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아래층에서는 글공부가 한창이었다. 그러나 학구열을 불태우고 있는 것은 교수자뿐, 학생은 흥미 없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다룸 선생이 또 다른 학습자를 발견하곤 말했다. 그는 점심때가 한참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낸 나니아를 책잡았다.
“오늘 늦잠은 좀 과했습니다.”
평소 부지런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하녀였지만, 억울하더라도 켕기는 바가 있어 입을 다물었다.
“늦었습니다. 포크는 됐고, 펜이나 쥐여드리지요.”
헤르가 테이블 앞에 앉은 나니아에게 술지와 둥근 촉 잉크 펜을 들이밀었다. 부엌 쪽을 흘긋 쳐다보자, 다룸이 그녀를 단념시켰다.
“오늘 식사는 포기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왜요?”
“수도에 문제가 생겼답니다. 저희도 아침부터 쫄쫄 굶다가 마른 빵 몇 조각 겨우 먹었을 뿐이고요.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물을 다뤄 보고 있었습니다. 공기 중에 있는 물을 모아 이 컵에 모을 겁니다. 방법은 기억하죠?”
헤르가 나니아의 앞에 추가로 빈 컵을 밀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벨로즈도 아까부터 물잔을 가만히 노려보는 중이었다. 그는 오묘한 물빛으로 반짝이는 구슬을 오른손에 꼬옥 쥐고 있었다.
나니아가 무엇을 쳐다보는지 알아차린 다룸이 말했다.
“그건 당신 거 아닙니다. 만져 볼 일 없을 테니까 내버려 두시고. 물 한 컵을 채우고 나면 다음은 소용돌이를 만들 겁니다. 당신은 자형은 곧잘 외우는데 형상화 능력이 좀 부족한 것 같아서 걱정이란 말입니다. 자, 시작하죠. 술지를 몇 장이나 쓰는지 한번 봅시다.”
헤르가 손가락 하나를 빙글빙글 돌렸다. 나니아는 멍한 표정으로 컵을 바라보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 총명한 척 또렷하게 눈을 떴다. 일어난 지 한참 지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던 까닭이다.
하녀는 전에 배운 술식을 천천히 적어 내려가면서도 흘긋 파키케팔로의 눈치를 살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아는지 모르는지 가늠하는 눈길이었다.
라히무스의 말에 따르면 인어의 술통에 남아 있던 일행들은 그녀가 언제 집으로 돌아왔는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챠링고의 행방도 따로 묻지 않는 것을 보니 그러려니 하는 모양이었다.
나니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뻑뻑한 목을 다듬어 말했다.
“…파코, 부탁해요.”
그녀는 한 손에 컵을 들고 그 위에서 술지를 팔랑거렸다.
파키케팔로는 순순히 입김을 불어 종이의 한 귀퉁이를 태웠다. 나니아는 타들어 가는 술지를 컵 안에 떨어뜨렸다. 성공적으로 식이 발동된 술지는 재를 남기지 않고 사라졌지만 겨우 한 모금 정도 되는 물이 컵 내부에 차오를 뿐이었다.
그 후로도 리자드는 몇 번이나 협조적으로 술지 태우는 일을 도왔다.
마침내 물 한 컵이 온전히 마련되었을 때쯤, 어디서 나타났는지 시커먼 동물 한 마리가 테이블로 올라왔다. 그 괴상한 생물은 물잔을 향해 돌진해 왔다.
“야잇…!”
물컵이 중심을 잃고 쏟아지면서, 신출내기 다룸이 간신히 모아 놓은 노력의 산물도 모두 엎질러졌다. 소용돌이를 채 돌려 보기도 전이었다.
물이 쏟아지자 자리에 있던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다리를 오므린다거나 팔을 들어 올린다거나 하면서 가볍게 소란을 피웠다.
“그 징그러운 도마뱀 관리 좀 똑바로 합시다.”
헤르가 짜증을 내자, 파키케팔로가 문제의 동물을 낚아챘다.
“아직 어려서 그래.”
그러고는 예뻐 죽겠다는 듯 손에 든 동물을 어르고 달래며 둥개둥개 흔들었다.
깜짝 놀라 움츠러들었던 나니아의 몸이 다시 바로 돌아왔다. 그녀는 파키케팔로가 손에 든 괴생물을 조심스럽게 관찰하였다. 태어나 처음 보는 생김새였다.
“이게 대체 뭐예요…?”
처음에는 축수의 일종인가 싶어 당황하였다. 나니아가 묻자, 파키케팔로가 썩 자랑스러워하는 투로 대꾸했다.
“이건 우우룡이라고 해. 귀엽지?”
그것은 강아지도 고양이도 아닌 것이, 크기는 딱 그만한 벌거숭이 파충류였다. 눈 코 입은 뱀과 같고 퉁퉁한 네 다리는 새끼 하마와 같았다. 정수리부터 꼬리까지 검고 탁한 비늘이 빼곡하게 박혀 있고 턱 아래로는 연녹색의 볼록한 뱃가죽을 지니고 있었다. 아직 길이를 가늠해 볼 수 없는 날개가 현재는 가지런히 접혀서 등에 붙어 있었다.
“이름은 코우야. 인사해. 안녕, 코우. 안녕, 나나.”
파키케팔로가 이 퉁퉁하고도 작은 도마뱀의 앞다리를 흔들어 여자에게 인사시켰다.
그것은 리자드의 품에 안겨서 끼유욱, 뀨욱 하며 이상야릇한 소리로 울었다. 계속 보니 귀여운 것도 같았다.
“얘도 서쪽에서 왔나요?”
어디 한번 쓰다듬어 보려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뜨악하는 비명과 함께 손을 치웠다. 녀석이 제법 앙칼지게 손가락을 깨문 것이었다.
“어어, 조심해. 우리 용족 외의 상대에게는 사나우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
파키케팔로가 우우룡을 안은 몸을 바깥으로 돌리며 경고했다.
그때 머리 위로 으스스한 그늘이 깔리며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정수리로 떨어졌다.
“뭐야 이건.”
어느새 계단을 내려온 라히무스가 작은 우우룡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딱딱한 줄만 알았던 녀석의 겉가죽이 고양이 목덜미처럼 늘어났다.
그것은 파키케팔로의 품에 안겨 여유를 부리던 때와 다르게 목숨의 위협이라도 느낀 듯, 다급한 소리를 내며 끼룩끼룩 울었다.
“주인 없는 우우룡이야. 새끼 인간들한테 얻어맞고 있던 거 주워 왔어. 이리 줘.”
파키케팔로가 어서 돌려 달라는 듯 손을 벌리자, 성격 나쁜 리자드는 살벌하게 인상을 구겼다.
“내 나냐 못 물게 해.”
남자는 파키케팔로의 품에 우우룡을 던지듯 놓아 주고는, 녀석이 앉아 있던 의자를 발로 찼다. 의자가 휘청이는 사이 발로 한 번 더 밀어서 기어코 나니아와의 사이에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 앉았다.
“사람을 구분할 수 있나요? 똑똑하네요….”
“그렇지. 잘 길들여 놓으면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게 많아. 편지도 나르고 심부름도 해.”
아직 녀석이 해낸 일이라고는 기껏 모아 놓은 물 한 잔을 엎어 버린 것밖에 없는데도, 파키케팔로는 기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어느새 이름을 붙인 우우룡 코우의 이마를 살살 긁어 주었다. 그러자 녀석이 또 끔찍 깜찍한 소리를 내며 엉겨 붙었다.
신기하고 귀여워서 다시 또 만져 보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질 않았다.
“만지려고 하면…. 또 물겠죠? 어떻게 하면 친해질 수 있어요…?”
작고 귀여운 동물에게 거절당한 슬픔으로 상심한 나니아를 향해 벨이 말했다.
“너무 기분 상해 말아요. 이것 보세요. 저한테도….”
벨로즈가 보란 듯이 손을 가져다 대자, 우우룡이 또 이를 깡깡 깨물며 입질했다. 하지만 님프는 재치 좋게 손을 빼내어 물리지 않았다.
“이런답니다.”
파키케팔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원래 그래. 얘들은 본능적으로 우리에게 끌리는 거야.”
리자드는 새끼 우우룡에게 흠뻑 빠져 있는 것 같았다.
한편 나니아에게 흠뻑 빠져 있는 리자드 사내는, 우우룡에게 물린 그녀의 손가락을 입으로 가져왔다. 나니아는 쪽쪽 빨아먹을 기세로 들이대는 것을 강렬하게 뿌리쳤다. 그 손은 남자의 뺨을 찰싹 두드리고 등 뒤로 감추어졌다.
헤르가 옆에서 참견했다.
“강아지 같은 거죠. 그것들도 맹목적으로 사람을 사랑하니까요.”
라히무스는 우우룡의 한쪽 날개를 부채 펼치듯 잡아당겼다. 억지로 벌어진 녀석의 날개가 힘겹게 파들거렸다.
척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남자가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날지도 못하는 우우룡을 어디다 써먹어.”
“아, 내가 치료해 줄 거라니깐!”
파키케팔로가 신경질적으로 라히무스의 손을 밀어 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버려진 것 같단 말이야…. 불쌍해.”
리자드가 침울한 투로 말했다.
나니아의 팔이 라히무스를 넘어 코우의 꼬리 끝을 살짝 건드렸다. 물리지 않을 위치라는 확신이 있었다. 실제로 녀석은 만져졌는지 어떤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다친 동물에게는 다정하게 대해 줘야죠.”
그녀가 훈계하듯 이야기하자 라히무스는 뾰로통해졌다.
“나는 너한테만 다정하기도 벅차.”
질색하는 헤르와 벨로즈의 맞은편에서, 사내는 묘한 표정으로 나니아에게 몸을 기울였다.
“나한테도 비슷한 게 달려 있는데. 이것부터 좀 귀여워해 주지 그래.”
그러면서 자신의 엉큼한 꼬리로 소녀의 종아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것이었다.
나니아는 얼굴을 확 붉히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리자드의 손을 잡아끌었다.
“잠, 잠깐 나 좀 봐요.”
나니아는 꺾어지는 복도 벽 뒤로 몸을 피한 후, 본격적으로 라히무스를 나무랐다.
“사람들 다 보는 데서 그러지 좀 말아요!”
리자드는 눈썹을 들어 올리면서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나니아는 주먹 쥔 손으로 그의 가슴을 꽁 때렸다.
“창피하다구요…!”
그녀는 라히무스와 그렇고 그런 걸쩍지근한 사이가 되었다는 사실을 가능한 한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애정 행각을 공공연히 보여 준다는 것이 부끄럽기도 하거니와, 일행들 사이에서 어색한 상황을 만들어 내며 민폐를 끼치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라키바하프를 사랑한다며 쫓아다닌 자신의 변심이 얼마나 우스워 보일까 걱정스러웠다. 물론 벨로즈의 시선도 신경 쓰였다.
“아무튼 무슨 말인지 알아듣죠? 아까 그렇게나 설명했잖아요….”
나니아가 라히무스의 옆구리에 힘없이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리자드는 왜 그래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 모습이 종전의 우우룡과 겹쳐 보여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여자가 웃자, 허락의 의미 같아 보였는지 남자가 고개를 기울여 왔다.
“안 돼.”
시도 때도 없이 입 맞추려는 그를 밀어 내며 나니아가 피곤한 투로 말했다. 푹 잠들지 못했던 탓에 실제로 몸이 무겁기도 하였다.
흥분해서 달려드는 그를 벌건 대낮에는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밀어낸 후였다. 남자는 언제나 그랬지만 오늘 특히 더 안달이 나 있었다.
“당신 때문에 빨래 거리가 산더미야. 어제 대체 얼마나….”
나니아는 남자를 책망하다 말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온갖 이상한 체액들로 범벅된 옷들을 떠올리자 얼굴이 화끈화끈해졌다.
그녀는 차오른 수치심을 떠넘기듯 사내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쿡 찌르며 비난했다.
“물이 많은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잖아.”
라히무스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갈 듯 꿈틀거리다가 제자리에 머물렀다. 생각지 못한 지적에 야릇한 수치심이 확 밀려들었던 탓이다.
남자가 겸연쩍게 한쪽 눈을 비비며 물었다.
“내가… 할까?”
“됐어요.”
저리 비키라며 어깨를 밀었더니 그가 다시 나니아의 팔을 붙잡았다. 남자는 그녀가 잊고 있던 사실을 말해 주었다.
“상수도에 문제가 생겼다던데.”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 몰라 알쏭달쏭한 표정을 짓자, 남자가 다른 객실의 손님들에게 주워들은 이야기를 덧붙였다.
“누군가 석회를 뿌렸다더군.”
하녀는 누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몰라 아리송하면서도 더는 방치해 둘 수 없는 빨랫감을 챙겨 냇가를 찾기로 했다. 헤르는 하던 공부도 제쳐 놓고 가사일 먼저 해치우려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옆에 있던 파키케팔로가 정화 작업에 당신이 도움을 보탤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핀잔을 주었더니, 다룸은 돈을 받지 않고는 일하지 않는다며 새침하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녀는 여관에서 빌린 왕골나무 바구니에 더러운 옷가지들을 쟁여 넣었다. 묽은 액체가 흘러내리거나 말라붙은 체액이 드러나지 않도록 얼룩진 부분을 안쪽으로 하여 조심히 접었다. 그러다 다시 또 간밤의 일이 생각나 얼굴이 화끈해졌다. 하녀는 기껏 접은 빨랫감을 바구니 안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크기가 말만 하다 했더니 배출량도 짐승 수준이었다.
“챠링고는 어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등 뒤로 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니아는 화들짝 놀라 나머지 옷들을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그녀는 방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아 떨떠름한 목소리로 그런 것 같다고 대꾸했다.
벨은 팔짱을 낀 채로 나니아의 뒷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사뿐사뿐 걸어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혼자 가려는 건가요? 길을 찾을 수 있겠어요?”
“파코랑 함께 가기로 했어요.”
“그래요? 그럼 나도 같이 가요.”
“네? 벨 님께서는 여기 안전하게 계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나니아가 걱정스럽게 말하며 고개를 얕게 저었다. 바닥을 짚은 손 옆으로 님프의 희고 긴 다리가 보였다.
그녀의 가벼운 옷차림을 보고 나니아는 걱정했다. 아무리 실내라지만, 춥지도 않은 걸까.
“내가 전쟁터를 따라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 빨래터인데요. 파키케팔로도 함께 간다면 나니아가 걱정할 만한 일은 벌어지지 않아요.”
벨로즈는 태연하면서도 자신만만한 투로 말했다.
“그리고 지금 내 모습은 어딜 봐도 벨 공주 같지는 않을 테니까요.”
나니아는 무례한 고개를 들어 공주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살폈다.
남의 것을 뒤집어쓴 것처럼 까맣고 짧은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아름다운 외모만큼은 여전히 비상했으나, 이제는 완연히 키가 큰 소년 같아 보였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역시 답답해요. 나는 갇혀 지내는 건 딱 질색이라서.”
벨이 조르듯 말했다. 눈이 마주치자 개구쟁이 같은 표정으로 빙긋 웃었다. 꿍꿍이를 알 수 없어 이상하다 여기기엔 그 미소가 지나치게 천진했다. 햇살을 모르는 백옥의 피부 위로 옅은 홍조가 묻어났다.
“다들 나 빼고 신나게 놀러 다니기나 하고 말이죠.”
