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
밖에서는 리슬링이 술병을 들고 실종된 라히무스를 찾고 있었다. 잠깐 한눈을 팔았더니만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사라져 버린 후였다. 은밀하게 유혹하려던 참이라 다른 일행에게 묻기도 민망했다.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던 리슬링이 참다못해 술에 취한 파키케팔로를 붙잡고 물었다.
“라히무스 못 봤어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재깍 답변이 나오지 않자 리슬링이 답답해하며 발을 굴렀다.
“몇 병 없는 용딸기술을 가지고 사라졌단 말이에요!”
그 말에 거나하게 취한 챠링고와 파키케팔로가 불평하며 언성을 높였다.
“와, 그 맛있는 걸 지들끼리만 먹으려고 했어?!”
그들은 사라진 라히무스보다 술의 행방을 아쉬워했다.
“라히무스라면 아까 나니아 방으로 들어가던데요.”
벨이 말했다.
“뭐라구요?!”
리슬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돌려 복도 쪽을 한 번 돌아보았다가, 가장 만만한 파키케팔로를 일으켜 세워 앞장서게 했다.
“그 인간 방이 어디야? 빨리 같이 가자.”
귀한 용술을 받아 낼 목적으로 동행한 파키케팔로가 나니아의 방문을 똑똑 두드렸다. 그의 곁에 팔짱을 끼고 선 리슬링이 새초롬하게 방문을 노려보았다.
이내 신경질적으로 벌컥 열린 방문 안쪽에서 짐작했던 대로 방주인이 아닌 라히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씨발, 뭐.”
다짜고짜 욕부터 박는 반라의 사내를 보고 리슬링은 숨을 집어삼켰다.
좋은 시간을 방해받은 수컷 리자드의 눈동자에 포악하고 음산한 빛이 깃들었다. 깜깜한 방 안에 타오르는 한 줄기 촛불. 벗은 몸에서 풍겨 오는 짙은 정사의 기운. 맡아 본 적 없는 아찔한 페로몬까지.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는 흥분과 분노의 잔열이 느껴졌다.
어금니를 꽉 깨문 라히무스를 보고 파키케팔로가 용감하게 항의했다.
“요, 용딸기 술! 갖고 갔다며.”
한편 나니아는 찬물을 얻어맞은 듯 얼얼한 정신으로 이불을 뒤집어썼다. 벗고 있는 것은 남자인데 왜 자신이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수치스러워서 참을 수 없었다.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와 술병을 거칠게 잡아 들었다. 걸음 소리에 성난 기색이 느껴졌다.
그는 다시 문밖으로 걸어가 파키케팔로와 리슬링의 가슴팍에 술병을 하나씩 밀어붙였다.
먹고 떨어지라는 듯 방문을 쾅 하고 거세게 닫아 버리고는 아예 자물쇠를 가져와 방문에 끼워 넣었다. 장치를 비트는 다급한 손길이 몇 번이고 헛돌며 미끄러지더니, 남자는 또다시 혼잣말 같은 욕설을 짧게 내뱉었다.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근 그는 어두움을 틈타 바지를 벗어 재끼고 다시 침대 위로 올라왔다.
사내는 태산 같은 덩치로 소녀의 몸을 덮쳐 왔다. 그는 애가 탄다는 듯 다시 손가락으로 나니아의 가랑이 사이를 더듬어 댔다.
그러고는 안달 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씨발, 내가 어떻게 적셔 놨는데….”
입이 바짝 바를 정도로 조급해진 사내가 소녀의 가랑이 사이로 대뜸 얼굴을 가져왔다. 사타구니에 혀를 가져다 대려는 것을, 깜짝 놀란 나니아가 발길질로 저지했다.
“하, 하지 마! 입으로는 안 된다고 했잖아!”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버둥거리는 작은 발에 얻어맞은 리자드가 한쪽 눈을 찡그렸다.
“빨고 싶은데 어떡하라고 그럼.”
누군가에게 한 번 방해받은 뒤라서일까. 참을성이 사라진 목소리가 불퉁했다. 완전히 적반하장이었다.
“더러워…. 싫어!”
소녀는 이불을 가져다 아랫도리를 덮었다. 사내에게 가랑이 사이를 빨리다니. 상상만으로도 낯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안 더러운데.”
남자는 불만스럽게 꿍얼거리며 집게손가락으로 야금야금 이불자락을 들어 올렸다. 야트막한 어둠 너머 가느다란 눈동자가 소녀의 은밀한 부위를 탐구하듯 훔쳐보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올라붙은 자신의 성기를 그녀 모르게 훑고 있었다.
혀도 안 된다, 입술도 안 된다, 코도 안 된다.
그럼 이건 되나?
사내는 자신의 성기 끄트머리를 여자의 입구 근처에 치덕치덕 문질렀다.
“뭐, 뭐….”
뜨겁고 두툼한 것이 예민한 살갗에 닿았다. 손가락과는 명백히 다른, 이상하리만치 생소한 촉감. 화들짝 놀란 나니아가 몸을 일으켜 침대 끝에 몸을 붙였다.
“뭐 하려고 했어요?”
그녀가 황급히 이불을 치우자, 사내는 항복하듯 양손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발뺌하는 어깨가 으쓱 움직였다.
“그냥 가져다 대기만 했어.”
손에서 놓아 버리는 바람에 붙잡고 있던 거대한 살덩어리가 허공에 덜렁 드러났다. 소녀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바지를 벗으라고 했지, 속옷을 벗으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
당혹스러움에 궤변을 늘어놓는 그녀에게 라히무스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원래 바지밖에 안 입는데.”
“그게 무슨, 자, 자랑이라고….”
알맹이 없는 한탄이 더듬더듬 혀끝을 떠돌았다.
대충 짐작은 했었는데, 그래도 저렇게 클 줄은 몰랐더랬다. 눈을 질끈 감아 보아도 이미 늦었다. 무식하리만치 거대한 남근의 형상이 뇌리에서 잊히질 않았다.
저 정도면 사람이 아니라 말한테 달려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녀가 마구간 근처를 오며가며 쌓은 상식으로는 그랬다.
무릎걸음으로 어물쩍 다가온 남자가 나니아의 어깨에 무너지듯 기대었다.
“하아…. 나냐, 어떻게 좀 해 줘….”
목덜미에 코를 비비며 조르는 음색이 간곡했다.
그 애처롭고 절실한 목소리에 감응하여, 나니아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가린 손가락을 살짝 벌리고 말았다.
거듭 확인한 그의 하반신에는 예외 없이 끔찍한 흉물이 붙어 있었다. 애교스러운 말투에 속아 또다시 눈을 버리고 만 소녀가 꽥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절대 그거 넣으려고, 넣으려는 건, 꾸, 꿈도 꾸지 마요?!”
기겁하는 나니아를 보고, 사내는 그동안 있는 줄도 몰랐던 스스로의 노출증 성향을 자각했다. 비록 소스라치게 놀라며 꺼리는 반응일지라도 자신의 벗은 몸이 그녀에게 어떤 반향을 일으켰다는 것 자체가 몹시 흥분되었다.
“왜 그렇게 놀라, 응?”
남자는 나니아의 목덜미에 거친 호흡을 밀어붙이며 탁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남자 생자지 처음 봐서 그래?”
뜨거운 날숨과 희롱하는 말에 수치스러운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손바닥에 가로막혀 웅웅거리는 말소리가 남자를 저주했다.
“징그러워, 울퉁불퉁하고, 흉측해!”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냐? 이렇게나 네가 좋다고 바짝 섰는데…. 귀여워해 줘.”
“귀엽지 않은 걸, 어떻게 귀여워해요?!”
몇 번씩이나 저리 치우라고 면박을 주어도, 간악한 리자드는 이죽대기만 했다.
그는 아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 버리는 소녀의 한쪽 손을 끌어 내렸다.
“나냐가 야하게 혀 같은 걸 내미니까 이렇게 됐잖아….”
그러니까 전부 네 책임이라며, 남자는 원망하는 말로 그녀의 관심을 구했다.
나니아는 이제 조금 익숙해 질 것도 같은 그의 성기를 꺼림칙하게 가늘어진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발기한 실물의 남근을 이토록 선명하게 두 눈 똑똑히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다.
리자드의 성기는 체모가 없이 깔끔했다. 수풀이 없으니 흉악한 모양새가 가감 없이 드러나 보였다.
표피를 밀어붙이는 손길이 선단 부분을 덮었다 벌렸다 하면서 요도를 뻐끔거렸다. 그 끝에서는 멀건 쿠퍼액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남자가 자기 물건을 줄기차게 흔들 때마다 그의 팔 근육은 물론이고 배와 가슴 근육까지 징글맞게 꿈틀거렸다.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채 스스로를 위로하는 그의 모습은 끔찍하리만치 음란했다.
“하아…. 나냐….”
소녀의 이름을 부르는 탄성은 어딘지 신음같이 들렸다. 오른손으로 사정없이 양물을 치대던 그가 왼팔을 나니아의 허리에 둘러 왔다. 그녀가 라히무스의 아랫도리를 살피는 사이, 그는 아까부터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니아가 눈길을 들어 몽롱한 시선을 마주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의 입술이 갈급하게 부딪쳐 왔다.
그는 나니아의 입술을 빨기 시작하면서 성기를 쥔 오른손을 더 세차게 흔들었다. 타액을 무자비하게 빼앗기는 일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졌다. 한참 키스를 당하고 있으려니 나니아는 자신이 마치 그의 자위 도구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깐씩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남자의 혀끝에서 예찬이 쏟아졌다.
“너무 예뻐, 정말 귀여워…. 너랑 이러고 있는 게, 후… 꿈같아.”
가식 없이 솔직한 입술이 소녀의 구순을 질척하게 물고 빨았다. 그러다 이내 참기 힘들다는 듯, 키스하던 것도 자위하던 것도 모두 멈추고 나니아를 꽉 끌어안았다. 그저 한 몸이 되고 싶은 것처럼 절절하게 들끓는 포옹이었다. 사내의 흐릿한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그가 노골적인 욕망을 입에 담았다.
“당장…. 당장 네 안에 들어가고 싶다, 나냐…. 너랑 연결되고 싶어….”
나니아는 자신의 빗장뼈에 새끼 강아지처럼 머리를 문지르는 그를 보며 이상스레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그가 말하는 ‘연결’이라는 게 결국 아랫도리 사정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여태껏 들어 왔던 ‘교미하고 싶다’든가 ‘섹스하고 싶다’든가 하는 말보다는 훨씬 나았다.
하지만 야릇한 기분이 되려던 것도 잠시, 술주정뱅이의 이성은 간간이 돌아올 때가 있었다.
“그래도…. 안 들어가요, 그런 건.”
거절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사내 또한 말의 진실 됨을 눈치채고 손을 멈추었다.
아니라고, 괜찮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나니아는 너무 작았다.
남자는 나니아를 꼭 끌어안은 팔에 잔뜩 힘을 주었다. 이전까지의 능청스럽던 모습은 사라지고 사정하는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럼 문지르는 건 괜찮아?”
“문질….”
나니아의 얼굴이 벌게졌다. 허락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사내가 은근히 허리 짓을 해 오고 있었던 탓이다.
“…모, 몰라요….”
“나냐는 손가락으로 만져 주는 거 좋아하니까…. 이번엔 자지로 문질러 줄게. 응? 어때?”
소녀가 말없이 눈만 질끈 감자, 사내는 무언을 허락의 의미로 알아듣고 반쯤 누운 그녀의 가랑이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달뜬 표정으로 나니아의 골짜기에 자신의 기둥을 문대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그러했던 것처럼,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두꺼운 살 기둥이 음부를 반으로 가를 것처럼 움직였다. 비벼지는 움직임은 언제나 클리토리스를 치대며 끝이 났다. 잇새로 신음이 새어 나갔다. 그를 위한 행위라기엔 나니아에게 가해지는 자극도 만만치 않았다.
“하아…. 씨발, 좋아….”
남자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황홀한 숨을 뱉었다.
그는 양팔로 상체를 받치고, 골반을 움직여 샅을 문질렀다. 가슴 밑에 누워 있는 나니아가 파르르 몸을 떠는 것을 보면서 도저히 음란 방탕한 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너, 물 진짜 많이 나오는 거 알아? 응?”
아까부터 줄기차게 배어나오는 음외한 애액이 라히무스의 살덩이를 잔뜩 적셨다. 그가 잠깐 몸을 멈추고 아래쪽을 구경하듯 바라보자, 나니아가 불안해하며 물었다.
“뭐, 뭐 해…?”
그는 성기의 뿌리 끝을 잡고 멈춰서 나니아의 구멍에 귀두 선단을 빙글빙글 문질렀다.
“내 좆대가리에 니가 싼 거 잔뜩 묻었는데…. 이건 아무리 봐도 들어와 달라는 신호 아닌가?”
사뭇 진지한 그의 고민에 나니아가 기겁하며 다리를 오므리려 들었지만, 사내의 팔 힘이 그걸 가만 놔둘 리 없었다. 그는 수치스러울 정도로 나니아의 가랑이를 활짝 벌리며 다시 좆머리를 그녀의 구멍에 맞추었다.
“안 넣어, 안 넣을게.”
남자가 피식 웃으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안 하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치고, 그의 성기는 자꾸만 아슬아슬하게 그윽한 접촉을 해 왔다. 골짜기 깊숙한 곳으로 전진하기 전, 소음순 사이에 가려져 있는 야트막한 공간에 자신의 성기를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도톰한 한 쌍의 소음순이 그의 귀두를 감쌌다가 뱉어 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즐기는 것이었다.
라히무스가 약속을 어길까 봐, 저 커다란 흉기가 금방이라도 안쪽을 뚫고 들어올까 봐, 겁먹은 마음이 벌벌 떨렸다.
한편으로는 빠듯하게 안쪽을 채워 줄 커다란 남성기에 대한 미지의 기대감이 심장을 뛰게 했다.
그 은밀한 기대감은 끙끙 앓는 신음 소리 뒤로 숨겼다.
“하아…. 씨발, 이것도 이렇게 좋은데…. 넣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리자드는 위태롭고 아찔한 밀착을 즐기며 미간을 좁혔다. 미끈미끈한 촉감이 환장하게 좋았다.
그는 간간히 손을 내려 소녀의 음핵을 짚고 손을 떨었다. 그럴 때마다 나니아는 몸을 덜덜 떨면서 남자의 팔목에 손톱을 세웠다.
눈물 고인 여자의 얼굴이 사내의 속을 간지럽게 긁었다. 그는 다시 짐승처럼 나니아의 몸을 덮치듯 끌어안고 허벅지와 허리와 엉덩이 근육을 번갈아 사용하며 몸을 흔들었다. 사용하는 근육이 바뀔 때마다 박자와 세기도 매번 달라졌다. 무자비한 허리 짓과 그의 육중한 무게감이 소녀를 짓누르며 몰아세웠다.
“하아, 나냐, 나냐….”
아득해진 정신이 여유를 잃었다. 행위에 집중한 미간에는 신경질적인 주름이 잡혔다.
남자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소녀의 여린 살에 성기를 밀어 올렸다. 그것은 대체로 나니아의 대음순 사이를 정확하게 반으로 가르며 움직였지만, 이따금 삐끗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살짝 솟아오른 그녀의 클리토리스가 더욱 거세게 문질러졌다. 덕분에 간간히 비명 같은 교성이 터졌다. 흐트러진 나니아의 목소리는 라히무스의 귓가에 재차 흥분을 불어넣었다.
“하, 쌀 거 같아….”
“으, 으응….”
“나냐 보지 위에 싸도 돼?”
“아, 읏…. 응….”
아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이 사납게 붉어져 있었다. 몸이 진동하면서 머리카락도 거칠게 흔들렸다. 날렵한 턱선과 높은 콧대는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 더 멋이 도드라졌다.
살짝 배어난 땀이 촛불에 번들번들 빛났다. 그녀를 압도하는 남자의 커다란 몸체가, 움직일 때마다 다른 모양으로 크게 꿈틀거리는 가슴 근육이라든가 흉부 끄트머리에서 야하게 맞물린 전거근 같은 것들이, 시선과 신경을 온통 앗아 갔다.
그의 거센 움직임에 따라 삐걱삐걱 앓는 소리를 내는 침대 프레임과 들썩들썩 흔들리는 침구의 느낌까지, 주위를 둘러싼 모든 요소들이 지금 벌이는 정사의 음외함을 지적했다.
리자드는 거칠게 숨을 쉬며 몸을 물렀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금 나니아의 안쪽을 파고들었다. 잔뜩 물에 젖은 구멍은 조금의 저항도 없이 그를 쑥 잡아 물었다.
사내는 흥건한 질 안쪽을 긴 중지로 격렬히 치대며 한껏 물 튀기는 소리를 냈다. 다른 한 손은 소녀의 음핵을 마구 흔들었다.
“아, 으, 아앗, 읏….”
연약한 비명이 날을 세워 남자의 팔뚝을 긁었다.
“그, 그만, 그만….”
