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Ⅰ. 집에 온 걸 환영해 (2/17)

Ⅰ. 집에 온 걸 환영해

미라벨라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도착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야. 피곤하면 좀 자도 괜찮고.”

“네?! 네…….”

우아한 달빛을 그대로 담아낸 듯 빛나는 은발을 지닌 남자. 같은 세상에서 숨을 쉬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귀족적인 남자와 함께, 태어나서 처음 보는 고급스러운 마차를 타고 수도로 향하고 있다는 현실이.

바로 어제, 아니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그녀는 성 루베이도 학원 기숙사의 가장 초라한 방에서 눈을 떴다. 보호자가 되어 줄 가족은커녕 먼 친척이나 후견인조차 없는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 그 말은 즉, 지금껏 그녀가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였다는 뜻이다.

그러니 미라벨라는 이제 와 누군가 자신을 찾아올 거란 기대는 꿈에서조차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럼, 제 여동생을 지금 바로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서류상의 문제는 없을 겁니다. 확인해 보시죠.>

하지만 불과 몇 시간 전.

성 루베이도 학원을 찾아와 공증인의 서명이 첨부된 흠잡을 데 없는 서류를 제출한 키가 큰 남자는, 믿을 수 없는 말과 함께 그녀를 데리고 나왔다.

<네 어머니 성함이 레이디 이스넬이 맞니? 넌 지난달에 열여섯 살 생일이 지나 성년이 되었고.>

<……네, 맞아요.>

<반가워, 나는 네 둘째 오라버니야. 아버지의 유언으로 이복 여동생의 존재를 알게 된 뒤 우리 형제들은 지금껏 널 찾고 있었어. 비록 정부에게서 난 자식이라 해도 가문의 핏줄을 거두지 않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

여러 가지 복잡한 절차를 동반하는 모든 수속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미라벨라는 이미 낡은 짐가방을 챙겨 그를 따라 커다란 마차에 타고 있었다.

‘꿈일 거야.’

미라벨라는 그런 생각으로 아까부터 몇 번이나 몰래 스스로를 꼬집어 보았지만, 잠에서 깨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르페르트 제국 양식의 견고한 마차는 가파른 산길을 달리면서도 바퀴가 덜컹거리는 흔한 소음 한 번 내지 않았고, 따라서 두 사람만 타고 있는 마차 안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그녀는 긴 다리 한쪽을 접어 반대편의 무릎 위에 가볍게 올린 자세를 취하며, 맞은편의 좌석에 앉은 남자를 살며시 곁눈질했다.

그는 미라벨라에게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마차의 창밖을 응시한 채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고 있었다. 성 루베이도 학원은 수도에서도 꽤 먼 거리의 깊은 산 속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그 시간에 도착하려면 아마도 새벽부터 마차를 출발시켰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날렵한 콧대와 턱선이 두드러지는 조각 같은 옆얼굴은 약간 피곤해 보였다.

“저…….”

게다가 그 모습은 성 루베이도의 교사들을 대할 때 줄곧 입가에 드리우고 있던, 친절한 사회적 미소와는 꽤 거리감이 있었다. 다소 차가운 인상마저 주는 무표정한 얼굴이 꼭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해서, 미라벨라는 차마 먼저 말을 붙이지 못하고 작은 어깨를 움츠렸다.

“왜 그렇게 봐?”

오랜 시간 지속된 침묵을 깬 건 의외로 은발의 남자 쪽이었다. 그는 자신을 곁눈질하는 미라벨라의 시선을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듯했다. 갑작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물어 오는 바람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네? 그, 그게……!”

“수도까지 좀 멀긴 하지. 심심한 건가?”

미라벨라가 놀란 걸 눈치채고 그는 약간 미안해하는 얼굴이 되었다. 그러더니 안심시키려는 것처럼 눈꼬리를 매끄럽게 휘며 웃어 보였다. 긴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눈은 태양을 머금은 듯 진한 금빛이었다. 새벽녘의 하늘에 떠오른 달빛 같은 서늘함과, 아침 햇살과도 같은 따스함을 동시에 지닌 남자. 하지만, 조금 전까지 보였던 차가운 표정은…….

과연 어느 쪽이 그의 진짜 모습일까. 미라벨라는 그 사이의 간극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미라벨라 양, 갈 곳은 정해졌니? 사정은 딱하지만 성년이 된 이상 여기서는 더 머무를 수 없는 게 원칙이라서. 적어도 이달 말까지는 기숙사를 비워 줬으면 좋겠구나.>

<네, 곤란하게 해 드려 죄송해요…… 선생님.>

<음, 정 머무를 곳이 없다면 사디르 후작님께서 널 거두어 주실 의사가 있다고 하셨단다. 너도 이제 성인이니까……. 혹시 정부 제도에 대해 들어 본 적 있니?>

어른이 된다는 건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제국법이 제공하는 최소한의 복지로 열여섯 살 생일이 지나기 전까지는 기숙 학교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지만, 성년이 되는 것과 동시에 이곳에서도 나가야 했으니까. 연락할 만한 가족도, 먼 친척조차도 없는 미라벨라는 이미 몇 달 전부터 초조하게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린 그녀를 이곳에 버리다시피 떠맡긴 어머니가 단지 1년 치의 수업료와 입학금만을 납부한 뒤 사라졌을 때부터 예견된 결과였다.

그렇다고 해도 성 루베이도 학원에 해마다 많은 기부금을 내는 늙은 후작을 따라 지방으로 가는 일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 미래였다. 재작년에 쉰 살을 넘긴 사디르 후작은 과거에도 미라벨라와 같은 보호자가 없는 소녀들을 네 명이나 정부로 데려간 전적이 있었고, 그 끝은 모두 좋지 않았다고 들었다.

<사디르 후작님께서 이번 주 중으로 방문하신다니 그때까지는 결정해 주렴. 최근 들어 적적하신지 빨리 데려갔으면 하신다는구나. 너도 마땅히 지낼 곳이 없는 건 사실이지 않니.>

<…….>

담임 교사로부터 그 말을 들은 게 불과 이틀 전의 일이었다.

그 외에 또 다른 선택지로는, 미라벨라를 괴롭히는 것을 삶의 가장 큰 기쁨으로 여겨 졸업 후에도 그 즐거움을 잃고 싶지 않아 하는 폭력적인 동급생, 자일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었다.

퍽.

<하지 마, 자일스!>

<이게 건방지게 어디서! 곧 우리 집에 가 내 전속 하녀가 될 텐데, 자일스 님이라고 불러야지!>

<읏, 비켜 줘! 대체 누가, 네 하녀가 된다고…….>

<그게 싫으면 오갈 데 없이 거리를 떠돌며 밥을 빌어먹든가. 너처럼 생쥐같이 조그만 계집은 바로 잡혀가 사창가에 팔려 버리고 말걸? 아, 그 전에 얼어 죽으려나. 수도의 겨울은 무척 추우니까 말이야.>

사실 청소나 빨래 같은 일이라면 이미 익숙했기에 하녀가 되는 것 자체는 상관없었다. 어머니는 귀족이었고 그녀 역시 그랬지만 이제 와 그런 신분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보호자가 찾지 않고 수업료를 전혀 내지 못하게 되면서, 그녀가 반쯤은 하녀처럼 기숙사의 잡일을 도맡아 하기 시작한 지도 이미 몇 년이나 흘렀으니까.

실제로도 미라벨라는 숙식이 제공되는 일자리를 찾기 위해 신문의 구인란을 틈틈이 살펴 여러 곳에 지원서를 보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경력이 없는 데다 귀족이라는 신분이 오히려 발목을 잡은 탓에, 미라벨라를 받아 주려는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하지만 자일스의 전속 하녀가 된다면 그녀의 주 업무는 그가 기분이 좋지 않은 날 샌드백이 되거나, 친구들과의 유희로 다트 게임을 즐길 때 과녁을 대신하여 오들오들 떨며 서 있는 일 따위가 될 게 분명했다. 몸만 자란 아이처럼 성정이 거칠고 인내심이라고는 없는 자일스가 그녀를 제 하녀로 삼고자 하는 의도는 뻔했기에 이쪽도 끔찍한 선택지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음, 그러고 보니 배가 고플 때가 됐겠구나.”

미라벨라의 작은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던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 아니요. 딱히…….”

꼬르륵.

하지만 미라벨라가 급히 대답하며 두 손을 내젓기가 무섭게, 배 속에서 창피한 소리가 흘러나와 조용한 마차 안을 울렸다. 무리도 아니었다. 어제 점심때 요리사의 심부름을 한 뒤 얻어먹은 마른 빵 한 덩이가 그녀의 마지막 식사였으니. 그나마도 오늘 눈을 뜬 뒤부터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기숙사 식당의 차디찬 바닥에 쪼그려 앉아 몇 시간을 손질했던, 커다란 바구니 하나 가득 담긴 양파 향을 떠올리자 또다시 코끝이 매워지고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순식간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미라벨라의 얼굴을 못 본 것처럼 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려주며 그가 물었다.

