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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굿간
수상한 남자
마른돼지숲
접촉
마굿간
파비올라의 하녀 나니아 뷔셀은 매력적이라는 찬사를 듣기엔 어딘지 조금 모자란 여자였다. 혈색 없이 창백한 피부에는 생기가 부족했으며, 그 위로 흐르는 짙고 검은 머리카락은 활력 없어 보이는 인상을 부추겼다. 언제나 불안한 빛을 띠는 보라색 눈동자에는 자신감이 부족했고, 희미한 인상만큼이나 가느다란 목소리는 듣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따분하고 재미없는 여자인지는 그녀의 주말 일정을 들여다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매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파비올라 산하의 노인 보호소에서 봉사 활동을 했다. 노인들을 씻기고 먹이는 일이 가장 주된 일이었으며, 때로는 빵을 굽고 때로는 옷을 기웠다.
몇몇 노인들은 교제 중인 남자 하나 없냐며 핀잔을 주었으나, 그때마다 나니아는 희미하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눈이 침침하고 거동이 불편한 그들과 몇 번씩이고 똑같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나니아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늙은 얼굴의 아버지를 떠올리곤 했다.
“오늘은 머리를 올려 줘, 나니아.”
한 노파가 꼿꼿한 허리를 바짝 세우며 나니아를 향해 말했다. 등이 굽은 노인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나니아는 대답 없이 희게 웃으며 그녀의 등 뒤로 다가갔다. 이제는 듬성듬성 빠지기 시작한 흰 머리카락들을 꼼꼼히 훑어 한데 그러쥐었다. 잔주름과 검버섯이 피어난 얼굴이었지만, 그것들이 노인의 마음까지 녹슬게 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 안에서 유명한 멋쟁이 할머니였다.
“너도 그 치렁치렁한 머리털을 좀 묶어. 하얗고 동그란 볼을 드러내는 편이 더 예쁠 거야.”
노인은 나니아에게 머리단장을 맡긴 채로 치장에 대한 조언을 했다.
나니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노파의 조언을 부정했다.
“제 뺨이 살굿빛으로 발그레했다면 마땅히 그랬겠죠.”
노인은 혀를 찼다.
“너는 너무 자신감이 부족해. 그러다 대장간장이를 빨간 벽돌집 딸내미들에게 빼앗기게 될 거야.”
삐져나온 머리칼을 빗으로 정리하던 나니아가 일순 당황하며 조금 전보다 더 강하게 노인의 말을 부정했다.
“저는 정말 그분께 관심이 없어요, 부인.”
“거짓말 하지 마, 이 동네 처녀들은 모두 대장간장이에게 홀랑 빠져 있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고?”
늙은이라고 무시하지 마. 노파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손바닥으로 뒷머리의 맺음새를 확인했다.
노망난 허튼소리쯤은 잘 들어 주는 나니아였지만, 이번만큼은 정말로 억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니아는 마음을 주고 있는 사내가 따로 있었던 것이다.
무어라 반박하려던 그때, 한 남자가 방문에 드리운 문보를 걷어 올리며 성큼 말을 건네 왔다.
“뷔셀, 장작은 헛간에 쌓여 있던 게 다야?”
남자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한 손으로는 자신의 목을 주물렀다. 양팔을 보기 좋게 걷어 올린 채, 나머지 한 손에는 도낏자루를 쥐고 있었다. 하녀는 화들짝 놀라 그의 앞으로 종종걸음 쳐 다가갔다.
“이, 이제 그만 내려놓으세요, 가주님.”
나니아가 손을 뻗어 연장을 빼앗으려 하였다. 남자는 쉽게 내어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귀엽다는 듯 하하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
“너는 이거 못 들어.”
남자는 도끼를 든 팔로 운동하는 시늉을 하며 힘을 과시했다. 두껍고도 예리한 철근이 달린 그것은 확실히 무거워 보였으나, 여자가 들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로부터 도낏자루를 넘겨받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연장 뺏기를 포기했다.
나니아 뷔셀은 그가 이렇게 종종 하인의 영역에서 이뤄지는 미천한 일을 도우려 들 때마다 곤란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녀는 좀처럼 고개를 들지 못하고 상대방의 발끝만 쳐다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런 건… 이제 그만하세요.”
우물쭈물 어렵사리 꺼낸 부탁의 말에 남자는 부러 불퉁스럽게 대꾸했다.
“이런 거 뭐. 내 성의 영지민들을 돌보는 일?”
“아뇨, 그게 아니라….”
남자는 일부러 짓궂게 말하며 나니아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난감해하는 하녀의 정수리를 보며 사내는 즐거워했다.
“도끼질도 제대로 못하는 사내가 무슨 쓸모가 있겠어? 항상 얘기하는 거지만, 돕는다기보단 내가 해야 할 일이고 또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네가 괜히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아….”
자존감 낮은 하녀의 귀에 그 말은 딱히 너를 위한 것은 아니니까 착각하지 말라는 소리로 들렸다. 공허해진 시선이 이제는 그의 발끝을 넘어 맨땅으로 향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힘쓰는 일은 좀 막막했는데 덕분에….”
“때론 남자가 필요한 일도 있는 법이지.”
나긋한 주인의 목소리가 하녀의 경직된 마음을 또다시 사르르 어루만졌다.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애써 손등으로 가렸다.
나니아 뷔셀이 남몰래 연모하는 상대란 바로 이 잘생긴 미남자였다. 파비올라 가문의 의젓한 외동아들, 라키바하프 파비올라. 감히 동네 대장장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으리만치 우아하고 아름다운 사내였다.
물론 이 어리숙한 하녀와의 연결 가능성만을 따져 본다면, 말 한 번 제대로 섞어 본 적 없는 대장간 남자 쪽이 차라리 더 높을지도 몰랐다. 파비올라 가문의 가주는 눈앞의 하녀가 감히 자신에게 연애 감정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있을 터였다. 일개 거주 고용인에 불과한 나니아는 감히 주인님에게 그러한 마음을 고백해서도 품어서도 안 되었다. 나니아는 몇 년째 자신의 연정을 마음속 깊숙한 구석에 처박아 두고만 있었다.
“나니아, 볼일이 끝나면 나와 동행하겠어? 장제사가 오기로 했거든. 오늘 발굽을 깎는 날이라서.”
나니아가 사는 파비올라 장원은 작지만 따뜻한 곳이었다. 영주 파비올라는 소박하고 다정한 군주였다. 그는 시간이 날 때면 이렇게 영지민들을 돌보고 살피며 때로는 허드렛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하녀는 잘 익은 밀밭 같은 그의 금빛 머리카락이 반짝이는 것을 황홀하게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갈게요.”
소녀는 흙발이 된 자신의 밑창을 내려다보며 오늘 좋은 신을 신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두엄 냄새가 나는 마구간 안에서 마구간지기가 장제사와 함께 영주를 반겼다. 편자 작업을 위해 몇 날 며칠을 걸려 여기까지 찾아와 준 고마운 사람이었다. 모순적이게도 말을 관리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이에게는 정작 말이 없었다.
말은 귀한 재산이었다. 인간처럼 보리와 귀리를 먹여 길러야 하는데 생산성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작은 파비올라에서는 유일하게 영주만이 감당할 수 있는 가축이었다. 멀리서 찾아오는 장제사에게 발굽 관리를 맡기는 데에도 큰돈이 들었다.
“여섯 마리 다 부탁하지. 정산은 내일 성에서 치르겠네.”
“영주님네 말들은 까탈스럽지가 않아 작업하기가 쉬운데, 보수도 항상 넉넉히 챙겨 주시니 불러 주실 때마다 기껍습니다. 그럼 바로 시작합죠.”
마구간지기의 도움을 받아 빗장을 풀고 말이 머무는 축사 안으로 발을 들였다. 말은 귀엽지만 말똥은 사양하고 싶었던 나니아는 벽에 기대어 그 모습을 구경했다.
그 옆에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의 영주가 팔짱을 낀 채로 양발을 고르게 딛고 서 있었다. 나니아는 자신도 모르게 흘끔흘끔 그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이렇게 사적인 시공간에서, 뜻밖의 순간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슴이 떨렸다.
“아이고, 얘가 벌써 몇 살이죠?”
“나랑 비슷하지.”
“그렇네요. 할아버지 다됐네. 영주님 아버지께서 저를 부르실 때부터 얘를 봤으니까요.”
장제사는 능숙하게 자신의 무릎 사이에 늙은 말의 앞발을 끼워 넣었다.
“여기까지 오는 길에, 새로운 소식은 없었나? 자네도 알다시피 파비올라는 새 소식이 늦어서 말이지.”
파비올라가 웃으며 물었다. 그것은 영주와 영지가 동일시되는 이곳에서 중의적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질문이었다.
“새 소식이라… 글쎄요.”
편자를 떼어 낸 장제사가 마구간지기에게 손을 뻗자, 남자가 그의 가방에서 물건을 찾아 건넸다. 커다란 면도칼처럼 생긴 기구였다. 장제사는 건네받은 연장을 바꾸어 들고서 말 다리를 고쳐 안았다.
“요즘 워낙 어수선해서요. 아시죠? 선왕께서 그렇게 돌아가시고 아직도 빈자리라. 내전이 끊이질 않고 있지요. 저도 여기서 서쪽으로 더 가 가지고 당분간 수도 근처로는 얼씬도 안 할 작정입니다. 마누라 먼저 폴핀으로 보내 놨습죠.”
“폴핀? 이번에도 도시로 가는군.”
“저야 뭐 원체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데 도가 텄지만, 가족들이 걱정이죠.”
목재 대하듯 말발굽을 깎아 내는 장제사의 표정이 다소 착잡해 보였다.
“여기 파비올라는 그게 부러워요. 영주님께서 자애로우시고 농민들의 삶을 우선으로 생각해 주시니까요.”
“하하. 그렇게 가마 태워 줘도 말이지, 더 얹어 줄 보수는 없어.”
“제가 몇 푼 더 받자고 마음에도 없는 알랑방귀 뀌겠습니까? 어, 일단 다리 네 개 전부 깎고 편자를 붙일 테니까. 오른쪽 다리 드는 것 좀 도와주게.”
장제사가 마구간지기를 향해 말했다. 굽은 허리를 일으켜 자리를 옮겨 앉은 그는 허한 목소리로 푸념을 이어 나갔다.
“무리하게 부역 노동을 시키시는 것도 없고, 툭하면 전쟁 나간다고 징집을 하지도 않으시고. 여기는… 좋죠. 좋겠죠.”
그 말은 노역을 피해 도망가는 처지를 인정하는 셈이었다. 외지인의 한탄 섞인 부러움을 옆에서 듣고만 있던 마구간지기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아예 여기 정착하지 그래?”
“아니. 나는 이런 깡촌에서는 못 산다.”
“부럽다고 할 땐 언제고 단칼에 거절한다?”
“내가 이래 봬도 도시 남자라서.”
장제사가 피식 웃었다. 편자가 절그럭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시. 나니아는 그 낱말에서 쇳내를 맡았다. 태어나 한 번도 발을 디뎌 본 적 없는 그 미지의 구역은 호기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했다.
파비올라는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 괴촌 영지였다. 도성의 소란한 갈등과 어지러이 북새를 떨어 대는 귀족들의 사정과도 거리가 멀었다.
훌레랑에서부터 달려온 왕의 서거 소식이 이곳 파비올라의 작은 장원에까지 도달하는 데만도 꼬박 닷새가 걸렸다. 왕은 이례적이게도 슬하에 친자식이 하나 없고, 법적으로 왕위 계승권을 이어받을 인물이 그의 수양딸뿐이었다. 하지만 하나뿐인 양부조차 세상을 떠난 마당에 순탄히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을 리가. 왕의 종형제와 종질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하며 군사를 일으킨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농민들에게는 남의 세상일 뿐이라. 마구간지기는 그보다는 다른 것들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보게. 거거, 도시에는 예쁜 여자들도 많지?”
“사람이 많으니까. 미인들도 많은 것처럼 느껴지지.”
남자는 두 번째 말의 축사로 자리를 옮기는 장제사의 뒤를 따르며 말을 붙였다.
“그럼 공주님도 본 적 있는가? 굉장한 미인이라던데.”
장제사는 발굽을 깎던 것을 잠시 멈추고 영주의 눈치를 흘긋 살폈다. 높은 사람 앞에서 더 높은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칫 불경스러워 보일까 염려스러웠던 탓이다.
“…나 같은 천것이 공주님을 어떻게 가까이에서 뵀겠어.”
“멀리서는 봤다는 말이네.”
