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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1-1. 르시엘 (14/17)

Epilogue 1-1. 르시엘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느린 듯하면서도 빨라서, 매일에 충실하다가도 문득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달라진 옷차림과 성큼 다가온 계절의 변화에 놀라게 되었다. 미라벨라의 결혼식이 임박한 건 긴 겨울이 훌쩍 지나고 어느덧 봄의 끝자락에 이르러, 여름이 오는 소리가 들려올 무렵이었다.

“다 됐다.”

미라벨라는 온종일 제 방의 책상에 앉아 어딘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시곗바늘이 5시를 가리키고 나서야 펜을 내려놓은 그녀는 작성한 보고서를 다시 읽어 보았다.

공작저에서 1년간 사용할 리넨과 기름 구입에 관한 예산안은 꽤 상세했다. 기존 거래처와 새로 섭외한 곳을 비교한 표와 최근 몇 년간의 사용량 추이를 나타낸 그래프, 특히 계절에 따른 사용량의 변화를 파악한 부분이 두드러졌다.

“음, 계산은 다 맞는 것 같고……. 내일 세세한 항목만 좀 더 추가해서 레이든 오라버니께 올려 드려야지.”

이제 공식적으로 ‘에펠 공녀’가 된 그녀가 지난 2년간 라이오넬가의 영애로 지내 왔던 사건은 한동안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간 황제가 비밀리에 지시한 일을 수행하느라 공작가에 의탁했던 것이라 공표했으나, 그에 대해 누군가는 의문을 품기도 했다. 그녀가 라이오넬 공작 부인이 된다는 소식에 그럼 혼전 동거를 한 게 아니냐며 수군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제1 우방국인 에펠 공국의 공녀를 깎아내리고, 황실과 공작 가문의 권위에 정면으로 맞설 만큼 대담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문은 금세 사그라들었고 늘 그렇듯 사람들은 타인의 일에 곧 관심을 잃었다.

본인의 의지에 따라 결혼식 전까지도 공작저에서 지내게 된 미라벨라는 여전히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젠 진짜 라이오넬가의 일원으로서 오라버니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가족이 되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니까. 그간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매일같이 노력한 결과, 지금은 주위의 도움을 받긴 해도 공작가의 큰살림을 제법 해낼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아, 이제 시간이 됐네.”

미라벨라는 시곗바늘이 마침내 온종일 기다리던 위치에 도달한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책상 위에 놓인 캘린더는 오늘 날짜에 커다란 붉은색 하트 모양으로 체크되어 있었다. 그만큼 오늘은 그녀가 며칠째 손꼽아 기다려 온 중요한 날이었다.

실은 그래서 일부러 더 일에 몰두한 것도 있었다. 그냥 기다리려니 시간이 더욱 더디게 느껴지고 자꾸 시계만 보게 되어서.

로지나가 밖으로 나서는 그녀를 발견하고 물어 왔다.

“아가씨, 어디 가세요?”

“응, 르시엘 오라버니를 마중 나가려고. 집으로 돌아오시는 날이잖아.”

얼마 전, 르시엘은 과거 반란을 일으켰던 세력의 잔당들이 소요 사태를 일으키는 바람에 국경 근처로 파견을 떠났었다. 결혼을 앞두고 벌어진 일이라 걱정했는데, 다행히 진압이 금방 마무리되어 무사히 수도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달받은 게 며칠 전이었다. 하지만 반란 진압의 결과를 보고하고 부재 기간 중 기사단에 발생한 업무를 처리하느라 귀가가 늦추어진 것이다. 그리 오래 떨어져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가 집에 없으니 무척 그리워서 가장 먼저 마중 나가고 싶었다.

저녁 무렵의 바람도 이젠 그다지 차지 않은 계절이었다. 미라벨라는 금방 올 테니 따라오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저택의 정문을 나와 한적한 길을 따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흑마가 보였다. 그 주인을 닮아서인지 보통의 말들보다 훨씬 더 덩치가 큰 새카만 말은 르시엘의 애마였다.

“벨라!!”

“아, 르시엘 오라버니!”

“날 마중 나온 거야? 영광인데.”

그리웠던 집에 돌아오자마자 처음 본 얼굴이 그녀라서 기쁜 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약간 더 날카로워진 눈매를 한 르시엘이 순식간에 표정을 부드럽게 풀었다. 그는 미라벨라를 번쩍 안아 올려 제 말에 함께 태웠다. 바람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달리던 말이 아까보다 확연히 속도를 늦추었다.

