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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
게롤린 항구
슈쉬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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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뷔셀에게 있어 지금 당장 제일 불편한 상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첫째로 헤르를 뽑을 것이오, 둘째로는 벨로즈를 꼽을 것이다.
아무 일 없었던 양 방긋방긋 웃어 주는 공주보다도 노골적으로 혐오스럽다는 시선을 건네 오는 다룸의 멸시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
나니아는 마침 말라비틀어진 감자 대신 통통하게 죽어 있는 새 감자를 들고 오다가 그를 마주쳤다.
“…….”
“…….”
문고리를 붙잡은 헤르와 계단 난간에서 손을 떼어 낸 나니아의 시선이 공중에서 교차했다. 그 우연찮은 시선 교환의 순간이 너무도 절묘했던 탓에 쉽게 눈을 떼기도 힘들었다. 둘은 틀림없이 서로를 고까워하고 있었다. 복도의 냉랭한 기운이 발목을 타고 올랐다.
“…흥.”
남자가 막혀 있던 코를 뚫듯이 숨을 내쉬었다. 그대로 못 본 척 지나가려는 헤르를 나니아가 잡아 세우듯 말을 걸었다.
“한 번도 사람을 해친 적 없어요.”
뜬금없지만 자신을 향한 것이 분명한 말에 남자가 발길을 멈추었다. 무슨 소리냐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사람을 보고 식욕을 느꼈다든가, 잡아먹고 싶었다든가, 그런 충동 느껴 본 적 없다구요.”
나니아가 말했다.
그녀가 긴긴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벌레 보듯 하는 거, 그만두세요.”
소녀는 폐를 부풀려 숨을 들이마셨다. 지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어깨를 펼쳤다. 제법 당돌한 대거리였다.
그러면서도 마음속 상상으로는 긴 복도를 이쪽부터 저쪽까지 마구 뛰어다니고 있었다.
‘말했다, 말해 버렸어!’
하지만 남자에게는 그런 말 한마디로 마음을 바꿀 엉성한 경계심이 아니었다.
“사람을 먹고 싶다고 예고하고 잡아먹는 축수가 어딨습니까. 내 동생을 앗아 간 괴물도 꼭 당신과 같았습니다. 멍청하고 무고한 낯짝으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다룸은 하던 말을 멈추고 마치 원수를 대하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선명하게 드러내는 적의가 용케 잘도 숨겼구나 싶을 정도로 날카롭게 벼려져 있었다.
뒤돌아 끊어지는 남자의 발끝이 나니아가 어렵사리 내민 화해의 신호를 무시하였다.
“난 당신 안 믿습니다.”
남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뒷모습은 계단 아래로 멀어져 갔다.
나니아의 감자 정화 작전에는 여전히 진전이 없었다. 헤르의 마음이 조금 풀어지면 조언을 구해 볼 생각이었는데 그조차도 여의치 않아 보였다. 나니아는 아버지의 책을 가방에 넣고 파키케팔로를 따라 나섰다. 오늘도 아이들 몫으로 나누어 줄 식량을 커다란 자루에 가득 실은 채였다. 리자드가 자루 끝을 졸라 묶으며 말했다.
“침대 부서진 거 아직 못 고쳤지? 이따 갔다 와서 손봐 줄까?”
녀석이 침대 수리를 돕겠다고 나섰다. 그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라히무스의 귀에 들어왔다. 무지막지하게 휘둘러진 꼬리가 눈치 없는 동료의 다리를 세게 후려쳤다.
“아, 또 왜!”
파키케팔로가 소리를 악 지르며 정강이를 문질렀다. 무릎 아래쪽이 철퇴로 얻어맞은 듯 얼얼했다. 단단히 팔짱을 끼고 선 사내의 몸은 겉보기론 아무런 미동도 없었기 때문에, 나니아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편자에 발을 올려놓을 뿐이었다.
“라히무스.”
그녀가 사내의 이름을 부르며 팔을 벌렸다. 리자드는 그것을 작별 신호로 알아듣고 쪼르르 달려가 끌어안았다. 옆에서 누가 끙끙대거나 말거나 뜨거운 포옹을 나누기 바빴다. 그러고 몇 초나 있었을까. 뒤늦게 이상함을 감지한 나니아가 사내의 커다란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선 웅얼거렸다.
“그게 아니라, 말에 올려 달라구요….”
언제부턴가 벨로즈의 명대로 감자밭 빈민가에 식량을 원조하고 돌아오는 일이 일상이 되어 있었다. 부족하게나마 배를 채울 수 있게 도왔지만 이마저도 그들에게는 얼마 남지 않은 행운이었다. 어느새 출항 일자가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나니아는 사라진 영주를 찾기보다는 감자 소생 연구에 더 힘을 쏟는 듯했다. 행여나 그녀가 라키바하프의 행방을 물어본다면 세워 둔 계획을 설명하려던 라히무스도 아직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그를 잊어 가는 중이라면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위태롭고 안일한 생각이 그를 지배했다.
남자는 못마땅한 눈빛으로 말 위에서 붙어 앉은 나니아와 파키케팔로의 모습을 주시하였다. 술을 먹고 뻗어 버린 챠링고 때문에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공주의 신변을 보호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에 셋 모두 자리를 비우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사실은 일전에 라히무스와 동행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이 그를 보면 경기를 일으키는 바람에, 식량 배급 임무는 전적으로 파키케팔로에게 맡겨졌다. 남자를 본 후로 아이들은 차라리 녀석을 거대한 초식 동물쯤으로 여기게 되었다.
“다녀올게, 라히무스!”
파코 녀석은 남의 속도 모르고 햇살처럼 밝게 인사를 건넸다. 리자드가 고삐를 잡기 위해 뻗은 팔이 나니아의 허리를 살짝 감싸 안았다. 라히무스는 그 모습을 보고 인상을 확 찌푸렸다. 반듯했던 미간 위로 사납게 주름이 잡혔다. 손이 닿는 위치에 있었다면 틀림없이 심술궂은 딱밤이 날아갔을 터다. 나니아는 험상궂은 사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같이 가고 싶은데 그러질 못해서 섭섭한 게 분명했다. 라히무스에게서 토라질 기미가 보였다. 그녀는 손을 뻗어 남자의 관자놀이와 뺨 윗부분을 어루만졌다.
“돌아오면 밤이 되어 있을 테니까….”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귀가 시간을 언급하는 대신 뒷말은 생략하였다. 밤을 내어 주겠다는 말이 엉큼한 음심을 돋웠다. 날 세운 동공이 무뎌지고 사납게 좁혀졌던 눈썹도 제자리를 찾아 가면서, 남자는 다시 순박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표정을 굳혔다 풀었다 하는 사내의 변덕스러운 모습이 가슴을 간지럽혔다. 나니아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갔다 올게요.”
따뜻하고 부드럽게 라히무스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길이 말발굽 소리와 함께 멀어져 갔다.
강변으로 향하는 내내 파키케팔로는 챠링고의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게게 풀어진 상태에 대해서 이런 저런 불만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벌써 도착한 것처럼 군다니까. 아주 임무 완수하셨어, 다.”
그녀는 정체를 감출 필요가 없는 이 안락한 리자드 커뮤니티에 안주하였다.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욕구를 채워 줄 수컷들이 널려 있었고, 어쩌다 마주친 인간들은 창칼을 들이대는 대신 설설 기었다. 본토와 다를 바 없는 여건 덕에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동족으로 둘러싸인 환경 속에서 모처럼 마음을 놓아 가는 듯했다.
“대신 그만큼 믿는 거겠죠, 파키케팔로를.”
나니아가 챠링고를 감싸듯 청년을 치켜세웠다. 단순하고 변화무쌍한 녀석은 그녀의 말에 금방 기분을 풀었다.
“그런가? 그렇지, 아무래도!”
붙잡을 힘 없는 나뭇가지들이 무기력하게 낙엽을 떨어뜨리는 길옆으로 저주받은 감자밭이 너르게 펼쳐졌다. 나니아는 그 근처에서 다 허물어져 가는 흙벽 집을 찾았다. 얼굴을 알고 지내는 농노 부부가 그곳에 있었다.
“여전히 차도가 없나요?”
“네, 똑같습니다….”
나니아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맥 빠진 대답이 돌아왔다.
남편은 일을 나갔는지 부인 혼자 집에 남아 갓난아이 하나를 품에 안고 한 방울도 나오지 않는 젖을 물리고 있었다. 고된 농사일과 굶주림으로 지친 얼굴엔 미래에 대한 희망 따위는 없고 오로지 탈력감만이 가득해 보였다.
나니아는 자루 속의 감자잎을 멋쩍게 만지작거리며 꺼내기를 주저하였다. 님프가 땅굴 안에서 키워 낸 감자를 이곳에 옮겨심길 수차례. 그러나 매번 하루를 가지 못하고 시커멓게 죽어 나갔다. 씨감자에서부터 감자 덩굴까지 식물 하나의 생장을 완성해 낸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듯하였다. 식물 두어 개를 성장시키고 난 다음이면 님프는 기진맥진하여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웠다. 그런 사람에게 ‘이번에도 소용없었어요.’라고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안타깝고도 괴로웠다.
감자가 아닌 다른 작물을 밭이 아닌 곳에 몰래 심어 주는 것 외에는 구제할 방도가 없었다. 그나마도 굶주리는 농민들의 허기를 채워 주기에 턱없이 부족한 양이었다. 따 먹으면 그만인 탓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많은 양을 만들어 내기에는 님프의 힘에도 한계가 따랐다.
‘감자가 아닌 다른 작물에까지 번지지 않으리란 법이 있겠습니까.’
공주는 이 지독한 전염병의 확산을 걱정했다. 벨테그위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폭압자의 형편없는 통치 능력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꼴에 제왕 수업 따위를 받은 것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님프는 타고나길 지도자가 될 운명이었다.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자가 다른 곳에서라고 좋은 정치를 펼칠 수 있을까.
이대로 출항하기 전까지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틀림없이 커다란 후회가 남을 터였다. 이 모든 사태를 방관하고 지나쳐 간 일에 대한 자기혐오가 살아가는 내내 불쑥불쑥 치솟게 되리라.
보잘것없는 하녀 역시도 이 땅의 안위가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루하루 굶주리지 않는 것. 오늘 배불리 먹고도 내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것. 농민들에겐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였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하녀는 근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두운 표정으로 농노 부부의 집을 나섰다.
다시 파키케팔로가 기다리고 있는 곳을 향했다. 강변 마을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던 그가 나니아를 보고 훤칠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녀석이 엉덩이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 내며 물었다.