“뭘 줄까, 사과, 아니면 복숭아? 주스도 있고.”

“저, 저는 아무거나 다 좋아요.”

“그래, 잠시만 기다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의 빈 의자 뚜껑을 열었다. 마차의 좌석 안쪽은 수납이 가능하도록 속이 텅 비어 있는 구조였다. 그가 안에서 무언가를 찾는 동안 미라벨라는 주저하며 질문했다.

“저기…… 이제 어디로 가요?”

“집이지.”

그가 간단히 대답했다. 집…… 미라벨라는 마치 입 밖으로 내서는 안 될 금지된 주문을 외우듯이 그 달콤한 단어를 웅얼거렸다.

마차 한쪽의 선반 위에는 그녀가 들고 온 초라한 짐가방이 놓여 있어 이 상황이 꿈이 아닌 분명한 현실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하지만 미라벨라는 어쩐지 ‘집’이라는 단어를 제 입으로 말했다간 이 모든 게 신기루와 같이 단숨에 사라질 것처럼 느껴져 두려웠다.

“그리고, ‘저기’가 아니야. 미라벨라.”

그는 어느새 과일이 담긴 은접시를 무릎 위에 올려 두고 작은 칼로 능숙하게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후광이 비치는 듯한 금안이 자신을 똑바로 향하고, 타인의 입에서 갑작스럽게 제 이름이 불리자 그녀는 또다시 어깨를 작게 웅크렸다. 다행히 그는 조금도 책망하지 않는 어조로 부드럽게 말했다.

“아까 내 이름을 알려 줬을 텐데.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도.”

“……에, 에일레스 오라버니.”

미라벨라는 아까부터 몇 번이나 속으로 연습했지만 차마 소리 내어 부르지 못한 호칭을 얼떨결에 더듬거렸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다시 한번 미소 지으며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그래, 벨.”

순간, 미라벨라는 정말로 이 모든 게 꿈결처럼 사라져 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되어 몇 번이나 동그란 눈을 깜빡거렸다.

* *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자녀가 책임감과 자립심을 갖춘 품위 있는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하여, 단체 생활을 통한 인내심과 자립심을 길러 주려는 의도로 가정 교사를 초빙하는 대신 기숙 시설이 있는 아카데미에 입학시키는 건 르페르트 제국에서 흔한 교육 방식이었다.

그러나 수도와 다소 멀리 떨어져 한적한 외곽지에 지어진 성 루베이도 학원은, 일반적인 귀족 자제들을 위한 학교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이곳은 가문의 명예와 품위를 그 무엇보다 중시하는 귀족 집안에서 ‘존재만으로도 곤란했지만’, 완전히 배척할 수는 없는 아이들을 성년이 될 때까지 맡아 교육하는 시설이었다. 예를 들면 하녀나 정부의 몸에서 본 사생아라든가, 또는 귀족 가문의 철없는 아가씨가 호위 기사와 정을 통해 아이를 낳은 경우라든가.

그 태생이 어떻든 간에 어린아이에게는 죄가 없다는 게 일반적인 제국민들의 정서였다. 설령 배우자의 부정으로 태어난 사생아라 할지라도, 혼인 생활을 유지할 생각이라면 너그럽게 포용하는 것이 덕성 높은 부인의 올바른 덕목으로 평가되었다. 반면,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어린아이를 보호하지 않고 내치는 행위는 큰 비난을 면치 못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 역시 정작 배우자의 부정을 알게 되고 사생아를 거두어야 하는 입장이 된다면 평정심을 잃는 모순적인 면을 가지고 있었다. 관대한 마음으로 용서하고 서자를 거둔다고 한들, 그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매일 한 집에서 얼굴을 마주하는 건 내키지 않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성 루베이도 학원은 이러한 특수성이 녹아 있는 각종 이해관계가 모여 탄생한 기관이었다. 일정한 수업료와 생활비만 부쳐 주면 더 이상 양육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뿐더러, 표면적으로는 기숙 학교에 보내 정규 교육을 마치도록 한 셈이니 어린아이를 매정하게 버렸다는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게다가 부정을 저질러 가정불화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 역시 배우자의 눈치를 상대적으로 적게 볼 수 있었으며, 제 자식에 대한 죄책감도 덜 수 있었으니 이보다 편하고 효율적인 방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물론 보호자가 큰 관심을 두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일반적인 아카데미에 비하여 학업 성취도가 형편없이 낮다는 단점은 있었다. 아이가 속한 가문에서는 성인이 될 때까지 필요한 모든 경제적인 지원을 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데려가 제 앞가림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하나 자녀에 대한 마땅한 관심과 애정보다는 그저 의무를 다한다는 생각이 컸다. 자연스럽게 가르치는 선생들 역시 매너리즘에 사로잡혀 열에 아홉은 열의가 없을 수밖에.

그 결과 교육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부모의 관심에서 벗어난 몇몇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다양한 문제를 겪기도 했다.

미라벨라는 그중에서도 특히 좋지 않은 케이스였다.

<엄마아! 잘못했어요, 흑,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얘는, 버리긴 누가 버린다는 거야? 열 밤 자면 데리러 온다고 했잖아. 얼른 들어가!>

<흐윽, 나 엄마랑 같이 살래! 이제 밥도 조금만 먹고, 울지도 않을게요…….>

미라벨라가 성 루베이도 학원에 맡겨진 건 여섯 살 때였다. 열 밤만 자면 데리러 오겠다던 어머니는 스무 밤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어린 미라벨라가 셀 수 있는 모든 숫자를 전부 넘어설 만큼 시간이 흐른 뒤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 언제 와요……? 나 이제 버섯도 잘 먹고, 혼자서도 안 울고 잘 자는데, 그러니까, 흑…….>

성 루베이도 학원에 오던 날 아침, 어머니가 처음으로 사 준 토끼 인형. 새하얀 토끼의 보송보송한 귀는 이미 눈물로 젖어 꼬질꼬질해진 지 오래였다. 어머니로부터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는 게 두려웠던 어린애는, 엄마가 마차를 타고 사라진 정문 앞 큰길이 한눈에 보이는 기숙사 뒤편의 언덕에 동그마니 앉아 온종일 기다렸다. 몇 년 뒤, 새로운 애인과 함께 외국에서 지내던 어머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부고를 접할 때까지 매일을.

미라벨라의 어머니는 몰락한 남작가의 외동딸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손바닥만 한 영지와 작위가 전부인, 찢어지게 가난한 지방 귀족의 딸. 그렇다 할지라도 싱그럽게 반짝이는 젊음은 가장 큰 자산이었으므로, 꽃처럼 아름다운 그녀에게 구애하는 남자는 많았다. 만약 그녀가 그들 중 인품이 바르고 신실한 청년을 골라 결혼했더라면, 미래는 풍족하진 않더라도 아담한 거실을 데우는 벽난로처럼 따사롭고 안온하였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고작 그 정도에 만족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었고, 가질 수 없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대부분 그렇듯 불행을 가져왔다.

미라벨라가 지닌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 중 대부분은 어머니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았던 날들이었다. 은퇴 후 지방으로 내려온 예순 살이 훌쩍 넘은 부유한 귀족부터, 외국 출신의 망명한 대부호, 본부인과의 관계를 곧 정리할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는 말을 근 몇 년이나 했던 어느 백작까지. 어머니의 애인이 바뀔 때마다 미라벨라가 사는 곳도, 아버지라 불러야 하는 남자도 달라졌지만 그들 중 누구도 진짜 아버지다운 사람은 없었고, 진짜 집이라 할 수 있는 곳도 없었다.

<너만 아니었어도 내가 이렇게 살지는 않을 텐데…….>

새 연인의 아들만 낳으면 본부인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까. 미라벨라를 낳을 때 산욕열을 크게 앓아 다시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된 어머니는 술만 마시면 어린 딸을 원망했다.

동화책에서나 볼 수 있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은 미라벨라가 가장 간절히 꿈꾸고 바라는 것이었다. 그녀를 두고 떠날 리 없는 다정하고 상냥한 어머니와 든든한 아버지, 친절하고 우애 깊은 형제들, 그리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아늑하고 따뜻한 집……. 그중 하나만이라도 갖게 해 달라고, 미라벨라는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었던 마지막 해의 크리스마스까지도 간절히 기도했다.

* * *

“……아앗!”

수도와 가까워지면서 제법 속도를 내던 마차가 뾰족한 돌부리에라도 걸렸는지 한 차례 크게 덜컹거렸다. 맞은편에 앉은 에일레스는 별다른 미동조차 없이 본래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차에 익숙지 않은 미라벨라의 작은 몸은 사정없이 흔들렸고, 그녀는 하마터면 좌석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나동그라질 뻔했다.

“에일레스 님, 아가씨! 정말 죄송합니다.”

앞쪽의 마부석에서 몹시 당황하며 사과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괜찮니, 벨?”

“아…….”

