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롤린 항구 (14/22)

게롤린 항구

리자드는 먼지 풀풀 날리는 선장실을 꿰차고 앉아 뻐끔뻐끔 담배를 피웠다. 배 안에서는 화기 엄금의 규칙을 따라야 하기 마련이지만 그 엄중한 규율도 남자에게는 예외적으로 적용되는 듯했다.

사내는 급하게 쓰인 미완 보고서의 빈 부분을 스스로 채워 가며 읽고 또 읽었다. 그 옆에 동대륙으로 탈주한 범죄자들의 수배서가 빽빽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남자는 본디 현장에서 발로 뛰기보다는 서류 한 장으로 오더를 내리는 결정권자에 가까웠으나 이번 일은 직접 몸을 움직일 만큼 마음이 급했다. 자신의 번듯한 집무실에 비하면 허름하다고 보아도 좋을 이 선장실에서, 달이 차고 기우는 시간을 견뎠다.

혹시라도 남의 공간에 협회 기밀을 흘려 놓는 일이 없도록 자리를 정리하던 차에, 리자드는 책상 끄트머리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던 종이 쪼가리를 새삼 발견했다. 남자는 그것을 펼쳐 다시 한번 읽어 보았다.

잘 보이려는 정성 없이 용건만을 짧게 휘갈겨 쓴 편지글.

[서풍, 때문에, 배, 없음. 님프, 자식, 무사, 귀환. 원함. 배, 필요함. 여기, 보안법, 개판. 너네, 일, 안 하냐?]

단어의 나열에 불과한 무성의한 서신을 읽으며 리자드는 재차 눈살을 찌푸렸다. 주인을 닮아 문체도 필체도 엉망진창인 글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멋대로 바꾸어 쓰기까지. 리자드는 짧게 코웃음 치며 그를 이곳에 있게 만든 문제의 편지 한 통을 서류 더미 위로 던져 놓았다. 곧이어 필요 없는 서류들을 끈으로 묶어 놓으려던 순간, 누군가 허락도 없이 선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남자의 시끄럽고 건방진 직속 하관 폴포포 소령이었다.

“밖으로 나도는 남자가 일중독에 담배까지! 역시 우리 사령관님 장가가긴 그르셨지 말입니다.”

여자가 입 가까이 앞발을 가져다 붙이며 요란스럽게 놀라는 시늉을 하자, 리자드는 꺼림칙한 눈초리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선내에서의 흡연이 떳떳한 행동은 아니었기에, 말없이 재떨이 위로 손을 가져가 천천히 궐련 끝을 비볐다. 못다 태워진 담배 연기가 남자의 붉은 머리털 위로 뿌옇게 흩어졌다.

사령관은 무슨 용건이냐고 말로 묻는 대신 폴포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눈썹 끝을 비딱하게 들어 올렸다. 할 말 있으면 딴소리 말고 보고하라는 뜻이었다.

“아버지 뒷배랑 얼굴만 믿고 그렇게 막사시다가는, 평생 뿔 두 개짜리 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실 겁니다.”

“본론.”

까불지 말라는 듯, 남자가 손가락을 튕기며 그녀의 말을 잘랐다. 암컷의 성희롱을 받아 주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철저한 계급주의적 품위가 엿보였다.

그에 폴포포 소령은 뒤늦게 다리를 어깨너비로 벌리며 예를 취했다. 치켜든 고개가 비스듬히 천장을 향하였다.

“목표 좌표 전방 51거, 함선이 곧 게롤린 항구에 정박할 예정입니다! 투묘를 앞두고! 보고! 드립니다!”

여자는 상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대신 천장 언저리를 쳐다보며 우렁차게 계고하였다. 암컷의 씩씩한 꼬리가 떨림 없이 반듯하게 차렷 자세를 취했다.

“풀어.”

남자는 최소한의 예를 다할 뿐인 하관에게 무심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의 말에 폴포포는 다시 느슨한 자세로 돌아와 깐죽거렸다.

“오랜만의 군 제복 차림이 새끈하시지 말입니다!”

“…오랜만에 군사 재판에 회부되고 싶나, 폴포포 소령.”

상관이 자신의 농담을 서늘하게 받아치자, 소령은 다시 과장되게 경의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짓은 예의 바르기보다는 익살스러웠다.

“죄명은 무엇입니까!”

“군내 추행죄.”

“어디를 만져 본 적도 없는데, 추행죄는 억울합니다! 기왕이면 한 번 주물러 볼 기회를 주시고, 그다음에 기소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자는 께름칙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싫어. 그럼 상관 모욕죄.”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에 폴포포는 턱을 내려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날카롭고 나른한 붉은 눈동자가 어디까지 까부는지 보자는 듯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내는 금욕적이고 견실해 보이는 인상과 별개로 따뜻하기보단 차가운 느낌을 주는 미남이었다. 새삼 얼굴로 자리를 해먹은 게 틀림없다는 뒷말이 나오는 이유를 실감하며, 여자는 말을 더듬었다.

“그… 그건 유죄 판결이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중장님!”

리자드는 참아 줄만 했던 소령의 장난이 끝나자 작게 한숨을 흘렸다. 암컷들의 성희롱은 직급에 관계없이 어딜 가나 따라오는 법이었다. 알면서도 매번 지쳤다.

남자는 잠시 정모를 벗은 채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이내 차분한 목소리로 하명하였다.

“가서 모든 중대 갑판 위로 소집한다. 실시.”

“실시!”

우렁찬 대답과 함께, 소령은 선장실 밖으로 달리다시피 걸어 나갔다.

기대했던 것보다 함선의 진항 속도가 빨랐다. 서풍이 부는 탓이었다. 시기를 잘 탔다고 볼 수 있었다. 리자드는 하선 준비를 위해 벗어 두었던 정복을 몸에 걸쳤다. 어깨에서 찰랑거리는 금빛 견장이 그의 미끈한 외모와 잘 어울렸다.

허리에서부터 목 끝까지 모든 단추를 단정하게 걸어 잠그고, 마지막으로 책상 서랍을 열어 자신의 위명을 드러낼 상징들을 꺼냈다. 군내 지위를 증명하는 화려한 휘장과 붉은 홍염의 훈장. 남자는 그것들을 몸의 중심에서 살짝 치우친 왼쪽 앞가슴에 정숙하게 달아 두었다.

큰 보폭으로 걸어 나가는 리자드의 등 뒤로 옷자락이 펄럭였다. 선실을 나서자 시원한 바닷바람이 긴 꼬리를 스쳤다.

중대원들은 모두 출동 집결을 마친 상태였다. 사내는 함교로 이어지는 단상 위에 올랐다. 그 위에서 오와 열을 맞추어 선 자신의 중대원들을 내려다보았다.

사내의 이름은 발카모스 바포르 마그라타. 동비안보 국제 상협 기구 휘하 헌병대의 사령관이었다.

그는 본디 태양사단과 와룡사단을 이끄는 군단장이었으나, 다소 급작스러웠던 이번 파병에서는 소수 정예의 삼 중대만을 거느린 채로 출항하였다.

정돈된 충성의 인사를 올리고 있는 대원들을 향하여, 사령관도 예의를 취했다. 발카모스의 가지런한 앞발이 두툼한 가슴 위를 짚었다. 직각으로 벌어진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반짝이는 황금 휘장들이 화려하게 빛났다.

남자는 장식적인 의미가 강해 보이는 얇은 칼을 빼내어 손잡이를 허리춤에 붙여 잡았다. 날카로운 칼날이 반듯한 귀 끝과 평행을 이루며 일자로 세워졌다.

정벌 목표를 호령하는 사령관의 곧고 커다란 목소리가 바닷바람을 헤치고 갑판 위로 울려 퍼졌다.

“하선 지점에서부터 30거. 지금부터 게롤린 내의 모든 사잇법 위반 용의자들을 수색, 체포한다. 일 중대, 땅굴을. 이 중대, 민간 지역을. 삼 중대, 나를 따른다.”

닻을 내리기 위해 캡스턴이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 소란한 철근의 소음과 파도 소리 외에는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혐의자들 대부분이 군형 용병 출신의 흉악범들로 이루어진 바, 집행 불복종 시 사령관의 권한으로 무력 진압을 위한 불가피한 살상을 허락한다.”

무거운 철근이 해안 바닥에 닿는 순간, 리자드의 칼끝이 춤을 추듯 곡선을 그리며 하늘 높이 태양을 찔러 올렸다.

사령관은 충직한 리자드 헌병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는 마지막 구령을 떨어뜨렸다.

“휘황한 태양 아래, 와룡이여 일어나라.”

“휘황한 태양 아래, 와룡은 일어난다!”

발카모스의 구호 뒤로 커다란 함성이 뒤따랐다.

“소탕을 시작한다.”

남자의 칼끝이 하선 위치를 향하자, 헌병들은 정박지를 향하여 열 맞추어 달려 나갔다. 일 중대와 이 중대를 이끄는 위관들은 모두 남자가 믿을 만한 부하들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맡은 바를 잘 해내리라 믿었다.

리자드는 자신의 곁에 남은 삼 중대를 내려다보며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출정에는 공적인 목표와 사적인 목적이 공존하고 있었다.

타깃은 불로수의 아들이었다.

* * *

굴러들어온 돌 몇 개를 빼낸 게롤린의 땅굴은 참으로 쉽게 일상을 되찾았다. 고통받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평소와 다름없이 흘러가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 가식적인 평화가 아수라장으로 바뀌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무장 헌병들이 순식간에 범법자들을 제압해 나갔다. 화들짝 놀라 겁에 질린 주민들은 대개 체념적인 반응을 보였다. 올 것이 왔구나 싶었던 것일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 허둥대던 자들도 상협 군복을 알아보고는 자포자기하듯 투항했다. 일부 반격으로 대응하는 자들은 가차 없이 피살당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말입니다.”

폴포포 소령이 혀를 차며 말했다. 사령관도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땅굴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인간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였다. 정체를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는 도마뱀들의 일상적인 방종은 개탄스러울 지경이었다.

“상협의 죄가 크다.”

발카모스의 말은 게롤린 사안에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던 스스로를 질타하는 비난이기도 했다. 유멘타 무역의 단맛에 빠져든 권세가들. 그리고 그들의 로비를 알음알음 받아들여 상황을 이 지경으로 악화시켜 놓은 협의체. 문제는 둘 모두에게 있었다.

용의자들은 본토로 압송되어 사잇법 위반 혐의로 국제 재판에 회부될 것이다. 피해 정도를 파악한 뒤 구형 의견을 내는 것까지가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원래대로라면 파병 책임관이 만들어 온 자료를 검토한 뒤 상부에 보고하는 절차를 거칠 뿐이지만 이번에는 몸소 현장까지 출동하셨으니 그가 직접 자료를 작성하여 제출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대동한 선박만으로 충당이 되겠습니까?”

폴포포 소령이 발카모스 사령관을 향해 물었다. 그녀는 범죄 이송에 필요한 범선의 수와 크기가 변변치 않음을 걱정하였다. 남자는 준비해 온 형구가 부족해 혐의자들의 손목을 밧줄로 묶고 있는 부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더는 추방될 곳도 없는 버러지 인생들, 돌아가면 예외 없이 사형이다. 잘못 건드렸다가 성가셔질 상단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이곳에서 즉각 사살해도 문제없다.”

말인즉 죽여서 짐을 덜겠다는 소리였다. 남자는 멀끔한 낯짝으로 끔찍한 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지껄이는 재주가 있었다. 좁은 배에 살아 있는 인간을 쌓아 놓는 것보다는 현장에서 시체를 치우는 편이 여러모로 더 간편하긴 했다. 군수 물자는 아끼고, 처리해야 할 서류의 양은 줄이고.

편리하지만 섬뜩한 계획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폴포포는 상관을 흘금 쳐다보며 떨떠름하게 팔을 문질렀다.

사령관은 항구 근처에 자리를 잡고서 수색대의 보고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막사의 천막이 걷힐 때마다 희미하게 기대감을 드러내었다가 상신 내용을 듣고는 다시 딱딱하게 얼굴을 굳히곤 하였다. 마치 기다리고 있는 정보가 그게 아니었던 것처럼.

