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해가 뜰 때까지만 기다리겠어요. 그 이후로는 예정대로 폴핀을 떠나겠습니다.”
벨이 단언했다. 말은 라히무스에게 하는 것이면서도 눈으로는 자기 옷을 입은 나니아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소녀가 허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저…. 무, 무사히 다녀오겠습니다.”
벨은 대꾸 없이 그녀를 훑다가, 이내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공주는 잘 웃는 듯하다가도 어느 순간 저렇게 미소를 싹 감추곤 했다. 나니아는 아리송해졌다.
하지만 의아해하던 것도 잠시, 이미 땅굴의 출입구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라히무스의 뒤를 재빨리 쫓아갔다.
나니아는 사내가 등에 짊어진 이런저런 물건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제가 뭐라도 좀 들어 드릴까요?”
남자가 자유롭게 몸을 움직이려면, 짐은 자기가 드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그러나 라히무스는 가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미덥잖다는 듯 내려다볼 뿐이었다.
“이렇게 쪼그만 손으로 들긴 뭘 들어.”
가소롭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꾸한 그가 보란 듯이 나니아의 손을 붙잡았다. 크기를 가늠하듯 자기 손 위에 얹어 놓고 주물럭거렸다.
나니아는 남자의 말을 듣고 자신의 손이 작은 게 아니라 그의 손이 큰 것이라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당황한 마음이 커서 그냥 버벅거리고 말았다.
몇 차례 욱신거리는 손등을 어루만지던 남자는, 아예 자기 호주머니 속에 그것을 쏙 넣어 버렸다.
라히무스의 손은 따뜻했고, 그의 주머니 속은 그보다 더 따듯했다. 마치 알을 품은 새의 둥지처럼 포근하기까지 했다.
리자드는 별것 아니라는 듯 퉁명스럽게 말을 덧붙였다.
“떨어지지 마.”
그러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그대로 걸음을 재촉했다.
“으, 으응….”
나니아는 남자의 큰 보폭을 따라가기 위해 종종걸음을 쳐야 했다. 붙잡힌 왼손이 자꾸만 화끈거리는 것은, 불에 입은 상처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라히무스와 나니아가 움직이기 시작한 시간은 모두가 잠든 새벽이었다. 벌건 대낮에 일을 치르는 것보다는 야밤을 틈타는 편이 나았다.
남자는 언덕배기를 오르며 올곧게 정면만 보았다. 무덤덤한 척했지만, 사실은 나니아가 언제 주머니에서 손을 빼낼지 몰라 긴장하고 있었다. 자신의 은근한 흑심과 충동이 벌인 짓을 그녀가 눈치채고 꺼릴까 봐 두려웠다.
“저…. 라히무스.”
그래서 나니아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을 때, 나쁜 짓을 들킨 아이처럼 몸이 굳었다.
다행인 점은 머리에 뒤집어쓴 후드로 벌건 낯빛을 숨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왜.”
목소리만 침착하게 꾸며 내면 될 일이었다.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라히무스에게는 아무 이득 없는 부탁인데 이렇게 도와줘서….”
여자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손을 빼 달라는 말이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 것도 잠시, 붉게 달구어졌던 심장이 다시금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을 느꼈다.
미안하다든가 고맙다든가, 남자가 그녀에게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었다.
남자는 머릿속으로 라키바하프의 반반한 낯짝을 떠올렸다. 희고 밝은 피부. 금발에 벽안.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왕자의 자태, 그 자체. 그녀의 이상형이라는 얼굴. 여러모로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는 새끼였다. 자세히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 놈은 속눈썹까지 밀밭색이었다. 깜빡이는 긴 속눈썹 사이로 자신을 경멸하듯 바라보던 새파란 눈동자를 기억했다.
영주를 구해 놓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이 가증스러운 신혼부부는 얼마나 더 멀리 도망쳐야 안전해질 수 있을까.
폴핀에 정착하겠다는 그들의 계획은 처음부터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이었다.
리자드는 생각했다. 어차피 도망칠 운명이라면, 국경 밖으로 데리고 나가 주자. 지켜 주겠노라 내미는 손을 감히 뿌리칠 수 없을 것이다.
벨에게는 나니아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라고 호기롭게 이야기하였지만, 막상 자기 덕에 목숨을 부지한 라키바하프가 다시 그녀를 차지할 것이라 상상하면 배알이 뒤틀리는 게 사실이었다.
공식적으로 연인 행세를 시작할 라키바하프의 꼴을 참고 봐 줄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나니아를 곁에 둘 수 있다면, 그게 설령 아주 찰나의 순간이더라도 좋을 것 같았다.
다른 남자를 택한 그녀를 곁에 두고 바라보는 것은 분명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바라볼 수조차 없게 되는 일이 훨씬 더 괴롭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깨닫게 되었다. 나니아의 부재는 세상 무엇보다 커다란 불행이었다.
“…고마우면 나중에 소원이나 하나 들어주든가.”
“소원…? 무슨 소원?”
“그건 나도 모르지. 아직은.”
쌀쌀맞은 말투와 다르게 리자드의 앞발은 뜨듯하기만 했다. 나니아의 얼굴도 덩달아 화끈해졌다.
남자의 소원이라고 하면, 당연히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지난날 편지를 뜯어 본 사실을 묻어 줄 테니 뽀뽀를 해 달라던 그의 뻔뻔한 모습이 떠올랐다. 자연스럽게 그와 나누었던 첫 키스에 대한 기억도 함께 되살아났다. 낯선 남자가 허겁지겁 입술을 빨아 대니 얼마나 무섭고도 가슴 저렸던가.
나니아는 벌게진 얼굴을 푹 숙이고 걱정했다.
‘이번엔 섹스해 달라고 하면 어떡하지….’
그러고도 남을 사내였다.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해진 그의 사고 패턴을 분석하면서, 소녀는 조마조마하고 콩닥거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나니아가 입술을 깨물며 야한 고민을 하는 사이, 라히무스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자는 자신의 사랑을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혀끝에서 그의 두 번째 고백이 맴돌았다.
나를 선택하지 않아도 좋아. 그냥 네가 좋아.
성욕하고 헷갈리는 게 아니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그 사실만 믿어 줘. 부정하지 말아 줘.
마침내 주머니에서 손을 빼내었을 때는 본격적으로 구출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성벽의 둘레를 맴돌던 나니아가 지하 감옥으로 연결되는 통로를 보여 주자, 사내는 팔짱을 낀 채로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나보고 여길 들어가라는 건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 치는 그의 한쪽 눈살이 비뚤게 찌푸려졌다. 그 위에 자리한 굵은 눈썹 한쪽도 비딱한 산을 그렸다.
나니아는 당황한 두 손을 입가에 모으고 버벅거렸다.
“그…. 제 생각에는…. 저는 이 방법이 제일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여기 하수도로 연결되어 있다는 건 확실하거든요.”
축수와 함께 그토록 먼 거리를 이동했던 까닭은, 순전히 그의 욕심 때문이었다. 뮤의 궁극적인 목적은 나니아를 감옥 밖으로 탈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도시의 하수도를 거의 끝에서 끝까지 기어나갔던 것이나 다름없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출로는 그것보다 훨씬 짧고 합리적일 수 있었다. 성안 병사들을 피해 은밀히 잠입하려면 이보다 더 좋은 통로가 없었다.
하지만 나니아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도 아니었고, 악취가 심하다거나 더럽다거나 하는 문제도 아니었다.
“역시…. 안 되겠죠?”
그녀가 통로로 사용하고자 했던 구멍은 라히무스에겐 지나치게 비좁았다.
“어이가 없군.”
리자드가 코웃음을 쳤다.
“저는 들어갈 수 있어서, 다른 사람도 당연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니아는 아까와 다른 의미로 얼굴을 붉혔다. 바보 같은 제안을 꺼낸 것 같아서 부끄러워졌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너무 터무니없는 방법이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철망 아래는 남자의 허벅지 한 개만 집어넣어도 꽉 낄 것 같았다.
“난 개구멍으로 드나드는 취미는 없어.”
남자는 대충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의 로프를 끌렀다.
“차라리 벽을 넘고 말지.”
성벽은 높고 견고해 보였다. 외세의 침입에 대비하여 만들어진 것이니 당연했다.
“네…? 성벽을 오르겠다구요? 이 높이를요?”
나니아는 폴핀 성의 지상 구조가 어떤 형태인지 알지 못했다. 그건 라히무스도 마찬가지였다. 전면으로 돌파한다는 것은 경로를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를 넘어 무수한 경비병을 직접 맞닥뜨리게 된다는 위험이 따랐다.
“그건 너무 무모해요…. 성벽 위에도 보초들이 잔뜩 서 있을 텐데, 그들 눈을 피한다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여자가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며 그에게 무리함을 호소했다.
“눈을 피해?”
리자드가 그녀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듯 되물었다.
인간은 아직도 자기들이 얼마나 여리고 약한 존재인지 모르는 성싶었다.
과연 누가 누구의 눈을 피해야 할까. 남자와 눈을 마주치게 되는 날이면 그쪽이야말로 안타까이 세상과 하직하게 될 터였다.
“내 걱정은 말고 병사들의 명복이나 빌어 주지 그래.”
남자는 무릎을 굽혀 그 위에 양손을 얹고 어깨를 좌우로 비틀었다. 찌뿌둥한 몸을 풀면서 고개는 위를 향했다. 나태하고 덤덤한 시선이 횃불 없이 가장 으슥한 지점을 찾았다. 로프 끝의 갈퀴를 던져 매달 곳을 가늠하는 중이었다.
준비 운동을 마친 리자드가 치렁치렁한 로브의 팔뚝을 걷어붙였다. 역시 이렇게 헐렁한 옷은 성가시고 불편했다.
“그치만, 떨어지면 어떡해?”
“…너는 나를 뭐로 아는 거야.”
“저런 높이에서 떨어지면 죽어요.”
“그런 어정쩡한 마음가짐으로 잘도 구해 달라느니 도와 달라느니 부탁을 했군.”
남자의 오른팔이 밧줄 끝을 남겨 잡고 커다랗게 원을 돌렸다. 몇 바퀴 허공을 회전하던 다섯 다리의 갈퀴가 성벽 위로 힘차게 던져졌다.
헤엄치는 문어처럼 날아가던 그것은 어딘가에 턱 걸쳐지는 소리와 함께 멈추었다. 리자드의 큰 손이 로프 끝을 붙잡고 자신의 온 체중을 실어 당겼다. 제대로 안착한 갈퀴가 꿈쩍도 하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는 나니아를 향해 당부했다.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 길 닦아 놓고 올 테니까.”
“호, 혼자서? 나는 돌아가라는 거예요?”
“정리하고 문 열어 줄 테니까 너는 그쪽으로 들어오라고.”
“성문을 열겠다구요…?”
역시나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는 대체 대도시 치안을 얼마나 우습게 아는 걸까.
그러거나 말거나 라히무스는 발을 동동 구르는 여자를 내버려 두고 성벽에 뒷발을 붙였다. 발 디딜 틈 없이 매끈한 벽이라 다리보다는 팔 힘을 더 써야 했다.
돈 되는 일은 무엇이든 해내는 그는, 전장을 휩쓸고 다니는 본업 외에 암살 의뢰도 심심찮게 수행해 냈다.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민첩하고 은밀하게 움직일 줄 알았다.
갈퀴가 물린 지점에 도달한 라히무스는 마지막으로 날렵하게 빠진 발목을 벽 위에 세워 놓았다. 조용히 몸을 낮추고 숨을 죽이며 상대할 보초병의 수를 파악했다.
하나, 둘, 셋…. 이쪽에 보이는 것만 세 명. 반대쪽까지 합하면 여섯 정도 될 것 같았다. 성벽 위를 지키는 병사들은 대체로 비몽사몽 곯아떨어져 있었다.
‘빠져 가지고.’
리자드는 쯧쯧 혀를 찼다. 침입자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요란을 떨며 성을 깨우는 놈들이었다. 후환이 없도록 모두 영면에 들게 만들어 주리라.
남자는 품 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챠링고에게 빌려온 것이었다. 무엇 하나 자기 것이 없었다.
그는 인간을 상대할 때 무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특별히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인간은 맨손으로도 쉽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었을 뿐.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벨로즈의 호위가 아니었다. 파비푸스에서의 소동과 오늘의 일을 연결 지을 수 없도록, 처리 방법을 달리해야 했다.
남자는 난간 위를 걸어 파수꾼들에게로 접근하였다. 발걸음은 아슬아슬하고도 사뿐사뿐했다.
새파란 칼날이 정확히 급소만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푹.
한 놈.
“크, 끗?!”
두 놈.
“뭐, 뭐…! 크헉….”
세 놈.
마지막 인간은 소리를 지를 것 같아서 급하게 모가지를 분질러 놓았다. 리자드는 난간을 박차고 내려와 끊어진 명줄을 확인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단말마의 고통을 느낄 틈조차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내의 칼질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미 숨이 멎은 것이 분명한 시체를 몇 차례 더 찌르고 쑤셨다.
험악하게 튀겨 오르는 핏물이 검은 옷에 스며들어 옅은 얼룩으로 남았다.
십수 번의 칼질. 지나치다 싶은 오버 킬.
파비푸스의 저택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이 살아남아서 목격담을 진술했는지 모르겠지만, 몇몇 시체들의 사인을 분석했다면 무언가 괴상쩍음을 눈치챘으리라. 동일 인물의 소행임을 눈치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위쪽을 모두 정리한 남자는 이제 아래쪽을 살폈다. 잠들지 못하는 보초병들이 불씨를 세워 두고 성문을 지켜 서 있었다. 까마득한 높이였지만, 여전히 전경을 파악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남자는 좁은 시야각을 넓히기 위해 가장 높은 첨탑을 타고 올랐다. 높고 쌀쌀한 바람이 눈만 내놓은 얼굴을 차갑게 할퀴었다.
