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마른돼지숲 (3/22)

마른돼지숲

다음 날 아침, 마차에 짐을 싣는 과정에서 나니아를 가운데 두고 마찰이 생겼다.

“인간 여자를 데려간다고? 어디까지? 난 저 쓸모없는 인간 남자들이랑 함께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짜증 난다고!”

챠링고의 귓가에 대고 파키케팔로가 불평을 속삭였다. 인간과 함께 다닌다는 것은 여러 가지 귀찮은 일들을 초래했다.

그녀를 반기지 않는 것은 파키케팔로 뿐만이 아니었다. 영주도 공주 곁에서 나니아의 동행을 반대하는 중이었다.

“어린 여자아이가 이 험준한 숲길에서 얼마나 도움이 된다고 데려가려 하십니까?”

벨은 커튼을 손목으로 들쳐 올리고 짐짝이 가득한 마차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신이 앉을 자리를 살펴보며 마뜩잖은 표정을 짓던 그녀가 대꾸했다.

“왜죠? 난 반대할 이유 없어요. 때론 주변을 방념시킬 수 있는 평범한 여자가 필요한 순간이 있거든요.”

벨이 커튼을 들쳐 올린 손을 내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보시다시피 나랑 저들은 좀 튀어서.”

그녀의 고갯짓이 용병들을 향했다.

“정 시중을 들 하녀가 필요하시다면, 노련하고 경험 많은 자를 구해 오겠습니다. 뷔셀은 파비올라 밖을 떠나 본 적 없어 미숙하고 서투른 어린아이입니다.”

영주는 나니아가 이 여정에 적격하지 않은 까닭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의 심란한 표정에서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반대하는 이유가 단지 그런 합리성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아까 전부터 나니아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고 그녀와 어색한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관망하던 라히무스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어리지 않던데.”

사내는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지껄인 후, 말 위에 얹을 안장을 손보았다. 그는 무슨 의도에선지 안장 꽁무니를 꺾으려 했다. 아마 형태를 뒤틀어 솟아 있는 부분을 평평하게 만들고 싶은 것 같았다.

한편 나니아는 자신을 어리게만 보는 라키바하프가 답답해서 그의 말에 반기를 들었다.

“태어나 파비올라 밖을 나가 본 기억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평생을 이 안에서만 살 수도 없는 노릇이잖아요. 그러고 싶지 않아요.”

세상 물정 모른다는 그의 평가가 박하게만 느껴졌다. 영주의 마음속에서 하녀는 아직도 철부지 10대 소녀쯤의 인상으로 남아 있는 듯했다.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나니아는 손에 쥔 봇짐을 짐 마차에 던져 넣으며 영주의 명령을 듣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엄밀히 말해서, 저는 이곳 사람도 아니니까요.”

그녀는 자신의 뿌리를 알지 못했다.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가르쳐 줄 아버지는 이미 죽고 없었다. 평생 외부자 취급을 받아 온 그녀는 차라리 진짜 이방인이기라도 했으면 억울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네가 그런 생각을 하는 줄은….”

언제나 조아릴 줄만 알았던 하녀가 제법 또렷하게 자기 생각을 이야기하자 영주는 당황스러운 기색이었다.

이제 논쟁을 끝내겠다는 듯 공주가 박수를 한 번 쳤다.

“나는 나니아가 편하고, 나니아는 나를 따라오고 싶다네요. 문제 될 게 없군요.”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 그가 좋아하는 여자의 두둔을 받는 것은 묘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챠링고가 머리를 좌우로 꺾으며 시답잖은 스트레칭을 했다.

라히무스는 여전히 안장 뒤집어 꺾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힘이 너무 과했는지 후교를 고정하던 철심이 견디지 못하고 힘없이 부러져 버렸다. 안장은 팔뼈가 부러진 사람처럼 힘없이 꺼덕였다.

파키케팔로는 벨의 곁으로 다가가 속닥거렸다. 온갖 딸린 입들을 만들어 낸 그녀를 원망하는 투였다.

“벨로즈 님도 저 남자 귀찮다고 하셨잖아요.”

벨이 새침하게 대꾸했다.

“그치만 어떻게 해? 나 이제 말 타고 가기 싫단 말이에요. 엉덩이 아파.”

표면적으로나마 논란거리가 해결된 후, 일행들과 성의 시종들은 짐을 꾸리는 것에 다시 집중했다. 기본적으로 음식과 옷가지, 그리고 야영 도구들을 우선적으로 챙겼다.

용병들이 데려온 말이 세 필, 영주의 말이 여섯 필이었다. 영주는 자기가 제일 아끼는 말을 직접 몰기로 했다. 이륜마차를 끄는 마부를 포함해서 기사가 넷이었고, 용병 셋은 자기들이 데려온–아마도 훔쳐 온- 말들을 각각 한 마리씩 차지했다. 공주는 짐들과 함께 마차에 탑승했으니, 문제는 나니아였다.

영주가 그녀에게로 걸어왔다. 마치 친구와 화해하는 어린아이처럼 난색을 짓고 한숨을 쉬었다.

“…뷔셀.”

그가 나니아를 불러 세웠다. 나니아는 몸을 돌려 그를 마주했다.

판금갑을 몸에 두른 라키바하프는 여느 때와는 다른 착장으로 빛나고 있었다. 투구를 쓰지 않은 머리카락 위로 황금빛 볕이 비쳤다. 어딘지 먹먹해 보이는 눈매는 여전히 그윽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나팔꽃 같은 남자였다. 유독 아침 햇살 아래 더욱 아름답게 피어난다는 점이. 아니, 사실은 낮밤을 가리지 않고 멋있었다.

나니아는 색다른 매력을 느끼게 하는 영주의 갑옷 차림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에게 상처받아 붉게 타들어 가던 마음이 또다시 담금질 당했다. 그렇게 모진 취급을 당하고도 이런 마음이 들다니. 하녀는 두근거리는 심정을 감추기 위해 뒤늦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영주가 그녀를 향해 말했다.

“어제는… 헤아리지 못해 미안했다, 뷔셀. 너도 알겠지만, 나는 너를 동생같이 아끼는 마음이었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까 솔직히 와닿지 않았어. 하지만 생각할수록 나의 태도가 너에겐 실망스러웠겠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후회했어. 사람 대 사람으로 사과하고 싶다.”

사람 대 사람으로. 나는 너를 여자로 보지 않는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내비치는 말이었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너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 모르겠어. 내가 너를 어려워하더라도, 당분간은 이해해 주렴.”

그는 할 말을 준비하고 정리해 온 사람처럼 명료하게 이야기했다.

남자는 선을 그을 뿐, 나니아를 밀어 내지는 않았다. 어떻게 보면 그래서 더 잔인했다.

나니아가 그의 말을 듣고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그저 가만히 머리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익숙하게 순종적인 그녀의 반응에 라키바하프가 엷게 웃었다.

“알아들어 줘서 고맙구나.”

남자가 나니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비록 딱딱한 건틀릿을 낀 손길이었지만 눈물이 왈칵 솟을 것 같았다. 어제의 고백으로 그가 영영 자신을 보려 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에게 존재를 외면당하는 것은 마음을 외면당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어떤 위치에서라도 좋으니 그의 곁에 남고 싶었다.

나니아가 흘러내리려는 콧물을 훌쩍이며 손등으로 인중을 문질렀다.

그러고 보니 미처 전하지 못한 이야기가 생각나, 울음을 꾹 참고 입을 열었다.

“저, 가주님….”

지금이라도 숲속에 도사리고 있는 축수의 존재와 수상한 동행자들의 정체를 알려야 했다. 영주와 기사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도록 그들에게 미리 언질을 줄 필요가 있었다.

“사실 드릴 말씀이 있는데.”

나니아는 듣는 귀가 없는지 조심스럽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려다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라히무스를 발견했다.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소름 돋게 서늘한 시선으로 영주의 뒤통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흠칫 놀란 나니아는 결국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그래. 네 마음이 편해질 수 있다면 언제든지.”

뭔가 오해한 것 같은 영주가 다시 또 나니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결국 라히무스가 둘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손에는 말고삐를 쥐고 있었다.

“이리 와. 말 타는 거 도와줄게.”

영주는 머리를 쓰다듬던 것을 멈추고 그 손을 나니아에게 건넸다. 등 뒤에서부터 가까워져 오는 살벌한 기운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 말을요? 제가 가주님 말을 타면, 가주님께서는 뭘 타시려구요…?”

“무슨 소리야. 같이 타야지.”

나니아가 당황하자 라키바하프는 어이없다는 투로 웃었다. 그리고 곁에 다가온 라히무스가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 안장에 어떻게 둘이 탄다는 거지.”

낮고 불투명한 사내의 목소리는 방심하고 있던 영주를 놀래기에 충분히 음산했다. 라히무스는 영주가 손을 뻗은 쪽과 가까운 나니아의 팔목을 붙잡아 그녀의 몸을 돌려세웠다.

“내가 태워 줄게.”

조금 전의 살기등등한 모습은 오간 데 없이 사라지고, 사르르 녹아내린 목소리가 나니아를 향했다. 사내는 자기가 베푸는 쪽이면서 마치 부탁하는 사람처럼 이야기했다.

“여기 타…. 응?”

그러고는 승낙의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나니아의 몸을 번쩍 들어 올려 말 위에 앉혔다. 그녀가 당황하여 어영부영하는 사이 무릎 위치를 잡아 주었다. 마지막으로 전교에 달린 손잡이를 붙잡게끔 하면서 은근하게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너, 너무 높아요…!”

순식간에 난생처음 보는 높이의 세상을 마주하게 된 나니아가 혼비백산하자, 라히무스도 남은 등자에 발을 올리고 그녀의 뒷자리로 뛰어올랐다. 워낙 장신의 사내였기에 체고를 높여 주는 발 받침대도 필요 없었다. 능숙하게 말 위로 탑승한 그는 고삐를 잡으며 나니아를 등 뒤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감싸 안았다.

“이거, 너무… 높은데.”

나니아가 여전히 불안감을 표하며 고개를 꺾어 남자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사내는 여자의 작은 체구를 둘러싼 팔에 더욱 힘을 주어 압박하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안 떨어뜨려.”

그는 믿음직스러운 사내인 척 굴더니, 고개를 숙여 나니아의 오른뺨에 살짝 입술을 가져다 댔다. 나니아는 꽉 붙잡고 있던 손잡이를 놓칠 정도로 기함하며 라히무스의 입술이 닿은 뺨을 황급히 손으로 가렸다. 그가 보지 않았을까. 다급하게 뒤를 돌아 영주를 찾았다. 다행히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이, 이 바람둥이! 한 번만 더 이런 짓 하면 당장 뛰어내릴 거예요?!”

남자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원할 때마다 키스하기로 했잖아.”

