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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리자드의 뿔 (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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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자드의 뿔

감옥

게롤린

감자

리자드의 뿔

깊이 잠들지 못한 머리가 몇 번이고 꿈을 꾸었다. 차가운 어깨 위로 이불을 끌어당기며 어렴풋하게 눈을 떴다. 맺어지지 못한 꿈들은 눈을 뜸과 동시에 바람에 흩어지는 먼지처럼 사라졌다.

지난밤 남자의 진심은 라키바하프에 대한 반항의 발로로써 그의 존재를 이용해 보려던 악의를 격쇄시켰다. 소녀는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사람을 제멋대로 휘두르며 착취할 정도로 대범하지 못했다. 이젠 정말 갈팡질팡할 때가 아니었다.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녀가 선택해야 할 남자는 정해져 있었다. 리자드의 허튼 고백은 혹시나 하는 그와의 미래를 꿈꾸게 했고, 나니아는 그것이 두려워 도망쳤다. 마음 한구석에서 의심스러운 모양으로 싹트던 호감조차 황급히 밟아 없앴다.

잠에서 깬 하녀가 방 밖으로 나와 복도 끝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수척하고 피로한 얼굴 위로 검고 긴 머리가 흘러내렸다. 부스스한 머리털을 손으로 크게 빗어 엉망이 된 가르마를 정리했다. 붉은 기운 없이 창백한 피부가 파르라니 빛났다. 태없이 처진 눈썹과 슬픈 눈꼬리. 혈기 없어 보이는 표정엔 걱정과 근심만이 가득했다.

‘…예쁘지 않아.’

여자는 자신의 얼굴을 객관적으로 감정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가 첫눈에 반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었다. 남자를 사랑에 빠지게 할 정도의 미모라면, 역시 공주님 정도는 되어야 가능한 일이 아닐까. 넌지시 벨로즈의 방문으로 시선을 보냈다.

희고 마른 손가락이 거울을 짚었다. 더듬는 손가락 끝에 지저분한 지문이 남았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던 라히무스의 말을 믿기 힘들었다. 어젯밤의 일도 꿈만 같았다.

“안녕.”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주듯, 리자드가 그녀의 등 뒤로 다가왔다. 남자의 크넓은 몸이 한 줄기 아침 햇살마저 다 먹어 버리는 바람에 나니아의 머리 위가 깜깜해졌다.

둥그렇게 놀란 두 눈이 거울을 매개로 남자를 보았다. 산뜻하게 건네는 인사말에 비해 표정이 밝지 못했다. 덤덤한 듯 긴장한 그의 눈동자도 거울 속 나니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나니아는 몸을 움츠리며 거울 밖 실물을 올려다보았다. 익숙한 각도로 한 뼘 더 다가온 그를 마주했다.

“잘 잤어?”

안녕이라는 겨우 그 쉬운 답인사조차 돌려주지 못하는 사이, 남자는 마치 처음 말을 배운 아이처럼 두 번째 관심을 건넸다.

-드르럭, 도로록.

남자의 커다란 손아귀 안에서 거칠고 울룩불룩한 피호두 두 알이 구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쳐다볼 자신이 없었던 나니아는 호두알에 시선을 두었다.

“…응.”

리자드는 위협적인 몸을 한쪽 벽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라히무스 한 사람으로 복도가 꽉 차는 느낌이었다. 그는 단지 서 있는 것만으로도 남의 앞길을 막았다. 어깨 한쪽을 벽에 구겨 놓은 채 그가 물었다.

“난 어땠을 것 같아?”

똑같이 안부를 물어봐 달라는 뜻은 아닐 테고.

“…라히무스도 잘, 잤어요?”

하지만 그 말 밖에는 딱히 생각나는 것도 없었다.

“어땠을 것 같아.”

역시나 그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며 나니아에게로 답변의 책임을 돌렸다.

어둡고 짙은 목소리에서 건조한 기운이 느껴졌다. 차마 그의 표정을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못… 잤다고 말할 것 같은데….”

실제로 그가 잠을 잘 잤는지 못 잤는지 진위와는 별개로, 어떤 투정을 부리고 싶어 하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다.

“잘 아네.”

네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든가 뭐라든가 그런 말을 하지 않을까 싶었다.

-도로록, 드르륵.

집중력 떨어지는 아이 손에 들린 장난감처럼, 호두는 계속해서 굴러갔다. 나니아의 시선도 여전히 그곳으로 흘러내려 있었다.

보다 못한 라히무스가 벽에 구겨 놓은 어깨를 펼쳐서 한쪽 손으로 나니아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너 어제 굿 나잇 키스도 안 해 줬잖아.”

남자가 말했다. 누가 들으면 아주 지대한 책무를 빠뜨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탓하는 목소리가 무겁고 진중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나니아는 고개가 들린 채로도 눈을 내리깔고 시선을 피했다. 맞닿는 순간 불이 붙을까 무서웠다.

더듬더듬 어렵사리 망설이는 대꾸가 이어졌다.

“난, 분명 말했어…. 당신하고 나 사이에 이제 그런 거, 없다고.”

그때 삐걱, 하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보았더니 라키바하프였다. 평소와 다름없었던 그의 얼굴은 라히무스와 나니아가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한 순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긴 속눈썹 아래로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하지만 이내 라히무스는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무시하고 나니아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갈 데가 있는데, 나나.”

남자가 같이 가자는 듯 손을 내밀었다.

“가자. 아침은 밖에서 사 줄게.”

어딘지 성마른 그의 제안을 듣고 소녀는 짤막하게 의구심을 품었다.

‘돈이 어디서 나서?’

하지만 그러잖아도 이 불편한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던 차에 그의 손을 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제의 그 결심에는 변함이 없었다. 남자를 단념시키기 위해 그를 멀리할 작정이었다. 정 떨어질 짓도 몇 번 저지를 용의가 있었다.

“…네.”

여자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라키바하프의 손을 잡았다. 일부러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까드득 무언가가 부수어지는 파열음이 귓가를 스쳤다. 남자의 손안을 구르던 피호두가 박살 나는 소리였다.

* * *

얇게 부친 밀가루에 계피로 절인 사과 조각을 올렸다. 하나는 돌돌 말아 라키바하프의 입에 넣어 주고 하나는 행상인에게 받아 든 그대로 손에 들었다.

당최 무일푼이었던 그가 아침 댓바람부터 밖에서 아침을 사는 까닭이란 무엇인가.

손에 들고 있기만 하고 먹질 않는 나니아를 보며 라키바하프가 묻듯이 권했다.

“먹으렴?”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듣고도 이제 안심이 되기보단 걱정이 앞섰다. 손에 든 사과 크레이프를 좀처럼 입에 넣질 못했다. 안 먹는다고 해서 환불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랬다. 나니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디서 일이라도 하셨나요?”

“응?”

“돈이….”

“아아.”

남자가 알았다는 듯 대꾸했다.

“데려온 말을 한 필 팔았어.”

애지중지하던 녀석들 가운데 하나였다.

“더 좋은 주인 만나겠지.”

그러길 바랐다.

남자의 덤덤한 대답은 나니아의 마음을 더 불편하게 했다. 그가 말들을 얼마나 아꼈는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뭐가 그렇게 걱정스러워서 못 먹니.”

라키바하프가 웃으며 종용했다. 하녀는 마지못해 손에 든 것을 입에 물었다. 그새 찬 바람을 맞아 차갑게 식어 있었다. 간간이 호두 알갱이가 씹혔다.

“나니아 네 말대로야.”

“뭐가요…?”

“가정 교사 자리. 쉽게 구했단다.”

“아, 정말요? 잘됐어요….”

봉토 없이 장사로 먹고사는 소귀족의 자녀랬다. 라키바하프 혼자서 지난 며칠간 도시 외곽을 헤맨 결과, 무작정 저택의 문을 두드려 가며 그 안의 귀부인들과 면대를 반복한 끝에 얻어 낸 자리였다. 대단한 자신감이 아닐 수 없었다. 짧은 시간 내에 증명해야 했을 지성과 학식도 중요했겠지만, 나니아는 틀림없이 그의 반듯하고 잘난 외모가 한몫했으리라고 확신했다.

일자리를 구했다는 보고 끝에 남자가 진심으로 묻고 싶은 바를 꺼냈다.

“생각…. 해 봤어?”

그가 궁금해하는, 나니아가 해야 하는 생각이랄 게, 딱 한 가지 있었다. 뭘 물어보는지 모르지 않아서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머뭇머뭇 대답하지 못하는 그녀를 향해 라키바하프가 부언했다.

“나머지 말 두 마리도 팔아서 집을 구할 수 있을 거야. 아주 대단하진 못하겠지만.”

남자의 설득 같은 다짐은 어딘지 간절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나니아는 라키바하프의 예상과는 다른 걱정을 했다.

“그럼 공주님이랑, 리자드들이 탈 말이….”

나니아가 손가락을 접어 가며 헛간에 묶여 있던 말들의 머릿수를 셌다.

가주님이 타고 오신 것 한 마리, 공주님이 타고 오신 것 한 마리, 라히무스와 함께 타고 온 것 한 마리, 챠링고와 파키케팔로가 데려온 것 두 마리….

그러자 라키바하프는 네가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다는 듯 은근하게 역정을 냈다.

“그건 내 말이다. 그놈들 것이 아니야.”

그는 파비올라에서부터 타고 온 말 세 마리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남자의 말에 하녀는 움츠러들었다. 어딘지 불쾌해 보이는 그에게 대든다거나 반박할 용의는 없었다. 다만 그들이 이러한 라키바하프의 계획을 전혀 모르고 있을 것 같아서 불안해졌다. 아무래도 오늘 돌아가면 말을 해 줘야지 싶었다.

남자는 그녀와 데이트 하는 기분을 내고 싶은 듯하였다. 하녀의 생각에는 한 푼이라도 아껴서 하루바삐 생활 기반을 다지는 데에 사용해야 할 것 같은데, 그는 마치 첫 임금을 받은 근로자라도 되는 것처럼 돈을 썼다.

마냥 즐겁지만은 못 했던 하루의 끝에서 하녀는 라키바하프의 입맞춤을 받았다. 달콤하기보단 씁쓸한 기분이 들 뿐이었으나 다가오는 그를 차마 밀어 낼 순 없었다. 입술이 닿는 순간 라히무스를 떠올리고 말았다. 영주의 서툴고 어색한 키스는 그 리자드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자기도 모르게 두 사람을 비교하고선 둘 모두에게 죄를 지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라히무스는 입으로 하는 건 다 잘했던 것 같다. 잘해도 너무 잘해서 문제였다. 그의 여성 편력에 대해 근거 있는 의심을 하던 나니아는, 이내 곧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가 싶어 생각하는 것을 관두었다.

나니아는 어쩌다 보니 청혼에 대한 대답을 회피한 셈이 되어 있었다. 그 또한 아직 대답을 들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아니면 재차 물어보았다가 거절의 대답이 돌아올 것을 두려워했는지, 두 번은 묻지 않았다. 하녀의 마음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음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이제는 익숙한 사잇길을 지나 샤르도네의 여관으로 돌아왔더니, 여지없이 술판이 벌어져 있었다.

“오늘은 영주님도 한잔하지?”

이미 거나하게 취해 있던 챠링고가 쾌활하게 웃으며 술병을 흔들었다. 라키바하프는 살풋 인상을 찌푸리더니 손을 내저었다.

“너도 일찍 자렴, 나나.”

기껏 권한 술잔을 거절당한 챠링고가 시퉁한 투로 끼어들었다.

“잘 거면 당신만 가서 자! 나니아는 우리랑 마실 거야. 그치, 나나?”

챠링고는 남자가 부르는 애칭을 흉내 내며 나니아에게 친근한 척 들러붙었다. 그녀의 어깨동무에서 차마 벗어나지 못한 나니아가 어색하게 웃으며 라키바하프에게 고개를 숙였다. 먼저 들어가 쉬시라는 의미였다.

라키바하프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한숨을 쉬더니 이내 그녀를 두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먼저 발이나 닦고 자려는 것이 분명했다.

곁에 있던 챠링고가 기분 좋은 듯 킬킬 웃었다. 나니아는 그녀의 손에 이끌려 전과 같은 자리에 착석했다.