리자드는 튀어나온 돌 한 덩이에 매달려 저 아래 보이는 성채의 구조를 파악했다. 가늘게 붉어진 눈동자가 건물 사이사이 곳곳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에 발견된 것은 지하로 향하는 커다란 철제문 하나. 라키바하프가 갇혀 있는 곳이 아마도 저곳이 아닐까 싶었다.
조금 의아했던 부분은 성벽 위의 군사나 성채 규모에 비하여 아래쪽을 지키고 있는 병사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어 보인다는 점이었다.
‘일이 수월하게 됐군.’
리자드는 잘된 일이라고 여기며 다시 성벽 위로 착지했다. 둘러맨 활을 내려 살을 꽂고 문지기에게로 겨누었다. 화살은 망설임 없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 초병의 가슴 위로 꽂혔다. 느리고 미동 없는 인간만큼 손쉬운 사냥감은 없었다.
“들어와.”
정말로 문이 열렸다. 나니아는 새하얘진 얼굴로 남자가 내민 손을 붙잡았다.
“…다친 데 없어요?”
“없어.”
“정말 들어가도 되는 거예요…? 안전한 거 맞아요?”
라히무스는 하얗게 질린 여자의 손을 잡아끌었다.
“일단 감옥 입구까지는.”
그의 말대로 성 안은 돌아다니는 쥐새끼 한 마리 없이 고요했다.
“사람이 별로 없네요….”
여자는 누군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야 네가 무서워할까 봐 시체를 안 보이는 데로 다 치워 놨으니까.
라히무스는 별다른 대꾸 없이 먼지 묻은 옷을 털었다.
“여기인 것 같은데.”
사내는 위에서 봐둔 지하 감옥 입구를 찾아 그 앞에 멈추어 섰다.
“이 아래로는 처리 못 했어.”
리자드는 머쓱하게 코 밑을 문질렀다.
나니아는 감옥 입구를 활활 밝히는 횃불과 그 아래 떨어져 있는 핏물을 보았다.
라히무스가 한 짓일까. 그가 살인을 쉽게 저지르는 사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오싹했다.
끼이익 하는 무거운 소리와 함께 두꺼운 철문이 열렸다. 그 아래로 긴 계단이 까마득하게 펼쳐졌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아래에서 기이한 괴물이 달려 나와 발목을 채 갈 것 같은 끔찍한 착각이 들었다. 짓무른 팔 위로 솜털이 다 서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도 비위를 상하게 만든 것은 이미 한 번 맡아본 바 있는 익숙한 지하의 냄새였다.
찌를 듯한 후각의 기억은 강렬한 공포로 다가왔다. 소녀는 입을 틀어막고 벌벌 떨었다.
“…왜? 못 들어가겠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리자드가 걱정스럽게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거친 호흡을 따라 흔들리는 눈동자가 불안한 빛을 띠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나니아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심호흡했다.
“아니, 아니에요…. 할 수 있어. 기억할 수 있어…. 맞아요. 여기예요.”
이전엔 알랭의 병사들에게 끌려 들어갔던 곳이다. 이곳에 자기 발로 다시 걸어오게 될 줄은 몰랐다.
나니아는 계단 아래로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익숙한 곰팡내가 콧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너 안 되겠다.”
리자드는 아까부터 그 무엇보다도 나니아의 건강 상태를 제일 우선으로 살피고 있었다. 몸은 괜찮은데 정신이 온전치 못해 보였다. 보다 못한 그가 소녀의 몸을 번쩍 안아 올렸다. 한쪽 어깨에 짊어지다시피 하여 포대 자루를 어르듯 자세를 다잡았다.
“칼 쓰려면 엉덩이 받쳐 주는 게 고작이니까 잘 매달려 있어.”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목을 감싸 안았다. 무리해서 올라간 팔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남자가 안아 주자 통증과는 별개로 마음이 놓였다.
“으응….”
그녀의 입에서 무력한 긍정의 대답이 나갔다.
라히무스는 소녀의 어깨 위로 턱을 겹쳐 올리고 초조하게 입술을 핥았다. 그녀에겐 나름 절체절명의 순간일 텐데, 남자는 주책맞게 심장이 떨렸다.
리자드의 오른손이 쓸데없이 칼을 던져 올렸다. 몇 바퀴 허공을 돌던 나이프는 다시 손잡이 쪽으로 떨어져 남자의 아귀 안에 갇혔다.
왼쪽 시야가 좁아지고 신체적 제약도 생겼지만,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기력이 솟아났다.
“아, 안 무거워요…?”
말소리를 크게 냈다간 누가 들을 수도 있으니 목소리를 아주 작게 낮추었다. 리자드는 마른침을 삼키며 불퉁하게 대꾸했다.
“귀에 대고 속닥거리지 좀 마. 간지러워 죽겠으니까.”
남자가 핀잔을 주자 나니아도 부끄러운 반항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작게 말해야 하는데 어떡해요….”
“그냥 말을 하지 마.”
품에 매달린 나니아에게서 자제하기 힘든 향기가 났다. 금방이라도 헐떡이면서 달려들고 싶게 만드는 체취였다. 거기다 맑고 예쁜 목소리로 나긋나긋 속삭이기까지 하니, 간질거리는 숨결과 더불어 귓바퀴가 짜릿해질 수밖에 없었다.
기습의 방식은 언제나 싸움의 우위를 가져다주었다.
남자는 벽 너머로 간수가 보일 때마다 잠시 나니아를 내려놓고 석궁에 활을 꽂았다. 즉사시키기엔 좋지 않았지만 여러 명이 침투한 것처럼 보이기 위해 무기를 바꾸어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수면 화살을 이용해서 픽픽 쓰러뜨린 간수만 다섯 명째.
옆에 선 나니아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이 좀 적어요.”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란 갇힌 사람과 감시하는 사람을 한데 묶어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몇몇 저항할 힘도 없이 시체처럼 늘어져 있는 노인들을 제외하면 철창은 텅 비어 있다시피 했다. 따라서 그들을 지키는 병사들도 어딜 갔는지 좀처럼 보이질 않았다. 원래도 이쪽에 병사가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감옥 복도를 누비며 두리번거리던 나니아가 한 지점에 멈추어 섰다. 축수가 갈아 놓은 철망이 보였다. 그녀가 갇혀 있던 그 방이었다.
“여기, 여기서 모퉁이를 돌았어요.”
큰 소리로 라키바하프의 이름을 부르려다 말고 혼탁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여기 어딘가…. 이쯤일 텐데. 맞는… 맞는데…?”
맞아야 하는데 맞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은 어째서 틀리질 않는지. 근방에는 라키바하프는커녕 그 어떤 죄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도 가두지 않았던 것처럼, 텅텅 비어 버린 창살만이 그녀를 비웃고 있었다.
새하얘진 머릿속에 스치듯 떠오르는 대화 내용이 있었다.
‘내일 마침 포트 게롤린으로 수감자들을 보내는 날이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군.’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게롤린.”
나니아가 중얼거렸다. 좌절감에 좁아진 목구멍이 턱하고 막혀 왔다.
“죄인들을…. 죄인들을 압송하는 날이었나 봐요.”
손끝이 차가워졌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쥐어뜯으며 생각했다.
“오늘이…? 아니 어제였던가…?”
넋이 나가서 몸을 떠는 나니아를 보고, 라히무스가 다그치듯 어깨를 흔들었다.
“정신 차려. 진정하고 일단 나가자.”
소녀는 입을 틀어막고 또 눈물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하…. 제발 그만 울어, 이 울보야.”
남자는 답답한 듯 나니아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기 어르듯 양팔로 단단히 감싸 안고 걸음을 재촉했다.
“찾아 줄게. 찾아 줄 테니까….”
제발 이제 그 새끼 때문에 울지 마.
* * *
벨은 라히무스로부터 사라진 라키바하프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포트 게롤린. 그곳은 하필이면 벨이 가장 피하고 싶은, 찬탈자 벨테그위의 거점이었다. 자신이 북서쪽으로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받았다면, 그가 자기 소령의 선착장을 관리하지 않을 리가 있을까.
선뜻 함께 가 주겠노라 대답하지 않는 공주를 보고, 나니아는 코끝이 찡해졌다. 후회로 빚어진 좌절감이 비강 깊숙이 차올랐다.
심약한 여자가 히끅거리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제가 거기서, 도망치지만 않았어도, 그, 흡, 그렇게 외롭고 무서운 길을 혼자 가시게 하지 않았을 텐데, 너무… 너무…. 어디로 가든, 제가 같이 갔으면, 그랬으면, 어, 얼마나….”
대역죄인 취급을 받던 라키바하프의 비참한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죽더라도 같이 죽고 끌려가더라도 같이 끌려갔어야 했다. 그것이 서로에게 유일무이한, 이 세상에 하나뿐인 그에 대한 도리이고 책임이었다.
아득한 죄책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여자의 눈물 젖은 호소는 점차 혼미한 뇌까림으로 바뀌어 갔다.
“차라리…. 흡, 나도 그냥 거기, 거기 있을 걸, 괜히, 호, 혼자, 살겠다고….”
소녀는 부모 잃은 아이처럼 엉엉 울어 댔다.
그녀의 뺨 위로, 매섭게 날아드는 손이 있었다.
짝-.
흙 한 줌 만져 본 적 없을 것 같은 희고 고운 손. 공주가 소녀의 뺨을 따갑게 내리친 것이었다.
“야이 씨발.”
곁에 있던 리자드가 화들짝 놀라 의자를 넘어뜨리며 다급히 일어섰다. 뜨듯하고 동그란 뺨을 감싸며, 다른 한 손으로는 벨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왜 애를 때려?!”
사내의 흥분한 꼬리가 장판을 부술 듯이 바닥을 내리쳤다. 높아진 언성에 선명한 분노가 묻어났다.
님프는 자기보다 흉통이 두 배는 더 두꺼운 리자드의 살벌한 위협을 받으면서도 전혀 주눅 드는 기색이 없었다.
“꼴사나운 소리를 지껄이잖아요.”
거칠게 붙잡힌 옷깃이 구겨지거나 말거나 도도하게 턱을 치켜든 채로 눈을 흘겼다.
“정신 차리고 현실을 직시해요, 나니아. 정쟁에 휘말린 귀족의 흔한 말로예요. 당신은 그를 구해 낼 능력도 없고, 그럴 의무도 없어요.”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커다란 앞발을 슬쩍 밀어 내고 스스로 손바닥을 덧대었다. 갑작스럽게 따귀를 얻어맞은 왼뺨 위로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덕분에 눈물이 쏙 들어가기도 했다.
공주의 매콤한 손바닥이 이번엔 라히무스의 손등을 내리쳤다. 멱살잡이한 이 손을 당장 치우라는 의미였다.
리자드에게서 벗어난 그는 졸렸던 목을 짜증스럽게 어루만졌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를 남자 꽁무니 쫓아다니며 여생을 허비할 생각이라면, 그래요. 가요.”
나니아의 축축한 눈망울이 다시금 벨을 바라보자, 알아듣지 못했냐는 듯 말을 덧붙였다.
“가자구요, 게롤린. 거기서 살아 있는 그를 찾는 게 빠를지 여기서 그의 시체를 찾는 게 빠를지 나는 모르겠지만.”
뒤로 넘겨 둔 머리카락이 짧은 길이를 견디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헤르에게 연락해요.”
공주는 신경질적으로 흐트러진 숄을 추어올리며 챠링고를 향해 말했다.
“그도 게롤린으로 가고 싶어 했으니, 길 안내를 부탁해 보죠.”
* * *
벨은 이렇게 여유롭고 느긋한 이동은 오랜만이라며 한만함을 만끽했다. 제발 이번에는 마차를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자며 볼멘소리를 내기도 했다. 맞바람에 나부끼는 그의 머리카락이 눈부시게 빛났다.
마차는 폴핀의 인간 사회에서 값을 치르고 구해 온 것이었다. 돌부리에 걸쳐 마차가 들썩일 때면 엉치뼈가 아려 왔지만, 말에 타는 것보다는 훨씬 안락했다. 이 상석을 누리게 된 인간은 물론 최약체 인간 둘과 공주 하나였다.
“아니요, 실속 면에서나 전투 면에서나 저도 어디 가서 꿀리는 다룸은 아닙니다.”
벨에게 무어라고 도발당한 다룸이 발끈하며 자기 가방을 뒤졌다. 그 안에서 꺼낸 것은 검고 두꺼운 책이었다.
“이거 보십쇼, 제가 쓴, 예? 제 원소 연구서라고요. 여기 있는 거 처음부터 끝까지 다 제가 구사할 수 있는 술식이거든요?!”
다룸이 책장을 소리 나게 넘기며 자랑했다.
그의 연구량은 원소술을 좀 배웠다 싶은 다룸이 보았더라면 대단하다며 치켜세워 주었을 수준이었지만, 그것의 가치를 알기에 벨과 나니아는 너무나 무지했다.
공주는 고상하게 귀를 후비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다룸의 이름은 헤르였다. 성은 없었다. 겉보기와 다르게 나이가 많은 편이었고, 싱글이었다.
그는 리자드 땅굴을 비롯하여 동대륙에 숨어 사는 이들의 존재를 가려 주러 돌아다닌다고 했다. 구성원 모두에게 십시일반 수금하기 때문에 제법 커다란 목돈을 만질 수 있다며 자랑하는데, 나니아는 그의 말을 듣고 궁금한 점이 생겼다.
“그런데요, 아무리 생각해도 불편한 점이 더 많을 것 같은데….”
말끝을 맺지 못하고 흘금 마차 밖의 눈치를 보았다. 어딘지 리자드들을 타자화하는 질문이라 나니아는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줄였다.
“왜 남의 땅에 건너와서 사는 걸까요…?”
헤르는 누구누구와 다르게 묻는 말에 착실하게 잘 대답해 주었다.
“일단 샤르도네 씨의 손녀처럼 태어날 적부터 이곳에서 나고 자란 경우가 많습니다. 아시다시피 집 떠나면 개고생이지 않습니까? 그들로선 익숙한 이곳을 버리고 밟아 본 적도 없는 본토로 돌아갈 이유가 없는 거죠.”
남자는 나니아의 사정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전해들은 바가 있었기에 빗대어 설명했다.
