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오넬 공작가의 가정 교육 지침서
2권
Ⅳ. 귀여운 막내 여동생
Ⅴ. 사라진 미라벨라
Ⅵ. 은밀한 가정 교육
Ⅳ. 귀여운 막내 여동생
“으, 아파…….”
미라벨라는 엉덩이가 아파 조금은 어기적거리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날의 수업은 그렇게 종료될 줄 알았건만, 레이든은 보기 드물게 엄격한 교육관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미라벨라가 눈물을 그치자마자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다음 스케줄을 조정하면서까지 예정되어 있던 정치와 역사 수업의 진도를 채웠다.
그뿐 아니라 자신이 일을 하는 동안 옆에 앉아 그녀가 못다 한 숙제까지 마저 끝마치도록 했다. 매 맞은 자리가 욱신거리는 통증 때문에 중간에 하녀가 가져온 간식도 제대로 먹지 못한 미라벨라가 몇 번이나 자세를 바꾸며 엉덩이를 들썩였지만 그는 끝내 모른 척했다.
‘의사를 불러 치료해 주어야 하나.’
마침 저택 주치의인 닥터 노만의 휴가 기간이었다. 아파하는 미라벨라의 모습을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주의 깊게 관찰하던 레이든은 외부 의사를 부를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오늘 에일레스가 돌아오는 날이었지.’
그는 체벌로 인한 후유증도 훈육의 연장선이라 생각하는 쪽이었다. 어차피 에일레스가 귀가하면 당장 치유 마나로 낫게 해 줄 게 분명했고, 그가 돌아오기까지는 이제 채 몇 시간도 남지 않았다.
그러니 수업을 마칠 때까지는 좀 더 반성하도록 두는 편이 나을지도.
하지만 학회의 일정이 갑작스럽게 변경되어 에일레스의 귀가가 늦추어지리라고는, 매사에 철저한 레이든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레이든의 수업 시간이 끝나고 공작의 집무실을 나온 미라벨라는, 아픈 엉덩이를 추스르며 자신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움직이다가 속옷에 상처 부위가 스치기라도 하면 몹시 쓰라려 중간중간 쉬어 가야 했다. 미라벨라가 사용인들의 발길조차 드문 2층 동쪽의 긴 복도를 걷던 중 잠시 멈춰 섰을 때였다.
“……!”
무심코 기대어 쉬고 있던 문이 갑자기 벌컥 열렸다. 화들짝 놀란 미라벨라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방 안에서 나온 사람 역시 그녀를 발견하고 당황한 건 마찬가지였다.
“으악! 꼬마! 뭐, 뭐야?”
“르, 르시엘 님?”
안에서 나온 사람은 마침 비번이라 집에 돌아와 있던 르시엘이었다. 모처럼 제 방에서 쉬고 있었는지, 그는 평소처럼 제복 차림이 아닌 편안한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집 안에서도 늘 완벽한 착장을 고수하는 레이든과 달리 그가 입은 옷의 위쪽 단추는 느슨하게 풀려 있었는데, 슬쩍 벌어진 이음새로 보기 좋게 그을린 단단한 피부와 두꺼운 가슴 근육이 엿보였다.
“뭐야, 왜 여기 있어?”
제가 말해 놓고도 너무 무섭게 들리진 않았나 싶어 르시엘은 흠칫했다. 아니나 다를까, 미라벨라를 내려다보니 그녀는 주저앉은 그대로 하얗게 질린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한 대 때리기라도 한 것 같은 모습이라 무척 당황한 르시엘은, 최대한 다정하게 목소리를 내기 위해 애쓰며 권유했다.
“음, 잠깐 안으로 들어갈래?”
비록 어두운 동굴에서 울리는 것처럼 굵은 저음의 목소리 탓에 그 말은 ‘야, 뒷골목으로 따라와’ 같은 종류와 비슷한 느낌으로 들렸지만…….
어쨌든 잠시 후, 두 사람은 르시엘의 방에 어색하게 마주 앉아 있었다.
“야, 저기…….”
르시엘은 어색한 침묵을 깨 보려는 시도로 일단 입을 열었으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도로 닫았다. 미라벨라는 그가 자신을 무척 싫어한다고 오해하고 있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단지 평생 두 형들 외에 다른 형제가 생길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기에, 갑자기 생긴 여동생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심하게 뚝딱거렸을 뿐. 오히려 그는 그녀가 자라 온 안타까운 환경을 전해 듣고 되도록이면 잘해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그 마음이 행동으로 적절하게 옮겨지지 않았을 뿐이다.
기사단 내에서 그는 제법 인망이 높은 리더였으며, 딱히 언변이 부족한 편도 아니었다. 하지만 직장 동료들 앞에서와 가족들 사이에서 보이는 모습이 일치하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게다가 가정 내에서 두 형을 둔 막냇동생 포지션으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일곱 살 아래의 여동생을 둔 오빠 노릇을 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음, 그러니까, 벨라?”
르시엘은 기사단의 직속 부하이자 동기인 에이버리가 그의 여동생인 아셀라가 방문할 때면 늘 다정하게 엘라, 하고 불렀던 것을 언뜻 기억해 냈다. 하여 어색하게 목을 가다듬으며 나름대로 애칭을 불러 보았다. 그가 제 이름을 부르자마자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미라벨라의 모습이 르시엘의 기민한 동체 시력에 포착되었다. 그 모습은 마치 포식자를 피해 오들오들 떨며 숨어 있다가 들키고 만 가엾은 초식동물 같았다.
“르, 르시엘 님……?”
“뭐야, 그 이상한 호칭은. 내 부하들도 날 라이오넬 경이라고 부르는데.”
“저, 그러면…….”
“너 내 동생이라며. 아니야?”
“……르시엘, 오라버니?”
자그마한 목소리가 머뭇거리며 그렇게 부르자, 르시엘은 티는 내지 않았지만 왠지 뿌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자신은 지금껏 무의식중에 에이버리를 꽤 부러워했는지도…….
“벨라, 이번 주까지 레이든의 수업을 받는다고 했나?”
“네, 오늘은 다 끝났어요. 그래서 막 방으로 돌아가려고…… 읏!”
“왜 그래?”
말하던 도중 미라벨라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아파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어딘가 불편한 곳이 있는지, 제대로 앉아 있지 못하고 내내 몸을 들썩이며 자세를 바꾸는 것 같았다. 기사다운 예민한 감으로 그녀를 주의 깊게 살피던 르시엘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다치기라도 한 건가?”
“아니요, 흐읏, 그냥 조금, 아파서…….”
그녀는 이만 방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하기 위해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테이블 모서리에 아픈 곳을 스치는 바람에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아, 흐으…….”
“아니, 대체 어딜 다친 거야? 이리 좀 앉아 봐.”
“그게, 저, 어, 엉덩이를……. 죄송해요! 이만 가 볼게요.”
“거기, 기다려.”
놀랄 만큼 민첩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르시엘이 그녀를 향해 성큼 다가왔다. 미라벨라는 다급히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이미 하얗게 질린 안색을 목도한 그는 손목을 꽉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야, 너 많이 아픈 거 같은데? 치료하지 않아도 괜찮겠어?”
“읏, 아마 지금쯤 에일레스 오라버니께서 돌아오셨을 거라고…….”
“에일레스? 형은 내일 아침에나 돌아올걸? 방금 내 방에 들렀던 집사가 말해 줬어. 일정이 갑자기 바뀌어서 늦는다는 연락이 왔다고.”
“어…….”
