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섬 밖으로 (19/22)

섬 밖으로

사랑스럽게 쪼아 대던 두 입술이 멀어지고, 그 사이로 쑥스러운 눈빛이 오갔다.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잠시 발아래 벗어 두고, 우선은 이 숨찬 몸과 마음을 그녀와 나누고 싶었다.

부끄러워하는 말의 간격이 띄엄띄엄 벌어졌다. 간질간질한 기분을 부러 외면하듯, 사내는 농담조로 말했다.

“버리지 말라든가, 질리지 말라든가…. 나랑 평생 같이 살아 달라는 뜻으로 들리는데.”

소녀는 고개를 들어 널따란 가슴 너머로 사내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라히무스도 흘긋 눈동자만 굴려서 그녀를 훔쳐보았다.

“…….”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그녀는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기 힘든 표정이었다.

겸연쩍은 기분에 다시 눈길을 돌렸다. 오갈 곳 없는 시선이 어중간한 허공을 향했다. 사내는 창피한 기색을 감추려 객쩍은 소리를 덧붙였다.

“그런 건, 청혼이나 다름없잖아.”

사내는 자기 욕망을 괜스레 그녀에게로 투영시켰다. 마치 잘못을 저질러 놓고 남의 탓을 하는 아이처럼. 내 여자니 약혼녀니 뭐니 하면서 예전부터 그녀에게 침을 발라 두지 못해 안달인 라히무스였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말은 입에 담지 못해서 쩔쩔매는 경향이 있었다.

‘젠장, 나랑 결혼해 줘….’

리자드는 오늘도 그 간절한 염원을 입 안에만 굴려 댔다.

그리고 나니아는 침착하게 그 말을 곱씹어 보였다.

“청혼….”

마치 처음 들어 보는 낱말인 것처럼 중얼거리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항상 열렬한 구애를 받아 왔던 것 같긴 한데, 정작 결혼해 달라는 말은 들은 기억이 없었다.

‘반지는 평생을 바치고 싶은 짝에게 주는 거야.’

‘나를 너의 것으로 삼아 달라는 의미야.’

‘그럼 우리 이제 결혼하는 건가?’

비슷한 얘기는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나니아는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나는 뿔도 반지도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해요?”

“…뭘?”

“그러니까, 당신들 방식으로 말이야.”

“그러니까 뭘.”

“청혼.”

사내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뭐?”

남자의 얼빠진 목소리가 바보 같게만 들렸다.

라히무스의 넋 나간 입술이 뻐끔거리는 사이, 소녀는 다른 고민에 골몰했다. 원래대로라면 예물 반지가 끼워져 있어야 할 자리를 쳐다보며 주먹을 죔죔 쥐어 보는 모습이 천연덕스럽기까지 했다.

“결혼은 우리 둘이 좋다고 하는 게 아니라, 집안 허락 같은 것도 받아야 하는 건데. 그런데 나는 양친 모두 안 계시니까…. 역시 라히무스 부모님이라도 만나서 말씀드리는 게 옳지 않아?”

사내는 정신이 번쩍 들어서 눈살을 찌푸렸다. 어이없는 발상에 기가 막혔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릴 하는 거야.”

여자는 언뜻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를 하는 듯했으나, 자신과 울로피와의 관계가 상식 밖의 문제를 끌어안고 있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었다.

“허락은 무슨 허락. 그 여자 허락이 왜 필요해?”

“꼭 허락을 받자는 게 아니라, 말은 해야 하지 않겠냐는 거죠.”

“내가 왜? 웃기지도 않아.”

“울로피는, 라히무스랑 나랑 통틀어서 하나뿐인 가족인 거잖아.”

소녀는 차분하고 의젓한 목소리로 사람 돌아 버리게 하는 소리를 했다.

“글쎄 가족 같은 게 아니라니까.”

같은 부정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소녀는 경직된 그의 어깨를 철부지 아이 대하듯 토닥이며 말했다.

“오랫동안 찾아다녔다면서요. 그럼 헤어지기 전에 인사는 해야죠. 그 참에 말하면 되잖아.”

“…뭐? 싫어. 보고 싶어서 찾은 거 아냐.”

“왜 싫어?”

남자는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긴 다리를 한쪽으로 꼬아 앉았다. 턱을 괸 얼굴엔 가득한 불만이 드러났다.

“…나는 그 여자가 안녕하길 바라지 않아.”

남자의 얼굴이 심술로 부풀어 있었다. 나니아는 모로 향한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허리를 깊게 숙이고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통에, 긴 머리카락이 땅에 닿을락 말락 아슬아슬했다.

그는 자꾸 아니라고 하지만, 역시 많이 닮았다.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커다란 몸집을 울로피에 겹쳐 보며 자신은 알지 못하는 제 부모의 모습을 어렴풋이 상상해 보았다. 철천지원수로 살더라도, 역시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안일한 생각을 했다.

“도저히 화해할 수는 없어요?”

“화해의 문제가 아니라, 난….”

라히무스는 추궁당하는 사람처럼 혼란스러워했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얼굴을 보면 당장에 찢어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치밀 줄 알았다. 바라던 것을 이루고 나면 다시없을 삶의 숙원을 이뤄 낸 것처럼 속이 시원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녀의 생사여탈권이 마침내 자신의 손에 들어왔을 때, 한없이 불유쾌한 기분만을 느꼈다. 자신이 바라던 것은 그녀의 목숨이 아니었음을 깨닫는 계기가 될 뿐이었다.

“그냥 콱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 수그러진 어깨가, 그럴 리 없는 데도 아주 작아 보였다.

“그런 못된 생각 하지 말아요.”

소녀는 다정한 타이름과 함께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해 본 적 없는 그녀가 남자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다만 딱지가 떨어질 때까지 그 상처를 보듬어 주고 싶었다.

“복수하고 싶었던 거라면, 이미 충분히 했잖아.”

나니아는 그가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이 더는 없기를 바랐다. 울로피를 위해서가 아니라 라히무스를 위해서라도 그런 식의 복수는 말리고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 부모를 해치려 들다니. 그런 짓을 벌이고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이 숲의 축수들을 가족처럼 아꼈어요.”

소녀가 차분하고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일궈 온 모든 것들을…. 모두 잃었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 때문에.

나니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남자는 조소와 함께 대꾸했다.

“진짜 자식은 버린 여자가, 이딴 데서 가족 놀음이나 하고 있었다니.”

부럽다든가 서글픈 기분은 없고 그저 같잖기만 했다. 바라던 바였다. 그녀가 자신에게 주지 않은 모든 것을 빼앗아 버리는 것. 생각해 보니 제법 통렬한 복수였지 않은가. 라히무스는 냉소적으로 웃었다. 나니아는 그 비뚠 모습이 안타까웠다. 부모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의도적으로 버려진 그의 삶은 저보다 더 안타까웠다.

연민 가득한 손끝이 사내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런데요, 라히무스한테는 내가 있잖아요.”

다정한 목소리엔 위로가 가득 담겨 있었다.

“내가 당신 가족이 될게요.”

두 사람 모두 가져 보지 못한 공백이 있었다. 그 빈자리를 서로의 존재로 채워 보자는 나니아의 말은, 과연 그 어떤 청혼보다도 달콤했다.

울로피. 그 여자가 자신에게 주지 못한 것. 자신이 그녀로부터 빼앗은 것. 이제 그는 있고, 여자에겐 없는 것.

“…나니아.”

가만히 그녀의 이름을 혀끝으로 뭉개 보았다. 리자드는 자신이 그녀와 행복해지는 것이 이 복수의 완성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 * *

나니아는 마지막 인사 따위 필요 없다고 버티는 라히무스를 끝까지 이기지 못했다. 울로피의 행방이 묘연했던 까닭이다.

“목숨이 아까웠으니 도망쳤겠지.”

“아무리 그래도, 제대로 얘기도 못 나눠 봤잖아요.”

나니아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안타까워했다.

“그 여잔 유명한 수배범이야. 꼭 내가 아니어도, 평생을 도망치면서 살아야 하지.”

염황은 그녀를 찾아내기보다는 쫓아내고 싶어 했으니, 수배자라기보단 추방자라고 보는 편이 더 맞으리라.

“무슨 죄로요?”

“불경죄.”

“누구에 대한?”

“황실에 대한.”

“어떤 불경한 짓을 저질렀는데요?”

사내는 머리를 긁적이다 싱거운 말투로 대꾸했다.

“…씨를 훔쳤어.”

“씨?”

꼬치꼬치 캐묻던 나니아의 반문이 끝까지 이어졌지만, 라히무스는 이제 더 말해 줄 내용은 없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울로피의 좁은 집을 뒤적거리며 객쩍은 소리를 지껄였다.

“그냥 여기서 우리 둘이 살림 차리고 살면 안 돼?”

그 바보 같은 생각에 나니아는 질색을 했다.

라히무스가 무사히 깨어났으니, 이제는 바다를 건널 길을 찾을 차례였다.

“동료들이 걱정되지도 않아요? 그때 파코는요, 라히무스를 구하겠다고 구명도 마다했어요.”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부족한 동료애를 질타하며 파키케팔로의 묘연한 행방을 걱정했다.

“그 애는 아마 우리랑 함께 난파선에 휩쓸렸을 거예요.”

험한 바다 물살에 목숨을 잃진 않았을까, 무인도에서 배를 곯고 있진 않을까, 나니아의 근심 가득한 모습에 라히무스는 뭐가 그리 불만인지 입술을 삐죽거렸다.

“…너는 항상 나보다는 다른 새끼 걱정을 더 많이 해.”

남자가 불평하자 나니아는 황당해하며 헛웃음을 흘렸다.

뻗어 온 두 손이 리자드의 불퉁한 뺨을 짓눌렀다. 정신 차리라는 듯 문질러 대는 통에 갸름한 볼살이 이리저리 휘저어졌다.

“라히무스 걱정은, 라히무스가 잠들어 있는 동안 실컷 했어.”

네가 알긴 뭘 아느냐며 꾸중하는 말에, 남자는 다소 멍청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붕어 주둥이처럼 불룩해진 입술이 귀여워서 나니아는 피식 웃었다. 통통해진 입술에 뽀뽀를 해 주려다가 말았다. 그런 짓을 했다간 또다시 기고만장해질 게 뻔했다.

그녀는 괜한 걱정을 했다는 듯 핀잔 투로 말했다.

“걱정한 내가 바보였죠. 이렇게나 건강한데.”

두 사람은 정글을 가로지르는 대신 일단은 해변을 따라 걷기로 했다. 최종 목적지는 언젠가 울로피가 알려 준 나룻목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그 배를 타고 떠났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남자는 파키케팔로를 찾지 않겠다고 했다. 이곳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그를 수색하는 데 시간을 허비할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라히무스의 의견을 따르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켕기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런 곳에서 제 한 몸 간수 못 해 뒤질 녀석은 아니니까 너무 걱정 마.”

“하지만…. 나한텐 그래도 라히무스가 있는데, 파코는 혈혈단신일 게 아녜요. 외로워서 죽어 버렸을지도 몰라, 그 애는….”

자기한텐 내가 있다는 말이 왜 그렇게 좋은지, 라히무스는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한편으로는 그녀의 얼토당토않은 염려가 우스웠다.

“너는 가만 보면 파코를 네 막냇동생쯤으로 여기는 것 같은데, 사실 네 또래잖아?”

“내 또래라구요? 나는 더 어리게 봤는데….”

나니아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이제 꺾일 일만 남은 나이고, 파키케팔로는 아직 꽃봉오리 같은 남자애였다.

“내 눈엔 너나 걔나 비슷한데.”

남자가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자 나니아는 자신의 몸을 감싸 안는 시늉을 하며 짓궂게 농을 쳤다.

“라히무스 눈에는 나랑 파코가 동년배로 보였단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손을 댈 생각을 했어?”

라히무스는 그만큼 녀석이 어리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나니아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지 한참을 생각하더니, 이내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대꾸했다.

“아, 아니야, 나는…. 나보다 어린 여자를 밝힌다거나, 절대 그런 거 아니고.”

결혼 적령기를 놓친 수컷이 저보다 나이 어린 여자를 탐하는 일은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일이었기 때문에, 리자드는 애써 자신을 변명했다.

당황한 라히무스를 보고 나니아는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웃었다. 허술하게 웃는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됐어요. 이제 와서 더 말할 가치도 없는 얘기야.”

“그런 게 아니라, 내 눈에 나냐 너는 충분히….”

밋밋해 보이는 옷맵시 밑으로 그녀가 어떤 몸을 감추고 있는지 알고 있는 라히무스로서는 이제 갖춰 입은 나니아를 보고도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그 너머를 상상하게 만들고 마는, 그녀는 완전히 무르익은 암컷이었다.

라히무스는 달아오른 얼굴로 쩔쩔매며 손바닥을 죔죔 움직였다.

“아무튼 내 말은, 파코는 그렇게 어리지도 약하지도 않다는 거야. 멀쩡히 살아 있다면 알아서 본토로 귀환할 방법을 찾고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라히무스의 말에 나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두 사람은 돌길을 지나 암벽을 딛고 해변가로 내려왔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절벽은 점점 가팔라지고, 그들은 넓게 펼쳐진 사빈을 따라 걸었다.

입자가 고운 모래사장에 발이 푹푹 빠졌다. 걷기를 힘들어하자, 남자가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나니아는 내려 달라고 떼를 쓰는 대신 가만히 몸을 맡겼다. 사내의 넓고 반듯한 승모근에 팔꿈치를 걸쳐 기대어 있으면 자세가 썩 안정적이었다. 허벅지와 엉덩이 사이를 받쳐 주는 커다란 팔뚝과 등을 감싸 안은 손바닥이 따뜻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성적인 의도 없이 몸을 바짝 붙이고 있는 것이 오랜만이라, 소녀는 가슴이 두근두근해졌다. 그에게 어떻게 안겨 있으면 가장 편한지 깨우쳐 버린 자신이 조금 민망했다.

바람은 적고 파도는 잔잔했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만 빼면 참 좋은 날이었다.

“가방 이리 줘요.”

나니아가 말했다. 그에게 신세를 지는 상황이 겸연쩍어서 다른 짐이라도 덜어 주고 싶었다.

“내가 메든 네가 메든, 어차피 내가 감당하는 무게라는 건 알지?”

남자가 가소롭다는 듯 웃자, 나니아는 할 말을 잃었다. 그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논리 면에서 그에게 지다니. 굴욕적이었다.

“…힘들면 말해요.”

기약 없이 걸어야 하는 일정이었다. 무거우면 언제든지 내려놓으라며 나니아가 말했다. 그녀의 말에 라히무스는 잠시 무릎을 굽혀 앉았다. 무엇을 하는가 했더니 모래 사이에 섞여 있는 조개껍데기 하나를 주워 그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나니아는 그것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흰 바탕에 갈색 줄이 서너 개 그어진 조가비였다.

그가 물었다.

“어때. 무거워?”

“…아뇨.”

“나한테 너는 그런 거야.”

라히무스는 품에 안은 나니아를 한차례 추스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고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널 안아 올려서 무슨 짓까지 할 수 있는지 침대에서 충분히 보여 줬지 않나?”

다시 보니 의기양양한 게 아니라 음흉한 미소였다. 나니아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면서 그의 어깨를 마구 때렸다. 더는 미안해하지 않기로 했다.

하얀 물거품이 발끝까지 기어 올 때쯤, 길이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자칫 잘못하다간 파도에 발이 젖을 기세였다. 그들은 다시 해식애 위로 오를 길을 찾았다.

“이제 내려 줘요. 걸을 수 있어요.”

“싫어.”

여기서부터는 제 발로 걷겠다는 나니아에게, 사내는 단호히 떼를 썼다.

“너랑 안고 있는 게 좋아….”

부끄러운 말을 속삭이는 리자드의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말을 듣는 쪽도 덩달아 뺨이 붉어졌다.

‘사실 나도 좋은데….’

그녀의 세 치 혀는 그만큼 솔직하지 못해서, 대신 라히무스의 목을 지그시 끌어안을 뿐이었다. 남자의 뺨에 이마를 붙이고 목덜미엔 코를 파묻었다. 무언의 행동으로 보이는 동조였다. 그 애틋한 접촉에 리자드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저항 없이 안겨드는 그녀가 귀여웠다.

절벽 너머 해변 아래로 간간이 부수어진 나뭇조각 따위가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난파선의 파편인지까지는 확실치 않았다. 절벽에 부딪힌 파도가 흰 거품을 일으키며 떨어지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다. 빠져 죽기 딱 좋은 높이였다.

길이 점점 좁아져서 지금은 모래벌판으로 내려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발길을 꺾어 다시 밀림으로 들어갔다. 잎맥이 깊고 짙푸른 활엽수들이 그들을 반겼다.

따지고 보면 나아진 게 하나도 없는 똑같은 상황, 똑같은 장소였다. 혼자서는 그렇게나 광활하고 무서웠던 공간. 맞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조차 확신이 없는데도, 라히무스가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되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마치 여행이라도 온 것처럼 즐거웠다. 남자가 자신을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지켜 줄 강력한 포식자여서가 아니었다. 어려움이 생기면 불평할 수 있고, 즐거움이 생기면 나눌 수 있는 상대이기 때문에. 단지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위안이 되었다.

해가 저물기 직전. 그들은 몸 뉘어 쉴 장소를 구했다. 사내는 초행길에서도 물을 잘 찾았다.

“쳐다보지 말아요.”

나니아는 몸을 씻기 전, 엉큼한 연인을 향해 신신당부했다.

“너는 보잖아.”

“나는 보려고 한 적 없어요. 라히무스가 눈 돌릴 틈도 안 주고 훌렁훌렁 벗어 던지는 거잖아.”

“봤으면서.”

“아니야.”

두 사람은 티격태격하면서 잘 준비를 마쳤다. 마른 장작을 주워다 불을 붙이고, 젖은 머리를 말렸다. 새카만 어둠 속에 오로지 그것만이 빛났다. 나니아는 벌레 우는 소리를 들으며 그 불꽃을 빤히 쳐다보았다. 챙겨 온 식량이 다 떨어질 때까지 섬 끝에 다다를 수 있을지 고민했다. 생각에 잠긴 어깨 위로 커다란 앞발이 다가왔다. 남자가 자신의 어깨에 슬쩍 팔을 걸쳐 놓는 것을, 나니아는 모른 척했다. 어스름한 밤기운이 예민해진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여기서는 안 할 거야.”

나니아가 새치름한 목소리로 말했다. 라히무스는 조금 억울한 듯이 대꾸했다.

“섹스하려는 거 아냐.”

그러나 분위기를 잡아 보려고 했던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어서 얼굴을 붉혔다.

정말로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도리어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단숨에 몸이 달아올랐다.

“물론, 나냐 네가 하고 싶다면 언제든지….”

“안 해.”

“…….”

“앞으로 적어도 일주일은 안 할 거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요.”

“…뭐? 아니, 왜?”

남자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불연히 당황했다. 나니아는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엊그제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까맣게 잊었어요?”

남자는 그녀가 말하는 엊그제가 생각나서 입술을 훑었다. 하지만 미안해하기보다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까먹기는커녕 자꾸 떠올라서 죽을 맛이었다. 나니아는 음란한 상상에 빠진 것이 분명한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소름 끼친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어떻게 그런 파렴치한 짓거리를 저질러 놓고 다시 또 금방 잠자리 가질 생각을 해? 이 저질 악마 도마뱀.”

그녀는 내친김에 어깨에 걸친 팔도 치워 버리고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리자드는 지은 죄가 있어서 맞서지는 못하고 내내 전전긍긍했다. 절절매는 꼬리 끝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닥을 기었다.

다음날 두 사람은 여러 갈래 물길의 합류 지점을 찾았다. 수영은 잘하는 사람이라면 헤엄쳐서 건너 볼 만한 폭과 깊이였다. 사내는 주인 없이 묶여 있는 나룻배의 밧줄을 천천히 잡아당겼다. 서너 사람 태움 직한 조각배가 잔물결을 만들며 끌려왔다.