그녀의 말에 나니아는 지난밤 챠링고를 따라갔다 나온 그 퇴폐업소가 생각이 나서 가슴이 뜨끔했다.
어색하고 껄끄러운 나니아와 다르게 공주의 파란 두 눈은 여느 때와 똑같이 맑고 깨끗했다. 태도는 여전히 당당하고 여유로웠다. 저를 섭섭하고 무안하게 했음직한 나니아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물없이 대해 주는 그녀가 고맙기도 하였고 어렵기도 하였다.
나니아는 복잡한 마음을 담아 소리 나지 않게 한숨지었다. 그러고는 쪼그려 앉은 몸을 일으킬 것처럼 자세를 취했다.
“벨 님 것도 빨아드릴까요?”
하녀가 묻자, 공주는 표정이 미묘해졌다. 여유를 한 겹 벗은 얼굴이 생각에 잠겼다.
“그건…. 남의 다리 사이에 앉아서 물을 말은 아니군요.”
고민하던 얼굴이 이내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는 것으로 힘을 풀었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벨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나니아의 어깨를 두어 번 토닥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렇게 급할 것도 없어요.”
채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듯 자신의 방문 밖을 나서는 벨의 뒷모습을 돌아보면서, 나니아는 겨울 찬 바람에 말린 옷처럼 딱딱해졌다.
나니아는 파키케팔로의 말을 얻어 탔다. 벨과 꼭 붙어 있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리자드의 볼록한 옷 속에 우우룡이 담겨 있었다. 녀석은 어미 주머니에 몸을 숨긴 짐승처럼 얌전하고 온순했다.
나니아는 파키케팔로로부터 동전 하나를 받아 챙겼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는 땅굴 통행증이었다.
숙소에서 나오기 전 리자드 둘이서 무어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부재한 라히무스의 행방을 물었다.
“라히무스는요?”
“편지를 부치러 갔어.”
“편지? 누구한테요?”
“그건 나도 모르겠는데. 아마 본토로 보내는 거겠지?”
혈혈단신의 삶을 사는 줄 알았던 그에게 안부를 전할 상대가 있다는 사실이 의외였다. 그러고 보니 라히무스에 대해 아는 바가 참 없었다.
‘…여자인가?’
나니아는 자신의 마음속에 여전히 그에 대한 불안감이나 불신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파키케팔로와 나니아 그리고 벨로즈를 태운 두 마리의 말이 담수를 찾아 달렸다.
가을이 되어도 옷을 갈아입지 않는 나무들의 군락이 저 멀리 펼쳐졌다. 민가가 드문드문 이어지는 길과도 한참 멀어진 곳이었다.
길을 찾을 수나 있겠냐는 벨의 걱정대로였다. 혼자서라면 결코 반나절 내에 다녀올 수 없었을 거리에서, 곧 바다가 될 냇물을 찾았다.
이쯤에서 내려도 좋을 법한데 앞서가던 벨로즈가 전진을 멈추지 않았다. 무언가 찾는 게 있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상류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누군가를 발견한 벨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번졌다.
쭈뼛거리는 아이들 틈에 가장 왜소한 아이가 폴짝거리면서 달려왔다.
마침내 말을 세운 벨을 따라 파키케팔로도 고삐를 잡아당겼다.
긴 다리로 강둑에 풀쩍 뛰어내린 님프는 곧이어 말 엉덩이에 동여맨 짐을 풀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니아도 파키케팔로의 도움을 받아 땅을 밟았다.
“요정님, 요정님이야.”
아이는 풀을 밟으며 달려오는 와중에도 간간이 뒤를 돌아 손짓했다. 의심하고 두려워하며 다가오지 못하는 다른 아이들을 향한 신호였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아이의 눈에서 투명한 믿음이 빛났다.
벨은 짐을 끄르며 불퉁스럽게 대꾸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죠.”
“그럼 뭐라고 불러요?”
“…네가 나를 부를 이름은 없어. 그냥 주는 음식이나 받아먹으라고 했잖아.”
님프는 친절한 건지 매정한 건지 알 수 없는 모습을 비쳤다.
파키케팔로는 다소 먼발치에서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아이들이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나니아는 그에게 낯선 아이의 정체를 물었다.
“굶는 게 딱하다고 몇 끼 챙겨 준 아이야. 그거 조금 먹겠다고 이 거리를 걸어서 왕복했다니 믿기지 않는걸. 워워, 진정해.”
그의 옷 속에 안겨 있던 코우가 아이들을 보더니 사납게 그르렁거렸다.
“쟤네들이거든. 얘를 국 끓여 먹겠다고 두들겨 패던 녀석들이.”
파키케팔로는 품에 안은 코우를 감추듯 겉옷을 끌어 올렸다. 녀석은 다시 리자드의 몸통에 달라붙으며 유약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벨로즈가 끌러 낸 보자 속에는 거친 호밀빵과 얇게 저민 햄이 종이에 투박하게 감싸져 있었다. 공주는 돌둑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그것을 아이에게 내밀었다.
“친구들도 오라고 해.”
님프가 딱딱한 얼굴로 말하자 아이는 활짝 웃었다.
나니아는 냇물 앞에 쪼그려 앉아 빨랫감을 비비면서 벨과 아이들의 말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옆에서는 파키케팔로도 일을 거들고 있었다.
“손 시려워!”
그는 불평하면서도 찰팍찰팍 앞발을 부지런히 놀렸다. 조물거리는 모양새를 보아 크게 도움 될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여하간에 썩 곰살가웠다.
벨은 한쪽 무릎을 굽혀 앉고 그 위에 턱을 괴었다. 가져온 식량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아이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가뭄이 든 것도 아니고, 왜 먹을 것이 없다는 거죠?”
이곳까지 달려오면서 살펴보기로 굶주림은 비단 이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닌 듯했다. 게롤린 전체를 구휼할 각오 따위 없지만, 기아가 많은 까닭은 알고 싶었다.
“올해도 감자 농사를 망쳤어요.”
“우리 집은 그저께 씨감자까지 먹어 버렸어.”
입가에 빵부스러기를 묻힌 아이들이 대꾸했다.
“…어디 작물이 감자뿐인가.”
벨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아직 거두어 들여지지도 않은 황금빛의 귀리밭이 가득했다. 그곳엔 분명 흐드러지게 풍성한 결실이 맺혀 있었다.
“감자 농사를 망쳤으면 밀을 빻아야죠.”
님프의 말에 어떤 아이들을 쩝쩝거리던 걸 멈추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말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허겁지겁 집어삼키다가 목이 막힌 아이가 가슴을 치며 기침하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말했다.
“밀이나 보리는 우리 것이 아니에요.”
“맞아요. 그리고 한 자루를 빻으려면 두 자루를 내야 해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말이 안 되죠! 우리는 쓸 수 없다는 뜻이에요. 쓰지 말라는 거나 다름없어요.”
나니아는 아이들의 말을 듣고 파비올라를 떠올렸다. 라키바하프는 방앗간과 공용 화덕 사용료를 폐지했었다. 그러나 보통 제분용 수차는 영주의 재산이자 징세 수단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녀가 바위 위로 젖은 옷을 패대기치며 중얼거렸다.
“세율이 지나치네요. 억지스러울 정도로….”
원활한 조세는 결국 영주의 주머니 사정과 결부되기 마련이었다. 소작농들을 바짝 말려 가면서까지 얻을 것이 무에 있을까. 현명한 군주는 배부른 농민이 배부른 영지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다. 돈이 나올 구멍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면 알을 낳아 줄 거위 배를 찢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벨로즈는 목 안쪽으로 신음을 흘렸다. 직할 영지가 이럴진대 다른 곳이라고 현명히 다스릴 리가 없었다. 벨테그위가 이 정도로 아둔한 작자였던가. 왕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보위는 다른 이에게 넘어가는 것이 좋으리라.
그때 한 아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이게 다 도마뱀들 때문이야!”
듣는 도마뱀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하는 말이었다. 파키케팔로는 고개를 돌려 녀석의 격분한 얼굴을 살폈다.
“우리 할머니가 그랬어. 도마뱀들이 이 땅에 자리 잡은 다음부터였다고. 우리가 먹을 식량도 부족한데 그것들이 배를 태워서 가져가고 있어.”
나니아가 파키케팔로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는 전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감자가 썩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야. 저주받은 땅이 되어 버렸단 말이야!”
농민들 사이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서쪽에서 건너온 악귀들이 토양에 깃들어 매해 감자 농사를 망치고 있는 것이라고. 그것은 정말 저주라고밖에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모든 감자는 땅속에서부터 거무튀튀한 반점에 뒤덮여 갔다. 건조하게 메말라 버린 껍질은 마치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빨린 것처럼 쪼글쪼글했다.
썩은 감자도 이보다는 먹을 만하리라. 굶주림을 못 이기고 저주받은 감자에 손을 댄 사람들은 여지없이 고된 진통을 겪었다. 설사, 구토, 고열에 시달리다 죽어 나간 우민들의 수가 게롤린 성벽 한 바퀴를 두르고도 남았다. 밥 한 끼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빈민들이 제대로 된 치료라고 받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재앙은 매년 되풀이 되었다. 작년보다 올해가 더, 어제보다 오늘이 더 배고픈 하루가 반복되었다. 멀쩡한 작물들은 모두 서녘으로 향하는 배에 실려 비싼 값에 팔려 나갔다.
배고픈 사람들은 더욱 배고파졌다. 가난한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생활고는 게롤린의 치안을 더욱 악화시켰다. 인간들은 목숨을 걸고 땅굴 안의 식량을 훔치거나, 뒤지거나, 구걸했다. 또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그들의 우물에 오물을 들이붓거나 백회를 풀었다. 붙잡히면 꼼짝없이 극형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님프는 문제의 저주받은 감자 한 알을 주워다 숙소로 가지고 돌아왔다. 세 사람 모두 감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골똘히 살펴보고 있었다.
“이쯤 되면 국가 차원에서 빈민 구제에 힘을 써야 마땅합니다. 국고를 풀든가 죽을 쒀 퍼 먹이든가 해야죠. 말 그대로 흙을 퍼먹고 있습니다, 저들은.”
공주는 화가 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어떤 정무적 판단도 허무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이었다.
벨이 감자를 향해 불쑥 팔을 뻗자, 곁에서 지켜보던 나니아와 파키케팔로가 ‘으….’ 하는 신음과 함께 팔을 움츠렸다. 마치 악령과 접촉하는 모습이라도 본 듯한 반응이었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감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관찰하였다.
“신이라든가, 악마라든가, 믿지 않습니다만…. 이건 확실히 이상하네요.”
님프의 새하얀 손이 검은 감자를 움켜쥐었다. 손가락 끝이 빨개지도록 힘을 주입해 보았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나는 시들어 가는 식물도 살릴 줄 알아요. 하지만 이 감자로는 싹을 틔울 수가 없어요.”
공주는 예쁜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저주받은 감자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고요하군요. 마치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나니아는 테이블 가까이 고개를 낮추어 거무죽죽한 감자를 들여다보았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모양새였지만 완전히 낯설지도 않았다.
이 중 유일하게 밭일 경험이 있는 하녀가 말했다.
“일종의 병해를 입은 게 아닐까요?”
“병해?”
“네에. 병으로 입은 피해가 아닐까 싶은데요…. 벨 님께서는 병 걸린 식물도 치료할 수 있으신가요?”
진지했던 공주의 얼굴이 점차 어벙해졌다.
“병든 식물과 시든 식물은 다른 건가?”
“시들었다는 건, 물이 부족했다는 거잖아요. 아니면 뿌리가 썩었던 걸까요? 아무튼 병해와는 또 다르지 않나 싶은데요….”
나니아의 지적에 공주가 턱을 괴고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님프는 시무룩한 얼굴조차 애교스럽고 어여뻤다.
“몰라요. 아무튼 잘 안 된단 말이야.”
하하 웃는 나니아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림이 있었다.
울퉁불퉁한 덩어리 위로 점점이 흩어진 반점. 쭈글쭈글한 주름.
그녀는 방으로 돌아와 자신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차곡차곡 가지런히 진열된 소지품들 사이에서 꺼내어 든 그것은 아버지의 일기장이었다.
나니아의 짐작이 맞다면, 아버지는 정말 그림에 소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여기 있다.’
생김이 단조로운, 그러나 여전히 해석할 수 없는 글귀들 사이에서 이제는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몇 개 생겼다. 개중에 유난히 복잡하고 각양하게 생긴 글자들은 분명 다룸에게 배운 공용어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었다.
헤르는 어째서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것처럼 얘기했을까.
-똑똑.
간결한 노크 뒤로 문이 열렸다.
나니아는 감자로 추정되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 페이지를 펼쳐 들고 다룸을 찾았다. 긴 부언 없이 그에게 적혀 있는 바를 읽어 달라 부탁했다. 몇 글자 되지 않았다. 겨우 다섯 글자였다.
다룸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방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자의 뒤를 따라온 누군가가 있는지 살피는 것이었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나니아를 자신의 방 안으로 밀어 넣고 거칠게 문을 닫았다.
“당신의 무지가 나를 몇 번이나, 몇 번이나 힘들게 하는군…!”
남자는 성가시다는 듯 손등을 벅벅 긁더니 이내 경고하듯 손가락질을 해 대며 말했다.
“부탁이니까 나한테 그런, 삿된 물건, 들이밀지 맙시다.”
“…삿된 물건이라뇨?”
“오, 나니아. 나니아….”
다룸은 어수선한 걸음으로 방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더니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는 커다랗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선서라도 하듯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우선 나는, 내가 아는 사실만을 얘기하겠습니다. 말해 주는 것 그 이상으로 나에게 더 요구하지 말아 주세요.”
글자 몇 개 물어보러 왔다가 이게 웬 푸대접인지. 하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책을 펼쳐 든 자세 그대로 움직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당신 아버지의 일기장에 가득한 글자들은 말이죠, 하, 그것을 글자라고 보아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굉장히 천한 문자죠. 그저 소리 나는 대로 적을 뿐인. 그나마도 몇 개 없고. 음, 전달력도 매우 떨어지고. 형편없고. 그래요. 식인귀들이 글을 써 봤자지.”
다룸은 정돈되지 못한 말들을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소녀는 다소 퉁명스럽게, 전에 없이 불손한 투로 말했다.
그 말에 다룸은 떠들어 대던 것을 멈추었다가 한참 뒤에 입을 뗐다.
“축수! 축수들이 쓰는 글자로 적혀 있다고.”
“…네?”
“나도 읽을 줄은 모르니까 물어보지는 마시고.”
나니아는 그의 말을 듣자 입에 머금은 공기가 부글부글 끓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왜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멍청해진 목소리가 물었다.
“그걸 나한테 물어서 어떡합니까? 당신 아빤데. 아니야. 그건 일단 그렇다고 쳐.”
처음에는 화를 내는가 싶던 다룸이 차라리 시원하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홍염, 우수, 대지, 돌풍, 광휘. 당신은 어느 것 하나 잘 맞는 게 없었지. 다 고만고만한 실력으로 그저 그렇게 다룰 뿐. 그건 제법 이상한 거야. 다룸은 보통 특출나게 잘 맞는 원소가 하나쯤 있기 마련이거든.”
그는 나니아가 손에 든 일기장을 빼앗아 다시 의자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남은 게 하나 있어. 그게 뭔지 알아?”
남자는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그것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하지만 이내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침대 위로 던져 버렸다.
