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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 (4/22)

접촉

파비푸스의 저택은 담벼락이 높고 경호가 삼엄했다. 한 번 나가면 다시 돌아올 수 없을까 봐 걱정스러웠던 나니아는 문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신원을 다짐받고 출입문 밖을 나섰다.

저택에서 민가까지 제법 한참을 걸었다. 시간이 늦어 문을 닫았으면 어떡하나 우려했던 것과 다르게 오히려 불이 켜져 있는 상점이 몇 개 남아 있지 않아 수월하게 약방을 찾았다.

주머니 속 푼돈을 짤랑거리며 상처에 잘 듣는 약을 달라고 요구했다. 어떤 상처냐는 말에 칼에 깊숙이 베이고 찔린 상처라 대답했다. 약방 주인은 그 정도면 약을 바를 것이 아니라 의원을 찾아가야 한다며 혀를 차면서도 나니아가 구하는 약을 손에 쥐여 주었다.

이제는 기억을 더듬어 라히무스 혼자 남기로 했던 장소를 찾아 걸음을 움직였다. 길을 따라 걷다 보니 시끌시끌한 말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 끝에 만취한 사람들과 흥겨운 인간들로 가득한 건물이 보였다.

얼굴이 새빨간 남자가 건물 사이 좁은 틈에서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그 뒤에서 등을 두드려 주었다.

영락없이 취한 얼굴로 해롱해롱하며 여자를 더듬는 남자도 있었다. 살짝 취기 오른 눈빛을 흘리며 추파를 던지는 저 아낙은 춘부가 틀림없었다.

사창가를 겸하는 거리였다. 매음의 기류를 읽은 나니아의 등에 바짝 긴장의 끈이 당겨졌다. 괜스레 옷깃을 한 번 더 여미고 건물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1층은 주점, 2층은 객사를 겸하는 가게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술 냄새가 진동했다.

두리번거리며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을 찾았다. 그나마 편하게 말을 걸 수 있을 것 같은 인상의 중년 여성이 마른 헝겊으로 접시를 닦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리자드의 행방을 물었다.

“오늘 여기서 투숙하기로 한 사람을 찾고 있는데요. 혹시 키가 큰 남자를 못 보셨나요? 아주, 아주 큰 사람이거든요.”

나니아가 머리 위로 손을 높이 들어 보였다. 한 번이라도 그를 봤다면 도저히 잊을 수가 없는 체격이니 확실한 답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자신했다.

“키 큰 남자? 본 거 같은데. 아까 위로 올라갔지 아마.”

“혹시 몇 호인지 알 수 있을까요?”

구체적인 객실 번호를 물어보려는데, 근처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남자가 갑자기 나니아의 팔목을 붙잡아 당겼다.

“못 보던 앤데? 새로운 얼굴이잖냐.”

이미 술기운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주정뱅이였다. 남자가 딸꾹거리며 물었다.

“예약한 사람이 얼마 주기로 했어? 내가 거기다 오십 더 얹어 주마. 오늘 새끼 돼지도 끌고 왔다고.”

남자가 소시지 같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자랑을 했다. 이 시간에 혼자 술집에 찾아온 여자라면 다 그렇고 그런 목적일 것이라고 건너짚어 생각하는 게 뻔했다.

“저는 그런 거 아니에요.”

손목을 비틀어 보았지만 빠져나오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낮에 보았을 때만 해도 이런 환락가인 줄은 몰랐다. 알고 그랬는지 모르고 그랬는지 하필이면 이렇게 저속한 장소에 머물기로 택한 그가 원망스러워지려 했다.

“에이, 빼지 말고. 나처럼 상냥한 손님도 없어.”

아니 어쩌면 그도 이 남자와 다를 바 없는 밤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지금 이런 말썽에 휘말리게 되어 생긴 불안감도 잊을 만큼 불쾌해졌다.

“놔주세요.”

나니아가 다시 한번 붙잡힌 팔목을 잡아당기며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술에 취한 남자의 힘을 이겨 낼 재간이 없었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광경인 듯 모두가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접시 닦던 여자조차 둘을 지나쳐 갔다.

난감함과 두려움에 눈물이 왈칵 솟으려던 그때, 무시할 수 없이 우람한 몸집이 전등 빛을 등지고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었다.

실랑이를 벌이는 남녀의 머리 위로 음산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손 떼.”

“…뭐, 뭐야.”

주정뱅이가 말을 더듬으며 목소리의 주인을 올려다보자, 그가 남자의 손을 낚아채고 우악스럽게 힘을 주었다. 리자드의 커다란 손 위로 성난 핏줄이 섰다.

“끄악!”

술기운이 달아날 정도로 끔찍한 고통이 치달았다. 남자가 악을 썼다.

“놔, 놔!”

비명을 지르든가 말든가 사내는 묵묵히 아귀힘을 썼다. 죽겠다고 소리치는 남자와 다르게 사내의 험상궂은 얼굴은 표정 변화가 하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놓아주지 않다가 기어코 손허리뼈를 부순 다음에야 내팽개치듯 손을 던져 버렸다.

추행범은 제풀에 지쳐 발라당 넘어지며 욕을 쏟아 냈다. 저놈이 나를 죽이려 한다, 손뼈가 부러진 것 같다, 요란하게 난리를 쳤지만 가게 안의 손님들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찌 보면 참으로 일관된 사람들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남들 눈엔 그저 손을 조금 맞잡았을 뿐, 커다란 폭력이 오고 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주정뱅이를 떼어 낸 남자가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머리 아파.”

도움을 받았지만 어쩐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나니아가 말없이 그를 쳐다보고만 있자, 남자가 말했다.

“여긴 왜 왔어.”

남자는 헤어졌을 때 그 모습 그대로 냉랭한 반응이었다. 전혀 반갑지 않은 눈치라 겸연쩍었다.

“상처에 바를 약, 가져왔어요.”

나니아가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 보였다. 라히무스는 말없이 그것을 쳐다보다가 성가시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거 쓰나 마나 큰 차이 없어.”

그래도 구해 온 성의가 있는데.

아무 감흥도 없고 고마워하지도 않는 그의 태도에 나니아는 서운해졌다.

“그 정도 상처라면 죽을 수 있다구요.”

“리자드는 쉽게 안 죽어.”

따박따박 반박하는 그가 얄미웠다. 잘해 주고 싶었는데 남자의 태도가 이런 식이니 슬슬 약이 올랐다.

돈 주고 사 온 물건인데 버릴 수도 없고. 자신의 선의를 몰라주는 그가 괘씸해서 나니아의 입에서도 더는 다정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말투도 덩달아 퉁명스러워졌다.

“참 잘났네요. 그래도 기껏 가져왔으니까 받아요. 새 옷 사려고 모아 놓은 돈인데 그것도 포기 했다구요.”

나니아가 손에 든 약통을 흔들었다. 그러자 남자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다시 그것을 빤히 쳐다보았다. 마지막 말에 마음이 흔들렸을까. 하지만 나니아의 눈에는 그의 모든 행동이 다 야박하고 매몰차게만 보였다.

왁자지껄한 주점 분위기가 불편해서 조용한 곳으로 이동하고 싶었다. 마침 어떤 여자가 라히무스를 야릇한 시선으로 훑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그의 육감적인 체구가 다른 의미로 이목을 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방으로 가요.”

거북해진 나니아는 라히무스를 종용했다. 그러자 예상 밖에 남자가 매우 당혹스러워했다.

“…내 방에는 왜.”

표정 없이 서늘하기만 했던 얼굴 위로 명백히 뜨거운 감정이 번져 나갔다.

남자가 오늘 처음으로 보인 감정적 동요에 나니아는 관심을 기울였다. 눈여겨본 끝에 그녀가 발견한 것은, 라히무스의 웃옷 가슴 언저리에 찍힌 입술 자국이었다. 붉은 연지가 그곳에 묻을 일이 뭐가 있을까.

애써 외면했던 문제의 퍼즐이 맞춰지자 가슴이 싸늘하게 식어 갔다. 그러니까 이 남자도 저 남자랑 똑같이 매음굴에서 성행위를 하기 위해 기꺼이 돈을 쓰는 수컷에 불과했단 거다.

“당신.”

불결하고 실망스러웠다.

“머릿속에 든 게 그거밖에 없죠?”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처음부터 알아봤어. 변태 호색한. 다 알고 있었으면서 왜 이렇게 속은 기분이 드는 거지?’

이유를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상실감이 가슴속 깊숙이 밀려들었다.

그녀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알 수 없기는 라히무스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이야, 그게.”

남자가 뻔뻔하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눈살을 찌푸렸다. 나니아는 배신이라도 당한 것처럼 울컥한 심정을 마구 쏘아붙였다.

“원래 남자들은 다 그렇게 여자라면 환장을 해요? 인간이나 리자드나 수컷들은 다 똑같아. 섹스라면 그저 몸이 달지? 지조고 정조고 뭣도 없어.”

리자드는 혼란스러워했다. 지금 자기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나는 당신이 끙끙 앓고 있을까 걱정돼서 달려왔는데…. 당신은 여자랑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방에 여자가 있는 거지? 그래서 못 올라가게 하는 거잖아.”

답지 않게 신랄한 발언을 쏟아 내는 그녀를 앞에 두고 라히무스는 매우 난처해했다. 어느새 곤혹스러움은 그의 몫이 되어 이제는 그가 자리를 옮기자고 청하는 입장이 되었다.

“알았으니까, 일단 올라가자.”

남자가 그녀를 달래어 방으로 올라가자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니아는 남자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알긴 뭘 알아. 이 저질 바람둥이야!”

여자는 유독 라히무스 앞에서 자주 흥분하게 되는 것 같았다.

점점 구체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두 남녀의 말싸움에 주변 사람들이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목이 끌리자 사내는 난감해하며 턱을 쓸었다. 그러다 결국 나니아를 번쩍 안아 올리는 방법을 택했다. 가진 게 힘뿐인 남자다웠다.

나니아는 발버둥 쳤다.

“싫어, 내려놔! 이 야만인, 짐승, 색광! 당신 같은 걸 걱정한 내가 바보야!”

“…걱정했어? 나를?”

라히무스는 얻어맞으면서도 귀가 솔깃해졌다.

“아니, 전혀? 이제 당신 다리가 파상풍에 걸려서 썩어 들어가든지 말든지 나랑 상관없어. 괴사 당해서 잘라내 버려!”

“알았어, 알았으니까….”

남자는 생떼 부리는 아기처럼 바르작대는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더럽고, 지저분해. 엉덩이도 가볍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여자를 품에 안고 그대로 무리 없이 2층 계단을 올랐다. 마침내 방문 앞에 다다랐을 때, 코가 빨개진 여자가 입술을 앙다물고 그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빨리, 이거 놔!”

남자가 문을 열었다. 뚜벅뚜벅 걸어 들어와 문제의 침대 앞에 나니아를 내려 주었다. 그녀는 여전히 씩씩거리고 있었다. 진정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고 다시 방문 앞으로 걸어갔다. 남자가 문을 닫자 시끄러운 취객들의 소리가 순식간에 멀어졌다.

나니아는 코를 훌쩍이며 문제의 현장을 검사하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에는 구겨져 있는 이불을 들춰 보며 그 밑에 숨은 사람이 없나 확인해 보기도 했다.

“…….”

역시나 아무것도 없었다.

나니아가 콧물이 쏙 들어간 얼굴로 천천히 라히무스를 돌아보았다.

“…….”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나니아를 향하여 남자가 불퉁하게 말을 던졌다.

“내가 뭘.”

비좁은 창문, 삐걱대는 바닥, 텅 빈 침대.

라히무스는 탁자 위 작은 유등에 불을 붙였다. 어두운 방 안이 작은 불꽃에 의지하여 간신히 빛을 얻었다.

짐작했던 것과 다르게, 방 안에서는 여자 머리카락 한 오라기 찾아볼 수 없었다. 새로운 주인의 흔적도 채 묻지 않은 객실은 휑하니 적막하기만 했다.

“…….”

나니아는 당황하여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녀를 세워 두고 라히무스는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피로한 듯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힘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확인했으니까 됐지.”

지친 얼굴의 그가 손가락으로 방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제 가.”

상대하기도 귀찮다는 듯 돌아가라 말하는 그를, 소녀는 무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눈도 마주치지 않는 그의 태도가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을 부추겼다. 어쩐지 코끝이 매웠다.

“그럼 왜….”