“울로피가 말해 줬던 그 배예요. 아직 섬 밖으로 나가지 않았나 봐.”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헤어진 것이 못내 아쉬운 듯 나니아는 계속해서 축수를 찾았다. 그에 라히무스는 냉담할 정도로 매정하게 대꾸하였다.

“…내 알 바 아냐. 너도 신경 꺼.”

그토록 궁금하던 생모의 행방이 이제는 거치적거리기만 했다.

라히무스는 나니아를 번쩍 안아 들고서 배 위에 올랐다. 마주 보는 자리에 앉혀 놓고 밧줄을 풀었다. 소녀는 노 한쪽을 들어 보려다가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남자가 쉽게 균형을 잡는 것을 보고 저도 그렇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라히무스가 한발 앞서 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하구에 풍덩 빠져 버릴 뻔했다. 그 후로 나니아는 자신은 노를 젓는 일에 크게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얌전히 자리에 앉아 물길을 건넜다.

사내는 노를 젓는 모습도 멋졌다. 넓은 어깨가 원을 그리며 움직였다. 우람한 상체가 젖혀질 때마다 반듯한 승모근과 우람한 가슴이 도드라졌다. 두꺼운 팔뚝이 물을 밀어내느라 힘을 받을 때면 울룩불룩 핏줄이 불거졌다. 그는 역시 몸을 움직일 때가 가장 늠름해 보였다.

소녀는 가만히 턱을 괴고 앉아서 의도치 않게 매력 발산 중인 애인의 모습을 구경했다.

‘일주일….’

라히무스가 흥분을 참지 못하고 달려든다면 자신은 또 기꺼이 받아들일지도 몰랐다.

‘너무 길게 불렀나?’

누구를 위한 벌칙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남몰래 달콤한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이 수동적인 음심은 상대방에겐 비밀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뀨룩, 끼이-육!”

애교스럽고도 괴상한 짐승의 울음소리.

건너려는 수로의 반대쪽에서 까만 우우룡 한 마리가 날아오고 있었다.

“코우!”

녀석은 어린 날개를 푸드덕 움직이며 다가와 뱃머리의 야트막한 난간 위에 착지하였다.

나니아는 배가 기우는 걱정도 잊고 녀석에게로 손을 뻗었다.

“라히무스, 코우예요! 우리 우우룡이 맞죠?”

우우룡이 뒷발을 들어 콧잔등을 긁으려는 것을, 나니아는 한 품에 안아 들고 기뻐했다. 녀석이 저를 두고 도망친 배신자라는 사실은 미처 생각나지도 않을 정도로 반가웠다.

“…이게 왜 여기 있어?”

라히무스는 노를 젓던 것도 멈추고 녀석을 떨떠름하게 쳐다보았다. 코우는 혀를 날름 내밀어 제 주둥이를 핥으며 커다란 눈알을 굴렸다.

“해변에서 헤어졌었는데요, 어떻게 알고 다시 찾아왔네요.”

소녀는 아기를 귀애하는 듯한 말투로 녀석을 얼렀다.

“라히무스 냄새를 맡고 온 걸까? 그런 거야, 코우?”

그땐 몰랐다. 녀석이 이쪽으로 왔다는 것은, 반대로 누군가 녀석을 놓친 거란 사실을.

조각배가 뭍에 닿을 때쯤 코우보다도 더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라히무스! 나니아!”

그들 못지않게 걸레짝이 되어 있는 홍염룡 한 마리가 발을 구르며 달려왔다. 파키케팔로였다. 청년은 야생마처럼 달려들어 토끼처럼 껑충 뛰어올랐다. 제 크기를 간과하고 라히무스의 품에 고목나무 매미처럼 안겨들었다.

“대체 어디에 있었냐니깐?! 한참을 찾았다고오.”

누가 누구를 발견했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기적적인 상봉이었다. 우는소리를 내며 엉겨 붙는 파키케팔로를 사내는 귀찮다는 듯 떼어 냈다. 그러자 녀석은 다시 나니아에게로 달려들어 그녀와도 찐한 포옹을 나누었다.

“무사했군요, 파코! 정말 다행이에요.”

“허엉, 죽은 줄 알았쎠.”

“야, 씹…. 안 떨어져?”

라히무스는 질색하며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그때까지도 코우는 나니아에게 안겨 있었다. 파키케팔로가 나타나자 자신감 넘치는 몸짓으로 날갯짓을 하며 그의 어깨 위로 올라가 버렸다. 녀석은 그 자리가 가장 편한 듯했다. 날개를 활짝 폈다 접는 모습이 기고만장해 보였다. 마치 처음부터 그들을 만나게 해 주는 것이 자신의 의도였던 것처럼 의기양양했다.

나니아가 축수들의 섬에서 고군분투하는 사이, 파키케팔로도 제 나름대로 막막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더랬다. 처음에는 녀석 또한 이 무인도나 다름없는 섬에 떨어져 어렵사리 삶을 연명해 나갔다. 그러나 비교적 운이 좋게도, 섬을 횡단한 끝에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곳은 인간이 터를 잡고 살 만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이따금 배가 닿아 나무를 베어 가는 그런 곳이었다.

“야호! 이제 드디어 마음 놓고 여길 떠날 수 있겠다.”

리자드 청년이 기운차게 웃으며 팔을 쭉 뻗었다. 그새 이곳을 잘 알게 된 파키케팔로에게 벌목장까지의 길을 안내받았다. 녀석은 벌목장 일을 돕는 대가로 근근이 삯을 벌어 입에 풀칠하고 살던 참이었다. 그새 벌채 노동자들과 안면을 튼 덕에, 세 사람은 목재를 실어 나르는 배를 어렵지 않게 얻어 탈 수 있었다. 라히무스의 말대로, 환경 적응력 하나만큼은 뛰어난 녀석이었다. 화물선은 부스러기 제도 끄트머리의 아그네일 시국을 향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하루를 넘기지 않았다. 난관은 이 작은 도시 국가에서 탈타르노 반도로 가는 배편을 구하는 과정에 있었다. 게롤린에서 출발했을 때보다야 당연히 가깝지만, 그래도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는 거리였다.

그간의 사정을 전해 들은 파키케팔로가 안타까워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라히무스도 나니아도 거렁뱅이구나.”

서글픈 신세 한탄이 제법 모질었다.

거렁뱅이들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녀석의 말대로였다. 뱃삯은커녕 오늘 당장 쓸 돈도 없으니 무슨 수를 써야 했다.

“한 방에 세 명은 안 돼요!”

리자드 청년이 싼값에 기거하는 작은 여관방. 여관 주인은 그를 뒤따라온 라히무스와 나니아를 보며 손사래를 쳤다.

“잠깐, 아주 잠깐이라니까는! 요.”

곧 방 두 개 잡을 만한 돈을 가져오겠다며 통사정을 했다. 성인이 된 이래로 돈이 궁해 본 적 없던 사내는 슬슬 자존심에 금이 가려 했다.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섬나라였다. 금융업자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한지라, 남자가 빈털터리 신세를 면할 길은 요원해 보였다. 리자드 청년은 지난 며칠 배를 타고 오가면서 라히무스와 나니아를 찾는 일에 몰두하느라 모아 놓은 푼돈도 바닥이 났다고 했다. 계획이 있느냐고 묻자 녀석이 대답했다.

“선착장에서 짐 나르는 일을 도우면 생활비 정도는 벌 수 있더라고. 벌목 일이 훨씬 더 돈이 되긴 하는데…. 너희를 찾았으니 이젠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라히무스가 있으니깐! 나나는 잠깐 방에서 쉬고 있어.”

노가다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 오겠노라 선언하는 목소리가 썩 쾌활했다. 녀석은 흥얼거리면서 라히무스의 등을 밀었다.

“어서 가자고! 리자드가 두 마리, 돈도 두 배.”

녀석에게 떠밀려 가는 라히무스의 표정이 썩 탐탁지 못해 보였다.

그는 사랑하는 암컷이 맘 편히 쉴 만한 보금자리 하나 만들어 줄 수 없는 상황에 지독히 무능해진 기분을 맛보는 중이었다. 파키케팔로가 이야기한 하역일은 신체 건강한 남성이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막노동이었다. 이렇게 평화로운 나라에서는 그 같은 용병들이 거금을 쥘 만한 일 따윈 없으니, 아쉬운 대로 품을 팔아야 했다. 그렇게 하루 반나절 몸을 굴려 손에 쥔 돈은 그야말로 푼돈이었기에, 남자는 진심으로 비참해졌다.

“망할 촌구석.”

리자드가 사납게 으르렁거렸지만 부질없는 소리였다. 오히려 파키케팔로가 어른스럽게 그를 달랬다.

“며칠만 참아! 이대로라면 뱃삯쯤은 금방일 테니까는. 라히무스나 나나 남아나는 게 체력인데, 이 정도면 평화 태평 무사 만점이지!”

녀석이 어깨를 팡팡 두드리는 와중에도 사내는 몸에 흐른 땀이며 먼지 따위를 신경질적으로 닦아 냈다. 애인에게 돈 걱정을 하게 만들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자존심이 상해서 입맛이 썼다.

여관으로 돌아왔을 때, 두 리자드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를 상황에 봉착했다.

“왔어요…?”

어딘지 무안한 기색의 나니아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그들을 반겼다.

지시대로 방에서 얌전히 머물러야 했을 그녀는, 어째선지 상당한 몫의 돈을 쌓아 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돈의 출처를 미처 물어보기도 전에, 파키케팔로는 함박웃음을 머금었다.

“이게 다 웬 거야?!”

청년은 믿을 수 없어 하면서도 화색이 되었다. 라히무스 또한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황당한 표정이 곧 질문이 되었다.

“운이 좋았어요. 술지가 필요하다고 해서 몇 장 써드렸는데, 그새 작게 입소문이 나서….”

소녀는 겸손한 태도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몸뚱이가 재산인 그들로서는 입이 떡 벌어지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나, 너, 그, 되게… 영민한 여자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돈 나올 구석이 있었다는 사실에 두 리자드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나니아를 칭찬하는 파키케팔로와 다르게 라히무스는 화가 나 보였다.

“방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했잖아. 위험하다고.”

서슬 퍼런 목소리가 그녀를 나무랐다. 혼이 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나니아가 우물쭈물 제 입장을 변명했다.

“그치만…. 다들 고생하고 있는데 나만 편하게 쉬고 있을 수는 없었어. 뭐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경각심을 좀 가져. 너처럼 작고 귀여운 여자애는 잡아다가 비싼 값에 팔아먹으려는 새끼들이 많단 말이야.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별일 없었어. 여기 사람들 다 친절하고….”

“그랬겠지! 이제 네가 다룸이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건, 내 말은 그러니까, 그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진 네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고….”

남자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어 그녀를 와락 끌어안으며 더러운 성질을 죽였다.

“누가 홀랑 집어 가 버리면, 씨발,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나면….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

나니아는 발꿈치를 들어 올린 자세로 버겁게 포옹당한 채 라히무스의 등허리를 토닥였다.

“그치만, 이제 내가 돈을 벌면 되잖아. 그러면 우리 떨어져 있을 필요도 없으니까요. 그쵸?”

다정한 손길이 리자드를 진정시켰다. 착잡하지만 그녀의 말이 맞았다.

조금 누그러진 기색의 리자드 사내가 소녀의 까만 머리카락에 대고 높은 콧대를 이리저리 문질렀다.

“여기서부터는 제발 내 말 좀 들어, 자기야…. 게롤린하고는 또 달라. 너는 네 생각보다 훨씬 작고, 약하고, 위험하단 말이야. 내가 자길 혼자 두고 나가면서 얼마나 초조했는지 알기나 해?”

남자의 등 뒤에 이 모든 광경을 떨떠름한 표정으로 질색하며 지켜보는 파키케팔로가 있었다.

“누가 보면 한 일주일은 떨어져 살았는 줄 알겠다!”

결국 나니아가 벌어 온 돈으로 세 명 몫의 숙박비를 치렀다. 리자드들의 수당과 합쳐 남는 돈으로 필요한 물건을 샀다. 주로 깨끗한 옷과 먹을거리였다. 방은 두 개를 빌렸기 때문에, 한 사람은 독방을 쓸 수 있었다. 아니, 써야 했다.

“교양 있는 수컷 리자드는 숙녀에게 독방을 양보하는 거라니까는.”

“너나 실컷 써.”

처음에는 나니아를 배려해 주려는 것처럼 굴던 파키케팔로가 결국 떼를 쓰며 속셈을 드러냈다.

“아이, 라히무스으! 그러지 말고 나랑 같이 자자! 둘은 계속 같이 있었던 거지? 내가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는데!”

그동안 사람이 고팠는지 제법 끈덕지게 달라붙는 녀석을 라히무스는 몹시 징그러워하며 발로 밀어 냈다.

“꺼져.”

“내가 라히무스 찾느라 얼마나 애를 썼는데! 너무한 거 아니냐고!”

녀석은 몹시도 서러워했다. 하지만 라히무스도 남 못지않게 원통한, 양보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내는 저에게 달라붙은 파코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작게 으르렁거렸다.

“눈치 없이 끼어들지 말고 가서 네 애완 도마뱀이나 끌어안고 자.”

녀석은 끝내 옆방으로 매몰차게 쫓겨났다. 라히무스는 집착적으로 문을 걸어 잠근 후, 조금 긴장한 얼굴로 입술을 문질렀다. 모처럼 푹신한 이부자리에서 애인을 부둥켜안을 생각에 가슴이 들떴다가 오늘 일이 떠올라서 조금 시무룩해졌다.

침대 끝에 털썩 주저앉는 모습에 힘이 빠져 보여서, 나니아는 의아했다.

“왜 그렇게 축 처져 있어요?”

남자가 철부지처럼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답했다.

“…손에 물 한 방울 묻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는 멋진 수컷이 되고 싶었다. 믿음직하고 의지할 만한 신랑감으로 보이고 싶었다. 이토록 빠르게 무너질 결심일 줄이야. 뛰어 보기도 전에 주저앉혀진 기분이었다.

남자가 풀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무능력해서 실망했지….”

나니아는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아서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의기소침한 그가 귀여웠다.

“물 아니고, 잉크 정도는 가끔 묻혀도 괜찮잖아요. 나는 내가 도움이 된 것 같아서 기쁜데요. 라히무스는 아니에요?”

축 처진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남자가 시무룩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거 아냐.”

“자질? 무슨 자질?”

“네 남편으로서의….”

남자가 쭈뼛대며 말을 얼버무리자, 나니아도 덩달아 민망해졌다.

“나, 남편이라니….”

발그레한 뺨에 쑥스러운 기색이 번졌다.

“라히무스는 왜 그렇게, 항상 앞서가요?”

평소 같았으면 히죽대며 허리에 팔을 감고도 남았을 그가 오늘은 고개를 떨구었다. 축 처진 꼬리 끝에 풀 죽은 기분이 드러났다.

“…그렇게까지 낙담할 일이에요? 라히무스도 오늘 고생했잖아요.”

돌아오는 대꾸가 없었다. 힘없는 꼬리 끝이 이불 위로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광활한 등이 꼭 안아 주고 싶을 만큼 안쓰러웠다. 나니아는 타박을 멈추고 위로를 택했다.

“하나도 실망하지 않았어. 나는 당신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너무 좋아.”

그녀의 말에는 한 점 거짓이 없었다. 나니아는 라히무스가 자신의 옆에서 숨만 쉬고 있어도 좋았다.

“예전에 챠링고한테 들었는데요.”

소녀의 작은 손이 리자드의 너른 어깨를 조물조물 안마하듯 움직였다.

“얼굴이 반반한 수컷들은요, 데리고 살아 주는 여자가 있으면 그쪽에 빌붙어서 편하게 산다던데요.”

그 말에 라히무스의 표정이 조금 아리송해졌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니아를 돌아보았다.

“당신도 그렇게 살면 되지.”

“…내가?”

“응.”

“…….”

라히무스의 살갗이 목덜미에서부터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라히무스도 그렇잖아요. 반반한 얼굴에….”

“…….”

“음, 가슴도 크고요….”

“…….”

사내는 그 말을 듣고 나서 온 신경이 가슴으로 쏠리는 기분을 느꼈다. 감흥 없던 부위가 마치 성감대로 변한 것처럼 온몸이 찌릿해졌다. 나니아의 적극성은 언제나 그를 얼어붙게 만들어서, 뚫린 입이지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반대로 라히무스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나니아는 대담해졌다. 몸을 조금 어루만져 줬을 뿐인데 하반신을 꼿꼿이 세운 그를 보고 덩달아 속옷이 젖는 기분을 느꼈다. 곧 잡아먹힐 초식 동물처럼 겁먹은 표정을 짓고 있는 주제에 아래로는 흉악한 물건을 추켜세운 꼴이 앙큼했다. 자신의 나른한 목소리에서 그렇고 그런 기운을 읽어 낸 것일 터다. 이럴 때 보면 참 발칙하고 귀여운 남자였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를 보면 더 장난스럽게 놀리고 싶어졌다. 소녀는 리자드의 도톰한 가슴 근육을 주물럭거리며 수줍게 지껄였다.

“나는 돈 보고 남편감 고르는, 그런 여자 아닌데.”

남자가 아무리 돈을 잘 벌어다 주어도 남자 구실을 못 하면 쓸모가 없는 법이라.

“당신의 경제력 같은 건 아무래도 괜찮아. 라히무스는 나한테 다른 식으로 기쁨을 주잖아….”

라히무스 당신이 가장 잘하는 ‘그것’이야말로 사랑받는 남편의 최고 미덕이 아니겠느냐며 나니아가 먼지같이 작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리자드의 얼굴에서 어느새 시무룩한 기색은 사라지고 혹시나 하는 안달만이 가득해졌다. 평소 같지 않게 유혹적인 애인을 상대하며 라히무스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피가 몰린 음경에서 뜨뜻한 맥박이 느껴질 기세였다.

“그게, 뭔데…?”

하지만 나니아가 일주일간 섹스 따위 꿈도 꾸지 말라고 선언한 다음이었다. 그 결심을 겨우 하루 만에 철회하였으리라 생각하긴 어려워서, 라히무스는 혼란스러웠다. 남자가 묻자, 소녀는 달콤한 귀엣말을 속살거렸다.

“아내를 만족시키는…. 그런 거.”

“…잠자리에서?”

“응, 잠자리에서.”

“…….”

남자는 몸을 비틀어 저를 끌어안은 나니아의 얼굴을 뒤돌아보았다. 벌써 어둑어둑해져서 으슥해진 공기가 그녀의 얼굴을 묘하게 물들였다.

“나 그건 좀….”

이런 식의 대화가 색사의 전조가 아닐 리 없었다. 덤벼들어도 되는 건지 아닌지 가늠하며 사내는 띄엄띄엄 말끝을 흐렸다.

“자신 있는 것 같은데….”

자신 있다고 말하는 것치곤 시선이 엄한 곳을 굴렀다. 수줍어하는 라히무스가 이상해서 나니아는 웃고 말았다.

“자신 있으면 있는 거지, 그럴 것 같은 건 뭐예요.”

그러자 사내가 몸을 돌려 그녀의 팔목을 강하게 가로채 잡았다.

“자신 있어.”

서늘한 목소리에 열이 붙었다.

“자기가…. 내 자지 커서 좋아하잖아.”

라히무스의 뜨거운 눈길이 동의를 구했다. 은근하게 몸을 밀어붙이는 탓에 엉덩이가 한 뼘 뒤로 물렸다. 나니아는 어느새 침대 끝으로 몰려 있었다. 사내의 몸 밑에 누워서 그를 올려다보며,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어루만졌다. 몸을 부딪혀 오는 통에 닿는 부위마다 화끈거렸다. 그녀 역시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앙큼한 소릴 지껄였다.

