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과시연
폴핀
질투
청혼
과시연
남자는 기어코 나니아의 손에 자수정 목걸이까지 들려 보냈다. 그것은 다음날 꽃단장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예요.”
나니아가 중얼거렸다.
하녀는 아침 일찍 벨의 방에서 그녀가 고른 드레스를 차려입고 머리 손질까지 받았다. 하녀가 같은 하녀에게 시중을 받다니 당사자는 몰라도 죄지은 기분이 들었다.
잠시 후 벨과 챠링고와 나니아만이 방에 남아 연회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전에 말했던 대로 공주는 여전히 잠옷 차림이었고, 챠링고는 기사복을 입고 있었다. 공작새처럼 꾸며 입은 것은 나니아 뿐이었다.
“무슨 색이 어울릴까 많이 고민했어요. 그런데 그건… 내가 라히무스와 같은 수준의 생각을 했다는 것 같아서 조금 자존심이 상하네요.”
벨도 나니아에게 어울리는 연보라색 드레스를 골라 둔 상태였다. 덕분에 라히무스가 준 자수정 목걸이와도 잘 어울렸지만, 벨은 썩 유쾌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원래 내 안목대로라면, 검은색 레이스로 꾸며진 와인색 드레스를 골랐을 거예요.”
“그건 너무 중년 여자 색이라니까요.”
“그게 좋은 거라니까?”
또다시 티격태격하는 챠링고와 벨을 두고 나니아는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한껏 차려입은 자신이 이제껏 본 적 없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스스로를 낯설어하고 있었다.
머리를 올리고 목선을 드러내니 괜스레 자세도 꼿꼿해졌다. 곱게 틀어 올린 머리에는 몇 시간이나 갈까 싶은 꽃장식과 머리핀이 잔뜩 꽂혀 있었다. 어젯밤 급하게 구멍을 뚫어 끼워 넣은 귀걸이도 얼굴 옆에서 반짝거렸다.
긴 머리카락으로 감춰 두었던 동그란 볼이 활짝 드러나면서 괜스레 얼굴 면적이 더 넓어진 것 같아 신경 쓰였다. 붉은 분으로 만들어 낸 가짜 홍조는 가식적이기 그지없었다. 굽 높은 신발도 어색하기만 했다.
주제에 맞지 않게 귀족 흉내를 내는 것 같아서 불편했다.
챠링고가 다가와 나이아의 가슴 위에서 반짝거리는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맨살에 닿아 흠칫 놀랐다.
“라히무스가 줬다고?”
그녀는 감정하는 눈빛으로 목걸이를 관찰했다. 매우 미심쩍다는 듯 의혹을 덧붙였다.
“빌려준 거 아니고?”
나니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내가 보석상도 아니고 장물아비도 아닌데 나니아가 뭘 어떻게 물어보고 빌려 왔겠는가. 애당초 그가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다.
하지만 그만큼 챠링고는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 새끼는 누구보다 지독하게 장물을 모으는 까마귀도마뱀인데….”
목걸이를 바라보던 시선이 천천히 나니아의 얼굴 위로 올라와 무례할 정도로 꼼꼼히 훑어보았다.
한편 벨은 나니아가 착용한 다른 장신구를 발견하고 기함을 했다.
“세상에, 지금 손에 뭘 낀 거죠?”
나니아의 왼손을 잡아 자신의 눈앞으로 가져왔다. 그녀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라히무스가 끼워준 반지가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이것도 라히무스가….”
“이렇게 못생긴 반지를, 그것도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 주다뇨. 기분 나빠.”
벨은 속이 탔다. 이 여자는 대체 어느 정도로 미련한 거지? 사내가 네 번째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는데 ‘네, 좋아요.’ 하고 가만히 있었단 말인가?
그녀는 자신의 심미안에 맞지 않는 검은 가락지를 노려보며 말했다.
“당장 빼요. 지금 입은 옷하고 정말 정말 안 어울려요.”
그러고는 단호하게 나니아의 손가락에서 직접 가락지를 빼내어 챠링고에게 넘겼다.
“이것 좀 보관해 줘요. 오늘 파티가 끝나면 다시 돌려주세요.”
“엑.”
챠링고는 공주가 넘겨준 것을 받아들고 인상을 구겼다. 집게손가락과 엄지로 반지를 꺼림칙하게 집어 들더니 눈살을 찌푸려 가며 살펴보았다.
“이건 또 뭐야….”
익숙한 도식의 반지였다. 손에 쥔 그것은 뜨겁고, 딱딱했다.
* * *
과시연은 그 목적과 의도에 걸맞게 성대하고 거창한 규모로 열렸다. 건물 안은 영주에게 초대받은 손님들로, 저택 안뜰은 초대받지 않은 영지민들로 가득 찼다. 오늘 같은 날에는 평범한 농민들에게도 저택이 개방되었다. 그들은 영주가 베푸는 술과 음식을 즐기기 위해 찾아왔다. 이 많은 인파를 감당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주최자의 자랑이며 긍지였다.
혼자가 된 나니아는 무수한 사람들 사이에서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 있었다. 하루아침에 축제 장소로 변한 저택 안에서 파비푸스의 하인들은 쉼 없이 뛰어다녔다. 왠지 금방이라도 저들 사이에 섞여 그릇을 날라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그림처럼 예쁘게 서 있는 것은 무척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녀도 저택 바깥에서 간신히 고기파이나 얻어먹고 있을 주제였으나, 지체 높은 집 규수처럼 차려입은 지금 평민들 무리에 끼어드는 것이 훨씬 이상해 보일 터였다. 차라리 여기 이렇게 가만히 서 있는 것이, 그녀 스스로는 좀 어색할지언정 남들 보기에는 덜 우스꽝스러울 것이었다.
설계 당시부터 연회 장소를 고려한 듯 저택은 커다란 중앙 홀과 그곳을 난간 너머로 내려다볼 수 있는 복층의 공간이 존재했다.
나니아는 1층 구석진 자리에서 2층에 있는 파비올라와 그의 고모 부부를 올려다보았다.
영주가 앉아 있는 위치가 가장 상석이었으며, 그와 근접할수록 중요한 인물임을 시사했다. 주최자의 주변으로 가장 귀한 손님들을 모셔 놓고, 산해진미와 값비싼 술을 대접하며 예우하였다.
2층에 있는 사람은 1층에 내려갈 수 있지만, 1층에 있는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암묵적 룰이 존재했다. 연회 개최자와 얼마나 가까운 자리에서 이 파티를 즐기고 있는가. 그것은 권력이라는 이름의 비가시적 위계질서를 물리적 위치 차이를 통해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이었다.
잘 차려입은 라키바하프는 그야말로 왕자님 같았다. 가볍게 머리를 넘긴 모습에 탄식이 흘렀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그 어떤 남자도 감히 그의 미모에 비견될 수 없었다. 분을 찍어 발라서 겨우 미천한 출신을 무마하고 있는 자신과 다르게, 그는 타고나길 귀족 자제다운 태가 났다.
그를 주시하고 있는 사람은 나니아뿐만이 아니었다. 신선하고 새로운 데다 보기 드문 미모의 청년이 등장하자 초청받은 내빈들도 술렁였다. 남자는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어떻게든 말 한 번 붙여 보고 싶어서 영주가 그를 소개해 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는 처녀들 역시 한둘이 아니었다.
물론 그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자도 있었으니, 신선한 미남자보다 신선한 요리가 더 좋은 리자드 두 마리였다.
파키케팔로는 무거운 철제 갑옷을 절그럭거리면서도 눈앞에 펼쳐진 성찬의 유혹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벌써 세 접시째 들이켜고 있었다.
“술은 먹지 마. 여기 어디에 벨로즈 님의 정체를 파악하고 위협해 오는 인간이 있을지 모르니까 긴장을 놓지 말라고.”
챠링고가 먹보 리자드에게 잔소리하자, 녀석은 신나게 갈빗대를 뜯으며 대꾸했다.
“알았어. 그래서 어차피 방에만 계신다고 했잖아. 이렇게 맛있는 걸 못 먹다니, 안타깝게 됐네.”
그러고는 전혀 안타깝지 않은 얼굴로 허겁지겁 네 번째 접시를 비웠다.
챠링고는 치즈가 녹아 흐른 다진 고기 덩어리들을 몇 알씩 입에 쑤셔 넣으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말소리에 기민하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쓸 만한 정보가 있는지 귀족들의 대화 내용을 모두 귀담아듣는 중이었다.
도성이 워낙… 했으니까요. …에 다녀오셨어요? 어수선해져서… 아니요. 결국 … 됐군요. 훌레랑은 앞으로 …해지겠네요. 네, 맞아요. 누가 그렇게 생각하죠? …를 만나 보셨나요? 오, 두렵게도. 아마 친왕파 인사들은 …이니까요. …라니. 끔찍해요. 저희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죠. 천박하긴. …가 정말 그랬나요? 편들어 줄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가 없어졌잖아요? 아마 …하겠죠. 여기 파비푸스 영주는요? 글쎄요 …라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지금 …에 호의적이겠네요. 반왕파 기질이 있었군요.
벨로즈 본인이었더라면 바로바로 알아들었을 이름들이 챠링고의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섞갈렸다.
역시나 기대했던 대로 귀족들 최고의 관심사는 훌레랑에서 벌어지는 일들이었다. 결국 반왕파가 궁을 장악했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렸다. 실종된 왕녀의 자리를 찬탈한 남자의 이름은 벨텍잉. 또는 발테그위. 또는 그와 비슷한 무언가.
낯선 동대륙식 이름은 리자드가 단박에 알아듣기에 무리가 있었다.
몇몇 귀족들은 그 이름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득세에는 성공했으나 친왕파 귀족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반대 세력을 숙청할 능력이 없다면 그들의 충성심을 돌려세우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할 것이다.
그는 공주에게 우호적인 사람일까 아닐까. 챠링고는 단지 그것만이 궁금했다. 왕위를 쟁취한 자가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에 따라 이번 임무의 난이도가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모쪼록 평탄하게 가는 길 막지 않는 인간이라면 좋겠는데.
안 그래도 불분명하게 알아들은 이름, 더 까먹기 전에 다녀와야겠다.
“야, 파키케팔로.”
“응?”
챠링고는 자신을 돌아보는 파키케팔로에게 가지고 있던 반지를 튕겨 보냈다. 녀석이 민첩하게 손바닥을 벌려 캐치했다.
“그거 아가씨 만나면 돌려줘.”
“이게 뭔데?”
일단 받고 나서 확인해보니 요르문간드 반지였다.
“라히무스한테 받았대.”
“뭐어? 둘이 반지 주고받는 사이야?”
파키케팔로는 놀라워하며 반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거… 그거 아니야?”
파키케팔로도 챠링고가 처음 반지를 봤을 때처럼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보기에도 그거지?”
“웩! 싫어, 다시 가져가!”
그는 마치 더러운 것을 만지듯, 닿는 면적을 최소화하여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팔을 앞으로 쭉 뻗어 몸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인간 여자는 그게 뭔지도 몰랐을 텐데.”
속 편하게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챠링고의 옆에서, 파키케팔로는 펄쩍 뛰었다.
“아 됐고, 다시 가져가라고! 이거 기분 나쁘다고오.”
챠링고는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딴생각을 했더니 아까 그 이름이 벌써 잊히려고 했다.
“아무튼 네가 걔 찾아서 좀 돌려줘.”
“어딨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니가 직접 주라고!”
길길이 날뛰는 리자드를 내버려 두고 챠링고는 다시 아멧을 뒤집어썼다. 지체하지 않고 벨의 방으로 향했다.
* * *
어느 정도 중요한 손님들이 자리를 채우자, 연회의 중심에 있던 파비푸스 영주가 대회사를 준비했다. 그가 눈짓하자, 나팔수가 취구에 입을 가져다 댔다. 현란한 나팔 소리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모두 영주를 주목하게 만들었다.
한순간에 고요해진 연회장 안에서, 영주는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이 환연하고 명예로운 자리에 함께해 주신 귀빈 여러분들께 먼저 감사드리오. 우리 부부가 오늘 이렇게 손님들을 한데 모신 까닭은, 모두 아시다시피 두 가지 경사스러운 이유가 있소이다. 첫째로, 우리의 처조카 라키바하프 파비올라의 파비푸스 방문과 사교 데뷔를 축하하기 위해서요. 청컨대 이 고귀한 청년을 위하여 커다란 박수와 환영을!”
술잔 안의 포도주가 찰랑거렸다. 영주의 부인이 먼저 손뼉을 치기 시작하자 연회장 안의 관중들도 그녀를 따라 커다란 갈채를 만들어 보냈다.
라키바하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정면, 우측, 좌측으로 허리 숙여 인사했다.
