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사라진 미라벨라
시간의 흐름은 도도하여 빠르게 흘러갔다. 공작가의 막내딸이 된 미라벨라가 세 오라버니와 함께하게 된 지도 어느덧 2년이 지난 어느 여름이었다.
지루했던 장마가 끝난 직후, 드높은 하늘은 온통 그림 같은 파스텔 톤으로 물들었다. 제국의 여름 날씨는 본래 습도가 높지 않아 쾌적했으며, 곁을 스치는 바람에는 맑고 청량한 계절의 기운이 어김없이 스며 있었다.
미라벨라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각종 교양 수업을 비롯한 가정 교육을 받느라 매일같이 바빴고, 주요 교과목들은 세 오라버니가 각각 맡아 가르쳐 주었다. 레이든이 역사와 경제, 정치 과목을, 에일레스가 수학과 음악, 미술을, 그리고 르시엘은 외국어 회화와 의외로 문학을 담당하는 식이었다. 예법과 사교 화술, 댄스 등의 필수 교양은 짬짬이 시간을 내어 돌아가며 봐 주었고, 이제는 완전히 루틴이 형성되어 있었다.
다만, 그녀 스스로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가장 중요한 가정 교육에 유예를 두겠다는 레이든의 생각은 여전히 확고했다. 초기에 미라벨라를 훈육하는 과정에서 체벌을 했던 일과 관련한 오해는 다행히 직후에 밝혀졌다. 큰형을 오해하고 독자적인 판단으로 여동생에게 야릇한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했던 다른 두 오라버니가 묵직한 죄책감을 느꼈음은 물론이다.
그 때문일까, 음란한 가정 교육을 보류하자는 가주의 결정에 그들은 기꺼이 동의했다. 하여 그 뒤로는 모두가 쭉 별일 없이 그녀를 공부시키는 데에만 충실하고 있었다.
“미라벨라, 지난주에 내 준 경제학 과제는 끝마쳤나? 오늘 르웰린 후작가의 티 파티에 참석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네, 레이든 오라버니. 아침 식사 후에 보여 드릴게요.”
“좋아. 그럼 내 집무실로 가져오도록. 난 사업상의 일로 급한 회의가 있어 오전 중으로 지방에 내려갈 거다. 아마 내일 저녁에나 돌아올 거야.”
“네, 알겠습니다.”
“이번 주 수업 일정은 좀 변경하기로 하지.”
옆에서 듣던 에일레스가 의아한 눈을 했다. 그는 마탑 부설 연구소에 근무하며 아카데미의 부교수로도 재직 중이었는데, 근래 들어 일이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전날에도 거의 수면을 취하지 못한 탓에 그는 지금도 다소 피곤한 얼굴로 캐모마일 티 잔을 들어 올리던 중이었다.
“르웰린 후작가의 티 파티?”
“그래, 후작가의 넷째 딸이 미라벨라보다 한 살 위였던가. 말이 티 파티지, 그 또래끼리 주기적으로 모여 노는 모임인 것 같더군.”
“아. 친구들이 생겼다고 하더니, 집에 놀러 가는 거로구나.”
“네, 저 혼자 가는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미라벨라, 아무 생각 없이 놀라고 보내 주는 게 아니니 그런 자리에서 다른 귀족 영애들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잘 보고 배우도록 해. 예법을 실전에 적용하고 사교 화술에 능숙해지기엔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
“네, 오라버니.”
꿀을 넣은 부드러운 오트밀 포리지를 한 입 먹으려던 미라벨라가 스푼을 내려놓고 바짝 기합이 들어간 얼굴로 대답했다. 사실 레이든이 보기에도 그녀의 예법은 이제 딱히 흠잡을 데가 없었다. 단지 잘 잡아 놓은 생활 습관이 풀어지는 걸 막기 위해 더 엄격한 어조로 말했을 뿐.
“너는 라이오넬이다. 밖에서 네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가문의 평판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도록.”
그러나 이는 사실 지극히 오라버니다운 마음에서 우러나온 결정이었다. 성 루베이도 학원에서 지낼 때 많이 외로웠다는 말을 레이든은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여 그들은 때때로 바쁜 시간을 쪼개어 막내 여동생을 음악회나 미술관, 오페라 관람에 데려갔고, 체스나 카드 게임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하지만 제 또래 친구들을 사귀어 노는 건 또 다를 테지.’
얼마 전 레이든은 평소 사업상의 교류가 있는 르웰린 후작가를 방문하는 길에 그녀를 동행시켰다. 미라벨라가 결혼하기 전까지만이라도 또래들과 어울리며 즐거운 추억을 쌓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비록 훗날 대공비가 되어 에펠 공국으로 떠나면 이어지기 어려울 짧은 우정일 테지만, 긍정적인 경험과 추억은 남을 테니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데에도 바람직한 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수줍음을 타는 성격은 여전하였으나 처음으로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뒤로 미라벨라는 부쩍 밝아진 모습을 보였다.
“오, 제법인데? 벨라.”
르시엘이 굉장히 기특해하는 얼굴로 뿌듯하게 미라벨라를 바라보았다.
“처음 여기 왔을 땐 말도 제대로 못 하더니, 이젠 친구도 사귀고 다 컸네.”
잘했다, 큼지막한 손을 뻗어 미라벨라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그를 보고 에일레스가 약간 웃음을 참는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본래 집안의 막내는 다 자라도 늘 어리게 느껴지는 법이기에, 그의 입장에서는 원래 막내였던 르시엘이나, 새롭게 가족이 된 미라벨라나 똑같이 귀엽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막내, 너 지금 겨우 그거 먹고 되겠어? 병아리나 참새도 아니고. 자, 빨리 수프 한 그릇 더 먹어. 10초 준다.”
“읏, 하지만 저 정말 너무 배불러요, 르시엘 오라버니!”
“어디 봐, 배 볼록한가 보자.”
“아앗, 하지 마세요! 으으…….”
“뭐야, 아직 납작하잖아? 이리 와.”
르시엘이 옆자리의 미라벨라를 꽉 붙잡아 디저트로 나온 크림을 얼굴에 묻히려 들었다. 미라벨라가 빠져나오려 바둥거리는 바람에 새하얀 식탁보가 이리저리 구겨지자 레이든이 눈살을 찌푸렸다.
“식탁에서 소란 떨지 마, 하여간 둘이 똑같군.”
사람이 들고 난 자리는 알 수밖에 없다더니, 이것은 계절의 변화와도 유사했다. 봄이 오는 걸 크게 실감하지 못하다가도 문득 정신을 차려 보면 따스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곳곳에 스며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추웠던 날들이 전혀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미라벨라가 없던 시절이 어땠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때도 나름대로 즐거웠던 것 같긴 한데, 아침 식탁에서는 서로 무슨 대화를 나누었고 생일이며 크리스마스에는 뭘 하며 보냈던가…….
“공작님, 그 편지가 또 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무렵, 라이오넬가의 집사장이 금박으로 포장된 선물 상자와 편지 한 통을 가지고 들어왔다. 실링 봉인된 번쩍번쩍한 황금색 봉투는 한눈에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뿜어냈다. 페이퍼 커터를 들어 내용을 확인한 레이든이 달갑지 않은 기색으로 미간을 좁혔다.
“누가 보낸 거야, 레이?”
르시엘이 몹시 궁금한 얼굴로 목을 빼고 넘겨다보았다.
“왠지 같은 광경을 이미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드는데. 분명, 어제도 똑같이 생긴 편지가…….”
“……트릴로체 황녀.”
그는 여전히 굳은 표정을 풀지 않은 채 답했고, 그 말을 듣자마자 에일레스가 인상을 확 구겼다.
“뭐, 트릴로체? 그 캄포 제국의 미친년?”
“에일레스.”
레이든이 미라벨라 쪽을 힐끗 보며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말 좀 가려. 동생한테 좋은 거 가르치지.”
하지만 정작 미라벨라는 그다지 놀라지 않은 듯 얌전히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도 아름다운 외모와는 다른 면이 있는 에일레스가 때때로 독설가가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 형으로부터 매서운 경고의 눈빛을 받은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캄포 제국은 르페르트와 국경을 마주한 강대국이었다. 현재는 평화 협정을 맺었으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과거부터 양국 간의 감정은 썩 좋지 않았다. 이제 에펠 공국에서도 새로운 종류의 마력석이 발견되어 앞으로의 판도가 어떻게 변화할지 알 수 없었지만, 캄포 제국에서 생산되는 것은 품질이 꽤 좋았기에 무시할 수 없는 동맹국이었다. 각국마다 생산되는 마력석의 양과 질은 각 나라의 국력을 좌우할 만큼 중요했으니까.
몇 년 전, 평화 협정을 위한 사절단과 함께 캄포 제국의 공식적인 후계자인 트릴로체 황녀도 처음 르페르트를 방문했었다. 당시 그녀가 라이오넬 공작에게 반하여 일정 내내 지겹게 쫓아다닌 일은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사건이었다.
대대로 여왕이 다스리는 캄포 제국의 군주는 통상 정식 국서 외에도 수십에서 수백 명의 정부를 두기로 유명했다. 그 딸인 황녀 역시 어머니의 본을 받아 일단 마음에 든 남자는 반드시 자신의 하렘에 수집한다 했던가. 다만 한때 총애하던 남자라도 질리거나 잠자리에서 한 번이라도 자신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사지를 자르고 혀를 뽑아 잔인하게 처형한다니. 여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할 정도였다.
당시 레이든에게 단단히 빠진 황녀는 그가 제 남자가 되어 주기만 한다면 정식 국서로 맞는 것은 물론, 현재 하렘에 있는 수백 명의 정부들을 죄다 처형시키겠다며 매달렸었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한동안 집요하게 편지를 보내왔고……. 그럼에도 양국의 관계를 고려하여 안하무인인 황녀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고 좋은 말로 거절해야 했으니, 당하는 사람만 괴로울 따름이었다.
“이건 뭐야? 선물인가 본데.”
“풀어 보자.”
편지와 함께 도착한 고급스러운 보랏빛 벨벳 상자를 열자, 낯 뜨거운 디자인의 남성용 속옷이 나왔다. 보기에도 민망한 그 하늘하늘한 속옷은, 앞쪽의 주요 부위에 용도를 알 수 없는 크고 둥근 구멍이 나 있었다.
“윽, 이게 뭐야.”
“막내, 넌 보지 마.”
에일레스가 질색하며 고개를 돌렸고, 르시엘이 옆에 앉은 미라벨라의 눈을 큰 손으로 가렸다.
“하, 레이든이 저걸 입은 모습을 상상하니까 작년에 마신 술도 올라올 것 같아.”
“그딴 걸 왜 상상해?”
“저녁에 씻고 나서 한번 입어나 봐, 레이. 의외로 취향에 맞을지도…….”
“닥쳐라.”
레이든이 인상을 찌푸리며 드물게 험한 말을 했다.
“그런데 최근 1, 2년은 잠잠하지 않았어? 그래서 포기한 줄 알았더니. 예전에는 어떻게 설득한 거야?”
“……아직 어린 동생이 있어서 결혼하긴 곤란하다고 했다.”
“아하. 그런데 갑자기 왜 또 저래?”
“지난번 황제 폐하의 탄신연 때 방문했던 트릴로체 황녀가 르시엘을 봤거든.”
“아.”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치켜올리며 에일레스가 즉시 수긍했다.
“하긴, 형아가 없으면 무서워서 못 잔다고 둘러대기엔 르시엘은 좀…… 지나치게 장성한 동생이긴 하지.”
레이든은 낮은 한숨을 쉬며 집사에게 그 끔찍한 선물과 편지를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그럼 먼저 일어날게. 오늘 잘 다녀와, 벨. 레이든도.”
“나도 간다.”
각각 기사단과 마탑으로 향할 르시엘과 에일레스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이든 역시 집무실로 올라가고, 혼자 디저트까지 식사를 마친 미라벨라가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막 복도로 나섰을 때였다.
“벨라.”
“르시엘 오라버니?”
이미 나간 줄 알았던 르시엘이 홀로 식당 앞 넓은 복도에 서 있었다. 그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렸던 것처럼 약간 초조한 얼굴을 하고 서성이는 중이었다.
“오라버니, 아직 안 가셨어요?”
“손.”
“네?”
바로 앞까지 성큼 다가온 르시엘이 별다른 설명도 없이 대뜸 말했다. 즉시 알아듣지 못한 미라벨라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올려다보자, 르시엘은 다시 말해 주는 대신 단단한 팔을 쑥 뻗어 손목을 붙잡아 갔다. 다음 순간, 그녀의 손에는 제국에서 통용되는 화폐 중 가장 큰 단위의 금화가 쥐여져 있었다.
“용돈.”
갑자기 왜 돈을 주는 건지 영문을 몰라 깜빡이며 올려다보는 시선을, 그가 무뚝뚝한 얼굴로 슬쩍 피했다.
“오늘 친구들이랑 약속 있다며. 얻어먹고 다닐 거야?”
“앗, 하지만 오늘은 그냥 집으로 놀러 가는 거예요! 저, 안 주셔도 되는데…….”