“그럼 오늘은, 당신이 자신 있는 남편의 역할을 하면 되지….”

“하, 씹….”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허락의 신호에, 사내는 맹렬해졌다.

“어떻게 할까, 오늘은.”

호흡이 흐트러지고 목이 낮게 잠기었다.

“부드럽게? 아니면 거칠게?”

좋아하는 쪽을 골라 보라고 말한 것치고 이미 그는 대단히 흥분해 있었다. 고작 하루 만에 결심을 번복할 정도로 그녀가 자신에게 성 충동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했다. 사내는 옷을 벗어젖히는 와중에도 대답을 망설이는 나니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잔뜩 도발할 때는 언제고 막상 원하는 섹스 스타일을 말해 보라 하니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부드럽게….”

“아…. 노력해 볼게.”

사실 그쪽으로는 별로 자신이 없지만, 라히무스는 노력해 보겠다는 말과 함께 나니아의 손목을 다급히 잡아 눌렀다. 목덜미에 대고 헐떡이는 호흡이 거칠었다. 리자드는 굶주린 맹수처럼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남자를 환장하게 하는 그 냄새였다.

“어디부터 빨아 줄까.”

지난날의 거친 행보를 만회하기 위해 라히무스는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애무하는 일에 공을 들였다. 따뜻한 몸 이곳저곳을 주무르던 손이 민감한 부위를 향했다. 커다란 손을 오므려 앞쪽부터 뒤쪽까지 선을 그리듯 어루만졌다.

“여기 전부 핥아 줄까? 응?”

“아, 시, 싫어…. 더러운 데는 핥지 마.”

“네 몸에서 더러운 데가 어디 있어, 나냐….”

남자의 입이 가장 쓸모 있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속도를 맞춰 주기 위해 헐떡이는 숨을 바로잡으며 몇 번이고 되뇌어야 했다.

‘부드럽게…. 느긋하게….’

사내는 의식적으로 천천히 숨을 쉬었다. 그리고 나니아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처박고 혀를 비비기 시작했다. 그 축축한 감각이 소름 끼쳐서 나니아는 끙끙거렸다. 한참 아랫도리를 핥아 먹던 그가 다시 위쪽으로 올라왔을 때, 붉은 입술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남자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가슴 빨아 봐도 돼?”

쾌락을 주기 위한 행위가 아닌 얻기 위한 행위였기에 사내는 허락을 구했다. 하지만 나니아로서는 그런 질문에 답변해야 한다는 것이 부끄럽기만 했다.

“으, 응…. 그냥, 그런 건, 묻지 말고….”

사내는 흥분해서 나니아의 상의를 들어 올렸다. 바로 누워 흘러내린 가슴을 그러모아 쭙쭙 빨아 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으로는 소녀의 밑을 쑤시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제 욕구를 채우는 동안 그녀가 식어 버려선 안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니아도 사실은 자기 젖꼭지를 환장해서 빨아 먹는 그의 모습을 보고 시각적인 흥분을 충분히 얻고 있었다.

“이제 넣어 주면 안 돼…?”

자신의 남성을 조르는 말에 라히무스는 살짝 이성을 잃었다. 음경을 붙잡고 여자의 음부 근처에 난잡하게 비벼 대며 삽입을 준비했다. 그의 딱딱한 살덩이가 구멍을 비집고 들어왔을 때, 나니아는 그를 향해 온몸을 열어 줘 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너무 커, 라히무스….”

소녀는 남자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칭얼거렸다. 그에 리자드는 다시 한번 정신을 가다듬고 확인하듯 속삭였다.

“아…. 부드럽게?”

“으, 응, 부, 부드럽게….”

“자기는 조금, 거친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아, 아냐….”

“아냐?”

“아, 앙, 아냐….”

“아니긴, 씨발….”

“아니, 앗, 아니야….”

“이렇게, 세게, 처박아 주면, 좋아, 죽잖아, 응? 자기야, 응?”

“아, 부, 부드럽게, 해, 해 준다고 했으면서…!”

나니아는 자신을 끌어안은 리자드의 등을 주먹으로 마구 두드려 보았지만, 사내는 부드럽게 하겠다는 처음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콱콱 찔러 올릴 때마다 몸에서 스파크가 번쩍번쩍 튀는 느낌이었다. 그에게 한참 빨렸던 가슴 끝이 바짝 서 버리는 것 같기도 했다.

“아, 미안…. 노력해, 본다고, 했잖아.”

“노력, 하….”

“그게 꼭, 가능하단 말은, 아, 씨발…. 자지 녹을 거 같아….”

나니아의 안쪽은 좁고 말랑거리면서도 밀고 들어갈 때마다 활짝 열렸다. 이제 자신의 음경을 어떻게 붙들고 어떻게 놓아주어야 하는지 학습해 버린 것 같았다. 하루 종일 짐승처럼 몸을 섞고 얻어진 쾌거였다.

“아, 시, 싫어, 너무, 너무 빨라, 아….”

“이렇게 좋은데, 내가, 어떻게 참아, 자기야….”

“아, 천, 천천히, 아, 나, 나, 가…!”

커다란 음경이 제 분수를 모르고 퍽퍽 찔러 왔다. 남자의 육중한 무게감도 함께였다. 격정적인 몸짓으로 땀이 배어나기 시작한 그의 육신이 매끈한 돌덩이처럼 손에 잡혔다. 크넓은 몸집이 주는 위압감이 그의 남성을 받아들이는 일의 짜릿함을 돋우었다.

“갈 것 같아? 응? 벌써 가면 어떡해. 아직, 한참, 더.”

“아앙, 처, 천천히, 천천히…!”

“하, 씨발…. 한참 더 해야 돼, 자기야. 응?”

“아, 나, 그만, 나 벌써…!”

“내 자지 좋아? 응? 좋아 죽겠어?”

“아, 조, 좋아, 그만, 그만…!”

“아, 씹, 좋아…. 너무 좋아, 자기야.”

쾌감과 거부를 함께 말하는 그 입술을 주둥이로 틀어막았다. 사내는 몇 번이고 그녀에게 절정을 선사하며 그 역시도 아득한 쾌락에 빠져들었다.

* * *

나니아는 라히무스가 건네준 물잔의 물을 한 모금 마시는 둥 마는 둥 하고 침대에 엎어졌다.

“파코한테 들렸을까…?”

나니아가 때늦은 걱정을 했다. 라히무스는 옆방에서 누가 들었는지 어떤지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나니아의 좁은 등을 다정스레 어루만졌다. 느끼면서 잔뜩 울어 놓고 후회하는 그녀가 귀여웠다. 엉큼한 앞발은 때때로 갈빗대를 타고 넘어가 이불에 짓눌린 가슴을 몰래몰래 주무르곤 했다. 한바탕 쏟아 낸 다음이면 소녀는 무기력해졌다. 사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런 짓 저런 짓을 해 대는 편이었다. 주로 그녀에게 엉겨 붙어서 간질거리는 말들을 속삭이길 즐겼다.

“어때.”

“뭐가요…?”

“나 섹스 잘해?”

“…….”

나니아는 샐쭉한 시선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주문 사항을 완전히 무시했으니 아니라고 해야 할지, 정신없이 빠져들어서 느껴 버린 건 사실이니 그렇다고 해야 할지. 반려의 관계가 된다는 것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해 보게 되는 밤이었다. 정서적 지지와 육체적 만족감. 둘 모두를 채워 주는 남자였다, 라히무스는.

“기대하는 답이 있는 거 알아서, 말해 주기 싫어요.”

나니아가 내놓는 삐죽한 답변에도 라히무스는 타격을 입지 않았다. 그녀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온몸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아랫도리에 달린 물건으로 말이다. 어찌나 물이 많던지.

리자드가 등 뒤에서 히죽거리는 것도 모르고 나니아는 투덜거렸다.

“당신이 음란한 남자라는 건 분명해요…. 저질, 호색한….”

“칭찬이지, 그거.”

사내는 모로 누운 나니아의 뒤에 찰싹 들러붙어선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따뜻한 입술이 귓바퀴와 뺨에 닿았다. 겨드랑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두 팔이 교차하여 말랑거리는 살덩이를 하나씩 붙잡고 조몰락거렸다.

“너무 쪼그맣고 말랑거려….”

사내는 부러 어린아이 같은 어투로 애교를 부었다. 나니아는 그 어리숙한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져서 평소 같았으면 뿌리쳤을 손을 물리지 못했다. 그게 다 조금이라도 더 오래 주물러 보려는 수작임을 몰랐다.

* * *

이만하면 그럭저럭 몸 실을 만한 배를 구할 수 있겠다는 금전 계획이 세워졌을 때쯤이었다. 길한 조짐은 또다시 뜻밖의 기회를 동반하였다.

부둣가엔 오늘도 서로 다른 목적으로 닻을 내린 선박들과 상선에 오르려는 짐들이 가득했다. 목청 높여 표를 파는 사람, 상품 입하를 기대하며 기웃대는 상인들, 생선 비린내를 풍기는 어부들에게로 분주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항구 앞 선착장. 승선을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에서 파키케팔로와 나니아는 낯선 리자드를 대좌하였다. 길고 가지런한 손톱 끝이 테이블을 콕콕 쪼았다. 그다지 절박하지 않은, 여유롭지만 냉랭한 음성의 여자가 말했다.

“이것저것 잡다하게 다룰 줄 아는 술식이 제법 있다 들었어. 선임은 따로 받지 않을 테니 저 배 말고 우리 배에 타지.”

거스러미 하나 없이 잘 다듬어진 손가락의 주인공은 어느 리자드 귀족 영애였다. 바닷물을 닮은 짙푸른 머리카락과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가 신경질적인 낯빛을 돋우었으며, 한 치의 어긋남 없이 반듯하게 잘린 단발머리는 그녀의 쌀쌀맞은 인상과 잘 어울렸다.

질 좋은 옷과 화려한 꼬리 장식. 세련되고 고상한 몸가짐. 누군가를 발아래 두는 것이 익숙한 사람의 태도. 그녀는 이제껏 나니아가 만나 본 그 어떤 리자드보다도 가장 고압적인 권력자 특유의 분위기를 풍기는 여성이었다.

나니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옆자리의 파키케팔로를 곁눈질하였다. 이 난데없는 제안을 받아들여도 좋은 것인지 참견과 조언이 필요했다. 어쩐지 꼼짝도 할 수 없고 뒤돌아보아선 안 될 분위기라 라히무스에게까지 눈을 돌릴 엄두는 내지 못했다.

나니아가 그들의 눈치를 보자, 여자의 관심도 그쪽으로 돌아갔다.

“주인의 허락이 필요한가?”

“아, 아뇨! 주인 같은 거 아니고, 그냥 동료야, 동료요.”

파키케팔로가 손을 휘저어 가며 부정했다. 산만한 몸짓만큼이나 엉성한 존대에 공손하지 못한 말투가 섞였다. 여자는 고운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녀석을 쳐다보다가 다시 나니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신원은 나의 이름이 보장한다. 내 이름은 티에트 마지 바리디. 얼어붙은 바다를 다스리는 빙해왕의 둘째 공주로서, 이 나의 제안에는 그 어떤 음해도 농간도 없음을 약속하는 바이다.”

왕이니 공주니 하는 말에 하녀는 숨을 집어삼켰다. 아직 나의 세계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아는 게 너무 없었지만, 높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면 지레 겁먹기부터 했다.

그러자 파키케팔로가 귓속말했다.

“너무 쫄지 마, 나나. 별거 아냐…!”

속닥거리는 말을 듣자 하니 원래 리자드 사회에서는 공주니 왕자니 하는 놈들이 난무한다 했다. 아주 조그마한 땅뙈기를 가지고도 왕 노릇 하기를 좋아하는 군상들이라고. 하지만 별로 대단할 것 없다며 기죽지 말라던 것치고 파키케팔로 본인부터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따라서 협상은 어른의 몫으로 남았다. 보호자 겸, 의형 겸, 애인 겸, 동료 겸. 여러 역할을 부여받은 라히무스가 잠자코 지켜보다 나섰다.

“우린 이미 저쪽 배에 오를 충분한 자금을 갖추었는데. 왜 그쪽 배를 타서 시자 짓을 하라는 건지 모르겠군.”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의 대답은 상당히 비판적이고 부정적이었다. 코앞에서 발이 묶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티에트는 라히무스가 말하는 작은 범선을 지칭하며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숙녀를 그따위 배에 태울 셈인가? 방종한 시정잡배들에게 돌려지기 딱 좋은 환경일 텐데.”

다소 괴팍하고 여과 없는 표현에 나니아와 파키케팔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뇨?!”

“우리 배가 여덟 배쯤 더 크고 쾌적하지.”

공주는 상대방의 반응 따위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기 할 말만 늘어놓았다. 점잖은 건지 무례한 건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 차갑고 냉랭한 시선이 나니아의 얼굴을 향했다.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는 시선이 상당히 묘했다.

“선내의 잡일을 거들 다룸이 필요해. 최상급 대우를 약속하겠다.”

티에트는 장담했다. 그러고는 두말하지 않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같이 잘라 놓은 단발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등을 돌렸다. 먼발치서 티에트를 지켜보던 시종들이 한 발 뒤처져서 그녀를 쫓았다. 거절은 미처 염두에도 두지 않는 듯한 태도였다.

나니아와 파키케팔로는 서로를 마주 보고 망연한 눈빛을 교환했다. 그 뒤에서 리자드 사내의 자존심은 또 한층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남자가 티에트의 배를 선택한 까닭은 순전히 나니아 때문이었다. 지위 높고 강인한 암컷 리자드의 함선이 여린 소녀에게 더 안전하리란 사실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했다. 공주의 한심스러워하던 협박이 제대로 먹혀들어 간 셈이었다.

최상급 대우를 해 주겠다는 얼음 공주의 약속은, 반만 맞고 반은 틀린 것이었다. 그녀는 오로지 작은 인간 여자에게만 그러한 은덕과 친절을 베풀었다.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밑바닥 도마뱀들에게까지 잘 대해 줄 생각은 없다. 하물며 수컷이잖나.”

그렇게 말하는 티에트의 표정은 매우 담백하고도 차가웠다. 독방으로 마련된 따뜻한 잠자리, 맛좋은 식사, 나긋한 옷가지, 그 모든 혜택은 나니아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지금과 같은 한적한 티타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걔 귀여워. 있지, 그 앳되고 늘씬한 홍염룡 말이야. 걔는 애인이 없니?”

이제 얼굴을 좀 익혀 가는 리자드 한 마리가 물었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나른하게 기대어 있었다. 수다스럽고 활달한 여자였다.

나니아는 그녀의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귀엽고 앳되고 늘씬한 홍염룡이라면, 아무래도 라히무스는 아닌 것 같았다.

라히무스와 챠링고의 말에 따르면, 녀석은 애인은커녕 발정기도 오지 않은 애송이랬다. 나니아는 그 얘기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 입을 다물었다. 잘은 몰라도 당사자에게 실례가 될 만한 폭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파코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여자 얘기를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서요.”

그래서 나니아는 간접적으로 에둘러 이야기했다. 그러자 질문을 한 리자드를 포함하여 곁에 있던 다른 여자들도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청년을 칭찬했다.

“몸가짐이 바른 앤가 봐. 맘에 들어.”

“동정일까?”

“그래 보여.”

여자들은 낯선 리자드 청년을 화두에 놓고 킥킥댔다. 나니아는 입꼬리를 어색하게 끌어 올리며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티에트의 배에는 그녀 말고도 다른 선객들이 아주 많았다. 모두 그녀와 같은 귀한 집 여식들이었다. 암컷들은 배 안에서 해양 정세에 대해 논하거나 게임 하기를 즐겼다. 간혹 사내 얘기로 웃음꽃을 피우기도 했다. 빙해왕의 둘째 공주는 어쩐지 수컷 리자드란 존재 자체를 싫어하는 듯했으나, 그쪽이 유독 별난 경우였다.

“아…. 용꼬리 두 개만 있었어도 스트레이트 플러시야.”

“그런 무의미한 가정은, 제 플러시로 막아드리죠. 자, 모두 같은 색.”

나니아는 지금 서로의 마작 패를 뒤집고 까기 바쁜 리자드들 사이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적극적으로 함께할 엄두는 나지 않았지만, 이것이 그들 나름의 사교적 망라임을 이해하였기에 자리를 지키려는 편이었다.

“아, 또 1점도 못 얻었어.”

유독 테이블 게임에 열중하던 어떤 여자는 패배를 선언한 뒤 상아제의 마작 패 한 조각을 집어 던졌다. 그러고는 무기력한 몸뚱이를 기다란 듀세스에 늘어뜨렸다. 게으른 꼬리 끝을 휘적대던 그녀의 관심이 문득 인형처럼 앉아 있는 나니아에게로 향했다.

“너…. 샬롯에게 들었어. 글은 모르는데 술식은 쓴다며?”

“조, 조금씩 배우고 있습니다….”

“네가 온 뒤로 목욕물을 데우는 시간이 빨라져서 좋아.”

여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아랫사람을 대하듯이 말했다. 그러다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옆에 있는 다른 여자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이봐, 그러고 보니 둘이 닮았지 않나?”

그녀가 동의를 구하듯이 물었다.

“뭐, 누구?”

두 여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나니아는 어색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질문을 받은 여자가 잠시간 소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이랑 둘이 닮았네.”

“그치.”

공감을 얻은 것이 기쁜 듯, 여자는 손가락을 탁 튕겼다. 멀리까지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티에트 님이 얠 괜히 데려온 게 아니라니까….”

여자는 호사가처럼 속닥거리다가 갑자기 미간을 팍 찌푸렸다. 뒤늦게 나니아가 입고 있던 옷이 눈에 밟힌 것이었다.

“야. 그런데 누가 일하는 애한테 이렇게 불편한 옷 입혀 놨니?”

그러자 나니아에게 그 옷을 빌려준 리자드가 그녀의 허리춤에 매달린 리본 끝을 붙잡고 잘게 흔들면서 대꾸했다.

“귀엽지 않아? 내 유멘타 주려고 저번에 동쪽에서 산 옷이야.”

“너무 치렁치렁하잖아.”

“인간들은 이렇게 평상시에도 자신을 꾸며 입는 것을 좋아한댔어.”

리본 끝을 흔들어 대던 여자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러자 누군가가 그 심리를 조류에 빗대었다.

“꼭 남의 깃털로 알록달록 장식한 까마귀 같지 않니.”

비하나 조롱의 의미라기엔 지나치게 신기해하고 있었다. 마치 인간 행동 연구가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리자드가 동대륙에서 사들였다는 옷들은, 그야말로 공주님이나 입을 법한 드레스들이었다. 노예에게 이런 옷을 선물하려 했다니, 나니아로서는 믿기 힘들었다. 그녀들과 말을 섞다 보면 현실 감각이 떨어질 때가 많았다.

이 배의 여자들, 그러니까 티에트와 그녀의 추종자들은 여태껏 나니아가 만나 온 리자드들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유랑하는 취지부터가 판이했는데, 그들이 배를 탄 목적은 외교적 파견도 사업적 상거래 때문도 아니었다. 모든 조선 기술을 총동원하여 만들어진 듯한 이 거대 선박은 오로지 여행만을 위해 건조된 호화 유람선이었다.

여행이란 생업에 쫓기지 않는 여유롭고 포만한 계층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었다. 그들의 직전 관광지였던 아그네일 시국은 산호초 가득한 수심 얕은 바닷물에 풍성한 초목이 아름다운 장소로 유명하다 했다.

“나는 포목점에서 원단만 잔뜩 샀어. 아주 이국적인 옷이 완성될 거야.”

“남편들에게 옷 한 벌씩 맞춰 줄 예정인가?”

“아아니?”

여자는 당치도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서넛 있는 남편을 모두 떼어 놓고 애인을 만들러 나온 유부녀였다. 집에서 매일 봐야 하는 그 얼굴들이 이제는 질린다고 했다.

