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롤린 (11/22)

게롤린

“아, 이제야 좀 열이 나네.”

번쩍번쩍 짐을 들어 나른 리자드가 허리에 손을 얹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북쪽은 너무 춥다니깐.”

네 번째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옷들은 전부 얇고 가벼운 것들뿐이었다.

“벨 님!”

“왜요.”

“우리 겨울옷 사러 가자요.”

녀석은 모처럼 손에 들어온 돈을 쓰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벨은 귀찮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무엇보다 벨테그위의 땅에서 꺼벙하게 헤실거리며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다.

“혼자 다녀오세요.”

“제대로 경호 안 했다고 챠링고에게 혼난단 말이야.”

파키케팔로가 칭얼거리자, 헤르가 끼어들었다.

“제가 곁에서 지켜드리죠.”

녀석은 고마운 줄도 모르고 다룸을 불신하였다.

“그 비실비실한 몸으로?”

어깨를 척 펼친 리자드 청년의 키가 오늘따라 훤칠해 보였다. 헤르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대꾸하였다.

“…인간 사이에선 평균입니다.”

벨로즈는 여전히 성가시다는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얌전히 있을 테니 걱정 마세요. 롱타나 한 판 두고 있죠, 뭐.”

“뭐! 롱타? 이따 나랑도 해!”

롱타 얘기에 흥분한 리자드를 보고 다룸이 비웃었다.

“어차피 질 거잖아요.”

“아, 아니라고! 내기하자, 내기!”

파키케팔로가 씩씩거리며 발을 구르자, 벨은 방문을 닫으려는 듯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알았으니까 가서 입을 만한 옷이나 몇 벌 건져 오세요.”

결국 파키케팔로의 상점행에는 나니아가 동행하였다. 그는 단지 자신의 옷만을 사려는 것이 아닌 듯, 자기가 입지 않을 치수의 의복도 꼼꼼히 살펴보았다.

나니아도 그의 옆에서 양털 옷 몇 개를 훑어보다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른 사람들의 취향은 물어보지 않아도 되겠어요…?”

파키케팔로는 상관없다는 듯 가벼이 대꾸했다.

“벨 님은 지금 자기가 옷을 가릴 처지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

나니아는 왕국 최고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드레스들을 잔뜩 입고 살았을 그녀가 때 묻은 천 옷을 입으며 어떤 심정일지 궁금하였다.

“챠링고나 라히무스는 무조건 편한 옷. 원래부터 그랬어. 그러니까 그냥 따뜻하고 편한 옷이면 돼.”

어차피 선택지도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런데 라히무스는…. 라히무스 옷은 사는 게 쉽지 않아.”

파키케팔로가 미간을 찌푸리며 주름 잡힌 콧등을 손가락으로 비볐다.

“왜요?”

나니아가 물었다.

“아니, 너도 봐서 알잖아. 떡대가 이따만 해 가지고….”

청년이 양팔을 어깨높이에서 좌우로 벌렸다, 가슴 높이에서 좌우로 벌렸다, 하며 라히무스의 체구를 가늠하듯 자세를 취했다.

“맞는 옷이 없다니깐.”

그것이 매우 불만이라는 듯, 파키케팔로는 의복 구매 담당으로서 그를 흉보았다.

나니아는 팔을 올리면 언뜻언뜻 허리가 보일 정도로 짧게 올라붙던 라히무스의 웃통을 기억했다. 유독 달라붙는 옷만 골라 입기에 취향인 줄로만 알았다.

‘작게 입는 것이 아니라 작게 입을 수밖에 없었던 거구나….’

사정도 모르고 그의 몸뚱이를 마냥 야릇하다고만 여겼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숙연해진 그녀의 옆에서 파키케팔로가 말을 더했다.

“특히 단추 달린 옷은 못 입어.”

“그건 또 왜요…?”

“젖탱이가 너무 크잖아. 쫌만 움직여도 단추가 다 날아가 버린다니깐.”

아주 까다로운 옷걸이라며 상스럽게 짜증 내는 파키케팔로의 옆에서, 나니아는 말없이 이마를 짚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청년은 금세 긍정적으로 변하여 콧노래를 불렀다. 리자드 상점에는 그래도 제법 큰 치수의 옷들이 있다며 즐거워하는 것이었다.

파키케팔로는 그물뜨기한 스타킹 같은 것을 손에 들고 고민하였다. 알고 보니 꼬리에 씌우는 니트 장식이었다. 화려한 모양으로 구멍이 술술 뚫려서 옷의 본디 역할인 보온 기능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한때 부업으로 레이스 뜨기를 배웠던 하녀가 보건대, 그 편물은 상당히 손이 많이 갔을 법했다. 말인즉 고가의 상품임이 분명했다.

그는 정말로 멋 내기에 진심인 듯하였다. 옆을 알짱대느니 눈에서 사라져 주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나니아는 그가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었다.

소녀는 거리를 두리번거리며 구경하였다.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 문호의 초입답게 정교한 모양의 벽돌을 기이한 형태로 쌓아 만든 집이라든가 다색채 기와로 지붕을 올린 건축물들이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뽐냈다. 화려한 버트레스가 높다란 벽을 보강하는 번잡한 길목도 이목을 끌었다.

그런데 정말 기이하게도, 거리는 화려한 듯 빈곤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다. 간간이 지나쳐 가는 걸인들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들은 개구멍을 통해 들어와 어떻게든 입에 풀칠할 거리를 찾아 헤매었다. 안쪽에는 마땅히 단속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땅굴 안으로 몰래 발을 들여놓아도 발각되어 쫓겨날 일이 없었다.

광장 한복판에 선전원이 종을 울리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지껄여 댔다. 그 옆으로 골동품을 진열해 놓은 노점, 그림을 그려 파는 사람, 맛좋아 보이는 과일을 잔뜩 실은 수레가 차례로 시선을 끌었다.

“이크….”

나니아는 몹시 야위어 보이는 아이가 주인 몰래 수레에서 과일 한 알을 슬쩍 훔치는 장면을 목격했다. 꽁무니 빠지도록 도망치는 뒷모습에서 궁핍한 굶주림이 느껴졌다.

사람들 주변을 서성거리던 나니아는 꼬질꼬질한 아이 하나가 꽃을 들고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꽃 사세요….”

가느다란 목소리는 누구에게 팔고 싶은 것인지조차 분명하지 못하고 흐릿하기만 했다.

“꽃…. 꽃 좀 사 주세요.”

남루한 옷차림의 아이는 여자아이인지 남자아이인지 그 성별이 참으로 모호하였으나, 분명한 것은 참 예쁘장했다.

딱 한 송이. 아이는 새빨갛게 화려한 꽃을 두 손 모아 쥐고 있었다. 불안한 눈동자에 뒤숭숭한 두려움이 서렸다. 저 마지막 한 송이를 팔면 아이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니아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그 꽃 얼마니?”

아이가 고개를 들어 파르르 떨리는 시선으로 손님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부르는 금액은, 꽃값치고는 조금 과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가격까지 듣고 모른 척 발을 돌리기에는 야위고 축난 아이의 몰골이 눈에 밟혔다. 결국 나니아는 아이 손에서 꽃을 가져오면서 값을 치렀다. 깡말라서 더욱 댕그랗고 커다래 보이는 아이의 눈이 뒤룩뒤룩 혼란하게 굴러갔다.

어디다 흘리기 전에 곧장 집으로 돌아가라 훈계하려는데, 아이와 나니아의 머리 위로 커다랗게 그늘이 졌다.

뒤를 돌아보니 기골이 장대한 리자드 여자가 서 있었다.

“어이, 아가씨. 여기서 뭐 해? 다른 사람들은?”

“아…. 챠링고. 빨리 오셨네요.”

예기치 못하게 반가움을 표하고 다시 아이 쪽을 돌아보았더니, 녀석은 무엇에 그렇게 화들짝 놀랐는지 이미 도망치고 없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선 라히무스를 만난 파키케팔로가 새로 산 옷을 자랑하고 있었다. 챠링고와 나니아도 함께 그쪽으로 걸어갔다.

“너 인마, 벨로즈 님은 어디다 모셔 놓고 너 혼자야!”

챠링고가 파키케팔로를 혼쭐낼 기세로 언성을 높였다. 골라 둔 옷을 라히무스의 가슴팍에 가져다 대어 보던 청년은 챠링고를 피해 사내의 등 뒤로 숨었다. 녀석이 소심하게 변명했다.

“다룸이 잘 지키겠다고 했다니깐.”

“넌 걜 믿냐?”

두 리자드가 아웅다웅하는 사이 라히무스의 시선은 나니아에게로 꽂혔다. 그는 나니아가 들고 있는 꽃을 보고 눈살을 확 찌푸렸다.

나니아에게로 성큼 걸어오더니 붉은 꽃잎 사이를 벌려 안쪽을 확인했다.

“…어디서 난 거야.”

그러고는 또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으르렁거렸다. 죄 없는 꽃을 짓이길 기세였다.

“어떤 새끼가 너한테 이딴 걸 줬어.”

“으, 응…?”

나니아는 그가 화를 내는 영문을 몰라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나는 그냥…. 행색이 가엾어 보이는 아이가 꽃을 팔고 있어서, 불쌍해서….”

쓸데없는 데에 돈을 썼다는 이유로 혼이 나는 줄 알았다. 곁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주워들은 챠링고도 나니아의 손에 들린 꽃을 알아보았다. 금방이라도 꽃잎을 찢어발길 기세로 노려보던 라히무스와 다르게 그녀는 아주 재미있는 것을 보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혹꽃이잖아.”

꽃을 향해 손을 뻗는 챠링고에게 나니아는 순순히 넘겨주었다. 그녀는 꽃에게 원한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수줍고 무고한 꽃의 향기를 기쁜 듯이 맡아 보았다.

“음, 향기 좋네. 이걸 누구한테 받았다고?”

“받은 건 아니고 파는 것이었어요. 동생뻘의 어린아이가요. 열둘…. 아니 열셋 정도.”

그 말을 듣고 곁에 있던 파키케팔로도 인상을 찌푸렸다.

“에엑, 완전 애잖아. 이 동네도 정상은 아닌 게 분명하다니깐.”

챠링고가 어리둥절한 나니아를 향해 꽃잎 사리를 벌려 확인시켜 주었다.

“아가씨는 잘 모르지. 이건 마혹꽃이라는 이름의 꽃인데…. 이거 봐 봐. 뭐 같아?”

“어….”

커다랗고 빨간 여러 장의 꽃잎 사이사이, 섬세하고 작은 꽃잎들이 오밀조밀 뭉쳐 있었다. 그 사이로 숨겨진 수술과 암술도 모습을 드러냈다.

문제는 그 수술과 암술의 모양이었다.

“생긴 게 좀 야리꾸리해. 그치?”

챠링고가 킬킬 웃었다. 나니아는 한 삼 초 정도 더 들여다본 다음에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고 얼굴을 붉혔다. 마냥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속을 들여다보니 징그러운 것도 같았다.

“어, 어…. 제가 생각하는, 그…. 그게 맞나요?”

얼굴을 붉히는 나니아를 보고 라히무스는 기분이 확 상했다. 성미가 더러워 보이는 얼굴로 꽃을 빼앗아 가더니, 기어코 줄기를 분질러 꺾어 버렸다. 동강 난 꽃이 그의 발밑에 짓이겨졌다.

“꽃한테 원수졌어요?”

이게 웬 횡포람.

나니아가 인상을 찌푸리자, 라히무스가 음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떤 창부 새끼가 너한테 추근댔는지 모르겠지만, 다신 다른 남자한테 이딴 거 받지 마. 알겠어?”

나니아는 자신이 뭘 그렇게 잘못했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씩씩대는 그와 다르게 파키케팔로와 챠링고는 키득거리고만 있었다.

“니가 주는 건 받아도 되고?”

여자가 아주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 말은 질문이라기보다는 놀림에 가깝게 들렸다. 나니아가 챠링고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물었다. 그녀는 아직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꽃이 좀, 안 좋은…. 나쁜 꽃인가요?”

“꽃한테 무슨 잘못이 있겠어.”

여자는 짓밟힌 혹꽃을 내려다보며 애도를 표했다.

“이걸 가지고 이상한 짓을 하려는 놈들이 문제지.”

혹꽃은 기묘한 생김에 걸맞게 정력 증강에 효험이 있어서 그렇고 그런 약제의 재료로 쓰인다 했다.

“그리고 보통은 부부 사이에서나 주고받는 꽃이라.”

기능도 기능이거니와 꽃 자체도 무척 화려하고 예쁜 편이었다. 결혼식 같은 데서도 많이 사용된다 하니 사람의 성기를 닮은 꽃술이 대롱대롱 매달린 예식장을 생각하면 조금 아찔해졌다.

파키케팔로가 바닥에 쪼그려 앉아 짓이겨진 꽃잎을 들추어보며 말했다.

“근데 이게 여기서도 자랄 수가 있나? 본토에 가까워지고 있는 게 확 느껴진다니깐.”

속뜻으로나 외양으로나 여러모로 야시시한 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라히무스가 왜 그렇게까지 성깔을 부려 댔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 그 애는 매춘 상대를 찾고 있었던 걸 거야.”

만개하기 전의 마혹화를 딱 한 송이만 손에 들고 있던 아이. 챠링고가 그 의미를 설명했다. 진짜로 팔려고 했던 것은 아마도 꽃이 아니었을 거라며 그녀는 조금 머쓱해했다. 그러니까 나니아는 애먼 장사 도구를 가져와 버린 셈이었다. 어쩐지 꽃 한 송이에 부르는 값치곤 세다 싶었더니만, 그런 의미였다면 완전히 헐값이었다. 겨우 몇 푼돈에 몸을 팔아야 할 만큼 생활이 어려운 아이였구나. 딱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울적해졌다.

“마혹화 한 송이에 그 정도 벌어 갔으면, 걔 입장에서는 오늘 수지맞는 장사를 한 거지.”

기분이 저조해진 나니아를 보고 챠링고가 위로 같은 말을 건넸지만, 착잡한 기분은 나아지질 않았다. 힘없이 팔을 떨던 아이의 눈빛이 생각나 입맛이 썼다.

* * *

인어의 술통으로 돌아온 나니아가 목격한 것은, 깜짝 놀라 손이 발발 떨리는 광경이었다.

“공주님….”

그녀는 태평스럽게 앉아 있는 벨로즈를 향해 더듬더듬 걸어갔다.

“대체 머리에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공주의 머리가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소녀는 그것을 한탄스럽게 어루만지며 경악하였다. 벨은 목을 조금 덮던 머리카락을 들추어 올리며 하얀 목선을 드러내 보였다.

“눈썹까진 어떻게 했는데, 속눈썹은 못 하겠더라고요. 헤르가 해 줬어요. 어때요?”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자 다룸이 슬쩍 손을 들어 알은체했다. 그 역시 뿌리 끝에서 자라나던 금빛의 머리카락을 새까맣게 덮은 후였다.

나니아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마치 공주가 대머리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어떻긴요, 너무, 너무 별로예요.”

