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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타르노 반도
탈렘
점화
탈타르노 반도
낮이면 태양을 따라, 밤이면 별을 따라 항선은 쉴 새 없이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그간의 고생을 보답받기라도 하듯 별 탈 없이 항해를 마친 배가 정박지에 다다랐을 때, 어느새 무더운 계절이 찾아오고 있었다.
바닷물은 이곳이나 저곳이나 똑같이 푸르고 청청한데 땅 위의 모습은 어쩜 이다지도 다른지. 말로만 듣던 서녘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나니아의 입에는 소리 없는 탄식이 새어 나갔다.
갈매기 우는 소리가 물 위를 경쾌하게 날아다니고 우렁찬 뱃고동은 이따금 연안을 가로지르며 출항과 입항의 신호를 알렸다. 모처럼 뭍을 밟은 사람들에게서 넘치는 기쁨이 느껴졌다. 특히 파키케팔로는 벌써 제 둥지로 돌아온 듯이 환호하였다.
“야호! 이제 비렁뱅이 이방인의 삶은 안녕이야.”
녀석이 짊어진 모든 과업은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미 완수되기라도 한 것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속이 시원해 보이는 녀석과 다르게 라히무스는 어딘지 경직되어 있었다. 빳빳하고 무거운 발걸음이 나니아의 손을 붙잡고 항만을 걸었다.
“티에트 님, 그리고 샬롯….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나니아는 저를 이곳까지 안전하게 인도해 준 배의 주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그들도 나니아의 작별을 기껍게 받아 주었다. 샬롯은 전에 없이 상냥한 웃음을 지어 주었고 티에트는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나니아는 이제 그 가면 밑에 어떤 달콤한 얼굴이 숨어 있는지 알았다.
“인간의 몸으로 유멘타 무역소에? 아무리 자유민이라지만 위험하지 않겠는가.”
티에트가 다시 딱딱한 얼굴을 무너뜨리며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곁에 있는 파키케팔로나 라히무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는 점이 참으로 일관성 있는 여자였다. 대신 그녀는 나니아의 향후 일정에만 관심을 가지고 알은체했다.
“리자드들도 같이 가요.”
소녀가 자신의 일행인 붉은 꼬리의 홍염룡들을 가리키며 대답하자, 티에트는 영 탐탁지 못한 표정으로 그들을 쳐다보았다.
“유멘타렘은 동반할 부인도 없는 미혼의 수컷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만한 곳이 아니다. 게다가 천한 신분의 용병들이 아닌가. 장담컨대 매매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탈타르노 반도의 유멘타렘, 즉 유멘타 거래 시장은 그 어느 곳보다도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한두 명의 인간 노예를 데려가려는 매입자보다는 수십 명씩 한꺼번에 사들이는 최상류층 큰손들이 더 많이 찾는 곳이었다. 그런 막중한 거사가 치러지는 장소에 미더운 암컷 없이 수컷들끼리만 드나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나니아 혼자서 유멘타 시장을 활보할 수도 없었다. 그건 불가능했다.
소녀는 어떡하면 좋겠냐는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티에트 말대로 유멘타 거래는 그들이 알지 못하는 영역 밖의 문제였다. 평생 자신을 위해 일할 인간 노예 따위, 구매는커녕 필요해 본 적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공주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먼저 한숨을 푹 쉬었다.
“달리 방도가 없군.”
그녀가 어느 하인의 이름을 부르며 손을 뻗자, 그 손에 날렵한 검이 한 자루 내밀어졌다. 공주는 세련된 움직임으로 칼자루를 뒤집어 제 허리에 차고선 한결 믿음직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드는 것 정도는 도와주도록 하지.”
유멘타렘. 그것은 일상적 건물이기보다는 경기장, 관람장의 형태와 가까웠다. 석회를 섞어 바른 모르타르 위로 정교하게 덧씌운 상앗빛 도기 타일이 햇빛에 반짝반짝 빛났다. 짐승의 뼈를 닮은 그 거대한 원통형의 곡면을 따라 걷다 보면 마치 용의 배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휩싸였다.
티에트의 말대로였다. 빙해왕의 이름을 팔아 어렵사리 입장한 그곳엔 불필요할 정도로 넓고 웅장한 규모의 마당이 펼쳐졌다. 알량해 보이는 전속 매도인 한 명이 따라붙었고, 그가 안내해 준 내부 건축물은 짐작보다 훨씬 압도적이었다. 수백 개의 통문이 연달아 붙어 있는 모습은 마치 닭장이나 개미굴을 연상케 했고, 켜켜이 쌓아 올린 층과 층 사이에서 공간적 위계를 느꼈다.
여닫을 수 있는 문이 따로 없는 개구부에는 안을 들여다볼 수 없도록 커다란 천을 내렸다. 으슥한 지하 감옥에 구금된 죄수들의 모습쯤을 상상하던 나니아는 생각보다 정갈하고 반듯한 분위기에 의외로움을 느꼈다. 하지만 저 안에 팔려 나가기를 기다리는 인간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조금 오싹해졌다.
상인은 회초리로 쓰일 법한 작대기를 손에 들고 고민하듯 발끝을 까닥거렸다. 반대쪽 손에는 대체 무엇이 적혀 있는지 모를 조그마한 장부 하나가 들려 있었다.
“건장한 체격에 미색까지 겸비한, 고등 교육을 받은 귀족 출신의 남자라…. 금발에 푸른 눈이고, 그런데 거기에 발목을 절뚝일 수도 있다는 말씀이시죠.”
상인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소리 나게 접더니, 탄성 좋은 작대기를 가볍게 휘두르며 말했다.
“그런 상등품은 조금 더 안쪽으로 가서 찾으셔야 합니다.”
상등품. 나니아는 라키바하프를 지칭하는 그 말을 듣고 고요히 숨을 집어삼켰다. 그 물적인 표현은 남자가 받고 있을 취급을 상상하게 했다.
더 내밀한 곳으로 갈 것을 제안한 매도인은 어딘지 어려워하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죄송하지만 대동하신 군형 리자드들은…. 함께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라히무스는 못마땅한 꼬리 끝을 타일 바닥에 휘두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난폭한 인상이 더욱 위협적으로 변하였다. 통제 불능의 짐승 취급을 받으며 대놓고 푸대접을 당하니 기분이 상했다. 상인은 바짝 졸아붙어 몸을 웅크린 채 저거 보란 듯이 이야기했다.
“야만적인 홍염룡 놈들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말입니다! 이, 이곳 방침을 따라 주셔야지요!”
“알았다.”
본의 아니게 세 사람을 거느린 모양새가 되어 버린 티에트가 뒤를 돌아 선을 그었다.
“자네들은 여기서 기다리도록 하지.”
그 말에 라히무스가 으르렁거렸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줄 알고 너랑 걔만 들여보내? 안 돼.”
리자드의 못마땅한 눈빛은 티에트에게서 상인에게로 옮겨 갔다.
“그리고 지갑을 열 사람은 나야. 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의 위협적인 언동에 상인은 움츠러들었다. 그 대신 티에트가 장갑 끝을 바짝 당기며 대꾸했다.
“이런 곳에서의 유멘타 거래는 돈의 문제가 아니다. 신용과 품격의 문제지.”
상인은 말이 통할 것 같은 그녀를 향해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맞장구를 쳤다.
“암요, 아주 예민한 문제지요. 동쪽에서 어렵사리 공수해 온 유멘타들이니까요. 유통 과정에 말 못 할 사정들이 가득해서요. 아무한테나 보여 줄 수 없는 노릇이지요.”
나니아는 라히무스에게로 다가가 그의 가슴에 손을 얹고 말했다.
“서둘러서 다녀올게요. 별일 없을 거예요.”
곁에 있는 공주의 존재가 든든하여 어떤 사고가 일어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실 라히무스가 그녀를 혼자 들여보내고 싶지 않은 까닭은 비단 신변 안전에 대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머뭇머뭇 아랫입술을 씹어 대던 그는, 끝내 자신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더 막을 수가 없어서 물러나고 말았다.
나니아와 티에트는 상인의 안내를 받아 발걸음을 옮겼다. 라히무스와 파키케팔로, 그리고 그의 옷 속에서 잠이 든 코우는 회랑에 머물렀다.
“영주가 끝까지 힘들게 하네. 그치, 라히무스.”
어린 리자드가 눈치를 살살 보면서 말했다. 공감해 주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비위를 맞추고 싶은 것 같기도 했다. 아우 노릇을 하듯 애교스럽게 어깨를 주무르기도 했다. 이곳에 도착하면서부터였는지, 배에서 내리면서부터였는지, 아니면 정박지에 배를 대기도 전부터 그러했던 것인지, 여하간에 오늘 라히무스는 확실히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그래.”
사내는 열주의 한 모퉁이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그 남자는, 그러니까 나니아의 첫사랑은, 참 다양한 방법으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었다.
라히무스는 두려웠다. 자신이 참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첫사랑과 마주하게 될 나니아가. 들여다볼 수 없는 그녀의 마음이. 오랜만에 극적으로 마주한 두 남녀 사이에 피어날 야릇한 온정이. 가라앉아 있던 열등감의 찌꺼기가 다시금 부유하기 시작했다. 불안한 마음이 요동쳤다.
이 상황을 어디까지나 남의 일처럼 여길 수 있는 파키케팔로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진짜로 여기 있을까?”
상대해 줄 생각 없어 보이는 리자드를 상대로 녀석이 말을 이었다.
“여기에도 없으면, 그럼 그땐 어떡하지?”
라히무스는 주먹 쥔 손에 턱을 괴어 놓으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야말로 자신이 고민해 마땅한 문제였다. 라히무스의 마음속에는 그가 나니아의 눈에 띄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과 하루빨리 그녀의 삶에서 청산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공존하였다.
리자드는 그렇게 하면 답답한 마음이 해소되기라도 하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어느 쪽이든 빨리 결론이 났으면 좋겠군.”
그를 나니아의 마음속에서 쫓아내려면, 일단은 만나기는 해야 했다.
담당 매도인의 뒤를 따라 걷는 동안, 티에트는 나니아에게서 상황을 전해 들었다. 문제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한 그녀가 덤덤한 투로 설명했다.
“상품 가치가 높은 유멘타는 이름이 남는 법이다. 귀한 신분의 인간을 휘하에 거느리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려는 귀족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지.”
한마디로 출신이 번듯한 라키바하프는 처음부터 특별 관리 대상이었으리란 말이었다.
“어차피 노예 신세로 전락한 처지는 매한가지라 생각될 법도 하다만.”
그것은 마치 혈통 좋은 품종견을 다루는 방식과 같았다. 어쩐지 비참하고 숙연한 기분이 든 나니아는 적극적으로 대꾸하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되었든, 이제야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를 알겠다.”
더는 시간 낭비하지 않겠다는 듯 티에트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상인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장부를 가져와라.”
상인은 그들을 출납계로 안내했다. 그쪽에서는 고객이 보고 싶다고 보여 줄 수 있는 자료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몇 번을 옥신각신한 끝에 라키바하프의 이름을 대신 찾아봐 주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파비올라, 파비올라, 라키바하프 파비올라….”
출납원의 어깨너머로 언뜻 훔쳐보자니, 사람들의 이름이 익숙한 표음으로 줄지어 적혀 있었다. 유멘타렘에서 일하는 상인들은 대체로 동쪽의 인간들이 쓰는 문자를 읽고 쓸 줄 알았다. 그들을 관리 감독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입하 날짜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소?”