소령은 더듬더듬 화제를 바꾸어 질문을 던졌다.

“한데, 사령관님…. 아까부터 뭘 자꾸 따로 찾으시는 것 같지 말입니다.”

하관의 참견에 발카모스는 말없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흘겨보았다.

허튼 말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닌 여잔데, 그렇다고 해서 또 눈치가 영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더 성가시고 귀찮은 부하였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발카모스는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모를 그의 밀고자와, 그 밀고자가 보호 중인 님프를 찾고 있었다.

리자드는 무어라 말문을 떼려 하였으나 한숨만 내쉬고 다시 입을 닫았다. 그의 시건방진 부하를 자신의 사적인 용무에 개입시켜도 될지 말지 고민하던 발카모스는 끝내 본인의 사적인 뒷사정을 털어놓았다.

“…라히무스 그자가 이곳에 있습니까?”

폴포포는 상관을 말을 듣고 처음에는 놀랐다가 이내 의외라는 듯 악동 같은 호기심을 내비쳤다.

“오랜만의 해후를 나누시려 하는 것은 아니실 테고….”

“그래서 찾아올 건가, 말 건가.”

남자가 싸늘하게 대꾸하자 폴포포 소령은 필사적으로 충성 자세를 취했다.

“명 받잡습니다! 중장님처럼 무식하게 젖통만 커다란 수컷 홍염 리자드! 매우 빠르게 찾아오겠습니다!”

사령관은 쏜살같이 막사 밖으로 달려 나가는 소령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었다.

“죽고 싶나, 저게 진짜….”

그렇게 남자의 산만하고 유능한 하관은 기대보다 빠르게 목표물을 찾아냈다. 녀석은 어이없게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의 격전지 근처에 붙잡혀 있었는데, 중대원들이 그 어느 곳보다 정성스럽게 총력을 기울이던 흉악범들의 소굴이었다. 용병 출신 수배범들의 저항이 제법 거세었으나, 애석하게도 머릿수에서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삼 중대는 항구 근처에서 한바탕 백병전을 치르고 그들의 손목과 발목에 아껴 두었던 구속 도구를 채워 주었다.

허름한 창고 안쪽. 이미 곤죽이 된 홍염룡 두 마리가 꽁꽁 묶여 간신히 숨만 붙은 채로 널브러져 있었다. 사령관은 그중 모르는 얼굴을 향하여 턱짓했다.

“풀어.”

중대원 중 하나가 곧장 상관의 지시를 따라 챠링고에게로 달려갔다.

구속에서 벗어난 여자는 바스라질 것 같은 몸을 가누어 자신을 구해 준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얼굴은 모르지만, 그의 가슴에 꽂혀 있는 홍염의 훈장만큼은 알아보았다.

“왜….”

그녀는 남에게 들리지 않을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의문을 표하였다.

이내 비틀거리는 몸을 세워 경례 자세를 취하려 하였으나,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발카모스가 혀를 찼다.

“인사는 필요 없다.”

그가 챠링고를 향해 관두라는 듯 손바닥을 펼쳐 보이자, 그녀는 다시금 무릎을 떨어뜨리며 힘겹게 주저앉았다.

단정한 구둣발 소리가 뚜벅뚜벅 라히무스에게로 다가왔다.

사령관은 사냥당한 짐승처럼 늘어져 있는 그를 내려다보면서 차갑게 빈정거렸다.

“꼴이 아주 볼만하군.”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는 동안 라히무스 역시 몽롱한 정신을 다잡기 위해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 또한 반감 가득한 시선을 들어 발카모스의 재수 없는 낯짝을 확인했다.

“편지를 봤으면…. 답장을 해야 할 거 아냐….”

한참을 짐짝처럼 묶여 있던 리자드의 입에서 낮은 신음과 원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발카모스는 작게 코웃음 쳤다. 그러고는 천천히 바지 주머니를 뒤지며 말했다.

“수신자에 아버지 이름을 잘못 써 놨더군.”

남자는 라히무스의 얼굴에 대고 그가 쓴 편지를 집어 던졌다. 봉투도 없이 꼬깃꼬깃하게 접힌 종잇조각이 사내의 콧등을 맞추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라히무스는 내가 그런 것까지 구분해야겠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비뚤게 대꾸했다.

“…니들 이름은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같이 생겨 먹었잖아.”

“그러니까 네가 멍청하다는 소리를 듣는 거다, 라히무스.”

남자는 스스럼없이 상대를 멸시하고 낮잡아 보았다. 시종일관 냉철하고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던 그가 고저 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불로수의 아들은 어디 있지.”

“몰라, 씨발….”

라히무스는 이를 부득 갈았다. 한참을 억눌려 있던 저음의 목소리가 더욱 낮게 바닥을 기었다. 난데없는 발카모스의 출현이 다행이라거나 고맙다는 생각은 들지 않고 굴욕적인 기분만이 앞섰다. 하지만 사령관도 딱히 그를 구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형편없군. 너야말로 일 처리를 이따위로 밖에 못 하나?”

“씹…. 이게 다 네가 굼떠서 그런 거잖아….”

쉰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던 리자드의 폐부에서 거친 기침이 일었다. 그러나 칼날이 휘저어 놓은 명치보다도 작게 찢어진 입가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더 신경 쓰였다. 말을 할 때마다 은은하게 쓰라린 점이 상당히 거슬렸다.

“호오.”

폴포포 소령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낯선 리자드의 전신을 훑었다. 너덜너덜해져서 바닥을 구르는 라히무스의 모습은 말 그대로 상처 입은 맹수 같았다. 그 아슬아슬 위태로운 수컷 홍염룡의 육감적인 몸뚱이가 암컷의 호기심을 끌었다.

“예상외로 쭉쭉빵빵하게 생겼지 말입니다?”

이상적인 신랑감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지만, 침대에서 데리고 놀기에 딱 좋은 인상. 그것이 라히무스를 처음 본 폴포포의 감상이었다. 소령의 멋진 상관도 남부럽지 않게 키가 훤칠한 편이었지만, 옆에 세워 놓으면 그보다도 더 우람할 것이 분명해 보이는 체격이었다.

“원래 그쪽 피는 다 이렇게 기골이 남달리 두껍고 우락부락합니까? 거기도?”

여자의 산만한 시선이 홍염룡들의 사이를 오갔다. 그녀는 광휘의 땅에서 태어난 반짝반짝한 리자드였다. 고개를 요리조리 흔들 때마다 어깨 위로 밝은 빛의 금발 머리가 찰랑거렸다.

발카모스는 소령의 음담패설은 완전히 무시한 채로 라히무스에 대한 비난을 이어 나갔다.

“별것도 아닌 조무래기 모리배들 농간에 이토록 무참하게 당할 수가 있나?”

“물론 제 눈엔 중장님이 조금 더 야릇한 매력이 있어 보이십니다! 은근해서 더 좋습니다!”

“매우 불명예스럽군. 이름값이 아깝다, 라히무스.”

“씹…. 다짜고짜 인챈트 잔뜩 붙은 칼로 맨몸을 쑤셔 대는데, 너라고 별수 있었을 것 같아…?”

리자드는 숨을 몰아쉬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온몸의 근육이 저절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신체의 균형을 해쳤고, 심장은 여전히 누군가 쥐고 주무르는 것같이 울렁거렸다.

“하….”

자꾸만 짐승 우는 소리처럼 나니아의 이름을 되뇌게 되는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이거나 빨리 풀어, 씨발….”

리자드는 팔을 뒤틀며 괴로워했다.

발카모스는 혀를 차며 소령을 향해 손짓했다. 열쇠는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다. 여자는 라히무스의 사지를 묶어 놓은 수족갑들에 꼬챙이 같은 열쇠들을 차례로 찔러 넣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목줄까지 벗겨 냈을 때 비로소 사족을 못 쓰게 만들던 기이한 감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리자드는 울긋불긋하게 자국이 남은 손목과 뻐근한 목둘레를 쓸어 보며 짜증스러워했다.

“이게 대체 뭐길래….”

그는 자신을 억압하던 물건들을 예사롭게 만져 보려다가 화들짝 손을 떼어 냈다. 온몸의 힘을 앗아 가는 듯한 그 나른한 감각이 순식간에 손끝을 타고 올라오는 듯했다. 께름칙하게 얼굴을 찌푸린 라히무스 옆에서 폴포포가 끼어들어 그것을 거침없이 되작댔다. 가볍게 살펴보는가 싶던 그녀가 조사 결과를 설명했다.

“이거 그겁니다. 요즘 조련사라는 것들이 만드는 마도구 말입니다.”

여자는 쇳덩이 안쪽에 음각되어 있는 울퉁불퉁한 글자를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상관에게 그 부분을 보여 주었다. 라히무스는 어쩐지 찌릿찌릿한 손끝을 실없이 주무르며 건물 벽에 기대어 앉았다.

건조한 목구멍이 바짝바짝 메말라 갔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시간을 가졌다.

빨리 헤어진 일행을 찾아야 했다. 인간은 잡아다 상품으로 선적시켜 버리는 곳이니 파코라면 몰라도 나니아는 생사가 안전할 것 같지만, 두 눈으로 직접 무사한 것을 보아야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정신이 또렷해질수록 속이 뒤집혔다.

“하, 씨발…. 뭐라도 좀 빌려줘.”

군수품을 요구하는 간절한 목소리에서 애달픈 기색이 느껴졌다.

남자는 맨몸이었고, 적군의 수와 상황은 파악되지 않았다.

여전히 거친 숨을 헐떡이는 먼지투성이의 야수와 다르게 사령관은 줄곧 숨조차 쉬지 않는 것처럼 가지런하고 반듯하게 서 있었다. 발카모스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고는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먼저 상황을 설명해.”

매정한 재촉이 라히무스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불로수의 아들은?”

모른다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된 까닭이 있을 것 아닌가. 남자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라히무스는 쓰린 가슴을 움켜쥐고 헐떡이면서 대꾸했다.

“…게롤린 영주.”

발카모스의 도움을 받겠다고 인정하는 듯한 그 대답과 함께 리자드는 자신의 싸구려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했다.

“영주가…. 영주가 데려갔을 가능성이 크다. 놈들이 그의 사주를 받았다고 했으니.”

“잘됐군. 어차피 들러야 하는 곳이다.”

발카모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필요한 정보를 얻어 낸 그는 손에 낀 장갑을 벗어 하관에게 넘겨주었다.

“여기서부터 나와 나의 대원들이 처리한다. 너는 빠져.”

사령관의 냉랭한 목소리가 라히무스의 귀에 일자로 꽂혀 들어왔다. 그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발카모스의 당초 계획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님프 구출 문제는 전적으로 라히무스에게 맡겨 두고, 자신은 그저 안전한 운반책 역할을 도우면서 눈도장이나 좀 찍어 두려 했을 뿐. 그런데 대관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라히무스, 나는 네가 영 못 미덥다.”

리자드는 서늘한 시선으로 눈을 내리깔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라히무스를 차갑게 응시하였다. 깔보는 것이 분명한 눈빛.

라히무스는 저 귀족적인 시선과 왕자스러운 낯짝이 지독히도 싫었다. 부러 입꼬리를 비뚤게 당겨 웃으며 반문했다.

“하, 그래서?”

“염황께선 너무 오래 기다리셨다.”

고작 과일 한 개 얻어먹자고 사활을 거는 노친네의 저열한 욕망을 발카모스의 혓바닥이 고급스럽게 포장하고 있었다. 남자는 그게 우스워서 빈정거렸다.

“하, 그새 불알이 쪼글쪼글해지기라도 하셨나 보지?”

이죽거리는 라히무스의 말에 발카모스의 붉은 눈동자가 돌연 살의를 띠었다. 남자는 순식간에 허리춤에 꽂혀 있던 칼을 빼내어 라히무스의 목에 겨누었다. 흐트러짐 없이 반듯했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지고 꼿꼿했던 자세도 무너져 내렸다.

“아버지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는 자제해라, 라히무스.”

남자가 이를 악물고 으르렁거렸다.

