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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75화 (175/181)

〈 175화 〉 외전) 몽중화 (8)

* * *

“...미쳤어.”

점심시간이 지나 대학교의 모든 수업이 끝나는 그 시간까지, 아이린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뺨을 감싼 채 한숨을 내쉬는 것뿐이었다.

대뜸 데이트 신청이라니, 며칠 전까지만 해도 숫기하나 없던 사람이 갑자기 자신에게 왜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관심이 있다는 말부터 이상하긴 했지만, 평소와는 달리 자신에게 서슴없이 다가오는 수현의 태도란...아무래도 적응하기 꽤나 힘든 것이었다.

그러다가 거울에 스스로의 모습이 비쳐서, 가만히 그걸 바라보던 아이린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어제 입고 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지 않은가. 씻기는 했지만, 화장도 제대로 못한데다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없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화장기가 옅은 얼굴. 그런 것을 여태껏 유지하고 있었다니, 순간 몰려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확 하고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런 것을 자신이 왜 신경 쓰고 있는지는 몰라도, 지금의 상태가 영 좋지 않은 것만은 확실해서.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린은 시간을 확인한 채 황급히 주차장을 향해 달려갔다.

#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갈게요.]

3시에 왔던 문자를 빤히 보던 수현은 피식 웃으며 손목에 걸린 시계를 툭툭 건드렸다. 지금 시간이 4시가 다 되어 가는데, 이건 그냥 거절한다는 의미인 걸까.

스스로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데이트’라는 발언에 여러모로 문제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쩌다 보니 뱉었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고...

솔직히 말하자면, 스스로도 준비가 되지 않은 발언이었다.

“후우.”

입에서 뱉어지는 숨은 무거웠다. 괜히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막상 내뱉은 말을 취소하자니 여러모로 실망할 아이린의 표정이 두려웠다.

여자와 자주 만나보지 못한 것은 사실이었으니, 먼저 데이트라는 걸 신청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을 따름이었다.

하여 준비된 결과물이란, 몇 시간이란 부족한 시간 동안 겨우 충족해낼 수 있었던 그리 만족스럽지 않은 것들이었다.

애초에 잠에 들면서 생각했던 것들이 아니던가. 아이린이 제 침대에 누워있을 때,

자신이 베고 누워있던 것 위에 있을 때 심장 소리를 숨기며 생각했던 것이라,

생각한 것보다 반응이 좋지 않을 때를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미쳤어.”

아침에 입고 있던 옷과 별반 차이 없는 옷이었다. 평소에 늘 그렇게 입었고,

옷차림에 대해 별 신경 쓰지 않았던 것에 대해 제대로 벌 받는 느낌이었다.

수업이 비는 시간에 틈틈히 옷을 찾아봤지만...그 몇 시간 동안 어떻게 옷을 구해서 갈아입겠는가.

하여 자신이 아는 가장 깔끔한 옷차림을 입긴 했어도, 막상 마주하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선 여전히 불안했다.

부우웅­

저 멀리서 들려오는 배기음은 수현에게 꽤나 익숙한 소음이었다.

여러번 듣기도 했고, 새벽엔 자신이 직접 운전도 해봤던 차. 검은색의 세단이 제 앞에 멈추고,

열린 창문에서 아이린이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슬쩍 들어 올리며 수현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요, 놀랐어요? 사람을 그렇게 멍하니 보면 어떡해요.”

사람 부끄럽게. 투덜거리면서 그리 말했지만, 수현의 시선은 여전히 아이린에게 머물러있었다.

혹시 머리스타일이 이상한 건지, 화장이 제대로 안 된 건지.

멀쩡한 머리카락을 살짝 다듬은 아이린이 선글라스를 다시 내리자,

조용히 있던 수현은 차 문을 열며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잘 어울려서 봤습니다. 그 옷.”

“그으...러면 다행인데, 음.”

입고 있던 코트의 단추를 매만진 아이린은 그 말에 운전대를 꼭 쥐었다.

보자마자 칭찬을 한다고 해도 뭐가 달라지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진 않고, 오히려 좋다고 해야할지.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는 감정상태에 눈썹이 위아래로 씰룩였다.

나름 신경 써서 입은 옷이었다. 잘 어울린다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건 아니었고,

그냥...예쁘다는 소리를 들어서 기분 나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걸 수현에게 직접 들으니 나름 괜찮아서, 슬쩍 미소 지은 아이린이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수현 씨도 잘 어울리네요. 아침하고는 옷이 다른 거 알아봤어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데이트 신청했으면서. 이제 우리 어디로 가요?”

선글라스를 한 쪽에 내려놓은 아이린이 묻자,

가만히 앞을 보던 수현이 핸드폰을 들어 어딘가로 향하는 주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쿡쿡 소리가 들리는 것을 듣기도 한참,

네비게이션이 있는 위치에 휴대전화를 올려놓은 수현은 아이린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입술을 달싹였다.

준비한 곳이 있긴 했지만, 이것이 과연 아이린의 마음에 들지는 아직 미지수 였으니까.

“...영화관이네요?”

