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 Ending (完)
* * *
"오랜만이다. 이 녀석아."
모두가 모였다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참 빠르게 흘러가서,
어느덧 하늘에 걸린 달이 선명하게도 보이는 밤이 된 지 오래였다.
밤하늘을 오래토록 바라보며 감상에 젖기에 충분한 시간, 상념을 흩트린 것은 크리스의 목소리였다.
"일부러 빠져드렸는데, 로페나가 안 놀아주십니까?"
"아가씨와 할 얘기가 있다 해서 빠져나왔지. 너도 나랑 같은 처지 아니더냐."
예전의 정정한 모습을 찾기 어려운 크리스였다.
만약 마스터에 다다랐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익스퍼트인 그가 자신처럼 젊음을 유지하는 건...생각보다도 더 힘들 일일 테니.
여러모로 씁쓸한 일이었으나 결국 자연의 섭리였다.
자신이 신이 아닌 이상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었고, 에반은 그에 수긍하는 것을 택했다.
새하얀 수염이 까끌까끌하게 난 크리스는 포도주가 담긴 잔을 흔들며 에반의 옆에 자리잡았다.
"난 옛날부터 밤이 싫었다. 밤에는 늘 긴장하고 있어야 했거든."
"절멸 때문에 그랬던 거 아닙니까?"
"그런 것도 있지. 절멸이 허구한 날 수도를 공격하려 하는 바람에, 내가 젊을 때는 항상 밤에 자지도 못 하고 눈을 시뻘겋게 뜨고 있어야 했으니까."
"이젠 다 옛날 얘기입니다. 절멸도 마베트도, 전부 없어지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그렇지. 에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크리스는 흐뭇한 표정으로 에반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늘 하는 생각이었지만, 처음 만났던 그 퀭한 표정의 아이가 이렇게 크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한 터였다.
조금이라도 신경을 놓치면 어느 순간 죽어있지 않을까.
마치 곡예를 하는 것처럼 참으로 위험해보였던 아이라, 크리스의 신경은 항상 에반에게 쏠려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렇게 커서...이제는 자신이 감히 쳐다도 못 볼 만큼 높은 위치에 있다니.
세월 무상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오히려 이렇게 되었다는 게 참 마음에 들었다.
"너에게 항상 말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지금 말해도 되나?"
세월이란 참으로 야속해서, 어떻게든 더 이 모습들을 지켜보는 크리스의 의욕을 참 잔인하게도 꺾기 마련이었다.
이제는 몸이 더 이상 예전같지 않음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비록 일반인 처럼 쉽게 죽지는 않겠지만, 젊을 때처럼 검을 휘두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에반이 조용히 크리스를 바라보자, 그런 에반과 눈을 마주친 크리스가 담담히 입을 열었다.
"나는 항상 네가 자랑스러웠다."
"...갑작스럽네요. 굉장히."
얼떨떨한 표정의 에반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아무 맥락도 없이 이런 말을 하면, 듣는 자신이 되게 무안해질 따름이었다.
칭찬에 인색했던 크리스가 이리 자신을 칭찬해주는 것이 어색해서,
헛기침을 내뱉은 에반이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항상 하고 싶었던 얘기였으니까. 당연히 어색하지. 내가 말하고도 쑥쓰럽구나."
"저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제가 왔던 건, 크리스 경의 도움이 없었으면 힘들었을 테니까요."
아마도 현대와 관련된 꿈을 꾸기 이전, 절멸의 세뇌에 휩쓸려 위태로웠던 자신을 구제한 건 오직 크리스 한 사람뿐이었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면 언제나 나타나 호통을 치고,
잡념을 품을 수 없을 정도로 훈련을 시켜 늘 노곤해진 정신으로 잠을 청하고.
지금에 생각해보면 그것을 일부러 했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에반은 언제나 크리스에게 감사해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지금 이렇게 여유를 즐기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크리스가 더 이상 말하지 않자, 에반 또한 아무런 말을 내뱉지 않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불어오는 바람, 숲속에서 들려오는 풀 벌레 소리.
바람이 흔들리는 풀잎이 종처럼 소리를 울리고, 달빛이 만들어낸 숲그림자에 또다시 밤에 우는 새가 조용히 운다.
여러 가지 소리가 섞여 들려오는 이 화음이야 말로 최고의 배경이었으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알 수 있기 마련이었다.
감사, 경애.
그리고 이제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 대한 아쉬움.
잔에 담긴 술 한 잔으로 나누기에 충분한 이야기였고, 아직 시간이 남아있음에 감사하며...그렇게 고요 속의 시간을 즐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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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말 없이도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건 크리스 하나 뿐이 아니었다.
아마도 평생 이렇게 있어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이 세상에 오직 하나 뿐이라,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는다.
"로페나하고는 잘 얘기하셨습니까."
"잘 얘기했어요. 크리스랑 사는 게 재밌나 봐요. 요즘에는 마작에 빠져있다고 걱정하던데, 크리스라면 알아서 잘 하겠죠."
손을 잡은 채 가만히 숲을 바라본다. 정원, 여러가지 기억들이 얽혀 있던 장소였다.
이제 말해봐야 입만 아프겠지만, 그토록 여러번 추억하는 것은 그 만큼 처음이란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당신에 대해 처음으로 좋게 생각했던 게 그 다과회 때문이었어요."