박수 소리는 더욱 커졌다. 일부는 휘파람을 불기도 했다.
그를 향한 사람들의 구가는 진심이었다. 모두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했으며, 사람들은 번듯하고 훤칠하며 젊은 귀족 남자를 좋아했다.
끝없이 이어지던 커다란 박수갈채가 회랑 밖으로 흩어질 때쯤, 영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둘째로, 우리가 줄곧 바라 오고 염원했던 꿈이 끝내 이루어지고야 말았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오.”
그는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지만 그게 사람들이 그의 처조카를 환영해 주어서는 아닌 듯했다.
“라키바하프 파비올라 공이 파비올라의 영주로서 길고 긴 숙고 끝에 지혜롭고 현명한 결단을 내린바, 오늘부로 파비올라가 우리 파비푸스의 일부가 되었음을 천명하는 바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통합을 이루었으니, 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흔쾌한 일인가! 모두 함께 경축해 주길 바라겠소. 파비푸스에 영광을.”
다시 나팔이 울려 퍼졌다. 오케스트라는 멈추었던 연주를 가장 거침없이 힘찬 곡조로 시작했다.
영주가 활짝 웃었다.
나니아는 깜짝 놀라 파비올라를 쳐다보았다. 그는 느릿하게 손뼉을 치고 있었다. 쓰게 미소 지은 얼굴은 혼란해 보였다.
명실상부 과시연의 하이라이트였다. 영주는 다른 귀족들을 불러 모아 공개적으로 선언함으로써 파비푸스에 대한 파비올라의 내속을 확실시하였다.
나니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드레스 자락을 세게 쥐어뜯었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정작 파비올라에 사는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한낱 농민들이야 고매하신 윗분들이 결정하신 바대로 따를 뿐이었지만, 영주가 바뀐다는 것은 그들의 삶도 송두리째 바뀌게 될 것을 의미했다. 영주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농민들의 삶이 좌우되는 세상이었다. 법도 제도도 모두 영주에게 달려 있었다. 이를테면 쌍둥이를 낳은 여자를 무시할 것인지, 차별할 것인지, 불에 태워 죽일 것인지를 정하는 일도 그들의 몫이었다.
그렇게나 힘들었을까. 그렇게나 도망치고 싶었을까. 나니아는 감히 라키바하프의 마음을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귀족에게 지배할 수 있는 영유지를 제하면 대체 무엇이 남는단 말인가.
뜻밖의 소식은 배신감마저 느끼게 했다. 비겁하고 무책임하다 감히 따지고 싶었으나 나니아는 지금 그의 가까이로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공표를 마친 파비푸스 영주는 라키바하프와 함께 회례하며 그를 귀족들에게 소개했다.
싱글벙글한 영주와 다르게 라키바하프의 억지웃음은 어딘지 떫은 구석이 있었다. 그러자 영주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가볍게 조언하듯 속삭였다.
“파비올라 공… 아니 이제 그 이름은 쓸 수 없겠군. 그러니 새로운 이름을 찾아봐야 하지 않겠소?”
이 땅에서 귀족이 봉토를 잃는다는 것은 이름까지 함께 잃는 것을 의미했다. 귀족들은 거느린 소령의 이름을 가족 이름으로 따르고, 영지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군림하였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성을 버리고 새로운 가족 이름을 얻는 방법은 오로지 결혼을 수단 삼아 새로운 가족 관계에 편입되는 것뿐이었다.
“행여나 상심하지 마시게. 어디 나처럼 좋은 초서 자리를 찾아 공자왕손의 사위가 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러니 부디 오늘 이 자리를 허투루 지내지 마시고 뜻깊게 보내시오.”
“이리 오시게, 우리 조카님.”
남자의 고모가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귀부인들 앞으로 라키바하프를 데려가 선보였다.
“보세요, 말했다시피 우리 처조카가 이 얼굴에 아직 배우자가 없습니다. 좋은 자리가 있다면 어디 소개 좀 해 주시지요.”
그들은 아마 딸을 가진 어머니거나 그게 아니어도 미혼의 조카 하나쯤은 알고 있을 마님들이었다.
귀부인들은 즐거운 듯 부채나 손으로 입을 가리고 호호호 웃었다.
“용모가 너어무 훌륭하셔서 우리 딸이 초름해 보이겠는데요.”
“어쩜, 최근에 이렇게 잘생긴 미남자를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요?”
“저는 없습니다.”
“어쩜, 저희 애가 예술 수업을 받을 때 사용하던 석고상보다도 더 코가 오똑하셔요.”
“참으로 탐나는 사윗감이 아닐 수가 없어요.”
“과연 그렇습니다.”
젊고 잘생긴 청년은 배불뚝이 남편을 데리고 사는 여자들에게 좋은 오락거리가 되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키도 훤칠하신 것이….”
한 여성이 표독스럽고 음흉하게 웃으며 라키바하프의 흉부를 접힌 부채 끝으로 꾹꾹 눌렀다.
“이 안은 어떤지 궁금하여 한번 벗겨 보고 싶소이다.”
여자는 심지어 옆에 있던 다른 부인의 귓가에 손을 붙이고 속삭였다. 젖이 좀 작지 않아요?
라키바하프는 깜짝 놀라 주춤 발을 물렀다. 가슴 아래 도톰한 부분을 꾹꾹 눌러 오는 감각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소름 끼쳤다.
어떻게 이런 불경한 짓을.
청년은 태어나 처음 겪어 보는 성적 수치심과 모멸감으로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싫은 소리를 잘하지 못하는 편이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뻥긋거리기만 하였으나, 그는 당연히 누군가 자신을 대신하여 저 음특한 여인의 만행을 크게 꾸짖어 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착각이었다. 아무도 그녀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농을 쳤다.
“부인. 지금 이분께서 찾으시는 것은 부인의 기둥서방 자리가 아니어요.”
“왜요. 아랫도리 사정까지 궁금하다 해 보시지요?”
그 말에 여자들이 까르륵 웃음을 쏟아 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도와줄 만한 사람은 하나 없고, 모두 이 젊고 잘생긴 남자를 품평하는 즐거움으로 흔연하기만 했다.
심지어는 그의 고모조차 아무 말 없이 가볍게 웃고만 있었다.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남자 나이 서른에 아직도 장가를 가지 못했다면, 아무리 포장지가 훌륭해도 의심이 가기 마련 아닙니까?”
“아무래도 사내구실을 못 하면 곤란하죠.”
부인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대관절 이게 무슨 수모란 말인가.
언제까지 이런 모욕을 듣고만 있어야 하는지 견딜 수 없었다. 라키바하프는 결국 그의 고모에게로 한 걸음 다가가 그녀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깃덩이가 된 것 같습니다. 이것이 귀부인들의 교양입니까?”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심정을 참은 것은 고모님에게 망신을 주지 않기 위한 조카의 마지막 배려였다.
그의 고모는 쯧, 하고 혀를 차며 부채로 입을 가렸다.
“참아라. 네가 이 나이 되도록 혼자인 것이 자랑은 아니지 않니? 원래 때가 지난 물건은 사람들이 더 깐깐하게 보기 마련인 것을.”
모처럼의 하대에서 그녀의 진심이 느껴졌다. 라키바하프는 다시 입을 다물고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이것이 귀족들의 결혼 시장이라면, 라키바하프는 당장에 매대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나니아. 그녀에게 결혼에 대해서 잘 안다는 듯이 떠들어 댄 것이 후회스러웠다.
“보잘것없는 제게 이토록 하해와 같은 관심을 가져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라키바하프는 무례하지 않게, 그러나 단호하게 이 지저분한 욕망들을 차단했다.
“허나 고모님. 저는 이미 마음에 둔 여인이 있습니다.”
이런 대답과 반응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 부인들이 재잘거리는 것을 멈추었다.
“누군가의 데릴사위가 되어 새로운 성을 갖고자 하는 마음도 일절 없습니다. 정치에 욕심이 있었더라면 제가 왜 그런 결단을 내렸겠습니까.”
영주 부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부채를 신경질적으로 펄럭였다. 라키바하프의 행동이 그녀의 처지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귀부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영주 부인의 눈치를 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파비올라를 고모님께 부탁드린 이유와 같은 맥락이지요. 저는 고모부님과 같은 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땅을 가진 여자도, 집안도, 그 무엇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청년은 그럴 것 같지 않게 맑고 고운 표정으로 자신의 고모부를 깎아내렸다.
물려받을 땅이 없었던 약소 귀족의 셋째 아들. 다른 가문 여식에게 빌붙어서라도 영주 노릇을 하고 싶었던 자다.
라키바하프 자신은 지금 그렇게 살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는 가지지 못한 것이 아니라 가진 것도 내려놓는 입장이었으니까.
영주 부인은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말을 받았다.
“괜한 자존심 세우실 필요 없네. 조카님께서 지금 이 상황이 불편하여서 면피하고자 하시는 말씀이라면….”
“아니요. 둘러대는 말이 아닙니다.”
그는 큰 키를 굽혀 고모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저와 함께 온 여성을 보셨잖습니까. 저에게 그러하셨듯 그녀에게도 괜한 해코지를 하실까 저어하여 밝히지 못했습니다만, 그분이 저의 피앙세입니다.”
빙긋 웃는 라키바하프의 얼굴을 올려다보는 영주 부인의 눈 밑 살이 떨렸다.
“그렇게 안달하시잖아도 곧 이 땅을 아예 떠나드릴 것이니, 괜히 고모님 입맛에 맞는 집안과 결혼시키려 애쓰지 마십시오.”
남자의 말은 마치 그가 영지를 버리고 떠나는 까닭이 사랑의 도피를 위해서이기라도 한 것처럼 들렸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시기를.”
남자는 거북한 마음을 참고 숙녀들에게 갖춰야 할 예를 다했다.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는 자리를 벗어났다.
남자의 고모는 그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불편한 심기를 감출 길 없는 그녀의 등 뒤에서 누군가 속닥거렸다.
“잘 구워삶아서 데려온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봐요.”
“그러게요. 합병 얘기도 영주의 수완이 아니었는가 보죠?”
영주 부인은 콧김을 크게 내쉬었다. 그리고 씩씩거리며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분에 겨운 움직임이 얼마나 거칠었는지 그녀와 어깨를 부딪친 하녀가 쟁반 위에 있던 접시를 떨어뜨리기도 하였다. 부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걸었다. 사람을 찾는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알랭!”
* * *
귀족들은 아름다운 선율과 함께 춤을 추거나 술을 음미하고 있었다. 나니아는 어떤 남자든 간에 눈이 마주치면 피하기 바빴다. 댄스 신청이라도 받게 된다면 곤혹스러운 일이 벌어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처음부터 참석하고 싶지 않던 자리였다. 시간이 갈수록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차라리 방으로 돌아가자. 홀을 지나 복도로 나가면 곧장 이 연회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몸을 틀어 방으로 향하려던 하녀는 그 길에서 마침 눈에 익은 모양의 투구를 뒤집어쓴 기사를 만났다.
“나니아.”
파키케팔로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갑옷을 갖춰 입은 모습이 적잖이 답답해 보였다. 깡통 안에서 투정하는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한참 찾았다고.”
그는 왜 자신을 찾았다는 건지 알 수 없어 의아해하는 나니아에게 주먹 쥔 손을 내밀었다.
“받아.”
“네?”
뜬금없는 지시에 반문하면서도 나니아는 의심 없이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로 떨어진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반지였다.
“이걸 왜 파키케팔로가…?”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그걸 왜 챠링고가 가지고 있었어? 라히무스가 줬다며?”
나니아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벨 님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잠깐 빼 뒀던 거예요.”
리자드는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있지….”
그가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그 반지, 알고 받은 거야?”
“…네?”
무엇을 알고 받았냐는 말인가. 질문은 포괄적이었고, 그래서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짐작 가는 바가 있어 손에 든 반지를 골몰히 들여다보며 대답하였다.
“혹시… 엄청 귀한 물건인가요? 라히무스는 아니라고 했는데, 역시 받지 말았어야 했나 봐요. 파키케팔로가 봤을 때 돌려주는 게 맞는 거죠?”
다시 반납해야겠다는 나니아의 말에 파키케팔로가 당황하며 쇠장갑을 휘둘렀다.
“아니, 아무것도 들은 게 없어? 네가 훔친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그냥 가져도 된다고 하면서 줬는데요….”
“그, 그으래?”
여자는 말을 하다 마는 리자드의 머리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라히무스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도 체고가 꽤 높은 청년이었다.
평소대로라면 시시각각 바뀌는 표정에 생각과 감정이 다 드러나는 편이었지만, 지금 그는 바이저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도통 의중을 읽을 수가 없었다. 마치 무생물과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면 다시 돌려주는 건 좀 그런데…. 행여나 돌려주더라도 내 얘기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 그럼 반지에 대한 얘기를 해 줄게.”
