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남자
나니아의 어깨에서 내려온 손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데려다주겠다는 말대로였다. 그는 내팽개쳐 둔 삽이나 옷가지 등은 생각지도 않고 곧장 파비올라 저택 방향으로 향했다. 나니아는 라히무스에게 붙잡힌 손이 신경 쓰였지만 구태여 그것을 꼬집어 말하진 못했다. 그의 큰 보폭을 쫓아가기만도 버거웠다.
“저기… 아까 그거, 많이 위험한 거예요? 축수라는 거.”
“저기 아니고 라히무스.”
“어, 네, 라히무스.”
나니아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주 잠깐 악력을 자랑한 그는, 그녀의 말랑말랑한 손바닥과 맞닿도록 손을 고쳐 잡았다.
“나한텐 안 위험해. 너한텐 위험해.”
자칫 잘못하면 잡아먹힐 수도 있었다는 챠링고의 말을 믿기 힘들었다. 나니아는 오히려 그 돼지 괴물보다 챠링고가 더 무서웠다. 하녀는 피로 물든 자신의 바짓단을 내려다보며 몸을 떨었다. 그냥 털이 조금 많은 돼지라고 생각했는데.
“분명 처음엔 친밀하게 다가왔어요.”
“…….”
착각이겠지, 라고 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라히무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 나니아의 목덜미 냄새를 맡았다. 누군가 아주 예민한 살갗 가까이에서 코를 킁킁대는 것은 매우 당황스럽고 기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왜 갑자기 냄새를 맡아요?”
나니아가 그로부터 몸을 물러서며 불쾌하다는 내색을 했다.
“…미안.”
자신의 충동적인 행동에 사과하는 라히무스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내비쳤다. 남자는 질색하는 나니아를 보며 초조해했다. 사내는 야수 같은 인상을 하고선 이따금 이렇게 어줍은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 남자가 그런 표정을 지을 때면 나니아는 자신이 아주 못된 계집애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나니아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아무렇지 않은 척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터벅터벅 속도를 늦춰 걷는 사내의 발소리에 묘하게 기운이 빠져 있었다.
“…됐어요.”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겸연쩍게 대꾸했다.
“보통 여자들은 그렇게 모르는 남자가 신체적으로 다가오고 접촉하면 불쾌함을 느낀다구요.”
“…불쾌했어?”
“조금?”
라히무스가 걸음을 멈췄다. 덕분에 나니아도 움직이던 것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햇빛이 그의 등 뒤에 있어 나니아의 얼굴 위로 커다랗게 그늘이 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불쾌하지 않지?”
남자가 물었다. 그 기이한 질문에, 어딘지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나니아는 남자 경험이 많은 척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말투로 대답했다.
“허락을 구해야죠. 상대방의 허락.”
사내는 어렵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화가 나서 인상을 찌푸릴 때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아랫입술을 달싹이는 표정이 진지해 보이기도 했고 그래서 조금 바보 같은 느낌도 있었다.
그가 긴 고민 끝에 질문했다.
“냄새 맡아도 돼?”
잠시나마 이 사내가 조금 귀여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던 나니아는, 역시 그냥 변태인 게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붙잡힌 손도 뿌리치고 라히무스의 커다란 가슴팍을 밀어 냈다.
“당연히 안 돼요!”
거부당한 라히무스의 얼굴에 낭패감이 엿보였다.
“그리고 이제 됐어요. 여기서부턴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나니아는 라히무스를 뒤에 남겨두고 도망치듯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가 어떤 얼굴로 자신의 꽁무니를 쳐다보고 있을지 신경이 쓰여서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
‘나 지금 성희롱당한 걸까?’
난생처음 겪어 보는 성인 남자의 이상한 접근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심장은 벌렁거렸다.
* * *
나니아는 피 묻은 작업복을 찬물에 푹 담가 놓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상한 오해를 살 만한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옷을 버릴 수는 없었다. 옷이 몇 벌 없는 신분으로서 한 벌 한 벌이 소중했다. 중간에 다른 하녀에게 빨래를 하는 상황이 목격되기도 했지만, 달거리 기간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해 한바탕 쏟아 버렸다고 둘러대었다.
세탁을 마친 나니아는 오늘 있었던 일을 가주님께 이야기할까 말까 고민하며 공주의 방으로 향했다. 공주가 없는 틈을 타 빨리 방 청소를 해 두는 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았다. 깊은 생각이 필요 없는 육체노동은 오히려 깊은 생각에 잠기는 데에 좋은 여건을 만들어 주었다.
돼지. 축수. 괴물. 그리고 챠링고. 라히무스.
그의 품에 덜덜 떨며 매달렸던 것이 떠올라 수치스러워졌다. 나니아는 테이블 바닥을 걸레질하며 남몰래 얼굴을 붉혔다.
누군가 안아 준다는 사실만으로 안심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생면부지의 사내 품이었다는 것은 다소 남부끄러울 일이었다.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다. 특히 파비올라 님이.
-똑똑.
젖은 걸레의 물기를 물통에 짜내려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여행객들이 모두 자리를 비운 지금 공주님 방에 노크를 할 사람이 대체 누가 있을까.
인기척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파비올라였다.
“영주님?”
문을 열자, 오늘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드센 인간들과 다르게 그저 부드럽기만 한 파비올라의 미소가 그녀를 반겼다.
“뷔셀.”
그의 얼굴을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순간 어제 공주와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이 머릿속에 소용돌이쳤다.
‘잘생겼죠?’
‘좋아하죠?’
‘봐 봐,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가슴이 떨린다는 표정을 짓잖아요.’
‘당신은 영주를 좋아해, 맞지요?’
‘왜 부정하지요?’
하녀가 손에 쥔 걸레에서 채 짜내지 못한 물기가 똑똑 떨어졌다. 아, 좋아한다. 나는 정말로 이 남자를 좋아해. 타인의 입을 통해 자각한 자신의 마음이 불씨가 되어 타오르려 했다. 남들 앞에서 마음을 감추고 부정하면서 어쩌면 자기 자신도 억누르고 있었는지 모른다. 한 번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하니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갈애의 충동이 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밀밭처럼 따스한 빛깔의 머리카락. 예리한 턱선. 다정한 눈매. 고운 속눈썹. 가지런한 치아. 왕자님이 계신다면 틀림없이 이런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을까.
왕자님은 몰라도 공주님은 알지. 뜻밖에 실물을 영접하게 된 카뮈안 공주. 나니아의 머릿속에 연쇄적으로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둘이 한 화폭에 담긴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남들이 보기에 얼마나 천생연분 같아 보일까. 라키바하프 님의 옆에 섰을 때 잘 어울릴 만한 여자는 그녀였다. 자신이 아니라.
그와 공주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이 저렸다. 자신은 그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커다란 자격지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니아는 속상한 감정을 억누르며 영주에게 설명했다.
“지금 공주님께서는 자리를 비우셨어요.”
라키바하프는 남의 애타는 속도 모르고 오늘도 차분한 얼굴과 단정한 목소리를 자랑했다.
“응, 알고 있어.”
그 다붓한 대꾸에 소녀의 기분은 또다시 햇살을 바라보려는 꽃잎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럼 설마 나를 보러 오신 거야?’
“고생 많지, 뷔셀.”
“아니요, 전혀요!”
영주는 어제 공주의 시선을 잡아끌었던, 자신에게는 잃어버린 일상 같은 가족 초상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니아는 어떤 기대감 때문인지 어미 오리 쫓는 새끼마냥 그의 뒤를 따랐다. 영주는 초상화 아래 키 낮은 장식장에 용건이 있는 모양이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여길 다른 사람에게 내어 준 것은 처음이지.”
저택에서 가장 귀한 방이었으니 공주 정도 되는 사람이 아니었으면 누구에게도 내어 줄 일 없는 공간이었다.
“여기 어머님이 쓰시던 패물 생각이 나서.”
라키바하프가 거울 아래로 손을 넣더니 그 밑을 더듬었다. 이내 철컥 소리와 함께 서랍장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안에 가득 들어찬 것은 값비싼 귀금속들이었다. 나니아는 깜짝 놀라서 한 걸음 물러나며 입을 가렸다. 정말 경계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천진한 남자였다. 나니아는 자신이 이걸 봐도 되는 건가 싶은 심정이었다.
“그걸, 저한테 보여 주시면 어떡해요….”
나니아가 앓는 소리를 했다.
“하하. 이거 가지고 도망가서 신세 필 거야?”
“아니요!”
영주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래, 알아. 네가 그런 애 아닌 거.”
영주가 웃어주자 나니아의 입꼬리도 비실비실 올라갔다. 자신이 라키바하프의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다는 사실에 벅차고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니아에게는 그가 자신에게 보내오는 신뢰의 눈빛이 저 현란한 보석들보다도 더 값지고 눈부신 것이었다.
영주는 몇 번 덜컥거리더니 장식장 서랍 한 칸을 통째로 빼냈다. 그것을 다리가 짧은 청동 장식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카우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와서 앉으렴.”
남자가 열린 문틈 사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그 전에 문은 닫아야겠다.”
하녀가 감히 귀족의 소파 위에 앉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일 수는 없었다. 문을 닫는 것은 하녀의 몫이었다. 쪼르르 뛰어가 문을 닫고 돌아오니 라키바하프가 다시 한번 자기 엉덩이 옆을 팡팡 두드렸다. 나니아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그의 옆에 조심스럽게 걸터앉았다. 이 비밀스러운 특별 취급이 나니아의 마음을 더욱 옥죈다는 사실을 그는 알까?
전혀 모른다는 얼굴로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전장의 시체처럼 쌓여 있는 패물들의 무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 있는 것들… 소중히 간직해 온 이유는 어머니 때문도 있지만.”
영주가 손가락을 뻗어 목걸이 하나를 들어 올렸다. 땅에 떨어진 머리카락 줍듯이. 체인이 가늘고 여성스러운 장신구였다.
“사랑하는 반려가 생기면 이 모든 것들을 안겨 주어야지 생각했었어. 나와 함께 새로운 파비올라 부부가 되어 달라고 청혼할 생각이었지.”
그는 사회적으로 결혼 적령기가 지난 사내였다.
“설령 내 아내 될 사람이 물려받을 봉토 없이 수녀원에서 갇혀 지내는 둘째 딸 신분이더라도, 나는 내가 보일 수 있는 모든 사랑을 쏟으려 했어.”