“봤다고 하기에도 좀 그렇지만…. 공주님은 멀리서 봬도 공주님이셔서 말이지.”
영주가 축사 밖으로 목을 내민 두 번째 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공주님이 사라지셨다던데. 여전히 소식은 없나?”
그 역시 다른 방향으로 왕궁 소식이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저는 뭐,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은….”
누구를 왕으로 모시게 될 것인가. 영주의 입장에서는 유의미한 문제였다. 왕이 봉건 귀족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는 중요한 의제였다. 파비올라는 제 나름의 추측을 중얼거리며 말의 콧등을 어루만졌다.
“위협을 느껴서 도망쳤거나, 어쩌면 그녀의 존재가 방해되는 자의 손에 의해 구속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
마구간지기는 재미없어진 화제를 다시 자기가 좋아하는 얘깃거리로 돌렸다.
“왕궁 근처에 사는 귀족 여자들은 피부도 하얗고 말이야.”
나니아로서는 차라리 공주 얘기를 하는 편이 더 나았겠다 싶은 주제였다.
“우윳빛 젖가슴을 드레스 끝까지 모아 올려 입는다지? 엉덩이를 이렇게 살랑살랑 흔들면서 걸어 다닌다던데.”
마구간지기가 제 엉덩이를 씰룩 씰룩 흔들자, 곁에 있던 하녀는 몹시 질색하였다. 그는 나니아보다 열 살 남짓 많은 남자였는데, 왜 아직까지 누구와도 결혼을 하지 못했는지 알 만한 인간이었다. 저속한 호기심에 토악질이 다 났다. 설령 그것이 사실이라 쳐도 그게 자기랑 무슨 상관인지. 듣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워진 기분에 목을 움츠렸다. 그녀의 굳은 낯빛을 확인한 영주가 수습하듯 말했다.
“숙녀가 있는 자리에서 음담패설은 자제하지.”
파비올라는 나니아의 가까이로 한 걸음 다가와 그녀의 머리 위에 손바닥을 얹으며 속삭였다.
“뷔셀, 아저씨들끼리 하는 얘기 껄끄럽고 재미없지?”
나니아는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저었다. 영주는 문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녀에게 자리를 피할 수 있는 일감을 주려는 의도였다.
“말 먹이 한 동이만 퍼다 주겠어? 밖에 있을 거야.”
“네, 가주님.”
나니아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꾸하곤 몸을 돌려 달음박질쳤다.
도망치듯 밖으로 뛰쳐나온 그녀는 어렵지 않게 말 먹이통을 찾았다. 퍼 담기 좋은 크기의 양동이와 손수레도 함께였다. 양동이 하나를 들어 사료통에 찔러 넣었다. 가득 담으면 무게가 꽤 나갈 것 같았다.
나니아는 곡물 사료가 가득 담긴 양동이를 들어 올리려다 말고 행동을 멈추었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말들은 배를 주리는 법이 없었다. 어차피 영주님의 목적은 자신을 밖으로 보내는 것 그 자체였을 것이다. 눈치 없이 일찍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니아는 벽을 등지고 쪼그려 앉았다. 펑퍼짐한 치맛자락이 바닥에 끌렸다.
조금 전에 들었던 이야기들을 가만히 되새김질해 보았다.
훌레랑, 공주님, 귀부인, 그리고 가슴….
“진짜 저질이야.”
나니아가 중얼거렸다. 곱씹다 보니 마음속에 형용키 힘든 불쾌한 감각이 솔솔 타올랐다. 원래 사내놈들이란 그저 모이기만 하면 여자 얘기 말곤 할 게 없는가? 그것도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지.
어쩌면 가주님도 그런 얘기가 즐거운 건지도 모른다. 내심 동조하고 싶어서 자신을 내보낸 것은 아닐까? 소녀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기대하고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상대방은 몰라주는 감정싸움을 하는 스스로가 애처로웠다.
‘라키바하프 님께서도 예쁘고 가슴이 큰 여자를 좋아하실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영주를 남자로 바라보면서, 그에 대한 성애를 키워나가면서 부쩍 외모에 대한 고민이 많아진 나니아였다. 그럴 나이기도 했다. 예뻐 보이고 싶다. 예뻐지고 싶다. 그의 눈에, 그의 마음에, 설레는 기분을 주는 미인이 되고 싶다. 내가 그에게 느끼는 두근거림을 그도 똑같이 느낀다면 얼마나 좋을까.
짝사랑을 한다는 것은 마주칠 수 없는 손뼉처럼 외롭고 허무한 일이었다.
자신의 양 볼을 감싸고 쪼그려 앉은 나니아는 허리를 펴고 시선을 내려 자신의 흉부를 살폈다. 그다지 자신 있는 부위는 아니었다. 뭔들 빼어난 부위가 있겠냐만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우울한 기분에 빠지려던 나니아의 발치에 무언가 닿았다. 낑낑대는 소리를 내며 다가온 그것은 침체되려던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어머, 너는 누구니?”
사람을 대할 때와는 다른 목소리가 끝 간 데 없이 높아졌다. 그것은 세상 누가 보아도 사랑스러운 털 뭉치였다. 바로 강아지였다. 그것도 아주 어리고 귀여운.
눈이 휘둥그레진 소녀가 그것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녀는 여느 아가씨들처럼 강아지와 고양이라면 환장하는 사람이었다.
“여기 강아지가 있어요!”
축사 앞으로 달려와 외쳤다. 말 먹이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은 채였다.
“마구간에서 키우는 강아지예요?”
장제사가 그 커다란 목소리를 듣고 놀란 척 중얼거렸다. 저 아가씨 말을 할 줄 아는군.
마침 세 번째 말 우리로 이동하려던 찰나, 마구간지기와 영주가 장제사를 남겨 두고 나니아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마구간지기가 다가오며 이야기했다.
“귀엽지? 저기 보리밭 개가 새끼를 여섯 마리나 낳아서 한 마리 업어 왔어. 늠름하게 키우면 나 대신 마구간을 지키게 해 볼까, 그런 속셈이지.”
마구간지기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니아는 자기 팔 안에 순순히 안겨있는 강아지의 얼굴을 살피며 새된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앙증맞아요.”
도무지 보초 역할은 어울리지 않게 깜찍한 강아지였다. 영주도 그에 동의했다.
“그러게. 너무 어리군.”
“그래 봬도 엄마 젖은 떼고 데려온 겁니다. 조그만 것도 한순간이죠. 개는 아주 금방금방 큽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말 뒷발에 채일 것 같아요.”
“그래서 아직 축사 안에는 못 들어가게 해. 방금 네가 데리고 들어왔지만.”
그러고 보니 문밖에 낯선 상자가 있었다.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만든 개집이었다. 말들에게 넣어 주는 것과 같은 건초가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개의 보금자리가 조금 더 아늑하고 푹신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송보송한 자신의 이불 위에서 그것을 재우는 상상을 하던 나니아는 오래도록 사용한 탓에 숨이 다 죽어 가는 자신의 베개가 생각났다. 여기에 그 솜 베개를 넣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딱 좋을 것 같았다.
“강아지 집 안에 부드러운 것을 좀 넣어 주면 어떨까요?”
마구간지기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싫은 표정을 지었다.
“버릇 나빠져서 안 돼. 그리고 나는 그걸 위해 쓸 돈도 없어.”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져올게요.”
절절하게 구는 나니아를 흘긋 바라본 파비올라가 말을 보탰다.
“내가 자네 거처를 축사로 옮기면 버릇이 좋아지려나?”
섬찟 놀라는 그를 보고 영주가 빙긋 웃었다.
“농담이네.”
농담이되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이었다. 하녀는 마구간지기 몰래 입을 가리고 배시시 웃었다. 역시 누구와는 다르게 영주님께서는 작은 동물에게도 다정한 심사를 베풀 줄 아는 멋진 사내셨다. 그가 자신의 편을 들어 주었다는 생각에 나니아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수줍어져 몸을 배배 꼬며 물었다.
“저, 지금 성에 다녀와도 될까요?”
“지금?”
영주가 놀란 눈으로 나니아를 내려다보았다. 항상 요구도 없고 자기 주관도 없던 그녀가 이렇게 안달하는 모습은 낯설었다.
“베개, 지금 가져오고 싶은데….”
불경스럽게도 그녀는 영주가 시킨 일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하지만 파비올라는 피식 웃으며 나니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다녀오렴.”
허락을 받은 그녀가 활짝 웃어 보였다. 품에 안은 강아지를 내려놓고 영주가 그녀에게 한 것처럼 강아지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라키바하프는 말없이 나니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언제부턴가 활짝 웃는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던 그녀의 얼굴에서 어릴 적 햇살 같고 귀엽던 모습이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아저씨들을 뒤에 남겨 둔 채, 소녀는 치렁치렁한 치맛자락을 들어 올려 처소를 향해 뛰어갔다. 서두르지 않으면 해가 지고 말 것이었다.
* * *
서두른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기대했던 것만큼 재빠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니아는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시간이 되어서야 마구간으로 가는 언덕배기를 밟았다. 베개를 안고 내리막길을 힘껏 달려오는 그녀를 마구간지기가 맞이했다. 기다렸다는 듯 벌떡 일어나 팔을 흔든다. 남아 있는 것은 마구간지기와 장제사뿐이었다.
아뿔싸. 그녀는 왜 라키바하프가 당연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까? 그는 이미 다른 볼일로 마구간을 떠난 뒤였다. 정말이지 오만한 착각이고 터무니없는 기대를 했다. 나니아는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뷔셀, 대체 얼마나 걸린 거야. 한참 기다렸다고!”
“저를요?”
기다릴 것까지 또 뭐가 있는가. 이곳이 곧 그의 일터이고 거처인 것을.
목소리를 높였던 마구간지기가 큼큼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나나, 오랜만에 남자들끼리 회포를 좀 풀려고 했는데 말이야…. 내가 대신 일해 줄 사람을 찾아놓지 않아서 그런데.”
나니아는 대꾸 없이 베개만 만지작거렸다. 눈으로는 ‘그래서요?’라고 묻고 있었다.
“오늘 하룻밤만 부탁할게. 엉?”
“…뭐를요?”
남자가 씨익 웃으며 짤랑거리는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그리고 나니아의 손에 억지로 쥐여 주면서 검은 속내를 밝혔다.
“축사 위쪽에 사다리 타고 올라가면 이불 있거든? 잠은 거기서 자면 되고, 네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어도 좋아. 얼마든지. 여기 여기, 멍멍이랑 좀 놀면서 시간 때우면 되는 일이라고.”
“네? 그게, 저는….”
“어려운 거 하나 없고,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무작정 비울 수가 없어서 그래. 새벽닭 울기 전엔 돌아올 테니까, 그때까지 잘 좀 봐줘?”
마구간지기가 눈썹을 크게 들어 올리며 사람 좋은 척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나니아가 의사 표현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말을 쏟아 내다가, 그녀가 어버버 하며 말을 더듬는 사이에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장제사의 목덜미에 팔을 두른 채였다.
이래도 돼? 께름칙하게 묻는 방관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아, 괜찮아. 쟤가 원래 저런 식이야. 어, 착해 착해. 파리 쫓듯 말을 휘젓는 듯한 마구간지기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더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바보처럼 쫓아가서 싫다는 말도 못 했다.
나니아 뷔셀은 자유롭고 외로운 처녀였다. 세상을 떠난 그녀의 아버지는 외지인이었고, 부모 형제는 물론 일가친척도 없었다. 어린 나이에 일찍 부모를 여의면서 파비올라가에 거주 고용인으로 의탁했고, 줄곧 정 붙일 곳을 찾아 헤맸다. 한 다리 건너 네 가족이 내 가족인 시골 영지에서 나니아는 뿌리 없이 부유하는 존재였다.
그 빈틈에 꼭 채워 넣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 자신에게 가장 사심 없이 다정하게 대해 주는 남자. 몸도 마음도 빈털터리인 그녀에게서 앗아 가려는 것 없이 담백한 관심만을 주는 남자. 그는 나니아의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멍멍아, 너도 엄마 아빠랑 떨어져 사느라 외롭겠다. 그렇지?”
나니아는 까만 개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저항 없이 안기는 그것의 엉덩이를 받쳐 들고 자기 무릎 위로 데려왔다.
하녀는 도마 위에 썰고 남은 마른 빵의 끄트머리를 집어 먹어 보려 했지만 영 입맛이 없었다. 식사를 관두고 강아지의 부른 배를 어루만졌다.
“아이구 졸려. 잘까요? 잘까?”
