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Ⅶ. 둘만의 비밀 수업 (8/17)

라이오넬 공작가의 가정 교육 지침서

3권

Ⅶ. 둘만의 비밀 수업

Ⅷ. 내가 모를 줄 알았어?

Ⅸ. 데뷔탕트, 젖어 든 밤

Ⅶ. 둘만의 비밀 수업

<……으윽, 가까이 오지 마!>

고급스러운 가구로 채워진 침실. 진녹색 휘장이 내려진 넓은 침대 위에는 꿀을 녹인 듯 진한 금발 머리의 남자가 잠들어 있었다.

다소 창백해 보일 정도로 흰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일까. 깊이 잠든 와중에도 그는 끊임없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질렀다.

<녹스, 넌 정말 뻔뻔하구나. 비천한 피를 타고난 주제에 감히 고귀한 척을 하다니.>

<스스로 네게 어울리는 자리로 돌아가는 게 좋을걸? 시궁창 같은 곳으로나 말이지.>

<아하하!>

짙은 경멸이 담긴 웃음소리. 어디선가 길게 뻗어 온 검은 손이 그의 머리에 올려진 황태자의 관을 빼앗으려 들었다. 그가 피하려 할 때마다 하나둘씩 늘어난 손은 어느덧 주위가 시커멓게 보일 정도로 많아졌다. 결국 그는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헉, 허억……!>

<거기 서, 녹스! 달아나 봤자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넌 어차피 비참하게 죽게 되어 있다니까?>

<순순히 포기하는 게 편할 텐데.>

그가 아무리 달아나도 그들은 계속해서 뒤쫓아 왔다.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그를 놀리듯 몇 걸음 간격으로 따라오며 키득거렸다. 우욱! 그는 점차 숨이 가빠 오는가 싶더니 갑작스럽게 토기가 치밀었다.

<허억, 허억, 큭!>

그는 아이처럼 몸을 말고 웅크린 채 정신없이 밭은 숨을 토했다. 이윽고 기침이 멎은 뒤 입을 가렸던 손을 떼어 냈을 때, 그의 손바닥은 붉은 피로 흥건하게 물들어 있었다.

<으악, 아! 안 돼!!>

<아하하하하하!!>

<녹스, 넌 죽을 거야, 널 죽일 거야!>

바로 그 순간, 쇠를 긁는 듯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검은색의 긴 손톱을 세운 수십 개의 손들이 동시에 뻗어 와 그를 덮쳤다.

“……아악!”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그가 잠에서 깨어나자, 황태자 궁의 시종들이 밖에서 소리를 듣고 뛰어 들어왔다.

“황태자 전하! 괜찮으십니까?”

“허억, 헉…… 다들 나가!”

10대 시절 발병한 녹스 황태자의 원인 모를 병은 성년이 된 이후로 점점 더 깊어져 최근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붉은 피를 토해 냈다. 게다가 어느 순간부터 매일같이 찾아온 고통스러운 악몽. 악몽 탓에 수면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니 안색은 늘 파리했고 그의 눈 아래에는 검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어린 날의 그는 비교적 쾌활한 소년이었으나 아픈 몸은 정신마저 서서히 병들게 하여 그를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었다.

“당장 전하의 약을 가져와라!”

가쁜 숨을 고르는 동안 급하게 준비된 약이 침실로 들여졌다. 약을 받아 들고 막 한 모금 마시려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내 약이 바뀌었나? 평소 먹던 것과 좀 다른 것 같은데.”

“저, 황태자 전하. 사실 그 약은…….”

약을 들고 온 시종이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고 망설였다.

“당장 말해.”

“그것이, 황후 폐하께서 직접 보내신 약입니다.”

쨍그랑!

그 말을 듣자마자 황태자는 마시던 약 그릇을 그대로 집어 던졌다. 바닥에 부딪힌 그릇이 처참히 깨어지며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안에 담긴 녹색 액체가 두꺼운 카펫을 엉망으로 적시는 광경을 그는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 황태자 전하……!”

“당장 갖다 버려.”

“전하, 이것은 황후궁에서 어렵게 공수한 귀한 약재로 만든 몹시 귀한 약이니 꼭 드시라 하셨습니다. 먼 지방에서 전하와 같은 병을 가진 환자를 찾아 시험해 보았는데, 비록 완치되진 않았지만 피를 토하는 증상에는 분명 효과를 보았다고 합니다.”

“하, 여기에 뭐가 들어 있을 줄 알고.”

그러나 녹스의 반응은 여전히 차가웠다.

어린 시절,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루이넬라 황후가 친어머니인 줄로만 알고 자랐다.

<황태자 전하! 저는 전하의 외할머니 되는 사람입니다. 가엾은 제 딸, 전하의 생모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불임인 황후께서 황제 폐하의 아들을 낳은 제 딸을 죽이고 그 아이를…… 전하를 빼앗아 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전하께서 앓고 계신 그 병이 왜 생겼는지도…….>

감춰져 있던 어두운 진실을 알기 전까지는.

* * *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음란한 가정 교육의 첫 수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지도 어느덧 석 달 가까이 지난 어느 날. 미라벨라는 황궁 내부의 약도가 그려진 작은 쪽지 하나를 들고, 붉은 벽돌로 지어진 큰 건물 주위를 아까부터 서성이고 있었다. 초록색 덩굴식물이 늘어진, 높다란 담 아래에 멈춰 선 그녀는 손에 들린 약도를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여기가 맞는 것 같은데…….”

그녀가 정말 황실 기사단의 숙소를 제대로 찾아오긴 한 듯, 높은 담 안쪽 어딘가에서 기사들의 쩌렁쩌렁한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미라벨라가 오늘 황궁에 온 건 르시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막내, 언제 한번 올래?>

<네? 어디를요?>

<나 일하는 곳.>

며칠 전, 뤽셀어 회화 수업을 마치고 막 방을 나오려는 미라벨라를 그가 붙잡았다.

<오라버니가 일하는 곳이요?>

<어.>

르시엘의 직장이라면, 황실 기사단이었지만…….

갑자기 왜?

무뚝뚝한 얼굴에서는 쉽게 의도를 읽어 낼 수 없어 미라벨라는 즉답하지 못했다.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르시엘이 빠르게 덧붙였다.

<바쁘면 안 와도 되고.>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훈련 일정 때문에 다음 주에는 내가 쭉 집에 못 들를지도 몰라. 그럼 일주일이나 못 보는 거니까…… 음,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왠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말하던 그는, 미라벨라가 입을 열기도 전에 서둘러 이유를 보탰다. 사실 대답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라 그럴 틈이 없었던 것뿐이었는데.

<다른 뜻은 아니고, 아! 그렇지. 외국어 회화라는 건 검술과 비슷한 구석이 있어서 며칠만 쉬어도 실력이 무뎌지는 법이거든. 그런데 지금 내가 집에 갈 수 없는 상황이니까…… 네가 만나러 와 주면 좋지 않을까.>

<아! 네네.>

뤽셀어 수업 일정에 차질이 생길까 봐 그러셨구나, 그제야 오라버니의 의도를 파악한 미라벨라가 햇살처럼 밝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오라버니! 실은 최근 들어 회화 실력이 좀 정체된 기분이라 고민이었든요. 책에서 보니 그럴 때는 공부하는 장소를 한번 바꿔 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하더라구요.>

<어, 그래. 뭐…… 그렇지.>

비록 그 말을 들은 르시엘의 표정이 다소 떨떠름한 빛을 띠며 묘해지긴 했지만…….

하여 레이든으로부터 외출 허락을 받은 미라벨라는 황궁으로 그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보안이 철저한 황궁 내에는 일정 구역 너머로 마차의 출입이 불가했고 방문 허가증을 지닌 당사자 외에는 시녀나 호위 기사도 동행할 수 없었다. 대륙의 반을 차지한 대제국의 황궁답게 규모가 무척 넓었으나, 미라벨라는 르시엘이 그려 준 약도를 보고 길을 찾아 황실 기사단의 훈련장 근처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영애, 이곳은 외부인 출입 통제 구역입니다. 혹시 허가증을 가지고 계십니까?”

“네, 잠시만요.”

정문 입구에 다다르자 경비를 서던 두 명의 병사들이 미라벨라의 앞을 막아섰다.

<플라타너스 길을 지나면 붉은 벽돌담이 보일 거야.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정문이거든. 입구에서 지키는 병사들에게 이걸 보여 주면서 라이오넬 경을 찾아왔다고 해.>

미라벨라는 르시엘이 출입 허가증을 건네주며 했던 말을 상기했다. 하지만 들고 온 가방을 열어 소지품 사이를 뒤적이던 그녀는 곧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아, 중간에 가방을 바꾸는 바람에…….’

르시엘과 수업할 외국어 회화 교재와 과제물을 이것저것 챙기다 보니 처음 골랐던 가방이 좀 작았다. 그래서 가방을 다른 걸로 바꾸겠다고 말해 뒀는데, 담당 하녀가 안쪽의 작은 포켓에 따로 챙겨 둔 출입 허가증을 옮기는 걸 빠뜨린 모양이었다.

“죄송하지만 출입증이 없으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미라벨라가 이제 와 그냥 되돌아갈 수도 없어 난감한 얼굴로 고민하던 차였다.

“무슨 일이지?”

“단장님! 오셨습니까.”

미라벨라의 뒤에서 키가 큰 은발의 여성 기사가 나타났다. 입구의 병사들이 그녀를 발견하고 일제히 경례 자세를 취했다.

“레이디께서 출입 허가증을 두고 오셨다고 하셔서 방문이 어렵다고 말씀드리던 중이었습니다.”

“죄송해요, 오라버니께서 주신 걸 집에 두고 온 것 같아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마차가 세워져 있는 황궁 입구까지는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또 르시엘이 기다릴 것도 걱정이 되었지만, 원칙을 어기고 들여보내 달라고 우길 수는 없어 미라벨라가 되돌아가려던 그때였다.

“잠깐, 영애.”

병사들에게 사과하고 막 돌아서려는 그녀의 손목을 은발의 여기사가 꽉 붙잡았다.

“오라버니? 못 보던 얼굴인데, 혹 우리 기사단원의 가족 되십니까.”

“저, 라이오넬 경이요.”

“라이오넬? 혹시 르시엘?”

“네, 맞아요.”

“아.”

날카로운 눈매 탓에 다소 차갑게 느껴졌던 표정이 순식간에 무장 해제된 것처럼 밝아졌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에일레스의 것보다는 좀 더 잿빛이 많이 섞여 회색과 더 비슷한 은발이었다. 단발에 가까운 짧은 머리카락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나른하게 반짝였다.

“르시엘이 오빠가 됐다고 하더니…….”

은발의 여기사는 호감이 역력한 얼굴로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말하는 투로 보아 르시엘과는 꽤 친밀한 사이인 것 같았다. 그녀가 기분 좋게 한 손을 내밀었다.

“난 델리나야. 황실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고, 르시엘과는 친구이기도 하지. 아, 말 놔도 되나? 미안, 너무 일찍 물어봤네. 가끔 다른 기사단원들의 동생들도 들르는데 다 편하게 말을 트고 지내서.”

“네, 물론 괜찮아요! 미라벨라라고 불러 주세요.”

“그래, 날 따라올래? 르시엘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줄게.”

델리나는 입구를 지키던 병사들에게 자신이 갖고 있던 여분의 출입증을 건네며 지시했다.

“이분은 내 손님인 걸로 해 둬.”

“예, 알겠습니다, 단장님.”

“미라벨라라고 했지? 가자.”

