

“너무해요….”

사실 너무한 일은 아직 벌어지지도 않았지만, 나니아는 챠링고에게서 자초지종을 전해 듣고 이 사회가 수컷들에게 유독 박한 문명임을 실감하였다.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냐. 신앙과 충정이 부족한 수컷들은 대개 위험한 짓도 겸하니까. 이런 식으로라도 기강을 잡고 통제하려는 거지.”

검고 매끈한 돌이 모래 먼지 뒹굴던 바닥을 촘촘히 메우고, 황적색 사암을 깎아 만든 기둥이 천장을 떠받친 회랑. 저 너머에는 절벽을 바라보는 택지 위에 정갈한 석조 저택이 자리했다. 대지룡 사원의 일부는 별장으로 중수되어 손님맞이에 쓰였는데, 손님이라고 해서 아무나 묵을 수는 없는 것이었고 대단히 덕성스러운 신자들에게만 제한적으로 개방되고 있었다. 이때 신자의 인덕과 정성이란 그들이 사원에 바칠 수 있는 돈의 크기를 의미했으니 그런 의미에서 염황 부부는 가장 신실하기로 정평이 나 있는 위인들이었다. 그래서 황제가 탈렘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의 룰이 곧 신전의 룰이 되었다.

누군가 닫혀 있던 문을 뻥 차고 걸어 나왔다. 그 순간 챠링고가 나니아를 구석으로 밀쳤다. 어서 저리 가서 눈에 띄지 않는 곳에 박혀 있으라는 뜻이었다. 나니아는 챠링고의 지시대로 보호색을 가진 동물처럼 벽 쪽에 붙어 서 있다가 납죽 엎드리며 배례하였다. 뒤이어 위엄이 넘치는 보무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온 그 사내가 바로 그들이 기다리던 염황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조금 전 부인에게 떨어 대던 교태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 낸 만면에 냉엄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이제 갓 성년식을 치렀을 법한 앳된 얼굴에 노숙한 눈빛이 인상적이었고, 땅에 떨어진 태양처럼 번쩍번쩍하게 빛이 났다. 마른 듯한 몸매는 아직 이차 성징이 더 남아 있을 것같이 늘씬했고, 허리 부근까지 길게 기른 머리카락은 명랑한 붉은빛을 띠었다. 사이사이 오색실을 꼬아 놓은 모습은 마치 열대 동물의 화려한 색을 훔쳐다 제 머리에 땋아 놓은 것처럼 아름다웠다. 흡사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더 멋진 깃털로 진화한 붉은빛 앵무새를 연상시키는 색채였다.

살굿빛 피부에 어울리는 하얀 톨라를 금장의 피뷸라로 고정한 채, 가는 허리엔 마찬가지로 번쩍이는 허리띠를 매었다. 가는 목엔 그 둘레에 꼭 맞는 카커넷에서부터 가슴까지 내려오는 목걸이를 차례로 두르고, 도톰한 귓불엔 커다란 에메랄드 밑으로 여러 개의 진주 드롭이 뻗어 나가는 샹들리에 귀고리가 잘랑거렸다. 열 손가락에는 모두 각기 다른 반지가 끼워져 있어서 사내의 노티 나는 취향을 알 수 있었는데, 그 모든 장신구의 베젤은 전부 도색이 아닌 순금이었다. 마디마디 허전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휘황하게 꾸며 입었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화려한 파트는 염황 본인의 얼굴이었다. 최소 입을 열기 전까진 모두가 그의 외견에 감탄할 정도로, 청초한 느낌의 벨로즈와는 또 전혀 다른 종류의 매력을 지닌 미인이었다.

‘폭군이다, 폭군.’

하지만 도마뱀들은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자비 없기로 유명한 염황을 맞이하며 챠링고와 파키케팔로는 자세를 바짝 가다듬었다. 라히무스 또한 초대받지 못한 사람처럼 뒷짐을 지고 서 있다가 마지못해 차렷 자세를 취했다.

가슴을 짚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가 정확히 직각을 이루고, 뾰족한 꼬리 끝은 일직선으로 정돈되었다. 턱 끝과 시선은 천장을 향하여 경외의 대상과 직접 눈을 마주치지 아니하는 법이었다.

그는 천제에 비견되는 절대자였다.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배알이 가능할까 싶은 그런 존재였다. 파키케팔로의 경직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나라님에 대한 뒷말을 실컷 씨불이면서 살아온 챠링고 또한 실물을 앞에 두고는 어쩔 수 없이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긴장하였다. 책 잡혔다간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기 때문에 그 짧은 틈에 몇 번이고 연습한 경례 자세는 완벽하였다.

문제는 라히무스였다. 남들처럼 가슴에 손을 붙이고 턱끝을 치켜들고는 있었으나. 비딱한 몸가짐과 허공을 휘젓는 시선에서 가득한 불만이 드러났다. 염황이 그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을 때, 사내는 저의 눈높이보다 한참 아래에 있는 그의 얼굴을 일말의 충심도 없어 보이는 눈빛으로 내려 보았다. 그리고 염황은 그러한 오만불손함을 참아 줄 군자가 못 되었기 때문에, 손에 든 부채로 라히무스의 오른뺨을 힘껏 후려쳤다.

“어느 안전이라고 이리 불경해.”

반항적인 리자드가 두 눈을 꾹 감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끓어오르는 반발심을 억누르듯 눈꺼풀에 덮인 눈알이 거죽 밑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붉은 눈동자는 얻어맞기 전보다 훨씬 더 불손해져 있었다.

“어허, 그 방종한 눈깔! 똑바로 굴리지 못하겠느냐?”

접선은 공평하게 왼쪽 뺨을 후려치는 것으로 그의 고개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나니아는 고개를 흘금 들었다 내리곤 경악스러워했다. 속수무책으로 얻어맞는 애인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상황이 속상했다. 제깟 것은 나설 수 없어서, 또 겉보기엔 파키케팔로 또래의 남자애로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라서 더욱 그랬다. 거죽만이 젊어 보일 뿐 알맹이는 아버지뻘 중노인이라 하니 그나마 위안 삼을 만한 부분이었다. 그의 뺨을 때리는 자가 진정 새파랗게 어린 남자였더라면 이보다 더 참기 힘든 기분이 들었으리라. 싱싱한 청년의 얼굴 뒤로 늙수레한 환영이 겹쳐 보였다.

“못 본 새 더 흉악스럽게 컸어. 갈수록 지 어미를 빼닮아 가!”

“…댁 얼굴도 제 나이를 찾아가는 중인데.”

두 홍염룡은 만나자마자 서로 모욕부터 하기 바빴다.

“무, 뭐라?! 이, 이 불경한…!”

내일이 없을 것처럼 말하는 라히무스를 보고 파키케팔로와 챠링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염황은 또다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손을 올렸다. 이번에도 그의 날카로운 부채 끝이 라히무스의 뺨을 후렸다. 크게 아프지는 않았지만 굴욕적이었다.

“하, 씨발….”

남자는 사춘기 소년처럼 볼멘소리를 냈다.

그의 야트막한 욕설이 염황의 귀에 닿기 전, 대담을 마친 샤르쿠스와 벨로즈가 나타났다. 그들의 등장은 시답잖은 승강이가 더 큰 폭력 사태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부채를 쥔 염황의 손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고 염후가 말했다.

“폐하, 대화는 손이 아니라 입으로 하셔야 한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염황은 억울하다는 듯 대꾸했다.

“이것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을 버르장머리 없이 뜨잖소!”

“원체 철부지 도마뱀이 아닙니까. 깨닫도록 타이르셔야지요.”

염황 부부가 설왕설래하는 사이, 님프는 파키케팔로의 주둥이에 씌워진 입마개를 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인가 싶어 눈살을 찌푸렸다. 벨로즈가 녀석의 입마개를 살짝 잡아당기며 물었다.

