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낙원 (18/22)

낙원

아버지가 대충 무엇을 목적으로 원소를 다루었는지 파악한 나니아는 그 뒤로 연구서를 해석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 양이 적지 않아서 하나씩 제목을 읽어 보는 데만 해도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러니까 이건 어딘가에 새겨 넣거나 주조되던, 또는 술지 그 자체로 만들어지던 술식에 대한 기록이었다. 종잇장은 몇 날 며칠 동안 몇 장을 넘어갔고, 마침내 기적처럼 발견하였다.

[신체 무력화 : 반영구적 수면 상태에 이르게 하는 법.]

찾던 것과 일치하는 병증. 나니아는 기대감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차근차근 읽어 보았더니 글에서 묘사하는 증상이란 게 라히무스가 빠져 있는 혼수상태와 비교하여 이보다 더 유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틀림없이 이 앞뒤에 상태를 치유하는 방법도 함께 적혀 있지 않을까. 나니아는 눈에 불을 켜고 근처를 샅샅이 읽어 보았다. 그새 조금 숙달되었는지 이제는 하나하나 동치시키지 않고서도 일견으로 문자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읽을 만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상황을 수습하는 새로운 술식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랜 시간 글자를 읽느라 지친 눈이 감겼다. 소녀는 눈을 감고 앉은뱅이 탁상 위에 엎드렸다. 커다란 한숨과 함께 흉강이 푹 꺼졌다. 무기력한 등만 봐도 수심이 가득했다. 나니아는 공부하기 싫은 어린아이처럼 옆으로 팔을 베고 누워서 눈에 보이는 단어들을 더듬더듬 무의식적으로 훑어 내렸다.

[심장과 혈관 등의 작용을 제외하고 모든 움직임을 비활성화시키는 방법으로 … 의식을 잃은 대상의 상을 그리며 …는 방법이 좋다. 간혹 신체의 에너지가 자체적으로 활발해지는 경우가 생기면 잠에서 깨어나는 경우가 생기므로 주의해야 한다. 반영구적이라 명시한 까닭은 그런 예외 상황을….]

마치 글자가 만져지기라도 하듯 종이 위를 더듬었다. 그 의미 없는 행위를 반복하며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필요 없는 쪽수들을 꼼꼼하게 읽으면서 배운 게 하나 있었다. 바로 주술을 무효로 돌리는 방법이었다.

자의 형태는 어렵지 않았다. 초석이 되는 본래의 술식에 역행하는 의미를 담는 몇 자를 추가하거나 글자 자체를 뒤집어쓰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나니아는 글로만 배운 내용을 감히 적용해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찢어서 사용할 아버지표 술지가 없으니 이번에는 감자밭에서 누렸던 요행도 바랄 수가 없었다. 나니아는 몇 장 남아 있지 않아 소중하게 보관해 오던 빈 술지를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달리 방법이 없어.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잖아.’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아 날이 밝았다. 다시 한번 라히무스를 살펴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그때였다. 서둘러서 다녀오려던 차에 익숙한 얼굴의 원숭이 두 마리가 나니아의 거처로 찾아 들었다. 밝고 성급한 목소리가 귓전으로 쏟아졌다.

“구원자님 어디 가!”

“어디 가!”

고립된 축수들에게 자신의 존재가 어떤 의미를 띠는지 알게 된 지금, 그놈의 구원자님 소리가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냥 나니아라고 해.”

원숭이들은 곧잘 그녀의 말을 따랐다.

“나니아 어디 가!”

“어디 가!”

놈들은 목소리가 컸다. 나니아는 입술 가까이 손가락을 가져다 붙이며 음량을 낮추었다.

“동굴에 다녀올 거야.”

“동굴….”

녀석들도 덩달아 은밀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미심쩍게 올려다보는 두 눈동자에 좀처럼 보기 힘든 흰자위가 드러났다. 나니아는 부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려다가, 이내 마음을 바꾸어 녀석들에게 권했다.

“같이 갈까?”

청탁보다는 동행이 더 확실한 입막음이 되리란 판단에서였다.

“갈래!”

“갈래!”

“…가자, 얘들아.”

나니아는 전처럼 모나쿠와 쿠나모에게 양팔을 하나씩 내어 주었다. 산책 가는 척, 다른 축수들로부터 별다른 의심을 사지 않고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 *

서늘하고 축축한 동굴 돌바닥.

나니아는 모나쿠에게서 돌돌 말린 모포를 넘겨받았다. 나니아 본인 몫으로 주어진 침구를 덜렁 가져와 버린 것이었다. 누군가 비어 있는 이부자리를 보고 이상하게 여기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원숭이들의 도움을 받아 라히무스를 요 위에 눕히고 그의 곁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잠이 든 사내의 얼굴이 전과 같이 평화로워 보였다.

혼자 왔을 적에는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기 바빴는데. 그렇게나 한스럽고 애통했었는데.

보는 눈이 있어서일까 처음이 아니어서일까. 남자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전보다는 비교적 덤덤했다.

나니아는 모포 사이에 감추듯이 둘둘 말아 가지고 온 단검을 손에 들었다. 주방에서조차 베어 본 적 없는 손. 시퍼런 칼날이 오른손 검지 끝을 겨냥했다. 소녀는 눈을 질끈 감고 손가락 첫 마디를 베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한 원숭이들은 털북숭이 뺨에 주름 많은 손바닥을 가져다 붙였다. 그러고는 비명을 지르듯이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나니아!”

“나니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가락 끝이 정사각형 모양으로 네모반듯하게 펼쳐진 술지를 향했다.

‘제발….’

통증은 따끔함을 넘어 쓰라림으로 번져 갔다. 소녀는 잉크를 대신하여 피로 맺는 술식에 원념을 쏟아부었다.

‘일어나. 일어나 줘, 라히무스.’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몇 번 본 적도 없는 그의 환한 웃음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불꽃은 밀랍 덩어리를 녹이며 가느다란 목숨 줄을 이어 가고 있었다. 디밀어진 술지에 옮겨붙은 불씨가 제물을 삼키듯 거세게 타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남자의 가슴 위로 스며들 듯 부서져 내렸다.

“라히무스.”

소녀는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라히무스….”

사내의 뺨을 아프지 않게 찰싹 때리며, 하염없이 그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라히무스, 라히무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녀는 사내의 가슴 위로 엎어져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쿠나모와 모나쿠는 그녀가 무슨 일을 행했는지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통곡할 만한 일임은 이해하였다.

무어라 참견할 줄도 위로할 줄도 모른 채, 서로의 눈치만 살폈다.

나니아는 좌절했다. 미미한 변화조차 없었다. 하다못해 감자밭에서 땅이 울렁거리던 것만큼의 미약한 성취조차 보이지 못했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해…. 이것마저 안 되면, 내가 뭘 더… 뭘 더 할 수 있냔 말야.”

나니아는 주먹 쥔 손을 라히무스의 가슴 위에 올려놓고 무력한 눈물을 줄줄 흘려 댔다.

‘이대로 죽어 버리면 어떡하지.’

그렇지 않아도 남자는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는 동안 전보다 수척해져 있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만 같아서, 그런데도 자신은 아무런 방법도 찾지 못하고 있어서 절망스러웠다.

모나쿠가 머뭇거리는 발걸음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나니아….”

녀석은 구슬픈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더니 나니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쿠나모도 비척비척 다가와 반대쪽 허리에 팔을 둘렀다. 축수들은 눈을 지그시 감고 주둥이를 우물거렸다.

“나니아 슬퍼. 슬퍼, 하지 마.”

“나니아 괜찮아. 모나쿠 있어.”

“쿠나모도.”

위로해 주려는 듯한 포옹에 코끝이 시큰해졌다. 나니아는 오른손을 들어 모나쿠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고맙고 기특했다.

“…쿠나모도.”

나니아가 모나쿠만 쓰다듬어 주자 쿠나모는 시무룩해졌다. 자신은 갖지 못한 나니아의 오른팔을 부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녀석의 투박하고 거친 앞발이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억지로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고는 쓰다듬을 종용했다. 왼손으로도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는데 꼭 오른손으로 그랬다.

나니아의 손을 빼앗긴 모나쿠가 표독스럽게 눈을 부라리더니 그건 원래 자기 것이었다며 소리를 꽥 내질렀다.

“모나쿠 거야!”

그러고는 이리 내놓으라며 다시 나니아의 오른손 손목을 빼앗아 갔다.

“아니야!”

“아니야!”

“내 거야!”

“아니야!”

경쟁적으로 뺏기고 빼앗던 중에 나니아의 손목은 거칠게 다루어졌다. 당황한 나니아의 허리 아래에서 한참을 지속하던 실랑이는 결국 그녀의 짧은 신음을 매개로 끝이 났다.

“윽….”

아파하는 나니아의 모습에 원숭이들이 화들짝 놀랐다. 두 녀석 모두 손목 쟁탈전을 포기하고 한 발씩 뒤로 물러났다. 처치해 두지 못한 손가락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조금 전에 칼로 베어 낸 그 위치였다. 털북숭이들은 경악스러워하며 주둥이를 쫙 벌렸다. 다정했던 형제 사이가 거짓말처럼 벌어져서 서로를 탓하기에 이르렀다.

“너 때문이야, 쿠나모.”

“너 때문이야, 모나쿠!”

나니아는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가슴보다 위쪽으로 들어 올렸다. 지혈하듯 뿌리 끝을 붙잡고 지친 목소리로 부탁했다.

“제발 싸우지 마….”

언제부턴가 저를 두고 갈등하기 시작한 축수들의 다툼이 그녀를 피곤하게 만들었다. 나니아 자신의 문제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팠다. 울적했다. 라히무스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그를 깨울 방법은 다시 또 묘연해졌다. 소녀는 암울한 심해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 * *

“올해는 카카와가 풍년이야. 나무 한 그루에 적어도 서른 개씩 꼬투리가 맺혔거든.”

대장이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니아는 그것이 어느 정도의 수확량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영혼 없이 칭찬했다.

“잘됐네요….”

소녀는 정강이 정도 높이에 오는 나무 의자에 힘없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등받이도 없는 뭉툭한 의자였다. 콩을 빻던 막자 손잡이가 나니아의 볼을 콕 건드렸다.

“네가 올 줄 알았나 봐.”

한 번 마음의 문턱을 낮춘 울로피는 그 뒤로 곧잘 서글서글하게 웃어 주었다. 심지어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불렀다. 석제 막자사발 안에서 건조된 카카와콩이 부지런히 빻아지고 있었다. 한 차례 발효 과정을 거쳐 볶아 낸 것이었다.

“쿠나모, 물 좀 끓여라.”

여자가 나니아의 곁에 붙어 있던 원숭이 중 한 마리에게 명령을 내렸다. 소녀는 대장이 가리킨 원숭이를 흘긋 쳐다보았다.

“그쪽은 모나쿠예요.”

그녀가 참견하자 모나쿠는 팔을 배배 꼬았다.

“나니아가 모나쿠를 알아.”

어차피 아무도 구분하지 못한다면서 상관없어하더니, 알아봐 주니까 내심 기쁜 모양이었다. 나니아는 녀석들에 대해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마을 축수들의 정성이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구분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외형적인 특징만 놓고 보자면 둘은 정말 쌍둥이 그 자체였지만 붙여 놓고 보면 풍기는 분위기가 완연히 달랐다. 모나쿠에게서는 맏이다운 반듯함과 의젓함을 엿볼 수 있었고, 쿠나모는 조금 더 천방지축인 느낌이었다. 발화 능력이나 사고 깊이도 모나쿠 쪽이 좀 더 나았다.

“나는 다 알아.”

나니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모나쿠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쿠나모가 질투심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얼굴로 긴 팔을 바닥에 내려쳤다.

“맨날 모나쿠만, 모나쿠만!”

하지만 녀석의 그런 불만도 오래 가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얼굴만 아는 축수 한 마리가 불만 가득한 발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카카와 시식이라는 하찮은 중대사를 앞두고 나름 평화롭던 분위기에 차가운 긴장감이 스며들었다. 무언가 큰 결심을 한 듯한 남자가 입을 열었다.

“대장은 요즘 왜 그렇게 구원님을 독점합니까?”

그는 마치 나니아의 존재가 어떤 공공재라도 되는 듯이 말했다. 아리송한 악감정이 그득해 보였다.

“저 녀석들은 구원님을 모셔온 일등 공신이니 그렇다 쳐요. 하지만 대장은 무슨 권리로 온종일 그분을 차지하고 있느냔 말이에요.”

“…뭐?”

대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어이없다는 듯이 반문했다. 여자가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세우자 그의 머리 위로 위협적인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 압도적인 덩치에 수컷은 위축되었다. 강단 있게 따지고 드는가 싶더니 가랑이 사이에 꼬리를 말아 넣었다.

울로피는 서열을 바로 잡으려는 우두머리 짐승처럼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내가 너희랑 같아? 독점하긴 뭘 독점해.”

수컷은 뒤로 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이 정도의 압박은 처음부터 각오했었다는 듯, 시답잖은 객기와 배짱을 쥐어 짜냈다.

“그, 그렇잖아요…. 대장은 구원의 전설을 믿지도 않았으면서. 항상 비웃었으면서!”

가장 덜 간절한 사람이 가장 큰 은혜를 누린다는 것이 어지간히 불합리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당신은 우리가 올리는 기도와 치성에 편승한 거야.”

수컷이 파들거리는 손가락 끝으로 울로피를 향해 삿대질했다. 녀석은 여자가 이제껏 보지 못한 독살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니아는 자신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이 상황이 못 견디게 불편했다. 지금 당장 그를 한 번 안아 주는 것으로, 말하자면 특혜를 주는 것으로 이 남자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방법에 지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고 달래 주기엔 소녀의 마음도 그리 넉넉지 못했다. 심적으로 지쳐 있던 그녀는 침묵으로 설득을 포기했다.

카카와 반죽에 넣을 물이 끓기도 전이었다.

나니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거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애타는 눈길이 느껴졌지만 아무도 그녀의 걸음을 막진 못했다. 시중을 드는 사슴에게 혼자 있고 싶다는 이야길 남겨 두었다. 소녀는 그대로 자신의 독방에 칩거하였다.

바람이 서걱거리며 나무를 스치고 잎맥 두꺼운 나뭇잎들은 지붕을 긁었다. 이제 이불도 없는 방바닥에 주저앉아 마룻바닥의 거칠한 감촉을 느꼈다. 힘없이 굽은 목은 뻣뻣하게 뭉쳐 있었고 목적 없이 멍한 시선은 허공을 배회했다.

그녀는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자꾸만 파고들었다. 마음은 온통 미몽에 빠져 있는 라히무스에게 쏠려 있었다. 끝내 아무런 해결책도 되어 주지 못한 일기장. 그것은 유일한 위안이 되어 줄 것처럼 탁상 위에 단정하게 놓인 채였다.

나니아는 다시 한번 속는 셈치고 그것을 펼쳐 보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했다. 이 지긋지긋한 축수들을 억지로 쓰다듬어 주는 일 외에는.

어지러운 필체의 아버지가 글 속에서 말을 걸어왔다.

[나는 이들과의 관계가-그들 자신에게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에게는 그리 완전하지 못함을 느낀다.]

제법 오랜 시간 축수들과 함께 삶을 지낸 후였다. 아버지의 마음은 이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극심한 고독에 시달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였다. 교화되지 않는 몇몇 축수들의 잔혹성과 자신을 향한 집착, 인간으로서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비인도적인 풍습과 환경 속에서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사람다운 사람이 그립다.]

[나니아가 보고 싶다.]

나니아의 시선은 그 문장에 한참을 머물렀다.

이런 생활을 시작한 지, 자신은 고작 며칠이었다. 그런데도 일기 속 아버지의 고혈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는 사실이 나니아를 못내 울적하게 했다.

[나 혼자 몸이라면 모를까, 사실은 작은 나니아가 더 걱정이다. 아이가 자라면 당장 나는 좀 덜 외로울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환경 속에서 아이를 문제없이 길러 낼 자신이 없다.]

일기 속 ‘작은 나니아’가 자신을 뜻한다는 것을 알고 읽는 이는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무엇보다 나는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낀다. 내가 죽고 나면 아이는…. 나는 이 삶을 스스로 선택했지만, 아이는 아니니까. 아이는 아니니까….]

소녀는 아버지의 두려움을 더듬더듬 읽어 내려갔다. 그는 겁에 질려 있었다. 점점 심해지는 병증과 홀로 남겨질 딸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그동안 아버지가 몸이 약해 돌아가신 줄만 알았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던 거다. 도망칠 당시 추적자에 의해 입은 악의적 주술이 그 원흉이라고 했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중상을 입었다. 극복해 보려 하였지만, 완치는 불가능했고 진행 속도를 늦추는 정도가 최선이었던 모양이다. 과거의 시간 선에서 아버지는 점점 병들어 가고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이곳에서 도망치리라 결심했다.]

그는 그렇게 조축수로서의 핏줄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는 곳을 찾아, 파비올라에 터를 잡았던 모양이다. 특별한 연고도 없으면서 서쪽으로 넘어간 까닭은 전적으로 자신 때문인 듯했다. 나니아는 그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을 읽었다.

[그곳이 어디든, 가문의 통제 아래 씨받이가 되거나 축수들 사이에서 영약처럼 살아가는 것보단 나으리라.]

“…씨받이.”

나니아는 그 단어에 섬뜩해졌다. 짐작할 수 없는 액운이 여러모로 나니아를 말리고 있었다. 뿌리를 찾으려 노력하지 말라고. 현명하지 못한 생각이라고.