상인이 물었다. 최소 몇 월 며칠 이후일 것이라 대답하는 나니아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가주님이 순순히 자신의 이름을 밝히어 적혔을까. 아니, 이곳에 무사히 당도하긴 하였을까.
그를 찾는 과정이 복잡다단해질수록 나니아는 조마조마해졌다. 밖에서는 이러한 과정조차 알 길 없어 더욱 속이 타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밀수입해 온 유멘타의 관계자가 당사자를 찾는다는 것이 썩 흔쾌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관리자는 부탁받은 대로 장부를 뒤지면서도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어떤 사연인지는 몰라도 송사를 벌일 생각이거들랑 접으시오. 이미 팔리기라도 했으면 무를 수 없소.”
“잔말 말고 빨리 찾기나 하라.”
“예이….”
남자는 티에트가 칼등으로 팔을 툭 건드리자 기세를 납작 낮추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길어지던 탐색 끝에 상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의 손가락이 드디어 장부 위의 한 점을 찾아 짚었다.
“여기, 여기 있습니다!”
줄곧 심드렁하던 그도 막상 찾던 이름을 발견하자 뛸 듯이 기뻐했다. 보여 줄 수 없다며 날을 세울 때는 언제고, 이거 보란 듯이 손짓하여 이름을 확인시키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나니아는 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이름을 읽었다.
아아, 있었다.
라키바하프 파비올라. 그 가엾고 아득한 이름이.
문제는 그 그립고도 익숙한 이름 위에 줄이 그어져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마치 이제는 없는 물건인 것처럼 삭막한 직선이. 아니나 다를까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았다.
“이건, 이미 팔렸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이름 위를 가로지른 줄을 따라 천천히 확인시켜 주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아….”
나니아의 입에서 허망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무너진 탑처럼 덜덜대는 그녀 대신 티에트가 전후 사정을 침착하게 조사하였다.
“언제, 누구에게, 얼마에? 찾을 방법은 없겠나?”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무척 최근이네요. 매수하신 분의 성함을 따로 적어 두지는 않습니다만…. 이 거래는 어음을 썼으니, 찾으려면 찾을 수 있겠습니다.”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었다. 안도할 만한 소식을 듣고도 심장은 널을 뛰었다. 라키바하프의 이름을 확인한 그 순간부터였다. 지지부진한 첫사랑으로서의 그를 자신의 삶에서 지워 가고 있었다지만 십수 년을 쌓아 온 인연이란 게 그토록 쉽게 끊어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나니아는 떨리는 두 손을 코앞에 가져와 놓고도 미처 맞잡지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그렇게 하면 누군가 굽어살펴 주기라도 할 것처럼 기도를 올리듯 두 눈을 감았다.
“살아 있어, 살아 있어서 다행이에요…. 살아 있어서….”
“그래, 다행이군.”
위태롭게 중얼거리는 나니아의 등을 티에트가 다독였다. 차갑도록 침착한 표정 위로 티끌만 한 안쓰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남자가 채무자의 이름을 확인하러 간 사이, 나니아는 한발 앞선 고민에 빠졌다. 막상 라키바하프와 재회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대체 그를 어떤 낯으로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남자와 헤어진 후 너무도 많은 일이 있었다. 아마 그건 라키바하프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남자가 ‘어떤 과거’를 겪으며 ‘어떤 현재’에 이르렀는지를 상상하던 나니아는, 끝내 ‘어떤 미래’라는 문제가 그들 사이에 남아 있음을 깨닫고 먹먹해졌다.
‘만나면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까. 그동안 잘 지냈느냐고? 힘들지는 않았었느냐고?’
저를 따라 이역만리까지 찾아온 하녀를 보고 그는 무슨 생각이 들까. 아직도 영주에게 그녀는 반평생을 함께하고픈 약혼녀의 존재로 남아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 어떤 안부 인사도 그에게는 기만이 되리란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라키바하프를 되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가능성도 고민해 봐야 했다. 그를 데려간 자는 리자드 귀족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일까. 비싼 값을 치르고 데려갔을 귀한 노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었으니 이렇게 많은 유멘타들 중 콕 집어 데려갔을 게 아니겠는가. 만일 억만금을 주어도 되팔지 않겠다고 하면, 그땐 어떡하면 좋을까.
“여기, 금전 대차 계약서입니다.”
그때 상인이 채권 장부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불길한 공상은 그가 펼쳐 든 종이 위에서 끝이 났다.
“보시면 채무자 성함이 적혀 있습니다. 저는 처음 보는 이름자라 읽을 줄은 모르겠습니다.”
남자가 장부 사이에 끼워져 있던 종잇장을 건네며 말했다. 티에트는 어음의 암쪽을 받아들면서도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돈도 받지 않고 물건부터 내주었단 말인가?”
“글쎄요. 상환 능력이 된다고 판단하였으니 어음도 써 주었겠지 싶은데….”
상인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에 든 장부에서 누군가 휘갈겨 적어 놓은 채권 기록을 살폈다.
“발행일로부터 내달까지 불입하기로 약속된 금액이…. 어이쿠, 그새 이자가 많이 붙었습니다.”
이런 파격적인 조건의 이율이라면 채권의 강제 집행을 기대하면서라도 판매할 수밖에 없었겠노라고 그가 덧붙여 설명했다. 공주는 손에 든 종잇장을 나니아에게도 잘 보이게끔 기울였다. 그리고 두 여자가 함께 어음을 살펴보았다.
“빈 둥지 길드….”
부채자는 뜻밖에도 가족의 이름을 갖추지 못한 빈 둥지 출신이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이름을, 티에트는 읽을 수 없었고 나니아는 믿을 수 없었다.
“…라히무스.”
그녀가 읽을 줄 아는 몇 안 되는 이름 하나가 그곳에 적혀 있었다.
* * *
라히무스의 이름으로 라키바하프를 매수해 갔을 인물이라 하면, 떠올릴 수 있는 접점은 딱 두 개뿐이었다.
챠링고. 혹은 벨로즈.
무사히 배를 탔으니 어디든 정박하였으리란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명의를 도용하여 멋대로 빚을 진 그들이 괘씸한 라히무스와 다르게, 파키케팔로나 나니아는 일행을 찾았다는 기쁨이 훨씬 지대하였다. 살아 내기 급급하여 뒷전으로 미뤄 두었던 동료의 행방을 이렇게라도 찾게 되어 반갑고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은 빈 둥지 출신들의 쉼터를 찾았다. 그곳은 근간 없이 태어나 홀로 선 자들에게 어디에나 있는 고향이요, 터전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무언의 결집 장소이기도 했다.
“챠링고오!”
파키케팔로는 그리웠던 동료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눈물마저 찔끔 흘렸다. 나니아와 라히무스를 만났을 때보다 더 감격스러워했다. 당연히 올 줄 알았다는 듯, 애써 싱거운 표정을 짓고 있는 챠링고가 보였다.
“아이, 오래도 걸렸네.”
마치 언제라도 너희들이 올 줄 알았다는 투였다. 언뜻 성가셔하는 표정으로 인사를 받아 주었으나 어깨를 두드리는 손끝에서만큼은 감출 수 없는 반색이 드러났다.
“나는 보이지도 않아요?”
벨로즈는 여자에게 덥석 안겨 있는 파키케팔로를 쳐다보면서 진심에도 없는 질투심을 내비쳤다. 어김없이 아름다운 그에게서 새하얀 향기가 풍겼다. 길드 안의 시큼털털한 군형 리자드들 사이에서 단연코 빛을 발하는 남자였다.
“벨로즈 님, 보고 싶었다니깐.”
“됐어요.”
님프는 뒤늦게 팔을 뻗어 오는 녀석을 밀어 내면서 나니아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이쪽이나 한번 안아 보죠, 뭐.”
“많이 걱정했어요, 벨로즈 님….”
얼결에 포옹을 당한 그녀도 손을 들어 벨로즈의 등허리를 다독였다.
님프는 성장기 소년처럼, 햇살 받은 수목처럼, 또 한 뼘 자라나 있었다. 이젠 그의 어깨에 턱을 올리기가 다소 버거울 정도였다.
“응, 나도.”
다감한 말과 감미로운 목소리가 오갔다. 라히무스가 둘 사이를 뜯어 놓기 전까지는.
“꺼져.”
동시에 파키케팔로의 입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왔다.
“순 거짓말! 어떻게 그렇게 쌩하니 떠날 수 있었냐니깐? 찾아볼 생각도 안 하고!”
“그래서 기다렸잖아요. 여기서.”
이달 내로 만나지 못하면 단둘이서라도 숲으로 떠날 참이었다며, 님프는 제법 냉철했던 계획을 밝혔다.
“뭐?! 대체 말이지, 아무도 내 걱정은 안 한 거냐고! 다들 매정하다고!”
발을 구르며 노발대발하는 파키케팔로의 뒤에서 챠링고가 나니아를 툭 건드리며 말을 붙여 왔다.
“파코나 라히무스 걱정은 안 했는데. 네 걱정은 좀 했어.”
그녀는 파키케팔로 못지않게 챠링고에게 매달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건드리면 터질 듯이 촉촉해진 보랏빛 눈동자가 챠링고를 향했다.
“너무….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요. 어디부터, 무슨 말부터 하면 좋을지 모르겠을 정도로요….”
저 앞에서 씩씩대는 리자드 청년과 다르게, 나니아는 조금 기다려보다 떠나기로 했었다는 그들의 선택을 이해했다. 망망대해에서 잃어버린 사람을 대체 어디서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그것이 설령 가족이어도 엄두가 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다시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었다.
“그래. 이담에 여자들끼리 한잔하면서 풀자고.”
여자는 잔을 잡아 흔드는 시늉을 하며 호방하게 웃어 보였다. 나니아는 희미한 미소로 화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적 같은 만남 뒤에, 단언컨대 가장 극적인 재회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주는.”
라히무스가 챠링고에게 넌지시 물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사내는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여자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흘긋 눈길을 주었다. 오가는 말소리에 섞여 어슴푸레한 대답이 돌아왔다.
“상태 안 좋아.”
“어디 있냐고.”
“…윗방.”
여자가 짧은 대답 뒤로 횡설수설하며 저자세를 취했다. 남자의 이름으로 어음을 쓴 일에 대한 변명이었다.
“그… 라히무스…. 이해하지? 나는 유멘타 하나를 데려올 만큼의 여유는 없었으니까. 너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가 없고, 무엇보다, 원래 네가 하려던 일이잖아. 그러니까, 음, 상관없지?”
챠링고가 라히무스의 눈치를 보다니 흔치 않은 일이었다. 여느 도마뱀들처럼 재물 모으기에 혈안인 그의 저금을 담보로 거액의 채무를 만들어 냈다. 본인이 눈앞에 살아 돌아온 이상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사내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서늘한 한숨을 쉬었다.
“네게 대위를 맡겼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군.”
리자드 용병들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일에 뛰어들 때면 의례적으로 위임 각서를 썼다. 사후 처리에 관한 권리를 믿을 수 있는 동료에게 일임하는 것이었다. 이토록 거창한 임무가 될 줄은 몰랐던, 어김없이 취해진 형식적 절차였다.
“상상 못 했지, 나도. 네 권한 대리를 쓰게 될 거라곤.”
다소 징그럽다는 듯 챠링고가 익살스럽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다 가족이 없는 빈 둥지 출신의 비애였다. 부모 자식은 물론 배우자조차 갖지 못한 그라서.