“됐어, 간다.”
사실 그녀는 지금껏 개인적인 용돈을 가져 본 경험이 없었다. 성 루베이도 학원에서 지내던 시절은 당연했고 공작저에 온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필요한 게 있으면 오라버니들이 전부 사 주었기에 따로 돈을 쓸 일도 없었고, 혼자 외출하는 것도 오늘이 처음이었으니까.
“오라버니, 하지만 이건 과해요, 너무 많아요!”
미라벨라는 처음으로 받은 용돈의 액수가 너무 큰 것에 놀라 황급히 거절하려 들었다. 하지만 르시엘은 벌써 휘휘 손을 내저으며 돌아서서 저만치 걸어가는 중이었다. 순식간에 훅 멀어진 너른 등 뒤에 대고 그녀가 서둘러 외쳤다.
“감사합니다! 르시엘 오라버니.”
“고맙긴……. 잘 놀다 와. 조심하고.”
뒤를 돌아보는 대신 그는 다시 한 손을 들어 보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넓은 대리석 복도에 늘어선 커다란 창문으로 환한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멀어져 가는 르시엘의 적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귀가 그 때문인지 약간 불그스름하게 보였다.
미라벨라는 마음속이 따스한 햇살로 물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그 자리에 서 있다가, 그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제 방으로 돌아왔다.
“아가씨, 이제 오세요? 외출복으로 갈아 입혀 드릴게요.”
방 안에는 담당 하녀인 로지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라벨라가 목둘레에 귀여운 프릴 장식이 달린 외출용 드레스를 입고 나갈 준비를 마쳤을 즈음, 그녀는 옷과 함께 들고 온 가방을 건네주었다. 간단한 화장품이나 작은 소지품을 넣을 수 있는 작은 백은 미라벨라가 입은 외출복과도 잘 어울리는 디자인이었다.
“참, 미라벨라 아가씨, 가방을 열어 안을 한번 보시겠어요?”
“가방 안?”
“실은 아까 드레스 룸에서 오는 길에 에일레스 도련님을 마주쳤거든요. 아가씨 것인지 물어보시더니 잠시만 가방을 달라고 하셨어요.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셨다가 나와서 다시 돌려주셨는데, 처음보다 무거워진 게 뭐가 든 것 같아요.”
“……에일레스 오라버니께서?”
“네, 아가씨께 뭔가 주실 게 있으셨던 거 아닐까요?”
딸깍.
미라벨라는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고 살펴보았다. 안주머니에는 꽤 큰 금액의 용돈과 함께, 작은 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귀여운 벨,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다 와. 저녁에 보자!]
에일레스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유려한 필기체로 쓰인 쪽지에서 특유의 낮은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의 섬세함이 듬뿍 배어 있는 그 짧은 문장을, 미라벨라는 소리 내지 않고 몇 번이나 읽었다. 다정다감한 단어 하나하나가 입 안을 구르며 부드럽고 연약한 점막을 쉼 없이 간지럽혔다.
“아가씨, 바로 출발하세요?”
“응. 아, 그 전에 레이든 오라버니께 숙제를 제출하고 올게.”
“그럼 전 아래층에 내려가 마차를 대기시키라고 말해 둘게요.”
“고마워, 로지나. 다녀올게.”
레이든의 집무실은 한 층 위에 있었다. 나선형 계단을 올라 그 앞에 도달한 미라벨라는 한 차례 크게 심호흡을 한 뒤 견고한 호두나무 문을 노크했다.
똑똑.
“들어와.”
안에서 곧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때 레이든은 갈색 마호가니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서류 틈에서 몇 장을 골라 가죽 케이스에 챙겨 넣고 있었다.
“레이든 오라버니, 지난주에 내주셨던 경제학 과제물을 가져왔어요.”
“거기 둬.”
미라벨라에게는 잠시 눈을 주었을 뿐, 그는 짧게 답하고 다시 하던 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정리된 다른 서류를 흐트러뜨리지 않도록 주의하며 책상 끄트머리에 가져온 과제물을 올려놓았다. 당장 보지 않을 것처럼 말한 것과는 달리, 레이든은 곧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미라벨라의 숙제를 집어 들었다.
“잘했군.”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굳어 있던 미라벨라는, 짧지만 긍정적인 평가에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과제물을 훑어보는 냉랭한 시선은 비록 평소와 다름이 없었으나, 엄격한 큰오라버니에게서 이 정도의 후한 평가를 받아 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핵심 주제는 확실히 이해했군. 세부적인 예시를 든 부분에서 약간 미흡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부족한 건 다음 수업 때 보충하도록 하지. 잘했어, 미라벨라.”
“……감사합니다!”
미라벨라가 예상 밖의 칭찬에 작은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는데, 그가 뜻밖의 질문을 던졌다.
“미라벨라, 요즘 키가 좀 자랐나?”
“네?”
“왠지 전보다 더 자란 것 같은데.”
“아, 네, 옷을 맞출 때 보니 조금 커졌어요.”
“그렇군.”
레이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을 뿐, 다른 말은 더 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바빠 보이는 그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그녀는 서둘러 인사한 뒤 나갈 태세를 취했다.
“저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오라버니.”
“잠깐.”
“네?”
“이리 가까이 오도록.”
미라벨라가 가까이 다가서자 그는 서랍 안에서 수표책을 꺼내 건넸다. 왠지 그녀가 오기 전부터 미리 준비해 둔 것 같았다.
“받아.”
“오라버니, 하지만 이건…….”
미라벨라가 쉽게 손을 내밀어 받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레이든이 무감한 낯으로 다시 한번 채근했다.
“그냥 주는 게 아니야. 너도 이제 어엿한 공작가의 일원이니 돈을 쓰는 법도 알아야 하지 않겠나.”
“…….”
말하자면, 경제학 수업의 일환이라는 뜻이었다. 미라벨라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수표책을 받아 들고 그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그만 나가 봐.”
“네, 알겠습니다.”
그는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고 옆에 있던 다른 서류 위로 눈을 돌렸다. 그건 늘 있는 일이었다. 미라벨라는 평소처럼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집무실을 나가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돌아섰다.
“레이든 오라버니.”
“말해.”
하지만 정작 그를 부르고 나자 말문이 막혀 버린 듯, 말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부드러운 가죽 실내화를 신은 조그만 발이 잠시 동안 머뭇거리며 한 자리에 머물렀다. 미라벨라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저, 오늘 조심히 다녀오세요.”
짧은 침묵과 함께 레이든의 푸른 눈동자가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에일레스나 르시엘과는 이제 꽤 친해져 제법 장난도 치는 것과 달리, 미라벨라가 자신만은 유독 겁내고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봄 하늘처럼 맑은 파스텔 톤의 눈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 오늘 먼 지방에 가시면, 내일 늦게 돌아오신다고 하셔서, 저는 그냥…….”
오라버니가, 걱정이 되었을 뿐인데…….
역시 주제넘은 행동이었던 게 분명했다. 괜한 말을 했다는 후회가 밀려오며 눈물이 날 정도로 무안해진 미라벨라가 황급히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던 차였다.
“그래.”
한참 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레이든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너도 잘 다녀와. 미라벨라.”
“아…….”
“내일 보자.”
우아하고 귀족적인 푸른 눈동자가 이번에는 곧장 다른 곳을 향하지 않고 그녀에게 붙박였다. 조각처럼 견고한 얼굴은 여느 때처럼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았으나, 미세하게 전보다 부드러워 보였다.
* * *
르웰린 후작가의 정원에는 구르는 듯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따가운 햇볕을 막기 위해 몇 개나 설치된 차양막이 그늘을 만들고, 그 아래에 새하얀 테이블이 놓였다. 후작가의 장미 정원에서 열린 소녀들의 모임은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미있었다. 미라벨라는 제 또래의 영애들과 교류한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지만, 그간 예법 공부를 성실히 해 온 데다 다들 상냥하게 대해 주었기에 금방 어색함을 떨치고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었다.
“반가워요, 라이오넬 영애! 오는 길이 멀지 않았나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르웰린 영애.”
“우리끼리는 아리아드네라고 불러요! 어서 들어가요.”
오늘 티 파티의 주최자인 르웰린 후작가의 넷째 여식은 미라벨라보다 한 살 위였다. 그녀는 평소 어머니인 후작 부인이 손님들을 대하던 모습을 그럴듯하게 흉내 내어 제법 어른스러운 태도로 친구들을 맞이했고, 미라벨라에게 유독 친근하게 굴었다.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서자 먼저 와 있던 다른 영애들도 미라벨라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처음 뵈어요, 라이오넬 공녀님. 제가 지방의 친척 집에 가 있느라 지난번 모임에는 나오지 못했답니다.”
“반가워요, 모쪼록 미라벨라라고 불러 주세요.”
“혹시 이 드레스, 어느 부티크 제품인지 알 수 있을까요? 마침 이런 디자인을 찾고 있었거든요.”
“아, 이건요…….”
흔히 칼 없는 전쟁터라 불리는 곳이 레이디들의 사교 모임이었으나, 데뷔탕트를 전후로 한 어린 영애들만 모인 자리였기에 딱히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모처럼 엄격한 모친이나 가정 교사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소중한 자유 시간이었다. 괜한 기 싸움으로 허비하기보다는 각자 재기발랄함을 뽐내며 수다를 떠는 편이 훨씬 생산적이었다.
“참, 그 이야기 들으셨어요? 글렌 후작가가 파산했다는 소식이요. 여러 부문으로 확장했던 사업이 갑자기 어려워진 데다 때마침 세무 조사관이 나왔다나 봐요.”
“저도 들었어요. 수도의 저택마저 경매에 넘어가고 가족들은 지방으로 흩어졌다고……. 게다가 막내아들은 불법 도박장에 출입해 온 사실이 발각되어 감옥에 갔다고 하던걸요?”
“수도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였는데, 한순간에 그렇게 되는군요.”
화제는 수도에 떠도는 소문에 관한 것에서부터, 귀족 중 누군가의 결혼 소식 같은 소소한 신변잡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흘러갔다.
“엘리 영애, 이번에 포렌트 백작가의 차남과 약혼이 결정되었다면서요? 정말 축하드려요.”
“고마워요, 로렌스 영애. 다음 달 초에 약혼식 초대장을 보내 드릴게요.”
“혹시 집에서 약혼자와 단둘이 만나는 걸 허락하시나요? 저는 결혼이 두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어머니께서 아직 안 된다고 하시네요. 지난번에는 글쎄, 웬일로 심야 오페라 극장에 가는 걸 허락해 주시나 했더니 바로 옆 좌석에 오라버니가 앉아 있었다니까요.”
“어머!”
그녀들에게 있어 가장 큰 공통의 관심사는, 역시 결혼이었다. 귀족가의 영애들은 대부분 가문에서 정해 주는 사내와 혼약을 맺었고 그게 당연한 일이라 교육받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운명 같은 로맨스를 꿈꾸지 않는 건 아니었으니까. 연애 경험이 전무한 미라벨라로서는 사실 그다지 할 말이 없었으나, 그간의 교육에 힘입어 품위를 지키면서도 제법 적절한 화술로 맞장구칠 수 있었다.
“라이오넬 영애는 아직 좋은 소식이 없나요? 공작가 정도면 청혼서가 줄을 이을 것 같은데.”
“네? 아아…….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기 전이라 당장은 그럴 것 같아요.”
“그럼 마음에 둔 영식도 없나요? 혹시 제가 아는 사람이면 밀어줄게요!”
“그게, 아직은 없어요.”
미라벨라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에펠 공국의 후계와의 국혼은 실제 사절단이 방문할 때까지는 공개할 수 없는 대외비였다. 두 사람을 결혼시키기로 이미 합의는 되었다지만, 에펠의 풍속에 따라 함께 밤을 보낸 뒤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진행되지 않을 테니까.
현재 여러 가문에서 들어온 청혼서는 미라벨라의 몸이 약해 데뷔탕트도 미루었다는 이유를 들어 레이든이 전부 돌려보내고 있었다. 처음에 질문했던 영애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제가 라이오넬 영애라도 그럴 것 같아요. 제국 최고의 미남 셋이 다 집에 있는데, 웬만한 영식들이 눈에 들어오겠어요?”
“아, 맞아요. 작년에 제 오라버니가 황궁 무투회에 출전했을 때 어머니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응원하러 간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상대였던 라이오넬 부기사단장님이 너무 멋져서, 저도 모르게 그쪽을 응원하고 말았다니까요!”
“미라벨라, 혹시 오라버니들께서는 지금 만나는 여자분이 없으신가요? 세 분 다 아직까지 미혼이신데…….”
누군가 질문을 꺼내자 다른 영애들도 모두 그 점이 궁금했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았다. 라이오넬 공작가의 세 남자는 현시점에 제국에서 가장 매력적인 신랑감이었다. 황실에 버금가는 재력을 소유한 명문가라는 지위와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법한 수려한 외모를 갖춘 데다, 그들은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탁월한 인재였다. 그러니 그들의 여동생인 미라벨라에게는 자연히 친절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장미 정원을 목전에 둔 티타임은 어느덧 순조롭게 끝을 맺었다. 모임에 참석했던 영애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겠네요,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저도 이만 일어나 볼게요, 다음에 또 뵈어요!”
