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I. 잊을 수 없는 밤
“제국의 빛나는 태양을 뵙습니다, 신의 축복과 광영이 늘 함께하시기를.”
“인사는 되었다. 일어나라.”
데뷔탕트 무도회 이후 그리 오랜 시일이 지나지 않았지만 황제의 얼굴은 눈에 띄게 수척해 보였다. 최근 황태자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걱정이 크기 때문이라 시녀장이 미리 귀띔해 주었다.
“라이오넬 공작이 말하길, 네가 깊은 병에 들었다던데.”
르페르트 제국의 황제, 카슈타르는 즉위 전 젊은 시절부터 전장을 주름잡으며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었다. 지금도 안색은 다소 좋지 않았으나, 일국의 군주이자 지금의 제국을 키워 낸 수장다운 눈빛만은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물론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오늘 보니 아주 건강해 보이는구나.”
레이든이 국혼을 파기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을 때부터 황제는 어느 정도 그의 마음을 의심하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능숙하게 숨겼다고 여길지 모르나, 훨씬 더 긴 인생을 살아온 선진의 입장에서는 때때로 보지 않으려 해도 포착되는 게 있는 법. 특히 그 대상이 어린 시절부터 애정을 가지고 지켜본 유능한 처조카인 경우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 눈빛에 스쳐 가는 찰나의 초조함, 답지 않은 망설임, 제가 가진 모든 것을 걸려 드는 간절함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게다가 자신 또한, 그보다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이미 절실하게 경험한 마음인 것을.
“교육을 시키라 하였더니…….”
황제가 마뜩잖은 기색으로 중얼거린 문장에는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공작님께서는 저를 걱정하셔서 그런 말을 하신 것뿐이니 심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제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습니다, 폐하.”
“그래, 듣던 중 다행이로구나.”
가짜 공녀가 일국의 공작보다 낫군, 그의 눈빛이 그리 말하는 듯 보였다. 그때, 황제의 수석 비서관인 포렌트 백작이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귀띔했다.
“황제 폐하, 새로이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에펠 공국의 마력석에서 추출한 성분이 혈액과 관련된 여러 종류의 질병에 유의미한 효과를 보였다 합니다. 어쩌면 황태자 전하께도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음, 듣던 중 반가운 소리로군. 하나 내 알기로는 마력석을 이용해 신약을 만들 때 필요한 성분을 추출하고 치유 마나와 결합하여 부작용이 없도록 정제하는 과정이 꽤 까다롭다고 알고 있는데.”
“그렇습니다. 높은 실력을 가진 치유 마도사가 아니면 어려운 작업이기도 하고요. 특히 신약 개발까지는 시일이 오래 걸리니 황태자 전하의 상태로 보아 일을 서두르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대륙 내에서 국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생산품인 마력석은 원칙적으로 국외 반출이 불가했고 수출조차 하지 않는 품목이었다. 간혹 국가 간 협상이 이루어질 때나 국혼의 예물로 일정량을 주고받는 게 전부이니, 역시 에펠 공국과의 혼약을 서두르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황제가 다시 미라벨라를 보았다.
“그럼 라이오넬 공녀, 일은 언제쯤 진행할 수 있나?”
“저는 빠를수록 좋습니다.”
“빠를수록 좋다? 당장 오늘 밤이라도 말인가?”
“……네.”
“좋다. 에펠 후계자가 마침 이곳에 와 있으니 비공식적으로 오늘 밤에 자리를 마련하지. 내일 아침,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공녀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비밀에 부쳐라.”
바로 그때, 황태자 궁의 시종 한 사람이 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뭐라? 대체 언제 말이냐!!”
포렌트 백작을 위시한 다른 보좌관들에게 뒷일을 부탁한 황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급히 알현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궁의 수석 시녀장이 몇 사람의 시녀들을 이끌고 미라벨라에게로 다가왔다.
“공녀님, 지금부터는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이쪽으로…….”
미라벨라는 그들을 따라 배정받은 별궁으로 향했다. 꽁꽁 얼어붙은 황궁 내의 큰 호수를 지나칠 무렵, 바로 옆에 있던 시녀가 작은 소리로 귀띔해 주었다.
“저분이 바로 에펠 공국의 후계자세요.”
차가운 호수 건너편에는 위아래로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거리가 꽤 먼 데다 마침 그녀를 등지고 서 있어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던 탓에,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먼발치에서 보아도 무척 훤칠한 체격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레이든이나 에일레스보다는 작았지만, 키도 꽤 큰 편이었다.
‘저 사람과, 오늘 밤을 함께…….’
함께 침실로 든 여자가 죽거나 미쳐서 나왔다는 소문이 도는 무서운 남자. 그런 사람과 함께 밤을 보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생각 외로 두렵고 떨린다거나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잠시 후, 도착한 곳은 타국의 귀빈이 머무르는 황궁 남쪽의 별궁이었다. 간단한 목욕을 도와준 시녀들이 그녀를 아늑한 침실로 안내해 주었다.
“공녀님, 저녁때까지 이곳에서 낮잠을 주무세요. 오늘 밤은 주무시기 어려울 테니까요…….”
“……고마워요.”
사실 그다지 잠이 오진 않았지만 시녀의 말대로 미리 쉬어 두는 게 좋을 것 같긴 했다. 그녀가 잠을 자는지 확인하려는 듯, 황제궁의 시녀장이 나가지 않고 방 한쪽에 대기하고 서 있기도 했고. 아니면, 혹시 마음이 바뀌어 도망을 치기라도 할까 봐 지키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이제 돌이킬 순 없었다. 미라벨라는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낯선 침대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내일 아침, 에펠 공국의 후계와 무사히 밤을 보내고 침실을 나설 때까지는 이 일이 비밀에 부쳐질 것이다. 오라버니들은 그녀가 지금 펠튼 백작가에 있는 걸로 알고 있으니 구하러 온다거나 하는 일도 결코 없을 테고……. 레이첼의 출산용품을 사러 나가는 하녀 중 하나로 위장하여 나왔고 분명 들킨 것 같진 않았다. 물론 내일 그녀가 돌아가지 않으면 사실을 알게 되겠지만, 그때는 이미 모든 게 끝난 뒤일 테니까.
아까 호숫가에서 본 남자가 그녀와의 밤을 흡족해한다면, 내일 정오에 이 일이 공식화되어 정식으로 국혼이 승인되었음이 발표될 것이라 했다. 물론 그건 무사한 모습으로 침실에서 나갈 경우겠지만…… 어쨌든 시도만으로도 라이오넬 공작가가 할 일은 다 했다고 볼 수 있겠지.
‘어젯밤, 오라버니가 하시려던 말을 직접 들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어차피 영원히 듣지 못할 말에 대한 미련을 깨끗이 접고자 노력하며 미라벨라는 푹신하고 낯선 침구에 몸을 깊이 묻었다. 얼마 후, 그녀가 잠든 것을 확인한 황궁의 시녀들이 침실을 나가고, 밖에서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 * *
알현실을 나선 황제는 빠른 걸음으로 황태자 궁을 향해 걸었다. 대제국의 황제라 해도 제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여느 부모와 다르지 않은 법. 게다가 녹스 황태자는 그의 유일한 핏줄이었다. 마음이 급하다 보니 나중에는 황제로서의 체통마저 무시하고 거의 뛰다시피 걷게 되었다.
“황태자가 언제부터 이상 증세를 보였느냐?”
“오늘 아침에만 해도 머리가 좀 어지럽다 하실 뿐 괜찮으셨는데, 속이 답답하다며 점심도 드시지 못하시더니 갑자기…….”
“그래, 황궁의는 뭐라 하더냐?”
“오, 오늘 밤이, 고비라고…….”
“그게 무슨 뜻이지? 설마 지금 황태자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냐?”
“그, 그것이…….”
가는 길에 전해 들은 소식은 더욱 좋지 않았다. 황제는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황태자 궁 안으로 급히 발을 들였다.
“녹스, 이 불쌍한 것!”
하지만 그가 황태자의 침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그 앞에는 뜻밖의 사람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황후?”
막 문을 들어서려던 그녀가 돌아보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급하게 달려온 기색이 역력한, 흐트러진 머리 장식과 가쁜 숨소리, 평소의 우아한 모습과는 대조적인 상기된 얼굴……. 공식적인 행사 외에 그녀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대하는 건 몇 년 만이었다.
르페르트의 황제, 카슈타르가 눈을 크게 뜨고 상대를 불렀다.
“……넬리.”
* * *
과연 잠이 들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미라벨라는 꿈조차 꾸지 않고 두세 시간을 내리 푹 잤다. 시녀장이 조심스럽게 부르는 소리에 깨어나 보니 이미 창밖에는 옅은 노을이 내려 하늘을 곱게 물들이고 있었다. 중간에 깨지 않도록 수면 향을 피운 모양인지 달짝지근하고 나른한 향이 미미하게 코끝에 맴돌았다.