“내가 언제요? 나는 그러겠다고 한 적 없어요! 이 사기꾼.”

사기꾼은 조금 새무룩해졌으나, 정말로 그녀가 말에서 뛰어내릴까 봐 입을 다물었다.

말은 또각또각 걸음을 걸어 원래 있던 위치로 돌아왔다. 이제 갈 준비를 모두 끝낸 마차와 말들이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니아를 앞에 끼고 앉은 라히무스를 보고 챠링고가 혀를 찼다.

“어쩐지 길고 납작한 안장을 찾더니만, 저 앙큼한 새끼….”

결국 찾지 못해서 멀쩡한 안장을 작살내 버린 것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부러진 안장 끝에 걸터앉은 그의 엉덩이가 썩 편치는 못할 터였다.

파비푸스에 도착하기까지 며칠의 야영은 불가피했다. 숲에서 머무는 시간을 줄이려면 해가 떠 있을 때 한시라도 더 서둘러야 했다. 숲은 초원과 다르게 말이 마음껏 속력을 낼 수 없었고, 마차가 지날 수 있는 너비의 오솔길을 찾아 달려야 했다.

나니아가 살짝 손을 뻗어 말의 갈기를 어루만졌다.

“내가 무겁지 않을까요. 죄책감이 들어요….”

하나도 아니고 둘씩이나 태우다니 얼마나 힘들까. 라히무스의 말이 가장 큼직하고 튼튼해 보이긴 했지만, 그래서 더 혹사당하는 것 같아 불쌍했다.

다정한 그녀와 다르게 별 동정심을 느끼지 못하는 라히무스는 무정히 대꾸했다.

“내가 아까 들어 보니까 애는 널 태운 줄도 모르겠던데.”

그는 여자를 깃털처럼 들어 올릴 힘이 있었지만, 말은 아니었다. 그녀도 엄연히 한 사람 분량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이 가엾은 말에게 의탁하기에 적지 않은 무게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라히무스의 덩치가 좀 커야 말이지. 족히 자신의 두세 배는 더 나갈 것 같은 몸뚱이였다.

비교적 수풀이 성기고 깨끗한 길이 나오자 걸음을 평보에서 속보로 바꾸었다. 태어나 처음 겪어 보는 기승 체험에 나니아의 몸은 한시도 긴장을 놓지 못했다. 빳빳이 굳어 있는 그녀의 몸을 눈치챈 라히무스가 조언을 거들었다.

“말의 리듬을 느껴. 버티려고 하지 말고 따라 움직여.”

“…모, 못 하겠어요.”

“차라리 몸에 힘을 빼.”

남자가 다시 온몸으로 나니아의 몸을 압박했다.

“긴장은 내가 할 테니까, 편히 기대.”

그의 몸은 확실히 안정감을 주는 부분이 있었다. 기대기 좋은 넓은 상체와 측면을 안정적으로 감싸주는 두 팔.

솔직히 말하면 아까부터 뒤통수에 닿는 라히무스의 가슴 감촉이 신경 쓰였다. 그가 흉근에 힘을 주지 않을 때면 두툼한 가슴 근육이 말랑해졌다. 그것은 틀림없이 좋은 쿠션 역할을 해 줄 것 같았다.

“그럼, 조금 실례….”

나니아는 라히무스의 말대로 몸에서 힘을 빼고 그에게 기대앉았다. 딱딱하게 버티려고 하지 말라는 사내의 조언이 무슨 말인지도 조금 알 것 같았다. 골반과 허리를 말의 걸음에 맞춰 흔들어 주는 편이 움직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훨씬 편안했다.

문제는 그 움직임이 본의 아니게 뒷자리 남자의 하반신을 자극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기사들과 다르게 갑옷 같은 것은 입지 않았기 때문에, 부푸는 대로 선연하게 드러났다. 그의 물건은 도저히 모를 수 없는 강직과 부피를 자랑했다.

큰 소란으로 번지기엔 기실 서로 수치스러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니아는 남자의 귀에만 들릴 정도로 성을 냈다.

“저질…!”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나 내릴 거야. 당장 멈춰요.”

나니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미안, 미안해. 그런데 물리적 자극은 원래 어쩔 수가 없어서….”

라히무스가 우물쭈물 변명하자, 나니아는 미심쩍어했다.

“진짜로 야한 생각 요만큼도 안 했어요?”

“…….”

남자가 침묵했다.

“왜 대답을 못 해요?”

나니아가 다그치자 그제야 웅얼거렸다.

“…했어.”

“당신은 착한 거짓말 같은 거 할 줄 몰라요?”

그들이 탄 말이 맨 뒤를 달리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이 추태를 지켜보지 않는다는 것이. 하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행동하다간 금방 누구한테 들켜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내려 줘.”

그녀의 단호한 하차 의사에 라히무스가 적반하장으로 골난 소리를 했다.

“야한 생각을 어떻게 안 해?”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야한 생각을 왜 하는데요?”

“네가 이렇게… 젠장, 귀엽고 야하게 움직이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짓이 연상되는 것이 당연했다. 수컷이라면 모두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거라며, 남자가 억울함을 토로했다. 이런 바보 같은 대화를 하는 와중에도 나니아는 그의 부푼 중심이 얇은 천 너머로 느껴졌다.

고삐를 잡은 손목이 엇갈렸다. 이젠 거의 나니아를 끌어안다시피 했다. 남자가 검고 음탕한 숨을 토했다.

“하, 씨발….”

“이젠 나한테 욕도 해요?”

나니아가 기가 찬다는 듯 라히무스를 돌아보았다. 라히무스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얼핏 불쾌해 보이는 찡그린 얼굴에 붉은 홍조가 은근하게 피어 있었다.

“…뭘 봐.”

딴에 쪽팔린 모양이었다. 반항적인 그의 말에 나니아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주 기가 막혔다.

“하, 얼마나 변태 같은 얼굴 하고 있나 무서워서 한 번 봤어요. 왜요?”

나니아가 화를 내며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가 지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자기라도 고삐를 잘 쥐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미안, 미안해. 다시 이쪽 봐 줘… 응?”

단 5초 만에 애걸복걸할 거면서, 왜 심술을 부렸을까. 나니아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읍.”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사내의 기습 키스였다. 그는 한 손으로 나니아의 턱을 붙잡아 그녀의 입술을 급히 훔쳤다. 영주를 곁에 두고 그와 키스하고 싶지 않았다. 나니아는 참지 않고 라히무스의 뺨에 손을 올렸다. 찰싹, 하는 소리가 그의 거친 입맞춤을 멈추었다.

“미쳤어요?!”

나니아는 뺨에 손자국이 난 라히무스의 얼굴을 살폈다. 주름진 미간에서부터 단단히 화가 나 있던 표정은 지워지고, 이젠 아예 초점 나간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맞닿은 하반신이 규칙적으로 비벼지는 감각과 그녀의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야릇한 체취가 절제력을 잃게 했다.

나니아는 그의 입술을 읽었다. 라히무스가 또 소리 없이 상스러운 욕을 하고 있었다. 그가 상기된 얼굴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성욕으로 범벅된 목소리가 낮게 속삭였다.

“…너랑 섹스해 보고 싶어.”

라히무스의 말을 듣고 나니아는 얼굴을 싹 굳혔다.

“당신 동료들이 왜 당신 아랫도리 사정을 걱정했는지 알겠네요.”

더 이상의 음담패설을 참고 들어 줄 수가 없었던 나니아는 결국 발버둥 치며 말을 멈출 것을 요구했다. 앞서가던 이들이 소란을 눈치채고 무슨 일이냐 물어 왔다. 도저히 말을 타고 갈 만한 몸 상태가 아닌 것 같다고 둘러대는 것으로 공주의 마차를 얻어 탈 수 있게 되었다. 진작 그쪽으로 얻어 탔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까.

일 초라도 빨리 라히무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던 나니아는 말의 높이는 미처 생각지 못하고 성급히 움직이다 안장 위에서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나니아는 결국 말에서 내려 바닥을 딛기까지 다시 라히무스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땅을 밟자마자 곧장 자신을 안아 내려 준 라히무스를 거칠게 떠밀고 그의 품 안을 벗어났다. 남자가 의기소침한 표정을 짓건 말건 알 바 아니었다.

공주는 천막을 걷고 웃는 낯으로 맞아 주었다. 나니아는 그녀가 불편하고 어려운 상대였으나, 정작 공주는 그쪽으로 별생각이 보였다. 마차에 창문이 없어서 멀미가 심하게 난다는 불평을 할 뿐 나니아 때문에 한결 더 좁아진 내부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오래도록 덜컹거리니 속이 메스꺼워지긴 했지만, 모르는 남자가 뒤에서 성기를 문지르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 * *

해가 떨어지고 숲이 어둠에 잠겨 말들이 나아갈 수 없게 되었을 때, 일행은 생활용수와 식수를 공급받을 강물을 찾았다. 물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했다. 파키케팔로가 익숙하게 모닥불을 지피고 사람들은 휴식을 준비했다.

편히 쉬고자 하는 마음에 기사들은 중갑을 벗었다. 용병들은 시작부터 편한 옷차림이었기 때문에 탈의할 것도 없었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갑옷을 벗지 않는 것은 영주뿐이었다.

“후, 벗으니까 좀 살 것 같구만.”

“숲이 생각보다 안전한 것 같지 않아?”

“그러게나 말여. 어디서 산적 떼가 쏟아져 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바짝 긴장했었는데.”

모닥불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파키케팔로가 턱을 괴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가 걱정한 것들은 그런 것들이 아니지만.”

오늘 하루 그들을 막아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실 물도 먹을 음식도 충분했다. 이대로라면 숲을 지나 파비푸스까지 당도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어디서 챙겨 왔는지 롱타보드를 가져온 파키케팔로가 기사들 앞에서 게임판을 벌였다. 용 머리를 쥔 모습이 전에 없이 진지했다.

남자들 속에 섞여 있는 라키바하프의 모습은 낯설었다. 저택에서 입던 옷과 다른 복장이라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다. 영주는 나니아를 대할 때와 다르게 사내들과 어울릴 때면 좀 더 호탕하고 거칠어지는 것 같았다.

챠링고는 모닥불 앞에서 육포를 질겅거리고 있었다. 맛보다는 배를 채우기 위한 식사였다. 라히무스가 그녀의 뒤로 다가와 무릎으로 등을 툭 건드렸다.

“뭐야.”

뒤를 돌아보니 밧줄을 손에 들고 쇠사슬 뭉치를 어깨에 둘둘 감아 맨 라히무스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엇을 묶기 위한 물건들인지 굵기와 길이가 상당했다.

“벌써 그럴 때가 됐나?”

라히무스와 그가 가져온 것들을 위아래로 훑어본 챠링고가 높이 올려 묶은 머리를 다시 매만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벨의 곁으로 다가가 무어라 속삭이자, 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이어 파키케팔로에게도 행선을 알렸다.