“저의 호위는 어째서 이런 취급을 받고 있습니까?”

탐탁잖은 기색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에 염황이 반응하였다. 벨은 리자드가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명확하게 알게 된 후로 전보다 더 버젓해져 있었다.

“저 때문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아침 일찍부터 이런 천대를 받는 겁니까?”

님프는 심히 속이 상한다는 듯 말하더니, 뒤이어 자신의 동행인들에 대한 예우를 부탁하였다. 벨로즈의 간청을 받아들인 염황이 시종들을 향해 손짓하였다. 뒤따르던 그의 수족 하나가 파키케팔로의 개목걸이를 풀고 입마개를 벗겨 주었다. 저를 얽어매던 속박이 사라지고 든든한 뒷배가 나타난 뒤로도 녀석은 한참이나 입을 열지 못했다. 하긴, 전부터 뚫려 있던 입이기는 했으나 그의 주둥이를 가로막은 것은 물리적 도구가 아닌 심리적 위축이었다. 염황의 리자드 시종이 뒤이어 라히무스의 입마개까지 벗기려 했다. 그때 님프가 가소로워하는 웃음과 함께 말했다.

“아, 그쪽은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 어떨까 싶은데.”

놀리는 것이 분명한 말투에 사내가 신경질적으로 눈을 흘겼다. 그 삐죽한 곁눈질이 벨로즈를 더욱 웃게 했다.

님프는 썩 유쾌해 보였다. 하지만 라히무스의 기분은 그러잖아도 질척질척한 참이었다. 요 며칠간 그를 괴롭히던 열등감의 싹이 지금 이곳에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천한 신분 탓에 괄시당하는 꼴을 보이면서 남자는 자존심이 상했다. 사랑하는 애인의 앞이어서 더욱 그랬다.

* * *

염황은 곧 다가올 막내딸의 생일 겸 벨로즈의 귀환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성대한 환영연을 열어 주겠노라고 포부를 밝혔다. 님프는 딱히 좋은 음식도 인맥도 명성도 필요하지 않았지만, 이곳 대지룡 신전의 공중 정원이 마음에 들었던 터라 그의 호의를 마다하지 않기로 했다. 일반적으론 감히 끼지 못할 그의 용병들도 환대받는다는 조건 아래에서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곧바로 탈렘의 우우룡들이 바쁘게 날아다니기 시작하였다. 이곳저곳에 초청장을 뿌리기 위해서였다. 연회 주인공의 출신지와 유행을 고려하여 그날의 드레스 코드도 요즈음 주목받는 동쪽 인간들의 양식을 따른다는 안내 따위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날까지 사원의 별채에 의탁하기로 한 벨로즈는 많은 시간을 정원의 풀숲에서 보냈다. 본인 말로는 회목 증상을 극복하기 위해서라지만, 사실은 그냥 한가로이 피크닉을 즐기는 일정이 마음에 든 것이었다. 특히 그는 하녀가 조물조물 빻아 온 꽃잎을 손톱에 붙여 놓고 멍청하게 앉아 있는 짓거리를 가장 좋아했다.

그런데 오늘은 옆에서 놀려 먹을 하녀도 리자드도 보이지 않았다. 님프가 그들의 행방을 묻자, 파키케팔로가 대답했다.

“나나는 오늘 라히무스를 쫓아갔어. 자길 자꾸 따돌리는 게 수상쩍다면서 말야.”

“그래서 둘은 화해를 한 거야, 아닌 거야?”

챠링고가 묻자 파키케팔로가 모르겠다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라히무스가 없는 자리. 기회라고 생각한 벨로즈가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괴물, 괴물, 말은 그렇게 했었지만 정말로 그런 남자였을 줄은…. 알고 있었던 거예요, 모두?”

에둘러 이야기했지만 리자드 둘은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건지 모두 알아들었다. 애처가로 소문난 염황의 사생아. 그것도 축수에게 겁간당하여 낳은 아이. 홍염룡들 사이에선 유명한 얘기였다.

“솔직히 나는 반쯤 잊고 살았는데…. 우와, 진짜 너어무 살벌한 거 있지? 나도 부채에 얻어맞는 줄 알았다니까는. 오줌 쌀 뻔.”

“소문은 익히 들었지. 정말 노인네라고는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어. 듣던 대로 정말 미남이더라….”

“막, 막, 존댓말도 안 써! 나는 글쎄, 라히무스가 살아 있는 게 신기하다니까는.”

그녀가 한 송이 붉은 장미 같던 염황의 얼굴을 떠올리는 동안, 파키케팔로는 그 순간의 공포를 회상하며 제 팔을 마구 문질렀다.

챠링고가 염황에 대한 생각을 떨쳐 내고 다시 라히무스 얘기로 돌아왔다.

“경로가 탈렘을 거치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 녀석의 주장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처음부터 벨로즈 님을 염황 앞에 데려다 놓으려는 계획이었던 게 아닐까요?”

“그래? 내가 라히무스한테 들은 거랑은 다른데.”

“…걔가 너한테 따로 뭔 얘길 했어?”

파키케팔로와 챠링고가 라히무스의 탈렘행에 대하여 이런저런 추측을 주고받는 가운데, 벨로즈도 흥미롭다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저를 만나고 싶어 했던 염황 부부 때문이 아니라면, 자신을 이따위 사막으로 끌고 와서 생고생시키는 이유가 달리 무엇일지 궁금했다.

“탈렘에서 만나야 할 친구가 있댔어.”

파키케팔로가 들은 라히무스의 용무란 게 뜻밖에도 무척 사적이었다. 님프가 반문했다.

“…친구?”

그는 마치 돼지에게 안장을 씌우겠다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콧잔등을 찌푸렸다.

* * *

라히무스가 만나야 할 친구라 함은 이곳 탈렘에 딱 한 사람뿐이었다. 그가 매음굴에 붙잡혀 있던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는데, 어리고 힘든 시절을 함께한 까닭에 정서적으로 제법 가까운 사이였다. 남자의 이름은 미구앵. 공예가이자 장사꾼인 그는 마도구를 취급하는 점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규모는 작지만 제법 번듯한 가게였다.

“친구는 무슨! 다 자기 똘마니인 줄 아는 새끼예요.”

미구앵이 작업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나무 궤짝을 이리 저리로 옮기며 말했다. 그 바람에 묵은 먼지가 풀풀 날렸다.

“몇 년 만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뭐? 네 뿔 쪼가리 남은 거 없냐고?”

남자가 투덜거리며 바닥에 놓인 짐을 발로 밀었다.

“좀 도와, 이 새끼야. 그 넘치는 스태미나는 뒀다가 어따 쓸래. 어? 침대에서만 쓰냐?”

친구의 불평에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꼬리만 덜렁거리던 라히무스가 일어났다. 그러곤 성가신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미구앵을 도왔다. 남자는 라히무스에 비하면 많이 왜소한 편이었다. 아니, 사실은 평균 정도인지도 몰랐다. 라히무스 옆에 서면 어지간한 남자들은 다 작아 보이는 경향이 있었으니까. 미구앵의 팔이 닿지 않는 선반에서 라히무스가 상자 몇 개를 더 내려놓았다. 나니아는 그 옆에서 조금 머쓱한 기분으로 그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동안 지켜본 바로 두 사람은 마치 어제도 만난 사이처럼 막역하였다. 서로에게 스스럼없는 태도에서 계산적 예의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솔직히 말해서 라히무스에게 친구라 부를 만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평생 벗 따위는 없을 것처럼 지껄이고 행동하던, 그의 사회성 떨어져 보이는 면모 때문이었다.

“븅신 새끼, 언제는 필요 없다면서 갖다 버리라 해 놓고는….”

