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슈쉬라호 (15/22)

슈쉬라호

항로는 남서쪽을 향해 그려졌다. 선상은 잔잔한 물결처럼 평화로웠다.

배의 이름은 선주의 이름을 딴 슈쉬라호. 선장을 중심으로 뭉친 선원들이 열 명 남짓 있었다. 실질적인 코르테알의 구성원들은 단주를 포함하여 다섯 정도. 그중에서도 님프는 셋뿐이었다. 부족한 일손은 현지 인력에 의존했다.

“소단주께서는 잠시 선창에서 용무를 보고 계십니다.”

선주는 코르테알 상단의 일부를 통솔하는 책임자로, 이제 막 첫걸음마를 뗀 신출내기 장사꾼이라고 했다.

“저는 그분을 곁에서 보필하고 있는 무하프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자신을 무하프라고 소개한 노인은 벨로즈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노신사의 부드럽게 굴곡진 주름이 친절한 인상을 자아냈다. 덥수룩한 흰 수염이 그의 얼굴에 중후한 멋을 더했다. 지금도 이렇게 멋진데, 젊은 시절에는 얼마나 미남이었을지 궁금해지는 님프였다.

그 옆에 또 제법 말쑥한 인상의 젊은 님프가 고개를 조아리며 예를 올렸다. 한쪽으로 곱게 땋아 내린 물빛 머리가 무척 아름다워서 나니아는 순간 그의 성별이 헷갈렸으나, 벨로즈는 단박에 그가 남성임을 알아차리고는 손등을 빨리 치워 버렸다. 뒤돌아서 한숨을 푹 쉬는 못마땅한 얼굴에 이제 더는 낯선 사내에게 키스받고 싶지 않아 하는 불만이 드러났다.

“저 돛대 뒤로 보이는 것이 조타실, 선장실, 그리고 저쪽 계단을 내려가셨을 때 오른쪽에 보이는 가장 큰 방을 소단주께서 사용하고 계시고, 그 옆에 붙어 있는 나머지 선실은 대체로 비어 있습니다. 후미에 선원실도 몇 군데 남아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저쪽 선실이 사용하시기에는 더 적합하시겠습니다.”

노인이 객실 위치를 안내하고, 젊은 님프가 짐을 몇 개 들어 주었다.

나니아는 인도해 주는 방향을 따라 다소 뒤처져서 걸어갔다. 라히무스가 그녀 곁으로 다가와 어깨를 슬쩍 밀어붙였다. 그는 꼭 말보다 몸으로 먼저 대화를 걸어왔다.

“방, 같이 쓸까?”

나직하게 물어보는 음성이 서늘하고 은근했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의도는 참으로 뜨겁고 노골적이었다. 올려다본 남자의 얼굴엔 역시나 싶은 야릇한 미소가 걸쳐져 있었다.

나니아는 지난밤 그에게 당한 수모가 생각나 전투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싫어요!”

그러고는 라히무스의 손에서 자기 짐도 빼앗고 잰걸음으로 도망치듯 앞서갔다.

“왜-.”

남자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꼬리를 늘리며 나니아의 뒤를 쫓았다.

“나랑 같이 자.”

“싫다니까요.”

종종걸음을 치는 여자와는 대조적으로 맹수의 보폭 넓은 발걸음은 어슬렁어슬렁 느긋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눈물겨운 신장 차이 때문에 좀처럼 거리를 벌릴 수가 없었다.

앞서가던 사람들이 각자 방을 골라잡을 때쯤, 사내는 속도를 조금 높여서 나니아를 따라잡았다.

기어코 그녀의 앞길을 막아선 그가 여유 만만한 얼굴로 물었다.

“어차피 나랑 잘 거잖아.”

소녀는 ‘잔다’는 말이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는 사실, 그리고 그중에서 남자가 어떤 의미로 물었는지를 깨달은 순간, 눈을 치켜뜨고 사내를 째려보았다. 저 날렵하고 거만한 콧대를 꼬집어 주고 싶었다.

리자드는 속셈 있는 얼굴로 삐죽하게 웃으며 손에 잡히는 선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와 동시에 나니아의 손을 잡아당겼다.

방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끌려온 나니아는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사내는 손에 든 짐을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버려두고, 여자가 손에 든 짐도 뺏어서 똑같이 던져 놓았다.

그러고는 곧장 그녀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서 나무판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대충 허리춤에 오는 높이로, 벽면과 한 몸인 듯 붙어서 선반 대용으로 쓰이는 듯했다.

그때까지도 나니아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이게 사람 무게를 견딜 수 있나 싶어서 안절부절못했다. 아슬아슬 위태로운 그녀의 양옆으로 사내의 두툼한 팔이 짚어졌다.

“왜 싫은데?”

라히무스가 묻자, 나니아는 그제야 두리번거리기를 멈추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지척에 붉고 맹렬한 눈동자가 다가와 있었다. 여자는 뜨끔한 눈길을 허공으로 두고 종알거렸다.

“나한테 그…. 그런 짓해 놓고, 같이 방 쓰자는 말이 나와요?”

남자의 짙고 사나운 눈을 마주할 때면, 덩달아 가슴에 불이 붙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 소녀는 그 마음을 식혀서 억눌러야 했다.

“무슨 짓.”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다 알면서도 모른 척, 정말이지 뻔뻔했다.

“내가 싫다는 데도 자꾸, 이, 이상한 짓 하려고 하고….”

나니아는 여전히 딴청을 피우듯 시선을 회피하며 대답했다. 작은 창틀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 한 줄에 빼곡히 먼지가 일었다.

“그리고 안에다가는…. 거기다 하면 안 된다고, 하지 말라고도 했는데, 말도 안 듣고….”

지난밤을 회상하는 소녀의 얼굴 위로 경황없는 홍조가 흠뻑 녹아내리고, 사내의 아랫도리는 당장에 단단해졌다. 수치스러워서 말도 더듬는 나니아를 내려다보면서 라히무스는 가슴이 찌릿해졌다. 당황해서 흔들리는 보랏빛 눈동자라거나, 새 부리처럼 오물거리는 입술이 깜찍했다. 남자는 목이 타는 기분으로 입을 맞출 듯이 다가왔다.

“그러니까, 네가 이런 냄새 풍기면서 이런 표정을 짓는 게 나쁘다고….”

“그게 무슨….”

“네가 자꾸 야한 얼굴로 날 쳐다보잖아.”

세상에서 제일 야하게 생긴 남자가 저를 그 같은 말로 매도하니 나니아는 어이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저를 보고 입맛을 다시는 라히무스가 소름 끼쳐서, 나니아는 그의 가슴을 밀어 내면서 거위처럼 꽥꽥댔다.

“당신 눈에 이상한 게 씐 거야! 어찌 됐든 나는 라히무스랑 같은 방 안 써요. 나한테 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하지만 익히 경험했다시피 그는 민다고 밀어지는 덩치가 아니었다.

“뽀뽀만 할게.”

“싫어요.”

“손만 잡고 잘게.”

“싫다니까요!”

라히무스가 지키지도 못할 약속으로 기만 작전을 펼치는 가운데, 나니아 쪽에서도 결코 양보가 없었다.

타협이 결렬되자 사내는 대뜸 입술을 들이밀었다. 여자는 재빨리 고개를 비틀어 그를 피했지만, 리자드는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쉽사리 키스에 응해 주지 않자, 라히무스는 여자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듯이 훑어 댔다. 나니아는 좀처럼 물러나지 않는 그의 가슴과 어깨 따위를 옹골차게 말아 쥔 주먹으로 인정사정없이 구타했다. 하지만 사내는 얻어맞으면서도 그저 흔연히 웃었다.

그러던 중에 나니아는 선반 옆에 있던 길쭉한 자물쇠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 자물쇠를 라히무스의 눈앞에다 들이밀고 협박하듯 흔들었다.

“나 이제 이것도 쓸 줄 알아요.”

“……?”

‘고작 그런 자물쇠 따위로 나를 막겠다고?’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 말없이 온 얼굴로 그녀를 비웃었다.

“설마 자물쇠까지 걸어 놓은 방에 몰래 침입해 들어오는, 그런 악질은 아닐 거라고 믿어요.”

“그렇게 필사적일수록 더 따 버리고 싶은 거 알아?”

사내는 비뚤게 웃더니 다시 돌진해 왔다. 겁탈하는 듯한 입맞춤이 이어지다가, 나니아가 자신을 마구 할퀴는 걸 알고 주둥이를 치웠다. 끝내 백기를 든 쪽은 라히무스였다.

“아, 알았어.”

작은 난투극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리면서도 입꼬리는 웃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 바뀌면 말해.”

“그럴 일 없어요! 그리구요, 방이 남는데 남녀가 한방을 쓰면은, 다른 사람들이 우릴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어요?”

“사랑하는 사이라고 생각하겠지.”

“…….”

“날 사랑한댔잖아.”

나니아는 잠시 당황하여 말을 잃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남자가 묘하게 자신감이 넘쳤던 까닭을.

“라히무스는 어떤지 몰라도 저는 창피하다구요…. 그러니까 안 돼요.”

그녀는 반대로 자신 없이, 그러나 신중하게 단언했다. 라히무스는 마지막으로 질척거렸다.

“뽀뽀 한 번만 더 해 주면 포기하고 나갈게.”

나니아는 의기양양한 그를 보고 샐쭉해졌다. 팔짱을 끼고 앉아서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는 것을, 결국 리자드가 먼저 허리를 굽혀서 입을 맞추었다. 소녀는 대꾸 없이 눈을 흘겼다. 꽉 다문 입술 옆으로 볼이 부풀었다. 사내는 좀 봐 달라는 식으로 나지막이 호소했다.

“너한테 몸 달아 있는 거 알잖아.”

내 마음 알아 달라며 절절한 구애를 마친 그는 바닥에 던져놓은 짐을 다시 챙겼다.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문 따고 들어오겠다는 건 농담이야.”

믿음직한 척하는 말에 신빙성이 부족했다.

남자가 살짝 열어 놓고 간 문틈 사이로 옆방에서 벌어지는 일이 생생히 보도되었다. 이미 임자가 있는 방이었는지, 티격태격 소동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왜?! 내 방이야! 내가 먼저 왔어!”

억울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파키케팔로였다. 녀석은 몇 차례 저항해 볼 기회도 없이 무력하게 쫓겨나는 듯싶었다. 사내는 틀림없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예의 그 자세로, 파키케팔로의 엉덩이를 걷어찼을 게 분명했다. 불쌍한 리자드가 깨갱거리며 나동그라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파코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니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라히무스와 같은 방을 쓰고 싶지 않은 이유는 복합적이고 다양했다. 그에게 말한 대로 온종일 붙어 지내며 휘둘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장 컸고,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임을 자랑하듯 공공연히 드러내고 싶지 않은 탓도 있었다.

또 항해 중에 한두 번은 월경이 찾아올 텐데, 그때마다 다른 사람과 한 공간을 쓰면서 신경을 곤두세우고 싶지도 않았다. 달거리를 할 때면 이성은 물론 동성과도 한 이부자리를 쓰기가 껄끄럽고 번거로웠다.

나니아는 선반에서 깡총 내려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배 위에 손을 올려놓은 그녀는 가만히 시름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피를 볼 때가 된 것 같은데 영 소식이 없었다. 소녀는 자신의 몸 깊은 곳에 리자드가 잔뜩 저질러 놓은 불찰을 떠올리며 몸서리쳤다.

‘그동안 괜찮았으니까 앞으로도 별일 없을 거야….’

나니아는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어찌할 도리 없는 찝찝함이 남아서 그녀를 괴롭혔다. 속옷을 더럽히는 날이 올 때까지는 계속 이렇게 불안할 것 같았다.

남쪽으로 나아가고 있다지만 선내는 아직 한창 겨울이었다. 나니아는 옷 위에 얇은 담요 한 장을 더 두르고 식당을 찾았다. 본래는 각자의 방으로 가져가서 먹어도 상관이 없다는데, 오늘 저녁은 항해의 시작을 함께하는 날이니만큼 모두 함께 모여 만찬의 자리를 가지기로 했다.

나니아는 선원과 상인들 외에 요리하는 사람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저녁때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그는 갑판 아래 낮은 곳, 선박의 하중을 받는 위치에서 식사를 준비했다.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하녀 본능이 그녀를 주방으로 이끌었다.

님프의 선박 안에서 어둠을 밝히기 위해 사용하는 물건은 기름 램프나 양초가 아니었다. 나니아의 손이 닿을락 말락 한 위치 곳곳에 불투명한 원통형의 등이 붙어 있었다. 그 안에 빛을 잡아 가둔 것처럼 둥글고 노란 광원이 맴돌았다.

식사 준비라고 해 봐야 별다를 게 없었다. 선상의 식사는 단출했다. 나니아는 약 스무 개의 접시 위에 절임 과일을 덜어 놓는 것만으로 그럭저럭 만족스러워해야 했다. 요리사는 그 작은 도움에도 크게 고마워했는데, 거지 같은 배꾼들은 밥투정이나 할 뿐 이런 친절을 베풀 줄은 모른다며 투덜거렸다.

식당 테이블은 선실의 선반이 그러했듯이 벽에 붙어 있는 판자를 끌어당겨 세워 놓는 구조였다. 돌아오는 길의 천장이 낮고 어두워 라히무스는 머리를 박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는 객쩍은 생각을 했다.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는 선원들 사이로 파키케팔로와 챠링고가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갔다. 테이블 사이사이를 누비며 먹을 것을 얻어먹고 잔뜩 귀여움을 받는 코우도 보였다. 녀석은 정말 리자드라면 맹목적으로 따르고 사랑하는 족속이었다. 도마뱀들의 뜨듯한 손에 의해 어루만져질 때마다 끔찍 깜찍한 소리를 내며 행복해했다.

벨로즈도 처음 만난 님프들과 꾸밈없이 어울렸다. 청년은 수려한 외모의 요정들 사이에서도 단연코 가장 아름다웠다. 자신이 모르는 바다 건너 고향 숲에 대한 환담으로 녹음을 닮은 푸른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한편 내향적인 성격의 인간 소녀는 말없이 저녁 식사를 깨작거렸다. 자기 또래 여자애들도 어려워하는 그녀가 시커먼 아저씨들과 어울릴 리 만무했다. 나니아는 자신의 오른쪽 자리를 곁눈으로 흘긋 살펴보았다. 묵묵히 그녀 곁을 지키는 충직한 리자드가 한 마리 앉아 있었다. 그는 이미 깨끗하게 비운 그릇을 옆으로 치워 놓고 테이블에 조용히 엎드린 상태였다. 두꺼운 팔뚝으로 날카로운 얼굴을 반쯤 가리고,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나니아의 옆얼굴을 훔쳐보고 있었다.

“라히무스는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나니아가 묻자, 라히무스의 길게 찢어진 한쪽 눈이 언뜻 순진한 박자로 껌뻑이며 시선을 마주쳐 왔다. 그는 어깨에 묻은 입술을 움직이지도 않고 목을 울려서 ‘응’이라고 대답했다. 소녀는 공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사내는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는 참으로 말이 없었다. 외톨이를 자처하는 고독한 짐승 같은 면모가 있었다. 나니아는 숫기 부족한 그의 모습에서 미약한 동질감을 느꼈다.

‘단지 낯선 사람들이기 때문일까? 파키케팔로나 챠링고 말고 다른 동료도 있을까?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소녀는 문득 그에 대해서 점점 알고 싶은 게 많아지는 것을 느꼈다. 라히무스는 군중 속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 사내인지, 그의 사회성이랄 게 궁금해졌다.

밤이 되어 나른해진 리자드의 얼굴 위로 은은한 빛이 번졌다. 나니아는 포크를 내려놓고 그의 뺨으로 손을 가져갔다. 턱과 목덜미 주위를 어루만져 주었더니 고롱고롱하는 끈끈한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라히무스는 만져 주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 귀여운 모습이 리자드들에게 쓰다듬 받으러 돌아다니는 우우룡의 행태와 겹쳐 보였다.

‘침대 밖에서는 이렇게 순하고 착한데….’

잠자리에서도 이렇게 온순하게 굴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어루만져 주기를 한참. 라히무스는 갑자기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키더니 덥석 나니아의 손을 가로챘다. 그러고는 깊게 잠긴 목소리로 속삭였다.

“…방으로 갈까.”

가서 무얼 하자는 것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나니아는 숨이 턱 막혔다. 어스름한 분위기 속에서 마주하는 라히무스의 모습은 어딘지 갈급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몸 위로 강한 명암이 드리울 때면 그의 뚜렷한 이목구비나 육신의 굴곡 같은 것들이 더욱 관능적으로 도드라졌다.

나니아는 그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그러고는 악마에게 홀리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오랫동안 같이 지낼 동행들인데요, 어울리진 못해도 자리는 지켜야죠.”

말 그대로 한배를 탄 사람들이었다. 모두 모인 자리에서 둘이서만 쏙 사라진다면 얼마나 꼴사납겠는가. 그것도 첫날부터. 사회성 부족한 리자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나니아의 상식에 의구심을 표했다.

“그게 필요해?”

“그게 사람 사는 거니까….”

내향적인 사람은 더 노력해야 하는 법이라며 나니아는 감히 조언했다.

“그리고 아직 제일 중요한 얼굴을 못 봤잖아요.”

그녀가 말하는 중요한 얼굴이란 모두가 식사를 끝내고 술병 마개를 따낼 즈음이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식사는 맛있게 하셨나요?”

거리가 멀고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쾌활하고 젊은 여자였다. 그녀가 이 배의 주인 슈쉬라 코르테알이었다.

“최악입니다.”

“완전 별로라고!”

“본인들은 물만 마셔도 된다고 이렇게 홀대하는 거 아니야?”

선원들이 선주를 향해 장난스러운 불평을 날렸다. 나니아는 그것이 자신을 향한 질책이 아님에도 경악스러웠다. 거친 뱃사람들의 투정에서 도무지 예의나 존중을 찾아볼 수가 없었던 탓이다. 요리사가 왜 그렇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그들을 험담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비난을 들은 대상은 자주 있는 일인 양 가볍게 웃어 보였다.

“여기는 당신들을 위한 호화 여객선이 아니니까요. 어쩔 수 없지요. 여행 온 게 아니니 착각들 말아 주시죠.”

받아치는 사람의 대답 또한 녹록잖았다.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가 썩 온화해서 당황스러웠다. 여자는 식당에 있는 모두에게 얼굴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의자를 밟고 올라섰다. 그때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불쾌할 만한 말들이 오고 가는데 아무도 기분 나빠하는 기색이 없고 그저 즐거워하기만 했다. 비난과 질타는 이들의 문화인 것일까? 심약한 소녀는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뒤이어 시야에 들어온 선주의 얼굴이 그 모든 혼란을 잊게 했다.

“모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오래 기다리셨죠?”

여자는 마치 축사라도 읊을 기세로 당당하게 술잔을 들어 올렸다.

슈쉬라호의 주인, 슈쉬라. 그녀는 너무도 어리고 사랑스러운 님프였다.

“반갑습니다. 오늘 저를 처음 뵙는 분들도, 구면인 분들도…. 왜 그러시죠? 구면이라는 말이 어디가 이상한가요? 조용히 좀 해 주시죠. 네. 정말, 하하…. 저 말 좀 할게요.”

낡고 허름한 옷을 입은 선원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일까. 그녀의 미모는 이 거무튀튀한 환경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듯했다.

검고 긴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찰랑찰랑 흘러내리고, 연보랏빛 실크 드레스가 늘씬한 몸 선을 따라 그리며 정강이까지 툭 떨어졌다.

“솔직히 이대로 억울하게 상협에 압류되는 것인가 싶어 참 걱정이 많았었습니다. 모두 난리 통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운 아마실로 성심껏 지어 낸 레이스가 군데군데 은근하게 장식되어 사치스럽지 않으면서도 화려한 분위기로 옷맵시를 완성했다. 그녀는 심지어 액세서리까지 완벽했는데, 온통 알이 굵고 호화스러운 것들뿐인데도 본인의 이목구비가 워낙 화려한지라 도통 과해 보이지가 않았다.

후미진 선내에 피어난 한 송이 붓꽃처럼 아리따운 그녀는, 이런 험준한 망망대해의 갑판 위에서가 아니라 화려한 연회장을 거닐며 우아하게 댄스 스텝을 밟아야 할 것 같았다.

나니아는 이전에 벨로즈를 처음 만난 그날과 같이 뒤통수를 강타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정말이지, 충격적으로 예뻤다.

“언제와 같이 우리의 앞길에 행운만이 가득하리라 믿습니다.”

시원시원한 말씨와 목소리가 싱그러웠다. 이를 환히 드러내며 웃는 얼굴은 무척 사랑스러웠다. 귀한 집에서 귀여움받고 자란 티가 풀풀 나서 벨로즈와는 또 느낌이 달랐다.

그녀는 상단의 리더이자, 배의 주인이자, 선원들의 고용주로서 이런저런 뜻깊은 말들을 입에 담았다. 이따금 장난스럽게 끼어드는 사공들의 말로 이야기가 산으로 향할 때마다 너스레를 떨며 다시 원위치로 돌아오게 만들었는데, 그 자신만만한 언변까지도 썩 괜찮은 여자였다.

나니아는 사실 그녀의 얼굴만 들여다보느라 무슨 말을 하는지는 하나도 귀담아듣지 못했다. 그냥 유창하다는 느낌만을 기억했다. 그녀는 자신을 소개하고, 포부를 밝히며, 그동안의 노고를 치하하고, 감사한 마음을 전하다, 마침내 축배를 들었다.

“그리하여 안전하고 성공적인 항해를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곳곳에서 나무 술잔이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님프는 의자에서 내려와 새 식구들을 향했다.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전체적인 인사말보다 개인적인 통성명이 더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파키케팔로와 챠링고, 그리고 벨로즈까지 거쳐 온 그녀의 발걸음이 라히무스가 앉아 있는 자리로 당도했을 때, 나니아는 숨이 멎는 기분을 느꼈다.

선주가 인사를 건네 왔다.

“슈쉬라 코르테알이라고 합니다. 편하게 슈라, 그렇게 부르셔도 좋아요.”

방긋 웃는 얼굴에서 사교적이고 붙임성 좋은 성격이 드러났다. 나니아는 무릎에 올려놓은 손으로 허름한 담요를 꼬집으며 대꾸했다.

“나니아 뷔셀…. 이라고 합니다.”

인간 소녀의 대꾸에 님프는 큰 관심 없이 싱긋 웃어 주었다. 슈쉬라의 시선은 곧바로 라히무스를 향했다. 어서 네 이름도 말해 보라는 듯 가지런한 검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이쪽이 우두머리군.’

슈쉬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한참 반응이랄 게 없는 리자드를 향하여 그녀가 대답을 재촉했다.

“보통 상대방의 이름을 들으면, 다음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게 순서죠?”

네 옆에 있는 여자가 무엇을 하는지 보지 못했냐는 듯, 술을 따라 낸 술병을 추켜올렸다. 물잔에 따라지는 황금빛 음료의 물줄기가 쪼르륵 약해질 때쯤부터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남자는 오랜 침묵 끝에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한 표정으로 단조롭게 대꾸했다.

“라히무스.”

그제야 님프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아름답게 미소 지었다.

“라히무스, 멋진 이름이군요.”

그녀는 술병을 라히무스 앞에 내려놓고 자신의 잔을 내밀었다. 마주 따르라는 제안이자 부탁이었다. 나니아는 그녀의 행동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자신은 주고받지 못한 술잔이 몹시도 신경 쓰였다.

‘…따를 거야? 따를 거야?’

나니아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면서 담요와 바지를 함께 쥐어뜯었다. 사회생활 운운한 것이 바로 몇 분 전인데, 어째선지 라히무스가 그녀를 무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자기 이름을 말하던 때와 똑같이 얼마간 뜸을 들이더니, 결국 술병을 들었다.

황금색 액체가 졸졸졸 슈쉬라의 잔을 채웠다.

“발카모스 사령관께 말씀 들었습니다.”

님프의 섬섬옥수가 술잔을 한 손에 쥐고 흔들었다. 잔을 부딪히자는 신호. 과묵한 리자드는 커다란 한숨과 함께 잔을 들었다. 남자가 손에 들고 있을 뿐인 술잔에 슈쉬라가 경쾌하게 자신의 것을 부딪혔다. 여자는 잔에 담긴 술을 마시고, 남자는 다시 내려놓았다. 님프는 따라 준 술을 마시지 않는 그를 보고 조심성이 많은 남자라 여겼다.

“독을 타진 않았는데요.”

그녀가 넉살 좋게 농을 치며 라히무스의 표정을 살폈다. 용건은 그게 다냐는 듯한 얼굴. 아무리 말주변 좋은 장사꾼이라 할지라도 대답 없는 상대를 붙잡고 대화하는 재주는 없었다.

“제가 어떤 부탁을 드렸는지는 미리 전해 들으셨으리라 생각해요.”

슈쉬라는 불청객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바윗돌과의 대화를 포기했다. 자리에서 쫓겨나듯 일어나면서도 연신 웃음을 잃지 않았다.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무적이면서도 상냥한 목소리가 맺음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이게 마지막이라는 듯, 슈쉬라는 라히무스를 향해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나니아는 또다시 자신에겐 내밀어지지 않았던 님프의 오른손을 보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악수할 거야? 잡을 거야?’

그리고 리자드는 마침내 앞발을 내밀어 님프의 고운 손을 마주 잡더니, 두어 번 흔들고는 놓아주었다. 나니아는 조금 멍한 눈으로 그들이 손을 잡고 흔들고 헤어지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 행위가 얼마나 건조한 인사인지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가슴은 다른 주장을 했다. 소녀는 자신의 마음속에 피어나는 어두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옆에서 빤히 보고 있는데, 다른 여자랑 손을 잡아…?’

차마 드러낼 수 없는 유치한 울분이 그녀의 마음속에 치솟았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라히무스는 단지 반 계약적 관계에 놓인 사람과 인사를 나눈 것에 불과했다. 처음 만난 사이에 주고받기로 반주와 악수만 한 행위가 없으니 참으로 예사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상대가 단지 어리고 예쁜 여자라는 이유로 기분이 나빠지고 만 것이었다. 그 객관적인 사실이 나니아로 하여금 부끄러운 자기혐오에 빠지게 했다.