“어이, 파키케팔로. 잠깐 자리 비운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파키케팔로가 챠링고와 라히무스 쪽을 돌아보았다. 여느 때처럼 험상궂은, 아니 훨씬 더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라히무스의 얼굴을 확인하고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걱정 말고 다녀오라며 손에 든 마른 나뭇가지를 흔들어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그의 신경은 다시 롱타보드 위로 옮겨 갔다.

챠링고가 라히무스의 등을 툭 쳤다. 그들은 어둠이 익숙한 듯 등불 같은 것도 챙기지 않고 길을 나섰다. 그러곤 달빛이 밝히는 부분 너머 컴컴한 숲속 길로 사라져 갔다.

자연히 나니아와 어울릴 사람은 공주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나니아의 곁으로 다가와 모포 한 장을 깔고 앉았다. 조금이라도 엉덩이를 더럽히지 않으려는 모습에서 귀하게 자란 티가 났다.

“왜 그렇게 우울해 보여요?”

공주가 묻자, 나니아는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저는 원래 표정이….”

평소와 다를 것도 없다며 우물쭈물 시선을 돌렸다. 벨은 지치지 않고 말을 걸어왔다.

“지금 머리 귀여워요. 어떻게 한 거예요?”

조금 전 양쪽으로 땋아 내린 댕기 한쪽을 공주가 장난스럽게 잡아당겼다. 친한 척 다가오는 공주의 태도가 영 불편하고 거북살스러웠다.

“그냥, 많이 움직이려면 불편해서요.”

활동성을 고려한 차림새였는데 공주에게는 그것이 귀여워 보였던 모양이다.

“나도 해 줘요, 그거.”

벨이 애교스럽게 요구하며 뒤로 돌아 머리카락을 등 쪽으로 보냈다.

나니아는 난감한 기분이 들었으나 감히 공주님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머리카락을 손에 쥐었다. 그녀의 희고 고운 목을 중심으로 가르마를 가르고 머리카락을 땋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달밤에도 고아하게 빛났다. 모든 빛을 흡수해 텁텁한 색을 띠는 나니아의 검은 머리카락과 다르게 벨의 고운 은발은 모닥불이 일렁이는 대로, 달빛이 부서지는 대로 요요히 다양한 색채를 반사했다.

그러고 보니 공주는 자신을 꾸미는 일에 크게 공들이는 것 같지가 않았다. 고귀하신 왕족 영애도 도망 중에는 치장할 여유가 없어지는 걸까. 이토록 다루는 즐거움이 있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는 것치고 그녀는 머리 모양을 매만질 줄 몰랐다. 높으신 분들은 자기 머리를 직접 단장할 일이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니아는 칙칙하고 푸석푸석한 자신의 것과 달리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공주의 머릿결에 감탄했다. 적당하게 구불거리는 모발은 아무렇게나 다듬어도 쉽게 모양을 내기 좋았다.

한쪽을 완성하고 다른 한쪽을 마저 묶으려는데, 문득 눈길을 들어 살피니 영주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나니아가 아니라 벨이었다. 조그맣게 벌어진 입과 불빛에 일렁이는 커다란 눈동자가 명명백백히 공주의 아름다움에 탄복하고 있었다. 그 넋 나간 시선은 또다시 나니아의 억장을 무너뜨렸다.

사랑스럽다는 듯 공주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감내하면서까지 머리를 만져 주고 싶지 않았던 나니아는 결국 나머지 오른쪽 머리카락을 헐렁하고 엉성하게 묶어 버렸다. 애매하게 짝짝이로 완성됐지만, 어차피 공주는 모를 것이다.

“됐어요.”

나니아가 머리카락을 내려놓자 공주는 흡족한 얼굴로 묶인 머리를 흔들었다.

“고마워요. 나도 나니아처럼 귀여워요?”

‘그 질문은 제가 아니라 저기 있는 저 남자에게 가서 물어보면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것 같은데요.’

답답한 앙금이 가슴에 맺혔다. 차라리 챠링고와 라히무스를 쫓아갈 걸 그랬다. 뭘 하러 어딜 가는지도 모르겠고 감히 따라갈 분위기도 아닌 듯했지만.

벨도 영주의 시선을 의식한 듯 그를 흘긋 쳐다보았다.

“요즘 영주와는 어때요?”

공주가 대뜸 질문을 던졌다.

“뭐가 어떻고 어떻다는 건지….”

당황한 나니아가 말을 얼버무렸다. 벨은 이미 말소리가 들릴 거리가 아님에도 라키바하프를 의식하듯 나니아의 귓가에 가깝게 속삭였다.

“사실, 영주에게서 편지를 받았어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글쎄 언제 봤다고 나에게 마음이 생겼다지 뭐예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나는 저 남자에게 일절 흥미 없답니다.”

벨이 무고한 투항병처럼 양손을 들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자기가 하는 말이 나니아를 안심시키거나 격려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짝사랑하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의 위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차라리 입을 다물고 가만있어 주는 게 더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런 나니아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벨은 아주 극도로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는 귀여운 사람을 좋아해요.”

그러고는 씨익 웃었다.

별로 궁금하지 않은 얘기였다. 나니아는 또 어색하게 고개만 끄덕이려다, 불성실한 응대에 그녀가 노여워할까 두려운 마음이 들어 억지로 대답할 거리를 찾아냈다. 애써 관심 있는 척해 보려는 나니아의 눈에 파키케팔로가 들어왔다.

“귀여운 남자라면, 저런 쪽인가요?”

나니아가 청년을 가리키며 말하자 벨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쟤가 귀여워요?”

노여움을 피하려 꺼낸 말이 되레 공주의 발분을 샀다. 나니아는 급히 파키케팔로의 장점을 찾아 변명을 더했다.

“아, 아닌가…. 키가 큰데 얼굴은 귀염상이잖아요. 저희 저택 시녀들은 다 저쪽을 좋아하던데요. 그 묘한 간극이 좋다고….”

벨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눈을 가늘게 좁혔다.

“여자들이란… 그저 키 큰 남자면 되는 걸까? 쟤는 귀여운 게 아니라 원숭이 같은 거예요. 정신 사나워.”

벨이 짜증스러워하며 손부채질을 했다. 그녀야말로 키가 큰 편이라 외려 남자를 볼 때 신장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은데 의외였다.

나니아는 고개를 돌려 치맛자락 밖으로 드러난 그녀의 매끈하고 긴 다리를 살폈다. 예쁜 다리에 환장하는 남자라면 틀림없이 시선이 끌릴 수밖에 없을 그녀의 각선. 그 끝에 벌레가 지나가고 있었다.

“버, 벌레!”

“응?”

나니아가 발끝을 가리키자 벨은 대수롭잖은 얼굴로 발을 치웠다. 벌레는 공주가 터준 길을 따라 나니아를 향해 빠른 속도로 직진해 왔다. 나니아는 비명을 지르며 공주의 모포 위로 뛰어들었다. 잡고 버틸 곳이 없어 실례인 줄도 모르고 벨의 몸을 붙들었다. 공주가 크게 웃었다.

“벌레 무서워해요?”

산중에 사는 벌레라 그런지 그 크기가 무시무시하게 커다랗고 끔찍했다.

“베, 벨 님은 안 무서우세요?”

“그다지.”

웃으면서 대꾸하는 공주의 목소리가 가볍고 건조했다.

벨은 경황없이 자신의 몸을 붙들어 안은 나니아의 머리카락에 코를 가져가 냄새를 맡았다. 공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대뜸 자신의 머리 냄새를 맡을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당황한 나니아가 여쭈었다.

“으, 무, 무슨 냄새가 나나요?”

“음… 라히무스가 당신에게서 좋은 향기가 난다고 했던 게 기억나서요. 그런데 난 잘 모르겠네.”

나니아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그 남자, 대체 무슨 말을 하고 다니는 거야.’

라히무스, 라히무스….

공주는 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문득 호기심이 일었다.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에 집중할 수 있을 정도로 침묵하던 나니아가 조심스럽게 질문을 꺼냈다.

“저기, 라히무스는 어떤 사람이에요?”

공주가 나니아의 머리끝을 손끝에서 뱅글뱅글 돌렸다.

“구체적으로 뭐가 알고 싶은 건데?”

역으로 질문하는 공주의 목소리가 느슨했다.

“나도 뭐, 자세히는 모르지만요.”

나니아는 왼손으로 오른쪽 팔뚝을 어색하게 긁었다. 그녀에게 라히무스에 대한 것을 물어보는 작금의 상황이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궁금함을 이길 수 없었다.

“그… 여성 편력이랄까… 그 남자의….”

벨이 쭈뼛대는 나니아를 보고 재미있다는 듯 입을 가렸다. 초승달처럼 둥글게 휜 눈이 애써 웃음을 참고 있었다.

“아아, 엄청나죠. 나니아도 당했나요?”

벨의 말을 듣고 나니아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굳었다. 나도 당했냐고? 대체 무엇을 당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사실은 알 것 같았다. 역시 예상처럼 그는 아무 여자나 닥치는 대로 들쑤시고 다니는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너도 당했냐는 말은 짐작 이상으로 신경 쓰였다. 어쩌면 그가 공주에게도 들이댄 적이 있다는 의미인가?

벨의 한마디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벨은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며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듯 말을 이었다.

“심할 땐 여자를 대여섯씩 끼고 지내는 사내랍니다. 뭐, 한 명의 여자가 도저히 버텨 낼 수 없는 정력이라나.”

나니아는 믿기 힘들다는 듯, 아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시시각각 낯빛을 달리하며 벨의 이야기를 들었다.

“때론 그 짓을 하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것처럼 변하기도 하죠.”

벨은 나니아의 표정 변화를 재밌어하는 것 같았다. 배신감, 수치심, 여러모로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하녀의 안색을 살피며 아주 즐거워했다.

나니아가 결국 궁금한 지점을 찾아 질문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내가 왜 이렇게 잘 안다고 생각해요?”

벨이 놀리듯 반문하자, 나니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고민하는 그녀를 보고 벨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은데요. 사실 그 정도로 문란하면 같이 지내는 입장에서 모를 수가 없어요. 답변이 좀 되었나요?”

“…문란.”

나니아가 중얼거렸다.

역시 너처럼 귀여운 애는 처음이라느니 뭐니 하는 말들도 다 입에 발린 소리였던 거다. 다른 여자를 꼬실 때에도 그런 식이었겠지. 당장 곁에 있는 여자가 동료와 의뢰인뿐이라, 쉽게 손댈 수 있는 제삼의 여자가 필요했던 것일 터다.

이미 다 짐작하고 예상했던 부분이면서도 속이 쓰렸다. 나니아는 앞으로 그 바람둥이를 대함에 있어 몸과 마음의 문을 꽁꽁 걸어 잠그리라 재차 다짐했다.