미구앵은 높게 쌓아 올렸던 짐 더미를 일렬로 늘어놓고 가장 바닥에 있던 것부터 차근차근 뒤지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반지를 만들고 남은 뿔을 어딘가에 보관한 기억은 분명 있는데 너무 오래된 일이라 찾는 것이 문제였다. 안타깝게도 그는 정리 정돈을 잘해 놓고 사는 도마뱀이 아니었다.

“그러게 내가 뭐라 했냐. 챙겨 놓고, 만들어 놓고, 그러면 다 쓸 데가 있댔지?”

입에다가 태엽을 감아 놓은 사람처럼 끊임없이 빈정대던 미구앵의 시선이 슬쩍 나니아에게로 가닿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나니아는 움찔했고 남자는 씨익 웃었다.

“저기요, 뷔셀씨.”

“…네?”

“몇 번째 손가락에 끼고 다녔어요?”

남자가 먼지 묻은 열 손가락을 해파리처럼 흔들면서 물었다.

“어…. 두 번째나, 불편할 때 가끔은 네 번째에도….”

“잘 맞았어요? 헐겁거나 꽉 끼잖고? 거참, 반지도 천생연분을 알아봤나 보네. 아니지, 나의 통찰력 덕분인가?”

옆에서 누군가 피식 비웃는 소리가 들렸다. 잠자코 작업 중이던 미구앵의 조수이자 직원을 겸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라히무스와 나니아에게 건성으로 인사하고 나서부터 쭈욱 저 자리에 앉아 조용히 밀랍을 깎는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미구앵은 그녀의 조소는 못 들은 척하면서 다시 나니아를 보고 물었다.

“그런데 그걸 어쩌다 잃어버렸대요?”

미구앵은 라히무스와 나니아 두 사람 사이에서 몇 번이고 오해와 갈등을 만들어 냈던 그때 그 반지를 제작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아주 오래전 울로피가 부러뜨린 라히무스의 뿔을 주워다 문제의 요르문간드 반지로 깎아 놓았는데, 그것은 가엾은 리자드 친구를 위한 선심이나 위로 같은 따뜻한 마음보다도 미구앵 본인의 야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리자드의 뿔이란 좀처럼 만져 볼 일 없는 귀한 재료였기 때문에, 당시의 풋내기 세공사 미구앵으로서는 놓칠 수 없는 좋은 기회였었다.

남자가 공들여 만들었을 작품을 잃어버린 나니아는 애써 궁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물에 빠져서요. 짐을 전부 잃어버리는 바람에, 반지도 함께….”

소녀는 죄스러워하였으나 미구앵은 태연한 얼굴로 그랬구나, 그랬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왜인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그는 쭈그려 앉은 자세가 힘이 드는지 문득 허리를 쫙 펴다가 다시 한번 더 나니아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상당히 뜬금없고 객쩍은 소리를 툭 던졌다.

“잘 부탁드려요.”

“네? 뭘, 아….”

남자가 잘 부탁한다는 게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반지일 리는 없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미구앵은 치켜든 엄지로 라히무스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생긴 게 좀 이래도, 마음만은 순정일 거여요.”

친구를 쪼아 대던 그의 목소리가 친구의 애인을 향해서는 다소 유해졌다.

“여자 데려온 게 처음이거든요. 내가 만들어 줬지만, 그 반지 정말 평생 주인을 못 찾으려나 했는데.”

“…닥치고 계속 찾기나 해.”

미구앵이 나니아를 보고 무어라 떠벌리려 하자 라히무스가 말을 끊었다. 구시렁거릴 때나 쓸 법한 말투로 괜스레 성을 내는 것으로 보아 부끄러워하는 게 틀림없었다.

나니아는 얼떨떨하면서도 가슴이 간질거렸다. 사실 그녀는 아직도 라히무스가 왜 그렇게 퉁명스럽고 쌀쌀맞게 구는지 알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위해서 미구앵의 가게를 찾아왔는지 알고부터는 그러한 갑갑함조차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남자는 다시 한번 더 그녀의 손가락에 기회를 줄 생각인 것이었다. 리자드의 반지가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된 지금, 소녀의 마음속에서는 핑크빛 기대감이 부풀고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제대로 된 프러포즈를 받게 되리란 생각에 무척이나 설레는 것이었다. 한편으론 라히무스가 어딜 가서 누굴 만나는지 알아야겠다며 꾸역꾸역 기를 쓰고 쫓아온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이런 선물은 모른 채로 받는 게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라히무스의 걱정을 덜어 줄 수 있어서 다행이기도 했다. 언젠가 그의 말대로 자신이 직접 단각을 해 줄 수도 있는 거니까, 혹시나 뿔 조각을 찾지 못하더라도 괜찮노라고 말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가짐이 무색하게도 미구앵은 어딘가에 잘 처박아 두었던 라히무스의 뿔 조각을 찾아내고 말았다. 그 옆에는 어린 날 미구앵이 그려 놓은 반지의 구상도도 함께였다.

관심 없다는 듯 제 할 일에 몰두하던 미구앵의 조수도 그의 곁으로 와 이제는 색이 누렇게 바래어 가는 그 그림을 훔쳐보았다.

“와, 엄청 촌스러워요.”

그녀는 믿기 힘들다는 듯 가차 없이 혹평하였다. 미구앵은 조금 부끄러운 듯이 종이를 숨기면서 괜히 언성을 높였다.

“이게 대체 언제 적에 만든 건데, 당연하지!”

그 자조적인 평가에 나니아가 손사래를 치며 남자를 격려하였다.

“아니에요, 굉장히 멋진 반지였어요. 투박하지만 섬세한 조각이 인상 깊어서….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달라고 했었어요.”

개중에 가장 덜 화려해 보여서 골랐긴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눈에 보이는 소재의 문제였지 디자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달라고 했다고요? 리자드의 반지를?”

그날을 회상하던 나니아가 괜히 멋쩍은 기분을 느끼며 또다시 변명을 늘어놓았다. 미구앵이 라히무스의 부탁으로 새 반지를 만들 계획이라는 것을 알고 요구 사항도 덧붙였다.

“그때 라히무스가 아무거나 골라 보라고 했는데…. 보석 같은 게 박혀 있지 않아서, 저는 제가 그걸 가져도 되는 줄 알았거든요…. 아, 아무튼 좋았어요. 같은 디자인으로 만들어 주시면 좋겠는데.”

그랬더니 남자가 질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라며 한사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미구앵이 보기에도 그 정도란 거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밀랍 주조에 집중하는 듯싶던 미구앵의 조수가 킬킬거렸다. 남자는 그런 그녀를 샐쭉하게 노려보다가 문득 물어보고 싶은 게 생긴 눈빛으로 나니아를 돌아보았다.

“다룸이라고 했죠? 이왕 만드는 거 뭐라도 좀 새겨 놓을까?”

단순한 반지가 아니라 마도구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만들어 보겠냐는 의사를 묻는 것이었다.

“너는 못 다루잖아.”

라히무스가 눈썹 한쪽을 비뚤게 찡그리며 끼어들었다. 아무리 멋진 세공사라도 원소를 다루는 능력이 없으면 술식을 새겨 놓기는커녕 단순한 인챈트도 부여할 수 없었다.

“나 말고. 내 조수가 주술 부여를 잘해.”

“일 떠넘기시려는 거예요? 난 싫어요.”

여자가 딱 잘라 거절하며 조각칼을 휘휘 저었다. 라히무스도 그런 것은 필요 없다 하였다. 미구앵은 영 아쉽다는 듯 나니아를 보고 물었다.

“착용하는 사람이 다룰 줄 알았으면, 전에 쓰던 반지에서도 뭔가 좀 느꼈을 텐데. 그런 거 없었어요? 뜨끈뜨끈하다거나 따끔따끔하다거나, 그런 거?”

소녀는 아무것도 끼워지지 않은 자기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하였다.

“어…. 뜨끈했던 건 기억나는데 따끔한 건 잘 모르겠어요.”