어째선지 이들과 술잔을 기울일 때면 항상 껄끄럽고 무안한 상태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가, 여태껏 단 한 번도 라히무스와 편한 사이였던 적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체념하였다.

“좋은 시간 보냈어요?”

갸름한 턱에 손등을 받친 벨이 싱긋 웃으며 나니아의 잔에 술을 따랐다.

“네…? 아, 네….”

공주님이 따라 주시는 술이라니.

하지만 오늘은 이 영광을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무턱대고 들이켰다가 전처럼 자제력을 잃어 실수라도 저지를까 두려웠다.

나니아는 손에 든 술을 마시진 않고 빙글빙글 돌렸다. 애초에 이게 무슨 술인지도 잘 몰랐다.

한편 리슬링은 잘 꼬셔지지 않는 라히무스를 앞에 두고 고전 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니아가 돌아온 뒤부터는 그의 시선이 자꾸 그녀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채고 덩달아 털을 바짝 세운 리슬링이 나니아를 노려보았다.

그래 봤자 인간 여자. 상대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경계심 가득한 리자드의 눈이 의외의 물건을 포착하였다.

“너.”

놀라움으로 재빨라진 리슬링이 앞발이 나니아의 한쪽 손을 낚아채었다.

“이 반지 누가 준 거야?”

물어보면서도 이미 그 답을 알았다. 리슬링이 커다란 목소리로 반지의 출처를 묻자, 네 쌍의 눈이 각기 다른 색을 띠고 라히무스를 향하였다.

경악스러운 리슬링의 시선, 조마조마한 파키케팔로의 시선, 술이 확 깬 듯한 챠링고의 시선. 그리고 별생각 없이 깜빡거리는 벨로즈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초롱초롱했다.

불만스럽게 턱을 괴고 있던 사내가 그의 덩치만큼 낮고 음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

남자의 살벌한 시선이 테이블 너머 나니아의 손끝을 향했다.

시끌벅적한 여관 주점. 적어도 그들의 술자리에서 만큼은 짧은 적막이 감돌았다.

아차 싶었던 나니아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꼼지락거리며 약지를 깊숙이 접어 보았지만 가려질 턱이 없었다. 둘도 없을 귀한 물건이라 하여 아무 곳에나 굴려 둘 수가 없어, 계속 몸에 지니고 있던 게 문제였다. 돌려줄 타이밍을 놓쳐 버리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나 버렸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하면서 나니아는 난감해졌다. 없는 침을 만들어 삼키며 반대쪽 손으로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여기서 반지를 빼 버린다면, 그에게 망신을 주는 꼴이 될 것 같아서 우려스러웠다.

그사이 옆에 있던 리슬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말소리를 높였다.

“대체 언제 뿔을 자를 틈이 있었는데? 발정기 멀었다며!”

추궁하듯 묻는 말에 어째선지 잊고 지냈던 그의 발정기가 언급되었다. 관련 화제를 저어하는 챠링고나 파키케팔로와 다르게, 전혀 근심할 거리가 없는 벨로즈만이 맹한 척 끼어들어 말을 얹었다.

“그 멋없이 튼튼해 보이기만 하는 반지의 소재가 뿔이었나요? 라히무스 뿔은 원래 동강 나 있었는데요.”

그때 만들어 뒀나 보죠.

대수롭잖아 하는 벨로즈와 다르게 리슬링은 뿔난 송아지처럼 발끈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둘이 그렇게 오래된 사이였어? 아니 그럼 결혼했으면 했다고 진작 말을 했어야지! 유부남한테 대체 무슨!”

무언가 단단히 오해한 리슬링을 향해 나니아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니에요. 저희 그런 사이 아니고, 라히무스는 유부남 아닌데….”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같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그녀가 사내를 변호해야 할 책무성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변명했다. 반지의 존재와 결혼을 직결시키는 것을 보니 역시 내 손가락에 끼워 놓을 물건이 아니구나 싶어서 자꾸만 그쪽으로 손이 갔다.

“그럼 그걸 네가 왜 끼고 있는데?”

리슬링이 물었다. 그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성을 냈다. 보다 못한 파키케팔로가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개입하였다. 녀석은 마치 부당한 일에 맞서는 의인처럼 말했다.

“마, 맞아 라히무스. 숙녀들을 속이는 건 나빠. 아무리 상대가 인간이라도 그렇지, 짝이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해야지, 단각(斷角)을 했으면서도 그걸 가, 감추고 상대방을 만나면…. 안 되는 거 아냐…?!”

모래성같이 위태로웠던 그의 용기는 매섭게 벼려진 라히무스의 시선으로 점점 깎여 나가는 듯하였다.

남자가 섬뜩하고 음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쟤한테도 그렇게 말했나 보지?”

날카롭게 수축한 동공이 살기등등하게 상대를 노려보았다. 좀처럼 볼 일 없었던 그의 살벌한 낯짝에 소녀는 안절부절 어쩔 줄을 몰랐다. 리자드들이 자꾸만 그의 안 좋은 지점을 쑤시는 것 같아서 관여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니에요, 라히무스는 이혼한 부인도 사별한 부인도 없댔어요…. 애, 애인도 없다고….”

더듬더듬 대변하듯 늘어놓는 말들은, 어째선지 리슬링을 더 자극할 뿐이었다.

“뭐야. 그럼 반려도 없으면서 단각을 한 걸레였다 이거야?”

마치 취객이 벌여 놓은 토사물을 마주하였을 때처럼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하, 더러워.”

그녀가 던져 놓은 폭언은 신랄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나니아는 헉 소리를 내며 숨을 집어삼켰다. 리슬링의 발언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던 듯, 마냥 재밌어하던 벨도 이번에는 조금 움찔하는 것 같았다.

당장에 싸움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사내의 불같은 성미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가만히 참고만 있지는 않을 것 같아서 염려스러워졌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자를 때릴까 싶어 라히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더니, 어째선지 그는 평소처럼 분노에 차 있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서우리만치 태세를 바꾼 리슬링의 처참한 발언은 계속되었다.

“남창 새끼처럼 잔뜩 몸 키운 것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하, 진짜 제대로 속았네.”

열이 뻗친다는 듯 손부채질을 하는 그녀를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바보스러울 만치 한 마디도 못 하는 라히무스 또한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기가 차고 어이가 없어서 무어라 말도 안 나왔다. 얼빠진 채로 입술만 뻐끔거리는데, 때마침 이쪽을 돌아보는 라히무스와 눈이 마주쳤다. 시선 교환은 우연하기보단 의도적이었다. 그는 명백히 나니아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경악에 찬 그녀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불안하게 흔들리던 그의 눈동자가 더욱 거세게 요동쳤다. 무언가를 겁내듯 굳어 버린 아래턱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불안정한 심호흡이 커다란 가슴을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초조한 손끝이 술잔을 스치고 무릎 아래로 떨어졌다.

라히무스는 견디기 힘들다는 듯 앉아 있던 자리를 드르륵 밀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커다란 보폭으로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그의 발걸음은 가게 문을 향해 있었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것도 아닌, 건물 밖으로 도망치듯 사라지는 뒷모습에서 평소 같지 않은 유약함이 느껴졌다.

나니아는 황망한 시선으로 그의 뒷모습을 좇다가, 이내 리슬링을 다시 돌아보았다. 그녀가 대체 어떤 부분에서 어떤 자격으로 이렇게까지 화를 내는지 모르겠지만, 동료가 이토록 심한 모욕을 당하는데 옆에서 큼큼대기만 하는 챠링고와 파키케팔로도 야속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저기,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좀처럼 화를 내는 법이 없는 나니아의 목소리도 함께 높아졌다. 하지만 리슬링은 전혀 개의치 않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야. 너도 인간이기 이전에 같은 여자니까 알려 주는 거야. 그 반지, 받고 절대 좋아할 물건 아니다? 네가 뿔 잘라 준 거 아니라며. 그럼 저 새끼 어디서 굴러먹던 걸레 새끼인지 모르는 거야, 너. 봐 봐! 지도 찔리니까 내빼잖아.”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끼고 선 그녀가 밉살스러웠다. 나니아는 답답한 심정으로 챠링고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뿔이, 그게 그렇게 대수예요? 이, 이런 취급을 받을 일이냐구요. 불의의 사고로 어디서 부러졌을 수도 있는 거고,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왜 그렇게 속단하며 사람을 몰아세우는 것이냐 탓하자, 챠링고는 술맛 떨어진다는 표정으로 찜찜하게 입맛을 다셨다.

“너도 봤잖아. 뿔은 발정기 때 솟아나는 거라…. 어지간하면 훼손당할 일이 없거든.”

네가 잘 몰라서 하는 말이라는 듯, 덧붙이는 설명엔 여전히 라히무스에 대한 보호나 배려는 전혀 없었다.

“그때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을 수도 있죠. 사람 팔다리가 부러지는 것처럼요.”

인간이 생각하기에 그들이 얼마나 대단치 않아 보이는 사실로 라히무스를 괴롭혔는지 피력하는 나니아를 향해, 챠링고가 민망한 듯 겸연쩍어 하며 그들의 짝짓기 풍습을 설명했다.

“그…. 리자드의 두각이라는 것이 말이지, 크흠, 발정기 때 최고로 흥분하면서 말랑말랑해지는데…. 보통은 사랑하는 여자에게 바치는 거야. 흠, 흠, 어, 잠자리를 하면서…. 암컷이 잘라 주는 거지.”

발정기를 함께 지내며 흥분으로 돌출된 한쪽 뿔을 잘라 사랑을 맹약하는 그 의식은, 리자드 사회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여졌다.

곁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벨이 덤덤한 소감을 이야기했다.

“얼핏 듣기로는 무척 로맨틱한데요. 이미 그런 낭만을 누군가에게 빼앗긴 셈이군요.”

턱을 괸 벨의 시선이 나니아의 반지로 향했다. 염세적 방관자의 감상평에 이어 리슬링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뿔 없는 수컷 리자드는, 누군가가 먹다 버린 옥수수 속대 같은 존재라고. 이제 알겠어?”

“아니요, 전혀 모르겠는데요?”

사연을 다 듣고 나서도 납득이 되질 않았다. 나니아는 인상을 구기며 라히무스와 마찬가지로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니까 당신들 말은, 라히무스가 그런 말을 들어도 싸다는 거잖아요.”

부아가 치밀어서 말을 쏘아붙이는 나니아를 보고, 두 리자드가 시선을 피했다. 무언은 긍정이었다.

“어디서 문란하게 굴다가 부러뜨려 먹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니까….”

“아무리 그래도요! 사람 면전에다 걸레라느니 남창이라느니, 그런 말은 너무했다는 거예요!”

왜 요지를 파악하지 못하는 걸까 답답해서 분통이 치밀었다. 어떻게 한 명도 편을 들어 주질 않은 거지. 외려 나니아가 배신감을 느낄 정도였다.

라히무스가 자리를 피할 만도 했다. 그녀 또한 이 숨 막히는 분위기를 참을 수가 없어서 가게 문을 박차고 나섰다. 도망친 리자드를 찾아 나서려는 것이었다.

멀리 가지는 않았을 텐데. 나니아는 집 나간 강아지를 찾듯이 발길이 닿는 전방위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샤르도네의 가게 옆 골목길 사이사이, 그러다가 이내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미처 양말을 신지 못한 발가락 끝이 밤바람을 직격으로 맞아 차가워질 때쯤, 저 멀리 깜빡이는 불빛이 보였다.

언뜻 벌레 꽁무니를 연상시키던 그것은, 불꽃이었다. 남자가 비뚜름하게 입에 문 궐련 끝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차디차게 파란 달빛 아래에서 성질머리 나빠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던 그는, 저를 찾아온 나니아를 발견하곤 입술에 붙인 손가락을 떼어 냈다.

“라히무스….”

여자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천천히 다가갔다. 처음 만난 길고양이에게 다가가듯 느릿하고 조심스러운 속도였다.

남자는 비딱하고 처연한 눈빛으로 불안정하게 시선을 마주치다가, 이내 사선 방향으로 눈을 내리깔았다. 눈길을 피한 그가 한 걸음 물러서 건물 기둥 끝에 몸을 기대었다. 머쓱한 입 밖으로 허연 구름이 일었다.