혀끝에 맴도는 ‘왜’라는 의구심이 사내의 변심과 스스로의 마음을 향했다. 전과 달리 다정다감하지 않은 라히무스의 태도가 섭섭하다 못해 서러웠고, 그런 그에게 일순 좌지우지되고 마는 자신의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틀림없이 반겨 줄 거라고 기대했다.

약을 발라 주고 싶었다.

어쩌면 비가 오니까 데려다준다고 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짓궂고 음험할 때도 있지만 그의 관심이 나쁘지 않았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웠었다.

‘나 내일 떠나.’

‘보고 싶을 것 같은데.’

‘나랑 같이 갈래?’

파비올라를 떠나기 전날 밤, 그가 전해 온 말들과 눈빛이 떠올랐다. 그때 그의 감정들을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니아도 그가 종종 생각날 것 같았으니까.

미약한 동지애가 싹텄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조금 더 오래 알고 지냈더라면 나름 좋은 친구 사이가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아서. 이대로 화해하지 못한 채 헤어진다면 분명 후회가 남을 것 같았다.

여러 가지 하고 싶은 말들이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정작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저지른 짓이 있어서 그런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차릴 길 없는 라히무스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나갈 길을 안내하듯 눈짓하며 또다시 무감한 얼굴로 돌아와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나니아는 어영부영 떠밀려 방문 앞까지 걸어왔다.

어서 나가라는 듯 내쫓는 손길이 서러워 결국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당신이 먼저 수상하게 굴었잖아요.”

뒤를 돌아보자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왜 들어오면 안 되는 것처럼 말했는데요?”

애초에 오해할 여지를 남긴 것은 너라며, 그의 탓을 하고 싶었다. 말하고 나서 보니 정말로 억울했다.

“전에는 당신 방에 데려가고 싶어서 안달이었으면서 왜.”

마지막 말을 미처 다 끝맺기도 전에, 사내가 문짝을 부술 기세로 거칠게 방문을 닫았다. 깜짝 놀란 나니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이 시간에 남자 혼자 쓰는 방에 들어오겠다고 떼쓰는 널.”

사내의 커다란 몸집이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두꺼운 양팔 사이에 갇혀, 그의 사나운 시선을 꼼짝없이 마주하였다.

“내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이를 악문 얼굴이 화를 참는 것 같기도 하고 답답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번뇌하는 눈빛 속에 격랑이 일었다.

“머릿속에 그 짓 할 생각밖에 없냐고? 그래, 맞아. 근데 네가 그걸 알면, 지금 여기까지 쫓아오진 말았어야지.”

냉랭한 반응에 불만을 가졌던 그녀를 벌주기라도 하듯 남자는 순식간에 맹렬해졌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니 후끈해졌다. 놀란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커다란 소리 때문일까 커다란 남자 때문일까. 위협적인 상황과 육신이 주는 긴장감에 숨이 막혔다.

불빛이 남자의 등 뒤에 있어서 그의 얼굴을 선명하게 볼 수 없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허름한 여관방. 방 벽 너머로 어렴풋하게 성관계를 하는 사람들의 교성이 들려왔다. 방음이 나쁜 객실. 익숙하지 않게 불온한 공간. 이곳은 나니아가 잘 아는 파비올라 저택이 아니었다. 전처럼 그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지도 않았다. 나니아는 초조해졌다.

“하아….”

남자가 갑갑한 숨통을 비워 내듯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은 그도 여자의 불안감을 모르지 않았다.

“가라.”

벽을 짚은 팔이 툭 떨어졌다. 그 손은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끼이익 하는 녹슨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남자가 문을 연 탓이다.

이것은 남자가 주는 마지막 기회였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도록 열어 준 퇴로.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니아는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턱 앞에 모아 쥐었던 손가락을 깨물었다.

끼이익. 다시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질렀다. 여자가 다시 방문을 닫았다.

나갈 의사가 없어 보이는 그녀를 의아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라히무스가 미간을 좁혔다.

“나는… 서로 안 좋은 감정이 있으면 풀고 싶었어요.”

여자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말했다. 자신 없는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그녀는 전처럼 화를 내지는 않았지만, 무척 침울해 보였다.

“당신이 나에게 다정하게 굴었던 건, 역시 나랑 한 번 자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그랬던 거죠.”

남자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고 가슴이 홧홧해졌다. 그녀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안 그래도 없는 뇌 주름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내가 섹스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한 뒤로 이렇게 쌀쌀맞게 구는 거잖아요….”

라히무스는 그제야 나니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았다. 입 밖으로 멍청한 탄식이 흘렀다.

“그런 거 아냐. 그런 거 아니고….”

남자는 본인의 행동이 그런 식으로 해석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을 보고 라히무스는 애가 달았다.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한 손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짚으며 얼굴을 가렸다. 힘겹게 고백하는 목소리가 비틀거렸다.

“내가… 너를 속였잖아.”

나니아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 손으로 채 가려지지 못한 남자의 얼굴을 살피며 자신이 무엇을 속았던가 곰곰이 생각했다.

“속여요? 나를요?”

나니아가 모르겠다는 듯 되묻자, 남자는 창피한 듯 손바닥에 코를 박고 웅얼거렸다.

“네 앞에서… 멀쩡한 인간 남자인 척했잖아. 너랑 자 보려고….”

우물대는 그의 말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여자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남자 쪽에서 주절주절 해명이 늘어졌다.

“네가 내 뿔이랑 꼬리랑… 흉측하다 생각했을 거고….”

“아….”

나니아의 입에서도 깨달음의 탄식이 흘렀다. 그가 무엇을 왜 감추고자 했었는지 그제야 이해가 갔다. 그녀는 조심조심 남자의 앞으로 다가가 손가락 사이로 삐져나온 그의 눈동자를 주시했다. 그 속에서 못다 꺼낸 감정을 읽었다. 하지만 그는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운 듯 눈을 감았다. 얼굴 가린 손을 재정비하며 시선을 피했다.

절대 보이고 싶지 않던 꼴을 들켰다. 그것도 최악의 형태로.

흉악스럽다든가 끔찍하다든가 하는 무시는 익숙한 그였지만 반해 버린 암컷에게만큼은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괴물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서 몸에 맞지도 않는 약을 먹으며 버텨 왔는데,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간 셈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는지 두려웠다. 인간 흉내를 낼 적부터 이미 자신을 두려워하는 듯하였으니 말이다. 딴에는 제법 다정하게 대하려 노력했었는데도.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어요? 당신이 흉측하다고?”

나니아가 물었다. 자신의 꼬리를 자랑스러워하고 애지중지하던 파키케팔로의 모습과는 영 딴판이어서, 의아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남자가 어떤 오해를 하고 있었는지 대강 이해한 그녀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한 뼘 커다란 앞발 뒤에 숨은 그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하던 차에, 모처럼 밝아진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얼떨떨해진 라히무스가 손을 치웠다. 가린 얼굴에서 떼어 낸 손이 다리 위로 툭 떨어졌다.

“귀엽다고 생각했어요, 꼬리.”

바닥에 처박은 시선을 들어 마주한 그녀의 얼굴이 활짝 피어나 있었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 없이도, 진심을 의심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처음 보는 그녀의 미소는 눈부시게 화사하고 아름다웠다.

우는 얼굴, 우울한 얼굴, 놀란 얼굴, 당황한 얼굴, 그동안 여자의 여러 가지 얼굴을 보았지만, 이토록 그늘 한 점 없이 활짝 웃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라히무스는 가슴이 뻐근해져서 홀린 듯 중얼거렸다.

“…예쁘다.”

조금 전까지 자기 얼굴을 가리는 데 쓰였던 손이 이번에는 조심스럽게 나니아의 작은 볼을 감쌌다. 하얗고 부드럽고 황홀했다.

“…너무 예뻐. 키스하고 싶다.”

남자의 굵은 목소리가 낯 뜨겁고 간지러운 소리를 중얼거렸다. 어느새 나니아의 얼굴에서 여유 넘치던 미소가 사라지고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눈을 내리깔자 라히무스의 다른 한 손이 황급히 나니아의 허리를 감았다. 그리고 그의 애끓는 시선이 한순간에 눈앞으로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입술을 부딪쳐 올 것만 같았던 분위기와 다르게, 남자는 달뜬 시선으로 나니아의 입술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볼을 붙잡은 손의 엄지가 말랑말랑한 입술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렸다.

남자는 이렇게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허술하게 세워 놓은 벽을 허물자마자 언제 거리를 두었냐는 듯 한달음에 간격을 좁혀 온다. 너무 쉽고, 또 어려웠다.

나니아는 달아오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선명한 욕망을 알아차렸다.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오늘 밤 침대를 데워 줄 여자가 필요했던 거라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남자의 텅 빈 방은 그를 난봉꾼이라 치부하고 싶었던 나니아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황량하기만 했다.

‘이 시간에 남자 혼자 쓰는 방에 들어오겠다고 떼쓰는 널, 내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머릿속에 그 짓 할 생각밖에 없냐고? 그래, 맞아. 근데 네가 그걸 알면, 지금 여기까지 쫓아오진 말았어야지.’

지금 이대로 가다간 도저히 아무 일도 없이 나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나니아는 이 벅찬 기류를 애써 부정하며 남자의 가슴을 밀어 냈다.

“오해가 풀렸다면 다행이에요. 나는… 우리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한 차례 거부당한 남자가 턱을 당기고 허리를 바로 세웠다.

“친구?”

인상을 찌푸린 채 그녀의 입에서 나온 낱말을 뇌까렸다. 얼토당토않다는 말투였다.

“…응.”

어줍게 대꾸하는 나니아를 내려다보며, 사내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쓸어 올렸다. 앞머리를 뒤집어 깐 손이 붉은 머리카락을 뿌리 끝까지 거칠게 흔들었다.

“나는 너랑 그런 관계 맺을 생각 없어. 너는 친구랑 섹스하고 싶어?”

나니아는 말없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나는 너랑 섹스하고 싶어. 난 너를 그렇게 봐.”

남자는 감정이 격해지면 말이 많아지고 빨라지는 경향이 있었다.

입에 담기 부끄러운 새빨간 단어가 반복되자, 나니아의 얼굴도 붉게 물들어 갔다.

“하아… 안아도 돼? 내 말은, 그러니까, 지금 팔을 벌려서 너를 안아도 되냐고.”

그는 험악해진 눈빛으로 포옹을 말했다.

남자의 흉통은 나니아의 양팔로 온전히 끌어안을 수 없으리만치 두꺼웠다. 그가 넓고 커다란 품으로 안아 주면, 솔직히 말해서 좋은 감정이 더 컸다. 그래서 거절할 수 없었다.

“응.”

나니아가 조그맣게 대꾸했다.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와락 끌어안겼다.

남자는 꼬옥 껴안은 나니아의 몸을 아주 천천히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면서 여자의 귓가에 소곤소곤 속삭였다.

“말했잖아, 너처럼 귀여운 여자애는 처음이라고….”

남자의 귀엽다는 말은 달콤하게만 들렸다. 하지만 나니아는 객관적으로 자기보다 예쁘고 귀여운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고 있었다. 오늘 1층에서 만난 사람들만 봐도 모두 나니아 자신보다 매력적인 이들뿐이었다.

빠르게 박동하는 리자드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나니아가 중얼거렸다.

“거짓말.”

남자는 세게 끌어안았던 팔의 힘을 풀고 나니아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녀는 남자가 못 미덥다는 듯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웃게 만들 수 있을지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다면 배우고 싶었다.

“젠장, 왜 못 믿는 거지? 지금도 내 머릿속엔 어떻게 하면 널 꼬셔서 한 번만이라도 저기 눕혀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인데.”

남자가 나니아를 다시 꽈악 끌어안았다. 볼에 닿는 그의 숨이 화끈거렸다. 리자드는 나니아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고 살짝 드러난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네 마음이 나와 같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지. 싫어하면 건드리지 않아.”

남자는 품에 꽉 차도록 끌어안았던 그녀를 놓아주면서 멀찍이 떨어뜨려 바라보았다. 혀끝이 씁쓸했다.

남자는 조금 서글픈 얼굴로, 그러나 분명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마.”

그 말을 마지막으로, 파도처럼 들이쳤던 그가 다시 잠잠해졌다.

나니아는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라히무스를 응시했다.

입을 다물면 끝없이 아득하고 무뚝뚝하게만 보이지만 의외로 단둘이 있을 땐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편이었다.

항상 자신의 마음을 감추고 쉬쉬하기 바쁜 여자는 그의 꾸밈없는 용기가 부러웠다. 저돌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는 사내의 모습은 사실 어느 정도 마음을 동하게 할 때가 있었다.