이미 그의 실험대 위에 오른 적이 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라히무스는 미구앵의 시도가 달갑지 않았다. 결혼반지에 주술을 새겨 놓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남자가 그곳에 박아 넣고 싶은 것은 값비싼 보석이었지 글씨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건 됐어. 언제까지 가능해?”

라히무스의 퉁명스럽고 성마른 질문에도 친구는 쾌활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디자인이 문제지, 깎는 건 금방이야.”

“그러니까 언제.”

모처럼 불알친구의 예물 반지를 정성껏 깎아 보려던 미구앵은 그 재촉 같은 질문에 기분이 상해선 주먹을 흔들었다.

“썅놈의 새끼, 그럼 돈부터 주고 말해!”

남자는 화를 냈지만, 나니아는 설레는 마음을 억누를 길 없었다. 이미 쫓아와서 깜짝 프러포즈를 망친 셈이었으니, 그 후로는 반지에 대해서 입을 다물기로 했다. 그 로맨틱한 선물은 자신에게 줄 것이 확실했으니 괜한 말로 그를 재촉하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 * *

정원에 나가는 일조차 귀찮아진 벨로즈에게 통창이 매끈하고 정경이 아름다운 테라스 자리가 주어졌다. 그를 자신의 울타리 안에서 머물게 하려는 염황의 욕심이자 배려였다. 벨이 선물 받은 공간은 절벽 같은 토대 위에 지어져 삼면이 시원하게 트여 있었다.

님프는 오늘도 그 위에서 찻물을 홀짝이는 중이었다. 자신의 띨띨하고 충실한 심복들과 함께였다.

“라히무스가 또 안 보이네.”

파키케팔로가 의아해하자, 챠링고가 대답하였다.

“염후께서 부르신 듯한데.”

확실하지 않다는 듯 여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미구앵의 가게에서 돌아온 뒤로, 남자는 뭐가 그리 바쁜지 얼굴을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나니아는 벨로즈가 환대받는 까닭과 그들 사이에 어떠한 청탁들이 오고 갔는지에 대해서 대략적인 사정을 전해 들었다. 라히무스가 벨로즈 구출 건에 가담하게 된 연유 또한 그의 군주에게 있음을 이해하였다. 염황의 마당 개라든가 잡종 개라든가 하는 언뜻 귀여우면서도 굴욕적인 라히무스의 별명에 대해서 들었다. 그 같은 용병은 아마 그런 식으로 윗사람들이 직접 행하기 껄끄러운 일들을 도맡아서 처리하는 모양이었다.

남자가 자리를 비운 까닭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나니아가 가장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는 줄곧 어딘가로 불려 가서 한참 없어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하고 있었는데, 돌아온 얼굴엔 짙은 피로감이 가득해서 감히 말을 붙여 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벌써 며칠째더라. 소녀는 어두운 그의 낯빛을 떠올리다가 문득 야릇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남편을 이십 대 청년처럼 싱싱하게 관리 중인 여자가 자신이 하수인처럼 부리는 창창한 나이의 남자를 불러들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란 과연 무엇인가.

‘에이…. 별거 아니겠지.’

나니아는 괜한 기우라고 생각하면서도 염후에 대한 이야기로 슬쩍 운을 띄워 보았다.

“저기…. 그분은 어떤 분이세요?”

“그분?”

“샤르쿠스 님 말이에요.”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더랬다. 젊은 여자를 데리고 사는 노신사가 아닌, 젊은 남자를 데리고 사는 노부인의 모습에서 커다란 위화감을 느꼈다.

“저는 사실 아직도 폐하의 나이가 믿기지 않거든요….”

둘 사이의 나이 차이가 실제로는 얼마나 되는 것이냐고 묻자, 챠링고가 대수롭잖게 대답하였다.

“눈에 보이는 정도는 아니지만, 원래도 열댓 살 정도 차이 나지 않나? 아마 그럴걸.”

“그만큼이나요…?”

그 또한 놀라웠다. 아무리 수컷 리자드라도 제국을 다스리는 권력자쯤 되면 얼마든지 나이 어린 여자를 부인으로 들일 수 있었을 텐데 싶은 통념 때문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의아해하는지 이해한 챠링고가 염황 부부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았다. 홍염룡들 사이에선 이미 익숙한 가십이었다.

“아, 유명하지. 남자 쪽이 매달려서 한 결혼이잖아. 염후께서도 못지않게 쟁쟁한 집안 따님이셔서, 꿀릴 게 없던 위인이거든. 게다가 그때 염황은 태자도 아니었고 말이야.”

챠링고가 알기로 선대 염황에게는 딸이 있었다. 손위 누이가 있는 수컷이 보위를 물려받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자가 바로 샤르쿠스였다. 한창때의 그녀는 정쟁에 능하고 계파 갈등에 사리가 밝았다. 몇 년에 걸친 정치적 공작 끝에 기어코 자신의 남편을 보위에 올리는 데 성공하였으니, 말하자면 킹메이커인 것이었다.

“그 자리는 염후께서 만들어 준 거나 다름없지.”

사실 챠링고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홍염룡들은 염황의 치세를 회의적으로 바라보았다. 많은 리자드들이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수컷은 나랏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을 거라 말했다. 그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대부분 염황보다는 그의 뒤에 버티고 서 있는 염후에게 더 큰 신의를 보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나니아는 그녀가 얼마나 유능한 위정자인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정치적인 얘기보다는 조금 더 사적인 얘기가 듣고 싶었다.

“그럼 두 분께서도 국혼을 올리신 관계인가요?”

챠링고는 네가 그 개념을 어떻게 아느냐고 의아해하다가, 아무래도 그렇지 않았겠느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러면요…. 염후께서도 첩 같은 걸 들이시는 건 불가능한 거죠?”

나니아가 조심히 묻자 여자는 깔깔 웃었다.

“나나 네가 갑자기 왜 그런 게 궁금해? 너는 그러고 싶은데 라히무스가 못 하게 할까 봐?”

“아뇨! 그런 게 아니라….”

나니아는 손사래를 치며 강하게 부정하다가 이상한 오해를 살까 싶어 결국 질의를 멈추었다. 제국의 어머니쯤 되는 여성이 자기 애인을 데리고 몹쓸 짓을 할까 걱정하다니. 다시 생각해도 바보 같은 고민이었다.

나니아가 라히무스의 부재에 대한 고민을 잠시 접어 두고 벨로즈를 위한 찻물을 떠오기 위해 테라스 밖을 벗어났을 때였다. 돌기둥을 지나 코너를 돌면 경사진 길이 나왔는데, 계단이라 부르기엔 단차가 낮은 층계가 이어졌다. 그 아래로 내려와 복도를 지나려는데, 웬걸 그녀의 엉덩이를 덥석 주무르는 손이 있었다. 나니아는 깜짝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대체…!”

갑작스러운 것은 둘째 치고 주변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 터라 더욱 기겁할 노릇이었다. 수상쩍은 괴한을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나니아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자신의 엉덩이 부근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 그녀의 엉덩이를 추행한 범인이 웃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나니아!”

파키케팔로가 그녀의 비명을 듣고 달려왔다. 챠링고와 벨로즈도 뒤이어 쫓아와선 길이 꺾이는 지점의 돌기둥에 손을 올리고 성급히 머리부터 내밀었다. 뒤이어 아직 예사소리와 된소리도 구분 못 하는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꼬리 없어!”

모두의 시선이 그 소리를 따라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범인이었다. 치한은 통통한 팔을 쭉 뻗어 나니아의 엉덩이를 가리키며 재차 소리쳤다.

“꼬리 없어!”