“닥터 노만도 지금 없을 텐데, 늘 월초에 휴가를 내거든.”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르시엘은 미라벨라의 연약한 팔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안 되겠다, 이리 와 봐.”
미라벨라를 제 침대 위에 앉혀 놓은 그가 일어나 서랍을 뒤적였다. 잠시 후 르시엘은 맨 위쪽의 서랍 안에서 의약품 상자를 찾아냈다. 그가 가져온 상자는 지난번 에일레스의 것보다는 작았지만, 상비약과 각종 연고를 비롯하여 타박상의 치료와 응급처치에 필요한 용품들이 제법 잘 정리되어 있었다.
“훈련 중에 다치는 일이 많다 보니까 기사들은 보통 하나씩 구비해 두는 편이야. 그때마다 마도사나 의사를 부르기도 좀 뭐하고 해서.”
사실 르시엘은 자신의 부상에는 좀 무딘 편이었다. 하룻밤 자고 나면 멀쩡해질 사소한 상처를, 유난을 떨며 일일이 치료하는 게 더 귀찮다고 생각하는 쪽이기도 했고. 하지만 다른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고 모른 척하는 건 그의 기사도 정신이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다 그랬어? 집에서 그런 델 다칠 일이 있나?”
르시엘이 제 침대에 앉아 있는 미라벨라에게 눈짓했다.
“엎드려, 약이나 발라 줄 테니까.”
“시, 싫어요.”
“상처를 봐야 치료를 하지. 뭐 어때? ……남매 사이에.”
“하지만, 그래도요…….”
“어차피 에일레스한테 치료받으려던 거 아니었어? 치유 마나를 써도 보여 줘야 하는 건 똑같아. 왜, 형은 괜찮고 나는 싫어?”
“아,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엎어 놓고 여자애 엉덩이를 까는 건 이쪽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르시엘은 일부러 시선을 맞추지 않고 더 무뚝뚝하게 말했다. 괜히 티를 내면 미라벨라가 더 부끄러워할 것 같아 그 나름의 배려였다고나 할까. 그리고 레이든이 유예를 두겠다고는 했지만, 어차피 문제의 교육을 시작하게 되면 피차 볼 것 못 볼 것 다 보게 될 텐데 뭐 어떠랴 싶었다. 어찌 되었든 옷을 입고 그걸 가르칠 수는 없을 테니까.
“저, 이렇게 하면, 될까요……?”
평소라면 너무 창피해서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지만, 미라벨라로서도 지금 당장은 아픈 곳의 치료가 간절했다. 내일 아침까지는 도저히 그냥 견뎌 낼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머뭇머뭇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며 르시엘의 침대 위에 엎드렸다. 끝부분에 레이스가 달린 하늘하늘한 속바지 위로, 동그랗게 솟은 둔부의 굴곡이 어렴풋한 윤곽을 드러냈다.
“내린다.”
르시엘은 최대한 딱딱한 어조로 말하며 제 앞에 엎드린 미라벨라의 속옷을 끌어 내렸다. 하지만 퉁퉁 부어오른 새하얀 엉덩이와 그 위에 가득한 붉은 자국들을 발견하자마자, 그의 눈은 열한 살 때 날뛰는 말에서 떨어졌을 때보다도 더욱 커졌다.
“야, 이거 좀 심한데? 대체 어디서 다친 거야?”
“저어, 레이든 오라버니의 교육 시간에…….”
“공부 좀 못한다고 형이 널 때렸어?!”
“그게, 혼을 내신 건 맞는데, 공부 때문은 아니에요. 단지 제가 오라버니의 뜻을 적절히 파악하지 못해서…….”
전부 다 제 잘못으로 혼난 거예요, 미라벨라가 조그맣게 덧붙였지만 르시엘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레이든의 수업 시간에 잘못을 해서 혼이 났다, 그래서 엉덩이를 맞는 벌을 받았는데 그게 또 공부 때문은 아니고……. 그럼 왜? 아니, 일단 미라벨라에게 뭘 바랐길래……?
동그랗고 작은 엉덩이에 남은 커다란 손자국, 회초리로 매를 때린 흔적이 역력한 붉은 가로선. 미라벨라의 둔부를 천천히 살펴보던 르시엘이 곧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뭐야, 레이든.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준다더니.
대체 무슨 수업을 한 거야?
“그나저나 레이, 취향이 좀…….”
짙은 눈썹을 찌푸렸던 그가 왠지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군……. 하긴 뭐, 그럴 것 같긴 해서…… 크게 놀랍지도 않지만.”
그렇게 형제간의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이 깊어져 갔다. 르시엘의 표정이 점점 더 알 수 없어졌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불륜이나 남색과 같은 사회 상규에 어긋나는 행위를 즐기는 게 아닌 다음에야, 다 큰 형제의 성적 취향은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이 아니던가. 좀 가학적인 면이 있다 한들 거기에 입을 대는 건 서로 어색해지기 딱 좋은, 선을 넘는 처사였다. 르시엘은 레이든의 취향을 이해할 순 없어도 존중하고자 노력하며 의료 상자 안에서 소독약과 거즈, 찜질용 팩을 꺼내 들었다.
“벨라, 상처가 너무 부었으니까 일단 좀 가라앉힐게.”
“흐으, 네.”
르시엘은 잔뜩 부어오른 미라벨라의 엉덩이 위에 납작한 얼음찜질용 팩을 올려놓았다. 그 상태로 또다시 어색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조용한 방 안에는, 간혹 르시엘이 목을 가다듬는 소리와 미라벨라가 아파하며 낑낑거리는 옅은 신음만이 흐를 뿐이었다. 시곗바늘이 옆으로 이동할수록 그들 사이의 기류는 더더욱 어색해졌다.
“이제 약 바른다. 따가울지도 몰라.”
시간이 적당히 지나자 르시엘은 무뚝뚝하게 말하며 찜질용 팩을 떼어 냈다. 부들부들한 거즈에 소독약을 적셔 상처 부위를 닦아 낸 그가, 제 손가락에 연고를 덜어 그 위에 바르기 시작했다.
“아, 흐읍, 오라버니! 아파요…….”
“좀 참아. 일단 이렇게 하고, 내일 아침에 에일레스에게 제대로 치료해 달라고 해. 이 정도만 해도 오늘은 훨씬 덜 아플 걸.”
“네, 르시엘 오라버니, 읏…….”
“너 오늘 밤에 엎드려서 자야겠다.”
미라벨라의 엉덩이에 약을 발라 주던 르시엘은 문득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검을 쓰느라 꽤 거친 편인 그의 단단한 손끝에 닿는 피부가, 마치 크림처럼 말랑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에.
‘……되게 작네.’
창피해서 저러는 건가. 엎드린 채로 앞으로 모아 꼼지락거리는 손과 얇은 레이스 양말을 신고 까딱이는 발이 꼭 인형의 것처럼 작았다.
‘그러니까, 저 손으로 뭔가를 하고 저 발로 걸어 다닌다는 거지?’
그 사실이 못내 신기해서 르시엘은 자꾸만 그녀를 흘깃거렸다. 실은 얼마 전 아침 식사 때에도 저 조그만 손과 입으로 야무지게 뭘 먹는 게 믿기지 않아 저도 모르게 눈길을 주긴 했지만. 동그란 뒤통수 옆으로 삐죽 나와 새빨개진 작은 귓불, 상처 난 곳에 연고를 발라 줄 때마다 움찔거리는 보드라운 엉덩이가 무척 귀여워 보였다. 아니, 귀엽다 못해 약간 설 것 같은…….
