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엄격한 훈육
다음 날.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추어 식당이 있는 층으로 내려오던 미라벨라는, 외부로 통하는 계단 앞의 출입구에 서 있는 에일레스를 발견했다. 막 나가려던 참이었는지 그는 열린 문 앞에 뒷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저…….”
그는 키가 크고 후리후리한 체격으로, 직각으로 떨어지는 어깨가 유난히 넓고 훤칠했다. 뒤에서 보니 반듯한 골격이 더욱 돋보였다. 허리 근처까지 오는 결 좋은 은발과 매끄러운 피부가 얼핏 섬세한 용모를 완성시키는 듯했으나, 아래에서 올려다본 턱선과 우뚝 선 높은 콧날은 날카롭고 남성적인 선을 지니고 있었다.
“……에일레스 오라버니!”
“잘 잤니, 벨?”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미라벨라가 조금 머뭇거리며 부르자 그는 곧 긴 눈매를 부드러이 휘며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외모만 봐서는 흡연자가 근처에 있기만 해도 얼굴을 찌푸릴 것처럼 보이는데, 혼자 있던 그는 밖과 연결된 출입문 앞에서 여송연을 피우고 있었다. 은색 견장을 부착한 크림 컬러의 정복이 어쩐지 눈이 부셔서, 미라벨라는 숱이 많고 긴 속눈썹을 몇 번인가 깜빡였다.
“아, 미안.”
그가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태우던 여송연을 비벼 껐다. 에일레스는 옆에 놓아둔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가져와 옆면의 포켓에서 작은 병을 꺼내 들었다. 안에 든 젤 같은 것을 약간 덜어 손을 적시자 상쾌하고 청량한 허브 향이 느껴졌다.
“저, 오라버니. 어디 가세요?”
“참, 네겐 말해 주지 않았구나.”
그가 여상하게 답하며 문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마차가 도착했는지 확인하려는 듯 보였다.
“출장. 갑자기 잡히는 바람에.”
“…….”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평이하기 그지없는 어조였으나 미라벨라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아직 새로운 가족들에게 적응하지 못해 어색한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솔직히 다른 두 오라버니들은 무섭기도 했고……. 그런 상황에서, 이 집에서 유일하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 부재하게 되는 것이다.
“……어, 얼마나요?”
“음, 공식적으로 예정된 건 2주. 더 길어지면 3주 정도?”
“…….”
예상보다 긴 일정에 미라벨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동그마니 서 있었다. 그녀의 작은 얼굴에 가득 떠오른 걱정을 알아차린 듯, 에일레스가 또다시 눈을 매끄럽게 접으며 조금 웃었다.
“그동안 잘 지낼 수 있지?”
“……네.”
커다란 손이 격려하듯 작은 어깨를 가볍게 한 번 쥐었다 놓았다.
‘아, 손이…….’
미라벨라는 문득 어제 일이 떠올라 얼굴이 저절로 화끈 달아올랐다. 마디가 곧고 긴 손가락이 제 속옷을 벗기고 어디를 만졌었는지가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던 것이다.
전날, 레이든의 집무실에서 혼절했던 그녀가 눈을 떴을 때에는 에일레스의 품속이었다. 그는 미라벨라를 품에 안고 방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어둠이 내린 복도를 걷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사용인들도 거의 숙소로 돌아갔는지 주위가 무척 조용했다.
<아, 일어났구나.>
<…….>
눈이 마주친 그가 부드러이 미소 지었으나, 미라벨라는 그대로 시선을 돌려 외면해 버렸다. 아까의 일로 여린 마음이 큰 충격을 받은 데다, 다정했던 그에게는 왠지 어떠한 배신감마저 들었기 때문이다.
<미안해, 벨. 네 마음을 좀 더 살폈어야 했는데. 그렇게 놀랄 줄은 몰랐어.>
<…….>
<부끄럽고 무서웠지? 내 생각이 짧았어, 정말 미안.>
그는 달리 변명하는 대신 조용히 사과했다.
<음, 이런 말도 그저 핑계로 들리겠지만…… 우린 지금껏 여동생이 없어서 널 어떤 식으로 대해야 할지 서툴렀거든. 말은 안 해도, 다른 형제들도 네게 무척 미안해하고 있을 거야.>
나지막한 어조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여전히 그의 눈을 바라보려 하진 않았지만, 미라벨라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낮게 웃고는 얼굴을 가까이 했다.
<오빠 용서해 줄 거야?>
<…….>
<자.>
그가 다정하게 속삭이며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미라벨라는 한동안 망설였지만 결국 그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이 집을 나가면 달리 갈 곳이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전날의 일을 다시 상기하자 미라벨라의 두 볼은 홧홧하게 열이 올라 뜨거워졌다.
“……벨, 어제 방에 올라간 뒤에 몸은 괜찮았어?”
같은 일을 떠올렸는지 그가 속삭이듯 조용히 물었다. 낮은 음조의 매력적인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미라벨라가 얼른 대답하지 않자 그는 그녀가 알아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듯, 눈맞춤을 시도하며 좀 더 직접적으로 물어 왔다.
“혹시 소중한 곳에서 피가 비쳤다거나…… 안쪽이 아프진 않았지?”
“아, 아니요…….”
햇살처럼 눈부신 금안이 마치 마음속을 투시하는 듯한 기분. 미라벨라는 괜히 멈칫하며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다소 허스키하고 낮은 음성이 파고들어 와 심장을 간질이는 것 같았다.
“왜 피해?”
미라벨라가 눈을 피하는 걸 알아차렸는지, 그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바라보는 시선에서 미라벨라를 퍽 귀여워한다는 게 느껴졌다.
“거기 보여 준 게 창피해?”
“…….”
크고 따뜻한 손이 머리 위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괜찮아.”
낮은 웃음소리가, 미라벨라의 마음속에 부드러운 미풍이 불어오게 했다.
“이리 와.”
미라벨라가 주춤거리며 다가서자 그는 지난번처럼 팔을 벌려 안아 주었다. 온몸이 말랑말랑한 미라벨라와는 다르게 넓고 단단한 품에서, 어딘가 나른한 느낌을 주는 옅은 베르가모트 향이 났다. 희미하게 함께 느껴지는 여송연 향기마저 그의 일부처럼 잘 어울려 싫지 않았다.
‘따뜻해…….’
미라벨라는 지금껏 누군가에게 이처럼 안겨 본 경험이 없었다. 심지어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조차도. 같이 사는 동안에도 어머니는 그녀를 늘 귀찮은 짐 덩어리로 여겼었다. 오라버니가 큰 손으로 도닥여 주자 등에서부터 따스한 아지랑이가 간질거리며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다녀올 동안 착하게 기다리고 있어……. 알겠지?”
쪽,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 위에 잠시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 정도의 베이비 키스는, 자상한 오라버니가 여동생에게 애정을 드러낼 때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의 상황에서도 당연히……. 미라벨라는 언젠가 마차 승강장 앞을 지날 때, 잠시 헤어지는 가족들이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작별 인사하는 모습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한동안 집을 비울 오라버니에게 인사하는 의미로, 미라벨라는 자신도 까치발을 들고 그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 하지만 미라벨라가 자신의 모든 용기를 끌어내어 다가간 순간, 돌연 그가 몸을 떼며 맞닿은 체온이 뚝 사라져 버렸다.
“미안, 이제 가 봐야겠다.”
“…….”
“마차가 도착한 것 같아서.”
그가 곤란한 듯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미라벨라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이번에는 약간 변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방금 전 다정하게 안아 주었던 것과 달리 그는 다소 매정하게 그녀를 품에서 떼어 놓았다.
“그럼 나중에 봐, 벨.”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오라버니.”
에일레스가 곧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한동안 그 자리에 혼자 서 있던 미라벨라는, 열린 출입구로 스며드는 이른 아침의 공기가 다소 차갑게 느껴질 때쯤이 되어서야 무거운 발길을 돌려 식당으로 들어갔다.
* * *
라이오넬 공작가의 큰 식당에는 매일 같은 시간에 식사가 준비되었다. 낮에 일하지 않는 건 미라벨라뿐이었기 때문에 보통 점심은 내려와서 혼자 먹었다.
“공작님이나 다른 도련님들은 워낙 바쁘셔서 종종 일찍 나가시기도 해요. 아가씨께서도 몸이 안 좋으시거나 일이 있으실 때 말씀하시면 식사를 방으로 올려 보내 드릴게요.”
이 집의 형제들은 아침과 저녁으로 시간이 맞으면 대체로 식사를 같이하는 것 같았지만, 로지나의 말처럼 평일에는 좀처럼 다 같이 모이기가 쉽지 않은 듯 보였다. 대개 누군가 한 사람은 이르게 집에서 나가거나 귀가가 늦어졌기 때문에. 지난 이틀간도 그런 이유로, 아침의 식당은 비어 있었다.
“……!”
미라벨라는 오늘도 그럴 거라 생각했지만, 넓은 대리석 식탁에는 레이든과 르시엘이 먼저 착석해 있었다. 식당으로 들어서자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미라벨라는 몹시 당황했으면서도 그런 기색을 내비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공작님?”
근무복을 착용한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에일레스가 떠난 듯 보이는 자리를 정돈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요 며칠간의 눈치로, 앉는 좌석은 늘 정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맨 끝의 상석은 그 집안의 가주의 자리였다. 레이든은 평소와 같이 완벽한 모습으로, 목 끝까지 단추를 채운 베이지 계열의 맞춤 슈트 차림이었다. 오늘도 안경은 쓰고 있지 않았는데, 아마도 주로 집무실에서 일할 때만 사용하는 것 같았다.
“좀 늦었군.”
“저, 그게…….”
“늦잠이라도 잔 건가?”
“…….”
도무지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차가운 시선이 잠시 그녀에게 닿았다 멀어졌다. 대답을 기대하지 않은 듯, 그는 조용히 식사를 계속했다. 그대로 선 채 머뭇거리던 미라벨라가 이번엔 르시엘 쪽을 바라보았다.
“아, 안녕하세요……?”
번뜩이는 붉은 눈동자가 제게 닿자, 그녀는 맹수와 맞닥뜨린 작은 동물처럼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공작가의 세 형제 중 가장 장신인 그는, 눈썹이 짙고 강렬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이마와 이어지는 눈썹 뼈는 뚜렷하게 두드러졌고 무표정한 눈빛은 다소 매서워 보였다. 그러나 사실 미라벨라가 겁을 먹어서 그렇지, 객관적으로는 무척 남자답고 굵직한 선을 지닌 미남이었다.
기사라고 하더니, 어제와 달리 그는 각 잡힌 제복을 제대로 입고 있었다. 사냥에 최적화된 강인한 맹수처럼 두꺼운 근육으로 점철된 육체가 빳빳한 옷감 위로도 여지없이 느껴졌다. 한편으로 사소한 동작마저 무척 민첩한 느낌이라 조금도 둔해 보이진 않았지만, 그가 소리 없이 움직일 때마다 바로 옆에 앉은 미라벨라는 종종 움찔했다.
“미라벨라, 어제는…….”
“…….”
“많이 놀란 것 같던데.”
레이든이 그녀 쪽을 바라보며 먼저 물어 왔다.
“어제 그 일은 미안하다. 네 혼사를 그르칠까 염려되어 서둘러 확인하려 했다가 본의 아니게 네게 상처를 준 것 같군. 사과하지.”
“……네, 공작님. 이제 괜찮아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어제 일은 충격적이었지만, 그걸 다시 입에 올리는 것 자체가 힘들어서 미라벨라는 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미라벨라가 다시 식사를 시작하려는데, 문득 낯선 시선이 느껴졌다. 분명, 바로 이 근처에서……. 강렬한 적갈색 홍채는 그녀가 음식을 입에 넣거나 우유 컵을 들 때마다 집요하게 따라왔다.
‘……대, 대체 왜 날 저렇게 보시지?’
미라벨라는 시험 삼아 가운데에 놓인 큰 접시를 향해 팔을 쭉 뻗었다. 큼지막한 버터 롤빵 하나와 과일잼을 집어 들자 이번에도 어김없이 르시엘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온몸의 솜털이 죄다 곤두섰다.
‘혹시 내가 너무 많이 먹어서? 딱히 하는 일도 없이 밥만 축낸다고 못마땅하신 게 분명해.’