그것은 알에서 깨어난 지 몇 년이나 됐을까 싶은 아주 어린 리자드였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것은 작은 키 때문이었다. 아이는 기둥 사이에 몸을 숨기는 장난을 치다가, 제 눈앞을 지나쳐 가는 허전한 엉덩이를 허락도 없이 움켜쥐어 본 것이었다. 새끼 리자드는 꼬리도 짧고 손도 작고 발도 작았다. 우우룡이 인간으로 둔갑한다면 이리 사랑스러울까 싶은 생김새였다. 아이는 흡사 작은 공룡이 쿵쾅대는 것처럼 뛰어와선 벨로즈의 엉덩이를 향해서도 손을 뻗었다. 그러곤 똑같은 소리를 지껄였다.

“꼬리 없어!”

그것이 아주 이상하다는 듯, 리자드는 입을 쩍 벌리고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그래. 난 꼬리 없어.”

대답해 주는 벨로즈의 목소리가 썩 다감했다. 그는 자기 곁으로 다가온 아이를 번쩍 잡아 올렸다. 평생 자식 따윈 낳아 본 적도, 낳을 생각도 없어 보이는 청초한 얼굴을 하고선 왼팔에 치우치도록 그녀를 안아 들었다.

눈높이가 같아진 아이가 벨로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입을 헤 벌렸다.

“예뻐….”

그러고는 님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것이었다.

“바바 가질래!”

무척 되바라지고 당돌한 말괄량이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님프는 싫은 기색이 없었다.

“미아인 것 같죠?”

“여길 어떻게 들어왔지?”

“좋은 옷을 입고 있는데. 귀족 집 자식인가 보다. 너는 걔 건드리지 마라, 파코. 큰일 난다.”

아이를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다. 잠시 데리고 있자며 테라스로 데려가서 의자에 앉혔는데, 얌전히 놀다 갈 성미가 못 되는 모양이었다. 다홍빛 비늘이 뽀얗고 어여쁜 그 리자드는, 난데없이 걸걸한 화염을 내뿜으며 장난을 쳤다. 몸집은 작은데 화력이 제법 좋았다. 아이가 뿜어낸 불바람 끝자락에서 살짝 태워진 챠링고의 머리카락이 꼬부랑해졌다.

“이래서 애새끼가 싫다니까!”

통제 불가능한 어린 홍염룡을 보고 챠링고는 질색하는데 벨로즈는 크게 웃었다. 아기 리자드에게 관심을 보이려던 코우도 심한 장난을 당할 것 같다는 예감에 멈칫하며 파코에게로 돌아갔다.

“콜록, 콜록.”

아이의 새 부리 같은 입에서 콜록대는 기침과 함께 작은 불꽃이 터져 나왔다. 그 섬광은 마치 연료가 다 된 점화 기구처럼 까만 그을음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제 더 안 나오는 모양인데.”

챠링고가 잘됐다는 듯 말하자, 아이가 그녀의 얼굴에 대고 마지막 화염을 토해 냈다.

“이크….”

여자는 재빠르게 고개를 물러서 피했다. 짜증 범벅인 챠링고와 다르게 님프는 기꺼워 보였다. 그는 자기 한쪽 무릎에 아이를 앉혀 두고 다정스레 물었다.

“아가야, 엄마는 어디 있니?”

새끼 리자드가 예쁘고 신기하기는 나니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님프의 옆자리에 다리를 쪼그리고 앉아선 봄꽃처럼 사랑스러운 그녀를 조심스레 구경했다.

“숨바꼬지. 숨바꼬지.”

“응, 숨바꼭질 중이야?”

아이는 명쾌한 대꾸 없이 님프의 옷깃을 이리 저리로 잡아당기며 헝클어뜨렸다. 새로 생긴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기운차 보였다. 부모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 주어야 하나 싶어 막막하던 것도 잠시, 일행들은 머지않아 그녀가 말하는 숨바꼭질의 술래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다.

“파티바!”

저 먼 테라스 아래에서부터 그녀의 보호자들이 부랴부랴 쫓아오고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아이를 놓치지 말고 보필해야 했을 리자드들을 몇씩이나 주렁주렁 매단 채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나니아가 아는 얼굴도 보였다. 누가 보아도 홀로 하인이 아닌 남자, 발타롭스였다.

그는 테라스와 정원을 이어 주는 꺾은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오르며 치렁거리는 바지 자락을 추슬렀다. 행방불명된 말괄량이를 찾으러 온 추적자에게서 다급한 호흡이 느껴졌다. 남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동시에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다시 뵙습니다, 그대.”

파티바 때문에 헤어졌던 상대를 파티바 때문에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그의 입장에선 기구한 운명이라 할 만했다.

“염황의 사 황자, 발타롭스 바포르 마그라타. 불로수의 아드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립니다.”

남자가 누군지 알자마자 용병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꼬리를 뻗었다. 그 모습을 보며 벨로즈는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발타롭스의 인사가 님프의 손등을 간지럽게 했다.

‘그래, 어쩐지….’

짙은 머스크 향을 풍기며 다가온 그에게 시각과 후각이 함께 이끌렸다. 남자는 나니아와 벨로즈가 신전에 출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 그때 그 리자드였다. 묘하게 아는 척을 하는 것 같다고 느낀 게 착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 역시 그 자신의 어머니처럼 진작에 자신을 알아보았던 것이리라.

남자는 늦둥이 파티바에게 막내 자리를 빼앗긴 염황의 넷째 아들이자, 본의 아니게 육아를 도맡게 된 그녀의 오라비였다. 그러니까 님프가 지금 허벅지에 앉혀 둔 그녀는 염황의 하나뿐인 막내딸 파티바 황녀님이셨다.

“황녀가 무례를 범하지는 않았습니까? 워낙 천방지축이라 이리 속을 썩입니다.”

“괜찮습니다. 귀하신 분인 것을 모르고 저야말로 예를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사과하겠다는 그를 보고 님프는 예의 그 사람 좋은 척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느긋이 손사래를 쳤다.

황자는 한시바삐 염황 폐하께 가서 황녀를 찾았노라고 고하라며 곁에 있던 시종을 향해 하명하였다. 그러고는 벨로즈로부터 파티바를 전해 받으려 했다. 황녀는 오라비의 품에 안기면서도 자꾸만 벨로즈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예뻐, 바바 가질래!”

아이는 멀어지는 그를 보며 바둥대다가 소리를 꽥 내질렀다. 그녀는 님프의 품에 조금 더 안겨 있고 싶은 모양이었다. 뜻대로 안겨 주지 않는 황녀를 버거워하며 황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얘가 이제 미추를 알아보기 시작하네….”

“내려 줘!”

벌써부터 이렇게 미남을 밝혀서야 어쩌면 좋을꼬. 발타롭스가 혀를 끌끌 찼다.

벨로즈는 자신을 향해 아슬아슬하게 뻗어 오는 황녀의 손바닥에 대고 자신의 검지를 쥐여 주었다. 아이의 순도 높은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님프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걸 어쩌나. 전하께서는 제가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다시 안아 주겠다고 말하는 벨로즈를 보고 발타롭스는 난감한 듯 탄식하였다.

“받아 주시면 안 됩니다….”

그러면서도 버둥대는 파티바를 그의 무릎 위에 돌려놓았다. 황녀는 그제야 만족한 듯이 얌전해져서 다시 벨을 만지작거렸다.

“바쁘지 않으시면 황자님께서도 차 한 잔 드시고 가시지요.”

벨로즈가 잠깐의 동석을 권하자 발타롭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용병 둘은 일어서 있던 자세 그대로 슬금슬금 옆걸음질을 쳐서 등 뒤 창가에 몸을 바짝 붙였다. 감히 황자님과 겸상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나니아도 덩달아 그들 옆으로 가서 나란히 자리를 지켰다. 습관적으로 두 손을 맞잡고 공손한 자세를 취한 채였다. 염황을 찾으러 간 시종 외에 황자의 곁을 지키던 다른 리자드가 서둘러 찻물과 다과를 내왔다. 파티바가 갑자기 엉덩이를 주무르지만 않았어도 나니아가 하려던 그 일이었다.

