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류
토사물이 식도까지 치미는 기분과 함께 정신이 돌아왔다. 켈록, 켈록. 눈을 뜨기에 앞서 기침부터 터졌다.
귓구멍에 고여 있던 바닷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하얀 모래가 젖은 살갗에 따갑게 달라붙었다. 그 모든 촉감이 낯설고 불쾌했다.
눈을 떴을 때, 나니아는 까끌까끌하고 뜨뜻한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기침 한두 번으로 전부 토해지지 않는 바닷물을 몇 번이고 게워 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앉았다. 무릎이 후들거려서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언제 그런 변덕을 부렸냐는 듯 풍랑은 잠잠해져 있었다. 청명한 하늘 아래 야속할 정도로 맑은 쪽빛 바닷물이 평화롭게 일렁였다.
그랬다. 나니아가 눈을 뜬 곳은 고운 금모래가 펼쳐진 백사장이었다.
소녀는 바닷물에 절은 몸을 추스르며 힘겹게 팔꿈치를 굽혔다.
‘여기가 대체 어딜까.’
이곳이 어디인지에 대해 고민하기 위해 뇌를 할애할 여유가 생겨났을 때쯤, 나니아는 허리를 벌떡 세우며 젖은 모래를 한 움큼 세게 그러쥐었다. 살아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여기기엔 광활한 망연함이 밀려들었다. 곧이어 그녀를 공포에 빠뜨린 것은, 등 뒤로 펼쳐진 낯선 환경뿐만 아니라 주변에 산재한 시체들이었다. 미동 없는 시신들이 해안가 곳곳에 무질서하게 널려 있었다. 부서진 선박의 파편인 듯한 해양 쓰레기들도 함께였다.
‘…라히무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은 그를 찾고 있었다. 눈을 떠 보니 이곳이었고. 혼자 남겨졌다는 사실보다도 저 깊은 물속으로 잠겨 버렸을지 모르는 그 생사 때문에 간담이 서늘해졌다.
소녀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모래사장 위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깨어날 가망이 없어 보이는 반인반수의 시체들 사이로 사내를 찾아 헤맸다. 무거운 가죽 가방이 엉덩이를 두드리고 발이 푹푹 꺼졌다. 그녀는 등에 멘 가방도 벗어 던지고 속도를 냈다.
“라히무스, 라히무스….”
그가 아님이 분명한 시체를 보고도 나니아는 떠밀려 온 표류자들의 얼굴을 꼭 한 번씩 확인했다. 자신이 찾는 남자가 아님을 확인할 때마다 가슴 저미는 좌절감과 안도감이 번갈아 가며 한 겹 한 겹 쌓여 갔다. 그러던 중 나니아는 요지부동의 주검들 사이에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축수를 한 마리 발견했다. 명백한 생체 반응이 눈길과 발길을 확 끌어당겼다. 그녀는 다소 처절한 심경으로 축수의 길쭉한 코 밑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규칙적으로 내쉬어지는 뜨거운 콧바람이 느껴졌다. 틀림없이 숨을 쉬고 있었다.
‘죽지 않았어.’
아직 숨이 붙어 있는 표류자를 발견하고 나서 그녀는 희망을 품었다. 라히무스 역시 살아 있을 것이라 믿으며 널브러진 생물들 사이를 누비던 중에, 저 멀리 익숙한 동물 울음소리가 들렸다.
“뀨욱, 뀌유우….”
사람을 보채는 듯한 서글픈 하울링. 울음소리의 주인공은 그녀의 작은 동료, 우우룡이었다.
“코우!”
소리가 들린 방향을 따라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그리고 녀석의 옆에는 그토록 찾아 헤매던 라히무스가 쓰러져 있었다.
“라히무스!”
나니아는 사내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짖으며 달려가기 시작했다. 급하게 뛰어오느라 신발 한 짝이 벗겨지는 줄도 몰랐다. 송장처럼 누워 있는 라히무스의 옆자리에 무너지듯이 무릎을 꿇어앉고, 그의 호흡을 확인했다. 울먹이듯 코를 훌쩍인 소녀가 라히무스의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댔다. 무사히 뛰는 심장을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참아 왔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다행이다…. 다행이다….”
우선은 입을 벌려 바닷물을 뱉어 내게 했다.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질식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아무리 흔들고 두드려 보아도 라히무스는 좀처럼 깨어나질 못했다.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던 마음이 무색해질 정도로 나니아는 다시 암담해졌다.
“슈쉬라, 그 망할 계집애….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소녀는 표독스럽게 중얼거렸다. 님프가 선사한 좌절과 절망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 탄연은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해수에 젖어 엉망진창이 된 몰골만 아니라면, 잠들어 있는 얼굴 자체는 너무도 평온해 보였다.
‘축수들 소탕용으로 쓰이는 발연탄이었습니다.’
‘뭐? 젠장, 그럼 라히무스가…!’
말을 뱉어 놓고 당황하던 파코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과 똑같이 무작정 달음박질치던 뒷모습도 함께.
‘파코는 무사할까….’
소녀는 막막한 심정으로 라히무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떻게든 눈을 뜰 수 있을 때까지 지켜 주어야 했다. 헤어진 일행들을 찾는 건 그다음 문제였다.
“끼욱, 끼유욱.”
우우룡 역시 리자드를 깨우려는 듯 울어 댔지만 소용없었다.
“너는 날 수 있잖아. 어쩌다 여기까지 왔어.”
그녀는 라히무스의 주변을 배회하던 녀석을 잡아다 무릎에 앉혀 놓고 쓰다듬었다. 거친 파충류의 비늘이 오늘따라 만질만질하고 애틋했다. 평소대로라면 귀찮아하며 벗어났을 녀석이 웬일인지 얌전하게 안겨 있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구슬프게 꾸룩거렸다.
“어떡하면 좋을까, 코우.”
소녀는 말도 못 하는 짐승을 상대로 침울한 고민을 털어놓았다.
“라히무스는…. 리자드가 아닌 거야?”
파키케팔로의 실언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너는 알 거 아냐, 코우….”
나니아는 우우룡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배를 뒤집어 안았다. 하지만 녀석은 그 자세가 영 마뜩잖은지 날개를 펼쳐 바둥거렸다. 불편하게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다시 모래 위로 내려놓았다.
코우의 날개는 파코의 극진한 보살핌 아래 순탄히 나아가고 있었다. 녀석은 비뚠 날개를 퍼덕이며 라히무스의 몸 위로 올라가더니, 그의 움푹한 명치에 똬리를 틀 듯 웅크려 앉았다. 우우룡의 그러한 행동은 마치 ‘얜 리자드가 맞아!’라고 말하는 듯했다.
자신에게는 축수의 피가 옅게 섞여 있다던 비비의 말이 떠올랐다. 문득 호기심이 솟은 나니아는 숨겨진 귀를 찾듯이 라히무스의 머리를 헤집어 보았다.
“…….”
괜스럽고 바보 같은 짓이었다.
바닷물에 젖은 검붉은 머리카락이 이마를 지저분하게 덮고 있었다. 나니아는 그것을 손빗으로 가지런히 쓸어 넘겼다. 애달픈 손바닥이 관자놀이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갔다.
나니아는 그의 얼굴을 딱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보기 좋게 반듯한 이마와 그 밑으로 도드라진 눈썹뼈가 듬직한 인상을 꾸렸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참 시원시원하게 잘생긴 호남자였다. 그 때문일까. 나니아는 아직도 긴가민가했다. 그녀가 아는 축수들이라 하면 대체로 섬뜩하고 괴기한 몰골을 가지고 있었다. 최소 여기 이렇게 해변에 쓰러져 있는 자들만 놓고 봐도 그랬다.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혼란스럽던 차에, 라히무스에 대한 의혹은 나니아의 빈약한 상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러다 문득 기형적이라는 것은 애초에 어떠한 특징인지, 무엇을 기준으로 판가름 될 것인지에 대하여 강한 회의감이 들었다.
사람과 짐승을 섞어 놓은 듯한 반인반수의 생김새. 인간의 형태와 멀수록 징그럽다고 느끼지만,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적인 판단이었다. 누군가를 외모로 판단하는 것 자체가 옳지 못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따지고 보면 리자드도 인간의 얼굴을 하고 도마뱀의 꼬리를 달고 있잖아.’
토끼 꼬리나 도마뱀 꼬리나 꼬리는 꼬리일 뿐, 평생을 인간 사회에서 살아온 소녀가 보기에는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 짐승의 흔적에 지나지 않았다. 이 같은 생각을 파키케팔로가 알았더라면 자기는 도마뱀이 아니라 용의 후예라며 길길이 날뛰었겠지만.
라히무스의 잘난 외양이 어느 정도 단초가 되었음은 인정하는 바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가 무엇이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령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징그러운 쥐의 주둥이나 돼지의 콧구멍을 가지게 된다더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그냥 그렇다고 말해 주지….”
남자가 자신에 대해 더 상세히 알려 주지 않은 것이 못내 섭섭했다.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본인 스스로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아무려면 감추고 싶었던 거겠지. 그는 리자드라는 정체도 부끄러워했으니 그럴 만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보기로는 아무런 태도 나지 않는데, 애당초 축수 혼혈종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남자의 약점에 대해 미리 알았더라면 이 같은 돌발 상황에도 미리 대비할 수 있었을까. 이제 와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지마는 그녀는 라히무스의 갸름한 턱을 어루만지며 서러워했다. 한없이 슬픈 기분에 젖어들었다.
“바보.”
혼자가 아닌데 혼자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소녀는 라히무스의 머리를 손으로 받치고서 섬의 안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대체 어디이며,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까. 여기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수없이 많은 걱정 중에서도 단연코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라히무스의 문제였다.
얼마나 기다려야 눈을 뜰까. 애당초 시간이 흐르는 것만으로 눈을 뜰 수 있긴 할 걸까?
해결해 낼 수 없을 것 같은 난관에 목구멍으로 왈칵 울음이 솟구쳤다. 하지만 어떻게든 꿋꿋이 버텨 나가야 했다. 이 난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겠다고, 소녀는 다짐했다.
“…찝찝해.”
우선 담수를 찾든가 술지를 쓰든가 해서 몸부터 씻고 싶었다. 나니아 자신뿐만 아니라 라히무스도 문제였다. 어찌나 젖었는지 옷 아래로 울룩불룩한 굴곡이 다 비쳤다. 소금물에 절은 몸을 이대로 방치해 둘 순 없었다.
던져 놓은 가방을 되찾으러 가려는데, 갑자기 코우가 몸을 낮추고 경계 태세를 취했다. 앞발을 낮추고 엉덩이를 들어 올리며 위협적인 소리로 울었다. 녀석이 평소 기분이 몹시 나쁠 때 보이는 반응이었다.
“왜 그래, 코우?”
