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땅굴은 그야말로 리자드들만의 작은 사회였다. 머리색, 눈 색, 피부색 등은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커다란 꼬리를 하나씩 끌고 다녔다. 이국적이다 못해 별세계가 펼쳐졌다. 나니아는 지나다니는 리자드들과 그들의 세상을 구경하기 바빴다.
파키케팔로가 어깨 무겁게 가지고 다니는 금속 장신구들이 오늘 모처럼 빛을 발했다. 그처럼 크고 작은 장신구들로 꼬리를 꾸민 리자드들을 보면서, 파키케팔로가 말한 꼬리 장식의 중요성을 어렴풋하게나마 체감했다.
인간들 사이에서 정체를 숨기기 위해 리자드들이 애용하던 로브를, 오늘은 나니아가 뒤집어썼다. 매번 커다란 천으로 온몸을 돌돌 감고 있던 그들은 모처럼 탁 트인 환경에서 거리낌 없이 피부를 드러냈다. 오랜만에 몸에 붙는 옷을 가볍게 걸쳐 입은 라히무스의 등을 보면서, 나니아는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파키케팔로나 챠링고와 다르게 살랑거리는 그의 붉은 꼬리는 아무 장식도 없었다.
물어보고 싶다. 물어보고 싶다. 너는 저런 거 안 하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그의 꼬리는 벌거벗은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특히 그의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저 암컷 리자드에 비하면 더 그랬다.
리슬링은 원래의 꼬리 색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빼곡하게 은 세공품을 치렁치렁 달고 있었다. 언뜻 보이는 비늘 색깔은 갈색 같았는데, 확실한 건 그녀의 청량한 머리카락만큼 예쁜 색은 아니었다.
“팔뚝 너어무 두껍다. 자기는 운동 많이 해?”
뒷덜미를 잡고 싶은 포인트가 한둘이 아니었다. 리슬링은 두께를 가늠하는 척 라히무스의 팔뚝을 주무르다가 슬쩍 팔짱을 끼워 넣었다.
‘자기?’
세상에나. 나니아는 당장 남편이 생겨도 그렇게 부를 자신이 없었다.
거기다 팔짱이라니. 팔짱이라니. 남자가 어깨를 감싼 적은 있어도 그와 팔짱을 껴 본 적은 없었다.
당연했다. 나니아 자신은 저렇게 적극적이었던 적이 없었으니까.
남자는 무생물 보듯 하는 눈으로, 그러나 착실하게 대꾸했다.
“아니.”
뭐야. 왜 밀어 내지 않아? 역시 좋은 거야? 너도 즐기는 거지?
“그럼 타고난 거구나~”
리슬링이 해죽 웃으며 다시 사내의 팔뚝을 쓸었다.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다. 묘한 기류가 흐르는 리자드 한 쌍을 지켜보면서, 나니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왜 이렇게 화가 치밀지?
나니아는 정작 벨이 자기 옆으로 와서 팔짱을 끼는 줄은 모르고, 라히무스가 괘씸한 까닭에 대해 나름의 이유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 바람둥이라는 말만 들었지 이렇게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절절한 척 자신을 꾀어내려고 했던 사내가, 어찌 저렇게 새로운 여자랑 금세 알콩달콩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내가 이렇게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신경 쓰지 말아야지. 신경 쓰지 말아야지.
그래, 차라리 잘됐어. 어쩌면 그의 본모습을 마주할 좋은 기회였다. 저토록 열렬히 몸을 던져 오는 여자가 있으니, 이제 저쪽으로 갈아탈지도 모르지.
차라리 두 눈으로 직접 보고 나면 정이라도 뗄 수 있을 것 같았다.
“약방부터 가신댔죠? 저기예요!”
팔뚝을 주무르던 손이 내려와 라히무스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 순간 흘긋, 남자가 고개를 돌려 아주 잠깐 뒤를 보았다.
날카로운 콧대와 턱선이 남자의 옆선을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어쩐지 불퉁한 입술과 삐딱한 눈썹에는 불만스러운 느낌이 가득했다.
나니아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는 행동으로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괜히 눈빛을 주고받다가 비뚤어진 마음만 들킬 것만 같았다.
리자드는 자신이 누구와 무엇을 하든 도외시하는 그녀를 확인하고 콧잔등을 살짝 찌푸렸다. 손목을 털어낼까 하다가 그냥 그대로 잡혀 있었다.
어느 점포 앞 건조대에 빈 플라스크 병들이 비스듬히 널려 있었다. 크기가 서로 다른 유리병들이 햇빛을 받으며 말라 가는 중이었다.
“너 같은 놈한테는 안 팔아! 꺼지라고!”
고성과 함께 건물 문이 벌컥 열렸다. 누군가 멱살잡이 당한 채 점포 밖으로 질질 끌려 나왔다.
거절당한 손님은 몸이 작고 왜소한 아이였다.
“돈, 돈은 있어요…. 제발, 한 병만이라도 팔아 주세요.”
아이는 가냘프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간청했지만 가게 주인은 인정사정없었다. 그는 사람을 짐짝 던지듯 바닥으로 내팽개쳤다.
아이는 넘어지면서 건조대를 쓰러뜨렸다. 그 바람에 건조 중이던 플라스크 병들도 모두 바닥으로 떨어져 조각조각 결딴나고 말았다. 가게 주인은 낭패감 가득한 얼굴로 골을 쥐어짜더니, 바닥을 나뒹구는 아이에게 화풀이하기 시작했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별 버러지 같은 게!”
맨바닥에 머리부터 나자빠진 아이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리자드는 그의 멱살을 쥐어 잡아 주먹으로 얼굴을 마구 후렸다. 그러고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워 발길질해 댔다.
“이 기생충 같은 새끼가, 약 처먹고,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어?”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어 배를 찍어 밟는데, 사람이 사람을 패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난폭했다. 인간과 다른 리자드의 폭력성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약이… 약이 필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일조차 할 수가, 컥.”
가게 주인의 무자비한 폭행은 주변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아이를 저렇게까지 때릴 이유가 뭐란 말인가. 보다 못한 나니아가 세 걸음 앞으로 달려가 바닥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든든한 뒷배가 있어서 감행한 용기였다.
“저기, 마, 말로 하시면 안 되나요…?”
그녀는 아이를 몸으로 가로막고 사정했다.
“너는 뭐야?!”
가게 주인 입장에서는 불청객과 꼭 닮은 옷차림의 여자가 난데없이 끼어든 셈이었으니, 한패인가 살피는 눈동자에 반감이 역력했다.
잔뜩 흥분한 리자드가 다시 주먹을 말아 쥐자, 라히무스가 한 발 앞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제야 리슬링과 엮여 있던 팔짱이 풀렸다.
사내가 말없이 점포 주인과 눈을 마주치자, 그는 뒤늦게 라히무스를 비롯하여 여자를 둘러싼 이들이 저와 같은 리자드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사선에서 가해지는 무언의 압박에 나니아를 향하려던 폭력이 가로막혔다.
머리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나니아는 그 틈에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흠씬 두들겨 맞은 아이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고통에 신음했다.
“저기, 괜찮니…? 일어날 수 있을까?”
나니아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플 때 아프더라도 당장은 여기서 벗어나는 일이 시급해 보였다. 나니아는 아이의 등에 팔을 두르고 몸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도와주려다가, 후드 안쪽에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이가 자글자글하고 촉촉한 눈으로 나니아를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것은 아이가 아니었다. 작은 키 때문에 어린아이인 줄 알았던 그것은 아무리 적게 봐도 오십은 훌쩍 넘긴 노인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인간의 얼굴이 아니었다. 뾰족한 코와 튀어나온 주둥이는 마치 쥐의 그것처럼 흉물스럽게 돌출되어 있었다.
“당신은….”
기다란 코가 씰룩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주름진 눈살을 구기며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에 경외심이 가득 담겼다.
“감사… 감사합니다…. 이럴 수가… 믿을 수가 없어요….”
그 기이한 생물은 자신을 챙겨 주려던 나니아의 옷자락을 붙잡고 감격스럽게 헐떡였다.
“세상에나, 감히 저 따위가….”
“그, 배는… 좀 어떠세요?”
처음의 생각처럼 어린아이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좀처럼 걱정스러운 마음을 거둘 수 없었다. 나니아가 다시 한번 상태를 묻자, 그것은 여전히 공상적으로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저를… 저를 해방시켜 주러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쥐의 얼굴을 한 인간은 아픔도 잊고 나니아의 손등을 하염없이 어루만지며 행복해했다. 고마움을 표현하는 정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때쯤, 챠링고가 나니아를 일으켜 세웠다.
“…아가씨는 여기서 가능한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아.”
나지막이 속삭인 그녀는 나니아의 머리 위로 더 깊게 후드를 눌러 씌웠다. 그리고 가게 주인과 대치하듯 마주 선 라히무스의 등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니아의 눈길도 자연스럽게 그녀를 좇았다.
남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주먹 쥔 손을 풀었다.
“뭐요, 당신들 유멘타요?”
점포 주인이 묻자, 남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얘는 그런 거 아니야.”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움직여 나니아를 훑는 그의 시선을 완전히 차단시켰다.
라히무스는 덩치가 크고 훤칠한 리자드였다. 그의 위압적인 체격과 인상은 같은 리자드끼리도 눈치를 보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붙어서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을 물리적으로 체감시켰다.
“뭐, 뭐가 됐든… 관리 잘하쇼. 요새 땅굴 안팎으로 돌아다니는 축수들이 많소. 저놈처럼!”
기세가 꺾이는가 싶던 점포 주인이 다시금 열을 내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괴인을 손가락질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쥐처럼 코끝을 씰룩거리던 그것은 불안한 얼굴로 얻어맞은 복부를 움켜쥐더니, 탈이 난 사람처럼 비틀비틀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허리도 채 펴지 못하고 쩔뚝거리면서도 꽁무니 빠지도록 도망치는데, 골목길로 사라져 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야말로 도시의 시궁쥐 같았다.
