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폴핀 (6/22)

폴핀

촌에서 자란 나니아에겐 파비푸스만 해도 어마어마하게 번창한 느낌이었는데, 폴핀의 융성함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두 눈으로 본 도시의 인상은 첫째, 시끄러웠고 둘째, 더러웠다.

성채 안은 가지런하기보다 복잡하였다. 구불구불 골목길을 지나는데 조금이라도 지체했다간 폐가 될 정도였다.

“와… 밤인데도 사람이 정말 많아요. 낮에는 더 많겠죠?”

나니아가 등 뒤의 라키바하프를 향해 물었다.

“그렇겠지. 야경꾼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아 우리도 빨리 묵을 곳을 찾아야겠구나.”

해가 지면서 환등 장수가 곳곳에 불을 밝혀 주고 다녔다. 나니아가 대표로 행인을 붙잡고 여관의 위치를 찾았다. 어느 여관을 찾느냐는 반문이 돌아온 것으로 보건대, 폴핀에는 길손이 많은 만큼 묵을 장소도 여러 군데 있는 모양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라키바하프의 차림을 흘긋흘긋 보는 터라 급하게 옷을 구해 갈아입었다. 옷시중을 받지 않고 스스로 훌렁훌렁 벗어젖히는 그의 모습이 낯설고도 기묘했다. 벨은 길을 가다 만난 날붙이 장수에게서 가위를 샀다. 그것을 왜 사는 것이냐 물었더니 피치 못할 사정이 생기면 푹 찔러 버릴 용도라는 장난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이 모든 것이 나니아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해결되었다는 점에서, 하루라도 빨리 챠링고와 합류할 필요가 있었다. 아마 숙박비도 그녀가 결제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정말 이곳으로 오고 있긴 한 걸까 걱정스러워졌다.

“네…? 남은 방이 세 개뿐이라구요?”

“수확제가 다가오고 있어요. 어느 때보다 여행객들이 많습니다.”

다 사정이 있다며 여관 주인이 설명했다.

“어딜 가도 비슷할 겁니다. 다른 곳으로 가 봤자 시간 낭비예요.”

당연히 작은 방 네 개를 빌릴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돈이 아니었다.

나니아는 난감한 기분으로 일행들의 얼굴을 하나씩 살폈다.

여기 네 사람이 대체 어떤 조합으로 방을 쓸 수 있겠는가.

한 명, 한 명, 두 명. 문제는 당연히 두 명이 함께 쓸 방이었다.

양, 늑대, 양배추를 가지고 강을 건너는 문제를 아는가?

네 사람은 입을 다물고 그 자리에 돌상처럼 멈추어 섰다. 저마다의 머릿속에서 지지부진한 침묵의 공상이 이어졌다.

라히무스와 라키바하프. 상상만으로도 난리가 날 조합이었다.

벨과 라키바하프. 누군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하겠으나, 누군가는 끔찍이 싫은 구성이었다.

벨과 라히무스. 둘은 이제 와 같은 잠자리를 공유한다고 해서 거리낄 이유가 없었으나, 하녀는 그것이 불편했다.

공주님과 가주님을 두고 자신이 독방을 쓸 수는 없었다. 누군가 불편하게 2인실을 써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라히무스와 같은 방을 쓴다? 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가주님과 같은 방을 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상상만 해도 가슴이 터지도록 불편했다.

어느 모로 보나 합리적인 조합은 하나뿐이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벨 님과….”

“다른 곳도 한번 둘러보고 오지. 방이 여기만 있는 것은 아닐 테니.”

나니아가 무어라 얘기하려던 그때, 라키바하프의 큰 목소리가 그녀를 이겼다. 옆에 있던 여관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오늘은 어딜 가도 방을 네 개씩이나 구할 순 없을 겁니다. 차라리 내일이면 여기서 방 세 개가 더 빕니다. 장기적으로 머물 계획이시라면은 오늘 하루만 어떻게 참아 보시죠.”

일행은 그의 으름장을 손님을 붙잡기 위한 장삿속으로 치부하고 흘려들었다. 그들은 폴핀이라는 대도시의 규모를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보기 좋게 배신당했다.

“그새 방이 하나 더 찼다구요?”

지칠 정도로 도시를 돌고 돌아 여관 주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상황은 이미 늦어 있었다.

“말씀드렸잖아요, 시간 낭비라고.”

그것 봐, 내가 뭐랬어. 여관 주인은 완전히 그런 눈이었다.

“어떻게 할까요. 방 두 개라도 내 드려요?”

너희들이 아니어도 아쉬울 것 없다는 그의 태도가 허세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 지금, 그들은 더 망설일 수 없었다.

투숙을 결정한 순간부터 여관 주인의 낯빛은 조금 더 살가워졌다. 그가 열쇠 두 개를 건네며 말했다.

“도둑 들기 딱 좋은 시기니까 문은 잘 잠그고 주무시고, 분실되는 물건 책임지지 않습니다.”

방 열쇠는 받았으나 들어갈 수는 없었다. 네 사람은 또다시 당착에 빠졌다.

나니아는 머뭇대다가 아까 하려던 말을 다시 꺼내려했다.

“벨 님께서만 괜찮으시면 제가….”

그런데 이번에는 리자드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말을 끊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차례차례 라키바하프와 벨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도 안 되고, 너도 안 돼.”

그는 나니아를 감싼 팔에 한 번 더 힘을 주며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러니까 나랑 자.”

“…….”

너무 어이가 없으면 말이 안 나온다는 사실을 이번 기회에 알게 되었다. 도무지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이 남자, 해도 해도 너무 뻔뻔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라키바하프가 뭐라 한마디 하려던 그때, 벨이 선수를 쳤다.

“숙녀의 정조가 위험해서 안 되겠는데요?”

남자도 거들었다.

“내 생각에도 그건 절대 아니라고 봐. 그렇지, 나나?”

나니아는 자신의 어깨에 붙어 있는 손을 조심히 떨어뜨려 놓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동성끼리 자는 게 맞죠. 그게 상식이에요, 라히무스….”

단둘이었다면 미친 소리 하지 말라며 비명을 질렀을지도 모르겠으나, 어젯밤 그에게 당한 바도 있거니와 보는 눈도 많아서 나니아는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자 리자드는 인정할 수 없다는 듯 항변했다. 손가락으로는 벨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저 새끼도.”

“라히무스.”

벨이 그의 손가락을 꺾어 올리며 라히무스의 가슴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잠깐 저랑 밖에서 얘기 좀 하죠.”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극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둘의 시선이 맞부딪쳤다. 입꼬리 한쪽을 샐쭉 올려 웃는 벨의 억지 미소가 리자드를 은근하게 압박했다.

뿌리치면 벗어나지 못할 것도 아니었으나, 손길이 제법 강경했는지라 그대로 딸려 나왔다.

벨은 건물 사이 골목길로 라히무스를 몰아넣고 그를 닦달했다.

“작작 해. 주둥이 벌릴 때 안 벌릴 때 구분 못 하지 말고.”

모진 고초를 겪으면서도 생글생글 웃던 천사의 얼굴에 미소가 싹 걷히기는 오랜만이었다.

“언제까지 무독한 척 계집 행세할 작정이지?”

본디 험상궂은 리자드도 살벌한 눈빛으로 그에 맞섰다.

“처신 잘하는 게 좋을 거야. 너의 그 변변찮은 연애 사정에 훼방꾼 하나 더 늘리고 싶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리야, 이 빌어먹을 변태 자식아.”

“하!”

벨은 화를 억누르듯 옆얼굴을 덮는 긴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쓸어 넘겼다. 그의 중성적인 미성이 조곤조곤 사유를 읊었다.

“처음엔, 그래, 너 때문이었어. 발정 났을 때 붙어먹을 계집애 하나 쥐여 주면 일이 좀 수월해질까 싶었지.”

벨은 처음부터 라히무스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간파하고 있었다.

“네 발정기 맞춰서 삼사 일씩 발목 잡혀 있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짝 있는 리자드는 한나절 쏟아붓고 나면 끝난다면서.”

착수금과 노임 빼고는 그 무엇도 관심 없다는 듯 굴던 수전노 목석이, 세상 만물 다 자기 발밑에 있는 것처럼 굴던 천하무적 안하무인이, 어느 날 갑자기 처음 보는 여자에 꽂혀 정신도 못 차리더라는 것이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휘청거리는 꼴은 또 얼마나 재밌던지.”

밉살스러운 비소가 벨의 입가를 스치고 사라졌다.

“근데 이제 생각이 바뀌어서 말이야.”

벨은 머릿속으로 나니아를 그려 보았다. 그녀의 우중충한 얼굴은 라히무스의 앞에만 서면 생기가 돌았다. 처음엔 그게 분명 재밌었는데, 갈수록 꼴 보기 싫어졌다.

“그거 알아?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도 남의 주머니에 들어가 있으면 괜히 살펴보고 싶어지는 게 사람 심리거든.”

자신을 바라보던 나니아의 눈빛을 떠올렸다. 내가 미워 죽겠으면서도 모질게 굴지 못하던 그녀를. 야트막한 정을 나누어 주고 마는 정성을.

“계속 보다 보니까 귀엽던데. 네가 왜 꽂혔는지 대충 알겠더라고.”

가늘고 흰 손이 라히무스의 한쪽 어깨를 짚었다. 그는 벨의 의중을 가늠하듯 눈살을 찌푸렸다.

“네가… 나니아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지금?”

벨은 다시 생긋 웃으며 기지개를 켰다. 흘려 내려간 소매 밖으로 드러난 고운 살결엔 털 한 오라기 없었다.

“맞아. 나도 몰랐어, 내가 그런 취향인지.”

리자드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얼떨떨해하다, 이내 붉은 눈을 형형하게 부릅뜨고 벨의 멱살을 쥐었다.

“넘보지 마. 걘 내 거야.”

격노한 목소리가 으름장을 놓았다. 옷깃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니아는 그렇게, 큿… 생각 안 하던데?”

그가 쥐어뜯는 것은 옷깃일 뿐인데도 목이 졸린 것처럼 숨이 막혔다.

“하… 무식하게 힘만 좋아서… 이거 놔. 놓고 말해. 야!”

벨이 짜증스럽게 팔을 할퀴었지만, 남자는 그의 멱살을 놓기는커녕 더 세게 움켜쥐었다.

“그걸 밝히는 이유가 뭐야. 이대로 도망치는 거 관두고 그냥 내 손에 죽고 싶어졌나?”

벨은 강한 척하지만 절박함이 묻어나는 그의 시선을 비웃었다.

“그러니까 처신 잘하라고. 네가 혀를 잘못 놀려서 알게 되는 날엔… 그녀가 얼마나 안심할까? 당신도 눈치챘을 거야. 영주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다는 걸.”

“…….”

“그거 알아? 라히무스 당신이 주둥이 간수 똑바로 안 하면 영주 다음은 나야. 그녀는 너보다 차라리 나 같은 얼굴을 좋아해. 내가 싫으면서도 내 얼굴은 하염없이 바라보거든. 영주든 나든 본격적으로 덤벼들면 너한테 승산이 있을까?”

자신감 넘치는 벨의 얼굴을 코앞에 두고 라히무스는 이를 악물었다.

근거 없는 자만이라 비웃기에 그는 님프의 화용월태에 푹 빠져서 인생을 망친 것들을 몇 명 알고 있었다.

“…정체를 숨기는 저의가 뭔데.”

사내가 벨의 멱살을 놓아주며 물었다. 벨은 구겨진 목덜미를 짜증스럽게 가다듬으며 대꾸했다.

“구구절절하게 설명해야 하는 게 싫어. 그리고 나한테 허물없이 굴잖아. 그게 좋아. 아직 좀 더 곁에 두고 부려 먹고 싶거든.”

“…….”

라히무스는 여전히 그의 심중을 분간해 낼 수 없었다. 다만 벨이 나니아를 좋아하는 방식은, 자신이 그녀를 원하는 방식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옷매무새를 다 정리한 그는 간지러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다시 한번 더 당부했다.

“아무튼 토 달지 말고 오늘은 영주랑 좋은 밤 보내세요, 라히무스. 알았죠?”

다시 나니아 곁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한쪽은 얼굴이 만개했고 한쪽은 죽을상이었다.

벨은 라히무스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며 자연스럽게 나니아의 팔짱을 꼈다. 라키바하프는 한숨을 쉬면서도 여자들의 결정을 따랐다. 이보다 더 정상적인 방법은 없었다.

나니아는 어딘지 평소보다 들떠 보이는 벨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왔다. 데운 물이 준비되기까지 얼마나 남았을까. 빨랫감을 미리 모아 두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벨은 의자에 앉아 하녀에게 가위를 들려 주며 말했다.

“나 머리카락 좀 잘라 줄래요?”

“예…? 머리를요?”

나니아에게는 숙련된 미용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난데없는 부탁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어, 얼마나 자르시려구요?”