[그 어떤 강렬한 외부 자극도 오랜 시간 노출되면 내성이 생기기 마련인가 보다. 익숙해진 것인지 질린 것인지, 이들은 옛날만큼 나에게 빠져 있는 것 같지 않다. 정을 요구하는 횟수가 현저하게 줄었고 어떤 축수들은 아예 나에게 찾아오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축수들로부터 도망치기 전, 본격적인 망명에 앞서 아버지는 점차 준비되어 가고 있었다. 심리적 상태도 물리적 상황도.

[조만간 적기가 찾아올 듯하다.]

나니아는 글을 더 읽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의 기쁨이 그녀에게는 한 겹 좌절감으로 더해졌다. 그렇구나. 이 거짓 같은 애정조차 언젠가는 사그라들 감정이구나. 거짓된 주제에 영원하지도 못한 것이로구나.

소녀는 다시 일기장은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러곤 무기력하게 몸져누워 책임감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극심한 우울감은 목적 없는 수면으로 이어졌다.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얕은 수면에 빠져드는 일밖에 없었다.

더는 잠도 오지 않아서 눈을 떴을 때, 사위는 어느새 깜깜해져 있었다. 저물어 간 해를 대신하듯 작대 끝에서 횃불이 타오르고, 불이 닿지 않는 마을 구석구석 언제 무엇이 튀어나와도 모를 정도로 새카만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무시하고 누군가 나니아를 찾아왔다. 단 한 명의 예외적인 인물, 울로피였다.

여자가 말했다.

“낮에 그 녀석은, 조금 극단적일 정도로 무례했지.”

네가 이해해 달라는 듯 여자는 묻지도 않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들은 네가 정말 신적인 존재라고 믿어서 그런 거야.”

그렇게 설명하는 울로피의 얼굴이 다소 착잡해 보였다. 그녀는 어째선지 자신이 죄를 짓기라도 한 것처럼 면목 없어 했다.

“생각해 봤는데…. 역시 너는 떠나는 게 좋을 것 같다. 너를 위해서도,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도.”

고민은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안은 명백히 충동적이었고, 이성적 판단은 다른 결론을 내렸다.

“빠를수록 좋을 테지….”

대장은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짐 챙겨. 바래다줄 테니까.”

그녀는 결심한 바를 당장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그에 나니아는 덜 뜬 눈을 비비며 당황스러워했다.

“이렇게 당장이요?”

“그래. 서둘러.”

대장은 아예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나니아의 가죽 가방을 손에 들고 눈에 보이는 대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가방 주인은 그 옆에서 허둥대기만 했다.

“그게, 저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어요.”

정확히는 라히무스가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

그런 사정까지는 알 길 없는 울로피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장로들이 내 생각을 눈치챘어. 내일부터는 감시가 더 심해질지도 모른다.”

나니아가 잠든 사이, 마을에서는 구원의 성은을 어떻게 나누어 가질지에 대한 회의가 열렸다. 일부 축수들의 반발을 수용한 결과였다.

문제의 주체에 해당하는 나니아가 빠졌다는 점에서 시작부터 이상한 회의였다. 당사자가 없는 상황에서 마치 사냥감의 부위와 분배 방식을 의논하듯 기계적이고 영합적인 교섭이 이루어졌다. 울로피는 그 모든 과정을 관찰하면서 꺼림칙하고 기이한 기분에 휩싸였다.

조축수의 존재가 어떠한 방식으로든 결국 마을에 불협화음을 가져올 것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였다.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봐야 했다. 이 야음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가족들이 알게 된다면 큰 비난을 면치 못하겠으나, 대장은 이것이 대의를 위한 일이라 믿었다.

소녀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대장은 그녀를 짐짝처럼 짊어졌다. 나니아는 당황한 얼굴로 입을 뻥긋거렸다. 다른 축수들을 끌어들이게 될까 봐 두려워서 실랑이를 벌일 생각도 못 했다. 경황없는 나니아와 다르게 울로피의 이행은 일사천리였다. 그녀는 은밀한 발걸음으로 마을을 빠져나와 칠흑 같은 정글을 달렸다. 목적지는 표류자들이 떠밀려온 북쪽 해안, 정확히 그 반대편이었다.

“해가 뜨면 뗏목을 타고 남쪽으로 가. 남쪽으로 남쪽으로 섬을 하나씩 지나다 보면, 이 작은 열도의 끄트머리에 인간들이 오가는 조림지가 있다.”

“저, 대장…. 길을 알려 주시는 건 좋은데.”

나니아는 그녀의 어깨 위에서 덜렁이면서 위태롭게 말을 더듬었다. 들리지 않는 것인지 들을 여유가 없는 것인지 대장은 자기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곳에서 벌목꾼들의 도움을 얻어. 뗏목은 버리고, 큰 배를 얻어 타. 제도 끝에 있는 아그네일 시국으로 향할 테니, 그때부턴 어디서든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여자가 제시해주는 경로는 꽤나 구체적이었다. 하지만 그 설명이 나니아의 귀에 제대로 들어올 리가 없었다. 차마 멈추어 달라는 말도 내려 달라는 말도 못 하고 나니아는 쩔쩔매기만 했다.

“너무 멀리 가면, 아, 안 돼요…!”

“그게 무슨 말이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문하면서도 여자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어둠을 꿰뚫는 눈동자와 밀림을 달리는 두 다리엔 거침이 없었다. 나니아는 황망한 고민에 빠졌다. 속 편하게 머리만 굴리는 와중에도 라히무스가 있는 동굴에서부터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저히 적절한 변명거리나 둘러댈 거짓말을 떠올려 낼 수가 없었다.

나니아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해 보았다. 리자드를 싫어한다던 대장은, 막상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처음 보는 상대를 단지 리자드라는 이유만으로 분별없이 해칠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우, 울로피….”

설령 유혈 사태가 벌어진다더라도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이생에 희망이 없어지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래서 나니아는 결국 실토하고 말았다.

“사실은 이 섬에 같이 가야 하는 리자드가 있어요.”

“뭐라고?”

“저번에 말했던, 그, 그….”

빠르게 달려가던 몸은 관성 때문에 한참을 더 나아간 다음에야 멈추었지만, 갑작스러운 고백은 확실히 울로피의 발걸음을 멈추었다.

여자는 나니아를 고쳐 안고 조급한 그녀의 얼굴을 황당하다는 듯이 들여다보았다. 인간에게는 암흑에 불과했지만, 여자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나니아는 횡설수설 그간 있었던 일을 마구잡이로 늘어놓았다.

“모나쿠와 코나모가, 당신이 리자드를 싫어한다고 해서, 처음부터 밝힐 수 없었어요. 나쁜 일에 휘말려서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혹시라도 당신이 해코지할까 봐 두려워서….”

만약의 상황을 들어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그녀를 매도할 수밖에 없었다. 나니아는 그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대장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서둘렀는지 이해해요. 하지만 그 사람 없인 갈 수 없어요. 부탁이에요, 다시 돌아가서….”

…돌아가서, 그다음엔?

소녀는 스스로 말문이 막혔다.

그녀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당장 혼자 힘으로는 라히무스를 옮길 수도 없고 뗏목을 탈 줄도 몰랐다. 정말이지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막연한 곤경은 머릿속을 엉망진창으로 흩트렸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게요. 그리고, 그리고…. 어떻게든 해 볼 테니까….”

근거 없는 다짐은 그녀 자신의 귀에도 객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어떤 방법도 강구해 내지 못하는 자신의 무력함과 무능함에 신물이 났다.

“나니아.”

“미안해요, 부탁이에요. 죽이지 마세요. 제발요….”

“나니아!”

정신 차리라는 듯 울로피는 소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닿지 않는 손 대신 어깨를 움직여 볼을 타고 내린 눈물을 지웠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알았으니까 울지 말고 제대로 설명해 봐.”

조바심 내는 나니아와 다르게 울로피는 침착했다.

“그러니까요….”

나니아는 말하기를 저어하며 잠시간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손바닥이 가슴 아래로 툭 내려왔을 때, 그녀는 결국 모든 상황을 이실직고하였다. 슈쉬라호의 난파 사건으로 말미암은 표류 문제와 더불어 자신의 리자드 애인이 처하게 된 곤경까지. 숨김없이 전부 다 털어놓았다. 울로피는 축축한 풀잎에 주저앉아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나니아는 그런 대장의 넓적다리 위에 웅크리고 앉아서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아버지, 일기에서, 방법을 찾을 줄 알았는데요, 아, 아무런 효과가, 없었어요.”

혼자서 감내하기엔 너무도 버거운 어려움이었다. 나니아는 누군가와 이 문제를 진지하게 의논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위안을 얻었다. 대장은 그녀의 작은 등을 힘 있게 토닥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내가 손이 닿는 곳까지 도와줄게. 아그네일 시국에서 탈타르노 반도로 건너갈 때까지. 대륙에서는 그 문제를 해결해 줄만 한 다룸을 찾을 수 있을 거다.”

나니아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하는 곳 어느 한 군데 가 본 적이 없었지만, 정말로 대륙에만 도착할 수 있다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은 희망이 샘솟았다. 사실은 파키케팔로를 비롯한 다른 일행들의 생사도 궁금했으나 당장은 코앞에 있는 라히무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도 급급했다.

“동굴까지 가는 길은 기억하고 있나?”

“여기서는 모르겠어요…. 마을을 시작점으로 하면, 어떻게 가는지 알아요.”

여자는 자기 덩치만큼 커다란 숨을 한 차례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그래. 그럼 다시 돌아가자.”

짐짓 결연하게 대꾸한 그녀는 다시 나니아를 안아 들고 이제껏 뛰어온 방향의 반대편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이전보다 확연히 느려졌다. 어차피 하루 이틀 만에 해결을 볼 수 없는 장기적 과제가 되리란 생각에서였다. 어찌나 느긋한지 이따금 윙윙거리는 벌레의 날갯짓마저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커다란 나뭇잎이 눈물로 젖은 얼굴을 이슬로 씻어 주듯 소녀의 뺨을 스쳤다. 문드러진 풀 내음과 이름 모를 과실의 농익은 단내가 비강 깊숙이 번져 들어왔다.

그들은 도망쳐 나왔을 때보다 훨씬 여유롭게 오랜 시간이 걸려서 마을로 돌아왔다. 빼곡하던 잎사귀가 점차 숨 죽어 가고 듬성듬성한 나뭇가지 너머로 별빛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낼 때쯤. 저 멀리 천연한 우림의 실루엣 너머로 활활 타오르는 열기가 느껴졌다.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은, 바람을 타고 전해져 오는 피비린내 때문이었다. 대장이 콧등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왜 이런 냄새가 나지?”

의아한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그녀는 나니아를 내려 두고 뾰족뾰족한 수풀을 헤쳐 길목을 열었다.

“꺄아악!”

그곳에서 끔찍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사, 살려 줘…!”

“으악!”

눈과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비명이 이곳저곳에서 쏟아졌다. 고통에 찬 단말마의 비명은 그것이 마지막 기회였던 것처럼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야.”

푸석푸석한 흙바닥 위에 축수들이 쓰러져 있었다. 대장은 아연실색하여 달려가 그들의 상태를 살폈다. 하나같이 처참하게 훼손당한 삶을 간신히 부여잡고 있었다. 또는 아예 숨이 거두어진 상태이기도 했다.

초입부터 이미 아비규환이었다. 저 안쪽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뾰족한 말뚝에 몸이 꿰뚫린 시체라거나 트리 하우스로 올라가는 사다리에 널브러진 몸이라거나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악몽이 두 눈앞에 펼쳐졌다. 나니아는 가까이에 있는 나무를 손으로 짚고 심약한 속을 뒤집어 구역질하기 시작했다.

하룻밤도 못 되는 그 짧은 새, 마을은 지옥이 되어 있었다.

“대, 대장….”

누군가 찢어진 뱃가죽 사이로 흉물스러운 체액을 쏟으며 신음했다. 차라리 즉사하는 것이 나았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이었다. 여자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다급히 무릎을 옮겼다. 그리고 그의 피 묻은 몸을 더듬으며 물었다.

“핌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축수는 남은 목숨을 쥐어짜 그녀에게 무언가를 알리려 했다.

“리, 리자드가….”

채 맺어지지 못한 다잉 메시지는 불완전한 경고로 남았다. 남자의 마지막 숨이 거둬지는 동시에 울로피는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어느샌가 모든 비명이 멎어 있었다. 마을 안에 무사한 생명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타오르는 불길을 배경으로 새카맣게 그늘진 인영이 보였다. 꼭 그녀만큼 크고 우람했다. 캄캄한 오두막 너머, 공터와의 경계를 가르는 나무 울타리 사이로 잔혹한 학살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장육부를 갈가리 찢어 낼 앞발. 살려서 돌려보내 주지 않을 기세로 쫓아올 두 다리. 사람 갈비뼈쯤은 우습게 부러뜨릴 굵다란 꼬리. 머리 위로 사납게 돋아난 용의 두각.

그자는 틀림없는 리자드였다. 그것도 몹시 흥분한, 발정기 리자드.

횃불은 그를 역광으로 비추었다. 얼굴을 미처 알아볼 틈 없었지만, 이 끔찍한 사달이 모두 저 손끝에서 벌어졌음은 확신할 수 있었다. 실상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재앙 같은 현실에 여자는 이성을 차리기 힘들었다. 핌핌은 그녀가 도망치기를 바랐겠지만, 당치도 않은 바람이었다. 울로피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리자드에게로 달려들었다. 거세게 악다구니를 치는 소리가 황량한 마을에 울려 퍼졌다.

치열하게 맞잡아진 두 앞발. 비늘이 돋아난 손등 위로 뜨겁게 달아오른 신열이 느껴졌다. 그것은 확실히 병적인 열기였다. 움켜쥔 두 손을 중심으로 과격한 사투가 시작되었다. 힘겨루기는 젊은 리자드 사내 쪽이 조금 더 유리해 보였다.

남자는 그녀를 내던지다시피 팽개치며 재빨리 무릎을 차올렸다. 굽은 관절이 대장의 하복부를 가격하였다.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맷집이 좋은 그녀였지만 발정기 리자드의 위력은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리자드는 거센 흥분을 가라앉히듯 헐떡였다. 밭은 호흡으로 흉강이 들썩였다. 파충류의 그것처럼 날카로워진 동공이 상대를 노려보았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버러지 한 마리.

사내는 그녀가 이곳의 우두머리임을 알아차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 짧은 육탄전을 통해서도 쉽지 않은 상대임을 체감할 수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좁혀지던 눈썹 사이는 아예 깊은 주름으로 골짜기가 패였다.

‘…내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남자는 생각했다. 실컷 피를 보고 많이 진정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금 스스로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워졌다. 이 현장은 어떤 의미로, 그에게도 악몽 같은 장면이었다.

“…울로피.”

흙먼지로 뒤덮인 듯 까칠한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읊었다. 낯선 침입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대장은 크게 당황하였다. 그제야 뒤늦게 사내의 외견을 살펴볼 생각이 들었다.

“…….”

단단히 굳어진 입매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이 꿈틀거렸다가 이내 다시 다물어졌다. 그녀 또한 그를 알아본 게 분명했다. 리자드는 혼란스러워하는 울로피의 표정을 통해 도리어 제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 치며 빈정거렸다.

“놀랍기는 나도 마찬가지야….”

남자는 허망한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향해 경멸 어린 시선을 내려 보냈다.

“그래, 당신은 아는 척을 하고 싶어도 부를 이름이 없겠네.”

그러고는 가르쳐 주길 원하느냐고 묻는 듯한 얼굴로 비뚤게 웃었다. 사내는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놀라서 말을 잇지 못하는 울로피의 코앞으로 다가와 불손한 각도로 무릎을 굽혔다.

남자는 한쪽 다리를 비스듬히 꿇어앉았다. 그러고는 먹잇감을 눈앞에 둔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라히무스.”

이제 막 긴 잠에서 깨어난 사내의 음성은 아직도 새카맣게 잠겨 있었다.

“그게 내 이름이다.”

여자는 음률을 곱씹듯 그 이름을 입에 머금어 보았다.

“라히무스….”

그 단단한 음운을 혀끝에 굴리며 짧은 회상에 잠겼다. 일찍이 동생들에게 떠맡기고 다시 찾았을 때가 놈이 열댓쯤 되었을 땐가. 아마 그때 제일 녀석이 누구의 핏줄인지를 실감하였더랬다. 제 아비를 똑 닮아 곱상한 낯짝만 봐도 속에서 천불이 치밀었으니.

“…정말 리자드 같은 이름이군.”

울로피는 담담한 감상을 내어놓았다. 몰라보게 장성한 아들의 면면엔, 이제 그녀가 사랑했던 리자드의 얼굴은 오래도록 희석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많이 컸구나.”

여자가 말했다.

숨통을 틔워 놓았기 때문일까. 혓바닥을 나불대는 꼴이 가증스러웠다. 그녀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이 너무도 태연하고 생경하여, 도무지 탐탁지가 않았다. 사내는 축축이 젖은 손으로 울로피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검붉게 피 칠갑된 앞발이 그녀의 옷깃에 핏물을 입혔다.

“너랑 내가 그런 소릴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지.”

사내는 다시 한번 그녀를 흙바닥에 자빠뜨렸다. 균형 잃은 몸을 발로 짓밟고 두꺼운 숨통을 가두었다. 닭 모가지 비틀 듯 간편하게 처치해 낸 다른 녀석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여자는 쉽사리 당해 주지 않았다. 목을 조여 오는 리자드의 팔을 붙잡은 채 안간힘을 주었다. 캑캑거리면서도 계속 헛소리를 지껄였다.