“오늘도 헛수고였어?”
“네, 그런 것 같아요.”
“이쯤 되면 감자가 아니라 흙이 문제 아냐?”
파키케팔로가 가볍게 던진 말에 나니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벨로즈는 멀쩡한 감자가 무사하게 번식할 방법을 찾았고, 나니아는 죽음이 좀먹은 감자로부터 불순한 입자를 제거하는 일에 골몰했다. 두 사람 다 감자 자체를 붙잡고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토양에서부터 비롯되었다면?’
소녀는 쓸쓸한 인상의 감자밭을 돌아보며 말했다.
“밭을 둘러보고 싶어요.”
두 남녀는 함께 황량한 밭고랑 위를 거닐었다. 저주가 번지는 것이 두렵기라도 한 듯이, 사람들이 감자를 모두 뽑아내 버린 후였다. 땅바닥에 쪼그려 앉은 나니아는 어디선가 주워 온 나뭇가지 끝으로 흙을 긁어 보았다. 겉보기로는 역시 아무런 문제도 찾을 수 없었다.
“벨 님도 그렇지만 너도 참 열심이네. 역시 동족의 일이라는 건가?”
목 뒤에 덤덤히 양손을 받쳐 기댄 파키케팔로가 저 멀리 고랑 끝으로 시선을 던졌다. 더 얻어먹을 것이 없는지 살펴보기라도 하듯 서성이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나니아는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단 한 구절만이라도 좋았다. 아버지의 일기장에 적혀 있는 술식이 사람을 이롭게 하는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저보다는 벨로즈 님이…. 벨 님은 좋은 분이신 것 같아요. 그쵸? …가끔 짓궂으시지만.”
소녀는 공주 본인에게는 밝힐 수 없는 무엄한 생각을 리자드 청년에게 슬쩍 터놓았다. 그도 웃으면서 동감했다.
“님프는 원래 다들 좀 그래. 심한 장난을 치는 것 같다가도, 대의를 위한 일에는 누구보다 앞장서더라고! 성격이 나쁜 건지 착한 건지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니깐.”
파키케팔로는 폐쇄적인 숲의 요정들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사실 나도 님프들이 사는 숲에 가 본 적은 없어. 거긴 중립 지대거든. 모든 종족들이 그들이 가진 숲의 힘에 기대어 살아. 그러니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지.”
자신만만하게 설명하던 목소리 끝이 흐려지더니, 무언가를 떠올리듯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건드리는 경우도 있지…. 하지만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셈이다 보니까. 음…. 이건 라히무스한테 물어보면 더 잘 얘기해 줄걸?”
나니아는 흙을 파헤치던 것을 멈추고 파키케팔로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왜 그의 이름이 나오는지 알 수 없었던 탓이다.
“우리 염황께서 님프들의 숲에 불을 질러 일으켰던 전쟁에서 말이지, 라히무스가 제법 활약했거든.”
청년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를 꺼내듯 말하였으나, 사실 그 전쟁은 홍염의 역사상 다시 없을 어리석은 참사로 기억되었다.
님프와의 갈등은 우방 연합국들이 참전하면서 더욱 커다란 싸움으로 번졌고, 무리한 교병으로 많은 수의 전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한때는 세력의 절반이 괴멸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으나, 염황은 자신의 강건한 아들들을 주축으로 사태를 뒤엎고 간신히 종전 협정을 이끌었다.
피를 볼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쫓아다녔던 라히무스 또한 몸 가는 대로 살다 보니 어째 조국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운 참전 용사가 되어 있었다.
“뭐, 우리 홍염룡들이 워낙 타고난 전사이기도 하지만 말이야!”
신이 나서 남의 공적을 공치사하는 녀석을 옆에 두고 나니아는 자신의 큼지막한 남자 친구를 떠올렸다. 우락부락하게 몸을 굴리는 모습을 종종 보았지만, 전쟁터에서 사람을 해치고 뛰어다니는 라히무스의 모습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침대 위에서 허리를 흔드는 편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미쳤어!’
나니아는 얼굴이 벌게져서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상한 상념들을 떨쳐 냈다.
평생을 평화롭게 살아온 그녀는 리자드에게 딱한 마음이 들었다.
“힘들었겠어요.”
“뭐가?”
“라히무스는 사실 외로움도 많이 타고, 사람을 좋아하고, 잔정이 많은 성격이잖아요.”
“뭐가 많다고?”
파키케팔로는 지금 내가 맞게 들었냐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니아는 조용히 독백 같은 혼잣말을 이어 나갔다.
“몇 살 때부터 그런 일로 내몰렸을까요? 언제나 남의 목숨을 빼앗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던 거잖아요. 매번 자기 목숨도 걸어야 했을 거고…. 너무 힘들었을 거예요.”
겉으로는 단단하고 듬직해 보여도 안쪽에는 보살펴 주고 싶은 여린 속살을 간직한 사내였다.
안아 달라, 재워 달라, 만져 달라, 뽀뽀해 달라…. 덩치만 커다랬지 하는 짓은 영 아기나 다를 바 없는 그를 떠올리며 나니아는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위험한 일은 다신 안 했으면 좋겠다.”
농사나 짓고 살면 좋을 텐데.
모아 둔 돈이 조금 있다고 했으니 어쩌면 땅을 사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돈이 좀 더 남으면 암탉을 몇 마리 사고, 그래도 남으면 소를 한 마리 사서….
하녀가 자영농의 삶을 꿈꾸는 사이, 라히무스에게 얻어맞기 일쑤인 파코는 어이없다는 듯이 인상을 구기고 서 있었다.
‘아니, 역시 소는 좀 무리이려나? 아무래도 그렇겠지….’
소 한 마리 값이 얼마나 되는지 떠올려 보던 소녀는 상상을 끝마치고 원래 하려던 일로 되돌아왔다. 가방 안을 파고든 손이 잉크 펜을 붙잡았다. 그것은 언제부턴가 몸에서 떨어뜨릴 일이 없는 물건이 되어 있었다.
몇 번이고 반복해서 써 버릇한 탓에 이제는 눈 감고도 쓸 수 있을 것 같은 술식을 종이 위에 휘갈겼다. 종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글씨를 쓰려니 정성을 들이기가 영 어려웠다.
나니아는 파키케팔로에게 점화를 부탁했다. 불이 붙은 술지는 아래에서 위로 타들어 가며 메마른 표토 위로 흩어졌다.
감자 위에서 보통의 종이처럼 그을음만 간직한 채 바스러졌던 때와는 분명히 달랐다. 술지는 까만 재로 남는 대신 토양과 결합하였다. 마치 지렁이 한 마리가 그 아래에서 꿈틀대는 것처럼 숨을 쉬듯 일렁였다.
나니아와 파키케팔로의 휘둥그레진 눈이 마주쳤다.
“…이건 분명.”
“뭔가 됐어! 뭔가 캐스팅됐다니깐…!”
얼떨떨해하는 나니아 옆에서 파키케팔로가 더욱 호들갑을 떨었다. 두 사람은 몇 번이고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그럴 때마다 술지가 스러져 내린 부분이 미세하게 꿈틀대며 약동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다섯 번 정도 그 짓을 반복하다가, 나니아는 고개를 들어 밭을 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밭의 크기가 잔인할 정도로 광활했다. 버려진 감자밭은 강줄기를 따라서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쪼그려 앉아 있던 소녀는 흙바닥 위로 무릎을 툭 떨어뜨렸다. 돌파구가 보였다는 기쁨도 잠시. 커다란 압박감과 절망감이 밀어닥쳤다.
일행들은 이틀 뒤에 출항할 예정이었다.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았다. 벨로즈가 키워 낸 감자를 심어 무사히 자라나는지까지 살펴보려면 일정이 촉박했다.
행동을 멈춘 나니아를 보고 파키케팔로가 물었다.
“왜 그래? 벌써 힘들어?”
나니아는 고개를 저으며 내려놓았던 나무 막대기를 손에 쥐었다.
“아뇨. 흙 위에 직접 술식을 완성한다면 어떨까 싶어서요.”
그녀는 천천히 글자를 써 나갔다. 복잡한 머릿속에서 모든 잡념을 비워 내고 오로지 땅속에 숨 쉬는 더러운 질병의 씨앗을 제거하겠다는 일념에만 집중했다.
식이 완성된 순간, 토양이 몸을 떨었다. 누군가 간지럽힌 것처럼 파르르 전율하는 흙.
그러나 여전히 적은 범위였다.
“아…. 안 돼….”
효험은 술지를 태우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나니아는 낙담하며 몸을 웅크리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파키케팔로가 실의에 빠진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좌절할 시간에 한 장이라도 더 쓰는 것이 좋지 않겠냐며 그다지 격려가 되지 않는 말을 건넸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나니아는 번쩍 고개를 들어 다시 가방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이것만…. 이것까지만 더 해 보구요.”
그의 말대로 시간이 없었다. 늦기 전에 공주님을 모셔 와서 정말로 토질이 회복되었는지도 확인해 봐야 했다. 오늘만큼은 처음부터 함께 왔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녀가 가방 속에서 꺼낸 것은 아버지의 책이었다.
나니아는 그 두꺼운 연구서를 촤르륵 넘겨서 원하는 부분을 찾았다. 이젠 너무 익숙한 감자 그림. 그 밑으로 정성스럽게 꾹꾹 눌러쓴 것이 분명한 문장을 살폈다. 아버지가 구성해 놓았을 가지런한 술식이, 더듬어 움직이는 손끝에서 천천히 읽혀 나갔다.
하도 펼쳐 본 탓에 다른 페이지보다 너덜거렸다.
나니아는 그 부분을 북 찢어 냈다. 오래된 종이가 명을 달리하며 황금빛 가루로 흩어졌다. 애지중지하던 것을 거침없이 찢어발기는 모습에 파키케팔로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뭐 하려고?”
“불붙여 주세요.”
“여기다가?”
파키케팔로는 난감해하며 이마를 문질렀다. 찢겨 나간 종잇장의 잔해가 책장 끝에 보기 싫게 붙어 있었다.
“아니, 이게….”
술식은 이미 외운 지 오래였고, 이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읽지 못한 다른 부분들도 어차피 무의미했다. 생각할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었다. 소녀는 이것이 아버지의 념이 담긴 술지이기를 바랐다.
“어서요.”
