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Ⅱ. 가족이 될 수 있을까요? (3/17)

Ⅱ. 가족이 될 수 있을까요?

미라벨라는 봄 가뭄 뒤의 정원의 꽃들처럼 온종일 축 처져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첫날 아침 식사를 함께한 이후, 두 오라버니와는 한두 번 잠깐 얼굴을 본 게 고작이었다. 잘은 몰랐지만 두 사람 다 각자의 일과로 늘 무척 바쁜 것 같았다. 앞으로의 거취나 어떻게 하라는 말도 아직 듣지 못했기에 그녀는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서 혼자 보냈다.

“휴우…….”

자그마한 입술 사이로 흐르는 한숨이 깊고 길었다.

이제 막 초여름으로 향하는 중인 날씨는 무척 맑았고,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란 하늘 역시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창틀 위에 두 팔을 얹어 뺨을 기대고 있는 미라벨라의 마음은 정반대로 무겁기만 했다.

이곳에 온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모든 게 낯설던 때에, 아침 식사 자리에서 있었던 일은 그녀에게 큰 상처를 주기 충분했다. 지금껏 누구에게도 보인 적 없는 신체의 민감한 부분을 아직 어렵기만 한 두 오라버니들 앞에 전부 내보인 채 서 있었던 순간……. 그게 며칠이 지나도록 계속 떠올라 괴로웠다. 가족들에게 먼저 다가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도 컸지만, 그날 일만 생각하면 부드러운 옷감으로 만든 실내용 드레스로 감싸고 있는 작은 몸이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아가씨, 정원 산책이라도 다녀오시는 건 어떠세요?”

종일 울적해 보이는 그녀에게 로지나가 조심스럽게 권유했다.

“……산책?”

“네. 조각 분수가 있는 공작저의 장미 정원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데요. 유리 온실도 있고요! 조금 걷고 나면 기분도 좋아지실 거예요.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하지만 로지나는 곧 은행에 가야 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오후에 휴가도 냈다고…….”

편하게 말을 낮춰 달라 했지만 아직 그러긴 어려웠던 미라벨라가 반문했다. 로지나의 어머니는 오랜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라 했다. 정기적으로 병원비를 송금하는 날이 마침 오늘이어서 오후에 자리를 비운다는 말도 아침에 전해 들었고. 그녀의 말에 로지나가 미소 지었다.

“괜찮습니다. 누구든 외부로 심부름을 나가는 사람을 찾아 부탁하면 될 것 같아요.”

“하지만 너무 미안해서……. 저, 아니면 혼자 산책을 나가도 될까요?”

“혼자 가신다고요? 아가씨만 괜찮으시다면 안 될 건 없지만…….”

“그러면 오늘은 저 혼자서 가 볼게요!”

잠시 후, 용기를 내어 방을 나선 미라벨라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로지나가 설명해 준 대로 정원 쪽으로 향했다. 첫날 마차에서 내려 저택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잠깐 보긴 했지만, 아직 해가 떠 있는 적막한 오후의 풍경은 또 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쪽으로 펼쳐진 공작가의 정원에는 이 계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꽃과 잘 관리된 흔적이 역력한 고급스러운 관목이 즐비했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실린 은은한 시클라멘 향기가 코끝을 톡톡 두드렸다.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일까, 미라벨라는 한가로운 정원을 혼자 걷다 보니 점차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족이잖아, 다정한 게 당연하지. 너는 내 동생이니까.>

‘에일레스 오라버니…….’

그를 떠올리자 문득, 가슴속 깊은 어딘가를 부드러운 깃털로 간질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라벨라의 작은 얼굴이 곧 사과처럼 발그레해졌다.

가족.

대부분의 사람은 세상에 태어남과 동시에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것이었지만, 미라벨라에게는 길지 않은 인생의 전반에 걸쳐 간절히 바라 온 존재였다.

‘내게도 이제 가족이 생겼어.’

가슴속에서 따뜻한 솜사탕이 부풀어 올랐다. 내 여동생, 가족, 오라버니. 특별할 것 없는 그 평범하고도 짧은 단어들이 언제나 외로웠던 미라벨라의 작은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들었다.

석조 분수의 하얀 포말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새하얗고 반듯한 돌로 이루어진 산책로를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휘익.

분명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돌연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다음 순간, 묵직하고 긴 칼이 가느다란 목 위에 닿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미라벨라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깊은 늪지대의 동굴에서 울리는 것처럼 낮게 가라앉은 굵은 음성이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누구냐.”

“…….”

“이곳은 사용인들의 출입이 제한된 구역인데, 어떻게 들어온 거지.”

“저, 저는…….”

자세히 보니 그녀를 누르고 있는 건 날카로운 검날 부분이 아닌 그 반대쪽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차마 소리가 나오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새로 온 하녀? 그런데 왜 유니폼을 입지 않았지? 어느 구역 담당인지 이름을 대라.”

계속해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뒷덜미를 잡은 손에 힘이 가해지며 목이 조여들었다. 그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기도 했지만, 미라벨라는 자신을 뭐라고 소개해야 좋을지도 몰라 입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런 태도가 더욱 수상해 보였는지 그가 검을 든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런, 르시엘.”

숨이 부족해지면서 어지럼증이 일어 눈앞이 하얘지려던 찰나, 미풍이 불어오듯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에일레스?”

꽉 잡혔던 목덜미가 순식간에 느슨해졌다. 사냥꾼에게 사로잡힌 토끼처럼 대롱대롱 붙잡혀 있던 미라벨라는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녀는 미처 뒤를 돌아볼 새도 없이 가느다란 목에 손을 대고 모자란 숨을 채우느라 콜록거렸다.

“르시엘, 며칠 만에 집에 오자마자 웬 심술이야. 숙녀에게 실례잖아.”

“수상하게 구니까 그렇지. 아는 얼굴이야?”

“대체 누가 수상해?”

아무리 봐도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말끝에 에일레스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미라벨라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돌아보았다. 에일레스는 이제 막 퇴근하여 저택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그가 한 손으로 심플한 디자인의 크라바트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만들었다.

“…….”

그녀를 붙잡았던 남자는 가슴에 황실의 문장을 수놓은 제복 위로 붉은 클로크를 두르고 있었다. 두껍고 단단한 근육이 빳빳한 각을 세운 제복으로도 다 감춰지지 않았다. 강렬한 적갈색 머리카락과 붉은 눈, 보기 좋게 그을린 갈색의 피부까지. 누가 보아도 검을 쓰는 사람임을 말해 주는 인상이었다. 레이든이나 에일레스도 키가 무척 큰 편이었으나 그는 두 사람보다도 훨씬 더 장신이라 목을 꺾어 한참을 올려다보아야 했다.

“수상하다니, 네 여동생이잖아.”

“어?”

“‘어?’가 아니야. 데려올 거라고 분명 이야기했는데.”

에일레스가 약간 힐난하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르시엘이라 불린 남자는 약간 멋쩍은 기색으로 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여동생은 무슨…….”

단지 혼자 중얼거린 것에 불과했지만 옆에 있던 미라벨라는 이미 그 말에 충분한 상처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정말로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꽉 끼는 제복 상의가 불편했는지, 이미 맨 위가 풀려 있는 단추를 그가 다소 거친 동작으로 두어 개 더 풀어 내렸다.

“어쨌든 새 막내한테 인사해, 엘.”

“……그렇게 부르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안녕, 꼬마.”

“험하게 대한 것도 사과하고.”

“아, 미안.”

그는 의외로 순순히 사과했다.

“반갑다.”

상대가 성의 없다 여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서둘러 덧붙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다지 효과적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너 지금 퇴근했어? 일찍 올 줄 알았더니 좀 늦었네.”

어쨌거나 상황을 중재한 에일레스가 연장자다운 태도로 유하게 물었다.

“어, 시간이 연장되는 바람에. 지난달에도 나가 있었는데 또 전지훈련이라니……. 형은?”

“회의가 있었어.”

