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 Ending (1)
* * *
처음 눈을 떴을 때가 언제더라, 예전 같았으면 하지도 않았을 생각이었건만.
문득 떠오른 생각에 잠시 추억에 잠긴다. 방에서 눈을 떠 처음으로 마주한 풍경.
낡은 목검이 쌓여있던 방 한 구석엔 이제 책장이 놓여 있었고, 크리스가 벌컥 들어왔던 문은 완전히 새것으로 바뀌어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완전히 기억 속에만 남은 풍경, 문에 몸을 기대어 가만히 제 방을 둘러보는 에반의 표정은 완전히 향수에 빠진 것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만약 자신이 꿈속에서 ‘장미 가시의 그대’라는 소설을 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아이린의 미래가 그리 될지 모른 채로 다시 깨어나 호위 기사가 되었다면...과연 지금처럼 이렇게 있을 수 있었을까.
아직도 생각하는 것은 그때의 자신이었다.
그때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품고, 아무것도 모른 채 아이린의 태도에 투덜거리기 바빴다면 아마 모든 것이 망가졌으리라.
고룡 마베트를 잡기도 전에 죽었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자신이 끝까지 소설 속 세계에 빙의했다고 믿었을 거란 생각에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정작 자신이 살았던 그 현대라는 세계가 오히려 더 환상에 가깝지 않을까.
몇 년 전 꿈속에서 보았던 그것이 생생했지만, 에반의 세계는 여전히 이 유리스에 있었다.
“공작 님? 황궁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아, 그건 내가 확인할 테니 가 봐도 괜찮아.”
테두리에 금실이 붙여진, 여전히 참 화려한 취향이 그대로 드러나는 편지였다.
시간이 흘러도 그 취향은 변하지 않는 건지, 편지지에 적힌 이름을 본 에반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기뻐보였다.
제국의 황제이지만, 그럼에도 아직 자신의 친우인 카이셀의 편지였으니까.
이제는 발전된 마법이라, 편지지 속에 적힌 것은 글씨가 아니라 카이셀의 음성이었다.
아직까지 제국 전체에 보급되지 않은 마법공학기기, 실시간으로 서로의 음성을 전달할 수 있는 그 기기를 조심스레 조작하자, 이내 카이셀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음, 그래. 들리나?]
“잘 들립니다. 도대체 몇 년 만입니까?”
에반의 목소리를 들은 카이셀은 씩 웃으며 가만히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황제가 된 이후로는 꽤나 바빴던 터라, 에반에게 아무런 연락도 취하지 못한 것이 벌써 3년이 된 터였다.
그동안 잘 지냈는지, 특히 카일과 로벨리아의 일로 얘기하고 싶은 게 엄청 많았지만.
처음부터 그런 얘기를 꺼냈다간 무슨 소리를 들을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도 황궁까지 찾아와 제게 소리치리라.
이 제국의 지고한 황제에게 소리칠 수 있는 사람이란 오로지 두 사람 뿐이었으니,
스칼렛과 에반이란 두 사람에게 만큼은 황제인 카이셀이 도무지 이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에반은 힘을 써도 못이기지 않을까. 황제로써 자존심이 조금 상하긴 했지만,
친구인 만큼 그런 것을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옛날 생각에 웃던 카이셀은 이윽고 기기를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얘기부터 꺼내야 할지, 허나 역시 먼저 꺼내야 할 얘기란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군. 작년에 야만족 토벌을 갔다고는 들었는데. 왜 직접 간 겐가? 키워놓은 기사단을 보내도 될 텐데.]
“아마 그랬다간 로벨리아가 평생 제 얼굴을 안 보려 했을 겁니다. 기사단을 보내면 제가 계속 신경 써야 할 텐데, 마침 그 때가 로벨리아 졸업식이었거든요.”
[...아, 졸업식.]
“기사단을 보내는 것보다 제가 직접 가는 게 빠르지 않겠습니까. 반나절이면 끝날 토벌이었습니다.”
어차피 에반이 나타나자마자 항복한 야만족이 수두룩했으니,
기사단이 토벌했을 때 걸린 시간에 비하면 몇 십 배는 빨리 진행된 토벌이었다.
토벌령이 내려온 뒤 이틀 뒤가 로벨리아의 아카데미 졸업식,
졸업식 이후로는 성인식이 있었던 터라 에반은 결국 그런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반나절...그것 참 편리한 얘기로군. 당장 예전에 북부 절반을 통합하는데 100년이 걸렸는데.]
“그때는 마스터도 없지 않았습니까. 지금은 아이린도, 폐하도, 그리고 황후께서도 마스터라고 들었습니다만.”
[마스터는 아니고, 아마도 마베트와 한번 융합된 영향으로 마나가 기이하게 많아진 거지. 그래서 우리처럼 늙지 않는 거라고 들었네.]
늙지 않는 것은 마스터 이상의 경지에 오른 기사와 마법사들이 가지는 혜택이었다.
세월이 주는 무게를 조금이나마 덜어낼 수 있는 것. 오로지 순수한 자연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것이 마나였으니,
인간에게 주어지는 노화의 영향 또한 적어지는 것이었다.
창문에 비친 에반의 모습은 여전히 스무살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아이린 또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서, 가끔 시간이 아예 흐르지 않은 게 아닌가 하고 착각할 때도 있지 않던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던 시간은 오로지 그들에게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 생각에 옅게 미소지은 에반은 이내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카일은 잘 지냅니까?”