모름지기 귀족들의 혼인이라면 집안끼리의 결합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그는 연애결혼을 꿈꾸기라도 했던 걸까? 영주의 부모는 그를 결혼 시장에 내놓기도 전에 세상을 등졌기 때문에 라키바하프는 적절한 결혼 시기를 놓쳐 버린 상태였다. 귀족들은 보통 빠르면 열다섯 살, 늦어도 스무 살에는 부모들끼리 부부의 연을 맺게 했다.
그가 약삭빠른 성격이었다면 혼자서도 좋은 혼처를 찾아 스스로를 흥정하며 누군가의 딸을 얻었을 테지만, 라키바하프는 그렇게 요령 좋은 남자가 아니었다.
나니아는 처량해 보이는 영주의 곁에서 몰래 유부남이 된 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누군가의 지아비가 된 라키바하프 님의 모습. 그녀와 함께 눕고, 함께 자고, 이불 위에서 그녀를 안고, 그녀와 입 맞추고, 그녀와….
아니다. 생각하지 말자.
나니아는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구체적으로 상상하며 스스로를 괴롭히는 특기가 있었다.
“그런데 나는 결혼은 그른 것 같지.”
파비올라가 체념하는 투로 말했다. 어딘지 홀가분하면서도 씁쓸한 얼굴이었다.
“아니에요, 가주님…. 지금부터라도 둘러보시면 분명 좋은 부인을 얻으실 수 있을 거예요.”
하녀가 마음에도 없는 격려를 했다. 파비올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부모님도 후견인도 없는 나야.”
열다섯이었다. 열다섯에 양친을 여의면서 가족의 그늘을 잃은 그는 아마도 자기 자신의 결혼과 출산을 통한 새로운 가족의 형성을 매우 갈망했을 것이다. 그는 잘생긴 외모에 걸맞잖게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사교계 데뷔도 하지 않았다. 파비올라에게 남은 가족은 그의 고모 부부뿐이었는데, 그다지 가족 같지 않은 가족이라 도움이 된 적은 없었다. 오히려 호시탐탐 파비올라와의 병합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혼자 용케 여기까지 왔네. 하지만, 뷔셀. 나는 이제 두려워.”
파비올라는 손을 앞으로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곤 그 사이에 코를 묻었다. 그제야 나니아는 그가 단순히 결혼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 땅에 존재하는 자로서의 고독, 압력, 강박, 그런 것들에 대해 토로하고 있었다.
“사실은 외롭고, 도망치고 싶어.”
남자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니아는 그의 옆에서 목석처럼 앉아 함께 목이 메는 기분을 느꼈다.
‘그 외로움을 제가 채워드릴 순 없을까요? 저로는 안 되나요?’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그를 바라본 나니아는, 그 누구보다 그의 선을 넘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가 먼저 선을 넘어 주지 않는 이상.
그때, 축축한 기류가 접했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슬픈 눈을 하고 있던 라키바하프와 그를 바라보고 있던 나니아의 젖은 시선이 맞닿았다.
“뷔셀.”
훤칠한 키의 라키바하프가 오늘따라 웬일인지 작아 보였다. 남자는 엄마 품에 숨고 싶은 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나나.”
그가 어릴 적 부르던 이름으로 나니아를 불렀다. 흔들었다.
“…가주님.”
“이름 불러봐. 예전처럼.”
“…파비올라 님?”
남자가 쓰게 웃었다.
“그거 말고.”
너무 길고 높아져서 한동안 닿을 수 없었던 그 이름.
“…라키, 라키바하프 님.”
“훨씬 낫네.”
그가 나니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길고 고운 손이었다.
“머리 기대도 돼?”
그가 다정히 웃으며 물었다.
나니아는 라키바하프가 건네는 과거의 잔에 취해 버렸다. 소녀는 상대가 어디에 기대겠다는 건지 제대로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고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다가왔다. 언제나 의젓하고 늠름했던 그가 무너지듯 나니아의 품 안으로 쓰러졌다. 온 체중을 실어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로 얼굴을 감추었다. 라히무스가 나니아의 체취를 맡으려던 그 위치였다.
“고모부가 무서워. 아버지가 계시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나한텐 너무 버거워….”
나니아의 목덜미에 이마와 코를 파묻은 영주가 그녀의 귓가에다 대고 습한 이야기들을 중얼거렸다.
“우리 그때 좋았는데. 그렇지 않아? 응? 나나.”
나니아는 어지럽고 행복했다. 하녀의 귀밑이 뜨거워졌다. 끓는 김을 가져다 댄 듯 남자와 닿은 부분이 화끈거렸다.
파비올라가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시기는 나니아의 인생에서도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그늘 밑에서, 나니아는 오빠 같은 라키바하프 밑에서.
남자와 자신 사이에 얼마나 높은 장벽이 있는 줄 모르고. 자기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여자로 자라나는 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가 그저 들이며 산으로 쏘다니던 시절. 주제 모르고 그와 웃고 떠들고 만지고 노래하며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 나가던 시절.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추상의 파편들이었다.
그가 들꽃을 꺾어 만들어 주었던 화관이 떠올랐다. 자기가 봄의 여왕이라도 되는 양 화관을 쓰고 빙글빙글 춤추던 소녀. 그리고 그 옆에서 어여쁘다 말해 주던 소년.
그래 맞아. 당신 그때 나보고 예쁘다고 말해 줬었잖아. 자기가 나보다 더 곱고 아리따운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서.
나니아는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충동적으로 영주의 목덜미를 감싸 마주 안아 주려던 그 순간.
“흡, 하!”
영주가 다시 고개를 번쩍 들고 기합을 넣음과 동시에, 짧았던 찰나의 행복이 끝났다.
“이제 됐다. 시원해졌어.”
“……?”
뭐가 됐다는 거야.
인상이 찌푸려진 하녀의 얼굴을 보고 영주가 머쓱하게 웃었다.
“남자답지 못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게 이런 투정을 부리다니.”
영주가 하하 웃었다. 물론 하녀는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몇 마디 젖은 말들로 나니아를 추억의 늪 속에 빠뜨리더니, 모른 척 순식간에 발을 빼 버렸다. 순식간에 홀라당. 발만 뺐다 뿐인가, 저 혼자 흙탕물을 씻어 내기라도 한 듯 개운해져 있었다.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가엾은 하녀만이 미련의 진흙을 덕지덕지 묻힌 채 꺼져 가는 발밑을 느꼈다.
“뷔셀, 다시 봐 봐. 여기서 뭐가 제일 예쁘지?”
영주는 금세 원기가 회복된 얼굴로, 자신이 꺼내 놓은 패물함을 가리켰다.
“목걸이든, 반지든, 팔찌든, 뭐든 말이야. 여자들은 어떤 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네.”
영주가 쑥스러운 듯 멋쩍게 웃었다. 그 싱그러움이 또 한 겹 나뭇잎처럼 날아와 나니아의 호수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원망하는 마음이 들려고 하다가도 그의 얼굴을 보면 화가 식었다.
“자, 어서 골라 봐.”
나니아는 어느새 늪 밖으로 기어 나와 입을 가리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저 비싼 것들을 나 같은 하녀에게 주시면 어떻게 해!’
“흐음, 이거 어때?”
남자가 보석이 빼곡하게 박힌 장물을 꺼내 들었다. 에메랄드가 화려하게 박혀 있어 풍요롭고 사치스러운 장신구였으나 그 용도가 짐작가지 않게 커다랗고 화려했다. 영주가 그것을 나니아의 목 가까이로 가져오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나니아는 그것이 목걸이인 줄을 알았다.
좋은 의미로 숨이 턱 막혔다. 부인에게 주고 싶었다던 패물을 자신에게 주는 의도가 무엇이란 말인가. 머릿속으로는 거절해야지, 거절해야지 생각하면서도 그가 자신에게 보여 주는 성의와 관심 때문에 폭주하는 이 감정은 멈출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 좀 들어 볼래?”
나니아가 길고 검은 머리카락을 오른손 손목으로 들어 올렸다. 영주가 가슴 앞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그 목걸이를 나니아의 목에 감았다. 뒷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끼쳤다. 그가 길이를 줄였다 늘였다 하며 길이와 위치를 가늠했다.
“좀 치렁치렁한가.”
“…아니요, 너무 예뻐요.”
받을 생각이 없다 없다 하면서도 나니아는 목걸이의 화려한 자태에 경탄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목에 걸어 주는 이 미남자의 잘생긴 얼굴을 보면서 입술이 말랐다. 다리 사이는 흥분의 기운을 내뱉었다. 그녀가 항상 꿈꿔 오던 순간이었다. 금방이라도 그가 자신에게 프러포즈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긴 여정에는 화려한 것보다 단순한 게 좋겠지.”
왜 사람이 사랑에 빠지면 눈치가 없어지는가. 왜 수도 없이 착각하고 헛된 기대를 품게 되는가.
영주가 응,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 목이 나니아보다 좀 더 긴 느낌이었으니까. 괜찮을 것 같다.”
아아, 아직 그곳은 늪지였다. 목걸이는 하녀의 것이 아니었다. 얼토당토않은 착각이었다.
“그동안 고단한 일을 많이 겪으셨는지 차림새가 많이 소박하시더라.”
영주는 궁금하지도 않은 생각들을 주절댔다. 그 옆에서 하녀는 얼굴이 벌겋게 타올랐다. 혹시라도 자기가 한발 앞서 사양하는 말이라도 꺼냈더라면, 얼마나 망신스러웠을까. 비록 상대는 모르는 나니아 혼자만의 착각이었지만 창피하기엔 충분했다.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고, 영주는 즐거운 듯 여러 가지 패물들을 뒤적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원래 그런 분이 아니셨을 텐데.”
“…예에….”
나니아는 화덕에서 빠져나가는 연기처럼 희미하게 신음하듯 대답했다.
단지 몇십 초 만에 박살 나 버린 허황. 꿈. 사랑. 사랑이란 원래 이런 감정일까. 세울 땐 찬찬히 쌓아 올렸던 것 같은데,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마침 주인 없는 보석들도 너무 많으니까. 작은 거라도 선물하고 싶어.”
늪지 바닥은 나니아의 예상보다 더 깊은 심연이었다. 그녀는 커다란 상실감과 소외감에 휩싸여 절망의 늪에 빠져 휘적댔다.