에일레스의 미려한 얼굴에 약간 피곤한 듯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것은 지난번 마차에서 목격했던 표정과도 언뜻 겹쳐졌다. 하지만 그는 곧 그런 기색을 지우고 옅은 미소를 띠며 미라벨라를 돌아보았다.

“벨, 산책하던 길이었니? 방으로 데려다줄까?”

“아, 아니요.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래, 그럼.”

그가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답했다.

“참, 오늘 저녁은 다 같이 먹을 거야. 그러니까 너희 둘 다 늦지 않게 내려와.”

“아, 네.”

“알았어, 에일레스.”

“그럼, 이따 봐.”

에일레스는 그 말을 끝으로 손을 흔들어 보이며 긴 다리를 움직여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미라벨라는 르시엘과 단둘이 남겨지자 어색한 기분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저어…….”

“꼬마, 저녁 식사 때 보자.”

미라벨라는 용기를 내어 작은 소리로 말을 붙여 보려 했지만, 르시엘이 먼저 선수를 치며 서둘러 그녀를 지나쳐 갔다. 그는 마치 미라벨라와 잠시도 더 한 공간에 머물러 있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혼자 남겨진 그녀는 ‘아……’ 하는 소리를 내며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진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발길을 돌려 제 방으로 향했다.

* * *

전부 남자 형제들뿐인 집은 원래 이런 분위기일까? 네 사람이 함께한 식사 시간은 비교적 조용한 편이었다. 그들 중 특별히 수다스러운 이도 없는 것 같았고…….

‘하실 말씀이라는 게 뭘까?’

라이오넬 공작, 그러니까 레이든은 오늘 미라벨라에게 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식사가 끝나 가는 지금까지도 별다른 말을 꺼내진 않고 있었다.

“르시엘, 그리고 미라벨라. 둘은 초면이지. 서로 인사는 나눴나?”

“아까 밖에서 마주쳤어.”

저녁 식탁의 적막을 깨고 말문을 연 레이든이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르시엘이 얼른 대답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르시엘은 황실 기사단 소속이다. 교대 근무라 집에 들어오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은 편이긴 하지만, 이 중에는 둘의 나이가 가장 비슷하니 서로 친하게 지내도록.”

“나보다 일곱 살이나 어린데, 비슷하기는…….”

새롭게 등장한 여동생과 같은 막내 라인으로 묶이는 게 불만인지, 얼굴이 약간 벌게진 채로 르시엘이 툴툴거렸다. 에일레스가 낮게 웃으며 부연했다.

“르시엘은 황실 기사단의 부기사단장이야, 벨. 아카데미에 다닐 때부터 두각을 보여서 예전에는 황제 폐하께서 ‘제국의 꼬마 검사’, ‘르페르트의 검술 신동’이라 부르시기도 했었지.”

“아 제발, 에일레스! 어디 가서 그런 말 좀 하지 마.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진짜…….”

그 말에 미라벨라는 와! 하고 자그마한 감탄사를 내보냈으나, 당사자인 르시엘은 어째서인지 칭찬을 듣고도 얼굴을 붉히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에일레스는 자신보다 훨씬 더 덩치가 큰 남동생을 꽤 귀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르시엘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지나치게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또다시 집을 오래 떠나는 훈련은 당분간 없는 거지, 엘?”

“으, 그렇게 좀 부르지 말라고…….”

혈육의 입에서 나온 애칭에 이번엔 그가 정말 진심으로 인상을 구겼다. 르시엘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미라벨라는 은은한 향이 느껴지는 민트 티 잔을 집어 들려다가 그 표정을 발견하고 움찔했다. 그러나 정작 에일레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특유의 저음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식사가 거의 마무리될 무렵, 미라벨라는 오라버니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에 조심스럽게 자신도 아는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아! 황후 폐하께서 라이오넬 공작가 출신이시라고 들었어요.”

“맞아, 고모님이셔. 우리 형제들에겐 어머니나 다름없는 분이시지.”

“성 루베이도 학원에 자선 공연이 열렸을 때,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이야기가 연극으로 만들어진 걸 본 적이 있어요. 두 분이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지셨다고……. 정말 멋지다고 생각했어요.”

“음.”

“그래서 저도, 언젠가는 그런 상대를 만나고 싶다고…….”

말을 잇던 미라벨라는 문득, 갑작스럽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깨닫고 말끝을 흐렸다. 꼭 필요한 대화가 아니면 하지 않던 레이든을 비롯하여 에일레스와 르시엘까지, 어느새 모두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뭔가 또 잘못한 걸까……. 옆자리에 앉은 르시엘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비스듬히 그녀를 곁눈질했다.

“운명적인 사랑이라.”

“…….”

“뭐, 그딴 게 있다고 믿는 쪽이 정신 건강에 이로울 수도 있겠지.”

“르시엘.”

“아, 말이 그렇다고.”

레이든이 엄격한 눈빛으로 경고를 보내자 그는 곧 입을 다물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한 미라벨라를 안심시키려는 듯 에일레스가 나섰다.

“맞아, 벨. 네가 아는 대로야.”

“네…….”

“고모님이신 루이넬라 황후 폐하께서 아직 라이오넬 공녀이던 시절, 당시 황태자셨던 지금의 황제 폐하와 축제장에서 우연히 만나셨지. 운명처럼 따라온 불 같은 사랑은 두 분을 곧 결혼까지 이끌었고.”

비록 지금은 전형적인 쇼윈도 부부일지라도 어쨌든, 그럴 때도 있었으니까.

그는 부드럽게 눈을 휘며 웃었으나 반듯한 미간은 곤란한 듯 약간 좁아져 있었다. 다행히 때마침 공작가의 수석 셰프가 다가와 어색했던 분위기는 풀어졌다.

“아가씨, 디저트를 드시겠습니까?”

“네? 아, 네에…….”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하필 셰프는 미라벨라에게 가장 먼저 물었고, 오늘 새로 들여온 딸기가 당도가 좋다는 친절한 설명이 이어졌다. 그녀가 얼른 결정하지 못하고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셰프는 먼저 딸기 아이스크림을 준비해 주겠다고 권했다. 잠시 후 그는 다른 세 형제들에게도 디저트를 어떻게 할지 물었으나 그들은 모두 거절했다.

“지금은 사양하지. 나중에 집무실로 커피나 올려 보내 줘.”

“저도 괜찮아요. 늦게라도 필요하면 차를 마시죠.”

“디저트? 난 됐어.”

“엇, 그러면 저도…….”

미라벨라는 자신도 먹지 않겠다고 서둘러 말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녀 몫의 디저트는 나온 뒤였다. 예쁜 크리스털 컵에 담긴 딸기 소르베를 가져온 하녀가 반짝이는 은제 스푼과 함께 미라벨라의 앞에 놓아 주었다. 스푼을 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녀를 힐끗 보며 레이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우리는 이만 서재로 올라갈까. 먼저 이야기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올라오도록, 미라벨라.”

“맛있게 먹어, 벨.”

“꼬마, 먼저 간다.”

“아, 네, 네에…….”

위층으로 사라지는 오라버니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라벨라는 왠지 모를 소외감에 둘러싸인 채 혼자 앉아 있었다.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에일레스가 뭐라 말하자 얼굴이 벌게진 르시엘이 맞받아치고, 그가 다시 쿡쿡 웃으며 자신보다 더 키가 큰 르시엘에게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늘 티격태격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은 나름대로 사이가 좋아 보였다.

‘저 사람들이, 나의 유일한 가족. 앞으로 이 집에서 함께…….’

미라벨라는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현실을 되새기며 은제 스푼으로 딸기 소르베를 떠올려 입 안에 넣었다. 혀끝에서 사르르 녹아든 그 달콤한 디저트는 곧 타액과 섞여 목 안으로 스며들었다. 문득 그녀는 울며 매달리던 어린 딸을 매정하게 내려놓고 영원히 떠나 버린 어머니가 떠올랐다.

또다시 버려지고 싶지 않아…….

