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스러미 제도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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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러미 제도

표류

낙원

섬 밖으로

거스러미 제도

슈쉬라 코르테알은 젊고 무모한 상인이었다. 노련하지만 보수적인 그녀의 아버지와는 달랐다. 다른 님프들이 꺼리는 험한 물건들을 배짱 좋게 취급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그 담대하고 노란 싹을.

“하루 이틀도 제게는 치명적이에요. 신선도가 중요한 품목이 많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해류의 흐름은 놓치지 않고 꾸준히 항주하고 있소. 바람이 뜻대로 불어 주지 않는 건, 사람의 능력 밖에 존재하는 일이오.”

“내 물건이 가축 사료로 전락하는 꼴은 못 봐요. 더는 지체할 수 없습니다. 항로를 다시 짜 주세요.”

뱃길을 놓고 선장과 선주 사이의 의견이 분분했다. 슈쉬라는 책상 위에 펼쳐 놓은 해도를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주인 된 자의 결정권을 행사했다.

“남서향 대각선 방향으로, 이쪽. 거스러미 제도를 통과하는 방향으로 가겠습니다.”

선장은 난감하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그녀를 만류했다.

“그쪽으로 최단 항로를 짤 수 있다는 걸 나라고 왜 모르겠소. 하지만 축수들의 노략질이 횡행하다지 않아.”

거스러미 해역에 대해서는 무성한 소문만이 존재했다. 부풀려진 듯 막연한 두려움은 게롤린에도 은은하게 퍼져 있었으나 정기선이 오가는 것도 아니라 정보는 미미했다. 게다가 해적의 습격은 곧 죽음을 의미했으니 선명한 목격담이란 게 존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고작 축수 떼를 무서워합니까?”

“아니, 무서운 게 아니라….”

선장이 그 바다를 꺼리는 이유는 단지 약탈의 위협뿐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원하는 항해로는 수심이 얕고 뱃길이 험했다. 그러나 문제를 제기했다가는 자신의 항해 기술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 인정하는 꼴이라, 선장은 약한 소리를 늘어놓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병기라면 이쪽도 지지 않아요. 적을 무력화시킬 만한 탄약들을, 이럴 때를 대비해서 준비해 두었죠.”

님프가 자신만만하게 대꾸했다. 그러고는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관철했다.

“제도 끝에 거쳐 갈 만한 시국이 하나 있더군요. 마음 놓고 정박하기 좋은 섬이라 들었어요. 빠르게 빠져나갑시다. 그곳에서 짧게 경유해 가지요.”

선장은 설득을 포기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딸뻘이지만 고용주인 그녀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거스러미 제도는 섬이 많은 만큼 자잘한 암초도 허다한 해역이었다. 어디다 뱃머리를 처박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다고 생각하며 주머니 속의 나침반을 만지작거렸다.

완연하게 높아진 남중고도. 이제는 불쾌할 정도로 더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역시 원거리 항해는 힘드네. 북상해서 들어오던 길보다 훨씬 먼 느낌이지?”

“육지가 그리워서 미치겠다고.”

“어디 연안에 잠깐이라도 하선해서 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어제부터 띄엄띄엄 섬이 보이던데, 아무 데나 좀 내렸다 가면 안 되나?”

“저긴 다 무인도다, 멍청아.”

챠링고와 파키케팔로가 지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었다.

햇빛이 반쯤 들이치는 그늘. 도마뱀들은 갑판 위에 나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객식구였다. 어떤 통제권도 결정권도 없이 그저 배에 딸려 탄 몸들이었기 때문에, 선주가 하자는 대로 했고 가자는 대로 갔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쯤 목적지에 도착하게 될까.

“파코…. 올라가서 망 좀 보고 와라.”

“뭐? 내가 왜?”

“너 눈 좋잖아.”

챠링고가 중앙돛대를 가리키며 말하자, 파키케팔로는 그게 웬 헛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걸 좀 보고 온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옆에 있던 벨로즈가 고개를 들어 돛대 끄트머리를 올려다보았다. 까마득한 위치에 전망대로 사용하는 구조물이 매달려 있었다. 태양만큼 높은지라 그곳을 쳐다보기 위해서는 눈 위에 그늘이 필요했다.

“저런 곳엘 어떻게 올라가죠?”

벨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재밌어 보이는 일은 참지 않는 님프지만, 목숨까지 걸 만큼 도전적이지는 못했다.

“슈라는 잘만 올라가던데.”

파코는 님프 중에서도 그가 특히 약골인 것 같다며 벨로즈를 놀렸다. 하지만 벨은 겁쟁이 운운에도 크게 괘념치 않았다. 오히려 의기를 보인 쪽은 나니아였다.

“바람을 통해 부양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컵 띄우는 것도 힘들어했잖아요, 나니아.”

“그건 그래요….”

게으른 암컷 리자드가 이젠 아예 드러눕다시피 하며 기지개를 켰다. 그녀는 놀리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나니아에게 도전을 권했다.

“올라갔다 와 볼래?”

“제가요?”

그녀가 뜨악한 눈으로 돛대 끝을 바라보자, 챠링고가 뜬금없이 돈을 걸었다.

“나는 할 수 있다에 은전 한 닢.”

“네?”

돈내기라는 것이 반대쪽에 걸어 주는 사람이 있어야 성립되기 마련인지라.

“그럼 나는 못 한다에 한 닢.”

파키케팔로 또한 짓궂은 웃음과 함께 발을 들였다.

리자드들은 돈내기를 좋아하는 승부사였다. 롱타보드를 가지고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기나긴 바닷길은 참으로 무료했다. 이토록 무의미하고 하찮은 내기를 제안할 만큼 그들에게는 어떤 유희 거리가 필요했다. 누구누구는 물고 빨고 할 애인이라도 있어서 좀 견딜 만한지 모르겠지만, 나머지 리자드들은 너무나도 심심한 것이었다.

난데없이 자신을 가운데 두고 내기 판이 벌어지자, 나니아는 당황했다.

“하겠다고 한 적 없는데요?!”

“그럼 내가 이기는 거지 뭐!”

“내 돈 사수해 줘, 나나.”

파키케팔로가 신이 나서 짤랑거리자, 챠링고도 지기 싫다는 듯 응원을 보탰다.

“안 그래도 뱃멀미로 힘든 사람한테 이상한 부담 주지 말아요.”

벨로즈가 한심하다는 투로 그들을 꾸짖었지만, 리자드들은 듣지 않고 라히무스까지 끌어들이려 했다.

“라히무스, 너는?”

어느 쪽의 판돈이 두 배로 늘어날 것이냐. 챠링고와 파키케팔로가 흥미진진한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둘은 각자 자신의 반대쪽에 걸어 주길 바라고 있었다. 챠링고의 물음에 나니아도 스윽 고개를 돌려 라히무스의 반응을 살폈다. 난처한 기분과는 별개로 그의 생각이 궁금하긴 했다.

“…뭐.”

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삐죽 들어 올렸다. 네 쌍의 눈이 모두 자신을 향하고 있어서 부담스러웠다. 한창 대답을 망설이던 라히무스는 바람 불면 날아갈 듯한 그의 가볍고 작은 애인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우뚝 서 있는 돛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내 단호하게 꺼내 든 부정.

“…못 해. 하지 마.”

덤덤하다 못해 냉정하기까지 했다.

너는 못 해.

그 말이 얌전하고 미온적이었던 나니아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켰다.

“그럼 못 한다는 쪽에 건다는 거지?”

받아 낼 판돈이 두 배로 늘어난 챠링고가 즐겁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니, 하지 말라고.”

라히무스는 왜 말귀를 못 알아 처먹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더니 나니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얘는 그런 거 못 해.”

너는 못 해.