그만 먹어야 하나 미라벨라가 고민하고 있는 사이, 레이든이 그녀를 불렀다.
“미라벨라, 넌 오늘 나와 함께 황궁에 가야 한다.”
“네? 화, 황궁에요?!”
“그래, 황제 폐하께서 널 보겠다고 하셨다.”
“……흐읍!”
황궁이라는 단어만으로도 당황스러운데 황제 폐하라니. 너무 놀라 숨을 들이켜던 미라벨라는 사레가 들려 몇 번이나 잔기침을 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평생 황제를 알현할 일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까.
“화, 황제 폐하께서, 저를…… 왜요?”
“황제 폐하는 사적으로는 너의 고모부가 되신다. 궁금해하시는 게 당연하지.”
레이든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물론 황제는 미라벨라가 가짜 공녀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으니, 그녀가 쓸 만한지 미리 확인해 두려는 것뿐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줄 수는 없으니 그냥 이 정도로만 해 두었다.
그때, 그의 비서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공작님, 오늘 일정 중 급하게 변경된 사항이…….”
보고를 듣자 레이든은 오른쪽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르시엘, 오늘 네가 미라벨라를 황궁에 데려갈 수 있나? 내 일정이 좀 빠듯할 것 같은데.”
“꼬마랑 둘이? 아, 그건 좀…….”
그는 미라벨라 쪽을 곁눈질하더니 말을 얼버무렸다. 단단하고 선이 굵은 얼굴 위에 노골적으로 질겁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의 근무처가 황궁 기사단이라 부탁한 것 같은데, 그렇게 싫을 일인가 싶어 미라벨라는 무척 민망해졌다. 레이든은 더 말하지 않고 무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가 데려가지.”
그는 아직 곁에 서 있었던 비서와 일정을 조율하며 추가로 몇 가지 더 지시를 내렸다.
* * *
잠시 후, 식사를 마친 세 사람은 출입구와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마차가 세워져 있는 저택 입구가 가까워질 즈음, 레이든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레이, 왜 그래?”
“둘이 먼저 마차에서 기다리도록. 일정이 바뀌면서 서류 하나를 더 챙긴다는 걸 잊었군.”
“아, 형…….”
레이든이 실수하는 건 마른하늘에 벼락이 내리는 것만큼이나 희귀한 일인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돌아보며 르시엘이 제 형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 안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하, 그냥 말 타고 갈걸.”
미라벨라가 듣지 못한다고 생각했는지, 근처에서 혼잣말로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나랑 있는 게 싫으신 거로구나.’
갑자기 나타난 사생아 여동생을 달갑게 여기는 게 더 어려운 일이겠지. 솔직히 미라벨라는 서늘한 위압감을 풍기는 레이든이 가장 어려웠지만, 르시엘도 무서웠다. 일단 맞으면 제일 아플 것 같기도 했고……. 미라벨라는 눈치를 보며 조금씩 티 나지 않게 그와의 거리를 벌렸다.
한 걸음, 또 반걸음. 그렇게 뒷걸음질 치며 점점 멀어지고 있는데…….
턱.
손목이 그대로 콱 붙잡혀 버렸다!
“꼬마, 지금 어디 가?”
“……!”
미라벨라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한 걸 가까스로 참아 냈다. 잘생긴 이마 위로 흘러내린 숱 많은 적갈색 머리카락. 그 사이로 날카로운 붉은색 눈동자가 번뜩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레이든이 마차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못 들었어?”
“저어, 저, 그게…….”
“타.”
때마침 도착한 마차를 그가 턱짓으로 가리켰다.
‘여기서 시간을 끌며 답답하게 굴었다간 정말 한 대 맞을지도 몰라.’
그녀는 오들오들 떨며 얼른 문 앞으로 다가섰다. 마차에 오르는 걸 도와주려는 듯 르시엘이 바로 옆에서 손을 내밀었다.
“뭐 해?”
미라벨라가 제 것보다 적어도 세 배는 더 커 보이는 그의 손을 쉽게 잡지 못하자, 르시엘의 짙은 눈썹이 크게 꿈틀했다. 뚜렷한 눈썹 뼈가 안으로 슬쩍 좁혀지며 울렁거렸다. 헙, 미라벨라는 반사적으로 숨을 삼키며 굳은살로 점철된 커다란 손 위로 급하게 제 손을 올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나치게 서두른 나머지 긴 치맛자락 끝을 밟았고, 그대로 발이 죽 미끄러지고 말았다.
“……아, 아앗!”
하마터면 넘어질 뻔한 그녀를 꽉 붙잡아 준 그가, 험악하게 인상을 썼다. 후, 하고 입으로 바람을 불자 적갈색 앞머리가 사납게 흔들렸다. 그 다음은 성큼 다가와 미라벨라의 허리를 덥석 잡고, 그대로 번쩍 들어서 마차 안에 올려놓았다. 마치 귀찮은 짐짝을 당장에라도 치워 버리고 싶다는 듯이.
“죄, 죄송합니다…….”
그때 마침 레이든이 돌아와 마차가 출발했다. 황궁까지 가는 도중에도 르시엘은 제 형과 몇 마디 말을 나누었을 뿐, 미라벨라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황궁 앞의 정문에 다다르자마자 그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레이든, 오전 훈련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간다, 꼬마.”
혹 레이든에게 일이 생겨 또다시 미라벨라와 단둘이 남겨질까 걱정이라도 되는 사람처럼, 훌쩍 내려선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차로부터 멀어졌다.
* * *
“알현실로 들어가면 먼저 황제 폐하께 인사를 드릴 거다. 알려 준 인사법은 잘 숙지했겠지?”
“네, 공작님.”
“좋아, 만일 황족에게 무례를 범하면 즉결 처형될 수도 있으니 유의하도록.”
“네……?!”
그의 무감한 얼굴로 봐서는 진심인지, 농담을 말하는 건지 도통 구분이 가지 않았다. 미라벨라는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안으로 들어섰다.
‘저분이 바로, 황제 폐하…….’
르페르트 제국의 황제는 단단하고 다부진 체격의 장년의 사내였다. 세월의 흐름에 희끗희끗한 머리가 곳곳에 보였으나 대제국의 수장다운 형형한 눈빛만은 여느 청년 못지않았다. 그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미라벨라를 훑어보았다.
“제국의 빛나는 태양을 뵙습니다.”
“……음, ‘라이오넬 공녀’인가.”
“신의 축복과 광영이 늘 함께하시기를, 라이오넬가의 미라벨라입니다.”
“얼굴을 들어 보아라.”
“네, 폐하.”
레이든이 가르쳐 준 대로 황실의 예법에 따라 인사한 그녀는 황제의 명령에 눈을 살짝 내리뜨며 고개를 들었다. 몹시 긴장되고 떨렸지만 다행히 별다른 실수를 하진 않은 듯했다.
‘라이오넬 공작이 데려온 가짜 공녀라…….’
라이오넬 공작가는 제국 내 대표적인 친황제파 가문이었다. 황제는 사적으로 처조카가 되는 그들을 아주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봐 왔다. 하나 세상의 그 누구도, 설령 피붙이라 하여도 완벽하게 신뢰할 수는 없는 게 제왕의 자리였다. 그는 장성한 조카들을 아들이나 다름없이 아끼면서도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않았다.
게다가 언젠가는 황태자가 자신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를 터였다. 지나치게 강한 외척의 존재는 군주에게 힘을 실어 주는 동시에 경계의 대상이 되는 법이니까.
이번 에펠 공국과의 국혼 건을 라이오넬가에 일임하는 건 황제의 입장에서는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의 충정을 시험하는 좋은 기회가 되는 동시에 공작가와의 유대와 결속을 더욱 단단히 할 수 있었다.
또 에펠의 대공비 자리는 확실히 매력적이나 양국 간 관계가 틀어질 경우에는 인질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될 수도 있었다. 가문의 이익을 따져서는 머뭇거릴 게 없지만, 정말 사랑하는 여동생이나 딸자식이라면 선뜻 내놓기 망설여질 만한 혼처였다.
어차피 가짜 공녀라면 공작의 입장에서도 거리낄 게 없어 편할 테지. 설령 가짜라는 사실이 발각된다 한들 여차하면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고 도리어 약점을 잡을 수 있을 테니,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다.
“흐음, 나쁘지 않아. 꽤 예쁘장하군. 잘 먹이고 제대로 가꿔 놓으면 봐줄 만하겠어.”
미라벨라를 찬찬히 뜯어보던 황제가 흡족한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역시 라이오넬 공작의 안목인가.”
‘저게 대체 무슨 뜻이지?’
황제의 말이 좀 이상하게 들렸지만 미라벨라는 워낙 떨리고 정신이 없는 터라 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참, 공작. 특별히 염두에 두라 지시한 그 일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지? 차질 없이 교육하는 중인가?”
“……천천히 진행할 생각입니다.”
“좋아. 다른 사람도 아닌 그대이니 알아서 잘 하겠지.”
“…….”
그 뒤로도 몇 가지 미라벨라가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이 더 오갔다. 황제는 미라벨라에게는 더 볼일이 없는 듯 곧 다른 화제를 꺼냈다. 레이든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미라벨라, 먼저 나가서 밖에서 기다리도록.”
“네.”
혼자 알현실을 나온 그녀에게 황궁의 시녀가 다가왔다.
“라이오넬 공녀님, 기다리시는 동안 다과를 준비해 드릴까요?”
“아, 아니요.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어느덧 시간이 꽤 흐른 탓에 약간 배가 고프긴 했지만 뭘 먹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미라벨라는 간식을 사양하고 대신 밖으로 나가 후원을 거닐었다. 극도의 긴장이 스르르 풀어지자 비로소 몸이 덜덜 떨려 왔다. 그때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지?”
“……!”
“이 궁의 시녀는 아닌 것 같은데.”
뒤를 돌아보니, 꿀을 녹인 듯 진한 금발 머리의 남자가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나이는 20대 초반쯤 되었을까. 레이든도 피부가 흰 편이지만 약해 보이진 않는데, 그의 안색은 다소 파리하고 창백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명령조가 익숙하게 밴 말투며 옷차림, 묻어나는 분위기가 한눈에 보기에도 일반 귀족은 아닌 것 같았다.
“저, 저는…….”
미라벨라는 겨우 긴장이 풀려 방심하고 있던 차였고, 하필 혼자였다. 얼른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꼭 입이 붙어 버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대답이 없지? 감히 황족을 무시하는 건가?”
‘황족……!’
한동안 답이 들려오지 않자 질문했던 남자가 화가 난 얼굴로 한 걸음 다가왔다.
황실 모독죄로 이대로 즉결 처분되는 건 아닐까……. 얼굴이 하얗게 질린 미라벨라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그 순간.
“황태자 전하.”
안타까울 만큼 떨리고 있는 작은 어깨 위로 커다란 손이 얹어졌다.
아, 공작님께서 오셨구나. 미라벨라는 왠지 돌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제게 닿아 온 손길이 그렇게 따뜻하고 든든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이 아이는 제 동생입니다.”
“동생…….”
황태자는 약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황궁의 예법에 서툴러 무례를 범한 모양이니, 너그러운 용서를 청하는 바입니다.”
레이든이 작은 표정 변화조차 없이 그를 바라보고 선 것과 대조적으로 황태자의 얼굴색은 한층 더 창백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어딘가 체념한 듯한 얼굴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
“…….”
“말씀 편하게 하시지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레이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전히 담담한 어조였다.
“녹스, 나를 먼저 형제로 대하지 않은 건 네 쪽이 아니었나?”
“그, 그건…….”
“네가 날 형으로 여겼다면, 네 어머니께 그리할 순 없었겠지.”
“…….”
“그럼, 차후에 뵙겠습니다, 전하.”
“……레이든 형님!”
“가자.”
그는 미라벨라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지 않고 가볍게 돌려세웠다. 얼떨결에 레이든을 따라 나가던 그녀가 코너를 돌며 시선을 돌렸을 때, 황태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라이오넬 공작님, 황태자 전하와는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신가요?”
“……어릴 땐 자주 어울려 놀았지. 고모님의 아들이라 우리와는 사촌 간이니.”
