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 외전) 몽중화 (7)
* * *
해가 뜰 무렵, 커튼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이 눈에 닿자 수진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휴대폰엔 여전히 수현에게 온 연락이 하나도 없어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쓸어내린 수진은 작게 눈살을 찌푸렸다.
어제 술 마신다더니, 누구랑 마신다는 말 하나 없이 이렇게 연락이 끊기면...도대체 자기 보고 뭘 어쩌라는 건지.
안경을 쓰곤, 커피를 마시기 위해 물을 끓인다. 보글거리는 소리를 듣기도 잠시,
불이 꺼져 있는 방을 유심히 살피던 수진은 침대 아래에 있는 누군가를 보곤 어깨를 흠칫 떨었다.
“...언제 왔대?”
침대 아래에서 자고 있는,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일어나지 못하는 수현의 모습이란 그리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부지런하다 못해 항상 자기보다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늦게까지 자는 것을 보는 건 처음이라,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수진은 이내 그것이 술 때문이란 것을 깨달았다.
늦게까지 술을 마셨으니, 아마도 숙취 때문에 고생하리라. 피식 웃은 수진은 서랍에 있던 꿀을 꺼내 꿀차를 달이기 시작했다.
숙취에 꿀차가 좋다고 했던가. 일어나면 주려고 하던 때에,
문득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들은 수진의 고개가 슬쩍 움직였다.
“일어났어? 왜 연락을 안 해, 사람 걱정”
“아.”
허나 뒤에 있는 사람은 오빠가 아닌, 난생 처음 보는 외국인 여자였을 뿐이었다.
하얀 색 머리카락이 길게 내려온, 한 눈에 보더라도 예쁘다는 감상을 받는 여자였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 여자가 나온 장소가 수현이 있던 방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수진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어지러운 머릿속에서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그건...수현이 술먹고 여자를 데려왔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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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아이린은 수진을 보며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을 째려보는 시선이 너무도 선명한 터라, 할 수 있는 말이라곤 죄송하다는 말 뿐이었다.
자초지종을 듣는다면, 누가 듣더라도 자신의 잘못인 터였으니까.
소주 2잔 먹고 취해 업혀와 방에서 잠들었다니,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재빨리 도망치려 했지만.
그마저도 이렇게 들켜 실패하고 말았다.
졸린 눈을 비비는 수현은 그런 아이린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당사자는 별 생각이 없는데, 동생에 들켜 이리 혼이 나다니.
하지만 조심할 필요는 있어 보였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이렇게 술자리를 가졌다가 이러면...그런 꼴은 딱히 보고 싶지 않았다.
왜 그런 것에 짜증이 나는지는 몰라도,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으리라.
“오빠, 오빠는 할 말 없어?”
“내가 뭐라고 해야 되는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여자를 같은 방에서 재우면 어떡해? 다른 방도 많잖아!”
사실 아이린이 그 방에서 자겠다고 한 거였지만, 창백해진 아이린의 안색을 힐끔 본 수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내가 까먹었다.”
“진짜. 내가 오빠 때문에 못 살아. 둘이서 잘 거면 나보고 나가 있으라고 하던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안 했어. 그냥 잠만 잤어.”
남녀가 둘이서 술 먹고 돌아와서 아무것도 안했다는 걸 믿으라는 걸까.
하지만 자신의 오빠라면 정말 그럴 것 같아서, 수현을 한참 노려보던 수진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쉴 따름이었다.
누구에게도 화를 내기 쉽지 않았다.
아이린이 누구인지 기억 속에서 떠올린 수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아이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쁘긴 하네.’
수현을 보며 미형에 꽤 익숙해진 눈이었지만,
그럼에도 아이린 유리스라는 사람의 외모는 나름 특출나다고 할 수 있었다.
연주자라는 사람들이 늘 그렇지만,
이렇게 쩔쩔 매는 모습 속에서도 내뿜어져 나오는 기품에 내심 혀를 내두르고 있지 않던가.
꼭 귀족 자제를 보는 것만 같아서, 찻잔을 쥔 모습을 본 수진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전에 콩쿠르에서 얼굴은 몇 번 뵌 것 같아요. 브뤼셀에서였나요? 우승할 때 연주했던 곡 인상 깊게 들었어요.”
“아...퀸 엘리자베스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제가 오빠 때문에 나름 콩쿠르는 열심히 가는 편이거든요. 연주는 못하지만, 듣는 건 조금 좋아해서.”
수진이 음악에 관심이 많다는 걸 들은 아이린의 안색은 전보다 훨씬 밝아졌다.
방에서 나온 걸 들켜 혹여나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나름 자신에게 호의를 품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수진과 아이린이 대화를 이어가자,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수현이 아이린의 어깨를 툭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슬슬 가죠. 저도 1시간 뒤엔 수업이라서.”
“...수업이 있는데도 나랑 술 마신 거예요?”