“저, 라이오넬 공녀님…… 이제 준비하시고 출발하셔야 합니다.”
“네, 알겠어요.”
“그럼 목욕과 단장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침실 문이 열리고 몇 사람이 더운물이 가득 담긴 큰 목욕통을 들여왔다. 그녀가 깨어나기 전부터 미리 준비해 놓은 듯했다. 그 목적이 달라서일까, 몸을 씻겨 주는 시녀들은 낮과 같은 사람들이었으나 아까보다도 시간이 몇 배나 오래 걸렸다. 이후의 일도 정신없이 흘러갔다. 그들이 이끄는 대로 화장을 하고 드레스를 갈아입으며 단장을 마치고 나니 어느덧 늦은 저녁 무렵이 되었다. 밖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는 미라벨라가 올라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도착한 곳은 황궁에서 멀지 않은 장소였다. 오래된 건물을 여러 번 보수하고 증축한 듯 돌로 된 외벽의 곳곳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지만, 그 웅장함과 고풍스러움만큼은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고저택. 적어도 황실의 가까운 친인척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의 집인 게 틀림없었다.
“공녀님, 이곳은 선황 폐하의 동생이신 에르고 대공의 저택입니다. 주로 영지에 내려가 계시면서 간혹 수도에 방문하실 때 지내시는 집이지요.”
“아, 네…….”
“내일 오전까진 이 일이 새어 나가서는 안 되기에, 부득이하게 황궁이 아닌 이곳에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철저히 준비시켰으니 불편함은 없으실 겁니다.”
에르고 대공은 현 황제의 숙부로 황위에 오를 때도 적극 지지하여 관계가 무척 좋다고 들었다. 이곳까지 그녀를 에스코트해 준 포렌트 백작이 설명을 마친 뒤, 이만 안으로 들어가자는 듯 손을 내밀었다. 미라벨라는 그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오라버니들과 함께 갔던 자신의 데뷔탕트 무도회가 떠올랐다. 극히 얼마 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아주 오래전의 일처럼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열린 비공식적인 연회라서 사람이 많진 않습니다. 하지만 공식화되기 전까지 알려져선 안 되는 일인 만큼 그편이 공녀님께도 더 나으실 테고요.”
“그렇군요.”
짧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내부가 무척 화려하게 꾸며진 파티장이 보였다. 하지만 포렌트 백작의 말대로 그 안에는 어딘가 썰렁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입장하시기 전에 공녀님께서도 이 가면을 쓰시지요.”
그가 한쪽 옆에 하얀 깃털이 달린 가면을 건네주었다. 이미 데뷔탕트를 치른 그녀의 얼굴을 누군가 알아볼 것을 고려하여 가면무도회로 준비시켰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파티장으로 들어가 모두 각자 다른 모양의 가면을 쓰고 있는 참석자들을 둘러보던 포렌트 백작이 은밀히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기, 저쪽에 계신 분이 에펠 공국의 후계자입니다. 공녀님의 인상착의도 미리 귀띔해 두었으니 알고 있을 겁니다.”
마침 악사들이 본격적인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착 가라앉은 그녀의 마음과는 상반되는 경쾌한 왈츠가 울려 퍼졌다. 한쪽에서 홀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던 에펠 공자와 눈이 마주친 건, 미라벨라가 포렌트 백작과 막 한 곡을 추고 플로어 바깥으로 나왔을 때였다.
“그럼, 분위기도 적당히 살아난 듯 보이니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만약 제 도움이 필요하실 경우에는 저 끝의 주황색 모자를 쓴 시종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이곳에서 좀 더 즐기시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도 나누시다가, 때가 되면 적당히…… 아시겠지요?”
포렌트 백작이 눈치 좋게 빠져 주자, 검은 새 부리 가면을 쓴 에펠 공국의 후계자가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미라벨라를 향해 능숙하게 무릎을 굽히며 한 손을 내밀었다.
“레이디,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부디 함께할 기회를 주신다면 큰 기쁨일 것입니다.”
‘……어떻게 된 거지? 우리말을 잘하잖아.’
에펠 공국은 르페르트 제국과 사용하는 공용어가 달랐기에 막연히 대화가 잘 통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외국어를 교육받았을 수도 있고, 그녀와의 국혼 건이 논의되기 시작한 게 2년 전이었으니 그사이 배웠을지도 몰랐다. 그렇다 해도 어릴 때부터 배운 것 같은 유려하고 익숙한 발음은 이질적으로 느껴졌지만, 미라벨라는 의아한 기색을 감추고 생긋 미소 지었다.
“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제 보좌관이 오늘 밤 이곳에 오면 미인이 있을 거라더니, 일찍 잠자리에 들지 않은 보람이 있군요.”
“……오늘 밤, 더 늦게까지 주무시지 않는다면 더욱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이런 어설픈 유혹이 과연 통할까 의문이었으나, 의외로 에펠 공국의 후계자는 가면 너머로도 느껴질 만큼 눈매를 휘며 웃었다.
“그렇군요, 몹시 기대가 됩니다.”
두 사람은 춤을 추었다. 그와 함께 두세 곡을 연달아 추고 난 뒤 물러 나오자, 포렌트 백작의 수하인 주황색 모자의 시종이 기다렸다는 듯 은쟁반을 받쳐 들고 다가왔다. 위에는 두 잔의 샴페인이 올려져 있었다.
“마침 목이 말랐는데 잘 됐군요. 영애께서도 한잔하시겠습니까?”
“고마워요.”
그가 건네준 잔은 이런 한밤의 기습 파티에 나오는 술답게,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 뒤로 독한 기운이 가려져 있었다. 그저 가벼운 샴페인처럼 보였지만 의외로 도수가 꽤 높은지 단 한 잔을 마셨을 뿐인데도 벌써 알싸한 기운이 혈관을 통해 흘렀다. 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포렌트 백작이 그녀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레이디의 눈동자에는 따사로운 봄 하늘이 담겨 있군요. 밖의 날씨가 꽤 매섭던데, 그대와 함께 있으니 조금의 추위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파티장에 흐르던 감미로운 음악은 어느덧 서서히 느려지고 있었다. 천천히 잔을 기울이던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검은 새 부리 가면에 가려져 있어 얼굴 대부분이 보이지 않았지만, 밤하늘에 펼쳐진 어두운 장막처럼 새까만 눈동자가 미라벨라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저 눈,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보았더라?’
문득 떠오른 생각에 열심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으나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미라벨라가 아는 남성 귀족은 그리 많지 않았다. 주된 사교 활동은 또래 영애들과의 티 모임이나 봉사 등이 고작이었고, 외출을 할 때는 늘 오라버니들과 함께였으며 데뷔탕트를 치른 뒤 시일이 짧아 큰 파티에 참석한 적도 드물었으니까.
‘검은색 눈은 흔치 않지만, 또 엄청나게 드문 것도 아니니까…….’
“영애, 가면에 가려져 아름다운 벽안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군요. 제가 상상하는 모습과 같을지 몹시 궁금한데.”
“방으로 올라가 자세히 확인해 보시겠어요?”
“네, 그 외에 다른 일도 궁금하기도 하고…….”
그가 말하는 다른 일이란, 잠자리가 잘 맞는지 궁금하다는 뜻이겠지.
“어쨌든, 레이디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군요.”
두 사람은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 연회가 계속될 아래층에서 연주되는 음악 소리가 점차 멀어지고 어느덧 주위가 조용해졌다. 계단의 끝에 이르자 복도에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넓은 응접실과 욕실, 그리고 호화로운 침대가 놓인 침실이 있는 익숙한 구조의 휴게실. 시녀들이 문을 닫고 나가자 비로소 몸이 떨려 왔다.
‘이제 정말 돌이킬 수 없어.’
더군다나 이곳은 황궁도 아니니 미라벨라가 여기 있다는 건 누구도 알 수 없다. 그건 오늘 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들 이 방에는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지금부터, 오라버니들이 아닌 다른 남자와 그 일을…….’
“레이디에게서 무척 좋은 향기가 나는군요. 왠지, 익숙하고 그리운 향기가…….”
“……아, 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빨리 눈앞의 남자를 유혹하는 것인데, 막상 이런 상황이 되자 그간 익힌 화술이나 예법도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도리어 그와 침대로 갈 시간을 어떻게든 늦추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이었다. 문득 자신의 옷을 내려다본 미라벨라는 기분이 더욱 착잡해졌다. 실크 드레스는 섬세한 레이스로 꼼꼼히 갈무리된 것처럼 보였으나, 정작 앞가슴의 리본 하나만 풀면 이어진 매듭도 자동으로 풀어지며 전부 벗겨지는 구조였다. 이런 걸 입고 여기까지 온 주제에, 이제 와 도망치고 싶다는 게 우스울 만큼 의도가 아주 명확했다.
