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외전) 몽중화 (9)
* * *
영화가 끝난 뒤엔 어느새 날이 어둑해져 있었다.
이제는 겨울이라, 어느새 도시의 불빛이 가득한 거리를 아이린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느 때 같았다면 그것에 푹 빠져 상념에 젖었겠지만, 옆에 있는 수현을 의식할 때마다 집중이 깨지기 마련이었다.
“저기...”
영화를 보다가 왜 자신을 빤히 바라봤는지, 팝콘 통 안에서 닿은 손이 왜 아직까지도 간질이는지.
여러모로 묻고 싶은 게 많아도, 막상 눈을 마주치면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며 속에서 이는 열기를 애써 식힐 뿐. 눈이 마주치자마자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린 아이린은, 이윽고 고개를 푹 숙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니에요."
무얼 말하고 싶었던 건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핸드폰에 찍힌 어디인지도 모를 경로를 향해 운전하면서, 머릿속은 이 아리송한 감정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처음 수현을 만났을 때를 떠올린다. 지금처럼 자연스럽게 웃지 못 할 무렵,
아직까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에 한 번도 자연스런 표정을 짓지 못했을 때였다.
처음으로 참가한 콩쿠르에서 수현의 음악을 들었고, 멍하니 있던 와중 말을 섞게 되었다.
본인은 기억하지 못 하는 것 같지만, 그 때 들었던 응원 한 마디 때문에 자신에 여기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만난 것은 그런 수현에 대한 흥미였다. 개인적인 관심, 자신이 이렇게 변한 것에 대해 감상을 듣고 싶었고...
지금은 그런 수현을 보며 어떤 감상을 받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 수현을 다시 만났을 때 받았던 감상이란, 의외로 평범했다.
자신이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저 멀리 있다고 느꼈던 것과는 달리 바로 앞에서 보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까탈스러워 보이는 외관과는 달리 친절했고, 세련되어 보였던 연주와는 달리 여러모로 허술한 점도 있었으니까.
눈 떠보니 같이 술을 마시고 있었고, 정신을 차려보니...이미 이전과는 다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것이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아직까지 확신이란 것을 느끼지 못해서, 아이린은 그저 침묵할 따름이었다.
슬쩍 움직인 시선이 차 창문에 기대어 있는 수현에게 향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시선을 던지는 것이 고작이었다.
“보이네요.”
그러다가 들려온 수현의 목소리에, 아이린은 고개를 들어 눈앞에 보이는 풍경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밤이기에 볼 수 있는 것, 서서히 창문에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관람차를 보는 아이린의 눈동자가 푸른빛을 발했다.
“놀이동...산?”
어둡게 물든 하늘 아래에 반짝이는 것들은 놀이공원의 기구들이었다.
이젠 한참 줄어든 사람들을 태우고 빙글 돌아가는 관람차, 목적지 없이 영원토록 돌아갈 회전목마,
퍼레이드를 위해 하늘을 떠도는 풍선까지. 여기에 왜 왔는지,
하필이면 왜 이곳인지 알아차릴 틈도 없이. 아이린의 정신은 서서히 그 빛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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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공원은 처음이에요. 어렸을 때 한 번 가보긴 했다던데, 잘 기억은 안 나거든요.”
“저도 그렇습니다. 어렸을 때는...사실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으니까요.”
사람이 거의 없어 한산한 놀이공원엔 그 공허한 음악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곧 있으면 폐장 시간이라 그런 것인지,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이 종종 보이곤 했다.
사람 하나 없이 저 혼자 움직이는 놀이기구들을 가만히 보면서, 그렇게 아이린과 수현은 텅 빈 놀이공원을 걸었다.
어렸을 때를 기억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수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방에서 보았던 사진을 떠올린 아이린은 그에 대해 따로 묻지 않았다.
동생과 수현만이 남아있던 사진, 예전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몰라도. 자신이 신경쓸 일이 아니란 것쯤은 금세 눈치챌만 하지 않은가.
“사실 그리 유명한 곳은 아닙니다. 크기도 그렇게 크지 않고, 아는 사람들만 오는 곳이거든요.”
“그런 곳으로 데려온 거예요?”
“그 편이 더 좋지 않습니까. 사람이 적으니까, 이렇게 둘이서만 있을 수 있는 거죠.”