벨은 붉으락푸르락하는 나니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비스듬히 턱을 괴었다. 씨익 웃는 예쁜 얼굴에 천사와 악마가 공존했다.

키 작은 나무 덤불이 흔들렸다. 풀숲이 부스럭대는 소리와 함께 챠링고가 돌아왔다.

“아직도 이러고 있어요?”

그녀가 허리를 숙여 나니아와 벨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누군가에게 기대듯 접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여자였다.

“내일 일찍 출발해야 하니 오늘은 이만 주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챠링고가 벨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은 공주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하는 말이었다.

나니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챠링고가 어깨에 얹은 손을 쳐다보았다. 어디서 무얼 하다 온 것인지 그녀의 손에서 비릿한 쇠 냄새가 났다.

라히무스는 어쩌고 혼자 돌아온 걸까. 물어보고 싶었지만 궁금하지 않은 척했다. 조금 전 공주와 그에 대해서 나누었던 대화 때문이었다. 그 남자에게 관심 있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미 몇몇 사람들은 피곤함을 못 이기고 뻗어 있었다. 나니아도 벨과 함께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공주의 이부자리를 마차 안쪽에 펼쳐 놓고, 그녀도 가냘픈 천막 아래 자리를 잡고 누웠다. 노숙이나 다름없이 너절한 잠자리였다. 머리 위를 기어 다닐 벌레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졌다.

부엉부엉.

밤 사냥을 시작한 새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민가와 멀리 떨어져 야생의 공간에 누워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싸름싸름 풀벌레 소리를 자장가 삼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직 모닥불은 타닥타닥 재 튀기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나니아의 잠을 깨운 것은 닭 우는 소리도 밝아 오는 햇살도 아닌 뜻밖의 소음이었다. 뒤숭숭한 진동과 함께 땅이 울렸다. 육중하고 거대한 짐승들이 뇌동하는 소리였다.

“으악! 뭐, 뭐야!”

소란함을 완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정신을 번쩍 깨우는 비명소리가 귀를 찔렀다.

아침이 밝아 오려면 아직 먼 시간. 힘겹게 눈을 떴을 때 사위는 여전히 어두컴컴했다.

모닥불 주위로 펼쳐진 광경을 찡그린 눈으로 직시하였을 때, 나니아는 자신이 아직 꿈을 꾸는가 싶었다.

지난밤 사내들끼리 롱타보드를 즐기던 평화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변변찮게 펼쳐 놓았던 여행 살림들은 풍비박산으로 흩어져 있었다.

“아악!”

거대한 야생 멧돼지가 사람을 덮쳤다. 보호구를 착용하지 않은 기사의 다리가 사정없이 물어 뜯겼다. 절단된 다리 한쪽을 누군가가 씹어 먹기 시작했다.

“살려, 살려 줘!”

식인 돼지들은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인간들에게 달려들었다. 광포한 입질은 주저 없이 온몸의 살점을 헤집었다.

“끄아아, 끄악!”

누군가는 정신없이 도망치다가 돼지머리에 받쳐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 목뼈가 꺾인 채 그대로 졸도해 버리기도 했다. 즉사한 사체에서 고약한 분비물이 넘쳐흘렀다. 움직임이 멈춘 인간들의 주위로 돼지들이 모였다. 그 역시 고깃덩어리가 되어 짐승들의 입속으로 사라져 갔다.

절단된 육신의 조각들이 널브러져 핏물이 강을 이루었다. 끔찍한 살육의 흔적이 흥건하게 흐르고 뭉쳤다. 아비규환이었다.

“가, 가주님!”

나니아는 이 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라키바하프를 찾았다. 간밤에도 무장을 해제하지 않았던 그는 다행히도 아직까지 사지가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하녀는 무사한 그를 보고 신을 부르짖었다.

남자는 핏물을 기어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웠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검집을 벗은 칼이 재빠르게 돼지의 옆구리를 쑤셨다. 영주는 자신에게 부닥쳐 오는 짐승을 물리치고 잠시 시간을 버는 듯하였으나, 또 다른 축생이 뒤에서 달려들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가주님, 뒤에요!”

나니아가 소리쳤다.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영주를 급습하려던 축수의 눈을 명중시켰다. 안도감과 놀람이 섞인 숨은 목구멍을 막고 허파를 부풀렸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활을 들고 나뭇가지 위로 올라간 파키케팔로가 그곳에 있었다. 그가 등허리에 맨 호록에서 화살을 꺼내며 소리쳤다.

“숫자가 너무 많아! 대체 어디서 이렇게 많이 기어 나온 거야?”

파키케팔로는 다시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쏘는 족족 축수들의 옆구리를 적중시켰으나 치명상을 입히기엔 부족한 수준이었다.

나니아는 그들 사이에서 유독 뒤틀린 체형을 가진 돼지를 보았다. 뒷다리가 기이하게 짧고 앞다리는 사람의 팔처럼 긴 짐승이었다. 단순한 야생 멧돼지가 아님을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것들은 괴물이었다.

축수 한 마리가 보기 싫게 코를 구기며 허공의 냄새를 맡았다. 구석진 나무 사이로 몸을 피하려던 나니아의 존재를 간파해 냈다. 그것은 뀌이익 하는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머리를 흔들며 돌진해 왔다. 곁에 있던 다른 축수들도 그녀를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죽는다. 처참하게 물어 뜯겨 죽는다.

무력한 절망감이 달아날 의지조차 상실시켰다. 힘이 풀린 다리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때, 또다시 챠링고가 나타나 나니아의 목숨을 부지시켰다.

“정신 차려!”

그녀의 단검 두 개가 차례로 돼지 목덜미에 꽂히고, 빠지고, 다시 꽂혔다. 단숨에 급소를 찌르지 못한 칼날이 옆구리를 무자비하게 난도질했다. 자루와 칼끝이 가까운 단검은 그녀의 완력을 온전히 싣고 살가죽을 몇 번이고 뚫었다. 날이 꽂혔다 빠지는 순간마다 핏물이 솟구쳤다. 나니아의 얼굴에, 몸통에, 팔다리에, 벌건 선혈이 튀겼다.

엉망진창으로 도축당한 축수들과 한 덩이 송장에 불과하게 된 기사의 몸뚱이를 바라보면서 나니아는 공포감에 몸을 떨었다. 챠링고가 가까이에 있었기 망정이지 그녀가 아니었더라면 나니아 역시 저들처럼 무참한 주검의 꼴을 면치 못하였으리라. 축수들은 누가 약한 먹잇감인지 분명하게 아는 것처럼 인간들만 골라 달려들고 있었다.

“젠장, 하필 라히무스가 없을 때!”

챠링고는 최선을 다해 축수들의 숨통을 하나하나 끊어 놓고 있었으나, 그 수가 방대하여 모두를 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마차 안의 벨을 지키는 일이 급선무였다. 여기서 한 발짝도 멀어질 수 없었다.

“어이, 아가씨!”

챠링고가 나니아를 불렀다. 혼탁한 시선으로 돌아보자,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엉겁결에 받아 든 그것은 열쇠 꾸러미였다.

“서쪽! 서쪽 강가 멀지 않은 곳에 있어! 가서 데려와!”

그녀가 긴 팔을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라히무스와 함께 사라졌다가 챠링고 혼자 돌아온 그 방향이었다.

목적어가 불분명한 명령을 알아들었다. 나니아는 헐떡이며 주저앉은 몸을 일으켰다. 창황히 뒷걸음질 치며 손에 든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사방이 암암하여 그를 찾아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일 초라도 빨리 그를 찾아오는 것만이 이 상황을 타개할 유일한 방법임을 알아차렸다. 나니아는 챠링고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 나갔다.

“꾸룩!”

그녀를 뒤따라오던 돼지 한 마리가 화살을 맞고 비틀거렸다. 섬뜩한 울음소리에 나니아가 멈칫 뒤를 돌아보았다. 파키케팔로가 부르짖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챠링고! 화살!”

“너는 돌아보지 말고 가!”

이곳을 조금만 벗어나도 더 이상의 지원 사격은 없다. 붙잡히면 죽음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니아는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부푼 폐가 터질 것 같고 목에서는 피 맛이 났다. 그래도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대체 몇 사람이 목숨을 잃은 거지? 가주님은? 가주님은 무사하실까?’

하녀는 지옥에서 도망쳐 나온 죄수처럼 덜덜 떨었다. 하지만 그곳은 아직 나락이었다.

“꾸애액!”

나니아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서 또다시 새로운 축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종전의 것들보다 침착한 놈들은 여자가 훌륭한 먹잇감인지 가늠하기라도 하듯 슬금슬금 다가오며 그녀를 압박해 왔다.

얼마나 더 많은 괴물들이 도사리고 있는 걸까.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던 나니아는 미처 바닥을 살피지 못하고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나니아는 가쁜 호흡으로 주변을 살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못해도 일고여덟 마리의 축수들이 거친 심호흡을 하며 호기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놈들은 기사들에게 달려든 축수들처럼 성급하거나 저돌적이지 않았다. 다만 나니아를 탐색했다.

“뀌이이….”

털이 무성한 돼지 한 마리가 다른 놈들보다 더 성마르게 다가왔다.

놈이 나니아의 다리에 코를 비비려 드는 순간, 또 다른 축수가 마치 견제라도 하듯 놈을 공격했다.

“꿰엑, 뀍!”

“끄액!”

등가죽에 이를 박아 넣는 모습을 통해 그들 사이에 어떠한 동료 의식도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했다.

여러 마리의 돼지 멱따는 소리가 귓바퀴를 휘저었다. 서로 덮치고 덮쳐지면서 풀밭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자기들끼리 혈투를 벌이는 틈을 타, 나니아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켜 다시 사력을 다해 자리를 벗어났다.

“라히무스, 라히무스.”

본능적으로 그 사내만이 이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 줄 것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돼지들이 서로를 도륙 내는 소리가 점점 잦아들 때쯤, 마침내 커다란 달이 술렁이는 물결을 만났다. 이곳 어딘가에서 그를 찾아야 했다.

“라히무스, 라히무스 어딨어….”

잘 참아 왔던 눈물이 왈칵 솟았다. 금방이라도 돼지들이 쫓아올 것 같아 두려웠다. 모진 바람이 불었다. 물결을 타고 피 냄새가 불어왔다.

부모를 잃은 고아처럼 강 주위를 서성이며 울먹이던 나니아의 시야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들어왔다. 그곳에서 분명한 인영을 보았다.

“라히무스!”