‘정말 좋은 여동생이 될게요, 그러니 부디 저를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세요.’

미라벨라는 아까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을 뒤늦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가족이 생겼지만 그 안에서도 여전히 타인인 듯한 기분은 계속해서 그녀를 외롭게 만들었다. 그들과 더 가까워지고, 함께하는 게 자연스러운 사이가 되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 걸까.

* * *

“정말 괜찮겠어?”

가주의 집무실과 서재를 겸한 넓은 공간. 그 한쪽에는 1인용 소파 몇 개가 낮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서로 마주 보는 형태로 배치되어 있었다. 남들보다 큰 체격 탓에 소파가 불편해서인지, 앉는 것을 사양하고 대신 큰 기둥에 비스듬히 기대고 선 르시엘의 말이었다.

“이름이 미라벨라라고 했지? 그 애, 굉장히 약해 보이던데.”

“이젠 다른 방법이 없어. 이미 서류 절차도 다 끝났고.”

레이든은 마호가니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가주의 인장을 첫 번째 서랍 안에 넣고 잠그며 몸을 일으켰다.

“문제는 미라벨라의 교육 수준이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형편없다는 거야. 성 루베이도 학원 출신이니 어느 정도는 감안했지만.”

하지만 그는, 이 정도인 걸 미리 알았다면 보류하고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말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다 지난 일을 두고 말해 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차라리 그 시간에 앞으로의 방향성을 의논하는 쪽이 낫다는 게, 합리적이고 냉철한 판단력을 지닌 레이든의 지론이었다.

“하긴 너무 영악해도 곤란할 테니, 순진한 편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군.”

“그렇지.”

“그래도 미라벨라에게 너무 냉정하게 대하지는 마, 레이든.”

형제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에일레스가 조용히 말했다.

“……아직 어린애야. 좀 더 부드럽게 대해 줄 수도 있잖아.”

“에일레스, 어차피 그 애는 완전히 남이야.”

레이든은 그 말에는 오히려 날카롭게 반응했다. 차가운 은테 안경의 테를 밀어 올리며 에일레스를 돌아본 그가 단호히 선을 그었다.

“자상한 오라버니 역할이 꽤 적성에 맞는 모양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넌 그 애를 이용하는 데 동조한 사람 중 하나일 뿐이라고.”

“…….”

“기억해 둬. 우린 처음부터 이 일에 이용하기 위해 아무런 연고가 없는 그 애를 속여서 데려왔다는 걸.”

그의 입에서 나온 바꿀 수 없는 진실에 에일레스가 입을 다물었다.

이것은 황실과 공작가의 정치적, 사업적 이해관계에 따라 복잡하게 얽힌 커넥션이었다. 그들의 조국인 르페르트 제국의 방계로부터 오래전 갈라져 나간 에펠 공국. 많은 세월이 흘러 혈연으로서의 의미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하지만 자원이 풍부하고 대륙 간 무역업에서도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에펠 공국과는 꾸준한 우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얼마 전, 에펠 공국의 국유지에서 엄청난 마나를 보유한 새로운 종류의 마력석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만약 그 마력석을 이용하여 무기를 만들게 된다면 지금껏 보지 못한 파괴력을 지닌 신무기가 탄생할 테니, 군사력에도 큰 영향을 미쳐 주변국의 판도를 뒤집어 놓을 수도 있었다. 하여 그것을 경계한 황제는 서둘러 에펠 공국과 혼맥을 맺어 양국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광활한 영토를 가진 르페르트 제국은 명실상부한 중앙 대륙의 패권자였으나, 국경을 인접한 캄포 제국은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그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는 중이었다. 우방국이라 하지만 언제 돌아서서 이빨을 드러낼지 몰랐기에 경계를 늦출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펠 공국과의 친교는 캄포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무척 중요했다.

외교를 통해 혼약은 거의 성사되었으나, 그 대상이 문제였다. 에펠 공국에서는 자신들의 차기 후계자와 맺어질 상대로 르페르트 제국의 황녀나 최소한 그에 버금가는 가문의 공녀를 원했지만 적당한 상대가 없었다. 황제의 자식이라고는 황태자가 유일한 데다, 방계 쪽에서도 나이가 맞는 숙녀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적당히 양녀를 들일 수도 있었으나 황제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그래도 고작 공국의 눈치를 보느라 황녀를 준다는 게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었다. 때문에 황제는 황실 다음으로 명망 있는 가문인 라이오넬 공작가에서 에펠 공국의 후계자와 국혼을 맺을 상대를 보내 주길 원했다.

한때 아버지의 정부였던 레이디 이스넬의 딸, 미라벨라를 자신들의 여동생으로 위장해 데려오자는 계획은 여기서 탄생했다. 비록 유서 깊은 공작가는 갑자기 나타난 막내딸로 인해 잠시 구설에 오를 것이고 사람들의 눈을 속여야 한다는 위험 부담도 있었으나, 황제는 그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약속했다. 이 일이 성공하면 라이오넬 공작가는 추진 중인 여러 가지 사업과 관련된 우선권을 보장받는 것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많은 이점을 얻을 수 있을 터였다.

“그렇지만 생각보다 여려 보여서 걱정이군.”

레이든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에펠 공국은 르페르트와 분위기가 달라서, 대공비가 하는 일이 후계 생산 외엔 거의 없다고는 하지만…….”

“너무 착해.”

“그러니 잘 견뎌 낼 수 있을지.”

겉으로는 그저 화려하고 아름답게만 보이는 사교계. 귀족 사회가 어떤 곳인지 잘 아는 에일레스는 씁쓸한 얼굴로 낮은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우리 모두 공범 아닌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나 얘기하지.”

지금껏 별다른 의견 없이 형들의 대화를 경청하던 르시엘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장기 훈련을 가는 바람에 네겐 말해 주지 못했군, 르시엘.”

레이든이 차분히 설명했다.

“미라벨라는 우리 가문의 막내딸로 지금까지 외국에서 요양 중이었다고 발표될 거다. 몸이 약해 데뷔탕트는 최대한 미룬다고 해 둘 거고. 그러니 우린 지금부터 그 애를 교육해서 어디에 내놔도 손색없는 숙녀로 만들어야 해.”

“가르칠 게 한두 개가 아니라며? 소문이 나면 안 될 텐데, 누가 교육하지? 선생은 구해 놨어?”

“……네 말대로 소문이 나선 안 되니 우리가 직접 해야지.”

“뭐? 하지만 여자애잖아. 교육계는 어떤 걸 쓰려고? 우리가 자라면서 배운 걸 그대로 하기엔 좀 그렇지 않나. 검술이라든가 과목도 그렇고, 귀족가의 영애들은 좀 다른 걸 배울 텐데.”

“그거라면 교재가 있어.”

르시엘이 레이든의 말에 반문하자 곁에서 대신 답한 에일레스가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냈다. 빈티지한 느낌의 가죽 표지를 아이보리색 레이스로 한 겹 감싸 커버를 만든 책 표지에는 커다랗게 제목이 쓰여 있었다.

『라이오넬 공작가의 가정 교육 지침서』

“기본적인 학습 내용이나 큰 줄기는 이대로 하고, 여기에 과목별로 필요한 심화 교재들을 추가할 거야.”

“이런 책이 있었던가…….”

모양 좋게 돋아난 짙은 눈썹 사이를 슬쩍 좁히며 르시엘이 중얼거렸다. 표지를 넘기자 맨 앞장에는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필체로 꾹꾹 눌러 쓴 작가의 말이 적혀 있었다.

[천사처럼 사랑스러운 라이오넬가의 모든 소녀들을 위하여.]

다시 말해, 이 책은 누군가 라이오넬 공작가의 어린 딸들을 위해 쓴 이른바 가정 교육 지침서였다. 영식들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게 보통이었으나 영애들의 경우는 또 달랐다. 보수적인 명문가에는 딸자식을 밖으로 내돌리는 걸 꺼리는 풍조가 여전히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는 유능한 가정 교사를 초빙하기도 했고, 가풍에 따라 어머니가 직접 교육하기도 했다.