그녀답지 않은 솔직한 간언을 듣고, 벨은 살짝 기분이 상하려 했다. 자신은 머리를 빡빡 밀어도 변함없이 아름다운 님프였다. 자기 머리도 아니고 남의 머리로 왜 그렇게까지 안타까워하는가.

“너무…. 너무 아까워요. 그렇게 반짝거리는 은발을 이렇게 칙칙하고 흔한 색으로 덮다니요!”

그녀는 아끼는 인형의 머리카락을 쓸어 보는 소녀처럼 공주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그러고 보니 머리카락을 잘라 달라고 했을 때도 이런 비슷한 반응을 보였더랬지. 벨은 두피 사이로 부드럽게 파고드는 나니아의 손길을 즐기며 언짢아지려 했던 기분을 풀었다.

님프는 여유롭고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나는 너무 빛나니까요. 이렇게 해서라도 존재감을 좀 가려 봐야죠.”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한 치의 의심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저도 같은 이유죠.”

헤르가 다시 손바닥을 꺾어 들고 깐족거리자, 챠링고가 빈정거렸다.

“정말로 남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거라면, 당신은 그 치렁치렁한 귀걸이부터 빼는 게 좋겠어.”

벨은 나니아의 손목을 잡아 자기 옆자리에 앉혔다. 그가 비탄에 잠긴 소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미소 지었다.

“내 머리카락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요? 괜찮아요. 어차피 자랄 거니까요. 그런데 이것도 나름 잘 어울리지 않나?”

님프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익숙하게 예쁜 척을 했다. 나니아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검정색은…. 그런 색은 허다하게 널렸구요, 매력도 없구, 그다지 예쁘지 않은걸요. 아무튼 별로예요. 형편없어요.”

그녀의 넋두리는 벨로즈의 머리카락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았다. 나니아는 자신의 모습을 공주에게 겹쳐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해서, 본인의 머리카락 색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었다. 개성 없고 평범한 검은 머리카락에 대한 불평을.

“나니아에게 말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여기 영주가 지금 궁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어요. 그래요, 나의 계부 대신이요.”

벨은 자신이 도망자임을 상기시켰다. 그녀가 싫어하는 수두룩하게 까만 머리카락으로 신분을 감추어야 하는 까닭을, 어리석은 하녀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고 간단하게 설명했다.

“지금은 훌레랑에서 고군분투하느라 이쪽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라고 기대하면서도, 그래도 사실은 불안하답니다. 언제 어디서 잡힐지 모르는 위험이 내 주변에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상당히 신중해질 수밖에요.”

턱을 괸 님프의 눈빛이 짙고 은밀해졌다.

“나는 오로지 당신을 위해서 이쪽 항구를 택했어. 내 말 이해해?”

“그, 그건….”

탓하는 것 같기도 하고 투정하는 것 같기도 한 벨로즈의 압박에 나니아는 긴장이 밀려들어 입을 뻐끔거렸다. 까맣게 머리를 물들인 벨은, 어딘지 낯선 사람 같았다.

높으신 분들의 복잡한 정쟁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민폐 끼쳐서 죄송하다고 뒤늦게 사죄라도 해야 하는 걸까. 당황하여 고민하는 나니아의 뒤로, 익숙한 중량감의 인영이 나타났다.

“그럴 일 없으니까 애한테 부담감 주지 마.”

머리 위에서 라히무스의 냉랭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내 그는 나니아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저, 저는, 죄송…. 죄송해요. 잘 몰랐어요.”

소녀가 무어라 다급히 지껄이면서도 라히무스의 손에 의해 끌려갔다.

위층으로 사라 져가는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파키케팔로가 어깨를 으쓱했다.

“라히무스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자기 방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끌고 올라가는 모습이 우스웠다. 챠링고가 파키케팔로의 옆구리를 툭 치며 물었다.

“야. 반지 없었지?”

“어, 없어. 안 끼던데.”

“차인 거 맞지 않아?”

“맞는 거 같은데…. 깨끗하게 포기할 줄 알았는데, 엄청 질척댄다. 그치?”

“아까 들었냐?”

“뭘?”

“다신 다른 남자한테 이딴 꽃 받지 마.”

챠링고가 라히무스의 흉내를 내자, 파키케팔로가 낄낄댔다. 정확히 무슨 맥락의 시늉인지는 몰라도 제법 익살스럽기는 하였다. 벨은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화제를 바꾸었다. 그가 물었다.

“배편은 알아보았나요, 챠링고?”

“아, 배요.”

벨의 질문에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리자드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러잖아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깜빡했네요. 아무래도 겨울이라….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동풍이 불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댑니다. 예상보다 체류가 길어질 것 같으니 염두에 두셔야겠어요. 염색은 잘하신 것 같아요. 답답하시겠지만 당분간 외출은 자제하시는 게 좋겠어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경비가 삼엄하지 않습니다. 헤르 말대로 치안을 아예 놓아 버린 느낌이 들더군요.”

그녀의 말에 다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요. 조심해야 할 건 고작 군병들이 아닙니다. 차라리 이곳에서 벌어질 흉악 범죄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 것을 경계하는 편이 이치에 맞겠죠.”

벨은 자신의 까만 머리카락 한 움큼을 눈앞으로 끌어와 배배 꼬았다. 하루라도 빨리 이 땅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상황은 뜻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 * *

인어의 술통은 뒤편에 커다란 양조장을 끼고 디귿자로 굽어지는 형태의 건물이었다. 그 규모가 샤르도네의 소박한 여관방과는 감히 비교될 수준이 아니었다.

리자드의 흉포한 앞발로 계단 끝의 엄지기둥을 붙들었다.

그가 물었다.

“네 방이 어디야.”

주점에서 객실로 연결되는 2층 건물은 좌우로 하나씩 붙어 있었다. 만약 그가 계단을 잘못 택했더라면 다시 같은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우스운 꼴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여긴 내 방이 없는데요.’라고 말하는 상상을 했더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뭐가 웃겨.”

실실거리는 나니아를 보고 리자드의 낯빛이 떨떠름해졌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니아는 헤식은 웃음을 거두고 순순히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사내가 왜 자신과 단둘이 있으려는지 예전처럼 궁금해하지도 않고 거부하지도 않았다. 묵직하고 사나운 그의 눈빛을 마주하자, 아래층에서 느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긴장감이 확 솟구쳤다.

“여기예요.”

등골이 찌릿찌릿한 느낌과 함께 방문을 열었다. 사내를 스스럼없이 방으로 들이는 자신의 모습에서 말 못 할 혐오와 환멸을 느꼈다. 동시에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상야릇한 기대감이 싹트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남자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항구를 둘러보고 온 그 짧은 시간 동안 아는 얼굴을 서넛이나 만났다. 서로 알은체하지 않았지만, 그들 역시 자신을 알아보는 눈치였다.

빈 둥지 출신 용병들은, 전장 밖에서는 그저 용병이라는 이름의 탈을 쓴 깡패 살인마들일 뿐이다. 여기 게롤린은 그중에서도 제일 질 나쁜 놈들만 골라 모은 것처럼 본토에서 추방당한 죄수들로 가득했다. 내키는 대로 사람을 때리고 찌르는 놈들이 수두룩한 환경에서, 사내는 날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여긴 폴핀처럼 신사적인 곳이 아니야. 가능한 네 방에 틀어박혀서 얌전히 지내. 앞뒤 분간 못 하고 그렇게 아무 곳에나 쏘다니지 말라고.”

나니아는 삐죽하게 대꾸했다.

“그치만…. 그치만 저도 이제 찾아봐야 하는걸요.”

모질게 으름장을 놓는 그를 보면서 대들고픈 마음이 들었다. 그물에서 놔준 물고기 대하듯 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 자신을 단속하려 든다는 생각에 오기가 생겼다.

“뭘?”

“라키바하프 님을….”

“…….”

리자드는 볼 안쪽으로 짜증스럽게 혀를 찔러 넣었다.

그래, 맞다. 애당초 그 새끼 때문에 여기까지 발걸음한 것이었다.

나니아의 말은 사내의 신경을 돋웠다. 그는 경계심으로 들끓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건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해 볼 테니까, 넌 그냥 한 발자국도 나가지 마.”

리자드가 손가락으로 방바닥을 가리켰다.

“특히 챠링고가 어디 가자고 꼬시면, 절대, 절대 가지 마. 알아들어?”

리자드는 ‘절대’라는 말에 힘을 실어 으르렁거렸다.

“왜, 왜요? 라히무스가 나한테 그럴, 그런 명령할 권리는 없어요.”

그녀가 속도 모르고 새치름하게 고집을 부리자, 라히무스는 버럭 성질을 부렸다.

“씨발, 불안해서 그래!”

그는 거친 욕을 내뱉어 놓고 아차 싶었는지 자신의 아래턱과 입술을 멋쩍게 문질렀다. 그러고는 이해해 달라는 듯 하소연하며 말을 이었다.

“여긴…. 여긴 너처럼 작고 귀여운 여자애한텐 너무 위험한 동네라고. 예쁜 여자만 보면 그저 따먹어 보려는 새끼들로 가득하단 말이야. 씨발, 나는…. 불안해서 너 못 내놔.”

라히무스는 생각나는 대로 지껄여 놓고 양손을 두피에 찔러 넣으며 무거운 앞머리를 털어 넘겼다. 그의 눈빛에 서린 걱정은 매우 진지하고 무거웠으나, 나니아의 귀에는 이상하게 간질간질하고 산뜻하게만 들렸다.

뉘엿뉘엿 해가 저물고 있었다. 주황빛 낙조가 창문을 타고 들어와 방 안에 가득 퍼졌다. 남자의 얼굴에 노을이 묻어 있었다. 그 아슬아슬하게 붉은 안색이 가슴을 뛰게 했다.

소녀는 작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내가…. 그…. 귀엽다고 생각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그 말은 들릴락 말락 하게 아주 조그마해서, 사내는 멍청하게 입술을 몇 번 더 뻐금거렸다. 그런 다음에야 멋쩍게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넌 거울도 안 봐?”

꼼지락거리는 소녀의 손끝이 방 안에 맴도는 침묵을 천천히 꼬집었다.

“음…. 별로 안 예쁜데, 나는….”

네 눈에나 내가 예뻐 보이는 것 같다는 말은, 감히 민망해서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리자드는 초조하게 입술을 잡아 뜯었다. 자신 없이 머리 숙인 나니아의 정수리가 보였다. 당장 고개를 들게 하고 싶은 마음과 방문을 열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코끝에 감도는 소녀의 살 내음이 목을 타게 했다. 커다랗게 부풀었던 가슴이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들썩거렸던 어깨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나는 항상, 예쁘다고 생각했어. 네 그…. 머리카락….”

흐릿한 침묵이 가늘게 흩어졌다.

“하나도 칙칙하다거나, 평범하다거나, 그렇지 않고…. 네 까만 머리카락은, 그러니까, 밤하늘 같아…. 아…름다워.”

리자드는 자신의 부족한 어휘로 그녀에 대한 찬미를 멋지게 이어 나갈 수 없음을 원통하게 여겼다. 더듬더듬 한참을 생각하며 말할 수밖에 없는 자신이 천치 같았다.

“허리 끝에서 찰랑거릴 때면, 나는…. 항상 시선을 뗄 수 없어….”

리자드는 소녀의 얼굴을 반쯤 덮은 오른쪽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려 했으나, 반쯤은 다시 볼 옆으로 흘러내렸다.

“네, 이…. 하얗고 동그란 뺨이랑 잘 어울려…. 속눈썹도…. 까맣고 예쁘고….”

‘…큰일 났다.’

리자드는 소녀의 뽀얀 뺨에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렇지 않아도 어여쁜 얼굴로 시선을 잡아끌던 그녀는, 날이 갈수록 사랑스러워져만 갔다.

주먹을 꽉 쥐어 보는 것으로 간신히 욕정을 참아 낸 그는, 이제 안 되겠다 싶어 황급히 등을 돌렸다.

“아, 아무튼 밖에 나오지 마. 여기 술집도 위험해.”

오랜만에 들어 보는 예쁘다는 말에 심장이 콩콩 뛰었다. 가슴 뛰는 격정을 참아 내지 못한 쪽은 오히려 나니아였다. 이대로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라히무스의 오른팔을 다급히 끌어안았다.

그때 남자가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라 그녀를 밀어 냈다.

나니아는 반걸음 밀쳐져 당황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내 또한 자신의 행동에 놀라서 두 눈을 껌벅거렸다.

“그, 어….”

밀쳐 낸 자세 그대로, 직각으로 꺾인 라히무스의 팔뚝이 허공에 어색하게 머물렀다.

그의 붉은 시선이 나니아의 가슴을 향했다. 리자드가 더듬더듬 자신의 행동을 변명했다.

“마, 말캉한 게 닿아서 갑자기….”

바보같이 입술을 달싹이는 그를 보고 나니아의 얼굴도 덩달아 화르륵 타들어 갔다.

“겨울옷이 두꺼워서요, 이제 더는 덧입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남자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시시콜콜한 고백을 늘어놓고 말았다.

그녀의 말을 듣고 라히무스도 얼굴을 확 붉혔다. 이제는 노을 때문이 아닌 게 확실했다.

그는 어쭙잖게 눈알을 굴렸다. 하지만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소녀의 가슴 앞으로 시선이 이동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아, 아무것도 안 입었다고?”

“아니, 입긴 입었는데. 입고 있잖아요.”

나니아가 위에 입은 털옷의 끄트머리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동그란 가슴의 모양이 더 선명해지려고 해서, 남자는 버벅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 응, 그래.”

가랑이 사이가 후끈해지려 했다. 이건 미친 상황이야. 바짝 마른 입술을 혀를 내밀어 핥으며, 정신을 차리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 나니아가 한 번 더 그를 붙잡았다.

“라히무스…. 당신 소원, 지금 쓸래요…?”

“…뭐?”

“마, 만져 볼래…?”

남자가 정말로 미친 게 아니라면 그녀는, 발정 난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그의 손을 잡아다 자신의 가슴 근처로 가져가려 했다. 의식 없는 입 안에 침이 고였다. 손가락 끝마디가 움찔움찔 떨렸다.

“너는 대체….”

그것은 틀림없이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믿기 힘들다는 듯 엉망으로 낯을 일그러뜨리던 그는, 끝내 나니아의 손을 물리치고 어지러운 마음을 정돈해 냈다.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 그 정도로 짐승 새끼는 아냐.”

뿌리친 손은 목 뒤로 넘어가 자신의 어깨를 쓸데없이 주물렀다. 리자드는 애써 냉담한 척 말하고는 그대로 방문을 나섰다.

나니아는 방 안에 홀로 남겨져 입술을 꾹 깨물었다. 키스하는 줄 알고 입술을 내밀었을 때나, 말에 태워 달라고 부탁했다가 거절당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참담했다.

뜨겁게 타오르던 수치심은 이내 숯덩이처럼 새까만 앙심으로 변해 갔다. 검댕이 묻은 마음은 지저분하고 부끄러웠다.

* * *

리자드는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낮은 층계를 두 칸씩 성큼성큼 걸어 내려왔다. 그러고는 꼬리 단장에 여념 없는 리자드를 불렀다.

“파코.”