나니아는 엉겁결에 가위 손잡이에다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벨의 머리카락은 허리까지 오는 긴 장발이었다.

벨은 목덜미 부근에 손날을 세워 탁탁 내리치는 시늉을 했다.

“아주 짧게요.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그렇게나 짧게요?”

얼마나 오래도록 기른 머리일까. 한순간에 절단해 버리겠다는 그녀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벨은 답답하다는 듯 나니아의 손에서 다시 가위를 빼앗곤, 막무가내로 자기 머리카락을 서걱서걱 썰어 버렸다.

나니아는 마치 자기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는 것처럼 기겁을 했다.

“아아아, 아, 안 돼요, 그런 식으로 자르면…!”

그녀는 결국 다시 가위를 받아 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공주의 부탁대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뭉텅이로 왕창 잘라 내기 시작했다. 어디다 팔면 돈이라도 될 것 같은데. 그런 불경한 생각이 들고 말았다.

“너무 아까워요….”

싹둑싹둑 머리카락 잘려 나가는 소리가 어딘지 구슬프게만 느껴지는데, 오히려 머리카락 주인은 후련해했다.

“진작 잘라 버릴 걸 그랬어요. 왜 아직도 이걸 꾸역꾸역 매달고 있었지?”

나니아는 공주님의 헤어스타일이 자기 손에 달려 있다는 책임감으로 최선을 다해 머리 모양을 다듬었다. 그녀는 완전히 전문적이지는 못했지만, 나름 손재주가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 결과물이 썩 나쁘지 않았다. 벨이 멋대로 잘라 버린 부분이 두피와 상당히 가까웠던지라, 쥐 파먹은 것처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전체적인 머리 기장 자체가 매우 짧아질 수밖에 없었다.

“…죄송해요, 남자애처럼 잘라 버렸어요.”

하지만 최선을 다했다며, 나니아가 그녀의 앞에 거울을 가져왔다. 벨은 이런 저런 각도에서 자신의 머리를 살펴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음, 괜찮아요.”

밝고 명랑한 그녀의 목소리에 안심하면서도, 방바닥에 처참히 나뒹구는 그녀의 은빛 머리털을 보면서 나니아는 심란한 기분이 들었다.

의자에서 일어난 벨은 자신을 보라는 듯 나니아의 턱을 잡아 올렸다.

“나 어때요? 예뻐?”

싱긋 웃는 얼굴이 무척 아름다웠다.

스스럼없이 환하게 웃는 공주의 미모는 눈이 부셨다. 나니아는 잠시간 넋을 잃고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벨은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그 시선을 즐겼다.

그녀가 왜 길게 기른 머리카락 따위를 잘라 내는 일에 연연하지 않았는지 알 만했다. 머리를 싹둑 잘라 놓아도 그저 아름답기만 했다. 엉성한 가위질 따위로 그녀의 미색을 퇴색시킬 수 없었다. 외려 오묘하고 신비로운 매력까지 더해져서 더욱 궁금증을 자아내는 미인으로 진화했다.

나니아는 생각했다.

‘나 같았으면 그냥 덜 큰 남자애로 보였을 텐데….’

자주 봐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공주의 압도적인 미모에 새삼스럽게 움츠러들었다.

“…예뻐요.”

대답을 마친 나니아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리고 곧장 부탁한 시중은 다 들어주었다는 듯 벨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다시 가방을 뒤지며 빨랫감을 챙겼다.

그 정 없는 태도에 벨은 싱겁다는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게 다야?”

나니아는 대꾸 없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무엄하다 꾸짖어도 할 말이 없었다.

팔에 주섬주섬 옷가지를 걸친 그녀가 벨을 향해 물었다.

“입고 있는 옷 벗어서 주시겠어요?”

“응? 왜…?”

어리둥절하다 못해 당황해하는 벨을 보고 나니아가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세탁하셔야죠.”

여관은 최소한의 숙식 제공을 할 뿐 그 이상은 손님의 몫이었다. 하지만 소녀가 누구던가. 철들었을 적부터 남의 집 가사를 도맡아 온 전문 살림꾼이었다.

“날이 건조해서 내일 아침이면 충분히 말라 있을 것 같아요.”

집을 떠난 뒤 자유롭게 잿물을 사용할 기회가 흔치 않았다. 겨를이 있을 때 빨래를 해 두어야 했다.

“주세요.”

종용하는 그녀의 얼굴이 평생 이런 일만 해 온 아가씨답게 어기차고 단호했다.

“나, 나는 괜찮아요. 당장 입을 옷도 없고….”

“내일 아침까지 마르지 않으면 그때 가서 제가 새 옷을 사 오면 되지요. 다행히 이불도 두툼하고 외풍도 없어요.”

그리고 아무렴 흙바닥을 구른 옷보다는 조금 덜 말라서 축축한 옷이 낫지 않겠는가.

벨은 앉은 자리 그대로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리며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난감해하는 그의 얼굴에서 보기 힘든 어수룩함이 묻어났다.

“그래도, 그… 아무리 그래도 좀….”

이불에 몸을 파묻고 창피해하는 벨을 보며 나니아는 갸우뚱했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옷시중이나 목욕 시중을 들게 한 적이 없었다.

‘이상한 데서 부끄러워하시네….’

심지어는 가주님조차 이 정도로 자신 앞에서 탈의를 꺼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같은 여자끼리 속옷 차림이면 뭐 어때요.”

나니아가 눈을 끔벅거리며 말하자, 벨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어린애처럼 고집부리는 그녀를 보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맨살을 보여 주는 것이 굉장히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공주님께서 싫으시다니 감히 더는 강요할 수가 없었다. 나니아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옷가지를 들고 일어났다. 옆방에서도 분명 세탁물이 나올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문밖을 나섰다.

한편, 사내 둘이 쓰는 방에서는 숨 막히는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휴전 국가의 군사 경계선에서 느껴질 법한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맴돌았다.

라키바하프는 신중하게 방 안을 훑었다.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이 좁은 데서 저 커다랗고 시커먼 사내와 단둘이 밤을 지내야 한다니.

무엇보다 최악인 것은, 침대가 너무 작았다.

안 그래도 성인 남자 두 명이 몸을 누이기에 턱없이 협소한 크기의 일인용 침대였다. 그에 반해 두 남자는 평균보다 월등히 크고 두툼한 덩치를 가지고 있었으니, 둘이 한자리에 눕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남자는 인간 그 이상으로 거대한 리자드를 보고 말했다.

“피차 불편할 것 같은데, 한 명은 카펫 위에서 자는 것으로 하지. 이불은 양보할 테니까.”

그 거만한 귀족 남성의 말 저변에는 ‘네가 침대 밑에서 자라’는 분부가 깔려 있었다.

그를 바라보는 라히무스의 눈빛에는 무생물을 바라보는 듯한 차가운 반감만이 느껴졌다.

라키바하프의 설득 같은 주장은 계속되었다.

“침대 밑이라 하여도 땅바닥에서 노숙하던 지난날들에는 비할 바가 못 되지.”

“아, 그래?”

그 말에 리자드는 코웃음을 치더니 보란 듯이 침대 헤드에 큰 몸을 기대앉았다. 그러고는 빈정거리는 말투로 대꾸했다.

“그럼 네가 거기서 자면 되겠네.”

라키바하프는 허리에 양손을 얹고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하… 말이 통할 거라 생각 않았어.”

그 말에 라히무스는 눈을 치켜뜨며 남자를 노려보았다.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를 꼽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랐다.

운 좋게 천부한 인간 사회의 지위 따위로 당연하게 상대를 내려다보듯 하는 그 눈깔이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엾고 귀여운 나니아는 워낙 익숙하게 대해 와서 그를 친절하다고만 여기는 것 같았지만, 사내는 그에게서 인간 귀족 남성 특유의 오만함을 항시 느낄 수 있었다.

감히 인간 주제에. 자기가 뭐라도 되는 듯 거드름 떠는 말과 행동은 상당히 신경에 거슬렸다.

리자드는 말도 섞기 싫다는 듯 잔뜩 표정을 구긴 채로 말했다.

“그러게 내가 나니아와 같은 방을 쓰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말았어야지.”

비뚤게 올라간 한쪽 입꼬리는 명백히 도발적이었다.

“나랑 걘 한 몸처럼 붙어 자는 게 가능한 사이라.”

조잡한 허세에도 라키바하프는 쉽사리 넘어갔다.

“내가 참견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말 천하고 상스러워서 못 견디겠군!”

리자드의 유치한 도발에 그도 똑같이 유치해졌다.

“너 몇 살이야? 나나가 몇 살인진 알고 걔한테 찝쩍대는 거야?”

라키바하프는 침대로 성큼 다가와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아 뜯을 것처럼 노려보았다.

감히 인간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던 리자드도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가슴을 맞대었다. 마주치는 두 사내의 눈빛에서 저열하고 치열한 불꽃이 튀었다.

“나이가 중요한가?”

“어린애 속여 먹지 마, 이 비열한 도마뱀 자식아.”

“어린애? 네가 못 벗겨 봐서 잘 모르나 본데, 걔 어리지 않아.”

“…뭐?”

리자드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었다. 그렇게 웃을 때면 인상이 꼭 비열해졌다.

“내가 벗겨 먹어 봐서 안다고. 완전히 무르익은 암컷이던데.”

“이 빌어먹을 새끼가.”

좀처럼 거친 말을 입에 담는 법 없는 고매한 남자가 상대방의 저급한 언어 선택에 분개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역시 나는 너 허락 못 해. 그따위 마음으로 나나한테 수작 부리지 마.”

라히무스는 가당찮다는 듯 진심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허락은 무슨.”

그리고 다시 턱 끝을 바짝 치켜들고는 남자를 내리깔아 보았다. 사내의 세 치 혀는 멈추지 않았다.

“걔 입술이 얼마나 부드러운지는 알아?”

“키스 좀 했다고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나 본데.”

“침대에서 어떤 얼굴을 하는지 알아? 어떻게 우는지는? 좆 빠지게 야하고 귀여운데 넌 모르지? 걔 치마 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어떤 감촉인지, 어딜 만져 주면 자지러지는지 알아?”

“…….”

“난 알아.”

리자드가 마지막으로 피식 비웃음을 흘렸을 때, 그의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퍽.

있는 힘껏 후려갈긴 라키바하프의 주먹은 라히무스의 얼굴을 강타하고 다시 불끈 쥐어졌다.

“한 마디만, 한 마디만 더 지껄여 봐?!”

라히무스는 얻어맞은 볼을 손등으로 한 차례 거칠게 문질러 닦았다. 질끈 감은 눈두덩이 안쪽으로 분노에 찬 안구가 빙글 돌았다.

“이 씨발….”

리자드는 그를 뼈도 못 추릴 정도로 흠씬 두들겨 팰 수 있었다. 여차하면 당장에 명줄을 끊어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하… 더 쳐 봐.”

“치라면 못 칠 줄 알고?”

남자는 정말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것처럼 라히무스의 얼굴을 한 차례 더 후려갈겼다.

-똑똑.

때맞추어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리자드는 부러 테이블과 의자 사이로 자신의 큰 몸을 쓰러뜨려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니아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 무슨 일이에요?”

그녀는 방 밖에서 사내들의 고함과 커다란 소음을 들었다. 우당탕탕 집기가 부서지는 소리에 덜컥 놀란 마음으로 방문을 열었다.

그녀가 들은 모든 소음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방 안은 총체적으로 쑥대밭이었다.

주먹을 말아 쥔 채 씩씩거리는 라키바하프와 무너져 내린 가구들, 그리고 주저앉은 라히무스.

나니아의 혼란한 시선이 두 남자의 얼굴을 차례로 살피다 마지막엔 라히무스의 왼쪽 뺨에서 멈추었다.

얻어맞은 것이 분명한 타박상.

소녀는 당장에 빨랫감도 던져 놓고 라히무스 쪽으로 무릎을 꿇어앉았다.

“왜, 왜 이래요, 어쩌다가 이랬어요?”

뺨을 숨기듯 감싸고 있던 사내의 손이 다가오는 그녀의 손길을 향해 열렸다.

얻어맞은 얼굴이 방문 반대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고정된 고개가 움직이질 않았다. 그는 어째선지 여자의 손길은 받아들였지만, 그녀의 시선은 외면했다.

리자드가 서러움을 감추는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쟤가 때렸어.”

마치 일방적으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구는 그의 태도에 라키바하프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가주님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그는 아주 말짱해 보였다.

“가주님, 폭력은 나빠요….”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볼을 어루만지면서 눈으로는 라키바하프를 원망하듯 바라보았다.

네가 뭘 아냐는 듯 그는 억울해하며 분개했다.

“그 자식이 먼저 너에 대해 더럽게 말했어.”

“그치만…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쓰러질 정도로 때리시면….”