남자의 솔직함은 자극적이었다. 그를 따라 숨겨 왔던 자신의 속마음도 살짝 내비쳤다.

“나, 라히무스가 다정하게 대해 주는 게 좋아요…. 귀엽다고 말해 주는 것도, 예쁘다고 말해 주는 것도….”

누군가로부터 이토록 맹렬한 관심을 받아 본 적 없어서, 불가피하게 가슴이 뛰었다. 응해 주어선 안 되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쉽사리 끊어 낼 수가 없었다.

“키스하는 것도, 소, 솔직히, 그렇게까지 싫지는 않았어….”

조심스러운 손끝이 뺨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습관적인 행동이었지만 그게 사내를 애타게 하는 줄은 몰랐다.

“꼭 안아 주는 것도…. 누, 누가 날 그렇게 안아 준 적이 없어서….”

남자는 잠시 숨을 멈추고 나니아의 몸통을 억세게 끌어안았다. 덕분에 그녀는 급히 발꿈치를 들어 올려야 했다. 사내의 커다란 날개뼈에 손을 올려놓고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치만, 나…. 그 이상은 안 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걸.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아….”

수절한다고 알아주는 남자도 아닌데,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품에 안긴 채로도 라키바하프를 떠올렸다.

사랑은 육욕을 포함하지만, 육욕은 사랑을 포함하지 못했다. 그에게 육체적으로 끌리고 있지만, 사랑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마 그도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키스는 좋지만, 섹스는 무서워…. 이런 내가 당신한텐 너무 이기적이에요?”

남자의 큰 손이 나니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대로 허리까지 내려와 머리카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그 말은… 나한테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남자의 낮고 짙은 음성이 맞닿은 가슴에서부터 웅웅 울려왔다.

그래, 뿌리치기엔 너무도 달콤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을 갈망해 주는 이 감각이. 한 번도 타인을 소유해 본 적 없는 외톨이에게, 이 리자드의 애정은 지나치게 자극적인 쾌락이었다.

“그럼, 딱 지금처럼만…. 계속 나를 원해 줘요, 라히무스.”

작고 발칙한 숨결이 리자드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는 이것이 빠져나오기 힘든 덫이라는 것을 눈치챘으면서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얼마든지. 네가 원하는 만큼.”

* * *

이 관계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남자와 어둑어둑한 골목길을 걸으며 나니아는 고민했다. 하지만 어차피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소멸할 관계라, 머리 아프게 이름 지어 줄 필요조차 없는지도 몰랐다.

나니아는 고개를 들어 라히무스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그의 붉은 눈동자가 나니아의 얼굴을 마주 담았다. 한쪽만 삐딱하게 올라간 눈썹이 왜, 라고 묻고 있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응.”

“나 걱정해 주는 거죠, 길에서 나쁜 일이라도 당할까 봐.”

“응.”

“술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응.”

“그런데 아까는 혼자 돌아가라고 했었잖아요. 몇 번이나.”

“응.”

“그땐 내가 걱정되지도 않았어요? 떼쓰는 내가 미워서?”

“뒤에서 따라가려고 했는데.”

“아….”

새어 나간 탄식이 천치 같이 들렸다.

그리고 다시 또 침묵.

나니아는 스스로 말수가 없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라히무스를 상대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수다스러워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이, 이 남자는 어째 침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낯을 가렸다.

“라히무스도 빈 둥지, 거기서 태어났다고 들었어요.”

“빈 둥지 출신.”

“응, 그거.”

“그냥 비유적인 말이다. 버려진 알에서 태어났다는 의미.”

“파키케팔로가 라히무스는 조금 다르댔어요. 그게 무슨 말이었을까요?”

나니아가 묻자 라히무스가 표정을 굳혔다.

“…글쎄.”

무슨 사정인지 몰라도 말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썩 유쾌한 주제가 아니긴 했다. 나니아는 사내의 눈치를 살피다 급히 화제를 돌렸다.

“저희 아버지도요, 서쪽 사람이었대요.”

이제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 도망친 죄수였다더라, 쫓기는 빚쟁이였다더라,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으나 진실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리자드들이 서대륙에서 왔다는 사실을 밝혔을 때 거부감보다 반가움이 앞섰던 것도 어딘지 모를 아버지의 고국과 그들의 고향이 연관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일기장이 있는데요, 모르는 글자라서 읽을 수가 없거든요. 그래서 계속 가지고 다니는 중이에요. 언젠가 그 문자를 해득한 사람이 나타날 수도 있으니까요. 읽을 수만 있다면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내가 어디서 왔는지 밝힐 수 있을 텐데.”

문제의 일기장은 당연히 이번 여행에도 동행했다. 영지 밖의 사람을 만날 기회는 흔치 않았으니까 말이다.

“어쩜 라히무스가 읽어 줄 수도 있겠네요!”

당신이 어디서 왔는지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는 듯 반색하자, 라히무스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배움이 깊은 편이 아니라.”

떠올려 보니 그가 편지를 앞에 두고 글자를 몰라서 읽지 못했던 게 기억났다. 단순히 모국어가 아니기 때문인 줄 알았다. 나니아가 혹시나 하는 말투로 물었다.

“라히무스 까막눈이에요?”

남자는 순간 당황하여 변명처럼 들리는 말을 내뱉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지만…! 리자드 문자밖에 모르니까, 나는.”

그나마도 간신히 익혔다는 사실은 비밀로 하고 싶었다. 남자는 지독히 육체파라 머리 쓰는 일에는 약했다.

“그렇겠다. 우리 아빠가 리자드는 아니었을 테니까.”

약간 김이 새는 기분이었다. 나니아가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하지만 편지를 쓰려면 역시 글자는 배워 놓는 게 좋겠어요.”

“편지?”

“역시 어려울까요? 여기서 당신 사는 곳까지 연통을 주고받는 건.”

말로 글로 옮겨 쓰느니 차라리 용병 임무를 몇 탕이고 더 뛰는 편이 홀가분한 라히무스였지만, 그녀 앞으로 편지를 붙이는 상상을 해 보았더니 당장에 펜을 쥐고 싶어졌다. 나니아가 자신과 그런 말랑말랑한 짓을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무척 낯간지러웠다.

“내가 당신 문자를 배우는 게 빠를까요? 나 그쪽으로는 좀 자신 있어요. 훌레리안도 혼자 깨쳤거든요.”

배움에 있어서 나니아는 제법 영리한 학습자였다. 어깨너머로 배운 것치고는 셈도 빠르고 글씨도 정갈했다.

“그러니까 헤어지기 전에 가르쳐 주고 가요. 알았죠?”

리자드 문자는 표의 문자라 하루아침에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으니 너의 언어를 배우겠다고 말하는 그녀는 무척 갸륵해서 그 사실을 일러 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남자의 녹진한 시선이 나니아의 얼굴에 끈끈하게 흘러내렸다. 그가 발걸음을 멈추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헤어지기 싫은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파비푸스 저택 담벼락 앞에 도착해 있었다.

헤어지기 싫다는 그의 말이 단지 오늘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필연적인 이별에 대한 이야기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일분일초라도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어서 말도 포기하고 걸어왔는데 야속한 시간은 쏜살처럼 빠르게 흘렀다.

밤바람이 두 남녀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겹쳐진 시선 끝에 작별의 신호가 울렸다.

“굿 나잇 키스해 드릴까요.”

나니아가 물었다. 사내의 뾰족한 눈이 휘둥그레졌다. 괜스레 앞머리를 털고 그녀 앞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갔다. 허리를 감쌀까 볼을 감쌀까 고민하던 두 손이 양어깨를 붙잡았다.

“너랑 키스하려면 허리 한참 숙여야 하는 거 알아?”

“저도 열심히 발꿈치 들고 있거든요.”

남자가 피식 웃었다. 설익은 미소가 그의 얼굴을 장식했다.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마주한 라히무스는 평소보다 더 근사하게 느껴졌다.

입술이 점차 가까워졌다. 따뜻한 숨결이 눈을 감긴다. 남자의 입술은 그 숨결보다 더 뜨거웠다.

짧게 끝날 것 같았던 입맞춤은 생각보다 길게 늘어졌다. 남자는 갈급하게 그러나 천천히 몇 번이고 입술을 빨았다.

어깨를 움켜쥐었던 손들이 나니아의 뺨을 감싸고 목 뒤를 어루만져 왔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대하는 것처럼 부드러운 손길에 몸도 마음도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때,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밤길 위로 인영이 보였다. 한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뷔셀?”

귓가에 꽂히는 익숙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이 든 나니아가 라히무스의 가슴을 밀어 냈다.

“가주님….”

마차 세 대는 멈춰 설 수 있을 만치 넓은 도로 맞은편. 라키바하프가 석상처럼 서 있었다.

돌아오지 않는 나니아를 찾아 친히 저택 밖을 서성이던 그가 뜻밖에 목격한 것은, 자신의 여리고 작은 시녀가 웬 무뢰한에게 입맞춤 당하는 모습이었다. 깨나 충격적인 광경이었기에 그대로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남자는 놀란 기색을 금하지 못하고 뚜벅뚜벅 길 건너편으로 걸어왔다.

“지금 둘이… 언제 그런 사이가 되었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기막혀하는 라키바하프를 앞에 두고 나니아는 말없이 입술만 달싹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당장에 라히무스에게서 한 발짝 떨어지더니 그쪽은 쳐다도 보질 않았다.

죄를 지은 아이처럼 고개를 수그리는 모습과 없는 사람 취급하는 태도에 오기가 생겼다. 라히무스는 불만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다시 나니아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부지불식간에 다가온 손이 그녀의 얼굴을 거칠게 붙잡아 돌렸다.

“라히뭇….”

그리고 갑작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사내는 보란 듯이 거창한 마찰음을 냈다. 쪽, 하는 짧고 질척한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사내는 다른 남자의 존재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그의 세상에는 오직 나니아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어지러운 보랏빛 눈을 들여다보며 속살거렸다.

“잘 자.”

확인 사살 같은 입맞춤을 재차 두 눈으로 확인한 라키바하프가 성큼성큼 걸어와 나니아를 가로채듯 빼앗아 갔다.

단단히 굳은 입매에서 성난 기색이 읽혔다.

“허랑방탕하군.”

단호한 말투와 언짢은 목소리가 사내를 비난했다. 원색적인 시선으로 상대방을 노려보기는 라히무스도 마찬가지였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거친 두 시선이 맞붙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나나.”

남자는 날 선 시선을 라히무스에게 고정한 채로 나니아를 향해 말했다.

라키바하프의 손이 나니아의 손을 강하게 붙들었다. 발걸음은 빠르고 성급했다. 여자는 버겁게 그의 커다란 보폭을 따랐다.

라히무스는 저택 안으로 사라져 가는 그들의 등 뒤를 지켜보았다.

여자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리자드는 답답한 상의 목둘레를 짜증스럽게 잡아당겼다.

성벽을 사이에 두고 남자와 거리가 생기자마자 훈계가 쏟아졌다. 그 와중에도 보폭 넓은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너를 밀어내서 빨리 그 공허함을 채워 줄 대체품을 찾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막 만나면 안 돼.”

어디부터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 까마득했다. 나니아는 그저 라키바하프에게 다른 남자와 키스 하는 장면을 들켰다는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새하얬다.

“저 남자는 아니다, 뷔셀. 질이 낮아 보이잖아.”

흙먼지 냄새나는 용병 출신 사내는 우아하고 세련된 귀족 남자의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그런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나니아는 파비올라 앞에만 서면 그지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꼈다. 좀처럼 똑똑하게 의견을 말하기가 힘들고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몸과 마음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그저 고개만 간신히 가로저으며 중얼댔다.

“가주님 때문에 아무 남자나 만난다거나,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그런 애 아니에요.”

나니아는 후회했다. 좋아한다고 눈물 뚝뚝 흘리며 고백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다른 남자의 입술에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보이다니. 얼마나 가볍고 경박해 보였을까.

하지만 영주는 나니아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하지 못했다. 제대로 들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세상에 착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남자는 얼굴이 다가 아니란다, 뷔셀.”

공주가 아름답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을 준 그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그는 나니아가 단순히 사내의 다부진 체격과 반반한 얼굴 따위에 이끌려 경솔한 만남을 가진 것이라 생각했다.

영주의 선한 눈꼬리가 애처롭게 휘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가장 결정적인 결격 사유를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인간도 아니잖아.”

맥이 풀린 목소리는 그 남자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연애 상대인지 알라는 듯 나니아를 책망했다.