그래, 착각이 아니었다. 공주를 향한 라키바하프의 끈끈한 시선.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던 그 음심. 뭇 남성들이라면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공주의 미모가 떠올랐다. 그것을 사내가 어떻게 간과할 수 있을까. 나니아의 왕자도 결국 좆 달린 사내인 것이었다.
한 번 재생되기 시작한 망상은 또다시 걷잡을 수 없는 수준으로 번져 갔다. 나니아는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상상 속 영주의 아내는 어느새 공주의 얼굴로 탈바꿈해 있었다.
아내의 예쁜 얼굴에 황홀경에 빠져서 그녀를 범하는 라키바하프. 청초하게 젖어 있는 그녀의 붉은 입술을 빨고, 그녀의 안을 파고들어서 끝내는 그 안에 정을 토할 것이다. 아내란 남편의 그것을 받을 수 있는 유일무이하게 합법한 관계의 여자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가 공주와 서로 물고 빨고 맛보는 상상을 하던 나니아는 자신의 경박한 상상에 제동을 걸기 위해 노력했다.
“대뜸 목걸이를 선물하는 것은 너무 갑작스럽겠지?”
영주가 묻자, 나니아는 영혼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님께서는 영주님의 선물을 기꺼이 받으실까?’
그녀는 나니아가 파비올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재밌어할 뿐, 영주에게 크게 흥미를 느끼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래서 말인데, 뷔셀.”
파비올라는 안주머니로 손을 넣어 뒤적거리는가 싶더니 품에서 종이봉투를 하나 꺼내 하녀에게 건넸다. 그의 얼굴에 숫총각다운 수줍음이 가득했다.
“이것 좀 부탁할게.”
“…이게 뭔가요?”
“공주님께 드리는 편지인데. 알잖아, 내가 그런 쪽으로 말주변이 없다 보니. 그래서… 하하.”
그것은 누가 보아도 연서였다.
아, 신이시여. 이 남자는 왜 이토록 가혹하게 구는 걸까요.
나니아는 가슴 속에 치미는 울분과 절망감을 억누르기 위해 몇 초간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영주가 계속 팔을 들고 있게 할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그의 손으로부터 편지 봉투를 건네받았다. 생김도 변변찮고 성격도 따분하기 그지없는 이 미천한 하녀는 감히 그 연서를 탐할 자격도 되지 않았기에. 그저.
“…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손안에 들어온 편지 봉투는 파비올라의 인장이 찍힌 봉랍으로 단단히 밀봉되어 있었다. 하녀는 당장이라도 그것을 뜯어 발기고 싶었다. 그 안에 남자의 어떤 마음이 적혀 있는지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 * *
이윽고 땅거미 내린 밤. 달빛과 횃불만이 어두침침한 복도를 밝히는 시간. 하녀는 나무 트레이를 굴리며 깊은 어둠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철컥철컥. 원래대로라면 활짝 열려 있어야 할 안채의 대문이 어째서인지 굳게 닫혀 있었다. 하녀는 별일이네 싶은 생각과 함께 주머니를 뒤졌다. 오늘 밤 불침번을 자처한 나니아에겐 열쇠 꾸러미가 있었다. 들어맞는 열쇠를 찾아 구멍에 맞춰 보기를 수차례. 마침내 끼긱-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하녀는 트레이 위에 올려놓았던 편지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공주의 방에서 작은 주황색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영주님께서는 편지를 읽는 공주님 곁에 서서 그녀의 반응을 살펴봐 달라 하셨다. 배알도 없이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아니면 차라리 단도직입적으로 파비올라 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볼까.
애초에 가주님께서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편지를 쓰신 거지? 어차피 공주님께서는 당장이라도 떠나야 하시는 분이잖아.
여러 가지 복잡한 고민에 시달리던 나니아는 어느새 공주의 방문 앞에 당도해 있었다. 방문을 두드리기 위해 손을 올린 그때, 작은 문틈 사이로 두런두런 들려오는 말소리가 신경을 빼앗았다.
“말들도 충분히 휴식을 취했으니 이제는 서쪽으로 향할 땝니다. 이런 영세 장원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더 무엇이 있겠습니까?”
“맞아. 그냥 한시바삐 이곳을 떠나는 게 답이야.”
챠링고와 파키케팔로가 향발을 주장하고 있었다. 공주에게 하는 말 같았다.
“축수라는 것들은 어쩔 셈이죠? 당신들 말대로라면 여기 사는 사람들이 매우 위험한 상태 아닌가요?”
“인간들의 지도자 흉내는 이제 그만 해도 된다니까? 그런 것들까지 고려할 이유 없지. 죽든가 말든가. 우리랑은 상관없어!”
관심 없다 말하는 파키케팔로의 목소리가 한없이 가벼웠다. 뒤이어 챠링고의 진중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라히무스가 둔갑약을 함께 먹기 시작했어요. 여기서 정체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약은 빠르게 바닥을 드러낼 텐데, 약이 다 떨어져서 인간 모습을 할 수 없게 되면 행동반경이 좁아질 수밖에 없게 될 겁니다. 서쪽 숲을 지나면 더 많은 수의 인간을 마주하게 될 텐데 가능한 한 서두르는 편이 좋겠습니다.”
“폴핀에도 약을 취급하는 암거래상이 있긴 할 거야.”
“그 전에 라히무스가 발정기라도 오면 곤란해. 걔는 약으로도 통제가 안 된다니까.”
나니아는 대화 내용에 집중하며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애썼다. 축수들은 신경 쓸 바가 아니라는 말, 약이 다 떨어져 가고 있다는 말, 인간의 모습을 할 수 없게 될 거라는 말, 그리고 라히무스의 발정기… 저게 대체 무슨 소리지?
나니아는 합이 어긋난 문틈 사이로 그들을 훔쳐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비좁은 시야각 안쪽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공주의 다리가 보였다. 그리고….
저 살아 있는 것처럼 흔들리는 물체는 뭐지? 그것은 자아를 가진 생물처럼 움직였다. 두껍고 통통했으며 비늘에 뒤덮여 있었다. 뱀? 뱀이라기엔 굵기가 일정치 않고 끝으로 갈수록 얇아지는 형태였다. 마치 파충류의 꼬리처럼. 그것은 옷을 입은 것처럼 가죽 타이를 마디마디에 걸치고 있었다.
‘맙소사. 이 사람들 대체 방에서 뭘 키우고 있는 거지? …혹시, 저것도 축수라는 것의 일종일까?’
그 듣도 보도 못한 비상식적인 생물에 대해 잘 알고 있던 것 자체가 이미 매우 수상쩍었다.
‘어쩌면 저 사람들이 우리 파비올라에 괴물을 들여왔는지도 몰라. 아니, 저들이 사람이긴 할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편지고 나발이고 어서 가주님께 달려가 이 불청객들의 수상쩍은 행보를 알려야겠다는 마음으로 조급해졌다.
그리고 그때.
“…뭘 엿듣고 있지?”
아주 작고 낮은 목소리가 나니아의 귓가에 스산하게 속삭였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기척 없이 다가온 라히무스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눈의 안광이 어둠 속에서도 야생 동물처럼 빛났다. 깜깜한 밤중에 만난 그는 낮보다 더 음산하고 위협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니, 나는 그냥. 전달할 서신이 있어서…요.”
나니아가 손에 쥔 편지를 들어 그의 눈앞에 보여 주었다. 편지를 확인한 라히무스가 그쪽으로 손을 뻗었다.
“대신 전해 주면 되는 건가?”
“아, 아뇨!”
나니아가 재빨리 서신을 등 뒤로 숨겼다. 라히무스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의아해했다. 그 때 방 안 누군가가 인기척을 눈치챈 듯 방 밖을 의식하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누가 왔나? 저흰 지금 약빨이 다 떨어져서 대신 나가 주셔야겠는데요.”
누군가 방 밖으로 나와 상황을 확인하려는 듯 움직였다.
나니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굴러갔다. 아직 이 편지를 전달하면 좋을지 어떨지도 결정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두리번거리며 숨을 곳을 찾았다.
그때 라히무스가 망설임 없이 나니아의 입을 틀어막았다.
“……!”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사내의 커다란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라히무스는 나니아를 가뿐히 들쳐 안고 주저 없이 복도 맞은편 창문을 열었다.
정작 입을 가로막은 손이 떨어졌을 땐 너무 놀란 나머지 찍소리 하나 내지 못했다.
사내는 나니아를 어깨에 둘러메고 예사롭게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꼼짝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는데, 남자는 창틀을 밟고 건물 외벽에 매달렸다.
“미, 미쳤어요?! 이게 무슨 짓이에요?”
라히무스는 어깨에 걸쳐 놓은 나니아의 엉덩이를 한쪽 팔로 받쳐 안았다. 다른 쪽 손은 석조 건물의 튀어나온 모퉁이를 붙잡고 버티는 중이었다.
“숨으려는 게 아니었나?”
도와줄 생각이었다는 듯 말하는 남자의 얼굴이 어리둥절해 보였다. 나니아는 기겁하며 대꾸했다.
“바,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었으니까요, 빨리… 빨리 내려 주세요!”
하녀는 새된 소리를 내면서도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사내의 목을 꽉 졸라맸다. 오늘 이 남자의 품에 매달리는 것이 대체 몇 번째인지. 지탱할 바닥없는 허공에 매달려 있자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3층 창문 밖으로 뛰쳐나왔던 남자는 긴 다리를 뻗어 어렵지 않게 2층 창문틀을 밟았다. 계단이 아닌 창문으로 층을 이동하게 될 줄이야 상상이나 했을까.
허리를 숙여 창문 안쪽으로 들어온 남자는 어째서인지 계속 나니아를 품에 넣은 암탉처럼 끌어안고 있었다. 그녀는 억지로 몸을 비틀어서 겨우 라히무스의 품을 빠져나왔다. 하녀가 앞치마를 탈탈 털면서 말했다.
“저는 다시 올라가야 해요.”
그대로 남자를 지나쳐 가려던 나니아의 옆으로 불쑥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라히무스의 팔은 나니아의 진로를 막고 그녀를 멈춰 세웠다.
“무엇을 들었는지 얘기해 줘야겠는데.”