잠결이 밀려드는 얼굴과 통통한 뱃살이 사랑스러웠다. 작은 짐승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제법 묵직했다. 고개를 들어 마구간지기가 설명한 취침 공간을 찾았다. 언덕 너머로 저물어 가는 햇빛이 축사 끄트머리를 비췄다. 그곳에 사다리가 있었다. 2층이라기엔 낮고 키보다는 한참 높은 복층 공간 사이에 놓여 있는 사다리였다. 나니아는 품에 안은 강아지를 번쩍 들어 나무 난간 사이로 밀어 넣었다.
“올라가자, 옳지.”
기름등까지 먼저 올려놓고, 사람도 뒤이어 사다리를 탔다.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안정감이 느껴지는 안락한 공간이었다. 난간 밖으로 머리를 내밀면 여섯 마리의 말들을 모두 둘러 볼 수 있었다.
‘이따 내려갈 때 조금 무서울지도….’
나니아는 낑낑대는 새끼강아지에게 자신의 배를 침대에 내어 주고 요 위에 몸을 누였다.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그치?”
마구간지기가 쓰는 이불이라 생각하니 어쩐지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맨바닥에 눕는 것보다는 나으리라. 나무판자의 빈틈 사이 너머로 칠흑의 어둠이 보였다.
불편한 잠자리도 날아드는 벌레도 무섭지 않았지만 캄캄한 적막은 조금 두려웠다.
하지만 별일 없을 거라는 마구간지기의 말을 믿었다. 그녀가 알기로도 여태껏 마구간에서 일어난 사고라고 해 봤자, 말 한 마리가 열린 문틈 사이로 빠져나가 귀리밭에서 좋은 시간을 보냈던 사건이 고작이었다.
‘오늘도 별일 없을 거야.’
나니아는 스스로를 안심시켰다. 다만 불빛이 꾀어내는 날벌레들이 영 거슬려서, 결국 등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시골의 밤은 일찍 찾아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동이 트려면 아직 먼 시간. 깊이 잠들 것 같았던 나니아의 선잠을 깨운 것은 말발굽 소리와 어수선한 인기척이었다. 두런두런 들려오는 사람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부드럽게 대해 주세요. 말들이 무서워하면 곤란해요.”
“이번엔 제일 순해 보이는 놈을 타고 갈 거야. 챠링고 말 믿고 튼튼한 놈 골랐다가 수명만 깎였다니깐! 이제 안녕이다, 요 녀석아.”
“조용히 말이나 골라. 말은 예민한 동물이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차분한 미성이 하나, 떠들썩한 남녀의 목소리가 둘. 합쳐서 셋.
“안장 올렸을 때 얌전한 녀석으로.”
거기다 소름 끼치게 낮고 음산한 목소리가 하나 더.
잠기운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고 바닥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상황을 정확히 분별할 수 있게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몽롱한 머리가 제자리를 찾아갔다.
‘도둑이다.’
저 사람들은 대체 누굴까. 어떡하면 좋지? 소리를 지를까? 무장 강도들이면 어떡하지? 여러 가지 무서운 생각들로 몸이 벌벌 떨렸다.
말들을 도둑맞는다면 마구간지기는 물론이고 나니아 또한 크게 문책당할 터였다. 파비올라에서 말은 나니아가 평생토록 성을 쓸고 닦으며 관짝에 들어갈 때까지 노동해도 그 값을 지불할 수 없는 귀한 가축이었다. 하필이면 오늘 이렇게 재수 없는 일이 벌어지다니!
여기서부터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곳까지 달려서 10분. 소리 나지 않게 신경 써서 움직인다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여기서 어떻게 더 조용히 내려가지?
나니아는 강아지가 괜히 울부짖지 않기를 바라며 조마조마하게 방법을 궁리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모든 고민은 송두리째 무의미해졌다.
“…냄새.”
“뭐?”
“여자 냄새.”
한 남자가 붙잡은 자물쇠를 놓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말똥 냄새밖에 안 나는데?”
“네가 말하는 여자 냄새가 대체 뭔데?”
두 남녀가 전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사내는 꿋꿋이 냄새가 나는 방향을 찾았다.
“…좋은 냄새.”
나니아는 온몸의 털이 서는 기분을 느꼈다. 눈을 질끈 감고 입을 틀어막으며 금방이라도 새어 나갈 것 같은 비명을 억눌렀다.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무거운 금속 물질이 흔들리고 부딪히는 소리였다. 소리가 멎었을 때,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가늘게 뜬 시야로 숨결의 주인이 보였다. 사다리의 존재를 무색하게 만드는 커다란 키의 남자가 새빨간 짐승의 눈을 빛내며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가씨 말은, 여기 있는 게 다 귀족의 말이다?”
나니아는 울음을 참으려 고개를 끄덕였다. 마구간 기둥에 손이 묶인 상태였다.
“사람을 시켜서 쫓게 할 여유가 있겠군.”
“라히무스가 다 죽여 버리면 되잖아?”
“헛소리 좀 하지 마.”
여자가 남자에게 꿀밤을 먹였다. 하나같이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행색이 수상쩍었다.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사이, 나니아를 찾아낸 덩치 큰 남자는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팔짱을 낀 채 다른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나니아는 자신을 말없이 험악하게 노려보는 시선을 느꼈다. 그쪽으로는 일부러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럼 이 동네에 다른 말은 또 어디 있지?”
“말은… 여기에만 있어요. 다른 데는 없어요.”
“뭐? 여긴 농사도 안 지어?”
나니아는 농사 얘기가 왜 나오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눈을 껌뻑였다. 여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영주한테 빌려서 해?”
“이 마을 농경마가 없나?”
“농사는 말이 아니라 소가….”
“아이씨, 그럼 이거 말곤 역시 방법이 없잖아!”
여자가 답답해하며 나니아가 묶인 기둥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앉아 있던 사내가 커다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며칠 묵고 가지.”
그의 손가락이 마구간의 말들을 가리켰다.
“관상용 말, 바꿔 타봤자 오래 못 타.”
“뭐어? 어쩌자고, 그러면?”
“지금부터 우리 말들을 휴식시킨다.”
“그럴 시간이 어딨냐?”
두 사람의 의견이 충돌하는 사이, 어디선가 나긋하고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히무스 말대로 해요.”
어느 틈엔가 마구간 강아지를 빼앗아 품속에 안고 있는 여자였다. 마찬가지로 검은 후드에 가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앞선 세 명과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그 귀공녀는 세 사람의 호위 대상인 듯, 지위 높은 귀족임에 틀림이 없어 보였다.
“지쳤어요. 당신들도, 나도.”
로브 아래로 오밀조밀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보였다. 대단한 미인이었다.
“하지만 벨로즈 님, 이미 저희는 계획된 경로도 이탈했다구요. 이래도 괜찮은 거야?”
“예상 밖이긴 그들도 마찬가지겠지요. 남부 해안을 향해 곧바로 직진했을 거라고 믿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린 서쪽으로 달려왔죠. 그것도 북서쪽으로. 여긴 인구도 작고, 산과 숲으로 둘러싸여 개진이 늦은 곳이에요.”
귀공녀가 다정하게 눈웃음치며 물었다. 누구든지 홀딱 빠질 만한 미소였다.
“당신, 이름이 무엇인가요?”
이 중에서 가장 온화하게 생긴 그녀가, 나니아에게는 그나마 매달릴 지푸라기로 보였다.
“…나, 나니아 뷔셀.”
“네, 나니아.”
그 고귀한 입에서 흘러나오니 나니아의 이름이 아름다운 노랫말 같았다.
“태어나 마을 밖으로 나가 본 적 있나요?”
무슨 맥락에서 하는 질문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요.”
나니아의 대답을 듣고 미인이 빙긋 웃었다.
“그럴 것 같았어요.”
그 말을 끝으로 나머지 설명은 더 이상 필요도 없다는 듯, 그녀는 의사 표현을 끝냈다. 걸걸한 여자도 저 사람에게 꼼짝 못 하는 것을 보니 실권자가 확실했다.
붉은 머리카락의 여자가 잠시 또 빙글빙글 주위를 걷다가 나니아의 앞에 풀썩 쪼그려 앉았다. 새빨간 시선이 하녀를 똑바로 마주해 왔다.
“잘 들어, 아가씨.”
나니아는 턱을 붙잡혔다. 붙잡힌 것은 턱인데 어쩐지 숨통이 막혔다.
“우린, 말을 훔치려던 게 아냐. 우리가, 나쁜 놈들 피해서 달아나던 통에, 엉? 이해해? 아주 급한 상황이었다고.”
여자가 횡설수설 변명했다.
“그런데 우리 말이 지쳐서, 그래서 말을 바꿔 가려 했던 거다. 여기 말들을 몇 마리 빌려 가는 대신, 그래! 빌려 가려던 거야! 그 대신 우리 말을 놓고 가려고 했다고. 물물교환. 뭐 그런 거 있잖아. 알아듣지?”
여자가 손짓발짓 더해 가며 요상한 구실을 늘어놓는데, 나니아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일뿐이었다.
“그냥 죽여 버리자! 그럼 되잖아. 시체는 내가 치울게.”
귀여운 말투의 남자가 옆에서 살벌한 소리를 지껄였다. 잘 구워삶고 있는데 끼어들지 말라는 듯 여자가 짜증을 냈다.
“멍청아! 여기서 며칠 묵자는 말 못 들었어? 살인자들을 잘도 받아 주겠다!”
“도둑은 받아 준대?”
“그러니까 도둑이 아니라고 얘기하고 있잖아, 얘한테!”
나니아는 신중하게 눈치를 살폈다.
‘일단 숨은 붙어 있을 수 있게 해 준다는 거지…?’
바짝 긴장했던 어깨에 힘이 풀렸다. 하녀는 아직도 조금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저기, 그러니까 제가 이해한 바로는, 오늘 여기서 일어난 일은 함구하라는 말씀이시죠…?”
도둑들이 티격태격하던 것을 멈추고 나니아를 돌아보았다. 키가 큰 여자가 나니아를 내려다보며 씨익 웃었다.
“그래. 생각보다 말이 통하네, 아가씨.”
작은 남자는 나니아의 뒤로 돌아와 그녀의 등을 무릎으로 툭 찼다.
“그럼 우리 이 여자 집에서 며칠 묵는 거야?”
“…네?”
나니아는 기막혀하며 고개를 올려 그를 쳐다보았다.
“왜. 싫어?”
마주친 눈빛에 살기가 돌았다. 하녀는 그가 자신을 ‘그냥 죽여 버리자’고 쉽게 이야기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를 바라보는 나니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룰루랄라 축사를 휘저으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제집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물 있으면 물 좀 줘. 약 먹게.”
“어, 나도 줘. 라히무스 너는? 또 안 먹냐?”
남자는 묵묵부답이었다.
“일단 저 아가씨 팔부터 풀어 주셔야죠.”
가엾은 포로의 붙들린 손목을 걱정해 주는 귀공녀의 명령에 따라, 라히무스라는 남자가 나니아에게로 다가왔다. 아까 전 사다리 위에서 느꼈던 거친 숨결이 또다시 왼쪽 뺨에 닿아 왔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느낌이었다.
포승줄을 푸는 사내의 손이 나니아의 손목을 스쳤다. 그의 살갗은 이상하리만치 뜨거웠고, 커다란 손은 흉기 같았다. 묶는 것이 아니라 풀어 주는 상황인데도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긴 로브 사이로 드러난 팔뚝이 지나치게 두꺼웠다. 저 육중한 팔과 손으로 나니아의 목을 분질러 죽이는 것쯤은 일도 아닐 것 같았다.
* * *
“너, 일부러 우리 엿 멕이는 거지?”
나니아가 도적들을 이끌어 인도한 곳은 당연히 파비올라 저택이었다.
“영주랑 같이 살면 그렇다고 얘기를 해야 할 거 아냐!”
“나니아 양, 본인의 집은 없나요?”
“저는, 여기서 먹고 자고 일해요….”
“바보냐? 그럼 진작 얘기를 했어야지!”
사실 나니아는 빨리 이 작자들과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이 밤에 어딜 가도….”
아무 문이나 두드려서 이 사람들을 재워 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너 그럼 독방을 쓰는 것도 아니겠는데. 무슨 생각이었어?”
“그, 그럼 어떻게 해요. 당신들은 당장이라도 나를 죽일 것처럼 말하는데….”
난생처음 겪어 본 살해 위협이었다. 이성적으로 판단한 겨를이 없었다. 키가 장대 같은 세 사람에게 둘러싸여 추궁을 당하고 있자니 눈물이 다 나려 했다.
“야, 너 울어? 이거 완전 울보네!”
나니아가 훌쩍거리자, 커다란 덩치의 사내가 허리를 숙이곤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뭘 그걸 가지고 울고 그래? 넌 또 뭘 닦아 주고 앉았냐!”