라키바하프는 그녀로부터 어떤 반박을 듣는 것이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틈을 주지 않고 설교를 늘어놓았다.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니?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는 너를 동생처럼 자식처럼 여기잖아. 그래서 네가 아무 남자나 만나는 꼴은 못 봐.”

어떻게 한낱 시중드는 여자애를 가족같이 생각한다는 건지. 그는 나니아에게 진짜 오라버니도 뭣도 아니면서 아버지 행세까지 하려고 들었다. 하녀는 그런 것을 바란 적도 없었다.

“저는 가주님을 친오빠처럼 생각한 적 없어요. 그 남자를 가주님 대체품으로 생각한 적도 없어요. 가주님을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 남자는 없다구요….”

“잘 몰라서 하는 말이야. 지금 당장은 섭섭하겠지. 하지만 네 마음을 진지하게 여길 수 없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단다. 넌 선택권이 없었을 뿐이야. 눈에 차는 남자를 고르기에 선택의 폭이 좁고 제한적이었을 테니까. 너는 착각하고 있는 거야.”

또 이런 식이었다. 미숙하고 철모르는 어린아이 취급.

어떤 남자를 만나고 다니는지 이래라저래라 참견하는 그의 간섭이 싫은 게 아니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가 자신을 돌아보고 신경 써 준다는 사실은 오히려 기꺼웠다. 그게 무엇이든 무관심보다야 나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감정을 풋내 나고 어설픈 어린애 소꿉장난 정도로 치부하는 데에는 화가 났다. 차라리 자신의 외모나 신분 문제를 들먹였다면 슬플지언정 분개하지는 않았으리라.

“착각… 착각이라구요?”

라키바하프는 다양한 인연을 만날 기회가 부족했던 것뿐이라며 그녀의 마음을 다시금 일축했다.

“내일모레 고모부님이 과시연을 열거야. 귀족들은 물론 평민들까지 입장이 허락되니 적잖은 사람들이 모일 테지. 너는 내 손님이니까 상석에서 머물 수도 있을 거야. 머리도 좀 만지고, 예쁘게 차려입고, 거기서 새로운 만남을 찾아보자꾸나.”

라키바하프가 나니아의 검은 머리카락 끝을 손에 쥐고 만지작거렸다. 좋은 제안이지 않느나며 웃는 얼굴이 사무치게 아름다워서 그녀는 울화가 치밀었다.

“필요 없어요!”

나니아가 영주의 손을 홱 뿌리치며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렀다. 본데없이 무례한 행동이었다. 그녀답지 않은 모습에 영주는 당황하면서도 나무라듯 타이르듯 말했다.

“언제까지 애처럼 굴 거야.”

“가주님이야 말로 언제까지 저를 어린애 취급하실 생각이세요? 상대가 궁했던 건 제가 아니라 가주님이시겠죠. 격에 맞는 아름다운 여자가 주변에 없었으니 그렇게 홀랑 공주님께 넘어가신 거라구요. 이런 감정 처음이라느니 첫눈에 반했다느니 숫보기 티를 내지 못해 안달이셨잖아요.”

“…너.”

분하고 서러워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다는 듯, 라키바하프의 얼굴에 모멸감과 수치심이 스쳤다.

그가 자신을 여자로 보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야속하여 상처 주고 싶은 마음에 못된 말들을 내뱉었지만, 막상 섭섭해하는 그의 얼굴을 보니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또다시 격양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내지르고 말았다. 무르익은 사랑은 수확해 주는 사람이 없어 썩어 갔다.

“가주님께서나 실컷 새로운 인연 찾아보세요. 저는, 저는 당신 말고는 필요 없어요!”

상처 주고, 상처받고, 하녀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길도 잘 모르는데 눈물까지 시야를 가렸다. 돌이킬 방법도 없이 틀어져 가는 관계에 겁이 났다. 그저 앞으로 내달렸다.

밤새워 흘린 눈물에 얼굴이 퉁퉁 부었다. 눈두덩이와 눈 밑 지방이 서로 붙으려는 것을 간신히 떼어 낸 기분이었다.

* * *

아침 일찍부터 호출을 받고 찾아간 벨의 방은 나니아의 지친 마음과 관계없이 벌써 행사 분위기였다. 방 안 가득 주인을 찾는 예복들이 이곳저곳에 널려 있어 여기가 침실인지 옷가게인지 가늠이 안 될 정도였다.

창틀에 걸터앉아 있던 챠링고가 손에 든 빨간 사과 한 알을 베어 물었다. 그녀가 나니아에게 옷의 출처를 말해 주었다.

“너희 영주가 옷을 고르라고 보내왔는데.”

방에는 챠링고, 벨, 그리고 못 보던 사람까지 곁에 있었다. 물건을 팔기 위해 직접 저택을 방문한 상인이었다.

내일 라키바하프 파비올라의 내방을 환영하기 위해 과시연이 열린다. 그때 입을 옷을 고르라는 뜻이렷다.

이 모든 아름다운 옷들이 공주의 환심을 사기 위한 영주의 수작이라 생각하니 가슴이 차게 식었다. 나니아는 자신이 왜 이 과정에 참여해야 하는지 고깝고 불편하여 표정을 굳혔다.

챠링고가 입 안의 사과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영주가 아가씨를 많이 아끼기는 하나 봐. 보통 시녀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나?”

“…제 옷도 고르는 거예요?”

나니아는 뜻밖의 이야기에 놀라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녀는 태어나 이런 화려한 옷은 단 한 벌도 가져 본 적 없었다.

벨이 보라색 염료로 물들인 드레스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 난리를 겪고 곁에 남은 자기 사람이 이제 나니아 하나뿐이니 새삼 중해졌나 보죠.”

나니아는 조금 전까지 아니꼬운 시선으로 노려보던 드레스들을 이제는 뒤숭숭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저는 이런 옷을 입을 이유가 없는데….”

사교계에 입성할 길 없어 이런 연회 참여 경험도 적은 파비올라가 아랫사람의 옷까지 챙길 겨를이 있었다는 게 오히려 놀라웠다.

“그러게요. 대체 누구에게 예뻐 보이려고 이런 옷을 입히지? 영주 본인이 보고 싶은 게 아닐까요?”

벨이 미묘하게 웃으며 말을 붙였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나니아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짝사랑하는 상대의 짝사랑 상대와 이런 얘기를 나누는 게 참 어이가 없었다. 그녀는 삐딱하니 불만스러운 데가 있는 말투로 어제 있었던 일을 짧게 축약하여 설명했다.

“가주님께서 저보고… 파티에서 새로운 남자 하나 골라잡아 당신한테는 관심 끄길 바라시네요.”

나니아의 솔직한 불평을 듣고, 벨은 입을 가린 채 풉 웃었다. 덕분에 안 그래도 언짢았던 기분이 더욱 불쾌해졌다.

“이번 기회에 신분 상승의 기회를 노려보라 이거군요.”

이따금 왕이나 귀족의 눈에 들어 보다 높은 지위를 얻게 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무사, 괄목할 만한 기술 발전을 이룩한 기술자, 특출 난 재능을 보이는 아틀리에 화가, 큰 재산을 축적하여 귀족들의 사치를 부담하는 장사꾼 등이 그러했다. 그들은 평민 출신이었기에 완벽한 어퍼 클래스로 인정받지는 못하였으나, 그들 곁에서 어느 정도 명예와 부귀를 보장받았다.

“누군가의 애첩 자리를 노려보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긴 하죠.”

챠링고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지도를 하나 펼쳐 들었다.

파비푸스는 남쪽 항구와 대도시 폴핀을 잇는 통상로 중간에 위치했다. 파비올라의 반대로 동쪽 숲은 길을 터놓지 않아 문호가 막혀 있다시피 했지만, 남쪽이나 북서쪽으로는 제법 번듯하게 길이 닦여 있었다. 초대를 받은 귀족들은 이르면 오늘 오후, 늦어도 내일까지는 당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무슨 파티를 이틀 만에 준비해?”

챠링고가 의문을 표하자 벨이 대답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조카를 위해 우리가 이 정도 되는 파티를 하룻밤 침대 위에서도 준비할 수 있다…. 애당초 인맥과 금권을 자랑하려는 목적에 딱 맞는 일정이지요. 그게 요즘 유행하는 개방 연회의 묘미니까요.”

귀족들의 과시연은 인간을 서열화하여 접대하는 방식의 파티였다. 주체자의 권세를 자랑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으로, 빠른 시일 내에 화려하게 준비할수록 그 효과는 더욱 극대화되었다.

지난밤 상석에서 머물게 해 줄 테니 좋은 남자를 찾아보라고 말하던 라키바하프가 떠올라 속이 쓰렸다.

딴에는 챙겨 주는 것 같지만 나니아는 도저히 좋은 감정이 들 수가 없었다.

그는 도대체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보는 걸까. 관심 없다는 사람에게 이런 옷까지 보내면서 치장하라고 종용하다니. 하녀라고 해서 마음도 배알도 없는 줄 아나 보다.

말과 생각이 좀처럼 곱게 나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은 공주도 매한가지였다. 나니아는 화풀이하듯, 하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는 이런 옷 필요 없어요.”

그러자 벨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어머, 그래요? 나도 필요 없는데.”

‘공주님은 왜요?’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그녀가 흘긋 눈동자를 움직여 외부인의 존재를 지시했다. 눈빛을 받은 장본인은 자세를 바꾸어 넙죽 허리를 숙였다.

“저는 방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입어 보신 옷은 꼭 따로 옆에 분리해 주시고, 부르실 때 이 종을 흔들어 주세요.”

서늘해진 분위기를 눈치 좋게 알아차린 상인은 몇 가지 당부 사항을 남겨 놓고 자리를 비켰다.

벨은 그녀가 문을 완전히 닫고 나가는 것까지 확인한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나는 안 가요. 중앙에 한 번이라도 와 본 귀족이라면 내 얼굴을 모르지 않을 테니까. 방 안에 콕 갇혀 있어야 해요. 그러니까 나니아 당신 옷이나 고르도록 하죠.”

벨은 즐거운 듯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방 안 이곳저곳에 널려 있던 옷걸이를 집어 나니아의 턱 밑에 가져다 대기 시작했다.

나니아는 화려하고 불편하게 주름 잡힌 원단이나 그 위로 어른어른하게 부착된 레이스 같은 것들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레이스를 짜는 것이 얼마나 수고로운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손톱 끝에 걸린 실오라기 한 줄로도 감당할 수 없이 훼손될 수 있는 섬세한 편물이었다. 보온, 보호의 기능은 전혀 없이 그저 미적인 목적만을 추구하는 화려한 옷 장식들은 그것을 두른 사람의 부와 지위를 과시하는 동시에 몸가짐을 구속하고 제한했다.

“머리가 까맣고 피부가 하얘서 어떤 색도 잘 받는군요.”

인형 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벨은 재미있어했다. 시기 질투의 대상이 정성스럽게 옷을 골라 주는 것은 참으로 오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녀의 칭찬은 그게 무엇이든 기만 같았다. 나니아는 조심스럽게 옷을 물리치며 말했다.

“제가 이런 옷을 어떻게 입어요.”

한 벌에 대체 얼마나 할까? 그 값어치를 짐작해 보다 부담스러워 고개를 저었다. 분수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면 탈이 나고, 내 것이 아닌 옷을 입으면 화를 입는 법이었다.

하지만 벨은 개의치 않으며 이번에는 검은 레이스로 은은하게 장식된 옷을 가져왔다.

“남의 돈으로 사치하는 거 싫어해요? 난 좋던데. 그런 낙이라도 없으면 왕궁 생활은 힘들었거든. 음, 이렇게 어두운 염료로 물들인 명주실 레이스는 눈에 띄지 않아서 감각 좋은 사람들만 알아보는 은근한 멋이 있지.”

벨은 옷을 고르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나니아는 도움을 청하듯 챠링고를 불렀다.

“챠링고는요? 챠링고도 내일 연회 장소에 가지 않나요?”

그녀는 벨의 눈과 귀를 대신하여 도성 소식과 왕궁 근황을 알아볼 계획이었다.

“가긴 할 거지만, 나는 그런 바보 같아 보이는 옷 안 입어. 손 붙잡고 빙글빙글 돌자는 멍청한 말이나 듣기 위해 참석하는 게 아니거든. 오, 그런데 이건 제법 반짝반짝하니 마음에 드는걸?”

챠링고가 보석 박힌 브로치를 손에 들고 요리조리 돌려 보았다. 벨이 그녀의 안목을 의심하는 눈초리로 말했다.