무슨 일인가 싶어 우우룡이 바라보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몸이 움칠 굳었다. 저 멀리서 사람이라기엔 조금 작고, 짐승이라기엔 너무 사람 같은, 원숭이를 닮은 생명체가 이쪽으로 겅중겅중 뛰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씩이나. 앞발로 추진력을 얻고 뒷발로 따라오는 듯한 움직임. 확실히 사람의 걸음걸이는 아니었다.
“코우, 어디 가?”
낯선 생물들의 접근을 꺼리던 우우룡은 기어코 자리를 떠나려는 듯 비상했다. 치우친 한쪽 날개가 멀쩡한 쪽의 날개보다 더 다급히 푸드덕 움직였다. 여기가 어딘지도 모를 텐데. 저 멀리 바다 건너편으로 사라져 가는 녀석의 꽁무니를 쳐다보면서, 나니아는 허탈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원숭이들은 계속해서 달려오고 있었다.
그나마 의지 삼고 있던 동물 친구마저 떠나 버리는 바람에 평정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낯선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하여 라히무스의 손을 꽉 붙잡았다. 자신은 그를 두고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저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하염없이 버티고 앉아 있기만 했다.
“이게 다 뭘까, 쿠나모.”
“가족. 가족이다, 모나쿠!”
“아냐. 이거 가족 아냐.”
놈들은 해변에 흩어져 있는 축수들의 얼굴을 하나씩 들춰 보면서 자기들끼리 무어라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누가 가족들을 이렇게 했지?”
“가족 아냐. 가족 아니다, 쿠나모.”
송장들은 옆구리에 흉흉한 칼집을 차고 있었고, 저 멀리 난파의 흔적도 발견됐다. 이제 알겠다는 듯 녀석이 말을 더했다.
“해적이다. 해적이다, 쿠나모.”
“해적? 대장은 해적을 싫어하는데!”
“대장 싫어한다. 해적 싫어, 쿠나모.”
원숭이를 닮은 그것들은 팔을 마구 휘두르며 난리를 피웠다. 어딘지 어수룩해 보여도 사람 말을 곧잘 하는 것을 보고 나니아는 확신했다.
저들은 축수다. 자신과 다르게 이곳에 익숙해 보이는 태도가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섬에 사람이 살고 있다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문제는 지금 저들이 사람을 먹는 축수들인지 아닌지, 해를 끼쳐 올 상대인지 아닌지가 중요했다.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까. 나니아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단검 하나를 손에 주웠다.
“거기, 너희들.”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대신 먼저 말을 걸었다. 나니아가 이목을 끌자, 두 쌍의 눈이 천천히 이쪽을 향했다. 녀석들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새카맣고 멍해 보이는 눈동자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한 놈이 입을 쩍 벌렸다.
놈들은 끼끽기긱거리는 이상한 울음소리와 함께 앞다투어 달려오기 시작했다. 날뛰는 발밑으로 모래가 튀었다. 지척으로 다가온 원숭이들의 생김은, 그들이 인간이 아님을 고려한다 해도 상당히 어려 보였다. 놈들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갸웃거리며 나니아의 주변을 선회했다.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
“누구야?”
앞뒤 좌우로 요란스러운 질문이 뱅글뱅글 쏟아졌다. 나니아의 둘레를 빙빙 맴돌던 놈들은 간간이 라히무스의 몸을 밟기도 했다. 그게 못내 신경 쓰였던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몸 반대편으로 한쪽 팔을 넘겨짚었다. 그를 보호하듯 감싸 안고 조심스레 통성명을 시도했다.
“내 이름은 나니아. 나니아라고 해.”
“나니아?”
“나니아!”
“나니아!”
“나니아!”
놈들은 마치 처음 배운 낱말을 따라 말해 보는 아이처럼 그녀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불러 댔다. 통통 튀어 다니는 녀석들은 꼭 저글링 공과 같아서, 그들을 좇는 나니아의 시선도 정신없이 돌아갔다.
“나는 쿠나모!”
“나는 모나쿠!”
“쿠나모!”
“모나쿠!”
나니아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어 나갔다. 자기소개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그래서 누가 누군지는 알 수 있어야 바르게 소개한 것이 아니겠는가.
“잠깐, 잠깐잠깐.”
그녀는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녀석들에게 멈추어 보라는 듯 팔을 내저었다.
“누가, 누가 쿠마노라고?”
“쿠마노 아니고 쿠나모!”
“그래. 그래, 쿠나모.”
라키바하프의 이름을 들은 라히무스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그렇다면 조금쯤 동감할 수 있을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니아는 둘을 구분해 보기 위해 먼저 쿠나모의 얼굴을 뜯어보려 했으나.
“내가 아니라 쟤가 쿠나모.”
그쪽은 쿠나모가 아니라 모나쿠라며 쿠나모를 향해 엄지를 펼쳐 들었다.
“그래, 저쪽이 쿠나모.”
소녀는 천천히 한 마리씩 손가락질하며 이름을 외워 보았다.
“이쪽이 모나쿠, 저쪽이 쿠나모. 맞지?”
둘을 구별하려는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듯 모나쿠가 말했다.
“가족들도 구분 안 해. 쿠나모랑 모나쿠.”
“쿠나모랑 모나쿠는 한 몸이야.”
“맞아. 우린 하나야.”
둘은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지간인 듯 서로를 똑 닮아 있었다. 얼굴은 물론 목소리까지 똑같았다.
“우린 하나.”
“둘이서 하나.”
“아무렇게나 불러.”
“다들 그래.”
한 묶음 취급해도 괜찮다는 그들의 말에 나니아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게 어디 있어….”
구분하는 방법을 찾고 말겠다는 듯 녀석들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는데, 한 놈이 손등을 모래판에 퍽퍽 떨어뜨리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나니아! 나니아! 어디서 왔어, 나니아!”
집중력이 깨진 그녀는 정신 사납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대꾸했다.
“나는 멀리 동쪽에서 왔어. 배가 부서져서 길을 잃었는데, 너희는 여기 사는 애들이니?”
쿠나모의 동그란 머리가 갸웃거리는 것을 넘어 점점 바닥을 향했다. 허리를 꺾어 가며 몸을 비틀던 녀석이 하얀 치열을 드러내며 웃었다.
“예뻐! 좋아! 쿠나모, 나니아 좋아!”
“…뭐?”
녀석은 꽃밭을 뒹구는 강아지처럼 그다지 향기롭지 못한 모래밭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모나쿠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냄새 나. 맛있는 냄새. 모나쿠도 맡아.”
맛있는 냄새.
나니아는 그 말에 오싹해졌다.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째선지 모나쿠도 뒤늦게 소름이 끼친다는 표정을 지었다. 북슬북슬한 뺨에 손바닥을 붙이고 비명을 지를 것처럼 입을 벌렸다. 그러고는 잊고 있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대장이 맛있는 냄새가 나는 인간은 조심하랬어…!”
그 말에 쿠나모가 몸을 벌떡 일으키며 뒷걸음질 쳤다.
“조심해? 우리를 해쳐?”
“찌를 거야?”
“해칠 거야?”
겁먹은 얼굴만 보고 있자면 놈들은 공격성이 낮아 보였다. 외려 축축한 눈망울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동정을 구했다.
“나쁜 짓 안 했는데, 모나쿠.”
“쿠나모도.”
졸지에 이쪽이 약한 짐승을 노리는 사냥꾼이 된 기분이라, 나니아는 자기도 모르게 칼을 내려놓았다. 어깨높이로 들어 올린 양 손바닥이 무고를 주장했다.
“아니야, 나는 그럴 생각 없어.”
너희들이 먼저 싸움을 걸어오지만 않는다면. 그녀 또한 누구보다도 안전과 평화를 바랐다.
“너희는… 인간을 먹어?”
나니아는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안 먹어. 인간 없어. 인간 안 먹어.”
그 말은 없으니까 못 먹는다는 것일까, 있어도 안 먹는다는 것일까. 무엇 하나 안심하고 확신할 수 없었다.
“얘들아, 난 도움이 필요해.”
“도움.”
“도움.”
“이곳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가고 싶어.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찾고 싶어. 알아듣겠니?”
그녀는 어린아이를 살살 달래듯이 물었다. 복잡해서 못 알아듣는 일이 없도록, 쉬운 말로 천천히.
“그럼, 대장한테 가!”
“대장한테 가!”
칼을 내려놓은 맨손을 쿠나모가 잡아챘다. 나니아는 녀석의 거칠거칠한 손바닥을 감촉을 느끼며 크게 당황했다. 도움을 청하긴 했지만, 쉽사리 따르지 못했다. 그들이 말하는 대장이 누구인지, 자신에게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는 것들의 말을 믿고 따라도 좋은지, 나니아는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다.
어쩌면 식인 축수의 소굴로 끌고 가려는 것은 아닐까. 안전한 곳이라는 확답을 받고 싶었다.
“대장도 너희들과 같아? 그러니까, 내말은…. 인간을 먹지 않느냐는 말이야.”
선뜻 축수라는 단어를 입에 담기가 힘들었다. 당사자들의 면전에다 직접 내뱉기엔 멸칭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축수임을 부정하던 비비와 유멘타라는 말에 거부감을 느끼던 헤르까지 함께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니아가 묻자, 모나쿠와 쿠나모는 고민에 빠졌다. 끙끙거리던 모나쿠가 누설하면 안 되는 비밀을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낮추었다.
“대장, 인간 되고 싶어서 잔뜩 먹었다는 소문 있어.”
쿠나모는 모나쿠의 폭로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짓더니 똑같이 어깨를 옹송그렸다.
“아니야. 대장 안 먹어.”
“맞아…. 이제 안 먹어, 대장.”
“옛날얘기. 대장 옛날얘기.”
“…….”
그녀의 얼굴이 두려움으로 하얗게 질려 가자, 모나쿠는 안심시키려는 듯이 긴 팔을 흔들었다.
“괜찮아. 대장 안 먹어.”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불신에 빠진 나니아는 다시 칼자루를 쥐고 싶어졌다.
“대장 사고야자 먹어. 대장 카카와 제일 좋아해.”
“대장 나니아 좋아할 거야.”
“맛있는 냄새 나는 인간. 대장, 좋아해.”
“맞아. 나니아 좋아. 대장이 찾아.”
“빨리, 빨리 대장한테 가!”
나니아는 양손을 쿠나모와 모나쿠에게 각각 한쪽씩 붙잡혔다. 녀석들은 좋다는 말을 반복하며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는지 신이 나서 몸을 흔들었다. 그 광경이 조금 귀엽기도 하고 짜증 나기도 했다. 잡아당기는 힘을 버티며 녀석들에게 애원하듯 말했다.
“잠깐만. 나 혼자는 못 가.”
어린 원숭이 인간들은 다시 얌전해졌다. 못 간다는 말에 의아해했다.
“이 리자드도 같이 가야 해.”