나니아는 파키케팔로의 입가에 연구서 낱장을 들이대고 재촉하듯 흔들었다. 멋쩍게 관자놀이를 벅벅 긁던 파키케팔로가 이내 입속에서 짧은 불꽃을 피워 냈다. 화염은 순식간에 종잇장을 물들였다. 천만다행으로 얼굴 모를 아버지는 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셨다. 불붙어 이울어 가는 모습부터가 달랐다. 술지는 바닥에 내려놓을 틈도 없이 반짝이는 티끌이 되어 밭 위로 흩어졌다. 그리고 돌연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휘감았다. 세상천지 모든 공기가 뒤섞이듯이.
두 사람을 헝클어뜨린 돌풍은 사태의 중심에서부터 나선을 그리며 번져 나갔다. 침묵하던 토지가 바람에 쓰다듬어진 억새밭처럼 부드럽게 물결쳤다. 이랑과 고랑이 차례로 꿈틀거렸다. 발밑에서부터 저 멀리 보이지 않는 곳까지.
그것은 믿기 힘든 파란이었다.
“야, 이 마녀야! 우리 밭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누군가 소리를 지르며 그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실감이 나지 않는 광경을 멍하니 관망하던 파키케팔로의 꼬리에 보기 좋게 명중하였다. 파코는 따끔한 꼬리 끝을 휘어 올리며 돌멩이가 날아온 방향을 확인했다. 시비를 걸어온 녀석의 얼굴이 익숙했다. 유독 리자드를 경계하던 그 아이였다.
“너도 도마뱀들과 한패지?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언제 이렇게 가까이 접근했는지, 제법 용감하게 덤벼든 녀석의 손에는 새로운 돌멩이 하나가 더 쥐여 있었다.
“아잇, 저 녀석이 또!”
옆에서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본 모양이었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마법 같은 일이었기 때문에, 마녀의 삿된 장난처럼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콧등에 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흐리멍덩하던 하늘에서 기어코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아이 장난 따위에 어울려 줄 시간이 없었다. 나니아는 정신을 차리고 파키케팔로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확인해 봐야겠어요.”
두 사람은 서둘러 배양 감자를 땅에 심었다. 옆에서 왈왈대는 아이는 완전히 무시한 채로. 이것이 마지막 실험체가 되어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마땅히 뒤따를 계획. 이 소란이 어떤 놀라운 기적을 일으킨 것인지 아니면 야단스러운 무위에 불과했는지 명확하게 판단해 줄 님프가 필요했다. 저주의 종지부를 찍기 위한 발굽이 힘차게 땅을 굴렀다.
* * *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평소보다 무리했던 벨로즈는 배양된 작물들을 파키케팔로와 나니아에게 맡겨 놓고 그대로 자리에 뻗어 있었다. 라히무스도 그와 마찬가지로 나니아를 떠나보낸 다음부터 쭉 자기 방에 틀어박힌 채였다.
한편 챠링고는 어떤가 하면, 최근 그녀의 일과는 술에 취해 있거나 술에 취할 준비를 하고 있거나 둘 중 하나였는데, 그녀는 매일 해가 떨어질 때쯤 1층으로 내려와 새로 사귄 리자드들과 술을 진탕 마셨다. 아니면 출장을 나온 수컷들과 기분 좋게 어울리거나, 그도 아니면 업소 자체로 직접 출근 도장을 찍었다. 유쾌하고 호방한 암컷 리자드의 일상 그 자체였다.
그녀는 아직 술이 덜 깬 얼굴로 쩝쩝대며 계단을 내려왔다. 저녁 식사 중이던 헤르의 옆자리에 착석하여 말을 걸었다.
“애들은?”
“어딨겠습니까?”
딱히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는 것은 진작 알고 있었지만 근래 들어 더욱 예민해진 느낌이 있었다. 챠링고는 멋쩍게 등을 긁으며 무엇이 그를 뾰족하게 벼려 놓았는지 물었다.
“뭐? 걔가 축수로 의심된다고?”
챠링고는 헛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니아는 본토 냄새라고는 한 톨도 맡아지지 않는 깡촌에서 데려온 아이였다. 그것도 아주 우연한 기회로.
그러나 아버지의 유품이라던 수상쩍은 연구서는…. 헤르의 말대로 범상찮기는 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아마 서쪽에서 도망친 사람이 맞긴 할 터다.
‘하지만 인간이 아닌 것 같다면…. 글쎄?’
“사실 축수 혼혈 같은 것은 어디에나 있잖아.”
챠링고는 수긍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며 테이블 위의 사과 한 알을 집어 들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말하는 태도에서 이 문제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무상함이 느껴졌다.
“축수 피가 한 방울만 섞여도 유해 생물 취급하는 놈들이 적지 않은 것도 알지만 말이지….”
여자가 품에서 단도를 꺼냈다. 그녀는 사람을 찌르던 칼을 과도처럼 사용했다.
“네가 그런 차별주의자적 사고방식을 지닌 줄은 몰랐는데.”
그 말에 다룸은 손에 든 식기를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언성을 높였다.
“차별? 지금 차별이라고 하셨습니까? 저에게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하, 마음껏 안일할 수 있는 당신의 강인함이 부럽군요.”
리자드들은 축수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어지간한 놈들은 위력 면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고, 애당초 놈들은 질기고 맛없는 도마뱀들을 공격 대상으로 삼지도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헤르는 상황이 달랐다. 그는 실력 좋은 다룸이지만, 그래 봤자 인간이었다. 물리적 급습에는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내 동생을 포식한 축수가 꼭 그랬습니다. 자그마치 10여 년을 친절한 이웃인 척 살았죠.”
선박과 같이 밀폐된 공간에서 언제 자신을 해할지 모르는 존재와 오랜 시간 함께 머무를 생각을 하니 뒤숭숭한 마음은 날로 커져만 갔다. 그리고 불안한 요소는 나니아뿐만이 아니었다.
“거스러미 제도에 해적선이 출몰한다는 말을 들었습니까? 그 노략질을 일삼는 무리가 축수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뭐? 터무니없는 소리. 축수들은 멍청하고 사회성이 부족해서 무리 짓기를 하지 않아.”
“그게 다 방심이고, 오만이고, 편견입니다.”
다룸은 여자가 무신경하게 건네는 칼 위의 사과 한 조각을 거절하며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젠장, 이럴 줄 알았더라면 당신들 처음 계획대로 해협을 통과하는 게 좋았을걸.”
항로 안팎으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에 두려워졌지만, 뒤늦게 발길을 돌리기엔 코앞의 상선이 아쉬웠다.
“저는 이번 항해를 꼭 무탈하게 마쳐야 합니다. 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조카를 위해서라도요.”
“조카?”
“아마 당신은 축수 때문에 가족을 잃어 본 적 없으니까 잘 모를 겁니다.”
애초에 가족이랄 게 없다 답했더니 남자는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여자는 주제가 무거워지는 걸 꺼려하면서도 사과 껍질을 질겅질겅 씹으며 물었다.
“뭐, 아무튼 말해 봐. 그래서?”
다룸은 마른 목구멍을 쥐어짜며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제가 원소 공부에 한창일 때, 동생 부부가 축수의 공격을 받고 명을 달리했습니다.”
“이웃에게 뒤통수 맞았다는 그 동생 말이지?”
“맞습니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거두어지지 못한 제 동생의 자식이 홀로 생존해서….”
“아이가 몇 살이었지? 많이 어렸나?”
“다섯 살 정도였습니다. 십 년도 더 지났으니 이제 성년이 될 나이죠.”
“그건 참 드문 일이군. 어떻게 새끼 혼자 살아남았지? 제일 야들야들하고 맛있었을 텐데.”
여자가 생각 없이 던진 말에 다룸은 도끼눈을 떴다. 무섭도록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챠링고를 노려보았다. 인간의 비극 따위 한없이 가볍게 여기는 그녀가 남자의 눈에는 식인귀나 다름없어 보였다. 챠링고는 적의로 가득한 그의 눈빛을 받아 주다가 이내 코웃음 치며 조카의 근황을 물었다.
“그래서 걘 어떻게 됐다고? 고약한 귀족 도마뱀에게 잡혀가기라도 했나 보지?”
“…….”
침묵은 긍정이었다.
정답을 적중당해 침묵하는 남자의 입술 끝으로 쓰라린 가시가 돋쳤다.
서쪽은 평범한 인간이 살아가기 힘든 터전이었다. 차라리 유멘타가 되어 주인의 보호를 받는 것이 낫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멀쩡한 어른도 납치해서 노예로 만드는 마당에 본토에서 부모를 잃은 고아 소년이라니. 데려다가 종으로 삼기에 그보다 더 호적할 순 없었다.
남자가 악착같이 돈을 모으는 까닭도 그에 있었다. 조카를 사서, 자유민으로 만들어 주려는 것. 그러려면 아주 많은 돈이 필요했다.
“정착 자금까지 포함해서….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제 곧 삼촌다운 역할을 할 겁니다. 가게를 차려서…. 평범하게….”
남자가 턱을 괴고 있던 손바닥에 이마를 묻었다. 괴로운 듯 삶의 계획을 읊조리는 그를 보며 챠링고는 혀를 찼다.
평소 서대륙 수컷 놈들이 치렁치렁 몸에 두르는 사치품들이란 게 그들 특유의 허세이며 방어 기제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조소가 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티끌만 한 돈이라도 더 아끼며 검소하게 살았더라면 그의 불쌍한 조카를 일 년이라도 더 빨리 자유의 신분으로 만들어 줄 수 있었을 테니까.
하여튼 간에 수컷들은 자기 파괴적이고 모순적이었다.
‘아, 술맛 떨어지네.’
차라리 라히무스랑 먹는 게 더 낫겠다. 걔는 놀리는 재미라도 있지.
여자가 입맛을 다시며 뼈대만 남은 사과를 접시 위에 툭 던져놓았다.
그때 가게 문이 짤랑이며 그나마 가장 재미있는 그녀의 술친구들이 돌아왔다. 감자밭의 파수꾼들이었다. 파키케팔로와 나니아는 반갑게 알은체를 하는 그녀에게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대하며 벨로즈를 찾았다.
“야, 뭔데. 또 어디가?”
“감자밭이요.”
빠르게 지나쳐 가는 그들을 향해 챠링고가 말을 걸었다.
다시 돌아갈 것이라 이야기하는 나니아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이 볼에 붙어 그 끝으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흠뻑 젖은 몰골이 가히 정상이 아니라 더욱 산만해 보였다.
“거긴 왜 또.”
“저희가 밭에, 밭에 뭘 좀 했는데, 확실하진 않고요, 그래서 벨 님께서….”