‘하, 내가 이런 쪽에 페티시가 있었던가.’
단전 아래가 부담스럽도록 묵직해지는 감각을 애써 외면하며, 르시엘은 약간 자괴감을 느꼈다.
“다 됐다.”
“감사합니다, 오라버니!”
기다렸다는 듯 얼른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옷을 입으려는 미라벨라를 그가 저지했다.
“좀 더 있어, 약이 마를 때까지는 계속 엎드려 있는 편이 이로울 테니.”
“아, 네에…….”
미라벨라는 르시엘의 침대에 다시 엎드린 채 어색하게 발끝을 까닥거렸다.
‘르시엘 오라버니, 생각했던 것처럼 무서운 분은 아닌 것 같아.’
그녀는 제 방에 비해 훨씬 심플한 공간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의 외모로 봐서는 꽤 와일드한 감성의 향수를 쓸 것 같았는데, 옅은 블루 계열의 침구에서 느껴지는 것은 의외로 잘 마른 빨래처럼 포근한 코튼 향이었다.
사용인의 손길이 닿은 걸 감안하더라도 공작가의 형제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깔끔한 성격인지 르시엘의 방 역시 잘 정리되어 있었다. 의외로 책이 많은 게 신기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그의 이미지는 물론이고 성인 남자의 방이 분명한 인테리어와도 전혀 매치되지 않는 귀여운 인형들이 침대 옆과 장식장 위까지 전부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왜, 하나 줘?”
미라벨라는 나름대로 보지 않는 척 그의 얼굴과 인형들을 몰래 한 번씩 번갈아 보았는데 들키고 만 모양이었다. 갖고 싶어서 그런다고 생각했는지, 르시엘이 장식장 위에 놓인 토끼 인형 하나를 무심하게 집어 들어 툭 던져 주었다. 보송보송한 꼬리가 달린 새하얀 토끼 인형……. 얼떨결에 인형을 받아 안고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는 미라벨라를 보며 그가 픽 웃었다.
“너 닮았다, 꼬마.”
잘 어울리네, 매일 검을 쥐는 사람 특유의 굳은살이 밴 손끝이 보드라운 오른쪽 뺨을 툭 건드렸다. 르시엘은 왠지 미라벨라의 엉덩이에 인형과 똑같은 통통한 토끼 꼬리가 달려 있어도 어색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제 침대에 엎드려 있는 그녀의 동그란 엉덩이 사이가 아무것도 없이 매끈하다는 사실은 지금도 몸소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지만.
“뭐 다른 것도 더 갖고 싶어? 있으면 말해.”
“아, 아니에요! 하나만 주셔도 괜찮아요.”
새하얀 볼을 무심코 쿡 찌르자 순식간에 꽃물을 들인 것처럼 발그레해졌다. 르시엘이 그 모습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길쭉한 토끼 귀를 작은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미라벨라는 자신의 마지막 토끼 인형을 떠올리고 있었다.
여섯 살 생일을 맞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느 날. 미라벨라가 좋아하는 시나몬 애플 타르트로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니는 평소와 달리 그녀의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직접 묶어 주었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번화가의 상점에 나가 새 인형을 선물 받았을 때, 어린 미라벨라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다.
<갖고 싶은 걸 하나 골라, 얼른.>
<엄마아, 정말 그래도 돼요?>
<그래, 시간 없으니까 빨리.>
<와아…….>
그 전까지 생일날에도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미라벨라는 혹시라도 어머니의 마음이 변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그녀는 가슴을 졸이며 서두르면서도 이왕이면 제일 예쁜 토끼를 고르고 싶었다. 언제 또 이런 행운이 주어질지 몰랐으니까.
한쪽 귀에 노란 리본을 단,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토끼 인형. 혼자 잠들기에는 너무 어렸던 수많은 밤, 매일같이 그녀의 눈물을 받아 마셨던……. 예쁜 인형을 품에 안았던 순간의 벅찬 기쁨, 그런 뒤 어머니가 성 루베이도 학원에 그녀를 내려놓고 영원히 떠나 버렸을 때의 슬픔. 결코 교집합을 이룰 수 없는 두 가지 감정이 마구 뒤섞인 채 수면 위로 솟구쳤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이제 가족이 생겼다. 앞으로는 마지막 인형이라 하면, 오늘 선물 받은 이 토끼 인형이 떠오르겠지. 선물을 준 사람의 것과 비슷한 붉은 눈을 가진.
“……선물 감사합니다, 르시엘 오라버니.”
비록 인형을 가지고 놀 나이는 한참 지나 버렸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마음 한편이 잘 마른 빨래처럼 포근해졌다.
“공부는 할 만해, 벨라?”
그냥 기다리기가 무료했던지, 르시엘은 미라벨라의 곁에 한쪽 팔로 머리를 받치고 옆으로 비스듬히 누웠다. 그가 옆에 오자 운동장처럼 넓었던 침대가 갑작스럽게 꽉 차는 것 같았다.
“다음 주부터는 나와 에일레스도 널 가르쳐야 하는데.”
“네, 그런데 제가 잘 따라갈 수 있을지……. 르시엘 오라버니께서는 어떤 과목을 담당하실까요?”
“나? 난 뤽셀어 회화를 맡기로 했던가, 어릴 때 거기 있는 기사 아카데미에서 반년 정도 교환 학생으로 지냈거든.”
“와, 혼자서요? 정말 대단하세요……. 어릴 땐데 무섭지 않으셨어요?”
“그때가 열두 살 때였으니까 뭐, 울지는 않았지. 넌 어디 가 보고 싶은 곳 없어?”
미라벨라의 엉덩이에 바른 연고가 다 흡수되길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이런 식의 사소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러다가 흰살생선과 붉은 생선 중 어느 쪽을 더 좋아하냐, 아침잠이 많은 편이냐, 비 오는 날에는 주로 뭘 하는 편이냐는 데까지 대화가 흘러갔을 즈음, 그녀는 문득 시간이 꽤 지났다는 걸 깨닫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라버니, 저 이제 그만 가 볼게요.”
아까까진 너무 아파서 미처 의식하지 못했는데, 정신이 들고 보니 제 모습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오라버니의 눈앞에 맨 엉덩이를 내놓고 엎드린 채 태연하게 저녁 메뉴에 관한 이야기나 나누고 있다니! 열이 올라 화끈거리던 상처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이번엔 창피함으로 인해 얼굴이 뜨거워졌다.
두 볼이 잘 익은 사과처럼 달아오른 미라벨라는, 앞쪽이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며 뽀얀 허벅지 중간에 걸려 있던 속옷을 얼른 끌어 올렸다. 옷을 입으면서 제 눈치를 살피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르시엘은 무심결에 생각했다.
‘……뭐야, 진짜 귀엽잖아.’
고작 엉덩이를 보인 걸로도 저렇게 얼굴이 새빨개지는데, 홀랑 벗겨 놓으면 울기라도 하려나.
‘하, 나 지금 무슨 생각 하냐.’
이건 치료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을 뿐, 나는 이런 어린애한테 발정하는 개새끼가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르시엘이 속으로 깊이 자책하고 있을 때였다. 벌어진 셔츠 깃 사이로 길게 그어진 검상을 발견한 미라벨라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엇, 르시엘 오라버니! 어디 다치셨어요?”
“아, 이거? 별거 아니야. 이번 훈련 중에 좀 스쳤나 본데.”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으나 미라벨라는 여전히 걱정 가득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아프실 것 같은데……. 저, 혹시 제가 약을 발라 드려도 될까요?”