“내 옷 해 입을 거야.”

“여자 옷 만들기엔 원단들이 너무 화려하던데.”

묘한 분위기 속에서 하녀는 가구처럼 앉아 있었다. 붙여 앉은 무릎 위에 주먹을 다물어 놓고 되록되록 눈만 굴렸다. 시시껄렁하고 털털한 여자들 사이에서 오직 그녀만이 공작새처럼 꾸며 입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멋쩍고 부끄러운 기분을 느끼게 했다. 이곳의 여자들은 슈쉬라처럼 매일 같이 분위기를 바꾸어 가며 꾸며 입는 습관은 없어 보였다. 대신 고급 원단만을 사용해 만든 깔끔하고 정갈한 차림새에서 은은하고 당위적인 부티가 느껴졌다.

말수가 별로 없던 선주 티에트가 잎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여기에 흡연자는 많은데 홍염룡은 없었다. 그래서 나니아는 담뱃불을 붙이려는 그녀에게 재빨리 술지 한 장을 써서 건넸다. 좀처럼 웃는 법이 없는 그녀에게서 만족스러운 미소가 돌아왔다.

지난 일정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감상을 나누던 중, 누군가 못마땅한 투로 투덜거렸다.

“이번엔 수질이 영 별로였어.”

“어째서지? 에메랄드빛 물색이 아름다웠지 않나?”

“그 수질 말고.”

“아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여자들이 낄낄댔다.

“글쎄…. 암컷들은 예쁘장하던걸.”

공주는 시답잖은 감상과 함께 희미하게 웃었다. 꼭 그녀의 미소를 닮은 희끄무레한 담배 연기가 도자기 같은 얼굴 위로 흐릿하게 흩어졌다.

그리고 다시 또 할 일이 없어진 나니아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누군가 그녀를 붙잡고 말을 시켰다.

“너는 눈치가 없진 않은데, 분위기를 맞추는 편은 아니구나.”

진력나는 동승객들 사이에 끼어든 새로운 인물은 흥미를 자아내는 법이었다.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네.”

“애인 앞에서는 잘만 재잘대던걸.”

애인 어쩌구 하는 말에 나니아는 얼굴이 빨개졌다.

“남자 친구 얘기 나오니까 부끄러운가 봐.”

“그래. 그놈 얘기 좀 해 봐. 어쩌다 리자드랑 눈이 맞았다니?”

남의 연애 얘기 듣기를 좋아하는 습성은 만국 공통인 듯했다. 어디서 처음 만났니, 누가 먼저 고백했니, 밤일은 잘하니, 결혼은 할 거니, 대답은 들을 생각도 없어 보이는 들뜬 질문들이 쏟아졌다.

“도마뱀 대물 맛을 본 계집들이 다신 수컷 인간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걸 나는 몇 번 봤지.”

누군가 팔뚝 끝을 쥐어 곧추선 양물 흉내를 냈다. 음담패설을 좋아하는 여자들 입에서 까르륵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니아는 당혹스럽고 민망해서 치맛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 한 번도 그런 티를 낸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숨길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이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어쩌다 한번 만나면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데, 모르려 해야 모를 수가 없었다. 뒹굴지 못해 몸 달아 하는 게 남들 눈엔 보였다.

“나는 나보다 나이 많은 남자는 싫더라.”

“맞아. 때 묻지 않은 놈이 좋지.”

“나는 동갑까진 괜찮아.”

여자들은 한 살이라도 젊은 수컷을 만나야 한다며 입을 모았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이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는데, 정실로 삼을 수컷은 보통 집안을 우선으로 보았다. 그러다 보면 얼굴은 조금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수컷이 얼굴이 받쳐 주지 않으면 어리기라도 해야 부부지정이 싹틀 수 있다는 게 그들의 지론이었다. 첩실은 집안이 조금 모자라고 나이가 조금 많아도 얼굴이 반반하면 데리고 산다 했다.

“그렇게까지 많지는….”

소녀는 더듬더듬 사내의 연식을 변명했다. 여기서 라히무스의 나이를 지적하는 암컷들도 딱히 그보다 어려 보이지는 않았다.

“여기 계신 분들하고 비슷할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문제라는 거야. 그 나이에 아직도 미혼이라며.”

“사실 그만하면 혼기를 놓칠 만한 얼굴은 아닌데, 그치?”

수컷은 보통 스무 살 전후로 제일 야들야들하고 어여쁜 시기이니 그때를 놓치면 장가가기가 힘들 댔다. 그러니까 라히무스는 결혼 적령기가 지난 셈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니아는 기분이 나빠졌다. 누가 뭐래도 그녀의 애인은 지금도 충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너무 놀렸나?”

표정이 어두워진 나니아를 보고 누군가 뱉은 말을 수습하려 들었다.

“그으래, 연상의 수컷도 나름의 매력이 있어. 힘들 때 기댈 수도 있고, 별것도 아닌 일에 삐져서 달래 줘야 할 일도 없고. 너도 그런 거지? 아무래도 인간 여자들은 좀 여리고 약하니까.”

애써 공감해 주려는 듯하였으나 나니아는 그 말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삐지는 것은 라히무스가 제일 잘하는 일이었다.

“…거기까지.”

사기그릇에 담배를 비벼 꺼트린 티에트 공주가 나니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소녀의 어깨 위에 앞발을 올리곤 주변의 다른 리자드들을 내려다보았다. 남의 연애 사정에 시시콜콜 참견하는 그녀들을 알량하게 여기는 눈초리였다.

“벌써 해 질 때가 되었군. 이 다룸은 오늘 샬롯의 가르침을 수행해야 한다.”

그만 괴롭히고 이만 놓아주라며, 하녀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러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냉랭한 목소리로 곧바른 지시를 내렸다.

“이만 나가 봐. 샬롯과 공부를 마치면, 그녀는 내 방으로 보내라.”

* * *

샬롯은 이 배의 하나뿐인 다룸이었다. 동시에 티에트 소유의 유멘타토르이기도 했다. 긴 머리카락을 동그랗게 말아 묶은 모양새가 썩 단정하고 귀염성 있는 여자애였다.

“오늘 하루도 재밌게 노셨나요?”

“네? 아, 네….”

그걸 놀았다고 볼 수 있는지 나니아는 고민스러웠다.

“저희 공주님 친절하시죠?”

던져 오는 질문마다 그 목적을 알기 힘들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기분이 석연찮았다.

“저는 그분을 아카데미 다니실 적부터 모셨어요. 좋은 분이세요. 저한테 소질이 있다는 걸 알고 배움의 기회도 주셨고요. 아, 물론 저를 좀 각별하게 여기셨으니 가능했던 일이지만.”

어딘지 자랑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비록 유멘타일지라도 원소를 다룰 줄 아는 그녀 나름의 자부심 때문인가 보다 했다.

“원래 아무한테나 그렇게 친절하진 않으신데….”

샬롯은 말을 하다 말고 나니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안면에 뭐가 묻었나 싶을 정도로 쳐다보는 통에 나니아는 저도 모르게 제 볼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샬롯의 무심한 시선이 다시 탁자 밑으로 향했다. 나무 궤짝의 걸쇠를 풀어 던지는 그녀의 손길엔 어딘지 냉한 느낌이 있었다.

샬롯은 다른 유멘타들과 함께 주인의 시중을 드는 여자애였다. 배에서 지내는 주인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일이 없도록 보필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하녀에겐 그것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도우려 하였지만, 그녀가 해야 할 일은 그런 자질구레한 잡무들이 아니라며 매일 이렇게 주술 강습을 받았다.

“오늘은 좋은 꿈을 꾸게 해 주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사람의 마음속에 침투하는 암악 계열의 술법이라 조금 까다롭지만, 당신이 소질이 있다고 하니 가르쳐드리겠어요. 많은 아가씨들께서 잠드시기 전에 이 주술을 꼭 찾으세요. 원래는 으깬 식물 가루에 오일을 섞어 그리는데요, 섣불리 자를 그렸다간 념과 상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수습하기 어려우니 저희는 이걸 쓰도록 해요.”

샬롯이 잉크 펜 하나를 건넸다. 그것을 나니아의 손목에 대고 짧게 획을 그어 피부에도 선명하게 그려지는 것을 확인시켰다.

“이 술식은 배우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캐스팅 자체도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해요. 가르쳐 드린 글자는 다 외워 오셨나요? 음, 좋아요.”

샬롯은 손목을 덮은 옷소매를 거둬 올리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아주 중요한 일은 아니에요. 하지만 제가 여기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고 있거든요.”

아무렴 좋은 꿈을 꾸고 싶다는 사치가 의식주를 해결하는 일보다 앞설 수는 없었다. 나니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말을 경청하였다.

“처음에는 순전히 호의로 해 드린 것이었죠. 아시다시피 저는 티에트 공주님의 유멘타이지, 다른 분들의 유멘타는 아니니까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당연한 일과로 변해 버려서…. 저녁 무렵부터는 도무지 쉴 틈이 없었다니까요.”

투덜거리는 목소리에서 상당한 불만이 느껴졌다. 청순해 보이는 외모나 조곤조곤한 말씨와 다르게, 순종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여자였다.

“그러다 보니 정작 티에트 님 시중을 들 시간을 부족해져 버린 거예요. 맞아요. 티에트 님께서 당신을 데려오신 건, 어디까지나 제 일을 줄여 주시기 위해서였단 거죠.”

나니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의아하게 생각했다. 전부터 내심 궁금하던 사실을 물어보고 싶었다.

“이렇게 크고 좋은 배에, 다룸은 샬롯 한 명뿐이라는 게 이상해요.”

그 말에 샬롯은 나니아를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 아이 보듯 하며 설명했다.

“다룸 한 명을 온전히 고용하려면 단순히 술지나 마도구를 매입하는 것 이상으로 비싼 값을 치러야 하니까요. 물론 빙해왕께서 그 정도도 감당 못 하실 분은 아니시지만…. 공주님께서 워낙 남자를 싫어하셔서요.”

티에트가 수컷을 끔찍이 싫어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라면 나니아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바였다. 이를테면 그녀 자신이 지내는 공간에 수컷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 태도가 그랬다. 공주는 언제나 암컷들에게만 둘러싸여 지냈다. 남자가 들어올 수 없는 장소는 티에트의 개인 침소뿐만이 아니었다. 나니아가 다른 암컷들과 어울리고 숙식하는 그 모든 곳이 금남의 구역이었다.

“빙해왕께서 구해 주신 세 명의 다룸이, 지금은 모두 물고기 밥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네?”

자신이 지금 무슨 소릴 들었나 싶어 입이 쩍 벌어진 나니아와 다르게 샬롯의 표정은 예사로웠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나니아의 등을 떠다밀었다.

“뭐, 그렇게 됐어요. 그나저나 지금 몇 시죠? 어머, 벌써 아홉 시가 넘었어요. 이제 티에트 님을 찾아뵈어야 할 시간이에요.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니까, 어서 나가 보세요.”

나니아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저항 없이 방 밖으로 쫓겨났다. 황당한 기분과 별개로, 이젠 그녀도 자유 시간이었다. 바닷바람이 맴도는 주갑판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는 리자드를 찾아가기 위해 그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라히무스!”

소녀는 품이 좁은 치맛단을 펄럭이며 그를 향해 뛰어갔다. 난간에 기댄 팔이 움찔거리며 수그렸던 덩치가 일으켜 세워지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쪼르르 달려와 풀썩 안기는 그녀를 보고 울고 싶어졌다. 그 역시 나니아를 거세게 끌어안으며 칭얼대는 목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늦었잖아.”

“미안해. 많이 기다렸어요?”

나니아는 가슴에 파묻어 둔 고개를 떼어 내고 라히무스의 불퉁한 얼굴을 확인했다. 다른 사람들도 남자가 저를 이런 눈으로 쳐다본다는 사실을 눈치챘다는 생각에 낯 뜨거운 기분이 들었다. 소녀는 발꿈치를 살짝 들어 올려 그의 턱 끝에 입을 맞추었다. 그랬더니 리자드는 고장이 났다.

“그, 어….”

이래도 되냐는 듯 남자는 어버버 말을 더듬었다. 나니아는 조금 뾰로통한 투로 대꾸했다.

“다들 이미 알고 있대. 당신이랑 나랑, 무슨 관곈지….”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숨겨지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사내는 짜증이 치민다는 듯이 분통을 터뜨렸다.

“씨발, 애인이 있다는 걸 알면서 너를 그런 데서 재워?”

라히무스가 말하는 그런 데란 부족함 없이 아늑하게 잘 꾸며진 그녀만의 독방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티에트의 지시대로 남자의 출입은 허락되지 않는 영역에 놓여 있다는 사실 정도였다. 내가 이래서 남녀 불문 귀족 놈들이라면 상종을 하고 싶지 않다며 화를 내는 라히무스를 보면서, 나니아는 물고기 밥이 되었다던 다룸들을 떠올렸다.

“그래도 티에트 님의 비위를 거스르는 짓은 하지 말아요….”

“뭐?”

사내는 나니아의 말을 듣고 더욱 언성을 높였다.

“그 여자가 너한테 뭐라고 했어? 혹시 괴롭혀?”

“아니, 나는 괜찮아. 나는 괜찮은데….”

가만두지 않겠다며 발끈하는 라히무스를 보고 나니아는 손사래를 쳤다.

“남자한테는 정말 조금도 자비가 없는 분 같아서 그래….”

라히무스는 그녀가 걱정하는 대상이 자신인 것을 알고 조금 진정이 되었다.

“나야말로 그깟 암도마뱀 하나도 거리낄 것 없어.”

못살게 구는 계집이 있으면 참지 말고 자기한테 일러바치라며, 남자가 신신당부를 했다. 감히 그런 짓을 했다간 참지 않겠다는 듯 씩씩대던 리자드는 문득 잠옷 차림의 나니아를 내려다보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잘 씻기고 잘 입혀 놓은 소녀는 귀한 집 여식이 총애하는 인형처럼 단정하고 깜찍한 구석이 있었다. 번듯하게 잘 먹고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정말 잘 지내고 있어요. 파코나 라히무스에게 미안할 정도로….”

남자는 매일 밤 허리를 잔뜩 숙여야만 지나갈 수 있는 공용 수면실의 해먹 위에서 잠을 청했다. 침구라고 해 봐야 대롱대롱 매달린 쇠사슬 끝에 연결된 천 쪼가리가 다였다. 그나마도 몸에 맞지 않아 다리는 바닥에 짚고 자야 한다고 했다. 그가 형편없는 환경에서 먹고 자고 하며 고생하는 데 비하면, 육지에서 누릴 수 있는 풍족함에는 현저히 못 미치는 수준이었지마는, 그래도 나니아는 나름 편안하게 지내는 편이었다.

그녀가 입은 잠옷의 소맷단이 나풀나풀했다. 라히무스가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네가 잘 지내면 됐어.”

티에트의 강건한 남녀 분리 방침이 처음에는 불만스러웠지만, 차라리 다행인지도 몰랐다. 이렇게 귀여운 나니아라니. 아무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오늘도 예쁘게 입었네.”

사내가 지극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소녀는 뺨을 물들이며 한쪽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예쁘다는 말을 들을 때면 항상 몸이 배배 꼬였다.

“이… 이상하죠? 내 옷도 아닌데, 자꾸…. 빌려줄 테니 입으라고…. 주니까 입기는 하는데, 음, 격이 떨어져 보여서 그런가….”

사내는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넋을 놓고 있었다. 이미 귀 뒤로 넘어간 머리카락을 자꾸만 덧그리듯 어루만졌다. 돌아오는 대꾸가 없자 나니아는 혼자서 말을 이었다.

“라히무스는 잠도 잘 못 잘 텐데, 나만 잘 먹고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미안해….”

애처로운 보랏빛 눈동자가 어두운 밤공기에 으슥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라히무스를 안쓰럽다는 듯이 응시하면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남자는 그 작은 손에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내가 잠을 못 자는 건 불편해서가 아니야, 나냐.”

한숨 섞인 목소리가 나직하고 달콤했다.

“밤새 네 생각을 하느라 뒤척여서 그렇지….”

나니아는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지끈지끈해졌다. 그를 알고 나서부터 홀로 잠드는 일이 얼마나 외롭고 허전한지 모르겠다. 아마 그도 같은 마음인가 보다 하였다. 배 위에서의 그들은 가깝고도 멀었다.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데 문제는 손을 뻗을 수가 없었다.

“이리 와 봐, 응? 여기서 입술 좀 빨아 주고 가….”

남자가 다급히 나니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 구석진 틈새는 둘만의 밀회 장소였다. 누구나 올 수 있지만 대체로 아무도 오지 않았다. 사내는 나니아를 번쩍 들어 올려서 자기 목에 팔을 감게 했다. 바람에 펄럭이던 옷자락이 그의 팔뚝 안에서 무참하게 구겨졌다. 키스를 조르던 남자는 나니아의 목덜미에 콧날을 문대며 냄새부터 맡아 댔다. 새끼 맹수처럼 고롱거리는 숨소리가 사랑스러우면서도 처음 그를 만났을 적처럼 오싹했다. 소녀는 고개를 비틀면서도 피하지는 않았다.

“라히무스….”

그녀가 이름을 부르자, 리자드는 입술을 들이밀며 키스를 종용했다. 소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싫은 기색이 없었다. 리자드는 어쩌다 한번 닿을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소녀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고 그 속을 헤집어 댔다. 겹쳐지는 숨결이 뜨거웠다. 귀가 멍해질 정도로 황홀한 입맞춤이었다. 남자가 빨아 달라고 한 것은 입술이었지만, 그보다는 혀를 더 많이 먹었다.

사내는 발 디딜 틈이 있는 한 칸 위의 계단에다 나니아를 내려놓고 자유로워진 두 손을 움직였다. 자그마한 날개뼈를 어루만지는 손끝이 만족할 수 없어 하면서도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했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가랑이 사이를 파고드는 다리가 서로를 미치게 했다. 바지 아래에서 단단하게 부푼 그를 느끼며 나니아는 기껏 갈아입은 속옷을 적셨다.

이렇게 밤마다 질척한 입맞춤을 나누지만 그뿐이었다. 남몰래 키스는 가능했으나 섹스는 불가능했다. 연인이 같은 침실을 공유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토록 애가 타는 일인 줄은 몰랐다.

한참 서로를 물고 빨던 입술이 떨어졌을 때, 라히무스는 눈을 질끈 감으며 중얼거렸다. 말소리보다는 바람 소리가 더 많이 섞인 음성이 흐릿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고 싶어 미치겠어, 자기야….”

“으응…. 나도….”

“…자기도?”

달뜬 입천장에 끈적한 흥분이 들러붙었다. 남자는 초조한 혀끝을 입 안에서 굴리며 주변 상황을 살폈다. 눈 딱 감고 저질러 버리기엔 감당해야 할 난관이 너무 높았다.

“씨발, 내가 다신 배를 타나 봐라.”

사내는 혼잣말처럼 나직이 욕설을 내뱉더니 다시 짐승처럼 헐떡이며 나니아의 입술을 빼앗았다. 붙잡힌 어깨가 얼얼할 정도로 흥분한 것이 느껴졌다.

응, 으움, 음….

입술이 접했다 떨어지는 순간이 밭아지면서 꽉 막혀 있던 숨통에 교태로운 신음이 섞였다. 마지막엔 식지 않는 열을 끌어안고 빈틈없는 포옹을 나누었다.

두 사람은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난간 앞에 붙어 앉아 서로의 하루를 공유했다. 라히무스가 매일같이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파코 말이 맞았어요. 이분도 공주님, 저분도 공주님. 공주님이 너무 많다니까요? 다들 파코 얘기를 했어요. 늘씬하고 귀엽대요. 애인이 없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고 했어요. 라히무스 얘기도 나올까 봐 조금 조마조마했는데요, 다행히 라히무스에게 관심 있는 아가씨는 없었어요.”