공작저로 돌아오는 마차 안. 레이든은 문득 밀려오는 피로감을 느꼈다. 그러고 보니, 지난 사흘간 집무실에서 밤을 거의 지새우다시피 하며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않았다. 그가 지끈거리는 눈가를 한 번 꾹 누르는데, 맞은편에 앉은 미라벨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하지만 황태자 전하께서는 황후 폐하의 친자가 아니라고 들어서요. 사실은…….”
황제가 비천한 하녀에게서 본 사생아를 황후가 거두었다는 건 몇 년 전부터 세간에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 결정은 배우자의 부정은 탓하되, 그 결과물로 생긴 죄 없는 아이까지 미워하지는 말자는 풍조에도 분명 영향을 준 일이었다. 레이든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런 말로 간단히 정의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미라벨라가 다시 입을 열어 질문하려 하자, 그는 약간 성가신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그렇게 관심을 갖는 게 아니야.”
“죄, 죄송해요.”
“괜히 쓸데없는 걸 궁금해하려거든 네 이야기나 해 봐.”
“……제 이야기요?”
“그래. 여기 오기 전엔 어떻게 지냈는지, 자신 있는 건 무엇인지, 뭐든.”
“하지만 제 이야기는, 별로 재미는 없으실 거예요…….”
미라벨라는 조금 머뭇거리며 그동안의 일들을 하나씩 이야기했다.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해 늘 춥고 배가 고팠던 성 루베이도 학원에서의 생활. 지내던 다락방은 항상 눅눅한 냄새가 났으며, 비가 오면 천장 곳곳에서 빗물이 떨어졌다는 것. 유일한 친구인 레이첼이 결혼하면서 자작가로 떠났던 일, 자일스의 괴롭힘과 외로웠던 나날들, 그리고 엄마의 수많은 애인들에 관해서까지…….
그녀가 꽤 솔직하게 이것저것 말하는 동안 레이든은 줄곧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미라벨라가 사디르 후작의 정부 제의를 받았던 일을 이야기할 즈음, 모양 좋은 눈썹이 슬쩍 꿈틀거린 것 같기도 했지만.
“……라이오넬 공작님?”
그는 아무래도 이야기가 지루한 나머지 잠이 든 것 같았다. 미라벨라는 오히려 조금 안심이 되어 정말 하고 싶었던 말까지도 전부 털어놓을 수 있었다.
“공작님, 저를 집으로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흔쾌히 가족으로 받아 주시고, 좋은 혼처를 구해 주려 마음 써 주신 것도요. 이 말씀을 꼭 드리고 싶었어요.”
“…….”
“생각지도 못한 가족이 있다는 말에 제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실 거예요. 오라버니들과 되도록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고 싶지만…… 말씀하신 대로 성인이 되면 결혼해서 집을 떠나야 하는 게 당연하겠지요? 함께 지내는 동안만이라도 좋은 여동생이 되어 드리고 싶은데……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 그럼 일단 공부를 열심히 하도록.”
“아, 안 주무셨어요?!”
화들짝 놀란 미라벨라가 급히 숨을 집어삼켰다. 듣지 않는 줄 알고 혼잣말로 털어놓았는데……. 동그란 눈이 당황하여 빠르게 깜빡였다.
“말을 잘하니 좋군. 앞으로도 그렇게 해.”
이유를 알 수 없이 약간 복잡한 심경이 된 레이든이 그 눈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속도를 늦추었던 마차가 완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부석에서 쩔쩔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이쪽 길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무슨 일인가.”
“요 앞에 새로 생긴 케이크 가게가 최근 인기라더니, 그 때문에 길이 막혔나 봅니다. 외국에서 온 파티셰가 만든 특제 디저트를 매일 일정한 개수만 정해 놓고 판매하고 있어 줄을 서느라 그렇다는군요.”
“음.”
“다른 길로 되돌아갈까요? 이대로는 한참 걸릴 것 같아서…….”
레이든은 마차의 창을 열고 밖을 보았다. 한정판 특제 디저트 판매! 라는 큰 글씨와 함께 알록달록한 케이크가 그려진 간판 아래, 미라벨라와 비슷한 또래의 소녀들이 모여 까르르 웃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같이 고운 옷을 차려입은 유복한 집안의 자녀들이었다. 그는 걱정이라는 단어를 모르는 것처럼 한없이 밝고 발랄한 모습을 보았다가, 다시 제 앞에 앉은 미라벨라를 보았다. 충분한 사랑을 받기는커녕, 그 나이에만 느낄 수 있는 사소한 즐거움이나 당연한 행복마저도 박탈당한 채 외로이 지내 왔을 소녀…….
“마르코, 거기 있나?”
“공작님, 분부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그의 부름에 마부석의 옆자리에 타고 있던 하인이 내려 문 옆으로 다가왔다. 레이든의 지시를 받고 케이크 가게 쪽으로 향한 그는, 잠시 후 가게 상호가 찍힌 종이봉투를 들고 되돌아왔다.
“한 사람당 구매 가능한 수량이 정해져 있어 많이 사진 못했습니다.”
“와아…….”
미라벨라의 시선은 달콤한 향을 풍기는 초콜릿 티그레와 폭신폭신한 베이비 슈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레이든이 그 모습을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간식을 넉넉히 만들라 해야겠군.’
르시엘은 몸 관리 때문에, 레이든과 에일레스는 그다지 단것을 즐기지 않아서, 평소 디저트는 생략하는 경우가 많았다. 집에 먹는 사람이 없어 그간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공작저의 파티셰가 무척 좋아할 소식이었다.
“다 네 거야.”
“감사합니다, 공작님!”
동그란 하늘색 눈이 기쁨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이런 걸로 그렇게 일일이 감사할 것 없어. 넌 내 동생이니까.”
미라벨라가 몇 번이나 거듭 감사 인사를 하자 그가 충고했다.
“미라벨라, 너는 라이오넬이다. 그러니 어디서든 당당하게 행동해. 누가 뭐라 해도 기죽지 말고, 널 무시하도록 놔두거나 함부로 고개 숙이지도 마. 알겠나?”
“네…….”
그는 다시 엄격한 얼굴로 돌아와 덧붙였다.
“그렇다고 안하무인처럼 네 멋대로 행동하라는 말은 아니야.”
“읏, 알겠습니다, 공작님.”
“나는 에일레스처럼 너그럽지 않아. 필요하면 매를 들기도 할 거다.”
그 말에 미라벨라의 작은 어깨가 움츠러들자, 그녀를 향해 그가 턱짓했다.
“먹어.”
“저, 공작님께서는 같이 안 드세요?”
“됐어. 네가 다 먹도록.”
“하지만, 맛있는 건 같이 먹으면…….”
더 맛있다고 했는데…….
그는 차마 혼자 먹지 못하는 미라벨라에게 다시 눈짓하더니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난 잠시 눈을 붙이겠다.”
“…….”
미라벨라는 갓 구운 따뜻한 디저트 하나를 조심스럽게 입에 넣었다. 혀끝에 부드럽게 닿아 사르르 녹아 퍼지는 초콜릿과 크림의 달콤한 맛…….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 레이든의 조각 같은 낯을 살짝 훔쳐보았다.
‘무척 피곤하셨나 봐.’
하긴 로지나가 공작님께서는 대체 언제 주무시는지 모르겠다고 했었지. 집무실에 늘 불이 켜져 있다고…….
미라벨라는 마차의 창을 통해 스며들어 잠든 그의 얼굴 위로 일렁이는 햇살이 신경 쓰였다.
처음으로 황제를 알현하며 무척 긴장했던 데다 달콤한 간식이 들어가니 차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미라벨라는 마차의 좌석에 앉은 채로 졸기 시작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레이든은 잠에서 깨어났다.
‘잠시 눈만 감고 있으려 했더니. 그사이 잠들었던 건가.’
툭.
그가 천천히 허리를 펴자 작은 손수건 하나가 얼굴 위에서 떨어졌다. 뻣뻣하고 거친 자투리 천으로 직접 만든 듯한 조악한 물건. 나름대로 장식을 넣어 보려 했는지 어설프게 수를 놓은 꽃송이는 결코 전문가의 솜씨가 아니었다. 하나 평소라면 손도 대지 않았을 조잡하기 그지없는 천 조각을 손끝으로 쓸며 레이든은 묘하게 부드럽다고 생각했다. 향수를 뿌린 것도 아닐 텐데, 모서리에 수놓인 작은 데이지 꽃잎에서 풋풋하고 옅은 꽃향기가 물씬 배어나는 느낌…….
“…….”
시계를 보니 시간은 얼마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아주 오랜 시간을 푹 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깊게 잠들어 버리다니. 다른 사람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걸 질색하는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미라벨라는 맞은편의 좌석에 웅크려 앉은 채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색색거리는 고른 숨소리가 조용한 마차 안을 일정하게 울렸다. 창밖에서 비쳐 드는 햇살이 혹 그의 수면을 방해할까 걱정되어, 제 손수건을 눈가에 올려놓은 모양이었다.
“하…….”
어딘가 복잡한 심경으로 손에 들린 손수건과 잠든 미라벨라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그는, 문득 제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아까 봉투에 담겨 있던 특제 디저트 중 제일 예쁜 것들 몇 개가 손도 대지 않은 채로 포장지에 곱게 싸여 놓여 있었다.
* * *
글렌 후작에게 있어 오늘은 무척 중요한 날이었다.
“자일스, 반드시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한다. 알겠느냐?”
“알겠어요, 아버지.”
후작저를 떠나는 마차 안에서, 그는 맞은편에 앉은 막내아들에게 몇 번이나 단단히 일렀다. 사실 작위가 더 높은 쪽이라 해도 이처럼 통보에 가까운 방문 요청은 무례하게 들릴 법했다. 노구를 이끌고 이른 아침부터 출발하는 일에도 다소 무리가 따랐다. 하지만 긴장과 설렘으로 뒤섞인 그의 마음은 그런 것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오늘의 만남을 청해 온 상대가 누구던가. 바로 제국 내 다섯도 되지 않는 공작가, 그중에서도 황가의 위세에도 비견될 수 있다는 라이오넬 공작가의 젊은 가주였기 때문이었다.
“이 애비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말고, 쓸데없는 말이나 행동은 절대로 삼가거라. 알겠느냐?”
“아, 알았다고요!”
이른 새벽부터 아버지의 손에 끌려 나온 자일스는 온 얼굴에 짜증이 역력했다. 게다가 그는 마차가 막 출발한 순간부터 이와 같은 잔소리를 벌써 몇 번이나 들어서인지 지루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아비의 면전에서도 버릇없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 막내아들을 바라보자니 글렌 후작은 울화가 치밀었다. 도대체 저 애의 어미는 애가 저 지경이 되도록 뭘 한 건지. 글렌 후작은 나이 어린 정부에게서 늦게 본 자식이라 하여 매사에 감싸주며 귀엽게만 기른 제 잘못은 생각지도 않고, 다른 곳으로 원망의 화살을 돌렸다.
“이런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을 보았나……. 명심하거라, 오늘 일이 어떻게 풀리는지에 따라 네 인생이 완전히 바뀔 수도 있어! 그 대단한 라이오넬 공작가에서 네 뒤를 봐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그래,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분명…….’
제국 내 거의 모든 핵심 산업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라이오넬 공작가는, 글렌 후작가와도 오래전부터 선박 무역 사업 건으로 얽혀 있었다. 선대 라이오넬 공작과 거래를 텄던 터라 지금의 젊은 공작과 직접 마주하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노련한 글렌 후작은 미취한 아들까지 동반해 달라는 오늘의 방문 요청에 분명 사업상의 문제 외에도 다른 뜻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얼마 전 라이오넬 공작가에서 갑자기 공표했다는 막내딸!’
공식적으로 발표된 내용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외국의 친척 집에서 요양 중이었다는 것이었으나, 사실 석연치 않은 구석은 있었다. 가문 내의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사생아를 거두었다 해도 알 게 뭔가. 뒤늦게 그 생모가 딸을 데리고 나타나 거래를 청했을 수도 있고. 물론 의심스럽다 한들 그 말을 감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만일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라이오넬 공작과 다른 두 공자들은 불편한 이복 여동생을 빨리 치워 버리고 싶을 게 분명했다. 정부가 낳은 이복 누이에게 새삼스럽게 정이 갈 이유도 없거니와, 괜히 시간이 흐를수록 상속권 문제도 복잡해질 테니까.