“아, 됐어, 이 정도로 약은 무슨.”
“그래도 꼭 치료해 드리고 싶어요…….”
미라벨라가 간절하게 올려다보는 눈빛에 진 르시엘은 마지못해 셔츠의 단추를 한 손으로 툭 툭 풀어 슬쩍 벌렸다.
“정 그러면 뭐, 그러든가. 마음대로 해.”
“감사합니다! 읏, 보기만 해도 아프실 거 같아요. 제가 약 발라 드릴게요!”
미라벨라는 조금 전 그가 해 주었던 것처럼 거즈로 상처 부위를 소독한 다음, 작은 손가락에 연고를 덜어 살살 문질렀다. 단단한 피부 위에서 꼼지락거리는 손길이 마치 갓 태어난 병아리가 부리로 건드리는 것처럼 간지러워 르시엘의 두툼한 가슴 근육이 연신 꿈틀거렸다. 약이 잘 스며들도록 마지막까지 톡톡 두드리고 난 뒤, 그녀는 왠지 뿌듯한 얼굴이 되어 속삭였다.
“저 실은, 아플 때 가족들끼리 서로 간호해 주고 그런 거, 무척 해 보고 싶었어요. 성 루베이도 학원에서 지내는 동안 늘 혼자인 건 익숙해져서 괜찮았지만, 몸이 아픈 날에는 괜히 더 서러웠거든요. 그래서 지금 이렇게 오라버니를 치료해 드릴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
배시시 웃으며 그를 바라보는 미라벨라를, 르시엘은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일말의 의심조차 담기지 않은 투명한 하늘색 눈동자. 왠지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사실 자신은 그녀의 오라버니도, 가족도 아닌 생판 남이었다. 단지 필요에 의해 속여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 중 하나일 뿐. 예리한 검날 같은 죄책감이 그를 할퀴고 지나갔다.
“……외로웠겠네, 너.”
아까보다 더 무뚝뚝한 음성으로 그가 문장을 끊어 냈다. 지금껏 그녀가 혼자 견뎌 왔을 시간을 생각하니 문득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그리고 미묘한 동질감도 함께였다.
그가 태어나고 1년도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 어머니. 모친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르시엘에게도 한때 가슴속에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 있었다. 당시에는 두 형들도 아직 어렸고 아버지는 늘 바빴으니까. 물론 르시엘에게는 유모와 사용인들의 살뜰한 보살핌이 있었기에 미라벨라와는 처지가 전혀 다르긴 했다. 하지만 오로지 가족만이 채워 줄 수 있는 부분도 분명 존재했고, 그것은 오직 당사자들만 알 수 있는 외로움이었다.
“…….”
르시엘은 아직 제 사정거리 안에 있는 미라벨라를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연고가 잘 스며들었나 보려는 건지, 동그란 머리가 그의 가슴에 거의 기대듯이 가까이 붙어 있었다. 피부에 닿는 연약하고 따스한 숨이 그를 간지럽혔다.
“엇…….”
순간 그는 충동적으로 손을 뻗어 미라벨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그녀는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오라버니가 자신을 위로해 주려 한다고 생각했는지 곧 밝게 웃으며 도리질해 보였다.
“저 괜찮아요, 아무 걱정 마세요.”
“…….”
“제 곁에는 이제 오라버니들이 계시니까, 저는 정말 행복…… 읏, 오라버니?!”
두꺼운 근육으로 짜인 단단하고 굵은 팔이 그녀를 꽉 잡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품 안으로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당황한 미라벨라가, 동그랗게 커진 눈을 하고 올려다보았다. 무언가를 힘겹게 억누르려 하는 꽉 잠긴 눈빛으로, 르시엘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벨라.”
“르시엘 오라버니? 저, 갑자기, 왜…….”
“이제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하게 되면,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아는 거지? 외국어 회화, 뭐 그딴 거 말고.”
깊은 동굴의 밑바닥에서 울리는 것 같은 그의 저음은 평소보다도 더욱 낮게 가라앉아 있었고, 끝이 약간 갈라진 것처럼 들렸다.
“그러니까, 오늘은 미리…… 그래, 오리엔테이션이라고 생각해.”
“네? 그게 무슨…… 읏, 흐읍!”
어딘가 무척 위험해 보이는 짙은 눈빛……. 르시엘의 커다란 손이 갸름하고 짧은 턱을 단단히 붙잡았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미라벨라의 입술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그는 바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여린 살결이 살짝 부어오를 때까지 제 것을 맞물려 세게 빨아들였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입술을 마음껏 베어 물 때마다 다디단 과즙이 흘러나오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난 때리는 취미는 딱히 없으니 안심하고.”
“……흐읍, 오, 오라버니!”
미라벨라가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을 파악하기도 전에, 르시엘이 입술 사이로 뜨겁게 침입했다. 자그맣게 열린 틈으로 다급히 흘러나오는 여린 숨마저 집어삼키며 그는 다소 성급하게 혀를 놀렸다. 더운 혀가 꾹 맞닿아 비벼지자 품 안에서 파닥거리던 작은 몸이 얼어붙은 듯 바짝 굳었다.
“하.”
“으흡……!”
갑작스러운 침입에 겁을 먹고 놀라 달아나려던 작은 혀는 단번에 사로잡혔다. 그가 무너지려는 미라벨라의 허리를 단단한 팔로 꽉 끌어안아 고정시켰다. 그는 그대로 미라벨라를 놓아주지 않고 강하게 휘감으며 부드러운 혀끝에 남아 있는 타액을 달게 빨고 또 빨았다.
미라벨라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새하얘졌다. 생애 첫 키스를, 오라버니와 하게 될 줄이야! 그런 교육을 할 거라는 말은 전해 들었지만, 부끄럽기도 하고 이래도 되나 혼란스럽기도 한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인 채 덮쳐 왔다. 미라벨라가 잡아먹을 듯 사나운 입맞춤에 적응하기도 전에 크고 단단한 손이 올라와 옷 위로 젖가슴을 담뿍 쥐었다.
“앗, 흐읏!”
바짝 굳어 있던 작은 몸이 불에 덴 것처럼 크게 떨렸다. 하지만 그는 행위를 멈추는 대신 한 줌도 안 될 만큼 가느다란 허리를 제 쪽으로 더 꽉 붙였다. 르시엘은 입맞춤을 지속하며 다른 쪽 손으로는 앞가슴을 여민 리본을 죽 당겨 풀어 버렸다. 커다란 손이 가운데가 벌어진 옷깃을 거침없이 열어젖히고 얇은 여름용 뷔스티에 안쪽을 파고들었다.
“하읏, 르시엘, 오라버니……!”
단단한 굳은살이 밴 손바닥이 부드러운 젖가슴을 밀어 올리며 맨살 그대로 움켜쥐었다. 미라벨라가 작은 손으로 그를 저지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단단한 벽처럼 버티고 있는 르시엘의 상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기분 좋은 촉감을 가진, 탄력 있는 구체의 감도를 측정하듯 주무르다가 바짝 일어선 작은 꼭지를 손끝으로 긁어 올렸다. 예민한 유두 끄트머리에서 느껴지는 쾌감 어린 자극에 미라벨라가 새끼 고양이가 우는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으, 응, 오라버니! 아, 안 돼요…….”
“쉬이, 있어 봐.”
“아앗, 어떻게, 흐윽.”