“마구간은 비루먹은 계집애한테 지키게 하질 않나, 영주가 산다는 곳엔 경비도 없고. 아주 개판이네!”
“이봐, 아가씨. 그래서 우릴 데려갈 작정이었어?”
붉은 머리 여자가 다시 또 하녀의 턱을 붙잡았다. 나니아는 물먹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빈방이 있어요. 제가 청소하는 곳인데….”
자기 집은 아니지만 자기 집처럼 저택을 잘 아는 하녀였다. 어쩌면 영주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빈방에서 숨어 지내라는 거야?”
“내일부터 당장 어쩔 건데?”
열 살 먹은 아이들처럼 소란을 떠는 남녀의 등을 짚고 귀공녀가 빙긋 웃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부터 입을 다물도록 하죠.”
상냥한 목소리에 살벌한 느낌이 있었다. 그녀의 말엔 다들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였다.
나니아와 불청객들은 하인들이 이용하는 쪽문으로 조용히 들어와 아무에게도 목격되지 않고 방 안까지 도달했다. 그들이 오늘 하루 몸을 누일 손님용 방에는 침대가 많아 봤자 두 개뿐이었다.
귀족 여자가 당연한 듯 침대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지쳤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지 그대로 쓰러져 엎드려 버렸다. 나머지 침대 하나를 두고 두 사람이 옥신각신 실랑이했다.
“넌 소파에서 자.”
“소파에서 자는 건 너야.”
남자 둘, 여자 둘, 함께 침대를 쓰면 되겠지 싶었는데 오산이었다. 귀인께서는 아무리 동성이라도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공유하지 않으시는 모양이었다.
“저, 아무래도 남성분들께 따로 방을 드리는 편이 좋겠지요?”
불청객도 손님인데 상황을 수습해야겠다 싶어 중재에 나섰다. 하지만 키가 크고 괄괄한 여자가 고개를 저으며 거절했다.
“어? 아니, 난 괜찮아. 어차피 붙어 있어야 하니까. 너도 이제 그만 가 봐.”
침대에 누워 버린 쪽은 아예 대답도 없었다. 도망자 신세라고 했으니 어쩌면 숙식을 함께하는 것이 새삼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니아는 손에 든 유등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급적 저들이 아침까지 조용하게 있어 주기를 바라며 근심 가득한 마음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 * *
아침이 되면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객들을 깨우고 영주에게로 달려가리란 계획을 세워 둔 참이었다. 문제는 그녀보다 더 일찍 영주를 배알한 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장제사와 마구간지기였다.
그들은 지난 새벽 늦게까지 주점에서 부어라 마셔라 술을 들이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 아침이 밝아 오기 전 마구간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을 반긴 것은 처량한 부엌데기 고아 아가씨가 아니라 둥지 잃은 오리 알처럼 바닥을 굴러다니는 새끼강아지, 그리고 낯선 말 세 마리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마침 저기 오네요!”
어젯밤 마구간에 적당히 묶어 두었던 말들이 마구간지기 손에 붙잡혀 있었다. 그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나니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수선거렸다. 그녀만이 이 어리둥절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나니아는 생전 처음으로 파비올라 성 응접실 의자에 앉아 보았다. 언제나 그 옆에 서서 다과를 내놓고 차를 따르는 것이 그녀의 몫이고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하녀가 곁으로 다가와 바삭한 전병을 탁자에 올려 두었다. 그 옆에는 따뜻한 차가 놓였다. 접대를 하는 입장이 아니라 받는 입장에 처해 보니 기분이 묘했다.
자리에는 검은 후드 삼인방과 라키바하프, 품삯을 받을 틈을 놓친 장제사, 그리고 말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함인지 마구간지기도 함께했다. 자리에 없는 것은 오직 그들의 수뇌뿐이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한 여자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귀를 긁으며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저희 금자께서 아침잠이 많으셔서.”
아직 못 일어났다는 소리였다. 귀 뒤를 벅벅 긁는 모습이 이상하게 털털하고 매력적인 인상이었다. 나니아는 그녀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만 시선을 흘긋거렸다. 어제와 다르게 눈동자가 조금 선해 보이는 듯도 하였다. 하지만 껄렁한 자세와 표정에서 느껴지는 불량한 인상은 여전했다.
소년과 청년 그 어디 즈음에 있는 남자가 접시 위로 팔을 뻗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쓰는 접시 위에서 딱딱한 과자를 그대로 깨뜨려 먹으니, 그 가루가 지저분하게 흩날렸다. 평민인 나니아도 흉을 보게 만드는 테이블 매너였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 가장 커다랗고 위협적으로 생겨선 행동 대장의 역할을 하는 듯한 이 남자는 한낮에도 예의 그 통 넓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벗을 생각을 않았다. 안면에 짙게 드리운 그림자가 살벌한 인상을 돋우었다.
세 사람 모두 훤칠하고 이국적인 생김에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가 닮아 있었다. 밝은 한낮 아래 다시 보니 사납고 삐죽한 인상이 비슷해서 사실은 형제들인가 싶은 의구심마저 들었다.
“우리 아이가 속이 깊은 성격이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방랑객들을 모른 체할 수가 없었던 모양인데.”
영주가 말했다. 그의 성대에서 흘러나왔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딱딱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자들을 내 소령에 머무르게 할 수는 없네.”
‘나를 가리켜서 방금 뭐라고 하신 거야? 우리 아이? 내 아이?’
“머무르게 할 수 없으면?”
철없는 소녀가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르는 사이, 낯선 여자는 못마땅한 투로 소리 내어 대꾸했다. 이들은 좀처럼 존대를 하는 법이 없었는데, 그것은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위치인 남자의 심기를 거스르기에 충분한 무례였다. 영주는 자기 앞에 놓인 잔의 테두리를 문질렀다.
“추방. 불복 시 투옥. 당연한 것 아닌가?”
영주의 말을 듣고 주변에 서 있던 그의 기사 두 명이 무거운 쇳덩이를 움직이며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첨예한 분위기가 내실을 가득 메웠다. 생각보다 살벌한 분위기에 나니아는 이들이 사실은 어젯밤 말 도둑질을 하려던 불한당들이라는 비밀을 고백할까 말까 매우 고민하고 있었다.
그 시퍼런 분위기와 고민을 깨듯 커다란 응접실 문이 열렸다. 시녀의 배웅을 받고 나타난 마지막 손님, 아리따운 숙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늦어서 미안해요.”
자애로운 미소. 여유 넘치는 몸가짐. 여인의 동작 하나하나에 눈길이 이끌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천사가 내려앉았다 간 듯 눈부시게 빛나는 백은의 머리카락. 투명하고 뽀얀 살결에 여리고 가냘파 보이는 인상, 그러나 보기보다 큼직하고 길게 뻗은 팔다리는 조막만 한 얼굴과 함께 인간이 아닌 것 같은 비율을 자랑했다. 보석처럼 빛나는 두 눈은 푸른빛과 초록빛을 동시에 품었고, 오밀조밀하게 박혀 있는 이목구비는 무엇 하나 흠잡을 틈이 없었다.
수수하다 못해 후줄근한 블리오를 걸쳤지만 그녀의 고귀한 신분을 감추기엔 역부족이었다. 맙소사, 그녀는 하늘에서 강림한 여신 같았다. 옷이 날개라는 말은 이 황홀한 미인 앞에서 무의미해졌다. 그녀 자신이 날개였다.
한 발 한 발 귀인의 사사로운 발걸음에 모두가 집중했다. 그녀가 다가올수록 공기조차 맑고 투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기다란 탁자 맞은편, 그러니까 영주와 마주 보는 자리까지 다가왔을 때였다. 옆에 있던 장제사가 입을 틀어막고 탄식했다.
“오, 세상에.”
그가 소란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바닥으로 납죽 엎드렸다.
“이, 이 영광스러운 날, 벨로스 공주님을 뵙습니다.”
장제사의 벌벌 떠는 인사말을 듣고 방랑객 세 명이 모두 인상을 굳혔다. 심지어는 시종일관 웃는 낯이었던 귀공녀조차.
“이 촌구석에도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간 유명인의 삶이란 거, 되게 피곤하네!”
호위 중 하나가 이마를 짚고 불평했다.
벨로스 카뮈안 공주. 행방도 생사도 알 수 없다던 사왕의 하나뿐인 수양딸.
의자가 덜컹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영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니아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하수인답게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탁자를 짚어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해 섰다.
다들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여인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모두 넋을 잃었다.
장제사의 한마디 말에 신빙을 부여한 것은 왕공거경의 존립 그 자체였다. 모두가 의심 한 자락 없이 무릎을 바쳤다. 이미 그녀를 어둠 속에서나마 마주할 기회가 있었던 나니아도 마찬가지였다.
밝은 빛 아래에서 더욱 황홀해진 신모에 다리가 후들거렸다. 사내들의 경외는 그보다 더 짙은 빛을 띠었다. 귀족 여성에 대한 내성이 없는 라키바하프에게 왕녀의 등장은 지나치게 아찔했다.
영주가 꿈결을 걷는 듯한 발걸음으로 공주에게 천천히 다가가 기사 서약을 받는 소년처럼 무릎을 굽혔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을 만지듯 여인의 손을 얻어 그 손등에 키스했다. 그리고 나니아는 영주의 등 뒤에서 그 모든 장면을 불안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공주님을 받드는 영광을.”
미인은 조금 곤란한 얼굴로 손을 거두었다.
“아니요, 저는… 그렇게 부르지 말아 주십시오.”
공주는 영주의 손과 시선을 곤란한 듯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초지일관 고고하고 여유롭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무너진 틈 사이로 복잡한 낭패감이 엿보였다.
장제사라는 뜻밖의 선전가 때문에 정체가 폭로되었지만, 파비올라는 사실 그들의 기대 이상으로 폐쇄적인 곳이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민초들은 대부분 죽을 때까지 단 한 번도 영지 밖으로 나설 일이 없었다. 찾아오는 사람 또한 매우 드물었다. 특히나 라키바하프가 양친을 잃은 뒤로는 그나마 성을 방문하던 손님들조차 발길을 끊은 상태였다.
그래서 파비올라 성의 부엌은 간만에 예고 없이 닥친 손님과 그들을 대접하는 점심 만찬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구태여 그들의 소개 현장에 끼어들 이유와 필요가 없어진 나니아도 본래의 위치로 돌아와 식사 준비를 거들었다. 낯선 이방인들의 존재에 하인들은 어수선해졌다. 특히 젊은 하녀들이 말이 많았다.
“정말 인형같이 생겼어?”
식전 음식을 두고 돌아온 수종들을 가운데 놓고 하녀들이 소란스럽게 떠들어 댔다.
“나는 그렇게 그림같이 아름다운 사람은 처음 봤어. 내가 알고 있는 말들로는 그녀의 미모를 설명할 수 없어.”
“세상에 공주님이라니. 그것도 자신을 위협하는 악의 무리로부터 도망치는 공주.”
위험에 쫓기는 공주란 그들에게 상상 속에서나 살아 숨 쉬는 것이었다. 설화 속 주인공 같은 인물의 등장에 사람들은 흥분했다. 그녀는 완전히 주인공이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왕국 기사들이라니?”
“행색은 시정잡배 같았는데. 아주 살벌하게 생긴 인간들이야. 우리 또래 남자애가 하나 있는데, 걔는 좀 귀엽게 생겼더라.”
“뭐야, 나도 자세히 보고 싶어.”
젊은이가 손꼽히는 촌구석에서 반반하게 생긴 청년은 언제나 환영받았다.
“나는 그 남자보다, 덩치가 교목만치 커다란 사내 보았어?”
“까만 로브를 뒤집어 쓴?”
“나도 봤어. 성에 웬 괴수 한 마리가 들어온 줄 알았지 뭐니?”
“그래 그 남자. 어깨가 내 세 배는 더 됐어. 옆 통은 이만하고, 팔뚝은 이만하고.”
하녀가 호들갑스럽게 팔과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사내의 덩치를 가늠해 보였다. 시녀들이 흥분 섞인 비명을 지르며 그녀의 등짝과 어깨를 두드렸다.
“에이, 거짓말. 그게 사람이니?”
“진짜라니까.”
“나나, 네가 모셔 왔다며. 공주님.”
“그렇지. 나니아가 훨씬 더 잘 알겠네.”
“내 말 진짜지? 그치?”
일순 하녀들의 관심이 나니아에게로 확 쏠렸다. 그녀는 숨이 턱 막혔다.
“응? 어….”