“비단옷은 관심 없고 모조 보석은 좋다?”

“반짝거리는 거 싫어하는 리자드가 어딨어.”

챠링고가 휘파람을 불었다. 벨은 콧방귀를 뀌며 또다시 검은 드레스 한 벌을 골라 손에 들었다. 챠링고도 한가하고 여유로운 기운으로 참견했다.

“나니아. 이거 어때요?”

“완전 노티 나.”

“우아하고 고급스럽잖아요.”

“굳이 따지자면 이 아가씨는 귀여운 느낌이죠. 그건 너무 귀부인 디자인 아닙니까?”

“뭘 모르네.”

“못해도 애를 둘 셋은 낳은 것 같아 뵈잖아요.”

“그 느낌이 좋은 건데요?”

나이에 맞게 입어야 한다는 주장과 원숙한 느낌이 좋다는 의견 사이에서 옷을 입을 당사자는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 * *

라히무스는 오늘 방구석에 처박혀 아무 데도 나가지 않을 계획이었다.

둔갑약 복용에는 부작용이 따랐다. 그의 경우 심한 두통이었다. 해소할 길 없는 지속적 편두통은 전투에서 입는 창상과는 달리 참는다고 능사가 아니었다. 근육이 찢기고 피가 흐르는 고통과는 불쾌함의 종류가 달랐다.

사내는 꼬리를 허벅지에 바짝 붙여서 하네스로 조였다. 긴 꼬리 끝은 마지막으로 발목에 가서 묶였다. 외출할 때는 다리까지 가려 주는 로브를 걸쳤다. 편치 않은 차림이었지만 두통보다는 나았다. 언제 어디서 인간을 마주치게 될지 몰라서 치르는 수고였다.

이를테면 지금과 같은 상황 때문에.

-똑똑똑.

찾아올 사람 없는 객실에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남자는 벗고 있던 웃옷을 묵묵히 챙겨 입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벌컥 방문을 열었다. 조심성이 없다기보단 조심할 필요가 없는 편이어서 그랬다.

“안녕, 라히무스.”

그곳엔 어제보다 더 귀여워진 나니아가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약상자의 위치를 확인했다. 먹어야겠군.

그는 들어오라는 듯 더 큰 각도로 문을 열어 주었다. 하지만 어쩐지 반기는 기색은 아니었다. 남자는 인사말도 없이 테이블 앞으로 향했다.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니아는 또다시 아리송해졌다.

“무슨 일 있어요?”

남자는 이번에도 대꾸가 없었다. 말없이 가루약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제는 그녀도 골이 나려고 했다. 사내는 생각보다 종잡을 수 없는 변덕쟁이였다.

“왜 그래요?”

“뭐가.”

“또 화난 것처럼 굴잖아요.”

“…화낸 거 아니야. 그냥 조금….”

어젯밤 가슴 언저리에 쌓인 감정의 잔여물이 아직도 남아 있는 상태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남자를 따라가는 너를 보며 처절한 패배감을 느꼈노라고, 그래서 조금 삐졌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얄궂은 기분이 들어 여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콕 찍었다.

“그 남자도 질투하던가?”

그 남자. 라키바하프를 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바깥 공기를 쐬며 조금 나아지는가 싶었던 기분이 다시 또 수심에 빠졌다.

“그분한테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무룩하게 중얼거린 여자는 터덜터덜 테이블 앞으로 걸어가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았다. 저택의 푹신푹신한 소파에만 앉다 보니 엉덩이 버릇이 나빠졌다.

리자드도 맞은편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았다. 그를 받치기에 턱없이 작은 의자였다. 평소 반듯하게 정자세를 유지하는 그가 나니아 앞에서는 미묘하게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였다.

비딱하니 턱을 괴고 여자를 응시했다. 그녀는 애써 밝은 척하며 물었다.

“왜 왔냐고 안 물어봐요?”

남자의 길게 찢어진 눈매가 천천히 껌뻑였다.

“보고 싶었어.”

“…동문서답하지 말구요.”

나니아는 얼룩덜룩한 양모 가방 안에서 종이와 펜을 꺼냈다.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감추기 위해 애쓰는 게 보였다.

“가르쳐 줘요, 당신이 쓰는 글자.”

편지를 쓰겠다는 말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새로운 지식을 경험하고 배우겠다는 의지로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대단한 학구열이었다.

라히무스는 어딘지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우리 글자는 한 글자 한 글자에 의미가 담겨서, 소리 나는 대로 쓰지 않아.”

“이론 설명은 됐어요.”

빨리 뭐라도 써 보라는 듯 나니아가 라히무스 손에 펜을 쥐여 주었다.

뭐부터 알려 줘야 할지….

리자드는 가르치는 일에 자신이 없어 보였다. 여자가 잉크 뚜껑을 열어 맞은편의 라히무스를 향해 스윽 밀었다.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어때요? 이를테면 숫자라거나.”

악필에게 배우면 악필이 되는 게 아닐까. 라히무스는 속으로 신음했다.

펜촉이 잉크를 머금었다. 요령 없는 손길에 잉크 한 방울이 종이 위로 똑 떨어졌다. 딥펜에 익숙하지 않은 티가 났다.

사내는 천천히 획을 그었다. 평소 같았으면 개발새발 휘갈겼을 그지만, 관심 있는 여자 앞에서만큼은 필체가 단정한 남자로 보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그게 악필인지 달필인지 구분도 못 하겠지만.

“와아.”

별것도 아닌데 단지 처음 보는 글자라는 이유로 여자가 작게 환호해 주었다.

어찌 보면 그의 이미지 때문만이 아니라 스승 된 입장에서 바르고 곧은 정자체를 보여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일에서부터 십까지 꾹꾹 눌러쓴 글자를 나니아에게 내밀었다. 펜 손잡이도 잡기 쉬운 쪽으로 돌려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숫자라 그런가 직관적이네요. 가만있어 봐요. 나 안 보고 쓸 수 있어요.”

나니아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글씨가 쓰인 종이를 보이지 않게 뒤집고는, 기억나는 그대로 따라 써 보기 시작했다.

“이거죠, 맞죠?”

다시 종이를 뒤집어 정답지와 확인하며 여자는 즐거워했다.

“너무 쉬웠어요. 다른 거, 다른 거요.”

나니아가 새로운 종이를 내밀자, 사내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본인이 글자를 처음 배우던 때를 기억해 내는 중이었다.

생각을 마친 남자가 글자 여섯 개를 차례로 적어 내려갔다. 종전과 달리 좀 더 복잡하고 추상적인 모양이었다.

“뜻이 뭔가요?”

리자드가 글자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 가며 뜻을 설명했다.

“불, 물, 땅, 바람, 어둠, 빛.”

나니아는 남자가 쓴 글자 아래로 똑같이 따라 그려 보면서도 긴가민가했다.

“어렵진 않은데, 자주 쓰일 말들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런가?”

이보다 더 실용적일 순 없는데. 리자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니아는 제시해 준 글자를 여러 차례 따라 써 보면서도 동시에 다른 말을 가르쳐 달라 요구했다.

“이런 거 말고, 좀 더 편지에 쓸 만한 말들부터 알려 주세요. 당신이 듣고 싶을 말들.”

나니아는 아예 뭉치째로 종이를 넘겨주며 말했다.

“연습하기 좋게 한 글자에 한 장씩이요.”

라히무스는 다시 종이 한 장을 가슴 앞에 가져다 놓고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눈썹을 찌푸려 가며 고심하더니, 금방 글자 세 개를 적어서 건네주었다.

“이건 뭐예요?”

나니아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종이 세 장을 가지런히 정렬했다.

이번에도 사내의 긴 손가락이 왼쪽부터 차례로 글자를 짚었다.

“이건 뽀뽀.”

“…….”

“이건 성교.”

설명하는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느껴졌다.

나니아는 얼굴을 붉히며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애초에 듣고 싶은 말을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이 패착이었다. 이럴 때야말로 좀 진지해질 수는 없는 걸까.

나니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려는데, 남자가 마지막 글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좋아해.”

‘좋아해’라는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 뜻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남자의 짓궂은 목소리에서 끈적한 기운을 느꼈다. 히죽 웃고 있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고개 들어 마주한 라히무스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분명 화를 낼 타이밍인데 말문이 막혔다.

나니아는 폐를 밀어 내리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곤 뱉는 숨과 함께 따져 물었다.

“그러니까… 두 개 합치면 그, 그거 좋아, 라는 뜻이 되어 버릴 거 아녜요.”

나니아는 라히무스 대신 탁자 위의 종이를 노려보았다. 손에 잡히는 종이 한 장을 집어 양손으로 와작와작 구겼다. 무참하게 구겨진 종이는 공 모양이 되어 사내를 향해 날아갔다.

“몇 번을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당신 진짜 저질이야.”

종이 쓰레기가 남자의 넓은 가슴팍을 때리고 바닥으로 톡 떨어졌다. 그는 뭐가 좋다고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탁자 앞에 기울였던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왜 그렇게 항상 뺨 맞을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내가 뭘.”

“당신은 언행이 매번 부, 불순하잖아요.”

등받이에 기댄 허리가 나태하게 흘러내렸다. 수납되지 않는 다리가 탁자 바깥쪽을 비스듬히 가로질렀다.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난 원래 지저분하게 말하는 편인데.”

나니아는 새초롬하게 눈을 흘겨 뻔뻔한 낯짝의 리자드를 훑어보았다.

“그래도 네 앞이라 많이 자제하는 중이야.”

씨익 웃는 얼굴이 불량해 보였다. 아무리 좋게 봐 줘도 시정잡배 같은 인상이었다. 품행이 단정치 못해 보이는 느낌은 그의 얼굴에 남은 상처나 커다란 몸집, 그을린 피부색 등에서 비롯되었다. 삐죽하고 험상궂은 표정은 잘못 얻어걸리면 쓴 고초를 겪게 해 줄 것 같이 위협적이었다.

하녀는 이자와 다르게 아름답고 우아한 남자를 알고 있었다. 흰 눈처럼 곱고 하얀 피부. 반짝반짝한 금발 머리. 선하게 내려앉은 눈꼬리. 그 안에 하늘빛을 머금은 푸른 눈. 부드럽고 해사한 웃음.

나니아가 좋아하는 얼굴은 그런 쪽이었다.

-끼이익.

의자 끌리는 소리가 소녀를 환상 밖으로 이끌었다. 남자가 나니아의 의자를 끌어당기는 소리였다.

“듣고 싶은 말도 좋지만, 하고 싶은 일이 더 많은데.”

그것은 마치 사람이 앉아 있지 않은 빈 의자처럼 무력하게 견인되었다.

남자가 슬쩍 나니아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키스할까?”

그 말은 얼핏 아침 먹자는 제안처럼 평이하게 들렸다.

하지만 마주 본 그의 붉은 눈동자는 긴장감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요구한 것치고 마음가짐이 허술했다. 거절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것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느껴졌다. 거만한 척 어깨에 걸쳐 놓은 팔은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묘한 지점에서 서툴게 구는 경향이 있었다.

나니아는 말없이 사내의 입술을 응시했다. 그가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라히무스와의 스킨십은 판돈 없는 도박 같았다. 안전하고, 찜찜하고, 즐거웠다.

잃을 것이 없는 관계 속에서 소녀는 담대해졌다.

“…지저분하게 할 거야?”

남자의 붉은 눈이 아주 잠깐 커다래졌다가 다시 가늘어졌다. 여자의 난데없는 질문에서 예상 밖의 미세한 기대감을 느낀 것이었다.

사내는 나니아의 머리채를 쓸어 올리며 그녀의 뒤통수를 움켜쥐듯 붙잡았다. 그리고 또다시 인간이 아닌 것처럼 숨을 쉬었다.

“사실 좋아하지? 내가 상스럽게 구는 거.”

남자의 목에 걸린 목줄이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질수록 음성은 낮고 서늘해졌다.

“입 벌려. 당장 네 입 안 곳곳 핥아서 더럽힐 거니까.”

공격성을 띠기 시작한 리자드가 그르릉거리며 이를 드러냈다. 나니아는 다가오는 그를 피해 손등으로 입을 가렸다. 남자는 거기다 자기 입술을 가져다 붙였다. 이미 키스할 때나 다름없는 거리에서 남자의 맹렬한 시선이 끓고 있었다.

“싫어, 더러울 것 같아….”

“거짓말.”

사내는 소녀의 양쪽 손목을 빼앗았다. 옴짝달싹할 수 없어진 그녀는 더 이상 얼굴을 가리지 못했다. 리자드의 너른 등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가리고, 여자의 얼굴 위에 그늘을 드리웠다.