추궁하는 남자의 눈빛은 처음 보았던 그때처럼 날카로웠다. 사내는 나니아의 답변이나 동의 따위 필요치 않은 듯 그녀의 가는 손목을 잡아끌었고, 상냥하지 못한 손길로 여자를 방에 밀어 넣었다. 공주의 침실 아래, 공교롭게도 그곳은 마침 라히무스의 방이었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는 나니아를 자기 방으로 끌고 들어오기 위해 한 층을 내려왔는지도 모른다. 사내는 거칠게 문을 닫고 하녀를 벽으로 몰아세웠다.
“뭘 들었지?”
라히무스가 다시 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니아는 고개를 비스듬히 돌려 그의 직접적인 시선을 피했다. 등으로 한줄기 땀이 흘렀다. 불청객들의 정체가 괴물, 또는 그 비슷한 것으로 추정되는 와중에 자신이 들은 바를 섣불리 실토하거나 자극해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다.
“…별것 아니었어요.”
나니아가 소극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라히무스는 회피하듯 얼버무리는 여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그녀의 표정을 식별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집요했다.
“별것 아닌 걸 듣는 모양새가 아니었는데.”
그가 여전히 미심쩍다는 투로 말했다. 나니아는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거짓말에는 어느 정도의 사실이 섞여야 했다.
나니아가 더듬더듬 변명하듯 이야기했다.
“이제, 공주님께서 떠나신다고….”
“또.”
“축수를 처리하는 것에 도움을 줄 생각이 없다고… 챠링고가요.”
“또.”
“파키케팔로도 동의했고….”
“또.”
그러나 계속되는 진실무위의 고백에도 라히무스는 의심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결정적인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리고?”
나니아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머리를 짜냈다. 그가 먹고 떨어질 만한 이야기를 생각해 내야 했다.
“당신의… 발정기?”
나니아는 비밀로 남겨 두려 했던 이야기를, 네가 추궁하니 어쩔 수 없이 밝힌다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입 밖으로 꺼냈다.
“그런 얘기를 하던데요.”
“…….”
그리고 그 이야기는 나니아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괜찮은 치명타로 작용했다.
라히무스는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을 주체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를 압박하던 기세가 단박에 꺾이고, 상황은 어느새 남자가 그녀의 눈을 피하는 형국으로 역전되었다. 다시 위협적인 기운이 사라진 그를 보고 자신감이 붙은 나니아가 말을 이었다.
“당신… 여자를 좀 밝히는 성격인가 본데…요. 아무튼 그걸 말하는 게 조금 민망했던 것뿐이니까요. 알았으면 이제 보내 주세요.”
나니아는 자기를 벽 쪽으로 가둔 남자의 두 팔에 전처럼 힘이 들어가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라히무스의 한 팔에 손을 올리고 이 팔을 치워 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사내는 밀쳐진 팔을 힘없이 떨구면서 중얼거렸다.
…그런 건 아닌데. 아니야. 오해야.
이제 정말 그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새 침착함을 되찾은 라히무스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편지는?”
“네?”
“줘, 편지. 전해 줄 테니.”
그가 아직 자기 시선 아래에 있는 나니아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니아는 껄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재차 거부했다.
“이건 내가 맡은 심부름인데요.”
“또 도둑고양이처럼 뭘 엿들을지 모르잖아.”
남자가 다소 심술궂은 말투로 대꾸했다.
“무슨 내용인데?”
그가 물었다. 라히무스는 재차 내민 손을 강조하듯 흔들었다. 대신 전해 주겠다는 그의 의지가 뜻밖에도 굳건해 보였다. 영주가 공주에게 무슨 말을 전하고자 하는지는 나니아도 알지 못했다. 사실 누구보다 그게 궁금한 건 그녀였다.
“그건 저도 몰라서 드리기가… 어렵겠는데요.”
드리기 어렵다? 아니, 싫다겠지.
하녀는 당장 이 거추장스러운 밀랍 실을 잡아 뜯어 버리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다. 편지 속에 감춰진 영주의 마음을 훔쳐 읽고 싶었다.
라히무스가 그녀의 이지러진 낯빛을 살피며 콧방귀를 뀌었다.
“별로 주고 싶지 않은가 본데.”
속마음을 들킨 나니아는 쌀쌀맞게 대꾸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그야, 좋아하는 상대가 다른 놈에게 편지를 주는데 마뜩잖을 리가.”
이 음흉한 남자는 그때 안 들은 척했으면서 역시 벨과의 대화 내용을 다 듣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제가, 뭐, 뭘 어쩐다고요?”
“좋아한다며. 나라면 신경 쓰일 것 같은데.”
사내가 덤덤한 척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는 무신경한 눈빛을 가장하며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옆에서는 그의 손끝이 초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손가락 검지부터 약지까지 차례로 벽을 두드렸다. 마치 건반을 두드리듯 그 행동을 거듭했다.
남자가 영주의 이름을 확인하듯 물었다.
“라미바노프 파비올라?”
“라키바하프 파비올라.”
라히무스가 엉터리로 부르는 영주의 이름을 도착적으로 바로잡으며 하녀는 자신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엊그제 처음 만난 인간도 자신의 마음이 누구를 향해 있는지 아는데, 이토록 선명한 마음이 정작 영주 본인에게는 닿지 못했다는 사실이 야속하고도 답답했다.
나니아는 이내 약점을 물린 초식 동물처럼 발악했다.
“그래서요? 맞아요. 영주님께 가져선 안 될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당신이나 공주나, 그게 아주 웃기죠? 재밌죠?”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는 하녀를 라히무스는 평이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다지.”
대꾸하는 그의 말투가 다소 냉랭했다. 라히무스는 연신 벽을 두드리는 것을 반복하며 이제는 손가락이 아닌 손톱으로 벽을 긁었다. 그의 몸이 손가락 마디 한 개를 구부린 것만큼 미세하게 다가왔다.
“재미없는데.”
그의 말대로 남자의 눈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어느새 또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라히무스가 편지를 향해 턱짓했다.
“궁금하면 뜯어 봐.”
“…….”
나니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안 그래도 바라던 바였다.
남자의 종용에 사로잡혀, 보답받을 수 없는 자신의 마음에 대한 연민에 이끌려, 여자는 결국 편지 봉투를 뜯고야 말았다.
그녀가 너무도 사랑하는 영주의 단정한 글씨가 보였다. 나니아는 소리 없이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친애하는 공주님께.
파비올라의 영주, 라키바하프 파비올라 5세입니다. 낙엽이 진 가지에 새잎이 돋아나는 생의 아름다움을 맞이한 지가 서른 번째. 그러나 저는 공주님을 처음 마주한 날, 그때야 비로소 진정한 탄생의 의미를 찾은 듯하였습니다.
….]
“…….”
라히무스는 편지지를 따라 침잠하는 여자의 시선을 좇았다. 나니아의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 변해감에 따라 그는 초조해졌다. 이내 라히무스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편지를 흘긋 훔쳐보았으나 역시나 인간의 문자로 적혀 있는 터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딴에는 몰래 들여다본다는 것이 다소 티가 났는지, 편지를 다 읽은 듯한 여자가 라히무스의 가슴팍에다 대고 편지를 집어 던지며 소리 질렀다.
“궁금하면 직접 읽어 보던가요!”
“…글자 모르는데.”
“몰라요!”
하녀는 엄한 데다 분풀이를 하더니, 여기가 자기 방이 아니라 남의 방이라는 사실도 잊었는지 라히무스의 침대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 끝내 엉엉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마 파비올라 저택에 사는 누구도 그녀의 이런 감정 동요를 본 적 없을 것이다. 그녀는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라히무스는 가슴에 맞고 떨어진 종이를 주워 들었다. 편지를 앞뒤로 돌려 가며 살펴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까만 것은 글씨요, 하얀 것은 종이였다.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는 난감한 기색으로 나니아에게 다가갔다. 침상 옆 탁자에 놓인 촛불에 불을 붙이고, 조심스럽게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이불 위로 쓰러진 그녀는 매우 절망스러워 보였다. 잘은 몰라도 눈물 흘릴 만한 일인가 보다 생각했다.
사내는 우는 여자를 달래 본 적이 없어 그녀의 등에 손을 올릴까 말까 고민하며 망설였다. 다정하게 말하는 것이 익숙지 않은 그가 스스럽게 입을 열었다.
“…내 이불에 콧물 묻힐 거면 무슨 일인지 말은 해 줘야지.”
짓궂은 핀잔에 나니아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쏘아붙이듯 원망하는 말투로 대꾸했다.
“가슴이 떨린대요! 이런 감정 처음이래요! 됐어요?”
짐작했던 대로 여자는 오늘 낮에 숲에서 보았던 얼굴과 비슷하게 눈물범벅이 되어 울고 있었다. 라히무스는 그녀가 손에 꽉 쥐고 있던 이불로 눈길을 주었다. 눈물 콧물을 잉크 삼아 그녀의 얼굴이 도장처럼 점점이 찍혀 있었다.
저건 눈이고, 저건 코였을 것이다. 사내는 이불에 묻은 흔적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런 남자의 생각은 전혀 알 길 없고 알 생각도 없는 나니아가 가슴을 들썩이며 우는 소리를 냈다. 숨 가쁜 감정을 추스를 수 없어 했다.
“내가… 내가 가주님께 느꼈, 흑, 더, 가, 감정을, 흡, 다른 여자에게 느끼고 계신 거예요, 흑….”
나니아가 라키바하프를 향해 품었던 마음, 생각, 기분, 그 모든 것들이 글자가 되어 적혀 있었다.
자신의 기분을 대변해 주는 듯한 세레나데. 그녀가 느끼는 것과 너무도 흡사한 형태의 심정 고백.
영주의 편지를 읽고, 사랑은 결국 어느 인간에게나 같은 양상을 띤다는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다만 그것이 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향한 마음이라는 현실이 나니아에게는 너무도 비통하고 잔인하게만 느껴졌다.
편지 내용을 머릿속으로 곱씹던 나니아는 다시 또 참아 왔던 눈물을 터뜨렸다. 나약한 고개를 이불에 처박고 질질 짜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어떡하면 좋아? 마음이 너무 아파.
하녀의 좌절은 이불에 파묻혀 축축한 울음이 되었다. 들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칭얼댔다.
“가주님이, 보고 싶어요….”