나니아가 대답을 얼버무리자 답답하다는 듯 재촉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러지 말고, 자세히 얘기해봐 .”
“얘는 공주님 일행인지 뭔지도 잘 몰랐다잖아.”
“아니 그래도, 어떻게 생겼는지는 다 봤을 거 아냐.”
나니아의 머릿속엔 공주와 영주의 얼굴만이 번갈아 떠오르며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래서 사내의 외관에 대해서라면 그저 느낌만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땠는지….”
나니아는 잠시 잊고 있었던 남자의 흐릿한 형상을 생각했다.
“고개를 들어도 사실 가슴밖에 안 보였어서….”
“어머 얘 미쳤어. 가슴만 쳐다봤대.”
꺄악, 미쳤어, 미쳤어! 쏟아지는 비명들이 귀를 괴롭혔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나니아는 홀로 침착히 상기해 보았다.
사실 그 남자의 코가 어떻고 턱이 어떻고 귀가 어떻고 하는 것들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오로지 눈빛. 나니아가 기억하는 것은 그의 눈빛뿐이었다. 방심하는 순간 목덜미가 물어뜯길 것 같았던 기분. 사내의 난폭한 시선이 아직도 뺨 위에 끈적하게 남아 있는 착각이 들었다.
* * *
화려한 촛대 끝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정원에서 갓 꺾어 온 식물들이 테이블을 풍성하게 장식했다. 그 앞에는 화려한 꽃들도 초라하게 만드는 미인 한 명과 고풍스러운 분위기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우아한 호위 기사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의뢰받은 목적 하나에만 정진하는 단순 무식한 용병에 가까웠다.
시끄럽고 말 많은 꼬마 청년의 이름은 파키케팔로.
붉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높게 올려 묶은 여인의 이름은 챠링고.
거대한 사내의 이름은 라히무스였다.
셋 모두 평균을 웃도는 커다란 신장과 강렬하고 또렷한 이목구비를 가지고 있었다. 더불어 이제껏 들어 본 적 없는 특이한 이름들은 부차적인 설명 없이도 그들이 이역만리에서 온 외지인임을 짐작게 했다.
파키케팔로는 쉴 틈 없이 음식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의 게걸스러움은 들이켠다고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챠링고와 라히무스는 극도로 적은 움직임으로, 그러나 파키케팔로 못지않게 상당히 많은 양의 식사량을 뽐내며 접시 위의 음식을 축내고 있었다. 공주는 나이프와 포크로 풀떼기만 깨작대면서 밥보다 물을 더 많이 마셨다. 그녀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난 것이 유쾌하지 않은 듯 본인이 처한 상황에 대해 더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이렇게 방문해 주신 것도 깊은 연인데. 제가 또 어떤 도움을 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공주님.”
“괜찮아요. 오려고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공주는 새침했다. 그래서 더 남자의 마음을 안달이 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입술을 문 영주의 눈치를 살피던 공주는 말이 조금 심했나 싶어 다른 인사말을 덧붙였다.
“이렇게 머물게 해 주시는 것만으로 큰 도움이 됩니다.”
“머무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하겠습니다. 식사는 입에 맞으실까요? 또 따로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제게 말씀을, 하인은 최대한으로 안배하여 받들게끔 하겠습니다.”
남자는 왕가의 사람을 모신다는 생각에 횡설수설하고 어수선해졌다. 챠링고가 옆에서 콧김을 크게 내쉬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어떻게든 공주에게 한마디 말이라도 더 붙여 보려는 갸륵하고 귀찮은 마음이 보였다. 세력이 약한 지방 귀족다웠다.
“고맙지만, 믿을 수 없는 졸개 같은 것은 옆에 두기가 껄끄럽다고.”
“좋아요. 하지만 많이는 필요 없어요. 어제 그 아가씨를 전속으로 둘래요.”
“예에?”
챠링고가 손에서 스푼을 떨어뜨리듯 내려놓았다. 라히무스도 공주의 객쩍은 소리에 반응했다. 포크질을 멈추고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보였다. 아랑곳하지 않고 식사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파키케팔로 뿐이었다.
공주는 달콤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그 아가씨 이름도 알아요. 나니아 뷔셀.”
그리고 산딸기 하나를 입에 쏙 넣으며 또 웃었다.
“예쁘장해서 맘에 들어.”
* * *
네 사람은 모두 각각의 침실을 배정받았다. 빈방이 많은 황량한 저택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공주마마께옵서는 돌아가신 마님의 내실을 차지하셨다. 먼지 한 톨 없이 관리가 가장 잘된 방이었다.
챠링고가 경호에 어려움이 있다는 이유로 반대했으나, 공주는 그동안 당신들과 너무 붙어 지냈다며 심리적 고단함을 호소했다. 그러다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익실을 챠링고에게 주는 것으로 합의점을 찾았다. 남자들은 아래층 방을 쓰게 되었다. 돌연한 사고가 생기면 창문으로 바로 올라갈 수 있다며 파키케팔로가 기이한 자신감을 비쳤다.
마님의 방에서 나니아가 하는 일은 새로운 손님께서 불편함이 없으시도록 곁을 지키는 것이었다. 쉽게 말해서, 오늘 당장 할 일이 없었다.
“…….”
나니아는 장식장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공주가 그녀를 필요로 하기 전까지.
오래전 나이 많은 하녀가 돌아가신 마님에 대해 떠들어 대던 것이 생각났다.
‘그들은 아랫사람으로부터 지키고 싶은 사생활도 없는 걸까? 우리는 그들에게 사람이 아니라 가구 같은 건지도 몰라.’
고작 십 분 정도 서 있었는데 벌써 다리가 저리고 몸이 근질거렸다. 방에는 안락의자가 놓였지만 하인이 엉덩이를 붙일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상당히 곤욕스러웠다. 차라리 땅을 캐거나 도리깨질을 하고 싶었다.
사모하는 가주님께 감히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 때쯤, 공주가 침묵을 깨고 말을 걸어왔다.
“정말 말수가 없네요. 참 과묵해요.”
나니아는 대답 없이 입술만 달싹였다. 하지만 감히 왕녀를 앞에 두고 경박하게 재잘댈 수 있는 사람이 이 성에 누가 있단 말인가.
“그런 성격은 별로 재미없는데. 난 재밌는 사람이 좋아요.”
그녀가 원한 것은 하녀가 아니라 광대였을까?
“…죄송합니다, 공주님.”
뭐가 죄송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사과부터 했다. 높으신 분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은 중요했다. 무엇보다 이 귀인은 어딘지 싸한 구석이 있었다.
“공주라고 부르지 말아 줄래요?”
바닥만 보고 있던 나니아가 고개를 들어 감히 공주의 얼굴을 살폈다. 그녀의 얇은 눈썹이 가지런해졌다. 도자기로 만든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딱딱했다. 아차 싶어 다시 시선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공… 아니 그럼 뭐라고 부르면….”
“눈.”
미인은 목소리마저 하늘 위 구름 속에 포개어진 것처럼 신선했다.
“말할 때, 눈 마주쳐요.”
“…….”
시키는 대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다시 생긋 웃어 주었다.
“눈동자가 깊고 예쁘네요.”
누구보다 진귀한 색을 띠는 눈동자가 자신을 직시했다. 그런 눈을 가졌으면서 남보고 눈동자가 예쁘다는 둥 헛소리를 하니 듣는 상대방은 기분이 오묘했다. 예쁜 눈의 미인이 카우치에서 몸을 일으켜 나니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발걸음이 사뿐사뿐했다.
가까이 다가온 왕녀는 가냘파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상당히 키가 큰 사람이었다. 큰 신장에서 비롯된 우아한 비율은 그녀를 여신처럼 보이게 만드는 데에 지대한 몫을 했다.
“아담하고, 작군요.”
공주가 나니아의 손을 붙잡았다. 수분이 촉촉하게 느껴지는 부드러운 손. 험한 일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을 것 같은 감촉이었다.
“손도. 발도.”
나니아는 이 영광스러운 손길에 무릎을 꿇어야 하는가 고민하다 잠자코 침만 삼켰다. 같은 여자인데, 이상하게 긴장됐다. 필시 그녀가 지나치게 아름다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리라.
“코도 작고. 입술도 작네요. 여기에 과연 얼마나 들어갈까?”
공주가 이번에는 나니아의 입술을 지분거렸다. 입술을 만지던 손가락은 귀 뒤로 까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내려왔다. 음음, 짧은 콧노래가 흘렀다.
“반할 만하네.”
미인의 기이한 외모 평가에 하녀는 어리둥절해졌다. 그 난해한 표정을 읽은 공주가 소리 내어 웃었다.
“미안, 보통 여자들은 이렇게 조각조각 물건 대하듯 칭찬하는 거 안 좋아하죠?”
자기는 싫어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렸다. 태어나 찬사밖에 들어 본 적 없어서 그런 걸까. 나니아는 생각했다.
“벨. 벨이라고 불러요.”
하녀는 당황스러웠다. 그는 자기 주인도 존함으로 부르지 않는 천출이었다.
“제가 어떻게 감히 공주님의 귀한 이름을 입에 담겠어요….”
나니아는 그녀가 어렵기만 했다. 왕녀, 아니 벨은 볼일이 끝난 사람처럼 다시 카우치로 돌아갔다. 다소 불손한 자세로 늘어져라 몸을 기댄 벨이 차갑게 말했다.
“나는 공주가 아니야. 나는 왕의 딸이 아니란 말이야.”
“…….”
나니아에게 하는 말인 듯, 모두에게 하는 말인 듯, 혼잣말 같기도 한 그 뇌까림 속에 짜증이 묻어났다. 국왕의 수양딸이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알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차마 더 이상 말대답을 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지만 높으신 분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녀는 영주와 다르게 매질을 할지도 모른다. 마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그럼 명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벨… 님.”
이름을 불러 주어서일까. 벨은 다시 밝은 얼굴로 돌아왔다.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은 나니아로 하여금 그녀를 더욱 불가사의하게 느끼도록 만들었다.
“저건 파비올라 영주인가요?”
벨이 침실에 크게 걸려 있는 영주님 가족의 초상화를 가리켜 물었다. 라키바하프와 그의 부친, 모친이 실제 크기와 거의 비례하게 그려진 거대 회화 작품이었다. 나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영주님이 어머니 무릎에 앉아 있었다.
“꽤 큰 값을 지불했겠는걸. 귀부인께서 살롱도 운영하셨나요?”
“네? 그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영지는 빈궁한 느낌이 있는데, 저택은 또 호화롭단 말이죠.”
벨이 곰곰이 생각하듯 카우치 팔걸이에 대고 턱을 괴었다. 그러곤 방 안을 쭉 둘러보더니 감상을 꺼내듯 말했다.
“영공 납부 부담이 큰 편인가요? 이 정도 사치는 부역 노동만으로 이루기 힘든 수준인데.”
벨이 눈만 들어 나니아를 쳐다보았다. 하녀는 손을 모은 채 무슨 말을 묻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영주가 세금을 많이 뜯느냐는 말이에요.”
“네? 아뇨오!”
그제야 벨의 말을 이해한 나니아가 손사래를 쳤다.
“영주님은 좋은 분이세요. 사망세도 없애 주셨고, 돼지세도 없애 주셨고, 포도밭도 곡물밭과 똑같이 취급해 주시구요, 그해 농사가 잘 지어지지 않은 땅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시기도 하구요, 또… 또… 제분기와 화덕도 공짜로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시구요, 숲에서 사냥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허락해 주셨구요.”
“아하?”
벨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키바하프의 면세 업적에 대해 줄줄 읊어대던 나니아는 이제 아예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농번기에는 직접 삽을 들고 밭을 일구시는데요, 발에 진흙도 자주 묻히세요.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잔인하게 고문하시는 일도 없구요, 가주님께서 다스리게 되신 이후로 고문당해 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숲으로 쫓겨난 사람은 있지만…. 근데 그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었어요. 모두들 영주님의 판결은 합당하다고 생각해요. 아주 공평하신 분이거든요.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겐 땅을 빌려주시고 지대도 안 받으세요. 파비올라에는 노인과 고아를 보호하는 곳도 있구요, 그것도 다 가주님이 만드신 거예요. 저택은 좀 화려해 보이시겠지만 그건 선대 가주님의 취향이시고, 라키바하프 님은 무척 검소하세요. 땅에서 난 양파나 감자도 천하게 여기지 않으시고 맛있게 드시구요, 또….”
나니아는 생각했다. 자신이 그를 존경하고 연모하는 이유를.
“떠돌이 노숙자 한 명도 따듯하게 품어 주시는 분이세요. 어릴 적부터 그러셨어요.”
“…….”