몇 번이고 반복되는 그의 무시가 이런 쪽으로는 좀처럼 불타오를 일 없는 소녀의 아집을 자극했다. 딴에는 보호해 주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무능하다 단정 짓는 것 같은 말에 그다지 달갑잖은 기분이 들었다. 남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언제나 오기를 불러일으켰다.

“할 수 있어요.”

나니아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호기롭게 앞돛대로 향했다.

“뭐?”

뒤에서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무시했다.

‘별거 아니야.’

슈라는 늘 오르내리는 전망대였다. 그 여자가 할 수 있다면, 자신이라고 못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저 밧줄을 잡고, 놓고, 밟고, 올라가는 행위를 반복할 뿐이었다. 나니아는 커다란 삼각형 모양의 로프 사다리 앞에서 펜을 들었다. 뒤따라온 라히무스는 ‘얘가 왜 이러지’하는 눈으로 그녀를 말렸다.

“하지 마.”

“불이나 붙여 줘요.”

소녀는 흔들리는 밧줄 위에 대고 방금 막 써 내려간 술지를 가져다 댔다.

“하지 마.”

남자는 고장 난 시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나니아에게는 여분의 성냥이 두 개나 더 있었다.

“챠링고.”

“안 돼.”

나니아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리자드는 게으르게 퍼져 있던 몸을 일으켜 다가왔다.

“그게 뭔데?”

챠링고가 웃으면서 묻자, 나니아는 대답했다.

“바람을 멎게 할 거예요.”

안전하게 올라가 보겠다는 일말의 노력을, 챠링고는 칭찬하고 라히무스는 반대했다.

“철저한데.”

“안 돼.”

“하, 씨. 남자 새끼가 말이 많아.”

여자가 하는 일에 토 달지 말라며 챠링고가 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가격했다. 남자는 조금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니아를 쳐다보았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듯한 얼굴. 하지만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니아는 몰랐다. 그저 주먹 쥔 손을 흔들며 다짐할 뿐이었다.

“할 수 있어요.”

라히무스를 상대할 때만 발현되는 특유의 맹랑한 언사에 패기가 넘쳤다. 그러고는 곧 등반이 시작되었다.

‘내가 몇 번을 죽다 살아났는데, 고작 이 정도가 무서워서 못 할 줄 알고?’

그녀는 이를 악물고 사다리를 올랐다. 그것은 사다리라기보다는 그물에 가까운 형태였다. 윗줄을 잡고 아랫줄을 밟고. 더 윗줄을 잡고 그 아랫줄을 밟고. 윗줄은 다시 아랫줄이 됐다. 소녀는 그 일련의 동작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용기보다도 체력이 더 큰 문제였다는 사실은 정상쯤에 가서야 알게 되었지만, 여자는 후들거리는 팔다리를 애써 다잡았다.

‘뒤돌아보지 말자. 뒤돌아보지 말자.’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 깨닫는 순간 평정을 잃을 게 분명했다. 옆 돛대를 흘금거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마침내 더 붙잡을 밧줄이 없을 정도로 올라왔을 때, 그녀는 난간 손잡이를 붙잡고 마지막 힘을 쥐어 짜냈다. 몸을 반으로 접어 상반신을 네스트 안으로 들인 순간, 나니아는 깜짝 놀라서 가슴을 툭 떨어뜨렸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전망대에 이미 누군가가 올라와 앉아 있던 것이었다. 마주친 두 쌍의 눈이 똑같이 휘둥그레졌다.

“아…. 안녕.”

상대방이 먼저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나니아의 하반신은 아직도 둥지 밖에 걸쳐져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허벅지를 끌어 올리고 비좁은 전망대 안으로 들어왔다. 몸을 움직이면서도 상대방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미 구면인 얼굴이었다. 하얗고 복슬복슬한 머리카락과 귀염성 있게 동그란 두 눈. 그는 일전에 나니아를 보고 친한 척 인사를 건넸다가 라히무스에게 혼쭐이 나서 돌아간 그 낯선 청년이었다.

소녀는 전망대를 꿰뚫는 돛대 기둥에 몸을 기대서서 그를 경계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떨어질 수 없으니 올라오긴 했는데, 그의 얼굴을 보니 막막해졌다.

“저기…. 비명은 지르지 말아 줄래?”

남자가 두 손을 항복하듯 들어 올리며 부탁했다. 그녀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나, 내 이름은 비비야.”

자신을 비비라고 소개한 청년은 전에 만났을 때보다 더 도드라져 보이는 앞니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그의 머리에 달린 토끼 귀가 가져온 시각적 착각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르겠으나, 그의 본 모습이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사람이 아닌 거죠…?”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비는 부정하고 싶지만 부정할 수 없다는 듯 대답하기를 어려워했다.

“난… 난 축수 피가 옅어. 그, 거의 인간으로 살아왔단 말이야. 힘없는 혼혈종이라고….”

말인즉 사람을 먹지 않겠다는 뜻이었으나, 나니아가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은 아니었다. 청년은 정체가 들통 났다는 생각에 크게 당황하였다. 그녀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비비에게 두려움보다는 호기심을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대화가 통할 것 같은 상대였기 때문이다.

여자는 비비의 얼굴에 뮤를 겹쳐 보았다. 자신이 집을 홀라당 태워 먹어 버린 그 불우한 생쥐 인간 말이다. 그녀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던 순간, 저 밑에서 챠링고가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니아! 잘했어! 괜찮은 거지?”

이제 내려오라며 안부를 묻는 그녀를 향해 나니아는 차마 고개를 내밀지는 못하고 팔만 흔들어 보였다.

“괜찮아요!”

외치는 소리는 갑판을 향했지만, 아슬아슬한 눈짓은 비비를 향했다. 내가 너를 못 본 척하겠으니 너도 조용히 있으라는 신호였다. 소녀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경치가 좋아요! 조금만 더 있다가 내려갈게요!”

여기는 아무 일도 없으니 안심하라며, 눈길 한 번 준 적 없는 바다 풍경 핑계를 대면서 시간을 벌었다.

청년은 심성이 여려 보였다. 우물쭈물 겁먹은 표정이 까닭 모를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복슬복슬한 귀가 바닥을 향해 축 꺼져 있었다. 남자는 그것을 양손에 쥐고 주물럭거리면서 전망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인간은 나를 무서워하고, 나는 리자드가 무서우니까…. 그래서 둔갑약을 먹어.”

선내 화합을 위해서 가능한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떨떠름하고 께름칙하다며 무시를 좀 당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수 혼혈인 그에겐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청년은 선장이 좋은 사람이라며 추켜세웠다.

“그런데 오늘은 왜 약을 먹지 않고 여기 숨어 있어요?”

나니아가 묻자, 비비는 골을 짚으며 대꾸했다.

“나는 약을 먹으면 두통이 아주 심해….”

그래서 가끔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머리를 식히는 시간을 가진다고 했다. 둔갑약 복용에 따르는 문제는 그것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매일 같이 투약하기엔 부담스러운 금액이기도 했고, 그마저도 내륙에서는 팔아 주는 사람이 흔치 않았다. 축수가 아닌 자들은 축수가 인간으로 위장하는 걸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상인을 통해 약을 쉽게 구할 수 있다는 이점은 비비가 이 험한 일을 선택한 까닭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을 뱃사람으로서 상선을 쫓아다니며 살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나니아가 서대륙 상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간간이 해설을 보탰다.

“나처럼 흔적을 숨기고 살아가는 자들이 한둘이 아니야. 어디서나 차별받고 멸시당하니까. 축수 혼혈은 언제 어디서 누가 죽여도 합법인 거 알고 있어?”

남자의 질문을 듣고 나니아는 상점 주인에게 흠씬 두들겨 맞던 뮤의 모습을 떠올렸다. 리자드에게 박해당하는 축수의 모습을 본 적 있다고 이야기하자, 비비가 흥분해서 말을 받았다.