소녀는 자신의 좁은 속을 고백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당신이 마음에 든다고 했으면, 나는 정말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을 것 같아요. 라히무스가 내 리자드인 걸 안다고 해서, 솔직히 마음이 놓였어요….”

“그랬어?”

“으응….”

남자는 재잘대는 나니아의 손을 주물럭거렸다. 다정한 맞장구와 함께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아참, 파코는 잘 지내요?”

“걔는 제집처럼 지내.”

“그렇구나. 워낙 붙임성이 좋은 애니까.”

“응.”

무릎 사이에 앉혀 놓은 나니아의 뒤통수가 가슴팍에 와 닿았다. 주책맞게 쿵쾅쿵쾅 뛰어 대던 가슴이 이어지는 뒷말에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데 대부분 남편을 두셋씩 데리고 산다더라? 많게는 네 명까지도 있대.”

“…뭐?”

라히무스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누가?”

“누구긴. 거기 있던 사람들.”

나니아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였지만, 라히무스로서는 도저히 가볍게 넘길 수가 없는 얘기였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오붓하던 속내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티에트를 비롯한 그네들은 라히무스 자신과 동년배였으니 남편을 둘씩 셋씩 거느렸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문제는 그에 대한 나니아의 생각이었다. 리자드는 그녀가 자신에게 불리한 그 문화를 흔쾌히 수용하고 싶어질까 봐 덜컥 겁이 났다.

“그, 별로, 안 좋아.”

“응? 뭐가요?”

“남편 여럿 두는 거.”

라히무스는 조급해져서 말이 빨라졌다.

“너무 많이 들이면 집에 바람 잘 날 없고, 허구한 날 쌈질이나 하겠지. 서너 마리씩 비위 맞춰주고 발정기 상대해 주려면 얼마나 귀찮겠어. 너처럼 연약한 여자애는 온몸이 남아나지도 않을 거다. 그리고 좀 더 멀리 보면, 재산 분할 문제도 생기고, 후계 문제도 복잡해지고….”

나니아는 고개를 뒤로 돌려 사내를 쳐다보았다. 맑은 두 눈을 끔뻑이며 평소답지 않게 수다스러워진 그를 살폈다. 어딘지 다급해 보이는 얼굴에 옹색한 질투심이 잔뜩 묻어 있었다. 무엇이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는지 고민하던 소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입을 떡 벌리고 물었다.

“설마 내 걱정을 하는 거예요? 내가 남편을 여럿 두고 싶어 할까 봐?”

“…….”

남자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 말이 맞았다. 나니아는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

남자는 멋쩍게 턱을 문지르면서 시선을 피했다. 허공을 맴도는 눈길이 오갈 곳을 모르고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둥그렇게 부푼 그의 동공을 멀뚱히 들여다보던 나니아는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나는 당신 상대하는 것만으로 벅차요, 라히무스.”

내가 어떻게 너를 두고 다른 자에게 한눈을 팔겠냐며, 소녀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비스듬히 입을 맞춰 왔다. 그러자 라히무스 역시 그녀를 뒤에서부터 와락 끌어안으며 먼저 시작해 준 입맞춤에 격렬히 응했다. 짙은 접합 끝에 쪽 소리를 내며 떨어진 입술 사이로 한숨 섞인 음성이 새어 나왔다. 박력 넘치던 몸짓과 다르게 가엾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목소리였다.

“나 말고 다른 새끼한테 관심 갖지 마. 응? 제발….”

불안해하는 그를 보고 나니아는 잔인할 정도로 활짝 웃었다. 그의 근거 없는 불안감이 사랑스러웠던 탓이다.

그녀가 미소 지을 때면 리자드의 마음속에는 환한 빛이 켜졌다. 하지만 불빛이 닿지 않는 등잔 밑은 더욱 어둑해지기 마련이라. 그 행복한 광경은 그녀가 다른 누군가에게도 웃어 주는 불운한 상상으로 이어졌다.

“그러겠다고 해, 응?”

리자드는 자꾸만 대답을 보채며 얼굴을 비벼 왔다. 나니아는 그의 목덜미를 간지럽히며 귀여워했다. 아무리 쏟아부어 주어도 부족하기만 했다. 검붉은 머리카락 끝이 가만가만 어루만져졌다.

티에트의 배 위에서 나니아의 생활에는 통금이랄 게 생겼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두 사람의 만남에 제약이 따르게 된 것이었다. 라히무스와 헤어질 시간이 다가오면 타는 듯한 목마름을 느꼈다. 몇 번이나 꼭 안아 주고 뽀뽀해 준 다음에야 겨우겨우 그를 향한 아쉬움이 달래어졌다.

소녀는 방으로 돌아와 제 침구에 누워서 오늘 하루를 생각했다. 방 벽 너머로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들락 말락 하던 시점이었다. 나니아는 저도 모르게 속옷 안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누군가 이 벽 너머에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다. 자신의 지저분한 본능이 어디에서부터 기인하였는가 생각하던 그녀는 얼굴이 화끈화끈해졌다.

‘라히무스 때문이야….’

그가 자신의 몸을 이토록 음탕하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나니아는 남자의 탓을 했다.

욕구불만은 그녀만의 문제가 아닌 듯했다. 평소 주색잡기를 일삼던 리자드 암컷들은 더했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이러다 구멍에 거미줄 치겠다니까.”

누군가 불평했을 때, 주변에서도 공감한다는 듯 낄낄대는 목소리를 냈다. 여자가 말하는 구멍이 무슨 구멍인지 구태여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얘기를 들어야 할 것 같은 티에트는 정작 자리에 없었다. 시계처럼 움직일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선 어울리지 않게 늦잠을 자는 모양이었다.

“탈타르노엔 유멘타 집창촌이 번성한대요.”

“가끔은 인간도 나쁘지 않지.”

“어우, 난 싫어. 탈타르노 다음 정박지는 어디지?”

“키나키렙 운하를 통과하면, 그다음은 육로로 이동할 거래.”

“탈렘으로 가나?”

“아마 그렇겠지.”

“나 홍염룡이나 대지룡은 취향이 아닌데.”

누군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마는, 이곳은 저마다 자기 집에서 내놓은 문제아들의 집합소나 다름없댔다. 배에서 일하는 다른 인간들에게 얘기를 듣고 보니 확실하게 분간이 갔다. 귀족으로서의 품위를 지키기보다는 묘하게 저속하고 방탕한 느낌이 들던 게 착각이 아니었다.

“뭐가 됐든 빨리 내리고 싶어. 배에서 지내는 건 너무 답답해. 잠자리 덥혀 줄 수컷 하나 끼고 지낼 수가 없으니, 원.”

갑갑하단 소리에 다른 여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입으로만 불평할 뿐, 티에트의 뜻을 거스를 생각까지는 없어 보였다. 나니아는 마음 한구석에 의문이 싹텄다. 의사 표현이 확실한 그녀들이 이쪽으로는 참고 있다는 점이 의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기 공간에 남성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한 티에트 공주가 정작 본인은 밤이면 밤마다 제 방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샬롯이 부탁한 대로 다른 아가씨들의 방을 드나들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니아에게 이런저런 옷을 한 아름 안겨 주던 그 리자드의 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자의 팔뚝을 붙잡고 그녀가 좋은 꿈을 꿀 수 있도록 술식을 써 내려갈 때였다.

“아….”

처음엔 욕망을 이기지 못한 어느 반항적인 리자드가 남몰래 자기 침대로 남자를 끌어들인 줄만 알았다.

“아흣…!”

어디선가 들려오는 야릇한 신음성에 나니아는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귀를 기울였다. 다시 들어 보아도 틀림없는 교성이었다. 나니아가 귀를 쫑긋 세웠다. 팔을 내어준 리자드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티에트 님 방이야.”

여자는 소리의 진원만을 알려주었다. 그러곤 무시하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영문 모를 모호한 뒷사정은 생략되었다. 나니아는 궁금했지만, 감히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날의 유령 같은 신음성을 다시금 떠올려 보고 있을 때였다. 방 밖에서 공손하고 깍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식사를 대령하였습니다.”

“들라 하라.”

문을 열고 들어온 유멘타 대표의 인사를 필두로 그들 앞에 아침 만찬이 차려지기 시작했다. 나니아는 머쓱한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귀한 신분의 여자들과 겸상한다는 것이 이상했다. 하녀는 부담스러운 기분이 들 때면 리자드들의 꼬리를 훔쳐보았다. 그녀들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느낄 때면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반쯤 귀여운 동물들과 어울리는 기분을 낼 수 있었다.

식사는 본식과 디저트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았다. 뭍에서 먹는 밥에는 한창 못 미치지만 그래도 배 위에서 누리기엔 충분한 호사였다. 나니아는 손에 든 수저를 입에 물고 라히무스를 떠올렸다.

‘하루에 한 끼만 먹는다는 것 같던데….’

입으로는 퓌레를 먹고 있는데 시선은 자꾸만 간식을 향했다. 붉은색 천을 바탕 삼아 소담하게 담겨 있는 쿠키였다. 가까이에 앉아 있는 이들이 하나둘씩 집어먹는 듯하였으나 그뿐이었다. 모두가 식사를 마쳐 갈 때쯤에도 쿠키는 한참 남아 있었다.

유멘타들이 돌아와서 상을 치우기 직전이었다. 나니아는 쿠키가 담겨 있는 보자기 끝을 잡아당겨서 자기 앞으로 슬쩍 끌어왔다. 마주 보는 귀퉁이 끝을 붙잡은 두 손이 매듭지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교차하였다. 하지만 그 움직임은 너무도 수상쩍어서 곁에 있던 다른 리자드의 이목을 끌고 말았다.

“가져가서 먹으려고?”

누군가 묻자, 느릿하게 움직이던 나니아의 손끝이 다급하게 매듭을 완성했다. 그러고는 새빨개진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아뇨, 그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어느 리자드가 피식 웃으면서 알은체했다.

“자기 먹으려는 거 아닐걸. 걔는 맛있는 게 있으면 꼭 자기 애인 갖다 주더라.”

“어머. 귀엽잖니.”

좋은 지어미라느니, 책임감 있는 가장이 되겠다느니, 여자들이 우스갯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들 딴에는 칭찬이었으나 듣는 사람으로서는 놀림으로밖에 느껴지지 않는 말들이었다. 깔깔대는 목소리가 나니아의 귓불을 데웠다. 졸지에 욕심껏 먹이를 욱여넣는 다람쥐 꼴이 되어 버려선, 볼 주머니가 부끄러워졌다.

나니아의 옆에 있던 리자드가 그녀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았다. 그러고는 소녀 스스로 포장한 쿠키 주머니를 그녀의 가슴 앞으로 바짝 밀어 주었다. 기꺼이 가져가도 좋다는 듯이.

“어차피 남는 거야. 가져다줘.”

꼭 수컷이 암컷에게 그러하듯이, 새끼 밴 반려를 위해 먹고 싶은 음식을 구해다 바치는 것처럼 구는 꼴이 귀여웠다. 오로지 한 마리만을 향한 지고지순한 순애가 리자드의 호기심을 끌었다.

“그 남자 어디가 그렇게 좋아?”

본인은 모르겠다는 듯, 여자가 물었다.

“신랑감으로는 영 별론데.”

도대체 그녀들이 말하는 좋은 신랑감이란 어떤 남자일까. 잘 모르겠지만, 나니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꾸했다.

“자상해요. 다정하고….”

웅얼거리는 말이 무릎 위에 고였다. 하녀의 말에 누군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그래? 완전 못되게 생겼던데.”

그 말에 다른 리자드들도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그에 대한 첫인상을 기억했다. 사납다 못해 험상궂은 분위기였다. 암컷에게 순종적일 것 같은 느낌은 아니랬다. 자기 내키는 대로, 제멋대로 살아온 분위기가 낙낙하다고.

“헤프게 생겼잖아요. 나는 그렇게 생긴 수컷은 싫어.”

“뭐, 하룻밤 데리고 놀 상대 정도라면 모를까. 데리고 살고 싶진 않죠.”

“맞아. 나도 거칠어 보이는 애들 별로.”

“남자가 좀 고분고분하고 애교스러운 맛이 있어야지.”

그녀들의 입담은 얼굴 잠깐 보았을 뿐인 수컷의 외견을 평가하는 데만도 도무지 거침이 없었다.

당사자의 애인을 앞에 두고도 스스럼없이 나불대는 폄하의 말들에 나니아는 발끈하고 말았다.

“아니에요…! 말도 잘 듣고, 순하고, 귀엽고, 엄청, 엄청, 애… 애교덩어리인데….”

강하게 부정하는 듯하던 목소리가 자신만 아는 사내의 귀여움을 언급하면서부터 점점 흐릿해졌다.

“뭐? 뭔 덩어리?”

“애교덩어리?”

여자들의 웃음은 조소와 폭소, 그 사이를 오갔다.

“뭐, 몸은 좀 봐 줄 만하더라.”

선심 쓰듯 사내의 장점을 찾아 말해 주는데, 하나도 고맙지가 않고 불쾌할 뿐이었다.

“그래. 어깨랑 가슴은 잘빠졌더라.”

“허벅지도, 나름.”

“밤일은 잘하지?”

“그치만, 전체적으로 인상이 너무 두껍지 않아? 난 조금 마른 애가 좋아.”

줄기차게 이어지는 품평에 나니아는 기분이 상해 버렸다. 언짢은 듯이 꾹 다물어진 입술에 소극적인 반감이 드러났다.

식사가 끝난 후에 나니아는 속상한 마음을 가득 안은 채로 자신의 리자드를 찾아다녔다. 이곳은 티에트 공주의 공간으로 넘어가는 길목. 라히무스 말고 다른 수컷들은 얼씬도 하지 않았다. 역정과 호통이 두려운 자들은 알아서 바짝 기어 다녔다.

남자는 나니아와 24시간 붙어 있지 못하게 되면서 잔소리가 이만저만이 아니게 되었는데, 사실 그녀는 어느 누가 보아도 안전하게 지내고 있었다. 배 안의 모든 여자들이 티에트를 등에 업고 지냈다. 리더의 위상이라든가 선내 질서가 유지되는 방식이 슈쉬라의 배와는 여러모로 다른 듯했다.

이 물 위의 작은 왕국에서 감히 그녀를 거스를 수 있는 자는 없어 보였다. 저기 저 성질머리 나빠 보이는 리자드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라히무스!”

소녀는 반가운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사내는 두꺼운 팔뚝을 훤히 드러낸 채로 갑판 위에 서 있었다. 널따란 어깨가 돌아가면서 바다 쪽을 노려보던 매서운 시선도 이쪽을 향했다. 나니아를 발견한 라히무스의 얼굴에서, 날카로운 콧날과 턱선이 빚어낸 뾰족한 분위기 따위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사내는 낮지만 밝은 목소리로 화답했다.

“나냐.”

대답 대신 불러 준 그녀의 이름에서, 그 진득한 음성에서, 뜻밖의 만남으로 인한 설렘이 가득 느껴졌다. 남자의 예리한 인상은 오로지 나니아에 한해서만 무디어졌다. 그 사실이 나니아의 마음을 지끈지끈하게 했다. 그녀는 갑판 위를 쪼르르 달려와 망설임 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 사내는 그런 나니아의 어깨를 한쪽 팔로 마주 안으며, 반대쪽 손바닥에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올려놓았다.

“머리 묶었네.”

단면이 동그란 물건을 붙잡듯 앞발을 둥글게 웅크리고선 옷감을 만져 보는 사람처럼 천천히 부드럽게 훑어 내렸다. 까맣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끝에서 가지런히 흩어졌다.

요즈음 그녀는 매일같이 옷 갈아입히기를 당하는 인형처럼 새로운 꾸밈새로 등장하기 일쑤였다. 오늘은 긴 머리카락을 하늘 높이 올려 묶고 있었다. 고개를 조금만 돌려도 꼬리처럼 찰랑거리는 움직임이 그야말로 말총이라 불릴 만했다.

“으응.”

소녀는 수줍게 웃었다. 익숙하지 않은 머리 모양을 어색해하면서 말했다.

“거울을 봤더니, 챠링고 생각이 나더라구요.”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서 정수리에 가깝게 높이 올려 묶는 방식은, 호방한 리자드 암컷들이 가장 선호하는 헤어스타일이었다. 간혹 멋 내기를 좋아하여 머리카락을 기르는 젊은 사내들에게도 해당하는 유행이었다. 그래서 라히무스는 포니테일이 귀엽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너는 이렇게 묶으니까 귀엽다.”

사내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걷어 올린 자리. 반듯한 목선과 동그란 얼굴이 훤히 드러나서 깨물어 주고 싶게 깜찍한 느낌이 있었다. 너무나도 귀여운 나머지 머리카락을 잡아당겨서 못살게 굴고 싶은 기분도 들었다. 그 못된 욕망을 차마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고, 하염없이 구경하기만 했다.

“예쁘다. 너무.”

사내가 말했다. 그 기습적인 칭찬엔 의식한 듯한 아부의 기색은 없고, 오로지 순수한 경탄만이 가득했다.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은 특히 더했다.

“시원해서 좋아요….”

소녀는 열 오른 두 뺨을 세게 문지르며 대꾸했다. 부끄러운 기색을 애써 감추려는 듯 골을 내기도 했다.

“그런데 라히무스는 왜 이렇게 헐벗고 있어요?”

“내가?”

“아랫도리만 잘 챙겨 입으면 다예요? 위에는 거의 벗은 거나 다름없잖아요.”

라히무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서 자신의 착의를 살폈다. 애인의 꾸지람에 크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옷차림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던 것이 사실이다. 날이 더운 곳으로 이동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허리가 드러날 듯 말 듯 아슬아슬한 기장의 민소매. 가슴은 딱 달라붙으면서도 암홀이 깊게 파여 있었다.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팔을 들어 올렸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손목을 붙잡고 팔을 들어 올리게 했다. 소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듣는 귀가 있는지 두리번거리더니 이걸 어쩌면 좋으냐는 듯 새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이렇게 하면 겨드랑이가 다 보이잖아…!”

소녀는 널따란 소매 사이로 부각 된 전거근과 흉부를 지적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안절부절못하는 나니아와 다르게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무방비한 몸가짐만큼 멀건 낯짝도 어리숙해 보였다. 꼭 깃털을 잘라 주려는 주인에게 한쪽 날개를 맡겨 놓은 관상조처럼.

“이상해?”

잘 모르겠다는 듯, 남자가 물었다. 덥고 건조한 그의 고향에서는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차림새였다. 하지만 나니아는 아무리 더워도 겨드랑이를 드러내는 법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그녀 눈에는 무척 남사스러워 보였다. 무엇보다도 다른 암컷들이 그의 굴곡진 몸 이곳저곳을 훑어보며 평가하는 게 싫었다.

나니아가 울상을 하고선 말했다.

“이렇게 입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자꾸 나쁜 말 하잖아.”

“나쁜 말?”

“헤퍼 보인다구, 걸레 같다는 말을 자꾸 듣잖아….”

“걸….”

“나 그거 진짜 싫어.”

사내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탄식을 흘렸다. 들어 올린 팔이 그대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게 꼭 옷 때문은 아닐걸…?”

이제는 더 깎여 나갈 자격지심도 없는지, 남자가 둔한 표정으로 태연자약하게 대꾸했다.

심각하게 받아들여 주지 않는 그가 야속했다. 나니아는 미안한 마음도 잊고 원망 가득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남자의 가슴을 콩콩 내리치며 분풀이를 해 댔다.

“몰라, 이 바보야!”

남자는 왜 얻어맞아야 하는지 영문을 몰라서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욕먹는 건 난데, 왜 자기가 속상해.”