그리움의 감정은 물리적 거리가 아닌 마음의 거리에서부터 비롯하는 것이라. 아무리 가까이에서 그의 곁에 머무른다 해도 해소될 수 없는 결핍의 감정 때문에 하녀는 괴로웠다.
라히무스는 죄 많은 벨로즈의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아무래도 영주가 그거한테 관심이 있는 모양인데.
벨의 못된 얼굴을 상기해 낸 라히무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 쉬었다. 동감할 순 없으나 동정해 줄 순 있었다.
그나저나 그에게는 이 작은 인간 여자가 문제였다. 라히무스로서는 지금 바로 여기, 자기 침대에 무방비하게 엎어져 있는 이 아가씨가 더 중요했다.
숲에서도 그렇게나 가냘프게 눈물짓더니, 이제는 내 방에서.
‘인간은 눈물이 많군.’
라히무스는 생각했다.
축수 때문에 두려워하는 인간을 달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간이 생명을 잃지 않도록 지켜 주면 되니까. 근본적인 해결책을 알고 있었다. 매우 쉬운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남자 때문에 우는 여자를 위로하는 방법은 알지 못했다.
라히무스는 골똘히 생각했다.
영주를 죽여 주면 되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럼 의뢰인을 죽여 주면 되나?
…그건 내가 곤란한데.
라히무스는 결국 문제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그래서 어떡할 거지? 전달할 건가?”
그것은 뜻밖에 비통함으로 허덕이는 나니아를 현실로 끄집어내는 질문이 되었다. 그녀가 눈물을 펑펑 쏟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라히무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라히무스는 그녀가 버리다시피 던지고 간 편지를 다시 보여 주며 알아듣지 못했냐는 듯 부언했다.
“이거.”
누군가 이미 들춰 본 기색이 역력한 모양새의 서신. 뜯기다 못해 구겨진 자국까지 지저분하게 남아 있었다. 하녀는 자신의 무릎 근처에 던져진 편지와 편지 봉투를 바라보며 말을 잃었다.
“…….”
어떡하지.
감정을 못 이기고 저지르긴 했는데, 뒷감당할 생각을 하니 눈물이 쏙 들어갔다.
나니아는 이 훼손된 서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뜯어진 상태 그대로 편지를 가져간다면 어떻게 될까. 편지 봉투를 새로 준비해서 거기다 넣을까? 만약 공주가 영주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바꿔치기한 편지 봉투를 직접 들고 가기라도 한다면? 영주가 눈치채지 않을까? 봉투 없이 편지만 가져다주는 것은 불가능할까?
여러모로 궁리해 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나니아는 조마조마해졌다.
말없이 울음을 그치고 고민에 빠진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라히무스. 그가 물었다.
“내가 도와줘?”
나니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떻게요?”
꺼림칙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대꾸했다.
“내가 이걸 뜯었고.”
라히무스는 서신이 담겼던 봉투를 손에 들고 밀랍이 붙어 있던 부분을 한 차례 더 찢어발겼다. 이로써 그의 말은 완전히 거짓만은 아니게 되었다.
“너는 입 다물면 돼.”
나니아는 신중하게 고민하며 그가 제안한 위증 상황을 곱씹어 보았다.
“…하지만 글을 못 읽는다면서요. 글을 못 읽는 당신이 굳이 편지를 뜯어볼 이유가 있었을까요? 당신 동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 같아요.”
남자는 다소 허를 찔린 듯 멈칫했다가, 이내 다른 수를 더했다.
“편지가 내 손에서 챠링고를 한 번 거친다면, 그녀에게 읽는 것을 부탁하는 척 자연스럽게 넘길 수 있다.”
공주에게 일차적으로 건네는 것이 아니라, 이 편지에 뭐라고 적혀 있는지 읽어 보라면서 챠링고에게 넘기겠다는 것.
“그리고 내가 물건을 찢고 망가뜨리는 것 자체는 그들에게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니까 괜찮아.”
“…….”
어딘지 허술한 각본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말대로 그와 나니아만 입을 다문다면 아무도 추궁할 여지가 없는 내용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녀가 온전한 상태로 편지를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 그것을 공주에게 직접 전하는 것에 성공했건, 무서운 남자에게 강탈당했건 간에 말이다.
나니아는 지금 그가 말한 것보다 더 좋은 방책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라히무스의 계획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 줄 수 있어요?”
나니아가 묻자,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당신이 나를 도와줘서 얻는 게 뭐예요?”
그가 충동질하는 바람에 편지를 뜯어 읽긴 했으나, 그것이 남자가 자신을 도울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나니아를 위해 거짓말해야 할 필요도 의무도 없었다.
나니아의 질문에 침대 헤드에 기대있던 라히무스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반쯤 내리깐 눈이 나니아의 동그란 얼굴을 살폈다. 이내 자신을 미심쩍게 여기는 시선을 피해 어색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큰 손이 날카로운 턱 밑을 쓸었다.
나니아는 ‘별 뜻 없다’든가 ‘그냥’이라든가 싱겁게 대답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무언가 속셈이 있음을 눈치챘다.
“바라는 게 있죠?”
그가 돈을 주면 무슨 일이든 하는 남자라던 벨의 말이 떠올랐다. 그가 바라는 보수를 자신이 지불할 능력이 될까 걱정스러웠으나, 일단 말이라도 한 번 들어 봐야지 싶었다.
울음소리와 중상모략이 사그라든 방. 아주 작은 두런거림조차 멎어 버린 이 적막한 공간 속에서 나니아는 숨죽인 채 라히무스의 답변을 기다렸다.
그는 말없이 입술을 핥으며 침묵을 지켰다. 한 손으로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며 겸연쩍어 보이는 행동을 지속했다.
흔들리는 촛불이 남자의 얼굴 반쪽을 뜨거운 색으로 물들였다. 깊고 예리한 이목구비를 따라 선명하게 명암이 졌다. 술렁거리는 것이 촛불인지 그의 속눈썹인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쯤, 그가 다시 시선을 들어 나니아를 마주 보았다.
마침내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나니아는 제대로 듣지 못해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다시 한번 더 큰 목소리로 이야기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전까지 또박또박 잘만 이야기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남자는 뭉개진 발음으로 열없이 웅얼거렸다.
“…너랑 키스하게 해 줘.”
남자의 어처구니없는 요구 사항을 듣고 나니아는 기막혀했다.
“…뭐라구요?”
남자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있던 등을 일으켜 황당해하는 나니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자신보다 한참 작은 하녀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 몸을 기울여야 했다. 둘 사이의 간극이 한 뼘 정도로 좁혀졌다. 내뱉는 말 한마디에 숨결까지 느껴질 만한 거리였다.
“입술만 닿게 할게.”
남자가 조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입술까지만이라며 선을 긋는 모습이 자기 딴에는 양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니아는 사내의 예측 불허한 돌변에 얼떨떨하다가, 불현듯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여기는 남자의 방이었다. 그의 방에서, 그와 단둘뿐이었다. 시간은 자정에 가까워져 가고 있고 날은 캄캄했다. 그는 여차하면 얼마든지 그녀를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니아를 내려다보는 라히무스의 크넓은 어깨는 웅대한 귀족 침대도 비좁은 여관방의 침상처럼 좁아 보이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사내는 조바심이 치민 눈빛으로 소녀의 얼굴을 군데군데 핥듯이 바라보았다. 문득 그의 커다란 덩치가 너무도 위협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맹수 앞에 목을 내놓은 사슴처럼 진정하기 힘들었다. 두려운 기분과 함께 가슴이 뛰었다.
난생처음 느끼는 이 위압감이 정확히 어떤 감정인지 형용할 수는 없었으나, 분명한 것은 오늘 낮에도 이와 비슷한 짓을 겪었다는 사실이었다.
“당신 변태예요?!”
나니아가 소리 지르듯 쏘아붙였다. 옆에 있던 베개를 품에 안고 방어 태세를 취했다.
“저번엔 냄새를 맡게 해 달라지 않나, 이번에는 키스라니.”
나니아는 부글부글 끓는 얼굴로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저질 호색한!”
그러곤 손에 쥔 베개를 휘둘러 남자의 얼굴을 가격했다.
퍽.
베개는 정확히 남자의 오른쪽 뺨을 때리고 떨어졌다. 베개로 맞아 봤자 얼마나 아프겠냐마는 워낙 무방비한 상태로 얻어맞은 탓에 힘없이 고개가 돌아갔다.
“…….”
라히무스의 고개는 몇 초간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나니아는 고장 난 듯 정지해 버린 그를 내버려 두고 도망치듯 방 밖으로 뛰쳐나왔다. 복도로 뛰쳐나온 그녀는 문고리를 잡고 큰 소리를 내며 방문을 닫았다. 마음 같아서는 자물쇠를 걸어 그를 가둬 버리고 싶었다.
누군가 이 소란을 듣고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 지금이라면 나니아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그 못된 하녀애들조차 반가울 것 같았다.
그녀는 쫓아오는 발걸음이 없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경황없이 2층을 벗어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하녀는 자신의 거부가 만 하루를 채 가지 못할 것이란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 *
다음날, 영주는 공주와의 식사 자리를 마련했다. 꽃보다 더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녀는 항상 혼자서 외롭게 식사하는 젊은 가주의 테이블을 빛내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주가 꽃처럼 방긋방긋 웃으며 앉아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의자에 앉아 풀 쪼가리 몇 개를 집어먹고 물만 꿀꺽꿀꺽 들이켜고 있었다.
파비올라가 안달 난 얼굴로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자신의 충직한 하녀가 편지를 빼돌렸을 것이라고는 의심조차 하지 않는 얼굴이었다. 애초에 그 편지는 지금 나니아의 손에 있지도 않았다. 어제 라히무스의 방에 두고 나와 버린 탓이다.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다른 시녀와 함께 트레이를 밀던 나니아는 문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라히무스를 발견했다. 굳은 입매의 그는 석상처럼 단단해 보였다.
“큼, 큼. 저… 공주님, 어제는….”
영주가 화두를 꺼냈다. 파비올라의 상기된 얼굴과 대조적으로 나니아의 얼굴은 창백해져 갔다.
나니아는 발소리가 나지 않게, 하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여 대문 앞에 서 있던 라히무스에게로 다가갔다.