이 커다란 거구의 사내를 때려눕히려면 대체 얼마나 세게 후려쳐야 했을까.

아는 사람들끼리 폭력을 주고받는 것은 모르는 사람과 싸워서 다치는 것과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벌렁거렸다.

사용인에게도 손찌검 한 번 안 하는 사람인데, 저 정도로 화난 것을 보면 정말 나쁜 말을 했나보다 싶긴 하였다.

“당신은 대체 무슨 말을 해서 이렇게 얻어터져요?”

나니아가 작은 손으로 리자드의 등짝을 두어 번 퍽퍽 때렸으나, 워낙 넓고 튼튼한 등이라 기별도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사내가 입 안에 고인 피를 쿨럭 뱉었다.

“세상에.”

나니아는 다시 떨리는 손길로 라히무스의 발갛게 달아오른 뺨을 쓰다듬었다.

“어떡해… 이빨 다친 거 아니죠?”

“그렇게 세게 치지 않았어!”

영주가 다시 변명하듯 외쳤으나 나니아는 듣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는 라히무스의 볼에 남은 붉은 손찌검 자국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더불어 어젯밤 자신이 물어뜯어 놓은 입술 위의 상처도 마음을 아프게 했다. 조금 심했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피딱지가 입술 끄트머리에 뭉쳐 있었다. 나니아는 볼을 어루만지는 손의 엄지를 뻗어 그 상처를 더듬었다.

“어떡해… 많이 아파요?”

“…조금.”

사실 방금 뱉어 낸 핏물은 스스로 볼 안쪽을 씹어 만들어 낸 것이었다.

여자가 자신의 볼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 참을 수 없이 좋았다. 그 달콤한 매만짐에 입꼬리가 히죽 올라가려는 것을 애써 참아야 했다.

선택받았다는 묘한 승리감에 도취하여 점점 표정 관리가 힘들어지려던 그때, 나니아가 라히무스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일어날 수 있죠?”

그녀가 살살 달래듯이 물어 왔다.

“응, 가요. 옆방으로 가자… 옳지.”

일방적으로 얻어터졌으니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그런 나니아의 걱정과 다르게 사내는 지금 통쾌하기만 했다.

리자드는 즐겁고 건강한 티가 나지 않도록 일부러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한쪽 팔을 나니아의 어깨에 걸쳤다. 물론 그의 두 다리는 부축이 필요 없을 정도로 멀쩡했다. 그는 나니아에게 기댄 것도, 그렇다고 혼자 씩씩하게 일어선 것도 아닌 모호한 자세로 그녀를 따라 걸었다.

그가 소녀의 정수리에 인중과 윗입술을 슬쩍 문지르고 떨어지는 것을 뒤에 있던 영주만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남자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나나, 절대 그놈이랑 단둘이 있지 마.”

그는 방을 나서는 라히무스를 등 뒤에 대고 지적했다.

“너랑… 너랑 침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자랑처럼 떠벌리는 남자야. 내가 정말 화를 참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뷔셀.”

라키바하프는 그녀가 속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싶었다.

“최소한의 예의도 교양도 없는 놈이라고!”

나니아는 이토록 감정적인 영주의 목소리를 들어 본 바가 없어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성난 음색만큼이나 무서우리만치 일그러져 있는 남자의 얼굴이 몹시 생경했다.

지난 며칠간의 그는 나니아가 평생토록 봐 왔던 다붓하고 단정한 도련님이 아니었다. 때론 두려워하고, 때론 비통해하며, 때론 절박해졌다. 울고 웃고 화내며 다채롭게 감정을 표현하는 그의 모습은 나니아가 알던 라키바하프 파비올라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특히나 그가 자신과 관련된 일로 이렇게까지 화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놀랍고 당황스러우면서도 가슴이 술렁거렸다.

나니아는 말없이 고개를 들어 라히무스를 바라보았다. 설명을 요구하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남자는 몸을 움찔 굳히더니 슬그머니 눈길을 피해 버렸다.

나니아는 한탄하듯 한숨을 흘리며 말했다.

“방에 가서 얘기해요.”

하녀는 가주님에게 잠시만이라도 편히 쉬고 계시라 인사하며 안심시켰다. 그런 뒤 데리고 나온 라히무스를 자기 방으로 밀어 넣고 방문을 닫았다.

여자가 잡아끄는 대로 순순히 침대에 걸터앉은 라히무스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당신도 여기서 머리 좀 식혀요.”

먼저 침대에 누워 있던 벨이 이건 뭐냐는 얼굴로 벌레 씹은 표정을 지었다.

“좁잖아요.”

하녀는 어쩔 수 없었다는 듯 공주님의 양해를 구했다.

“옆방에서 가주님과 다퉈서요. 싸움이 더 커지기 전에 떨어뜨려 놨어요.”

합사에 실패한 가축 주인처럼 말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하녀는 공주의 웃음을 허락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약이 없으니 찜질이라도 해 주려구요.”

그녀는 벨에게 상황을 설명하면서도 오른손으로는 라히무스의 뜨듯한 볼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 곰살궂은 손길에 이미 용서받기라도 한 듯 남자는 다시 게게 풀어진 얼굴로 볼을 씰룩거렸다.

“찬물 적셔서 가져올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나니아가 일어나려고 하자, 리자드는 다시 그녀의 손을 잡아다 자기 뺨에 올려놓았다. 심지어 그쪽은 딱히 아픈 쪽도 아니었다.

“그냥 만져 주면 곧 나을 것 같은데.”

리자드는 소녀의 손등 위로 자신의 앞발을 겹친 채 우물거렸다.

여자는 자신의 손바닥에 얼굴을 비비는 남자를 난처하게 바라보며 타일렀다.

“아기처럼 굴지 말구요….”

그 말에 벨이 질겁하며 물었다.

“나니아한테는 그게 아기 같아요?”

세상에 이렇게 커다랗고 징그럽고 음흉한 아기가 어디 있냐며 물건 가리키듯 남자를 손가락질했다.

“해, 행동이 그렇다는 거죠….”

하녀는 모처럼 말을 더듬었다. 남자의 눈치 없는 애정 행각이 당황스럽기도 하고, 벨의 참견이 부끄럽기도 했다.

애써 붙잡힌 손을 빼내며 단호한 척 말했다.

“갔다 와서 가주님께 무슨 말을 했는지 물어볼 거니까, 실토할 준비나 하고 있어요.”

그 말에 리자드는 다시 죄인의 얼굴로 돌아왔다. 추욱 처진 어깨에 시름이 가득했다.

하녀는 깨끗한 헝겊을 찾아 들고 라히무스와 벨을 남겨 둔 채 방문을 나가 버렸다.

벨이 소름 끼친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돌도 부수는 괴물이 고작 그 정도가 아파서 간호받으려고 왔어요?”

그 돌도 부수는 괴물 덕에 여태껏 목숨 부지하며 도망쳐 온 주제에 은혜를 모르는 괘씸한 비난이었다.

하지만 라히무스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조금 전까지 뺨에 닿아 있었던 나니아의 손바닥 촉감을 상기했다. 그녀의 걱정스러운 이목이 온통 자신에게로 집중되었을 때의 짜릿함이 함께 떠올랐다.

“나냐가… 편들어 줬다.”

라키바키 뭐시기를 제쳐 놓고 단박에 자기 앞으로 와서 얼굴을 살펴봐 주던 나니아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이런 식의 보살핌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 가증스러운 놈에게 몇 대고 더 맞아 줄 의향이 있었다.

그녀는 엄살을 부리고 있다든가, 교양 없는 놈이니 가까이하지 말라는 놈의 말도 무시하다시피 했다. 그 사실만으로 사납게 일어났던 분노가 뭉클한 행복 속에 희석되어 흐리멍덩해졌다. 하찮은 인간 놈이 건방지게 시비를 걸어 왔던 것도 상관없어졌다. 그녀의 앞에서라면 알을 갓 깨고 나온 새끼 용처럼 구는 것도 좋았다.

“이런 식으로 잔꾀를 부려서 방 배정을 바꿔 보겠다? 행여나 여기서 재워 달라 할 생각은 추호도 말아요.”

벨은 라히무스의 허벅지까지 닿아 있던 이불을 홱 빼앗듯이 잡아당겼다.

달큼한 생각에 젖어 있던 리자드는 정색하며 그를 노려보다가 이내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안 그래도 좁아 죽겠는데!”

옆에서 벨이 질색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제집처럼 편안히 자세를 고쳐 잡았다. 머리를 확 잘라 낸 벨을 보고 어쩐 일이냐 알은체를 할 법도 한데, 완전히 무시하고 없는 사람 취급하는 태도가 참으로 그다웠다.

사내는 양팔을 목 뒤에 받친 채, 천장을 바라보며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안고 자고 싶다….”

무엇을 끌어안고 싶다는 것인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은 제발 입 밖으로 꺼내지 말고 혼자 머릿속으로 생각할 수 없냐며 옆에 있는 벨이 투덜거렸지만 역시나 안중에도 없었다.

그 조그맣고 말랑거리는 몸을 품에 꼭 끌어안고 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남자는 상상했다. 그녀의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에 코를 처박고 그녀의 야릇한 향기에 흠뻑 취하며 잠이 드는 상상을.

소녀의 가녀린 팔이 자신의 몸을 마주 두르면, 작은 얼굴을 가슴에 파묻으면, 터질 것처럼 꽉 끌어안아 주고 싶다. 손끝에 닿는 보드라운 맨살을 하염없이 어루만지고 싶다. 자신의 뜨거운 체온으로 그녀를 따뜻하게 덥혀 주고 싶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곳이 설령 자갈 바닥이더라도 아늑하고 포근하리라.

리자드는 소녀를 끌어안는 상상만으로 목이 바짝바짝 타고 아랫도리에 열이 몰렸다. 아득하고 황홀했다.

“아… 섹스하고 싶다.”

중얼거림을 끝으로 망상을 마무리한 그는 다시 삐죽하게 눈을 뜨고 벨을 노려보았다. 벨 역시 경멸스러운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예요, 그 표정은.”

벨은 끔찍하다는 몸짓으로 자기 팔뚝을 문질렀다.

“나만 없었어도 당장 나니아를 자빠뜨릴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나 본데, 머릿속에 그딴 생각밖에 없으니까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가 없는 거예요.”

혐오스럽다는 듯 말하는 벨을 보고 리자드는 이해할 수 없어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좋아하는 암컷이 생기면 당연히 매일 하고 싶은 거 아닌가?”

할 수만 있다면 그는 당장에 나니아를 잡아다 자기 둥지에 가둬 놓고 백날 천 날 그 짓만 하고 싶었다.

대화하는 와중에도 머릿속으로는 자기 품 안에서 흐드러진 그녀의 안에 자신을 쑤셔 넣는 상상을 하던 사내가,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켜 앉으며 벨을 노려보았다.

“내 나냐한테 그딴 마음 품기만 해 봐. 죽여 버릴 테니까.”

그는 세상 수컷들이 다 자기 같은 음심을 품고 있을 것이라 믿고 시퍼렇게 날을 세웠다. 누군가 자기 여자를 가지고 음란한 상상을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화가 치밀어서 눈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제 발 저리는 라히무스를 향하여, 벨은 시종일관 벌레 보듯 하는 시선을 고수했다.

“모든 사람이 다 당신 같은 줄 알아요? 세상엔 그것보다 더 숭고한 방식의 애정이 있어.”

그는 몸을 섞는 일의 덧없음을 득도한 지 오래였다. 성욕이라는 원초적 욕망보다 더 높은 차원의 감정과 관계를 추구했다.

사내는 못 미덥다는 듯 가늘어진 눈으로 한참이나 벨을 노려보다가, 다시 어깨를 늘어뜨리며 탄식했다.

“하… 걔는 너무 귀여워.”

누군가 그녀를 욕심내기 전에, 빨리 내 여자로 만들어 숨겨 놓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해답을 찾을 수 없었다. 네가 처음이라는 말도, 교미 상대가 되어 달라는 말도, 심지어는 요르문간드 반지도 통하지 않았다.

인간 여자는 보석도 싫다고 하고, 발정기도 없고, 페로몬도 통하지 않고, 아무튼 너무 어려웠다. 지난밤 입술을 물어뜯긴 자리가 괜스레 따가워졌다.

벨이 바보 같은 불청객을 상대하는 일에 지쳐 갈 때 쯤, 나니아가 돌아왔다.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물에 젖은 수건이 들려 있었다.

여자를 바라보는 리자드의 눈빛이 다시금 처연하고 쓸쓸해졌다. 벨은 그 꼴을 가증스러워하며 눈꼴 시려 했다.

다소곳하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그에게로 나니아가 다가왔다. 그녀는 라히무스와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자리에 걸터앉았다.

“이리 숙여 봐요.”

여자가 손짓하자 라히무스는 다시 뺨을 내밀었다. 소녀는 그의 볼에 차갑게 적셔온 물수건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왜 맞고만 있었어요.”