“1세대 이주자들은 보통 본토에서 사회적 약자였던 사람들입니다. 저쪽은 철저히 약육강식의 세계라서요. 가난하거나, 힘이 없거나. 아, 물론 범죄자들도 많죠.”
“아무튼 떨거지들이 건너와서 산다는 말이네요.”
날이 갈수록 말이 험해지는 공주를 보며, 나니아는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군요. 말씀마따나 서쪽에 제대로 발붙이고 살기 힘든 자들이 주로 건너옵니다. 여기서는 어떻게든 살아지거든요.”
나니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곁에 있는 그의 연구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두껍고 기이한 책을 보고 있자니 생각나는 물건이 있었다. 아버지의 일기장이었다.
일기장을 비롯한 나니아의 짐들은, 다행히도 라키바하프와 아주 잠깐 머물렀던 마지막 여관방에 버려지지 않고 무사히 남아 있었다. 그녀는 자기 몸처럼 잘 챙겨 온 짐 꾸러미에서 일기장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다룸의 앞에 내밀며 물었다.
“저기, 헤르는 박식하니까…. 여기 뭐라고 적혀 있는지 읽을 수 있을까요?”
“뭐죠?”
박식하다 일컬어진 남자가 거만한 손끝으로 책을 건네받았다. 지식을 뽐낼 기회로 으쓱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다룸은 탐구심 가득한 시선으로 그것을 열어 보았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그는 몇 차례 입술만 뻥긋뻥긋 움직이며 말을 망설이다가, 나니아의 보라색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머뭇거리는 시선이 다시 책으로 내려왔다.
“미안한데, 모르겠네요….”
그 말에 옆에서 잠자코 듣고만 있던 벨이 경망한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고.”
식사는 점점 현장에서 조달하는 방향으로 해결하게 되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챠링고는 말들이 먹을 만한 풀을 찾아 나섰다. 파키케팔로는 자리를 정리했고, 헤르는 일찍 마차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는 이동 중에 멀미로 고생을 좀 했다.
나니아는 먹고 남은 사슴고기의 볼깃살을 불 가까이 걸어 두고 장작을 태웠다. 나무 타는 연기가 공기 중으로 불규칙하게 흩어졌다.
벨이 그녀 곁으로 다가와 쪼그리고 앉았다.
그가 물었다.
“뭐 해요?”
나니아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훈연시키고 싶었는데, 여기선 잘 안 될 것 같아요….”
님프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그걸 왜 하는데요?”
“…….”
시비를 건다기엔 너무도 순진한 눈빛이라, 나니아는 잠시간 말을 멈추었다가 머뭇거리며 대꾸했다.
“아까우니까…요?”
모닥불 너머로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파키케팔로였다.
“라히무스는 공동생활의 기본이 안 돼 있어. 자기 혼자 개운하게 목욕하러 가고! 좋은 신랑감이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니깐.”
아직 뿔도 안 난 리자드가 찡얼거리는 말이, 라히무스나 챠링고가 들었더라면 퍽 웃었을 만한 소리였다.
나니아가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뭐 도와드릴까요?”
“아냐, 됐어. 너는 식사 준비를 도왔잖아.”
그렇게 따지면 라히무스는 식량 조달이라는 역할을 했지만, 구태여 반박할 성격이 못 되었기 때문에 여자는 말을 아꼈다.
파키케팔로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까 물 떠 온 곳 있잖아, 라히무스 거기로 갔거든. 이거 가져가서 떠넘기고 와 주라.”
나니아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부탁이었다.
리자드가 저녁 식사에 사용했던 식기구들을 건넸다. 크게 오염되지 않았고 가짓수도 적었다. 나니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릇을 받아 들었다. 누굴 시키느니 그냥 본인이 닦아 올 요량이었다.
‘위험한 야생 동물 같은 건 없겠지….’
나니아는 달빛에 의지해 오솔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마른돼지숲에서 축수들에게 쫓기던 생각이 났다. 그날도 이렇게 라히무스를 찾아다녔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리자드들의 정체를 막연히 괴물로 넘겨짚었더랬다.
반짝거리는 용의 꼬리와 악마 같던 뿔. 비늘 돋친 앞발과 부풀어 오른 육신.
발정기 때의 그의 모습은 지독히 무섭고도 아름다웠다.
짐승처럼 호흡하던 라히무스의 숨결이 떠올랐다.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이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느껴졌다.
바스락거리는 발걸음 끝에 너울거리는 물가가 나타났다. 시리도록 검푸른 수면 위로 달빛이 부서졌다.
규칙적으로 잔잔하게 움직이던 물살이 원을 그리며 파동치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 가운데에서 부글거리는 물거품과 함께 나타났다. 쏴아아 물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흉터로 가득한 너른 등이 드러났다.
나니아는 순간 호흡을 멈추었다. 아무리 밤 달빛 아래서라지만, 남자의 알몸을 저렇게 노골적으로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던 탓이다.
악취미라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떼기 힘들었다. 리자드가 물속을 걸을 때마다 살랑거리는 꼬리와 두툼한 허벅지를 따라 거친 물결이 일었다. 철렁거리는 물소리만이 공허한 어둠을 채웠다.
‘…인어 같다.’
객쩍은 생각과 함께 숨을 집어삼켰다. 움푹 파인 둔근의 보조개가 눈길을 끌었다.
사내가 뒤를 돌았다. 하지만 아직 인영을 눈치채지 못한 듯하였다.
파란 달빛이 그의 날카로운 뺨과 콧대를 조각했다. 남자는 한쪽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쓸어 넘기며 젖은 머리카락을 올려붙였다. 물에 젖은 머리카락은 다시 제 위치로 가닥가닥 불성실하게 흘러내렸다.
나니아의 눈길이 남자의 가슴과 배 언저리를 살피다가 점점 아래로 흘러내렸다.
‘다리가… 세 개….’
망부석처럼 굳어서 멍한 시선으로 그의 하반신을 홀린 듯 구경하는데.
“…나니아?”
번쩍 정신을 차리게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리자드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소녀는 화들짝 놀라 가까이 있는 나무 뒤로 재빨리 몸을 숨겼다. 엄밀히 따져 보자면, 몸을 숨겨야 하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라히무스였다.
“빠, 빨리 옷 입어요…!”
소녀가 적반하장으로 소리를 빽 내질렀다.
사내는 춥지도 않은지 젖은 몸 아래 천 한 장만 대충 걸치고 바위에 걸터앉았다. 입김이 희게 솟는 것을 보아 센 척하는 것 같았다.
그가 허리에 묶은 천의 끈을 조이듯 매만지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왜 왔어.”
수치심은 없는 것 같은데 경계는 했다. 나니아는 애써 태연하고 떳떳한 표정을 가장하며 가지고 온 설거짓감을 내보였다.
“이거 씻으러 왔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라며, 나니아는 의연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른 식기들을 하나하나 물에 넣고 씻어 냈다. 빵가루를 털어 내기 위해 간간이 문지르며 닦아 내기도 했다.
라히무스도 팔을 뻗어 포크 하나를 손에 쥐었다. 여자가 하는 양을 흉내 내며 물에 넣고 흔들었다.
“…….”
“…….”
둘 중 아무도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 않아서 들리는 건 보글거리는 물거품 소리뿐이라, 나니아는 이 숨 막히게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해 보고자 자기 딴에는 웃겼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파키케팔로가 그러는데요, 라히무스는 좋은 신랑감은 못 되겠대요.”
“…….”
물속을 휘젓던 팔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말해 놓고 아차 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에게 새신랑 순결 콤플렉스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말았다.
신랑감 운운하는 그녀의 말이 남자에게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켰는지 알 만했다.
뒤늦게 파키케팔로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샘솟기도 했다.
“어, 음, 그러니까… 이런, 설거지나 뒷정리 같은 거, 돕지 않는다고, 그래서 나온 말이에요. 우… 우스갯소리…였어요.”
“…….”
애써 뒤늦게 변명을 붙여 보았지만 이미 진창이 되어 버린 그의 기분을 풀어 줄 수는 없는 듯싶었다. 남자의 과묵한 두 입술은 단단히 다물어져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나니아는 괜히 머쓱해진 기분을 강압적인 말투로 풀어 나갔다.
“그러니까 의식주와 관련한 것들은 도, 돕는 편이 좋다구요.”
남자와 대화할 때면 이상하게 신중해지질 못했다. 어느샌가 뱉고 나서 뒤늦게 곱씹는 습관이 생겨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또다시 자신의 말이 어딘지 이상하게 들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남편이 되려면 집안일을 도와야 한다, 라고 설교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남자가 묘하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라면 하는데.”
“하, 하라고 할 때까지 안 하는 게 문제거든요….”
나니아는 턱에 튄 물을 머쓱하게 닦아내며 화제를 돌렸다.
“아니…. 안 추워요? 이런 물에 몸을 씻는다는 게….”
그도 그럴 것이 고작 그릇을 닦으면서도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손까지는 그럭저럭 견딜 만한지 몰라도, 온몸을 담글 엄두는 나지 않았다.
여자의 질문에 라히무스의 시선이 비딱해졌다.
“춥다고 하면.”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그 어떤 성인 남자보다도 짙고 음산한데, 나니아를 쳐다보는 그의 눈빛은 어딘지 반항기를 맞은 소년 같은 구석이 있었다.
“안아서 데워 주기라도 할 건가?”
비아냥거리는 라히무스의 태도가 어딘지 이전과는 결이 달랐다. 무심하고 기계적인 목소리로 불쑥 던지는 성희롱은, 듣는 나니아로 하여금 무어라 화도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대답 없는 나니아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 냉담한 시선으로 바닥을 응시했다. 자그마한 돌멩이를 하나 주워 가볍게 팔을 휘둘렀다. 물 위로 던져진 조약돌이 몇 번을 통통 튀어 오르더니 이내 으슥한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아니면 신경 꺼.”
조약돌이 퍼뜨린 물보라가 잔잔했던 나니아의 마음에도 파문을 일으키는 듯하였다.
고개를 돌려 부루퉁해진 라히무스의 옆얼굴을 살폈다. 뺨이라 부르기엔 입술 쪽에 더 가까운 그의 볼 주머니에, 불룩한 심술이 담겼다.
‘안아 달라는 말을 돌려서 하는 건가?’
남자의 화법은 이전보다 더 둥글고 어려워졌다.
나니아는 차라리 그가 어떤 요구를 해 주었으면 했다. 그는 그럴 권리가 있었다.
정조는 없어도 의리는 있는 사내였다. 나니아는 그가 두려운 것과는 별개로, 진심으로 고맙기는 하였다.
지금 이 세상에 그녀를 위해 줄 사람이 어느 누가 남아 있을까.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나니아는 그가 도와주는 것을 빌미로 육체적 접촉을 요구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기 때문에, 슬쩍 운을 띄워 보았다.
“소원, 안 써요?”
“뭐?”
두어 번 죽다 살아나 보았더니 까짓것 무엇이든 해 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얼마만큼 각오했는가 하면, 남자가 대뜸 자기 거시기를 빨아 달라고 해도 뺨을 때리지 않을 자신이 있을 정도였다.
“소원 들어달라고 했잖아요.”
나니아는 사내의 외면을 틈타 어물쩍 그의 몸을 훔쳐보았다. 몸 파는 남자 같다는 극찬을 받은 육체였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형태로 늘씬하게 빠진 역삼각형 몸매가, 그런 게 좋은 줄도 몰랐던 어린 소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에게서 난생처음으로 사내를 배웠다. 나니아 같은 풋내기 처녀에게는 너무도 강렬하고 자극적인 경험이었다.
악마 같은 남자.
그는 매혹적이고 요사스러웠다.
라키바하프와 라히무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니아는 당연히 평생을 함께해 온 영주를 골라야 했다.
하지만 남자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갈피를 종잡을 수 없어졌다. 그런 그가 두려웠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 라히무스에 대한 자발적 이끌림을 인정하고, 또 부정했다. 잡아 당겨졌기 때문에 끌려가고 있을 뿐이라 믿고 싶었다.
아무런 걱정도 고민도 자리 잡을 수 없도록, 차라리 나를 몰아붙여 주었으면….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기대와 달랐다. 남자는 건조하고 퉁명스러웠다.
“별로….”
리자드는 그녀를 위해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증명하고 싶었다. 그녀를 바라는 자신의 마음이 성욕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임무를 제대로 완수해 내지 못한 자신은 그녀에게 다시 고백할 자격도 없었다.
“못 구했잖아, 결국.”
의지를 상실한 꼬리 끝이 바닥으로 털썩 눌어붙었다.
낙담한 그의 옆에서 여자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바보.”
정작 자리 깔아 주면 아무것도 못 해.
라히무스가 그 서운한 중얼거림에 반응하였다. 고개를 돌려 눈살을 찡그리는 얼굴이, ‘뭐라고?’ 하며 물어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니아는 입술을 다시 꾹 다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척했다. 이내 자기 무릎에 고개를 처박으며 작고 속상한 등을 보여 주었다.
나니아의 반응을 보고 리자드는 혼란스러워졌다.
“내가 뭘 또 잘못 말했어?”
남자가 찌푸린 낯으로 물었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냐는 듯, 고개 숙인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나니아는 바위 아래 숨은 게처럼 눈만 내밀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거 보여.”
“뭐?”
소녀는 다시 홱 하고 고개를 돌려 다리에 파묻었다. 그녀의 짜증스럽게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무릎 사이에 갇혔다.
“당신 그게 보인다구요!”
“……?!”
라히무스의 표정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구겨지더니, 대번에 자신의 다리 사이로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흘러내린 천 밖으로 거대한 살덩어리가 빼꼼 삐져나와 있었다.
나니아는 심술궂게 말했다.
“…더러워.”
리자드는 황급히 천을 잡아당겨 치부를 가리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한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니, 내가 보이고 싶어서 보인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말할 일이냐며 남자가 억울해했다.
나니아는 무릎을 끌어안은 팔 위에 얼굴을 꺼내 놓고 비스듬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부끄럽고 겸연쩍어하는 모습이 썩 고소했다.