“그래, 리자드 놈들이 특히 심하지!”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렇게까지 축수의 존재를 증오하는가. 축수들이 먹잇감으로 삼는 건 어디까지나 인간들이고, 자기들은 얼마든지 손쉽게 제압할 수 있는 상대라면서. 나니아는 그것이 의문이었다.

인간이 양이라면, 축수는 늑대였다. 오래전부터 유멘타를 잡아먹는 축수의 존재는 재산 피해를 입히는 유해 동물로 취급받아 왔다. 농경 사회가 시작되면서부터 뿌리내린 혐오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처지였다.

나니아는 비비의 옆에 똑같이 쪼그리고 앉았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제껏 보았던 중에 당신이 제일 인간처럼 생겼어요.”

그녀는 비비의 손등을 흘긋 쳐다보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흰 털이 보송보송하게 자라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등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있잖아요, 당신처럼 그렇게…. 겉으로 보기에는 완전히 사람 같은데 사실은 축수 혼혈이었다든가, 그럴 수도 있을까요?”

“왜? 누가 또 의심돼?”

누구를 의심하냐는 그의 물음에 나니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타인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 자신에 대한 고민이었다.

비비는 짐작보다 호의적인 그녀의 태도에 마음이 조금 놓이는지 자세를 편하게 바꾸었다.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그가 단단히 팔짱을 꼈다.

“네가 믿을지 모르겠지만, 내 부모님은 모두 인간이었어. 아니, 인간인 줄 알았지. 인간인 줄 알고 살아온 두 사람 사이에서 나 같은 게 태어났단 말이야. 그게 어떤 의미였겠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 것 같으냐고.”

“……?”

나니아는 눈살을 찌푸린 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비비가 다 하지 못한 말을 이어나갔다.

“두 분이 서로를 속인 게 아니라면, 먼 조상 중에서 있었던 거야. 본인도 모를 만큼 먼 조상 중에. 그리고 나는, 아주아주 재수가 없었던 거지. 부모님의 안에 도사리고 있던 축수의 피가 깨어난 거야. 인간 사회에서 태어난 아기 축수라니! 그들에겐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이나 돼?”

비비는 손가락 한 개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한 방울만 섞여도 축수라고? 아니, 그런 건 다 헛소리야! 누가 그걸 판단할 수 있는데?”

청년은 맺힌 것이 많은 사람처럼 토로했다.

“저 오만한 도마뱀들도 마찬가지야. 용의 후예? 흥, 웃기지도 않아. 리자드는 리자드 알에서 태어나 리자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건 모르는 거야. 누가 그 알을 품고, 누가 그 알을 수정시켰는지. 진실은 어미만이 알겠지!”

너무도 다채로운 종족들을 만난 이후로, 나니아는 형이상학적 궁금증을 느꼈다. 서대륙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최초의 생명체는 무엇이었을까. 짐승들은 섞이고, 섞이고, 또 섞여 왔을 것이다. 교잡이 가능한 관계에서라면 얼마든지 사랑을 나누며 다양성을 일궈 왔을 테다.

청년은 세상에 순수한 피 같은 건 없을 거라고 했다. 근친 교배를 이어 왔거나, 나무에서 태어나지 않은 이상. 비비는 자신이 그 증거라 했다.

“동대륙 인간이라면, 아마 인간이 맞겠지. 하지만 네가 말하는 그 인간이 서쪽 출신이라면, 그건 모를 일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해.”

나니아는 혼란스러웠다. 비비의 주장은 부족하게나마 지탱해 오고 있던 그녀의 상식을 모조리 무너뜨렸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세상은 식인종과 혼혈종을 구분하지 않지만, 둘은 엄연히 달라. 그건 분명히 구별해 줬으면 해. 네가 백지장 같은 사람이라 부탁하는 거야.”

나니아는 아직도 그 개념이 어려웠다.

“아무튼 당신은 인간을 먹지 않는다는 거죠…?”

“그래. 중요한 건 그거긴 해. 너는 나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 그리고 나는 네가 꽤 마음에 든단 말이야.”

비비는 그 말과 함께 볼을 살짝 붉혔다. 하지만 소녀는 청년의 호감을 알아차리는 일에는 영 관심이 없어 보였다.

“왜요? 왜 먹지 않아요?”

여자가 묻자, 그는 살짝 불퉁한 얼굴로 대꾸했다.

“왜냐니! 나는 사람 고기보다 송아지 고기가 좋아. 그게 얼마나 부드럽고 맛있는지 알아? …물론 나도 딱 한 번밖에 못 먹어 봤어. 그리고 난… 음, 심지어는 토끼 고기도 좋아해.”

비비는 그 말을 하면서 다시 자기 귀를 만지작거렸다. 나니아는 아직도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더 깊고 사적인, 그래서 더 께름칙한 질문을 던졌다.

“사람을 먹어 보긴 했다는 말이에요?”

그 질문에 비비의 얼굴이 어두운 빛으로 변했다. 모욕감을 느낀 것 같기도 하고 점직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먹는다는 건 말이야. 대단한 게 아니야. 그저 배에 넣고 소화시키는 과정이잖아.”

그가 대답했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미심쩍은 마음에 나니아는 조용히 무릎을 감싸 안았다. 울적한 색을 띠던 비비의 눈이 토끼처럼 빨갛게 빛났다.

“그런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무슨 뜻이에요?”

“누구나 인간을 죽이고, 그걸 먹을 수 있단 말이야. 이빨만 있다면 누구나 무엇이든 씹고 삼킬 수 있다고.”

“…….”

“알겠어? 인간도 인간을 먹을 수 있어.”

“그건….”

나니아는 말을 하다 말고 자신의 경험을 떠올렸다. 먼 나라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던 기근의 비참함. 게롤린에서 직접 목도하기 전까지는 허구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었다. 배고픔이 극한으로 치달으면 자식을 해치는 부모가 생기기도 했다. 식인은 골육지친의 관계가 아니더라도, 심지어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서도 가능했다. 길거리를 구르는 주검에 대한 취급이 동물과 같아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사람을 먹는 일은 드물어요.”

그런 종류의 비극에는 극단적인 절박함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없지 않지.”

“달라요. 나는 돼지 형태의 축수가 사람을 해치는 것을 보았어요. 그건 단지 배고픔의 문제가 아니었어요.”

“저능한 식인 축수가 인간을 잡아먹는 건, 어쩌면 아주 당연한 일이야.”

축수에 의한 식인 행위가 별것 아니라 말하는 그의 귀여운 얼굴이 섬뜩했다. 나니아는 엉덩이를 한 뼘 뒤로 물리며,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인간은 발가벗겨 놓았을 때, 무엇보다 약한 사냥감이 되니까. 어쩌면 소나 돼지보다도 더 쉽지.”

“…….”

나니아는 침묵했다. 비비와의 대화는 무엇 하나 시원한 구석이 없었다. 어찌 보면 질문에 대한 대답도 회피한 셈이었다.

“서쪽에서 살 거라면 너도 그걸 알아 둬야 해. 약한 건 죄야. 힘은 곧 법이지. 약한 개체가 강한 힘에 지배당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란 말이야.”

나니아는 그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청년은 그저 자기 같은 축수가 인간을 먹는다는 사실을 정당화하고 싶은 듯했다.

‘역시 축수라는 것은 미심쩍구나….’

나니아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 여차하면 그의 맨살을 물어뜯고 소리 지를 각오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아직 묻고 싶은 게 더 남아 있기도 했다. 그래서 나니아는 남자의 식인 본성에 대해 캐묻는 것을 그만두고, 그녀가 정말 궁금했던 다른 화제를 꺼냈다.