가장 빠른 방법은 역시 시집을 보내 버리는 거였다. 그러니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적당한 상대를 찾은 거라면 꽤 가능성이 있었다. 오랜 기간 사업상 거래를 유지해 온 관계이기도 했고, 글렌 후작가는 대대로 쌓아 온 인망이 높고 유서 깊은 중앙 귀족 가문이 아니던가. 공작가와 사돈을 맺기에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글렌 후작의 생각이었다.
‘비록 작위가 더 낮다 하나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우리 가문이 아닌가? 이 정도면 공작가에 꿀릴 게 없지!’
제국 내에서 후작가와 공작가의 위세는 하늘과 땅 차이였지만, 선대부터 평생을 일궈 온 가문에 대한 프라이드가 엄청난 그는 자체적으로 이렇게 판단했다.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다면 최근 자일스가 몇 가지 사고를 저지르는 바람에 평판이 떨어졌다는 점이지만…….
‘애들이 다 그러면서 크는 거지. 사내 녀석들은 원래 철이 좀 늦게 드는 편이기도 하고. 한두 번 사고 치는 것쯤이야……. 게다가 내 아들은 나를 닮아 외모도 꽤 준수한 편이 아닌가? 이 정도면 일등 신랑감이지.’
사실 자일스의 한심한 행태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자면, 누가 보아도 글렌 후작은 자식 농사에 실패한 사람이었다. 하나 어찌 되었든 팔은 안으로 굽는 법. 글렌 후작은 이처럼 남의 자식에겐 엄격하고 제 자식의 허물에는 관대한 부모의 전형적인 모습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오늘의 만남은 사실상 선을 보는 자리가 되겠군.’
그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제 막내아들과 라이오넬 공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안고 인사하러 오는 상상까지 펼쳐지고 있었다. 어쩌면 그 대단한 공작가와 사돈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몹시 가슴이 뛰어 늙은 글렌 후작의 혈압은 다소 위험 수치까지 올라갔다. 그는 혹 라이오넬가의 딸이 적녀가 아닌 사생아라 하더라도 그 정도쯤은 관대하게 받아들여 주겠다고 다짐하며, 스스로를 무척 너그러운 사람이라 생각했다.
* * *
‘젊은 놈이 건방지긴…….’
현 라이오넬 공작, 레이든을 처음 마주한 글렌 후작의 감상이었다.
“반갑습니다, 글렌 후작.”
가주의 응접실에서 그를 직접 맞이했고 하녀를 시켜 최고급의 홍차와 티 푸드를 내는 등 겉보기에는 흠잡을 데 없이 정중한 태도였으나, 공작은 묘하게 고압적이었다. 마치 누가 아랫사람인지 철저하게 알려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비록 작위는 낮다 해도 이쪽이 연장자인 데다 곧 사돈이 될 사이인데 저리 뻣뻣한 태도라니. 혼약을 맺게 되면 보통 아들 가진 쪽이 우위에 서기 마련인 제국의 풍조에 익숙한 글렌 후작은 그 태도가 퍽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작 각하, 처음 뵙겠습니다.”
하지만 노련한 귀족답게 불쾌한 감정을 속으로 감춘 그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었다. 아마도 라이오넬 공작은 알량한 지참금이나 쥐여 주고 이복 여동생을 치워 버리려는 속셈이겠지만, 자신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생아든 뭐든 공작가의 딸이 내 며느리가 되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잘 구슬려 꾸준히 우리 쪽으로 재산을 빼 오게끔 해야지…….
게다가 라이오넬 공작은 물론, 다른 두 공자들도 모두 아직까지 미혼이었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혹시 그들 생식 기능에 문제라도 있을지 알 게 뭔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 자일스의 아이가 후사를 이어 공작가를 차지할 수도 있을 텐데……. 새파랗게 젊은 놈 앞에 고개를 숙이는 건 자존심 상했지만, 장밋빛 앞날을 그려 보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하긴 내 아들놈이라면 공작가에서도 탐낼 만큼 괜찮기는 하지. 암, 나를 닮아 사내답게 잘생기기도 했고.’
“아! 화장실! 화장실 어딨어? 나 오줌 싸겠네!”
하지만 글렌 후작의 뿌듯한 망상은, 아들의 경박한 언사에 산통이 깨지고 말았다. 하녀가 내온 티 푸드를 공작이 권하기도 전에 먼저 두세 개씩 집어먹고, 목이 메어 찻잔을 들고 벌컥벌컥 마시던 자일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저런 얼빠진 행동을 한 것이다.
“화, 화장실은 나가셔서 오른쪽 복도를 지나…….”
“야, 좀 비켜!”
서빙을 돕던 하녀가 지금껏 본 적 없는 몰상식한 매너에 놀라 더듬거리며 문 쪽을 가리켰다. 자일스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하녀를 밀치고 응접실을 뛰쳐나가 버렸다. 심지어 그는 호스트인 라이오넬 공작에게 양해조차 구하지 않았다. 당황한 글렌 후작의 메마른 낯빛이 한층 더 누렇게 떴다.
“죄송합니다, 공작 각하! 제 아들놈이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서…….”
“아닙니다. 뭐, 너무 급하면 그럴 수도 있지요.”
“새벽부터 출발하느라 아침을 못 먹였더니, 애가 배가 고팠나 봅니다. 저 애가 어린 시절부터 장이 민감한 체질이기도 하고…….”
“예, 그랬던 것 같군요.”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정중했지만, 공작의 입가에 옅게 떠오른 감정은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글렌 후작은 기분이 잔뜩 상해서 민망해진 감정을 곱씹었다. 철없는 어린 것이 배가 고프면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고 나와 내 아들을 대놓고 비웃어? 며칠 전 성 루베이도 학원을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망나니처럼 사고만 치는 자일스를 그는 요즘 들어 부쩍 자주 혼내곤 했다. 하나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인지, 정작 남이 제 아들을 안 좋게 여기는 기색을 보이자 심히 불쾌했다.
‘설마 내 아들이 적자가 아니라고 무시하는 건가?’
고작 그 일 때문에 혹시라도 기가 죽을까 싶어 더 귀하게 길렀는데, 감히 내 아들을…….
“제가 오늘 후작을 뵙자고 한 이유는 짐작하셨을지 모르겠지만.”
“아, 뭐 이미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나이가 들며 아집은 안 좋은 쪽으로 강해졌고, 부모 된 마음은 망막에 한 꺼풀을 덧씌워 사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런 이유로 평정심을 잃어버린 그는, 매너가 아니라는 사실조차 잊고 공작의 말허리를 자르며 성급하게 끼어들었다. 글렌 후작의 대답에 공작이 의외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말을 이었다.
“갑작스럽게 말씀드려 당황하시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이미 짐작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서두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요, 공작 각하.”
이쯤에서 글렌 후작은 약간 표정 관리를 했다. 너그러운 자신이 너의 급한 사정을 특별히 헤아려 주겠다는 것처럼. 그가 알기로 현재 제국 내에서 공작가와 혼약을 맺을 만한 급의 가문 중 자일스 또래의 영식은 드물었다. 있다 해도 대부분 이미 약혼한 상태였고. 그렇다고 외국에서 상대를 찾기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번거로울 테니, 여동생을 빨리 시집보내고 싶은 공작으로서는 내게 아쉬운 소리를 할 수밖에 없겠지.
‘지참금 대신 투자금을 더 늘려 달라고 할까? 아니지, 지참금은 지참금대로 가져와야지!’
라이오넬 공작가와는 선박 사업상의 거래로 안면을 튼 사이였지만, 공작가는 후작가가 운영하는 다른 몇 가지 사업에도 막대한 투자금을 넣어 주고 있는 거물급 투자자였다. 거래처라고는 해도 저쪽에서는 아쉬울 게 없는 반면 글렌 후작가의 입장에선 공작가와의 연계가 필수적이었지만. 하나 이제부터는 서로의 입장이 바뀔지도 모른다. 그는 이 혼약을 승낙하는 대가로 요구할 만한 사업상의 이익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음, 이해해 주시니 이야기가 오래 걸리진 않겠군요.”
하지만 그런 후작에게 라이오넬 공작이 꺼낸 말은 완전히 예상 밖의 것이었다.
“저희 라이오넬 공작가는 이 시간 이후 선박 무역 사업과 관련하여 글렌 후작가와 진행 중이던 모든 거래를 중단하려 합니다.”
“……예?!”
전혀 생각지도 못한 통보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진 글렌 후작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뭐, 아니, 공작! 각하,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것들은 물론이고, 기존에 예정되어 있던 모든 계약을 취하할 생각입니다. 물론, 공작가와 글렌 후작가가 향후 다시 거래 관계를 맺는 일도 없을 거고요.”
“말도 안 됩니다, 대체 이유가 무엇인지라도 알려 주십시오!”
“이걸 보시면 충분히 납득할 사유가 될까요.”
벌게진 얼굴로 격분하여 따져 묻는 글렌 후작과 달리, 젊은 공작의 표정은 차를 권할 때와 마찬가지로 침착하기만 했다. 그가 우아한 동작으로 꺼내 든 장부를 후작의 떨리는 손에 건네주었다. 그것을 살펴보던 글렌 후작의 얼굴은 점점 더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아, 아니…… 이건…….”
그것은 후작가의 가업이나 다름없는 핵심 사업인 ‘글렌 상회’의 최근 몇 년간 회계 자료였다. 거기에는 후작가에서 그간 관행적으로 고의적인 회계상의 오류를 범해 부당 이득을 취해 온 증거와, 거래처인 영세 업체에게 과실을 덧씌워 손해를 전가시킨 정황들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이건 공작가와 거래 중인 것과는 별개의 사업이었다. 게다가 불법이긴 하지만 이 정도 잘못은 암묵적으로 다들 저지르지 않나! 그리고 만만한 영세 업체에게나 이렇게 굴었지, 공작가와 거래할 때는 알아서 납작 엎드려 제대로 계산했고……. 그런 이유로 글렌 후작은 다분히 억울한 얼굴로 공작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공작 각하! 이건 공작가와는 아무 관계없는……!”
“물론 그렇지요. 하지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저는 후작가가 신뢰할 만한 거래처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보고서에도 나와 있듯 지난달에는 메이블 남작가가, 작년에는 베인 상회가……. 지금껏 글렌 상회의 과실을 대신 뒤집어쓰고 도산한 영세 업체가 한두 곳이 아니더군요.”
“아, 아니, 각하, 잘 모르시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인데, 이런 건 원래…….”
“그러니 언제 공작가의 뒤통수를 치려 할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글레 후작은 ‘네가 아직 잘 모르는 모양인데, 원래 이 바닥에서는 다 이렇게 살아남는 거다’라는 취지로 젊은 놈을 일깨우고 싶었으나, 상대는 공작이었다. 어쨌든 이대로 당하기만 할 수는 없어 흥분한 낯으로 따져 물으려던 글렌 후작은 문득 말을 멈추었다.
사실 거래가 끊어지면 곤란해지는 건 오직 후작가뿐이었고, 상대의 입장에서는 전혀 아쉬울 게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라이오넬 공작은 글렌 상회에 들어가 있는 투자금까지 회수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현재 공작가의 투자 지분은 막대한 수준이었기에, 만약 현 상황에서 갑자기 그것을 거둬들이겠다고 한다면 후작가는 당장 파산하고도 남았다.
글렌 후작은 새삼 최근 하청 업체들을 쪼아 대어 무리하게 사업 범위를 확장시킨 일이 후회스러웠다. 그는 자존심과 안위 사이에서 갈등하며 겨우 자신을 가라앉힌 뒤, 다시 정중한 태도로 초조하게 청했다.
“공작 각하, 선대부터 거래해 온 정을 고려하여 부디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지요.”
“아니요, 한번 내린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
온갖 장밋빛 상상을 펼치며 여기까지 왔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는, 고귀한 청금석을 연상시키는 공작의 새파란 눈을 바라보며 글렌 후작은 그야말로 암담한 심정이 되었다.
* * *
“와, 집 한번 더럽게 넓네.”
화장실에서 급한 일을 해결하고 난 자일스는 바로 응접실로 되돌아가지 않고 그 앞의 복도를 서성이며 시간을 죽였다. 테이블에 남아 있던 달콤한 티그레와 버터 쿠키를 더 먹고 싶긴 했지만, 지루한 이야기를 듣는 건 딱 질색이었다. 어차피 이따가 더 달라고 하면 될 테니, 지금 들어가는 것보다는 여기서 최대한 늑장을 피우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나중에 아버지가 잔소리를 할 테지만 뭐 어쩌겠어.’