당당한 체격에 황실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그녀의 모습은 무척 근사하게 보였다. 델리나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잡으며 미라벨라는 동경의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저, 델리나 경은 르시엘 오라버니와 가까운 사이신가요?”

“그럼, 난 그 새끼가 검으로 사과도 못 깎던 시절부터 알았는데.”

“와! 그럼 소꿉친구이신 거네요?”

“음, 보통은 그렇게 말하겠지만, 사실 소꿉놀이는 한 번도 안 해서.”

미라벨라의 질문에 그녀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르시엘이나 나나 그런 쪽엔 영 관심이 없어서……. 아, 전쟁놀이는 수도 없이 했어. 실은 내 막내 숙부가 검술 교사셔서, 어릴 때 둘이 같이 배웠거든.”

델리나가 유쾌하게 말하며 앞장섰다. 병사들이 지키던 정문을 지나 조금 걷다 보니 널따란 연무장이 나왔다. 안에는 황실 기사단 소속의 기사들이 한창 훈련 중이었는데, 저마다 짝을 이루어 대련을 하거나 홀로 검을 휘두르며 수련하고 있었다.

“아마 곧 끝날 거야. 여기서 좀 기다릴래? 난 이만 집무실에 가 봐야 해서. 먼저 실례해도 될까.”

“네, 델리나 경! 여기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 남은 미라벨라는 훈련에 방해되지 않도록 울타리 밖에 서서 기다렸다.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젊은이들의 힘찬 기합과 열정, 검을 맞부딪히는 소리가 드넓은 연무장 안을 가득 채웠다.

챙! 챙챙!

“하앗!”

훈련 중인 수많은 기사들 사이에서 그녀는 르시엘을 쉽게 찾아냈다. 평소의 무뚝뚝한 얼굴에 진지한 모습이 더해진 그는, 유달리 민첩한 움직임을 보이며 대련 중인 상대 기사를 제압하는 중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은 문외한인 미라벨라가 보기에도 깔끔했고 휘두르는 검날마다 묵직한 기운이 실려 있었다.

‘와, 르시엘 오라버니…….’

관능적인 남성미를 갖춘 육체는 완벽한 짜임새로 이루어져 있었다. 웃통을 벗어 던져 구릿빛 상체를 떳떳이 드러낸 그가 뒤돌아서자, 두꺼운 등 근육이 꿈틀거리는 모습이 멀리서도 무척 잘 보였다. 단단한 피부와 붉은 기가 도는 숱 많은 머리카락이 땀으로 젖어 있는 모습은 최근 들어 미라벨라가 자주 목격한 그의 은밀한 얼굴을 연상시켰다. 저도 모르게 아랫배가 긴장으로 꽉 조여드는 것을 느끼며 미라벨라는 남몰래 얼굴을 붉혔다.

“벨라, 왔구나.”

“오라버니!”

어느덧 훈련을 마친 르시엘이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깨에 아무렇게나 얹어 둔 수건 하나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가 땀으로 번들거렸다. 묵직한 저음으로 기사단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그의 모습은 집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르게 보였다. 큼지막한 손이 미라벨라의 머리카락을 슬쩍 흐트러트리고 지나갔다.

“금방 씻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

그는 기사단 건물 안에 미라벨라를 데려다 놓고 잠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미라벨라가 카페테리아에 조금 어색하게 혼자 앉아 로비를 오가는 다른 기사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까 만났던 델리나가 곁으로 다가왔다. 투명한 병에 담긴 복숭앗빛 과일 주스가 바로 눈앞의 탁자 위에 놓였다.

“이거 마셔.”

“아, 델리나 경. 감사합니다.”

“뭘.”

맞은편 의자에 걸터앉은 그녀가 당근과 케일을 간 것처럼 보이는 음료를 벌컥벌컥 마시며 물었다.

“어때? 오빠로서 르시엘은. 잘해 줘?”

“네, 무척 잘해 주세요!”

“그래, 르시엘이 괜찮은 녀석이긴 하지. 무뚝뚝한 성격이라 재미없긴 한데, 또 주변 사람들은 잘 챙기거든. 좀 서툴지도 모르지만 나름대로 잔정도 많은 편이고.”

“맞아요, 오라버니는 정말 좋은 분이세요…….”

미라벨라는 문득 처음 공작저에 와 그를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레이든에게 혼이 나 아파하는 걸 그냥 넘기지 못하고 치료해 주려 했던 그의 따뜻한 모습. 처음엔 조금 무서웠던 게 사실이지만 그건 자신의 오해였다.

“내가 처음 기사단장이 되었을 때도 초반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있었어. 여자가 기사 작위를 받을 수 있게 된 것도 오래되지 않았는데, 단장까지 하는 건 시기상조라나. 그때 자기가 더 화를 내며 나서 준 것도 르시엘이었고…….”

“벨라.”

때마침 되돌아온 르시엘이 곁으로 다가왔다. 막 샤워를 마친 그의 잘생긴 이마 위로, 물기가 완전히 마르지 않은 적갈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는 미라벨라의 앞에 놓여 있던 주스 병을 자연스럽게 집어 들고는 뚜껑을 열어 손에 쥐여 주었다.

“오오, 자상한 오라버니네.”

델리나가 놀리듯이 말했다. 그녀가 ‘벨라?’ 하고 그의 말을 따라 하자마자 르시엘은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마구 쓸어 올리며 인상을 구겼다.

“왜, 뭐.”

“야, 밖에서도 이러면 집에서는 아주 물고 빨고 하겠다, 너? 하긴, 이렇게 귀여운 여동생이면 나라도 그럴 것 같지만.”

그 말에 르시엘은 더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실은, 최근 들어 좀 다른 의미로 집에서 여동생을 물고 빠는 중이라 뜨끔했기 때문에.

“신기하네, 둘이 하나도 안 닮았잖아.”

델리나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엘, 네 동생인데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거지?”

“……라이오넬 경이라고 불러라. 그리고 내가 뭘.”

“난 우리 부모님 아들과는 밖에서 아는 척도 하기 싫던데. 내가 그래서 일찍 결혼했잖아, 어머니가 자꾸 걔를 무도회 파트너로 데려가라고 해서.”

델리나의 남동생은 그녀보다 한 살 아래로, 현재는 황태자 궁에 소속된 황궁 기사였다. 그들 남매는 근무 중에 종종 마주쳤지만, 딱히 싸웠거나 반목하는 사이가 아님에도 대체로 서로 투명 인간 취급을 하며 그냥 지나치곤 했다.

“여동생은 원래 좀 다른 건가? 르시엘, 내 동생이랑 바꾸자.”

“웃기고 있네. 남의 동생 탐내지 말고 퇴근이나 하시지.”

“참나. 야, 안 그래도 곧 가려고 했거든.”

델리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미라벨라와 시선이 마주치자, 고양이를 꾀어 집으로 데려가려는 사람처럼 눈가를 휘며 매력적으로 웃었다.

“미라벨라, 언니 집에 갈래? 강아지도 있는데, 진짜 귀여워. 옷도 같이 입자, 아, 길이가 안 맞으려나.”

그러자 르시엘이 인상을 팍 쓰며 몸을 틀어 미라벨라를 그녀의 시야로부터 차단했다.

“빨리 가, 너.”

“간다, 가. 그리고 직장에서 말 까지 마, 르시엘 경. 나는 그대의 상관이야.”

“하.”

소꿉친구의 위엄 있는 언사에 르시엘이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는 곧 로비에 걸린 벽시계를 가리키며 삐뚜름한 미소를 걸쳤다.

“이봐, 델리나. 근무 시간 끝났어. 6시야.”

“안됐지만 아직 5시 57분이야, 르시엘. 아직 시계도 볼 줄 모르다니, 너 같은 사람 때문에 기사들이 검만 휘두를 줄 아는 멍청이라는 오해를 받는 거잖아.”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건 늘 있는 일인지 다른 기사들은 다들 신경 쓰지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그때, 아직 앳된 얼굴의 하급 기사 한 사람이 델리나를 향해 왔다.

“단장님, 블레이즈 비서관님께서 오셨습니다.”

“곧 나가겠다고 전해 줘. 엘, 클레멘트가 벌써 왔나 봐. 나 먼저 간다.”

델리나는 짧은 단발머리를 손으로 대충 빗어 하나로 묶으며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 미라벨라. 가족이 와서 먼저 가 볼게. 다음에 봐.”

“반가웠어요, 델리나 경! 조심히 들어가세요.”

“네가 벨라를 또 볼 일이 뭐가 있어, 다신 안 데려올 건데.”

“그건 모르는 일이니까. 르시엘이 마음에 안 들게 하면 언니네 집으로 와, 알겠지?”

로비의 유리창 너머로 흰 피부에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미남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델리나의 남편인 모양이었다.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간 그녀가 활짝 웃으며 그에게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었다.

‘두 분은 서로를 무척 사랑하시는구나…….’

마주 바라보며 웃는 다정한 얼굴,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 둘만 아는 이야기를 나누며 가까워진 상체와 바쁘게 움직이는 입 모양……. 누가 보아도 서로를 무척 사랑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며 미라벨라는 왠지 기분이 미묘해졌다. 한편, 기사단장인 델리나가 떠난 것을 시작으로 그날의 당번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도 차례로 귀가를 서둘렀다.

“라이오넬 경, 내일 뵙겠습니다.”

“어, 그래. 수고했어.”

“부기사단장님, 저희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일찍 쉬어라. 내일 아침 훈련은 더 타이트할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어느덧 로비에는 두 사람만 남아 있었다. 미라벨라는 그를 만나러 나온 소기의 목적을 상기하고, 슬슬 공부를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아 책과 필기구를 꺼냈다. 하지만 르시엘은 오늘 외국어 회화를 공부할 마음이 전혀 없었기에 약간의 어이없는 감정과 당황한 기색을 동시에 내비쳤다.

“벨라, 공부하자고? 지금?”

“엇, 밖에서 수업하자고 하신 거 아니셨어요?”

“아니, 뭐, 맞는데…… 힘들까 봐 그러지. 괜찮겠어?”

“저는 괜찮은데, 오라버니, 힘드세요? 어디 편찮으신 곳이라도…….”

“……그게 아니고.”

그는 약간 말하기가 민망한지 귓가가 은근히 붉어진 채 부연했다.

“그거 말이야, 이제 막 끝났잖아.”

“아……!”

그가 뭘 말하는지 바로 알아들었다는 듯 미라벨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가 여동생의 월경 주기를 알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석 달 전 음란한 가정 교육의 첫 수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뒤로, 다음 진도를 나가는 일도 순조롭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세 오라버니와의 부끄러운 수업은 여린 미라벨라가 감당하기에는 사실 무척 벅찼다. 평소 잘 쓰지 않던 신체 근육을 과도하게 사용한 탓에 늘 기진맥진했고, 때로는 도중에 기절하거나 잠이 드는 날도 많았다.

세 번째 교육을 한 날이었던가. 견디다 못해 침대 밖으로 달아나려는 여동생을, 하필 르시엘이 막 붙잡아 왔을 때였다. 그는 미라벨라를 눕혀 놓고 가느다란 두 다리를 번쩍 들어 제 어깨에 걸치려 했다. 하지만 키 차이가 너무 나는 탓에 그 자세가 불가능한 걸 깨닫고 그냥 위로 든 상태에서 기세 좋게 제 것을 삽입했다.