축수의 문자에 대한, 정확히는 그것을 가르쳐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저서를 꼭 읽고 싶었다. 하지만 비비는 축수들이 쓰는 글자를 배우고 싶다는 나니아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말했잖아. 나는, 모습은 이렇게 생겼지만, 거의 인간이나 다름없이 살아왔다니까.”

그런 것은 배우고 싶지도 않고, 배울 일도 없었다며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나니아는 크게 실망하며 기대감으로 솟아올랐던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그렇다면 이제 더는 그에게 볼일이 없어서, 나니아는 이만 내려가 보겠다며 섭섭한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곳은 작별하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떠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너무 높았다.

나니아는 자신의 하향길을 바라보며 창백해졌다. 올라올 때는 고지를 바라보면서 어떻게든 꾸역꾸역 발을 움직였는데, 내려가는 일은 차원이 다른 공포였다. 소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파코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파코!”

“왜?!”

다행히 목소리가 갑판까지 닿았다. 나니아는 소리쳤다.

“못 내려가겠어요!”

그 비명을 듣고 챠링고가 낄낄 웃었다.

“자기 때문에 돈도 잃었는데 와서 내려 달라니. 참 잘도 도와주겠다. 야, 됐어. 내가 은전 두 잎값 한다.”

그녀가 팔뚝을 걷어붙이는 사이, 라히무스는 이미 돛대 앞으로 향해 있었다. 남자가 밧줄을 움켜쥐는 것을 보고 나니아는 다시 소리 질렀다.

“라히무스 말고, 파코한테 부탁했어요!”

그 말에 라히무스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돛대 끝을 올려다보았다. 괜한 만용을 부리는 나니아를 지켜보면서 아까부터 얼마나 조마조마했던가. 당장에 들쳐 메고 내려오고 싶은 걸 용케 참고 있었다. 본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챠링고나 파키케팔로에게 맡길 수 있을 리가. 남자는 당사자의 거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성큼성큼 사다리를 올랐다. 그 모습은 흡사 나무 위를 오르내리는 표범과도 같아서, 거북이처럼 꾸역꾸역 올라온 누구와 다르게 신속하고 여유롭기만 했다.

“…안 돼.”

소녀는 나지막이 신음을 흘렸다. 전망대 안은 숨을 곳이 없었다. 외간 남자와 단란한 한때를 보내기라도 한 듯한 광경. 이 협소한 공간에서 단둘이, 그것도 제법 오랜 시간을, 심지어 거짓말까지 쳐 가며 만들어 낸 상황이었다. 그가 목격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불 보듯 뻔하였으나, 어찌 더 말려 볼 틈도 없었다.

사내는 머뭇거림 없이 망루에 다다라, 나니아가 그랬던 것처럼 마지막 손잡이를 붙잡았다. 그리고 남자가 목격한 것은 뜨악한 표정의 나니아 뒤로 보이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 언제나 뜨겁기만 하던 붉은 눈동자에 한기가 들이닥쳤다.

“…….”

기다란 동공이 조여들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나면서 싸늘했던 얼굴은 이내 점점 맹렬하게 일그러져 갔다.

“…내 꺼 건드리지 말라고 했지.”

살기등등한 눈빛과 으름장을 놓는 목소리에 가엾은 축수 한 마리가 자그맣게 쪼그라들었다. 앞뒤 따지고 잴 것도 없이 공격적으로 으르렁거리는 그를 보면서, 나니아는 위협과 수치를 함께 느꼈다.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올라온 거잖아요.”

다른 수컷을 감싸고도는 그녀의 태도에 라히무스는 금방 울상이 되어 확연히 달라진 목소리로 그녀를 대했다.

“한참 안 내려왔잖아.”

남자가 원망하듯 묻자 소녀는 변명했다.

“비비가 붙잡은 게 아니라, 내가….”

“비비?”

그게 저 새끼 이름이냐는 듯, 라히무스는 당장 놈의 멱살을 쥐어뜯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다는 듯이 녀석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너한테 껄떡댔던 그 새끼잖아!”

나니아의 눈에는 비비가 감추고 있던 것부터 보였는데, 사내는 그런 게 더 중요한 모양이었다. 그가 사실 축수였다든가 하는 사실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어. 말이 통하는 축수는 처음이었단 말이에요.”

별것 아니었다는 듯한 나니아의 말에 남자는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놈이 붙잡아서 말을 시킨 것도 아니고, 그녀 스스로가 대화를 원했다면 더욱 배알이 뒤틀렸다.

“그딴 게 뭐가 대단하다고.”

“당신들은 잘 말해 주지 않잖아.”

“…….”

‘당신들’이라는 마음의 거리가 느껴지는 표현과 네가 채워 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듯한 면박이 라히무스의 가슴을 따끔하게 찔러 왔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해.”

남자는 무언가 쏟아 내고 싶은 마음을 꾸역꾸역 눌러 담는 듯했다. 억지로 참은 분노 끝에 먹먹한 재가 남았다.

“진짜로 나 돌아 버리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축수 하나 없애 버리는 것 따위 일도 아니었다. 그는 수틀리면 얼마든지 상대방을 찢고 꺾어 물고기 밥으로 던져 줄 수 있는 남자였다. 참고 있는 까닭은 마지막 한 가닥 눈치와 이성 덕분이었다. 나니아는 분노와 서글픔이 뒤섞여 있는 그의 얼굴을 심란하게 바라보았다.

만약 어딘가로 사라져서 한참 동안 나타나지 않던 그가 비좁은 공간에서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발각되었더라면? 그녀는 이제 역지사지를 알았다. 들끓는 질투심 앞에 차릴 이성이나 객관 같은 것은 피차없었다. 독점욕을 드러낼 때면 언제나 긴박하고 절절해지는 그의 온도를, 어여쁘게 여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소녀는 아직 다 올라오지도 못한 라히무스의 목을 끌어안고 그를 달랬다.

“화내지 말고, 일단 같이 내려가. 응?”

분한 듯이 그릉그릉거리는 그의 턱에 짧게 입을 맞추어 주자, 성났던 야수는 콧잔등을 씰룩거리면서 조금 진정하는 듯싶었다.

가엾고 바보 같은 내 리자드.

그녀는 금세 순종적인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는 라히무스의 붉은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남자는 자세를 고쳐 잡고 그녀를 유대류 짐승처럼 끌어안았다. 그렇게 죄 없는 목숨 하나를 살렸다.

소녀는 맹수의 커다란 품에 안겨서, 그르렁거리는 목울음을 온몸으로 전해 들었다. 이제는 흉포한 도마뱀을 다루는 방법을 조금 익힌 듯했다.

나니아는 가죽 가방에서 까맣고 두꺼운 책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라히무스에게는 단 한 번도 직접 보여 준 적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헤르도 챠링고도 못 읽는 글을 그에게 보여 줘 봤자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던 게 없지 않아 있었다. 자신의 무의식이 그를 무시하고 있었음을 자각한 나니아는 조금 미안해졌다.

그녀는 아버지의 유고가 축수들의 문자로 적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여태껏 아무도 읽어 주지 못한 글자를 혹시라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지만 결국 소득은 없었다는, 그런 아쉬운 이야기였다. 여자는 그간 감추려 했던 이야기를 털어놓고 긴장한 얼굴로 리자드의 눈치를 살폈다.

‘나도 나를 잘 모르겠는데, 라히무스는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할까.’

몰살시켜야 할 버러지들. 그가 살아온 리자드 사회에서 축수란 그런 존재인 듯했다.

“내가….”

그녀는 남몰래 품고 있던 그간의 고민을 고백했다.

“나의 아버지가 그것이었을까?”

축수라는 말을 입에 담기조차 겁이 났던 그녀는 두루뭉술하게 자신을 저하했다. 라히무스도 자신의 출신에 거부감을 느끼고 실망하지는 않을까. 헤르가 그랬던 것처럼.