라히무스는 자신의 약혼녀에게로 흘긋 시선을 주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 손가락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그녀가 라키바하프에게로 쪼르르 달려가 버리기 전에 붙잡아야 했다. 남자는 그녀의 손을 잡고, 한발 선수를 치듯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나니아는 벨로즈와 이야기를 하다말고 그에게 끌려 나오면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주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사람을 빼내 오더니 정작 말이 없었다. 소녀는 날이 선 사내의 뺨을 어루만지며 반쯤 기대어 서서 물었다.
“어디…. 뭐가 잘못됐어요?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리자드는 우물쭈물 대답은 않고 심통 난 눈빛을 바닥에다 쏘았다. 그러자 나니아가 그의 양손을 붙잡고 한 차례 가볍게 흔들었다. 답을 재촉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제야 사내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응? 무슨 준비?”
챠링고는 라키바하프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이야기했지만, 라히무스 자신이야말로 지금 속이 타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 새끼랑 너랑 마주 보고 정답게 회포를 푸는 꼴을 볼 준비가!”
사내는 부글거리는 목소리로 언성을 높이다가, 다시 또 시선을 피했다.
“…안 됐다고.”
나니아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인 다음에야 무엇이 남자를 그토록 초조하게 만들었는지 깨달았다. 작은 입술 사이로 탄식이 흘렀다.
“아….”
어둡고 우울한 낯빛의 리자드가 말했다.
“위에 있대. 라키마요프.”
“라키바하프라니까요.”
“갈 거면 같이 가.”
끝까지 남자의 이름을 틀리게 부르는 그를 보고 긴장이 풀렸던 것도 잠시, 손목을 덥석 낚아채는 그로부터 맹목적인 집착과 불신을 느꼈다. 나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같이요? 아니요. 불편할 거예요, 둘 다. 아니, 셋 다.”
그를 만나 어떤 얘기를 나누면 좋을지 그녀도 아직 고민 중이었다. 라히무스가 낀다면 좋게 좋게 끝날 수 있는 얘기도 그르칠 게 분명했다.
“왜? 무슨 얘길 나눌 작정이길래 내 존재가 불편해?”
사내는 짐작보다 훨씬 단호한 나니아의 태도에 몹시 초조해졌다. 한편 나니아는 혼자서 저만치 앞서가는 그를 보고 어이가 없다는 식으로 대꾸했다.
“그건 모르죠. 아직 얼굴도 못 뵀어.”
“못 뵀어?”
남자가 격앙된 말투로 나니아의 말을 곱씹었다. 그녀가 영주에게 꼬박꼬박 경어를 쓰는 점도 그를 미치게 하는 요소 중 하나였다.
“얼굴 보면 무슨 얘길 할 건데. 뭐라고 할 건데. 앞으로 걔랑 어쩔 건데.”
사내는 질투와 흥분으로 눈이 뒤집힐 때면 꼭 이렇게 수다스러워졌다. 따박따박 쏘아붙이는 말에 나니아는 골치가 아파졌다.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심중에 기름을 부어 주는 격이었다. 그가 신경 쓸 만한 일은 아직 벌어지지도 않았고 벌일 생각도 없었다.
“그 새끼 생각은 중요하지 않아. 나는 너의 계획을 묻고 있는 거야.”
“통보하러 가는 게 아니라 대화하러 가는 거예요. 가주님 만나 뵙고, 그쪽 사정부터 들어 보는 게 순서겠죠.”
나니아의 미래는 나니아 자신이, 라키바하프 그의 미래는 그가 정하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 라히무스가 끼어들 틈은 없었다.
남자가 나니아의 팔목을 다소 아프도록 쥐었다. 소녀는 둔탁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렸다.
“단둘이 만나는 건 안 돼.”
리자드가 이를 드러내며 흉악스럽게 으르렁거렸다.
“안 될 말을 하는 건, 내가 아니라 라히무스예요.”
자기를 빼놓고는 만날 수 없다니 세상에 그런 억지가 어디 있단 말인가.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지금 이러한 태도만 놓고도 알 수 있었다. 라히무스를 옆에 두고선 정상적이고 건실한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없을 게 뻔했다.
“무슨 얘기를 해도 사사건건 시비 걸면서 방해할 거잖아요.”
“시비?”
리자드가 주둥이를 삐죽거리며 모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언제 시비를 걸었다는 거야.”
“항상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잖아요.”
사내는 영주를 도발하거나 견제하거나 괴롭힌 일에 대한 기억은 까맣게 잊어버린 듯했다. 아니면 양심이 없거나.
“내가 널 여기까지 데려왔고, 그 새낀 내 돈 주고 빼냈어. 그럼 나한테도 권리가 있는 거 아니야?”
“그건… 정말 고맙게 생각해요. 맞아요. 다 라히무스 덕분이에요.”
남자의 공치사는 다소 좀스러웠으나, 나니아는 그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입이 두 개여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소녀는 끝까지 라히무스의 이해를 바랐다.
“하지만 그거랑은 별개로 우리 둘이서만 차분하게 얘기할 시간부터 필요한 거예요.”
“…그 새끼랑 너랑 합쳐서 우리라고 부르지 마.”
시답잖고 타당한 표현에도 남자는 어금니를 꽉 깨물면서 싫어했다. 그의 목소리가 과열되는 것을 느꼈다.
“네가 오랜만에 그 새끼 얼굴 보고 홀랑 넘어가 버리기라도 하면, 그럼 어떡할 건데?”
“어떻게 그래요? 그럴 일 없어요.”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냐는 듯, 나니아는 어이없어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장담해.”
라키바하프와 동행할 당시를 떠올려 보면, 나니아는 항상 그를 택했다. 아슬아슬한 저울질은 언제나 그의 쪽으로 기울었고 자신은 그 남자를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었다. 라히무스는 불안했다. 자신은 영주가 공석으로 남겨 둔 자리를 겨우 차지했다는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것은 온전한 승리라고 부르기엔 다소 비참한 쟁취였다.
“그 새낀 네가 울며불며 목매던 남자잖아!”
시퍼런 열등감은 날카로운 촉이 되어 자신을 꿰뚫고 상대방을 향해 날아갔다. 격분한 사내의 어깨가 거친 운동을 한 사람처럼 들썩였다. 그가 만들어 낸 탁한 그림자 밑에서 나니아는 믿기 힘들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라구요?”
나니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당황한 얼굴은 이내 실망스러운 기색을 띠었다.
‘아, 당신 마음속엔 아직도 내가 그 모습으로 남아 있구나. 짝사랑하는 남자에게 울며불며 목을 매던 여자로.’
그녀가 침잠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히무스는 나를 못 믿는군요.”
“그런 게 아니라….”
“내가 못 미덥고 의심스러운 거잖아요.”
“아니야,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소녀는 서글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내 마음을 충분히 표현했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이 나한테 얼마나 특별한지, 내가 당신한테 얼마나 진심인지….”
그들 사이에 사랑은 있는데 신용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아직 이 사랑이 성숙하지 못하다는 증거였다.
“그렇다면 더더욱, 나는 혼자 가야겠어요. 라히무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할 테니까.”
소녀는 속이 꽉 찬 얼굴로 단호한 의사를 남겼다.
“…싫어.”
리자드의 머뭇거리는 앞발이 금방이라도 등을 돌릴 듯한 나니아를 붙들었다. 그의 생떼는 이제 분노보다는 애원에 가까워 보였다.
“이대로 그냥 가면, 나 진짜… 나 진짜 화낼 거야.”
화를 예고하는 그의 모습은 전혀 무섭지가 않고 가엾기만 했다. 물리력을 행사하기보다는 투정을 들어주지 않으면 울어 버릴 것만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세 살배기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었다.
나니아는 자신의 어깨에서 그의 손을 내려놓았다. 안쓰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탈타르노 반도의 탈타란타는 거대한 항구 도시였다. 물 건너 서쪽 땅의 도식으로 지어 올린 건물들이 빼곡하게 줄이어 서 있었다. 동서 문물을 겹쳐 놓은 듯한 역동성은 번잡스러우면서도 경쾌한 양상을 이루었다. 이곳 빈 둥지 쉼터 근처는 특히 더 그랬다. 건물 사이사이의 간격이 좁다 보니 빈말로도 채광이 좋다고 말하기는 힘든 곳이었다.
남자는 그런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길을 잃은 아이처럼, 외톨이처럼.
들어가겠다는 노크와 함께 문을 연 나니아는 그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코나 입, 둘 중 하나는 숨 쉬는 방법을 잊었던 것 같다. 준비한 인사말들은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케케묵은 먼지가 작은 진동에도 쉽게 흩날리는 방. 두 남녀 사이에 무섭도록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언젠가 리자드가 긴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를 보고 수척해졌다든가 말랐다든가 걱정하면서 안쓰럽게 여겼던 마음이 우스워질 정도였다. 눈앞의 라키바하프는 그때의 라히무스보다 훨씬 앙상궂은 사내가 되어 있었다.
“…뷔셀.”
먼저 침묵을 깬 쪽은 그였다. 수심 어린 푸른 눈동자 사이로 한 줄기 반색이 엿보였다. 남자는 자신의 얼굴을 수척한 손으로 서너 번 쓸어내리고 올리기를 반복하였다.
“아, 신이시여.”
남자는 자리를 딛고 일어나 절뚝절뚝 걸음을 옮겼다. 가슴이 철렁했다. 부족한 보폭이 하녀로부터 아릿한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살아 있었구나, 다행이야.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영주는 감격스러워하며 하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네, 정말.”
다행이에요.
소녀는 자신이 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키 큰 사람에게 안기는 것이 익숙해진 그녀는, 남자의 어깨에 가만히 턱을 올렸다. 뿌리치지 않았지만 마주 안아 주는 것도 아니었다. 이 광경을 라히무스가 보았더라면 가만두지 않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역시 데려오지 않기를 잘했지.’
라키바하프를 만나는 중에도 그를 떠올리는 자신이 우스웠다.
포옹은 시작했던 사람이 끝을 냈다. 남자가 몸을 물러 멀어졌을 때, 나니아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살폈다. 뺨을 덮을 정도로 길어진 금발 머리카락이 차분하고 자연스럽게 굴곡져서 귀 뒤로 넘어가 있었다. 나비 날개처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에도 같은 색의 가루가 내려앉아 있었다. 마르고 야윈 와중에도 여전히 사랑했던 그 얼굴이었다.
라키바하프는 안심한 듯 긴장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공주…. 아니, 벨로즈 님께 들었단다.”
영주가 조금쯤 쉰듯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그분께 그간 벌어졌던 얘기들. 그리고 나나 네 얘기도. 나를 쫓아 이곳까지…. 원래 가려던 길도 바꾸어 가면서 그랬다지. 감사한 일이더구나. 그분께도, 너에게도….”
그는 시큰한 미소를 지으며 하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아와 줘서 고맙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다는 것은 그녀도 알 것 같은 마음이었다. 나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성치 않아 보이는 그의 발목이 신경 쓰였다. 라키바하프도 그녀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깨달았다.
“아, 이건 그때 알랭의….”
남자의 얼굴이 겸연쩍은 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반왕파는 앞으로 힘을 쓰기 어려울 것 같다든가, 파비올라에 남겨 놓고 온 영지민들이 걱정된다든가, 살짝 어긋난 이야기들을 횡설수설 늘어놓으며 앉을 자리를 찾았다. 그의 부상은 사실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발목에 무리가 가는 정도였다.