“좋아? 응? 나냐, 좋아?”
“으, 응, 이제, 응, 그만…!”
눈앞이 번쩍이는 기분에 눈이 질끈 감겼다. 절정에 다다른 나니아는 골반과 허벅지를 파르르 떨었다. 그제야 라히무스도 그녀에게서 손을 떼어 내고 제 것을 털어 함께 절정을 맞이했다.
후드득 후드득 질척한 액체가 여자의 사타구니와 가랑이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하, 씹….”
드센 호흡을 따라 그의 우악스러운 상반신이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나니아도 숨을 가다듬으며 남자의 집중한 얼굴을 살폈다. 흥분한 얼굴과 화난 얼굴이 비슷한 점이 인상 깊었다.
이제 끝인가 싶을 때마다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것이, 뭘 모르는 나니아가 보기에도 그 양이 엄청났다. 아마 저런 것을 안에다 쌌더라면 바깥까지 꾸역꾸역 밀려 나오지 않았을까 생각하면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사정을 마친 라히무스는 자신이 싸질러 놓은 정액으로 더러워진 소녀의 음부 주위를 잠시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씨근덕대며 새빨간 흥분을 토해 냈다.
“아, 나냐…. 너무 좋았어, 나….”
그가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나니아의 작은 몸을 뒤에서부터 꽉 끌어안았다.
절정의 여운이 남아 있는 육신이 끝 간 데 없이 벅차올랐다.
행위 그 자체도 환상적이었지만, 그녀가 자신의 손끝에서 또다시 열락을 맞이했다는 것이, 이런 음행을 허락해 주었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라히무스의 입술이 소녀의 관자놀이며 뺨 같은 곳에 닿는 부위마다 도장을 찍어 댔다. 낮고 달콤한 목소리가 미완성의 정사를 찬미했다.
“자기도 좋았어? 응?”
남자의 짙고 그윽한 음성이 생각지도 못한 단어를 입에 담았다.
“자, 자기? 내가 왜 당신 자기예요….”
그의 목소리가 닿은 피부에 오소소 닭살이 돋는 기분이었다.
“안 돼?”
연인을 대하듯 부르는 말에 얼굴이 화끈화끈해졌다.
‘그런 건 정말 사랑하는 사이에나 사용하는 애칭이잖아.’
창피하고 부끄러우면서도 그렇게 싫지만은 않은 기분이 든다는 점이 두려웠다. 몸집을 부풀릴 기미가 보이는 스스로의 감정 역시도. 남자가 자신을 그렇게 달콤하게 대해선 곤란했다. 이 이상 나아가면 돌이킬 수 없는 선 위에 올라설 듯한 느낌이었다.
“자기는 좀…. 차라리 나냐라고 불러요.”
나니아는 그 노골적인 연인간의 애칭 대신 자신을 혀 짧은 소리로 부를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편이 차라리 나았다.
하지만 리자드는 납득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물고 빨고 비볐는데 자기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는 수긍하는 대꾸 없이 나니아의 볼에 입술을 밀착시켜 놓고 연거푸 쫍쫍거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매달려 오는 라히무스의 검붉은 머리털을 쓰다듬으며 작은 숨을 몰아쉬었다. 발가벗은 리자드는 뜨겁고 커다랗고 온순했다. 행복해진 꼬리가 침대 시트를 퍼덕 퍼덕 내리치는 것을 보면서, 그녀는 정액 범벅이 된 이불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침은 눈 깜짝할 사이 둔탁한 기상과 함께 찾아왔다. 육신이 무겁고 아둔하였다. 누군가 날카로운 꼬챙이로 골을 쑤시는 듯한 두통으로 눈을 떴다.
힘겹게 들어 올린 눈꺼풀 사이로 단잠에 빠진 라히무스가 보였다. 형형하게 빛나는 새빨간 눈동자를 얇은 눈 거죽 뒤에 숨기고 쌔근쌔근 귀여운 숨을 쉬었다.
나니아는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육중한 다리와 꼬리의 무게를 감지했다. 리자드의 비늘 돋친 꼬리가 허벅지 안쪽으로 뻗어 와 그녀의 발목을 가볍게 감싸 덮었다. 그가 제공하는 울퉁불퉁한 팔베개는 목 밑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었다. 온몸을 옥죄듯이 끌어안은 양팔은 뜨겁고 숨이 막혔다. 체온 높은 리자드의 맨살에서 후끈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사내는 기민했다. 특별히 뒤척이지 않았는데도 잠에서 깬 나니아의 몸으로부터 수면 상태와 다른 중량을 알아차렸다. 쌍꺼풀 없이 날카롭게 찢어진 두 눈. 그 사이로 드러난 동공이 뱀처럼 길쭉하게 빛을 품었다. 나니아는 흠칫하며 숨을 멈추었다. 그의 붉은 눈알은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의 그것처럼 소름 끼치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사나운 기색을 띠었던 것도 잠시, 그녀와 시선을 마주친 눈 밑 살이 봉긋하게 차올랐다.
“안녕.”
밤새 꼭 붙어서 잠을 청해 놓고, 남자는 마치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손이라도 흔들며 말해야 할 것 같은 인사를 건넸다. 답지 않게 청정하고 담백한 아침 인사는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덕분에 나니아는 말없이 눈을 휘며 웃는 그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감상하고 말았다.
“…안녕.”
몇 초 늦은 답인사를 듣고, 라히무스는 그녀를 끌어안은 팔에 잔뜩 힘을 주었다. 심장이 쥐어 짜인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지난밤 미처 이부자리를 정리할 틈도 없이 곯아떨어져 버렸다는 사실이 기억난 나니아는 손을 내려 어젯밤 남자가 질펀하게 싸질러 높은 부분을 짚어 살폈다. 돌아온 것은 커다란 낭패감이었다.
“하아….”
아랫도리 근처에서 말라붙은 흔적이 만져졌다.
여자는 한숨과 함께 남자의 팔에서 벗어나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뒤를 따라 일어난 라히무스가 또다시 등 뒤에서부터 격렬한 포옹을 해 왔다.
“윽, 숨 막혀요.”
술에서 깬 여자의 태도는 어제와 다르게 냉담하고 매정했다. 재차 남자의 포옹을 거부한 그녀는 침대 밖으로 발을 뻗어 말려 올라간 치맛자락을 정리했다.
그녀는 다시 또 침대에 늘어지게 누워 꼬리만 살랑거리고 있는 철없는 사내를 보았다.
“깔아 누웠던 이불, 빨아야겠으니까 좀 비켜 봐요.”
남자에게 침대보를 내놓으라 명령한 하녀는 바닥에 팽개쳐진 자신의 속옷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돌돌 말린 이불보에 그것을 숨겨서 한 품에 가득 안았다.
수치가 숙취를 이긴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이 더러운 이불과 옷가지를 들키지 않고 처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반면에 라히무스는 색사의 뒷맛과 단잠의 여운에 빠져 느른하게 눈만 껌뻑거리고 있었다.
나니아는 우려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다가 당부하듯 말했다.
“저 나가고 나면, 조금 이따가 나와요. 알았죠? 바로 나오지 말고요.”
같이 잤다는 사실을 들키지 말자는 뜻이었다. 같은 방에서, 그것도 심지어 자신의 방에서 나오는 라히무스의 모습을 일행들에게 들킨다고 생각하면 그 수치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감당할는지 눈앞이 다 캄캄했다. 자신은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어땠을까. 모두들 고주망태가 되어 있었으니 어쩌면 잘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녀는 라히무스의 대답을 들을 겨를도 없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왔다.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살금살금 발끝을 움직이는데, 저 멀리 주방 벽 너머 샤르도네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의아한 얼굴의 리자드가 물었다.
“그걸 왜 들고 나오지? 세탁은 여기서 알아서 해 주는데.”
“그, 어, 제가 직접…. 할까 해서….”
버벅거리는 하녀의 뒤로 철컥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양이처럼 조용하게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는 자가 있었으니, 진저리쳐지는 음주의 끝에서도 망가짐 없이 아름다운 벨로즈였다.
“이상한 거라도 묻혔나 봐요?”
그가 나니아의 귓가에만 들릴 목소리로 나직하게 물었다. 그 은밀하고 시커먼 물음에 화들짝 놀란 나니아가 토끼 눈을 하고선 뒤를 돌아보았다. 벨은 숙취 같은 건 모르는 사람처럼 아침부터 싱그럽게 웃고 있었다.
“말했잖아요. 당신은 티가 너무 많이 난다니까요.”
입꼬리를 당겨 웃는 그의 입술이 빨갛고 얇은 호를 그렸다. 다 알고 있다는 듯 의뭉스러운 말을 건네는 공주 때문에 나니아는 얼굴을 붉혔다.
그는 무어라 거짓말하려고 버벅거리는 하녀의 어깨에 양손을 짚고는 샤르도네를 향해 말했다.
“피가 묻었다네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지?
그는 꼭 그런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샤르도네는 알아들었다는 듯, 하지만 여전히 빨랫감을 회수할 생각은 변하지 않았는지 주방 문턱을 나서려 했다.
“그래도 손님이 할 일은 아니지. 이리 주게.”
나니아는 팔을 뻗어오는 샤르도네를 향해 세차게 고개를 저어 거절 의사를 표했다.
“아, 아니요…! 제가 할게요. 제가, 마음이 무거워서…. 너, 너무 많이 묻어서요.”
샤르도네는 이불을 세게 끌어안는 나니아를 보고 이상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세 번씩이나 고집을 피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물러섰다.
“정 그렇다면야.”
손님이기 이전에 인간이니까 그러려니 하는 부분도 없지 않아 있었다.
“리슬링, 어딨니!”
그녀는 손녀를 불러 나니아를 수돗가로 데려가게끔 했다.
촌에서 자란 여자가 과연 이 쇳덩이에서 쏟아져 나온 물이 깨끗한지에 대해 의심하는 사이, 리슬링은 작두질을 멈추고 새치름하게 종이를 찢었다. 몇 갈래로 죽죽 찢긴 종이가 비벼지는 손바닥 안에서 가루로 변했다. 가루는 어느새 종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하여 빨랫감 위로 뿌려졌다.
가루에 물이 닿으면서 천 위로 거품이 일었다. 술지는 무언가를 터뜨리고 태우는 방식 외로도 사용되는 모양이었다. 궁금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따로 물어보지는 않았다. 말없이 빨랫감을 조물조물 비비기 시작한 나니아의 머리 위로 첨예한 질문이 떨어졌다.
“야, 인간. 너 라히무스랑 무슨 관계야?”
그 뜬금없는 질문에 나니아는 하던 행동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리슬링을 쳐다보았다.
적대적인 눈초리에 덩달아 반감이 일었다. 하지만 그녀와 다르게 나니아는 적개심을 표현할 자신이 없었다.
‘걔랑 무슨 관계냐고?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비뚜름한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리슬링은 팔짱을 끼고 양 다리를 크게 벌리며 섰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니아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척 봐도 여자가 궁할 것 같이 생기진 않았어. 그치만 인간한테까지 손대는 리자드일 줄은 몰랐단 말야.”
도통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의중을 알 수 없어서 나니아는 대꾸 없이 고개를 처박고 다시 이불 비비는 일에 집중했다. 속옷 빨래를 하기 전까지는 좀 사라져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너한테는 진심 아닐걸.”
나니아나 리슬링이나 사내의 진심을 모르기는 피차 마찬가지일 터였다. 하지만 아리송한 나니아와 다르게 그녀는 확신하는 것 같았다.
“인간이나 축수에게 손대는 건, 암컷 리자드에게 선택받지 못한 패배자들이나 하는 짓이야.”
“…….”
이로써 그녀가 자신을 아래로 보다 못해 완전히 가축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나니아는 쇳덩이가 길어 올린 물을 거품 묻은 이불에 퍼부으며 대꾸했다.
“이해가 잘 안 돼요. 그럼 당신은 패배자에게 선택받고 싶어 하는 건가요?”
“뭐?”
물을 먹은 이불은 이전보다 훨씬 무거워져서 들기도 힘들었다. 나니아는 커다란 천을 부분 부분 쥐어짜다가 아예 빨랫줄 위로 널어 버렸다.
“당신 말을 듣자하니 왜 라히무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는걸요.”
정말 좋아하는 상대라면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이대로 시비를 받아 주다간 대화가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나니아는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체액으로 더러워진 부분만 급히 문질러 닦고선 빨래를 마무리했다.
씩씩거리는 리슬링을 뒤에 남겨 두고 도망치듯 몸을 피했다. 이불 밑에 꿍쳐 놓은 속옷이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랐다. 적당히 물기가 마르면 방으로 가져와서 말려야지.
그리고 나니아는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이쯤 됐으면 라히무스가 시간차를 두고 나오자는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돌아갔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그러나 마주한 장면은 기대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정오를 향해 가는 늦은 아침. 땅굴로 돌아온 라키바하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나니아를 찾는 것이었다. 공주에게 그녀의 행방을 묻고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나온 인물은 뜻밖에도 웬 덩치 커다란 리자드 한 마리였다. 심지어 웃통까지 홀랑 까 벗은.
때마침 그 옆을 지나던 챠링고가 헐벗은 라히무스와 흉흉한 영주를 보고 몸을 수그렸다.
“어이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황급히 자리를 피하는 그녀의 시야에 뭐가 그리 즐거운지 키득거리는 벨이 포착되었다. 저 불편한 조우는 성격 나쁜 님프의 작품인 게 틀림없었다.
문 앞을 버티고 선 괴수를 보고 라키바하프는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왜….”
한순간 방을 잘못 찾아왔는가 생각도 해 보았지만, 잘록한 옆구리 너머로 보이는 저 짐은 분명 나니아의 것이 맞았다.
“네가 왜 여기서 나오지?”
의문 가득한 얼굴이 불쾌함을 감추지 못하고 잔뜩 꾸깃꾸깃해졌다. 나니아를 찾는 그가 탐탁지 않기는 라히무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머리카락을 털어 올리는 팔 위로 굵은 힘줄이 솟았다. 반듯한 이마 아래 칼날 같은 코끝에서 비열한 입꼬리가 조소를 머금었다.
남녀가 한방 한 침대에서 잤는데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냐는 듯, 사내는 빈정거렸다.
“왜겠냐?”
그 끔찍한 당면을 막지 못하고 달려온 나니아가, 다급하게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그녀는 뒤늦게 깨닫고야 말았다. 어젯밤 일을 감추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녀 혼자뿐이었다는 사실을. 라히무스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자는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영주의 기이한 눈빛을 감내하며 어렵사리 대꾸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신 거죠? 잠깐, 조금만 이따가 갈게요. 곧 갈게요, 가주님.”
그녀는 라히무스의 맨 가슴을 억세게 밀어붙여 다시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사내는 저항하지 않고 뜻대로 몸을 움직여 주었다. 그 와중에 나니아는 볼 수 없는 높이에서 승자같이 우쭐대는 리자드의 미소가 영주를 자극하고 있었다.
방문을 쾅 닫아 버린 나니아가 라히무스를 다그치듯 물었다.
“왜 아직도 안 갔어요?”
하지만 사내는 동문서답을 할 뿐이었다.
“네 방에서 네 냄새가 잔뜩 나.”
허튼소리를 상대하기엔 날이 너무 밝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가 말하는 냄새라는 것이 신경 쓰이기도 하였다. 대체 무슨 냄새가 자꾸 난다는 건지. 여자는 슬쩍 팔을 들어 코를 킁킁거렸다.
암컷의 체취에 취한 리자드가 꼬리를 너울거리며 그녀의 가녀린 목을 파고들었다. 냄새를 맡는 그의 숨결이 짐승의 그것처럼 소름 끼쳤다.
그러다 갑자기 라히무스는 나니아의 엉덩이 밑으로 팔을 집어넣고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 깜짝 놀란 입술 사이로 새된 비명이 튀어나왔다. 졸지에 나무에 붙은 매미 꼴이 되어 그의 목에 매달려야만 했다.
소녀는 이게 무슨 짓이냐는 눈으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어깨에 들쳐 메진 경험은 있어도 이렇게 마주 본 체위로 공중에 떠 있기는 처음인 것 같았다. 그는 베개를 들어 올린 것처럼 가뿐하니 자세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목이 아파서.”
눈높이가 비슷해진 사내가 갈급히 입술을 부딪쳐 왔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나니아는 어찌할 바를 몰라 두 눈을 질끈 감고서 무서울 정도로 익숙해진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혀로 입술을 핥아 오는 감촉이 뾰족해졌던 현실 감각을 다시 흐리멍덩하게 만들었다. 높은 위치에서 하는 입맞춤은 편리하고 안락해서 하염없이 빠져들었다. 키스에 열중한 손이 남자의 목 뒤를 감싸 쥐었다.
슬그머니 눈을 떴을 때, 이전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각도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도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 몽롱한 눈빛을 마주쳐 왔다. 붉게 안개 낀 두 눈동자가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혀끝이 난잡하게 움직였다. 그 지저분한 움직임에 수치심이 왈칵 밀려와서 얇은 신음을 뱉었다.