미라벨라도 입을 열어 그만 가 보겠다고 말하려던 차였다. 정원 입구 쪽에서 나타난 하인 하나가 급한 걸음으로 르웰린 후작 영애를 향해 다가왔다. 하인의 보고에 그녀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미라벨라를 돌아보았다.
“이를 어쩌죠? 영애가 타고 온 공작가의 마차에 문제가 좀 생긴 모양이에요.”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바퀴가 빠지는 바람에 수리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릴 것 같다네요. 어머니께서 외출하시면서 마부가 함께 나가 있어 모셔다 드릴 수도 없고, 퍽 곤란하게 되었어요.”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후작저에 좀 더 머물다 가라는 친절한 권유가 이어졌으나, 미라벨라는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처음으로 혼자 친구들을 만나러 간다고 기특해하던 오라버니들의 얼굴이 떠오른 탓이었다. 원래 돌아가기로 한 시간보다 귀가가 늦어지면, 혹시 걱정하실지도 모르는데…….
“저, 근처에 혹 사설 마차 승강장이 있나요?”
“혼자 마차를 타려고요? 그건 너무 위험해요, 영애.”
“제가 공작저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가씨.”
묵묵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후작가의 하인이 곁에서 끼어들었다. 그는 키가 크고 가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무뚝뚝한 인상의 남자였다.
“실은 내일이 쉬는 날이라 지금 막 집에 가려던 참이었거든요. 라이오넬 공작저라면 방향이 같아 괜찮습니다.”
“아, 벤! 그래 줄래요? 고마워요.”
르웰린 후작 영애가 밝아진 얼굴로 미라벨라를 돌아보았다.
“얼마 전 새로 온 하인인 벤인데, 일을 아주 잘해요. 마부는 아니지만 사설 마차를 몰았던 경력도 있어 공작저까지 잘 모셔다 줄 거예요. 공작저의 마부에게는 우리 마차를 타고 먼저 돌아갔다고 전해 둘게요.”
“정말 감사해요, 다음에 또 뵈어요.”
후작가를 상징하는 수선화 문양이 양각으로 새겨진 은마차는 바로 뒤뜰에 세워져 있었다. 벤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오르려다 말고 미라벨라가 문득 멈칫했다.
“왜 그러십니까?”
“이름이 벤이라고 했나요? 팔에, 상처가…….”
“일하다 좀 쓸린 건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차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던 벤이 큰 상처가 벌어진 제 팔을 얼른 감추었으나 그녀는 좀처럼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미라벨라는 옆으로 메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금화 하나와 상처에 붙이는 약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벤, 일이 바빠서 그런 거라면 시간이 될 때 꼭 의사에게 가요. 몸을 상하면서 일하는 걸 알면 가족들이 슬퍼할 거예요.”
“제겐 가족이 없습니다.”
그가 잠시 동안 미라벨라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가씨께서는, 친절하시군요.”
후작가의 마차 안에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미묘한 향기가 느껴졌다. 꽃이나 과일 향기 같기도 하고,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알싸한 향 같기도 한……. 막 마차에 타려던 미라벨라가 머뭇거리자 벤이 변명하듯 설명했다.
“아, 공기 정화에 좋다는 향초를 피웠는데 그 향이 배었나 봅니다. 어제 마차 내부를 청소했더니 소독약 냄새가 좀 강한 것 같아서요.”
“아, 네…….”
‘왜 저렇게 빤히 보는 걸까?’
어딘가 묘한 위화감이 들었지만 르웰린 후작가의 마차였으니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마차에 오른 미라벨라는 푹신한 좌석에 앉아 등을 기댔다. 처음으로 혼자 참석한 사교 모임이라 피곤했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갑작스러운 수마가 찾아왔고, 곧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 * *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미라벨라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시야가 암흑처럼 어두웠다. 엎드린 뺨에 닿는 딱딱한 바닥, 눅눅하고 찬 습기, 숨을 내쉴 때마다 목과 코 안을 따갑게 만드는 축축한 먼지…….
“……으읏.”
미라벨라는 곧, 제 눈앞이 검은 천으로 막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등 뒤로 단단히 묶인 팔과 다리가 무쇠 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워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이내 누군가에게 납치당했다는 가정을 떠올리자 두려움이 치솟았다.
“웬일이야, 벤? 그 집 딸을 잡아 오는 즉시 죽여 버릴 줄 알았는데.”
바로 근처에서 누군가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 노예로 팔겠다는 거야? 막상 죽이려니 마음이 약해지기라도 했어?”
“상관 말고 데려가기나 해.”
“나야 좋지. 저렇게 예쁘장한 귀족 계집애라니, 완전히 수지맞았잖아.”
저벅저벅, 이윽고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눈을 가린 검은 천이 휙 벗겨졌다. 미라벨라는 잠시 빛에 적응하느라 눈을 깜빡였다. 이곳은 외곽 지역에 흔히 있는, 버려진 창고인 것 같았다. 앞에는 아까 후작저에서 만난 하인 벤과 수염이 덥수룩한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가 함께 서 있었는데, 둘 중 처음 보는 사내가 깨어난 그녀를 보고 히죽거렸다.
“오, 벌써 깨어났어? 기분이 좀 어때? 눈이 동그래지니 더 귀여운데.”
“베, 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원망하려거든 네 아비와 오라비들을 탓해. 이건 정당한 대가를 치르는 것뿐이니까.”
미라벨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벤은 차갑게 시선을 외면했다. 분노에 찬 목소리가 조용한 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왜 이런 일을 꾸몄는지 궁금하겠지. 잘난 공작가 덕에 행복했던 우리 집은 풍비박산이 났어. 그뿐인 줄 알아? 나는 사랑하는 동생과 아버님을 둘 다 잃었다. 우리 가족의 단란했던 행복을 깨뜨린 대가는 똑같이 되돌려 받아야지.”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어느 순간 거센 분노로 번들거렸다.
벤, 본디 그는 대대로 직물 수입 사업에 종사하며 공작가의 하청 업체로 있던 집의 장남이었다. 불행의 시작은 오래전, 그의 여동생이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지면서부터였을까. 상대는 남작가의 자제였고 그들은 평민이라는 이유로, 남자 쪽 가문에서 말도 안 되는 지참금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와 결혼하지 못하면 약을 먹고 죽겠다는 딸의 성화에 그의 아비는 결국 그릇된 선택을 하고 말았다. 물건을 바꿔치기하고 마진을 빼돌려 사익을 추구했던 것이다. 사실을 알게 된 선대 라이오넬 공작은 단번에 그들과의 거래를 끊어 버렸고, 그 과정에서 소문이 퍼져 그들은 다른 업체와도 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 가업은 한순간에 몰락하고 말았다.
“똑같이 자식을 키우는 입장이니 이해해 달라고 그렇게 사정했는데, 거들떠보지도 않은 너희 아버지 때문에……! 결국 결혼이 무산되자 로잘린…… 내 사랑스러운 동생은 얼마나 상심했던지 스스로 그만…….”
그는 증오를 가득 담은 눈길로 미라벨라를 노려보았다. 그 후 처지를 비관하던 아버지 역시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여동생의 뒤를 따랐다. 복수를 결심한 벤이 본격적인 계획을 세운 건, 외국에서 요양 중이던 공작가의 막내딸이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고부터였다. 처음에 그는 공작저에 들어가려 했지만 워낙 꼼꼼히 신분 확인을 하고 있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대신 친분이 있는 후작가의 하인으로 위장하여 기회를 노렸다.
“……마차를 고의로 망가뜨린 것도 당신 짓이었군요, 벤.”
“그래. 네 오라비들도 사랑하는 동생을 잃는 슬픔을 맛봐야지. 내가 겪은 고통을 반드시 되돌려 줄 거다.”
“이런 짓을 하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 여동생과 아버지가 그걸 원할까요?”
“시, 시끄러워! 원래 죽이려다 마음을 바꾼 거니까 고마운 줄이나 알라고!”
“그래그래, 벤. 나머지는 내게 맡기고 어서 가 봐. 이 아가씨에겐 내가 잘 알려 주지. 앞으로 펼쳐질 노예로서의 행복한 삶에 대해서 말이야.”
수염이 덥수룩한 노예상이 옆에서 빙글거렸다. 벤이 그녀의 몸값을 받아 들고 사라진 뒤, 그는 굴러다니는 천 조각을 대충 뭉쳐 미라벨라의 입을 거칠게 틀어막았다.
“……으흡! 읍!”
“쉴 수 있을 때 한숨 푹 자 두라고, 아가씨. 일어나면 완전히 다른 세상일 테니까.”
손발이 묶인 채 어두운 화물 마차의 뒷좌석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그녀는, 어느 순간 또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 *
“으음…….”
미라벨라는 주위의 시끄러운 소음에 눈을 떴다. 완전한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의식이 서서히 수면으로 떠올랐다.
아까처럼 손발이 묶여 있진 않았으나 움직임은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덜컹거리는 마차에 짐짝처럼 구겨져 한참을 실려 온 탓에 신체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꽉 잠긴 목에서는 작은 소리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머, 너 깨어났구나?”
근처에서 화장을 고치던 여자가 깨어난 미라벨라를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다.
“이곳은, 대체 어디…….”
“살롱이란다, 코르티잔들이 손님을 받는.”
“……!”
“여긴 르페르트 제국과 캄포 제국의 국경 지대에 있는 곳이야. 너 꽤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어! 깨어나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미라벨라가 누워 있던 곳은 대기실처럼 보이는 넓은 방 안이었다. 환하게 밝힌 주황색 조명, 벽 쪽에 일렬로 늘어선 거울. 그리고 그 거울 앞에서는 거의 벗은 것이나 다름없이 야한 옷차림을 한 여자들이 저마다 화장을 하거나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좀 전에 노예 상인이 널 이곳에 팔고 갔거든, 이천 골드에.”
“노예…….”
말을 걸었던 여자가 하얗게 질린 미라벨라를 향해 안됐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르페르트 제국 출신이지? 널 위해서라도 일찌감치 포기하고 받아들이는 게 좋을 거야. 수도에서 지금 당장 출발해도 여기까지 오는 데 반나절은 걸릴 텐데. 여긴 정식 허가를 받은 영업소도 아닌 데다 국경 지대에 있어서 양 제국의 법을 미묘하게 빗겨 가 있어. 포주가 관리들에게 꾸준히 뇌물을 먹여서 단속에도 걸리지 않고. 나도 여기 온 첫해에 두 번이나 도망치려다 잡혀서 이렇게 됐단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조용히 윗옷을 걷어 올려 제 몸을 보여 주었다. 얇은 레이스 속옷 위로 드러난 풍만한 가슴에는 불로 지진 듯 끔찍한 노예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흉하게 일그러진 살 위에 선명하게 찍힌 낙인을 목도한 미라벨라의 눈이 커졌다.
“한번 여기 온 이상 절대 빠져나갈 수 없어. 그래도 운명이라 생각하고 적응하면 나름 괜찮을 거야.”
“여태 뭐한 거야, 소피아. 아직도 준비가 안 됐어?”
그때, 포주인 듯 보이는 여자가 잔뜩 화난 얼굴로 다가왔다. 열 손가락 모두 주먹만 한 보석이 박힌 반지를 끼고 목에도 몇 겹이나 되는 장신구를 휘감은 그녀는, 몸을 떠는 미라벨라를 못마땅하게 훑어보았다.
“신입 옷을 갈아입히고 대기시키라고 했잖아. 빨리 일도 가르쳐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당장 준비시켜! 지금 귀족 영애 한번 따먹어 보겠다고 저 밖에서 기다리는 사내들이 한둘인 줄 알아? 귀족 출신의 노예 계집애는 늘 인기가 많지. 거칠게 구르던 용병이나 재산을 많이 모은 상인, 그 외에도 높으신 분들에게 원한을 가진 자들은 수도 없이 많으니까.”
“제발, 그냥 돌려보내 주세요! 노예상에게 지불한 돈이라면 어떻게든…… 아흑!”
짜악!
순간 매서운 소리와 함께 미라벨라의 얼굴이 옆으로 완전히 돌아갔다.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그녀의 뺨을 휘갈긴 포주 여자가 사나운 얼굴로 경고했다.
“건방지게 굴지 마. 그리고, 이제 와 집에 돌아간다고 해서 과연 네 가족이 널 반겨 줄까? 네가 여기서 무슨 일을 당했을 줄 알고?”
“읏…….”
“너 꽤 높은 귀족가의 딸이라지? 대단하신 분들의 사고방식은 우리와 완전히 달라. 혈육이라 해도 가문의 이름에 누가 된다면 가차 없이 쳐내니까. 좋은 예를 들어 줄까? 저길 봐.”