붙잡을 이유가 없어서 붙잡지 못했으나, 그에게서 받은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리슬링이 밝게 웃는 얼굴로 험악해진 분위기를 진정시키기 위해 끼어들었다.
“손님이에용, 손님.”
잘 아는 사이였는지 점포 주인의 어깨를 주무르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요새 먹고 살려고 동쪽으로 건너온 축수들이 많아졌나 봐. 둔갑약 때문에 아저씨가 유독 시달리는 것 같애.”
이해한다는 듯 살랑거리는 그녀의 말에 지친 푸념이 쏟아졌다.
“아이고, 말도 마라. 저것들 사고 쳤단 봐. 누구 탓 되겠어? 네가 약을 팔았네, 관리를 소홀히 했네 하면서 또 나만 족치겄지.”
점포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손짓했다.
“들어가쇼. 둔갑약이랑, 또 뭐 필요한지 모르겠지만 고르고 계시오.”
그러고는 문가에 기대어 있던 빗자루로 부서진 유리 파편을 쓸기 시작했다.
“아아, 이제 안심 안심.”
파키케팔로가 동전을 짤랑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동대륙에 섞여 살아가는 서대륙 생물들에게 인간 생체를 흉내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물약 복용은 필수였다. 나니아는 평소 그들이 왜 인간 사회 속에 숨어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역으로 인간이 다른 생물로 변신할 수 있는 약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역시 지금 당장 제일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아까 그 쥐처럼 생긴 남자를… 축수라고 했나요?”
나니아가 곁에 있던 챠링고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니아는 이상하다는 듯 의문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건… 분명 인간 같았어요.”
그녀가 경험한 축수는 돼지와 닮은 끔찍한 형태의 식인귀로, 인간의 모습과 매우 거리가 멀었다. 방금 그 괴인처럼 말을 할 수 있는 두뇌를 소유한 것 같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사람을 닮은 그것과 돼지를 닮은 그것이 같은 이름으로 불리고 있으니 의아할 따름이었다.
“아가씨가 그때 본 축수는 제일 지능이 낮고 허접한 것들이었어.”
“그렇다면 아까 그 사람은….”
“사람 형태를 닮은 축수는 둘 중 하나지. 축수의 피가 섞여 있거나….”
챠링고는 알려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니아를 쳐다보았다.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의 설명을 곁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리슬링이 이어받았다.
“그만큼 많은 인간들을 잡아먹었거나.”
리슬링이 후드 안쪽으로 나니아의 눈을 쳐다보며 씨익 웃었다.
그녀의 눈빛은 ‘그래, 너 같은 인간들 말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에 대한 상식이 빈약하기로는 벨도 마찬가지였다. 고개를 갸웃 움직이는 그의 은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인간을 잡아먹어서,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죠?”
“축수는 인간을 양분 삼아 성장해요. 잡아먹힌 인간은 그들의 뼈와 살이 되는 것은 물론 뇌까지 진화시키죠.”
그의 질문에 챠링고가 설명했다. 그리고 착잡한 얼굴로 나니아의 어깨를 작게 도닥였다.
“무서워할까 봐 자세히 말 못 했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믿기 힘든 이야기에 나니아는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둔갑약을 포함하여 기타 필요한 다른 물약들을 구매한 파키케팔로가 작은 유리 플라스크들을 깨뜨리지 않고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가방을 열어 조심조심 끼워 넣었다. 그가 빠르게 볼일을 마친 덕분에 나머지는 가게 안으로 들어갈 틈도 없었다.
라히무스가 파키케팔로로부터 가방을 받아 들었다. 그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 다음 목적지를 향하려는데, 나니아는 제자리에 멈추어 서서 혼란하게 질문을 쏟아 냈다.
“얼마나, 어디까지 인간에 가까워지는 거죠? 얼마나 많은 축수들이 이곳에… 그럼 아까 그 쥐를 닮은 자는 얼마나 많은 인간을 해친 건가요?”
벨은 다시 나니아의 오른팔에 팔짱을 끼우고 그녀를 잡아끌었다. 물론 벨로즈 역시 미지의 생명체에 대해 궁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그게 혼혈인지 식인귀인지는 어떻게 알지? 둘을 구분해야 할 필요성이 있지 않나?”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은 리슬링이 했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과 다르게 그녀가 내뱉는 말엔 어떤 부드러움이나 자비가 느껴지지 않았다.
“구분하지 않아요. 더러운 축수인 건 매한가지니까.”
서대륙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 피가 단 한 방울만 섞여도 축수 취급을 받았다. 식인 여부는 두 번째 문제였다.
그들에게 축수는 가장 천하고 더러운 생명체였다. 개중에는 운 좋게 티가 잘 나지 않는 외모를 타고났거나, 다른 피가 너무 많이 섞여 사실상 혼혈임이 무의미한 자도 있었다. 뭐가 됐든 알려져 봤자 좋을 게 하나 없으니 가능하다면 감추고 살았다.
“본토에서는 축수 혼혈을 죽이는 것이 권장된다면서요?”
동대륙에서만 자라온 리슬링이 흥미롭다는 듯 묻자, 다른 리자드들이 얼굴을 찌푸렸다.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화제인 것 같았다.
하지만 리슬링으로서는 거리낄 게 없는 대화 주제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토끼 사냥을 떠나는 사람처럼 아주 가볍고 쾌활했다.
“우리는 잃을 것이 없으니까 귀찮게 그런 짓까지 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당신들은… 조금 조심해야겠네요?”
조심해야겠다고 말하는 리슬링의 눈이 나니아를 가볍게 훑었다.
어렴풋하게만 가지고 있었던 느낌이 방금 그녀의 눈빛으로 인해 공고해졌다.
나니아는 슬쩍 고개를 돌려 리슬링의 시선을 피하고는, 앞서 가던 챠링고를 향하여 작게 물었다.
“리자드는 원래 인간을 싫어하나요…?”
저 어여쁜 암컷 리자드는 햇살 가득 받고 자란 과일처럼 상큼하고 생기발랄하며 누구에게나 싹싹하게 굴었다. 하지만 나니아에게만큼은 예외였다.
그동안 자신에게 호의적이거나 최소 배타적이지 않은 리자드들만 곁에 있어서 몰랐는데, 조금 전 물약 상점 상인의 태도도 그렇고 리슬링도 그렇고 어쩐지 천대받는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챠링고는 대답을 어려워했다.
“싫어한다기보다는….”
그때 리슬링이 라히무스 옆에서 애교스럽게 깐죽거렸다.
“아까 그 수컷 유멘타는 제법 쓸 만해 보였는데, 쟤는 영 아니지 않나요?”
리슬링이 쟤라고 칭하는 상대는 물론 나니아였다.
그녀는 이 과묵한 수컷 리자드에게 뭐라도 한마디 더 붙여 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철부지 리자드 소녀의 질문은 영 안 좋은 곳을 스치면서 사내의 짜증을 돋울 뿐이었다.
“쟤는 그런 거 아니라고 했지.”
라히무스의 낮고 굵은 목소리에 분노가 섞였다.
“똑같은 소리 한 번만 더 하게 해 봐.”
그는 이제껏 리슬링이 본 적 없는 살벌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다정하게 답변해 주진 않더라도 이토록 쌀쌀맞게 선을 긋지도 않았던 사내의 낯선 모습이 리슬링을 크게 당황 시켰다. 그녀는 다시 팔짱을 끼려던 것도 멈추고 몸을 굳혔다.
남자의 서늘한 시선은 다시 앞으로 돌아갔다. 리슬링은 양손을 코밑에 붙이고 과장되게 콧소리를 냈다.
“힝… 라히무스 무서워용.”
쪼그라들었던 것도 잠시, 리슬링은 금방 용기를 회복하곤 다시 그의 곁에 바짝 붙어 걸었다.
나니아는 둘의 등 뒤에서 여러모로 복잡한 의문을 품었다. 안 그래도 적응이 어려운 서대륙 문화 속, 라히무스와 리슬링의 겹쳐진 존재감이 그녀의 심경을 어지럽혔다.
저게 싫어하는 게 아니면 뭐지?
“유멘타라는 게 뭔지 아세요…?”
어쩐지 그 단어가 라히무스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듯해서 차마 크게 물어볼 수가 없었던 나니아가 옆에 있는 벨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 역시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답답하면서도 왠지 모를 동질감이 들었다. 이따가 챠링고에게 다시 물어봐야지.
한편 라히무스의 곁의 암컷 리자드는 단순해서 행복해 보였다.
그녀는 헤헤 웃으며 여느 때와 같이 밝게 쫑알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근데 화내니까 더 잘생겼다.”
솔직함은 무릇 손실을 동반했다.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클 것이란 확신이 있을 때만이 진솔해질 수 있었다.
속내를 감추는 까닭은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자신의 진심을 외면할 방법인 탓이 더 컸다.
감당할 수 없는 말을 충동적으로 지껄이고 나서 겪게 될 결과의 동요가 두려웠다.
그래서 나니아는 리슬링이 라히무스에게 보여 주는 저 ‘아니면 말고’식의 저돌성을 시샘했다. 사랑과 만남에의 좌절이 두렵지 않은 그녀가 부러웠다. 부닥쳐 오는 여자를 딱히 밀어내지 않는 라히무스가 신경 쓰였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그의 뒷모습을 좇게 되었다.
“술지를 사기엔 가진 돈이 좀 쪼들리는데….”
파키케팔로가 가벼워진 돈주머니를 짤랑거리며 걸었다.
“이게 다 챠링고가 선금 일부만 가져가자고 해서 그런 거잖아.”
녀석은 불만스럽게 투덜거리며 동료에게 책임을 돌렸다.