질투와 집착은 언제나 그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나니아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거울에 비추어 본다면, 과연 남 말할 처지가 아니었다. 애인이 이성과 악수를 좀 했기로서니 이처럼 기분이 상할 줄이야.

‘…나야말로 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님프가 돌아간 뒤, 라히무스는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소녀는 그 모든 행위 하나하나에 의미 부여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름을 바로 말하지 않고 뜸을 들였던 까닭은 가까이 다가온 미인의 얼굴을 구경하느라 넋을 잃었던 탓인 것 같고, 예쁜 여자가 술을 따라 주니 그도 사내라면 내심 두근거렸을 것 같고, 미녀의 고운 손을 만져 볼 기회라 생각하며 기꺼이 악수에 응했던 것 같고, 이제와 술잔을 돌려 보는 행동은 마치 그녀의 예쁜 얼굴을 곱씹어 보는 일인 것만 같았다.

나니아가 자신을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물끄러미 응시하자 라히무스는 비딱하게 눈썹 한쪽을 들어 올렸다.

‘너도 마실래?’라고 물어보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잔을 기울여 보여 주는 것을, 그녀는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세 갈래 포크 갈퀴가 멀뚱멀뚱 접시를 긁었다. 비어 가는 접시 위에 남아 있는 한 조각 올리브 덩어리를 으깨 보기도 하였다. 그렇게 한동안 의미 없는 짓을 반복하던 나니아는 라히무스를 향하여 불쑥 질문을 던졌다.

“…되게 예쁘다. 그쵸?”

그러고는 말을 꺼내자마자 후회했다. 머릿속에서는 작은 물레방아가 팽글팽글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지금 이런 걸 왜 묻는 거지?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은 거야?’

리자드는 단번에 알아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응?”

“방금 저분이요.”

낭패다. 이 이상한 질문을 빨리 철회했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어야 했어.’

나니아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질문 속에 담긴 의도가 무척 불순하다는 사실을. 이것은 일종의 시험이었다.

사내는 나니아의 턱짓을 좇아 다시 슈쉬라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님프들이 있는 테이블로 돌아가서 무어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먼발치에서도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모여 만든 얼굴이 무척 어여뻐 보여서, 나니아는 초조해졌다.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돌아 본지 한 5초 정도 지났을까. 그는 대수롭잖은 투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

나니아는 올리브를 으깨던 포크를 접시 위에 툭 내려놓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소녀에게는 그 짧은 5초의 시간이 5분 같고, 5시간 같았다.

‘…왜? 왜 그렇게 길게 생각해야 했는데?’

누가 봐도 인형처럼 예쁘장한 여자였다.

‘그러면 그냥 그렇다고 바로 대답하면 됐잖아.’

차라리 그의 반응이 빠르게 돌아왔더라면, 아름다운 예술품을 칭찬하는 것과 비슷한 대답쯤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왜 그렇게 뜸을 들이다가 대답하는 건데?’

나니아는 남자가 그 긴 시간 동안 대체 그녀의 어디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속이 타서 미칠 지경이었다.

아니다. 솔직해지자. 사실은 ‘응’이라는 대답 자체가 문제였다. 그의 긍정이 어지러운 마음속에 추악한 불길을 일으켰다.

* * *

나니아는 여러모로 속이 뒤집혔다. 뾰족한 파도들이 선박을 때리며 선체를 크게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난간 사이로 동그란 머리통을 내밀고 속을 게워 내는 중이었다. 멀쩡한 줄 알았던 몸이 드디어 멀미를 시작했다.

“아유, 이 아가씨를 어떡한담.”

챠링고가 등을 두드려 주면서 걱정을 했다.

왜 라히무스가 수발을 들고 있지 않은가 하면, 너는 내 곁에 얼씬도 하지 말라는 나니아의 엄포 때문이었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토하는 모습 같은 걸 보여 주고 싶을 리가.

노련한 바닷사람들은 이 정도 흔들림에는 끄떡없어 보였다. 리자드들도 아주 멀쩡했고, 심지어는 벨로즈조차 어지러운 내색 없이 고스란했다. 뱃멀미를 심하게 앓는 사람은 오직 나니아 뿐인 듯했다.

“차라리 방에서 기절해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말이야.”

더는 게워 낼 것도 없어서 위액과 타액만 퉤퉤 뱉어질 때쯤, 나니아는 챠링고가 건네주는 깨끗한 물로 입을 헹궈 냈다.

“잠도 안 오지?”

“괜찮아요…. 이제 괜찮아진 것 같아요.”

환자는 뒤를 돌아 뱃전에 기대어 앉았다. 시원한 바깥바람을 맞으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사위를 둘러보아도 뭍이 보이지 않아서, 그제야 진정 난바다로 떠나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방에 틀어박혀 있으면 눈은 멈춰 있는데 몸은 요동을 쳐서 메슥거리는 기운이 더 쉽게 올라왔다. 당장 토기가 치밀었을 때 처신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었다. 제대로 닦아 낼 수도 없는 선실 나무 바닥에 토사물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아직, 가까이 오지 말아요.”

나니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오는 라히무스를 향해 손을 내저었다. 쩔쩔매는 그의 시선을 무시했다. 남자를 외면하는 까닭은 추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은 탓도 있지만, 사실은 그냥 말을 섞고 싶지가 않았다.

“이야, 높다.”

곁에 있던 파키케팔로가 손등을 이마에 받치고 저 높은 곳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 끝에 놓인 것은 중앙돛대 최정상의 까마귀 둥지였다.

“뭐가 좀 보이나?”

원래는 망을 보는 사람의 자리였다. 그 까마득한 고공에 선장과 선주가 함께 올라가서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니아의 눈에는 그게 너무 높아서, 높은 만큼 대단해 보였다. 가느다란 줄사다리 하나에 의존해서 저기까지 올라가는 상상을 했더니 아찔해졌다. 그런데 파키케팔로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아찔하다는 식으로 말했다.

“벨로즈 님 때문에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청년은 아리송한 말과 함께 어지럽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뭐가.”

“슈라 말이야. 저 정도면 님프 중에서도 진짜 예쁜 편이지?”

슈라. 그 이름이 썩 친밀하고 귀엽게 들렸다. 녀석은 정말로 슈쉬라가 부르라는 대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벌써 막역한 사이가 된듯했다.

볼일을 끝마친 슈쉬라가 위태로운 밧줄 끝을 붙잡고 거침없이 층계를 내려왔다. 때마침 불어오는 해풍에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 신비롭고 청량한 모습은 그야말로 요정같이 아름다웠다. 나니아는 검은 머리카락이 시시하고 볼품없다는 편견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님프가 가진 흑단 같은 머리카락은 자신의 것과는 사뭇 다르게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항상, 예쁘다고 생각했어. 네 그…. 머리카락….’

‘하나도 칙칙하다거나, 평범하다거나, 그렇지 않고…. 네 까만 머리카락은, 그러니까, 밤하늘 같아…. 아…름다워.’

‘허리 끝에서 찰랑거릴 때면, 나는…. 항상 시선을 뗄 수 없어….’

나니아는 일전에 라히무스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그때는 그 말이 그렇게나 듣기 좋았는데 곱씹을수록 떨떠름해졌다. 그 모든 칭찬의 말들이 슈쉬라에게 딱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남자가 주장하는 것만큼 아름답지 못했다. 누군가 한눈에 반할 만한 외모는 아니라고, 언제나 그렇게 염세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정말 라히무스의 이상형이 딱 그런 것이라면? 소녀는 괜스레 자신의 까만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리면서 우울해졌다. 어느 누가 보아도 나니아 자신보다는 슈쉬라가 훨씬 매력적이었다.

비관에 빠져드는 나니아를 다시 갑판 위로 끌어올린 것은 벨로즈의 새치름한 미성이었다.

“뭐예요, 파코. 나한테는 한 번도 그런 말 해 준 적 없잖아요.”

“예에? 내가 왜 남자한테 예쁘다는 칭찬을 해 줘야 하는데?!”

파키케팔로는 소름 돋는다는 듯 자신의 팔뚝을 문지르며 벨로즈로부터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나 때문에 익숙해진 줄 알았다면서요. 말인즉 익숙해지기 전에는 파코 눈에 내가….”

“아니, 그거랑 이거는 다르죠.”

두 남자의 설전에 챠링고도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선루 위의 슈쉬라를 쳐다보았다. 한껏 치장한 모습이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으로 매혹적이었다. 한 치의 허술함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무새에 공들이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파키케팔로의 진심 어린 격찬만큼은 아니었으나 챠링고의 무감한 목소리에도 건조한 감탄이 실렸다.

“천생 님프 아가씨긴 하네.”

그녀가 말하는 천생 님프란, 사람 홀리도록 빼어난 미모와 청아함에 대한 수사였다. 챠링고는 파키케팔로의 등을 두드리면서 정신 차리라는 듯이 당부했다.

“그래도 인마, 어쭙잖게 반하면 안 된다. 저런 얼굴 보고 있으면 진심이 될 수밖에 없으니까, 코 꿰이기 딱 좋다고.”

“저런 미인이라면 다섯 번째 남편이 되어도 좋을 것 같아.”

“다섯 번째라고 되겠냐, 니가?”

리자드들이 낄낄거리면서 나누는 대화의 내용이 지난밤 선원들 사이에서 돌던 말들과 비슷했다. 그들도 언뜻 미혼인 슈쉬라에게 구혼하고 싶다든가 그런 말들을 지껄였던 것 같다. 동료들이 하나같이 여자의 미색을 극찬하자, 나니아는 기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계속되는 그들의 찬탄은 지난 저녁 만찬에서의 불쾌한 경험을 상기시키며 부적절한 열등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거북살스러웠던 것은 나니아뿐만이 아니었던 듯,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벨로즈가 도리어 예민하게 털을 세웠다.

“왜 그렇게 호들갑인지 모르겠네요.”

그 수컷 님프는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예쁜 줄만 알았던, 태어나 자신에게 견줄 수 있는 미인은 오로지 저랑 똑같은 얼굴을 가진 누나뿐이었던 자였다.

“객관적으로 내가 더 낫지 않나?”

자신의 미인 자리를 넘보는 새로운 인물과 아름다움을 겨루는 벨로즈의 태도는 사뭇 진지하기까지 했다. 남자는 손등 위에 턱을 받친 채로 보석 같은 눈을 깜빡였다. 갸웃 고개를 기울이는 모습이 익숙하게 사랑스러웠다. 그는 확실하게 자기편을 들어 줄 것 같은 상대를 골라서 재차 질문을 던졌다.

“응? 나니아. 나니아 생각은 어때요?”

벨로즈에게 지목당한 나니아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라히무스를 향했다. 어째선지 그의 눈길도 나니아에게 닿아 있었다. 여자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하고,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제 생각도 그래요.”

어딘지 흐리멍덩한 그녀의 말투는 마치 단짝 친구의 주장이라면 무조건 동조해 주는 사람처럼 줏대 없게 들렸다. 나니아는 그 뒤로도 남자를 기분 좋게 해 줄 만한 말들을 두서없이 줄줄 읊어댔다.

“처음 뵈었을 때는 여신이 강림한 줄 알았으니까요. 아니, 천사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눈부시게 아름다우시잖아요, 벨로즈 님은. 반짝반짝 너무 예쁘셔서, 저는 감히 남자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최측근다운 하녀의 아첨에 벨로즈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역시 나니아는 뭘 좀 안다니까요.”

그녀에게 잔뜩 찬양받고 흡족하게 미소 짓는 벨로즈의 모습이, 이번에는 라히무스의 심기를 건드렸다.

자신은 어쩌다가 한 번씩 스쳐 지나가는 말로 잘생겼다는 칭찬을 들을까 말까 한 처지인데, 나니아가 님프에게는 온갖 오색찬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 것을 보고 간만에 심사가 뒤틀렸다.

“하, 아무렴 네가 그 꼴로 저 여자한테 비할 바가 된다고 생각하나? 거울 본 지가 너무 오래됐나 보지?”

남자의 비아냥거림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벨로즈는 이제 나니아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처럼 여신 같은 용모는 아니었다. 불쑥불쑥 길어지는 몸의 마디라든가, 예전만큼 관리되지 못한 머리카락이라든가, 갸름한 대신 단단하게 빚어지기 시작한 턱선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그랬다. 여러모로 가냘파 보이던 인상은 점점 사라져 가고, 뒤늦게 사내다운 풍채로 자라나고 있었다.

그래서 라히무스의 조롱은 어느 정도 타격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그 따가운 공격을 받은 사람이 벨로즈 한 사람만이 아니라는 데에 있었다. 남자의 이죽거림에 벨로즈는 물론 나니아도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님프를 비꼬기 위해 꺼낸 비수는, 그보다는 오히려 옆에 있던 나니아에게 더 깊숙이 꽂혔다. 소녀는 떨리는 눈으로 라히무스가 입에 담은 ‘저 여자’를 황망히 바라보다가, 벨로즈가 당겨 올리는 손에 의해 일으켜 세워졌다.

“흥, 이 중에서 가장 아름다움과 거리가 먼 사람의 말은 듣고 싶지 않아요.”

라히무스에게 불퉁하게 대꾸한 님프는 나니아를 향해서는 무척 다정하게 물었다.

“나니아, 속은 좀 괜찮아졌어요?”

그녀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가지 않을래요? 괜찮으면 내 머리 좀 잘라 줘요. 너무 길어진 것 같아.”

남자가 까맣기도 하고 하얗기도 한 머리카락을 손톱으로 빗어 넘겼다. 그의 눈웃음은 요사스러웠으나, 깍지를 껴 오는 손끝은 엄마를 향한 어린아이처럼 애교스럽고 천진했다. 그 꼴을 보고 부아가 치민 라히무스는 악다문 이를 드러냈다.

“저게….”

쫓아가기 위해 한쪽 발을 쿵 내디뎠다가 이내 멈칫했다.

‘…이제 가까이 가도 괜찮은 건가?’

그에게는 어겼을 경우 무시무시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는 접근 금지 명령이 떨어진 상태였다. 리자드가 우두커니 멈춰 서 있는 사이, 공주는 자신의 전속 미용사를 이끌고 재빨리 선내로 도망쳐 버렸다. 그래서 눈치 없는 도마뱀은 애인의 저조해진 기분이라든가 어두워진 안색 같은 것은 살펴볼 생각도 못 하고 그녀를 놓쳐 버렸다.

일방적인 감정의 골은 그렇게 더욱 깊어져만 갔다.

* * *

나니아는 자신의 방으로 끌려와 벨로즈가 건네주는 가위를 손에 들었다. 손님은 등받이 없는 목제 스툴에 앉아서 미끌미끌한 천을 몸에 둘렀다.

“염색했던 부분은 다 잘라 줘요.”

남자가 흥얼거리듯이 말했다. 그와 대조적으로 나니아는 꼿꼿이 얼어붙었다. 벨로즈의 주문은 여태껏 그가 자신의 머리에 저질러온 그 어떤 과업보다도 가장 끔찍할 것임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면 파코보다도 더 짧아지실 텐데요….”

진정 그리하여도 되겠냐는 듯, 하녀는 걱정스러워했다. 벨로즈는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의 머리카락에 대하여 큰 미련이 없어 보였다. 남의 머리카락 가지고 아쉬워하는 것은 항상 나니아였다.

“뭐가 됐든 지금 내 머리보단 낫지 않겠어요?”

남자는 은빛 뿌리가 길게 자라난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며 눈을 치떴다.

“내가 생각해도 내 꼴이 좀 우스웠던 것 같아.”

거울 본 지가 오래되었냐는 리자드의 말에 사실은 자존심이 상했던 걸까. 님프는 태연한 척했지만, 어쩌면 공주 대접을 받을 때만큼 윤색되고 있지 못한 상황을 신경 쓰고 있는지도 몰랐다. 실제로 그의 머리털은 사람 손이 오래도록 닿지 않은 떠돌이 개처럼 푸석푸석하고 어정쩡했다.

벨은 달관한 사람처럼 말했다.

“하지만 나는 민머리여도 잘생겼을 테니까. 뭐, 괜찮아요.”

남자의 자신만만한 자기 자랑에 나니아는 무언으로 긍정했다.

풋내기 미용사의 어설픈 가위질이 님프의 머리카락을 싹둑싹둑 가다듬기 시작했다. 모양을 예쁘게 만들기 위해서 검은 부분을 완전히 없애 버릴 수는 없었다. 벨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머리카락의 잔해를 덤덤하게 바라보았다. 어쩐지 속이 시원했다. 이제는 멀쩡한 머리카락을 남의 색으로 덮을 일도 없겠지.

사실 남자가 진정으로 털어 내고 싶은 찌꺼기는 이미 동쪽 땅에 남겨 두고 왔는지도 몰랐다. 이발은 지저분한 사념과 부자유한 나날들에 대한 기억을 도려냈다. 그것은 평생토록 자신을 옭아맨 거짓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행위였다.

“그거 알아요, 나나?”

“네?”

님프는 미용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시선을 정면에 둔 채로 나니아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알기 쉽다고 했잖아.”

나니아가 잠시 가위질을 멈추고 머뭇거리자 벨로즈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예전에 나를 보던 그때 그 눈으로, 선주를 보고 있더라고요.”

소녀는 남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리고 얼굴을 붉혔다. 어둑한 속내가 참으로 쉽게 간파당했다.

“나는 그게 뭔지 알아. 질투한 거죠?”

벨로즈는 마치 흥미진진한 수수께끼를 맞추듯 즐거워했다.

“라히무스는 전혀 짐작도 못 하는 것 같던데요.”

벨이 재미있다는 듯 묻자 소녀는 다시 가위질을 시작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티가 많이 났던 걸까?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그랬으려나….’

하녀는 사실 슈쉬라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계속,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그녀를 벨로즈와 비교하고 있었다. 같은 님프이기 때문일까. 아니. 그들의 문제라기보다는 나니아 자신의 마음가짐 문제였다. 말도 몇 번 섞어 본 적 없는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은, 예전에 라키바하프를 사이에 두고 공주에게 품었던 악독한 시새움과 똑 닮아 있었다.

“발전한 게 없는 것 같아요, 저는…. 그래서 부끄러워요.”

나니아가 소심하게 중얼거리자 벨로즈는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나야말로 여자를 상대로 기이한 투기를 부렸어요. 따지고 보면 내가 더 우습죠.”

“아녜요. 그러실 만했어요….”

나니아는 어쩌면 심적으로 더 가까운 벨로즈에게 자아를 의탁했는지도 모른다. 슈쉬라를 상대로 경쟁심을 드러내는 그에게 은밀한 동료애를 품었다. 그리고 내심 응원했다. 자신은 감히 그 요정의 상대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열등의식은 추했다.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면 상대방을 저주하고 싶어지는 감정으로 발전하니까. 단지 부러워하는 데서 그치질 않고. 그녀는 타고나길 미인일 뿐인데,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시기하며 견제하다니. 참으로 어리석고 못났다. 그것이 건전하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한 마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억누를 수가 없었다.

벨의 머리 손질이 끝나 갈 때 즈음, 잔뜩 골이 난 리자드가 결국 그들을 찾아왔다. 반경 다섯 걸음 안쪽으로 들어오면 일주일 동안 뽀뽀를 해 주지 않겠다는 무시무시한 접근 금지 명령도 사내의 불꽃같은 질투심을 저지하지 못했다. 그는 방문 앞에 멈추어 서서, 높은 덩치를 좁은 통로에 어중간하게 구겨 넣고, 벨로즈와 나니아의 다정한 한때를 못마땅한 눈초리로 노려보았다.

“이제 완전히 사내놈 다 됐군.”

공주 행세는 물 건너갔다며 꼴좋다는 듯 벨로즈를 향한 야유를 아끼지 않았다. 벨은 여유를 잃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응수했다.

“그럼 이제 왕자님 해야 하나? 그렇게 불러 줄래요, 나니아?”

그 말에 라히무스의 눈빛이 살기등등해졌다. 포악한 리자드의 꼬리 끝이 신경질적으로 벽을 쿵쿵 두드렸다. 나니아는 아이 다그치듯 스읍, 소리를 내며 엄하게 을러멨다.

“하지 말아요, 그거.”

그녀의 지적에 리자드는 허공에다 대고 꼬리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투정 부리듯 흔들리는 꼬리 끝은 이따금 힘 조절이 되지 않아서 다시 또 문틀과 쿵쿵 부딪혔다.

하녀는 미끈한 천 아래 벨로즈의 손에다 거울을 들려 주었다. 다행히 그녀는 손재주가 좋은 편이었다. 벨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잠시 어색해하다가 이내 상쾌하게 웃었다.

“맘에 들어.”

무엇을 어떻게 해도 좋다고 말해 주는 벨로즈가 고마웠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담백한 관심과 애정을 바라는 그의 태도가, 아직도 조금 아리송하고 어렵기는 하지만, 전보다는 훨씬 수월한 느낌이었다.

나니아는 그를 좋아했다. 그것이 성애적 감정은 아닐지라도.

해사하게 웃는 나니아를 보고 라히무스는 언짢아졌다. 심지어 님프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떼어 주기 시작하자, 그것이 리자드의 난폭한 본성을 자극했다. 흉포한 도마뱀은 시샘을 참지 못하고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고 연약한 님프를 겁박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꺼져.”

남자가 으르렁거리자, 벨은 예상외로 순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사나운 도마뱀이 그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앉았다. 나니아가 어이없어하며 그를 내려다보는 가운데, 사내는 처량한 척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졸랐다.

“나도 해 줘.”

님프는 자기 머리카락을 받쳤던 미용 천을 곱게 접어 안으며 눈꼴사납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말했다.

“이건 내 거야. 안 빌려줘요.”

님프는 혀를 빼물고 콧방귀를 뀌면서 방문을 나섰다. 리자드는 그따위 것 필요 없다는 듯이 코웃음 치며 웃통을 훌렁 벗어 던졌다. 맨몸에 떨어진 머리카락은 물로 씻어 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몸에 붙은 머리카락을 여자가 다정하게 떼어 내 준다면 그건 그거대로 무척 짜릿할 것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황홀해서 자지에 핏발이 섰다.

남자가 설레발을 치는 줄은 모르고, 나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뭘 더 자른단 말이에요?”

여자가 핀잔을 주자 사내는 커다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칭얼거리면서 눈썹 위의 머리카락 몇 가닥을 늘려 보듯이 잡아당겼다.

“앞머리가 자꾸 눈을 찔러.”

나니아는 그가 바라는 것이 단순한 이발이 아님을 알았다. 자신에게 닿고 싶어 끙끙거리는 그의 모습이 사랑스럽고도 가증스러웠다. 하는 수 없이 그의 머리에 가위를 가져다 대면서도 도무지 다정하게 대해 주고 싶지가 않았다.

나니아가 그의 머리를 매만지는 일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녀는 종종 파키케팔로나 라히무스의 머리카락도 다듬어 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내놈들은 머리카락이 너무 빨리 자랐으니까.

더 손볼 데도 없는 라히무스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는 아주 조금 조금씩 잘려 나갔다. 가위 날은 이따금 허공을 베기도 했다.

나니아는 멍한 기분이었다.

사실은 계속해서 라히무스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아무렴 네가 그 꼴로 저 여자한테 비할 바가 된다고 생각하나?’

“…라히무스.”

“응?”

힘없는 목소리가 리자드의 이름을 불렀다. 그도 벨로즈처럼 시선을 정면에 고정해 둔 채로 귀를 쫑긋 세웠다. 소녀는 예민하게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물었다.

“…정말로 그 님프가 벨로즈 님보다 예뻐요?”

또다시 비슷한 과오가 저질러지는 순간이었다. 나니아는 초조하게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짧은 몇 초가 그녀의 초조한 마음속에서 무한하게 팽창하였다. 사실 진짜로 묻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비교하고 싶은 대상은 벨로즈가 아니었다. 도저히 그 말 만큼은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걔가 나보다 예뻐?’라는 질문은. 그리고 설령 그 속 보이는 물음에 ‘네가 더 예뻐’라는 말이 돌아온다 해도, 전혀 기쁠 것 같지 않았다. 답을 정해 놓고 묻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질문이니까.

뜬금없는 소리에 주춤하던 라히무스는 마침내 세 번째 기회까지 날려 버렸다.

“작정하고 꾸민 여자보다 예쁠 수 있나?”

서두에는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벨로즈가, 라는 주어가 생략되어 있었다. 하지만 펄떡거리는 질투심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나니아는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저 들은 내용만 곱씹었다.

그랬다. 진짜 문제 삼고 싶은 부분은 바로 그것이었다. 작정하고 꾸민 여자가 그의 눈에 예뻐 보였다는 거다. 라히무스에게도 멀쩡히 눈이 달려 있었다는 것. 그가 미추를 구별하고 논할 줄 안다는 것. 나니아는 스스로가 그 부분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음을 깨달았다.

‘너도 예쁜 게 뭔지 아는구나. 예쁜 여자와 그렇지 않은 여자를 구분할 줄 아는구나.’

그게 왜 이렇게 속상하고 실망스러운지. 나니아는 자신의 좀스럽고 치사한 속내를 마주하고는 그 옹졸한 민낯이 혐오스러워서 재빨리 마음의 문을 걸어 잠갔다. 이 구차한 마음이 들키지 않도록.

“…다 됐어요.”

남자가 얼굴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떼어 주길 바라고 있을 때, 다정한 손끝이 아닌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눈을 번쩍 뜨이게 했다.

“이제 나가요.”

“…….”

남자는 멀뚱히 눈을 깜박거리다가 미간 사이를 확 좁혔다.

“왜 화났어?”

“화 안 났어.”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묻자, 나니아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뒤이어 손에 든 가위를 내려놓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빗자루질했다.

“화난 거 맞잖아.”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는 듯, 라히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바쁜 체하는 나니아의 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대화를 청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니아는 살갗이 채 닿기도 전에 그를 피했고, 남자는 육체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삐끗하는 순간을 맛보았다.

나니아는 비질을 멈추고 자루를 쥔 손을 가슴 앞으로 당겨 왔다. 그러고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투로 기운 없이 대꾸했다.