“암악. 당신이 아마도 그쪽일 거라고 생각했어, 나도. 그 책을 봤을 때부터!”
“암…. 뭐라구요?”
“그것은 어둡다는 뜻이야. 아주 어두워. 당신 아버지 일기장에 쓰여 있는 술식들 말이야. 아니. 빛과 반대되는 개념은 아니야. 명백히 달라.”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느 다룸의 일기장, 아니 아마도 연구서였을 그것을 나니아의 품에 떠밀었다.
여자는 엉겁결에 그것을 끌어안고 물었다.
“내가…. 내 아버지한테, 뭔가 물려받았을 거라는 거예요? 재능을?”
“어둠? 아니야. 그보다는 악. 내가 당신한테 가르칠 수 없었던 영역이지.”
다룸은 대화를 한다기보다 혼자서 자꾸만 중얼거렸다. 그는 윗입술을 깨물더니 손가락 하나를 관자놀이까지 올렸다가 다시 문제의 연구서를 삿대질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그건 나쁜 겁니다, 나니아. 당신 아버지는 아주 악질적인 것들만 다루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것들만. 그 안은 온통 시체 얘기로 가득해. 무얼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어. 알고 싶지도 않아.”
남자는 혼란함이 깃든 나니아의 보랏빛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잠정적 광인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건, 아무리 재능 있어도 건드리면 안 되는 영역이야. 나는 나쁜 짓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다룸치고 제대로 된 놈을 못 봤어. 다 정신병자 미치광이들뿐이야.”
남자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나니아를 밖으로 몰았다.
여태껏 많이 참아 왔던 것처럼, 이제는 가감 없이 그녀를 섬뜩해 했다.
“솔직한 말로, 이제 더는 당신하고 얽히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나눈 대화는 없었던 걸로 합시다. 잊든지 곱씹든지 당신 마음대로 하되, 나는 모르는 일인 걸로.”
차가운 말을 건네는 다룸의 목소리에 어렴풋한 안타까움이 섞였다.
* * *
아버지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니, 사람이긴 했을까.
나니아는 방으로 돌아와 베개를 끌어안고 쓸쓸한 생각에 잠겼다. 테이블 위에는 아버지의 일기가 휑뎅그렁하게 놓여 있었다.
이제 감자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잊고 지내던 생쥐 인간이 떠올라 어지러운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헝클어뜨렸다.
‘어쩌면 그는 알아보았던 걸까? 내 안에 축수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아버지는 축수이면서 동시에 다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아니, 어머니는 사람이었을까?
위태로운 정체성이 그녀를 괴롭게 했다. 여자는 이불을 목 끝까지 당겨 덮고 뒤숭숭한 몸을 떨었다.
일기장에 시체 얘기가 가득하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인지.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왈칵 솟았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인기척을 낸 사람은 입장을 허락받지도 않고 벌컥 문부터 열고 들어왔으니, 누군지 알 만했다.
“나니아?”
리자드가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방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는 작은 협탁 위에 놓인 촛불에 불을 붙이고 어둠 속에 누워 있는 소녀의 얼굴을 살폈다.
난데없이 눈물 바람인 나니아를 보고,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울고 있지?”
나니아는 대답 없이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척 울음을 그치기 위해 노력하였다.
“누가 울렸어. 응?”
사내가 이불 안쪽을 파고들어 나니아의 몸을 끌어안았다. 서러운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라히무스는 여자의 귓불과 뺨 끄트머리에 쪽쪽대던 것을 멈추고 문득 불안한 투로 물었다.
“…설마 내가 울린 거야? 내가 뭘 또 잘못했나?”
그가 존재하지도 않는 미지의 실수를 두려워하자, 나니아는 축축한 눈두덩이를 문질러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뭔데.”
남자는 초조해했다.
나니아가 몸을 반대로 돌려 눕자, 남자는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듯 붉은 눈을 껌벅거렸다.
미적대던 소녀는 두서없는 질문을 던졌다.
“라히무스는 내가… 내가 사실 괴물이라면 어떡할 거야?”
아직 울음을 지우지 못한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별 이상한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나니아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이렇게 작고 귀여운 괴물이 어딨어.”
그녀의 물음은 모호하고 불충분했다. 어떤 방향도 갈피도 없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에게 ‘내가 축수일지도 모른대. 당신들이 그렇게 버러지 취급한다는 그거 말이야.’라고 말할 용기를 낼 수는 없었다.
“…아니야. 못 들은 걸로 해요.”
여자는 괜한 얘기를 꺼냈다는 후회와 함께 우물쭈물 말끝을 흐렸다.
“그냥, 생각해 보니까 라히무스는 나를 왜 좋아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 어느 날 내가 너무 못생겨 보이거나 그러면, 나한테 질리려나 싶기도 하고….”
얼렁뚱땅 둘러대려던 이야기는 점점 진심이 되었다. 마음속 깊은 구석에 도사리고 있던 걱정들이었다.
남자는 어둑어둑 가라앉는 나니아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내가 못나 보이면 어떡하냐 시답잖은 걱정을 늘어놓는 얼굴이, 너무도 어여뻤다.
그는 하나뿐인 베개에 바짝 머리를 기대 누우며 소녀의 슬픈 시선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따듯한 색감의 불빛이 사내의 얼굴을 밝혔다. 나니아도 쑥스러워서 피하기 바빴던 그의 눈길을 모처럼 또렷이 마주했다.
가느다란 동공이 어둠 속에서 부풀었다. 그 속에 고즈넉한 애정과 몰아치는 정욕, 주름진 잔물결과 거친 격랑이 공존했다.
소녀는 팔을 뻗어 라히무스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토록 두렵고 광활한 망망대해에서 붙잡을 버팀목이 하나 남아 있다는 사실에 서글픈 안도감이 들었다.
“라히무스는…. 나랑 계속 같이 있어 줄 거야?”
그가 물 위를 떠도는 한 덩이 통나무 조각이라도 좋았다. 뿌리 없는 부유물끼리 서로 부둥켜안고 떠다닐지니.
“어디 가지 않을 거지…? 그러겠다고 약속해….”
애원하는 목소리가 습하게 젖어 들어갔다. 리자드는 영문을 알 수 없어 하면서도 나니아의 붉은 눈시울을 다정하게 쓸어 주었다.
“내가 너를 두고 어딜 가.”
그는 때마침 생각났다는 듯 몸을 일으켜 주머니를 뒤졌다.
안 그래도 이걸 제자리에 돌려놓을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던 중이었다.
그는 나니아의 한 손을 부드럽게 잡아 올렸다. 붙잡은 손에 끼워 넣은 것은 그의 반지였다.
“나는 이미 네 거잖아.”
나도, 나의 반지도.
이제는 정말로 온전히 너의 것이라. 너에게 바쳐졌노라. 맹세하는 그의 목소리가 엄숙하고도 달콤했다.
남자가 눈 밑을 구기며 웃었다.
“이제 돌려주지 않을 거지?”
나니아는 자신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생경하게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아선 남자를 향해 팔을 뻗었다.
“안아 줘….”
그 말에 남자는 나니아의 손을 내려놓고 자기 손등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멋쩍게 드러난 두 눈만이 초조하고 더운 빛을 반사했다.
“이리 와.”
남자는 다시 자리에 누워 나니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불이 스치는 소리에서 조급함이 느껴졌다.
“라히무스….”
바짝 메마른 마음이 습윤한 위로와 애정을 갈구했다.
나를 원한다고 해 줘. 내가 필요하다고 해 줘.
헛헛하게 치미는 외로움에 처량히 몸을 떨었다. 커다랗게 구멍 난 가슴을 그로 채우고 싶었다. 그렇게 해 주었으면 했다.
“해 줘, 라히무스…. 해 줘….”
나니아는 리자드의 커다란 흉통에 매달려 애달프게 우는 소리를 냈다. 그의 넓은 가슴에 뺨을 비비며 눈물을 묻혔다.
남자는 자신의 품을 파고드는 나니아를 곤란한 시선으로 지켜보았다. 그렁그렁한 눈시울은 참을 수 없이 애틋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그녀가 입버릇처럼 요구하는 ‘해 줘’라는 말이 대체 무엇을 해 달라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난처하기만 했다.
“그….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
어떤 위로를 건네면 좋을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사이, 그녀가 라히무스의 몸을 눕혀 놓고 그 위를 타고 올랐다.
빗장뼈 위로 주먹 쥔 두 손이 올라왔다. 작은 가슴이 그의 몸통을 짓눌렀다.
“…나냐?”
의아해하는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니아는 기습적으로 그의 입술을 훔쳤다. 작은 새의 부리 같은 입술이 몇 번이고 라히무스를 쪼아 댔다.
“…….”
항상 올라타기만 했지 깔려 본 적은 없어서 얼떨떨하게 굳어 있던 입매가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렸다.
그 슬프도록 애교스러운 입맞춤을 한참이나 즐기던 리자드는, 꿈을 꾸는 듯 몽롱한 눈동자를 느릿하게 껌벅였다.
“하아, 나냐….”
그는 한숨과도 같이 그녀의 이름을 신음하며 나니아의 작은 몸통을 위아래로 어루만졌다. 이곳이 침대이기 때문인지 지금이 밤이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꿈결 같았다. 옷 위로 만져지는 가녀린 몸 선이 사내를 애타게 했다.
숨이 차고 애타기는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등허리가 녹아내릴 듯이 쓰다듬어 대는 통에 몸도 마음도 달아올랐다.
“어제처럼 해 줘, 라히무스….”
남자가 자신을 엉망진창으로 헤집어 주었으면 했다. 아무런 고민도 생각도 들지 않도록 모든 걱정거리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다.
소녀는 기어코 사내의 사타구니 사이로 손을 뻗쳤다. 단단하게 모양을 잡아 가던 물건이 손바닥 아래로 두툼하게 짚어졌다.
순순히 입맞춤을 받아들이던 때와 다르게, 리자드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물렀다.
“그, 읏…. 아, 안 돼.”
그는 나니아의 팔목을 붙잡아 행동을 저지시켰다. 그러고는 이불에 완전히 뻗어 있던 몸을 반쯤 일으켜 침대 끝에 어정쩡한 각도로 기대어 앉았다.
거부당한 여자가 슬픈 눈으로 물었다.
“…왜? 싫어?”
남자는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 아니…. 싫을… 리가… 있나….”
그녀가 먼저 나서서 자신의 것에 관심을 보인다니 괄목할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헤벌쭉 더러운 아랫도리를 만져 달라 내밀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안 그래 보여도, 딴에는 정숙하게 굴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지금 그런 짓을 할 기분도 아닌 것 같았다. 남자가 생각하기로는 그랬다.
“항상 나만 받았으니까, 나도 라히무스 기분 좋게 해 주고 싶어….”
여자가 나직하고 애달픈 목소리로 졸랐다. 그녀의 고운 말씨는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나니아는 다시 라히무스의 불룩한 바지 앞섶을 짚었다.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아찔한 손길에 사내는 결국 백기를 들고야 말았다.
사랑하는 암컷이 직접 성기를 애무해 주다니.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감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사내는 떨리는 손으로 바지 속 성기의 각도를 바꾸었다. 편안하게 위치를 찾은 살덩이가 다시 나니아의 손 밑에서 부드럽게 어루만져졌다.
나니아가 지그시 눈을 감으며 몸을 기울여 다가왔다. 라히무스는 무릎 한쪽을 세워 그녀의 손 가까이로 성기를 밀어붙이고, 소녀와 입을 맞추었다. 그도 눈을 감고 여자의 입술을 달게 빨았다.
위로는 키스를 해 주면서 아래로는 성기를 만져 주다니. 그로서는 상상치도 못한 사치였다. 정말 환장하게 좋았다. 입술만 빨게 해 주어도 감지덕지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내는 입을 맞추다 말고 간간이 고개를 물렀다. 커다랗게 호흡하거나 꽉 깨문 이 사이로 숨을 뱉었다. 그저 옷 위를 문지를 뿐인 요령 없는 손짓에도 리자드는 쉽게 흥분했다.
푹 익어 버린 몸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날카로운 턱 끝을 천장 높이 치켜들었다. 흥분에 물든 얼굴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덮었다. 그 안쪽으로 거친 숨이 차올랐다.
나니아는 자신의 두세 배는 됨직한 사내의 몸이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고 함께 흥분을 느꼈다. 자신의 손 밑에서 움찔대는 그가 야하고 사랑스러웠다. 남자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뿌듯하고 기뻤다.
소녀는 라히무스의 볼에 입술을 비비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거 넣을래…?”
그 말에 리자드가 크게 심호흡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전세가 역전되어 몸이 뒤집혔다.
라히무스는 소녀의 양 손목을 결박하듯 잡아 올리고 입술을 허겁지겁 빨았다. 익히 드러났다시피 그는 참을성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남자는 나니아의 은밀한 부위를 짚고 흔들면서 음란한 말들을 속삭였다.
“내 자지 또 넣고 싶어? 응?”
나직하고도 맹렬한 음성이 소녀의 몸을 데웠다. 그의 낯빛에 전처럼 짐승 같은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가 쏟아 내는 사나운 시선을 온전히 받아들이며 그녀의 마음속에서도 음탕한 불씨가 당겨졌다.
제법 익숙해진 감촉과 양감을 느끼며 바지 밖으로 드러난 리자드의 굵은 성기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라히무스 꺼 좋아….”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속살거리자 사내의 입 안에서 거친 욕이 맴돌았다.
수줍어하며 밀어내는 그녀도 안달 나게 좋았지만, 적극적이고 도발적인 나니아는 자신을 돌아 버리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여자가 잠자리에서 묘하게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이 단지 술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남자는 나니아의 아랫도리에 얼굴을 묻고 본격적으로 삽입을 위한 전희를 시작했다. 사내의 능숙한 입술이 빠른 속도로 여자의 하반신을 축축하게 적셔 갔다. 손가락으로 몇 번 쑤셔 주자 금세 갈 것처럼 허리를 뒤트는 것을 보고 함께 아랫도리가 팽팽해졌다.
라히무스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나니아의 몸 위를 타고 올랐다. 이제 더 무언가를 해 줄 필요도 없을 정도로 촉촉해진 틈으로, 사내의 딱딱한 살기둥이 파고들었다.
“하, 씹….”
남자는 숨소리와 비슷하게 욕설을 뱉었다.
처음 하는 것처럼 좋았다. 소녀의 안쪽은 어제와 똑같이 좁고 따뜻했지만, 그녀가 제정신으로 자신을 허락해 주었다는 데서 오는 심리적 만족감이 너무도 지대했다. 하루 종일 이 짓만 하라고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후…. 좋아? 응? 나냐, 응? 좋아?”
사내는 시작부터 강하게 허리 짓하며 나니아를 추궁했다. 찧어 대는 대로 소녀의 입에서 신음이 끊어져 나왔다.
“아, 응, 좋아, 좋아해, 라히무스….”
리자드는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빨리 끝내고 싶은 거 아니면 그런 말 하지 마.”
어금니를 세게 깨물고 덤덤한 척하던 그는 결국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곧바로 속도를 높였다. 그는 허벅지로, 무릎으로, 발목으로, 무게 중심을 이리저리 바꿔 가며 찔러 대다가 아예 한쪽 발을 바닥에 짚었다. 진동하듯 박아 대는 통에 눈앞이 번쩍번쩍했다.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박는 힘도 더 거세어졌다. 그가 성기를 넣고 뺄 때마다 나니아의 음핵 근처도 어지럽게 떨렸다. 강한 자극에 정신이 아찔아찔했다.