“더 편찮으신 곳은 없으세요?”
나니아가 묻자 라키바하프는 손사래를 쳤다.
“아니야. 나는 괜찮아. 앉아, 그래. 앉으렴.”
남자 자신은 침대에 걸터앉아서 그녀에게 맞은편 자리를 권했다. 하녀는 그가 권하는 허름한 나무 의자에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고르고 골라 꺼낸 말은 결국 그에게 들은 말과 같았다.
“무사하셨어서 다행이에요.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게 된 것도요….”
“그래. 나를 잊지 않고 찾아와 줘서 내가 정말 고맙다.”
계속 감격스러워하는 그를 두고 하녀는 가슴 한구석이 먹먹하고 불편해졌다. 영주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를 찾기 위해 오른 여행길이었다. 처음에는 분명 그랬다.
하녀는 맞잡은 제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저 혼자서는 절대 이곳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래, 안다.”
“라히무스가…. 많이 도와줬어요.”
“…그래, 그것도 안다.”
남자의 앞에서 라히무스의 이름을 거론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그 이름이 불편하기는 라키바하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의 얼굴도 단단히 경직되었다.
“…함께 왔니?”
“네. 지금 밑에 있어요.”
“그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글쎄, 그자가 내 감사를 받아 줄지 모르겠구나.”
나니아의 말에 영주는 염세적으로 답했다. 자존심이 상한 것 같기도 하고 무안한 것 같기도 했다. 그 작은 불씨조차 꺼트리려는 듯이 하녀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제가 대신 전할게요.”
“…그래. 그래 주려무나.”
그리고 다시 또 침묵이 찾아왔다. 두 사람 모두 정말 나누고 싶은 대화 주제는 따로 있는데, 어색하고 어려워서 시작하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당시를 떠올려 보았다. 둘의 결혼을 약속하고 함께 꾸려 나갈 미래를 다짐했을 때였다. 그것이 라키바하프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로부터 너무나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비단 둘을 에워싼 외부 환경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마음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점이. 그게 가장 큰 문제였다.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면 좋을지 막막했다. 제대로 시작조차 해 본 적 없는 사랑을 끝내길 바란다는 것이 송구스럽고도 민망했다. 그것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해야 하는 상황이니만큼 더더욱. 말을 잇지 못하는 하녀를 보고 라키바하프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불편한 화두를 그가 먼저 던져 주었다.
“그자와… 잘 지내 온 모양이더구나.”
각오하고 있었으나 몸이 흠칫 떨리는 화제임은 부정할 수가 없었다. 나니아는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떨구었다.
‘벨로즈 님이 말씀해 주셨을까? 아니면 챠링고가?’
사실 출처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어디까지, 무슨 말을 들었는지가 더 궁금했다.
라키바하프 파비올라는 많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중에는 당연히 라히무스와 나니아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남의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본인의 입으로 들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둘이 많이 깊은 사이가 되었다고….”
덤덤한 척하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다 안다는 듯이 말했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부정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하녀는 영주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은 매정했고,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
라키바하프의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는 처지처럼, 남자는 자기 손바닥에 얼굴을 묻을 뿐이었다.
태양이 하늘 높이 뜨는 땅이었다. 밖으로는 날이 더웠고 속으로는 불이 붙었다. 뒷덜미부터 흐른 땀이 등허리에서 싸늘하게 식어 갔다.
어디서부터 잘못 꿰어졌을까.
영주는 가면을 벗어 던지듯 얼굴 가린 손바닥을 치웠다.
“하지만, 나나!”
억눌러 왔던 분통이 터지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들은, 그것은 괴물이야!”
죄인에서 포로로, 포로에서 노예로. 한 마리 상품처럼 배에 실려 이곳 탈타르노 반도에 전시되기까지, 라키바하프는 그간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갖은 수난을 겪었다. 그가 버텨 낸 고초는 자연스럽게 리자드에 대한 공포와 혐오로 이어졌다. 그것은 라히무스 개인에 대한 원감이나 반감 그 이상이었다.
“폭력적이고 음탕한 본성이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족속들이야. 아니, 그 이상이지.”
남자가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나니아의 어깨를 불쑥 붙잡았다.
“처음엔 달콤하게 굴었겠지. 너를 자기 손에 떨어뜨리기 위해서. 멋대로 움켜쥐고 마음껏 간음하기 위해서!”
“가주님….”
“하지만, 나나.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머지않아 본색을 드러낼 테니까.”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지, 남자에게 붙잡힌 어깨가 골을 울릴 정도로 흔들렸다.
“내가 잘 안다. 그것은 악마야. 인두겁을 뒤집어쓴 악마! 속아선 안 돼. 그래선 안 되는 게다!”
“가주님!”
하녀가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불러 세웠다. 이제껏 들어 보지 못한 고성에 라키바하프는 깜짝 놀라 하던 짓을 멈추었다. 정신을 차려야 할 사람은 도리어 그였다.
“저를 지켜 준 것도, 가주님을 구해 준 것도, 리자드예요. 아시잖아요.”
소녀는 다시 침착하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라키바하프의 어깨를 내리누르며 그를 진정시켰다. 그녀도 당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리자드의 흉포한 본성을 모르지 않았다.
“괴물이라고 하신다면…. 그래요. 괴물이 맞는지도 몰라요.”
그런데도 왜.
영주는 일그러진 얼굴로 의문을 표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흥분을 다스리던 중이었다. 하녀는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한테는 정말 사랑스러운 괴물이었어요.”
나니아의 말을 듣고 라키바하프는 숨을 집어삼켰다. 부푼 폐가 터질 듯이 요동쳤다.
“그건….”
“사랑해요.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됐어요….”
면전에 대고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남자는 상처 입은 표정을 지었다. 커다란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어서 죄송해요.”
“아니, 아니다. 그건 아니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너를 위해서 그 마음은 접어야 한다. 내가 너를 지켜 주지 못해서, 너를 그런 위태로운 상황에 빠트려서, 혼란스러운 나머지 나니아 네가….”
“아니에요. 아니에요, 가주님.”
남자가 경황없이 주절대는 말을 하녀는 단호하게 잘라 냈다. 그러고는 애달픈 목소리로 자기 얘기를 했다.
“힘들고 괴로워서, 거기에라도 매달리고 싶어서 사랑하게 된 게 아니에요.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그녀는 라키바하프가 자신에게 마음을 준 방식과 자신이 라히무스에게 마음을 빼앗긴 방식은 다르다고 말하고 싶었다. 가진 걸 모두 잃은 다음에야 비로소 옆자리를 내어 주려 했던 그가 떠올랐다. 상황에 떠밀린 듯한 청혼은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그 공석은 자신을 위한 자리가 아닌 것 같았더랬다.
소녀는 시큰해진 코끝을 다스리며 말했다.
“그 사람은 저를 초라하게 만들지 않아요….”
당신과 다르게. 뒷말은 흐릿하게 생략되었다.
그녀는 나여도 상관없는 자리가 아니라,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의 곁에 있고 싶었다.
* * *
난간을 짚고 계단을 내려오는 발끝이 살짝 떨렸다. 여기도 리자드, 저기도 리자드. 주변이 온통 오통통한 꼬리를 늘어뜨린 도마뱀들로 가득했다. 이따금 어깨라도 부딪히면 시비가 걸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먼 시간인데 챠링고는 벌써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벌건 얼굴로 술병을 흔들며 오랜만에 만난 동료와 회포를 푸는 듯했다. 한결같이 해맑은 표정의 파키케팔로가 그녀 옆에 앉아 있었다. 나니아는 일행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라히무스는요?”
“으응, 일단 앉아야지! 한 잔 받아, 우리 아가씨!”
알딸딸한 얼굴의 챠링고가 흥겨운 표정으로 술잔을 건네주었다. 나니아는 얼결에 술을 한 잔 받아 마시고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목구멍이 시리고 칼칼했다.
“라히무스는요?”
이제 됐냐는 듯 나니아가 다시 물었다. 맹목적으로 라히무스부터 찾는 그녀를 보고 챠링고가 혀를 찼다.
“파키케팔로의 말을 들어 보니까, 둘이 내내 붙어 있었다면서.”
“제가 알려드리죠.”
알고 싶으면 잔을 받으라며 벨로즈가 술병 주둥이를 술잔에 가져다 댔다. 저 멀리 가게 구석에서 연주되는 가락을 따라 흥얼거렸다. 님프 또한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나니아는 아슬아슬하게 찰랑거리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한 잔에 한 모금 겨우 마셨을 뿐인데 벌써 찌르르하니 부담이 느껴졌다. 은근슬쩍 반 잔만 마시고 내려놓으려 했더니 파키케팔로에게 딱 걸렸다. 녀석은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술잔을 내려놓지 못하게 했다. 그대로 나니아의 얼굴에 밀어붙였다. 두 번째의 술잔을 힘들여 들이켜는 그녀 옆에서 벨로즈가 깔깔대며 좋아했다. 파키케팔로가 입에 묻은 맥아주 거품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물었다.
“그새 또 싸웠어? 꼬리로 뭐라도 아작 낼 기세던데.”
말을 듣자 하니 아무래도 단단히 삐진 것 같았다. 나니아는 라히무스를 만나기 전에 먼저 그를 달랠 방법부터 고민해야 했다.
“그렇다잖아요. 어디 있는지 빨리 알려 주세요….”
그녀는 제 속도 모르고 헤실헤실 웃기만 하는 벨의 어깨를 흔들었다. 결국, 그가 가르쳐 주는 방향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남자가 머물기로 한 방. 공교롭게도 라키바하프와 대화를 나누었던 그 방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등잔 밑에 있는 것을 모르고 번거롭게 아래층을 오간 셈이었다. 잠금장치가 제대로 걸려 있지 않은 문에서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최상위 포식자의 여유와 방종이 느껴졌다.
“라히무스, 나 들어가요.”
소녀는 열린 문틈 너머로 일방적인 허락을 구했다. 초대받지 않은 처지를 생각하며 방문을 아주 조금만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이제껏 잠만 잘 수 있으면 그만이던 숙소와는 달랐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아름다운 첨형 아치문은 따로 여닫을 필요가 없이 두꺼운 문틀만 남아 있었고, 그 너머로 이런저런 필요를 갖춘 방들이 들여다보였다. 가장 안쪽에 자리한 방문에는 모슬린 커튼이 드리워져 있었다. 보여 줄 듯 말 듯 아슬아슬 내비치는 은밀함이 그 내실의 존재감을 돋우었다. 팔에 부드럽게 감겨 오는 천을 걷어 올리고 방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나니아의 짐작대로 그곳은 침실이 맞았다. 그리고 토라진 리자드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방문으로부터 정확히 등을 돌린 채였다.
여독을 씻어 내고 쉬고 있었다든가 하는 삶의 기척 따위는 전혀 느껴지질 않고, 남자는 처음부터 오직 그렇게 기다리고만 있던 것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누가 왔는지 알았을 텐데도 뒤돌아보지 않는 모습이 몹시도 고집스러웠다.
“라히무스.”
이름을 불러 보아도 비늘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어지간해선 이 갈등에서 져 주지 않을 완강한 기세였다. 나니아는 사내가 앉아 있던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그의 등 뒤에서 다시금 말을 붙였다.
“기다렸어요?”