리자드라는 말에 쿠나모와 모나쿠의 시선이 움직였다. 나니아가 가리키는 라히무스를 멀뚱히 내려 보았다.
“죽었잖아.”
“아니야, 아직 살아 있어. 잠이 든 거야.”
죽은 게 아니라는 말에 원숭이들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는 소리를 지르며 날뛰기 시작했다.
“리자드 무서워!”
“리자드 싫어!”
“리자드 끔찍해!”
이런 반응이 돌아올 줄 몰랐던 나니아도 심히 당황스러웠다.
“아니야, 해치지 않아.”
그녀는 안심하라는 듯이 축수들을 어르고 달랬다.
“착해. 착한 리자드야.”
어디까지나 그녀 앞에서만 순한 양처럼 구는 라히무스였지만, 나니아는 알지 못했다. 사실은 그가 얼마나 잔혹하고 무서운 맹수인지. 제대로 속고 있었다.
“무엇보다 지금 이렇게 의식이 없잖아.”
불쌍하지도 않느냐는 듯 라히무스의 뺨을 어루만지며 호소하자, 모나쿠가 곤란하다는 식으로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하지만 대장 리자드 싫어해. 리자드 안 돼.”
“맞아, 리자드 죽일 거야!”
쿠나모가 대장이라는 사람을 흉내 내듯 두 팔을 높이 들어 올렸다. 몸집을 부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라히무스를 위협하는 것 같기도 한 몸짓이었다. 그 말에 나니아는 그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라히무스의 가슴 위에 엎드렸다. 가엾이 웅크린 어깨가 필사적이었다.
“안 돼. 그러지 마.”
여자가 자신을 꺼리며 그를 감싸자 쿠나모는 적잖이 시무룩해졌다.
“쿠나모 말고…. 대장.”
그들에게 리자드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이토록 향기롭고 사랑스러운 나니아였다. 모나쿠는 빨리 그녀를 가족들 앞으로 데려가고 싶었다.
“리자드는 버리고 가.”
“리자드 못 가. 리자드 안 돼.”
“나니아 혼자 가!”
“안 돼, 얘들아. 나 혼자는 못 간다니까.”
“왜 못 가?”
여자가 그럴 수 없다며 고개를 가로젓자, 원숭이들은 의문을 표했다. 이들이 말하는 대장이란 최소 라히무스에게는 적대적일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그에게 발각되면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나니아는 조급해졌다. 라히무스가 제정신이라면 모를까, 이런 상태로 마주하게 둘 순 없었다.
“여기 이렇게 두고 갈 수는 없잖아.”
“왜?”
“왜?”
“왜?”
“왜?”
끊임없이 갸우뚱, 갸우뚱. 모르겠다는 듯 손가락을 빠는 모습이 천진한 악마 같았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아 나니아는 갑갑한 심경을 토해 내듯 울먹였다.
“내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야. 눈뜰 때까지 지켜 줘야 해.”
그를 떠나 홀로 생존을 도모하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혼자 살아 보겠다고 도망친 결과가 어떠했는지 그녀는 이미 경험한 바가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버려두고 떠나는 비겁한 짓은 한 번으로 족했다.
“어떻게든 살릴 거야, 나 얘 없이는 못 살아….”
소녀는 여러 가지 감정이 복받쳐서 코끝이 빨개졌다.
쿠나모와 모나쿠는 난처한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나니아 못 살아?”
“쿠나모랑 못 살아?”
그들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소녀의 눈물을 감정했다.
“나니아 리자드 사랑해…?”
남녀 간의 통정이란 것은 전혀 모를 것 같은 어리숙한 얼굴로, 그러나 그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는지 쿠나모가 말했다.
“나도 모나쿠 사랑해.”
그러나 모나쿠도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녀석을 마주 안았다.
“나도 쿠나모 사랑해.”
원숭이들은 긴 팔로 서로를 끌어안고 둥실둥실 어깨를 움직였다. 나니아는 빨개진 눈시울로 그들을 주시했다. 퍽 따뜻하고 다정한 광경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그래도 덕분에 코를 한 번 훌쩍이는 것으로 눈물을 참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녀석들은 포옹을 풀고 엉덩이를 흔들어 댔다. 무릎을 굽혔다 펼치면서 온몸이 위아래로 덩실덩실 흔들렸다.
“나니아 사랑해. 나니아 리자드 사랑해. 나니아 사랑 지켜 줘!”
“지켜 줘! 지켜 줘!”
지켜 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너희 대장한테 말하지 않을 거야?”
뭘 어떻게 해 주겠다는 건지 녀석들은 꽤나 열의를 뽐냈다.
“숨겨!”
“숨겨?”
“동굴.”
“동굴!”
모나쿠가 제안하자 쿠나모는 아주 좋은 생각이라는 듯 활짝 입을 벌려 웃었다. 동굴에 은신시키자는 뜻이었다. 그 말을 알아들은 나니아가 물었다.
“동굴? 사람을 숨길만 한 동굴이 있어?”
쿠나모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더니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 커다랗게 원을 만들었다.
“비밀 동굴. 쿠나모와 모나쿠의 비밀 동굴!”
“비밀 동굴에 리자드 숨겨. 그리고 나니아 같이 가! 그리고 모나쿠랑 살아!”
“쿠나모도!”
같이 살자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지 몰라서 난처했다. 하지만 새끼 원숭이들이 내민 손을 감히 뿌리칠 수 없었다. 일단은 이들 말대로 대장이라는 자를 만나자. 허허벌판에 고립되어 있는 것보다는, 누구라도 만나서 부딪쳐 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가자.”
목적은 생존이었다. 무엇이든 해 봐야 했다.
축수들은 보기보다 기운이 좋았다. 이렇게 무지막지한 거구의 사내를 어떻게 옮기면 좋을까 막막했는데, 둘이서 힘을 합치니 제법 거뜬했다. 쿠나모가 리자드의 날갯죽지를 받치고 모나쿠가 양다리를 들었다.
“에구구, 무거워. 리자드 무거워!”
하지만 마지막에는 거의 팽개치다시피 했다. 라히무스의 육중한 몸이 딱딱한 동굴 돌바닥 위에 털썩 소리를 내며 떨어지자, 나니아는 황급히 그의 곁으로 뛰어가 앉았다. 여기까지 옮겨 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이지만, 어쩐지 야속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잠들어 있는 얼굴이 가엾고도 천진했다. 나니아는 그를 불쌍히 여기며 애틋하게 어루만졌다.
이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녀는 리자드의 생존 한계를 알지 못했다.
“자주 올게.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근심 가득한 목소리에 비통한 애정이 흘러넘쳤다. 듣지도 못하는 귀에다 대고 쓸쓸한 약속을 맹세했다. 지킬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를 다짐이라는 생각에 기분이 착잡해졌다. 소녀는 고개를 숙여 잠이 든 리자드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입술은 평소처럼 뜨거웠다. 여전한 그의 온기가 그녀를 서글프게 했다.
“…….”
“…….”
모나쿠와 쿠나모는 나니아의 작별을 기다리며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고 있었다.
“…….”
초롱초롱한 두 쌍의 눈이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아는 부끄러워졌다. 멋쩍게 입술을 문지르며 녀석들의 눈치를 살피는데, 한 놈이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쿠나모도!”
쿠나모는 나니아의 가까이로 다가와 그녀에게 두툼한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자 모나쿠도 녀석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했다.
“모나쿠도!”
자신의 행동을 그대로 모방하는 순진한 원숭이들 때문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입 맞추어 달라는 듯 양옆에서 들이 밀어진 주둥이가 징그럽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했다. 나니아는 손사래를 치며 더듬더듬 부정했다.
“이건, 사… 사랑하는 사이에 하는 거야.”
“사랑?”
축수들은 고개를 갸웃갸웃 기울이더니 자신 있게 외쳤다.
“나니아 사랑해!”
“모나쿠도!”
나니아는 눈을 질끈 감고 더 빠르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사랑한다는 게 그렇게 쉬운 감정이 아니라…. 너흰 나랑 오늘 처음 만난 사이잖아.”
아무튼 나는 너희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필사적으로 부정하는 그녀를 보고 쿠나모의 어깨가 바닥으로 축 처졌다. 잔뜩 들떠 있던 녀석이 입술을 집어넣고 슬픈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나니아, 쿠나모랑 모나쿠 사랑하지 않아….”
“그게….”
나니아는 난처해하며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오락가락하는 녀석들을 짠하게 바라보았다.
“그, 이제부터…. 이제부터 천천히 친해지면 되지….”
동굴 바닥을 배회하던 반 짐승들의 눈동자가 다시금 나니아를 향했다.
“친해지면 쭈우- 해 줘?”
쿠나모가 입술을 내미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나니아는 다소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친해지면 언젠가….”
그런 날이 올지 어떨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또다시 서로의 마음속에 불투명한 약속을 새겨 넣었다.
이제 원숭이들의 바람과 그녀 자신의 각오대로 움직일 시간이었다. 목적지는 그들의 정착지. 나니아는 모나쿠와 쿠나모에게 양손을 쥐여 준 채로 동굴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았다. 붙잡힌 오른팔과 왼팔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모험을 선택한 두 다리가 두려움으로 후들거렸다. 하지만 라히무스를 위해서라도 이제 와 돌이킬 순 없었다. 어떻게든 이곳을 살아서 나갈 방도를 찾아야 했다.
흙바닥이 축축해서 티가 나지 않았지만 젖은 가방에서는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우거진 밀림은 소녀가 이제껏 본 적 없는 열대 식물들로 가득했다. 정글은 검푸른 빛으로 물들어 압도적인 야생의 원기를 느끼게 했다.
교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나 그 너머를 감히 꿈꿀 수 없을 정도로 무성한 그늘을 드리웠고, 목초는 인류의 훼방 없이 담대하게 자라나 사람의 발길을 가로막았다.
이따금 걸어온 길이 기억나지 않을 때마다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고는 주변에서 가장 인상적인 나뭇가지를 찾아 그것을 동여맸다. 여벌 수건을 모두 사용한 다음부터는 치맛자락을 찢어 흔적을 남겼다. 길을 헤맬 것 같은 지점마다 그 일을 반복했다. 그에게 돌아오는 길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이정표였다.
그러다 마침내 밟히고 꺾여서 더는 자라지 않는 풀숲이 보였다. 납작한 수풀이 생물이 오간 흔적을 말해 줄 때쯤,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르내리기 좋게 나뭇가지를 늘어뜨린 덩굴이라거나 지능 있는 생물의 필요를 위해 베여 나갔을 나무 밑동 같은 것들이 가시적인 문명의 서곡을 보여 주었다. 잎맥이 깊고 광택이 흐르는 커다란 나뭇잎 사이. 그 사이를 헤치고 드러난 생경한 풍광에 소녀는 발길이 멈추었다.