그런데 때마침 시작된 월경으로 인해 어린애 팔뚝만 한 흉흉한 기둥과 눈치 없이 불끈거리는 좆 대가리에 붉은 혈흔이 묻어 나왔다. 그 순간 저를 향했던, 마치 짐승 보듯 경멸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두 형들의 눈빛을 그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벨!! 다쳤어? 아파? 어디 봐!>

<하, 내상인가? 당장 의사를 불러야겠군.>

<읏, 저, 오라버니……! 이건 다친 게 아니에요.>

만약 미라벨라가 부끄러움으로 새빨개진 얼굴로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두 형들과 적어도 내년 크리스마스까지는 대화다운 대화를 나눌 수 없었으리라.

<매달 이렇게 힘들지는 않아요. 가끔 유난히 심할 때가 있는데, 흐읏…….>

미라벨라는 이번 달엔 정말 꽤 힘들어 보였다. 진통제를 먹고도 아랫배가 욱신거리는지 이마가 종종 미세하게 찡그려졌고, 흰 피부가 더욱 새하얗게 질려 안쓰러움을 자아냈다. 엄격한 레이든조차도 아침 식탁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경제학 수업을 미룰 테니 쉬라고 먼저 말할 정도였으니까.

아니, 훈련받은 기사도 아닌데 일주일씩 피를 쏟아 내면 사람이 살 수 있는 건가?

여동생의 생리 기간 내내 르시엘은 줄곧 안절부절못했다. 직전년도 제국 무투회 우승자인 그가 아닌 델리나를 기사단장으로 임명할 때, 황제는 검술이나 격투 실력 외에도 종합적인 모든 사항을 고려한 것이라 말했었다. 역시 그건 얼마나 타당한 인사였던가.

매년 개최되는 황실 무투회는 늘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한여름에 열렸다. 보호구와 레더 아머만 착용해도 힘든 계절에, 일주일 내내 그런 일을 겪어야 했다면 분명 자신은 매달 누구 하나는 죽였을 거라 르시엘은 확신했다.

그러니 그는 막 월경이 끝난 미라벨라를 당장 공부시킬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니, 실은 꼭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지금은 단둘이서만 함께하는 첫 데이트였다. 그런 귀중한 시간을 발음마저 딱딱한 뤽셀어로 시사 토론 따위나 하며 보내고 싶을 리가.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말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해한 모양이었다.

“아, 맞아요. 지금 막 훈련이 끝났는데 바로 수업을 시작하시기는 역시 좀……. 죄송해요, 오라버니께서 힘들어하실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어요.”

“…….”

“얼굴이 조금 붉어지신 것 같은데, 많이 힘드세요? 저는 여기서 기다려도 괜찮으니 휴게실에서 조금 쉬세요, 오라버니. 아니면 옆에 같이 있어 드릴까요?”

미라벨라는 사려 깊지 못한 자신을 탓하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사과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르시엘의 마음은 약간 복잡해졌고 왠지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우회적으로 목적을 이루긴 한 것 같았다.

“뭐, 쉴 필요까진 없을 것 같고…… 일단 식사나 할까?”

하지만 이번에는 또 어디서 무슨 밥을 먹느냐가 문제였다. 미라벨라가 오면 어디를 가서 뭘 먹이고 뭘 할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두었어야 했는데! 르시엘은 일단 형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둘만의 데이트를 쟁취하는 데까지만 몰두하느라 이후의 일은 치밀하게 계획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그는 몇 년 전 기사단에 입단한 뒤로 바쁘고 딱히 생각도 없어서 누구와 데이트를 한 적이 없었다. 당연히 최근 수도의 레이디들 사이에서 인기를 끄는 레스토랑이나 디저트 가게, 데이트 명소 등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레이든이나 에일레스한테라도 물어볼 걸 그랬나…….

아, 여기서 형이 왜 또 나오는데.

“벨라,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저는 다 잘 먹어요, 오라버니.”

“그래도 특히 생각나는 메뉴가 있을 거 아니야. 뭐로 할래.”

“네, 음, 그러면…… 건강에 좋은 음식 먹으러 가요!”

미라벨라가 그렇게 말한 건 르시엘을 걱정해서였다. 그녀가 직접 눈으로 본 기사단의 훈련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고되어 보였고, 몸 쓰는 일을 하는 오라버니가 자연히 염려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건강에 좋은 음식?”

르시엘이 약간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기사들은 평소 다른 이들보다는 식단 관리에 더 신경을 쓰는 편이기는 했다. 하지만 건강, 건강에 좋은 음식이라……. 뭐가 있지?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의 비율을 적절하게 맞추어 완벽한 영양의 균형을 이루는 동시에 과한 조미료를 사용하지도, 칼로리가 넘치지도 않는 식단을 내는 곳이라면, 당장 떠오르는 장소가 있기는 했다.

결국 그가 선택한 두 사람의 첫 데이트 장소는, 황실 기사단 숙소의 1층에 있는 카페테리아, 즉 구내식당이었다.

“르시엘 오라버니, 버섯 요리가 정말 맛있어요!!”

“입에 맞는다니 다행이네.”

다행히 미라벨라는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 편이었기에 열심히 포크를 움직였다. 그때, 마침 식당 앞을 지나가던 델리나가 그들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 옆에는 아까 로비 앞에 왔던, 황궁의 비서관이라는 그녀의 남편도 함께 있었다.

“……르시엘?”

“뭐야, 델리나. 아직 집에 안 갔어?”

“뭘 놓고 가서 다시 들른 거야. 그러는 넌 왜 아직도 여기 있어?”

“르시엘, 오랜만이야.”

델리나의 남편이 그에게 반갑게 말을 붙였다. 대화하는 내용들로 보아 세 사람은 모두 예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 사이인 것 같았다.

“어, 클레멘트. 좋아 보이네. 다음에 술이나 한잔해.”

“야, 르시엘. 지금 여동생이 놀러 왔는데 고작 구내식당 밥을 먹이는 거야?”

델리나가 완전히 질렸다는 얼굴로 쏘아보았다. 급기야 그녀는 짜증을 내며 르시엘의 등을 떠밀었다.

“네 동생, 몸이 약해서 계속 요양 중이었다며. 오라버니가 돼서는 뭐 하는 거야? 빨리 나가, 데리고 나가서 좋은 데 구경시켜 주고, 예쁜 것도 사 주고 그러란 말이야! 황궁 근처에 좋은 레스토랑이 얼마나 많은데, 어휴.”

델리나의 성화에 르시엘은 미라벨라를 데리고 떠밀려 나왔다. 그들이 얼떨결에 도착한 곳은 황궁 근처의 번화가였다. 수도에서도 가장 상권이 발달된 이곳은 옷가게와 보석상이 즐비한 쇼핑 거리, 디저트 가게가 즐비한 카페 거리, 각종 신기한 물건과 무기를 파는 곳으로 구획이 나뉘어져 있었다.

“와, 르시엘 오라버니! 저건 뭐예요?”

일단 나오긴 했지만 어딜 가 보면 좋을지 얼른 떠오르지 않아 난감했는데, 다행히 미라벨라는 꽤 즐거워했다. 그녀는 상점 앞에 진열된 여러 가지 물건들을 구경하느라 연신 주위를 둘러보며 동그란 하늘색 눈동자를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데리고 나오는 건데.

“저것 좀 보세요, 오라버니!”

“신기해?”

“네, 그런데 이 길은 사람이 굉장히 많네요? 꼭 축제 날 같아요.”

“오늘은 아니지만 여기서 축제가 자주 열리긴 하지. 그럴 땐 지금이랑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붐비거든. 간혹 치안 문제로 황실 기사단에서 지원을 나갈 때도 있으니까.”

“축제가 굉장히 크게 열리나 봐요.”

“……보고 싶으면 다음에 한번 같이 나올래? 나 근무 안 서는 날에.”

그가 지나가는 말처럼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녀는 약간 놀란 듯 동그래진 눈을 깜빡이다가 곧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오라버니!”

뭐라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쓱 돌렸지만, 어느새 그의 입가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슬쩍 걸려 있었다.

“어서 오세요. 찾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구두 상점 앞을 지날 때, 그는 별다른 언질도 없이 미라벨라의 손목을 잡고 안으로 들어섰다. 상점에서는 외출용 슈즈부터 무도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성품과 수제화를 판매하고 있었다. 미라벨라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오라버니, 신을 사시려고요?”

“아니, 네 신발.”

“제 거요?”

“아까부터 불편해 보여서.”

지금 그녀의 발에 신겨져 있는 건 제국의 숙녀들 사이에 가장 선호되는 가느다란 굽의 높은 구두였다. 집에서는 대체로 예법에 구애받지 않고 편한 복장을 하도록 했지만, 최근 미라벨라는 데뷔탕트를 앞두고 익숙해지기 위해 밖에 나올 땐 이런 구두를 신었다. 저딴 걸 신고 오래 걸으면 무척 불편할 텐데. 미라벨라가 아까부터 오른쪽 발이 아픈 듯 미세하게 끄는 모습을 르시엘은 기민한 시선으로 놓치지 않았다.

그는 예법이고 뭐고 당장 미라벨라가 작은 발을 절룩이는 걸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종일 업고 다니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내려 달라고 난리를 칠 게 뻔하니 일단 다른 걸로 바꿔 신겨야겠다 싶었다.

“더 작아졌네.”

굽 높은 구두를 신었을 때도 작았던 미라벨라인데, 납작하고 편한 디자인의 신발로 바꿔 신으니 이젠 르시엘의 어깨보다도 한참이나 더 아래에 있었다. 그는 바로 옆에 내려다보이는 동그랗고 작은 머리가 갑자기 못 견디게 사랑스러워서, 몇 번이나 손을 올려 쓰다듬었다.

“벨라, 뽑아 줄까?”

그 다음부터는 마음 놓고 걸으며 거리를 구경했다. 가는 길에 르시엘은 상품을 걸고 다트 게임을 하는 곳에 잠시 멈추어 섰다. 뾰족한 다트를 던져 풍선을 터트리는 게임을 그는 열 발 모두 가뿐히 성공시켰고, 상품으로 가장 큰 곰 인형이 미라벨라의 품에 안겨졌다.

“이 근처에서 가끔 친구들을 만나거든. 기사단 녀석들과 나올 때도 있고. 이걸로 내기를 몇 번 했는데, 버리기도 좀 그래서.”

“아, 그래서 오라버니 방에……!”

미라벨라는 그제야 르시엘의 방에 왜 그렇게 인형이 많았는지 알 수 있었다. 길가에 서서 구경하던 어린애들이 그녀 품의 곰 인형을 보고 졸라 대자 부모들이 난감해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추가로 다트 게임을 하고 그 아이들에게도 커다란 인형을 하나씩 안겨 주었다.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한참 더 거리를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아직 미라벨라를 보내고 싶지 않았기에 르시엘은 점차 초조해졌다. 하지만 더 이상 귀가를 미룰 만한 다른 핑계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

새까만 장막처럼 고요하기만 한 하늘을 슬쩍 보며 그는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봄꽃이 피었네, 무슨 날이네, 하며 툭하면 축제를 열고 뻑하면 불꽃놀이도 하더니. 오늘은 왜 아무것도 안 하냐.

‘불꽃놀이를 보여 주면 벨라가 좋아할 것 같은데.’

르시엘은 다음에 축제가 열리는 날, 반드시 그녀를 데리고 나와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어쨌든, 그때는 그때고 오늘은 또 오늘이었다.

“저, 오라버니. 그럼 저는 이제 집으로 가 볼…….”

“벨라.”

도톰하고 예쁜 입술 사이에서 이만 돌아가겠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르시엘은 가느다란 손목을 꽉 쥐며 선수를 쳤다.

“……한잔할래?”

* * *

황궁 근처, 번화가 골목에 위치한 분위기 좋은 펍.

