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 외전) 몽중화 (6)
* * *
술에 취한 여성을 어디로 데려가야 할까. 여러 생각이 떠올랐지만, 수현이 떠올린 것은 역시 자신의 집이었다.
모텔...같은 곳에 데려갔다간 이상한 오해를 사기 십상이었으니까. 만약 중간에 아이린이 깨어났을 때 어색할 테고,
그녀 나름대로 편하게 대하기 위해 이렇게 한강으로 향했는데. 자신이 그런 것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술에 약하면 사질 말던가.”
조수석에 누워있는 아이린은 자신이 차에 타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 했다.
세상 편한 얼굴로 잠이 들어서, 자신이 아닌 다른 이가 여기 있었다면 무슨 일이 있을지 불안한 마음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서야, 나중에 한 번 크게 다칠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허나 그렇다고 자신이 무어라 할 만큼 친한 건 또 아니라,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쉴 따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 자정을 지났을 무렵, 수현은 비로소 가까워진 집을 보곤 아이린을 힐끔 살폈다.
술에 취해 벌개진 얼굴,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모습에 절로 쓴웃음이 지어졌다.
“아이린, 언제 일어날 겁니까.”
“...흐응.”
결국 집 앞에 다다를 때까지 일어나지 않은 탓에, 아이린을 어깨에 들쳐 업은 수현은 그대로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무겁지는 않았다. 술에 취해 축 늘어나긴 했지만, 원체 가벼운 몸인 건지 이렇다 할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뼈만 있는 것 같진 않은데, 도대체 그리 긴 시간 동안 연습을 할 수 있는 지 궁금증이 일었다.
완전히 불이 꺼진 집의 문을 조심스레 열자, 아무래도 수진이가 잠에 들었는지 안은 조용했다.
술을 마시기 직전에 오늘 늦을 거라 보냈으니, 아마도 먼저 잠에 들은 것이리라.
만약 이런 모습을 봤으면 소란스러웠을 테니, 다행이라 생각한 수현이 조용히 안으로 몸을 움직였다.
“으응...”
수진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간 수현이 불을 켜자, 이불이 곱게 개어져 있는 침대가 보였다.
아이린을 눕히고, 이불을 배까지 덮자 그제야 호흡을 고를 수 있었다. 방은 조용했다.
아이린이 침대에 누워 내뱉는 자그마한 숨소리만 들려올 뿐, 조금의 소음도 없는 이 공간엔 묘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생각해보면 조금 이상한 상황 아닌가. 술을 같이 마시고, 술에 취한 여자를 제 방에 데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막상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얼굴이 뜨거워져서, 뺨을 쓸어내린 수현이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켰을 때 보인 것은, 그 긴 머리카락을 펼친 채 침대에서 잠을 청하고 있는 아이린의 모습이었다.
조금의 근심도, 걱정도 없이 편안하게 잠든 터라. 이제는 깨우기에도 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집에서 저리 무방비하게 잠들어도 정말 괜찮은 건지. 저도 모르게 볼을 쿡 하고 찌르자 아이린이 간지러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맨날 혼자 쓰던 방인데, 단지 아이린 한 사람이 이곳에 누워있다는 사실만으로 괜스레 이 방이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술에 취한 여자를 데려와 재우게 될 거라곤,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부스럭
아이린이 입고 있던 셔츠의 단추가 하나 풀려있음을 발견한 수현은 끙 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고작 단추 하나였지만, 이 묘한 분위기에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불편해지기 마련이었다.
머릿속을 떠도는 것이 평범하지 않은 생각뿐이라, 아무래도 머리를 식혀야 할 성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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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파서, 눈을 비집고 새어 들어오는 빛에 아이린의 눈썹이 와락 일그러졌다.
머리 바로 위에 있는 형광등 빛에 눈을 가리다가, 평소와는 달리 어색한 이불의 촉감을 느끼며 몸을 일으킨다.
가시가 박힌 것처럼 쑤셔오는 머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숙취였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은 한강에서 소주를 사는 자신이었으니, 아마도 술에 취한 것이리라.
“...으.”
침대 옆에 놓인 탁자 위엔 숙취를 해소하는 음료 하나가 있었다. 누가 그것을 놓았는지 신경조차 쓸 새 없이.
그저 본능에 따라 벌컥벌컥 들이 마신 아이린은 그제야 힘겹게 숨을 토해낼 수 있었다.
술에 약한 건 알고 있었지만, 솔직히 2잔 만에 취할 줄은 몰랐던 탓이었다.
와인도 2잔 만에 취하진 않았는데, 생각보다 도수가 훨씬 쌔지 않은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며 음료를 마시자,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엔 비로소 주변을 살필 수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장소였다. 술에 취한 다음에 향한 곳이니 모텔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모텔이라기엔 조금 어색한 곳이었다.
잠시 이곳이 무엇인지 생각하던 아이린은,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남자 방 같은데.”
그리고 탁자에 보인 것은 한 가족 사진이었다.
가족 사진이라기엔 조금 부족해보이는, 윗부분이 찢어져 어린 남매만 남은 사진을 유심히 보다가,
방 한 구석에 놓인 피아노를 보곤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 사진에 있는 남자...그리고 피아노라면.
“무엇이 그리 궁금합니까?”
“꺄악!”
뒤에서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아이린이 소리치자,
그 입을 가로막은 수현은 손가락을 들어 조용히 하라며 신호를 주었다.
수현의 얼굴을 확인한 아이린이 고개를 끄덕이고, 그제야 손을 뗀 수현이 아이린의 손에 들린 액자를 가져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동생이 자고 있습니다. 그나저나...술은 깬 겁니까?”