핀잔을 들은 챠링고가 어깨를 으쓱 움직이며 대꾸했다.
“내가 동대륙 물가를 우습게 여겼다는 점은 인정하지.”
잘못된 물가 계산도 문제였지만, 머무는 시일을 잘못 짐작한 탓도 컸다. 이렇게까지 경로를 틀고 또 틀어서 북쪽으로 가게 될 줄이야 알았을까. 애당초 라히무스와 동행한다고 해서 일을 안일하게 계획했던 것부터가 실수였다.
의뢰의 속성이 평소 그가 활약하던 임무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생각했어야 했다. 천하의 라히무스는 지키고 살리는 것보다 부수고 파괴하는 것이 더 능한 남자였다. 그러니까 냉정하게 말해서, 생각만큼 도움되는 동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넌 어쩌다 이런 시시껄렁한 일을 맡았냐?”
챠링고가 라히무스에게 물었다. 그녀의 말에 벨이 장난스레 삐죽거렸다.
“지금 제 인생이 달린 일이 시시껄렁하다고 말한 건가요?”
챠링고도 피식 웃으며 변명같이 첨언했다.
“아니, 라히무스같은 군형 용병이 평소 하는 일에 비하면 비교적 평화로운 게 사실이라서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걸어가던 라히무스는 비뚜름하니 짧게 대꾸했다.
“돈.”
“돈?”
그 간단명료하고 분명한 목적은 충분한 대답이 되지 못했다.
“제시된 보수가 높긴 했지만, 아뇨 벨로즈 님, 저희는 기존에 얘기했던 것보다 완수금을 더 받아 낼 겁니다. 그 정도 보수로 택도 없는 뺑이를 쳤어. 그땐 이렇게까지 귀찮은 일이 될 줄 몰랐거든요. 아무튼, 그래 봤자 너한텐 푼돈일 거 아냐.”
챠링고의 말이 라히무스와 벨 사이를 오갔다.
남자는 둘러댈 말을 찾는 것처럼 생각에 잠기는 듯싶더니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은 챠링고가 슬쩍 라히무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서 말인데, 가진 거 팔아서 경비 좀 마련하자.”
그녀는 라히무스의 넓은 어깨 저편 리슬링에게도 물었다.
“어이, 대지용 아가씨. 여기 전당포는 없나?”
“있어요, 전당포! 우리 가게 바로 뒤에 있었는데.”
챠링고와 리슬링 사이에서 라히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왜?”
함께 쓰는 돈을 왜 내 호주머니에서만 꺼내려는 것이냐며 날을 세우자, 챠링고가 그의 어깨를 턱턱 두드리며 귓가에 속삭였다.
“이 멍청아, 관심 있는 암컷 앞에서는 여유롭게 돈 쓰는 모습을 팍팍 보여 줘야지. 이 정도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굴란 말이야.”
그녀는 조언하는 척 라히무스를 부추겼다.
타당한 얘기인지 고민하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디를 쥐어서 흔들어야 하는지 손잡이를 파악한 다음부터는 다루기가 참 쉬웠다. 라히무스가 멍청하고 단순해서 다행이었다. 파키케팔로를 시켜서 숙소에 다녀오게 한 다음, 리슬링의 안내를 따라 전당포로 향했다.
챠링고는 마치 자기 것처럼 라히무스의 물건을 들이밀었다.
“오켈로에 진주가 지금 삼십 개 넘게 박혀 있는데 그거밖에 안 쳐준다고요?”
“담보 맡길 게 아니라 아예 파는 거라며. 서쪽에서는 이거 흔하잖아요.”
“아니 여기는 동대륙인데? 뱃값 끼면 천정부지로 뛰어요. 사장님 이거 잘 모르시네.”
챠링고가 전당포 주인과 흥정을 하는 사이, 나머지는 건물 앞 의자에 앉아 그늘에서 휴식을 취했다. 좁은 길목 양쪽 벽에 기다란 벤치가 몇 개씩 붙어 있었다. 조용히 파키케팔로의 옆에 가서 앉은 나니아는 맞은편 리슬링과 라히무스를 본의 아니게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녀는 이번에도 라히무스의 곁에 바짝 붙어서 그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자기 좋을 대로 구경하며 재잘거렸다.
“이거 너어무 예쁘다!”
암컷 리자드는 황홀하다는 듯 탄성을 질렀다. 리슬링의 화려한 꼬리 장식은 그녀가 평소 치장에 얼마나 공을 들이는 리자드인지 짐작하게 했다.
“몇 호예요? 한 15호쯤 되나?”
굵고 둥그런 그것은 완전한 원을 이루기 전에 작은 틈을 내어 벌어진 형태였다. 굵기가 딱 맞는 부분에 끼우고 밑 부분을 잠그는 식으로 착용하는 물건이었다. 알록달록한 칠보 장식은 눈이 아플 정도로 화려했다.
“난 원래 은색이 잘 받는데, 이런 것도 괜찮다.”
리슬링이 그것을 자기 꼬리에 가져다 대어 보며 쫑알거렸다. 그녀는 꼬리 끝을 애교스럽게 흔들며 라히무스를 졸랐다.
“이거 나 주면 안 돼요? 응?”
남자는 떨떠름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누구는 준다고 해도 싫다는데 또 누구는 이렇게 맡겨 놓은 것처럼 당당히 요구한다. 차라리 이쪽이 더 알기 쉽긴 했다.
평소 같았으면 가당찮게 여기며 무시했을 텐데, 챠링고가 한 말이 신경 쓰였다.
그는 맞은편 나니아를 흘긋 살폈다. 1초 정도 눈이 마주쳐서 아닌 척 급히 시선을 돌렸다.
고심 끝에 남자가 말했다.
“…가져.”
그 순간 나니아는 코로 숨을 크게 훅 들이마셨다. 앙다문 입술 사이로 부아가 끓었다. 이로써 그도 리슬링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주면 주는 거지 내 눈치는 왜 봐?’
자기도 몰래 훔쳐보았기는 매한가지면서 그런 볼멘 생각을 했다.
시선을 느꼈는지 리슬링이 이쪽을 쳐다보면서 나니아와 눈길이 엉켰다. 그녀는 조금 얄미운 표정으로 씨익 웃어 보였다.
‘그게 뭔데. 난 하나도 안 부럽거든.’
유치한 불평들을 속으로만 꿍얼거리면서, 해소되지 못한 물음을 옆에 있던 파키케팔로에게 건넸다.
“있죠, 리슬링이 나를 유멘타라고 불렀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니아가 묻자, 그 역시 챠링고처럼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엣, 그거는….”
자기 턱을 몇 번씩이나 빠르게 문질러 대며 고민하는 파키케팔로에게 여자가 자신의 추측을 이야기했다.
“리자드와 인간은 적대적인 관계인가요?”
“적대적?”
나름 근접한 예상이라고 생각했는데, 파키케팔로는 말도 안 된다며 웃었다.
“우리가 너희를 적으로 대하느냐고? 그럴 리가!”
그는 발치에서 앙알대는 강아지를 대하듯 귀엽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인간이 어떻게 리자드의 적이 될 수 있겠어.”
그러곤 목소리를 낮춰 나니아가 물어본 바에 대해 대답했다.
“그거, 가축이라는 뜻이거든. 인간을 비하하는 말이나 다름없으니까 너를 그렇게 부르는 리자드가 있다면 당장 피하도록 해. 처음 보는 인간에게 다짜고짜 유멘타냐고 묻는 리자드라면 그냥 상대하지 않는 게 좋아. 물론, 니가 앞으로 리자드를 만나 봐야 얼마나 더 만나겠냐만.”
“…가축.”
얼굴을 보이면 큰일 날 것처럼 감싸고 돌 때부터 어느 정도 짐작하였던 사실이지만, 그 노골적인 빗댐에 가슴이 철렁했다.
만족스러울 만큼 라히무스의 패물을 돈으로 교환한 챠링고는 똘마니들을 데리고 다음 목적지를 향해 움직였다.
그곳은 마른 종이와 잉크 냄새가 정신을 평화롭게 안정시켜 주는 가게였다.
얼핏 서점 같아 보이는 점포 안에는 나니아가 읽을 수 없는 리자드어로 쓰인 종이가 가득했다.
나니아는 상대적으로 대답을 잘해 주는 파키케팔로에게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긴 뭐 하는 데예요?”
여행 중에 책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에 무엇을 사려는 것인지 궁금했다.
벨은 어느 정도 안다는 듯이 끼어들었다.
“이거 그거죠? 요술 종이.”
그 또한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적힌 종이를 한 장 손에 들고 노려보았다.
파키케팔로가 벨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들고 설명했다.
“맞아. 술지라고 부르는 거야. 우리 같은 경우는 이걸 불로 태우면….”
리자드가 입으로 바람을 훅 불었다. 성냥불보다 조금 큰 불꽃이 종이 끝을 태워가기 시작했다. 타들어 간 종이가 펑 하고 터지는 소리를 내며 기이한 불꽃을 쏘았다. 불꽃은 자그마한 폭죽처럼 반구를 그리며 주변을 밝히다가 금방 사라져 버렸다.
“술지에 적힌 대로 원소의 힘을 빌릴 수 있지.”
“우와….”
“신기하긴 한데, 그리 대단치도 않은데요?”
감탄하는 나니아의 옆에서 벨이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마침 챠링고가 툴툴거리며 가게에서 파는 술지의 수준에 대해 불평하고 있었다.
“쓸 만한 게 영 없네.”
“거기 위험하니까 실내에서 쓰지 마쇼. 아니 계산도 안 했잖아!”
가게 주인은 챠링고 너머 파키케팔로에게 경고하듯 손가락질하다가 자기 장부에 글씨를 휘갈겨 적었다. 이따 계산할 때 방금 태운 술지도 포함 시키려는 것이 분명했다.