남자는 자신의 커다란 몸통을 간신히 감당하는 크기의 거목에 묶여 있었다. 나무를 감싸듯 팔을 등 뒤로 돌려 묶은 자세에서 포박 목적이 그의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를 결박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라히무스 본인이 종전에 들고 있던 그 쇠사슬이었다. 쇠사슬은 사내의 두툼한 몸뚱이를 칭칭 휘감고 몇 개의 자물쇠로 굳게 고정되어 있었다.

“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나니아는 황급히 라히무스에게로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숨통이 겨우 붙어 있을 만한 수준의 상처. 치명적이지 않을 정도의 결박. 대체 무엇 때문에 이처럼 참혹한 모습으로 속박당해 있어야 했는가. 한없이 굳건해 보였던 허벅지엔 커다란 자상이 남아 있었고 신체 곳곳엔 상흔이 가득했다. 쇠사슬 사이로 불거져 나온 커다란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움직였다. 이대로 괴물들에게 발견되기라도 했더라면 어떤 변고를 겪게 되었을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몰골이었다.

소녀는 거친 심호흡과 함께 열쇠 꾸러미를 다잡았다. 쇠사슬을 단단히 고정하고 있는 자물쇠가 한 개, 두 개도 아니고 무려 다섯 개였다.

“미쳤어, 미쳤어.”

혼란한 중얼거림이 라히무스의 잠을 깨웠다. 그가 느른한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구멍에 열쇠를 끼워 맞추는 손이 위태롭게 벌벌 떨렸다. 쉽사리 돌아가지 않는 열쇠를 몇 번이고 비틀었다. 마지막 열쇠를 풀어 갈 때쯤, 자기들끼리의 싸움을 끝낸 축수 무리의 일부가 사라진 나니아를 찾아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베이스캠프에서부터 쫓아온 녀석들인지도 몰랐다.

마지막 자물쇠까지 끌어내고 아직 칭칭 감겨 있는 쇠사슬을 걷어 내려 할 때였다.

“저, 정신이 좀 들어요?”

나니아는 고개를 들어 라히무스의 얼굴을 살폈다. 눈꺼풀 안에서 드러난 억센 눈이 붉게 빛났다.

무슨 일이냐는 물음을 건넬 것이라 짐작했던 것과 다르게, 눈을 뜬 그는 마치 나니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그르렁거렸다.

남자는 어깨를 비틀어 팔을 움직였다. 사내의 흉포한 이두근이 억지로 사슬을 끌어당겼다. 그의 괴력이 헐거운 간격을 만들었다. 쇠사슬이 남자의 헐벗은 가슴 아래로, 허리춤으로, 허벅지로, 종아리로 흘러내렸다.

끝끝내 그의 몸이 완전히 자유로워졌을 때, 라히무스는 한 마리 야수처럼 짙게 포효하며 축수들을 향해 달려 나갔다.

나니아는 손에서 열쇠 꾸러미를 떨어뜨리고 그가 묶여 있던 나무에 힘없이 몸을 기댔다.

“…저건.”

확실히 사람은 아니었다.

남자는 맹수처럼 움직였다. 눈이 쫓아가기 힘든 속도였다.

“뀌애액!”

“꾸이익!”

축수들은 그에게 덤벼드는 것인지 나니아에게 달려드는 것인지 모르게 내달았다. 사내는 한 치의 접근도 허용하지 않고 모조리 도륙을 내기 시작했다.

핏줄이 선 손이 괴물의 배를 쑤셨다. 평소보다 더 억척스럽고 거칠어진 손가락과 그 끝의 손톱은 마치 칼날처럼 상대방의 살갗을 찢었다. 남자의 손톱이 생살을 뚫고 갈랐다. 쏟아져 흐르는 장기가 손을 더럽혔다.

옆으로 달려드는 미물들은 무릎과 발끝으로 상대했다. 걷어차인 축수들은 나무 기둥으로 날아가 몸을 부딪치고 떨어졌다. 갈비뼈가 몇 대 부러질 정도로 거친 충격을 입었다.

남자의 살육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맨손으로 축수의 목을 비틀고, 다리를 꺾었다. 공중에서 내려쳐진 놈들은 바닥으로 추락한 달걀처럼 힘없이 가꾸러졌다. 나니아는 죽어 가는 돼지들의 소음 속에서 귀를 틀어막고 몸을 옹송그린 채 이 끔찍한 학살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남자의 오른손에서 마지막 축수 사체가 툭 떨어졌다. 소름 끼칠 정도로 적막해진 숲속에 남자의 숨만이 거칠게 붙어 있었다.

뿌옇게 그늘진 구름을 벗어나 눈부시게 하얀 달이 드러났다. 푸르다 못해 차가운 달빛이 흉터로 가득한 남자의 등을 비추었다. 그의 드센 호흡을 따라 어깨가 들썩였다. 반라의 등에 그가 살아온 흔적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뚜렷하고 선명한 날갯죽지. 그 사이를 정확히 가로지르는 척추뼈. 그 밑으로 엉치뼈에서부터 뻗어 나온 무언가.

검고 반짝이는 비늘로 둘러싸인 그것은, 이제껏 본 적 없는 거대한 파충류의 꼬리였다.

용의 꼬리가 거칠게 바닥을 내리쳤다.

지상의 것이 아닌듯한 절대적 힘의 차이. 지금껏 겪어본 적 없는 광포한 위압감.

인간이라 보기 힘든 몸집과 근골이 지독하게 야만적이었다. 그는 생동하는 한 마리 흉기였다.

라히무스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핏발 선 눈동자가 어둠 속 여자를 정확히 노려보았다.

나니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라히무스…? 나, 나예요.”

하지만 남자는 그르렁거리기만 할 뿐 묵묵부답이었다.

뚜벅뚜벅, 목표를 향해 다가오는 맹수의 느릿한 발걸음에 하녀는 겁먹은 호흡을 집어삼켰다.

도망치는 순간 그 즉시 또 다른 사냥이 시작될 것 같은 분위기 속에, 구제되었다는 안도감보다는 대상이 바뀌었을 뿐인 공포를 느껴야 했다.

좁아진 기도 끄트머리로 가쁜 숨을 뱉었다. 어느새 코앞으로 다가온 그를 목이 빠지게 올려다보았다.

남자가 나니아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이지가 통하지 않는 눈동자 속에서 그녀는 완전히 타인이었다.

크릉… 사내의 목구멍에서 울음이 끓었다.

조금 전까지 축수를 찢어발기던 손에서는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손톱. 터질 것 같은 손등의 핏줄. 용 비늘이 빼곡하게 돋아난 손의 생김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이번에는 여자가 도륙 날 차례였다.

‘살해당한다.’

나니아는 두려움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잔디를 쥐어뜯으며 발발 떨고 있는 그녀의 어깨에 닿은 것은, 라히무스의 검붉은 머리카락이었다. 뜨거운 피부였다. 축축한 땀이었다.

남자는 어미 찾는 새끼처럼 나니아의 품에 안겨들었다.

“…나냐.”

거스러미 돋친 음성이 중얼거렸다. 짧은 언성은 여자의 이름을 닮아 있었다.

사내는 길고 높은 콧등을 나니아의 목덜미에 파묻은 채,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쌔근쌔근 기분 좋아 보이는 숨소리가 나니아의 빗장뼈 위로 흩어졌다.

“…라히무스?”

나니아는 자신의 품에 안겨 이마와 뺨을 치근대는 사내의 모습에 안심하면서도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그는 여전히 피투성이 학살자의 모습을 한 채로 길이 든 집짐승처럼 얌전하게 고롱거렸다.

‘도대체….’

나니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의 행동과 생김에 당황하며 그의 모습을 면밀하게 살폈다.

“당신은… 뭐죠?”

나니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남자의 몸 곳곳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신체 부위가 관찰됐다. 두껍고 기다란 꼬리 끝은 땅바닥에 호를 그리며 살랑거렸고, 목덜미나 등허리 국소에 검고 까슬까슬한 비늘이 돋아 있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그의 머리 위에 돋아난 뿔이었다.

귀와 관자놀이 사이에서 뾰족하게 자라난 그것은, 산양의 두각처럼 겹겹이 쌓인 형체로 초식 동물의 상아 모양을 닮아 있었다. 색은 꼬리처럼 짙고 어두운 빛깔을 띠었다.

매우 기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기한 모습이었다. 나니아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의 머리 위로 손을 가져갔다.

“한 개는 부러졌네….”

원상태 그대로였다면 아마도 완벽히 짝을 이루었을 한 쌍의 두각. 그러나 어째서인지 오른쪽 뿔이 잘려 나가 비대칭의 상태였다.

거칠게 잘려 나간 단면을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쓸어 보았다.

그러자 잠잠해졌던 라히무스가 벌컥 고개를 들어 뿔을 만진 손목을 움켜쥐었다.

“뭣….”

나니아는 깜짝 놀라 팔을 몸 쪽으로 당겼다. 하지만 이미 단단히 붙들린 손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 만지면 안 되는 거였어요?”

나니아는 다소 바보스럽게 들리는 질문과 함께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어른 몰래 장난을 치다 걸린 아이 같았다.

깜짝 놀란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는지, 남자도 충격받은 얼굴로 눈을 크게 치떴다.

“…….”

하지만 이내 다시 자신의 뿔 위로 나니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오히려 만져 달라는 듯 무른 접촉을 유도했다.

너그럽고 허용적이었다.

남자가 이끄는 대로 가만가만 왼쪽 뿔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이상하게 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밭은 숨을 몰아쉬던 라히무스가 다시 고개를 들어 나니아를 응시해 왔다. 정념 어린 시선은 그날 침대 위에서 교차했던 그 눈빛과 똑같았다.

헐떡이는 숨, 살짝 벌어진 입술. 그는 마치 성감대라도 만져진 사내처럼 흥분하고 있었다.

“아읏, 아파…!”

아차 싶었을 때는 이미 격앙된 그가 나니아의 목덜미를 거칠게 깨문 후였다.

순식간에 사내는 커다란 체구로 야수와 같이 덮쳐 왔다.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나니아는 발버둥 쳤다.

그때,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와 라히무스의 경추에 꽂혔다.

예기치 못한 피습에 나니아는 기겁했다. 그녀를 옥죄었던 남자의 팔에 힘이 빠져나가면서, 끝내 땅으로 툭 떨어졌다.

“나나!”

크게 당황하여 남자의 덜미를 살피려던 그때, 저 멀리 파랗게 밝아 오는 여명을 따라 라키바하프가 달려오고 있었다. 챠링고와 파키케팔로, 벨도 함께였다.

영주가 나니아의 곁으로 다가와 다급히 무릎을 꿇었다. 피에 절은 건틀릿이 우악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상태를 살폈다.

“무사했구나, 무사했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나니아의 안위를 확인한 영주가 파키케팔로의 멱살을 잡고 화를 냈다.

“이봐! 방금 그 화살에 아이가 맞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나?!”

파키케팔로가 황당하다는 듯 대꾸했다.