신신당부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불안감과 두려움이 느껴졌다. 라히무스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게 분명했다. 덕분에 나니아도 찜찜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혹시 저주에 걸린 반지라거나 그런 거면 어떡하지.
파키케팔로는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그 반지는 말야… 요르문간드 반지라고 하는 거야. 자기 꼬리를 문 용의 모습을 하고 있지.”
나니아는 반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의 설명을 들었다.
“꼬리를 문 용은 시작과 끝이 맞물려 있음을 의미해. 그러니까 내 말은… 반지가 원래 다 그렇지만 말이지, 그건, 어… 영원! 영원을 의미하는 거라고.”
파키케팔로는 아멧의 바이저를 들어 올리고 드러낸 눈 앞머리를 긁적였다. 벅벅 긁어 보아도 전혀 시원하지가 않았다.
그는 띄엄띄엄 말을 이었지만, 상대방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여자가 반지를 껴 줬다는 것은 그 빈 곳을 채워서 완성해 주겠다는 거거든.”
남자가 오른손으로 구멍을 만들고, 왼손 검지를 구멍 사이에 쑤셔 넣는 시늉을 하려 했다. 하지만 건틀릿을 낀 손가락이 두꺼워서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내 말 알아들어?”
아니, 전혀.
나니아는 입에서 생선 가시를 발라내지 못해 우물거리는 사람처럼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설명을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아무튼 제가 가질 물건이 아니라는 거죠?”
무언가 각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 정도만 이해할 수 있었다.
자세한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그녀를 앞에 두고 리자드는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하지만 이곳도 저곳도 인간으로 가득했다.
나약하고 미천한 인간들.
파키케팔로는 자신보다 강하고 늠름한 리자드가 이상형이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인간을 연애 대상으로 본 적 없었고, 때문에 라히무스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역시 좋아하는 거지? 이 여자를.’
토끼는 풀잎을 뜯어 먹고 살아야 하는 법이다. 문제는 안중에도 없던 집토끼 따위와 말을 섞다 보니 조금 정이 들어 버렸다는 것일까.
“너는 라히무스를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네?”
아까부터 그는 바보같이 되묻게 만드는 질문만 했다. 어떻게 생각하냐니? 대답할 거리를 찾지 못해 우물쭈물하자, 리자드가 질문을 바꾸었다.
“둘은 무슨 사이야?”
누군가와 이런 얘기를 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기 때문에, 나니아는 닭살이 돋았다. 무슨 사이냐니.
“친구…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괜스레 낯이 뜨거워졌다. 목에 닿는 목걸이는 새삼스레 간지러웠다.
나니아의 대답을 듣고 파키케팔로는 머리통을 긁는 대신 깡통을 흔들었다. 덕분에 위로 올라갔던 바이저가 다시 툭 떨어졌다. 그는 다시 장식용 갑옷 그 자체 같은 모습이 되었다.
“친구?”
‘친구? 나는 너랑 그런 관계 맺을 생각 없어.’
‘너는 친구랑 섹스하고 싶어?’
‘나는 너랑 섹스하고 싶어. 난 너를 그렇게 봐.’
얼토당토않다는 듯 반문하는 그의 목소리는 며칠 전 라히무스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했다.
“그 반지는 친구한테 주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적어도 라히무스는… 라히무스는 너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야.”
남자가 핵심을 꼬집었다. 나니아는 반지를 손에 움켜쥐었다. 그건 그녀도 알고 있었다. 다만 그와 자신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 내리면 좋을지 몰라 외면하고 있었을 뿐.
“라히무스는 우리에게도 자기 얘기를 잘 하지 않아서 나도 잘 안다고 할 순 없지만… 괜한 참견일 수도 있는데 말야, 그는 생각보다 그렇게 좋은 남자가 아닐 수도 있어.”
“네…? 둘은 사이가 좋은 줄 알았는데요….”
“아니, 그런 오해는 하지 마! 물론 나는 그를 강하고 듬직하다고 생각해. 실질적으로 우리 대장이나 다름없거든. 내 말은, 그러니까, 수컷으로서 말이야. 여자한테는 그리 좋은 상대가 아닐 수도 있다고.”
이어지는 파키케팔로의 말은 진심으로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 반지… 주인이 따로 있을지도 몰라.”
물론 아닐 수도 있고.
남자가 중얼거렸다.
파키케팔로의 말은 들을수록 아리송하기만 했다. 무언가 속 시원히 이야기해 준다면 좋을 텐데, 제일 중요한 설명은 자꾸 비껴 나가는 느낌이었다. 라히무스와의 의리와 나니아에 대한 걱정을 저울질하며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 망설이고 있었다. 녀석은 나니아가 그에게 무언가 속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쯤 되니 그가 동조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주인이 따로 있는 반지라고? 나니아는 중고품으로 의심되는 반지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고 많은 패물 중에 이런 걸 골라 버리다니. 그렇다면 라히무스는 왜 그녀가 이 반지를 골랐을 때 말리지 않았을까.
나니아는 오목한 반지 구멍을 문지르며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굉장히 뜻깊은 물건인가 봐요. 돌려줘야겠어요. 그리고 파키케팔로가 뭘 걱정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랑 라히무스는 짐작하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이들은 무엇을 자기들끼리만 알고 있으려는 걸까. 감추고자 하는 게 뭘까.
“맞아요, 사실 친구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어요.”
어쩌면 파키케팔로는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돌려 말해 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너처럼 귀여운 여자는 처음 본다느니 뭐니 하면서 뒤로는 그런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는 생각에 머리가 차가워졌다.
“불편할까 봐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현지처 취급은 사양하고 싶어서 괜한 오기가 생겼다. 나니아 자신도 그 남자를 아주 가볍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내색하고 싶었다.
“우린 그냥… 서로 즐기는 중이에요.”
누군가에게 입 밖으로 꺼내 말하고 나니, 정말 그것이 맞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숙해 보이던 소녀가 뜻밖에 경망스러운 소릴 하자 파키케팔로는 심히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어, 어우, 그래? 어, 그래. 리자드와 인간 사이에서는 애, 애도 안 생기니까. 서로 즐기는 상대로는 뭐, 좋다… 그렇다기도… 한다더라고….”
이런 화제가 익숙하지 않은 듯 리자드는 멋쩍어했다.
“아무튼 내가 이런 말 했다고 하면 안 돼. 나 진짜 라히무스한테 죽어.”
그가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죽는다는 말은 비유적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나니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볼일이 끝난 청년 리자드는 다시 식사를 하러 돌아갔다. 어찌 보면 일행 중에서 유일하게 파키케팔로만이 오늘 이 연회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나니아는 반지를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넣어 둘 장소가 마뜩잖아서 결국 다시 손가락에 끼울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없는 회랑으로 나와 복도를 걸었다. 여기부터는 손님의 영역이 아니라 저택에 사는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군중들이 떠드는 소리가 멀어져 갈 때쯤, 나니아의 앞으로 한 남자가 끼어들어 그녀의 길을 막았다.
“안녕, 아가씨.”
정장을 완벽하게 차려입은 그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음에도 어딘지 낯이 익었다.
“파티는 아직 한창인데 어딜 가시나.”
나니아는 이 남자가 누군지, 왜 자신에게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지 알지 못했다.
“누구세요…?”
어딘지 자신감이 넘쳐 보이는 낯짝의 그는 기름을 발라 바짝 머리를 넘기고 외양에 걸맞게 느글느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하, 그대는 나를 본 적이 없었군. 나는 영애의 이름은 몰라도, 얼굴은 알고 있었지.”
남자가 윙크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내 이름은 알랭 파비푸스. 으흠, 이제 알겠다는 얼굴이로군. 그래, 맞소. 내가 이 자랑스러운 파비푸스가의 장남이라오.”
이 얼굴을 어디서 봤다 했더니, 자기 아버지를 미묘하게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누군지 알고 나서도 여전히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왜 나니아를 알은체하는 것일까. 가던 길도 막으면서 말이다.
“이제 그대가 자신을 소개할 차례로군.”
그가 자신을 가리키던 손바닥의 방향을 비틀어 나니아를 지목했다.
“저는 나, 나니아 뷔셀…이라고 하는데요.”
얼결에 이름을 말했다. 나니아의 이름을 듣더니 남자가 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뷔셀… 뷔셀… 발 넓기로 정평 난 내가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로군. 어디에 있는 지역이지? 아버지 성함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대뜸 인적 사항을 물어보는 것이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나니아는 께름칙한 얼굴로, 그러나 자칫 잘못하여 불똥이 튀는 일 없도록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게… 왜 궁금하신 거죠?”
“오, 레이디. 그렇게 경계할 것 없어. 나의 사랑하는 이종사촌 라키바하프 군이 백년가약을 맺기로 한 여자가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었을 뿐.”
“백년가약이요? 제가요?”
“음음, 이제 감출 필요 없어. 라키가 다 밝혔으니까. 사랑 때문에 자기 영지도 버리고 떠나다니. 참으로 로맨틱한 일이 아닌가.”
한없이 가벼운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가던 남자가 기분 나쁘게 히죽 웃었다.
“믿는 구석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하지만 나니아가 꽂힌 부분은 그게 아니었다.
그녀는 주먹을 꾹 말아 쥐며 그에게 들은 말을 따라 읊조렸다.
“라키바하프 님이 그러셨어요? 여자 때문에 영지를 버리고 떠나는 거라고…?”
충격에 빠진 나니아의 얼굴이 얼어붙은 빙상처럼 굳어져 갔다.
* * *
챠링고는 귀동냥으로 주워 온 말들을 모아다 그녀의 의뢰인에게 보고했다. 두서없는 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며 벨은 이마를 짚었다.
“벨테그위? 하! 그 살모사 같은 인간이 잘도….”
왕궁에서 승기를 거머쥔 자가 누구인지 알게 된 벨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신경질적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 힘에 탁자가 흔들리고 찻잔 받침이 파르르 떨렸다.
“최악이야.”
“나쁜 소식입니까?”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해서 우릴 쫓아올 인간이죠.”
“바라는 대로 왕위를 차지했다면 이미 목표를 달성한 것 아닙니까?”
누군가 왕실의 혼란을 잠재웠다면 이제 공주는 무사히 퇴장할 차례다. 파벌 싸움이 끝난 이상 아무도 사라진 공주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뢰인의 반응을 보아하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어떤 인간이길래, 뭐가 걱정스러운 거죠?”
챠링고의 물음에 벨은 손에 든 포크를 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벨테그위의 집안은 수도 훌레랑과 멀리 떨어진 곳에 웅크리고 있던 왕가의 찌꺼기로,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왕의 자리는 넘볼 수도 없는 작자였다.
“모르는 사이 상당한 머릿수의 군사를 모았다더라 하는 말은 들었습니다. 사병은 돈 잡아먹는 귀신이라 그들을 감당하려면 상당히 힘에 부칠 텐데. 대체 어디서 어떻게 어떤 돈줄을 잡은 건지 의아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벨은 자리를 고쳐 앉으며 손에 든 포크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생각해서 가져다준 디저트는 고마웠지만, 그녀가 함께 가져온 소식 때문에 입맛이 떨어졌다. 지금은 한가롭게 크림이나 찍어 먹을 때가 아닌듯했다.
“쌓아 올린 밑천으로 지금 당장은 왕궁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겠지만, 반대 세력의 반발을 완벽히 잠재울 순 없을 거예요.”
정통하지 못한 자가 얻은 권력은 마찬가지로 쉽게 전복되기 마련이었다. 그를 대체할 수 있는 인간은 수도 없이 많았다. 이변이 없는 한 지금 이대로라면 그는 다른 왕족 찌꺼기들과 끊임없이 대립하고 충돌하며 불안에 떨어야 할 것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정당성. 그것을 왕녀와의 결혼으로 채우려 들 것입니다.”
그 음흉한 자식은 죽은 왕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똑같은 대가리를 달고 있는 한 아마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하겠지.
“어차피 친자식도 아니지 않습니까?”
“핏줄보다 중한 것이 양자제로 얻어진 왕위 계승권입니다.”
오로지 힘의 논리로 흘러가는 사회에서 자라 온 리자드는 인간들의 명분 싸움을 이해할 수 없었다.
벨은 고개를 돌려 벽에 걸려 있던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눈부시게 하얀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늘어뜨린 미인이 냉소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벨테그위 그 인간….”
새 권력자가 달갑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다.
“안 그래도 이 얼굴을 미치게 좋아했었어.”
“…예?”
챠링고가 턱을 벌리며 반문했다. 벨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응시한 채 머리카락을 어깨너머로 넘겨 보았다.