해가 뉘엿뉘엿 져 가면서 약효가 떨어졌지만, 셋 중 아무도 둔갑약 재복용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파키케팔로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바라보자, 라히무스는 턱짓으로 나가자는 신호를 보내 왔다.

“응? 어디 가?”

사내가 일행들의 테이블 옆에 비딱하게 서서 말을 떨어뜨렸다.

“무기상.”

“있어?”

“가. 화살 떨어졌다며.”

“오, 좋아.”

라히무스의 제안을 허락하며 몸을 일으키려는 녀석을 챠링고가 다시 잡아 앉혔다.

“뭐야. 지금 몇 신데? 안 돼.”

“멀어? 잠깐 갔다 올게.”

“언제 올 건데?”

그걸 파키케팔로가 알 리 없었다. 챠링고는 라히무스를 향해 물었다.

“몰라.”

사내가 짧고 무책임하게 대꾸했다. 분명하게 귀가 시간을 제시하지 못한 그를 향해 챠링고는 다시 안 된다는 말을 반복했다.

“이따 밤엔 내가 나가야 돼.”

“챠링고는 어디 갈 껀데?”

“…애송이는 알 필요 없고. 아무튼 파코는 집 지켜.”

“아, 뭔데!”

벨로즈는 졸지에 한시도 혼자 내버려 둘 수 없는 세 살배기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결국 가장 먼저 몸을 일으킨 것은 그였다.

“저는 얌전히 나니아 방에서 놀고 있을 테니까, 다들 볼일 보고 오세요.”

그러나 라히무스가 그의 앞길을 막았다.

“너 내가 몇 번을 참았다고 생각해?”

리자드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위협했다. 여기저기 잡도리할 놈들 투성이였다.

“내 여자한테 집적거리지 마. 뒈지기 싫으면.”

본인이 들었다면 당장에 따귀를 올려붙일 소리였다. 그런 상황까지는 알지 못했지만, 여하간 벨은 기죽지 않고 그를 비웃었다.

“하, 누가 당신 거예요? 유치한데 주제넘기까지.”

그렇게 의기충천하더니만 아직 끝까지 가지 못했다면서. 그 사실이 벨의 비웃음에 한몫을 더했다.

“그만해라, 라히무스. 그러다 진짜 한 대 치겠다?”

챠링고는 한숨을 내쉬며 둘을 말렸다.

“발정기가 다가오는 있는 건 난데 왜 네가 더 예민하게 구는 거야….”

바람 잘 날 없는 하루하루는 강 건너 불구경일 때가 많았지만, 가끔은 내 집까지 불길이 번져 오는 것 같아서 곤란했다.

“라히무스?”

그때, 소란 아닌 소란에 끼어드는 남자가 있었다. 라히무스를 알아본 어느 낯선 수컷 리자드였다.

리자드는 삐죽한 눈길을 옮겨 그를 돌아보았다.

누구든 자신을 알아보는 자가 있다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이야…. 진짜 라히무스잖아!”

붉은 홍염의 흔적. 일체의 장식을 두지 않는 야만적인 꼬리. 순수한 리자드 그 이상으로 현격하게 비대한 덩치.

참전 경험이 있는 리자드라면 그의 이름을 모를 수 없었다. 무엇보다 흔한 이름도 아니었다.

“이봐, 나도 용골 전쟁 참전 용사란 말이야. 생각보다 훨씬 젊은 리자드였잖아. 투구 안에 이런 얼굴이 있는 줄은 몰랐네. 하하, 나는 끝까지 갑옷 때문에 조금 커 보이는 것뿐이라고 주장했었는데 말이지, 그 무거운 중갑 안짝에 이런 몸을 숨기고 있었나?”

남자가 두툼한 라히무스의 몸을 짚어 보며 친한 척을 해 왔다.

그는 라히무스를 잘 아는 양 말했지만, 정작 라히무스는 그의 이름을 몰랐다. 잘 기억나지 않는 뇌 주름을 쥐어짜며 전우의 이름을 떠올려 보려 했다.

남자가 넉살 좋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 이름은 포콘일세. 모르는 것도 당연하지.”

라히무스는 끝까지 포콘의 얼굴을 기억해 낼 수 없었다. 대인 관계가 엉망인 사내는 상대를 알아보지 못한 것에 대해 별달리 미안함을 표하지도 않았다. 그는 신원이 불분명한 자와 호의를 나누는 짓을 멍청한 일이라고 여겼다.

다만 허울뿐인 이 전우가 때마침 주술을 붙여 파는 무기 상점에 몸담고 있었기에, 이곳 지리를 잘 아는 듯한 그의 길 안내를 거부하지 않기로 했다.

“나이도 들고 부상도 깊고 회복은 더디고. 용병 생활 더는 못 하지. 결국은 예서 풀무질이나 하고 있다네.”

라히무스는 포콘을 따라 찾고 있는 종류의 상점들이 가득한 길목으로 들어섰다. 이미 때가 늦었는지 문을 닫은 곳도 많았다.

“그래, 여기야. 여길세. 내 땅쟁이 친구가 하는 가게라네.”

가게의 주인이자 가마의 주인 되는 자가 흘긋 시선을 들어 라히무스를 쳐다보았다.

땅딸하고 둥글넓적한 외모의 땅쟁이는, 장사꾼치고 상당히 숫기가 없어 보였다. 그는 손님을 향해 목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다시 또 모루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쩔겅쩔겅 쇳덩이를 내리치는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땅쟁이가 입에 문 파이프를 보니 그도 담배가 당겨서 주머니를 뒤져 한 까치 꺼내 들었다. 부푼 볼이 일회용 연초 끝에 불을 붙였다.

궐련 한 개비를 입에 문 리자드는 말없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어두운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가게는 야트막한 토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작업장과 진열장이 분리된 구조였다. 이런저런 종류의 방어구와 무기들이 두서없이 나열되어 있었다.

영업 담당인 듯, 포콘은 손님의 주변을 맴돌며 이런저런 말들로 간섭해 댔다.

“자네는 역시 양손 장검이지?”

그는 육중한 칼날을 휘두르던 라히무스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날의 전투가 아직도 눈앞에 선명해. 용골에서 말이야. 그때 그 자네의 검기 말일세! 맞으면 정말 골로 가겠구나 싶었더랬지.”

그는 마치 유명 인사와 친분을 쌓고 싶어 안달이 난 애송이처럼 굴었다. 누군가 자기 얘기로 요란하게 떠들어 댄다는 것이 라히무스로서는 썩 유쾌하지 못했다.

그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검에 붙은 주술만 열댓 개였어.”

사내는 활약의 공을 명검에게로 돌렸다. 바꿔 말해 괜히 호들갑 떨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래, 그 좋은 칼을 지금은 어디다 뒀나? 한 몸처럼 들고 다니던 게 아니었어?”

라히무스는 탐탁잖은 얼굴로 입에 문 궐련을 손가락에 끼워 들었다. 별 바보 같은 질문을 다 듣겠다는 듯 찡그린 눈을 흘겼다.

“전시도 아니고 그딴 걸 여기서 어떻게 들고 다녀.”

남자는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이내 덤덤한 태도로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너클을 만지작거리다 먼지 낀 쇠줄에서 빼내었다. 착용해 보려 했으나 손가락을 끼워 넣을 구멍의 간격이 살짝 좁았다.

포콘은 그가 호신용품 수준의 무기를 고르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참견해 왔다.

“아니 왜 호랑이가 고양이 털실을 굴리고 놀 생각을 하지? 여기 자네에게 어울리는 장검들이 잔뜩 있네.”

남자가 반대편으로 팔을 벌려 보란 듯이 피력했지만, 손님은 그의 열성적인 판촉에 여전히 무관심했다.

“필요 없어.”

“검사가 검이 필요 없다니. 지금 무슨 일을 하기에 그래?”

리자드는 찜찜한 얼굴로 손가락을 튕겨 담뱃재를 아무렇게나 바닥에 털어 버리고는 이내 짤막하게 대꾸하였다.

“…경호.”

그 말에 포콘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흠… 그래? 살 생각이 없더라도 잠깐 자랑 좀 들어 주게. 서쪽에서 물 건너온 것들이니까 품질은 믿어도 좋아. 이건 비밀인데, 우리 사장이 재련은 잘해도 밀랍 주조엔 형편없거든.”

남자는 땅쟁이가 들을 수 없도록 목소리를 낮추어서 속삭였다. 라히무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으며 더 커다란 치수의 너클을 찾았다.

“아이, 그러지 말고 이거 한 번 봐 보라니까.”

남자가 벽에 기대어 놓았던 한손장검을 집어 들었다. 손잡이가 가늘고 우아하게 생긴 그 검을, 포콘은 날렵하고 자신만만하게 검집에서 빼내었다. 시퍼렇게 매서운 금속음과 함께 기다란 쇠붙이가 이빨을 드러냈다.

챙-.

날카롭게 벼려진 살기가 라히무스의 목을 노렸다.

“어때…. 제법 쓸 만하지?”

남자가 이죽거렸다. 호의를 지운 그의 얼굴에 완벽한 적개심만이 남아 있었다.

그가 검집에서 검과 함께 빼낸 것은, 아군인 척 감춰 두었던 서슬 퍼런 살의였다.

라히무스가 콧등을 찡그리며 싱겁게 지껄였다.

“…팔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벌어진 입술 사이로, 아직 다 태우지 못한 장초가 툭 떨어졌다.

사내는 포콘의 독기를 한발 앞서 알아차리고 기습을 받아 냈으나, 담배까지 챙겨 물 여유를 부리지는 못했다.

“…무슨 목적인지 똑바로 말해. 단순 원한이라면 살려 주지.”

“하, 건방지고 오만무도한 건 여전하군! 네 명줄 끊어 놓고 싶은 리자드가 어디 한둘이겠어?”

남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삼자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고, 무엇보다 땅쟁이의 눈이 휘둥그레진 것이 보였다.

목적이 벨로즈가 아니라 자신이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평생을 타인의 목숨을 빼앗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그 또한 누군가에게 자주 노려지곤 했다.

“내가 네 아들의 원수인지, 동생의 원수인지, 형의 원수인지 내 알 바 아니고.”

남자가 팔에 힘을 주어 맞부딪힌 칼날을 밀어 냈다.

“목표가 나라면 됐어. 살려 줄 테니까 꺼져.”

“주둥이 터는 것도 거기까지다, 이 잡탕 도마뱀아!”

그러나 포콘의 칼은 예상 밖에 라히무스가 손에 든 쇠붙이를 동강 내며 돌진해 왔다.

리자드는 급히 허리를 숙여 칼끝을 피했다. 다시 또 주변에서 아무렇게나 집어 든 칼로 간신히 공격을 막아 내는 듯하였으나, 무기의 강도 면에서 완전히 밀리는 바람에 결국 손바닥으로 칼날을 받아 내야 했다.

칼날이 파고든 살점에서 흥건히 피가 흘렀다. 아릿한 냉기와 함께 얼어붙는 듯한 통각이 느껴졌다.

“하, 씨발…. 귀찮게.”

그의 말대로 제법 괜찮은 검이었다.

* * *

한편 관심 있는 남자에게 용감하게 섹스어필해 보았다가 무참히 무시당한 소녀는 커다란 굴욕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귀엽다든가, 예쁘다든가, 말이나 하지 말지. 사람 헷갈리게!’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참으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녀는 일부러 쿵쾅거리는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와 화풀이할 대상을 찾았지만, 못된 리자드는 이미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나니아를 향해 챠링고가 손짓했다.

“어이, 아가씨. 저녁 먹어야지.”

그녀는 잔뜩 화가 나 보이는 나니아를 옆자리에 앉혀 두고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나니아를 두고 ‘내 여자’ 운운하던 라히무스가 과연 그녀와 무슨 대화를 나누고 내려왔는지가 궁금했다.

“뭐가 또 잘 안 풀렸나 보네? 에이, 그깟 남자 문제로 속 썩지 마.”

“그런 거 아니에요…. 별로 신경 안 써요.”

나니아는 어울리지 않게 반항적인 표정을 짓고서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라히무스 때문에 들쑥날쑥 요동치는 감정을 다른 사람 앞에서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챠링고는 저보다 한참 어린 여자애의 머리통을 싱겁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 생각에 너도 한 번쯤 일탈의 경험을 해 둘 필요가 있어 보이는 데 말야.”

그녀는 세상 재밌는 것을 혼자서만 다 알고 있는 얼굴로, 나니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동안 촌구석에 처박혀 사느라 인생에 남자랄 게 별로 없었어. 그치? 그래서 만나는 놈들마다 쬐애끔 괜찮아 보이면 앞뒤 잴 것 없이 정을 줘 버리고 마는 거지.”

리자드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하녀의 지고지순한 결핍을 분석했다. 나니아는 그녀의 품에 안기다시피 하여 껌벅껌벅 눈을 굴렸다.

“…제가 그래 보여요?”

여자는 의젓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서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미소에서 인생 선배다운 여유가 느껴졌다.

“아가씨는 아주 운이 좋아. 탈선을 도와줄 사람이 마침 여기 있잖아.”

챠링고가 손바닥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쾌활하게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바로 나.”

같은 여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원체 호방한 성품이라서일까. 그녀는 자신의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거리낌이 없었다.

“내가 오늘내일 중으로 발정이 올 거라서 말이야. 너도 대충 짐작했겠지만, 우리는 그날이 오면 피를 보든 좆을 보든 둘 중 하나는 해야 되거든.”

여자가 낄낄댔다.

성교나 살육으로 해결되는 욕구라니. 징그럽고 섬뜩했다. 이럴 때마다 그들이 인간보다 짐승에 가까운 무언가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평소 같았으면 약 먹고 참는 편인데, 좋은 데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가 보지 않을 수가 없지. 쌔끈한 수컷들이 가득하길 바래 보자고.”

챠링고가 손가락을 튕기며 입천장에 혀를 두들겼다. 유혹을 건네는 소리가 가볍고도 익살스러웠다.

* * *

사람이 나쁜 짓을 더 쉽고 빠르게 배우는 것처럼 이 땅에도 불순 불량한 문화가 빠르게 뿌리내린 듯하였다.

챠링고가 그녀를 끌고 간 그곳은, 한눈에 보기에도 퇴폐 윤락 업소였다. 배편을 찾으러 가던 길에 눈여겨본 곳이랬다.

‘그냥 혼자 오기 적적했던 거죠, 챠링고….’

나니아는 그녀의 들뜬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분위기 맘에 들어?”

난생처음 들어 보는 어수선한 음악이 고막을 어지럽혔다. 낯선 타악기들이 끊임없이 난타당하며 빠른 박자로 둥당둥덩 시끄럽게 울어 댔다. 색을 넣은 불꽃들이 곳곳에서 어지럽게 공간을 밝혔다. 사람들의 얼굴을 이색 저색으로 비추었다. 기묘한 향취의 연기가 자욱하게 공간을 채웠다. 그 뿌연 공기를 보고 있자니 절로 기침이 하고 싶어졌다.

무엇보다도 가장 겁이 났던 것은, 헐벗은 차림의 리자드들이었다. 중요 부위만 간신히 가린 수컷 리자드들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대체 눈을 어디다 둬야 하는 거야….’