포주가 가리킨 방향에는 다 찢어진 속옷만 걸친 여인 하나가 멍한 눈으로 앉아 있었다. 매질을 당했는지, 그녀의 볼품없이 마른 몸에는 얼룩진 상처와 새카만 멍이 가득했다. 심지어 한쪽 뺨과 가슴에는 처음에 말을 걸었던 여자에게 있던 것과 같은 노예의 낙인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저 애도 과거엔 어느 남작가의 딸이었어. 아비의 작위가 높진 않지만 얼굴이 반반해서 제법 괜찮은 가문으로 혼처가 정해졌던 모양이지? 하지만 전처의 자식이 제 딸보다 더 좋은 곳에 시집가는 게 못마땅했던 남작의 후처가 납치당한 것으로 가장해 노예상에 팔아 넘겼지. 그리고 결국 여기로 오게 됐단다.”
“…….”
“듣기로는 그 아비와 약혼자가 추적한 끝에 노예상을 잡긴 했다더군. 하지만 그 후 어떻게 됐을까? 이곳으로 팔렸다는 말을 듣자마자 둘 다 즉시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어. 신분 낮은 놈들에게 더럽혀진 여자를 부인으로 맞을 수 없다는 게 약혼자의 입장이었고, 아비 역시 소문이 나면 집안 망신이니 차라리 딸이 죽은 셈 치는 게 낫다는 거였지.”
“자기 딸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그게 명예와 체면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고고한 귀족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이다. 우습게도 비천한 자들이 사용했던 구멍을 쓰는 건 자존심이 상한다 이거지. 자기들도 깨끗하지 못한 주제에. 네 가족들이라고 어디 다를 것 같아? 이곳에 있었다는 증거로 버젓이 노예 인장이 찍혀 흠집 난 계집을 어디다 써먹지? 다시 결혼 시장에 팔아먹을 수도 없고, 두고두고 다른 가족들의 앞길에 방해만 될 게 뻔한데.”
그녀는 사납게 입꼬리를 올리며 다른 이들에게 명령했다.
“밖에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서둘러. 오늘 최소한 서른 명은 상대해야 하니까.”
“안 돼! 흐읏…….”
“얼른 옷 갈아입자, 말 안 들으면 더 맞아.”
“아흑, 하지 말아요! 싫어!”
대기실에 있던 여자들이 다가와 미라벨라를 붙잡고 옷을 벗겼다. 미라벨라가 음부를 겨우 가린 손바닥만 한 속옷 위에, 속살이 훤히 비치는 네글리제만 걸친 차림이 되자 포주는 그제야 만족한 얼굴을 했다. 얇은 천 너머로 부드러운 가슴선과 분홍빛 유두가 언뜻 비쳐서, 미라벨라는 몹시 수치스러웠다.
“좋아, 그대로 내보내면 되겠어.”
하지만 미라벨라를 훑어보던 그녀는 곧 다시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너 계속 그렇게 죽상으로 있을 거야? 손님들의 기분을 잡쳐서 장사를 망치게 하려고? 얼굴에 상처가 남으면 값이 떨어지니 더 때릴 수도 없고, 이걸 그냥.”
“읏…….”
“안 되겠어. 이봐, 약품 저장고에 가서 그걸 가져와!”
“네, 알겠습니다.”
포주의 명을 받은 누군가가 새하얀 알약이 가득 든 투명한 통 하나를 들고 왔다. 그들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미라벨라의 양팔을 세게 붙잡고 여럿이서 강제로 입을 벌리게 한 뒤 그걸 통째로 쏟아부었다.
“……흐읍, 읍! 흐…….”
“맛이 어떻지? 자, 이만큼 먹었으면 아무리 처녀라도 양껏 즐길 수 있을 거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을 억지로 삼키고 나니 잔기침이 거듭 터져 나왔다. 괴로워하며 목을 감싸는 미라벨라를 향해 포주가 잔인한 미소를 띠었다.
‘읏, 머리가, 아, 너무 어지러워…….’
여러 개의 알약이 목 안으로 넘어가자마자 미라벨라는 식도가 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즉시 온몸이 나른해졌다. 팔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고, 독한 술을 마신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워 저항할 기운조차 없었다. 그사이 건장한 하인들이 양옆에서 그녀를 붙잡아 방 밖으로 질질 끌어냈다. 술과 약, 여자에 취한 몇몇 손님들이 미라벨라를 발견하고 음험하게 눈을 빛냈다.
“오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새로 온 아가씨인가 보지? 제법 귀여운데.”
“어디, 속살은 얼마나 달콤한지 맛을 좀 볼까?”
“시, 싫어! 읏, 저리 가……!”
“흐흐, 제법 앙탈하는 걸 보니 더 구미가 당기잖아, 이거.”
숱이 듬성듬성한 턱수염을 옹졸하게 기른 사내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입맛을 다셨다. 지저분한 손길이 뻗어 와 네글리제의 치맛자락을 들추려 시도했다. 마침 미라벨라가 더는 반항하지 못하리라 생각해 하인들의 경계가 느슨해진 차였다. 그 틈을 타,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다가오는 사내를 발로 걷어찼다.
퍽!
“아악! 이런 되바라진 년을 봤나…….”
“하아, 읏.”
온몸에 퍼지기 시작한 약 기운 탓에, 필사적인 공격에도 거의 타격을 입히진 못했다. 하지만 턱수염 사내는 살롱의 여자에게 거부당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격분한 모양이었다. 움푹 팬 그의 메마른 뺨이 비틀린 분노로 실룩거렸다.
“감히 네까짓 게 분수도 모르고 날 거부해? 얌전히 다리를 벌렸으면 귀여워해 주려 했더니!”
그가 막 미라벨라를 때리려 팔을 높이 들어 올리는데,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포주 여인이 재빨리 다가와 허리를 굽실거렸다.
“하이고, 나리! 꽃 같은 얼굴에 상처가 남으면 오늘 손님을 받지 못하니 너그럽게 용서해 주시지요.”
“이봐! 직원 교육을 대체 어떻게 시키는 거야? 감히 이 몸이 누군 줄 알고…….”
“아유, 죄송합니다. 그 계집애는 르페르트 고위 귀족가의 여식인데, 아직 상황 파악이 덜 된 모양이니 제대로 혼쭐을 내 기강을 잡겠습니다.”
“오호, 르페르트의 고위 귀족?”
캄포 제국의 말단 관리가 호기심으로 눈을 빛냈다. 그는 불법 유흥가의 단속반 중 한 사람으로, 뇌물에 약해 포주가 주기적으로 금품을 찔러 주는 자였다. 덕분에 그는 이곳에 올 때면 항상 마치 왕처럼 기세등등하여 돈 한 번 내지 않고 향응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속내는 늘 고위 귀족들에 대한 열망과 비틀린 질투심으로 꽉 차 있었다.
‘저런 계집들은 보통 제 아비나 오라비의 위세를 믿고 콧대가 높아져서는 재수 없게 굴지. 나 같은 말단 귀족은 눈에도 안 찬다는 듯 만나 주지도 않고……. 사람 마음은 보지 않고 작위나 재산만 따지는 나쁜 년들, 언제고 한번 본때를 보여 주려 했는데 잘 되었다.’
그는 무척 구미가 당기는 얼굴로 헛기침을 했다.
“오늘이 처음이라는 건, 흠흠, 아직 손님을 받은 적이 없는 몸이라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나리. 아직 낙인도 찍지 않은 새 상품이니, 일단 노예의 표식을 새긴 뒤 마음껏 즐기시지요.”
“좋아, 그렇다면 이번 한 번만 특별히 봐 주지. 대신 낙인은 내가 직접 찍게 해 줘.”
“그러시지요.”
포주의 신호에 하인들이 낙인을 찍기 위한 도구를 들고 왔다. 그간 수없이 해 온 일인지 동작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건장한 하인 두 사람이 미라벨라를 억지로 바닥에 눕혀 양팔을 내리누르고, 불 속에서 벌겋게 달구어진 쇠붙이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흠, 이게 바로 노예의 낙인이로군. 그럼 버릇없는 계집에게 주제도 가르칠 겸…… 왼쪽 젖 위에 찍어 주기로 할까?”
차마 온도를 가늠할 수 없는 벌건 쇠붙이에서 허연 김이 풀풀 솟아오르자 콧수염 사내가 가학적인 흥분으로 눈을 빛냈다. 온실 속 꽃처럼 곱게 자랐을 귀족 계집애의 몸에, 이 손으로 직접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노예의 인장을 새기다니! 고통과 절망으로 몸부림치는 걸 마음껏 농락할 생각을 하니 그의 바지 속에 든 조그만 물건이 기대감으로 움찔거렸다. 게다가 타 제국 출신이라 했으니 얼른 일을 마치고 내빼면 뒤탈도 없겠지.
“……아흑! 읏, 이거 놔!”
“가만히 못 있어? 자꾸 반항하면 양쪽 젖에 둘 다 노예 낙인을 찍을 줄 알아!”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미라벨라를 꽉 잡아 누른 포주가 그녀의 가슴을 드러내려 옷자락에 손을 댔다. 바로 앞에는 캄포 제국인인 콧수염 사내가 달구어진 쇠붙이를 들고 기대감이 서린 얼굴로 다가와 있었다. 순간 이젠 정말 끝이라는 극한의 공포 속에서 약 기운으로 흐릿해진 시야에 떠오른 건, 가족이 생겼다는 기쁨을 알게 해 준 세 오라버니의 얼굴이었다.
‘좋은 여동생이 되어 드린다고 약속했는데……. 정말 죄송해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미라벨라가 두 눈을 꼭 감은 그때였다.
탕!
갑작스러운 총 소리와 화약 냄새, 구멍이 뻥 뚫린 이마에서 붉은 피를 콸콸 쏟아 내며 뒤로 넘어가는 콧수염 사내……. 탕! 곧이어 같은 소리가 한 번 더 들렸고, 이번엔 포주 여인이 그 자리에 쓰러졌다.
“으악! 뭐, 뭐야……!”
“여, 여길 대체 어떻게 알았지? 당장 도망쳐!”
두꺼운 철문을 부수며 기사들이 들이닥치자 비밀 살롱의 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신분을 들키면 곤란한 입장인 이들은 필사적으로 얼굴을 가렸고, 약에 취한 채 바닥을 기면서도 어떻게든 달아나려 아우성을 쳤다. 어떤 이들은 불법적으로 소지한 무기를 휘두르며 거칠게 저항하기도 했다. 검은 갑주를 착용한 기사들은 그들을 한 사람도 놓치지 않고 날렵한 몸짓으로 제압했다.
미라벨라의 눈에는 그 모든 게 환상처럼 보였다. 바로 눈앞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져 있는 포주와 콧수염 사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술집과 벌벌 떨며 달아나는 사람들, 그들 사이를 민첩하게 휘젓고 다니는 한 무리의 기사단. 그리고, 저 멀리서 그녀를 향해 걸어오며 서늘한 위압감을 자아내는 균형 잡힌 장신의 남자. 그의 침착한 얼굴은 주변의 소란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어 보였다.
“미라벨라, 괜찮나?”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주저앉은 미라벨라를 그가 가볍게 안아 들었다. 레이든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손에 들린 채 우아한 총구 끝에서 하얀 연기를 내뿜고 있는, 고급스러운 황금빛 문장이 양각으로 새겨진 피스톨. 그제야 그녀는 주위를 오가는 기사들의 검은 망토에서 눈에 익은 그리핀 문장을 발견했다. 그들은 공작가에 소속된 라이오넬 기사단이었다.
“레, 레이든 오라버니…….”
그는 아침에 공작저를 출발하기 전 보았던 것과 같은 베이지색 슈트 차림이었다. 단단하고 너른 품 안에서 우아한 오 드 콜로뉴의 향이 느껴졌다. 그 익숙한 향기가 폐부를 침입함과 동시에 미라벨라를 지배하고 있던 전신의 긴장이 일시에 스르르 풀어졌다.
라이오넬 공작, 아름답고 강한 그녀의 보호자가 이곳에 온 이상, 미라벨라를 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절대적인 명제와도 같은 사실과 함께 믿어지지 않을 만큼 커다란 안도감이 격랑처럼 밀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던 의식이 한계를 맞이했고, 마침내 눈앞이 까맣게 사위어 갔다.
* * *
“출발해.”
공작가의 마차는 가문의 문장을 알아볼 수 없도록 검은 천으로 겉면이 가려져 있었다. 레이든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건물 앞에 세워져 있던 마차가 빠르게 출발했다. 오라버니의 품에 안겨 그곳을 빠져나온 뒤에도 미라벨라는 여전히 혼란스러워 했다. 입은 거라고는 속살이 훤히 비치는 하늘하늘한 네글리제 하나가 전부인 작은 몸이 계속해서 떨려 왔다.
“몹시 떠는군. 추운가?”
덜덜 떨고 있는 막내 여동생을 레이든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질문에 대한 답을 기대하진 않았는지, 그는 미라벨라가 입을 열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재킷을 벗어 어깨 위로 걸쳐 주었다. 잘 손질된 고급스러운 원단의 남성용 겉옷이 뽀얀 허벅지를 반쯤 가리며 길게 내려왔다.
“……레이든 오라버니! 오늘 사업상의 일로 급히 지방에 내려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 건이 잘못되면 가문의 사업에 막대한 손실을 끼칠 거라고 분명…….”
“취소했다.”
실은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레이든이 간단히 답했다.