바위처럼 단단한 몸으로 그녀를 단단히 감싸 안은 커다란 기사가, 목덜미 위로 부드럽게 흩날리는 백금발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하, 벨라…… 정말…….”

“너무 보고 싶었어요, 오라버니.”

“아, 내가 먼저 말하려고 했는데.”

선수를 빼앗긴 르시엘이 아쉬운 얼굴을 하자, 미라벨라가 소리 내어 웃으며 그에게 살짝 기대어 왔다.

“누가 먼저 말하면 어때요, 마음은 서로 같은데.”

“아, 그렇지.”

그녀의 말이 왠지 무척 흡족하게 들려서, 그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보고 싶었어, 벨라.”

“저도요…… 읍.”

순간 사랑스러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르시엘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작은 얼굴을 잡아 제 쪽으로 돌린 그가, 새하얀 이마와 복숭앗빛 뺨, 요정처럼 섬세한 입술 위에 무차별적인 키스를 퍼부었다. 그녀의 얼굴을 다 닳게 만들 기세로 쪽쪽거리며 한참 뽀뽀 세례를 하던 르시엘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이제 이렇게 부르면 안 되는 건가?”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오라버니?”

“음, 그러니까 내 말은…….”

그는 약간 어색한 태도로 밀착했던 몸을 떨어뜨렸다.

“……이제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해서.”

“아.”

미라벨라가 고개를 돌려 말 위에서 그를 올려다보자, 눈을 마주친 르시엘이 약간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제국법상 아직 일처다부제를 허용하지 않았기에 그녀는 공식적으로 레이든의 약혼녀였다. 법적으로는 곧 형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

그녀가 자신들에게 고른 애정을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딘가 서운했다. 자신이 그런 것에 신경 쓰는 성격인 줄 몰랐는데, 생각보다 소심했던 모양이다. 이런 관계 자체가 일반적인 게 아니니 어쩔 수 없다 여기면서도, 저도 모르게 씁쓸한 얼굴이 되었다.

“오라버니.”

그의 심경을 눈치챈 미라벨라가 다정히 미소 지으며 눈을 맞추었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도 사소한 한 가지 행동이 마음을 표현하기에 더 효과적일 수 있었다. 가느다란 팔이 뻗어 와 그의 단단한 뺨을 상냥하게 쓰다듬고, 이내 적갈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진 목을 꼭 끌어안았다.

“윽, 벨라! 나 안 씻었는데.”

“상관없어요.”

“……빨리 오려고 황궁에서부터 바로 말을 타고 달려온 거야. 진짜 땀 냄새 많이 나.”

“괜찮아요, 사랑하니까.”

“……!”

“그것까지 좋아요.”

뜻밖의 사랑 고백에 르시엘이 답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미라벨라는 무척 수줍음을 타면서도, 가끔은 너무 솔직해서 그를 당황시켰다. 나가 있는 동안 태양 볕에 그을려 다소 붉었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라 그의 등 위로 지고 있는 저녁노을과도 별 차이가 없을 만큼 확 벌게졌다. 동시에 그는, 이 로맨틱한 상황에 눈치 없이 끼어들며 불끈거리는 제 신체의 반응을 감지하고 얼른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어느새 다가온 작은 손이, 두꺼운 몸을 슬쩍 뒤로 빼려는 르시엘을 꼭 붙잡았다. 당황한 그의 붉은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동자는 봄 하늘이 그대로 담긴 듯 따사로웠다.

“저는 언제까지나, 오라버니들의 미라벨라예요.”

“벨라.”

“르시엘 오라버니, 정말 사랑해요. 제 곁에 늘 함께 있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도.”

그 기꺼운 고백에 답한 건 꽤 한참 만이었다. 르시엘이 상체를 숙이며 단단한 팔로 미라벨라를 꽉 끌어안았다.

“계속 같이 있자.”

“네, 언제나요.”

“사랑해, 벨라, 언제까지나.”

어느덧 복숭앗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하늘 아래를 지나 공작저로 향하던 두 사람은, 저택이 바라다보이는 근처의 높은 언덕에서 잠시 멈춰 섰다. 드디어 집에 돌아온 걸 아는 듯 르시엘의 흑마가 만족스럽게 푸르릉거리는 소리를 냈다. 오늘 밤에는 둘이서만 같이 있자는 약속을 받아 낸 뒤라,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던 그에게 미라벨라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참, 오라버니! 혹시 새 이름은 정하셨어요?”

“이름?”

“네. 개명하기로 하셨다고, 안 계실 때 레이든 오라버니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아, 그거…….”