에일레스가 서둘러 붙잡아 준 덕에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일은 면했지만, 미라벨라의 손에 들려 있던 사과 주스 병은 떨어지며 바닥에 부딪혀 처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안에서 쏟아진 내용물이 그녀의 옷과 마차의 바닥에 깔린 카펫을 흠뻑 적셨고, 깨진 유리조각의 파편이 튀어 올라 손등을 스쳤다.

“저, 정말 죄송해요! 이 카펫은 도착하는 대로 제가 깨끗하게 세탁을…….”

“다치지 않았니? 어디 봐.”

당황한 미라벨라가 팔을 뻗어 젖은 카펫을 살피려는데, 그보다 더 빠르게 에일레스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는 유리 파편에 긁힌 상처로 붉은 핏방울이 맺힌, 하얗고 작은 손등을 주의 깊게 살폈다.

“죄송해요…….”

울상이 된 미라벨라가 제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다시 한번 사과했다. 바닥을 적신 사과 주스는 그녀의 빛바랜 외출용 드레스 위로도 쏟아져 내려 옷자락을 끈적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정교한 자수가 새겨진 부드럽고 푹신한 카펫은 미라벨라가 입고 있는 낡은 옷보다도 수백 배, 수천 배는 더 고가의 물건일 게 분명했다.

“왜 자꾸 그런 말을 하지, 벨?”

오전의 햇살을 머금은 듯한 에일레스의 금빛 눈동자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건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닌데.”

“저어, 그게…….”

“잘못한 게 없으면 함부로 사과하는 게 아니야.”

“아…….”

뜻밖의 질책에 얼굴을 붉혔던 미라벨라는, 흐릿하게 바랜 치맛자락이 젖으면서 몸에 밀착되어 그 아래 뽀얀 허벅지의 윤곽이 투명하게 비치는 것을 발견하고 다급히 떼어 냈다. 그것을 못 본 체하며 에일레스가 그녀의 다친 손을 다시 잡아 제 쪽으로 슬쩍 당겼다.

“잠깐 실례할게.”

“……!”

에일레스는 부드러운 피부가 상처 입어 붉은 핏방울이 맺힌 손등 위로 가볍게 손을 뻗었다. 다음 순간 그의 긴 손끝에서 시리도록 새하얀 빛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손등에 난 상처가 스르륵 사라졌다. 눈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다치기 전과 같이 되돌아간 제 손이 믿기지 않아 미라벨라의 눈이 커졌다.

“마, 마법이에요?”

“……마도사야. 치유 계열.”

봄 하늘을 담은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에일레스가 약간 곤란한 듯 웃었다.

“나, 마탑에서 일하고 있거든.”

“와…….”

과거와 달리 마법이란 영역이 도식화 혹은 수식화되면서, 마탑은 마나를 연구하고 해석하는 연구 기관적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베일에 싸여 있던 마탑의 부설 아카데미는 개방되었고 마도사에 대한 통상적인 인식, 예를 들면 어두운 탑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며 수정구를 들여다본다거나 종일 정체 모를 약물을 만들어 낼 것 같은 이미지 또한 크게 변화했다.

하지만 예전과는 그 위세가 조금 다른 방향이긴 해도, 마도사가 갖는 사회적 위치나 명예는 과거와 비교해도 결코 적지 않았다. 마법이 수학적, 물리학적인 영역에 보다 가까워졌다 해도, 일단은 소수의 선택받은 자들만 타고나는, 마나라는 귀하고 특수한 재능이 뒷받침되어야 시작할 수 있다는 사실은 변함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라벨라는 태어나서 한 번도 마도사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대단한 사람이 비록 반이지만 자신과 피를 나눈 오라버니라니.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아 그녀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왠지 조금 전보다 더한 거리감과 함께 더욱 위축되는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그냥 직장인일 뿐이야, 별로 특별한 건 없어.”

“…….”

“밖에서는 웬만하면 잘 안 쓰려고 해서.”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읽어 낸 에일레스가 다소 씁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미라벨라가 용기를 내어 질문한 것은, 그로부터 약간의 시간이 더 흘러 마차가 수도와 연결된 도개교를 막 지났을 때쯤이었다.

“수도에 가면 오라버니와 둘이서 살아요?”

잠시 잊고 있었다는 듯 에일레스가 눈썹을 살짝 치켜떴다.

“아, 내가 말해 주지 않았었나. 다른 형제들과 함께 지낼 거야.”

“다른 형제들이요?”

“그래, 네겐 오라버니들이지. 두 사람 더 있어, 난 그중 가운데고.”

“……저, 다른 분들도, 다 친절해요?”

한동안 망설이다 꺼낸, 중간에 ‘에일레스 오라버니처럼’이라는 말이 생략된 질문에 그가 의외라는 듯 낮은 소리로 쿡쿡 웃었다.

“음, 글쎄. 뭐라고 해야 하지?”

아름다운 외모와는 대조적으로 약간 허스키한 저음의 목소리가 꽤 매력적으로 들렸다.

“역시 직접 겪어 보고 판단하는 쪽이 낫지 않을까? 먼저 말하면 편견이 앞선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아, 네…….”

‘에일레스 오라버니가 다정한 건 원래 상냥한 성격이라서일까? 아니면…….’

미라벨라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아버지의 핏줄에 대한 의무감으로 미라벨라를 거두었다고 말했지만, 다른 오라버니들도 호의적일 거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정당한 혼인 관계에서 나고 자란 귀족 가문의 후계자들이 사생아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진다는 게 사실 더 이상한 일이니까.

“겁먹을 거 없어, 벨. 내 어머니는 막내를 낳고 1년도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거든. 설마 2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아버지 곁에 아무도 없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걱정스러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에일레스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물론 네 존재는 의외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두에게 잘된 일이었고.”

‘모두에게 잘된 일이라니?’

미라벨라가 막 입을 열어 그게 무슨 뜻인지 물으려는 순간, 점차 속도를 줄이던 마차가 멈추어 섰다.

“도착했습니다.”

바깥에서 마부가 고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자, 꿈속에서도 그려 보지 못한 웅장하고 화려한 저택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와…….”

여기가 앞으로 살게 될…….

우리 집.

미라벨라는 감탄하는 동시에 왠지 모를 두려움으로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사이 먼저 마차에서 내린 에일레스가 그녀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정중히 한 손을 내밀었다. 미라벨라가 쉽게 그 손을 잡지 못하자, 그는 부드러이 시선을 맞추고 긴 눈매를 매끄럽게 휘어 보이며 속삭였다.

“집에 온 걸 환영해, 벨.”

* * *

공작가의 고풍스러운 대저택은 어스름한 저녁 기운으로도 감출 수 없는 웅장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섬세한 양각이 조각된, 높다란 정문 앞에서 미라벨라는 차마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잠시 멈추어 섰다. 그녀의 키를 훌쩍 뛰어넘는 정문을 수호하듯 지키고 선 대리석 조각상, 가문의 위세를 나타내는 찬란한 황금빛 문장. 그 모든 것들이 이곳은 네가 감히 범접할 수 있는 공간이 아니라는 듯 작은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 같았다.

“이만 들어갈까?”

“아, 네…….”

미라벨라가 느끼고 있는 부담감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에일레스는 걸음을 재촉하지 않고 곁에서 잠시 기다려 주었다. 마차를 타고 오는 길에 그녀가 받게 될 가문의 이름이자 그의 성이 라이오넬이라는 걸 전해 들었을 때, 미라벨라는 한여름에 눈이 내렸다는 말을 들은 것만큼이나 크게 놀랐다.

황실과도 버금가는 위용을 지닌, 가장 명망 있고 오래된 귀족 가문 중 하나. 라이오넬 공작가의 명성은 제국의 세 살 먹은 어린아이라도 알 만큼 유명했다. 사교계의 정보나 소식과는 한참 거리가 먼 미라벨라도 그 이름은 들어 본 바 있었다. 게다가 현 황제의 황후가 선대 공작의 손위 누이라 하니, 바로 이들의 고모가 되는 격이었다.

몇 개나 되는 문을 통과하여 실내로 들어서자, 정문 앞에서도 보았던 커다란 황금빛 문장이 높다란 천장을 가득 메운 채 번쩍이는 광경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르페르트 제국의 국조(國鳥)를 형상화한, 라이오넬가(家)를 상징하는 문장. 어머니는 지금껏 미라벨라에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누구인지도 몰랐던 친아버지가 이런 대단한 가문의 사람이었을 줄은…….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이곳으로 오는 동안 미라벨라가 조심스럽게 질문했을 때, 에일레스는 그런 걸 물을 줄 몰랐다는 듯한 얼굴로 간략하게 답했다.

“아버지? 귀족적인 분이셨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그 지위에 딱 적합한.”

“아, 네…….”

딱히 긍정적이지도, 그렇다고 부정적으로도 들리지 않는 답이었다. 하지만 에일레스는 아버지에 대해 그녀에게 더 자세히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듯했다. 사생아에 불과한 자신이 더 캐묻는 게 주제넘은 일인 것 같기도 해서 미라벨라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오셨습니까, 에일레스 도련님.”