이번에는 벨이 말을 잃고 동그래진 눈을 껌뻑거렸다. 그러다 이내 폭소를 터뜨렸다.
“당신 제법 수다스러워질 수 있는 사람이었군요?”
그녀는 어쩐지 즐거워 보였다.
“영주님 찬송가를 써서 외우고 다니는 건가요? 나 정말 깜짝 놀랐네. 그렇게 크고 빠른 목소리로 말할 수 있으면서 왜 평소에는 딸기씨만 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죠?”
깔깔거리는 벨을 보며 나니아는 얼굴이 확 붉어졌다. 찬양처럼 들렸구나 싶어 창피함이 몰려왔다.
“그치만… 다 사실이에요.”
“아, 알겠어요, 알겠어. 그는 정말 좋은 군주군요. 좀 바보스러울 정도로.”
웃음을 다 쏟아 낸 듯 몸을 바르게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 단조로운 표정으로 돌아와 나니아를 향해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잘생겼죠?”
“…네?”
“좋아하죠?”
“네에?”
나니아의 얼굴이 붉은 장미처럼 타오르는 색으로 변해 갔다.
“영주의 이름이 어떻게 되죠?”
“네…?”
“이름을 모를 리는 없을 테고.”
“…라, 라키바하프 파비올라.”
“봐 봐,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 가슴이 떨린다는 표정을 짓잖아요.”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그녀의 말대로 심장과 입술이 떨렸다.
“애인이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어. 그런데 그럴 필요 없겠네요. 당신은 영주를 좋아해. 맞지요? 나 눈치 좋은 편인데. 근데 내가 아니어도 당신은 티가 많이 나요.”
어제 만난 사람에게 불과 몇십 분간의 대화만으로 간파당하다니. 나니아는 자기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이 불경하고 방자한 하녀의 음심을 당장에라도 영주에게 달려가 낱낱이 까발릴 것만 같았다. 천한 부엌데기가 감히 주인님이나 다름없는 귀족가의 외동아들을 마음에 품어? 열 손가락 손톱 끝을 모두 굵은 쇠침으로 쑤셔도 모자랄 일이었다.
혼란한 기분에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일단 부정하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요, 오해하신 거예요. 저는 영주님을 존경합니다. 단지 그것뿐이에요.”
나니아는 태연하기 위해 애썼다.
“라히무-스.”
벨이 말을 길게 늘이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이리 나와요. 아까부터 거기서 엿듣고 있는 거 다 알고 있었어요.”
벨이 고개를 돌려 창문 쪽을 응시했다. 나니아의 시선도 그녀를 따라갔다. 애먼 커튼만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벨은 귀찮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부답인 창문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나니아에게 사뿐사뿐 걸어오던 것과는 정말 다른 발걸음이었다. 그러곤 반쯤 열려 있던 양문형 창문을 확 열어 젖혔다. 그제야 진짜로 벽에 매달려 있던 라히무스가 창틀에 다리를 걸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실제로 창문을 출입구 삼아 오가는 사람은 파키케팔로가 아니라 그였다.
벨은 좁은 창문에서 어깨를 빼내는 그를 한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이러고 있을 줄 알았어요. 제발 내 방에 신경 좀 끄라고 말하고 싶은데.”
그러다 목소리를 낮추어 그의 귓가에다 대고 속삭였다.
“당신이 관심 있는 대상이 내가 아닌 걸 아니까 참는 겁니다.”
“…….”
라히무스는 말이 없었다. 그리고 마치 원래부터 거기가 제 위치였던 것처럼, 아무것도 들키지 않은 사람처럼 그렇게 뻔뻔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창문 옆에서 꿋꿋이 팔짱을 끼고 선 그는 여성스럽고 화려한 마님의 방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니아는 대체 그가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고, 어디부터 자신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몰라 수치스러웠다. 그리고 저 사람이 왜 나가지 않고 계속 여기에 남아 있는 건지 그것도 불만스럽고 화가 났다.
벨이 남자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 치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땠어요? 다 들었죠? 라히무스가 듣기에도 저 아가씨가 영주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까?”
후드 아래로 남자의 턱이 보였다. 굳게 걸어 잠근 입술은 아무 말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벨은 재미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따분하긴. 당신 말고 챠링고가 같이 들었으면 좋았을걸.”
벨은 푸념하듯 말했다.
“왜 부정하지요? 고백도 못 해 본 비밀스러운 마음을 내가 멋대로 가져다 나를까 봐 그러는 건가요?”
가엾은 하녀에게는 너무나 중하고 큰 문제인데 공주는 장난감 다루듯 손에 쥐고 쥐락펴락하며 나니아를 놀려 댔다. 더군다나 듣고 있는 귀가 하나 더 있었다고 생각하니 당혹스러웠던 감정은 모멸감으로 바뀌어 갔다. 귀족의 놀잇감이 된 것 같은 기분에 불쾌했다. 그러나 불쾌감 이전에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복잡한 감정들이 소용돌이쳤다. 왕녀 때문일까 아니면 영주 때문일까.
“정말, 정말 아니에요. 저 같은 천것이 어떻게 영주님을 마음에 담겠어요. 제발… 그러지 마세요.”
나니아가 아랫입술을 깨물고 심각한 표정을 짓자, 벨도 장난스러운 표정을 얼굴에서 지웠다. 그녀가 전과 다르게 낮고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허울뿐인 귀족인 게 문제가 되나요? 끌어내리면 되잖아요. 같은 높이로.”
벨이 나니아의 소매를 잡고 끌어당기는 시늉을 했다.
“내가 겪어 봤는데, 왕족? 귀족? 그런 거 다 의미 없거든요.”
벨의 하얗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나니아의 얼굴 가까이에서 찰랑거렸다. 그녀가 고개를 숙여 나니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질린 눈빛은 흥분으로 물든 눈빛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두 감각은 이성이 바짝 마르고 또 축축해지는 느낌이 반복된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벨은 씨익 웃으며 유혹하듯 속살거렸다.
“원래 갖고 싶은 건 내가 먼저 뺏고, 찢고, 상처 입히는 거야.”
그 목소리는 라히무스의 예민한 귀에도 잘 들릴 만한 크기였다.
* * *
다수의 하인들이 기거하는 파비올라 저택의 후미진 방. 아침 일찍 일어난 나니아가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 침대의 하녀가 불평의 목소리를 터뜨렸다.
“누구는 농번기라고 아침 일찍 끌려가서 이거 따고 저거 따고 허리 펼 틈이 없는데, 누구는 예쁜 공주님이랑 하하호호 인형 놀이하고 있고. 정말 부럽다.”
이불을 접던 손이 멈추었다. 들으라고 한 소리가 명백했다. 누가 들어도 나니아를 겨냥한 비아냥이었다. 안 그래도 평소에 하고 싶은 말을 못 하는 성격이었는데, 오늘은 정말이지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음 같아선 그녀도 차라리 흙밭을 구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니아는 반듯하게 갠 이불을 곱게 내려놓고 옷을 챙겨 입었다. 일언반구 대꾸 없는 그녀를 보고 기가 찬다는 듯 하녀가 중얼거렸다.
“진짜 음험한 애라니까. 표정도 없고 말도 없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녀는 말수가 없는 나니아를, 그래서 더 자극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옆에서 괜히 시비 걸지 말라며 말리는 사람도 있고 동조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니아는 못 들은 척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 * *
챠링고와 파키케팔로는 롱타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벨의 방에 마침 롱타보드를 겸하는 테이블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대륙에서 전해졌다는 이 게임은 용머리 모양을 한 말들을 움직여서 상대방의 말을 잡아먹거나 자기편으로 만드는 놀이였다.
“잘못하면 이번 판도 또 지겠는데.”
파키케팔로가 붉은 머리털을 긁적였다.
“잘못하면, 이 아니라 너는 이미 지고 있다.”
챠링고가 호기롭게 웃으며 말을 옮겼다. 파키케팔로는 챠링고를 상대로 승률이 영 좋지 않았다. 그리고 벨은 밥 먹고 롱타만 했는지 여기 있는 누구보다 게임을 잘하는 인간이었다. 파키케팔로는 누구라도 하나 이기고 싶은 모양으로, 라히무스에게 다음 게임을 권했다.
“라히무스, 나랑 롱타 할래?”
“라히무스는 멍청해서 롱타 룰 이해하는 데만 한참 걸릴걸?”
“아, 그것도 그런가.”
멍청하다는 말이 심기를 거슬렀는지 가만히 서 있기만 하던 라히무스가 꿈틀하고 반응했다. 말없이 둘을 노려보는가 싶던 그가 품에서 은전 하나를 꺼내 롱타보드 위로 날렸다. 그것은 용머리들을 볼링 핀처럼 쓰러뜨리며 정확히 보드 한가운데에 안착했다.
“그거 먹고 닥쳐.”
이 게임에 걸린 내기 돈이 은전 한 닢이었다.
“하여간 저 성깔.”
챠링고가 혀를 차며 은전을 챙기려는데, 파키케팔로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따졌다.
“그걸 왜 니가 가져?”
“그럼 어쩌라고. 말 위치 기억해?”
“아니지이, 방금 판은 무효가 됐으니깐 그 돈 걸고 한 판 더 해야지!”
“아, 더럽고 치사해서 안 가져.”
챠링고가 다시 은전을 테이블 위에 던져 놓으며 투덜거렸다. 파키케팔로는 히죽 웃으며 좋다고 그 돈을 챙겼다.
챠링고는 롱타보드에 턱을 괸 채 몸을 돌리고 라히무스를 관찰했다. 사내는 오늘따라 더욱 인상이 더러워 보였다. 언제나 양 다리를 균형 있게 딛고 서 있던 그가, 오늘은 어딘지 불쾌해 보이는 낯짝으로 커다란 몸을 구겨 듀셰스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긴 팔다리가 팔걸이 밖을 빠져나가 그조차도 상당히 불편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약 먹었네.”
그 말에 라히무스가 감았던 눈을 뜨고 눈동자만 움직여 챠링고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찌푸린 인상은 더러웠지만, 평소보다 훨씬 독기가 빠진 눈이었다. 남자의 시선은 이내 다시 천장으로 돌아간 뒤 눈꺼풀에 덮였다.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라히무스가 웬일?”
옆에서 파키케팔로도 끼어들어서 의아함을 표현했다. 그는 테이블 서랍을 열어 롱타 게임에 사용했던 말들을 쓸어 담았다.
“머리 아프다고 싫어했잖아.”
그러니까 남자는 지금 약을 먹고 두통에 시달리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험상궂은 안색이 더욱 비뚜름해 보였던 것은 그 때문이라.
침대에 반쯤 누워 있던 벨이 읽고 있던 책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리고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알지. 라히무스가 왜 안 먹던 약을 먹었는지.”
그리고 때마침, 작은 하녀가 문을 두드렸다.
“공주님, 뷔셀입니다.”
나니아 뷔셀은 벨의 방에서 펼쳐지고 있는 광경을 보고 굉장히 놀랐다. 털지 않은 흙발로 방을 돌아다닌 것이 틀림없는 발자국.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집기들. 그리고 무엇보다 감히 공주님의 소파와 의자 위에 앉아 노닥거리고 있는 거리 출신 용병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여기가 동네 여관방인지 뭔지 기가 차고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어째선지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방에 있던 네 사람의 시선이 모두 나니아의 얼굴로 날아들었는데, 혹시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었나 싶은 불쾌한 의심이 들 정도로 당황스럽고 부담스러운 주목이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나니아.”
벨은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침대에 걸쳐 앉았다. 그녀는 오늘도 예쁜 눈을 빛내며 나니아와 시선을 마주쳤다.
“네, 벨 님.”
사실 오늘 아침은 그리 유쾌하지 못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벨은 오늘도 그저 침대에 예쁘게 앉아서 나니아를 향해 눈을 빛낼 뿐이었다. 감히 그녀에게 말을 걸어 주기를 기대하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니아의 상투적인 인사말에도 벨은 활짝 웃었다. 그녀가 영문을 알 수 없이 즐겁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난 잘 잤어요, 나니야 양. 오늘도 귀엽네요. 나니아가 보기에 오늘 라히무스는 어때….”
벨이 말을 끝마치기 전, 쏜살처럼 다가온 라히무스가 그 입을 틀어막았다.
“…….”
남자의 튀는 행동은 나니아로 하여금 눈길이 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라히무스는 예의 그 시커멓고 답답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지 않았다. 감고 있던 붕대도 풀고, 두르고 있던 두건도 벗고, 아무튼 처음으로 속 시원하게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의 인중이나 턱이 아닌 눈썹과 콧대 등을 제대로 보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부엌 사람들 대부분이 파키케팔로 얘기를 하는 가운데 간혹 라히무스의 흉통이나 팔뚝, 다리 등에 대해 떠들어 대는 하녀들도 있었다. 나니아는 지금 그 사람들이 떠올랐다.