실내에는 감미로운 재즈풍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르시엘과 미라벨라는 다른 테이블들과 따로 떨어진 조용한 좌석에 마주 앉았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몇 번이나 진득하게 몸을 섞은 사이답지 않은 왠지 모를 어색함이 맴돌았다.

‘장소가 바뀌어서 그런가. 괜히 긴장되네.’

생각해 보니, 그렇고 그런 일을 하기 시작한 뒤로 이렇게 둘이서만 있는 건 처음이었다. 은밀한 가정 교육 시간에는 늘 다른 형제들과 함께였고 식사 때나 그 외의 여가 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가 담당하는 외국어 회화 시간에는 두 사람뿐이었지만, 그땐 정말 공부만 했으니 또 상황이 달랐다. 이처럼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둘이서만 오롯이 마주 앉아 있는 자리는 낯설었다.

사실 미라벨라가 공작저에 온 지도 어느덧 2년이나 지났고, 그들은 꽤 가깝게 장난도 치는 사이가 되었다. 이젠 몸까지 섞었으니 더 친밀해지고 스스럼없어져야 할 것 같은데, 왜 새삼 긴장이 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이 묘한 분위기를 타파하는 건 제 몫이어야 할 것 같은 연장자로서의 책임감에 르시엘이 먼저 침묵을 깼다.

“뭐 마실래, 벨라?”

“저는 이런 곳에 와 본 게 처음이라서……. 오라버니와 같은 걸로 할게요.”

“그럼 내가 알아서 주문한다.”

“네, 오라버니.”

가만히 보니 미라벨라 역시 어색한지, 아까부터 계속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거나 테이블에 놓인 티슈를 돌돌 말고 있었다. 저 멀리 서 있는 직원을 부르기 위해 손을 들어 보인 르시엘이 이 어색한 상황에 대해 약간 변명하듯 덧붙였다.

“아, 역시 좀 그런가…….”

“뭐가요, 오라버니?”

“다인에 익숙해지다 보니 일대일은…… 왠지 어색해서 말이지.”

“…….”

하지만 그는 곧, 지금 한 말이 굉장히 색정광처럼 들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보다 확연히 더욱 어색해진 분위기에 깊은 후회가 밀려왔다.

‘하, 그냥 입을 꿰맬까.’

르시엘이 고뇌하고 있을 즈음, 다행히 때를 맞춰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다가왔다. 그는 맥주 두 잔과 함께 적당히 메뉴를 주문했고, 곧 갈색 소스로 코팅되어 윤기가 흐르는 먹음직스러운 돼지고기 폭립과 잘 손질된 과일 안주, 그리고 거의 미라벨라의 얼굴만큼이나 큰 잔에 담긴 차가운 맥주가 서빙되어 나왔다.

“벨라, 이전에 술은 마셔 봤어?”

“지난번에 케이크를 먹을 때 샴페인을 조금 맛보긴 했지만 다른 건 처음이에요. 오라버니께서는 술을 즐기시나요?”

“딱히 싫어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필요한 때가 아니면 자주 마시지는 않는 편이지. 과음도 안 하고. 아무래도 몸 쓰는 일을 하다 보니까, 나쁜 건 되도록이면 안 하려고 해서.”

“맞아요, 건강은 정말 중요하니까……. 다른 오라버니들은 어떠세요?”

“술은 우리 중에 에일레스가 제일 잘 마셔. 레이든도 딱히 취하는 건 못 보긴 했지만.”

“아, 네에…….”

단지 맥주 몇 모금을 마셨을 뿐인데, 벌써 약간 발그레해진 얼굴로 미라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르시엘은 그 모습이 너무 귀엽게 보여 당장 옆자리로 옮겨 앉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정확히 말하면, 르시엘 오라버니…… 라면서 말꼬리를 길게 늘이는 작은 입술에 그대로 입 맞추고 싶은 원초적인 본능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는 기사다운 인내심을 발휘해 삿된 욕망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그 역시 술이 약하지는 않은 편이라 적어도 맥주를 먹다 취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벌써 취기가 돌기라도 하는 듯 갑작스럽게 속이 울렁거렸다.

‘벨라가 원래 이렇게 예뻤던가?’

르시엘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관찰했다. 처음 공작저에 왔을 때도 귀엽고 예뻤지만, 최근 그녀에게서는 매혹적인 분위기마저 흐르는 것 같았다. 동그랗고 작은 코끝과 복숭앗빛 뺨, 요정처럼 섬세한 입술……. 옷 위로 드러난 피부가 마치 눈처럼 희었다.

이미 알몸도 꽤 여러 번 보았기에, 그 아래 숨겨져 있는 우윳빛 속살이 그녀가 입은 매끄러운 실크 소재 드레스보다도 더 부드럽고 촉촉하다는 걸 르시엘은 잘 알았다.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실에 문득 조건반사처럼 아랫배가 뻐근해졌다.

“……르시엘 오라버니?”

저를 향한 시선을 느꼈는지, 미라벨라가 그를 향해 눈을 돌렸다. 예전에는 눈이 마주쳤다 하면 그저 어쩔 줄을 모르고 피하기 바빴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먼저 생긋 웃거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동그란 눈매가 종종 고양이처럼 새초롬해질 때면, 르시엘은 허리 아래가 묵직해지며 속된 말로 미친 듯이 꼴렸다. 최근 들어 벌써 몇 번이나 위기였다. 저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 애한테 무슨 이런 개 같은 생각을 하나 싶어 자책감이 들었지만, 그는 곧 솔직히 인정했다.

‘그 애한테 섹스를 가르치는 내가 개새끼지 뭘.’

그는 문득, 살짝 웨이브 진 부드러운 백금발을 하나로 묶고 있는 긴 은색 리본에 눈을 주었다. 저건 원래 에일레스 거였는데. 사실 그는 평소 에일레스가 밧줄로 머리를 묶건 쇠사슬로 묶건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번 온천욕을 마친 뒤 그가 미라벨라의 머리를 빗기고 직접 묶어 주던 장면을 상기하자 묘하게 심사가 뒤틀렸다.

아까부터 취한 듯 울렁거리던 속이 갑자기 완전히 뒤집히는 것 같다. 당장 그 빌어먹을 리본을 풀어 버리고 싶어 꿈틀거리는 팔 근육을 가까스로 억제하고 있는 그에게 미라벨라가 물었다.

“르시엘 오라버니, 저 뭐 하나 여쭤봐도 돼요?”

“뭔데, 말해.”

“그, 다른 분들은 다 오라버니를 라이오넬 경이라 하시던데, 왜 델리나 경만 다르게 부르시는 건지 궁금해서요…….”

“아, 그거…….”

작위를 받은 기사를 경, 이라 부를 때면 성이 아닌 이름을 넣어 호칭하는 게 올바른 예법이라 배웠다. 분명 예법서에서도 그렇게 읽은 기억이 있었기에 미라벨라는 낮부터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다들 성으로 부르는 건, 사실 내가 이름을 싫어해서 그런 거야. 델리나는 놀리려고 그렇게 부르는 거고.”

바삭한 감자튀김을 씹으며 르시엘이 약간 멋쩍은 듯 설명했다.

“그게 말이지, 실은 이름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바꾸고 싶거든.”

“……오라버니의, 성함을요?”

“어. 어머니가 몸이 약해서 가족계획은 내가 끝이었다는데, 그래서인지 형제들 중 내 이름만 어머니가 지었거든. 레이든은 조부의 이름을 가져온 거고 에일레스는 외가 쪽 조상 중 유명한 마도사야. 하…… 내 이름도 그렇게 가계도에서 적당히 골랐어야 했는데. 보다시피 이렇게 되어 버려서.”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이든 말로는, 우리 어머니가 나를 가졌을 때 아기 천사가 날아와 품에 안기는 꿈을 꾸는 바람에 이따위 이름을 미리 지어 놨다는 거야. 내가 막 태어났을 땐 머리 색이 옅어서 완전히 금발처럼 보였다나. 나 참, 얼굴도 기억 안 나는 어머니한테 가서 따질 수도 없고.”

“하지만…… 다른 것으로 바꾸신다면 어떤 걸로요?”

“글쎄, 그냥 뭐 적당히 남자다운 걸로? 왜, 있잖아. 헌터라든가, 막시밀리언도 괜찮고……. 문제는 레이든이 허락을 안 해 줘. 제국법상 귀족이 개명을 하려면 가주의 동의가 꼭 필요하거든. 범죄를 저지른 뒤 신분 세탁이나 재산 상속 문제 때문에.”

그가 불만스럽게 덧붙였다.

“어머니도 참 너무했지, 인간적으로 성서에 나오는 천사 이름이 나한테 어울리기나 하냐고. 벨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아니요, 저는…….”

투명한 하늘색 눈이 속눈썹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았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지금의 성함이 오라버니께 무척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걸요.”

커다란 맥주잔을 막 들어 올리려던 르시엘이 그 말에 멈칫했다.

“……어울린다고?”

“네, 제게 있어 오라버니는 정말 천사처럼 좋은 분이시니까요. 성서에 나오는 아기 천사 르시엘보다는, 가까이 계신 오라버니가 더…….”

“이봐, 벨라.”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릴 자격은 없지만…… 돌아가신 공작부인께서도 분명 오라버니가 이렇게 좋은 어른이 되실 걸 아셨을 거라 생각해요. 선친의 이름을 따는 것도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지만, 사랑하는 아기의 이름을 직접 지어 줄 수 있어 무척 기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도 내 마지막 아기라고 생각하면, 정말 너무 소중하니까…….”

“…….”

순간적으로 그의 얼굴이 머리 색과 한 번에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붉어진 것 같았다. 르시엘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찬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주제넘은 말을 해서 죄송해요, 오라버니. 하지만 만약, 제가 언젠가 엄마가 된다면…… 저도 그럴 것 같아서요.”

“……뭘. 그 정도 말은 할 수 있지. 날 위로하려고 그런 건데.”

“하지만 오라버니가 천사처럼 좋은 분이라는 건 위로가 아니라 진심인걸요. 실은 늘 생각하고 있었으면서도 조금 쑥스러워서 말씀드리지 못했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르시엘 오라버니.”

미라벨라가 진심으로 인사하며 밝게 웃었다. 그 사심 없는 말간 얼굴을 르시엘은 한동안 말없이 응시했다. 그리고 곧 절실히 깨달았다.

아, 이젠 정말 한계였다.

* * *

두 사람이 펍을 나온 것은 거의 자정이 가까워 온 늦은 시간이었다. 밖에는 갑작스러운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마치 잠시나마 미라벨라를 독점했던 행복한 시간을 끝내고, 이젠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야만 하는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처럼.

르시엘이 좀처럼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라이오넬 경!”

저 멀리서 급하게 달려온 사람은 공작저의 마부였다. 그는 오늘 낮에 미라벨라를 태워 온 뒤 줄곧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알렌, 무슨 일이지?”

“저, 실은 마차에 문제가 좀 생겼습니다. 원래 마차를 두려던 장소가 공사 중이라 다른 골목길에 세워 두었는데, 갑자기 내린 비로 바퀴가 진흙탕에 빠지고 말아서요. 지금 사람을 부르긴 했지만 밤이라 고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답니다. 아가씨께서 기다리시기엔 힘드실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요? 새벽에 상업 마차를 타는 건 역시 위험하실 것 같아서…….”

지난번 납치 사건 이후로 그들은 절대 미라벨라를 외부 마차에 태우거나 혼자 다니도록 두지 않았다. 마부의 말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마차가 고쳐지는 대로 알아서 귀가해. 미라벨라는 내가 데려다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예, 알겠습니다.”

