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I. 용서받지 못할 죄
하늘에 구멍이 뚫리기라도 한 듯 쏟아져 내리는 굵은 빗줄기가 얼굴을 아프게 때렸다. 전날까지 이어지던 화창한 날씨를 보기 좋게 비웃기라도 하듯, 밖은 완전히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흐읍!”
별장을 뛰쳐나온 미라벨라는 숨이 턱 끝까지 닿도록 정신없이 달렸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로. 차가운 빗물이 혼란스러운 그녀의 입 안으로 마구 흘러들었다.
우르릉, 쾅!
온통 먹구름에 뒤덮인 컴컴한 하늘에서 우레와 같은 천둥소리가 들려왔을 때쯤에서야 미라벨라는 자신이 맨발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어디선가 단단히 쓸린 듯 새하얀 발에 난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걸음을 멈추자 비와 섞인 핏물이 떠내려온 흙더미 틈으로 초라하게 흘러내려 갔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발등의 상처는 꽤 깊었지만 그보다 마음이 더 쓰라려서인지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
‘처음부터 이용할 생각으로 데려왔으면 끝까지 철저히 이용해.’
조금 전 들었던 믿기지 않는 말들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마음을 후벼 팠다.
미라벨라는 우리와는 아무 상관없는 남. 동생도 뭣도 아닌 갈 곳 없는 고아…….
‘오라버니가 아니었어. 단지 정략혼을 시킬 상대가 필요해서 날 데려왔던 거야.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는데, 난 아무것도 모르고 혼자…….’
모든 게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지난 2년간 가족이라 굳게 믿었던 사람들이 실은 아무 상관없는 남이었다니. 그렇다면 그동안 세 오라버니들이 보여 준 자상한 모습도, 다정하게 대해 준 것도 모두 연기였던 걸까.
‘미라벨라가 이곳에 있었던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금방 잊힐 거야.’
그래, 자신은 지금껏 오라버니라 믿었던 이들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체스 말이나 다름없는 신세였던 것이다. 매일같이 은밀한 교육을 받으며 오라버니와 몸을 섞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던 것도,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걸 깨닫고 밤새 가슴앓이를 했던 것도, 전부 그녀 혼자만의 몫이었다. 그 시간들조차 그들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흐윽, 아…….”
여동생이 아닌 그저 오갈 데 없는 고아라 여겼으니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을 것이다. 절정의 쾌감을 느낄 때마다 어쩔 수 없는 죄책감이 번져 가는 제 얼굴을 내려다보며 얼마나 비웃었을까. 얼마나 한심하고 우스웠을까.
어쩌면 어머니에게 버림받았을 때보다 더한 슬픔과 절망, 믿었던 사람들에게 철저하게 속았다는 배신감과 미움이 가슴속에서 한꺼번에 뒤섞였다. 엉망으로 뒤죽박죽된 날카로운 감정들이 마구 솟구치며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널 내 동생이라 생각하니 때린 거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렇게 혼내지도 않아.>
<다정한 게 당연하지, 가족이니까.>
<뭐야, 그 이상한 호칭은? 너 내 동생이라며.>
그런 말들이 전부 다 거짓이었다고.
“흑, 으흑, 아……!”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난도질당한 조각난 마음. 그것은 그녀의 절망감을 장작으로 때어 뜨겁게 녹은 뒤 두 눈을 통해 흘러나왔다. 빗물인지 눈물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으로 손과 얼굴을 흠뻑 적시며 미라벨라는 한참 동안 울었다.
<꽤 쓸 만하군. 역시 라이오넬 공작의 안목인가.>
조카딸을 대한다기엔 어딘가 미묘했던 황제의 반응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더는 여기 있고 싶지 않아.’
하지만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머릿속이 그저 멍했다. 고양이가 가지고 놀던 실타래가 엉망으로 뒤엉킨 채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 세 오라버니들…… 아니, 실은 그녀를 이용만 하려 했던 그들을 또다시 마주하게 된다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까.
미라벨라는 뒤를 돌아보았다. 정신없이 뛰어오면서 꽤 멀리 왔는지, 별장의 지붕이 아주 작게 보였다. 그녀는 나올 때 얼핏 본 관리인이 머무르는 작은 집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던 것을 상기했다. 이번 주는 세 오라버니가 교대로 머무를 거라 휴가를 보냈다고 했던 것 같았다.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는 걸어서 꼬박 반나절은 가야 한다고 했어. 산이 가파르고 외진 곳이라 이 주변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고.’
그사이 빗줄기는 더 굵어져 몸이 차가웠다. 주위에는 어느덧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어서 숲이나 산으로 들어가는 건 위험할 거야. 일단 산 아래의 길을 따라 걸어가자. 가장 가까운 마을이 남쪽에 있다고 했으니까.’
미라벨라는 온통 높은 산뿐인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동안 이곳에 머무르면서도 별장 밖으로는 나갈 일이 없었기 때문에 주변의 지리가 낯설었다. 근처에서 큰 나무가 베어진 밑동을 발견한 그녀는 나무 그루터기의 나이테와 주변의 바위에 낀 이끼의 분포도를 보고 가야 할 방향을 찾아냈다. 이제 빗물과 토사로 바닥이 거의 보이지 않는, 인적 없는 길을 따라 미라벨라는 한참을 걸었다.
이렇게 상황을 회피하고 달아나는 건 어린애 같은 태도라고, 레이든 오라버니가 질색하실 텐데.
‘이제 와서 무슨 그런 생각을…….’
머릿속에 떠오르는 얼굴들을 떨쳐 내려 미라벨라는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톡. 톡톡.
‘……돌?’
어디선가 작은 돌과 낙엽, 흙이 뭉쳐진 덩어리가 날아와 그녀에게 부딪힌 건 바로 그때였다.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미라벨라는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대체 어디서 날아온 거지? 꼭 위에서 떨어져 내린 것 같은…….’
“……!”
다음 순간, 그녀는 본능적인 위험을 감지하고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머리 위를 보았다.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이 크게 떠졌다. 바로 옆에서, 가파른 산의 일부가 폭우로 무너지며 빗물이 섞인 엄청난 양의 검은 흙더미가 빠른 속도로 미라벨라를 향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 결국 이렇게…….’
미라벨라의 모든 세상이 새카맣게 뒤덮였다. 암흑이 찾아오기 전, 문득 누군가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 같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그런 생각마저 멈추고 완연한 어둠 속으로 까마득히 의식이 사라져 갔다.
* * *
“……벨라!!”