“장난해?”

예법과 역사, 정치 등 대체로 평범한 교양 과목들로 이루어진 ‘가정 교육 지침서’를 훑어보며 르시엘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구겼다.

“우리 가문은 루이넬라 고모님을 제외하고는 자그마치 5대째 아들만 줄줄이 태어났다고! 방계 쪽도 딸은 씨가 말랐는데, 대체 누가 이따위 책을 썼지? 이런 쓸데없는 건 말 먹이로나…….”

“르시엘.”

레이든이 엄격한 어조로 경고했다.

“그 책의 맨 뒷장을 봐.”

르시엘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책장을 넘겼다. 제일 뒤쪽의 표지 안쪽에는 제목을 쓴 것과 같은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나의 작은 아기 천사, 엘의 탄생을 축하하며♥]

“…….”

“그건 어머니께서 널 가졌을 때 직접 쓰신 책이다. 아기 천사가 날아와 품에 안기는 꿈을 꾸시고는 이번엔 분명 딸일 거라며 크게 기뻐하셨지. 그래서 네 이름도 르시…….”

“오, 내 어머니께서 선견지명이 있으셨군. 이런 날이 올 줄 미리 아시고 말이야.”

르시엘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조용해졌으나, 곧 빠르게 태세를 전환했다. 하던 말을 가로막힌 레이든이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다행히 조용히 관망하던 에일레스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참, 레이든. 며칠 전 황제 폐하를 알현했잖아. 특별히 다른 말씀은 없으셨어?”

“있었지.”

미라벨라의 몸에 남은 상처를 확인했던 날 아침, 그가 서둘러 나가야 했던 건 다름 아닌 황제와의 선약 때문이었다. 레이든이 무겁게 황제의 말을 전했다.

“다들 알겠지만 에펠 공국의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결혼 전까지는 문란한 성생활을 하다가, 결혼한 뒤에는 오직 배우자에게만 충실하기로 유명하지.”

“그게 왜? 꼬마한테는 좋은 거 아니야? 조신한 척하다가 나중에 호박씨 까는 새끼들보다는…….”

“그만큼 부부생활을 중시한다는 게 문제야. 그들은 속궁합이 맞지 않는 상대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아. 지위나 가문을 우선하는 정략혼의 경우에도 그 조건은 필수적이지. 그래서 황제 폐하께서는 정식으로 국혼이 진행되면 큰 연회를 열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에펠 공국의 사절단과 함께 후계자가 제국을 방문했을 때…….”

여기서 그는 한 차례 말을 끊고 두 동생들을 둘러보았다.

“파티가 열리는 그날, 미라벨라가 그를 유혹해서 잠자리를 가지도록 주문하셨어. 특히 에펠 후계자의 성적 취향이 어떻든 간에 빠르게 파악하여 반드시 하룻밤 안에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더군. 아이까지 가진다면 더 좋고.”

“뭐?!”

“말도 안 돼!”

르시엘과 에일레스가 동시에 소리쳤다. 거의 저녁 식사 때 미라벨라의 딸기 소르베를 받쳐 나왔던 은쟁반만큼이나 눈이 커진 채로 르시엘이 더듬거렸다.

“아니 근데…… 그 꼬마가, 하룻밤에, 어떻게…… 나 참.”

“레이, 그 애가 성인이 된 지 이제 두 달도 안 됐다고 말해 봤어?”

“말했지. 하지만 소용이 없었어.”

본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성세대들은 젊은이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법이었다. 레이든은 ‘요즘 것들은 죄다 발랑 까져서 일찍부터 섹스를 한다던데?’라고 태연하게 말하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게다가 성 루베이도 학원 출신이면 그 안에서 문란한 연애를 하는 게 대부분이니 이미 충분한 실전 경험이 있을 거라고 하셨다.”

황제의 말을 그대로 전하는 것임에도 떨떠름한 심정으로 레이든이 덧붙였다. 그들 역시 성 루베이도 학원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미라벨라가 설마 아무 경험도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에펠 공국의 후계자를 하룻밤 안에 사로잡을 정도로 능숙할지는……? 솔직히 그의 눈에 미라벨라는 문란한 연애는커녕 친구도 별로 없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에펠 공국에서도 허혼의 뜻을 밝히긴 했지만 국가 간의 혼사에는 수많은 절차가 따르니, 실제 국혼이 진행되려면 적어도 2, 3년은 소요되겠지. 그것도 넉넉한 시간이라 볼 순 없겠지만.”

레이든은 말하면서 머리가 아픈 듯 지끈거리는 미간을 꾹 눌렀다.

“하지만…….”

에일레스가 뭔가 말하려 했을 때, 서재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렸다. 형제들의 시선이 동시에 그쪽으로 향하였다. 가장 가까이 있던 르시엘이 다가가 문을 열자, 긴장된 얼굴의 미라벨라가 안으로 들어섰다.

“저 왔어요.”

“…….”

“그, 아까 제게 하실 말씀이 있으시다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세한 침묵이 흘렀다. 가장 먼저 표정 관리를 끝낸 레이든이 평소의 냉정한 얼굴로 돌아와 미라벨라에게 설명했다.

“미라벨라, 너를 입적시키는 일과 관련된 서류가 전부 수리되었다. 이제 넌 어엿한 라이오넬 공녀이자 우리들의 동생이야.”

“네.”

“공작가의 일원이 된다는 건 때로는 나 자신보다 가문을 우선시해야 할 상황도 생긴다는 것을 뜻하지.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당황스러울 수 있겠지만, 난 너를 곧 결혼시킬 생각이다.”

“……네, 네?! 결혼이요?”

“상대는 인근 에펠 공국의 후계자야. 놀랐겠지만 네게도 나쁜 조건은 아닐 거다. 그쪽에서 모든 걸 극비로 하고 있어 알려진 사항이 없지만 너와 비슷한 나이라고 하더군.”

다소 가혹하게 들릴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레이든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가 기민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미라벨라의 앳된 얼굴이 차차 실망감으로 물들었다.

‘역시 그런 거였구나.’

가문을 위한 정략혼의 도구. 그런 쓰임이 아니라면 그들이 갑작스러운 호의를 베풀어 그녀를 데려올 이유도, 새삼스럽게 가족으로 받아들여 줄 이유도 없었다.

풀이 죽은 그녀를 바라보며 레이든이 아까보다 부드러운 어조로 회유했다.

“하지만 정략혼에 이용할 목적으로 널 데려온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길 바란다. 늦게 만난 가족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은 네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성년이 된 직후 바로 약혼이나 결혼을 하는 건 귀족가의 영애라면 흔한 일이지. 비록 적녀가 아니라 해도 너는 분명한 아버지의 딸이니, 나는 내 여동생에게 어울리는 가장 좋은 혼처를 찾아 줄 생각이다.”

“네, 공작님.”

“곧이라고 해도 막상 실제로 떠나기까지는 3년은 걸릴 거야, 벨. 가족 간의 추억을 쌓기에는 충분한 시간이 있어.”

의기소침해진 그녀를 위로하려는 듯 에일레스가 다정하게 거들었다.

“시집을 간 뒤에도 우리가 네 가족이라는 사실은 변치 않을 거다. 라이오넬 공작가는 네 친정으로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줄 거야. 훗날 재산의 상속이나 지참금 역시 섭섭하지 않을 만큼 공정하게 배분해 줄 생각이고.”

“……알겠습니다.”

최초로 미라벨라를 데려오기로 결정했을 때, 이용할 생각뿐이었던 건 사실이다. 어차피 갈 곳 없는 고아라니 저 애한테도 이게 최선이 아닌가, 라는 마음으로 먼 나라까지 속여서 보내 버린다는 죄책감을 지워 버린 것도. 에펠 공국의 후계자란 사내가 어떤 자인지 몰라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은 우호 관계를 맺는다 해도 낯선 타국의 비로 보내진 소녀는 훗날 정쟁에 휘말려 언제든 양국 간 싸움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은 애써 눈감아 외면했다.