그들의 비상식적인 꾸밈새가 손님과 수상쩍은 접대부 사이의 경계를 명확하게 나누었다. 암컷도 간혹 보였지만 수컷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입으나 마나 한 옷들로 살갗을 훤히 드러낸 채 그럴 목적이 분명한 몸짓으로 유혹하는 눈빛을 보내 왔다. 나니아는 흠칫 놀라서 챠링고의 팔뚝에 꼭 달라붙었다. 안 그래도 반강제로 따라 왔지만 더욱 자신이 없어졌다. 잔뜩 졸아붙은 나니아와 다르게 챠링고의 격양된 목소리는 이미 두 톤 정도 높아져 있었다.

“물 괜찮네!”

“챠링고오…. 저기…. 저는 이런 데에 익숙하지 않아서…. 아, 아무래도 돌아가는 게….”

나니아가 조심스럽게 귀가 의사를 밝혔지만 때마침 천둥같이 진동하는 북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리자드는 음악 소리를 이기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맘에 드는 애 있으면 말해! 돈은 내가 대 줄 테니까.”

그녀가 대 주는 돈으로 대체 무엇을 사야 하는가.

“쟤 괜찮다. 얼굴은 귀여운데 빨통이 크네.”

나니아는 물어보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너 가슴 큰 거 좋아하지, 나나?”

“아, 아닌데요?!”

흥에 겨운 챠링고가 나니아를 부르는 호칭도 어느새 아가씨에서 나나로 바뀌어 있었다. 주변 남자들을 물색하고 평가하는 그녀의 말과 시선에서 이곳을 방문한 목적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래? 나는 좀 마른 애가 좋더라.”

리자드는 오랜만에 맡아 보는 낯선 수컷 페로몬에 완전히 홀려 있었다. 어떤 말로도 그녀의 발길을 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공기 중을 가득 채운 연기도, 귓가에 울리는 음악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도,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적응될 것 같지 않은 것들 투성이였다. 등에서 땀이 삐질 흘렀다. 이제라도 혼자 나가면 될 텐데, 챠링고의 곁에서 떨어질 엄두가 나질 않았다.

“암컷 두 분, 옆에는 약 드신 거죠?”

누군가 착석을 권했다. 그는 나니아가 인간으로 둔갑한 리자드라고 생각하는 성싶었다. 그의 착각이 나니아를 더욱 불안하게 했다. 만약에 인간인 것을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냐고 몰래 물어보았더니 여자니까 별일 없을 거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야트막한 벽들을 사이사이에 두고 돌덩이를 평평하게 깎아 만든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챠링고가 흔쾌히 자리에 앉았다. 그 옆에 딸린 작은 혹도 함께였다. 여자가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용딸기 술 두 병.”

자리를 권했던 리자드가 챠링고의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며 애교를 부렸다.

“아이, 제 것도 사 주세요.”

남자는 파키케팔로와 비슷하게 어려 보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불꽃색이 얼룩덜룩하게 그의 모습을 변모시켰다. 챠링고는 수컷의 애교에 기분 좋게 웃었다.

“알았어, 세 병.”

수컷이 챠링고의 목에 매달리고 그녀의 손이 수컷의 엷은 허리를 더듬었다. 남자는 옆구리가 훤히 트여 있는 옷을 입고 있었다. 아니, 그것을 옷이라고 불러도 되는 건지부터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나니아에게는 난해하기만 했다. 옆에 앉은 챠링고도 더 이상 그녀가 아는 챠링고가 아닌 것만 같았다. 스스럼없이 노골적으로 수컷을 탐하는 그녀의 모습은, 완전히 낯선 사람 같았다. 팔뚝을 끌어안고 있는 것도 이제는 민폐인 듯하여 조심스럽게 몸을 물렀더니 슬슬 맛이 가기 시작한 그녀의 눈동자가 보였다. 믿고 의지할 사람이 없어진 것 같은 기분에 덜컥 겁이 밀려왔다.

쿵쿵쿵쿵… 쿵쿵… 쿵….

세차게 울리던 북소리도 점차 잦아들었다. 누군가 감미롭고 투명한 선율로 짧았던 침묵에 화답했다. 새로운 곡조의 시작이었다.

느릿하고 여린 음악의 분위기에 맞추어 주변을 둘러싼 불꽃들도 색조가 바뀌었다. 뭇사람들의 얼굴이 이제는 푸른빛과 하얀빛으로 아롱거렸다. 어느 연주자의 은은한 독주가 계속되었다. 서로 다른 길이의 대나무를 반으로 갈라 돛단배처럼 줄줄이 엮어 놓은 악기였다. 연주자가 그것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드르륵 긁어내렸다. 뒤이어 얇고 부드러운 선율이 따라 나왔다. 과격하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어서 좌중은 순식간에 끈적해졌다.

챠링고의 곁에 달라붙은 수컷이 무어라 속닥거렸다. 방을 잡자든가 안으로 들어가자든가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이성을 놓아 가기 시작한 발정기 암컷 리자드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그녀는 참기 힘든 듯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수컷을 자빠뜨렸다. 나니아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못 볼 꼴을 봐 버린 기분에 꼿꼿이 얼어붙었다. 얼 나간 머릿속엔 새하얗게 눈이 내렸다. 걸어온 발자국이 뒤덮여 오갈 곳을 잃었다.

“처음인가 봐요. 그쵸?”

그때 누군가 나니아의 곁으로 와 앉았다.

“아, 응, 네.”

리자드가 몸을 밀착해 오자 얼결에 대답이 내뱉어졌다. 그 숙맥 같은 반응이 수락의 의미로 받아들여졌는지, 리자드는 나니아의 어깨에 허락 없이 팔을 둘렀다.

“떨 필요 없는데. 귀엽긴.”

나니아는 긴장이 역력한 시선으로 낯선 리자드를 곁눈질하였다. 언젠가 라히무스가 다른 남자한테서 절대 받지 말라던 그 꽃을 손에 들고 있었다. 나니아가 무엇을 흘긋거리는지 알아차린 리자드가 씨익 웃으며 물었다.

“받아 줄래요?”

“아, 아니….”

거절할 틈도 없이 꽃송이가 귀에 꽂혔다. 남자가 나니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면서 그 사이에 끼워 넣은 것이었다. 당황한 나니아가 얼굴에 손을 올리자 리자드가 손목을 잡아챘다.

“예쁘네. 고향에서 먹힐 얼굴인데, 왜 여기까지 왔어요.”

남자는 자기 것도 아닌 술병의 모가지를 자연스럽게 집어 들었다. 능숙하게 마개를 열고, 나니아의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사업차 왔어요? 아님 여행? 의외로 지명 수배자라거나.”

자기가 지껄여 놓고도 말이 안 된다는 듯 낄낄댔다. 남자는 대답 없는 상대를 두고도 참 말이 많았다.

“여긴 친구 따라 온 거죠? 애인 몰래 왔어요? 아니면 남편 몰래?”

애인 몰래 왔냐는 말에 라히무스의 얼굴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애인은 무슨!’

나니아는 몸서리치며 그 남자에 대한 생각을 떨쳐 냈다.

“아뇨, 그런 거 없어요.”

나니아가 머리를 흔들며 강하게 부정하자, 리자드가 그녀의 턱을 붙잡아 돌렸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시종일관 웃는 낯의 리자드는 접대하는 남성 특유의 살랑거리는 색기를 지니고 있었다.

“좋네…. 나도 뒤가 켕기는 게 없는 손님이 좋아.”

괜한 치정에 휘말리고 싶은 자가 여기 어디 있으랴. 리자드는 그녀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자기도 곧 발정기야?”

“바, 발정…. 아니, 나는….”

그런 거 없다고 말하려던 나니아는 본인이 지금 사람으로 둔갑한 리자드 행세를 하던 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곤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발정기란 말만 들어도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은 그녀를 숫기 없어 보이게 했다. 이런 암컷은 매우 드물어서, 리자드의 흥미를 끌었다. 그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언제부턴가 아예 말을 놓고 있었다.

“경험은 있지?”

“아니, 난…. 없어, 없어요. 그런 거 몰라….”

리자드의 질문을 듣고 나니아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내가 어쩌다 처음 보는 사람이랑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지?’

혹시나 했던 의심이 진실로 드러나자 리자드는 골 때린다는 듯 허허 웃었다. 훤한 겨드랑이를 드러내며 머리를 빗어 넘기는 모습은 어딘지 유쾌해 보였다.

“맙소사, 오늘 아다 떼러 온 거야? 어떡하지, 나 같은 반뿔 걸레한테는 과분한 손님인데.”

얼굴로 돈을 벌어 먹고사는 창부이니만큼, 남자는 그럴싸한 언변과 상스럽고 근사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불빛 때문에 정확히 확인할 순 없었지만 머리색이나 피부색이 아주 밝고 화사한 것만큼은 확실했다. 하얀 이를 시원하게 드러내는 모습이나 눈이 휘도록 미소 짓는 얼굴은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띠었으나, 목 밑으로 뻗어 나가는 육체의 선은 깍듯하니 곧은 직선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나니아로서는 남자의 미색 따위가 눈에 들어올 상황이 아니었다.

“아뇨, 난 그런 거 아니고, 오, 오늘 그냥 따라온 거예요….”

“마셔. 일단 마셔요.”

“으….”

소녀는 리자드가 들이미는 술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몇 모금 마시다 적당히 자리에서 일어날 낌새를 보여 주자. 나니아는 일 초라도 빨리 이곳에서 떠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에 팔을 두른 남자는 쉽게 보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처음이라 낯을 가릴 뿐, 자신이 리드하여 주길 바라는 손님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남자가 떠나가는 챠링고를 향해 흘긋 턱짓을 하며 말했다.

“자기 친구는 이제 사적인 공간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나니아도 고개를 돌려 챠링고를 찾았다. 그녀는 수컷을 들쳐 메다시피 끌어안고 저 안쪽 가게 깊숙한 어딘가를 향해 가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나니아의 머릿속이 또다시 새하얘졌다. 이제는 완전히 폭설이었다.

“어때? 우리도 갈까?”

리자드가 나직한 유혹의 신호를 보내 왔다. 나니아는 손을 떨었다. 남자가 그 손을 붙들고 주물렀다.

“그렇게 긴장돼? 진정시켜 줄까?”

남자는 나니아의 어깨에 두르려 했던 오른팔을 뻗어 지나가던 종업원에게서 펜대를 받아 들었다. 그것은 서빙되는 술병처럼 이곳저곳을 누비는 종업원에 의해 팔려 나가고 있었다.

“…뭐 하려는 거예요?”

남자가 나니아의 소매를 걷어서 팔뚝을 드러냈다. 그러곤 말릴 틈도 없이 살갗 위에 웬 글자를 써 내려갔다.

“자기 같은 손님에게 딱 필요할 만한 주술.”

혹꽃잎, 레몬즙, 식초, 그리 강하게 우린 찻물. 장시간 방치되어 염료의 기능을 하게 된 그것은 다룰 줄 아는 능력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주술적 힘을 가진 물건이었다.

“몸이 나른해지고, 기분은 좋아질 거야.”

남자가 자기 목에 채워진 목걸이를 잡아당기며 느슨하게 몸을 풀었다. 그의 손이 옆구리를 더듬자, 그 순간 나니아의 몸에 기묘한 열이 확 솟구쳐 올랐다. 그녀가 허벅지를 꽉 붙이며 입술을 깨물자, 남자는 올 것이 왔구나 싶은 표정을 지으며 그때까지도 손에 들고 있던 펜대를 저 멀리 던져버렸다.

“어때? 슬슬 반응이 좀 와?”

“무, 무슨….”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을 땐 이미 늦어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고, 등 뒤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무엇보다도 가장 당황스러운 변화는 다리 사이로 지끈지끈하게 느껴지는 충동이었다.

“이, 이게 뭐예요…?”

팔목에 새겨진 글자를 벅벅 긁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벌겋게 열 오른 얼굴에 남자의 손이 다가왔다.

“처음엔 좀 뜨끈뜨끈할 텐데, 괜찮아. 몸에 해로운 건 아니니까.”

그는 헐떡이기 시작한 나니아를 자리에 눕히고서 예의 그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쉬이…. 괜찮아. 너는 마음 놓고 즐기기만 해.”

* * *

라히무스가 인어의 술통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반기는 것은 파키케팔로뿐이었다.

녀석이 라히무스가 손발에 끼워 넣은 장비들을 살피며 물었다.

“뭘 그렇게 챙겨 입었어, 라히무스?”

남자는 파키케팔로의 방 문틀에 기대어 서서 피로 끈적거리는 왼쪽 장갑을 벗었다. 상흔을 입은 손바닥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파코 너도 여기서는 천 쪼가리 말고 제대로 챙겨 입어. 길에서 칼 맞아 뒤지고 싶지 않으면.”

“히익, 피!”

파키케팔로가 놀라는 시늉을 하다 이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흘린 피보다 흘리게 한 피가 더 많겠지….”

어린 리자드가 꿍얼거렸다. 누군지 몰라도 애도를 표할 따름이었다.

사내는 이어서 붕대를 찾았다. 동료가 찾아온 헝겊을 손에 둘둘 감더니 팔목에서 매듭지었다. 라히무스가 손바닥을 몇 번 죔죔 쥐어 보더니 입을 뗐다.

“나니아는?”

남자는 귀가한 지아비가 마누라 종적 확인하듯 그녀의 행방을 물었다. 그에 파키케팔로가 목 뒤를 받치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나니아는 챠링고하고 같이 놀러갔는데.”

“…뭐?”

라히무스는 친구인 척하던 남자가 대뜸 자신에게 칼을 들이밀었을 때보다 더 놀라서, 손바닥을 움직이던 것도 멈추고 파키케팔로를 쳐다보았다. 리자드는 자신의 불길한 예감이 빗나가기를 바라며 재차 물었다.

“어디로.”

“나는 몰라도 된다고, 여자들끼리만 간다던데.”

안 그래도 내심 무시당한 일이 불만스러웠던 듯, 녀석이 입술을 내밀고 불쾌함을 표했다.

사내는 피로 절은 장갑을 바닥에 신경질적으로 내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바람난 아내 잡으러 가는 의처증 걸린 남편처럼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 * *

구역질이 날 정도로 비위가 상하고 역한 기분에 숨을 참았다. 그것은 비단 곳곳에서 끼쳐오는 수컷의 페로몬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 어지럽고 문란한 매음굴은, 남자가 혐오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를테면 저속한 박자로 음심을 부추기는 가락이나 실내를 흐릿하게 메운 향연들이 그러했다. 그중에서도 남자가 가장 최악으로 여기는 것은 곳곳에서 마혹에 취해 흘레붙는 리자드들이었다.

목 뒤에 술식을 새겨 놓은 리자드 한 마리가 비틀거리다 라히무스에게 부딪혔다.

“씨발, 더럽게….”

사내는 욕지거리와 함께 신경질적으로 어깨를 털었다.

이런 매음굴에서는 성감 고취를 위한 짓거리들이 매우 공공연하고 빈번하게 이뤄졌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남자는 메스꺼운 두려움에 시달려야만 했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중요치 않고, 그저 삶의 목표가 교미뿐인 것처럼 행동하는 리자드들의 모습에서 강한 경멸을 느꼈다. 주위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끔찍하고 역겨웠다.