“아니, 자세한 건 일단 가면서 얘기해.”
파키케팔로가 우의를 대신할 모포를 둘러 주며 피곤해 보이는 벨로즈의 등을 밀었다. 그 와중에 공주는 비몽사몽 했다.
“…비가 많이 오나요?”
“내린 지 한참 돼서 이제 곧 그칠 것 같아요.”
“오늘은 너무 늦지 않았냐?”
“급해! 후딱 다녀올 테니까, 라히무스한테 나나 기다리지 말고 자라고 그래!”
“야, 나한테 그런 어려운 일을 시키면….”
녀석은 벨로즈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챠링고의 대답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가게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나니아도 정신없이 뒤를 따랐다.
그들이 열어 놓은 가게 문 안쪽으로 거친 비바람이 몰아쳤다. 주룩주룩 떨어지는 빗물이 밤하늘 아래에서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금방 그칠 것 같지 않은데.”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까지 외출하고 싶지 않았던 챠링고가 업소를 포기하려던 때, 반가운 얼굴이 그녀를 찾아왔다. 손님을 기다리는 대신 몸소 영업을 나온 수컷 리자드였다.
“누님!”
“야, 이 누구야.”
여자는 반가운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남자는 챠링고가 발정기 때 이틀 밤낮을 함께 보낸 그때 그 남창이었다.
“누님, 저 그날 이후로 어엄청 기다렸는데요. 다신 안 오는 줄 알았더니, 맨날 다른 새끼들만 찾았다면서요.”
리자드가 챠링고의 옆자리에 붙어 앉으며 그녀의 어깨에 다짜고짜 머리를 기대었다. 질투라도 난다는 듯이 자못 애교스럽게 칭얼거리는 녀석을 보고 여자는 기분 좋게 웃으며 빈정거렸다.
“너도 그때 다른 손님 받는 중이었던 걸로 아는데. 나만 탓하면 억울하지.”
사실은 따먹을 새끼들이 너무 많아서 한 놈을 두 번 이상 찾지 않았을 뿐이다.
어쨌거나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기특하니 엉덩이를 쓰다듬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암컷은 남창을 옆에 끼고 주물럭거리며 오늘치 화대를 책정했다.
“그래, 오늘은 얼마나 주면 되는데?”
음흉한 졸부처럼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낮고 은밀했다. 수컷은 가게 밖이라 그런지 전보다 수수하고 얌전한 차림새였다. 청순해 보이는 인상의 녀석이 어딘지 촉촉하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해 왔다.
“얼마나 줄 수 있는데…?”
녀석이 챠링고의 목에 팔을 두르는 것을 본 헤르는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자가 수중의 돈을 파악하며 손가락을 몇 개 접어 보이자, 남창이 배시시 웃어 보이며 속삭였다.
“미안해, 누님….”
“응? 뭐가.”
“내가 이미 딴 데서 돈을 너무 많이 받았어.”
녀석은 뜻 모를 소리를 하며 입술을 빼앗을 것처럼 다가왔다. 코와 코가 부딪히고 주둥이가 맞물릴 듯하던 그 순간, 챠링고의 목덜미로 싸한 냉기가 와 닿았다. 기분 나쁘게 쩔렁이는 금속음이 귀 끝을 스쳤다. 누군가 그녀의 목에 차가운 쇠사슬을 감아 당긴 것이었다.
“큽…!”
여자는 숨통이 조여들어 고개를 치켜들었다. 자신을 공격한 괴한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나 전혀 모르는 리자드였다. 그녀는 테이블 위에 던져놓은 단검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남창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녀석은 단검을 손에 쥐는 자세가 영 어색하기만 했다.
“나 사람을 죽여 본 적은 없는데. 다른 사람한테 맡겨야 하나.”
챠링고의 무릎에 올라앉은 그가 태평한 소리를 지껄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와 동시에 이때까지 평범한 손님들인 줄 알았던 주변 인물들이 하나둘씩 목적 있는 눈빛을 보내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는 저마다 칼을 한 자루씩 들고 있었다.
“옆에 있던 다룸도 한패다. 허튼짓하기 전에 빨리 잡아!”
누군가 소리쳤다. 헤르의 비명과 그를 덮치는 소음이 고막을 휘저었지만, 고개를 돌릴 수조차 없었다. 무자비한 칼끝이 남자를 노리고, 그는 고통스러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인간의 목숨은 보통의 칼 한 자루로도 쉽게 끊어 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챠링고 역시 본인의 검으로 뱃가죽이 쑤셔졌다. 사람을 죽여 본 적 없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 터무니없는 위치였다.
“내가 찔러 줬음 했던 건 이런 게 아닐 텐데. 그렇지?”
남창이 피 묻은 손으로 킬킬거리는 것을 보고 챠링고는 소리 없이 욕을 퍼부었다.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칠 때마다 날카로운 손톱 끝으로 목을 찌르고 긁어 보았지만 스스로 생채기를 만들어 낼 뿐이었다. 뇌에 산소가 부족해지면서 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와중에도 취기 어린 꿈에서 깨어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치 이제까지의 모든 일상이 연극이었던 것처럼. 그 기분은 매우 역설적이었다.
저 멀리 모략을 나누는 자들의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주를 받은 한당이 한둘이 아닌 듯했다.
“라히무스는 2층에 있다. 녀석부터 잡아! 나머지는 잔챙이들이야.”
“님프는?”
“그쪽은 벨테그위의 병사들이 알아서 할 거야. 우리가 맡은 건 라히무스뿐이다.”
“일단 밖으로 끌어내! 포획은 그다음이다.”
“우리한텐 그게 있으니까 쫄지 마.”
이 중에서 목표물의 생김을 정확하게 아는 것은 포콘뿐이었지만, 그는 라히무스의 얼굴을 모르는 것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호언장담했다. 남자의 말대로였다. 심상찮은 소란을 듣고 내려온 염황의 잡종 개가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모두가 그를 알아보고 달려들었다.
반응은 본능적이었다. 그의 몸은 언제나 머리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라히무스는 발길을 돌려 2층으로 도망치는 대신 그대로 난간을 넘어 1층으로 뛰어내렸다. 육중한 낙차의 힘으로 둘, 각각 발끝과 팔뚝으로 제압한 뒤 경직된 꼬리를 휘둘러 주변을 물리쳤다. 그러나 치명타는 될 수 없었다.
‘…나니아는?’
그녀가 무사히 밖으로 나갔는지 주변을 둘러볼 틈도 없었다. 그의 급소를 노려오는 칼날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몸통을 보호하려다 보면 팔뚝 서너 번은 내어 줄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남자가 바닥에 쓰러뜨린 놈이 그의 다리를 붙들고 늘어졌으나 다행히 맷집이 좋은 도마뱀은 아니었다. 라히무스는 녀석을 걷어차 떨어뜨려 놓은 후, 놈이 바닥에 흘린 칼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발버둥치는 챠링고를 보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 이 칼을 어느 방향으로 던져 꽂아야 할지 고민했다. 한눈을 파는 라히무스의 복부를 향해 다시 한번 흉기가 들이 밀어졌다.
“씹….”
알싸한 냉기가 꿰뚫린 자상에서부터 배 속을 물들였다. 라히무스는 통증을 무시하고 긴 테이블을 훌쩍 뛰어넘어 동료의 목을 조르는 손을 노렸다.
“그거 하나 못 해?!”
노발대발 탓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챠링고를 맡기로 했던 리자드는 맡은 바를 완수할 틈 없이 벽으로 밀려나 라히무스의 무릎에 명치를 가격당했다. 챠링고는 놈이 허둥지둥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벗어났다. 죽을힘을 다해 쥐고 있던 쇠사슬은 이제 그녀의 무기가 되었다.
단검으로 챠링고의 배를 쑤셨던 남창은 종전의 호기로운 모습은 오간 데 없이 크게 당황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꽁지 빠지게 도망치는 모습에서 녀석의 하찮음이 드러났다. 챠링고는 그가 이 접전의 중심에 설 인물까지는 아니었음을 알고, 녀석과 어떤 베갯머리송사를 나누었는지 고민했다. 대체 언제부터 자신을 해칠 칼날을 갈고 있었는지도.
녀석은 알량한 복수심으로 쫓아가기엔 너무 보잘것없는 상대였고, 상황은 좋지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인간 열댓 명이라면 모를까 리자드 열댓 명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챠링고는 재빨리 그 남창을 쫓는 것을 포기하고 곁에 있던 다른 리자드의 목에 쇠사슬을 감았다.
“크헙…!”
“정교한 체인인데. 덕분에 내 목에 예쁜 목걸이가 생겼겠어, 이 빌어먹을 도마뱀 새끼들. 네게도 똑같은 걸 만들어 주마.”
그녀는 누구에게도 제법 뒤지지 않는 악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문제는 손이 두 개뿐이라는 사실이었다. 빼앗아 든 쇠사슬의 전격이 상대방의 목둘레를 찌릿찌릿하게 구워 주기도 전에, 다른 누군가가 챠링고의 등 뒤에서 메이스를 휘둘렀다. 그녀는 쿨럭거리며 각혈과 함께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다음부터는 라히무스도 여유가 없었다. 남자는 맨몸이고, 적들은 원소 인챈트가 붙은 무기를 사용했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었다.
무리하게 몸을 움직이던 라히무스가 칼을 놓쳤다. 식탁 위의 접시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구르고 술상은 엉망진창으로 뒤집혔다. 평화롭던 인어의 술통이 난장판으로 변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모든 집기가 바닥에 널브러지고 기둥 몇 개는 박살이 났다. 라히무스는 깨진 술병의 유리 파편을 들어 누군가의 눈알에 찔러 박았다. 놈은 비명을 지르며 비틀대긴 했지만 쉽게 자빠져 주지 않았다.
상대는 단련된 군형 용병들이었다. 그들과의 격렬한 몸싸움은 좀처럼 수월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라히무스는 파성추와 같이 몸을 부딪쳐 적들의 빈틈을 뚫고 빠져나와, 손에 잡힌 테이블을 힘껏 들어 던졌다.
남자는 캄캄한 창밖을 확인했다. 빗물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싸움이 성가실지언정 두려워 본 적은 없었던 심장이 거세게 동요하였다.
나니아. 님프와 동행 중일 그녀의 부재가 염려스러웠다. 여기 이 아수라장 속에 그녀가 없다는 사실은 다행이었지만, 곁에서 지켜 줄 수 없다는 점이 몹시도 불안했다.