더운 입술이 턱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 가느다란 목덜미를 슬쩍 물었다. 하지만 르시엘은 아직 그녀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미라벨라의 유두는 익숙지 않은 성감으로 인해 양쪽 모두 바짝 세워져 있었다. 그는 앙증맞은 젖꼭지를 손가락 사이에 집어넣고 굴렸다. 단단하고 큰 손은 의외로 무척 섬세했고, 유두 끝부분의 작은 젖 구멍을 파헤치듯 긁는 오라버니의 손길에 미라벨라는 부끄럽게도 옅은 신음을 터트렸다.
“……아흐윽!”
어느새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다리를 꼭 붙이고 있었다. 문득 은밀한 곳 안쪽에서부터 따뜻한 액체가 막을 수도 없이 울컥 흘러나왔다. 얇은 천을 흠뻑 적신 선명한 감각이 낯설어 몸서리가 쳐졌다.
잔뜩 달아오른 작은 몸은 제대로 눈을 뜨기조차 어려워, 그녀는 완전히 중심을 잃고 르시엘의 가슴에 파묻혀 있었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바르작거리던 손이 확연히 남다른 존재감을 과시하는 묵직한 하반신을 스쳤다. 르시엘이 윽, 거친 신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머리끝까지 차오른 열로 눈앞이 흐릿했던 미라벨라는 그게 무엇인지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후.”
“하아, 아…….”
한참이 더 지나서야 르시엘은 비로소 팔에 힘을 풀고 그녀를 놓아주었다. 미라벨라의 작은 입술은 그의 타액으로 흠뻑 젖은 채 가쁘게 할딱이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예기치 못한 상대와 나눈, 지나치게 길고 진했던 첫 키스에 대한 감상은 그저 얼떨떨하기만 했다.
방금 한 일이 믿어지지 않아 가만히 제 입술을 만져 보던 미라벨라는, 문득 그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본능적인 부끄러움이 솟아나 그 시선을 피했다. 르시엘이 느른한 포식자처럼 비스듬히 내려다보며 물어 왔다.
“왜, 싫었어?”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
늦여름의 태양 아래 사과처럼 발갛게 익은 얼굴로 미라벨라가 고개를 흔들었다. 교육이라고는 했지만, 정말 오라버니와 이런 일을 해도 괜찮은 걸까……. 혼란스럽고, 부끄럽기도 하고,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처럼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수많은 감정이 뒤섞였지만 확실한 건, 싫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기분이 조금…….”
얇은 속옷의 아래쪽이 폭 젖은 채 여린 속살에 밀착되어 오는 부끄러운 감각이 선연했다. 아무 경험이 없더라도 그게 창피한 일이라는 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어서, 미라벨라는 얼굴을 붉히며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이상해서요.”
홧홧하게 달아오른 양 볼에 손등을 가져다 대며 미라벨라가 제 기분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르시엘이 의아한 눈으로 되물었다.
“뭐가 이상해?”
“그게, 자꾸 아, 아래가 젖는 거 같아서…….”
“야, 너 진짜…….”
어딘가 잔뜩 억눌린 음성으로 르시엘이 띄엄띄엄 말했다.
“왜 이렇게 귀엽게 구는데?”
“읏, 르시엘 오라버니! 흐읍, 숨 막혀요!”
“하…….”
그는 미라벨라의 작은 몸을 제 품으로 끌어당겨 꽉 안았다. 탄탄한 근육으로 다져진 너른 가슴에 완전히 밀착되어 파묻힌 그녀가 숨이 막혀 파닥거렸다. 미라벨라는 조그맣게 주먹 쥔 손으로 단단한 상체를 몇 번이나 통통 두드리며 뭐라 외쳤지만, 르시엘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 * *
다음 날, 레이든은 일이 있어 자리를 비웠고 대신 3주 만에 돌아온 에일레스가 아침 식사 시간에 함께했다. 지방의 도시에서 열린 학회의 세미나에 참석했던 그는, 새벽녘에 돌아온 탓에 약간 지쳐 보였다. 하지만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을 만나서인지 평소보다 다소 수다스러웠다.
“하여간 완전히 제멋대로라니까, 거기서 갑자기 일정을 늘리다니. 오늘 쉬라고 하는 바람에 죽이려다 참았어.”
임의대로 일정을 변경한 직속 상사를 한동안 험담하고 나자 마음이 좀 풀렸는지, 에일레스는 얼그레이 스콘에 크림을 얹으며 뜨거운 홍차 잔을 들었다. 높이 틀어 올려 묶은 긴 은발이 달빛을 머금은 듯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아, 미라벨라. 그동안 잘 있었니?”
“네, 오라버니. 저는 잘 지냈어요.”
“못 본 사이 약간 통통해졌나? 하긴, 그 전에는 너무 말랐었지.”
안부를 확인하는 사려 깊은 물음과 다정한 시선에 미라벨라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왜 얼굴이 빨개져?”
“네? 그, 그게…….”
식탁 위에 놓인 라즈베리 잼보다야 확실히 더 발그레하게 물든 그녀를 보며 에일레스가 약간 놀리듯이 웃었다.
“진짜, 귀엽게.”
미라벨라는 그의 시선을 피하려는 시도로 넓은 식탁 중앙에 놓인 큰 버터 접시에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우연찮게 동시에 버터를 집으려던 르시엘과 손끝이 맞닿았고, 놀란 그녀가 먼저 손을 거두어들였다. 르시엘은 약간 어색한 태도로 작은 버터 조각 하나를 집어 들고는 무뚝뚝하게 미라벨라의 접시 위에 놓아 주었다.
“자, 여기.”
“앗, 감사합니다, 르시엘 오라버니.”
에일레스는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한쪽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미묘하게 가늘어진 눈초리가 두 동생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희 막내 둘, 그사이 꽤 친해진 것 같다?”
“…….”
“내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단지 가볍게 던져 본 말에 르시엘과 미라벨라, 두 사람이 동시에 움찔했다. 미라벨라는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빵에 버터를 바르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자꾸만 얼굴이 화끈거렸다. 꿀을 바른 듯 똑같이 입을 다물어 버린 두 동생들을 바라보던 에일레스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벨, 오늘 뭐 해? 오후에 일정이 있니?”
“아, 아니요, 특별한 일정은 없어요.”
“그럼 차 마시는 시간 뒤에 내 방으로 올래? 네 몸에 남아 있던 오래된 흉터를 치료해 주기로 했지.”
“네, 오라버니.”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르시엘은 기사단으로 향했고, 미라벨라는 방으로 돌아와 다음 주부터 시작될 외국어 수업을 대비하여 미리 예습했다. 티타임이 지난 오후, 그녀는 에일레스의 방을 찾아 조심스럽게 문을 노크했다.
“안으로 들어와.”
에일레스는 막 자고 일어났는지 셔츠의 위 단추를 느슨하게 풀고 있었다. 돌아서서 방의 중앙으로 걸어가며 그가 기지개를 켜듯 팔을 위로 쭉 뻗었다. 집이라서인지 긴 은발을 편하게 틀어 올려 묶고 있어, 유난히 넓은 등과 어깨가 돋보이는 뒷모습이 더욱 근사해 보였다.
“앉아, 벨.”
에일레스가 가리킨 방향에는 그의 침대와 소파가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미라벨라는 푹신한 소파 위로 엉덩이를 내려놓았다. 그의 방은 르시엘의 방과 비슷한 구조였으나 훨씬 더 시크한 모노톤의 인테리어로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화이트와 그레이 컬러가 주된 공간은 자칫 단조로워 보일 수 있었으나, 적재적소에 포인트가 배치되어 주인의 세련된 취향을 짐작게 했다.