난잡하고도 어스레한 인파 속에서 라히무스는 찾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망루 꼭대기에서 빛나는 한 점 불빛과 같이, 어둠 속 향기로써 맡아졌다.

그는 바닥으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카락을 찾아낸 후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그러나 그것은 안도의 한숨이 아닌, 끓어오르는 분을 삭일 한숨이었다.

사실 라히무스는 나니아에게 버림받은 그날부터 막연히 두려운 상상과 꿈꾸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저렇게 그녀가 다른 사내를 원하고 탐하는 모습이라든가. 그랬다. 그가 사랑하는 여자가, 어느 낯선 수컷 리자드와 키스하고 있었다.

사내는 충격에 빠졌다. 언젠간 버텨 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막상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해 보니 좀처럼 침착하기가 힘들었다. 애타게 찾아 헤매던 소녀가 누군가와 입을 맞추고 있는 광경을 발견하면서, 사내는 강렬한 파괴 욕구와 심약한 질투를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나니아의 주먹 쥔 손이 자신을 덮친 남자를 마구 두드리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생각과는 또 다르게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남자는 곧장 외설스럽게 차려입은 낯선 리자드의 목덜미를 끌어내 나니아에게서 떨어뜨려 놓았다.

“뭐, 뭡….”

“너 뭐야, 이 씨발 새끼야.”

패대기쳐진 리자드의 두 눈에 혼란함이 깃들었다. 그는 흉흉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덩치 좋은 사내와 조금 전까지 자신이 깔아뭉개고 있던 소녀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결백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나, 남자 없다고….”

여기저기서 눈칫밥을 먹고 자란 리자드는 사태 파악이 빨랐다. 지금 이 남자가 왜 자신을 이렇게 죽일 기세로 노려보는 것인지 익히 경험한 바가 있기에 알 수 있었다.

라히무스는 그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크, 크헉…!”

속눈썹이 길고 예쁘장하게 생긴 수컷이었다. 사내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살펴보다 인상을 확 찌푸렸다. 살기등등한 라히무스의 모습은 뭇 리자드들에게도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구석이 있었다. 민간인이 덤벼서 이길 상대가 아닌 것은 분명했기에, 눈치 좋고 비굴한 리자드는 손까지 싹싹 비벼 가며 간절하게 빌었다.

“어, 얼굴만은, 얼굴은 때리지 마세요…!”

비굴하고 처절한 부탁은 외려 그를 부추길 뿐이었는지, 라히무스의 커다란 손바닥이 리자드의 얼굴을 철썩 내려쳤다. 남자가 새된 비명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반편이 매춘부는 제일 힘없고 천대받는 존재였다. 이 정도 소란이면 누군가 말릴 법도 하건만, 주변에서는 그저 혀를 끌끌 차거나 분위기를 망쳤다는 듯 불평할 뿐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천둥같이 진노하며 다시 또 이목을 끌었다.

“애한테 무슨 짓했어, 어?”

남자의 구둣발이 때리지 말아 달라는 부위만 정확히 까 내렸다. 피를 볼 때까지 리자드의 얼굴을 후려 패던 그는, 본래 찾아온 목적을 생각하며 겨우 이성을 차렸다.

“자기야.”

라히무스는 경황없이 무릎을 꿇어앉고 나니아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는 새우처럼 등을 말고 엄동설한에 던져진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남자가 나니아의 손을 주물럭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불러 보았다.

“나냐, 나냐…. 정신 들어? 응? 나 알아보겠어?”

가쁜 호흡을 따라 작은 가슴이 들썩이고 있었다. 여자가 힘겹게 시선을 돌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확인했다.

“라, 라히무스….”

남자는 열에 흐릿해진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다시 또 버럭 화를 냈다.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잖아!”

그러면서 가엾은 남창의 머리통을 또 한 대 후려쳤다.

“그, 그냥 헤나로 몇 글자 적어드렸을 뿐이에요…!”

그의 말에 라히무스는 시선을 돌려 테이블 위를 살폈다. 속이 빈 마혹꽃 줄기를 잘라 만든 펜대. 그 안에 어떤 염료가 담겨 있었을지 알 만했다.

“어디야!”

사내는 씨근덕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어디다 썼냐고!”

“파, 팔뚝…. 오른쪽….”

그제야 라히무스의 시선이 나니아의 팔에 가닿았다. 억지로 흥분을 돋우는 암악술식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눈이 뒤집혔다.

“그냥 몇 글자? 내성도 없는 인간한테 이딴 더러운 글자 휘갈겨 놓고 그냥 몇 글자?”

“이, 인간이요…?! 저는 몰랐어요, 모, 몰랐다, 쿠헉…!”

잔뜩 핏대를 세운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또 무자비한 폭력을 쏟아 냈다. 누구 하나 죽일 기세의 발길질과 그 끝에서 무력한 신음이 이어지는 가운데, 애처롭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라히무스…. 라히무스….”

그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들을 수 없을 정도였다. 눈시울이 축축하게 붉어진 나니아가 골반을 뒤틀며 그를 불렀다. 리자드는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술을 짓씹으며 그녀에게로 팔을 뻗었다.

“하, 씨발…. 응, 나냐. 그래, 괜찮아. 이리 와. 응, 괜찮아….”

누워 있는 나니아의 등 뒤로 양팔을 욱여넣은 채, 그대로 품에 안아 올렸다. 그러자 그녀는 엄마에게 처음 안겨 보는 아기처럼 들러붙어선 계속 우는소리를 냈다. 자그마한 전신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불쌍하고 가엾어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전장에 칼 없이 홀로 남겨져도 이보다 더 아찔하진 않을 것 같았다. 남자는 나니아를 품에 매달고 다급히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은 어지럽고 혼란했다. 이걸 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사내는 허리에 두른 그녀의 다리 사이가 애끓도록 좁아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보다 더 뜨겁고 짙은 숨이 귓가에 느껴졌다.

“씨발, 씨발, 씨발…. 그딴 더러운 술식으로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씨이발…. 챠링고 너도 내가 가만 안 둬….”

남자의 초조한 마음을 혼잣말로 풀어냈다. 그의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가슴을 통해 웅웅 울렸다. 나니아는 몸에 닿는 두꺼운 사내의 육신을 힘껏 끌어안고 야트막한 신음을 흘렸다. 가랑이 사이가 수치를 모르고 젖어들었다.

짧지 않은 거리를 이동하는 내내, 두 남녀는 유대류 동물과 같이 서로에게 찰싹 달라붙어 움직였다. 나니아는 태어나 처음 열을 앓아 보는 아이처럼 칭얼거렸고 남자는 그런 나니아를 몇 번이고 고쳐 안으며 어르고 달랬다.

무슨 일이냐 물어 오는 파키케팔로나 벨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라히무스는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황급히 계단을 올랐다. 나니아의 방문을 열고 들어가 그녀의 침대에 한쪽 무릎을 디뎠다. 침대에 눕혀놓으려 했지만,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나냐.”

녹아내린 버터처럼 흐물거리면서도 그의 목에 매달려 버틸 팔 힘 정도는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라히무스는 자기 목이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붙들고 있는 소녀를 타일렀다.

“나냐, 이거 놔. 놓고 눕자.”

나니아는 싫어서 울먹거리면서도 그의 말대로 했다. 남자의 커다란 품을 벗어나자마자 또다시 헛헛함이 밀려들었다. 그녀는 난로를 빼앗긴 사람처럼 몸을 웅크리고 떨었다. 남자가 커다란 몸으로 자신을 꽉 안아 주었으면 했다.

리자드는 그녀를 내려놓고 몸을 일으켜 앉으며 어지러운 번민에 빠져들었다.

발정기를 맞이한 리자드는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생의 목표가 오로지 교미, 그뿐인 것처럼 사고하고 행동했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 금수 같은 면이 있다지만 그러한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성질이 더욱 짙어지고 마는 것이었다.

통제 불가능한 욕구 속에 자신을 맡기고 싶지 않은 리자드들은 약물을 복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리자드제 발정 억제제는 라히무스에게 잘 듣지 않는 편이었기에, 그는 주로 살육을 통해 발정기의 폭력성을 해소해 왔다. 첫 발정 이후로 생애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내다시피 한 까닭이 그에 있었다.

어떤 리자드는 외려 주술을 통해 그 시기를 앞당기거나, 촉매제를 사용하여 더욱 커다란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곤 하였다. 그러나 남자가 직접 당해 본 바로 그것은, 이중고의 미친 짓에 지나지 않았다. 해면체로 끝없이 피가 몰리고 판단력은 비상식적으로 흐려지면서 남의 성 노리개로 쓰이기 딱 좋은 상태가 되어 버릴 뿐이었다.

하지만 문제의 술식을 인간의 몸에 적용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라히무스는 그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인간은 너무 작고 약했다. 뼈도 약하고 근육도 약하고 피부도 약한데, 내장이라고 강할까. 조금만 꽉 끌어안아도 으스러질 것처럼 연약한 그녀가 그깟 불에 살을 데여 왔던 것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 작은 여자는, 태어나 겪어 보지 못했을 성적 충동에 던져진 것치곤 참으로 얌전하게 흥분하고 있었다. 아니면 예의 그 심약하고 소극적인 성격이 이런 지경까지 와서도 발휘되고 있는지 몰랐다.

“견딜 만한 것 같은데….”

육욕이 들끓는 몸을 그저 이리저리 치대고 비비며 견뎌 낼 뿐, 그녀의 몸짓에선 발정기 암컷 같은 적극성은 찾아볼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 달려드는 법 없이 저 혼자 끙끙 앓는 그녀의 상태를 보아 이대로 내버려 두는 게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라히무스는 나니아를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다가 그녀의 손등 위에 입술을 꾹꾹 찍어 누르며 속살거렸다.

“조금만 참아 보자, 애기야….”

그러고는 정말로 강보에 갓난쟁이를 싸매는 것처럼, 나니아를 이불로 둘둘 감싸는 것이었다.

자꾸만 바들바들 떠는 것이 안타까워 따듯하게 해 주려는 의도였건만, 나니아는 잠투정하는 아이처럼 이불을 팔다리로 헤치고 떠밀어 결국에는 원상태로 돌아왔다. 더운 건지 추운 건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뭐가 됐든 그녀는 몸을 배배 꼬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굴었다.

여자가 물먹은 시선으로 흐릿하게 웅얼거렸다.

“싫어, 미워, 미워….”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는 것인 줄 알면서도, 밉다는 말은 가시처럼 따가웠다.

“라히무스 미워….”

“왜 미워.”

리자드는 땀에 젖은 나니아의 머리카락을 얼굴에서 떼어 내 주었다. 이런 마음을 품으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발정이 나서 볼을 붉게 물들인 그녀의 얼굴은 이제껏 보아 온 그 어떤 얼굴보다 색정적이었다.

한편 나니아는 자신의 다리 사이가 축축하게 젖어 드는 것을 느꼈다. 온몸이 팽창하는 것 같다가도 갑작스럽게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힘없는 육신과 연약한 영혼이 무기력한 개폐를 반복했다.

그녀는 젖은 다리 사이를 감추고 싶었다. 동시에 활짝 벌려서 보여 주고 싶기도 했다. 그 이상야릇한 충동이 치미는 것을 억누르면서 허벅지를 뒤틀었다. 허리를 번쩍번쩍 들고 싶은 기분이 들면서 다리가 이리 저리로 비틀리고 꼬였다.

그녀는 자신의 모습이 비를 맞는 지렁이처럼 징그럽고 끔찍하리란 생각이 들었다. 수컷과 섹스하고 싶어 꿈틀대는 꼴이라니. 볼썽사나울 게 분명했다. 좋아하는 남자에게 그따위 흉측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으면서도, 그가 필요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라히무스의 눈에 그녀는 벌을 꾀는 한 송이 꽃이었다. 꿈에서조차 만나 본 적 없는 그녀가 눈앞에 펼쳐졌다. 쾌락에 들떠 몸을 떠는 나니아의 모습은 지독히도 음란하여 눈을 떼기 힘들었다.

소녀의 보들보들한 털옷 아래로, 그보다 더 보드라울 것이 분명한 살덩이가 볼록한 산등성이를 그리며 남자의 시선을 빼앗았다. 그는 이미 나니아가 그 밑에 아무런 속옷도 입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손에 쥐면 틀림없이 말랑말랑 말캉거리겠지. 눈 딱 감고 한 번만 쥐어 보고 싶은 욕망이 치솟았다.

“해 줘, 라히무스….”

때마침 그녀가 넋 나간 목소리로 사내를 보챘다. 그녀가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 아닌 줄 알면서도 가슴이 철렁하였다. 리자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 안을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꼬리 끝이 걸음을 따라 선회하였다.

“너는 왜 항상 나한테 이런 시련을….”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열 손가락이 두피 끝을 파고들었다. 신이 있다면 찾고 싶었다. 그는 시험을 당하는 성직자처럼 고뇌하였다.

“손으로…. 손으로 해 줄게. 이걸로 참아.”

라히무스는 결국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나니아의 곁에 앉았다. 마치 병간호라도 하는 사람처럼 꼿꼿하게 앉아선 그녀의 가랑이 사이로 담백한 척하는 손을 가져갔다.

“아…. 아, 아, 라히무스….”

기대하던 손끝이 닿아 오자, 소녀는 허리를 움찔 떨었다.

남자는 중얼중얼 욕을 뱉었다.

“…내 이름 부르지 마.”

미약한 점성을 가진 액체가 끈끈하게 손가락에 묻어났다. 그녀의 아랫도리는 이미 너무 축축하게 젖어 있어서 착복이 무의미할 정도였다.

리자드는 커다란 두 손으로 소녀의 자그마한 속옷을 벗겨 내렸다. 거기다 코를 파묻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이겨 내고 침대 끝에다 던져 놓았다. 다리를 띄워 속옷을 벗기는 것을 도운 나니아는, 허리를 들썩이며 기대감에 찬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에게 약을 먹였던 리자드의 얼굴 같은 것은 하나도 생각나질 않았다. 소녀는 선이 굵으면서도 뾰족하고, 무던해 보이면서도 신경질적으로 생긴 그녀의 리자드를 하염없이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보고 있어도 보고 싶었다.

리자드는 그런 줄은 모르고 나니아의 은밀한 골짜기 근처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 세 개로 그녀의 엉큼한 음핵을 짚었다. 그러고는 더 이상의 애무가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푹 젖어 있는 그곳을 살살 흔들어 주었다.

소녀의 입에서 밭은 신음이 쏟아졌다. 만족해하는 것이 분명한 신음이었다. 남자는 뒤이어 도톰한 살덩이 전체를 짚은 채로 손목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것은 손가락 끝으로 갉작거리는 것보다 훨씬 확실하고 선명한 쾌감을 가져다주었다. 젖은 살점들이 마찰하면서 지저분한 소리가 났다.

나니아는 이불에 눈물 젖은 뺨을 비비다 말고, 다시 촉촉한 시선을 들어 라히무스를 바라보았다. 안타깝게도 그는 이 행위에서 어떤 즐거움도 찾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경건하게 손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지금 억지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전과 다르게 정직하고 신사적인 그의 애무가 못내 유감스러웠다. 나니아의 마음 한구석에는 그가 평소와 같이 저급하게 굴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전처럼 격렬하게 흥분하지 못하는 나니아를 보고 라히무스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왜. 입으로도 해 줘?”