문제가 생기더라도 개인적인 선에서 끝낼 수 있는 수준일 것이라 믿고 등한시한 것이 패착이었다. 자신에게 복수하겠다는, 겨우 그런 일념 따위로 무리를 지으면서까지 공격해 올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던 것이었다.
“죽이지 못하겠으면 제압만이라도 해!”
누군가의 지시를 따라 한 리자드가 몸을 던져 왔다. 등 뒤로 장판이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라히무스는 바닥으로 넘어지며 그와 대치하였다. 조잡하게 벌어진 나무 목재의 가시가 허벅지를 찔러 왔다. 사내는 적의 몸을 방패 삼아 다시 날붙이를 피했다.
“가져와! 개새끼에게 어울리는 목줄을 달아 줄 때다!”
한 리자드가 명령하듯 소리쳤다.
주변에서 무어라고 지껄이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다. 라히무스는 팔꿈치로 자신을 덮친 리자드의 얼굴을 가격하며 한 치 앞을 모면하는 데 급급했다. 박차고 일어나려는 그를 향해 또다시 대여섯의 리자드들이 달려들었다. 아무리 쑤시고 찔러도 끄떡하지 않자 칼자루를 내려놓은 놈들이었다. 그의 거동을 방해하려는 손이 한둘이 아니었다. 라히무스는 재차 종아리를 붙잡히며 바닥에 무릎을 찧었다. 놈들이 하체를 노린 이유가 있었다. 그의 발목에 족갑을 채우려는 의도에서였다.
* * *
파키케팔로와 나니아를 태운 녀석이 유독 말을 듣질 않아 강변으로 가는 내내 애를 먹였다. 이제 뽀송뽀송한 축사에서 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다시 끌려 나온 셈이었으니 녀석은 그 단맛이 그리울 만했다.
세찬 비에 젖은 말갈기 끝으로, 사람들의 코끝으로, 흔들리는 나뭇잎 끝으로, 빗물은 흐르고 맺히다 떨어졌다. 이제껏 버티고 버티던 나뭇잎들도 오늘 내리는 비에 모두 함락되고 말 것이 분명했다.
비에 젖은 육신에 오한이 밀려들었다. 내일이면 틀림없이 지독한 감기를 앓게 될 테지만, 말을 달리는 일을 멈출 수 없었다.
가는 길에 설명하겠다던 약속을 지키기라도 하듯이, 파키케팔로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바람이 휘몰아치고, 땅이 파도쳤어요! 뭔가 하긴 했는데, 뭘 한 건지 모르겠어요!”
자못 멍청한 소리처럼 들리는 그 말은 빗물에 반쯤 집어 삼켜졌다. 마찬가지로 반쯤은 알아듣고 반쯤은 알아듣지 못한 님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다 젖어 버린 모포의 무용함을 느끼며 속눈썹에 맺힌 물기를 손등으로 닦아 냈다. 거센 빗소리가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을 멎게 했다. 세 사람은 땅을 구르는 발굽의 아우성만을 흔들리는 온몸으로 느꼈다.
이제 곧 목적지에 다다를 때가 되어서였다. 새카맣고 적막해야 할 강변 마을에 점점이 횃불이 보였다. 기민한 암살자가 역으로 묘한 낌새를 눈치챈 것은 그쯤부터였다. 밭길에 다다라 말을 멈추어 세웠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돌려, 말 돌려요!”
파키케팔로가 벨로즈를 향해 다급히 외쳤다.
화살. 남자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그것이, 그를 태운 말의 꽁무니로 와서 박혔다.
날카로운 시촉에 찔린 말이 평정을 잃고 앞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녀석이 고통에 겨워 울부짖는 소리가 온 세상에 공명하였다. 너무나도 불길한 그 소리와 함께 중심을 잡지 못한 나니아의 입에서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워, 워!”
리자드가 고삐를 흔들며 다잡아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기어이 그는 동승자를 끌어안고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쪽을 택했다. 남자는 소녀의 머리를 감싸 안고 진흙 바닥을 뒹굴면서도 그가 보호해야 할 대상을 찾았다.
“벨로즈 님!”
언제부터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것일까. 깡통을 뒤집어쓴 수십의 근위병들이 여왕을 쫓는 벌 떼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감당할 수 없으리만치 많은 화살이 그를 향해 쏟아졌다. 파키케팔로가 끌어안고 있는 나니아도 그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었다.
“파코!”
님프의 절박한 호명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어떤 외지인이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준다더라. 붉은 리자드와 함께 움직인다더라. 어디서 자꾸 길러 온 작물들을 밭에 심게 한다더라. 그 기묘한 선행이 자아낸 것은 거미줄의 한 축이었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모두가 그 거미줄의 완성에 기여하였고, 포위망은 진작부터 촘촘하게 좁혀져 오고 있었다. 라히무스를 향하여, 챠링고를 향하여, 파키케팔로를 향하여, 그리고 벨로즈를 향하여.
* * *
찬탈자의 성긴 거미줄은 드높은 창공을 날아다니는 새도 낚아챌 기세로 번들거렸다. 벨로즈는 자신을 잡아 가둘 새장을 향해 까마득하고 요원한 길을 올랐다. 그 끝에 아가리를 활짝 벌린 포식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은 비탈진 길 위의 성문을 거쳐 본격적으로 요새의 중심을 향해 호송되었다. 곧장 감옥에 처넣어져도 이상스럽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그들은 안락한 방바닥을 구르는 방향으로 안내받았다.
어제의 공주였던 자와 오늘의 왕이 된 자의 감격스러운 상봉. 그 영광스러운 장면을 코앞에서 관람할 기회가 주어진 상대는 공주의 친구들과 벨테그위의 믿음직한 심복 둘 뿐이었다. 남자는 그들을 제외한 나머지 근위병들을 모두 방 밖으로 물렀다.
온통 거무죽죽한 분위기의 방 안은 그 차가운 느낌을 애써 감추듯 붉은 휘장을 곳곳에 두르고 있었다. 허울 좋은 장식품과 벌거벗은 인물로 깎아 낸 대리석 조각이 다소 흉물스러운 느낌으로 실내를 장식했다.
남자는 흙탕물을 구르다 온 거지꼴의 관객들이 구정물을 뚝뚝 흘리며 카펫을 더럽히는 데도 크게 개의치 않아 보였다. 다만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피앙세를 눈앞에 두고서 조금 놀라워하긴 했다.
“공주, 이게 대체 무슨 꼴이오.”
님프는 장작불이 타오르는 커다란 벽난로 앞에서 팔다리가 묶여 기다시피 엎드려 있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의 벨로즈를 딱하다는 듯 내려다보던 벨테그위가 그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이를 악물어 단단해진 하관에서 분개한 심정이 만져졌다.
남자는 까맣게 물들인 벨의 머리털을 안타깝다는 듯이 바라보며 짐짓 침통한 투로 지껄였다.
“휘황한 백조 같던 자태는 어디로 가고 어째 비루한 까마귀 한 마리가 되어 나타났는가 말이오.”
사내애처럼 잘라 놓은 머리털뿐만 아니라 성징을 시작한 것이 분명한 몸 선도 달갑잖았다.
“완전히 사내 태가 나기 시작했잖소, 공주. 이래서야 어디 앞으로 몇 년이나 더 공주 흉내를 낼 수 있겠소.”
“알았으면 이제 그놈의 공주 소리 좀 집어치워.”
“무슨 소리요, 공주. 내가 당신을 왜 이렇게까지 애타게 찾았는데. 공주는 평생 내 옆에서 공주로서 살아 주어야만 하오.”
님프가 이를 갈며 을러대자, 벨테그위는 귀엽다는 듯이 조소했다. 그는 일부러 공주라는 말을 더 많이 입에 올리는 것 같기도 했다.
“선왕의 왕녀이자, 나의 왕비로.”
그의 목적이 벨로즈 자신의 짐작과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님프는 너덜너덜해진 행색으로도 요요하고 날카롭게 웃어 보이며 그를 조롱했다.
“당숙과 부부의 연을 맺겠다니. 아주 대단한 결심을 하셨습니다.”
“딸과 붙어먹는 아비도 보았는데, 내가 겨우 그런 것을 저어하겠소?”
남자가 지껄이는 끔찍한 과거에서 고약한 망령의 냄새가 맡아졌다. 벨은 눈을 부릅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받아 주는 벨테그위의 시선에선 여유가 흘러넘쳤다.
“추잡스럽고, 형편없는 놈…. 어딜 너 따위 인간이….”
벨로즈는 평정을 잃은 목소리로 중얼중얼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자 벨테그위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였다.
“누가 왕이 되어도 공주의 양부보다야 썩 훌륭하게 해내지 않겠소?”
강인한 군사력과 부유한 경제력. 더불어 싱싱한 젊음까지. 그것이 어디에서 기인하였는지 알게 된 벨로즈의 눈에는 사상누각 같아 보일 뿐이었지만, 남자는 자신했다.
‘나 벨테그위는 탁월한 군주다. 카뮈안의 피를 이어받은 그 어떤 사내들보다.’
그 지저분한 내란의 승기를 잡는 것으로 증명해 보이지 않았던가. 남자가 남들보다 우위를 점하지 못한 것 단 한 가지. 그것은 정통성이었다.
왕위를 물려받을 자식도, 형제도, 심지어는 사촌 형제조차 몇 없는 선왕의 가계도에 이름이 남아 있는 것은 그의 새파란 내종질들뿐이었다. 어차피 다 고만고만한 타당성을 갖추고 있었다는 말이다.
저 자리가 내 것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런 가당찮은 탐욕을 품은 왕족들이 아직도 훌레랑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 성가시고 부적절한 야망을 끊어 내기 위하여, 벨테그위는 공주가 필요했다.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태로 자신의 품에 안겨 줄 공주가. 그의 왕좌에 정당성을 더해 줄 카뮈안의 공주가. 그녀는 귀족들의 콧대를 꺾어 줄 마지막 퍼즐이었다.
“아쉽게도 공주 본인은 아니지만…. 뭐, 그조차도 괜찮소.”
남자는 심복을 시켜 벨로즈가 무릎을 꿇게 했다. 그의 지저분한 시선이 님프의 몸을 훑었다. 아슬아슬한 칼끝이 벨로즈의 앞섶에 닿았다. 남자는 그것을 헤치듯 벌려 보았다. 차가운 칼등이 젖은 피부에 닿아 모골이 송연해졌다.