“나는 네 보호자야. 네게 문제가 생기면 구하러 가는 게 당연하지 않나.”
“하지만 아침에 분명, 미룰 수 없는 일정이라고 하셔서…….”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앗, 네.”
“널 보호하는 건 내 일이지. 너는 네가 할 일들에 충실하도록.”
단호히 선을 긋는 차분한 음성에 미라벨라가 다소 풀이 죽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정신을 잃었던 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이미 마차 안이었다. 끔찍한 일이 벌어질 뻔한 그 무서운 장소에서 벗어났다는 게 미라벨라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몸에 퍼진 약 기운으로 인해 머릿속이 흐릿했고, 현실과의 경계가 불명확했다. 눈을 거듭 깜빡거려 애써 초점을 잡으려 노력하며 그녀는 아까 일을 되짚어 보았다.
<벨라!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아까 그 살롱에서 잠깐 눈을 떴을 때, 레이든의 품에 안긴 그녀를 향해 적갈색 머리카락의 기사가 민첩하게 다가섰다. 어디서든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장신과 두껍고 큰 신체를 가진 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날렵한 움직임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잠자리 날개보다도 못한 얇은 네글리제만을 간신히 걸친 미라벨라를 목도하고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던 붉은 눈. 희미한 의식으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세차게 흔들렸던 것 같았다.
‘……르시엘 오라버니?’
잠시 정신을 차렸다가 잠들기를 반복하는 미라벨라의 어깨를 붙잡고, 그는 거듭 다친 곳이 없는지 물었다. 당시에는 작은 소리조차 만들어 낼 기운이 없었기에 그녀는 간신히 고개만 끄덕이고 레이든의 품에 도로 얼굴을 묻었다. 그가 레이든과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미라벨라가 겨우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때에는 이미 르시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미라벨라.”
역시 그건 꿈이었을까? 미라벨라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이 현실이었는지, 단지 꿈을 꾼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그가 정말 그 자리에 왔던 게 맞는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제 그녀는 안전하다는 사실이었다.
“미라벨라, 몸은 괜찮나?”
“……아, 안 돼! 싫어!”
꿈과 현실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미라벨라는, 아까의 공포스러운 기억이 무의식중에 떠올라 반사적으로 외쳤다. 그녀는 세차게 도리질하며 몇 번이나 소리치고 난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떠 익숙한 공작가의 마차 안인 것을 확인하자 그녀는 비로소 안심했다.
“꿈을 꿨나 보군.”
이어지는 차분한 중저음에 미라벨라는 반쯤 감기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고결한 청금석과 같은 푸른빛을 띤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맞아, 레이든 오라버니와 함께 그곳에서 빠져나왔지…….’
미라벨라는 미약하게나마 정신이 돌아오자 아까 그곳에 있던 다른 여자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오라버니, 아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나요?”
“절반 이상이 납치된 여자들이더군. 아니면 가족의 빚에 팔렸거나. 대부분 심각한 약물 중독 증세를 보여 우리 가문과 연계된 병원으로 보냈다. 치료를 마치면 원하는 곳으로 돌려보낼 예정이니 걱정하지 마라.”
“아…….”
다시금 밀려오는 안도감에 미라벨라의 도톰한 입술 사이로 자그마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녀를 무사히 구해 낸 뒤, 레이든은 라이오넬 기사단을 통해 그 건물은 물론 그곳을 운영하던 자들과 손님들까지 전부 흔적도 없이 처리했다. 추후라도 문제 될 소지를 남기지 않기 위한 조처였다. 그런 사실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겠지.
“흐윽, 하지만, 오라버니! 어쩌면 국혼에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요. 만약 제가 그곳에 있었다는 게 소문이라도 나면…….”
“소문이라니. 넌 내가 그까짓 일 하나 해결하지 못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자신 때문에 모든 일이 엉망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초조하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레이든은 오히려 쓸데없는 걱정 말라는 듯 단번에 일축했다.
그의 확언에도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못하던 미라벨라는, 문득 몸 상태가 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몸속을 가득 채운 미지근한 공기가 서서히 따스하게 데워져 안쪽을 멋대로 부유하며 간질이는 것 같았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극심했던 추위는 단숨에 가라앉고, 어째서인지 점점 더워지는 듯한 기분이…….
“미라벨라,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나?”
“저, 그게…….”
“열이 나는 것 같은데.”
그녀의 변화를 기민하게 눈치챈 레이든이 제 여동생의 상태를 세세히 살폈다. 그의 손이 열을 재려는 것처럼 양쪽 뺨과 귀 뒤쪽을 천천히 쓸고 동그란 이마 위를 짚었다. 그 순간 미라벨라는 정말 열이 오르는 것처럼 두 볼이 홧홧해지고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마와 뺨을 쓰다듬는 오라버니의 커다란 손과 잘 다려진 셔츠의 소매 깃, 작은 몸을 덮고 있는 긴 남성용 겉옷에서 느껴지는 품위 있는 오 드 콜로뉴의 향. 늘 빈틈없이 완벽한 그와 더없이 잘 어울리는 어른스러운 잔향이 갑자기 미친 듯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향기가 폐부를 통해 가느다란 혈관 곳곳까지 전부 스며들기라도 한 것처럼.
“맞아, 약……! 오라버니, 그들이 제게 강제로 이상한 약을 먹였어요.”
“약? 어떻게 생겼지?”
“그게, 길쭉한 타원형에 크기는 이만하고, 아무 냄새도 나지 않는…….”
미라벨라는 기억을 되짚어가며 최선을 다해 그 약의 생김새를 설명했다.
“……하얀 알약이었어요.”
“흰색, 아무런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것처럼 완전히 새하얀 빛깔이었나? 처음 목에서 넘길 때 식도가 타들어 가는 듯하고, 삼키는 즉시 팔다리가 무력해지는.”
“네, 맞는 것 같아요.”
“하, 와포르페정을 먹인 모양이군.”
“와포…… 르페요?”
견고한 조각상 같은 얼굴에 미세한 실금이 갔다. 미라벨라의 두 눈이 영문을 몰라 동그래졌다. 그녀를 흘깃 바라본 그는 두통을 겪는 사람처럼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반듯한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그건 동대륙에서 건너온 미약의 일종이야. 해독이 까다롭고 심각한 부작용이 뒤따라 황제 폐하의 명으로 국내에서는 통용이 금지된. 그걸 먹으면 처음에는 술을 마신 것처럼 신체의 감각이 나른해지고, 이후에는 몹시 추위를 느끼다가 서서히 열이 나며 더워진다고 하지. 근육이 무력해진 듯 잘 움직여지지 않을 거고.”
“아…….”
“지금쯤, 몸이 뜨거울 것 같은데.”
레이든이 비스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확고히 단언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처음 마차에 오를 때만 하더라도 추위를 느꼈던 몸이, 지금은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달아올라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두 다리 사이 비밀스러운 곳이 가장 화끈거렸다. 여린 몸을 가득 채운 열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해 괴로운 감각을 해소하고자, 미라벨라는 저도 모르게 부드러운 허벅지를 맞대고 위아래로 비비듯 움직였다. 하나 그 정도의 간접적인 자극만으로는 가뭄으로 메마른 땅에 반 컵의 물을 붓는 것만큼이나 턱없이 부족했다. 오히려 감질만 나 더한 갈증이 치솟을 뿐이었다.
“그 약의 원리는 몸 안에서 과도한 열을 만들어 낸 뒤 밖으로 배출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거지. 사람을 완전히 망가뜨릴 때까지 계속해서 본능적인 욕구를 자극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괴로워질 거다.”
“그, 그럼, 흐읏, 어떡하죠?”
“이게 들을지 모르겠는데.”
그는 품 안에서 투명한 크리스털 유리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안에는 사탕 크기의 황금빛 알약 여러 개가 들어 있었다. 그 상비약은 여러 종류의 독에 유효한 고가의 해독제였다. 병을 기울여 든 레이든이 그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입 벌려.”
“읏, 네…….”
그가 입에 넣어 준 알약은 맛이 굉장히 썼고, 심지어 잘 녹지도 않는 편이었다. 미라벨라는 괴로울 만큼 쓴맛을 참아 내며 혀로 그것을 녹여 보려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몸에 퍼진 미약의 기운으로 인해 움직이기 어려운 건 팔다리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약 중에서도 크기가 꽤 큰 편인 해독약을 그냥 삼킬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공작가의 마차에 늘 물이나 주스가 비치되어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라버니, 저, 물 좀…….”
“그냥 녹이는 편이 나을 텐데? 삼키기는 쉽지 않을 거다. 이런 종류의 약에는 보통 해독을 방해하려는 의도로 구역감을 유발하는 제제가 포함되어 있으니까.”
“으흡, 그래도 해 볼게요.”
“좋을 대로.”
레이든이 물병을 찾아 건네주었다. 그녀는 알약을 삼켜 보려 시도했지만, 목 안으로 꿀꺽 넘기려는 순간 강한 구역감이 치밀어 그만 도로 뱉어 내고 말았다.
“……우욱!”
미라벨라의 입술 사이를 빠져나온 알약이 툭, 레이든의 가슴에 부딪혔다가 마차 바닥으로 떨어져 데구루루 굴렀다. 마치 쓴 약을 먹기 싫어 투정 부리는 어린애처럼 보였을 게 분명했다. 창피한 마음에 얼굴을 붉힌 그녀를 향해 레이든이 말했다.
“그 약은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해소되는 성분이 아니야. 일반적인 미약이라면 관계를 가져 욕구를 충족시켜 주면 어느 정도 해갈되지만, 와포르페는 다르지. 그래서 사람을 망가뜨리는 약이라 하는 거고.”
“흣, 그러면, 어떻게 해요……?”
“부작용을 겪지 않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유효한 해독제를 복용한 뒤 몸 안의 수분을 빼내면 돼. 그때 미약 성분이 열과 함께 녹아 섞여서 배출될 거다.”
그동안에도 증상은 차차 더 심해졌다. 마치 몸 전체가 후끈후끈한 난로가 된 것처럼, 미라벨라는 제 안에 가득 고인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괴로울 정도로 홧홧한 음부와 그 사이를 비집고 마구 솟아오르는, 제정신이 아닌 것만 같은 충동. 눈앞에 오라버니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리를 벌려 부끄러운 곳을 스스로 만지고 싶은…….
미라벨라는 미치지 않고서야 상상할 수조차 없는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도무지 믿기지 않아 소스라쳤다.
“레이든 오라버니, 읏, 저를…… 묶어 주세요.”
“……묶어 달라고?”
“네, 제 손을 좀…… 제발요, 흐윽.”
너무 괴로운 나머지 울고 싶은 심정으로 미라벨라가 애원했다.
묶어 달라니, 오라버니가 대체 어떻게 생각했을까. 무척 이상하게 들릴 게 분명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일 그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금방이라도 제 스스로 치마를 걷어 올리고 은밀한 곳에 손을 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레이든의 귀족적인 눈동자가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부끄러움과 괴로움이 뒤섞인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미라벨라에게, 마침내 레이든이 간결하게 답했다.
“원한다면.”
그가 평소와 다름없이 무감한 어조로 말하며 타이를 한 손으로 풀었다. 그리고 미라벨라가 내민 두 손목을 모아 하나로 단단히 묶었다.
‘다행이야, 이렇게 해 두면 적어도, 오라버니가 보는 앞에서 혼자 이상한 짓을 하는 최악의 사태는 면할 수 있지 않을까…….’
미라벨라는 앞으로 묶인 두 손을 배꼽 근처에 다소곳이 둔 채 마차의 좌석에 기대어 앉았다. 마음은 조금이나마 편해졌지만, 약 기운이 퍼질 대로 퍼진 신체는 여전히 뜨겁게 들끓고 있었다.
“안 되겠군, 다시 한번 해 보지.”
그녀의 상태를 관찰하던 레이든이 또다시 약 한 알을 꺼냈다. 미라벨라는 성실한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려 그것을 목 안으로 넘기려 노력하였으나, 애석하게도 아까와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그다음도, 또 그다음도……. 마차의 바닥을 구르는 황금빛 알약의 숫자가 점점 늘어만 갔다.
“레이든 오라버니! 죄송해요…….”
울상이 된 미라벨라가 초조하게 레이든을 올려다보았다. 유리병에 일곱 개쯤 들어 있던 해독약이 이제는 겨우 두 알밖에 남지 않았다. 단 한 알이 수도의 대저택 한 채의 가격과 맞먹는 귀한 해독제였지만, 그는 달리 티를 내지 않고 끈기 있게 한 번 더 약 먹이기를 시도했다.
“다시. 입 벌려.”
“하으, 이번에는 꼭 삼키도록 할게요.”
“미라벨라, 혀를 움직일 수는 없나?”
“그게, 읏, 잘 안 돼요…….”
레이든은 커다란 알약을 혀 안 깊숙이 올려놓은 뒤, 이번에는 미라벨라를 놓아 주지 않고 갸름한 턱을 한 손으로 단단히 쥐었다. 그리고 엄지를 턱에 걸어 말랑한 혀 위에 놓인 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직접 녹여서 먹여 볼 생각인 것 같았다.