“음, 혹시 한잔 더 하시겠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는 미라벨라가 어색했는지, 테이블 앞의 소파에 먼저 앉으며 그가 권했다. 본격적인 몸의 대화를 나누기 전,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만들어 주기 위함일까. 낮은 테이블 위에는 향이 좋은 술과 크리스털 잔, 그리고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잘 손질된 과일이 담긴 은접시가 놓여 있었다.
“제가…… 따라 드릴게요.”
“그럼, 사양하지 않지요.”
유리병을 들어 그에게 술을 따라 주려는데 자꾸만 손이 덜덜 떨렸다. 결국 손이 미끄러지고 만 미라벨라는, 다행히 병을 떨어뜨리진 않았으나 안에 든 내용물을 그의 상의에 왈칵 쏟고 말았다. 달콤하고 알싸한 술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아앗!”
“읏!”
“저, 정말 죄송합니다!!”
“아, 괜찮습니다, 공녀.”
당황한 미라벨라를 향해 그가 가면 쓴 얼굴로 웃어 보였다. 하지만 젖어서 축축해진 옷을 계속 입고 있을 수는 없었던지, 그녀로부터 뒤돌아서서 제 상의를 훌렁 벗었다.
‘어차피 벗을 거라 괜찮다는 말이었나? 하긴, 그 일을 하려면 옷을 벗어야 하니까…….’
다시 울적한 심정이 된 미라벨라를 향해 상의를 완전히 탈의한 에펠 공국의 후계자가 돌아섰다. 그는 다소 마른 편이었으나 꾸준히 수련한 듯 적당한 크기의 근육이 전체적으로 분포되어 꽤 괜찮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맨살을 보이는 게 민망했는지 가면 옆으로 드러난 귀와 뺨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거의 매일 상대를 계속 바꿔 가며 문란한 생활을 즐긴다는 사람 같진 않잖아.’
물론 겉모습만으로 누군가를 판단하는 건 대단히 위험하다는 사실은 알았다. 하지만 함께 밤을 보내는 여자를 다치게 하거나 심지어 죽게 만들 정도로 위험한 취향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미라벨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건……?’
그녀는 문득 에펠 공국 후계자의 어깨 부위에 있는 커다란 흉터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분명, 어디선가 저 상처를 본 적이 있는데…….
“……레이디.”
하지만 그 순간, 그가 몸을 숙이며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더 생각할 여유는 없었다.
“라이오넬 공녀라고 하셨습니까?”
“네, 맞아요.”
혹시 가짜 공녀라는 걸 들켰나 싶어 잠깐 가슴을 졸였으나 그렇지는 않은 듯했다. 상체를 더 바짝 붙인 그가 미라벨라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마치 한쪽 뺨을 감싸 쥐고 키스하려는 것처럼. 하나, 둘. 속으로 미처 셋까지 세기도 전에 그가 다가들었고, 마침내 하얀 깃털을 단 가면이 그의 손에 잡혀 벗겨지고 만 순간.
“……역시,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군요.”
“아…….”
“공녀, 제 얼굴을 똑바로 보세요.”
미라벨라는 그만 눈을 꼭 감아 버렸다. 바로 앞에서 그가 자신의 가면도 벗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이렇게 밝은 곳에서 도저히, 도저히 다른 사람과 그런 일을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입 맞출 때 얼굴이라도 보지 않는다면 차라리 오라버니들이라고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까…….
“불을, 불을 좀 꺼 주세요!”
“아니요, 일단 눈을 뜨고 저를 좀 봐 주시겠습니까?”
“싫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제발…….”
“그래도 제 얼굴을 한 번만 보시면…….”
눈을 뜨고 자신을 보라는 그와 싫다는 미라벨라 사이에 한동안 실랑이가 이어졌다. 그녀가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다시 한번 부탁했을 때였다.
“하아, 누님.”
“……네?”
뜻밖의 호칭에 놀란 미라벨라는 얼결에 눈을 떴다. 잠시 후, 눈앞에 있는 사람을 알아본 그녀의 하늘색 눈이 믿기지 않는 듯 깜빡이며 동그랗게 커졌다.
“너는…… 서, 설마, 디온?”
“네, 접니다, 미라벨라 누님!”
“어떻게, 네가 여기에…….”
“제가 반드시 다시 만날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너는 분명…… 읏!!”
순간, 에펠 공국의 후계자가 미라벨라를 숨이 막힐 정도로 꽉 끌어안았다.
“누님, 정말 보고 싶었어요!”
에펠 공국 후계자의 훤칠한 얼굴 위로, 오래전 친동생처럼 따르던 어린아이의 얼굴이 겹쳐졌다.
* * *
세찬 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해의 겨울날.
환한 불빛이 밝혀진 실내에서는 오늘이 무슨 날인지를 알려 주는 캐럴 음악과 함께 맛있는 음식 냄새, 활기찬 대화와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회칠을 한 외벽에 붉은 지붕을 얹은 단층 건물은 성 루베이도 학원에서 각종 행사가 열릴 때 사용하는 대강당이었다.
“으아앙! 엄마아, 엄마…….”
“디온, 울지 마. 응?”
벽 하나를 두고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입구와 멀리 떨어진 담 아래에는, 초라한 차림을 한 조그만 어린아이 둘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을 조금도 막아 주지 못할 게 분명한,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낡고 커다란 옷. 조그마한 손과 발, 코끝이 죄다 얼어붙어 새빨개진 두 아이는 서로 딱 붙어 앉아 추위를 견디는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더 작은 남자아이 쪽은 울어서 얼굴이 엉망이었다. 어린 미라벨라는 실은 자신도 울고 싶은 걸 꾹 참으며 동생을 달래 주었다.
“엄마 금방 오실 거야, 디온. 누나 엄마는 돌아가셔서 이제 못 오시지만…….”
“어언제! 으앙.”
“……열 밤, 아니, 스무 밤만 자면.”
“누나아, 스무 밤 어떻게 세? 나 손가락 열 개밖에 없어.”
“으응, 그건 말이지…….”
‘귀족들의 고아원’이라는 멸칭처럼, 성 루베이도 학원의 아이들은 모두 귀족가의 핏줄이었다. 가정에서의 양육이 곤란해 이곳에 맡겨졌다 해도 최소 양쪽 부모 중 한 사람, 또는 조부모 중 누군가는 일말의 양심이 있어 아이에게 신경을 쓰기 마련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없었기에 수업료는 꼬박꼬박 납부되었고, 크리스마스나 생일에는 기부금이나 형식적인 선물이라도 보내왔다. 미라벨라나 디온처럼 그 누구도 찾지 않는 건 지극히 드문 경우였다.
“저리 가! 너네는 들어오지 마.”
“왜, 왜?! 아까 선생님이 강당으로 다 모이라고 말씀하셨단 말이야! 오늘 저녁에, 크리스마스 파티 할 거라고……. 그치, 누나?”
“야!! 그게 다 무슨 돈으로 차려진 줄이나 알아? 음식은 우리 아버지가, 트리는 로건의 할아버지가 보내왔단 말이야. 수업료도 안 내는 거지들 주제에. 그리고 이따가 선물 증정식을 할 텐데, 어차피 너희 선물은 없을 게 뻔하잖아?”
디온의 손을 잡고 강당 안으로 막 들어서려는 미라벨라를, 자일스가 으스대며 막아섰다. 사생아인 건 마찬가지였으나 그의 어머니는 가장 사랑받는 정부였고, 늙은 글렌 후작은 막내아들에게 무척 관대했다. 하지만 아이의 인성 교육까지 신경을 쓰기란 매우 귀찮았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들로 손쉽게 애정을 대신했다. 그런 부모는 자일스의 아비 외에도 숱하게 많았고, 선생들마저 교육에 크게 열의를 갖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부분은 자연히 아이들 사이에 하나의 권력이 되었다.
“누나아, 우리는 진짜 선물 없어?”
나 나쁜 어린이 아닌데…… 누나 뒤에 숨어 있던 디온이 손가락을 빨며 눈치를 보았다. 조그마한 손으로 미라벨라의 치맛자락을 꼭 쥐고 있는 아이는 올 초에 성 루베이도 학원에 와 이곳에서의 첫 크리스마스를 맞는 거였다.
기세등등한 자일스의 등 뒤로 보이는, 대강당의 커다란 트리 아래 쌓여 있는 수많은 선물들. 잠시 후 교사 중 한 사람이 산타 복장을 하고 나눠 주게 될 그 선물들은 실은 전부 학부모들이 보낸 것이었다. 그러니 1년 내내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했다 한들, 미라벨라나 디온의 이름이 불릴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미라벨라는 이미 여러 번 그 같은 경험을 했고 진짜 산타가 없다는 사실도 알았지만, 자신보다 어린 디온이 받게 될 상처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선물 같은 소리 하네. 꺼져! 거지 같은 게!”