“이런 건 얼마나 하나…….”
그는 볼일을 본 다음 씻지도 않은 손으로 복도에 장식된 조각과 명화를 마음대로 만지며 구경하고 다녔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유명한 화가의 유화는 복제품이 아닌 진품이었으나, 자일스의 손에 묻어 있던 기름기와 오염이 지문과 함께 고스란히 그 위에 찍혔다.
“어? 너는……!”
한동안 제집처럼 복도를 휘젓고 다니던 자일스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마주친 미라벨라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차를 마시러 가려고 계단을 막 내려오던 참이었다. 성 루베이도 학원에서 지내는 동안 그녀를 한 번이라도 더 괴롭히지 못해 안달하던 동급생 자일스. 오라버니들로부터 부끄러운 신체검사를 받게 한 원인 제공자인 그가 대체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걸까!
“……자, 자일스?”
“어떻게 된 거지? 네가 왜 여기 있어?”
그와 눈이 마주친 미라벨라가 조각상처럼 그 자리에 굳어져 있는 사이, 자일스는 재빨리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험악한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하얗게 질린 미라벨라는,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돌려 달아났다.
‘도망쳐야 돼.’
오랜 시간 익숙하게 새겨진, 아직 선명한 폭력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본능적으로 공포심이 솟아났다. 이젠 여기가 자신의 집이라는 것도, 자일스는 더 이상 제게 손을 댈 수 없으며 자신은 도망칠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당장은 생각나지 않았다.
“야! 너 당장 거기 안 서?”
그녀가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빠르게 오르며 도망치자, 뜻밖의 상황에 맞닥뜨린 자일스는 씨근거리며 쫓아왔다. 결국 미라벨라는 긴 대리석 계단 중간쯤에서 그에게 팔을 붙잡히고 말았다.
“이게 진짜!”
“아흑! 이거 놔!”
“쥐새끼 같은 게 감히 내 앞에서 도망을 가? 너 대체 어디 갔었어?”
자일스는 한 번에 세 칸씩 계단을 뛰어오르느라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식식거렸다. 공교롭게도 그는 미라벨라가 공작가로 떠나 온 바로 다음 날, 부친의 손에 이끌려 가문으로 돌아온 참이었다. 미라벨라를 데려가 제 하녀로 쓰겠다는 그의 말에 아들을 데리러 온 글렌 후작은 별생각 없이 허락해 주었다. 그리고 자일스는 그제야 그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미라벨라라니, 처음 듣는 이름인데 글렌 영식이 뭔가 착각한 게 아닐까요?>
<네?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선생님.>
<그런 학생은 명단에 없답니다, 아버님께서 기다리시니 얼른 가 보는 게 좋겠군요.>
<하지만, 전날에도 분명…….>
자일스는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었다.
성 루베이도 학원의 선생들은 미라벨라라는 학생은 원래부터 없었다며 모두 같은 말을 할 뿐이었다. 여자 기숙사의 입구를 가로막은 사감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일스는 서둘러 교실로 가 보았으나 그녀가 사용하던 책상 역시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식당 앞에서 마주쳤을 때 들고 있던 사과를 던져 등을 맞히었는데, 그 계집애가 하루 만에 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자일스! 거기서 뭘 꾸물대고 있는 게냐!>
<지금 갈게요, 아버지.>
<어서 마차에 타거라.>
그와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은 데뷔탕트 시즌에 앞서 대부분 이미 가문으로 돌아간 뒤였다. 다른 학생들이라도 붙잡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성격이 거칠고 자기중심적인 그는 교우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게다가 때마침 그를 데려가기 위해 방문했던 아버지가 크게 역정을 냈기에 자일스는 하는 수 없이 마차에 올라야만 했다.
“역시 내가 틀렸을 리가 없지! 대체 어떻게 도망친 거야?”
“읏, 아파! 이거 놔, 자일스!”
“이게 어디서 반항이야, 진짜. 야! 가만히 좀 있어 보라고!”
미라벨라가 붙잡힌 팔을 빼내려 힘껏 저항했지만, 그는 결코 그녀를 놓아 줄 생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집으로 돌아온 뒤 괴롭힐 대상이 없어 지루했던 데다 거듭된 아버지의 잔소리에 짜증이 나 있던 차였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잃어버린 장난감을 되찾을 줄이야!
퍽!
“악! 뭐야?”
“내, 내가 놓으라고 했잖아!”
“이, 이 오갈 데 없는 천한 고아 계집 주제에 감히 이 몸을 쳐?”
끌려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미라벨라에게 정강이를 걷어차인 자일스가 사납게 날뛰며 눈을 부라렸다. 내, 내가 자일스를 공격하다니! 제가 해 놓고도 믿기지 않아 미라벨라는 도리어 겁을 먹고 떨기 시작했다. 그가 당장에라도 한 대 칠 것처럼 주먹을 쥐고 위협하자 작은 어깨가 움츠러들며 바짝 굳었다. 게다가 하필 이곳은 사용인들의 출입조차 드문 복도였기에, 하인들조차 지나가지 않았다.
“용케 신분을 숨기고 여기 하녀로 취직했나 보지? 하지만 네 출신을 알면 당장 내쫓길걸? 귀족들은 평판 때문에라도 같은 귀족을 고용인으로 두진 않으니까.”
“읏, 그런 거 아니야! 나, 나는…….”
“이 저택의 집사는 어디 있지? 당장 사실을 밝히고 널 우리 집으로 데려가야겠는데.”
자일스는 가문으로 돌아온 첫날, 재미 삼아 다리를 걸어 하녀장을 넘어뜨렸다가 아버지에게 걸려 호되게 혼이 난 일 때문에 아직도 분하던 차였다. 그 늙은 하녀가 조부 때부터 후작가에서 일해 온 사람이었다나 뭐라나. 이번 기회에 제 전속 하녀를 들인다면 앞으로 무슨 짓을 하건 누구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당장 미라벨라를 데려가 제 전용 하녀로 삼을 생각에 자일스는 무척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너…….”
미라벨라의 팔을 억지로 잡아끌던 자일스의 녹색 눈이 문득 묘한 빛을 띠었다. 주의가 무척 산만한 그는 본래 자신이 관심을 둔 일 이외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편이었다. 한데 둔감한 그가 보기에도 그녀의 모습이 예전과는 달라 보였다. 자일스는 새삼스러워하는 눈으로 미라벨라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뭐야…… 왜 이렇게 예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늘 비 맞은 병아리처럼 볼품없고 초라하다고만 생각했던 그녀는 그사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단기간에 충분한 영양을 공급받아 살짝 통통해진 장밋빛 뺨은 귀여웠고, 새하얀 살결에는 투명한 윤기가 흘렀다. 그뿐인가, 양옆으로 땋아 올린 백금발은 반짝였고, 거기에 러플 장식이 들어간 아이보리색 실내용 드레스까지 차려입으니 마치 시내의 고급 상점에 진열된 도자기 인형처럼 사랑스러웠다.
지금껏 알던 미라벨라는 항상 기숙사에서 남들이 버린 제 체구보다 큰 헌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서 다람쥐처럼 조그맣고 비쩍 말라빠진 계집애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자일스의 탁한 눈동자가 딱 맞는 부드러운 공단으로 휘감겨 있는 미라벨라의 몸을 훑어 내렸다. 한 줌도 되지 않을 것 같은 가느다란 허리와, 노출이 전혀 없는 디자인임에도 둥근 볼륨이 느껴지는 가슴선. 문득 그의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이익, 뭐, 뭐야!’
갑작스러운 제 신체의 반응에 당황하던 자일스는, 가느다란 팔을 세게 붙잡혀 아파하는 작은 얼굴을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다트 과녁 대신으로나 쓰면 제격일 만큼 볼품없는 고아 계집애를 보고 마음이 동했다는 사실은 좀 자존심 상했지만, 어차피 하녀는 주인의 소유 아닌가? 특히 이 계집애는 따로 갈 곳도 없을 테니 제 전용 하녀로 삼아 옆방에 머무르게 하고…….
‘그런데 공작가에서는 하녀한테도 죄다 이런 옷을 입히나?’
막 미라벨라를 끌고 가려던 그는 문득 의구심이 들었다. 여자 옷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자일스가 보기에도 그녀가 입고 있는 원피스는 무척 비싸 보였다. 공작가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글렌 후작가도 여러 대를 이어 온 무역업으로 꽤나 부유한 축에 속했다. 하지만 거미줄처럼 얇은 수제 레이스 장식은 사치 품목으로 분류되는 고가의 수입품이라, 어머니조차도 소매 끝이나 옷깃에만 아주 조금씩 넣는다고 들은 것 같은데…….
아까 응접실에서 서빙해 주던 하녀도 같은 옷차림이었던가? 자일스는 열심히 되짚어 보았지만 무리였다. 하녀가 차를 따라 주는 동안 열심히 쳐다보았던, 스타킹 신은 다리만 자꾸 떠올랐으니까. 본디 인내심 없고 머리 아픈 건 딱 질색인 자일스는 신경질이 나 벌컥 짜증을 냈다.
“아, 알 게 뭐야, 공작가에 돈이 썩어 나나 보지! 야, 일단 따라와!”
“아흑, 어딜 가는 거야, 자일스!”
“닥치고 너 일단 우리 집 마차에 타! 너 하나쯤 없어진다고 무슨 일 나겠어?”
“하읏, 이거 놔!”
“나중에 따로 하인을 보내서 값을 치르든지 하면 되겠지, 뭐.”
가냘픈 비명을 내지르는 미라벨라를 끌고 자일스가 막 복도를 벗어나려던 그때였다.
“지금 내 집에서 뭐 하는 짓이지?”
뒤에서 위압적인 중저음이 들려왔다. 머리 꼭대기부터 강하게 찍어 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엄습했다. 움찔한 자일스가 돌아본 곳에는 라이오넬 공작이 서 있었다. 그리고 공작의 옆에 선 아버지도 눈에 들어왔다. 당장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사람처럼 허옇게 질려 사색이 된 게 뭔가 이상해 보였지만, 본디 남 생각 따윈 하지 않는 자일스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버지? 거기서 뭐 해요?”
“자, 자일스…… 너야말로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게냐.”
“아, 이 계집애를 데려가 제 하녀로 쓰려고요, 아버지. 마침 공작 각하께서 오셨으니 잘됐네요, 하인 편에 돈을 보내려고 했는데.”
“지금 그 애를, 네 하녀로 쓰겠다고?”
공작이 고압적인 시선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자일스도 나름 제국 성인 남성의 평균 키를 가진 당당한 사내였지만, 그의 앞에 서니 마치 성인 남성과 꼬마처럼 보였다. 때문에 자일스는 자존심이 무척 상하는 한편 왠지 흘러가는 분위기가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눈치라곤 없는 그는 곧 그런 생각을 떨치고 제 할 말만을 했다.
“네, 얘를 사려는데 얼마를 드리면 됩니까? 쥐방울만 한 계집애라 별로 비싸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하, 뚫린 입이라고 못 하는 말이 없군.”
공작은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자일스에게 잡혀 있는 미라벨라를 바라보았다. 다친 곳이 없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그의 푸른 눈이 투명한 눈물방울이 맺힌 하늘색 눈동자에 닿았다가, 천천히 이동하여 자일스에 의해 꽉 붙들린 가느다란 손목에 멈추었다.
“……10초 뒤에도 그 팔을 쓰고 싶다면.”
서늘한 음성이 흩어졌다.
“당장 그 더러운 손을 내 동생에게서 떼는 게 좋을 거다, 꼬마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얘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천한 고아 계집애인데…….
자일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을 때였다.
“이 망나니 같은 놈이! 대체 무슨 짓이냐!”
“악! 아버지 미쳤어요?”
“시끄럽다! 당장 놓아 드리지 못하겠느냐?”
글렌 후작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들고 있던 지팡이로 제 아들의 팔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느닷없이 얻어맞은 자일스는 악 소리를 지르며 미라벨라를 잡고 있던 손을 놓치고 말았다. 아버지가 저를 때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그가 제 아비를 향해 눈을 부라리며 대들었다.