“잘 안 녹는군.”
“아, 흐으…….”
미라벨라는 그의 손에 얼굴이 붙잡혀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줄곧 입을 벌린 채로 있었던 탓에 안쪽에 서서히 침이 고였다. 약을 빠르게 녹이기 위함인지, 레이든은 혀 위에 올린 엄지를 앞뒤로 움직이며 출납을 반복했다. 혀가 굳어 버린 듯 스스로는 조금도 움직여지지 않는데, 그의 단단한 손가락이 문지르는 감각은 어째서 이토록 선명하게 느껴지는 걸까.
“읏!”
어린애처럼 계속 입을 ‘아’ 벌리고 있는 것도 부끄러웠지만, 제 타액이 오라버니의 손을 흠뻑 적신 것을 발견하자 미라벨라의 얼굴은 더할 수 없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약을 넘길 수만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커다란 알약을 완전히 녹이는 데 성공한 레이든이 손가락을 쑥 빼낸 순간, 안타깝게도 미라벨라는 울컥하고 또다시 약을 토해 내고 말았다.
“……흐읍!”
큰 알약이 녹아서 만들어진 끈적한 액체와 타액이 뒤섞인 채 앞으로 뿜어져 나갔다. 그 바람에 구김 하나 없이 말끔했던 그의 셔츠 한쪽이 젖고 말았다. 게다가 하필 그 부위가 왼쪽 가슴 중앙이라, 단단한 상체에 자리한 연갈색 유두가 언뜻 비치는 것 같았다. 미라벨라가 새빨개진 얼굴로 급히 사과했다.
“흐읍, 죄송해요! 오라버니.”
그녀는 제 손이 하나로 묶여 있다는 것도 잊고 어쩔 줄 몰라 하며 팔을 뻗었다. 그러면서 레이든의 셔츠를 닦아 주려 작은 손이 젖어 있는 부위를 스쳤다. 가느다란 손끝에 살짝 닿은 그의 상체에서 단단한 온기가 느껴진 것 같았다. 하나 그것도 잠시, 레이든은 별말도 없이 미라벨라의 두 손목을 한 번에 턱 잡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엇, 저…….”
하…… 한쪽 가슴께가 흠뻑 젖은 자신의 셔츠를 내려다보며 레이든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약간 겁먹은 얼굴과 속살이 고스란히 비칠 만큼 얇은 리넨 차림의 작은 몸에 새파란 눈동자가 잠시 닿았다가 멀어졌다.
옷을 더럽힌 게 화가 나 닦아 주려는 손길마저 불쾌했던 걸까? 평소 결벽에 가깝도록 완벽한 차림을 고수하는 레이든이었으니 그럴지도 몰랐다. 그 추측이 맞는 듯, 제 옷과 미라벨라의 얼굴을 번갈아 응시하던 그가 돌연 커다란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레이든 오라버니, 잘못했어요…….”
미라벨라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혼날 것을 각오하고 눈을 꼭 감았다. 하지만 웬일인지 시간이 지나도 화난 음성은 들려오지 않았다. 살짝 눈을 뜬 미라벨라의 시야에,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는 조각상 같은 얼굴이 담겼다. 이미 표정을 정리한 그는 평소의 냉정하고 침착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벌이라는 말에 오래전 그에게 엉덩이를 맞았던 일이 떠올라 미라벨라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그녀에게 화가 난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옷을 버린 것 역시 크게 개의치 않는 얼굴로, 레이든이 한 알 남은 약병을 들어 보였다.
“이제 하나 남았어. 이번엔 삼킬 수 있겠나?”
“흐읏…….”
그사이 빠르게 몸집을 불린 뜨거운 불덩어리가 내부를 강하게 헤집었다. 미라벨라는 도저히 해소할 수 없는 괴로움에 제대로 답조차 하지 못한 채 옅은 신음만 삼켰다. 몸 안에 가득 고인 열기가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해 건조하게 달아오른 눈가가 잔뜩 붉었다.
“무척 힘들어 보이는군, 미라벨라.”
“네…… 흐윽, 오라버니! 제발, 어떻게 좀 해 주세요.”
“……하.”
그가 하나 남은 알약을 긴 손가락 사이에서 느릿하게 굴리던 동작을 딱 멈추었다. 비스듬히 아래로 향한 시선이 깊은 상념에 잠긴 듯, 조금 전 그녀가 토해 낸 타액으로 축축해진 자리에 한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다시 미라벨라에게로. 그 눈에는 어딘가 무척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하지만 이젠 마치 질식할 것처럼 더워진 기분에 그녀는 더운 열기가 느껴지는 숨을 힘겹게 할딱였다.
“어떻게 좀 해 달라…….”
“흑, 제발요, 오라버니! 읏, 너무 힘들어요.”
“미라벨라, 많이 괴로운가?”
“네, 흐윽! 제발 어떻게, 좀, 흑.”
“그래.”
얇은 천 너머로 내비치는 속살은 온통 달아올라 복숭앗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가 네글리제 사이로 드러난 실크 같은 피부를 느릿하게 훑어 내렸다. 새파란 눈동자에 언뜻 미묘한 열기가 스쳤다. 그는 마치 깊은 고뇌에 찬 사람처럼, 약간 사이를 띄우고 문장을 끊어 냈다. 이윽고 결정을 내렸는지 조각처럼 잘생긴 입술 사이로 다소 잠긴 듯한 중저음이 흘러나왔다.
“내가, 어떻게 해 줄까.”
문득 내려다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친 순간, 미라벨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늘 시리도록 푸른 빛이라 여겼던 그의 눈동자가, 열에 달뜬 어지러운 시야로도 이상하게 뜨거워 보였기 때문에. 아니, 마치 짙게 타오르는 새파란 불길 같은……. 더 생각할 틈도 없이 조각상처럼 견고한 턱선이 바로 눈앞까지 다가왔고, 그대로 뒷덜미를 잡힌 미라벨라의 작은 코끝에 날카로운 콧날이 닿았다.
“……오라버니, 흐읍!”
최초로 그가 다가온 순간은 눈 한 번 깜짝할 사이처럼 짧은 것 같기도 했고, 반대로 시간이 멈춘 것처럼 영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고결하고 푸른 청금석 같은 눈동자가 마침내 바로 눈앞에 놓였을 때 미라벨라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남자치고는 무척 긴, 느른하게 내리뜬 옅은 색 속눈썹이 아주 가까이에서 보였다.
지나치게 가까워져 서로의 숨결이 뒤섞이는 거리. 코끝이 아슬아슬하게 닿은 상태로 그는 짧게 시간을 두었다. 딱히 동의를 구하려는 의도라기보다는 미라벨라에게 조금이나마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를 주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그가 망설임 없이 입술을 겹쳐 왔다.
“아, 으흡…….”
“음.”
쓰디쓴 알약을 제 입 안에 먼저 머금었던 레이든이, 그녀의 뒷덜미를 단단히 받치고 다른 손으로는 가느다란 허리를 안은 자세로 입술을 열며 밀어 넣었다. 오, 오라버니……! 미라벨라의 다급한 외침은 완전히 소리가 되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그대로 집어삼켜졌다. 뜨겁고 부드러운 혀가 입술 사이를 가르고 완전히 파고들자 미라벨라는 단숨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어깨에 걸쳐져 있던 레이든의 재킷이 좌석 아래로 툭, 떨어지는 소리가 무척 크게 들렸다. 겹쳐진 몸이 깊게 밀착되며 얇은 천 하나만 덮은 부드러운 젖가슴 위로 단단한 상체가 맞닿아 꾹 내리눌렸다.
“읏, 하아…….”
그의 입술은 무척 뜨거웠다. 맞닿아 있는 훤칠하고 단단한 상체와 얼굴을 간질이는 숨결마저 더웠다. 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서늘하다고 느꼈던 걸까. 새파란 눈동자 안에는 숨길 수 없는 짙은 정염이 아슬아슬하게 넘실거리며 데일 듯한 온도로 절절 끓고 있었다.
반쯤 녹아내린 알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말랑한 혀를 휘어 감은 그가 자그마한 치아를 훑고 연약한 점막을 긁어 올렸다. 오라버니가 혀 안쪽의 오목한 부분을 깊이 누르자 미라벨라는 숨이 막혔다. 터질 듯 빠르게 뛰던 심장은 그의 타액이 집요하게 혀끝을 적시는 질척한 소리에 꽉 조여들었다. 도리질하는 얼굴을 잡아 돌리는 커다란 손, 흔들림 없는 단단한 팔에서 느껴지는 우아한 잔향에 질식할 것 같았다.
“하읏, 읍……!”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몰아붙이는 점은 르시엘과도 비슷한 면이 있었으나, 레이든에 비하면 그와 했던 키스는 차라리 담백한 편이었다. 같은 육식동물이라도 한입에 거칠게 집어삼키는 타입과, 느긋하게 그 맛을 음미하려는 우아한 맹수의 차이라고나 할까. 길쭉하고 둥근 알약이 녹아내린 액체가 목 안으로 반쯤 넘어갔을 즈음, 미라벨라는 약의 쓴맛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전부 삼켜.”
“흐읍, 네.”
약이 녹아 만들어진 물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걸 막기 위함이었는지, 그는 여전히 입술을 붙인 채로 명령했다. 밀착되어 있는 잘생긴 입술이 지나치게 부드러워 미라벨라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두 사람의 타액이 함께 섞인 액체를 꼴깍꼴깍 조금씩 삼키는 미라벨라의 뺨을, 그녀의 것보다 더 옅은 색채를 띤 백금빛 머리카락이 간질였다. 미라벨라가 약을 겨우 다 넘긴 것을 확인하고 천천히 얼굴을 떼어 낸 레이든이 그녀를 마차의 좌석 위에 길게 눕혔다. 얇은 은색 실선이 두 사람 사이로 길게 늘어졌다.
“……읏.”
엄격한 큰오라버니의 얼굴을 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미라벨라는 극도의 긴장감에 거의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미라벨라는 젖가슴이 고스란히 비치는 부끄러운 옷차림을 한 채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로 누워 있었다. 하나 그녀는 지금 그것을 의식하고 몸을 가릴 정신조차 없었다. 짙은 키스의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아 가쁜 숨을 할딱일 뿐.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천천히 닦아 내며 레이든이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오라버니, 정말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새빨개진 얼굴로 그의 앞에 누운 채 미라벨라가 조그맣게 사과했다. 그녀는 몹시도 깊은 죄책감을 느끼며, 그의 타이에 묶인 양손을 맞대고 작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오라버니는 제게 해독약을 먹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얼마나 싫으셨을까. 혹시 비위가 상한다거나 더럽다고 생각되어 화가 나셨으면 어떡하지…….
그에 반해, 자신은 방금 전 일어난 일이 싫기는커녕…….
“…….”
레이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곁에 앉아 그녀를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자칫 오만하게 느껴지는 눈동자에 새파란 열기가 내비쳤다. 미라벨라가 또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한 제 몸을 눈치챈 건 바로 그때였다.
“흐윽, 레이든 오라버니! 해독제의 효과가…… 없는 것 같아요.”
대체 어째서? 힘들게 약을 먹었는데도 불구하고, 몸 안을 가득 채운 더운 열기는 그대로인 것 같았다. 도리어 아까보다도 훨씬 더해진 괴로움에 들썩이며 미라벨라가 애처로이 호소했다.
“약을 삼킨 것만으로는 당연히 그렇지. 내가 아까 말해 주지 않았나? 해독제를 먹고 난 뒤 수분을 빼내야 한다고.”
“네? 그러면…….”
“그 해독약은 단지, 미약의 독성이 몸 안의 수분과 함께 녹아 배출될 수 있도록 돕는 작용을 할 뿐이다.”
“아…….”
아까 묶어 두었던 미라벨라의 양손을 레이든이 돌연 풀어 주었다. 좌석 뒤의 수납함으로 긴 팔을 뻗은 그는, 안에서 적당한 크기의 빈 통 하나를 찾아내어 미라벨라에게 건네주었다.
“미라벨라, 여기에 소변을 봐.”
“……네, 네?”
동그란 눈망울이 더할 수 없이 커졌다. 하지만 그의 어조는 결코 농담이 아니라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기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 지금…… 여기서요?”
“그래. 그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못 버텨. 해독이 늦어지면 후유증이 남을 확률이 높아지는 건 불가피한 일이니까.”
“읏, 하지만……! 그런 일을, 대체 어떻게…….”
시, 싫어요…… 미라벨라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것도 오라버니와 단둘이 마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작은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레이든이 담담하게 말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읍, 그래도, 흐윽…….”
그의 말은 다분히 합리적이었다. 점점 더 심해지는 신체의 괴로운 감각 또한 달랠 도리가 없었다. 미라벨라는 어쩔 수 없이 통을 받아 들고 적당한 장소를 찾으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평소에는 그렇게 넓어 보이던 마차가 갑자기 한없이 작아 보였다. 또한 마차의 구조라는 게 다 그렇듯 단순하여 아무리 구석으로 숨어 보아야 전부 그의 시선이 닿는 사정거리 안쪽이었다. 게다가 지나친 긴장감 때문인지 당장은 요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라버니! 흑, 저 정말 못 하겠어요…….”