사위가 온통 어두웠다. 주변의 사물을 분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굵은 빗줄기가 사방에서 들이치는 가운데, 라이오넬 공작가의 세 오라버니들은 사라져 버린 하나뿐인 여동생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대체 어디로 갔을까, 벨. 이렇게 비가 오는데…….”
에일레스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비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나 잘 손질되어 아름답게 반짝이던 결 좋은 은발이 빗물과 땀, 흙탕물에 젖은 채 이리저리 엉망으로 붙어 있었다. 그는 겉옷의 주머니 안에 손을 넣어 잡히는 것을 움켜쥐었다. 응접실 문 앞에 떨어져 있던, 파란 보석이 박힌 나비 모양의 머리핀. 날개를 펼쳐 날아가지도 못하고 바닥에 혼자 외롭게 추락해 있던 모습이 꼭 미라벨라 같아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대체 어디서부터 들은 걸까, 어디까지 들었을까. 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까…….’
일단은 미라벨라를 찾는 게 가장 급선무였다. 어느새 날이 저물었고 기온이 내려가 점점 추워지고 있었으니까.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더할 테지. 저녁 내내 하늘에 큰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퍼붓던 폭우는 한풀 꺾였으나, 가늘게 변한 빗줄기는 여전히 쏟아져 내렸다.
“……하, 가까운 마을은 다 찾아봤는데 어디에도 없어.”
말을 타고 꽤 멀리까지 나갔던 르시엘이 급하게 뛰어내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레이든이 생각에 잠겨 깊게 침음했다. 그 역시 말끔했던 슈트 이곳저곳에 흙이 튀고 젖어 더럽혀져 있었고, 안색은 무척 창백했다. 레이든은 전에 없이 초조한 얼굴로 셔츠의 위 단추를 거칠게 두어 개 풀어 내렸다.
“이제 찾아볼 곳은 다 가 본 것 같지?”
“그래, 별장 북쪽의 산책로만 남았어.”
“아, 오다 보니 그쪽은 길이 완전히 막혔어. 폭우로 산이 무너져서 들어갈 수가 없다던데? 지금도 다른 길로 돌아서 온 참이야.”
“……일단 그쪽도 가 보기로 하지. 혹시 모르니.”
레이든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르시엘의 말대로 별장 북쪽의 좁은 길은 위쪽의 작은 산이 완전히 무너져 들어갈 수도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도로의 형체조차 찾을 수 없이 사라져 버려 이쪽으로는 갔을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절대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직감적으로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피어올랐다. 왠지 불안한 느낌에 그들은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산사태가 일어난 지 몇 시간이나 됐지?”
“아까 저녁때였으니 대략…….”
툭.
“…….”
잿빛 흙더미로 변한 산이 무너져 내린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레이든은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끼고 멈칫했다. 발아래에 닿는 어딘가 이질적인 촉감. 설마, 이 느낌은…….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직감적으로 불길한 기분에 사로잡힌 채 그는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발끝에 닿은 물체가 뭔지 확인하자 조각 같은 낯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미라벨라!!”
산처럼 높이 쌓인 검은 흙더미 아래에 애처로이 빠져나와 있는, 하얗고 자그마한 손. 지난 2년간 매일같이 보아 온 그 손의 주인이 누군지 모를 리가 없었다.
“이쪽으로 와!! 빨리!!”
그의 외침에 근처를 찾아보고 있던 다른 형제들이 당장 달려왔다. 세 사람은 서둘러 주위의 흙더미를 파헤치고 그 아래 깔려 있던 미라벨라를 함께 끌어냈다. 생명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밀랍처럼 창백한 얼굴을 대하자 짙은 공포감이 엄습했다.
“벨!! 아, 대체 어떻게…….”
“설마, 벨라가…… 주, 죽은 건 아니지?”
새하얗게 굳은 얼굴, 아주 작은 미동조차 없는 감긴 눈꺼풀, 얼음처럼 차가운 작은 손과 발. 웬만한 의사들은 죄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짐을 챙겨 돌아가 버릴 듯한 모습이었다. 오라버니! 밝게 웃으며 사랑스럽게 종알거리던 자그마한 입술은 이제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 것처럼 굳게 다물려 있었다.
늘 침착했던 레이든의 얼굴에마저 감춰지지 않는 두려움이 떠올랐다. 천천히 상체를 숙여 미라벨라의 왼쪽 가슴에 얼굴을 가까이 한 그가 침통하게 말했다.
“……숨은, 붙어 있어.”
하지만 아무도 그 말에 안도하지 못했다. 레이든의 말 앞에 ‘아직’이라는 단어가 생략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들 모두 알았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지금 미라벨라는 죽어 가고 있었다. 희미하게 꺼져 가는 생명의 불빛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형!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순간 에일레스의 손끝에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듯한 흰 빛이 모여드는 걸 발견하고 르시엘이 벌떡 일어섰다. 주위의 어둠을 밝히는 새하얀 빛. 그의 손에서 뻗어 나간 가장 높은 단계의 치유 마나가 잠자듯이 쓰러져 있는 미라벨라의 작은 몸을 둘러쌌다. 최대치로 끌어내어 어느 때보다 강한 에너지를 형성한 그의 마나는 눈부시게 반짝이며 그녀의 몸 위로 흩어졌고, 서서히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지기 무섭게 에일레스가 울컥, 검붉은 피를 토해 냈다.
“……우욱!!”
“에일레스, 지금 제정신인가?”
레이든이 낯을 일그러뜨리며 그의 팔을 확 잡아챘다. 반듯한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이클립스 기간에 마나를 쓰는 건 자살행위야! 네 생명을 떼 주는 거나 다름없다는 걸 알 텐데. 대체 몸에 얼마나 무리가 갈 줄 알고……. 죽고 싶나?”
“상관없어.”
“미친 소리 마. 정말 네가 죽을 수도 있었어.”
“……벨을 살리려면 어쩔 수 없었어.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할 거고.”
붉은 피가 흘러내린 입가를 손등으로 닦으며 에일레스가 애써 의연한 얼굴로 허리를 세웠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지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사람처럼 완전히 창백해져 있었다.
본디 마도사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원리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마나를 먼저 흡수하고 자신의 마나와 결합한 뒤 적절한 형태로 변환하여 운용하는 것. 모든 에너지의 근원인 태양이 가려지는 이클립스 기간에는 자연 상태의 마나를 흡수하는 일이 불가능해졌기에 원천적으로 마법의 사용도 불가했다.