“사장님, 여기 너무 귀여운 것들뿐인데 우리가 스케일이 좀 커다란 원소술도 필요하거든. 콰과광, 하는 그런 거 좀 없습니까?”
술지를 파는 젊은 장사꾼은 귀여운 것들뿐이라는 그녀의 평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꼈다. 파는 물건들이 낮잡아 보인 것 같아 속상한 것 같았다.
그가 자신의 상품들을 변호하듯 이야기했다.
“조만간 아는 다룸이 올 건데, 실력이 괜찮아. 그때 다시 오던가. 써 달라는 건 다 써 줄걸? 근데 부르는 값이 좀 만만치 않을 거야.”
“엄… 그래요?”
실력이 좋다는 말을 믿어도 좋을지 어떨지 고민하는 그녀에게 사장이 추가로 자랑하듯 설명했다.
“이 땅굴 보호 굴절도 다 그 다룸 혼자서 해 놓은 거야. 이번에 방문하는 것도 한 번 손 볼 때가 되어서 오는 거거든.”
사장은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지붕을 그리듯 움직였다. 땅굴은 인간들 눈에 띄지 않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굴절 장벽을 세워 둔 상태였다.
“여기 전체를? 꽤 큰데. 대기술사입니까?”
“바람보다는 빛 쪽으로 좀 더 능통하지.”
라히무스가 한마디 거들었다.
“안 그래도 광전기가 필요해.”
상대방을 찌릿찌릿하게 보내 버릴 수 있는 원소술이 필요했다. 그는 파비푸스에서 탈주하던 순간을 기억해 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인간을 티 나지 않게 죽이든가 죽이지 않고 제압만 하려면 여러모로 술지가 꼭 필요했다.
정작 그를 힘들게 한 벨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아리땁게 사뿐사뿐 가게 안을 거닐고 있었다.
사장은 그 성별이 모호한 느낌의 님프를 홀린 얼굴로 바라보다 말했다.
“샤르도네 가게에서 머물고 있지? 도착하자마자 바로 연통을 주지.”
솔깃하면서도 고민하는 챠링고를 향해 리슬링이 다가와 어깨를 주물렀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이런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아이, 언니야. 살 것도 있는데 이참에 더 있다가 가요.”
“그 다룸은 언제 오는데?”
“아무리 늦어도 이번 주 안으로는 올 텐데.”
리슬링의 부채질을 사장이 도왔다.
“며칠은 좀 더 기다려 볼까….”
챠링고가 고려해 보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리슬링이 쾌재를 불렀다.
“아싸~ 라히무스 꼬실 기회가 더 늘어났당.”
그녀는 다시 남자에게로 돌아가 꼬리를 흔들었다.
나니아는 그쪽을 쳐다보지 않기 위해 애써 근처 물건들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종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건 그냥 종이에 글씨만 쓰면 되는 거예요?”
왜 너희들이 직접 만들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파키케팔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우린 육탄전에 강한 편이라…. 원소를 다루려면 재능도 있어야 하지만 공부도 많이 해야 되거든.”
“한 마디로 무식해서 못 한다는 거네요.”
벨이 비웃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우리는 애초에 다루는 기질을 타고나지 못했다니깐요!”
어리고 무식한 리자드가 억울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옆에서 조용히 종이들을 훑어보던 나니아가 물었다.
“저, 이거 읽을 줄 알아요. 빛이라는 뜻이에요. 그렇죠? 맞죠?”
아는 글자를 만나 반갑고 신기했다. 뿌듯해진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오, 읽을 줄 알아?”
청년이 대단하다는 듯 띄워주자 소녀는 어깨가 으쓱해졌다.
“쓸 줄도 알아요.”
답지 않게 희미한 자랑을 하자, 파키케팔로가 비치되어 있던 종이와 펜을 건넸다.
“한 번 써 봐.”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사용할 수 있도록 가게에서 제공하는 서비스였다. 그게 다룸이라면 잉크값으로 몇 장 남기고 가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런 서쪽 문화를 알 길 없는 나니아는 그저 글을 막 배우기 시작한 아이처럼 어색하게 펜을 쥐었다. 펜촉은 둥글고 말랑거리는 것이, 흔히 사용해 본 딥펜과는 필기감이 달랐다. 점을 찍기 딱 좋은 느낌이었다.
술지는 아주 자그마했다. 기껏해야 한 장에 한 글자씩. 나니아는 천천히 중얼거리며 펜대를 움직였다.
“이건 물… 이건 어둠… 땅… 바람… 그리고 이게 불.”
어느샌가 챠링고와 리슬링도 곁에 와서 인간의 재롱을 구경하고 있었다. 가르쳐 준 적 없는 것들을 막힘없이 써 내려가는 모습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잘 모르고 써서 그런가, 오히려 개성 있는데?”
획을 긋는 상식과 관습을 탈피한 이방인의 자유로운 필체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벨로즈 님 긴장하셔야겠습니다. 어째 서대륙에서 살아갈 당신보다 아가씨가 더 많이 알아요.”
“내가 리자드 말 따위 알 필요 없잖아.”
“당신이 쓸 문자도 대충 비슷하거든요.”
챠링고가 벨의 옆구리를 툭 건드리자, 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근데 너는 언제 이런 걸 배웠어?”
파키케팔로가 맞은 편 자리에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물었다. 차마 라히무스에게 배웠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머뭇거리는 사이, 그가 다른 질문을 또 건넸다.
“다른 거 아는 글자 있어?”
곰곰히 생각하는 펜대가 나니아의 머리를 두드렸다.
“음… 숫자랑….”
뽀뽀… 섹스….
수치스러운 지식에 얼굴이 붉어졌다. 구태여 배웠노라 알리고 싶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워낙 백지 상태에서 받아들인 글자들이다 보니 잘 잊히지도 않아서 탈이었다. 다시 생각해 봐도 라히무스는 좋은 스승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다행히 대답 없는 나니아를 보고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파키케팔로가 씨익 웃으며 쥐고 있던 펜을 가져갔다.
“내가 한 글자 더 알려 줄게.”
녀석은 무어라 동글동글한 글자를 그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랬다. 그것은 쓴다기보다 그리는 것에 더 가까운 행위였다. 그는 뭘 모르는 나니아가 보기에도 펜을 많이 잡아 보지 않은 티가 났다.
한참을 혀까지 빼물고 집중하던 녀석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펜을 내려놓았다. 완성된 글자는 어딘지 잔망스럽고 진중함이 부족해 보였다.
“실제로 있는 글자예요?”
나니아가 미심쩍어하자, 파키케팔로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멋지지? 내가 만든 글자야. 이렇게 쓰고, 파키케팔로라고 읽는 거야.”
진담인지 농담인지 헷갈렸다. 원래 글자라는 것이 이렇게 아무나 쉽게 만들어 내는 것인가? 인간은 혼란스러웠다.
파키케팔로의 말대로, 그들은 자신의 이름자를 직접 지어냈다. 말하자면 세상에 하나뿐인 자기 서명이었다.
우쭐한 그의 이마에 챠링고가 장난스럽게 딱밤을 먹였다.
“성인식도 못 한 게 까불어.”
그 말에 리슬링이 풉, 하고 비웃는 소리를 냈다.
“파키케팔로 아직이었어? 뭐야, 그럼 앞으로 날 누나라고 불러!”
“파코가 좀 늦은 편이긴 하지.”
라히무스까지 합세하여 놀리자, 파키케팔로는 발끈했다.
“그거랑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이름자 정도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거잖아!”
분개한 파키케팔로 앞에서 나니아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따라 써 보았다. 그녀의 손끝에서 글자는 조금 더 글자다워졌다.
“오우… 나보다 내 이름을 더 잘 쓰잖아.”
녀석은 나니아가 쓴 자기 이름을 보고 화를 누그러뜨렸다. 인정받은 기분이 드는 모양이었다.
“볼수록 제법 괜찮은 느낌인데… 내 이름도 써 봐, 아가씨.”
이번에는 챠링고가 펜을 빼앗아 글자를 슥슥 휘갈겼다.
여자는 어디 가서 이렇게 관심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뜻밖에 칭찬이 쏟아지자 기분이 좋았다.
선뜻 그녀의 이름을 따라 써보는 나니아의 귓가에 벨로즈가 속닥거렸다.
“내 이름도요. 물론, 훌레리안으로요.”
그 퉁명스러운 요청에 나니아가 작게 웃었다. 새 종이에 익히 알고 있는 공주의 이름을 적었다.
벨로스 카뮈안.
“이렇게 쓰는 게 맞나요?”
확인하듯 문자, 벨이 펜을 가져갔다.
“아니, 이렇게.”
그는 몸을 기울여 나니아의 어깨 위로 턱을 올렸다. 그리고 철자를 조금 고쳐 주었다. 여자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문득 라히무스의 이름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졌다. 나를 부르는 이름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정해졌겠지만, 나를 쓰는 방법은 내 스스로 결정한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도 자기 이름을 멋지게 만들어 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을까? 좀처럼 상상하기 힘든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다시 등을 돌린 그의 뒷모습을 흘긋 확인한 나니아가 은밀한 목소리로 챠링고에게 물었다.
“라히무스 이름은 어떻게 쓰는지 아세요?”
“어, 알지.”
그녀는 어렵지 않게 그의 이름자를 기억해 냈다. 나니아는 챠링고가 적어 준 대로 그를 칭하는 글자를 따라 써 보고는, 꽤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미련하고 단순한 성정답게, 그를 적는 방법 또한 굵고 간결했다.
라히무스.
한참을 쳐다보고 있자니 글자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의 눈앞에 흔들면서 이게 맞느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다 놀았으면 이제 가죠?”
전부터 흥미 없다는 듯 하품을 쉬던 벨이 말했다.
나니아는 급히 다른 종이들로 라히무스의 이름이 적혀 있는 종이를 가렸다. 흐트러진 쪽지들을 한가운데로 모으듯 쓸어 담았다.