미라벨라가 울먹이며 고개를 흔들자 레이든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
“흐윽, 아, 안 나올 것 같아요. 그리고, 지금은…… 별로 마렵지도 않아요.”
필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며 거기까지 말했을 때, 미라벨라의 작은 얼굴은 불이라도 지핀 듯 새빨개져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반듯한 미간을 깊게 찌푸린 그가 커다란 손으로 이마를 슬쩍 짚었다. 그녀는 아래의 괴로운 감각을 참아 내느라 살짝 찡그린 얼굴로 마차 안을 두리번거렸다.
“저 혹시, 물이라도 좀 더 마시면…….”
“네가 아까 다 마셨지 않나.”
그의 긴 손끝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빈 물병을 가리켰다. 이젠 정말로 절박한 심정이 된 미라벨라가 힘겹게 물었다.
“오라버니,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싸는 게 싫으면 울기라도 해야지. 위든, 아래로든.”
“……네? 흐읏!”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 그녀가 되묻기도 전에 작은 몸이 번쩍 들렸다. 미라벨라는 마차의 긴 좌석에 똑바로 눕혀진 뒤 양손이 위로 들렸고, 아까처럼 하나로 묶여 그 끝은 어딘가에 단단히 비끄러매졌다. 당황한 미라벨라가 팔을 흔들어 보았지만 단단히 속박되어 꿈쩍도 할 수 없었다. 잠시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던 레이든이, 얇은 네글리제 자락을 자비 없이 휙 걷어 올렸다.
“흐읍, 레이든 오라버니……!”
원피스 형태의 네글리제가 둘둘 말려 가슴 위로 걷히자, 그 안에 입은 건 음부를 가린 손바닥만 한 속옷 하나가 전부였다. 오라버니의 커다란 손이 그것마저 잡아 거침없이 벗겨 냈다. 놀란 미라벨라가 마구 바둥거렸으나 무용한 일이었다. 아무것도 가릴 것 없이 새하얀 알몸이 곧 그의 시선 앞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신체의 은밀한 부분들이 오라버니 앞에 낱낱이 노출되자, 미라벨라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울 것처럼 달아올랐다.
“흑, 오라버니! 시, 싫어요, 창피해요…….”
“가만히, 미라벨라.”
“아, 흐윽, 제발.”
크고 단단한 손바닥이 우유푸딩처럼 뽀얀 젖가슴을 밀어 올리고, 둥근 가슴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가 유방 아래쪽의 연약한 살결을 간질이며 천천히 쓰다듬자 조그마한 유두가 단박에 꼿꼿해졌다. 미라벨라는 분홍빛 라즈베리 열매 같은 꼭지를 위로 바짝 세운 채 양쪽에 매달고 부끄러움으로 몸을 들썩거렸다. 작은 체구에 비해 유난히 토실토실한 흰 젖가슴이 그때마다 사랑스럽게 흔들렸다.
“으응, 앗, 아흣! 아파요…… 흐읏!”
레이든은 미라벨라의 유두를 다소 아프게 애무했다. 흥분으로 달아오른 끄트머리를 단단한 손끝으로 짓누르고, 잔뜩 예민해져 바짝 선 젖꼭지를 탁 튕기며 자극하는 감각에 미라벨라는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고통과 쾌감 사이, 그 어디쯤에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가느다란 몸을 쓸어내리며 잘록한 허리를 지나친 커다란 손이, 새하얀 허벅지를 움켜쥐고 두 다리를 활짝 벌렸다.
“미라벨라.”
“흐윽, 레이든 오라버니, 보지 마세요…….”
날카로운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눈치챈 미라벨라가 애원했다. 연약한 다리를 벌리는 동시에 위로 높이 들어 올린 그는, 둥그스름한 둔부를 관찰하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이 체벌을 가했던 부위를 살피는 것 같았다.
지난날 오라버니의 손으로 직접 매를 때렸던 엉덩이는 진작에 다 나아 깨끗해져 있었다. 하나 마치 보이지 않는 각인이라도 남은 것처럼, 그의 손끝이 스친 자리는 갑작스럽게 홧홧해졌다. 게다가 이런 자세라면, 아무것도 입지 않은 음부 안쪽까지도 전부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일 게 분명했다.
“……하읏!”
그가 두 다리를 양옆으로 더 벌리자 젖은 속살이 서로 떨어지며 부끄러운 소리가 울렸다. 연한 분홍빛 소음순이 꽃잎처럼 열린 틈으로 쌀알보다 작고 발긋한 구멍이 귀엽게 움찔거렸다. 음순 주위로 가지런히 돋아난 체모는 음란하게 젖은 채 살갗에 이리저리 달라붙었고, 그것은 당사자인 미라벨라에게도 여실히 느껴졌다.
미라벨라는 그런 모습까지 오라버니에게 전부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이 온몸의 솜털이 다 곤두서도록 창피했다. 턱 끝까지 차올라 질식할 것 같은 부끄러움을 감내하며 그녀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저, 이제…… 아, 아래가, 많이 젖은 것 같아요…….”
“미라벨라, 내가 모호한 화법을 지양하라고 했을 텐데? 젖은 것 같은 게 뭐야.”
“그, 그게…… 으흡!”
긴 손가락이 뻗어 와 민감해진 젖꼭지를 세게 쥐고 혼을 내듯 잡아당기는 통에 미라벨라의 입술 사이로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다시, 제대로 말해.”
아무것도 입지 않은 미라벨라의 두 다리를 활짝 벌려 놓은 채로, 조그만 음핵의 포피를 벗겨 다소 아프게 자극하며 그가 야속하게 말했다. 하으…… 자꾸만 흘러나오려는 야릇한 소리를 참아 내느라 미라벨라는 입술을 꼭 깨물어야만 했다.
“흐읏, 저, 아래가, 많이 저, 젖었어요, 오라버니…….”
“그래서?”
“아까 해독이 되려면,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와야 한다고 하셔서…… 하읏, 이걸로 충분할까요?”
“아니.”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어, 말을 끝맺으며 그가 부끄럽게 갈라진 균열 사이로 굵은 손가락을 겹쳐 푹 처박았다. 흐읍! 비좁은 속살을 파고드는 선명한 감각에 미라벨라가 숨을 들이켰다. 잔뜩 예민해진 내벽은 흥분으로 부드럽게 부풀어 있었고, 안쪽을 깊게 쑤실 때마다 촉촉한 애액이 손끝에 배어났다.
“미약의 독성을 빼내려거든 한참 더 울어야지.”
“흐윽! 아…….”
“위든, 아래로든.”
숙련된 마부가 모는 공작저의 마차는 구름 위를 내달리듯 안정적으로 달렸다. 하지만 외곽 지대의 좋지 않은 길을 지날 때면 어쩔 수 없이 한 번씩 크게 덜컹거렸다. 그녀의 여린 내부에 깊이 박힌 오라버니의 손가락이 그때마다 가장 약한 스폿을 푹 찔러 들었다.
“……으응!”
긴 손가락이 질 안을 드나들며 자극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미라벨라는 흐느끼듯 신음을 토해 냈다. 어쩌면 마차를 운행 중인 마부에게까지 야릇한 소리가 들리는 건 아닐까 덜컥 겁이 났지만, 그런 걱정으로 가슴을 졸이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인 것 같았다.
“읏, 레이든 오라버니……!”
미라벨라의 부끄러운 구멍 안에 손을 그대로 삽입한 채, 레이든이 두 다리를 완전히 위로 들어 올려 얼굴 근처까지 넘겨 버렸다. 작고 부드러운 신체가 마치 체조 연습이라도 하는 것처럼 유연하게 반으로 접혔다. 당황한 얼굴 바로 옆에서 새하얗고 작은 맨발이 애처로이 달랑거렸다. 맨발바닥에 오라버니의 시선이 닿는 게 창피해서 미라벨라가 발끝을 움츠렸다. 그러나 잠시 후, 그녀에게 닥친 일에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무언가 달각거리는 소리가 바로 위에서 들려오자 미라벨라는 반사적으로 그쪽에 시선을 주었다. 그녀가 누워 있는 마차의 긴 좌석, 바로 위의 천장에서 튀어나온 것은 둥글고 큰 거울. 중요한 파티에 참석하거나 먼 곳으로 외출하는 숙녀들이 이동하는 마차 안에서도 편리하게 화장을 고칠 수 있도록 부착된 거울은, 접이식 형태로 만들어져 필요할 때마다 펼쳐 다각도로 조절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섬세한 메이크업을 돕기 위한 물건이었기에 당연히, 작은 솜털 하나하나까지 세세하게 비출 만큼 최상급의 유리만을 사용했다. 문제는 지금 거울 속에 비치고 있는 게, 그 집 아가씨가 참 얌전하더라는 칭찬을 들을 만한 바람직한 모습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시, 싫어요! 흐윽.”
“고개 돌리지 마, 미라벨라. 제대로 보도록.”
먼지 하나 없이 투명한 거울 안에, 부끄럽게 폭 젖어 든 자신의 음부가 확대되어 고스란히 비치는 것을 본 미라벨라가 다급하게 숨을 삼키며 울먹였다. 창피한 줄도 모르고 한껏 벌어져 개방된 분홍빛 소음순과 오라버니의 손가락을 꽉 물고 있는 음란한 구멍……. 가장 수치스러웠던 것은, 촉촉한 물기를 머금은 음모 몇 가닥이 곧게 뻗은 레이든의 긴 손가락에 달라붙어 민망하게 휘감겨 있는 모습이었다.
“흐읍, 이건, 흑…… 너무해요.”
미라벨라는 무릎을 조금이라도 모아 붙이려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레이든은 여동생의 다리를 활짝 벌려 놓은 채 그녀가 볼 수 있도록 음부를 노골적으로 헤집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음모를 빗어 넘기고 소음순 위쪽의 좁아지는 부위를 까뒤집자 부푼 음핵이 버젓이 드러났다. 맑은 분홍빛을 띤 작은 클리토리스는 흥분으로 단단해져 반질반질하게 젖어 있었다. 미라벨라가 도저히 볼 수 없어 눈을 감으려 들 때마다 그가 엄격한 손길로 엉덩이를 철썩 후려쳤다.
“확실히 어디 내놓을 만한 숙녀가 되려면.”
“……오라버니, 아흑!”
“좀 더 얌전해질 필요가 있겠군, 내 동생은.”
약지와 중지를 위아래로 겹친 오라버니의 단단한 손가락 두 개가 다시 아래에 푹 처박혔다. 그는 아까처럼 깊은 곳을 쑤시는 대신, 손끝을 느릿하게 움직이며 질 아래쪽 내벽에 원을 그리듯 애무했다. 손목을 돌려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방향을 바꾼 뒤에는 자궁 경부와 가까운 위쪽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유연하게 구부러진 손가락이 부풀어 오른 내벽을 부드러이 긁고, 어딘가를 찾는 것처럼 계속해서 각을 바꾸어 가며 더듬었다.
“흐, 읏. 으응!”
잠시 후, 질 윗벽의 볼록하게 부푼 스폿을 찾아낸 레이든이 그 부위를 꾹 눌렀다. 미라벨라는 짓누르는 듯한 자극에 요의와도 비슷한 욕구가 확 치밀었다. 생경한 감각에 놀라 바둥거리는 미라벨라를 단단히 붙잡고, 그가 부풀어 오른 자리를 끈기 있게 좀 더 문질러 주었다. 계속해서 같은 자리를 애무하며 동시에 다른 손으로는 도톰하게 솟은 음핵을 건드리고, 배꼽부터 치구에 이르기까지 손바닥으로 부드러이 압박하며 훑어 내려갔다.
흐윽…… 미라벨라는 작은 소리로 색색거리며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에라도 아래에서 뭔가가 확 터져 나올 것만 같은, 도저히 참아 낼 수 없는 자극.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 가득 눈물이 고였다.
“후.”
“……아, 흐읍, 안 돼!”
“미라벨라, 아래에 힘 빼.”
쾌감이 한계까지 차오른 가운데 마침내 레이든이 긴 손가락을 뽑아낸 순간, 훤히 개방된 미라벨라의 구멍에서는 맑은 물줄기가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분수처럼 탁 터지며 쏟아져 나온 무색무취의 액체가 그의 단정한 슈트를 흠뻑 적시고, 날카로운 콧날과 뺨에도 튀어 방울방울 맺혔다. 동시에 엉덩이가 바짝 조여드는 깊은 절정이 찾아왔다.
“흐윽! 어, 어떻게, 흐읍, 아…….”
그나마 다행이라 해야 할까. 레이든의 조각 같은 낯에는 일말의 불쾌감도 서려 있지 않았지만, 미라벨라는 이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어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그가 품 안에서 이니셜이 새겨진 미색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흣, 아아…….”
연속적인 절정의 희열이 거듭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가운데, 아래가 경련하는 극도의 쾌감과 수치심이 동시에 들이닥쳤다. 미라벨라는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거울로 목격하고도 도저히 믿고 싶지 않았다. 오라버니의 바로 눈앞에서, 발가벗고 두 다리를 활짝 벌린 채, 무언가를 잔뜩 싸 버린 것이다…….