남자는 어딘지 삐딱한 표정으로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자신에게 다가온 나니아를 내려다보았다. 하녀는 다급히 손짓하며 귀를 가져다 대라는 시늉을 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낯짝인데도 순순히 허리를 숙여 주었다. 입술 근처로 낮아진 그의 귓가에다 대고 나니아가 다급히 속삭였다.
“어제 그거, 할게요. 할 테니까, 제발 영주님보다 먼저 공주님께 말씀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남자는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딱딱한 말을 툭 내뱉었다.
“뭘?”
나니아는 빨개진 얼굴로 가까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말을 이었다. 손으로 동굴을 만들어 속삭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뽀뽀, 해드릴 테니까, 빨리요!”
그 다급하고 낯간지러운 속살거림에 라히무스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는 여전히 새초롬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덤덤한 척하는 틈 사이로 미약한 환희가 엿보였다.
챠링고와 파키케팔로가 다소 의아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가운데, 라히무스는 뚜벅뚜벅 벨을 향해 걸어갔다. 나니아는 아무 일도 아닌 척 다시 트레이로 되돌아가 접시를 정리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라히무스의 행동을 좇고 있었다.
그는 공주의 지척으로 다가가 영주와의 시들한 대화를 끊어 버리고 그녀의 귓가에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흘리는 듯했다. 뭐라고 속삭이는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았으나, 벨을 자리에서 일으켜 세우는 데에는 성공했다.
“잠시만, 급히 의논할 문제가 생겼다네요.”
공주가 우아하고 긴 손을 들어 보이며 영주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녀는 라히무스와 함께 테라스 쪽으로 걸어갔다. 영주는 닭 쫓던 개가 된 심정으로 그들의 꽁무니를 쫓았다. 미련한 하녀는 자기가 자초한 일임에도 그런 영주의 모습을 가련하고 불쌍하게 바라보았다.
듣는 귀가 없는 곳에서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이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돌아온 공주의 표정은 이전보다 더 차갑게 식어 있었다.
“급작스럽지만, 저희는 내일 파비올라를 떠나려 합니다.”
그녀는 예기치 못한 이야기를 서느렇게 꺼냈다.
“짧은 시간이지만 이토록 극진히 대우해 주어 고맙습니다.”
영주는 무척 당황하며 그녀를 붙잡았다.
“공주님, 혹시 지난밤 저의 이야기가 공주님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까? 제가 어제 보낸 편지가….”
“아니요. 그저 떠날 때가 되어서 떠나는 것일 뿐, 당신과는 관계없습니다. 오해 마시기 바랍니다.”
영주는 공주의 말을 믿기 힘들었다. 자신이 연서를 보낸 직후 저토록 냉랭한 낯빛으로 떠나겠다 이야기하니, 거절의 뜻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당신과는 관계없다는 말. 어쩌면 그 어떤 거절의 말보다도 더욱 잔혹한 의사 표현이었다. 어젯밤 영주가 전하고자 했던 마음은 그녀에게 어떤 의미도 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라키바하프의 얼굴에 수치스러움과 민망함이 뒤섞여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하녀는 안도감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꼈다. 사랑 때문에 처량하고 초라해진 영주님의 모습이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공주와의 백년해로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상처받기를 바란 것도 아니었다.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영주가 눈을 감으며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뒤엔 마치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계획을 이야기하듯 애써 담담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저희 기사들과 함께 서쪽 숲 너머 파비푸스까지 호위하겠습니다. 저 역시 그곳에 계신 고모님께 용무가 있어 찾아뵙는 것이니, 그것까지 아니 된다 말씀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최후의 보루 같은 그의 제안에 공주는 크게 싫어하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마차를 한 대 준비해 주세요.”
공주는 허락 같은 말을 남겨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이어 더는 볼일 없다는 듯 자신의 용병들 셋을 데리고 식사 장소를 떠났다.
그렇게 나니아만이 영주 곁에 남게 되었다.
하녀는 침통한 영주 곁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어떤 말로 가엾은 그를 위로할 수 있을까.
그는 앞에 놓인 그릇들을 팔로 밀어 치우고 그 위에 힘없이 엎어졌다.
실의에 빠진 라키바하프의 모습은 식어 가는 성찬을 바라만 보아야 하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그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저 예쁘다는 이유로 반해 버린 그가 괘씸하기도 했다. 공주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알아볼 생각도 않았으면서. 몇 년을 지고지순하게 바라봐 왔던 자신과 다르게,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그의 마음을 앗아가 버린 공주의 미모가 부럽고 미웠다.
그녀는 떠날 사람이었고, 저를 좋아한다는 남자에게 그럴싸한 마음 한 톨 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테이블 위에 고개를 처박은 영주가 두런두런 입을 열었다.
“숲을 개간해서 길을 닦자는 고모부님 말씀을 그동안 듣지 않았지. 그 길을 발판 삼아 파비올라를 침공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거든.”
그는 지금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시종이 누구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저 들을 귀가 있으면 충분한 듯 머릿속의 고민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고모부님 말씀을 따랐더라면 공주님이 안전하게 서쪽으로 이동하실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랬더라면 지금처럼 호위 핑계로 따라가겠다는 명분조차 생각해 낼 수가 없었을 테지. 차라리 잘된 일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가 이해가 안 되네. 나 왜 이러는 거지?”
심란한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대로 오락가락하는 파비올라의 모습은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사춘기 소년 같았다. 그의 온 사고가 공주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게 느껴졌다.
엎드려 있던 그가 고개를 살짝 비틀어 나니아를 쳐다보았다. 이제야 자신의 곁에 있는 하녀가 누구인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우수에 찬 눈빛에 가슴이 저몄다. 그를 달래 주고 싶은 마음에 입술이 뻐끔거렸다.
그런데 그가 꺼내는 말이, 나니아의 존재를 확인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너무나도 지독하기 짝이 없었다.
“…혼자 있고 싶어. 나가 줘, 뷔셀.”
“…….”
하녀는 여느 때처럼 ‘네’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망연자실하였다. 그에게 건네려던 위로, 공주에 대한 지질한 험담,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 있을 것이란 격려. 상처받은 그를 위로하기 위해 혀끝에서 곱씹고 고심하던 모든 말들이 ‘떠나라’는 그의 말 한마디로 산산조각 바스러졌다.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생각해서 쳐다보는 것조차 아까웠던 사람이다. 나무 밑에 누가 있는 줄은 모르고 떠나가는 새만 하염없이 바라보는 그가 야속했다.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는데. 당신의 가장 가까운 곳에, 여기 내가 이렇게 있는데.
“사실은, 저는, 저도….”
남자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 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더는 아무것도 아닌 돌덩이로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라도 했으면.
“좋아해요. 조, 좋아해요.”
하녀는 결국 참지 못하고 오래도록 쌓아 온 둑을 무너뜨렸다. 충동적인 연정은 주체할 수 없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질끈 감은 두 눈 사이로 눈물이 함께 흘렀다.
“좋아해요, 가주님…. 사실은 제가 그동안, 그동안 많이….”
죄인처럼 벌벌 떨리는 목소리. 멍울로 가득해 볼품없는 고백은 쓰라리고 얼얼했다. 필사적으로 숨겨 왔던 마음이 상처받아 부식된 틈 사이로 쏟아져 내렸다.
“그게 무슨….”
라키바하프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엎드려 있던 자세를 일으켜 앉았다.
“갑자기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갈피 없는 하녀의 고백은 영주에게도 갑작스러운 것이었다.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는 듯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머리를 긁었다. 그 멋쩍은 손은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넘어가 목 뒤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연애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 없는 상대의 사랑 고백은 기껍기보다는 곤란한 마음이 더 컸다.
“난… 나는 뷔셀… 무슨 말을 해 주면 좋을지 모르겠는데.”
그러다 문득, 영주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 공주님께서 이런 기분이셨나.”
남자의 말은 나니아에게 참담한 기분을 안겨 주었다. 이토록 가혹하고 모진 사람이었던가. 저를 향한 고백을 듣고도 다른 여자를 헤아릴 만큼.
사랑하는 이와 마음이 통하는 순간을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았다면,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그가 자신의 사랑을 난감하게 여기더라도 너무 상심하지 말자고. 그 다짐이 더 크고 굳건했더랬다. 자신은 평범하고, 작고, 초라한 하녀니까.
용기 내어 고백한 결과가 이토록 야멸차고 잔혹한 무시라니. 참기 힘든 모멸감에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참을 수 없어 주룩주룩 흐르게 내버려 두면서도, 우는 소리를 내고 싶지 않아 입을 틀어막았다.
나니아는 후회했다. 비참하고 창피해서 도망치고 싶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5분 전으로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하녀는 도저히 이 상황을 견딜 수가 없어서 문 쪽으로 내달렸다.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한 문제 따위는 이제 더 염려하고 싶지도 않았다.
문을 열고 뛰쳐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나니아의 손목을 낚아채는 커다란 손이 있었다. 라히무스였다.
나니아는 너무 놀라 울음을 멈추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급해 보이는 붉은 눈이 안달이 나 있었다. 뜨거운 시선이 그녀를 찢을 것처럼 응시했다.
“…빨리.”
그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아.”
약속했던 그와의 키스가 생각났다. 그녀는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이끌렸다. 못된 사람에게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덩달아 못된 짓을 하러 가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또다시 붙잡혀 온 그의 방. 남자는 방문을 닫자마자 나니아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앞뒤 재지 않고 갈급하게 입술을 들이미는 그를, 양손으로 급히 밀어 냈다.
“저기, 잠깐. 잠깐만요.”
저지당한 라히무스가 목 끝으로 앓는 소리를 냈다.
“…왜.”
애달프게 허락을 구하는 목소리가 흥분으로 잠겨 있었다. 나니아는 손가락을 들어 어린아이 대하듯 그를 가르쳤다.
“당신이 어제 말했던 대로 입술까지만이에요. 그리고 딱 한 번. 3초 정도 세고 뗄 거예요. 알았죠?”
나니아가 여러 가지 조건을 대가며 한계를 짓자, 사내는 답지 않게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싫어.”
“어째서? 자기가 말한 건 지켜야죠!”
라히무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 조건은 어제로 끝났다. 네가 거절했어.”
“난 같은 조건에서 수락한 건데요?”
“생각이 바뀌었어.”