빽빽한 캐노피 사이로 숨구멍을 틔어 놓은 햇살이 그곳을 비추고 있었다. 가지런히 내리쬔 빛이 우거진 밀림 속의 사회를 밝혔다.
“모나쿠가 왔어!”
“쿠나모도!”
원숭이들은 나니아의 손을 놓고 어딘가로 기쁘게 달려갔다.
줄기가 뿌리를 내리고 기근이 어지럽게 자라 있는 반얀트리 사이. 긴 사다리를 드리워 놓은 트리 하우스가 곳곳에 지어져 있었다.
낯선 환경 속, 무엇보다도 두려웠던 것은 그녀를 직시해 오는 축수들의 눈길이었다.
소녀는 독사에 물린 사람처럼 파랗게 질려서 제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그들은 대체로 두 발 달린 사람의 형상을 띠고 있었으나 분명 인간은 아니었다. 팔다리가 짐승처럼 털이 부숭부숭한가 하면, 눈, 코, 입, 귀가 부분적으로 금수의 그것과 흡사하였다.
“세상에….”
누군가 놀라워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니아는 그것이 자신을 보고 내뱉은 말인 줄 알고 어깨에 둘러멘 가방끈을 꽉 쥐었다.
탄식은 웅성거림의 시작이었다. 주변 다른 모든 축수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구경이라도 난 듯이 모여들었다.
설마요. 정말요?
내용을 알아듣기 힘든 그들의 대화 소리가 나니아의 귀를 불쾌하게 간지럽혔다. 여기까지 따라온 것이 과연 잘한 선택이었을까. 겁에 질린 소녀가 뒷걸음질을 치고 싶어졌을 때쯤, 되돌아온 모나쿠와 쿠나모가 다시금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쪽, 이쪽!”
그들은 나니아를 보호하듯 원을 그리며 그녀의 둘레를 뛰어다녔다. 땀 맺힌 손바닥을 주먹으로 말아 쥐었다.
얼룩덜룩 염료를 칠하다 만 장대들이 울타리 역할을 하듯 삐죽삐죽 경계를 세웠다. 전망이 가장 높은 나무. 그 위에 지어진 목제 오두막을 향하여 원숭이들이 소리 높여 울었다.
“대장!”
“대장!”
나니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이 말하는 대장이란 대체 어떤 남자일까. 얼마나 드세고 흉측한 축수일까. 바짝 긴장한 채로 그를 기다리는 와중에, 주변에는 참견하고 싶고 관여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리는 다른 축수들이 운집하고 있었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하우스의 주인은, 그 얼굴을 알아볼 틈도 없이 나뭇가지에 뛰어올랐다. 빠른 움직임을 좇아 시선이 움직였으나 눈이 발보다 늦었다.
높은 곳에서 몇 초간 상황을 관망하던 그것은 이내 또 비호와 같이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애당초 사다리 같은 기물은 필요치도 않았던 것처럼 착지는 가뿐했다. 고양잇과 동물 특유의 가벼운 몸놀림이 느껴졌다.
그것은 하늘에서 떨어진 자세 그대로 상체를 숙여 두 팔로 비스듬히 땅을 짚었다. 추락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접힌 두툼한 무릎 관절과 두꺼운 손등의 핏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나니아가 드디어 그 모습을 온전히 눈에 담았을 때, 축수는 굽은 몸을 일으켜 두 발로 당당히 기립하였다.
“…웬 소란인가 했더니.”
오랜 세월 마모되어 빛바랜 듯 까칠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엄청난 걸 찾아왔군.”
그들의 대장은, 밀림을 두른 듯한 야만적인 인상의 여걸이었다. 짐승의 피가 섞여 흉악무도하게 생겨 먹은 사내의 얼굴을 상상하고 있던 나니아는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대장이라는 여자는 생각 외로 무척 아름답고 육감적인 인상의 피조물이었는데, 부채꼴 모양의 둥근 귀와 늘씬하고 기다란 꼬리가 아니었더라면 영락없이 사람이라고 착각했을 외모였다. 나이가 꽤 들어 보였지만 우아하게 주름진 얼굴은 푸근하기보단 고혹적이었다.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샛노란 눈동자가 커다란 고양잇과 동물을 닮아 있었다. 노련해 보이는 눈빛과 몸가짐에서 농염한 관록이 엿보였고, 훤칠한 체격과 단단한 근육에서 강한 전사의 기운이 느껴졌다.
‘크다….’
챠링고보다 더, 어쩌면 라히무스에 버금가게 거대한 여자였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삐뚜름한 표정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샛노란 홍채가 가늘어진 눈매 속에서 상대방을 가늠하였다. 다른 축수들은 모두 나니아의 존재에 놀라운 희망을 느끼며 경모와 숭배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녀는 달랐다.
여자가 크고 거친 앞발을 뻗어 나니아의 목 뒤를 콱 움켜쥐었다. 고통 없이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입맞춤이라도 할 것처럼 얼굴을 들이민 그녀에게서 묘한 풀 냄새가 났다. 여자는 지척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이런 오지까지 너 같은 게 무슨 일로 왔지?”
“저, 저는….”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는 말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대장은 둘 사이에만 들릴 만큼 낮은 목소리로 작게 으르렁거렸다.
“무슨 짓거리를 벌이러 왔든 소용없어. 그 예쁘장한 얼굴로 속일 수 있는 건, 한 번도 너 같은 걸 본 적 없는 얼뜨기들뿐이니까.”
겁박하듯 을러대는 그 말은, 나니아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하, 그럴 줄 알았지.”
나니아가 목소리를 내자 축수가 동그란 한쪽 귀를 퍼덕거렸다. 마치 고양이 귀가 사람 손에 닿았을 때처럼 움직이는 모습에서 예민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이젠 구름 같은 목소리로 홀리려 드는구나. 안 됐지만 내겐 통하지 않아.”
그녀는 무언가 자기 좋을 대로 오해하고 있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부정하면 좋을지 모르겠을 정도로 단단히 단정적이었다. 대장이 반겨 줄 것이라 자신하며 나니아를 데려온 원숭이들은 생각과 다른 반응에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그때 모여든 인파를 비집고 사태의 중심으로 나서는 이가 있었다. 털이 아주 곱슬곱슬하고 희끗희끗한 노파였다.
“그분에 대한 무례한 행동을 멈추시오!”
발굽을 닮은 앞발이 그녀를 막아 세웠다.
“…장로.”
“장로님!”
대장의 매서운 눈이 순간 둥그레졌다. 노파의 개입에 여자는 주춤하는 듯싶었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몸을 받치기 위해서 다른 축수들 두엇이 더 튀어나와 그녀를 부축했다. 없는 힘을 쥐어짜낸 듯 지팡이를 짚은 손이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다. 나니아는 결연하게 나서서 자신을 감싸고도는 그 늙은 축수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등은 낙타처럼 굽어 연로한 나이를 짐작하게 했고 무겁게 처진 눈두덩이는 주름으로 쪼글쪼글했다. 그 사이로 간신히 부릅뜬 눈이 대장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대가 그토록 부정하던 구원의 존재가, 드디어 우리 앞에 강림해 주신 것이오!”
노파가 다그치자, 대장은 답답하다는 듯 대꾸했다.
“대체 몇 번이나 더 설명해야 하지? 우리를 사랑해 줄 신 같은 건 없다니까.”
“어허!”
노인은 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불호령을 떨어뜨렸다. 연장자 특유의 보수적이고 꽉 막힌 성격이 엿보였다. 불만 가득한 대장의 강변은 무시한 채, 노파는 감격스러워하며 나니아를 향한 찬미의 인사를 올렸다.
“오오… 위대하신 해방자시여, 구원자시여. 부디 이곳에 머물러 저희에게도 은총을 내려 주소서. 몽매한 권솔들을 거두어 주소서…!”
장로는 마을의 정신적 기둥이나 다름없었다. 오랜 세월 쌓아 온 연륜과 지혜로 말미암아, 대장과는 다른 의미로 존경을 받는 어르신이었다. 그런 장로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렸다. 비틀거리는 몸을 청년들에게 의지한 채였다. 그녀가 나니아를 구원이라 부르며 예를 표하자 긴가민가하던 다른 축수들도 웅성거리던 것을 멈추고 전부터 계속 이끌리던 본능에 몸을 맡겼다.
곳곳에서 탄복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구, 구원이시여.”
“구원자님….”
원을 둘러 모여 있던 축수들이 하나둘씩 몸을 낮추기 시작했다. 꽃잎이 펼쳐지듯 모두가 바닥에 엎드리는 장관 속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것은 오로지 대장뿐이었다. 그녀는 가르마를 흐트러뜨리듯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살벌한 안색만 보자면 금방이라도 쌍욕을 뱉을 느낌이었다.
“이런 멍청한….”
하지만 아무도 그녀가 못마땅한 투로 중얼거리는 것을 듣지 못했다.
* * *
나니아는 마을 공용 공간으로 인도되어 원로들이 주재하는 회담의 중심에 섰다. 마른 목재로 얼기설기 벽을 세운 집은 이렇다 할 바닥재 없이 붉은 수숫대를 엮어 만든 돗자리가 깔렸다. 자연물을 거의 그대로 활용하여 살림을 꾸린 모습에서 발달된 문명과는 많이 떨어져 있는 환경임을 느낄 수 있었다.
늙수레하고 인자한 인상의 축수가 다섯. 가장 끝 쪽 자리에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표정의 대장이 비딱하게 앉아 있었다. 나니아는 그들 맞은편에 심문을 당하는 사람처럼 앉아서, 사방에서 쏟아지는 관심을 감내하였다. 어느 모로 보나 상석인 자리였으나 심적으로는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주변을 에워싼 다른 축수들은 대체로 대장과 나이가 비슷한 어른들이었다. 모나쿠와 쿠나모처럼 어리고 젊은 축수들은 자리가 부족해서 실내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런 자들은 궁금해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건물 밖을 기웃거리기라도 했다. 시원하게 뚫려 있는 창문 너머로 옹기종기 둘러선 축수들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커다란 바나나잎 위로 난생처음 보는 빛깔과 향기를 가진 과일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그것은 구원을 향한 경외를 담아 축수들이 자발적으로 진상한 것들이었으나, 나니아는 그 경건한 마음의 깊이까지는 알지 못했다. 단지 어느 나이 어린 축수 한 마리가 네다리로 겅중겅중 뛰어와 자기도 슬쩍 과일 한 알을 더 놓고 가는 것을 보고 이것이 십시일반 마련된 다과라는 사실을 짐작했다.
“오랜 세월 기다리고 그려 왔습니다….”
“구원께서 이곳을 낙원으로 만들어 주실 거라고, 오오, 저희는 믿겠습니다!”
연로한 노인들이 그녀를 향해 굽신거렸다. 그 거룩한 태도에서 어떤 종교적 믿음과 신의마저 느껴졌다.