얼굴을 보게 되면 더 좋아하게 될지도 모르겠는걸.
“…….”
나니아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몇 번 봤다고 이제는 그의 눈이 조금쯤 덜 무서운 듯도 하였다. 오싹한 느낌은 아예 없었다. 이전에 마주쳤던 흉포하고 붉은 시선이 생각날 듯 말 듯 한 기분이 들어 나니아는 고개를 갸웃 움직였다.
그러자 오늘은 어째선지 사내가 먼저 시선을 홱 돌려 피하더니, 몸을 일으켜 조금 전의 제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도통 말이 없으니 의중을 알기가 어려운 남자였다.
이 기묘한 침묵과 심란한 뒷담이 신경 쓰이던 나니아는 어렵사리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방을 치우겠습니다.”
“아니야, 냅둬! 어차피 또 더러워져.”
그렇게 말하는 파키케팔로의 신발이 또 한 번 카펫 위에 자국을 남겼다. 나니아는 착잡한 얼굴로 그 더러움을 지켜보며 대답했다.
“그게 제 일이라… 지금 제가 여기서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거든요.”
“지금 하고 있잖아?”
네 일은 나를 돌보는 일이 아니냐며 벨이 자신의 양팔을 한껏 벌렸다. 나니아가 우물쭈물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음… 사실 요즘 한창 바쁜 시기인데요…. 농번기엔 저택 하녀들도 많은 일을 나누어 맡거든요….”
벨은 무슨 말을 하는지 보자는 듯 팔짱을 꼈다. 나니아가 슬금슬금 말을 이었다.
“보리 탈곡도 해야 하고, 밀밭도 갈아 줘야 하구요, 포도도 따야 하고, 당근이랑 순무도 뽑아야 하구요. 산에서 버섯도 따고… 도토리도 주워야 해요.”
“그래서?”
“…그런데 저는, 지금 여기서… 그러니까, 음… 공주님이랑 오순도순 놀고 있다고… 눈치가 보여서요.”
이들이 더럽힌 방을 청소하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면, 나니아는 그야말로 일이 없었다.
아침엔 아닌 척했으나 사실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 편이었다. 이 여행자들이 떠나고 나면 그녀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안 그래도 이따금 파비올라로부터 받는 특별 취급 아닌 특별 취급 때문에 그녀를 고깝게 생각하는 하녀들이 몇몇 있었다. 이방인의 딸, 그것도 고아에 대한 은은한 차별이 존재하는 환경에서 나니아는 노력해야 했다. 그들과 물에 물 탄 듯 튀지 않고 섞이기 위해서 그녀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하고 제 몫을 다하려 애를 썼다.
소녀가 앞치마 끝자락을 비비며 꼼지락거렸다.
“특별히 시키실 일이 없으면 제가 원래 하던 일을 하러 갈 순 없을까요? 아, 물론 이곳 정리 정돈은 모두 끝난 다음에요….”
제법 직접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밝히는 나니아를 보고 벨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
‘일하고 싶다고 부탁하는 꼴이라니. 정말 노예가 따로 없군.’
그러다 이내 좋은 수가 생각난 듯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가.”
이렇게 쉽게?
공주는 사실 생각보다 좀 무른 성격이 아닐까, 나니아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가 예상 밖의 말을 덧붙였다.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였는데. 어서 가죠.”
“…같이요?”
공주가 이동한다는 것은, 곧 그 뒤에 따라붙는 세 마리의 똘마니들도 함께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니아는 졸지에 딸린 식구를 둘도 셋도 아닌 넷이나 끌고 밭일에 나서게 되었다.
요즘 파비올라는 농지 확장을 통한 생산량 확대, 궁극적으로는 조세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개발 대상 토지 면적 범위가 점점 넓어져 이제는 벌목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나니아가 오늘 할 일은 마른돼지숲 근처 불모지 개간 사업을 돕는 일이었다.
그녀는 모처럼 앞치마를 벗고 장화를 신었다. 머리에는 왕골나무 챙을 엮은 두건을 썼다. 귀하신 공주님은 커다랗고 잎이 풍성한 나무 그늘 아래에 모셔 두었고, 파키케팔로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 두꺼운 가지 위에 자리를 잡았다. 나니아는 높은 곳을 좋아한다는 그가 고양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챠링고는 오랜만에 깨끗한 시냇물로 몸을 씻고 싶다며 근처 계곡으로 떠났다. 벨은 엄마를 따라 나온 아이처럼 세워 앉은 자신의 무릎 위에 팔을 괴고 나니아를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나니아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은 그 옆에 우뚝 서 있는 그녀의 호위 용병도 마찬가지였다.
“뭐 할 거야?”
벨이 물었다.
“농사를 쉬는 땅이어서요. 잡초가 난 흙을 갈아엎고 부엽토를 뿌려 줄 거예요. 뭉친 흙은 잘게 부수고, 잡초는 흙 속으로 돌아가 양분이 돼요.”
가을에 심는 밀과 호밀은 파비올라 사람들의 주식이었다. 가을 작물을 심기 전, 밭의 지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작업이었다. 나아가 삽을 집어 들자, 커다란 남자 손이 불쑥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삽?”
라히무스였다. 그가 대뜸 나니아를 붙들고 그녀의 손에 들린 물건을 쳐다보았다.
“설마 저걸 하려는 건가?”
그가 가리키는 것은 삽으로 흙을 퍼서 잘게 다지고 섞는 부역 노동자들의 모습이었다. 나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히무스는 알 수 없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이걸 어떻게 해. 너는 조그맣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던 사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러더니 나니아의 고사리손에서 삽을 뺏어 들었다.
“작잖아.”
나니아는 라히무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수가 없어 의아해하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나무 그늘 사이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이 그의 얼굴을 얼룩덜룩하게 밝혔다. 그는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하는 장신의 남자였다. 목이 아플 정도로 꺾어야 그의 눈을 쳐다볼 수 있었다.
근데 어째선지 그는 자꾸 눈을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확 틀어 버리는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낮고 굵은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이런 건 소나 말이 하는 일이지 너처럼 작고….”
이미 주름 잡힌 미간과 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조그만 여자애가 하는 거 아니다.”
라히무스는 자꾸 말을 입 안으로 삼키는 것처럼 굴었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조그맣다, 작다는 소리만 반복하는 꼴이 그랬다. 그리고 꼭 눈동자만 움직여 힐긋 나니아의 얼굴을 쳐다본 다음에야 억지로 말을 끝냈다.
작다는 말을 네 번이나 들었더니 분한 기분이 든 나니아가 그에게서 삽을 돌려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저는 작지만 할 거 다 하거든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다 나보고 야무지다고 해요.”
나니아답지 않게 제법 앙칼진 어조였다.
강한 사람 앞에서 약해지고, 약한 사람 앞에서 강해지는 인간의 습성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보다. 뒤따라 다니는 나머지 세 사람은 공주님과 다르게 신분이 높지 않은 자들이었다. 남자에게 생각보다 어수룩한 면이 있음을 간파한 나니아는 어쩐지 라히무스가 조금 만만하게 느껴져서 영주나 공주에게는 감히 사용하지 못할 말투로 그를 대했다.
“그리고 내가 작은 게 아니라, 그쪽이 이상하게 큰 거예요.”
나니아가 이번에는 정말 삽을 가져올 생각으로 재빠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라히무스는 뻗어 오는 손을 피해 삽을 쥔 오른손을 하늘 높이 들었다. 제법 무거운 물건인데도 그의 팔은 손수건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안 그래도 키가 큰 남자가 공중으로 팔을 뻗으니 그녀의 삽은 엄두도 나지 않는 높이로 멀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차라리 나무 위에 누워 있던 파키케팔로에게 더 가까울 것 같았다.
사내가 나니아의 손목을 잡아끌어 공주 쪽으로 팽개치듯 놓았다.
“…너도 거기 앉아 있어.”
초면에 자꾸 팔을 만지고 손을 잡으려 드는 게 이상했다. 나니아는 신경을 곤두세우며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왜 이러는 거예요?”
공주와 눈이 마주친 나니아가 물었다. 둘 중 누구한테 묻는 말인지 알 수 없어졌다.
라히무스는 눈을 내리깔고 잔뜩 경계하는 나니아를 쳐다보며 옆에 앉아 있던 벨을 향해 턱짓했다.
“걔가 못 하는 일이면 너도 안 하는 게 맞아.”
나니아는 공주를 ‘걔’라고 칭하는 그의 불손함에 깜짝 놀라 입이 벌어졌다.
“차라리 내가 해.”
남자는 거추장스러운 윗옷을 나무 밑동에다 벗어 던졌다. 헐렁한 겉옷을 벗자, 몸에 붙은 까만 천이 드러났다. 검은 옷은 남자의 굴곡진 근육을 따라 주름져 있었다. 옆구리의 외복사근 개수를 하나하나 셀 수 있을 정도로 착 달라붙는 옷이었다. 그의 두툼한 가슴 아래로 어둡게 그늘이 진 것을 보고 나니아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드러난 살갗은 하나도 없는데, 보아선 안 될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몸이었다. 지나치게 외설스러웠다.
“내버려 두세요. 저자를 공짜로 부려 먹을 기회는 흔치 않을 것 같네요.”
벨이 말했다.
“맞아. 무식하게 힘만 좋아서 저런 거 잘해.”
나무 위에 팔자 좋게 누워있던 파키케팔로도 거들었다.
“부러워요. 라히무스처럼 몸이 좋으면 머리가 고생을 안 하니까요.”
벨이 농담조로 말했다. 그 말을 듣고 파키케팔로는 낄낄 웃었다.
사내는 소가 끄는 써레 부럽지 않게 삽을 끌었다. 보통의 사람들은 으깬 감자를 숟가락으로 옮기듯 삽으로 흙을 퍼서 이랑에 뿌렸는데, 남자는 그냥 삽을 땅에 쑤셔 박고 밀었다. 그가 지나가는 길이 곧 고랑이 되었다.
“저 사람은… 원래 하는 일이 뭔가요?”
나니아가 미간 사이를 좁히며 나지막이 물었다. 정말 직업이 알고 싶다기보다는, 저 괴력을 어떤 일에 쓰는지가 궁금했다.
“뭐든지 해요. 돈만 주면 뭐든지. 그렇죠, 파키케팔로?”
명쾌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벨은 성심껏 답변을 해 준 셈이었다. 긍정하는 파키케팔로의 목소리는 즐거워 보였다.
“맞아. 사실 지금도 일하는 중이야. 지금은 벨로즈 님 호위 의뢰를 받고 움직이고 있지.”
나니아는 그들의 대화보다는 저 앞에 시키지도 않은 육체노동을 하며 땀방울을 흘리는 사내가 자꾸 신경 쓰였다. 파키케팔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길은 거듭 그를 향하고 계속해 머물렀다.
두꺼운 허벅지로 시작해서 얇은 발목으로 끝나는 길쭉한 다리라든가, 일자로 떡 벌어진 어깨에서부터 역삼각형으로 쭉 빠진 허리 같은 것들은, 근육질 남자에 별 흥미가 없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보기에도 야릇한 시선을 끌었다.
라히무스에 대해 숙덕거리던 하녀들은 헐렁한 옷 아래로도 저 몸을 미리 가량해 보았다는 것일 터. 나니아는 그녀들의 눈썰미에 감탄하며 심심한 감상을 내놓았다.
“다른 건 몰라도… 농사는 확실히 잘 짓겠네요.”
나무 위에서 파키케팔로가 벨을 향해 물었다.
“저거 그냥 벨 님이 해 줄 수 있는 거 아냐? 짠, 하면 짠, 할 거 아냐.”
“내가 왜요?”
언뜻 알 수 없는 대화가 오고 갔으나, 라히무스에게 시선이 고정된 나니아는 그들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고 흘려보냈다. 그런 나니아의 표정을 관찰하던 벨의 얼굴이 점차 어두운 감정으로 물들어 갔다.
그러다 또 무슨 변덕이 끓는지 입술을 삐죽거리며 나니아를 불렀다.
“나니아.”
워낙 정신을 놓고 있어 그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려 주의를 돌려야 했다.
“나니아, 나 목말라요.”
“아, 물을… 가져다드려야겠군요.”
예상치 못했다는 것처럼 나니아가 자신의 주위를 더듬듯 살펴보며 대답했다.
