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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악녀의 호위기사가 되었다-171화 (171/181)

〈 171화 〉 외전) 몽중화 (5)

* * *

“표정이 좀 괜찮아졌네요? 아까는 어두워 보이던데.”

연습이란 것을 언제까지고 할 수는 없는 터라, 잠시간의 휴식 시간을 맞이한 아이린은 수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조금 뚱한 표정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무언가가 만족스러워진 듯 꽤 풀린 표정이 아닌가. 아이린이 묻자, 수현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연주가 꽤 괜찮았으니까요. 아무래도 학생들을 가르칠 때보다는 이렇게 맞춰서 연주하는 게 훨씬 낫군요.”

“...아,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네요. 피아노 치는 사람은 여럿 봤지만, 이렇게 만족스럽게 맞춰주는 사람은 몇 없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했었나, 그 마음을 조금 이해할 것도 같아 아이린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곤 소파에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단순히 몇 분이면 끝나는 연주라지만, 그것을 두어 번 반복하면 지치기 마련이었다. 호흡 하나, 몸짓 하나, 모든 것을 쏟아내야 하는 활동이었으니까.

땀이 흐르는 것을 닦아내고 눈을 감았을 무렵, 문득 이마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에 아이린의 눈이 가늘게 뜨였다.

흐릿한 시야 사이에 보이는 것은 물병이라, 한차례 피식 웃고는 그것을 받아들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센스 좋네요?”

“항상 가지고 다니는 편입니다. 수분 보충은 여러모로 중요하니까요.”

성격도 섬세한 편이고, 연습을 시작했을 때와는 달리 호흡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 꽤 자연스러워 보였다.

지치지도 않는 건지, 아니면 이렇게 연주하는 게 자연스러운 건지. 게다가 연주에 방해되지 않게 반주하는 모습이란, 그 사소한 것에서 실력의 편린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수현이 작게 헛기침을 내뱉자 아이린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계속 보실 겁니까?”

“아...미안해요. 그냥 조금 신기해서요. 지치지도 않나 봐요? 얼마나 연습을 많이 한 거예요?”

지치지도 않느냐는 그 질문에, 예전 기억을 떠올린 수현이 작게 웃었다. 예전에는 떠올리기만 하더라도 화를 냈던 기억이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고,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울렁거려 숨쉬기조차 힘들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전부 털어낸 것들이었다. 더 이상 두렵지도 않았고, 자신을 위협할 미래의 위협이 있지도 않았다.

완치한 동생도 이제 자신이 직접 데리고 있지 않은가. 스스로도 태연한 것이 신기해서, 의자에 조용히 앉아있던 수현이 입을 열었다.

“연습을 많이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래저래 혼이 났거든요.”

소매를 걷자 나온 것은 아직 차마 지워지지 않은 멍자국이었다. 이전에 수진이를 데려오겠다고 했을 때 생긴 자국이었던가.

덕분에 맷집이 강해져 이제는 이런 상처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수진이를 제때 보지 못해 죽었더라면, 그게 더 아팠으리라.

멍자국을 본 아이린은 침묵했다. 팔에 있는 멍자국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으니,

그럼에도 태연한 수현의 표정에 도저히 무어라 말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저 멍자국이 가리키는 것은 아마도 하나일 테니.

“...미안해요, 내가 괜한 걸 물어봤네.”

“괜찮습니다. 이제는 다 잊었으니까요. 또 앞으로 그럴 일이 없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며 분위기를 풀어보려 했지만, 이미 차갑게 식어내린 분위기를 이전처럼 만들기란 영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찌해야 할지, 괜히 이상한 얘기를 꺼낸 것을 후회하던 아이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수현의 안색을 살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는 듯 해도, 생각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었다. 이런 분위기를 견디기 힘들어서,

수현을 힐끔 쳐다보던 아이린은 입을 꾹 다문 채 허공을 응시했다.

그냥 연습을 많이 했나 했더니,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터였다.

그래도 계속 이렇게 있을 수는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난 아이린이 수현에게 다가가 팔을 끌어 당겼다.

연습이야 나중에 하면 되는 거고, 오늘 당장은...이 분위기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허나 어떻게 이 분위기를 풀어야 할지, 그것에 대해선 이 자리에 있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심지어는, 아이린마저도.

#

사실, 아이린이 방금 한 말에 대해 수현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예전 일이었으니, 그런 것에 일일이 기분 나빠하면 어떻게 사람을 만나겠는가.

아이린이 자신을 불안한 눈으로 쳐다봤을 때부터 생각한 것이었지만, 이에 대해 여러모로 오해가 있는 것 같았다.

“저기...저는 괜찮습니다. 전부 다 잊고 있었던 일이었으니까요.”

“내가 안 괜찮아요.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에서 계속 있고 싶지도 않고요.”