“사장님, 이거 얻다 버려요?”
파키케팔로가 손을 번쩍 들고 묻자, 그냥 놓고 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행은 그가 말하는 다룸의 방문을 기약하며 가게 문을 나섰다.
“안 가?”
아직 문간에서 멈춰 서 있는 라히무스를 보고 챠링고가 물었다.
그는 건물 안으로 흘긋 시선을 주더니 짤막하게 대꾸했다.
“먼저 가.”
그러고는 다시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려는 게 있거나 묻고 싶은 게 있거나 둘 중 하나겠거니 싶어 더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돈도 생겼으니까 오늘은 거나하게 취해 볼까?”
키가 큰 암컷 리자드가 긴 팔을 쭈욱 뻗어 기지개를 켰다. 그 옆에서 파키케팔로가 과소비 좀 하지 말자며 핀잔을 주었다.
“옛, 뭐 놓고 간 거 있으십니까?”
다른 리자드들에겐 꼬박꼬박 반말하던 사장이 라히무스에게는 존대를 썼다. 강한 자 앞에서 약해지고 약한 자 앞에서 강해지는 리자드의 야생적 보편 특성이 여실한 인물이었다.
그는 돌아온 라히무스를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했다.
“놓고 간 게 있어서.”
별것 아니라는 듯 관심을 무시한 그가 걸어간 곳은 테이블 앞이었다. 미처 치울 틈도 없었던 그곳엔 낱장의 종이들이 분란하게 흩어져 있었다. 사내의 커다란 손이 종이 더미를 헤집었다. 아닌 척했지만, 전부터 모든 신경이 그쪽에 기울어 있었다.
본인 못지않게 엉망인 글씨 사이로 유독 단정하고 예쁜 글자들이 보였다.
그중에서도 남자가 바라는 것은 단 한 자였다.
…이거다.
남자는 찾고 있던 종이를 테이블에 가만히 올려놓은 채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자기 생에 가장 많이 쓰고 보았던 글자임에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었다.
리자드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들어 올렸다. 그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서 종이는 작고 귀여워졌다.
여자가 펜으로 부른 자신의 이름이 가슴 한구석을 아릿하게 긁어내렸다.
보는 것만으로 쓰라려지는 그것을 말없이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 * *
나니아는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라키바하프를 걱정하며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폴핀 같은 대도시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 짚더미에서 바늘을 찾는 것처럼 무모한 일은 아니었을까.
“술, 안 좋아해요?”
좀처럼 잔을 입에 가져다 대지 않는 나니아를 보고 벨이 물었다.
“아, 아뇨… 자주 마셔 본 건 아닌데….”
잘 마시는 편은 아니었지만, 딱히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다. 챠링고를 비롯한 리자드들은 위장에 알코올을 때려 넣고 있었다.
여관에 묵지 않더라도 술을 마시기 위해 샤르도네의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제법 있는 것 같았다.
“허덕이는 언덕에, 타다 남은 잔화에!”
어느 고주망태가 뽑아내는 곡조에 다른 리자드들도 흥겹게 음을 섞었다.
“깊은 그늘 꿈꾸는 태양 아래서.”
“휘-황한 영광이 햇빛에 찢겨.”
흥얼흥얼 따라 부르는 건 나니아의 곁에 앉은 리자드들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다 아는 노래인 듯 어떤 부분에선 일제히 테이블을 두드리며 박자를 맞추었다.
처음 보는 리자드들이 가득한 이곳. 자신만이 겉도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나마 비슷한 입장인 벨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우아한 손길로 잔을 빙글 흔들었다. 공기와 접촉하면서 더욱 향긋해진 발효주가 가볍게 머금어졌다.
“술맛 괜찮은데요.”
벨이 나니아를 보며 생긋 웃었다. 접히는 눈꼬리가 아리따웠다.
“짠.”
작고 귀엽게 건배를 말하는 목소리가 석류빛깔 달콤함을 머금었다. 여자의 술잔에 자신의 것을 가져다 부딪히는 소리가 그의 얼굴만큼이나 청량했다.
벨은 기분이 썩 괜찮아 보였다. 챠링고는 행복해 보였고, 그 옆에서 술을 받아먹어 주는 파키케팔로는 벌써 만취한 사람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리고 라히무스는….
“라히무스는 발정기가 언제예용?”
발정기가 언제냐고 묻는 암컷 리자드는, 이미 그때가 도래한 것처럼 라히무스의 꼬리에 자신의 꼬리를 비비고 있었다. 리슬링과 닿은 그의 꼬리가 한차례 휙 옆으로 비껴가며 가볍게 바닥을 후렸다.
“지났어.”
“그다음은 언제냐구.”
자리가 시끄러운 탓에 나니아는 남자의 나지막한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보란 듯 그를 유혹하는 리슬링의 높은 음성만이 귀에 와 박혔다.
“우리 같이 발정기를 맞춰 나가 보지 않을래?”
그녀는 수줍은 척하는 얼굴로 남자가 턱을 괸 쪽 반대편 손등을 톡톡 건드렸다.
사내는 한쪽 팔목에 턱을 받친 채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열어 줄 듯 말 듯 메마르게 구는 그의 태도가 리슬링을 더 애타게 했다.
나니아는 그 리자드 커플의 모습을 바라보며 코로 숨을 훅 들이켰다.
대체 누가 사람 많은 데서 저딴 대화를 해?
그녀는 잔에 담긴 술을 홧김에 한입에 털어 넣으면서 그들의 저속함을 저주했다.
“잘 마시네!”
나니아의 빈 잔을 본 챠링고가 신나게 새 술을 부어 주었다. 나니아는 그것 또한 단번에 목구멍으로 넘겨 버렸다.
그녀가 누구를 의식하고 있는지 벨의 눈에는 선명하게 보였다.
그가 웃으면서 물었다.
“영주는 언제쯤 올까요?”
“…저도 몰라요.”
대꾸하는 나니아의 목소리가 뾰로통했다. 발긋해진 볼을 보아하니 술기운이 좀 올라온 것 같았다. 벨의 손끝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귀엽네요.”
그 말에 나니아의 눈이 땡그래졌다가 이내 다시 게게 풀렸다.
“공주님이… 더 예뻐요.”
“응. 나도 알아.”
씨익 웃는 얼굴이 조금 재수 없었다.
“난 귀엽다고 했는데?”
내가 언제 예쁘다고 했니? 귀엽다고 했지.
짓궂은 그의 농에 나니아가 피이- 삐지는 소리를 냈다.
“예쁘면… 예쁘면 좋죠? 세상 남자들이… 막 다, 다 내 발밑에 있는 거 같고… 막 그러죠.”
고조된 목소리에서 술 냄새가 났다.
얘 취했네.
벨이 가볍게 혀를 찼다.
이 여자는 나를 볼 때 그런 생각을 했었는가 싶어 감상이 새로웠다.
나니아의 흐릿한 시선이 노골적으로 벨의 얼굴을 쏘았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을 한 몸에 받아 내면서 묘하게 얼굴을 찌푸려 웃었다.
이렇게 예쁜 여자는, 어떤 남자를 좋아할까?
소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공주님은… 귀여운 남자가 좋다고 하셨죠.”
언젠가 모닥불 앞에서 그런 얘기를 했던 것도 같다. 벨은 기억을 더듬듯 천장으로 눈길을 보내며 대꾸했다.
“아, 그랬던가요.”
귀여운 것보다는 다정한 게 더 좋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가 역으로 나니아에게 물었다.
“나니아는 어때요? 이상형이?”
두 사람이 객쩍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테이블 정도가 자리를 파하고 나가면서, 소란한 가게 안이 조금 잦아들었다.
나니아는 다시 한번 목구멍 따끔하게 음주를 즐기며, 들으란 듯이 높은 피치로 떠들어 댔다. 상기된 얼굴과 목소리가 전에 없이 용감했다.
“저는요, 좀 마르고 늘씬하고, 얼굴은 하아얗고, 눈이 착하게 생긴 남자가 좋아요…. 금발에 푸른 눈이 정말 좋아. 왕자님 같잖아!”
여자가 손에 든 잔을 꽝 하고 내려놓으며 고개를 턱 숙였다. 속이 쌀쌀하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단지 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고개 숙인 검은 머리카락이 폭포처럼 얼굴을 감추었다. 여자가 그 속에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도 너 같은 남자 별로야… 알아?”
짓이긴 마음 한구석에서 추적추적 진물이 샜다.
만만찮게 취한 챠링고와 파키케팔로는 뭐가 그리 웃긴지 깔깔거리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누구는 완전 탈락이네?”
“차라리 그냥 영주가 좋다고 해! 그렇게 돌려 말하는 게 더 잔인하다.”
여자의 이상형 고백은 라히무스의 두 귀에도 똑똑히 담겼다.
그는 엄지로 턱을 받치고 손날로 코 밑을 가린 채 흉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분 상한 꼬리가 신경질적으로 퍼덕였다.
사나운 리자드의 눈빛에 모처럼 더러운 감정이 가득 담겼다. 서늘하게 새빨간 눈동자가 홧홧한 질투심으로 불타올랐다.
소녀는 주먹으로 자신의 양 볼을 짓눌렀다. 불룩해진 볼살을 따라 입술이 붕어처럼 튀어나왔다. 어푸어푸 벌어진 입술과 비공으로 숨찬 호흡이 이어졌다.
“몇 잔이나 마셨지?”
“네 잔? 다섯 잔?”
누군가 그녀의 주량에 대해 나누는 말들이 귓전에서 맴돌았다. 무슨 말을 하는지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술 취한 전념이 몽롱하게 날갯짓하여 라히무스를 좇았다. 흘긋흘긋 훔쳐만 보던 시선은 조금 더 담대해졌다.