사내는 소녀의 몸을 짐짝처럼 들어 올리더니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제 몸에 주저앉혔다. 라히무스의 몸이 침대 위에서 덜컹거리는 여파에 따라 그의 품에 안긴 나니아도 중심을 잃고 흔들렸다. 그는 또다시 은근하게 고개를 비틀어 나니아의 입술을 탐하려 들었다.
“새로 바뀐 조건은, 내가 원할 때마다야.”
속삭이는 목소리가 낮고 음흉했다.
“그런 게 어딨어요!”
졸지에 사기를 당한 것이나 다름없어진 나니아는 얼굴을 붉히며 씩씩거렸다. 하지만 라히무스 또한 이 협상을 양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질 호색한.”
“…아니야.”
사내는 저를 비난하는 말을 듣고도 이전처럼 난처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약속한 대가를 받아낼 생각으로 기대감이 넘쳐흘렀다. 나니아는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고 어깨를 둥글게 말았다. 안 그래도 아담한 몸이 더 조그마해졌다. 라히무스는 허전해 보이는 그녀의 품에 베개를 안겨 주었다. 나니아는 그가 안겨 준 베개를 꽉 끌어안고 앙잘거렸다.
“애초에 당신이 나랑 입 맞추고 싶어 하는 이유도 모르겠다구요.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예요?”
남자의 큰 손이 나니아의 동그란 뺨을 스쳤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그가 눅눅한 시선으로 나니아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아래에서 올려다보아도 굴욕 없는 턱선을 자랑했다. 나니아는 문득 자기가 어떻게 보이는지 신경 쓰여서 눈을 내리깔았다. 시선을 피하는 그녀를 보고 대답을 망설이던 라히무스가 입을 열었다. 짙고 습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너무… 귀여워서.”
뺨을 쓸었던 손길은 나니아의 가슴께로 내려와 그녀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그의 커다란 아귀가 나니아의 손을 완전히 감싸 쥐었다.
“작고… 귀여워.”
나니아는 놀란 눈으로 라히무스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는 정말로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숨 막히는 시선에서 눈을 떼기 힘들어 나니아도 남자의 붉은 눈을 멍하니 직시했다.
“…제가요?”
남자한테 귀엽다는 말은 태어나 처음 듣는 나니아였다. 생경하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것도 이렇게 번듯하고 훤칠한 사내 품에 안겨있는 야릇한 상황이라 더더욱.
머릿속으로는 입바른 소리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뛰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콩닥거리지?’
나니아는 험악하고 날카롭게 생긴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그래, 나는 무서운 거야.’
성적인 의도를 가득 담아 접촉해 오는 그가 낯설고 두려운 것이라 믿었다. 무서우니까, 두려우니까, 그러니까 거부할 수 없는 거야. 그리고 그는 사람이 아닌지도 모르잖아. 이상한 괴물이라거나 악마일 수도 있어. 곰곰이 생각해 보니 역시 무서운 게 맞는 것 같았다.
은밀하게 다가온 라히무스의 콧날이 나니아의 턱을 스쳤다. 목덜미로부터 그녀의 체취를 들이마셨다. 사내의 숨결에 나니아는 몸을 떨었다. 거부하듯 턱을 반대쪽으로 비틀었지만 오히려 내어 주는 모양새가 되었다. 지금 당장 드러난 목을 물어 뜯긴다 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목을 무는 대신 코를 묻고 숨을 들이켰다.
“너한테서 좋은 냄새도 나….”
전부터 줄곧 맡고 싶었던 그녀의 향취. 라히무스는 정신이 아찔해졌다.
“…시, 싫어. 맡지 마.”
나니아가 작고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사내는 반쯤 넋이 나간 시선으로 그녀의 입술을 쫓아왔다.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듯 입술을 부딪쳐 왔다. 뜨겁고 말캉한 입술이 와 닿는 순간, 가슴을 밀어 거부하려던 의사는 그저 남자의 옷깃을 말아 쥐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남자의 입술이 떨어졌다 부딪히기를 반복하며 하염없이 나니아의 입술을 빨았다.
첫 키스를 이렇게 낯선 남자에게 줘 버려도 괜찮은 걸까. 그것도 정체 모를 괴한에게. 나니아는 갈등하면서도 라히무스를 저지하지 못했다. 사내는 아예 나니아의 품에 있던 베개도 뺏어 저 멀리 던져 버리고 그녀와 몸을 밀착시켰다. 이렇게 붙어 있으니 그의 체격이 얼마나 짐승 같은지 더욱 실감이 났다. 혀가 닿으면 당장에 밀어 내야지 생각했는데, 그는 예상 밖에 정말로 입술만 빨아 댔다. 한참을 그렇게 먹잇감이 된 기분을 느끼던 나니아는 더는 버틸 수가 없어 신음을 흘렸다.
“…웅, 읍.”
온몸이 부둥켜져 옴짝달싹할 수 없는 가운데, 몸을 비틀고 고개를 움직여 그의 무아지경에서 벗어났다.
하아, 하아….
두 사람 다 거칠어진 숨을 뱉으며 서로를 살폈다. 커튼이 쳐져 있었지만 그래도 낮이었다. 어제보다 더 선명하게 관찰되는 그의 얼굴을 보고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워졌다.
“이, 이제 충분하지 않아요?”
두툼하고 넓은 가슴 위에 얹어 놓은 나니아의 작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를 밀어 내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라히무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그는 충분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싫어?”
그가 애달픈 눈으로 고개를 꺾어 전과 다른 각도로 나니아의 눈치를 살폈다. 고기 붙은 뼛조각을 탐하는 사냥개처럼 간절해 보였다. 나니아는 변명하듯 웅얼거렸다.
“시, 싫다기보다는, 너무 이상해서.”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좋아하는 사이도 아닌데. 이런 입맞춤을 하는 것은 이상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홀딱 빠진 것처럼 구는 사내의 눈빛과 태도가 나니아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어찌 됐건 싫지 않다는 말을 남자는 동의로 알아들었다. 라히무스는 아예 나니아를 침대 위로 쓰러트리고 그녀의 몸 위로 달려들었다.
“귀여워. 내가 본 암컷 중에 제일 귀여워… 넌, 난… 전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어.”
사내가 더듬더듬 꿈결을 헤매는 것처럼 그동안 품어 왔던 마음들을 실토했다. 그는 입맞춤으로 만족하지 않고 나니아의 목덜미와 뺨 곳곳에도 입술을 찍어 댔다. 나니아는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었다. 라히무스는 틈틈이 그녀의 체취를 맡는 행위도 멈추지 않았는데, 그의 숨소리는 어딘지 금수 같은 면이 있었다. 커다란 몸집이 온몸을 짓눌렀다. 남자의 비상식적으로 넓은 어깨와 가슴 같은 것들이 야릇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그의 두꺼운 허벅지가 느껴졌다.
그 순간 아주 망측하게도, 그곳에 몸을 비비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대담하지 못한 하녀는 몰래 골반을 뒤틀어 문질렀다. 만족하지 못한 몸이 뜨거워졌다.
그때, 달라붙은 허벅지 사이로 흉흉한 기운이 느껴졌다. 사내의 흥분은 여자의 그것과 다르게 티가 많이 나기 마련인지라, 존재감이 지나치게 거대한 탓에 남자 경험이 없는 나니아도 그가 무엇을 세웠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저기.”
나니아는 몸을 바르작대며 음욕에 빠져 있는 라히무스의 행동을 멈춰 세웠다. 계속 정신 못 차리고 빠져 있다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이건 더 이상 키스가 아니잖아요.”
라히무스는 나니아의 분명한 거부 의사에 그녀를 탐하던 것을 멈추었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한 얼굴로 미련을 뚝뚝 흘리며 나니아를 내려다보았다.
남자가 침대 위에 양팔을 받치고 상체를 세웠는데도, 나니아에게 느껴지는 무게감은 상당했다. 그가 억지로 자신을 취하려 든다면 역시나 완력으로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무, 무서워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나니아가 무릎을 세워 몸을 웅크렸다.
“무서워?”
무섭다는 말에 조금 충격을 받은 듯, 라히무스는 그녀의 몸 위에서 내려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어 나니아도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머리카락과 옷매무새가 헝클어져 있었다. 그 흐트러진 모습이 수컷의 음심을 또 한 번 돋우었으나, 나니아 본인은 알지 못했다.
라히무스는 비뚤어진 옷깃을 바로잡아 주며 말했다.
“…무섭게 할 생각은 없었어.”
나니아는 그의 바지 속이 아직 단단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미안….”
하지만 건네는 말은 신사적이어서 일단은 믿어 보기로 했다.
“괜찮아요. 그치만, 두 번은 없을 거예요.”
“어째서?”
그의 곁에 있으면 또다시 머리가 이상해지는 일이 발생할 것 같았다. 나니아는 다소 매정하게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야, 당신이 절제하지 못하는 남자라는 걸 알았으니까.”
자신도 내심 즐겼다는 사실을 그가 눈치채고 지적하기 전에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본인이 무섭다는 인간 여자를 차마 붙잡을 수 없었던 라히무스는, 떠나는 나니아의 등 뒤에 대고 질문을 던졌다.
“…나랑 키스하는 거 싫었어?”
풀 죽은 목소리가 걸음을 멈추게 했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의 어린애 같은 질문에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하지만 나니아는 마음이 약해지지 않으려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정을 줄 이유가 없는 대상이었다.
“억지로 한 거예요. 알잖아요. 저는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무정한 대답만을 남겨 두고, 하녀는 방문을 닫았다.
* * *
영주의 정행 소식에 저택 안이 분주해졌다. 시종들은 이동하면서 먹을 수 있는 빵과 염장 식품, 모포나 옷붙이 따위를 꾸리고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바쁜 상황 속에서 영주나 라히무스의 일을 떠올릴 틈이 없었으니 어찌 보면 잘된 일이었다.
거처로 돌아온 시간은 일과가 모두 마무리된 저녁 즈음이었다. 시녀들은 모두 자리에 누울 준비를 했다. 나니아도 그들 속에 섞여 이부자리를 만졌다. 잠자리에 들기 전 삼삼오오 수다를 떠는 것이 시녀들의 소소한 낙이자 일상이었다.
“영주님께서 파비올라와 파비푸스의 합병을 말씀드리러 가시는 거라며?”
“공주님 경호는?”
“겸사겸사겠지, 뭐.”
“원래 파비올라와 파비푸스는 옛날에 같은 왕국이었다고 하니, 이상한 노릇도 아니야.”