이제는 본격적인 이야기라서, 카일의 이름을 들은 카이셀은 조용히 자세를 고쳐 앉아 귀를 기울였다.
[카일?]
“예, 그 녀석 말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 아들인데 그 녀석이라 하는 건 조금 너무한 것 같은데. 나름 황태자라 대우해주면 안 되겠나?]
“지금 제가 폐하와 사돈이 되게 생겼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겁니까?”
꾹 다물린 입술이 파르르 떨려,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 에반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몇 년 전부터 대충 알고는 있었다만, 대뜸 서로 사귄다니.
아무리 그래도 아빠인 자신한테 자초지종을 설명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여 카일이랑 자신 중에 누가 더 소중하냐 물었더니, 머뭇거리는 로벨리아의 모습에 에반은 사흘 밤낮을 끙끙 앓을 정도였다.
마음 같아선 직접 찾아가 카일의 이런저런 면을 직접 평가해주고 싶었으나,
하필이면 황태자일 건 또 뭐란 말인가. 로벨리아가 자신과 평생 살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렇게 카일에게 뒤통수를 맞을 거라곤 정말 상상도 못한 에반이었다.
[그, 흠. 내가 미안하다고 하면 화가 좀 풀리려나?]
하지만 카이셀은 그저 싱글벙글 웃을 뿐이었다.
하나 있는 아들이 제 짝을 찾아 결혼하겠다는데, 그것을 반대할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그게 또 에반 유리스의 딸이라면...심지어 소중하게 생각하다 못해 아주 애지중지하는 로벨리아라면.
정치적인 이유로 정략 결혼하는 것을 그리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나,
카이셀의 입장에선 두 사람이 이어지는 것이 나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마음 같아선 아예 국가적 정책으로 내세워 추진하고 싶을 정도이지 않던가.
“그렇게 풀릴 기분이었다면 제가 이러고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속으로는 좋지 않은가? 로벨리아가 카일을 좋아하는 것 같던데, 아주 많이.]
아주 많이를 특히 강조하는 그 말투가 짜증나긴 했지만, 로벨리아가 좋아하는 것에 자신 또한 행복하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아버지라 그런 걸까, 제 딸이 그리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썩 괜찮아 보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것과는 별개로 미련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애지중지 해서 키운 딸이 다른 남자와 연인이라니.
그것은 아서 또한 마찬가지라, 자식들이 매일같이 가져오는 소식에 에반과 아이린은 항상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마련이었다.
“좋긴 하죠. 어찌 그것을 부정하겠습니까.”
[그럼 뭐가 문제란 말인가. 서로 좋다 하고, 자네도 좋아]
“아무래도 폐하께서 제일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런가? 아무튼, 조만간 한 번 보는 건 어떤가. 다같이 모인 것도 벌써 몇 년 되지 않았는가.]
생각해보면 저번 소풍 이후로 가족 전부가 모여 만났던 적은 없던 터라,
카이셀의 말을 들은 에반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스칼렛도, 카이셀도. 그리고 그 카일도. 전부 직접 보는 것이 훨씬 좋을 테니까.
“그럼 며칠 뒤에 보는 걸로 하죠. 마침 수도에서 건국제가 열리는 해 아닙니까.”
한 번 물꼬가 트인 대화는 순식간에 결론까지 다다를 따름이었다.
며칠 뒤면 마주하는 친우를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은 후련해져서, 에반은 가볍게 미소 지은 채 기기를 조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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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오늘도 낚시하러 가요?"
마나를 가진 이만 세월을 빗겨갈 거라 생각했지만,
로페나는 여전히 이십대 중반의 그 외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성인이 되었을 때조차 어린 아이처럼 보였던 탓일까.
마흔이 다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성숙해진 모습이라,
이따금 친구들의 모임에 나가면 언제나 부러운 시선을 받기 일쑤였다.
"낚시는 질렸어."
"낚시 안 할 거면 또 마작하러 갈 거잖아요. 차라리 낚시를 하세요. 에전에는 아서 가르친다고 바쁘더니, 이제는 왜 아무것도 안 해요?"
"나보다 잘하는 녀석을 뭘 가르쳐? 게다가 레비가 있잖아. 여자친구가 옆에서 잘 가르쳐주겠지. 아주 찰싹 붙어서 말이야."
하얀 수염이 성성한 크리스를 본 로페나는 쓰게 웃었다.
이제는 완전히 할아버지가 다 되어서, 예전처럼 듬직했던 덩치는 온데간데 사라진지 오래였다.
다만 그 큰 목소리만큼은 여전한지라, 방 곳곳을 가득 메우는 큰 목소리에 로페나는 자연스레 제 귀를 틀어막을 따름이었다.
"뭐, 그럼 수도는 저 혼자 갈게요. 집에서 그 재밌는 마작이나 두라고요."
"수도? 갑자기 거긴 왜!"
크리스가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묻자, 품속에서 편지를 꺼낸 로페나의 입꼬리가 샐쭉하게 휘었다.
크리스에겐 너무도 익숙한 문장, 유리스의 문장이 박힌 편지를 꺼내든 로페나가 이윽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같이 한 번 모인다네요. 우리도 가야죠. 안 그래요?"
"...당연한 얘기를."
참으로 오랜만에 모이는 것이라, 크리스는 늙은 몸의 활력이 비로소 제대로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모시던 아가씨에게 무어라 인사해야할지.
허나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 자신이 가르쳤던 에반이라,
크리스는 꽤 기쁜 듯 킬킬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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