라히무스는 짧게 코웃음 쳤다. 고결한 척하는 그의 체통을 무너뜨리는 것이 즐거웠다. 리자드는 입에 고여 있던 것을 뱉었다. 타액이 섞인 핏물이 남자의 가슴에 달린 훈장을 더럽혔다.

곁에서 지켜보던 폴포포와 챠링고 모두가 경악하는 사이, 발카모스는 칼자루 끝에 달려 있던 가죽 태슬로 리자드의 얼굴을 거침없이 후려쳤다. 그러고는 일그러진 얼굴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더러운 잡종 새끼….”

선명한 채찍 자국으로 보건대 그의 칼은 장식 이상의 기능을 하는 듯했다. 라히무스는 이를 드러내며 삐죽하게 웃었다. 비록 얻어맞았지만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미 터질 대로 터진 얼굴에 그깟 상처 하나 더 생긴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 보였다. 그의 오만방자한 얼굴을 마주한 발카모스는 분을 삭이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보아도 여전하군.”

감정과 시간을 불필요하게 낭비했다는 생각과 함께 사령관은 금방 평정을 되찾았다. 벗어 놓은 장갑을 소령에게서 빼앗듯이 받아들고 더럽혀진 훈장을 대충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그것을 바닥에 내팽개치듯 버려두며 하관에게 명령을 남겼다.

“가지고 있는 검 중에서 가장 커다란 것으로 줘라. 무식한 괴물 새끼에게 어울리는 걸로.”

남자는 그 말을 마치고서 등을 돌렸다. 창고 밖으로 푸르스름하게 밝아지려는 하늘이 보였다. 저문 해가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 * *

님프는 아름다웠다. 나니아는 그 솔직하고 너절한 감상을 입에 머금고 망설였다. 어떻게 저런 옷이 아무에게나 어울리겠는가. 하녀는 똑같은 옷을 차려입은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다가 터무니없다는 듯 털어 냈다. 벨로즈는 나니아가 아는 그 어떤 여인들보다도 저 순백의 웨딩드레스가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신모는 성별의 통념에서조차 벗어나는 듯했다.

소녀는 벨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그에게 해 줄 말을 고르고 또 골랐다. 하지만 그것은 온통 모르는 말로 적혀 있는 책과 같아서 어떤 부분을 펼쳐 읽으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끝내 그녀는 이 상황에 적절한, 어쩌면 벨이 원하는 그런 대답을 찾는 대신, 본인이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왜 숨기셨어요?”

마음껏 경멸스러워 해도 좋다며 큰소리친 벨로즈의 얼굴은 그가 보인 만용과는 영 딴판인 색으로 물들어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허둥대는 제 꼴을 보시면서…. 즐거우셨던 건가요?”

“…….”

님프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또렷하게 응시해 오는 하녀의 눈길은 덤덤했고 어떤 질타나 원망의 기색 없이 무감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벨은 좀처럼 그녀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관절까지 올라오는 망사 장갑이 팔꿈치를 간지럽혔다. 님프는 장갑 낀 손을 멋쩍게 쥐락펴락하며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았어요.”

이상한 도마뱀들이 구박하고, 흙바닥 위에서 불편한 잠을 자면서,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는 꼬리뼈가 혹사당해도, 그래도 마냥 즐거웠다.

일행들은 잘 몰라주는 것 같지만, 벨로즈는 그들을 썩 좋아했다. 챠링고도, 파키케팔로도, 나니아도, 헤르도. 심지어는 라키바하프나 라히무스까지도. 뭐, 아주 약간 정도.

동료들과의 나날은 그가 텅 빈 인생에서 쌓아 올린 최초의 봉우리였다. 설령 밟으면 폭삭 무너져 내릴 위태로운 모래성이더라도, 님프는 그 추억이 제법 소중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면 했어.”

그것은 벨로즈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한 희구였다.

가짜 공주는 가시 돋친 장미꽃들로 둘러싸여 화려한 생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쭉정이 같은 삶 자체는 장밋빛 인생과 거리가 멀었다.

왕은 아름다운 님프를 손에 쥐고 싶어 했다. 동시에 그는 자식을 범하고 싶어 하는 미치광이 변태 성욕자였다. 그래서 그는 열매 속 아이를 자신의 수양딸로 키웠다. 앞에서는 그녀를 금지옥엽 키운 딸이라 소개하고 뒤에서는 포악무도하게 욕보이기를 즐겼다.

그들 사회에서 쌍둥이란 매우 불길한 부정의 산물이었으며 더군다나 왕에게는 남자가 필요 없었다. 그러니까 벨로즈는 여러모로, 그다지 필요한 자식은 아니었다. 쓸모없는 아들에게 주어진 소임은 무엇이었는가 하면, 자신의 누이가 양아버지를 비롯한 여럿의 남성들에게 간음 당하는 꼴을 지켜보는 일이었다.

“당신의 애정은 참 순수해요, 나니아. 좀처럼 나를 미워하지도 멀리하지도 못했죠.”

벌들은 꽃을 괴롭히기 바빴고, 꽃병 안의 꽃들은 서로에게 가시를 세웠다. 뾰족한 말들로 상대방을 찌르고 헐뜯고 승강이하는 것이 귀족들의 일상이었다. 옥신각신 아귀다툼하기 바쁜 그 환경 속에서, 남자가 배울 수 있는 감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폭력적이었다. 탐하고 싶어서 훔치고, 가지고 싶어서 뺏고, 자신을 새겨 놓기 위해 상처 입히는.

벨은 언제나 먼지 낀 유리창 너머로 타인을 바라보았다. 그 혼탁한 위선자들 사이에서는 정신이 망가지지 않고 버티는 것만으로도 가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솔직히 고향에서 도망친 라키바하프의 심정도 아주 조금쯤은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 나의 이름을 불러 줄 때면, 나는 내가 된 것 같아서 좋았어요.”

처음 벗어나 본 새장 밖은 온통 신기하고 재미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가 자라 온 왕성과는 많은 것들이 달랐다.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나로서 살 수 있어서 좋았어.”

광활한 토지 위에서, 그가 모르는 꽃들이 끈질기게 피어나고 있었다. 님프는 그 너른 땅에 깃든 투박한 생명력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고 투명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을 보면 재미있었다. 사람들이 울고 웃고 화를 내는 것이 좋았다. 벨로즈는 자신에게 없는 다채로운 감정들에 대해 하나둘씩 알아 나갈 때마다 즐거웠다.

그리고 나니아는, 그 관념적인 감정들의 윤곽을 또렷하게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

“하, 하지만 아시잖아요. 저는 공주님의 성함도 잘 몰랐어요….”

그녀가 가진 감정의 색채는 대체로 우울하지만 따뜻한 빛을 띠었다.

“처음부터 제게 벨 님은 그냥, 그냥…. 벨 님이셨어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아, 그래 이렇게.

본인도 누구 못지않게 우울한 성격이면서, 그녀는 남이 우울해하는 기색을 보이면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고는 작고 하찮은 위로로 상대방의 걱정을 덜어 주려 노력하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거예요…. 공주님이 사실 공주님이 아니었다고 해도, 남, 남자였다는 걸 알았더라도.”

사랑하고, 질투하고, 동경하고. 당황하고, 슬퍼하고, 부끄러워하다가, 또 아주 가끔 기뻐하는. 소녀의 노골적이고 투명한 속내를 들여다보고 있자면, 그 역력한 감정이 자신에게까지 들불처럼 번져 오는 듯했다.

님프는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참으며 부러 뻔뻔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나니아는, 마음이 잘 변하는 편인데요.”

“네에…. 네?”

“한 달에 한 번씩, 좋아하는 남자를 바꾸고 있잖아요.”

“그, 그런 거 아닌데요?”

“변덕쟁이 뷔셀.”

“아니….”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나니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 선명한 부끄러움을 내려다보는 님프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쳐졌다. 쿡쿡 소리 내어 웃는 그를 보고 나니아는 그제야 또다시 님프의 장난에 말려들었음을 깨달았다. 여자는 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님프의 말은, 반쯤은 진담이었다.

그녀는 사랑이 참 쉽다. 그렇다면 나도 사랑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남자는 전부터 그 감정이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나니아에게 입을 맞추어 보았다.

“……!”

님프는 그녀가 얼떨떨해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입술을 살짝 빨아 보았다. 그리고 다시 짓궂게 웃으며 한발 물러났다.

“…벨로즈 님!”

소녀는 새빨개져서 그의 이름을 외쳤다.

유리구슬처럼 투명한 얼굴에 또다시 얼룩덜룩한 감정들이 번져 갔다. 벨은 소리 내어 크게 웃었다. 그는 자신의 충동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때, 그들이 어떤 처지인지 자각시켜 주기라도 하듯, 어디선가 커다란 굉음이 들려 왔다. 화약이 터지고 성벽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탁월풍의 방향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 * *

발카모스는 수습을 마친 중대원들을 이끌고 산을 올랐다. 거침없이 저돌적으로 진격해 나가는 삼 중대의 선봉에 라히무스가 있었다. 그는 성에 차지 않는 칼을 휘둘러 가며 천둥 같은 검기로 적진을 파고들었다.

“포화병, 앞으로!”

“앞으로!”

영문 모를 기습을 맞닥뜨린 벨테그위의 병사들은 긴급히 중화기를 꺼내어 맞섰으나, 작정하고 육박해 오는 리자드들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마도구도 조금 사용하는 듯했지만, 본토에서 건너온 장병들을 상대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었다.

곳곳에서 폭발을 일으키는 돌들이 던져졌다. 헌병들은 순식간에 벽을 허물고 게롤린 성 안을 점령해 나갔다.

“출구는 모두 봉쇄한다! 영주를 찾을 때까지 한 놈도 살아서 나가게 하지 마라!”

“출구, 봉쇄!”

“출구를 봉쇄하라!”

라히무스는 바닥에서 하늘을 향하여 일자로 검을 휘둘렀다. 번쩍이는 전광이 바닥을 긁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검기가 스친 인간들은 모두 저릿저릿한 통구이가 되어 쓰러졌다. 그 망할 ‘가능한 한 적게 죽이기’ 제한이 따르지 않으니 일이 이렇게 쉬웠다.

“젠장, 그만 좀 부숴 먹으라고 해!”

라히무스는 사령관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붕괴해 가는 성채를 바라보며 사내는 초조해졌다. 무너져 내리는 건물 파편이 사람을 구분해서 떨어지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연약한 소녀가 저 쑥대밭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어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나니아는 주먹만 한 돌 한 덩이에도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남자는 이제 저항하는 근위병들을 상대하는 대신 날아오는 포탄을 피하며 성 안을 수색하기에 바빴다. 그는 발카모스와 달리 벨테그위의 행방과 국제법의 수호 문제 따위에는 관심 없었다.

오로지 이곳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그의 여자를 구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 * *

파키케팔로는 정신이 조금 혼미했다.

그는 동족들에 의해 무사히 구출되었으나, 별달리 보살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직도 환부가 욱신거려서 마른 흙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혹시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만약 이게 정말 꿈이라면 대체 어디서부터였을까. 몽롱한 머리를 굴려 현실과 꿈의 경계를 찾았다.

비바람 맞으며 말을 달릴 때부터? 쏟아지는 화살에 구멍이 송송 뚫렸을 때부터?

카펫 위에 납작 엎드려 있던 벨로즈 님의 잔상도 언뜻 떠올랐다. 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로 범벅되어 처절하게 울부짖던 그의 얼굴이. 헛것을 보았나 싶을 정도로 아주 흐릿한 기억이었다.

‘그나저나 내가 아직 게롤린에 있는 게 맞지…?’

무엇보다도 가장 믿기지 않는 광경은 허다한 군형 리자드들이 일사불란하게 주변을 뛰어다니는 지금의 상황이었다. 파키케팔로는 자신의 두 눈을 몇 번이나 의심했다.

“파코!”

그리고 뒤이어, 이제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믿기 힘든 광경이 닥쳐왔다. 화약 냄새가 맴돌고 돌가루가 흩날리는 폐허 속. 어딘지 쩔뚝거리는 듯한 새하얀 웨딩드레스 차림의 벨로즈가 보였다. 신부는 신고 있던 구두도 던져 버리고 파키케팔로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거는….”