유일한 방법은 마도사 자신이 타고난, 몸 안에 내재되어 있는 마나를 꺼내 쓰는 것뿐. 하나 자연에 속한 마나와 결합하지 않고 그 자신의 마나만을 오롯이 사용하는 것은 사용자에게 큰 타격을 입혔기에 생명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행위였다. 손실된 마나는 시간이 지나면 느리게 채워져 애초에 타고난 양까지는 회복된다고 하나 내상이 심하면 그 전에 죽을 수도 있었다. 만일 그가 손꼽히는 상위 마도사가 아니었다면, 이 정도의 마나를 단독으로 끌어낼 수도 없었겠지만 사용한 순간 분명 내장이 터지거나 충격에 인한 심장 마비로 즉사했을 것이다.
“윽…….”
에일레스가 다시 한번 자잘한 핏덩이를 뱉어 냈다. 죽은 조직과도 같은 몽글몽글한 붉은 덩어리가 흉물스럽게 스며들며 검은 흙더미와 뒤섞였다.
“에일레스, 괜찮나?”
“형! 내가 업고 갈게.”
“됐어.”
그가 르시엘의 부축을 뿌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무척 창백했고 내상이 꽤 깊어 보였다. 그나마 희망적인 건 미라벨라의 몸에는 서서히 온기가 돌아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신을 차리진 못했지만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작은 손발이 서서히 따스해졌고, 밀랍 인형처럼 희게 질렸던 입술과 양 뺨에는 조금씩 발그레한 홍조가 돌아왔다.
“벨이 무사하니 다행이야.”
“아, 에일레스, 진짜…….”
“……일단 별장으로 돌아가지.”
그들을 지켜보던 레이든이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 * *
별장으로 돌아온 뒤에도 미라벨라는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다. 어지간한 실력의 마도사라면 살리지 못했을, 희미하게 꺼져 가던 생명의 불꽃. 에일레스가 제 목숨을 담보로 쏟아부은 강력한 치유 마나의 효과로 호흡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불안정한 맥박과 체온도 서서히 되돌아왔으나, 연약하게 감긴 눈꺼풀과 창백한 입술은 여전히 열릴 줄을 모르고 굳어져 있었다.
본가로부터 두 차례 다녀간 라이오넬 공작가의 오랜 주치의는, 다행히 큰 위기를 넘겨 생명에는 지장이 없으리라는 진단을 내렸다. 다만 몸이 원래 약한 데다 정신적인 충격이 몹시 커서 깨어나지 못하는 것이라고. 에일레스는 한 번 더 치유 마나를 사용하려 하였으나 이미 심각한 내상을 입은 그를 레이든이나 르시엘이 그냥 보고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미라벨라를 지켜보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지도 벌써 사흘째. 세 사람은 서로 간에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줄곧 조용히 눈을 감고 팔짱을 낀 채로 창가에 기대어 서 있던 레이든이, 천천히 침대 근처로 다가왔다.
“그만 올라가, 에일레스. 여긴 나와 르시엘이 있겠다.”
“난 괜찮아.”
“아니, 넌 좀 쉬어야 해.”
“괜찮기는…… 레이 말대로 해. 형 얼굴 보면 지금 당장 관에 들어가 누워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데.”
좀처럼 한자리에 진득하게 앉아 있지 못하고 서성이던 르시엘이 거들었다. 그는 아까부터 몇 분에 한 번씩 초조한 얼굴로 제 머리를 흐트러트리며 방 안을 빙빙 돌고 있었다. 레이든이 그를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르시엘, 그렇게 정신 사납게 만들 거라면 너도 같이 올라가고.”
“아니, 난 그냥…… 지금 앉을게.”
에일레스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이클립스 기간에 마나를 사용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중이었다. 그는 미라벨라만큼이나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마나의 단독 사용으로 입는 내상은 거의 장기 하나를 멀쩡한 정신으로 들어내는 것과 맞먹는 고통이라 했던가. 몸 안을 도는 유기적인 마나의 구조가 전부 뒤엉켰기에 자연적으로 회복될 때까지는 심장을 거세게 압박하며 계속해서 충격을 줄 것이다. 그 자리에서 죽지 않은 게 기적이다. 달리 치료 방법조차 없으니 적어도 몇 달은 제대로 요양해야 할 깊은 내상이었다.
‘저 바보가…….’
작은 신음 한번 내뱉지 않고 고스란히 고통을 감내하고 있는 에일레스를 보며 레이든이 속으로 혀를 찼다. 끝내 고집을 부리며 자리를 지키면서도 그는 처음엔 진통제조차 먹지 않으려 들었다. 괜찮다고 주장하는 걸 르시엘과 함께 억지로 먹이긴 했지만, 아마 그다지 도움이 되진 않을 터였다. 통증 때문에 힘들긴 한 모양인지, 제 형제들이 보지 못하게 슬쩍 고개를 돌려 입술을 깨무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벨에겐…… 말하지 말아 줘.”
내장이 끊어지는 듯한 고통을 삭여 내느라 평소보다 훨씬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에일레스가 말했다.
“뭘, 네가 저 애를 살리느라 죽을 뻔했다는 걸?”
“그래. 고작 그런 걸로 동정을 사서 내가 한 일을 용서받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괜한 걱정을 하는군, 에일레스.”
레이든이 날카롭게 그를 돌아보았다.
“걱정 마. 미라벨라는 이미 우리가 제게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 알고 있지 않나.”
“…….”
“깨어나면 오히려 네가 죽지 않은 걸 아쉬워할지도 모르지.”
“그래, 맞아.”
기운 없이 수긍하는 에일레스를 바라보며 레이든이 화가 난 듯 입을 다물었다. 다소 날을 세운 목소리로 질책하듯 말했으나, 그 기저에는 제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을 서슴지 않은 동생에 대한 염려가 담겨 있었다.
“벨라가 깨어나도…… 예전처럼 웃는 얼굴은 못 보겠지?”
제 형들의 눈치를 살피며 르시엘이 무겁게 말했다. 들려오는 대답은 단지 무거운 침묵뿐. 그들은 미라벨라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지었다. 처음부터 거짓으로 시작된 관계. 우리가 네 가족이라며, 따뜻한 애정에 목마른 소녀를 몇 년간 속여 마음대로 휘두르고 정략혼의 장기말로 삼아 머나먼 타국으로 보내 버리려 했다. 그 과정에서 순결한 몸과 마음을 취하고, 파렴치한 짓을 한 주제에 그녀의 맹목적인 사랑과 존경을 받고…….