“…이름은, 네 생부가 지어 줬나?”

“그럴 리가.”

남자는 당치도 않다는 듯 비웃음 가득히 대꾸하였다. 울로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곧 뒤질 여자한테 이름 따윈 뭐 하러 알려 줬을까, 내가.”

당신이 생각하기에도 그렇지 않느냐며 리자드가 씨익 웃었다. 경쾌한 입가에 어울리지 않게 살벌한 눈매는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울로피는 회한이 가득한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날이 올 것이라고 예견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갈가리 찢겨 흩어진 여동생들의 시신을 수습하던 그날부터.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단지 죽기 전에 꼭 한번 보고 싶은 얼굴이 있었다.

“그는…. 잘 지내고 있나?”

그녀가 물었다. 리자드는 그 말을 듣고 비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 따위 게 궁금해?”

여자는 기억 속의 모습보다 더 늙고 지쳐 있었다. 라히무스가 아는 그녀는 이렇게 애틋하고 아련한 표정을 짓는 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십수 년이 지난 지금, 우습게도 그녀의 비뚤어진 순애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이 되어 있었다.

“…내가 당신들을 닮긴 했나 봐. 사랑 따위 생전 모를 것처럼 살다가, 코 꿰여서 눈 뒤집혀 사는 게.”

리자드가 통 모를 소리를 지껄이며 울로피를 바라보았다. 그다지도 두려워했던 이 노란 눈깔 속에 절망이 깃들게 만들고 싶었다. 그는 이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잘 지내고 있느냐고? 당연하지.”

신랄한 소식을 전하는 그의 얼굴이 무척이나 기꺼워 보였다.

“사랑하는 본부인 곁에서, 너 같은 요물의 꾐에 넘어가 나 같은 괴물을 낳은 걸, 두고두고 사죄하면서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으니까. 당신이 걱정할 필요 없어, 울로피….”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여전히 네가 끼어들 자리 같은 건 없다는 소리였다. 리자드의 빈정거림에 여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이내 질끈 감은 두 눈 밑으로 눈물 한 방울이 반짝 흐르고 스며들었다. 기대 이상의 반응에 라히무스는 가슴이 찌릿해졌다. 그것은 마냥 개운한 감각은 아니었으나 어느 정도 통쾌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그럼 이제 당신이 내 질문에 답할 차례야.”

남자는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내가 왜 그렇게 미웠는지. 미워할 거라면 대체 왜 낳았는지. 그 어린 게 뭘 잘못했다고 그토록 모질게 대했는지. 왜 하필 매음굴에 버렸는지. 당신 여동생들이 내게 저지른 짓을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마침 그녀가 훼손시킨 두각이 머리 위로 솟아나 있었다.

“이거 보여? 네가 부러뜨린 내 뿔.”

리자드가 비뚤게 웃으며 오른쪽 머리를 기울였다.

“애당초 그럴 의도였을 테지만, 너도 짐작하다시피 내가 이것 때문에 어디 가서 멀쩡한 사내 취급을 못 받고 살았는데 말이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듯 감상을 구하는 태도가 썩 익살스럽기까지 했다.

울로피는 리자드의 시답잖은 고통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이 무시하였다. 미안하다거나 후회한다거나 그런 태도는 전혀 없었고, 다시 눈을 뜬 얼굴은 평소처럼 무덤덤해져 있었다. 그 지독하게 냉한 얼굴이 어찌나 자신과 닮았는지, 리자드는 헛웃음이 다 났다. 남자가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내 약혼녀 어디 있어.”

많고 많은 의문 중, 그가 가장 궁금한 것이었다. 여자가 부러뜨려 놓은 자신의 뿔. 그 진정한 주인. 나의 사랑스러운 피앙세.

“…니들이 데려갔지.”

모를 수 없을 거라며 그윽한 설명을 덧붙였다.

까만 밤하늘이 허리에서 찰랑거리고, 두 눈엔 보랏빛별을 품은 그녀에 대해서.

“봤으면 알 거야. 엄청 조그맣고 귀여운 인간 여자애거든….”

어딘지 불길한 감정에 사로잡힌 듯한 리자드의 눈동자가 얕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의 묵직한 무릎이 축수의 명치를 짓눌렀다.

“잡아먹었다고 하면, 정말 죽여 버리겠어….”

다행스럽게도 그가 찾는 여자는 멀쩡히 살아 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남자의 이름을 불러 세웠다.

“라히무스!”

리자드는 익숙한 목소리에 허리를 바짝 세우고 소리를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나냐.”

남자도 한숨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꿈결 같은 소녀의 모습은, 이것이 현실임을 자각하게 했다. 자신의 꿈속이었다면 나니아가 저렇게 불행한 얼굴을 하고 있을 리 없었다.

울로피는 두 남녀가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라히무스의 손에서 스리슬쩍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라히무스는 아예 울로피에게서 손을 털어 내고 나니아를 향해 달려갔다. 여자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커다랗게 숨을 몰아쉬었다. 액살당하기 직전이었던 여자는, 다소 어안이 벙벙한 기분이 되어 스스로의 목을 문질렀다. 녀석이 너무도 쉽게 자신을 포기하자 방금 느꼈던 공포나 고통의 감각도 모두 거짓처럼 느껴졌다.

호흡조차 버거워하던 몸에 다시금 피가 돌았다. 혈액은 뇌를 거쳐 그녀가 생각하게 했다. 아들의 얼빠진 낯짝을 보자 허탈한 웃음이 빚어졌다. 나니아가 말하던 리자드가 그일 것이라고 어디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 너는 내게 구원이 아니라 재앙이었구나.’

소녀가 그녀에게 가져다준 것은 이가 썩을 지경으로 달콤한 절망이었다. 울로피는 다 커 버린 리자드의 널따란 등에 아득한 눈길을 보냈다.

언뜻 멀쩡해 보이는, 그러나 아직 가시지 않은 흥분의 열기가 잔존한 상태에서, 남자는 고장 난 물건처럼 말을 더듬었다. 사납게 비늘 돋친 두 손은 다급히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자기야, 이게, 이게 왜…. 왜 이래, 응?”

날카로운 손톱이나 거친 표면으로 생채기를 만드는 일이 없도록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이제 그 정도 이성은 돌아온 상태였다.

“대체 혼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다친 덴 없어?”

하나뿐인 그의 공주님이 너덜너덜 거지꼴이 되어선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은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데, 영문은 모르겠고 심장은 철렁했다.

“여기 좀 봐 봐. 어?”

남자가 얼굴을 가까이하자, 나니아는 피했다.

“왜.”

“토, 토했어….”

소녀가 입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그런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라히무스가 다시 뒤통수를 감싸 안자, 이번에는 악을 쓰듯 대꾸했다.

“이거 다, 라히무스가 한 짓이야?”

여자는 피로 물든 주변을 보란 듯이 가리켰다. 애초에 토악질을 한 이유가 그것이었다. 자신을 탓하는 투에 사내는 울컥했다. 자초지종을 늘어놓는 목소리에 여유가 없었다.

“…일어나서 네 냄새를 맡았어. 이곳이 어딘지 모르겠는데, 등 밑에 깔린 요에선 네 냄새가 났고, 바닥엔 피가…. 피가 떨어져 있었다. 난 그게 네 피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의문의 핏방울은 아주 작았으되 틀림없는 낙하 혈흔이었다. 베인 상처가 움직이면서 뚝뚝 떨어졌을 피의 흔적. 그것이 누구의 피인지 확신이 든 순간 머릿속에 불길이 일었다.

리자드는 뿌옇고 미진한 사고를 더듬는 대신 충동적이고 격정적인 육신을 움직여, 그녀를 찾아 헤매기 시작하였다. 보잘것없는 천 조각은 그에게도 이정표가 되어, 라히무스를 마을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니아의 이름을 들먹이는 축수들을 보았다. 어차피 팔은 두 개라느니, 무릎은 내 것이라느니, 그녀를 고깃덩이 자르듯 조각조각 분절하여 차지하려는 듯한 대화를 들었다. 더운물에 삶아져 살이 발라진 뼛조각을 보았고, 그것은 인간의 대퇴골을 닮아 있었다. 솥에서 펄펄 끓는 사람 뼈를 보고 리자드는 완전히 이성을 잃었다. 그렇지 않아도 피를 보고 싶은 욕망이, 주체할 수 없는 파괴 욕구가 끓어올랐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주변을 초토화로 만들어 버린 후였다.

“얼마나…? 대체 얼마나 죽인 거야?”

그때의 절망적인 감각은 나니아에게 미처 전달될 틈 없이, 그녀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절규했다. 라히무스는 망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게 왜.”

그는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일이 참 쉬운 남자였다. 상대가 축수라면 더더욱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합법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전쟁터를 떠돌던 그였다. 실컷 피를 본 다음에는 빠르게 진정 상태로 접어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억제제도 듣지 않는 괴물이 발정기를 해소하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그 난행이 평범한 인간 상식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소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라히무스가 살아 숨 쉬고, 움직이고, 말을 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감사하고 기쁜 마음이 들어야 마땅한데, 마냥 그럴 수가 없었다. 소녀는 질색하듯 비탄의 말을 남겼다.

“…끔찍해.”

그러고는 비틀대는 몸을 일으켜 세워 붙잡으려는 라히무스를 뿌리치고 어딘가로 뛰어갔다. 남자는 왜 그러냐는 말을 꺼낼 틈도 없이 그저 조급하게 나니아의 뒤를 쫓았다.

사방에서 죽음의 냄새가 진동했다. 차라리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발아래로 펼쳐질 광경을 직접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었더라면 지금 이렇게 두 발로 걸어 다닐 엄두조차 나지 않았을지 몰랐다.

“모나쿠.”

그녀는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기다리듯 축수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쿠나모!”

어디서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매일매일 안아서 토닥여 주던 사이였으니, 대부분 아는 얼굴들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은 낱개의 죽음 그 이상일 수밖에 없었다. 소녀의 가슴은 또 차오른 울음으로 헐떡거렸다.

“쿠, 쿠나모…. 모나쿠….”

원숭이들은 서까래만 놓여 있는 나무 천막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그녀는 사이좋게 손을 붙잡고 생을 마감한 둘 사이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말이 없는 그들을 이제는 분간해 낼 재주가 없었다. 둘 중에서도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녀석의 안면에 깃든 공포가 나니아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즉사조차 사치였던 듯, 고통을 끌어안고 서서히 죽어 간 얼굴이었다.

“모, 못 해 줬는데….”

여자가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는 소리에 라히무스가 반응했다. 그녀는 후회 막심한 눈물을 뚝뚝 흘리며 통탄했다.

“친해지면 해 준다고, 그렇게 말해 놓고 내가…. 뽀뽀 한 번 해 주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뭐?”

남자는 어리둥절함을 넘어 어이가 없어졌다. 조금 마른 듯한, 그러나 여전히 우악스럽고 강건한 팔이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대체 뭔데, 이건.”

남자가 핏기 없이 서늘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기절한 그 짧은 사이 털 북슬북슬한 원숭이와 바람이 났다고는 믿기 힘들었다. 나니아는 붙잡힌 팔목을 포함하여 양손으로 라히무스의 가슴을 퍽퍽 두들겼다.

“왜 그랬어!”

리자드는 비딱하게 인상을 좁히면서도 피하지 않고 구타당했다. 솜방망이가 가슴 안쪽을 제법 따끔거리게 했다.

“얘들은 널 지켜 주려고 했는데, 너는 왜 그랬어!”

그녀가 따져 묻는 것은 응당 라히무스가 알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소녀는 고개를 들어 험악한 리자드를 올려다보았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체열. 무시무시하게 흔들리는 용의 꼬리. 피부 곳곳에 드문드문 돋아난 비늘. 평소보다 더 날카로워진 송곳니. 맹렬하게 붉은 뱀의 눈동자. 아마도 그의 생모가 부러뜨려 버린 듯한 반쪽짜리 뿔.

두려움에 질린 보랏빛 눈동자가 라히무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발정기 리자드의 모습은 여자를 현혹하기 위해 지옥에서 솟아난 악마처럼 관능적이었다.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서워.”

그리고 아름다웠다.

“…끔찍해.”

그리고 매혹적이었다.

“네가…. 네가 무섭고 끔찍해, 라히무스….”

퉁명스러운 손짓 한 번으로도 그의 피를 말릴 수 있는 소녀는, 남자가 제일 싫어하는 방식으로 잔인한 말을 꺼냈다. 사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축수잖아. 겨우 버러지 몇 마리 죽었다고 나한테 그렇게 말하는 거야?”

“겨우…? 당신한테는 이게 겨우라고 말할 수 있는 숫자야?”

나니아는 바닥에 펼쳐져 있는 선명한 살해의 현장을 가리키며 따져 물었다.

“그리고, 라히무스가 그렇게 말해도 돼? 너도 다르지 않잖아. 네 출신도 별반 다르지 않은 거잖아!”

“…….”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는 듯, 남자의 놀란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저 여자가 그래?”

“당신도 축수 피가 섞였다며. 당신도 이들과 같다며!”

“…아니, 난 리자드야. 그리고 당신, 당신, 그렇게 부르지 마!”

사내는 꼬리 끝을 맹렬히 휘두르며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차가운 호칭에 성을 내는 것은 덤이었다. 나니아는 그런 시답잖은 투정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계속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사내를 탓했다.

“조금 모자라긴 해도, 순박한 사람들이었어. 이런 짓을…. 이런 짓을 당할 이유가 없었어.”

“사람이라니. 이건 그냥 괴물들이야, 나냐.”

라히무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대꾸하였다. 그가 가진 죄책감의 수준은 개미를 밟아 죽였을 때나 느낄 법한 약간의 꺼림칙함, 그 이상은 아닌 듯했다.

“괴물…?”

나니아는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냐는 듯이 경멸스러워했다.

“당신이야말로 괴물 같아, 라히무스.”

나니아는 끔찍하다는 듯이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하지만 밀려나는 쪽은 그녀 자신이었다.

한 발 뒤로 물러선 여자가 울분을 쏟아 냈다.

“여기서 가장 끔찍한 괴물은, 바로 당신이라구!”

피가 차갑게 식었다. 뜨겁게 쿵쾅거리는 동맥을 보아서는 그럴 리가 없는 데도.

“…괴물.”

사내는 그 말을 여러 차례 곱씹듯 중얼거렸다. 흉포한 리자드의 안면 곳곳에 힘줄이 돋았다.

앙다물어진 어금니 아래로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날카로운 턱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사내는 괴물이란 말을 너덧 번 더 중얼거리더니 나니아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발정기 리자드의 깊숙한 가슴 한구석에는 미처 꺼지지 못한 불씨가 남아 있었다. 들쑤셔진다면 언제든 다시 큰불로 번질 수 있는. 가물었던 흥분이 다시금 끓어올랐다.

“…진짜 괴물이 뭔지 보여 주지.”

리자드는 나니아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면서 주인 잃은 빈집을 찾아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소녀의 미약한 저항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생부는 물론이고 생모까지도 외면했던 그의 태생은 리자드가 되기 위해 빚어진 알에서 시작되었다.

축복 없이 부화하였지만 건장하게 자라난 리자드 사내에게 그깟 핍박과 학대쯤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반쪽짜리 핏줄은 부정하면 그만이었다. 문제는 그의 아비가 너무 유명하고, 그의 어미가 너무 요란한 사랑을 했다는 것이었다. 스스로 빈 둥지 출신이 되기를 자처하며 도망쳐 나온 뒤로도, 라히무스에게는 여전한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잡종.

그를 아는 자들은 흔치 않은 형태로 빚어진 그의 출생에 대해 말하기를 즐겼다. 사내는 비정상적인 욕망과 수단으로 태어난 괴물이었다.

“하지 마…. 이러지 말아요, 라히무스.”

평생을 부정해 온 본성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러나 이다지도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

“놔, 안 해요. 안 할 거야.”

사내의 거무죽죽한 감정은 용광로 속에서 끓는 쇳물처럼 붉게 뭉쳐졌다. 걱정, 불안, 분노, 색욕, 서로 다른 흥분의 감정이 한데 뒤섞여 데일 듯한 온도를 띠었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축수들을 향한 노여움이 그대로 나니아에게 전이되었다. 그녀의 분실이 가져온 갈급증과 초조함도 함께였다. 간신히 참고 있던 생식과 파괴에 대한 욕구에 불씨가 당겨졌다.

사내는 날카로운 손끝으로 나니아의 옷을 북북 찢어 버렸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를 가슴 아프게 만들던 문제의 넝마였다.

“하기 싫다고 했어!”

내 말 들리지 않느냐는 듯, 소녀는 목소리를 높였다. 공기 중에 훤히 드러난 살갗을 수치스러워하며 양팔로 감싸 안았다.

“싫어요, 싫다니까.”

남자가 너무나 그립고 보고 싶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런 기분으로 그와 사랑을 나눌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더 하면 강간이야!”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 경고하는 말을 듣고 사내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강간?”

어떻게 너랑 나 사이에 그런 단어가 끼어들 수 있냐는 듯 충격받은 듯 중얼거리던 리자드는, 이내 곧 험악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휘두르는 팔에 몇 번 맞아 주던 리자드는 이내 그녀의 팔목을 빼앗아 눌러 놓고 무섭게 을러댔다.

“괴물은 그런 거 몰라.”

“하지 마. 깨물 거야! 깨물어 버릴 거야!”

“…그래, 해 봐. 좋네, 그것도.”