두 사람의 몸이 점점 침대 끝으로 밀려났다. 남자는 나니아의 정수리에 손을 짚고 행여나 그녀가 벽에 머리를 찧는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도록 예방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몸이 기우뚱했다.
“…….”
“…….”
그 비상식적인 파열음에 두 사람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던 것도 멈추고 몸이 기운 까닭을 찾았다. 침대 한 귀퉁이가 힘에 부쳐서 주저앉은 듯하였다.
라히무스는 어이없다는 듯 한숨을 한 차례 크게 내쉬더니, 자신을 비집어 넣은 상태 그대로 나니아를 들어 올렸다.
“아, 시, 싫어….”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몰라 당황한 나니아가 오랜만에 거부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괜찮아, 괜찮아.”
사내는 익숙하게 그녀를 달래며 옆에 있던 의자로 몸을 움직였다. 그가 의자에 앉으면서 나니아도 팔걸이 위에 양다리를 어색하게 올려놓았다.
“여기서 어떻게 해….”
여자가 칭얼거리자, 라히무스는 그녀의 볼에 주둥이를 비비고 어르며 타일렀다.
“내가 흔들어 줄게. 자기는 가만히 있어.”
“의, 의자도 부서지면 어떡, 어떡해.”
“괜찮아. 살살할게.”
“시, 싫어…. 창피해.”
그와 완전히 밀착한 상태에서 다리를 활짝 벌리고 있는 것이 너무도 수치스러웠다. 나니아는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그의 몸에 착 달라붙었다.
“왜 또 싫다고 그래, 좋으면서…. 응? 이런 거 좋아하잖아.”
리자드는 소녀가 고개를 들게 만들어 그녀의 입술 주변을 질척하게 빨았다. 나니아는 눈을 꽉 감고 그저 흔들리는 대로 흔들리는 수밖에 없었다.
까맣고 긴 머리카락이 등 위로 나풀나풀 흔들렸다. 그 광경이 지나치게 야하고 아름답다는 생각과 함께, 라히무스는 이 지저분한 행위에 한없이 빠져들었다.
여자의 머리카락은 목을 덮고 팔꿈치까지 흩어져 내려와 있었다. 그것을 가지런히 모아 한쪽 어깨로 고이 넘겨 놓고는 드러난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나냐 살 냄새 너무 좋아….”
리자드는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세게 허벅지를 떨어 대던 것도 멈추고 소녀의 체취를 들이마시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는 느릿하게 허리를 휘저으며 맞물린 하반신의 결합을 되새김질하였다.
노를 젓듯 은근하게 움직이는 그의 몸짓에 나니아는 몸이 달았다. 그것은 억센 진동으로 몸이 흔들리는 것과는 또 다른 수치심을 가져다주었다.
여린 목덜미 위로 사내의 숨결이 흩어졌다. 그 간질간질한 느낌에 나니아는 두 눈을 질끈 감고 허벅지를 오므렸다.
라히무스는 그녀가 입은 옷의 목둘레 안쪽으로 손가락을 비집어 넣었다. 어깨 방향으로 잡아당겨 억지로 드러낸 부분에 코와 입을 문질렀다. 마음 같아선 그녀의 온몸에 입술을 찍어 대고 싶었으나 당장이라도 찢어발기고 싶은 것을 참고 이성의 끈을 다잡는 중이었다.
“나 이거 싫어, 침대에서 할래.”
그 와중에 나니아가 허리를 뒤틀며 버둥거렸다.
계속해서 칭얼거림이 이어지자 라히무스는 커다랗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럼 내 방으로 갈까?”
그가 묻자 나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자신의 허리에 여자의 다리를 휘감아 놓은 상태 그대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튼튼한 두 팔이 흐트러짐 없이 여자를 받쳐 안았다. 그대로 방문 앞까지 걸어가 문을 열 기세로 손잡이를 잡았다.
나니아가 화들짝 놀라 물었다.
“이러고 나간다구요?”
남자는 뭐가 문제냐는 듯 눈썹산을 삐죽 들어 올리며 표정으로 대답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빨리 내려 줘요…!”
말리지 않으면 정말로 나갈 기세라 난리를 피웠다.
아무리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지만 복도는 공용 공간이었다. 그의 사고방식은 정말 미친 것 같았다.
리자드는 누가 보면 뭐 어떠냐는 몰상식한 말을 했다가 여자에게 뺨을 한 대 얻어맞았다.
두 사람은 결국 남들 보기에 부끄러움 없도록 옷을 갖춰 입은 다음에야 안심하고 방을 옮겼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으니, 객실 밖 복도의 서늘한 공기가 뇌를 통과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나니아는 집 나갔던 이성이 돌아오는 기분을 느꼈다.
‘침대를 부수다니…. 내일 가게에는 뭐라고 말하지?’
리자드는 그 옆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옷을 훌렁훌렁 벗어 던지다가, 제정신을 되찾은 나니아의 눈동자를 보았다.
아차 싶었다.
여자는 침착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핏 멍해 보이지만 명백히 현실을 자각한 눈빛이었다.
라히무스는 마른 입술을 축이며 조용히 침대로 다가갔다. 그녀의 몸 건너편으로 팔을 짚고 슬쩍 몸을 기울였다. 은근히 벗은 몸을 피력하는 자세였다.
가만가만 말을 고르며 선뜻 입을 열지 못하던 리자드는 어떻게 하면 다시 암컷의 마음을 동하게 할 수 있는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나니아가 가라앉은 시선을 움직여 라히무스와 눈을 마주치고 무어라 이야기하려던 순간, 그가 먼저 선수를 쳤다.
“…가슴 만질래?”
그 말에 나니아는 하려던 말도 까먹고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로 멈추어 버렸다. 시선은 자기도 모르게 아래로 움직였다.
경솔한 두 눈동자가 사내의 두툼한 흉부를 시야에 담았다. 등불에 비쳐 울룩불룩하게 굴곡진 사내의 나신은, 빼곡한 상처조차 장식으로 만들어 버릴 만큼 대단히 육감적이었다.
라히무스는 나니아의 눈 속에 물결치는 욕망을 읽었다. 선뜻 손을 뻗지 못하는 여자를 위하여 그가 먼저 용기를 냈다. 머뭇거리는 나니아의 손을 잡아다 자신의 가슴 위로 이끌었다.
그녀는 이렇다 할 수락이나 거절의 말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다만 밀쳐 내지 않고 사내의 가슴 위로 가만히 손바닥을 얹는 것을 보아, 어느 정도 기대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흉부의 중심선 아래, 어둑하게 그늘이 지는 그 부분부터였다. 힘을 빼고 바닥으로 기울여 준 사내의 가슴 근육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말랑하고 부드러웠다. 여자는 본능적으로 그 감촉에 빠져들었다. 남자들이 왜 그토록 남의 가슴을 주무르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제법 한참을 그렇게 말캉한 살덩이를 만지작거리던 나니아는, 문득 너무 매몰되어 있었다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들어 라히무스의 안색을 살폈다.
기고만장해 있을 거란 짐작과 다르게 사내는 부끄러운 듯 손등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왜…. 왜 그런 표정을 짓는데요? 당신이 만져 보라고 했으면서…. 꼭 나한테 억지로 당하는 것처럼….”
나니아도 덩달아 얼굴을 붉히며 민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싫다고…. 한 적 없는데.”
그 역시 발그레한 얼굴로 우물우물 대꾸했다.
“…그럼 더 만져 봐도 돼요?”
남자는 손등에 코를 처박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무언은 긍정이었다.
소녀는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밀어 올리며 겨드랑이로 이어질 부분을 매만졌다. 엄지손가락이 선단을 스치자 남자의 입에서 피치 못할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몸을 멋대로 조종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자기 몸에 이런 게 있으니까…. 내 가슴은 쪼그매서 흥미가 안 생겼나 봐.”
나니아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사내는 인상을 확 찌푸리면서 자세를 바꾸었다.
“내가?”
남자가 몸을 움직이면서 가슴 근육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경직된 흉근은 순식간에 딱딱해졌다.
나니아는 단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자기 손을 멋쩍게 주물럭거리며 대꾸했다.
“그동안, 위에는 안 만져 줬잖아….”
“안 만져 줬다고?”
남자는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것이냐는 듯 사납게 미간을 좁혔다.
“난….”
남자는 억울하다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가, 숨을 내쉬며 다시 떨어뜨렸다. 그의 한쪽 눈가가 비딱하게 찌푸려졌다.
“네가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뭐, 뭐를…?”
소녀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자 라히무스는 이마를 벅벅 긁으며 말을 이었다.
“그…. 네가 언제, 가슴이…. 드러난 옷을 입었을 때였는데….”
이따금 말문이 막히는 것처럼 자신의 턱을 어루만지던 사내는 어느새 뿌옇게 흐려진 표정으로 멋쩍어했다.
“…싫어했잖아.”
나니아의 입에서 어렴풋한 깨달음의 탄식이 흘렀다. 평생 가슴이 드러난 옷을 입어 본 적은 그날이 처음이었던 탓에, 남자가 얘기하는 순간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 낼 수 있었다. 파비푸스에서 분수에 맞지 않게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날이었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라히무스에게서 들꽃을 건네받고, 그러고 나서….
“그건, 나는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까….”
나니아는 무어라 변명하듯 언성을 높이다가, 이내 얼굴을 붉히며 어깨를 떨어뜨렸다.
“딱히 싫어하지 않아요….”
수줍고 애매한 허락으로 말끝을 흐리며 나니아는 다시 침대 위로 흘러내렸다.
이불 위로 꺼지듯 누운 몸이 슬금슬금 웃옷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렸다. 리자드는 넋이 나간 얼굴로 그녀가 하는 양을 바라보기만 했다.
홀딱 벗고 있는 그의 앞에서 한 자락도 허락하지 않고 버틸 수가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조차도 명분이나 핑계에 불과했다. 사실은 그냥 보여 주고 싶은 것이었다. 그가 언제나 자신의 도발에 흔들려 준다는 점이, 무엇이든 예쁘다 말해 주는 점이 좋았다.
나니아는 볼록한 가슴 아랫부분이 보일 때까지 옷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볼래…?”
그것은 어느 모로 보나 지독히도 유혹적이었다. 사내는 다시 숨이 끓어올랐다. 별다른 신체 접촉 없이도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수줍은 새신랑 같던 모습에서 다시 야만스러운 침략자의 낯빛으로 돌아왔다.
반향은 폭발적이었다. 사내는 허락받은 손 대신 멋대로 입술을 가져왔다. 나니아의 가슴 아랫부분, 살이 접히는 부분을 입에 물고 성난 숨을 몰아쉬며 그 둘레를 온통 지저분하게 탐닉하였다.
소녀는 이지를 잃은 사내의 얼굴을 부끄럽게 바라보다가 더 으슥한 밑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리자드의 손이 자신의 곧추선 성기를 바쁘게 훑고 있었다.
여자 젖통을 빨면서 무아지경으로 흥분해서 자위하는 사내의 모습은, 당하는 쪽도 기이한 열락에 휩싸이게 했다. 너무도 남사스러운 광경이라 차마 더 눈에 담지 못하고 나니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허리가 들뜨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갈급한 손끝이 사타구니 사이로 향했다. 한 방향으로 모인 네 손가락은 애타는 움직임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나니아의 가슴 밑에 코를 비비던 리자드는 그녀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고개를 들고 탐욕에 젖은 시선으로 나니아가 자위하는 모습을 핥듯이 바라보았다. 천장 쪽을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시선을 느끼고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 치열하고 뜨거운 눈길에 참을 수 없이 부끄러운 기분과 맹렬한 흥분이 함께 밀려들었다.
남자는 결국 나니아의 손을 거둬 내고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한 손으로는 그녀의 음부를 지분거리며, 다른 한 손으로는 반쯤 가리어져 있던 가슴이 완전히 드러나도록 나니아의 옷을 말아 쥐었다.
사내는 자신의 성기를 흔들던 것도 관두고 여자의 위아래를 동시에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술이 긴장으로 뾰족해진 소녀의 유두를 입에 머금었다. 따뜻한 혀끝이 그 위를 굴렀다. 나니아의 입 안에서 나직한 신음이 터졌다.
그녀는 라히무스가 아무 말이 없어서 조금 무서워졌다. 그의 이름을 부르며 칭얼거리자, 남자가 가슴을 빨아 대던 것을 멈추고 흥분이 짙은 숨을 위쪽으로 가져왔다.
나니아의 얼굴을 하염없이 사랑스러워하며 바라보다가 정신없이 입을 맞추었다. 잔뜩 흥분한 얼굴로 혀를 꺼내는 것이, 마주 비벼 주길 바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은 아주 추잡스럽고 짐승이 된 기분이 들게 하는 키스였다. 흥분으로 어질어질했던 나니아도 처음에는 혀를 꺼내 그의 것에 문질렀다. 그러다 문득 너무 부끄러워져서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리자드는 끝까지 따라와서 그녀의 입 주위를 질척하게 핥아 댔다.
발정기 금수와 같은 얼굴을 한 사내가 헉헉거리며 물었다.
“나냐…. 또 넣어도 돼?”
그의 손가락이 축축해진 소녀의 내부를 넓혔다. 무엇을 넣겠다는 것인지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여자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이 열기를 어떻게든 가라앉혀 주었으면 했다.
사내의 좆머리가 다시 또 그녀의 질구를 넓히고 들어왔다. 남자는 좀처럼 숨을 가다듬질 못했다.
“아, 좋아, 너무….”
그는 황홀경에 빠진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낮고 어두운 목소리가 여자의 귓가에 음란한 말들을 흘려 넣었다.
자기도 좋아? 응?
내 자지 좋아, 자기야?
그는 계속해서 확인받고 싶어 했다. 이 행위가 둘 모두에게 쾌락을 가져다주고 있는지를.
다소 버거울 만한 크기의 물건을 흥건해진 구멍이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내부를 들락거리는 커다란 남성기는 지끈지끈한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눈물이 맺힐 정도로 몰아치는 행위에 나니아는 숨 가빠 했다. 리자드는 그녀의 허벅지를 바짝 올려 안고 마구 밀어붙였다.
“하, 씨발…. 너무 좋아….”
솔직한 쾌감이 입 밖으로 터져 나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여태 이 여자를 모르고 어떻게 살았나 억울할 정도로 황홀했다.
“중독될 것 같아….”
리자드가 중얼중얼 말을 뱉었다.
남자는 자세를 바꾸어 두 다리를 한쪽 어깨에 받쳐 놓고 허리를 흔들었다. 나니아는 그의 몸을 보지 않을 수가 없는 자세에서 달뜬 시선으로 리자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굵직한 몸에 비하여 갸름하게 날을 세운 얼굴이 사납고도 근사했다.
그는 찔러 올리는 성기의 각도를 바꾸어 나니아의 갈비뼈 근처를 붙잡고 거세게 몸을 움직였다.
라히무스의 시선은 어딘가에 완전히 꽂혀 버린 것처럼 한 점에 머물렀다. 진득한 시선이 붙박여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너는 가슴도, 젠장…. 어떻게, 이렇게, 귀여워, 응?”