적어도 미라벨라를 사랑하게 된 뒤에는 솔직하게 털어놓고 용서를 구했어야 했다. 그녀의 의견을 묻고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그녀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은 채 자신들의 뜻대로만 일을 진행하려 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미라벨라에게 끝까지 단 한 번도 솔직했던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을 마음대로 주무르려 한 대가를, 대체 무엇으로 치러야 할까.
“으음…….”
지금껏 미동조차 없던 작은 손끝이 보일 듯 말 듯 움직인 건 바로 그때였다. 부드럽게 내리뜬 연약한 눈꺼풀이 가늘게 떨리고, 도자기로 빚은 듯 굳게 닫혀 있던 작은 입술 사이로 여리디여린 한숨이 흘러나왔다.
“……벨?”
깜빡.
벨벳 같은 긴 속눈썹이 서서히 밀려 올라간 틈으로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섬세한 레이스가 중앙으로 모여든 연하늘색 캐노피, 완전히 내리면 사면을 다 덮는 실크 휘장. 성서에 나오는 아기 천사를 네 기둥에 양각으로 조각한 사주식 침대…….
완전히 정신이 돌아오지 않은 채로 미라벨라는 몇 번 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머릿속은 아직 희뿌연 안개가 낀 듯 맑지 않았지만, 몸은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가뿐한 느낌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오라버니들은 왜, 이런 얼굴로 날 보고 계시지…….’
미라벨라는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주위를 돌아보았다. 커튼을 닫아 둔 탓에 방은 다소 어두웠다. 때문에 안색까지 자세히 볼 수는 없었으나, 어렴풋이 보이는 오라버니들의 표정과 분위기는 왠지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바로 옆에 앉아 그녀를 주시하고 있던 에일레스, 초조하게 방 안을 서성이던 것을 멈추고 급히 다가오는 르시엘, 그리고 창가에 선 채 이쪽을 보고 있는 레이든의 모습도 보였다.
“……미라벨라, 몸은 좀 어떤가.”
“벨라, 정신이 들어?”
“아, 벨…… 아픈 곳은 없는 거지?”
이제 막 깨어난 그녀가 놀랄까 봐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걱정 가득한 물음과 시선이 가득 쏟아졌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갑작스럽게 가슴 한편이 무너져 내리는 듯 아려 오는 기분은……. 그 다정한 얼굴을 마주하는 게 힘이 들었다. 미라벨라는 대답하지 않은 채 가만히 눈을 내리떴다. 그 시선 끝에, 새하얀 시트가 조금 젖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대체 누구의 눈물일까.
아. 그 순간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던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기분이 들었다. 서서히 되살아나는 기억……. 동시에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미라벨라.”
계속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녀에게 레이든이 가까이 다가왔다. 큰 충격을 받으면 기억을 잃는 경우도 있다고 하던데 혹시 그런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나?”
“……네, 전부 기억나요.”
그의 말에 미라벨라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차갑게 말하며 올려다보았다.
“제가 뭐라고 불러 드려야 할까요, 라이오넬 공작님?”
“…….”
“말씀해 보세요, 공작님. 설마 이렇게 불렀다고 또 매를 드실 건가요?”
“……미라벨라.”
“벨라, 그게…….”
“말하지 마세요.”
뭐라 다급히 입을 열려던 르시엘이 순간 멈칫했다. 그의 말을 냉정하게 끊어 낸 그녀가 싸늘한 눈으로 세 사람을 돌아보았다.
“변명하실 자격이 없는 건 세 분 다 마찬가지세요.”
미라벨라는 자신을 덮고 있는 새하얀 시트를 들춰 보았다. 산사태로 흙더미에 깔렸던 몸은 먼지 하나 없이 말끔했고, 깨끗한 새 잠옷으로 갈아입혀져 있었다. 별장에는 따로 시중드는 하녀가 없다. 누가 그녀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혔는지는 자명했다. 하, 그녀는 짧은 숨을 내쉬며 며칠 전까지 제 오라버니였던 세 남자들을 노려보았다.
“만약 저를 진짜 동생이라 생각하셨다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몸에 손을 대지도 않으셨겠지요.”
“제발, 벨라! 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속아 넘어가는 제가 우습고 재미있으셨나요? 지난 2년간 심심하지는 않으셨겠어요.”
“벨, 내가 한마디만 해도 될까?”
“아니요.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라이오넬 교수님.”
“…….”
“다정한 척하면서 또 무슨 거짓말을 하시려고요.”
여기서 무슨 변명을 더 할 수 있을까. 따사로운 봄 햇살처럼 늘 한결같이 다정했던 여동생은 영영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만든 거였다. 그녀의 차가운 태도에 세 오라버니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르시엘이 간절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미라벨라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그들은 지금껏 그녀를 기만하고 속인 데 대한 형벌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각오했던 사실이지만, 뻔뻔하게도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 왔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눈이 마주치면 밝게 웃던 그녀의 미소는 아마도 다신 보지 못할 것이다. 무조건적인 믿음이 담긴 애정 어린 눈빛과 오라버니라 부르며 따르던 사랑스러운 목소리도. 이제 두 번 다시는.
“이만 나가 주세요. 쉬고 싶어요.”
“네겐 아직 간호가 필요해. 조용히 옆에 있을게.”
“왜요, 에펠 공국에서 건강한 공녀를 요구하던가요? 정략혼을 성공시키기 위해 지금껏 마음에도 없는 일까지 하셨는데, 그게 물거품이 될까 염려되어 그러시나요?”
“미라벨라.”
레이든이 굳은 얼굴로 이름을 불렀다. 그는 한사코 마주 보려 하지 않는 그녀와 눈을 맞추려 애를 썼다. 아주 짧은 순간, 겨우 시선이 맞물렸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를 먼저 외면하며 냉정하게 고개를 돌린 건 미라벨라 쪽이었다. 뭐라 말할 듯 입을 열었던 그가 이내 그만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다, 쉬도록.”
“벨라, 내가 미안해, 정말…….”
“나가세요.”
참지 못하고 눈가를 붉게 물들인 르시엘이 앞으로 나섰으나 그녀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에일레스는 차갑게 변한 미라벨라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서던 그가 르시엘의 어깨를 툭 쳤다.
“르시엘, 벨이 쉴 수 있게 이만 나가지.”
“알았어…….”
“혹시라도 필요하면 언제든 불러 줘. 밖에 있을 테니까.”
“…….”