“챠링고가 가지고 다니는 물병이 있어요. 마침 그녀가 냇가로 갔으니 거기서 한 잔 떠다 줘요.”
“아, 그… 조금 오래 걸릴 것 같은데, 그럼 서둘러서 다녀올게요.”
하녀는 자신의 부족한 준비성을 탓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비올라 저택과 숲속의 샘물 중, 어느 쪽이 더 가까울까 저울질하던 나니아는 벨의 말대로 마른돼지숲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더 이상 뒤를 돌아볼 일이 생기지 않을 정도로 멀어졌을 때쯤, 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언덕 밑의 텃밭을 향해 걸어갔다. 평소의 나긋나긋한 발걸음과 다르게, 자신 있게 발을 디뎌 둑을 내려가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벨은 신발을 벗었다. 라히무스는 돌연 밭으로 난입한 벨을 발견하고 삽질을 멈추었다.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땀이 난 이마를 닦았다.
벨은 신발 위에서 내려와 맨발로 땅을 디디며 얼굴을 찡그렸다. 의뢰인의 영문 모를 행동과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라히무스도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벨은 경계가 모호한 밭고랑 사이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발을 씻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귀찮음이 밀려오지만, 흙을 밟는 감촉만큼은 언제나처럼 좋았다. 나풀나풀 걷는 그의 모습은 흡사 나비 같았다. 희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어깨와 가슴 위를 찰랑거렸다. 모처럼 깨끗하고 우아한 블리오 자락이 함께 휘날렸다. 라히무스는 커다란 반응 없이 그 광경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밭을 훑듯이 걸어 다니던 벨이 라히무스에게 가까워졌을 때쯤, 그가 교만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이제 삽질 그만해요.”
“…뭐?”
“여기서 당신이 그 무식한 근육 뽐내면서 할 일 없다고.”
라히무스가 항시 먼저 도발적으로 굴기 때문일까, 단둘이 있을 때의 벨은 다른 사람이 곁에 있을 때와 다르게 격식을 차리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고려하고서라도 대체 벨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라히무스가 무어라 따져 물으려던 그때.
“꺄악-!”
저 멀리 마른돼지숲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나니아의 목소리였다.
* * *
숲은 가장자리부터 이미 울창하고 그늘져 있었다. 걷는 걸음 음에 나뭇잎이 밟히고 이따금 큰 소리를 내며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기도 했다.
근처에는 돼지들이 있었다. 마른돼지숲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돼지를 방목하는 곳이었다. 강아지처럼 귀엽지는 않지만, 나니아는 돼지들도 꽤 좋아했다. 특히 새끼 돼지는 아주 귀여웠다. 물론 야생동물이나 다름없이 길러지는 그것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그녀의 종아리에 몸을 비벼 오는 돼지가 있었다. 나니아는 돼지답지 않게 인간을 친밀히 여기는 면모를 보이는 그것에 관심을 가졌다.
“안녕 돼지야. 너는 흙투성이 돼지구나.”
비록 지저분한 돼지일지라도, 동물을 사랑하는 나이아는 기꺼이 그것을 쓰다듬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돼지는 어딘지 이상했다.
숨소리가 매우 거칠었고 푸르릉 푸르릉 코를 떠는 모양새도 어딘지 기이했다. 몸에는 털이 너무 많았고, 숨을 쉴 때마다 보이는 이빨도 너무 날카로웠다. 마치 육식 동물의 이빨처럼.
“야! 당장 거기서 떨어져!”
숲 안쪽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잔뜩 젖은 머리를 휘날리면서 달려오는 챠링고였다.
그 순간, 돼지는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나니아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돼지의 맹렬한 돌진에 나니아는 비틀거리며 나무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고 쓰러졌다. 돼지는 더욱 광분하여 이제는 아예 앞발을 들고 나니아의 골반에다 대고 몸을 비비려 들었다. 그리고 챠링고는 망설임 없이 품에서 양날 단검을 꺼내 돼지를 향해 던졌다.
“꺄악-!”
그녀가 소리를 지른 것은 바로 그다음이었다.
라히무스는 들고 있던 삽을 내동댕이치고 비명 소리를 따라 달려왔다. 바람에 흩날린 앞머리가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야.”
라히무스는 가장 먼저 나니아를 찾았다. 그녀는 충격받은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거름으로 더럽혀져야 했을 작업복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남자는 다급히 한쪽 다리를 굽혀 그녀 곁에 앉았다. 커다란 양손으로 나니아의 얼굴을 감싸 쥔 채, 자신을 바라보도록 고개를 틀게 했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이 겁에 질려 있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라히무스는 그녀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주변 상황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저 멀리에서는 파키케팔로와 벨이 한발 늦게 따라오고 있었다.
“축수다.”
챠링고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의 손에는 피로 얼룩진 단검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나니아의 발치에서 그녀의 단검에 피를 묻힌 범인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나니아가 비명을 지른 이유였다. 그 이상한 돼지 때문이었다.
챠링고는 돼지의 등에 단검 하나를 꽂아 움직임을 저지하고, 뒤이어 다른 단검으로 순식간에 목을 그었다. 목을 따인 돼지 사체가 나니아의 다리 위로 쓰러졌고, 끔찍하게 쏟아져 나오는 피는 그대로 나니아의 흥건하게 하반신을 적시며 바닥에 웅덩이를 이루었다.
닭목을 비트는 일도 버거운 하녀에게 돼지 목을 따는 광경은 너무나 참혹하고 끔찍했다. 무엇보다 그것은 도축이 아니라 살육이었다.
라히무스는 제 가슴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나니아를 그대로 자기 품 안에 밀어 넣었다. 그녀의 작은 뒤통수를 감싸 안고 다시 현장을 볼 수 없도록 시야를 차단했다.
챠링고가 나뭇잎으로 단검을 닦으며 이야기했다.
“저 여자를 보고 달려들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앞으로 모인 팔이 포박되다시피 품에 안겨진 나니아는 눈앞의 까만 옷을 꽉 그러쥐려 했다. 그러나 남자가 입은 옷이 지나치게 타이트해 그의 가슴 위로 손톱을 세우게 될 뿐이었다.
꽉 붙잡을 것이 필요했던 나니아는 양팔을 올려 라히무스의 목에 둘렀다. 사내가 움찔, 몸을 굳혔으나 나니아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붙들 것이 생긴 안정감에 취하여 다급히 매달릴 뿐이었다.
뒤늦게 나타난 파키케팔로도 현장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축수? 이게 왜 여기 있지?”
그의 오른발이 사체를 툭툭 건드렸다. 돼지와 흡사하게 생긴 그것은 눈을 까뒤집은 채 즉사한 상태로, 그 형모가 매우 혐오스러웠다.
“이게 뭔가요? 내가 보기에도 썩 정상적인 동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벨 또한 유혈과 시체에 익숙하지 않은 듯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라히무스에게 안겨 있는 나니아의 모습을 불유쾌한 시선으로 바라보다, 피투성이 현장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섰다.
파키케팔로는 흥미롭다는 듯 몸을 굽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아무 걱정 없이 사는 평화로운 영지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라히무스가 사체를 눈으로만 살피며 말했다.
“새끼 축수다.”
파키케팔로는 남일 보듯 뒷짐을 지고 말했다.
“이 숲 어딘가 어미가 있겠어. 어쩌면 이미 군집을 이뤘을지도. 여기 사는 인간들은 긴장을 좀 해야겠는데.”
실제로도 남 일이 맞았다.
“그러니까 이게 뭐냐니까요.”
벨은 흡사 따돌림을 당하는 기분에 짜증을 내며 끼어들었다. 셋 중 희박하게나마 벨에 대한 예의와 존중을 갖춘 챠링고가 한쪽 다리를 삐딱하게 짚고서 설명했다.
“동물의 형태와 흡사하지만, 평범한 동물은 아닙니다. 인간을 잡아먹고 사는 괴물이죠. 서대륙에서는 축수라고 부릅니다.”
챠링고는 돼지 등에 꽂힌 단검을 빼내어 오른손 검지에 끼우고 빙글빙글 돌리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축수 중에서도 저급하고 열등한 개체라. 뭐, 우리 같은 상위 포식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피 묻은 단검의 칼끝이 나니아를 가리켰다.
“그대로 두면 걔가 잡아먹히기 딱 좋았거든.”
마지막 말은 라히무스를 향한 것이었다. 챠링고는 라히무스와 그가 품에 안은 인간 여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근데 지금 이걸 얘가 들어도 되는 거야?”
라히무스는 자신의 목을 감은 나니아의 팔을 풀어내고 그녀를 무릎 사이에 앉혔다. 오른팔로 등을 받쳐 안고 왼손으로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광대가 동그랗고 귀여웠다. 손바닥으로 나니아의 턱을 감싼 채 엄지로 발그레한 볼을 문질러 주었다.
챠링고가 한숨을 쉬며 나니아 앞에 쪼그려 앉았다. 어쩐지 기시감이 드는 상황이었다.
“어이, 아가씨. 방금 본 건 없던 걸로 하자?”
나니아는 코를 훌쩍이며 챠링고의 얼굴을 한 번, 그녀가 손에 든 단검을 한 번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내팽겨 쳐진 괴물의 시체까지 시선이 닿으려던 순간, 라히무스가 손바닥을 눈 옆에 세워 시야를 막았다.
나니아가 콧물이 꽉 찬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요? 가주님께 말씀드릴래요.”
“뭐라고. 숲에 이상한 돼지 괴물이 있었다고?”
울음으로 호흡이 버거웠던 나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오늘 여기서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더라도 너네 영주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그렇게 말하는 챠링고의 얼굴은 단호하고 냉정했다.
“하… 네가 오늘 본 건 단순히 인간을 해치는 괴물이 아니야. 인간을 잡아먹고 그 육신과 지능을 빼앗는다고. 성급한 객기는 자발적으로 먹잇감이 되어 주는 꼴이 될 뿐이야.”
챠링고는 혼란스러워하는 나니아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축수의 존재조차 몰랐던 인간에겐 어려운 얘기겠지.”
가만히 침묵하던 라히무스가 나니아의 얼굴을 덮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손길.
그제야 자기가 남자의 무릎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나니아는 엉덩이를 떼고 벌떡 일어서서 아직 낙엽 사이에 주저앉아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았다. 안 그래도 못난 얼굴이 더욱 엉망이 되었을 거란 생각에 부끄러워졌다. 나니아는 코 밑과 입가로 흘러내린 체액들을 손등으로 정신없이 문질러 닦았다.
라히무스는 그녀의 당황한 모습을 올려다보며 무언가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더니 곧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런 거 몰라도 돼.”
남자가 나니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숲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내가 다 잡아 주면 되니까.”
“뭐?”
여기 사는 인간들이 죽든가 말든가, 챠링고는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안 그래도 파비올라에 머무는 작금의 상황 자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그녀는 못 볼 꼴을 보겠다는 듯 역정을 냈다.
“바빠 죽겠는데 웬 헛소리야. 이 괴물 새끼가 벌써 발정이 돋나?”
챠링고의 말에 라히무스의 입술이 들썩였다. 그가 나니아는 볼 수 없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어 동료를 향해 이를 드러냈다. 금방이라도 폭력을 휘두를 것 같이 위협적인 제스처였다.
“저, 저, 눈깔 봐라. 하여간 성질머리…!”
“야야, 그만해. 우리 어차피 서쪽 숲을 지나긴 할 거니깐….”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파키케팔로가 중간에서 눈치를 보며 챠링고를 말렸다. 라히무스에게 대들어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그였다.
“야, 너 혼자 걔 데리고 어디 가는데?”
챠링고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다시 송곳니를 숨긴 라히무스가 건성으로 대꾸했다.
“…위험하니까 데려다줄 거야.”
“미치겠네. 네가 지켜야 하는 건 그 여자가 아니야.”
쫑알쫑알 잔소리하는 챠링고가 슬슬 짜증 나기 시작한 라히무스가 그녀를 빈정거렸다.
“왜. 아주 잠깐이라도 나 없인 아무것도 못 하겠나?”
이번 임무에 가담한 용병 세 사람의 전력 차이는 아무리 좋게 봐 줘도 9:1:1 정도. 남자의 말은 그 명백한 힘의 우위를 인식시키려는 도발이었다. 챠링고는 말을 잃고 입술을 빠끔거리다 분개하던 어깨를 힘없이 떨구었다.
“아오, 씨… 니 맘대로 해라!”
그녀는 아직 채 마르지 않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분하다는 듯 발을 구르기도 했다. 파키케팔로는 네가 참으라며 곁에서 속살거렸다. 정작 호위를 받아야 할 사람은 옆에서 팔짱을 낀 채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