한때 아버지의 정부였던 레이디 이스넬, 미라벨라의 어머니는 다른 남자를 동시에 만나던 것을 들켜 완고한 아버지에게 내쳐진 듯했다. 레이든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서랍 안쪽에서 발견했던 미라벨라의 친자 검사 결과서를 떠올렸다. 결과는 불일치. 그가 알기로 부친은 르시엘이 태어난 후 줄곧 공작가의 오랜 주치의에게 피임약을 처방받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디 이스넬을 만난 기간과 미라벨라가 태어난 시기가 겹쳤기에 혹시나 하는 우려에서 친자 확인을 해 본 모양이었다.

만났던 기간이 겹친다는 사실은 추후에 혹 사생아라는 게 밝혀져도 라이오넬가의 핏줄이라는 것만은 의심받지 않을, 좋은 방어막이 되어 줄 수 있었다. 어차피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라 친자 검사를 다시 할 방법은 없었다. 미라벨라의 친부로 추측되는 자 역시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기에 훗날 문제가 생길 소지가 없다는 점이 그녀가 선택된 이유였다. 레이든이 사전에 조사한 바로는 미라벨라의 외가 쪽에도 남아 있는 친척이 전혀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세상에 완벽하게 혼자 남겨진 고아였던 것이다.

미라벨라의 첫인상과 달리 레이든은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이 매정한 사람은 또 아니었다. 말로는 딱 잘라 남이라 단언했지만, 그도 이런 배경을 모두 아는 상태에서 그녀를 직접 대하자 어쩔 수 없는 인간적인 측은함이 생겨났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신들을 유일한 가족이라 믿고 따르는 간절한 얼굴. 어린 시절, 언젠가 에일레스와 함께 길에서 주워 왔던 어린 강아지처럼 순수한 눈빛, 다시 내쳐질까 겁을 먹은 나머지 애처로이 떨리는 목소리…….

만약 그녀가 그대로 성 루베이도 학원에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제대로 된 교육조차 받지 못하고 보호자 없이 세상에 혼자 남은 소녀. 인형처럼 예쁘고, 법적으로는 성인이라 하나 스스로의 일을 결정하기에는 한없이 미숙한. 그 상태로 성년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작정 밖으로 내보내졌다면 아마도 오갈 데 없이 떠돌다가 나쁜 일을 당하고 말았으리라.

10년 이상 먼저 사회에 나온 성인이자 르페르트 제국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레이든은 그런 일만은 막아야 한다는 사회적 책임감을 느꼈다. 하지만 기댈 곳 없는 소녀의 간절함을 이용하고 정략혼의 도구로 쓸 목적으로 속인 건 자신들도 마찬가지였으니, 달리 할 말이 없긴 했다.

‘어차피 귀족 영애라면 대부분 성년이 된 후 몇 년 안에 결혼할뿐더러, 열에 아홉은 정략혼이 아닌가. 지금 저 아이의 상황에서는 공작가의 일원이 되어 에펠 공국의 대공비가 되는 게 가장 나은 미래일 것이다.’

그는 이런 생각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마음대로 뒤흔들었다는 이율배반적인 죄책감을 억눌렀다. 대신 그는 겉으로나마 그녀를 여동생으로 받아들이고 시집갈 때까지 부족한 것들을 가르쳐 기꺼이 보호자의 역할을 다할 용의가 있었다.

어쨌든 지금은, 미라벨라가 자신들을 믿게 하여 원하는 대로 움직이도록 만드는 게 가장 중요했다. 레이든은 가능한 미라벨라가 상처받지 않게 적절한 말을 골랐다.

“대외적으로 너는 그간 외국의 친척 집에서 요양을 했던 것으로 발표될 거다. 그러니 국혼이 발표되기 전까지 라이오넬 공작가의 공녀로서 손색없는 완벽한 숙녀가 되어야만 해.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직접 널 교육할 거고.”

“네, 알겠습니다.”

현재 그녀의 학습 수준을 보면 정말 라이오넬 공녀가 맞는지 누구든 의심할 게 분명하기에 외부의 선생을 초빙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일부러 제외시켰다.

아직 풀이 죽은 듯 보였지만 미라벨라는 의외로 순순히 대답했다. 그녀는 서글픈 심경을 감추고 마음을 다잡으려 부단히 노력하는 중이었다. 자신을 정략혼의 도구로 쓰려는 게 아니라는 말은 어쩌면 완전한 진심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눈을 가려 외면하고서라도 미라벨라는 간절히 그 말을 믿고 싶었다. 그래도 세 사람이 자신과 피를 나눈 오라버니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으니까.

낳아 준 어머니에게마저 버림받은 그녀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 준 사람들. 가족이 되자고 말해 준 그들에게 자신도 좋은 여동생이 되고 싶다는 다짐은 변함이 없었다.

“좋아. 그럼 네 교육 일정과 커리큘럼에 대해 상의하기 전에…….”

다소 평정을 찾은 미라벨라의 얼굴을 살피며 레이든이 입을 열었다.

“그 전에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 네 몸에 있던 상처들은 어떻게 된 거지? 그건 단기간에 생긴 게 아닌, 명백히 지속적인 폭행의 흔적이었다.”

“저, 그게, 실은…….”

미라벨라가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자일스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난 형제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글렌 후작가라면, ‘글렌 상회’의 그 글렌? 몇 년 전부터 선박 무역에도 발을 넓혔다는 가문인가?”

“그럴 거야. 주로 타 대륙을 통해 고가의 향료나 향신료 등을 거래하는. 제지와 담배 사업도 같이 할걸.”

“그러고 보니, 내가 가주가 된 뒤 새로 맡은 사업 중 하나의 거래처 명단에 글렌 후작가가 있었던 것 같은데.”

잠시 생각에 잠겼던 레이든이 차분한 어조로 확언했다.

“그 처분에 관해서는 다들 신경 쓸 것 없어. 내가 알아서 하지. 그리고, 미라벨라.”

“…….”

“글렌 후작의 아들로부터 물리적인 폭행 외에 혹 성적 학대가 있었나?”

“네? 그게 무슨…….”

뜻밖의 질문에 미라벨라의 눈이 커졌다.

“혹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솔직하게 답해 주길 바란다. 성적 행위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면 국혼에 문제가 생길 수 있어 먼저 치료해야 하니까.”

“그, 그런 일은 없었어요.”

미라벨라가 그의 눈빛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히 겁을 먹어서였다. 하지만 그 행동은 사실을 감추고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레이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직접 확인해 봐도 괜찮겠나?”

“네? 하지만, 확인이라면…….”

그리고 그 서슬 퍼런 말에 더욱 움츠러든 미라벨라가 어깨를 작게 웅크리며 악순환이 이어졌다.

“……어, 어떻게요?”

세 오라버니들에게 좋은 여동생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는 조금 전의 굳은 결심이 위기를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 * *

잠시 후, 미라벨라는 1인용 소파에 착석한 르시엘의 품에 갇힌 채 그의 무릎 위에 앉혀져 있었다.

“흐윽, 무서워요! 제발, 내려 주세요…….”

그녀는 갑작스럽게 높아진 시야와 등 뒤로 느껴지는 무쇠처럼 단단한 근육에 겁을 먹고 바둥거렸다. 하지만 뒤에서 그녀를 안고 있는 르시엘에게는 작은 참새나 병아리가 쪼아 대는 것처럼 미약한 진동으로만 전해질 따름이었다.

“르시엘, 거기 앉아.”

“나?”

“그래, 너 말이야.”

불과 몇 분 전, 의료용품이 든 상자를 들고 온 에일레스의 갑작스러운 지시에 르시엘은 왜? 하는 얼굴로 스스로를 가리켰다. 그는 그러면서도 순순히 소파에 앉았고, 그러기가 무섭게 옆에 서 있던 미라벨라의 작은 몸이 위로 번쩍 들리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에일레스는 놀란 나머지 소리도 지르지 못한 그녀를 가볍게 들어 올려 르시엘에게 답삭 안겨 주었다.