님프는 쏟아지는 모든 햇빛을 온몸으로 반사해 내며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거는, 확실히 꿈이다….”

파키케팔로는 그 비현실적으로 예쁜 님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꿈결은 점점 가까이 다가왔으며, 심지어 말도 했다.

“무사했군요, 파코.”

벨로즈가 웃으며 그의 양 뺨에 손을 올렸다.

“벨…로즈 님.”

파키케팔로는 멍한 얼굴로 님프를 올려다보다가 흐리멍덩한 눈빛과 어울리는 멍청한 소리를 지껄였다.

“결혼식…. 나는 왜…. 초대 안 해 줬어요…?”

님프는 마치 혼자서만 다른 세상에 있다가 온 것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그와 키스를 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었다.

“왁!”

파키케팔로는 님프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고 황급히 소리를 질렀다.

“뭐, 뭔데?!”

정말로 꿈인가? 아니, 도리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의 입술에서는 거짓처럼 선명한 분 맛이 느껴졌다.

“웨딩드레스 입고선 미쳐 버린 거냐고!?”

아픈 것도 잊고 난리를 피우는 파키케팔로를 내려다보며 님프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좀 다른가?”

그러더니 무언가 확인해 보는 것처럼 자기 입술을 톡톡 두드리는 것이었다.

“악! 내 첫 키스!”

바닥을 구르며 괴로워하는 파키케팔로 앞에서 벨로즈는 다음 상대를 찾았다.

“챠링고는 어딨지?”

인간들의 필사적인 항전은 가냘프게 끝이 났다. 벨테그위는 끝내 붙잡혔고, 이제부터 상협은 또 다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어딜, 이, 일국의 지존에게 이런 무엄한…!”

폴포포 소령은 친절하게 그의 거취 문제와 사후 사안 처리에 대한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남자는 사잇법 위반 공모 혐의로 체포되어 철저히 서대륙 국제법 관점에서 조사를 받게 될 예정이라는, 그로서는 말도 안 되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벨테그위는 이후 배를 띄울 때까지 본인이 그렇게 사람 잡아 넣기를 즐겨 하던 감옥에 친히 구류되기로 하였다.

사령관은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벨테그위의 등을 향해 턱짓하며 명령을 내렸다.

“체격과 체형이 비슷한 시신 한 구 찾아 놓도록. 얼굴은 어차피 짓이겨질 터이니 상관없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리자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본격적인 일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벨테그위 본인의 말대로 일국의 국왕을 하나 납치해 가는 것이니 뒤처리가 면밀해야 했다. 본토 정보에 노출된 인간들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나고 드는 인간들이 없도록 영지를 봉쇄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뒤늦게 암악술사를 구해 오자니 시간이 많이 지체될 것 같은 데다 절대적인 수도 너무 많습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소령의 생각에 사령관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우선 인접국과의 전쟁으로 위장하는 것이 가장 좋을 듯했다. 마침 국경선 근처이니. 그다음 남아 있는 선택지는 두 개였다. 남김없이 몰살시키거나, 살려서 본토로 호송해 가거나. 아마 협회는 후자를 더 좋아할 터였다. 무엇하나 녹록지 않을 것 같은 예감에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느 쪽이 되었든 지금보다 훨씬 많은 증원 병력과 물자가 필요하다는 사실 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사령관은 항구로 돌아가면 우우룡 날개부터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당분간 아주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발카모스는 고개를 돌려 이곳에 찾아온 또 하나의 이유를 찾았다.

저 멀리서 빌려준 검도 팽개쳐 놓고 웬 여자 하나를 품에 안고 돌아오는 라히무스가 보였다. 그녀가 누구인지에 대한 관심은 그리 길게 가지 않았다. 그 여자보다는 라히무스의 곁에 선 다른 사람이 눈에 띄었던 탓이다. 대체 왜 저런 악취미적인 옷을 입고 있는지 모를, 어느 모로 보나 존재감이 상당한 미인이었다. 발카모스는 그가 자신이 찾고 있는 불로수의 후계자임을 확신했다.

첫 키스의 낭만을 잃고 울부짖는 리자드 청년과 그의 입술을 빼앗은 어여쁜 수컷 님프 곁으로 낯선 홍염룡 한 마리가 다가왔다.

반듯한 자세와 멀끔한 이목구비가 단연 시선을 끄는 사내였다. 특히나 그가 머리 위로 만드는 그늘은 무시하기 힘들었다.

“…….”

님프는 갸우뚱한 시선으로 발카모스를 기울여 보았다. 모르는 남자가 대뜸 내려다보니 썩 유쾌하지 못한 기분이었는데, 이어지는 그의 행동에 비하면 내려다보는 것쯤은 별것도 아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남자는 벨로즈의 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경의를 표하는가 싶더니, 흰 망사 장갑을 낀 님프의 손등 위에다 경건히 입을 맞추었다.

“염황의 이황자, 발카모스 바포르 마그라타. 불로수의 아드님께 인사 올립니다.”

님프는 파키케팔로가 자신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경악스러워하며 손을 물렀다. 벨로즈는 다소 삐딱한 언사로 껄끄럽다는 듯이 대꾸했다.

“초면인 사내에게 받고 싶은 인사는 아니군요.”

그가 누군지, 왜 자신에게 인사를 올리는지 의문이었다.

“뭐어? 그럼 나는? 나는 어떻겠어?”

원통한 듯 따져 묻던 파키케팔로가 순간 고장 난 것처럼 대거리를 멈추었다. 낯선 사내의 이름에서 뒤늦게 기시감을 느낀 탓이었다.

바포르 마그라타. 남자가 누구인지 이해한 녀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파키케팔로는 등허리가 쑤시는 것도 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리자드식 경례 자세를 취했다.

경계하는 벨로즈를 보고 싱겁게 미소 짓던 발카모스는, 마찬가지로 무릎 꿇은 자세에서 일어나 이역만리에서 마주한 조국의 백성을 맞대했다.

그는 턱을 치켜들고 파들거리는 파키케팔로의 가슴 앞으로 천천히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투욱, 쇄골에 붙어 있던 녀석의 검지를 아래쪽으로 밀어 주었다. 가슴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들이 서로 닿도록.

“엄지 빼곤 붙여야지.”

어린 리자드는 높으신 분에 대한 경례가 익숙지 않았다. 꼬리는 좀처럼 침착하질 못하고 꿈틀거렸다. 녀석도 자기 자세가 엉성한 줄 아는지 귓불을 붉게 물들였다.

* * *

헌병들은 쓸 만한 건물을 차지하고 그곳에 주둔하였다. 범죄의 경중을 따져 묻는 수사관들과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혐의자들의 변론으로 임시 취조실은 밤늦게까지 시끌시끌했다. 그들의 입씨름을 밝히기 위한 등불이 꺼질 줄을 몰랐다.

전세는 압도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상자가 없지는 않았다. 군의관들은 진료소 공간 안을 바쁘게 움직였다. 나니아도 그 틈에서 엉겁결에 일을 도왔다. 정확히는 그들에게 지원받은 의약품으로 파키케팔로를 비롯한 일행들을 보살폈다.

“이, 이거를…. 이걸로 사람 살을 꿰매라구요?”

나니아가 바늘을 들고 리자드 청년의 질긴 가죽 앞에서 허둥대는 사이, 벨로즈는 기어코 챠링고의 입술까지 쟁취했다. 그는 여전히 자기 혼자 다른 세상을 살고 있는 듯했다. 쇠약한 몸으로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것이 고작인 챠링고에게 벨의 기습 키스는 피할 노력조차 기울이고 싶지 않은 이상한 짓거리였다.

“뭡니까?”

잠깐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마저도 곧 심상해졌다. 마치 조각상에 입술을 부딪힌 것처럼 덤덤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녀의 반응은 누구누구들과는 다르게 무척 재미없었다.

챠링고에게 흥미를 잃은 님프는 또다시 자기 입술을 싱겁게 두드려 보다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인물을 쳐다보았다.

“…….”

남자는 그와 눈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질색했다.

“…뭐야.”

험상궂게 인상을 쓰는 사내를 보며 벨로즈도 지지 않고 눈살을 찌푸렸다.

“…불쾌해.”

그러고는 끔찍하다는 듯 남자와 멀리 떨어진 자리로 옮겨 갔다.

사람 얼굴을 보고 대뜸 불쾌하다니. 남겨진 라히무스는 어이없어하며 눈썹을 좁혔다. 님프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관심 없었다. 그가 관심을 받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었다.

“나냐.”

그녀는 지금 자기가 한 짓을 도저히 믿을 수 없어 하며 파키케팔로의 상처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실을 잘라 내는 중이었다. 남자가 나니아의 옷 끝을 잡아당기며 칭얼거렸다.

“나도 아파.”

나니아는 아프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약간 측은해 보이는 것 외에는 특별히 아파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에 붕대 갈아 드렸잖아요…?”

남다르게 부상 상태가 심각했던 그에 대한 처치는 진작에 군의관 손으로 모두 끝이 난 상황이었다. 냉정하게 말해서 나니아는 라히무스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아파.”

리자드는 슬금슬금 나니아의 눈치를 살피더니, 그 말밖에 모르는 것처럼 똑같은 투정을 반복했다. 소녀는 난감한 기분으로 사내의 몸을 훑어보았다.

그는 상처투성이 복부에 붕대를 둘둘 감고 있었다. 새삼 급소만 골라 다친 라히무스를 보니 나니아는 속상하다 못해 화가 났다. 그를 해했던 자들은 대체 얼마나 극악무도한 놈들이었을까. 또 라히무스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플 만도 하지.’

나니아는 작게 혀를 찼다. 복부에서 가슴을 타고 올라온 눈길이 남자의 얼굴에 당도했다. 그녀는 살짝 불퉁해져 있는 라히무스의 주둥이를 알아보았다. 신경 써 줬으면 하는 마음을 알아차린 나니아의 입에서 애틋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야차 같은 형상으로 나타나 정신없이 자신을 부둥켜안던 사내는 온데간데없고, 덩칫값 못하는 떼쟁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나니아는 손에 든 물건을 내려놓고 불쌍한 척하는 사내의 뺨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혹시나 쓰라린 곳을 건드리진 않을까 조심하면서.

“많이 아파요?”

얼마나 더 많은 위험이 그의 앞길에 도사리고 있는 걸까. 소녀는 남몰래 한탄했다. 사실은 아직도 폭발음의 공포가 귓가에 선연했다. 남자는 그때 나니아를 발견하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달려와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넋이 나간 얼굴로 자신의 상태를 이리저리 더듬어 살피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또다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터질 것처럼 뛰는 심장으로 터질 것처럼 서로를 끌어안았다. 하염없이 나니아의 이름을 외는 그의 목소리에서 감추기 힘든 떨림을 느꼈다. 상처투성이 얼굴에 울음이 깊게 배어 있었다. 소녀는 라히무스의 목을 끌어안고 도리어 그를 안심시키듯 이곳저곳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자신에 대한 극렬한 연정으로 이성을 잃은 사내의 모습은, 이런 마음 드는 것이 그에게는 미안할 정도로, 무척 아찔했다. 나니아는 그때도 지금도 조금씩 현실감이 부족한 기분이 들었다.

소녀는 사내의 너덜너덜한 뺨을 어루만지며 지그시 물었다. 그녀의 예쁜 말씨는 젖먹이 아기를 달래는 말처럼 보드라웠다.

“내가 어떻게 해 주면 좋아?”

무엇이든 들어줄 것처럼 속살거리는 말에, 사내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대꾸했다.

“…호 해 줘.”

피딱지가 곳곳에 뭉쳐 앉은 얼굴에 옅은 홍조가 번졌다. 낮은 목소리에서도 열기가 느껴졌다.

나니아는 못 말리겠다는 듯 옅게 웃으며 그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이리 와요.”

평소 같았으면 쓸데없이 애교부리지 말라며 핀잔을 주었을 테지만, 얼룩덜룩한 그의 얼굴에 마음이 약해졌다.