“다섯 걸음 이내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 명령이 진심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갑자기 억울해진 라히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제를 따지고 들었다.

“애초에 왜 그래야 하는 건데?”

리자드의 커다란 체구는 단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너한테 미쳐서 오줌도 받아먹겠다는 판에, 내가 그깟 토사물 닦아 주는 게 문제겠어?”

사내는 스스로 목소리가 커지는 걸 느끼고 뒷짐을 졌다. 행여나 너를 해코지하는 일은 없을 거라는, 무의식의 신체적 선언이었다.

수치스러움에 얼굴이 달아오른 나니아는 침착함을 잃고 소리를 질렀다.

“절대로 그럴 일 없어요!”

분기에 찬 보랏빛 눈이 라히무스를 노려보았다. 화가 난 건 대충 알겠는데, 씩씩거리는 얼굴이 또 너무 깜찍해서 미칠 노릇이었다. 사내는 답답한 마음을 입맞춤으로 해소하고 싶은 본능에 이끌려 고개를 숙였다.

“하…. 나냐.”

너를 어떻게 달래면 되냐는 듯이 한숨처럼 다가온 속삭임이 소녀의 볼 위로 스러졌다. 여전히 뒷짐은 풀지 않은 채였다. 남자의 입술이 쪽쪽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니아의 뺨을 쪼았다. 소녀는 그 껄끄럽고 다정한 아양을 받아 주다가 무어라 경고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때였다. 방문 너머로 고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슈라예요.”

그녀는 여기에 있다고 전해 들었다며 라히무스를 찾아왔다. 반쯤 열려 있는 문틈으로 용건을 집어 던지는 태도가 거침이 없었다. 남자가 누구와 먼저 어떤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저번에 말씀드렸던 호위 건에 대해서 의논할 바가 있어요.”

그 허물없고 시원시원한 풍모에 나니아는 바짝 얼어붙었다. 하마터면 슈쉬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라히무스의 몸을 끌어안을 뻔했다. 마치 그녀가 남자를 빼앗아 가기라도 할 것처럼.

슈쉬라는 문고리를 잡아 늘인 몸을 반쯤 방 안으로 들여놓고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경직되어 있는 나니아를 이상스레 뜯어보고는 다시 라히무스와 눈을 마주쳤다.

“얘기 끝나면 제 방으로 와 주세요.”

여자는 점을 찍듯 말을 마치고 방문을 닫았다. 마저 이야기를 나누라는 듯이.

남의 방에 불쑥 쳐들어와선 어쩜 저렇게 자신감이 넘칠까. 그녀의 당당함은 그 무엇보다 멋진 액세서리였다. 빗자루를 세게 움켜쥐어서 손등이 하얗게 질린 나니아가 말했다.

“잘됐네요. 어서 가 봐요.”

“…잘됐다고?”

라히무스는 눈살을 찌푸리곤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곱씹었다.

“나는 라히무스랑 더 할 말이 없는데, 저 여자는 할 얘기가 있다잖아요.”

“그치만 네가 지금….”

“그리고 나, 피곤해요. 봤잖아요. 멀미 때문에 도저히… 당신 상대할 기운이 없어요.”

피로한 척, 덤덤한 척, 의연한 척하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몸과 마음은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저 내 기분이 너에겐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저 여자의 말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이 무시했으면. 그냥 지금 당장 나를 끌어안아 주었으면.

‘내가 수백 번 너를 밀어내도, 너는 수백 번 다시 나를 원해 줘. 항상 그랬잖아. 언제나 네가 져 줬잖아.’

하지만 입 밖으로 꺼낸 적 없는 소원이 이루어질 리가. 말한 적도 없는 섭섭함을 상대방이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이기적이었다.

사내는 허리를 짚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려워 죽겠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결국 나니아의 마음이 바라는 것이 아닌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피곤해서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차마 거스를 수 없었다.

남자가 방문을 닫고 나가는 그 순간에도 나니아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뒷모습을 외면했다. 그것은 말하자면 마지막 자존심의 발로였다. 상대방은 알지도 못하는, 이 지질한 혼자만의 싸움에서 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저 문을 다시 벌컥 열어젖히고 그가 다시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그런 헛된 상상을 했다. 그러나 남자가 다시 돌아오는 일 따위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녀의 발간 뺨 위로 패배감 짙은 눈물이 흘렀다. 동그랗고 작은 턱에 보기 싫게 주름이 잡혔다.

“…바보.”

처음 해 보는 연애는 생각처럼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소녀는 크게 상심하며 침대 위로 쓰러져서 베개를 붙들고 한참 동안 엉엉 울었다.

* * *

슈쉬라의 방은 다른 곳과 비교해서 아늑함의 정도가 사뭇 달랐다. 물론 그래 봤자 귀부인의 방이라기보다는 창고에 더 가까운 형태라는 점은 비슷했다. 벽에 걸린 커다란 해도라거나 널브러진 나침반과 천측 기계 따위가 이곳이 선주의 방임을 실감케 했다. 그중에서도 리자드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방 한 귀퉁이에 쌓여 마녀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물들이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수상쩍은 약병들, 아직 진정한 주인을 만나지 못한 마도구들, 몇 번이나 들춰 보았을까 싶은 고서적들이 괴짜같이 케케묵은 느낌을 자아냈다. 슈쉬라는 그의 눈길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 눈치채곤 말했다.

“별거 아니에요. 우리 상단이 취급하는 물건들이죠. 돈이 될 만한 건 이것저것 다 건드려 보거든요.”

남자의 멀건 시선은 유독 이런저런 서로 다른 모양의 약병들에 머물렀다. 코르테알의 작은 단주는 그가 무언가를 꿰뚫어 보기 전에 선제적으로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래요. 사실 떳떳한 물건들은 아니에요. 암악술사들이 제조한, 어두운 기운이 응축된 약물들이죠. 아시다시피 인식이 좋지 않아서 은밀하게 거래하는 것들이 많아요. 부탁인데 탄약은 건드리지 마세요. 물약들도 가능하면, 네.”

그녀는 이 흉포한 리자드가 악역무도한 군형 용병임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상인은 자신이 비밀리에 취급하는 물건들을 거리낌 없이, 아니 오히려 아주 자랑스럽게 떠벌리기 시작했다. 마치 새로운 고객 유치라도 하려는 장사꾼처럼 정성이었다.

“이 탄약의 매캐한 포연은 흡입하는 사람을 영원한 잠에 빠뜨려요. 전쟁터에서도 자주 쓰인다고 알고 있어요.”

그녀의 설명은 마치 ‘이건 너도 알고 있지?’라고 묻는 듯했다.

“또 일시적으로 육신의 기운을 폭발적으로 끌어내는 영약이라거나, 핏줄이 조각조각 끊어지게 만드는 독약도 있죠. 이건 내장에 구더기가 득실거리게 하는 저주 물약이에요. 무시무시하죠? 그리고 이 옆에 제일 앙증맞고 귀여운 병은….”

상품을 하나하나 설명할 기세던 님프는 유독 예쁘장한 향수병같이 생긴 약병을 귀엽게 흔들어 보였다.

“사랑의 물약이에요.”

재밌지 않느냐는 듯 상큼하게 미소 짓는 얼굴에서 라히무스는 언뜻 벨로즈에게서 느끼는 짓궂은 심술을 감지했다. 여자는 손에 든 약병을 다시 원위치에 되돌려 놓았다.

“이런 건 한 개를 팔아도 큰돈이 되니까요.”

하나같이 기분 나쁜 약품들을 소개받으며 리자드는 미간을 좁혔다.

“이런 걸 인간한테도 파는 건가?”

유멘타 거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사잇법 위반 혐의가 없다는 결백이 완벽히 동치되는 것은 아니었다.

“뭐…. 아주 조금쯤은요?”

배시시 웃는 님프를 보고 라히무스는 알 만하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 여자도 만만찮게 대륙 간 비밀 보안 문제에 비협조적인 인사였던 것이리라. 뭐 아닐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알 바 아니었다. 리자드 용병은 세계 정의 문제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앉으세요.”

여자가 자리를 권했다. 항상 구비되어 있는 건가 싶은 잔 두 개에 정체 모를 액체를 따랐다. 몇 초간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리자드가 자리에 앉기를 마다하고 차갑고 딱딱하게 이야기했다.

“용건만.”

그는 이야기가 길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라히무스는 단단히 팔짱을 낀 자세로 먼저 자리에 앉은 슈쉬라를 내려다보았다. 연약한 상대와 단둘이 대화를 나눌 때 뒷짐을 지는 섬세함은 다른 여자 앞에서는 발휘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님프는 강요하지 않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 움직이고는 자기 혼자서 잔을 기울였다. 대낮부터 꿀꺽꿀꺽 음용하는 것을 보아선 술은 아니고 찻물인 듯했다.

“그때 그 용건과 동일해요. 당신이 보초를 서 주길 바란다고요. 해가 지고, 해가 뜰 때까지.”

찻잔을 내려놓은 가느다란 손끝이 선실 문을 가리켰다.

“내 방 앞에서요.”

리자드는 수용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스러워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너는 우리 고용인이 아니다.”

“반쯤 그런 관계 아닌가요?”

남자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렸다. 바닥에서 살짝 들린 꼬리 끝이 언짢은 모양을 그렸다.

님프들은 원래 다 이렇게 재수가 없었던가. 아마 대체로 그랬지. 근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던 것 같은데.

남자가 비딱하게 대꾸했다.

“지금 누구 덕에 이 배가 움직일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

상인에게는 시간이 곧 생명이었다. 시장의 조건은 시시각각 변하고, 그 변화 속에서 손해 보지 않으려면 굼뜨지 않아야 했다. 게롤린에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손실은 하루하루 늘어가고 신용은 하루하루 깎여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상협은 그런 사정 봐줘 가면서 조사하는 신사 집단이 아니었다.

“정말 너희들이 남들보다 깨끗하고 결백한 줄 알아서, 그런 이유 때문일 것 같나?”

사령관의 직권 남용과 융통성은 오로지 벨로즈를 위하여 발휘된 것이었다. 우리가 네 덕을 보는 것이 아니라, 네가 우리 덕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을 공연히 귀 뒤로 넘기는 슈쉬라의 행동에서 난감한 기색이 읽혔다. 하지만 그녀는 열세에 몰려서도 고집스러웠다.

“하지만 무사히 평화롭게 이동하고 싶다면, 내 부탁대로 하는 편이 좋을 거예요.”

“내내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으란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리자드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역정을 냈다. 뱃삯 대신 상단의 요구를 이행하라는 발카모스의 당부도 있거니와, 원래 하는 일이 그런 것이다 보니 사실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껏이어야지.

“그럼 열한 시부터 다섯 시요.”

“…열한 시부터 두 시. 그 이상은 안 돼.”

더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치켜든 턱 끝이 완고해 보였다.

“일주일 정도 지켜보기로 하지. 방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정도로도 충분할 것 같으니까.”

자기 한 몸 간수 못 하는 것이야 그렇다 치자.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님프는 너무 과민했다. 이런 망망대해에서 선내 화합을 해치면서까지 자중지란을 감행할 또라이가 있겠는가 말이다.

“일주일이요? 그건 너무 짧아요. 오히려 그 후에 경비가 빈틈을 노린다면요?”

“씨발, 그 정도로 찝찝하게 만드는 새끼가 있으면 먼저 매달아 버렸어야지.”

슈쉬라는 자신이 느끼는 위협이 축소되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했다.

“…내가 예민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좋아요. 앞으로 일주일 동안, 당신 말과 다르게 정말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면, 그땐 계약 연장을 요구하겠어요.”

두 사람은 다시 조건을 명확화했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열한 시부터 두 시. 당분간 그가 슈쉬라의 선실 앞에서 파수꾼 노릇을 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슈쉬라와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라히무스는 나니아의 방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다가 문이 굳게 잠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크게 낙담했다. 억지로 연다면 열지 못할 것도 없겠으나 곤히 잠들었을지 모르는 그녀를 깨울 수가 없어서 조용히 물러났다.

라히무스는 식당으로 내려와 식사까지 거를 생각인 듯한 나니아를 생각하며 짜고 질긴 보존 식품을 씹었다. 그는 나니아의 기분이 좋지 않은 까닭에 대하여 다른 리자드들이 아는 바가 있는지 넌지시 캐 보았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라히무스와 기다란 널빤지 식탁을 사이에 두고 앉은 벨로즈는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기는커녕 뭐가 문제인 줄도 모르는 그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왜 그러는지 정말 몰라요?”

공주가 입을 움직여 말할 때마다 턱 밑에 나른하게 괴어 놓은 손목이 얄밉게 까닥거렸다.

“알고 싶어?”

사내는 눈엣가시 님프의 밉살맞은 놀림에 콧등을 찌푸리면서도 내심 솔깃해하는 게 보였다. 거만하게 미소 짓는 님프의 미색은 이제 막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피어난 한 송이 백장미 같았다. 언제부턴가 그는 순결한 백합보다는 뾰족뾰족하게 가시 돋친 꽃을 닮은 남자가 되어 있었다.

“알고 싶으면 따라 말해 봐. ‘벨로즈 님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십니다.’”

벨은 매우 장난스러운 어조로 듣고 싶은 아첨을 제시했다. 주문을 외우듯 읊조리는 말에 라히무스는 그럼 그렇지 하는 눈으로 벨로즈를 노려보았다. 못 들은 척 무시하는 라히무스를 보고 벨은 키득거렸다.

“뭐 어려운 일이라고.”

님프는 그를 놀리는 것이 어지간히 즐거운 듯했다. 굴욕감을 주는 재미는 덤이었다. 라히무스는 어리숭한 작금의 상황을 개탄하면서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건….”

역시 따로 있지 않은가.

님프가 꼴 보기 싫은 것과는 별개로 그 말은 진실도 아니었다.

나니아 뷔셀. 언제부턴가 사내는 그 보물 같은 여자를 이루는 모든 조각 하나하나에 심장이 뛰고 있었다.

수줍은 뺨에는 사랑스러운 생기가 감돌았으며, 그 위로 흐르는 짙고 검은 머리카락은 신비롭고 야릇한 분위기를 돋웠다. 언제나 다정한 빛을 띠는 보라색 눈동자에는 애정이 가득했고, 작고 귀여운 인상만큼이나 나긋하고 상냥한 목소리는 듣는 사람을 설레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도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의 귀여운.

“…나니아거든.”

남자는 자신의 피앙세를 떠올리면서 실실 웃었다.

턱을 받친 손이 코 아래를 가리고 있었지만 헤벌쭉한 표정을 가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소름 끼치는 소리를 지껄이는 그를 향해, 챠링고는 짜증을 냈고, 파키케팔로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으며, 벨로즈는 눈이 동그래졌다.

‘뭐야. 이미 정답을 알고 있잖아.’

벨은 ‘그 얘기 나니아한테도 했어요?’라고 물어보려다가 조용히 입을 가리고 악동처럼 웃었다.

‘쉽게 알려 주면 재미없지.’

나니아가 중앙 갑판 아래로 내려왔을 때, 이번에는 라히무스가 자리에 없었다. 어째 약속이라도 한 듯이 어긋나게 출몰하는 그들을 보고 벨로즈는 혀를 찼다. 나니아가 넌지시 부재자들의 행방을 묻자 파키케팔로가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챠링고는 슈라 따라서 무기고에 갔고, 라히무스는 이따 새벽에 경비 서야 해서 일찍 눈 붙이러 갔어.”

파코의 말을 듣고 여자는 또다시 적잖은 충격에 휩싸였다. 새벽 보초를 서 가면서까지 그녀를 보호한다니. 그건 마치 공주님과 기사 같지 않은가.

맡은 일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쩐지 코끝이 찡해졌다.

‘라히무스, 바보 멍청이, 음란 도마뱀….’

나니아는 무릎 높이 정도 오는 턱에 걸터앉았다. 그 옆에는 밍밍한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운 파키케팔로와 벨로즈가 앉아 있었다.

“여기서 물고기가 잡히나요?”

“아니. 그냥 너무 심심해서. 있길래 그냥 꺼내 왔는데 전혀 입질도 없다니깐.”

아무래도 바다낚시는 아무 데서나 하는 게 아닌 듯했다.

세 사람은 태양을 등지고 흘수선 가까운 그늘에 앉아 멍하니 바다를 보는 시간을 가졌다. 자리에 햇볕 한 점 들지 않는데도 전처럼 춥지 않았다. 공기가 점점 따뜻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뾰족뾰족한 물결은 조금씩 완만해지고, 선체에 부딪혀 철썩철썩 잘게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아름다웠던 물빛이 벌써 지긋지긋해지려 했다.

그때 상갑판 위쪽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휴게하는 선원들이었다. 그들이 피우는 매캐한 담배 냄새가 여기까지 번져 왔다.

“그래서, 오늘은 뭘 입었든?”

“안에 반쯤 비치는 셔츠를 받쳐 입은 드레스인데, 여기 가슴 부분이 이렇게 파여서, 크….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갔는데, 오늘도 죽이더라.”

“고 안에 입은 걸 싸악 벗기고 위에 것만 입히면 좋을 텐데….”

심상치 않게 저질스러운 말이 오가는 것을 듣고 세 사람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파키케팔로의 일그러진 입술이 벌어지려는 것을 본 벨로즈가 그의 주둥이를 틀어막으며 손가락 한 개를 자기 입술에 올렸다. 어디 무슨 말을 하는지 더 들어 보자는 의미였다.

“그동안 겨울이라서 아쉬웠는데. 남하할수록 다시 벗겠지?”

“하…. 이 좆같은 배 위에서 이런 즐거움이라도 있는 게 어디냐.”

선원들 사이에서는 아마도 미인 선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입방아를 찧어 대는 일이 즐거운 유흥거리인 듯했다.

“그 님프년 도착하기 전까지는 한 번 따먹어야 하는 건데.”

경쟁적으로 음담패설을 주고받던 목소리는 그 후로도 얼마간 더 낄낄대다가 흩어지는 담배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갑판 아래에서 조용히 그들의 대화 내용에 귀를 기울이던 소녀는 징그러운 기분에 몸서리를 쳤다. 배꾼들이 멀어졌다는 확신이 들 때쯤 벨로즈가 어깨를 으쓱하며 입을 열었다.

“예쁘다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라니까요.”

남 일 같지 않다는 듯 탄식하는 목소리에 공감이 묻어났다.

“슈라는 알고 있을까?”

“글쎄요. 경호를 바란다는 것도 저자들 때문인지 모르죠.”

“에이…. 아무리 그래도.”

암컷들이 주도하는 사회에서 나고 자란 리자드 청년은 연약한 님프 선주의 불안감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지만, 벨은 힘없는 여자가 추악한 사내들 밑에서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나니아도 조심하는 게 좋겠어요. 질이 나빠 보여요.”

님프가 나니아의 안위를 걱정했다. 그녀는 이 배에서 가장 여리고 가냘픈 약자였다. 벨의 말에 나니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희롱이나 듣자고 예쁘게 차려입은 건 아닐 텐데. 분명 좋은 감정보다는 악감정이 더 앞서는 상대인데도, 어쩐지 측은함이라든가 동정심 같은 것이 싹트려 했다.

* * *

벨로즈가 조심하라고 당부했던 상황이 바로 이런 상황일까.

나니아 혼자 늦은 저녁을 챙겨 먹고 방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였다. 이곳의 계단은 오르내릴 때마다 발이 빠지면 어떡하나 싶은 아슬아슬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곧은 계단의 마지막 디딤판을 딛고 내려온 순간, 처음 보는 낯선 남자가 그녀에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

“……?”

“그…. 저녁은 맛있게 먹었어?”

어색하게 건네 오는 인사말이 참으로 상투적이었다. 뜬금없이 알은체해 오는 그를 수상하게 여기면서도, 무시하고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마지못해 대꾸하였다.

“…네.”

낯선 남자는 그녀가 대화에 응해 주었다는 생각만으로도 들뜨는 듯했다. 남자가 깡총거릴 기세로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워낙 말이 없어서, 그, 너, 목소리도 되게 좋구나?”

남자는 하얗고 복슬복슬한 머리털을 가진 남자였다. 키는 나니아보다 약간 큰 듯했고 동그란 눈과 도드라진 앞니가 귀여운 인상이었다.

“사실은 전부터 한 번쯤 말을 붙여 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거든.”

말인즉 지금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접근했다는 뜻일까.

“항상 용족들하고 붙어 지내더라? 그런데 너는 아니지? 리자드….”

이 배에 탄 사람들은 여태껏 본 적 없는 다종족의 생물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니아는 그의 정체를 확신할 수 없었다.

“둔갑약 먹은 것 같지는 않거든. 인간 맞지?”

서로의 본색을 알 수 없기는 피차 마찬가지인 듯했다. 인간인지 리자드인지 그게 왜 궁금할까. 나니아는 미심쩍은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니, 아니야. 잡아먹으려는 거 아니야. 나는 그냥 좀…. 친하게 지내볼까 싶었을 뿐이거든.”

잔뜩 털을 세우고 주의하는 그녀를 보고 남자가 횡설수설 변명했다.

“너한테서 풍겨 오는…. 뭐랄까…. 분위기가, 되게 좋아서….”

그는 호기롭게 다가온 것 치고는 말재간이 없었다. 위협적이기보단 다소 멍청해 보이는 그를 두고 나니아의 경계심은 점점 느슨해졌다.

“옆에 항상 붙어 다니는 커다란 리자드는 애인이야?”

“…네?”

통성명도 없이 대뜸 이상한 질문을 건네 오자 나니아는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가 그런 걸 왜 궁금해하지 싶어서 대답을 망설이는데, 그녀의 뒤로 으슥한 인영이 다가왔다.

“애인이냐고?”

지옥에서 올라온 사신의 부름처럼 음산하고 불길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섬뜩하고 커다란 마수가 소녀의 어깨를 감쌌다. 흠칫하며 고개를 드니 살기등등한 얼굴의 리자드가 날카롭게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니. 얘는 내 약혼녀야.”

사내는 먹잇감을 두고 경쟁하는 맹수처럼 으르렁거렸다.

“알았으면 꺼져.”

커다란 용의 꼬리가 선체 벽면을 거칠게 후려치자, 남자는 잔뜩 졸아붙어서 뒷걸음질 쳤다. 파코라면 그럭저럭 맞아 주는 강도였지만, 그에게는 충분히 위협이 된 모양이었다. 나니아는 사냥꾼에게서 벗어나는 토끼처럼 줄행랑치는 사내의 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얼떨떨한 기분으로 다시 라히무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리자드는 살짝 죄를 지은, 그러나 자기도 따질 게 있다는 듯한 어정쩡한 자신감을 비치며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나니아였다.

“내가 언제부터 라히무스랑…. 아니, 그건 됐구요.”

앞으로 몇 날 며칠을 함께 가야 하는 사람인데 그렇게까지 겁을 줄 필요가 있었을까. 현명한 대처는 아니었다.

“라히무스는 대화 방식이 항상 너무 과해요. 지금도 과했구요. 돌아가서 우리에 대해 안 좋게 말하면 어떡해요.”

그녀의 말을 듣고 라히무스는 코웃음 쳤다. 애인 있는 여자한테 작업 걸다가 허탕 친 얘기를 어느 누가 남에게 떠벌릴 수 있단 말인가. 남자 자존심이란 게 있지.

소녀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마저 방으로 돌아가려는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몇 걸음 못 가서 바로 라히무스에게 가로막혔다. 사내는 몸을 비틀어 그녀를 벽면으로 밀어 세우고 사납게 추궁했다.

“넌 왜 애인이냐는 질문에 대답을 못 했지?”

그도 처음엔 이해하려고 했다. 공연한 염문으로 불편한 눈총을 받고 싶지 않다는 나니아의 마음을.

“…꼭 말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말할 필요가 없어?”

“나는 불편해. 누가 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거….”

하지만 매번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감추는 듯한 그녀의 태도를 이제는 견딜 수가 없었다. 불안하다 못해 화가 났다.

남자는 나니아의 왼손을 잡아 올리며 높아진 언성으로 그녀를 질책했다.

“내가 이걸 멋으로 끼워 놓은 줄 알아?”

사내의 거친 꾸지람에 소녀는 순간 겁을 먹었으나 이내 당돌한 척 손을 쳐 내고 반지를 빼내는 시늉을 했다.

“이거 때문에 당신이 약혼자니 뭐니 하면서 나한테 윽박지르는 거라면, 이런 거…. 안 끼고 다닐 거야.”

“그거 빼기만 해 봐.”

“빼면 어쩔 건데?”

“하여튼 빼기만 해 봐.”

“그렇게 노려보면 내가 못 할 줄 알구?”

“빼 봐, 어떻게 되나.”

이미 수차례 주인을 잃었다가 되찾기를 반복했던 반지다. 평생의 순애를 바치고픈 단 한 명의 정인으로부터 두 번, 세 번씩 그것이 버려진다는 것은 상징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끔찍하게 서러운 일이었다. 리자드의 순정에 상처를 입히기에 그보다 더 치명적인 방법이 없었다. 한 번만 더 그녀가 자발적으로 반지를 빼서 던진다면, 그땐 정말 눈이 뒤집힐지도 몰랐다.

나니아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붙잡고 조그맣게 씩씩거렸다. 하지만 남자가 자신의 손가락을 씹어 먹을 것처럼 노려보자 마음을 고쳐먹고 방으로 들어갔다. 더는 라히무스와 갈등하지 않으려는 회피책이었으나, 남자는 기어코 방 안까지 따라 들어왔다.

남자가 거칠게 문을 닫는 것을 보고 나니아도 슬슬 화가 났다. 자기가 왜 이렇게 혼이 나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볼이 부풀었다.

“너랑 나랑 만나는 걸 꼭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

수상한 사람에게 신상을 숨겼기로서니 뭐가 그렇게 문제인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그가 갑자기 나타나지만 않았어도 나니아 본인 입으로 그렇다고 말했을 터다. 그녀는 옆방에 들릴지 모른다는 걱정도 잊고 소리쳤다. 그러자 라히무스 역시 지지 않고 방문 밖 남자가 사라져 간 복도 쪽을 가리키며 언성을 높였다.