하지만 그녀가 도움을 요청하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는 사실은, 거기 있는 네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 * *
어느덧 별장 주위에는 짙은 어둠이 내렸다. 며칠째 하늘이 무너질 듯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달빛조차 사라진 고요한 밤. 온몸이 욱신거리는 아픔에 미라벨라는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났다.
“읏, 하아…….”
밤만 되면 유난히 더 심해지는 고통.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몸에 깊은 마음의 상처가 겹쳐 그녀를 괴롭혔다. 창가 옆의 서랍 속에 약이 있다는 걸 알았지만 거기까지 걸어갈 힘도 없어 그대로 누워 있었다.
‘아, 머리가…….’
열 오른 머리가 몹시 어지럽고 꿈속을 부유하는 듯 아득했다. 그 속에서도 무거운 마차 여러 대가 상처 입은 몸을 으스러뜨리며 위를 지나는 듯한 통증이 선명히 느껴졌다. 미라벨라는 어떻게든 정신을 다잡아 보려 노력했지만 고통에 잠식된 눈앞은 점차 흐릿해졌다.
“으응…….”
“쉬이, 착하지.”
희미한 의식 사이를, 누군가의 다정한 손길이 파고들었다. 조용히 문이 열리고 침대 곁에 걸터앉은 누군가가 미라벨라의 머리를 제 무릎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우리 아가, 약 먹자…….”
토닥이는 손길은 따뜻했고 나지막이 달래는 낮고 허스키한 음성은 꼭 달이 잠든 밤처럼 깊었다. 잠시 후, 쓴 맛 나는 물이 담긴 작은 스푼이 입가에 닿았다. 알약을 가루로 내어 물에 갠 것 같았다.
“……감히 입으로 먹여 줄 만큼 뻔뻔하진 못해서.”
“흐읍, 싫어…….”
잠결임에도 혀끝에서 느껴지는 강한 쓴맛에 그녀는 새하얀 이마를 찡그렸다. 으응…… 본능적으로 도리질하며 혀로 밀어내고 그대로 뱉어 내는 바람에 입술 사이로 약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거 먹어야 안 아파, 응?”
그 후로도 끈기 있게 몇 번이나 더 입가로 다가오는 스푼을 고갯짓을 하며 쳐 내자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벨, 왜 그래……. 지금은 정말 마나도 쓸 수 없단 말이야.”
“읏.”
“그럼 이건 정말, 약을 먹여 주기 위해서야. 그러니까…….”
“……흐읍.”
“부디 용서해 줘.”
이제 마지막일 테니까.
너무나도 잘 아는 감촉. 어린아이를 안듯 아주 조심스럽게 머리를 감싸 안고,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위로 겹쳐졌다. 비스듬히 닿은 채로 잠시 망설이던 그가 천천히 갈라진 틈을 파고들었다. 익숙하고 따스한 숨결과 함께 그가 대신 머금었던 약물이 입 안으로 스며들어 왔다.
“으음.”
“하읍, 아아…….”
그의 타액과 섞인 약은 더 이상 쓴맛이 나지 않았다. 도리어 마주 얽힌 혀끝부터 꼴깍꼴깍 타고 넘어가는 목 안까지 죄다 꿀에 절여진 듯 달았다. 미라벨라는 본능적으로 온기가 느껴지는 품을 파고들었다. 약물이 완전히 타고 넘어간 걸 확인한 그가 몸을 떼려 했지만 따스한 체온이 멀어지는 게 싫어서, 아직 힘이 들어가지 않는 팔을 뻗었다. 목을 끌어안고 매달리자 상대가 잠시 멈칫하며 굳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촉, 영원히 놓아 주지 않을 것 같았던 더운 혀끝이 스르륵 풀려 멀어지고, 젖은 입술이 가벼운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그렇게 길고도 짧았던 그들의 마지막 입맞춤은 끝이 났다.
“……고마워, 벨.”
밀어내지 않아 줘서.
부드러운 손수건을 쥔 손이 다가와 입가를 꼼꼼히 닦아 주었다. 마치 자신이 남긴 흔적마저 매정하게 지워 내어 없던 일로 만들려는 듯.
“좋은 꿈 꿔.”
탁.
침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가 미련 없이 방을 떠났다. 에일레스가 나간 뒤에도 미라벨라는 움직이지 않고 한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서서히 약 기운이 돌아 나른해졌다. 어느 정도 고통이 사라진 몸에 옅은 잠기운이 몰려왔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미라벨라는 욱신거리는 팔다리를 시원하게 주물러 주는 손길을 느끼고 얕은 선잠에서 깨어났다. 경직된 근육이 뭉쳐 있던 종아리부터 자그마한 발끝, 발가락 하나하나까지. 크고 단단한 손이 마사지하듯 세심하게 그녀의 전신을 문지르고 있었다.
“……벨라.”
“으응…….”
“벨라,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네게 솔직하게 말했어야 했는데……. 꽉 잠긴 듯한 굵은 저음이 이상하게 끝이 갈라진 것처럼 들렸다. 뒤이어 매끄러운 종아리 위로 뚝뚝 떨어지는 뜨거운 눈물. 미라벨라의 작은 발을 마사지해 주고 있는 커다란 남자는, 그녀가 깰까 봐 소리를 죽여 가며 마치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네가 웃는 얼굴 같은 건 못 보겠지?”
“…….”
“절대, 용서해 달라고는 못 할 테니까…….”
르시엘의 숨이 다시 한번 크게 일렁였다. 미라벨라는 그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욱신거리던 자리를 정확히 짚어 내어 꾹꾹 눌러 주는 손길은 무척 시원했다. 어느 순간 깊은 잠에 빠져들게 할 만큼.
그렇게 푹 자고 난 뒤 이른 새벽에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누군가 밖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쪽을 바라보니 응접실로 통하는 방문이 약간 열려 있었다.
* * *
“미라벨라는?”
“아까 깊이 잠들었어.”
“그래…….”
그녀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잠들지 못한 이른 새벽. 레이든이 두 동생들을 돌아보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 무척.”
침착한 어조였으나 그의 음성은 가라앉은 응접실의 분위기만큼이나 무거웠다. 라이오넬 공녀의 초상화를 본 뒤, 그녀가 아니면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겠다 고집을 피웠다는 에펠 공국의 후계자. 그가 대제국의 문물을 견학한다는 빌미로 극비에 르페르트의 황궁을 방문했다는 건 확실히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최근 캄포 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데다 녹스 황태자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어 동맹이 더 절실해진 황제가,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을 크게 환영했다는 사실도.