“우와, 내 사렵 솜씨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온단 말야? 고작 이 정도 거리에서 못 맞출까 봐?”

자타공인 신궁이라 자부하는 파키케팔로였다.

“그리고 내가 아까 니 목숨을 대체 몇 번이나 살려 줬는데.”

그는 이 배은망덕한 인간 남자를 그냥 축수 먹이가 되든 말든 구해 주지 말았어야 했다고 성을 냈다.

하지만 나니아에게 중요한 것은 화살이 본인을 빗겨 나갔는지 아닌지가 아니라, 애당초 왜 라히무스가 공격당해야 했는가 하는 문제였다.

파키케팔로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걸어와 라히무스의 목에서 화살을 뽑아냈다. 상처 난 구멍에서 피가 주룩 흘렀다.

‘어떻게 동료에게 이런 짓을…!’

나니아는 자신의 무릎을 베고 쓰러진 라히무스의 뒤통수를 안절부절 쓰다듬으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짓을 벌인 파키케팔로를 원망하였다.

“이미 너무 많이 다쳐 있었는데, 당신 때문에… 빠, 빨리 치료를….”

파키케팔로는 당치도 않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라히무스는 그 정도로 안 죽어. 반죽음 상태로 만들어 놓지 않으면 우리가 제어할 수 없다고.”

그가 팔짱을 낀 채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원상의 라히무스는 화살 따위로 꿰뚫을 수 없는 강한 거죽을 가지고 있었다. 파키케팔로가 사용한 것은 마취 효과가 있는 화살촉으로, 사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든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잠깐.

“으악. 그것보다 뿔 돋았어. 저거 봐, 챠링고!”

파키케팔로가 징그럽다는 듯, 그러나 분명히 재밌어하는 얼굴로 잠든 라히무스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진짜 짝짝이네.”

파키케팔로가 히죽거렸다.

그의 말을 듣고 챠링고도 라히무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불유쾌한 표정으로 라히무스를 못 본 체했다.

나니아의 곁으로 다가온 챠링고가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진 열쇠 꾸러미를 수거했다.

“고생했네, 아가씨. 어쩌면 벌써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이군.”

그녀의 말을 듣고 라키바하프가 따지듯 물었다.

“당해? 뭘 당한단 말이지?”

벨이 쓰러진 라히무스를 향해 턱짓하며 말했다.

“발정기 라히무스는 꽤 무섭거든요.”

영주도 그제야 하녀에게서 관심을 돌려 그녀의 품 안에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도 뒤늦게 보통의 인간과 다른 라히무스의 신체 변화를 알아차렸다.

“이건 대체….”

영주는 혼란스러워하며 뒷걸음질 쳤다.

챠링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굵은 쇠사슬을 천천히 팔에 감아 거둬들였다.

영주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충격에 빠진 표정을 짓자, 파키케팔로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고뇌했다.

“아아,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이래서 인간하고 같이 다니면 귀찮다니까!”

일행은 잠든 라히무스를 베이스캠프로 이동시키려다가 끝내 포기했다. 그가 너무 무거워서 짜증 나기도 했거니와, 시체들이 뒹구는 전지에서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어 하는 라키바하프 때문이었다. 그는 기사들의 유해를 수습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거듭 토악질만 해 댔다.

하녀는 눈물, 콧물에 이어 구토까지 쏟아 내는 영주의 곁에서 말없이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더 이상 게워 낼 것도 없어 투명한 위액만 쏟아 내자, 토사물로 더러워진 영주의 입가를 피 묻지 않은 옷자락 끝으로 닦아 주었다.

공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모습을 빤히 관찰하고 있었다.

영주의 구역질이 멈추자, 나니아는 입고 있던 옷을 빨아 적당히 널어놓고 라히무스에게로 돌아왔다.

그녀는 쇠사슬로 꽁꽁 묶여 미라처럼 누워 있는 라히무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설핏 만져 본 그의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몸에서 이렇게나 열이 나는데도 매정한 그의 동료들은 신경 쓰지 말라 했다. 자기들은 깨끗한 민물에서 목욕까지 마쳐 놓고서는.

아무리 그래도 사람 몸에 이게 무슨 짓인지.

남자는 온몸이 혈흔과 상처로 가득했다. 사슬 너머로 그의 몸을 닦아 주는 데만도 한계가 있었다.

나니아는 가지고 있던 천을 둥글게 말아 가엾은 그의 머리 뒤에 받쳐 주었다.

그와 달리 이 모든 상황은 어디까지나 남의 일인 듯, 벨은 무심하게 관조했다.

“지극정성이네요.”

“네?”

“아니에요.”

어딘지 못마땅한 말투였다. 하지만 나니아는 그녀의 기분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핼쑥해진 영주가 겨우겨우 어렵사리 몸을 가누었다. 그는 지난밤 자신을 지켜 준 금속의 갑옷을 좀처럼 벗지 못했다.

하룻밤 사이에 신용하는 기사 넷을 모두 잃었다. 그것도 매우 참혹하고 잔인한 방식으로.

씹다 뱉은 고깃덩어리가 되어 있는 시체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마차와 짐은 모두 챠링고와 파키케팔로의 도움을 받아 호수 근처로 옮긴 후였다. 마차를 버리자는 파키케팔로와 포기 못 한다는 벨이 투닥거린 결과였다.

피에 젖은 머리카락을 채 씻어 내지도 못한 영주가 파리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남자는… 그리고 우리를 공격한 것은 무엇이지?”

한 남자는 곤죽이 되어 누워 있고, 한 남자는 실신할 것 같은 얼굴로 간신히 앉아 있는데, 파키케팔로만이 명랑할 정도로 팔팔하게 선 채였다.

“이왕 이렇게 들통났으니 설명하지!”

그는 고목나무 둥치 위에 우뚝 서서 위풍당당한 자세를 취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용의 후예. 사실 인간 따위가 아니었다, 이 말씀이야!”

귀엽긴 했으나 그다지 도움이 되는 설명은 아니었다.

곁에 있던 챠링고가 덤덤히 해설을 덧붙였다.

“다른 이들을 우리를 용족, 혹자는 용인, 보통은 리자드라 부르지.”

‘우리’란 파키케팔로, 챠링고, 그리고 라히무스. 세 사람 모두를 포함했다.

또다시 파키케팔로가 끼어들어 선언하듯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용의 후예라고 불러 주는 걸 더 좋아해!”

스스로를 과시하는 어린 리자드의 얼굴에 자랑스러움이 넘쳐흘렀다.

“국제법상 동대륙에 사는 인간들에게 서대륙의 정보를 흘리는 것은 금지된 일이야. 그래서인지 동대륙 인간들에게 대양 너머 서쪽 땅은 미지의 세계지. 맞아, 우리는 서대륙 출신이야.”

만 하루를 채 가지 않는 약효가 떨어지면 그들도 라히무스처럼 감춰 왔던 꼬리와 비늘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챠링고가 피 묻은 단검을 닦아 내며 축수에 대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우리가 온 땅엔 저런 것들이 널려 있어. 하지만 머릿수로 몰아치지 않는 이상 감히 우리 같은 리자드에겐 적수가 안 되지. 저능한 돼지들은 너희를 보고 덤빈 거다.”

그러나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마치 이 숲에 사는 모든 축수들이 한데 모이는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서대륙에는 축수와 인간들에 대한 문제를 의논하고 교섭하는 협의 기구가 있었다. 그 다종족 협의체는 축수들이 인간의 땅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일 수 없도록 통제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니까 협의체의 관리 아래에서 인간의 땅에 숨어들어 사는 축수의 수가 이렇게 많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씨를 말려 놓은 것 같긴 한데… 솔직히 가늠 안 되는군.”

라키바하프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혼란스러워 했다.

“아직 숲에 남아 있는 것들이 영지를 습격한다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나니아를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뷔셀, 이곳은 너무 위험해. 돌아가야 한다.”

파키케팔로는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는 동안의 안전은 어떻게 보장할 건데. 일단 여기까지 온 거, 우리 곁에 남는 편이 가장 안전해.”

가만히 듣고만 있던 벨이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했다.

“라히무스가 깨어나면 즉시 출발하죠. 당신도 파비올라보다는 파비푸스에 먼저 당도하여 그곳 영주에게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것이 좋겠어요.”

벨은 나니아가 지난밤 묶어 주었던 머리끈을 하나하나 풀어냈다. 매듭지어졌던 머리카락이 북슬북슬하게 흘러내렸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마침… 일어났네요.”

“라히무스!”

“라히무스, 정신이 좀 들어요?”

철렁거리는 쇠사슬 소리가 남자의 기상을 알렸다. 힘겹게 눈을 뜬 그가 허공을 응시했다. 목 깊숙한 곳에서 신음이 아릿하게 흘렀다.

모두가 눈을 뜬 라히무스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웬일이래.”

“이제 풀어 줘도 되는 거예요?”

나니아가 남자 곁에 무릎을 붙이고 앉아 물었다.

상처가 덧나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나니아는 그의 불덩이 같은 이마에 손을 올려 보고, 고단해 보이는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밝은 아침 햇살 아래에서 본 라히무스의 얼굴은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약을 먹고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했을 때보다야 사나워 보이긴 했으나, 또렷한 눈동자는 확실히 이성을 되찾은 것 같았다.

겨우겨우 눈을 뜬 라히무스를 내려다보며 챠링고가 질색을 했다.

“이봐, 일어났으면 빨리 그 민망한 뿔부터 어떻게 좀 하라고.”

뿔 이야기에 라히무스의 눈동자가 번쩍 뜨였다. 아직 채 정신이 돌아오지 못한 상태였는데도 그랬다. 나니아와 눈이 마주친 그가 표정을 싹 굳혔다.

남자는 어젯밤 일을 온전히 기억해 냈다.

당혹감에 아랫입술을 꽉 깨무는 그를 보고 파키케팔로가 킬킬거렸다.

나니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라히무스의 머리 위에 돋친 뿔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어리숙한 시선은 좀처럼 안색이 변하는 일 없는 사내의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남자는 애써 그녀의 시선을 외면하며 동료들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당장… 풀어.”

챠링고는 네가 알아서 하라는 듯 파키케팔로에게 열쇠를 던져 주었다. 청년은 히죽대면서 라히무스의 포박을 풀어헤쳤다. 느슨해진 쇠사슬 사이로 몸을 일으킨 사내는 곧장 등을 돌려 짐마차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마차 밖으로 나온 그에게서는 뿔도 꼬리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 만난 그날처럼 길고 검은 로브를 머리끝부터 뒤집어쓰고 있었다. 사나운 두 눈과 높은 콧대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남자가 조용히 바윗돌 위에 다리를 올려놓고 아물지 않은 상흔을 살폈다. 나니아는 그가 제대로 치료하지 않았다는 점이 못내 신경 쓰였다. 그녀가 라히무스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약이 없는 거죠?”