나니아는 바르작거리며 말로만 입질을 해 댔다. 사내는 그런 나니아의 허벅지를 팔뚝 쥐듯 손쉽게 제압하고 보드라운 살결 위에 거친 손자국을 냈다. 뒤이어 벌려 놓은 다리 사이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당장에 빨아먹을 것처럼 다가오는 입김을 감지한 소녀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 질렀다.

“그러지 마, 싫어!”

사내는 계속되는 거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땀과 애액이 배어 있는 그녀의 음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 축축한 감촉과 냄새는 열대의 습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그곳은 당연하게도, 평소보다 조금 더 더러운 상태였다. 깨끗하게 씻은 후에도 물려 놓기 부끄러운 비부를 남자가 허겁지겁 빨아 대기 시작하자 역겹고 수치스러워서 눈물이 차올랐다.

“흐읍…. 아, 아읏….”

허리를 뒤틀고 허벅지를 오므려 봐도 소용없었다. 앙칼진 손톱이 리자드의 등가죽을 할퀴고 꼬집었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모든 저항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은 소녀는 남자를 구타하던 손을 거두어 자신의 얼굴을 덮었다.

“싫어, 창피해, 싫어…!”

이따금 날카로운 송곳니의 감촉이 닿을 때면 질구가 바짝 수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 야릇한 위협에 몸이 떨렸다. 남자의 혓바닥은 여느 때처럼 뜨겁고 말캉했다. 그 축축한 살덩이가 볼록한 대음순을 좌우로 넓게 핥다가 점점 중심을 향해 왔다. 할짝대는 방향을 바깥에서 안쪽으로 서서히 좁혀 오고 있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끈질긴 애무였다. 그리고 너무 오랜만이었다. 사내는 평소보다 더 끈덕지게 입술을 움직였고, 흥건한 타액은 착실하게 음부를 적셔 나갔다.

“아, 라히무스….”

음탕한 몸은 괴로운 마음과 다르게 점점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 저속한 감각을 똑똑히 기억했다. 종잡을 수 없는 쾌락으로 몸이 벌벌 떨렸다.

“읏, 아, 으응…!”

호흡이 신음이 되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라히무스의 거친 숨결은 소리가 아닌 온도로 느껴졌다. 조그마한 살덩이들을 물고 빠는 소리만이 그의 말소리를 대신했다.

그렇게 얼마나 빨아 댔을까.

커다란 손등이 젖은 입술을 닦아 냈다. 흉흉한 눈동자가 험악한 빛으로 물들었다.

“…어때, 괴물하고 붙어먹는 기분이.”

남자가 빈정댔다.

“그동안 내가 너무 신사적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 리자드 흉내는 그만두려고.”

지금껏 수컷 리자드로서의 정체성과 사회성으로 말미암아 간신히 통제되고 있던 사내는, 그나마 가지고 있던 상식조차 놓아 버리겠노라고 선포했다.

“강간할 여자에게 잠자리 매너 같은 건 지킬 필요 없겠지.”

라히무스는 사타구니에 처박았던 고개를 들어 소녀의 젖은 살에 피 몰린 중심을 가져다 댔다. 맞닿은 성기를 아슬아슬하게 치대고 비비는 그의 움직임은 흡사 전희를 즐기는 사람 같았지만, 어두운 낯빛은 조마조마해 보였다. 어느 한 가닥 살짝만 잡아당겨도 실밥이 뜯어질 옷처럼 아슬아슬했다.

나니아는 기가 차서 항변했다.

“원래부터 그런 매너 같은 건, 지킨 적 없으면서…!”

주제에 섹스 예절을 운운하다니 가당찮은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래? 그거 큰일이네.”

리자드는 비딱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보다 더 정중할 순 없었는데, 나는.”

남자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나니아의 입에서는 히익, 하고 놀란 숨이 들이켜졌다. 두꺼운 핏줄이 돋아 우둘투둘한 리자드의 음경이 단번에 그녀를 꿰뚫고 들어왔다.

“앗…! 응, 아…!”

소녀는 작살에 꿰인 사냥감처럼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사내를 배워 버린 몸은 참으로 쉽게 틔워졌다. 단지 그 저돌적인 삽입만으로도 질 내벽이 가쁘게 진동했다.

아랫구멍을 꽉 채워 오는 부피감이 짜릿했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남성을 느끼게 된 자신의 몸뚱이가 징그럽고 경멸스러웠다. 표피가 거세게 딸려 내려간 쾌감은 그 역시 맹렬했는지, 라히무스도 잠시 눈을 감고 허리를 떨었다. 발정기를 맞아 쾌락은 배가되었다. 가늘게 벌어진 눈꺼풀 속, 붉은 눈동자가 희미하고 탁했다. 흥분으로 흐리멍덩해진 동공에선 초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리자드는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괴물이든 뭐든…. 네가 날 뭐라고 생각하고, 뭐라고 부르든, 너는 이제 도망 못 가…. 너무 늦었어, 나냐.”

그가 뱉어 내는 흥분이 뜨겁고 눅눅했다.

“시… 싫어, 비켜 줘. 안 할래, 나 안 할래!”

저항하며 바둥대는 작은 몸을 억센 팔로 꼼꼼히 끌어안았다. 사내의 우람한 몸집은 단지 포옹하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꼼짝 못 하게 옭아맬 수 있었다.

“가만히 있어….”

평소에도 이 짓이 그렇게나 좋았는데, 발정기가 되니 더했다. 온몸이 성기가 되어 버린 것처럼 찌릿찌릿하고 예민했다. 사내는 온몸으로 그녀를 느꼈다. 말랑한 살 위에 몸을 포개어 놓고 끊임없이 이곳저곳을 비비적거렸다.

“아, 씨발…. 너무 좋아….”

다분히 본능만 남아 있는 야만스러운 몸짓이었다. 발정이 끝나려는 듯이 제정신이 돌아오는가 싶던 그는 또다시 이성을 놓아 가고 있었다.

“안에다 가득 싸 줄 거야…. 너랑 밤새도록 교미할 거야, 나냐….”

소녀는 평소와 다른 맥박과 숨소리에 그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흥분에 흠뻑 젖은 그의 눈빛을 마주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아, 안 돼, 그만….”

입으로는 거절을 말하면서, 하반신으로는 계속 그를 쥐어짜고 있었다. 파고든 성기가 통감하기로는 그저 빨리 움직여 달라는 뜻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질 내부가 질끈질끈 빨아 당기자 사내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다정하게 대해 주고 싶었던 그간의 노력 아래, 저열히 꿈틀대고 있던 집착과 폭압의 이면을 느꼈다.

리자드는 몸을 흔들어 그녀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미끈하게 들락거리는 감각에 나니아의 몸에도 점차 열꽃이 피었다. 자주 입던 옷처럼 익숙한 감촉. 익숙한 부피. 익숙한 품. 평소보다 거칠게 덤벼들어서 버겁기는 했지만, 소녀는 이 몸뚱이를 알았다. 끔찍하고 황홀한 열락에 빠져들 수밖에 없게 만드는 부피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아, 라히, 라히무스, 응, 아, 아읏, 응…!”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힘겹게 교성을 뱉어 내는 일뿐이었다. 그조차도 짐승의 흥분을 단단히 돋우는 듯했다. 한참을 그렇게 흔들어 대던 사내는 짓눌렀던 윗몸을 살짝 떨어뜨려 음산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입 벌려.”

무슨 짓을 하려는 것인지 잘은 몰라도 추저분한 음행일 게 뻔했다. 나니아가 고개를 모로 돌리며 거부하자, 그는 억지로 턱을 잡아끌었다.

“뭅, 싫, 읍!”

무작정 저항하는 그녀의 입술을, 사내는 흥건하게 물고 빨았다. 지척에서 느껴지는 억센 숨결이 확실히 인간 같지는 않았다. 볼이 짓눌려 둥글게 뭉쳐진 입술이 리자드의 입 안으로 함빡 빨려 들어갔다. 삼키다시피 한 입술을 흐물흐물 녹여 버릴 것처럼 한참 동안 굴려 먹었다.

그러다 아주 약간 입술을 떨어뜨리더니, 입 안에 고인 침을 상대방에게 먹이듯이 흘려 넣었다. 그것은 뱉는다기보단 질질 흘리는 것에 가까웠다. 끈적하게 이어진 타액이 그녀의 혓바닥을 적시며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소녀는 입을 다물 여력도 없이 그 짓을 모조리 당하고만 있었다.

“더, 더러워….”

남자가 자신에게 이런 짓을 시킨다는 걸 믿기 힘들었다. 심장이 벌렁거렸다.

“야만인! 변태! 짐승!”

소녀는 사내의 등을 끌어안고 있던 손으로 주먹을 쥐고 그를 들때렸다. 그 와중에도 꿰뚫린 몸은 끝없이 예민해지고 있었다. 남자가 다시 한번 같은 행위를 시도하려 하자, 그제야 고개를 돌려 세찬 거부의 움직임을 보였다.

“시, 싫어, 그거 하지 마….”

고개를 비트는 방향을 따라 몇 번이나 쫓아오던 라히무스는 결국 겁탈하듯 입을 맞추었다. 누구 것인지 불분명해진 타액을 도로 빼앗아 가기라도 하듯 질척한 키스였다. 그렇게 한참을 지저분하게 빨아 대다가, 남자는 잠시 입술을 떨어뜨려 놓고 스산하게 속삭였다.

“…다음엔 좆물을 먹일 거야.”

“하, 하기만 해 봐, 씹어 버릴 테니까…!”

“보지에 아무리 싸 줘도 네가 임신을 못 하잖아.”

남자는 그게 불만이라는 듯 골이 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밀어붙였다. 등 밑을 완강히 받친 팔이라거나 엉덩이에 철벅철벅 부딪혀 오는 허벅지에 잔뜩 힘이 들어간 것이 느껴졌다. 소녀는 씹어 버리겠다느니 똑같이 침을 뱉어 주겠다느니 성난 소리를 지껄이면서도 사내의 단단한 육신이 밀어붙이는 쾌감에 속절없이 흔들렸다. 절정이 가까워짐에 따라 골반을 들썩이던 나니아는 지독한 흥분으로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다.

“그만, 그만…. 나, 가, 나 가아…!”

백치처럼 질질 흘리는 신음에, 박아 대는 쪽에서도 점점 속도를 높였다. 쉴 틈 없이 가해지는 육박으로 나니아는 금방 오르가즘에 다다랐다. 몸에서 힘을 놓아 버릴 만큼 강렬한 감각이었다.

탈력감에 늘어진 육체와 다르게 질 내벽은 쉴 틈 없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보통 이쯤이면 움직임을 멈춘다거나 속도를 늦추어 여유를 되찾게 해 주는 라히무스였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 그만…. 그만, 나 이제…!”

리자드가 상반신을 일으켜 앉으며 자세를 바꾸었다. 나니아는 한도에 다다른 몸으로도 끊임없이 헤집어졌다. 소녀의 몸은 거의 반으로 접히다시피 허리가 들어 올려져, 다리가 얼굴과 나란히 놓이는 추태를 겪었다. 거꾸로 뒤집히듯 꺾여선 커다란 성기가 들락거리는 꼴을 직접 지켜봐야 했다.

“이런 건, 시, 싫어…!”

이왕 할 거라면 사람답게 하고 싶었지만, 상대는 짐승이라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색사에 빠져들었다. 이어지는 만행은 그동안 신사적으로 행동했다는 말을 믿게 만들 정도였다.

“창피해…. 싫어….”

그는 제정신이 박힌 남자라면 절대 시키지 않았을 온갖 기형적인 체위로 그녀를 괴롭혀 댔다. 본인 말마따나 자기 딴에는 섹스 매너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신경 쓰고 있었는지, 그 한계를 부수어 버림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었다. 최소한의 상식마저 저버린 사내가 어디까지 파렴치해질 수 있는지 나니아는 깨달아야 했다.

“아, 이런 건 싫어…. 싫어, 라히무스, 내려 줘, 내려 줘….”

“무릎이 아프다고 해서 위로 올려 줬더니, 뭐가 또 불만이야.”

불평하는 나니아에게 까칠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녀는 라히무스의 몸 위에서 천장을 보고 누운 채,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각도로 음부가 들쑤셔지고 있었다.

“너는 그냥 내가 흔들어 주는 대로 앙앙대기만 하면 되잖아.”

사내의 음침한 목소리가 오소소한 감각을 남기고 덜미를 스쳤다. 울퉁불퉁한 그의 몸뚱이는 기대어 누워 있기에 편치 못했다. 리자드의 길고 매끈한 음경이 금방이라도 튕겨 나갈 듯한 각도로 내벽을 긁었다. 거미처럼 바닥을 짚고 꺾인 다리가, 세워 놓은 무릎이, 쳐올리는 속도에 따라 덜덜덜 흔들렸다. 낯선 방향으로 출입해 들어오는 성기는 마찬가지로 생소한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한편 라히무스는 하반신으로 느끼는 쾌감보다도 눈으로 읽는 자극이 더 커서, 바로 누워 납작해진 소녀의 젖가슴을 커다란 앞발로 움켜쥐었다. 그것을 그러모아 손잡이라도 되는 것처럼 주물러 대더니, 감탄 같은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 말랑말랑해….”

도드라진 핏줄과 흉 진 살갗으로 험상스러운 자신과 다르게 어린 소녀는 온몸이 보드랍고 말캉거렸다. 그 부들부들한 감촉이 사내를 미치게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잘근잘근 씹어 놓고 싶을 정도였다. 리자드는 참지 못하고 그녀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잠자리를 갖는 내내 붉은 잇자국과 습한 울혈이 가엾은 소녀의 전신에 수놓아졌다. 남자가 요구하는 성행위는 집요하게 한참을 이어졌다.

“이, 이제 제발…. 으응, 놔, 놔줘….”

매가리 없는 저항은 끝을 모르고 습관처럼 이어졌다. 다물어지지 못한 입술 사이로 달뜬 신음이 새어 나갔다. 이전 같았으면 당장에 페니스를 빼내고 토닥여 주었겠지만, 이제는 그런 말을 들으면 더욱 흥분하면서 몰아세우기만 했다.

똑같이 천장을 바라보던 나니아의 고개를 모로 꺾었다. 리자드는 혀를 내밀어 반쯤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여자가 입을 다물자 라히무스는 으르렁거렸다.

“입 벌려….”

다급히 싫어하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리자, 라히무스는 윗입 대신 아랫입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는 나니아의 오금 밑으로 억센 팔을 밀어 넣었다. 바닥을 짚고 있던 다리를 들어 올려 기댈 곳이라곤 오로지 자신의 몸 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서로가 연결된 부위로 완전히 힘이 쏠리는 것을 느꼈다. 소녀는 거의 몸이 던져지다시피 흔들리며 굵직한 성기에 콱콱 처박혔다.

“아, 안 돼…. 쌀 것 같아, 라히무스…! 시, 싫어, 싫어…!”

“싸고 싶어? 응? 기분 좋아, 자기야?”

이성을 잃고 소리를 질러 대는 그녀가 귀여웠다. 더욱 몰아세워서 엉망으로 울부짖게 만들고 싶었다. 그녀가 무시하는 자신처럼, 같은 높이로 끌어내리고 싶었다. 애인의 바닥을 보고 싶었다.

“하, 씹…. 잘 느끼네….”

“아, 으응, 응, 읏, 그, 그읏, 그만, 그만!”

“괴물은 싫어도, 괴물 자지는 좋은 거지?”

“읏, 아냐, 아냐…!”

멈추어 달라고 애원하는 말이 오히려 그를 부추기고 있었다.

“흐…. 읏, 아…. 안….”

잘게 떠밀어 대는 탓에 허리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식의 도망은 허락지 않겠다는 듯 복부에 팔을 감아 왔다. 내리누르는 완력을 이겨 낼 수 없어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사내의 뜨거운 입김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기력을 놓아 버린 나니아는 그의 몸 위에서 요동쳤다. 리자드는 그녀를 겁박하듯 몰아세웠다.

“이렇게, 좋아하면서, 흣, 씨발, 보짓물, 읏, 줄줄, 흘리면서, 어? 대체, 뭐가, 흣, 하아…. 뭐가 아니야….”

“앗, 아니, 잇, 으, 으응…!”

“하아…. 좋아…. 젠장, 너도 좋은 거지? 응? 좋아, 나냐?”

“아니, 아냣, 앗, 아, 나, 이제 더는…!”

얕고 성급하게 들락거리는 양물이 그녀를 버거운 절정으로 떠밀었다. 입구가 빠르게 문질러지면서 요도도 함께 자극을 받았다. 더불어 내벽 너머의 방광까지 쿵쿵 찧어 대는 통에 참기 힘든 요의가 닥쳐왔다.

“나, 싸, 시, 싫어, 싸, 쌀 것, 놔줘, 놔줘, 라히무스!”

갈급해진 그녀가 소리쳤다. 허리를 뒤틀며 몸부림을 쳐 보았지만 제압하는 힘이 압도적이었다.

“아…. 나도 쌀 것 같아, 자기야….”

리자드는 황홀경에 빠져서 중얼거렸다.

“아, 으아, 바, 바보, 그, 말고!”

나니아는 말아 쥔 주먹으로 리자드의 허벅지를 마구 내리치며 복장 터진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오, 오줌 쌀 것 같단 말야!”

절정을 참는 감각과 소변을 참는 감각이 흡사했다. 터져 나갈 듯한 쾌락 앞에 중첩된 충동이 사타구니 사이로 몰리고 솟구쳤다. 이대로 놓아 버린다면 더없이 참혹한 일이 벌어질 게 분명했다.