"의외로군요. 뒷담화를 했다하여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
"내가 처음에 조금...박하게 대했잖아요. 그런 게 미안하기도 했고, 당신에 대해 호감을 품었던 것도 이때니까요."
에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인간에 대한 신뢰가 한참 무너진 뒤였다.
누군가를 믿기 보다는, 차라리 철저하게 의지할 사람 한 명을 원하던 때였으니까.
마음을 기대고, 제 모든 감정을 털어놓은 채 펑펑 울고 싶을 때이지 않았던가.
마침 그때 만난 사람이 에반이라는 것이, 아이린은 항상 운명처럼만 느껴졌다.
자신이 필요로 하던 사람이 어느 순간 제 앞에 나타나서, 동화속의 왕자님처럼 자신을 구원해줬으니까.
이제는 자주 웃는다. 이제는 울지 않았고, 무감한 표정을 보이는 것은 이따금 에반이 잘못을 저지를 때 뿐이었다.
"엄마가 그랬어요. 제가 잘 웃었으면 좋겠다고."
탁자에 놓인 액자는 여전히 아이린의 책상 위에 있었다.
다만 덮어두지 않고, 그 얼굴을 그대로 보이며 아이린을 향해 웃어주고 있었다.
아이린이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 에반과 아이린의 그림이 놓인 액자 옆에 나란히 말이다.
자신이 엄마의 입장을 알게 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피어오르는 감회에 젖어서, 잠시 피식 웃은 아이린의 고개가 에반의 어깨에 푹 하고 얹어졌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웃는 게 더 예쁘다는 그 말, 벌써 몇 백 번은 들었어요."
잠시 벙찐 표정을 짓는 에반의 표정이 우스워서, 아이린은 웃는 얼굴 그대로 에반의 뺨을 쿡 찔렀다.
"몇 천 번 더 들어도 기분 좋은 건 맞지만요."
아주 가끔 꾸는 악몽은 자신이 에반이 만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서 비롯하는 것들이었다.
난데없이 반역자로 몰려 죽고, 자신을 바라보는 스칼렛은 그것을 비웃고.
이제는 둘도 없는 친구인 스칼렛과 남편인 에반이 없다는 게 참 끔찍해서 깨어나면,
옆에는 언제나 자신을 꼭 끌어안은 채 자는 에반이 있었다.
하여 걱정하지 않는다. 에반이 없었다면 하고 생각하는 건 그저 상상일 뿐이었으니까.
아무리 그걸 걱정해도 제 사랑스러운 남편은 항상 제 곁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있으면, 항상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무슨 생각 말씀이십니까?"
"그냥...이 모든 게 다 꿈만 같다는 거요. 내가 낀 반지, 당신이 내 남편이란 것. 아서랑 로벨리아가 곧 결혼하는 것까지 전부."
"어떻게 하면 확신을 얻으시겠습니까?"
그 말에 곰곰히 고민하던 아이린은 이내 샐쭉하게 웃으며 제 입술을 툭툭 두드렸다.
"글쎄요. 난 잘 모르겠는데."
마주친 눈동자에 달빛이 서려, 늘 마주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조용히 흐르기 시작했다.
언젠가 세이렌에서 연주했던 세레나데가 두 사람의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따듯하고, 포근한. 어느 때보다도 추웠던 겨울에 들었던 그 고백에 그 어떤 순간보다도 따스했던 그 마음을.
기억하고, 또 추억하기에 행복한 것었다.
누군가가 행복하냐고 물었다면, 과거의 자신들은 아마도 아니라고 대답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있게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제는 별을 싫어하지 않았고, 혼자 있는 것이 두렵지 않았고.
더 이상 이별과 아픔을 생각하는 것보다는 만남과 행복을 생각하는 것이 더 익숙해져버렸으니까.
"그거 알아요?"
서로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 마주한 그 순간, 아이린은 에반의 초록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언제나 같은, 숲을 닮은 눈동자는 자신을 부드럽게 감싸안고 있었다.
시선을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감상은 아주 간단했다. 처음에는 부끄러웠던 말, 하지만 이제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말.
"사랑해요."
그 말에 에반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가까워지는 거리에 달콤한 향이 주변에 흘렀다.
같은 욕실에서 같이 씻으며, 이제는 같은 목욕수를 쓰기에 맡을 수 있는 향이었다.
가시가 가득한 장미의 향이었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오직 허락한 이에게만 내비치기 위해 잔뜩 뻗은 가시.
어쩌면 장미 가시의 그대라는 말은,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이 여인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달빛보다도 새하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장미보다도 붉은 입술을 탐한다.
호숫가의 물빛보다도 푸른 눈동자가 스르르 감기고, 동시에 품어지는 그 야릇한 분위기 속에서 서로를 탐할 뿐이니.
로맨스 판타지의 소설이라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운 이 숲 속에서,
연인들은 그렇게 서로를 탐닉하며 사랑을 노래했다.
악녀라 불렸어야 했던 여인의 사랑 이야기였고,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남자의 사랑 이야기였다.
"저도 사랑합니다."
떼어진 입술 사이로 가늘게 새어나온 목소리에 서로 미소짓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영원히. 자신은 아이린 유리스라는 여인의 호위 기사일 것이라고.
남편을 겸해서 말이다.
로판 속 악녀의 호위 기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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