“지금 황실 내에서는 국혼을 앞당겨 하루빨리 에펠과의 협정을 강화시키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모양이야. 그게 폐하의 뜻이기도 하고. 그러던 차에 이 혼약을 적극 원한다는 뜻을 먼저 밝혀 온 공국의 후계자가 황궁에 머무르게 되었으니…….”
“……조만간 벨라를 들여보내라는 전갈이 올지도 모르겠군.”
“그래, 어쩌면 며칠 안으로 당장.”
그 말에 르시엘이 낮게 침음했다. 말없이 듣고 있던 에일레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이, 그간 극비에 부쳐져 있던 공국의 후계에 대해 최근 이상한 소문이 돌던데. 들어 봤어?”
“……함께 침실에 든 여자가 죽어서 나왔다는 소문 말인가?”
“그 외에 살아 나온 여자들 중에도 어디 한두 군데가 망가지거나 아예 미쳐 버린 경우가 숱하다는 소문이야. 에펠 공국에서 그렇게까지 후계자에 대해 감추려 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고.”
“들었어. 그에 대해서는 에펠 쪽에 심어 둔 사람을 통해 꾸준히 알아보고 있었으니까. 아직 널리 퍼지지는 않았고 고위 귀족들 사이에서만 암암리에 도는 소문인 것 같더군.”
“하. 그런 새끼한테 절대 벨라를 넘길 수는 없어.”
“당연히.”
레이든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침묵이 흐른 뒤, 그가 에일레스 쪽을 돌아보았다.
“에일레스, 이제부터 네가 라이오넬 공작이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갑자기가 아니야. 이미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지.”
여전히 어이없는 기색이 역력한 에일레스를 향해 그가 단호하게 못 박았다.
“에펠 공국과의 혼사가 갑작스럽게 어그러지면 양국 관계가 어찌 될지 모르지. 하지만 어지러운 정세가 한동안 지속될 거란 사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어. 이런 상황에서 최선은 타 우방국과의 동맹이라도 강화하는 방법뿐.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난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캄포 제국과의 조속한 국혼을 정식으로 청할 생각이다.”
“뭐?!”
“레이, 미쳤어?”
“트릴로체 황녀의 하렘에 제 발로 들어가겠다고?”
“……우방국이라지만 현재로서는 언제든 칼을 겨누어도 이상할 게 없는 알량한 관계가 아닌가.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혼맥이겠지. 다행히 이 국혼을 통해 지난번 맺었던 협약의 조건을 최대한 자국에 유리하게 수정시킨다면, 에펠과의 일은 그걸로 넘어갈 수 있을지도.”
“형, 농담하는 거지?”
“지금 그럴 여유가 있나? 에일레스, 여러 번 설명할 시간 없으니 잘 들어. 르시엘도.”
레이든은 잠시 말을 끊고 동생들을 한 번 둘러보았다.
“내 집무실 책상의 첫 번째 서랍에는 가주가 꼭 보관해야 할 중요한 서류와 인장이 있다. 그 열쇠는 끝에서 두 번째 책상의 다섯 번째 열에 감춰져 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내가 만들어 둔 매뉴얼도 함께 있어. 나중에 네 식대로 다시 만들더라도, 당분간 루틴의 업무는 그걸 보고 처리하면 큰 어려움은 없을 것 같군.”
“이봐, 레이!”
“두 번째 서랍 안의 서류들은 이달 안에 반드시 끝내야 하는 것들. 지금 들어가 있는 건 내가 이미 확인을 끝냈으니 날인만 해도 괜찮아. 세 번째 서랍은 좀 더 여유가 있으니 다시 알려 주지. 그리고 수행 비서들이 아침마다 보고하는 사항들 중에는…….”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한 얼굴로 그는 에일레스에게 급한 일들만을 빠르게 인계했다. 말을 끝내려던 레이든이 르시엘 쪽을 보며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그리고 상황이 좀 정리되면 엘이 개명하는 걸 허가해 줘.”
“하, 진짜 장난해?”
“그렇게 싫어했는데, 진작 허락해 줄 그랬군.”
“지금 그런 말 할 때야?”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로 르시엘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형이 그 빌어먹을 캄포 제국에 가게 생겼는데 그딴 게 대수냐고. 집어치워, 이름 같은 건 르시엘이 아니라 엘사나 엘리자베스라도 이젠 상관없으니까.”
감정이 북받친 듯 르시엘이 격한 어조로 말했다.
“차라리 나한테 다 뒤집어씌워. 내가 벨라를 데리고 국외로 나갈 테니까. 내가 그 애한테 눈이 돌아 황제 폐하의 명을 어기고, 그만 납치해서 달아났다고……. 어차피 완장 떼면 용병이나 기사나 하는 짓은 다를 것도 없어. 이왕 이렇게 된 거, 적당히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면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엘, 그렇게 너 하나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야. 너는 널 자식처럼 아껴 주신 네 고모님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나?”
레이든이 조용히 타일렀다.
“황제 폐하와도, 황태자와도 관계가 좋지 않은 지금, 그분의 입지가 불안하다는 건 너희들도 알 거다. 뒤에서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도 그렇고. 그런 중에 그분께 힘이 될 수 있는 건 가문뿐인데 이번 일로 책이 잡히게 된다면 황후 폐하의 입장이 무척 곤란해져. 우리에겐 어머니나 마찬가지인 고모님께 힘이 되어 드리지는 못할망정 누가 되어서야 되겠나.”
“…….”
“그리고, 황태자 역시…….”
마침내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기 전,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에게는 아직 공식적으로 황후 폐하의 양자라는 것 외에는 다른 뒷배가 없지. 모자간의 사이가 멀어진 것과 별개로, 황후 폐하의 입지가 불안해지면 호시탐탐 황위를 노리는 방계 쪽에서 분명 그와 연결시켜 끌어내리려 할 거다. 솔직히 녹스와 우리는 이제 완전히 틀어졌다고 봐야겠지만……. 실수를 했다고 해서 형제를 버릴 수는 없지 않나.”
“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에일레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됐어, 캄포 제국에는 내가 갈게. 형은 여기 있어야지. 라이오넬 공작이잖아.”
“에일레스.”
“…….”
“네 말대로 공작이니까, 내가 가야 하는 거다.”
그가 담담한 어조로 차분히 말을 이었다.
“우리 라이오넬가는 공신의 가문으로 제국으로부터 작위를 받아 대대로 많은 권리를 보장받아 왔지. 내가 날 때부터 누려 온 모든 것들은 이유 없이 주어진 게 아니야. 나에겐 제국의 공작으로서 이런 상황에 책임을 지고 충성을 다할 의무가 있다. 그건 작위를 승계할 때 이미 맹세한 일이니, 아무런 이견이 없어.”