“아직 머리가 아파요. 그럼, 여긴 수현 씨 집인가요?”
“데려갈 곳이 없어 여기에 데려왔습니다. 차 키는 밖에 있으니까, 나가실 거면 가지고 나가시면 됩니다.”
그렇다고 당장 나가기엔 아직 술기운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니,
잠시 눈을 지그시 감은 아이린은 다시 침대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럼 이 숙취해소제도 수현이 둔 것일까. 그것이 고마워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문득 시야에 들어온 수현의 몸에 아이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미, 미쳤어요? 왜 벗고 있는 거예요?”
“참 빨리도 반응하십니다. 아까부터 이러고 있었는데, 이제 와서 놀라는 겁니까?”
아래에는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위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수건만 입고 있는 수현이었다.
항상 옷을 입고 있어 가려져 있던 몸이란 운동선수처럼 다부진 터라, 저도 모르게 뜨거워진 얼굴을 가린 아이린이 고개를 푹 숙였다.
조각이라도 한 듯 참 예쁘게도 갈라진 몸이었다. 얼마나 운동을 한 건지, 음악을 하는 와중에도 그렇게 몸을 가꿀 시간이 있었는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오, 옷 좀 입어요. 여자 앞에서 그렇게 있으면 어떡해요.”
“상관없지 않습니까. 어차피 우리 집인데.”
아이린의 그런 반응에 싱긋 웃은 수현은, 얇은 티 하나를 꺼내 입었다. 살짝 젖은 몸에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 아이린은 겨우 표정을 조절할 수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매만지며 한숨을 푹 내쉬곤, 다시 수현을 쳐다본 아이린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해요. 내가 그렇게 술에 약한지 몰랐어요.”
일단은 사과부터였다. 분위기를 풀어보겠다고 그렇게 갔는데, 2잔 만에 취해버릴지 누가 알았겠는가.
술에 취한 자신을 건드리지도 않았고, 이렇게 자신의 집까지 데려와 침대를 내어준 것에 대해 그저 고마울 뿐이었다.
하여 고개를 숙이자, 수현은 괜찮다며 아이린의 옆에 털썩 앉았다.
갑자기 가까워진 수현에게 샴푸향이 피어오르자, 아이린은 입을 꾹 다물곤 자리를 아주 약간 옮겼다.
아까부터 쿵쿵 뛰던 심장이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까워질수록, 눈을 오랫동안 마주칠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그 증세에 아이린은 달뜬 숨을 내뱉었다.
“잠깐만 여기에 있다가, 술 깨면 다시 가볼”
“자고 가도 됩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수현이 말하자, 멍하니 고개를 돌린 아이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러니까...자고 가라는 말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란 것일까?
화악 달아오르는 얼굴에 귀까지 뜨거워져서, 어버버 거리던 아이린이 수현에게 살짝 거리를 벌렸다.
“어...자고 갈 필요까지는 없지 않나요...?”
“술에 취한 게 방금인데, 멀쩡한 상태도 아닌 사람이 어딜 혼자 갑니까. 내가 못 보내줍니다.”
조수석에 쓰러져 웅얼거리던 것이 눈에 선했다. 다른 사람이라면 알아서 가든 말든 신경쓰지 않았겠지만,
수현은 아이린을 이대로 보내고 싶진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다 큰 어른인 걸 알고 있으나, 자신이 보기엔 그저 동생마냥 어리고 걱정되는 사람이었을 뿐이니까.
못 보내준다는 말에 아이린의 고개가 푹 숙여지자, 피식 웃은 수현이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서울의 도심이 고스란히 보이는 것이 그곳이라, 잠시 야경에 정신을 맡긴 수현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담스럽습니까? 내가 이렇게 하는 게.”
“아, 아니요. 그냥 조금 놀라서 그런 거예요. 저를...조금 거리를 둔다고 생각했거든요.”
거리라, 어쩌면 그렇게 느꼈을 지도 몰랐다. 태어나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을 주는 것이 아이린 유리스라는 여인이었다.
그것이 낯설고 새로워서, 저도 모르게 선을 긋고 있을지도 모르리라. 허나 그것은 본심이 아니었다. 단지, 스스로 그런 감정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내세운 방어기제에 불과했다.
아이린 유리스라는 여인이 싫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단호하게 고개를 저을 수 있지 않을까.
“거리 둔 적 없습니다. 오히려, 조금 가까워지고 싶은 쪽이 맞겠군요.”
“...예?”
“처음부터 싫어한 적 없었다는 겁니다. 가끔 연락하는 게 조금 귀찮긴 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요.”
연락이 귀찮다는 말에 아이린의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이윽고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 수현을 보곤 고개를 푹 숙일 따름이었다.
눈을 마주칠 때마다 쿵쿵 뛰는 심장 소리는 어느새 이 방의 적막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쿵쿵 이 소리는 어디서 들려오는 걸까. 아이린의 가슴 속에서만 들려온다고 느꼈던 소리는, 사실 수현의 안에서도 들려오고 있었다.
툭, 투명한 창문에 머리를 기댄 수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곤 다시 눈을 떠 아이린을 보다가, 이제는 조금...제 마음을 털어놓을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강으로 간 건, 분위기가 어색해져서 그렇게 한 겁니까?”
“제가 괜한 걸 물어봤다고 생각했으니까요...그건 제가 미안해요. 조금 말실수를 했나봐요.”
“왜 사과를 합니까. 당신은 궁금해해도 상관 없습니다.”
궁금해해도 된다는 말에 아이린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천천히 아이린을 향해 다가간 수현이 그 옆에 다시 앉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지만, 실상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사소하지 않은 말이었다.
“당신이니까. 제가 당신에게, 조금 관심이 생긴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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