요즘 유행하는 영화가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왜 하필 영화관인지가 궁금했다.

벌써 예약도 해뒀는지, 시간을 계속 살피는 모습에 한편으론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도대체 무엇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눈을 가늘게 뜬 아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

“이런 영화일 줄은 몰랐는데요.”

꽤나 당황한 듯, 입을 작게 벌린 아이린의 말에 수현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시간만 확인하고 급하게 예약해서 그런 탓일까. 자신이 예약한 영화의 장르가 로맨스라는 걸 영화관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거기에 좌석은 하필이면 커플석이라, 의자에 앉은 아이린은 가운데가 없는 것을 깨닫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디테일은 좋네요. 데이트를 하자더니, 이렇게 커플 분위기도 내줄 줄은 몰랐어요.”

“자리가 빈 곳이 이런 곳밖에 없어서...”

“뭐, 좋아요. 나 로맨스 영화 좋아하거든요.”

말은 그렇게 덤덤하게 했지만, 막상 앉으니 서로의 팔이 딱 붙는다는 걸 깨달은 귀가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코트를 벗어 얇은 긴팔 티 하나가 있을 뿐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닿는 건 아무래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조금 떨어지는 게­”

“데이트라면서요. 그리고 떨어질 수는 있나요?”

둘이 앉으면 딱 가득 차는 좌석이었다.

아이린의 말에 이렇다 할 반박을 하지도 못한 수현은, 빨개진 귀를 더듬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시작된 영화는 로맨스 영화 답게 남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많이 본 이야기 였다. 중세를 배경으로 둔 영화, 호위 기사와 공작가 영애의 이야기를 둔 영화였지만.

수현은 그것이 꼭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구태여 비교하자면 자신은 저 호위 기사,

아이린은 귀족 영애라고 하는 편이 옳으리라. 순간 머리가 지끈거렸으나,

옆에 아이린이 있다는 걸 떠올리곤 애써 표정을 조절할 따름이었다.

아이린 유리스라는 여인을 보며 느끼는 것은 말 못할 기시감이었다.

항상 어디선가 본 것만 같아서, 이전에 콩쿠르에서 만났던 기억을 진즉에 떠올리고도 그 전부터 만났던 것만 같은 친근함이 느껴졌다.

같이 있으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맥박이 빨라지고, 호흡하기가 힘들어졌다.

꼭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감정과 완전히 같은 그 반응이 의아하기만 했다.

만난지 고작 며칠, 이렇다할 대화도 해본 적 없었고.

서로 추억할 만한 기억이라 해봤자 그리 아름다운 것이라 할만한 것도 하나 없었건만, 어째서 자신은 이 여인을 쭉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더 이상 영화가 아니었다. 영화에 빨려 들어가기라도 한듯,

멍하니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는 아이린만이 수현의 영화였다.

영사기가 돌아가며 반전되는 음영은 눈의 깜빡임이었고, 그 순간마다 달라지는 아이린의 모습이 서로 다른 감흥을 주었다.

어째서, 왜. 그런 의문을 채 해결하기도 전에 새로운 감정을 품게 되었다.

아이린 유리스. 그 여섯 마디 음절을 곱씹으며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자신은 이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당신한테 관심 있는 건 사실이에요.

먼저 다가왔고.

­어, 어...그건 그러니까. 해, 햇빛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오해가 아니라!

가끔은 우스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고,

­언제까지 말 그렇게 딱딱하게 할 거예요? 이제 편하게 해도 되잖아요.

잊을 때쯤, 다시금 계속 떠올리게 만드는 모습을 제게 보여주는 여인.

적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떠올려 보면 생각보다도 인상 깊은 장면이 꽤나 많지 않은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피식 웃은 수현이 다시금 스크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제 막 하이라이트에 왔는지, 별빛이 내리는 공원에서 입을 맞추는 두 사람의 모습이 클로즈업 되었다.

어째서일까, 마치 자신의 일처럼. 단순히 영화의 한 장면에 불과한 그것에 심장이 뛰는 이유는.

문득 붉어지는 것이 뺨이라, 손으로 얼굴을 감싸쥔 수현은 갈 곳 없는 손을 먹지도 않을 팝콘 통을 향해 뻗었다.

툭.

그리고 부딪히는 손길에 두 사람은 동시에 몸을 떨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얽혀서, 서로의 손등이 닿은 그 평범한 순간에 얼굴을 붉힌다.

방금까지 본 장면이 문제인 건지, 아니면 여태껏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던 수현의 시선을 알고도 모른 척 했던 것이 문제인지.

수현도 아이린도 무엇이 그에 대한 답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서로에게 닿았던 손길이 유난히도 화끈거려서,

더 이상 스크린도 보지 못한 채 고개만 푹 숙여...이 시간이 어서 빨리 흐르도록 속으로 애타게 빌 뿐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내려 다시 완전히 밝아진 상영관엔 오로지 두 사람만이 남아있었다.

방금 닿았던 손길을 아직도 추억하는, 머릿속에서 상영 중인 그들만의 영화를 아직까지 시청하는 아이린과 수현만이 남아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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