“또 한 가지. 우리가 향하려던 항구도 하필이면 그가 전부터 관할하던 지역이네요. 경로를 다시 바꾸는 것이 좋겠어요.”
그 말에 챠링고는 질린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남쪽으로 가는 편이 좋았을까요?”
“아니요. 북서쪽으로 계속 나아갈 거예요. 항구만 다른 곳으로 찾아보죠. 배를 타기 전까지 긴장을 풀 수 없겠어요.”
벨은 거추장스러운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며 목덜미에 숨통을 터 주었다. 나니아가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주던 생각이 나서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좀처럼 되지 않았다.
“마차에 짐을 실어 주세요. 오늘 밤에 당장 출발하죠.”
“분부대로.”
허리 숙여 따르는 챠링고의 등 뒤로, 멀리 떨어진 연회의 소란스러움과는 다른 선명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방문 너머에서 누군가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 * *
“영애의 소령은 굉장히 먼 곳에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지요?”
알랭이라는 남자는 나니아를 얕잡아 보는 듯,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모르는 유력 가문의 자식일까 경계하며 간을 보는 중이었다.
그는 능글맞은 미소가 매우 비호감으로, 딴에는 꾸미고 있어서 더 거북살스러운 인상이었다.
“…잘못 보셨습니다.”
라키바하프를 떠올리며 분별이 없어진 와중에도 나니아는 자신의 차림새가 남자의 오해를 불러일으켰음을 깨달았다.
“저는 가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분이 아니에요.”
하녀는 알랭을 무시하고 그의 옆을 지나쳐 갔다. 하지만 그는 방으로 걸어가는 상대를 쫓으며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가주님? 아가씨 파비올라 사람인가? 그의 밑에 있는 계집인 게로군.”
남자가 손바닥에 주먹을 탁 내리쳤다.
“아하, 이제 알겠어. 방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던 그 아가씨가 바로 내가 찾는 라키의 피앙세야. 맞지?”
알랭은 깨달았다는 듯 과장된 몸짓으로 손가락을 흔들었다. 안 그래도 심경이 복잡한데 웬 경박한 남자가 파리처럼 주변을 맴돌기까지 하니 번잡스럽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여자가 달리 대꾸하지 않자 알랭은 자신의 추측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렇게 얼굴 한 번 비치지 않고 감싸고도는 거였어. 이제야 말이 되는군.”
조금만 더 걸어가면 일행이 묵고 있는 침실, 저 문 너머에 그가 찾는 벨이 있었다.
그런데 남자는 다른 목적이 생긴 것처럼 잰걸음으로 밀착해 왔다. 모퉁이쯤에 다다라 한 발짝 크게 떼더니 코너 바깥쪽으로 치우쳐 지나가던 나니아를 다시 한번 막아섰다.
“가주님이라 부르는 것을 보면 너는 라키 밑에 딸린 식솔인 것 같은데. 그런데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누굴 꼬시려던 걸까, 응?”
마음을 바꾼 듯 알랭의 눈에 이전과 다른 기운이 어렸다. 나니아의 앞을 막아선 그는 그녀의 머리에 달린 꽃가지를 더듬으며 특유의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를 쫓아다니는 리자드가 비의도적으로 학습시킨 결과, 나니아는 이것이 남자가 보내는 추파임을 알아차렸다.
“아니에요. 생각하신 그런 의도 없습니다….”
나니아는 자신이 왜 불쾌한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고민의 결과는 간단했다. 그는 취향이 아닌 것을 떠나서 완전히 수비 범위 바깥이었다.
아무리 가주님이 돌아가신 마님 미모를 빼닮았다지만, 내외종간에 이다지도 닮지 않을 수 있다니 안타까웠다. 알랭은 심지어 자기 어머니의 털끝 하나도 닮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너 같은 애 한둘 보는 줄 알아? 어중간한 인맥 이용해서 상류층 사회에 발을 들여 보려는 거. 내가 재미 보게 해 준 계집들이 수도 없이 많아.”
알랭은 새로운 여자라면 일단 흥미를 느끼는 탕아였다. 심지어 자신이 시기해 마지않는 사촌이 데려온 여자애라니. 손을 뻗치고 싶은 게 당연했다.
“생긴 건 좀 촌년 티가 나지만… 너 같은 것도 나름 별미니까.”
남자가 우악스럽게 팔목을 붙잡았다. 깜짝 놀라 걸음을 뒤로 무르는데, 익숙지 않은 구두 굽이 삐끗해서 순간적으로 발을 절었다. 그 틈에 알랭이 다른 손으로 그녀의 허리까지 휘감았다.
“이거 이거, 계산된 행동인 거 모를 줄 알고? 너도 사실 이런 기회만을 기다려 왔지? 이 앙큼한 년. 너 같은 게 귀족 남자 맛을 본 적이 있는가 몰라.”
“하, 하지….”
나니아는 잘못 걸렸다 싶은 심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원치 않는 낯선 사내의 유혹은 그저 불쾌하고 끔찍하기만 했다. 그런데도 바보같이 저항 한 번 하지 못했다.
‘가주님. 당신이 바라시던 게 이런 거였나요.’
눈을 질끈 감고 라키바하프를 떠올렸다.
“어허, 그래. 파비올라같은 촌구석에 살다가 이런 데 와 보니 눈이 돌아가지? 어때. 내가 더 재미난 걸 알려 줄 수 있는데. 바로 옆에 방은 넘쳐나고 말이야.”
요즘 따라 이런 괴이한 일이 잦은 까닭은 뭘까. 안전하고 평화롭기만 했던 파비올라가 그리워지려는 순간이었다.
“알랭, 지금 뭐 하는 짓인가.”
나니아의 그이가 백마 탄 왕자처럼 등장하셨다.
“당장 그 손 떼.”
남자는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던가 싶을 정도로 무섭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노한 발걸음으로 다가온 그가 알랭의 팔을 뜯어냈다.
알랭은 과장되게 손을 들어 올리며 항복하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입으로는 빈정거렸다.
“뭐야, 그 표정. 누가 보면 내가 겁간이라도 시도한 줄 알겠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할 셈인가?”
라키바하프는 나니아를 숨기듯 자신의 등 뒤로 잡아끌었다. 그의 믿음직한 등 뒤에서 나니아는 입을 틀어막았다. 보호받는 느낌이 들어 주책없이 가슴이 뛰었다.
“걔도 혹하는 것 같으니까 붙잡고 있었던 거야. 내가 뭐가 아쉽다고 그런 촌년을….”
“내 사람한테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마.”
알랭의 말에 라키바하프는 자기 자신이 모욕을 당한 것처럼 화를 내며 그를 힐난했다.
“여전히 허랑방탕하고 변한 게 하나 없군.”
고상한 말투를 잃지 않는 그를 보고 알랭은 비웃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라키. 역겨운 이상주의자. 결국 네 꼴이 어떻게 됐는지 봐.”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얄밉게 손바닥을 펼쳤다. 벌어진 손바닥이 라키바하프를 가리켰다.
라키바하프는 뒤로 뻗은 팔을 나니아의 어깨 위에 올려놓고 토닥거렸다. 안심하라는 제스처였으나, 하녀의 마음 한편은 송구하고 불안해졌다. 그가 자기 때문에 하지 않아도 될 싸움을 벌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 가주님….”
이만 갈등을 끝내고 싶은 마음에 조심히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첨예하게 대립하는 두 남자 사이에서 나니아가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그때, 벨의 방에서 챠링고가 벌컥 문을 열고 나왔다. 벌어진 문틈 사이로 방의 주인인 공주도 보였다.
라키바하프를 발견한 챠링고는 뜻밖이라는 듯 말을 꺼냈다.
“오, 영주. 안 그래도 할 얘기가 있었는데.”
그리고 바짝 얼어 있는 나니아와 분노한 라키바하프, 두 사람과 대치 중인 남자의 존재까지 뒤늦게 확인하고는 어색하게 말을 높였다.
“…요.”
챠링고가 맞은편 남자를 의식하자, 라키바하프도 그녀를 향해 있던 시선을 돌려 알랭을 다시 쳐다보았다.
갑작스러운 타인의 등장에 그 역시 적잖이 놀란듯했다. 열린 방문을 바라보는 얼굴에 묻은 당혹감이 딱딱하게 말라 굳어 갔다.
알랭은 말을 섞을수록 득보다 실이 많은 인간이었다. 이쯤에서 물리치려 했는데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녀석이 먼저 자리를 피했다.
챠링고는 자기 얼굴을 보자마자 도망치듯 사라지는 그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뭐야 저 치즈가 녹아내린 미트볼처럼 생긴 녀석은.”
이내 가벼운 손짓과 함께 입실을 권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지?”
라키바하프는 나니아의 손을 붙잡은 채 뚜벅뚜벅 방으로 걸어 들어왔다. 남자가 손아귀 힘을 조절하지 않아 시큰거릴 정도였다.
그는 방문을 닫자마자 다른 두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도 잊고 나니아에게 호통을 쳤다.
“너는 왜 애가!”
드레스 때문에 맨 살갗을 드러낸 어깨에 두 손을 얹고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요즘 왜 그렇게 아무 데나 흘리고 다녀. 응?”
조금 전 그럴 애가 아니라고 말한 것치고 황당한 이야기였다. 터무니없는 힐난을 듣고서도 나니아는 혼란스러워했다. 그가 어려움으로부터 자신을 지켜 준 것이 기뻤다. 자신을 나무라는 눈빛과 탓하는 목소리가 짐짓 처절하기까지 했다.
보다 못한 챠링고가 참견을 했다.
“귀엽게 입혀 놨더니 누가 찝쩍거린 모양이지? 당신이 예쁘게 차려입으라고 해 놓고 뭔 소릴 하는 거야?”
그녀는 접시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청포도 한 알을 입에 넣었다. 할 얘기는 조금 미뤄두기로 했다.
챠링고의 말을 듣고 문득 그의 억지를 자각한 나니아가 소심하게 저항했다.
“가주님이… 가주님께서 새로운 인연 찾아보라고 하셨잖아요.”
그 말은 라키바하프에게 당신이 바랐던 게 이런 게 아니냐고 비난하는 것처럼 들렸다.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었어…. 알랭 같은 놈 노리개 따위로 만들려던 게 아니었다고.”
남자는 초조한 손짓으로 목을 감싼 크라바트를 풀어헤쳤다. 드레스 차림의 나니아를 보니 목이 탔다.
아마도 코르셋을 조여 만들었을 잘록한 허리. 그 위로 알랭의 손이 닿아 있는 것을 보고 순간 눈이 돌았다. 훤히 드러난 어깨에, 깡마른 두 팔에, 봉긋하게 솟은 윗가슴에, 눈이 팔려 그랬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노출의 정도에 충격을 받기도 하였다. 나니아가 그런 옷을 입어선 안 됐다.
라키바하프는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의 하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가 눈동자를 굴리는 방향을 가만히 지켜보던 벨이 피식 웃으며 끼어들었다.
“나니아는 오늘 여러 사람의 눈요기가 되었을 텐데요. 지금 당신이 그러는 것처럼.”
그 말에 남자가 퍼뜩 놀라 시선을 거두었다. 눈요기라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벨은 의뭉스럽게 빙긋 웃었다.
“물론 저를 포함해서요.”
아슬아슬한 그의 속내가 벨의 눈에는 보였다. 흐릿해지는 정신을 다잡듯 라키바하프가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는 나니아에게 사용인 이상의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까닭은 일종의 가족애 때문이라고 믿었다.
“저는 이 아이 보호자나 다름없습니다. 제겐 딸 같은 아이란 말입니다. 알랭이 얼마나 형편없는 남자인지 공주님께서는 모르시겠죠.”
이제껏 왕녀의 말이라면 벌벌 기기 바빴던 그가 어쩐 일로 감히 언성을 높였다.
그가 찔려 하는 부분을 잘 건드렸다고 벨 스스로는 자신했다. 어디 한번 떠들어 보라는 듯 팔짱을 끼고 조소했다.
“글쎄요. 나는 딸 가진 부모 심정이 어떤 건지 잘 몰라서요.”
언뜻 비아냥거리는 말을 흘려듣고 라키바하프는 다시 나니아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가 호소했다.
“맹세코, 나나. 나는 너에게 그런 마음 품은 적 없단다.”
남자는 결백을 주장하듯 이야기하였지만, 그가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나니아의 기분은 처참해져 갔다.
한순간 그의 야릇했던 눈빛과 태도에 작은 기대감이 싹텄으나, 결국 떡잎부터 자근자근 밟혀 사멸할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말했잖니, 너는 내게 딸 같고 동생 같은 아이라고. 가능한 좋은 남자를 찾아 주고 싶었어. 그게 뿔 달린 괴물이거나 주색잡기에 빠져 지내는 파락호여서는 안 돼.”