‘여기가 에일레스 오라버니의 방…….’
철저히 휴식을 위한 공간답게, 다소 나른한 무드의 옅은 베르가모트 향이 느껴졌다. 그것은 간혹 그가 가까이 스칠 때 느껴지는 향기와도 일치했다.
미라벨라는 왠지 몸 안에 보드라운 깃털 뭉치가 굴러다니며 심장을 간질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사이 에일레스가 그녀의 흉터를 치료해 주기 위해 곁으로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여기랑 여기. 아, 그리고 팔 아래쪽도 좀 그랬던 것 같은데. 잠깐 들어 볼래?”
“읏, 네.”
“옳지, 그대로 있어. 참, 치유 마나를 사용하려면 다친 곳을 직접 접촉해야 하거든. 불편하더라도 이해해 줘.”
미라벨라가 지난번 식당에서 알몸이 되어 신체를 검사당했던 날, 한 차례 보았을 뿐이었으나 에일레스는 흉터가 남아 있던 위치를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같은 곳에 여러 번 멍이 들면서 피부가 어두워진 자리에 그가 치유 마나를 불어넣었다. 에일레스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새하얀 빛은 오래된 흉터를 점차 흐려지게 만들더니, 곧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끔히 사라졌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상처를 치유하는 건 그보다 더 빨랐다.
“왼쪽 등에도 찍힌 것 같은 흉터가 하나 있었고, 맞아?”
“네, 맞아요…….”
“아, 침대에 앉는 편이 낫겠다. 이쪽에서 내게 보여 줘.”
미라벨라는 오늘 하필 단추나 매듭이 없는 원피스를 입고 오는 바람에 등에 남은 흉을 치유하자면 어쩔 수 없이 위로 올려 벗어야만 했다. 지난번 미라벨라가 울었던 일을 기억해서인지 그는 한층 조심스럽게 배려하는 태도를 취했다.
곧 얇은 레이스 뷔스티에만 걸친 작은 등이 눈앞에 드러났다. 에일레스는 시트를 죽 끌어당겨 침대 위에 돌아앉은 그녀의 허리 아래쪽을 가려 주었다. 긴 손가락이 가느다란 등줄기를 따라 천천히 내려오며 치유 마나를 흘려보냈다.
“벨, 오른쪽 가슴 위에도 멍든 자국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읏, 저, 하지만…….”
“할 때 마저 다 치료해야지, 이쪽을 봐.”
부드럽지만 거스를 수 없는 어조에 미라벨라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마주 보는 방향으로 돌아앉았다. 젖가슴을 가린 얇은 레이스 위로 뽀얗게 부풀어 오른 사랑스러운 굴곡이 도드라졌다. 에일레스는 천을 약간 아래로 끌어 내려 멍 자국이 있던 자리를 노출시킨 뒤, 가슴 윗부분에 손끝을 가져갔다. 처음 왔을 때 짙푸른 색으로 멍들어 있던 자리는 그사이 나아져 옅은 노란색이 되어 있었다.
“앗, 흣.”
치료를 위해 꼭 필요한 부위만을 접촉했을 뿐이었지만, 미라벨라는 그가 닿을 때마다 움찔하며 작게 몸을 떨었다. 마디가 곧고 우아한 손가락은 부드러운 곡선의 시작점을 꾹 누를 뿐 더 이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유방 전체나 젖꼭지를 애무당하는 것처럼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다 됐다.”
“감사해요, 오라버니! 흐읍.”
마침내 그가 손을 떼어 냈을 때, 무심코 시선을 아래로 향하던 미라벨라가 작게 숨을 들이켰다. 앞을 가린 뷔스티에가 아래로 비스듬히 흘러내리며 오른쪽 가슴이 반쯤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유두는 아슬아슬하게 보이지 않았으나, 푸딩 그릇을 엎어 놓은 듯 뽀얗고 말랑말랑한 구체의 윗부분과 연한 분홍빛의 유륜이 한창 바깥 공기를 쏘이는 중이었다.
얇은 천을 다급히 끌어 올리며 그녀는 혹시 오라버니가 그것을 보았을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런 걱정을 고스란히 읽어 내기라도 한 듯 에일레스가 낮게 웃었다.
쪽.
발그레한 볼에 가벼운 마찰음이 일며 따듯한 입술이 짧게 스쳤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뒤늦게 인지한 미라벨라가 작은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그는 단지 어린 여동생을 귀여워하는 것처럼 이번에는 새하얀 이마에 입을 맞추며 또다시 허스키한 웃음을 터트렸다.
“일단 내가 기억하는 상처는 다 치료했어, 혹시 빠진 곳이 있을까?”
“아, 아니요.”
르시엘이 약을 발라 준 뒤 화끈한 열감이 많이 가라앉긴 했지만, 실은 매 맞은 엉덩이가 아직도 욱신거렸다. 하지만 미라벨라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고 나니 그래도 참을 만한 것 같기도 했거니와, 왠지 그에게는…… 어린애처럼 엉덩이를 맞았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손끝에 맺힌 치유 마나가 여전히 희게 빛나며 거둬들여지지 않자, 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벨? 정말 더 아픈 곳이 없는 게 맞아?”
“네, 네! 없어요.”
“확실해?”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 들며 벗어 놓은 원피스를 집어 드는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했다. 그녀를 미심쩍게 바라보던 에일레스의 눈매가 차차 가늘어졌다. 다음 순간, 일어서려던 미라벨라의 연약한 손목이 그대로 붙잡혔다.
“앉아, 벨.”
“오, 오라버니! 흐읏!”
그다지 세게 힘을 주지 않았지만 작은 몸은 그만 중심을 잃고 침대 위로 발라당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지면서 아픈 엉덩이를 무방비하게 부딪치는 바람에 미라벨라는 가느다란 비명을 토해 냈다. 붙잡아 일으켜 주면서도 지나치게 아파하는 모습이 이상했는지, 에일레스가 의심 어린 시선을 보냈다.
“왜 이렇게 아파하지? 나 좀 봐.”
“흣, 정말 괜찮아요, 오라버니.”
“거짓말.”
“……!”
“괜찮지 않은 것 같은데.”
하지만 마법 아카데미의 최연소 부교수이자, 차기 마탑주로 거론될 정도로 유능한 치유 계열 마도사인 그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미라벨라를 천천히 살펴보던 에일레스는, 곧 제 여동생이 어디를 아파하고 있는지 눈치챘다. 다정하기만 했던 평소와는 달리 그는 약간의 권위를 내세워 그녀를 잡아 눌렀다.
“오라버니! 흐윽, 차, 창피해요…….”
“그러게 누가 거짓말하래? 가만히 있어.”
옷을 전부 벗기고 몸을 확인하던 중, 붉은 회초리 자국이 선명한 미라벨라의 엉덩이를 발견하고 에일레스가 처음 보는 무서운 얼굴을 했다.
“미친 새끼.”
“에일레스 오라버니, 저…….”
“애를 때려? 대체 때릴 데가 어디 있다고.”
“저, 하지만, 이건 제가 잘못해서…….”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거 완전 변태 아니야?”
에일레스는 진심으로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는 발가벗겨 놓은 미라벨라를 그대로 제 침대 위에 엎드리게 한 뒤 누가 보아도 과할 정도의 치유 마나를 마구 끌어냈다. 오라버니의 침대에서 알몸이 되고 만 것도, 맨살의 둔부에 직접 닿은 손바닥도 부끄러워 미라벨라가 낑낑거렸다. 그는 아름다운 얼굴을 험악하게 구긴 채 계속해서 레이든을 비난했고, 미라벨라가 해명하려 해도 자꾸만 말이 가로막혔다.