“저를 왜, 무엇 때문에….”
설마 이런 대접을 받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던 하녀는 아무 이유 없이 우러러지는 것이 부담스럽고 당황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저는,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뭘 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녀는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바라는 것처럼 낙원으로 데려가 줄 수도 기적을 내려 줄 수도 없었다. 소녀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한 축수가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그저 이렇게 곁에 머물러 주시는 것만으로도, 저희는 이미 행복하여요.”
또 어떤 자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듯 손바닥을 비비며 기도했다.
“그저 가끔 성은을 베풀어 주시면,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지요!”
들으면 들을수록 가관이었다. 그녀는 의도치 않게 사기꾼이라도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모두가 나니아에게 푹 빠져서 해롱거리는 가운데, 오직 단 한 사람 대장만이 제정신인 것처럼 덤덤하게 앉아 있었다.
소녀는 자신에게 쌀쌀맞은 그녀가 도리어 객관적으로 자신을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구명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는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자는 냉담한 얼굴로 입술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비딱하게 기울였다. 어디 한번 두고 보자는 듯 가늘어진 시선이 나니아를 노려보았다.
* * *
본격적인 구원의 임무를 다하기 전, 나니아는 아늑한 독방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축수들을 한 마리씩 맞이하며 본격적으로 ‘성은’을 내렸다. 축수들이 말하는 ‘성은’이라는 것은 정말로 별게 아니었다.
“정말, 행, 행복해요오….”
나니아의 품에 안긴 축수가 감격스러워하며 중얼거렸다. 소녀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솜털이 빼곡히 자라난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곁에 있어 주기만 해도 행복하다는 말이 사실인 듯 그들은 나니아의 다정한 말 한마디, 손짓 한 번에 벌벌 떨면서 영광스러워했다.
“아아, 구, 구원자님…!”
우락부락한 아저씨들을 끌어안아야 할 때면 나니아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들이 내뱉는 말들도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라서 더 그랬다.
“허억…. 너무, 너무 냄새가 좋아요….”
한 마리 한 마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포옹이 길어질 때면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축수들로부터 어김없이 독촉이 쏟아졌다.
“이제 그만 나와!”
너 혼자 그분을 독점할 생각이냐며 성난 기분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데, 나니아는 그들이 요구하는 바를 들어주면서도 황당한 기분을 금치 못했다.
“머리를 쓰, 쓰다듬어 주세요.”
“배를 만져 주세요…!”
“여, 여기를…. 아아….”
그나마 작고 어린 축수들을 어루만질 때면 기분이 좀 나았다. 만져 달라고 떼쓰는 강아지 같기도 하고 관심받고 싶어서 알짱대는 고양이 같기도 했다. 이미 구면인 쿠나모와 모나쿠도 마찬가지였다. 녀석들은 자신들의 차례가 돌아왔을 때 흥분을 금치 못했다. 그녀가 구원이라는 말을 들은 다음부터 조금 더 의식적인 호감을 표현했다.
“모나쿠 구원자님 사랑해….”
“쿠나모도.”
살면서 이토록 열렬한 관심을 받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외려 군중 속에서 공포와 고독을 느꼈다.
‘아버지, 구원이란 대체 무엇인가요…?’
이 짓이 끝나고 나면 반드시 그의 일기장을 다시 들춰 보리라. 나니아는 다짐했다.
포옹을 받고 나서도 주변에 얼쩡거리면 남아 있는 축수들의 경계를 받았다. 마지막 순서가 다가올수록 주변은 점점 조용해졌다. 마침내 긴 줄의 끄트머리가 보일 때쯤, 나니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마지막은 다람쥐를 닮은 작은 축수였다. 그것의 북슬북슬한 꼬리를 어루만지는 것으로 마침내 마을 모두와의 포옹이 끝난 듯했을 때, 절대 나타나지 않을 것 같던 축수가 마지막 순서로 나타났다.
대장이었다.
“…….”
“…….”
방문 밖에서 단단히 팔짱을 낀 그녀의 모습을 발견하고 나니아는 숨이 턱 막혔다. 대장은 다 잡은 먹잇감을 궁지로 몰아넣는 맹수처럼 어슬렁어슬렁 여유롭게 걸어 들어왔다.
여자는 커다란 몸으로 나니아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아 품을 벌렸다. 어서 안기라는 듯이 팔을 뻗는 자세가, 앞선 짐승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깊게 안기지 못해 허둥지둥 댔었으니까.
‘성은’에는 전혀 관심 없는 것처럼 보이던 그녀였다. 대장의 서늘한 얼굴과 큼지막한 체구에 심장이 뛰었다. 나쁜 짓을 당할 것 같기도 하고 듬직해 보이기도 한 품이었다. 소녀는 어떤 적의가 돌아오기 전에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그녀의 팔에 안겼다. 어색하게 마주 두른 팔이 대장의 몸통을 끌어안았다. 비대하고 다부진 몸이 느껴졌다.
마지막 차례의 이점을 누리려는 걸까 아니면 우두머리로서의 특혜일까. 포옹이 제법 길어진다는 생각이 들 때쯤, 음산한 목소리가 귓가에 흘러 들어왔다.
“나는 네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
“네가 우리의 메시아 따위가 아니라는 걸 알아.”
“…….”
협박하듯 을러대는 말에 나니아는 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저물어 가는 햇살이 흐릿한 꼬리를 길게 빼놓은 시간. 커다란 고양잇과 동물의 눈매를 가진 여자가 어스름한 눈빛으로 나니아를 응시하였다. 그리고 그 사나운 시선을 닮은 말을 꺼냈다.
“…지켜보겠다.”
허튼수작 벌일 생각 말라는 듯, 여자는 커다란 앞발로 나니아의 어깨를 한 차례 꾹 짚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앞치마를 뒤로 맨 사람처럼 바보 같고 답답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을 둥둥 떠돌았으나 미처 질문이 되지 못한 채 엉망진창으로 얽히고설켰다. 나니아가 입술을 달싹이는 사이, 대장은 가차 없이 뒤를 돌아 멀어져 갔다.
‘나야말로 내가…. 내가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원치도 않는 구원자 행세를 마친 그녀는 심정이 허탈해졌다. 온몸에 기운이 쭉 빠졌다. 긴장이 풀린 채로 앉아 있는데, 머리에 사슴뿔을 단 축수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고개를 조아렸다.
가슴털이 복슬복슬하고 앙상한 인상의 그는 나니아의 시중을 들게 된 자였다.
“죄송합니다, 구원자니임….”
성은을 입지 못한 축수들이 스무 명쯤 남아 있을 때였다. 그에게 종이나 펜이 있으면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였으나 아무래도 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글씨를 쓸 만한 물건은…. 어딜 찾아봐도 없었어요오….”
맨손으로 돌아온 그를 보고 나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이나 송구스러워하는 탓에 도리어 이쪽이 더 미안해졌다.
“괜찮아요.”
아무래도 이 마을에는 무언가를 문자로 기록하고 남겨 두는 습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글자가 널리 쓰이지 않는 데엔 모종의 이유가 있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나니아는 이제 아무도 찾지 않는 방문 너머를 내다보았다. 그러자 축수가 초식 동물다운 예민함을 발휘하여 그녀의 마음을 헤아렸다.
“예에, 그럼 저는 물러 가겠습니다아. 오늘은 이제 편하게 쉬셔요오.”
필요할 때는 언제든 불러 달라며 축수는 조용히 물러났다. 혼자 남은 방 안에서 나니아는 조용히 아버지의 책을 꺼냈다. 휴식 없이 내내 시달리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어 마음이 한결 놓였다.
아버지의 일기는 물에 젖어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번지지 않는 잉크로 쓰였다는 사실이 천만다행이었다. 종이와 펜이 없던 터라 어쩔 수 없이 맨손으로 읽어 나갔다. 덕분에 독해 속도가 확연히 느려졌다.
[그들은 마치 처음 본 사람을 향해 꼬리치는 개와 같이 첫눈에 우리를 알아보고 맹목적인 신뢰와 충성을 바쳐 온다.]
신뢰와 충성이라는 낱말에 두 줄로 죽죽 선이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말을 고쳐 적은 게 보였다.
[사랑.]
나니아는 중얼거리면서 그 부분을 다시 소리 내어 읽어 보았다.
“맹목적인 사랑….”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아버지의 서술은 나니아가 겪은 축수들의 태도와 일치했다.
[나는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반면에 그들은 나의 페로몬에 매료된다는 점에서,-심지어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아- 이 일방적인 사랑의 형태는 리자드와 우우룡 간의 관계를 떠올리게 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관계를 쌓아 온 나니아는 그것이 무척 불가해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직접 만나 보니 그렇다. 이들과 조금이라도 감정적으로 교류할 기회가 생긴다면, 아마 다른 조축수들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겠지. 이렇게까지 날 사랑해 주는 존재를 어떻게 감히 미워할 수 있을까.]
“…….”
나니아는 그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맹목적인 사랑. 일방적인 사랑.
사랑.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될 수밖에 없었던, 생체적 설계에 따라 만들어진, 필수 불가결했던 사랑.
그래서 거짓 같은, 사랑.
* * *
하루하루 날짜를 세는 일조차 마음 같지 않았다. 부스러기 같은 이 작은 섬에서 나니아는 감옥에 갇힌 죄수가 된 기분을 느꼈다. 영혼 없이 거죽만 남아 몇 날 며칠을 허송세월로 보냈다. 평생 이보다 더 풍족할 수 없는 타인의 관심과 온정을 누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어딘지 곪아 가고 있었다.
기계적으로 축수들을 안아 주었다. 그들이 주는 음식을 먹고, 그들이 제공한 잠자리에서 머물다, 다시 또 그들이 은총이라 여기는 행위들을 반복했다. 쓰다듬고 토닥이고 어루만지고. 그러다 시간이 나면 일기를 읽었다.
[갇혀 있는 다른 가족들도 이들의 사랑을 직접 겪어 본다면 좋을 텐데. 그러면 단지 축수 피가 섞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죽여 마땅한 존재라 규정짓던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워지겠지.]
아버지는 정말로 그들을 사랑한 듯한데, 나니아는 좀처럼 그 감정에 동화되지 못했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적어도 우리는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우물 안 개구리. 딱 그런 꼴이었다.]
일기 속에서 아버지가 ‘우리’라고 지칭하는 가족의 존재가 몹시도 신경 쓰였다.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뿌리가 그 안에 있었지만, 나니아는 그들을 만나고 싶다든가 찾고 싶다든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도리어 멀리하고 싶은 거부감만이 앞섰다. 어쩌면 자신과 같은 형질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니까 조축수라고 불리는 자들이 저 바다 건너에 아주 많이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라히무스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길 수도 있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주었던 것과 똑같이 뜨겁고 숭고한 그 사랑을 바치면서. 본능에 끌려 다른 누군가에게도 필연적으로 매료되고 말 그의 모습을 떠올리자면, 나니아는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였다.