“나는 싫어. 영주님께서 영주님이 아니게 되는 거잖아.”
잘생긴 영주는 나니아뿐만 아니라 다른 시녀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사실 그는 온 백성들로부터 사랑받는 군주였다. 귀품 있고 수려한 위엄을 갖춘 것은 물론, 인자한 치세를 펼치는 그는 누구에게나 칭송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가주님에 대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관심 없는 척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는 나니아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옆자리 마리앤이었다.
“나나, 쟤들 말이 진짜야?”
“…글쎄.”
네가 모르면 여기서 누가 알겠냐는 얼굴로 마리앤이 집요하게 물어왔다.
“네가 영주님과 제일 가깝잖아. 뭐 들은 것 없어?”
가깝다니. 지금 누구보다도 영주가 멀리하고 싶은 사람은 나니아일 것이다.
들은 바가 있지만 떠들어 댈 권리도 의지도 없었다. 나니아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워서 천장을 보고 있으려니 영주와 라히무스의 얼굴이 차례로 지나갔다. 오늘 두 남자가 그녀의 심중에 커다란 변곡점을 남겼다.
이번에는 거꾸로 나니아가 마리앤에게 물었다.
“있지, 보통 남자들은 낯선 여자라면 일단 관심을 가지고 보는 걸까? 그 여자가 특별히 예쁘지 않아도?”
나니아의 질문에 마리앤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오, 맙소사. 나니아 뷔셀이 남자 얘기라니. 너도 이제 드디어 집 나간 사춘기가 돌아온 거니?”
“…그건 한참 전에 지났어.”
“왜? 누가 너 맘에 든다면서 쫓아다녀?”
“아니… 마음에 든다든가 그런 말은 못 들었는데….”
나니아가 쑥스러워하며 코끝까지 담요를 덮었다.
“어떤 남자가, 처음 보는 여자한테 귀엽다고 하면… 그건 무슨 의미일까?”
“세상에, 누가 너보고 귀엽대?”
마리앤이 호들갑을 떨자 주변의 다른 여자들도 하나둘씩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남자 얘기, 연애 얘기라면 평소 친분 없던 계집애의 얘기더라도 흥미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오늘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어딜 갔나 했더니, 남자를 만나고 왔구나?”
“그게 누군데? 우리가 아는 사람인가?”
질문에 대한 답변은 듣지 못했는데 곳곳에서 이목을 집중하니 당황스러웠다.
“그, 그래서 무슨 뜻일 것 같아…?”
“무슨 뜻이긴, 당연히 너한테 관심 있으니까 껄떡대는 거지!”
“그냥 한번 자빠뜨려 보려고 맹탕으로 하는 소리일 수도 있어.”
“야. 너는 뭐가 그렇게 꼬였냐?”
“원래 남자들은 여자한테 귀엽다는 말 진짜 쉽게 해. 이 여자랑 한번 해 볼 수 있을지 가늠하는 말이나 다름없어.”
“그건 그래. 오입쟁이들일수록 아무한테나 간이고 쓸개고 빼 줄 것처럼 군다니까.”
몇몇 경험 있는 아가씨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람 말도 맞고 저 사람 말도 맞는 것 같은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바람둥이라는 의견 쪽에 힘이 실렸다. 다짜고짜 냄새를 맡질 않나, 부탁을 들어줄 테니 뽀뽀를 해 달라지 않나,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대뜸 거시기를 세운다는 점이 그랬다.
아마 누구한테나 그런 식이었을 터다. 귀엽다는 말을 남발하는 달콤한 목소리로, 보는 눈을 흥분시키는 외설적인 몸뚱이로, 무던히 많은 여자들을 함락시켜 왔겠지. 그 모든 기행들이 하룻밤 동침할 여자를 구하기 위한 수작질이었다고 생각하니 이해가 갔다.
‘내가 얼마나 쉽고 만만해 보였으면!’
하녀는 그 괘씸한 사내에게 휩쓸리지 않았던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조그맣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까짓 귀엽다는 말에 홀랑 넘어갈 줄 알아?’
사실 이미 한 번 넘어갈 뻔했던 전적이 있지만….
복잡한 생각일랑 접어 두고 이제 그만 화제의 중심 속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는데, 누군가 숙소 방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덕분에 딴소리할 필요도 없이, 사람들의 관심이 일제히 그쪽으로 쏠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문 가까이에 누워 있던 하녀가 큰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세요!”
하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침묵했다. 문밖에 찾아온 사람이 누군지, 위험한 인물은 아닌지, 신경을 곤두세우고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누구세요? 누구신지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문을 열어드릴 수 없어요!”
문을 열어 줄 수 없다는 말을 하자, 그제야 나무문 너머 수수께끼의 인물로부터 대답이 돌아왔다.
“나니아.”
익숙한 남자 목소리.
단 세 음절에 나니아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방문을 응시하던 모든 여자들의 시선이 나니아에게로 이동했다.
“미, 미안해. 신경 쓰지 말고 자.”
수습하듯 변명하는 나니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불안함에 숨죽였던 하녀들이 저마다 입을 막고 눈빛을 교환했다.
“나니아가 말한 그 남자인가 봐.”
여자들은 저마다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야유인지 환호성인지 모호한 아우성이었다.
‘하필이면 조금 전까지 그런 얘기를 하는 바람에…!’
나니아는 맨발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 문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갔다. 정말이지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다.
급히 문고리를 잡고 방문을 밀었다. 겨우 손가락 두 마디쯤 열렸을까. 벌어진 문틈 사이로 남자의 손이 나타나, 참을성 없이 방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이번에는 하녀들이 진실로 소리 나게 비명 지르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남자의 무례한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라면서도, 이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의 남자주인공이 누군지 궁금해서 다들 모가지를 길게 빼놓고 있었다.
대체 여기까지 어떻게 알고 쫓아왔는지, 당황한 나니아가 문밖으로 남자를 쫓아내기 위해 그의 가슴을 떠밀었다.
“여기는 아무나, 특히 남자가 이렇게 막 오면 안 되는 곳이에요!”
남자는 얼빠진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마침내 방문을 닫고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부터 해방된 나니아가 물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에요?”
대화 소리가 방 안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어진 다음에야 마음이 놓였다.
라히무스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묵묵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나니아를 쳐다보는 그의 표정이 오묘했다.
“뭐, 왜….”
하녀는 뒤늦게 자신이 잠옷 차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얇은 면 사이로 받쳐 입은 옷이 한 장도 없어, 속절없이 살이 비쳤다. 동그란 가슴 굴곡이 무시할 수 없이 도드라져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몸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황급히 몸을 움츠렸다.
모멸감을 느낀 여자가 온갖 나쁜 말들을 떠올리고 있는데, 라히무스는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덕분에 나니아는 톡 건드리면 발사할 것처럼 장전해 두었던 욕설들을 다시 비워 내야 했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옷을 양보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고맙다는 인사말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애초에 그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감사할 일 따위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 내일 떠나.”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라히무스였다.
그의 뜬금없는 말을 듣고 나니아는 고마움을 말하는 대신 미심쩍은 눈으로 라히무스를 쳐다보았다.
“…그래서요?”
그가 나니아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관자놀이를 덮고 있던 까만 머리카락을 귀 뒤로 조심스럽게 넘겨 주었다.
남자는 고민하는 얼굴이었다.
“보고 싶을 것 같은데.”
“…….”
이 바람둥이가 침대로 여자를 끌어들이고 싶어서 계교를 부리는 것이라 결론 내린 직후였다. 두 번은 넘어가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남자가 다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오늘 낮에 보여 주었던 모습처럼 뜨겁지는 않았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에는 감출 수 없는 잔열이 남아 있었다.
“나랑 같이 갈래?”
객쩍은 소리 하듯 툭 건넨 말 속에 차가운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제가 왜요?”
나니아의 냉담한 대꾸에 라히무스는 공연히 오른발을 까딱거렸다. 잠시 머뭇대던 그가 말을 이었다.
“…계속 보고 싶을 것 같아서.”
“…….”
무심한 얼굴로 감미로운 이야기를 하는 그의 태도가 혼란스러웠다.
‘역시 천하의 난봉꾼은 표정 연기도 수준급이구나!’
“영주도.”
남자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얕은 동공에 나니아의 얼굴이 담겼다. 말을 잇는 그의 눈은 전에 없이 우울해 보였다.
“영주도 가니까. 그를 따라오는 건 어때.”
그의 말을 듣고 나니아는 잊고 있던 영주와의 마찰을 떠올렸다. 그녀가 확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영주님이 허락해 주실 리가… 없어요.”
라히무스는 그녀가 거주 이전의 자유가 있는 자유민 신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필요하다면 영외 이주 세금을 대신 불입할 의사도 있었다.
“너는 날 따라가는 거라고 말해.”
편지 문제를 숨겨 주었던 때와 마찬가지로, 남자는 매사 자기 탓으로 돌리라는 식이었다.
“…제가 당신을요?”
“불편하면 공주 핑계를 대던가.”
“…….”
나니아는 지금 당장 영주를 마주할 자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영영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마음속에는 내심 티끌만 한 기대와 소망이 남아 있었다. 오늘 당장은 당황하고 곤란해했지만, 이제라도 자신의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 상황이 조금쯤 달라지지 않을까? 그의 곁에 머무르다 보면 언젠가 한 번쯤은 기회가 올지도 모른다고 믿고 싶었다.
하지만 만일 그가 파비올라를 고모부에게 신탁하고 끝까지 공주를 쫓아간다면, 그 협소한 기회조차 꿈꿔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사이 공주와 진심으로 눈이 맞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 고모 부부가 이제라도 부모 역할을 자처하여 그에게 혼처를 알아봐 준다면? 그토록 다정하고 멋진 남자가 아직까지 미혼인 것은, 이 파비올라가 깡촌이기 때문에 허락되는 불가능이었다.
나니아는 불안했다. 자신이 지켜볼 수조차 없는 공간에서 그를 빼앗기고, 잃게 될까 봐.
갈등 끝에 내린 결정은 끝내 승낙이었다.
“…갈게요.”
라히무스는 그녀가 무슨 고민을 했는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영주 생각에 몰두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듯하여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다만 내일을 기약하며 스치듯 그녀의 볼을 손등으로 건드렸다.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