몹시도 불안한 한편, 나니아는 믿고 싶었다. 믿으려 했다. 아니, 믿었다.

사랑한다는 그의 말을. 그 진솔한 마음을.

자신의 몸에 그 기묘한 피가 흐를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남자가 저를 멀리하게 될 거라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굳게 다물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올 위안의 말들을 기대했다.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오해가 있을 거야.

아니, 사실은 네가 무엇이라도 괜찮다는 그런 말을 듣고 싶었다.

축수든 인간이든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데에 너의 핏줄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그런 따스하고 믿음직한 말을 바랐다.

그러나 어딘지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라히무스의 표정은, 좀체 그런 달콤한 말들을 속삭여 줄 것 같지가 않았다. 나니아는 조바심이 났다.

‘후회하는 걸까? 나 같은 축수 혼혈과 관계를 맺게 되어서….’

마침내 그가 팔짱 낀 몸을 고쳐 앉았다. 석연찮은 얼굴의 그에게서 나온 대답은 예상 밖에 부정도 긍정도 아니었다.

“다른 새끼 말고, 내가 가르쳐 주면 되는 거잖아.”

사내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나니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멍하니 입술이 벌어져 얼빠진 표정을 지은 그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걸 알아?”

넋 나간 시선이 라히무스의 얼굴과 테이블 위를 오갔다. 그의 가슴 앞에 놓인 아버지의 연구서가 그 어느 때보다 남의 물건처럼 생경해 보였다.

“그러니까 이제 그 희멀건 토끼 새끼랑 말 섞지 마.”

남자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으려 하자, 나니아는 소스라치게 놀라서 허둥지둥 책을 회수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따져 물었다.

“왜, 왜 알아?”

“어릴 때…. 어쩌다 어깨너머로 배운 거라.”

조금 헤맬 수도 있다며 자신 없다는 듯 우물거리는 그의 태도에도 어딘지 저어하는 구석이 있었다.

“어릴 때? 얼마나 어릴 때? 누구한테 배웠어요?”

“배우려고 배운 건 아니고, 그냥….”

이런저런 환경 속에서 자라 왔노라고 둘러대는 목소리에 끙 하고 앓는 소리가 섞였다. 자세한 사정은 말하고 싶지 않은 표정에서 떨떠름한 심정이 느껴졌다.

두 사람 모두 마지막까지 들춰지고 싶지 않은 한 겹을 지니고 있었다.

나니아는 그 석연찮음에 대해서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한참을 헤매었던 문제의 실마리가 이토록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배움이 깊은 편이 아니라.’

‘리자드 문자밖에 모르니까, 나는.’

남자가 그렇게 말한 바가 있기도 하거니와, 아무도 읽을 줄 모르는 글의 정체가 점점 미심쩍어지면서부터 혹시나 하는 기대감도 접은 지 오래였다. 왜 진작 보여 주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게 아니었다. 모순적이게도.

“이, 이건 보지 말구….”

차라리 아무것도 몰랐더라면 무식이 용기가 되었을 텐데. 막상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나타나자 선뜻 내놓기가 어려워졌다.

다른 사람도 아닌 라히무스였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음의 경중이 달랐다. 헤르나 챠링고에게는 아무 페이지나 대충 펼쳐 보이며 읽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그가 자신의 모든 부분을 온전히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다가도, 혹시 모를 추한 근본을 낱낱이 들키게 될까 봐 두려운, 불가해한 양가감정이 마음속에 자리했다.

소녀는 어딘지 죄스럽고 새치름한 음성으로 꿍얼거렸다.

“글자만 가르쳐 줘….”

종이를 펼쳐 놓고 펜을 들었다.

소녀는 배움을 즐기는 편이었으나, 그것이 반드시 순탄하게 이루어진다는 뜻은 아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문자를 배운다는 것은 역시나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닌 듯했다. 무엇보다 스승의 가르침에 구멍이 너무 많았다.

“그러니까 이게, 소리가…. 후?”

“아니, 흐.”

“후으?”

“흐.”

“그럼 이거랑 이건? 뭐가 달라요?”

“…….”

획의 삐침이 아주 조금 다른 글자 두 개를 펜촉이 번갈아 짚었다. 남자는 턱 밑에 주먹을 붙이고선 미간을 찌푸린 채 그것들을 노려보다가 어딘지 갑갑한 느낌의 숨을 코로 내쉬었다.

“잘 모르겠으면 넘어가요.”

“…….”

말하는 내용만 듣고 있자면,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역할이 전도된 듯하였다. 라히무스는 애석하게도 글을 가르치는 일에는 영 재능이 없어 보였다. 낱소리 하나하나를 중구난방 기억나는 대로 가르쳐 주는 탓에 나니아는 그 체계적이지 못한 설명을 스스로 개괄하고 정리해야 했다. 남자가 좀처럼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하자 나니아가 그의 어깨를 위로하듯 토닥였다.

“괜찮아. 자주 쓰는 것도 아닌데. 사용한 지 오래되었으면 기억이 안 날 수도 있죠.”

“…….”

하지만 그 말은 위안이 되기보다는 자존심에 생채기만 낼 뿐이었다. 리자드는 엄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깊은 번뇌에 빠져들었다. 그 면목 없어 하는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나니아는 피식 웃고 말았다.

“바보 같아.”

바보라는 말은, 바보가 아닌 자에게는 그저 웃고 넘길 수 있는 가벼운 농담이겠으나, 진짜 바보에게는 상처가 되는 법이었다. 라히무스는 볼멘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뾰로통하게 나니아를 쳐다보다가 슬쩍 등을 돌려 앉았다. 가볍게 미소 짓고 있던 나니아의 얼굴에 더 큰 웃음이 번졌다.

‘귀여워.’

힘 빠진 꼬리 끝이 방바닥을 청소하듯 틱 틱 움직였다. 그것은 제법 선명한 의사소통 도구였다.

“삐졌어?”

“…별로.”

“삐졌잖아.”

“아니야.”

라히무스의 볼살이 제법 동그란 곡선을 그렸다. 나니아는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옆으로 잡아당겼다. 그제야 뒤를 돌아보는 리자드의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보였다. 그에겐 정말이지, 동물 같은 귀여움이 있었다. 길쭉한 꼬리도 오늘따라 유달리 통통하고 사랑스러워서 잔뜩 귀여워해 주고 싶었다. 아무런 장식도 두르지 않은 날것 그대로의 모습. 나니아는 남자의 꼬리를 잡아다 가만히 자기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리본 묶어 주고 싶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아 주고 싶은 마음이 이러할까. 어떤 색이 잘 어울릴까 감히 상상만 해 보는데 리자드가 몸을 돌리며 꼬리를 스르륵 후퇴시켰다. 나니아는 순간적으로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 붙잡았다. 문제는 그 반사 행동의 결과였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손에 쥔 비늘을 빤히 쳐다보았다. 리자드의 커다란 비늘 한 개가 툭 하고 빠져 버린 것이었다. 탈모를 앓는 머리처럼, 이 빠진 그릇처럼, 횅하니 허전해진 그의 살갗을 보고선 나니아는 사색이 되었다.

“미, 미안해요….”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비늘을 쥔 손을 떨며 그에게 사죄했다.

“이거 다시 자라는 거예요?”

제발 그렇다고 말해 달라며 나니아의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간곡한 빛을 띠었다. 사내도 조금 얼떨떨한 낯으로 구멍 난 부위를 살피다가 대꾸했다.

“아니.”

그의 대답에 나니아는 비명을 지르고 싶어졌다. 라히무스는 덤덤한 말투로 감상을 이었다.

“평생 땜통으로 살아야겠는데.”

“거짓말….”

“진짜로.”

“…….”