“레이, 내 말 좀 들어 봐.”
“시간이 늦었군. 둘 다 그만 자.”
“형!! 그래도 이건…….”
“새 이름이 정해지면 편지해라, 르시엘.”
이만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레이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뭐라 다시 입을 열려 하는 르시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할 말을 잃은 동생들의 곁을 지나쳐 갔다.
* * *
“미라벨라.”
듣기 좋은 울림을 지닌, 낮은 중저음이 곧은 목울대를 울리며 흘러나왔다. 침착하고 익숙한 어조였다.
“……네게 변명하지 않겠다, 아무것도.”
깊은 잠에 빠진 그녀는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할 테지만, 그는 마치 고해 성사를 하듯 차분한 음성으로 고백했다.
“처음에는, 단지 정략혼에 이용할 생각으로 널 데려온 게 맞아. 누군가의 인생을 마음대로 흔든다는 사실에 별다른 죄책감이 없었다는 걸 부정하지 않지.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아니었다.”
레이든이 손을 뻗어 잠든 미라벨라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새하얀 이마 위로 흐트러진 백금발을 잠에서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넘겨 주는 동작이 더없이 자상했다. 그녀에게 매사에 엄격했던 큰오라버니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앞으로 나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주어서라도 네가 행복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
“그게 한때나마 너의 보호자였던 사람으로서의 도리일 테지.”
하얀 이마 위에 흐트러져 반짝이던 머리카락이 치워진 자리에 그의 입술이 조용히 내려앉았다.
“믿지 않겠지만, 네가 있었던 시간이 아무 의미도 없다는 말은 결코 진심이 아니었어.”
눈물이 마른 매끄러운 두 뺨 위에도 천천히, 한 번씩.
“너와 함께 지낸 날들은, 늘 의무나 책임 같은 것들에만 매몰되어 살아가던 나를 진정으로 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 준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러니 앞으로 평생을, 네가 내게 만들어 준 그 소중한 순간들을 추억하며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지.
“결국 나는 네게 좋은 남자도, 좋은 오라비도 될 수 없겠지만, 난…….”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나는, 우리는, 진심으로 너를…….”
낮게 가라앉은 음성 끝에 들릴 듯 말 듯 희미하게 마지막 단어가 떠도는 것 같았다. 끝내 말하지 않고 그대로 삼켜 버린 레이든이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쓰게 웃었다.
“하, 양심이 있으면 이 말을 하는 것도 사치겠군.”
그는 대신 잠든 미라벨라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고 돌아섰다.
“잘 자, 미라벨라.”
탁.
긴 다리를 움직여 입구 쪽으로 향하는 기척이 느껴졌고, 곧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아무도 없는 조용한 침실 안에서 미라벨라는 조용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어두운 방의 천장이 망막에 고요히 담겼다.
‘미라벨라. 나는, 우리는, 널…….’
그 밤, 그가 끝내 하지 못한 마지막 말은 대체 뭐였을까…….
* * *
“……벨라?”
다음 날 아침, 굳은 얼굴로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르시엘이 방에서 나오는 미라벨라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오라버니들의 진실을 알게 된 이후, 그녀가 스스로 침실 밖으로 걸어 나와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다.
레이든은 나갈 준비를 마치고 막 황궁으로 출발하려던 차였다. 현관 입구에 서 있던 그와 에일레스가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며칠 만에 밖으로 나온 미라벨라는 별 장식이 없는 단순한 외출용 드레스 차림이었다.
“미라벨라, 대체 어딜 가려고…….”
“라이오넬 공작님.”
“벨라…… 설마 우리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아서…….”
정말 이곳을 떠나려는지, 그녀의 손에는 간소한 짐이 담긴 여행용 가방이 들려 있었다.
“에펠 공국과의 혼약은 어차피 결정된 사안이었으니 무르기 쉽지 않겠지요. 차라리 저를 데리고 황제 폐하께 가서 국혼을 서둘러 달라고 말씀드려 주세요.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으니까.”
“미라벨라, 그 일이라면 내 선에서 무마할 테니 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원치 않는 혼약은 하지 않아도 괜찮아.”
“이제 와서 무슨 말씀이세요? 원래 그런 용도로 쓸 목적으로 절 데려오셨던 게 아니었나요?”
“……그래, 처음엔 그랬지. 하지만 이젠 아니다.”
“제겐 인생이 달린 일인데, 뭐든 참 쉽게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서 좋으시겠어요. 하지만 오갈 데 없는 고아를 데려와 무려 공녀로 만들어 주셨는데, 그 값은 해야지요. 하긴, 벌써 값은 치렀으려나요? 제가 그동안 대 드린 몸값만으로도…….”
“벨!!”
에일레스가 약간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대 주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
“그럼,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까요? 그 교육이 애초에 제가 원한 게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요.”
그 어느 때보다 매서운 분위기의 미라벨라가 차갑게 그들을 쏘아보았다.
“……작정하고 저를 속인 사람들과 더 이상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 얼굴을 마주하는 것조차 역겨워요. 남의 인생을 체스 말처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몸을 섞었다고 생각하니 저 자신까지 싫어질 지경이라서요. 어디 가서 뭐가 되든, 오라버니들의 동생인 것보다는 더 낫겠어요.”
“그래. 미안하다, 벨.”
에일레스의 황금 안이 스르륵 풀어졌다. 그가 힘을 잃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말 미안해. 하지만 에펠과의 정략혼은 안 돼. 대신 다른 원하는 걸 말하면 다 들어줄게.”
“미라벨라, 유학을 간다거나 다른 해 보고 싶은 일이 있다면 지원해 주겠다. 살고 싶은 나라가 있으면 그곳에 정착하도록 돕고, 만약 결혼을 하고 싶다면 외국의 귀족 중 네 마음에 들 만한 좋은 남자를 찾아 줄 테니 자유롭게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 그런 뒤엔 다신 네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
“……한번 생각해 볼게요, 먼저 친구를 만나러 다녀온 뒤에요.”
“친구?”
“펠튼 백작가에 좀 다녀오려고 해요.”
펠튼 백작가는 미라벨라가 성 루베이도 학원에서 지내던 시절, 거의 유일한 친구였던 레이첼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백작가의 차남과 결혼한 그녀가 아기를 가졌다는 말은 그들도 전에 미라벨라에게 들었었다. 기간을 헤아려 보니 거의 산달이 다 되었을지도.
