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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1-2. 에일레스 (15/17)

Epilogue 1-2. 에일레스

예식이 코앞으로 다가와서일까, 긴장한 탓에 오히려 잠들기가 어려웠다. 사실 그들은 지금도 한집에 살고 있었고, 단지 결혼식을 올리는 것뿐이니 크게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한참 전부터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눈이 감기기는커녕 점점 더 또렷해지기만 했다.

‘책이라도 읽으면 잠이 오지 않을까?’

자리에서 일어난 미라벨라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을 막 펼쳐 들었을 때였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리고 열린 문 사이로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벨, 자는 거니?”

“……에일레스 오라버니?”

“아, 다행이다. 아직 잠들지 않았구나.”

“네, 오늘도 많이 늦으시는 줄 알고……. 이제 오신 거예요?”

“응, 지금 막.”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녀의 방을 찾은 듯, 에일레스는 아직 크라바트도 풀지 않은 차림이었다. 요즘 들어 일이 더 바빠진 듯한 그는 부쩍 귀가가 늦었다. 하여 이렇게 얼굴을 본 게 무척 좋았지만, 그러면서도 깨어 있는 걸 지나치게 반가워하는 게 약간 의아한 마음이 들긴 했다. 본래 그는 늦게 귀가하는 날에도 꼭 그녀의 방에 들러 잠든 얼굴을 한참 보고서야 나간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오라버니, 제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평소와는 미묘하게 다른 태도가 어색하게 느껴져 미라벨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심지어 그는 어딘가 초조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은 네 반지가 오늘 나왔거든. 얼른 보여 주고 싶어서.”

“아! 하지만 결혼반지라면, 이미…….”

“그거 말고, 벨.”

인장으로도 사용되는, 대대로 내려오는 공작 부인의 반지는 며칠 전 미리 전달받았다. 속눈썹을 빠르게 깜빡이는 미라벨라를 바라보며 그가 다시 옅게 미소 지었다.

“‘진짜’ 결혼반지 말이야.”

에일레스는 제 목깃 안으로 손을 가져가 얇은 은색 줄을 빼냈다. 남들에겐 보이지 않도록 옷 안으로 착용하고 있던 목걸이 줄 끝에 걸려 있는 건, 빛나는 반지 하나였다. 이어서 그는 품 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냈다.

“동일한 디자인으로 네 개를 만들었어. 부디 신부의 마음에 들어야 할 텐데.”

달칵, 상자를 열자 그의 것과 거의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쿠션에 끼워져 있었다. 주위를 압도하는 화려함에 치중한 공작 부인의 반지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 밴드 형태의 링이 아름답게 반짝였다. 심플하면서도 결코 흔치 않은 감각적인 디자인에 저절로 탄성이 흘렀다. 화이트 골드의 기본 디자인은 같았으나, 미라벨라의 것은 메인 스톤 외에도 작은 멜리 사이즈의 다이아가 파베 세팅되어 사랑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와아…….”

“벨, 결혼반지가 마음에 들어?”

“네, 정말 너무 예뻐요!”

“디자인은 셋이 함께했어. 스톤을 정하는 것도. 세공은…… 내가 직접 했고.”

“……오라버니께서 직접이요?”

“응, 겸사겸사 보석 세공도 배울 겸 해서. 내 손으로 해 주고 싶었거든.”

그 바쁜 틈에 대체 언제 그럴 시간이 있었을까. 미라벨라는 그의 세심함에 늘 이렇게 감동받게 되었다. 영롱한 빛을 내는 보석보다도 더 아름다운 그의 황금 안을 물끄러미 보던 미라벨라가 문득 떠오른 듯 질문했다.

“그런데 제 손가락 사이즈는 어떻게 아셨어요?”

“설마, 그걸 모를까 봐.”

그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지만, 그녀는 아직 의문이 다 풀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알려 드린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다 알지, 네 사이즈는.”

“…….”

“전부 다.”

그녀를 응시하던 에일레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살짝 웃었다. 왠지 제 속을 다 들여다보는 것 같은 기분에 미라벨라는 작은 어깨를 움츠렸다. 게다가 왠지 그 시선이, 손가락 둘레뿐 아니라 신체의 다른 곳의 사이즈마저 전부 세세히 알고 있다는 얼굴이라서. 하긴, 그렇게 매일 벗겨 놓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물고 빨면 저절로 기억할 수밖에 없을…… 무심코 떠오른 생각에 작은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정말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는 양, 어딘가 뜨겁게 느껴지는 시선이 집요하게 따라와 눈을 맞추었다.

상자 안에 담긴 반지의 메인 스톤이 실내등의 불빛 아래 영롱한 빛을 냈다. 가장 높은 등급의 다이아몬드보다도 더 반짝이는 광채에 의문을 품었을 즈음, 에일레스가 답을 주었다.

“벨, 이건 굉장히 희귀한 이국의 마력석이야. 이젠 대륙에 몇 개 없는 거라 정말 구하기 힘들었어.”

“그렇게 귀한 걸 어떻게…….”

“또 평범한 보석과는 다른 특별한 효과를 가졌거든.”

“특별한 효과요?”

“그래, 어떤 효과인지는…… 예식이 끝난 뒤에 말해 주기로 할까.”