사내는 줄곧 그런 느낌으로 가늠되어 왔다. 하도 들었더니 이젠 익숙했다. 무엇보다 그러한 평판을 가장 신경 쓰게 만드는 원인은 나니아였는데, 그녀가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여 주면서부터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딴 여자들이 라히무스를 그런 눈으로 보는 게 싫어. 이렇게 다 내놓고 다니니까, 그렇고 그런 눈으로 보잖아….”

남자는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음란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아는 당사자여서 안달이 났다.

“아무 때나 야해 보이지 말아. 내가 볼 때만, 내 앞에서만 그랬음 좋겠어….”

소녀는 달래 주기를 바라는 아이처럼 막무가내로 투정을 부렸다. 말려 올라가려는 윗옷의 끄트머리를 자꾸만 아래로 잡아당겼다. 사내는 제 옷자락을 쥐고 있는 나니아를 내려다보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지금 나 단속하는 거야?”

나니아가 뜨끔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남자가 재차 물었다.

“누가 내 맨살 보는 게 싫어?”

나직한 목소리에서 은근한 기대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치기 어린 독점욕을 눈치챈 것이었다. 그 욕망이 라히무스는 기꺼웠다. 그런가 하면 나니아는 자신의 두루뭉술한 욕심을 직시하고선 부끄러워졌다.

‘단속이라니….’

여행을 떠나기 전 남편들에게 정조대를 채우고 왔다던 어느 리자드의 자랑이 떠올라서 얼굴이 발개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속박하고 싶어지는 이 마음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니아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무력한 몸짓으로 끄덕였다.

그러자 라히무스가 그녀의 이름을 한숨처럼 뱉었다.

“아, 나냐….”

이미 잔뜩 말랑말랑해져 있던 얼굴이 한 차례 더 녹아내렸다. 남자는 행복해하면서 그녀의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찰랑거리는 말총머리를 어루만지며 빙글빙글 손끝에 꼬아 보기도 했다. 리자드는 단정치 못한 행실로 그녀를 걱정하게 만든 것을 반성하며 뉘우쳤다. 내일부터 다시 긴 옷으로 갖추어 입겠노라 약속하고는 나니아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내가 잘못했어…. 자기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 속상해하지 마. 응?”

이제는 그녀의 토라진 얼굴도 귀엽기만 했다. 종잡을 수 없는 점은 여전했으나, 전처럼 두렵지는 않았다. 이유를 듣고 나서 보면 도리어 사랑스러울 때가 더 많았다.

한바탕 시답잖고 일방적인 언쟁 뒤에, 두 사람은 바다가 보이는 갑판에 붙어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니아는 이제 대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는데 라히무스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사실은 남자의 노출도를 지적하며 가리라고 떼를 쓰던 그녀야말로 오늘따라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허연 종아리가 휑하니 드러나 보이는 그 원피스는 인형 놀이를 좋아하는 어느 리자드가 오늘도 어김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골라 입혀 놓은 옷이었다. 라히무스 또한 그 옷차림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보고 싶은 마음과 남한텐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하다 구태여 티를 내지 않는 쪽으로 결론 내렸다.

소녀는 치마 위에 올려놓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예쁘기만 한 줄 알았는데 제법 실용성이 높은 치마였다. 속치마와 겉치마 사이에 넉넉한 주머니를 감추고 있었다. 소녀는 그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서 엉성하게 포장된 쿠기를 꺼내 라히무스 앞에 내밀었다.

남자는 그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여자가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어디서 자꾸만 주전부리를 챙겨오는 그녀가 귀여웠다. 달콤한 간식 그 자체보다도 자신을 챙겨 주고 싶어 하는 정성이 갸륵했다. 자리에 주저앉은 리자드의 꼬리가 가만있지를 못하고 기쁜 듯이 흔들렸다. 이대로 나무 바닥을 청소할 기세였다.

나니아는 잼 쿠키 한 개를 손에 들고 말했다.

“자. 아아, 해.”

꼭 소꿉장난을 치는 것 같아서 리자드는 가슴이 벌렁거렸다.

남자가 입을 벌리자 나니아는 그 사이로 쿠키를 쏙 넣어 주었다. 먹이를 받아먹는 아기 새 같아 귀여웠다.

“맛있어요, 우리 아가 도마뱀?”

다 큰 남자가 단 음식을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것이 무척 귀여워서 쓰다듬어 주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사내는 그 부드러운 손끝에서 고롱고롱 울었다.

으응. 남자는 입을 다문 채로 목을 울려 대답했다. 게게 풀어진 얼굴이 순종적이었다.

‘이렇게 귀여운데.’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뺨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가끔 저질스럽고 가끔 폭력적이지만, 그래도 천성은 순하고 다정한 사내라고 믿었다.

‘용병 일은 꼭 관두게 해야지. 술지를 써서 돈을 벌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어쩌면 내가 먹여 살릴 수도 있을 거야. 그러니까 괜찮아….’

소녀는 야무진 꿈을 꿨다.

쿠키가 가루만 남아서 흩날릴 때쯤, 둥글게 말려서 바닥을 탁탁 두드리는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나니아는 꼬리 끝을 붙잡아서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가장 얇은 부분인데도 꽤 두껍고 묵직했다.

“어떤 아가씨들은 여기다 잔뜩 치장하던데. 고리도 끼우고, 보석도 두르고.”

하녀는 그동안 이곳에서 수없이 다양한 꼬리들을 만나 보았다. 꼬리 꾸미기에 사활을 다하는 리자드가 있는가 하면 적당히 벌거벗지 않을 정도의 장식만 해 두는 사람들도 있었다. 벨트를 채우거나 뜨개 그물을 씌우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끈으로 휘감아 놓았다. 그 방식이 참으로 천차만별이었다. 꾸밈이 간소한 사람은 있어도 라히무스처럼 아예 아무런 단장도 하지 않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거추장스러운 장신구들은 잠들기 직전에나 빼놓는 듯했다. 남자가 훌렁훌렁 벗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이유인지도 몰랐다. 아무래도 귀찮고 번거로운 모양이었다.

나니아는 자아가 있는 것처럼 꿈틀대는 꼬리 끝을 어루만지며 생각했다.

‘여기다 리본을 달면 무척 귀여울 거야.’

여자는 자기 허리에 묶여 있는 끈을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사내에게 리본은 좀 그렇겠지 싶어서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리자드는 손에 묻은 가루를 툭툭 털어 냈다. 그 큼직한 손이 눈에 들어왔다. 나니아는 괜스레 그의 손에 깍지를 껴 보았다. 길고 두꺼운 손가락은 마디가 불거져서 투박하고도 야성적인 느낌을 주었다. 자신의 것과는 굵기나 길이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아서 그가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종족, 다른 성별이라는 실감이 들었다. 그녀는 마치 생경한 물건을 잡아 보듯 라히무스의 손가락 하나를 쥐어 보았다. 그러다 문득 스스로를 위로해 보려던 지난밤을 떠올렸다. 나니아 자신의 손가락으로는 도통 만족할 수가 없었더랬다.

‘…딱 이 정도로만 굵어도 좋은데.’

이 길쭉한 손가락이 푹푹 찔러 주던 감각이 떠올라서 얼굴은 물론 사타구니도 화끈화끈해졌다. 어쩔 땐 성기보다도 더 기분 좋을 때가 있을 정도로, 라히무스의 손가락은 두껍게 들어찼다. 손가락이 빠르게 오고 갈 때는 너무나도 짜릿했다. 그 순간이 떠올라서 침이 꿀꺽 넘어가고 다리 사이가 지끈지끈해졌다.

“무슨 생각해?”

나니아가 말없이 손가락만 만지작거리자 라히무스는 의아해했다. 남몰래 음탕한 생각에 빠져드는 그녀를 그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왜….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

리자드는 저를 조사하듯 더듬던 나니아의 손목을 홱 낚아채서 뒤집어 보았다. 돌발 질문만큼이나 기습적인 움직임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기 위해 고개를 기울였다.

“사람을 만지작거리면서 그런 표정을 지으면…. 오해하기 딱 좋잖아.”

목소리는 낮고 은밀해졌다. 그 속에 의심과 기대가 공존했다. 붉고 뜨거운 눈빛은 습격과도 같았다. 벗어나기 위해서 고개를 돌렸다.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론 자그마한 얼굴을 가리면서.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네 손가락이 가랑이 사이를 쑤셔 주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따위는.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라히무스의 얼굴이 보였다. 반항적인 인상마저 근사한 사내였다. 비딱한 눈매가 가늘어져선 살짝 흥분한 기세로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소녀는 작게 우물거리며 말했다.

“…키스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노라 부정해 봤자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이미 들통나 버린 음심을 작고 귀엽게나마 포장했다. 사내는 그것이 얼마나 축소된 거짓말인 줄은 모르고, 뜨거운 한숨과 함께 달려들었다.

그와의 입맞춤은 언제나 폭발적이었다. 부딪힌 입술 사이로 질척한 숨소리가 새어 나갔다. 라히무스는 그녀를 터질 것처럼 끌어안고 막무가내로 입술을 빨아 댔다. 한마디 말이 오가기 힘들 정도로 다급했다. 몸이 엉겨 붙으면서 그 사이로 열이 일었다.

‘크고 따듯해….’

소녀는 그에게 맞추어 입술을 움직이다 말고 밭은 숨을 흘렸다. 사내는 움직이지 않는 그녀의 입술을 쪼아 댔다. 끊임없이 빨고 놓아주기를 반복했다. 어느샌가 그의 무릎 위에 앉아 버린 나니아는 맞붙은 하반신을 비비고 싶어 애가 닳았다.

“라히무스, 나….”

달뜬 목소리가 그를 부르자 리자드의 몽롱해진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나 여기, 너무….”

소녀는 자신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사내의 손을 붙잡았다. 남자는 순순히 따라 주었다. 이끌린 앞발이 향한 곳은 그녀의 다리 사이였다. 그녀는 매우 담대하게도, 남자가 그곳을 만지게 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간지러운 속살거림이 라히무스의 귀를 어지럽혔다.

“사실 나, 너무 하고 싶은데,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사내를 올려다보는 보랏빛 눈동자가 애욕으로 젖어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간곡한지 알아들은 그는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다. 벅찬 호흡을 따라 목소리도 낮게 잠기었다. 마치 목구멍이 좁아져 버린 것처럼.

“하, 씨발…. 보지가 근질근질해?”

저속한 육담에 얼굴이 화끈화끈해졌다. 허리를 추슬러 안는 커다란 두 팔에 전과 다른 감흥의 힘이 실렸다. 소녀는 차마 눈을 마주하진 못하고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정확히 전달되어 버린 욕망이 부끄러웠다.

“또 내 생각하면서 자위라도 했나? 응?”

라히무스가 물었다. 역시나 그런 적 없다고 해도 믿어 주지 않을 눈빛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단념 같은 긍정의 표현으로 입술만 꾹 깨물었다.

“하, 젠장. 그랬구나…. 너도 나처럼….”

사내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곧 울 것 같은 나니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날이 갈수록 솔직하고 음탕해져 가고 있었다. 그 변화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만들어 낸 결과란 생각에 온몸 구석구석 짜릿함이 치밀었다.

라히무스는 당장에 그녀를 들쳐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움직이는 커다란 보폭이 갑판을 울렸다.

어딘가로 향해 가던 그의 발길은 변소 한 칸 정도 있음직한 비좁은 공간에 다다랐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들어간 그곳은 일종의 통로였다. 갑판 사이를 오르내리는 사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쾅-.

쾅-.

살짝 벌어져 있던 문틈이 거센 발길질에 뒤틀렸다. 합이 어긋나 버린 출입구는 밖에서 당기는 방법으론 열 수 없게 되어 버려선 망가진 것이나 다름없어졌다.

“…기다려.”

사내가 나니아를 내려놓고 다급히 당부했다. 말을 던져 놓고는 곧바로 아래층을 향했다. 그 신속한 움직임은 사다리를 탄다기보다는 붙잡고 뛰어내리는 것에 가까워 보였다. 뒤이어 다급히 자물쇠를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나니아는 무릎을 꿇고 그 아래를 살펴보았다. 임무를 치르는 사람처럼 엄중한 그의 정수리가 보였다. 리자드는 일전에 한번 봐 두기라도 한 것처럼 공간의 구조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자잘한 사다리를 한걸음에 몇 칸씩, 다시 또 위쪽으로 올라오는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눈높이가 맞지 않아 우물쭈물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니아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육중한 몸집만큼 음험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도 안 와, 여긴.”

구석진 위치에 그저 상하를 연결하는 것만이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설비되어 있는 이 사다리 방은, 긴급 상황 발생 시에나 사용되는 비상 통로였다. 상시에는 멀쩡한 계단을 두고 이런 경로를 택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까 라히무스가 이곳을 찾아 들어온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인적이 드문 장소를 파악해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 목적이, 나니아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정말이지 발칙하기 짝이 없는 남자였다.

사내는 한 발 높아지는 문턱 위에 그녀를 올려 두고 게걸스럽게 입술을 부딪쳐 왔다. 뽀뽀 정도는 남들 눈을 피해서 조금씩 주고받았지만, 이렇게 온 입술을 핥아 오는 듯한 입맞춤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맞닿은 다리 사이가 비벼지면서 서로에 대한 기대감으로 파들파들 떨렸다.

“아, 라히무스….”

소녀는 고개를 비틀어 그의 이름을 신음했다. 남자가 커다란 몸으로 육박해 올 때면 온몸에 피가 돌았다. 정작 머리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하기 힘들 정도로 아찔해졌지만. 라히무스의 팔이 가슴을 스치고 배를 지나 음부로 향했다. 단단한 팔뚝이 주는 중량감이 그녀를 압박해 왔다. 사내가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부터 내가 이런 짓 해 주길 바란 거지? 그래서 이런 옷 입고 온 거잖아.”

“아, 아니야. 이건 그냥….”

“씨발, 아까부터 여길 이렇게 만지고 싶었어….”

짧은 치마는 그 속을 탐하기가 무척 쉬웠다. 커다란 앞발이 속치마까지 모두 걷어 올리고 그 안의 은밀한 부위를 더듬었다. 사내는 그녀의 다리 밑으로 흘러내렸다. 허벅지 뒤로 돌아간 두 손이 엉덩이 밑의 도톰한 살을 더듬었다. 팔랑거리는 치마폭 밑에 감춰져 있던 두 다리가 그의 눈앞에 선명히 드러났다.

남자가 혼란스러워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내 눈앞에서 걸어 다니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이렇게…. 젠장, 미칠 것 같은지.”

엉덩이를 주물러 대던 손이 천천히 그 아래를 향했다. 허벅지, 무릎, 종아리를 지나 발목으로 연결되는 그녀의 다리 윤곽을 천천히 음미하듯 쓸어내렸다. 통통한 허벅지 살이 주물러지는 느낌이나, 터무니없이 작은 무릎뼈와 귀여운 오금이 한 손에 잡히는 것이 좋았다.

“젠장, 나한테 뭘 가르쳐 놓은 거야? 나는 이제 네 다리만 봐도 발정이 나서….”

남자의 입술이 허벅지 안쪽을 훑었다. 날카로운 콧대가 그곳에 문질러지는 감각이 선명했다. 나니아는 허전한 상체를 웅크리며 손끝을 씹었다. 사나운 육식 동물의 손아귀에 위태로운 하반신을 완전히 빼앗긴 채로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도 라히무스의 길쭉하게 잘 빠진 종아리나 두꺼운 허벅지를 보면 심장이 떨리곤 했기 때문이다.

“나냐 여기 빨아 줘?”

사내가 그녀의 예민한 부위를 짚고선 다소 장난스러운 리듬으로 흔들면서 물었다.

“아, 안 돼요….”

“왜…. 근질근질하다며.”

“치, 침실도 아닌데….”

“내가 풀어 줄게.”

사내는 그녀의 거절 같지 않은 거절은 무시한 채, 속옷 끈에 손을 올렸다.

“아, 시, 싫어요. 이런 곳에선….”

허리를 뒤트는 움직임을 굳건한 팔 힘이 가로막았다. 믿음직스러운 척, 제안은 상스러웠다.

“나 보지 잘 빠는 거 알잖아….”

“아, 안….”

도저히 잊기 힘든 그 감각이 떠올랐다. 사내의 어깨를 짚은 손가락이 기대감과 두려움으로 발발 떨렸다. 라히무스는 기어코 그녀의 속옷을 끌어 내렸다. 완전히 벗겨 버릴까 하다가 무릎까지만 내려 두었다. 결박당한 듯이 묶여 있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씨발, 이미 젖었네….”

사내는 그녀가 뱉어 낸 끈적한 애액을 확인하곤 흥분을 금치 못했다. 그러고는 다시 엉덩이가 끝나는 지점을 음흉하게 어루만졌다.

“이리 와.”

남자가 음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가 붙잡은 곳은 몸의 중심이었다. 당기면 당기는 대로 끌려갔다. 잠시 중심을 잃고 휘청이던 소녀는 결국엔 그가 사타구니 사이에 주둥이를 처박도록 허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

아랫도리에서 느껴지는 습한 숨결에 덩달아 한숨이 터졌다. 말려 올라간 치마가 그의 코를 가려서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혓바닥이 돌기를 굴리는 느낌만큼은 선연했다. 온몸에 털이 삐죽 섰다. 나니아는 입을 틀어막고 신음했다. 은밀하고 어둑하다지만 그래도 엄연히 공공장소였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배에서, 이렇게 훤한 대낮에, 이런 추행을 저질러도 괜찮은 걸까.

‘삽입만 안 하면…. 아무 일 없었던 척할 수 있지 않을까.’

나니아는 허리를 움찔움찔 떨면서도 혹시나 하는 상황을 수습할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라히무스의 혀가 자신의 절반을 가를 듯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애액인지 타액인지 모를 액체들로 흥건해진 살갗이 빨아 당겨지는 소리도 적나라했다. 남자는 잠시 숨을 고르듯 입술을 떼어 내고선 조금 전까지 정신없이 빨아 대던 그곳으로 신중히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몇 번 어르듯이 떨어 대더니, 밭은 호흡을 그 근처에 흘리며 진입을 시도했다.

소녀는 라히무스의 어깨에 올린 손으로 주먹을 꼬옥 쥐었다. 사내의 두꺼운 손가락이 구멍을 파고들었다. 그 빠듯한 감각이 또렷하게 느껴져서 온몸이 예민해졌다. 질 내벽은 그가 반가운 듯이 수축했다. 그 빨아 당기는 감각을 라히무스도 느꼈다.

“좋아? 응? 이거야?”

남자가 감상을 묻자, 나니아는 벌벌 떨었다. 빠르게 헤집어 주었으면 했다. 거칠게 쑤셔 주었으면 했다.

“아, 조, 좋아….”

좋다는 말에 사내도 크게 흥분하는 것이 느껴졌다. 바지 속의 양물이 남모르게 끄덕이고 있었다.

“씨발…. 너 왜 이렇게 밝혀.”

“아, 너무, 조, 좋아….”

“좋아? 응?”

“아, 조… 좋아….”

“밤마다 이 짓이 하고 싶었어? 응? 그래서 혼자 쑤셨어?”

“아, 응, 으….”

길고 우락부락한 손가락의 마디마디가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 탐탁한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갈급해진 손톱 끝이 그의 어깨를 찌르듯이 파고들었다. 사내는 그 통증마저도 짜릿했다.

“씨발, 이렇게 좋아하는데….”

얘가 이렇게 하고 싶어 하는데, 섹스를 할 수 없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억울해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사내는 기다란 손가락을 뿌리 끝까지 집어넣으며 얕게 떨어 주었다. 휘청이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얕고 밭게 몰아세웠다. 그래서인지 소녀의 절정은 너무 빠르게 찾아왔다.

“으, 나, 나 싸, 쌀 것 같아요, 시, 아…!”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사내는 끊임없이 손가락을 움직이며 혀로는 클리토리스를 핥아 주었다. 나니아는 너무 느낀 나머지 울음이 났다.

“아, 그, 그만, 금, 그만해, 제발!”