“으아앙! 아파! 미라벨라 누나……!!”
“……디온!! 하지 마, 자일스! 무슨 짓이야?”
결국 자일스의 발에 호되게 걷어차인 디온이 넘어져 엉엉 울었다. 미라벨라는 온몸으로 막아서며 밖으로 데리고 나왔고, 아직까지 울음을 그치지 못한 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흑, 흐읍! 누나, 내가 자꾸 울어서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 안 주는 거야?”
“……아니야, 올겨울은 눈이 많이 와서 썰매가 못 가는 곳도 있거든. 그런 곳은 멀리 돌아가야 해서 산타 할아버지가 너무 바쁘시기 때문에 착한 아이라도 선물을 다 챙길 수가 없어. 대신 이번엔 누나가 선물 줄게, 자.”
“우와!!”
미라벨라가 꺼낸 건 식당에서 아주 가끔 후식으로 나오는 초콜릿 캔디였다. 그녀도 아직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그런 간식을 무척 좋아했지만, 디온을 위해 먹지 않고 꼬박꼬박 모아 두었던 것이다. 캔디의 양 끝부분을 서툴게 꿰매어 붙여 목걸이로 만드느라 작은 손은 몇 번이나 바늘에 찔려 상처를 입었다. 사탕 목걸이를 목에 걸고 좋아하면서도 디온은 약간 시무룩한 기색이었다.
“그치만, 그럼 누나 선물은 없잖아.”
“누나한텐 네가 있잖아, 디온. 그러니까 몇 년은 선물을 받지 않아도 괜찮아.”
“누나아……!”
디온을 만난 건 새해가 밝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기숙사 사감의 명에 따라 본관으로 물을 뜨러 가던 길. 늦은 밤이라 텅 빈 교정에는 아무도 없었고, 바닥에는 새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은 여린 살을 에는 듯 추웠으며 컴컴한 어둠도 무서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미라벨라가 커다란 물통을 들고 낑낑대며 돌아오고 있는데, 근처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흑, 흐윽, 엄마! 엄마…….>
미라벨라보다도 두세 살은 어려 보이는 아이 하나가 남자 기숙사 건물의 뒷담 아래에서 쪼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꽁꽁 언 맨발에, 겉옷조차 없이 얇은 내의 한 장만 걸친 채로. 아이는 며칠 전 처음 이곳에 맡겨진 디온이었다.
자일스 패거리가 텃세를 부리며 때리고 울려 기숙사 바깥으로 쫓아내고는 그 사실조차 잊고 태평하게 잠들어 버린 것이었다. 남자 기숙사의 사감인 필립 역시 대충 점호를 한 뒤 제 방에 틀어박혀 술이나 마시고 있었기에 아이는 꼼짝없이 잠긴 문 앞에서 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미라벨라가 발견하지 못했다면, 디온은 그 추운 겨울밤에 어떻게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디온은 자신을 구해 준 미라벨라를 친누나처럼 따랐고, 외로웠던 두 아이는 서로를 의지하며 조금씩 자라났다. 그런 그가 갑자기 사라진 건, 그로부터 2년 뒤의 어느 날이었다.
“……디온?”
그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깨끗하게 치워진 클래스의 책상과 기숙사의 방. 여러 번 찾아갔지만 디온의 담임 교사로부터 그런 학생은 원래 없었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읽고 나서 반드시 불태우렴. 그리고 누구에게도 그 애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마. 네가 정말 디온을 위한다면 그게 좋을 거란다.”
계속해서 매달리는 그녀에게 선생이 마지못해 전해 준 편지.
[누님, 나중에 꼭 다시 만나요.]
편지라고 하기에도 뭐한 작은 쪽지는 급하게 흘려 쓴 흔적이 역력했다.
* * *
“실은 어머니의 외가가 르페르트 제국이었거든요.”
“아, 그래서…….”
그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은 미라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거 에펠 공국에서도 치열한 후계 싸움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과정에서 디온의 아버지가 사망했고, 어머니는 당분간 아이를 안전한 곳에 숨겨 두기 위해 가족이 있는 르페르트 제국에 왔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에 불의의 선박 침몰 사고로 목숨을 잃어 디온은 모두에게 잊힌 아이가 된 것이었다.
“다행히 조부께서 제가 있는 곳을 찾아내어 데려가셨죠. 원래 뒤를 잇도록 되어 있던 사촌 형이 각종 사고를 치는 바람에 제가 후계자가 되었고요.”
같이 밤을 보낸 여인을 해쳤다는 건 그의 사촌 형이 저지른 일인 모양이었다. 디온이 감격한 얼굴로 미라벨라를 바라보았다.
“……피나는 노력 끝에 후계로 확정되고 난 뒤 은밀히 찾아갔지만, 이미 누님은 성 루베이도 학원에 안 계셨어요. 사람을 풀어도 행방을 찾을 수 없어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죠. 그러다가 르페르트 제국에서 보내온 초상화를 보고 직감했고요. 아,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모든 사실을 다 밝힐 수는 없었지만, 미라벨라는 그간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어쨌든 이렇게 잘 자라 주다니, 정말 잘 됐다, 디온! 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종종 널 떠올렸거든. 선생님이 말씀하신 게 마음에 걸려 더 찾을 수 없었고 가족에게로 돌아갔다고 하니 잘 지낼 거라 생각하긴 했지만, 그래도…….”
“……저는 항상이요, 누님.”
“응?”
“저는 지금껏, 한시도 누님을 잊은 적이 없거든요. 빨리 안정적인 자리까지 도달하여 다시 만나겠다는 생각에 힘들었던 후계자 교육도 견뎌 낼 수 있었어요.”
“……그랬구나.”
검은 암석 같은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불빛에 반사되어 반지르르한 윤기가 흘렀다. 어린 시절 미라벨라보다 한참 작았던 키는 이제 훌쩍 더 커져 있었고, 마르고 작았던 아이는 간곳없이 드러난 어깨와 등이 훤칠했다. 다시 만난 것도, 이렇게 잘 자란 모습을 본 것도 무척 기뻤으나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걱정이 솟아올랐다.
‘디온이 에펠 공국의 후계자였다니……. 그럼 국혼은 할 수 없을 테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미라벨라는 문득 그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저기 디온,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런 부탁은 미안하지만, 혹시, 그…… 나를 직접 보고 나니 마음에 안 든다고 말해 줄 수 있어? 실은 이 국혼이 파기되면 우리 가문의 입장이 무척 곤란해지거든. 하지만 네가 먼저 그렇게 말해 주면, 어쨌든 최대한 노력은 다한 거니까 나 혼자만 책임지면 될 것 같아서…….”
“무슨 말씀이십니까, 누님.”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듯, 그가 미라벨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까만 눈이 미묘하게 빛을 냈다. 검은 암석처럼 아름답기도 하고, 왠지 아슬아슬하게 보이기도 했다.
“마음에 안 들다니요.”
“……읏, 디온?”
상의를 벗은 그가 훅 가까이 다가온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뒤로 몸을 물렸다.
턱.
작은 몸이 넘어지지 않도록 잡아 주며, 디온, 아니, 에펠 공국의 후계자가 어딘가 위험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이 결혼, 하고 싶은데요.”
* * *
미라벨라가 에르고 대공의 사저를 나와 황궁으로 돌아온 건 그로부터 얼마 후, 막 동이 트기 시작한 새벽녘이었다. 그녀의 곁에는 디온도 함께였다.
“수고하셨습니다, 공녀.”
“포렌트 백작님, 지금 황제 폐하를 알현할 수 있을까요?”
“예, 말씀을 드렸으니 곧 오실 겁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지금 막 깨어나셨다는군요!”
미리 대기하고 있던 포렌트 백작이 그녀를 맞아 주었다.
“안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하지만 그의 안내에 따라 들어선 알현실에는 먼저 도착해 있는 사람이 있었다.
“미라벨라! 너, 대체, 무슨 일을…….”
얼마나 급하게 온 걸까. 그녀를 보자마자 다가오는 레이든의 얼굴은 평소의 침착함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에일레스와 르시엘, 다른 두 오라버니들 역시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서성이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얼굴만 봐도 지난밤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벨!! 세상에, 어디 다친 곳은 없니?”