“아 왜 때려요? 제가 그때 하녀로 삼겠다고 했던 고아가 바로 이 계집애란 말이에요! 아버지도 분명 허락했으면서…….”
“닥쳐! 철이 없어도 유분수지, 아주 집안을 말아먹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공작 각하, 정말 죄송합니다!”
아들의 입을 틀어막고자 글렌 후작은 그의 뺨을 다급하게 몇 번이나 후려갈겼다. 한편으로는 라이오넬 공작을 향해 연신 고개를 숙이며 거듭 사죄했다. 잘못하면 정말 가문에 큰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얼굴이 벌게진 자일스는 그제야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걸 파악하고 어물거리고 있었다.
“어, 뭐, 뭐야…… 이상한데……? 분명 저 계집애는…….”
“글렌 후작.”
“철없는 제 자식이 감히 라이오넬 공녀님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를!”
“감히 내 집에서, 내 동생을 납치하려 한 게 철이 없다는 말로 무마될 일인가.”
글렌 후작의 머리 위로 냉기가 배어 나올 듯 서늘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곧이어, 자식을 잘못 둔 죄로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숙인 후작에게 차갑고도 정중한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그간의 정을 고려하여 글렌 상회에 지원한 투자금의 회수는 유예해 드리려 하였는데, 역시 계획을 수정해야겠군요.”
“고, 공작 각하! 제발…….”
“전액 반납까지 사흘을 드리지요. 그 안에 원만하게 처리되길 바라겠습니다.”
“그것만은 안 됩니다! 부디 선처를…… 각하!”
“끌어내.”
일련의 소란을 듣고 달려온 가문 소속의 기사들에게 레이든이 간단히 지시했다. 자비를 청할 기회조차 잃고 아들과 함께 밖으로 끌려 나가며 글렌 후작은 예감했다. 몇 대째 이어져 오던 가문의 사업, 후작가의 재정을 든든히 뒷받침해 주던 가업이 그의 대에서 파산을 맞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한동안 소란했던 복도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레이든은 한편에 서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미라벨라에게 잠시 시선을 주었다. 글렌 후작과 그의 아들에게 그런 처분을 내린 건 라이오넬 공작가를 무시한 데 따른 온당한 처사였다. 거기에는 미라벨라에게 그녀가 어엿한 가족의 일원임을 알려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에일레스의 말대로 어느 정도는 부드럽게 대해 줄 필요도 있겠지. 어쨌든 저 애가 우리 뜻대로 움직이도록 만들어야 하니.’
그는 자신이 베푼 호의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고, 반대편으로 몸을 돌렸다.
“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미라벨라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저 무섭고 어렵기만 했던 그가, 폭군 같은 자일스로부터 그녀를 지켜 준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단지 자신의 집에서 소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를 불러 세울 듯 말 듯 머뭇거리며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가도, 그녀는 차마 말을 붙이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서기만을 반복했다.
“……공작님.”
걸음을 멈춘 레이든이 뒤를 돌아보았다. 기다려도 자그마한 목소리가 더 들려오지 않자, 그가 먼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라벨라.”
“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차는 마셨나?”
“아, 아니요.”
그는 고개를 흔드는 미라벨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제 보니 초콜릿 티그레를 잘 먹는 것 같던데. 생각 있으면 함께 가지.”
“어…….”
레이든은 그 말만을 마친 뒤 다시 자신이 온 방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잠시 동안 그 자리에 굳은 듯 서 있던 미라벨라는, 곧 서둘러 그를 뒤따랐다.
“네, 네!”
“복도에서 뛰지 마.”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더 뒤돌아보지 않고 앞장서 걸어갔다. 레이든을 따라 긴 복도를 절반 이상 걸었음 즈음, 미라벨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참, 라이오넬 공작님. 혹시 손수건 하나 못 보셨어요? 흰 천에 데이지꽃 자수가 있는 건데요, 실은 어제 마차에서…….”
“보지 못했다.”
“아…….”
“물건을 잃어버렸나? 필요하면 새것을 사 주지.”
“네, 그런데 그게 제가 직접 만든 거라서…….”
“차가 식겠군. 빨리 안 올 건가?”
“아, 아니요! 가요!”
보드라운 양가죽 실내화를 신은 작은 발이 다시 바삐 움직였다. 고아한 청금석 같은 레이든의 눈동자는 평소와 같이 무감한 빛을 띠고 있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의 큰 보폭을 따라잡으려 종종거리는 미라벨라의 가슴속에는 홍차에 스며든 크림처럼 포근하고 부드러운 감정이 아주 천천히, 사르르 번져 갔다.
* * *
정원의 푸르른 잔디 위로 반짝이는 햇살이 바야흐로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장마가 시작되기 전이라 대기는 아직 상쾌했고, 저녁이면 불어오는 바람은 계절의 정기를 품어 더없이 싱그러웠다. 어느덧 공작가에서의 생활이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미라벨라는 오전 내내 여름 더위에 시들해진 정원의 꽃들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서 때로는 체벌도 필요하지. 내 수업 시간에는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레이든으로부터 본격적인 가르침을 받게 되면서, 그녀는 하루하루 자신감을 잃어 가고 있었다. 아직까지 체벌을 한 적은 없었으나 엄격한 큰오라버니는 기초가 없는 그녀를 혹독하게 가르쳤다. 두 번 이상 설명해 준 것을 대답하지 못하거나 머뭇거리면 반드시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덕분에 부족했던 학업 성취도는 단기간에 눈부시게 향상되었으나, 공부 외에도 애티튜드의 문제로 몇 번이나 혼이 났기 때문에 미라벨라는 완전히 주눅이 들고 말았다.
아, 여기서 말하고 있는 ‘교육’이란 정치, 역사, 경제나 예법, 화술과 같은 일반적인 교과목들이므로 문제의 그 음란한 교육은 아직 포함되지 않고 있었다.
<미라벨라, 초야에 관한 교육은 모든 귀족가의 영애들이 다 받는 것이다. 네게만 특별한 일이 아니야.>
당연히,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물론 결혼 전에 성교육이야 하겠지만, 이런 미친 방식으로 딸이나 여동생을 가르치는 집안이 세상 천지에 존재할 리가.
미라벨라의 반응도 예상대로였다.
<네?! 그런 건 마, 말도 안 돼요!>
<에펠 공국인들의 결혼 풍속에 관해서는 들었겠지? 황제 폐하께서는 이 국혼이 차질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사전에 너를 ‘완벽하게’ 교육할 것을 당부하셨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어, 어떻게, 오라버니들과 그런 일을…….>
<이건 일반적인 혼사가 아니니까. 제국의 미래와 관련된 중요한 사안인 만큼, 애초에 폐하께서는 네게 그 일을 가르칠 교육 담당을 친히 보내 주겠다고 말씀하셨어.>
<네, 네?!>
<하지만 내가 고사했다. 하나뿐인 내 여동생의 성교육을 지골로 따위에게 맡길 수는 없으니까.>
<아…….>
<너도 모르는 사내보다는 우리에게 배우는 편이 낫지 않겠나.>
레이든은 비즈니스 회의에 임할 때처럼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침착하게 그녀를 설득했다. 바로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일레스와 르시엘이 약간 질렸다는 얼굴을 했다. 무심결에 서로 눈이 마주친 그들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레이든, 사업을 할 게 아니라 사기를 쳤어도 성공했겠는데.
<이건 우리 가문의 입장에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야. 너도 이제 한 가족이자 공작가의 일원이 되었으니, 집안 사정을 어느 정도는 헤아려 주길 바란다.>
<그, 그렇지만, 공작님…….>
<배우는 과정에서 필수 불가결한 신체 접촉이 따르겠지만, 단지 물리적인 행위일 뿐이다. 서로 마음이 없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 단순한 몸의 반응에 불과하지. 그러니 오라비와 살을 섞는 일이 부끄럽다 여기거나 죄책감을 느낄 것도 없어. 우리에게 있어서도 네게 다른 과목을 공부시키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일이니 마음 쓰지 마라.>
<…….>
<그리고, 중앙 대륙의 역사를 살펴보면 과거에도 여러 제국에서 손위 형제와의 경험을 통해 초야를 교육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러니 우리가 하려는 일이 썩 도리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말하며 그가 보여 준 역사서는 오래된 외국어로 쓰여 있었던 데다가, 번역본이 아닌 원서였다. 미라벨라는 당연히 읽지 못했지만, 어떤 것이든 명문화된 문서는 단지 구두로 설득하는 것보다 큰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법.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레이든의 말이니 미라벨라는 더 의심하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또 반드시 하룻밤 안에 후계자를 사로잡을 수 있도록 철저히 교육하라 황제가 명령했다는 말은 좋은 방패가 되어 주었다. 결국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지만, 작은 얼굴은 큰 충격을 받아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미라벨라, ‘그 교육’에 관해서는 네가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지. 무리해서 괜한 트라우마가 생긴다면 오히려 곤란해질 테니.>
레이든은 결국, 그녀가 받을 충격을 우려하여 그 일에 관해서만큼은 최대한 오랜 기간 유예를 두겠다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아직 너무 어려.’
에펠 공국 후계자의 방문까지는 그래도 꽤 시간이 있었다. 어차피 그것 말고도 가르쳐야 할 게 수두룩하니,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는 없을 터였다.
‘스스로 마음을 열지 않는 한 억지로 해 봐야 역효과만 날 뿐이다. 강제하는 건 내키지 않기도 하고.’
덕분에 그간 미라벨라가 받은 수업은 기존 ‘라이오넬 공작가의 가정 교육 지침서’에 의거한 평범한 과목들로만 구성되었다.
‘지금쯤 분명 날 받아들인 걸 후회하고 계실 거야.’
사실 기초가 형편없던 것과 짧은 학습 기간을 감안하면 미라벨라는 크나큰 발전을 보이는 편이었다. 그녀는 성실한 학생으로서 진도를 잘 따라와 주었고 생각보다 이해력도 높았다. 초기에 거의 제로에 수렴했던 레이든의 기대치를 훨씬 웃도는 성과였다. 하지만 역시 가장 큰 문제는 낮은 자존감과 소극적인 태도였다.
“휴…….”
미라벨라는 혼자 점심을 먹은 뒤 가주의 집무실에서 레이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앞에 놓인 건 오늘 제출해야 하지만 반의반도 채 마치지 못한 과제물. 어젯밤 이런저런 생각들로 심란했던 나머지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레이든이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끝마쳐야 했지만 오늘따라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하녀가 되는 쪽이 마음 편하지 않을까?’
공작가의 하녀는 그녀가 앉아 있는 테이블 근처를 오가며 청소 중이었다. 하녀의 손에 들린 빗자루와 먼지떨이를 보며, 미라벨라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쪽이 자신에게 훨씬 더 어울릴 것 같다고.
언젠가 받아야 할 ‘그 교육’에 관한 두려움은 때때로 작은 가슴을 짓눌렀다. 물론 당면한 다른 과목들도 버겁기는 마찬가지였고……. 어제만 해도 그랬다. 자신은 분명 연표를 완벽하게 암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수업 시간에 레이든이 묻자 머릿속이 새하얘져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난 건 당연지사였다.
‘날 동생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거야. 난 이런 것 하나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바보인 걸……. 공작님께서도 이젠 내가 대공비가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걸 아셨을 테니까…….’
막 정리 정돈을 마치고 책장의 먼지를 닦기 시작한 하녀는 무척 분주해 보였다. 언뜻 들으니 집안에 일이 생겨 갑작스럽게 휴가를 요청한 다른 하녀의 대직까지 하느라 무척 바쁘다는 것 같았다. 미라벨라는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저기, 있잖아. 많이 바쁜 것 같은데 혹시 내가 좀 도와줘도 괜찮을까?”
“네? 아가씨께서요?”
뜻밖의 말에 하녀가 놀란 얼굴로 손사래를 쳤다.
“그건 안 돼요! 아가씨께서 어떻게……. 그리고 이건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내가 해도 괜찮은데…….”
하지만 하녀는 한사코 거절하다 잠시 후 잊고 있었던 일이 떠오른 듯 허둥거렸다.
“아! 내 정신 좀 봐! 빨래를 찾아왔어야 했는데……. 아가씨, 저 아래층에 잠시 다녀와도 될까요?”
“응, 천천히 다녀와.”