남자는 몸이 흔들리는 대로 헐떡거리면서 나니아를 희롱했다. 겨드랑이 밑을 붙잡은 손이 손바닥 끝으로 슬쩍 가슴을 끌어 모을 것처럼 움직이다가 다시 멀어졌다.
소녀는 거칠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양팔을 모아 망울을 가리려 했다. 사내는 어림없다는 듯 그녀의 손목을 가로채서 귀 옆으로 붙여 놓았다.
“제발, 가리지 마….”
그는 팔목을 결박한 김에 고개를 낮추어 그녀의 입술을 훔쳤다. 칭얼거리며 팔에 힘을 주거나 키스를 피하는 것조차 애간장이 타도록 사랑스러웠다.
“시, 싫어….”
정신없이 쑤셔 대는 통에 체면을 차릴 틈이 없었다. 나니아는 고개를 마구 내저으며 쾌락의 신호를 알렸다. 리자드는 눈물이 고일 듯이 붉어진 그녀의 눈시울을 내려다보며 탄식을 흘렸다.
“아, 돌겠다…. 너무 예뻐….”
리자드는 눈을 질끈 감고 허리를 떨었다. 나니아의 귓가에 붉은 신음이 쏟아졌다. 섹스에 열중한 태도나 자신을 보고 흥분한 그의 모습이 여자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아, 라히무스…. 아, 그, 그만, 그만….”
은근하게 허리를 들썩이던 소녀가 움직임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그녀의 절정을 알아차린 리자드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그 역시 뜨거운 색욕으로 데워졌다.
여자의 질 안쪽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감각이 사내를 미치게 했다.
“씨발, 너 지금 안에 조여. 알고 있어?”
“아, 조, 그, 그만…!”
“남자 자지 빨아 먹으려고, 응? 내 자지 쥐어짜려고 이러는 거잖아, 자기야.”
남자는 사정을 봐주지 않고 계속해서 허리를 흔들었다. 그 역시 쾌락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 나냐….”
“라, 라히무스, 이제, 아….”
“나도, 가, 갈 것 같아, 나냐….”
“응, 아, 가, 아…. 아…!”
“안에 싸도 돼? 응? 자기 안에 싸고 싶어, 제발….”
“아, 읏…. 응….”
여자는 완전히 넋이 나가서 잦아들지 않는 쾌감을 버거워하며 허벅지를 떨었다. 대답을 닮은 신음이 쏟아지는 것도 같아서 남자는 끝내 그녀의 안에서 분출하고야 말았다.
“아, 나냐…. 사랑해, 사랑해….”
어제보다 적은, 그러나 여전히 거나한 양의 체액이 나니아의 깊숙한 곳 안쪽에서 질펀하게 쏟아져 나왔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이 격정적이었던 순간이 모두 지나고, 여자는 기진맥진하여 침대 위로 쓰러졌다.
‘뭔가 흘러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힘이 빠진 허벅지가 움츠러들었다. 적당히 닦아 낸 후였는데도 다리 사이에 수컷의 체액이 남아 흐르는 듯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전신에 쾌락의 잔열이 남아 있었다. 뒤처리를 끝낸 라히무스가 다시 침대에 누워 예민해진 소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귓전에 대고 나직이 속삭이는 목소리가 간지러웠다.
“나냐…. 오늘 어땠어?”
사내의 젖은 목소리는 어떤 질문이든 불순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었다. 자꾸 물어보나마나한 당연한 사실들을 입에 담게끔 했다. 나니아는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말없이 꼼지락거리다 결국엔 그를 등지고 누웠다.
“어떻긴 뭐가 어때요.”
쑥스러운 감정을 숨기려는 목소리가 쌀쌀맞아졌다. 그녀의 퉁명스러운 태도와는 대조적으로, 라히무스의 물음은 어딘지 애처로웠다.
“제 정신으로도 네가 나랑 섹스하는 게 좋았는지 궁금해.”
그는 나니아의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 중얼거렸다. 간질거리는 목덜미 위로 뜨겁고 벅찬 숨이 흩어졌다.
“나는…. 나는 너무 좋았어. 자기 안쪽이 너무 촉촉하고 따뜻해서, 난….”
황홀했던 내벽의 감촉이 아직도 음탕한 살덩이 끝에 남아 있었다. 넣고 흔들기 딱 좋게 미끌미끌한 탓에 밤새 이성을 잃고 파고들었다.
사랑하는 암컷과 제정신으로 섹스를 한다는 것은, 아니 결국엔 제정신일 수가 없었지만, 아무튼간에 상상 이상으로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그녀와 다시 한번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감히 이 사랑스러운 암컷 하나만 내 곁에 남겨 둘 수 있다면, 가지고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을 잃는다 해도 좋았다.
남자가 넋이 나간 음성으로 늘어놓는 감상에 나니아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민망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돌처럼 굳어 있는 그녀의 등 뒤에서 라히무스는 초조해졌다. 그는 돌아누운 나니아의 얼굴에 자신의 뺨과 턱을 하염없이 문질러 댔다.
“너한테 난 어땠어? 나 섹스 잘해?”
라히무스의 물음에 여자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리자드는 인간보다 얼굴 가죽도 두꺼운 걸까. 그녀는 말없이 눈을 질끈 감았다.
라히무스는, 섹스를 잘했다.
비교할 상대는 없었지만.
긴긴 밤 내내 다리 사이가 마를 틈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의 잠자리 기술이 훌륭하다는 사실만큼은 더없이 분명해 보였다.
그는 하반신을 쉼 없이 놀려 대는 와중에도 애무를 멈추지 않았다. 부서뜨릴 것처럼 박아 대면서도 허리 위쪽으론 썩 다정했던 것이었다. 커다란 손과 부드러운 입술이 온몸을 부지런히 훑어 주었다. 쾌락으로 떠오른 몸은 땅으로 떨어질 틈이 없었다. 대체 몇 차례나 하늘의 문을 두드리고 왔는지 셀 수 없을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래, 너 잘한다!’라고 소리쳐 주고 싶었지만, 그가 바라는 것은 칭찬이 아닌듯했다. 그는 마치 고칠 점이 있는지 알아내야 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나니아는 그의 집요한 추궁에서부터 벗어나고자 마지못해 불평 어린 감상을 내놓았다.
“조, 좋지도 않은 걸, 계속할 리가 없잖아….”
그녀의 대답은 라히무스의 가슴 한편에 남아 있던 불안감을 몰아내 주었다. 그는 곧 나니아의 허리에 꼭 달라붙어서 한결 쾌활해진 투로 지껄여 대기 시작했다. 히죽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다스릴 줄 모르고 표정 관리를 못했다.
“우리, 속궁합이 꽤 잘 맞는 것 같은데. 그치? 처음엔 내가 너무 커서 힘들 것 같았는데, 자기가 워낙 물이 많으니까…. 어제도 오늘도 매번 나냐 보지가 내걸 딱 알맞게 물어 주는데, 넣었다 뺐다 할 때마다 나가지 말라고 조르는 것 같아서 너무….”
“그만, 그만 좀 해요!”
나니아는 신이 나서 떠벌리는 라히무스의 입을 간절히 틀어막았다. 너무 추접스러워서 더는 들어 줄 수가 없었다.
리자드는 말을 멈추고 저를 원망스러운 듯 바라보는 나니아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비틀어 소녀의 손바닥을 볼 쪽에 옮겨 놓으며 슬그머니 어루만져졌다. 여자가 싫은 기색을 비쳐서 더는 말을 꺼내지 않으려 했지만, 머릿속으로는 자꾸만 지난밤의 황홀했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네가 침대 위에서 엉망으로 흩어진다는 게…. 네 야한 모습 나밖에 모른다는 게, 그게 너무 좋아.”
리자드는 경쟁 상대 없는 승리감에 도취하였다. 결혼 운운하던 라키바하프조차 길을 내지 못한 몸이었다. 그 순결한 눈밭에 누구보다 먼저 더러운 발자국을 찍어 버린 것이다.
이 정도면 가히 사실혼 관계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겠는가. 현재로서 나니아의 남편 자리에 가장 가까운 것은, 누가 뭐래도 라히무스 자신이었다.
“아무도…. 나 말고 아무도 나냐 여기 만져 본 적 없는 거지?”
올가미처럼 뻗어 나간 그의 손길이 소녀의 말랑말랑한 살덩이를 위아래로 주무르고 지분거렸다.
그에 나니아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그런 게 중요해요?”
그러자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던 기분도 잠시, 언뜻 불쾌해하는 나니아의 반응에 리자드는 불안해졌다.
이 남자 저 남자 좋을 대로 따먹고 다니는 챠링고가 떠올랐다. 사실은 그것이 라히무스가 아는 보편적인 암컷의 생활이었다.
무엇이든 처음만 힘들지 두 번째부터는 쉬운 법이었다. 사내 맛을 알아 버린 나니아의 몸이 혹시라도 저 말고 다른 수컷을 궁금해하게 될까 봐 두려워졌다. 누군가 그녀를 가로챌까 봐 벌컥 겁이 났다.
“나냐, 이런 거 나랑만 하면 안 돼…?”
사내는 소녀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그녀를 욕망했다. 자신밖에 모르는 몸으로 만들고 싶었다.
“다른 새끼랑은 하지 마. 제발….”
“하…. 내가 대체 당신 아니면 누구랑….”
너 말고 누구랑 또 이런 짓을 하겠느냐고 대답하려던 나니아는, 문득 억울한 기분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자기는 여태껏 좋을 대로 여기저기 좆질하고 다녔을 주제에, 감히 자신을 보고 처녀라서 좋다는 투로 말하는 그가 얄밉고 가증스러웠다. 설령 자신이 다른 남자에게 눈을 돌리는 일이 생기더라도, 그간의 행실을 반성하며 참고 견뎌 줘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나니아는 샐쭉한 얼굴로 몸을 돌려 그와 마주 누웠다. 리자드는 포옹을 푼 자세로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이 엉덩이 가볍고 경박한 사내에게 모욕감을 줄 수 있을까. 소녀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그를 곤란하게 할 방법을 생각했다. 문득 오늘 새롭게 배운 방법이 떠올라 그의 가슴을 콱 꼬집었다. 정확히는 꼬집듯이 손에 쥐었다.
“……?!”
예상대로 남자는 얼굴을 짓쩍게 일그러뜨렸다.
“그러는 라히무스는, 경험이 많아서 좋아요?”
“…뭐?”
“다른 사람들한테 걸레니 남창이니 그런 말 들어가면서, 계속 그, 그렇게 문란하게 살아왔던 거잖아. 자기는 이 여자 저 여자랑 뒹굴었으면서 나보고는 하지 말라고 하고…. 이기적이야.”
말로는 매정하게 타박하면서 손으로는 연신 부드러운 가슴 근육을 조몰락거렸다.
라히무스는 속상하고 섭섭하다는 투로 말하는 나니아 때문에 크게 당황하며 얼어붙었다.
“아니야…. 나는…. 나도 제정신으로 하는 건 처음이라고….”
남자가 우물쭈물 변명을 늘어놓으려 하자, 나니아는 난처해하는 그의 입술 위로 손을 뻗었다. 밤새 자신을 쉴 새 없이 물고 빨아 대던 그 입술이었다.
“당신이 내 밑을 빨아 줄 때마다… 항상 궁금했거든요? 대체 어떤 여자가 이런 걸 가르쳤을까, 하고.”
“그땐 너무 어려서 시키는 대로 해야 했어. 발정기 때 억지로 당해서, 기억도 잘 안 나. 누구랑 뭘 했는지…. 기억하고 싶지도 않고.”
“너무 어려서…? 자꾸 정당화하는 게 더 수상한 거 알아요? 발정기가 와야 성인 취급을 해 준다면서요. 그럼 적어도 파키케팔로 나이쯤은 됐다는 거잖아요.”
“걘, 파코는 많이 늦었어. 반대로 나는 발육이 빠른 편이었고….”
나니아는 머릿속으로 어린 라히무스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무시무시한 사내가 되었을까. 그래도 조금쯤 귀염성이 있었을지도 몰랐다.
“확실히…. 발육이 좋은 편은 맞는 것 같지만요.”
소녀는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며 다시 남자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그에 라히무스의 얼굴이 확 붉어지면서 날카롭던 눈썹산이 무너져 내렸다.
“뿔이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챠링고에게 들었어요. 그러니까, 당신도 어느 정도 즐겼으니까 그렇게 된 거잖아.”
나니아는 그동안 어깨너머로 어설프게 배운 그들의 관습과 관념을, 이 반뿔 리자드를 놀려 먹는 데에 사용하였다.
“정작 라히무스는 나한테 바쳐 줄 뿔도 없으면서.”
“그…. 그건,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런데 당신은 내가 남자 경험이 없어서 좋다는 식이고.”
“그런…. 그런 뜻이 아니었어.”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당신은 이미 다른 여자 때를 잔뜩 묻혀 와 놓고서, 나한테는 정조를 요구하다니. 불공평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미안. 미안해.”
“미안하면 다예요?”
질 나쁜 비난이 자비 없이 몰아쳤다. 리자드는 잔뜩 주눅 든 채로 무방비하게 가슴을 내어 줬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을 못하는 점이 바보 같아서 귀여웠다.
“그치만, 너는 뿔 같은 거 상관없다고…. 이걸로 날 경멸하지 않는다고 했잖아.”
버림받기 직전의 강아지처럼 끙끙거리는 라히무스의 모습은 기묘한 만족감과 애달픈 안쓰러움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그를 골리는 것이 즐거워서 못된 말이 술술 나왔다. 아무리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도 꿈쩍 못 하는 점이 자꾸만 선을 넘게 했다. 무엇보다 그를 이겨 먹는 느낌이 좋았다.
‘…불쌍하니까 괴롭히는 건 이쯤에서 그만둘까.’
그를 놓아 줄 생각을 하면서도 가슴을 만지작거리는 것은 멈출 수가 없었다.
문득 어제 저녁 챠링고에게 들은 말이 떠올랐다.
‘너 가슴 큰 거 좋아하지, 나나?’
나니아 자신도 몰랐던 스스로의 기호를 어째선지 그녀가 먼저 파악하고 있었다.
‘쟤 괜찮다. 얼굴은 귀여운데 빨통이 크네.’
소녀는 그것이 사내의 가슴을 저속하게 일컫는 말임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사람은 원래 나쁜 것을 빨리 익히기 마련이라. 나니아는 손위 형제에게 못된 말을 배운 동생처럼 그 단어를 잊지 못했다. 그녀는 마치 사람 말을 흉내 내는 새처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지껄였다.
“라히무스도 빨통이 크고 얼굴이 귀여운…가?”
“…뭐?”
남자는 경기를 일으키며 손을 뿌리쳤다. 얼굴이 시뻘개져서 언성이 높아졌다.
“너, 누구한테 그딴….”
그는 대체 누가 너에게 그런 저질스러운 말을 가르쳤느냐 따지려다 말고 눈을 질끈 감았다. 나니아의 주변에 그런 저속한 단어를 쓸 만한 인물은 딱 하나뿐이었다.
“…챠링고.”
여러모로 가만두지 않겠다며 라히무스는 이를 갈았다.
뒤이어 그는 이마를 문지르며 중얼중얼 변명했다.
“귀여운 얼굴로 그, 그딴 말 쓰지 마. 그리고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나, 난… 일부러 남창 새끼처럼 보이려고 몸 부풀린 거 아니라고.”