“빨리, 빨리 내려 줘! 제발…!”

“씨발, 쌀 것 같은 게 그거였어?”

사내는 그 말을 듣고 나니아를 놓아주기는커녕 도리어 꽁꽁 감싸 안을 뿐이었다.

“아, 아으, 제, 제발!”

“그냥 싸라니까. 다 핥아서 닦아 준다고, 내가….”

억센 힘이 그녀의 허벅지를 양쪽으로 활짝 벌려 놓았다. 추진력을 얻은 하체가 더 거센 속도로 그녀를 쳐올렸다.

“아, 제바알, 흐아, 시, 싫…!”

“하, 씨발…. 나도 쌀 것 같은데….”

쑤시는 각도가 달라질 때마다 방광이 새로운 충격을 받아들였다. 백발 양보해서 그것까지만 해도 참아 줄 만했다. 사타구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그의 손이 음핵을 짚고 떨어 대지만 않았어도.

“싫어! 만지지 마! 하지 마, 제발…!”

소녀는 그 흉악한 마수에서 벗어나고자,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다. 손톱을 세워 라히무스의 손등을 꼬집고 할퀴었다. 하지만 떼어 내려 용을 쓰면 쓸수록 그는 더 집요하게 손끝을 흔들고 굴릴 뿐이었다. 나니아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울음을 터뜨렸다. 그와 동시에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나와서는 안 될 액체가 무참히 쏘아 올려지고야 말았다.

“싫어어!”

참아 왔던 쾌락을 쏟아 내는 감각은 처참할 정도로 짜릿했다. 참으려 할수록 도리어 살에 묻을 뿐이라 차라리 힘을 주는 편이 낫다는, 그 찰나의 판단을 내리면서 소녀는 참혹한 기분을 맛보았다.

“아, 흐윽, 흑….”

리자드는 쾌감으로 허리가 휜 나니아의 허벅지를 활짝 벌려 안으며 윗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전부터 보지 못해 안달이었던 그 장면을 두 눈에 똑똑히 담았다.

온몸을 거쳐 왔을 그 맑고 더러운 액체는 라히무스의 손을 적시고, 살기둥을 적시고, 마룻바닥에까지 흘러내렸다.

“씨발, 너는 어떻게 오줌도 귀엽게 싸….”

“제, 제발, 라히무스…!”

사랑하는 암컷이 쾌감에 못 이겨 방뇨해 버리고 마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거센 욕정을 느꼈다. 까만 머리카락을 걷어 올렸더니 그 안으로 사랑스러운 절경이 펼쳐졌다. 배설하는 모습 그 자체보다도 이렇게 수치스러워서 죽겠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는 점이 좋았다.

사내는 마음이 동해서, 그 또한 소변량에 버금가는 정액을 울컥울컥 분출해 냈다. 단단한 음경은 튕겨 나오듯이 그녀의 몸 안에서 빠져나와서 소녀의 뽀얀 살결 위로 더러운 체액을 흩뿌렸다.

두툼한 귀두가 그녀의 음핵을 비비고 문지르면서, 한 방향으로 분출되던 물줄기가 이리저리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합쳐지기를 반복했다. 맑은 물줄기가 쪼르륵 잦아지던 그 순간에도 사내의 남근은 나니아의 조그마한 살 알갱이에 비벼지고 있었다.

“…짐승 새끼랑 짐승 짓 하니까 어때.”

남자가 흥분을 머금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한테 이런 것까지 보여 줘 놓고…. 어디 도망칠 수나 있겠어.”

그의 말대로였다.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 없는 최저의 추태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애액들로 흥건히 젖은 음부. 그 위로 끈적한 추상화가 그려졌다. 점성질의 체액은 소녀의 가랑이 사이는 물론이고 배 위에까지 흩뿌려졌다. 나니아는 엉엉 울어 버렸다. 동시에 커다란 탈력감이 그녀를 덮쳐 왔다.

“나한테만 보여 줘야 해….”

야수는 그녀의 뺨에 자신의 뺨을 마주 대고 부드럽게 으르렁거렸다.

“나 말고 다른 새끼 앞에서 이렇게 보지 까서 보여 주면 안 된다고. 알아들어?”

나니아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리자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잔뜩 예민해진 소녀의 클리토리스를 다시 오른손으로 굴리고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넌 물도 너무 많고, 특히 안쪽이, 씨발…. 좆대가리 녹여 먹을 것처럼 말랑거려….”

네 개였던 손가락은 한 개가 되어, 길쭉한 중지 한 개만 홀로 남아서 나니아의 내부로 침범해 들어왔다.

“아무거나 쑥쑥 삼킬 것 같아서 불안하단 말야, 젠장….”

끈적이고 촉촉한 감각에 사내는 다시금 빠져들었다. 나니아는 대꾸 없이 헐떡이기만 했다. 젖혀진 고개가 그의 어깨에 기대어졌다. 인사하듯 비벼지던 사내의 남성이 다시 파고들려는 기미가 보이자, 그녀는 힘겹게 신음했다.

“그만, 정말 그만해…!”

아래로 뱉을 수 있는 건 다 뱉어 낸 느낌이었다. 수치를 모르고 쏘아 낸 배설물들이 딱딱한 마룻바닥에서 그들 자신처럼 난잡하게 섞였다. 이제 더는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육체적인 어려움보다도 정신적인 버거움이 지대했다.

“아직 부족해….”

“제발, 아으, 응…!”

“한참 멀었어.”

소녀의 저항은 가볍게 묵살당했다. 정액 범벅이 되어 버린 질구는 출입이 훨씬 수월해졌다. 나니아는 끝을 모르고 지속되는 쾌락에 고통스러울 정도로 빠져들었다. 절정, 그 끝엔 다시 또 절정이었다. 붕 뜬 허리가 몇 번이고 파르르 떨리며 감출 수 없는 쾌감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수도 없이 자세를 바꾸어 가며 살을 섞었다. 뒤집히고 들리고 깔리고. 그러다 다시 또 엎어졌다. 남자의 위에서, 아래에서, 또는 옆에서 다채롭게도 들쑤셔졌다. 대체로 그의 밑에 송장처럼 누워서 헐떡이는 자세가 최선이었다.

정중하기 위해 노력했다던 말은 과연 거짓이 아니었다. 자제력을 발휘할 생각이라곤 요만큼도 없어 보이는 그의 맹렬한 기세를 받아 내며, 소녀는 그동안 라히무스가 얼마나 봐주고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사내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렇게 횡포를 부릴 수 있는 남자였다. 연약한 아가씨 한 명 손 하나 꼼짝 못 하도록 유린하는 일쯤은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두려울 정도로 광활한 몸집 아래에서 나니아는 자아 없이 흔들렸다. 그야말로 교미라 불릴 만한 행위였다. 어찌나 지긋지긋하고 집요하게 구는지 이따금 까무룩 잠들어 버리기도 했다.

기절하듯 쓰러진 사람을 상대로도 발정기 야수는 끈질기게 자신을 밀어 넣었다. 희미하게나마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떠보면, 여지없이 범해지고 있었다.

“아, 이제, 그만…. 정말, 그만….”

“정신이 좀 들어?”

“아, 응, 으아, 앗….”

“아, 깼으면 여기 좀 봐 봐…. 응? 자기야….”

“응, 아, 아흣….”

“자기 눈 보면서 하고 싶어….”

어수룩하게 깎아 놓은 목각 인형처럼 기절하듯 누워 있는 나니아도 어여뻤지만, 역시 바르작거리며 반응해 주는 쪽이 더 좋았다. 거부하고 저항하며 질색하는 모습은 남자의 사냥 욕구를 불타게 했다.

나니아는 일부러 뜬 눈도 질끈 감고 그의 애절한 바람을 무시했다. 감히 눈을 마주치며 섹스하려 들다니.

“눈 떠.”

“…싫어.”

“눈 떠.”

“시, 싫다구…!”

“그래…. 계속 그렇게 감고 있어 봐. 잘됐어. 다음엔 얼굴에 싸 줄 테니까….”

“흑, 흐읏….”

“제대로 감고 있어. 눈에 들어가면 아파, 애기야.”

“…으, 싫어….”

“하, 씹…. 얼마나 예쁠까…. 땀에 젖어도 이렇게 예쁜데. 그치, 나냐….”

“아, 아읏…!”

깜깜했던 밤하늘이 어느새 푸르스름하게 밝아오고 있는데도, 사내는 좀처럼 지칠 줄을 몰랐다.

“너무 많이, 아, 응…!”

아무리 빌어 봐도 소용없었다. 사타구니가 아린 것보다도 수도 없이 절정을 느껴야 하는 점이 가장 괴로웠다. 이토록 폭력적인 오르가즘은 처음이었다. 질 내벽이 녹진하게 녹아내려 그의 성기와 찰싹 달라붙어 버린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다신 다물어지지 않을 것처럼 미끈미끈한 질구도 끊임없이 경련하고 있었다.

나니아는 있으나 마나 한 얇은 천 위에서 등이 배길 정도로 들쑤셔졌다. 상대를 꼬집거나 끌어안을 힘조차 남지 않은 양팔이 무기력하게 늘어졌다. 그저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느낌이었다.

몽롱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헐떡이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여명이 드러낸 사내의 육신은 미세하게 마른 느낌을 주었다. 며칠씩 섭취도 활동도 없었던 만큼 근육이 조금 빠진 듯했다. 다른 사람에 비하자면 여전히 위협적인 덩치이지마는, 나니아는 알 수 있었다. 조금 야윈 듯한 사내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신경질적이고 사나워 보였다. 날카롭게 벼려진 턱선이 뾰족한 인상을 돋웠다.

꼬리를 넘어 옆구리를 타고 올라오던 비늘도 보이지 않았고, 맹금류의 앞발처럼 무시무시하던 손톱도 제자리를 찾았다. 탐욕스럽게 헐떡이는 숨소리나 뱀처럼 요사스럽게 꿈틀대던 눈동자도 이젠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으앗, 아, 아…. 아, 라히무스….”

“응, 나냐….”

“으응, 읏….”

“너무 좋아…. 너무….”

“으, 조, 좋….”

“아, 끈적해…. 안에 너무, 흣….”

쳐올리는 몸짓을 따라 숨소리도 끊어졌다.

“나냐, 나냐….”

그것은 말이라기보다는 울음소리 같았다.

“아….”

어쩌면 낯모르는 괴수에게 당하는 듯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친숙한 얼굴이 눈앞에 선명히 와 닿았기 때문이리라.

“아, 사랑해…. 사랑해, 나냐….”

“으, 으응…. 흐앗….”

“나한테는 이제 너뿐인데…. 미워하지 마, 응?”

“흣, 아, 으흣…. 라, 라히무스….”

“제발, 괴물이든가…. 그런 말 하지 마…. 응? 사랑해. 사랑해, 자기야….”

“아….”

어둠이 걷히고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귀에 닿는 목소리나 눈에 선한 그의 얼굴이 새삼 안도감을 자아냈다.

허리 아래로는 이보다 더 폭력적일 수가 없으면서, 얼굴은 마치 자신이 겁탈당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긴박하고 절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그였다.

그녀가 아는 라히무스였다.

눈을 감기 전에 벌어진 모든 일이 꿈같이 느껴질 정도로, 남자는 사랑스러웠다.

‘…보고 싶었어.’

소녀는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낼 힘이 없었다. 그를 올려다보는 무기력한 눈동자는 마치 물 밖으로 쫓겨나온 생선처럼 흐리멍덩했다. 그를 그리워하던 마음에 갑작스레 모든 심중을 장악당했다.

애달픈 시선이 마주치자 사내는 또다시 눈이 뒤집혀서 짐승처럼 허리를 처박아 댔다. 나니아는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틈 없이 닥쳐오는 입술에 그마저도 봉합돼 버렸다. 사내는 기진맥진한 상대를 붙잡고 자비 없이 몰아세웠다. 성난 감정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그저 맹목적인 애욕만이 남아 있었다. 허리를 바로 세우고, 두 손을 맞잡은 채, 허벅지를 흔들었다.

“아, 아, 응, 아…!”

눈물 젖어 엉망이 된 얼굴에 까만 머리카락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눈물 머금은 보랏빛 눈동자는 습윤한 보석처럼 빛이 났다. 동그랗고 하얀 얼굴 위로 발갛게 달아오른 두 뺨의 열기는 사내의 마음을 후끈하게 덥혔다. 이런저런 어여쁜 색채로 물든 나니아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졌다. 리자드의 마음도 덩달아 얼룩덜룩해져 갔다.

“예뻐…. 너무 예쁘다….”

라히무스는 덥고 습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땀에 젖어 한 몸처럼 들러붙어선, 이제 누구 것인지 모를 체액을 접합부로 흥건히 교환했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달콤한 피앙세라니. 어찌 놓아줄 수 있을까.

“내 거야…. 넌 내 거야, 나냐…. 내 암컷이야….”

사내는 첫 발정을 맞이한 소년처럼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열에 들떴다.

“아, 좋아…. 너무 좋아….”

“으, 조, 좋지, 않, 아, 나 더 못 해…!”

“사랑해, 나냐.”

“으응, 제발….”

“사랑해….”

소녀는 밭은 신음을 흘리며 쉴 새 없이 흔들렸다. 사내는 그 조그맣게 벌어진 입술을 몇 번이나 달게 빨았다. 마음에 품은 여자와 이토록 황홀한 발정기를 지내보기는 처음이었다. 나니아에게는 미안하게도, 그에겐 너무 완벽한 밤이었다.

* * *

야외나 다름없이 허름한 오두막. 그 안쪽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정체 모를 체액이 이곳저곳에 흩뿌려져 난잡한 정사의 흔적으로 남았다. 밤새도록 짐승같이 굴러 댄 증거였다. 소녀는 자신이 저질러 놓은 짓에 외면하기 힘든 수치심을 느꼈다.

‘…지저분해.’

참담한 기분으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온몸이 비명을 질러 댔다. 삭신이 쑤셨다. 잔악한 도마뱀에게 물어뜯긴 살갗이 성한 곳 없이 얼룩덜룩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그녀는 엉망진창으로 더럽혀진 자신의 몸을 스스로 살펴본 다음에야 저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남자를 돌아보았다.

커다란 창 하나를 넘어온 햇살이 그를 비추었다. 나니아와 간음을 나눈 상대는 가증스러울 정도로 평화롭게 잠들어 있었다.

소녀는 씨근덕거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목제 베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나니아는 그것으로 사내의 얼굴을 내갈겼다. 철썩, 둔탁하게 아픈 소리가 났다. 간밤의 수모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을 가득 실은 일격이었다.

작지 않은 충격이 리자드의 잠을 깨웠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끔뻑끔뻑 초점을 찾았다. 사선으로 내리꽂히는 태양 빛이 눈을 뜨기 어렵게 만들었다.

나니아는 새된 소리를 내지르며 다시 한번 목침을 휘둘렀다. 연약한 소녀가 흉기로 사용하기에 손색없는 물건이었다.

“이 살인마, 강간마!”

그 통렬한 질타에 사내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랑하는 애인의 목소리로 듣기엔 지나치게 섬뜩한 호칭이었다.

“이 나쁜 새끼…. 더럽고, 천박하고, 사악하고, 저질에다가, 이, 이… 변태 도마뱀! 죽어, 죽어 버려!”

그에게로 매서운 폭언과 폭행이 쏟아졌다. 사내는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아….”

여자가 휘두르는 나무 베개에 퍽퍽 얻어맞으며 시큰거리는 콧등을 지그시 눌러 보았다. 다행히 부러진 것 같지는 않았다. 이대로 계속 얻어맞다간 골절은 아니어도 코피는 흐를 것 같았다. 라히무스는 눈을 질끈 감고 날아오는 베개를 피해 팔을 들어 올렸다. 시커멓게 잠긴 목소리로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아, 그만….”

“뭐? 그만?”

소녀는 그 ‘그만’이라는 소리가 참으로 어이없어서, 베개를 내두르는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너는, 내가, 어제, 몇 번을, 그만하라고, 했는데!”

소녀는 한마디에 한 대씩 분을 풀었다.

“…미안.”

“미안?”

사과가 너무 쉽다는 점도 화가 났다.

“그런 말로 넘어갈 수 있겠어요, 내가?”

“아, 미안…. 미안해, 자기야….”

“그렇게 부르지 마, 이 악마야!”

“악마라니….”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하게 성을 내던 소녀는 이내 제풀에 지쳐 목침을 내던졌다. 그러고는 양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목 놓아 울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해!”

그녀는 충격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쉼 없이 꿍얼거렸다.

“어떻게 이유도 없이…. 살아 있는 생명을 그렇게….”

“…….”

훌쩍이는 목구멍에 가래 같은 울음이 잔뜩 껴 있었다. 이어지는 나니아의 말은 남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돼, 돼지나 닭도 그렇게는 안 죽이잖아…. 짐승도 그렇게는 안 죽인다구….”

“…뭐?”

라히무스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녀가 질책하는 내용이 짐작과 달라서였다. 남자가 사과하려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너한테 멋대로 군 점이… 화난 게 아니었어?”

“그것도 당연히 화나!”

소녀는 야무지게 말아 쥔 주먹으로 온 힘을 다해 그를 때렸다. 두들기는 대로 몸이 쿵쿵 울렸지만 사내는 꿈쩍 않는 것 같았다.

“나쁜, 나쁜 놈아!”

소녀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나랑 뒹굴 수가 있어.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어떻게…!”