“똑바로 말을 안 하니까 저런 새끼들이 너한테 껄떡대잖아!”

“…….”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고성에 잠시 할 말을 잃고 그와 눈을 마주쳤다. 사내의 붉은 눈동자 속에서 치열한 용광로가 끓고 있었다. 그 속에서 부글거리는 것은 선명한 분노. 그리고 질투였다.

“그런 거, 아냐…. 그 사람은 그냥, 말을… 말을 걸어 보고 싶었던 것뿐이라고…. 했는데….”

소녀는 자기 입으로 말을 하면서도 무언가 이상함을 감지하고는 고개를 떨구었다.

남자가 여자한테 뜬금없이 말을 걸어서 애인이 있냐고 물어본다면, 그건 역시 이성적인 관심으로 해석해야 하는 걸까. 그저 경계하고 두려워하기 바빠서 낯선 사람의 접근 의도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뒤늦은 깨달음에 긴가민가한 얼굴 위로 붉은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 모습을 본 리자드는 더욱 사나워졌다.

다른 남자를 떠올리면서 귀엽게 얼굴을 붉히는 꼴이라니. 당장이라도 그 자식을 쫓아가서 흠씬 두들겨 패 주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런 식으로 다른 새끼들한테 빈틈 주지 마. 나 돌아 버리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두 번째나 세 번째 남자여도 괜찮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었다. 아니, 완전히 새빨간 거짓말이다. 다른 남자와 그녀를 공유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불타 없어질 것만 같았다. 물론 그 전에 그 새끼부터 불태워 버려야겠지만.

“그런 적 없어, 나는….”

자신은 지은 죄가 없다며 발뺌하는 소녀를, 흥분한 리자드는 참기 힘들다는 듯 침대로 쓰러뜨렸다. 놀라서 발버둥을 쳐 보았지만 아주 잠시뿐, 곧 무거운 몸뚱이가 전신을 압박해 왔다. 옴짝달싹할 수 없이 이불에 파묻힌 가운데 사내의 갈급한 입술이 숨을 틀어막았다.

“응, 으, 읍…!”

분노, 질투, 욕망, 사랑. 그 다채롭고 어지러운 감정들이 모두 거친 입맞춤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것이 사내가 소녀에게 가할 수 있는 최대한의 폭력인 듯했다.

다툼으로 시작한 키스는 어느새 성욕에 물든 몸짓으로 변해 갔다. 소녀는 사내의 허리를 할퀼 듯이 붙들고 있다가, 그가 하반신을 느릿하게 밀어 오는 통에 온몸에 힘이 빠졌다. 화를 내는 와중에도 몸이 기억했다. 이 우람한 육신이 주는 열락을.

다리 사이가 젖어 드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뒤이어 덮쳐 오는 감정은, 이런 상황에조차 흥분하고 마는 스스로에 대한 환멸.

숨이 막혀서 침을 삼키는 것조차 버거워질 때쯤 남자가 입술을 떼어 내고 이마를 맞댄 채 으르렁거렸다.

“용납 못 해.”

어느새 단단하게 곧추선 그의 중심. 남자와 맞닿아 있는 여러 부분 중에서 단언컨대 가장 뜨겁고 적나라했다.

“너한테 이딴 걸 세울 수 있는 새끼들이랑은, 말도 섞지 말라고.”

나니아는 벅찬 숨을 헐떡이다가, 사내의 커다란 몸통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손으로 그를 움켜쥐었다.

“그러는 너는?”

여자가 악에 받친 목소리로 물었다. 사내는 이 부메랑이 왜 자신에게 돌아오는지 깨닫지 못한 사람처럼 멍청하게 되물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

“너나 잘해!”

여자는 고개를 돌려 사내의 팔뚝을 세게 깨물었다. 리자드에게 그것은 생쥐 앞니에 찔린 정도로 따끔한 수준이었지만, 한순간 흠칫 놀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가! 가서 일이나 해!”

라히무스는 자신을 마구 밀쳐 내는 손을 견디며 한쪽 눈시울을 찌푸렸다.

“뭐, 뭐….”

“가서 그 잘난 보초나 서란 말이야!”

* * *

좁혀지지 않는 갈등의 골짜기는 그 후로도 며칠 라히무스의 속을 썩였다. 예민하고 배타적인 나니아의 태도가 그를 고민에 빠뜨렸다.

대체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걸까. 내가 밤일을 나가는 게 싫었나? 그게 아니면 새삼 내가 하는 일 자체가 싫어졌나?

뱃멀미로 스트레스가 쌓인 나머지 이런 배를 타게 만든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든가, 왜 이런 거칠고 무모한 짓을 하며 살아가는 남자를 따라왔을까 후회하고 있다든가.

열등감을 기조로 한 불안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라히무스의 머릿속을 장악해 나갔다.

군형 리자드, 그중에서도 특히 용병 일은 암컷들이 타기시하는 직업 중 하나였다. 시비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몸을 굴리기 때문에, 그 무모함과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아 좋은 신랑감 취급을 받을 수 없는 풍조가 만연한 것이었다. 사내는 깍지 낀 손 아래에 이마를 묻고 앉아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라히무스는 슈쉬라의 선실 문 앞에서부터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위치에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보초라고 해 봐야 마땅히 할 일도 없으니 불길한 잡념만 늘어갔다.

선주의 걱정과 다르게 지난 며칠간 그녀의 선실 근처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얼씬하지 않았다. 느슨한 척해 달라는 요구에 어느 날은 위치를 바꾸어 눈에 띄지 않는 자리를 골라 잠복도 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코르테알의 무기고에서 꺼내 온 먼지 쌓인 장검도 닦아 낸 보람 없이 널브러져 있었다. 라히무스 본인도 그 같은 무용함을 느끼며 선체 벽면에 나른히 기대어 앉았다.

드문드문 벽면에 붙은 등불이 사내의 어깨를 밝혔다. 불빛은 달빛보다 작고 은은했다.

이제는 풀벌레 소리보다 파도 소리가 귀에 익었다. 달빛에 부서지는 바닷물이 사내의 착잡한 심경에 철썩철썩 파랑을 일으켰다.

리자드는 밤하늘에 떠오른 달을 보며 그의 연인을 떠올렸다. 솔직히 요새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어도 온통 그녀 생각뿐이었다. 마음속으로 나니아를 그리다 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 속에서 고통과 환희가 맞바람 쳤다. 남자는 벤치 역할을 하는 기다란 궤짝 위에 양팔을 짚었다. 그의 곁에는 집착적으로 흘러가는 태엽 시계가 놓여 있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지만, 괜스레 다리가 꼬아졌다.

“하아, 씹….”

남자는 속 타는 마음에 외투 주머니를 뒤졌다. 한동안 잘 참고 있던 담배가 당겼다. 사실 그는 요 며칠 욕구불만 상태였다.

일상적인 욕망은 발정기 충동과는 또 결이 달랐다. 참으려면 참을 수 있는, 그래서 더 애타는 충동이 남자의 사고를 지배했다.

본격적으로 연인 사이가 되면, 온종일 붙어 있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는 줄 알았다. 당장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사랑하는 여자가 있는데 마음껏 키스할 수도 만질 수도 없다니. 차라리 모르면 몰랐지 한 번 맛본 단맛은 쉽사리 혀끝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남자는 오늘도 묵묵히 망상에 젖어들었다. 그의 꿈속에서 나니아는 살굿빛 나신으로 나타나 보드라운 살결로 자신을 끌어안았다. 그 모습은 언제나 잔인할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그녀의 해말간 웃음은, 사실 현실에서는 몇 번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 드문 기억 속의 얼굴을 한 나니아는 자신의 손을 끌어당겨서 스스로의 몸을 어루만지게 했다. 그녀는 온몸 구석구석을 더듬어지며 흥분의 잔열로 눈시울을 붉게 물들이고, 단지 그뿐인데도 언제나 아득한 황홀함으로 자신을 사로잡았다.

리자드는 비딱하게 궐련 한 개비를 물고 씹었다. 분질러 찢어 버리고 싶은 욕망과 다시 주머니 속에 잘 넣어 두고 싶은 마음이 공존했다. 불을 붙일까 말까 고민하던 그때, 고요한 갑판 위로 왜소한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

사내는 해이해진 신경을 바로잡으며 벽에 기대어져 있던 검을 손에 쥐었다. 잔뜩 경계 태세를 취한 라히무스의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해치워야 할 적이 아니라 목말라하던 그의 오아시스였다.

라히무스는 자신이 꿈을 꾸는가 했다.

“…나냐?”

이름을 불러 확인하는 목소리가 낮고 조심스러웠다.

아닌 밤중에 잠옷 차림으로 나타난 소녀는 무언가 용건이 있는 듯이 라히무스를 향해 걸어왔다. 리자드는 신기루를 보는 사람처럼 얼빠진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딘지 울적한 기운을 띠는 보랏빛 눈동자에 흐릿한 등불이 닿을 때쯤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야…?”

라히무스가 물었다.

이 오밤중에 갑자기 자신을 찾아올 정도라면 무언가 심각한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헐거워진 뇌 주름이 긴장으로 바짝 조여들었다.

소녀는 머뭇거리며 잠옷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옷자락은 속이 반쯤 비쳐 보일 정도로 얇디얇았다. 날이 따뜻해지고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낮의 얘기였다. 새벽 기온은 아직 쌀쌀했다.

사내는 급히 겉옷을 벗어 주려는 생각에서 목덜미로 손을 가져갔다. 그때 여자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잠이 안 와.”

“…….”

“혼자 자기 싫어.”

“…어?”

남자가 옷을 벗으려던 것도 멈추고 멍청하게 되묻는 사이에, 나니아는 그의 벌어진 허벅지 위로 무릎을 얹어 왔다.

사내의 돌덩이 같은 허벅지는 어느 누가 온 무게를 실어 앉아도 꿈쩍하지 않는 듯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나니아는 남자가 제지할 틈도 없이 곧바로 그의 다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잠… 잠이 안 와…?”

들은 말을 그대로 반복해 묻는 라히무스의 얼굴은 어지간히 멍청해 보였다.

무릎 위에 앉은 나니아가 자신의 목을 감싸 안았을 때, 그는 입에 문 담배를 빼냈다. 애당초 그런 물건엔 관심도 없었던 것처럼 의자 위에 던져 놓고 성마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갑작스럽지만 분명한, 성욕의 신호를 읽은 것이었다.

짐작대로 소녀의 입술이 다가왔다. 마치 키스하려는 것처럼.

사내는 넋이 나가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자세를 추슬렀다. 여자가 자신의 다리 위에 앉아 있기 좋은 굴곡으로 허벅지를 움직이는 행동이었다.

쓸데없이 담배를 씹었던 것을 후회했다. 그 쓰고 역한 맛이 전해질까 봐 염려하면서도, 감히 그녀가 주는 은총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파도 소리뿐이던 정적에 나른한 숨소리가 섞여 들어갔다.

“응….”

“읍, 으…. 음….”

‘…일하다 말고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지.’

돌연한 키스는 난데없고 얼떨떨했지만, 그래서 더 흥분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침착한 생각도 잠시, 입술은 흔연히 갑작스러운 요행을 쫓았다. 리자드는 눈을 감고 키스에 몰두했다.

저돌적으로 파고들기보다는 가만히 입술을 우물거리며 그녀와 박자를 맞추었다. 나니아 쪽에서 먼저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례로 빨아 주는 감각에 사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두 입술은 몇 번이나 각도를 달리하며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질척하기보단 건조했고, 치열하기보단 애틋했다.

수십 번도 더 서로의 입술을 쪼아대다가 마침내 나니아가 고개를 멀리하는 것으로 탐색이 끝났다. 리자드는 나른한 숨을 뱉어 내며 천천히 눈을 떴다.

소녀가 사내의 다리 위에 올라앉을 때면, 평소엔 불가능한 높이로 시선이 교차했다. 의중을 알 수 없는 그녀의 쓸쓸한 눈동자 속에 축축한 적막이 들여다보였다. 많이 참았다는 듯, 알아주지 않아서 서러웠다는 듯, 여자가 속삭였다.

“나 외로워….”

그녀는 당장에라도 훌쩍일 것처럼 칭얼댔다.

“혼자 두지 마….”

“…….”

혼자 두지 말라니. 외롭다니. 지금 그게 대체 누가 할 소린지. 그 원망에 대해서라면 라히무스는 할 말이 많았다. 말을 걸 때마다 냉랭하게 대꾸하던 것도 그녀고, 들어오지 못하게 문을 잠근 것도 그녀였다.

하지만 누가 무엇을 더 잘못했는지 시시비비를 따지고 판가름하기엔, 도마뱀에게 그럴 주변머리가 부족했다. 여하간 이렇게 끌어안고 있는 것이 너무 좋은 것이었다.

어딘지 나사 하나 빠진 것처럼 구는 사내의 고요함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나니아는 다시 울분을 쏟아 내듯 입을 맞추었다. 리자드는 다소 벅찬 신음을 흘리며 그녀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숨통을 틀어막는 것이나 다름없이 거친 키스였다.

나니아가 먼저 이런 키스를 시작해 온 적은 없어서, 남자는 마치 걸쇠가 걸린 문짝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목을 끌어안고 있던 소녀의 양손이 슬금슬금 사내의 흉부를 짚어 왔다. 갈비뼈를 감싸듯 어루만지던 손은 말랑한 가슴 근육이 뭉쳐 있는 부분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 적나라한 손길이 정신을 번쩍 차리게 했다. 남자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자기야, 여기서는 좀….”

“하고 싶어….”

“방에 먼저 가, 가 있으면, 내가….”

“여기서 하고 싶어.”

누군가에게 들릴 만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전에 입술을 쪽쪽거리던 소리가 더 컸을 것 같다. 그런데도 남자는 조금 당황한 듯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더듬더듬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 여기서…?”

라히무스는 한 손을 여자의 허리에 둘러놓은 채로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이 끝날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소녀는 초조하게 두리번거리는 리자드의 턱을 양손으로 고정했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라히무스의 눈빛에서 분명한 설렘의 기색을 읽었다. 소녀는 그 은밀한 흥분에 용기를 얻어서 본인의 상의를 속옷째로 말아 올렸다. 주름 잡힌 옷감 아래로 도발적인 살갗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남자의 눈앞에 닥친 시련은 보기 좋게 희고 말랑말랑한.

“아니, 안 돼. 안 돼, 나냐.”

사내는 어지러운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었다. 두 손은 이미 나니아의 흉통 모양으로 일그러뜨려 놓고 막상 만지지는 못했다.

“이따가, 잠깐만.”

그는 가슴 위로 말려 올라간 옷을 붙잡고 내리려 했지만, 상대가 칭얼거리면서 물리치는 통에 다시 또 허공만 움켜쥐었다. 이기려 한다면 어찌 이기지 못하겠는가마는, 사내는 머뭇대기만 했다.

“얼마 안 남았어. 그, 내가, 곧…. 갈 테니까….”

남자는 자신의 기대감을 부정하듯 급히 시계를 주워 확인하는 척했다. 하지만 그조차도 온 힘을 다해 빼앗아 간 소녀는 시계를 저 먼발치에 던져 버리고, 라히무스의 손을 자신의 가슴 위로 가져왔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감돌던 살갗에 리자드의 크고 뜨거운 앞발이 와 닿았다. 갈등에 종지부를 찍어 주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싫어…. 여기서 하는 거 아니면 안 할래.”

“…….”

나니아가 잡아 간 사내의 왼손은 물건을 훔치는 밤손님처럼 손에 잡힌 살덩이를 머뭇머뭇 주물렀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얼굴. 그러나 손에 닿는 보드라운 가슴 감촉이 지나치게 유혹적이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표면에 떠오른 당혹감을 지워 내면, 그 아래로는 분명히 좋아하고 있었다.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 것이 보였다.

“나는, 괜찮은데….”

사내의 오른손이 자신의 턱을 분주히 주무르고 훑었다. 그는 다시금 주변을 살피듯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눈길이 다시 소녀를 향했다.

여긴 야외나 다름없잖아. 아니, 야외 그 자체잖아.

“누가 오기라도 하면….”

사내는 벼랑 끝에 몰린 사람처럼 신음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가 아니라 나니아가 입에 담았을 법한 말이었다.

바다 위를 표동하는 배 위에서 하는 섹스란 과연 어떤 맛일까. 그 불순한 호기심이 음심을 자극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아무리 캄캄한 새벽이라지만 이곳은 너무도 훤히 열려 있는 공간이었다. 무엇보다 당장 저 벽 너머에 슈쉬라가 잠들어 있지 않은가.

누군가에게 발각될까 봐 초조한 마음. 하지만 남자는 그것이야말로 나니아가 원하는 바임을 알지 못했다. 지난 며칠간 소녀는 홀로 방 안에서 두문불출하며 무수한 상념들로 시간을 보냈다.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낯선 남자의 존재가 번민의 기폭제가 된 셈이었다.

‘나, 어쩌면 평범…. 정도는 되는 걸까?’

소녀는 자기 혼자 몇 번이고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누가 알면 부끄러운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나니아는 이성에게 성애적 호감을 사는 일이 익숙지 않았다. 그런 일이 드물기도 했거니와 지나온 삶이 짧고 좁은 탓도 있었다. 그래서 라히무스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아직도 믿기 힘든 난제였다. 그의 마음을 신뢰하면서도 동시에 불신했다.

자신은 둔덕에 꽂힌 깃발이었다. 낯설고 두려워하며 펄럭이다가 마침내 그의 커다란 마수에 뽑히고 말았다. 그렇다면 만약에, 그가 더 멋진 산꼭대기를 발견한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 손에 쥔 것보다 훨씬 멋지고 화려해서 사내의 정복욕을 자극하는 그런 깃발 말이다.

‘언젠가는 나한테 질리지 않을까. 내가 시시해지지 않을까.’

그런 날이 오면, 남자는 얼마든지 자신을 버리고 더 좋은 깃발을 쟁취하러 떠날 수도 있었다.

나니아의 눈에 비친 라히무스는 아무리 콧대 높은 여성이라도 거뜬히 함락시킬 만한 매력적인 수컷이었다. 실제로 나니아 자신이 그렇게 당하지 않았던가.

‘분명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객관적으로 근사한 남자였다. 준수한 얼굴에 몸매도 화끈하고, 오래 두고 보면 애교도 많은 데다 귀엽고, 다정하고….

‘아무튼…. 다 너무 멋진 것 같아….’

사랑에 눈이 먼 소녀는 흐릿한 판단력으로 애인의 요모조모를 따져 보았다. 하루가 멀다고 그에게 점점 빠져들었다. 문제는 좋아하는 마음과 비례하여 불안한 마음도 더욱 커져만 간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자꾸만 확인받고 싶었다. 그는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을까. 이 사랑은 앞으로 얼마나 길게 유지될까.

‘…애초에 나 같은 애를 왜 좋아하는 거지?’

나니아는 불안했다. 그가 원하는 것이 자신의 비루한 몸뚱이라면, 기꺼이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다른 여자에게 돌아가려는 눈길을 잡아 둘 수만 있다면. 유혹하는 손짓에 속절없이 끌려와 주는 라히무스의 모습은 그녀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자신에게 안달 난 숨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것이 나니아가 이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가느다란 등불이 겨우 비칠락 말락 하게 두 사람을 밝혔다. 소녀의 뽀얀 살결이 사내를 현혹했다. 나니아는 그가 만져 주지 않는 반대쪽 가슴을 가운데로 모으듯이 움켜쥐었다. 라히무스는 먹잇감 앞에서 침 흘리는 맹수처럼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 예뻐요?”

나니아가 물었다. 그 말은 언뜻 그녀가 자신의 가슴을 흔들면서 이야기했기 때문에 그 부위에 국한된 질문 같았지만, 라히무스의 시선은 나니아의 얼굴과 몸을 정신없이 위아래로 배회하고 있었다.

“예뻐, 예뻐….”

그가 탄식하듯 대꾸했다. 사내의 매섭고 단단한 인상이 그토록 쉽게 무너져 내리자, 나니아는 뿌듯하고 만족스러워졌다. 그 괘씸한 감정에는 목적한 바를 이루었다는 성취감도 섞여 있었다.

남자가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 뭘 하는 거냐고. 나를 놀리는 거냐고. 하지만 그것이 괜한 기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여자는 점점 용기가 생겼다. 사소한 행동 하나로 그를 안달복달하게 만들 수 있음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남자의 관심을 저에게 붙들어 놓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부끄러운 짓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라히무스가 자신을 원한다는 사실을, 자신이 그를 설레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드높인 깃발로 선전하고 싶었다. 과시하고 싶었다. 질투와 독점욕은 라히무스만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 빨리 예뻐해 줘….”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발긋한 홍조가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정말이지, 남자가 아는 나니아가 아닌 것 같았다. 저질스럽고 싫다면서 한결같이 밀어낼 땐 언제고 가끔가다 이런 짓을 벌이는 점이 사내를 환장하게 했다.

맡은 바 직분이라든가 책임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염두에 놓고 고민하기에, 그는 너무 짐승이었다. 유일한 제어 장치가 나니아 본인이었는데 지금은 그조차도 없는 꼴이니.

“아, 나냐….”

리자드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나니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상식보다 본능이 앞섰다. 날카로운 콧대가 보드라운 살 둔덕을 파고들었다. 얼굴에 닿는 가슴의 느낌이 미치도록 좋았다. 남자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허겁지겁 유두를 입에 물고 빨아당기려는 것을, 모처럼 저지당했다.

“소리…. 크게 내면 안 돼.”

들키기를 바라는 마음과 다르게, 막상 그가 침대 위에서나 다를 바 없이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초조해졌다. 누군가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염려는 어쩔 수 없이 사람을 위축시키는 듯했다.

예상외로 라히무스는 그녀의 말을 순순히 따랐다. 혀를 날름거리며 희롱하는 대신, 두 입술로 부드럽게 베어 물고 천천히 우물거렸다. 나니아의 젖을 게걸스럽지 않게 빨아먹는 것은, 라히무스로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당장에라도 헉헉대면서 지저분하게 굴고 싶었지만, 소리를 죽여 가며 애간장을 녹이는 듯한 이 느낌도 나쁘지는 않았다.

나니아의 눈에는 그 모습이 엄마 젖을 문 갓난아기처럼 귀여워 보였다. 소녀는 어린아이 목을 받치듯 라히무스의 머리를 끌어안고 그의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빨기 좋게 가슴을 더 앞으로 밀어 주기도 했다.

새삼 달밤 아래에서 본 리자드의 얼굴이, 날카롭게 깎아지른 광대라든가 턱선 같은 것들이, 사무치게 관능적이었다. 이따금 눈을 치켜뜨며 자신을 바라볼 때면 그 매서운 붉은 눈동자에 숨이 막혔다. 젖먹이 아기처럼 귀여운 느낌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다 큰 성인 남자에게 젖꼭지를 물려 놓았다는 자각이 확 들었다.

나니아는 길어지는 전희에 조바심이 일었다.

“라히무스, 나 빨리….”

그녀는 리자드의 손을 치마 속으로 잡아끌었다. 다리 사이에서 이미 후끈한 습기가 느껴졌다. 남자는 더듬더듬 소녀의 음부를 확인했는데, 그것은 한 발짝 더 큰 고조를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길고 두꺼운 손가락 한 개가 어렵지 않게 구멍을 파고들었다. 단순히 애액으로 젖은 것 그 이상으로 미끄러웠다.

“어떻게 된 거야…. 응? 이미 잔뜩 젖었잖아.”

낮고 눅눅한 목소리가 나니아를 추궁했다. 소녀는 사내의 목덜미에 얼굴을 감추듯 파묻고 웅얼거렸다.

“…미리 하고 왔어.”

“미리 하고 왔어?”

“으응….”

확인하듯 물어 오는 음탕한 질문에서 짙은 흥분과 기대감이 느껴졌다.

“혼자 자위하다 온 거야?”

라히무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야한 낱말이 나니아의 수치심을 찌릿하게 훑어 내렸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서로를 깃털처럼 간지럽혔다. 작게 속삭이는 일은 육성으로 또박또박 말하는 것과 다르게, 되바라진 자신감을 불러일으켰다.

“라히무스랑 하고 싶어서, 미리 자위했어….”

“…그랬어?”

“손가락 혼자 넣는데 무서웠어….”

“하, 씹…. 그랬어. 무서웠어….”

남자는 아찔하다는 듯이 윗입술을 핥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제 내가 해 줄까, 응?”

“…으응.”

리자드의 손가락이 흥건한 주름을 가르며 소녀의 안쪽을 천천히 드나들었다.

“자위하면서 무슨 생각 했어, 자기야….”

“…….”

“내 생각했어?”

“으응….”

“씨발, 그런 걸 왜 혼자서 해.”

아무도 몰래 흠뻑 적셔 오다니. 어쩜 이렇게 앙큼하고 맹랑할 수가.

“나도 보여 줘야지, 자기야….”

문을 걸어 잠그다시피 하며 방 안에서 혼자 이런 짓을 하고 있었던 거라면, 너무 아까워서 속이 쓰릴 지경이었다.

“나, 이제 넣어 줘….”

라히무스는 소녀의 다리를 더 커다란 각도로 벌리게끔 했다. 헐떡거리며 바지를 내리고, 꺼떡거리는 성기를 꺼내 잡았다. 이런 자세로는 삽입이 쉽지 않을 텐데 걱정하면서도 일단 나니아의 골반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남자의 성기를 좁은 구멍에 맞추고 천천히 그 위로 내려앉았다.

하아…. 스읍….

라히무스의 입에서 소리가 되지 못한 한숨이 뱉어졌다.

아, 정말 미친 것 같아. 이건 미친 짓이다.

부둥켜안은 몸이 앞뒤로 가볍게 흔들렸다. 소녀는 여전히 젖을 모두 드러낸 채로, 남자의 상체와 바짝 밀착하였다. 그동안 멀리해 왔던 사내의 몸뚱이가 절실하게 와 닿았다.

생생한 바닷바람이 벗은 살갗을 스쳤다. 벽도 천장도 없는 공간이라는 점이 발칙한 연인을 극한의 긴장감으로 몰아넣었다. 두 사람은 모두 가능한 한 소리를 죽이기 위해 노력했다. 대신 목소리를 참는 만큼 숨소리가 더 거칠어졌다.