사내는 암컷들이 자신의 몸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보통의 암컷 리자드들이 정실로 삼고 싶어 하는 청순한 느낌이 전혀 없었다. 말인즉 헤퍼 보이는 외모였다.
“이렇게 생긴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리자드는 양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웅얼거렸다.
“나도 불편하다고….”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라히무스는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나니아를 훔쳐보았다. 그녀는 말간 얼굴로 여전히 자신의 몸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괜스레 가슴이 화끈해지고 따끔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니아는 묘한 기분으로 바라보던 그의 상처투성이 몸에 다시 손을 가져다 댔다. 가슴이 쿵쾅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부끄…러워요?”
“…….”
“여기 만지는 거, 부끄럽냐구요.”
“…….”
남자는 다시 손가락 사이로 숨었다. 무언은 긍정이었다.
“왜요…?”
이제 와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모르겠으면서도, 아무튼 창피해하는 꼴이 보기 좋았다. 나니아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그를 대했다.
리자드는 가슴이 답답하고 목구멍이 간질거렸다.
“…거기 만질 때 네 손은 좀…. 다른 사람 같단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라히무스야말로 다른 사람 같았다. 여자는 그의 가슴을 콕콕 찔러 보다가 본격적으로 손에 넣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겨드랑이 살 근처까지 더듬다가 말랑말랑한 살덩이를 흔들어 보았다.
“그…렇게 만지지 마, 제발….”
“라히무스도 어제 이렇게 했잖아.”
사내가 미치겠다는 듯 애원하자, 소녀는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옆으로 누운 그의 한쪽 가슴이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골 쪽으로 쏠려 있었다. 그 네모난 살덩이를 억지로 밀어 올려 보았다. 손을 떼자마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탱글탱글하게 흔들리는 모습이 다분히 유혹적이었다. 여자는 몇 번이나 그 짓을 반복하면서, 그 탄력적인 움직임에 빠져들었다.
“…그, 역시 좀…. 너무 커서 그래…?”
남자의 말에 나니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우물거리는 입꼬리가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순간 자랑하고 싶은 건가 생각했지만, 표정을 보아하니 으스대려는 의도는 아닌듯했다.
그가 재차 물었다.
“살을 좀…. 빼는 게 좋을까.”
그는 마치 체중 관리에 신경을 쓰는 아가씨처럼 말하면서 멋쩍게 얼굴을 문질렀다. 나니아는 가슴을 꾹꾹 눌러 대던 것을 멈추고 그의 복근 위에 일자로 획을 내려 그었다.
“갑자기 왜요?”
대체 여기에 뺄 살이 어디 있다고.
나니아가 묻자 남자가 대꾸했다.
“너는 마르고 늘씬한 남자가… 좋다고… 그랬잖아.”
자신감 없는 목소리에, 낮게 저문 눈빛에, 묘한 열등감이 서려 있었다. 한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희롱하던 나니아는 당황하였다.
“제가요? 아….”
어리석게 되묻자마자 자신이 언젠가 술에 취해 그런 말을 한 적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리자드는 약간 왈칵한 얼굴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들어 올린 팔뚝 아래로 한쪽 흉근이 길쭉하게 모양을 바꾸었다.
머리색이나 피부색 같은 건 어쩔 수 없어도 체형만큼은 노력하면 그녀의 취향에 맞출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젠장, 나는 네 곁에 붙어 있는 허여멀건 새끼들만 보면 초조해져. 그 다룸 새끼도 그렇고….”
“헤르요?”
“그 새끼도 망할 너네 영주처럼 푸른 눈에, 진짜 머리는 금발이고…. 곱상한 편이고….”
남자는 우물쭈물 말을 이어 나가다가 이내 북받친 듯 울분을 토해 냈다.
“씨발, 네 남자 취향이 그런 거라며….”
라히무스가 헤르를 두고 그런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나니아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오, 오해예요. 저는 한 번도 헤르를 보고 그런…. 그런 마음은….”
어디서부터 부정하면 좋을지 모르겠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나니아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을 쫓아내던 헤르의 신경질적인 얼굴을 떠올랐다. 묘하게 화려한 구석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일면에 반해 버릴 만큼 멋진 사내는 아니었던 것이다.
“오히려 반대예요. 그 사람은 절 싫어한다구요.”
이전에도 딱히 호의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곱씹어 보니 아니꼬운 기분이 들어 나니아는 불퉁하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저도요.”
그 어떤 긍정적인 감정도 없었노라 제법 단호하게 부정했는데도, 라히무스는 영 시무룩한 표정을 거둬들이질 못했다. 그의 토라진 시선이 침대맡을 기었다.
나니아는 사내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날카로운 턱선을 둥글게 받쳐 들었다. 리자드의 귀염성 부족한 두 뺨이 나니아의 하얀 손바닥에 짓눌렸다.
모로 돌아갔던 라히무스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당겨온 나니아는, 달아오른 냄비처럼 속에 든 내용물을 쏟아 내듯 언성을 높였다.
“지나가는 여자들 붙잡고 물어보면 열이면 열 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말을 멈추었다.
“…….”
“……?”
고요히 마주친 두 쌍의 눈이 크게 껌뻑였다.
그녀는 다급히 라히무스의 얼굴을 놓아 주면서 원래 하려던 말과 다른 얘기를 덧붙였다.
“그…. 그 남자는 별로라고 할 거예요.”
소녀는 우물쭈물 말을 얼버무리더니, 이내 다신 눈을 마주치지 않을 사람처럼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놓았던 치마를 황급히 주워 들었다.
“나 이… 이제 갈래.”
“…갑자기?”
“잠은 내 방에서 잘게요.”
“그 침대에서 자겠다고?”
“…….”
라히무스의 말에 나니아는 아랫도리에 다리를 꿰어 넣으려던 자세 그대로 멈추어 버렸다. 침대에 앉아 허벅지를 들어 올린 몸이 무게 중심을 잃고 한 차례 뒤로 휘청였다.
그때 리자드가 등 뒤를 받쳐 주는가 싶더니, 커다란 두 팔로 소녀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나랑 같이 자.”
다감하고도 애틋한 제안에 소녀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듯 바라보았다. 독기가 쏙 빠진 눈빛이 감미로울 정도로 달콤했다.
섬뜩하게만 느껴졌던 붉은 눈과 그 속에 담긴 가느다란 동공이 어느샌가 사랑스러워져 버렸다. 소녀는 매일매일 그에게 조금씩 빠져들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이 행복하기보단 두려웠다.
* * *
파키케팔로는 굶주린 아이들을 가엾게 여기는 벨로즈의 모습이 매우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는 어떤 죄책감을 느끼는 것처럼 말했는데, 그러한 감정조차도 님프와는 지독히 어울리지 않았다. 리자드는 그에게 장단을 맞춰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괜한 짓이라 여겼다.
그는 마른 옥수수 알갱이 자루와 밀빵, 그리고 주방에서 얻은 토마토소스와 햄을 몇 조각 챙겨 넣은 가방을 짊어졌다.
“정말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죠?”
파키케팔로는 빈 둥지 출신인 자신의 유년기를 생각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데리고 살아 줄 것도 아니면서 애매하게 베푸는 친절은 잔인한 것이었다.
벨로즈가 눈을 흘기듯 자신을 바라보자, 청년은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툭 떨어진 오른팔이 멋쩍게 허리를 긁었다.
“어차피 애들 입으로 들어가는 건 별로 없을 텐데.”
파키케팔로의 쓴소리에 님프도 덩달아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벨로즈 카뮈안. 그는 왕궁 울타리 안쪽에서 태어나 평생을 물리적 풍요 속에서 살아온 그림자 속의 공주였다. 궁 밖으로 나온 뒤에야 그것이 사치였음을 알았다.
그는 세상 어디에서도 이렇게 사는 아이들은 본 적 없었다. 그들이 집이라고 부르는 집은, 사실 집 같지도 않았다.
벽을 쌓을 능력이 없으니 토굴을 팠다. 그 위에 간신히 지붕만 얹어 놓고 지냈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노숙보다 아주 조금 더 나은 수준이었다.
겨우 그 정도였다. 말이 지내는 마구간도 그보다는 나았다.
“어설픈 동정은 애들을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니깐요.”
“흥, 뭐든 없는 것보다야 낫겠죠. 당신이 그 에코인지 아쿠인지를 돌보는 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세요.”
“둘 다 아니고, 코우거든요!”
벨로즈가 우우룡을 향해 손가락질하자, 파키케팔로는 그것을 부둥켜안으며 항변했다. 리자드의 품에 안긴 우우룡이 넉넉한 하품을 흘렸다. 녀석은 언제부턴가 파키케팔로와 벨로즈의 방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있었다.
그들 곁으로 여유롭고 느긋한 발걸음이 따라 들어왔다.
“코우? 그게 뭔데?”
발소리의 주인공은 마치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돌아와서 대화에 끼어들었다.
“챠링고!”
파키케팔로가 그녀를 나무라듯 반겼다.
“뭐야, 지금 돌아온 거야? 대체 며칠을 놀다 온 거야!”
“놀다 온 거 아니다.”
“목덜미에 잇자국이 가득한데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하지 그래.”
“어허. 어딜 감히 꼬맹이가 발정기에 대해 논하려 드느냐?”
리자드가 파키케팔로의 옷 안에 파묻혀 있는 코우를 보고 알은체를 했다.
“귀여운 우우룡이잖아! 이게 방금 말한 코우냐? 웬 거람.”
챠링고가 코우를 향해 손가락을 내밀자 녀석이 갸르릉거렸다. 놈은 처음 보는 사람도 리자드라면 그저 좋은 모양이었다.
“파코의 우우룡이라는 뜻이래요.”
벨로즈가 유치하다는 듯 부언했다. 함께 비웃어 주자는 의도가 느껴졌다.
“뭐야, 뜻까지 알고 있잖아요! 근데 대체 이름은 왜 자꾸 바꿔 부르는 건데?”
발끈하는 리자드를 향해 님프가 얄밉게 혀를 내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챠링고는 다른 볼일이 있다는 듯 라히무스를 찾았다.
그녀가 방문 밖을 나서려 할 때, 때마침 나니아가 그 앞을 스쳐 지나갔다.
리자드는 반가워하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이, 나나.”
그날, 챠링고는 낯선 수컷들의 페로몬에 여과 없이 노출된 나머지 예정보다 빠르게 발정을 시작하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뒷방을 뒹굴고 있었다.
끝까지 챙겨 주지 못한 점이 미안하면서도, 그녀가 잘 빠진 리자드와 좋은 시간을 보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나니아는 그녀의 부름을 듣지 못하였는지 도망치듯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고, 그 뒤를 따르던 라히무스만이 챠링고를 발견하곤 돌연 방향을 바꾸었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리자드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넌 나부터 좀 보지.”
파키케팔로는 올 것이 왔구나 싶은 마음으로 몸을 사렸다. 그는 나니아와 함께 다녀오겠다며 벨로즈의 귓가에 비밀스럽게 속삭인 뒤, 벽에 찰싹 붙어서 더듬더듬 방문을 통과했다.
이후 벨은 자기 방에서 네 탓이네, 내 덕이네, 실속 없는 언쟁을 벌이는 커다란 리자드 두 마리를 권태롭게 지켜보았다.
“남창 새끼들이 덤벼 봤자지! 애초에 걔들은 그런 생각도 못 해. 네 걱정처럼 그런 위험한 일이 일어나는 곳이 아니야.”
“애 팔뚝에 혹꽃으로 헤나 칠을 해 놔서, 완전히 취해 있었다고. 책임질 생각도 없이 그딴 더러운 곳에 애를 데려가?”
“오호라. 그러니까, 내 덕분에 네가 걜 자빠뜨릴 수 있었다는 거잖아? 나 아니었으면 아직까지 손가락만 쪽쪽 빨고 있었겠지.”
챠링고는 누구 덕에 네가 그런 기회를 잡을 수 있었는지 생각하면 외려 내게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거들먹거렸다. 암컷의 내밀한 조소가 그를 비웃었다.
“그래서, 좋았냐?”
“…….”
그녀의 물음에 라히무스는 씩씩거리면서도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였다. 결국 멍청한 수컷 리자드는 말발이 후달려서 말싸움으로는 여자를 이길 수 없었다.
챠링고가 혀를 끌끌 찼다.
“허, 참. 다른 새끼 맛 좀 보라고 데려갔더니 엄한 도마뱀한테 홀랑 잡아 먹혔구만. 됐어, 그 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단 말이야. 귀여운 애인 자랑은 나중에 해.”
성가신 얘기는 집어치우라는 듯 휘휘 손을 내저은 챠링고가 벨로즈를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 놀다 오기만 한 거 아니고, 거기까지 간 김에 알아 온 정보가 몇 개 있습니다.”
챠링고는 슬며시 방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라히무스를 향해 말했다.
“너랑 갔던 곳에서 배편을 다시 알아봤어. 게롤린에서 출발하는 배는 전부 탈타르노 반도로 향한다더군. 문제는 그 항로에 요사이 문제가 많아서 배를 잘 띄우지 않는대. 아, 이건 다룸도 같이 들어야 할 텐데.”
챠링고는 헤르를 부를까 말까 고민하며 문고리 위로 손을 가져갔다.
“무슨 문제죠?”
벨이 묻자, 챠링고는 머뭇거리던 것을 관두고 님프의 앞으로 걸어왔다. 그녀는 테이블에 한쪽 팔을 짚고 비스듬히 지탱해 섰다.
“거스러미 제도라고, 꼭 지나쳐야 하는 곳이 있는데 그 부근에서 난파되어 실종되는 배들이 부쩍 늘었답니다. 요새는 목숨 걸고 배를 띄우는 장사꾼들 화물선밖에는 없다고 그러더군요.”
“암초 때문인가?”
“해적 떼의 소행 때문인 것 같다는데…. 그래서 바람이 바뀌어도 여객선은 찾기 어려울 거라더군. 더 지체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급히 화객선 자리라도 알아봤어.”
챠링고가 탑승권 대용으로 받아 온 증명서 몇 장을 탁자 위에 꺼내 놓으며 말했다. 총 여섯 장이었다. 라히무스는 그것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배를 탈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리자드 용병 셋, 님프 하나, 다룸 하나, 그리고….
챠링고는 라히무스의 눈치를 보다가 조금 다른 화제를 꺼냈다.
“그리고 한 가지 소식이 더 있어. 좋은 소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굳게 닫혀 있는 방문을 흘긋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내가 파비올라 영주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를 조금 찾은 것 같은데 말이지.”
챠링고는 이 이야기를 나니아에게 전해도 좋을지 어떨지 고민하다가, 결국 그녀를 돕겠다고 한 라히무스에게 판단을 맡기기로 했다.
리자드는 엄지와 검지를 붙여 비비는 시늉을 하면서 벨에게 시선을 던졌다.
“여기 영주가 유멘타 장사로 재미를 좀 보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때 그 유멘타 사냥꾼들보다 훨씬 큰 단위로, 훨씬 짭짤하게 말이죠.”
“군주가…. 벨테그위가 직접 인신매매에 앞장서고 있단 말입니까?”
님프는 테이블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의자 등받이에 완전히 기대었다. 그러고는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믿기 힘든 이야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한가득 실어 나른다는 것을 봐서는 열 명, 스무 명…. 그런 수준이 아닌 것 같습니다. 배 한 척이 무사히 탈타르노 반도에 다다르면, 그 돈으로 금광 서넛은 거뜬히 사들인다는 걸 봐서는.”