얼굴로 날아드는 시선이 무시할 수 없으리만치 강렬했기 때문일까. 사내는 잔을 입에 물고 얼굴을 반쯤 가린 채로 차가운 시선을 부딪쳤다.
신경질적인 그의 시선은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았다.
…왜 나한테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어?
불꽃보다 뜨겁던 그의 눈동자가 냉랭하게 식어 있었다. 서러운 코끝이 시큰해졌다.
남자는 땅바닥에 떨어진 밤송이 같았다. 대단한 수확이 되기엔 번거롭고 성가시다는 점에서 그랬다. 따끔거리는 껍질에 찔려 가면서까지 허리 굽혀 줍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가시를 세운 모습을 보니 섭섭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손만 스쳐도 녹아내릴 것처럼 굴어 주던 그가 그리웠다.
얼마든지 내가 원하는 만큼 나를 원해 주겠다고 했으면서.
여자는 자기가 먹기 싫어 모른 척 밟고 지나갔으면서도, 가시에 찔린 발을 아파했다.
차마 입 밖으로 꺼내 말할 수 없는 흉측하고 이기적인 감정들이 마음속에서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구르면 구를수록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최대치에 다다른 순간.
리슬링이 라히무스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간드러지게 웃는 그녀의 입술은 거의 살갗에 닿을 것처럼 가까웠다. 어떤 감언이설로 그를 꼬드기는 중일까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술기운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후끈후끈해졌다.
감정의 실타래는 나니아 자신도 해답을 알 수 없이 꼬여 있었다. 엉킨 실을 뚝, 잘라 내 버린 것은 남자의 얼굴에 솔깃하게 피어오른 흥분이었다.
조금 놀란 얼굴의 그가 고개를 돌려 리슬링을 바라보았다. 선명한 표정 변화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흥미로워하고 있었다. 남자가 짧은 물음을 던지고,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그는 아주 매혹적인 제안을 받은 사람처럼 이끌리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슬링이 따라오라는 듯 손짓하자, 남자는 순순히 그녀를 뒤따랐다.
두 리자드가 함께 향하는 곳은.
…맙소사.
나니아가 알기로 저곳은 리슬링의 침실이었다.
벌컥.
여자는 홀린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우악스럽고 갑작스러웠는지, 옆에 있던 벨이 휘청이다 못해 넘어지려는 의자를 바로 잡았다.
“저, 저….”
즐겁게 나부끼는 두 꼬리에서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살랑이는 꼬리 끝이 벽 너머로 완전히 사라졌을 때,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스러지는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나니아를 향해 누군가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저기 저 방문밖에 없는 것처럼 온 신경이 그곳에 쏠려 있었다.
멍한 목소리가 암담하게 흘러내렸다.
“이만… 가서 잘래요….”
“왜? 더 먹어.”
“맛있는데.”
다른 리자드들이 그녀를 붙잡았으나 여자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술기운이 오른 눈과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방문 잘 잠그고 자요.”
누군가 걱정스러운 굿 나잇 인사를 건네는 것도 흘려보내고, 터벅터벅 무거운 다리를 이끌었다.
방으로 돌아가려면 필연적으로 리슬링의 침실 앞을 지나가야 했다. 라히무스가 사라진 방문 앞에서, 여자는 순간적으로 몸을 멈추었다.
당장에 이 문을 벌컥 열어 젖히고 싶었다. 방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몰두하면 무슨 소리가 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집중했다가, 이내 쓸데없는 행동이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소녀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침대 위로 몸을 던져 코를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억눌러 보려던 서러운 마음이 터지고야 말았다.
바보, 멍청이, 걸레짝 같은 바람둥이.
놀아났다는 생각에 분한 마음을 감출 길 없었다.
이쯤에서 관둘 수 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지도 몰랐다. 시작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끝낼 것도 없었으니까. 품었는지도 몰랐던 마음이라 어디부터 어떻게 덜어 내야 할지 막막하다는 게 문제였지만.
소녀는 자기 자신을 세뇌했다. 나는 한 번도 그에게 진심이었던 적 없었노라고 되뇌었다. 그가 자신에게 육체적 관계만을 요구해 왔던 것처럼, 나도 그에게 바랐던 것은 그 잘빠진 몸뚱이뿐이었던 거라고.
지금 이렇게 섧고 섭섭한 기분이 드는 것도, 그가 안겨 주던 쾌락이 이제 와 아쉬워졌기 때문이다. 얼굴은 별로 취향이 아니었지만, 잘 짜인 육신만큼은 사내답고 매력적이었으니까.
빼앗겼다는 기분이 드는 것은, 그의 마음이 아니라 몸이 그리워서다.
소녀는 자신의 상실감을 어떻게든 저속한 욕망에 필사적으로 비추어 바라보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더 비참한 기분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따금 목구멍 안쪽에서 비분이 끓어올랐으나, 젖은 코를 한 번 들이마시는 것으로 참아 눌렀다.
불 한 점 없는 어두운 방 안에서 홀로 끝없이 가라앉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방문 손잡이를 덜컹 움직였다.
나니아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켜 앉았다. 알코올로 절여 놓은 심장이 어찌나 놀랐는지 딸꾹질이 다 나올 정도였다.
방문이 열리고 그 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야, 방문을 잘 잠그고 자라던 누군가의 충고가 떠올랐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인영은, 거대한 체격의 리자드였다.
애써 비집고 들어오려던 방 바깥의 불빛도 모두 그의 몸에 가리어졌다.
역광을 받는 검은 인영은 그 실루엣만으로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나니아는 자기 몸을 지켜 줄 방패처럼 이불을 잡아당겼다.
“…왜, 왜요.”
남자는 멋대로 들어와 놓고 말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그게 또 괘씸했다.
“허락도 없이 막, 막… 그렇게 들어오면 아, 안 되죠.”
톡 쏘아붙이려는 목소리가 어색하게 고꾸라졌다.
“그거 아주… 나쁜 버릇이에요.”
리슬링과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왜 지금 여기까지 찾아온 걸까.
의심 가득한 입 안이 바짝바짝 말랐다.
눈도 코도 입도 없는 검은 물체가 드리워진 어둠만큼이나 으슥한 음성으로 물었다.
“…더 안 마셔?”
누가 들으면 둘이 함께 좋은 술자리라도 가졌던 것처럼 말하는 것이 어이없었다. 나니아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다시 이불을 뒤집어쓰며 몸을 눕혔다.
“당신이나 실컷 마셔….”
술에 젖은 목소리가 웅얼거렸다.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이불 밑에서 더운 입김이 공기를 데웠다.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침대 옆 테이블에 무언가를 올려놓는 것 같았다.
바람을 부는 소리와 함께 화르륵 타오른 불꽃이 초를 밝혔다. 얇은 이불 위로 따뜻한 빛이 번지면서 침대가 가볍게 출렁였다. 남자의 손길이 이불자락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
까맣기만 하던 검은 자취에 익숙한 눈코입이 생겼다. 휘적거리는 불꽃을 따라 사내의 얼굴에 갈피를 잡기 힘든 음영이 드리웠다.
내리깐 눈동자에서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읽어 내려는데, 남자가 커다란 등을 숙여 나니아의 입술을 빼앗았다.
저항할 틈도 없이 급작스럽게 다가온 입맞춤은 울음으로 벅차올랐던 호흡을 다시금 가쁘게 만들었다.
그는 아예 나니아의 목 밑에 커다란 손을 받치고서 하염없이 그녀의 입술을 빨았다.
진동하는 술 냄새가 자신의 것인지 남자의 것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오랜만에 느껴 보는 그의 흥분한 숨결이 소녀의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들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혀를 내밀고 질척하게 섞이기 시작했다.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입술이 퉁퉁 불어날 정도로 빨아 먹은 다음에야, 라히무스는 소녀를 놓아주었다.
키스할 때와 다름없이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물었다.
“왜… 왜 이번에는 물어뜯지 않지? 넌….”
그의 혼란한 눈동자가 춤추는 불꽃을 따라 일렁였다.
“도통 모르겠어.”
그녀를 차지하는 일은 여태껏 라히무스가 쟁취하고 이뤄 냈던 그 어떤 일보다도 험난했다.
소녀는 자신을 경멸스럽다는 듯 바라보다가도, 때로는 강하게 갈구하는 눈빛을 보내 왔다.
무엇이 허락되고 무엇이 허락되지 않는지. 어느 때는 괜찮고 어느 때는 괜찮지 않은지. 그 차이를 구분하고 자제하는 것이 어려웠다.
남자가 허리를 펴 앉으며 중얼거리듯 물었다.
“…원래 연애란 게 이렇게 어려운 건가?”
그 가소롭고도 가당찮은 중얼거림에 나니아가 벌건 얼굴을 태우며 반발했다.
“누, 누가 당신이랑 연애를 해? 내가요?”
조금 전까지 축축하게 입술을 물고 빤 주제에 기어코 내외를 하는 꼴이 남들 보기엔 우스울 따름이었으나, 라히무스를 다시 시무룩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연애. 그 진중하지 못한 가벼운 단어가 둘 사이의 관계를 정의 내리기에 가장 적합한 단어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자는 벽이 높았다. 그 가뿐한 관계도 쉽사리 허락하지 않았다.
또다시 망할 분위기에 휩쓸리고 만 자신을 자책하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건 당신의 그, 그 새롭고 귀여운 암컷 리자드랑 해 보지 그래요?”
닦달하듯 빈정거리는 말에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리슬링?”
그가 발음하는 여자의 이름이 소름 끼치게 싫었다. 여자는 그래서 더 악다구니를 썼다.
“걔는… 걔는 너랑 뒹굴고 싶어서 안달이 났잖아. 그 짓이 하고 싶으면 그쪽 가서 한번 알아보라구요.”
남자는 조용히 인상을 찌푸렸다. 깊게 파인 미간 주름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몇 초간 뾰로통한 나니아를 바라보던 그가, 체념하듯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럴까, 그럼.”