붙잡힌 머리카락이 잡아 뜯길 즘에야 남자는 손가락을 빼내고 입술을 떼어 냈다. 그리고 쾌락의 정점에 던져진 나니아의 모습을 감상했다. 눈물 젖은 얼굴과 질척해진 가랑이 사이 모두 장관이었다. 어느 곳 하나를 최고로 꼽기 어려웠다.

라히무스 자신도 곧추선 성기로 손을 가져갔다. 문지르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욕구 불만으로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 * *

나니아는 점심때가 한참 지나서야 방으로 돌아왔다. 수컷 리자드의 음탕한 페로몬을 흠뻑 뒤집어쓴 채였다. 저에게서 어떤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지 당사자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오로지 같은 리자드만이 맡을 수 있었다.

“나니아.”

선상 복도에서 나니아를 마주친 샬롯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 세웠다. 샬롯 또한 나니아에게서 풍겨 오는 수컷 리자드의 페로몬 따위는 감지해 낼 수 없었다. 다만 걷는 것도 뛰는 것도 아닌 종종걸음에서 어딘지 미심쩍은 느낌을 받았다. 여자는 몹시도 부산해 보였다.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요?”

샬롯이 물었다. 나니아는 이름이 불리었을 때부터 화들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더니 이제는 황망한 몸짓으로 뒷걸음질 쳤다.

“아, 아무 데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나 마나 한 부정에 샬롯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아무것도 아니긴.’

긴장해서 바들거리는 나니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턱 끝으로 흐르는 땀과 상기된 얼굴이 이 상황에서 얼마나 달아나고 싶은지를 보여 주었다.

“어디 있다가 온 거예요?”

“갑판 밖에서요. 바람 쐬다가….”

거짓말이 서툰 여자였다. 무언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수상한 동태와 불안한 눈빛이 의심스러웠다. 무엇을 그리 잘못했을까. 가령 도둑질을 했다거나.

샬롯은 불길한 기분을 느끼곤 나니아가 달려온 방향을 확인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커다란 철문이 끼이익 닫히려는 소리가 들렸다. 저 먼 복도 끝에서 티에트의 방으로 향하는 문이었다.

쾅-.

철문은 굉음을 남기며 제 몸을 부술 듯이 닫혔다.

“…손에 뭘 들고 있죠?”

샬롯이 싸늘해진 눈빛으로 나니아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항복하는 자세로 두 손을 어깨높이에 들어 올렸다.

“아무것도 없어요.”

시치미를 뗀다고 생각하는지 샬롯의 눈살이 조금 더 찌푸려졌다. 쉬이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 치마, 속주머니가 달려 있죠?”

이런저런 술식들을 다감하게 가르쳐주던 샬롯은 이제 없었다. 그녀는 냉랭한 언성으로 추궁하더니 치마를 들춰 볼 기세로 다가왔다.

“치마요? 아, 안 돼요!”

나니아는 질겁하면서 물러났다. 지금 당장 몸을 피하고 싶었겠지만 그래 봤자 더욱 수상쩍어질 뿐이었다. 고작 옷을 만지는 데 저렇게까지 경악할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심지어 자기 옷도 아니지 않은가. 샬롯은 강제로라도 뒤져 볼 요량으로 나니아의 주머니에 손을 뻗쳤다.

“아,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그렇게 결백하면 보여 줘요. 꺼내 봐요, 치마 주머니.”

나니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샬롯의 손을 피했다. 뒤돌아 줄행랑을 치려던 그때, 마침 사람을 넘어뜨리기 딱 좋은 높이의 턱을 만났다. 부주의한 발목이 꺾이고 한쪽 다리가 균형을 잃었다. 휘청이던 몸은 아차 싶은 사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자빠졌다.

벌러덩 넘어진 두 다리가 활짝 벌어졌다. 짧은 치맛단이 무릎 위로 착지하면서 허벅지 아래로까지 스르륵 걷혀 올라갔다. 그 사이로 보이면 안 될 것이 보였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종류의 위화감이었다.

“나니아, 당신 왜….”

그녀가 치마 아래로 숨기고 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것도 없었다.

사람이 너무 많이 놀라면 말도 나오질 않는데, 샬롯이 딱 그랬다. 황당해 보이던 낯빛은 곧 경멸의 감정으로 물들어 갔다. 나니아는 무어라 변명할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서 도망쳤다. 그대로 바닷물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일단은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이불을 쥐어뜯으며 라히무스를 욕했다.

‘그 추잡한 도마뱀…!’

허전한 아랫도리를 추스를 힘조차 없었다. 이렇게 축축해진 속옷은 입으나 마나 하지 않느냐며 라히무스가 빼앗아 간 후였다. 그래서였다. 아랫도리가 흥건해진 것도, 그 꼴을 남에게 보이고 만 것도. 전부 다 그 난잡한 도마뱀 때문이었다.

* * *

그 후로 나니아는 한참 동안 자기 방에 처박혀 있었다. 창피한 마음에 한 발자국도 나가려 하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리자드 영애들에 의하여 강제로 끌려 나왔다. 흥청망청한 술자리를 빛내 줄 안줏감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이 필요한 것은 파키케팔로를 유인해 낼 미끼였다.

“어쩐지! 네가 라히무스가 아니라 나를 찾는다고 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니깐.”

“저는 파코가 여기 있는 줄도 몰랐어요.”

파키케팔로와 나니아가 서로의 귓가에 대고 쑥덕거렸다. 그 흉을 보는 듯한 밀담은 더 크게 웃고 떠드는 리자드 암컷들의 목소리에 묻혔다.

그날 밤은 암컷들이 참다 참다 기분이라도 내야겠다면서 아껴 두었던 용딸기술의 마개를 땄다. 제대로 폭음을 할 분위기였다. 술내를 맡은 리자드 청년의 붉은 눈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술잔 밑에 깔린 저의는 차치하고서라도 달콤한 용딸기술을 거절할 수 있는 리자드는 많지 않았다.

“술을 좀 마시나 본데.”

“좋아, 좋아. 잘 마시면 좋지.”

“대작이 가능한 수컷이라니. 훌륭하군.”

모든 리자드 암컷들이 파키케팔로의 근처로 자리를 옮겼다. 여자들에 둘러싸이면서 어느 틈엔가 멀어져 버린 파키케팔로가 나니아는 여러모로 걱정되었다.

‘파코, 괜찮으려나…?’

그녀들이 순수한 의도로 녀석을 불러낸 것 같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티에트가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은 곧 무색해지고 말았는데, 헤벌쭉해진 녀석이 따라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기 시작한 것이었다. 언제 투덜거렸었냐는 듯 행복해 보였다.

“티에트 님께는 뭐라고 말할 셈이야?”

“아직 발정기도 안 왔다면서요?”

“아이, 그럼 아직 수컷이라고 볼 수 없지.”

“내 생각도 바로 그거야.”

암컷들은 궁색한 핑곗거리를 미리 주고받으며 입을 맞췄다. 티에트의 책망과 호통에 맞설 변명이었다.

“나는 수컷인데?!”

슬슬 술기운이 오르기 시작한 파코 녀석이 나는 사내가 맞다며 발끈하는 것을, 넉살 좋은 한 아가씨가 다독였다.

“그래, 그래. 젊은 수컷이 따라 주는 술맛이 어땠더라? 기억이 안 나.”

왼쪽에선 술을 따라 보라며 잔을 내밀고, 오른쪽에서는 파키케팔로의 겨드랑이 밑으로 허리를 더듬어 왔다. 여자들이 어떤 의도에서 녀석을 불러들였는지 그 속셈이 너무도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주정뱅이들은 웃고 떠들고 마셨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 농담에 까르륵거리며 자지러지기도 했다. 리자드 청년도 그 사이에서 기분 좋은 듯이 웃고 있었다. 나니아는 갈등했다. 저 철없는 리자드를 이쯤에서 빼내어 라히무스에게 돌려보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둬야 할지.

“역시 방긋방긋 웃어 주는 수컷 한 마리 옆에 놓고 마시니까 술맛이 확 사네.”

“암요, 무릇 술자리가 이래야지요.”

귀족 아가씨들에게 낯선 리자드 청년은 커다란 기쁨이 되었다. 젊고 늘씬한 데다 싹싹하기까지 한 리자드 청년은, 애교도 많고 말도 많아서 술자리 분위기를 참 잘 띄웠다. 괜히 챠링고와 벨로즈가 녀석과 자주 술잔을 기울이는 게 아니었다.

“요렇게 예쁘장하게 생겼는데, 애인도 없다며.”

“어때, 내 다섯 번째 첩실 자리는?”

“다섯 번째는 너무 심했다, 얘.”

오고 가는 즉흥적인 혼담은 다분히 장난스러웠다. 제대로 된 집안의 자식을 상대로는 이런 식의 농지거리를 즐길 수 없었다. 적당히 끼고 놀기엔 파코처럼 신분이 천한 빈 둥지 출신 남자가 아주 제격이었다.

어느새 그들이 들이켠 술의 양이 한 궤짝을 훌쩍 넘어갈 때쯤. 한 잔 두 잔 얻어 마시던 나니아의 시야도 몽롱하게 흐릿해져 갔다. 이제는 그녀도 다른 누구를 챙길 여력이 없었다.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술에서 깰 겸 밤바람을 맞으러 문을 열고 나왔다. 방 안은 그럭저럭 밝은데, 방 밖은 새카맣게 어두웠다. 가느다란 달빛이 눈이 닿는 곳곳을 간신히 푸르스름하게 밝히고 있었다. 만취한 소녀는 벽을 짚고 엉금엉금 기다시피 걸어갔다. 등 뒤로 리자드 아가씨들의 왁자지껄한 함성이 들렸다. 붙잡히기 전에 방문을 닫아 버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들 파키케팔로에게 푹 빠져 있어서 자신이 사라진 것쯤은 모를 것 같았다. 그에겐 미안하지만 다행인 일이었다.

부어라 마셔라 즐기기 바쁜 소리가 한 겹 멀어지고, 그 대신 다른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주정뱅이들 틈바구니에서는 미처 들리지 않던 아주 작은 소음이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여자의 목소리. 그것은 누군가의 비명이며 고함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나니아는 술에서 확 깨는 듯한 기분마저 느꼈다. 작은 음량은 점점 더 커다래졌다. 무언가 던져지고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웅얼웅얼 그 내용까지는 알 수 없는 말소리에서 격렬한 분노가 느껴졌다. 분명 혼자서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여자는 누군가와 싸우고 있었다.

나니아는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서 더듬더듬 앞으로 나아갔다. 낮에 발이 걸려 넘어졌던 그 위치에서 또다시 우당탕 넘어지기도 했다. 마침내 당도한 곳은 활짝 열려 있는 철문 너머의 복도. 티에트의 방으로 연결되는 통로였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까지는 제대로 분간할 수 없었지만, 고성은 그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티에트 님?”

나니아는 때때로 공주의 방에서 들려오던 수상쩍은 신음과 지금의 이 소란을 연결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저렇게 왁자지껄한 술판이 벌어졌는데 나타나 보지 않으시는 점이 이상했어.’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지 못한 것이었다.

또다시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그녀의 방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는 자는 누굴까. 어쩌면 밤마다 찾아오던 티에트의 밀회 상대일지도 몰랐다. 난폭해진 수컷에게 해코지라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났다.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나니아는 마음이 급해져서 허둥지둥 달려갔다. 다른 고주망태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대신 홀몸으로 티에트의 방문을 열어젖혔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잘한 선택이었다. 티에트 공주의 채신과 위엄이 나니아 한 사람 앞에서만 망가지는 것으로 끝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해 있었다. 촛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 못했다. 화에 못 이겨 내던진 물건들로 바닥이 난장이었다. 나니아의 시선이 방 한복판에 놓인 침대 위를 향했다. 어둠 속에서 티에트가 누군가를 깔아뭉개고 있었고, 깔린 쪽은 덮친 쪽의 뺨을 할퀴고 있었다.

“누구냐!”

인기척을 느낀 티에트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상대방의 정체를 감추듯 이불을 덮어 주었다. 웅크린 손등에 핏줄이 섰다. 공주의 꼬리 끝이 사납게 펄럭였다. 생각 외로 멀쩡한 티에트의 상태에 나니아는 당황했다. 그녀의 경계심 가득한 태도가 소녀를 움츠러들게 했다.

“비, 비명 소리가 들려서….”

나니아는 여기까지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떠듬떠듬 변명했다. 그 순간, 티에트의 밑에 깔려 있던 이불 고치가 맹렬하게 꿈틀거렸다. 그자가 제 얼굴을 가린 이불을 열어젖히며 소리를 질렀다.

“왜 저 계집애 앞에서 저를 숨기시는 거예요?!”

둘 중에 누가 물건을 던진 사람이고 누가 소리를 지른 사람인지,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날카로운 고성. 간드러진 신음. 그 모든 것들이 티에트가 아닌 샬롯의 목소리였다는 사실까지도.

“역시 저 애랑 뭔가 있으신 거죠?”

“아니야, 샬롯!”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손아귀가 다시 한번 티에트를 할퀴었다. 공주는 샬롯의 손목을 저지하며 강하게 부정했다.

“예뻐서 데려온 게 아니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 주어야 믿겠나?”

“거짓말. 공주님은 거짓말쟁이세요!”

“나는 정말 억울하구나! 네가 대체 어쩌다 그런 망상에 빠지게 되었는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공주님이 좋아하는 얼굴이라 하셨잖아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잖아요! 하셨어요! 저와 닮았다고 하셨잖아요!”

“그래, 그딴 헛소리를 지껄인 내 잘못이구나. 내 잘못이다.”

티에트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고 싶은 것처럼 샬롯을 어르고 달랬다. 하지만 저항이 거셌다. 그간 유순해 보이던 인상과 다르게 샬롯의 분노는 매우 폭발적이었다.

“제발, 샬롯. 부탁이다. 진정해.”

나니아는 발이 붙어 떨어지지 않는 사람처럼 그 모든 추태를 다 지켜보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려는 것처럼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이봐, 인간! 네가 무슨 말을 좀 해 봐. 대체 샬롯이 왜 너와 나의 관계를 의심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단 말이다!”

티에트가 간절한 목소리로 구조의 손길을 바랐다. 그사이에도 샬롯은 이불 아래에서 발길질해 대며 공주를 못살게 굴고 있었다. 몸에 물이 묻은 고양이처럼 끊임없이 바르작댔다. 도도하신 빙해의 공주는 어쩔 줄을 몰랐다. 총애하는 유멘타에게 감히 완력을 쓰지 못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야 마는 모습이 참으로 진풍경이었다.

마침내 샬롯이 제풀에 지쳐 몸을 늘어뜨렸을 때가 되어서야 티에트에게도 제대로 된 변명의 기회가 주어졌다. 노예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마음가짐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사이, 공주는 문을 꼼꼼히 걸어 잠그고 의자에 앉았다. 그들 사이에서 나니아는 겸연쩍은 기분으로 앉아 있었다.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아 둔 양손이 쉴 새 없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우선은 설명이 필요했다. 그들이 먼저 나니아에게 해명해야 할 사항이 있었다.

“짐작했겠지만, 보다시피….”

티에트가 큼큼하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홍조 띤 얼굴이 뒷말을 생략했다. 얼음장 같던 공주의 가면이 불그스름하게 녹아내렸다. 발긋한 분위기를 풍기기는 샬롯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이미 단정해진 머리카락을 연신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니까 두 분은…. 단순한 주종 관계가 아니란 말씀이시죠.”

리자드 주인과 인간 노예. 게다가 성별이 같았다. 언뜻 봐도 사랑이 싹트기에 적절한 사이는 아니었다. 자신이 어느 정도로 입조심을 해야 하는지 파악해 두고 싶었던 나니아가 물었다.

“다른 분들도 알고 계시나요?”

“공공연하지는 않지. 아는 자도 있고, 모르는 자가 더 많다.”

“그렇군요….”

얌전히 무릎 위에 올라가 있던 손이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나니아는 불쑥 목소리를 높였다.

“그치만 나한테도 애인이 있다는 걸 알았잖아요, 샬롯!”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그런 오해를 할 수가 있죠?”

작고 동글동글한 인상의 소녀는 훤칠한 체구의 여성들로 가득한 서쪽에서 어느 정도 수요가 있는 타입이었다. 그러니까 샬롯은, 티에트의 이상형에 부합하는 나니아 뷔셀이 자신의 멋진 애인과 그새 눈이라도 맞은 줄 알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기 힘들죠!”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발칵 역정을 내자, 샬롯이 고개를 수그렸다. 유구무언이었다. 티에트가 그런 샬롯의 어깨를 감싸 안고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팔뚝을 문질러 편을 들어 주는 손길이 다정스러웠다.

“챙겨 주는 옷들로 예쁘장하게 차려입고서 내 근처에 얼쩡대니 불안했었을 수밖에.”

“티에트 님, 바보!”

샬롯은 자신이 보는 앞에서 또 대수롭지 않게 다른 여자를 칭찬하는 티에트를 야속해하며 소리를 빽 내질렀다. 공주가 미안하다며 웃었다. 방금 얘기는 일부러 자극한 게 맞았다. 자기 때문에 다른 여자를 견제하는 그녀가 영 싫지만은 않아 보였다.

나니아가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쨌든 저는 동성을 그런 식으로 보지 않아요, 샬롯.”

부디 안심하길 바란다며 이 소동의 마침표를 찍었다. 언젠가 벨로즈에게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떠올라 민망해졌다. 한편으론 슈쉬라에 대한 질투심으로 이성이 마비되었던 스스로의 과거를 돌이켜보게 되었다. 사랑에 빠진 자는 누구나 저렇게 별것도 아닌 일로 꼴사납게 오해하고 추해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앞으로 저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라히무스를 떠올리면 자신이 없어졌다. 지나치게 매력적인 사내는 여자를 불안하게 했다. 나니아 자신은 이미 그를 쥐고 흔들 무기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으면서도.

그러던 중에 문득 페로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인간의 사랑엔 그런 것이 필요 없다지만, 리자드는 아니지 않은가. 느물느물해진 상태의 티에트가 조금 편안해진 소녀는 전보다는 거리낌 없어진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나니아가 물었다.

“그렇다면 티에트 님께서는 수컷 리자드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으시는 건가요?”

“글쎄…. 페로몬이 때론 기분을 묘하게 만드는 게 사실이지만, 어떤 놈들의 것은 아주 역하기도 하지.”

“완전히 무감하신 것은 아니군요.”

“내 신경 체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누구나 그것에 종속되는 것은 아니니까. 사랑에 페로몬은 절대적이지 않아.”

세상엔 그녀와 같은 리자드도 있는 모양이었다. 이성의 페로몬에 맹목적으로 휘둘리지 않는 리자드. 리자드의 사랑에 페로몬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말은 나니아에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따위 것 없이도 내겐 네가 세상 어떤 리자드보다 매력적이야. 너도 그렇지, 샬롯?”

티에트는 샬롯의 귓가에 속삭이며 달콤하게 웃었다. 평소처럼 머리를 말아 묶지 않아 풀어헤친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뜰하게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샬롯은 면목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사과의 말을 꺼냈다.

“죄송해요…. 티에트 님 결혼을 앞두고 제가 너무 예민해져 있었나 봐요.”

여자 둘이 사랑을 한다는 것도 놀라운데, 결혼까지 할 예정이라니.

“두 분이 결혼하세요?”

나니아가 묻자, 샬롯이 대답했다.

“…아뇨.”

무언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난처해진 티에트의 표정과 씁쓸한 샬롯의 얼굴이 많은 것을 말해 주었다.