스스로를 조축수라 규정지은 아버지. 축수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는 뒤늦은 승복. 그리고 그렇게 둘 사이를 연결 짓는 원초적 끌림. 아마 자신과 라히무스에게도 오고 갔을 무의식의 교류.
소녀는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의 일기와 그간의 경험으로써 본인을 두르고 있던 한 겹 껍질의 실체를 확인했다. 그것은 줄곧 그녀를 괴롭혀 오던 정체성의 혼란을 불식시켰으나, 이내 더 큰 혼돈을 초래하였다. 의심쩍었던 외피를 벗겨 낸 자리에는 당당한 해방감이라거나 잠재된 능력을 발견한 사람의 희구 같은 기쁨은 전혀 없고, 오로지 쭉정이 같은 허탈감만이 남아 있었다.
소녀는 통렬한 배신감과 그리움을 동시에 느꼈다. 라히무스가 보고 싶었다.
그 야속하고 사랑스러운 남자를 살피러 가고 싶었으나, 항상 대장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언제나 나니아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동굴을 찾는 일은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자가 사냥을 떠나면서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새카만 표범을 닮은 그 여자는 육식을 즐긴다고 했다. 사고야자만으로는 부족한 식사를 피 흘리는 사냥감으로 보충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나니아는 어스름한 새벽녘의 허술함을 틈타 마을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딜 보아도 우거진 밀림이라 과연 길을 찾을 수나 있을까 걱정스러웠는데 이전에 표시해 둔 도표가 큰 도움이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동굴 안에 들어선 나니아는 불을 붙여 줄 그가 없음에 서러워하며 어둠 속에 누워 있는 라히무스를 끌어안았다. 남자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고, 여전히 따뜻했다.
“라히무스….”
소녀는 닿지 않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마주 안아 주지 못하는 품을 파고들었다. 잠든 그의 얼굴은 악마가 빚어낸 인형처럼 아름다웠다. 돌바닥은 딱딱하고 차가웠지만, 두꺼운 팔에 기대어 누우면서 조금쯤 견딜 만해졌다.
소녀는 슬픈 얼굴로 라히무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나는 우리가 차곡차곡 마음을 쌓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라히무스 말고 나한테만 해당하는 얘기였나 봐.”
그에게 닿지도 못할 원망을 속삭이다 눈물이 왈칵 솟았다.
“너는 내가 나여서, 날 사랑한 게 아니라….”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는 그가 미웠다. 그를 사랑하는 만큼 고민스러웠다. 어떻게 이런 번민을 혼자만의 몫으로 남겨 놓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의 입을 통해 어떤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좋으니 일어나서 무슨 말이라도 해 주었으면. 곁에서 함께 고민하고 의논해 줄 그가 필요했다.
하지만 소녀는 혼자였다. 젖은 코를 훌쩍이고 또 훌쩍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긴긴 외로움 끝에 내린 결론은 마침내 자기비하적인 함몰에 이르렀다.
‘그는 나에게 억지로 끌렸던 거야…. 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역시 나 같은 걸 좋아할 이유 따윈 없었던 거야.’
라히무스는 자신의 알맹이가 아니라 껍데기와 사랑에 빠졌던 거다. 그건 마치 사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기라도 한 것 같은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이 비통한 실망감은 그가 제게 욕정을 풀 몸만을 바라는 것 같다고 속상하게 여기던, 그날의 섭섭한 심정과도 흡사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이제 그를 놓아줄 자신이 없을 만큼 라히무스를 사랑하게 된 자신이었다. 남자는 그녀에게 난생처음 사랑받는 기분을 알게 해 준 사람이었다. 그것이 설령 허구적 감정에 뒤따른 결과였을지라도.
비록 그의 사랑은 허상의 형질을 좇은 감정이었을지언정, 그에 뇌동해 버린 자신의 애정은 의심할 나위 없이 진실이었기에.
라히무스를 포기할 수 없었다.
* * *
사냥에서 돌아온 대장은 어깨에 짊어진 커다란 사냥감을 불 옆에 팽개쳐 놓았다. 피 묻은 칼이 무심하게 던져져 물통에 풍덩 잠겼다. 더러워진 창칼을 손질하는 건 내자들의 몫이었다. 대장이 마을에 남아 있던 이들에게 통지하듯 말을 건넸다.
“해변에 낯선 놈들이 널려 있더군.”
여자는 보았다. 비정상적인 잠에 빠져 있던 축수들. 그리고 난파된 함선의 조각.
아마도 제도 주변을 털고 다닌다는 해양 도적놈들이지 싶었다.
“어떻게 하셨어요?”
숨통이 붙어 있었다는 대장의 설명에 부하가 물었다.
“다 끊어 놨다.”
여자는 돌아보지도 않고 대꾸하면서 잡아 온 사냥감의 목덜미를 찢었다. 피를 빼기 위한 도축 작업에 불과했으나 맨손으로 생물을 찢어발기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살벌한 광경을 연출했다. 한 축수가 피가 줄줄 흐르는 사냥감 더미에 물을 한 바가지 쏟아부으며 물었다.
“무슨 일에 휘말렸던 걸까요?”
“…글쎄.”
그렇게나 많은 수의 축수들이 죽지도 않고 일제히 잠이 들어 있는 꼴이란 확실히 범상하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아마 상대를 잘못 골라 달려들었다가 재수 없는 암악 주술에 걸려들기라도 한 모양이지.
어쨌거나 호의를 가질 만한 놈들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이곳 거스러미 제도에서 해적들의 노략질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편이었고, 당장은 잠이 들어 있지만 언제 저주가 풀려서 깨어날지 알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동족이라는 문제로 특별히 구애받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으니 골치 아픈 문제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해변은 청소했어야 했다.
한 톨의 동정심도 느끼지 못하였느냐 묻는다면 그런 건 아니었다. 대장은 놈들의 멱을 따면서도 혀를 끌끌 찼다. 본토에서 쫓겨나 그런 식으로 삶을 영위해 나가는 축수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대장은 패배주의적으로 도망쳐 왔다는 점에서 자신과 그들이 별반 다를 바 없음을 느꼈다.
“대장 덕에 오늘도 고기 요리 먹는 거야?”
“대장 최고!”
해산물보다는 육지 짐승을 더 좋아하는 녀석들이 벌써 신나 했다.
여자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예찬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저에게 기대어 살아가는 다른 축수들을 볼 때면 애틋함을 느꼈다.
대장은 대장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지키기로 마음먹은 이 작은 낙원을 수호했다. 모든 것을 잃고 찾아온, 낯선 이방인에 불과했던 자신을 그들이 식구로 맞이해 주면서부터였다. 부모, 형제, 자식, 남편 무엇 하나 제대로 가진 게 없었다. 오로지 이 섬의 동족들만을 가족처럼 여기며 살았다.
그래서였다. 나니아의 거류를 참아 줄 수 없는 까닭은.
이 작고 소중한 평화를 위협할 존재였다. 여자는 그녀를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구원은 뭘 하고 있지?”
대장은 그녀가 구원자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은 남들이 부르는 대로 그녀를 불렀다. 멍청한 축수들과 일직선으로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다.
“구원께서는 오늘 성은을 끝내셨고오…. 거처에 계실 텐데요오…. 그곳에서 항상 책을 읽으시는 듯해요오.”
뾰족한 사슴 발굽을 가진 남자가 말했다. 가장 수더분하고 유순한 성격이어서 구원 곁에 가장 가까이 머무는 것이 허락된 자였다.
대장은 알았다는 듯 턱짓 한 번으로 대답을 대신하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잘 꾸며진 아늑한 방. 평범하게 뭍에서 살다 온 사람이라면 부족하게만 느껴질 환경이겠으나 이곳 기준으로는 무척 공을 들여 꾸려 놓은 상태였다. 그 사실을 아는 대장은 입이 썼다. 얼마나 극진히 모시고자 하는지 그 지고지순한 성심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글쎄 그 계집애는 여신 같은 게 아니라니까.’
하지만 이내 대장은 쓴웃음도 거두어 버리고 싸늘한 탐색의 시선을 입었다. 방 안은 사람 그림자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뒷간에라도 갔나 싶었지만, 집 주변을 둘러보아도 좀체 찾을 수 없었다.
‘멍청한 계집.’
그녀의 부재를 확인한 것이 자신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누군가가 알게 되었더라면 당장에 요란스러운 수색이 시작되었을 터다. 하지만 대장은 하나는 알고 둘은 몰랐는데, 이렇게 늦은 시간이 되면 자기 말고는 아무도 감히 나니아의 방을 찾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 못 했다.
그녀가 사라져 주길 바라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쫓아내고 싶은 것이지 자기 발로 도망치게 내버려 두려는 게 아니었다. 아직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목적이 무엇인지도 묻지 못했다. 대장은 도망친 표적을 쫓는 사냥꾼처럼 기민하게 움직였다. 정확히는 그러려고 했다. 나니아가 두고 간 가방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누가 만질라치면 건드리지도 못하게 하던 그 가방이었다. 애지중지하던 세간들을 모두 놓고 사라졌을 리는 없으니 정말 밤 산책이라도 나섰는가 싶어서 조금 허탈해졌다. 대장은 냉담한 손길로 가방을 덥석 쥐어 들었다. 거꾸로 뒤집어 바닥으로 탈탈 털어 대니 시답잖은 소지품들이 잔뜩 쏟아져 나왔다.
허름한 옷가지, 구급약품, 머리끈, 찢어진 손수건, 작은 주머니, 여분의 신발, 슬쩍 넣어 둔 단검, 은은한 광택으로 번들거리는 가죽 지갑. 용도를 모르겠는 물건은 그것뿐이라 손바닥만 한 가죽 제품에 손이 먼저 닿았다. 펼쳐 보았더니 별 건 없고 맨 앞장에 종이 한 장이 꽂혀 있었다. 재질과 규격을 보아 술지인가 싶었지만, 고작 한 글자였다. 본적 없이 낯설어서 한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역시나 읽을 수는 없었다.
사람 이름인가 보다. 대장은 대수롭지 않아 하며 손에 든 지갑을 바닥으로 툭 던져놓았다. 단검에 무시무시한 술이 붙어 있나 싶었지만, 그도 아닌 것 같고.
정말 특이 사항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시시껄렁한 물건들뿐이었다. 그러던 중에 여자는 다른 세간살이들과 다르게 가방에서 이미 꺼내져 있던 물건을 발견했다. 연식이 오래되어 보이는 허름한 책이었다. 표지가 까맣고 두툼했으며 옆면은 물에 젖어 쪼글쪼글하게 부풀어 있었다.
책을 펼쳐본 여자는 ‘그럼 그렇지’하는 얼굴로 눈살을 확 찌푸렸다.