마부가 안심한 얼굴로 인사를 하고 사라지자, 옆에서 듣고 있던 미라벨라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르시엘 오라버니, 시간이 너무 늦은 것 같은데 이만 기사단 숙소로 돌아가셔야 하지 않으세요? 분명 내일, 이른 새벽부터 훈련이 예정되어 있다고…….”

“……벨라.”

원래도 굵직한 저음인 그의 목소리가 어쩐지 평소보다 더 낮게 울렸다.

“아까, 내게 쉬어야 할 것 같다고 했지.”

“오라버니, 그건…….”

“그동안 옆에 있어 준다며. 지금 그러고 싶은데.”

“하지만 시간이 너무 늦어서 집에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어디서 쉬시려고요……?”

그는 미라벨라의 말에 답하는 대신 곧장 지나가는 상업 마차를 불러 세웠다.

“레이든한테는 내가 말할게. 그럼 문제없는 거지?”

“네? 그렇긴 하지만…….”

그의 팔에 붙잡힌 자그마한 몸이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번쩍 들려서, 그대로 마차에 태워졌다.

“그러니까 자고 가.”

* * *

탁.

프라이빗한 시스템이 갖추어진 수도의 최고급 호텔. 미라벨라가 실내로 들어와 문이 닫히기 무섭게, 단단한 근육질의 육체가 그녀를 품 안에 가두었다. 그를 부르며 다급하게 열리던 작은 입술이 도로 틀어막히면서, 뭐라 종알거리며 쏟아 내던 소리마저 이내 묻혀 사라졌다.

“흐읍!”

뒷걸음질 치던 미라벨라의 등이 닫힌 문 안쪽에 부딪혔다. 제 몸과 단단한 벽 사이에 그녀를 가둔 르시엘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민첩한 감각을 발휘하여 여동생을 알몸으로 만들었다. 가장 먼저 매듭이 풀린 드레스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 안의 속치마와 얇은 속바지도 함께. 상체를 가린 속옷마저 아래로 끌려 내려와 뽀얀 속살이 완전히 드러나자 미라벨라가 팔을 올려 젖가슴을 가리려 바둥거렸다.

“……흐읏, 르시엘 오라버니!”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름을 부르는 건 흉포한 짐승을 더욱 자극할 뿐이라,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연약한 두 팔을 앞으로 교차하여 감추려는 시도 역시 사랑스러운 유방의 굴곡만 오히려 더 돋보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희고 말랑한 두 개의 구체가 꾹 눌리는 외설적인 광경에 르시엘이 낮게 끓는 소리를 내며 목을 울렸다. 부드러운 탄력을 지닌 둥근 젖가슴을 그가 큰 손으로 움켜쥐었다.

“하읍, 오라버니! 불, 불이라도 좀 꺼 주세요……!”

꿀이라도 발라 놓은 양, 여동생의 젖가슴을 한참 괴롭히며 놓아 주지 않던 그가 제 상의를 훌렁 벗어 던졌다. 잘 짜인 넓은 활배근과 위협적으로 꿈틀거리는 커다란 어깨 근육이 드러나는 장면을 보고 도망치는 걸 포기한 미라벨라가, 차라리 불을 꺼 달라 사정했다. 바로 옆의 벽에 환하게 켜져 있는 실내등, 그 불빛 아래 적나라하게 비치는 나신이 부끄러워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불을 왜 꺼? 좋은 건 더 자세히 봐야지.”

“……흐읏, 너무해요! 아, 읏.”

미라벨라는 음부를 가린 얇은 속옷 하나만을 겨우 걸친 채, 상체를 탈의한 르시엘 앞에 서 있었다. 오라버니의 시선만으로도 약간 도톰해졌던 분홍빛 꼭지는 몇 번을 거듭 쭉쭉 빨리면서 이제 완전히 바짝 일어섰다. 끝이 빨개진 채 촉촉이 젖은 앙증맞은 유두와 벌써 손자국이 남은 뽀얀 젖가슴을 르시엘이 홀린 듯 바라보았다.

“예쁘다, 벨라.”

그는 손바닥이 위를 보게 하여 검지와 중지 사이에 미라벨라의 젖꼭지를 끼웠다. 민감한 끄트머리를 엄지손가락의 지문부로 집요하게 문지르고, 단단한 손끝으로 젖 구멍을 파헤치듯 쿡쿡 쑤셔 대기도 했다.

부드러운 젖가슴이 커다란 손등에 꾹 눌리고, 이미 빳빳해진 유두가 굵은 손가락 사이에 꼼짝없이 갇혀 비벼지는 감각. 눈앞이 아찔해지는 쾌감을 고스란히 느끼며 미라벨라가 옅은 신음을 흘렸다.

“으응, 오라버니, 저는 이만 가 봐야…… 아흣!”

그가 상체를 확 숙여 미라벨라의 젖가슴에 그대로 얼굴을 파묻었다. 희고 부드러운 살결에는 이미 붉은 꽃잎이 잔뜩 수놓아져 있었다. 귀엽게 발딱 일어선 꼭지와 그 주위를 동그랗게 감싼 분홍빛 유륜, 봉긋한 살이 한꺼번에 쭉 빨려 들어가 르시엘의 입술 사이로 사라졌다.

여인의 예민한 부위를 집요하게 자극하는 쾌감에 온몸이 떨려 와, 미라벨라는 등을 기댄 문에 의지하여 간신히 서 있었다. 가장 여성스러운 부분이 안쪽에서부터 몹시 뜨겁고 간질거렸다. 어느 순간 르시엘이 허벅지 사이로 제 다리를 밀어 넣자, 묵직한 존재감을 과시하는 남다른 크기의 성기가 미라벨라의 배를 쿡쿡 찔렀다.

“가긴 어딜 가.”

“……아흐, 오라버니!”

“큭, 지금 자지가 터질 판인데.”

그는 커다란 손바닥으로 오른쪽 허벅지 아래를 단단히 받치고, 한쪽 다리를 옆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속옷의 매듭을 거의 뜯어내듯 풀어 버린 뒤 얇은 천 조각을 바깥으로 쑥 빼냈다. 은밀한 부위가 개방되는 서늘하고 부끄러운 감각. 그에게 꽉 잡혀 위로 들린 뽀얀 허벅지가 더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적나라하게 노출된 균열을 가르고 굵은 손가락이 음부를 푹 쑤셨다.

아흑……! 검을 드느라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이 밑구멍을 들쑤시고 부푼 음핵을 비벼 올리는 감각에 연신 가느다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벌써 몇 번이나 뚫어 주었는데도 여전히 비좁기만 한 내벽. 탄력 있는 속살이 부드럽게 젖어 들며 오라비의 손가락을 맛있게 받아 삼켰다. 선명하고 자극적인 쾌감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미라벨라가 질끈 눈을 감았다.

“읏, 흐읍! 아…….”

여동생의 밑구멍을 농락하던 르시엘이 급하게 손을 내려 제 하의를 풀었다. 그의 것은 한참 전부터 터질 듯 피가 몰려, 육중한 기둥부터 어린애 주먹만 한 둥근 귀두까지 죄다 불그스름했다. 보기에도 흉물스러운 검붉은 성기가 묵직하게 튕겨져 나와 위로 치솟으며 미라벨라의 가슴 아래를 철썩 때렸다.

뜻하지 않게 매를 맞은 새하얀 살결이 금세 발갛게 변하자 그의 낯은 만족스럽게 물들었다. 르시엘은 마주 보고 선 자세 그대로 미라벨라의 다리 한쪽만 들어 올려 삽입을 시도했다. 잠시 후, 그가 거칠게 신음하며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윽! 젠장, 안 되잖아.”

레이든과 에일레스도 훤칠하게 키가 컸지만 그는 기사단 내에서도 가장 장신이었다. 반대로 미라벨라는 평균보다도 아담한 축이었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체위의 제약이 더 많았다. 특히 지금과 같이 선 자세로는 어떻게 해도 무난한 삽입이 곤란했다. 짙은 욕정으로 점철된 붉은 눈에 짧은 초조함이 스쳤다.

“……아, 흐! 오라버니, 무서워요, 흐윽!”

“후, 꽉 잡아, 벨라.”

급기야 그는, 미라벨라의 양 무릎 아래에 손을 집어넣어 그녀를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난데없이 공중으로 붕 떠오른 그녀가 갑작스럽게 달라진 높이에 겁을 먹고 바르작거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은 순간, 미라벨라의 팔이 엉겁결에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르시엘은 작은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에 만족스러운 낯으로 씩 웃었다.

“잘 잡고 있어. 후, 놓치면 떨어진다.”

“흐읏, 아, 흡, 잠깐만요…… 하읏!”

두 다리가 쫙 벌어진 자세로 무릎 아래를 받쳐 번쩍 들린 탓에, 미라벨라의 음부는 완전히 개방되어 있었다. 보들보들한 음순이 양옆으로 한껏 문을 열자, 그 안에서 빠끔거리던 작은 구멍을 거대하게 발기한 오라버니의 자지가 묵직하게 틀어막으며 콱 처박혔다.

“아흑, 아아…….”

위압적인 크기의 좆 기둥이 사납게 불끈거리며 끝도 없이 아래를 꿰뚫었다. 가장 깊은 곳까지 무도하게 치받자, 미라벨라는 버거운 감각에 가쁜 숨을 꼴깍꼴깍 넘겼다. 납작한 아랫배를 뚫고 나올 기세로 안쪽을 마구 들쑤시고 자궁구를 밀어 올리며 사정없이 짓찧는 압박감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울리는 듯했다.

크윽, 르시엘의 단단한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가고 목에 굵은 핏대가 섰다. 늘 형들과 공유하던 여동생을 독점하고 있다는 고양감이 타는 듯한 욕정에 기름을 부어, 그는 거칠게 허리를 흔들며 잔뜩 갈라진 숨을 내뱉었다. 성기를 박아 대는 리듬마다 커다란 손이 자국을 낼 기세로 밀 반죽처럼 말랑한 엉덩잇살을 내키는 대로 움키어 주물렀다.

미라벨라는 오라버니의 단단한 목을 끌어안고 매달린 채 꼼짝하지 못하고 그가 박는 대로 박히고 있었다. 잘못하면 바닥으로 떨어질까 봐 무섭기도 했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한계까지 팽팽하게 늘어나 있는 구멍이 찢어질 것 같아 겁을 먹어서였다.

“으윽, 크…….”

“아흡, 오라버니……! 흣, 으응!”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히는 자세 탓에 평소보다 삽입이 더 깊었다. 여린 몸이 탄탄한 근육으로 단련된 가슴과 팔 안에 갇힌 채로, 버거운 크기의 육중한 좆 기둥이 연약한 점막에 더 퍽퍽 꽂혔다. 흥분으로 내려와 있는 말랑한 자궁 경부를 두툼한 귀두가 연신 치받으며 쳐올릴 때마다 미라벨라의 입에서는 열에 달뜬 숨이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좁다란 질구를 사납게 파고드는 움직임이 어느 순간 더욱 빨라졌다. 빠듯하게 벌어진 아래는 그사이 몇 번이나 거듭해서 절정을 맞으며 수축과 경련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한참이 지나 그가 두툼한 어깨 근육을 경직시키며 파정한 뒤에도 쾌락에 젖은 조그맣고 음란한 구멍은 여전히 움찔거렸다.

“하아, 읏, 오라버니…….”

“크, 흡.”