입구에서 가장 먼저 그들을 맞아 준, 나이가 지긋한 집사가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아가씨의 방은 분부하신 대로 햇살이 잘 드는 3층의 동쪽에 준비해 두었습니다.”

“네, 수고했어요. 아, 르시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요?”

‘원래 상냥한 성품일 것’이라는 짐작이 틀리지 않은 듯, 에일레스는 사용인들에게도 함부로 말을 낮추지 않았다. 하인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미라벨라의 짐가방을 받아 주려 달려오자, 에일레스는 가볍게 사양하며 홀 중앙 쪽으로 긴 다리를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미라벨라의 낡은 옷보다 훨씬 좋은 공단을 사용한, 말끔한 유니폼 차림의 하녀들 역시 하나같이 친절했다. 감히 발을 내딛기가 두려울 정도로 반짝반짝 윤이 나는 바닥, 높은 천장에서 빛을 내는 샹들리에, 모든 것이 완벽하게 조형된 것처럼 아름다운 대저택. 이곳에 어울리지 않고 겉도는 건 오직 초라한 차림을 하고 잔뜩 주눅이 든 그녀 하나뿐이었다.

미라벨라는 메인 홀 양옆으로 이어지는 나선형의 대리석 계단을 앞장서 성큼성큼 오르는 에일레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떤 옷이든 세련되게 소화할 게 분명한 직각의 어깨와 넓은 등 뒤로, 달빛을 머금은 듯 아름다운 은발이 부드러이 흩날렸다.

문득 그의 손에 들려 있는 낡고 투박한 짐가방이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기숙사를 나올 때 낑낑대며 들고 온, 원래는 미라벨라의 것인 그 가죽 가방을 에일레스는 한 손으로 가볍게 쑥 들어 올렸다. 떨어질 듯 무거웠던 팔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던 순간을 상기하자 미라벨라의 마음은 도리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마차를 오래 타서 피곤할 거야. 웬만하면 그냥 쉬도록 하고 싶지만, 형제들과는 빨리 인사를 나누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괜찮니?”

“네, 저는 괜찮아요.”

“르시엘은 아직 밖이라는데, 일 때문에 가끔 며칠씩은 집에 못 들어올 때도 있어서. 레이 형에게만 들렀다가 네 방으로 데려다줄게.”

고풍스러운 회화와 태피스트리가 장식된 긴 복도를 걸으며 에일레스가 설명해 주었다.

“레이든은 분명 아직까지도 집무실에 있을 게 확실하거든. 침실보다도 집무실을 더 좋아하는 변태라서 말이지.”

말하면서 그는 예의 허스키한 저음으로 작게 웃었지만, 곧 어린 여동생에게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애매한 농담이었다고 판단한 듯 웃음을 거둬들였다. 물론, 그가 말하려던 건 단지 레이든이 잠자는 것보다 일하는 쪽을 좋아한다는 문장 그대로의 의미였다.

가주의 집무실은 바로 위층에 있었다.

“현 라이오넬 공작인 그는 이제 네 법적 보호자이기도 해.”

마침내 2층의 서쪽 복도 끝에 이르자 굳게 닫힌 커다란 갈색 문이 보였다. 외부의 소음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두꺼운 호두나무 목재로 만들어진 문에는 정교하면서도 절제된 양각 문양이 조각되어 있었다.

“원래부터 일을 좋아하는 성향이긴 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공작 위를 승계한 이후로 레이든은 더욱 바빠졌어. 이전부터 여러 가지 사업을 병행하고 있었던 데다 영지의 일과 가주가 신경 써야 할 핵심적인 부분까지도 전부 책임지게 되었으니까.”

그 앞에 멈춰 선 에일레스가 가볍게 문을 노크했다.

“나야, 레이.”

안으로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힌 미라벨라는 가엾게도 떨고 있었다.

‘만약 다시 돌려보내지면 어떡하지…….’

에일레스는 그녀가 자신들과 같은 아버지를 둔 남매간이라고 했지만, 부친이 이미 세상을 뜬 이상 이복 오라버니들로서는 굳이 그녀를 거두어야 할 의무가 없었다. 만약 그녀가 가문에 도움을 줄 만큼 어떠한 분야에 특출난 재능을 보이는 재원이라거나, 어느 가문에서든 혼맥을 맺길 원할 정도로 뛰어난 미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겠지만. 그 어느 쪽도 해당이 없는 미라벨라로서는 단지 그들의 순수한 호의에만 의존해야 했다.

“들어가자, 벨.”

그사이 에일레스는 이미 문을 열고 가볍게 안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주인의 취향일까, 젊은 라이오넬 공작의 집무실 내부는 차분한 베이지와 아이보리 톤으로 조성되어 있었다. 조용하고 넓은 공간을 채운 심플한 가구들은 문외한인 그녀의 눈에도 하나하나 고급스러운 자재만을 사용한 수제품으로 보였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그들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잘 다듬어 깔끔히 손질된 짧은 백금발, 냉정한 인상을 주는 청금석처럼 푸른 눈동자. 에일레스와 얼핏 이목구비가 닮은 것 같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의 사람……. 시린 냉기가 서린 듯 차게 느껴지는 그의 눈과 시선을 마주친 순간 미라벨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데려왔군, 에일레스.”

완벽이라는 단어를 사람으로 조형한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신이 공들여 빚은 조각처럼 견고한 외모와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레이든은 다소 완고한 인상을 주는 남자였다. 자신의 공간에 속해 있을 때, 게다가 늦은 시간이라면 대부분의 사람은 다소 풀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구김 하나 없는 완벽한 슈트 차림에 고급스러운 맞춤 셔츠의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운, 그야말로 약간의 흐트러짐조차도 용납하지 않는 모습은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뿜어냈다.

“이름이 미라벨라라고 했나?”

그는 첫 만남부터 다정하게 대해 주었던 에일레스와는 완전히 달랐다. 가느다란 금속제 안경 너머의 날카로운 눈동자가 미라벨라를 차분히 훑어보았다. 이 배다른 여동생을 거두면 가문에 도움이 될지, 오히려 누를 끼치지는 않을지 판단하려는 듯한 가주의 시선으로.

미라벨라는 그의 차가운 눈을 마주하자 마치 입이 붙어 버린 것처럼 굳어져 얼른 답이 나오지 않았다.

“왜 대답이 없지? 설마 말을 못 하는 건가.”

얼어붙은 인형처럼 그 자리에 서 있는 미라벨라를 응시하며 레이든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서늘하고 위압적인 존재감이 자꾸만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녀는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감추지 못한 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저, 아, 안녕하세요…….”

“…….”

수도의 내로라하는 가문에서는 일곱 살만 넘어도 하지 못하게 할, 귀족 영애의 예법과는 한참 거리가 먼 인사였다.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미간을 좁힌 레이든이 뭔가를 묻고 싶은 듯한 얼굴로 에일레스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잠시 당황한 것 같았지만, 에일레스는 곧 양해를 구하는 것처럼 옅은 미소를 보이며 미라벨라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예상했잖아, 레이. 성 루베이도 학원의 선생들이 대체로 교육에 불성실하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니까. 지금부터 천천히 가르치면 돼.”

“……천천히, 그래.”

낡은 치맛자락 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자꾸 맴도는 작은 손가락에 얼음처럼 싸늘한 시선이 닿았다.

“하지만 과연 그럴 시간이 있을까.”

그는 눈빛만큼이나 차갑게 느껴지는 금속제 테의 안경을 한 차례 밀어 올리며 미라벨라에 관한 서류를 살폈다.

“나이가 어떻게 되지?”

“그게, 저, 저는…….”

“레이, 미라벨라는 올해…….”

“그만.”

단숨에 겁을 먹고 더듬거리는 그녀를 도와주려 에일레스가 나섰으나 레이든은 즉시 제지했다.

“네 입으로 말해.”

미라벨라의 나이와 이름 같은 기본적인 신상에 대해서는 물론 레이든도 이미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책상에 놓인 서류에도 자세히 적혀 있는 정보였지만, 레이든은 그녀의 입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려 했다.

“여, 열여섯이요. 지난달에 생일이 지났어요.”

“좋아. 그럼 제국법상으로 성인이군.”

들고 있던 서류를 천천히 덮어 내려놓은 그가 미라벨라를 다시 응시했다.

“예법이야 바보가 아닌 이상 금방 배우겠지. 너,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나? 하프라든가, 쳄발로 같은.”

“저어, 피아노만, 조금…….”

“그러면, 외국어는? 열여섯이면 정규 교육 과정상으로 에펠어나 뤽셀어는 수료했겠군. 둘 다 회화나 토론은 무리 없이 가능한가?”

이번에는 매끄러운 억양의 외국어로 질문이 날아왔다. 미라벨라는 물론,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망가진 눈사람처럼 동그마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제국의 복지 정책에 따라 성년이 될 때까지 성 루베이도 학원에서 쫓겨나진 않았지만, 수업료를 내 줄 보호자가 없었던 탓에 미라벨라는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그녀 몫이 되어 버린 교실 정리와 잔심부름, 그리고 기숙사에서 나온 다른 학생들의 빨래와 방 청소까지……. 이런 잡일을 하느라 수업 시간에 늦는다거나 과제를 빠뜨려도 누가 신경 쓰지도, 혼을 내지도 않았다. 학습 진도가 뒤떨어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분명 쫓겨나고 말 거야.’