소녀는 사내를 비어 있는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 배분받은 보급품 가방을 열어 약을 꺼냈다. 타박상과 찰과상에 수시로 도포하라고 안내받은 외용약이었다. 나니아는 끈끈한 고형의 약품을 새끼손가락에 묻혀서 남자의 얼굴 곳곳에 톡톡 두드렸다. 남자는 고분고분 턱을 들어 올린 채 그녀의 손길을 받아들였다. 가늘게 뜬 눈과 헤실거리는 입꼬리를 보아 기분이 썩 좋은 듯했다.

뱃가죽이 뚫렸던 것에 비하면 이 정도쯤은 아무렇지도 않을 텐데, 하잘것없는 생채기를 보살펴 주길 바라는 모습이 귀여웠다.

“많이 아팠어?”

소녀의 여리고 순한 목소리가 라히무스의 귀에는 자장가처럼 느껴졌다.

“우리 애기 누가 이렇게 괴롭혔어. 응?”

다정하게 묻는 말에 사내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입술이 멍청하게 벌어지고 입꼬리는 히죽 올라갔다. 그는 사람 말로 대답하는 대신 짐승처럼 골골거렸다. 목 안쪽을 울리는 그 소리는 표범 같은 두께로 고양이 같은 리듬을 가졌다.

여자도 딱히 대답을 바라면서 하는 말은 아닌 듯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가엾어라.”

나지막이 쏟아지는 달콤한 잔말들에 남자는 넋을 놓고 해롱거렸다. 한순간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예쁘다.’

근심 가득한 보랏빛 눈동자에 오직 자신만이 담겼다.

“나냐….”

“왜애.”

“나냐….”

소녀는 남자가 이름을 불러 놓고 별말이 없는 데에서 응수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대신 걱정스럽다는 듯 눈썹을 휘며 중얼거렸다.

“잘생긴 얼굴에 흉 지면 어떡해….”

그녀의 작은 새끼손가락이 라히무스의 얼굴 곳곳을 누볐다. 이마, 눈썹, 뺨, 턱, 차근차근 그림을 그리듯 더듬는 손길에 사내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언제나 자신을 밀어내고 도망치기 바빴던 그녀가 오늘은 마치 다른 사람인 것만 같았다. 아니면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걸까.

애정 가득한 손길에 흥분으로 호흡이 거칠어졌다. 남자는 엉덩이를 들썩거리고 싶은 것을 참고 양 발목만 괜스레 까닥거렸다. 두꺼운 허벅지가 철없이 꿈틀거렸다.

“나냐….”

이번에도 또 쓸데없이 이름을 부르는 것인 줄 알고, 소녀는 말없이 눈썹만 들어 올렸다. 남자는 얼이 빠진 얼굴로 초조하게 웅얼거렸다.

“뽀뽀하고 싶어….”

주인이 장난감을 던져 주길 바라는 강아지처럼 끙끙대는 사내를 보고 나니아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수줍게 미소 지으며 ‘여기서는 안 돼.’라고 말하려던 차에, 누군가 그들 옆으로 다가왔다.

“한가한 것 같은데 얘기 좀 하지.”

서늘하고 묵직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나니아는 얼결에 고개를 들어 낯선 리자드를 발견했다. 그러고는 곧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버리고 말았다.

“한가해 보여?”

등 뒤에서 몹시 짜증스러워하는 라히무스의 대꾸가 들렸다. 한창 좋은 때를 방해받은 그는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오늘 하루 이토록 바쁘고 분주했던 때가 또 없는데, 감히 네가 지금 여기서 이렇게 이런 식으로 훼방을 놓아?

단잠에서 억지로 깨어난 그의 눈빛에 뾰족뾰족 반항적인 가시가 돋아났다.

발카모스는 무감한 시선으로 라히무스를 내려다보다가 의자 아래로 흔들리는 꼬리 끝을 향해 턱짓했다.

“그건 확실히 바쁜 것 같군.”

자각 없이 씰룩대는 도마뱀의 꼬리가 여자에게 예쁨받을 적과 똑같이 관성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금 관광이라도 왔나?”

발카모스는 언뜻 괘씸하다는 투로 가벼운 비난을 덧붙였다. 일하라고 보내 놓은 곳에서 암컷에게 꼬리나 치고 있다니. 단추 한 개 간신히 잠가 놓은 옷처럼 게게 풀려서 헤죽거리는 꼴이 차마 눈 뜨고 봐 주기 힘들 정도였다.

한편 라히무스는 갑자기 끼어든 사령관보다도 표정을 알 수 없는 나니아의 뒷모습에 더 신경이 쓰였다. 흘긋 살펴본 그녀의 시선이 아직도 녀석에게 붙박여 있었다. 다시 자신을 향하지 않는 그녀의 눈길이 왜 저를 불안하게 만드는 것인지 깨닫기도 전에, 남자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라히무스의 육중한 몸이 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기어코 의심스러운 시선을 차단했다.

“얘기해, 짧게.”

그는 퉁명스러우면서도 초조한 투로 대꾸했다. 놈을 빨리 치워 버리기 위해서라도 어서 이 대화를 끝내고 싶었다.

사령관은 단단히 팔짱 낀 자세로 본론을 이야기했다.

“탈타르노 반도로 향하는 배에 태워 주겠다. 속히 건너가서 임무를 완수하라.”

“배를 움직여 줄 리자드들은 네가 다 잡아가는 게 아니었나?”

상협의 등장으로 게롤린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게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라히무스가 그 점을 지적하자, 옆에서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천것이 황자님께 감히 ‘너’라니.

하지만 정작 황자님께서는 크게 개의치 않으시는 듯했다.

“코르테알 상단이 운용하는 님프의 배다. 규모는 작지만 신원이 확실하지.”

발카모스는 그들도 사정을 알고 흔쾌히 수락하더라는 말을 작게 덧붙였다. 같은 님프라면 여정의 목적이자 중심인 벨로즈에게 호의적인 아군이 되어 줄 터였다. 감히 기대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남쪽에서부터 해안선을 훑고 올라와 게롤린에 당도하였다. 정박지에서 동풍이 불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 조사 중인 혐의와는 무관했다.

님프들이 유멘타 장사에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들은 합법적이고 순수한 상품 거래만을 목적으로 동대륙을 찾았다. 코르테알이 빠르게 수사망을 벗어날 수 있었던 까닭도 그에 있었다. 발카모스의 직접적인 입김과 관습적인 통념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다.

“물론 그들도 자선 사업가는 아니다. 상단주 자신도 보호받기를 원하는 눈치더군.”

“보호? 무엇으로부터?”

“선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소동과 위험으로부터.”

“…그 배를 정말 믿고 타도 괜찮은 건가?”

본인의 배에서 경호를 받아야 할 이유란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거치는 곳마다 난리를 겪었더니 문제의 소지가 있을 만한 배라면 이쪽에서 먼저 사절하고 싶었다. 하지만 떨떠름한 라히무스와 다르게 발카모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하였다.

“본디 장사꾼들은 누가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몰라 불안한 족속들이지.”

바다 위에서 상인의 재산을 위협하는 존재는 해적선뿐만이 아니었다. 큰돈을 만지는 사람 곁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기 마련이라, 해상에는 상선 내부의 적과 외부의 적을 모두 신경 써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랐다. 이를테면 상인들과 선원들 사이에서 마찰이 빚어질 수도 있었고, 여차하면 하수인들이 주인을 살해하고 재물을 갈취하는 일도 생겼다. 뱃머리를 돌릴 줄 아는 사람이 작정하고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아무리 명실상부한 배의 주인이라 할지라도 꼼짝없이 당하는 수밖에 없었다.

선내에서의 정치 상황을 현명하게 다스리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권능이 필요했다. 돈과 무력. 아랫사람들이 딴마음을 품지 않도록 충분한 임금을 지급하는 동시에, 물리적인 힘의 권력도 갖추어 두는 편이 좋았다.

자세한 소명은 코르테알에게 직접 전해 들으라는 명령을 마지막으로 사령관은 이야기를 끝마쳤다. 뒤이어 벨로즈에게로 향한 그가 멀어져 가는 그 순간까지, 나니아는 발카모스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저 새끼 왜 그렇게 쳐다봐?”

나니아는 귓가에 꽂히는 날카롭고 폭압적인 추궁에 머리를 번쩍 들었다.

고개 들어 마주한 라히무스의 얼굴이 무섭게 그늘져 있었다. 나니아는 멋쩍어하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크, 너무 노골적으로 구경했나….’

발카모스 본인은 이쪽에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기에 마음 놓고 쳐다보았더니만, 라히무스 쪽에서 노려보고 있을 줄이야. 나니아는 소극적으로 그의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당신이 사는 곳의 왕자님…. 이라고 들어서….”

신기해서 쳐다보았을 뿐 별 뜻은 없었노라고 변명하는 말에도 라히무스는 미덥잖은 마음을 좀처럼 내려놓지 못했다.

왕자님. 그 말은 사내로 하여금 병적인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원래도 별로 안 좋아했는데, 나니아를 만난 뒤로는 더욱 끔찍하게 싫어졌다.

붕대를 둘둘 감아 놓은 자신의 어깨는 엉망진창으로 전장을 굴러 데이고 찔린 자국으로 흉물스럽게 더럽혀져 있었다. 반면 견실하고 진중한 정복 차림의 발카모스는 유리 덮개를 씌워 기른 온실 속 화초처럼 우아하고 번듯했다.

그 먼지 한 톨 허락할 것 같지 않은 깔끔한 품격과 자신의 폐품 같은 몸뚱이 사이에서 라히무스는 새삼 처절할 정도로 극명한 차이를 느꼈다. 눈꼴시려 한 적은 있어도 질투해 본 적은 없었던 이 황자의 고상한 모습이 암담한 패배감을 불러일으켰다.

발카모스의 정갈한 외견 위로 불현듯 라키바하프의 반반한 낯짝이 떠올랐다. 사실은 그 남자야말로 들끓는 열등감의 원인이자 이 답답한 심경의 잔재였다. 마치 첫눈에 반하기라도 한 듯이 발카모스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나니아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리라.

사내는 가슴이 먹먹하고 괴로워졌다. 그래서 자신의 너절한 몸뚱이 위로 벗어 두었던 옷을 대충 꿰어 입고 여자를 번쩍 들어 올렸다.

“왜, 왜 그래, 갑자기….”

그녀는 라히무스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무어라 더 말을 붙여 보았지만 사내는 무서우리만치 대꾸가 없었다. 납치된 소녀는 주인을 잃은 인어의 술통으로 끌려가 아무도 없는 방 안의 침대 위로 던져졌다. 이제 막 솜털이 돋아나는가 싶던 보송보송한 봄볕 기운을 느낄 새도 없이, 차가운 북풍한설이 몰아닥쳤다.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해….”

그녀는 이전에 헤르를 상대로 근거 없는 적의를 불태우던 라히무스를 기억해 내고는, 남자가 갑자기 뿔이 난 이유를 찾았다.

“내가 다른 남자 쳐다봐서 화났어요?”

“…….”

대꾸 없이 콧등을 찡그리는 리자드를 보고 나니아는 정답을 확신했다. 그러고 나니 매섭게 얼어붙은 라히무스의 험상궂은 얼굴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그랬구나. 응? 싫었구나.”

소녀는 먹잇감을 위협하듯 자신의 몸 위로 올라탄 맹수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사내는 사소한 일에도 그것이 다른 수컷과 얽힌 일이라면 쉽게 흥분했다. 심지어는 파키케팔로와 친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도 종종 안달을 내곤 했으니.

그 집착적인 소유욕이 나니아는 싫지 않았다. 남자의 마음속에 독점하고 싶은 단 하나로 자리매김한 듯하여 오히려 기꺼운 충족감마저 들었다.

“속상하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미안해.”

질투심이 많은 그가 귀여웠다.

“이제 안 그럴게…. 화 풀어.”

원하는 말만 쏙쏙 골라 긁어 주는데도 라히무스는 어딘지 가렵고 불길한 기분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진짜 속내는 감춰 두고 당장 듣기 좋은 말들만 늘어놓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까지 들었으니 더는 투정을 부릴 수가 없었다.