소녀는 그의 목에 매달리면서도 방 밖의 영주를 머릿속에 떠올렸다. 이 얇은 벽 너머로 그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기이한 죄의식과 쾌락이 한데 뒤섞였다. 달콤한 배덕의 감각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울렸다.
-쾅쾅쾅.
참을성 없이 문 두드리는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나니아!”
성난 음성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당장 나오지 않으면 쳐들어올 것 같은 느낌에 질겁한 나니아가 남자의 입술을 밀어 냈다.
“내, 내려 줘요.”
“가지 마.”
집요하게 따라붙는 주둥이를 손바닥으로 막아 내며 그를 나무랐다.
“이제, 그만 좀…! 작작해요!”
질색하는 나니아를 보고 리자드는 시무룩해졌다.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으면서도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쟤랑 있는 거 싫어.”
너도 그 마음 무엇인지 알지 않느냐고 칭얼거리는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나니아는 떨떠름했다.
“그냥 대화할 뿐이에요, 우린.”
“우리라고 하는 것도 싫어….”
그녀가 자신과 영주를 한데 묶어 우리라고 칭할 때면, 사내는 끼어들 수 없는 간극을 느꼈다.
사내가 양보의 대가를 요구하듯 물었다.
“그럼 여기 남아 있어도 돼?”
네 방에 조금 더 머물고 싶다며 졸라 대는 말에 나니아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돌아와서 쫓아내기 전까지는 나가 있어야 해요. 알았죠?”
마지못해 허락하고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방문을 열고 나온 하녀는 짐짓 죄지은 표정을 짓고서 라키바하프의 눈치를 살폈다.
“방으로 가 계시지….”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느냐고 묻는 입술이 침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방문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 만했다. 라키바하프는 말없이 미간을 굳히고 나니아의 손목을 잡았다.
“일단 내 방으로 가자꾸나.”
“…….”
하녀는 틀림없이 호되게 문책당할 것이라고 예상하며 그를 따랐다. 그가 이전처럼 자신의 행실과 관련하여 훈계를 늘어놓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어젯밤 라히무스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위는 일절 물어보지 않았다. 해당 화제를 피하는 모습이 사실을 직면하고 싶지 않은 사람 같기도 했다.
남자가 영 딴소리를 했다.
“내가 장제 일을 배워 보려고 해.”
“아, 정말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하녀의 대답에는 어딘지 성의도 영혼도 없었다. 하층민과 같이 노동을 해서 돈을 버는 영주의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었던 탓이다.
“언제까지고 이들과 함께 지낼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의 집에서 신세를 지기로 했단다. 나니아 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고 말이야. 함께 가 보지 않겠니?”
너무도 쉽게 짜인 그의 인생 계획에는 당연하다는 듯 나니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하녀가 자신과 함께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한편 나니아는 여러 가지로 복잡하고 신경 쓰이는 일들이 많아서 마음이 심란했다. 자신에게 어떤 선택지가 주어졌는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 다른 방도가 있는지 고민했다.
이전 같았으면 꿈같은 일이라 여기며 덥석 그의 손을 잡았을 터다. 그런데 왜 지금은 기쁘기보다 혼란한 것일까.
대답이 돌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리자 라키바하프는 초조해졌다. 그는 자조적인 웃음과 함께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전처럼 믿음직스럽지 못하겠지. 지금의 나는.”
비관적인 땀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는 그의 모습에 하녀는 심장이 철렁했다.
“아,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그는 분명 나니아가 사랑하던 예전의 그 남자가 아니었다. 한때 성애적 사랑이라 굳게 믿었던 그 깊고 짙은 감정 위에서 자꾸만 머뭇거리게 되는 까닭은, 단순히 지위를 잃고 초라하게 몰락한 그가 매력적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가주님께서…. 전과 달리 저를 많이 챙겨 주시려고 하니까, 그게 조금 낯설고 이상해요.”
얼핏 그간의 설움을 토로하는 듯하였으나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시선을 피하는 나니아의 손바닥 아래로 남자의 희고 고운 손이 닿았다.
“더 이상 가주님이라고 부르지 말자꾸나. 나는 이제 너의 그런 것이 아니니….”
그는 하녀의 손을 당겨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다정한 입꼬리가 나니아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라키. 이전처럼 라키라고 부르렴.”
지킬 집안이 없는데 가주라고 부르는 것도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디 이름을 함부로 부를까.
“제가 어찌 감히….”
“너는 공주님도 성함으로 부르지 않니.”
“그건, 공주님께서 그렇게 부르라고 하셔서….”
본인의 무례함을 변호하듯 허둥지둥 해명하는 나니아를 보며 라키바하프가 부탁하듯 말했다.
“그래.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불러 주렴.”
남자가 예의 그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자, 나니아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 대답했다.
“라키…바하프 님.”
언젠가 그 ‘님’소리도 빠지기를 바란다며 해사하게 웃는 푸른 눈이 소녀를 따듯하게 응시하였다.
나니아는 라키바하프를 따라 장제사의 집으로 향했다. 땅굴 밖 인간들의 거리엔 눈과 귀를 흥미롭게 해 주는 물건들이 너무나 많았지만, 작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동전 한 닢 허투루 쓸 수 없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비좁게 세워 올린 검은 벽돌집. 그중에서도 3층 오른쪽 방이 장제사의 가족들이 사는 공간이었다.
응접할 공간조차 마땅찮은 좁은 실내엔 앉아 있는 것만으로 불청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서 신세를 지겠다고?’
아이가 셋에, 장제사 부부까지 합하면 다섯이었다. 다섯 식구가 생활하기에도 빠듯해 보이는 공간에 군식구가 끼어들 틈 따위는 조금도 없어 보였다.
“잠시, 그, 포도주에 계피라도 넣어서 좀 데워오겠습니다요….”
부엌으로 향하는 장제사의 발끝에 무언가 차여서 와장창 엎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앉을 자리를 양보한 부인의 양팔에는 갓난아이가 안겨 있었다.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하고 옹알이를 하는 아기였다.
“여기 앉으세요, 부인.”
하녀는 권해 받은 의자에 앉을 틈도 없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였다.
“아니요, 손님께서 앉으셔야지요.”
여자 둘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실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사내아이 둘이 정복자처럼 의자 위에 올라 소란을 떨어 댔다. 그제야 아이 엄마가 자식들을 야단치며 의자 아래로 쫓아내고 본인이 그 자리에 앉았다.
어화둥둥 아기를 어르며 이쪽 눈치를 보는 모습이 영 불안했다. 끈 떨어진 물동이 신세라지만 한때 영주였고, 귀족이었던 사내다. 누추한 집에 귀하신 몸 들여놓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녀의 마음도 덩달아 불편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의심스럽고 걱정스럽던 참이었다. 아무리 이주를 미리 계획하고 있었다지만 평범한 농민이 그 짧은 기간 새 지역에 정착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을 터였다. 거기다 누군가를 거둘 여유까지 생겼다니, 영 미심쩍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라키바하프 님.”
하녀는 와인을 홀짝거리는 영주의 의자 오른편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예상치 못한 접촉에 놀란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니아를 내려다보았다. 붉게 상기된 그의 얼굴과 다르게, 하녀는 낮은 온도의 눈빛으로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상적인 안부 인사와 현재 상황에 대한 보고, 더불어 장제 작업을 배우기 위해 조만간 폴핀에서 제일 큰 마구간으로 도제 교육을 나간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그리고 거처에 대한 말이 나오기 전에 남자의 손을 이끌고 집 밖으로 그를 끌어냈다.
“왜 그래. 집이 네 생각보다 좁고 남루해서 그러니?”
영주는 어리둥절하다가 유감스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영 잘못 넘겨짚어 생각하는 그를 보고 나니아는 답답해했다.
“아니요, 그럴 리가요.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야, 응?”
나니아는 그의 손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이 체면은 있는데 눈치는 없는 귀족 남자에게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지 말을 골랐다.
“그런 집에서 어떻게 일곱이 지낼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결국 좁다는 말이 맞군.”
자존심 상해하는 그를 보고 나니아는 먹먹해졌다.
“그게 아니라…. 민폐잖아요.”
“민폐?”
“아마 그 사람들은 가주님 부탁이라 마지못해…. 어려워 보이는 살림이잖아요. 저희는 거기에 머물 수 없어요.”
“하지만 나나. 내가 그간 저자를 어떻게 대우했는데. 나는 언제나 필요 이상으로 후한 값을 치렀어. 그뿐이야? 파비올라에 올 적마다 감히 그가 누릴 수 없는 것들로 대접하고 꼬박꼬박 선물도 품에 안겨 줬었어. 지금 그가 사용하는 장비들? 그것도 다 내 돈으로 맞춰 준 거야.”
그러니까 그 정도 신세는 질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격앙된 목소리로 씨근거리는 남자를 나니아는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가진 자가 베푸는 것과 없는 자에게 긍휼을 바라는 것은 달라요.”
가진 자, 없는 자를 운운하는 그녀를 보며 남자는 예민한 살점을 할퀴어진 것처럼 날을 세웠다.
“그거니까 네 말은, 내가 이제 가진 게 없어서, 그래서…!”
차마 말끝을 잇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어 버리는 그였다. 거칠어진 호흡이 밭은 숨으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런,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하녀는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달래면서도 남자의 한쪽 손을 잡아끌어 인적이 드문 사잇길로 몸을 옮겼다.
괜찮은 것이 아니라 애써 괜찮은 척했던 것일까. 남자는 근래 들어 자주 감정적으로 변하는 듯했다. 얼굴을 가린 저 손 너머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주름져서 흔들리는 턱과 일그러진 입술이 그의 요동치는 감정을 짐작하게 했다.
“너는, 그러는 너는 계획이 있어? 앞으로 어디서 어떻게 지내면 좋을지 생각이 있느냔 말이야.”
울먹이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맙소사.
“울지 마세요, 가주님….”
나니아는 눈물 젖은 그의 손을 치워 내고 마른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눈가를 쓸어 주었다.
“가주님, 가주님, 그놈의 가주님…!”
남자는 울분으로 엉킨 마음을 불만스럽게 토해 내면서도 얌전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 도마뱀 자식이…. 너한테 미래를 약속하기라도 했니? 그 자식이랑 함께, 흡… 갈, 갈 거냐고. 날 버리고….”
이지를 잃어 가는 목소리가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늠름하고 의젓하지 못한 그의 낯선 모습은 안타깝고 애처로웠다. 눈물은 언제나 자신의 몫이었는데. 눈물 흘리는 라키바하프의 모습을 보면서 하녀는 외려 침착해졌다. 뒤바뀐 입장이 얄궂고도 기이했다.
“그런 적 없어요…. 그렇게 진지한 마음 아니에요.”
라히무스를 향한 자신의 마음은 어떤지 몰라도, 나니아를 향한 그의 마음은 확실히 아니었다.
이제 겨우 일주일 남짓한 시간이었다. 우리 둘은 당신 생각처럼 대단한 관계가 아니라며, 상대를 달래기 위해 꺼낸 말에 이상하게 나니아 자신이 상처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나….”
울음을 집어삼키는 라키바하프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우악스럽게 나니아를 끌어안고 사죄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못되게 말해서 미안하다…. 불안해서…. 불안해서 그랬어, 지금 우리를 둘러싼 이 모든 상황이, 나는, 나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토록 바라 왔던 자유는 생각처럼 녹록지도 달콤하지도 않았다. 매달릴 품이 이곳뿐인 처지가 비참하면서도 무안하여 절망스러웠다.
나니아는 남자의 등허리에 팔을 마주 두르고 가만가만 자장가를 부르듯 두드렸다.
“가주님께서는….”
“…라키.”
“…라키바하프 님께서는 어디서 가정교사 자리를 구할 수도 있을 거예요. 학문이면 학문, 악기면 악기, 승마나 펜싱까지 할 줄 아시는걸요. 세상에 그런 엘리트 교육이 가능한 사람이 얼마나 흔할까요.”
구태여 장인의 기술을 새롭게 배우지 않아도, 그는 이미 할 줄 아는 것이 많은 귀족 남성이었다. 이 고아한 사내는 그동안 당연하게 누리고 쌓아 온 지식의 가치를 알아야 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자산은 틀림없이 어딘가에서 귀중한 능력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었다.
“저야 삯바느질을 하든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든, 못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저도 당장 내일부터 일자리를 알아볼게요.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혼자 고민하시게 해서 죄송해요.”
당장 융통할 수 없는 돈이 한 푼도 없었을 테니 얼마나 초조했을까. 이해 못 할 마음도 아니었다.
다정한 위로에 남자의 울먹거림은 더욱 벅찬 높이로 끓어올랐다.
“못되게 말해서 미안하다…. 불안했어, 너, 너마저… 나를 떠날까 봐, 나를 버릴까 봐. 그러지 말아 줘, 나나. 제발…. 나한테는 이제 너뿐이야. 나는 너밖에 없어….”
통곡하는 떨림이 들썩이는 어깨 밑으로 전해졌다.
그토록 짝사랑하던 남자의 너뿐이라는 말, 너밖에 없다는 말. 상상 속에서나 무수히 꿈꿔 왔던 감미로운 고백의 말.
가슴이 터질 것처럼 끌어안긴 자세로, 하녀는 오히려 머리가 차가워졌다. 감격스러워야 마땅할 이 순간이 좀처럼 행복하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지 생각했다.
울음이 조금 잦아들면서 남자는 나니아를 품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눈물 젖은 입술을 닦아 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피부가 하얀 만큼 붉은 콧볼과 눈시울이 도드라졌다. 그는 애써 웃어 보려고 했지만 생각처럼 잘 안 되는 것 같았다.
“꽃 한 송이 없이 이런 말, 정말 별로인 거 아는데… 그런데 지금이 아니면 말 못 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남자는 떨리는 입술을 붙여 놓고 마른침을 삼켰다. 머뭇머뭇 망설이던 목소리가 커다란 용기를 냈다.
“나나…. 우리 결혼할까?”
불안한 눈동자가 하녀의 시선을 훑었다.
“…….”
그녀는 혼란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했다. 차마 이렇다 할 대답을 당장 꺼낼 수가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결혼 얘기 같은 걸 생각하고 있었을까.
상당히 얼떨떨한 제안이기도 했고, 어렴풋이 짐작하던 상황이기도 했다. 대비되는 마음만큼이나 상충된 예견이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에게 하나뿐인 무언가가 되었다. 그 애틋한 사정이 낭만적이지 못한 까닭은, 그의 주머니가 가난해서가 아니라 그의 마음이 가난해서였다.
남자는 먼지밖에 남지 않은 저변을 쓸어서 자신을 발견했다. 밑바닥에서 발견된 자신은 결코 그의 꼭대기가 될 수 없음을 확신했다.
그 야박하고 잔인한 마음을 계산했으면서도, 불쌍하고 측은한 마음이 드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소녀는 떨리는 입술을 가로막고 머뭇거리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생각….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 * *
오후 늦게 잠에서 깬 파키케팔로가 복도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늘어지는 하품과 함께 등장한 그는 볼기짝을 벅벅 긁으며 주변을 살폈다.
“해 뜨는 것도 못 봤는데 지게 생겼네!”
처음 보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챠링고, 그리고 그 옆에서 턱을 괴고 구경하는 벨로즈, 한발 떨어져서 그 모든 광경을 못마땅한 눈초리로 관망 중인 라히무스가 있었다.
안 그래도 살벌한 인상을 무시무시하게 구기고 있는 그의 시선을 피해 벨로즈의 귓가에 대고 속삭여 물었다.
“왜 또 저런다요?”
벨은 파키케팔로가 흘기는 방향을 따라 눈을 굴리다가 씨익 웃으면서 대꾸했다.
“나니아 때문이죠, 뭐. 내버려 두세요. 오늘 영주를 따라 나갔거든요.”
파키케팔로는 역시나, 싶은 얼굴로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을 기웃거렸다. 숙취를 달래 줄 진한 레몬차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을까 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쉬워하며 자리에 앉으니 그제야 낯선 손님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셔야 적어드릴 수 있겠는데요.”
“그러니까, 고압 전기 연쇄 사슬이라던가, 대기 부양 같은…. 아, 뭐 그런 거 있잖아! 대충 알아서 좀 써 주지 그래.”
“생각보다 단순한 것들만 말씀하시는군요.”
남자는 시시하다는 듯 펜을 휘갈겼다. 제법 짧지 않은 원소술식을 막힘없이 술술 써 내려갔다. 그는 서대륙 공용 문자를 사용했다.
“이게 답니까? 제가 몸소 출장까지 왔는데.”
“출장은 무슨…. 걸어서 십 분 거리를.”
챠링고는 그가 써 놓은 술식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며 틀린 구석이 없는지 확인했다. 물론 훼손시켜 보기 전까지는 모르는 것이 술지라지만.