문제는 그게 아니었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입으로 해 주는 것이 좋았다.

사내는 초조하게 입맛을 다시더니 이내 커다란 덩치를 숙여 나니아의 비부로 얼굴을 가져왔다. 단정하고 상냥한 애무를 퍼부어 대는 것은 그의 입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소음순을 머금은 입술이 위아래로 벌어졌다 닫혔다 하며 나니아의 도톰한 살갗을 못살게 굴었다. 작은 돌기를 입에 머금고, 아주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혀로 굴리기도 하였다.

“아, 응…. 라히무스, 좋아….”

휑했던 마음과 다르게 몸은 착실하게 흥분해 나갔다. 리자드는 입술을 넓게 뒤집어 입술 안쪽의 여린 살로 음부를 쓸어 올렸다.

쪽쪽거리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마구 흔들자, 나니아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교성이 더욱 아득하게 높아졌다.

소녀는 대범하게도,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그의 코와 인중과 입술 전부에 자신의 젖은 음부를 문질러 대는 것이었다.

“씹….”

라히무스는 욕설을 뱉으며 고개를 홱 들었다. 그러고는 음탕한 액체로 잔뜩 젖어 버린 얼굴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더러워서가 아니라, 참기 힘들어서였다.

나니아의 야릇한 체취가 가득 묻어나는 사타구니에 코를 처박고 흥분하지 않는다는 건 매우 커다란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또 들어줄 수 없는 요구를 했다.

“라히무스…. 키스, 키스해 줘…. 응?”

리자드는 입술을 문지르던 걸 멈추고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수초 간 망설이더니, 이내 화풀이하듯 소녀의 대음순을 아프지 않게 꼬집었다.

“지금 그런 것까지 바라지 마.”

여기서 입술까지 비비고 빨게 된다면, 이 행위에 빠져들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라히무스 미워….”

이제 나니아는 밉다는 말을 라히무스의 마음을 돌려놓을 주문 정도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효과가 괜찮았다. 리자드는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깨물다가,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은 아주 짧고 짙은 입맞춤을 남기고 떨어졌다.

하지만 나니아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다시 그를 보챘다. 그녀가 입술을 내밀 듯 말 듯 하는 모양새로 달싹이는 것을 보고 라히무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손으로는 나니아의 아랫도리를 비비며, 입술은 음부를 빨아 먹었던 것처럼 부드럽게 쪽쪽거렸다. 여자는 그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황급히 라히무스의 목에 팔을 둘러 매달렸다.

처음에는 이 또한 의무적인 일에 불과한 것처럼 깔끔하고 정직하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나 여자가 혀를 꺼내서 그를 건드리자, 리자드는 사납게 돌변하였다.

욕설 같은 한숨을 내뱉은 다음, 그는 질척하고 폭력적인 키스를 퍼부어 댔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신음이 터졌다. 이러면 안 된다고 속삭이는 견실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나니아가 입술을 피해 고개를 옆으로 비틀었다.

“으, 빙글빙글 돌리는 거 싫어….”

그녀의 안을 헤집는 손가락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내는 성가시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은데.”

“안에, 넣었다 뺐다 하는 거 해 줘…. 빨리, 빨리이….”

“아, 씨발….”

속도를 높여 달라는 요구에 남자는 키스하던 것도 멈추고 핑거링에 집중했다. 질 안을 오고 가는 남자의 손가락은 마치 방직기를 다루는 것과 같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그의 사무적인 손 아래에서 나니아는 오늘 안에 완성되어야 하는 직조물처럼 성가셔 보였다. 오로지 그녀를 빠른 시간 내에 만족시키는 것이 목표인 것처럼, 자신을 물건 다루듯 하는 그의 손길이 자극적이었다.

남자가 팔을 흔들어 나니아의 안을 쑤셨다. 난잡하게 흔들리는 그의 어깨와 머리카락을 보았더니 흥분이 확 끼쳤다. 나니아는 결국 몸을 움찔움찔 떨면서 첫 오르가즘을 맞이했다. 라히무스는 그녀가 전에 없이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리를 떠는 것을 보고 곧장 손가락을 빼냈다. 그러고는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그녀의 음부를 아기 엉덩이 도닥이듯 찰박찰박 두드렸다. 절정에 오른 상태에서는 그런 가벼운 움직임조차 극심한 쾌감으로 발전했다. 소녀는 팔뚝에 얼굴을 파묻고 갓 태어난 새끼 짐승처럼 울었다. 남자의 손가락은 굵고 길었지만, 나니아는 그것으로 충분치가 못했다. 만족하지 못한 여자가 또다시 우는 소리를 냈다.

“더…. 더 해 줘, 더 해 줘….”

소녀는 몽롱한 몸을 반쯤 일으켜 사내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그의 중심을 더듬었다.

리자드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달려드는 그녀의 손목을 저지하고는 우물쭈물 구구절절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네가 이러면 내가…. 내가 그동안 참은 게 뭐가 돼….”

남자가 제발 봐 달라는 듯 호소했지만, 나니아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몽롱한 눈을 끔뻑거릴 뿐이었다.

“할래, 하고 싶어….”

언제부터였을까. 소녀는 이 충동이 단지 오늘 벌어진 사고 때문만은 아님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소녀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다리를 넓게 벌렸다. 전부터 그렇게 보여 주고 싶었다는 듯, 오금 아래 손을 받치고 침대 위에서가 아니면 보여 줄 일 없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고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이상한 말을 지껄이는 것이었다. 라히무스 자지를 넣어 달라든가 그딴 말이었다.

“너 지금 완전히 딴사람 같은 거 알아?”

남자가 다급히 바지춤을 풀어헤쳤다.

“…분명 후회할 거야. 제정신 차리고 나면 분명히 후회할 거라고.”

그는 이미 한껏 부풀어 있던 성기를 나니아의 젖은 구멍 가까이에 가져갔다. 그녀가 뱉어 놓은 애액으로 성기를 적시며, 리자드가 중얼거렸다.

“씨발, 아주 물난리가 났네….”

그러나 흠뻑 젖어 있는 것과는 별개로 나니아의 질구는 여전히 좁아 보였다. 사위가 어둡기는 하였으나, 맨정신에, 그것도 이렇게 자세히 여자의 은밀한 곳을 관찰하기는 처음이었다. 침대 옆에서 아른거리는 불꽃이 괜스레 심장을 더 벌렁거리게 했다.

라히무스는 나니아의 허벅지에 손을 짚고 엄지손가락으로 음부를 벌려 보았다. 그 앞에 대기 중인 자신의 성기도 마치 남의 것처럼 생경하게 바라보았다. 소녀의 뽀얀 허벅지 사이에서, 그것은 너무도 흉악무도해 보였다. 이렇게 작고 가녀린 여자에게 이런 불결한 물건을 들이밀어도 괜찮은 걸까. 여태껏 쑤셔 보고 싶어 안달이었으면서 막상 기회가 닥치니 덜컥 겁이 났다.

고민하는 남자의 사타구니 사이로 나니아가 손을 뻗어 왔다. 가까스로 선단에 닿을 때쯤 라히무스가 황급히 밀어 냈다.

“더러워. 만지지 마….”

사내의 성기는 이미 사출에 대한 기대감으로 요도에 있는 불순한 것들을 찔끔찔끔 밖으로 밀어 내고 있었다.

“더러워…?”

남의 성기를 싹싹 핥아먹은 남자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소녀는 얼굴을 베개에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나한테, 그거…. 넣을 거면서…. 더러운 자지, 넣어 줘….”

아롱거리는 목소리엔 이지가 부족했다. 머리가 회까닥 돌아 버렸는지 되는대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는 무릎을 팽팽히 당겨 앉은 자세로 굳어 버렸다. 그는 다시 자신의 양손에 얼굴을 묻고 고뇌하였다. 다리 사이가 시큰시큰했다.

하고 싶다.

안 돼.

저 귀여운 보지에 쑤셔 넣고 싶다. 마구 흔들어서 싸 주고 싶다. 잔뜩 들쑤셔서 헤집어 놓고 안에다 질펀하게 싸지르고 싶다. 임신시키고 싶다.

…안 돼.

음험한 내면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격렬히 논쟁을 벌였다.

라히무스는 얼굴을 감싼 손가락 사이로 상대를 훔쳐보았다.

그녀는 라히무스의 허리에 다리를 감고 누워서 부족한 열락에 취해 있었다. 땀에 푹 젖은 이마와 뺨에 발긋한 핏기가 돌았다. 사내가 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하는 줄도 모르고, 경각심 없어 보이는 해사한 얼굴은 음란하고도 무구했다.

“해 줘. 빨리 해 줘.”

소녀는 안달을 냈다. 놀아달 라고 보채는 아이처럼 엉덩이를 흔들었다. 음란한 장난을 치고 싶어 했다. 라히무스의 고민이나 걱정 따위는 그녀가 알 바 아닌 듯했다.

수컷 리자드의 멍한 머리가 성욕으로 새카맣게 물들어 갔다. 그는 본능적으로 함께 허리를 휘저어 나니아의 입구에 좆머리를 비비다, 결국 그 틈을 파고들고 말았다.

라히무스는 자세를 바꾸어 주먹 쥔 양손을 침대에 짚고 우람한 상체를 받쳤다. 굽혀 놓은 다리를 펼치고 발목으로 몸을 지탱했다. 그러곤 자신의 온 체중을 실어 강하게 딱딱한 중심을 밀어 넣는 것이었다.

넣을 수 있을까 고민한 시간이 무색할 지경이었다. 일전에 결국 삽입을 포기하고 문지르기만 했던 것이 억울할 정도로, 나니아는 사내의 길고 딱딱한 살덩이를 쑤욱 받아들였다.

“하….”

사내는 벅차오른 숨을 토해 냈다.

쾌락을 배척하고 부정하며 의무만을 다하려던 각오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하아, 씹…. 너무…. 너무….”

남자의 한스러운 속삭임이 나니아의 귓가에 흩뿌려졌다.

“너무 좋아, 씨발….”

좋았다. 좋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처음 들어가 본 나니아의 안쪽은, 사랑하는 암컷의 내부는, 너무나 부드럽고 황홀하여 혼을 쏙 빼앗아 갔다. 그 어떤 다짐이나 의지도 지켜 낼 수 없었다.

나니아에게서도 만족스럽고 버거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깊어, 깊어, 아, 아…. 라, 라히무스 꺼, 너무 커, 커어….”

나니아의 안쪽은 리자드의 육중한 성기로 더는 벌어질 수 없을 것같이 빠듯하게 채워졌다. 그가 인간이 아님을 새삼스레 체감하게 되는 크기였다. 인간의 것이 아닌 물건을 인간에게 넣어도 괜찮은 걸까. 어쨌거나 나니아의 질 내벽은 움찔거리며 그것을 반겼다.

“아직…. 아직이야….”

나니아가 주술에 취해 넋이 나가 있는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엄두가 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리자드는 아직 몇 마디쯤 더 남아 있는 살덩이를 끝까지 밀어 넣으려 들었다. 무리시키는 것을 알면서도 욕심이 났다. 성기를 뿌리 끝까지 찔러 넣고 소녀의 야릇한 음모에 들러붙고 싶었다. 완전히 맞닿아서 가냘프고 사랑스러운 몸을 꽉 끌어안고 싶었다.

팔을 일자로 펼쳐 몸을 지탱하던 자세를 바꾸어, 바닥에 팔꿈치와 무릎을 디뎠다. 침대에 닿을락 말락 한 나니아의 머리를 감싸 안고 허리를 움직였다. 사내의 넓은 어깨가 나니아의 입술에 닿았다. 그녀는 아픈 짐승처럼 울먹이다 그의 어깨를 깨물어 통증을 옮겼다. 하지만 그조차도 남자에겐 짜릿한 자극이 되어 성기를 쳐올리는 신호로 작용할 뿐이었다. 짧게 짧게 쳐올리는 속도에 따라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가 조각조각 끊어졌다. 나니아의 입에서 나오는 신음과 라히무스의 입에서 뱉어지는 성난 음성이 그랬다.

“씨발, 최악, 최악이야….”

남자는 생애 최고로 황홀한 환희에 빠져서 더없이 흉포한 분노를 느꼈다.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어, 이딴 식으로, 내가 제일, 좆같이 여기는 짓을, 내가, 너한테, 씨발…!”

남자의 허벅지가 나니아의 사타구니 사이를 사납게 찍어 눌렀다. 밀어붙이는 힘이 점점 거세져서 일 초에 두 번 내지 세 번은 찍어 누르는 속도로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리자드는 물론 그녀와의 첫날밤을 꿈꿨다. 그녀가 자신을 받아들여 주는 날이 오면. 그런 날이 온다면. 아름답고 갸륵한 잠자리를 만들어 주리라. 이 세상에서 제일 존귀한 여자로. 나만의 신부로.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대해 주리라. 천천히. 부드럽게, 정중하게. 이보다 더 찬란하다 느낄 수 없도록.

바라고, 다짐하고, 꿈꿨다.

“그런데 씨발,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남자는 격렬히 사타구니를 빻아 대던 것을 늦추고, 천천히 몸을 세웠다. 아득한 쾌감으로 이지러진 나니아의 얼굴이 내려다보였다. 단단히 뭉친 울분이 사르르 녹아내릴 정도로 귀여웠다.

리자드는 괴어 놓은 한쪽 팔을 뻗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예쁘잖아, 젠장….”

그 와중에 얘는 또 왜 이렇게 예쁘고 귀여운지.

남자는 괴로운 듯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키스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키스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는 홀린 듯 소녀에게 입술을 가져갔다.

짧게 부딪치고 떨어지려 했던 소박한 마음이 혀를 내미는 나니아 때문에 산산이 부수어졌다. 여자가 고개를 살짝 비틀어 더 질척한 키스를 준비하는 것이 보여서 리자드는 다시 거세게 흥분하고 말았다.

여자는 그와 키스를 하기 위해서 침대 위에서조차 고개를 젖혀야 했다. 사내의 단단한 목에 팔을 두르고 그의 어깨를 더듬었다.

꽉 맞물린 입술이 끈적하고 흥건하게 타액을 주고받았다. 작고 귀여운 입술에 커다란 혀를 꽉 채워 넣으면서 다리 사이가 지끈지끈해졌다. 움찔거리는 것은 나니아의 질벽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물건도 여자의 깊숙한 내부에서 꺼덕거리며 흥분을 드러냈다.

질척하고 음란하게 혀를 비비다 지저분하게 늘어지는 액체를 보았다. 거친 흥분이 밀려들어 이를 악물었다. 남자는 다시 또 짐승같이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온몸이 흔들리면서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이 와중에도 혀를 비벼 보겠다고 빼꼼 내미는 나니아가 귀여워서 미칠 것 같았다. 결국 남자는 입술을 완전히 밀착시키기 위해서 상체를 고정하고 허리가 아닌 엉덩이를 흔들어야 했다.