당황해서 허벅지를 세로로 세워 놓고 시선을 피하려던 리자드는, 뒤늦게 그녀가 눈이 휘도록 웃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었다.
장난스러운 기색을 알아차리자마자 재빨리 나니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팔을 무릎 아래로 끌어 내려서 다시 엎드리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니아가 크게 박장대소하며 손을 뿌리쳤다.
“저리 가, 꼬추 만진 손으로 만지지 마.”
“안, 아니 안 만졌거든?”
여자의 입에서 갑자기 그런 유치하고 야한 단어가 나올 줄 몰랐기 때문에 리자드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어어, 나 아직 아픈데. 화상 아픈데요.”
잡아 멈추려는 손길과 피하려는 손길이 함께 투덕거렸다. 라히무스가 이런 식으로 성적 수치심을 느끼는 모습은 이제껏 본 바 없어 신선하고 우스웠다. 나니아는 끝까지 키득거리다 끝내 도망치려는 듯 바닥을 짚고 기립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을 놓칠 리자드가 아니었다. 남자는 도망치는 토끼를 포획하듯 나니아의 작은 몸을 낚아챘다. 더는 얄궂은 소리를 지껄일 수 없도록, 팔을 뻗어 품 안에 가두었다. 허리를 감아 오는 팔뚝의 단단함이 나니아를 긴장시켰다. 몇 번을 겪어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살갗에 심장이 철렁했다.
“나, 나 갈 거야…. 놔줘요….”
돌아가겠다며 떼쓰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설익은 장난기가 점차로 빠져나갔다.
물 냄새에 섞인 체취가 코끝으로 훅 끼쳐 왔다. 가까워진 거리만큼이나 짙고 깊었다.
“가지 마.”
남자가 속삭였다. 그의 간지러운 음성은 자세히 귀 기울이지 않으면 풀벌레들 울음소리에 묻힐 정도로 나지막했다.
나니아는 바둥거리는 것을 멈추고 사내의 넓은 어깨와 팔뚝에 기대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초조하고 새빨간 빛의 눈동자가 그녀를 가늘게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같이 있자.”
남자의 속삭임은 낮고 달콤하였다.
별이 빼곡한 하늘은 너무 높고, 그들을 둘러싼 숲은 광활하였다.
달밤에 보는 라히무스의 얼굴은 언제나 야릇하고 위험한 기분에 빠지게 했다. 서늘한 온도로 진지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면, 정말로 이 넓은 세상에 둘만이 남겨진 것 같았다.
소녀는 애써 수줍고 민망한 마음을 감추며 그를 나무랐다.
“누, 눈을 왜 그렇게 야시시하게 떠요?”
“야…. 뭐?”
남자의 눈썹이 비뚤게 휘었다. 그 역시 지지 않고 나니아를 규탄했다.
“네가 먼저 내 가슴 이상한 눈으로 훔쳐봤잖아.”
“내가 언제요?”
“목욕 끝나고 나올 때부터 계속.”
나니아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여자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우물거리자, 라히무스의 붉은 눈동자가 집요할 정도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리자드가 마른 입술을 핥으며 혀를 뭉갰다. 목소리가 뜨겁고 눅눅했다.
“나보고 꼴린다는 표정 지었잖아, 너….”
사내의 저속한 언어 선택에 여자는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 그런 적 없는데요.”
어떤 당돌함도 자신감도 느껴지지 않는 소녀의 목소리가 허공으로 잘게 흩어졌다.
찬 바람에 부르튼 그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객기를 쥐어짠 목구멍으로 침이 꿀꺽 넘어갔다.
끌어안긴 팔에 힘이 바짝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었을 때, 잔뜩 안달이 난 리자드의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너는…. 너는 날 헷갈리게 만들어.”
성욕과 사랑을 헷갈리지 말라고 해 놓고선. 정작 몸이 다는 것을 참고 인내하려니, 이제 와 충동을 부추기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가 떨리는 호흡을 부딪쳐 왔다. 거칠게 다가온 입술이 부드럽게 파도쳤다. 그는 입술 안쪽, 가장 말캉하고 축축한 살로 나니아의 것을 빨았다. 젖은 입맞춤의 소리가 밀려드는 물살의 노래에 섞였다.
여자는 적극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둘러 환영하지는 않았지만, 수동적인 두 팔을 남자의 가슴 위에 올려놓고 저항 없이 키스를 받아들였다.
너무 오랜만에 부닥친 그의 입술은 낯선 사내의 것 같기도 했고 어제 맛본 것처럼 익숙하기도 했다. 어느 쪽으로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주 잠깐 벅찬 숨을 고르기 위해 고개가 멀어졌을 때, 여자는 얼결에 시선을 내려 리자드의 하반신을 확인하고 말았다.
…아, 저게 원래 저런 크기까지 부풀었었지.
불거진 그의 중심을 보고 움찔 몸을 굳히자, 리자드의 몽롱한 눈깔도 제정신으로 돌아오는 게 보였다.
남자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품에서 나니아를 떨어뜨려 놓았다. 기겁한 리자드의 반응에 나니아의 정신도 덩달아 선명해졌다. 두 사람 모두 흥분으로 흐려졌던 머릿속에 뿌연 안개를 걷어 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홧홧한 열기로 팽창했던 마음이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쪼그라들었다.
여자는 지금 하나뿐인 사람을, 식구나 다름없는 사람을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도 모르는 사람의 걱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그깟 알몸 좀 보았기로서니 마음이 동해선 감히 그와 뒹굴 생각이나 하고 말았다.
나니아는 자기가 이렇게까지 밝히는 계집이었던가 자조하였다. 깊은 자기혐오가 밀려들었다.
머릿속에 든 게 그거밖에 없냐며 그를 질타한 적 있었다. 절제할 줄 모르는 사내라며 손가락질했고, 자신에게 몸만 바라는 것 같다며 서운해했었다.
변태. 저질. 호색한. 바람둥이.
나니아가 그를 부르던 낱말들이었다.
그녀가 쏘아 올린 비난의 화살은 하나도 빠짐없이 스스로에게로 돌아왔다.
사람은 동시에 두 사람을 좋아할 수 없는 거라며 의기양양하게 말해 놓고선. 며칠 만에 그 말을 번복해야 할 위기에 처했다.
소녀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생각했다. 그에게 느끼는 강렬한 성욕과 호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언젠가 라키바하프가 그녀에게 물어보았던 바보 같은 질문을, 그에게 똑같이 건네고 싶었다.
나는 당신을 좋아하는 걸까.
나는 왜 감옥 끝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너의 얼굴을 떠올렸을까, 라히무스.
“엣취.”
남자가 재채기하자 나니아는 기이한 광경을 목격한 사람처럼 눈이 휘둥그레졌다. 돌덩이나 쇳덩이인 줄만 알았던 라히무스의 몸이 평범한 생체 반응을 보였던 탓이다.
“역시 춥죠?”
나니아는 고민하던 것도 멈추고 황급히 겉옷을 벗었다. 그러나 남자의 태산 같은 어깨에 걸쳐 주기엔 너무나 작고 앙증맞은 옷이었다. 선뜻 그의 몸에 둘러주지 못하고 주저하였다.
그사이 리자드는 자존심을 바짝 세우고 대꾸했다.
“전혀.”
하지만 코를 한 차례 훌쩍이는 행동에서 그의 객쩍은 혈기가 드러나고야 말았다.
“…거짓말.”
소녀는 당장 라히무스의 손을 붙들고 함께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다.
나니아는 리자드를 모닥불 앞에 앉혀 놓고 흡수성 좋은 천으로 그의 머리를 훑기 시작했다.
“헤르에게 담수 데우는 방법 배웠어요. 그러니까 다음부턴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따듯한 물로 씻자?”
“…응.”
마른 천을 두피 가까이 붙이고 조물조물 문질렀다. 검붉은색 머리카락 끝으로 물방울이 토독 토독 떨어져 나갔다. 남자의 흉포한 몸은 머리카락을 조물거리는 작은 손 아래에서 새끼강아지처럼 온순해졌다.
“젖은 머리로 자면 감기 걸려. 귀찮다고 자꾸 벗고 다니지 말구, 특히 밤에는 옷 여러 벌 껴입어야 해요. 알았죠?”
“…응.”
나긋나긋한 말씨가 아늑한 온기를 띠었다. 그녀의 예쁜 목소리는 잔소리를 잔소리 같지 않게 만들었다. 라히무스는 천 너머로 느껴지는 그녀의 손길을 즐겼다. 야무진 어루만짐이 기분 좋은 마찰을 일으켰다.
그러자 나니아가 핀잔을 주듯 말했다.
“꼬리 좀 가만히 있어 봐요.”
그의 등 뒤에 서 있던 터라, 리자드가 꼬리를 움직일 때마다 얻어맞는 중이었다.
“응….”
리자드는 순순히 그녀의 말대로 했다. 행복에 겨워 살랑거리던 것을 멈추고, 차렷 자세를 유지하는 사람처럼 바닥에 납작 붙였다.
그 절제된 모습은 나니아로 하여금 피식 웃음을 흘리게 했다.
머리에 남아 있는 물기를 탈탈 털어 내면서 리자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의 잔혹하고 살벌한 모습은 남의 얘기 같을 정도로, 다붓하게 응응거리는 것이 귀여웠다.
소녀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뺨에 뽀뽀를 해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 참았다. 고분고분하고 얌전한 라히무스에게서 안아 주고픈 사랑스러움을 미량 느꼈다. 몸에 정이 든다는 것은 이렇게나 무서운 일이었다.
남자가 고개를 뒤로 꺾어 치켜뜬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았을 때, 나니아는 젖은 수건으로 그의 얼굴을 덮어 버렸다.
“…나한테 애교 부리지 마요.”
정말이지 곤란했다.
* * *
이튿날, 아직 해가 지려면 한참이나 남은 시간에 또다시 마차가 멈추어 섰다. 말들은 조금 더 달릴 수 있었다. 문제는 헤르였다.
“이 다룸 진짜 귀찮네!”
챠링고가 마차 뒤쪽 덮개를 걷어 올리며 투덜거렸다. 마차 안에서 바퀴 아래로 구르다시피 뛰쳐나온 헤르가 눈에 보이는 나무 기둥을 붙잡고 신음하였다.
“허어… 크엑….”
묽은 신음은 토악질로 바뀌어 갔다.
“괜찮아요? 계속 이래서 어떡해요….”
헤르를 따라 나온 나니아가 마차 아래로 껑충 뛰어내렸다. 다룸은 나무가 구세주라도 되는 것처럼 매달려,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해 내기 시작했다. 다가온 나니아가 그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아직 말 위에 앉아 있던 파키케팔로는 역겹다는 듯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으…. 나니아 생각보다 비위 좋네.”
그는 토하는 사람 옆에는 가까이 가고 싶지도 않았다.
챠링고가 팔짱을 끼고 서서 말했다.
“저런 몸으로 잘도 여행을 다니는군.”
겨우 이 정도로 멀미라니.
남자는 호기롭게 편승한 것치고 마차의 덜컹거림에 매우 취약한 듯 보였다.
“이래서 배는 탈 수 있겠어?”
챠링고가 그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배가 차라리 낫습니다….”
남자가 침을 흘리며 어렵사리 대꾸하더니, 오래 지나지 않아 또다시 토사물을 게워 내기 시작하였다. 음식물이 위장에서부터 식도를 밀고 올라왔다. 그것은 매우 끔찍한 감각이었다.
새하얗게 아름다운 님프가 마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쩔 수 없네요. 오늘은 여기서 자리를 갖죠.”
깡총 뛰어내려야 했던 나니아와 다르게, 공주는 긴 다리를 뻗어 우아하게 땅을 딛고 하차하셨다.
다룸이 그의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쏟아 낼 것도 없어서 입에 고인 침을 퉤퉤 뱉어 대는데 나니아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헤르의 턱을 닦아 주었다.
말에서 내린 라히무스가 그 모습을 보고 터벅터벅 큰 걸음으로 쫓아왔다. 여자가 다룸의 입가를 점점이 찍어 대는데, 사내가 그 손목을 거칠게 낚아채었다.
나니아는 잔뜩 골이 난 라히무스를 보고 영문을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왜….”
남자가 씩씩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챠링고와 파키케팔로는 간단히 짐을 풀기 시작했으며, 벨로즈는 선이 가는 몸을 하늘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바로 앞에 헤르가 있었지만 외려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동료들의 듣는 귀를 확인한 다음에야 리자드가 볼멘소리를 냈다.
“너는 왜 그렇게 아무 남자한테나 다정해?”
그의 말에 나니아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소녀의 잔정은 상식적인 수준이었다. 아픈 사람은 간호하고 보살펴 주는 것이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라히무스는 그녀의 관심을 다른 사람, 특히 남자와 나누고 싶지 않았다. 좋아하는 여자가 아무한테나 잘해 주는 것은 싫었다. 우는 얼굴도 웃는 얼굴도 오로지 다 자신의 것이길 바랐다. 그녀의 다정다감한 손길을 온전히 독점하고 싶었다.
남자는 비틀거리는 다룸의 머리 꼭대기를 빤히 쳐다보았다. 까맣게 물들인 머리는 시일이 좀 지났는지 뿌리에서 본래 빛깔이 드러나고 있었다.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색채였다.
그는 나니아의 손을 잡아다 다룸에게서 멀리 떨어뜨려 놓았다. 작고 소중한 그녀를 다시 마차 안에 곱게 넣어 두었다. 둘이 붙어 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사이 헤르는 바닥에 떨어진 나니아의 손수건을 들어 올렸다. 사심 없는 흰 천에서 정결함이 느껴졌다. 자신의 침으로 더러워졌지만 말이다.
‘빨아다 줘야겠지…?’
아직 속이 좀 메스꺼웠지만, 정신은 돌아오는 것 같았다. 깨끗한 물로 입을 헹구고 싶었다.