그를 받아 내느라 얼얼해진 점막을 달래듯, 진한 정액이 고루 끼얹어졌다. 홧홧하게 달아올라 애처로이 떨리는 여린 내벽……. 르시엘은 사정 후에도 삽입을 풀지 않고 미라벨라를 마주 들고 있었다. 정액 샤워로 녹진하게 풀린 구멍이 기분 좋은 쾌감을 주어 도통 나오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아직 발기가 풀리지 않은 좆 기둥을 미라벨라 안에서 기세 좋게 휘저었다. 둥근 귀두 끝이 보드라운 질 벽에 꾹 짓눌리자 마치 뜨거운 크림 속에 잠긴 듯 몹시 기꺼웠다.

격렬한 행위에 느슨해져 있던 그녀의 머리 리본이 툭, 하고 풀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긴 은색 리본이 하늘거리며 벗어나자 부드러운 백금발이 폭포처럼 흘러내려 벗은 어깨와 목덜미, 새하얀 등을 뒤덮었다. 그에게 안겨 있던 미라벨라가 고개를 숙여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흣! 리본이…… 에일레스 오라버니가 주신 건데……!”

“하, 뭐?”

순간 르시엘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동시에 그녀의 밑을 꿰뚫고 있는 성기가 크게 불끈거렸다. 좀 전보다 확연히 더 몸을 부풀리며 아래를 팽창시키는 감각에 미라벨라의 눈이 커진 찰나, 르시엘이 다시 거칠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느다란 비명을 내지르며 그의 목을 더 꽉 끌어안고 버틸 수밖에 없었다.

“벨라, 으윽, 넌 진짜…….”

“아, 흣, 너, 너무 깊어요! 자, 잠깐, 으응……!”

그는 양옆으로 달랑거리는 새하얀 두 다리가 제 허리를 단단히 감도록 자세를 고쳐 준 뒤, 가장 약한 지점을 퍽퍽 들이받았다. 미라벨라의 작은 어깨가 바들바들 떨리고 르시엘이 정제되지 않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동그란 엉덩이를 꽉 쥐고 강하게 허리를 짓쳐 올릴 때마다 위아래로 사정없이 흔들리는 작은 몸. 부드러운 젖가슴이 뒤따라 들썩이며 그 정점에 바짝 선 유두가 단단한 맨가슴에 깊이 마찰했다. 집요한 자극으로 울혈이 맺힌 꼭지 끄트머리가 쉼 없이 화끈거려 미라벨라는 눈물이 핑 돌았다.

“흐윽, 읏, 오라버니…… 아흑!”

“크읍.”

지나친 밀착과 결속에 거친 음모가 여린 살결을 잔뜩 긁어 회음부까지 얼얼했다. 첫 번째와 거의 비슷한 시간이 지나 르시엘은 꽤 많은 양을 꿀렁거리며 사출했다. 그런 뒤에도 그는 여동생을 놓아주지 않고 엉덩이를 꽉 잡아 세게 주물렀다. 기진맥진한 미라벨라는 그의 어깨에 턱을 올려 얼굴을 묻고 겨우 숨을 고르고 있었다. 오라버니와 부끄럽게 결합된 부위가 전류라도 흐르는 듯 쉴 새 없이 움찔거리며 잘게 경련했다. 흠뻑 젖은 아래는 물론, 다리로 허리를 껴안아 오히려 제가 매달린 것 같은 자세가 차마 고개를 들 수도 없이 부끄러웠다.

“하아, 하아.”

“벨라, 윽…….”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몸을 슬쩍 물려 제 것을 빼냈다. 기다랗고 굵은 성기가 굴곡진 내벽을 죽 훑고 빠져나가자 안에 고여 있던 백탁 액이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무리하게 들쑤셔진 아래가 가벼운 열상이라도 입은 듯 화끈거렸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르시엘은 이쯤에서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지친 기색조차 없이 미라벨라의 음부를 손바닥으로 감싸 대충 훔쳐 낸 다음,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바로 삽입해도 될 정도로 단단하고 둔중한 성기가 아래에 닿았다. 제 음부를 벌리는 손길에 미라벨라가 도리질을 하며 작게 훌쩍였다.

“흐윽, 오라버니, 읏, 오늘은 더는 힘들어요…….”

“…….”

“아래가, 쓰려서…… 쉬고 싶어요, 흑, 제발요.”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에서 배어난 물기가 단단한 맨어깨를 적시자 르시엘이 굳어졌다. 겨우 두 번으로 끝내자니 감질만 날 뿐이지만, 힘들다고 울기까지 하니 봐줄 수밖에. 그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봐줄게.”

“흐읏…….”

그런데 정작 봐주겠다던 그는, 미라벨라를 안고 침대로 향했다. 아직 알몸인 그녀를 침대에 눕히더니 제 남은 옷가지마저 죄다 벗어 던지는 게 아닌가.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지며 르시엘이 제 옆에 눕는 걸 보고 화들짝 놀란 미라벨라가 항의했다.

“……읏, 봐주신다고 했잖아요!”

“누가 또 한대? 강제로는 나도 싫어.”

거리낌 없이 자신을 드러낸 남자답고 단단한 육체가 희고 자그마한 알몸을 끌어안았다. 느른한 맹수처럼 몸을 늘인 그가 맨살을 밀착해 왔다. 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더없이 기꺼웠다. 그는 미라벨라의 머리를 강한 팔로 감싸고, 제 품으로 꽉 당겨 안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그냥 이렇게 좀 있자…….”

발기가 풀리지 않아 묵직한 기둥이 아랫배를 압박하고, 피가 몰려 불그스름해진 둥근 귀두가 배꼽 언저리를 쿡쿡 찔렀다. 하지만 르시엘은 정말 더 하려 들지 않고 참아 주었다. 작은 틈조차 없이 완벽하게 밀착된 서로의 나신. 본래도 체온이 높은 편인 그에게서 기분 좋게 전해지는 온기가 이상하리만큼 두근거렸다.

“……으응, 르시엘, 읏, 오라버니.”

물론, 참아 준다고 해서 그의 몸 전체가 얌전히 있었던 건 아니었다. 사냥을 마친 뒤 휴식을 취하는 짐승처럼, 미라벨라를 안고 누운 그의 손이 어느 순간 위로 슬쩍 올라왔다. 젖가슴을 덮친 오라버니의 커다란 손이 말랑한 살을 꾹꾹 주물렀고 부어서 새빨개진 유두를 부끄럽게 만졌다. 나중에 그는 아예 얼굴을 파묻어 젖을 먹는 아기처럼 꼭지를 쭉 빨아 뱉고, 혀로 감싸 집요하게 굴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르시엘은 유난히 미라벨라의 가슴을 그냥 놔두는 법이 없었다. 삽입하지 않을 때도 틈만 나면 보려 하고 주무르려 든 탓에, 음란한 교육을 시작한 뒤로 미라벨라의 뽀얀 살결에는 늘 그의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지금도 유두가 얼마나 부었는지 평소보다 배는 불어난 느낌이라, 미라벨라가 품에서 벗어나려 몸을 이리저리 틀었다.

“오라버니, 흐읏, 좀 그만…….”

“왜, 싫어?”

“그게 아니라…… 너무 많이 만지니까 자꾸, 여기가 커지는 거 같고…….”

그녀의 투정에 르시엘이 음험한 눈빛으로 낮게 웃었다. 안 그래도 통통하게 부은 젖꼭지가 못된 손에 붙잡혀 쭈욱 당겨졌다.

“……아!”

“커지면 더 좋은 거 아냐? 애 낳으면 물리기도 그렇고. 작아서 어디다 써?”

“하으, 진짜…… 너무해요.”

작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인 미라벨라가 주먹으로 돌처럼 단단한 어깨를 때리며 반항했다.

“오라버니 몸도 아닌데! 흐읏, 왜 자꾸 제 걸 가지고…….”

“억울하면 너도 내 거 만져.”

“……읏!”

그가 달아나려는 작은 손을 붙잡아 돌처럼 딱딱한 제 가슴 근육 위로 끌어다 놓았다. 보드라운 손바닥에 단단한 유두가 걸리고, 훨씬 뜨거운 체온과 피부 아래에서 힘차게 뛰는 심장의 박동이 느껴졌다. 차마 르시엘이 하는 것처럼 마구 주무를 수는 없어 미라벨라는 그냥 얹어 놓은 채 손끝만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내 건 딱딱하니까, 네 게 좋지.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워서…….”

기분 좋거든…… 그가 느른하게 숨을 몰아쉬며 미라벨라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짙은 색 머리카락이 잘생긴 이마 위로 보기 좋게 흐트러졌다. 그녀는 문득, 제게 안겨 휴식을 취하고 있는 맹수처럼 커다란 남자가 정말 성서에 나오는 아기 천사 같다는 착각이 일었다.

약간의 망설임 끝에 미라벨라는 가느다란 팔을 천천히 앞으로 뻗었다. 작은 손이 잘 발달된 단단한 등을 안고 토닥였다. 눈을 감고 있던 르시엘이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너 에일레스 좋아하지, 벨라.”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넘기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르시엘이 문득 물었다.

“에일레스가 왜 좋아? 다정해서?”

“네? 그건…….”

“너한테만 다정한 척하는 거야, 속지 마.”

실컷 여동생을 독차지하고도 성에 차지 않아, 질투심에 속이 뒤집힌 르시엘이 혈육 간의 우애도 저버리며 제 품에 갇혀 마주 보고 누워 있는 미라벨라를 슬슬 꾀었다.

“알고 보면 우리 중에 제일 무서운 사람일걸.”

“르시엘 오라버니, 저는…….”

“잠깐.”

막 입을 열려 하는 미라벨라를 그가 가로막았다. 생각해 보니 차라리 듣지 않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을 테니까.

“아니다, 그냥 말하지 마.”

하지만 그녀는 하려던 말을 멈추지 않았다.

“저, 에일레스 오라버니 좋아하는 거 맞아요.”

“하, 말하지 말라니까……. 알았어, 벨라.”

르시엘이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곧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 저는, 오라버니도 정말 좋아해요.”

“……뭐?”

그녀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이 믿기지 않아 르시엘의 붉은 눈이 커졌다.

“처음 집에 왔을 땐 사실 낯설고 두려운 마음도 꽤 있었어요. 그때 에일레스 오라버니께서 다정하게 대해 주셔서 많이 의지가 되었고요. 그건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그리고 이젠, 세 분 오라버니 모두 제 일상에서 너무나 큰 의지가 되는 소중한 가족인걸요.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정도로요.”

“하, 벨라…….”

“흐읍! 오라버니, 숨, 숨 막혀요!”

순간 사내다운 관능이 물씬 풍기는 단단하고 야성적인 육체가 미라벨라를 꽉 끌어안았다. 벨라, 난 정말 네가…… 그는 꽉 잠긴 목을 울리며 낮게 끓는 소리를 내고, 반쯤 몸을 일으켜 내려다보며 전신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아직 열기가 가라앉지 않은 작은 몸이 또다시 달아오르면서 촉촉하고 부드러운 살결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발기가 채 풀리지 않았던 묵직한 성기가 완전히 뻐근해지며 포피가 당길 정도로 부푸는 감각에 르시엘이 윽, 짧게 신음했다. 괴로운 듯 잘생긴 미간이 찌푸려졌다. 두툼한 귀두 끝 갈라진 틈으로 남아 있던 정액과 미끈거리는 투명한 액체가 줄줄 흘러 번들거렸다. 그것은 붉게 충혈된 표면을 흠뻑 적시고, 새하얀 시트와 미라벨라의 몸 위로도 뚝뚝 떨어졌다.

“……저, 르시엘 오라버니. 한 번 더…… 하셔도 돼요.”