잎담배도 본 적 없는 나니아는 의아해하며 손을 뻗었다. 남자가 입에 문 것을 빼내어 살폈다.

“이게 뭐예요?”

리자드는 못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재빨리 그것을 되찾아왔다. 그러고는 곧장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두툼하고 굵직했던 궐련이 남자의 커다란 발 아래 무참히 짓이겨졌다.

“…아무것도.”

남자는 착잡한 낯빛으로 나니아의 관심을 외면했다. 그녀 역시 심란한 마음으로 그의 안색을 살폈다. 단둘이 있을 때면 그래도 말이 많아지는 편이었는데, 말수가 없는 라히무스는 조금 어려웠다. 토라진 것 같기도 하고, 애석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익숙지 않게 의기소침해진 그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위로를 건넸다.

“저기, 라히무스…. 리슬링이 하는 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친절한 위안에도 그는 자신감이 바닥을 치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그리고 바닥에 버린 담배 대신 두 입술만 망연히 부딪히고 깨물었다.

또 어떤 말을 해 주면 좋을지 몰라 소녀는 갈팡질팡했다.

사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라히무스의 마음을 칼같이 잘라 낼 기회인지도 몰랐다. 리슬링과 같은 태도로 그를 대한다면, 상처받은 그가 자신에게 정을 떼고 거리를 두지 않을까.

하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상처 받아 축축해진 눈빛을 보고 있자면, 그 아릿한 생채기에 소금을 뿌릴 용기 같은 것은 나지 않는 것이었다. 모른 척 넘어갈 수 없었던 까닭은 서글픈 그의 얼굴이 잊히질 않아서였다. 남자가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다.

“…너도 내가 더러워?”

그가 서러운 입술을 열어 물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낮고 우울했다. 그 대중없는 물음에 나니아는 인상을 찌푸리고 말았다.

“사실 나는 당신들 문화는 잘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그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거죠?”

라히무스를 닦달하는 암컷 리자드들을 보면서, 처녀의 순결을 강조하는 사내들을 떠올렸다.

“솔직히 여자 경험이 없을 거라고는 생각 안 했지만….”

말끝을 흐리는 나니아를 보며 남자의 앙다문 입술이 일그러졌다. 눈을 마주치는가 싶던 그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손등으로 아래턱을 가렸다.

커다란 가슴이 한차례 솟았다 꺼지는 것을 보았다. 가쁜 호흡이 불규칙하게 흔들렸다. 남자의 목울대가 느릿하고 처절하게 일렁였다.

나니아는 숨을 집어삼키며 얼굴을 가린 그의 팔을 떼어 냈다. 그러곤 믿을 수 없다는 듯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우, 울어요…?”

손등을 떼어 낸 자리, 피를 낼 것처럼 깨문 아랫입술이 덜덜거렸다. 붉게 물들어 가는 눈시울에 아직 흘러내릴 정도로 고이지 못한 눈물이 맺혔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습한 기운을 머금었다.

“우, 울지 마요….”

소녀가 사내의 턱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남자의 울음이 손바닥을 타고 전율했다.

여자는 축축하고 발긋해진 시선을 마주하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항상 그의 앞에서 울기만 했지, 우는 그를 달래 본 적은 없어서 우왕좌왕하였다.

그사이 리자드는 자신의 앞발을 나니아의 손등에 포개었다. 남자의 울먹거리는 숨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널을 뛰었다.

“좋아해, 나냐. 좋아해.”

짙고 눅눅한 음성이 호소했다. 훌쩍이는 코끝이 뒤로 돌린 손등에 맞닿았다. 남자는 나니아의 한쪽 손등을 구원의 끈처럼 붙잡고 얼굴을 비벼 댔다. 묵직한 덩치의 남자가 어린 아이처럼 울상을 지었다.

“나 버리지 마…. 응?”

결국 눈물방울이 긴 뺨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데, 인간은 그저 혼란할 따름이었다.

눈물짓는 남자를 보며 나니아는 심히 당황했다. 언제나 냉랭하거나 음흉하거나 둘 중 하나였던 얼굴이 속죄하듯 애원하는 모습이 묘했다. 이렇게까지 울 일인가 싶었다.

“우, 울지 말고요…. 일단 들어가요.”

훌쩍거리는 숨소리가 여자와 다르게 낮고 깊었다. 힘겨운 호흡으로 눈물을 닦고 있던 라히무스의 한쪽 손목을 잡아 내렸다. 자신감 없이 눈물 젖은 얼굴과 축 처진 어깨가 너무도 그답지 않아서 낯설었다.

커다란 손에 깍지를 꼈다. 그의 육중한 팔은 무거웠으나, 다행히 나니아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움직였다. 슬며시 뒤를 돌아 살펴본 그의 얼굴엔 서러운 그늘과 상기된 홍조가 공존했다. 다 큰 남자의 우는 얼굴은 어린아이의 그것보다 훨씬 처량했다. 언제나 그에게 끌려다니기만 했지, 이렇게 손을 붙잡고 앞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온 사내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새 술자리를 파했는지 리자드들은 온데간데없고 벨로즈만이 자리에 남아 마개를 딴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나니아는 벨과 눈이 마주쳤을 때 검지 하나를 들어 입술에 붙였다. 좁아진 눈썹이 아무 말도 하지 말아 달라 부탁하고 있었다. 벨은 작게 코웃음 치며 비웃었다. 그는 또 라히무스가 허튼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방문을 닫고 그를 침대에 앉혔을 때, 사내는 긴 콧대를 찡그리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방종한 사내를 향한 손가락질의 정도도 그렇지만, 손가락질을 받는 장본인의 반응도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혼 첫날밤 순결을 의심받고 추궁당하는 신부도 이렇게 죄스러워하며 서럽게 울진 않으리라.

떳떳하고 당당하지 못한 그의 태도는 한 조각 어두운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리자드의 붉은 눈시울이 여자의 표정을 살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몰라 불안해하고 있었다. 우물거리는 입술에서 감출 수 없는 초조함이 드러났다.

“반쪽뿐인 뿔이 그런 의미인 줄은 몰랐어요.”

나니아의 담담한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새로이 알게 된 바를 건조하게 말했을 뿐인데, 남자는 또다시 왈칵하며 얼굴로 손바닥을 가져갔다.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

딱히 속았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그래요. 난 어차피 당신들 문화 같은 건 잘 모르니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말하는 차가운 태도가 남자의 불안감에 더 큰불을 지폈다.

차라리 잘됐다. 무슨 말로도 그를 단념시킬 수 없었는데, 어쩌면 이번이 기회였다. 이제 나니아는 나니아의 세계로, 그는 그의 세계로 돌아갈 순간이 도래한 것이었다.

“첫사랑이랑은 잘 안 됐었나 봐요.”

나니아는 아직까지도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빈정거리는 것은 아니었다.

반지는 이상할 정도로 온도가 높았다. 그 안에 혼백이 깃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뜨겁고 영험한 기운을 풍겼다. 보통 장신구가 아니라는 것쯤은 진작에 눈치챘어야 했는데.

남자는 울던 와중에도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첫사랑…?”

라히무스의 삭막한 인생엔 그런 달콤한 음절로 부를 만한 존재가 없었다.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앉은 그의 눈높이에서, 나니아가 반지를 빼내는 것이 보였다. 남자는 황급히 그녀의 손을 붙잡고, 빼낸 반지를 다시 손바닥 안에 넣어 주었다. 남자의 커다란 앞발이 반지를 쥔 나니아의 오른손을 소중하게 감쌌다.

“그런 거 아니야…. 한 번도 좋아서 그랬던 적 없어….”

남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손에 넣은 나니아의 주먹에 이마를 문질렀다. 그러다 눈물 마를 틈 없는 얼굴을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침대에 앉아 있던 남자의 팔이 마주 서 있던 소녀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덥석 매달린 라히무스의 얼굴이 가슴에 파묻혔다. 웃옷에 눈물 자국을 찍어 대더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품에 붙은 리자드의 턱 끝이 딱딱한 가슴골을 짓이겼다.

“직접 잘라 낸 게 아니면 역시 싫어…?”

‘글쎄 나는 당신들 상식 같은 건 잘 모르겠다니까….’

나니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항상 그랬지만 언어가 통한다고 해서 대화가 통하는 건 아니었다. 여자는 가슴에 파고드는 리자드를 가만히 마주 안은 채 그의 목둘레에 손을 얹었다. 사내의 관자놀이 근처를 더듬듯 어루만지며 그의 머리에 자랐던 뿔의 모양을 떠올렸다.

그 다정한 손길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라히무스는 애원하듯 입술을 떨었다.

“내가…. 깨끗, 깨끗한 남자가 아니라서 미안해….”

울부짖는 심장이 빠른 속도로 뛰었다. 말을 명료하게 잇기 힘들 정도로 숨이 거칠어졌다. 눈물 젖은 얼굴을 끌어안은 몸통에 비비며 마른 옷을 더럽혔다.

날뛰는 호흡은 배에 닿는 그의 가슴으로 느껴졌다. 바짝 조여든 팔 힘에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혔다.

“너에게 바칠 순결한 뿔이 없어서, 미안, 미안해, 용서해 줘.”

남자는 신 앞에 참회하는 죄인처럼 고해하였다. 나니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라히무스, 아니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리자드가 아니니까 잘 몰라요. 뿔이 없다는 이유로 당신을 경멸하려는 게 아니에요.”

사실 그들만의 문화 같은 것은 이젠 아무래도 좋았다. 알면 알수록 신비롭고 불가해한 그가 이제는 다른 의미로 버거웠다.

“나한테 사과하고 용서받을 일은 아니잖아.”

왜냐하면 냉정하게 말해서 나니아와 남자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여자는 마지막이 될 것 같은 그와의 포옹을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짙은 적색의 머리카락을 다정다감하게 쓰다듬으며, 자장가 같은 리듬으로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라히무스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니아는 그의 날카로운 턱과 뺨을 어루만지며 엉망으로 흘러내린 눈물 자국을 닦아 주었다. 마지막을 알리려는 태동이 그에겐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애처롭고 짙은 호소가 이어졌다.

“이제 걸레같이 굴지 않을게. 정숙한 수컷이 될게…. 네가 필요할 때만 찾아도 좋아. 빨라면 빨고, 핥으라면 핥고, 최선을 다할 테니까…. 응?”

어딘가 단단히 비뚤어져 있는 그의 방향성이, 처음에는 답답했으나 이제는 안타깝기까지 했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해요…. 내가 당신에게 원한 게 그런 것 같았어?”

리자드의 머리카락 사이를 누비던 손끝이 허탈하게 멈추었다. 나니아는 가만히 그의 뒤통수를 짚었다.

“남편 자리 같은 건 넘보지도 않을게. 그냥…. 그냥 곁에만 있게 해 줘.”

사납고 날카로운 줄만 알았던 사내의 얼굴이 여리게 무너져 내렸다. 듬직하게만 보이던 어깨는 이젠 길 잃은 아이처럼 가엾게 여겨졌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밀어내기 힘들었을 연민이 그의 얼굴에 있었다.

“라히무스.”

소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정한 음색이 그렇지 못한 말을 입에 담았다.

“전에도 말했죠. 인간은 한 번에 한 명만 사랑해.”

“나도, 나도 사랑해. 나는…. 너만, 너뿐이야.”

나니아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사랑한다는 말. 누구에게라도 좋으니 듣고 싶었던 말.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아니. 당신은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다른 여자들처럼 쉽게 넘어오지 않아서, 그래서 더 애가 닳는 것뿐이야.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에요, 라히무스.”

나니아의 말은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성욕과 사랑을 헷갈리지 말아요.”

고개 숙인 나니아의 입술이 남자의 이마에 키스를 남겼다. 미처 빼놓지 못한 반지를 이번에는 틀림없이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사랑스럽고 잔인한 작별 인사였다.

* * *

완성된 적 없었던 만남에 뒤따르는 이별의 여운은 마음 한구석에 보관하기에도 허름하고 변변찮은 찌꺼기로 남았다. 슬퍼하는 얼굴을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아서 행선지도 알리지 않고 땅굴을 떠났다. 라키바하프의 손을 잡고 가게 문을 나서던 날, 이른 새벽부터 그들을 배웅한 사람은 의외로 벨로즈 하나뿐이었다.

“결국 이렇게 됐네요.”