경멸을 토해 낸 입술이 울음을 참으려는 듯이 앙다물어졌다. 그 추레한 원망은 사실 나니아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주검으로 가득한 나락 속에서, 그녀는 무엇을 했는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을 죽인 남자와 살부터 섞었다. 그 몰상식한 쾌락에 빠져든 이상, 자신도 공범이나 다름없었다.

미안하고, 부끄럽고, 치욕스러웠다.

소녀는 손등으로 눈물을 찍어 내며 훌쩍였다.

“당신이 너무 무섭고 끔찍해, 라히무스….”

“…….”

그 말은 사내의 말문을 턱 막히게 했다. 어쩌면 괴물이라는 표현보다 더 쓰라린 소리였다. 남자가 물었다.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대관절 어떻게 주워 담으면 되겠냐는, 그런 간곡하고 반항적인 물음이었다.

여자는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다리를 가슴까지 끌어당겼다. 작게 웅크린 등이 코 먹는 소리와 함께 들썩였다.

리자드는 억울함과 후회가 반반 섞인 표정으로 손가락만 까닥거리고 있었다. 자신을 살인마라고 부르는 상대에게 감히 닿을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쁜 놈, 나쁜 도마뱀….’

사내는 의심할 여지 없이 포악무도한 악당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무엇일까. 나니아는 고뇌하였다.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을 직시하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뉘우치는 사람처럼 울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보다 더 끔찍한 건, 이런 일을 겪고도 너를 미워할 수가 없는 내 자신이야….”

악한을 사랑하는 일은 이율배반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당신이 깨어나서, 당신이 나타나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어! 그런데 나는…. 나는 네가 이렇게 움직이고 말을 한다는 게 너무 기뻐….”

그가 눈을 떠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자신이었다. 남의 목숨 열 개보다, 그의 목숨 하나가 더 소중한 자신이었다.

“너랑 눈을 마주칠 수 있다는 게, 이렇게 행복할 줄 몰랐어.”

부적절한 안도감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그게 너무 싫어…. 내가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게 너무 끔찍하고 싫다구요, 라히무스….”

사실은 당장이라도 그의 너른 품에 뛰어들고 싶었다. 안겨서 엉엉 울고 싶었다. 보고 싶었노라, 그리웠노라, 부르짖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도 문밖에 쌓여 있을 시신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런 나니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사내는 커다란 몸집으로 억센 팔을 뻗어 오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내가 미안해, 나냐. 울지 마….”

정확히 무엇을 잘못했는지에 대한 자각도 없으면서, 리자드는 회개하는 척했다. 기쁘다든가 행복하다든가 하는 그런 불완전한 사면에 기대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살결에서 그리운 체취가 맡아졌다. 따스한 체온도 여전했다. 울음 가득한 목소리가 잔물처럼 일렁였다.

“나는 당신을, 그리고 나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문제는 용서할 수 없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은 별개의 감정이라, 좀처럼 저버릴 수 없는 애증이 들끓었다. 축수들의 죽음을 티끌 없이 애도하기에, 그를 너무 사랑했다.

* * *

울로피, 그녀는 지독한 불청객이었다. 부족함 없이 단란하게 살아가던 무리에 자격 없이 편승하여 주제 넘는 소속감과 가족애를 누리다, 끝내는 자신을 징벌할 전차로 무고한 저들을 압사하였다.

허탈한 심정으로 시체들 사이를 누비던 그녀는 깊은 회한에 빠져들었다. 숨어야겠다는 생각보다도,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도망칠 수 없었다. 도망치지 않았다는 말이 더 합당할지도 모르겠다.

아침 해는 여명의 색을 흩뿌리며 솟아올랐다. 여자는 그때까지 모든 삶의 의지와 희망을 잃고 주저앉아 있기만 했다. 등 뒤로 묵직한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젠 늙어서 도망칠 힘도 없던가?”

악인의 그것처럼 차갑고 비열한 조소도 함께였다. 축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을 노려보는 아들의 얼굴을 마주하였다. 여자는 저것의 손에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죽을 용기도 없었으니, 차라리 잘됐다.”

그녀가 말했다. 한숨도 이루지 못해 퀭한 눈가엔 허망한 비관만이 가득했다. 리자드는 말없이 비딱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널 곱게 죽여 줄 것 같아?”

어제처럼 맹목적으로 달려들지만은 않는 녀석은, 침착한 눈깔을 보건대 비교적 제정신으로 돌아온 듯했다. 자신이 분질러 놓은 반쪽짜리 뿔도 이젠 보이지 않았다. 두 모자 사이에 덤덤한 침묵이 오갔다.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

리자드가 물었다.

“없어.”

돌아오는 대꾸는 무성의하고 짤막했다.

“…없어.”

라히무스는 그녀의 말을 차분히 곱씹는 듯하다, 이내 불같이 성을 냈다.

“없어? 어떻게 없을 수가 있어!”

거친 발걸음으로 터벅터벅 다가온 사내가 울로피의 멱살을 잡아 뜯었다.

“당신 동생들이 내 손에 어떻게 뒤졌는지, 그때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그거라도 물어봐야 할 거 아냐!”

어디 가서 힘으로 밀리지 않던 그녀는 리자드가 휘두르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가슴 언저리에 닿을 때쯤 방기해 두었던 자식이, 어느새 머리 위로 자라 있었다.

“…안 궁금해.”

끝내 라히무스는 울로피의 멱살을 던지듯이 놓아 버렸다. 지저분한 욕설이 그의 입 밖으로 내뱉어졌다. 한발 늦게 뒤따라 나온 나니아가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라히무스….”

그는 재빨리 뒤를 돌았다. 시선을 차단하다시피 가로막으며 그녀의 앞에 섰다.

“우, 울로피는, 그러니까, 당신 엄마는….”

“엄마 아냐.”

아는 척하기가 무섭게 라히무스의 입에서 부정하는 소리가 나왔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아니야.”

“맞잖아.”

소녀는 나를 바보로 아느냐는 듯이 따지고 들었다. 아직 전후 사정을 정확하게 이해하지는 못하였으나, 대화를 듣고 짐작할 수 있었다. 기적적으로 상봉한 가족치곤 살기만이 가득한 게 의아했지만.

“난 엄마 같은 거 없어.”

엄마라니. 라히무스는 그런 따뜻한 말로 불릴 만한 존재를 가져 본 적 없었다.

“한 번도 부모라고 생각한 적 없어.”

그리고 그것은 울로피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아니란다고 아니게 되는 관계가 아니잖아요….”

소녀는 자신처럼 천애 고아인 줄만 알았던 라히무스가 서먹해졌다. 멀쩡히 혈육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낯설어서, 심지어 자신이 아는 사람이었다는 게 놀라워서 희미하게 말끝을 흐렸다.

라히무스는 조금 씁쓸한 눈빛으로 말없이 인상을 찌푸렸다. 한 번도 부모라고 생각한 적 없다는 그 말은, 사실 반쯤은 거짓이었다. 자식이 부모의 사랑을 바라는 마음을 어찌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그녀는 남자가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복수의 대상인 동시에 갈망의 대상이었다. 만나서 무얼 하고 싶었던가.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지난날의 네가 알던 어리고 약한 리자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고, 따지고 싶고, 비난하고 싶었다.

라히무스는 나니아에게서 등을 돌려 다시 울로피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내는 그녀의 귀에만 묻을 정도로 나지막한 선포를 남겼다.

“…딱 하루야. 지금부터 주어진 시간.”

여자가 살아 있는 한 이 비참한 미련은 평생토록 단념되지 않으리라.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벼려 왔으나 막상 얼굴을 보니 쉽지 않았다. 그녀의 동생들을 주저 없이 처단하던 때와는 달랐다. 이런 식으로 조우하게 될 줄은 몰랐던 탓일까. 마음의 준비가 부족함을 느꼈다.

“또 도망치려면 도망쳐 봐.”

화해 같은 것은 바라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았다. 이대로 그녀를 죽이거나 놓치거나 선택지는 둘 중 하나뿐이었다. 사실은 어느 쪽도 괴로울 것 같았다. 조금쯤 피해 버리고 싶은 기분마저 들었다. 마음속 한구석에는 차라리 도망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싹트고 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사랑해 주는 애인이 생겨서, 넉넉해진 마음이 베푸는 마지막 자비였다.

남자는 나니아가 시키는 대로 장례 의식에 착수하였다. 예식이라고 해 봐야 별건 없었다. 죽임당한 이들을 땅에 묻고 고인을 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었다. 죽은 이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게 그리 많지 않았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맞잡아 조촐한 예를 올리는 것이 그녀로서는 최선이었다.

간특한 리자드는 옆에서 나니아가 하는 양을 따라 하다가 눈을 흘금 떠서 곁눈질하였다. 귀 뒤로 곱게 넘긴 머리카락, 발그레하고 둥근 뺨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맞잡은 손 앞에서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어여뻤다. 제 손으로 찢어 버린 축수들의 생을 애도하기보다는 기도를 올리는 애인의 모습에 정욕을 느끼기 바쁜 것으로 보아, 남자는 악마가 맞았다.

“…여기가 끝이에요.”

마지막 한 구덩이를 남겨 놓고 드디어 삽다운 삽을 발견한 라히무스는 혀를 끌끌 찼다. 여태껏 사용하던 연장을 던지듯 버려두고 새로운 삽을 손에 들었다. 소녀는 사내가 어디선가 구해 와서 깔아 놓은 깔개 위에 가지런히 앉아 있었다. 모아 앉은 무릎 위에 팔을 올려놓고 가만히 턱을 괴었다. 실컷 울었더니 이젠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벌건 눈시울로 묵묵히 애도할 뿐이었다. 그녀는 리자드가 흙을 파는 동안 내내 고요하다가 문득 울로피가 사라져 간 방향에 시선을 둔 채로 입을 열었다.

“…더 얘기 나눠 보지 않아도 되겠어요?”

시종일관 나니아의 눈치를 보기 바빴던 라히무스가 모처럼 불퉁한 대꾸를 꺼냈다.

“누구. 울로피? 하…. 그 여잔 신경 쓰지 마.”

구시렁거리는 목소리에 불만과 불신이 가득했다.

“널 뭘로 꼬드겼는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정 줄 만한 상대 아냐.”

부드러운 표토 아래 비교적 단단한 토층이 드러났다. 딱딱한 흙을 파내기 위해 부지런히 힘이 들어갔다. 두꺼운 팔뚝에 힘줄이 섰다. 무더운 기후는 단순한 몸짓만으로도 땀이 줄줄 흘렀다. 그렇게 한참을 힘쓰던 사내는 잠시 윗옷을 끌어와 턱 끝과 목덜미에 흐른 땀을 닦았다.

소녀는 삽 머리를 밟느라 단단해진 그의 다리에 눈길을 주었다. 그녀는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데도 손바닥에 땀이 가득했다. 그 땀이 더운 날씨 때문인지 초조한 기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간밤의 추악한 음행을 떠올리게 하는 야릇한 육신에서 관심을 덜어 내기 위해 그녀가 말문을 열었다.

“라히무스 뿔, 엄마가 부러뜨렸다는 거죠? 왜 사실대로 말을 안 했어요?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녀가 스스러운 후회를 드러내자, 라히무스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부모한테 뿔을 뜯겼다는 미친 소릴 내 입으로 하고 다니라고? …엄마 아니라니까.”

리자드는 삽을 밟던 발에 다소 신경질적으로 힘을 가하며 퍼낸 흙을 멀리 던져 버렸다. 나니아는 그와 대화한다기보다는 혼자서 죄를 고백하듯 말을 이었다.

“그치만…. 말하지 않으니까 다들 라히무스가 문란하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흉보고 욕했잖아요…. 솔직히 나도 내심 믿고 있었구요. 그게 너무 미안해요. 그동안 내가 많이 오해했어요.”

그녀의 진솔한 사과에 화답하듯 돌부리가 삽 끝을 턱 하니 가로막았다. 사내는 그대로 하던 일을 멈춘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꼭 오해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다. 이 달갑잖은 화제에서 벗어날 방법을 궁리하며 미적대는데, 다행히 나니아의 관심이 다른 쪽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궁금증은 라히무스가 아닌 울로피를 조명하였다.

“왜 하필 뿔이었을까요….”

말거리가 다른 쪽으로 옮겨 가자 리자드는 안도하였다. 대수롭지 않은 척 대꾸를 이었다.

“자기가 갖지 못했으니까.”

리자드의 두각은 진실한 순애의 상징이었다. 그러니까 생부의 뿔은, 애당초 그녀가 꿈꿔서는 안 될 물건이었다. 그녀가 사랑한 리자드 수컷의 뿔은 그의 본부인에게 바쳐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여잔 어릴 때부터 날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었다. 한 살 두 살 자라나면서 점점 더 심해졌지.”

“왜요?”

“날 보면 그 남자가 떠올랐을 테니까.”

“그 남자라면…. 아버지요?”

나니아의 물음에 라히무스는 떨떠름한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은 부모에게 가장 쉬운 분풀이 대상이잖나. 나를 괴롭히고 망가뜨려서, 그를 욕보이는 듯한 착각에라도 빠지고 싶었던 거다.”

축수는 발정기를 틈타 리자드의 몸을 탐하는 일에는 성공했으나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차지하지는 못했다. 자식을 가지면 그가 책임감을 느껴 주기라도 할 것이라 믿었던 모양이지만 어림없는 희망이었다.

어미는 그 결핍에 대한 열등감을 자식에게 풀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리자드 소년의 여린 뿔은 그렇게 희생되었다. 그것은 일종의 대리 만족이자, 복수이자, 정신병의 발로였다. 암표범 네 마리에게 둘러싸여 조롱당하던 기억이 지금까지도 생생했다.

“그럴 사람 같지는 않았는데….”

라히무스가 말하는 울로피와 나니아가 아는 울로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아랫사람을 아끼고 보살피던 그녀의 모습을 생각하면 좀처럼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십여 년이라는 시간은 감히 무시할 수 없는 긴 세월이었다. 울로피와 겨우 며칠 알고 지냈을 뿐인 그녀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라히무스는 생모에게서 위협적인 덩치와 사나운 인상만을 물려받은 듯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닮은 듯도 하였지만, 구석구석 따져 보면 닮은 구석이 별로 없어서 나니아는 그의 아버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해졌다. 울로피처럼 초연해 보이는 여자를 홀려 놓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죄 많은 얼굴을 하고 있을까.

뾰족한 반쪽짜리 두각의 형태가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소녀는 미처 말하지 못한 잘못을 생각해 냈다. 금세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라히무스, 나….”

그녀가 새로운 말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끼워지지 않은 맨손이 서로를 붙잡고 꼼지락거렸다.

“잃어버렸어요….”

“뭘?”

“반지….”

라히무스의 시선이 나니아의 손끝으로 와 닿았다. 이제야 그 허전함을 발견했다.

‘내가 이걸 멋으로 끼워 놓은 줄 알아?’

‘그거 빼기만 해 봐.’

반지를 빼 놓는 일에 대해서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이번에도 무섭게 을러대려나. 낙심하거나, 분노하거나, 둘 중 하나의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 예상했다.

“어디서?”

“그날 배에서. 급히 도망치다가 그만….”

어디서 잃어버렸느냐고 묻던 라히무스는 나니아의 대답을 듣고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러곤 그가 다시 흙바닥에 삽을 찔러 넣었다. 생각 외로 태연한 라히무스의 반응에 나니아는 얼떨떨해졌지만 일단 사과부터 했다.

“미, 미안해요….”

“괜찮아.”

남자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녀가 반지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본인 의지로 ‘버리는 것’이었다. 따라서 분실쯤은 아무래도 괜찮았다. 잃어버려서 미안해하는 나니아를 보니, 그만큼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는 생각에 제법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또 만들 수 있으니까.”

리자드는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 올리며 머리 위로 손을 가져갔다. 돋아난 두각이 사라진 자리가 어쩐지 조금 간질간질한 듯도 했다. 남자의 뿔은 정상적인 방법으로 단각되지 못했기 때문에, 뿌리가 길게 남아 있는 편이었다. 단면이 울퉁불퉁한 까닭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멋쩍게 내려놓은 앞머리가 이마 위로 어지러이 흩어졌다. 사내는 어딘지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눈빛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

창피한 마음에 일부러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괜히 삽질에 집중하는 척 앞만 보고 말했다.

“나중에 네가, 직접 잘라 주든가….”

낮게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두근두근하게 심장을 주물렀다. 소녀는 덩달아 볼을 붉히며 두 눈을 깜빡였다. 무언가 낯간지러운 소릴 들었다는 느낌은 있는데 정확히 와 닿지는 않았다.

리자드가 내뿜는 달콤한 오라에 휩싸여있던 소녀는, 문득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아차 싶어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런 말을 들으려고 꺼낸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니야…. 나,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나니아가 고개를 숙이며 부정하자, 라히무스는 그녀를 안심시키려 했다.

“반지 하나 만드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아. 아주 조금만 더 잘라 내면 돼. 손가락 한두 마디 정도. 어쩌면 전에 부러뜨렸던 그 뿔이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아니야. 그런 말이 아니에요.”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상대방의 말을 끊었다.

“반지를 받을 수 없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뜻이 아니라?”

라히무스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나니아는 거짓처럼 순진해 보이는 눈빛을 받으며 심란해졌다. 산재한 문제들로 덮어 두었던 고민이 다시금 머리를 들었다. 남자가 어떠한 연유로 자신에게 빠져 있는지 알게 된 후로, 나니아는 그의 사랑을 전과 같이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곰팡이가 피어 버린 빵처럼 먹지도 버리지도 못하게 만드는 망설임을 남겼다.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던 그녀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예전에 파비푸스 성으로 끌려갔을 때요…. 내가 어떻게 도망쳐 나왔는지 말해 준 적 없었죠?”