운전대를 잡은 아이린의 머릿속은 복잡할 따름이었다. 이렇게 나오긴 했지만, 도대체 뭘 해야 하는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밥을 먹기엔 이른 시간이었고, 둘이서 다니기엔...

‘우리가 그렇게 친하진 않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과, 막상 진짜 친한가에 대해선 여러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만난 지도 며칠 안 됐고, 자신이 친근하게 대하고 싶은 것과는 달리 수현은 제게 선을 조금 긋는 편이었으니까.

“그런데, 어디로 가는 겁니까?”

“...나도 몰라요.”

“......예?”

어이없다는 듯 되묻는 수현에게 아이린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말 목적지를 몰랐으니까. 홧김에 나왔는데, 어디로 가야할지에 대해선 운전하면서 생각하는 중이었다.

“납치라도 하는 겁니까?”

“내가 그렇게 나쁜 사람처럼 보여요? 걱정 마세요, 집까지 멀쩡하게 돌려보내 드릴 테니까.”

그 말엔 조금 짜증이 났는지, 눈살을 찌푸린 아이린의 표정에 수현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이렇게 나온 것이 썩 마음에 들었다. 나온 것이 아닌, 아이린이라는 사람과 함께 이렇게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이유...는 몰라도, 자신이 그렇게 느끼면 그것으로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이렇게 나온 적도 꽤 드물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유로워보여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겨울이 끝나가는 봄, 아직 땅에는 얼음이 고인 물 위로 둥둥 떠다녔지만, 앙상해졌던 나무엔 조금씩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올해 들어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동생 일을 신경 쓰느라, 자기 나름대로 자리를 찾아가느라 이런 것을 보지 못했던 탓이었다.

순간 느낀 감상이란 여유였다. 여유롭게, 무언가를 신경 쓰지 않고 이렇게 평화로운 분위기라.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

그런 감상에, 수현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달리는 차에 몸을 맡겼다.

아이린 유리스라는 사람과 있을 때면 몸이 이상하리만치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익숙했고, 친숙했다. 태어나서 올해에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런 기분을 왜 느끼는 건지.

유난히 푹신한 차시트에 졸음이 몰려와,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수현은 조용히 잠을 청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감각에 눈을 뜨자 눈앞에 있는 아이린의 얼굴을 보곤 수현의 몸이 움찔 떨렸다.

“일어나요. 도착했으니까.”

어느새 어둑해진 하늘을 멍하니 보다가, 그제야 밤이 되었음을 깨달은 수현이 황급히 휴대폰을 확인했다.

쌓여있는 동생의 연락, 그리고 성이 난 듯 무어라 시끄럽게 적힌 크리스의 문자. 그걸 멍하니 보다가, 이윽고 아이린을 쳐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뭡니까?”

“한강이요. 한강 처음 와 봐요?”

별이 반짝 거리는 한강, 강이 바로 앞에 보이는 경사진 풀밭엔 저마다 돗자리를 펼친 채 앉아있는 사람이 흔히 보였다.

자신이 잠든 사이에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걸까.

허나 돌아가기엔 수단이 마땅치 않아서,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납치 한 번 당했다고 생각하면 편하리라.

“그 봉지는 뭡니까?”

“이거요? 소리만 들어도 알 텐데.”

차문을 잠근 아이린은 손에 든 봉지를 가볍게 들었다. 짤랑, 거리는 유리 부딪히는 소리에 멍하니 있던 수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술?”

“소주요. 저 미국에 살아서 이거 한 번도 마셔본 적 없거든요.”

“갑자기 술은 왜 마시는 겁니까?”

“그냥 마시고 싶었어요. 술에 약한 건 아니죠?”

묘하게 한국적인 그 술에 쓰게 웃다가, 이윽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소주를 받아들었다. 나쁘지 않았다.

아직까지 어색한 사이이지 않은가. 술을 마시다 보면 자연스럽게 친해질지도 몰랐다.

아이린이 풀밭 위로 돗자리를 펼치고, 수현은 그런 아이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술을 잘 마실지, 그것이 조금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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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으윽.”

난데없이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린에 수현은 그저 난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소주 몇 병, 아니...몇 잔조차 되지 않는 양이었다.

그저 두어 잔 들이킨 것이 전부 아닌가. 서로 얘기나 나누면서 천천히 마실 생각이었는데,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진 아이린은 평소보다도 훨씬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와인을 마시고 취한 모습을 어디서 본 것 같았지만, 그런 상상을 지우곤 아이린을 들쳐 업었다.

등에 업힌 아이린이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한숨을 내쉰 수현은 그저 차로 향할 따름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이제는 자정에 가까워진 시간, 집을 물어봐도 대답조차 제대로 못하고...

아무래도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소는 하나 뿐이라, 새하얀 얼굴이 더욱 창백하게 물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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