사장이 말한 실력 좋다는 다룸은 뜻밖에 리자드가 아닌 인간이었다. 호리호리하고 앙상해 보이는 인상의 그는 치렁치렁한 귀걸이와 화려한 옷차림을 커다란 외투 안쪽으로 숨기고 있었다. 꾸미는 걸 좋아하는 듯 화려한 인상이었으나 머리카락만큼은 차분한 흑갈색이었다. 대신 그 길이가 사내치고는 제법 길어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찰랑거렸다. 벨로즈는 그를 보며 귀를 겨우 덮는 자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거기 계신 님프분께서도 이 정도는 충분히 쓰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남자가 벨을 가리키며 말했다. 묘하게 상기된 얼굴을 보아하니 전부터 말을 걸어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던 게 확실했다.
“난 까막눈이라서요.”
한 점 부끄럼 없는 대꾸는 도도하기만 했다.
“하긴, 님프들은 굳이 이런 것을 배울 필요도 없겠죠. 하하.”
어색하게 뒤통수를 긁는 그의 정강이에 챠링고의 발이 닿았다.
“남자야.”
“…예?”
그 한 마디에 모든 기류가 끊기고 상황이 종료되었다.
챠링고는 아쉬운 듯 펜대를 돌리며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종이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더 괜찮은 게 있으면 소개 좀 해 봐. 그렇게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니 창작도 좀 하는가 본데.”
원소술은 그게 문제였다. 무궁하고 무진하여 보고 들은 바가 없으면 다룰 방법도 모르고 그게 좋은 줄도 몰랐다. 즉, 아는 만큼 부릴 수 있었다.
“하아이, 그런 거 없습니다.”
다룸은 웃으면서 겸손을 떨었다. 딱히 칭찬은 아니었는데.
필요한 만큼은 얻었으니까 이 정도로도 나쁘지 않았다. 챠링고가 입맛을 다시며 테이블 위로 돈을 굴렸다.
남자는 굴러 들어오는 은전들을 챙기며 씨익 웃었다.
“제가 사기꾼이면 어떡하려고 이렇게 잘 믿어 줍니까?”
챠링고는 술지 몇 장을 덜어 라히무스 무릎 위로 던져 놓으면서 대꾸했다.
“다룸 행세를 하는 인간이 어중간하게 공부했을 리가 없잖아.”
그 말에 인간이 떨떠름한 얼굴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미리 말해 두는데 저는 유멘타 출신이 아닙니다.”
미묘하게 냉랭해진 목소리에 챠링고는 고개를 돌려 그의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속에 일렁이는 작은 경계심을 읽었다. 하지만 이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니가 트랙타토르든 유멘타토르든 관심 없어. 중요한 건 얼마나 괜찮은 술지를 써내느냐지.”
그러고 보니 리자드는 그의 이름조차 궁금해하지 않았다. 덤덤한 성격만큼이나 미동 없는 그녀의 꼬리를 흘긋 쳐다보며 다룸이 콧방귀를 뀌었다.
“흥, 리자드치곤 매너가 좋군요.”
여자가 손가락을 튕기며 주문을 덧붙였다.
“연막 열 장만 더 써 줘. 그리고 괜찮은 거 생각나면 언제든 가져와. 조건은 아까 그거.”
“줄행랑칠 때 쓰기 좋은 것?”
“그래, 그런 거.”
벨은 암호 같은 그들의 말을 이해하려다 결국 참지 못하고 파키케팔로의 옆구리를 찔렀다. 벨로즈를 위한 설명은 인간인 나니아의 질문에 답해 줄 때보다 더 개방적이고 소상해졌다.
원소를 다루는 능력이라는 것은 누구든지 가질 수 있고, 또 누구나 가질 수 없는 힘이었다. 기회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서대륙에 사는 인간들 가운데 몇몇은 운 좋게 공부할 기회를 얻어 다룸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트랙타토르라 불리며 보통의 인간들과 구분되었다. 원소를 다룰 줄 안다는 것만으로 존중과 경계의 대상이 되어 여러모로 취급이 달라지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유멘타 출신은 유멘타토르로 불려서 구분하지만요, 보통 그 정도로 공부를 시키는 경우는 없어서요. 아무래도 쫌 드물어요.”
파키케팔로가 어깨를 으쓱하며 설명을 마쳤다. 벨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랫것이 똑똑해지면 힘들다, 뭐 그런 논리겠죠.”
옆에 있던 챠링고가 끼어들면서 잔소리를 했다.
“벨로즈 님도 이참에 서대륙 공용어라도 좀 배워 놓으시지요.”
파키케팔로도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님프들은 타고나길 잘 다룬다니까요.”
“조금만 배우시면 이 정도는 써 주실 수 있습니다.”
“그거, 글자만 안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공부를 하셔야지요.”
“싫어. 귀찮아.”
벨은 다룸이 쓰다 망쳐서 구겨 놓은 종이를 손가락으로 멀리 튕겨 버렸다. 하필이면 그게 라히무스의 가슴에 딱 맞고 떨어져 버리는 바람에 그의 험난한 미간 위로 주름이 한 줄 더 파이고 말았다.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다룸이 헤실 웃으며 물었다.
“제가, 조금 알려드릴까요? 하하, 원래 공짜로 가르쳐 드리는 거 아닌데.”
그 속셈 있어 보이는 태도를 간파한 챠링고가 잊었냐는 듯 다시 벨의 성별을 짚어 주었다.
“남자라니까?”
“아뇨, 뭐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요. 하하.”
벨이 인상을 팍 구기며 대꾸했다.
“내가 싫어.”
단호한 일축에 머쓱해진 다룸이 가방 안에 펜을 챙겨 넣으며 말했다.
“그래도 뭐, 아주 간단한 술식 정도는 구성하시던데요. 리자드 문자를 쓰는 님프라니, 독특하긴 하지만. 뭐가 됐든 발동만 걸리면 됐죠.”
그 말에 파키케팔로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었다.
“벨 님은 리자드 문자는커녕 자기 종족 글자도 못 배우셨다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거냐며 의아해하는 리자드와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 한 명뿐인 님프도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다룸은 가방 문을 닫다 말고 눈을 껌벅였다.
“예…? 그러면 가게에 써 놓고 가신 그 종이는 누구 껍니까?”
의혹의 중심에서 리자드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창문을 가린 그의 몸통 아래로 어두운 그늘이 졌다.
앉은키만 보아도 기골이 장대할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거대한 리자드는 오랜만이라 살짝 졸아붙고 말았다.
그는 아까부터 영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다룸은 자신의 언행에서 그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무언가가 있었는지 돌이켜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문제가 될 만한 소지는 없었다. 역시 그냥 인간을 혐오하는 부류의 리자드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합리적이었다.
사내는 겁에 질린 인간 다룸의 희멀건 얼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거래 끝났으면 이만 가지.”
“예? 아, 예….”
“아니, 아직 대화 안 끝났어.”
그를 여기서 일 초라도 빨리 내보내는 게 목적인 듯 구는 리자드와 아직 더 할 말이 남아 있다며 붙잡는 리자드 사이에서 다룸이 갈팡질팡하는 사이, 짤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아는 얼굴들이 돌아왔다.
그 순간, 봄 내음 맡은 꽃봉오리처럼 사내의 험상궂은 인상이 활짝 피어났다.
사내는 다룸을 노려보던 것도 멈추고 당장에 그쪽으로 걸어갔다. 가볍게 흔들리는 꼬리가 살랑이며 바닥을 쓸었다.
정체를 감추듯 뒤집어쓴 후드 밖으로 까맣고 긴 머리카락이 보였다. 작은 체구에 희미한 인상. 이내 모자를 벗으면서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보고 확신했다. 자신과 같은 인간이었다.
“별일 없었어? 오는 길에 시비 거는 놈은? 언제 오는지 알았으면 데리러 갔을 텐데.”
그녀의 외투를 벗겨 내듯 받아 들며 사내가 쫑알거렸다. 저렇게 말이 많은 남자였나 싶어 놀라울 정도였다.
‘뭐야…. 엄청 무게 잡더니만.’
리자드가 인간 애인을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보며 다룸은 허탈할 정도의 안도감을 느꼈다.
나니아는 라키바하프와 라히무스 사이에 낀 채로 좁아터진 복도를 걸으며 난처해했다. 두 남자는 아닌 척 서로를 노려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 숨 막히는 분위기를 견딜 수가 없어 어느 쪽을 먼저 들여보내야 하나 고민하다가 좀 더 참을성 좋은 쪽을 떠밀었다.
“라키바하프 님, 저녁은….”
“난 괜찮아. 입맛이 없군.”
“네…. 그, 언제든 요깃거리 달라고 하면 주시더라구요.”
“그래, 알겠다. 생각해 주어서 고맙구나.”
하녀는 자신이 감사받을 일이 아니라며 불편한 얼굴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조심스럽게 이른 저녁 인사를 올리고 몸을 물리는데, 그 뒤에 입술을 불퉁하게 내밀고 있는 리자드가 버티고 서 있었다.
남자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왜 저걸 이름으로 불러?”
나니아는 한숨을 쉬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 남자와 대화할 때는 분리된 공간으로 이동할 필요가 있었다.
어찌 보면 그를 방 안으로 들이는 것이 더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니아는 방문은 활짝 열어 둔 채로 벽 뒤에 그를 세워 두었다.
조곤조곤 달래는 말씨가 퍽 차분하고 잔잔했다.
“나는 이제 저 분을 모시는 처지가 아니라서 그래요.”
“…그래?”
님이란 소리는 여전히 듣기 싫었지만, 그녀의 입으로 이제 자신이 그에게 귀속된 존재가 아님을 인정하는 말을 듣는 일은 참 기꺼웠다.
라히무스는 부글부글 만개하려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소녀를 꼭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고작 한나절이었다. 나니아는 리자드의 커다란 가슴에 안겨 오늘 유독 작게 느껴졌던 라키바하프의 품을 떠올렸다.
그녀는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라히무스의 몸을 살짝 밀어 냈다. 아주 잠깐 포옹이 풀어지는 사이, 발꿈치를 한껏 들어 그의 턱 밑에 입을 맞추었다. 남자가 고개를 숙여 주지 않으면 키스를 할 수 있는 위치는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달콤한 입맞춤 뒤에는 씁쓸한 거부 의사가 이어졌다.
“나 오늘 너무 피곤한데, 라히무스….”
“…….”
남자의 양손은 당장에라도 나니아의 팔뚝을 꽉 쥐어 키스를 퍼부을 것 같은 자세로 멈추었다. 혼란한 눈동자가 미진하게 흔들렸다.
아무 맥락 없이 그녀가 먼저 뽀뽀를 해 주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터질 듯 뛰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이 얼뜨기처럼 버벅거렸다.
“…어.”
벌어진 치아 사이로 멍청하게 움직인 혀가 멋쩍게 입술을 핥았다.
“응….”
사내는 소녀의 입술이 닿았던 턱을 어루만지며 한참을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쫓겨났다는 사실보다도 그게 더 중요한 듯했다. 바보 같게도.
어수선한 하루의 끝을 넘기고, 이튿날 아침이 되자마자 챠링고는 나니아를 방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고는 대뜸 종이와 펜을 쥐여 주며 글씨 쓰기를 종용하는 것이었다.
“저번처럼 아무 말이나 써 봐. 불, 그래. 불이 좋겠어.”
부산스러운 손바닥이 그녀를 재촉했다. 나니아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염소젖 한 모금 입에 머금고 둥근 펜촉을 움직였다. 한 글자 점을 찍어 완성함과 동시에 목울대가 넘어갔다.
챠링고는 식탁 위의 종이를 가로채듯 손에 들었다. 그리고 의미심장한 눈길로 가게 밖을 한 번, 나니아를 한 번, 다시 가게 밖을 한 번,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아니라니까.”
“맞다니까.”
그녀의 자신감 넘치는 발걸음이 가게 문 밖으로 향했다. 옥신각신하던 파키케팔로도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활짝 열린 가게 문 바깥에서 아침 찬바람이 불어왔다. 큰 창을 통해 바깥이 훤히 내다보였다. 그들이 무엇을 하려는지 굳이 뒤따라가 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챠링고는 큰 결심이나 한 듯이 입술을 모았다. 둥글게 부푼 뺨 안쪽에서부터 불꽃이 일었다. 그녀의 뒤편에서 파키케팔로는 귀를 막아 몸을 옹송그리는 자세를 취했다.
리자드가 피어올린 불꽃이 한 조각 종이에 옮겨 붙었다. 여느 술지들과 같이 까맣게 타들어 가던 그것은.
“…….”
“…….”
그저 그렇게 까만 재로 변했다.
연소를 마친 종이는 바닥에 그을음을 남겼다.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아무런 원소 반응도 일어나지 않았다.
움츠렸던 어깨를 펼쳐 선 파키케팔로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거봐. 아니라고 했잖아.”
챠링고는 까맣게 불타 버린 종이 쪼가리를 허망하게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붉고 삐죽거리는 머리털을 강하게 질끈 올려 묶더니 다시 나니아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하녀는 저며 놓은 올리브 슬라이스와 말린 무화과 조각을 빵 위에 가지런히 올려서 공주님 앞에 진상하는 중이었다.
“가자.”
챠링고가 말했다. 묵직한 목소리는 결사를 앞둔 사람처럼 장중하기까지 했다.
“…네?”
“라히무스 일어나기 전에 빨리.”
리자드는 벨로즈의 몫이 될 뻔했던 빵을 집어 나니아의 입에 넣어 주었다. 소녀는 길쭉하게 커팅 된 몽둥이 빵의 반쪽을 작은 입에 쑤셔 넣고 웅얼거렸다.
“어이으요?”
챠링고는 나니아와 벨까지 대동하여 다룸을 찾아 나섰다. 술지 파는 장사꾼 말이 그는 오늘 장막 보수를 위해 땅굴 높은 곳 귀퉁이를 순시 중이라 했다.
나니아에게 원소술이라는 것은 너무나 희한하고 불가사의한 이야기였지만, 이제껏 알지 못했던 세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은 그녀를 설레게 했다. 소녀는 리자드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하려 노력했다.
“아가씨가 쓴 종이에서 빛반응이 있었다고 해. 누가 쓰고 갔는지 몰라도 한 번 태워 봤다는데.”
그건 분명히 네가 구성한 술식이었을 거라며 챠링고는 확신하고 있었다.
나니아는 자신에게 그런 기이한 능력이 있을 것이라 믿기 힘들었지만, 이유야 어찌 됐건 잠시나마 여자들끼리 오순도순 함께하게 된 이 순간이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라히무스보다는 차라리 챠링고가 편했다. 두 번이나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상대이기도 했고, 다정하진 않지만 매정하지도 않은 점이 일관된 사람이라 좋았다.
“음, 바보들이 옆에 없다는 것만으로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 들어요.”
고하를 막론하고 친근하게 팔짱을 껴오는 공주님의 접근은, 솔직히 말해서 처음에는 어렵고 불편했지만, 무엇이든 반복하다 보니 익숙해지는 법이었다.
나니아를 가운데 세워 놓은 벨이 고개를 비틀어 리자드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나니아가 설령 그런 재능을 갖췄다손 쳐도, 그게 챠링고랑 무슨 상관이죠?”
그 고의적이진 않지만 악의적인 질문에 리자드는 멈칫하며 말을 서슴었다.
“그야…. 협조를 바라겠죠?”
조심스럽게 대꾸를 하면서도 흘긋 나니아의 눈치를 보았다. 사실 그녀의 의사는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고 챠링고 혼자서 앞서 나가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어이, 아가씨.”
리자드가 나니아를 불렀다. 여자가 길쭉한 귓불을 긁적이며 물었다.
“라히무스랑은, 그…. 어떻게 돼 가?”
그 말에 나니아는 닳아빠진 양말 구멍을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화끈해졌다. 딴에는 조심한다고 했지만, 역시나 주변 사람들 눈을 속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은근하게 돌려 묻는 질문은 단도직입적인 추궁보다 더 민망했다.
어떻게 되어 가냐니. 뭐라고 대답하면 좋지? 잘 되어 가고 있다? 못 되어 가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이 아니다?
말을 잇지 못하는 나니아를 보며 챠링고도 덩달아 머쓱해졌다.
걔 머릿속에선 이미 너랑 살림 차려서 애를 셋은 낳았던데, 너는 걔랑 어디까지 갈 생각이니? 그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볼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부끄러워하며 대답을 망설이던 나니아는 더듬더듬 역으로 질문을 꺼냈다.
“리슬링이 그랬는데요, 리자드 세계에서 뒤처지는 수컷들이 어쩔 수 없이 인간들한테라도 손을 대는 거래요….”
그 말이 맞나요? 라고 물어보는 듯한 시선이 리자드로 하여금 진상을 요구했다.
그에 챠링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하, 고 기집애는 여기서 나고 자랐다면서 어쩜 그런 것들만 배워서. 본토에서도 돼먹지 못한 노친네 노망 취급받을 소리를.”
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젓는 그녀를 보며 어딘지 마음 한구석이 편해졌다. 리슬링이 자신의 기를 죽이기 위해 하는 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내심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뭐, 왜 그런 소리가 나오는 거냐면….”