“잘도 싸는군.”
발그스름한 질구는 여전히 혼자 움찔거리며 남은 물방울을 마저 짜내고 있었다. 자잘한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그녀의 음부를 들여다보던 레이든이 툭 던지듯 말했다. 확인 사살이라기엔 무감한 어조였으나, 만일 더 울리려는 의도였다면 성공적이었다. 그 말을 들은 미라벨라가 온몸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더 큰 소리로 엉엉 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가 위아래로 줄줄 울며 해독약의 효과가 충분히 발휘될 만큼 수분을 빼낸 뒤에야 흐느낌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흐윽, 흑…….”
수치스러운 쾌감에 젖어 기진맥진한 나머지 미라벨라는 당장 몸을 일으킬 기운조차 없었다. 허벅지 안쪽이며 엉덩이 아래까지 전부 흠뻑 젖어 축축했다. 좀처럼 눈물을 그치지 못하는 그녀를 달래려고 한 말인지는 몰라도, 레이든은 그건 소변이 아니었으니 신경 쓰지 말라고 타일렀다. 비록 세상이 끝나 버린 듯 울고 있는 미라벨라에게 큰 위로는 되지 않았지만.
가장 좋은 가죽으로 섬세하게 만들어진 공작가의 마차, 그 뒷좌석에 잔뜩 남겨진 음란한 얼룩은 어쩌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지도…….
그것은 무척 묘한 기분이었다.
완전히 지친 얼굴로 훌쩍이다 잠들어 버린, 자신의 가짜 여동생. 레이든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감정을 곱씹으며 미라벨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곧 마차의 좌석에 떨어져 있던 자신의 재킷을 가져와 희고 부드러운 알몸 위를 덮어 주었다.
“…….”
제 손길에 솔직하게 반응하면서도 사랑스럽게 울먹이던 작은 얼굴에는 분명 진한 죄책감도 가득했다. 저를 피가 섞인 오라버니라 굳게 믿고 있으니 그런 마음이 드는 것이겠지. 매끄러운 뺨에 흘러내린 눈물이 마른 자국이 선명하게 길을 냈다. 문득, 잠든 미라벨라를 깨우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여 아까보다도 더 크게 울리고 싶은 강한 충동이 일었다.
“하…….”
미라벨라가 납치되었다, 그 보고를 처음 받았던 순간을 떠올리자 레이든은 또다시 가슴이 내려앉았다. 어느 정도냐 하면, 평생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가늠할 수 없는 높이에서 뚝 떨어진 심장이 서늘한 바닥을 형편없이 굴렀다. 누군가 몸 안에서 내장을 움켜쥐고 산 채로 비틀며 조각조각 끊어 내는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은…… 전혀 익숙하지 않다.
그녀를 가족으로 인정하고 보호자의 의무를 다하기로 한 이상 위험에서 구하러 가는 건 당연했다. 설령 지난 몇 년간 공을 들인, 막대한 이익이 걸린 사업상의 스케줄을 깨끗이 포기하고 손실을 감내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나 의무나 책임과 같은 평범한 단어로 당시에 그가 느낀 감정의 무게까지 해석할 수 있을까.
평소의 그였다면 아마도 끝까지 자신을 몰아붙였을 터였다. 이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을 스스로 납득할 만한 사유로 설명이 가능할 때까지.
하지만.
“……미라벨라.”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거지.
어느 순간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온 미라벨라. 제 유일한 가족이라 믿고 있는 세 오라버니에게 오롯한 애정을 보이며 따르는 미라벨라. 작은 새처럼 사랑스럽게 공작저를 누비고 다니는…….
어쨌든, 저 애는 무사히 돌아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당장은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는 지금의 감정에 대해 분명한 대가를 치러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일단, 여기에서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매끄러운 속눈썹이 다 젖어 든 채 울다 잠든 작은 얼굴, 미처 풀어 주지 못해 여전히 그의 타이에 묶인 연약한 손목, 밑을 가릴 속옷조차 입지 못한 채 자신의 겉옷을 덮고 있는 애처로운 모습이 묘하게 만족스러웠다. 동시에 레이든은 그녀가 당장 제 눈앞에서 사라질 리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서서히 안도감이 차올랐다.
이 모습 그대로 저만 볼 수 있는 어딘가에 영원히 감금하고 싶다는, 문득 치미는 거센 충동을 그는 애써 지워 냈다.
……일단 위아래로 저만큼 울었으면, 해독은 확실히 되었겠지.
레이든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잠든 미라벨라에게로 다가가 앉았다. 그는 자신의 이니셜이 새겨진 미색 손수건으로 부드러운 뺨에 남아 있는 눈물과 젖은 음부까지도 꼼꼼히 닦아 주었다.
성가시게 우는 것도, 완벽하게 말끔했던 착장이 망가지는 일도, 사전에 계획한 일정이 어긋나는 변수도. 전부 그가 딱 질색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미라벨라가 무사하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워서일까, 어째서인지 오늘은 그중 어느 것도 거슬리지 않았다.
* * *
“벨라! 괜찮아?”
두 사람이 탄 마차가 공작저에 도착하기 무섭게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르시엘이 보였다. 마치 며칠을 굶주린 뒤 사냥에 나선 수사자와도 같은 사나운 기세였다. 멀리서부터 단숨에 뛰어온 그는 아직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검은 갑주를 그대로 착용하고 있었다. 마차가 멈추어 서자마자 큰 소리로 ‘벨라!!’ 하고 부르며 문을 벌컥 열어젖힌 그가, 미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그녀를 덥석 안아 내렸다.
“무사한 거지? 다친 데 없어?!”
“르시엘 오라버니, 저는 괜찮아요.”
미라벨라의 어깨를 꽉 움켜쥔 르시엘이 날 선 눈으로 몸 이곳저곳을 빠르게 훑었다. 어깨에 걸친 레이든의 재킷을 꼭 여미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속이 훤히 비치는 얇은 네글리제 하나가 전부였기에, 그녀는 작은 어깨를 움츠렸다. 물론, 커다란 손에 꽉 붙잡힌 어깨가 조금 아프기도 했고…….
“아.”
그녀가 옅은 신음을 흘리자 흥분한 나머지 힘을 조절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르시엘이 그제야 손을 풀어 주었다. 그가 허리를 쭉 펴고 일어서며 손끝으로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었다.
“전 오라버니가 와 주셨던 게 꿈인 줄 알았어요…….”
“아까 본 거 기억 안 나? 그 새끼들을 마저 정리하느라 따로 왔지.”
말을 타고 달리는 데 익숙한 그였기에, 더 늦게 출발했음에도 마차보다 먼저 도착한 모양이었다.
“하, 벨라…….”
커다란 근육질의 체구를 가진 장신의 사내가, 몸을 한참 숙여 제 가슴께에 겨우 닿는 미라벨라의 어깨에 이마를 댔다. 난 정말 네가 어떻게 된 줄 알고…… 그가 문득 목이 꽉 잠긴 듯한 소리를 냈다. 그녀가 무사히 이 자리에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려는 듯, 르시엘은 미라벨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얼굴을 완전히 파묻고 한참 동안 달콤한 체향을 가득 들이마셨다. 방금 전까지 성난 맹수 같았던 거대한 남자가, 한순간에 길들여진 짐승처럼 온순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진짜, 미치는 줄 알았어…….”
그 길지 않은 문장만으로도 르시엘이 얼마나 그녀를 걱정했는지 고스란히 전달되기엔 충분했다. 묵직한 저음 끝에 느껴지는 떨림, 뺨에 닿은 단단한 근육질의 가슴에서 전해지는 온기, 목덜미 위로 흩어지는 낮은 한숨. 그리고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미라벨라는 코끝이 찡해졌다.
또 다른 마차 한 대가 바람을 일으키며 그들의 옆에 멈추어 선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안에서 급하게 뛰어내린 에일레스가, 지옥에 다녀온 사람 같은 얼굴로 미라벨라를 꽉 끌어안았다.
“벨!!”
“……에일레스 오라버니?”
“아, 정말 다행이야……. 벨, 혹시라도 네가 잘못됐으면,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에일레스의 금안에는 처음 보는 초조한 빛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는 급히 온 흔적이 역력한 제 오라버니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평소와 달리 마구 흐트러진 긴 은발을 아무렇게나 뒤로 넘기며 그가 미라벨라의 작은 어깨를 붙잡았다. 방금 전까지 제 품에 있던 미라벨라를 빼앗긴 르시엘이 약간 못마땅한 얼굴로 제 형을 바라보았다.
“어디 좀 봐, 벨! 안 다쳤니?”
“아, 아무 데도 안 다쳤어요! 에일레스 오라버니.”
“안 되겠다, 들어가서 다시 봐야겠어.”
옷 위로 드러난 부분을 세심하게 살피던 에일레스가 급기야 작은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혹시 작은 생채기 하나라도 남지 않았는지, 당장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히 살펴 직접 확인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미라벨라를 안고 걸음을 옮기던 그가 다른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바로 그쪽으로 갔는데 길이 엇갈렸나 봐. 약물 중독자들 중 특별히 상태가 심각한 사람은 내 선에서 처리했어.”
그가 품 안에서 바르작거리는 미라벨라를 고쳐 안으며 설명해 주었다.
“네가 잡혀간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가 두 곳이라, 나뉘어서 갔었거든.”
“아…….”
“좀 더 빨리 구해 내지 못해 미안해, 벨. 많이 무서웠지?”
에일레스는 큰일을 겪은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미소 지었으나, 미라벨라는 따라 웃을 수 없었다. 때때로 진심이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빠르게 전달되는 법. 그들의 얼굴만 보아도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세 오라버니가 위험에 빠진 하나뿐인 여동생을 얼마나 걱정했는지, 또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가족…….
미라벨라는 문득 눈가가 뜨거워졌다. 제게도 진짜 가족이 생겼다는 사실이 이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그것은 마음속 어딘가를 깊숙이 파고들어 툭 건드렸다. 그에 반해 자신은 오라버니들의 진심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끝내 완벽한 믿음을 주지 못했던 건 아닌가……. 미라벨라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아, 흐윽…….”
“벨!! 왜 울어? 다쳤니?”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벨라, 아파?”
“미라벨라, 어디가 불편한가?”
갑작스레 솟아난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후드득 떨어졌다. 걱정스럽게 지켜보던 에일레스가 돌아보다가 레이든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마음을 읽은 두 사람은 동시에 약간 난감한 표정을 했다.
“저는, 흐읍, 아무도 오지 않을 줄 알고, 흑…….”
“무슨 소리야, 너는 우리들의 소중한 동생인데. 당연히 어디든 직접 구하러 가야지.”
안심시키려 다정하게 달래는 말에도 눈물은 쉽게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한참 뒤 미라벨라는, 무언가를 굳게 결심한 얼굴로 매끄러운 뺨을 적신 눈물을 닦아 냈다.
“오라버니, 저, 그거…… 할게요.”
“뭘 말이야?”
“그, 국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교육’이요. 저도 어엿한 가문의 일원이니, 제 유일한 가족인 오라버니들에게 뭐든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비록 아직 목이 메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지만, 그녀는 꽤 분명하게 제 의사를 전했다. 에일레스와 르시엘이 당황한 얼굴을 하고 서로 눈을 마주쳤다.
“벨.”
“이봐, 벨라. 그건…….”
그때, 아무 말 없이 듣고 있던 레이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레이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막아서는 에일레스를 뒤로하고, 그의 차분한 시선이 미라벨라에게로 향했다.
“미라벨라, 그럼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겠나?”
“……저는 지금 당장에라도 괜찮아요.”
“그게 네 뜻이라면 그러도록 하지.”
“레이, 그래도 너무 서두르는 거 같은데.”
여전히 염려하는 기색을 놓지 못한 에일레스가 미라벨라를 안아 든 팔에 힘을 주었다.
“지금 바로 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역시 벨이 조금 더 진정된 후에, 천천히 서로 다시 이야기해서…….”
“아니, 결심이 섰다면 차라리 지체하지 않는 편이 나아.”
레이든이 확고하게 단언하며 그의 말을 잘라 냈다. 지금까지 그 교육을 시작하지 않은 건 당사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원치 않는데 무리하게 진행한들 성적 행위에 대한 트라우마만 유발할 뿐이니까. 모든 일은 첫 시작이 가장 어려운 법이었고, 일단 본인이 결심했다면 오히려 다른 생각이 들기 전에 빠르게 추진하는 편이 좋았다.
“……그래.”
“그럼, 장소는 역시…….”
“거기가 좋겠지.”
묵시적 동의에 의한 형제간의 의견 합일이 이루어진 뒤, 저택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탁.
자줏빛 카펫이 깔린 긴 복도의 맨 끝 방. 소음을 차단하는 효과가 탁월한 두꺼운 호두나무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굳게 닫혔다. 그날, 방 안에서 벌어진 모든 일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뿐인 여동생을 아끼는 오라버니들의 다정한 마음에서 비롯된 가정 교육의 일환이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