거기까지 말을 줄이며 그는 상자 안에서 반지를 꺼내 들었다. 직접 끼워 주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미라벨라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더 이상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막 고개를 갸웃했을 때였다.

“……!”

순간 당황한 미라벨라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갑작스럽게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는 그녀의 앞에 꿇어앉았던 것이다. 아침의 햇살을 머금은 듯 눈부신 황금빛 눈동자가 침착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레이디 미라벨라, 나 에일레스 라이오넬은 모든 진심과 염원을 담아 경애하는 그대에게 청혼하는 바입니다. 저와 평생을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에일레스 오라버니…….”

문득 눈가가 뜨거워졌다. 왠지 가슴이 뭉클해지는 기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 있던 미라벨라는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요.”

투명한 눈동자에 고인 눈물이 매끄러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라버니와 평생, 영원히, 함께 있을게요.”

대답한 순간, 작은 몸이 위로 높이 떠올랐다.

“다행이야, 거절당하지 않아서.”

“저…….”

“사실 좀 떨었거든. 티 안 났어?”

에일레스가 제 품 안에 쏙 들어오는 그녀를 안아 들고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그렇지만 미라벨라는 뭐라 더 말할 수 없었다. 법이 개정되지 않는 한 그들 모두와 공식적인 관계가 될 수는 없는 게 사실이었기에, 그게 무척 미안해서. 그런 마음도 다 안다는 듯 미라벨라의 두 볼을 감싸 쥐며 그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으니까 걱정 마, 벨.”

“그렇지만…….”

“세상이 우리의 관계를 뭐라 정의하건 전혀 상관없어. 내게 넌 영원히 하나뿐인 아내일 테니까. 난 네가 날 오라버니라 부르는 것도 참 좋고.”

“…….”

“그리고, 법적으로는 형수님이잖아? 그쪽이 왠지 더…….”

언뜻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빛난 것 같았는데……. 미라벨라가 궁금한 얼굴로 올려다보았으나, 에일레스는 더 말해 주지 않았다.

훗날 녹스에게 법을 개정해 달랄 거라며 벼르고 있는 르시엘과 달리, 그가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다는 건 사실이었다. 중요한 건 마음이지 세간에서 규정한 법적 구속력 따위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게다가 어차피 일반적인 관계가 아닌 그들의 사랑에, 그런 평범한 기준을 들이대 봐야 뭐하겠는가. 그럴 시간에 더 사랑하는 게 낫지. 그는 미라벨라를 번쩍 안아 들고 빠르게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사랑해, 벨, 영원히.”

어느새 발갛게 달아오른 작은 귓불이, 그의 입술 사이에서 아프지 않게 슬쩍 깨물렸다. 저도 사랑해요, 오라버니. 에일레스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미라벨라는 진심으로 속삭였다. 달빛이 스민 듯 아름다운 은발이 품에 안긴 그녀의 작은 등을 감싸며 흘러내렸다. 그의 손이 새하얀 잠옷을 빠르게 벗겨 냈다.

“……읏, 벨.”

“으응! 하으, 흣.”

어느새 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있었다. 지나치게 다정하고 상냥한 애무에 녹아내린 미라벨라가 달뜬 얼굴로 숨을 할딱였다. 그는 무척 세심하면서도 과감한 시도를 꺼리지 않아 늘 미라벨라가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뒤엉킨 그들은 새벽이 올 때까지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다.

“아, 흐읏…….”

“오늘은 같이 자자.”

한참 뒤, 가늘게 떨리는 작은 몸을 다독이며 에일레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평소보다 더 낮게 가라앉아 있는, 끝이 살짝 갈라진 음성. 단단한 팔이 그녀를 제 쪽으로 더 당겨 안자 서로의 나신이 빈틈없이 겹쳐지며 따스한 체온이 전달되어 왔다.

“읏, 오라버니! 그래도 씻고 자야…….”

“피곤하잖아, 그냥 자. 잠들면 내가 씻겨 줄게.”

“…….”

에일레스는 지그시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로 당연한 듯 말했다. 사실 그와 함께 자는 날, 그랬던 적은 꽤 많았다. 그냥 씻기기만 하는 게 아닌 걸 알아서 부끄러웠지만 완전히 녹초가 되었기에 쉽게 몸이 일으켜지진 않았다. 지금은, 좀 많이 졸리기도 했고…….

문득, 그가 처음 성 루베이도 학원으로 찾아왔던 날이 떠올랐다. 처음 본 순간 빛의 신 같다고 생각했던 오라버니. 다정한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그와 어쩌다 이런 관계가 되었을까. 미라벨라는 운명론자는 아니었지만, 가끔은 왠지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몰려오는 잠을 애써 밀어내며 그에게 물었다.

“에일레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저랑 이런 사이가 될 거라는 거 알고 계셨어요?”

“알았지.”

“정말요? 언제부터 아셨어요?”

“……글쎄.”

대답 대신, 그는 긴 눈매를 매끄럽게 휘며 웃었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에 힘을 주며 미라벨라가 답을 재촉했지만 말해 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낮고 허스키한 음성이 감미롭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사랑합니다. 나의 하나뿐인 아내, 벨.

그는 끝내 알려 주지 않았지만, 미라벨라는 어쩐지 그가 자신과 같은 날을 떠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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