나니아는 어깨에 붙은 그의 손을 매몰차게 밀어 냈다. 남자는 순간 손이 따끔하여 부딪힌 부분을 살펴보았다. 불에 덴 듯 화끈거렸으나, 우울하고 처량한 목소리가 그의 신경을 다시 빼앗았다.
“가주님은 좋으시겠네요….”
그를 향한 비뚤어진 투기심이 가늘게나마 이어지고 있던 참을성의 줄을 끊었다.
“당신께선 당신의 백 년을 바쳐 사랑할 여자를 만나셨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이니, 나나.”
“공주님과 함께하고 싶으신 마음에 영지도 포기하셨다면서요. 이걸 어떻게… 이걸 어떻게 제가….”
어째서 이런 얘기를 고향 같은 파비올라 밖에서 들어야 하는 걸까.
남자는 나니아의 눈에서 원망의 기색을 읽었다. 그리고 당황해하며 공주의 눈치까지 함께 살폈다.
“함께, 아니… 그런 건, 아니라고 할 순 없지만, 단지 그런 이유 때문에 합병을… 아니야, 그건 아니야. 이건 전부터 고민하고 있던 계획이었어. 네가 뭘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나, 네가 들은 건 그냥 변명이었고….”
횡설수설하는 라키바하프의 시선이 벨과 나니아 사이를 오갔다. 변명이었다고 변명하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은 나의 영주도 무엇도 아니다.
나니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마지막 목소리를 짜냈다.
“…저는 더 할 말 없어요.”
그러고는 라키바하프와 끝까지 눈을 마주치지 않고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또각거리는 구두 굽 밑으로 비통한 마음이 뚝뚝 부러졌다.
“나나.”
라키바하프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쫓지는 못했다. 챠링고는 말이 없었고, 벨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 말했다.
“당신의 아빠 흉내가 그녀는 싫은가 보네요.”
벨이 비웃자 남자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자라다 보면, 언젠가 내 마음을 알아 줄 겁니다.”
남자의 억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부성애라든가, 모성애라든가, 수긍할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벨은 내려놓았던 뾰족한 포크 끝으로 케이크 시트를 뭉개며 대수롭잖게 중얼거렸다.
“뭐, 딸과 섹스하고 싶은 아버지가 될 수도 있겠지.”
* * *
방으로 돌아온 나니아는 눈물을 흘리며 쓰러졌다. 기대는 실망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뼈저리게 느꼈음에도 이 짝사랑을 좀처럼 그만 둘 수 없었다.
공주가 말한 눈요기라는 것조차 그녀는 나쁘지 않았다. 그의 눈에 들 수 있다면 무엇이든 좋았다. 무엇이든 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여자로 바라봐 주기를 원했다. 자신을 보고 성적으로 동요해 주기를 바랐다.
소녀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엉엉 울었다. 고백하고, 거절당하고,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이런 기분을 느낄 필요가 없을 줄 알았다. 후련해질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게 다 착각이었다. 실연의 아픔은 쌓아 온 인연만큼이나 켜켜이 나니아를 괴롭혔다.
‘이런 옷을 입어서 정말 내가 뭐라도 된 줄 알았던 거야.’
그녀는 자신을 감싼 껍질에 화풀이를 하기에 이르렀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벗기도 힘든 이 옷을 당장 찢어서라도 벗어 버리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였다.
누군가 창문을 두드렸다.
고개를 들어 창문 밖을 살폈다.
그리고 그를 발견했다.
“…라히무스?”
남자의 손가락 관절이 재차 창문을 두드렸다. 나니아는 화들짝 놀라 당장에 창문을 향하여 뛰어갔다. 그리고 그의 몸이 붙어 있는 방향 반대쪽, 오른편 창문을 열어 주었다.
남자가 큰 몸을 구겨 창문 안쪽으로 다리를 넘겼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이런 식으로 들어와요?”
빨리 들어오라며 재촉하면서도 동시에 남자를 나무랐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가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올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의 삼엄한 경비가 오늘은 연회 문제로 다르게 쓰이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너무 무모한 접근이었다.
심지어 그의 옷차림은 누가 보아도 나쁜 짓을 저지르러 온 침입자 같았다. 눈만 내놓은 복면 차림에 머리 위로는 후드까지 깊게 뒤집어써서는, 도저히 파티를 즐기러 온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 수상쩍은 행색 때문일까. 등 뒤로 숨긴 오른팔엔 칼이라도 들려 있을 것 같았다.
“울었어?”
남자는 왼손으로 이마를 쓸어 넘기며 모자를 벗고, 코와 입을 가린 복면은 손가락으로 끌어 내렸다. 그리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여자의 젖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니아는 콧물을 킁 삼키며 대꾸했다.
“…별거 아니에요.”
벌게진 눈이 태연한 척했다.
“그보다 당신… 누가 보면 자객인 줄 알겠어요.”
눈물 흘리지 않은체하는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남자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리자드는 그녀의 볼에 흘러내린 눈물 자국을 당장 혀로 핥아 주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등 뒤에 숨긴 건 뭐예요?”
여자가 물었다.
라히무스는 오른손에 들고 온 것을 내밀면서 반대쪽 손으로는 그녀의 머리 장식을 만졌다.
“네 생각나서 꺾어 왔는데… 이미 더 예쁜 걸 달고 있네.”
그가 자신 없이 내민 것은, 오늘 아침 소녀가 머리에 꽂아 넣은 장식용 생화에 비하면 훨씬 작고 소박한 들꽃이었다.
너무 생각지도 못한 것이 눈앞에 들이 밀어지자, 나니아는 잠시간 말을 잃었다. 대답 없는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리자드는 움켜쥔 손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수풀 속에 있을 땐 예뻐 보였는데.”
꺾어서 손에 든 그 순간부터였을까. 그녀의 머리에 훨씬 더 화려하고 커다란 꽃이 꽂혀 있는 것을 보고 난 후일까. 아니면 꽃보다 더 아름답게 꾸민 그녀의 앞이라서일까.
생각보다 볼품없어진 꽃송이에 리자드는 시무룩해졌다.
나니아는 풀 죽은 그의 볼에 급히 손등을 가져다 문지르며 말했다.
“예뻐요.”
그리고 금방이라도 바닥에 떨어질 것 같던 작은 꽃을 그의 거친 손으로부터 구해 냈다. 자신의 생각이 났다며 가져온 꽃 선물을 싫어할 소녀가 어디 있겠는가. 그것이 설령 아무렇게나 피어난 야생화일지라도. 들끓었던 마음이 그깟 들꽃 다발에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나니아는 붉은 입술을 앙다물고 조심히 꽃향기를 맡아 보았다. 꽃향기보다는 풀냄새와 흙냄새가 더 짙은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맘에 들어요. 고마워요.”
나니아는 남자에게서 등을 돌려 그에게 자신의 머리를 맡겼다. 어깨너머로 다시 그에게 꽃을 건네며 요청했다.
“다른 거 빼고, 당신이 가져온 꽃으로 꽂아 줄래요?”
남자는 주저하며 꽃을 받아들고 그녀의 머리에 가져다 대어 보았다.
“…안 어울리는데.”
“괜찮아요.”
“…네가 너무 예뻐.”
그래서 이까짓 꽃이 안 어울려.
라히무스는 꽂으라는 꽃은 안 꽂고 등 뒤에서 그녀의 옆얼굴을 살폈다.
“…예쁘다.”
남자는 다시 또 혼잣말에 가까운 감탄을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듣고 아주 미약하게나마 웃음이 났다.
사내는 여자의 옅은 웃음을 알아차렸다. 그의 두꺼운 팔이 그녀의 가슴 아래를 감싸 안으며 찰싹 엉겨 붙었다.
남자는 위에서 아래로, 여자를 등 뒤에서부터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절절매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내가 보고 싶었어?”
그 말에 나니아는 잠시 머뭇거렸다. 오늘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를 떠올릴 겨를이 없었다.
곧장 대답하지 못하는 나니아를 보고 남자는 심통이 났다. 그녀가 예쁘게 차려입은 모습도 사실은 못마땅했다.
“이렇게 입고 누구 만났어?”
목덜미가 후끈해졌다. 그럴 온도가 아닌데도 괜히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나니아는 왜 자신이 추궁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자신이야말로 그에게 반지에 대해서 따지고 들어야 했다.
“그 새끼도 봤어?”
그가 말하는 그 새끼가 누군지 파악하는데 잠시간 고민이 필요했다.
당연하게도, 애당초 이 옷을 사 준 사람이 그 남자였다.
나니아는 대답하는 대신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이거… 잘 어울리죠?”
말을 돌리는 것처럼 느껴졌을까 봐 긴장됐다.
고개를 들어 확인한 남자의 얼굴은, 복잡해 보였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어여쁜 그녀를 보고 느끼는 두근거림과 애달픈 질투심이 충돌하고 있었다.
그도 말없이 나니아의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딴짓을 하면서도 손과 입술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 눈 밑으로 펼쳐진 광경이 아찔했다.
남자는 결국 참지 못하고 지껄였다.
“가슴 말랑말랑해 보여….”
귓가에 들려오는 남자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나니아를 뒤돌아보게 한 것은 남자의 말뿐 아니라 그의 야만적인 호흡 때문이기도 하였다.
“약, 안 먹었어요?”
그제야 나니아는 남자의 얼굴을 좀 더 꼼꼼히 살펴보았다. 꼬리를 잘 숨기고 있어서 눈치채지 못했다. 평소보다 더 굵직해진 얼굴선과 이목구비, 매서운 눈매와 그 속에 담긴 흉포한 눈동자를 보았다.
“당신이 여기 있다는 걸 들키지 말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요….”
그녀는 자신의 가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라히무스를 내버려 두고 방을 오가며 커튼을 쳤다. 마지막 커튼을 내리고 방문까지 걸어 잠갔을 때,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와 다시 그녀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끙끙대다가 여자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다시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그가 만지고 싶은 것은 목걸이가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게 안달 난 손끝에서 느껴졌다.
“사람을 볼 땐 가슴이 아니라 눈을 봐야죠.”
건조한 질타가 남자의 눈동자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계속 그런 식이면 저도 당신 가슴만 쳐다보면서 대화하는 수가 있어요. 그래도 좋아요?”
나니아는 손가락 끝으로 남자의 가슴을 쿡 찔렀다. 깊숙하게 쑥 들어가는 손끝을 보고 입이 다물어졌다. 그러다 이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말랑말랑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이네요.”
그리고 그의 가슴을 밀쳐 내며 조롱하듯 말했다.
“가서 본인 촉감이나 즐겨요.”
나니아의 말에 리자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기 왼쪽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재미없어.”
맥 빠진 표정으로 팔을 늘어뜨리더니 다시 그녀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굶주린 아이가 갓 구운 빵을 탐하듯 오프 숄더 드레스 위로 드러난 맨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니아는 이제 저 갈증 난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다. 리자드의 눈빛은 자신을 향한 색욕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라히무스로 인하여 수컷이 암컷을 바라볼 때 어떤 얼굴을 하는지 알게 된 지금, 그녀는 맹세코 자신에게 욕정을 품은 적 없다며 믿어 달라던 라키바하프가 떠올랐다. 아마 그에게서도 이런 욕망을 느끼고 싶었던 것이리라.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구조 장치를 더듬어 목걸이를 풀어헤쳤다. 거추장스러운 장신구가 사라진 자리에 남자의 애끓는 음심이 와 닿았다.
그의 양손이 나니아의 갈비뼈 부근을 짚었다. 떨리는 두 손이 가슴 바로 밑까지 올라와 한껏 끌어 올린 그녀의 살덩이 아랫부분과 접촉했다. 그 아슬아슬한 접근에 나니아는 한숨을 푹 쉬며 물었다.
“꽃값이에요?”
“…응?”
멍청하게 되묻는 라히무스를 바라보는 나니아의 시선이 차가웠다.
“꽃값으로 가슴 한 번 만지게 해 달라 그거냐구요.”
“…….”
생각 밖의 매몰찬 말에 충격을 받은 듯, 라히무스의 손끝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니야.”
이내 강하게 부인하며 그녀의 가슴 밑에서 손을 떨어뜨렸다.
“그런 생각 안 했어.”
그리고 불안한 듯 여자의 눈치를 살폈다.
나니아는 남자의 불안감을 보살피는 대신 지친 얼굴로 손가락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잘생긴 남자한테 현혹당해서 온 마음 내어 주는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이 반지, 의미가 있는 물건인 거죠?”
나니아의 질문에 남자는 아무런 말도 답하지 못하고 그저 입술만 달싹였다. 여자는 그의 반응을 확인하고 이 반지가 그의 결혼반지, 또는 약혼반지, 못해도 그의 리자드 애인에게 주었던 무언가였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총각도 아니면서….”