특별히 섭섭해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녀의 오묘한 얼굴빛에선 어떤 감정을 읽어 내기가 어려웠다. 어깨를 감싼 상아색 숄이 새파란 찬 바람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했다. 그것을 한 차례 추켜 두르는 손끝이 오늘따라 더 우아해 보였다.

남자가 공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따스하고 경건한 입술이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

“옥체 강녕하십시오.”

정중하고 의리 없는 인사말에 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그녀의 도도한 시선이 나니아를 향했다. 아리따운 은색 속눈썹이 거만하게 나풀거렸다. 공주가 그녀의 앞으로도 손등을 내밀었다.

“…….”

“뭐 해요?”

의도를 알아듣지 못하는 하녀를 앞에 두고 벨이 말했다.

“키스해야지.”

“…….”

모시던 여주인에게도 이런 것을 요구받은 적이 없어 얼떨떨했다. 하지만 시키는 대로 그녀의 손등을 받쳐 들고 입을 맞췄다.

나니아에게까지 입맞춤 받은 벨은 손을 거두며 다시 숄의 위치를 가다듬었다. 야트막한 호기심이 느껴지는, 그러나 어디까지나 무감한 색채의 목소리가 물었다.

“정말로 둘이 결혼해요?”

턱없이 엉뚱한 질문에 나니아의 얼굴이 빨개졌다. 부끄러운 기분이 드는 것은 그녀뿐인 듯, 라키바하프는 비장한 얼굴로 나니아의 손을 잡았다.

“네.”

얼마 전까지 반했다며 쫓아다니던 여자의 앞에서 피앙세가 생겼노라 소개하는 그의 심중을 짐작할 수 없었다. 아직 나니아는 그에 대한 답변을 돌려주지 못했음에도, 확신에 차서 대답하는 라키바하프의 선언에선 어떤 의지마저 느껴졌다.

“내 머린 이제 누가 만져 주죠?”

한탄 섞인 말에 가벼운 투정이 더해졌다. 나니아는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잘 가요. 덕분에 그동안 심심할 틈 없었어요.”

“가시는 곳까지 꼭 안전하게 돌아가세요….”

기묘했던 삼각관계의 한 변을 잘라 내면서, 후련함보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발걸음을 옮기는 도중에도 간간이 뒤를 돌아 벨의 존재를 확인할 때마다 그녀는 가볍게 손을 들어 보였다. 더는 서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게 되기까지, 공주는 계속해서 그들을 지켜보며 배웅하였다.

* * *

도심 속 저택은 파비올라처럼 커다란 외곽을 가지지는 못했다. 대신에 잘 꾸며진 중정에서 누리고픈 호사스러움이 잘 드러났다.

가지고 있는 것 중에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을 챙겨입은 라키바하프의 모습은 검소하지만 학식 있는 명문가의 셋째 아들쯤으로 보였다. 일자로 곧게 편 척추. 정확하게 수평을 이루는 어깨. 그린 듯한 고개의 위치와 가지런한 턱의 높이. 타고나길 고매한 사내의 기품은 옆에 선 나니아의 기를 죽였다. 그의 곁에서 나니아는 영락없는 하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도무지 미래를 약속한 연인 사이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응접실로 안내받은 라키바하프는 당연한 권리를 누리듯 손님용 소파에 자연스럽게 착석하였지만, 하녀는 마음이 불편해서 그러질 못했다.

이곳의 진짜 하녀는 안주인을 모셔 오겠다며 허브티를 내려놓고 사라졌다. 라키바하프는 접대받은 찻잔을 홀짝이는 데 반해 나니아의 몫은 차갑게 식어 가는 중이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호기심이 왕성하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아주 좋은 아이야. 역사 쪽은 영 젬병이지만, 지리에는 관심이 많더군. 방에는 지도가 가득했지. 파비올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 땅인지도 알더라니까. 이제 고작 열한 살인데 말이야.”

본인이 공부를 가르칠 대상의 이야기를 하면서 라키바하프는 자못 즐거워했다. 나니아 역시 그의 소개를 받아 이곳 안주인과 면대를 하고, 운이 좋으면 일자리를 얻게 될 수도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제법 긴 기다림 끝에 라키바하프가 잔은 물론 주전자까지 비워 갈 때쯤, 마침내 응접실의 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이 댁의 종도 자식도 주인도 아닌, 뜻밖의 인물이었다.

“라키.”

들뜬 목소리가 이죽거리며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라키바하프의 떨리는 손끝이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딱딱하게 굳은 입술이 그의 이름을 탄식과도 같이 읊조렸다.

“…알랭.”

재회의 기쁨을 나눌 사이는 아니었다.

성대 끝으로 끅끅끅 웃으며 나타난 그는, 라키바하프의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고종사촌이었다.

“오, 정말 상상도 못 했다는 얼굴이로군. 그 표정, 마음에 드는데.”

남자의 당찬 발걸음 뒤로 익숙한 문양의 서코트를 두른 병졸들이 따랐다. 응접실은 순식간에 그가 데려온 병사들로 채워졌다. 분란하게 움직이는 발끝의 절걱거리는 새버턴 소리가 공포심을 조장했다.

“저번에는 내가 너무 물렀지. 이번에는 늦지 않게 너를 절단 내 주고 싶지만….”

알랭의 비열한 시선이 라키바하프가 앉아 있는 의자 너머의 나니아를 향했다. 그는 실망한 듯 말을 이었다.

“안타깝게도 벨테그위 님이 더 필요로 하실 것은 너의 목 따위가 아니라 공주의 행방일 테니까. 그런데…. 같이 있다던 여자는 역시 공주가 아니었군.”

그래도 라키바하프의 종적을 알아낼 수 있던 것에 대해서만큼은 제법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었다. 파비푸스와 폴핀 사이의 커넥션은 라키바하프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긴밀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듯 나타난 그의 존재가 의아하지 않을 리 없었다.

“길에 붙은 너의 수배서를 보지 못했나? 안타까운 라키…. 혼자 잘난 척은 다 하더니만 결국 이 정도였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의 천사 같이 경건한 얼굴과 몸가짐은 어디에 있어도 너무 튀었다.

“이번엔 발목을 한쪽 분질러 놓을까. 감히 도망칠 엄두가 나지 않도록 말이야.”

알랭의 손짓에 병졸 하나가 그의 머리채를 붙잡고 바닥으로 찍어 눌렀다. 소파에서 떨어지듯 주저앉은 라키바하프의 손목이 등 뒤로 꺾였다. 그는 뒤틀린 어깨를 바둥거리며 악에 받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젠장,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공주는 어디에 있지?”

“모른다!”

남자가 턱 끝을 치켜들며 고함쳤다. 알랭은 이런 지경까지 와서도 자신에게 눈을 부라리는 그의 당돌함이 가소로웠다.

“잘라.”

남자가 손날을 흔들며 말했다.

병사 둘이 라키바하프의 양팔을 붙잡아 누르고, 한 명이 그의 몸 위로 올라탔다. 옴짝달싹할 수 없어진 그의 발목이 붙잡혔다. 라키바하프가 소리를 질렀다. 알랭의 명령은 차갑고 단출했다.

“인대부터 끊어 놔. 절름거리는 꼴이 볼만하겠지.”

분노와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이 고막을 울렸다. 나니아 역시 두 손을 포박당한 채로 가해지는 폭력에 무릎 꿇었다. 비참한 광경에 두려움이 솟았다. 후드득 눈물이 흘러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알랭은 폴핀 성주에게 지원받은 사병들을 향하여 명령을 내렸다.

“성으로 데려가. 고문 기구를 빌려야겠어. 네가 언제까지 그렇게 도도한 낯짝으로 나를 노려볼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

남자가 킬킬거리며 바닥에 엎어진 라키바하프의 얼굴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목줄을 채워서 지하에 가둬. 기왕이면 포크가 달린 것이 좋겠어. 저 오만하게 들린 면상이 한시도 내려올 수 없게 말이야.”

나니아의 손에 착고를 채운 병사가 물었다.

“이 여자는 어떻게 할까요?”

그의 물음에 알랭의 졸루한 눈빛이 나니아를 향했다.

“같이 가둬. 라키바하프가 끝까지 버티면, 그 계집은 다음이다.”

알랭의 바람대로 라키바하프의 목 밑에 날카로운 포크가 곧추섰다. 두 눈을 질끈 감은 라키바하프는 독할 정도로 욕 한 마디 없었다. 두 갈래의 쇠꼬챙이는 무자비한 각도로 숨통을 겨냥했다. 치켜든 턱 끝을 내릴 수 없게 만들어 고통을 주는 기구였다. 나니아의 팔목에 가지런히 채워진 나무 형틀은 그에 비하면 훨씬 사정이 나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들어가!”

병사의 손이 거칠게 등을 밀쳤다. 두 손이 묶인 채로는 온전히 몸을 가누기도 힘들었다.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며 무릎과 팔꿈치가 쓸리고 까졌으나 정신이 느끼는 공황에 비하면 몸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철제문이 아가리를 닫았다.

나니아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쇠창살 밖을 바라보았다. 라키바하프 역시 모퉁이를 돌아 시야를 벗어난 방 어딘가에 가둬지는 듯하였다. 창살이 철컹거리며 굳게 다물어지는 소리와 함께, 비로소 모든 것이 끝났다는 절망감이 엄습하였다.

간수들의 말소리가 넓은 지하에 나지막이 울려 퍼졌다. 라키바하프를 독방에 집어넣은 간수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영주님께선 개입하지 않으신다고 했어. 친왕파든 반왕파든 그 문제라면 골치 아파하셨잖아. 우린 그저 파비푸스에서 왔다는 그의 말을 따르면 돼.”

“견딜 수 있을까?”

“저런 남자는 어떻게든 돈이 되니까 죽이진 않을 거야.”

간수 하나가 흘긋 고개를 돌렸다.

“귀족 남자는 그렇다 쳐도, 저렇게 어린 계집애가 무슨 중죄를 저질렀다고….”

“아까 못 들었어? 반역자라잖아.”

반역. 하잘것없는 하녀의 인생에 붙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수식어. 나니아는 높으신 분들에게 자신이 얼마나 부스러기 같은 존재인지 알았다. 오늘 당장 이곳에서 죽어 나간다 해도 그녀를 기리고 애도해 줄 사람 하나 없었다. 그야말로 파리 목숨이었다.

하녀는 고뇌하였다. 이 난관을 헤쳐 나갈 방법이란 무엇인가.

그들이 첫째로 바라는 것은 공주님의 행방이었다.

아는 것을 다 실토한다면 풀려날 수 있을까.

아무리 인간 병사가 많다 한들 리자드들이 당해 내지 못할 것 같진 않았다. 그들에겐 소동이겠지만 하찮은 인간 소녀에게는 명줄이 걸린 일이었다. 공주님의 일행은 물론 리자드 커뮤니티에도 커다란 폐를 끼치게 될 것이 분명했지만, 그들을 팔아먹는 대가로 목숨을 보전할 수만 있다면….

그러나 라키바하프를 향한 알랭 개인의 원한도 문제였다. 자백한다손 치더라도, 무사히 돌려보내 줄 것 같지 않았다.

갈등하며 입술을 깨물던 소녀의 혀끝으로 비린 피 맛이 느껴졌다.

범죄자들을 대하는 간수들의 태도라는 것이, 친절할 리가 없었다. 이미 한차례 얻어맞고 터져 버린 입술 끝이 쓰라려 왔다. 손을 움직일 수 없어 팔뚝으로 더듬어 보았다. 이정도 상처쯤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앞으로는 과연 어떨까.

나니아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곳의 고문이 어느 정도 수준일지 짐작하며 두려움에 떠는 일밖에 없었다.

‘정말 여기까지인가….’

오른쪽에서 나온 눈물이 왼쪽 눈을 적시며 떨어졌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제대로 된 작별 인사라도 하고 올 것을. 죽음을 목전에 둔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은, 우습게도 라히무스였다.