챠링고가 옆으로 지나쳐 가는 리자드들을 가볍게 턱짓하며 설명했다.
“아가씨도 대충 봐서 느꼈겠지만, 우린 암수 성비가 좀 치우쳐 있거든.”
치우친 성비 불균형이 어디로 기울어 있는가. 누군가 지적해 주기 전까지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이미 충분히 경험한 바 있었다.
새삼스럽게 깨달아 버린 것은 나니아뿐만이 아니었는지 옆에 있던 벨이 먼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남자가 많았어요. 모든 수컷 리자드가 짝을 구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겠군요.”
“맞습니다. 그래서 암컷 한 마리가 수컷 여러 마리를 거느리는 경우가 흔해요. 반대의 경우도 없지 않지만.”
그녀는 다시 인간 소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인간을 짝으로 삼는 일이 희귀한 건 사실이야. 평범하게 애를 낳을 수 있는 관계는 아니니까. 그런 맥락에서 짝짓기에 실패한 리자드가 어쩔 수 없이 인간에게 손을 댄다, 뭐 그런 얘기가 나오기도 하는 거지만.”
어딘지 둘의 관계를 지지하고 두둔해 주는 느낌으로, 한 오라기 변명이 동료를 감쌌다.
“라히무스가 여자한테 인기가 없어서 궁할 타입은 아닌 것 같지 않아? 물론 내 취향은 아니지만.”
칼같이 선을 긋는 목소리에 단호함이 묻어났다. 나니아 역시 그녀의 말을 미량 인정했다.
“그건, 그렇죠…. 딱히 제 취향도 아니지만….”
약속한 듯 둘 모두가 덧붙이는 말에, 벨이 입꼬리를 씰룩이며 웃었다.
“그럼 그 남자는 대체 누구의 취향인데요?”
“글쎄요…. 아마 리슬링?”
“아, 확실히.”
남의 얘기하듯 가볍게 오고가는 실언에 셋 모두가 즐겁게 웃었다. 라히무스와 리슬링에 대한 이야기를 홀가분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것으로 보아 나니아 자신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존재에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사실은 어제 있잖아요….”
소녀는 가뿐한 웃음 뒤에 뭉쳐 놓았던 고민을 조심조심 펼쳐 보였다.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용기를 냈다.
“청혼을 받았거든요….”
청혼이라는 말에 깜짝 놀란 두 쌍의 눈이 나니아를 조명하였다. 그녀는 재빨리 구혼의 주인공을 밝혔다.
“가주님께요.”
“아, 뭐야 난 또….”
오해할 뻔했다는 듯 안도하려던 챠링고가 다시 벌컥 나니아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영주가?!”
벨은 나니아의 오른팔에 끼워 넣은 팔짱을 더욱 강하게 조여 왔다. 콩알 같은 질문이 점점이 쏟아졌다.
“그래서요? 받아 줬어요? 여기에 남으려구요? 둘이 결혼하려고?”
소녀는 자기보다 더 격정적으로 반응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우두망찰하였다.
“아, 아뇨, 아직 잘 모르겠어요…. 대답을 못 했는데….”
고민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며 현재는 유예 상태라고 설명하자 두 사람은 각자 무슨 생각이 드는 것인지 찜찜한 얼굴로 입맛을 쩝 다셨다. 챠링고가 어리둥절한 나니아의 어깨를 몇 번 도닥여 주었다.
비록 전과 다름없이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했지만, 누군가에게 털어놓았더니 속이라도 좀 시원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니아는 희미하게 웃으며 라키바하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와 함께 한다면 이대로 폴핀에 못이 박히는 걸까.
대화가 어쩌다 이런 화제로 접어들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을 때쯤,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랐다. 그제야 나니아는 두 사람과 동행한 본래의 목적이 떠올랐다.
땅굴 가장자리, 높은 바위담 끄트머리. 맨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주저앉아 무언가에 매우 몰두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날카로운 쇠칼을 손에 들고 바닥을 후볐다. 오른손에 든 막대기가 쇠칼을 통통통 내리쳤다.
남자가 앉아 있는 바위담 바닥은 손톱으로 긁어서 가루를 낼 수 있을 정도로 고운 머드스톤 성분이었다. 무엇을 하는가 보았더니 바닥에 음각으로 글자를 새기는 중이었다. 매우 골몰하여 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터라 섣불리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감히 말을 걸 수가 없어 숨죽여 뒷모습만 올려다보는데, 그가 먼저 이쪽을 쳐다보았다.
“뭡니까?”
까칠하게 뒤를 돌아보는 다룸의 귀 끝에서 커다란 체인이 찰랑거렸다.
“미안. 방해할 생각은 없었어. 중요한 작업인 것 같은데.”
마저 하라는 듯 턱짓하자, 다룸이 투덜거리며 조각칼을 내려놓았다.
“됐습니다. 집중 깨져서 이미 텄네요.”
남자가 하던 것을 멈추고 사다리에 발을 올렸다. 리자드에겐 껑충 뛰어 올라갈 수 있는 위치였지만, 인간에겐 조금 버거운 높이였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남자가 엉덩이를 탈탈 털었다. 챠링고가 나니아의 등에 손을 올려놓고 그를 향해 말했다.
“당신이 어제 말한 술지의 주인이 이 아가씨가 맞는 것 같은데 말이야. 우리가 태워 봐도 전혀 반응이 없었어.”
그 말에 다룸이 나니아를 쳐다보았다. 낯선 이를 탐색하는 푸른 눈동자가 다소 염세적으로 빛났다.
“념(念)이나 상(像)이 부족했겠죠.”
내가 왜 이런 것까지 챙겨 줘야 돼? 라는 퉁명스러운 말투에서 귀찮음이 묻어났다. 그러면서도 터벅터벅 나니아의 앞으로 걸어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어제 봤던 그 사람이군요.”
그는 학교에 처음 입학한 어린아이를 대하는 투로 물었다.
“한 번도 다루어 본 적이 없겠죠? 그럼 캐스팅은 우연히 이루어졌던 걸 테고요. 종이 있습니까?”
그가 챠링고에게서 여분의 종이와 펜을 받아들더니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그의 정수리에서 노란 털이 보였다. 속눈썹 색과 머리카락의 색이 다르다 했더니만 머리에는 까맣게 물을 들인 모양이었다.
다룸이 이리 앉으라는 듯 손을 까닥까닥 움직이자, 나니아도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울퉁불퉁한 바닥 위에서 글씨를 잘도 썼다.
그가 적은 글자는 빛이라는 뜻의 글자로 보였다. 나니아가 아는 모양과 획의 뻗침이나 위치가 살짝 다른 듯도 하였지만 알아봄직한 수준의 차이였다.
남자가 그것을 리자드에게 건넸다. 불을 붙여 달라는 뜻이었다. 챠링고가 그것을 태우자 밝은 섬광이 작은 폭죽처럼 파파팡 빛을 내고 사라졌다. 코끝에 자극을 받은 챠링고가 가볍게 인상을 찌푸렸다.
“잘 보셨습니까?”
다룸이 나니아를 향해 확인하듯 물어 왔다. 무슨 뜻에서 물어보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보긴 보았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손가락을 접어 가며 설명했다.
“술식을 완성하는 데에 필요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자(字). 보시다시피 우리가 사용하는 글자를 말합니다.”
그는 흙바닥에 그림을 그리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태초에 원소술은 복잡한 마법진을 매개로 구사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점차 단순해지고 간략해진 것이 술식에 사용되는 글자들이죠. 당신이 그동안 동대륙에서 사용해 왔을 문자와는 내재 가치가 다릅니다.”
남자의 검지가 머리위로 올라와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둘째로 상(像). 다룸은 캐스팅할 원소술의 형태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펼쳐 내고자 하는 바를 머릿속에 완벽하게 그려 낼 수 있어야 하죠. 그래서 배우지 않고는 쓸 수도 없습니다.”
그의 손가락이 나니아의 미간을 톡 건드렸다.
“셋째로 념(念). 여기서부터는 완벽하게 천부의 영역입니다. 자와 상을 알아도 념이 없이는 이뤄낼 수 없습니다.”
그는 나니아의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며 주문을 외는 것 같은 설명을 이어 나갔다.
“떠올리세요. 아까 보여 드렸던 그 빛의 움직임. 당신이 그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확신. 자신감. 념은 다룸의 깊은 곳에서부터 생겨나는 힘의 근원입니다. 염원하듯 강렬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계속, 계속해서요.”
그가 나니아의 손에 빠르게 펜을 쥐여 주었다. 그리고 그 밑에 종이를 가져다 댔다. 그녀는 남자가 자신에게 무엇을 쓰라고 말하는지 알았다.
빛. 그것이 나니아가 써야 하는 글자였다.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적는 글자가 아니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필요한 것은 오히려 정성이었다. 다룸의 가르침대로, 나니아는 천천히 마음속에 바라는 형상을 그렸다. 그녀가 구사하고 싶은 빛의 율동을.
“…이리 줘 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순간. 진득한 상념과 함께 완성된 그것을 다시 챠링고가 손에 들었다. 타들어 가는 불꽃이 절벽 위로 던져졌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빛 덩이가 튀어 올랐다.
“아….”
나니아의 보랏빛 눈동자 안쪽에서 그녀가 만들어 낸 섬광이 반짝반짝 요동쳤다.
벨도 그 불빛을 보며 중얼거렸다.
“예쁘네요. 아까 그것보다 훨씬.”
“맞다니까.”
챠링고가 한쪽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역시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자신과 작은 감격스러움이 그녀의 웃음에서 호기롭게 피어났다.
확인이 끝났다는 듯 남자가 덤덤히 몸을 일으켰다.
“다룰 줄 아는 것이 맞네요.”
다시 사다리를 타고 오르려는 그를, 챠링고가 바짓가랑이를 붙잡아 가며 멈춰 세웠다.
“이봐, 이 정도면 썩 괜찮지 않아? 잘하는 편이잖아. 그치?”
“그런데요?”
짜증스럽게 돌아보는 얼굴은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귀한 다룸인데, 몇 자 가르침을 좀 주지 그래.”
“제가 왜요.”
“너는 인간끼리의 정도 없냐.”
“리자드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요.”
투닥투닥 저를 두고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나니아의 신경은 영 다른 곳에 팔려 있었다.
내가, 내가 무언가 했어. 무언가 할 수 있었어.
눈부신 섬광은 그녀의 가슴 한구석에서도 부르트고 번지는 중이었다.
다룸은 첫인상과 다르게 냉정했다. 자신의 영업 비밀을 그리 쉽게 누설할 수야 없다며 챠링고의 간청을 끝까지 거절하였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떼려는 가운데, 벨이 무어라 슬쩍 말을 걸고는 일행의 곁으로 돌아왔다.
챠링고는 다른 다룸의 술지를 분석하고 모방하는 방식으로 독학할 수 있다며 나니아를 격려했다. 그녀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원소를 다루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확인받았지만, 그 뒤로는 아무것도 정해진 바가 없었다.
그녀가 말하는 공부라는 것을 더 해야 하는 것일까. 이 능력을 활용할 기회를 찾아보는 것이 좋을까.
‘그런데 배워서 어디다 쓰지?’
라키바하프의 제안대로 그와 함께 이곳에 정착한다면 필요 없을 능력이었다. 사실 나니아가 생각하기에도 뜬구름 같은 재주였다. 그녀는 앞으로 이런 이세계적 재능과는 하등의 상관없는 삶을 살아 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기분이 좋았다. 옆에서 추켜세워 주는 챠링고 덕분일까. 파키케팔로에게 여봐란듯이 자랑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작은 희열을 느꼈다.
“넌 천재야!”
챠링고의 입에서 성대한 과찬이 쏟아졌다. 겨우 종이값으로 공짜 술지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샤르도네의 가게로 돌아온 후, 나니아는 내내 테이블 앞에 앉아서 글자를 끄적이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벌써 세 가지 종류의 술지를 필사해 내는 데에 성공했다. 강도나 정확도 면에 있어서 다소 균일하지 못한 결과치를 보이기는 했으나, 직관적이고 단순한 원소술은 어렵지 않게 흉내 냈다. 반복적으로 다루다 보면 불안정한 실력은 점차 다듬어질 것이라 했다.
그렇게 잔뜩 신이 난 채로 하루가 다 갔다. 잠자리에 들기 전 따뜻한 과일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새롭게 배운 글자들을 암기하듯 적어 보았다. 어느샌가 슬그머니 옆에 앉은 라히무스에게서 뜨뜻한 관심의 온도가 느껴졌다. 나니아는 그의 팔뚝을 톡톡 건드리며 물었다.
“라히무스는 나한테 시켜 보고 싶은 거 없어요?”
그 말에 남자의 눈썹이 삐죽 치켜올라 갔다. 아주 이상한 질문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어이없어했다.
“왜 없겠어?”
“…….”
그 속된 눈빛에 담긴 의미를 한 발 늦게 파악한 나니아가 입술을 뻐끔거렸다. 그녀는 아차 싶은 마음으로 황망히 시선을 피했다.
라히무스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예사롭게 그녀의 오른손을 감싸 쥐고 펜대를 조종했다. 손등을 덮은 커다란 앞발이 느릿느릿 삐뚤빼뚤 글자를 그렸다.
완성된 기호는 여자도 익히 아는 모양이었다.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라 아무 말도 못 하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사내가 나지막이 되물었다.
“시켜 보고 싶은 거?”
굵기가 나니아의 팔뚝보다 몇 배는 더 될 것 같은 라히무스의 상박이 그녀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이거 태우면, 나랑 해 주는 건가?”
고개를 꺾어 비밀스럽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장난스러웠다. 히죽 웃는 눈꼬리는 얄밉게 휘어 있었다.
그 말에 나니아가 펜을 던지듯 내려놓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듬더듬 수치스러워하는 목소리가 그를 나무라고 질책했다.
“하, 하여간 나는 그런, 그런 게 아니라…. 좋은 의도에서 무, 물어본 건데, 그랬는데도 당신은…!”
소녀의 샐쭉한 눈빛이 뾰족한 펜촉처럼 남자를 찌르고 흘겼다.
“…변태 리자드.”
말을 말자는 듯 경멸스러워하는 목소리가 뺨 대신 귓전을 후렸다.
그대로 줄행랑을 친 나니아는 본인의 방으로 돌아와 열 오른 뺨을 식혔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하려고. 정말 창피해 못 살 지경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소녀는 테이블 위에서 식어 갈 차를 아쉬워하며 갈아입을 옷을 챙겼다.
* * *
따끈하게 데운 물로 하루를 마친 소녀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몸을 침대에 눕혔다. 리자드들은 더운물 사용을 참으로 쉽게 했다. 목욕통에 뜨거운 물을 가득 받는 술법도 있으려나. 문득 궁금해졌다.
원소술이라니.
죔죔 쥐어 보는 손힘이 어색했다. 나니아는 오늘 태어나 처음으로 특별해진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다니. 그 기대에 없던 유능감과 성취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뿌듯하고 벅찬 감흥을 가져다주었다. 그들이 바라는 대로 무엇이든 다 써 주고 싶고 가진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보고 싶었다. 왜냐하면 나니아의 삶에 이런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래에 대한 고민이 더욱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도 자리를 비운 라키바하프는 아마 구직 활동을 목적으로 폴핀 시내를 배회했을 터였다. 리자드들과 함께하는 자리를 불편하게 여기며 일부러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마 나니아가 아침 일찍 챠링고에게 끌려가지 않았더라면, 그의 방황에 자신도 동반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어딘지 필사적이기까지 한 라키바하프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그에게만 모든 고민과 책임을 떠넘긴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도 조만간 일자리를 알아봐야 할 텐데.’
걱정 가득한 머리가 베개 위로 툭 떨어졌다.
라키바하프의 청혼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아야 했다. 긍정이든 부정이든 어느 쪽으로든 간에 그에게 답변을 줄 생각을 하면 가슴이 먹먹해졌다.
성혼 끝에 부부가 된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밀접하고 소중한 관계가 된다는 것.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누구보다 믿고 의지할 남자가 생긴다는 사실이, 어쩐지 감격스럽기보단 두려웠다. 두 사람 모두 조실부모한 것은 물론 일가친척 하나 남지 않은 외톨이들이었다. 그와 결혼하게 된다면 현생에 단둘뿐인 가족이 될 것이고, 동시에 세상에 둘도 없는 친우가 될 것이고, 그리고….
캄캄한 방에 가만히 누워 있던 나니아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내가 가주님과 그 짓을 할 수 있을까?!’
나니아가 여태 해 본 중에 가장 부부관계에 가까웠던 경험은 모두 라히무스와 저지른 짓들뿐이었다.
‘가주님하고…. 라히무스랑 했던 것처럼….’
소녀는 그와 경험하였던 모든 행위의 주체를 라키바하프로 바꾸어 상상해 보았다.
그의 입술을 빨고 혀를 얽고 침을 섞고…. 서로의 성기를 만지고 만져지고…. 삽입하고, 허리를 흔들고….