저 멀리, 아마도 토사물로부터 먼 자리를 골라잡았을 리자드들이 일찍부터 불을 피우고 있었다. 헤르가 그들을 향하여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는 식수가 든 물병을 찾아 손에 들었다. 그리고 라히무스가 걸어간 방향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둘이 그거, 뭐,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죠?”
헤르는 수틀린 리자드가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의 눈 밖에 나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왜 아무 남자한테나 잘해 주냐니. 그 투명하고 순도 높은 질투란. 곁에 서 있기만 해도 온몸이 따끔거리는 불유쾌한 전류가 흘렀다.
답을 확신하고 있는 헤르와 다르게, 파키케팔로는 선뜻 단언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우린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있어….”
그러니까 너도 가능한 한 끼어들지 않는 게 좋을 거라며 파키케팔로가 조언하자 다룸은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는 미의 기준이 높은 편이었고, 나니아는 그의 눈에 찰 정도로 썩 대단한 미인은 아니었다.
파키케팔로와 나니아는 라히무스가 숲에서 잡아 온 새들의 털을 뽑고 있었다. 일찍 손질을 해 두어 해가 질 때쯤 푹 고아 먹을 계획이었다.
“핫뜨뜨, 뜨거워.”
파키케팔로가 요란을 떨었다.
한 차례 끓는 물에 담금질한 새를 바닥에 내려놓고 털을 죄 뜯었다. 맨손으로 감당하기엔 아직 제법 온도가 높았다. 좀처럼 과감해지기 힘들었다.
한편 몸이 녹슬었음을 느낀 라히무스는 찌뿌둥한 몸을 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턱걸이를 할 수 있음직 한 높이의 지지대가 필요했다.
그는 일자로 쭉 뻗은 줄기를 찾아 나무를 올랐다. 휘청이는 나뭇가지에 올라앉는가 싶더니 몸을 눕혀 거꾸로 매달렸다.
반듯한 가지에 오금을 끼워 놓은 그가 윗몸을 들어 올렸다 다시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묵직한 상체를 끌어 올리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복근의 긴장이 필요했다. 허벅지와 엉덩이에도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나니아는 그 모습을 흘금흘금 훔쳐보았다. 처음에는 중력을 못 이기고 말려 올라간 옷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속살에서 정숙하지 못한 기운이 풍겼다.
‘…야하다.’
자꾸만 그런 생각부터 드는 스스로가 난감했다. 소녀는 깃털을 쥔 자신의 손으로 이마를 꽁꽁 내리쳤다.
문제가 발생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던 순간은, 가지 끝에서 우지끈하는 소리가 날 때였다.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 상황은 이미 늦어 있었다.
후두둑, 쩌억-.
육중한 다리를 걸쳐 놓은 줄기가 그대로 찢기듯 부러져 나갔다. 남자는 그 즉시 물구나무를 서듯 바닥을 짚고 안정적으로 착지하였으나, 부러진 나무는 그러질 못했다.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처참한 모습으로 바닥을 뒹굴었다.
리자드는 물구나무선 다리를 반으로 접어 내리며 풀쩍 몸을 뒤집어 세웠다. 그리고 멋쩍게 허리를 긁었다. 눈앞에 자신이 만들어 놓은 참상이 펼쳐졌다.
0.1톤가량의 사내가 매달리기엔 너무 여린 가지였나 보다.
챠링고가 혀를 끌끌 찼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
파키케팔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난리를 피웠다.
“아, 뭐야아!”
나뭇가지가 하필이면 헤르의 휴대용 롱타보드 위로 떨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 바람에 말과 말판이 엉망으로 뒤집히고 흩어졌다.
식사 준비를 위해 잠시 승부를 뒤로 미뤄 둔 참이었다. 모처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라히무스가 다 망쳐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녀석은 당장에 그의 곁으로 달려가 발을 쾅쾅 구르며 소리 질렀다.
“라히무스, 이 돼지!”
남자의 눈썹이 삐죽 올라갔다. 단순히 몸무게만으로 돼지라 불리기엔 그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다. 육중한 체구의 리자드가 가엾은 파키케팔로의 머리를 겨드랑이에 끼워 놓고 마구 꿀밤을 먹였다.
“윗몸일으키기는 바닥에서 하면 될 거 아냐 바닥에서!”
녀석이 남자의 매서운 손뼈로 마구 응징당하면서도 소리를 꽥 내질렀다.
덕분에 그는 자기가 꺼낸 말 그대로 라히무스의 받침대 역할을 떠맡게 되었다.
투덜거리면서도 그의 다리를 꽉 붙들어 안았다.
라히무스의 윗몸이 오르내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을까. 챠링고가 물이 담긴 들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봐, 이거야말로 누가 좀 들어 줘야겠는데.”
라히무스든 파키케팔로든 누구라도 좋으니 와서 도우라는 말이었다. 애당초 챠링고는 벨로즈나 헤르에게는 기대하는 것도 없는 듯하였다.
그에 파키케팔로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나 가!”
그러고는 나니아를 향해 손짓하는 것이었다.
“나니아, 여기 와서 나 대신 라히무스 좀 잡아 주라.”
“…응?”
마침 깃털을 모두 뽑아낸 참이었다. 파키케팔로가 어서 이리 오라는 듯 라히무스의 종아리를 탁탁 두들겼다.
녀석은 또 라히무스를 향해서는 한쪽 눈을 찡긋 감아 보였다. 녀석의 앙큼한 윙크에서 음흉한 속셈이 엿보였다. 자기 딴에는 나름 라히무스의 연애 사업을 도와주려는 것 같았다.
폴짝 몸을 일으킨 파키케팔로가 나니아와 바톤 터치를 했다.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 아님에도, 어쩐지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였다.
“여기 앉고, 바짝 잡고.”
파키케팔로가 나니아의 팔을 턱턱 움직였다. 그의 말대로 남자의 발을 엉덩이 밑에 깔고 앉았다.
여자는 이게 정말 도움이 되나 싶은 의구심이 들었다. 대체 누가 누구한테 매달려서 몸을 고정하는 상황인지. 남자는 너무 크고 무거웠다. 자신이 이 커다란 사내에게 어떤 지지대가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일단은 시키는 대로 그의 종아리를 꽉 끌어안았다.
말없이 몸을 반쯤 일으켜 앉아 있던 라히무스의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어지러운 마음에 눈이 핑글 돌았다.
무릎 아래로 소녀의 말캉한 가슴이 닿아서, 온몸의 신경이 그 촉감에 쏠리고 있었다.
나니아의 걱정대로였다. 남자의 하지를 단단히 붙들어 놓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었지만, 소녀의 아담한 체구는 그가 다리를 지탱하는 데에 별달리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라히무스는 그 사실을 구태여 말하지 않고 스스로 골반에 힘을 주어 몸을 고정하기로 했다. 괘씸한 파키케팔로를 괴롭히고 싶었을 뿐,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잡아 주는 사람의 존재가 있으나마나 했다.
남자의 몸이 느릿하게 서너 번 오르락내리락하였다. 그럴 때마다 천막을 덮은 것처럼 세상이 깜깜해졌다.
나니아는 말없이 그의 뾰족한 턱과 코끝만 쳐다보다가, 어느 순간 몸을 일으키는 그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
그순간 라히무스는 배를 접어 올라오던 것을 멈추고 바닥에 벌러덩 누워 버렸다.
딱히 지쳐 보이지 않는데 왜 그러나 싶어 나니아가 물었다.
“왜요…? 힘들어요?”
남자가 심호흡했다. 널따란 흉근이 커다랗게 부풀다 가라앉았다.
리자드는 넋 나간 시선으로 나뭇잎 사이사이에 끼어드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어두침침한 마음과 다르게 햇살은 밝고 따사로웠다.
“…어.”
영혼 없이 멍한 목소리가 짧게 대꾸하였다.
불순한 의도가 배제된 접촉은, 그래서 더 아찔하게 정신을 죄었다. 무릎을 움직여 그녀의 도톰한 가슴을 흔들고 비벼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리자드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인내하였다. 부푼 흥분이 들키지 않으려면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남자는 다시 귀 뒤에 손을 얹고 몸을 일으켰다.
예고 없이 갑작스럽게, 나니아의 눈앞으로 남자의 가슴이 들이닥쳤다. 꽉 붙는 옷을 입은 그의 흉부가, 그리고 그 밑으로 줄지어 뭉쳐 있는 복부 근육이, 옷 주름을 잘게 잡고 몸의 윤곽을 그렸다.
나니아는 아주 잠깐 숨을 쉬는 것도 멈추고 눈을 굴렸다. 태산 같은 그림자가 얼굴 위를 덮었다 사라졌다 하는 사이, 소녀는 멋쩍은 시선을 돌려 흐릿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도무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게 만드는 사내였다.
콩닥콩닥 뛰는 가슴이 맞닿은 신체를 타고 그에게 전해질까 두려웠다. 감정의 동요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니아는 다시 태연한 척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바로 돌렸다. 어색한 시선을 들어 머리 위의 남자를 흘긋 올려다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도 나니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
“…….”
그의 붉고 짙은 눈동자가 심장을 데웠다. 무더운 뙤약볕처럼 목 타게 했다. 홧홧한 열기를 품은 두 눈 아래로 살짝 벌어진 입술이 보였다. 아득한 시선의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건조한 입술 끝이 타는 목마름으로 바짝바짝 말라 갔다. 얼굴이 가까워질수록 정신은 멀어졌다. 긴장한 소녀는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이어질 행동을 기대하듯이.
“…고마워.”
그러나,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가 생각한 것과는 한참 달랐다.
“이제 충분해.”
덤덤한 목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나니아가 종아리에 두른 팔을 풀어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볼일이 끝났다는 듯 순식간에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망연히 좇다가, 화끈해진 얼굴을 손바닥에 묻었다.
‘당연히 입 맞출 줄 알았는데….’
소녀는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졌다. 언제부터 그에게 키스받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게 되었는가. 라히무스가 자신의 착각을 눈치챘는지, 눈치챘다면 어떻게 생각할는지 민망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본인의 수치심에 몰두하느라 남자가 어기적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벨이 헤르에게 물었다.
“어차피 내일 다 토할 거 뭐 하러 먹어요?”
음식을 깨작대던 그가 파리한 얼굴로 대꾸했다.
“인간은 음식물 섭취가 필요합니다….”
“그건 나도 아는데, 당신한테 뭘 먹이는 건 영 낭비 같아서요.”
벨의 퉁명스럽고 태연한 말투에서 언뜻 짓궂음이 비쳤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둘 다인지 알 수 없었다. 헤르는 입맛을 쩝 다시며 스푼을 빨았다.
“오늘 밤 안에 다 소화시키겠습니다….”
놀릴 사람이 하나 더 생겨서 기분 좋은 듯 공주가 키득키득 웃었다.
한편 나니아는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는 먹는 양이 너무 적었다. 저러다 픽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벨 님은 조금 더 드셔야겠어요.”
“아뇨, 괜찮아요.”
새고기로 엉성하게 끓여 낸 스튜에는 빈곤한 기름이 둥둥 떠다녔다. 헤르는 나니아가 그것을 벨에게 권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분께서는 물만 마시면 되는데요.”
“네?”
나니아 역시 마찬가지로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다룸이 대수롭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
“님프니까요.”
“…….”
“네?”
말을 똑바로 알아듣지 못한 나니아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그를 돌아보았다. 옆에 있던 벨은 신경질적으로 인상을 팍 구겼다. 파키케팔로도 입에 있던 음식물을 꿀떡 넘기고 눈치를 보았다.
“이쁘니까 물만 마시면 된다구요…?”
나니아는 자기가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냐는 듯 눈썹을 찡그리며 확인했다. 그 얼토당토않은 청해력에 다룸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요, 아니요. 님프니까. 님프잖아요.”
하지만 나니아의 귀에는 ‘이쁘니까, 이쁘잖아요.’라고 들렸다. 그녀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리며 인상을 찌푸리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챠링고가 대신 말을 덧붙였다.
“이 아가씨는 몰라. 님프가 뭔지 모른다고.”
리자드가 퉁명스럽게 한숨을 쉬자, 헤르는 그제야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이상 기류를 읽었다. 천천히 돌아간 그의 고개가 벨로즈를 향했다. 무섭도록 신경질적인 얼굴의 님프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에효. 이제 와서 더 숨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이참에 말해 주자요.”
파키케팔로가 손에 든 스푼을 흔들며 말했다. 벨은 손에 든 그릇을 소리 나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딱히 숨기려고 숨긴 건 아니었어요. 남의 입을 통해서 알려진 게 불쾌할 뿐이죠.”
그는 어리둥절한 나니아를 향해 체념한 투로 설명했다.
“맞아요. 난 인간이 아니에요, 나니아. 서쪽이 고향이라는 말을 듣고 대충 눈치챘을 것 같았는데. 아니었나요?”
전혀요.
나니아는 당황한 얼굴로 대꾸 없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잖게 말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당돌하고 도발적이었다.
“나는 님프예요.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내가 당신과 뭐가 그렇게 다른지 몰라요.”
“님프…요?”
그게 대체 뭔데요?
나니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누군가 보충하여 설명해 줄 사람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않자, 나니아가 호소하듯 벨을 바라보았다.
“…그게 다예요?”
너무 불친절했다.
벨은 그새 제법 길어진 앞머리를 한 차례 쓸어 넘기며 몸을 젖혔다. 기지개 켜듯 하늘로 쭉 뻗어 올린 팔이 다시 또 나른하게 바닥을 짚었다.
“내가 숲의 요정이라서 이렇게 예쁜 거예요. 이제 좀 이해가 돼요?”
그런 걸 물어본 것은 아니었지만, 나니아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공주의 미모는 인간 같지 않은 구석이 있었기 때문에, 어딘지 타당하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리숙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나니아를 보며 벨이 실소를 터뜨렸다.
“또 뭘 이야기해 줘야 해? 난 입에서 불을 뿜을 줄은 모르는데.”
벨로즈는 열없이 목덜미를 주무르다 곁에 있던 흙을 한 움큼 파 올렸다. 정확히는 흙이 아니라 그 위에 피어난 잡초가 목적이었다.