“못해도 백 단위겠군.”
“이렇게 대대적으로 유멘타를 거래하는 곳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어.”
챠링고가 굉장하다는 듯 말하자, 님프는 신음했다.
“사람이 감자도 아니고, 어디서 그렇게 난단 말입니까….”
그는 머릿속으로 이곳 게롤린에서 이르는 곳마다 늘비하던 부랑자들을 떠올렸다. 아무도 몰래 슬쩍 잡아가도 누구 하나 찾을 것 같지 않게 정처 없는 인간들이었다.
벨테그위에게는 자신의 영지민들이 언제든 팔아먹을 수 있는 물자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차피 팔아 버릴 물건, 그 위에 먼지가 쌓인다든가 하는 문제는 크게 중요치 않았던 것일 터다.
“바로 그 부분이죠. 잡음 없이 쉽게 팔아 치울 만한 것들이라면, 그게 누구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먼 곳으로 쫓아내 버리고 싶은데, 돈까지 쳐준다고 하면.”
챠링고가 말했다. 라히무스는 팔짱을 낀 채로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게롤린에 득실거리는 떨거지 흉악범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죄수들인가?”
라히무스가 말하자, 챠링고가 그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빙고.”
“…서로 범죄자 교환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군.”
“아무래도 여기가 손해 보는 장사지. 본토는 부려먹을 유멘타를 얻었지만, 여긴 치안만 나빠졌잖아.”
챠링고는 우스갯소리를 마지막으로 본래 논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다른 성에서 죄수들을 압송해 오면서까지 유멘타 장사에 열을 올리고 있어. 그 말인 즉…. 어디로 갔겠어?”
그녀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했냐는 듯 다소 익살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라키바하프 파비올라.
벨로즈는 그가 왜 게롤린으로 이송되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따져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벨테그위 앞으로 끌고 간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의 근거지는 이제 더 이상 게롤린이 아니었다.
“반역죄를 다스리기 위함이었다면 애당초 훌레랑으로 보내졌겠군요.”
벨은 스스로 답을 찾듯 중얼거렸다.
문제는 좀 더 복합적이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훨씬 하찮고 잔인한 진의가 그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서대륙으로 실려 갈 준비를 하고 있거나, 어쩌면 이미 팔려 나갔을 수도 있었다.
챠링고가 탑승권 한 장을 손에 들고 흔들었다.
“어쩔 거야? 찾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시간 안에 가능하겠냐?”
배가 떠나는 날짜는 약 이 주 후로 정해져 있었다.
라히무스는 서늘한 시선으로 펄럭이는 종이 끝을 좇았다.
나니아는 파키케팔로를 따라 강변의 아이들을 만났다. 그들에게 식량을 전달하는 일은 어느샌가 하녀의 몫이 되어 있었다. 벨로즈는 가급적 외출을 자제해야 했으며, 파키케팔로는 인간 아이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탓이다.
배급을 마치고 돌아온 나니아로부터 리자드 청년이 빈 자루를 건네받았다.
“짜식. 오늘도 엄청 야리네.”
파키케팔로가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니아도 그를 따라 아이의 얼굴을 흘긋 돌아보았다. 리자드가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았다.
“끝까지 받지 않던걸요.”
개중에 유독 리자드를 경계하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녀석은 허기진 얼굴로 군침을 삼키면서도 나니아가 건네는 빵을 거절했다. 그러고는 줄곧 파키케팔로가 돌아갈 때까지 그 모습을 노려보고만 있는 것이었다.
하녀는 음식을 나눠주다 들은 얘기를 꺼냈다.
“저 아이 부모가 리자드와 얽힌 문제로 수감자 신세가 되었대요.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아마 그것 때문인가 봐요.”
“그것도 그렇겠지만, 무엇보다 감자가 병든 게 우리 탓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것 같던데.”
파키케팔로는 콧방귀를 뀌며 나니아가 말 위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 그러던 와중에 나니아의 주머니 속이 불룩한 것을 확인했다.
“감자는 왜 또 챙겼어?”
파키케팔로가 묻자 나니아는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 뭐… 뭐라도… 해 볼까 싶어서….”
아버지의 책에 적힌 내용을 토대로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파키케팔로가 그런 말을 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네 주제에 뭘 할 수 있겠냐고 비웃음을 당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부끄러웠다.
* * *
감자에 내린 저주의 정체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이건 오래전에 본토에서도 제법 문제가 되었던 거잖아.”
챠링고가 저주받은 감자 한 알을 손에 쥐고 살폈다. 그녀는 이 검게 죽은 감자에 대하여 아는 바가 있어 보였다.
라히무스를 제외한 모두가 그게 뭐냐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챠링고가 파키케팔로를 향해 물었다.
“너는 본 적 없어?”
“없어.”
“그래? 하긴. 내가 어렸을 때도 이미 박멸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사그라든 줄 알았던 감자 역병이 동쪽에서 다시 활개를 치고 있었다. 감자가 저주를 받았다는 말도, 게롤린을 점령한 도마뱀들이 그 저주를 몰고 왔다는 말도, 모두 틀린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배는 사람뿐만 아니라 역병을 함께 태우고 들어왔다.
벨로즈가 챠링고를 보고 물었다.
“해결할 방도를 알고 있습니까?”
그녀는 탐탁잖은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을 뿐이었다. 문제의 출처는 알아내었으나 여전히 해결책은 묘연하기만 했다.
“다룸을 고용해서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만 기억이 납니다.”
나니아는 챠링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꾸만 아버지가 그려 놓은 감자 그림이 생각났다. 결국 그녀는 챠링고를 자신의 방으로 불러내어 아버지의 일기인지 연구서인지 모를 것을 보여 주었다.
이미 헤르에게 한 번 삿된 물건 취급을 받은 터라 긴장이 됐다.
“여기…. 이 부분이에요.”
나니아는 그녀가 읽어 주었으면 하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본인은 그 짧은 글귀 속에서 땅이라는 말 한 글자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것은 리자드어가 아닌 서대륙 공용어였기 때문에, 챠링고는 다소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비황 작물…. 땅…. 시체 입자, 제거….”
한 글자 한 글자 띄엄띄엄 읽어 나가던 챠링고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것은 분명 사람 사이에 말을 전달하기 위해 적은 평서문이 아니었다. 또렷한 목적을 가진 낱말들이 응축된 원소술식을 구성하고 있었다.
챠링고가 책을 번쩍 들어 올리더니 다른 페이지를 주르륵 넘겨 보았다.
“이게 네 아버지가 쓴 글이라고?”
그녀는 문서 내용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다른 미지의 문자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읽을 수 없는 말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충분히 놀라웠던 탓이다.
“너네 아버지 다룸이었구나?”
챠링고가 재밌다는 듯 말했다. 이제껏 본적 없는 낯선 술식들이 그녀의 흥미를 끌었다.
“네 말대로 그 부분은 작물 역병을 다루는 방법에 대한 저술이 맞는 것 같은데.”
“그…. 그래요? 그래 보여요?”
어쩌면 아버지의 일기 속 감자 그림이, 그 곁에 적힌 말들이, 이곳 게롤린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 소녀는 맹랑한 기대를 품었다. 챠링고의 말이 그녀의 믿음에 힘을 실어 주었다.
끔찍하고 흉하다며 저리 치우라고 말하던 헤르와 달리, 리자드 용병의 감탄은 상당히 긍정적이고도 호의적이었다.
“차근차근 읽어 봐야 알겠지만, 다른 페이지에 적혀 있는 연구 내용도 전체적으로 수준이 상당히 높아 보여. 나 같은 무지렁이도 그렇지만, 그건 아마 우리 잘난 척쟁이 다룸도 잘 모를 거다. 언젠가 암악에 능한 다룸을 만나게 된다면 꼭 보여 주도록 해 봐. 어쩌면 네가, 네 아버지의 연구를 물려받을 수도 있겠지.”
챠링고가 책을 덮어 돌려주며 씩 웃어 보였다. 나니아는 어딘지 가슴 한구석이 뻐근해지는 기분으로 그것을 돌려받았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의 흔적. 그 꺼끌꺼끌한 느낌을 손끝으로 아로새겼다.
‘그래. 아버지는 죽이는 것이 아닌 살리는 방법을 연구하던 사람일 거야.’
나니아는 어릴 적 아버지의 일기장을 들추어 보며 아버지가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을 하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곤 했었다. 아버지가 그려 놓은 그림 중에는 사람이 다친 모습이나 신체 일부를 제법 정밀하게 묘사한 것이 많았다. 그 때문이었다.
소녀는 시체 냄새가 진동한다며 비난받은 책을 펼쳐 놓고 공부를 시작했다. 이제 도와줄 사람이 없으니 그녀에게 남은 방법은 독학뿐이었다. 챠링고를 조금 더 귀찮게 해서 몇몇 글자의 뜻을 알아냈다. 높은 빈도로 등장하는 낱말부터 차근차근 머릿속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시체 입자. 당장 배운 말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유독 그 낱말이 많이 보였다. 썩는다든가 꿰맨다든가 하는 말도 자주 나왔다. 아쉽게도 챠링고는 아주 어려운 글자까지는 읽어 주지 못했다. 뜻 모를 글자들이 간간이 껴 있다는 점 외에도 문제는 있었다. 원소술이라는 게 혼자서 골몰한다고 습득될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리고 아까부터 계속 자신을 부담스럽게 관찰하듯 쳐다보고 있는 저 리자드 사내도 문제였다.
소녀의 큼지막한 골칫거리 남자 친구는, 한시도 그녀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지금은 지루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엎드려선 그녀가 펼쳐 놓은 종이를 입으로 후후 불어 훼방을 놓았다.
“아잇, 정말…!”
종이가 흔들리면서 한창 써 내려가던 글자의 획이 일그러졌다.
나니아는 말썽꾸러기 아이 대하듯 라히무스의 볼을 꼬집어 당겼다. 엉성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뾰족한 송곳니가 드러났다.
“얌전히 좀 있어요.”
소녀는 사내의 볼살을 몇 번 더 흔들어 보다가 놓아주었다.
따분해 보이던 얼굴에 옅은 화색이 번졌다. 남자는 그렇게라도 관심을 받아서 기쁜 듯했다.
여자는 그의 뺨을 다독이듯 두어 번 톡톡 두드려 주면서 새 종이를 가슴 앞으로 가져왔다.
두 번은 안 할 줄 알았는데, 남자는 또다시 입으로 바람을 불었다. 좋아하는 여자애를 못살게 구는 악동처럼 짓궂고도 집요했다. 글자가 빼곡한 헌 종이와 새 종이 몇 장이 저 멀리 테이블 끝으로 날아갔다.
나니아는 못살겠다는 듯 진저리를 치며 아예 그의 입술을 한 손으로 덮어 놓고 펜촉을 움직였다. 리자드는 약에 취한 사람처럼 눈을 게슴츠레 뜨고 꼬리를 흔들었다. 여자는 그 틈에 빠르게 술지 한 장을 더 완성하였다.
그녀는 입김 따위로는 꿈쩍도 하지 않는 검은 감자 위로 종이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라히무스의 입에서 손을 떼어 냈다.
“불, 좀…. 붙여 줄래요?”
나니아가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리자드의 시선이 감자와 그녀 사이를 느릿하게 오갔다.
사내는 손등 위에 괴어 놓았던 고개를 일으켜 술지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 모든 동작이 느긋하고도 느직느직하였다.
후, 하고 바람 부는 소리 뒤에 곧바로 쪽, 하고 입 맞추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마치 불값을 지불받듯 재빠르게 나니아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장난꾸러기 아이처럼 눈을 휘며 웃었다.
여자는 얼떨떨해하며 뺨을 문질렀다. 돌아본 사내의 얼굴 반쪽이 팔뚝에 파묻혀 있었다. 하지만 코 아래쪽으로도 실실거리고 있을 그의 얼굴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애교 부려도 안 되는 건 안 돼요.”
나니아는 새퉁맞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애써 민망한 기색을 감추었다.
그사이 술지는 병든 감자를 덮은 채로 불타다 의미 없이 검은 재만 남기고 사라져 갔다.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얼굴이 화끈화끈해졌다. 마치 노래 연습을 하다 들킨 음치가 된 기분이었다.
소녀는 괜스레 남자의 어깨를 주먹으로 한 대 때리며 무안함을 표출했다.
“비웃지 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랬다.
사내는 난데없이 얻어맞은 어깨를 문지르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내가 왜 비웃을 거라 생각하지?”
“쓸데없는 짓으로 종이 낭비나 하고 있으니까….”
알고 보니 술지는 보통의 종이와 달라서, 결국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소모품에 해당했다. 연이은 실패로 허비되는 종이가 아깝다는 듯 이야기하자 리자드가 그녀를 격려하였다.
“그딴 거 얼마 안 해.”
그녀가 원한다면 나무 한 그루를 통째로 뽑아다가 신혼집 앞마당에 꽂아 놓을 수도 있었다. 물론 그녀가 필요한 것은 원형의 나무가 아니라 제지된 종이겠지만.
나니아는 펜을 만지작거리며 자신 없이 말을 이었다.
“그… 그리고 뭔가 우습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뭘 해 보겠다고 설치는 게….”
“원래 다룸은 다들 그렇게 연구하는 거 아닌가?”
이쪽에 물어봤자 알 턱이 없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는 놀리거나 무시할 생각이 없어 보여서, 나니아는 조금 안심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전히 답답했다.
“헤르 말대로예요…. 글자를 알아도 형상을 모르니 전혀 진척이 없어요.”
술식을 알아도 이럴진대, 본 적도 없는 원소술을 새롭게 창작해 낸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리자드는 나니아의 옆에서 그녀의 뺨을 손가락으로 간질이며 물었다.
“더 잘해 보고 싶어?”
소녀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화해졌다. 웃는 모습만 보고 싶다가도 울적한 얼굴마저 귀여웠다.
그의 주변엔 항상 능숙하게 교전용 원소술을 캐스팅하는 놈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서툴고 어설픈 신출내기 다룸이 끙끙대는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무언가 해낼 때마다 기뻐하는 그녀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가져다 바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원석을 구해다 줄까. 그 다룸은 몇 개 들고 다니던데.”
그도 무기나 방어구 쪽이 아닌 마도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지만 돈만 있다면 물어물어 구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 * *
남자는 구해다 주겠다 약속한 그 물건을 찾아 땅굴을 헤맸다.
원석이란 원천석의 준말로 물질 근원이 스스로 작용하고 기능할 수 있는 마력을 내재한 광물이었다. 원석 그 자체는 원소의 힘을 배증시켜 다룸의 능력치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강한 원천석은 물리적 술식 없이 형과 념만으로 캐스팅이 가능하도록 도왔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숙련된 다룸뿐, 보통은 무기에 상감 세공되어 해당 무기에 원소의 힘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쓰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암악 원석? 그런 건 매물이 없지. 채광되자마자 전쟁 물자로 몽땅 휩쓸어 가는 걸 어째 동대륙에서 찾아. 보통의 원석들하고 다른 거 알잖아.”
상인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반응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은데.”
“없어, 없어. 다른 데 가도 똑같지. 글고 그걸 통짜로 그냥 쓰는 사람이 여기 어딨겄어. 그거 박은 스틱이나 스태프도 마찬가지야. 이 동네선 못 구해.”