소녀는 새삼 스스로의 나약함을 깨달았다. 그 없이는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린 자신이 한심했다. 제가 행복하게 잘 살 것이라 믿으며 아무것도 모른 채 폴핀을 떠날 그를 생각하니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감방 구석진 곳 새카만 철창 너머로 순서를 지켜 떨어지는 물방울의 소리가 들렸다. 콧속 가득 어둡고 습한 곰팡내가 피어났다. 차가운 돌바닥에 던져진 것이라곤 남루한 모포 자루 하나. 터진 옆구리로 메밀 껍데기가 쏟아져 나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천장은 높디높았다. 햇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터라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웠다. 식도로 넘어간 것이 하도 없어서 배도 주린 느낌이 없었다. 다만 마실 물이 간절했다.

“내일 마침 포트 게롤린으로 수감자들을 보내는 날이네.”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군.”

“여기 이렇게 드러누워서 쥐한테 뜯어 먹히며 지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지.”

“항구를 통해서 어딘가로 팔려 간다던데. 대체 누가 죄수들을 사들이는 거지?”

게롤린. 나니아로서는 처음 들어 보는 성의 이름이었다. 어딘가로 팔려 간다고?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채 그들의 대화 내용을 곱씹었다.

그 와중에 새로운 목소리가 나타나 알랭의 지시를 알렸다.

“어이, 파비푸스의 작은 영주께서 죄인을 데려오라신다.”

남자가 가져온 횃불이 새카만 방을 비추었다.

“알겠네.”

“여자는?”

“데려오라고 한 건 남자만이야.”

절그럭거리는 소음과 함께 무장한 간수들의 발걸음이 멀어져 갔다. 다시 한번 무거운 쇠창살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라키바하프를 끌어내는 듯하였다.

“꼬챙이로 턱주가리가 관통되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움직여!”

간수 하나가 윽박지르며 소리를 쳤다. 혈관 끝이 납땜을 당한 것처럼 심장이 콱 막혔다.

원통하고 두려운 마음에 사지를 비틀어 더럽고 차가운 바닥을 기었다. 아무리 꿈틀거려 보아도 손목을 죄인 칼은 무지근하였다. 거친 돌바닥에 뺨을 갈며 생각했다. 이보다 더 바닥일 수 있을까.

춥지 않은데도 온몸이 덜덜덜 떨렸다. 나약한 의식과 육신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다가올 미지에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온 정신을 좀먹어 들어갔다. 철창 너머 횃불이 타들어 가는 소리가 벌써부터 발아래를 데우는 듯하였다. 지난날 쌍둥이를 낳은 죄로 단상에 올라 화형당하던 여인이 떠올랐다. 자신도 그녀와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리란 생각에 좌절감이 밀려들었다.

* * *

“챠링고, 내 원소 화살 다 떨어졌어.”

파키케팔로가 허전한 호록을 뒤적이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챠링고는 잔소리하는 누이처럼 혀를 끌끌 찼다.

“그러니까 내가 화살 제대로 회수해 두랬지.”

그녀는 자신의 가죽 가방을 바닥으로 두어 번 내리치면서 추슬렀다. 안타깝게도 이곳 땅굴엔 주술 붙은 무기를 취급하는 상인이 없었다. 마도구는커녕 주물을 취급하는 제련공조차 찾기 어려웠다. 떠나기 전 다룸에게 무기 인챈트라도 부탁해 볼까 싶었지만, 깐깐한 낯짝으로 비싼 값을 치르게 할 느낌이라 그도 관두었다. 어차피 인간들을 상대하는 데에는 원소 붙은 무기가 필요할 일이 많지 않았다.

“하…. 저거는 언제까지 저렇게 비운의 남창처럼 앉아 있을 셈이지?”

바쁘게 짐을 챙기던 챠링고는 잠시 허리에 손을 얹고 방구석에 처박혀 있는 라히무스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작지 않은 말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진 파키케팔로가 쫓아왔다. 녀석은 문틀 너머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손가락을 세워 제 입술을 두드렸다.

“그 말 좀 그만 써…!”

“뭐가.”

챠링고가 인상을 찌푸리자, 파키케팔로는 눈치를 살피듯 라히무스의 방문을 흘긋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바람 소리처럼 속삭였다.

“남창이라든가, 걸레라든가, 그런 말 그만하라고.”

라히무스를 위한다기보다는, 앞으로의 화합과 안녕을 바라서 하는 말이었다. 파키케팔로는 그가 아직 나니아와 관련된 일로 자신을 추궁하지 않았다는 점이 못내 신경 쓰였다. 신경 쓰인다는 말은 곧 언제쯤 그로부터 주먹이 날아들까 종잡을 수 없어 두렵다는 뜻이었다. 라히무스의 고요함은 폭풍 전야처럼 불길한 구석이 있었다.

때마침 그들의 말소리를 들었는지 어쨌는지 모를 라히무스가 방 밖으로 나왔다.

“…….”

“…….”

챠링고와 파키케팔로는 대화를 멈추고 그의 얼굴에 묻은 감정을 살폈다.

남자는 바쁘게 떠날 채비를 하던 그들의 모습을 덤덤한 시선으로 훑어 내리더니, 이내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스쳐 지나갔다. 짐 챙기기에 여념 없는 리자드들과 다르게 그는 무슨 생각인지 호젓하기만 했다.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집어먹을 수 있게끔 올려놓은 왕골 바구니에서 호두 한 알을 집어 들었다. 땅콩 외피를 벗기듯 가볍게 으깨어 부수며 식탁 앞에 앉았다.

“야, 라히무스.”

챠링고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파키케팔로는 조마조마하며 두 리자드 사이에서 눈치를 보았다.

“너 어쩔 거야? 갈 거야, 말 거야.”

미적거리는 라히무스의 모습은 기어코 이런 질문을 꺼내게 했다. 그가 가지고 있을 법한 미련을 알기에, 이쯤에서 행로를 확실히 해 두자는 의미였다.

남자는 힘 조절을 못 해서 가루가 되어 버린 호두 한 조각을 입에 털어 넣으며 대꾸했다.

“가.”

나니아가 떠난 날부터 급격히 생기 없어진 눈동자엔 권태로움만이 엿보였다.

챠링고는 결국 하던 일도 멈추고 라히무스의 맞은편 자리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하…. 솔직히 나는 네가 그 아가씨 곁에 남겠다고, 지금 여기서 갑자기 때려치우겠다 해도 그러려니 할 것 같다.”

남자의 식탐은 호두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지난밤 누군가 테이블에 남겨 놓은 싸구려 술을 나발째로 배 속에 밀어 넣었다. 훤한 대낮부터 알코올을 섭취하는 모습을 보아 역시나 그다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남자가 입맛만 버려 놓은 술병을 던지듯 내려놓으며 푹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난 이 일 그만 못 둬.”

미지근한 술맛이 입에 남은 호두 껍데기에 씁쓰름하게 엉겨들었다.

“돈이 목적이냐고 물었지.”

그는 한 푼, 두 푼이 아쉬운 챠링고나 파키케팔로와는 사정이 달랐다. 다른 목적이 있을 것 같다던 그녀의 짐작대로였다.

“그래. 나는 이 의뢰의 보수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내가 필요한 건 불로과(不老果)다.”

라히무스의 말에 여자는 눈살을 찌푸리며 벨의 위치를 확인했다. 그녀의 벌어진 입술이 미심쩍은 탄식을 흘렸다.

“너 의외로 그런 욕심이 있었어?”

“…나 말고. 염황의 명이다.”

조그맣게 벌어졌던 챠링고의 입술이 더 멀리 떨어졌다. 그녀는 알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아하…?”

지체 높은 그들의 오버로드. 홍염 땅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그 남자는, 시간의 흐름조차 거스르고 싶어 했다.

“그런 일에 잘도 요령 없는 너를 보냈네.”

염황은 주기적으로 젊음의 열매를 필요로 했으나 최근 몇 년간 님프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겨 원활하게 공급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깟 노화 방지 과실 따위에…. 하여간 수컷들이란.”

리자드가 코웃음을 쳤다. 언제나 젊은 청년과 같이 아름답다던 염황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게 다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나 보다. 하지만 챠링고가 알기로 라히무스는 그에게 기르는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네가 얻는 건 뭔데. 황궁에 한자리 챙겨 주겠다고 했어?”

질문에서 비웃음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어지는 라히무스의 탄백은 덤덤하니 차분하기만 했다.

“염황이 가진 정보가 필요해.”

“그게 뭔데?”

리자드는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명심하자는 듯, 스스로에게 당부하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내 뿔을 이렇게 만들어 버린 여자의 행방.”

울로피. 그 빌어먹을 여자.

챠링고는 그 말을 듣고 멈칫하였다. 거기서부터는 그녀도 모르는 이야기였다. 지난밤을 뜨겁게 달구었던 화제가 등장하자, 꺼림칙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게 누군데? 찾아내서 뭘 어쩌게? 다시 붙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자는 손에 잡힌 주머니칼의 날을 접었다 폈다 하며 허전한 손을 움직였다. 그러고 보니 날붙이를 써 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칙적으로 쩔걱거리는 금속의 소리가 으슥하게 뜸 들이는 사이사이를 채웠다.

“글쎄….”

리자드는 오랜만에 악몽을 꾸었다.

‘저주로 빚어진 짐승아, 축복 없이 부화한 괴물아. 징그럽고 천박한 도마뱀의 아이야….’

‘아, 정말 불행하기도 하지…. 어느 누가 너 따위 걸 사랑해 주겠니.’

‘그나마 봐 줄 만한 게 얼굴뿐이잖니.’

‘지 애비랑 똑 닮아선….’

‘여기서 평생 몸이나 굴리며 살겠지.’

소름 끼치는 음성이 귓가에 선연했다.

성욕과 사랑을 구분하라던 나니아의 말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누군가를 이토록 원하고 바라 본 적 없는데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냐고 울부짖었어야 했다.

이번 기회에 깨달았다. 자신이 그녀를 찾아서 뭘 어쩌고 싶은 건지.

남자는 좌절된 첫사랑의 책임 또한 그 여자에게 묻고 싶었다.

허공을 돌던 잭나이프가 오리나무 테이블에 깊숙이 박혔다.

“…이번에야 말로 찢어서 죽여 버리겠어.”

도시에는 필연적으로 쥐가 들끓었다. 여기 폴핀에서 몇 번이고 나니아를 놀라게 했던 시궁쥐들은 이곳에도 예외 없이 나타났다. 과장을 조금 보태어 고양이만 한 것들이 뽈뽈뽈 뛰어다녔다.

저것들은 어디로 들어왔을까.

이전 같았으면 쥐를 보며 펄쩍 뛰었겠지만, 현재는 그럴 여력도 없었다. 이렇게 시체처럼 누워 있다 보면 쥐의 먹잇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지금이야 못 본 체 지나쳐 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간수들의 말대로 나니아의 살갗을 물어뜯을지 모를 일이었다.

간헐적으로 찍찍거리는 쥐 울음소리와 함께 가래 낀 듯 이상야릇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정신 차려 보세요…!”

하녀는 쇠창살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없는 힘을 쥐어 짜내어 어깨를 바닥으로 밀었다. 간신히 고개를 가눈 나니아가 쉭쉭거리는 음성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여기요, 여깁니다!”

조밀한 철망 틈으로 누군가 길쭉한 코를 들이밀었다. 킁킁거리며 움직이는 그것은 흡사 시궁쥐의 주둥이처럼 뾰족했다. 나니아의 기억대로라면 그는 틀림없이 물약 가게 앞에서 보았던 그 축수였다.

설마 이런 곳에서 그를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순간 헛것을 보는가 싶어 두 눈을 껌벅거렸다. 눈물 젖어 부은 눈덩이가 뻑뻑하고 무거웠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제가, 제가, 제가 구해드릴 겁니다…!”

나니아와 눈을 마주친 축수는 방정맞게 흥분하며 철창을 더듬었다. 이내 길쭉한 이빨을 드러내며 얼기설기 꼬여 있는 쇠망을 갉작이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소음이 지질하게 물 흐르는 소리와 섞였다. 가까이에 있는 병사들이 모두 라키바하프 압송에 동원되었기 때문인지 다행히도 들여다보는 이가 없었다. 얼떨떨하면서도 조마조마했다.

축수의 거대한 앞니는 철사도 면사처럼 갉아 냈다. 갉는 족족 끊어지며 점점 구멍이랄 것이 만들어졌다. 부지런한 이갈이 끝에 결국 나니아의 몸 하나 비집어 넣을 만한 틈이 생겼다.