‘세상에나!’
이제 와 머릿속에 그려 보니 망측하고 불경스럽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나니아는 다시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어두컴컴한 침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유부녀가 된다는 것은 평생토록 한 지아비만을 섬기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순정을 바치는 것도 몸을 섞는 것도 오로지 그에게만 허락되는 일.
‘평생 가주님하고만….’
나니아는 묘한 기분으로 허공을 응시하였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헛헛한 기분과 함께 육체적 공허가 밀려들었다. 흐리멍덩하던 라키바하프의 얼굴이 점차 다른 사내의 얼굴로 바뀌어 갔다.
크고, 거칠고, 흉포한 리자드.
‘라히무스….’
음흉하고 삐딱하게 웃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면 이상스레 가슴이 뛰었다. 직접 얼굴을 마주할 때면 온몸의 신경이 바짝 예민해져서 자기도 모르게 가시 돋친 말을 내뱉고 마는 나니아였지만, 사실은 그를 볼 때마다 퍽 두근거리고 신경 쓰였다. 한 번도 실행해 본 적 없는 라키바하프와의 스킨십보다는 라히무스와의 격정적이었던 접촉을 상기하는 일이 더 쉬웠다. 사내의 얼굴도 얼굴이지만 그 몸을 잊을 수가 없었다. 넓어야 할 곳은 넓고 가늘어야 할 곳은 가늘게 잘빠진 그의 육신을.
‘그렇게나 하고 싶은가? 나랑….’
남자가 저를 보고 성적 욕망을 느낄 때면 덩달아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요구하는 것이 단지 그것뿐이라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과는 별개로.
‘결혼하기 전에 그 남자랑 한 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 모르지….’
불순하고 발칙한 생각이 그녀를 충동질했다. 라키바하프가 안다면 놀라 나자빠질 생각일지도 몰랐다.
그의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커다란 남성기가 자신의 중심을 꿰뚫는 감각을 상상했다. 그의 커다란 몸이 자신을 깔고 뭉갤 때의 압박감을 떠올렸다. 상상과 경험이 뒤섞여 가지런했던 감각을 일깨웠다.
익힌 고기처럼 흐물흐물해진 몸이 침대 위로 흘러내렸다. 바스락거리는 이불 감촉에 맨살이 간질간질했다. 소녀는 예민해진 몸뚱이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 보았다. 뜨거운 호흡이 한숨처럼 흘러나왔다. 육신이 달뜨고 다리 사이가 젖어들었다. 어둠을 타고 으슥한 욕망이 밀려들었다. 좀처럼 절제하기 힘든 충동이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지폈다.
라히무스.
그가 자신에게 가르쳐 놓았다. 이 들끓는 욕정의 감각을. 애달픈 몸이 자꾸만 그를 떠올렸다. 그의 손이, 그의 입술이, 그의 눈빛이 그리워졌다. 커다란 두 손이 온몸을 어루만져 주는 상상을 했다.
“아, 응….”
입에서 달뜬 신음이 새어 나갔다. 스스로의 손가락에 의존해 보려 해도 좀처럼 그 만족스러운 느낌을 흉내 낼 수 없었다. 나니아의 몸은 예측 불가하게 움직이던 남자의 손가락을 원하고 있었다. 그녀의 깊숙한 여성이 빨아들일 것을 원하며 움찔거렸지만 그뿐이었다. 스스로 그 안을 쑤실 용기는 나지 않았다.
풀어 낼 방법 없는 음욕을 다시 이불 밑으로 감추고, 밀려드는 졸음에 승복하였다. 빨리 잠이라도 들어야 이 무절제한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 * *
모든 객실의 모든 손님들이 잠들었을 야심한 시각. 새벽의 고요함을 덜컹덜컹 흔드는 소리와 함께 이불 밖 차가운 공기가 발목을 스쳤다.
문소리를 듣고도 일어나지 못하던 나니아는 누군가 이불을 들추고 그 밑을 파고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몽롱한 정신을 가다듬었다.
“으응…?”
눈보다 피부로 먼저 알아차렸다. 다리 밑의 커다란 인영과 그의 기척을.
아차, 방문을 잠그지 않았구나 깨달았을 때는 이미 침입자를 이불 안쪽으로 들여놓은 후였다.
벌벌 떨리는 손이 탁자 위를 더듬었다. 성냥을 찾아 불을 붙이려는데, 괴한이 나니아의 발목을 가볍게 끌어당기며 훼방을 놓았다.
금방이라도 비명을 지를 것처럼 발버둥치는 다리를 잡아 누르며, 사내가 나니아의 사타구니 사이로 얼굴을 집어넣었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속옷까지 벗겨진 상태였다.
습하고 뜨거운 기운이 살갗에 닿았다. 경직된 허벅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하, 하지, 하지 마, 하지 마요….”
척척한 입술과 혀의 촉감이 금방이라도 여린 살에 접촉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긴장한 허벅지가 괴한의 머리를 조였다.
잠결에 깜짝 놀라 파들거리는 움직임이 뒤늦게 그에게로 전해졌는지, 검은 인영은 침대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몸을 옮겨 왔다.
“쉬이….”
안심시키려는 듯한 바람 소리에 겨드랑이 아래쪽에서부터 바짝 소름이 돋았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물이 왈칵 솟으려는데, 저음의 목소리가 다정스레 한쪽 뺨을 훑었다.
“겁주려는 게 아니었는데….”
남자가 두껍고 강인한 팔뚝으로 그녀를 끌어안았다. 커다란 손이 등과 어깨를 나긋나긋 쓸어내렸다. 피부에 닿는 가슴의 감촉이 단단하고 뜨거웠다. 여자가 잠들기 전 떠올리던 그 품이었다.
“미안해, 자기야…. 무서웠어? 응?”
낮고 으슥한 음성이 달콤한 척 귓가에 끈끈하게 달라붙었다.
“라히무스…?”
앙상한 목소리가 정체를 확인하듯 괴한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앞면과 뒷면의 차이와 같은 불안과 안도가 한데 뒤섞여 경황없이 젖어 들어갔다.
품에 그러안은 어깨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낀 사내는 흐릿한 숙녀의 눈시울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축축하게 눈물이 묻어났다.
아, 또 울려 버리고 말았다.
리자드는 낭패스러워하며 입맛을 다셨다. 애지중지 아껴 주고 싶은 마음뿐인데 왜 항상 이렇게 되어 버리는지 모를 일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소녀는 이렇다 할 거부 반응이 없었다. 그저 말없이 눈물만 훌쩍거리는 것이 가엾고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소녀의 작은 등을 한 바퀴 두른 손이 위로하듯 어깨를 다독였다. 사죄하는 목소리가 불면을 발로했다.
“밤만 되면 자꾸 네 생각이 나. 그래서 잠을 잘 수가 없어….”
고백은 탄식과도 같았다. 남자의 두 입술이 뺨 위로 흘러내린 눈물 자국을 쫓았다.
나니아는 코를 쿨쩍거리면서 가만히 그의 말을 들었다. 두 눈이 좀처럼 어둠에 익지 못하는 가운데, 사내의 존재는 칠흑 같은 야음을 비집고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턱 끝에서부터 볼을 스쳐 올라오는 콧날의 각도, 코끝에서부터 입술이 시작되는 지점 사이의 거리,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의 간격, 그 두께, 그 촉감, 그 모든 것들이 익숙했다.
뺨에 붙은 입술이 떨어질 줄을 모르고 뻐끔거리기를 반복했다.
“자기는 내 생각 안 해?”
투정하듯 물어보는 그의 말엔 작은 떨림이 있었다. 부디 너의 밤에도 내 생각에 잠 못 이루는 순간이 왔으면 좋겠다는 긴한 바람이 느껴졌다.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 몰래 마음에만 품었던 욕정을 간파해 버린 질문에 소녀는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애당초 이 모든 게 남자 때문이었다.
“라히무스가 나한테, 이, 이상한 짓 하니까….”
원망하고 탓하며 그의 잘못을 주장했다. 놀란 심장이 제 박자를 찾기도 전에 다시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몸이 이상해….”
리자드는 소녀의 허벅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다리를 붙이고 몸을 배배 꼬는 그녀의 행동으로 성적인 신호를 파악했다. 칭얼대는 목소리 속에서 부끄러움과 흥분을 읽어 낸 아랫도리가 단박에 부풀었다.
사내의 기대감 가득한 손가락이 은근슬쩍 소녀의 아랫도리를 짚었다.
“이상해…? 어디가 이상해, 응? 여기? 여기가?”
속옷 봉제선을 사이에 두고 나니아가 느끼는 위치, 정확히 그곳에 손가락을 문질렀다.
“으응….”
몸이 달았던 소녀는 평소처럼 거부하는 대신 얌전히 긍정했다.
그녀는 자신이 줄곧 바라 왔던 것이 바로 이런 종류의 쾌감이었음을 깨달았다. 이 남자와의 접촉이 그리웠음을 인정했다. 예측 불가능한 타인의 손이 가져다주는 쾌감에 속절없이 흔들리는 경험. 그 감각을 스스로 흉내 낼 길 없어 몸이 달았던 오늘 밤의 여한이 비로소 청산되는 기분이었다.
무방비하게 다리를 살짝 벌려 아랫도리를 허락해 주는 나니아의 모습은, 리자드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하아….”
몸이 달기는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부푸는 가슴 속에서 바람을 빼냈다. 그녀를 함락시키고 싶은 정복욕이 불타올랐다. 야릇한 거리로 접근해 온 그의 입술이 나니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입으로 해 줄까?”
왜 그 더러운 곳을 자꾸 입에 넣지 못해 안달인지, 나니아는 끔찍해 하며 남자의 가슴을 밀어 냈다. 하지만 그는 쉽게 당해 주지 않고 여지없이 그녀의 아랫도리로 얼굴을 가져갔다.
암컷 아랫도리 빨아 주는 일을 자발적으로 하고 싶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리자드는 여자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몸을 숙였다. 침대가 짧았던 탓에 한쪽 다리만 걸쳐 앉았다가 아예 바닥으로 내려가서 무릎을 꿇었다. 다시 또 여자의 발목을 손목 잡듯 가뿐하게 그러쥐고 아래로 훅 끌어당겼다. 치맛자락을 들어 올리며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냥하게, 자상하게, 못된 말 하지 않기.
남자는 스스로 지키고자 하는 기준을 세워 되뇌었다. 오늘만큼은 뿌리쳐지지 않겠다는 의욕을 품었다.
한편 나니아는 침대 중간쯤부터 머리를 대고 누워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종류의 쾌락에 대한 기대감으로 몸을 떨고 있었다. 여성기도 남성기처럼 팽창하는 구조였더라면 이미 끝 간 데 없이 부풀었을 느낌이었다. 직접적인 자극 없이 정신적인 관능만으로 아랫도리가 젖어 들고 있었다. 나니아는 캄캄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리자드는 수줍은 가랑이 사이를 커다란 각도로 벌려 그곳에 순문을 가져갔다. 처음엔 그저 입을 맞춘 상대로 살짝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여자는 낯설고 기묘한 감각에 휩싸여 허리를 띄웠다.
“아, 응….”
그는 자꾸만 부유하려는 허리를 붙잡아 자세를 고정시켰다. 부드러운 입술 안쪽 살로 소녀의 자그마한 살덩이를 물었다. 오물거리는 입술이 간지럽고 야릇한 감각을 자아냈다.
여자의 입에서 언어가 될 수 없는 신음들이 흘러나왔다. 숨이 넘어갈 것처럼 달뜬 호흡을 뱉고 새끼강아지처럼 끙끙거리는 모습이 더없이 예쁘고 가상했다. 이 자그만 몸에 남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 구멍이 완벽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믿을 수 없이 사랑스럽고 경이로웠다.
여자의 은밀한 샘을 빨아들일수록 외려 자신이 휘말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사타구니 사이로 평소보다 더 깊고 천한 체취가 풍겼다. 그를 미치게 하는 기운이었다.
남자는 입술 면적을 넓게 잡고 소음순과 음핵을 서너 번 크게 쫍쫍 빨아올리면서 그녀의 이름을 신음했다.
“하아, 나냐….”
사내는 자신의 구강이 여성기에 기쁨을 가져다주는 방법을 알았다. 여자들은 어중간하게 이빨이나 혀를 쓰는 것보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을 훨씬 좋아했다. 격정적으로 빨아들이는 것보다 보들보들한 살로 문질러 주는 편이 나았다.
의도치 않게 쌓아 올린 성 지식은 그의 어수룩한 암컷에게도 탁월하게 맞아떨어졌다. 생전 처음 남자에게 아랫도리를 빨리면서 소녀는, 그의 능숙한 애무에 샅이 떨렸다.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보니 촉각에 신경이 잔뜩 쏠리면서 평소보다 더 민감해졌다. 어느새 그녀의 아랫도리는 그것을 적신 물이 자신의 애액인지 남자의 타액인지 모를 정도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소녀의 희디흰 다리 사이에서 남자가 중얼거렸다.
“자기 보지에 빠져 죽고 싶다….”
그러고는 좀처럼 내밀지 않았던 혀를 꺼내서 예민한 부위를 할짝할짝 핥아 올렸다.
“아, 라히, 라, 라이…!”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쾌감으로 휘청거렸다. 뜨듯하고 축축한 살들이 격정적으로 음부를 문지르고 비벼 대는 통에 차오르는 쾌감을 버틸 재간이 없었다. 골반을 이리저리 뒤틀던 나니아는 결국 참지 못하고 허벅지를 조였다. 소녀의 뽀얀 허벅지살이 라히무스의 얼굴을 압박했다. 고개를 흔들 수 없게 된 사내는 조금 더 속도를 높여서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 빠른 움직임이 너무도 난잡하고 문란했던 통에 견디기 힘든 수치스러움이 밀려들었다.
“그러지마…. 흣, 아응…. 으, 싫어….”
배설 기관을 남에게 들이민 것도 모자라 그곳을 입에 물리고 있다니. 환장하듯 입술을 비벼 오는 그가 무섭고 부끄러웠다. 평소와 다르게 말도 별로 없어서 젖은 입술이 내는 쪽쪽거리는 소리나 너저분하게 움직이는 혀 사이로 부는 바람 소리 같은 것들이 귀를 맴돌았다.
남자는 음핵과 소음순, 그리고 질구 부분을 차례로 물고 핥고 뽀뽀하기를 반복했다. 거칠고 격렬한 탓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 하으, 읏…!”
꾹 참아 보아도 입술이 벌어지고 그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갔다.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교접하는 것처럼 허리를 흔들고야 말았다. 도망치듯 뒤틀던 골반의 움직임은 어느새 규칙적으로 그의 얼굴에 아랫도리를 비비는 동작으로 바뀌어 갔다. 남자의 온 얼굴에 척척히 젖은 음부를 문질러 대며 그의 입 주변을 더럽혔다. 그는 여자가 문지르면 문지르는 대로 버티지 않고 얼굴을 내주었다.
“아, 가, 라히무스, 아…!”
사내의 입술 위에 자위하던 소녀는, 결국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절정에 다다랐다. 강한 쾌감이 발끝으로 치밀어 허리와 다리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발등이 곱은 다리는 죽기 직전 거미의 그것처럼 파르르 격동하다 다시 침대로 떨어졌다.
절정을 맞이한 다음에도 소녀의 몸은 몇 번이고 부르르 떨렸다. 강한 쾌감은 눈물로 번졌다. 눈시울이 다시 또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리자드는 입 주변을 흥건하게 적신 체액을 바닥에 떨어져 있던 천 하나에 대충 비벼 닦고 다시 나니아의 곁으로 올라왔다.
허리 밑으로 손을 집어넣은 자세는 금방이라도 안아 올릴 것처럼 긴밀했다.
“엄청 잘 느끼네…. 기분 좋았어? 또 해 줄까?”
흥분한 여자를 보는 일은 그에게도 커다란 기쁨이었다. 어울리지 않게 밝은 그의 목소리에서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허리가 잠잠해진 나니아는 얼굴을 가리고 아무 말도 못 했다. 저리로 가라는 듯 그저 우는 소리만 내면서 밀착해 오는 남자를 멀리했다. 사내는 벅찬 팔을 벌려 그녀를 힘껏 끌어안고 얼렀다.
“왜 이렇게 칭얼거려, 애기야. 너무 느껴서 창피해?”
소녀는 듣기 싫다는 듯 또 으으응 하면서 거부하는 음높이로 그를 밀어냈다.
‘진짜 귀엽다….’
남자는 헤벌쭉 웃으며 설레 했다.
쾌감에 파묻혀 내는 신음도, 칭얼거리며 우는 목소리도, 솔직하고 난잡하게 허리를 움직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수치스러워하는 모습도, 무엇 하나 동하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느릿하게 옆구리를 쓸었다. 겨드랑이 아래쪽부터 허리와 골반을 타고 내려간 손길은 엉덩이와 허벅지를 쓸고 오금을 잡아 당겼다. 얼결에 다리를 엉킨 채로 나니아는 다시 또 코를 훌쩍 먹었다. 남자의 나긋한 손짓에 온 육신이 긴장을 주입받았다.