“괜찮아, 벨라? 하, 내가 가지 말고 곁에 있었어야 했는데!”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낯으로, 그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튕기듯 곁으로 다가섰다. 르시엘의 붉은 눈은 해일로 초토화된 바다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에일레스의 얼굴은 참담했다. 그는 이클립스 기간에 마나를 사용한 대가로 얻은 내상이 아직 회복되지 않아 다소 창백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미안해, 네게 호위를 붙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오라버니들은 결국 미라벨라가 잘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녀가 펠튼 백작가를 떠나 제 발로 황궁에 간 것을 알고 어찌나 소스라치게 놀랐던지. 뒤늦게 자신들의 여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황태자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황제를 알현할 수 없었고, 미라벨라의 행방은 비밀에 부쳐져 같이 떠났던 포렌트 백작 외에는 모르는 사항이었기 때문에.
“미라벨라, 황제 폐하께는 내가 알아서 말씀드리겠다. 넌 아무것도 신경 쓸 것 없어. 지난밤에 무슨 일이 있었든 에펠 공국과의 국혼 따위는 잊어버리도록. 나는 앞으로 널 네가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모습으로 살게 할 테니까.”
“저,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레이든이 굳은 얼굴로 말하고 있을 때였다. 뒤에서 듣고 있던 디온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형님?”
본능적인 경계의 눈빛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이 새벽에 미라벨라와 함께 나타난 남자. 그는 분명, 그녀와 어젯밤 함께 있었을 에펠 공국의 후계자일 것이다. 거의 살기마저 느껴지는 눈빛에 멈칫하며 물러선 디온이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실은 드릴 말씀이…….”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그의 말이 막 이어지려던 찰나, 밖에서 포렌트 백작의 외침이 들려왔다. 곧 옷을 갈아입고 매무새를 정돈한 황제가 알현실로 들어섰다.
“다들 모여 있었군.”
“제국의 빛나는 태양을 뵙습니다.”
쓰러진 황태자의 곁에서 밤을 지새운 그는 무척 피곤해 보였으나, 아들이 깨어나서인지 한편으로는 가뿐해 보였다. 그의 시선이 디온에게로 향했다.
“에펠 공자, 새벽에 보좌관을 통해 보낸 서신은 확인했네. 국혼에 관해 변경된 사항이 있다고.”
당장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들을 휘둘러보며 황제가 알 만하다는 듯 낮게 웃었다. 그는 왠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다들 할 말이 많은 얼굴인데, 일단 급한 것부터 이야기할까. 그, 국혼에 관한 것부터.”
“황제 폐하, 그 건에 대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대는 그럴 테지, 라이오넬 공작. 포렌트 백작, 지금 몇 시지?”
레이든을 힐끗 본 황제가 근처에 선 포렌트 백작에게 시선을 주었다.
“6시 40분입니다, 폐하.”
“황후와 약속이 있으니 서둘러야겠군.”
황제의 말에 레이든이 고개를 들었다. 황제와 황후는 결혼 후 몇 년간은 사이가 좋았지만 그 뒤로 급속도로 멀어져 지금은 완벽한 쇼윈도 부부였다.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면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꺼려 하는 관계인데, 어떻게…….
“아내와 아침을 같이 먹기로 했거든.”
“…….”
의구심이 서린 눈을 한 조카를 바라보며 황제가 어딘가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그럼, 다 같이 먹는 건 어떨까요?”
“넬리!”
그때, 알현실의 문이 열리고 황후가 안으로 들어섰다. 뜻밖의 상황에 뒤를 돌아본 미라벨라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보일 듯 말 듯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우아하게 뻗은 눈매가 부드러움을 머금고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한 가족이 될 사이이기도 하고…… 이야기가 꽤 길어질 것 같은데.”
* * *
여러 사람에게 있어 그날 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기나긴 밤이었다.
“더운 물수건으로 입가의 핏자국을 좀 닦아 줘요.”
“그래, 알겠어.”
“…….”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약을 한 번만 더 먹여 볼까?”
“내가 먹일 테니 녹스의 상체를 받쳐 안도록 해요.”
녹스 황태자는 새벽까지 몇 번이나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공식 석상에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면 서로 본척만척하던 황제 부부는, 처음으로 한마음이 되어 밤새도록 아들을 간호했다. 희미한 새벽빛이 밝아 오는 시각이 되어서야 황태자는 가까스로 고른 숨을 내쉬었고, 황궁의로부터 큰 고비는 넘겨 생명에 위협은 없으리라는 진단을 받았다.
조용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 물러가라는 명을 내린 뒤, 루이넬라 황후는 문득 곁에 남은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간 공적인 자리 외에는 그를 만나 주지 않았기에 지금처럼 흐트러진 모습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녹스 황태자의 투병 기간이 길긴 했지만 오늘과 같이 위험했던 적은 없었고, 혹 방문 시간이 겹치더라도 의식적으로 한 사람이 자리를 피하는 게 그간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당신도 많이 늙었네요, 카슈타르.”
“……넬리!”
마음속의 말이 무심코 바깥으로 흘러나온 순간. 나란히 앉아 있던 카슈타르가 놀란 눈으로 휙 돌아보았다. 그에게 아내가 먼저 말을 걸어 준 건 근 20년 만에 처음이었다. 위엄 넘치는 대제국의 황제답지 않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가 더듬거렸다.
“넬리, 당신은, 그때와 똑같아.”
그를 보지 않고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 녹스의 상태를 살피던 그녀의 손이 멈칫했다. 그가 말하는 ‘그때’란, 아주 오래전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시절을 뜻하는 것일 터였다.
라이오넬 공작가에 몇백 년 만에 처음 태어난 귀한 딸, 공녀 루이넬라. 그녀는 로맨스 소설에나 등장할 듯한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소녀였다. 제국 제일 명문가의 공녀로 태어난 자신의 운명을 잘 알았고 나이가 차면 황가와 혼약을 맺기로 했으니 연애는 금지라는 엄한 부모님의 말도 있었지만, 끝까지 그 꿈을 포기하지 않은 데는 약간의 치기 어린 반항심도 있었다.
<가문이나 지위, 재산 같은 건 제겐 중요하지 않아요. 오직 저 하나만을 평생 사랑해 줄 그런 남자를 만날 거예요.>
어느 날, 남동생 레오폴트의 권유에 따라 신분을 감추고 축제장에 갔다가 카슈타르를 만난 건 완전히 우연이었다. 아니, 운명이라 생각했다. 젊은 연인은 빠르게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고, 황태자와 공녀인 서로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된 후 결혼까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실 카슈타르가 그날 축제장에 왔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녀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오랜 친구인 레오폴트와 서로 짜고 한 일이었다. 그는 루이넬라와 달리 크게 부모님을 거스를 생각이 없었고, 약혼 내정자인 그녀의 초상화를 보고 무척 마음에 들어 호감을 가진 상태였다. 그러던 중 그녀가 정략혼은 싫다며 버틴다는 말을 듣고 상황을 꾸며 낸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루이넬라는 실망했지만, 이미 사랑에 빠진 연인에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비록 시작은 그릇되었다 한들 지금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카슈타르의 마음은 진짜였으니까.
<대신 평생 저 외에 다른 여자는 보지 말아 주세요.>
<물론이야, 넬리. 이 자리에서 약속하지. 영원히 그대만을 사랑할 것이라고. 내 평생에 다른 여자는 결코 없을 거야.>
당시 고위 귀족이나 황족 남성의 경우 정부를 두는 게 흔했기에 루이넬라는 이런 조건을 내걸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영원할 것 같았고 그때만 해도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문제는 결혼한 지 10년이 지난 뒤에도 둘 사이에 아기가 생기지 않았을 때 벌어졌다. 당시 카슈타르는 이미 즉위하여 황제가 된 뒤였다. 공작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데다 다른 잘못도 없는 황후와 감히 이혼하라 할 수는 없었지만, 귀족들은 서서히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만약 다른 여인이 폐하의 아기를 낳게 된다면……?’
이후 우연을 가장하여, 또는 대놓고 황제를 유혹하려 드는 여인들이 숱하였으나 카슈타르는 결코 넘어가지 않았다. 부부 사이의 믿음이 굳건하다 생각했고 오히려 알게 되면 신경을 쓸 거라 여겼기에 그런 일이 있더라도 루이넬라에게 일부러 숨겼다. 하지만 그것은 도리어 그녀의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오랜 난임으로 인해 몹시 지쳐 있던 그녀는 겉으로는 황후로서의 할 일을 다하며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속은 이미 바짝 타들어 가다 못해 재가 되어 버린 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축하드립니다, 황후 폐하! 드디어 아기님께서……. 하지만 폐하께서는 타고나길 몸이 찬 성질이라 아기가 잘 자리 잡지 못하는 데다 지금도 무척 불안한 상태이니 정말, 정말 조심하셔야 합니다.>
어렵게 첫아기를 가진 기쁨도 잠시, 당시 임신 초기였던 루이넬라에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발생했다.