“안심, 안심, 안심하세요, 안심하세요, 제가, 제가 구해드릴 겁니다…!”

축수는 나니아보다 약간 작은 몸집을 수그려 구멍을 통과했다. 그리고 겁도 없이 감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오오, 가엾으신 분…. 나쁜, 나쁜 인간들….”

축수는 안절부절못하더니 입 안에 들어온 쇳가루를 바닥에 퉤 하고 뱉어 냈다.

“이쪽, 이쪽으로 오시죠.”

쉿쉿거리는 가냘픈 목소리가 은밀하게 낮아졌다. 축수는 팔이 자유롭지 못한 나니아를 부축하였다. 여자는 무릎을 딛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앞장을 서는 축수를 따라 힘겹게 하수도를 굴렀다. 일어서서 움직이기엔 비좁은 지름이었다. 마음 같아선 결박도 함께 갉아 없애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으나 우선은 이곳을 벗어나는 일이 더 시급했다.

언제나 남들이 볼 수 없는 길로 다녀야 했던 축수에게는 익숙한 통로였다. 제정신이었다면 이렇게 더러운 바닥을 포복할 엄두는 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진창을 구를 대로 구른 상태였다. 소녀의 가죽신은 출처를 알 수 없는 오물로 푹 절어 있었다. 무릎과 정강이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무두질하며 똥오줌도 견뎌 냈던 피혁이니까. 나니아는 의연해지려 애썼다.

발등과 발끝으로 무릎을 밀어 간신히 간신히 앞으로 나아갔다. 이내 곧 경사로가 등장하면서 교차 지점의 수위가 조금 더 높아졌다.

“여기서부터는 일어나서 걸으셔야 합니다. 할 수 있으시겠어요?”

축수가 물었다.

“아…. 네, 차라리 이게 낫겠어요.”

나니아는 등 뒤의 벽을 어깨로 짚고서 어렵사리 몸을 일으켰다. 길은 조금 더 넓어졌지만, 여전히 어깨를 펴고 걷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어딘가를 지탱하지 않고서는 경사로를 걸어 올라갈 수 없었다.

“제가, 제가 뒤에서…. 허억, 허락, 허락, 허락하신다면…!”

축수는 왜소한 몸을 웅크려 나니아의 뒤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작고 앙상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밀어 올렸다. 가까스로 한 발 한 발 내디디면서 문자 그대로 시궁창 같던 지하 감옥을 벗어났다.

제법 오랜 시간 긴 거리를 걸어 빠져나온 하수도의 끝엔, 강으로 쏟아져 흐르게끔 만들어진 낭떠러지가 이어졌다. 가파른 절벽 길은 도저히 사람이 지나다닐 만한 수준이 아니었기에, 까마득하고 아찔한 순간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마침내 굴러도 좋을 풀밭이 펼쳐졌을 때, 나니아는 주저앉고 말았다. 내 한목숨 살아남고 나니 그제야 타는 듯한 목마름과 라키바하프에 대한 걱정이 떠올랐다.

“저기, 조금만 더 가시면 저희 집이 나와요…. 거기까지 걸어가요.”

축수가 가리키는 손끝에 허름한 오두막집이 보였다. 그는 인간들의 눈을 피해 후미진 골짜기에서 살고 있었다. 나니아는 오물투성이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싶어 어쩔 줄을 몰라 하다 축수에게 말을 꺼냈다.

“하, 혹시…. 이것도, 이것도 좀 갈아 없애 주실 순 없으신가요?”

그녀가 뒤를 돌아 손에 채워진 착고를 보여 주었다. 축수는 초조한 얼굴로 앞니를 드러내며 양손을 코앞으로 모으더니 히익 히익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안에, 안에 들어가셔서….”

주름진 눈살이 파르르 떨렸다. 나니아는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의 말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성에서 멀리 떨어졌으니 이곳까지 병사들이 쫓아오진 못하리라는 안도감이 컸다. 소녀는 축수를 따라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정말 고맙습니다…. 덕분에 험한 꼴을 면했어요.”

“여기, 여기 앉아 계시지요.”

축수가 높은 의자를 보여 주며 착석을 권했다. 어색하게 감사함을 표하던 나니아는 그의 말대로 했다.

그는 쓸리고 헤집어져 엉망이 된 나니아의 다리를 보며 호들갑을 떨었다.

“끄오, 오호, 오오, 옷도 많이 더러워지셨고, 곳곳에 상처가 너무 많이 나셨어요…!”

축수가 발을 동동 구르면서 기묘한 울음소리를 냈다.

“괜찮아요. 돌아가서 치료받을게요.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물 한, 아니 그 전에 어서 팔을…. 부탁드려요.”

바짝바짝 마르는 입 안쪽으로 침을 모아 삼켰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라키바하프의 안위가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한시바삐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리자드들을 찾아가야 했다. 염치없지만 매달릴 상대가 그들밖에 없었다.

“아, 물, 물, 물물, 물.”

쥐 인간은 경망스럽게 팔을 흔들며 테이블로 걸어갔다. 한 손에는 물병을, 한 손에는 손수건을 들었다. 그는 병에 든 물로 손수건을 적셨다. 상처를 닦아 주려는 듯 젖은 수건을 들고 오는 그를 보며 나니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마실 물을 달라는 의미였어요….”

“예…. 예에….”

쉭쉭거리는 숨소리에 초조한 신음이 섞였다.

“압니다…. 알아요, 아마 제가, 저는 누구보다 당신을 잘 알고, 저 말고는 아무도 모, 모르는 것 같죠…. 저는…. 절대, 절대로…. 다치시는 일이 없도록, 행복하게 보, 보필할 거예요….”

“…네?”

축수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기울여 걸음을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젖은 손수건이 나니아의 입을 재빨리 틀어막았다. 넋이 흐려지면서 수건을 적신 액체가 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 * *

나니아는 비몽사몽 눈을 떴다. 일어나 보니 익은 보리처럼 고개가 꺾인 채였다. 얼마나 한참을 이렇게 앉아 있었는지 모르게 목덜미가 뻐근했다.

“…당신 뭐야. 왜, 왜 이러는 거야….”

결박을 풀어 주지 않은 이유가 이것이었나 보다. 등받이 뒤로 돌려진 팔목엔 다시 또 밧줄처럼 비틀린 천이 꽁꽁 묶여 있었다. 이젠 아예 의자와 한 몸이 되었다. 장소만 바뀌었지 다시 또 똑같은 감금 상황이었다.

“오…. 나의 구원자시여, 눈을 뜨셨군요…!”

쥐 인간은 나니아의 정강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갸륵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행복에 겨워하며 기다란 코를 그녀의 무릎에 비벼 대는데, 마치 사랑에 빠진 남자 같아서 소름이 끼쳤다.

“내가 당신을 도와줘서, 그래서 이렇게 나에게로 접근한 건가요?”

호의로 한 행동이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이야 알았을까.

그녀가 감옥에 갇혔는지 어쨌는지 알고 있었던 것부터가 수상쩍은 일이었던 것을.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생각에 판단력이 흐려지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다른 선택지가 있었나 싶기도 했지만, 적어도 그가 왜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지 의심은 해 봤어야 했다. 도무지 누구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 그렇지요, 저를 도와주셨지요! 맞아요!”

쥐는 마치 이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 감탄하며 요란을 떨었다. 오호호, 오호호, 웃어 대는 모습에 이건 확실히 미친놈이구나 싶었다.

어쩌면 나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애당초 그는 사람도 아닌 식인귀였다.

소녀가 두려운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잡아먹을 건가요?”

그 말에 축수는 박차듯 소리 지르며 부정했다.

“아니요! 감히! 감히 제가 어떻게!”

도대체 목적이 뭘까. 나니아는 박약한 그의 늙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보면 알랭의 군사들보다는 이 축수가 차라리 만만했다. 특별히 적대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어딘지 호의적이었다. 솔직히 지능도 조금 낮아 보였다. 잘 구슬리면 자신을 풀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난…. 나는 나니아예요. 나니아 뷔셀. 당신은 이름이 뭐죠?”

나니아가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러자 축수는 이전에 리자드 장사꾼에게 얻어맞았을 때처럼 울상을 지었다.

“제, 제 이름을 물어봐 주신 겁니까? 역시, 역시 당신은…! 나의 구원이시여, 나의 진실한 인생이시여….”

쥐 인간이 바닥에 납죽 엎드려 난리를 피웠다. 나니아는 성가시다는 듯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재차 물었다.

“이름, 이름이요.”

“뮤, 저는 뮤…. 뮤라고 불리었습니다. 아아, 이게 얼마나 오랜만에 발음해 보는 저의 이름인지…!”

그것은 털이 숭숭 난 손등으로 자신의 볼을 어색하게 쓰다듬으며 얼굴을 붉혔다. 감격스러움과 부끄러움이 교차하는 듯싶었다.

소녀는 숨김없이 솔직하게, 그리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뮤…. 미안하지만 저는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일행이 아직 감옥에 있어. 리자드들에게 어서 도움을 청해야 해요. 나를 풀어 줘요.”

하지만 단도직입적인 그녀의 부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제껏 순해 보이던 눈망울이 단박에 사나워졌다.

“안 됩니다!”

그는 손에 든 장작을 휘두르며 떠들어 댔다.

“절대 그들에게 돌려보낼 수 없어요. 리자드들에게 속고 있는 겁니다! 그 도마뱀들을 믿습니까? 단언컨대 그것들은 이 땅에서 가장 야만스럽고 흉포하며, 우리 축수와 인간 보기를 아주 우습게 아는, 아주 똥덩어리로 아는, 그런, 그런, 그런 쓰레기들이라고요!”

축수는 화가 난 듯 씩씩거리다가 화덕에 장작을 조금 더 집어넣었다.

“나의 구원자시여…. 당신은 행복하게, 행복하게 나랑 살아요. 당신을 저의 신부로 맞이할 거예요. 우리 함께 낙원으로, 낙원으로 가요.”

축수가 기분 나쁘게 히죽 웃었다. 반갑지 않은 프러포즈가 풍년이었다. 벽난로에 장작을 쑤셔 넣고 돌아보는 눈빛이 그야말로 영 돌아 있었다.

“오오, 나의 신부님. 당신을 먹여 살리려면 나는 좀 더 바빠져야겠어요. 하지만 나를 구원해 주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깟 장작 따위 아깝지 않아요.”

시련의 종류가 이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이 어려움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을 수 없어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지친 입술 사이로 체념 같은 말들이 흘러나왔다.

“대체 나한테 왜…. 낙원이라든가, 구원이라든가…. 왜 내가 당신의 신이라도 된 듯이 말하는 거예요…. 나는 그냥, 당신이 일방적으로 폭행당하는 것이 불쌍했을 뿐인데. 누구라도 그랬을 거라구요.”

“오, 오, 모른다는 듯 굴지 말아요. 나를 낙원으로 데려가 줄 거잖아요. 나는 알아, 나는 아주 나이가 많은 축수니까 알고 있다구요. 어딘가에 당신 같은 사람이 계실 거라고, 저에게도 나타나 주실 거라고 믿고 있었죠.”

축수는 매우 흥분한 기색으로 방에 있던 책꽂이를 향해 달려갔다. 그의 집 안을 채운 가구들은 어디서 주워 온 것처럼 낡고 허름했다.

“물론, 믿음의 불씨가 꺼져 가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요. 하지만, 하지만! 자, 여길 보세요.”

그는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나니아에게 펼쳐 보였다.

“당신은 우리 축수들을 사랑해 줄 구원의 핏줄을 가지고 계시잖아요. 그렇죠? 당신은 낙원의 땅이 어디인지 알고 있죠? 그렇다고 말해 줘요. 오, 제발…. 해방자시여….”

그는 사이비 종교에 탐닉한 사람처럼 나니아를 추궁했다.

“난…. 난 그런 게 아니야. 몰라, 모른다고….”

“잘 봐요! 존재만으로 알 수 있다고 쓰여 있어요. 난 당신을 보자마자 느꼈다고요! 사랑을! 미칠 것 같은 사랑을!”

“하….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가 보여 준 문구는 읽을 수 없으나 구면인 느낌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일기장에 쓰여 있던 글자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대체….”