“다신 이런 짓 하지 말까? 응?”
“…….”
“싫으면 이제 하지 말까?”
“…….”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대답 못 할 것을 알면서 짓궂게 집착적으로 물어 왔다. 나니아는 밀려드는 부끄러움을 버텨 내고 베개 밖으로 얼굴을 드러냈다. 울음을 꾹 참는 목소리가 새빨갛게 부끄러운 말을 꺼냈다.
“시, 싫지는…. 않았는데….”
그에겐 말할 수 없지만 아직도 아랫도리가 움찔움찔 개폐를 반복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싫으면 다시 하지 말자는 말이 아쉽고 유감스러웠다. 여자는 이 짓이 또 하고 싶은 게 분명했다. 자신 없고 창피해하는 목소리가 남자의 가슴에 화살을 꽂았다.
“좋아, 좋았어…. 좋았는데…. 너무 부끄럽단 말이야.”
음예한 마음을 밝히는 것이 어려워서 목소리가 떨렸다. 그 숫접은 반응이 사내의 심장을 쿵쾅 두드려 팼다.
“…좋았어?”
여자 아랫도리를 빨아 주고 이렇게 뿌듯했던 적이 또 없었다. 남자는 흥분 섞인 한숨을 흘려보내고 나니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솔직하게 말했으니까 또 해 줘야겠는데…. 그치.”
잠시간 그를 덮었던 이불이 또다시 펄럭였다.
“아, 싫어….”
희미하고 가느다란 거부는 남자의 귀에 닿지 않았다. 리자드는 또다시 여자의 다리 사이로 엎드려 자리를 잡았다. 그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헌신하고 싶었다. 한 번 절정에 다다랐던 여자를 고양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입김만 닿았을 뿐인데 바짝 긴장한 내부가 축축하게 설레발을 쳤다.
“라히무스….”
소녀는 입술을 앙 다물었다. 막상 새롭게 시작되는 음행에 그녀는 욕심이 났다. 자신의 다리 사이를 빠는 그의 얼굴이 보고 싶은 마음에 성냥을 그었다. 등 뒤로 팔을 짚고 일어서 등불을 켰다. 어둠뿐이었던 침실에서 붉은 화기를 품고 나타난 그의 얼굴은, 짐작보다 훨씬 흥분해 있었다. 여유롭게 몰아붙이기에 그런 갈급한 표정을 짓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번에는 살짝 상체를 기대어 일으킨 자세로, 남자의 입술이 움직이는 바를 감상했다. 그는 쪽쪽거리는 소리를 내며 이번에도 입술을 널찍하게 부딪혔다.
빛을 비춰 보고서야 알았다. 나니아의 음핵을 못살게 구는 것은 이따금 날름거리는 혀뿐만이 아니라, 그의 높다란 콧대도 한몫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남자는 질 입구 가까이 축축한 입술을 붙이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남자의 코가 나니아의 음핵 부분에 격렬히 문질러졌다. 그것은 물리적 자극도 자극이거니와, 시각적으로도 음란한 감각을 선사했다.
언제나 위에 있던 라히무스의 얼굴을 이런 각도로 내려다보기는 처음이었다. 그의 입술이 샅 주변을 유영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데, 시선을 눈치챈 리자드가 내리깔았던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치켜뜬 눈 속에 붉게 빛나는 눈동자가 공격적으로 일렁거렸다. 덕분에 눈이 마주치자마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남자는 입술을 과장되게 두어 번 쫍쫍 빨아 먹듯 움직이더니, 눈 아래를 휘게 접으며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혀를 꺼내서 소음순을 핥고 흔들었다. 지독히 천박한 광경에 나니아는 입을 틀어막고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사내는 다시 나른한 눈동자를 내리깔고 고개를 마구잡이로 흔들어 비볐다.
“아, 응, 아앙…!”
그의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치미는 쾌감을 참아 보려 했다. 나니아가 머리채를 쥐는 바람에 리자드의 반듯한 이마와 사내다운 눈썹산이 훤히 드러났다. 그는 다시 한번 눈을 들어 흥분에 질린 소녀의 얼굴을 확인하고 애무하는 속도를 높였다.
도발적인 시선과 움직임은 다시금 소녀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아, 더 못 하겠어…. 더 못 하겠어, 라히무스…!”
못 하겠다며 엉덩이를 빼는 그녀를 다시 또 끌어 내려 바로 눕혔다. 가녀린 손목을 옆구리에 가져다 나란히 붙여 놓고 허리와 손목을 한꺼번에 쥐었다. 사내의 커다란 양손에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하반신이 힘겨운 반항을 이어 갔다.
“놔줘, 나, 놔줘, 아, 읏, 아….”
사내는 일부러 살갗을 빨아들이는 소리를 내면서 혀와 입술을 지저분하게 움직였다. 격렬하게 후르릅거리는 소리가 나니아를 수치의 구렁에 빠뜨렸다. 입술은 물론이고 인중과 코끝으로 아랫도리를 자극해대는 통에, 여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는 소리를 냈다.
“라히무스, 제발….”
그의 콧날에 가장 기분 좋은 부분을 문지르고 싶어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조금만 더 하면 이상한 것을 쌀 것 같아서 곤란해지려던 차에 또다시 허리가 튀었다. 지독한 쾌감을 견디지 못한 입에서 울음이 터졌다.
남자는 여자가 뱉어 낸 애액을 기꺼이 빨아 먹었다. 나니아 본인이 안다면 한나절 내내 엉엉 울면서 쥐구멍으로 숨어들 사실이었다.
흘러나오는 것들을 전부 혀로 닦아 낸 다음에야 결박한 손목을 풀어 주었다. 남자는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거칠게 문질러 닦으며 탁한 숨을 뱉었다.
쓰읍.
“후….”
축축한 얼굴 아래쪽을 여러 차례 닦아 낸 그가 다시 나니아의 옆으로 와서 비비적거렸다.
“이번엔 쑤시면서 빨아 줄까?”
남자가 손가락을 갈고리처럼 휘어서 긁는 시늉을 했다. 나니아는 질색하며 붉어진 뺨을 베개 뒤에 숨겼다.
“시, 싫어…. 이제 그만할래….”
그만하고 싶다는 일축에 모든 행위를 멈추었다. 사내는 여느 다른 수컷들처럼 아랫도리 충동에 좌지우지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었으나,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리자드 사회의 일원이었다. 암컷이 그만두고 싶다면 그 즉시 손을 떼야 했다. 그것이 매너 있는 리자드 수컷의 상식이었다. 괜히 욕심을 부리다가 그녀를 울리거나 불쾌하게 만들고 싶지 않기도 했다.
라히무스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억누르듯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서 온 힘을 다해 나니아를 끌어안았다. 자신에게 허락된 애정 행각이 오직 이것뿐인 것처럼.
얽힌 다리 사이로 묵직한 열기가 뭉쳤다. 부푼 성욕이 해소될 길 없어 엉겨 붙은 허벅지가 끈적하게 리듬을 탔다. 긴 꼬리가 이불 위를 흐느적거렸다. 이 넘치는 애욕을 견디기 힘들다는 듯이.
“나랑 같이 자.”
남자는 동굴 같은 목소리로 어린아이가 떼쓸 때나 할 법한 이야기를 꺼냈다. 투정 부리듯 조르는 말엔 간곡한 떨림마저 느껴졌다. 내가 이쯤에서 참을 테니 너의 품에서 잠이라도 재워 달라는 간청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남자에게 침대를 허락한다는 것은 밤새 내 몸을 멋대로 다루어도 좋다는 승낙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안 돼요….”
지금까지의 은밀한 소란만 해도 벽 너머 누군가에게 알려질까 봐 조마조마한 상황이었다. 터지는 쾌감을 참을 수 없어 신음을 내지르고 만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왜에….”
라히무스는 앙다문 팔에 힘을 주고는 아쉬워하는 목소리를 귓가에 흘려보냈다.
멀쩡한 상태로 저지른 실수는 술에 취했을 때보다 훨씬 커다란 회한을 가져왔다. 또다시 라히무스와 한 침대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라키바하프에게 보이게 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저번처럼 모른 척 넘어갈 줄 것 같지 않았다. 그의 위태로운 초석을 흔드는 일은 처음에만 통쾌했었다.
나도 누군가에겐 여자로 보일 수 있어요. 나를 어디에나 널려 있는 잡초 취급하지 말아요. 당신도 나를 꽃처럼 대해 줘요. 라히무스를 이용해 은연중에 호소했던 마음은, 햇빛에 바랜 물건처럼 이제는 유쾌하지 못한 색을 띠었다.
“…역시 안 돼요.”
남자를 방에서 내보내야 했다. 작달막한 손바닥이 그의 가슴을 밀어 냈다. 그리고 당신과 다시 같은 자리에 누울 의사가 없다는 뜻에서 아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리자드는 그녀를 따라 육중한 윗몸을 반쯤 일으켜 세우며 미련을 뚝뚝 떨어뜨렸다.
“이렇게 좋은 잠자리에 누울 수 있는 날도 기껏해야 하루 이틀이야. 그때까지만이라도 좋아.”
또다시 노숙 같은 잠자리로 해결되는 밤이 이어질 터였다. 도망자 신분에 따뜻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잠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고 기회였다. 그렇게 피로와 여독을 풀기도 부족한 차에 좋아하는 여자 생각으로 도통 잠이 오질 않으니 죽을 맛이었다. 그녀를 품에 넣지 않고서는 도무지 안락한 밤을 지낼 수가 없었다. 소녀의 체취와 살갗이 간절했다.
“하룻밤만이라도 네 곁에서 잠들게 해 줘….”
그의 간곡한 부탁은, 그러나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좋았을 말로 남았다.
라히무스의 말을 듣고 나니아는 부푼 구름처럼 하늘 높이 떠올랐다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는 기분을 느꼈다.
“…하룻밤.”
여자가 중얼거렸다.
“그래요….”
‘당신은 어차피 떠날 사람이었지.’
나의 인생에 묶어 둘 수도, 나를 묶어 줄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붙들고 무슨 허황된 꿈을 품었던가. 나니아가 필요로 하는 상대는 단단히 뿌리박은 거목이지 물 위를 떠도는 부평초가 아니었다. 하물며 서로 진지하지도 못했다.
아릿한 정념에 휩싸여서 그를 바라는 것은, 이제 단념할 순간이었다. 여기까지다. 그를 밀어내야 했다.
“라히무스 말이 맞아요. 우리 이런 것도 다 그만둬요….”
따뜻한 색의 불꽃이 일렁이는 가운데에서도 차갑게 얼어붙는 나니아의 얼굴을 보고 나서야, 라히무스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대답이 왜 그렇게 되는 거지…?”
축축하게 젖어 들었던 아랫도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끈적해지는 것처럼 불쾌감이 엄습했다.
“무책임한 짓은 관두자구요.”
퇴짜를 놓는 것은 나니아 자신이면서 어째선지 마음 아파하는 듯 보이는 것도 그녀였다. 리자드는 여자가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는 이유를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워했다.
“왜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에요. 항상 생각하고 고민해 왔어, 나는.”
고작 며칠 사이. 풍랑처럼 밀려드는 당신 때문에 얼마나 허우적댔는지. 그가 아니어도 소녀의 삶은 충분히 고단하고 어려웠다.
“…가주님과 결혼할 거예요.”
여자는 고저 없이 냉랭한 목소리로 통보했다. 복잡한 감정을 애써 숨기며 그의 어깨 너머로 초점 없는 시선을 던졌다.
사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아직도 결론을 내리지 못한 문제였지만, 이방인을 쫓아내기엔 충분한 내용의 선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사나운 눈썹이 험하게 일그러졌다. 얼굴 가득 살벌한 물음을 띄운 그를 보고, 나니아는 자신의 지난 행적들과 비견하여 수습하듯 변명했다.
“이번에는 내 일방적인 마음이 아니에요. 그가 먼저 청혼한 거야.”
“…언제.”
“얼마 안 됐어요. 어제요.”
남자는 믿기 힘들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사내놈을 계집으로 오해하여 반했다며 헤벌쭉하던 놈이다. 그런 새끼 마음에 갑자기 진심이 생겨 봤자 과연 얼마나 참되고 진실할까. 하지만 나니아는 차라리 그런 변덕쟁이의 손을 들어 주는 듯했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인생에 끼어든 낯선 괴물이 아니라.
그러나 남자를 진실로 화나게 하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누가 먼저 청혼을 했다는 거야.”
리자드는 그르렁거리며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핏줄이 솟을락 말락 하는 이마가 드러났다.
“나 같은 짐승 새끼가 하는 말은, 너한텐 말 같지도 않았어? 무식하고 말도 안 통하는 괴물이라 들어 줄 가치조차 없던가?”
남자는 지난날 리자드라는 사실을 들켰을 때처럼 자신을 깎아내리며 폄훼했다. 나니아도 그의 비아냥이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당신을 그렇게 생각한 적 없다고 했잖아.”
“그게 아니면, 그게 아니면? 날 없는 새끼 취급하는 널, 내 말을 완전히 무시하는 널,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데?”
도통 이해할 수 없어 하는 나니아의 시선이 다시금 불안하게 흔들렸다. 붉은 눈동자는 거칠게 분개했다. 격앙된 분노의 끝에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다.
“그냥 네가 원래 그런 여자인 줄 알았어. 못 들은 척, 모르는 척, 애매하게 굴어도 그런가 보다 납득하려고 애썼어. 네가 워낙, 네가 워낙 예쁘고 귀여운 걸 나도 아니까. 주변에 다른 새끼 하나둘 더 있어도, 아쉬운 건 나니까. 내가 매달리는 입장이니까. 질투 나서 미칠 것 같아도 참았어.”
언성을 높이던 사내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뭐?”
바람 빠지듯 허탈하게 새어 나간 웃음과 함께, 성난 시선이 침대 밖으로 돌아갔다.
“걔가 먼저 청혼을 했어? 그래서 그 새끼 곁에 남겠다고.”
남자는 내뱉는 웃음과 함께 심호흡하더니 갑자기 어깨를 홱 돌려서 나니아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것을 자신과 여자의 눈높이로 들어 올리며 물었다.
“너는 내가 이 예쁜 손에 반지를 끼워 줬을 때, 대체 무슨 생각을 했지?”
남자의 비웃음은 씁쓸하고도 살벌했다. 화가 난 그의 말투와 몸짓이 무서워지려 할 때쯤, 그도 나니아의 얼굴에서 두려움을 읽어 냈다.
“아, 역시 나는 네 이상형은커녕 그 발끝에도 못 미치는 괴물 새끼라 이건 아니다 싶던가? 도저히 끔찍하고 견딜 수가 없어서, 그래서 손에 끼고 있기조차 좆같고 거북했나? 그래서 돌려줬어?”
그 역시 자기가 뱉은 말에 스스로 상처를 받고 있었다.
대체 왜? 나니아는 어디부터 꼬여 버렸는지 모를 그의 발분을 다잡았다. 잊고 있던 파키케팔로의 귀띔을 떠올리면서.
‘그 반지는 친구한테 주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수컷으로서 말이야. 여자한테는 그리 좋은 상대가 아닐 수도 있다고.’
‘그 반지…. 주인이 따로 있을지도 몰라.’
“이 여자 저 여자 헤프게 구는 건 당신인데, 왜 당신이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 아무한테나 돌려쓰게 만드는 반지, 나한테 줘서 그게 뭘 어쨌는데. 그래서 필요 없으니까 돌려준 거잖아!”
생각해 볼수록 화를 낼 사람은 나니아 자신이었다. 억울해서 북받치는 마음은 참을 길이 없어 그녀도 언성을 높였다.
남자의 입가에 남아 있던 삐딱한 웃음이 거둬지고, 그 끝이 다시금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게 무슨 말이야.”
팔목을 붙잡은 손에 힘이 빠졌다. 한 뼘 가까이 다가온 얼굴이 위태롭게 녹아내렸다. 뾰족하게 경직되었던 눈썹 산도 완만하게 무너져 있었다.
“그걸…. 그걸 내가 왜 자기 말고 다른 여자한테 줘. 나 그런 적 없어.”
끊어질 듯 가늘게 이어지는 말에 위태로운 숨소리가 섞였다. 오해를 짚어 낸 손끝이 조심스럽게 소녀에게로 향했다. 허리를 감싸 안은 팔이 나니아의 가녀린 몸을 자신의 가슴 앞으로 끌어당겼다.
여자는 그의 팔에 안겨서도 진정치 못했다. 부아가 치미는 얼굴로 역전된 울화를 참지 않고 풀어냈다.