“……읏!”

“으악! 뭐, 뭐야?!”

얼떨결에 그녀를 품에 안게 된 르시엘은, 갓 태어난 병아리를 떠안게 된 사람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펄떡거렸다.

“에일레스!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렇게 좀 안고 있어.”

에일레스는 간결하게 답하고 근처에 있던 다른 의자를 끌어와 그 앞에 앉았다. 르시엘과 같은 방향을 보고 무릎에 앉혀진 미라벨라의 바로 앞쪽에. 자그마한 등 뒤로 맞닿은 탄탄한 가슴 근육을 느끼며 그녀는 왠지 모를 두려움으로 몸을 떨었다.

“벨, 겁먹을 거 없어. 단지, 음, 네 소중한 곳이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하려는 것뿐이야.”

“…….”

에일레스는 두려움이 번진 파스텔 톤의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하며 다정하게 달랬다.

“지금부터 아래를 확인하려는데, 불편하더라도 조금만 참아 줘.”

“……네? 읏!”

가엾은 미라벨라는 아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래를 확인한다’는 그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기도 전에 양 발목이 커다란 손에 붙잡혀 붕 떠올랐다.

“아흑, 싫어요! 놔 주세요……!”

그에게 잡힌 발목이 위로 들리며 넓게 벌어지고, 그 반동으로 치맛자락이 발랑 뒤집혔다. 미라벨라가 작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둥거렸지만 그럴수록 치마는 더 위로 올라가 뽀얀 허벅지를 반쯤 드러낼 뿐이었다.

“르시엘, 잡고 있어.”

“이, 이렇게?”

르시엘은 주인의 품에서 달아나려는 아기 고양이를 붙잡듯 바둥거리는 미라벨라를 엉겁결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에일레스의 지도에 따라, 커다란 손을 미라벨라의 두 허벅지 안쪽에 넣어 받치듯이 붙잡았다. 단단한 팔 힘으로 붙잡힌 두 다리가 M자 형태로 활짝 벌어진 채 고정되자, 작은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새빨개졌다.

“흐윽, 싫어! 싫어요…….”

밖에 나갈 일이 없는 데다 이르게 더워진 초여름의 날씨를 고려하여 미라벨라는 다소 가벼운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스타킹이나 치마를 부풀리는 페티코트도 착용하지 않은 심플한 디자인의 원피스. 자세 탓에 스커트가 자연스럽게 올라간 터라, 뽀얀 허벅지 사이로 보이는 건 음부를 아슬아슬하게 가린 플레어 팬티 하나뿐이었다.

“이, 이런 거, 하지 마세요, 흑…….”

미라벨라는 불과 며칠 전의 아침에도 손바닥만 한 속옷 하나만을 입고 상체는 알몸인 채로 두 오라버니 앞에 선 전적이 있었다. 그날의 충격도 아직 다 해소되지 않았는데,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 게다가 이처럼 다리를 활짝 벌려서 얇은 속옷만 입은 음부가 정면으로 보이는 자세를 취하는 건 그보다 훨씬 더 수치스러웠다. 꼼짝달싹할 수 없도록 붙잡혀 있으면서도 그녀는 이리저리 도리질하며 울먹거렸다.

“미안해, 하지만 외부 의사를 부르는 건 너무 위험해서 어쩔 수 없어. 불필요한 소문이라도 나게 되면 네게도 좋지 않거든. 우리 가문의 주치의인 닥터 노만이 있긴 하지만, 어차피 부인과 진료 전문도 아니고 남자분이셔. 네가 괜찮다면 그라도 부를까?”

“읏, 저, 절대 싫어요! 흐윽.”

“그러면 조금만 참아 줘, 응? 아프게 하지 않을 테니까.”

“흑, 하지만…….”

“월경은 지금쯤 끝났을 것 같은데. 내가 잠시만 아래를 좀 볼게, 벨.”

에일레스가 부드럽게 설득하며 양옆으로 묶여 있는 리본 매듭에 손을 댔다. 두 다리 사이의 부끄러운 곳을 겨우 가리고 있는 하얀 속옷은 얇은 천으로 만들어져 있어, 가운데가 갈라진 음부의 모양이 고스란히 비쳤다. 플레어 팬티를 고정한 두 개의 리본을 풀어 여동생의 몸에서 거둬 내는 오라버니의 다정한 손길에 미라벨라가 큰 소리로 훌쩍거렸다.

“왜 울어, 부끄러워서 그래? 괜찮아.”

“아…… 흐윽, 흑!”

“착하지, 벨. 아픈 곳이 없는지 그냥 확인만 하려는 거야. 창피한 일 아니야.”

“흐읍, 싫어요, 흑…….”

리본 매듭이 풀린 속옷이 뽀얀 허벅지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가자, 완전히 개방된 음부에 서늘한 바깥 공기가 닿았다. 에일레스가 괜찮다며 한참을 어르고 달랬으나, 미라벨라는 새빨개진 얼굴로 다시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그나마 자신을 뒤에서 안고 있는 르시엘에게는 보이지 않겠지만, 바로 앞에서는 며칠 전 처음 만난 두 오라버니가 활짝 벌린 그녀의 다리 사이를 지켜보는 것이었다. 정말 기절할 것처럼 창피해서, 손을 내려서라도 가리고 싶은데 르시엘의 단단한 팔 아래 끼어 도통 움직여지지 않았다.

“잘 잡아, 르시엘.”

“어어, 꼬마! 그렇게 움직이면 다친다고.”

미라벨라가 몸을 들썩이며 벗어나려 바르작거리자 당황한 르시엘이 두꺼운 팔로 허리를 꽉 안았다. 그 바람에, 사랑스럽게 부풀어 오른 두 개의 부드러운 구체가 그의 팔뚝 위쪽에 깊이 눌렸다. 장기가 다 들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가느다란 허리에 비하여 그 부위는 유독 토실토실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제 팔에 닿은 따스하고 말랑한 촉감의 정체를 깨달은 르시엘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이제부터 움직이면 정말 다치니까 얌전히 있어야 해, 알겠지?”

치유 계열의 마도사들은 대부분 아카데미의 부전공으로 의학을 택했다. 의사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의학 지식과 원리를 아는 쪽이 치유 마나의 구조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제 방에서 가져온 의료용품 상자를 연 에일레스는 안에서 거즈와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깨끗이 소독한 손에 얇고 신축성이 좋은 재질의 장갑을 낀 다음, 병 안의 내용물을 부드러운 거즈에 충분히 흡수시켰다.

“허브에서 추출한 즙으로 만든 소독제야. 따갑진 않겠지만 혹시 그러면 말해 줘.”

“네, 읏…….”

“벨, 아래가 불편하니? 아파?”

“아, 아니요. 그건 아닌데…… 흑, 너, 너무 창피해요, 오라버니.”

미라벨라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정신이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차분한 서재, 그리고 그곳과 이어져 있는 레이든의 집무실. 두 다리를 한껏 벌린 채 의자에 앉혀져 은밀한 부위를 노출하고 있는 그녀의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금방 끝날 거야. 약간 차가우니까 놀라지 말고…….”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소독제를 적신 얇은 거즈가 부끄러운 곳에 닿았다. 세로로 갈라진 연분홍 속살 사이사이를 세심하게 닦아 내는 손길을 따라 동그란 엉덩이가 움찔거렸다. 소독제가 닿자 민감한 부위에서 민트를 먹었을 때처럼 화한 느낌이 났다.

“아, 아파요! 읏!”