“침대 밖에서까지 홀딱 벗고 가랑이를 흔들 일은 없을 테니까, 벨로즈. 그 점은 안심해도 좋아.”
남자는 부러 모욕감을 안겨 주기라도 하듯 공주의 옷가지를 찢을 듯이 벗겨 내렸다. 그와 동시에 님프의 입에서 비명 같은 욕설이 새어 나왔다.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도 그의 하얀 나신은 눈이 부시게 빛났다. 보드랍고 매끈한 몸. 그러나 틀림없이 여성의 것이라고 보기 힘든 납작한 가슴이 관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단지 대가 가늘다는 말로 변명하기엔 너무도 빈약한 살덩이. 넓게 벌어지기 시작한 어깨. 늘씬하지만 남성적인 허리와 골반.
왕의 심복들은 이제껏 말로만 들었던 공주의 본질을 목도하고 놀란 숨을 집어삼켰다. 혼란스럽기는 나니아도 마찬가지였다.
‘공주님이, 공주님이 아니야…?’
그럼 저 남자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소녀의 충혈된 눈이 놀란 토끼처럼 벨을 응시했다. 그때 마침 벨로즈도 고개를 돌려 나니아의 눈길을 확인하고야 말았다. 님프의 하얀 치열이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는 마치 날개가 찢긴 나비처럼 파르르 몸을 떨었다. 혼탁한 눈동자가 푸르고 비참하게 빛났다. 나니아에게서 시선을 거두어간 벨로즈가 나지막이, 그러나 다분히 공격적인 말투로 중얼거렸다.
“변태 새끼….”
“영광이군. 훌레랑 제일의 변태 성욕자로부터 그런 말을 듣다니.”
남자는 부드러워 보이는 말투와 다르게 흉포한 손길로 님프의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벨로즈의 고개가 쥐어뜯길 듯이 들어 올려져 벨테그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순간, 님프가 입에 모아 두었던 침을 왕의 얼굴에 대고 뱉었다. 타액은 그의 왼쪽 눈 밑에 명중하여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전하!”
근위병들이 질겁하며 달려드는 것을 손을 들어 저지한 남자가, 같은 손으로 님프의 따귀를 힘껏 내갈겼다.
-짝.
가축을 길들이듯 거칠게 올라붙은 손바닥이 고결한 뺨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남자는 침이 묻은 왼편의 눈을 질끈 감고서 벨로즈의 머리채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장갑 낀 손등으로 천천히 닦아 낸 뒤에는 아무렇게나 벗어서 바닥에 던져두었다. 그가 저열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나는 전부터 네가 좋았어, 벨로즈. 고분고분 시체 같던 네 누이보다 훨씬 앙칼진 맛이 있었거든. 언제나 한 번쯤 손을 대 보고 싶다고 생각했지….”
가식적으로 부풀린 경어는 언제부턴가 그의 혀끝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차라리 네 쪽이 진짜 공주였다면 좋았을 걸….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남의 그림자로 산다는 게 그리 유쾌한 기분은 아니잖아.”
남자는 짐짓 비통한 체하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아쉬워하다가, 다시금 머리채를 붙잡아 이리저리로 돌려보며 님프의 얼굴을 면면히 살폈다.
“과연 훔쳐 오고 싶었을 만한 만고절색이라….”
경탄이 번져 가던 벨테그위의 안면에 다시 비소가 들어찼다.
“괜찮아. 이 정도의 앙칼짐은 공주 얼굴값이라 생각하면 참을 만하니까.”
어차피 벨로즈의 역할은 자신의 가슴 앞에 달아 놓은 영예로운 휘장, 아름다운 꽃송이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은 후사를 보기 위해, 또 가신들과의 돈독한 관계를 위해, 수도 없이 많은 혼례를 올리게 될 터다. 그 계약적 혼인들이 자신의 입지를 더욱 굳건하게 다져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두 번째 계획. 가능한 한 공주를 그의 정실로 맞이하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벨테그위는 굽혀 앉았던 무릎을 다시 세우고 일어나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예의 그 영달한 사람의 흉내를 내는 듯한 말투를 다시 이어 나갔다.
“우린 제법 아름다운 부부가 될 수 있을 거요. 정원 꽃들에게 기울였던 것만큼만 내게 정성을 들이는 것이 어떻겠소? 하다못해 공주는 다 죽어 가는 감자에게조차 애정을 베푸는 갸륵한 마음씨를 지녔으니.”
진지하지 못한 말은 빈정거림에 가까웠다. 님프도 지지 않고 모욕적인 말을 입에 담았다.
“지랄 말고 가서 도마뱀들 아랫도리나 더 빨아.”
“흐음…. 그 잘난 도마뱀들 비호를 받던 공주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소만.”
님프는 코웃음 치며 그의 도마뱀들을 떠올렸다. 벨로즈의 간곡한 목표는 챠링고와 라히무스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 그리고 어떻게든 그들이 자신의 위치를 알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벨테그위의 거드름이 그 희망에 재를 뿌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곳엔 한 마리뿐이군…. 나머지 두 마리는 지금쯤 처리가 되었으려나? 응? 공주. 어떻게 생각하오?”
‘처리…?’
벨과 파키케팔로, 그리고 나니아는 그제야 인어의 술통 쪽에서도 무언가 차질이 생겼음을 눈치채고 동요하였다.
“내 그대 하나 잡자고 항구에 돈을 처발라 가며 수도 없이 많은 도마뱀들을 내 편으로 꾀어야 했었다오. 그들 영역에 군사를 대동할 수 없다는 화약을 맺었거든…. 젠장,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병신 같은 조항이었어.”
남자는 잠시 딴생각에 빠져서 중얼중얼 과거 일을 떠올리는 듯했다.
“하지만 그래도 운이 좋았지…. 운이 좋았어. 이렇게라도 공주를 붙들 수 있었으니 말이오. 왕좌가 나의 것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나? 이곳이 내 땅임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찌 게롤린으로 오셨는가? 응? 하필 여기로!”
남자는 기분 나쁠 정도로 유쾌하게 웃어 댔다. 공주의 안일함이 낳은 결과가 매우 마음에 드는 듯했다.
‘라히무스….’
나니아는 마음속으로 그 이름을 섧게 불러 보았다.
이럴 줄 알았다면 감자고 뭐고 오늘 밤은 그의 곁에 남아 있을 것을. 알아낼 길 없는 그의 안위에 대한 걱정으로 소녀는 불안해졌다.
‘나 때문에….’
나니아는 원통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어지러운 실타래가 어디부터 꼬여 버렸는지 거슬러 올라가다가, 그녀는 까무룩 정신을 놓아 버리고픈 충동을 느꼈다.
“식은 당장 내일이나 모레 중으로 열릴 거야. 공주의 꼴을 보니 도성에서 성대하게 진행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우선 근처의 주교를 불러야겠군. 우리의 영원한 사랑 서약을 증명해 줄, 그냥 그 정도면 충분하겠어.”
남자가 손바닥을 비벼 가며 성급하고 서툰 결혼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벨은 그의 아름다운 신부 따위가 되어 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하! 네 밑에서 다시 또 그 지옥 같은 성벽에 갇히느니 혀를 깨물고 죽겠어.”
자결을 논하는 그의 혓바닥이 거짓이 아님을, 새파랗게 불붙은 눈빛이 증명했다. 그러자 남자의 손이 벨로즈의 이마를 향해 다가왔다. 그는 흉악스러운 아귀힘으로 그의 앞머리를 비틀어 쥐고 파키케팔로와 나니아가 쓰러져 있는 쪽을 똑똑히 바라보게 했다.
“저 둘이 얼마나 쓸모가 있었는지 모르겠소만, 일단 나한테 필요가 없는 것들임은 분명한데.”
젊은 왕은 체통 없이 쪼그려 앉은 자세로, 님프의 얼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검사해 보기라도 하려는 듯이.
“내가 아는 공주라면 눈 하나 깜짝 안 할 텐데…. 어떻소?”
공주를 달래기 위한 사탕으로 효용 가치가 있을까. 밑져야 본전이니 떠보는 것이었다.
님프의 떨리는 두 눈이 그가 말한 인질들을 향하였다. 정신을 잃은 파키케팔로의 등에는 아직도 고슴도치처럼 화살 십수 개가 꽂혀 있었고, 겁먹은 나니아는 그저 듣기 싫게 코를 훌쩍거리고만 있었다. 벨테그위는 그 짧은 순간 공주의 눈동자에 깃든 애틋함을 엿보았다. 더욱 확실히 인질들의 가치를 판가름하기 위하여, 왕은 명령했다.
“저 둘은 이제 쓸모가 없으니 데려가서 처리해.”
병사에게 명령하면서도, 벨테그위의 시선은 여전히 벨로즈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아, 안 돼.”
님프가 황급히 남자를 말렸다. 그 절박한 감정을 읽어 낸 벨테그위의 얼굴에 암특하고 비열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기대 이상의 반응이어서 놀랍기까지 했다.
님프가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당신 왕국 문제와는 전혀 관계없잖아…. 그냥, 그냥 돈을 받고 자기 일을 하던 애들일 뿐이야. 사, 살려 줘도 문제 될 거 없잖아.”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
살리나 죽이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말하는 벨테그위의 얼굴에 작위적인 웃음이 지어졌다.
“하, 할게…. 시키는 대로 할 테니까, 건드리지 마. 건드리지 말아 줘….”
언제부턴가 부품이 하나 빠져 버린 듯이 구는 님프의 모습이, 그 겁에 질린 얼굴이, 의외로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총명한 빛이 꺼진 눈동자가 그제야 제 누나를 좀 닮았다. 그 꼬락서니가 아주 처연하니 볼만했다.
“공주는 언제 어느 때나 무정하고 도도하던 것이 매력이었소만…. 대체 어디서 이런 표정을 배워 온 거요?”
벨테그위는 님프의 턱을 어루만지며 탄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내라는 점이 아쉬울 정도로, 이 가짜 공주는 지나치게 미인이었다.
“그새 천것들과 정분이라도 난 것이오? 어느 쪽이지? 이쪽? 아니면 저쪽?”
벨테그위의 자유분방한 손가락이 두 포로 사이를 오갔다. 그때마다 님프의 머리끄덩이가 이쪽저쪽으로 흔들렸다. 그것은 매우 치욕스럽고 굴욕적인 움직임이었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고 판단한 님프가 눈을 질끈 감고 답변을 거부하자, 벨테그위는 알겠다는 듯이 이기죽거렸다.
“아, 아니면 그거군. 저 둘이 붙어먹는 걸 보고 즐겼나?”