라히무스는 이야기가 왜 그리로 튀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물약 상점 앞에서 무자비하게 얻어맞던 축수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생쥐의 뾰족한 주둥이와 자글자글한 주름을 가진 늙은이였다.

“나는 그 축수가, 내가 그때 상점 앞에서 자기를 감싸 준 것이 고마워서, 그래서 나를 구해 줬다고 생각했어요.”

소녀는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진저리쳤다. 쿰쿰한 감옥 냄새가 코끝을 맴도는 듯하였다.

“그 남자는 나를 구원자라고 불렀어요.”

눈에 익은 모양의 글자로 쓰인 책을 펼쳐서 보여 주던 그가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 보면 축수들 사이에서 읽히는 일종의 종교 서적이라도 되었던 것일까.

“낙원으로 데려가 달라느니, 신부로 맞이하겠다느니, 평생을 함께 살자느니…. 영락없이 미친 사람 같았지요. 잘못 걸렸구나 싶어서 무서웠어요. 팔에 묶인 천만 태우려다가 그 집 전체에 불을 질러 버렸는데, 그렇게 도망쳐 나왔어요.”

그녀의 덤덤한 회상이 라히무스의 눈썹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렸다. 그녀가 말해 주는 모든 것들이, 그로서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나니아의 화상투성이 양팔과 라키바하프의 구출 문제로 여념이 없어서 미처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구원이라든가, 낙원이라든가…. 그런 이상한 말들은 한동안 잊고 살았어요. 라히무스가 알려 준 글자로 아버지의 일기를 읽기 전까지는요.”

혹시 그도 축수들이 믿는 바에 관하여 아는 바가 있을까. 넌지시 떠보려는 의도였으나 그는 울로피나 뮤와는 다르게 영 모르는 눈치였다. 나니아는 어쩔 수 없이 혼자만 아는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아버지도 축수들에게 구원이라 불리며 숭배의 대상으로 모셔졌다고 적혀 있었어요. 나는 그 명칭을 우연이라 생각하기 힘들었어요. 그들에게는 신앙이 있었어요, 라히무스.”

구원. 남자는 영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 낱말을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도통 알 수 없었다.

“들어 봐요. 그러다가 슈쉬라가 사용한 수면 탄약이 우리 중에 당신에게만 듣는 것을 보고 알았어요. 축수 혼혈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다는 걸….”

혼혈 운운에 리자드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별로 듣기 좋은 말은 아닌 게 분명했다. 담론은 다시 이곳 부스러기 섬으로 돌아왔다.

“여기 처음 왔을 때… 축수들은 모두 나를 좋아했어요. 잡아먹힐까 봐 두려웠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요. 나에게 좋은 냄새가 난다고…. 예쁘다든가 귀엽다든가, 평생 들을 칭찬은 다 들었던 것 같아요. 같이 있으면 행복하다면서 자꾸만 만져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는…. 나는 매일 같이 그들을 안아 줘야만 했어요.”

나니아는 모나쿠와 쿠나모가 떠올라서 심경이 착잡해졌다. 그런 나니아를 앞에 두고 사내는 황당한 분노를 느꼈다.

“그 새끼들도 눈은 달려 있었을 테니까. 근데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야. 시체들 상대로 질투라도 하라고?”

역시 죽여 버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는 비밀이었다. 간악한 리자드가 무슨 생각을 하는 줄은 모르고, 나니아는 서글퍼졌다.

“이상하지 않아요? 나는 그런 식으로 누군가의 첫인상에 호감이 되어 본 경험이 별로 없어요.”

자신 없이 내리깐 눈동자에 축축한 슬픔이 어렸다. 그녀는 묵혀 왔던 눈물을 내비치며 중얼거렸다.

“떠올리게 했단 말이에요. 그들이 보이는 행동이 꼭….”

“꼭?”

“꼭 당신 같았단 말이야….”

“…나?”

남자는 자신을 가리키며 바보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앞에서 소녀는 코끝이 붉어졌다.

“내가 라히무스한테 나를 왜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그때 넌 그냥이라고 했잖아. 그냥.”

차분하고 침착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목소리가 울렁거렸다.

“그 대답이 우리 관계를 말해 주는 거예요.”

“…그 얘기가 여기서 대체 왜 나와.”

“이곳의 축수들도 나를 구원이라고 불렀어요. 그건 신화 같은 게 아니었어요.”

나니아는 그가 잠들어 있는 동안 홀로 속 썩을 수밖에 없었던 문제의 사연을 설명했다. 뷔셀의 일기장으로부터 또는 울로피의 전언으로부터 보고 들은 이야기였다.

“나한테 그런 힘이 있대요. 축수들을 끌어당기는 힘….”

부모님이 그녀에게 남겨 준 핏줄은, 이 사랑엔 너무나도 비극적인 유산이었다.

“첫눈에 반했다고 했잖아. 나는 항상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나 같은 애한테, 그럴 리가 없는데…. 라히무스는 처음부터 나한테 속고 있었던 거야. 내가 예쁘다고, 내가 향기롭다고, 나를 좋아한다고, 그게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밖에 없었던 거라구요.”

“…그건 또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라히무스는 손에 든 삽을 던져두고 나니아에게로 다가와 무릎을 굽혀 앉았다. 우는 얼굴에 손을 올리며 답답하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착각? 내가?”

초조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다르게 눈물을 닦아 주는 손끝이 다정했다.

눈물 젖어 일렁이는 보랏빛 눈동자가 남자를 애타게 했다. 아무래도 자신은 그녀를 웃게 만드는 재주 따윈 없는 모양이었다. 우는 얼굴이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한편 꼴려서 죽을 맛이었다.

“이렇게 예쁜데…. 내가 대체 뭘 착각했다는 거야, 자기야.”

나니아는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예쁘다는 그의 말도 이젠 도무지 기쁘지가 않았다. 쓰라린 가슴을 더욱 먹먹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동안 또 거울 보는 거 깜빡했나 본데.”

사내가 그녀를 어르고 달랬다. 그 말이 다소 우스갯소리처럼 들렸다. 하지만 듣는 이는 농담할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울상이었다. 나니아는 그의 가슴을 밀어 내며 칭얼거렸다.

“아니야, 다 거짓말이야. 당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 거라구요.”

남자는 밀쳐지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내가 뭐에 씌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

“…그래요. 당신이 제정신이었더라면, 나한테 반하는 일 같은 건 없었을 테니까. 무언가에 씌었던 거나 다름없죠.”

“제정신이 아니라는 거야, 내가?”

“내가 조축수가 아니고, 당신이 축수가 아니었더라면….”

“나는 축수 따위가 아니라 리자드라고.”

계속되는 부정이 신경을 날카롭게 벼려 놓았다. 사내는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부정할 또 다른 핑곗거리를 찾아냈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밀었다.

“그래, 백 발 양보해서 그렇다고 치자. 내가 빌어먹을 잡종 새끼라는 걸 인정할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지?”

“당신은 나라는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조축수로서의 나에게 끌린 거잖아요.”

나니아는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그녀는 점점 더 감정적으로 변해 갔다.

“꼭 내가 아니었어도 됐던 거잖아요. 내가 그런 체질이 아니었더라면 우리 관계가, 우리 사이가, 이렇게까지 발전하지는 못했을 거라구요.”

소녀는 그에게 조금씩 젖어 드는 사랑을 했다. 서서히 스며든 자신의 감정은 의심할 여지 없이 진실이었다.

하지만 라히무스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발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고 풍덩 빠져 버린 것에 불과했다. 나니아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일종의 사고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이 나한테 끌리고, 내가 당신한테 끌렸던 그 모든 순간이,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는 일이었단 게, 그게 너무 괴로워. 그게 너무 후회돼. 더는 전처럼 당신을 사랑할 자신이 없어, 나는….”

처절한 비관과 함께 나니아는 울음을 터뜨렸다. 잠자코 듣고만 있던 라히무스는 후회된다거나 사랑하지 못하겠다거나 하는 말들을 들으며 인내심이 바닥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우연?”

그는 달갑잖은 느낌의 헛웃음을 흘리며 그녀가 정의 내린 이 관계의 이름을 곱씹었다. 기가 차는 소리였다.

“아, 그래…. 확실히 우연이었지. 그날 마구간에서 너를 만난 것까지는.”

리자드의 흥분한 목소리가 점차 격앙되어 갔다. 전에 없이 빈정대는 듯한 말투였다.

“그것까지는 우연이라고 부를 만해. 인정하지. 계획대로 움직였더라면, 그 좁아터진 산골 영지까지 갈 일도 없었을 테니까.”

우연을 인정하겠다고 이야기한 그는, 말과 다르게 그다지 수용적이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내는 삿대질하듯 신경질적인 말을 쏘아붙였다.

“하지만 그때 난, 네 입술 한번 빨아 보겠다고 개수작 부리지 않을 수도 있었어. 네가 자는 곳까지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지 않을 수도 있었고, 얼마든지 너를 두고 그곳을 떠날 수 있었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 온 발자국은 모두 라히무스 자신의 것이었다. 사내가 사내에게 주는 연서 따위 찢어 버리면 그만이었고, 이제 갓 성인이 된 인간 계집애 따위 도움보다는 방해가 될 게 뻔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잖아…. 너는 모르겠지만, 나한텐 매번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어.”

거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무안함이 그라고 어찌 없었을까.

“네가 그 새끼랑 나를 저울질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저울에서 그냥 내려올 수도 있었어. 글자 가르쳐 주겠다는 핑계로 너를 어떻게든 내 침대에 눕혀 보려고 용쓰지 않을 수도 있었어. 그즈음부터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반지를 줬다가 뺏었다가 하면서 나를 희망 고문했잖아. 그때 내가 너를 포기했더라면, 우린 지금쯤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나니아는 말없이 그가 말하는 만약의 상황을 떠올려 보았다. 파비올라에 남아 돌아오지 않는 라키바하프를 기다리는 자신이라거나, 라키바하프와 함께 파비푸스에서 살림을 차리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 터무니없는 가정은 좀처럼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그 망할 영주 새끼 구해 달라고 했을 때도, 무시하고 내 갈 길 갈 수 있었어. 게롤린에서 그 난리 피우지 않고 조용히 북쪽 해협을 통과해 갈 수도 있었어. 내가 널 포기했다면, 네 사정 따위 모두 외면했다면…. 그래, 네 말대로 우리 지금 이런 관계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었겠지.”

사내는 거칠어진 호흡을 커다란 한숨 한 번으로 정리하려 했다. 그러나 한번 달아오른 흥분은 쉽게 가라앉혀지지 않았다.

“너를 차지하기 위해 나는 무엇이든 했어. 그런데 너는, 내 이 모든 노력을 우연이라고 말할 셈인가? 그동안의 모든 사건 사고들이, 내가 내 의지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에 씌어 저지른 일 같아?”

남자가 저 멀리 구덩이에 파묻을 송장 더미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는 나를 저기 누워 있는 것들하고 같은 취급하고 싶은 모양인데.”

그는 그녀가 여타 다른 축수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듯한 태도에 화가 나는 듯했다.

“너야말로 내가 그저 너 좋다고 달려드는 개새끼들 중에 하나, 그냥 그쯤으로밖에 보이는 거 아냐?”

“…그런 거 아냐.”

나니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남자는 그런 그녀의 턱을 커다란 한 손으로 움켜쥐며 사납게 눈을 빛냈다.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서 판단력이 흐려진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섬뜩할 정도로 음산했다.

“너야말로 무언가 대단히 착각하고 있다고, 뷔셀.”

그가 부르는 낯선 이름에 몸이 움칠 떨렸다. 나니아는 즉각 대꾸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페로몬 같은 게 오간다고 했단 말야. 그, 그것 때문에 당신 판단력이 흐려져서….”

고집스러운 불신이 이어졌다.

“페로몬?”

“마치, 그러니까…. 리자드와 우우룡의 관계에서처럼….”

의아해하는 사내를 보고 나니아는 자신 없이 더듬거렸다. 주장하는 이조차도 좀처럼 확언하기 힘든 추측이었다. 라히무스는 조금 놀라워하며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가만가만 턱을 문지르며 골몰하는 것으로 보아 조축수와 축수 사이에 관한 이야기를 허무맹랑하게 여기지만은 않는 것 같았다. 남자는 입술이 바짝 마르고 목구멍이 간질간질해졌다. 눈만 겨우 드러낸 얼굴에선 묘한 설렘이 피어났다.

“…씨발, 그럼 처음부터 네가 나를 작정하고 꼬셨단 거잖아?”

“뭐, 뭐라구요…?”

나니아는 내가 지금 대체 무슨 소릴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 말을 미처 이해하기도 전에, 묵직한 포옹이 육박했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사내는 끌어안은 머리통에 코를 처박고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처음엔 분명…. 젠장, 그게 페로몬 때문이었다고 하면 이해가 돼.”

코끝을 부드럽게 간지럽히는 머리카락의 감촉과 비강 깊숙이 밀려들어 오는 살 내음이 그를 황홀하게 했다. 새삼 가슴이 벌렁거렸다.

“그러니까, 이게 나냐 네 페로몬이란 말이지….”

어딘지 과하게 흥분한 듯한 목소리가 여린 귓가에 뜨뜻하고 음험한 바람을 속삭였다. 언제나 아른거리던 감각을 페로몬의 형태로서 인식한 순간, 어렴풋이 간질거리기만 하던 기분은 더욱 농밀한 자극으로 와 닿았다. 이것이 그녀의 체질이 자아내는 유혹이었다면, 앞선 주장을 일부 철회할 의향이 있었다. 라히무스는 여러모로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하아, 씹…. 이런 걸 아무한테나 질질 흘리고 다니면 어쩌자는 거냐고….”

본인은 자신의 꾐에 반응해 주지 않으면서 이렇게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유혹을 지속해 왔다니. 사람을 잔뜩 홀려 놓은 주제에 책임지지 않을 생각이었다는 것도 앙큼하기 짝이 없었다.

남자는 그것이 무척 설레고 만족스러워 보였지만, 나니아로서는 그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동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페로몬에 끌리는 그를 보며 허구적 욕망을 느꼈다.

“그래서 가짜라는 거예요, 나에 대한 당신의 마음이.”

구슬픈 목소리에 리자드는 고개를 물렀다. 혼자서 황홀경에 빠져들던 일을 멈추고 나니아를 바라보았다. 다시금 그녀에게 반해 버린 자신과 다르게, 상대는 더없이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었다.

남자가 의아한 듯이 되물었다.

“가짜라고?”

“페로몬이 아니었더라면, 당신이 날 좋아할 이유 따윈 없었던 거잖아.”

리자드의 상식으로는 그녀의 반응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뭐가 그렇게 이상하지? 남녀 사이에 당연한 거잖아.”

“그치만… 나는 리자드가 아니고, 라히무스랑 나는 그냥 남녀 사이가 아니잖아.”

“남녀 사이가 아니면 뭔데?”

“당신이 나를…. 나를 신적인 존재로 여길 만큼 맹목적인 본성이 뒤따르는 관계인 거잖아요, 당신이랑 나 사이는.”

그것이 연인 간의 사랑으로 발전되어도 좋은 감정이 맞느냐며 나니아는 불안해하고 서러워했다. 남자는 별 헛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구원인지 뭔지, 나는 그 너한테 그런 마음 들었던 적 없어. 신이랑 떡칠 생각으로 가득한 신자라니. 그딴 게 가능할 리 없잖아. 신성 모독이군.”

남자는 비웃으면서 말했지만 나니아는 심각했다.

“꼭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라, 그러니까 우린 마치…. 애완동물과 주인 사이의 그런…. 그런 감정일 수도 있어. 그런걸, 그럴지도…. 모르잖아….”

말을 하면 할수록 그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게 보여서, 나니아는 말끝을 흐렸다. 남자는 크게 빈정 상한 얼굴로 되물었다.

“애완동물?”

“난, 내 생각엔, 그…. 우우룡이 그렇다고 해서요…. 그러니까 마치, 강아지처럼…. 그런 감정일 수도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소녀는 자신 있게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초조하게 흙바닥을 내려다보며 있지도 않은 입술의 딱지를 뜯었다. 외면하고 싶은 따끔한 시선이 옆얼굴로 느껴졌다.

“…네가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줄 몰랐는데.”

엄숙하리만치 낮은 목소리가 무거운 실의를 건넸다. 크게 유감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져서 나니아는 당황했다.

“아뇨, 내가 아니라 라히무스가….”

“전에도 비슷한 얘기 했었잖아. 나는 너랑 친구 할 생각 같은 거 없다고. 그런데 이제는 애완동물인가?”

“아니, 내가 그렇게 느낀다는 게 아니라요….”

“나니아.”

남자는 끓는점에 다다르기 직전의 온도로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네게 남자이고 싶어. 그딴 애착 짐승 같은 게 아니라, 네가 의지하고 싶고 안기고 싶은 수컷이 되고 싶다고.”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는 듯 침울해하는 라히무스의 얼굴을 보고, 나니아는 덩달아 울고 싶어졌다.

“결과적으로 어떻든, 당신 의지와는 관계없이 품게 된 감정이잖아요.”

“내가 내 의지대로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시켜서 널 좋아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라히무스는 페로몬 때문에 나를 억지로 좋아하게 되어 버린 거니까.”

“억지로?”