숨이 찰 정도로 얼얼한 입맞춤을 받으면서, 나니아는 백치처럼 침을 흘렸다. 물론 그것은 턱이나 뺨으로 흐르지 않도록 남자가 핥아 먹었다.

그녀는 자신의 깊은 안쪽에 접촉을 느낄 수 있는 통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짓을 하기 위해 가지고 있는 장기구나. 처음 맞아 보는 남성이 만족스럽고 탐탁해서 다리가 벌벌 떨렸다.

여성기의 입구 근처와 좆머리가 쳐올려지는 부분에 가장 지극한 쾌락의 지점이 놓여 있었다. 몇 번이고 찍어 눌러지면서 그녀는 고비를 맞이했다.

“아, 응, 아앗…!”

남자의 육중한 몸에 깔려 허벅지를 꽉 조이는 것으로 절정을 드러냈다. 라히무스도 그것을 눈치채고 잠시 몸을 흔들던 일을 멈추었다. 여자의 좁은 내벽이 움찔움찔 떨리는 것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그의 정신도 함께 아찔해졌다.

“하…. 나냐…. 너무 조여….”

그는 나니아의 목덜미에 이마를 묻고 아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성기로 절정을 맞이한 나니아의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을 가져다주었다. 함께 사출해 버리고 싶은 욕망에 휩싸였으나, 애써 참아 냈다.

사내는 몸을 일으켜 앉아서 본인의 체위를 바꾸었다. 성기는 빼내지 않은 채로 그녀의 허리를 바짝 당겨 눕혔다. 느긋하게 몇 번 더 안쪽을 찔러 주면서 끝까지 그녀의 쾌락을 도왔다. 파들거리는 것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두 번째 정사를 준비하면서 리자드는 땀에 젖은 웃옷을 벗어 던졌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털어 넘기며 습관적으로 입술을 핥았다.

나니아는 눈물 젖어 흐릿한 시야로 그의 벗은 몸을 훔쳐보았다. 광활할 정도로 발달한 그의 어깨나 가슴에 시선이 머물렀다. 그 매끈하고 뜨거운 속살과 닿고 싶었다.

나니아가 자신의 옷자락을 끌어 내리며 칭얼거렸다.

“나 이거 벗을래, 벗겨 줘….”

일단 옷을 벗고 싶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하자, 부드러웠던 털옷도 거칠거칠하게만 느껴졌다.

남자는 선물 상자를 눈앞에 둔 아이처럼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다 옷을 잡아당기는 나니아의 양 손목을 빼앗으며 신음했다.

“아… 안 돼.”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녀의 알몸 같은 것은. 제 정신과 제 의지가 없는 여자를 상대로 이미 치사량의 나쁜 짓을 저질렀다. 소녀의 뽀얀 속살을 보게 된다면, 지금처럼 적당히 참으면서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나니아는 반항하듯 꿈틀거리며 기어코 옷을 끌어 올렸다.

“안 돼, 안 돼.”

리자드는 당황하여 나니아의 팔목을 허리 옆에 붙여 놓고 저지했다. 그녀가 또 밉다느니 나쁘다느니 칭얼거리는 것을 이번에는 모른 체했다.

옷을 벗고 싶다는 부탁이 통하지 않자, 나니아는 다른 요구를 했다.

“그럼, 또, 또 해 줘…. 또 그거 해 줘, 라히무스….”

이지를 잃은 얼굴로 입을 살짝 벌리고 허리를 흔들어 대는데, 이겨 낼 재간이 없었다.

사내는 다시 또 발정 난 개처럼 허리를 찧어 대야 했다.

여자의 절정은 아직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한층 더 예민해진 내벽이 다시금 활발하게 리자드의 남성을 반겼다. 최정상에 오른 뒤 지금껏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던 쾌락을 다시 꼭대기로 끌어 올렸다.

사내는 나니아의 몸 아래로 팔을 집어넣고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덕분에 침대에서 조금 떨어진 채로 공중에 떠서 그를 한껏 받아들여야 했다. 내벽을 찔러 오는 성기의 각도가 바뀌고 접합부가 더욱 깊어졌다.

라히무스는 나니아가 느끼는 순간을 오롯이 눈에 담고 싶었다. 그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물었다.

“기분 좋아? 응?”

“응, 아, 조, 좋아, 좋아….”

평소와 다르게 솔직한 그녀가, 제정신이 아닌 본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죽도록 사랑스러웠다.

“하…. 나도 좋아…. 너무… 너무 사랑해, 사랑해 나냐….”

성욕에 젖은 사내의 고백은 두 사람 모두의 전신에 후끈한 열을 끼쳤다. 라히무스는 자기가 말해 놓고도 심장이 간질거리고 부끄러워서 여자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얼굴을 숨겼다.

이제는 아예 앉은 자세로 깊다랗게 쑤셔 박았다.

사내가 짙은 색의 목소리로 속살거렸다.

“갈 것 같을 때 말해 줘…. 응?”

그는 꼭 확인하듯 조르는 음성을 붙여 물었다. 나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딱하고 흉기 같은 그의 몸을 힘껏 끌어안았다.

이렇게까지 좋을 줄은 몰랐는데. 사랑하는 암컷이랑 섹스한다는 것은, 이다지도 가슴 벅찬 일이었던 것이다.

누군가 그의 가슴을 터뜨릴 기세로 세게 움켜쥔 기분이었다.

“이러다 화장실까지 따라오겠어요.”

벨이 파키케팔로의 기우를 두고 빈정거렸다. 리자드는 동료들 없이 본인 혼자서 의뢰인을 경호해야 하는 작금의 상황이 불안한 듯, 벨의 일거수일투족을 졸졸 쫓아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뿐인걸! 파비푸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새 까먹었어? 요?”

청년이 비장한 표정으로 자기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벨은 조금 질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손에 든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는 오늘도 자기 몫으로 주어진 정찬을 조금 깨작대다 마는 중이었다.

“물이나 좀 떠오지요.”

벨이 그릇을 들고 일어나자 종업원이 테이블 정리를 하다 말고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사장과 친인척 관계에 있는 듯하였는데, 님프가 남긴 음식을 보고 아깝다는 듯 혀를 찼다.

“다 남기실 거면 받지를 말지. 방금 음식물 쓰레기도 다 내다 놨는데. 저기요, 손님들. 죄송하지만 저 밖에 내다 버려 주시겠어요? 일 층 양조장 가는 길 있지요. 왼쪽으로 꺾으면 축사가 나와요. 그 앞에다 좀 쏟아 버리세요. 그릇은 가져오시고요.”

공주는 이런 대접이 익숙하지 않아 눈을 끔뻑거렸다. 파키케팔로는 고장 난 듯 멈춰 있는 벨의 눈앞에 대고 손을 흔들었다.

“보통 손님에게 이런 일을 시키나요?”

벨은 종업원이 시키는 대로 하면서도 불만스럽게 쫑알거렸다.

“우리 식사가 워낙 늦긴 했죠.”

“흥, 식감도 맛도 최악이었어요.”

“그런가? 나는 괜찮았는데.”

벨은 겨우 한 입 떠먹었을 뿐인 포타주에 대해 트집을 잡다가, 나니아가 있었더라면 그녀가 상냥하게 대신 치워 줬을 거라는 둥 라히무스가 있었더라면 접시 비우는 일쯤은 간단했을 거라는 둥 철없고 어린 소리를 해 댔다. 그는 커다란 도마뱀을 자신의 음식물 쓰레기통쯤으로 생각하는 듯싶었다. 나이는 벨보다 어리지만 그나마 조금 더 의젓한 리자드가 불평 없이 그의 손에서 접시를 빼앗아 들었다. 그것으로 벨의 서투른 투정은 일단락되었다.

어스레한 달빛 아래 찬 바람이 불었다. 벨은 어깨에 걸친 숄을 예민하게 추켜올리며 목을 웅크렸다.

길을 맞게 찾아왔는지 두엄 냄새가 나는 한편에서 길들인 집돼지의 코 먹은 숨소리가 들렸다.

“잡았어, 내가 잡았어!”

헛간 귀퉁이가 꺾이는 위치에서 누군가 어렵사리 흥분한 티를 감추며 말했다. 어른 몰래 장난을 치는 악동의 목소리였다. 뒤이어 몸집이 작은 동물이 낑낑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렸다.

모른 척하기엔 너무나 궁금증을 자극하는 소리였다. 벨은 파키케팔로를 뒤에 두고 슬금슬금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림자도 없이 꺼먼 인영이 캄캄한 구석에서 조용한 소동을 피우고 있었다. 어린아이 세 명이었다. 그들은 긴 작대기를 주워 들고 바닥에 쓰러진 작은 짐승을 후려 패고 있었다.

“구우면 맛있을까?”

“바보야, 물에 담가서 국을 끓여 먹어야지! 그래야 오래오래 많이 먹을 수 있잖아.”

들뜬 아이들이 사냥감의 조리 방법을 논했다. 작은 동물을 사랑하는 벨로즈는 개인지 고양이인지 모를 그것을 위해서 오지랖을 부리기로 했다. 님프는 부러 발소리를 크게 냄으로써 자신이 있음을 알렸다.

아이들은 화들짝 놀라 벨을 돌아보았다가, 그 뒤로 더해지는 리자드의 형상에 더욱 질겁하였다. 손에서 놓친 작대기가 바닥을 굴렀다. 누군가 꽥 내지른 비명을 시작으로 모두가 혼비백산하였다. 녀석들은 시시할 정도로 쉽게 사냥감을 포기하고 줄행랑을 쳤다.

“…내가 무섭게 생겼나?”

파키케팔로는 도망치는 아이들의 꽁무니를 눈으로 뒤좇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만큼 켕기는 짓을 하고 있었다는 거겠지요.”

벨로즈가 코웃음을 치며 바닥에 쓰러진 동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 와중에 아직 도망가지 못한 네 번째 아이가 발견되었다. 벨은 인상을 찌푸리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더럽고 허름한 자루의 끄트머리를 쥐고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저, 저는 안 그랬어요….”

아이는 조금 전의 그 녀석들보다 더 작고 앙상한 듯했다. 오른손에는 풀떼기 같은 것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을 자루에 담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보였다.

“뭐 하는 거죠?”

벨이 물었다. 그는 차마 아이가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했다.

“무… 무청을….”

손질된 순무의 머리에서 따낸 풀 쪼가리를, 아이는 아주 귀중한 식량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에 꼭 쥐었다.

“그, 어, 어차피 여기서는 버리는 거잖아요.”

빼앗기지 않겠다는 듯 제법 맹랑하게 따져 드는 아이를 보고 벨은 의아해했다.

“먹으려는 건가요? 남이 버린 걸?”

어떤 의미로든 한 번도 굶주려 본 적 없던 그는 사람이 도둑고양이처럼 쓰레기를 뒤지는 까닭을 알지 못했다.

“이런 거라도… 집에 가져가야 해요.”

아이는 손질된 채소의 꽁다리를 긁어모아 끓여 먹음으로써 주린 배를 채운다고 했다. 며칠째 피죽도 못 얻어먹은 몰골의 아이가 배를 움켜쥐었다. 때마침 그 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벨은 아이의 말을 듣고 그해 수확을 망친 농사꾼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잎사귀만 무성하게 자라 정작 땅속에 묻힌 부분은 엄지손가락만 해진 뿌리채소를 보는 기분이었다.

뜻밖에 마주한 허기와 빈곤의 민낯은 한때 왕족으로 살았던 그를 부끄럽게 했다.

벨로즈는 파키케팔로가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다시 빼앗아 들었다. 돼지 축사에 흩뿌려질 운명이던 자신의 저녁 식사를 아이의 앞에 내밀었다. 그의 정찬은 이미 군데군데 흔들리고 섞여 있었지만, 그래도 무청 찌꺼기보다는 먹을 만해 보였다.

“…내일도 배가 고프면 이곳으로 와요. 당분간 삼시 세끼 정도는 챙겨 줄 수 있을 테니까.”

벨로즈는 어딘지 물렁한 언색으로 아이를 향해 말했다. 아이는 두려워하며 대답했다.

“여기는… 밤이 아니면 못 들어와요.”

근거 없이 베풀어진 호의에 경계를 풀면서도 아이는 미심쩍어했다. 벨을 무릎을 굽혀 녀석의 팔을 잡아당겼다. 흠칫하는 손을 끌어다 자신이 내미는 접시를 받게 했다. 그러곤 당부하듯 이야기했다.

“님프의 심부름을 받았다고 해. 파란 눈에 흰 속눈썹을 깜빡이는 님프를 찾아왔다고.”

아이는 분간이 쉽지 않은 어둠 속에서 벨의 눈을 가만히 마주 보았다. 자신을 또렷하게 응시해오는 두 눈에 슬픈 이채가 감도는 것을 확인하고는, 이내 벨로즈가 자신을 측은히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녀석은 동정을 거부할 이유가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제안이 과연 얼마만큼의 신용을 주었을까. 아이는 한 손에 자루를, 다른 한 손에 접시를 들고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 파키케팔로는 사라져 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멀뚱히 지켜보다가 입을 열었다.

“밥 한 끼 베푼다고 저 애 상황이 크게 나아지진 않을 거예요.”

녀석답지 않게 객관적이고 냉소적인 평가였다.

“무슨 생각이세요?”

여태껏 지내 온 바로는 님프가 누군가에게 그것이 무엇이든 조건 없이 베푼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었다. 확실히 기이하고 수상쩍은 일이었다.

“글쎄요….”

님프는 무릎을 펴고 일어서며 말끝을 흐렸다.

“제가 애랑 동물한테 약해서요.”

아이는 모름지기 나무칼을 들고 병정놀이나 하면서 동네를 들쑤시고 다녀야 했다. 자신의 팔뚝 같은 발목으로 휘청휘청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고 있는 녀석을 보니 썩 마음이 편치 못했던 게 사실이다.

동시에 벨로즈는 머릿속으로 벨테그위를 떠올리고 있었다. 자신의 영지 하나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무슨 왕 노릇을 하겠다고 설친단 말인가. 역시나 그는 좋은 왕의 재목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파키케팔로와 다시 걸음을 나란히 했다.

“접시는 어떡해? 요?”

“깨트렸다고 해요.”

“내가요?”

“응.”

벨의 뻔뻔한 요구에 파키케팔로 녀석이 안 좋은 건 맨날 나만 시킨다며 투덜거렸다.

* * *

중천에 뜬 해가 창문을 넘어 방을 밝혔다. 무리한 밭일에 끌려갔다 온 다음 날처럼 온몸이 욱신욱신 결리고 쑤셨다. 베갯잇에 반사되는 자신의 숨소리를 남의 것처럼 들었다. 그러다가 나니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오갈 데 모르는 몽롱한 시선을 움직여 주변 상황을 막연하게 소극적으로 살폈다.

흉터로 가득한 등이 보였다. 고개 숙인 사내의 뒷모습에서 깊은 고뇌가 느껴졌다.

그때까지도 나니아의 의식은 반쯤 수면 상태에 머물고 있었다. 리자드가 커다랗게 한숨을 쉬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세상 모든 회한을 품은 그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그제야 비로소 흐리멍덩하던 뇌가 정신 차리고 지난밤의 일들을 머릿속에 그려 주었다.