<아, 어떻게 이럴 수가……! 마리가, 내게 어떻게…….>
황후궁의 일을 돕는 하녀, 마리가 카슈타르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초기도 아닌 출산이 임박한 상태로, 만삭이 될 때까지 숨겨 가며 일했다고 했다. 루이넬라는 황태자비 시절 처음 만난 그녀를, 낮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동생처럼 잘 대해 주었기에 더욱 충격이 컸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진 그녀가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넬리! 제발 내 말을 들어 줘. 정말, 내 뜻이 아니었어. 그 여자는 멀리 보낼 거야. 아이도 내 아이로 인정하지 않을 거고…….>
마리는 본디 약초 상의 딸로 각종 약재를 다루는 데 능숙했다. 야망을 품은 그녀가 사내를 자극하고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약을 사용해 하룻밤을 보내고, 아이를 가진 것마저 숨겨 왔던 것이다. 나중에 사실을 알았지만 카슈타르에 대한 믿음도, 그녀가 바라 마지않던 완벽한 사랑도 이미 깨진 상태였다. 그가 매일같이 찾아왔으나 루이넬라는 받아 주지 않았다.
<미안해, 넬리. 그 일이 있었을 때 솔직하게 말하고 용서를 구했어야 하는데. 혹시라도 그대가 날 떠날까 봐 겁이 났어.>
<……일단 아기를 무사히 낳고 나서 이야기해요. 그때까진 찾아오지 말았으면 해요.>
<알겠어, 내 방문 자체가 스트레스가 된다면 그렇게 하지.>
하지만 불행히도 어렵게 가진 아기는 산달을 코앞에 두고 별이 되고 말았다. 그건 사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최선을 다했지만 아기님은 그만……. 그, 그리고 송구하오나 원래 몸이 약하신 데다 아기집이 상하여 더 이상 임신을 하시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 안 돼…… 아가야, 내 아기…….>
지켜야 할 것도, 의무도 많고 쉽지만은 않았던 황후로서의 삶. 그것을 버텨 내게 한 건 가문에 대한 책임감도 있었으나 카슈타르에 대한 사랑이 가장 컸다. 그에게 크게 실망한 후로 아기는 새로운 희망이었다. 만약 그녀의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났다면, 언젠가는 그와의 관계가 회복되었을지도. 하지만 바로 전날까지 태동을 느끼며 고이 품어 온 아기를 잃은 루이넬라의 절망감은 엄청났다.
<넬리, 다 내 잘못이야, 아아…….>
<나가요, 카슈타르. 우린 이제 부부로서도, 연인으로서도 끝났어요. 하지만 황후로서 해야 할 일은 지금처럼 제대로 할 테니 걱정 말아요. 공식 석상에도 빠짐없이 참여하고요.>
<루이넬라, 제발……! 용서해 줘, 나에게 한 번만 기회를 줘……!>
<돌이켜 보면 첫 만남부터 꾸며 낸 거짓이었으니, 결국 이렇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싶네요. 이만 나가 주세요, 다시 찾아오면 정말 떠날 생각이니까. 두 번 다시 사적인 자리에서는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황제 폐하.>
<넬리, 넬리…….>
그날 이후 루이넬라는 한 번도 그를 만나 주지 않았고, 혹시라도 정말 그녀가 떠날까 봐 카슈타르 역시 더 이상 찾아오지 못했다. 그가 평생 동안 다른 여자를 들이지 않고 수절하며 자신에게 용서를 구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는 끝내 받아 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문득 고개를 들어 창가에 올려진 화분을 바라보았다. 먼 옛날, 카슈타르와 처음 만났던 축제를 장식했던 것과 같은 꽃. 아네모네의 꽃말은 기다림, 그리고 속절없는 사랑이었다.
<넬리, 혹시 그대가 나를 떠난다 해도 난 아네모네의 꽃말처럼 영원히 이 자리에서 기다릴 거야.>
<카슈타르…….>
언젠가의 고백처럼, 그는 지금까지도 줄곧 그녀가 용서해 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반드시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것만이 진짜 사랑일까. 때론 부족하고 실수가 있었다 한들, 포용할 줄 아는 것 또한 사랑인 것을. 우리 모두는 그런 과정을 통해 서로를 다독이고 단단해지며 삶이란 힘든 고행을 지속할 힘을 얻고, 더 나은 인생을 향해 의지하며 나아갈 수 있는 건 아닐까…….
“……여긴 내가 있을 테니 먼저 가 봐요.”
한참 각혈을 해 황태자의 입가에 남아 있는 핏자국을 물수건으로 닦아 주며 루이넬라 황후가 조용히 말했다. 황궁의와 사용인들마저 모두 내보낸 뒤라 방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황제, 카슈타르의 눈이 커졌다.
“아까 에펠 공자가 서신을 보내왔죠? 문 앞에서 포렌트 백작과 이야기하는 걸 들었어요. 지금쯤 알현실에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여럿이겠군요.”
“황후, 나는…….”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간절한 눈으로 그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오랜 세월이 지나 고운 이마에는 약간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하나 콧날로 이어지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은 처음 만났던 날과 다른 것이 없었다.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면목이 없었다. 자신은 그녀의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었고, 너무나 큰 죄를 지었으니까.
“일단 알현실에 가 봐요. 녹스의 상태가 좀 더 호전될 때까지 곁을 지킨 뒤에…….”
그의 간절한 시선을 눈치챈 루이넬라가 짧게 시선을 주었다. 남편을 볼 때면 늘 얼음처럼 차가웠던 시선이 다소 녹아내린 듯 부드러웠다.
“……아침을 함께 들도록 하죠.”
“넬리……!”
카슈타르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감격에 찬 어조로 외쳤다. 얼른 가 봐요, 그녀는 다시 아들에게로 시선을 돌렸으나 그는 잠시 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루이넬라가 완전히 자신을 용서하진 않았다는 걸 알았지만, 마치 잃었던 나라를 되찾기라도 한 듯 벅찬 감격이 차올랐다.
“그럼 아침 식사로 버터와 살구잼을 곁들인 빵과 과일 뮤슬리를 준비하도록 하지.”
“그래요.”
그건 두 사람이 처음 사랑에 빠졌던 당시, 아침 식사로 자주 함께 먹었던 메뉴였다.
“으음…….”
카슈타르가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녹스는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아직 희뿌연 시야에 익숙한 모습이 비쳤다.
“녹스, 깨어났구나.”
“……어머니?”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져 피를 토하며 쓰러졌던 것까지 기억이 났다. 무심결에 부르던 그는 자신이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다는 걸 깨닫고 흠칫하며 몸을 빼려 했다. 문득, 사이가 벌어진 뒤로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았던 어머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무던히도 속을 썩였던 지난 몇 년간, 부쩍 수척해진 낯빛. 그녀의 얼굴만 봐도 그가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처음 발병하여 피를 토했던 날, 밤새 옆에서 손잡아 주며 그를 간호했던 것처럼 어머니는 지난밤에도 똑같이 그를 돌보며 새벽 별을 본 것이다.
늘 화려한 것들에 둘러싸인 완벽한 황후가 아닌, 단지 아픈 자식을 근심하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그때와는 달리 이젠 훨씬 작아진 그의 어머니.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구나.”
“어, 어머니…….”
“녹스, 내 아가야.”
감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더듬거리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루이넬라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너에게 꼭 해 줄 이야기가 있단다.”
이건 내가 처음 엄마가 되었던 날에 대한 이야기란다…… 그녀의 긴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유산 후, 루이넬라는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후로서의 업무에 복귀했다. 아기에 대한 미안함에 제대로 몸조리조차 하지 않은 채로.
겉으로는 이전과 다른 점이 없었기에 모두들 안심했으나 마음의 병은 갈수록 깊어졌다. 황제의 엄명이 있기도 했고 사용인들부터 쉬쉬했지만, 그녀는 밤마다 서럽게 흐느끼며 아기를 찾아 황궁을 헤매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아가, 내 아가야…… 어디 있니? 흐윽, 엄마가, 이렇게 왔는데…….>
<으앙! 으아앙!>
<……아, 아가?>
어둠이 내린 밤, 캄캄한 복도에 희미하게 울리는 아기의 울음소리. 루이넬라는 홀린 듯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 방에는 어린 녹스가 강보에 싸인 채 혼자 울고 있었다.
이것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카슈타르는 이미 배 속에서 자랄 대로 자란 마리의 아이를 어떻게 하진 못했다. 다만 마리를 멀리 보내 혼자 낳아 키우도록 조치하였으나 그녀는 아기를 낳다가 죽고 말았고, 마리의 본가에서도 맡으려는 사람이 없었다. 어찌 됐든 자신의 핏줄을 저버릴 수는 없었기에 그는 아기를 황궁으로 데려오라 명한 것이었다.