여자가 원망스러운 말투로 중얼거리자, 남자는 흠칫 놀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무어라 입을 떼려던 그에게 나니아가 먼저 탁자에 올려 두었던 목걸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역시 안 되겠어요. 목걸이도, 반지도, 당신이 준 것들 다시 다 가져가요. 돌려드릴게요.”
어쩌면 가주님 말에도 일리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언제 어떻게 헤어질지 모르는 이방인. 좋아한다는 말 한 번 없이 그저 자신의 몸을 탐하기 바쁜 사내였다. 진심도 아닌 상대에게 몸을 주었다가 마음도 주게 될까 봐 덜컥 겁이 났다.
남자의 손에 들린 제비꽃을 보고 가슴이 철렁했을 때부터였다. 행여나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을 먹게 될까 두려움이 생긴 것은.
손가락에 끼워 넣은 반지를 비틀어 빼려던 그때, 옆방에서 방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의 고함이 들려왔다.
“반역자 라키바하프 파비올라와 그의 수호를 받고 있는 벨로스 카뮈안 공주를 잡아들여라!”
* * *
벨은 방으로 들이닥치는 군졸들을 아연실색하여 바라보았다. 병사를 끌고 온 것은 영주의 아들, 알랭 파비푸스였다.
“공주는 반드시 생포하여야 한다!”
벨은 그의 얼굴을 보고 중얼거렸다.
알랭… 알랭….
“…알랭 뮬라브.”
기억났다.
그 짧은 순간 눈을 마주친 것만으로 기시감이 느껴졌을 때부터 고민했어야 했다.
가진 것에 비해 지나치게 난 체하고 숙녀들에게 집적거리는 정도가 심하다는 이유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던 뮬라브가의 탕아.
“저 남자가 왜… 왜 여기 있죠?”
라키바하프는 황망히 주변을 살피면서도 입으로는 그녀의 물음에 대꾸했다.
“뮬라브? 고모님과 재혼하면서 그 이름은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남자는 라키바하프와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촌이었다.
벨은 아차 싶었다. 전적으로 자신이 부주의했던 결과다. 파비올라도 파비푸스도 익히 들어 본 바 없는 지방 영지라 방심하였던 것이 불찰이었다.
알랭이 칼집에서 칼을 빼어 들며 말했다.
“라키… 이 음흉한 쥐새끼 같으니라고. 너의 머리통을 잘라 공주님과 함께 벨테그위 님께 바칠 것이다. 이 일거양득을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반역자라니, 당치도 않다!”
남자가 성난 목소리로 소리치자, 알랭은 교만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며 이죽거렸다.
“설마 그녀가 누군지도 몰랐다고 할 생각은 아니겠지.”
라키바하프는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병사들은 그들을 결박하기 시작했다. 등 뒤로 돌아간 손목에 밧줄이 감겼다.
“공주님께서 뭐라고 유혹하시던가? 왕국을 탈환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면 네 그 반반한 낯짝을 높게 사서 나중에 곁자리 하나 내어 주겠다 하셨나? 설마 그 말을 믿은 건 아니지, 라키.”
알랭이 히죽 웃으며 허리를 굽혔다. 무릎을 꿇어앉힌 공주의 갸름한 얼굴을 한 손으로 덥석 쥐었다.
“애당초 그럴 능력도 배짱도 없는 여자야. 봐 봐, 이렇게 오만불손한 행동에도 찍소리 하나 못하는 것을.”
“당장 그 더러운 손 떼지 못해!”
라키바하프가 몸을 들썩이자 옆에 있던 군사들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알랭은 벨의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이기죽댔다.
“너 같은 촌놈은 몰랐겠지. 왕궁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 여자인지 네가 알았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감히 공주님 꽁무니에 붙어서 출세를 꾀할 생각 같은 건 꿈에도 못 했을 거야.”
벨 역시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여기서 어떤 말을 해도 도발이 될 뿐이라 당장은 입을 다물었다.
알랭은 다시 사촌의 목에 칼끝을 겨누었다.
“친왕파 인사들은 이제 끈 떨어진 연이나 다름없게 되었다. 너는 줄을 잘못 선 거야, 라키.”
칼날이 라키바하프의 목덜미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무방비한 목에 생채기를 내고 멀어져 갔다.
“끌고 나와!”
알랭이 칼집에 칼을 집어넣고 기세등등하게 복도로 나섰다. 저 멀리서 몇몇 기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그의 아버지가 보였다. 알랭은 모처럼 장자 노릇을 했다는 기쁨에 취해 웃음 지었다.
붙잡힌 라키바하프가 그 뒤를 따르고, 벨 또한 포박된 몸을 일으켜 죄인처럼 걸어 나갔다.
하필이면 호위가 한 명도 없을 때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챠링고나 파키케팔로 둘 중 하나는 남겨 두었어야 했다. 그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애당초 영주의 성에서 지내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 바보 같게만 느껴졌다.
“끅….”
후회막심하던 벨의 뒤에서 병사 하나가 갑자기 풀썩 쓰러졌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고꾸라진 그는 벨의 발치에서 홉뜬 눈을 부라렸다.
숨이 턱 막혀 왔다.
몸을 돌려 확인한 등 뒤에, 그를 구원할 리자드 한 마리가 서 있었다.
“…라히무스.”
이 남자가 이토록 반가웠던 적이 있던가. 벨은 참았던 숨을 뱉으며 안도했다.
그는 라키바하프 뒤에 있던 병사의 모가지까지 비틀어 끊어 버린 다음, 그들의 손목을 묶은 끈을 막무가내로 잡아당겼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영주 부자와 그의 군사들도 등 뒤에서 나타난 괴한의 정체를 확인했다.
“수, 숨어 있던 반역자다! 잡아라!”
억센 장력에 의해 밧줄은 후드득 끊어져 흘러내렸다. 리자드는 긴 부언 없이 물었다.
“몇 명.”
벨은 복도를 가득 메운 파비푸스의 사병들을 바라보며 가늠하듯 말했다.
“한… 열 명 정도?”
남자는 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불만스러운 투로 대꾸했다.
“이미 두 자리 썼는데, 그럼.”
기사들을 사이에 두고 알랭이 흥분하여 칼을 흔들었다.
“공주를 제외한 나머지는 죽여도 좋다!”
의뢰인을 지키는 데엔 까다로운 조건이 따랐다. 그것은 전투에서 도망치는 것보다 싸워서 이기는 것이 전문인 라히무스에게 성가신 제약이었다.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면 군력이 과대평가되어 따라붙는 압박도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게 벨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인간을 죽지 않을 만큼만 팬다는 것은 너무 어려웠다.
리자드는 달려드는 인간들의 가슴과 복부에 차례로 주먹을 꽂거나 무릎을 꽂거나 하여 대치 상황을 끌었다.
그러다 다섯 번째 즈음에서는 아차 싶었다. 조금 전 발길질은 틀림없이 장 파열로 이어졌을 것이다.
“뭐 하는 거야, 지원군이라고 해 봤자 고작 한 명이다!”
사내는 결국 가슴께에 붙은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종이를 몇 장 꺼냈다.
사람 손으로 죽인 티가 나면 안 된다니, 사고사로 만들어 주는 수밖에.
리자드는 코앞으로 들어 올린 종잇조각에 입김을 불었다. 입김은 바람이 아닌 불꽃이 되어 종이를 태웠다. 남자는 타들어 가는 종이를 멀리 던져 버리며 뒷걸음질 쳤다.
“크헉, 헉, 컵, 이게 뭐야…!”
“켁, 켁켁.”
공중에서 재가 되어 사라진 종이를 중심으로 검은 연막이 퍼져 나갔다. 시야를 흐리는 짙은 연기가 순식간에 회랑을 가득 메웠다.
“가주님, 벨 님!”
그때, 틈을 노리던 나니아가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라히무스의 지시 아래 급히 옷을 갈아입고 짐까지 챙긴 그녀가 두 사람의 손을 잡아끌었다.
“마, 마구간으로 가요.”
뒤뜰을 달려 밖으로 나가 일 초라도 빨리 말을 타라는 것이 그의 지령이었다.
라히무스는 세 사람이 중정으로 달려 나가는 것을 확인 한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건물을 부수기 시작했다.
그는 가까이에 있던 기둥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왼팔로 겨냥한 채, 오른손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퍼억.
남자의 주먹이 기둥 아래쪽을 힘차게 쳐올렸다. 가격당한 석조 기둥이 힘없이 무너져 내리며 굉음과 함께 아스러졌다.
연막과 더불어 돌가루까지 풀풀 날렸다.
“뭣들 하는 거야! 그거 하나 못 찾아?!”
“저리 비켜!”
화가 난 영주와 그의 아들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렸다.
리자드는 퇴각하는 와중에도 차례로 자잘한 귀퉁이들을 무너뜨렸다. 팔뚝과 팔꿈치로 후려갈길 때마다 기둥이 격파당하는 모습이 그야말로 성벽을 부수는 충차나 다름없었다.
부서진 기둥이 한둘이 아니게 될 때쯤 그것들이 받치고 있던 천장도 주저앉기 시작했다.
“무너진다!”
돌덩이가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면서 상황은 더욱 아비규환이 되었다.
파손된 건축 자재들과 안개로 인해 추격이 어려워졌을 때쯤, 리자드도 일행의 뒤를 쫓았다. 흔들리는 가슴에 힘을 주고 거침없이 달리는 모습은 검은 표범 같았다.
그는 순식간에 일행을 앞질렀다. 그리고 벨을 향해 물었다.
“링고파코는.”
“당신을 찾으러 마을로 보냈어요.”
남자는 혀를 찼다. 그것들까지 찾아오기엔 여유가 없었다.
짐이라도 챙겨 올 테니 차라리 잘된 일일지 모르지.
리자드가 다시 복면을 내리고 답답했던 안면을 드러냈다.
그리고 힘에 부쳐 속도가 점점 느려지기 시작한 벨과 나니아를 양어깨에 둘러메다.
여자는 당황하여 버둥거렸다.
“가만히 있어. 나는 정숙하게 달리는 법은 몰라.”
얌전하게 달릴 수 없다던 그의 말마따나 두 사람은 그의 어깨 위에서 짐짝처럼 흔들렸다. 정신이 혼미해 보이는 라키바하프도 숨 가쁘게 뒤를 따랐다.
멀미가 날 정도로 어지러워졌을 때쯤, 마침내 마구간에 도착했다. 라히무스는 벨과 나니아를 내려놓고, 자리를 지키던 인간들을 하나둘씩 기절시켰다. 힘 조절에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숨통을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남자가 나니아를 말 위에 올려놓고 자신도 따라 앉았다. 그녀는 등 뒤에 라히무스를 두고 불안하게 벨을 찾았다.
“공주님, 저와 함께 가시죠.”
라키바하프가 다급한 와중에도 말안장을 올리며 벨에게 동행하기를 권했다. 그녀는 발 받침대를 딛고 올라가 남자가 올려놓은 안장에 날름 착석하였다. 그리고 불퉁하게 대꾸했다.
“필요 없어요.”
라키바하프는 준비된 말을 몰고 밖으로 나가 버리는 그녀를 멍청하게 바라보다 다시 다른 말에 안장을 올렸다.
박차가 없어 속력을 낼 수 없는 라히무스가 말 위에 앉아 그를 재촉했다.
“북쪽으로 빠져나간다. 빨리 길 안내해.”
“하, 대로로 이동하는 동안 편하게 마차를 타고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내가 허튼 꿈을 꿨네요.”
공주는 태연자약하게 말을 달렸다. 생포의 고비를 넘긴 사람답지 않게 태평했다.
이로써 그녀가 마차를 타려 했던 까닭은 말을 탈 줄 몰라서가 아니라 싫어서였음을 알게 되었다.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을 처리한 뒤 다시 또 샛길로 빠졌다. 일행은 큰길을 두고 숲속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나니아는 파비푸스에 남겨진 리자드들이 걱정되었다.
“챠링고와 파키케팔로는 이대로 두고 가나요?”
“두고 가는 게 아니라 따로 가는 거예요. 공유된 목적지가 있으니 생각이 있다면 알아서 찾아올 테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공주는 생각 외로 근심이 적어 보였다.
같은 위험에서 빠져나온 라키바하프의 몰골은 영 말이 아니었다. 며칠 새 너무도 많은 일을 겪은 그는 흰 머리털이 십수 개는 더 자라 있을 것 같았다.
나니아는 그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앞으로의 거취를 고민했다.
우리가 가는 길의 끝은 어딜까.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그녀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남자와 자신을 한 묶음으로 여겼다.