맞은 자리라 후끈후끈한 건지, 원래 그런 온도인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니아는 차분히 그의 마음을 헤아렸다.

“영주님 다칠까 봐 참았어요?”

그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수치로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인간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는 것은 파악했다.

짐작대로 그는 아무리 약을 먹은 상태라지만 그깟 인간 하나 제압하는 것쯤은 우스운 일이었다.

“그 새끼 때리면… 네가 날 더 싫어할까 봐.”

리자드가 우물쭈물 대답했다.

더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는 그의 말이 나니아의 가슴 한구석을 찌르르 아프게 했다. 처량한 눈빛의 그가 가련하고 불쌍해졌다.

“…그랬구나.”

입술이 벌어지는 부분에 남은 피딱지에 자꾸만 눈이 갔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깨무는 건 너무했어.’

누군가의 살점을 뜯어 피를 낸 것이 나니아로서는 처음이었다.

고분고분 얌전해진 그는 이제 막 말썽을 피우고 눈치 보는 법을 익히는 어린 강아지 같았다. 온순하게 굴 때면 이렇게나 갸륵해지는 것을.

“착하다….”

여자는 자기도 모르게 아기 어르듯 속삭이고 말았다. 그러자 리자드가 허리를 바짝 세우며 사라진 꼬리를 흔들 기세로 안달했다.

뽀뽀 내지는 포옹을 기대하는 얼굴이었다. 칭찬을 바라는 듯한 그 뜨거운 눈빛을 받으면서, 나니아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처럼 말을 더듬었다.

“애, 애교 부리지 말고 찜질이나 더 해요.”

남자가 허리를 피는 바람에 손에서 놓친 수건이 무릎을 적시고 있었다. 여자의 말은 또다시 벨을 경악스럽게 만들었다.

“나니아한테는 그게 애교 같아요?”

그 기함에 나니아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당황한 그녀의 목덜미에 남자가 기습적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소녀는 창피하고 당황한 마음에 남자가 턱 끝으로 슬쩍 자기 가슴을 건드리고 있는 줄도 몰랐다.

“워, 원래 라히무스는 애교가 많은 편인데요… 응석도 많이 부리고….”

변명하듯 웅얼거렸으나 자신이 듣기에도 이상한 말이었다.

라히무스를 밀어 내지도 끌어안지도 못하는 그녀를 보고 벨이 혀를 찼다.

“하, 재밌네. 더해 봐.”

그는 코웃음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히무스를 깔아 보며 비웃더니, 다시 나니아를 향해 이야기했다.

“난 그럼 옆방 가서 다른 남자를 달래 줄게요.”

공주는 허락 같지 않은 허락을 구하며 문고리를 잡았다.

“…예?”

“저쪽도 위로가 필요할 것 같아서.”

공주의 말에 나니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벨은 그 속에 혼재한 양가감정을 읽어 내고 피식 웃었다.

공주는 하얗고 긴 손가락을 가볍게 나부끼는 것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사라지는 그녀를 잠시간 바라보던 여자의 고개가 천천히 라히무스에게로 돌아왔다.

“그래서 가주님께… 무슨 말을 했다구요?”

그녀의 질문에 리자드의 눈썹 끝이 움찔 경련했다. 그의 몸은 곧 어깨부터 허리까지 바짝 얼어붙었다.

옆방에서 여과 없이 마구 이기죽대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참 동안 말을 고르던 그는 어렵사리 지껄였던 음담패설들을 복기해냈다.

한 줄 한 줄 그녀가 싫어할 법한 이야기들을 실토하며, 네가 침대에서 얼마나 끝내줬는지 자랑했다는 고백을 마지막으로 남자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아는 나니아의 허용 범위에 따르면 대충 이쯤에서 따귀가 날아오리라 짐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예상했던 반응이 돌아오지 않자, 리자드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한쪽 눈을 슬쩍 떠서 상황을 살폈다.

빨개진 얼굴의 소녀가 입술을 앙다물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녀가 울먹일 것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가주님이 뭐라고 하셨어요?”

뭐라고 했냐니.

“…너도 봤잖아.”

그는 다짜고짜 주먹을 날렸다.

라히무스는 구체적인 대답 대신 그에게 얻어맞은 볼을 문질렀다.

나니아는 남자의 부은 얼굴 위에서 조금 전 목도했던 라키바하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토록 정숙하고 예의 바른 남자가 누군가에게 손찌검할 정도로 대단히 분노해 있었다. 언제나 가지런하던 그의 이목구비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던 모습은 확실히 인상 깊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열기가 확 올라왔다.

소녀는 심장 뛰는 소리가 목구멍을 울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입을 틀어막았다.

오랜 세월 한 방울, 한 방울씩 쌓이고 모인 마음이 어느새 못을 이루었다. 지친 웅덩이가 고일 대로 고여 썩어 갈 때쯤, 끝이 없는 줄 알았던 심연의 바닥을 발견했다. 이 마음의 밑바닥을 버티고 있던 것은 굳건한 지반이 아니라 무른 마개였다.

그리고 오늘 누군가 그 마개를 잡아당겼다. 커다랗게 구멍 난 바닥으로 참아 왔던 감정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처음 라히무스와 키스하던 모습을 그에게 들켰을 때 어떤 심정이었던가. 그때처럼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너무 기쁘고 통쾌했다.

그 순간, 영주와 대화를 마친 벨이 다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는 문 안쪽으로 고개를 먼저 들이밀었다. 그리고 여자를 불렀다.

“나니아,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 것 같은데요.”

그는 입꼬리에 짓궂은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하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간 자리, 남겨진 리자드가 불신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왔지?”

벨은 자기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머리카락 한 올을 털어 내며 콧노래를 불렀다.

“별거 아냐.”

그는 미지근한 온도를 띠고 있는 물수건을 주워 들었다. 그녀의 다정함을 한 사람이 차지하게 둘 수 없었다.

“그냥 자기 처지를 좀 깨우치게 해 주고 왔지.”

나니아는 방문 앞에 서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짐작하며 대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남자가 또다시 아버지 역할을 운운하며 자신을 훈계하려 들 것이 분명했다. 가장 일어날 법한 대화 상황을 가정하며 어떤 말로 그를 상처입힐 수 있을지 생각했다.

당신이 신경 쓸 바가 아니라고 쏘아붙일까.

참견하지 말라고 대들어 볼까.

이제 나는 당신의 하인도 무엇도 아니라고 건방지게 굴어 볼까.

-똑똑.

짧은 노크와 함께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전처럼 단정하고 근엄한 모습의 위정자가 아닌, 몸도 마음도 빈털터리가 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나.”

그의 비감한 목소리가 나니아의 이름을 불렀다.

남자가 맞은편 의자를 향해 눈짓하자, 하녀는 조심스럽게 그곳에 앉았다. 발치에는 그녀가 던져 놓고 간 빨랫감이 나뒹굴고 있었다.

남자는 지금 아주 얇은 가죽으로 만든 북과 같았다. 거칠고 우렁차게 울고 있지만, 실상은 얼마 못 가 찢어질 상태였다.

그는 무슨 말부터 꺼내면 좋을지 몰라 고민했다. 어쩌면 아직 그녀와 대화할 준비가 되지 않은지도 몰랐다. 하지만 성마른 갈증이 들어 더는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요란한 말들이 혀끝에서 휘몰아쳤다.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 시켜 뱉은 질문은, 그의 이성이 가장 묻지 않으려던 이야기였다.

“그 남자랑 잤니?”

눈을 살짝 가릴 정도로 길게 자란 머리카락 사이. 안광이 희미한 눈동자가 푸르고 서느렇게 나니아를 바라보았다.

하녀는 그의 질문에 답할 의무가 없었지만 대답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녀는 이 뜻밖의 질문이 괴상하고도 불편하면서도, 결국 착실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남자는 고개를 숙여 수척한 얼굴을 밀밭색 머리카락 사이로 숨기고 땅이 꺼질세라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쥐지 못한 공허한 손을 몇 차례 쥐었다 폈다 하며 혼란한 마음을 다스렸다.

공주는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를 향했던 얄팍한 호기심의 실체를. 다른 감정을 덮어씌워 가면서 외면하고 있었던 어스레한 진심까지.

그녀의 말대로, 그의 곁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끼던 영지도, 따르던 기사들도, 지위도, 재물도, 아무것도. 마치 모든 것을 도둑맞은 것처럼 황량하기만 했다.

지금 그의 곁에 남은 것은 이 소녀가 유일했다.

남자가 우울감에 젖은 목소리로 물었다.

“…날 아직 좋아하니?”

“…….”

그 말에 소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이제 와 자신의 마음을 다시 확인하고자 하는 의도가 무엇인지 난해했다.

대답을 망설이는 입술에 남자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의 눈동자가 낙담으로 물들어 갈 때쯤, 하녀는 반사적으로 대꾸하고 말았다.

“네.”

건조한 목구멍으로 축축한 목소리를 냈다.

“…좋아해요.”

증오라는 불순물이 섞여 이전과 온전히 같은 마음은 아니었지만, 그의 얼굴을 보면 여전히 마음이 술렁였다.

이 요동치는 심금은 자신이 아직 그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았다.

기대했던 대답에 라키바하프의 표정이 부드럽게 무너져 내렸다.

그가 초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대답을 망설이는 찰나의 순간에도 나는….”

남자는 어지러운 심정을 감추듯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소녀의 늦은 대답이 심장을 조였다 풀기를 반복했다. 그는 아직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녀의 말에 안심하였다.

남자는 그녀가 떠난 후에 혼자 남아 홀로 곱씹어야 했던 감정들을 하나하나 토로하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너와 관계를 맺었다고 으스댔을 때, 속이 부글부글 끓었단다. 그가 말하는 너는… 내가 아는 나니아 뷔셀이 아닌 것 같았어. 그의 곁에 있는 너는 내가 모르는… 완전히 다른 여자처럼 보여.”

남자는 고개를 들어 나니아를 보았다. 마찬가지로 혼란한 얼굴의 그녀가 자신을 마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지금 이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도… 너무나 낯선 여자 같아.”

손바닥에 가로막힌 남자의 목소리는 그의 탁한 눈빛만큼이나 흐릿해졌다.

남자가 어딘지 절망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널… 좋아하는 거니?”

“…….”

하녀는 질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주춤했다. 분명한 건 아직도 그녀의 발아래로 묵혀 왔던 감정이 콸콸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것이 시원함인지 허전함인지 깨우치기도 전에, 남자는 다시 그녀의 마개를 닫았다.

* * *

라히무스는 지난 밤, 문짝을 부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라키바하프가 기다리고 있던 방으로 들어간 나니아는 다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아 돌렸을 때, 방문은 출입을 거부하듯 굳게 잠겨 있었다.

벨은 팔짱을 끼고 서서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라히무스가 참지 못하고 팔꿈치를 세웠을 때, 벨이 고개를 저으며 그의 행동을 저지했다. 정도가 지나친 폭력적 간섭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며 회유했다.

아침이 되도록 열리지 않는 문을 지켜보며 그의 말이 궤변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잘 잤어요?”

한숨도 자지 못한 리자드를 보고 여자가 물었다. 다정한 인사말과 다르게, 그녀는 남자의 눈을 보지 않았다.

“…왜 거기서 잤어.”

여자는 머뭇거리며 더듬더듬 대꾸했다. 손으로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라히무스보단 내가 그 방을 쓰는 게 나은 것 같아서.”

“방문은 왜 잠갔는데?”

“…….”

“왜.”

옆으로 빠져나가려는 여자의 팔을 라히무스가 거칠게 잡아 세웠다.

대답하길 꺼리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사내는 자기가 그런 질문을 꺼낼 권리도 없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했다.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태풍의 눈 속에 머무는 듯 숨 막히는 감각이 그들을 압도할 때쯤, 멀고도 익숙한 목소리가 그들을 반겼다.

“오, 드디어 찾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어린 리자드가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하고 있었다.

“세상에나… 파키케팔로, 무사했군요.”

조용히 라히무스의 손아귀를 빠져나간 소녀가 커다란 반가움을 표하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뜻밖의 재회에 놀란 남자의 손이 망설이는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왜 니가 나를 제일 반기냐? 아니 그보다 어쩌다 너도 같이 도망자 신세가 된 거야? 뭐야, 영주도 있잖아? 인간을 데려가도 괜찮으려나…? 아아아, 몰라. 일단 다 같이 가자고! 벨로즈 님은?”

“방에 계세요.”

소란스러운 상황에 아직 잠이 덜 깬 공주가 부스스한 얼굴을 비비며 나왔다.

“뭐야… 파키케팔로잖아.”

그녀는 아직 꿈나라를 헤매는 듯 몽롱한 얼굴이었다.

“…나 보고 싶었어?”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옷이나 입어요!”

그는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겨야 한다며 짐을 챙기라 종용하였다.