하지만 거구의 사내가 여자를 안느라 헐떡이는데, 아무런 소음도 발생하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삐걱거리는 나무판자 소리 같은 것은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고, 오랜만에 서로를 만끽하는 두 남녀의 쾌락이야말로 통제할 방법이 없었다.

라히무스는 궤짝에 붙어 앉은 하반신을 반쯤 걸쳐 놓고 허벅지를 흔들었다. 그는 말수가 없는 만큼 더 뜨거운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라면 부끄러워서 눈길을 피했을 나니아지만, 오늘만큼은 어둠을 틈타 그의 황홀한 시선을 받아들였다. 보기 좋게 반듯한 콧대라거나, 찡그린 눈썹이라거나, 매섭게 찢어진 눈매 같은 것들이 오늘따라 더 근사해 보였다.

라히무스의 붉고 사나운 눈빛에 빠져든 그녀가 잔뜩 달아오른 목소리로 물었다.

“응, 아, 나, 예뻐? 응? 예뻐요?”

나니아는 섹스할 때 먼저 말을 걸어오는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녀의 의외로운 질문은 남자를 쉽게 자극했다.

“하, 씹, 예뻐….”

“아, 예뻐?”

“하아…. 예뻐, 예뻐….”

소녀는 엉망진창으로 몸이 흔들리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카락이 꿈결에 찾아온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말아 올렸던 상의가 반쯤 흘러내린 모습이라든가, 발긋하게 헐떡이는 입술이라든가, 야하게 떨리는 눈시울 같은 것들이 라히무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너무, 흣, 예뻐….”

사내의 색색거리는 대답에는 소리가 반쯤 부족했지만, 나니아는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예쁘다는 말이 침잠한 마음을 부글부글 끓어 넘치게 했다. 누군가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이 근사한 사내가 오로지 나로 인해 이렇게 흥분한다는 사실을. 나를 이렇게나 원해 준다는 사실을. 이렇게 멋진 사내가 결국엔 내 것이라는 사실을.

소녀는 몸을 기울여 라히무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입술에 닿는 그의 귓가에 탄식과 신음을 흘려 넣었다.

“아, 조… 아, 조, 좋아….”

“하아, 씹…. 좋아? 어?”

쾌락에 들떠서 발음이 불분명했지만, 전에 없이 솔직한 그녀의 감상은 어김없이 라히무스를 채찍질했다. 험하게 털어 대는 하반신에서 그의 갈급한 흥분이 느껴졌다. 어찌나 거칠고 난잡했는지, 여자는 비명을 질러 대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그때가 첫 번째 오르가즘을 느낀 순간이었다. 움찔움찔 내벽이 조여들자 라히무스는 그녀가 절정에 다다른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속도를 늦추었다. 쾌감에 허우적대는 나니아의 뺨에 연신 입을 맞추었다. 겨드랑이 밑으로 들어간 손은 늑골에 붙은 말랑말랑한 살들을 주물럭거렸다.

‘잘 느껴서 너무 귀여워….’

남자는 천천히 몸을 흔들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번에는 오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는 그런 방어적인 정찰이 아니었다. 그는 이 천박한 짓거리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싶었다. 마음껏 처박아서 애써 소리를 참는 애인을 엉엉 울리고 싶었다. 그러려면 다른 자세를 찾아야 했다. 라히무스는 아직도 움찔거리는 나니아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찔러 넣은 자세 그대로였다.

“아, 라, 라히무스…!”

나니아의 입에서 다급한 진성이 뱉어졌다. 스스로 깜짝 놀란 그녀는 자진해서 입을 틀어막았다. 성기가 딱 좋은 각도로 안쪽을 채우는 바람에 버거운 쾌감이 닥쳐온 것이었다. 라히무스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그녀는 밭은 숨을 내쉬었다. 리자드의 목덜미와 어깨에 짧은 손톱이 파고들었다. 그는 나니아의 떨리는 입술을 알아보고 삐딱하게 웃어 보였다.

“뭐야. 이대로 흔들어 줘?”

이상하게 야한 짓을 할 때만큼은 눈치가 좋은 남자였다. 씨익 한쪽 입꼬리를 당겨 짓는 미소가 음탕하기 짝이 없었다.

“이 자세도 속도 내기는 힘든데….”

그는 영 각이 나오질 않는다며 불평하더니, 품에 넣은 나니아를 한 번 더 추슬러 안았다.

바닥을 내려다보는데 까마득했다. 남자는 체고가 너무 높았다.

표범처럼 늘씬하게 쭉 뻗은 다리 한쪽이 벤치 위로 올라갔다. 성기를 쳐올리기 좋은 각도로 골반을 비틀기 위해서였다.

리자드에게 소녀는 솜 인형처럼 가벼웠다. 그래서 스멀스멀 죄책감이 피어났다. 이렇게 앙증맞은 여자애한테 이딴 더러운 짓을 시켜도 되는 걸까 싶어서. 그렇지만 막상 고개를 숙여 두 눈을 마주하면, 너무나 무르익은 숙녀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라히무스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 누가, 봐, 보면…!”

나니아는 남자의 양팔에 단단히 들린 채로 미약하게 저항하였다. 앉은 자세에서는 치마로 잘 가려 놓으면 어찌저찌 둘러댈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으로 라히무스에게 덤벼들었다. 이런 자세로 몸을 섞다가 들킨다면,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꼴이 될 게 분명한지라. 소녀는 심장이 떨렸다.

“보라고 해.”

여자가 불안하거나 말거나, 라히무스는 낮게 중얼거리며 골반을 흔들기 시작했다.

“아, 이거, 응….”

“후우…. 후….”

소녀는 선체에 부서지는 파랑처럼 철퍽철퍽 부서지기 시작했다. 남자의 두꺼운 허벅지며 꽉 짜인 아랫배 따위에 작고 하얀 엉덩이가 정신없이 부딪혔다.

“아, 어떡, 어떡해, 너무웃….”

“왜, 너무, 후, 너무 좋아? 어?”

낯선 각도로 벌어진 관절이 사내를 버겁게 받아들였다. 소녀는 양다리의 오금을 사내의 단단한 팔뚝에 걸쳐 둔 채로 흐느끼듯 신음하다가, 들썩이는 몸을 그에게 기대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엉키듯 달라붙었다. 상대방의 숨소리가 자꾸만 귀를 간지럽혔다. 그 감각이 너무나 짜릿하다는 사실을 알아서, 둘은 서로의 귓가에 다시 또 음란한 말들을 흘려 넣었다.

“이런 데서, 하는 게 좋아? 나냐는?”

“아, 누가, 누가 볼까 봐….”

“흐읏, 조은, 좋은 거잖아, 그게, 그치?”

“아, 아니….”

“좋다고 해 봐, 응? 자기야, 좋아, 아, 좋다고.”

“아, 조, 조아, 라히무스, 조, 아앗…!”

남자는 입을 맞추려고 했지만 거세게 흔들리는 통에 쉽지 않았다. 조금 더 허리를 뒤로 젖혀서 여자를 제 골반에 앉히다시피 한 그는, 오금에서 빼낸 팔로 나니아의 몸을 꽉 끌어안았다.

물려 놓은 입술이 떨어지지 않도록 상체를 고정한 채, 아래만 덜덜 떨어서 빻아 댔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여자의 비명이 터지려는 것을 끝까지 쫓아가서 꾹꾹 삼켰다.

그때가 두 번째 오르가즘이었다.

오랜만에 즐기는 교미가 너무 즐거워서, 리자드는 슬슬 이성을 잃어 갔다. 시간은 또 얼마쯤 지났을까. 여기가 어디고 원래 무엇을 하던 중이었는지 따위는 점점 잊혀 갔다. 이 세상에 둘뿐인 것처럼 행위에 빠져들었다. 어둠 속에서 죄를 짓듯 간신히 일을 치르던 것으로 모자라서 이젠 아예 달빛이 파랗게 내리치는 공간으로 몸을 움직였다.

“아, 부, 부끄러워, 싫어…!”

드디어 싫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을 정도로, 자세는 점점 대범하고 수치스러워졌다. 하지만 먼저 시작한 게 누군데. 라히무스는 봐줄 생각이 없었다.

“발 올려 봐, 옳지….”

남자는 소녀의 오금 아래로 팔을 집어넣어서 그녀를 뒤에서부터 안아 올렸다. 활짝 벌어진 다리가 새카만 바닷물을 향했다.

“아, 떨어져, 떨어질 것 같아….”

“안 떨어져.”

속삭이는 목소리는 여전히 깃털처럼 작고 간지러웠으나, 이 정도면 거의 봐 달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체위였다.

둘은 기어코 달빛을 관객 삼아 뱃전의 난간을 붙잡고 외설스럽게 몸을 섞기 시작했다. 사내는 빠질 틈 없이 길고 굵은 성기로 사정없이 음부를 쑤셨다. 난간에 올라간 여자의 발끝이 자꾸만 굽었다. 잘게 쳐올리는 것이 아니라 귀두 아래쪽부터 기둥 끝까지 처박는 통에 아찔아찔했다. 그녀의 허벅지를 받친 두 팔 중 하나가 사타구니 안쪽을 파고들어서 나니아의 음핵 부분을 마구 흔들었다.

“아, 하지 마…!”

“왜, 흣, 또 쌀 거 같아? 어?”

“아, 응, 하지 마…. 제발!”

여자는 라히무스의 손을 밀어 내려 했지만, 그래 봤자 그의 너른 흉부에 폭삭 안긴 상태였다. 오히려 괴롭혀 주고 싶은 마음만 더 부추겼다.

“오늘은, 흐읏, 바다에다 싸 볼까? 응, 괜찮잖아.”

“아, 아, 싫어어…!”

저항하는 목소리에 가느다란 울음이 섞였다. 그녀가 우는소리를 낼수록 음핵은 문지르는 손은 더 다급해졌다.

“싸자, 응? 싸 보자, 자기야.”

“아, 안 돼, 진짜로, 나와…!”

정도가 지나친 쾌감은 요의로 이어졌다.

“아, 싫어, 싫어, 안 싸, 나, 다신, 아, 안 할 거야, 너랑, 아, 안 해…!”

“하…. 그렇게 싫어?”

라히무스는 그 짧은 순간 신속하게 갈등을 마쳤다. 간신히 화해한 것 같은데 또 미움을 살까 봐 걱정된 사내는 결국 나니아의 샅에서 손을 떼어 냈다. 그녀는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몸을 떨었다.

간신히 배설을 참아 낸 뒤에 맞이한 세 번째 오르가즘이었다.

* * *

요사스러운 달빛 때문이었을까. 야릇한 바닷바람 때문이었을까. 무언가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던 것만 같다.

나니아는 갑판 위에 쪼그려 앉아서 라히무스를 구경했다. 한 발 떨어져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가까이 붙어 있을 때보다 훨씬 덜 위협적이었다. 조금 만만한 느낌마저 들었다.

“…뭘 봐.”

뚫어지게 쳐다보면 그도 멋쩍어한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무섭기보다는 귀여웠다. 남자는 나니아를 내려놓고 자기 손으로 절정을 찾고 있었다. 안에다가는 절대 안 된다는 그녀의 엄명에 굴복한 결과였다.

“…보지 마.”

남자는 난간에 한쪽 팔꿈치를 기대고 몸을 수그렸다. 자기는 이런저런 수치스러운 짓을 잔뜩 시키는 주제에 이제 와 수음을 부끄러워하는 꼴이 참으로 가당찮아서 우스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도 그럴 만했던 것이, 아직도 공기 중에 물건을 훤히 드러낸 자신과 다르게 그녀에게서는 정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남자는 조금 억울해졌다.

“…자기는 내 자지에 다 묻혀 놓고.”

그의 성기와 오른손이 흥건한 까닭의 8할 정도는 나니아 때문이었다. 정작 그녀는 이제 누가 보아도 떳떳한 모습이지만. 그래서 그런지 발성도 조금 커지고 움직임도 당당해진 듯했다.

“어디에 뭐가 묻었다구요?”

“조, 조용히 해….”

나니아는 키득대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좀처럼 사정하지 못하는 그를 향해 다가왔다.

“…왜, 뭐.”

“도와줄까요?”

“…됐어.”

그는 계속해서 음경을 문질러 보았지만, 아무래도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외려 점점 죽어 가는 듯해서 결국엔 나니아에게 도움을 청했다.

“뽀, 뽀뽀나 해 주든가….”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그답지 않은 수치심이 묻어났다.

“아니…! 거기 말고 입, 입에다.”

남자는 다리 사이에 앉으려는 나니아를 번쩍 들어 올려서 자기 종아리 높이쯤 오는 턱에 그녀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나니아는 선뜻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구름처럼 가벼운 키스였다.

“아, 좋아….”

입술을 벌린 채 웅얼거리는 말은 역시나 발음이 불분명했지만, 그 황홀한 기분만큼은 똑똑히 전해졌다.

이대로 키스만으로 쌀 수 있을 것 같았다. 리자드는 왼손으로 그녀를 비스듬히 끌어안고 오른손으로는 세차게 양물을 흔들었다. 한창 입술을 쪽쪽거리던 중에, 여자가 슬며시 눈을 떴다. 사내는 처음부터 그녀를 야릇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나니아가 살짝 입술을 떼어 낸 채 물었다.

“무슨 생각해?”

떨어진 입술이 닿을락 말락 따뜻한 숨을 뱉었다. 리자드는 멋쩍게 입맛을 다시더니 중얼거렸다.

“…네 얼굴에 싸는 생각.”

“…….”

목소리에도 얼굴에도 웃음기가 하나 없어서 그 진의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노려보는 나니아의 눈살도 덩달아 가늘어졌다.

“아니면 네가 내 얼굴에 싸는 생각.”

“…하고 싶은 걸 말하라는 게 아닌데요.”

나니아는 탁탁탁 흔들어지는 사내의 중심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의아하게 물었다.

“그게 그렇게…. 보고 싶어?”

“…어.”

단호한 대답에 마른 침이 삼켜졌다.

소녀는 먼 바다를 향해 턱짓하며 그를 도발했다. 반쯤 놀리는 것이었다.

“라히무스 먼저 보여 주면.”

“…여기서? 지금 이거?”

“응.”

“…봤잖아, 매번.”

“맨날 안에다 쌌잖아.”

“…….”

“그리고 제대로 본 적 없어요.”

“…….”

남자의 불퉁한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나니아는 이대로 그를 두고 도망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하다가, 황당해서 어벙해진 그의 표정이 좋아서 조금 더 놀리는 쪽을 택했다.

“라히무스는 그것도 오줌만큼 싸니까, 특별히 봐줄게.”

“…….”

남자는 되바라진 나니아의 얼굴을 찡그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무어라 할 말이 가득한 것처럼 입을 뻐끔거리더니 도전적으로 대꾸했다.

“…씹, 까짓거 못 할 줄 알아? 약속 지켜.”

남자는 약이 오르기도 했고 지기 싫은 마음도 생겨서 다시금 열렬하게 살기둥을 훑어댔다. 탁탁탁, 젖은 살갗을 쳐올리는 소리가 적나라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다시 패배자 같은 목소리로 애원해야 했다.

“…뽀뽀해 줘.”

나니아는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소원대로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입을 맞춰 주었다. 자위하는 데에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단 사실에 기묘한 보람을 느꼈다.

입술이 닿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의 호흡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맹렬하게 헉헉대는 숨소리. 사출의 신호였다. 나니아는 입술을 떼어 낸 채 그의 부끄러운 순간을 눈에 담았다. 날이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마 포물선을 그리며 후두둑후두둑 떨어지는 듯했다.

보나마나 한 캄캄한 바닷물 대신, 절정을 느끼는 사내의 얼굴을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찡그린 눈썹과 미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화가 난 사람처럼 일그러진 얼굴이 무척 야했다. 나니아는 한 발짝 올라 서 있던 자리에서 내려왔다. 난간에 엎드리다시피 한 라히무스에게로 가까이 붙어 섰다. 거칠한 뺨에 대고 살며시 입술을 문질렀다. 사내는 그 갑작스럽고 부드러운 감촉에 놀라 눈이 질끈 감기고 몸이 파르르 떨렸다. 손목에 묻어 놓은 입술이 수십 가지 감탄과 욕설을 머금었다. 음경을 문지르는 손이 점차로 늦어졌다. 리자드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 짜내는 동안, 여자는 그의 옆에 멀뚱히 서서 오르락내리락하는 넓은 등을 구경하고 있었다.

갑판 위에 몇 방울 흘린 것 같은데. 찾아서 놀리고 싶었다.

아슬아슬한 밀월의 순간이 밤잠을 빼앗아 갔다. 그 후에도 방으로 돌아와 만족할 만큼 살을 문댄 다음에야 지친 서로를 끌어안고 잠을 청했다.

* * *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일어나지 못하는 나니아와 다르게 리자드는 짧고 깊은 숙면을 취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새근새근 잠을 자는 소녀의 얼굴이었다. 아침잠에 취한 귀여운 모습을 애틋하게 감상하다 어렵사리 몸을 일으켰다. 애인의 입에 물려 줄 요깃거리를 찾으러 방을 나섰다.

점심 즈음 멀끔한 얼굴의 라히무스가 나타났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파키케팔로의 경멸스러운 눈빛이었다.

“…뭔데.”

“라히무스는 진짜, 걸레 소리를 들어도 싸다니깐!”

난데없는 오욕에 영문을 몰라 뭉툭했던 물음이 뾰족해졌다.

“뭔데?”

녀석은 말을 섞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홱 치웠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냐는 눈으로 챠링고를 돌아보았더니 그녀 역시 모른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갑자기 사람을 매도시킬 거면 이유라도 알려 주든가.

남자는 탁자 위에서 꼬리를 씰룩거리던 우우룡의 목덜미를 낚아채서 인질 삼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녀석이 끼룩끼룩 울었다.

“똑바로 말을 해.”

답답하게 굴지 굴고 속 시원히 얘기하라며 녀석을 압박하자, 파키케팔로가 성질을 냈다.

“이 난폭하고 지저분한 도마뱀!”

“진짜 난폭한 게 뭔지 보여 줘?”

“이…. 이…!”

녀석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의자 위에 올라섰다. 라히무스가 번쩍 들어 올린 코우를 억지로 빼앗아오더니, 의자에 다시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물었다.

“라히무스 어젯밤에 보초 서다 말고 뭐 했어?!”

“…….”

어젯밤이라는 말에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지게 만드는 화제였다.

“봐 봐, 이거 봐! 아무 말도 못 하잖아!”

찍소리도 못 하는 라히무스를 보고 파키케팔로는 자신과 확신을 얻었다. 딱 걸렸다는 듯 손가락질하며 언성을 높였다. 방방 뛰어 대는 녀석을 보고 챠링고는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고개 들어 돌아본 라히무스의 얼굴엔 수줍은 기색이 역력했다. 챠링고는 그가 아래턱을 문지르며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다가, 짜증 난다는 듯 설명을 독촉했다.

“그니까 뭐냐고.”

“몰라! 더러워서 내 입으로는 말하기도 싫어!”

파코는 상종하기 싫다는 듯 입술을 삐죽거렸다. 반면 사내는 간밤의 일이 생각나 아랫도리가 지끈지끈해졌다. 그토록 싫어하던 말인데, 걸레라든가 더럽다든가 하는 소리에 모멸감을 느끼기보다는 짜릿한 배덕감이 피어올랐다.

라히무스의 민망한 시선이 허공을 배회했다.

“…어디부터 봤냐?”

“보긴 뭘 봐! 본 게 아니라 들은 거야!”

파키케팔로는 끔찍하다는 듯 사내를 힐난했다. 두 사람이 같은 듯 전혀 다른 얘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조금 더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최초 목격자는 어느 선원이었다.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라히무스는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누군가 생쥐 같은 발걸음으로 슈쉬라의 방을 찾았다가 그들의 만행을 목격한 것이었다.

그는 먼발치에서 남달리 기골이 장대한 리자드와 호리호리한 여성이 엉켜 있는 형체를 확인했다. 보자마자 깜짝 놀라 벽 뒤로 숨은 선원은 들키지 않기 위해 다시 발소리를 죽이고 황급히 자리에서 벗어났다.

소문은 최초 출처가 누구인지 밝혀낼 수 없을 정도로 일파만파 빠르게 번져 나갔다. 선원들을 중심으로 돌고 돌던 소문은 끝내 슈쉬라의 귀에도 들어갔다. 심복 무하프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 노인네가 이 민망한 얘기를 꺼내기 위해서 어찌나 진땀 흘렸을지를 생각하면 슈쉬라는 웃음이 다 나왔다. 정작 자신은 방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줄도 모르고 잠만 잘 자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녀가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기 위하여 먼저 찾은 사람은 라히무스가 아닌 나니아였다. 소녀는 무하프의 전언에 따라 슈쉬라를 만나러 왔다.

‘볼일이 있으면 직접 찾아오든가. 라히무스한테는 그렇게 했으면서. 나더러는 왜 오라 가라 명령하는 거야?’

하녀는 강한 척 투덜거려 보았지만, 속으로는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왜 나를 찾는 걸까?’

오늘도 빙긋 웃는 요정의 얼굴이 몹시도 아름다웠다. 나니아는 그녀의 앞에서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님프는 소녀를 손님 자리에 앉혀 놓고 본론부터 꺼냈다.

“이야기 들었는지 모르겠어요.”

나니아에 대한 그녀의 경어는 완전히 정중한 느낌은 아니었는데, 마치 또래 친구를 대하듯이 편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혹시 지난 새벽에 저의 방문 앞에서 라히무스를 만나셨나요?”

“…….”

“제가 이걸 왜 묻는지도 대충 아실 테고요.”

다 알고서 물어보는 것이 분명한 기색이었다. 나니아는 파코에게 추궁당하며 얼굴을 붉히던 라히무스와 다르게 경황없는 수치심으로 하얗게 질려 갔다.

이렇게 될 줄 정녕 몰랐던가.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죄의식으로 심장이 울렁거렸다. 어제의 그 호전적인 결의는 어디로 숨어 버렸는지 입이 두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심약한 마음속에 버거운 죄책감이 깃들고, 등 뒤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것만 같았다.

“보기보다 엉큼한 구석이 있더군요.”

나니아는 축축해진 손바닥을 느끼며 두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수치심과 별개로 오기가 생겼다. 아니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짓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슈쉬라에게 피해를 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과하라고 하면 싫다고 할 거야….’

하녀의 옹졸한 마음속에 하찮은 반항심이 싹텄다. 딴에는 제법 당돌한 다짐이었으나, 이어지는 슈쉬라의 발언에 몇 초를 못 가서 무너져 내렸다.

“정작 나는 상상도 못 해 본 일인데, 사람들이 당신을 나라고 오해하는 바람에 일이 아주 재밌게 됐어요.”

“…네?”

나니아는 순간 자기가 무얼 잘못 들었나 했다. 슈쉬라는 눈이 휘둥그레진 소녀의 반응을 보고 알아차렸다.

‘아하. 여기까진 듣지 못했구나.’

“어두워서 제대로 보지 못했나 봐요. 그러고 보면 우리 둘이 뒷모습이 좀 닮은 것 같기도 하죠?”

“그러니까, 소문이…. 어제 그게 제가 아니라….”

그제야 님프의 말을 알아듣고 나니아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한 치 앞도 구분하기 힘든 어둠이었으니, 얼굴은 알아보지 못하고 리자드의 우람한 체격과 나풀거리는 긴 머리카락만 눈에 들어왔던 모양이다. 사람을 정확히 식별하는 데에 어려움이 따랐으리란 생각은 들지만, 이런 오해가 빚어질 줄 어느 누가 알았을까.

어렴풋한 실루엣과 선주의 독실 근처라는 대범한 장소. 거기다 요 며칠 라히무스가 슈쉬라를 위해 경비를 서고 있다는 내밀한 사실까지. 여러 가지 정황들이 슈쉬라를 지목하고 있었다.

“참 웃기죠? 나랑 그 남자랑 둘이서 눈이라도 맞은 줄 아는 모양이에요.”

차라리 처음 배에 탔을 때부터 연인 티를 풀풀 냈더라면 오해를 피해 갈 수 있었을까. 나니아는 좀처럼 얼굴을 비치는 일도 없고 말수도 적어서, 배에서 내리면 기억도 안 날 그런 여자애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문의 파렴치한 여성과 흐릿한 인상의 소녀를 연결 짓지 못했다.

한편 선주가 어디서 데려왔는지 모를 육욕적인 인상의 리자드 사내는 엉덩이가 가볍고 문란해 보이는 생김새로 말미암아 전부터 주시되고 있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슈쉬라가 매음굴에서 데려와 호위인 척 끼고 지내는 사내라는 말까지 돌고 있었다. 그리고 모름지기 험담이라는 것은 나와 가까운 사람의 얘기일수록, 그리고 자극적일수록 재밌기 마련이었다.

“나에 대해 희롱하고 떠드는 게 재미있는 놈들이다 보니, 사고가 그런 식으로밖엔 돌아가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요.”

슈쉬라가 푸념하듯 말했다. 하녀는 수치스럽고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사과받자고 부른 거 아니에요. 좀 놀라긴 했지만.”

나무라거나 탓하려는 게 아니라는 말이 사실인 듯, 님프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둘이 약혼한 사이인 거죠?”

슈쉬라가 나니아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향해 턱짓했다. 그녀가 반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나니아는 왼손 약지를 만지작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소녀는 자괴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꼈다.

눈여겨보지 않으면 몰라볼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괜한 호승심과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는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애당초 슈쉬라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잘못도 없다는 것을. 그녀가 고까웠던 것은 라히무스의 사소한 말 몇 마디와 자신의 열등감 때문일 뿐, 감히 그녀를 미워하거나 증오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선 안 되는 것이었다.

애인이 잘나 보여서. 불안해서. 트집 잡고 싶어서. 그런 저열한 마음이 여자를 미워할 구실이 될 수는 없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그런 망신을….”

소녀는 다시 한번 더 진솔한 사과의 뜻을 전했다.