가지런히 맞물린 분홍빛 소음순을 가르고 드러난 질 입구에 에일레스가 긴 손가락을 삽입하자, 놀란 미라벨라가 비명을 질렀다. 그곳은 지금껏 그 무엇도 드나든 적 없는 밀지였다. 심지어 제 손으로도 더듬어 보지 않은 그런 곳에 뭔가를 넣는다는 건…… 지금껏 상상해 본 일도 없었다. 오라버니의 눈앞에 음부를 내보이고 손길이 직접 닿는 것도 울고 싶도록 부끄러웠지만, 이번엔 아픔까지 더해져 눈물이 핑 돌았다.

“오라버니, 너무 아파요, 으흑…….”

“미안, 벨. 젤을 좀 바르면 아프지 않을 거야.”

그가 작은 입구를 헤집고 한 마디쯤 들어갔던 손가락을 빼내며 미라벨라를 토닥였다. 에일레스는 옆의 상자 안에서 윤활제로 쓸 만한 의료용 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후, 그는 고개를 들어 난감한 기색으로 형제들을 둘러보았다.

“……없네.”

“뭐가?”

“하필 의료용 허브 젤이 다 떨어졌어. 이렇게 아파하는데 그냥 할 수도 없고…….”

“그럼 어떡해?”

“적셔야지, 다른 걸로.”

“다른 거? 뭐? 레이든의 책상 위에 물이 있긴 한데 좀 그렇지 않나?”

“……너 바보야?”

에일레스는 아직 이해하지 못한 표정의 르시엘을 내버려 두고, 팔짱을 낀 채 책장에 기대어 서 있던 레이든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까부터 말없이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레이든, 도와줘.”

“……꽤 귀찮게 하는군.”

탐탁지 않은 얼굴로 말하면서도 레이든은 긴 다리를 움직여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옅은 분홍빛을 띤 미라벨라의 부끄러운 곳을 잠시 응시하다가, 손을 뻗어 소음순 위쪽의 음모를 걷어 냈다. 맞물린 속살을 잡아 벌리자, 소독제를 바를 때의 자극으로 귀엽게 부풀어 오른 음핵이 나타났다. 앙증맞은 클리토리스는 약간 젖어 도톰한 진주알처럼 반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수줍음 많은 주인의 성정처럼 안쪽으로 다소 숨어든 형태였기에, 레이든은 미라벨라의 음핵 표면을 손끝으로 문질러 얇디얇은 포피를 벗겨 냈다.

“아, 으응…….”

익숙지 않은 감각에 미라벨라가 작게 신음하며 도리질했다. 르시엘에게 붙잡혀 있는 뽀얀 허벅지에도 긴장으로 힘이 바짝 들어갔다. 마침내 얇은 포피에 감싸여 있던 클리토리스가 외부로 완전히 노출되어 드러났다. 여성의 가장 민감한 성감대, 그 중앙부에 엄격한 큰오라버니의 손끝이 닿자, 최초로 경험하는 강한 성적 자극에 놀란 미라벨라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화드득 몸을 떨었다.

“읏, 아, 흐읍!”

“옳지, 착하다. 소리 내도 괜찮아, 벨.”

에일레스가 그녀를 달래며 막 젖어 들기 시작한 구멍 앞쪽을 가볍게 문질렀다. 레이든은 길고 곧은 손가락 사이에 음핵을 가두어 본격적으로 굴리기 시작했다. 미라벨라의 가느다란 등줄기를 타고 낯선 쾌감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생경한 감각이 두렵고 겁이 나 미라벨라가 약간 울먹였지만, 작고 부드러운 여체는 반응이 빠른 편이었다. 그녀의 조그만 구멍은 기특하게도 두 오라버니의 손길에 곧이곧대로 반응하여 어설프게나마 깊은 안쪽으로부터 서서히 촉촉한 애액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하읏, 오라, 버니! 느낌이, 이상해요…… 흑.”

에일레스는 잠시 기구를 사용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예상보다 안쪽이 더 빠듯한 듯해 촉진으로 대신하기로 결정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여동생은 경험이 그다지 많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레이든이 조그만 음핵을 붙잡고 괴롭히며 놓아 주지 않는 동안, 그는 바짝 긴장한 작은 구멍이 충분히 이완될 수 있도록 발갛게 달아오른 질 입구를 마사지했다. 그는 한참을 부드러이 문질러 준 뒤, 마침내 안쪽까지 젖었다는 판단이 들자 신중하게 손을 밀어 넣었다.

“음, 입구가 좁은 편이긴 한데 생각보다 꽤 아파하네.”

“흐읏! 아, 읏…….”

“벨, 아래에 너무 힘주지 말고. 응?”

미라벨라의 음부는 이제 윤활용 젤이 전혀 필요치 않을 정도로 폭 젖어 있었다. 투명한 애액이 분홍빛 소음순과 그 주위에 솜털처럼 귀엽게 난 음모를 죄다 적시더니, 새하얀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려 르시엘의 제복 바지에도 음란한 얼룩을 만들었다.

에일레스는 기름한 손가락 두 개를 여동생의 비좁은 질 안에 느릿하게 삽입했다. 비스듬히 겹친 손가락을 입구에 걸쳐 질 아래쪽을 적당히 압박한 다음, 빙글 돌려 가며 천천히 진입하자 빠듯하긴 해도 끝까지 들어갔다. 손가락 사이의 오목한 부분이 질 초입에 걸릴 때까지 완전히 밀어 넣은 뒤에는, 안쪽에서 손가락을 구부려 촉촉하게 달라붙는 내벽을 세심하게 더듬었다.

“아, 너 위쪽을 좀 더 잘 느끼는구나. 여기쯤?”

“아흣……!”

미라벨라는 최초의 삽입 때 짧은 비명을 내지르긴 했지만, 미리 충분히 적셔 둔 터라 크게 아파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갑작스러운 이물감에 마냥 힘겨워 하던 여린 점막은 흥분으로 볼록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점마다 꾹 눌러 가며 슬슬 문질러 주자, 그곳은 오히려 더 조르듯 그의 손가락에 착 감겨들었다.

‘읏, 기분이, 하아, 너무 이상해…….’

처음 겪는 강한 자극과 성적 쾌감으로 미라벨라의 눈앞은 하얗게 물들어 갔다. 에일레스 오라버니는 의사나 마찬가지라지만, 그래도 이런 곳을 검사받는 건 너무……. 오라버니의 긴 손가락이 다리 사이의 부끄러운 곳을 만지고, 은밀한 구멍 안쪽을 파고드는 선명한 감각이 너무너무 창피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온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은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미라벨라는 입술을 깨물며 필사적으로 참아 보았지만 자꾸만 제 것 같지 않은 야릇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흐윽!”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차오른 쾌락은 한 번에 팡 터졌다. 미라벨라는 결국, 세 오라버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가느다란 비명을 쏟아 내며 생애 첫 절정을 맞았다. 까마득히 높은 교회의 첨탑에서 추락했다가 강제로 끌어 올려지는 듯한 자극적인 감각이 여린 몸을 몇 번이나 휩쓸었다. 작고 새하얀 발등이 바짝 힘이 들어가 뾰족해졌다가 동그랗게 말리기를 거듭하더니, 종내에는 바르르 떨리며 툭 떨어졌다.

“아, 읏, 흐으…….”

“기절했군.”

“차라리 잘 됐어, 지나치게 겁먹은 것 같아 불안했거든. 가엾기도 했고…….”

르시엘의 품에 축 늘어진 작은 몸을 응시하며 레이든이 상체를 일으켰다. 슈트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든 그는 품위 있는 동작으로 젖은 손을 닦아 냈다.

“특별한 외상은 없는 것 같은데.”

에일레스가 그렇게 말하며 정신을 잃은 미라벨라의 외음부를 꼼꼼히 확인했다. 그는 긴 손가락으로 연약한 음순을 벌리고 안팎으로 섬세하게 살펴보았다. 투명한 애액이 아직도 조금씩 흘러나오는 질구 안으로 얇은 장갑을 낀 손을 넣어 촉진하던 그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리고 의료 상자를 열어 기다란 검진용 스틱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겉보기에는 그저 투명한 유리 막대처럼 보였다.