공주는 하품하며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안 그래도 오늘부터 방 네 개 값을 내야 해서 초조했는데. 가진 건 나니아의 홀쭉한 지갑뿐이었거든요.”

“너무해요. 여태껏 홀쭉한 지갑으로 제가 보필해드렸잖아요.”

“아아, 걱정 마! 챙겨야 할 건 다 챙겨왔다고. 중요한 짐은 모두 라히무스가 가지고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었어. 성으로는 다시 들어갈 수 없었거든.”

“챠링고는?”

“그쪽도 벨로즈 님을 수색 중일 거야. 서로 반대쪽에서 출발해서, 찾지 못하면 다시 돌아오기로 했거든.”

“우리가 만났다는 사실을 알려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운이 나빴지 뭐! 내가 먼저 찾아서 다행이야. 히히.”

라히무스가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상황은 이미 나니아와 대화하기 힘든 분위기가 되어 있었다.

그녀는 추궁을 피하려고 일부러 밝은 척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우중충하고 위태로웠던 네 명의 조합에 파키케팔로의 활력이 더해지면서, 아닌 게 아니라 훨씬 숨통이 트였다. 청년의 성마른 재촉이 거멓게 피어오르는 불화의 연기를 헤집었다. 일행은 옷을 챙겨입고 짐을 챙겨 하룻밤 야단을 치렀던 그곳을 빠져나왔다.

희끄무레한 아침 공기가 얼굴을 차갑게 감싸고 귀 끝으로 흩어졌다. 적막이 흐를 틈조차 주지 않는 청년의 수다가 무색해질 정도로 도시의 신단은 소란스러웠다.

“아침을 데울 화주 있어요, 사탕 한 알 공짜.”

“신선한 청어, 우리들의 청어!”

“갓 짠 우유, 우리 집 우유에 밀가루는 절대 타지 않아요.”

가두 행상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호객 행위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에 특정한 멜로디와 리듬을 섞어서 듣는 이의 고막에 각인시켰다. 손님을 애타게 부르는 말들이 와글와글 거리를 메우니, 귀가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발로는 파키케팔로를 분주히 뒤따르면서, 눈으로는 그들을 구경하기 바빴다. 촌에서 자란 나니아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낯설고 새롭기만 했다. 사실 뭐가 됐든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애쓰는 중이기도 했다.

도시는 생각처럼 말쑥하고 세련된 곳이 아니었다. 인구 밀도가 낮은 시골보다 더 짙고 걸쭉한 느낌을 주었다.

크고 넓게 닦인 도로는 오히려 파비푸스보다 너절하고 지저분했다. 좁은 골목길엔 누군가 쓰고 내다 버린 물과 오물 등이 흘렀다. 버리는 사람은 있는데 치우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아마 비가 오기 전까지는 계속 저 상태일 것이다.

더러운 골목길을 빠르게 누비는 시궁쥐를 보고 놀라기를 몇 차례, 옆에서 비웃던 벨이 나니아의 팔짱을 꼈다.

개중에서도 너도밤나무 물통을 들고 다니는 물장수의 존재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물을 돈 받고 팔다니요.”

나니아가 가까이에 있던 벨에게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도시는 원래 그래요.”

공주가 대답했다.

파키케팔로가 안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수록 어째 점점 인적이 드물어졌다. 그들은 맞게 가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구석진 길을 걸었다. 기껏 발을 들인 성채의 중심에서 점차 멀어지는 중이었다.

굽이굽이 미로처럼 꺾여 있는 골목길은 통로 그 자체가 목적인 것처럼 좌우로 그저 벽뿐이었다. 높은 담벼락 사잇길은 어둡고 서늘했다. 또다시 발 옆을 스쳐 지나가는 시궁쥐를 보고 소녀는 발끝을 오므렸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노폭이 좁아졌을 때쯤, 파키케팔로가 뒤를 돌았다.

“여기야.”

그가 말했다.

그러고는 끝이 막혀 있는 골목의 초입에 멈추어 서서 입고 있던 옷을 벗었다.

‘막다른 길이잖아?’

청년은 의아해하는 나니아의 어깨에 벗은 로브를 둘렀다. 그러고는 후드를 코끝까지 잡아당겨 깊숙이 뒤집어씌웠다.

“어지간하면 벗으라고 해도 좋다고 할 때까지 벗지 마. 영주는… 뭐 괜찮겠지.”

짧은 조언을 마친 그는 몸을 꺾어 어딘가를 비집고 들어갔다. 막다른 길인 줄 알았던 담벼락 끝에 사람 하나 간신히 지나다닐 만한 틈이 있었다.

“좁으니까 옆으로 돌아서 지나가야 해.”

공간은 양어깨를 펼치고는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비좁았다. 그는 게처럼 옆으로 걸어 구멍을 빠져나갔다.

필연적으로 벽을 쓸어야 했다. 벨이 더럽다며 잠시 투덜거리긴 했지만, 얄팍한 체구의 그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파키케팔로가 지나간 자리를 따를 수 있었다. 그보다 작은 나니아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끼는가 싶던 라키바하프도 무리 없이 빠져나왔다. 문제는 가장 뒤에 있던 라히무스였다.

“…….”

그는 어깨 한쪽과 다리 한쪽을 밀어 넣고 멈추어 섰다. 두툼한 흉부가 꽉 껴서 더는 진입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모두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말없이 난감해하고 있을 때, 파키케팔로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책망했다.

“아, 진짜 라히무스으! 무식하게 젖탱이만 커가지고.”

“…….”

버릇없는 어린 리자드의 힐난에 남자는 눈을 꾹 감고 앞머리를 들어 올렸다. 드러난 이마에 힘줄이 섰다.

그는 더 비집고 들어오는 것을 포기하며 뒤로 물러나는가 싶더니, 반대쪽 벽을 박차고 도약하였다. 팽팽한 허벅지가 높은 탄성을 자랑하며 뛰어올랐다.

커다란 손이 담벼락 끝을 턱 하니 짚었다. 남자는 전완근에서 상완근으로 넘어가는 팔 힘을 이용해 장벽 위로 윗몸을 일으켜 세웠다.

상체를 추켜세운 다음부터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양쪽 다리를 넘겨 벽 너머로 풀쩍 뛰어내렸다.

땅이 크게 진동해도 이상하지 않을 덩치의 사내였지만, 그의 착지는 익숙하게 가볍고 산뜻했다.

남자는 벽을 넘어오자마자 파키케팔로의 머리를 쥐어박고는 이를 악문 채로 속삭였다.

“안 그래도 너랑 할 얘기 많다.”

그러고는 두고 보자는 듯 정수리를 팔꿈치로 찍어 눌렀다.

파키케팔로는 얻어맞은 머리를 감싸 쥐고 골목길 끝에서 펼쳐진 새로운 공간을 다시 안내했다.

“이제 다 왔어.”

“여긴 어디죠?”

지하로 향하는 미심쩍은 계단 앞에서 벨이 물었다.

“대지용의 후예들이 파 놓은 땅굴을 찾았어요. 여기에서라면 필요한 물건을 다 찾아서 떠날 수 있어.”

청년은 얼얼하게 얻어맞은 정수리를 비비면서도 다시 의기양양해졌다.

일행과 헤어진 사이 챠링고와 파키케팔로가 찾아 놓은 그곳은, 인간 세상에 숨어 사는 서대륙 생물들의 커뮤니티였다.

계단 아래로 펼쳐진 광경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이름은 땅굴이었지만 그것은 숨어 사는 리자드들의 공간을 부르는 은어일 뿐, 실제로는 지하와 반지하, 그리고 다시 다른 계단을 통해 닿을 수 있는 야트막한 지상이 공존했다.

무른 바위를 파서 만든 암굴 형태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또 하나의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제껏 본 적 없는 기이한 양식의 건축물들은 마치 개미굴을 연상시켰다.

계단을 내려오면서부터 얼마나 걸었을까. 파키케팔로가 후드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주변을 제대로 둘러볼 틈도 없이 목적지에 다다랐다. 그곳은 특별히 문이랄 것 없이 구멍이 뻥 뚫려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공간이었다. 곳곳에 쇠줄로 매달려 있는 램프가 부족한 실내 채광을 보완했다.

“우리가 당분간 머물 곳이야. 벨 님부터 찾느라 아직 아침도 못 먹었다니깐.”

청년이 투덜거리면서 실내로 들어오자,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웃으며 아는 체했다.

“무탈하게 찾아왔나 봐?”

주인은 희끗희끗하게 세기 시작한 양털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이 인자해 보이는 여성이었다. 나이가 지긋하고 인상이 푸근한 그녀가 평범한 여자가 아니라는 것은 그녀의 꼬리를 보고 알았다.

붙임성 좋은 얼굴로 파키케팔로가 서로를 소개시켜 주었다.

“샤르도네 씨, 여기는 제 동료 라히무스. 그리고 보호 중인 의뢰인 벨로즈 님이에요. 라히무스, 여기는 샤르도네 씨.”

되바라진 님프는 처음 보는 어른에게도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하는 법이 없었다. 샤르도네 역시 벨보다는 라히무스에게 더 큰 관심을 드러내며 손을 내밀었다.

“여행하는 용족들은 언제나 환영하지! 그것도 빈 둥지 후예들이라면 말이야.”

라히무스가 어색하게 손을 맞잡고 흔들었다. 중장년 암컷 리자드는 그에게 어려운 존재였다.

“아, 사나운 홍염용을 셋이나 받게 되다니. 우리 집에 불이 나지 않는지 잘 살펴야겠구만.”

샤르도네가 껄껄 웃었다.

리자드들이 인사하는 사이, 주변인의 기분을 지우기 힘든 이 낯선 공간 속에서 나니아는 어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제야 가게 주인이 소개받지 못한 둘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쪽은?”

파키케팔로는 대수롭잖게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인간 둘인데, 우리 군식구예요. 신경 쓰지 마요. 아, 그래서 말했던 것보다 두 명분의 방이 더 필요한데. 손녀는 어디 갔어요?”

“그러니까 얘가 또 반죽 주무르다 말고… 리슬링! 리슬링 어디 있니?”

리자드가 손녀의 이름을 소리 높여 불렀다.

“손님이 왔으면 내다봐야지, 리슬링. 빨리 열쇠 가져다드려라!”

파키케팔로가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주점을 겸업하는 듯한 중앙 공간을 지나 길이 좁아지는 복도로 향했다. 복도는 방과 다르게 머리 위로 천장이 뚫려 있었는데, 비가 내리면 그대로 쫄딱 맞을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바닥에는 육각형으로 모양을 낸 돌들이 깔려 있었다. 그게 이곳 나름의 멋인 것 같았다.

복도 가장 바깥에 있던 방에서 사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마른 흙을 덧발라 놓은 듯한 문틀 사이로 꼭 맞물려 있던 나무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방에서 나온 이는 열린 문에 느슨하게 기대어 태만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작은 주인이었다.

파키케팔로와 비슷해 보이는 연령대의 그녀는 마침 문 가장 가까이에 있던 나니아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요정을 보았는가 싶을 정도로 놀라워 두 눈을 비비고 싶었다. 청포돗빛 머리카락에 마찬가지로 맑은 연두색 눈을 가진 그녀는, 아주 어리고 예쁜 리자드였다.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고정되자 리자드는 활짝 웃어 보였다. 그녀는 남의 눈을 부담스러워하기보다 즐기는 타입인 것 같았다.

파키케팔로가 마침 잘 나왔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열쇠 줘. 일인실 네 개.”

그 말에 벨이 딴지를 걸었다.

“왜요? 나는 챠링고랑 같은 방 쓸 건데요.”

파키케팔로는 팔을 휘휘 내저으며 대꾸했다.

“여기서는 벨로즈 님 호위 필요 없어요. 누가 감히 당신을 건드리냐니깐. 차라리 저 두 인간이라면 모를까.”

나니아는 리자드 청년에게 손가락질 당하며 옷깃을 움켜쥐었다. 사실 그녀는 아까부터 이 이세계의 대화와 환경을 따라가기가 버거웠다.

“저, 저기, 그건 마치….”

왜 벨 님은 우리와 다른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는가 물어보려던 나니아의 질문이, 옆에 있던 낯선 암컷 리자드의 새된 비명에 가로막혔다.

“헐, 완전 내 스타일!”

그녀는 부탁한 열쇠를 줄 생각은 않고 양 뺨을 감싼 채 누군가를 황홀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청포도처럼 상큼하고 구김살 없어 보이는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동자가 향한 곳은, 라히무스였다.

턱밑에서부터 매끈하게 뻗은 목선. 크고 탄탄한 흉근. 그 밑으로 늘씬하게 들어간 허리. 굵직한 허벅지와 대조적으로 미끈하게 빠진 발목.

리슬링의 시선이 사내의 몸을 품평하듯 꼼꼼히 훑어 내려갔다.