황녀는 도마뱀들에게 둘러싸여 지내서 다른 종족들을 본 일이 드물다 했다. 듣자 하니 황실에서는 인간 노예를 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황성에서 일할 고용인들이라면 리자드로만 구성해도 차고 넘쳤다.

“그래서 제 엉덩이를 그리 신기해하며 더듬으셨군요.”

“예…? 황녀가 귀공의 그… 그것을요?”

님프가 웃으면서 하는 말에 발타롭스가 크게 당황했다. 남자는 능글능글하던 첫인상과 다르게 파티바의 일에 관해서라면 조금 쩔쩔매는 모습을 보였다.

“이걸 어떡하나…. 외간 남자의 소중한 것을 만지셨으니, 전하께서 책임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벨은 아이가 붙잡은 손가락을 위아래로 살살 흔들면서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를 파티바를 상대로 농을 쳤다. 그에 황자는 난처한 듯 머리를 쓸어 넘기면서도 님프의 장난에 장단을 맞추었다.

“어,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할까요….”

“글쎄요. 지금부터 대기를 서면 세 번째 남편쯤은 시켜 주실는지요.”

“하하, 세 번째라니요. 귀공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둘째도 아니고 세 번째 첩실 노릇을 하시려 합니까.”

“아무렴 정실은 저보다 더 어리고 예쁜 수컷으로 들이셔야 이치에 맞겠지요. 그러니 저는 세 번째로 족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이고, 우리 황녀가 아직 오라비들도 못 구한 배필을 벌써….”

벨의 얼굴에 푹 빠져 있던 황녀가 두 남자의 헛소리에 불쑥 끼어들었다.

“배필이 뭐야?”

커다란 눈동자가 잘 다듬어진 루비처럼 반짝거렸다. 그것을 본 님프는 짓궂게 대꾸했다.

“전하의 남자라는 뜻이지요.”

“바바의 남자…!”

아이는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꼬리를 팡팡 휘둘렀다.

농담은 이제 여기서 끝을 내자는 듯 발타롭스가 이야기의 화제를 바꾸었다. 장난스러운 혼담이 아니라 현실적인 파트너 문제에 대해서였다.

“파트너라니요?”

“연회 때 에스코트를 맡길 상대를 구하셨는가 말입니다.”

황자의 말을 듣고 벨로즈는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게 필요하단 사실 자체를 지금 처음 알았다.

“저는 사내인데, 그런 것이 필요합니까?”

“고하에 따라 높으신 분이 에스코트를 받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더군다나 그날의 주인공이시잖습니까.”

사 황자를 바라보는 벨로즈의 눈초리가 의심스러워졌다. 혹시 그 자리를 저에게 맡겨 달라 청하려는 것인지 가늠하는 중이었다. 탐탁잖은 기색의 벨로즈를 보고 리자드는 조금 걱정스러워했다.

“입장하실 적에 손을 잡아 줄 파트너 정도는 있으셔야 합니다. 그 문을 혼자서 통과하시면 꼴이 상당히 우스워지니까요.”

“…그것이 관행이라면 따르겠으나 모르는 사람 손을 붙잡고 친밀한 척 보일 생각은 없습니다.”

발타롭스는 조금 머쓱하게 눈을 접어 웃었다.

“가능한 홍염룡의 에스코트를 받으셨으면 좋겠다는 것이, 폐하의 의견이십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그 역할을 발타롭스 자신에게 일임해 달라는 은근한 부탁이기도 했다. 하지만 벨로즈는 다 알면서도 모른 척을 했다. 님프가 챠링고와 파키케팔로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제 호위 중 한 사람에게 맡기면 될 일이군요.”

남녀가 손을 잡는 편이 아무려면 타당하지 않으냐며, 벨의 시선이 챠링고를 향했다.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저는 그런 거 못 합니다. 절대요!”

황자의 앞에서 무엄해 보이지 않을까 싶은 염려보다도 팔자에도 없는 귀족들의 관습과 규칙에 시달릴 걱정이 더 컸다. 그녀는 그저 아무런 책임 없이 먹고 마시며 즐기고만 싶은 한량이었다. 귀찮은 일은 남에게 떠맡기기 좋아하는 그녀가 대안을 제시했다.

“라히무스를 시키죠? 그야말로 황실에서 바라는 그림이겠지 않습니까?”

“되겠냐고, 그게.”

챠링고가 좋은 생각이라는 듯 말하자 옆에 있던 파키케팔로가 그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남자가 그날 누구 손을 붙잡고 싶을지 묻지 않아도 뻔했다.

‘파트너…. 파티….’

나니아는 도무지 감조차 오지 않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기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끌어들였다. 그녀 인생의 최초이자 마지막 파티는 다름 아닌 파비푸스에서의 과시연이었다. 그다지 아름답지만은 못한 결말로 끝이 났었지만, 사건이 터지기 전의 그 화려한 분위기만큼은 가슴을 울렁거리게 할 정도였더랬다. 그녀는 예쁜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라히무스의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도는 상상을 하다가, 정말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며 조용히 얼굴을 붉혔다.

‘춤 같은 거 출 줄도 모르면서!’

남부끄러운 망상은 무거운 낙석이 되어 나니아의 심장 위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나 같은 촌뜨기가 괜히 그런 델 쫓아가서 망신살이라도 끼치면 어떡하지?’

긴장해야 할 주인공은 따로 있는데 괜한 걱정이었다. 그녀가 이런저런 감정의 기복을 타는 사이, 벨로즈는 답이 나왔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그럼 남은 리자드는 하나뿐이네요.”

그가 파키케팔로를 바라보며 싱그럽게 웃었다.

“잘 부탁해요, 파코.”

“…엥?”

멍청한 표정으로 벨로즈의 말을 곱씹던 파키케팔로는 잘 부탁한다는 그의 말이 대체 무슨 소리인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내 황자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발을 쿵쿵 굴렀다. 무례한 행동이었다.

“왜 또 나야?! 절대 싫어!”

녀석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세게 저항했다.

“섭섭하네요, 파코. 우리처럼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또 어디에 있다고….”

“내가 왜 벨로즈 님이랑 한 쌍이냐니깐?”

“나랑 뽀뽀도 했으면서.”

“미치겠네, 진짜로!”

과연 누가 이 우아한 프린스 님프를 에스코트할지에 대한 논란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또다시 테라스 아래에서부터 행차를 알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염황이었다.

‘황녀, 황자, 다음에는 또 염황이라니…!’

떼를 쓰던 파키케팔로는 물론 챠링고까지 단숨에 벽에 붙어 곧추섰다. 반듯하고 딱딱해진 모습이 꼭 벽돌 같았다. 두렵고 어렵고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

반면 파티바는 누구보다도 화색이 되어 소리쳤다.

“빠빠!”

그녀는 그렇게나 좋아하던 벨로즈의 무릎 위에서 폴짝 뛰어내려선 제 아비를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작은 몸 어디에서 그런 힘이 솟는지 씩씩하게 쿵쾅대는 발걸음이 정숙해야 할 신전의 바닥을 울렸다. 아이는 눈 깜짝할 새 계단을 뛰어 내려가 염황의 품으로 힘차게 도약하였다. 남자는 그녀의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고 번쩍 들어 올려 그 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오, 나의 바바, 나의 공주…!”

“빠빠, 못 찾았어!”

“대관절 그 짧은 새 언제 여기까지 도망친 게야.”

아이는 술래잡기의 패배 사실을 인정하라며 그를 종용했고, 염황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겼어.”

“공중 정원 위로는 올라가지 않기로 했잖니, 바바.”

이쪽도 바바, 저쪽도 바바.