적나라했던 정사의 장면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믿을 수 없으리만치 추잡스럽고 천박한 기억들뿐이었다. 만져 달라고 허리를 뒤틀던 것이나, 스스로 다리를 벌리며 삽입을 조르던 일이나, 잔뜩 흥분한 몸뚱이로 밀어 붙여지던 것이나, 그의 두꺼운 팔에 붙들려 꼭두각시처럼 흔들리던 일 등등.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인 기억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죽을 것 같이 행복해하고 또 죽을 것 같이 괴로워하던 라히무스의 얼굴이었다.

목 위로 피가 쏠렸다. 온몸의 혈관이 터져 버릴 듯한 수치심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나니아는 손에 잡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며 소라게처럼 몸을 감췄다.

회피하듯 이불속으로 숨어 버리는 그녀의 모습은 리자드의 억장을 무너뜨렸다.

제정신으로 돌아오자마자 저런 반응이라니. 착잡한 마음에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사내는 침통한 얼굴을 손바닥에 파묻었다. 새벽녘의 뜨거웠던 열락이 처절한 방 안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죽도록 후회되는 한편, 죽을 만큼 좋았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나 싶으면서도, 다시 어젯밤으로 돌아가도 또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았다.

“…….”

여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덮어쓴 이불이 요지부동하였다. 오래도록 침묵을 지키던 리자드가 마침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네가…. 어제 일을 얼마나 어디까지 기억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얼굴을 문지르던 손은 이마 위로 올라와 헝클어진 앞머리를 움켜쥐었다. 바짝바짝 말라 가는 입 안에는 너절한 변명과 애원이 맴돌았다. 사내는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괴여 있던 한 마디를 내려놓았다.

“…미안.”

그리고 시큰한 눈앞머리를 긁적이며 콧대를 쥐었다.

라히무스는 언변이 화려하지 못한 자신이 한스러웠다. 사랑하는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그 어떤 멋진 말도 떠올릴 수 없다니. 비통하고도 한심했다. 그는 다시 벌어진 무릎 사이로 꺼트릴 듯 고개를 떨어뜨려 놓고 웅얼웅얼 호소하였다.

“…네가 성욕과 사랑을 헷갈리지 말라고 해서 나는…. 참아 보려고 했어. 내가 너한테 바라는 게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저급한 육욕만은 아니라고 믿음을 주고 싶어서, 난….”

평소보다 주절주절 말이 많아진 그의 모습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는 초조함이 느껴졌다. 고개 숙인 이마 아래, 리자드는 오른손을 꼭 말아 쥐었다.

“젠장, 내가 다 망쳤어.”

그는 주먹 쥔 손을 어쩔 줄 몰라 하다 침대를 한 차례 내려쳤다.

“제정신도 아닌 너를 데리고…. 네가 강간당했다고 여겨도 할 말 없을 정도로 더러운 짓을….”

그동안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그녀에게 점수를 따기 위해 아등바등하던 것이나, 어렵사리 쌓아 왔던 환심이나 호감 같은 것들까지 모두 다.

그녀는 언제나 한 발 가까워졌다고 느낄 때면 세 발 멀어지곤 했다.

그때, 통한에 취해 둔감해진 남자의 꼬리를 툭툭 건드리는 손길이 느껴졌다.

리자드의 긴 꼬리가 예민한 고양이 귀처럼 퍼뜩 움직이며 접촉을 피하는가 싶더니, 다시 침대에서 느릿하게 일렁거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나니아가 이불 밖으로 붉은 뺨을 내밀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조그마한 입술을 벌려 말했다.

“다 기억하는데….”

지난밤 하도 물고 빨았던 탓일까. 발간 입술이 통통하게 부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라히무스의 얼굴엔 얼이 빠진 채였다.

나니아는 쭈뼛쭈뼛 말을 이었다.

“내가 보챈 것도 기억나고, 우리 둘이 뭐, 뭘 했는지, 당신이 한 말도…. 다 기억나….”

그와 엉겨 붙어 있던 자세들이 떠올라 또다시 새빨간 부끄러움이 치솟았다. 쥐구멍이 있다면 당장에 숨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강간 운운하는 그를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내가 해 달라고 졸랐던 거잖아요. 라히무스가 죄책감 느낄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그 말에 리자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또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머뭇거리다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더니 다소 완강하게 느껴지는 말투로 낮게 뇌까렸다.

“…환각에 취해서 억지로 하는 섹스가 좋았을 리 없잖아.”

그는 쓰디쓴 약을 입에 머금은 환자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푸념 섞인 안도감이 미약하게 엿보였다. 눈물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운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눈시울이 붉었다. 누구보다 견고하고 단단하게 생긴 주제에 좀처럼 내버려 두기 힘들게 만드는 사내였다. 나니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불 고치를 벗어났다. 굵고 팽팽한 팔뚝 위에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두드리며 핀잔을 주었다.

“울보.”

“…아니야.”

리자드는 겸연쩍어하며 나니아의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그녀도 지지 않고 고집스럽게 리자드의 앞발을 붙들었다.

“참는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요…. 나는…. 나한테 질린 줄 알았는데요.”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라 고막이 간질간질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나니아는 남자의 손에 조심스럽게 깍지를 끼워 넣었다. 태연한 척했지만 딴에는 큰 용기를 내는 중이었다.

“라히무스니까…. 한 거야.”

마치 아주 중요한 말을 실토하는 것처럼 나니아가 말했다. 하지만 라히무스는 목적어 없는 그녀의 고백을 이해하지 못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소녀는 입술을 몇 차례 더 씰룩거린 다음에야 전하고 싶은 마음을 겨우겨우 보태었다.

“오락가락하는 와중에도 다른 남자가 건드리는 건, 그건 분명 싫었다구요….”

솔직해지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사랑한다든가, 좋아한다든가, 그런 말도 너무 어려웠다. 미약한 감정을 입 밖으로 꺼내 말하는 순간, 그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 것 같아서 두려웠다. 그래서 나니아는 또다시 좋아한다는 말 대신 한발 뒤로 물러선 고백을 남겼다. 그 간접적인 말조차 라히무스에겐 충분한 자극이 되었다. 리자드는 얼굴을 붉히며 야릇하고 수줍은 전파를 보내오는 나니아를 기이한 생명체 보듯 바라보다가, 험상궂은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뜨렸다.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는 너무 잘 알아서, 다시 또 아래쪽이 욱신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 발 몸을 뒤로 물리려 하였으나, 그녀를 몰아세우는 라히무스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는 나니아를 침대 끄트머리로 밀어 눕혀 놓고 그녀의 몸 위를 타고 올랐다.

무언가 할 말을 고르는 것처럼 그의 혀가 아랫입술과 윗입술을 실속 없이 훑기를 반복하였다. 고민 끝에 꺼낸 말은 결국 시시하고 진력나는 것이었다.

“…사랑해.”

“…….”

소녀는 곤란한 듯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을 피했지만, 뛰는 심장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사랑해…. 사랑해, 나냐.”

리자드의 입술이 요령 없이 여자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색욕으로 농후해진 목소리가 한결 더 끈적하게 귓가를 어지럽혔다.

“나는…. 나는 어제 정말 좋았어.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좋아서… 네 안이 너무 좁고 따뜻해서 난….”

첫 경험을 이야기하는 소년처럼 풋풋한 그의 반응에 민망하고 쑥스러워졌다. 소녀는 두 눈을 꾹 감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사내의 뜨거운 입맞춤이 턱을 타고 뺨으로 올라왔다. 이곳저곳에 찍어 누르는 입술이 닿는 부위마다 점점이 열을 틔웠다.

“사랑해서 그랬어…. 사랑해, 나냐….”

남자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허벅지에 닿아 오는 그의 물건이 어느새 또 단단하게 일어서 있었다.

나니아는 눈을 질끈 감고 라히무스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억세고 끈덕진 사랑 고백이 심장에 눌어붙었다.

날이 추운데, 몸은 더웠다.

박동하는 심장에서부터 혈류가 돌고 체온이 높은 그에게서 열기가 전해졌다.

리자드는 나니아에게 답삭 안긴 자세로 드러누워서 그녀의 목덜미에 포만한 한숨을 흘렸다.

“그럼 우리 이제 결혼하는 건가?”

남자가 물었다.

“으… 어?”

놀라움을 집어삼킨 목구멍에서 사람 말 같지 않은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니?!”

경악을 금치 못한 소녀가 누운 자리를 박차고 몸을 일으켰다. 나니아가 밀어 내는 바람에 리자드도 허리를 세우고 앉아서 다리 한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는 한이 맺힌 눈초리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아니지? 우리 둘이 아기 만드는 짓까지 해 버렸는데.”

“당신이 그런 걸 신경 쓰는 남자였어요…? 그리고 아, 아기 같은 거는 안 생긴다면서….”

“한 번 따먹어 봤으니까 이제 또 버리는 건가?”

“따, 따먹…!”

사내가 억울한 듯 이야기하자, 나니아는 기막혀했다.

“대체 누가 누구를요? 내가요? 당신을요?”

양 허리에 짚은 손이 황당한 심정을 대변했다. 입이 떡 벌어졌으나 좀처럼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남자의 사고는 지나치게 비약적이고 극단적이어서 순식간에 저 멀리 도약해 나갔다. 그에 나니아가 버거움을 피력하였다.

“당신은 왜 그렇게, 주, 중간이 없어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모름지기 과정이 있기 마련인데, 둘은 이미 너무 많은 단계를 뛰어넘은 상태였다.

“결혼은… 결혼은 아니죠…! 그게 무슨 애들 장난인가요? 내가 당신의 뭘 믿고, 아니, 그렇잖아요. 라히무스도, 내가… 날, 나를….”

여자는 말해 놓고 아차 싶어서 말을 더듬었다. 상처가 될 것을 알면서도 그의 비상식을 지적하고 싶은 욕구가 더 앞섰다.

리자드는 뾰로통해져서 꼬리 끝을 침대 밖으로 털썩 떨어뜨렸다. 시무룩하고 통통한 꼬리가 진자 운동을 하였다.

“나는 그냥 즐기는 용도고. 살림은 그 새끼랑 차리려는 거지.”

남자가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그가 말하는 ‘그 새끼’가 누군지 알 만해서 숨이 턱 막혔다.

“그런 거 아니에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나니아는 골치 아프다는 듯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래서. 안 찾을 건가?”

남자가 의심스러운 눈총을 보내왔다. 잊고 있던 죄책감을 손수 일깨워 주는 그가 참으로 고마웠다.

“찾으려고… 여기까지 왔죠.”

구태여 지적해 주지 않아도 충분히 막막하고 갑갑하던 차였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나니아가 말을 잇지 못하자, 라히무스는 다시 분통한 기색을 내비쳤다.

“항상 이런 식이야. 나는 네가 언제쯤 내 머리 올려 줄까 전전긍긍 기다리다가, 너는 결국 가장 중요한 순간엔 그 새끼를 고르겠지.”

그는 강렬한 실체를 가진 질투의 대상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몇 번이고 희망 고문당한 심장이 너덜너덜 넝마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남자가 뇌까리는 것을 듣다 말고, 나니아가 역정을 냈다. 그녀는 허벅지에 반쯤 걸쳐져 있던 베개를 끌어안고 쥐어뜯었다.

“그게 아니라, 말했잖아! 한 번에 두 명을 좋아할 수는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너는 또 나를 가지고….”

“이제 네가 좋아져 버렸는데 어떻게 가주님 타령을 해?!”

“…….”

여자가 답답하다는 듯 짜증을 내며 말을 끊자, 라히무스는 고장 난 벽시계처럼 말을 멈추었다.

의아해하는 그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번졌다.

“…내가 좋아?”

사내의 뜨듯한 목소리가 찻물에 퍼뜨린 찻잎처럼 은은하고 묽게 번져 나갔다. 나니아도 덩달아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다.

“그걸 꼭….”

그걸 꼭 말로 해야 하느냐고 물으려다가, 언젠가 자신이 비슷한 성화를 부렸다는 사실을 기억해 낸 나니아는 분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리자드가 손을 뻗어 나니아의 발그레한 볼을 감쌌다.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입술에 두어 번 쪽쪽거리다가, 다시 또 와락 끌어안았다.

“나도 좋아해.”

폭죽을 터뜨리듯 달콤한 마음을 쏟아 내는 사내의 품에 안겨서 나니아는 소극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결혼은 아니야…. 그건 아니죠….”

“왜에.”

“우리는 좀 더…. 그…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지 않나… 싶은데….”

다시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남자의 가슴에 손을 얹고 밀어 내려 용을 써 보았다.

그러나 리자드는 아끼는 헝겊 인형을 품에 안은 아이처럼 행복해하며 쉽게 밀려나 주지 않았다.

남자는 수줍은 얼굴로 나니아의 볼에 자기 볼을 가져다 문지르며 속살거렸다.

“내가…. 내가 더 매력적인 수컷이 되기 위해 노력할게…. 다른 새끼들은 눈에도 안 들어올 정도로, 네가 날 온전히 선택하도록….”

언젠가 그 새끼 앞에서도…. 그러려면 일단 어디 있는지 찾아서 명줄을 붙여 놔야겠지.

리자드는 그녀 모르게 황홀한 미래를 그려 보았다.

“그…. 노력까지 할 필요는 없구요….”

나니아는 더듬더듬 쑥스러워하며 그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자꾸만 뺨과 목에 입을 맞춰 대는 라히무스 때문에 그녀의 마음도 덩달아 싱숭생숭해졌다.

여자는 현재의 행복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조금 더 염려하는 편이었다. 남자가 자신을, 그리고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지금 이 마음이 과연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되는 것이 연애 감정이리라. 이 마음을 사랑이라 정의 내리긴 어려웠으나, 발전하는 것까지 막을 생각은 없었다.

남자가 나긋하고 짙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그럼 이제 자기라도 불러도 돼?”

여태껏 잘만 불러 놓고서, 이제 와 허락을 구하는 것이 어이없어서 나니아는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역시나 대답 없이도 멋대로 엉겨 붙었다.

“응? 자기야.”

“…나, 나한테 똑같이 부르라고 강요하지만 않으면….”

마음대로 하라며 단출한 허락을 내려 주는데, 그녀도 영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라히무스는 나니아의 말을 듣고 멍하니 상상에 빠졌다. 그녀가 작고 발긋한 입술로 ‘자기야’라고 불러 주는 모습을. 상냥하고 예쁜 목소리를.

그러다 지난밤 귓가에 새겨 놓은 그녀의 신음이 그 말과 함께 겹쳐지고, 남자의 상상은 점점 지저분해졌다.

잔뜩 밀어 붙여진 나니아의 입에서 자기야 싫어, 라든가 자기야 좋아, 라든가 뭐가 됐든 다급하게 터져 나오는 교성을 떠올렸더니 곧바로 하체에 피가 몰렸다.

하, 씨발…. 또 하고 싶다….

“그, 그런 눈도 금지야.”

남자가 저를 아주 야릇하고 이상하게 쳐다보자, 나니아가 그의 눈을 가렸다.

“…눈 그렇게 뜨지 마요.”

남자는 뻔뻔하게 되물었다.

“내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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