“뭐랄까, 완전….”

무례하고 끈적한 시선은 다시 남자의 얼굴로 올라왔다.

길게 뻗은 콧대, 사납게 찢어진 눈매와 더불어 굳게 닫힌 입매가 날카로운 인상을 완성했다.

평가를 끝낸 여자가 손가락으로 라히무스를 척 가리키며 선고하듯 지껄였다.

“내 남편감!”

“…뭣.”

그 말을 듣고 파키케팔로의 입이 바보스러운 간격으로 벌어졌다. 열쇠를 받기 위해 내밀었던 오른손이 오므라들었다.

“…….”

난데없는 삿대질에 라히무스의 비딱한 시선도 그녀의 손가락을 향했다. 뒤이어 손가락 주인의 얼굴을 살펴보는 눈빛 속엔 기묘한 감정이 비쳤다.

그리고 부딪치는 시선의 중심에 나니아가 서 있었다.

그녀는 가슴 한구석에서 이유 모를 불편함을 느꼈다.

리자드들은 모두 저렇게 처음 보는 상대한테도 거리낌 없이 호감을 표현하는 걸까? 거절당할 것에 대한 불안감이라든가 수치심 같은 것은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라히무스의 표정을 재빨리 훑고 아닌 척 눈을 돌렸다. 나니아가 얼핏 봤을 때, 그도 딱히 싫어하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알 바 아니지.

나니아는 자조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면서 의도치 않게 곁에 있던 라키바하프의 발을 밟고 그의 가슴에 뒤통수를 부딪히고 말았다.

남자가 주춤하는 나니아의 팔뚝을 잡아 부축했다.

“조심해야지.”

그녀가 미처 죄송하다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영주는 부드럽게 웃으며 나니아의 이마에 짧게 입맞춤했다.

“쉬고 있어.”

그러고는 벨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늘 폴핀에서 찾아보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방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남는 방을 감사히 사용하지요. 오늘 저녁엔 돌아올 터니 그때까지 나나를 잘 부탁합니다.”

아주 짧은 순간 이루어진 그의 모든 언행이, 라히무스에게는 매우 거슬리는 것들뿐이었다.

“네가 뭔데 걔를 부탁하고말고….”

“아이참, 인간 혼자 나가면 위험할 수 있거든. 내가, 내가 땅굴 입구까지 다시 바래다줄게!”

라히무스가 미처 이를 다 드러내기도 전에 파키케팔로가 그의 말을 끊고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그… 방 좀 잘, 안내, 그, 응? 알았지?”

그러고는 리슬링을 향해 이리저리 수신호를 보내며 동시에 라키바하프의 등을 떠밀었다.

파키케팔로가 친절하게 배웅을 자처한 이유에는 그의 말마따나 인간이 길에서 해코지를 당할까 하는 걱정도 없지 않았으나, 성난 라히무스로부터 영주를 떨어뜨려 놓고 자신도 잠시간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는 매를 먼저 맞기 보단 끝까지 미루는 타입이었다.

나니아는 라키바하프의 입술이 닿았던 이마를 어색하게 문질렀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차마 고개를 바짝 들고 다른 사람의 얼굴을 뻔뻔하게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나니아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매우 이상스러운 행동이었다. 무엇보다 라히무스의 표정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웠다. 그의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몰라 난감해지는 일이 잦았다.

다행히도 파키케팔로가 나가면서 고자질을 한 덕택에 샤르도네가 재빨리 뒤쫓아 와 상황을 수습했다. 그녀는 들고 있던 밀대로 손녀의 머리를 가볍게 내리치며 훈계했다.

“리슬링, 손님들 귀찮게 하지 마라.”

“아이참, 할머니. 지금 손주사위를 만들어 주려고 하고 있는 거잖아!”

“예끼, 이 녀석아.”

샤르도네는 발칙한 손녀의 머리통을 그 뒤로도 몇 번 더 통통 두들겼다. 리슬링의 머리카락 위로 포도 껍질 바깥에 맺힌 당분처럼 하얗게 밀가루가 묻어났다.

결국 샤르도네가 리슬링의 방 안으로 들어가, 돌을 깎아 만든 선반을 뒤적거리며 열쇠를 찾아 건넸다.

그녀가 복도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방은 그 저쪽부터 네 개. 오른쪽, 오른쪽, 그다음 오른쪽과 맨 끝 왼쪽 방을 쓰시게나.”

샤르도네가 말하는 방들은 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에 문제없이 알아들을 수 있었다. 어려운 건 그녀가 건넨 물건이었다.

나니아는 건네받은 물건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용도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그것은 열쇠라기보다 꼬챙이에 가까웠는데, 끝이 갈고리처럼 구부러져 있으면서도 불규칙하게 굽은 부분이 존재했다. 더불어 직육면체 모양의 돌덩이가 함께 주어졌다. 그 돌덩이에는 누가 봐도 꼬챙이를 쑤시고 싶게 생긴 작은 홈이 나 있었으나, 정확한 사용 방법을 알 수 없어 난해하기만 했다.

“이게… 뭐죠?”

나니아가 자물쇠를 들고 헤매자, 성난 리자드의 음산한 목소리가 고개 숙인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내가 가르쳐 주지.”

그는 나니아의 손에서 벼락같이 물건을 빼앗아 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녀의 손목도 가로채 갔다.

아차 싶은 사이 그는 가장 가까운 방으로 나니아를 밀어 넣었다.

방문이 큰 소리를 내며 거세게 닫혔다. 세로로 길쭉한 방문 손잡이 두 개에 돌덩이가 끼워 맞춰졌다. 그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커다란 손이 분주히 움직였다. 당기고 비틀고 쑤시는 등 원리를 알 수 없는 행동들이 이어졌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문을 잠그는 것이 분명한 그 움직임에 여자는 불안해졌다.

“가르쳐 주는 중이잖아.”

남자는 서늘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더니 손에 든 쇠막대기를 나니아가 서 있는 위치와 가장 먼 곳 반대편에 던져 버렸다.

“이렇게 쓰는 거다.”

일말의 다정함조차 사라진 목소리는 쇠붙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만큼이나 매섭고 통렬했다.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는 라히무스의 얼굴에 분노와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감금. 손 쓸 겨를도 없이 휘말린 여자는 뒤늦게 버벅이며 거부감을 표현했다.

“이, 이러지 마요.”

“뭘.”

남자가 붉은 눈을 빛내며 나니아에게로 한 발짝 다가왔다.

그는 오늘도 약을 먹지 않았다.

“네가 어제 했던 거잖아. 문 잠그는 거.”

날 선 표정만큼이나 목소리에도 잔뜩 가시가 돋쳐 있었다. 평소와 달리 만만치 않아 보이는 느낌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여자는 그를 향해 경계심을 드러내며 털을 바짝 세웠다.

“나가게 해, 해 줘요.”

그녀가 무서워하면 언제나 크게 뉘우치며 행동을 멈추던 그였다. 하지만 오늘은 무언가에 단단히 꽂힌 것처럼 집착적으로 굴었다.

“그 새끼가 왜 너한테 추근대?”

“…거기서 이제 멈춰요.”

“어제 문 잠가 놓고 둘이 뭐 했냐고 물어봤잖아.”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말아요.”

“왜 대답을 피하지?”

뒤돌아서 도망치면 당장에 뒷목을 물어뜯길 것만 같았다. 소녀는 맹수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면서도 발로는 뒷걸음질 쳤다.

더는 물러난 공간도 없이 딱딱한 벽에 부딪혔을 때쯤, 코앞까지 다가온 사내의 싸늘한 눈빛이 나니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잤어?”

남자가 섬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짧은 물음 속에 차디찬 냉기와 절절 끓는 열기가 공존했다.

여자는 어딘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그의 질문에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나 요즘 그 질문 자주 받는 거 같은데.”

그게 왜 그렇게 궁금한 걸까? 내가 처녀가 아니면 싫다는 건가? 자기는 갱생 불가 걸레라면서.

등이 벽에 닿으면서 자연스럽게 가슴이 펴졌다. 여자는 그대로 턱을 치켜들고 사내를 마주 노려보았다.

“당신 같은 사람한테 그게 대체 뭐가 중요해요?”

자기는 이 여자 저 여자 붙어먹고 사는 족속이면서 남의 아랫도리 사정에 왜 그렇게 참견하냐는 소리였다.

그러나 남자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얼굴을 잔뜩 일그러뜨리고 콧잔등을 구겼다. 씹어 뱉듯 꺼내는 말에 긴한 노여움이 느껴졌다.

“아, 그래. 나 같은 짐승 새끼는 대가리에 생식 본능밖에 남지 않아서 말이지.”

남자는 작정하고 나니아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끌려가 침대에 내동댕이쳐졌다. 가로누운 그녀의 몸 위로 남자의 커다란 몸뚱이가 겹쳐졌다.

“네 눈에 안 차는 끔찍한 괴물이라 아쉽게 됐네.”

그러고는 하나도 미안하지 않은 얼굴로 나니아의 팔을 들어 올렸다. 귀 옆에 붙은 팔뚝이 몸부림쳤다. 남자의 커다란 한 손이 소녀의 양 손목을 그러쥐어 결박했다.

다른 한쪽 손은 여자의 가랑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사정없이 폭력적인 손길에 소녀는 악을 쓰며 발악했다.

“이거 놔!”

남자는 이를 악물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새끼랑 한 번 했으니까 나랑도 해.”

“안 해!”

“누가 더 잘 빨아 주는지 한번 보자고. 누가 알아? 너랑 내 속궁합이 환장할 정도로 좋을지.”

이죽거리며 입술을 들이미는 그를 피하기 위해 사정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자는 이성적인 대화가 도저히 통할 것 같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서워진 나니아가 울먹거리며 소리 질렀다.

“안 했어, 안 했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일 없었어!”

새된 비명 속 절박함이 흥분했던 리자드의 행동을 멈추고 사고를 정지시켰다.

사내는 입술을 비비려던 것을 중단하고 그녀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안 했어?”

소녀는 그 멍청한 얼굴에 침을 뱉어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으나,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꾹 참았다.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이거 놓고 말해.”

리자드가 침을 꿀꺽 삼켰다. 움켜쥐었던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나니아는 그의 가슴을 팍 밀쳐 내며 몸을 일으켰다. 꼼짝도 하지 않았던 그의 덩치가 쉽게 밀쳐졌다.

나니아는 침대 헤드로 도망치듯 움직여 남자와의 거리를 벌렸다. 또다시 붉게 손자국 난 손목에 아릿함이 번져 왔다.

여자가 울음을 참으며 쉰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냥 당신들 방해받지 않고 대화할 시간이 필요했어.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여기서라도 터를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먹고살 방법을 이제부터 찾아봐야 하니까.”

복잡한 심경으로 고백하던 나니아의 두 눈에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눈물이 맺혔다.

“우린 이제 돌아갈 곳이 없단 말이야.”

소녀의 눈물은 방울방울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혼란스럽다는 듯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내가 왜… 당신한테 계속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뭘 그렇게, 흡, 잘못했다고….”

억울하다는 얼굴로 펑펑 눈물을 흘려대는 여자를 보며 라히무스는 당황했다.

눈이 뒤집힌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어느 정도 그녀 탓이었다. 언제부턴가 영주도 자신과 똑같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리자드는 나니아의 짝사랑이 성공적인 결실을 맺게 될까봐 두려웠다. 조급하고 초조했다.

라히무스가 더듬더듬 변명하듯 말했다.

“하지만, 그 새끼가 네 이마에 키스한 건 사실이잖아.”

다시 떠올렸더니 화가 치민다는 듯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그 새끼 때문에 네가 날 쳐다보지도 않으면… 젠장, 하다못해 네가 내 몸만 바라도 좋아. 그 새끼 자극하기 위해서 나를 이용하는 것도 괜찮아. 그냥 뭐든 좋으니까… 그러니까….”

앞머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손등에 힘줄이 섰다. 그가 불안해 죽겠다는 얼굴로 뇌까렸다.

“제발 너랑 나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말하지만 마….”

나니아야말로 부탁하는 마음으로 묻고 싶었다. 당신과 나 사이에 육체적 끌림을 제외하면 대체 무엇이 남느냐고.

“몸 말고 없잖아요, 어차피.”

그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오로지 그것뿐이지 않은가.

소녀는 놀란 마음에 치민 울음을 가라앉히는 한편, 냉소적으로 웃었다.

비꼬듯 던진 말이 무엇을 함의하고 있는지 라히무스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무언가 기대하는 눈으로 나니아의 손을 자기 가슴 위로 가져와 더듬게 했다.

“…내 몸에 끌려?”

남자는 머릿속 한구석으로 조금 전 리슬링이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의 눈빛을 떠올렸다. 그녀는 커다란 옷 아래 감춰진 육신의 실루엣만 보고도 페로몬을 흘렸다.