남자가 잇새로 위협하듯 말했다.

“지금 얼마나 안달 난 얼굴 하고 있는지 모르지.”

“…아니야.”

그는 이 작은 인간 여자가 자신을 무서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행동을 멈추고 자제하려는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에서는 두려운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은은한 흥분의 기운이 옅게 번져 있었다.

사내는 자신했다. 그녀도 지금 자신을 원하고 있다고.

남자는 나니아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침대로 데려갔다. 내려 달라든가 싫다든가 하는 말도 없었고, 평소처럼 그에게 마구잡이로 손찌검하지도 않았다.

그는 침대 가운데로 여자를 쓰러뜨리듯 눕혀 놓고 단숨에 그 위를 올라탔다.

그리고 곧장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듯 여자의 입술을 훔쳤다.

이전의 키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치 깊은 각도로 구순이 맞물렸다. 남자는 준비 운동 하듯 몇 차례 반복적으로 나니아의 입술을 빨았다. 그는 나니아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해 첩첩거리는 소리를 일부러 더 크게 내는 것 같았다.

뒤이어 남자의 축축한 혀가 거칠게 약동하며 나니아의 두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는 예고했던 대로 입속 깊은 곳을 헤집어 댔다. 그의 혀가 입 안쪽을 쓸고 핥았다. 우왕좌왕하는 나니아의 혀는 힘없이 핥아지고 괴롭혀졌다.

사내가 잠시 입술을 떼어 내고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하아… 좋아하는 것 같은데, 나냐.”

여자의 젖은 입술이 반짝거렸다. 목석처럼 딱딱하게 굳어서는 아무 말도 못 하는데, 그 서툰 모습이 사무치게 귀여웠다. 쾌락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이 앙다문 입술과 촉촉한 눈시울이 마음을 동하게 했다.

“아, 아냐…. 더러워, 싫어.”

“또 거짓말….”

사내는 코끝을 간지럽히는 여자의 체취를 가슴 깊숙이 들이마셨다. 아득한 정신의 한편이 황홀해졌다.

갈급했던 색욕의 불씨가 어느 정도 잦아들자 남자는 진득해졌다. 다정한 척하는 음험한 목소리가 나니아를 현혹했다.

“좋아한다고 인정하면 다시 쪽쪽 빨아 줄게.”

일부러 저급한 말만 골라 하는 그가 얄미웠다. 여자는 칭얼거리며 남자의 볼을 밀어 냈다.

“싫어.”

키스가 싫다는 건지, 좋아한다고 인정하기가 싫다는 건지. 아마도 후자인 것 같다고 라히무스는 생각했다.

“내 밑에 깔려서 그런 소리 해 봤자 이제 앙탈로밖에 안 들려.”

그는 자신을 밀어 내는 나니아의 손과 다시금 실랑이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나니아는 자신의 팔목을 사로잡은 리자드의 큰 손을 살폈다. 그는 뭐든지 다 컸다. 손도, 가슴도, 어깨도, 허벅지도….

사내의 널찍하고 무거운 가슴 밑에 깔려서 그의 커다란 혀를 입 안 가득 버겁게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자극적인 일이었다.

그의 육체가 보는 것만으로 성적인 흥분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이제는 나니아 자신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리자드의 짙은 수컷 냄새가 좀처럼 솔직해지지 못했던 소녀의 은밀한 음심을 부추겼다. 그를 뿌리치지 못하고 어떻게든 해 주었으면 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라히무스는 정말 그녀가 무언가를 부탁하기 전까지는 움직여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저 비열하고 엉큼한 미소를 띠고 있을 뿐이었다. 소녀는 수치스러운 듯이 두 눈을 꼭 감고 입을 열었다.

“시, 싫지는….”

어렵사리 조르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좋아. 좋으니까… 이제 다시 해 줘….”

번복된 대답에 사내는 다시 이성 없는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아주 간발의 차이로, 입술보다 혀가 먼저 부딪히는 키스가 다시 또 시작되었다.

리자드의 혀는 뜨겁고 말랑했다. 누군가와 이렇게 음란하게 젖은 살을 부딪쳐 보기는 처음이었다.

은근하게 혀를 내밀어 동조해 주었더니, 라히무스가 자기 살덩이를 거기다 비비며 타액을 섞었다. 누구의 것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질척하게 뒤섞였다. 간간히 쫍쫍거리며 흘러내리려는 침을 빨아 먹기도 했다. 그의 키스는 발정 난 금수처럼 난잡하고 지저분한 면이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사내의 찬사가 쏟아졌다.

귀여워, 부드러워, 예뻐, 예쁘다.

“응, 후으….”

나니아가 달뜬 숨을 뱉어 내며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두 입술이 떨어졌다.

밑에서 올려다본 라히무스의 붉은 눈이 색정에 푹 절어 있었다. 한껏 저속해진 음색이 이제 막 성욕에 눈뜨기 시작한 소녀를 꾀어냈다.

“입술 말고 다른 데도 잘 빨아 줄 자신 있는데.”

남자가 허벅지 사이를 조였다. 그의 무릎이 나니아의 다리 사이를 압박했다.

“어때. 응?”

그가 지그시 눌러 오는 지점이 저릿저릿해졌다.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리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라히무스는 한 손으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고, 밑으로 내려간 반대쪽 손으로는 나니아의 치마 위를 짚었다. 한 번도 다른 사람의 손이 닿아 본 적 없는 은밀한 위치였다. 목적이 뻔해 보이는 손가락이 다가와 그곳을 문지르자, 두려움을 닮은 흥분감이 피어올랐다. 남자와 키스하면서부터, 그곳은 이미 젖고 있었다.

“여기 누가 만져 준 적 있나?”

불손한 질문을 건네 오는 목소리가 뜨겁게 잠겨 있었다. 소녀는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육욕에 절은 리자드는 점점 절제력이 없어졌다.

“처음이야? 남자랑 이런 짓 하는 거.”

더는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듯 나니아가 얼굴을 가렸다. 사내는 무언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다.

색사 경험이 없는 그녀가 자신에게 만져지면서 흥분하고 있다는 사실이 미치게 좋았다.

“처음이라 어떡해, 그치.”

젖먹이 아기 어르듯 남자의 목소리가 지독히 달콤해졌다.

그의 손가락이 나니아의 긴 치마 속을 비집고 들어와 속옷 위를 느긋하고 끈덕지게 꾹꾹 건드렸다. 얇은 천은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처음인 것치고 엄청 밝히는데….

자꾸만 침이 넘어갔다. 살짝 상기된 얼굴과 땀에 젖어 달라붙은 잔머리가 남자를 애타게 했다.

여자가 손가락을 씹으며 칭얼거렸다.

“누, 누가 만지니까 이상해.”

생경한 남자 손이 치부를 문질러 오는 감각은 익숙한 자신의 몸을 낯설게 만들었다.

사내는 손가락을 세워 아주 약하게 긁적거리기 시작했다. 부끄러워하는 소녀의 모습은 수컷 리자드로 하여금 정복하고 싶은 음욕을 자극했다.

그가 마른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평소에 혼자 어떻게 해? 가르쳐 줘.”

그녀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만져 주고 싶었다. 어서 네가 세상에서 가장 야해지는 순간을 보여 달라며, 리자드는 여자의 귓불을 잘근잘근 씹어 댔다.

소녀는 점점 거칠어지는 그의 숨결을 피부로 느꼈다. 남자가 그녀의 손을 잡아 사타구니 사이로 가져가게 했다. 그곳을 빤히 쳐다보는 눈길에 가슴이 떨려 왔다.

혼자서 자신을 위로하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여 주게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정말이지 정신이 나간 짓이었는데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문 나니아의 손이 볼록한 샅에 가 닿았다. 검지와 중지를 번갈아 바꾸어 가며 자신이 좋아하는 속도로 가장 기분 좋아지는 부근을 문질렀다.

라히무스는 매우 열중하며 그 광경을 관찰했다. 사실은 아까부터 그의 중심도 바지춤 안쪽으로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남자는 상체를 일으켜 앉은 자세 그대로 바지 안쪽에 손을 넣었다. 딱딱해진 성기의 각도를 편안한 방향으로 바꾸었다. 커다란 살덩이가 허벅지에서 배 쪽으로 올라붙었다. 리자드는 바지 밖으로 머리를 내민 그것을 옷 위로 문지르며 소녀의 자위 장면에 몰두했다. 한순간도 그곳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니아의 손이 머뭇거리기 시작하자, 남자는 자기 양물을 흔들던 행동을 멈추고 그녀에게 손을 가져갔다. 여자의 떨리는 손이 야릇한 기대감으로 자리를 피해 주었다.

라히무스의 손이 그녀를 대신하여 음부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녀가 스스로를 만지던 모습을 기억하며, 그것과 같은 리듬으로 움직였다.

“이렇게? 응? 이렇게 문지르면 좋아?”

그가 자꾸만 보채듯 질문을 던졌다. 좁아지는 허벅지 사이를 어림없다는 듯 힘주어 벌렸다. 여자의 다리가 수치스러운 각도로 벌어졌다.

라히무스는 잠시 애무를 멈추고 그녀의 야하고 귀여운 모습을 감상했다. 벗겨지다시피 한 치마 아래로 펼쳐진 속옷 차림에 넋이 나갈 것 같았다.

허락해 줄 것 같지 않던 그녀가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에게 결국 몸을 내주었다는 사실만 해도 이미 정신이 회까닥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저 얇디얇은 천 너머에 보드라운 속살이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리자드는 여자의 음부를 가린 천 조각을 슬쩍 옆으로 벗겨 치웠다. 뒤이어 긴 손가락이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읏, 하지 마….”

나니아가 젖은 눈망울로 칭얼거렸지만, 사내는 이제 그녀를 달래 줄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그저 들리지 않을 정도로 헉헉대며 정사에 빠져들고 있었다.

조갯살같이 말랑한 소음순의 감촉에 머리끝까지 혈액이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작은 살덩이 틈을 가로지른 손가락이 골짜기 사이를 비비적거렸다. 음문에서 흘러나온 끈적한 애액이 남자의 중지를 더럽혔다. 라히무스는 그것을 나니아의 음부 전체에 골고루 펴 발랐다.

“촉촉해졌네…. 기분 좋은 거지?”

남자의 질문은 부끄러움을 가중시켰다.

젖은 손가락이 원을 그리며 도톰한 살을 굴렸다.

젖은 살이 부드럽게 그의 손을 따라 움직였다. 손가락을 축축하게 적신 애액은 리자드의 신경도 마비시켰다.

“나니아는 보지도 귀엽네….”

라히무스가 중얼거리자 나니아는 그런 이상한 말 하지 말라며 그의 가슴을 때렸다. 하나도 아프지 않아서 깜찍하기만 했다.

사내는 가장 긴 손가락을 이용해 나니아의 음부를 자상하게 비비고 문질렀다. 기계적인 리듬은 정직해서 더 외설스러웠다.

한참 동안 그렇게 규칙적으로 손가락을 문대던 사내는 이따금 변주하듯 난잡스럽게 움직였다. 도톰한 살 주위를 흔들 듯 어루만질 때마다, 여자의 안에서는 더 많은 물이 새어 나왔다. 그 척척한 촉감이 남자를 환장하게 했다.

“하아… 빨아 먹고 싶다. 응? 그래도 돼?”

“싫어, 절대로, 하지 마….”

나니아는 입으로 해 주고 싶다는 그를 완강히 거부하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분해 보이는 얼굴도 말투도 귀엽기만 했다.

“왜에, 빨아 주는 게 싫으면 손가락 넣고 흔들어 줄까?”

화난 그녀를 달래듯 라히무스의 목소리는 되레 애교스러워졌다. 여자는 콧물을 훌쩍였다.

“…무서워, 아무것도 넣어 본 적 없단 말야.”

“괜찮아. 엄청 젖어서 잘 들어갈 것 같은데….”

재차 그녀의 젖은 살을 쓸어 올리며 꿀꺽 침을 삼켰다.

자신을 음식 보듯 하는 그 행동이 소름 끼쳐서 소녀는 기어코 남자를 밀쳐 냈다. 하지만 그도 지지 않고 나니아의 등 뒤로 따라붙었다. 그녀의 작은 몸을 뒤에서부터 감싸 안으며, 그녀가 자기 스스로 만질 때와 같은 각도로 다시 손을 쑤셔 넣었다.