“거짓말하지 마. 내가 뭘 애매하게 굴었다는 거야? 당신이야말로, 당신이야말로 나한테 진심도 아니면서,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귀엽다느니 자기라느니 멋대로 굴어서, 나를, 날 혼란스럽게 했잖아.”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울분이 눈동자에 습한 물기를 자아냈다. 흐릿해지려는 시야로 라히무스의 두 입술이 멍청하게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차 싶은 표정을 짓는 그의 얼굴이 박동하는 심장 위로 차가운 기대감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미안. 나한테는 너무 당연한 거라, 설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 했어.”
라히무스는 커다란 손으로 입을 가리며 몹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제야 어디가 어떻게 꼬여 있었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인간 여자는 반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턱이 없었다는 사실을.
“잠깐…. 잠깐만 기다려 줘.”
남자는 얼굴을 덮은 쪽의 반대편 손바닥을 그녀에게 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떠나면서 침대는 크게 출렁거렸다.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성큼성큼 걸어가 방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얼결에 그를 따라나설 것처럼 침대 밖으로 다리를 빼고 앉은 나니아는, 쫓아갈 겨를 없이 그대로 멈추어 버렸다.
“…….”
소녀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코를 훌쩍이며 멍청한 리자드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쿵쾅거리는 발걸음과 함께 돌아왔다. 어찌나 요란하고 다급한지 방문 너머로 들리는 저 소리에 다른 누가 깨지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문을 벌컥 밀고 들어온 그는 언제 야단을 떨었냐는 듯 빳빳해졌다. 일시 정지된 사람처럼 잠시간 아무런 말도 행동도 없더니, 문가에 바짝 기대어 서서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그마한 촛불이 간신히 그의 커다란 몸을 밝혔다. 불꽃이 미치는 범위 바깥으로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우량한 가슴이 더욱 비대하게 부풀었다 잠잠해지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시선은 허공을 맴돌았다. 몇 차례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는 중이었다. 이번이 처음이 아닌데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떨렸다.
리자드는 이내 결심한 듯 천천히 침대 곁으로 다가갔다. 붉은 초가 그의 턱 끝을 밝힐 때쯤, 침대에 걸터앉은 나니아의 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숨이 턱 막혀 와서 당장에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는 못했다. 나니아는 의문스러운 얼굴로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하였다.
사내는 매우 조심스럽게 소녀의 하얗고 작은 손을 이끌었다. 내리깐 속눈썹이 긴장으로 짧게 흔들렸다.
“반지는…. 리자드의 반지는 평생을 바치고 싶은 짝에게 주는 거야.”
떨리는 건 그의 속눈썹뿐만이 아닌 듯하였다. 그는 왼손으로 나니아의 손을 받치고, 오른손으로는 다시 신중하게 그녀의 손가락을 더듬었다. 아마도 그의 방에서 급히 찾아왔을 반지가 그녀의 네 번째 손가락에 뜨겁고 단단하게 끼워졌다.
“평생 한 개뿐이고, 한 번뿐이야.”
바닥에 꿇어앉은 사내가 눈을 들어 나니아를 올려다보았다.
“두 번째는 없어.”
라히무스의 얼굴이 발긋해 보이는 것은, 비단 따뜻한 색감을 비추는 촛불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반지가 끼워진 나니아의 약지는 그대로 빳빳이 굳어 버렸다. 여자는 할 말을 잃은 채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만나 보자든가 교제해 달라는 말도 아니고 대뜸 평생을 바치고 싶은 상대라니. 그건 마치… 열렬한 프러포즈 같지 않은가.
나니아는 멍해졌다. 높아졌던 목소리는 다시 나지막하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당신 처자식 없어?”
“없어.”
“이혼한 부인은? 사별한 부인은?”
“결혼한 적이 없는데 처가 어디 있고 자식이 어디 있나.”
“애, 애인은…? 고향에 남겨 두고 온 애인은….”
“없어. 없다고.”
고집스러울 정도로 연속되는 질문에 라히무스는 당치도 않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나니아의 그런 바보 같은 질문조차 사랑스러웠다. 남자는 그녀의 손바닥을 펼쳐 그곳에다 뺨을 비볐다. 안도하는 낯빛이 만족스럽게 풀어졌다.
그러나 정작 손길의 주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계속되는 의문을 이어 나갔다.
“그치만, 부정하지 않았잖아.”
차곡차곡 다져 왔던 믿음에 금이 갔다. 금만 갔다 뿐인가. 아예 쩍 하고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당신한테 바람둥이라든가, 총각 행세하지 말라든가…. 그런 소리도 했었는걸.”
왜 그때 오해를 바로잡아 주지 않았느냐 책망하자 라히무스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그의 뜨듯한 숨결이 무릎 위로 흩어졌다.
“그건 네가, 뿔…. 뿔 얘기를 하는 줄 알고.”
리자드는 꺼림칙하게 말끝을 흐리며 머릿속으로는 그의 어린 동료를 떠올렸다.
그럼 파코 녀석 대체 무슨 소릴 지껄였던 거지.
역시 엉덩이를 흠씬 두들겨 패 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다짐하는 사이, 소녀는 손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이건 그럼 당신 뿔로 만든 거야?”
예기치 못한 질문이었는지 남자는 고개를 번쩍 쳐들고 얼굴을 붉혔다. 어딘지 민망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회피하듯 찡그린 눈시울이 어색하게 이지러졌다.
“…어.”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던 그의 짝짝이 뿔이 떠올랐다. 평생 하나뿐이라는 말은 그런 뜻에서였을까. 반지가 갖는 의미가 생각보다 훨씬 심중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지금, 껄끄러운 부담감이 밀려들었다.
“그런 중요한 걸 달란다고 덜컥 줘 버리면 어떡해요. 나는, 나는 몰랐어…. 그렇게 거창한 물건인지.”
어쩌면 한 발자국씩 작게 맴돌던 그를 곁으로 훅 잡아당긴 것이 다름 아닌 나니아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지끈지끈해졌다.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받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복잡한 심경의 여자 밑에서 그녀의 표정을 면밀히 관찰하는 리자드가 있었다. 그는 샐쭉한 눈을 치켜뜨며 소녀의 구부러진 손가락들 끝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처음 봤을 때부터 끌렸어.”
사내의 낮고 뜨거운 음성이 손끝에서부터 찌릿하게 울렸다.
“언제…?”
“그날 마구간에서부터. 처음 네 냄새를 맡았을 때부터.”
“…….”
내가 당신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당신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나니아는 불편한 입술을 깨물었다.
“줄곧 눈을 떼기 힘들었어.”
나니아는 대답 없이 얼굴만 붉혔다. 분명 싫지 않은 느낌으로 굳어 가는 그녀를 보며, 리자드는 자기도 모르게 눈웃음 쳤다.
언제나 차갑고 냉랭하던 눈매가 햇빛에 녹아내리는 동토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너도 모르지 않을 텐데.”
태산 같은 남자가 발아래 복종하듯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손가락을 더듬던 남자의 입술이 손등 위로 올라와 키스를 남겼다. 그러고는 애정을 갈구하듯 나니아의 한쪽 손등에 뺨을 문질렀다.
“그때부터 매일 네 생각뿐이었으니까, 나는 운명이라고밖엔 생각할 수 없었어.”
항상 자신을 내려다보기만 하던 거구의 사내가 정수리를 보일 정도로 낮은 위치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상황은 낯설고도 기묘했다.
나니아로 가득 찬 눈동자가 순종적으로 껌벅거렸다. 사랑에 빠진 리자드의 시선이 목마르게 그녀를 핥았다.
“나는 세상 어떤 여자한테도 이런 마음 품어 본 적 없어.”
굴종하던 무릎을 들어 천천히 고개를 가져왔다. 어느새 다시 높아진 그의 얼굴이, 그의 손길이, 나니아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내 평생을 바칠 상대는 너야, 나냐….”
남자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긴장으로 굳은 그의 입술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입을 맞출 것 같은 지척에서, 나니아가 물었다.
“나를 좋아해?”
“…….”
“라히무스는, 나를 좋아해…?”
그 말에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살짝 내민 입술 그대로 멈추어 섰다.
무쌍의 눈두덩이 아래로 반쯤 가려진 눈동자가, 그게 또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냐는 듯 첨예해졌다.
“인간은 그걸 꼭 말로 해야만 아는 건가?”
어딘지 한심하다는 듯 묻는 그의 말은 또다시 나니아의 울화를 돋웠다.
말로 해야만 아냐니.
“말로 안 하면 어떻게 알아?”
소녀의 얼굴에 심통이 번지는 것을 본 리자드는 키스는 글렀다는 생각과 함께 고개를 물렀다. 완전히 몸을 일으켜 세워 선 바람에, 이제 다시 촛불이 가까스로 그의 목덜미를 비췄다.
라히무스는 콧대를 덮을락 말락 하는 앞머리 밑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깎아 놓은 듯 정갈한 이마 위로 너저분하게 들어 올렸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그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좋아하냐고? 좋아하지도 않는 암컷에게 구애하는 리자드가 어디 있어.”
섹스하고 싶다는 말보다 더 확실한 관심 표현이 어디 있단 말인가.
“당신은 항상 내 몸만…. 바랬잖아.”
나니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리자 남자는 탄식했다. 그동안 자신의 마음을 전혀 전해 받을 길 없었다는 듯 말하는 그녀를 보며 망연해졌다.
“그럼 여태 너한테 난 뭐였던 거지. 허구한 날 섹스만 부르짖는 짐승 같았겠군.”
조소하듯 말한 그의 자책은 뜻밖에 정답에 근접했다.
한편 소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며 라히무스의 말을 반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중얼거렸다.
“인간은…. 마음 없이도 섹스할 수 있어.”
그녀는 어째선지 남자의 마음을 부정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좀처럼 쉽게 나니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반지는 아냐.”
남자는 다시 한번 더 그녀의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어루만지며 설명했다.
“반지는 맹세다. 평생 너만 바라보겠다는 맹세.”
리자드가 나니아의 손을 들어 올렸다. 반지를 낀 자리 위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니까 나를 너의 것으로 삼아 달라는 의미야.”
애틋하게 내리깐 눈이 시선을 들었다. 붉은 눈동자에 열렬한 정념이 타오르고 있었다.
“말이 부족했다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어. 그게 너에게 확신을 줄 수 있다면.”
남자가 나니아를 침대 위로 밀어 눕혔다. 힘 빠진 소녀는 지푸라기 인형처럼 베개 위로 풀썩 쓰러졌다.
사내의 육중한 몸이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그러고는 다시 또 뜨거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해 왔다.
“좋아해. 모든 순간 좋아하고 있었어, 너를.”
리자드의 거칠고 처절한 음성이 솜털 같은 고백을 입에 담았다. 그는 평소와 다른 느낌으로 흥분하고 있었다.
남자의 마음을 전해 들은 나니아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줄곧 좋아했다는 그의 말은 가슴 아프기만 했다. 당황스럽고 놀라워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미안, 미안해.”
리자드는 그녀가 왜 사과를 하는 것인지 몰라 인상을 찌푸렸다.
“나, 나를 그 정도로 생각하는지 몰랐어. 당신에게 상처 줘서 미안해.”
참아 보려 했던 눈물이 속눈썹 사이사이로 새어 나왔다. 붉어지려는 코끝을 보고, 남자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뭐가 미안해.”
“더는…. 더는 안 돼.”
“뭐가 안 돼.”
소녀는 남자의 몸 아래 반쯤 깔려 있던 상반신을 일으켜 그로부터 한 뼘 벗어났다. 눈물은 혀끝에서도 배어나는 것인지 여자의 발음이 어리숙하게 뭉개졌다.
“당신이 진심이었다면,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나를 끌어안고 어루만지면서 당신이 얼마나 기대했을까. 내가 당신에게 키스했을 때, 잠자리를 거절하지 않았을 때, 내가…. 내가 당신을 가지고 노는 것 같다고 느꼈을 거 아냐.”
짝사랑이 얼마나 가슴 아픈지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와 같은 고통을 나니아 자신도 누군가에게 안겨 주고 있었다니. 꿈에도 상상 못 하던 일이었다.
“나, 나는 당신도 나에게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 없이 손을 대는 건 줄 알았는데…. 당신이, 당신이 나를 정말 좋아하는 거라면…. 내가 그러면 안 됐던 거잖아.”
울먹이는 목소리가 점점 흐트러졌다. 기묘한 죄책감은 눈물을 불러일으켰다.
“다, 당신이 안아 줘서 좋았다느니, 나를 원해 달라느니, 그런 말로, 그런 이상한 말로 당신을 헤집어 놨잖아.”
이래서야 라키바하프와 자신이 다를 바가 무엇인가. 나니아는 스스로가 경멸스러워지려 했다. 그에게 내뱉었던 모든 말들이 죄악으로 되돌아왔다. 적당히 즐기다가 관둘 수 있을 거라 가볍게 생각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가 아니라. 상대방의 몸만 바랐던 것은 자신이었다. 그가 아니라.
“미안, 미안해…. 그치만 나는, 난 당신 마음 받아 줄 수 없어.”
그녀는 리자드와 진지한 관계가 될 마음이 없었다. 그럴 수 없다고 보는 게 더 맞을지도 몰랐다. 어느 날 갑자기 별똥별처럼 나타났다 사라질 이방인에게 인생을 베팅할 순 없었으니까. 당연했다.
리자드는 나니아의 당혹감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이유를 본인 스스로에게서 찾았다.
“내가 싫어?”
사내의 굵은 팔뚝이 나니아의 허리에 감겼다. 커다란 육신이 주는 위압감이 숨을 멎게 했다.
“내가 수컷으로서 매력이 전혀 없나? 아직 나랑 제대로 자 보지 않았잖아. 나는 자신 있는데 네가 기회를 안 줘.”
서글픈 시선에 투명한 욕정이 섞였다.
무엇이 자신 있다는 것인지, 바짝 가까워져 오는 그의 얼굴에서 읽어 낼 수 있었다. 육중한 가슴을 가까스로 밀어 내는 등 뒤로 한 줄기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당신은 분명 멋진 남자야. 매력적인 남자라구요…. 그치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야. 알잖아, 나는…. 나는 당신하고 사는 세계가 달라.”
나니아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꼬리 끝에 가 닿았다. 리자드는 그 시선을 눈치채곤 애처롭게 찡그린 얼굴을 완전히 일그러뜨렸다.
“내가 끔찍해? 괴물 같아서?”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
사내의 어긋난 자격지심이 소녀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런 게 아니면 왜.”
“현실적으로…. 우리 둘은, 살아온 환경이 많이 다르고…. 앞으로도 그렇고…. 당신은 떠날 사람이고, 난….”
“나랑 함께 가자, 나냐. 아버지 흔적도 찾고, 네 진짜 고향을 찾아서.”
“아니, 난, 가주님하고….”
나니아는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불현듯 라키바하프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이 그들을 두고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상기해 냈다. 결혼하기 전에 남자와 한 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든가, 그따위 끔찍한 욕심에 잠겨 있었다. 남의 불구덩이 속에서 불장난을 쳐 볼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니.
한편 라히무스는 그녀의 입에서 일컬어진 라키바하프의 존재에 이를 아득 갈았다.
“…몰랐다며. 이제 알았으니까 나한테도 기회를 줘.”
원래 암컷들은 자신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여러 마리의 남편을 거느리기 마련이었다. 아쉬운 건 이쪽이니 견뎌야 했다. 자신은 그럴 의향이 충분했다. 일대일의 관계라면 더욱 좋겠지만, 그것이 어렵다면 두 번째, 세 번째라도 좋았다.
“네가 누구보다 날 더 좋아하게 만들면 되는 거잖아.”
처량한 처지에 호기로운 선언을 하는 그를 보면서, 나니아는 고개를 세차게 저어 그를 부정했다. 그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거라면, 희망이나 기대감 따위 가질 틈도 없이 단칼에 잘라 내는 것이 맞았다. 받아 줄 생각이 없다면 단념할 수 있게 도와주기라도 해야 했다. 어중간한 마음과 태도는 상대방에게 독이 될 뿐이었다.
“아니야…. 당신이랑 나는, 그런 관계가 될 수 없어요. 나는 이제 라히무스를 멀리할 거고, 당신도 나를….”
“아니, 난 그럴 생각 없어.”
“내가, 읍…!”
리자드는 결국 참지 못하고 못된 말만 늘어놓는 나니아의 입술로 돌진했다. 몇 차례 입술을 빨리던 나니아는 울먹이는 소리와 함께 그를 거세게 밀어 냈다.
“아, 안 돼요! 이제 이렇게 입 맞추는 건 안 돼. 포옹도 안 돼. 당신에게 다정하게 대해 줄 수도 없어. 그게 얼마나, 얼마나…. 얼마나 잔인한 건지 나는 알아.”
라히무스는 서늘한 눈빛으로 나니아를 내려다보았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조차 가슴 미어지도록 사랑스러웠다. 그녀의 까맣고 긴 머리카락을 조그마한 귀 뒤로 넘겨 주면서, 예쁜 얼굴을 감상했다. 미운 말만 해 대는 그 얼굴을 보고만 있어도 행복했다.
“달라지는 건 없어. 난 널 원하고, 너도 날 원하게 만들 테니까.”
리자드 스토리 R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