혼란스러운 눈빛이 읽을 수 없는 책장을 훑었다. 그러자 축수가 턱 소리가 나게 책을 덮었다. 남자가 기이할 정도로 입꼬리를 올려 웃으며 말했다.

“당신도 나를 사랑하게 되면, 우리 함께 낙원으로 떠나요.”

“그러니까, 나한테 바라는 게 뭐냐구요.”

나니아가 눈을 치켜뜨며 묻자, 생쥐 인간은 몸을 웅크렸다. 이미 나니아에게 몹쓸 짓을 저지른 주제에 우습게도 그녀의 심기는 거스르고 싶지 않아 했다.

“알, 알겠어요. 그렇게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지 마세요, 신부님. 따뜻하게 대해 주세요. 낙원, 낙원 아니어도 좋아요. 그런 거 없어요. 바라는 거 없어요. 그냥 제 곁에 있어만 주세요. 나는 당신 곁에 있기만 해도 행복해져요.”

부끄럽다는 듯 몸을 배배 꼬는 그를 보며 나니아는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생물이었다.

축수는 손에 든 책을 내려놓더니 다시 또 요란하게 부산을 떨어 댔다.

“저는 다시 일을 나가요. 버섯을 많이 캘 거예요. 신부님께는 조금 부끄럽지만, 저는 인간 같은 일은 못 해요. 숨어요. 숨어서 해야 해요.”

그는 어딘지 슬퍼 보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면서 허름한 배낭을 둘러맸다. 양손에는 끌과 곡괭이를 챙겼다.

“아까 오는 길에 약초 보았어요. 그 벼랑엔 돈이 될 만한 것들이 많이 자라요. 아직 땅쟁이들한테서 구한 둔갑약이 남아 있어요. 걱정, 걱정하지 마세요. 걱정 말고 기다리세요!”

축수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배웅받는 사람처럼 해맑게 손까지 흔들었다. 이내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나무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고 닫혔다. 나니아는 자신을 묶어 둔 채 집 밖으로 나가 버리는 축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자리를 비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뮤가 떠난 집에 홀로 남아, 나니아는 탈출 방법과 경로를 고민했다.

지금 이곳은 폴핀의 어디쯤일까. 리자드 땅굴까지는 얼마나 떨어져 있을까. 아까 보았던 그 강은 어디서 어디로 흘렀던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옆에서 지도를 좀 더 눈여겨봐 뒀을 텐데. 나니아는 자신의 좁은 세계와 시야를 저주하며 몸을 앞뒤로 거세게 흔들어 보았다. 다리가 높은 의자에 무릎이 묶여 그 아래로 발목이 덜렁거렸다.

‘절벽….’

땅굴도 가파른 절벽 아래 자리 잡고 있더랬다. 다룸의 원소 놀음 아래 그곳은 평범한 건물이 늘어서 있는 예사로운 공간으로 비추어진다고 했다. 이제 막 원소를 다루는 방법을 터득했을 뿐인 나니아가 보기에도 그것은 매우 어렵고 복잡한 마법처럼 느껴졌다. 얼마나 공을 들여야 그런 일이 가능할까.

문득 나니아는 무른 바위 위에 음각으로 글자를 새기던 다룸의 모습이 떠올랐다.

‘꼭 종이가 아니어도 되는 걸까….’

나니아는 고개를 뒤로 돌려 의자 등받이와 벽 사이의 간격을 확인했다. 가설을 시험해 볼 캔버스가 필요했다. 그녀는 엉덩이와 허리를 움직여 덜컹덜컹 의자 다리를 바닥에 찧었다. 의자는 조금씩 조금씩 나무 벽과 가까워졌다.

한 가닥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이었다. 그녀는 벽 위에 글자를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잉크. 나니아는 턱을 내리고 주변에 흔적을 남길 만한 도구가 없는지 살펴보았다.

나니아가 앉아 있는 의자는 마감처리가 깔끔하지 못한 목재로 만들어져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사포질을 제대로 하지 않았는지 군데군데 가시가 뾰족하게 돋쳐 있었다.

나니아의 손끝이 더듬더듬 가시를 찾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매섭고 날카로운 가시에 힘껏 손가락을 찔러 박았다.

“아….”

찌릿한 통증에 신음을 뱉었다. 오른손 중지에 핏방울이 맺혔다.

고작 이 정도로 아파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니아는 고개를 꺾어 피가 맺힌 손가락 끝을 벽에 가져다 댔다. 핏물은 획 하나도 긋지 못하고 가느다랗게 흐려졌다. 술식을 완성하기엔 너무 적은 양이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또 의자 가시를 톡톡 두들겼다. 한 차례 크게 심호흡하며, 날카로운 첨단에 손가락을 쑤셔 벌렸다.

전보다 훨씬 많은 양의 피가 새어 나왔다. 떨어질세라 아까워하며 벽으로 가져갔다.

“제발, 제발….”

그녀가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작은 화재를 일으키는 일밖엔 없었다. 무지한 신출내기 다룸은 타오르는 불씨를 상상하며 뒷짐 진 오른손으로 위아래가 뒤집힌 글자를 써 나갔다.

* * *

“예? 필요 없어졌다고요?”

다룸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벨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히 손톱 끝을 어루만지며 대꾸했다.

“네. 배울 사람이 이제 없어서요.”

다룸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양 손바닥을 펼쳐 상대방, 벨을 가리켰다.

“여기 이렇게 계시잖아요?”

그에 벨은 대꾸하기도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찼다. 벨은 다룸에게 짬이 날 때 원소술을 가르쳐 주러 와 달라는 부탁을 남겨 둔 바 있었다. 본래 목적은 벨 자신이 원소술을 배우는 척하면서 나니아를 동반시켜 그녀가 가르침을 받을 수 있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는 너무 늦었고, 나니아는 이제 없다.

벨은 내밀한 꿍꿍이를 생략한 채로 문가에 쌓인 짐을 가리키며 보란 듯이 말했다.

“이제 곧 떠날 거라서요.”

“아니….”

다룸은 그것을 보며 내가 여기까지 왜 왔지? 라는 표정을 지었다.

벨이 그의 뒤통수에다 대고 물었다.

“당신은요? 당신도 여기가 연고지는 아닌 것 같던데.”

“예, 저도 돌아가야죠. 님프께서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니…. 이제 저도 여기 더 남을 이유가 없네요. 장막 보수는 모두 끝났거든요.”

“당신도 서대륙으로 갑니까?”

“예. 아무리 제가 인간이라도, 동대륙은 불편해서 영…. 매번 오래 머물지는 못하겠더군요.”

벨의 질문에 착실히 대답하던 그는 문득 좋은 수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빛냈다.

“제가 합류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이왕 서대륙으로 가는 거, 저도 함께 경호해 주시죠.”

남자는 생각 외로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리자드는 싫으면서 리자드 용병의 보호는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거저 해 달라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도움이 되면 됐지, 방해가 되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게롤린으로 가시는 거죠?”

남자는 뻔뻔한데다 자신만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벨은 고개를 내젓는 대답을 내놓았다.

“미안하지만 우린 게롤린으로 가지 않아요.”

그 말에 다룸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죠? 근방에 서쪽으로 가는 배가 통하는 항구가 있는 도시는 그곳뿐일 텐데요.”

“저희 경로는 그것보다 더 위로 올라갈 거예요.”

“게롤린에서 더 위로 올라가면 거긴 아예 국경선 밖이지 않습니까. 설마 해협을 통과해서 가시려는 겁니까? 너무 동선 낭비잖습니까.”

다룸은 동행을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는 듯 팔짱을 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벨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어요. 그곳은 날 잡아가려는 인간의 본거지라서.”

“자세한 사정은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거긴 워낙 이상한 놈들이 많고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 곳이라 몸을 숨기기엔 더없이 좋은 곳일 텐데요.”

다룸이 아쉬워하며 벨로즈를 설득하려 했지만, 벨은 경로를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정은 어디까지나 그가 했다. 그의 결정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것은 리자드들의 몫이었다.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은 다룸의 뒤로, 짐을 나르던 파키케팔로의 깜짝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나니아?!”

그 무시하기 힘든 외침에 모두 소리를 따라 밖으로 나와 보았다.

난데없이 돌아온 나니아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은 비단 파키케팔로 뿐만이 아니었다. 벨도 챠링고도 라히무스도, 모두 할 말을 잃을 만한 상황이었다.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린 것처럼 주저앉아 있었다.

라히무스는 건물 토대 아래로 빠르게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게 무슨…. 누구야. 누가 이랬어. 어?”

멀쩡한 얼굴로 나타났어도 충분히 놀라울 일인데, 며칠 사이 온몸이 너덜거리는 상태로 나타났으니 당혹스러울 만도 했다. 험한 꼴을 당한 흔적이 여실한 모습에 리자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나니아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라히무스의 팔을 붙잡았다. 금방이라도 실신할 것 같은 상태로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하, 저…. 저, 부탁, 부탁이에요. 가주님께서, 가주님께서…!”

토악질할 것처럼 숨 가쁘게 울먹이는 그녀의 등을 보다 못한 챠링고가 두드려 주었다.

“진정하고 차근차근 말해 봐, 아가씨.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나니아는 고개를 들어 챠링고의 걱정스러운 얼굴을 쳐다보았다. 곁에 있을 때 든든했던 그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동시에 라키바하프를 두고 홀로 빠져나왔다는 죄책감을 더욱 견디기 힘들어졌다.

그녀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알랭…. 알랭 파비푸스가 쫓아왔어요. 공주님의 행방을 물었고, 저희는 반역죄로 감옥에, 저는, 저는 운이 좋아 빠져나왔지만, 지금 가주님께서, 가주님께서는….”

너무도 많은 일을 겪은 터라 차근차근 조리 있게 말하질 못했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힘겨운 상태였다. 상황을 설명하면서도 머릿속은 라키바하프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남겨 두고 온 그가 지금쯤 어떤 짓을 당해서 어떤 꼴이 되어 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일단 치료부터 해.”

라히무스가 그녀의 양팔을 와락 붙잡고 말했다. 라키바하프 따위 알 바 아니었다. 그보다는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나니아의 상흔과 발적이 걱정되어 미칠 지경이었다.

“저는, 저는 괜찮아요. 저보다 더 심한, 심한 짓을, 가주님께서….”

“네 상처부터 치료하고.”

“한시가 급해요…!”

하녀는 왈칵 눈물을 쏟으며 머리를 숙였다. 당장 무언가가 해결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처럼 손톱으로 바닥을 긁어 댔다.

그때 라히무스가 그녀의 어깨를 한 차례 거칠게 흔들었다.

“나니아!”

성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렇게 큰 소리로 이름을 불리기는 처음이라, 소녀는 일순 정신을 차리는 듯 보였다. 습기를 머금은 두 눈동자가 벅찬 호흡만큼이나 파르르 떨렸다.

“알았어, 알아들었다고. 네가 해 달라는 건 뭐든지 해!”

끓어오른 목소리가 평소처럼 낮아지더니 애달픈 시선이 그녀를 훑어 내렸다.

“그러니까 지금은, 치료부터 해.”

안녕을 고하고 헤어지자마자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난감한 듯 이마를 짚은 벨이 나니아를 걱정했다.

“그래요, 나니아. 지금 다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네요.”

곁에 있던 다룸과 리슬링도 소란스러운 상황에 가담하였다. 당황스럽고 의아한 표정으로 관망하는 다룸의 옆에서 리슬링이 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떠난 줄 알았던 인간 여자가 되돌아와 의아했던 것도 잠시. 리슬링이 샐쭉한 얼굴로 말했다.

“설마…. 저 더러운 걸 우리 가게 안으로 들일 생각은 아니지?”

‘더러운 것’으로 지칭된 소녀는 몸을 움찔 떨며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제야 하수도를 구른 자신의 모습이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자각이 된 것이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얼마나 고약한 냄새가 나고 있을까. 흉하고 더러울 자신의 모습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어쩔 바를 몰라 멈칫거리던 그 순간, 라히무스가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아, 저, 안 돼요…!”

나니아는 얌전히 안겨 있지 못하고 몸을 바르작거렸다. 자신의 더러운 몸이 그의 멀쩡한 옷을 버려 놓고 말 거라 생각하니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히무스는 가게 뒤편 상수도 시설로 나니아를 데려갔다. 뒤따라온 챠링고가 물을 받는 사이, 그가 다시 나니아의 팔을 살폈다.