“곧 예정일이 다가오니 그 전에 얼굴을 보려고요. 백작가에서 하룻밤 머무른 뒤 내일 돌아올게요. 감시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으니 호위 기사는 절대 붙이지 마시고요.”
“하지만, 벨, 그건 너무 위험…….”
“알겠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이든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하지.”
“그럼 다녀올게요.”
“르시엘, 네가 미라벨라를 바래다주고 와.”
다행히 미라벨라는 펠튼 백작가까지 데려다주는 것까지는 거부하지 않았다. 르시엘이 그녀와 함께 떠난 뒤, 레이든은 소파 등받이에 깊게 몸을 묻고 앉았다.
‘황제 폐하를 알현하려던 걸 미뤄야 하나.’
캄포 제국의 황녀와 결혼하겠다는 뜻을 밝히면 상대측에서는 분명 최대한 일정을 서두르려 할 것이다. 갑작스럽게 떠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 가능한 업무를 미리 처리하고 인계 자료를 만드느라 그는 최근 잠시도 쉴 시간이 없었다. 며칠째 식사도, 수면도 제대로 취하지 않았더니 눈이 소금을 뿌린 양 따가웠다.
‘……그래도 내일 미라벨라가 무사히 귀가하는지는 확인해야겠지.’
같은 시각, 미라벨라와 같은 마차를 타고 그녀를 펠튼 백작가에 데려다주던 르시엘은 가는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오래전 그녀가 처음 황궁에 가던 날, 그때는 미라벨라가 줄곧 그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렸는데 오늘은 반대의 상황이 된 것이다.
“저기, 벨라…….”
말없이 창밖만을 응시하는 그녀의 얼굴은 여전히 싸늘했기에 차마 말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백작가에 도착하기 전까지 미라벨라는 르시엘이 먼저 말을 걸 때만 짧은 단답으로 답했을 뿐, 그에게 제대로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마침내 펠튼 백작저의 정문 앞에 마차가 도달했을 때, 그가 내리는 것을 도와주려 얼른 손을 뻗었으나 미라벨라는 몹시 불쾌한 얼굴로 그것마저 외면해 버렸다. 끝까지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정문을 통과하여 사라지는 그녀를 르시엘은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레이첼!”
“어머, 미라벨라! 당분간 놀러 오는 게 어렵다고 하지 않았어?”
안으로 들어서자 연락을 받아 기다리고 있던 레이첼이 놀란 눈으로 맞아 주었다. 그녀의 남편인 펠튼 공자가 내일이라도 당장 아기를 낳을 것처럼 배가 부른 레이첼을 자상하게 부축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을 약속하고, 두 사람을 쏙 빼닮은 아기를 낳아 함께 기르는 행복한 삶……. 그런 다정한 미래는 제게는 결코 오지 않을 것 같았기에 어쩔 수 없이 씁쓸한 마음이 들었으나 미라벨라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레이첼…… 나 네게 부탁이 있어.”
“부탁?”
호위 기사를 붙이지 않겠다고 했지만, 분명 그녀의 안전을 걱정해 오라버니들이 보낸 사람이 저택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나를 백작저에서 몰래 빠져나가 황궁으로 갈 수 있게 해 줘.”
“미라벨라,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오랜 시간 자신을 속여 온 오라버니들에게 미운 마음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처음부터 거짓으로 시작된 관계였다는 사실에 받은 충격도 컸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모두 덮어 버릴 정도로 큰 건, 스스로도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사랑.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라벨라는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있었다.
폭우로 무너진 산이 그녀를 덮쳤던 날. 새카만 흙이 비 내리는 하늘을 가리며 머리 위로 무겁게 쏟아져 내리고, 어느 순간 뒤로 기우뚱 넘어가며 축축한 땅이 제 몸을 끌어안았을 때.
‘추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카맣고 무거운 암흑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건.
오라버니, 보고 싶어요……. 검은 흙으로 가로막힌 입 밖으로는 아주 작은 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으나, 분명 미라벨라는 마음속으로 그들을 불렀다. 그녀가 알던 모든 세상이 암흑 속에 뒤덮인 순간. 우습게도 유일하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사람은 자신을 속인 세 오라버니들이었다.
모든 게 마지막이라 생각하자 도리어 솔직해졌다.
깜박, 깜박. 서서히 사그라들며 꺼져 가는 게 느껴지는 생명의 불꽃. 무섭고, 괴롭고, 억울하다는 생각도 물론 들었다. 하나 그 모든 것을 이기고 가장 먼저 수면 위로 떠오른 감정의 정체는 바로.
‘오라버니들을, 사랑해도 되는 거였구나…….’
안도감.
피가 섞인 오라버니를 남자로 느끼고 있다는 괴로움과 죄책감이 모두 사라지자 일시에 편안해졌다. 미라벨라는, 마음껏 그들을 사랑해도 되는 것이었다.
비록 애초부터 불순한 목적으로 비롯된 관계였고 오라버니들이 그녀를 속이고 기만한 건 사실이지만, 지난 2년간 그들이 보여 준 모습들이 전부 진심이 아니었을 거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어젯밤, 열린 문틈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속마음을 알게 된 미라벨라는 마침내 오라버니들을 용서하기로 했다.
에펠 공국의 후계자가 어떤 사람이든 그녀는 자청하여 밤을 보내고 정략혼을 치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는 오라버니들이 몹시 곤란해질 테니까. 자신이 한 모진 말들이 뾰족한 칼날이 되어 그들을 할퀴었을 거라 생각하면 무척 슬펐다. 하지만 이렇게 정을 끊어 내야만 자신이 떠났을 때 오라버니들의 마음이 덜 아플 거라 생각하니 조금은 괜찮아졌다.
‘차라리 다행이야. 그래야 내가 없어도 오라버니들이 슬퍼하시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너무 빨리 잊어버리면 서운할 것 같은데.
끝까지 착한 여동생이 되려고 노력했으니까, 그러니까…….
미라벨라가 오라버니들 곁에 함께했던 시간을 어느 정도는 기억해 주세요…….
<미라벨라. 나는, 우리는, 널…….>
마음속에 얹혀 있던 무거운 돌덩이 같은 응어리가 순간 사르르 녹아내렸다. 비록 레이든이 하려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지만, 미라벨라는 왠지 알 것 같았다.
‘……오라버니, 사랑해요.’
이걸로 충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숭고한 결심. 지금껏 늘 타의에 의해 휘둘리는 삶을 살아온 그녀가, 처음으로 분명한 제 의지로 택한 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