아마 저 앞의 이름 잃은 영주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라키바하프가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나니아도 파비올라에 남기를 거부한 지금. 둘의 향후 행보는 그 무엇도 전과 같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것은 미래에 대한 걱정뿐만이 아니었다. 여자는 자신의 뒤에 바짝 붙어 앉아 있는 리자드의 존재를 의식했다. 그와의 문제를 미처 다 정리하지도 못했는데 이토록 밀접하게 붙어 있게 된 현재 상황이 숨 막히도록 불편했다.
라히무스는 고삐를 잡고 있던 양팔을 모아 경직된 소녀의 좁은 어깨를 끌어안듯 압박하였다.
“많이 놀랐어?”
남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 낮고 깊은 음성이 등에서부터 진동하듯 울리면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이전과 다름없이 다정한 말투였다.
“…아뇨.”
나니아는 작고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경직된 몸은 한층 더 뻣뻣해졌다. 남자가 그녀의 정수리에서 입을 맞추는 소리를 내고 떨어졌다. 거리를 두고 싶었는데, 그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햇빛이 닿지 않는 숲속의 밤. 캄캄한 어둠은 빠르게 찾아왔다.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어졌을 때쯤 일행은 물가를 찾았다. 식수를 얻을 수 있는 곳 가까이에 터를 잡고 하룻밤 눈 붙일 준비를 했다.
세간을 모두 두고 나오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고생스러운 야영 환경이 더욱 궁핍해졌다. 가진 것은 나니아의 가방뿐, 그조차 생존에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은 없었다.
밤이 되면서 기온이 떨어지고 추위가 엄습했다. 사내는 부지런히 마른 장작을 모았다. 그의 옆에는 생존 능력 떨어지는 세 사람이 어미를 기다리는 새끼 새처럼 유약하게 웅크리고 리자드가 하는 양을 바라보기만 하고 있었다.
사내는 장작을 내려놓고 멋쩍은 듯 허리를 긁었다.
“계속 그렇게 쳐다볼 건가?”
처음에는 면박을 주는 줄 알았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민간인 세 사람에게 건네는 핀잔.
하지만 그의 민망한 낯빛에서 질문의 의도가 그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사내는 어딘지 어색하게 나니아를 등지고 쪼그려 앉았다. 바윗돌 같은 등짝은 앞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숨기기에 알맞았다.
영문을 알 수 없게도 순식간에 불꽃이 훅 타오르더니 모닥불에 불이 지펴졌다.
“…방금 뭘 한 거예요?”
궁금해 하는 나니아의 귓가에 벨이 속삭였다.
“입에서 불도 뿜어요. 이럴 때마다 이종족이라는 사실이 실감 난다니까요.”
짓궂게 쫑알거리는 목소리가 라히무스의 귀에도 닿았다. 리자드가 뒤를 돌아 공주를 노려보았다. 삐죽거리는 입술에서 달갑잖은 기색이 느껴졌다. 매서운 시선은 나니아에게로 옮겨 가 부끄러운 듯 녹아내렸다.
남자는 다시 홱 뒤를 돌았다. 그는 고집스럽게 등을 보이며 불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리자드의 꼬리가 맨바닥을 턱 턱 내리쳤다. 잘은 몰라도 기분이 좋아서 흔드는 것은 아닌 게 확실했다.
나니아는 그의 행동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고 가방을 뒤적거렸다.
“배고프시죠, 벨 님.”
가방 안에 먹을거리가 없는지 찾았다.
“가주님도….”
남자와 눈을 마주치기가 거북했다. 이쪽도 저쪽도 껄끄러운 사람들 투성이였다.
“난 괜찮아. 달리 입맛도 없구나.”
하지만 라키바하프는 괘념치 않고 웃어 보였다. 그의 어른스러운 미소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나는 물이나 조금 마시면 돼요. 나보다는 나니아가 배고프겠어요.”
애석하게도 가방 안에서 마땅히 요깃거리가 될 만한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나니아도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어 괜찮다는 표현을 했다. 허기는 무시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이었다.
문득 라키바하프가 머금은 미소에 씁쓸함이 서렸다. 그가 나니아를 향해 물었다.
“나 혼자 여기서 이렇게 차려입은 꼬락서니가 참 우습지 않니.”
그는 걸리적거리는 견장과 파스망트리 따위가 가득 달린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자조하였다.
파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남자는 애당초 연회 근처에 가지도 않은 라히무스나 벨과 다르게 한껏 멋을 낸 모습 그대로였다.
평화로운 괴촌의 영주였던 라키바하프. 한순간에 탐욕스러운 반역자로 실추당한 기분이 어떠할까. 그것도 나름 가족이라 믿었던 사람들에 의해서.
“부끄러워서 당장 벗어 버리고 싶네.”
농담인 듯 어색하게 웃는 얼굴이 안타까웠다.
나니아는 그를 위로할 말을 찾았다.
“아니에요, 오늘 굉장히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장소에 상관없이 가주님께 정말 잘 어울려요….”
둘의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리자드가 슬쩍 고개를 꺾어 인간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을 확인했다. 알록달록하고 번잡스러운 차림새였다.
반의반쯤 뒤돌았던 머리는 관심 없는 척 빠르게 제자리로 돌아갔다. 남자는 시선을 내려 자신의 거무죽죽하고 소략한 옷을 보았다.
“…….”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꼬리가 또다시 거칠게 바닥을 두드렸다.
미처 갈아입을 틈도 없었던 남자의 복장을 살펴본 나니아는 자신도 머리를 정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 냈다. 틀어 올린 머리가 허둥지둥 뛰어다니느라 엉망이 되어 있었다.
뒤통수를 더듬어 뒤꽂이를 빼내고 흘러내리는 검은 머리를 한쪽으로 모았다. 미처 챙기지 못한 머리 장식이 귀 끝을 스치며 떨어졌다. 무릎으로 살포시 내려앉은 그것은 라히무스가 꺾어 온 들꽃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꽃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물끄러미 라히무스의 뒷모습을 살폈다. 내려놓았던 가방을 다시 뒤져서 아버지의 일기장을 꺼냈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빈 페이지에 꽃을 끼워 넣었다.
그러는 사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라키바하프는 자못 진지한 말투로 물었다.
“이제는 말씀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공주님. 공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무엇을 하고자 하시는지.”
벨은 그 질문에 잠시간 침묵했다. 이내 곁에 있던 나뭇잎을 잘게 찢는 손장난을 하며 대꾸했다.
“난 나의 진짜 고향을 찾아가는 중이에요.”
“제가 듣기로… 공주님께서는 난파당한 선박에서 발견된 고아셨던 것으로 압니다. 자식이 없는 젊은 선왕께서 당신을 입양하셨고, 이후에도 후사를 이을 자식을 갖지 못해 당신만을 애지중지 키우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공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짜 고향이라는 것이 어디를 말씀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쩜 여기에 제대로 부모를 가진 자가 하나도 없구나. 나니아는 그녀에게서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물었다.
“벨 님께서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아세요?”
애지중지 키워졌다는 말에 벨은 그저 웃음이 났다.
“서대륙. 나는 서대륙으로 가요.”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의 수풀에 새끼손톱만큼 작고 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아마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식용은 아니었다. 벨은 그것을 따다가 손톱으로 짓이겼다.
“나는 훔친 씨앗입니다. 도난당한 과수입니다.”
열매를 짓이긴 손끝이 빨갛게 물들었다. 빈약한 과육 안에는 크고 딱딱한 씨앗이 두 개나 들어 있었다.
“비를 셋씩이나 두고 자식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나요? 왕이 고자가 아니었다는 것은 내가 제일 잘 압니다.”
벨은 치가 떨린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나니아도 라키바하프도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그 무엇도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친절하지 못한 설명만을 남긴 공주는 더 자세히 말하고 싶지 않은 듯 입을 다물었다.
라키바하프는 아직 의문이 해소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시고자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남자가 묻자, 벨은 짜증 난다는 듯 대답했다.
“덜떨어진 질문을 하는군요. 안락한 권능을 벗어던진 자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당신이 제일 잘 알지 않습니까?”
공주 행세가 지긋지긋한 그녀와 영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내려놓고 싶었던 그가 선택한 것은 궁극적으로 같은 가치였다.
“나는 단지 자유를 원할 뿐입니다. 내 한 몸 나 스스로 운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요.”
복잡한 것은 질색이라는 듯 공주가 손을 휘저었다. 더는 얘기해 줄 것도 없다는 제스처였다.
언뜻 얄팍하기 그지없는 그녀의 바람은 라키바하프의 공감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남자는 전부터 고모 부부가 두려웠다. 의문스러운 부모님의 죽음 뒤에 그들이 있다는 의심을 지우기 힘들었으며, 위태로운 위치는 항상 두려움을 일으켰다.
파비푸스는 호시탐탐 파비올라를 노리며 침략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명분을 기다렸다. 죄 없는 조카의 땅을 이유 없이 빼앗는 일은 주변 다른 영주들로부터 응당 손가락질받아 마땅했으니까.
언제 어떻게 발발할지 모를 분쟁을 기다리며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무력으로 통일되는 것보다 평화롭게 합병하는 쪽이 더 낫겠다는 판단을 내린 까닭은 그것이 가장 적은 손실을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전쟁은 현실이었다. 롱타보드 위에서 벌어지는 전략 게임이 아닌 것이다.
귀족들의 권력 다툼 따위에 무고한 농민들의 목숨을 희생시킬 수 없었다. 불필요한 피를 흘리지 않고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그들은 단지 자신에게만 악인이었다. 객관적으로 치세는 평범한 편이었다. 알랭 같은 인간이 영지를 물려받는다면 모를까 하지만 그는 고모님의 태생이 아니니 그럴 가능성도 희박했다.
영지민들에게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단지 지도자가 바뀔 뿐, 목숨을 걸고 싸우다 패잔병이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라키바하프 한 명만 자리를 잃고 끝나면 될 일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영주 자리를 버림으로써 더 값진 것을 얻을 수 있었다.
남자가 중얼거렸다.
“자유….”
그것은 라키바하프가 바라 마지않던 염원이었다.
생각에 잠긴 그를 옆에서 바라보던 나니아가 물었다.
“가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실 작정이세요?”
미래를 고민해야 하는 것은 공주보다 그가 더 시급했다. 적어도 그녀는 목적지가 있었다. 하지만 나니아와 라키바하프는 아니었다.
“저도 저지만, 가주님께서는 이제 파비올라로 돌아가실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녀의 걱정과 다르게 라키바하프의 표정은 한결 산뜻해졌다.
“사람 잡아먹는 괴물도 보고, 불 뿜는 용도 보았다. 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나 하나 발붙이고 살 곳 없겠나 싶구나.”
침통한 것보다야 저렇게 밝은 모습이 낫지만, 이럴 때 보면 그는 참 귀족답게 해맑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사는 게 어찌 그리 쉬울까.
“그런가요….”
고뇌하는 나니아의 옆에서 남자가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정 안 되겠으면 너랑 나랑 어디 자그맣게 소작지나 빌려 농사지으며 살까?”
“…네?”
그 엉뚱한 소리에 나니아는 멍청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이번에도 공주를 따라가겠다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는 공주는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더니, 기묘한 말들로 나니아를 헷갈리게 만들었다.
남자는 아주 가볍게 농을 던지듯 말하였으나, 소녀의 마음은 또 요동치기 시작했다. 머리가 팽글팽글 돌았다. 모든 것을 잃고 아무도 곁에 남지 않은 라키바하프에게 이제야 그녀가 보이기 시작한 것일까. 단둘이 농사나 지으며 같이 살자니. 완전히 부부나 다름없는 삶이 아니겠는가.
심장이 크게 쿵쾅거려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하는 그녀의 얼굴 위로 커다랗게 그림자가 졌다. 어느샌가 벌떡 몸을 일으켜 나니아의 앞으로 다가온 리자드가 음산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닥불을 등진 그의 표정은 알 수 없이 어둡고 혼탁했다.
남자가 넋을 놓은 나니아의 손목을 빼앗았다. 그에 의해 팔이 번쩍 들리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나랑 얘기 좀 해.”
리자드가 강한 힘으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사내의 강압적인 행동은 옆에 있던 라키바하프를 자극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끼어들었다.
“이봐, 지금 뭐 하는 거야. 그 손 당장 놔 줘.”
“넌 빠져.”
라히무스가 으르렁거리며 이를 드러냈다. 가감 없이 공격성을 보이는 그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나니아는 살기 어린 그의 눈을 보고 당장 둘을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이 상책임을 깨달았다.
“괜찮아요. 잠깐 다녀올게요.”
그는 입에서 어떤 말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폭약 같은 남자다. 라키바하프와 벨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이느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오는 편이 백번 나았다.
“하지만 나나….”
라키바하프가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나니아는 나서지 말라는 듯 무언의 눈짓을 보냈다.