역시나 그 계집은 구원자 따위가 아니었다. 그저 해로운 침입종일 뿐.
* * *
밤이 내린 숲속, 드문드문 들려오는 새 울음소리만이 깜깜한 적막을 허물었다. 나니아는 자신의 먹먹한 심정만큼이나 새카만 수풀을 걸어 마을로 돌아가는 길을 찾았다.
무엇하나 해결하지 못한 채 라히무스를 두고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자신은 공주가 아니기 때문일까. 하녀의 키스는 왕자님을 깨울 수 없었다.
한스러운 마음이 풀릴 때까지 미동 없는 그를 만지고 또 만졌다. 하지만 아무리 입을 맞추고 끌어안아 보아도 이 처량한 기분은 달래지지 않았다. 마주 안아 주지 못하는 팔과 반응 없는 입술에 외로움이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비참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원 없이 한참을 엉엉 울고 난 다음에야 동굴 밖을 나선 것이었다. 정말이지 혼자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더 이렇게 지내야 하는 걸까. 무엇을 어떻게 해야만 이 어려움을 타개할 수 있을까.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이 막연한 고독과 싸워 이겨야 하는 앞날이 요원하기만 했다. 이미 구를 대로 굴러 본 장성한 용병 사내라면 모를까, 평생을 부엌일이나 하며 살아온 하녀에게는 수월찮고 험난한 현실이었다. 다시 또 눈물이 찔끔 흘러서 남몰래 콧등을 찡그렸다.
그러던 중에 불쑥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야행성 동물다운 시력의 맹수 한 마리가 그녀의 등 뒤로 툭 떨어져 내렸다. 대장이었다.
마중을 나와 주었다기엔 접근 방법이 섬찟했다. 나니아는 깜짝 놀라서 손에 든 등불도 떨어뜨렸다. 그녀는 사냥감을 낚아채듯이 나니아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러고는 육식 동물처럼 으르렁거렸다.
“어딜 다녀오는 거지?”
마을에 있는 가족들을 따돌리고 여기까지 기어 나와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어서 섬을 돌아다녀.”
그녀는 나니아가 어떤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가설을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했다. 맹수는 거센 추궁과 함께 나니아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소녀는 우악스러운 힘을 견디지 못하고 휘청이더니 기어코 무게 중심을 잃고 그녀의 품 안에 쓰러졌다.
대장은 나니아에게서 맡아지는 아찔한 향내를 의식적으로 거부했다. 자신은 속지 않는다. 헛된 믿음만 없다면 정신적으로 버틸 수 있는 종류의 유혹이었다. 허를 찌르고 모든 것을 실토하게 만들겠다고 다짐하던 차에, 어둠 속에서도 선명해지는 시력으로 보았다.
소녀의 얼굴이 젖어 있었다.
“…울어?”
대장은 크게 당황하며 나니아에게서 손을 떼어 냈다. 그리고 다시 그 뺨을 어루만져 주기라도 해야 할 것처럼 책임감을 느끼며 커다란 앞발을 깜박거렸다. 예리하고 날카롭던 추궁이 순식간에 무디어졌다.
“왜, 왜 울어….”
군데군데 눈물로 붉게 물든 예쁘장한 얼굴이 견디고 버텨 오던 저항감을 폭삭 허물어뜨렸다. 그녀가 흘려보내는 페로몬이 전에 없이 강렬하기도 했다.
“누가, 괴롭혔어?”
멍청할 정도로 뭉툭해진 질문에 나니아는 꾹꾹 눌러 왔던 울분을 터뜨렸다. 그녀는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정말로 엉엉, 울었다.
“그러니까, 너는 동쪽에서 나고 자라 서쪽으로 가는 중이고. 가는 길에 사고를 당해 표류 되었을 뿐이고. 이건 아버지가 남긴 유품이고. 너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거지.”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입술을 삐죽이려던 대장은 나니아의 침잠한 낯빛을 확인하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자식뻘의 조그마한 여자아이에 불과한데도 어쩐지 거스를 수가 없이 어려웠다. 이것이 조축수에게 지배당하는 감각인가 싶어 기분이 더러워지려다가도 이내 곧 형언하기 힘든 설렘이 혈관을 타고 온몸을 덥혔다.
대장은 그녀를 절대자라 믿는 다른 멍청이들처럼 실실대지 않기 위해서, 일부러 더 퉁명스러운 태도를 꾸며 냈다.
“젠장,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렇게 넙죽넙죽 안아 달란 대로 안아 줬단 말이야?”
“그렇지 않으면, 비위를 거슬렀다가 잡아먹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나니아가 쪼그려 앉은 몸을 더욱 웅크리며 대답했다.
그들은 모래사장에 앉아 있었다. 대장과 그의 부하들이 한낮에 청소를 마치고 깨끗해진 해변이었다. 밤바다 철렁이는 소요 속에 서로 다른 박자로 가슴이 뛰었다.
대장이 설명했다.
“너 같은 조축수들은, 세간에서는 그저 축수 잡는 술지나 무기를 만들어서 판다고만 알고 있지.”
아는 사람들은 보통 조련사라고 불렀다. 축수 조련사. 그들은 트라나디라는 패밀리 네임을 가지고, 오랜 옛날부터 축수를 길들이는 일을 가업으로 삼아 왔다.
시장에 풀리는 축수 잡이용 도구들은 모두 그들의 손을 거쳐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는 옛날만큼 쓸모와 효용이 대단치 못해서 그 명맥이 가늘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군사작전이나 반란 진압 등을 위해 쓰이곤 하는 물건들이었다. 꼭 통치자가 아니더라도 수요는 다양했다. 세상에는 사적으로 축수를 길들이고 싶은 귀족들이 제법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트라나디 가문의 인간들이 특별한 까닭은 단지 축수를 다루는 암악술에 능통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은 너희 혈족의 뼈와 살 그 자체가 우리에겐 무기나 다름없다는 걸….”
여자는 무기에 빗대기엔 너무도 유약해 보이는 소녀를 흘긋 훔쳐보며 말끝을 흐렸다.
“…나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지.”
나니아는 대장의 이야기를 남의 일처럼 들으며 모래 위에 의미 없는 원을 그렸다. 궁금했던 가문의 이야기를 들으며 개운하기보다는 착잡한 마음이 앞섰다.
‘내가 단순히 다루는 능력만 있었던 게 아니었구나.’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던 의외로운 능력이었다. 그러나 글씨로 불꽃을 피워 올리던 그날처럼 가슴 벅차고 뿌듯하지는 못했다.
“그런 얘기는 아무도 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제 동료들이요. 리자드가 셋, 다룸이 하나 있었는데….”
나니아는 리자드라는 말을 뱉어 놓고 멈칫했다. 라히무스를 숨겨 놓은 이유이자 원흉이 지금 코앞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대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한테까지 분노를 표출할 미치광이는 아닌 모양인지, 당연하다는 듯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모르지, 보통은. 원체 숨어 사니까.”
“숨어 살아요? 왜요?”
“아무렴 알려져 봤자 귀찮지 않겠나?”
귀찮지 않겠느냐는 말에 자신은 왜 또 라히무스가 떠오르는 것일까.
“우리 섬에 사는 저 얼간이들처럼 분간 없이 달려들면,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피곤해지겠어.”
나니아는 대장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한 명만 상대하기도 벅찼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아버지는 왜 가문을 벗어나고 새 삶을 찾으려 했을까. 그 이름을 왜 버리고 싶었을까. 그리고….
“대장은 왜, 다른 축수들과 달라요?”
“뭐가.”
“그러니까, 당신은…. 다른 축수들처럼 저한테 조종당하지 않잖아요.”
나니아의 말에 여자는 가당치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조종? 착각하지 마.”
“…아닌가요?”
그저 조금 달콤한 목소리와 예쁘장한 얼굴을 가졌기로서니, 네가 우릴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라고.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런 거 아냐. 그냥 좀….”
하지만 실제로 지금 당장 배를 까뒤집고 쓰다듬을 받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도 사실이라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왜 아니겠는가. 대장 또한 예외 없이 호르몬 과분비 현상을 겪고 있었다. 단지 그녀는 나니아가 신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경도되지 않으려 인내할 뿐이었다.
대장이 말을 얼버무리는 사이, 나니아는 생각했다.
‘잘 안 통하는 상대도 있는가 봐.’
소녀는 밤하늘의 별을 목적 없이 올려다보다가 조심스레 새 질문을 건넸다.
“있죠, 더 물어봐도 돼요? 다른 얘긴데….”
“뭔데.”
여자가 대답해 줄 것처럼 묻자, 나니아는 부끄러운 이야기를 꺼내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전전긍긍하며 고민해 오던 아버지에 대한 얘기보다 이런 게 더 궁금하다니.
“애인이 있거든요, 제가….”
‘내 애인이 알고 봤더니 축수 혼혈인 것 같아요. 그럼 그 남자는 내게 속은 건가요? 내가 이런 체질이 아니었더라면 역시 걔가 나를 좋아하는 일은 없었을까요?’
그녀가 자신 있게 말을 잇지 못하고 우물쭈물 질문하기를 망설이자, 대장은 알겠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리자드 애인?”
물으려던 바는 아니지만 감추려던 걸 간파당한 것은 사실이기에 나니아는 깜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제, 제가 뭐, 무슨 말을… 한 적이 있나요?”
어쩌면 동굴까지 쫓아와서 그 모든 광경을 다 지켜보았던 걸까? 혹시 모르는 척 시치미 떼고 앉아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나? 나니아는 소름이 끼쳐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라히무스가 위험해.’
하지만 이어지는 대장의 말이 다시 나니아를 주저앉혔다.
“애인이 아니면 누가 리자드 껍질 따위를 그렇게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겠어?”
“…….”
상대방은 전혀 모를 일이지만, 바보가 된 기분이 들어 부끄러웠다.
“가방 좀 뒤져 봤어.”
여자가 말했다. 네 사생활을 훔쳐보았노라 선언하는 목소리가 썩 당당했다.
“지금 그는 어디 있지? 네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 알고 있나?”
대장이 물었다. 사실대로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나니아는 결국 적당한 거짓말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아, 아니요. 몰라요…. 그래서 빨리 뭍으로 가는 방법을 찾아야 해요.”
그녀의 말에 대장은 한숨을 얕게 내쉬면서 턱을 쓰다듬었다.
나니아가 이 섬을 망치려는 속셈 가득한 조축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한시바삐 그녀를 쫓아내려던 계획도 어그러졌다.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그녀를 이곳에 머물도록 설득할지, 아니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무사히 떠날 수 있도록 도울지 고민이 됐다. 하지만 지금 당장 조언해 주고 싶은 한 가지는 분명했다.
“리자드는 만나지 마.”
언뜻 집안 어르신처럼 엄격하게 말하는 그녀를 나니아는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리자드를 싫어한다더니. 그것이 남의 연애 상대로도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왜요?”