“…아니야.”
“여전해, 아주 여전해.”
“아니야, 아니라고!”
남자는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듯이 마귀처럼 웃어 댔다. 고통에 치를 떠는 벨로즈의 모습이 그를 더욱 즐겁게 했다. 젊은 왕의 웃음에 점점 광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남들 씹질 구경하면서 흥분하는 관음증이 여전한 게지! 응?”
“그 입 닥쳐.”
벨은 귀를 틀어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다.
“네 얼굴이 아니어도 그게 가능하던가? 응?”
“닥쳐! 닥쳐, 제발…!”
때마침 창문 밖에서 번개가 번쩍이며 방 안을 섬광으로 물들였다. 뒤이어 따라오는 천둥소리가 절망 어린 울음소리와 뒤섞였다.
둘은 둘이되, 하나였다. 같은 열매에서 태어난 두 명의 님프.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다르게 공주는 난파선에서 주워 온 자식이 아니었다. 그의 양부는 그들을 훔친 도둑이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는지까지는 남매도 알지 못했다. 커다랗고 탐스러운 열매 속에 잉태된 아기 님프. 그들은 인간의 간악한 요람 위에서 부화하였다.
누나는 발끝으로 껍질을 뜯고 세상 밖으로 나와 우렁찬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열매 속 모든 영양분을 독차지하기라도 한 듯 건강한 모습으로 첫 숨을 쉬는 사이, 미숙한 남동생은 그때까지도 붉은 과육 속에서 작은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열매의 주인은 따로 있고 그는 이물질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왕은 커다란 씨앗에는 벨로스라 이름 짓고 신이 점지해 준 양녀로 삼았다. 그 옆에 자그마한 씨앗에는 벨로즈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공주와 그녀의 그림자로 살아갈 미숙아를 구분 지으려는 방법일 뿐, 그림자의 이름을 소리 내어 다정하게 불러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벨로즈는 사실, 예정에 없던 자식이었다.
“진짜 벨로스 공주는 어디로 갔지?”
벨테그위가 물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녀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니었고, 딱히 정확한 대답을 기대하는 것도 아닌듯했다.
라일락 꽃향기가 뜰 안을 가득 메울 때쯤이었다. 왕궁 정원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보랏빛 봄꽃. 이 지옥 같은 궁 속에서 남매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것이었다.
눈물겹게 따스해서 더 비극적인 봄바람이 몸에 두른 옷을 한 겹 두 겹 빼앗아 갈 때쯤, 공주 앞으로 선물이 도착했다. 매우 진귀한 것이라 공주님께 꼭 진상하고 싶다며 바쳐진 그것은 님프가 사랑하는 꽃이었다. 아직 못다 핀 꽃봉오리가 매우 거대하고도 이국적이었다. 사람 주먹만 한 크기의 커다란 망울 속에 조그마한 편지 한 장이 감추어져 있음을, 꽃이 만개하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그 은밀한 꽃 편지를 통해 처음 알게 된 것이다. 바다 건너 저편에 진짜 가족이 있다는 사실과 어머니가 자식을 애타게 찾고 있다는 소식을.
님프는 카펫에 이마를 처박고 웅얼웅얼 대꾸했다.
“벨로스는 진작에 서쪽으로 넘어갔어. 이제 걔는 못 찾아.”
안전하게 어머니 품으로 돌아갔을 여형을 떠올리며 벨로즈는 자기 일처럼 기뻐할 수 없었다. 씁쓸한 그의 눈동자에 부러움, 시기, 체념의 감정이 뒤섞였다.
공주는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꾸려진 수색대의 호위를 받으며 비밀스럽게 성을 탈출했다. 벨로스를 위한 용의주도한 구출 작전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다.
아무도 그녀가 사라진 것에 대해 신경 쓰지 못했다. 추적하려 해도 어느 방향으로 도망쳤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뒤를 쫓을 생각 자체를 해낼 겨를이 없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남겨진 사람들은 왕의 죽음을 수습하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늙은 왕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한 수양딸의 손에 목이 졸려 저승으로 떨어졌다. 솜 빠진 인형처럼 영혼 없이 휘청이던 그녀의 어디서 그런 배짱이 솟아났는지 모를 일이다. 목을 조른 손이 두 개가 아니었다는 것을 보아서는 그조차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듯했지만.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되면서 비어 있는 왕좌를 두고 다투려는 자들이 하나둘씩 도성으로 모일 때쯤, 남겨진 벨로즈에게는 더욱 경계 높은 감시가 뒤따랐다.
비극적인 진혼곡 속에 홀로 남겨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나무는 잃어버린 열매 속에 씨앗이 두 개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진짜 공주는 무리 없이 빠져나간 동대륙을 그대가 아직도 배회하고 있던 까닭이 무엇이겠소.”
벨테그위의 손등이 언뜻 다정스럽게 벨로즈의 뺨을 쓰다듬었다.
“고작 도마뱀 세 마리. 그게 무엇을 의미할 것 같소? 당신에겐 그 정도밖에 투자할 가치가 없었던 거요.”
“…아니야.”
“공주님께서도 참 무심하시지. 평생을 의지하고 살아온 동생을 버려두고 어떻게 혼자서만 도망칠 궁리를 하셨을까.”
남자는 히죽거리며 벨로즈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그 당사자를 폄훼하였다. 님프는 분한 기분으로 눈을 질끈 감고 거친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실은 그도 같은 생각을 했었기에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그만 당신이 두 번째 중에서도 두 번째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좋겠소, 공주.”
그늘은 태어난 그 순간부터 머리 위로 깊게 드리워져 벗어날 길을 알지 못하게 했다. 누나는 이제 없는데, 그녀가 남겨 놓고 간 그림자만이 곁에 남아 손에 잡힐 듯했던 빛조차 가리어 버렸다.
같은 어머니 나무에서 태어난 불로수의 후계자.
둘은 하나이며, 그러나 둘이었다.
* * *
무엇이든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익숙해질 수 있는가 보다. 그것이 감옥에 갇혀서 느끼는 감상이 될 줄은 나니아도 몰랐다.
생에 두 번은 겪고 싶지 않았던 수감의 경험. 하지만 나니아는 외려 무던해졌음을 느꼈다. 게롤린 성에서의 하룻밤은 하늘이 무너진 듯 절망적이었던 폴핀에서의 기억에 비하면 그리 무섭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사실상 자포자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일 터다.
퀴퀴한 감방의 어둠에 익숙해졌을 때 즈음, 간수가 나니아를 그곳에서 꺼내 주었다. 허튼 짓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묶여 있던 손목과 발목을 풀어 주기까지 했으니, 하녀는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병사를 따랐다.
게롤린 성은 축조된 자리부터가 가파르고 험준한데 더불어 건물 자체도 매우 우뚝하니 높다랬다. 나니아는 계단을 오르고 올라 커다란 첨탑 끝으로 향했다. 병사가 안내한 곳은 그 안의 커다란 내실이었다.
귀부인을 위한 공간인 듯 우아하고도 안락하게 꾸며진 그곳은 마치 신부 대기실 같은 느낌을 주었다. 구색 맞추기 용으로 진열해 놓은 꽃 장식들이 생각보다 어여쁘게 멀건 여백을 단장시켰다. 방 안 구석구석 천사가 앉았다 간 듯한 사랑스러움이 흘러넘쳤다.
고풍스러운 유리창 너머로 영롱한 햇빛이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며 화려한 드레싱 테이블 위로 잘 닦인 거울을 비추었다. 그 앞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백의 신부가 세상 누구보다 불행해 보이는 얼굴로 앉아 있었다.
단언컨대 그야말로 이곳의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꽃송이였다.
님프의 옆에는 시중을 드는 하녀 몇몇이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가장 끄트머리에 선 여자가 기다란 드레스 자락을 바닥 위로 평평하게 펼쳐 놓았다. 하지만 움직일 때마다 주름이 지는 옷이니 부질없는 짓이었다.
벨로즈는 방문을 열고 들어온 나니아의 모습을 거울 너머로 확인했다.
“다 나가.”
님프가 빨간 입술을 열어 차갑게 명령했다. 그 도도한 얼굴은 마치 말할 줄 아는 인형 같아 보였다. 나니아는 여러모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첫째로는 숨 막히게 매혹적인 공주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들어오자마자 나가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공주님.”
하지만 하녀 하나가 난감해하며 그에게 불복하는 모습을 보고는 뒤늦게 벨의 명령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가, 다.”
공주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똑같은 말을 순서만 바꾸어서 반복했다. 님프의 명령은 나니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을 향한 것이었다. 그에 시종들이 몸을 수그리며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면 좋을지 고민하고 의논하는 눈초리였다. 벨테그위의 종들이 자신의 지시를 곧바로 따르지 않자, 공주는 노여워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나가라고 했잖아.”
“송구하오나 그것은…. 아니 되옵니다.”
“아무 짓도 안 해. 너희들이 만들어 놓은 나의 이 꼴을 보세요. 보면 몰라요? 이러고는 도망도 못 쳐.”
질타 한두 번이 통하지 않자 님프는 부아가 치밀었다.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니 단단히 감시하라는 명이라도 받은 걸까. 시종들도 제법 고집스럽게 뜻을 물리지 않았다.
“…그래도 아니 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공주는 코웃음을 치며 물었다.
“내가 누군지는 알고 있는 거야?”
“…….”
아주 쉽고 간단한 질문에도 침묵을 택하는 하녀들을 보고 님프는 버럭 성깔을 부렸다. 뒷머리에 꽂아 놓았던 면사포와 꽃핀을 잡아 뜯어 바닥으로 팽개친 것이었다.
“말해! 내가 누구냐고!”
님프가 목소리를 높여 하명하자, 그제야 하녀 한 사람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이 여, 영광스러운 날, 벨로스 공주를 받들어 모십니다.”
공주는 익숙한 인사말을 받으며 다시 평안을 되찾은 척하는 낯빛으로 돌아왔다. 님프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나는 선왕의 이름을 이은 독일무이의 왕녀, 벨로스 카뮈안입니다. 당신들 주인이 길거리에서 주워 온 넝마주이쯤으로 감히 착각해선 곤란하지요.”
벨로즈의 파리한 시선이 화장대 위를 훑었다. 섬섬옥수 모양 예쁜 남자의 손이 잡히는 대로 향유 병을 집어 들었다.
“내가 지금부터 저 여자애랑 나눌 이야기는 너희 주인이 너희들한테도 숨기는 이야기들뿐이니까 마음대로 해. 쥐새끼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엿듣고 벨테그위 칼에 목이 댕강 잘리거나….”