라히무스의 불신은 어느 정도 근거가 있는 오해였던 것이, 실제로 나니아에게는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한 생각이 남아 있었다. 라히무스가 발카모스의 얼굴에 라키바하프를 겹쳐 보는 동안, 나니아는 도리어 라히무스를 그의 얼굴에 빗대어 보고 있었다. 낯선 리자드는 분명 그녀의 리자드와 상당히 닮아 있었던 것이었다.

비슷한 듯싶다가도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그 미남자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오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라히무스에게서 야성을 빼앗고 귀족적인 정숙함과 엄격함을 더해서 완성한 듯한 얼굴. 그것은 마치 똑같은 피조물을 만들어 내려던 조물주가 변덕을 부린 결과물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 나니아는 파키케팔로와 챠링고에게도 남매냐고 물어보는 실수를 범한 적이 있기에, 감히 비슷한 실례를 저지를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무엇보다 그는 황제의 둘째 아들이라지 않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혈연관계라고 보기 힘들었다. 어찌 보면 머리 붉은 리자드들 모두가 길쭉길쭉하고 눈매가 사나운 것이, 대충 다들 그렇게 생긴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뺨을 어루만지던 손끝이 턱을 지나 목 뒤를 다정하게 주물러 주었다.

“내가 좋구나, 라히무스는?”

소녀가 배시시 웃으면서 물었다. 맹수는 눈이 가늘어지면서 또다시 고로롱거리는 소리를 냈다. 지그시 마주치는 두 눈에 야릇한 정염이 번졌다.

“내가 다른 남자한테 한눈파는 것 같아서, 그래서 질투한 거지?”

사내는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 같기도 하고 모르는 것 같기도 한 나니아의 야속한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두 눈을 내리깔면서 항복했다. 소녀는 리자드의 목에 양팔을 두르고 그를 끌어당겼다.

“나도 그 마음 뭔지 알아….”

겁먹은 눈송이는 햇볕 없이도 따뜻한 어둠 안에서 녹아내렸다. 라히무스는 포근한 목소리만큼이나 아늑한 손길에 어스름한 강박감을 내려놓았다. 아무도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공간에서, 그는 결국 소녀의 입술을 가졌다.

적막한 공간에 이불이 스치는 소리와 축축한 숨소리만이 머물렀다. 나니아는 가만히 눈을 감고 느릿한 박자로 자신을 물었다 놓았다 하는 라히무스의 긴장감을 느꼈다. 허덕이는 숨소리가 예민한 살갗 위로 뜨겁게 흩어졌다.

남자는 조금 더 갈급하게 입을 맞추며 소녀의 작은 손에 깍지를 꼈다. 자신이 끼워 놓은 반지가 만져져서 어쩐지 더욱 애가 탔다. 입술이 스칠 듯 말 듯 한 거리로 가깝고도 멀게 물러났을 때, 나니아는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붉고 그윽한 눈동자가 부끄러운 빛으로 자신을 원하고 있었다. 죽음 문턱에 다녀온 사내가 오랜만에 사랑하는 암컷과 무엇을 나누고 싶은지 너무도 명백했다.

소녀는 조심스레 남자의 웃옷을 벗길 의도로 말아 올렸다. 그리고 발견했다. 붉은 피로 물들어 있는 붕대를.

“어떡해, 상처가 터졌나 봐요!”

여자는 깜짝 놀라 소란을 피웠다.

“괜찮….”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아 하는 부상자와 다르게 그녀는 곧 죽을 사람처럼 그를 대했다. 섹스의 문턱에서 끌어내려진 사내가 좌절한 표정으로 침대에 눕혀지는 사이, 나니아는 깨끗한 붕대를 찾아오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정말로 괜찮다니까.”

사내는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서 떠나지 못하게 막았다.

“나, 그… 우리 그냥, 하던 거 계속하면 안 돼?”

남자가 수치스러운 것도 잊고 다급하게 물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초조했다. 하지만 여자는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

“안 돼요, 아픈 사람은 안정을 취해야죠!”

내가 쾌락에 눈이 멀어 몹쓸 짓을 저지를 뻔했다는 둥, 중상을 입은 사람을 두고 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둥, 나니아가 자신을 두고 자학을 하는 사이, 리자드는 눈을 질끈 감고 바지 안을 정리했다. 부푼 중심이 배 쪽을 향했다.

여자가 붕대를 풀고 다친 자리를 확인하고 싶어 하자 라히무스는 그녀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하복부 위로 얹었다. 그러고는 안달 나서 낑낑거리는 목소리로 신음했다.

“하…. 제발, 나냐…. 나 거기 말고, 여기가 너무 아파….”

야릇하게 입술을 핥는 혀가 소녀의 음심을 보챘다.

“그러니까, 돌봐 줘…. 응?”

나니아는 손 아래 잡히는 묵직한 양감에 몸을 흠칫 떨었다. 그러고는 곧 새빨갛게 얼굴을 달구었다. 저승으로 건너는 다리에서 그녀를 건져오기라도 하듯 절박하게 굴던 사내는, 안전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자마자 이제 딴생각이 드는 모양이었다.

“우리…. 못 했잖아.”

리자드는 여자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며 졸랐다. 뜨듯한 호흡이 손금을 간지럽혔다.

“매일 하다가, 하루라도 네가 없으니까…. 나, 너무….”

남자는 말을 하다 말고 먹먹히 입술을 핥았다. 너에 대한 금단 증상을 느끼고 있노라고 더듬더듬 고백하는 얼굴 위로 붉은 홍조가 번졌다. 그 갈급한 욕정의 온도가 지나치게 높아서 덩달아 숨이 막혔다.

“몸이 아프잖아요…. 상처 덧나요….”

소녀는 미미한 거절을 입에 담으며 말끝을 흐렸다.

“괜찮아.”

“아, 안 괜찮아….”

사내의 주목을 피해 내려간 눈길이 그의 벗은 몸에 닿았다.

상처투성이의, 그래서 더 야만스러운 색을 띠는 수컷의 육신이 소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아….”

라히무스의 몸을 끈적하게 핥아 보던 자신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몸이 상한 사람하고…. 어떻게 그런 짓을….’

나니아는 침대 위에서 늘 폭풍우처럼 거세게 난폭해지는 그의 모습이 떠올라서 얼굴이 화끈해졌다. 사실은 나니아 역시 사내의 커다란 두 팔에 가득히 안기고 싶었다. 잊고 있던 그리움이 떠오르고 뜨거운 육신에 이끌렸다.

소녀는 머뭇거리던 끝에 결국 소극적인 허락을 건넸다.

“격렬하게 움직이는 건…. 안 돼요.”

그 말에 라히무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격렬하지 않게 섹스하는 방법 따윈 알지 못했다. 남자가 항의하자, 소녀는 바지춤에 올린 손을 아름아름 만지작거렸다. 마지못해 받아들이겠다는 듯 당부하는 말씨가 무척 조심스러웠다.

“라히무스는 가만히 있고…. 나는….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 있으면….”

우물쭈물 두서없이 늘어놓는 말을 듣고 사내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한참을 생각했다.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 테니까, 그냥 누워 있어요. 상처 벌어지지 않게….”

“…….”

전신에 힘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맥없이 벌어지던 입술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해 달라는 거, 전부 다?”

나니아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뽀뽀하면서 손으로 만져 주는 것 정도는 기꺼이 해 줄 만했다.

‘입으로 빨아 주는 것까지도 어쩌면…. 그동안 받은 게 있으니까 보답하는 기분으로 조금쯤은….’

음탕한 짓거리를 해 주겠다고 마음먹었더니 새삼 나쁜 장난을 앞둔 아이처럼 가슴이 쿵쾅거렸다. 나니아가 각오를 다지는 사이, 리자드는 얼간이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몇 개?”

“…….”

“…여러 개 말해도 돼?”

“일단 하나라도 좀 말을 하고 나서!”

비슷한 소리 여러 번 말하게 만들지 말라며 그녀는 사내의 가슴을 콱 꼬집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얼굴에 이미 감추기 힘든 수치심이 번져 가고 있었다.

“대신에 무리하지 않는 걸로…. 진짜로…. 라히무스는 가만히 누워 있기만 해야 돼….”

여자는 조건을 잊지 말라는 듯 웅얼거렸다.

“나는, 그, 어….”

리자드는 커다란 앞발로 얼굴 절반을 덮어 놓고 숨을 들이마셨다. 긴장한 호흡이 살갗에 부딪히는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아무거나 다 해 준다고?’

너무 열려 있어서 도리어 머릿속이 좁아졌다. 꼿꼿하게 버티고 서 있던 허리가 스르륵 미끄러져 내리고, 사내는 침대 위로 완전히 드러누워 버렸다. 어색하게 침 삼키는 소리가 귀를 스쳤다. 그는 이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깊은 고민에 빠져드는 듯했다.

라히무스 곁에 반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나니아는 흘긋 그의 바지춤을 살폈다. 뻣뻣하게 뭉쳐 있는 태가 나서 눈이 저절로 따라갔다.

‘입에…. 안 들어갈 것 같은데….’

그녀는 지나치게 들떠있는 사내를 말없이 기다리고 있기가 창피해서 괜한 심술을 부렸다.

“…열 셀 거야.”

“뭐….”

“열, 아홉, 여덟, 일곱….”

“아…. 잠깐만.”

“여섯….”

“잠깐만.”

“다섯….”

드러누워서 할 수 있는 게 뭐 얼마나 된다고 그걸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지. 나니아는 여전히 기껏해야 손이나 입으로 해 달라는 소원쯤을 예상하는 중이었다.

“넷….”

“어, 얼굴.”

“응?”

“얼굴 위에 앉아 줘….”

“…뭐?”

여자가 괴상한 사람 보듯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사내는 황급히 그녀를 탓했다.

“…다 해 준다며.”

“…….”

소녀는 남녀 간의 통정에 대하여 잘 아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남자가 요구하는 것이 썩 정상적인 행위는 아님을 직감했다. 무엇보다 부탁하는 라히무스 본인부터가 저렇게 얼굴을 붉히고 있는 걸 봐서는 상당히 저질스러운 행위를 요구한 것임이 분명했다.

“왜… 왜 거길 앉아야 하는데요? 라히무스가 의자도 아니고.”

이상스럽다는 듯 따져 묻는 말에 사내는 입술을 훑으면서 좀스럽게 변명했다.

“누워서, 빨고 싶어….”

“…….”

“…다 해 준댔잖아.”

“좀 알기 쉽고 일반적인, 그런 부탁이면 안 되겠어요?”

“누워서 빨리는 거나 앉아서 빨리는 거나 다를 것도 없고….”

차라리 뻔뻔하게 굴었더라면 깜빡 속아 넘어갔을 텐데, 사내는 자기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얼굴로 허둥지둥 궤변을 늘어놓았다.

“섹스는 원래 사람이, 제정신으로는 못 하는, 그, 일반적이지 않게 변하는, 그런 행위 아닌가?”

“좀 얌전하고 상냥하게, 덜 부끄럽게 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뭐? 섹스는 원래 부끄러운 거야. 그리고 모르나 본데, 넌 부끄러워할 때가 제일, 꼬, 꼴려.”

“…….”

아, 이 남자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지.

나니아는 손에 잡히는 이불을 말아서 그의 얼굴 위로 패대기쳤다. 환자고 뭐고 그런 가엾은 생각도 이제 더는 들지 않았다.

남자는 자기 얼굴 위로 쏟아진 이불을 치워 버리고 도망치려는 나니아를 낚아챘다. 성욕에 절어서 안달이 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그런, 씨발, 그런 꼴리는 표정을 짓지 말아야지, 그럼!”

“이거 놔, 저질 도마뱀아!”

그래, 이 얼굴. 이 표정. 수치스러움에 눈시울을 붉게 일그러뜨리며 화를 내는 나니아를 보면, 남자는 너무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하, 젠장…. 이리 와 봐. 응?”

남자는 기어코 바르작대는 나니아의 몸을 번쩍 들어다 자기가 원하는 위치로 끌어놓았다.

“어려운 거 아니잖아. 그냥, 그냥 내 위에 올라타기만 하면 돼.”