라히무스는 동떨어진 장소로 이동하는 데에 동의한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고 성큼성큼 걸었다.
당사자가 괜찮다고 말하니 감히 더 말릴 수 없었다. 뒤에 남겨진 남자는 주먹을 말아 쥐었다. 언제 입었는지 모를 손가락 화상이 따끔따끔 간지러웠다. 시야를 벗어나 수풀 속으로 두 사람은 점점 멀어져 갔다.
사내는 기어코 달빛이 내리비치는 밝은 물가로 끌고 온 다음에야 그녀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조금 전 사나웠던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뜸 절절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나한테 화났어…?”
남자는 죄지은 아이처럼 나니아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는 어이없어했다.
“내, 내가 할 소리예요. 당신은 뭐가 그렇게 화났어요?”
소녀는 욱신거리는 손목을 붙잡고 따지듯 반문했다. 남자가 힘 조절을 하지 못한 탓에 나니아의 피부에 벌건 손자국이 남았다. 틀림없이 멍으로 발전할 통증이었다.
말만 다정하면 무엇하나. 잠깐이었지만 그의 악력은 아주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미안… 미안해.”
라히무스는 뒤늦게 자기가 저지른 짓을 깨닫고 속죄하듯 나니아의 손목에 입을 맞추었다.
역시 인간은 너무나도 여리고 약했다.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부서질 것 같았다.
“됐으니까, 이제 더 만지지 마요. 아파….”
괜한 짓을 한다는 듯 나니아는 다소 차갑게 뿌리쳤다. 울상이 된 리자드가 물었다.
“나한테 왜 그렇게 차가워?”
질문은 비단 지금 이 순간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니아는 주눅이 든 그의 모습을 보고 잠시간 양심의 가책을 느꼈으나, 이내 곤란해하며 모르겠다는 듯 눈을 피했다.
“내가 뭘… 어쨌다구요.”
하지만 남자는 다가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싫어졌어?”
남자는 피하는 대로 쫓아와 나니아와 눈을 마주치려 들었다. 그의 애처로운 눈빛과 태도는 마치 여자가 죄를 짓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우리가 언제 싫고 말고 할 그런… 사이였나요.”
회피하듯 얼버무리는 것 말고는 해 줄 말이 없었다. 그럴수록 남자는 애가 닳았다. 딱딱하게 벽을 세우는 그녀를 보고 애걸복걸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뭐 잘못했어? …가슴 쳐다본 거 많이 불쾌했나? 미안해. 이제 안 그럴게.”
남자는 자꾸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궁리하고 찾았다. 노력하겠다는 듯 이야기하는 그의 말이 나니아를 곤란하게 했다.
“용서해 줘… 내가 더 참을게. 싫어하는 거 다 고칠게. 응?”
다시 기회를 달라는 듯, 남자는 과할 정도로 비굴하게 굴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나니아를 향해 사내가 몸을 바싹 붙여 왔다.
애절한 그의 목소리는 지극히 다정하였으나, 여전히 그의 몸집은 억척스럽고 위협적이었다. 멍든 손목은 시큰거리고 남자가 주는 위압감은 숨이 막혔다.
“당신이 나한테 용서를 빌 필요가 뭐가 있어….”
“그럼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뭘 말하는지 모르겠어.”
“나한테 정이 떨어진 것처럼 굴잖아.”
야속함과 원망 섞인 그의 시선은 라키바하프를 바라볼 때의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만 같았다.
줄 듯 말 듯 하는 자신의 태도가 그에게 어떻게 느껴질는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전에, 나니아가 모르는 그의 감춰진 본성과 의심쩍은 신상이 문제였다.
결국 소녀는 스스로 궁금해하지 말자 다짐하며 금기시해 왔던 질문을 꺼냈다.
“당신은…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해요?”
그 말에 남자는 아주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아주 어려운 질문을 받은 것처럼 고민했다.
좋아한다고 말해. 좋아한다고.
당신에게 다른 여자가 있더라도, 그녀를 버릴 정도로 내가 좋다고. 그렇다면 모르는 척 눈감아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마음 한 칸에 그를 위한 빈자리를 남겨 줄 수 있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리자드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귀여워. 귀엽고, 예뻐.”
남자는 마치 정답을 맞히듯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말들로는 소녀를 홀릴 수 없었다. 나니아는 어느새 그의 귀엽다는 말에 무뎌져 있었다. 더는 설레지도 두근거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뽀뽀하고 싶어.”
“그게 다예요?”
“…섹스도….”
답안을 내놓듯 답변하던 남자는 어느새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나니아의 질책이 흥분한 아랫도리에 찬물을 끼얹었다.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요?”
남자의 말엔 한 점 거짓이 없었다. 나니아는 그래서 더 짜증이 났다.
이게 아닌가. 하는 얼굴로 리자드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짝짓기… 하고 싶다?”
나니아는 더 이상 대화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고 한숨을 쉬었다.
직설적이고 교양 없는 그의 말에 심장이 두근거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거두절미하고 그녀의 몸만 바라는 듯한 사내의 태도는 점점 거부감을 느끼게 했다. 이제와 돌이켜보니 착각을 했던 것 같다. 몸을 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지지부진한 짝사랑에 가슴 아픈 소녀는 이쪽에서라도 명확한 고백을 바랐다.
“당신 진짜… 질리네요.”
나니아가 눈을 내리깔고 체념하듯 중얼거렸다. 라히무스는 질린다는 말에 크게 충격받고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너도 분명 즐겼잖아.”
“즐겨? 즐겼다고? 하, 당신 머릿속에는 진짜 그런 거밖에 없구나.”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사람을 헷갈리게 하니, 울컥한 나니아는 붙잡힌 어깨를 비틀며 대들었다.
“너 같은 남자는 뭐가 문젠지 말해 줘도 몰라.”
“…너라고 하지 마.”
“너를 너라고 하지 그럼 뭐라고 해? 그러는 넌 날 뭐라고 부르는데? 당신도 나한테 너, 너, 하는 건 마찬가지 아냐?”
남자의 낯빛이 사나워질수록 나니아도 오기가 생겼다. 그러면서도 눈물이 맺힐락 말락 했다.
라히무스의 눈빛은 어느새 라키바하프를 바라볼 때나 다름없이 포악해져 있었다. 그는 화를 참는 것처럼 주먹을 말아 쥐더니 나니아의 등 뒤에 있던 나무를 세게 내리쳤다. 나무가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나뭇잎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저 새끼는 널 애칭으로 부르단 말이야!”
나무는 얻어맞은 부위에 움푹 형적이 남았고, 분을 못 이겨 소리친 사내는 3초 만에 후회하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니아는 그가 말하는 저 새끼와 저 새끼가 부른다는 자신의 애칭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했다.
남자가 그토록 시기 질투하는 라키바하프. 그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 나나.
하지만 그건 꼭 가주님에게만 국한되는 애칭은 아니었다.
“누구나 나를 그렇게 불러. 당신도 마음대로 해. 그럼 되잖아.”
“…똑같이 부르기 싫어.”
남자가 토라진 표정으로 웅얼거렸다. 나니아는 그것이 이젠 전혀 귀엽지가 않고 답답했다.
“하… 진짜 이런 대화도 전부 바보 같아.”
지친 어깨를 떨어뜨리자, 남자는 다시 위기감을 느낀 듯 허리를 굽혀 눈을 마주쳤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나 질려 하지 마.”
남자의 손바닥이 나니아의 볼을 어루만졌다. 손길은 애틋하고 눅눅했으나 여자는 목이 졸린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이거 놔요. 만지지 마.”
“전처럼만 대해 줘… 응?”
라히무스는 그녀와 나누었던 황홀한 순간을 잊지 못했다. 자신의 손끝에서 절정을 맞이한 그녀의 짜릿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녀의 야릇한 체취가 사내의 온몸을 달구었다. 그때만 같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안타깝지만 당신이 이걸 나한테 준 순간부터, 아니, 당신은 처음부터 맞지 않는 단추였어.”
나니아는 드디어 자신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냈다. 땅바닥에 버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남자의 손을 억지로 펴서 그 위에 올려놓았다.
반지를 문제 삼는 그녀를 보고 리자드는 이를 악물었다.
“…누구한테 무슨 소릴 들었어.”
직접 골라 간 반지를 이제 와 돌려주겠다는 그녀의 행동이 남자의 입장에선 이상하지 않을 리 없었다. 나니아는 난감해하며 파키케팔로를 떠올렸다. 그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지금 자신의 행동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당신이 그 애한테 앙금을 품지 않겠다고 하면….”
“아니. 답은 이미 충분하군.”
라히무스는 그녀가 말하는 ‘그 애’라는 것이 누군지 바로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니아는 아차 싶었지만 파키케팔로에게는 미안하게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내가 물어봤어요. 그 앤 어쩔 수 없이 대답해 준 거야. 부탁이니까 혼내지 말아요.”
첨언 하는 그녀의 행동 때문에 라히무스는 더욱 성을 냈다.
“그걸 감싸 주는 이유는 또 뭔데. 왜 나한텐 그렇게 다정하지 않아?”
하다 하다 파키케팔로에게까지 질투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남자가 반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반지의 굴곡을 손바닥에 선명히 아로새겼다.
남자가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내가 더럽다고 생각해…?”
나니아는 남자의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를 보았다. 외도인지 바람인지 더러운 짓을 하는 건 자신이면서, 왜 상처받은 얼굴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침묵은 리자드에게 긍정의 사인으로 읽혔다. 성난 가슴이 숨 가쁘게 오르내렸다.
남자는 다시 거칠게 나니아의 왼손을 빼앗았다. 그리고 그녀가 거절한 반지를 다시 네 번째 손가락에 억지로 끼워 넣었다. 광분으로 차오른 숨이 거칠어졌다.
“안 됐지만, 이건 이제 네 거야. 너는 내 거고. 아무한테도 안 뺏겨.”
폭주하는 리자드의 입술이 나니아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시, 싫어! 읍…!”
남자는 도둑질하듯 애타게 여자의 입술을 물고 빨았다.
“싫….”
“하, 나냐….”
사내의 폭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녀는 발버둥 쳤다. 머리를 이리 저리로 비틀어 보려 했지만, 고개가 돌아가는 방향을 따라 남자는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남자의 혀가 거칠고 추잡스럽게 입 주위를 핥았다.
“응, 읍, 읏…!”
빼앗긴 두 팔은 완전히 부자유했다. 사내가 작정하고 자신을 강제로 취하려 든다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려웠다. 남자가 왜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집착하는지 알 수 없어서 섬뜩하다 못해 무서워지려고 했다.
그래서 나니아는 온 힘을 다해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아.
남자는 나지막한 신음과 함께 떨어졌다. 양 손목을 결박했던 손아귀에도 힘이 빠져나갔다.
칼을 찔러 넣어도 꿈쩍할 것 같지 않던 그가 동요했다.
남자의 강철같이 단단한 신체, 그중에서 가장 여리고 말랑말랑한 부분. 리자드의 붉은 입술에 핏방울이 맺혔다.
살점을 도려낼 기세로 남자의 입술을 물어뜯은 소녀는 자신의 행동이 가져온 결과에 당황하면서도 젖은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하, 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녀의 입 안에서도 피 맛이 났다.
“싫다고… 싫다고 했잖아.”
나니아는 타액으로 범벅이 된 입 주위를 문지르면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
“당신 이러는 거 짐승 같아. 끔찍해.”
소녀의 격렬한 거부에 남자는 석상처럼 굳었다. 그가 가장 듣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짐승 같다든가, 끔찍하다든가. 괴물 같다든가, 징그럽다든가. 그런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써 왔는데,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된 기분이었다.
나니아는 그가 당장이라도 자신을 쫓아와 강물에 던져 버릴 것 같은 공포심을 이겨 내고 베이스캠프로 뛰어 돌아왔다. 남자가 작정하고 자신을 해치려 든다면 그 누구도 도와줄 수 없을 테지만, 벨과 라키바하프의 잠든 얼굴을 보니 당장은 안도감이 들었다. 소녀는 울먹울먹하면서도 맨땅에 머리를 눕히고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떴을 때, 스산한 몸뚱이에 남자의 옷이 덮여 있었다.
“하…. 이 숨 막히는 분위기 대체 뭐죠?”
벨은 나니아가 라히무스의 말이 아닌 영주의 말을 얻어 탄 것을 보고 의아해했다. 간밤에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분명한 것은 지금 가운데에 낀 자신의 위치가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중립 지대임이 확실했다.
벨은 흥미롭게 사람들을 관찰했다. 아직 폴핀까지 한나절인데, 어째선지 라히무스는 불필요하게 약을 복용했으며 나니아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싸웠군.’
명쾌한 결론을 내리고, 벨은 마음속으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