사람이 많은 곳은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다. 사람이 많으면 소리가 뒤섞이고 엉켜서,
아이린 유리스라는 사람이 가진 소리에 집중할 수가 없었으니까. 한적한 이 곳,
아무도 듣지 않는 공허한 음악소리만이 퍼져 음산하면서도 나름의 분위기를 가지는 이 놀이공원이...수현이 생각하기엔 썩 괜찮은 장소처럼 느껴졌다.
사실 둘이서 롤러코스터를 탈 것도 아니지 않던가.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기념품을 파는 카트를 발견한 수현은 그 위에 있는 머리띠 하나를 집어 아이린의 머리 위에 사뿐하게 올렸다.
별 하나가 툭 튀어나온 머리띠, 아이린이 갸웃거리자 그 별 또한 같이 움직여서. 피식 웃은 수현이 그 별을 톡 치며 입을 열었다.
“머리띠 싫어합니까?”
“...그런 건 아닌데, 조금 갑작스러워서요.”
오히려 좋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조용한 곳에서 나름 놀이공원에 왔다는 느낌이 그나마 나는 것도 같았다.
머리에 씌워진 머리띠를 조심스럽게 매만진 아이린은 작게 웃으며 수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조금 가까워진 것을 알아차려, 이내 뒤로 슬쩍 물러나며 헛기침을 내뱉을 따름이었다.
“별 좋아하나 봐요. 보통은 다른 거 달아줄 텐데, 뿔 같은 거.”
“예전엔 싫어했습니다. 조금은, 음. 외로워 보였으니까요.”
“별이 외로워 보여요? 나랑은 완전 반대네요.”
“지금은 좋아합니다. 예전에 싫어했을 뿐이죠.”
그리 말한 수현이 멈춰 선 곳은 밝은 빛을 내뿜으며 돌아가는 회전목마 앞이었다.
어두운 놀이공원 안에서 마치 별처럼 홀로 빛나고 있는 것.
지금 나이와 어울린다곤 하지 못하는 기구였지만,나름 괜찮지 않은가.
어차피 제대로 작동하는 기구라 해봤자 몇 없어서, 아이린을 슬쩍 바라본 수현이 손가락으로 회전목마 하나를 가리켰다.
“탈래요?”
난데없이 회전목마를 가리키는 것에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막상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떠올린 아이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 분위기 있는 데이트라며, 속으로 불평하면서도 입가엔 옅은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수현의 손을 잡고 목마에 올라타자, 마치 오르골에서 들릴 법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회전목마가 빙빙 돌아가기 시작했다.
위로, 다시 아래로. 파도가 넘실거리듯 움직일 때마다 머리띠에 달린 별이 동시에 움직이고,
어렴풋이 떠오르는 어릴 때의 기억에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어릴 때 많이 탔던 건데. 어른이 되어서도 이런 걸 타고 있네요.”
“동생이 이걸 좋아했습니다. 언젠가는 꼭 한 번 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죠.”
“아, 그...수진 씨 말하는 거죠? 전에 만났던.”
고개를 끄덕이는 수현의 표정은 전과 달리 어두웠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옛 기억을 떠올렸기에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영문을 모르는 아이린은 그에 어깨를 으쓱이며 빤히 지켜볼 뿐이었다.
왜 갑작스레 표정이 어두워진 건지, 한참 흐르던 정적 속에서. 수현은 아이린과 눈을 마주치곤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쳤습니다. 나름 천재 소리도 들어보고, 어느 순간부터는 유망주랍시고 기자들이 찾아와 제 사진을 찍어댔죠.”
“저도 알고 있어요. 유명하잖아요.”
“수진이는 제가 그렇게 유명한 걸 싫어했습니다. 맨날 피아노만 치고, 정작 자신한테는 신경 쓰지 않는다며 저한테 쭉 불평을 내뱉었죠.”
오빠는 왜 맨날 피아노만 쳐? 나랑 저번에 놀아주기로 했잖아.
어릴 때의 기억이었다. 늘 연습을 하고 돌아오면 모두가 잠에 들 새벽이라서,
지친 몸을 겨우 씻고 누울 때쯤이면 2층 침대 위에 있던 동생이 그리 묻곤 했다.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몰래 깨어나서, 그제서야 하루종일 있던 일을 늘어놓는 것이 수진이의 일상이었다.