그녀는 그것을 발산할 줄만 알았지 수용해 본 적은 없으니, 그런 소리를 태평하게 지껄일 수 있는 것이었다. 계속해서 공전하는 대화에 남자는 지쳐 갔다.

“페로몬에 조종당한다는 게 뭔지, 너는 몰라.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지.”

소녀의 무지를 비난하는 목소리에 거친 원망과 분노가 묻어났다.

“나는 성년이 된 후로 수도 없이 그런 일을 겪어 왔어! 조절할 수 없는 충동에 지배당하는 일. 원치 않게 흥분하고 발정하는 일. 나는 그게 너무 싫어서, 스스로 살을 찢고 묶여 지냈어. 단 한 번도 즐거웠던 적 없어.”

즐기기는커녕 치욕스러운 기억만이 가득했다.

“어제 너랑 같이 보낸 잠자리가 나한텐 처음이었어. 넌 끔찍했겠지만…. 젠장, 난 너무 좋았어…. 좋아하는 암컷이랑 발정기 때 붙어먹는다는 게…. 씨발, 다른 새끼들이 왜 거기에 그렇게 목을 맸는지 알게 되어 버렸다고.”

어젯밤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랫도리가 지끈지끈했다. 사내는 상대방의 목덜미에서 지난밤의 흔적을 찾으며 마른침을 삼켰다. 저를 음흉하게 훑는 시선을 느낀 그녀는 얼굴을 확 붉히며 소리쳤다.

“나, 나는 그런 식으론 다신 하고 싶지 않아요!”

질색하는 반응을 보니 사실 거의 제정신이나 다름없었다는 말은 차마 밝힐 수가 없었다. 사내는 뒤숭숭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네가 믿어 줄지 모르겠는데….”

당장이라도 폭로해 버리고 싶은 충동과 평생을 묻어 두고 싶은 고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중이었다.

“내가 널 페로몬 때문에 억지로 좋아하게 된 거라고 말하니까 얘기하는 거야.”

남자는 차마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것은 지난밤에 대한 감상이기도 했고, 그동안 숨겨 왔던 과거이기도 했다.

“있지, 나냐…. 나는 매음굴의 논다니들 밑에서 자랐어.”

라히무스는 한쪽 손을 들어 공연히 콧대를 문질렀다. 커다란 한숨이 턱을 쓸어내리는 손바닥 안으로 부서졌다. 일단 뱉어 놓고, 뒤늦게 후회하며, 다급히 변명을 덧붙였다.

“믿어 줄지 모르겠지만, 몸을 판 적은 없었어.”

사창가에서 자랐다는 남자를 어느 누가 찝찝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단지 그것만으로도 걸레라 경멸당해 마땅한 근본을 가진 탓에 남자는 초조해졌다.

“그래서요…?”

소녀는 왜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러나 진중한 태도로 경청하였다. 그 천진하게 깜빡이는 눈동자를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어서 라히무스는 고개를 푹 꺼트렸다. 바닥을 짚은 시선이 맨땅을 배회하였다.

울로피는 자기 자식을 동생들에게 버려두고 훌쩍 떠나 버렸다. 나 대신 잘 키워 달라든가, 그런 무책임한 기망조차 없었다. 아마 그녀도 알았을 것이다. 그런 형편없는 환경 속에서 자식이 어떻게 자라날지 하는 것쯤은.

“어릴 땐 잡다하게 힘쓰는 일을 했어. 차라리 그때가 좋았지, 머리가 좀 커지니까 여자들이 가만두질 않았어.”

여자들이 가만두지 않았다는 말에 나니아는 스스로의 신경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으레 자랑처럼 구사되기 마련인 얘기가 한탄처럼 들려서 기분이 묘했다.

“발정기가 닥치면 나는 그곳에서 일하는 창부들 노리개 취급을 당했어. 발정이 난 몸에 이상한 주술까지 덧씌워지면 나 같은 체질은 완전히 못쓰게 되어 버려. 알아? 기억도 이성도 모두 휘발되어서는, 몸도 마음도 내 것이 아니게 돼.”

사내는 스스로 치부를 드러내면서 돌이킬 수 없는 자괴지심에 빠져들었다. 짙고 험악한 목소리가 점점 더 격앙되어 갔다.

“억지로 한다는 건 그런 거야. 원치도 않는 충동에 지배된다는 건 그런 거라고.”

리자드가 소녀에게 느낀 감정은 그런 인공적이고 불량한 기분이 아니었다.

“너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원해 본 여자야. 누가 시켜서, 속아서, 착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고른 내 암컷이야. 나는 내가 선택했어. 네가 날 선택하게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고.”

우연도 억지도 아니었다. 매 순간 누구보다도 진심이었다.

“나는 너를 억지로 사랑한 적, 한순간도 없어.”

한 줄기 가느다란 햇볕이 선홍색 눈동자를 빛냈다. 날카롭던 눈매가 애처롭게 무너져 내렸다.

라히무스 그는 도리어 나니아가 의심스러워지려 했다. 그녀야말로 자신에게 진심이긴 한 걸까. 어쩜 이렇게 매번 쉽게 포기할 수 있단 말인가.

표현하는 건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반했다든가, 너뿐이라든가, 그런 입에 발린 말들은 꿈도 꾸지 않았다. 여자는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조차 한 번도 해 준 적이 없었다.

“…너를 왜 좋아하느냐고 물었지. 그럼 이번에는 어디 한번 네가 말해 봐. 대체 그 질문에 대한 정답이 뭔지 나도 궁금하니까.”

나니아는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한 듯이 눈을 여러 번 깜빡거렸다. 리자드는 질문을 공고히 하듯 재차 물었다.

“너는 내 어디가 좋으냐고 묻는 거야, 나냐.”

그를 무던히 괴롭혀 대던 질문이, 역으로 자신에게 돌아오자 나니아는 당황했다.

‘어디가 좋으냐니…. 나는 그냥, 네 모든 게 전부….’

그녀는 즉각 대꾸하지 못하고 입술만 뻥긋거렸다. 이따금 벌어지려던 말문이 달싹이기만 하다가 다시 다물어졌다. 리자드는 그녀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한발 앞서 으름장을 놓았다.

“그냥이라고 하기만 해 봐.”

“…….”

순식간에 할 말을 빼앗겨 버린 나니아는 한참 고민하고 나서야 어렵사리 운을 뗐다.

“나는….”

질문에 대답하기 앞서서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더듬더듬 기어 올라간 시선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살짝 샤프해진 얼굴이 조금쯤 다른 인상을 자아냈으나, 오랜만에 밝은 빛 아래에서 마주하는 그의 얼굴은 변함없이 단단하고 늠름하여 매력적이었다. 그 근사한 마스크에 새삼 매료되어 버린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이내 곧 고개를 내저으며 스스로의 마음을 부정하듯 이야기했다.

“나, 나는 이제, 당신 겉모습 보고 좋아하는 거 아냐.”

그녀의 말에 라히무스는 말없이 눈살을 찌푸렸다.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이제 안 그런다’는 말은 ‘전엔 그랬다’라는 말로 보아도 좋은 것일까. 완전히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었다.

남자는 비난하는 투로 이야기했다.

“그럼 애초부터 너랑 나랑 별로 다를 바도 없었던 거잖아.”

잘 걸렸다는 듯 얄미울 정도로 파고드는 목소리가 어딘지 의기양양했다.

“너도 내가, 그나마 이 정도로 생겨 먹지도 못했으면, 그래, 가령 파비푸스에서 만난 그 쥐새끼처럼 생겼다고 쳐 보자. 너는 나한테 마음 줬을까?”

“…그건, 벌어지지 않은 가정이니까 의미 없어요.”

“그래, 의미 없는 가정. 네가 계속하고 있는 거잖아.”

나니아는 그가 득세한 듯 구는 것이 고까워서 뾰로통해졌다.

“당신은 그렇게 자만할 정도로 내 취향은 아니야. 전부터 얘기했잖아.”

하지만 나니아의 취향 운운은 더 이상 그에게 타격을 입히지 못했다. 그는 이미 관계의 우위를 점한 사람처럼 한껏 교만해져 있었다. 남자가 은근한 높이로 속삭이며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거짓말.”

높은 체온과 또렷한 시선이 살갗을 덥혔다. 당장에라도 뿌리치고 밀쳐 내고 싶은 나니아와 다르게 그는 썩 만족스러워 보였다.

“너도 어느 정도 내 껍데기에 끌린 거잖아.”

모든 사랑에는 계기가 필요한 법이라. 그것은 대체로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보다는 즉각적으로 얻어지는 직관적이고 외적인 특징에 좌우되기 마련이었다.

“나는 그거 싫지 않아, 나냐….”

나니아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를 사내는 기꺼이 기쁘게 여기려 했다.

“싫지 않다니요. 그게…. 그런 게 아니라….”

시작은 정말로 그 상스러운 육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껏 겪어 본 적 없는 관능적인 몸뚱이로 육박해 오면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니까.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사납고 야한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주 작은 계기에 불과했다. 자신이 그것만으로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나니아로서는 많이 억울한 오해였다. 성적 호기심이 사랑으로 발전하기까지 더 많은 것들이 필요했으니까.

“나는 단지 그런 것 때문에…. 정말로, 아니야. 나는 라히무스가….”

더듬더듬 낱낱의 조건들을 읊기 시작한 나니아의 모습은 어딘지 절박하고 경쟁적이었다.

“네, 그, 그윽한 목소리가 좋아…. 커다란 손도 좋아…. 머리카락 넘겨 줄 때나, 눈물 닦아 줄 때가 좋아. 애정 표현을 자주 해 줘서 정말 좋아. 번쩍번쩍 들어서 뽀뽀해 주는 것도, 팔베개해 주는 것도, 이불처럼 안아 주는 것도 좋아….”

그를 좋아하는 크고 작은 까닭들을 하나둘씩 열거했다. 말할수록 어째선지 코가 시큰해지려 했다. 수다스러울 정도로 힘차게 달려가는 말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꼬리가 특별해. 자기라고 부를 때 애교스러워지는 눈빛이 예뻐. 자다 깨서 배시시 웃을 땐 고양이 같아서 귀엽고, 가끔 바보같이 굴어도 귀여워…. 입술에 뭘 묻혀 놓고 모를 때 바보 같고, 내 물건 부숴 놓고 미안해서 쩔쩔매는 모습도 바보 같아.”

쉴 틈 없이 재잘대던 소녀는 마침내 숨을 한 번 크게 몰아쉬었다.

“나도 가끔은…. 가끔은 네가 너무 귀여워서 심술부리고 싶어.”

천천히 말을 마치고 고개 들어 돌아본 라히무스의 얼굴은, 그녀가 좋아한다고 이야기한 딱 그런 표정으로 머저리가 되어 있었다.

“…바보 같아.”

나니아가 발개진 눈시울로 꿍얼거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고만장하던 리자드는 할 말을 잃고 가만히 마른 침을 삼켰다. 멋쩍은 손 아래로 목울대가 커다랗게 일렁였다.

라히무스는 언제나 그녀의 머릿속이 궁금했었다. 자신을 얼마나 원하는지, 얼마나 좋아하는지, 아니 정말 좋아하기는 하는지. 첫사랑은 잘 잊었는지, 그를 좋아하던 마음과 자신을 좋아하던 마음의 크기는 같은지, 다른지, 다르다면 어느 쪽이 더 크고 진지한지. 매번 질보다는 양을 궁금해했었다. 라히무스 자신이 간직한 애정은 조금 단순무식한 편이었기에.

생각보다 깊고 진한 애착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연인의 마음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마주하기는 처음이라, 더없이 조급한 속도로 가슴이 뛰었다.

“나니아, 그건.”

사내는 다시 그녀의 발아래 무릎 꿇려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날 사랑한다는 거잖아.”

소녀는 사랑한다는 말 없이 사랑을 말했다. 이별을 원한다는 말로 갈망을 나타냈다. 사실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맞아.”

가엾을 정도로 미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랑해.”

호흡하는 방법조차 까맣게 잊어먹을 정도로 벅찬 사랑 고백에, 리자드는 숨이 턱 막혀 왔다.

“사랑해요, 라히무스….”

누군가는 천천히 스며드는 사랑을, 누군가는 홀딱 빠진 채로 시작하는 사랑을 했다. 스스로 몸을 던졌든 발을 헛디뎠든 간에 그곳에 빠질 수밖에 없는 심연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소녀에게 흠뻑 젖어서 사랑을 시작한 사내가, 그 손에 묻은 사랑이, 그녀를 서서히 적셔 나갔다.

“시간이 지나면, 페로몬에 내성이 생길 수도 있다고 그랬어. 그런 날이 오면 어떡해? 네가 그 감각을 더는 느끼지 못하게 되면, 나한테 설레는 감정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이 오면….”

소녀는 조그마한 주먹 안에 초조함을 말아 쥐고 훌쩍였다.

“나는…. 나는 불안해요. 나 이제 너 없이는 못 살 것 같단 말이야. 그런데 라히무스가 나한테 질려 버리기라도 하면, 그러면 나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가정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언젠가 이 사랑이 모두 증발하여 없어지는 순간이 올지도 몰랐다. 하지만 메마를 것이 두려워 젖지 못하는, 그런 척박한 사랑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 버리지 마…. 나한테 질리지 말아요, 라히무스.”

나니아는 애원하듯 말했다. 사내의 두꺼운 약지 한 개가 손에 잡혔다. 금방이라도 헤어져 달라고 말할 것 같던 연인이, 이젠 또 더없이 절실한 필요를 이야기했다. 그것은 무척 혼란스럽고도 달콤했다.

사내는 심장이 뜨겁다 못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그가 말했다.

“…네 말을 듣고 확신했어.”

아득하게 누그러진 눈빛이 그녀를 향했다. 소녀의 양 뺨을 감싸 쥔 커다란 앞발에 눈물이 스며들었다. 포개어진 손바닥 사이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너를 왜 사랑하느냐는 질문에, 역시 정답은 없었다는 걸.”

사랑은 법칙 같은 것이 아니었다. 조건을 달성하면 떨어지는 보상도 아니었고, 딱 맞는 열쇠로 해결되는 자물쇠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래, 처음엔 호기심이었는지도 몰라. 너를 상대로 이제껏 느껴 보지 못한 기분이 들어서, 자꾸만 눈이 갔어.”

시작은 호감이라는 한 점에서부터였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귀여웠어.”

그녀는 자꾸 남자의 마음에 점을 찍고, 그 점과 점 사이를 이어서 선을 그었다.

“네가 가느다란 허리에 커다란 테이블보 같은 걸 두르고 팔랑대는데, 그게 나울거릴 때마다 나는 울렁거렸어. 인간들은 왜 일하는 여자에게도 치마를 입히는지 모르겠지만, 너를 보고 그게 무척 귀엽다는 걸 알았어.”

그녀에 대해 알아 갈수록 더 많은 선이 그어졌고, 겹쳐진 선과 선은 면의 형태로 이루었다.

“조그만 손으로 뭘 자꾸 달그락거리는데, 너는 항상 뭐가 그렇게 바쁘고 분주한지…. 보고 있으면 꼭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 같았어. 만져 보고 싶고, 말 걸어 보고 싶고, 할 수 있다면 내 주머니에 넣어서 매일매일 들여다보고 싶었어.”

두 사람의 인연은 아직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부족한 관계였다. 앞으로도 알아 가고 메꿔 가야 할 부분들이 많이 남아 있지만, 그조차도 즐거울 테니까.

“날 아끼고 존중해 주는 듯한 네 걱정과 위로가 좋았어. 내가 아는 암컷 중엔 너 같은 애가 없었으니까. 너는 말씨도 곱고, 마음씨도 곱고, 상냥하고, 다정하고, 헌신적이고…. 그게 항상 나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지만….”

사내는 얼굴을 붉혔다.

“그다음은…. 너도 알잖아.”

열없이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네가 점점 더 좋아졌어.”

사랑은 결실이 아닌 뿌리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저분하게 얽히고설키며, 때로는 더러운 흙까지 묻혀 가면서 복잡하게 자라나는 것이 사랑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 느낀 여자에게 반했다가도 한순간에 식어 버릴 수 있는 것이 사랑이고, 아무리 좋게 봐 줘도 아끼는 여동생쯤에 불과하던 하녀가 어느 날 갑자기 둘도 없는 반려자로 느껴질 수 있는 것이 사랑이었다.

직접 땅에 묻어 가꿔 온 사랑도 사랑이고, 어느 날 갑자기 바람에 실려 와 뿌리내린 사랑도 사랑이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사랑은, 우연한 필연이었다.

“나냐, 나는 이제 성욕과 사랑을 헷갈리지 않아.”

뺨을 어루만지던 손이 천천히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깨를 거쳐 허리까지 내려온 앞발이 나니아의 작은 손을 손등째로 움켜쥐었다.

“사랑해.”

사내는 그 손을 들어 자신의 뺨 위로 가져왔다.

“사랑하고 있어.”

한참을 훌쩍이기만 하던 나니아는, 갑작스레 그가 쥐여 준 뺨을 잡아당겨 사내에게 입을 맞추었다. 라히무스의 입에서 달뜬 신음이 새었다. 그 역시 눈을 감고 입맞춤에 집중하였다. 부드럽고 건조한 살갗의 감촉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등허리를 옭아매듯 더듬고 어루만지는 움직임이 어지럽게 자라난 수목을 닮았다.

함께 물 위를 떠도는 부평초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건만. 바탕이 없다고 생각한 그들의 인생은, 이미 서로에게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지탱해 줄 서로가 있다면 그 땅이 어디라도 두렵지 않았다. 함께하는 그곳이 곧 낙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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