가랑이 사이를 파고든 손은 다시 제자리를 찾은 듯이 나니아의 클리토리스를 더듬었다. 꼭꼭 누르며 압박하다가 살짝살짝 긁어 주는 것이 이젠 아주 익숙했다.

“그럼 만져 주는 것만 할까? 이건 어때… 응? 이건 좋아하지?”

커다란 가슴이 등 뒤에 붙어서 그의 시커먼 목소리가 몸 전체로 웅웅 울리는 기분이었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앓는 소리만 내자, 남자가 나니아의 고개를 꺾어 뒤에 있는 자신을 돌아보도록 만들었다.

남자의 손은 젖은 살과 끊임없이 접촉했다. 이제는 물이 뚝뚝 떨어질 정도였다. 고개를 돌린 이유는 혀를 섞기 위해서였다. 입 밖으로 꺼낸 살덩이가 난잡하게 얽혀 갔다. 그 상스러운 짓거리에 나니아는 또다시 울컥하고 자신을 어루만지는 남자의 손에 애액을 뱉었다.

리자드가 입술을 핥으며 질 낮은 음담패설을 지껄였다.

“나니아 보지 너무 축축하다…. 이거 보여?”

그가 끈적하게 젖어 있는 자신의 손가락을 나니아의 눈앞으로 가져왔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질척한 점액이 실처럼 이어져 있었다.

나니아는 저리 치우라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먹거렸다. 하지만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사내를 더욱 부추길 뿐이었다.

“이거 남자랑 섹스하고 싶을 때 나오는 건데. 그치.”

남자가 무어라 지껄일 때마다 볼이 화끈화끈해졌다.

“후우… 어떻게 여기도 이렇게 귀엽지?”

미끌미끌하게 젖은 손가락은 더욱 거침없이 마찰을 반복했다. 뜻대로 멈춰 주지 않는 움직임은 제어할 수 없는 타인의 손으로만 느낄 수 있는 색다른 흥분을 안겨 주었다.

나니아의 입술 사이로 귀여운 신음이 새었다. 몸을 떨기 시작한 것이 느껴지면서 속도를 높였다. 소녀가 온몸을 바르작거리며 벗어나려는 것이 느껴졌지만, 사내는 그녀를 강한 힘으로 끌어안고 놔주지 않았다. 오히려 감춰 두었던 입술을 빼앗아 다시 또 지저분하게 혀를 섞었다.

“아, 응, 그만…!”

결국 나니아는 통제할 수 없는 쾌감 안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그녀가 최고로 만족하는 순간에, 남자도 최상의 흥분을 느꼈다.

여자가 몸을 바르르 떠는 것을 보고 나서야, 라히무스도 비비는 속도를 천천히 늦춰 가며 애무를 멈추었다.

아직 움찔거리는 그녀의 음부를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둥글게 어루만지자, 그럴 때마다 몸이 튀는 것이 느껴졌다.

여자의 볼에 쪽쪽 귀여운 입맞춤을 남기면서도, 입으로는 음탕한 소리를 지껄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잘 느끼네… 하… 씨발, 귀여워.”

만져 주는 것만으로 이렇게 가 버리는데, 넣고 흔들어 주면 어떤 얼굴이 될까. 그가 다시 힘 빠진 나니아의 고개를 돌려 입술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가만히 누워서 남자가 만져 주는 대로 절정에 다다랐을 뿐인데, 마치 과격한 운동이라도 한 것처럼 숨이 가쁘고 가슴이 뛰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쇳덩이가 되었다가 찬물에 던져진 느낌이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팔다리는 흐느적거렸다. 절정의 여운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성감이 잦아들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나니아가 벽을 보며 벅찬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라히무스는 그녀의 치마 안쪽을 느긋하게 휘저었다.

사내의 커다란 손이 배 속의 신생아처럼 몸을 웅크린 소녀의 허벅지와 오금 등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격한 애무가 끝난 뒤에 나릿나릿 쓰다듬어지는 것은 뻐근한 충족감을 가져다주었다.

“좋았어?”

남자의 질문이 멍해져 있던 머릿골을 톡 건드려 왔다. 서늘한 목덜미에서부터 냉랭한 현실 감각과 함께 열이 확 치밀었다. 귓불이 뜨거워졌다.

사고 쳤다.

나니아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쾌감에 멍해져 있던 머릿속이 삽시간에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해졌다.

지금 내가 뭘 한 거지? 이게 지금 내 첫 남자 경험인가? 이 남자 앞에서 내가 지금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지? 곧 떠날 사람이니 상관없나? 아니 나는 그럼 어차피 헤어질 사람과 지금 이런 관계를 맺어 버린 건가? 앞으로 가주님 얼굴을 어떻게 보지?

마음이 심란해졌다. 어디로든 숨고 싶어진 그녀는 감촉 나쁜 이불을 손에 꼭 쥐었다. 좋았냐는 물음에 대답은 않고 슬금슬금 이불을 끌어다가 얼굴을 파묻었다.

두더지처럼 숨기 바쁜 여자의 등 뒤로 라히무스가 자신의 바윗돌 같은 몸을 바짝 붙여 왔다. 아직 해소되지 못한 그의 욕망이 나니아를 더듬는 손끝에서 드러났다. 하염없이 그녀의 살갗을 쓰다듬었다.

자신은 충분히 즐겼지만, 라히무스는 아니었다. 나니아는 이불에 코를 박은 채 생각했다.

‘나도 뭔가 해 줘야 하는 걸까?’

그녀는 일전에 동료 시녀들로부터 보고 들은 지식을 총망라하여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았다. 그가 무엇을 요구해 올지 짐작해 보는 것이었다.

넣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으니 대신 다른 방법으로 만족시켜 달라고 요구할 것 같았다. 그가 자신에게 해 준 것만큼은 돌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은 책임감도 느꼈다.

‘손으로 만져 주는 것쯤은 할 수 있을지도….’

사내의 그것을 만질 생각을 하니 상상만으로도 남사스럽기가 그지없었다. 죽을 만큼 부끄럽고 창피해져서 마음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고민에 빠진 그녀의 어깨너머로 라히무스가 다시 물어 왔다.

“아직 부족해?”

부족하냐는 질문에 화들짝 놀란 나니아 세차게 도리질 치며 얼굴을 가렸던 이불도 단숨에 젖혀 버렸다.

“아니요?!”

그녀는 꾸물꾸물 몸을 돌려 천장을 바라보고 누웠다. 라히무스도 나니아의 몸에 두른 팔을 풀고 그 손으로 자기 머리를 받쳐 누웠다. 비스듬한 시선이 나니아를 내려다보았다.

소녀는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부러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몸에서 위아래로 질질 흘러나온 체액들을 모두 빨아들인 남자와 눈을 마주치며 대화를 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

“저는 이제 더는, 음… 됐어요.”

“만족했어?”

나니아는 남자의 질문에 난감해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째서 부족했냐는 둥 만족했냐는 둥 그런 짓궂은 질문을 하는 걸까. 자기가 만들어 준 쾌락 속에서 절정에 다다르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지켜봤으면서.

그녀는 남자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 생각하며 새치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음탕한 질문에는 좀처럼 의연하게 대꾸하기가 어려웠다.

만족했다는 대답을 얻어 낸 그가 의기양양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거만하게 쳐다볼 것이라 생각했다.

금방이라도 ‘이제부턴 네가 나를 만족시켜 줄 차례’라며 자기 바지춤에 손을 가져갈 것만 같았다. 평소 그의 행실을 보건대, 지금 당장 바지를 내려 자기 거시기를 내밀어도 이상하지 않을 사내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남자는 흡족해하기보다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래.”

그는 짧은 대답과 함께 나니아의 몸에서 손을 떨어뜨렸다. 맨살을 애타게 어루만지던 손길이 서먹하게 멀어져 갔다. 그는 심지어 초연해진 낯빛으로 말려 올라간 치맛자락을 정리해 주기까지 했다.

나니아는 얼떨떨해하며 눈을 끔뻑거렸다.

“…끝이에요?”

나니아가 묻자, 라히무스는 뭘 물어보냐는 듯 한쪽 눈썹을 삐뚤게 들어 올렸다. 다리 한쪽은 이미 침대 밖으로 나가 있었다.

“그럼?”

남자가 반문했다. 나니아도 얼결에 그를 따라 상체를 꼿꼿이 일으켜 앉았다.

“…어, 음, 당신은…?”

라히무스는 더 이야기할 것도 없다는 듯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보통 암컷이 기분 좋게 만족했으면 거기서 끝나는 거잖아?”

그것이 리자드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의 문화와 통념을 알 길 없는 인간 여자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래요?”

라히무스는 소녀의 얼굴을 힐끗 쳐다보고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움직였다. 육중한 체구 탓에 간단한 움직임으로도 침대는 크게 출렁거렸다.

그는 나니아를 향해 등을 보이고 앉아 목덜미를 벅벅 문질렀다.

“저기….”

얼굴 보고 말할 생각 없어 보이는 등짝이 부탁을 건네 왔다.

“잠깐 나가 있지 않을래?”

남자의 요청에 나니아는 순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응? 왜요?”

라히무스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새었다. 그는 왜냐는 물음에는 답하지 않고 같은 부탁을 반복했다.

“…1층 가서 식사라도 하고 있어. 곧 따라갈 테니까.”

나니아는 남자의 말대로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끝까지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내가 또 뭘 잘못했나?’

나니아는 여관 복도를 걸으며 생각했다.

긴장이 풀리자 허망함인지 안도감인지 모를 마음속 구멍이 느껴졌다.

그래, 안 그래도 조금 곤란해지려던 참이다. 아주 잠깐이라도 그와 떨어져서 이 혼몽한 열기를 식힐 필요가 있었다.

문득 이 객실의 방음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던 것이 기억났다.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았을까 싶은 걱정에 민망해졌다.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말대로 1층으로 내려와 식사를 주문했다.

“으깬 감자 죽 한 그릇 주세요. 호밀빵도 하나 주세요.”

나니아는 형편없이 딱딱한 스툴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방에 있던 것과 똑같이 사람이 앉으면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였다.

가게는 어제와 다르게 조용하고 한적했다. 지난밤의 그 떠들썩하고 혼잡했던 광경은 온데간데없었다. 취객으로 가득하던 주점은 해가 뜨면 평범한 식당이 되었다.

테이블 위로 주문한 음식이 툭툭 서빙되었다. 누가 보면 돈 주고 사 먹기 아까운 수준의 음식일 테지만 나니아에겐 평범한 농민의 식사였다.

혀를 데일 것처럼 뜨거웠던 감자스프가 먹기 좋게 식었을 때쯤, 계단을 내려오는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딘지 조금 착잡해 보이는 얼굴의 라히무스였다.

그는 나니아 맞은편 자리의 의자를 빼다 앉았다. 역시나 평범한 의자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가혹한 덩치였다.

나니아는 숟가락으로 괜히 그릇 안의 음식물을 휘저으며 물었다.

“뭐 하고 왔어요?”

“…….”

질문을 외면하는 것은 언제나 그녀의 몫이었는데, 이번에는 남자가 대답을 회피했다. 그는 어색하게 뒷목을 주무르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호밀빵을 가져다 입에 물었다.

“그거 내 건데.”

그는 이미 먹어 봤다는 듯 빵을 씹기도 전에 맛을 평가했다.

“어차피 맛없어.”

남자는 자기 손만 한 크기의 빵을 세 입에 털어 넣었다. 나니아는 욕심쟁이 식탐꾼의 오른쪽 입꼬리에 빵 부스러기가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적했다.

“여기 묻었어요.”

나니아가 자신의 입 옆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빵가루가 묻은 위치를 알려 주었다. 어린애처럼 눈을 크게 뜬 남자가 거울 속의 사람처럼 나니아의 행동을 따라했다.

“아니 반대쪽, 왼쪽이요.”

다시 위치를 정정해 주자, 손이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남자의 왼손 엄지가 왼쪽 입꼬리를 문질렀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자연스럽게 동그란 혀끝이 마중 나왔다. 작게 내민 혀가 입꼬리 부근을 핥아먹었다.

라히무스는 확인하듯 나니아를 보고 눈짓했다. 이제 다 닦였냐는 무언의 질문이었다.

입술을 핥는 그의 모습이 평소 자신을 탐하던 때와 닮아 있어서 소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자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접시에 얼굴을 처박을 기세로 고개를 수그렸다.

저 혀가 얼마나 난잡하게 움직이는지 알고 있었다. 그와 키스했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불과 몇 분 전의 일이었다.