“이유 설명하면, 제 동생이 뭐라 할지도 모를 텐데요.”
잠든 사이 한강으로 운전한 건 아이린인 터라, 수진의 눈치를 힐끔 본 아이린은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상 납치’였던 그 일이 들킬까 황급히 밖을 나서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아이린이 수현을 슬쩍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내가 나가려다가 들켜서.”
“가만히 있었으면 아침밥이라도 해주고 보내주려 했는데, 성격이 생각보다 급한 편인가 봅니다.”
“아침밥을 거기서 어떻게 해줘요...밥 먹으면 그냥 나 여기서 잤어요, 하는 거랑 똑같은 거잖아요.”
“그냥 말할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재웠다고.”
이런 걸 딱히 숨길 얘기도 아니고, 어차피 새 이불을 꺼낸 것을 보면 금방 알아차릴 일이었다.
구태여 몰래 나갔으면 그게 더 수상했을 터. 그런 수현을 아이린이 멍하니 쳐다보자, 운전대를 잡은 수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이제 그만 연락할까요?”
“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에요?”
“그런 겁니다. 어차피 계속 볼 사이니까, 동생한테 미리 말해두려고 했을 뿐입니다.”
그 말에 아이린은 고개를 휙 돌렸다. 간질이는 뺨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차 창문에 기댄 채 창밖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실은 창밖 풍경 따위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 동생에게 자신을 소개한다는 게...꼭 가족에게 자신을 소개해주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연인...아니, 그 이상이 되기라도 할 것처럼. 주책이었고, 아이린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럭무럭 자라나는 상상의 나래는 어느덧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손을 잡고 같이 걷는 사람이 시야에 콕콕 집혔다. 머리를 털어 지워 봐도, 계속 자신을 괴롭히는 상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해서.’
대뜸 관심이 있다느니, 자신을 동생에게 소개해주겠다느니.
그런 말이 어차피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걸 잘 알았지만,
한 편으론 기대감이 샘솟는 게 참 괴로웠다. 착각일 텐데, 그냥...상대는 별 생각 없을 텐데.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습니까?”
수현의 말에 아이린은 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우울해져서,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을 애써 피할 따름이었다.
부우웅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만이 이 정적 속에 울리고 있었다. 변덕스러운 기분에 조절할 수 없는 것이 표정이라,
손으로 제 뺨을 주물럭거리고 있는 지금이 영 우스꽝스럽게만 느껴졌다.
우울해할 이유도, 그리고 딱히 기뻐해야할 이유도 없을 텐데. 그것이 참 한심해서, 달리는 차 안에서 잠시 눈을 감는다.
끼이익! 그러다가 갑작스레 멈춘 차에 아이린의 몸이 휘청거렸다. 도착했으면 도착했다고 말이나 해주지.
허나 고개를 들었을 때 창밖에 보인 풍경은 대학이 아닌, 차 하나를 겨우 댈 수 있는 빈 공간이었다.
“차는 왜 멈춰요, 도착한 것도 아니잖아요.”
수현은 제 시선을 피하는 아이린을 가만히 지켜봤다.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실컷 부끄러워하더니, 갑자기 저렇게 침울해하니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습니까?”
“...아니요.”
“아까 집에서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아니요.”
“그런데 왜 갑자기 그렇게 울상을 짓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제 이불 냄새를 킁킁 맡다가 그러면, 저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 겁니까?”
“내가 언제 이불 냄새를 킁킁 맡았다고 그래요!”
그 말에 발끈하다가도, 다시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에 쓰게 웃는다.
왜 저러는지 그 이유를 조금 알 법도 해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넘겨주며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집에서 했던 말 중에 장난으로 한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
“거짓말일까 봐 그러는 게 아닙니까. 내가 한 말이 그냥 장난일까봐, 관심이 있다는 말도. 그냥 허투로 내뱉은 걸까 봐.”
스스로 이런 것에 대해 해명하는 게 영 부끄럽긴 해도, 지금은 이렇게 말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관심이 있다는 말은 이성으로써 관심이 있다는 말이었고,
동생에게 소개시켜주겠다는 말은...지금의 관계 이후를 바라보며 한 말이었다.
그러니 이렇게 우울해하기 보다는, 차라리 어제처럼 대놓고 행동하는 편이 마음에 들었다.
턱에 손을 살짝 대어 얼굴을 올리자,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아이린의 눈이 보였다.
축 늘어진 입꼬리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는, 힘을 주어 당기자 마치 웃는 것처럼 보였다.
“당신은 울상을 짓는 것보다, 웃는 쪽이 더 잘 어울립니다.”
“...이거 놔요.”
“그럼 나랑 약속하나 하는 건 어떻습니까. 수업 다 끝나고, 제가 연락하면 정문에서 만나죠.”
“갑자기 정문에서는 왜요?”
의아해하는 아이린에게, 수현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지금, 데이트 신청하는 겁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