“그럼 그렇지, 침실보다 집무실을 더 좋아하는 인간이 정상일 리가 있나.”
미라벨라는 어쩐지 자신 때문에 레이든이 형제들로부터 뭔가 오해를 사고 있는 것 같아 무척 미안했다. 그녀가 큰오라버니의 잘못이 아니라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다시 말해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에일레스는 만약 레이든이 집에 있었다면 당장 그의 집무실로 올라가 한마디 할 기세였다. 혹시라도 자기 때문에 오라버니들이 싸우기라도 할까 봐 그녀는 조마조마하게 가슴을 졸였다.
“다 됐으니까 기다려, 벨.”
잠시 후, 어느 정도 화를 가라앉힌 에일레스가 상처를 치료하는 일에 집중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미라벨라의 시야에 탁자 위에 놓인 액자 두 개가 들어왔다. 골드 컬러 프레임에 나뭇결무늬가 있는 작은 액자 안에는 귀족 여인의 초상화가 들어 있었다.
반짝이는 긴 은발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여인. 누가 보아도 그녀가 에일레스의 어머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사람은…….
‘혹시 에일레스 오라버니의 연인?’
웨이브 진 다갈색 머리카락을 어깨 위로 늘어뜨린 숙녀는 그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고, 무척 아름다웠다. 침대 옆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을, 어머니의 초상화와 나란히 차지한 여인이라면 역시…….
오라버니 곁에는 초상화 속의 여인처럼 아름답고 우아한 숙녀들이 수도 없이 있겠지. 그건 조금도 이상한 게 아닌데, 어째서일까. 미라벨라는 갑작스럽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어린애처럼 혼이 나 새빨개진 엉덩이를 하고 있는 제 모습이 그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생각하니 한없이 속이 상했다.
“벨? 왜 그러지?”
눈치 빠른 에일레스는 그녀가 울적해하고 있다는 걸 즉시 알아차렸다.
“왜 갑자기 우울해졌을까.”
“저, 그냥, 문득 제 자신이 너무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서요.”
괜히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미라벨라는 말끝을 흐렸다.
“완벽한 숙녀가 되어 국혼을 무사히 치러야 저도 뭔가 가문에 도움이 될 수 있을 텐데, 제가 잘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벨.”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하던 에일레스가 부드럽게 위로했다.
“그런 시기는 누구에게나 다 있는 거야.”
“하지만, 저는…….”
“음, 확실히 나도 예전에 그런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지.”
“네? 에일레스 오라버니가요?”
“그럼.”
반듯한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완벽하게만 보이는 오라버니에게 저와 같은 시기가 있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아 미라벨라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리 와 봐, 벨.”
그는 엉덩이의 상처가 말끔하게 치유된 걸 확인하고 미라벨라를 번쩍 들어 제 무릎 위에 옆으로 앉혔다. 처음 본 순간부터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쓰였던 미라벨라. 에일레스는 그녀의 풀이 죽은 자그마한 어깨를 마주할 때마다 어째서 시선을 뗄 수 없었는지, 왜 그렇게 꼭 안아 주고 싶었는지 알 것 같았다.
<공작 부인의 친정 가문은 대대로 저명한 마도사를 배출했다고 들었어요. 마나가 발현하는 정확한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전력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죠? 그러니 자식들 중에서도 한 명쯤은 나올 줄 알았는데, 아무도 없다니 의외네요.>
<실은 공작가의 차남이 태어났을 때 몹시 기대했다는군요. 한 핏줄에서 마나를 타고난 이들은 보통 뚜렷한 외모적 특성을 지니는 거 아시죠? 그렇게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듯 반짝이는 은발에, 햇살 같은 금안은 흔치 않으니까……. 하지만 마나를 타고났다면 보통 다섯 살 전후로 나타날 텐데 이미 열 살이 넘었다니, 틀렸다고 봐야죠, 뭐.>
<공작 각하께서 실망이 크시겠어요. 아카데미를 수석 졸업했다는 장남은 작위와 사업을 잇게 하고, 검술 신동이라는 막내는 기사로, 둘째는 마도사로 키울 거라 공공연히 말씀하셨다던데.>
<쉿, 듣겠어요. 아쉬워도 어쩔 수 있나요? 자식이 여럿이라고 다 훌륭하게 자라리란 법도 없는데.>
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야.
가문에도, 가족들에게도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고……. 돌아가신 어머니께서도 이런 날 보면 부끄럽게 여기실 거야.
<에일레스 도련님은 정말 상냥하고 친절하셔! 나이가 어린데도 무척 의젓하시단 말이지.>
<라이오넬 공작가의 차남은 참 밝고 사교적인 소년이지. 누구에게나 붙임성 좋고.>
그러니까, 모두에게 잘하지 않으면 안 돼. 그렇지 않으면 다들 날 싫어할 테니까…….
문득 떠오르는 오래전의 기억에 에일레스는 다소 씁쓸하게 웃었다. 그가 뒤늦게 발현한 마나는 누구보다도 강력했고, 현재 그는 제국 내에서 가장 촉망받는 마도사였다. 어린 시절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받았던 상처는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미라벨라를 보며 무의식중에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넌 그동안 케어받기 어려운 환경에 있었지. 게다가 이제 막 여러 가지를 배우는 입장이니 그런 마음이 생길 수 있어. 그래도 너무 조급해하지는 마.”
“……에일레스 오라버니.”
“국혼을 성사시켜 가문에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충분히 이해해. 하지만 설령 그렇지 못한다고 해서 네가 가치 없는 사람이라거나 내 소중한 동생이 아닌 건 결코 아니야, 알겠지?”
눈부신 금안이 속마음을 꿰뚫어 볼 듯 가만히 응시했다. 그것은 마치 흐릿해진 하늘을 빛으로 물들이는 햇살 같았다. 사려 깊은 조언에 발그레해진 볼을 살짝 꼬집으며, 에일레스가 다소 장난스러운 투로 덧붙였다.
“벨, 하루빨리 완벽한 숙녀가 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걸 보니.”
“네?”
“얼른 시집가서 대공비가 되고 싶은 거야? 오라버니 곁을 일찍 떠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조금 서운하네.”
“오라버니,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누가 봐도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한 어조였지만 미라벨라의 얼굴은 당황으로 발갛게 물들었다.
“빨리 떠나고 싶어 하다니, 당치않아요. 오라버니께서는 정말 다정하시고, 또, 세상에서 제일 좋은 분이셔서…….”
다급한 변명을 듣고도 그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미라벨라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자신이 무슨 실수를 저질렀나 싶어 슬슬 눈치를 보았다. 한동안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에일레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은 음성에는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어떡하나, 나는 그렇게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 아닌데.”
“…….”
“아, 벨, 너는 정말이지…….”
말을 끝맺는 대신, 에일레스는 다소 허스키하게 느껴지는 특유의 저음으로 쿡쿡 웃었다. 그가 팔을 뻗어 제 무릎 위에 앉혀 놓은 미라벨라를 꼭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리 와, 우리 착한 아가.”
연한 색 앞머리가 흐트러진 하얀 이마에 그가 아까처럼 입술을 가져갔다. 약간 열이 오른 두 뺨과 도톰한 입술 위에도 쪼는 듯한 경쾌한 소리가 내려앉았다.
쪽, 쪽.