다른 무엇도 아닌 입에 담기 수치스러울 정도의 추잡한 섹스 스캔들이었다. 그 더러운 책임을 남에게 전가한 꼴이었으니, 나니아야말로 악인이고 슈쉬라는 피해자였다. 창피해 죽을 것 같더라도 그녀를 위해서 빨리 소문을 바로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슈쉬라가 빙긋 웃으면서 기묘한 부탁을 꺼내기 전까지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제가 그 염문이 좀 필요해졌어요.”

“…네?”

나니아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자, 님프는 씩씩하고 당찬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당신만 괜찮다면 저는 그 소문, 사실인 척하고 싶은데요.”

“…….”

“허락해 줄래요?”

슈쉬라의 말을 듣고 머릿속으로 오만 가지 생각이 지나갔다. 당최 몇 번을 곱씹어 보아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왜요?”

“라히무스 같은 남자는, 옆에 두는 것만으로 무기가 되거든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동대륙에서만 지내 왔을 테죠. 서쪽으로 건너가면 그곳은, 아마 당신 생각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철저한 약육강식의 세계일 거예요.”

님프는 네가 잘 모를 만하다는 식으로 전후 사정을 설명했다. 힘의 논리는 언제나 절대적이고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이 작은 선박 안에서도 통용되는 법칙이었다.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알더군요. 누가 강한지. 누구한테 덤비면 안 되는지.”

자기보다 강한 수컷의 여자는 감히 건드릴 수 없다는 것. 그 단순무식한 원리원칙이 슈쉬라에게 필요했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성가신 해충들을 견제하고 쫓아낼 수 있을 테니까. 님프는 라히무스와의 염문이 필요한 이유와 함께 자신의 구구절절한 사연까지 덧붙여서 해설을 마쳤다.

하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설득되기보다는 기이한 불쾌감에 휩싸였다. 결과적으로는 남자와 연인 행세를 하고 싶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설령 의도된 거짓일지라도, 나니아는 영 싫은 기분이었다.

‘걔는 내 거야. 내 리자드라구….’

그러나 좀처럼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될 일인데 그게 너무 어려웠다. 하녀는 남의 부탁을 똑 부러지게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언제나 나쁜 사람, 매정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은 강박에 시달렸다.

“라히무스도 동의했나요…?”

“아뇨. 그쪽에는 아직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본인 의사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애인의 허락을 구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거든요.”

슈쉬라는 자기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는 듯 싱그럽게 웃어 보였다. 여자들끼리만 주고받는 그런 웃음이었다.

“뭘 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든, 기분 나빠하지 마시고 묵인하고 계셔 달라는 거죠. 그냥 그뿐이에요.”

“오해하게 내버려 두자는 말씀이시죠?”

“네, 맞아요.”

님프는 자신의 부탁이 불쾌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있어 보였다. 기분 나쁘겠지만 기분 나쁘지 말아 달라니. 본인의 입으로 시인한 셈이 아니겠는가. 나니아는 우물쭈물 주저하며 대답을 망설였다. 그러자 손바닥을 모아 붙인 님프가 애교스럽게 간청했다.

“이렇게 부탁할게요. 이 방법이면 라히무스도 더는 새벽마다 보초를 설 필요가 없을 거예요.”

본인이 유리한 상황대로 거래를 성사시키고자 하는 슈쉬라의 목소리에 장사꾼다운 열정이 실렸다. 그녀는 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으며 너털웃음을 치기도 했다.

“무엇이 거북하신지 알아요. 하지만 저는 정말 그 사람한테 관심 없답니다.”

“…….”

“혹시라도 선을 넘는다거나, 그 의혹을 더 키워 보겠다고 욕심부린다거나, 절대 그런 짓은 없을 테고요.”

그녀는 어쩜 나니아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정확히 신경 쓰고 있던 부분들만 콕콕 집어 해명하고 회유했다. 하녀는 부끄러워졌다. 그녀를 향해 품고 있던 자신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까지 들통 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 사심 없는 사람을 상대로 그동안 지나치게 예민했던 것 같아. 무고한 사람을 마음속으로 헐뜯고 질투하고….’

이렇게 버젓이 동의를 구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떳떳하고 결백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 어려운 것도 아니잖아. 달밤에 그 미친 짓을 한 여자가 나였다고 설명하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야.’

게다가 라히무스가 더는 그녀를 위해 보초를 서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객관적으로 이득이었다. 그래서 나니아의 마음은 점점 슈쉬라의 부탁을 들어주는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나만…. 나만 참으면….’

* * *

파코는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라히무스로부터 어김없이 꿀밤을 얻어먹었다. 챠링고는 그 옆에서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다.

“이게 진짜 멍청한 건지 순수한 건지….”

“아니 그러게 오해받을 짓을 왜 해?!”

파키케팔로는 빨개진 이마를 문지르며 악을 썼다.

“그러니까 하긴 했다는 거네?”

챠링고가 물었다. 누구랑 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당연한 듯이 생략되었다. 남자는 대답이 없었지만 엉큼한 눈매가 이미 답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입꼬리가 히죽 올라가려는 것을 앞발로 감춘 채였다.

“어휴, 미친 새끼.”

챠링고가 기막혀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이번에는 무하프가 라히무스를 찾으러 왔다. 슈쉬라로부터 호출받은 리자드 사내는 또다시 그녀의 방을 들렀다.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도 할 얘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슈쉬라 코르테알은 지난 일주일간 본인의 걱정과 다르게 무사했다. 그녀의 신변에 위협이 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오늘부터는 약속대로 경호를 중단하겠노라고, 라히무스는 이야기했다. 하지만 님프의 생각은 그와 달랐다.

“목격자를 찾지 못했어요. 나는 그자가 처음에 나를 노리고 접근했을 거라고 확신해요.”

“어쨌거나 아무 일도 없었잖아.”

“당신이 있었으니까요!”

슈쉬라의 말은 네 덕분이라는 감사의 의미보다는 너 때문이라는 비난처럼 들렸다. 사내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래서, 이 짓거리를 더 하라고?”

“저한테 좋은 수가 있어요. 이대로 당신이 내 애인인 척하는 거예요. 그러면 당신이 무서워서라도 감히 저에게 덤비지 못하겠죠.”

슈쉬라가 제안하자, 라히무스는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험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염려증으로 머리가 어떻게 돌아 버린 건가?”

“당신과 나, 모두를 만족시킬 최선이에요.”

“나 애인 있어.”

“알아요. 당신 약혼녀는 동의했어요. 이제 결정은 당신이 하면 돼요.”

“…뭐?”

남자는 슈쉬라의 말에 다소 놀라는 듯싶더니, 의자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대앉으며 자세를 바꾸었다. 곰곰이 턱을 매만지는 모습이 깊은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님프는 그가 자신의 제안에 대해 고민하는 줄로만 알았지만, 사실은 전혀 다른 생각에 꽂혀 있었다.

당신 약혼녀.

내 약혼녀.

약혼녀.

그의 귀를 쫑긋하게 만든 세 음절.

남의 입에서 흘러나오니 더 훌륭하고 그럴싸하게 들리는 호칭이었다.

라히무스는 의자 팔걸이에 팔꿈치를 세우고 다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자꾸만 뒤척이듯 움직이는 모습이 몹시도 산만해 보였다.

남자가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 별말 없던가? 그런 거 아니라거나….”

“금방 인정하던걸요.”

“그으래…?”

두 사람은 서로 전혀 다른 내용을 묻고 답하였지만, 막상 대화는 매끈하고 만족스럽게 이어지는 듯했다.

* * *

나니아는 슈쉬라에게 긍정의 대답을 남겨 두고 나왔지만, 실은 방을 나서면서부터 계속 속이 편치 못했다. 불쾌한 생각들이 머릿속에 꽉 들어찼다. 그 유해하고 무가치한 상상은 슈쉬라와 라히무스가 연인처럼 붙어 서 있는 모습에서부터 전개되어 나갔다. 훤칠하고 늠름한 사내 옆에 늘씬하고 아름다운 미녀 아가씨. 누가 보아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일 터였다. 반면에 자신은 어찌나 초라한지. 평생토록 작은 키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유독 라히무스의 곁에만 서면 완두콩만 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겼었다. 서로를 향하는 마음이 견실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누군가에게 알릴 필요도 인정받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사람들이 다른 여자를 그의 애인으로 오해하고 있다 생각하니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쾌해지는 것이었다. 슈쉬라와의 대화는, 한편으로는 나니아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녀는 라히무스가 자신과의 관계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싶어 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자신은 그때마다 어떻게 반응했던가.

‘사람들 다 보는 데서 그러지 좀 말아요! 창피하다구요…!’

‘라히무스는 어떤지 몰라도 저는 창피하다구요…. 그러니까 안 돼요.’

‘…꼭 말해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나는 불편해. 누가 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거….’

‘너랑 나랑 만나는 걸 꼭 모든 사람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잖아!’

“…….”

역으로 돌이켜보니 몹쓸 말을 많이도 했던 것 같다. 남자의 한 마디 한 마디에 꼬박꼬박 상처 입었던 것치곤 자신의 발언도 썩 사려 깊지 못했음을 인정했다. 그때 라히무스는 어떤 얼굴이었지? 어떤 기분이었을까? 어쩌면 인과응보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소녀는 라히무스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불만 없이 따르자고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니아의 방으로 슬쩍 발을 들인 리자드는 무언가 이루어 낸 사람처럼 흡족해 보였다. 나니아는 그의 팔에 번쩍 들리면서 다소 얼떨떨한 낯으로 그를 맞이했다. 라히무스는 의자에 앉아 있던 그녀를 침대 위에 던져 놓고 그 옆자리를 파고들었다.

“왜…. 그렇게 웃어요?”

나니아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남자는 실실거리면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라히무스는 모로 누운 소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어지럽게 흩어진 검고 긴 머리카락을 귀 뒤로 가지런히 넘겨 주었다.

‘약혼자, 내 약혼자. 내 여자…. 내 암컷….’

사내는 마음속으로 혼자만의 웨딩마치를 벌이는 중이었다. 그 광란의 속내를 알 길 없는 나니아는 그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볼 뿐이었다. 소녀는 아주 띄엄띄엄 느릿하게 말을 더듬었다.

“그…. 들었어요?”

“응?”

“그 여자한테…. 부탁받은 거….”

어쩐지 슈쉬라라는 이름부터가 어감이 나긋나긋하고 어여쁜 듯하여 소리 내어 부르고 싶지 않았다. 앙금이 아주 치졸했다. 남자는 용케 말을 알아듣고 대꾸했다.

“아, 그거. 거절했지.”

“…그래요?”

내심 그 대답을 바라고 있었으면서 아닌 척, 나니아는 화색을 감추었다. 남자는 조금 섭섭한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한 표정을 지으며 나니아의 볼을 꼬집었다.

“너는 그래도 된다고 했다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그만큼 많이 곤란하다고 들어서….”

흥, 헛소리.

남자는 과민한 님프의 겁먹은 얼굴을 떠올리며 코웃음 쳤다. 이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설탕 과자를 바라보는 얼굴로 나니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런 식의 임무는 수행하지 않아. 무엇보다 나한텐 네가 약….”

약….

남자는 자꾸만 혀를 근질거리게 하는 그 낱말을 입 밖으로 꺼내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간 더….”

하지만 보채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된 나머지 얼렁뚱땅 다른 말로 얼버무렸다.

“더….”

보탤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말을 질질 끄는데, 소녀는 뒷말을 기다리는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그 영롱한 보랏빛 눈동자와 촘촘하게 새까만 속눈썹이 한 올 한 올 사무치게 사랑스러웠다.

‘아, 어떻게 이런 애가 다 있지….’

남자는 자기도 모르게 가슴 속에 스며든 감상을 웅얼거렸다.

“…예쁘다.”

나니아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약간 더 예쁘다고?’

예쁘다는 말 자체는 감미로웠으나 그 앞에 붙은 ‘약간’이라는 말이 너무도 신경 쓰였다. 거슬리는 점은 표현뿐만이 아니었다. 발언의 기저에 깔린 은근한 속뜻이 여자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나보다 더 예뻐 보이는 여자가 있으면, 그런 게 생기면, 그럼 그 여자한테 가는 거야?’

그녀는 비딱해진 마음으로 라히무스의 말을 비약해서 받아들였다. 그의 사소한 말 한마디에 또다시 휘둘리고 마는 자신이 싫었다. 궁색하고 청승맞게 느껴졌다. 소녀는 참다못해 가슴속에 억눌러 왔던 그 질문을 입에 담았다.

“있잖아…. 라히무스는 내가 왜 좋아?”

다소 뚱딴지같은 질문이었다. 대답을 아주 잘해야 하는 종류의 질문이기도 했다. 너의 사랑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느냐는, 소녀의 근원적인 의구심은 자못 거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나니아는 질문을 던져 놓고도 정작 본인부터가 해답이랄 것을 정해 두지 못한 상태였다. 자기 스스로 어떤 말을 들으면 만족할 수 있을지, 늦었지만 차근차근 생각해 보았다.

‘아무튼 그 여자보다는 내가 더 예쁘다는 거잖아. 말도 안 되지만, 적어도 네 눈에는 말이야.’

라히무스의 말은 그녀의 상심을 어느 정도 가라앉혔다. 누구 말마따나 아주 약간뿐이지마는. 그러니까 지금 같은 기분으로서는 그가 어떤 이유를 들어도 그럭저럭 탐탁한 기분으로 넘어가 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마음씨가 따뜻해서 좋다거나, 자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 점이 좋다거나, 하다못해 잠자리가 잘 맞아서 좋다는 둥 허튼소리를 지껄여도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구실이 무엇이든 그가 바라 마지않는 이상형의 여자가 될 수 있다면. 홀린 듯 자신을 바라봐 주는 라히무스 특유의 진실한 눈빛만 곁들여진다면.

사내는 세모꼴로 팔을 괴고 누운 채 천장을 향한 나니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나니아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한 그가 말할 답변을 기다렸다. 하지만 라히무스의 대답은 기대와 다르게 허무할 정도로 싱거웠다.

“그냥?”

“…그냥?”

소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남자의 말을 되풀이했다. 리자드는 말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좋아.”

여자는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다.

‘최악이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찬해 주길 바란 것도 아니다. 그냥 한 조각 서술이 필요했을 뿐인데. 이렇게나 성의 없을 수가.

소녀는 찬물이 끼얹어진 사람처럼 냉랭하게 얼어붙었다. 반쯤 가늘어진 눈이 뾰족하게 라히무스를 노려보았다. 그 차가운 눈빛에 리자드는 어리둥절해졌다. 의아해진 꼬리 끝이 공중으로 휘어 올라갔다.

나니아는 이불을 뒤집어쓰다시피 잡아당기며 매정하게 등져 누웠다. 뒤집어쓴 이불 너머로 뾰로통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방에서 나가.”

소리가 막혀서 웅웅거리는 감이 없잖아 있었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위세만큼은 대단히 단호했다. 리자드는 머리에 받친 팔을 삐끗하더니 상체를 반쯤 일으켜 세웠다. 응당 이해할 수 없어 하는 물음이 뒤따라왔다.

“뭐? 아니, 왜?”

“그냥.”

그녀는 사내의 무성의한 말을 똑같이 되돌려 주며 앙갚음했다.

“그냥 나가.”

하지만 사내는 이런 쪽으로는 영 눈치가 없어서, 자기가 지금 치졸하고 유치한 보복을 당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그저 돌아누울 생각 없는 상대에게 우악스레 엉겨 붙을 뿐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애.”

그는 나니아의 작은 몸을 이불째로 끌어안으며 묵직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아양을 떨었다. 등 뒤로 리자드의 커다란 몸집이 느껴졌다. 소녀는 엉킨 마음을 풀지 않으려는 듯이 손에 쥔 이불을 굳게 움켜잡았다.

“빨리 나가라구….”

꼬여 버린 실을 좌우로 더 세게 잡아당기는 것처럼 속상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여전히 분별력 없는 리자드의 앞발이 몸 위로 다가왔다. 슬금슬금 허벅지의 형태를 그려 나가며 더듬는 꼴이, 무엇을 찾는지 알 만한 몸짓이었다. 그 괘씸한 오른손이 나니아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 때쯤, 소녀는 예민하게 저항하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 말라구!”

“…왜애.”

어기차게 거절당한 리자드의 목소리가 측은해졌다. 불쌍한 척하는 사내의 앞발이 다시금 끈질기게 하반신을 더듬어 왔다.

“하지 마, 진짜로.”

이미 한 번 몸으로 화해한 전적이 있어서일까. 남자는 영 버릇이 잘못 들어 버린 듯했다. 심지어는 입으로 해 주겠다며 설쳐 대는 것을, 나니아가 질색하며 발로 걷어차기까지 했다. 매몰찬 반항이 남자의 콧대를 후려쳤다. 아무리 리자드가 튼튼하다지만 그 부위를 발길질로 얻어맞는다는 것은 제법 적잖은 타격이었는지, 사내는 하던 짓을 멈추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나니아는 조금 뜨끔한 눈으로 그의 안색을 살폈지만, 침대를 공유하지 않겠다는 의사는 끝내 철회되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그의 소원을 들어줄 수 없었다.

정성 부족한 대답으로 애인의 심기를 거스른 라히무스. 그의 입에서 뱉어진 ‘그냥’이라는 말은, 사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언어로 정립해 내지 못한 결과였다.

사내는 그녀의 얼굴만 봐도 온몸에 피가 돌았다. 냄새만 맡아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열이 오르고 가슴이 뛰었다. 때로는 천치처럼 멍해졌다. 나니아가 어루만져 줄 때면 온몸에 힘이 빠져나간 듯이 나른해졌다. 그런가 하면 찬물에 담금질 당한 쇠붙이처럼 심장이 조여들기도 했다. 지끈지끈, 시큰시큰. 누군가 심장을 쥐고 주무르는 기분이었다. 여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를 하늘 높이 끌어 올렸다가 떨어뜨리기를 반복했다.

또다시 독수공방 신세로 전락한 사내는 서글프게 한숨지었다.

‘대체 왜? 갑자기 왜?’

아무리 생각해도 수긍할 수가 없어서 미련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나니아의 방문 앞을 서성였다. 얼마간 기다리면 그녀가 자신을 다시 불러 주지 않을까 싶었으나 헛된 희망에 지나지 않았다. 남자는 끝내 애타는 마음만 가지고 본인의 방으로 돌아갔다. 시무룩한 꼬리 끝이 바닥에 질질 끌렸다.

* * *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꼭 밖으로 나와서 바닷바람도 쐬고 벨로즈와 담소도 나누다가 들어가는 나니아였다. 여전히 뱃멀미는 심한 듯했지만 그만큼 대처하는 방법도 능숙해졌다. 그런 나니아가 오늘따라 코빼기도 뵈질 않아서 라히무스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얼굴조차 보여 주기 싫을 정도로 화가 났단 말인가.

사내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음과 별개로 그녀의 마음을 풀어 주고 싶었다. 그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으나 또 언제나 해내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하늘을 봐야 별을 따듯 얼굴을 봐야 화해라도 할 것 아닌가. 대체 무엇에 대한 화해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나니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조금쯤은 혼날 각오를 하고 있었다.

-똑똑.

나직한 손기척이 나무문을 통통 울렸다. 그러나 돌아오는 응답이 없었다.

“나니아.”

그는 이내 으슥한 목소리로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열고 들어간다.”

남자는 문짝을 부숴 버리고 싶을 정도로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환기도 없이 오래도록 밀폐되어 있던 방. 그 안은 남자가 환장하는 나니아의 체취로 가득 차서 정신이 까마득해질 정도로 야릇한 향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리자드는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흉부를 부풀렸다. 냄새만으로 발정할 것 같았다.

“…아.”

남자는 나지막이 탄식했다. 본래 목적도 잊은 사람처럼 멍해져 있던 그는 고개를 털어 정신을 되찾았다. 침대에 웅숭그리고 누워 있는 나니아의 모습이 비로소 눈에 들어왔다.

“나니아.”

넋이 나가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역력한 당혹감이 묻어났다. 라히무스는 다급히 몸을 움직여서 침대 모서리에 붙어 앉았다.

“어디 아파?”

초승달처럼 웅크린 몸. 더위 먹은 듯이 붉어진 얼굴. 힘겹게 새근거리는 숨소리.

고통을 참는 것처럼 찌푸린 미간에서 확신을 얻었다. 어느 모로 보나 소녀는 매우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라히무스는 이불 밖으로 간신히 드러낸 소녀의 목을 어루만졌다. 땀에 젖어 축축하고 두근거렸다. 그녀의 커다란 심장 박동이 후두에까지 와 닿는 듯했다.

“어디가 아픈 거야, 응?”

그는 땀 흘린 얼굴을 부산하게 어루만지며 증상을 물었다. 열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리자드 본인의 체온이 워낙 높아서 인간의 미열을 감지해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뭐가 됐든 정상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

사내는 통탄하듯 물었다. 가닥가닥 젖은 채로 달라붙은 나니아의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쓸어 올리며, 하얗게 드러난 이마에 경황없이 입을 맞추었다. 그것은 남녀 사이의 애정 행각이라기보다는 새끼의 양수를 핥아 주는 어미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나는 너 이러고 있는 줄도 모르고….”

남자는 한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끙끙 앓고 있는 모습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그녀는 무거운 눈두덩이를 반쯤 걷어 올리고 흐릿한 시선으로 라히무스를 올려다보았다. 대답조차 힘에 부치는 듯이 새근거리기만 하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좀처럼 믿기 힘든 말을 하며 자세를 뒤척였다.

“아무것도 아니긴 뭐가 아니야.”

사내는 나니아의 성의 없는 대답에 속이 타들어 갔다. 그녀는 슬슬 대답해 주는 것조차 귀찮은 듯이 가늘어지는 목소리로 힘겹게 대꾸했다.

“진짜로 별거 아니야. 그냥…. 그냥 내버려 둬, 좀….”

라히무스로서는 결코 이행해 줄 수 없는 부탁과 함께 그녀는 그의 반대편으로 돌아누웠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나니아의 상태를 뜯어보려 했다.

“어디가 아픈 거지?”

몸을 좀 살펴보자며 이불을 젖히려는 것을, 나니아가 칭얼거리며 거부했다.

“하지 마아….”

“그러지 말고 좀 봐 봐.”

건드리지 말라며 힘껏 대들어 보았지만 박약한 환자의 저항은 리자드의 거센 집념 앞에서 무력하기만 했다. 보잘것없이 일방적인 실랑이 끝에 결국 이불이 들추어지고 말았다.

“이게….”

병증을 찾기 위해 분투하던 사내는 체온으로 데워진 뜨끈한 이불 밑에서 위화감을 주는 냄새를 맡았다. 그가 잘 아는 냄새였다.

“피 나잖아!”

그것은 이처럼 작고 여리고 소중한 나니아에게서 흘러서는 안 되는 액체였다. 라히무스는 크게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가 누워 있던 자리를 더듬었다.

“대체 어디서….”

무엇이 우선이었는지 모르겠다. 한 방울 혈액의 흔적을 발견한 것이 먼저였는지, 비릿한 피 냄새를 맡은 것이 먼저였는지. 어쩌면 두 가지 자극이 동시에 연쇄 작용을 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범상찮은 증후라 생각하며 황망한 반응을 보이는 라히무스와 다르게 나니아의 얼굴은 점점 계면쩍은 수치심으로 물들어 갔다. 마치 죽을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구는 사내의 태도를 보다 못한 그녀는 견디다 못해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러니까, 별거 아니라고 했잖아…!”

소녀는 겸연쩍은 만큼 더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걷힌 이불이 다시 펄럭이며 몸을 덮었다.

그날 아침부터였다. 속옷에 피가 묻은 것을 확인했을 때, 나니아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임신하지 않은 여자에게서 발견되어야 하는 저주적 출혈. 그 흔적은 두 가지 측면에서 안도감을 가져다주었다. 첫째로는 홑몸이라는 점 그 자체가, 둘째로는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이 위로되었다.

나니아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 우리 아버지는, 나는, 괴물 같은 게 아닐 거야.’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월경은 감춰야 할 병증이었다. 그것은 임신하지 않아 게으른 여자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 믿어졌다. 진지하게 믿거나 믿지 않거나, 부정적인 현상이라는 인식만큼은 분명했다. 여자가 피를 흘리는 몸으로 음식을 만들거나 강물에 닿을 때면 뉘우침의 기도문을 올려야 할 정도였다.

소녀는 죄 없는 몸을 남들 앞에서 죄스럽게 여겨야 한다는 점이 싫었다. 그래서 가능한 아무도 모르게 닷새를 흘려보내고 싶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알에서 태어난 리자드 사내는 상세한 설명을 듣지 못한 채 다시 방 밖으로 쫓겨나야 했다. 어안이 벙벙했다. 어떻게 몸에서 피가 흐르는데 그게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단 말인가. 그는 혼자서만 앓겠다는 나니아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곧장 배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도움을 청할 상대를 찾아다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회성 떨어지는 님프 하나와 난태생 리자드 두 마리 역시 별 도움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인간 여자가 겪는 아픔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말하자면 이 배에는 그녀와 같은 증상을 겪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다.

라히무스는 애가 다 죽어 가는 몰골로 시름시름 앓고 있다며 그녀의 병세를 부풀렸다. 걱정스럽고 답답해서 미치겠다는 듯 유난을 떨어 대는 사내의 모습은 나니아 본인이 알았더라면 당장에 입을 틀어막고 싶었을 정도로 꼴사나웠다.

애처로운 심정으로 가득한 그의 설명 사이사이에 주관적인 감상이 끼어 들어갔다. 그는 아픈 나니아에게서 어미로부터 버림받고 신세가 처량해진 새끼고양이의 눈곱 낀 얼굴을 겹쳐 보았다.

어떻게 된 게 이 배에는 아픈 사람 봐줄 선의 한 명 없다며 소란을 피워 대던 것을, 지나가던 무하프가 보고 들었다.

“환자가 있습니까?”

님프가 물었다. 다행히 그는 지혜롭고 인자한 노인이었다.

“제 생각이 맞는다면 그것은 몸 건강한 인간 여자라면 모두가 겪는 증상입니다. 누구에게나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일이지요.”