막상 다 클 때까지 한 번도 놀아준 적이 없는 것이 자신인데, 무엇이 좋다고 그리 쫓아 다녔던 걸까.
“부모님과 사이는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한 건 저였지만,콩쿠르 입상에 목을 메는 건 제 부모님이었으니까요. 연습, 연습. 친구를 만나겠다고 하면 뺨을 맞고,하루 쉬겠다고 하면 그 날은 벌거벗은 채 밖으로 쫓겨나가곤 했죠.”
하지만 이젠 전부 지난 일이었을 뿐이었다. 고작 그 정도였다면, 아마 여태까지 쭉 연락하며 지냈을지도 몰랐으리라.
부모니까, 그래도 낳아준 부모라며 애써 화를 억누르면서 말이다.
“...그런데 동생이 아프다는 걸 안 알려줬을 때는. 아무래도 제가 오빠 노릇을 하고 싶었나 봅니다.”
수진이는,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뺨을 맞고, 아무 것이나 던져대는 부모를 무시한 채 수진이를 데리고 해외로 이동했다.
크리스에게 연락하여 의사를 찾고, 동생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를 찾아 겨우 병을 고쳤다.
부모님과 의절하는 것은 허탈하리만치 쉬운 일이었다. 왜 여태껏 그리 하지 못했냐고 스스로를 질타할 만큼.
“방에서 사진 봤죠?”
“...일부러 본 건 아니었어요.”
수현의 질문을 들은 아이린의 어깨가 흠칫 떨리자, 수현은 괜찮다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의 기둥을 잡은 채, 입에서 내뱉어지는 하얀 숨을 멍하니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 눈빛에 섞인 것은 회한, 그리고 아마도 후련함이 아닐까.
“부모님이 제게 연습을 시키고 잠을 자러 갈 때면, 혼자 몰래 나와서 창밖을 바라봤습니다. 하늘에 혼자 떠있는 별을 보면서, 그게 꼭 지금의 자신 같다고 생각했죠. 외롭고 외로워서, 아무도 자신에게 빛 한점 주지 않는 외톨이 같은 별 이라고."
"......"
"조금은 감상적인 생각인데, 그때는 그렇게 생각하곤 했죠. 뭐, 어릴 때니까 다들 그렇지 않습니까."
별이란 것이 어쩌면 괜찮은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 언제더라.
아마도 연주를 끝마치고 봤던 하늘이 참 예뻐서, 어느 순간부터는 밤하늘을 보는 것이 취미가 되었던 것 같았다.
동생의 치료를 끝내고, 비로소 제게 주어진 짐이 모두 사라졌다는 그 홀가분함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우웅
폐장시간이 다가오는 탓일까, 우웅 거리며 진동한 회전 목마의 빛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위 아래로 움직이는 목마의 움직임 또한 덜컹 거리고, 그걸 느끼던 수현은 살짝 놀란 표정의 아이린을 쳐다보았다.
운명이란 말이 있었다.
모든 연주가 끝나고 봤던 별처럼,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음에도 평생을 함께 한 것만 같은 익숙함을 느꼈다.
사소한 것에 가슴이 뛰고, 별 것 아닌 행동에 웃음이 나온다.
탁
불이 꺼진 기구에서도, 홀로 반짝이는 것이 있었다.
캄캄한 어둠, 서로의 얼굴마저 분간하기 힘든 그 정적 속에서 수현은 아이린과 눈을 마주쳤다.
그 파란색의, 꼭 어릴 때 보았던 밤하늘 보다도 더욱 푸르고 맑은 눈동자를 바라본다.
"언제까지 말을 그렇게 딱딱하게 할 거라고 물었죠?"
"어...그랬죠?"
"이제 편하게 말해도 됩니까?"
이 상황에 그런 말을 꺼내는 것이 의아했지만, 아이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상황이었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한데, 수현의 얼굴만큼은 유난히도 잘 보여서.
완전히 눈을 마주친 그 사이에 다시금 잠시간의 침묵이 흘렀다.
딸칵
"좋아해."
번쩍 거리며 순식간에 돌아온 빛 속에서, 수현은 웃는 표정 그대로 아이린을 응시했다.
무어라 단말마조차 내뱉을 수 없었던 그 찰나의 순간.
그 말을 비로소 이해한 아이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을 때,
수현은 한 번 싱긋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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