애정 어린 입맞춤은 이번에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았다. 촉, 하는 가벼운 베이비 키스로 시작해 미라벨라의 입술 위에 그가 체류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조금 더 뒤에는 부드러운 입술을 맞닿은 채 한동안 그대로 있기도 했으며, 서로의 입술이 살짝 포개진 형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흐읍.”
어느 순간, 그는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왔다. 가로막혀 놀란 소리조차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한 미라벨라가, 제 안으로 파고드는 내밀한 숨결을 얼결에 받아 삼켰다.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바짝 굳은 작은 혀를 달래듯 끌어오며 그가 어르는 듯한 소리를 냈다.
“쉬이, 착하지.”
“흡, 오라버니, 오라버니…….”
“기분 좋게 해 줄게, 응?”
에일레스는 르시엘처럼 그녀를 잡아먹을 듯 사납진 않았지만, 느릿하게 안을 파고드는 그의 움직임은 훨씬 더 과감하고 노골적이었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간만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 사이를 오가는 낯 뜨거운 혀의 움직임이 너무나 농밀하고, 또 선명해서 등줄기가 바르르 떨렸다.
“음.”
“아, 으읏, 흐읍.”
더운 혀끝이 야릇하게 얽혀 입천장을 긁어 올린 자리가 간질간질했다. 여동생에게 애정을 표한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진하고 농밀한 키스였다. 매끄러운 볼 안쪽의 점막과 작은 치아까지 남김없이 빨린 미라벨라가 숨이 모자라 할딱이자, 에일레스가 입 안으로 후 숨을 불어 넣어 주었다. 바르르 떨리는 둥근 엉덩이를 따뜻하고 큰 손이 감싸고 어르듯 토닥였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천천히 입술이 떨어지자, 미라벨라는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으로 오라버니에게 안겨 있는 제 모습을 자각하고, 미라벨라가 창피해서 달아나려 했다.
“하아, 오라버니, 잠깐만요…….”
“귀여워, 벨.”
그가 사랑스럽게 부푼 하얀 젖가슴을 큰 손바닥으로 밀어 올리며 속삭였다. 옅은 분홍빛을 띤 두 개의 앙증맞은 꼭지는 아직 손이 닿지 않았는데도 부끄럽게 바짝 서 있었다. 에일레스는 동그란 유륜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지그시 누르고 몇 번인가 덧그렸다가, 엄지와 검지 사이에 자그마한 유두를 끼워 가볍게 돌리며 귀여워해 주었다.
“여기도.”
“흐읏.”
얼결에 고개를 들었다가 자신의 젖꼭지를 쥐고 있는 오라버니와 눈이 마주치자 미라벨라는 귀 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유두를 속박한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그가 배꼽 주변을 문지르자 그녀는 순간적으로 아랫배가 꽉 조여들었다. 비밀스러운 곳이 갑작스럽게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미라벨라는 지금 제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들킬까 봐 양쪽 허벅지 사이에 힘을 주어 딱 붙였다. 하지만 오라버니의 큰 손은 허리선을 타고 당연한 듯 내려와 그 사이를 느릿하게 파고들었다. 귀엽게 꼭 다물린 조그마한 소음순이 온통 말간 액으로 젖은 것을 발견하자 에일레스가 낮게 웃는 소리를 냈다.
“꽤 음란하네.”
“아, 으흡, 읏!”
아직 성적 쾌감에 익숙지 않은 솔직한 신체는, 손바닥으로 음부 전체를 감싸 진동을 주고 클리토리스 중앙을 꾹 눌러 비비는 행위만으로도 빠르게 궤도에 올랐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갈라진 틈을 오르내리다가, 일부러 질척이는 소리를 내며 부끄러운 균열 사이로 미끄러졌다. 소음순 안쪽의 연약한 점막을 지나친 오라버니의 단단한 손끝이 질 입구를 감질나게 건드렸다. 미라벨라는 저도 모르게 맞닿은 무릎을 비비며 작게 떨었다.
“벨, 내가 이런 델 만져 주는 게 좋아?”
“으응, 읏.”
“여기가 젖었다는 건…… 기분이 아주 좋다는 뜻인데.”
“흐윽…….”
이제 속상한 거 사라졌어? 에일레스가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겨 주며 나지막이 속삭이는 말에, 미라벨라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였다. 그는 안쪽까지 삽입하진 않고 음핵과 외음부만을 세심하게 애무해 주었을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여린 몸은 거듭 옅은 절정을 맞닥뜨렸다.
걷잡을 수 없이 피어나는 쾌감이 그녀를 완전히 잠식했다. 오라버니와 이런 일을 하는 건 분명 받아들이기 버겁고, 무섭기도 하고, 너무 창피한데, 조금만, 조금만 더…… 계속해 주었으면 싶기도 한, 야릇하고 알 수 없는 기분.
어느 순간 에일레스의 금빛 눈동자에도 가라앉아 있던 짙은 정욕이 범람했다. 수면 위로 무섭게 번진 어두운 욕망. 사실 그는 그녀를 방으로 들였을 때만 하더라도 이럴 마음은 없었다. 처음엔 단지 미라벨라가 지나치게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아 조금 위로해 줄 생각이었는데. 그 스스로도 이어진 행동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는 걸 인정하나, 어쨌든 자신이 충분히 제어할 수 있다고 판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더 이상은…….
“하.”
다소 거칠어진 한숨을 내뱉으며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연약하고 사랑스러운 소녀에게 애처로운 감정이 드는 것과 별개로, 여기서 더 빠져드는 건 확실히 위험하다. 레이든의 말대로 다정한 오라버니처럼 구는 건 시한이 정해진 일이었다. 그렇다면, 분명히 선을 그어야 했다.
“아, 오라버니, 흐읏…….”
에일레스에게 기대어 있던 미라벨라는 문득 엉덩이 아래에 닿는 묵직한 감각을 인식했다. 이게 뭐지? 뭔가 굉장히 크고, 단단한, 기둥 같은 게……. 불편함을 느껴 자리를 고쳐 앉으려던 그녀의 작은 손이 무심결에 그 위를 짚었다.
“……!”
하지만 그게 뭐였는지 깨닫기도 전에, 돌연 몸이 위로 떠올랐다. 에일레스가 그녀를 들어 올려 제 무릎에서 내려놓은 거였다.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에 당황한 미라벨라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매정하게 그녀를 제게서 떼어 놓은 에일레스는, 어느새 평소처럼 다정한 오라버니로 되돌아와 있었다.
“자, 그럼 치료도 다 됐고.”
“…….”
“우울했던 것도 좀 나아진 거지?”
그는 대답조차 듣지 않고 빠르게 손을 움직여 옷을 도로 입혀 주었다. 영문을 모르고 눈만 깜박이던 미라벨라는 순식간에 떠밀리듯 방문 앞에 세워졌다. 에일레스는 마치 어린 여동생의 고민을 들어주는 건실한 시간이라도 가졌던 양, 태연한 모습으로 그녀를 배웅했다. 짙은 정욕이 타오르는 불길처럼 번져 있던 눈과, 농밀하게 키스하면서 보였던 남자의 얼굴을 싹 감춘 채로.
“이따 저녁 식사 때 봐, 벨.”
“저…….”
“그럼 잘 가.”
“…….”
바로 눈앞에서, 미련 없이 문이 닫혔다. 축축하게 젖은 속옷이 어느새 차가워져 속살에 달라붙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복도에 혼자 남겨진 미라벨라는, 꼭 그만큼이나 무안한 심정이 되어 한동안 닫힌 문 앞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