“이런 거 할 줄 알아요.”
나니아는 벨의 손을 주목하였다. 검은 흙이 숨을 쉬듯 꿈틀거렸다. 마치 그 안에 지렁이가 살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함께 파 올린 식물의 줄기가 느릿한 속도로 자라났다. 사이사이로 보이는 뿌리 역시 발을 넓히고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쯤 길어진 그것은 머리 꼭대기에서 또 다른 한 쌍의 쌍떡잎을 피어 올렸다.
“와….”
새싹은 님프의 손안에서 비정상적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나니아는 할 말을 잃고 이름 모를 잡초의 마법 같은 발육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 경이로운 광경도 잠시, 벨은 다시 식물을 땅에 묻으며 싱거운 말투로 이야기했다.
“아, 힘들어. 이제 그만할래요.”
공주의 흰 손이 흙 위를 새침하게 토닥거렸다.
나니아는 얼떨떨한 얼굴로 손에 든 새고기 스튜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면 벨 님께서는 식사가 필요 없으신 거예요?”
그 말에 다룸이 끼어들었다.
“미식을 즐기는 님프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의 말엔 당신은 그런 부류가 아닌 것 같다는 뒷말이 생략되어 있었다.
벨은 객쩍은 표정으로 두 눈을 끔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난, 물만 마셔도 돼요.”
하녀는 무엇보다도 그 사실에 가장 큰 배신감을 느꼈다.
“그럼 저는 그동안…. 드시지도 않을 식사를 매번….”
고매하신 공주님께서 밥을 깨작대실 때마다, 그것이 궁중에서 귀하게 자란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인 줄 알고 전전긍긍했던 것이 몇 날 며칠의 일이던가.
상실감에 휩싸인 소녀의 어깨가 힘없이 아래로 처졌다. 벨로즈는 그답지 않게 당황한 기색으로 실의에 빠진 나니아를 위로하였다.
“아니에요. 챙겨 주는 것 항상 고맙게 잘 먹었어요.”
님프가 손을 뻗어 검은 장막처럼 얼굴에 드리운 나니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가지런히 넘겨 주었다. 똑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라히무스와 다르게 그의 손끝은 확실히 자연스러웠다. 둘 중 아무도 리자드가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벨로즈는 나니아가 이것저것 입에 넣어 줄 때마다 덜 자란 아기 새처럼 받아먹는 것을 즐겼었다.
‘이제 안 해 주려나.’
하녀가 다정하게 챙겨 주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 아쉬워지려 했다.
“여태까지 해 준 거 다 먹을 만했어요. 나니아는 분명 좋은 엄마가 될 거야.”
벨이 배시시 웃으며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어영부영 식사를 마치고 헤르의 수다가 이어졌다. 남자는 본 것도 많고 한 것도 많고 말도 많았다.
“님프들의 숲은 무척 아름다웠죠. 그들에게는 일상이겠지만, 저에겐 정말 멋진 휴양림이었어요.”
파키케팔로가 턱을 괴고 말했다.
“우와. 난 가 본 적 없어.”
“한 번도?”
“한 번도.”
님프들이 사는 영역에 발 들여 본 적 없기는 챠링고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사이가 좋지 않으니까. 접근이 쉽지 않지.”
그녀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도 숲을 홀라당 태워 먹었죠.”
알 만하다는 듯, 다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니아는 재미없는 이야기를 남겨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무언가 어지럽혀져 있는 꼴을 못 봤다. 다 먹은 그릇들을 겹쳐 올리며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왜 설거지는 매번 나니아의 몫이죠?”
벨이 불만스럽게 이야기하자, 하녀가 정색했다.
“아니요. 제가 할 거예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나니아의 표정이 보기 드물게 단호했다. 리자드들이 닦아 오는 꼴을 보면 도무지 성에 차질 않는 것이었다.
벨은 멋쩍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나니아를 쫓았다.
“저도 같이 가요.”
하녀는 무엇이든 자기 손으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벨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그저 나니아의 곁에서 말동무 노릇이나 하였다.
“여신이 아니라 요정이었군요….”
나니아가 중얼거렸다. 한때 공주를 시기 질투했던 것도 이제는 다 머나먼 이야기 같았다. 그녀가 인간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녀에 대한 열등감을 한 풀 꺾어 내리는 사유가 되었다.
“원래 님프들은 다 그렇게 아름다운 거예요?”
숲의 요정이기 때문에 이렇게 예쁜 것이라던 벨의 말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벨로즈도 무어라 자신 있게 답할 형편이 못 되었다. 구중궁궐에 갇혀 자란 그 역시 아는 게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글쎄요. 나도 태어나서 나 말고 다른 님프를 딱 한 명밖에 못 봐서요.”
그마저도 자신과 똑같이 생긴 얼굴이었기 때문에, 표본으로 삼기도 어려웠다.
나니아의 입으로 듣는 찬사는 벨로즈의 흡족하게 만들었다.
“내가 그렇게 예뻐요?”
님프가 싱긋 웃었다. 둥글게 접히는 눈매가 매혹적이었다.
나니아는 무어라 대꾸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물 묻은 손을 털었다. 깨끗하게 씻은 그릇들을 마른 천 위에 차곡차곡 쌓았다.
벨은 돌 위에 앉아 길고 고운 다리를 까닥거렸다. 님프의 흰 다리는 기분 탓인지 조금 더 길고 탄탄해진 것 같았다.
그가 무릎에 받친 팔로 턱을 괴어 나니아를 빤히 쳐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그래서, 생각해 봤어요?”
“…예?”
“임신 걱정이 없는 상대와 섹스할 수 없는 이유.”
벨이 뜬금없는 소리를 지껄이자, 나니아는 손에 든 그릇을 물에 떨어뜨렸다.
“생각해 보기로 했잖아요.”
흐르는 물에 두둥실 떠내려 가려던 그것을 허겁지겁 잡아 올리며 더듬더듬 대꾸했다.
“…그, 그게 왜….”
나니아는 께름칙한 얼굴로 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묘한 얼굴에서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지금 여기서 왜 그 얘기가 나오는 거지?’
예쁘다든가, 아름답다든가, 찬미하는 말에 흔연히 기뻐하던 벨의 미소가 눈에 밟혔다.
“그, 그거는… 라히무스 때문에 물어보신 줄 알았는데요….”
어수룩한 눈동자가 벨의 반응을 살폈다.
“뭐, 그것도 있고.”
바짝 긴장한 하녀와 다르게 님프는 태연하기만 했다.
나니아는 설마설마하는 생각으로 손끝을 씹었다. 남자가 치근대는 것을 귀찮게 여기던 벨의 모습과 자신에게 유독 살뜰히 대해 주던 벨의 모습이 겹쳐졌다.
목 끝까지 차오르는 질문이 있었다.
‘혹시 저한테 관심 있으세요?’
하지만 나니아는 자신의 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거한 착각으로 수치스러운 짓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라히무스가 뽀뽀하려는 줄 알고 입술을 내밀었던 자신을 생각하면 지금도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싶었다.
“저,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 마세요…. 왜냐면 벨 님께서, 그, 말을 너무 어렵게 하시니까요…. 제 말이 좀 무례하더라도 이해를 해 주셔야 해요….”
진심으로 묻고 싶은 질문은 혀끝에만 맴돌았다.
무슨 말을 꺼내려는 것인지 포석을 잔뜩 깔아 놓는 하녀를 보며, 벨은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떴다. 공주는 아량 넓어 보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물대던 하녀가 매우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여자… 좋아하세요?”
세상 어딘가엔 같은 성별끼리의 연애를 즐기는 사람도 있다 들었다. 하지만 나니아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동성을 그렇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벨의 은근한 추파는 난감하고 곤란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수초를 기다려도 대답하지 않는 공주 때문에 아찔해졌다. 하녀는 눈을 질끈 감고 용기를 쥐어 짜 냈다.
“죄송해요, 벨 님…. 저는… 남자를 좋아해요.”
말해 놓고 나서 보니 얼굴이 화끈해지는 소리였다. 어딘지 발랑 까져서 남자를 밝히는 계집애처럼 보였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도저히 돌려 말할 수가 없었다.
벨의 갸름한 얼굴이 턱을 괸 손바닥에 푹 잠기었다. 그는 나니아가 눈치가 영 없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남자면 되는 건가요?”
공주의 질문에 나니아는 탄식을 터뜨렸다. 그녀의 터무니없는 가정이 안타까웠던 탓이다. 여자를 좋아한 나머지 남자가 되는 상상을 해 본 적 있는지도 모른다. 소녀는 오만하게 동정하였다.
“아니에요, 벨 님. 저번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서, 성관계는요, 사랑하는 사람하고 하는 거예요….”
남녀를 떠나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나니아는 설교하면서도 어딘지 가슴이 콕콕 찔렸다.
님프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물었다.
“그럼 라히무스랑은 사랑해서 했어요?”
“…네?”
그녀는 부모에게 아이는 어떻게 태어나는 것이냐고 묻는 자식처럼 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아니요, 한 적 없어요. 라히무스랑 그런 적 없어요…!”
소녀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안 했다고?”
님프의 얼굴이 의아한 호기심으로 빛났다. 그의 맑은 표정에서는 실연의 아픔이라든가 하는 어떤 어두운 감정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럼 여태껏 내가 들은 당신 신음은 다 뭐였어요?”
공주가 또다시 천사처럼 고결한 얼굴로 난잡한 질문을 던지자, 나니아의 머릿속에서는 천둥이 쳤다. 대체 언제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걸까. 짐작 가는 바가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소녀는 기어코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뇨, 그거는…. 그건,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라….”
나니아는 엉겁결에 진실과 거짓을 섞어 둘러대었다.
“실수, 실수였어요. 워낙에… 아시잖아요, 라히무스가 워낙….”
나니아는 무어라 말을 완성하지 못하고 얼굴을 손바닥에 파묻었다.
이제 와 그의 관능을 탓해서 무엇하겠는가. 차마 그의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육욕에 져 버린 적 있노라고 인정할 수 없었다.
안 그래도 라키바하프와 라히무스의 문제로 마음이 어지러운데, 공주님까지 합세하니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말도 안 돼….’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벨은 그녀가 예쁜 얼굴에 쉽게 홀리는 점이나, 리자드의 육체적 꾐에 자주 넘어가는 점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나니아의 말은 섹스보다 사랑이 먼저라는 거네요.”
사랑 없이 섹스하지 않는다는 말은 임신 걱정으로 섹스할 수 없다는 말과는 전혀 달랐다.
공주는 전혀 실망한 기색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흥얼거렸다.
“좋아. 나도 그거 좋아해요. 사랑.”
나니아는 고개를 들어 벨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나사 하나 풀린 듯한 대답은 나니아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고 물어보려던 그때, 달빛만을 비추던 강물 위로 붉은 횃불들이 나타났다.
하나둘씩 점점이 어른거리던 그것이 거무죽죽한 인영들을 몰고 나타났다.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여자다! 둘이나 있어!”
누군가 아주 횡재했다는 듯 소리 질렀다. 뒤이어 사출 신호가 떨어졌다.
“쏴라!”
나니아와 벨로즈 모두 돌연한 기습에 창황하였다. 그 틈을 타 엉성한 궤도로 화살이 날아들었다.
벨이 숨을 집어삼키고 나니아가 그를 돌덩이 아래로 끌어 내리는 사이, 당사자들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쏜살같이 달려오는 남자가 있었다.
나니아는 강가의 돌무지에 털썩 주저앉아 탄식하듯 그의 이름을 터뜨려 불렀다.
“라히무스….”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리자드가 그들을 엄호하기 위해 달려든 것이었다. 위험을 감지한 맹수의 몸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공격 신호보다 한발 앞서 달려온 그는 날아든 화살을 똑똑히 움켜쥐었다. 리자드의 커다란 앞발이 가느다란 나무 살대를 무참히 동강 냈다.
“뒤로 빠져.”
남자가 바윗돌 같은 몸을 한 발 내디디며 말했다.
“하, 대체….”
벨로즈가 황망히 바닥을 더듬었다. 나니아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공주의 팔을 잡아당겼다.
“머리, 머리 숙이세요…!”
수상쩍은 패거리의 급습은 물론이요, 갑작스러운 라히무스의 등장도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여자 둘 외에 한 놈 더 있다!”
누군가 기름 바른 화살에 불을 붙였다. 이번에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리자드가 급히 등을 돌려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한 나니아와 벨을 감쌌다. 남자의 너른 육신은 방패가 되었다. 도당들의 화살 몇 개가 라히무스의 등허리에 박혔다.
“씹….”
그는 나지막한 욕설과 함께 손에 잡히는 화살 하나를 뽑아냈다. 상당히 찌릿했다. 불로 공격하기 위해 불을 붙인 화살이 아니었다. 연소는 수단일 뿐이었다.
쓰러지지 않는데? 저건 뭐야? 놈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속으로 들어가. 가능한 머리끝까지 담그고 있어.”
리자드가 팔을 뻗어 지시했다. 우물쭈물 몸을 움직이는 그들을 향하여 고함쳤다.
“빨리!”
리자드는 뒤이어 날갯죽지에 꽂힌 화살을 신경질적으로 뽑아낸 뒤 우거진 수간으로 몸을 숨겼다. 야수 같은 몸뚱이가 으슥한 나무줄기를 올랐다.
당황한 적들이 횃불을 흔들어 보았지만 그를 찾을 수는 없었다.
“여, 여자들부터 잡아!”
누군가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리자드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크억!”
나무 위로 몸을 숨겼던 라히무스는 무리의 중심으로 뛰어내렸다. 그 과정에서 한 남자의 머리를 세게 걷어차며 쓰러뜨렸다.
정신을 잃은 그의 배 위에 발을 올리고, 그것을 회전축 삼아 눈에 들어오는 놈의 얼굴에 주먹을 내질렀다. 작정하고 휘두른 꼬리는 철퇴가 되어 서너 사람의 하지에 통렬한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차례로 한 놈씩 골로 보내는 와중에, 리자드의 귓가에 철벅거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아차 싶었을 땐 이미 한 놈을 놓친 후였다. 물을 건너 도망치려는 것인지 여자들을 인질로 삼으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옳지 못한 방향이었다. 남자는 바닥에 드러누워서 바르작대는 놈을 한 차례 발로 밟아 주고 강가를 향해 다급히 뛰어갔다.