발칙하게도, 그는 자신의 어떤 부분이 암컷들에게 어필되는지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에게 호감을 표현하는 암컷 리자드들에게나 통할 방법이었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악효과만 가져올 뿐이었다.

“끝까지 헛소리!”

나니아는 외려 더 화를 내며 손에 닿은 그의 가슴을 밀쳤다.

“이제 다 고치겠다고, 폭력적으로 굴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도, 항상, 항상 이런 식이야.”

여자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자신을 가로막은 자물쇠를 부술 듯이 흔들었다.

“싫어하는 짓 하지 않겠다고 말했었잖아. 그럼 이것부터 열어 줘, 당장!”

* * *

열린 방문 틈으로 도망치듯 뛰쳐나온 하녀를 맞이한 것은 벨로즈였다. 그는 맞은편 방문 문틀에 비스듬히 기대어 라히무스가 그녀를 끌고 들어간 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옆방에 짐 가져다 뒀어요.”

벨이 엄지손가락으로 본인의 옆방을 가리키며 가볍게 안내했다. 나니아는 축축한 얼굴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으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벨은 여자의 얼굴이 눈물로 젖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혀를 찼다.

말없이 나니아의 뒤를 쫓아온 그가 아직 닫히지 않은 문틈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 방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자물쇠 사용 방법 배웠는데. 알려 줄까요?”

건네는 목소리가 어딘지 기대고 싶게 친절했다.

“네에….”

나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벨도 그 순종적인 대답이 좋았다.

그가 짐작했던 바대로였다. 사용법을 알려 주겠다며 끌고 갔지만, 정말 그런 목적이었을 리 만무했다.

벨은 지친 얼굴로 앉아 있는 나니아 곁에 나란히 착석했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그녀 몫의 돌덩어리를 손에 들었다.

“이걸 여기에 꽂아요. 정해진 방향대로 비튼 다음, 움직이면 돼요. 이렇게.”

여자는 아직 채 눈물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벨이 알려 주는 내용에 집중하며 귀를 기울였다.

자신의 손끝을 주시하는 눈동자와 몰두한 얼굴이 귀여웠다. 골몰히 관찰당하는 손가락 끝이 찌릿찌릿해져 왔다.

나니아는 벨을 따라 잠금장치를 몇 번 만져 보더니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벨은 자물쇠를 건네주고 빈손을 갸름한 얼굴에 괴었다. 그리고 촉촉해져 있는 나니아의 눈시울을 빤히 쳐다보다 물었다.

“라히무스가 괴롭혔나요?”

공주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나니아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저을 뻔했다. 그녀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치맛자락을 쓸데없이 만지작거렸다.

“…그냥, 조금 버겁게 굴어요.”

“어떤 점이?”

“그냥….”

심경을 복잡하게 만드는 일들이 너무도 다양했기에 짓눌린 마음 아래 미세한 구멍으로 그냥이라는 엉성한 대답부터 삐져나왔다.

“서로 책임질 수 없는 관계를… 자꾸… 원해요.”

나니아 뷔셀은 부모도 형제도 없었다. 불과 며칠 전 여태껏 살아온 터전도 잃었다. 뿌리 없는 그녀의 다리를 묶어 줄 지지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제 몸만 바라요.”

곁에 머물 남자가 생긴다면, 그 사람은 나니아에게 가장 가족에 가까운 존재가 될 터였다. 가벼운 연애 감정만 품어 보려고 해도 그게 잘 안 됐다. 아무것도 가져 보지 못한 그녀는, 그래서 더 신중해야 했다.

벨은 시무룩한 소녀의 표정과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서 머릿속으로 주판을 움직였다.

“나니아는 어떤데요? 당신은 그를 좋아해요?”

공주가 묻자, 하녀는 화들짝 놀라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앞머리가 세차게 찰랑거릴 정도로 부정이 거셌다.

“아니요! 저는, 아, 아시잖아요… 제가 좋아하는 분은….”

나니아는 부끄러운 듯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 보면 공주님과 지금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도 너무 이상한 일이었다.

자꾸만 시선을 회피하는 여자와 다르게, 벨은 단 한 순간도 그녀에게서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차분한 목소리가 나긋나긋이 소녀의 마음을 들추고 헤집었다.

“나니아도 알죠? 저는 이제 완전히 그의 관심 밖이에요.”

“그런… 그런가요….”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던 부분을 당사자가 확언해 주었다. 속 시원하기보단 심란했다.

“어제 둘이 잤어요?”

“네?! 아, 아니에요. 대체….”

왜 다들 그것을 궁금해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니아가 볼을 붉혔다.

“그냥 대화만 했어요.”

“대화.”

무슨 대화? 물어보듯 눈썹을 들어 올리자 나니아가 말을 받았다.

“같이… 폴핀에 정착할 방도를 알아보자고….”

가주님과는 긴긴밤 다양한 고민을 나누다 잠이 들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였다.

때때로 리자드와 공주의 앞에서는 꺼낼 수 없는 말들도 나왔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위험천만하며 의심스러운 여정에 함께할 수는 없다는 의견이었다.

그러니까 라히무스나 벨이 밖에서 그런 오해를 하고 있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가주님께서는 장제사를 찾으러 가셨어요. 벨 님도 기억하실 거예요. 파비올라에서 공주님을 알아 았던 그 사람이요.”

“그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생기나요?”

“무작정 신세를 지시려는 건 아니고… 일자리라도 좀 알아봐 달라 부탁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셨어요.”

아무렴 도시에는 밥벌이 수단이 어떻게든 있을 터였다. 사지 멀쩡한 사람 둘이니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싶었다.

“얘기가 그렇게 됐군요.”

벨은 자기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혼잣말하듯 대꾸했다.

“나는 그와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무슨 말씀 나누었는데요?”

그걸 내가 감히 물어봐도 되냐는 듯, 하녀가 눈치를 보았다.

“라히무스가 집도 지위도 없고, 그의 기준에서는 직업도 변변찮은 떠돌이 신세에, 가진 건 반반한 얼굴과 몸뚱이뿐이니 나니아와 만나게 하기 걱정된다고 하더군요.”

여자는 그 비슷한 말을 여러 차례 들었던 터라 알고 있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벨이 능청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냐고 했지요.”

“…예?”

“집도, 지위도, 변변찮은 직업도 없고, 가진 건 반반한 얼굴과 몸뚱이뿐이라니. 너무나 자기 얘기잖아요?”

아버지 역할을 자처한 것치고 그의 눈동자는 뒤늦게 절절한 연정에 빠져 있었다. 아주 중요한 걸 빼앗긴 사람처럼 발을 동동거리는 모습이 우스웠다.

욕망은 언제나 빈 술잔과도 같은 것이라, 흘렸든 마셨든 비어 있으면 다시 채우고 싶어지기 마련이었다. 값비싼 술에 정신 팔려 테이블 위에서 언제고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물 주전자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갈증을 느꼈을 때쯤, 주전자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겠지.

그자의 일렁이는 눈빛만 봐서는 당장 프러포즈라도 할 줄 알았는데.

“자극이 부족했나?”

전부터 생각했지만, 공주님은 성격이 좀 못된 것 같았다. 그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유를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나니아를 보고 공주가 말했다.

“영주가 섹스하자고 하면 할 건가요? 사랑하니까?”

“…그, 그런.”

왜 공주가 그런 부분까지 관여하려 하는지 알지 못해 황당했다. 벨은 나니아가 무어라 대답할지 고민할 틈도 주지 않았다.

“라히무스는 당신이랑 한번 자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던데.”

“그….”

소녀는 말문이 막혀서 얼굴에 피가 몰렸다.

대체 나 모르게 무슨 말을 하고 다니기에 다른 사람 입에서까지 이런 말이 나오는 걸까.

창피하고 열이 나서 황급히 대답할 말을 찾는데 다시 또 질문이 들어왔다.

“나니아는 좋아하지 않는 남자와는 할 수 없나요?”

벨이 순진한 척 고개를 갸웃거렸다. 턱 끝을 받친 하얀 손가락이 자기 얼굴을 톡톡 두들겼다.

나니아는 벨의 마지막 질문을 한 번 더 되새김질하여 이해한 다음에야 눈살을 약간 찡그리고 되물었다.

“그 말은… 제가 듣기로는… 그러니까, 공주님께서는….”

당신은 가능하다는 말로 들렸다.

벨은 희미한 정조 관념을 가진 아가씨처럼 백치같이 눈을 깜빡였다. 그 천진한 얼굴을 보고 나니아는 질겁했다.

“마음에도 없는 상대랑 덜컥 잠자리를 가졌다가, 애, 애라도 생기면 어떡하시려고 그래요?! 그러면 고생하는 건 여자뿐인데요. 공주님, 절대 그러시면 안 돼요. 남자가 어떤 사람인줄 알고요….”

자기도 남자 경험이 희박하면서 어린아이 가르치듯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귀여웠다. 그녀는 큰일 날 사람을 보았다는 듯 벨의 팔을 붙잡고 흔들기까지 했다.

벨은 아아, 하고 알았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 그렇지. 그런 점에서 불편하겠구나.”

벨은 나니아에게 붙들린 팔을 보았다. 걱정해 주는 건가? 자식 걱정하듯 바라봐 주는 그 시선이 달짝지근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벨은 그녀가 희한했다. 구중궁궐에서 한껏 치장한 미인들만 보고 자라서 그런가, 잡초같이 수수한 나니아의 모습은 벨로 하여금 기이하고 신선한 매력을 느끼게 했다. 꾸밀 줄도 모르고 꾸미려는 노력도 딱히 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감도 없었다.

남의 밑에서 일만 열심히 하다가 적당한 남자를 만나서 적당히 결혼하고 적당히 아이를 낳고 살아갈 것 같은 느낌.

똑같은 하녀라지만 자기 수발을 들던 여자애들과는 또 달랐다. 그것들은 무표정한 얼굴 아래로 의뭉스러운 속내를 감추고 묵묵히 간자 노릇을 하는 것들뿐이었으니까.

가시 돋친 장미들 사이에서 지내다 보니 들꽃이 예뻐 보이는가 보다.

“나니아는 아이 생각이 있어요?”

아까부터 계속 뜬금없는 질문만 해대는 공주를 보고 나니아는 혼란스러워했다. 남자도 없는데 애 생각이 있냐니.

“좋은 엄마가 될 것 같아.”

벨이 배시시 웃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어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런 황당무계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벨은 자기가 아는 상식까지 꺼내와 천연덕스럽게 간섭했다.

“하지만 리자드랑 인간 사이에선 피임이 필요 없다는데요.”

그 말에 나니아의 얼굴이 다시 또 식을 틈 없이 불타올랐다.

매일 밤 같은 잠자리에 눕는 친구와도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하물며 상대가 누군지도 아는 사람과 이렇게 피임이니 섹스니 하면서 노골적으로 성생활에 대해 떠들어 대다니. 나니아는 도무지 적응할 수 없었다.

“단지 그런 이유 때문인가요? 혼전 임신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두려워서?”

여자는 부정하고 싶은 얼굴로 벨을 쳐다보았지만, 마땅히 반박할 거리를 찾을 수 없어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편으로는 가치관에 혼란이 오기 시작했다.

여성의 자유연애가 권장되지 않는 분위기는 모두 그런 사유에서 기인했다. 하지만 임신 걱정이 없는 상대라면 괜찮은 것인가?

벨은 고개 숙인 나니아의 시야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올려다보는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깜빡거렸다.

“육체 접촉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밀착하는 허벅지 밑으로 이불에 구김이 갔다. 한 뼘 더 가까이 다가온 벨이 나니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누구와도 할 수 있죠.”

그녀는 남자 경험이 아주 많은 것처럼 여유롭게 웃었다. 나니아는 고개를 들어 벨의 오뚝한 콧대를 바라보았다. 갸름한 턱선이 오늘따라 높은 곳에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림같이 붉은 입술이 투명한 피부 위에서 유독 선명하게 도드라진다는 생각이 든 순간, 벨의 입술이 다가왔다.

아름답고 부드러운 입술이 아주 잠시간 소녀의 입술을 훔쳤다.

뿌리칠 틈도 없이 재빠르게 떨어져 나간 그것은, 슬쩍 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중요한 건 마음이죠.”

소녀는 화들짝 놀라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뒤로 물렀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석상처럼 몸이 굳었다.

반면 공주의 반응은 태평스럽기만 했다. 그녀는 여느 때처럼 구김 없이 미소 지어 보였다.

“어때요. 끔찍하게 싫었나요?”

한 가지, 경황이 없던 나니아는 그의 입꼬리가 살짝 떨리는 것까지는 보지 못했다.

“그, 그건 아닌데요….”