전엔 몰랐는데 이 리자드는 천성적으로 행동이 좀 야한 것 같았다. …라고 당사자가 들으면 억울할 생각을 하면서, 나니아는 감자죽을 뒤적거렸다.

나는 이 남자에게 아무런 흑심도 없다. 나는 친구, 친구가 되고 싶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누구도 리자드 친구는 없을걸?

리자드 친구. 리자드 친구. 나니아는 속으로 주문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러다 애써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밥 다 먹으면 글공부는 잠깐 제쳐 두고 서대륙 얘기를 들려줄래요?”

괜히 해맑은 척 씩씩한 말투로 말을 붙이는 그녀에게 사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 엄… 라히무스가 태어나 자란 곳은 어떤 나라예요? 여기서 아주 멀겠죠?”

“조금.”

“어때요? 여기 사람들이 사는 것과 비슷해요?”

“메마르고 척박한 땅이라 생활 방식은 많이 달라.”

그가 나고 자란 홍염용의 땅은 드문드문한 초원 주변으로 넓은 사막이 펼쳐진 건조 지역이었다. 흙보다 모래를 더 자주 밟고 사는 그들은 생계 수단으로 농사를 택할 수 없었다. 주된 삶의 방식은 대금업, 상업, 노략질, 전쟁, 또는 라히무스처럼 아예 고향 땅을 떠나 용병 생활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니아는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듣는 귀가 없는지 살피다, 아무도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야 조심스럽게 물었다.

“리자드들은 원래 다 그렇게 커요? 라히무스보다 큰 리자드도 있어요?”

남자는 턱을 괴고 가만히 생각했다.

그러곤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나니아의 손바닥에 가만히 자신의 손바닥을 맞춰 보았다.

“인간은 확실히 작아.”

크다 크다 했지만 이렇게 직접 비교해 보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리자드의 앞발은 나니아의 것보다 손가락 마디 두 개는 더 있었다. 손가락 굵기는 비교하는 것이 무의미했다.

라히무스는 맞닿은 손바닥의 방향을 비틀어 활짝 펼쳐진 나니아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자기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그대로 깍지를 낀 채 끌어다가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너무 조그맣고 귀여워.”

귀엽다는 말은 몇 번을 들어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고 귀가 간질거렸다. 데면데면하게 굴다가도 갑자기 확 선을 넘는 그의 행동이 시시때때로 심장을 조여 왔다.

나니아는 붙잡힌 손을 빼내어 겸연쩍게 팔짱을 꼈다.

“그… 라히무스 짐 가방에 뭐 새로운 거 없어요? 구, 구경시켜 줘요. 서쪽에서 가져온 물건 같은 거….”

* * *

식사를 끝낸 두 사람은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음식값을 받지 않는 것으로 보아, 숙식 비용을 이미 한꺼번에 치른 모양이었다.

“재밌는 거 있어요?”

“그다지.”

나니아의 발 앞에 가죽 가방이 툭 떨어졌다. 이 안에 남자의 삶이 뒤죽박죽 섞여 있었다.

잭나이프. 용도를 알 수 없는 물약 병. 옷가지. 이상한 리자드 말이 잔뜩 쓰여 있는 종이뭉치. 어디다 쓰는 물건인지 자물쇠도 몇 개 있었다. 떠돌이 방랑객이 자물쇠로 걸어 잠글 것이 대체 뭐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그날은 왜 그렇게 묶여 있었어요?”

가만히 침대에 걸터앉아 나니아가 하는 양을 구경하고 있던 라히무스가 대답 없이 한쪽 눈을 찌푸렸다.

“마른돼지숲에서 사고가 있었던 그 밤이요. 당신은 그런 쇠사슬로 묶여 있어야 할 만큼 위험해지는 거예요?”

너란 괴물은 어디까지 끔찍해질 수 있는지 물어보는 것만 같아서 라히무스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코 밑을 문질렀다.

“그때 그 뿔은, 평소엔 없는 거예요? 꼬리도 꼬리지만, 그것도 당신 본모습의 일부라고 생각했어요.”

소녀가 양손으로 뿔을 만들어 머리 위에 뾰족하게 세우는 시늉을 했다. 자신을 흉내 내는 모습이 귀엽고 깜찍한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민망하기도 했다.

리자드는 턱을 쓰다듬던 손바닥 뒤로 얼굴을 감추었다. 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나중에 챠링고한테 물어봐.”

그 말에 나니아는 입술을 삐죽거렸다.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 그가 얄미웠다.

뒤이어 나니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줏빛의 벨벳 자루였다. 변변찮은 사물들 사이에 비교적 섬세하게 포장된 물건이어서 호기심이 일었다.

“이건 뭐예요?”

커다란 자루 안에는, 그보다 더 작은 주머니들이 또 가득했다. 재질은 마찬가지로 곱고 부드러운 비로드였다.

손에 잡히는 것 하나를 무릎 위로 가져와 입구를 벌려 보았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면서 나니아의 입도 떡 벌어졌다.

헉.

그녀는 숨을 집어삼키며 다시 주머니의 주둥이를 조였다.

“미, 미안해요, 손대서.”

들춰 본 것만으로도 사과하고 싶어지는 주머니 속 물품의 정체, 그것은 엄청나게 번쩍거리는 귀금속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물건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허름한 여관방에 누워 딱딱한 호밀빵을 감자죽에 찍어 먹는 남자가 가지고 있을 만한 귀물이 아니었다. 나니아는 의심했다. 어디서 훔친 장물들은 아닐까.

“다른 것도 다 이런… 그런 거예요?”

그녀가 열어 보지 않은 다른 주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단 주머니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것들은 모두 값비싼 금붙이와 패물들로, 모두 합하면 일전에 나니아가 파비올라 부인의 패물함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흠집 나는 일이 없게끔 부드러운 천으로 하나하나 감싸 놓기는 하였으나, 이런 식으로 아무렇게나 가방 안을 굴러다닐 물건들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이 이방인 남자는 알면 알수록 의문투성이였다.

“대체 이런 걸 왜 들고 다녀요?”

나니아가 묻자, 사내는 무언가 생각하는가 싶더니 싱겁게 대꾸했다.

“…취미?”

유랑 생활을 하는 사람이니 믿고 맡길 데가 없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몸에 지니고 다녀야 하긴 했다.

하지만 대체 귀부인도 아니고 성인 남자가 이렇게 많은 보석 세공품들을 가지고 다닐 이유가 뭐란 말인가.

차라리 파키케팔로 가방에서 이런 물건들이 나왔다면 그러려니 했을 것 같다. 반짝거리는 것을 자기 꼬리에 가져다 대며 좋아하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하지만 라히무스처럼 덩치가 산만 하고 투박한 사내와는 어울리지 않는 취향이었다.

“이런 거 좋아해요?”

의심스러워하는 나니아의 질문에 라히무스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명쾌하게 대꾸했다.

“응.”

“…….”

그의 대답을 듣고 여자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이것들이 어디서 났는지도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만져선 안 될 물건을 건드린 사람처럼 벨벳 자루를 도로 가방 안에 조심조심 집어넣었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 근처로 다가왔다.

“괜찮아. 구경해도 돼.”

나니아는 허리를 숙여 패물 주머니의 틈을 살짝살짝 벌려 보며 이게 무엇이었던가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두 개가 아니어서 살펴보는 데만 한참이었다.

그러더니 대뜸 무덤덤한 목소리로 권했다.

“가지고 싶은 거 있으면 가져.”

참으로 뜬금없고 멋없는 선물이었다.

나니아는 생뚱맞은 그의 제안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렇게 값비싼 선물을 받을 이유가 없었고, 그럴 사이도 아니었다.

그녀는 껄끄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사양했다.

“제가 왜요.”

“그냥.”

그러거나 말거나 라히무스는 자수정 목걸이를 하나 꺼내어 나니아의 턱밑에 가져다 대 보았다.

“예쁘니까.”

그 말에 몸이 움찔 굳었다.

‘목걸이가? 아니면 내가?’

사내가 고개를 한 뼘 뒤로 물러 나니아의 얼굴과 그 밑에서 반짝거리는 목걸이의 어울림을 살폈다. 감정하듯 가늘어진 눈, 감탄하듯 살짝 벌어진 입술.

그는 나니아가 정말 아름답기라도 한 것처럼 황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히무스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그녀를 그렇게 바라본 적이 없었던지라, 역시나 부끄러운 기분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피, 필요 없어요…. 부담스럽고….”

하녀는 치마 위로 괜히 손톱을 세웠다. 이상하게 가슴이 간질거렸다.

하지만 라히무스는 시선을 피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가 나니아의 턱을 쥐고 고개를 잡아 올렸다. 시선을 들어 마주한 눈빛은 날카롭고도 달콤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그는 나니아의 눈을 또렷하게 직시해 왔다.

“네 눈동자는 세상 어떤 보석보다도 예쁘게 빛나.”

리자드는 반짝거리는 것에 환장하는 속물들이고, 라히무스도 그런 기질이 다분한 사내였다. 다른 리자드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재물을 모으는 일에 매달리고, 집착하며, 신경을 쏟았다.

아마 나니아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그의 재산에 손을 댔다면 당장에 손톱을 뽑아 버렸을 일이다.

라히무스가 바라본 나니아는,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는, 그가 가지고 싶었던 것 중에서도 가장 찬란하게 반짝거리는 무언가였다.

여태껏 돈이 되지 않는 것을 두고 이토록 눈부셔하며 가슴 떨려 본 적이 있던가.

소녀는 리자드에게 있어 어여쁘고 향기로운데다 야릇하기까지 한 보물이었다.

“이런 자수정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부담 갖지 말고 받아 주었으면 좋겠다며, 남자가 목걸이 연결고리를 완전히 걸어 잠갔다.

나니아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 위쪽에서 반짝거리는 그것을 쳐다보았다.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쓸며 어색해했다.

공주에게 선물할 목걸이를 자신의 목에 시험 삼아 대어 보던 영주가 생각났다. 그때 느껴야 했던 창피함과 원통함이 떠올라 또다시 가슴 한구석이 시큰해졌다.

그래, 받지 말아야 할 건 또 무어냐.

괘씸하고 야속했던 라키바하프를 떠올리니 오기가 생겼다.

다른 남자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쩌면 영주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었다.

“그럼 이거 말고 다른 거…. 작은 거 딱 하나만요.”

하지만 아무래도 보석이 수십 개나 빼곡하게 박힌 목걸이는 부담스러웠다. 일상생활에서 착용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 당연했다.

그래서 나니아는 조금 덜 화려해 보이는 물건을 찾아 다른 주머니들을 이것저것 들춰 보았다.

묵직한 주머니들 사이에서 내용물이 가장 작고 가벼워 보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손바닥 위에 뒤집어서 탈탈 털어 보니 조그마한 반지가 굴러떨어졌다.

그것은 검붉은 빛을 띠었다. 꼬리를 문 용을 형상화한 듯 형형한 안광의 용머리와 비늘을 한 땀 한 땀 새겨 넣은 모양새였다. 구멍 안쪽은 반질반질하게 닦여 있었으나 조각이 새겨진 겉면은 거칠고 남성적이었다.

“이거 비싼 거예요?”

“그거…? 아니,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

독특한 디자인이긴 했으나 나니아의 눈에는 개중에 가장 수수해 보이는 장신구였다. 크기가 작은 만큼 부담감도 덜 했고 특별히 튀어 보이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이걸로 할게요.”

검지와 중지에 차례로 끼워 보며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여 보았다. 마침 크기도 딱 알맞았다.

라히무스는 이렇다 할 대꾸가 없었다. 그저 얼빠진 얼굴로 여자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아끼는 물건인가?’

나니아는 리자드의 넋 나간 표정을 살피며 망설였다.

“왜요? 이건 좀 그래요?”

남자의 시선에서 당혹감을 읽어 낸 그녀는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냈다.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리자드가 그것을 말렸다.

“아니, 아니야. 괜찮아.”

그가 반지를 빼앗았다. 그리고 다시 나니아의 손가락에 조심히 끼워 주었다. 네 번째 손가락이었다.

“…괜찮아. 괜찮을 것 같아.”

그리고 여전히 얼이 나간 표정으로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너 가져.”

리자드는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갑자기 벅찬 몸짓으로 나니아의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더니 그녀의 입술을 빼앗았다.

쪽, 쪽, 쪽, 쪽.

몇 차례에 걸쳐 짧고 질척하게 소리 내며 입을 맞추었다.

나니아는 얼떨떨해하며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 뜨는 것을 반복했다. 누가 보면 선물을 받은 것은 자신이 아니라 남자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리자드 스토리 R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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