나니아는 간신히 허벅지에 힘을 주고 그의 얼굴에 주저앉는 것을 막아 냈으나, 졸지에 다리 사이에 그의 얼굴을 가둔 꼴이 되었다.

“시, 싫다니까, 이상한 거 시키려는 거잖아…!”

그녀는 울먹이듯 소리치며 벽을 붙잡고 버텼다. 하지만 그 간격조차도 마치 의도했던 것인 양 사내는 나니아의 치마 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속옷을 벗겨 내렸다.

“이, 시, 싫어…!”

“아, 나냐…. 한 번만 해 줘.”

사내는 성기를 바짝 세우고 애걸복걸했다.

“시, 싫어, 하지 마….”

남자는 기어이 나니아의 허리를 붙잡고 드러누운 자신의 얼굴 위로 끌어 내렸다.

“한 번만 비벼 줘…. 응? 평소에 하는 거랑 별로 다를 것도 없잖아….”

남자의 낮게 잠긴 목소리가 소녀를 어르고 달랬다. 그 호소는 뜨거운 입김이 되어 은밀한 살갗에 번져 나갔다.

“다, 달라, 싫어….”

낯선 자세에서 사내의 호흡이 느껴지자, 질구가 움찔거리며 개폐를 반복했다. 그 감각은 나니아 본인에게도 지나치게 선명할 정도로 느껴졌다.

“나냐 여기는 좋아하는데.”

리자드의 짓궂은 혀끝이 그녀를 놀리자, 소녀는 자신의 음부가 보인 반응에 소스라치게 놀라서 사내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손에 쥐었다.

“이, 이러지 마, 라히무스, 싫어….”

갈피를 못 잡고 방황하는 손이 벽을 짚었다 침대를 짚었다 하며 황망하게 움직였다. 종내에는 사내의 가슴을 짚고 그의 얼굴 위에 온 체중을 실어 앉는 행위를 간신히 버텼다. 하지만 그녀의 저항은 너무도 미약하기만 했다. 라히무스는 도리어 더욱 흥분하여 소녀의 가랑이 사이에 호흡기를 가득 묻고 온 살갗을 지저분하게 빨아 먹었다.

“싫어, 아, 싫어, 놔줘….”

나니아는 골반을 뒤틀어 보았으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허리를 붙든 손이 너무도 굳건했다. 나니아는 감당하기 힘든 쾌감에 허리를 덜덜 떨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상흔으로 얼룩덜룩한, 하지만 그래서 더 천박하게 잘생긴 사내가 살 속에 코를 파묻은 채 고개를 흔들고 있었다. 지독히도 야만적이고 음란한 광경이었다.

차마 눈 뜨고 봐 줄 수 없는 그 틈새가 지저분한 마찰음으로 가득 메워졌다. 남자가 입 안팎으로 만들어 내는 너저분한 바람 소리는, 이보다 더 자극적일 수 없을 정도로 나니아의 귀를 괴롭혔다. 그 게걸스럽게 쩝쩝거리는 소리를 듣다 보면 그야말로 여물통에 고개를 처박은 짐승에게 아랫도리를 내어준 듯한 기분에 휩싸이고 마는 것이었다.

“그만, 너무…. 너무 창피해, 라히무스….”

소녀는 골반은 내어준 채로 척추를 바짝 세워 보았지만 결국에는 허리를 덜덜 떨면서 무너져 내렸다. 추스를 틈 하나 내주지 않는 쾌감이 정신없이 밀려들었다.

“아, 제발, 그만….”

“하…. 나냐, 좋아?”

“시, 실….”

말랑말랑하고 작은 살점들과 남자의 이목구비 굴곡이 이리저리 불규칙하게 맞물렸다. 흥건하게 젖은 살갗이 비벼지는 소리와 흥분에 겨워하는 사내의 간헐적인 탄식이 수치심을 돋웠다. 소녀는 뜻대로 조절할 수 없는 쾌락을 버거워하며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 싫어…. 그만해, 나, 진짜로, 싸, 쌀 거 같애, 싫어….”

“하…. 쌀 거 같아? 응?”

그게 무엇이든 배출하고 싶은 감각을 버텨 내며 허벅지를 덜덜 떠는 나니아를 보고, 라히무스 또한 이성을 놓아 가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손을 내려서 자신의 것을 훑고 싶었다. 하지만 붙드는 손이 없으면 나니아가 도망갈 것을 알아서 그러질 못했다.

그는 흥분한 혀끝을 여자의 돌기에 대고 비비며 신음을 흘렸다.

“뭐 쌀 거 같아, 응?”

“오, 오줌 쌀 거 같단 말야, 싫어, 싫어, 이제 놔줘!”

절정에 가까워진 소녀가 반쯤 정신을 놓고 하반신을 부르르 떨면서 애원했다.

사내는 손가락 한 개를 축축하게 젖은 구멍에 밀어 넣고 바쁘게 움직였다.

“아, 그만, 빨리, 빨리 놔줘….”

“하, 썅….”

흥분한 리자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오른손을 내려 자기 좆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냥 싸, 내가 다 마실 테니까.”

사내가 헐떡이면서 헛소리를 지껄이자, 여자는 소름 끼쳐서 다급히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몸을 바르작거리다 보니 어느새 자신을 억압하는 한쪽 팔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황급히 리자드의 마수에서 벗어난 그녀는 다행히 애인의 얼굴에 대고 실례하는 짓만은 면할 수 있었다. 그러고는 침대에 엎드려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라히무스는 그 옆에서 젖은 얼굴을 손등으로 닦아 내고 뻔뻔한 표정으로 자위를 해 댔다. 방탕한 오른손이 수치를 모르고 위아래로 움직였다. 딱딱한 살덩이를 치대면서 여자가 이불에 얼굴을 처박고 웅얼거리는 말에 귀 기울였다.

죽여 버릴 거라든가 죽어 버릴 거라든가. 대충 그런 저주를 퍼부어 대는 것 같았다. 새빨간 얼굴로 이불을 쥐어뜯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다.

“나냐.”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리자드는 입맛을 다시면서 치욕스러워하는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이 애처로우면서도 아슬아슬했다. 저건 분명히 화가 많이 나 있을 때의 상태였다. 그래서 섣불리 말을 걸지 못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저대로 베개를 던지고 방을 뛰쳐나갈 기세였다.

“자기 화났어?”

남자가 조심스럽게 묻자, 소녀는 결국 새빨간 눈시울을 반만 내밀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히끅거리는 목소리로 울음 섞인 분노를 토해 냈다.

“…취, 흑, 취소야.”

“응?”

“뭐든지, 다, 해 준다는 것도, 흡, 쪼금, 귀, 귀엽다고 생각한 것도, 다, 취소야.”

“내가 귀여웠어?”

사내는 침대 머리에 느긋이 팔을 기대 놓으며 겁도 없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왜 항상 이런 반응이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는 걸까.

그는 가만히 누워 있으라는 태초의 명도 어기고 여자의 등 뒤로 슬그머니 엎어졌다. 그러고는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살거렸다.

“이제 안 마려워? 화장실 가기 귀찮으면 여기서 나한테….”

깝죽대던 그는 결국, 말을 끝내기도 전에 뺨을 세게 얻어맞았다.

“아야….”

이번에는 제법 진심인 타격이었다.

여자는 라히무스를 버려두고 떠나는 듯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왔다.

누가 봐도 볼일을 보고 돌아온 게 틀림없는 시각이어서, 리자드는 문을 열고 돌아오는 나니아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녀는 씩씩거리면서 자기가 아는 못된 말들을 모조리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흉측하고, 불결하고, 악랄하고, 나쁜, 나쁜….”

라히무스는 아직도 얼얼한 뺨을 어루만지며 그녀의 모든 악담을 받아들였다.

나를 놀리는 것이 그렇게 재밌냐고 묻는 말에, 그는 입 안에 싸달라는 말이 진심이었다는 뜻을 밝혔다가 반대쪽 뺨도 얻어맞았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귀여운 나냐의 몸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달게 받아먹을 자신이 있었다.

“정말로 안 해 줄 거야?”

남자는 곧추선 물건을 쉼 없이 흔들며 그녀를 졸랐다. 리자드는 스스로 거위 배를 가른 멍청이였다. 그 속엔 더 이상 알이 없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속도로 할게.”

“…싫어.”

나니아는 이제 라히무스의 뱃가죽이 터지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를 모질게 대했다. 사내는 끈덕지게 그녀의 몸 위로 올라와 아직도 예민하게 젖어 있는 그녀의 음부에다 살덩이를 문질렀다.

“나냐 여기 부족하잖아….”

“아니니까, 저리 가.”

“잘 젖어서 쑥 들어가겠는데.”

“시, 싫다고!”

“왜 싫어. 내 자지 좋아 죽으면서.”

사내는 자꾸 노출증 환자처럼 자위하는 모습을 노골적으로 구경시켜 주었다. 나니아는 도마뱀의 그럴듯한 겉가죽에 속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잘빠진 몸에 홀려서 똑같은 실수를 자초하고 싶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부족했잖아, 자기야…. 응?”

기죽지 않고 계속되는 사내의 음담패설에 나니아는 경기를 일으키며 몸을 뒤집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맞추면서 못살게 굴었다. 허겁지겁 부딪쳐 오는 입술이 손속을 봐주지 않고 따라붙었다. 여자는 금세 산소가 부족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불 안에 가득 파묻힌 몸은 사내의 큰 손으로 어루만져졌다. 뜨거운 입맞춤과 나긋한 손길에 식어 가던 하반신으로 다시 자극이 몰렸다. 나니아는 헐떡이면서도 라히무스를 밀어내지 못했다. 비교적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애무를 지속해 나가던 그가 자신의 딱딱한 살덩이로 여자의 음부를 문질러 왔다.

넘어가지 않으려고 해도 그의 단단하고 두꺼운 팔뚝이라든가 야성적인 가슴이 자신을 밀어붙이면 나니아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의 우람하고 관능적인 체형이 눈을 감아도 피부로 느껴졌다.

여자는 결국 반항 대신 침묵으로 리자드의 만행을 허락했다. 말없이 몸에 힘을 푸는 것으로 그의 출입을 도왔다. 사내도 그 신호를 알아듣고 숨을 고르며 자신을 밀어붙였다. 적절한 각도로 벌려 놓은 다리가 삽입을 수월하게 했다.

귀두가 구멍을 비집고 들어오는 감각이 생경해서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두꺼운 음경은 여자의 질 내에 딱 맞게 들어찼다.

사내는 그녀의 안쪽을 침범하자마자 정신없이 나니아를 헤집어 놓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속도로 움직이겠다는 약속은 또다시 무참히 저버린 채였다.

리자드의 흥분한 숨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혔다. 소녀는 그의 박자의 맞추어서 정신없이 흔들리다가,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서 황급히 당부했다.

“그, 아, 안에다, 싸면, 아, 안 돼….”

사내는 의아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허리를 치대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왜냐고 물어보는 듯한 그의 표정에 나니아는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씨, 씻을 때, 곤란하니까….”

그 적당한 변명이 사내의 비위에 거슬렸는지, 자못 쌀쌀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왜, 이제 와서 내가, 네 안에 싸는 게, 더럽기라도 해?”

“그, 그게 아니라….”

사내는 성난 마음을 담아, 더욱 야멸차게 박아 대기 시작했다.

“이, 임신할 수도, 이, 있으니까, 아…!”

나니아는 속절없이 휘저어지면서 솔직한 말을 내뱉었지만, 진심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이 리자드 사내의 추저분한 음심을 더 자극해 버린 듯했다.

“나냐 임신할 것 같아? 응? 임신할까?”

“아, 싫어, 안 할래, 싫어….”

두 사람 모두 절정이 가까워진 듯, 넋을 놓아 갔다. 남자는 팔을 굽히고 허벅지를 흔들어서 정신없이 하반신을 빻아 댔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으로 헝클어진 나니아의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정신없이 입을 맞추었다. 침을 삼킬 겨를도 없어 보이는 다급한 입술을 마음껏 문대고 빨았다. 그녀가 신음을 흘리며 내벽을 조이는 것이 느껴져서, 사내도 사출의 충동을 느꼈다.