나니아는 절망적인 심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한 번 빠지면 다시 나지도 않을 부위가 이렇게 쉽게 빠져도 되는 건가. 갓난아기 유치도 이보다는 튼튼하겠다. 이 죄를 어떻게 갚으면 좋을지 몰라서 하염없이 사과와 변명을 반복했다.

“미안…. 미안해요,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나는 그냥 진짜로, 그냥, 조금 쓰다듬고 만져 보고 싶어서….”

리자드의 어깨가 들썩이는가 싶더니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거짓말이지.”

속았다는 것을 직감한 나니아가 정색을 하자, 라히무스는 그녀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고 뺨에다 입술을 문질렀다. 내뱉는 숨결이 웃음소리를 따라 끊어졌다.

“응.”

남자가 짧게 긍정하자, 나니아는 대번에 주먹을 말아 쥐고 그의 가슴을 두들겼다. 직성이 풀릴 때까지 패 댔지만 딱히 아파하는 것 같진 않았다. 원래는 새 비늘이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빠지는 거라고 했다. 나니아 때문에 한동안 땜빵이 난 채로 살아야 하는 건 맞았다. 아주 조금 미안해진 그녀는 손찌검하던 것을 그만두고 그의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라히무스는 그녀가 자신 때문에 감정이 널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좋았다. 화를 내다가도 결국엔 이렇게 꼭 안아 주는 것도. 소녀는 그의 품에 안긴 채로 주먹 쥔 손을 펼쳤다. 그 안에는 아직 라히무스의 파편이 남아 있었다. 검붉게 반짝거리는 용린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빛을 비추어 보던 그녀가 물었다.

“그럼 나 가져도 돼요?”

뽑아 버린 용비늘을 기념품으로 하나 챙겨 두고 싶었다.

“…너는 내가 네 살비듬 가지고 싶다고 하면 줄 거야?”

라히무스는 무안해하며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자 나니아는 이상한 비유라고 여기며 웃었다.

“그거랑은 다르죠! 이건 예쁘잖아요.”

“…예뻐?”

리자드에겐 비록 깎아 낸 손톱만큼이나 가치 없는 것이었지만, 그것을 애인이 예쁘게 봐 준다는 것은 제법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뽀뽀 한 번 해 주면 비늘 한 개 줄게….”

남자가 물건값을 제시하며 입술을 내밀었다. 뻔뻔한 조건을 제시한 것치고 풋내기 소년처럼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터무니없이 저렴한 가격이었다. 나니아는 활짝 웃으며 기꺼이 거래를 수락했다. 그 뒤로 끈덕진 입맞춤이 한참을 이어졌다. 남자가 꼬리 비늘을 모두 뽑아내도 모자랄 정도였다.

* * *

아버지의 연구서는 기술 방식이나 필체 면에서 크게 대조되는 차이를 두고 명료하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녀가 가장 먼저 해석하기로 마음먹은 대목은 뒷부분이었다. 연구서의 중후반부 즈음부터 아무래도 날짜가 분명한 듯한 반복적 숫자의 나열들이 꼬박꼬박 적혀 있었는데, 그것은 전부터 나니아가 이 책이 아버지의 일기라고 믿어 의심치 않게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그림이나 술식이 없어서 단 한 번도 내용을 짐작해 볼 수조차 없던 페이지였다.

표음 문자를 읽어 내려간다는 것은 머릿속에 입력된 정보 값을 가지고 술술술 파악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니아는 한 글자 한 글자 띄엄띄엄 변환하듯이 글을 받아들여야 했다. 발음이 명확하지 않은 글자도 존재했거니와 그것은 때때로 지나치게 소리 나는 대로 적혀 있어서, 합리적인 음절로 바꾸어 생각하는 절차도 필요했다. 그래서 아예 책 옆에 종이 한 장을 펼쳐 놓고 훌레리안으로 옮겨 적는 작업을 시작했다. 한 문장을 말이 되게끔 바꾸어 해석하는 데만도 시간이 아주 오래 걸렸다. 그렇게 첫 문장부터 알아듣기 힘든 말들이 쏟아졌다.

[조축수. 조련사. 트라나디. 대륙에서 우리를 아는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나니아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조련이라는 말밖엔 없었다. 아버지는 동물을 다루는 사람이었을까.

[하지만 이들은 우리를 ‘구원’이라 부르고.]

구원. 나니아는 그 말을 적어 놓고 한참 펜을 움직이지 못했다.

[‘구원’이 만들어 줄 세계를 ‘낙원’이라 여기는데.]

“…….”

이쯤 되니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인물이 있었다.

[이 믿음은 굉장히 신앙적이고 전설적이어서 이곳에서 나는 거의 숭배의 대상으로 모셔지고 있다. 평생 자기들을 죽일 방법만 궁리하며 살아온 나에게 이런 대접과 이런 이름이 가당키나 한지 모르겠다.]

소녀는 자신에게 구원자니 해방자니 운운하며 낙원으로 데려가 달라던 생쥐 인간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는 우리 혈족의 성을 버리기로 했다. 이 비참한 트라나디의 이름을 아이에게는 물려주지 않을 생각이다. 그리고 나니아가 원했던 것처럼, 아기에게는 나니아의 이름과 나의 이름을 하나씩 남겨 놓기로 했다.]

뷔셀. 아버지는 그냥 뷔셀이라고 불렸다. 그것이 성이 아니라 이름이었을 것이란 사실을 다음 이어지는 내용을 통해 확신할 수 있었다.

[언젠가 아이가 평범한 인간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된다면,-갓난쟁이를 두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우습다.-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될 텐데, 그런 점에서 지워지는 쪽이 나의 이름이라는 사실은 다행이다.]

평범한 인간 남자와의 결혼. 그것이 혹시라도 아버지의 바람이었다면 죄송스러울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아직 아이의 이름을 나니아라고 부르는 것이 익숙지 않다. 그래서 그냥 아기, 아가라고만 한다.]

“나니아 뷔셀….”

소녀는 그 이름을 마치 남의 것처럼 불러 보았다. 아버지는 왜 그런 말씀을 해 주지 않으셨을까. 내 이름은 어머니의 이름이라고. 내 이름 속에 그녀가 묻혀 있다고. 아쉬워하던 그녀는 문득 자신이 영유아기에 대한 추억 자체가 얼마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뺨을 긁적였다. 아무리 어린 시절이었다지만 어쩜 기억나는 게 하나도 없을까. 파비올라 이전의 삶은 누군가 박박 지워 버린 것처럼 깨끗하고 깜깜하기만 했다.

물론 그보다 더 의문스럽고 궁금한 부분은 따로 있었다. 나니아는 ‘구원’이라든가 ‘낙원’이라든가 하는 말이 몹시도 신경 쓰여서 그다음부터는 문장을 차례대로 읽을 수 없었다. 그 의아한 낱말과 똑같은 모양의 글자를 찾아 두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부르는 말이 거창하지만, 이들에게는 아주 소박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 지능 있는 반축들에게 ‘낙원’이란 그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공동체적 삶을 일컫는 말에 불과하다. 이들에게는 단지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기회가 필요한 것이다. 별과 바람을 읽는 법. 파종과 수확의 시기를 아는 것. 식량을 저장하고 보관하는 법.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배고픔을 해결하는 법. 그리하여 무리를 이루고 어울려 사는 것. 그것이 내가 이들에게 알려 주어야 하는 것들. 주제에 맞지 않게 ‘구원’이라 불리는 일에 대해 치러야 할 이름값.]

나니아는 펜을 내려놓고 침침한 눈가를 문질렀다. 읽으면 읽을수록 오리무중이었다. 아버지는 ‘이들’에게 ‘구원’이라 불렸다. 글 속에서 말하는 ‘이들’이라는 존재가 축수일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축수라는 낱말도 찾아보면 있지 않을까. 나니아는 역으로 그 낱말을 옮겨 적은 뒤에 똑같은 글자를 탐색해 보았다.