그러고는 침대에서 일어나 미련 없이 등을 보이는 것이었다.
두근거리던 심장 소리가 성난 박자로 바뀌어 갔다. 몸을 벌떡 일으켜 앉은 나니아는 술기운에 헤매는 손으로도 그의 등허리에 베개를 집어 던져 명중시켰다.
여자는 자기가 부추기고 들쑤셨으면서, 배반당한 연인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섹스만 할 수 있으면 누구라도 상관없었던 거지!”
가던 길을 멈추어 선 사내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침대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커다랗던 보폭의 끝은 나니아에게로 향했다.
거센 풍랑을 만난 조각배처럼 그녀의 몸이 크게 일렁였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침대 위로 뛰어든 사내 때문이었다. 그는 다시 잡아먹을 듯이 여자의 입술을 삼켰다.
이번에는 아예 나니아의 작은 몸 전체를 으스러뜨릴 것처럼 끌어안았다. 오랜만에 안겨 보는 그의 품이 두렵고도 친근했다. 두툼한 그의 몸뚱이에는 팔을 둘러 깍지를 끼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남자의 날숨이 축축하고 뜨거웠다. 규칙적으로 입술을 빨아 대는 그의 움직임이 성급하고도 달콤해서, 소녀는 자기도 모르게 얄팍한 신음을 흘렸다. 마침내 입술을 떼어 냈을 땐 뜨거운 호흡이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도 피를 보지 않고 무사히 키스를 마친 사내가 열 오른 시선을 보내 왔다. 그녀의 눈동자를 통해 심연까지 들여다보려는 듯했다.
“…질투해?”
남자는 오늘 줄곧 어렴풋하게 짐작하던 바를 꺼내 물었다. 그 짤막한 질문이 나니아의 마음속에 긴 비명을 이끌었다.
“아, 아니요? 내가 왜 당신 상대로, 그, 그런 감정을…!”
애써 부정하는 술주정뱅이의 고개가 옆으로 홱 돌아갔다. 눈을 마주치기엔 지나치게 창피했던 터다. 필사적으로 감추려 했던 무언가가 하나씩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농락당한 것 같으니까 당연히 기분이 나빴을 뿐이야. 당신은… 당신은 아무하고나 그, 그런… 방에도 막 따라 들어가고… 발정기가 어쩌고저쩌고….”
횡설수설하는 소녀의 턱을 남자가 잡아 돌렸다. 억지로 마주한 그의 얼굴에 옅은 희열이 번져 있었다.
“술이 있는데.”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나긋해져 있었다.
“여기서는 못 구하는 거라.”
그가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은 술병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니아의 시선도 흘긋 그 방향을 따라갔다. 색을 알 수 없는 술병 두 개가 보였다.
나니아는 코를 한 번 훌쩍이며 확인하듯 물었다.
“…가서 그거 받아 온 거야?”
물어보는 목소리가 다시 작고 소심해졌다.
사내는 무언으로 긍정했다.
잘못된 망상을 했었다는 사실은 부끄러웠지만, 한편으로는 오해의 소지를 제공한 그가 나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걔랑 팔짱도 꼈으면서… 선물도 주고….”
술에 취한 소녀는 평소보다 더 솔직해졌다. 무엇이 그녀의 속을 썩이고 애를 태웠는지 호소하는 말투는 이미 아무것도 벨 수 없을 정도로 뭉툭해져 있었다.
자신을 원망하는 나니아를 보고 라히무스가 아이 어르듯 물었다.
“하지 말까?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응?”
느긋하고 부드러운 음성이 귓불을 데웠다.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바라보는 눈빛에 솜털이 오소소 서는 기분이 들었다.
“…내 귀여운 나냐. 응?”
그가 나니아의 볼에 몇 번이고 입술 도장을 찍었다. 아예 그녀의 옆자리에 비스듬하게 누워 뜨듯해진 볼을 쓰다듬었다.
사실 그가 리슬링에게 받아온 술은 속칭 ‘후림주’, ‘꾐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과실주였다. 리자드라면 모두 환장하고 사랑하는 음료였지만 보관과 유통이 쉽지 않아 동대륙으로 건너온 뒤로는 실과는커녕 그것을 삭혀 만든 술조차 한 방울도 구경을 못 한 터였다.
대중적으로 널리 사랑받는 음료임에도 왜 그런 세속적 이름을 가지게 되었는가 하면, 술술 넘어가는 것에 비해 도수가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다. 달콤한 맛에 빠져 정신 못 차리고 먹다 보면 회까닥 돌아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이 술은 작업 걸고 싶은 대상이 있을 때 진탕 먹여서 꼬시는 용도로 널리 사용되었다. 모두가 그 의미를 아는 지금에야 ‘이거 먹고 나랑 잘래?’라는 은유로 쓰일 뿐이지만.
남이 주는 술을 날름날름 잘 받아 마시는 나니아를 보고 심통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의 술잔을 채워 주고 싶었다. 볼이 발긋해져서 솔직하게 쫑알대는 모습이, 술에 취해서 꼬장을 부리는 나니아는 짐작보다 훨씬 귀여웠다.
오해가 풀리자 우습게도 마음이 놓였다. 너무 쉽게 그랬다. 쿨쩍거리는 목소리가 아이처럼 칭얼거렸다. 지질한 투정은 끝 간 데를 모르고 이어졌다.
“나, 나한테 무서운 표정 짓지 마.”
“응.”
“걔가 말 걸어도 대답해 주지 마.”
“응.”
“팔짱 끼는 것도 싫어. 하지 마….”
“응.”
남자는 나니아의 모든 지적에 오냐오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유치하고 심술궂은 요구 사항들을 하나씩 늘어놓으면서도, 부끄러운 듯 남자의 가슴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숨기었다.
좁혀 오는 신체적 거리에 남자는 흥분한 마음을 감출 길 없었다. 더는 참지 못하고 나니아의 작은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을 때 느껴야 했던 그 거칠고 추악한 감정을, 그녀가 이해한다는 것이 기뻤다. 자신을 독점하고 싶어 하는 여자의 욕망이 기꺼웠다.
“…또?”
과격했던 포옹과 다르게 어르는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더 어떤 부탁을 들어주랴 살갑게 묻는 말에 소녀는 물먹은 용기를 쥐어짰다. 눈물 삼키는 목소리가 몇 번이고 딸꾹거렸다.
“내가… 여자가 필요한 거면, 내가 할게… 내가 다 할 수, 할 테니까… 다른 여자랑, 딴 여자랑 사이좋게 지내지 말아….”
행복했던 것도 잠시, 라히무스는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니아의 얼굴을 가슴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뭐?”
조심스레 살펴본 그녀의 얼굴에 절박한 울분이 느껴져서 사내는 적잖이 당황했다.
“왜… 그런 말을 하지?”
나니아의 젖은 눈시울은 이제 슬슬 부어오르고 있었다. 그녀가 원망하는 투로 말했다.
“라히무스는, 바람, 바람둥이잖아… 처음 보는 여자한테도 막, 귀, 흡, 귀엽다고 뽀뽀해 달라고 하고, 거기도 막, 흡, 만지고….”
횡설수설하는 말에 라히무스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내뱉는 호흡과 함께 다시 풀썩 쓰러지듯 그녀를 끌어안았다.
“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 거야… 그런 건 너한테만 하는 거야. 너처럼 귀여운 애는 본 적 없다고 했잖아….”
암컷이 사랑스럽다고 느낀 것도, 그래서 주둥이를 비비고 싶었던 것도, 품에 넣고 몸을 겹치고 싶어진 것도, 모두 나니아가 처음이었다.
처음 그녀의 체취를 맡았을 때부터 줄곧 그랬다. 뜨끈한 환열이 단박에 그를 덮쳤다.
하지만 나니아의 귀에는 아무리 들어도 바람둥이의 작업 멘트 그 이상으로는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떨떠름하게 훌쩍이는 그녀의 귓가에 사내가 재차 한숨 같은 고초를 토로했다.
“이런 건 나도 처음이니까, 가르쳐 달라고… 대체 어떻게 하면 네가 나랑 짝짓기해 주는 건지….”
호소하는 목소리가 절절 끓었다.
나니아는 끝까지 머릿속에 그런 생각밖에 없는 것 같은 야수의 애달픈 눈빛을 보고 한숨지었다. 하지만 다른 여자 곁에 있는 라히무스를 보는 것은, 섹스해 달라고 조를 뿐인 그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힘겨운 일이었다.
체념 속에서도 욕정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라히무스의 입술을 훔쳤다. 허락 같은 입맞춤에 맹수는 신음하였다.
고요한 적막 속에 타액이 오가는 소리만 가득해졌다.
아득하게 길어지는 입맞춤. 더는 새로운 각도로 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리저리 맞물리고 끊어지기를 반복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침대 위에서 몸을 부둥켜안고 입술을 빨고 있으려니, 더한 짓을 하고 싶어진 몸뚱이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각자 머릿속에 든 건 달라도, 그 음란한 육욕만큼은 똑같이 꿈틀거렸다.
둘 모두의 손이 상대방의 목과 등허리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어떻게 하면 서로에게 더 가까워질 수 있는지 탐색하듯 움직였다.
허벅지 근처를 더듬던 손이 은밀한 위치로 이동했다.
남자가 젖은 입술을 움직여 물었다.
“나냐, 여기 빨아 줄까…?”
그녀를 위해서라면 남자 자신이 아는 모든 지식과 기술을 활용해 정성껏 빨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소녀는 몽롱한 머리로도 펄쩍 뛰며 필사적으로 거부했다.
“시, 싫어. 절대 안 돼… 빠는 건 절대로, 싫어….”
빨아 준다는 말만으로 질겁하며 그의 손을 치마에서 떼어 냈다. 라히무스는 포기하지 않고 재차 들러붙었다.