“아, 쌀 거 같아….”

“으, 응, 바, 밖에다, 응….”

“하아…. 나냐 임신시킬래.”

“싫….”

“임신 해 줘, 자기야….”

“아, 으, 안 돼!”

“해 줘, 내 아기 가져 줘, 응?”

“아, 싫어, 싫어, 라히무스, 안 돼….”

“아, 씨발.”

사내는 이루어질 리 없는 번식에의 욕망을 입에 담으며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체외 사정을 바라는 나니아의 바람을 끝까지 무시한 채, 그녀의 안에 자신의 체액을 울컥울컥 쏟아 넣었다.

“하…. 씹, 좋아….”

라히무스는 낮게 중얼거리면서 나니아의 양 뺨을 붙잡고 입술을 빨았다.

자신이 싸질러 놓은 점액으로 구멍이 흐르고 넘치는 것을 느꼈다. 미끈미끈하고 따뜻한 내벽이 기분 좋았다.

남자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더 성기를 추켜올리며 자신의 정액을 밀어 넣었다. 나니아는 그럴 때마다 질 안을 한껏 수축하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사내가 강하게 퍽퍽 쳐올릴 때마다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극심한 쾌감을 느껴야 했다. 남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니아는 그의 좆을 쥐어짜고 있었다.

“아, 안 되는데….”

소녀는 훌쩍거리면서 질구를 움찔거렸다. 허용치를 초과한 아기씨가 작은 구멍 밖으로 왈칵왈칵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 밤은 게롤린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 * *

창궐한 시체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음을 무뎌지게 만들었다. 항적 끝에 처단당한 도마뱀들의 사체와 싸움에 휩쓸린 인간들의 목숨이 광장에 산을 이루었다. 마을 곳곳에는 격렬한 반발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헤르의 시신을 거두어 땅에 묻으면서도 그가 죽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흙을 파헤치고 일어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머리를 내밀 것만 같았다. 두 눈 부릅뜨고 짜증을 내는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했다.

‘미쳤습니까?’

하지만 모든 것은 허망한 상상일 뿐, 남자는 지하로 돌아갔다. 얼어붙은 동토는 무자비할 정도로 차갑고 단단했다. 소녀는 그의 영혼에 안식을 줄 기도문 한 마디 외워 줄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며 한 다발 들꽃을 그의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

헤르의 짐을 품에 안은 챠링고가 침통한 얼굴로 기대 없이 물었다.

“부고를 전할 곳을 아는 사람은 없겠지? 젠장, 나는 조카가 있다는 말까진 들었는데 어디 사는 누구인지는 몰라서….”

헤르의 유품은 결국 땅에 묻지 않았다.

이제 내 머리카락은 누가 물들여 주냐는 벨로즈의 시답잖은 불평에 파키케팔로가 더는 변장할 필요도 없지 않겠느냐는 말로 응수했다. 아마도 무거운 분위기를 깨뜨리기 위한 농담이었겠으나, 그저 우울하고 싱겁기만 했다.

작별을 마친 사람들이 언덕 아래로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나니아는 보잘것없는 묘표 앞에 가만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겨울의 찬 바람이 긴 머리카락을 까맣게 흔들고 동그란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돌아갈 고향이, 그를 맞아 줄 가족이 있는 남자였다. 당연하게도.

그제야 실감이 났다. 죽음은 너무도 가까이에 있었다. 죽음은 머리가 하얗게 새어 검버섯이 피어날 때쯤에야 안온한 침대 위로 천천히 찾아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니아.”

곁에 남은 라히무스가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니아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갗이 시큰해지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붉게 가라앉은 사내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어떤 위로를 건네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가만히 뺨을 감싸는 그의 손이 멋쩍고 따뜻했다. 나니아는 고개를 저으며 뉘우치듯 고백했다.

“아니야. 나쁜 생각을 했어요. 나는 다른 사람 무덤 앞에서 내 생각만 하는 그런 애예요.”

가슴이 저미는 듯했다. 저기 저렇게 누워 있는 것이, 어쩌면 당신이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아니면 나였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더는 홀로 남겨지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잃고 싶지도, 나를 잃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소녀는 사내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도 예기치 못한 포옹에 당황하는가 싶더니 그녀의 작은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나니아는 남자의 가슴에 입술을 묻고 웅얼거렸다.

“…약속해.”

“뭘?”

“라히무스는 나보다 오래 살아야 해…. 나 두고 어디 가면 안 돼…. 알았지?”

리자드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나니아의 눈동자에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목이 빠지게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가씨가 애처로워서 리자드는 그녀를 번쩍 안아 들었다. 땅에서 멀어진 그녀는 라히무스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작게 훌쩍거렸다.

과거와 현재에 걸쳐진 미안함과 그리움들이 종국엔 두려움이 되어 그 너머를 알 수 없는 캄캄한 미래를 움켜쥐었다.

사내는 자신의 작고 사랑스러운 소녀를 품에 안고 어르다가 줄곧 전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서쪽으로 갈 거야.”

“…….”

“네가 찾는 그….”

남자는 살짝 인상을 썼다. 떠올리기 싫은 것을 생각해 내려는 것 같기도 하고, 떠오르지 않는 것을 기억해 내려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씹….”

어쩌면 둘 다인 것 같기도 했다.

“라키마키프.”

“…라키바하프?”

“그래, 그거.”

나니아는 그 이름이 갑자기 튀어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에, 흠칫 몸을 굳혔다. 품에 안은 그녀의 허리가 꼿꼿하게 경직되었다. 그 반응에서 분명한 동요를 느낀 라히무스는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도통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더 초조했다.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서쪽에서.”

사내는 별로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를 찾는 문제가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 데 주효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사실이 속이 쓰렸지만, 이 문제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롤린의 지하 감옥에는 없었다. 사내는 벨테그위의 유멘타 장사에 희생되었을지 모르는 라키바하프의 운명을 이야기해 주었다. 어디까지나 예측과 추정에 불과한 이야기일지라도, 지금으로서는 그나마 가장 가능성 있는 가정이 아닐 수 없었다.

리자드는 소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긴장한 목소리로 그녀를 달랬다.

“살아 있기만 하면, 차라리 그게 나아. 사형대에 오를 놈을 구하는 것보다 돈을 주고 사는 편이 훨씬 쉬울 테니까.”

초조한 기분으로 그녀를 안심시키면서도 속은 문드러졌다. 남자는 그녀 안에 도사리고 있던 깊은 그늘 속에 또다시 자신을 태울 불을 지펴 준 셈이었다.

리자드는 소녀의 희고 둥근 얼굴을 애타게 바라보았다. 유구무언의 침잠한 낯빛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 낼 수가 없었다.

더는 아무 생각도 하지 말라는 듯 호승심 가득한 팔이 그녀를 거세게 끌어안았다. 사내는 사라져 가는 일행을 따라 언덕 아래로 걸음을 옮기며 애타게 속삭였다.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너는 그냥 날… 날 계속 좋아하는 것만 해.”

사실 라히무스야말로 누구보다 간절히 그가 살아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뒤진 첫사랑을 마음속에 평생 품고 살아가게 하는 것보다는 놈이 멀쩡하게 늙어 뒤지는 모습을 보여 주는 편이 훨씬 나을 터이기 때문에.

* * *

여태껏 항구 근처에 머물고 있었으면서 이제야 진정한 의미의 바다를 마주하는 듯했다. 잔잔한 바닷바람에 코끝이 시렸다. 수심 깊은 물빛은 푸르게 반짝였다. 끝 모르게 광활히 펼쳐진 지평선을 보고 산골 소녀는 압도당하고야 말았다.

“날이 좋네. 순풍이 불어 주려나.”

챠링고가 그 옆을 지나가면서 기분 좋게 웃었다. 높이 올려 묶은 붉은 머리가 해풍에 가볍게 휘날렸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바다 못지않게 하늘은 더욱 깨끗하고 맑았다. 구름이 막지 못한 햇살을 일렁이는 바닷물이 눈부시게 끌어안았다.

“아직 완연한 동풍은 아니지만, 삼각돛을 달았으니 어떻게든 비스듬히 나아 갈 겁니다.”

안내를 맡은 항해사가 바닥에 걸리적거리는 그물망 따위를 곱게 치워 놓으며 말했다. 먼 바다로 떠날 준비를 하는 뱃사람들의 모습이 어수선하고도 기운찼다. 항해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비품과 식량을 선적하는 자리에 어째선지 파코가 하역을 거들고 있었다.

천생 종복이라며 비뚤게 조소하던 벨로즈는 그럴 힘이 있으면 내 짐이나 좀 들어서 옮겨 달라고 그를 타박했다.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품에 안겨 선창을 지나 범선의 좌현에 올랐다. 그가 건너편 갑판에 내려 주었을 때, 소녀는 어린아이처럼 뱃전으로 달려갔다. 그 뒤를 천천히 따라온 라히무스는 난간에 올린 두 팔 안에 나니아를 가둬 놓고 함께 바다를 구경했다.

“이런 거, 본 적 없어요.”

소녀는 고개를 들어 바닷바람이 헤쳐 놓은 사내의 얼굴을 마주했다. 날카롭게 벼려진 눈썹 산 밑으로 내리깐 시선이 짙고 뜨거운 온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햇볕에 찡그린 눈시울과 동공이 날카로웠다. 나니아는 손을 뻗어 사내의 눈 위로 차양을 만들었다.

그녀는 내륙 지방에서 자란 소녀답게 고작 뭍에 닿은 해수에도 가슴이 벅찼다. 높은 곳에서 더 가깝게 바라보는 바다의 모습은 드넓고도 망막했다.

“라히무스는 이런 곳을 건너온 거야?”

남자는 새로운 천지를 만난 것처럼 설레어 하는 그녀가 귀여워서 동그란 볼을 살짝 꼬집어 당겼다.

“이 바다는 아니고. 정확히는 남쪽에서.”

남자는 처음 훌레랑 앞바다를 건너오던 날이 생각났다.

일이 계획대로 돌아갔더라면 지금쯤 어디에 있었을까. 어쩌면 님프를 진작에 엄마 품에 돌려줄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보수 책정을 다시 해 달라는 챠링고의 요구는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훌레랑을 떠나오면서부터 무엇 하나 설계대로 굴러 가는 것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라히무스가 사는 곳까지 가려면 얼마나 걸려요?”

“…아주 먼데.”

남자의 고향 땅은 배가 정박할 곳에서부터 또 한참을 들어가야 했다.

오늘 저녁에는 아마 초승달이 떠오르리라. 오른편에서 기운 달이 왼편에서 웃을 때쯤이면 탈타르노 반도에 도착해 있겠지.

“나니아.”

“응?”

예측 불가한 상황들로 말미암아 얻어진 그의 보물은, 세상 무엇보다도 귀하고 사랑스러웠다. 생의 목적조차 바꾸어 놓는 그녀의 앞에서, 복수를 위해 평생을 벼려 온 칼날조차 무력하게 녹이 슬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너만 곁에 있어 준다면.

리자드는 소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바닷바람이 어지러이 흔들어 놓으려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작은 머리통에 턱을 숙여 놓고, 버거운 마음을 밀어붙였다.

“사랑해.”

난데없는 사랑 고백이 당황스러워서 나니아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상스러울 정도로 뜬금없었던 것치고 사내는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이었다. 장난스럽게 꺼낸 말이 아닌 듯하여 나니아는 초조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 나도.”

“…뭐?”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듯, 소녀는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감추었다. 리자드는 다급하게 나니아의 뺨을 붙들었지만, 그녀는 입술만 삐죽거릴 뿐 두 번은 말해 주지 않았다. 안달 난 꼬리 끝이 갑판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니아는 그만 활짝 웃고 말았다.

사랑은 모험과 닮아 있었다.

타인에 대한 미지에 도전하고, 자신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면, 끝내 얻어지리라. 바다는 언제나 잠잠하지만은 않을 테지만, 그래도 배는 돛을 펼치고 닻을 올렸다. 거친 파도가 유능한 뱃사람을 만들고, 격랑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만이 바다를 건널 수 있었다. 사랑도, 모험도, 바야흐로 원양으로 나아갈 때가 도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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