나니아는 이럴 때 사용할 수 있는 원소 기술 하나 배우지 않았음을 후회하며 차가운 물속을 허우적댔다. 사위가 불분명한 어둠과 거친 물소리는 그녀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긴 다리로 사냥개처럼 쫓아온 리자드가 마지막 한 놈의 머리통을 붙잡고 강물 깊숙이 처박았다. 목덜미에서부터 꽂아 넣은 손가락이 뒤통수까지 올라와 머리채를 쥐어뜯듯이 잡았다. 그는 몇 번이고 머리를 들어 올렸다 다시 처박기를 반복하며 잔인한 성정을 내보였다. 벅찬 물고문에 괴로워하던 남자가 콜록대며 목숨을 구걸했다.
“살, 살려 주세요, 살려, 푸억….”
자술시킬 목적으로 마지막 한 놈의 목숨을 살려서 베이스캠프로 데려왔더니, 그쪽에도 이미 한패로 보이는 놈들이 두엇 잡혀 있었다.
벨은 그들이 폴핀에서부터 쫓아온 추격자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와 무관한 산적 떼였다.
챠링고는 괘씸해서 안 되겠다며 그들이 본거지로 삼고 있는 오막살이로 안내하게 했다. 일행은 도적 떼의 근거지를 샅샅이 뒤지며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갈취했다.
“가진 거 다 내놔. 내놔, 내놔.”
파키케팔로가 흥얼거리며 서랍을 칸칸이 열어젖혔다.
“또 숨겨 놓은 거 있어? 있으면 빨리 말해.”
챠링고가 손등으로 포로 한 명의 얼굴을 탁탁 두드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과연 누가 악당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포로 셋은 가지런히 의자에 묶여 있었다. 그중 하나가 눈물을 찔끔 짜며 호소했다.
“모,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귀중품을 뒤지는 챠링고나 파키케팔로와 다르게, 라히무스는 벽에 걸려 있는 무기들에 더 관심을 보였다. 그는 무언가 찾는 것이 있는 것처럼 칼자루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에 챠링고가 잔소리를 했다.
“고물덩어리 말고 돈이 될 만한 걸 찾아. 계속 네 돈 쓰기 싫으면.”
라히무스는 칼등을 벗겨 칼날까지 살펴보았다. 그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술지를 두른 화살을 썼어.”
“엥?”
사내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는 칼을 다시 벽에 걸어 놓으며 말했다.
“너나 나를 보고도 놀란 기색이 없지.”
리자드는 여분의 의자를 끌어다 포로 셋 중 가장 겁에 질려 있는 놈의 앞으로 던져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주머니에서 잭나이프를 꺼냈다.
포로의 손은 팔걸이에 단정히 묶여 있었다. 리자드는 그의 약지와 중지 사이에 나이프를 쑤셔 박으며 몇 차례 비틀었다.
위협당한 남자가 겁을 내며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리자드의 사나운 눈동자가 다음은 네 손가락 위로 쑤셔 주겠다고 말하는 듯했다.
인간의 화살촉 따위, 그에게는 바늘에 찔린 수준으로 따끔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등에 쏘아 박은 화살은 달랐다. 리자드는 틀림없는 전격을 느꼈다. 그것은 분명히 원소 공격이었다.
“너네 뭐야.”
라히무스가 물었다.
그리고 파키케팔로가 방금 찾은 종이 뭉치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엥, 진짜로 있네.”
방관하던 다룸이 다가가 그에게서 종이를 받아 들었다. 몇 장 넘겨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급이 낮은 것들뿐이지만, 분명 술지가 맞네요.”
포로 중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그리고 잘되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요, 맞아요, 저, 저희는 그저 유멘타 사냥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용의 후예들이신 줄 알았으면, 어, 어딜 감히 덤볐겠습니까?!”
리자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의 간절한 하소연에서 아첨의 기운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저는 게롤린에 알고 지내는 리자드 형님들도 많구요, 그, 그것도 다 그 형님들이 쓰라고 준 겁니다. 아, 아무튼 저희는 당신들 적이 아닙니다, 예?”
“적?”
파키케팔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당연히 아니지.”
방긋 웃던 것도 잠시, 포로들은 이어지는 말을 듣고 몸을 굳혔다.
“인간이 어떻게 리자드의 적이 될 수 있겠어.”
씨익 웃는 리자드 청년의 미소에 어딘지 소름 끼치는 잔혹함이 깃들었다.
나니아는 파키케팔로의 말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말없이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던 그녀는 포로들의 말을 곱씹었다.
‘유멘타 사냥이라는 것은, 인간을 사냥하는 중이었다는 말인 걸까? 인간이 같은 인간을? 왜?’
챠링고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런 허접 무뢰배들이 어떻게 우리 존재를 아는 거야?”
그녀는 무뢰배라 칭한 이들의 머리통을 손가락으로 툭툭 밀었다.
다룸이 아는 바가 있다는 듯 말을 얹었다.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게롤린은 사잇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무법 지대나 다름없습니다.”
사잇법이란 서대륙 생물들이 동대륙에서 지켜야 할 그들만의 국제법을 이야기했다. 사잇법의 가장 커다란 목적은 동대륙 인간들이 서대륙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도록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비물질문화가 물질문화의 비약적인 발전 속도를 쫓아가지 못한 경우라고 해 두죠.”
챠링고가 골치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사실 사잇법이 지켜지든 말든 우리 같은 하루살이 용병들이 알 바는 아니긴 한데…. 그래도 영 찜찜하군. 일단 죽이지 말고 잡아가자. 들어 봐야 할 내용이 더 있을 것 같으니까.”
그들은 지나가는 여행객을 습격하여 재산을 갈취하는 강도 단체였다. 문제는 그들이 물건만 훔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훔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사냥당한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게롤린으로 가면 유멘타를 취급하는 사, 상인들이 있습니다. 노, 노, 높은 값을 쳐주니까…. 농사일로는 절대 못 만져 볼, 그런 돈 못 만져요.”
먹고 살기가 고달파서 그랬다는 변명을 들으며, 나니아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나니아가 아는 유멘타란 인간을 뜻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은 마치 사고파는 것이 가능한 가축이나 물건처럼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리자드들은 간혹 미간을 좁히며 주름을 잡기도 하였으나, 그들의 얼굴 위에서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종류의 의구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자는 유일한 동족인 헤르를 조용히 오두막 밖으로 불러냈다. 언제나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붉은 리자드의 시선이 따라붙었지만, 무시한 채 문을 닫았다.
나니아가 물었다.
“당신은 유멘타가 아니라고 했죠. 그럼 저는 유멘타인가요?”
여자는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다룸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건 당신이 알겠죠. 왜 나한테 물어봐요?”
그러고는 상대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다룸을, 나니아가 소매까지 잡아 가며 말렸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유멘타가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몰라요. 인간을 비하하는 단어라고만 알고 있어요.”
그러자 헤르는 아주 께름칙하고도 떨떠름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님프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당시와 비슷하게 당혹스러워하는 것도 같았다.
“당신 정말 아는 게 별로 없군요.”
언뜻 무시하는 언사 속에 옅은 동정이 섞였다. 그는 한숨을 한번 푹 내쉬더니 설명을 이어 나갔다.
“유멘타는 서대륙 지배 계층이 부리는 노예 계급의 인간을 말합니다. 저렇게까지 공공연하게 포획하여 매매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을 줄은…. 나도 오늘에야 처음 알았습니다만.”
헤르는 무언가 마음에 켕기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나니아의 빗장뼈 근처를 쿡 찌르며 물었다.
“당신은 평생 동대륙에 남을 사람입니까? 아니면 저들과 함께 바다를 건넙니까?”
남자는 전부터 일행인 듯 일행 같지 않은 나니아의 이질적인 존재에 의구심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지금 사잇법을 어겼습니다. 만약 당신이 이 사실을 널리 떠들고 다닌다면, 나는 동대륙 비밀 안전 보장법 위반으로 국제 상협에 쫓기는 꼴이 되더라도 할 말 없는 입장이 된 거죠. 부디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불쌍해서 알려 주긴 하겠으나 뒷말 나오는 일 없도록 어디 가서 발설하지 말아 달라는 이야기였다. 나니아는 그의 말을 곱씹고 생각하느라 무어라 조속히 대답하지 못했다. 그사이 다룸은 또 한 가지 경고를 남겼다.
“조언 하나 해 드리죠. 리자드들을 믿지 마세요. 그들은 가장 게으르고 포악하며, 누구보다 인간에 배타적인 족속들입니다.”
그리고 나니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룸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똑똑히 알게 되었다. 포로 중 하나가 용변 핑계를 대며 몰래 도망치려던 것이 발각되자 챠링고가 일말의 주저 없이 그를 베어 버린 것이었다. 그의 죽음은 나머지 두 사람에게 본보기가 되어 도망은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들에게 인간을 썰어 죽이는 일은 나니아가 벌레를 밟아 죽이는 것만큼이나 쉬워 보였다.
다음날 포로들은 마차에 실렸다. 그들은 뜻밖에 길잡이가 되었다. 도당들의 말에 따르면 부지런히 달려서 오늘내일 중으로 게롤린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니아는 헤르가 짐을 챙기는 일을 도왔고 리자드들은 말과 마차를 정비했다. 벨은 마차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포로들 때문에 좁아진 내부에 대하여 투덜거렸다.
라히무스는 어딘지 묘하게 차가웠으나, 나니아의 팔을 돌보는 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진물이 흐르는 그녀의 팔뚝에 세심히 붕대를 감아 놓는 데 열중하였다.
나니아는 라히무스에게 몸을 맡겨 놓은 채로 골몰히 그의 표정을 살폈다. 집중한 두 입술이 굳게 다물려 있었다.
‘…다정해.’
살뜰히 챙겨 주는 그가 고마웠다. 함께 보듬어 주고 싶은 기분이 들어, 그녀도 뒤늦게 라히무스의 부상을 걱정하였다.
“화살 맞은 부위는 괜찮아요?”
“어.”
“거기도 약 발라야죠.”
소녀가 다정스레 말했다. 그녀는 화살촉에 구멍 났던 그의 등가죽을 다시 살펴보려 했다.
하지만 리자드는 굉장히 무심한 목소리로 그녀의 관심을 몰아냈다.
“그런 걸로 낫는 상처 아냐.”
“그, 그래요…?”
매몰찬 거부에 소녀는 기가 죽었다.
나니아는 그가 곱게 감아 준 붕대 끝을 만지작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어제 일을 물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거기 있었던 거예요?”
“뭐가.”
“어제 말이에요. 라히무스가 1초라도 늦었다면 그 화살은 내가 맞았을 텐데…. 금방 나타나 줬잖아.”
그녀는 고마움을 표하려던 것뿐인데 남자는 눈에 띄게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리자드는 허를 찔린 사람처럼 어영부영 둘러대었다.
“…그냥,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야.”
나니아는 라히무스가 무슨 용건으로 자신을 찾았던 걸까 궁금해하다가, 이내 챠링고가 묻는 말에 신경이 팔려 그 생각을 날려 버렸다.
“아가씨는 마차 탈 거지? 벨로즈 님은 말을 타고 가시겠다 해서 말이야.”
그녀는 어지간히 인간 남자들과 함께 있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헤르까지 합하면 셋이니까, 이례적으로 남자가 과반수였다.
“어, 저는요….”
마차에 탄 사람과 마차를 끌 사람을 가늠하던 나니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라히무스를 돌아보았다. 어딘지 기대감을 품은 듯한 그녀의 눈동자가 별을 품은 것처럼 반짝 빛나 보였다.
“저기, 라히무스.”
여자가 머뭇거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리자드는 대답 없이 그녀의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발갛고 조그마한 입술이 물어 왔다.
“오, 오랜만에 라히무스 말에 태워 줄래요…?”
수줍게 물어 오는 나니아의 얼굴 위로 발그레한 홍조가 피어났다. 자리가 좁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의 몸에 닿아 있고 싶은 욕망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몰라 소녀는 낯 뜨거운 구실을 찾았다.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던 사내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가 돌려준 대답은 매정한 거절이었다.
“…안 돼.”
리자드는 비정한 음성으로 단언하더니, 아예 등을 돌려 자기 말 옆으로 걸어갔다.
아주 짧은 거리지만 그의 뒤에 남겨진 나니아는 부끄럽고 무안하여 고개를 푹 숙였다. 이 정도로 매몰차게 거부당할 줄은 몰랐던 터라 상당히 굴욕적이었지만, 분통 터뜨릴 입장은 못 되었다.
“내가 태워 줄까요, 나니아?”
그 치욕스러운 빈틈을 님프가 파고들었다. 하지만 나니아로서는 고마운 마음보다는 창피한 마음이 더 컸다. 남에게 이 부끄러운 대화 내용을 들켰다는 생각에 낯 뜨거워졌다.
민망한 기분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라히무스가 그녀에게로 뚜벅뚜벅 걸어 돌아왔다.
“타.”
명령하듯 이야기하는 낮은 음성과 살벌한 얼굴이 섬찟했다.
“으응…?”
변덕쟁이 리자드는 마음을 바꾸어 자신의 앞자리에 나니아를 태웠다. 소녀는 자신이 바라던 바대로 되었음에도, 어딘지 성난 것 같은 그의 얼굴이 무서웠다.
벨은 그 옆에서 빙긋빙긋 웃고만 있었다.
속보로 뛰어가는 말 위에서 나니아는 두리번거렸다. 사내의 두꺼운 팔이 양옆을 조였다. 울끈불끈 솟은 핏줄을 보고 있자면, 그는 팔뚝에도 심장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니아가 고개를 비스듬히 꺾어 물었다.
“나 기대도 돼요?”
“…안 돼.”
여자는 그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뾰로툥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치이….”