하지만 루이넬라에 대한 사랑과 죄책감 때문에 그때까지 황자로 인정하진 않았다. 갈 곳 없는 아기는 사용인들의 숙소에서 지내며 하녀들이 번갈아 돌보게 되었다. 그날도 밤에 번을 서는 하녀들이 아기를 교대로 보다가 일이 바빠 잠시 혼자 둔 것을, 루이넬라가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아가야, 우리 아가! 엄마 왔어, 혼자 무서웠지? 미안해, 엄마가 너무 미안해…….>
루이넬라는 아기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며 품 안에 꼭 안았다. 애정에 굶주렸던 아기는 반대로 그녀가 안아 올리자마자 울음을 뚝 그쳤다. 황궁의 골칫덩이였던 가엾은 아기. 그때까지 이름조차 없었던 사생아는 그날부터 루이넬라의 하나뿐인 소중한 아기, 녹스가 되었다.
<먀먀! 으음, 마아……!>
<녹스! 지금 엄마라고 한 거야? 어쩜, 우리 아기는 이다지도 똑똑할까!>
<음! 마아! 어엄마, 죠아!>
<우리 아가, 엄마도 네가 너무 좋아……. 엄마랑 아기는 서로 너무 사랑해요. 그렇지?>
비록 황제와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으나, 마음의 병으로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가던 황후는 차차 건강을 되찾았다.
<아가, 이쪽은 네 사촌들이야. 레이든과 에일레스는 형님이고 엘은 친구이니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안녕, 녹스.>
<정말 귀엽네, 만나서 반가워.>
<자, 우리 아가도 형님한테 안녕 해야지?>
<형아! 형님! 죠아! 녹스랑, 같이 놀아아!>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그의 눈에서는 깊은 후회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스스로의 어리석은 자격지심으로 모든 행복을 망쳐 놓은 것이다.
몸이 아파 짜증이 난 나머지 어린 마음에 괜히 떼를 썼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시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직접 그를 안아 들고 잠들 때까지 토닥여 주었던 어머니. 하지만 이젠 어리지도 않은 자신은, 철없는 말과 행동들로 어머니의 가슴에 얼마나 많은 못을 박았던가.
“네 생모의 가족들을 조사했던 건, 건강했던 네가 일곱 살 무렵 갑작스럽게 이 병을 앓게 되었기 때문이었단다. 지혈이 잘되지 않고 때때로 피를 토하는 병이 모계 쪽의 유전일지도 모른다는 의학적 소견이 있었거든. 드러날 정도의 병증은 없었다지만 너의 생모도 혹시 그 때문에 아기를 낳다가 목숨을 잃었는지도 모르고……. 그 이야기를 먼저 해 주지 못한 건 네 친모가 아니라는 나의 쓸데없는 자격지심 때문이었지. 정말 미안하구나.”
“아, 어머니, 흑, 죄송해요…….”
“녹스, 너를 처음 품에 안은 순간 난 본능적으로 알았단다. 하늘에서 보내 준 나의 소중한 아기 천사라는 것을. 널 누가 낳았든 전혀 상관없어. 이건 엄마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거니까.”
“어머니, 흐윽……!”
뜨거운 후회의 눈물을 뿌리는 녹스를 루이넬라는 품에 꼭 안아 주었다. 이젠 손도 발도 키도 그녀를 훌쩍 넘어선 아들이었지만, 어머니의 눈에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아기로만 보였다.
* * *
6개월 뒤, 르페르트 제국의 황후궁.
“공녀.”
“네, 황후 폐하.”
미라벨라는 루이넬라 황후와 창가의 테이블 앞에 마주 앉아 티타임을 갖고 있었다. 황후의 부름에 얌전히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맑은 눈에 기품이 넘쳐, 누가 보아도 가정 교육을 잘 받은 숙녀라 칭찬을 아끼지 않을 법한 모습이었다.
“차 맛은 어떤가요? 결혼을 앞두고 신경 쓸 일이 많을 것 같아 피로 회복에 좋은 차를 내오라 하였는데.”
“깊고 그윽한 다향이 폐하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와 같아 심신의 피로가 절로 풀리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황후 폐하.”
“그래요. 지난 늦가을 찬 서리를 맞은 꽃잎을 따 말렸더니 색감도, 향도 한층 짙어 풍미가 좋더군요. 마음에 든다니 귀가할 때 좀 가져갈 수 있도록 챙겨 놓도록 하지요.”
“황공하옵니다.”
황후가 흡족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르페르트 제국과 에펠 공국의 국혼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다만, 그 대상이 조금 바뀌었을 뿐.
이야기는 6개월 전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미안해, 디온. 내겐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실은 오늘 일을 결심한 것도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이럴 생각으로 나왔으니 네가 강행하겠다면 거부할 수 없겠지만, 널 남동생 이상으로 생각하게 될 수는 없을 것 같아.>
<누님이 그러시다면 강요할 수 없지요. 제겐 누구보다 소중한 분이시니.>
<디온……?>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디온은 깨끗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돌아보지 않은 채, 그사이 거의 마른 상의를 한 번에 입었다.
<……하지만 언제든 마음이 변하면 말씀하십시오. 전 항상 같은 자리에서, 누님을 기다릴 테니까요.>
디온의 조부는 손자의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그녀를 아들의 양녀로 입적하여 기꺼이 가계도에 올렸다. 그 결과 국혼의 주인공은 에펠 공국 후계자의 누이인 공녀 미라벨라와 르페르트 제국 황제의 조카인 라이오넬 공작으로 바뀌게 된 것이었다. 실은 ‘에펠 공녀’였던 그녀가 ‘라이오넬 공녀’로 지냈던 일에 대해서는 긴밀한 임무를 수행하느라 양국의 합의에 따른 것이었다는 황제의 공표로 논란을 일축했다.
반대로 에펠 공국에서 손녀를 시집보내는 형태가 되면서 결혼식 전까지 미라벨라는 공국에서 지내야 했지만, 그녀의 요청으로 종전대로 공작가에 머무르게 되었다. 대신 새로이 발견된 마력석을 비롯한 많은 예물을 보내는 것으로 디온의 조부는 그 섭섭함을 대신했다.
“황후 폐하, 황태자 전하께서 거의 완쾌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축하드립니다.”
양국의 동맹을 굳건히 하는 중요한 국혼이기도 했지만, 어머니가 없는 미라벨라의 처지를 고려해 황후는 바쁜 와중에도 세심하게 결혼 준비를 도와주고 있었다. 물론 아들이나 다름없는 조카의 결혼식이기도 했고. 미라벨라는 그 점이 무척 고마웠다.
“폐하의 얼굴도 훨씬 좋아지신 것 같아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고마워요, 에펠 공녀.”
황후가 우아한 미소와 함께 찻잔을 들었다. 기품 넘치는 온화한 얼굴이 언뜻 한창때의 소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에일레스가 오랫동안 연구하던 신약에 에펠 공국에서 보내온 마력석에서 추출한 물질을 첨가한 약은 확실히 큰 효과가 있었다. 녹스 황태자의 병은 이제 거의 완쾌되었고, 어머니의 변함없는 사랑을 깨달은 그는 지난날의 과오를 깊이 반성했다. 라이오넬가의 사촌 형제들에게도 진심을 담아 사과했음은 물론이다. 그들은 물론, 직접 공작가로 찾아와 사과하는 그를 두 팔 벌려 맞아 주었다.
“결혼을 앞둔 신부를 너무 오래 붙잡아 두었네요, 이만 일어날까요? 나도 남편과 약속이 있어서.”
“네, 황후 폐하.”
이제 곧 같은 라이오넬가의 사람이자 조카며느리가 될 미라벨라를 한 가족이라 생각해서일까. 그녀의 앞에서 황후는 황제를 스스럼없이 남편이라 칭했다.
비록 오랜 기간 벽을 치고 지냈으나 두 사람은 젊은 시절 진심으로 사랑하던 사이였다. 게다가 오래된 부부의 벌어진 틈을 이어 줄 수 있는 자식이라는 매개체도 있었다. 모자간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오랜 기간 앙금이 쌓였던 부부의 사이도 녹아내렸고, 그들은 늦게나마 가족 간의 따스한 정을 나누며 삭막한 황궁에서도 비교적 사람다운 행복을 느끼는 중이었다.
“참, 가기 전에 결혼 선물을 줘야겠군요. 안나, 그걸 가져와요.”
“여기 있습니다, 황후 폐하.”
시녀장이 눈치 빠르게 황후가 지시한 물건을 가져왔다. 고급스러운 자줏빛 벨벳으로 싸인 커다란 상자였다. 황후가 미라벨라를 돌아보며 어서 열어 보라 눈짓했다.
‘이게 뭐지?’
딸깍.