왠지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미라벨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피가 잔뜩 몰려 검붉어진 귀두가 터질 듯 팽창했고 기둥 쪽의 피부는 너무 당겨져서 아파 보였다. 아직 아릿한 음부로 또다시 그를 받아 낼 엄두가 나진 않았지만, 온몸에 걸쳐 퍼부어진 키스에 그녀 역시 안달이 나기도 했다.

“후으, 그럼 다른 데로 할게.”

순식간에 그녀를 잡아챈 르시엘이 마주 본 자세로 배 위에 훌쩍 올라앉았다. 무릎에 힘을 주어 미라벨라에게 제 무게가 실리지 않도록 한 채, 육중하게 발기한 기다란 성기를 부드러운 젖가슴 사이에 끼웠다. 그는 말랑한 두 개의 구체 사이에 제 것을 속박하여 앞뒤로 움직이며 점점 더 속도를 더했다.

“앗, 하으, 아, 흣!!”

“하.”

사랑스럽게 부푼 뽀얀 젖가슴이 앙증맞게 발기한 꼭지를 매달고 그의 움직임에 따라 오르내렸다. 그 음란한 광경을 내려다보며 짙어진 시선이 정욕으로 잔뜩 흐려졌다. 빠르게 미끄러지는 두툼한 성기는 피할 수도 없는 미라벨라의 작은 턱과 입술까지도 종종 닿았다. 알이 굵은 귀두가 뱀 머리처럼 꿈틀거리고 갈라진 끝에서 묽은 액체와 고여 있던 정액이 흘러 표면을 번들대며 적시는 모양이 너무 잘 보여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 벨라…… 후읍.”

르시엘의 탄탄한 둔부가 한순간 홈이 팰 정도로 강하게 수축하고 그가 허리를 짧게 떨며 그대로 사정했다. 벌겋게 익은 귀두가 살아 있는 듯 울컥거리며 요도구에서 몽글몽글한 허연 정액을 쏟아 내는 민망한 광경을, 미라벨라는 눈을 돌리지도 못하고 생생히 지켜보아야만 했다. 지칠 줄 모르는 체력만큼이나 양도 많고 사출되는 힘도 강해 그녀의 턱과 달아오른 뺨에도 그의 흔적이 튀었다.

“후…….”

미라벨라의 몸 위에 비릿한 정액을 잔뜩 싸지른 건 르시엘인데, 도리어 그녀가 얼굴이 더 새빨개졌다. 수치를 모르는 그는 오히려 제 체액으로 엉망이 된 여동생의 젖가슴과 아랫배를 느긋이 감상하며 배부른 수사자처럼 만족스러운 낯짝을 보였다.

“……미라벨라, 벨라.”

몸이 더러워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그가 미라벨라의 등을 꽉 안아 제게 완전히 밀착시켰다.

“벨라, 나는, 네가…….”

분명 술기운이 남은 건 아니었는데, 바라보는 붉은 눈이 잔뜩 충혈되어 주변을 다 태울 듯 들끓었다.

“정말, 너무…….”

좋아……. 작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한 조각의 숨마저 뜨거운 열기로 집어삼키듯 덮쳐졌기에 그에 대한 답은 할 수 없었다. 미라벨라는 대신, 저를 휘감아 오는 오라버니의 단단한 목을 꼭 끌어안았다.

달아나지 않고 얌전히 순응하던 말랑한 혀가 어느덧 그의 움직임을 똑같이 따라 하며 사랑스럽게 화답했다. 그 밤, 질척하게 섞여 드는 서로의 타액은 그 어떤 미약보다 달았다.

늘 갈급하고 잡아먹을 듯 다소 거칠었던 다른 날과 달리, 그는 자신을 억누르며 제법 품격 있게 입술을 겹치고 숨을 불어넣어 왔다.

“하…… 으음.”

“아…….”

친밀하고 애정 어린 행위에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떨렸다. 서로를 깊이 얽은 느릿하고 부드러운 입맞춤은 그렇게 고요한 밤을 오래도록 물들였다.

* * *

미라벨라가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슴푸레한 새벽녘이 다 되어 있었다.

“그럼 다음 주에 봐, 벨라.”

“조심히 들어가세요, 르시엘 오라버니!”

결국 다시 한번 불이 붙었고 두 사람 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니, 사실 그녀는 르시엘에게 시달리던 도중 잠깐 기절하듯 잠이 들긴 했지만, 중간중간 눈을 떴을 때마다 여전히 그의 아래에서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경악했다.

미라벨라는 상업 마차를 타고 혼자 갈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르시엘은 끝내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미라벨라를 마차에서 무사히 내려놓은 뒤, 저택에 잠시 들를 틈도 없이 기사단까지 꽤 먼 거리를 되돌아갔다.

이미 모두가 잠들었을 시각. 어두운 하늘에는 소금을 뿌린 듯한 새벽별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조용히 방으로 올라가려던 미라벨라는 문득 2층 가장 왼쪽 창문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방은 레이든의 집무실이었다.

‘설마 오라버니께서 아직까지 일하시는 건…….’

늦은 시각이었기에 그냥 제 방으로 갈까,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그의 집무실이 있는 층으로 향했다.

똑똑.

굳게 닫힌 문 안에서는 평소처럼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내려지지 않았다. 미라벨라는 한 번 더 노크하고 잠시 기다렸다가 문을 살짝 열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오라버니, 저예요.”

언제나처럼 건조한 방 안. 그녀의 눈에 들어온 건 의외의 광경이었다. 레이든은 집무실에서 밤을 지새운 듯 책상에 앉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그가 일할 때 쓰는 얇은 금속제 테를 두른 안경이 바로 옆에 보였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는 마시다 만 독한 위스키 잔이…….

문득 방 안의 공기가 약간 싸늘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마침 벽난로 안 장작이 거의 다 재로 변해 불씨가 사그라들고 있었다. 미라벨라는 그를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벽난로 앞으로 다가가 사위어 가는 불씨를 살려 낸 다음, 옆에 놓인 장작도 한두 개 더 던져 넣었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

레이든은 정말로 깊이 잠든 것처럼 보였다. 이처럼 무방비한 모습은 언젠가 마차를 타고 함께 황궁에 다녀왔던 날 이후 처음 보는 것이다. 반듯한 이마 위로 흘러내린 풍성한 백금발과 같은 색의 긴 속눈썹이 내려진 눈을 그녀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드물게 휴식을 취하는 오라버니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미라벨라는 가만히 곁에 앉아 지켜보았다. 잠든 그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모른 척 입을 맞추고 싶을 만큼. 매끄러운 조각처럼 흰 피부와 남자치고는 붉은 입술, 그리고 품위를 갖춘 커다란 손. 우아하게 펜대를 쥐는 손가락은 마디가 시원스럽게 길었고, 손톱은 늘 짧게 다듬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단정한 손끝을 응시하던 미라벨라는 난데없이 얼굴을 붉혔다. 불과 며칠 전, 그의 우아한 손가락이 그녀의 어디를 아프게 꼬집고 어디를 부끄럽게 파고들었는지가 너무도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 대체 무슨 생각을!’

무심결에 떠오른 야릇한 장면을 지워 내려 그녀는 황급히 도리질을 했다. 단지 혼자 생각한 것뿐인데도 제 음란한 머릿속을 공개적으로 들킨 것처럼 민망했다. 아까 지핀 벽난로의 불은 아직 활활 타오르지 않았으나, 미라벨라는 왠지 목이 타는 듯 마르고 몹시 더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빠르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던 미라벨라는, 유일하게 알고 있는 자장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기분이 극히 좋은 날에만 가끔 들을 수 있었던 노래……. 자그마한 손이 숱 많은 백금발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부디 오라버니의 짧은 휴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벽난로 안의 잘 마른 장작이 어느샌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고요한 집무실 안에서 잠든 레이든 곁에 앉아 있던 미라벨라는 서서히 졸음이 왔다. 나지막이 자장가를 부르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면서, 밀려오는 잠을 이기지 못한 그녀는 어느 순간 수마에 몸을 맡기고 말았다.

‘……후.’

잠시 후, 책상에서 몸을 일으킨 레이든은 손끝에 힘을 주어 눈가를 지그시 눌렀다. 시계를 보니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았지만 왠지 아주 오랜 시간 숙면에 든 듯 몸이 가뿐했다. 그가 문득 제 옆의 작은 의자에 웅크린 채 자고 있는 미라벨라를 발견하고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미라벨라가 노래한 거였군.’

잠결에 어렴풋이 들었던 낯익은 자장가. 그것은 분명 아주 오래전, 그의 어머니가 첫아기를 위해 불러 주었던 것과 같은 노래였다……. 바로 옆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작은 얼굴을 그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으응…….”

웅크린 자세가 불편했는지 미라벨라는 잠결에 몸을 뒤척였다. 치맛자락이 훌쩍 올라가 고스란히 드러난 희고 가느다란 발목. 그 연약한 살결에서 잠시 눈을 떼지 못하던 레이든은 급히 시선을 거두고 다소 거친 동작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거지. 그 대상조차도 불명확한 짜증이 갑작스럽게 밀려왔다.

미라벨라를 욕망한다.

그래, 자신은 확실히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체 언제부터? 미라벨라가 납치되었던 그날, 혹은 그보다 훨씬 더 전부터였을지도 몰랐다. 무의식으로부터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었던 사실을, 최근에 와서는 도저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짜증이 일 정도로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단순한 욕정이라 생각했다. 꽤 오랫동안 여자를 안지 않아 이런 식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하지만 그따위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라이오넬 공작으로서가 아닌 그 개인이 스스로 갖고 싶다 욕망한 최초의 대상. 만약 이 애가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진다면 어떤 기분일까. 레이든은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거세게 뒤틀렸다. 용광로보다도 더 뜨거운 불덩이가 어디선가 날아와 마지막 한 방울까지 혈관을 말렸다. 열로 바짝 오그라든 내장이 조각나 끊어지고 식도와 성대마저 태우며 치받아 오는 것 같았다.

태어난 순간부터 소공작이라 불렸던 그는 두 동생들보다도 훨씬 더 많은 제약 속에 살아왔다. 아버지는 후계자인 그를 엄격하게 다루었으며, 아주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욕망은 늘 후순위로 배제되었고, 어느 순간에나 그가 최우선으로 여겨야 할 가치는 가문의 명예와 가주로서의 의무였다.

미라벨라를 교육시켜 정략혼을 성공시키는 것 또한 자신의 책무 중 하나일 뿐이라 여겼는데, 도저히 통제 불가능한 감정이 갑작스럽게 끼어들면서 모든 것을 망쳐 놓았다. 어느 순간 그는 걷잡을 수 없이 꼬이는 기분과 함께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어 간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으응…… 오라버니?”

깊은 잠에 빠져 있던 미라벨라가 깨어난 건 바로 그때였다. 대체 밤새 뭘 하고 왔길래, 잠기운이 도통 물러가지 않은 하늘색 눈이 그를 향했다. 마음속의 혼란한 감정을 빠르게 갈무리한 그가 엄격한 큰오라버니의 얼굴을 보란 듯이 뒤집어썼다.

“미라벨라, 이제 온 건가.”

“늦어서 죄송해요, 오라버니. 마차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들었어, 르시엘과 있었다고. 지금까지 뭘 했지?”

“…….”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자그마한 얼굴을 새파란 눈동자가 뚫어지게 응시했다. 미라벨라가 그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어색하게 목 언저리를 만지작거렸다.

“저, 삯마차가 올 때까지 르시엘 오라버니와 공부를…….”