“딱히 질 점막이 상처를 입은 흔적도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듯, 에일레스는 시약을 흡수시킨 검진용 스틱을 여동생의 질 안에 삽입했다. 경부 근처까지 깊게 밀어 넣은 채 잠시 기다렸다가 빼내었을 때, 그것은 옅은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낯빛이 차차 어두워졌다.

“…….”

“에일레스, 왜 그래?”

정신을 잃은 미라벨라의 눈꺼풀 아래에서 긴 속눈썹이 애처롭게 떨렸다. 물기를 머금은 섬세한 벨벳처럼 약간 젖어 든 채로. 그 광경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일레스가 제 형제들을 무겁게 돌아보았다.

“처녀야, 완전히 의심할 바도 없이.”

대리석 조각처럼 견고한 레이든의 무감한 낯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그 말은 즉, 라이오넬 공작가의 가정 교육 지침서에 추가하여 그들의 여동생에게 가르쳐야 할 필수 과목이 하나 더 늘어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 * *

“……‘그걸’ 가르쳐야 한다고?”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더 흐른 뒤. 라이오넬가의 형제들은 레이든의 집무실에서 난감해하며 둘러앉아 있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미라벨라는 기진맥진하여 깊은 잠에 빠진 채였다. 젖은 다리 사이를 조심스럽게 닦고 옷매무새를 정리해 준 에일레스가, 그녀를 긴 카우치 위에 눕히고 자신의 재킷을 벗어 덮어 주었다. 그는 지금 내가 네 오라버니라고, 널 집으로 데려가려 온 것이라 말해 주었을 때 환한 기쁨으로 물들었던 미라벨라의 작은 얼굴이 떠올라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가르치지? 설마 이것도 직접? 형들이랑 내가?”

“아마도.”

“사실 뭐, 진짜 여동생은 아니니까, 못할 건 없지만…….”

르시엘이 난감한 얼굴로 깊이 잠들어 있는 미라벨라의 앳된 얼굴을 흘깃거렸다.

“아니, 좀, 너무 어리기도 하고……. 나 좆이 안 설 거 같은데.”

“르시엘이 발기부전인 건 둘째 치고, 미라벨라를 어떻게 설득할 건데?”

에일레스가 다소 날카롭게 말했다.

“대체 누가 문제가 있다는 거야.”

무척 자존심이 상한 듯 약간 벌게진 낯으로 르시엘이 옆에서 으르렁거렸다.

“저 애는 우리를 피가 섞인 혈육으로 알고 있어. 시집가기 전에 오라버니와 그런 걸 연습하자는 말을 누가 받아들이겠어?”

“해야 돼. 이 일이 잘 해결되는지에 따라 향후 가문의 입지가 크게 달라질 거다.”

레이든이 제 동생들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답했다. ‘라이오넬 공녀’를 통해 이번 문제를 해결하는 대가로 황제는 정치적으로도 유리한 위치를 안겨 줄 몇 가지 이권은 물론, 동쪽 광산의 채굴권과 항로 무역의 우선권까지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가문에서 추진 중인 주요 사업의 세를 크게 확장시킬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또한 그는 가주였다. 표면적인 이해관계 외에도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사항까지 따져서 멀리 볼 필요가 있었다. 동생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먼 미래의 일까지도.

“황제 폐하께서 건재하시니 황좌의 주인이 바뀌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미래는 어찌 될지 모르는 법이다. 특히 황태자와 우리 가문의 관계가 멀어진 지금, 다들 물어뜯을 기회만을 찾고 있어.”

“그렇지.”

“……그리고 황제 폐하께서도 우리를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으신다. 본디 외척이란 그런 거야. 이번 일을 제대로 성공시키지 못한다면 좋은 구실을 안겨 주는 셈이지.”

“그래, 무슨 뜻인지 잘 알겠어.”

에일레스가 낮은 한숨과 함께 동의했다. 곁에서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던 르시엘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우리가 직접 하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나.”

“황제 폐하께서는 ‘그 일’에 관해 완벽한 수준의 교육과 철저한 보안을 요구하셨다. 만약 공작가 내에서 해결하기 어렵다면, 직접 사람을 보내 주겠다고 하셨어.”

중앙 대륙 내에서도 나라별로 향유하는 문화가 다르긴 했지만, 외국의 왕족이나 귀빈이 방문했을 때 밤 시중을 들 여인을 보내 주는 행동을 미덕으로 여기는 곳들도 많았다. 그런 나라에서 손님이 올 것을 대비해 황성에는 몇 사람의 고급 코르티잔들이 별궁에 따로 머무르고 있었다. 그리고 사내들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실전을 통해 이들을 가르치는 남성 접대부도. 황제가 말하는 건 그런 이들을 선생으로 보내 주겠다는 뜻일 것이다.

“창부에게 맡기는 건 절대 안 돼.”

에일레스가 싸늘해진 얼굴로 못을 박았다.

“그렇지, 그건 나도 좀…….”

르시엘이 동조하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든 역시 코르티잔을 교육하는 남성 창부에게 미라벨라를 내주는 일은 도의적으로 내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의견은 빠르게 하나로 모아졌다.

“그럼 어떻게 시작하지?”

“일단 한 명씩 돌아가면서 개별 수업을 진행한 뒤 추후의 교육 방향과 진도를 상의하여 결정하기로 할까.”

“한 명씩 돌아가면서? 일대일로 하자고?”

무심결에 되묻던 르시엘은 문득 제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걸 깨달았는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 여동생에게 이런 걸 가르친다는 것부터가 이상했지만, 여러 명이 동시에 하는 건…… 더 이상하지 않은가.

“아니, 내 말은…….”

“그것 외에도 가르쳐야 할 과목이 수두룩해. 그에 대한 배분과 일정도 상의해야 하고.”

다행히 에일레스는 그 말을 못 들은 체해 주었고, 레이든은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제 할 말만을 계속했다.

“그럼 순서부터 정하지. 누가 먼저 시작할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곤히 잠든 미라벨라를 바라보며 에일레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난 내일부터 마법 학회의 세미나가 있어서 곤란해. 아마 대략 2주 정도는 외부에 머무를 거야. 운이 좋으면 일정이 축소될 수도 있긴 하지만.”

“좋아.”

레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르시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르시엘, 너는?”

“나?”

갑자기 형들의 시선이 동시에 자신에게로 향하자 르시엘은 본능적으로 스프링처럼 튕겨 일어났다.

“모레부터 비번인 걸로 알고 있는데.”

“윽, 그렇긴 한데…… 좀 봐줘. 아무래도 처음은 좀…… 부담스럽다고.”

자신을 사이에 두고 오라버니들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 줄도 모른 채 단잠에 빠져 있는 ‘여동생’을 힐긋거리며 르시엘이 말끝을 흐렸다. 숱 많은 적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귀가 얼핏 붉어진 것처럼 보였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어도 처음이 부담스럽기는 다들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 다 성인이 된 지 오래였으며, 유서 깊은 공작가의 자제라는 배경을 차치하고라도 누구나 호감을 보일 만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문란한 생활을 해 오지는 않았지만 또 완전히 숙맥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20대 초반에서 후반의 성인 남자에게 요구되는 적정한 수준의 경험치를 보유했다고나 할까.

그런데 이제 갓 성년이 된, 그것도 자신을 오라버니라고 믿고 있는 순수한 소녀에게 성애를 가르쳐야 한다니. 그것도 단순한 잠자리 교육을 넘어 어떤 플레이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음란한 몸으로…….

르시엘이 슬쩍 시선을 피하자 레이든의 반듯한 미간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하지만 그는 다른 말을 얹는 대신 긴 다리를 움직여 고풍스러운 마호가니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캘린더를 가져와 다음 주의 일정을 체크하기 시작했다.

“그래. 처음은 내가 하지.”

잠시 동안 스케줄표를 넘겨 보며 일정을 조율하던 그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조별 과제의 가장 곤란한 역할은 역시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연장자의 몫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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