그리고 흘러가는 바람 소리에 묻힐 정도로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자꾸 안 된다고만 하구….”
리자드는 그녀가 무어라 말했는지 제대로 듣지 못해 되물었다.
“뭐?”
짧고 다정하지 못한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아프고 시렸다.
“왜 그렇게 나한테 차가워요?”
나니아가 물었다. 그러자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만 같은 캄캄한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뭘.”
언젠가 같은 질문을 그에게 들었던 것도 같은데. 나는 왜 그렇게 라히무스에게 차갑게 대했더라.
나니아는 자신의 과거 행적을 곱씹어 보았다.
그렇게 둘은 어색함을 가득 싣고 나무가 드문드문해진 들판을 달렸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면서도 말의 뜀박질에 동조했다. 몸을 띄우고 앉기를 반복하는 사이, 속도를 이기지 못한 몸이 자연스레 라히무스와 접촉하였다.
그러다 갑자기 남자가 몸을 깊게 눌러앉으며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정지 신호를 알아들은 영리한 말이 천천히 자리에 멈추었다.
사내가 예고 없이 멈추어 서자 마차도 고삐를 잡았다.
“뭐야, 갑자기.”
뒤편에서 챠링고가 시큰둥하게 물어 왔다.
나니아도 의아한 마음에 몸을 돌려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그때 리자드가 신경질적으로 버럭 짜증을 냈다.
“젠장, 내려.”
“…뭐라구요?”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그의 반응을 따라가기가 영 벅찼다. 나니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뒤를 돌아보니 붉으락푸르락 흥분한 리자드의 얼굴이 보였다. 무엇이 그의 성질을 돋웠는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왜….”
“내리라고. 당장.”
그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행동으로 옮겼다. 자기가 먼저 말 위에서 뛰어내리더니, 곧이어 나니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마차를 모는 챠링고의 옆으로 가 앉았다. 왜 저러느냐는 그녀의 질문엔 나니아도 답할 수가 없었다.
“이랴.”
챠링고가 다시 말의 엉덩이를 채찍으로 두들겼다. 나니아는 덜컹거리는 마부석에 앉아 심란한 얼굴로 고민하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섹스하고 싶다며 들러붙던 사내다. 죽고 못 사는 것처럼 굴던 그가 자신을 성가셔하자 뜻밖에 커다란 상처가 되었다. 사소한 접촉도 기피하며 꺼리는 반응은 적잖이 충격적이었다.
나니아는 스스로가 달콤한 과일에 꼬인 날벌레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자기 것이 아닌 물건을 탐하여 남을 번거롭게 하는 초파리.
좋아하는 것을 가질 수 없는 기분은 익숙했다. 하지만 모래 한 줌이 손안을 빠져나간 것처럼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녀는 번민하였다.
‘관심이 식은 걸까…. 내가 싫어졌나…?’
이제 와 그와 닿고 싶고 부대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자신이 나빴다. 좋다고 들이댈 땐 이런저런 말들로 거절하다가 정작 마음을 정리하려고 하니 또 들쑤신 셈이 된 게 아니겠는가. 따지고 보면 다 그녀가 자초한 셈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가슴에는 구멍이 난 것처럼 상실감이 솟았다.
‘내가 그렇게 예쁘고 귀여운 애가 아니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는지도 몰라.’
그의 눈에서 드디어 기묘한 콩깍지가 벗겨졌나 보다. 소녀는 서글픈 생각과 함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태양이 하루의 반 바퀴를 돌아 지쳐 내려앉았을 때, 벨은 엉덩이가 아프다며 다시 마차를 탔다. 소녀는 그것이 어쩐지 자기 곁에 있으려는 벨의 속셈인 듯하여 불편해하다가 이내 자의식 과잉이라며 스스로를 질타했다. 여느 때처럼 해사하게 웃는 공주의 얼굴엔 좀처럼 심산이 드러나지 않았다.
마차 안에 버티고 앉아 있던 파키케팔로가 사라지자, 포로들이 슬금슬금 나니아의 눈치를 보았다. 그중 빼곡한 콧수염을 짧게 기른 사내가 속삭였다.
“이봐…. 같은 인간들끼리 불쌍하지도 않나? 좀 도와주게.”
나니아는 그의 말을 듣고 어이가 없다 못해 괘씸했다. 우다다 쏘아붙이는 모습에서 평소답지 않게 열성적인 그녀의 분노를 느낄 수 있었다.
“당신들은 날 향해 활시위를 당겼어요. 나를 사냥하려 했다면서요. 그런데 같은 인간이라니요. 그 말이 지금 가당키나 한가요?”
격앙된 목소리는 옆에 있던 벨과 헤르의 잠을 깨웠다.
콧수염은 짧은 다리를 동동 구르며 말했다.
“아니 어찌 그렇게 말을 하는가. 다시 생각해 봐. 그게 정말 나였어? 활을 쏜 것이 나였는가 말이야. 우린 그저 순찰을 돌고 있었어.”
그는 베이스캠프를 얼쩡거리다 챠링고에게 붙잡힌 경우로, 그의 말은 언뜻 일리가 있어 보였다.
“행동 대장들은 따로 있어. 그들이 너를 공격했겠지. 나는 그냥 돈이 되는 일이라고 해서 따라왔을 뿐인데, 이런 일인 줄은 몰랐어.”
나니아는 하소연하는 그의 눈동자에서 결백을 읽어 내려 하였으나, 이내 관두었다.
“…거짓말. 어쨌거나 한패거리였잖아요.”
여자는 허튼수작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야멸차게 고개를 돌렸다. 애당초 그녀에게는 그들을 풀어 주고 말고 할 권한도 없었다.
“게롤린의 치안대를 만나게 되면 당신들을 고발하겠어요. 그… 그러자고 할 거예요. 그럼 당신들 영주가 당신들을 법대로 처벌하겠죠.”
탈옥수치고는 제법 용감한 발언이었다.
나니아의 말에 또 다른 포로 하나가 피식 웃으며 비웃음을 흘렸다. 마르고 신경질적으로 생긴 그는 땅딸막한 남자보다 조금 더 체념하였으며 조금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게롤린에서 도마뱀 놈들이 노예 거래로 활개 치는 게 다 누구 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의 말에 벨과 헤르가 확실하게 고개를 들었다. 두 쌍의 푸른 눈이 남자를 향했다.
“높으신 분들도 눈감아주고 있는 거라고. 자기들도 득 보는 게 있으니까 말이야.”
그는 밧줄로 둘둘 감겨 있는 상황에서도 어딘지 의기양양하였다.
“노예 거래라….”
벨로즈가 혼잣말처럼 웅얼거리며 마차 벽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었다.
그는 여섯 등분하여 접어 놓은 지도를 손에 들고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포트 게롤린.
이곳은 벨테그위 부자의 수완 아래 빠른 성장세로 발전한 지역이었다. 무엇이 계기였는지, 어떤 수단을 썼는지, 이제 와 어렴풋이 윤곽이 잡히는 것도 같았다.
자신이 북서쪽으로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파비푸스로부터 보고 받았다면, 벨테그위 그가 자기 땅의 선착장을 관리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런 적진의 소굴에서 배를 탄다는 건 역시 무모한 선택이었나. 후회는 하지 않지만 불안한 감정은 별개였다. 하루빨리 범선을 얻어 타야 했다.
더는 숲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로 나무가 드문드문해지고, 야트막한 석회암 절벽 아래로 너른 들판이 펼쳐질 때쯤.
언덕 아래로 해안 마을이 펼쳐졌다. 말들은 푸른빛이 바래 가는 풀밭을 힘차게 달렸다.
“바다다!”
마부석에 앉은 파키케팔로가 외쳤다. 나니아는 저 멀리 새카맣게 펼쳐지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바다라는 것은 너무나 크고 넓어서, 그녀가 보려 하지 않아도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광활하였다.
바닷물이 땅 안쪽으로 곱아들어 있었다. 물 위를 지나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했다. 모래 해안을 멀리에 두고 방풍림 너머 가팔라지는 땅 위에 그들이 찾는 도시가 있었다.
챠링고는 말을 멈추게 하여 마차의 천을 들추었다.
“이봐, 인간.”
챠링고가 물었다.
“저 다리를 건너면 곧장 게롤린인 것 같은데, 시내로 진입하는 데에 통행 허가 같은 것이 필요한가?”
똥똥한 남자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밖으로 나갈 때는 샅샅이 짐 단속을 하는 편이지마는 들어갈 때는 딱히….”
옆에 있던 다룸이 잘 안다는 듯 끼어들었다.
“전에도 말씀드렸습니다만, 흉악하고 난잡한 놈들이 많아서 치안은 개나 줘 버린 곳입니다. 좋게 말하자면 이방인들에게 개방적이라고 포장할 수 있겠네요.”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모르는 게 이상하죠. 워낙 떠오르는 항구 도시가 아닙니까. 이제껏 서쪽에 이만한 선착장이 없었으니까요.”
리자드들은 남서쪽으로 들어와서 북서쪽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애당초 계획해 둔 탈출로가 이 방향이 아니었기에, 그들에겐 완전히 낯선 초행길이었다.
본격적으로 인간들의 공간에 숨어들기 전에, 리자드들은 둔갑약을 복용했다. 꼬리가 사라진 챠링고가 포로들을 마차 밖으로 끌어내 포박을 풀어 주었다.
“니들이 인간을 잡아 넘기던 그곳으로 안내해.”
그들이 거래를 트고 있다던 유멘타 상인의 거점이 곧 땅굴일 것이고, 서대륙행 배편을 알아볼 방법의 지름길이 될 터였다.
하지만 포로 중 하나가 고분고분하지 못하게 소리를 치며 으름장을 놓았다.
“우리가 이렇게 당한 것을 알면, 우리 뒤를 봐 주던 리자드가 가만있지 않을 거다!”
그는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듣는 리자드들은 코웃음 칠 뿐이었다.
“고작 인간을 위해 동족을 해치는 리자드는 없어.”
파키케팔로가 말했다.
“쫑알쫑알 시끄럽네….”
챠링고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나니아는 가만히 서서 그들을 지켜보다가, 누군가 그녀를 갑작스럽게 잡아당기는 통에 몸을 뒤로 돌았다.
라히무스였다.
그는 나니아의 머리통을 감싸 자기 가슴 아래 붙여 놓고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처절하고 끔찍하여 몸서리가 쳐질 정도였다.
오싹해진 고개가 모로 돌아가려 했다. 하지만 라히무스가 뒤통수를 감싼 손에 힘을 주는 탓에 그러지 못했다.
피 흘리며 쓰러진 남자를 보고 파키케팔로가 마뜩잖아 했다.
“이제 하나밖에 안 남았잖아! 그렇게 쉽게 죽이면 어떡해.”
“흥…. 땅굴로 안내할 사람 하나만 있으면 돼. 어이, 너는 알아 몰라?”
챠링고가 피 묻은 검 끝을 콧수염 난 남자에게로 겨누며 물었다.
“아, 아, 알아요, 압니다…!”
분명 아무것도 모른다던 그는 덜덜 떨면서 차링고의 발밑을 기었다. 남자는 길 안내가 끝나면 자신을 살려 줄 것이냐 묻고 애원하였다.
절벽 높은 곳에 게롤린 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 사는 귀족의 거룩하고 단단한 존엄이 엿보였다.
일행이 발을 들인 아랫마을은, 북적북적한 상업지구와 민가가 혼재한 도시였다.
이것은 확실히 기이했다. 어느 순간 나니아가 이제껏 보지 못한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나타나더니, 정복을 차려입은 보초병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콧수염 난 남자가 윗주머니에서 동전 한 닢을 꺼내 보여 주자 길을 터주었다. 리자드가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제일 가치가 낮은 서대륙 통화였다.
누가 주었냐 물었더니 알고 지내는 리자드에게 받았단다. 통행증이나 다름없이 쓰인다 했다.
“땅굴 앞을 인간이 지키고 서 있다고? 숨기려는 노력도 안 할 정도란 말이야?”
챠링고가 믿기 힘들다는 듯 중얼거렸다.
“듣던 대로 개판이군.”
라히무스도 동조했다.
그것은 이미 이름만 땅굴일 뿐, 그저 높은 벽 한 겹을 사이에 둔 분할 구역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눈속임 장치도 없이 당당하게 존재했다. 이쯤 되면 약을 먹을 필요도 없었겠다며 파키케팔로가 투덜거렸다.
그들이 멈추어 선 곳은 ‘인어의 술통’이라는 이름을 가진 커다란 여관 앞이었다. 척 보기에도 그들 같은 이방인들로 가득한, 복작복작한 가게였다.
말에서 내린 챠링고와 라히무스가 말고삐를 넘겨주며 말했다.
“나와 라히무스는 이 인간을 데리고 하루라도 더 빨리 출항할 수 있는 배편을 알아보겠어. 파키케팔로 너에겐 투숙을 맡기지. 벨 님은 먼저 들어가 계시죠.”
그녀와 라히무스는 방을 잡아 놓으라며 돈까지 던져 주곤 더 깊은 땅굴의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파키케팔로는 소년 가장이라도 된 듯한 비장한 자세로 콧김을 내뿜더니, 곁에 남은 세 사람이 머리에 뒤집어쓴 후드를 한 번 더 꼭꼭 당겨 씌웠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가며 꿍얼거렸다.
“사람이 정말 많은데. 방을 얼마나 잡아야 하지?”
하녀가 소시민적으로 계산하였다.
“여자 방, 남자 방 하나씩 잡으면 되지 않을까요?”
셋, 셋이니까 인원수도 딱 알맞았다.
“엑, 그러면 너무 좁잖아!”
그러나 파키케팔로는 몹시 질색하며 반대하였다.
“일 인당 하나씩 잡아야죠.”
다룸이 뭘 고민하냐는 듯 말을 얹었다. 당연하다는 투였다.
그에 망설이는 듯하던 파키케팔로가 호탕하게 응낙하였다.
“그래, 날치기로 번 돈도 있으니까!”
이건 라히무스 돈이 아니라며, 젊은 리자드는 흔쾌히 주머니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