하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나니아는 리자드의 단단한 목을 등 뒤에서부터 끌어안았다. 그래도 돌아봐 주지 않자, 어깨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소녀의 까맣고 긴 머리카락이 라히무스의 목덜미를 간지럽히고 몇 가닥은 가슴 아래로까지 흩어졌다.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곤 라히무스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단단히 토라진 얼굴. 새침한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삐졌구나.”
사내는 멋대로 쳐다보지 말라는 듯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버렸다.
“아니야.”
그러고는 제 기분을 ‘삐졌다’는 가벼운 말로 매도하는 애인을 향해 불만을 드러냈다. 퉁명스러운 말투의 목소리가 낮고 음산했다.
“아닌 게 아닌데?”
나니아는 리자드의 한쪽 뺨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하지 마.”
사내는 한쪽 어깨를 비틀면서 그녀를 밀어 내는 척했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녀를 저 멀리 떨어뜨려 놓을 수 있는 그였다. 하나 마나 한 저항은 그저 시늉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삐지지 마요.”
“…삐진 거 아니라고.”
“삐진 게 아니야?”
“아니야.”
나니아의 얼굴이 오른쪽에서 슬금슬금 가까워질수록 라히무스의 고개는 왼쪽으로 비틀어졌다.
그는 싸늘하고도 섭섭한 목소리로 말했다.
“…화낼 거라고 했잖아.”
친히 예고까지 해 주었는데 네가 무시하지 않았느냐며, 사내는 치졸한 원망을 표했다.
여자는 그를 뒤에서 끌어안는 걸 포기하고 소파의 앞쪽으로 돌아왔다. 양팔 가득 안아도 부족한 그의 몸을 품 안 가득히 끌어안고 물었다.
“자기 화났어?”
익숙지 않은 호칭에 리자드가 움찔했다. 그가 그녀에게 종종 건네는 말들과 완전히 똑같은 투였다.
“화내지 마, 자기야…. 응?”
제 말투를 따라 하는 것인 줄 알고, 사내는 얼굴이 빨개졌다.
라히무스 자신은 매번 쓰는 말이면서 막상 되돌려받으니 참을 수 없이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는 그녀가 그렇게 불러 주기를 바란 적도 있었는데 말이다. 심장이 간질간질 쿵쾅쿵쾅 뛰었다.
우물거리는 입꼬리 끝에서 이걸 올려야 할지 내려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게 보였다. 나니아는 그 허술한 틈을 놓치지 않고 망설이는 주둥이 끝에다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입술이라기엔 뺨에 가까웠고 뺨이라기엔 입술이 가까운 자리였다. 뭐가 됐든 얼어붙어 있던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화끈해지는 게 느껴졌다.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가슴 앞쪽으로 미끄러져 안겼다. 구렁이 담 넘어가듯 능청스럽고도 어물어물했다. 널따란 가슴에 문질러지는 말캉한 볼이 사랑스러웠다.
“무슨 얘기 하고 왔게?”
나니아가 물었다. 라히무스는 궁금하지 않은 척 고개를 돌렸다. 제대로 얼굴을 마주했다간 쉽게 화를 풀어 버릴 것 같았다. 상대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드러냈는데도 나니아는 굴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의 목에 진득하게 팔을 감았다.
“당신을 사랑하게 됐다는 얘기를 하고 왔어….”
그 말을 듣고 라히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나니아는 남자의 가슴에 턱을 붙이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로부터 어떤 반응이 돌아오길 기대하는 것처럼 두 눈을 깜빡거렸다.
사내는 침을 꿀꺽 삼키고 눈동자만 흘긋 움직여 저에게 매달린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눈이 마주치자 굳은 결심도 무색하게 만드는 해말간 웃음이 다가왔다.
나니아가 그 남자의 앞에서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노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얼굴에 기분 좋은 열이 몰렸다. 오래전 몇 번이고 자신을 참담하게 만들었던 그 희멀건 얼굴에 비슷한 패배감이 떠올랐으리라 생각하면 통쾌해졌다. 그 꼴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보았더라면 더 좋았을 걸 그랬다. 사내는 심장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흔쾌한 기분이 들었으나 겉으로는 관심 없는 척했다.
“…그래서.”
“당신이 걱정할 만한 일은 없었다구.”
남자는 계속 얄밉게 말했다.
“그래서.”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는 식의 대답이 나니아를 무안하게 했다. 라키바하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라히무스라면 틀림없이 이런 식으로 자신을 치켜세워 주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 믿었다. 당사자는 모르는 모욕을 안겨 주면서까지 그를 달래려던 계략이 뜻처럼 먹히질 않자, 나니아는 밥 먹기를 거부하는 강아지를 돌보듯 사내의 얼굴 곳곳을 어루만졌다.
“어떡하지, 내 귀여운 도마뱀. 정말 속상했구나.”
그녀는 들으란 듯이 혼잣말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화를 풀까? 응? 라히무스.”
소녀의 작고 보드라운 입술이 남자의 턱 끝을 몇 번이고 쪼아 댔다. 라히무스는 히죽거리는 입술을 말아 물고는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꾹 참았다. 그깟 뽀뽀 몇 번으로 봐주지 않겠다는 듯이 턱 끝에 힘을 주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나니아는 그런 라히무스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더는 그에게 치대지 않고, 그의 옆자리에 차분히 앉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말을 걸었다.
“있잖아, 나는 그분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화를 풀어 주려던 게 아니었어? 라히무스가 제 옆에 앉은 나니아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다시 저를 긁기 시작한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가엾은 사람이잖아, 사실.”
첫사랑이었다. 외로운 삶을 보듬어 준 사람이었다. 영영 잊어버릴 수 있을 거라 자신한다면 그것은 나니아 자신과 라히무스에 대한 기만이 될 터였다. 남자가 행복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 행복은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어야 해. 가주님의 행복한 앞날에, 내가 함께하고 싶진 않아.”
“…….”
나니아의 말은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다. 남자는 그녀 말고 다른 여자를 사랑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도 몰랐다.
“당연한 말이지만, 라히무스. 나는 당신도 행복하길 바라. 그리고 당신의 행복한 미래엔…. 거긴 내가 있었으면 좋겠어. 내가 없는 당신은 불행하길 바랄 거야.”
미련이 남지 않은 사람에겐 저주조차 사치였다. 나니아는 라키바하프에게 어떤 악감정도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그를 위해 사용할 마음이 동나 버린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누군가 자신을 잃고 마음 아프길 바란다면, 그만큼 아직도 상대방에게 연연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나니아가 그런 마음이 들게 만드는 사람은 이제 라키바하프가 아니었다.
“나 때문에 외롭고, 나 때문에 괴롭고, 나 때문에 속상한 당신 마음이…. 그게 너무 기꺼운 내 마음이…. 나는 그게 사랑인 것 같아, 라히무스.”
소녀는 사내의 팔을 들어 올리고 그의 가슴에 한쪽 뺨을 털썩 기대었다. 꼿꼿하던 리자드의 어깨가 얕게 얼은 빙판처럼 내려앉았다. 당장 팔을 뻗어 여자를 감싸 안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사내는 투덜거렸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새끼보다 날 훨씬 더 사랑한다는 거잖아.”
“…맞아.”
그 간단한 말을 왜 그리 길게 늘어놓느냐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나니아는 여전히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라히무스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그 뺨에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그리고 남자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릎걸음으로 일어서서 커다란 인형을 끌어안듯 포옹하였다.
“네가 정말 좋아.”
“…….”
소녀의 품은 작지만 컸다. 아껴 주는 듯한 그 몸짓에 사내는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다.
“…그럼 뽀뽀해 줘.”
그리해 주면 이번에는 정말 맺힌 응어리를 풀겠노라고 투정을 부렸다. 나니아는 웃으면서 그의 입술로 다가갔다. 화해라든가, 위로라든가, 그런 부차적인 메시지 없이, 오로지 키스 그 자체가 목적인 입맞춤이 오갔다. 소녀는 온 힘을 다해 그의 몸에 부딪혀 왔다. 고작 그런 힘으로 쓰러져 주기엔 너무도 미약했지만, 라히무스는 그녀의 밑에 기꺼이 깔려 주었다.
사내는 덮쳐지는 기분으로 소녀의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그의 얼굴을 간지럽히던 긴 머리카락이 한쪽 귀 뒤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며 아찔해졌다. 머리카락을 넘긴 방향으로 다시는 그것이 쏟아지지 않도록 고개를 살짝 비트는 몸짓이 그를 안달 나게 했다. 소녀가 입을 뗐을 때, 사내의 혀끝이 따라갔다.
“아, 나냐….”
리자드는 한참 부족한 얼굴로 헐떡거렸다.
“나냐 꺼 먹여 줘….”
무엇을 달라는 것인지 몰라 머뭇거리는 그녀를 보고, 사내는 입맛을 다셨다. 자신에게 타액을 먹여 달라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몹시도 저열하게 들렸다.
“시, 싫어…!”
혀를 얽다 보면 어차피 뒤섞이는 분비물이지마는, 아무리 그래도 애인의 입에 침을 뱉고 싶지는 않았다. 나니아는 도망치려 했으나 이미 한발 늦어 있었다. 남자에게 허리가 붙잡힌 채였다.
“왜…. 먹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먹여 달라는 건데.”
남자는 적반하장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듯이 말했다.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거 아니냐고 꾀어내는 그의 눈빛이 이미 홧홧한 감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소녀는 그의 가슴에 팔을 붙이고 의도찮게 바짝 엎드려 있었다. 남자의 팔이 그녀를 꽁꽁 옭아맨 탓이었다.
“응? 어서. 빨리, 자기야….”
“으….”
소녀는 끔찍하다는 듯이 눈을 질끈 감았지만, 말이 없는 입술 안쪽에는 침이 고이고 있었다. 그 밑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사내의 모습은 참으로 상스럽게 야했다. 나니아는 무언가 저질러 버리는 듯한 기분으로 그 혓바닥에 제 침을 흘려 넣었다. 끈적하고 불결한 타액이 둘 사이를 연결했다. 무릎 아래 닿아 있는 그의 남근이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너무 부끄러워서 눈 밑이 시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리자드의 게슴츠레한 두 눈에 몹시도 만족스러운 기색이 어렸다.
나니아는 그 음란한 눈빛을 마주하고 수치심에 물들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곤 말했다.
“더, 더러워…. 이런 게 왜 하고 싶은 거야.”
그러고는 라히무스의 팔에서 빠져나와 도망치려는 것을 다시 붙잡혀서 끌어안겼다. 창피해하면서도 어지간한 부탁은 다 들어주는 자신의 음란한 암컷이, 남자는 너무 좋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야, 너한테서 나온 건 다 먹고 싶으니까….”
그는 나니아의 작은 몸을 등 뒤에서부터 감싸 안고 그녀의 가슴 한쪽을 다소 거칠다 싶을 정도로 움켜쥐었다. 위에서 나온 것도, 아래에서 나온 것도, 전부 다 먹어 봤는데, 여기서 나오는 것만큼은 영영 먹어 볼 수 없으리란 생각에 한스러워졌다. 라키바하프 같은 인간 남자의 정액만이 그녀를 임신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리자드는 억울하고 서러워서 미칠 것 같았다. 거기다 종족적인 열등감마저 들었다.
라히무스는 나니아의 온 얼굴에 주둥이를 대고 쪽쪽거렸다. 그녀는 성가시단 듯이 밀어 내다가 이내 이겨 낼 수 없음을 깨닫고 포기하였다. 그러곤 사내의 우람한 몸에 기대어 축 늘어졌다. 팔을 들어 그의 뺨을 툭툭 짚으며 물었다.