님프는 차분한 설명으로 흥분한 리자드를 진정시켰다. 라히무스는 근심으로 젖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혼란한 듯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하지만 저렇게나 아파하는데.”

그냥 내버려 두면 저절로 낫는다니. 사내는 그 말을 믿기 힘들었다. 그가 평소 병증을 구분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죽을병인지, 나을 병인지. 전자라면 생을 포기하고 뒈지면 될 일이고, 후자라면 참고 견디면 될 일이었다. 부상과 질병이라는 것은 그의 인생에서 단지 그뿐인 일상이었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가 아파하는 모습은 달랐다. 아주 잠깐뿐이었지만 뇌리에서 잊히질 않았다.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문드러졌다.

노인은 지배인의 역할을 담당했다. 최종 결정권자는 슈쉬라이지만, 무하프 역시 선내 상황을 감독하고 관리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 난감한 듯 턱수염을 어루만지던 님프는 이내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코르테알이 취급하는 품목 중에, 통증에 차도를 주는 약물이 있을 겁니다. 약품은 선창이 아니라 소단주께서 직접 관리하시니 말씀드려 보시지요. 기꺼이 찾아 주실 겁니다.”

* * *

누군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니아는 눈을 뜨지 않고도 그 묵직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녀의 숨결이 뜨거웠다. 이제 더는 나가라고 말할 힘조차 없는 사람처럼 눈을 감고 색색거렸다. 잠이 들지는 못했다. 저릿한 아랫배 통증에 자꾸만 집중하게 되는 바람에 까무룩 정신을 놓아 버리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커다란 존재감이 침대맡에 육중한 무게를 실어 앉았다. 열 오른 아이 대하듯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나니아의 귓가에 와 닿았다.

“나냐. 많이 아파?”

대답할 가치도 기운도 없었다. 그저 비틀린 신음만이 새어 나갔다.

“잠깐만 일어나 봐. 응?”

나니아는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스러운 생각을 가득 품었다.

‘그냥 내버려 둬 달라니까 왜 끝까지 귀찮게 하는 거야….’

그녀는 가늘게 눈을 떴다. 흐릿한 눈꺼풀 사이로 라히무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코르크 마개가 씌워진 수상쩍은 물약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게 뭐야…?”

나니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슈라한테 받은 약이야.”

“…슈라?”

“효과 있을 거래.”

잠깐 일어나서 먹어 보자며 나니아의 등 뒤로 손을 넣었다. 그녀를 일으켜 앉히려 했다. 사내는 오늘따라 유독 나니아를 애지중지 어르고 달랬지만, 정작 그녀의 귀는 남자의 첫 마디에 꽂혀 있었다.

‘…슈라? 슈라라고 불렀어, 지금?’

불면 날아갈세라 쥐면 꺼질세라 금지옥엽으로 대해 주는 라히무스의 태도보다도 그게 더 중요했다. 언제부터 그 여자의 이름을 그렇게 친근하게 부르기 시작한 걸까. 남자가 혀 짧은 소리로 부르는 애칭이 자신에게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에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아무 여자 이름이나 그렇게 귀엽게 줄여서 불러도 되는 거야?’

나니아는 울컥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등 뒤로 들어온 손을 밀쳐 냈다. 그러고는 라히무스가 앉아 있는 위치와 먼 방향으로 몸을 물렀다. 그녀가 화풀이하듯 소리쳤다.

“그 여자가 준 걸, 내가 뭘 믿고 먹어?!”

“…….”

리자드는 크게 당황하며 물약 뚜껑을 덮었다. 이렇게까지 맹렬하게 거부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었다. 남자는 우물쭈물 해명했다.

“그래도 파는 물건이니까…. 믿고 복용해 봐도 좋지 않을까, 나니아.”

너를 위해 가져왔을 뿐이라 이야기하는 목소리에 시무룩한 낭패감이 느껴졌다. 여자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이마 위에 손등을 얹었다. 고달픈 몸으로 고함을 치다 보니 골이 지끈지끈 울리는 기분이었다. 못 미더운 약을 먹이려고 해서 화가 났구나 싶었던 사내는 마개를 연 약병을 손에 쥐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가 노심초사하며 물었다.

“내가 먼저 먹어 볼까? 그럼 안심이 되겠어?”

“됐어. 필요 없다구!”

차갑고 예민한 나니아의 눈치를 살피며 사내는 어쩔 줄을 몰랐다. 님프들은 좀 짜증 나는 성격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남을 해하는 놈들은 아니었다.

“코르테알은 제법 명성 있는 상단이고, 슈라도 악행을 저지를 여자는 아니다. 그러니까 한 번만 믿고 먹어 보자. 응?”

리자드는 약의 안정성을 피력하기 위해 슈쉬라의 인성을 감싸고 들었지만, 나니아에게 그따위 변호가 달갑게 들릴 리 없었다. 오히려 기름을 들이붓는 꼴이었다. 격렬한 질투심에 경도되어 있던 그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이불을 홱 열어젖혔다. 아픈 것도 잊은 채로 소리를 꽥 내질렀다.

“그놈의 슈라, 슈라!”

아픈 몸에 서러운 마음이 겹쳐져서 눈물이 핑 돌았다. 쌓여 있던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밀어닥치는 기분이었다. 소녀는 폭주하듯 분통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너는, 너는 나랑 대체 왜 만나? 그렇게…. 그렇게 예쁜 여자가 곁에 있는데.”

“…뭐?”

“너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나 말고 다른 여자한테 갈 수 있잖아.”

울음으로 눅눅해진 소녀의 분노는 점점 작고 초라해졌다. 마치 목구멍을 타고 역방향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듯했다.

“예쁜데, 돈도 많고, 성격까지 좋아? 그래, 그렇게 괜찮은 여자면, 이제 걔를, 잘 꼬셔 보면 되겠네! 그 여자한테 가서, 너, 흡, 너 그거 잘하잖아.”

그녀는 어딘지 치졸하고 소극적이면서도 매우 신경질적이었다. 사실은 그런 마음이 전혀 아니면서도, 피곤한 몸과 마음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혓바닥을 통제하지 못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라히무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거지?”

어이없다는 듯 반문하는 사내의 목소리가 자못 서늘했다. 소녀는 순간적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예상 밖의 냉담한 반응에 얼어붙었다.

“라히무스가….”

어느새 눈시울을 붉게 물들인 눈물이 뺨 옆으로 주르륵 흘러내렸다. 불평하듯 쥐어짠 그의 이름 뒤에는 결국 아무런 원성도 이어지지 못했다.

탓하고 싶은데 탓할 게 없었다.

밝힌 적 없는 마음을 그가 알아주길 바라는 게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좀처럼 야속한 마음을 벗어 던질 수가 없었다. 여태까지 계속 그게 문제였다.

눈물을 닦고 싶기도 하고 우는 얼굴을 감추고 싶기도 했다. 나니아는 고개를 돌려서 젖은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하지만 라히무스는 훌쩍이는 그녀로부터 다시 베개를 빼앗아 갔다.

“끝까지 말을 해.”

그의 말과 행동은 평소보다 조금 더 강압적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으니까.”

다정하게 물어봐 주지 않는 것이 미워서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음이 차올랐다. 나니아는 부끄러웠다.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줄곧 삐져 왔다는 사실을 실토하기가 겁이 났다. 하지만 직접 말하지 않으면 끝까지 전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화를 내는 그가 싫어서, 부끄러움을 감수하기로 한 그녀는 결국 새빨개진 얼굴로 강짜를 놓았다.

“왜, 왜 애칭으로 불러, 왜!”

그러고는 곧바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애칭?”

리자드는 아직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귀 뒤를 긁었다. 소녀는 뒤집어쓴 이불을 안쪽에서 한 움큼 입에 쑤셔 넣기라도 한 것처럼 웅얼거렸다.

“슈라라고, 이름을, 흐윽, 그렇게 불렀잖아….”

라히무스는 그녀가 한 말을 이해하기 위해 수 초간 생각했다. 잠시간 말이 없던 그가 얼빠진 투로 물었다.

“…그게 문제야?”

딱히 애칭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다들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까.

“아니, 젠장…. 발음하기가 너무 어렵잖아, 이름이.”

라키마키프나 슈쉬시라나 아무튼 남자는 그런 발음의 이름에 좀처럼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고작 그런 것이 문제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는 라히무스의 반응은 다시 또 나니아를 자극했다.

“서, 성으로, 성으로 부르면 되잖아요, 성으로! 코르테알, 이라구 부르면, 그러면 되는데…!”

한 번 금이 가기 시작한 제방은 강력한 감정의 수압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무너져 내렸다.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있던 불만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예쁘다고, 나는 걔보다 쪼끔 예쁘다고, 흑, 그러고, 흑, 착하다고, 걔랑 밤마다 같이 있었으면서…. 슈라라고 이름도, 귀엽게 부르고….”

소녀는 북받치는 감정을 참기 힘든 듯이 눈물을 쏟아 냈다. 사내가 원망스러워서라기보다는 자기 자신이 추하고 못나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인색한 품성과 속 좁은 성격이 들통 난 것 같아 부끄러웠다.

“자꾸, 다른 여자랑 있는 거, 싫은데, 나는, 나는…. 흐윽….”

여자는 성대를 쥐어 짜냈다. 목이 꺽꺽 막혔다. 그 답답한 칭얼거림을 알아듣기 위해 라히무스는 다시 인상을 썼다. 두서없는 불평불만을 해득해 나가던 이맛살에 점점 여유가 사라져 갔다.

“네 말은 그러니까, 내가 걔한테…. 아니, 아니.”

그는 무어라 이야기를 꺼내려다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손을 털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차마 그 단어를 입에 담기가 어렵다는 듯이.

“자기 혹시….”

감정의 누수는 어느새 커다란 범람을 일으키고, 남자의 마음속에는 섣부른 환희가 차올랐다. 라히무스는 긴장한 낯빛으로 자기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나 때문에 그 여자 질투했어…?”

그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참을성 있게 기다리지 못하고 슬쩍 이불을 끌어 내렸다. 이불 안에는 화덕에 구워진 것처럼 발갛게 달아오른 나니아가 따끈따끈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귀여워.’

라히무스의 눈에는 그 모습이 한 입 베어 물고 싶을 정도로 깜찍해 보였다.

아니야, 라고 외칠 것처럼 크게 벌어졌던 나니아의 입술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녀는 울음을 집어삼키듯이 두 입술을 앙다물었다. 말아 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허….”

라히무스의 입에서 한숨 같은 탄식이 새어 나갔다.

흔들리는 보랏빛 눈동자에서 긍정의 대답을 읽어 낸 그는 마음속으로 믿지도 않는 신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사내는 열없이 턱을 문지르며 설레어 했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꿈틀거리던 눈썹이 제자리를 찾아갈 때쯤, 리자드는 침대 위로 엎어져서 나니아에게로 달려들었다.

“내 사랑, 내 귀염둥이, 내 공주님….”

사내의 우람한 팔뚝이 그녀를 이불째로 끌어안았다. 낮고 짙은 목소리가 솜털을 간지럽혔다.

리자드는 눈물 젖어 축축해진 소녀의 뺨에 짧은 키스를 퍼부어 댔다. 입을 맞출 때마다 희희낙락한 꼬리 끝도 마구잡이로 휘둘러졌다. 그가 영역 표시를 오십 번쯤 시도했을 때, 나니아는 거부하고 싶은 듯이 칭얼거리며 고개를 비틀었다. 하지만 라히무스는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차피 독 안에 든 쥐였다. 튼튼한 팔다리가 소녀의 전신을 꽁꽁 옭아맸다. 발칙한 주둥이도 끝까지 그녀를 쫓아왔다.

“내가 잘못했어? 으응, 내가 잘못했구나, 그랬어.”

쪽쪽거리는 입술이 뺨에서 떨어질 때마다 사내는 좋아 죽겠다는 듯이 속살거렸다.

“내가 다른 여자랑 있는 게 싫었어? 그냥 그것만으로도 싫었어? 으응, 그랬어.”

자기 생각이 맞느냐는 듯 자꾸만 물어 오는 그의 질문에 나니아는 대답할 겨를도 없이 훌쩍거렸다. 어느새 밭은 입맞춤의 횟수가 백 번을 넘어가고 있었다. 가엾어 하며 얼러 주는 말에 서글픈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나니아는 씨근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라히무스가, 걔가 더 예쁘다구 그랬잖아….”

“내가?”

“상대도 안 된다고…. 걔가 제일 예쁘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아직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 씩씩대던 목소리가 점점 작고 흐릿해졌다. 리자드는 암컷의 볼에서 주둥이를 떼어 내고 지난 일을 되짚어 보았다. 생각에 잠긴 두 눈이 날카롭게 가늘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럴 법한 기억을 떠올려 냈다.

“수컷 님프보다 암컷 님프가 예쁜 건 사실이지.”

라히무스는 별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겠다는 투로 대꾸했다. 비교군은 어디까지나 얄미운 벨로즈였지만, 궁핍한 마음가짐의 소녀는 그조차도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성질을 부렸다.

“아무튼 그 여자가 예쁘다고 생각한 거잖아!”

리자드는 이내 작은 주먹으로 퍽퍽 얻어맞기 시작했다. 널따란 가슴이 그녀의 화풀이를 받아 냈다.

“더 예쁜 여자가, 있는데, 그냥, 내가, 내가 더 쉬우니까…. 그래서 나랑, 나랑 만나는 거고, 너는…. 너는….”

여태껏 터무니없는 불평불만을 잘만 들어 주던 사내였지만, 그 말만큼은 도저히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남자는 어이없다는 듯한 반응을 보이며 대꾸했다.

“네가 쉬워? 세상에 너처럼 어려운 여자애가 어디 있다고.”

다시금 주먹이 날아들었다.

“아니, 아니…. 미안해, 나냐.”

사내는 느슨해진 팔에 힘을 주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더는 그를 때릴 수 없게 된 나니아가 엉엉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소리가 라히무스의 어깨에 묻혔다. 남자는 그녀의 통통한 볼에 뾰족한 턱을 마음껏 문지르며 즐거워했다.

‘감히 예쁘다는 말을 다른 여자에게 사용하고, 밤마다 그 여자의 방문 앞에서 보초를 서고, 이름을 줄여 부르고, 그런 게 싫었다 이거지?’

질투란 흘러넘친 사랑의 흔적이었다. 그것은 지저분한 얼룩으로 남아 사랑을 증명했다.

‘날 좋아하나 봐.’

라히무스는 그 생각으로 가슴이 벅찼다.

“다른 여자한테 예쁘다는 말 쓰지 말까…? 응?”

그가 물었다. 소녀는 그 질문에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런 유치하고 지질한 욕망이 바로 자신이 원하는 바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힘들었다. 그녀는 코를 훌쩍이면서 부러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꾸했다.

“그런다고, 흡, 라히무스가 한 말이 취소되는 건 아니야.”

한 번 흘린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며 질책하는 목소리에 잔뜩 심술이 묻어났다.

“그건 다르지. 너더러 예쁘다고 하는 거랑, 그 여자보고 예쁘다고 한 거는, 전혀 다른 거야.”

“뭐가 다른데?”

“보통 그런 여자를 보고 예쁘다고 하긴 하잖아.”

“…….”

남자는 사회적 기준과 보편적 정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듯했지만, 나니아는 그의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는 라히무스가 바라보는 쪽 반대편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자 리자드의 커다란 손이 따라와 그녀의 작은 얼굴을 감싸 쥐었다. 남자는 두런두런 소녀를 향한 예찬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나한테 너는…. 단지 그런 말로는 부족한 거 알잖아.”

나직하고 농후한 사내의 목소리가 징그러울 정도로 간질간질했다.

“알고 있잖아. 내가 널 얼마나 예뻐하는지, 너한테 얼마나 사족을 못 쓰는지….”

너를 다른 여자들과 구분 지을 최상급 표현을 찾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부족한 언변이 그녀를 어르고 달랬다.

“내가 예쁘다는 말보다 더 좋은 표현을 몰라서 그래…. 앞으로 다른 여자한테 예쁘다는 말 안 쓸게.”

“…….”

그의 대답은 여전히 탐탁잖았지만, 그와 별개로 넓은 손바닥이 따스하고 다정해서 용서해 주고 싶었다. 커다란 손가락이 눈 밑을 가만가만 쓸어 주었다.

“여기 좀 봐 봐.”

라히무스는 소녀의 볼을 어루만지던 손에 힘을 주었다. 다시 이쪽을 보게끔 고개를 돌리려는 것이었다.

“…싫어.”

“왜.”

“울어서 못생겼어.”

라히무스는 피식 웃으면서 자세를 뒤척였다. 나니아의 허리 밑으로 팔을 집어넣기 위해서였다.

“너는 우는 얼굴이 더 꼴린다고 했잖아.”

조그마한 여자의 억지로 뒤집어 돌려놓는 일 따위 그에겐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이리 와….”

라히무스는 기어코 나니아가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 다음, 포대기로 감싼 아기 대하듯 그녀를 다독였다. 그새 눈물로 팅팅 부어 버린 눈이나 입술 같은 것이 사무치게 사랑스러웠다.

‘나 때문에 울다니….’

눈물을 그치게 하려고 애썼던 기억만이 가득한데, 이번에는 달랐다.

‘내가 좋아서…. 나 때문에….’

언제나 애처로웠던 모습이 오늘만큼은 더없이 사랑스럽고 흐뭇하기만 했다. 그렁그렁한 보랏빛 눈동자에서 헤어 나오기가 힘들었다. 세상 모든 달콤한 것들이 그 울적한 표정에 깃들어 있었다. 이제 그녀의 구석진 질투심이 라키바하프가 아닌 자신을 향한다는 사실에 깊은 충족감을 느꼈다.

‘젠장, 제발 나랑 결혼해 줘….’

꾸준한 열망은 여전히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사내는 땀과 눈물에 젖어 있는 나니아의 머리카락을 가닥가닥 떼어 내서 목 뒤로 넘겨 주었다. 동그랗고 하얀 뺨. 발긋하고 통통한 입술. 작고 뾰족한 코. 언뜻 불쌍하게 처진 눈썹과 그 아래에서 위태롭게 반짝이는 눈동자. 소녀의 얼굴을 차근차근 뜯어보던 리자드는 기분 좋게 한숨지었다.

“너는 예쁘다는 말론 부족할 만큼 예뻐, 나냐….”

남자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나니아는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혔다. 겸연쩍어 시선을 피한 그녀가 민망한 듯 웅얼거렸다.

“…거짓말.”

내리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사내는 그 수줍은 움직임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답답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대체 얼마나 더 얘기해야 믿어 주는 거지? 나는 너처럼 귀여운 암컷은 살면서 처음 본다고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그치만…. 그치만 나보다 더 귀여운 여자가 나타나면….”

자신이 처음이라는 그의 말을 신용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이후에라도 다른 여자에게 관심이 생기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다.

“그러면 나 다음이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

사람은 타인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때때로 마음속에 드리워지는 의심과 끊임없이 마찰해야 했다.

그로부터 얻고 싶은 것은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겠으나, 내가 아닌 남의 마음을 어찌 감히 확신할 수 있으랴. 결국엔 아무도 승기를 거머쥘 수 없는 갈등이었다. 사내는 나니아의 불안감을 듣고서 경쟁적으로 하소연했다.

“나야말로, 네가 날 얼마나 불안하게 하는지 알아?”

사실 그는 이런 종류의 속앓이에 있어서 나니아보다 훨씬 앞서 있었다. 리자드는 그녀가 다른 남자와 말만 섞어도 속이 뒤집혔다. 독점욕이 극에 달할 때마다 그녀를 집에 가둬 놓고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상상을 했다.

“네가 내 밑에서 엉망으로 흐트러질 때면, 나는 그게 너무 좋다가도…. 이 짓을 나 말고 다른 새끼랑도 해 보고 싶어지면 어떡하나 싶어서 대가리가 돌아 버릴 지경이라고.”

라히무스의 상상 속에서 그녀는 종종 얼굴 없는 사내의 품에 안겨 제게 그랬던 것과 똑같이 칭얼거리며 앙앙 울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자주 라키바하프로 변하곤 했다.

“게다가 너는 이미 나 말고 다른 남자를 좋아한 적이 있는데.”

“…….”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너보다는 내 입장이 더 딱한 거 아닌가.”

흐물흐물 져 줄 것처럼 굴어 주던 사내의 눈빛이 라키바하프에 대한 생각으로 단박에 뾰족해졌다. 무안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여자가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나는…. 그런 생각, 아, 안 해….”

두 사람은 서로의 고민을 가볍게 생각했다. 당사자는 꿈에도 모르겠지만, 정작 나니아의 야릇한 망상 속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라히무스 본인이었다.

소녀는 리자드의 음탕한 몸을 알게 된 후, 오로지 그의 육신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야한 생각에 빠져들 수 있게 되었다. 사실은 지금도 그 부끄러운 욕망이 스멀스멀 피어나려고 했다. 사내가 주는 쾌감을 배워 버린 그곳이 지끈지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달거리를 하는 몸에는 삿된 기운이 스며드는 것일까. 소녀는 아랫입술을 깨무는 것으로도 모자라 손톱을 입에 물고 질겅거렸다.

어느새 눈물은 멎어 있었고, 얼굴은 여전히 발그레했다. 나니아는 자꾸만 라히무스의 몸을 흘금거렸다. 자신을 단단하게 받쳐 안은 양팔에서 강인한 육체미를 느꼈다.

그는 비교적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가벼운 차림이라고 해 봐야 우람한 덩치의 사내에게는 편치 않은 수치였기 때문에, 얇은 옷은 두툼한 흉부에 바짝 달라붙은 상태였다. 타이트한 옷 아래로 육신의 짜임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그 굴곡은 차라리 벗은 것보다도 못하게 음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소녀의 앙큼한 아랫도리가 피를 흘리는 시기라는 사실도 잊고 그를 받아들이고 싶어 했다.

‘몸만 멀쩡했어도 당장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니아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너무나도 발칙하고 부패한 생각이었다.

‘라히무스가…. 나를 이상하게 만든 거야.’

소녀는 눈을 질끈 감고 사내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끝까지 남 탓이었다.

그녀는 마음을 고쳐먹고 육체적 쾌락 대신 정서적 안정을 좇기로 했다.

“라히무스….”

“응.”

“사랑한다고 해 줘….”

먼저 말을 하면 어련히 같은 말을 되돌려 줄 텐데, 그녀는 끝까지 주기보다는 받고 싶어 했다. 그에 미련한 도마뱀은 당최 불만을 가질 줄 몰랐다. 위협적인 육신과 사나운 인상에 걸맞지 않게, 사내는 순종적인 목소리로 달콤한 사랑 고백을 이어 나갔다.

“으응, 사랑해…. 사랑해, 나냐. 사랑해….”

* * *

리자드가 태양이라면, 우우룡은 해바라기 같았다. 나니아가 아무리 떠받들어 줘도 좀처럼 정을 주질 않았다.

“맘마 먹자.”

인간 따위 친절하든가 말든가. 나니아가 입에 먹이를 흘려 넣어 주는 그 순간에도 녀석의 시선은 라히무스에게 꽂혀 있었다. 어떻게 하면 예쁨받을 수 있을까 궁리하는 게 분명한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이 났다.

“걔는 그냥 벌레나 주워 먹으면 된다니까.”

정작 라히무스는 코우에게 빼앗긴 나니아의 관심을 되찾고 싶어 했으니, 지독한 삼각관계라 할 만했다. 고깝다는 듯이 핀잔을 준 그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턱을 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갸름한 볼살이 납작하게 짓눌렸다. 나니아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파코나 챠링고라면 몰라도, 나보다 라히무스를 더 좋아하는 건 너무 부당해.”

섭섭하다 못해 분할 지경이었다. 작은 동물을 사랑하는 하녀의 정성은 코우를 돌보는 일에도 발휘되었다. 비록 녀석은 그녀를 식기 도구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 듯하였지만.

“내가 이렇게 잘해 주는데, 어쩜 자기 괴롭히는 사람한테만 꼬리를 흔드는 걸까요? 그러지 말아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히무스가 코우의 꼬리를 홱 잡아당겼다. 나니아는 다급히 손에 든 수저를 내려놓고 남자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네발짐승의 몸이 위태롭게 휘청이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 커다란 눈이 끔뻑끔뻑 순진하게 굴러갔다.

“왜 그래, 정말?”

나니아는 라히무스를 꾸짖었다. 그는 묘하게 잔혹한 구석이 있는 사내였다. 이럴 때마다 정나미가 다 떨어졌다. 하지만 정작 코우는 무슨 짓을 당해도 어김없이 라히무스를 향해 다시 꼬리를 흔들었다. 그 어리석을 정도로 맹목적인 우우룡의 본성이 나니아는 안타까웠다.

누군가 저를 끓는 물에 처넣어도 저 무한한 신뢰를 보내 올 것만 같았다. 그것이 리자드라면.

하녀는 아기 이유식처럼 물에 개어 놓은 우우룡의 식사를 쓸데없이 휘적거렸다. 넙죽넙죽 받아먹으면서도 좀처럼 친하게 지내 주질 않으니 애석할 따름이었다. 나니아의 이목이 줄곧 녀석에게만 머물자,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그녀의 관심을 갈구했다.

“나도 맘마 줘.”

“…….”

덩치에 걸맞잖은 어리광과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은 어휘 선택. 그 모든 요소와 요소에서 껄끄러운 부조화를 느꼈다. 나니아는 라히무스를 샐쭉하게 노려보다가 결국엔 등을 돌려 앉았다. 걸쭉한 밥그릇을 찹찹찹 뒤적이면서 그를 모른척했다.

리자드는 심통 난 얼굴로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뒤에서부터 침입해 들어온 앞발이 소녀의 통통한 가슴 한쪽을 움켜쥐었다. 나니아는 펄쩍 뛰었다.

“미쳤어요?!”

당장은 단 둘뿐인 으슥한 구석이었지만, 언제 누가 지나가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섹스하던 것도 들킨 마당에 고작 이 정도 애정 행각을 주저할 그가 아니었다. 리자드는 소녀의 가슴을 조물조물 희롱하면서 그녀의 귓가에 대고 음산하게 속삭였다.

“나냐 젖 먹고 싶어….”