“왜에… 기분 좋을 텐데….”
하지만 나니아도 지지 않고 끝까지 도리질 쳤다.
리자드는 입맛을 다시며 좀 더 노골적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럼 만져 주는 건 좋아?”
그는 여자를 바로 눕히고 그녀 옆에 비스듬히 올라타듯 엎어져 본격적으로 손가락을 놀리기 시작했다. 리자드의 손끝이 그녀의 은밀한 부위를 실톱처럼 문질렀다. 그는 나니아의 음부를 반으로 가를 듯이, 그러나 부드럽고 온화하게 어루만졌다.
소녀는 라히무스가 볼 수 없게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창피해하는 얼굴이 귀여워 끝까지 쫓아간 입술이 짧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사내는 나니아의 속옷을 벗기고 축축하게 젖어 드는 그녀의 아랫도리에 좀 더 열중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을 적셔 오는 은밀한 액체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건조한 다른 부위에 경종을 알렸다.
여자는 치미는 쾌락으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미끌미끌하게 펴 발라진 체액 때문에 성감을 느끼는 부위가 점점 넓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이 손가락을 알고 있었다. 이 거칠고도 부드러운 손이 주는 강렬한 쾌락을 기억했다.
그가 어떤 속도와 어떤 박자로 어떤 즐거움을 가져다주는지 알게 된 지금, 그때보다 더 큰 긴장감과 기대감이 온몸을 압도했다.
비스듬히 일부만 닿아 있어도 그의 상체는 충분히 크고 무거웠다. 그 육중한 양감이 흥분에 무게를 실었다. 나니아가 하는 일이라곤 그저 천장을 보고 누워서 위아래로 애무를 즐기며 신음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소녀의 여리고 부드러운 살갗을 다시금 탐할 수 있게 된 것이 감격스러운 듯, 리자드는 거세게 흥분하고 있었다.
“오늘은 넣어 볼까? 응?”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더한 불장난을 제안하며 속살거렸다. 나니아는 두려움에 가슴이 뛰어 또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싫어, 아파….”
“안 아프게 할게. 안 아플 것 같은데….”
사내는 그녀의 젖은 입구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뗐다 하며 탄식했다. 야한 물을 질질 흘리기 시작한 그곳은 주인의 엄살과 다르게 흠뻑 젖어 있었다.
라히무스는 양손으로 나니아의 비부를 만지기 위해 몸을 아래로 움직였다.
한 손으로는 음핵 주변을 마구 문지르며, 다른 한 손으로는 질 입구를 더듬었다.
“여기 이렇게 해 주면서 넣으면, 어때… 응?”
그의 말대로였다. 치미는 성감에 정신이 팔려 교성을 참고 파르르 떠는 사이, 남자의 길고 굵은 손가락이 그대로 소녀의 처녀를 뚫고 들어왔다.
닫혀 있던 구멍을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의 감각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안쪽이 침입당한 와중에도 여전히 클리토리스는 사정없이 문질러지고 있었다.
나니아는 허리를 비틀어 헐떡였다. 자신을 못살게 구는 팔뚝에 손톱을 세우며 울부짖었다.
“흐, 흐응, 시, 싫어… 싫어… 빼 줘.”
손톱에 긁히는 통증조차 지독한 흥분으로 이어졌다. 남자는 이성을 잃고 흐릿해진 나니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따뜻하고 주름진 그녀의 안쪽 또한 라히무스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는 가장 긴 손가락을 푹푹 찔러 넣으며 물을 튀겼다.
“하아… 나냐… 기분 좋아?”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나니아의 얼굴에 입술을 쪽쪽거렸다. 소녀는 그조차도 창피하고 싫은 듯 도리질 치더니 아예 베개를 가져와 얼굴을 덮었다. 싫다고 하면서도 허리를 물리지 않는 그녀의 반응에 자신감을 얻었다. 찔러 넣은 손가락을 느릿하게 회전시켜 새로운 감각을 선사했다. 여자는 발끝을 오므리고 베갯잇에 쾌락을 토해 냈다.
몇 번이고 깊게 들락날락하던 손가락이 꾸욱 내부를 밀고 들어와 얕은 간격으로 쳐올렸다. 라히무스는 베개를 뺏어 치워 버리고는 그녀의 입술을 성급하게 빨아 댔다. 남자의 혀가 난잡하게 움직이다 음담패설을 뱉었다.
“나냐 안에 손가락 말고 다른 거 넣어 보자… 응? 자지도 넣어 볼까?”
“흐윽, 싫어….”
구멍 안쪽을 헤집던 손가락은 이따금 밖으로 빠져나와 그녀가 가장 느끼는 부위를 짚고 흔들었다.
“아닌 것 같은데… 나냐 여기는 남자랑 하고 싶어서 안달 났잖아.”
몸이랑 말이 따로 논다며 자신을 음란하게 몰아세우는 남자가 얄미웠다. 나니아는 그의 어깨며 가슴을 마구 때리며 눈물을 터뜨렸다.
“싫어, 싫다고 했잖아…! 무섭다고, 무섭다고….”
“후….”
맞는 것은 아프지 않았지만, 울면서 바르작거리는 나니아의 거부는 치명적이었다. 리자드는 결국 아쉬움을 뒤로하고 손가락을 빼냈다.
그리고 세 치 혀로는 계속 여자를 타이르고 달랬다.
“싫어? 왜 싫어, 응?”
분명 기분 좋아서 골반을 떨었던 것 같은데.
라히무스는 나니아의 작은 몸을 꽉 끌어안고 그녀의 뺨과 눈꼬리에 쪽쪽 입을 맞추었다.
“무, 무서워. 아프고, 싫어, 안 할래.”
눈물에 젖어 엉망이 된 얼굴을 손등으로 닦아 내는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프게 했어? 미안해….”
라히무스는 아프다는 말에 안절부절못하며 눈물이 흘러간 자리를 입술로 닦았다.
“그럼 어떻게 할까, 응? 어떻게 하는 게 기분 좋아?”
그녀가 원하는 수준까지만이라도 좋았다. 모르면 몰랐지 한 번 맛본 짜릿한 접촉은 그만둘 수 없이 중독적이었다.
막상 자극을 주던 손길이 떨어져 나가자 소녀는 온몸이 진공 상태에 놓인 것처럼 허전하고 간질간질해졌다.
사실 아프다는 말은 엄살이었다. 이제껏 겪어 본 적 없는 감각에 두려워서 거짓말하고 말았다.
하지만 무섭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모든 신경이 사타구니로 몰린 듯하고 이불에 실례를 저지를 것만 같은 이상야릇한 감각이 두려웠다.
음탕한 행위의 주체가 되어 정신을 놓고 흔들리는 일은 지나치게 부끄러웠다. 음란한 짓을 할 때면 아찔해지는 라히무스의 표정을 구경하는 쪽이 더 좋았다. 전자가 제어할 수 없는 육체적 쾌락을 안겨 준다면, 후자는 마음껏 느껴도 좋은 정신적 쾌락을 선사했다.
그의 외설스러운 육신 앞에서 흥분으로 붉어진 눈을 마주할 때면, 덩달아 야한 기분이 들었다.
울음을 멈춘 여자가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옷, 벗어 줘.”
그리고 그녀의 시선이 끈적하게 라히무스의 가슴 언저리를 훑었다.
리자드는 잠시간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잃었다가, 이내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터뜨렸다.
“하, 얼굴은 취향이 아니라면서. 내 몸은 봐 줄 만한 건가?”
삐딱하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나니아를 탓하듯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그는 비난하던 것과 다르게 착실히 나니아의 몸 위로 자세를 고쳐 앉고 탈의를 준비했다. 그녀의 자리는 남자의 벗은 몸을 관찰하기 좋은 일등 관람석이 되었다.
겹쳐진 손목이 착 달라붙어 있던 상의의 끄트머리를 잡고 젖혀 올렸다.
커다란 호흡을 따라 커다란 가슴 근육이 일렁였다. 주황색 양초 불빛이 남자의 그을린 몸을 붉게 태웠다. 굴곡진 신체는 또렷한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움직일 때마다 다른 모양으로 울룩불룩하게 움직이는 그의 상반신을 보면서 나니아는 또다시 아랫도리에서 무언가가 울컥 치미는 느낌을 받았다.
술 취한 눈시울이 어디를 보고 붉어지는지 확인한 사내가 경박하게 입술을 깨물더니 삐딱하게 웃었다. 그는 옷을 벗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거칠게 털어 넘겼다.
“이런 걸로 꼬셔지는 줄 알았으면 진작 벗었지.”
자신만만한 그의 말마따나, 그의 널따란 어깨와 흉통은 지켜보는 것만으로 지독히 음란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사실은 그가 치렁치렁한 로브를 벗어젖혔던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어떤 여자든 동할 수밖에 없는 몸을 가지고 있는 사내였다. 마치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굴었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이제 와 남몰래 인정했다.
“아래도….”
“뭐?”
“…아래도 벗어 줘.”
수줍은 척하는 목소리가 맹랑한 소리를 지껄였다. 인상을 찌푸리는 그를 올려다보며 소심하게 뒷말을 덧붙였다.
“근데 나는 안 벗을래.”
되바라지다 못해 이기적이었다.
여자는 옆에 있던 이불을 끌어와 얼굴을 반쯤 가리고 눈만 빼꼼 내밀어 남자를 쳐다보았다.
“하, 씹….”
남자는 짧게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급히 바지춤에 손을 가져갔다.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탈의를 바라는 그녀의 엉큼한 속셈이 딱히 싫은 것 같지도 않았다.
팽팽하게 부푼 남근이 바지 안쪽으로 선명한 흥분을 드러냈다. 그 거대한 위용은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 않았다.
허벅지를 들어 하의를 끌어 내리려는 찰나,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