그녀의 작은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어느 가문에서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가주의 의견을 가장 우선시한다는 사실은, 귀족 가의 생리에 무지한 미라벨라라도 알고 있었다. 레이든의 냉정한 눈빛으로 짐작해 보아 그는 이미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확실해 보였다. 사생아 출신의 이복 누이동생이 가문에 도움이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며, 일말의 동정심으로도 거둘 만한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했다.

“레이, 그런 건 좀 나중에 묻는 게 어떨까.”

자그마한 어깨를 떨고 있는 모습이 옆에서도 다 보여 안쓰러웠던지, 에일레스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이 정도 질문도 못 하나? 그리고 지금 한시가 급해, 에일레스.”

“그건 알아. 하지만 벨은 지금 몹시 지쳐 있어. 지내던 곳을 갑자기 떠나오게 되어 놀란 데다 온종일 마차에 시달렸다면, 누구라도 그렇지 않을까.”

“……벨?”

레이든이 의외라는 얼굴로 고개를 들어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 말하고 싶은 듯 보였으나 견고한 입술이 실제로 열리는 일은 없었다. 잠시 후, 그가 이쪽을 바라보지도 않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로 다시 눈을 돌리며 말했다.

“좋아, 내일 다시 이야기하지.”

“그래, 아침에 봐. 가자, 벨.”

에일레스는 여전히 떨고 있는 미라벨라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며 문 쪽으로 향했다. 그를 따라 집무실을 나서기 전, 미라벨라는 뭔가 인사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머뭇머뭇 고개를 숙였지만, 그 동작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고 이미 새로운 서류를 펼쳐 든 레이든은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 * *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뒤에 초콜릿이 든 따뜻한 우유를 한 잔 마시면 좋을 거야. 잠도 더 푹 잘 수 있을 거고.”

에일레스는 이렇게 말하며 미라벨라를 방으로 데려다주는 길에 3층의 키친 앞에 잠시 멈추어 섰다.

“……에일레스 도련님!”

마침 졸고 있던 당직 하녀가, 직접 나타난 그를 보고 화들짝 놀라 앉아 있던 의자에서 구르듯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에일레스의 주문을 받은 그녀는 곧 능숙한 손길로 핫초코를 만들어 주었다.

“고마워요, 마샤.”

따뜻한 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받아 들며 그가 잔잔한 미소를 보이자, 하녀는 미라벨라조차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얼굴을 붉혔다.

“여기가 앞으로 네가 지낼 방이야, 벨.”

에일레스를 따라 도착한 곳은 마치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이 살 것만 같은 예쁜 방이었다.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푹신한 카펫과 크림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침구, 사랑스러운 분홍빛 레이스 캐노피를 드리운 사주식 침대. 종일 긴장해 있던 탓에 다리가 몹시 아팠다. 새하얀 침대와 보라색 벨벳을 씌운 긴 소파는 무척 아늑해 보였지만, 미라벨라는 차마 앉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미라벨라 아가씨. 저는 로지나라고 합니다.”

“네, 반가워요…….”

에일레스는 침대 옆의 긴 줄을 당겨 앞으로 그녀를 담당하게 될 하녀를 호출했다. 곧 밝은 다갈색 머리카락과 녹색 눈을 지닌 쾌활한 인상의 하녀가 불려 오자, 그는 몇 가지 일들을 상세히 부탁한 뒤 돌아갔다.

“아가씨, 잠자리에 드시기 전 목욕 시중을 도와 드리겠습니다.”

방 안에 딸려 있는 넓은 욕실 안에는 몇 사람이 들어가도 공간이 남을 것 같은 큰 대리석 욕조가 놓여 있었다. 커다란 욕조 안에는 이미 더운물이 가득 차 있어 욕실 전체에 따스한 기운이 맴돌았다. 능숙하게 미라벨라를 욕실로 인도한 로지나가 그녀의 옷을 벗겨 주었다. 미라벨라는 이런 시중에 익숙하지 않아 부끄러웠지만, 머뭇거리느라 시간을 끌면 그녀의 퇴근이 늦어질 거란 생각에 로지나가 하는 대로 따르며 얌전히 있었다.

“……아가씨? 몸에 상처가…….”

목욕 시중을 도우려던 로지나의 녹색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옷을 입고 있을 땐 드러나지 않아 몰랐으나, 알몸이 된 미라벨라의 속살은 온통 울긋불긋한 멍 자국과 상처로 가득했다. 보이지 않는 곳만 골라 고의적으로 상처 입힌 흔적. 그것은 대부분 자일스의 소행이었다. 그는 재미 삼아 단단한 물건을 미라벨라에게 던져 맞히곤 했으며, 제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화풀이로 마구 때리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자일스는 부유하기로 이름난 글렌 후작가의 아들로, 비록 사생아였으나 적장자 못지않은 가문의 비호를 받고 있어 늘 기세등등했다. 그 배경에는 오랜 지병을 앓던 글렌 후작 부인이 세상을 떠난 것과, 노쇠한 후작이 나이 어린 정부와 늦게 본 막내아들에게는 관대한 편이라는 사실이 크게 작용했다. 그 덕에 자일스는 당초 아비의 인맥으로 훌륭한 커리큘럼을 갖춘 일반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타고나길 포악한 성격을 버리지 못한 그는 다른 영식들을 때리거나 괴롭혀 무려 세 곳에서 퇴학당하고 말았다. 마지막에 일레인 백작가의 손자를 크게 다치게 했을 때는 가문 전체가 비난의 대상이 되기에 이르렀기에, 그의 아버지가 서둘러 성 루베이도 학원으로 보낸 것이었다.

처음부터 미라벨라가 주된 표적이었던 건 아니었다. 자일스 패거리의 괴롭힘 대상이었던 디온이라는 하급생을 도와준 일로 눈 밖에 난 사건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뜻밖의 행운으로 조부를 만난 디온이 성 루베이도 학원을 나간 이후로는 오로지 그녀 혼자 자일스의 화를 받아 내야 했다.

이유 없는 무자비한 폭력에 강하게 저항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자일스의 아버지 때문이었다. 그는 주기적으로 아들을 보러 성 루베이도 학원을 방문했고, 그때마다 막내아들의 편의를 위해 교사들에게 후한 선물을 제공했다. 겉면에 복음서나 계시록 등 유명한 성서의 이름이 적힌 두꺼운 책 보관용 하드케이스에 실제로 뭐가 들어 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걸 받을 때마다 환해지는 담임 교사의 낯빛으로 미루어 보아, 자일스의 폭력을 고발하거나 적극적으로 맞설 경우 오히려 그녀가 죄를 뒤집어쓰고 내쫓기리라는 사실은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가씨. 물은 뜨겁지 않으세요?”

잠시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으나 로지나는 경력이 많은 베테랑 하녀였다. 곧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한 그녀는 목욕용 스펀지에 향이 좋은 비누로 거품을 내어 미라벨라의 몸을 부드럽게 씻겨 주었다. 폭신한 수건으로 남은 물기를 톡톡 두드려 흡수한 뒤에는 나비 날개처럼 부드러운 네글리제와 비단 속옷이 입혀졌다.

“피곤하실 텐데 아무 생각 마시고 푹 주무세요, 내일 아침에는 시간 맞춰 깨워 드릴게요.”

“네, 고마워요…….”

로지나가 불을 끄고 나간 뒤 미라벨라는 하얀 시트가 깔린 푹신한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했다.

‘내일 아침이면 뭔가 착오가 있었다며 다시 나가 달라고 할지도 몰라…….’

아니면, 그녀를 거두는 일이 도저히 가문에 득이 될 게 없다고 판단되어 내쫓기거나.

여기서 내쳐지면 아무 데도 갈 곳이 없다는 두려움이 마음을 깊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온종일 긴장한 상태로 마차를 타고 온 터라 에일레스의 말대로 그녀는 몹시 지쳐 있었다. 게다가 더운물에 담가 노곤해진 몸에 초콜릿이 든 따뜻한 우유가 들어가자 어느 순간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졸음이 쏟아져, 미라벨라는 곧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 * *

아침이 되어 눈을 뜬 미라벨라는 잠시 동안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며 눈을 깜빡거렸다. 익숙한 성 루베이도 학원 기숙사 맨 위쪽 다락방의 누렇게 물든 천장이 아닌, 연한 핑크빛의 사랑스러운 캐노피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여긴…….’

미라벨라는 아직 꿈속인 게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눈을 꼭 감았다 떴지만, 시야에 들어온 예쁜 물건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사이 그녀가 일어난 것을 발견한 로지나가 곁으로 다가왔다.

“아가씨, 일찍 일어나셨네요? 지금 막 깨워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로지나가 환기를 위해 커튼을 걷고 흰색 골조를 두른 십자형 창문을 활짝 열자, 이른 아침의 상쾌한 공기와 유월의 청명한 햇살이 새하얀 침구 위로 조르르 쏟아졌다.