남자는 멈칫하며 상처를 살피던 행동을 멈추었다.

“파비푸스에 도착하면 의원부터 들려요.”

“…….”

남자는 대꾸가 없었다. 빳빳하게 굳은 몸은 그가 나니아의 말을 알아들었음을 증명하는데, 무시하듯 고정된 고개는 그녀 쪽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나니아는 한 걸음 더 다가가 뒷짐 진 자세로 허리를 숙였다. 고개 숙인 그를 밑에서부터 올려다보았다.

“붕대 감는 거 도와드릴까요?”

남자는 자신의 시야각 안으로 성큼 들어온 나니아를 흘긋 눈동자만 굴려서 쳐다보더니, 아예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버렸다.

“…됐어.”

필요 없다고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예상외로 냉랭했다.

딱딱하지만 쌀쌀맞게 군 적은 없었던 라히무스의 차가운 거절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는지, 이번에는 나니아가 뒷짐 진 자세 그대로 굳어 버렸다.

라히무스는 그런 그녀를 뒤에 남겨 두고 피하듯 자리를 옮겼다.

짐수레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우세하여 이륜마차를 끄는 것은 결국 파키케팔로의 몫이 되었다.

“아, 좁아요. 둘 다 마차 안으로 좀 들어가.”

“멀미 난단 말이에요.”

좁은 마부석에 꾸역꾸역 세 사람이 끼어 앉자, 파키케팔로가 짜증을 냈다.

“그럼 한 명만이라도 좀 들어가요.”

“싫어요. 나니아 없으면 심심해.”

“아니 그럼 왜, 나를 꼭 가운데 끼고 앉아야 하는 거야?”

“그야 파키케팔로가 조종을 해야 하니까.”

“안 그래도 꼬리가 답답해 죽겠다고! 이제야 좀 자유로워지나 싶었는데.”

청년이 마부석과 마차 사이 좁은 틈에 낀 꼬리를 신경질적으로 흔들었다. 숨겨 왔던 정체가 인간들에게 탄로 난 그는 이제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며 좋아했었다. 나니아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의 꼬리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파키케팔로 꼬리는 반짝반짝해졌네요.”

그 말에 파키케팔로는 알아봐 주어 기쁜 듯 뽐을 냈다.

“그럼, 꼬리에 멋을 내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고.”

리자드 청년의 꼬리는 마치 반지를 여러 개 낀 손가락처럼 여러 가지 금속 장식과 벨트 등으로 빼곡하게 꾸며져 있었다.

나니아는 고개를 돌려 앞서가는 챠링고의 꼬리도 살펴보았다. 그녀의 꼬리는 긴 천을 둘둘 감고 있었는데, 장식이라 부르기에 어폐가 있을 정도로 수수했다. 정말 그냥 옷을 입은 것 같았다.

시선을 눈치챈 챠링고가 말했다.

“봐 줄 사람도 없는데 꾸며서 뭘 해?”

“흥. 멋쟁이 수컷 리자드라면 언제나 꼬리가 매끈하고 아름다워야 하는 법.”

파키케팔로는 챠링고 몰래 나니아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암컷들은 저렇다니까.”

나니아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간밤에 보았던 라히무스의 꼬리를 떠올렸다. 사정을 듣고 보니 로브 너머 그의 것도 궁금해졌다. 라히무스는 여전히 자신의 꼬리를 옷으로 감추고 있었다. 이제는 숨길 필요가 없는데도 그랬다.

라히무스도 파키케팔로처럼 치장에 심혈을 기울였을까? 꼬리 맵시에 신경을 쓰는 그의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옷을 들추어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짓궂은 상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챠링고, 방금 얘가 너 비웃었어.”

“뭐?”

“아, 아니에요.”

나니아가 당황해서 뒤돌아보는 챠링고를 향해 손사래 쳤다. 파키케팔로가 낄낄댔다.

“그러고 보니 웃는 거 처음 보네. 좀 웃고 살아.”

익살꾸러기 리자드가 나니아를 향해 씨익 웃었다. 옆에서 벨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어제 그런 일을 겪었는데 웃으라고 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나요?”

“에, 그도 그런가.”

비교적 가볍고 유쾌한 분위기의 뒤쪽과 다르게 앞서가는 남자 두 명은 죽을상이었다. 잃어버린 기사 대신 길잡이 역할을 하던 영주가 침잠한 목소리로 말했다.

“곧 파비푸스 성에 다다른다. 다시 꼬리를 가리던지 치우던지 해야 할 것 같군.”

“통행은 당신 얼굴로 보증하는 거지?”

“자네들도 챙겨 온 갑옷으로 갈아입고 나의 호위들로 가장하는 것이 좋겠네. 함께 성에서 머물고 싶다면 말이지.”

“와, 저거 보기만 해도 답답했는데.”

불평하는 파키케팔로와 다르게 챠링고는 동의했다.

“따뜻한 데서 먹여 주고 재워 준다면, 기꺼이.”

그 말에 파키케팔로가 한숨을 쉬었다.

“하아… 공짜 밥이라면 어쩔 수 없지.”

멀고 험난한 길을 쉬지 않고 달려 도착한 파비푸스. 다시 인간 사회로 들어가기 위해 둔갑약 복용은 필수였다. 짧았던 즐거움을 뒤로 하고 다시 꼬리 장신구를 가방에 집어넣는 파키케팔로의 얼굴이 슬퍼 보였다.

일행은 성문을 코앞에 두고 멈춰 서서 영주의 말대로 옷을 갈아입었다. 챙겨 온 기사 갑주 세 벌 가운데 각자 몸에 맞는 것을 찾아 어색하게 팔 다리를 욱여넣었다.

“파키케팔로까지는 어찌저찌 됐는데… 라히무스한테는 너무 작지 않아?”

챠링고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판갑 한 벌을 쳐다보며 근심했다. 가장 큰 체격의 사람이 입던 것이었는데도 사내에게는 턱없이 작았다.

“어차피 라히무스한테 안 맞는 거면 차라리 나 줘라. 이거 매우 답답해.”

한 치수 크게 입어 보려는 파키케팔로가 마지막 남은 판갑을 탐냈다.

있는 그대로의 소임을 다할 뿐인 하녀는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리자드들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그녀는 마부석 위에 가만히 앉아 그들을 지켜보았다.

라히무스는 어지간한 장정들보다 머리 한 두 개는 더 커다란 사내였다. 처음 보았을 때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까지 키가 클까 놀라웠는데, 남자가 인간이 아님을 알고 나니 평균을 훨씬 웃도는 그의 신장도 납득되었다.

“그러니까 옷이 안 맞는 건 어쩔 수 없죠. 라히무스는 마을에 방을 잡고 투숙하기로 해요.”

벨이 말했다.

“따로 다니자는 말씀이세요?”

“별수 있나요. 나 같아도 저렇게 험상궂고 수상하게 생긴 남자는 받아 주기 싫은 걸. 그렇죠, 영주님?”

챠링고가 마뜩찮아 하자 벨이 파비올라를 향해 생긋 웃으며 물었다.

“아, 네, 네. 공주님 말씀이 옳습니다.”

바보 같은 얼굴로 긍정하는 영주를 보며 나니아는 한숨을 쉬었다.

* * *

파비푸스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챠링고의 예상과 다르게 그들의 신분은 라키바하프의 얼굴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통행증으로 보장되었다. 남자가 통행증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출입은 간단히 이루어졌다.

“영주의 조카씩이나 왔으니 크게 환대하는 나팔이라도 불어 줄 줄 알고 기대했는데.”

파키케팔로의 쓸데없는 말에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파비푸스는 파비올라에 비해 깔끔하고 넓은 포장도로가 발달해 있었다. 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길이었다. 큰 길을 중심으로 빼곡하게 들어선 건물들은 질서정연했다. 도시라 칭하기엔 부족했으나 그렇다고 시골이라 부르기에도 어색함이 있었다.

파비올라가 아닌 다른 마을을 구경하기는 처음이었다. 나니아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어린아이 같은 해맑은 눈빛에서 촌사람 티가 났다.

초행길이 아닌 라키바하프와 수도 출신 벨, 그리고 수도 없이 많은 곳을 돌아다닌 용병들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흔한 영지일 뿐이었다.

일행은 파비푸스의 영주가 사는 저택으로 가기 위해 광장을 지났다. 좌판에서 물건 파는 소리로 시끄러워야 할 광장이 평소와 다른 쟁점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광장 높은 곳, 처참한 몰골의 여자가 기다란 작대 끝에 가축처럼 묶여 있었다. 그 밑으로 구경거리라도 난 듯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관중들의 웅성거림을 따라 하나둘씩 더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였다.

누군가 재단에서 큰 목소리로 호령했다.

“이 간녀는 평상시 삿된 악행과 부도덕한 음행을 일삼은 바, 사특한 조악을 저질러 우리 파비푸스의 이름을 더럽혔다! 이에 마땅히 처형으로 심판 하여 본보기를 보이겠노라. 집행인, 시작하라!”

“네!”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환호성 쳤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화형식이 집행 중이었다. 관중들이 일제히 구호를 외치며 손을 흔들고, 극도로 흥분한 누군가는 꼬챙이에 묶인 여자를 향해 돌을 던지기도 했다.

무엇이든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구경하던 나니아였지만, 차마 저것만은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평화로운 파비올라 밑에서 지내 한동안 잊고 살았다.

고문과 처형이 빈번한 세상이었다. 여느 장원과 같이 이곳 파비푸스도 범법자 처벌과 관련하여 군주가 절대적인 무소불위의 판결권을 행사했다.

나무 작대 아래에 소복하게 쌓인 밀짚 위로 불이 붙었다. 타들어 가는 불꽃이 금방이라도 사형수를 집어삼킬 것처럼 이빨을 드러냈다. 이미 곤죽이 되어 무력하게 죽음을 기다리던 사형수는 불꽃이 발끝에서 일렁이기 시작하자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광장 가득히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산송장 같던 몸에 화르륵 불이 옮겨 붙었다.

나니아는 끔찍하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라키바하프는 지나가던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대관절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저토록 끔찍한 처벌이 내려진 것이냐?”

행인은 라키바하프의 귀한 행색을 위아래로 훑었다. 영문 몰라 하는 그를 보고 외지인임을 확신하며 대답했다.

“저 유부녀가 지난주에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뭐?”

챠링고와 파키케팔로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안색이 나빠지기는 나니아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다야?”

“유부녀가 쌍둥이를 낳은 게 뭐?”

챠링고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설명을 요구했다. 한 차례 한숨을 내뱉은 영주가 앞장서 말을 몰았다.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면서 얘기하지. 숨 막히게 불편한 느낌이군.”