“그런데 에일레스 오라버니 말로는 엘사나 엘리자베스로 하실 거라던데, 설마 거짓말이죠?”

“하! 형이 그랬다고?”

에일레스, 가만 안 둬…… 르시엘이 식식거렸다.

“역시 그럴 것 같긴 했어요.”

“그런데 벨라, 내 이름 말이야.”

다음 말을 꺼내면서 그는 미세하게 약간 더 얼굴을 붉혔다.

“그냥 안 바꾸기로 했어.”

“엇, 정말요? 왜요?”

그의 마음이 갑자기 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일단 반가운 마음에 미라벨라가 감탄했다. 르시엘은 대답 대신 커다란 손을 들어 사랑스러운 연인이자 여동생의 머리 위를 쓰다듬었다. 실은 네가 그 이름을 좋아해 주니까, 어느 순간 나도 좋아졌다고 말하기가 왠지 쑥스러웠기 때문에.

“벨라, 있지.”

“네?”

“나를 부를 때 말이야.”

“오라버니를 부를 때요?”

“그래, 그럴 때 말이지…….”

그는 여기서 한 템포 뜸을 들였다.

“……엘이라고 불러도 좋아.”

그를 바라보던 미라벨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 채 깜빡거렸다.

“오라버니, 그 애칭 싫어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저는 지금껏 좋아하지 않으시는 줄 알고…….”

“그랬는데, 너는 괜찮아.”

“오라버니만 괜찮으시다면, 저는 너무 좋아요!!”

생긋 웃는 작은 얼굴을 바라보자 르시엘의 마음은 뿌듯하게 차올랐다. 왠지 연인 사이의 특별한 애칭을 만든 것 같아 마음 한편에서 기분 좋은 간질거림이 느껴졌다.

“아, 우리 둘이 있을 때만 말이야.”

그는 빠르게 한마디 덧붙였다.

“형들한테 걸렸다간 앞으로 최소 몇 년은 놀려 댈 게 뻔하거든.”

“네, 꼭 그럴게요.”

미라벨라가 밝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하아, 읍.”

해 질 녘의 시원한 바람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어느새 겹쳐진 서로의 입술은 따스했고, 르시엘은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게 그녀를 파고들었다. 다정한 재회의 키스가 끝난 뒤 그의 품에 안겨 잠시 호흡을 고르던 미라벨라가, 또다시 생각난 게 있는 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라버니! 성 마티아스 보육원에서 감사 편지가 왔던데, 혹시 아세요?”

“아, 그건…… 별거 아니야.”

시작은 몇 달 전이었다. 그는 가끔 집사를 통해 제 방에 가득한 인형을 보육원 아이들에게 보내 주곤 했는데, 그날따라 갑자기 훈련이 취소되어 시간이 생기는 바람에 직접 한번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처음엔 그냥 후원금만 보낼 걸 괜히 가는 건가 싶었지만, 예상외로 아이들은 그를 무서워하지 않았고 ‘힘센 기사 아저씨’의 방문을 열렬히 환영했다. 결국 그날 내내 실컷 목말을 태워 놀아 준 뒤 다음 주에는 바비큐를 구워 주었고, 그다음 주에는 함께 공을 차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아이들이 그가 오기만을 목을 빼고 기다리게 된 거였다.

“정말 대단하세요! 오라버니는 역시 정말 좋은 분이세요.”

미라벨라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다음엔 저도 함께 가요, 오라버니.”

“그래.”

딱히 칭찬 들으려 한 일도 아니지만, 그녀에게 대단하다는 말을 듣다니 괜히 뿌듯했다. 100점 맞은 시험지를 받아 든 아이처럼 그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주위를 슬쩍 둘러본 그가 다시 한번 입술을 겹쳐 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더 열정적으로. 르시엘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이고 미라벨라의 가느다란 허리가 낭창하게 뒤로 젖혀졌다.

“벨라, 사실 난 그다지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한참 뒤,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진 뒤에도 그들은 여전히 숨결이 닿는 거리에 있었다. 혹시라도 말에서 떨어질까 봐 겁을 내는 미라벨라를 제 쪽으로 꽉 당겨 안으며 커다란 손이 한 줌도 안 될 허리를 단단히 받쳤다.

“널 위해서라면 평생토록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아.”

“오라버니는 제게 늘 좋은 사람이에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알고 있었는걸요.”

“벨라…….”

사랑해.

서로의 뜨거운 입술이 또다시 맞물리는 순간.

고귀한 성녀에게 바치는 기사의 맹세처럼, 느릿하고 진중한 입맞춤은 아주 오랫동안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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