‘아, 맞아. 어제 나는 오라버니와 함께…….’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는 미라벨라를 향해 로지나가 웃어 보였다.

“세안과 단장을 도와 드릴게요. 아침 식사를 같이하시려고 공작님과 에일레스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녀가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나간 사이, 미라벨라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부드러운 양털 토퍼는 구름처럼 폭신하였으나 왠지 모르게 몸이 무겁고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시트를 살짝 들춰 본 그녀는 화들짝 놀라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

주기가 가까워 오긴 했지만 설마 벌써 시작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그러고 보니 며칠 전부터 아랫배가 당기는 것 같고 몸이 좋지 않다고 느끼긴 했었다. 평소라면 미리 준비를 했겠지만, 어제 갑작스럽게 이곳에 온 탓에 미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미라벨라는 더럽혀진 시트를 당황한 손길로 황급히 걷어들었다.

“미라벨라 아가씨?”

그사이 화이트에 가까운 아이보리색 원피스와 그에 어울리는 리본을 챙겨 돌아온 로지나가 방문을 열었다. 그녀는 붉은 얼룩이 진 새하얀 시트를 손에 든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미라벨라를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마치 범죄 현장을 들키기라도 한 사람처럼, 미라벨라가 새빨개진 얼굴로 더듬거렸다.

“죄, 죄송해요! 세탁실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시면, 제가 깨끗하게 빨아서…….”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미라벨라를 안심시키듯 로지나가 상냥하게 웃어 보였다. 잠시 후, 다시 밖으로 나갔던 로지나는 새 시트와 속옷, 그리고 부드러운 리넨 천에 솜을 넣어 꿰맨 생리대를 가지고 되돌아왔다. 처음에 가져왔던 새하얀 원피스 대신 리본이 달린 귀여운 민트색 드레스도 함께였다. 답답한 코르셋을 조이는 걸 생략하고 활동하기 편하도록 옷을 입혀 준 그녀가, 옅은 핑크빛이 도는 백금발을 포니테일로 상큼하게 묶어 주었다.

“이렇게 입으시니 너무 예쁘세요, 아가씨!”

꼭 로지나의 칭찬이 아니더라도 단장을 마친 미라벨라는 정말 인형처럼 예뻐 보였다. 거울 속에 비친 제 모습이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잠시 넋을 잃고 바라보던 그녀는, 로지나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서둘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 * *

바로 아래층에 위치한 식당은 커다란 직사각형의 대리석 식탁이 중앙에 놓인, 넓은 홀이었다.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한 큰 창을 통해 봄날의 프리지어처럼 화사한 이른 아침의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미라벨라는 입구에서 맞아 준 집사의 안내를 받아 안쪽으로 들어섰다. 식당 안에는 레이든과 에일레스가 먼저 도착해 각자의 자리에 착석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잘 잤니, 벨?”

에일레스가 먼저 그녀를 발견하고 다정한 아침 인사를 건넸다. 그는 나갈 준비를 마쳤는지 어제보다는 한층 더 격식을 차린 복장이었다.

대리석 조각처럼 차가운 인상의 레이든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구김 하나 없이 말끔한 슈트 차림이었는데, 아침 식탁 앞에서도 여러 장의 서류를 읽으며 뭔가를 체크하고 있었다. 어제 집무실에서 만났을 때처럼 안경을 쓰고 있진 않았으나, 맨 끝까지 빈틈없이 채운 단추가 왠지 그녀의 목을 조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숨이 막혔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에일레스 오라버니.”

에일레스와는 인사했지만 옆에 앉은 레이든에게도 그렇게 불러도 좋을지 알 수 없어, 미라벨라는 선 채로 한동안 망설였다. 어제의 그는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고만 했을 뿐, 그녀를 동생으로 인정한다거나 여기서 쫓아내지 않겠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언니라고 부르자마자 바로 손이 날아왔지 뭐야! 볼이 빨갛게 부풀어서 이틀은 아예 밖을 다니지도 못했어.>

성 루베이도 학원에서 가깝게 지냈던 거의 유일한 친구, 레이첼의 말도 생각났다. 미라벨라보다 한 살 위인 그녀는 루이델 자작가의 하녀가 낳은 딸이었는데, 졸업을 반년 앞두고 가문으로 돌아갔다. 정략혼을 맺어 제 친딸을 보내기로 약속한 상대가 낙마 사고로 다리를 절게 되자, 몸이 불편한 이에게 딸을 주고 싶지 않았던 자작부인이 대신 써먹을 패가 필요해 데려간 것이었다.

다행히 레이첼의 남편은 인품이 좋은 사람이라서 그녀는 잘 지내는 것 같았고, 미라벨라를 만나러 한두 번 성 루베이도 학원에 놀러 오기도 했다. 그런 그녀도 처음 집에 갔을 때 무심코 자작가의 적녀를 ‘언니’라고 불렀다가 뺨을 몇 대나 얻어맞았다는 이야기를 떠올린 미라벨라는, 얼른 레이든의 손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긴 펜대를 우아하게 쥐고 있던 그의 손가락은 무척 길고 곧았다. 딱히 흉터가 있다거나 거친 느낌도 아니었다. 하나 저 큰 손바닥으로 맞게 된다면 절대 이틀 정도 뺨이 빨갛게 부푸는 정도로는 그치지 않으리라. 이렇게 미라벨라는 자신이 사용할 호칭을 쉽게 결정할 수 있었다. 저택에서 일하는 다른 하인들이 그를 부르는 말과 같은 것으로.

“안녕히 주무셨어요, 공작님.”

집사가 막 내려 준 커피 잔을 들어 올리던 레이든이 잠시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힐끗 건너다보았다. 탐탁지 않은 눈빛이 미라벨라를 잠시 향했으나, 다행히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다시 읽고 있던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배고프지? 얼른 앉아.”

“네.”

오도카니 서 있는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에일레스가 자리를 권했다. 하지만 그녀가 막 의자에 앉자마자 사용인들이 음식을 들여오기 시작했고, 미라벨라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간 하녀나 다름없이 생활했던 습관이 그녀를 가만히 앉아 있도록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어쩌면 곧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되면 지금 입고 있는 옷까지도 변상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뭐든 쓸모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미라벨라로서는 이런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미라벨라가 덩치 큰 하인이 들고 있는 큰 쟁반 위에서 음식 접시를 들고 와 레이든 앞에 내려놓자, 그가 한쪽 눈썹을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지?”

순간 식당 전체를 얼려 버릴 것처럼 차디찬 음성에 움찔한 미라벨라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저, 저는 그저, 식사를 나르려고…….”

“앉아.”

다소 화가 난 어조에 미라벨라는 잔뜩 기가 죽어 말없이 자리에 앉았다. 불쾌한 듯 미간을 좁히며 레이든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널 하녀로 쓰려고 이 집에 데려온 줄 아나? 대체 어디부터 가르쳐야 하는 거지?”

“죄, 죄송해요…….”

“미라벨라, 우리가 널 데려온 이유는…….”

“레이, 식사부터 하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치맛자락만 만지작거리는 미라벨라를 본 에일레스가 끼어들었다.

“출근 전 아침 식사 자리에서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잖아.”

“……좋아.”

그의 말에 납득한 레이든이 낮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르시엘이 돌아오면 이야기하자,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그러지. 그때 의논할 것도 있으니. 저 애한테 해 줄 말도 있고.”

“그럼 이제 식사할까. 어서 먹어, 벨. 배고프지?”

부드러운 말로 상황을 중재한 에일레스가 다정하게 미라벨라를 돌아보았다. 식탁 위에는 아침 식사로 들기에는 버거울 정도로 다양한 요리가 차려져 있었지만, 긴장으로 목 안이 꽉 막힌 느낌이라 도무지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한동안 머뭇거리던 미라벨라는 겨우 스푼을 들어 바로 앞에 놓인 수프 접시로 가져갔다.

‘……맛있어!’

딱 한 숟가락을 입에 넣었을 뿐이지만 충분히 익힌 감자와 리크가 듬뿍 들어간 따뜻한 수프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맛있었다. 성 루베이도 학원에서 대부분의 끼니를 해결했던, 다른 학생들이 먹다 남긴 질긴 베이컨이나 딱딱하게 마른 빵으로 끓인 죽과는 감히 비교도 되지 않는 맛이었다.

곧 쫓겨날지도 모르는 처지에 뻔뻔하다고 생각되었지만, 일단 한 스푼을 맛보고 나니 계속해서 손이 움직였다. 결국 제 몫의 수프를 깨끗이 다 비운 미라벨라는 갓 짜낸 신선한 과일 주스와 라즈베리 잼을 곁들인 흰 빵도 조금 맛보았다.

“…….”