귀족들 간의 결합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티에트도 사랑 없는 정략결혼을 하게 될 예정이었다. 식을 올리기 전 떠나온 이 여행은 말하자면 진짜 연인과의 비공식적 고별 여행인 셈이었다. 귀족 영애와 인간 노예와의 사랑은 남들 보기에 심히 모양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여행은 티에트를 위한 처녀 파티인 척 위장되었다. 생각보다 판이 커져 버렸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선상엔 많은 인원이 동원되어 관광 유람이 성대하게 치러지는 중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빙해의 땅으로 돌아가는 날이면, 이제 지금 같을 순 없겠죠? 너무 슬퍼요, 티에트 님.”

갑작스레 감정이 북받친 샬롯이 공주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녀는 이 관계의 약자였다. 유멘타는 주인의 총애가 언제까지고 영원할 것이라 확신할 수 없었고, 주인의 사랑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갈 것 같을 때마다 불안했다.

“아니.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너는 그저 너이기만 하면 돼, 샬롯. 모든 것은 내가 알아서 하마.”

“티에트 님….”

꿀이 뚝뚝 떨어지는 애틋한 분위기 속에서 나니아는 훼방꾼이 되어 버린 듯한 기분에 전전긍긍했다. 애써 위로하겠답시고 꺼낸 말이 이랬다.

“그… 그치만 여자들은 첩실도 여럿 들인다면서요? 이런 점에선 잘된 일이네요.”

많게는 넷씩도 거느린다는 배우자의 자리에, 하나쯤은 어여삐 여기는 동성의 유멘타를 앉혀도 될 일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티에트의 결혼 문제에는 조금 더 복잡한 사정이 있었다.

신부 티에트 마지 바리디와 신랑 우쿤 주야 바하리는 각각 빙해왕의 차녀와 해무왕의 장남으로서, 둘의 혼례는 통상혼이 아닌 국혼으로 치러질 예정이었다. 국혼이란 해당 결혼이 국가에 꼭 필요한 결합이었음을 왕이 인정하고 신랑 신부가 서로 평등한 관계를 맺는 방법이었다. 이때 평등한 관계의 첫걸음은 일부일처제를 의미했는데, 보통 두 번째 배우자를 들이는 쪽은 암컷이었기 때문에 이는 여자 쪽을 묶어 두기 위한 족쇄라고 볼 수 있었다.

국혼의 목적과 본질은 국가적 실리와 사명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 엄숙한 맹약의 의미가 점차 변질하여, 지위와 재력을 갖춘 부모가 제 아들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보루로써 활용하게 되었다. 남자 쪽에서 밑지는 장사를 하지 않기 위해 요구하는 일부일처의 합의혼. 말하자면 그런 것이었다.

리자드 사회에서는 슬하에 딸이 없는 경우 변변찮은 아들 대신 총명한 자부를 들여 그녀에게 후계 자리를 넘겨주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티에트의 경우에도 훗날 남편을 대신하여 나라를 물려받는 조건으로 해무왕의 장남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상대 쪽의 국혼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라를 물려받을 며느리가 다른 배우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다음 왕위에 올렸다간 본래의 대가 끊기게 되니, 처음부터 그 싹을 잘라 버리기 위해서라도 이 같은 방책이 꼭 필요했다.

두 사람이 서로 마음이 통했는데 신분과 집안 문제가 갈등의 원인이 되다니. 나니아로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종류의 어려움이었다. 샬롯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자신의 연인은 빈 둥지 출신의 근본 없는 사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라히무스와의 관계에서는 적어도 세간의 이목이나 부모의 반대 따위와는 부딪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샬롯 그녀가 세상 모든 비극을 끌어안은 얼굴로 말했다.

“티에트 님, 이제 단둘이 있고 파요.”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어린애 같았다. 그 말에 티에트가 나니아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했다. 자신들이 저질러 놓은 아수라장 위에서 두 여자는 오직 둘뿐인 것처럼 서로의 몸을 끌어안았다. 방해꾼은 퇴장해 줘야 할 차례였다. 나니아는 몹시 겸연쩍은 기분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자신이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여기까지 왔나 싶어 허망해졌다.

깜깜해진 밤하늘에 별이 보였다 보이지 않기를 두어 차례. 갑자기 몸을 움직여 그런지 가벼운 빈혈 증상을 느꼈다. 소녀는 벽을 짚고서 두 눈을 끔뻑거렸다.

‘뭐야…. 그러니까 여태껏 자기들은 좋을 대로 만나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는 거잖아.’

술판이 벌어진 모습을 공주에게 들키면 어쩌나 싶어 걱정했던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다른 여자들을 한심하게 여겼던 것이 미안해졌고, 심지어는 측은한 동질감마저 느꼈다.

나니아가 다시 어두운 복도 벽을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여 자리로 돌아왔을 때였다. 티에트의 방과는 또 다른 의미로 진창이 되어 있었다. 술병과 술잔이 바닥을 뒹굴고 술독에 빠진 얼간이 몇 명도 빨래처럼 널려 있었다. 누군가는 노래를 부르고, 누군가는 몸을 흔들었다. 정상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나니아를 포함해서였다.

“…라히무스 보고 싶어.”

남자에 대한 그리움이 불쑥 치밀어서, 나니아는 중얼거렸다.

* * *

남자는 나니아가 없는 밤이 지겹고 외로워서 가능하면 그냥 일찍 자 버리는 편이었다. 타인과 어울릴 생각이 없는 것은 라히무스뿐, 침실 밖에서는 아직 잠들지 않은 이들이 담소를 나누거나 술을 마시거나 보드게임을 하고 있었다.

“어이구, 이게 누구야. 그 성질 나빠 보이는 홍염룡의 애인이잖아. 뭐? 그 남자라면 저 안에서 자고 있지. 어구구. 이봐, 아가씨. 제대로 걸을 수는 있는 거야?”

남자의 밤을 깨운 것은 잠든 코도 꿰뚫는 술 냄새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안겨 오는 부드러운 몸이 느껴졌다. 라히무스는 눈을 뜨고 제 품에 안긴 여자를 확인했다.

“…나니아.”

사내는 누가 자신을 찾아왔는지 알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칫 잘못하면 중심을 잃기 쉬운 해먹에서 번쩍 몸을 일으켰다. 남자의 커다란 몸에 기댄 나니아가 그를 믿고 흐느적거렸다.

“왜…. 어떻게 여기까지….”

야심한 시각. 반가움보다도 걱정이 앞서는 시간이었다. 볼을 붙잡아 이쪽을 보게 했더니, 게게 풀린 눈빛으로 웃고 있었다.

“라히무스으.”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그녀에게서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너, 너….”

남자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만취 상태의 나니아를 마주하는 일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때는 함께 대작하기라도 했었다.

“누구한테 뭘 이렇게 받아 마셨어?”

“쪼오끔 마셨어….”

나니아가 헤실거리는 얼굴로 그에게 주둥이를 내밀었다. 술 냄새가 풀풀 풍기는 입술로 남자의 볼을 더듬었다. 술에 취한 여자는 말도 어눌하고 표정도 바보같이 귀여웠다.

“라히무스, 보고 싶어서…. 고민하다가, 왔어….”

주정뱅이의 몸은 물먹은 솜처럼 축축 늘어져서 평소보다 조금 더 무겁고 무방비해졌다. 누가 몰래 업어 가서 예뻐해 주기 딱 좋은 상태였다. 남자는 그런 나니아를 내려다보며 돌아 버리겠다는 듯이 말했다.

“미쳤어? 여기가 어디라고 와.”

타박하는 그의 말이 다소 따가웠다. 이 알코올에 돌아 버린 여자가 저로 착각해서 다른 남자 품에 뛰어들기라도 했더라면 어땠을까 상상하니 꼭지가 돌아서 참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친절…. 친절해, 여기 도마뱀들…. 친절해, 친절한 도마뱀….”

소녀는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정말 용할 만큼 천치처럼 옹알거렸다. 인사불성의 나니아를 품에 안고 안절부절못하던 라히무스는 이내 결심한 듯 그녀의 엉덩이 밑에 팔을 받쳤다.

“걸을 수 있어? …못 걷겠지? 이리 와, 데려다줄 테니까.”

자세를 추슬러 안은 그가 해먹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허리를 완전히 펼 수 없는 그곳에서 남자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빠져나왔다. 선실 밖에서 목을 축이던 선원들이 그를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 애인이 귀엽다느니 너무 어린 것 아니냐느니 하는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완전히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갔다.

“능력이 좋네. 저렇게 어린 여자를. 게다가 다룸이라면서.”

“저래서야 어디 늦장가 들 수 있겄어? 단물만 쪽 빨리고 버려지는 거 아닌가 몰라.”

“나는 저 형씨 이름도 오늘 처음 알았네. 라히무스?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말여.”

라히무스는 다른 수컷들이 뒤에서 어떤 입방아를 찧어 대는 줄은 모르고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품에 안은 나니아에게서 억지스러울 정도의 끈적임을 느꼈다. 그녀는 꼭 거머리처럼 들러붙어선 왱알왱알 뜬구름 잡는 소리를 지껄여 댔다.

“파코도 왔어, 라히무스도, 돼…. 티에트 님이랑, 샬롯이랑, 자니까…. 나도 라히무스랑 자….”

“뭐라는 거야.”

“나도 라히무스랑 교미할래…. 라히무스 내 방 가자….”

“하, 나 씨발….”

흐리멍덩한 혀끝이 이젠 아예 그의 이름을 라이뮤슈라고 발음하고 있었다. 남자는 신경질적으로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귀여워.”

술이 깨면 또 얼마나 후회하려고 저딴 소리를 지껄이는지. 너무 깜찍해서 짜증이 다 날 지경이었다. 라히무스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상대로 유혹당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던 중 리자드는 티에트가 정해 놓은 금남의 구역 바로 앞까지 와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갈등하며 망설이던 그는 이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몸을 움직였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몰라도 나니아를 안전한 잠자리에 재워 놓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그게 싫었으면 애를 이렇게 만들어 놓지 말았어야지.’

아무도 몰래 눕혀 놓고 오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모든 이들이 한방에 모여 술독에 빠져 있는 줄은 모르고 조심조심 움직였다.

“나냐. 네 방 어디야. 응? 말해 봐.”

라히무스가 나니아의 몸을 옆으로 돌려 안으며 물었다. 사내의 몸에 새끼 짐승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던 나니아의 몸이 기사에게 안긴 공주처럼 들렸다. 소녀는 비몽사몽한 눈살을 찌푸려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고는 흐물거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기…. 죠금 더 가서, 오른쪽….”

라히무스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걸어갔다. 킁킁대는 코끝이 가까이에 맴도는 술 냄새를 넘어 나니아의 흔적을 더듬었다. 불분명한 지시를 따라 걸어온 방향, 그 어딘가에서 리자드가 가장 사랑하는 그녀의 체취가 느껴졌다.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그 유혹적인 향기를 따라 나니아의 방을 찾았다.

자신을 꼼짝 못 하게 만드는 냄새로 꽉 찬 방. 그 안에서 더듬더듬 나니아를 눕힐 자리를 찾았다. 들키지 말아야겠다는 압박감에 불을 켤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에 정강이에 부딪힌 침대의 존재를 알아차리곤 그 위에 조심조심 나니아를 내려놓았다.

“너는, 진짜….”

라히무스는 해롱해롱 꿍얼대는 그녀를 보고 혀를 찼다.

“앞으로 나 없는 데서 술 마시기만 해 봐.”

발끝에 말려 있던 모포 끝을 잡아당겨 소녀의 몸 위에 덮어 주었다. 자장자장 두드리려는 손을 그녀가 세게 붙잡았다. 만취자의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제법 굳세었다.

“여기, 라히무스….”

“응?”

“같이, 같이 자…. 자구 가, 라히무스….”

계속 헛소리를 늘어놓는 그녀의 복부를 붙잡히지 않은 다른 쪽 손으로 다독였다.

“재워 주고 갈 테니까, 어서 자.”

“나 잠 안 와.”

“빨리 자.”

남자는 다정하였으나 나니아는 그런 그가 야속했다.

“뽀뽀…. 뽀뽀해 줘….”

라히무스는 가볍게 버드 키스를 할 생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 소녀는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젖 먹던 힘을 다하여 끌어당겼다. 그 기습적인 인력에 사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황해서 멈칫한 그의 입술을 나니아가 달게 빨았다.

“라히무스으….”

몇 차례 상대방의 입술을 할짝거리던 소녀는 엄마 잃은 새끼 짐승처럼 떼를 썼다. 몸이 달아 미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섹스해 줘, 응? 라히무스…. 섹스할래….”

알코올에 절어 높아진 목소리. 그 애교스러운 음색에 숨이 턱턱 막혔다. 라히무스의 나지막한 욕설이 섣부른 흥분과 회한을 싣고 천천히 늘어졌다.

“하아…. 씨발….”

난감해하던 리자드는 끝내 애인의 사랑스러움에 굴복하였다. 어물쩍 침대에 올라 그녀의 옆자리에 모로 누웠다. 나지막이 속삭이는 사내의 목소리가 나니아의 귓가에 낮게 울렸다.

“너처럼 이렇게 술주정 심한 애는 절대 남자랑 술 마시면 안 돼. 알아들어?”

사내의 음산한 협박에도 나니아는 방실거릴 뿐이었다. 라히무스가 곁에 누워 줘서 기쁜 모양이었다. 소녀는 그의 몸에 팔다리를 얽으며 천치같이 물었다. 라이뮤스랑은?

“나랑은… 먹어도 돼.”

나니아의 이런 귀여운 빈틈을 아는 자는 없어야 했다. 라히무스 혼자만 알고 싶었다. 술 처먹고 다른 놈들에게 애교부리는 그녀를 생각하면 상상만으로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남자는 술 냄새를 풀풀 풍기는 그녀의 주둥이를 몇 차례 쪽쪽 빨아 주었다. 덥석 안겨 오는 그녀의 몸이 작고 보드라웠다.

라히무스라고 해서 그녀의 몸이 어찌 그립지 않았을까. 다만 허락되지 않은 곳에 침입해 버린 상황과 반쯤 얼이 빠져 있는 나니아의 상태 때문에 쌍수 들고 환영할 수가 없을 뿐이었다.

하지만 술에 취한 나니아의 마음이 평소의 그녀와 완전히 별개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술기운의 힘을 빌려 조금 더 솔직해질 뿐.

불붙은 리자드의 음심이 부피를 늘려 갔다. 그는 제게 엉겨 오는 나니아의 겨드랑이에 손을 밀어 넣고 그녀의 팔뚝이나 갈비뼈에 붙어 있는 살들을 주물러 댔다. 그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까 손가락으론 부족했어?”

“으, 으응… 그런 거 말구, 라히무스 꺼….”

“…그래. 네 남자 자지가 필요하냐고.”

내 남자. 그 말에 나니아의 몽롱한 머릿속이 후끈해졌다. 이내 침을 질질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으, 응…. 줘…. 주세요….”

굶주린 맹수의 눈빛이 포악스럽게 변했다. 리자드는 금방이라도 나니아의 목을 물어뜯을 것처럼 그르렁거렸다. 마침 몸이 달아오른 그녀가 베개 사이에 머리를 떨어뜨리곤 하얀 목덜미를 드러내고 있기도 했다. 남자가 그 부근에 코를 처박고 거친 호흡을 흩뿌렸다. 몇 번 헉헉대던 그가 그새 조금 잠겨 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자지 받을 준비할까? …응? 나냐.”

사내의 대물은 원한다고 해서 바로 가질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다. 라히무스의 손이 그녀를 준비시키기 위해 치마 속을 헤집고 들어갔다. 속옷 위로 음핵을 짚고 살살 흔들어 주었을 뿐인데, 나니아는 허리를 뒤틀며 신음했다. 손을 대자마자 느껴 버리는 모습에 입천장이 바짝 말랐다. 리자드는 마른침을 삼키고 그녀와 입을 맞추었다. 작지만 도톰한 입술의 부드러움을 만끽하는 동시에 그 사이로 혀를 비집어 넣었다. 비집고 들어가야 할 볼록한 살덩이는 입술뿐만이 아니었다. 사내는 나니아의 음부를 끈질기게 문지르다가, 아예 벗겨 버릴 생각으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 않아서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내려가 고개를 숙였다. 그새를 못 참은 나니아가 그의 머리채를 잡고 자기 사타구니 쪽으로 내리눌렀다. 그러곤 당당하게 지껄이는 것이었다.

“빨아 줘….”

라히무스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렸다.

“나를 자위 도구로 아는 거야, 뭐야.”

섭섭하다는 투로 말한 것치고 기분이 썩 나빠 보이진 않았다. 사내의 구순은 그녀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쓸모를 다했다. 처음엔 기계적이었던 입술의 움직임이 어느샌가 갈급해져 있었다. 쾌감에 들떠 뒤트는 허리를 양손으로 꼭 붙들어 놓으면서 그녀를 몰아붙이는 즐거움을 느꼈다.

버거운 육신을 침대에 늘어뜨린 소녀는 애인이 안겨 주는 모든 쾌락을 거절하는 법 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라히무스는 자신을 받아들여 줄 그녀의 여성을 넓히다 드디어 몸 위로 올라탔다. 딱딱한 살덩이를 그녀에게 밀어붙이며 못 참겠다는 듯 속살거렸다.

“너 진짜 잘 젖어….”

그러고는 나니아의 옷 아래로 손을 넣어 그녀의 봉긋한 살덩이를 손등으로 밀어 올렸다. 감히 손바닥으로 주무를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렇게 슬쩍슬쩍 만지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하아…. 씹….”

굵직한 성기가 그녀의 안쪽을 딱 맞게 파고들었다. 극심한 쾌감에 몸을 지탱한 두 팔이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만족스럽기는 나니아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그녀가 소리를 높여 탄성을 질렀다.

“아, 조, 좋아….”

“쉬잇….”

“너무 커, 너무, 아, 좋아….”

“좀 작게, 나냐.”

“아, 앗, 좋아…! 좋아!”

여자가 소리를 지르자 사내는 깜짝 놀라서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사내의 커다란 손바닥은 그녀의 방정맞은 주둥이뿐만 아니라 조그마한 얼굴 전체를 가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얘가 왜 이래. 리자드는 식겁해서 하던 짓도 멈추고 숨을 죽였다. 라히무스도 자기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조용히 좀, 해…!”

들키면 어쩔 작정이냐는 듯 그녀를 타박하면서도 행위를 멈추지 못했다. 이 손을 떼어 내면 곧장 어마어마한 소리가 쏟아져 나올 것을 예감한 라히무스는, 그대로 나니아의 입을 가로막은 채 허리를 움직였다.

너무 느껴서 소리를 지르고 싶어 하는 애인이라니. 조마조마한 마음과는 별개로 갈급한 욕망이 거세어졌다. 평소에도 이렇게 큰 소리로 앙앙대고 싶었던 거라면, 그저 듣는 귀가 신경 쓰여서 참고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 소리를 듣고 쫓아올지 모른다는 초조함도 흥분을 돋우었다.

“나냐, 좋아? 좋아서 그래? 응?”

“우, 웁, 으, 웅!”

그녀는 손바닥 아래에서도 끙끙대기를 멈추지 않았다. 초점 풀린 눈동자에 선명한 쾌락이 느껴졌다.

“아, 하아…. 나도 좋아…. 좋아, 나냐….”

잔뜩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한 나니아의 얼굴을 보고 라히무스 역시 심하게 고양되었다. 품에 꼭 안기는 체구를 덮쳐 안고 절제 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그녀와의 신혼집은 한적한 시골에 마련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어느 누구도 없는 둘만의 세상에서 마음껏 범해 보고 싶었다. 가성이 아닌 진성으로 교성을 지르는 그녀가 보고 싶었다.

얼마나 예쁜 목소리로 울어 줄까.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이렇게 살을 섞으며 지낼 수만 있다면.

어둠 속에서 겹쳐진 몸은 그 뒤로도 한참을 헐떡이며 서로를 쑤시고 탐하였다. 누군가 찾아와서 경을 칠지 모른다는 우려도 더는 그들을 억누를 수 없었다.

리자드 스토리 R 5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