바포르는 부인이 저를 부르는 것과 꼭 같은 애칭으로 그녀를 불렀다. 아들들 앞에서는 언제나 폭발 직전의 활화산처럼 이글대는 그가 늦둥이 막내딸 앞에서는 꿀물처럼 흘러내렸다.

“오, 나의 말썽꾸러기 아가 용…. 그새 또 머리가 엉망이 됐구나.”

남자는 저를 두고 좌불안석인 아랫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그저 아침까지만 해도 예쁘게 묶여 있었을 황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애달픈 탄식을 흘리기 바빴다.

아이는 벨로즈에게 그리했던 것처럼 염황의 붉은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꼬아 놓고 헤죽거렸다. 감히 제국 지존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는 그녀에게서 이겨 낼 수 없는 천연의 힘을 느꼈다. 남자는 머리를 쥐어뜯기면서도 행복해했다.

파티바를 품에 안은 바포르의 모습은 정말 한창때의 새신랑 같아 보였다. 한편 샤르쿠스 그녀가 얼마나 힘겹게 낳은 아이였을지도 가늠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산으로 늘그막에 얻은 막내딸이란 대단히 귀중한 보배일 터였다. 게다가 황녀는 염황 자신보다도 그가 사랑하는 염후를 더 닮은 편이었으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데에는 그러한 까닭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아이를 안은 채 테라스로 올라와서 뒤늦은 인사를 건넸다.

“용맹무쌍한 우리 황녀가 귀공의 머리카락을 사르겠다며 덤벼들진 않았소?”

염려스러워하는 말에 님프는 웃었다.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엄밀히 말해서 그녀가 태워 먹은 것은 챠링고의 머리카락이었으니까.

발타롭스가 염황의 귓가에 대고 무어라 속닥거렸다.

“폐하, 불로수의 아드님께서는 연회에….”

뒷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염황이 못마땅해하는 것은 느껴졌다. 그는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자기 아들을 흘겨보다가, 이내 사람 좋은 척하는 웃음을 지으며 벨로즈의 손을 잡았다.

“그대, 벨로즈. 에스코트를 맡길 상대가 정 마땅찮으면 그날의 주인공 둘이서 함께 입장하는 것은 어떻겠소?”

주인공 둘. 말인즉 황녀를 품에 안고 등장해 달라는 말이었다. 남자가 어떤 식으로 쇼를 꾸미고 싶은지 알 만했다. 장성한 수컷의 손을 잡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제안이었다.

“그것이 괜찮은 것이라면, 저는 그리 하지요.”

벨로즈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고, 염황은 크게 기뻐했다.

이내 재단사와 재봉사는 물론 세공사까지 호출되어서 그들의 이곳저곳을 재기 시작하였다. 그날 님프는 아마도 이 탈렘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내가 될 터였기 때문에, 그의 동행인들도 수준 높은 치레를 할 필요가 있었다. 말인즉 파키케팔로와 나니아에게도 옷 한 벌을 맞춰 입을 의무가 생긴 것이었다.

“챠링고는요?”

“나는 빌려 입을 거야.”

만사가 귀찮은 암컷 리자드는 맞춤옷 따위 딱 질색이라고 했다.

브로슈어를 들여다보며 디자인과 컬러를 고르는데, 그때부턴 벨로즈도 즐기기 시작했다. 모든 과정을 끅끅대며 관전하던 챠링고는 마침내 염황이 아들딸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을 때야 비로소 참아 왔던 폭소를 터뜨렸다.

“아, 웃지 말라고!”

파코 녀석은 평소에도 치장하기를 딱히 싫어하지 않는 편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남의 손으로 이곳저곳을 재단당한다는 게 무척이나 부끄러운 듯했다.

“나도 그냥 근위병인 척 단복이나 뒤집어쓰고 있음 안 돼?”

녀석이 발을 구르며 조르자, 벨로즈는 고운 손끝으로 제 입을 가리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왜 내 마음을 몰라주죠? 난 그저 파코에게 멋진 옷 한 벌 맞춰 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 작위적인 언변이 참으로 가증스러웠다. 손바닥 밑으로는 히죽대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래, 인마. 즐길 수 있을 때 즐겨 두라고. 우리 같은 밑바닥 도마뱀들한테 어디 이런 기회가 흔하냐?”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놀림에 챠링고도 가담하였다.

“혹시 모르지. 운 좋게 귀족 집 마님 눈에 들어서 첩실 자리를 하나 꿰찬다거나.”

그녀가 녀석을 격려하는 나름의 까닭이 있었다. 파코처럼 어린 수컷 리자드라면 결혼을 통한 신분 상승을 꾀해 볼 만도 했기 때문이다.

“말이 되는 소릴 하라니깐! 고양이한테 갈기 달아 준다고 사자가 되냔 말이야!”

청년은 저런 옷을 입어야 한다는 상상만으로도 쪽팔려 죽겠다면서 머리를 쥐어뜯었다.

* * *

별빛이 황량하게 빛나는 사막의 밤. 나니아는 그날 두근두근한 기분으로 라히무스를 기다렸다. 챠링고와 함께 쓰는 방에서 살금살금 도망 나와 그의 침실로 들어갔다. 근위병들이 지키는 염황 부부와 벨로즈의 방과는 다르게, 기둥이 떠받드는 홍예문 너머로 몸 누여 잘 만한 공간쯤을 차려 놓은 정도였다.

푸르스름한 조명이 먼빛으로 보이는 복도 끝에서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사내의 얼굴에 먹구름이 가득 껴 있었다. 단지 캄캄한 어둠 탓만은 아닌 듯했다.

“라히무스!”

나니아는 그의 품에 폭삭 안기며 오늘치의 그리움을 풀어냈다. 벨로즈나 챠링고와 함께한 덕에 크게 외롭지는 않았지만 적적했던 마음이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나냐….”

그 역시 나니아의 이름을 신음하며 그녀의 작은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그렇게라도 해야 이 고갈된 피로감이 떨쳐 내질 것처럼.

남자는 나니아의 허리를 번쩍 들어 제 발등에 올리더니 오뚝이처럼 뒤뚱뒤뚱 걸었다. 허리를 끌어안은 팔과 겹쳐 오는 무게감이 평소보다 훨씬 육중하였다. 그에게 조종당하는 듯한 기분과 한 발 한 발 제멋대로 움직이는 다리의 감각이 이상해서 웃음이 나왔다.

“꼭 춤추는 것 같아.”

“…하.”

그 말에 남자도 피식 웃었다.

느직한 걸음이 침대 끝에 당도하였다. 라히무스는 나니아를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벌러덩 쓰러져 누웠다. 남자의 커다란 등이 그리 두껍지도 않은 시트를 움푹 꺼트렸다. 나니아는 그 위에 엎어져서 그의 가슴을 쿠션 삼아 베고 누웠다.

“있잖아, 요즘 뭐가 그렇게 바빠?”

나니아가 물었다.

저번에 듣기로는 탈렘에서 해결해야 할 임무가 하나 생겼다고 들었다. 그는 매일 밤 피곤에 절은 얼굴로 돌아와 이처럼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라히무스처럼 강철 같은 체력의 사내를 지치게 할 일이란 대체 무엇인가. 모르긴 몰라도 상당히 고된 일임이 분명했다.

“…그러게.”

지친 목소리가 돌아왔다.

물어본 내용에 대한 답은 아니었지만, 라히무스도 그 일을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나니아는 사내의 목덜미에 코를 붙이고 그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그랬더니 라히무스가 몸을 움찔 굳히며 제 팔뚝에 코를 묻고 똑같이 킁킁거렸다.

“왜…. 무슨 냄새 나?”

나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뭘 하고 왔나 해서.”

너에게서 술 냄새나 피 냄새가 나는지 검사해 보았노라고는 이야기할 수 없었다. 적당히 둘러대듯 얼버무리기는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 별거 아닌데.”