벨의 돌발 행동은 경악스럽긴 했지만 끔찍할 것까진 아니었다. 라히무스가 억지로 입을 맞출 때면 본능적으로 손바닥이 날아갔던 때와 다르게 수치심이 들지도 않았다. 감히 공주님의 따귀를 때린다는 건 말이 되지 않거니와, 같은 여자이기 때문인지 그리 역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여자의 얼굴은 너무나도 그린 듯이 아름다워, 마치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각상에 입술이 닿은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 이상하게 심장이 뛰는 것은 오늘따라 낮고 그윽한 그녀의 목소리 때문인 듯했다. 그녀는 예쁘장한 외모와 다르게 목소리가 중성적이었다. 거기다 머리카락까지 짧게 잘라 놓아서 그런지 묘하게 소년 같아 보이기도 했다.

감히 공주님 보고 남자 같다니!

나니아는 불경스러운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그녀를 훑던 시선을 바닥으로 내리눌렀다.

불편해하는 낌새를 눈치 챈 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신 걱정 없는 상대와 잠자리 할 수 없는 이유, 생각나면 언제든지 알려 줘요.”

공주는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방문을 향해 걸어 나가는 뒷모습이 요요하고 아름다웠다. 언뜻언뜻 보이는 다리는 길쭉하니 매끈했다. 부럽다고만 생각했던 그녀의 각선미가 오늘따라 관능적으로 느껴졌다.

방문을 닫기 직전, 그녀가 다시 뒤를 돌아 고개를 들이미는 바람에 나니아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허공으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변태 도마뱀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방문 꼭 잠그고요.”

벨이 웃으며 당부했다.

“네에….”

그 강단 없는 대꾸를 뒤로하고 남자는 자기 방으로 돌아왔다.

들어오자마자 방문을 닫고 자기 머리카락을 뽑을 듯이 들어 올린 남자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미쳤지.”

‘거기서 키스를 왜 해?’

본인이 직접 세 치 혀로 지껄였던 말과 완전히 반대였다.

‘뭐? 육체 접촉은 아무것도 아니야?’

별것 아니라고 했던 행위에 지금 누구보다 크게 연연하고 있지 않은가.

벨은 짧아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꼬았다. 머리가 길 적부터 가지고 있던 습관이었다. 짧은 머리털은 두 바퀴를 채 꼬기도 전에 스르륵 손 사이로 흩어졌다.

사실은 어젯밤 라히무스가 영주에게 얻어맞았다는 이유로 나니아에게 반쯤 안겨 아양을 부릴 때부터, 눈꼴 시려하면서도 내심 부러웠었다.

사실 그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키스보다는 포옹이었다. 자신도 그녀에게 아이처럼 안겨 보고 싶었다.

한 명의 인간, 한 명의 님프, 그리고 한 명의 리자드가 자신들의 방에서 각자의 세상에 빠져 있는 사이.

그들을 찾아 헤매던 챠링고가 땅굴 밖에서 파키케팔로를 만나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그녀는 의뢰인의 안전을 확인하고 상태가 좋지 않은 라히무스의 눈치를 살폈다.

“쟨 또 왜 저래?”

챠링고가 묻자, 파키케팔로는 이를 꽉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궁금해하지도 건드리지도 말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곤 아직 닫혀 있는 나니아의 방문을 두드렸다.

“점심이나 먹죠. 돈 없어서 고생했겠네.”

복도 전체에 그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샤르도네, 여기 식사 부탁해요.”

다섯 명의 일행은 커다랗고 길쭉한 오리나무 식탁 앞에 둘러앉았다. 모처럼 가벼운 차림새의 리자드들이 의자 밑으로 꼬리를 휘저으며 앉아 있었다. 나니아의 눈이 잠시간 그 움직임을 좇았다. 만져 보게 해 달라고 하면 역시 실례일까.

나니아는 일부러 가장 늦게 자리를 골라 라히무스와 멀리 떨어진 위치에 앉았다. 혹시라도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그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으려 했는데, 당겨 앉으려던 의자가 삐끗하는 바람에 자기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마주친 눈빛이 서늘했다.

여자는 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회피했다.

화를 낼 사람이 누군데 자기가 저런 얼굴을 해? 문득 심통이 나서 다시 그를 노려보았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포타주 그릇을 뒤적이고 있었다.

한편 맞은편 벨은 나니아의 얼굴을 보고 막힘없이 싱긋 웃었다. 하녀는 어색하게 눈인사하며 식기를 만지작거렸다. 감히 공주님과 마주 보고 밥을 먹다니.

식사는 여태껏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적당히 섭취해 왔던 음식들과 다르게 다채롭고 풍성했다. 코리앤더와 타임을 찢어 올린 토끼 고기, 육두구 껍질과 소금으로 양념한 소고기, 꿀에 절인 호두와 석류 씨앗을 묻힌 배. 구운 사과. 내용물이 걸쭉하게 흘러내리는 구스베리파이 등이 식탁을 가득 메웠다.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고기 요리들을 눈앞에 펼쳐 놓고도 공주님께서는 감자스프나 깨작거리고 계셨다.

나니아는 건포도 소스가 묻은 포크를 입에 넣고 멍하니 벨의 눈치를 살폈다.

아무리 사심 없는 입맞춤이었다지만 자신은 이렇게나 신경이 쓰이는데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자약한 그녀를 보며 일정 정도 감탄했다. 과연 공주님은 그런 사사로운 스킨십 하나하나에 촌스럽게 의미 부여를 하지는 않으시는구나.

예사로운 벨의 반응은 나니아의 뛰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개의치 않는 그녀 덕분에 하녀도 편한 마음으로 식사할 수 있었다.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포타주를 우물거리는 그녀와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살짝 맹해 보이는 얼굴이 참 예뻤다.

가주님은 이제 더는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 얌체 같지만, 그것만으로도 공주에 대한 그동안의 반감이 완전히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에게 썩 다정다감하지 않은가. 이따금 이상한 소리를 할 때도 있었지만 천사같이 웃는 얼굴을 보면 그마저도 괜찮아졌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제 더는 그녀를 꺼려할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는 나니아가 먼저 생긋 웃어 보였다. 동그란 눈이 초승달처럼 접혔다. 적대시하던 선을 지우고 간격을 좁히는 신호였다.

“아무리 먹기 싫어도 스푼을 던지시면 어떡해요.”

파키케팔로가 장난스럽게 농담을 건네며 벨이 무심코 떨어뜨린 스푼을 주워 주었다.

“…어, 고마워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번에는 따라 웃어 주지 않아서, 나니아는 다시 포크만 빨았다.

벨과 나니아가 마주 앉은 방향 반대편, 즉 라히무스가 앉은 자리 옆 테이블의 짧은 쪽 변에 새롭게 의자가 놓였다.

“저도 같이 먹어도 되죠?”

발랄하게 물으며 자기 몫의 식기와 접시를 챙겨서 내려놓는 그녀는, 붙임성 좋은 이 집 손녀 리슬링이었다.

음식값을 별도로 받지 않는 만큼 종종 이렇게 손님들과 식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동대륙에 사는 리자드는 소수 집단이었기 때문에 만나면 무조건 반가울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땅굴에서는 처음 보는 리자드끼리도 긴밀히 담소를 나누며 정을 쌓았다.

게다가 오늘은 정분을 쌓고 싶은 멋진 수컷 리자드도 있었다. 결코 마다할 수 없는 자리였다.

리슬링이 헤헤 웃었다. 라히무스는 그녀를 흘긋 쳐다보곤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토끼 고기 위의 코리앤더를 옆으로 치워 놓고 자기 접시 위로 한 덩이를 더 가져왔다.

나니아는 자신이 선택해서 라히무스와 떨어진 곳에 앉았으면서, 정작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앉은 리슬링을 보니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쟤는 원래 내 옆에 앉는 걸 좋아했는데.

“엄마 나무숲으로 간다고 했죠? 폴핀은 언제쯤 떠날 거예요?”

“내일모레쯤.”

“너무 이르다! 바쁘지 않으면 좀 더 놀고 가요. 곧 인간들이 수확제를 하니까 볼거리도 먹을거리도 많을 텐데.”

“하루라도 빨리 끝내서 잔금 받고 헤어지고 싶거든.”

그건 안 된다며 챠링고가 고개를 젓자, 벨이 능청스럽게 끼어들었다.

“너무하네요, 챠링고. 나는 당신에게 정들어서 헤어지기 싫을 정도인데.”

그 말에 챠링고가 코웃음을 쳤다.

나니아는 조용히 생각했다. 벨 님은 원래 여자한테는 다 저렇게 편하게 대하시나?

아까부터 대답은 파키케팔로와 챠링고가 하고 있는데, 리슬링의 시선은 꾸준히 라히무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애당초 식사 생각도 없어 보였다.

“라히무스라고 했죠. 원소는 다룰 줄 알아요? 전쟁은 나가 봤어요? 역시 몸으로 싸우는 편인가? 얼굴에 상처 난 것도 너무 멋지다. 난 자기처럼 살짝 야만적인 리자드가 좋더라.”

홀딱 빠진 것처럼 재잘재잘 질문을 퍼부어 대는 리슬링을 보며, 나니아는 호두를 아그작 씹었다. 그녀는 상상도 할 수 없으리만치 적극적인 태도였다. 여러모로 나니아와는 많이 달랐다.

관심의 대상인 사내는 저어하지도 않고 귀찮아하는 기색도 없이 묵묵히 토끼고기만 입에 쑤셔 넣고 있었다. 그런 그를 나니아는 짤막하게 흘금흘금 훔쳐보았다.

저거 즐기고 있는 거지? 그런 거지?

사실 리슬링은 지금 나니아의 생각보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는 중이었다. 턱을 괴고 하염없이 라히무스만을 응망하는 이 암컷 리자드에게서는 지금 수컷을 유혹할 때 사용하는 페로몬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사내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말없이 무시하고만 있었다. 그녀의 페로몬이 파키케팔로는 무안했고, 챠링고는 거북했다.

제대로 된 리자드 사회에서 자라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히 어리기 때문인지, 하여튼 간에 예의범절이 좀 부족했다.

챠링고가 맞은편 파키케팔로의 접시를 포크 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야, 저거 뭔데.”

“몰라. 지 스타일이래.”

리슬링은 목석같은 라히무스의 귓구녕에다 대고 자기 얘기를 떠들어대느라 여념이 없었다. 구시렁대는 두 리자드의 목소리가 나니아의 귀에는 쏙쏙 박혔다.

“페로몬 좀 집어치우라 해.”

“니가 해.”

“내가 어떻게 말해.”

테이블 밑으로 서로의 종아리를 걷어차며 티격태격하던 그들은 끝내 라히무스의 정강이를 차는 것으로 다툼을 끝냈다.

챠링고가 그를 향해 말했다.

“야, 여기서 살 거 많다. 밥 먹고 바로 나갈 거야.”

라히무스는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곧 긍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지금의 그는 마치 처음 보았을 때처럼 과묵하고 차가웠다. 그게 새로운 암컷 리자드의 욕망을 더 미치게 돋우는 줄은 몰랐을 것이다.

“아가씨도 같이 나가야 해. 언제 어디서든 우리랑 있는 편이 좋을 거야.”

쭉 챠링고와 파키케팔로에는 반응이 없던 리자드가 그 말만은 귀신같이 알아듣고 참견했다.

“외출하실 건가요? 제가 길 안내할까요?”

리슬링이 해맑게 웃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손목에서 짤랑거리던 보석 팔찌가 팔꿈치 바로 위쪽까지 내려왔다.

“그, 엄….”

살다 살다 인간의 눈치를 보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던 챠링고가 슬쩍 나니아의 표정을 살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그녀의 얼굴을 챠링고도 보았고, 파키케팔로도 보았는데, 라히무스만은 보지 못했는지 덤덤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헤맬 필요 없이 목적지만 빠르게 훑고 돌아오지.”

그 말은 즉 길 안내를 받자는 뜻이었다.

리슬링이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꼬리를 방방 흔들었다.

“어디 어디 가실 거예요? 제가 잘 알아요! 여행자 안내는 완전 전문이에요.”

투명한 연둣빛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흥겹게 찰랑거렸다. 그녀는 싱싱한 외모만큼이나 명랑하고 밝은 소녀였다. 상대적으로 옆에 있던 나니아의 얼굴은 한층 더 칙칙해졌다.

샤르도네가 다가와 꺼림칙한 표정을 짓고 있던 다른 리자드들을 향해 말했다.

“아저씨 아줌마들만 보다가 오랜만에 자기 또래 리자드들을 만나니 들뜬 모양이야. 폐가 되지 않는다면 부디 데려가 주게나.”

부탁은 정중했다. 챠링고는 나니아 눈치 보기를 그만두고 파키케팔로는 어색하게 귀 뒤를 긁었다.

리슬링은 샤르도네가 자식 내외를 잃고 혼자 기르는 소중한 손녀딸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라 조금 버르장머리 없게 기르고 말았다며 소탈하게 웃는 낯을 보고,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일행은 새로운 리자드 한 마리를 더 끼워서 땅굴 쇼핑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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