“그럼 이제 화 푸는 거야?”
기분은 좀 괜찮아졌냐는 질문에 주책없이 달려들던 라히무스가 다시 조금 뻣뻣해졌다. 사실 마음 같아선 라키바하프가 보는 두 눈앞에서 나니아를 잔뜩 헤집어 놓는 꼴이라도 보여 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그 불순한 생각에 빠져든 리자드의 눈이 음험해졌다.
‘내 밑에서 네가 어떻게 앙앙대는지, 그 새끼가 알아야 하는데….’
라히무스는 나니아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그녀의 체취를 흠뻑 들이마시며 애석한 응어리를 풀었다. 오늘 이 밤, 아쉬운 대로 놈의 방까지 소리가 닿을 수 있게 그녀를 쾌감에 진저리치도록 만들리라 다짐하였다.
* * *
처량한 새벽의 소리 없는 석별. 님프는 라키바하프가 남겨 두고 간 편지를 발견함으로써 그가 사라진 것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나니아에게.]
주인을 닮아 단정한 필체의 글씨가 이 편지의 수신자를 가리켜 말하고 있었다. 이와 똑 닮은 연서가 자신의 앞으로도 향한 적이 있다는 기묘한 사실을 벨로즈는 알지 못했다.
남자는 선이 가는 눈썹을 치켜들면서 편지를 주워 들었다. 도도한 낯짝엔 이렇다 할 호기심조차 내비치지 않으면서도 마땅히 그럴 권리가 있는 사람처럼 종이를 펼쳐 들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손끝이 뻔뻔스럽도록 가지런했다. 벨로즈는 계단을 한 칸 한 칸 내려가면서 라키바하프의 편지도 한 줄 한 줄 읽어 내려갔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지리멸렬한 마음들을 헤아리면서.
꽤나 장문의 글이었다. 지난 세월의 추억, 자신의 심경, 그리움, 미안함,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 따위에 대한 말들이 동시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님프는 그간 라키바하프와 주고받은 말들을 떠올렸다. 빈약한 동정심이 자극당한 벨은 라키바하프 역시 자신의 숲으로 데려가 먹고 살 방법 정도는 찾아주겠노라 약속했었다. 지쳐 보이는 얼굴 뒤로 이런 심산이었구나 싶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라히무스와 나니아를 면대하고 나니 그들을 따라나설 마음이 감쪽같이 사라진 모양이었다.
쯧쯧.
라키바하프의 편지를 마지막 줄까지 다 읽은 벨로즈는 짧게 혀를 차면서 종이를 구겼다. 영주는 연문을 썩 잘 쓰는 편이었다. 읽는 이가 마음이 흔들릴 만한 문장으로 가득했다.
침대가 출렁이는 감각에 파키케팔로가 눈을 떴다. 방으로 돌아온 님프가 아직 잠들어 있는 그의 머리맡에 걸터앉은 것이었다.
“파키케팔로.”
벨로즈가 청년의 이름을 불렀다.
“으, 엉….”
비몽사몽 눈을 뜨는 것조차 힘겨운 녀석에게 너덧 장의 종이 뭉치가 내밀어졌다.
“여기 불 좀 붙여 줘요.”
“에, 뭐….”
녀석이 찌푸린 두 눈을 끔뻑이며 물었다. 누군가 그를 성냥 취급하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은 아니었지만, 아침 댓바람부터 태워야 할 문서가 있다는 건 이상했다. 어렴풋이 읽어 보려 했더니 리자드는 모르는 글자였다.
“이게 뭔데요….”
님프는 반듯한 얼굴로 엉뚱한 소리를 했다.
“나니아의 신세.”
“으어…?”
“자세히 알 거 없고, 빨리 불이나 붙이세요.”
“어, 어응….”
리자드는 언제부턴가 벨로즈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순종하는 습관이 생겼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으면서 시키는 대로 했다. 화르르 타오른 불꽃이 종이에 옮겨붙었다.
오래전 멋대로 훔쳐본 편지 한 통에 전전긍긍하던 누군가와 다르게, 통째로 훔쳐서 태워 버리기까지 하는 님프의 만행엔 일말의 양심도 없어 보였다.
한 남자의 후회와 미련은 그렇게 완전히 인멸되었다.
* * *
벨로즈의 뒷머리가 어느덧 목덜미를 모두 덮고 어깨에 닿기에 이르렀다. 예쁘장한 얼굴만 보고 있자면 머리를 짧게 자르는 편을 좋아하는 아가씨 같으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면 훤칠한 키가 도드라졌다. 그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조금쯤 성별을 의심하게 되는 분위기로 변모하였다.
손바닥 날을 눕힌 파키케팔로가 님프와의 키 차이를 가늠해 보았다.
“그새 좀 더 큰 것 같지 않아? 요?”
비견하는 손끝이 자신의 콧날과 벨로즈의 정수리 사이를 오갔다. 두피마저 새하얀 그의 머리카락은 얼룩덜룩하게 보기 흉했던 이전의 모습은 잘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요정같이 매끈하고 아름다웠다. 나니아가 파키케팔로의 말에 맞장구쳤다.
“꼭 나무처럼 쑥쑥 자라시네요.”
벨은 하루에도 너덧 번씩 머리를 자르고 싶다고 말했지만, 나니아는 그 짧은 머리카락을 꾸역꾸역 묶어 주면서 님프의 신성한 미모를 지켰다. 간신히 한 묶음으로 모아 놓은 머리카락이 새의 꽁지 모양이 되었다. 그 모습이 상당히 깜찍해서 사실은 본인도 조금쯤 마음에 들었다.
세 사람이 소꿉장난 같은 담소를 나누는 사이, 두 어른 사이에서는 다음 목적지에 대한 의견이 오갔다.
“탈렘을 거쳐서 가지.”
“운하가 말라비틀어질 지경이라고 들었는데. 계속 육로로 이동할 계획이냐?”
“배라면 이제 지긋지긋해.”
라히무스의 말에 챠링고가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파코. 다음 목적지는 탈렘이다.”
“오오, 좋아!”
청년은 얼마 만에 밟아 보는 고향 땅인지 모르겠다며 좋아했다. 셋의 대화를 주워들은 벨로즈가 물었다.
“다른 곳을 들렀다 갑니까?”
“직행하려면 드넓은 사막이라, 사람 사는 곳을 거쳐 가려 합니다. 그렇게 멀리 돌진 않습니다. 어차피 가는 길이라서요.”
“그래요?”
벨로즈는 여로에 오른 날수를 가만히 헤아려 보더니 특유의 도도하고 까칠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오래 걸렸으면 좋겠네요.”
“왜요?”
“나는 아직 당신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거든요.”
“…예?”
리자드들은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 님프의 말을 곱씹었다. 말한 내용만 따져 보면 웬걸 사랑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뭐 그런 소릴… 내 신발 한번 핥아 보라는 투로 말해요?”
파키케팔로가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님프는 환하게 웃었다.
* * *
라히무스는 길드 안의 대금업자를 찾았다. 콩고물이 떨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파키케팔로도 그와 함께했다. 딱 돈놀이를 좋아하게 생긴 대금업자가 깐깐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했다.
사업장에서는 여러 마리의 우우룡을 길렀다. 길드원 정보를 이곳저곳으로 나르는 놈들인 게 분명했다. 그중 한 마리가 탁자로 날아들었다. 낯선 체취를 풍기는 코우에게 관심을 표하는 듯했다. 남자는 습관적으로 자기 우우룡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오른손으로는 보증 비율을 적어서 내보였다.
“원금 위치가 상당히 멀어서 수수료는 이만큼이올시다.”
남자가 내미는 숫자에 파키케팔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산수라면 영 젬병인 녀석이지만, 남자가 말도 안 되는 비율을 제시했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남의 돈을 생으로 빌려도 이만큼은 안 떼먹겠다!”
청년은 자기 돈도 아니면서 눈 뜨고 코 베일 예정인 사람처럼 씩씩댔다. 대금업자는 뜨끔한 얼굴로 빈곤한 턱 끝을 쓰다듬었다.
“예치금 확인도 없이 빌려드리는 거잖소.”
엄밀히 말해서 돈을 빌린다기보단 자기 돈을 꺼내 쓰는 것이었다. 맡겨 놓은 재산을 담보로 이쪽에서 빌리면 저쪽에서 빼 가는 구조였다. 대금업자들은 그 사이에서 수수료를 챙겼다.
원래대로라면 금고에 돈이 정상적으로 남아 있는지 우우룡을 보내서 알아봐야 했다. 적잖은 시일이 걸리는 일이었기 때문에 기다릴 여유가 없는 사람은 급한 만큼 높은 고리를 감당했다. 적법 절차를 생략한 거래는 철저히 빈 둥지 출신들끼리의 신용에 의존하여 이루어졌다.
“잔금엔 기별도 안 가겠소만, 뭘….”
대금업자가 툴툴거리며 말했다. 그가 높은 비율을 제시한 데에는 역시나 주금고의 위치가 멀다는 것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어 보였다. 파키케팔로는 동료가 빌리려는 금액과 잔액을 슬쩍 확인했다. 두 줄을 넘어가는 액수에 화들짝 놀라서 보면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황급히 손으로 가렸다.
“라히무스 미쳤어? 공용 금고에 돈을 이만큼이나 넣어 두는 리자드가 어딨어!”
이러니까 맨날 뒤통수로 칼이 날아드는 거라며 꽥꽥대는 것을, 라히무스는 듣기 싫다는 듯 귀를 후볐다. 군말 없이 인출 수수료를 받아들이며, 어딘가로 서신을 전할 우우룡을 빌렸다. 남자가 누구에게 어떤 편지를 쓰는지는 몰라도 파키케팔로는 그의 느슨해진 경제관념을 탓하기에 바빴다. 이런 식으로 살다간 나이도 많은데 장가도 못 갈 거라며 극단적인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생의 목적이 그저 재물을 모으는 일뿐인 것처럼 살던 사내는 언젠가를 기점으로 씀씀이에 후해졌다. 그것이 아그네일에서 돈에 쪼들릴 적에 무너져 내린 자존심을 만회하고자 하는, 일종의 보복행위라는 사실을 파코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뒤이어 그들은 턱없이 높은 요금으로 턱없이 먼 거리를 이동할 마차를 구했다.
“돈 때문에 일하는 게 아니라더니. 허풍이 아니었나 보군.”
챠링고가 파키케팔로로부터 얘기를 전해 듣고 시시콜콜한 감상을 중얼거렸다.
흔들리는 말의 꽁무니 위에서 일 년 가까이 고생한 청년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다.
“나 마차 너무 좋아!”
고삐를 잡을 일도 박차를 가할 일도 채찍을 휘두를 일도 없었다. 탈렘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녀석은 말 엉덩이 대신 자기 엉덩이를 들썩였다.
반면에 나니아는 착잡한 기분으로 짐 더미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종적을 감추어 버린 라키바하프의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은 후였다. 얘기의 출처는 당연히 벨로즈였다. 간악한 님프의 혀끝에서 영주는 제 살길 도모하겠다며 말도 없이 잠적한 샘바리 비겁자가 되었다.
“상심이 커 보였어요. 도저히 우리랑은 함께 할 수 없겠다더군요. 아무래도, 그랬겠죠.”
몹시 안타깝다는 듯, 남자가 위선을 떨었다.
“말릴 수 없었어요. 인연이 여기까지인가보다 싶었죠.”