미라벨라가 문득 레이든과 에일레스 쪽을 살짝 곁눈질하니 그들은 식탁 위에 차려진 수많은 음식들이 무색하도록 전혀 손도 가져가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은 원래 아침을 간단히 드는 편인지, 샐러드에 약간의 견과를 곁들여 조용히 식사하는 중이었다. 이미 배가 부르기도 해서 눈치를 보며 살며시 스푼을 내려놓았지만, 다행히 그들은 미라벨라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미라벨라, 식사는 충분히 했나?”

아침 식사가 끝나 갈 무렵, 의외로 레이든이 먼저 물어 왔다.

“네?! 네……. 무척 맛있었어요.”

“다행이군. 뭘 좋아하는지 몰라 다양하게 준비하도록 했는데, 입에 맞았다니.”

아마도 식탁 위에 차려진 수많은 종류의 음식들은 미라벨라를 위한 것이었던 듯했다. 조금 더 먹으라며 에일레스가 권유했지만 그녀는 도리질하며 사양했다. 너무 오랜만에 배불리 먹은 터라 여기서 식사를 더 했다간 탈이 날 것 같았다.

“그러면 이 앞으로 와서 서도록.”

레이든이 턱짓으로 제 앞을 가리켰다. 미라벨라는 잔뜩 긴장한 채로 주춤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의 맨 위쪽에 앉아 있는 그의 앞까지 걸어갔다.

“좋아, 이쪽으로 더.”

미라벨라와 레이든, 두 사람 다 백금발에 푸른 계열의 눈동자를 가졌음에도 외모가 주는 분위기는 판이하게 달랐다. 미라벨라의 머리카락이 옅은 핑크빛이 도는 따뜻한 색인 데 반해 그의 것은 시리도록 냉한 계열의 상앗빛에 가까웠다. 눈동자 역시 봄 하늘처럼 안온한 파스텔 톤의 색감과 청금석을 연상케 하는 푸른색으로 그 궤를 달리했다. 그녀가 레이든의 바로 앞에 서자, 둘의 상반되는 분위기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났다.

“네 몸 이곳저곳에 상처가 있다던데, 그 말이 사실인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한 미라벨라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레이든은 꿰뚫어 볼 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녀의 말로는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폭행당한 것 같다더군.”

“저어, 그, 그게…….”

공작가에서 지내려면 몸에 맞은 흔적이 있으면 안 되는 걸까.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미라벨라의 하늘색 눈동자는 한동안 방황했다. 결국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바닥을 향해 시선을 내리뜬 채 가장 하기 쉬운 말을 했다.

“……죄송해요.”

“그런 말을 들으려는 게 아니야.”

레이든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직접 확인해야겠다.”

그가 이어서 명령했다.

“옷을 벗어, 미라벨라.”

“……네?”

한순간 귀를 의심하게 하는 명령이 떨어지자 미라벨라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무섭기만 한 첫째 오라버니는, 악기는 어떤 걸 다룰 수 있는지 외국어 회화 실력은 어느 정도 수준인지 물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어조로 다시 한번 단호히 지시를 내릴 뿐이었다.

“못 들었나? 벗으라고 했어, 내가 확인할 수 있도록.”

“하, 하지만, 공작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이 된 그녀는 다정한 둘째 오라버니를 향해 간절히 구원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에일레스가 다소 난감한 얼굴로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결국 미라벨라를 외면하지 못하고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레이, 조금만 더 부드럽게 말하지? 벨이 겁을 먹었잖아.”

넌 그냥 있어도 무서운데, 뒤이어 덧붙이는 말에 레이든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못 본 척 홍차를 젓던 머들러를 차분히 내려놓으며 에일레스가 미라벨라를 돌아보았다.

“레이든은 단지 네가 아픈 곳이 없는지 확인하려는 것뿐이야, 벨.”

“흑, 하지만…….”

사실 20대 후반인 레이든의 입장에서는 미라벨라가 아직 덜 자란 어린애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에일레스도 마찬가지였다. 자그마한 얼굴은 앳된 티가 역력했고, 이제 막 성년이 되었다 한들 자신보다 열 살 이상 어렸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보는 앞에서 옷을 벗으라는 명령도 그래서 별생각 없이 할 수 있었지만, 받아들이는 쪽에서는 또 달랐다.

“널 혼내거나 책망하려는 게 아니니까 무서워하지 않아도 괜찮아.”

미라벨라는 한창 예민할 나이의 수줍음 많은 소녀였고, 아무리 가족이라 해도 그들은 젊은 남자였다. 그런 두 사람 앞에서 옷을 벗고 검사를 당하듯 신체를 보여야 한다니. 게다가 대체 얼마나, 또 어디까지 벗어야 하는 걸까. 상상만으로도 창피해서 얼굴이 새빨개진 미라벨라가 제 옷깃을 꼭 쥐고 도리질했다.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일레스는 여전히 부드럽지만, 조금 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네 보호자로서 확인할 필요가 있다는 건 나도 동의하는 바야.”

괜찮지, 벨? 다정하게 쐐기를 박는 물음이 이어졌다.

만약 여기서 거부하면…….

‘이대로 쫓겨날 거야.’

식당 안에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미라벨라는 결국,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겨우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목 부근에 달린 리본 장식의 매듭 위로 떨리는 손을 가져갔다.

“…….”

작은 손으로 리본의 매듭을 푼 다음은 그 아래로 죽 달린 동그란 단추를 열 차례였다. 입고 있는 민트색 드레스와 같은 색깔 천으로 감싸인 콩 모양의 단추들은 배꼽 바로 위까지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잠시 후, 앞쪽의 단추가 모두 풀리자 실내용 드레스와 스커트를 가볍게 부풀렸던 페티코트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조금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부드러운 실크 스타킹과 리넨 재질의 슈미즈를 벗어 내릴 때까지도 레이든은 그만해도 좋다는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읏.”

조용한 공간 안에는 한동안 적막이 맴돌았다. 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눈치 빠른 사용인들은 아무도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앞가슴을 가렸던 속옷의 매듭을 풀고 몸에서 떼어 내는 일은 큰 망설임을 동반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최초의 명령이 거둬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미라벨라는, 결국 치솟는 눈물을 꾹 참으며 생명줄처럼 붙잡고 있던 천 위에서 손을 치웠다.

“흐윽…….”

앞을 감싸고 있던 부드럽고 넓은 천이 길게 풀린 매듭을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타인 앞에 예기치 않게 노출된 새하얀 젖가슴과 그 정점을 귀엽게 장식한 앙증맞은 유두가 바르르 떨렸다.

하지만 미라벨라는 마지막으로 남은 아래의 속옷까지는 차마 내리지 못하고 여러 차례 손가락을 걸었다가 놓기를 반복하며 망설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마저 벗게 되면, 두 오라버니가 지켜보는 앞에서 정말 완전히 알몸이 되어 버리는 거였으니까. 더욱이 지금 그녀는…….

“저어, 공작님, 저…….”

몇 번이나 하려던 말을 그만두고 입술만 달싹이는 그녀를 레이든이 냉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봄 하늘 같은 눈동자에 살짝 물기가 맺힌 것도 같았다.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향하던 그가 무언가를 눈치채고 눈썹을 비스듬히 치켜올렸다.

“월경 중인가?”

“읏! 네에…….”

미라벨라가 들릴 듯 말 듯 조그만 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작은 얼굴이 이미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갰다. 동그란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투명한 물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만, 됐어.”

다행히 레이든은 거기서 더 강제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한번 명령했다.

“내게로 더 가까이 와.”

“흐윽, 네.”

그녀는 가느다란 두 팔을 앞으로 교차하여 젖가슴을 겨우 가린 채 그의 앞에 섰다. 희고 동그란 어깨와 맨살이 고스란히 노출된 등이 최대한 움츠린 채로 잘게 떨렸다. 이제 미라벨라가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둔부의 윤곽이 어렴풋이 비치는 얇은 플레어 팬티 한 장이 전부였다. 여러 겹의 리넨 천에 솜을 넣어 두툼하게 만든 패드를 아래에 넣은 탓에 가랑이 사이가 약간 불룩했다. 필사적으로 젖가슴을 감싸고 있는 연약한 손과 팔, 허리 근처에도 번져 있는 울긋불긋한 멍 자국에 레이든의 날카로운 시선이 닿았다.

“팔을 높이 들어. 머리 위에 두고 똑바로 서도록.”

“읏, 하지만, 공작님……!”

“나는 같은 말을 두 번씩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흐윽…….”

미라벨라는 가느다란 두 팔을 가엾을 정도로 바들바들 떨며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식탁 아래에 처량하게 흩어져 있는 옷가지들이 마치 오갈 데 없는 그녀의 신세를 대변하는 것 같았다.

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넓은 식당의 한쪽 벽 전체를 차지한 큰 창의 커튼은 내려져 있지 않았다. 때문에 초여름의 맑은 햇살이 티끌 하나 없이 투명하게 닦인 유리창을 투과하여 홀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 환한 빛은, 어제 처음 만난 두 오라버니 앞에 부끄럽게 발가벗겨져 울 것 같은 얼굴로 간신히 서 있는 미라벨라에게 고스란히 쏟아져 내렸다.

“이 상처도 꽤 오래된 것 같군. 같은 곳을 여러 번 다친 흔적이야.”