[새끼를 낳은 포유류 축수에게 젖동냥을 받았다. 정이 넘치는 암컷들이 많다.]

[아기를 안고 돌아다니다 보면 나를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작은 나니아는 나를 쏙 빼닮은 듯하다. 애석하게도. 엄마를 닮았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나니아는 희미한 웃음을 흘리며 그 부분을 두 번 세 번 읽어 보았다. 이상하게 코끝이 시큰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구원’이라 불리며 축수들과 함께 살았던 걸까. 어머니를 여읜 자신에게 그들의 젖을 물려 주면서 말이다. 알 듯 말 듯 그의 인생이 나니아의 삶 뒤로 겹쳤다.

평생 누군가를 죽일 방법을 궁리하며 살았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 소녀는 더 어려운 문제를 찾아 푸는 학습자처럼 완전히 다른 쪽을 펼쳐 보았다. 책의 앞부분은 다룸으로서의 연구 내용인 듯한 글들로, 한 줄 한 줄 독음해 볼 때마다 나니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사라져 갔다.

[외상없이 창자를 끊어 놓는 법.]

“…….”

의학 지식을 적어 놓은 줄만 알았던 페이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녀는 모든 페이지를 첫 줄, 첫 단락만 읽어 보았다. 그다음부터는 도저히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부 출혈과 관련하여: 고문용과 살상용을 구분하여 장기 별로 기술한다.]

[정신 착란 일으키기: 구체적인 환각 내용은 술사의 역량에 달려 있으므로, 가장 기초가 되는 공식만을 기술한다.]

‘…이게 다 뭐야.’

도대체 이런 연구가 어디에 필요했을까. 아버지가 쓴 것이 맞긴 할까. 나니아는 일기 부분과 대조하여 필적을 확인했다. 같은 사람의 것이 분명한 글씨체. 소녀는 책을 덮어 버리고 손을 떨었다. 책과 아버지를 싸잡아 매도하던 헤르의 말이 떠올랐다.

‘그건 나쁜 겁니다, 나니아. 당신 아버지는 아주 악질적인 것들만 다루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그 안은 온통 시체 얘기로 가득해.’

‘나는 나쁜 짓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다룸치고 제대로 된 놈을 못 봤어. 다 정신병자 미치광이들뿐이야.’

나니아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어쩌면 그가 맞게 본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탓이었다. 어지러운 기분에 펜을 내려놓았다. 처참한 시선이 탁자 위로 떨어졌다.

종이에 옮겨 적은 글들이 끔찍했다. 나니아는 그것들을 모두 손에 넣고 엉망진창으로 구겨 버렸다. 마치 저주 담긴 술지가 만들어지기라도 했던 것처럼. 모르는 것이 약이었을지 모른다. 이 이상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두려워졌다. 소녀는 가죽 가방 안에 책을 쑤셔 넣고 꽁꽁 묶어 버렸다. 앞으로 이것을 누구하고도 의논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체성에 대한 혼란은 선악에 대한 혼란과 뒤섞여 더없이 당황스러운 번민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나쁜 게 아니잖아. 나랑은 상관없어, 나랑은….’

* * *

비 내리는 오후였다. 물러간 해가 하늘을 푸르스름하게 남겨 두었고 짙은 먹구름이 달빛마저 어두컴컴하게 가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니아는 선원실 근처를 배회하며 비비를 찾았다. 낙원이라든가 구원이라는 말을 혹시라도 들어 봤는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축축한 공기 중에 나발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갑판 밑의 소녀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전방에 함선, 함선입니다!”

망을 보던 선원이 소리쳤다. 그것은 순조롭던 항해의 위기를 알리는 외침이었다.

선원의 말대로였다. 저 멀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선박 한 대가 나타났다.

“전방에 정체불명 함선!”

낯선 배는 정방향의 해류를 타고 슈쉬라호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움직임이 몹시도 미심쩍었다.

“정지! 일단, 정지!”

그날, 상선의 평화는 빗물과 함께 내려앉았다. 들이받아 버릴 기세로 돌진해 오는 함선. 뱃머리에 붙어 있는 쇠붙이는 틀림없이 해상 전투용 파성퇴였다.

“…해적, 해적이다!”

해적선. 익히 들어 온 바가 있으니 그것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소!”

혼란한 상황 속에서 선장은 머리를 쥐어뜯었다. 사실 그가 쥐어뜯고 싶은 것은 슈쉬라의 머리채였다.

“키, 키를 돌릴깝쇼?”

방향타를 잡아야 하는 선원이 물었다. 정말로 이런 상황을 맞닥뜨릴 줄은 몰랐던 슈쉬라가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얇은 잠옷이 빗물에 젖어 들어 하얀 살갗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도주가 가능하겠습니까?”

그녀가 선장을 보고 물었다. 나름 각오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전은 상상과 달랐다. 위기감이 확 끼쳐 왔다.

“노력은 해 보겠지만, 저쪽은 첨저선인 듯한데, 아, 아무래도 속도 차이가…!”

선장은 말을 채 끝마치지도 못하고 헐레벌떡 조타실로 달려갔다.

“활대! 활대를 돌려라!”

목표는 불어오는 바람을 전부 받아 기존 진행 방향의 반대쪽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적선이 슈쉬라호보다 크기는 작아도 속도는 훨씬 빨랐다. 그들은 백병전이 목표인 것처럼 접촉을 시도해 왔다. 전투 경험이 없는 선원들이 절대다수였다. 대부분이 삭구를 붙잡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가운데, 소란함을 느낀 리자드 용병들도 갑판 위로 뛰어 올라왔다.

“무슨 일이야?”

챠링고가 혼비백산한 선원들을 돌아보며 사태를 파악했다. 그리고 물살을 가르며 좌현으로 다가오는 수상쩍은 함선을 보았다.

“무기를 들어라!”

누군가 배 안의 모두를 향해 소리쳤다.

“…씨발, 골 때리는군.”

라히무스는 무기고 방향을 흘긋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저것이 무엇이든 싸워야 한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어떻게 한 번을 그냥 넘어가는 적이 없어?!”

파키케팔로는 불평을 하면서도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등에는 활을 짊어지고 유리한 고지를 점유하기 위해 망루를 올랐다. 적선에서 갈고리가 달린 로프가 날아왔다. 한두 줄이 아니었고, 한두 명이 아니었다. 수십 개의 갈고리가 걸쳐지면서 선박 사이에 장력이 가해졌다. 배의 현을 가까이하려는 시도였다.

“줄부터 끊어!”

어쩔 줄을 모르는 선원들을 향해 라히무스가 소리쳤다. 그들이 우왕좌왕 헤매는 와중에도 적들은 밧줄을 기세 좋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배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파키케팔로는 가장 낮은 위치의 상층 구조물에 올라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세찬 빗줄기 사이로 가늘어진 두 눈이 초점을 맞추었다.

“…진짜로 축수 떼잖아.”

적들의 정체를 알아본 녀석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놈들은 하나같이 흉물스러운 짐승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기형적인 팔다리와 요란한 울음소리. 피식자이기보단 포식자에 가까운 몸집과 공격성. 우악스러운 함성과 함께 칼을 빼 드는 소리가 들렸다. 배와 배 사이를 건너기 위한 널조각이 하강했다. 적들이 근접해 오기 시작했다. 벌떼처럼 쏟아지는 축수들을 보고 선원들은 크게 당황했다. 배는 순식간에 반인반수의 짐승 떼들로 점령당했다.