님프는 먼저 바닥을 나뒹굴고 있던 면사포 위로 향유가 담긴 유리병을 거세게 집어 던졌다. 그것은 투척한 사람의 의도대로 산산이 조각나 신부의 고결한 베일을 더럽혔다.
“가서 새로운 노리개나 구해 오거나.”
님프는 폭이 좁은 치맛단을 억지로 잡아당겨 다리를 꼬았다. 그것은 공주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마음껏 신경질을 부리고 나서 한결 산뜻해진 얼굴의 벨로즈가 비딱하게 턱을 괴었다.
“어느 쪽이든 충분히 충성스러울 테니 걱정하지 말고.”
하녀들은 우물쭈물하며 서로의 안색을 살폈다. 그들 미래의 안주인이 성미가 더럽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상당히 근심스러운 눈치였다.
결국 가장 연륜이 있어 보이는 시종이 바닥에 떨어진 면사포를 손에 쥐는 것으로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그녀는 한시바삐 문제를 해결해 오겠다며 머리를 조아렸고, 나머지 하녀들도 줄줄이 물러 나갔다. 님프가 마지막으로 병사를 노려보자, 그 역시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끈 떨어진 왕녀라도 하나뿐인 공주의 이름에 따르는 고결함이란 그런 것이었다.
나니아는 이제 홀로 벨로즈의 곁에 남았다. 우두커니 서서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저 분노를 혼자서 오롯이 받아 낼 생각에 벌써부터 뒷골이 뻐근해졌다. 공주는 다시 인형처럼 꼿꼿이 앉아서 말없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관찰하는 눈빛이 마치 남의 얼굴을 훑어보는 사람처럼 생경하였다.
벨은 고저 없이 무감한 말투로 나니아에게 요구하였다.
“지금 내 꼴이 얼마나 우스운지 말해 봐요.”
푸른 유리알처럼 공허하게 빛나는 님프의 눈동자가 거울 속의 나니아를 향하고 있었다. 하녀는 그가 무슨 대답을 원하는지 몰라 갈등하며 입술만 달싹이고 서 있었다. 그가 다시 짧은 정적을 깨고 물었다.
“사내란 걸 알게 된 지금, 이 우스꽝스러운 차림새가 네 눈에 어때 보이는지 묻잖아.”
남자는 금세 히스테릭해졌다. 고개를 홱 돌려서 마주한 그의 얼굴에 짜증스러운 기색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그는 이제 거울을 통해서가 아니라 나니아의 눈을 직접 응시하였다. 그 속에 담긴 경멸과 배신감을 마주하려 했다.
“너도 내가 볼썽사납지? 그런데 난 원래 이렇게 살았어. 여자처럼 머리를 기르고 여자 옷을 입으며, 필요할 땐 공주 흉내를 내며 누나를 대신했어. 그래서 나는 이게 몸에 익어. 바지보다 드레스가 더 편하고 익숙하다고.”
몸에 잘 맞는다는 말이 무색하게도 그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는 보폭에 지장을 줄 정도로 매우 불편한 디자인이었다.
남자가 희미하게 조소하며 혼잣말했다.
“…병신같이 이딴 걸 준비했어.”
누구 때문인지 이젠 그도 욕설이 익숙했다. 자조적인 웃음에 싱거운 푸념이 섞였다.
꽉 끼는 순백의 실크드레스가 흉통을 터뜨릴 듯 조여 왔다. 살이 비치는 레이스를 군데군데 재봉해 넣은 옷감이 잘록한 허리를 감싸고 각진 골반 밑으로 답답하게 떨어졌다. 가녀린 몸 선을 자랑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게 분명한 맵시의 드레스였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옷을 준비했는지, 님프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이딴 옷은 입을 수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너는 항상 내가 아름답다고 말했지만, 그게 여장 남자 따위를 위한 찬미가 아니었음을 알아.”
님프는 긴 다리를 세워 앉아 있던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언뜻 여자치고 넓어진 어깨를 가리기 위해 흰담비 털 숄을 걸치고 있었다. 그조차 신부를 위한 물건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듯 눈부시게 희어서 몹시도 짜증이 나던 차였다.
새하얀 차림새와는 대조적이게도, 분노인지 수치심인지 모를 감정으로 님프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갔다. 그는 들통 난 치부를 도리어 폭발적으로 드러내듯 자학적인 말을 쏟아 냈다.
“솔직하게 말해도 좋아. 내가 역겹다고, 경멸스럽다고. 다리 사이에 뭐가 붙어 있는지 철저하게 감추면서 계집인 척, 해롭지 않은 척, 너를 속이고 음흉하게 곁을 맴돌면서 즐거워한 나를, 나는….”
평소답지 않게 분노에 차서 뚜벅뚜벅 걸어온 님프는, 나니아의 코앞에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필사적이어서 더욱 초조한 그의 푸른 눈동자가 처량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작은 씨앗의 위태로운 존재감이 볕 들지 않는 토양 속에서 건조하게 메말라 가고 있었다. 비난이든 조롱이든 무엇이든 좋다. 그러니까 제발 무슨 얘기라도 해 달라며, 님프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호소했다.
“말해 봐. 네가 본 내 모습은, 나란 건 대체 뭐냐고….”
* * *
통증보다도 나른함이 라히무스를 꼼짝 못 하게 만들었다. 어질어질하고 몽롱한 기운이 전신을 휘감아서 좀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거 정말 신통하네.”
“그러게 내가 뭐랬어. 이것만 있으면 저런 잡종 새끼는 쪽도 못 쓴다고 했지.”
즐겁게 떠들어 대는 목소리가 성공에 취해 있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벨테그위에게 거하게 받아 내서 각자 자기 몫 챙기고, 그리고 저 새끼 들고 여길 뜨면 되는 거야.”
“그런데 나는 마당 개 목숨값으로 과연 얼마나 벌 수 있을까 의심스러우이…. 이거이 증말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는가?”
“겁나면 여기부터 빠지시든가.”
“아니, 겁나는 게 아이라…. 번거롭잖어. 기냥 여기서 콱 뒈져 뿔면 좋겄구만.”
겁쟁이 취급을 당한 남자가 화풀이하듯 인질의 배를 발로 걷어찼다. 덕분에 라히무스는 쿨럭거리면서 간신히 눈을 떴다.
짓눌린 뺨에 닿는 바닥의 감촉이 차갑고 거칠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리자드들의 뒷발과 꼬리. 남자는 무거운 몸을 움직여 부자유한 운신을 확인했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자세를 뒤틀어 보았지만 무엇하나 자유로운 부분이 없었다. 사지에는 수족갑이, 목에는 목줄이, 입에는 재갈이 물리어져 있었다. 발정기도 아닌데 이렇게 꽁꽁 묶여 보기는 또 처음이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그 생존의 기척을 알아들은 리자드가 재차 신발 콧등으로 라히무스의 볼을 툭툭 건드렸다.
“정신이 드나 본데?”
“이봐, 기분이 어때. 갑옷도 무기도 없이 무력하게 벌레처럼 누워 있는 꼴이 말이야.”
자신을 비웃는 목소리에도 사내는 그저 무거운 눈꺼풀을 느릿하게 껌뻑껌뻑 움직이길 반복할 뿐이었다. 라히무스의 붉은 눈동자가 흐릿하게 드러났다 감춰지기를 반복했다.
맹수처럼 날뛰는 모습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얌전한 그를 보니 미심쩍은 기분이 드는 리자드가 있었다.
“이게 진짜로 라히무스가 맞아?”
“맞다니까!”
그 목소리는 라히무스의 귀에도 제법 익숙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성난 발걸음으로 다가와 라히무스의 가슴을 발로 힘껏 밟아 댔다. 배 속 깊은 곳에서 식도를 관통해 올라온 토혈이 쿨럭이는 기침과 함께 뱉어졌다. 핏물이 거쳐 온 군데군데 쓰리지 않은 곳이 없었다. 군데군데 찔리고 쓸려서 성치 않은 몸이 정신을 잃는 동안 벌어졌던 구타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라히무스가 발에 차여 바닥을 구를 때마다 사지 마디마디에 채워진 쇳덩이가 기분 나쁜 소음을 만들어 냈다. 쇠사슬로 만들어진 그의 목줄은 건물 안쪽으로 돌출된 들보에 높이 묶여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건물을 박살 내고서라도 거세게 대응했을 그가, 어째선지 마취당한 짐승처럼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못 잡은 한 놈은 벨테그위가 잘 대처했을까?”
“우리 역할은 라히무스를 붙들어 놓는 것까지다. 인어의 술통 바깥 일은 우리가 알 바 아니야.”
“그럼 저 암컷은 어떡하지?”
“암컷은….”
고민하듯 흐려지는 말끝이 라히무스의 몽롱한 귓가에 와 닿았다. ‘암컷’이라는 말에 한순간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가 지켜 주지 못한 자신의 여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 여자는 벨테그위가 결혼식을 마치고 수도로 돌아가면, 그때 풀어 주자. 라히무스 없이 혼자서 별수 있겠나?”
“그래. 임무 포기하고 본토로 돌아가겠지.”
“상당히 굴욕적이겠구만. 일감이 뚝 끊기겄어.”
한 리자드가 낄낄거렸다.
라히무스는 그제야 그들이 말하는 암컷이라는 게 챠링고를 뜻하는 것임을 이해하고 황망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다시 라히무스를 보고 이기죽거렸다.
“혀 깨물고 뒈질 놈은 아니니까 입마개를 좀 풀어 줘 보는 게 어때? 소감을 들어 보고 싶지 않나?”
그 말에 한 리자드가 라히무스의 뒤로 다가왔다. 그가 입을 틀어막은 줄을 끌러 주자, 코로만 간신히 이어 왔던 벅찬 숨이 터져 나왔다.
“으…. 침 질질 흘리는 꼴이 아주 걸작이구만.”
남자는 세상 무서울 것 없어 보였던 짐승이 굴욕적으로 너덜거리는 것을 보며 즐거워했다. 그를 통제하던 기구가 하나 사라졌지만, 라히무스는 여전히 시체처럼 누워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단지 그뿐인데도 호흡이 주체할 수 없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쥐고 주무르는 것처럼 심장이 뛰었던 탓이다. 그 병적인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사내는 열이 오른 얼굴로 간신히 성대를 열었다.
“…너네 뭐야.”
그의 목소리는 오랜 침묵으로 낮게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