리자드는 미치겠다는 듯 짜증을 내며 중얼거렸다.

“이게 대체 뭐냐고…. 어?”

챠링고가 나니아의 팔 위로 물을 뿌렸다. 흙먼지와 오물이 씻겨 나가면서 화상의 흔적이 여실히 드러났다. 쓸리고 까진 찰과상은 물론 거대한 수포가 넓게 번져 있었다. 응급 처치를 받지 못한 손등과 손목 위로 흉측하게 물집이 잡힌 것을 보며 라히무스는 이를 꽉 깨물었다.

나 버리고 그 새끼랑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떠났으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것이지. 왜 이런 꼴로 나타나서 사람 속을 또 뒤집어 놓는가 말이다.

“하, 씨발 속상하게 진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라히무스가 이내 벌컥 화를 냈다.

“네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그 새끼는 대체 뭘 한 거야?”

영주 그 자식이 가장 문제였다. 놈은 이렇게 귀엽고 예쁜 암컷을 탐낼 자격이 없었다. 자기 여자 하나 지켜 주지도 못할 거면서. 무능한 새끼.

나니아의 더러워진 몸은 챠링고가 거의 씻겨 주다시피 했다. 양팔 사용을 제지당한 그녀는 챠링고의 손에 무력하게 세척되었다. 늦은 밤이라 수도를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카락까지 건조당하는 사이, 라히무스는 본인의 객실로 돌아와 기껏 정리해 둔 가방을 엉망으로 헤집고 있었다. 젖어서 몸이 비치는 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하는 소녀에 의해 쫓겨난 후였다.

리자드의 방문 앞에 팔짱을 낀 벨로즈가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정말로 갈 겁니까.”

그가 라히무스의 등 뒤에 대고 물었다.

리자드는 본인의 꼬리를 갈무리하여 줄을 채우고 있었다. 약을 먹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대답 없는 그를 향해 벨로즈가 다시 또 신경을 긁듯이 질문을 던졌다.

“이대로 영주가 사라져 준다면, 당신으로선 좋은 일 아닌가요?”

때는 이때다, 홀랑 채 가면 될 일이었다. 벨이 생각하기엔 그랬다.

“몸소 사랑의 연적을 구하러 나서다니. 라히무스는 생각보다 관대하네요.”

벨이 비아냥거리자, 리자드는 마지막 벨트를 종아리에 조여 놓으며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씨발, 그럼 어떻게 해? 그렇게 우는데….”

그는 답답한 듯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었다. 뒤이어 책망하는 손가락 끝이 벨을 가리켰다.

“애초에 너나 나랑 엮여서 이렇게 된 거잖아.”

그들이 없었다면 지금쯤 파비올라에서 얌전히 말이나 돌보면서 지냈을 인간들이었다.

하지만 벨은 어깨를 으쓱하며 얄궂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라키바하프에겐 미안하지만 님프는 이제 와 그에 대한 책임감을 느낄 정도로 갸륵하고 선량하지가 못했다.

영주는 나니아의 발목을 묶고 있는 하나뿐인 족쇄였다. 스스로 끊어져 주다니 이보다 더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의지할 곳 없어진 그녀의 빈틈을 노려서 파고들기에 딱 좋은 기회가 아닌가.

하지만 라히무스의 사고방식은 그와 조금 다른 듯하였다.

“걔가 행복한 게 우선이야.”

리자드는 벨의 어깨를 밀치고 방문 밖으로 나섰다.

치료를 위해 여관 안쪽으로 돌아온 나니아의 팔을 보며 다룸이 참견을 했다.

“어디 불이라도 났었습니까? 부상의 정도가 심하네요.”

나니아는 화끈거리는 팔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제가 도망치려다 불을 내서…. 이렇게 됐어요.”

그 말을 듣고 다룸은 혀를 찼다. 본인이 일으킨 불에 본인이 다치다니.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다루는 방법이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게 쓰라고 가르쳐 준 원소술이 아닌데.”

박정한 그의 반응에 챠링고가 대신 골을 냈다.

“가르치긴 뭘 가르쳐? 그러게 애초에 애가 화기 저항 방법을 익히기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다칠 일 없었을 거 아냐.”

“난들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까?”

두 사람이 언쟁을 벌이는 사이, 나니아는 방 밖으로 나온 라히무스를 보며 애처롭게 눈을 빛냈다. 당장이라도 품에 뛰어들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리자드는 당황하여 시선을 피했다.

다룸이 말했다.

“우선 화상 치료부터 하죠.”

“…화상?”

그가 부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알고, 라히무스는 다시 나니아의 상태를 살폈다.

파키케팔로가 가지고 있는 약품을 탈탈 털어 보였지만 화상약이랄 것은 없었다.

“…단지 불 때문에 이렇게 크게 다쳤단 거야?”

리자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자, 다룸이 빈정거리듯 대꾸했다.

“단지 불이 아니죠. 인간의 피부는 당신 리자드들과 다르게 가연성이 높아서 작은 불에도 쉽게 다친다고요. 진피까지 손상되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일단 염증에 좋은 약이라도 좀 발라 주시죠.”

다룸이 골라 준 약을 파키케팔로가 바르는 사이, 라히무스는 의자를 끌어다 곁에 앉았다. 그는 약품 도포를 마친 나니아의 팔 위에 붕대를 감아 주었다. 몸으로는 다정하게 챙겨 주는데, 얼굴은 저리 살벌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심중을 종잡을 수 없었다.

나니아는 화가 난 듯한 그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에 라히무스는 이를 꽉 깨물면서 말을 짓이겼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그녀가 이렇게 될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도와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가슴이 쓰렸다. 언젠가 리자드 자신이 전상으로 목숨이 오락가락하던 순간에도 이렇게까지 괴롭지는 않았었다. 대신 아파 줄 수만 있다면 마땅히 그러하고 싶었다.

분노와 시름에 잠긴 라히무스와 다르게, 챠링고는 나니아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며 호탕하게 말했다.

“이 정도 상처는 훈장이지, 뭐.”

나니아는 붕대 감기를 마친 라히무스를 바라보며 안절부절 이야기했다.

“저…. 이제, 감옥에…. 가, 가주님을….”

라히무스에게 그의 구조를 부탁한다는 것이 너무도 염치없는 일임을 알았기 때문에 소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리자드는 다 쓴 붕대를 테이블 위에 던지듯 내려놓으며 못마땅한 혀끝으로 볼을 부풀렸다.

벨의 말대로였다.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을 버리고 함께하려는 남자다. 그를 구해 달라고 말하는 나니아는, 야멸차고도 잔혹했다.

운이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조금만 늦었어도 그들은 떠나고 없었을 것이다.

사내는 폐부 깊숙이 공기를 채웠다. 부푼 가슴을 꺼트리면서 커다란 한숨이 내쉬어졌다.

“기억나는 대로 설명해.”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나니아는 한참 높아진 그의 얼굴을 목이 아프도록 올려다보았다. 내려다보는 시선이 냉랭하고 차가웠다.

“면적, 골조, 통로 너비, 내부 조명, 사람 숫자, 위치, 그밖에 감옥 구조에 대한 것. 아는 만큼 전부 다.”

어디부터 어떻게 잠입해 들어가야 하는지, 간수들을 따돌리는 일이 가능할지, 아니면 전부 조져 놓는 게 차라리 쉬울지, 사전 판단이 필요했다. 기껏해야 인간들을 상대하는 일이지만 기왕이면 바탕이 있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여자는 내놓으라는 정보는 주지 않고 딴소리를 했다.

“같이, 같이 갈게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은 결심을 한 얼굴에 한 줄기 기백이 돋보였다. 문제는 그 기세가 다른 남자를 위해 쥐어짠 용기라는 데에 있었다. 라히무스의 머리는 한층 더 싸늘해졌다.

“그런 몸으로 어딜 가. 너는 얌전히 여기서 기다려.”

“갈 수 있어요. 라히무스는 길도 모르잖아요.”

제법 앙칼지게 대꾸하는 여자를 보며, 사내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등을 보였다. 감옥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본 적도 없었던 것처럼 매몰차게 말을 돌렸다.

“파코. 석궁 내놔.”

“에엑?! 싫어! 또 부숴 먹을 거지. 나 이제 진짜 더 없다니깐!”

질색하는 파키케팔로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라히무스는 손을 까딱일 뿐이었다.

“각궁도 아니고 어떻게 부숴. 가져와. 화살하고 같이.”

덧붙이는 말에 파키케팔로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시무룩하며 챠링고를 돌아보았지만 별다른 대변은 없었다.

“막 쓰면 안 돼…? 진짜, 진짜로 이제 몇 개 없단 말야.”

“사 줄게.”

라히무스는 주저하는 녀석에게서 호록과 활을 빼앗아 들었다. 반대쪽 어깨에는 로프를 둘러 감고 목에 매어 둔 복면을 끌어 올렸다. 마지막으로 후드를 뒤집어쓰며 잠입 준비를 마쳤다.

“감옥이 넓어요. 헤맬 거예요.”

밖으로 나서려는 그의 뒤로 나니아가 따라붙었다.

“내가 알아서 해.”

“부탁이에요. 나도 갈래. 응? 나도 데려가요.”

남자의 완강한 발걸음은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쳐 갔다. 가게 문을 비틀 기세로 열어젖혔다. 깜깜하고 차가운 밤공기가 남자의 굴곡진 허리를 스쳐 그를 따라 나온 소녀에게로 흘러갔다.

“방해되지 않게 할게요, 라히무스….”

소녀는 꽤나 집요했다. 라히무스가 쌀쌀맞게 말했다.

“어떻게 방해가 안 된다는 거야. 너는 그냥 옆에 서 있기만 해도 방해가 돼, 나한텐.”

“…너, 너무해요. 나 그렇게까지 쓸모없지 않아요. 할 줄 아는 것도 생겼고, 또, 나는, 나는 내가 한 부탁이니까, 그, 그래서 그냥…. 도, 돕고 싶은 건데….”

상처받은 듯이 울먹거리려는 나니아를 보고 라히무스는 몹시 난처해했다.

“뭐?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소녀의 발긋한 눈시울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 와중에도 우는 얼굴이 너무 귀엽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녀가 곁에 있으면 마음이 싱숭생숭해서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럴 상황도 그럴 사이도 아닌데, 눈이라도 마주칠라치면 심장이 찌릿하고 쿵쾅거려서 버티기 힘들었다.

여자를 좋아한 것도 차여 본 것도 처음이라, 지금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이 또한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리자드가 무슨 심정인지 알 길 없는 소녀는 울먹이면서도 고집스럽게 말을 이었다.

“걱정되니까, 내가…. 내가 당신까지 사지로 몰아넣는 걸까 봐, 나는, 내가 이기적인 거 아는데, 그래도, 내가 라히무스까지 그렇게 만들어 버리면….”

그의 힘을 빌려 가주님을 구하고 싶으면서도, 정작 그 또한 잘못될까 봐 걱정된다니. 그 이중성이 나니아 스스로도 경멸스러웠다. 분하고 점직한 마음은 눈물로 표출되었다.

리자드는 눈을 질끈 감으며 양손으로 천천히 머리를 넘겼다. 덕분에 눌러쓴 후드가 다시 벗겨졌다.

“하…. 알았어, 알았다고.”

그는 다시 단호한 손가락을 들어 당부하듯 선언했다.

“대신 네가 위험해지는 상황이 오면 그땐 바로 상황 종료야. 라키바키고 뭐고 그 새끼 버려두고, 나는 너만 들고 나를 거라고. 알겠어?”

나니아는 훌쩍 코를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폐가 되지 않게 할게.”

습한 목소리가 다부지게 대꾸했다. 남자는 마른 침을 삼키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귀여워. 눈물 닦아 주고 싶다.’

“알아들었으면 빨리 옷 챙겨 입고 나와. 따뜻하고 튼튼하게.”

명령하듯 말을 마친 라히무스가 끝으로 창문 너머 벨로즈를 가리켰다. 그의 옷을 뺏어 입으라는 뜻이었다. 무릎에 흙먼지 하나 묻지 않게 안고 다닐 수 있었지만, 어쩌다 환부가 덧나기라도 한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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