그는 마치 떠나가는 영주를 직접 목격하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편지로나마 그의 마지막을 배웅한 사람이 그였으니 완전히 허언인 것만도 아녔다.
“몇 푼 쥐여 드려야 했던 게 아닐까요?”
“오, 나니아. 이 천연덕스러운 악녀 같은 사람….”
남자는 근심 가득한 하녀의 어깨를 짚으며 희곡 무대의 주인공처럼 과장되게 말했다. 으쓱한 표정이 참으로 태연자약했다.
“당신은 정말이지, 남자를 비참하게 만드는 자질을 타고났군요.”
“…제가요?”
“소리 없이 떠났길 천만다행이죠. 당신의 그 어중간한 동정이 영주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박살 내고 말았을 거예요.”
님프는 먼저 마차에 오르더니 뒤따라오라는 듯 하녀를 향해 손짓했다.
“어서 타요, 나니아. 갈 사람은 가야죠.”
나랑 함께.
소녀는 제자리에 우뚝 서서 숙연한 마음으로 골몰하였다. 그의 말이 맞았다. 곁에 있어 줄 것이 아니라면 차갑게 돌아서 주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그래도 어디로 가는지 정도는 말해 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좀처럼 떨쳐 낼 수 없는 꺼끌꺼끌한 기분이 소녀의 마음을 들쑤셨다.
* * *
마부는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의 유일한 재산이나 다름없는 마차는 치안 걱정 없는 대로를 달렸다. 강인한 용병 리자드가 세 마리. 마부는 먼 거리를 이동하면서도 무서울 것이 없었다. 고삐를 휘감은 손은 경쾌하기까지 했다.
목적지인 탈렘은 홍염 땅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였다. 탈렘과 수도 사이의 거리는 딱 탈타르노에서 탈렘까지의 거리와 비슷했다.
깎아지른 사암 벽의 협곡 속에서 비로소 자신들의 영역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건조한 흙먼지가 뒹구는 땅에서 나니아는 이제껏 본 적 없는 종류의 광활함을 느꼈다.
“이런 메마른 땅에서 사람이 산다는 게 이상해요.”
마차가 달리는 내내 주위를 둘러보면 풀포기 한 점 없는 바위산으로 둘러싸여 있을 때가 많았다. 그런 곳에서도 사람들은 꾸역꾸역 살아갔다.
“탈렘은 역사가 오래된 고대 도시야. 아주 옛날에는 사막이 아니었다지.”
챠링고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대답도 나니아의 호기심을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과거에 어쨌든 지금은 이렇게 척박하잖아요. 이런 곳에서 농사는 어떻게 지어요?”
“농사?”
나니아의 말에 챠링고는 물론 파키케팔로도 깔깔 웃었다.
“우리들은 농사를 짓고 살지 않아, 나나.”
“네? 그치만… 그럼 뭘 먹고 살아요?”
모름지기 농경이란 어느 곳에서나 생활의 기반이고 삶의 바탕이 되어 줄 일이었다. 먹을 것이 없는데 어찌 삶을 이어 나갈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글쎄. 착취와 강탈?”
“지금 하는 이런 일.”
파키케팔로가 두 손으로 스스로를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가진 것이 없으니 뺏으면서 산다는 뜻이야.”
잠자코 듣고만 있던 벨로즈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착 세력을 상대로 전쟁을 자주 일으킵니까?”
“예, 맞아요. 그런 셈이죠.”
홍염룡들은 상업 중심지와 군사 요충지를 빼앗거나 점령하는 방식으로 배를 불려 왔다. 주변 약소국가들을 속국으로 만들어 수탈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목적지인 탈렘도 지난 몇 세기 간 홍염룡들과 대지룡들 사이에 치열한 공방을 거치며 빼앗고 빼앗기기를 반복하던 땅이었다. 역사적으로 대지룡들의 영토였던 세월이 훨씬 길었는지라 그들의 선현을 기리는 신전이 도시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 있었다.
“그럼 우리가 지금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교전지로 향하고 있단 말인가요?”
“아니요. 지금은 아니죠. 대지룡들이 수복을 꿈꾸기엔 빼앗긴 지 너무 오래된 땅입니다. 무엇보다 리자드 협정 이후로 대륙이 전체적으로 잠잠해졌거든요.”
“그건 모르는 거야, 챠링고. 나는 귀족 놈들을 믿을 수가 없어!”
“뭐, 우리 같은 용병들이야 일거리가 생기면 좋지만.”
“홍염룡들만 좀 가만히 있으면 돼.”
라히무스가 못마땅한 투로 말했다. 염황이 들쑤시지만 않으면 대륙 평화도 요원한 일이 아니었다.
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땅 위에서 그들은 물로 돌아간 물고기처럼 자유로워졌다. 내 것 아닌 색으로 머리를 물들일 필요도, 몸에 맞지 않는 약을 먹고 두통에 시달릴 필요도, 꼬리를 허벅지에 묶어 놓을 필요도 없었다.
“움직이시면 안 돼요.”
나니아가 말했다. 그녀는 지금 어디서 났는지 서너 가닥 꼬아 놓은 긴 실을 가지고 수예를 즐기고 있었다. 챠링고의 꼬리에 대고서. 하녀는 마치 벌집을 꾸리는 꿀벌처럼 규칙적인 패턴으로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무료함 속에서 즐기는 소소한 일거리였다.
시키는 대로 가만히 앉아 있던 챠링고가 물었다.
“어디서 이런 걸 배워 온 거야?”
뭘 하려는지는 몰라도 하고 싶다는 걸 실컷 하게 내버려 두었더니만, 꼬리에다 대고 마크라메를 짜고 있었다.
“아이, 이런 건 부잣집 아가씨들이나 하는 거잖아.”
이런 식의 화려한 실매듭은 꼈다 뺐다 할 수 있는 여타 장신구와 다르게 번거롭고 소모적이었다. 남에게 꼬리 단장을 맡길 여유가 있는 귀족 리자드들이나 즐길 법한 장식이었다.
나니아가 이상한 걸 배워 왔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민가를 만나 마차가 잠시 멈추었을 때였다. 하녀는 평소처럼 수컷들의 머리카락을 다듬어 주더니, 챠링고를 포함한 리자드들의 앞발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날카로워진 손톱 끝을 뭉툭하게 잘라내고 네일 파일에 갈아서 매끈매끈하게 만들었다.
“이러다 아주 귀도 파 주고 배도 긁어 주겠다.”
챠링고가 핀잔을 주듯 말했다. 소용없는 짓이라고 하면서도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긁어 드려요?”
“필요 없어.”
챠링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나니아가 자기 가방에서 꺼내 온 미용기기 일습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런 건 또 어디서 난 거야?”
자그마한 반짇고리인 줄 알았더니 실이나 바늘 따위가 아니라 못 보던 물건들이 자꾸만 튀어나왔다.
“선물로 받은 거예요.”
“누가 이딴 걸 선물로 줘?”
“샬롯이라고, 탈타르노로 오는 배에서 만난 사람인데요. 이것저것 배웠어요.”
“…걔, 유멘타였지?”
뿌듯해하는 나니아를 보고 챠링고가 물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야. 어디 가서 이런 거 해 주지 마.”
“벼, 별로예요?”
“아니, 시중받는 입장에선 좋기야 한데….”
챠링고는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노예들이 주인들에게나 해 줄 법한 봉사를 동료에게 받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해지려는 것이었다.
“하여간, 너는….”
하녀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다시 마차에 올랐을 때, 어디서 또 처음 보는 물건을 꺼내 와선 자랑했다. 광을 내는 기름이라며 손수건에 묻히더니 그것으로 꼬리 비늘을 한 땀 한 땀 닦았다. 반질반질하게 윤을 낸 다음에는 조물조물 마사지가 이어졌다.
“자꾸 내 앞에서 남의 꼬리 주물럭댈 거야?”
라히무스는 참다 참다 짜증을 내면서 그녀를 빼앗아 왔다. 얼떨떨한 얼굴의 나니아가 그의 품에서 라히무스를 올려다보았다.
“…안 돼요?”
당연히 안 되지! 사내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파코 녀석 앞발을 만지작거릴 때부터 거슬려 미치는 줄 알았다.
“다른 놈들 꼬리엔 신경 꺼. 대체 네가 그걸 왜 관리해 주려는 건데?”
“그치만… 나는 재밌어서 하는 건데요.”
“싫단 말이야, 나 말고 다른 새끼들이 네 손 타는 거.”
남자는 버럭 화를 내더니 나니아를 꼭 끌어안았다.
“내 거 말고는 애지중지 다루지 마….”
으르렁거리던 숨소리는 이내 곧 유치한 칭얼거림으로 변하였고, 사내는 나만 예뻐해 달라며 나니아의 얼굴에 대고 제 뺨을 문질렀다.
“그럼 코우는요?”
“…그것도 안 돼.”
앞에서 보고 있던 챠링고는 질린다는 듯이 말했다.
“어유, 수컷이 저렇게 질투가 많아서 어디다 써.”
파키케팔로는 대충 저 꼴을 보면서 지내야 할 줄 알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뺨으로 뺨이 비벼지던 나니아가 말갛다 못해 싱거운 투로 불평했다.
“그치만, 라히무스 꼬리는 재미없단 말이에요.”
“…뭐?”
그녀의 말에 사내는 다소 충격을 받는 듯했다. ‘재미없다.’ 말인즉 매력이 없다는 뜻인가. 남자의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곁에 있던 파키케팔로가 쯧쯧 혀를 찼다.
“그러게 꼬리 치장에 신경을 좀 쓰라니까는.”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몰라도 일단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라히무스는 아무것도 하기 싫어하니까요. 건드릴 엄두가 안 나는걸. 거추장스러운 게 싫은 거잖아요. 그쵸?”
“…아니야.”
리자드는 자신의 암컷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신념이라기엔 얄팍한 버릇 정도에 불과했으나, 그까짓 고집 얼마든지 꺾을 수 있었다.
“안 싫어해.”
라히무스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라도 하듯 선언했다. 네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다며 나니아의 무릎에 대고 퉁퉁한 꼬리를 올려놓았다. 그녀는 잠시간 망설이듯 눈을 껌뻑이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그럼 전부터 꼭 해 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해 봐도 돼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녀는 장난감을 손에 쥔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라히무스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나니아는 자신의 짐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티에트의 배에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한 벌, 두 벌 선물 받은 옷들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옷더미를 파헤쳐서 꺼낸 물건은 연노란색 리본이었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 듯, 그것은 남자의 꼬리 끝에 매듭지어졌다. 꼬리 주인이 누군지 모른다면 썩 귀여운 모양새였다.
그 해괴한 짓거리를 목격한 링고파코는 몹시도 끔찍스러워했다.
“커다란 수놈한테 어딜 그런 걸…. 징그러워 죽겠네.”
“우리니까 참고 봐주는 거지 어디 가서 그러고 돌아다니면 큰일 난다니깐!”
덤덤할 줄 알았던 라히무스도 얼굴을 화악 붉히며 예사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턱을 쥐고 문지르는 행동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나니아는 덩달아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싫어요? 역시 남자한테 리본은 좀, 그… 그런가?”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해서 지나치게 들떴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채신머리없는 짓거리인가 보다. 나니아는 매듭을 잡아당겨서 풀어 버릴 요량으로 손을 뻗었다. 그랬더니 리자드가 꼬리를 홱 휘저어서 치워 버렸다.
“…괜찮아.”