그는 포유류 암컷의 생식 방법에 대해 얕은 지식을 얻은 이후로 줄곧 그녀의 가슴을 야릇하게 탐해 왔다. 남자의 검지 손톱이 어딘가를 찾아 헤맸다. 뾰족한 부분을 찾아 긁으려는 것이었다.

“미쳤어, 진짜 미쳤어!”

누군가 듣고 쫓아올까 두려운 마음에 목소리를 크게 내지도 못했다. 숨죽여 그를 비난했다.

“이거 놔, 이 저질 도마뱀아…!”

뺨을 올려붙이고 도망치려 했지만, 단단히 포옹당한 탓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말캉거리는 입술이 무방비한 목덜미를 탐했다. 그 거침없이 야만적인 숨결에 나니아는 소름이 끼쳤다. 요 며칠 달거리 때문에 몸을 내주질 않았더니 시도 때도 없이 이런 식으로 달려들곤 했다.

“제발, 남들 보는 데서 이러지 좀 마.”

“밤까지 못 기다리겠어, 자기야….”

서로가 서로에게 애원했다. 오늘은 그들이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날이었다. 출혈의 저주가 끝나는 날. 나니아는 불안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다급하게 항복했다.

“방에, 방에 가서 해. 응?”

사내는 그녀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럼 찌찌 빨게 해 줄 거야…?”

소녀는 벌게진 얼굴을 푹 숙이고 가슴을 쥔 그의 손을 잡아 뜯었다. 그런 험상궂은 얼굴로, 그런 험악한 음성으로, 그런 영유아 같은 말 좀 하지 말아 주었으면.

“알았어, 알았으니까…. 제발 여기서는 그만해.”

소녀는 끝내 백기를 들었고, 자신의 침대에 무력하게 드러누워서 항복의 의사를 표현해야 했다.

라히무스는 꼭 나니아의 방에서 일을 치르고 싶어 했다. 그녀의 냄새가 물씬 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정말 식사라도 하는 것처럼 나니아의 젖을 빠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여자는 두통을 앓는 환자같이 이마에 손등을 올려놓고 신음할 뿐이었다. 고개를 들 수 없이 창피했다. 무어라 호응할 기력도 없었다.

“아무것도 안 나오잖아….”

그녀는 힘 빠진 목소리로 하소연했다. 남자가 돌기 부분을 입술로 잡아당길 때마다 통증과 쾌감을 동시에 느꼈다.

리자드는 커다란 앞발로 나니아의 가슴을 그러모았다. 간격이 좁아진 유두 사이사이를 난잡하게 오가며 물고 빨았다. 그 지저분한 움직임이 당하는 쪽의 수치심을 극한으로 몰아세웠다. 나니아는 부끄럽지 않은 척 짜증을 쥐어 짜냈다.

“정말이지…. 꼭 그렇게 저질스럽게 빨아야 해?”

나니아의 원망에 라히무스는 날카로운 눈매를 치켜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매섭게 찢어진 두 눈은 뭐가 문제냐는 듯 뻔뻔스레 깜빡였다. 떨어진 입술 대신 뾰족한 혀끝이 그녀의 젖꼭지를 못살게 굴었다. 한시도 가만두질 않았다. 핥고 있지 않은 쪽의 가슴은 엄지손가락으로 빙글빙글 굴려 댔다. 나른한 표정으로 혀를 내민 모습이 지독히 도발적이었다. 소녀는 그 음란한 눈빛과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천장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아, 제발….”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고 있던 손이 점차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자면, 나니아는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니게 되는 기분을 느꼈다. 참고 참다 다시 고개를 내려 그를 바라보면 어김없이 정욕에 물든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소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멀쩡한 얼굴로 왜 저렇게 추접스러운 짓거리를 해….’

그러나 잘생긴 남자는 지저분한 짓을 해도 잘생겼다는 사실을 그녀는 못내 인정했다. 직접적인 쾌감을 느끼는 부위는 아니었지만, 가슴을 허겁지겁 빨고 있는 라히무스의 모습 그 자체가 흥분을 고조시켰다. 물론 부끄럼 많은 소녀는 그 쾌락을 인정하는 데만도 긴 시간이 필요했다.

“라히무스…. 이제, 그만….”

리자드는 가슴골에 콧대를 처박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그 숨은 먹잇감을 해치우는 맹수의 호흡과 닮아 있었다. 딱딱한 복장뼈에 정신없이 입술이 문질러졌다. 소녀는 애타는 신음을 흘렸다. 아직 무언가가 부족해서 뱉어진 아쉬움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라히무스의 한쪽 손을 붙잡았다. 말리는 게 아니라 이끄는 손길이었다. 사내는 놀란 눈을 치켜뜨면서도 움직이는 대로 따라 움직여 주었다. 손끝이 닿은 곳은 나니아의 음부 위였다.

“…….”

라히무스는 알았다는 듯이 그 부근을 속옷 위로 비벼 주기 시작했다. 소녀는 쉽게 축축해졌다.

라히무스는 자기 손톱을 들여다보았다. 초조한 듯이 입술을 훑더니 목 뒤를 벅벅 긁었다. 그리고 다시 손톱 끝을 확인했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욕설이 새어 나갔다.

나니아의 안쪽은 너무 좁아서 손가락으로 넓혀 주는 과정이 꼭 필요했다. 하지만 일주일 내내 방치해 둔 탓에 거칠고 뾰족해진 손톱 끝이 마음에 걸렸다.

꾸준한 손톱 관리는 사랑받는 수컷의 필수 덕목이라. 그런 의미에서 라히무스는 자격 미달이었다. 남자가 무엇을 망설이는지 알지 못해 애가 타기 시작한 나니아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왜 그래요?”

리자드는 주먹을 말아 쥘 듯 말 듯 멋쩍게 움직이며 엄지손가락의 굳은살에 대고 손톱을 긁었다.

“손톱이 그새 길어져서….”

라히무스는 자신의 게으름을 고백하며 낯을 들기 어려워했다. 상대방이 ‘그게 왜?’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바짝바짝 말라가는 입술을 혀로 축여 가며 대꾸했다.

“…미안.”

매력적이고 능숙한 수컷의 섹스는 물 흐르듯 흘러야 하는 법이었다. 말하자면 산통을 깨뜨린 셈이었으니, 그래서 사과가 앞섰다. 하지만 나니아는 크게 개의치 않는 얼굴로 자신의 손가락을 살폈다. 몸을 일으켜 반쯤 벽에 기대앉더니, 조심조심 무릎을 접어 올렸다.

“그럼 내가 할까…?”

그녀는 스스로 노력해 보겠다는 듯, 남자의 것에 비하면 턱없이 가늘고 유약한 자신의 손가락을 사타구니 사이로 가져갔다. 하지만 손가락은 선뜻 진입하지 못하고 소음순 사이에 머물렀다. 훨씬 두꺼운 물건으로 몇 번이고 꿰뚫려 보았으면서, 그곳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꾹 다물려 있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든 뚫고 들어오는 것과는 달랐다. 자진해서 질구 안을 헤집는 일은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혼자서는 어려웠던 그녀가 부끄러워하며 도움을 청했다.

“도와줄래요…? 잘 못 하겠어….”

라히무스는 조금 멍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다가, 나니아의 가장 긴 손가락을 한 마디만 남겨 놓고 손에 쥐었다.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음부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어떤 의식과도 같아 보이는 그 행동 뒤에, 라히무스는 그녀의 손가락을 도구 삼아 피동적으로 구멍을 더듬게 했다.

“여기.”

“여기…?”

“응, 거기….”

사내는 조금 목이 막힌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그녀의 손가락을 질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진입만 힘들었지 두 번째 마디부터는 쉬웠다. 내벽을 가르고 들어간 손가락이 나니아 자신의 안쪽을 천천히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라히무스는 나니아에게서 손을 떼어 낸 후 그 모습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은 앞으로 이 장면을 떠올리며 수도 없이 자위하게 될 것이라고.

언제나 몸은 머리보다 빠르게 반응했다. 그도 줄곧 피가 쏠려 있던 음경으로 손을 뻗쳤다. 그녀가 자위하는 것을 보면서, 그도 자위했다.

사내는 달뜬 숨을 뱉었다. 사나운 눈동자가 소녀의 몸을 샅샅이 핥아 댔다. 나니아는 부끄러워하며 시선을 피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는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잘 쑤셨다. 발가벗고 자신을 헤집는 꼴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음탕했다.

“하, 씨발….”

남자의 못된 손이 그녀의 젖꼭지 한쪽을 잡아당겼다. 간간이 주둥이를 들이밀어 입술을 빨거나 목덜미를 훑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엔 다시 멀어져서 그녀를 구경하기를 반복했다. 사내는 오감으로 그녀를 즐겼다. 그들의 모습은 서로에게 너무도 적나라했다. 라히무스만큼이나 나니아도 그의 육체가 주는 시각적 자극에 빠져들고 있었다. 힘차게 흔들어지는 그의 남근이라거나, 잔뜩 화가 나 있는 허벅지 근육이라거나, 큼직하게 잘빠진 흉근의 모양새 같은 것들이 그녀의 시선을 빼앗았다. 무엇보다 자신을 쳐다보며 격앙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라히무스의 눈빛이 일렁이는 마음에 불을 질렀다. 그가 자신을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자 음부가 벌렁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입에서 사탕을 굴릴 것 같은 얼굴과 음색으로, 나니아가 물었다.

“…꼴려?”

그에게 배운 못된 말이었다. 수줍고도 천박했다. 질문에 대한 사내의 대답은 건조했다.

“어.”

하지만 그 짧은 음절만으로도 뜨거운 욕정은 선명히 드러났다. 라히무스 또한 그녀의 시선이 자신의 어디 어디에 닿아서 배회하는지 잔뜩 의식하고 있었다. 여자가 자신을 통해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부터 심장이 뛰었다. 리자드는 침대 위에 긴 다리를 올려놓고 전신을 비스듬히 고쳐 앉았다. 자기 몸매가 어필되는 방향으로 자세를 바꾸어 앉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의도적이라기보다는 본능적이었다. 그는 타고나길 발칙한 수컷이었다. 그 생리적으로 계산된 몸가짐을, 소녀는 달뜬 시선으로 탐미했다.

너비가 좁은 직사각형 모양의 햇빛이 방 안으로 길게 뻗어 들어왔다. 선내는 실외만큼 명명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바깥은 아직 훤한 대낮이었다. 이런 조도는 익숙지 않았다. 눈에 설었다. 어둠에 잠식되는 부분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리자드의 나신이 소녀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그는 정말이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외설스럽게 생긴 사내였다. 성기를 쥐고 흔들기 위해 불룩해진 가슴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너무 야해.’

숨 막히게 관능적인 광경에 목이 마를 지경이었다. 그녀는 침대에 등을 기대어 앉아 있었고, 남자는 대각선 방향으로 길게 누운 채였다. 이토록 뻔뻔하게 서로의 몸을 관찰하며 살을 섞을 순간을 기대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너는….”

라히무스가 입을 열었다. 그새 조금 잠겨 버린 듯한 목소리.

“너는 내 어디가 제일 꼴려.”

그 높낮이만 듣자면 마치 협박 같은 질문이 던져졌다. 섬뜩할 정도로 낮은 음성 밑에는 너는 지금 당연히 나를 보고 흥분했다는 전제와 그녀가 돌려줄 대답에 대한 짙은 기대감이 함께 깔려 있었다. 소녀는 얼굴을 확 붉히면서 시선을 피했다. 그의 몸을 샅샅이 눈에 담고 있던 것이 죄스럽기라도 한 듯이.

“그… 그냥.”

나니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의 종아리 부근을 쳐다보았다. 대범하지 못한 시선이 야금야금 그의 전신을 훑어 나갔다.

길고 늘씬하게 뻗은 정강이는 빠르고 날렵한 포식 동물의 그것을 닮았다. 굵직한 허벅지는 탄탄한 대퇴근을 중심으로 보기 좋게 움푹 파여 있었고, 그 위로 모양 예쁜 복직근과 두툼한 대흉근이 자리했다. 마지막으로 넓게 벌어진 어깨와 두툼한 팔뚝이 역삼각형으로 빠지는 몸매를 완성했다.

어디 하나 아쉬운 구석 없이 완벽한 굴곡이 차례로 눈길을 빼앗았다. 입천장이 바짝 마른 소녀는 차마 대답을 잇지 못했다. 그러자 다시 한번 그녀에 의해 음란한 시선으로 훑어져서 흥분한 라히무스가 답을 재촉했다.

“어디가 좋아, 응?”

나니아는 스스러운 듯이 눈을 내리깔고 입술을 깨물었다. 꼭 붙여 앉은 허벅지 사이로 수줍게 끼워 놓은 오른손이 촉촉한 구멍을 들쑤시고 있었다. 손목을 겹쳐 놓은 두 팔 사이로 동그란 유방이 기울고 모였다. 라히무스는 그 야릇한 젖무덤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요염하고 깊숙한 골짜기 사이에 씨물이 질질 흐르는 성기를 끼워 놓고 싶었다. 마구 비비고 흔들어서 더럽히고 싶었다. 남자는 대답을 기다리다 못해 자기가 먼저 달뜬 감상을 내뱉었다.

“나는 너 가슴 출렁거릴 때마다 돌아 버릴 것 같아….”

그 말에 나니아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가슴골을 내려다보았다. 무엇이 그를 흥분시켰는지 깨닫고 얼굴이 화끈해졌다. 당장에 그의 입술을 틀어막고 싶은 반발심과 그를 위해서 가슴을 흔들어 주고 싶은 음심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그런 저급한 욕망을 마음에 품고 말았다는 사실에 말 못 할 죄악감을 가졌다. 그를 닮아 자신도 점점 음탕한 여자가 되어 가는 걸까. 도대체 일주일을 어떻게 버텼던가. 사실은 그녀도 참기 힘들었었다.

아무래도 역시 손가락으로는 부족했다. 주름진 내벽도 그것을 시시해 하는 게 느껴졌다. 나니아는 이제 더 길고 굵직하게 자신을 채워 줄 물건을 원했다.

“라히무스, 나 이제….”

그녀는 말끝을 맺는 대신 자신의 손가락을 빼내고 다리를 벌렸다. 리자드는 눈이 완전히 벌겋게 달아올라서 서둘러 그녀의 다리 사이를 차지했다.

그녀의 알몸을 눈요기 삼아 잔뜩 키워 낸 음경으로 나니아의 안쪽을 가르고 들어갔다. 따뜻하고 축축한 점막이 그를 반겼다. 쭉 빨아 당기는 듯한 감각에 리자드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라히무스.”

몇 초간 그렇게 머물러 있었을까. 나니아가 멈춰 있는 그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숨 쉬어. 숨.”

“…하.”

그 말에 막혀 있던 숨이 터졌다. 알려 주기 전까지 그는 자신이 호흡을 참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사내는 그 후로 첫 숨을 배운 짐승처럼 헐떡이기 시작했다. 한숨 같은 목소리가 아찔한 감탄을 속삭였다.

“아, 너무 부드러워….”

축축한 내벽에 감응한 성기가 이보다 더 단단해질 수 없을 정도로 팽창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깊게 찔려질 때마다 두 사람 모두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라히무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남자가 눈을 떴다. 천천히 거둬 올린 눈꺼풀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혼탁하게 빛났다. 침대에 몸을 묻은 소녀가 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안아 달라는 듯 벌려 오는 두 팔에 사내는 기꺼이 몸을 맡겼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완전한 알몸이 겹쳐지고 맞닿았다. 상처투성이 리자드의 몸은 뜨겁고 거칠었다. 나니아는 그 늠름한 품에 매달려서 남자의 목덜미에 입술을 문질렀다. 라히무스는 그 야들야들한 감촉과 보드라운 살결에 온몸이 달아올랐다. 그의 두 팔도 나니아를 억세게 끌어안았다. 자신에 비하면 턱없이 작고 여린 몸이었다.

“귀여워, 너무 귀여워….”

깊게 묻어 놓은 음경이 단단히 팽창했다. 마치 그곳이 온몸의 피를 앗아 가기라도 한 것처럼 현기증이 다 나려 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남자는 당장에 절정을 맞이하고 싶은 사람처럼 빠른 속도로 쑤셔 박기 시작했다. 그에 나니아는 다급한 신음을 흘리며 그를 말렸다.

“아, 너무 빨라. 빨라, 라히무스…!”

철없이 벌어진 입술에서 버거운 교성이 터졌다.

“천천히…. 응? 천천히 하자.”

‘이렇게 좋은데 어떻게 천천히 해.’

하지만 잠자리에서 암컷의 보폭을 맞추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사내는 어쩔 수 없이 들끓는 애욕을 억누르며 속도를 천천히 늦추었다. 빠르게 처박고 싶은 욕망을 꾹꾹 눌러 참으며 시계 초침과 같은 속도로 천천히 쳐올리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니아는 거칠어졌던 숨을 고르며 새근거렸다. 그녀는 조금 진정해서 차분해진 라히무스의 귓가에 대고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빨리 가는 거 싫어. 천천히 하자.”

라히무스는 의아했다. 그는 암컷에게 빠르고 잦은 오르가즘을 선사하는 일이 최고의 잠자리 덕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나니아의 애절한 부탁에 생각을 고쳐먹었다.

“라히무스랑 이거, 오래…. 오래 하고 싶어.”

체력과 정력엔 어디까지나 한계가 존재했다. 소녀는 두 뺨을 물들인 채 그 한계가 찾아오는 순간을 최대한 뒤로 늦추고 싶다는, 빠르게 끝내지 않고 오래도록 즐기고 싶다는, 부끄러운 고백을 했다. 그 수줍은 언행에 남자는 또다시 숨이 멎는 기분을 느꼈다.

“씨발…. 나랑 섹스하는 게 그렇게 좋아?”

흉포해진 리자드의 육신이 소녀의 안쪽을 푹푹 파고들었다. 천천히 하자는 약속을 도저히 지킬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할까? 밤새도록 할까?”

“아, 앗, 천, 천천히….”

“아직 해도 안 졌는데, 응? 어쩔 거야. 나랑 이것만 할까? 하루 종일 씹질만 해?”

“아, 시, 싫어.”

쾌감에 이지러진 소녀는 대답인지 신음인지 모를 울음을 터뜨리며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추켜올리는 속도가 다시 또 빨라졌다. 빠르게 찔러 주는 감각에 나니아는 쉽게 절정으로 치달았다.

“시, 싫어…. 아, 싫어….”

나니아의 입에서는 몸과 다른 감상이 새어 나갔다. 라히무스는 싫다는 말을 피하려는 사람처럼 그녀의 입을 입술로 틀어막았다.

“으읍…!”

정신없이 박아 댈수록 애액이 흥건하게 흘렀다. 그것은 여자가 한껏 느끼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주름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미끌미끌해진 내벽이 사정없이 문질러졌다. 뻐근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으리만치 흥건해진 점막이 수컷의 빠른 출입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아, 싫어, 빠, 빨라.”

리자드는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허벅지 대신 둔근을 흔들어 더욱 박차를 가했다. 소녀는 어찌할 도리 없이 속수무책으로 절정을 맞이하고야 말았다.

“아…!”

몸을 파르르 떨며 울먹이는 나니아의 얼굴 곳곳에 바쁘게 입을 맞추었다. 발긋하고 보드라운 살결이 입술에 붙어서 딸려 오는 감각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이번에는 이렇게 할까.”

“아, 으, 조, 조금만 이따가….”

“즐겁게 해 줄게, 자기야.”

“아, 싫어….”

“너는 느끼기만 해….”

“아…!”

남자는 자세를 바꾸어 옆으로 몸을 늘인 채 나니아의 음부를 쑤셔 대기 시작했다. 소녀는 라히무스의 몸 위에 한쪽 허벅지를 올려놓고 무참하게 헤집어졌다. 절정이 가라앉기도 전에 다시 또 끌어 올려지는 감각에 소녀는 이성을 잃고 신음했다.

“싫어, 아, 천천, 히잇…!”

“하아…. 그러지 말고 좋다고 해 줘, 나냐. 응? 좋다고.”

남자가 애달프게 사정하자, 나니아는 눈을 질끈 감고 생리적인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 응, 시, 싫어엇….”

“좋아하잖아, 좋잖아.”

“아, 라, 라히, 라히무스!”

“이런 거, 좋아하지. 여기 좋아하잖아.”

소녀는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사타구니 사이가 한없이 지끈거리고 요의가 치밀 정도로 쾌감이 강했다.

“아 씨발, 나는 너무 좋아…. 아, 읏, 쌀 거 같아.”

남자는 쾌감을 고백하는 일에는 솔직했지만, 쾌감 그 자체에는 충실하지 않았다. 그는 사정하고 싶은 감각을 몇 번이고 버텼다. 아직 암컷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더욱 속도를 높이고 싶은 기분에 그는 다시 나니아의 몸을 바로 눕혀 놓고 그녀의 허벅지를 벌려 안았다. 사내의 중심에 맞추어지느라 나니아의 허리가 침대로부터 멀어졌다. 허리가 뜬 만큼 어깨에 힘이 실렸다. 이번에는 포옹조차 허락되지 않는 자세였다. 리자드는 잔뜩 성이 나서 부푼 가슴을 전면에 세워 놓고 하체를 밀어붙였다. 침대가 부서질 것처럼 맹렬해지는 체위였다. 한편으론 눈 아래로 펼쳐진 광경이 믿을 수 없이 아름다웠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나니아의 몸은 그 어떤 예술품보다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사내는 벅차올랐다. 쾌감에 들떠서 어쩔 줄을 모르는 몸이 너무도 사랑스럽고, 거칠게 쳐올릴 때마다 출렁이는 가슴은 황홀했다.

“아, 씹, 도저히, 도저히 안 되겠다.”

사내의 시선이 집착적으로 그녀의 몸에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그는 허락을 구하듯 중얼거렸다.

“나 한 번만 쌀게. 또 금방 세울 테니까….”

아랫도리에 가해지는 자극보다도 시각적 충격이 너무 커서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니아 역시 태산 같은 리자드의 육신을 올려다보며 온몸이 예민해지는 것을 느꼈다. 두 눈이 마주치자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진 그녀는 상대방을 안지도 잡지도 못하게 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추었다. 하지만 리자드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손목을 빼앗듯이 잡아 올리며 으르렁거렸다.

“얼굴 가리지 마.”

그의 사나운 눈동자는 여자가 느끼는 얼굴을 구경하고 싶어서 잔뜩 안달이 나 있었다. 겨우 한 손이었다. 사내의 한 손은 소녀의 두 손목을 쉽사리 포박했다. 결박당한 두 팔이 포로처럼 위로 젖혀진 채로 나니아는 바르작거렸다.

“놔, 놔줘….”

그녀는 다른 게 아니라 자신이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까 봐 그게 너무 신경 쓰였다. 고개를 비틀어 이불에 파묻어 버리려는 것을, 남자가 그마저도 저지했다. 그가 다른 한 손으로 턱을 쥐어 돌리는 바람에 그녀를 제압한 손으로 온 체중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아플 정도로 조여 오는 악력에 격양된 위압감을 느꼈다.

“아, 너무 예뻐….”

라히무스는 부끄러워하는 나니아의 얼굴을 지척에서 내려다보며 황홀경에 젖어들었다. 그는 그녀의 이런 얼굴을 볼 때마다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본 적 없었을 표정. 마치 그녀를 완벽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착각에 빠지게 했다. 한편 나니아는 정말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아름답다 여기는 듯이 어지러움이 깃든 라히무스의 눈을 들여다보며 온몸이 저릿저릿해졌다. 자신의 안쪽이 기뻐하면서 그를 끌어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또 이불을 잡아당겨 몸을 가리려 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나니아는 훌쩍이며 앙알거렸다.

“부끄럽단 말이야….”

사내는 부끄러워할 여유가 생긴 그녀가 탐탁지 않은 듯이 다시 또 허리를 흔들어 댔다.

“아, 싫어, 이제 그만…!”

소녀가 아쉬운 소리를 해 대자 그의 마음속에 반감이 들었다.

“이렇게, 질질, 흘리면서, 대체, 뭐가, 싫다는 거야.”

쾌감에 실성한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으로 인해 잔뜩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선명한 교성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나니아는 흔들리는 시야로 라히무스의 얼굴을 마주했다. 기분 좋다고 이야기해 달라는 그의 눈빛이야말로 어딘지 회까닥 돌아 있었다. 그의 선명한 흥분을 접한 음부가 바짝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상대방이 섹스를 즐기는 모습을 두 눈으로 마주하는 것은, 신체에 직접 가해지는 쾌감보다도 더 큰 희열로 다가왔다. 자신도 그에게 같은 관능을 안겨 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솔직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좋아, 좋아….”

여자는 차오르는 쾌락을 입 밖으로 모두 꺼내 말했다.

“좋아? 아, 좋아?”

“아, 조, 좋아, 좋아 라히무스….”

“하, 씨발…. 나도 좋아….”

마침내 간절히 염원하던 말들을 두 귀에 꾹꾹 담아 들으며, 사내는 짐승처럼 헐떡였다. 두꺼운 귀두가 나니아의 배 속 깊은 곳을 쿵쿵 찧어 댔다.

“아, 사랑해…. 사랑해, 자기야.”

“으, 응.”

남자가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내벽이 움찔움찔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정말 교미라고 부를 만한 움직임이었다. 음란한 육신의 본성이 흘레붙은 상대에게 사정을 재촉하고 있었다. 수컷 리자드도 그 감각을 눈치채고 번식의 충동을 절절히 느끼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좁은 안쪽이 더욱 조여드는 것이 느껴져서, 결국엔 참지 못하고 정을 터뜨리고 말았다. 커다란 음경이 몇 번이고 움찔움찔 약동했다.

임신시키고 싶다. 남자는 자신이 이뤄 낼 수 없는 그것을 아쉬워하며 이루 말할 수 없이 유감을 느꼈다.

그녀가 아기를 낳으면 귀여운 가슴에서 젖이 줄줄 흐르리란 생각에 갈증이 일었다. 사내는 다시 또 성기에 힘줄이 돋아나는 것을 느끼며 아쉬운 대로 그녀의 빈 젖을 빨아 댔다.

리자드 스토리 R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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