사람을 해하는 것이 끔찍하게 싫어 고문과 사형을 금지한 파비올라다. 하지만 이곳은 어디까지나 남의 소령이었고, 그는 지금 당장 저 사형수의 문제를 해결해 줄 능력도 용기도 없었다. 암약하지만 곁에 머물고 싶지도 않았다.

이곳 파비푸스의 군주인 고모 부부는 파비올라와는 많이 다른 성정을 지녔다. 필요하다면 살인과 고형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쌍둥이가 뭐 어쨌는데.”

광장을 벗어날 때쯤, 인간 문화를 이해할 길 없는 리자드가 반발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영주 대신 벨이 대답했다.

“쌍둥이는 불길하다고 믿어지니까요.”

그러고는 넋 없이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맞아, 이런 곳이었지. 그새 잠깐 잊고 있었네.

“쌍둥이는 부정한 관계의 산물이지. 지아비가 있는 여자가 둘 이상의 남자와 관계를 맺고 쌍둥이를 잉태했으니, 이곳에선 사형감으로 여기는 모양이로군.”

믿을 수 없다는 듯 챠링고의 입이 떡 벌어졌다. 벨이 다시금 중얼거렸다.

“아, 정말 미개해.”

“이봐, 인간들은 정말 그렇게 생각해?”

파키케팔로가 놀라워하며 옆구리를 쿡 찌르자, 나니아는 자신 없어 하는 목소리로 학습된 대답을 내놓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쌍둥이는 불길하다고….”

“허, 참.”

챠링고가 어이없어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자조하듯 말했다.

“니들 논리대로라면 우리 엄마도 이 남자 저 남자한테 다리 벌리는 문란한 여자였다는 거네.”

“우리 엄마는 진짜 창녀였을 수도 있어, 챠링고.”

“닥쳐.”

장난치고는 말이 좀 심하지 않나 걱정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파키케팔로의 얼굴이 썩 진지했다.

쌍둥이는 당연히 재앙을 가져오는 불순한 존재인데 리자드들에게는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들도 개나 돼지처럼 여러 마리의 새끼를 낳는 걸까? 아니 애초에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나기는 하는 건가?

나니아는 그들이 난생 동물인지 태생 동물인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생식에 대해 묻는다는 것이 조금 실례인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파키케팔로와 챠링고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던 나니아가 다른 질문을 꺼냈다.

“세 사람은 남매지간인가요?”

“셋? 누구? 나?”

파키케팔로가 입을 쩍 벌리며 손가락으로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나니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키케팔로랑 챠링고랑, 그리고 라히무스요.”

쥐죽은 듯 조용히 앞서가던 라히무스도 이번에는 등이 움찔 굳는 것이 느껴졌다. 챠링고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듯 잘 걸어가던 말을 세워 가며 극구 부정했다.

“아니! 대체 어딜 봐서?”

“웩.”

파키케팔로는 구역질하는 시늉을 했고, 라히무스도 기분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재밌다는 듯 깔깔 웃는 것은 벨뿐이었다.

“그냥 머리색도 그렇고, 눈 색도 그렇고, 이목구비나… 키가 훤칠한 것도 닮았고….”

저마다 채도 차이는 있었지만 세 리자드 모두 붉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을 가졌다. 약을 먹으면 눈 색이 인간의 것처럼 검고 탁하게 짙어지는 경향이 있었으나, 약효가 떨어졌을 때 그들의 진짜 눈동자는 이국적이면서도 화려한 색채로 빛났다.

시원하게 쭉 찢어진 눈매라든가, 뾰족하고 날렵한 콧대와 턱선 등으로 구성되는 사나운 고양잇과의 인상도 셋을 닮아 보이게 만드는 데에 한몫했다.

딴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많다고 느꼈는데 완전 잘못 짚었나보다.

파키케팔로가 자기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집어넣고 벅벅 뒤흔들면서 해명했다.

“이거는, 머리색은 그냥 우리 지역 근방에서 태어난 애들은 다 이런 색이야!”

“아니 내 얼굴 어디가 어떻게 얘들을 닮았다는 건데?”

“맞아. 내가 라히무스보다 훨씬 잘생겼어.”

파키케팔로의 말에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라히무스가 옆에서 흘긋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것을 나니아 본인은 알지 못했다.

“나는 이 수치스러운 경험을 잊지 못할 거야.”

챠링고가 화를 내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의 머리끝에서 높이 올려 묶은 머리가 찰랑거렸다. 어쩐지 이제는 화를 내는 그녀의 모습이 예전처럼 무섭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우리 엄마’라고 말하길래…. 같은 엄마 밑에서 태어났는가 싶었어요.”

“우린 빈 둥지 출신이야.”

“…그게 뭐예요?”

“엄마가 없다는 소리지.”

“아….”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뜻밖에 욕보이는 말을 해 버렸다. 아차 싶은 마음에 나니아가 사과했다.

“죄송해요.”

“미안할 거 뭐 있어, 너도 고아라며.”

“…그건 그래요.”

“그리고 우리는 그런 거 신경 안 써. 빈 둥지 출신들은 자유롭고 용감하지.”

파키케팔로가 주먹으로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나니아는 다시 또 앞서가는 라히무스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라는 것은 라히무스도 포함하는 말일까?

“라히무스도 빈 둥지, 뭐 그런 건가요?”

“아, 틀린 말은 아닌데, 라히무스는 우리랑은 좀 다르지….”

파키케팔로는 난감한 듯 볼을 긁적였다. 나니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른 질문을 던졌다.

“라히무스는 형제가 있나요?”

“글쎄… 어느 쪽 형제?”

“어느 쪽 형제냐니요?”

의문을 채 해결할 새도 없이, 라히무스가 둘 사이의 대화에 훼방 놓듯 말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갈라지지.”

남자가 자신의 등 뒤를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멈춰선 곳은 여관 앞이었다. 저택까지 함께 할 수 없는 라히무스가 그곳을 체류 장소로 선택했다.

“오케이, 한 이틀 쉬었다가 다시 또 움직이자고.”

챠링고가 고개를 끄덕이고 벨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나니아는 고개를 내밀어 라히무스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려 했으나 마차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이렇게 라히무스만 두고 가요?”

맞는 옷이 없다는 이유로 한 사람만 떼어 놓고 간다는 사실이 편치 않았다.

“왜. 사고 칠까 봐?”

챠링고가 피식 웃었다.

“너도 쟤랑 여기 남을래?”

“…아뇨.”

나니아는 얌전히 무릎에 손을 붙이고 어깨를 모아 앉았다. 사실은 좀처럼 말 붙이기가 쉽지 않았던 라히무스의 차가운 태도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회색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니아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래도 비가 와서 다행이네요.”

옷 속으로 배어드는 빗방울에 불쾌할 정도로 살이 젖어 들 때쯤, 키 큰 사이프러스 나무들 사이로 목적지가 드러났다. 도성의 최신 유행 양식을 따라 한 파비푸스 영주 부부의 저택은 건설에 투입된 자본과 노동력의 규모를 절로 가늠해 보게 되는 호화롭고 화려한 건물이었다. 웅장한 분위기의 파비올라 저택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남자는 저택의 입구를 지키는 문사에게 라키바하프 파비올라가 왔노라고 전언하라 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일행은 저택 안쪽으로 인도되었다.

예고 없는 방문이 뜻밖이었는지, 라키바하프를 맞이하러 나온 영주 부부는 실내복 차림이었다.

“우리 귀한 조카님께서 예까지 어쩐 일인가.”

중년의 여성이 라키바하프를 향해 양팔을 벌렸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고모님.”

남자는 자신의 고모와 포옹을, 옆에 있던 고모부와는 악수를 나누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족 간의 따스한 상봉 장면 같았으나 진심으로 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식적인 미소에서 조카에 대한 은근한 경계심이 느껴졌다. 상대방의 의중을 읽고 꿍꿍이를 찾는 눈빛이었다. 그들에게 라키바하프는 친족이기 이전에 경쟁자였다.

“별로 안 닮았는데?”

“가주님은 외탁하셨어요.”

“아하. 엄마가 굉장한 미인이셨나 보군.”

한 발 떨어진 곳에서 챠링고와 나니아가 속닥거렸다.

라키바하프의 고모부, 파비푸스의 영주는 풍채가 좋고 치켜 든 턱이 거만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파비올라 공. 헌데 오는 길에 산적이라도 만난 것이오? 아니면 못 본 새 파비올라에 커다란 전염병이라도 돌았는가. 대동한 기사 수가 믿을 수 없이 처량하구려.”

남자가 혀를 끌끌 차며 라키바하프의 등 뒤를 향해 턱짓했다. 걱정보다는 빈정거림에 가까웠다. 남자의 말에 라키바하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안 그래도 그와 관련하여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보다 먼저 긴 여정에 지친 저의 수족들에게 방을 내어 주실 수 있으시겠지요.”

라키바하프의 요청에 그의 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 있던 시종이 머리 숙여 그녀의 명을 받들었다.

“먼저들 가서 여독을 풀게나.”

라키바하프가 아랫사람을 대하는 투로 말하자, 투구를 뒤집어쓴 두 리자드도 그에 장단 맞추어 경례하는 시늉을 했다.

“따라오시지요.”

안내를 맡은 시종이 미심쩍은 눈으로 벨을 훔쳐보았다. 후드를 뒤집어쓴 궁색한 차림이었으나 빛이 나는 미모는 넝마주이 따위로 가릴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출발하였는데도 꼬박 한나절이 걸려 도착한지라 때는 벌써 저녁 시간이었다. 따뜻한 식사부터 대접받고 시종의 안내에 따라 배정받은 방에 짐을 풀었다. 라키바하프가 친히 부탁한 덕분일까, 아니면 그만큼 저택이 거대하기 때문일까. 나니아도 혼자 쓰는 객방을 누리게 되었다. 주제에 가당치 않은 호사였다.

하녀는 푹신한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지게 된 혼자만의 시간. 여러 상념이 머릿속을 스쳤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자신이 집을 떠나 이토록 멀리까지 오게 될 줄 알았을까. 그것도 이렇게 으리으리한 집에서 손님 대접을 받으면서 말이다. 여러 가지 험난했던 사건 사고도 포함하여 생에 둘도 없을 드문 경험들이 몰아쳤었다.

영주님의 볼일이 끝나면 그를 따라 다시 파비올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공주님 일행과는 아마 여기서 헤어지게 되지 않을까.

그들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가슴 한 부분이 허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내내 곁에 붙어서 얘기를 나누었더니 소소하게 정이 들고 말았다. 파키케팔로도 챠링고도,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공주에게도.

물론 그 남자도.

점차 이상한 감상에 젖어 드는 나니아를 일깨운 것은 라히무스에 대한 문제였다. 정확히는 그가 입은 부상이 생각났다.

‘마지막이니까 잘해 줘야지.’

막연한 결심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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