“리자드는 어차피 리자드를 사랑하게 되어 있어.”
대장은 무언가 씁쓸한 추억을 곱씹는 것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미 데인 바 있는 것처럼 말을 하니 어쩔 수 없이 궁금증이 일었다.
“리자드를 사랑한 적이… 있으신가 봐요?”
나니아가 물었다. 정중하게 들리기 위해 신경을 쓰긴 했는데 너무 사적인 호기심인가 싶어 말을 뱉어 놓고 후회했다. 다행히 대장은 나니아의 질문 자체가 불쾌하지는 않은 듯했다.
“혼자만의 일방적인 사랑도 사랑으로 쳐 준다면, 뭐.”
이제는 그를 떠올리면 헛웃음이 나는 것으로 보아, 알게 모르게 상처는 아물어 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해 봤지. 반반한 리자드 남자한테 빠져서 인생을 송두리째 말아먹는 일.”
그녀는 오를 수 없는 나무를 감히 욕심내었다가 비참하게 추락해 본 경험이 있었다. 그것은 주제를 모르는 축수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대장은 본래 대륙 출신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외딴 섬에 숨어 사는 신세이지만. 한때 장군 직함을 달고 일국의 군사들을 호령하던 관인이었으니, 시쳇말로 도시물을 좀 먹어 본 여자였다.
축수치고는 이례적인 출세라는 평이 항상 따랐으나 그만큼 그녀는 대단히 늠름하고 걸출한 무인이었다. 리자드와도 비등하게 싸울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전사였기 때문에 인재가 한 명이라도 아쉬운 나라에서는 감히 홀대할 수 없었다.
또한, 그녀는 아름답기도 했다.
축수를 향한 은은한 차별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했으나 그것이 매력적인 암컷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거부감 없는 외양은 커다란 이점으로 작용하여 같은 축수들로부터는 질투와 부러움을, 축수들을 배제하려는 다른 종족들로부터는 적의와 호의를 동시에 샀다.
그래서 여자는 자기가 뭐라도 된 줄 알았다. 그래 봤자 축수는 축수인 줄 모르고.
미천한 것들에게는 더 넘볼 수 없는 한계가 지어지는 법이었으며, 허락의 범주를 넘어서는 순간 철퇴가 가해졌다.
“리자드 사이에도 페로몬이 오가는 거 알아?”
대장이 묻자 나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실감은 나지 않지만, 거기에 집착하는 챠링고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다.
대장은 체념하는 투로 조소했다.
“걔들은 그걸로 사랑을 해. 너는 그거 못 이겨.”
느껴 본 적 없는 감각을 이해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다만 여자의 충고에 대해서라면 나니아도 반박하고 싶은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제 애인은…. 축수 혼혈인 것 같아요.”
그러면 대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내가 그 사람과 계속 사랑을 할 수 있겠냐는 듯, 소녀는 간절한 마음을 품었다. 염원하는 눈빛이 그녀의 조언을 애타게 기다렸다.
“리자드와 축수 혼혈?”
“네.”
하지만 대장은 기대와는 다르게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딴소리를 해 댔다.
“그런 게 흔치는 않을 텐데….”
“왜요?”
“왜냐니.”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듯 질책하려던 대장은 입을 다물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두 눈을 깜빡이는 동대륙 출신 소녀의 얼굴이 천진하고 무지했던 탓이다.
“그야 리자드는….”
여자는 어중간하게 들어 올린 양손으로 커다란 타원을 그리듯이 움직였다.
“알에서 태어나.”
“…그건 저도 알아요.”
“알에서 태어난다는 건, 리자드의 생은 처음부터 절대적으로 어미에게 달려 있다는 거야. 알이 누구와 만든 유정란인지는 어미만 알지.”
“유정란….”
닭이 품은 달걀이 떠올라서 와중에 웃음이 났다.
“어차피 알에서 태어날 아이는 리자드니까 굳이 아비가 누군지 따지지도 않는 문화야.”
리자드는 리자드였다. 리자드 암컷이 누구와 관계를 맺든 아종이 만들어지는 일은 없었다. 나니아는 대장의 설명을 듣고 아리송해졌다.
“엄마 쪽이 축수라면요? 아, 그렇게 되면 알이 없어서….”
알 없이 태어나는 리자드가 있을까. 나니아가 고민하는데 대장이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없는 알은 만들어서 낳아야 하지.”
“만들어서요?”
“그래. 배 안에 억지로 리자드 알을 만드는 거야. 암악 주술의 힘을 빌려서.”
“…….”
“하지만 보통 그렇게까지 하진 않지.”
대장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이 나니아의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툭 밀었다.
“혹시라도 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면 일찍 접는 게 좋아. 모태에 부담이 많이 가니까.”
“…인간도 가능해요?”
“하지 말라니까.”
대장은 못 말리겠다는 듯 비뚤게 웃으며 다시 한번 소녀의 볼을 꼬집었다.
“아무튼, 가능하다는 거죠?”
여자는 대답 대신 헛웃음을 흘렸다. 애당초 리자드랑 헤어지라는 조언을 하다 말고 어쩌다 그것과 자식을 낳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건지.
“아서라. 그렇게 태어난 자식은 딱히 내 자식 같지도 않아.”
평소답지 않게 꼬치꼬치 캐묻는 나니아의 호기심이 포기를 모르고 이어졌다.
“그때 그 남자 자식을 낳은 거예요? 리자드 알을요?”
“…철없을 때 얘기지. 이삼십 년도 더 된 일이니까.”
별로 아름답지 못한 과거였다. 환영받지 못한 아이를 혼자 짊어지게 된 미혼모의 삶이란 게 순탄할 리가 없었다.
“지금 이 섬에서 살고 있나요?”
“아니. 그럴 리가.”
나니아는 자기가 물어봐 놓고도 썩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무안해졌다. 이 섬에서 리자드라고는 본 적 없었으니까. 아마 그녀가 숨겨 놓은 라히무스뿐일 거다. 소녀는 결혼해 달라는 말도 제대로 받아들여 준 적 없는 주제에 감히 그와의 아이를 상상해 보았다.
“저는 줄곧 가족이 가지고 싶었어요. 그런데 대장 말을 듣고 나서 보니….”
평생을 일가친척 없는 고아로 살아온 소녀는, 서로가 서로를 끈끈하게 옭아맬 수 있는 절대적인 관계를 꿈꾸곤 했다. 혈육이 없으니 결혼으로라도 그런 가족을 꾸리고 싶었는데.
“나한테도 피붙이가 있구나, 어쩌면 찾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조금 얼떨떨해요.”
보고 싶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아버지가 이유 없이 그곳에서 도망쳐 나오지는 않았으리란 생각에서였다.
“대장도 가족이 있나요?”
나니아의 질문에, 여자는 자식 얘기를 물었을 때보다 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여동생이 셋 있었는데….”
딱히 끈끈한 관계는 아니었다.
“다 죽었어.”
덤덤한 투로 말하는 비극적인 얘기에 나니아는 심장이 철렁했다. 큰 실례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조심히 입을 가로막는 시늉을 했다.
“죄송해요…. 별 뜻 없이 물어봤는데, 그런 줄은 모르고….”
“알아.”
괜찮다고 말하는 대장의 얼굴은 정말로 태평하게만 보였다. 나니아는 초조하게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리자드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 때문일까. 남자에게 버림받아서.
“그런 괴물을 낳은 내 업보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
여자는 찜찜한 과거는 털어 버리듯이 어깨를 활짝 폈다. 기지개를 켜 올리는 양팔이 애를 낳아본 몸 같지 않게 매끈하고 늘씬했다.
“괴물….”
얼마나 끔찍했으면 없는 알도 만들어서 낳은 제 아이를 괴물이라 말할까. 대장은 양팔을 한 바퀴 크게 돌리며 찌뿌둥한 몸을 풀었다. 등 뒤로 크게 돌아간 오른팔은 이내 나니아의 어깨에 걸쳐졌다.
“나한테 이제 가족은 여기 이 섬의 축수들이야. 가족이란 게 꼭 피가 섞여야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더군.”
그녀는 은근슬쩍 나니아의 작은 몸을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오늘 아침 생각하던 것과는 딴판인 말을 꺼냈다.
“너도 이곳에 머물 생각이 든다면 좋겠어. 네가 있다면…. 어쩌면 정말 낙원이 될지도 모르지.”
적어도 그녀를 신이라고 믿는 다른 가족들에게만큼은. 허무맹랑한 전설일지라도 그것이 종교적 안락을 가져다준다면 특별히 나쁠 것도 없으리라.
대장 자신조차도 계획에 없던 제안이었으니 청을 받는 나니아의 입장에서는 더욱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쫓아내지 못해 안달이었던 여자의 청탁이었다. 대장은 승낙보다는 거절을 더 말할 것 같은 나니아의 얼굴을 살피다, 덤덤한 척 그녀의 볼을 손등으로 툭 건드렸다. 악의 없는 조축수의 순진한 눈빛이 대장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당장 붙잡겠다는 거 아냐. 천천히 고려해 봐.”
여자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고운 모래가 묻어 있었다.
“내일 아침엔 카카와에 거품을 내주마. 내가 이 섬에서 제일 좋아하는 거다. 너도 그걸 맛보면 여기 눌러앉고 싶어질지 모르지.”
마지막 말은 우스갯소리였다. 씨익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는 얼굴이 호쾌하고 근사했다.
“가자, 나니아.”
대장이 일으켜 세워 주려는 듯이 손을 뻗자, 소녀는 그 커다란 손을 마주 잡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이름… 알고 계셨네요.”
여자는 낯간지러운 긍정 대신 짧게 코웃음 쳤다. 당겨 올리는 팔 힘이 대단하여 나니아는 거의 끌려가다시피 기립했다. 그러다 결국엔 대장의 커다란 가슴에 쏠리듯 안기고 말았다. 무안한 몸을 뒤로 물리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가늘게 예리해진 눈빛에 익숙한 마력을 느꼈다. 까만 고양이가 가지고 있을 법한 샛노란 눈동자. 소녀는 홀린 듯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성함도 못 여쭤봤어요. 다들 대장이라고만 불러서.”
멋쩍은 웃음과 함께 그녀의 이름을 물었다. 참 빨리도 물어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을 받는 입장에서도 겸연쩍기는 마찬가지였는지, 여자는 등을 벅벅 긁으며 불퉁하게 대꾸했다.
“그냥 너도 대장이라고 불러.”
“부르려고 물어보는 거 아녜요. 그냥 알고만 있을게요.”
머쓱한 시선이 밤하늘을 배회했다.
“…내 이름.”
그녀 자신도 너무 오랜만에 발음해 보는 소리라, 마치 남의 것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여자가 삐죽한 눈썹을 들어 올리며 대꾸했다.
“울로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