밖으로 나간 하녀가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발소리가 멀어지자, 미라벨라는 그녀가 바닥에 내려놓은 청소 도구를 집어 들었다.
평소 집무실의 청결 상태나 빈틈없이 완벽한 차림을 고수하는 성정으로 미루어 봤을 때, 레이든은 꽤나 까다로운 편일 듯했다. 며칠 전 수업 시간에 간식으로 나온 케이크를 먹던 미라벨라가 실수로 크림을 흘렸을 때도, 그는 뭐라 말을 하진 않았지만 미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그리고 옆에서 직접 티슈를 뽑아 건네주며 말했다.
<닦아.>
그런 뒤 풀이 죽은 그녀가 혼날까 봐 눈치를 보며 제 입가와 앞가슴의 리본에 묻은 하얀 크림을 닦아 내는 동안, 그는 굳은 얼굴로 잠시 지켜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미라벨라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그의 책상이 아닌 제 가슴에 크림을 떨어뜨린 게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하녀에게 듣기로 그는 평소 혼자 업무를 볼 때 커피 외에 다른 걸 요청하는 일이 결코 없다고 했는데, 최근 레이든은 수업할 때마다 늘 간식을 들이도록 지시했다. 미라벨라는 그가 갑자기 단 것을 찾는 이유가 기초도 없는 자신을 공부시키는 게 힘들어서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늘 열심히 먹는 쪽은 미라벨라뿐이었고, 정작 그는 딸기 타르트나 쿠키 같은 맛있는 간식에 손도 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성 루베이도 학원의 넓은 복도와 기숙사를 매일같이 쓸고 닦던 터라 미라벨라는 청소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바쁜 하녀를 도와주기도 할 겸 대신 청소해 놓고, 레이든이 오면 공작저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부탁해 볼 생각이었다.
“저길 닦으려면 밑으로 들어가야겠네…….”
서재와 응접실이 함께 연결된 넓은 집무실의 청소를 마친 미라벨라는, 한숨을 돌리며 빠진 곳이 없는지 점검했다. 레이든이 평소 서류를 결재하는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아래, 가장 안쪽 구석의 바닥에 거슬리는 얼룩 하나가 보였다. 시계를 보니 그가 돌아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있었다.
‘신발이 더러워질지도 모르니까 벗어 둬야지.’
귀족 영애다운 행동은 아니었으나, 미라벨라는 진주 장식이 달린 부드러운 양가죽 실내화를 레이든의 책상 옆에 가지런히 벗어 놓았다. 아침에 로지나가 가져다준 예쁜 슈즈를 더럽히고 싶지 않기도 했던 데다가 어차피 집무실 안에는 저 혼자뿐이었으니까. 그녀는 작은 발에 레이스 양말 하나만 신은 채로 낑낑거리며 레이든의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 * *
외부 일정 중 하나가 취소되어 당초 예상보다 일찍 공작저로 돌아온 레이든은 황당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막 집무실로 돌아와 재킷을 벗어 둔 뒤 그는 집무실 안을 휘둘러보았다. 지금쯤 얌전히 앉아 예습을 하고 있어야 할 미라벨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먼저 와 기다리라고 했는데, 잊은 모양이군.’
아니면 어딜 잠깐 나간 건가.
레이든은 손님용 테이블 위에 놓인 미라벨라의 노트와 분홍색 필통에 시선을 주었다. 바로 옆에 자신이 내 준 과제물이 거의 백지에 가까운 상태로 놓여 있는 것을 보고 그가 헛웃음을 쳤다.
‘요즘 잘 따라와 준다 싶더니…….’
나중에 약속을 어긴 벌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오전에 보던 서류를 마저 처리하기 위해 책상에 앉으려 했다. 그런데 발밑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게 아닌가. 레이든이 아래를 내려다보니, 조그만 토끼 한 마리가 책상 밑에 기어 들어가 끙끙대고 있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미라벨라는 바닥에 엎드린 채 어딘가에 몰두하느라 그가 온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레이든은 어이없다는 듯이 그녀의 뒷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높은 포니테일로 묶은 연한 백금발의 머리카락은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작은 등 위에서 살랑거렸다. 올라간 치맛자락 아래로 삐죽 나온 새하얀 종아리와 엎드린 자세 탓에 위로 뜬 동그란 엉덩이, 발목까지 오는 얇은 실크 소재 양말로 감싸인 작은 발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미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는 곧 그런 기분을 떨치고, 주저 없이 팔을 뻗어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화들짝 놀란 미라벨라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앗!”
“너,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공작님! 그, 그게, 청소를 하려고……. 바닥에 뭐가 묻어 있어서요.”
“그러니까 그걸 왜 네가 하느냐고. 너는 분명 이 시간에 나와 약속한 다른 할 일이 있었을 텐데.”
“읏…….”
“미라벨라, 내가 전날 지시했던 과제와 예습은 다 마친 건가.”
“그, 그건…….”
“분명 오늘 3시까지 해서 내 책상에 올려 두라고 말하지 않았나?”
차가운 시선이 제게 닿자 단박에 겁을 집어먹은 미라벨라는, 그와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변명했다.
“그, 그게, 정말 하려고 했는데…….”
“하려고 했는데 뭐.”
“어제 깜빡 잠이 들어서…… 오, 오늘 진짜 하려고 했어요!”
“그래? 그럼 제대로 했는지 지금 확인하기로 할까.”
미라벨라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가 내민 커다란 손을 바라보았다.
“그게, 생각보다 오래 걸리고, 해석이 너무 어려워서…….”
“그건 지금 네 레벨에서도 하루 안에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수준의 숙제였어. 네가 쓸데없는 생각이나 행동으로 시간을 허비하지만 않았다면.”
“그, 그렇지만, 저는 시간을 좀 더 달라고 말씀드릴 생각이었어요…….”
“시간을 더 달라. 언제까지.”
“저어, 열흘이나, 아니면, 일주일만이라도요…….”
“하.”
레이든은 기가 차다는 듯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지금 나와 장난을 치고 싶은 건가?”
낮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서며 레이든이 툭 던지듯이 말했다.
“왜, 차라리 에펠 공국에 간 뒤에 해서 전보로 부치겠다고 하지.”
미라벨라는 또다시 입을 꾹 다물고 어깨를 움츠리며 그의 시선에서 달아나려 들었다. 레이든은 그런 답답하고 회피적인 태도가 평소에도 몹시 마음에 들지 않은 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꺼낸 다음 말은 그를 정말로 화나게 만들었다.
“저어, 실은, 공작저의 하녀가 되려고…….”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넌 내 동생이자 라이오넬 공녀인데, 어떻게 이곳의 하녀가 되나.”
“고, 공작님, 그게요…….”
“고개 들어. 내 눈을 보고 제대로 말해, 미라벨라.”
“실은…… 저 공녀를 그만두려고 해요.”
“……뭐?”
그녀의 말에 레이든은 어이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라이오넬 공녀를 그만두겠다는 건, 내 동생 노릇도 그만하겠다는 뜻인가?”
“네, 맞아요…….”
“하.”
그는 기가 차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정말 죄송해요, 전 그냥 이곳에서 하녀로 일하게 해 주시면…….”
“아니, 내 집에서는 너처럼 말을 못 알아듣는 아이는 채용하지 않아.”
“하, 하지만…….”
“그래. 가족이라는 게 하고 싶으면 하고, 싫증이 나면 또 네 마음대로 안 할 수 있는 건가?”
레이든은 진심으로 화가 치밀었다. 대체 이 소심하고 섬약한 소녀가 왜 이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답답했다. 이미 황제에게 보고가 끝난 일이라 무를 수도 없다지만, 설령 가능하다 한들 제 미래에 어느 쪽이 더 나은 일인지 이렇게 판단이 안 되는 걸까.
“미라벨라, 네가 누구인지 몰라?”
“저, 그게…….”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했어.”
“……저, 저는 이제 라이오넬 공녀이고 한 가족이니,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도록 두지 말고, 어, 언제 어디서든 라이오넬의 이름에 걸맞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고요.”
미라벨라는 위압감이 서린 눈빛에 압도되어 바들바들 떨며 그의 가르침을 읊었다. 그 모습을 응시하며 레이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 애가 에펠 공국에 가 대공비가 된다 한들 잘 지낼 수 있을까.’
제국 내에서 손꼽히는 유능한 사업가다운 안목을 지닌 그는 사람에 대한 판단이 꽤 빠른 편이었다.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미라벨라가 어떤 타입인지는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다. 따뜻한 마음씨와 다정하고 착한 성품은 이 애의 가장 큰 자산이지만, 반대로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황제의 명을 이행하고 이 혼약을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것과 별개로, 그는 미라벨라가 괜찮은 인생을 살기를 바랐다.
그녀가 앞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할 곳은 르페르트 제국이 아니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타국이었다. 그렇다 해도 제국의 황가 다음 가는 공작 가문의 딸이라면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테지만, 이처럼 그녀 스스로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눈치 빠른 귀족들에게 휘둘리는 것은 물론, 시중드는 이들에게조차 무시당할지도 모른다. 얼마 전 에일레스에게 그녀를 완전히 남이라고 딱 잘라 말했던 것과 달리, 어느 순간 레이든은 지극히 오라비다운 걱정을 하고 있었다.
“신발 제대로 신고 이리 나와.”
차라리 정신이 번쩍 들도록 단단히 혼을 내어, 버릇을 잡아 주는 편이 이 아이에게도 낫겠지.
“너, 다시 한번 더 이런 짓을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분명 경고했던 것 같은데.”
미라벨라를 책상 아래에서 끌어낸 그가 낮은 음성으로 경고하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막 외출에서 돌아온 레이든은 오늘도 역시 흠잡을 데 없는 슈트 차림이었다. 차가운 조각처럼 완벽한 그 모습은 이미 겁을 집어먹은 그녀의 가슴을 내려앉게 만들었다.
“지금 내 말을 무시하는 건가?”
“고, 공작님, 그런 게 아니고…….”
“말 더듬지 마. 그 나쁜 습관을 고치라고도 여러 번 말하지 않았나.”
“죄, 죄송…….”
그의 푸른 눈동자에 짙은 화가 깃든 것을 감지한 미라벨라가, 쏘아보는 듯한 시선을 피하며 또다시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심장이 덜컥 소리를 내며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몇 번을 이야기해도 도통 듣지를 않는다는 건…….”
레이든은 천천히 긴 다리를 움직여, 떨고 있는 미라벨라를 그대로 지나쳐 갔다. 침착하고 낮은 중저음이 툭 던지듯 미라벨라의 곁을 스치며,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포니테일을 흔들어 놓았다.
“꼭 매를 들어야만 알아듣는 타입인가?”
잠시 집무실 내부를 둘러보며 시선을 준 뒤 그는 가계도가 걸려 있는 벽 쪽으로 걸어갔다. 선대에서 수여받은 각종 훈장들이 진열된 대형 크리스털 장식장. 그 안에서 그가 꺼내 든 것은 초대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물건으로, 빛나는 은나무 가지였다. 유서 깊은 공작가의 세를 보여 주는 그 고귀한 하사품은, 대대로 공작의 집무실에 장식되어 긴 세월 속에서도 변치 않는 반짝임을 뽐내고 있었다.
“이쪽으로 서.”
그것을 들고 다시 몸을 돌려 천천히 다가온 그가 자신의 집무용 책상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레이든이 고급스러운 맞춤 셔츠의 커프스 버튼을 풀고 소매를 반쯤 걷어 올리자 핏줄 선 단단한 팔뚝이 드러났다. 굵직한 힘줄과 손목뼈가 도드라진 팔, 그 아래에 자리한 커다란 손. 겁을 먹고 동그래진 하늘색 눈동자가 느릿한 동작을 따라 정처 없이 흔들렸다.
“저어, 라이오넬 공작님…….”
턱을 치켜들고 그녀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레이든의 눈빛은 서늘한 냉기를 품고 있었다. 초콜릿 티그레를 먹으러 오라고 말해 주었던 며칠 전과는 완전히 달랐다. 질식할 것만 같은 위압감에 납작하게 짓눌린 미라벨라가 그만 입을 다물었다. 자그마한 손가락이 갈 곳을 잃고 애꿎은 치맛자락만 만지작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그 꼴을 본 레이든이 다시 눈을 치켜뜨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길 잡아.”