라히무스는 홀로 땅굴 상점가에 원천석을 찾으러 나왔다가 그런 것은 팔지 않는다는 말을 지금 다섯 번째 듣고 있었다.
“그러고 물건이 있으면, 살 돈은 있고? 원석이 어디 한두 푼 해야 말이지. 지금 내, 어, 내 가게 여기 있는 물건 다 팔아도 그거 하나 값 못 하겠네, 그려.”
상인은 가당치도 않다며 코웃음을 치더니 선반 아래쪽을 뒤져 보석함 같이 생긴 상자를 꺼냈다.
“아주 쪼오그마앟게 원석 박아 넣은 반지는 있어. 볼텨?”
그가 뚜껑을 열어 보여 주는 물건들은 값나가는 상품답게 귀히 모셔져 있었다. 라히무스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쪼그맣다는 말을 유독 강조한 이유가 있었다. 원석 크기가 먼지만 했다. 기능을 못 할 것이 뻔했다. 그렇다고 장신구로 쓰기에도 딱히 예뻐 보이지 않았다.
돈을 주고도 살 수가 없다니. 리자드는 착잡한 심경으로 턱을 문질렀다.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남자는 그동안 한 번도 관심 가져 본 적 없는 다룸의 물건들에 눈길을 주었다. 그러다가 이게 뭔가 싶은 것을 발견했다. 은은한 광택이 고급스러워서 시선을 끌었다.
그것은 손바닥 정도 크기의 가죽 지갑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판촉이 허탕을 치는 듯하여 서운해하던 장사꾼의 얼굴에 다시 열의가 솟았다.
“요새 이거 안 쓰는 다룸이 어딨어. 아, 본인이 쓸 게 아냐?”
그는 라히무스가 관심을 보인 제품의 용도에 대해 열렬히 설명하였다.
“이게 뭐냐 하면, 술지를 한 장 한 장 끼우는 건데, 여기 맨 앞장 있지. 여어다 이렇게 끼워서 따악 쓰고. 응? 요 안에 철사가 있어서 고정이 된단 말여. 이거는 펜대 꽂는 부분. 이렇게 따악 접으면? 이봐 이거. 편리하지? 한 번 써 보면 없이는 못 살아. 블랙 앙귀스 가죽으로 만들어 가지고, 봐 봐. 미끈하니 세련됐어.”
라히무스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 흔쾌히 값을 치렀다. 상인은 싱글벙글 웃으면서도 어딘지 걱정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손님…. 아까부터 계속 사람들이 흘긋흘긋 쳐다보는디. 어디서 뭔 사고라도 치셨는가?”
가게 창문은 촘촘하게 짜인 목조 장막을 위아래로 여닫는 구조였다. 사람이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창틀을 통해 누구나 그 안쪽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가게 안의 사생활 같은 것은 전혀 지켜지지 않을 것 같이, 또 그럴 필요도 없다는 듯이 개방감이 넘쳤다.
길을 가던 용병들이 문밖에서부터 그를 알아보고 수차례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그들이 보이는 관심의 정도가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 가게 주인은 의아한 것이었다.
라히무스도 본인의 등 뒤로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뒤를 돌아볼 듯 말 듯 고개를 틀어 불유쾌한 관심을 확인했다.
전쟁 전생의 살육자, 버림받은 잡종 리자드, 염황의 마당 개, 라히무스.
패밀리 네임 없이 짧은 사내의 이름은 전장을 뛰어다닌 이후로 원치 않게 유명세를 치렀다. 적어도 홍염 땅을 밟고 산 자라면 그의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얼굴은 아니었다. 피 칠갑 투구 아래 가리어진 전사의 생김 따위가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누가 알겠는가 말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일개 용병일 뿐, 장성급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어디서 공개적으로 얼굴을 드러낼 일도 없었다.
무릇 전쟁터에서 영걸과 악당은 종이 앞뒷면의 차이와 같은지라, 조국의 영웅이라 해 봐야 누군가에겐 그저 찔러 죽이고 싶은 외적에 불과했다.
문제는 이 무법지대 불한당들의 땅굴 커뮤니티가 생각보다 좁고 긴밀하다는 데에 있었다.
이토록 자신을 알아보고 적대적인 시선을 던져 오는 놈들이 많아진 까닭에는 아무래도 그놈 탓이 있겠지 싶었다. 팔콘인지 파콘인지 하는 놈을 그때 그렇게 살려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대답 없는 그를 두고 상점 주인이 멋쩍게 자문자답하였다.
“그게 아니면…. 아무래도 민꼬리가 시선을 끄는 갑네.”
싱겁게 뱉은 추측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사내는 뻣뻣한 꼬리 끝을 움직여 발목 옆으로 가지런히 붙여 두었다. 아무런 장식도 두르지 않은 그의 벌거벗은 꼬리는, 그래서 더 튀어 보이는 경향이 있었다. 그 이례적으로 야만적인 모습이 사내를 알아보게 만드는 데 한몫했을 터다. 남들보다 몇 뼘 더 커다란 덩치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사려야 하는 것은 그의 의뢰인뿐만이 아닌 듯하였다.
사내는 인어의 술통으로 돌아와 자신의 앞으로 온 편지가 없는지 찾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도착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짜증스러워했다. 본인의 연락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냥 씹혔을지도 모른다.
뉘엿뉘엿 저물어 간 해가 어느새 종적을 감춘 시간.
게롤린의 저녁을 즐기기 바빴던 챠링고의 시간은 언젠가부터 낮과 밤이 바뀌어 있었다. 술꾼은 오늘도 어김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라히무스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1층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나니아의 행방을 물었다.
“나나? 지금 내 방에서 자고 있을 텐데.”
“…걔가 왜?”
“침대가 주저앉았다고 하더라.”
“…….”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챠링고와 다르게 라히무스의 낯짝은 그날의 침대 다리처럼 무너져 내렸다. 옆에서 파키케팔로가 속도 모르고 명랑하게 지껄여 댔다.
“내일 고쳐 줘야겠네! 나 그런 거 잘하는데. 아씨, 왜 때려!”
난데없이 정수리에 딱밤을 얻어맞은 녀석이 버럭 항변했다.
챠링고의 벌겋고 몽롱한 시선이 라히무스의 표정 변화를 읽었다. 그녀는 술잔을 든 손으로 옆에 앉은 파키케팔로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 새끼 진심인가 봐. 어떡하냐.”
파키케팔로가 두 리자드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가 술병 주둥이에 손가락을 쑤시는 시늉을 하자, 녀석도 그제야 희롱하는 상황임을 이해하였다. 파코는 놀리는 것 같기도 하고 축하하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투로 수선을 떨었다.
“라히무스 그럼 이제 진짜로 유부남 되는 거야?!”
“하여간 숫놈들이란…. 칼 뽑기 전에 가죽 벗길 생각부터 하지. 쫌만 잘해 줘도 착각하고 기어올라서 피곤하다니까.”
챠링고가 한심하다는 투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파키케팔로가 자신의 손가락을 가리키며 물었다.
“뭐야. 아냐? 나 손에서 반지도 봤는데?”
암컷은 질린다는 듯, 그러나 이참에 너도 잘 배워 두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야, 여자가 한 번 자 줬다고 결혼까지 생각하고 그러는 거 아니다.”
그녀의 말대로 아직 피앙세 자리 근처에도 가 보지 못한 수컷 리자드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침묵하였다. 그 어두침침한 낯빛이 주정뱅이의 즐거움이 되었다.
“근데 너는 정말로 걔가 머리 올려 주면 할 거냐? 전식, 본식, 피로연, 무드 별로 옷 바꿔 입어 가면서? 꼬리에 천도 안 두르는 네가?”
상상만 해도 너무 재밌다며 여자는 깔깔 웃어 댔다.
본인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여러 마리의 남편을 거느릴 수 있는 암컷 리자드와 다르게, 수컷 리자드의 결혼식은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때문에 그 길고 장황한 행사의 주인공 역할은 수컷에게로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신랑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현란하게 꾸며져 하객들 앞에 선보여져야 했다. 아름다운 신랑의 모습은 그 무엇보다 값진 예물로써 신부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수컷은 삼단 예식의 분위기 별로 때론 우아했다가, 때론 사랑스러웠다가, 때론 근사해야 했다.
그것은 마치 한창때의 사내가 인생의 정점이라도 찍어 보이는 듯한 퍼포먼스였다. 길고 긴 불편함과 복잡함을 감내하면서 얻어지는 것은 품평의 시선과 박수갈채. 수컷은 그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진짜로 식 올리게 되면 나는 꼭 불러 줘라.”
“…닥쳐.”
술잔이 찰랑거릴 정도로 낄낄대는 챠링고를 향하여 라히무스가 으르렁거렸다. 붉어진 얼굴에 수치스러운 기색이 드러났다.
무시하고 2층으로 올라가려 하는 그를 챠링고의 말이 붙들어 세웠다.
“야, 애는 내버려 둬. 요즘 통 못 잤대.”
* * *
나니아가 눈을 뜨면서 챠링고가 침대를 찾았다. 날이 밝아 오는 시간이었다. 옆에 누운 여자에게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소녀는 절묘하게 맞바꾸어진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오랜만에 숙면을 취한 몸이 가볍고 개운했다.
그러나 마냥 홀가분한 일만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아침 일찍부터 토라진 리자드 사내를 감당해야 했다.
나니아는 자신을 등지고 앉은 리자드의 집채만 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의자 밑으로 축 처진 꼬리 끝이 ‘나 서운해’라고 말하고 있었다.
소녀는 뒷짐을 진 채로 살금살금 걸어가 그의 옆에 섰다. 누가 자신의 방에 들어왔는지 알면서도 뒤돌아보지 않는 모습에서 단단히 삐진 기색이 느껴졌다.
“라히무스.”
여자는 그의 이름을 부르며 허리를 숙였다. 수그린 몸이 사내의 옆얼굴을 노리며 다가왔다.
어깨 위로 넘어 온 시선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을 알고, 라히무스는 그녀를 향해 흘긋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이내 다시 거두어들였다.
가라앉은 눈빛과 삐죽이는 입술에서 섭섭한 감정이 읽혔다.
사내는 어딘지 처연한 빛으로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낮게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밤만 기다리는 거 알잖아.”
나니아는 그가 무엇을 아쉬워하는지 알고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것은 그렇게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할 내용이 아니었다.
“라히무스가 자게 내버려 두질 않으니까….”
“내 침대에서 자도 됐잖아.”
“자꾸 만지잖아.”
네 잘못이라며 닦달하는 나니아의 목소리에서 반발심이 느껴졌다. 밤일에 대해서라면 나도 할 얘기가 많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어떻게 사람이 매, 맨날 맨날 그 짓을 해…?!”
사내는 허리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으며 그런 말을 들을 줄 몰랐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얼떨떨한 시선이 이제는 똑바로 나니아를 쳐다보았다.
“싫었어?”
분명 좋아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는 듯한 눈빛이 언뜻 순수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니아는 그 투명하게 붉은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한 채로 중얼거렸다.
“아, 아니…. 싫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훤한 대낮에 밤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다. 대답하는 목소리가 더듬더듬 기어 들어갔다.
“…부, 부부도 맨날 맨날은 안 할 거야.”
그래서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사내는 소녀의 팔을 끌어다 자기 옆에 똑바로 세워 두었다. 허리를 감아 오는 팔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퇴로를 차단했다. 소녀는 훅 다가온 신체적 거리에 또다시 쿵쾅쿵쾅 심장이 뛰었다.
이어 나가는 언쟁이 시답잖고 남부끄러웠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그 정도는 알아.”
“매일 하고 싶은데 그럼 어떻게 해. 낮엔 만지지도 못하게 하잖아.”
못마땅해 하는 리자드의 꼬리가 방바닥을 탁탁 쳐 대는 소리가 점점 거세어졌다. 그는 눈썹과 눈 사이를 좁히더니 주둥이를 삐죽 내밀기에 이르렀다. 아이처럼 투정 부리는 목소리가 징그럽도록 깊고 음산했다.
“밤에도 안 해 주고, 낮에도 안 해 주면. 너랑 나는 언제 사랑을 나눠?”
남자가 사랑이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나니아는 심장이 콱 막혔다. 빈속에 억지로 솜을 욱여넣은 것처럼 간질간질하고 갑갑해졌다.
그것은 사랑하는 남녀 사이에 나누는 행위라고 정의하며 몸소 행하기까지 하였으나, 아직까지도 그 말을 주고받는 일은 어렵기만 했다.
“고작 하루였어요….”
봐 달라는 듯 애원하는 목소리가 지쳐 있었다.
남자의 정이라면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칠 정도로 받아 주었다.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평균 이상의 적잖은 횟수였다. 나니아는 확신했다.
“그동안 많이 했잖아.”
그녀는 진력난다는 투로 대꾸하면서도 소박맞은 색시처럼 뾰로통한 라히무스의 뺨을 한 손으로 어루만졌다.
‘달거리라도 시작하면 아주 난리를 칠지도 몰라.’
나니아는 자조적인 생각과 함께 남자를 쓰다듬었다. 리자드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 안에 얼굴 반쪽을 문지르며 칭얼거렸다.
“그치만, 나는 이제 너 없이는 하루도 힘들어.”
본인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그녀는 사내에게 외로움을 가르쳤다. 매일 밤 옆자리를 데워 주던 그녀의 부재가 라히무스를 밤새 뒤척이게 만들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반나절이었어요.”
“반나절도 힘들어.”
“자꾸 꼬박꼬박 말대답할 거예요?”
“…아니.”
유치하게 대화를 물고 늘어지던 중에 남자가 백기를 들었다. 그는 아예 나니아의 가슴 아래쪽에 얼굴을 묻고 비비적거렸다.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도 라히무스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검붉은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는 라히무스의 모습은 시도 때도 없이 놀아 달라고 보채는 아이처럼 성가시고 귀여웠다.
내 인생에 나를 이 정도로 좋아하고 아껴 줄 남자가 또 나타날 수 있을까.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까지 집착적으로 원하고 갈구해 왔던 적이 없었던 탓에 나니아는 곤욕인지 희열인지 모를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언제부턴가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데에서 느껴졌던 거부감은 그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옅어져 있었다. 아마 나니아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에의 의구심이 싹트면서부터 희석되어 간 것일 터다.
문제는 또 다른 부정적인 감정이 흐릿해진 거리낌의 자리를 대신했으니, 언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를 남자의 관심이 또 언제 어떻게 닳아 없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것이었다. 쉽게 얻어진 것은 쉽게 없어지기 마련이라고 생각했다.
짧지 않은 침묵 끝에 소녀가 입을 열었다. 남자는 여전히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라히무스.”
“응.”
“축수랑 리자드 사이에서는 아이가 만들어져요?”
“…….”
느닷없는 질문에 사내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달콤한 순간에 찬물을 확 끼얹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
남자는 당황스러웠다. 대체 어디서부터 그런 호기심이 피어났는지 그 맥락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기이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린 라히무스와 다르게 질문을 꺼낸 나니아는 차분하기만 했다. 그녀는 어떤 흔들림도 없는 침착한 목소리로 ‘그냥요.’라는 싱거운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에 사내는 겸연쩍어하며 눈썹 끝을 긁었다. 그러고는 불확실한 투로 대꾸했다.
“글쎄…. 생기기도 하던데….”
나니아는 자신이 그런 이상한 괴물 따위가 아니라고 믿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피임에 대한 두려움이 불쑥 샘솟았다.
리자드 스토리 R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