영문을 몰라 당황스러웠지만 미라벨라는 조심스럽게 자줏빛 상자의 금장 걸쇠를 밀어 올렸다. 안에는 또 각기 다른 색의 벨벳으로 싸인 작은 상자 세 개가 들어 있었는데, 보석이나 패물을 보관하는 함처럼 보였다. 그것을 열자 자잘한 다이아몬드를 엮은 팔찌와 토파즈 목걸이, 붉은 루비 브로치 등 한눈에도 값져 보이는 영롱한 보석들이 담겨 있었다.
“황후 폐하, 이건…….”
“받아요, 미라벨라 양에게 주는 거랍니다.”
섣불리 상자를 받아 들지 못하는 미라벨라에게 그녀가 빙긋 웃어 보였다.
“르페르트에는 자식이 결혼할 때 그 어미가 패물을 해 주는 전통이 있죠. 이건 내 조카들이 결혼할 때 세상을 떠난 그 아이들의 어미를 대신해 신부에게 주려던 거랍니다. 그 아이들은 내겐 아들이나 다름없으니까. 이건 레이든의 것, 이쪽은 에일레스, 그리고 르시엘의 몫까지……. 나중에 녹스에게 주려는 것과 같은 등급의 보석들이니 서운하진 않을 거예요.”
황후는 여전히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었으나 미라벨라는 함께 웃을 수 없었다. 그녀는 결국 긴장한 얼굴로 되물었다.
“저, 그런데 왜 그걸 모두 저에게…….”
“글쎄, 그건 미라벨라 양이 더 잘 알지 않을까?”
“…….”
“그럼, 이만 가 봐요.”
“아, 네…….”
“결혼식 날 봐요, 공녀. 그때는 ‘진짜’ 라이오넬이 되어 있겠네요.”
미라벨라가 얼떨떨한 얼굴로 인사하고 물러간 뒤, 곁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황후궁의 시녀장, 엘리제 백작 부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황후 폐하, 왜 공녀에게 상자 세 개를 다 주셨나요? 그건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셨던 귀한 보석이라 구하기도 어려운 것들인데, 나중에 라이오넬가의 다른 두 공자들이 혼인할 때 섭섭해하기라도 하면…….”
“그건 걱정 말아요, 그 둘은 전혀 서운해하지 않을 테니까.”
“……네? 그걸 어떻게…….”
“이 나이가 되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생긴답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서 있는 시녀장이자 오랜 친구를 바라보며, 황후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은 얼굴로 즐거운 듯 미소 지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과 가족의 형태가 있다는 걸 인정할 만큼 이해심도 많아지고 말이지요.”
“…….”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안나, 저녁 약속에 가기 전에 새로 단장하는 걸 도와주겠어요?”
“아, 네. 황후 폐하.”
시녀장이 의상을 가지러 드레스 룸으로 들어간 뒤,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레이든이 혼자 날 찾아왔던 게 언제였더라…….”
아, 그래. 분명 데뷔탕트 무도회가 있던 날이었지.
그날, 루이넬라는 몸이 좋지 않아 공식 석상에 나가지 않고 쉬고 있었다. 하지만 유난히 정을 많이 주었던 첫 조카의 방문이라면 내색하지 않고 맞아 줄 수밖에. 종종 인사를 오긴 했지만 이렇게 갑자기 찾아온 건 처음이었다. 가벼운 안부와 근황을 물은 뒤, 그녀는 별생각 없이 미라벨라에 대해서도 한마디 건넸다. 진짜 공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 그간 굳이 만나 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데뷔탕트를 치르게 되어 함께 황궁에 들어와 있다니 형식적으로 안부를 물은 것이었다.
‘그 뻣뻣한 아이가 그런 눈으로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처음 봤으니까. 눈물을 흘리는 모습도 일곱 살 때 이후 처음이었고.’
대체 어떤 아가씨이길래 내 조카를 그렇게 만들었나 했더니…….
조금 전 만났던 미라벨라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녀는 만족스럽게 눈가를 휘었다. 우아한 손끝이 편안한 안락의자의 팔걸이를 톡, 톡 일정한 박자로 두드렸다.
아, 물론 이후의 일까진 예상하지 못한 터라 좀 놀라긴 했지만.
‘다 함께 모였을 때, 다른 두 아이들도 같은 눈으로 미라벨라 양을 보고 있는 걸 보고 어찌나 놀랐던지. 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랑과 가족의 형태가 있고, 거기에 정답은 없는 법이니까. 녹스와 내가 가족인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가뿐한 걸음으로 내실로 들어서며, 그녀는 문득 궁금하다는 얼굴을 했다.
“한데, 아기는 누굴 닮으려나.”
* * *
“……오라버니!”
미라벨라가 황후궁 밖으로 막 나섰을 때, 저쪽에서 걸어오는 르시엘이 보였다. 올 초에 황실 기사단의 구조가 개편되면서 델리나와 나란히 제1 기사단, 제2 기사단의 단장이 된 그는 현재 황후궁에 배치되어 있었다.
“벨라.”
그녀를 발견한 르시엘이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한 번 번쩍 들었다 놓으며 슬쩍 입을 맞췄다. 황궁 안에는 외부의 마차가 들어올 수 없었기 때문에 정문까지는 좀 걸어야 했다. 두 사람이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그들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레이든과 에일레스가 보였다. 그들은 각각 황제가 있는 중앙궁과 황태자 궁에서 오는 길이었다.
“르시엘, 미라벨라. 여기 있었군.”
“기다리라고 했는데 왜 먼저 가?”
“아 진짜? 못 들었어.”
에일레스가 쿡 찌르며 핀잔을 주자 르시엘이 모른 척 시침을 뗐지만, 두 형들은 그쯤에서 눈감아 주었다. 잠시라도 미라벨라를 독차지하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니까. 그녀와 함께하게 된 게 더없이 행복하면서도 괴롭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가슴속에서 늘 들끓고 있는 독점욕과 소유욕은 항상 해소되지 않는 갈증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피를 나눈 형제였다. 남보단 낫다는 게 공통된 지론이었고 우애를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는 감수하며 현재의 균형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그래야만 미라벨라가 가장 행복할 테니까.
“저, 오라버니, 이제 어디로 가요?”
레이든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오르며 미라벨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의 세 오라버니들은 최근 무척 바빴다. 결혼식 이후, 가족 여행을 빙자한 긴 신혼여행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절차와 격식이 따르는 국혼 준비는 물론, 부재한 기간에 각자 해야 할 일도 미리 끝마쳐야 했다. 하여 요즘은 대체로 다들 귀가가 늦었고, 저녁에도 다른 일정이 있는 경우가 잦아 공작가의 식당은 쓸쓸한 날이 많았다.
“집에 가야지.”
하지만 오늘은 다른 스케줄이 없는지, 에일레스가 선선하게 대신 대답했다. 오랜만에 다 같이 저녁을 먹겠다는 생각에 미라벨라의 얼굴이 환히 밝아졌다. 마차가 출발하기 전, 좌석에 앉기 무섭게 르시엘이 푹신한 쿠션을 그녀의 등 뒤에 받쳐 주었다.
“벨라, 피곤하지? 어서 여기 기대.”
“앗, 감사해요, 르시엘 오라버니.”
“뭘.”
그가 기분 좋은 얼굴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흐트러트렸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그의 귀 끝이 약간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미라벨라, 봄볕이 유난히 뜨겁더군. 황후궁에서 이곳까지는 꽤 거리가 있는데 오가는 길이 힘들진 않았나? 탈수증이 생길지도 모르니 시원한 물을 마셔.”
얼굴이 붉어진 건 르시엘인데, 마시기 좋게 구부러진 스트로가 꽂힌 투명한 물병은 미라벨라를 향했다. 목이 말랐는지 단숨에 꼴깍꼴깍 마시는 모습을 보고 맞은편 좌석에서 에일레스가 눈을 크게 떴다.
“혹시 배고프니, 벨? 어디 좋은 곳 들러서 먹고 갈까?”
“아니요.”
이번에야말로 미라벨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세 사람이 사랑하는 햇살 같은 미소를 띤 그녀가 눈을 들어 그들을 바라보았다.
“우리 집에 가요.”
바쁜 하루가 지나면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곳, 그날의 일상을 서로 나누는 따스한 저녁 식탁. 온 가족이 함께하는 집보다 더 편하고 좋은 곳은 세상에 없을 테니까.
“……그래, 가자.”
집으로 출발합니다! 잠시 후, 공작저의 마부가 말을 출발시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 서서히 속도를 더하는 마차에 몸을 맡긴 채, 미라벨라는 그 달콤한 단어를 입 안에서 웅얼거렸다. 문득, 갑작스러운 파도처럼 벅차오르는 감정이 가슴속 깊이 밀려들었다. 말로는 다 표현 못 할 충만한 행복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