“일부러 안 보이는 곳을 골라 멍이 들도록 교묘하게 때린 건가?”

그녀를 괴롭히는 수치심 따윈 아랑곳없이, 레이든과 에일레스는 알몸의 미라벨라를 인형처럼 세워 놓은 채로 전신을 꼼꼼히 훑어보며 의견을 교환하는 중이었다. 맞아서 생긴 상처가 겨우 아문 곳 위로, 또다시 새로운 상처가 덧씌워진 흔적. 피부에 남은 오래된 흉터들을 주시하며 레이든이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이쪽은 뭔가 단단한 물건을 던져서 맞은 것 같은데.”

“미라벨라, 좀 움직이지 않을 수 없나?”

그녀의 오른쪽 가슴 위는 며칠 전 자일스가 던진 철제 필통에 맞아 짙푸른 멍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자세히 살펴보려 했으나 미라벨라가 자꾸만 어깨를 움츠리고 숨기려 드는 바람에 쉽지 않았다. 레이든은 손목시계를 찬 팔을 들어 시각을 확인하고는 지그시 미간을 좁혔다.

한정된 시간 안에 많은 일을 해내야 했기에 그는 늘 직접적인 효율을 중시했고, 대부분의 경우 다소 강박적으로 시간 관리를 하는 편이었다. 한데 계속 이런 식이면 늦을 게 분명하다는 판단이 섰다.

“……!”

레이든은 팔을 뻗어 미라벨라의 오른쪽 유방을 그러쥐었다. 둥글게 부풀어 오른 부드러운 젖가슴은 작은 체구에 비해 꽤 발육이 좋은 편이었다. 그런 곳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는데, 커다란 손이 민감한 살결에 닿기까지 하자 미라벨라는 흐읍, 본능적으로 숨을 집어삼켰다.

“아흣…….”

하지만 곧고 단단한 손끝이 새파랗게 멍든 윗가슴을 문지르자, 창피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아픔으로 인한 작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레이든의 긴 손가락이 닿아 있는 지점의 바로 아래, 긴장으로 바짝 일어서 있던 자그마한 분홍빛 유두가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바르르 떨렸다.

“뒤를 돌아 똑바로 서.”

“읏, 네에…….”

그의 손가락이 젖꼭지에 닿을까 봐 잔뜩 얼어 있던 미라벨라는, 그제야 겨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두 오라버니를 향해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섰다. 새하얀 목덜미 근처에서 포니테일로 묶은 연한 색의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옷을 입었을 때 쉽게 노출되는 목과 어깨는 깨끗했지만, 그 아래로 이어진 가느다란 등줄기와 허리는 앞쪽과 마찬가지로 울긋불긋한 멍과 상처로 가득했다.

“하,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앗, 흐읏!”

잘록한 허리와 골반이 이어지는 부위에도 새파란 멍이 들어 있는 걸 확인한 레이든이 손을 뻗어 크림색 플레어 팬티를 아래로 끌어 내렸다. 단순히 멍 자국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확인하려는 의도였으나, 놀란 미라벨라는 뒷덜미를 잡힌 토끼처럼 팔짝 뛰었다.

새하얀 엉덩이 사이로 부드러운 리넨 천을 두껍게 접어 꿰맨 생리대 끝부분이 삐죽 올라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뽀얗고 동그란 엉덩이에는 아무런 상처가 없는 걸 확인한 그가 손을 놓아 주자, 그녀는 조금 훌쩍이며 반쯤 내려간 속옷을 서둘러 끌어 올렸다. 그는 미라벨라를 그대로 놓아둔 채 에일레스를 돌아보았다.

“멍도 멍이지만, 오래된 흉터가 너무 많아.”

“응. 아마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못해서겠지.”

“이대로는 곤란한데. 에일레스, 치료할 수 있나?”

“오래된 흉터를 지우는 건 엄밀히 말하면 치유의 영역은 아니지만 가능해. 지금 진행 중인 상처보다 시간이 더 걸리긴 해도 안 되는 건 아니야.”

“다행이군. 그것도 나중에 같이 이야기하지.”

“……흐윽.”

순간 옆에서 자그마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그녀를 돌아본 두 사람은 그제야 미라벨라의 눈물을 발견했다. 봄 하늘 같은 파스텔 톤의 눈동자에는 투명한 눈물이 가득 고여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가엾은 미라벨라는,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감출 생각도 하지 못하고 알몸으로 그 자리에 선 채 소리죽여 울고 있는 것이었다.

“흑, 아, 흐윽…….”

눈처럼 흰 살결은 비록 얼룩덜룩한 멍과 상처로 뒤덮여 있었지만, 아담한 체구는 당장에라도 안아 주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킬 만큼 사랑스러웠다. 둥글고 부드러운 모양으로 부푼 새하얀 젖가슴과 가운데가 쏙 들어간 허리, 엉덩이로 이어지는 연약한 곡선. 그리고 바깥의 이질적인 공기를 느끼며 타인의 시선 앞에 원치 않게 노출된 연한 분홍빛의 젖꼭지는 부끄러움으로 양쪽 모두 바짝 선 채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

에일레스는 난감한 얼굴로 미라벨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몸이 멍투성이라는 하녀의 보고를 듣고 실은 무척 놀랐다. 만약 사실이라면, 자신들이 이제부터 하려는 일에도 지장을 줄 테니.

그러나 그들은 빠르게 상처를 확인하려는 목적에만 치중한 나머지, 갑자기 낯선 곳에 떨어진 섬약한 소녀의 마음을 지나치게 배려하지 못한 것이다. 서럽게 울고 있으면서도 큰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처음 지시한 대로 높이 올린 두 팔을 차마 완전히 내리지도 못한 채 떨고 있는 가엾은 모습……. 발가벗고 있어서인지 그렇지 않아도 자그마한 체구가 더 작아 보여 안쓰러웠다.

정면에서 노출된 새하얀 겨드랑이의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에 문득 시선이 닿았다. 만지면 우유 푸딩처럼 부드러울 것 같은 더없이 애처롭고 연약한 속살. 순간, 에일레스는 그녀를 안아 주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레이든 역시 미라벨라가 울고 있는 모습을 목도하였으나 반응은 약간 달랐다. 그는 말없이 미간을 슬쩍 찌푸린 채 다시 한번 시각을 체크했다. 그에게는 오늘, 오전부터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일정이 있었다. 그걸 알고 있는 에일레스가 먼저 가 보라 눈짓했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섰다.

“먼저 간다.”

“그래, 저녁에 봐, 레이.”

레이든이 떠나고 미라벨라와 단둘이 남겨지자, 에일레스는 약간 곤란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가까이 다가설 때까지도 미라벨라는 여전히 눈물을 그치지 못한 채 훌쩍이고 있었다.

“벨.”

출근 시간이 가까워 온 터라 그도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처투성이의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채 서럽게 흐느끼고 있는 소녀를 그냥 두고 떠난다는 건, 누구에게나 내키는 일이 아닐 것이다.

“가엾기도 하지, 이리 와.”

“흐윽…….”

그가 팔을 벌려 안아 주려 하자, 미라벨라는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으나 곧 순순히 품에 안겨 들었다. 아마도 꽤 오랫동안 옷을 벗고 있어 추위를 느꼈거나, 어딘가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거겠지.

자그마한 몸에 비해 발육이 좋은 둥근 젖가슴. 따뜻하고 말랑한 살결이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에일레스의 탄탄한 상체에 부드럽게 눌렸다. 그는 자신의 겉옷을 벗어 상처투성이의 작은 등 위로 걸쳐 주며 달래듯 어깨를 토닥였다.

“이거 입고 있어, 벨.”

“……오라버니, 흐윽.”

“월경 중에는 배를 따뜻하게 해야지. 아프면 안 되니까.”

그렇지? 그가 눈을 맞추며 묻자 순종적이고 앳된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울음은 겨우 멎었으나 라즈베리 열매처럼 붉고 도톰한 입술은 약간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에일레스는 문득, 저 깊은 곳 어딘가에서 거칠게 스멀거리는 미묘한 충동을 느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감정을 파악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고, 가느다란 백금발이 흐트러진 새하얀 이마와 눈물 자국이 남은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마치, 다정한 오라버니가 어린 여동생에게 애정을 표하듯이.

“이제 정말 가야 돼, 저녁에 보자.”

“에일레스 오라버니…….”

“응?”

미라벨라의 머리 위로 커다란 손을 올려 쓰다듬으며 에일레스가 미소 지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를 홀린 듯 올려다보던 그녀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저한테 왜 이렇게 자상하세요?”

그 질문에 에일레스는 예의 곤란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가족이잖아, 다정한 게 당연하지.”

“…….”

“……너는 내 동생이니까.”

순간, 채광이 좋은 대형 홀의 큰 유리창으로부터 비친 한 줄기 햇살이 에일레스의 금빛 눈과 긴 은발에 스며들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로 물든 그 모습이 마치 빛의 신처럼 아름답게 느껴져, 미라벨라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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