별거 아닌 게 그래서 대체 뭘까. 나니아는 사내의 가슴 위에 올려놓은 손등에 가만히 턱을 기대었다. 아래에서부터 올려 본 그 얼굴이 뉘 집 자식인가 싶게 잘생겼다. 잘난 남자는 여자를 불안하게 했다.

“있잖아….”

소녀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요새 어디 가서 사람 죽이거나 술 따르거나 그래?”

“…뭐?”

그게 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 황당해하는 라히무스의 눈썹이 기형적으로 휘었다. 이내 헛웃음이 섞여 나오는 음성으로 대꾸하였다.

“둘 다 아냐.”

살인과 음주는 서로 무슨 관계가 있느냐며 어이없어하는 라히무스를 두고 소녀는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염후께서 자꾸 부르신다 해서…. 혹시 어디 이상한 데 불려 가 가지고 마님들 노리개로 쓰인다거나, 아니면 염후께서 직접 예뻐해 주고 있다거나…. 그런 거 아닌가 걱정했어.”

“…그럴 리가.”

남자는 미친 소리라는 듯 중얼거렸다.

“여자한테 술을 따르다니….”

정절을 의심받았다는 생각과 함께 리자드는 초조해졌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깨끗하지 못한 과거가 있으니 이렇게 자꾸만 불신을 사게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내가 절절한 목소리로 호소하였다.

“나 진짜, 그런 짓 안 해….”

당황하여 부정하는 그를 보니 마음이 놓이는 동시에 놀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니아는 파키케팔로를 놀릴 때의 벨로즈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며 새치름하게 대꾸하였다.

“믿을게.”

본인이 아니라니 다행인 일이었다. 질 나쁜 암컷들에게 몹쓸 짓이라도 당하고 오는 걸까 봐 어찌나 조마조마했던지.

그렇다면 정말은 무슨 일로 그렇게 바쁜 걸까. 나니아가 묻기 전에 그가 먼저 뜻 모를 소리를 지껄였다.

“이걸로 염황이 시키는 일은…. 정말 마지막이야.”

“마지막?”

“응….”

라히무스는 눈을 감고 자장가를 부르듯 웅얼거렸다. 으슥하고 짙은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깊은 잠에 빠질 것처럼 노곤하게 들렸다.

“이 일이 끝나면, 나냐 너랑 나랑….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으로 가서…. 거기서….”

거기서 우리 둘이 둥지를 틀고 알콩달콩 살자고, 남자는 그렇게 말하려다 말고 눈을 감았다. 단둘이 살림을 차리는 상상을 하며 리자드의 입꼬리가 음흉스레 슬쩍 올라가는 것을, 나니아는 보지 못했다.

그 후로도 라히무스는 불분명한 발음과 구성으로 자기 얘기를 늘어놓았다. 그는 탈렘에서의 축하연을 마지막으로 이젠 정말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을 거라 했다. 벨로즈를 데려다주는 임무도 가능하면 다른 홍염룡에게 떠넘길 계획이라고. 하지만 벨로즈가 그나 나니아를 놔줄 리가 없으니 어디까지나 라히무스 혼자만의 바람일 듯했다.

행사를 앞두고 용병이 해야 할 일이란 무엇인가. 나니아가 아는 라히무스의 특기는 주로 경호, 잠입, 암살과 같은 것들이었다. 짐작 가는 바로는 아마 대충 그런 비슷한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고 보면 이 신전은 경비가 너무 부실해.’

염황쯤 되는 인물이라면 큰 행사를 앞두고 누군가에게 목숨이 노려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전 세계적으로 정적이 한둘이 아닌 남자랬다. 아무래도 라히무스는 염황 부부를 위해 경비를 서고 있는 게 분명했다. 슈쉬라의 배에서 슈쉬라를 위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생각하니까 또 그때의 짜증이 밀려왔다. 그래도 아무렴 젊은 여자를 지키는 것보다는 노부부를 보호하는 게 낫지. 나니아는 졸린 눈을 비비며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면 암살자를 미리 찾아내서 척결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는지도 몰라. 마당 개라느니 잡종 개라느니, 황실은 그를 투견쯤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잠결에 몽롱한 머릿속에서 꿈같은 세상이 펼쳐지기 직전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라히무스는 대단히 예리한 육탄전과 첩보 작전을 동시에 벌이고 있었다.

‘남자가 너무 유능해도 문제라니까….’

상상 끝에 소녀는 문득 고단하다는 투로 이야기했다.

“…왕족이나 귀족들의 삶은 정말 피곤한 것 같아.”

그녀는 라키바하프와 알랭, 벨테그위 등의 생각이 났다. 권력을 위해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던 그들의 삶이.

그러자 이미 반쯤 곯아떨어져 있던 라히무스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유행하는 귀족 양식으로 치장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해 미치겠는 파키케팔로였다. 그런 그가 좌절할 만한 고초는 아직도 몇 개나 더 남아 있었다. 디데이가 다가오면서 녀석을 괴롭히는 일들이 하나둘씩 늘어났는데, 모든 것은 다 벨로즈 때문이었다.

벨은 염황이 붙여 준 사람 밑에서 이 대륙의 에티켓이라든가 대인 관계, 사교댄스 따위를 속성으로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나니아와 파키케팔로는 그때마다 연행되어서 벨과 함께 강습을 받았다. 단지 그가 혼자서는 적적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내가 이걸 왜 해야 되냐니까, 진짜로?”

팔자에도 적성에도 없는 교양 교습을 받으며 파코는 가뭄이 망친 농작물처럼 시들시들해져 갔다.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요, 파코.”

벨이 녀석의 불평에 핀잔을 놓자, 옆에서 챠링고가 맞장구를 쳤다.

“그래, 인마. 신세 피려면 잘 배워 둬. 다 너 잘되라고 그러는 거 아냐.”

“나는 정말 신분 상승에 대한 꿈이 없다니깐? 아니, 그럼 챠링고는 왜 안 하는데? 자기는 맨날 나가서 술만 퍼 마시면서?!”

“그럼 내가 이 나이에 그런 걸 배우리?”

이제 와 사교계 매너 따위를 익혀도 내가 그걸 어디다 써먹겠느냐며 여자가 빈정거렸다. 반면에 정말로 쓸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 파키케팔로는 분한 듯이 항변하였다.

“이…! 이…! 애초에 나니아만 있어도 되는 거잖아, 충분하잖아!”

그에 벨로즈가 제 곁에 둔 리자드의 존재 의의를 짚어 주었다.

“엉망진창인 파코를 보고 있으면, 자신감이 생긴단 말이에요.”

“뭐라고요?”

티격태격하는 세 사람을 지켜보면서 나니아는 소리 없이 웃었다.

파키케팔로의 말대로 요즘 벨과 나니아는 매일 같이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서로의 포지션에서 상대방의 발을 괴롭히지 않고 댄스 스텝을 밟는 법을 익히는 중이었다. 가장 대중적이고 느린 곡조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하나만 배우기로 했다. 두 사람 다 처음 춰 보는 춤이었지만 곧잘 따라했다. 문제는 파키케팔로였다.

가장 중요한 학생은 두말할 것 없이 벨로즈였지만, 교사는 어쩐지 파코를 가르치는 일에 더 열을 올렸다. 그녀는 항상 자기가 집중해서 가르쳐야 할 님프 대신 애꿎은 리자드의 손을 잡고 스텝을 밟았다. 몇 번을 가르쳐 줘도 나아지는 게 없는 녀석은 능숙한 파트너 없이는 한 악절을 넘기는 것조차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왜 나한테 그렇게까지 하냐고…. 그냥 대충해 달라고….”

청년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징얼거렸다. 벨로즈는 그 옆에서 쉼 없이 놀려 댔다.

“파코는 허리 아래로는 영 못쓰겠네요.”

어쩐지 성희롱처럼 들리는 것이, 완전히 기분 탓만은 아닌 듯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