끝이 살짝 떨리는 조심스러운 목소리. 미라벨라는 거짓말에 무척 서툴렀다. 둘이서 밤새도록 하고 온 게 적어도 외국어 회화 공부는 아니었으리라는 사실쯤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레이든은 조금 전 그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닿았던 새하얀 목 아래에서 손톱 크기의 붉은 자국을 발견했다. 오라비에게 순종하는 착한 여동생인 양 얌전히 앉아 있지만 곳곳에서 느껴지는 르시엘의 흔적……. 날 때부터 봐 온 제 손아래 형제의 냄새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래.”

막 희미한 빛이 밝아 오기 시작한 창밖으로 시선을 주며 그가 천천히 말했다.

“밤새 외국어 회화 공부를 했다니, 무척 피곤하겠군.”

“…….”

“이만 가 봐.”

그녀의 얼굴에는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한 데 대한 죄책감이 짧게 스쳐 갔다. 이만 나가 보라 축객령을 내리자 미라벨라는 눈에 띄게 안도하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

턱.

막 뒤돌아서려던 미라벨라가 붙잡힌 손목을 내려다보고는 동그랗게 커진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미라벨라.”

그 눈을 보며 레이든은 잠시 동안, 어린 여동생의 가느다란 허리를 들어 책상 위에 엎어 놓고 그대로 범하는 상상을 했다. 놀라 뒤돌아보려는 그녀를 고개조차 들지 못하도록 뒤에서 콱 잡아 누르고, 새하얀 엉덩이만 높이 치켜들게 한 뒤 엉엉 울 때까지 아래를 쑤셔 대는 상상을.

단단한 책상에 한쪽 뺨이 짓눌리고 젖가슴과 바짝 선 유두가 종이 위에 쓸릴 대로 쓸려 애처로운 울음을 터트릴 그녀를 상상하자, 레이든은 순식간에 허리 아래로 묵직하게 피가 몰렸다.

“……오라버니?”

저를 부르며 고개를 갸웃하는 미라벨라를 앞에 두고, 그는 비로소 자신의 뚜렷한 욕망을 마주했다.

지금껏 계획해 온 모든 일들을 걷어치우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그녀를 가두기라도 해 유일한 보호자로 남고 싶은 욕망. 그는 깜찍하게 거짓말을 하며 외박을 하고 돌아온 여동생을 발가벗기고 엉덩이를 때려 가며 혼을 내 울리고 싶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소녀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고 잠자리까지도 가르쳐 여자로 만든 것처럼, 앞으로도 제 손으로 그녀의 모든 것들을 통제하고 싶었다. 어두운 욕망이 선명한 형태를 드러내며 스멀스멀 그를 잠식해 왔다.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그 새카만 욕망을 접어 두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간 레이든은 목선이 보이지 않도록 옷깃을 여며 주었다.

그런다고 붉은 성애의 흔적이 즉시 사라질 리 없었지만, 자신은 몰라도 남들에게까지 보여 주고 싶진 않다. 보초를 서는 가문의 기사들이나 혹 사용인들이 지나다닐지도 모르는 복도 밖에 이런 모습으로 내보낼 수는 없었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밤공기가 차.”

그는 치솟는 감정을 지그시 억눌렀다.

“감기 들어. 따뜻하게 입고 다니도록.”

“앗, 네.”

그 어두운 속내를 알 리 없는 미라벨라가 몹시 감동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가 보도록.”

“네, 오라버니. 감사합니다!”

미라벨라가 나간 뒤, 조용한 집무실 안에는 또다시 벽난로의 불이 타닥거리는 작은 소음만이 자리했다.

치미는 상념들을 무시하며 그는 눈앞에 보이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종이를 채우고 있는 글자들은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한동안 말없이 응시하던 그가 결국 그것을 집어던졌다. 하얀 페이퍼가 허공을 날며 바닥에 흩어지는 광경을 보며 레이든은 다소 예민해진 낯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조금 전, 감격한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미라벨라를 떠올리자 스스로에게 욕지기가 치밀었다. 하, 동생으로 거두겠다고? 제 여동생에게 발정하는 오라비는 세상에 없다. 그는 차라리 감정에 솔직한 두 동생이 부러웠다.

참을 수 없는 두통이 일었다. 그가 고른 가짜 여동생은 정말 빌어먹게 사랑스러웠다. 에펠 공국의 후계자 따위를 유혹할 수 없을 리가. 그의 취향이 어떻든, 좆 달린 사내라면 반드시…….

드르륵.

과거의 장부를 정리하고 통계를 내는 해묵은 일 처리라도 할 생각으로 그는 평소 잘 쓰지 않는 맨 안쪽의 책상 서랍을 열었다. 하지만 두껍게 쌓여 있는 서류 더미 사이에서 한눈에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한쪽 귀퉁이에 노란 데이지꽃이 어설프게 수놓인 새하얀 손수건이었다. 그는 천천히 팔을 뻗어 그것을 집어 들었다.

“…….”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날아가기는커녕, 폐부를 더 강하게 파고드는 풋풋하고 옅은 향기. 그의 후각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을 자극하며 참을 수 없는 어떠한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그는 이를 악물었다.

신경질적으로 하의를 풀자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가 기다렸다는 듯 속옷 밖으로 튕겨져 나와 솟구쳤다. 그것은 아까 미라벨라와 대화를 나눌 때부터 터질 듯이 부풀어 앞섶을 채우고 있었다. 울퉁불퉁한 핏줄이 불거진 기둥을 레이든은 다소 갈급한 손길로 잡아챘다. 뭉툭한 선단에 집중적으로 피가 몰려 팽창한 귀두 끝은 거의 검붉은 색이었다. 그는 굵직한 중간을 휘어잡고 포피를 당겨 거칠게 쓰다듬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

탄력 있게 부푼 선단에서 멀그스름한 선액이 흘러나와 핏줄이 툭툭 불거진 기둥을 타고 흘렀다. 억눌려 있던 호흡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탁, 탁.

작은 천 조각을 얼굴에 얹고 여동생의 향기를 들이마시며 그는 제 것을 쥔 채 한참 허리를 흔들었다. 끈덕지고 질긴 선액이 줄줄 흘러 번들대는 기둥을 아래위로 쓸고, 부푼 귀두 끝의 요도구를 엄지로 지그시 누르며 문질렀다. 품위 넘치는 라이오넬 공작이 할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할 각종 파렴치한 상상을 하며, 그는 집무실의 의자에 앉은 채로 사춘기에도 잘 하지 않던 짓을 정신없이 해 댔다.

후…… 한참 후에야 낮은 한숨과 함께 그가 욕망을 토해 냈다. 하나 완전히 후련하지는 않았다. 뭉툭한 끝머리가 울컥거리고 성기를 쥐고 있는 손을 끈적하게 적시는, 산뜻하지 못한 기분을 느끼며 그는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의자에서 머리를 젖히고 잠시 호흡을 고르던 그가 시선을 비스듬히 아래로 내렸다. 수음하는 내내 얼굴 위에서 바쁘게 일렁거리던 손수건을 치우자, 여전히 발기해 있는 그의 성기가 보였다. 짙은 쾌감만큼이나 진하고 비릿한 수컷 향을 풍기는 정액을 길게 토해 내고도 그것은 여전히 아랫배 위로 한참 치솟아 빳빳이 머리를 들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지그시 물며 손수건을 쥔 손으로 또다시 제 것을 휘어잡았다.

“하, 윽…….”

순결했던 흰 손수건은 오래지 않아 엉망이 되었다. 그만큼 그의 심경도 엉망진창이었다.

바로 며칠 전 알현했을 때도 황제는 그녀를 교육하는 일이 잘되고 있느냐고 떠보았었다. 그는 물론 잘 되어 간다고 답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가슴이 콱 막힌 듯 답답했다. 라이오넬가의 모든 사업은 순조로웠고 정치적 입지는 탄탄하여 다 잘 풀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은 그의 마음속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한심하기 짝이 없는 상태였다.

“하…….”

순수함의 상징과도 같았던 하얀 천이 더러운 욕망으로 얼룩진 모습을 내려다보니 기분이 몹시 참담해졌다. 레이든은 그렇게 착잡한 심경으로 밤을 새웠다.

* * *

며칠째 내리던 비가 그치고 오랜만에 따스한 햇살이 비쳤다.

황후가 머무르는 장미궁.

르페르트 제국의 황후, 루이넬라는 유리 온실로 만들어진 실내 정원에서 자신이 가꾸는 관엽 식물과 장미목을 돌보고 있었다.

지금의 황제와 혼인하여 궁에 들어온 지도 어느덧 30여 년. 쉰 살이 넘은 나이였으나 그녀의 자세는 누구보다 꼿꼿했고 손짓 하나조차 퍽 품위가 있어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하나 갓 피어난 꽃송이를 바라볼 때 살포시 미소를 담아내는 눈빛이라든지 특유의 가벼운 걸음걸이는 기나긴 세월에도 변함이 없어, 오래전 라이오넬 공녀라 불리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저, 황후 폐하. 황태자 궁으로 보냈던 시종이 돌아왔습니다.”

황후궁의 시녀장이자 그녀의 오랜 친구인 엘리제 백작 부인이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어린아이의 손바닥처럼 여린 잎사귀를 부드러운 천으로 손수 닦아 내던 루이넬라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곧 평소와 다름없는 온화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들라 하세요.”

잠시 후, 황후의 명으로 황태자에게 다녀온 시종이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 폐하, 분부하신 대로 황태자 전하께 약을 전달했습니다.”

“황태자가 약을 먹었느냐?”

“그, 그것이…….”

차마 보고하지 못하는 시종에게서는 어딘가 쩔쩔매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것만으로도 결과는 알 수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는 오간 데 없이 섬세한 입가가 딱딱하게 경직되었고, 자엽색으로 막 움트기 시작한 식물의 잎을 바라보던 얼굴은 눈에 띄게 굳어졌다.

“알았다.”

온화하기 짝이 없던 유리 온실이 갑자기 북풍이라도 든 것처럼 서늘해졌다. 주위에 있던 가까운 사용인들이 저마다 고개를 수그리고 눈치를 보았다. 황후가 황태자 궁에 무언가를 보내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고, 그때마다 늘 이와 같은 결과가 뒤따랐다.

황후가 시종의 곁을 지나쳐 밖으로 나가자 시녀장이 황급히 뒤따랐다. 실내 정원을 빠져나오니 이번엔 시종장이 덮개가 씌워진 커다란 은쟁반을 들고 입구 쪽에 서 있었다.

“황후 폐하…….”

“무슨 일인가.”

“황제 폐하께서 환절기라 하여 몸에 좋은 보양식을 보내셨다 합니다. 방금 전 황제궁에서 사람이 와 두고 갔습니다.”

그가 둥근 덮개를 열자, 접시에는 부드러운 흰 다랑어 스튜와 먹음직스러운 향을 풍기는 자고새 요리가 들어 있었다. 모두 황후가 오래전부터 즐겨 먹는 음식들이었다.

“하…….”

그녀는 한순간 복잡한 얼굴을 했지만 그것은 곧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루이넬라는 낮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장미궁 안으로 향했다.

“바람이 차네요, 엘리제 백작 부인. 이만 안으로 들어가죠.”

“네, 황후 폐하.”

시녀장이 급히 황후의 뒤를 따르며, 들고 있던 숄을 걸쳐 주었다.

“황후 폐하! 이 요리는 어떻게 할까요?”

그때까지 쟁반을 들고 서 있던 시종장이 다급히 물었다. 황후는 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그를 지나치며 차갑게 답했다.

“가져다 버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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