녀석들이 모두 건너온 다음부터 설상가상으로 파랑까지 점차 난폭해졌다. 비바람이 얼굴을 강타하고 선박은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파키케팔로는 불길한 기분에 공격을 멈추고 돛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빗물이 앞을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파키케팔로는 녀석이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멍청한 놈들, 저걸 자르면 어떡해!”

돛을 묶어 놓은 삭구들이 무참하게 끊어져 나가고 있었다.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녀석들은 슈쉬라호를 온전한 형태로 갈취해 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배를 함몰시키는 게 목적은 아닐 텐데도.

흔들리는 배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조차 어려워질 때쯤, 벨로즈와 나니아도 뒤늦게 이상함을 감지하고 계단을 찾았다. 갑판 위로 오르내리는 그 길목을 라히무스가 지키고 서 있었다.

“올라오지 말고, 밑에 있어!”

남자가 소리쳤다. 아무도 나니아가 있는 갑판 밑으로 내려갈 수 없도록 접근해 오는 축수들을 하나둘씩 분질러 버리는 중이었다. 적의 병력보다도 통제할 수 없는 낯선 환경이 문제였다. 무엇이든 다 때려 부셔도 좋은 육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젠장….”

라히무스는 허리춤에 박힌 날붙이를 빼내 바닥으로 던지며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검만 있으면 충분히 제압할 만한 오합지졸들이었다.

“링고!”

그가 소리쳤다.

“아무거나 가져와!”

그녀는 코앞에 닥친 축수 한 놈의 뱃가죽에 단검을 찔러 넣고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생략된 주어가 무엇을 말하는지 재빨리 파악했다.

주술 붙은 양손 장검. 많은 수의 적을 휩쓸어 버릴 그의 주무기였다.

밀려드는 적들의 머릿수를 확인했다. 챠링고 또한 그편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우선 뒤를 맡기기로 했다. 그녀가 쓸 만한 검을 찾아오기 위해 선창 쪽으로 몸을 돌릴 때였다.

-쿵!

심상치 않은 굉음과 함께 배가 크게 흔들렸다. 방향 잃은 선박이 커다란 암초와 충돌한 것이었다.

“배가 좌초될 것 같습니다!”

누군가 소리쳤다.

“젠장, 뭐 하자는 거야!”

남자는 돌아가는 상황을 알지 못해 조타실을 욕했지만, 그곳에서도 난전은 일어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널빤지조차 필요 없을 만큼 가까워진 적선이 슈쉬라호와 크게 맞부딪쳤다. 이쯤 되니 정상적인 운항이 불가능했다.

물건보다 중요한 것은 목숨이다. 슈쉬라는 눈물을 머금고 배를 버릴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계단 밑에서 옴짝달싹 못 하는 벨로즈와 나니아를 향해 소리쳤다.

“저쪽 배로 건너가겠습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배를 버릴 거라구요! 뭐라도 하나 더 챙겨서 올라오세요. 이곳은 제가….”

-쿠쾅!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비상용 독목주라도 내려서 태워 드릴 테니까, 어서!”

손에 폭약 가방을 들고 나타난 슈쉬라가 무어라 경황없이 지시하더니, 어깨를 밀치다시피 하며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주, 중요…. 중요한 거.”

나니아는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뛰어갔다. 그러고는 집에 불이 난 사람처럼 허둥지둥 물건을 챙겼다. 옷가지, 패물, 각종 집기, 그런 것은 얼마 있지도 않지만 중요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선반 위에 올려 두었던 반지였다. 씻고 나오자마자 손에 꼈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오늘따라 패용을 미루었던 것이 큰 실수였다. 배가 크게 흔들리면서 어디로 굴러떨어졌는지 제자리에 없었다. 나니아는 어딘가로 떨어졌을 반지를 찾아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쿠콰앙-!

무언가가 자꾸 붕괴하고 폭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벨로즈가 다급히 방으로 돌아와 문턱을 짚었다.

“나니아.”

한참을 기다렸는데 돌아오지 않자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아직이에요?”

“반지, 반지가….”

“지금 반지가 문제예요?”

벨로즈는 답답하다는 듯이 그녀의 어깨에 배낭을 둘러 매주고 손을 잡아끌었다.

“반지는 두 개든 세 개든 살아 있기만 하면 얼마든지 낄 수 있잖아. 그 고운 손가락 물에 퉁퉁 붓고 싶지 않으면, 일단 여기서 탈출해요.”

갑판 위에서 슈쉬라는 연막탄을 터뜨렸다. 한두 개로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같은 종류의 탄약을 거의 모두 소진한 후였다. 위력은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 연기를 흡입한 축수들은 하나 같이 바닥으로 픽픽 쓰러져 버렸으니, 이대로 영원한 잠에 빠져 일어나지 못하게 될 터였다. 조금 더 빨리 사용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슈쉬라는 후회막심했다.

나니아와 벨로즈는 갑판 위에 퍼져 있는 뿌연 연막을 보고 본능적으로 입을 가렸다. 그것이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몰라서였다. 님프는 원소의 도움을 받아 없던 길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슈쉬라호의 난간을 이루던 목재들이 살아 있는 나무줄기처럼 뻗어 나가 적선을 붙들었다.

“어, 어떻게 된 거죠?”

나니아는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그 짧은 새 상황 정리가 되었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다.

“어서 건너가세요!”

슈쉬라가 손에 든 우든 스태프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이미 발 빠른 선원 몇몇이 다리를 딛고 넘어가서 돛을 바꾸고 있었다.

“벨로즈 님, 이쪽입니다!”

챠링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벨로즈를 번쩍 들어 올려서 다리를 건넜다. 슈쉬라가 깜빡했다는 듯이 어느 항해사를 보고 지시했다.

“선원 중에 축수 혼혈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요? 살리고 싶다면 어서 가서 데려오세요!”

그 말을 듣고 파키케팔로가 끼어들었다.

“뭐? 방금 뭘 터뜨린 거야, 슈라!”

“축수들 소탕용으로 쓰이는 발연탄이었습니다.”

다분히 예민한 반응에 슈쉬라는 무엇이 문제냐는 듯 대꾸했다. 공기 중에 퍼져 있는 탄약 연기의 정체를 알고 파키케팔로는 크게 당황했다.

“뭐? 젠장, 그럼 라히무스가…!”

“라히무스가, 왜, 왜요?”

녀석의 황망한 탄식에 나니아는 불길한 기분을 느꼈다. 파코는 말실수를 한 사람처럼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녀를 쳐다보다가 이내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챠링고와 벨로즈는 지금 어떤 상황인지도 모른 채 이미 배를 건넌 상태였다.

여기서 만약 그를 두고 떠난다면….

-쿠쾅!

갈등하는 사이 선박은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파키케팔로의 동요하던 시선이 나니아에게로 고정되었다. 리자드가 소녀의 양어깨를 내리 짚으며 소리쳤다.

“찾아야 해!”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도 전에 파코는 선박 안쪽으로 내달렸다. 설명을 위해 지체할 시간도 없었다. 돌아오라고 소리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슈쉬라인지, 챠링고인지, 벨로즈인지 분간할 여유조차 없었다. 나니아는 본능적으로 크게 한 발을 내디뎠다. 머릿속이 번잡했으나, 역시나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정말로 그깟 반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것은 따로 있었다.

침착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보일 것도 보이지 않는 법이었다. 배의 이물 부분은 이미 난파되어 발을 딛고 선 부분과 갈라선 지 오래였고 선박이 기울기 시작하면서 평형을 잡기도 힘들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갑판은 빗물에 젖어 몹시도 미끄러웠다. 더는 정상적으로 부유할 수 없어진 슈쉬라호가 할퀴어 대는 파도에 방향을 잃었다. 마지막으로 기억할 수 있는 장면은 몸이 기우뚱하던 그 순간의 감각이었다. 파선은 침몰의 고비를 견디지 못하고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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