미라벨라는 고풍스러운 마호가니 책상의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레이든이 가리킨 곳은 그녀가 선 가장자리에서 세 뼘쯤 떨어진, 황금으로 조각된 페이퍼웨이트 문진이 놓인 지점이었다. 왜 이런 지시를 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시키는 대로 했다.
미라벨라가 책상 위 중앙에 손을 짚기 위해 팔을 뻗자, 자연스럽게 허리가 굽혀지며 엉덩이를 내밀고 선 자세가 되었다. 등 뒤로 다가온 그가 발을 좀 더 뒤쪽으로 가져오게 하고, 양다리의 간격을 더 벌리도록 하여 자세를 고쳐 주었다.
“좋아, 그대로 있도록.”
“저어…….”
아직 영문을 모르는 미라벨라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려던 순간. 발목 위까지 오는 치맛자락이 커다란 손에 잡히는가 싶더니, 뒤에서부터 가차 없이 휙 걷어 올려졌다.
“……읏, 공작님!”
허리 아래가 순식간에 서늘해지는 감각에 화들짝 놀란 미라벨라는 자그마한 비명과 함께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레이든의 무감한 시선은 냉랭하게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일어서, 미라벨라.”
“흐읍, 라이오넬 공작님, 하지만…….”
“항상 두 번씩 말해 줘야 하나?”
“아, 아니요.”
거스를 수 없는 권위적인 어조에는 분명한 위계가 새겨져 있었다. 미라벨라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일어나 그의 책상을 짚고 뒤돌아섰다.
“네 손으로 치마 잡아.”
“읏…….”
허리 위로 걷어 올려진 치맛자락이 작은 손에 쥐여졌다. 실내에 머무르고 있었고 최근 날씨가 부쩍 더워진 탓에 미라벨라는 스타킹을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때문에 그녀를 감싸고 있는 것은 끝부분에 레이스 장식을 단 짤막한 여성용 속바지와 그 안쪽의 얇은 속옷이 전부였다. 레이든은 그 두 가지를 한꺼번에 잡아 주저 없이 아래로 끌어 내렸다.
“흐읏, 공작님……!”
희고 동그란 엉덩이가 맨살 그대로 고스란히 드러나자, 그 위로 서늘한 수치심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레이든은 미라벨라가 부끄러워할 여유조차 주지 않았다.
휙.
철썩! 그의 손에 들린 날렵한 은나무 가지 회초리가 매섭게 공기를 가르자, 그와 동시에 새하얀 둔부에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부드러운 살이 그대로 찢어지는 것 같은 아픔에 미라벨라가 비명을 지르며 팔짝 뛰었다.
“아흑! 흐으…….”
“자세 바로 해.”
뒤이어 맞은 자리에서 따끔따끔한 열감이 피어올랐다. 읏…… 미라벨라는 차마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연약한 신음을 흘렸지만 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냉정하게 명령했다. 그녀가 서럽게 훌쩍거리며 처음과 같은 자세로 돌아오자, 레이든은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한번 회초리를 내리쳤다.
아흑!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아픔에 미라벨라는 또다시 제자리에서 깡충거렸다. 작은 입술 사이로 흐르는 가냘픈 비명에 약간의 울먹임이 섞였다.
“흐윽, 공작님, 너무 아파요! 흑.”
“네가 뭘 잘못했는지 깨닫게 되면 이야기하도록.”
“읏, 으읍!”
이제 겨우 두 대를 맞았을 뿐이었지만 둔부 전체에 홧홧한 통증이 가득했다. 미라벨라는 어떻게든 아픈 곳을 감싸려 본능적으로 팔을 뻗었지만, 가느다란 손목을 그대로 붙잡힌 채 또다시 가차 없이 매를 맞아야 했다.
“……아흑!”
“미라벨라, 똑바로 서.”
“흐읍, 하지만, 너, 너무 아파서, 흑…….”
“이대로 복도에 나가 다들 보는 앞에서 혼나려거든 마음대로 하고.”
“흣, 아니요, 아니요! 앗.”
그 다음부터는 몇 대를 맞았는지 셀 수도 없었다. 레이든이 다섯 번째로 회초리를 들어 올렸을 때, 미라벨라는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여린 맨살을 무섭게 내려치는 단호하고 엄격한 손길에 숨도 못 쉬고 눈물이 펑펑 솟았다. 탄력 있고 날렵한 은나무 가지 회초리는 부드러운 피부에 쉽게 상처를 냈다. 희고 동그란 엉덩이는 금세 퉁퉁 부어올랐고, 연약한 둔부에 가로로 그어진 붉은 매 자국에는 작은 핏방울마저 맺혀 있었다.
“흐윽, 잘못했어요! 흑, 제발 용서해 주세요, 공작님!”
모진 체벌이 스무 대를 훌쩍 넘겼을 즈음, 미라벨라는 소리 내어 울며 그에게 무작정 빌었다. 치마를 걷고 속옷은 무릎 위까지 내려진 부끄러운 모습으로 조용한 집무실 안에서 어린애처럼 엉덩이를 맞고 있다는 수치심도 너무 아파서 날아가 버렸다. 눈물로 온통 엉망이 된 여동생의 작은 얼굴에 오라버니의 무감한 시선이 내려앉았다.
“난 네가 뭘 잘못했는지를 말하라고 했어.”
“읏…… 하, 하녀가 되겠다고 한 거랑, 흑, 숙제를 하지 않은 거요…….”
“또.”
“흑, 공작님과 한 야, 약속을 지키지 않고, 흐윽.”
“울지 말고 똑바로 말해, 미라벨라.”
“흐읍, 말을 더듬고, 끝을 흐리면서 말한 것도요…….”
“하나 더 있어.”
미라벨라는 아픔을 감내하며 필사적으로 생각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또 무슨 잘못을 했는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상처 입은 둔부의 여린 살결은 점점 더 화끈거렸고, 매끄러운 두 볼과 턱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후.”
레이든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제 손에 들린 은나무 가지를 내려다보았다. 그건 무려 초대 황제가 내린 하사품이었다. 그 귀한 물건을 어린 누이동생을 훈육하는 회초리로 쓰다니.
‘……하지만 집안의 가보를 부러트리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겠지.’
그는 마호가니 책상 위에 천천히 회초리를 내려놓은 다음 긴 소파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미라벨라, 이리로 와.”
“…….”
가엾은 미라벨라는 흘러내린 눈물을 닦지도, 엉덩이 아래로 내려진 속옷을 차마 끌어 올리지도 못한 채로 그를 향해 주춤주춤 다가갔다. 온통 겁먹은 기색이 역력한, 눈물 가득한 얼굴. 물기로 촉촉이 젖은 그 얼굴은 레이든에게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안아 주고 싶도록 애처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울리고도 싶은, 마음속 깊숙이 자리한 어둡고 가학적인 본능, 심연처럼 새카만 욕망을.
“이 위로 엎드려.”
소파에 착석한 레이든이 자신의 무릎 위를 눈짓했다. 미라벨라는 자그마한 신음을 삼키며 소파 위로 기어 올라갔다. 움직일 때마다 맞은 자리가 무척 쓰라렸고, 불이 붙은 듯 뜨거운 작열감이 느껴졌다. 최소한 며칠은 의자에 앉기 힘들 게 분명했다. 회초리 자국으로 가득한 작은 엉덩이를 고스란히 내놓은 채 훌쩍이며 엎드린 여동생에게, 레이든이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미라벨라, 아직도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나?”
“흐윽, 모, 모르겠어요…….”
“그러면 알 때까지 혼이 나는 수밖에.”
“……아얏, 아!”
철썩, 레이든은 그대로 손을 들어 떨고 있는 어린 여동생의 둔부를 가차 없이 후려쳤다. 맨살이 마찰하는 날카로운 효과음과 함께, 이미 새빨개진 가엾은 엉덩이가 호되게 얻어맞아 바르르 떨렸다.
“공작님, 흐윽! 아, 흐으…….”
부드러운 살결이 이미 찢기고 터진 자리를, 크고 단단한 손바닥이 내려치자 회초리로 맞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아팠다. 단 한 대만으로도 엉덩이가 떨어져 나가는 듯 욱신거리고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터져 나왔다. 미라벨라는 그의 무릎에 엎드린 채 창피한 것도 잊고 아픔으로 바둥거리며 울먹였다.
“나는 분명 너를 내 동생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잘못했어요, 공작님, 흐윽!”
“한데 넌, 지금껏 나를 가족이라 생각하긴 한 건가?”
“아얏! 제발 그만요, 흑…….”
짝, 온통 붉은 자국으로 가득한 엉덩이 위로 그가 또다시 손을 들어 매를 때렸다. 그녀가 엉엉 울며 작은 몸을 들썩였지만, 레이든은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누른 채 발가벗은 양쪽 엉덩이를 번갈아 내리칠 뿐이었다. 그는 정말로 미라벨라가 스스로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흑, 몰라요, 저 정말 모르겠어요! 공작님…… 으흑.”
이미 한계를 넘어선 아픔에 미라벨라는 눈물을 쏟아 내며 두 다리를 바둥거렸다. 주름 하나 없이 완벽했던 레이든의 맞춤 슈트가 그 바람에 엉망으로 구겨졌다. 정말, 이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는 조금도 봐주지 않고 한 번 더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바로 그 순간.
“흐윽…… 레이든, 오라버니!”
미라벨라의 작은 입술 사이로 가냘픈 비명과 함께 울음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오라버니, 죄송해요……!”
그 순간, 무섭게 내려칠 것처럼 높이 올라갔던 그의 커다란 손이 거짓말처럼 공중에서 딱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아래로 내려졌다.
“그래.”
“읏, 흐읍, 아…….”
“잘했어, 미라벨라.”
평소와 다름없는 차분한 중저음이 묘하게 부드럽게 들렸다. 미라벨라의 둔부를 다 덮을 만큼 큰 손바닥이, 열이 올라 화끈거리는 엉덩이 위로 느릿하게 내려앉았다. 가엾을 정도로 퉁퉁 부은 여린 살갗을, 그가 잠시 동안 달래듯이 쓰다듬어 주었다.
“흡, 흐윽.”
그의 무릎 위에서 한참을 소리 내어 울며 미라벨라는 비로소 자신의 진짜 잘못을 깨달았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이제 알겠나?”
“흐읍, 네, 오라버니, 아, 흑…….”
“울지 마.”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미라벨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울지 말라는 소리를 들으면 어째서 더 많이 울게 되는 걸까. 그가 이니셜이 새겨진 미색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아 주자, 그 무심한 손길에 미라벨라는 호되게 매를 맞을 때보다도 더 눈물이 났다. 흰 백사장에 갑작스러운 파도가 들이닥치듯 서러움이 밀려왔다. 작은 가슴속에 가득 차오른 눈물이 아무리 참으려 해도 자꾸만 터져 나왔다.
“그만 눈물 그쳐. 뭘 잘했다고 울지?”
“오라버니, 잘못했어요, 흐읍, 제가 정말 잘못했어요…….”
진심으로 잘못을 비는 말에 온기를 품은 커다란 손이 머리 위를 아주 잠깐 스쳐 지나갔다. 미라벨라는 그만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울어 버렸다. 무릎 바로 위까지 내려져 있는 미라벨라의 속옷을, 레이든이 조용히 끌어 올려 다시 입혀 주었다.
“너를 내 동생이라 생각하니 때린 거다.”
속옷을 올려 주는 그의 셔츠 소매 깃에서 매니시한 우디 계열의 오 드 콜로뉴 향이 느껴졌다. 특유의 울림을 지닌 차분한 중저음이 엎드려 있는 그녀의 위로 내려앉았다.
“그렇지 않았으면 이렇게 혼내지도 않아.”
“아, 흑, 레이든 오라버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의 큰 손에 맞은 엉덩이는 여전히 화끈거리며 아팠고, 레이든은 다정한 말로 위로해 주지도, 에일레스처럼 품에 꼭 안아 어르며 달래 주지도 않았다.
하지만 크고 단단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와 있는 듯한 안온한 기분에 무던히 안심이 되어 미라벨라는 이날 무척 많이 울었다. 그녀의 절대적인 보호자가 된 엄격한 큰오라버니로부터 미라벨라가 처음으로 받은 체벌이자 훈육이었다.
『라이오넬 공작가의 가정 교육 지침서』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