사내는 수줍어하면서도 썩 의연하고 강건한 투로 대꾸했다.
“나는 너한테 이런 취급받는 것도 싫지 않아. 괜찮아.”
그는 다시 나니아의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그의 콧대는 덜컹거리는 바퀴를 따라 의도적으로, 그리고 비의도적으로 문질러졌다. 뒤이어 애교스럽게 입을 맞추려 하는 것을 소녀는 깜짝 놀라서 밀쳐 냈다.
“사,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뭐 하는 거예요.”
그 말에 리자드는 미간을 좁혔다. 꼬리에 리본은 달아 줬으면서 뽀뽀는 안 된다니. 그녀의 상식과 기준을 알다가도 모르겠는 것이다.
오랜 승차에 지친 소녀가 라히무스의 무릎을 베고 쓰러져서 잠들었을 때였다. 파키케팔로도 벨로즈도 모두 곯아떨어지고 깨어 있는 사람은 라히무스와 챠링고 단둘이었다. 그녀가 짜증스러워하며 말을 건넸다.
“이제 그 리본 좀 떼지?”
라히무스는 말이 없었다. 보란 듯이 꼬리 끝을 흔들 뿐이었다. 완전히 무시당했다.
약이 오른 챠링고가 남자를 괴롭힐 묘책을 떠올렸다. 요즘 들어 약혼녀가 생겼다고 거만해진 놈의 코를 어느 정도 납작하게 만들어 줄 필요가 있었다.
“넘마, 라히무스.”
챠링고가 알량한 어조로 다시 관심을 끌었다. 리자드의 붉은 눈이 스르륵 움직였지만 그뿐이었다. 여자는 대꾸 없이도 말을 이었다.
“고작 미동 취급받는 게 목표였냐?”
이번에는 확실한 반응이 돌아왔다. 사내의 서늘한 눈빛에 불쾌한 낌새가 엿보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라히무스가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자는 잘 생각해 보라는 듯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네가 너무 초짜처럼 굴잖아. 연애가 처음인 건 알겠는데, 영 능숙하지가 못하다고.”
챠링고의 말은 반쯤 놀림이고 반쯤 진심이었다. 동료가 애교를 부리는 걸 볼 때마다 토악질이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열아홉, 스물의 꽃다운 나이도 아닌데 그런 식의 아양이 과연 어디까지 먹힐지 회의적이기도 했다.
“네 쪽이 연상인 걸 그런 식으로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아? 으응, 절대 아니거든. 어린애가 어린 짓을 해야 귀엽게 봐주지. 너 같이 파릇파릇하고 싱싱한 시기 다 놓친 새끼가 그러고 있으면 역효과밖에 안 난다고.”
“…하지만, 얘는 날 귀여워해.”
“그게 아니라는 거야, 이 답답아.”
꼴같잖게 입술을 삐죽 내민 라히무스를 챠링고는 한심하게 여겼다.
“내가 봤을 때 나나 걘 귀여운 남자 별로 안 좋아해. 아니, 인간 여자들은 대체로 그래. 걔들이 수컷 리자드한테 기대하는 게 뭐냐? 큼직한 체구에서 나오는 듬직한 야성미거든. 어른스럽고 믿음직한 수컷한테 끌린단 말이야, 걔처럼 약한 애들은.”
챠링고가 ‘걔’를 향해 턱짓했다.
“그리고 이건 종족 불문 암컷들의 공통점인데….”
여자는 잠든 이들을 깨우지 않도록 말소리를 낮추었다. 마치 천기누설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한 언변이었다.
“여자들은 줄 듯 말 듯 헷갈리게 하는 남자를 좋아해.”
“…뭐? 아니, 왜?”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의 라히무스를 보고 챠링고가 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름지기 여자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수컷과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즐기기 마련이라고 주장했다.
“너처럼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줄 것처럼 굴면 좋아할 것 같지? 절대 아니야. 재미없어한다니까?”
“…….”
남자는 오늘 재미없다는 말을 두 차례나 들었다. 처음 들을 때도 그랬지만 두 번째는 더했다. 확인 사살 같은 치명상을 입었다.
“요즘의 넌 너무 쉬워. 정복욕을 좀 자극해 줄 필요가 있다고.”
나니아에게 긴장감을 주어야 한다는 그녀의 훈수는 애꿎은 라히무스만 긴장시킬 뿐이었다.
* * *
벽과 지붕을 갖춘 마차는 때때로 변변찮은 잠자리가 되었다. 말들이 지쳐서 민가에 닿지 못한 채로 땅거미가 져 버렸을 땐 이보다 더 나은 선택지가 없었다.
평소 노숙이 일상이던 리자드 용병들은 물론 평생 누구하고도 침실을 공유해 본 적 없던 공주 출신 님프까지도 어느덧 불편한 잠자리에 익숙해졌다. 특히 파키케팔로는 머리만 댔다 하면 바로 잠이 들었다. 벨로즈도 녀석의 곁에서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고, 챠링고는 불편하지도 않은지 한쪽 모퉁이에 기대앉아서 눈을 붙인 채였다.
나니아는 주로 다른 사람들이 누워 있는 벽면의 반대편에 붙어서 잠을 청했다. 그 옆에는 라히무스가 떡하니 버티고 있어서 거의 빵 사이의 햄 조각처럼 찌부러질 때가 많았다. 부족한 자리는 라히무스의 몸으로 대신했다. 그의 위에 비스듬히 엎어져서 포근한 가슴을 베개 삼고 단단한 두 팔을 이불 삼아 잠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자리가 좀 넓었다. 몸이 쌀쌀하다는 생각이 들 때쯤이었다. 낮잠을 지나치게 자둔 탓일까. 나니아는 일어나선 안 될 시간에 눈을 떴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그에게 안겨 있는 것이 아니라 라히무스의 얼굴을 마주한 자세로 누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개구부로 새어 들어온 달빛이 사내의 얼굴을 밝혔다. 소녀는 라히무스의 잠든 얼굴이 고요히 들여다보았다.
‘잘생겼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건강한 매력을 뽐내던 사내는, 밤이 되면 묘하게 퇴폐적인 인상으로 변했다. 눈을 감고 있어도 그랬다. 남자의 잠든 얼굴은 그다지 천사 같지는 않았다. 억세고 독한 느낌이 가득했다. 라히무스의 얼굴을 남의 남자 보듯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생각이 많아졌다. 떠돌이 생활을 끝내면 어딘가에 정주해서 살게 될 텐데, 주변 여자들이 과연 라히무스를 가만 내버려 둘까. 나니아 자신뿐이라는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앞으로 긴긴 세월 지내면서 그를 유혹할 조축수 한 명쯤 더 만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었다. 라히무스와 티에트는 리자드의 사랑에 페로몬이 꼭 필수적이지 않다고 했지만, 글쎄….
나니아는 이런저런 걱정들에 휩싸이면서 더욱 잠들기 어려워졌다. 불안감을 달래려는 듯이 라히무스의 품에 파고들었다.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쑤셔 넣고 그의 등을 끌어안았다. 떨어져 있던 그의 몸은 여전히 따끈따끈하고 포근했다. 잠에서 깨진 않았으려나. 고개를 들어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만 뒤척이고 이제 정말 자야지 마음먹은 그때, 남자가 눈을 떴다.
“…….”
길게 찢어진 눈이 초승달처럼 가느다랗게 벌어지더니, 이내 그 안의 동공을 드러냈다. 달빛에 물든 흰자위가 꼭 그런 색으로 빛나고 본래 붉은색을 띠어야 할 홍채는 깊은 밤하늘을 담고 있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망막이 서로를 선명하게 인식하였을 때. 그들은 말없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새근새근 숨을 쉬었다. 아무런 목적 없는 시선 교환은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
“…….”
칠흑의 적막 속에서 파키케팔로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귀는 멀리까지 열려 있는데 눈은 목전을 향했다. 뾰족한 눈매가 매섭고도 나른했다.
고요한 어둠 덕분일까. 남자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이 부끄럽기보단 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밤을 삼키고 새카매진 눈동자에 점점 빠져들었다. 남자는 말없이 팔을 올려 그녀를 끌어안았다. 동시에 나니아의 다리 사이로 제 다리 한쪽을 끼워 넣으며 몸을 밀착시켰다.
바스락, 바스락. 평범하게 뒤척이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의 잠을 깨우기에는 부족한, 평범한 소음이었다. 하지만 맞닿은 몸은 이제 일상적인 상태를 벗어나 두근두근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라히무스….’
소녀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조여 오는 팔과 엉겨드는 다리에 숨이 가빠 왔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의 눈만 바라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입술을 맞대었다. 젖은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고 그윽하게.
떨리는 숨결이 코와 입으로 느껴졌다. 입술이 닿는 촉감보다도 그 간질거림이 더 선명했다. 쪽쪽거리는 소리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두 입술은 그저 닿았다 떨어질 뿐이었다. 무척이나 건조했다. 이런 식으로는 몇 번을 해도 부족했다. 질척하게 빨고 싶어서 애가 닳았다.
그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아니면 그도 같은 마음이었는지, 남자가 혀를 살짝 내밀었다. 그러고는 야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어서 여기다 비벼 보라는 듯이. 동료들이 지척에 잠들어 있었다. 방음 나쁜 벽조차 세워져 있지 않은 공간. 그 짧은 거리감이 곤란해서 망설여졌다. 남자는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처럼 나니아의 입술을 할짝거렸다. 하지 말라고 밀어내야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사내는 눈을 감지 않고 나니아를 빤히 쳐다보았다. 너도 어서 내밀지 않고 뭐 하냐는 듯 무언의 메시지를 보내오는 듯했다.
‘이런 건, 이상해….’
소녀는 전과 달리 부끄러워져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혀를 아주 조금, 조금 내밀어서 그에게 동조했다. 누가 일어나지 않으려나. 알아차리지 않으려나. 촉각을 바짝 곤두세우고 조심하면서도 멈추지 못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다 보니 감각은 더욱 예민해졌다. 음란한 율동으로 마찰하는 혀끝 사이, 뜨듯한 날숨이 느껴졌다.
그때, 시끄럽지만 규칙적이던 파키케팔로의 호흡이 멈추었다.
“크으… 컹!”
비강 깊숙이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니아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사내의 태산 같은 어깨너머로 건너편을 살펴보려는데, 우악스러운 앞발이 다가와 그녀의 반사 행동을 저지했다.
남자는 신생아의 고개를 가누듯 나니아의 목 뒤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입술 쪽으로 강하게 잡아끌었다.
“……!”
나니아는 한순간에 모든 숨을 빼앗겼다. 부지불식간에 덮쳐진 입술이 힘겨운 신음을 뱉어 내려 하였으나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동굴처럼 벌어진 입술이 서로를 틀어막고 질척한 점막을 교환했다. 남자가 혀를 넣었다 뺐다 하는 감각이 평소보다 더 선연했다.
‘숨, 숨 막혀….’
소녀는 벗어나고 싶은 듯이 리자드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큰 소리가 나는 것이 두려워서 마음껏 밀어내지는 못했다. 아니, 그러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남자가 거칠게 끌어안아 주는 것이 좋았다. 기습적으로 자신을 탐하려는 것도 좋았다. 무엇이든 좋았다. 너무 좋아서 아랫도리가 지끈지끈했다. 사내의 호흡이 점점 더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보다 더 나아갈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빨리 단둘이서만 지낼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연인들의 야속한 밤은 그렇게 깊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